목회란 무엇인가2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 1:9-11)
녹취자: 조경훈/백지영
우리는 제일 먼저 목회의 정의를 내렸습니다. 목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목회의 본질적 의미를 정리하면서 우리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그 정도로 했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을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고, 성화는 그 사랑 안에 머무르며 점점 더 사랑하게 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성화의 완성인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은 사랑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로 넘어가서 목회자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말론 카이 말론(μᾶλλον καὶ μᾶλλον) 점점 더 풍성하게 할 수 있을까? 그 수단이 무엇일까? 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 지식과 총명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림을 그려 드렸습니다. 지식은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입니다. 이것은 그노시스(γνωσις)라는 단어에서 왔고 에피(ἐπ)라는 전치사가 덧붙여진 것입니다. 그노시스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고 전치사 에피가 붙어서 그 지식이 훨씬 더 철저하고 어떤 사물에 대한 전체적이고 보다 확실한 지식을 에피그노시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지성을 강조하는 것이 사람들 속에 생생한 성령의 사랑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하면서 지식과 사랑을 대비시켰습니다. 지식과 사랑 이 자체가 이미 잘못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1세기 정확하게 1090년에서 1153년까지 살았던 인물 중에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us Claraevallensis, 1090~1153)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버나드 성인을 가리킵니다.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모르 입세 에스트 노뛰띠아(Amor ipse est notitia) 사랑 그 자체는 지식이다. 즉 사랑과 지식을 통합적으로 보아왔던 것이 기독교의 전통입니다. 다른 이야기도 합니다. 노뛰띠아 에스트 아모르(Notitia est amor) 지식은 곧 사랑이다. 그의 전집을 제가 가지고 있는데 그는 어마어마한 대학자였습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신랑 신부의 관계로 아주 훌륭하게 이론화해서 후대 교회에 남겨준 인물이고 칼빈에게도 상당히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저것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의 견해만이 아닙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지식과 사랑이 찢어지기 시작한 것은 훨씬 후의 일입니다.
사랑과 지식을 대조되는 경우로 보는 것은 18세기 이후에 미국에서 소위 얘기하는 부흥주의 운동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복음주의의 뿌리에는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역사적인 개신교주의 그 중에서도 특별히 개혁교회의 신학들이고 또 하나는 18세기 이후에 미국에서 이루어졌던 부흥주의 운동들입니다. 부흥주의 운동들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함께 남겼습니다. 건전한 부흥주의자들은 성령의 생생한 임재와 역사를 강조합니다. 미국이 전도하기 시작한 것도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이 있고난 후 부터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영향은 지식인이 목회자가 되는 오래된 기독교의 전통을 허물어 버립니다. 설교자는 불 받은 사람이 설교자가 됩니다. 평신도 설교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전통적으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의 설교는 논리적이고 훌륭했지만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덜 끼쳤고 오히려 불 받은 평신도들과 공부 거의 안한 설교자들은 사람들에게 임팩트를 주었던 것입니다. 저쪽 목소리들을 귀 기울이지 않고 점점 이 쪽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19세기에 와서 그 운동은 아주 변질된 신앙운동으로 바뀝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75) 라고 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펠라기안주의자였으며 원죄도 인정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인간의 중생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있고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굉장한 신학적인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는 윤리적으로나 하나님의 말씀에 그래도 성실하려고 애썼지만 그런 전통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그만 못한 추종자들이 생겨나면서부터 아주사퍼시픽 에서부터 토론토 블레싱 같은 운동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기독교의 유구한 전통은 사랑과 지식을 불리하지 않고 지식은 곧 사랑이다. 노뛰띠아 에스트 아모르(Notitia est amor) 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오래된 가르침입니다. 지식이 없는 곳에는 사랑도 없고 사랑이 있는 곳에서 참된 지식이 습득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에피그노시스, 독사(δόξα, 영광), 에피스테메(επιστήμη) 등의 이야기를 어제 우리들이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지식과 함께 총명이 있습니다. 총명은 희랍어로 아이스테시스(αἰσθήσις)입니다. 아이스테시스는 무엇일까요? 재미있는 게 희랍어성경 네슬알란드(Nestle-Aland) 28판에서는 아이스테시스(αἰσθήσις)로 나옵니다. 그런데 현대 그리스인들이 쓰는 성경에는 이것이 노에시스(νοησις)로 나옵니다. 노에시스는 누스에서 옵니다. 희랍 철학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플라톤 특히 플라톤의 철학을 이후에 다시 일어나게 했던 2~3세기의 인물 중에 플로티노스(Πλωτῖνος, 204-270)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노스 라고도 하고 누스라고도 합니다. 이 사람에 의하면 세계가 두 세계로 나뉘어져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 아래에는 물질세계 위에는 사유의 세계입니다. 이것을 가시계라고 이야기 한다면 여기는 가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는 위에서부터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는데 이쪽으로 올라갈수록 신령한 세계입니다. 이쪽으로 내려올수록 물질적인 세계입니다. 신령할수록 선한 세계가 되고 신령한 곳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악한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 전체를 하나의 영혼이라고 보는데 그것이 누스입니다. 모든 물질의 세계는 마지막에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세계 속으로 통합이 되는데 이것이 누스의 세계입니다. 현대 그리스어에서 노에시스의 채용은 물질계에 살고 있는 인간이 지상뿐만 아니라 천상과 함께 알 수 있는 가능성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 자체가 세계영혼의 일부입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세계를 뛰어넘어 세계의 영혼과 접촉해서 알게 되는 어떤 지식이 노에시스, 곧 총명입니다. 이런 것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아이스테시스도 이런 개념들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 드리기를 지식이 두 종류가 있는데 한 종류의 지식은 추론적인 지식입니다. 추론적인 지식은 무슨 뜻입니까? 사물들 하나하나 사이에 있는 관계를 인과 이것이 인이 되고 이것이 과가 되는 연결들을 짐작해 내는 것이 추론입니다. 그런가 하면 지식에는 변증의 기능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물을 초월해서 초월적인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지식입니다. 그것은 직관과 같이 사람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화) 지금으로부터 약 12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어떤 방문객이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대전에서도 더 내려가서 유성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아내의 형제들이 사이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동서들과 함께 만나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그 동네가 우리교회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쯤 와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고 그 전에도 자기 친구들과도 만나서 술을 먹고 그 집에서 자고 난 후에 성탄절 낮 예배를 아내를 따라서 교회를 온 것이었습니다. 왔는데 교회 의자가 너무 푹신하고 좋았습니다. 어제 술은 먹었고 숙취는 왔겠다. 들어오자마자 팔짱을 끼고 잘 생각을 한 것입니다. 생전 처음 보는 어떤 사람이 설교단에 올라왔습니다. 바로 저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이니까 훨씬 젊었습니다. 성경을 펴고 읽었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에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 이 말씀을 그는 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플라톤을 전공하는 학자였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였습니다. 플라톤 철학으로 무장되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철학 속에 하나님이 들어갈 여지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라는 성경을 봉독할 때 갑자기 그 어른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내와 함께 앉기 싫어서 따로 앉았는데 아마 잔소리할까봐 그랬을 것입니다. 눈물을 펑펑 쏟는데 설교시간 끝날 때까지 쉬지 않고 울었다고 본인이 고백하였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나는 신이 없다고 믿었고 어제도 가르치는 학생들과 동료들과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먹었는데 이것은 뭘까? 그런 생각에 잠겨서 유성까지 내려갔습니다. 서울에 있는 우리교회에서 약 160km 쯤 됩니다. 당연히 아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려가서 남편이 얘기를 했습니다. 여보. 다음 주일 날 교회 예배에 한 번 더 올라오자. 아내는 남편을 전도하고 싶어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기뻤을 것입니다. 160km 올라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올라와서 이 철학자는 시험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도대체 지난주에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아내와 따로 앉아서 다시 예배를 드렸습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철학자들은 원래 의심이 많습니다. 다시 내려갔습니다. 남편이 오고 갈 때에 말이 없는 것입니다. 남편이 내려가면서 여보. 다음 주에 한번만 더 올라오자. 세 번째 올라왔습니다. 세 번째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이 사람이 깨달은 게 아! 플라톤철학에서 얘기하는 노에시스, 아이스테시스가 내게 임하였구나. 그 사람들은 이것을 체관(諦觀)이라고 부릅니다. 체관은 인튜이션(intuition)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말로 약간 뜻이 다르긴 한데 직관이라는 뜻입니다. 체관에는 훨씬 더 깊은 종교철학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평생을 이성으로 추론을 해도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누스의 세계에 대해서 단박에 쾅하고 깨닫게 되는 그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돈(頓)이라고 부릅니다. 돈오점수( 頓悟漸修) 단박에 깨닫고 점점 수양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체관이 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플라톤철학을 하면서 깨달았던 많은 내용들이 정리가 되었고 그 체관의 한복판에는 그리스도가 계셨던 것입니다. 6개월 안에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조직신학서들을 평신도가 다 읽었습니다. 사랑은 지식을 요구합니다. 사랑하는데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진짜사랑이 아닙니다. 지금은 부산에 내려가서 자기 일을 하면서 삽니다. 지금도 아마 강의 하고 얼마 전까지도 전주대학교에서도 강의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외국에 있는 학자들한테 세미나 할 때 이야기 했는데 굉장히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철학자들의 회심이 얼마나 어려운지 스펄전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교회가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넘쳤는지를 얘기하면서 철학자도 회심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돌아갑니다. 열화, 열렬하게 타오르는 불이 있을 때 한 편으로는 지식이고 또 하나는 총명입니다. 저런 사람들에게 희귀하게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있는데 너무 근심 걱정이 많아서 수없이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모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잠시 있는 헛된 것들이고 스테반이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가 일어서신 것을 보는 것처럼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새로운 지식 초월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우리들에게는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 때 도저히 우리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르쳐줄 때 성령이 역사하시면서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니고데모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거듭나야 하겠다고 하니까 나는 이렇게 큰데 우리 엄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는 추론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역사하면 그 비밀들을 터득하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이 두 개는 뭐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까? 총명은 신앙 곧 믿음을 통해서 습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하나씩 하나씩 주워 모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시는 것도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고 총명을 깨닫게 하시고 그노시스가 에피그노시스가 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인간은 아무것도 할 것이 없이 저절로 이것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탐구해야 됩니다. 무엇 하나도 그냥 보지 말고 공중의 새가 날아다니는데 저건 무슨 의미일까? 공중의 나는 새를 생각하여보라. 그러면서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희랍 사람들이 교육을 했던 방식이 이런 통합적인 방식의 교육을 시켰던 것입니다. 로마의 힘도 그리스의 교육 사상들을 계승하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거슨 세 가지 공식에 의해서 학문을 하는 것입니다. 피지카는 물리가 아니라 자연입니다 당연히 자연 속에는 물리현상이 있을 것입니다. 자연학이라고 부릅니다. 이 자연에서 로기카를 찾는 것입니다. 로기카는 논리학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살아야 할 까? 로 연결하는 것이 에티카, 윤리학입니다. 윤리학이 국가에 적용될 때 그것은 정치학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교육과 사유의 방식이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으로 이어지는 서구에만 있었던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이 시냇물이 흘러가는 것을 봅니다. 시각입니다. 보면서 생각을 합니다. 사입니다. 그리고 발견합니다. 물이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구나 하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서 적용을 합니다. 아! 인간은 물 흘러가듯이 살게 되어있는 존재이구나. 분수에 맞게 살자.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물 수(水)가 나오고 흘러간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법(法)이 나옵니다. 일본철학은 공부할 기회가 없어서 사실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 중국의 철학을 놓고 보면 일본도 하나의 커다란 동북아 사상권 안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그 사유하는 사람들은 자연의 세계를 결코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연을 보면서 시각과 청각 정확히 얘기해서 감각을 통해서 자연의 세계와 접합니다. 거기서 무엇인가를 관찰해 내고 그것을 가지고 논리로 사유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윤리를 만들어 냅니다. 예수님이 하신 방식이 이것과 너무 유사하지 않습니까? 들에 핀 백합화를 봐라. 꽃처럼 저렇게 화려한 옷을 입으려면 길쌈 수고를 많이 해야 하는 데 꽃은 하지 않는다. 무슨 의미일까? 너희도 이렇게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신다. 너희 힘으로 사는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다. 거기서 마지막 적용이 나옵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그 앞에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라고 나옵니다. 어마어마한 인생의 좌표를 꽃 한 송이, 새 한 마리에서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어제 밤에 강의 들어오기 전에 하늘을 쳐다 봤는데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별의 숫자를 보았습니다.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찬양) 온 천하 만물이 그림 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그 사랑 알아요.
이 곡을 누가 작사했는지 아십니까?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가 작사를 했습니다. 물론 이런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과 교인들을 향한 교육도 이런 점에서 많은 반성을 해야 합니다. 예배당에 와야만 겨우 겨우 하나님이 느껴지고 예배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서 하나님이 추호도 느껴지지 않는 삶은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어디를 가든지 아이스테시스와 에피그노시스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사랑의 불길이 계속 타올라야 합니다. 우리들이 흔히 설교할 때 쓰는 쉬운 말로 얘기해서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에 대해서 눈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것 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단순히 기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뜨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눈을 뜨게 해 주시지 않으면 소경처럼 가려져있기 때문에 무엇이 지나가도 알 수 없는데 눈을 뜨게 해 주셔서 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계시를 열어주셔서 초월적인 것들을 인식할 때 사랑의 불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에피그노시스는 이성, 논리, 경험에 관한 지식이라면 총명은 인식, 판단과 관련된 것입니다. 인식한 것을 판단하고 판단한 것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지식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목회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말론 카이 말론, 점점 더 사랑이 풍성하게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에피그노시스의 지식이 끊임없이 공급이 되어야 하고 계속해서 잘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배우고 잘 믿고 이것을 통해서 사랑의 불길은 타오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목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으로 들어가서 한 번 더 보겠습니다. 너희 사랑을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테시스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라고 돼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떠오릅니다. 만약에 신자의 마음 안에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이 점점 불타오르게 되면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의 목표, 이것이 목회의 수단을 이야기한다면 이것으로써 무엇을 하게 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의도가 무엇이냐? 성도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서 그 불이 점점 더 풍성하게 해서 무엇을 하게 하려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옛날에 증기기관차에 석탄을 물을 잔뜩 부어서 끓이면 엄청난 수증기가 나옵니다. 그것을 엔진의 구동력에 연결하면 기차는 달리는 것입니다. 사랑을 점점 끓어오르게 만드는 것이 엔진을 가열해서 구동력을 갖게 하는 것이라면 그 구동력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가지고 무엇을 하게 하려는 것인가?
그것이 오늘 성경에는 세 가지로 나옵니다. 첫 번째는 선한 것을 분별하며 입니다. 두 번째는 진실하여 입니다. 세 번째는 허물없이 입니다. 무과실, 과오가 없는 상태입니다. 사랑의 불길을 일어나게 해서 이 세 가지를 하게 하려고 사랑을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분별하며 라는 단어가 희랍어로 도키마조(δοκιμάζω)입니다. 일본어로도 똑같은지 모르겠는데 조흔판(條痕板, streak-plate) 이라는 단어를 아십니까? 유액을 묻히지 않고 초벌구이를 한 도자기가 깨졌을 때 나오는 쪼가리는 유약을 묻히지 않고 구웠으니까 표면이 맨질맨질하지 않고 꺼끌꺼끌할 것입니다. 여기에 거무스름한 광석이 있는데 이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깨진 쪼가리로 이것을 문지르면 스크래치가 날 것입니다. 꺼치꺼칠한 표면을 왔다갔다 하면서 가루가 떨어지는데 그 가루를 모아봤더니 색깔이 녹색인 것입니다. 덩어리로 있을 때는 검은색이었는데 긁어서 가루로 놓고 보니까 녹색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것이 무슨 성분의 돌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행위를 도키마조 라고 합니다. 여기에 들어오다 보면 로비에 돌기둥이 서 있는데 저는 2층에 올라가서 제일 먼저 그 돌기둥을 두들겨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퉁퉁퉁 하면서 나무통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돌 모양으로 나무를 만든 다음에 접착제를 칠하고 돌가루를 뿌려서 만들었다는 것을 제가 깨달았습니다. 멀리서 보면 감쪽같이 돌 같지만 가서 두드려보거나 심하면 칼로 확 긁어보면 속에서 나무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가짜 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도키마조입니다. 도키마조는 시험하여 판별하는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 앞에 나오는 지극히 선한 것 이라는 단어가 희랍어 성경에는 안 나옵니다. 지극히 선한 것 이라고 돼있는 이 부분이 디아페론타(διαφέροντα) 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복수인데 디아페로(διαφέρω)라는 동사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상태동사인데 다르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be different입니다. 디아페론타는 다른 것들 different things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을 판별하여내며 라는 뜻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목회는 사랑을 불일 듯 일어나게 하는 건데 계속해서 지식이 주어지고 계속해서 총명이 주어지면서 그 불길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오른 사랑의 사람은 첫째로 그런 사랑으로 서로 다른 것들을 판별하여 내는 것을 하게 하려고 이 사랑을 불일 듯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직관적으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판별을 못하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판별하지 못한다는 것이겠습니까?
우선 첫 번째로 이단과 정통의 문제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쓰는 시기인 당대에도 그는 수많은 이단들 속에서 말씀사역을 했습니다. 그것은 교회역사에서 끈질기게 형태를 바꾸어서 등장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릇된 이단들이 가르치는 교리, 이단까지는 아니더라도 성경을 저렇게 해석하면 안 되는데 잘못된 곳으로 가는 것 즉 오류에 빠지게 되고 그것들을 따라갑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올바른 앎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까짓 차이가 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어차피 믿음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아니니까 누가 뭘 어떻게 믿든지 신경을 안 쓰는 것입니다.
제가 실제로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한 시골 교회에서 예배당을 지어야 되는데 돈이 없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이라는 분이 목사님한테 하는 얘기가 목사님. 통일교회에서는 교회를 거저 지어준다는데 한 번 생각해보면 안 되겠습니까? 무엇이 없는 것입니까? 다른 것들, 디아페론타를 신앙적으로 구별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시의 현실이었고 지금의 현실입니다. 제가 충격을 받은 게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교인이 700명 정도 모였고 6년 쯤 됐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담임목사인 제가 직접 교리반을 가르쳤고 지금도 그것이 전통입니다. 그때는 열렬했으니까 15명 씩 만 들어오게 했습니다. 제 방에 모아놓고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 1873~1957)의 조직신학 책을 가르쳤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봤더니 10명 중에 9명은 양태론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삼위일체 설교를 들은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중에는 이전 교회에 장로도 있고 심지어 신학생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도키마조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럴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2가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성적으로는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테시스가 없기 때문이고 의지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알려고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무지는 명백하게 악이다. 라고 좀 충격적인 얘기를 했습니다. 무지는 안 알기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지는 사실 변명할 수 없는 죄입니다. 더군다나 목회자와 선교사들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잘 몰랐습니다. 라고 하면 요즘은 손만 뻗으면 책이고 틀기만 하면 인터넷입니다. 어쨌든 서로 다른 것들을 분별을 못해내는 것입니다. 분별해 내지 못하면 정통을 파수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모르니까 지켜야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겠습니다.
두 번째는 세상 사조가 문자가 되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도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 라는 사람의 책이 많이 읽히지 않습니까? 히브리대학의 교수입니다. 그 사람의 책이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최근에 나온 책이 호모데우스(Homo Deus), 사피엔스(Sapiens) 등이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학문을 넘나들면서 펼쳐냅니다. 어마어마한 학문을 가지고 자연과학을 재미있게 풀어내서 수천만부의 책을 전 세계에 팔았는데 게이라고 커밍아웃을 했습니다. 이제는 그런 것이 문제가 안 됩니다.
컴퓨터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튜링이라는 영국 사람입니다. 그가 컴퓨터를 만들어서 2차 대전 때 독일군이 보내는 암호를 완벽하게 해독을 했습니다. 언제 폭격이 떨어지고 어느 배를 공격하고 어느 지역을 공격할 거라는 것을 다 해독을 해서 100% 다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섯 번 정도만 그렇게 해독을 하면 독일군이 발각됐다는 것을 알고 암호를 바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학자가 동원돼서 의심하지 않을 확률을 계산하는 것입니다. 아군부대가 있는데 무전 하나만 치면 다 피할 수 있는데 그냥 죽게 놔두는 것입니다. 더 큰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독일군은 공격할 때 아무 방책이 없이 당하는 것을 보면서 역시 우리 비밀은 아무도 모르는구나. 라고 하는데 이상하게 큰 것을 공격하려고 하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수학자가 의심하지 않을 확률을 계산해서 그것을 가지고 다 대응을 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독일은 암호가 해독된 것을 몰랐습니다. 암호부대가 암호를 해독을 하는데 튜링의 컴퓨터가 돌아가면서 그것을 해내는 것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오늘날의 컴퓨터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영국에서 엄청나게 대접을 받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비참하게 인생의 최후를 맞이합니다. 왜냐하면 한 참 과학에 열중하면서 일을 하는데 게이라는 사실이 발견된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완전히 인간을 매장시켜 버렸습니다. 지금은 영국에서 그렇게 하면 처벌을 받습니다. 실제입니다. 내가 영국교회 목사인데 남자 두 사람이 와서 목사님. 다음 주 토요일에 결혼식 주례를 서 주십시오. 라고 했는데 나는 싫습니다. 나는 게이의 주례를 설 수 없습니다. 라고 하면 현행범으로 체포됩니다.
도대체 뭐가 세상을 그렇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무엇이 인간을 그렇게 바꾸어 놓았을까요? 우리가 믿는 남녀가 유별하다고 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윤리와 성에 대한 관점, 기독교적으로 구별되어 온 남녀의 구별 이런 것들이 왜 무너졌을까요? 왜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겠습니까? 18세기 까지는 대체로 그렇지 않았는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세계정신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절대적인 규범은 없다.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나서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연히 그런 절대적인 규범을 가진 인간에게 강요할 수 있는 신도 없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 같은 사람에 의해서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이런 사람들이 오늘날에 절대적인 규범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다. 라는 것들이 이미 일반화가 되었습니다. 1968년도에 프랑스에서 학생혁명이 일어납니다. 일어난 이유는 몇 가지 있는데 미국이 월남전에 참여하는 것, 대학에 대한 당국의 권위적인 재제, 학생들의 어려운 경재상황 등이 맞물리면서 부당한 권위에 대해 도전하는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프랑스 대혁명처럼 불 지르고 하는 과격한 식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고 기존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모든 질서에 대한 저항운동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유행했던 말이 30살 넘은 인간하고는 대화하지 말라. 였습니다. 다 꼰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같은 현대 철학자들에 의해서 이 운동이 주도됩니다. 그 위로는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도 거기에 들어갑니다. 이미 그 이전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모든 규범들이 파괴되는 작업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나 사르트르 같은 실존 철학자들에 의해서 그것들은 계승합니다. 버터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같은 사람은 나의 평생에 과업은 진리라는 것을 허물기 위해서 나는 이 땅에 태어났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하고 싶은 얘기는 진리를 허물겠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는 것을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노예가 돼서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이데거 같은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거부하고 나면 인간은 완전한 자유인이 된다. 그런데 그것은 무시무시한 자유다. 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이미 신처럼 되었는데 신으로 살아갈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신의 자리는 자기가 탐내서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오는 무시무시한 자유라는 개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조들이 번져갑니다.
일본에서 만든 만화영화 한 편이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져서 아시아권에서 크게 히트를 친 작품이 있습니다. 제목이 공각기동대(攻殻機動隊, Ghost in the Shell)입니다. 일본에서 네 번에 걸쳐서 텔레비전에서 방영을 했고 할리우드에서 왕년에 전사의 이미지에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배우가 나옵니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도 상영을 했고 여기서도 상영이 됐는데 저는 저 영화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몇 사람쯤 될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백 사람이 보면 한 명 많아도 다섯 명도 안 될 거라고 봅니다. 그 안에 엄청난 철학이 깔려있습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자기 인생의 기억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것은 조작된 기억이었습니다. 그때에 나라는 존재는 무엇에 근거해서 나는 나인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보시면 그런 문제부터 시작을 해서 인간이 기억을 못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데 뇌를 빼고 거기에다가 칩을 심습니다.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무한한 기억력을 가지고 저장능력도 엄청나게 늘어나고 팔다리도 기계로 바꿨을 때 과연 그것이 인간인가? 하는 논의들이 지금 한창입니다.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 소위 얘기하는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것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도대체 무엇이 인간인가? 하는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한창 논의되는 문제이고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사상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상을 모르지만 유행을 타면서 사고 자체가 그런 철학에 의해서 지배를 받으면서 인간의 사고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전에 있었던 도덕적인 기준점 같은 것들이 모두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임무는 그것을 판별해 내는 것입니다. 이런 사조들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 비판하고 기독교의 진실성은 입증해야합니다. 현대라는 사회 속에 영적으로 보면 악한 영들에게 지성적으로 보면 현대 인본주의적인 사상 혹은 비이성적인 신비주의사상에 빠져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그들로 하여금 이 세계가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망령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1930년대에 독일을 지배하고 있을 때 국민의 지지율이 97프로였습니다. 아픈 얘기해서 미안한데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일어날 때 수많은 청년들이 천황을 위해서 대일본을 위해서 불꽃처럼 산화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영광스러운 죽음이라고 그들이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일본에 부끄러운 과거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없기 때문입니까? 판별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의 사조에 물들지 않고 성경에 입각해서 디아페론타, 서로 다른 것을 도키마조해서 올바른 판별을 내리게 해주는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목회자는 결국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지혜자가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충분한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테시스를 통해서 교인들을 그렇게 살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렇게 살아서 서로 다른 것들을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연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싫든지 좋든지 내가 설교하는 사람은 현대 정신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목회자들이 그런 공부를 별로 안합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는 이야기가 통하는데 신앙이 없거나 신앙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못 알아듣는 자기네들끼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전도가 어려워집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싫든지 좋든지 내가 설교하는 사람이 현대 정신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목회자들이 그런 공부를 별로 안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는 이야기가 통하는데 신앙이 없거나 신앙 밖에 있는 사람한테는 못 알아듣는 자기들끼리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뭐가 어려워집니까? 전도가 어려워집니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교회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사랑하던 사람을 변화시켜서 하나님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자기가 사랑하고 있는 이런 것들이 정말 사랑할 가치가 없는 헛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목회자에게 있어서 이 변증의 능력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변증하지 않는 것은 진리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가치를 알 때에만 모조품에 대해서 분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피그노시스 그 다음에 아이스데시스입니다. 지식, 총명. 그래서 이렇게 해서 결국은 실제적으로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분별함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결국은 뭐에 대한 분별이냐 하면, 서로 다른 것, 상이한 것들을, 그런데 어떤 문제이지요? 서로 다른 것들인데 사실은 보일 때에는 동일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동일하게 보이는 것들을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를 가지고 보니까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 판별을 내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가 사랑과 결합되었을 때, 사랑으로 타올랐을 때, 그때 동일한 것이 서로 다르게 보여서 그것을 판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해 보셨습니까? 차를 몰고 좍 갑니다. “이쪽이 동경 가는 길 맞지?” 그리고 죽 가다가 딴 생각을 하다가 계속 갑니다. 그러다가 고속도로로 들어선 것입니다. 옆으로 갔어야 되는데. 그 다음에는 10키로 내로는 출구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여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도 할 수 없이 계속 가야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인생의 낭비가 크게 세 가지 때문에 낭비됩니다. 첫째 뭐냐 하면 태만입니다. 게으름, 태만 때문이고, 두 번째는 무지, 무지로 인해서 인생이 낭비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기는 하는데, 완전히 태만한 것은 아닌데 그냥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생이 낭비됩니다. 그래서 이 사도가 세 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분별함과 진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무과오 혹은 무과실입니다. 이게 제일 먼저 나왔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게 제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는 이렇게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 그리고 그 사랑을 가지고 동일해 보이는 것을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 분별하게 함으로써 인생을 낭비하지 않게 해 주는 것입니다. 헛된 일을 위해서 인생을 허비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제가 중국에를 오래도록 관여하고 있고 벌써 중국을 드나든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꽤 큰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선족이나 이런 사람들에게 관심 없고 완전 한족들입니다. 한족들도 있고 다른 족도 있지만 어쨌든 간에 중국 사람들 본토인들을 대상으로 신학교육을 하는데, 그 지역에 아주 굉장히 선한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나는 거기가면 원장님이라고 부르는데, 원장님이 “이분하고 서로 관계를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이분이 우리학교에 학생들을 많이 보내주셨습니다.” 젊은이들이 많은 교회니까. 대화를 나누는데 비록 통역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지만 이분은 진짜 목사입니다. 목사의 분위기가, 사람이 굉장히 신실하고 겸손합니다. 사실은 학생들은 그분을 우리 학교에 받아주면 좋겠다고 그랬는데 그분이 대학을 안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학을 나오는 게 필수입니다. 아마 중학교나 고등학교쯤 나오신 것 갔습니다. 그런데 목사로서의 풍모가 풍깁니다. 그리고 교회도 작지 않은 교회를 하셔서 한 3백 명에서 오백 명 가까이 되는 교회를 목회하던 분이셨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 학교에 이사 같은 직책을 드릴까 생각을 했던 분입니다. 그러고 나서 한 1년 반쯤 지났는데 그 교회가 난리가 난 것입니다. 거기에 있는 전도사를 비롯해서 우리로 말하자면 구역장이나 이런 사람들이 우리 신학교에 와서 개혁신학을 공부했는데 이 목사님은 그 사이에 신사도운동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내가 널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늘 아침 내가 계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쓸모없는 사람으로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신앙 있는 학생들은 그러면 안 된다고 계속 해서 하다가 말하자면 치리당해서 찍혀서 잘린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신실하던 형제자매들이 상처를 받고 그 교회를 떠나가고 그리고는 그 신사도운동에 동의하거나 미친 사람들만 거기 모인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것을 분별해 낼 능력이 없으니까 교회 전체가 도탄에 빠지고 신실했던 성도들이 이단 비슷한 모습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진리에 대한 사랑은 반드시 무지에 대한 미움을 동반합니다. 그것을 동반하지 않으면 진리를 사랑하는 것일 수가 없습니다. 그 진리에 대한 사랑이 무엇입니까? 필로소포스, philosophy, 철학이라는 말이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철학 중의 최고의 철학, 진정한 지혜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대한 경륜이 그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이것은, 다른 모든 지식으로 똑 잘라져서 예수만 튀어나온 그 지식이 아닙니다. 어제 설명한 것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를 원리로 하고 그것들이 하나로 묶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진실하여” 그랬습니다. 이게 목표입니다. 그러면 이 진실이 무엇일까요? 텔레비전에 가끔 나옵니다. “진실을 파헤친다.” 이번에도 어느 회사 사장이 자기 월급을 속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일본 텔레비전에도 '진실', '진실' 그러고 나왔습니다. 경찰 수사를 하면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러면 도대체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 진실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희랍어로 에일리크리네이스라고 나옵니다. 에일리, 이것은 동사활용, conjugation이 된 것이고, 에일리크리노스입니다. 그러면 에일리크리네, 그러면 이게 도대체 무엇일까? 에일리크리네가 도대체 무엇일까? 이게 희랍어에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채 아시지요? 옛날에 엄마가 떡방아 빻아가지고 여기다 가루를 놓고 하면 고운가루가 아래로 떨어지고 굵은 덩어리는 위에 남습니다. 그래서 떨어진 가루들이 모여서 반죽을 할 수 있는 고운가루가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을 에일리크리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무슨 이야기입니까?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인격, 생각, 그 다음에 그가 가지고 있는 감정, 그의 의지, 이런 것들을 이 채에 놓고 막 흔들어보니까, 그 다음에 이 채에 통과를 못하고 걸린 것도 있고 빠진 것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걸려있는 것들은 용도에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떡을 하려면 절구에다가 쌀을 빻았는데 쌀알이 이쑤시개 쪼가리 같은 것을 가지고 떡을 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 기계로 돌리지만 그때는 절구로 빻았습니다. 절구로 빻아서 굵은 채가 아니라 아주 가느다란 채로 쳐가지고 아주 고운 가루만 걸러내야 합니다. 그렇게 걸러내어진 것 그게 크리네입니다. 에일리크리네입니다. 첫 번째 가능한 해석입니다.
두 번째 이 단어가 지시하는 바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햇빛에 비추어 본’ 그런 뜻입니다. 돈을 받았습니다. 요새 복사기가 너무 좋아졌습니다. "이거 복사한 것 아냐?"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가게 주인이 햇빛에다 이렇게 비춰보는 것입니다. 홀로그램이, 이렇게 딱 비춰보면 그 속에 있는 그림이 없습니다. 그것은 복사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오천 원짜리 하나를 똑같이 만드는데 3만원 든다고 합니다. 만들겠습니까? 안 만들겠습니까? 당연히 안 만듭니다. 물론 조폐공사에서 찍을 때는 3만원 들여서 찍지 않을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이 찍으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한국 전체에 있는 오천 원짜리만큼 찍을 수는 없잖습니까? 섞어서 살짝 써야 하니까. 그런데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 제조비가 3만원 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위조지폐가 못 나오는 것입니다.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딱 비춰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일리크리네라는 이 말은 뭔가 사람이 이렇게 하면서 내미는 것입니다. “나 그리스도인이야.” 하고 내미는 것입니다. “나 예수 사랑하는 사람인데” 그리고 내미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가지고 한번 빛에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아, 가짜구만” 아니면 “아, 이것 맞네.” 그것을 통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햇빛, 일광, 그 다음에 채를 뭐라고 합니까? 망이라고 칩시다. 이런 망과 일광, 햇빛, 양이라고도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햇빛이든지 양광이든지간에 그런 것들이 암시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게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없으면 진실을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설명이 될까요? 신학교 다닐 때 제일 먼저 외우는 단어가 이것 아닙니까? 알레데이아, (? 1.34) 그러면서 외우지 않습니까? 기억 안 나십니까? (?, 1.35) 그러면서 외웠잖습니까? 희랍어 정관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격변화. 알레데이아는 진리입니다. 혹은 진심이라는 말로도 사용이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 진리입니다. 자, 이게 진리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디서 온 것이냐? 이게 ‘아’ 플러스 ‘레디아’에서 온 것입니다. ‘아’는 무슨 뜻입니까? ‘없다’, 희랍어에서 ‘아’가 ‘없다’ 뜻입니다. 그래서 ‘레디아’에서 온 것입니다. ‘레디아’는 ‘란다노’라는 단어에서 옵니다. 란다노는 무엇이냐 하면 ‘감추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감추어진 것, ‘아’는 안 감추어진 것,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도저히 감출 수가 없이 너무나 명백하게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진리입니다. 진리는 자명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누구 때문에 진리가 되는 게 아니라 진리는 그 자체가 진리입니다. 그 진리임을 사람을 통해, 역사를 통해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진리는 자연적인 진리, 도덕적인 진리, 철학적인 진리, 신학적인 진리, 설명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지 간에 알레데이아는 진리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왜 필요 하느냐 하면, 성경에 의하면 한 인간에게 알레데이아가 없으면 그 다음에 에피튜니아의 존재가 됩니다. ‘튜니아’는 ‘욕망’이고 ‘에피’는 ‘모든’ 이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모든 욕망, 희랍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에피튜니아입니다. 욕망입니다. 용솟음치는 인간의 모든 욕망입니다. 진리의 빛이 없으면 아무 거나 욕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 오늘 사람을 죽였어.” “왜?” “너무 심심해서.” “어떻게 너 심심하다고 사람을 죽일 수 있냐?” “그게 왜 나쁜데?” 이렇게 묻는 것이지요. “동성애 왜 하는 거야?”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러면 안 되지 않아?” “누가? 누가 그러느냐?" 그러니까 진리의 빛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은 에피튜니아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이리로 넘어가면, 이것은 지우겠습니다. 에피크리네, 에일리크리네 다 지웁니다. 자, 그러면 이제 여기서 이 ‘진실하다’라고 하는 것을 라틴어로 ‘베루스’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베루스 필로소프스 에스트 아마또르 데이”, “참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참된 철학자입니다. 초등학교밖에 못 나왔는데 물론 철학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모든 세계관, 인생관, 역사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 하면 진리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에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생각과 그 다음에 사고와 그 다음에 행위 이런 것들이 이 사람이 이 진리와는 상관없이 이렇게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는 이렇게 가라고 가리켜줍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실제로 이렇게 가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에서 무엇입니까? ‘하마르티아’ 하마르티아가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그래서 하마톨로지 그러면 죄론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그런데 이게 원래 무슨 뜻이냐 하면, 미스터마크, 과녁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리고 가야될 사람이 이리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느 순간에 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이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합치하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이쪽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지만 어쨌든 이렇게 삽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진리와 접촉하는 이 부분에서는 이 사람이 에일리크리네, 진실해 진 것입니다. 결국은 진실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베리따스’, 진리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는데 결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이 이렇게 해서 진리가 이렇게 가리키는데 조금씩 빗나가는 적은 있지만 이렇게 합치되게 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오락가락했습니다. 그러다 그 다음에 이렇게 합치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의 인격과 생활이 진리에 합치된 상태, 이게 진실입니다. 에일리크리네가 이런 의미입니다.
진실한 것은 숨기는 것이나 혹은 감추는 것이 없어야 됩니다. 자, 제가 돈이 매우 궁합니다. 그래서 권 목사님 돈을 훔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잠깐 쉬러 나간 사이에 가방을 뒤졌습니다. 와서 보니까 돈이 없습니다. “내 지갑이 없어졌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 돈이 너무 궁해서 네 지갑을 훔쳤거든, 안 돌려줄 거야.”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솔직하긴 한데 진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이 진리와 합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진실입니다. 너무 궁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돈을 잘 번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그런데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만 엔짜리가 백장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만 엔을 꺼내서 넣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교회 지을 돈입니다. 성도들이 걷어준 것입니다. 갑자기 너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성도들이 낸 헌금을 가지고 지금 건축을 하려고 계약을 하려고 하는 돈인데, 권 목사님이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어디 떨어지지 않았나하고, 전관에서 방송이 나옵니다. 혹시 백만 엔 들어있는 봉투 주운 사람은 갖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모님이 저쪽에서 울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목사님, 정말 미안합니다. 내가 사실은 너무 궁해서 목사님 화장실 간 사이에 봉투를 꺼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빗나갔었는데 인간이 그러면 안 된다는 그것을 안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채에 쳐진 것입니다. 걸러지니까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안 것입니다. 혹은 어떻게 해석 할 수 있습니까? 내 행동을 빛에 비춰본 것입니다. 진리의 빛에.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궁핍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렇게 진리와 완벽하게 합치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만약에 있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곧 しんり, “私がすぐの真理”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완벽하게 합치되는 삶을 살면,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私がすぐの真理” 그럴 것 아닙니까? 그런데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인간은 없고, 만약에 있다면 그것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왜? 그렇게 못 사니까. 그러면 이 그림을 확대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1997년도에, 눈이 올 때니까 아마 1월 달인가 2월 달에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헬리콥터를 탔습니다. 그것도 혼자서. 왜 그랬느냐하면 충무라는 곳으로 집회를 갔는데 끝나자마자 부산으로 이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아슬아슬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 헬리콥터 항공편이 있었는데 그건 사실 돈이 절대 안 됐습니다. 그 당시 오만 원이었습니다. 오만 원 티켓을 끊으니까 그 여행사에서 산꼭대기까지 나를 실어주고 거기에 최신 헬기가 대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왜 했느냐 하면,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항공루트를 선점하려고 했는데 IMF가 나면서 무산이 됐습니다. 그때가 IMF 직전이었습니다. 탔습니다. 그런데 놀라웠습니다. 내가 5만원 내고 거기 갔는데, 여자 승무원 한 사람이 나를 안내하고 조종사, 부조종사 두 사람이 비행기 운전을 하고 갔습니다.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네비게이션을 보았습니다. 자동차 네비게이션이 다 항공 산업에서 온 것입니다. 웃기는 게 뭐냐 하면, 여기가 충무이고 여기가 부산인데 경로를 딱 찍으니까 이렇게 파란 줄이 딱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날아가는데 날아가는 데로 이렇게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조종하다가 딱 빗나가면 다시 이것을 틀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게 무엇입니까? 이것이 진리라면, 무엇을 가르쳐주느냐 하면, 이렇게 빛나갈 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그 다음에 다시 신앙을 갖게 되고, 여기서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를 새롭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진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또 빗나가겠지요?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으로는 이것과 거의 합치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를 믿게 하시는 목적입니다. 당연히 선교사와 목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능력이 더 중요할까요? 진실이 더 중요할까요? 당연합니다. 우리가 못하면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치 일본 선교를 혼자 다 할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별같이 많은 그리스도인 중에서 별같이 많은 선교사와 목회자 중에서 - 한국에 목사가 16만 명이라고 합니다 - 그 중에 한 사람이고, 그것도 그저 한 서른다섯에 목사를 시작하면 한 35년 하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안 사라지려고 하는 것도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태어난 인간의 궁극적인 소명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에 앉아있는 의자를 다음 사람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기 직전까지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이런 일을 해야 된다.” 그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런 생각하면 안 됩니다. 떠나가야지만 다음 사람이 옵니다. 그러면 바로 목회자는 이 자기 자신이 이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실한 것인지를 이렇게 철학적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도저히 접근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으셨다면 도대체 그리스도인중 몇 명이 진실해 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안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진실한 삶의 이론을 모두 몰라도 이 진실의 모본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셔서 이러한 학문적인 지식이 모자라는 사람도 따라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대신 성령의 충만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가 없이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러니까 나름대로 그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식으로 에피그노시스를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우리 담임목사님이, 제가 30세 초반에 전도사를 했는데 그런데 목사님이 자기 부흥회 갔다 온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시골에 가서 교인 한 열댓 명 모이는 곳에 가서 부흥회를 했는데, 진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당연히 한글은 모르고 아무 것도 안 적이 없고, 너무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 산도 넘어가 본 적이 없는 거의 화전민 수준의 생활을 하던 분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이신지를 깨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높은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동네에 처음으로 높은 게 들어왔습니다. 전봇대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할머니가 간절한 마음으로 울먹이면서 기도를 하시는데, “전봇대 같이 높으신 하나님, 돼지 같은 나를 돌아 보사”, 이 할머니 눈에는 돼지가 정말 미련 맞은 짐승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도 아주 훌륭한 에피그노시스입니다. 그리고 아이스데시스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무식한 할머니가 하나님이 계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꽉 붙들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열렬히 기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정도의 불길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불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무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러니까 그런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참 진실해 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붙잡고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예수님 뭐라고 대답하시면 됩니까? "I am." 그러면 간단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안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진리가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진리를 진심으로 알고 싶은 것도 아니고 믿으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호기심, 궁금증, “진리에 관해서 한번 들어나 보자.”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답을 안 하십니다. 결국은 진실은 이렇게 진리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살아가는 것은 인간인데 드러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진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진리는 어떻습니까? 선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엄청난 격려를 받게 만들고, 악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슴이 섬뜩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제가 들은 한 형제는 공인감정사였습니다. 여기도 그렇지만 한국에서 감정사의 임무는 무엇이냐 하면 건물이나 토지를 보고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를 매겨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은행에서 대출금액을 결정합니다. 그러니 조그만 집 같으면 별거 아니지만 어마어마하게 큰 공장이나 혹은 땅이라면 10퍼센트만 감정을 더해주면 대출 금액이 수백억이 왔다 갔다 하고, 이게 회사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현장에 가서 너무 많으니까 자면서 1박2일로 묵으면서 그것을 감정을 하게 되는데, 밤중에 숙소로 회장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정말 나를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꼭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걱정 마십시오. 제가 최선을 다해서 높은 가격으로 감정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가방을 꺼내더니 - 지금부터 한 30년 이전 이야기입니다 - 신문지로 똘똘 뭉친 뭉치를 내놓는 것입니다. 펴보니까 나달나달하게 낡아서 도저히 추적할 수 없는 낡은 돈 백만 원 다발 열다섯 개를 앞에 탁 놓는 것입니다. 그 천오백만원이면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교회를 처음 얻었을 때 보증금이 천오백만원이었으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분이, “제가 꼭 회장님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것은 안 받습니다.” 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것 받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이야기했을 때 이 회장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섬뜩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기 있구나.” 그게 무엇입니까? 돈 싫은 사람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싫으십니까? 싫으면 절 주십시오. 돈 싫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 돈보다 더 중요한 진리가 시퍼렇게 살아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것입니다. 그때에 그 사람이 보이는 게 아니라, “아, 인간이 이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하는 밤하늘에 별똥이 지나가는 것처럼 진리가 확 가르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이 세상에 두신 목적입니다. 진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게 하려고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교사나 목사들이 진리보다 자기 사역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역은 저 하위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진리가 짓밟힐 때가 되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사람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결사(決死)의 애정, 결사적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사역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비즈니스입니다. 비즈니스,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여기서는 뭐라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에서는 상무(商务)라고 합니다. 비즈니스입니다. 이게 원래 뜻이 무슨 뜻입니까? 장삿일이라는 것입니다. 장사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저 어제 강의하고 들어가서 새벽 내내 앓았습니다. 제 체력이 이렇게 할 체력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천명 이천 명이 오라고 하면 안 오는데 여기 와서 제가 오늘 이렇게 열을 내고 장시간 강의해서 결국은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을 다 못 끝내고 갑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것 하려고 목회하는 것이고, 전 여기에 와서 사역을 하는 것이고,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면 진리의 사역이 될까, 이게 도움이 될까하고, 나같이 미천한, 서울도 아니고 서울 변두리에 있는 시골교회 목사를 불러다가 이 강의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은 상무가 아닙니다.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후배들이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개척교회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제가 야박하지만 묻습니다. “개척교회를 하지 않을 이유가 너에게 있느냐? 나한테 한번 말해보라. 왜 하는데?” “교회를 세워서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고 싶습니다.” “너 진짜 하나님 나라 사랑 하냐?” “네.” “네 마음에도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느냐?” “네.” “그러면 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것과는 치열하게 싸우느냐?”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임하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 하소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그래서 선교사와 목사에게는 통곡하는 영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뭐라고 부르느냐 하면 토혈(吐血) 설교, 피토하는 설교입니다. 토혈의 목회, 피 토하는 목회가 되는 것입니다. 왜 피를 토합니까? 일본 계시니까 이해 잘 하실 것입니다. 일본 사무라이들은 (? 2.07) 그런데 언제 그렇게 토혈을 해 버립니까? 사무라이들은? 일본 바둑사에 보면 어떤 사람이 바둑에 져서 지금도 토혈국(吐血局)이라는 기보(碁譜)가 전해 내려온다고 합니다. 저는 바둑을 그렇게 잘하지 못하지만. 바둑을 두다가 졌습니다. (? 2.07)돌을 던지면서 너무 분해서 바둑판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피를 확 토하고 죽은 것입니다. 그게 토혈국이라는 기보입니다. 들어보셨습니까? 바둑사에서 들어보셨지요? 토혈국이라는 기보입니다. 한번 인터넷에서 찾아보십시오. 바둑을 두다가도 지니까 원통해서 피를 토하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교를 하다는 되면 되고, 잘 된 거는 내가 워낙 헌신했기 때문이고 안 된 거는 선교지의 특수성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묻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요새 잘못 피를 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이 토혈의 기준이 자기 철학입니다. “나 개척교회 성공했거든? 이렇게 하면 되더라. 이렇게 안 하는 건 다 꽝이야. 그리로 가지마. 나를 따르라.” 그래서 자기 (? 2.09)안 하는 사람을 보면 피를 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피는 진짜 그 피가 아닙니다. 이게 토혈의 사명입니다. 진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찬양)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도다.
믿는 자여 어이할꼬.
그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 선교사, 목회자의 일생은 토혈, 피토하다 죽은 (? 2.10) 이게 삶입니다. 결국은 이게 진리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 속에서 빌립보교인들을 생각하면서, 좁게 생각하면 빌립보교인이지만 빌립보교인들뿐만 아니라 자기가 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이렇게 되기를 너무너무 원한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목회자들이 목회를 잘 해서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를 통해서 자기도 이렇게 되고 성도들의 가슴에 사랑의 불길이 태어나게 하고, 그래서 분별해 내고, 에일리크리네가 되어서 진실한 사람이 되고, 그래서 이 사람들이 분별을 통해서 진리 안에서 생각하고 진리 안에서 살고 그 다음에 진리에 합치하도록 살아서, 결국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김중권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살아 계실 때. 그분은 선교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대학(? 2.12) 뭐냐 하면, 선교를 한다는데 인공위성 같은 사람이 선교를 한다고 하더라. 지구가 그리스도고 인공위성은 지구 주위를 돕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돌아서 열 몇 시간 만에 한 바퀴씩 돌 수 있습니까? 뭐냐 하면 여러 해를 돌았지만 한 번도 지구와 만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서 받은 불 때문에 유대교의 지도자였던 사도바울이, “살아도 주를 위해 죽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비록 성령이 각성에서 증거 하여 환난과 결박이 나를 기다린다 하여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는 내 목숨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담대하게 선포하고 마지막에 뭐라고 합니까? ("To die is to me" 2.13) "내가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하니 이는 내 안에 사는 이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를 깊이 만나고 눈에 비닐이 벗겨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쏟아져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이 사람의 숙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아모르빠띠, 운명적 사랑이 된 것입니다. 토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랑이 된 것입니다.
저는 선교보다는 목회 쪽에 훨씬 더 많이 관여했으니까. 비전은 있습니다. 그런데 피를 토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세웁니다. 성공하면 혼란한 사상을 전파하고, 정상적이면 안 되겠지요?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 속에서 사랑이 부어지고, 그것을 통해서 진리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도키마조하고, 그렇게 하고 자기 자신이 진실해져서 결국은 자기의 존재를 통해서 진리를 보여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이 사람의 이상이 아닙니다. 이것을 반드시 돈하고만 연결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적인 상무는, 비즈니스는 반드시 돈과 관련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도 돈과 관련되지 않는 비즈니스 많습니다. 나의 이름을 내고, 돈은 별로 들어오는 게 없는데 한번 권한을 행사해 보는 것입니다. 돈은 들어오는 일이 없지만 그러나 한번 내 이름을 내고 내가 가지고 있는 꿈을 한번 펼쳐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모두 다 상무입니다. 비즈니스입니다. 진리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보시면서 그 사람들이 고통 받고 방황하는 이유가 결국은 무엇이라고 본 것입니까?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그렇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살아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을 뒤잇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를 포함해서 우리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하여 왔을 때, 내가 너희 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그리고 자기가 소아시아에 어떻게 사역을 인해서 모든 겸손과 눈물과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가 했던 일은 회개와 믿음을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 2.18)에게 가장 심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이 진리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편으로는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예언자처럼 꾸짖으면서, 어떻게 하든지 그들을 모든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를 통해서 이 진리에 합치되는 사람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되는데, 그렇게 토혈의 선교, 토혈의 목회를 하면서 이 일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소망을 가져야 됩니까? 내가 이렇게 되고 싶은 타오르는 욕망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욕망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큰 사업을 하고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자금을 움직이고 세상에서 많은 사람에게 박수갈채를 받고 그리고 누구도 해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사역을 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이 진리에 합치된 사람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그런 고백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 살아 있으려고 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매일 매일 진리를 발견하며 그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 속에서 이 진리를 따라 살지 않으려는 자신이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으면서 죽은 만큼 자기 안에 예수가 살아가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비밀입니다.
마지막 이것으로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허물없이” 그랬습니다. 허물없이, '아프로스포코스'입니다. ‘아’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없다’는 뜻이고, ‘스포크로포스’는 이게 흠결입니다. 흠, 흠이란 것 아시지요? 흠입니다. 법률행위에 흠이 심각하면 그 행위 자체가 무효가 됩니다. 개인이 되었든 나라가 되었든지 간에. 그리고 책임을 져야 됩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추석 때 같은 때 한국의 최고의 백화점에 가면 배하고 사과하고 10개밖에 안 집어넣었는데 10만 원짜리가 있습니다. 한 알에 천 엔입니다. 천 이백 엔쯤 됩니다. 과일 하나가. 그런데 한 알을 깎아서 도저히 못 먹을 정도로 큽니다. 그런데 불빛 앞에 아무리 돌리고 보아도 프로스코포스가 없습니다. 흠집이 없습니다. 흠집이 있으면 결격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 이상 흠집이 나지 않도록 고급 포장지에 싸가지고 화려한 박스에다가 담습니다. 시장에서 그것보다 약간 작은 것 한 만원에 다섯 개 살 수 있는 것을 한 알에 만 이천 원 정도 줘야 살 수 있는 최고급 명품과일선물세트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잡지에서 읽었는데 일본에서 진짜 비싼 소고기가 1키로 그램에 4백만 원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4백만 원인데, 오늘도 저는 200그램 먹고 장로님은 300그램 먹었는데 양 많이 먹는 남자들은 1키로 혼자서도 먹을 수 있습니다. (? 2.23)면 1키로가 안 되잖습니까? (? 2.23) 650그램 정도 됩니다. 능히 먹습니다. 그런데 4백만 원입니다. (?) 저 미국산 소고기 냉동으로 들어오는 것 400만원이면 이 책상만한 것 살 수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기를 때부터 아예 그 고기만 특정 부위를 떼어내려고, 제가 읽은 그 기사에 의하면 우유로 목욕을 시키고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고 일체의 스트레스도 없이 그 소를 모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 2.24) 내려고. 거기가 ‘아 프로스코포스’의 고기입니다. 그런데 미국으로 건너가도 보통 최소한 350불 심지어 500불 줘야 스테이크 한 조각 먹을 수 있도록 고가의 스테이크인데 (? 2.24) 진짜 (?) 상표가 유명합니까? (?) 차이가 무엇입니까? 일체의 흠결이 없는 고기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맛있겠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사야서에서 5장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이스라엘을 극상품의 포도나무로 만들려고 심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들 포도만 맺혔구나.” 똑같은 사상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엄격한 농부 (? 2.25) “이 나무를 찍어버려라.” 왜? “땅만 버리는구나.”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허물이 없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어떤 점에서 허물이 혹은 과오가 ‘아 프로스포코스’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신학적으로 프로코포스가 없어야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이 만든 신학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칼빈도 비판을 받아야 하고 루터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학을 하는 이 사람은, 어차피 인간이 하는 신학은 완전할 수 없으니까 그만두자 혹은 아무렇게나 하자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자, 저격수들이 (? 2.27) 전 세계의 나라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드는 부대가 있습니다. 그게 스나이퍼, 저격수입니다. 유튜브에 1.2킬로에서 저격을 하는 기슬을 보여준 영상이 있었습니다. 1.2킬로면 사람이 보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안 보이는데 정확하게 한발에 죽이는 것입니다. 확대경으로 보여주는데. 그러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 스나이퍼가 예를 들자면 백발백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주 숙련된 저격수 말고 제가 오늘 처음 뽑혔습니다. "너 김남준, 스나이퍼다. 오늘부터 훈련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600미터 바깥에다가 무엇을 세워놓고 하는데 내 실력으로는 60미터에 있으면 정확하게 머리 부분을 맞힐 수 있는 실력입니다. 그런데 600미터에 세워놓은 것입니다. 특수한 총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것 맞출 때에 나는 그것을 맞출 능력이 없습니다. 10발 쏘면 두발 밖에 안 맞습니다. 그런데도 내 머리 속에는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어차피 많이 쏘아도 안 맞는다고 이렇게 안 하고 어떻게 합니까? 매번 쏠 때마다 "이건 명중해야 해, 명중할 수 있어." 그리고 쏘는 것입니다. 과녁이 여기 있는데 활을 당깁니다. 그런데 잘 못 맞춥니다. 잘 못 맞추니까 하고 여기다대고 쏘는 사람은 없다 이 이야기입니다.
신학을 할 때 누구도 완전한 신학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경에 대한 믿음과 지식 그 다음에 신앙, 사랑, 영혼,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서 가장 올바르다고 믿는 신학을 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이렇게 해서 허물이 없는 신학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렇게 신학적으로 허물없이 설교하고 목회하고 선교하고 가르치고 살고 살게 하고 그렇게 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지적으로.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윤리입니다. 신학적인 프로스코포스는 가끔 묻힙니다. 어마어마하게 설교를 했는데 그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이단을 (? 2.30) 그러면 교회에서 쫓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한 애매모호합니다. 그냥 놔둡니다. 별로 그렇게 크게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올바른 목회나 선교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윤리는 프로스코포스가 생명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여태까지 쌓아왔던 엄청난 모든 좋은 평탄과 명성, 하나님께 돌렸던 영광 이런 것들이 한 번에 쏟아져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 마음속에 어느 한 선교사가 너무 너무 훌륭하게 헌신했던 것은 잠깐 기억을 하고 과실을 저질러서 윤리적인 프로스코포스가 생기게 된 것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기억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선교지로 (? 2.31) 이해되십니까? 그리고 이것은 목회자들이나 선교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인들을 그렇게 기르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목회하고 선교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신학적으로 이렇게 프로스코포스가 되지 않으려면, 아프로스코포스가 되려고 하면 당연히 하나님은 많은 지식 그 다음에 올바른 판단, 그리고 그 판단이 성경에 기초하고 그것을 설교해내고 풀어내서 사람들이 그릇된 것과 참된 것들을 분별하도록 만들고, 꼭 같아 보이는 것들 중에서 다른 것 그런데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똑같은 것들을 분별해 내서 그것을 명료하게 해 주는 한편, 자신이 그것을 온 몸으로 살아내서 자기가 윤리적으로 아프로스코포스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끊임없이 자기를 채찍질하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자기 부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것입니다. 이게 대부분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의 길입니다. 저는 오늘 여기까지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의와 영광이 되게끔 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시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그리고 선교는 바로 이러한 큰 구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입니다. 제 강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