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심화편1)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8-9)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추호의 겸손이나 과장이 아니라 목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알기까지 교회를 시작하고 10년이 넘게 걸렸던 것 같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예전에 가졌던 목회에 대한 생각들이 너무 폭이 좁거나 한쪽으로 치우쳤었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앞으로 사는 날 동안 더 깨닫게 되겠지만 최근에 하나님이 목회에 대해 이 본문을 통해서 총체적으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이 본문은 1년 전에 제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깨달음에 대해 오늘 간략하게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한 사람이 무엇을 목표하고 살아가는 지는 그 사람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초대교회와 온 세상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 대해 어떤 이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주기도문처럼 확실히 드러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쉬운대로 주기도문을 잘 가르치면 기독교신앙의 뼈대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칼빈 시대에 주기도문을 1년을 가르친 것을 보면 기독교신앙에 얼마나 중요한 골격을 형성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목회자들이 주기도문을 깊이 탐구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똑같이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드렸다고 고백하는 기도 속에는 그가 꿈꾸고 그리고 있던 기도의 제목에 대한 이상이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 66권 전권을 통틀어서 우리가 오늘 읽은 8절부터 11절 사이에 나오는 구절만큼 목회에 대해 의심할 여지없이 명료하게 포괄적으로 언급한 성경을 처음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500-600페이지를 쓰면 누가 읽겠습니까? 그래서 고민이 한손에 들어올 정도의 책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 편지를 쓸 때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을 때입니다. 어쩌면 순교를 당할지 모를 상황인데 그 마음속에 쉼 없이 타오르고 있는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인들, 더 넓혀서 보면 이 땅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기도였습니다. 그것은 목회로 나타났습니다. 놀라운 것은 감옥 속에서 마지막 인생의 최후를 바라보면서 그의 관심사가 선교가 아니라 목회였다는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가 상반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한참 청년 시절에 열렬한 시기를 지나고 불타는 열정의 시대, 위대한 30년의 시기를 지나면서 인생의 말로에 접어들면서 그의 관심사는 다시 교회로 향한 것이었다고 자리매김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교회로 관심이 모아지면서 이 교회가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을 이루는 매체가 된다는 것을 빌립보서, 골로새서, 로마서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기도하노라…” 라고 이야기하면서 “너희 사랑을…”말합니다. 당연히 ‘너희’는 ‘빌립보 교인들’입니다. “너희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에 이어서 11절 구절까지 중간에 많은 단어가 나오지만 다 괄호 속에 넣어보면 “풍성하게 하사…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원하노라”가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목회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오늘 목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작은 교회는 겨우 생존하기에 바쁘고 큰 교회는 사업을 하는 것처럼 교회를 운영하기에 바쁩니다. 큰 교회는 커다란 프로젝트와 성과에는 관심이 있지만 영혼 하나하나에 대한 뼈저린 관심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목회의 본질이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없는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너희 사랑을 풍성하게 하사…”입니다. 그 사랑의 소유격이 비록 ‘너희’라고 나오지만 그 사랑은 그 사람 속에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 자신에게서 나온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그 사람 사랑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우리들이 한눈으로 보면 결국 창조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타락은 인간의 그 지혜와 사랑을 떠난 것입니다. 구속은 그 지혜와 사랑을 회복시키는 과정입니다. 그 모든 세계의 완성은 그 지식과 사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완성’은 두 국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의 창조와 타락으로부터 나타난 지식의 실종과 사랑의 상실의 측면에서 완성이지만 영원한 세계 안에서 증진할 지혜의 빛과 사랑의 증가의 측면에서는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의 운명은 세계가 완성된 이후에도 매일 천국의 기쁨을 인식되는 지혜의 증진, 새롭게 경험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앎의 증대에 대해서 인간은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 아침마다 새롭고, 매순간 새로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신학적으로 교회는 이미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조지 엘던 래드에 의하면 침투해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모든 세계에 침투해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이미 침투해 들어왔고 침투해서 사람들 속에까지 들어오게 된 무리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목회는 이미 내 사랑을 가지가 내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중매쟁이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자기가 그 여성을 신랑에게 소개시켜줘서 사랑과 혼인의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시기감을 느끼면 중매쟁이가 아닙니다. 나는 이것이 목회의 윤리에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많은 교회에서 부교역자들에게 절대로 그룹으로 성경공부를 못하게 합니다. 여기 있다가 가는 형제는 열심히 목회를 하고 싶었지만 허락 없이 심방을 못하게 하는데 그 허락은 장래, 개업, 돌, 임종 이런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나는 그 목사님이 많은 피해의 경험을 통해 습득이 되는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중매하고 자신이 잊혀도 행복하듯이 부교역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교인들을 그리스도께 담임목사를 통해서 교회가 전체적으로 하나를 이루도록 하는데 기여하고 자신은 거기서 잊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담임목사도 똑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인들을 자꾸 그 마음을 도적질하고 찢고, 교회에서 부교역자에게 설교를 시켰을 때 뛰어나게 설교를 잘하는 사람을 제외시키는 것이 현실입니다.
결국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할 때 ‘너희 사랑’은 하나의 사랑이 아니라 ‘헤 아가페’, ‘그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 ‘아가페’라고 하는 것은 신약성경에서 여러 말로 사용이 안 되고 그냥 아가페입니다. 요한복음에 “네가 너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에 동사가 세 개로 나오지만 큰 의미의 차이가 없고 기본적으로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서방교회가 사랑에 이야기할 때 사랑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방식은 희랍철학자들이 느낀 사랑의 방식과 다른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도 자기 이익을 위해 돌아가는 것이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육욕적으로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면 육욕적인 자기 사랑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을 믿음으로 보십니다. 진정으로 자기를 위한 사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열등한 사랑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종류의 사랑을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 보니까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발견하고 나면 내가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었던 동기, 나를 교회로 인도했던 고통스러운 상황,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런 모든 것들은 모두 검불이 되어 날아 가버립니다. 이것이 헤 아가페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3일 전에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여러 명이 모여서 읽고 나누었습니다. 두 시간 반을 수업했는데 10절을 나갔습니다. 이미 들었던 이야기이지만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에 희생은 없다. 사랑에는 자기 부인도 없다.’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니까 희생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희생한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아직까지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데 도달하지 않아서이고, 자아가 느끼는 상실감이 자기희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돌멩이에 맞아서 내 몸에 피가 철철 흐릅니다. 내 손을 들어서 상처에 난 피를 닦고 약을 발라줍니다.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나의 손이 내 얼굴을 위해 희생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몸은 하나의 자기 사랑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구절을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한없이 울었습니다. 내가 이제껏 알고 왔던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들이 그래도 뭔가 자기 의무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끊임없이 영웅담을 늘어놓듯이 자기가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 자기가 얼마나 많이 포기했는지를 자랑합니다. 물론 짐승처럼 막 산 사람에 비해서는 훌륭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게 한 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고 발견한 헤 아가페가 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구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한때 나도 그랬지만 너무 괴롭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조용히 손을 얹고 ‘오. 하나님 제가 목사입니다. 그리고 나는 사랑해야 합니다. 주여. 저는 어떤 희생을 치러도 좋으니 그리스도의 교회에 평화와 기쁨을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 사랑이냐?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를 부인한 사실이 죽기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기억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단화 할 때 바리새인의 삶입니다. 능가하게 느끼는 것은 팩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미 나를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용서하고 사랑하셨는지에 대한 기억을 그 팩트를 잊어버려서 아직도 희생하는 내가 보이고 끊임없이 나를 죽이는 것이 기억에 남고 내가 저 사람의 유익을 위해 버린 것이 기억에 남고 그것이 나에게 손해로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아. 이것이 나의 수준입니다.’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매일 싸우는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의 기억은 명료하고, 이미 무한하게 입은 하나님에 대한 입은 사랑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렇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불편한 것을 해결하거나 고통을 감소시키거나 더 많은 기쁨을 주기 위해서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해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에 대한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아담에게로부터 받은 고백이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런 사랑이 주님이 우리에게 부어졌으나 그 사랑에 대한 현재적인 기억으로부터 현저히 멀어진 만큼 우리는 그 사랑의 원리에 배반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주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셔도 어거스틴이 말하는 그런 완전한 사랑에 누가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랑에 깊이 빠졌을 때 잠시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도 자식이 너무 사랑스럽고 고귀할 때 자기의 콩팥을 떼어주고 간을 떼어주면서 희생했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입니다. 부모가 하는 이야기가 ‘내가 네 놈을 위해 어떻게 길렀는데….’ ‘어떻게 사랑했는데….’ ‘모든 것을 주었는데….’ 라고 말하잖습니까?
저도 교회를 목회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마음이 먹먹해지면서 ‘내가 내 청춘을 이 교회를 위해 다 주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주고 그렇게 어마어마한 책을 팔고, 그렇게 인기 있는 강사로 전 세계를 돌아다녔어도 내 주먹에 단 오천만원도 없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렇게 다 주었는데.’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무엇을 받은 게 있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살았던 삶이 정말 사랑의 삶이었고 그것이 진짜 나 자신을 아낌없이 주는 사랑의 삶이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양심에서 나오는 사랑이고 다른 사람과의 사랑에 비교해서 나온 사랑의 개념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엄마보다 좀 나은 하나님의 사랑, 아빠보다 좀 나은 하나님의 사랑, 돈 많은 할아버지보다 괜찮은 사랑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절대’는 줄을 이어서 함께 마주할 수 있는 상대가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상대해서 비교해서 같은 반열에 세워서 대조할 수 있는 짝이 없는 것을 절대적인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이라는 말을 남발하는데 아무것도 절대적이 아닙니다. 부모의 사랑이 절대적이라고 하나 가변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성도들에게 부어주시고 목사들에게 부어주셨을 때 우리의 사랑의 원리는 절대적인 사랑의 원리를 따르는 삶입니다. 그것이 헤 아가페입니다. 그것을 상세하게, 배운 대로 에로스의 사랑에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가고 아가페의 사랑에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아가페로만 구분하여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의 사랑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분석을 좋아하는 서방교회가 그것을 나누고 성경에도 영향을 미쳐서 하나는 love, 하나는 charity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절대적인 사랑이 아닌 반짝이는 빛과 같은 사랑을 중구난방으로 던져주면서 ‘이것이 사랑이 아니냐?’ ‘이런 사랑을 본받아야 하지 않냐?’ 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복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이해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한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 간의 교통에서부터 완전성과 아름다움으로 서로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은 당신들의 존재의 양식이 사랑이기 때문에 모든 만물을 이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하시고 아무 사람도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도록 그 대신 받고 주는 사랑이 각기 자기 발전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헤 아가페에 대해서 눈뜨면서 수많은 사랑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 된 가운데 그 하나의 사랑으로 사람들이 살아가게 하십니다. 목회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인간을 진정한 행복으로 데려갈 그 헤 아가페에 대해서 충만하게 눈뜨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는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심겨진 그 사랑이 어떤 요소로 인해서 계속 풍성히 자라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의 활동입니다. 수없이 건물을 짓고 헤아릴 수 없이 지혜로운 시스템을 만들고 엄청난 헌금을 쏟아 부어서 조직을 돌린들 마지막 결과물은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 그렇게 주님께로부터 받았던 사랑이 불일 듯 풍성하게 사랑하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주 간단하게 목회의 성공을 얼마나 교회가 커졌는가를 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매우 슬프게 하는 관점입니다. 교회의 목회의 성패는 사람들 속에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한번 이것을 물어봅시다. ‘내 교회는 30명밖에 안 모입니다.’ ‘내 교회는 100명도 안 모입니다.’그런 관점에서 오는 판단에서 목회자는 좌절을 느낍니다. 글서 ‘그래. 나는 능력이 부족하고, 전도를 잘 못해서 30명이 모였다. 그 상황이 벌써 10-15년이 되고 있다.’ ‘내 그릇이 이거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절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목회 운명론으로 접어드는 길일뿐입니다. 절대 본인 생각으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100명, 200명으로 가지 않으면 나는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의 원리는 식물을 심는 원리와 비슷합니다. 씨앗을 심고 정성껏 돌보면 싹이 납니다. 매일 정성껏 가꿨더니 새싹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습니다. 자란 나무를 화분에서 땅으로 이식합니다. 끊임없이 옮겨 심고 뿌리가 흔들릴 까봐 받쳐주고, 때에 맞는 거름을 주고, 해충이 모이는 곳을 만들어주면서 정성을 기울이면 그 나무는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교회 앞에 은행나무가 두 개 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무도 그 나무에게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닦달한 사람이 없습니다. 때가 되면 한 가마니가 나올 정도로 은행이 쏟아집니다. 자연스러운 원리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3000-5000명의 목회를 하도록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으로 비율이 낮고 이미 기독교 인구가 심각하게 줄어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물어야 합니다. 내게 있는 10명의 교인이 그 속에 사랑이 나의 목회를 통해,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렇게 되고 있는가? 그것을 물어야 합니다. 교회가 200명모이면 힘이 생기고 300명모이면 목이 굳어지고 500명모이면 누구에게 배우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사랑에서 목회의 생명이 시작합니다. ‘그래요. 하나님. 제 그릇이 이 정도여서 20명밖에 못 모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 속에 있는 하나님 사랑이 왜 내가 목회하는데 점점 증가하지 않고 있습니까?’ 이렇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에서 ‘점점 더’는 희랍어로 ‘말론 카이 말론’이고, 영어로 ‘more and more’입니다. ‘점점 더’는 점진적인 것입니다. 점점 증가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그릇이 작아서 그것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수천 수백 명을 모으지 못하더라도 정말 그렇게 되고 있습니까? 들어가 보면 빈 껍질의 교인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을 목회의 본질에서 자신의 마음의 중심에 닻을 내리고 목회를 하면 목회가 커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목회하는 현장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어야 한다는 본질에 충성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수천 명을 데리고 있다가 죽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수백 명을 데리고 있다가 죽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열린교회 교역자로 있었으니까 기억이 날 것입니다. 2005년에 전교인 영적 건강 검진을 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통계가 충격적이었습니다. 열린교회는 수평이동으로 유명한 교회였는데 전체 교인의 40%가 불신자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교인 중 70%가 열린교회 온지 1년 미만의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40%의 불신자를 전도한 것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그 사랑이 ‘말론 카이 말론’, 점점 더 풍성하게 되면 전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로 선교사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이명성 목사를 만났습니다. 북한에 갇혀있던 사람입니다. 저와 대한신학교 동창입니다. 동기동창은 아니고 나이는 나와 같거나 나보다 한해 먼저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분이 2시간 동안 특강을 했는데 신학적으로 깊이 강의를 한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정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분도 유명인사가 되었잖습니까? 북한에 모금해서 보낸 돈이 600억 정도라고 합니다. 부산에서 인기 있는 강사인데 큰 교회 집회를 갔다가 집회 전에 낮에 시간이 있어서 사모님과 해운대에서 하루 종일 전도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정도로 성공한 사람이 연세도 있으니까 피곤할 텐데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3000명이 넘는 교회에서 목회하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한편으로 그 사랑을 성도들에게 풍성하게 일어나게 하기를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 여러분들은 1:1놓고 상담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입니다. 1월에 한 번, 7월에 한 번 이렇게 하면 10일 만에 모든 심방을 끝낼 수 있습니다. 돌아다니면서 마음만 먹으면 여러분 면담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하고 대화하면서 ‘얼마나 이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나’, ‘내 목회를 통해 주님 사랑에서 미끄러졌나 진정했나?’ 이것을 보고 미끄러졌으면 고통 해야 목회자의 양심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수없이 온 교인을 동원하는 날을 만들어서 교회를 가득 채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랑을 그들에게 심어줄 수 있는 기회일 뿐입니다. 그 자체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형성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새벽에 새벽기도를 작심하고 이틀을 나오고 이틀 동안 못 일어났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침대에서 기도를 하는데 계속 생각이 납니다. 나에게 모든 정보가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청년들의 이야기, 한 다리 두 다리 건너서 들어오는 이야기 등, 기도하는데 눈물을 주십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은 윈윈이 안 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는 가능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게 오는 많은 양떼 네게 맡겨줄 테니 내 양떼를 부탁한다.” 하시잖습니까? 온 힘을 다해 설교하고 강대에 내려와서 은혜를 받은 사람을 생각하면 기쁘지만 마음이 주님에게 떠난 사람을 생각하면 눈물이 흐립니다.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지혜를 주십니다. 청년부 교역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청년부에 이야기했습니다. “청년부에 막 떠벌리지 말고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진 사람들 중 정말 벗어나고 싶은 자발성이 있는 사람을 순서대로 35명 정도 뽑아봐라.” 32명이 채택됐습니다. 보시다시피 토요일은 교리반이 있었습니다.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을 어떻게 돌볼까?’ 생각하다가 두 번만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핵심이 무엇이냐, 영혼의 핵심에 빠진 이유, 주님의 사랑을 자꾸 잊는 이유에 대해 질문을 하라.’라고 했습니다. 많은 질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만나서 서로 소개한 후 나의 이야기를 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기도한 것이 아니라 차분차분 모든 질문에 답했습니다. 한 시간 사십분이 걸렸습니다. ‘기도를 하라.’고 했고 ‘몇 분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새벽기도 나오라고 강요하지 않겠다. 왜 사랑을 잃어버렸는지 기도하라.’ 그리고 이 카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약속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매일 기도하마.” 정말 매일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매일 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한없는 눈물을 주셨습니다. 너무 가여웠습니다. 청녀들의 사정 하나하나를 들어보면 나라고 해도 그 이상은 못살 거 같은 한계상황이었습니다. 매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힘이 없어 금식을 못했지만 온 마음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2주후에 절반을 찢어서 만나고 저녁을 차려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2주밖에 안 지났는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 엄마아빠의 기도를 받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기도해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에게도 기도하는 아빠가 생겼구나. 그리고 마음을 다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리도 안하고 1주일에 한 편만 설교를 들으라고 했습니다. 한 청년은 자기는 물리적으로 죽어도 기도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매일 새벽 한시에 퇴근했다고 합니다. 끝나고 와서 마음을 다해 답을 해주었습니다. 엄청난 기도회를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대부분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지성적 혼란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을 우리가 표상이라고 부릅니다. 청년들이 첫날 만나고 다음날 생각을 바꾼 것입니다. ‘나에게는 출근 시간이 있지 않은가. 전철을 타는데 앉을 자리가 없다.’ 내가 그 이야기를 이미 해주었습니다. 오랫동안 침체에 빠진 사람이었는데 만원 전철 속에서 하나님이 너무 간절한 기도 속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철타고 가는 시간이 거의 45분-1시간인데 간절한 기도를 하니까 직장에 갔을 때 분노, 억울함, 그런 데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하루를 기쁨으로 시작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감싸면서 시작합니다. 그때 느낀 것이 내가 영혼의 침체에 빠진 것은 내 시간과 상황의 문제가 아닌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간증들이 생겨나고 다음 주에 생겨나고 2주후에 5주 마지막에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림짐작으로 32명 중에 10명 정도 큰 영향을 못 받았고 20명은 회복을 시켜주고 10명 정도는 비상하리만치 영혼 침체에서 벗어나고 금식하며 새벽기도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듣고 눈물이 났습니다. ‘이렇게 조금만 애를 쓰면 영혼이 살아나는데, 나는 도대체 무엇이 중요해서 이런 일들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물론 내가 모두 할 수 없었지만 너무 가슴 깊이 밀려들어왔습니다. ‘원래 여기가 끝이다.’했습니다. 꽃다발까지 가져왔길래 “자. 우리 한 달만 더 기도해줄게. 한 달 후에 만나서 고기 먹자.” 한 달 동안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연말이라 바빠서 16명이 모였는데 정말 불과 8주 전에 만났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살아있습니다. 이렇게 사랑해주고 조금만 더 마음을 쏟으면 일어설 수 있는 영혼들이 그렇게 놓여있는 사람, 아직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목회는 그런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풍성하게 일어나니까 상황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상황이 자신이 주님께 나아가는데 방해받지 않는 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가 커 보이면 세상이 작아 보이고 세상이 작아 보이면 예수가 커 보이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교인이 30명밖에 없어도 밥 먹으러 모여 다니지 않아도, 이런 영적인 문제들을 인간관계로 묻어버립니다. 정이 들어가는 것으로 목회합니다. 청교도들이 목회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심각한 잘못으로 봤습니다. 교인들은 목회자와 가까워지지 말고 목회자는 교인들 속에 내려가지 말고 주님의 사랑으로 대언자가 되고 그들은 먹게 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존경합니다. 좋아합니다.’라고 해도 좀 떨어져서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도 있지만 떨어져서 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기울여서 돌보는 양떼들을 내버려두고 욕심에 사람들에 대한 욕심은 구령의 열정이 아닙니다. 있는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데 있지 않는 영혼에 대한 사랑이 본질적으로 무엇을 지시하는 사랑이겠습니까? 어거스틴은 전도는 주님 말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그것이 잘 안 되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 목회자의 마지막 양심입니다.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목회자의 마음이 부패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런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할 것인가? 그것을 지식과 총명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은 희랍어로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에피’는 ‘~에 관하여’ 이고, ‘그노시스’는 ‘지식’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결국 지식으로 목회하는 것입니다. ‘에피그노시스’는 우리가 오늘날 이야기하는 information knowledge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온전한 앎입니다. 그 사물 속에는 하나님도 들어가고 인간도 들어가고 세계 자연 만물도 들어갑니다. 결국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대한 지식의 시작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있기도 전에 지식을 가지고 계셨고 그 지식에서 창조세계가 나온 것입니다. 온전한 지식으로 목회하는 것이고, 그것 없이는 사람들 속에 참된 지식을 불러일으킬 수 없습니다. 제가 이번에 깨달은 것은 영적 침체의 가장 큰 원인은 죄라기보다 모르는 것입니다. 몰라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일단 지은 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니까 밤새워도 할 수 없는 질문이 나오는데 그 중에 한 자매의 질문이 인상적입니다. “저의 영적침체는 그날 목사님이 한 시간 사십분 동안의 답변을 듣고 빛을 봤습니다. 이제 어디로 나가야 할지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지식으로 목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끊임없이 참된 지식을 찾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공부하고, 책만 붙들고 목회를 망치는 사람을 봤습니다. 책을 보고, 남의 이야기를 듣되 끊임없이 이것이 어떻게 나를 참된 지식에 이르게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그노시스’가 어디서 나온 지 아십니까? 희랍어 동사 ‘기노스코’에서입니다. ‘알다’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그노시스를 이야기할 때 근원적인 학문의 그노시스가 아니라 ‘그노시스 투 예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분 안에서 이 모든 세계의 만물들에 대한 의미가 밝혀집니다. 설교의 기본은 모르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입니다. 매시간 새로 아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5000편 정도의 설교를 해보십시오. 공부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한번 실험을 해보십시오. 설교를 하고 성도를 시켜서 녹취를 해보게 하십시오. 자기가 건질 내용이 있는지 동그라미를 쳐보십시오. 그래서 공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유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사물에 대한 온전한 지식에 도달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총명’입니다. ‘아이스데시스’라는 단어입니다. 유서 깊은 단어입니다. 결론적으로 아이스데시스는 서론,본론,결과 이런 것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어떤 사물을 확 하고 관통하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13년 전에 성탄절 낮 설교에 한 젊은이가 왔습니다. 충청도에 사는 사람인데 처남집에 왔다가 성탄이 돼서 우리 교회에 왔습니다. 전공이 플라톤입니다. 예배당 의자에 앉았는데 잠자기 좋은 의자였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데 설교자가 강단에 올라와서 본문을 낭독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순간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습니다. 끝나는 시간까지 울었습니다.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일까?’ 돌아가면서 아내에게 “여보. 다음 주에 이 교회 한 번 더 오면 안 될까?”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철학자다. 내 평생 이성으로 사고한 사람인데, 지난주에는 지나친 숙취와 과음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생각하고 다음 주에 우리교회에 또 왔습니다. 설교시간에 똑같은 경험을 하고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플라톤 철학에서 말로만 듣던 체관이었습니다. 논리를 넘어서 사물을 꿰뚫으면서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 아들이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결국 도덕적 판단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주석가들이 아이스데시스를 설명할 때 도덕적 판단을 내리게 하는 능력이라고 해석하지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통찰에서 오는 도덕적 판단입니다. 우리가 늘 하는 말로 사용하면 믿음이 생겨나는 것을 말합니다. 목회하면서도 이상한 상황에 처했는데 이상한 짓을 계속합니다. 계속 수렁에 빠지고 불행해집니다. 온 이성을 동원해서 설명해도 인간이 말을 안 듣습니다. 내 목회를 통해서 믿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믿으라고 가르치지만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에 지식은 사랑의 불은 끈다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이 그림을 영원히 마음속에 넣고 있으면 됩니다. 볏짚 단입니다. 여기에 불을 지르면 한없이 불꽃이 타오릅니다. 예전에는 사람을 나무에 태웠는데 몸집이 큰 사람은 잘 안탑니다. 그래서 볏짚으로 태웠습니다. 장작과 비교할 수 없는 열입니다. 한 트럭을 갖다 놔도 15분도 채 안돼서 타버립니다. 이런 것은 정상적인 불이 아닙니다.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 속에서 사랑이 타올라야 합니다. 내 목회를 통해 에피그노시스를 넣어 던져주고 아이시데스가 계속 올라갈 때 이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릅니다. 이것을 타오르게 하는 분은 성령이 역사하실 때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를 사용해서 아가페의 불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온 마음을 다해 설교하고 열정을 다해 외치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 일을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일이 모두는 아닙니다. 아이를 낳는 것이 아내의 중요한 임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모두는 아닙니다. 에피그노시스는 끊임없는 탐구와 자신 안에 체화시켜야 합니다. 매일 그럴 수는 없지만 내 삶 자체를 흔드는 깊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 이것 없이 내가 짐승처럼 살았구나.’ 깨닫게 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한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타고난 것만이 아닙니다.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하고 주님을 깊이 만난 모든 사람이 대단한 목회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한 사람도 끊임없이 체화시키면서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설교자가 창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들음에서 나옵니다. 끊임없이 이 ‘들음’이라는 올바른 지식의 재료들을 올려놓고 마치 갈멜산에 장작을 쌓아놓은 엘리야의 심정으로 이 쌓아놓은 장작이 무슨 일을 일으킬 것이라고 엘리야는 생각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 위에 물까지 부었는데 말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론 카이 말론’의 목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어떻게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다.” 심장이라는 말은 희랍어에서 “카르디아”입니다. 여기서 쓰인 단어는 “카르디아”가 아닙니다. “스프랑크나”입니다. “스프랑크나”는 “창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창자에 영혼의 좌소가 있다고 봤습니다. 이것이 동사로 사용될 때 열린교회를 세운 원인이 되었던 누가복은 9장 35절의 말씀처럼 “에스프랑크니스데”, “불쌍히 여기시니”가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으니”라는 동사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아가페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목회자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파송하는 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신 원리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에스프랑크니스데”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예전에는 예수님이 무리들을 사랑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을 사도로 선택해서 보내실 때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예수는 예수이고 목회자는 목회자인데 이것을 관통하는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헤 아가페” 그 사랑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자기 할 일을 다 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 영혼 하나 하나에 대한 눈물겨운 사랑, 그리고 그들의 아픔을 내가 느낀다고 말하는 한,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게 내 아픔이 될 때 그것이 사랑입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 저들의 아픔을 내가 느낀다고 할 때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이 내가 아플 때, 너와 나 사이에 구별이 없이 아플 때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묻고 싶습니다. 목회자는 처음 목회로 부름 받을 때는 그 사랑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내가 항상 그 사랑 안에 있지는 않습니다. 내가 항상 그 사랑 안에 있지 않은 것을 고민하는 것이 목회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신자의 양심인 것입니다. 목회자가 완전한 사람이라면 문제가 없습니다. 한 번 받은 그 사랑으로 죽을 때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목회자도 물건을 보면 욕심이 나고 좋은 곳을 보면 가보고 싶고 심지어 죄를 짓고 싶을 때도 있고 게으르고 싶을 때도 있고 대우가 좋은 곳으로 가보고 싶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성공한 친구들을 볼 때 열등감도 생기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자기는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질 때도 있고, 심지어 부부싸움도 자주 합니다. 그런 불완전한 인간이 목회자입니다. 어떤 때는 교인들이 우리보다 나은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너무 순수한 까리따스 사랑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것을 느낍니다. 해결의 길은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내가 이만큼 목회를 했으니까 경험에 의해서, 이만큼 이걸 했으니까 이런 것에 의해서, 이런 것이 아니라 자신은 매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 속에 부어지지 않으면 나는 맨 처음 소명의 진실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진짜 선하지 않은 목자로 일생을 마칠 수 있다는 거룩한 긴장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사역을 잘하면 교회에서 사랑받고 담임 목사에게 예쁨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 아십니다. 당연히 우리도 교회에 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영성이 심오하지만 일은 하나도 못하는 젬병같은 사람은 제쳐두고 좀 떨어져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사랑이 끊임없이 자신 속에 부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도 똑같습니다. 목회란 무엇인가? 그 마음속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 이 이야기는 이미 15년 전에 나와 함께 있을 때 해 준 이야기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하나도 변하지 않고 똑같고 그때처럼 똑같이 슬픕니다. “나는 한순간도 주님의 사랑의 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라고 느끼면서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마지막에 자기의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했고 이제는 순교의 길을 간다고 하면서도 그 위대한 30년의 전도 활동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겨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매일매일 우리 속에 감동으로 다가올 때 그것을 가지고 예수의 심장으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가 기도하노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회가 닿으면 제가 어제 설교했던 시편 5편 1, 2절의 첫 번째 강해를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생각하면서 설교했습니다. 나를 바꾸어 놓는 기도, 내 목회를 바꾸어 놓는 기도는, 무엇에 의해서도 추호도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성질의 기도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나의 눈물을 그치게 할 수 없는 그러한 기도인 것입니다. 진짜로 기도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목회자를 만나면 “저는 새벽기도를 한 번도 빠지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너무 훌륭합니다. 나처럼 건강이 좋지 못해서 나가지 못하는 사람은 늘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 계실 때 했던 것처럼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덧붙이고 싶은 것은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마지막 이야기하는 것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수천 명의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의 예외적인 케이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런 점에서 나에게 잘못 배웠습니다. 여러분은 매일, 매우 특별한 목회적인 일정이 있지 않은 한, 휴가가 아닌 한, 여러분은 매일 전도하러 나가야 합니다. 교인들을 행사 속에 달궈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서 전도해야 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임현식 목사님이, 자기가 평소 가보지도 않은 해운대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고 열 명과 대화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전도를 했는데 세 사람이 교회에 나가겠다고 약속을 했답니다. 여러분도 그 확률은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전도지를 팽개치고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세 사람 쯤은 교회에 간다고 할 것이고 그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자기 교회에 방문해 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첫째로 당신이 감동을 받으셔서 다른 방식으로 성도를 보내주십니다. A 동네에 가서 미친듯이 전도를 했는데 한 사람도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상상도 못했던 곳에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등록합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살아있는 목회를 하려고 눈물로 몸부림치는 당신의 종들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정말 미안하지만 절대로 여러분을 얕잡아보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가슴 아픈 것이 50명 모이는 교회의 후배들은 300명 모인 교회의 목회자처럼 목회를 하고, 100명 모이는 교회의 목회자 후배들은 500명, 200명 모이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1000명 모이는 것처럼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나는 전체 에드워즈 전집을 통틀어서 에드워즈가 노방전도를 나갔다는 이야기를 못 들어봤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가 지금의 시대와는 다르고 내가 목회하던 시대와 지금도 다릅니다. 여러분이 안 된다면 전심으로, 뛰어난 평신도에게 교육을 받아서라도 그렇게 여러분들에게 전도 자체가 사역의 일부가 되게 해야 합니다. 엊그제도 우리 교회에 와서 목사님이 전도 강의를 했는데 혈혈단신으로 목회하면서 전도하여 500명을 모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6개월만 전도하면 하나님은 6개월이 지나도록 부부가 혼자 전도하도록 절대 놔두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그 열정으로 목회를 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명입니다. 나는 이미 그런 시절을 다 보냈고 나는 이제 목회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나는 나의 길을 걸었지만 여러분 중에서는 나와 유사한 길을 걸은 사람은 없습니다. 나도 물론 그렇지만 여러분 자신도 지극히 평범하고 한 번의 설교로 수천 명을 감동시켜서 내 이름 석자를 듣고 밀려오는 목회는 아닐 것라고 진작부터 결론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던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게으르거나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전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자신의 “업”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모와 함께, 자신은 헌신한 사람입니다. 정말 웃기는 사람은 선교사로 파송될 사람들인데 이 땅에 있는 동안 전도를 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같은 문화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전도하지 않고 구령의 열정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선교지에 가서 거기 피부색깔이 다른 사람들은 만난다고 전도의 열정이 솟아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라고 할 것이 없는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반드시 이것은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여러분의 팔에 힘이 없고 혀가 굳어지고 중풍에 걸리고 치매가 와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2005년도쯤 “새벽기도”를 쓸 때 3만부가 팔렸습니다. 그 책에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난 새벽기도를 하다가 너무 힘이 들어서 일어날 수 없을 때 두 발로 이불을 뻥! 차면서 충성!하며 일어납니다.” 라고 강의를 했을 때 옆에서 정필두 목사님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못합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게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충성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물리적인 힘이 안 됩니다. 내가 왕성했던 날보다 정확하게 20kg을 잃었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그런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 앞에 생사를 걸고, “주님, 나의 목회를 여기서 끝나게 하시겠습니까?” 이 뜻은, 50명에서 끝나게 하시겠습니까? 하는 뜻이 아닙니다. 나는 50명이라도 정말 주님의 사랑이 “말론 카이 말론”, 살아서 불붙고 있다면 그런 기도도 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작은 지역에서 더 이상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나의 마음이 증거합니다. 이 이상의 목회가 있다고, 그리고 적어도 내가 목사로 부름을 받을 때 꿈꾸었던 목회는 이 이상 순결함에 있어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에 있어서나 성도들이 누리는 영혼이 풍성함에 있어서 이 이상을 꿈꿨는데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서 인생을 끝내는 것이냐고 물어야 합니다.
어제 우리 김성구 목사님 아버님, 은퇴하신 목사님께서 오셔서 간증을 하셨습니다. 몇 천명을 목회하시던 목사님이 아닙니다. 앙드레 김의 친구였습니다. 패션 디자이너였습니다. 성공한 길을 버리고 목회에 들어섰을 때 21일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살릴 것인가 죽으실 것인가? 이것이 이 나이에 버겁게 느껴지면 여러분의 목회는 그냥 밋밋하게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목회자로서 기본적인 교회를 꾸려가면서 밥 먹고 그냥 어울리면서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만난 주님인데… 저는 지금도 계속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내가 손해를 봤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이 나에게 그런 놀라운 사랑을 주시고 나에게 모든 것을 주셔서, 안 주신 것이 없습니다. 어린 나이에 나를 높이셔서 교수 삼으시고 무지랭이같은 나를 한국교회의 목사들에게 감동을 주게 하시고 두 번 망한 교회의 자리에 열린교회를 서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목양하게 하셨습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전부 빚덩어리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빚덩어리. 그리고 나의 존재라는 것은 이제 알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고 코끝에 달려있는 호흡도 예수의 것입니다. 옛날에 가리켜 묘사하기를, “나의 존재는 그리스도의 핏방울 끝에 매달려있고 내가 매일 호흡하며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리신 예수의 눈물 끝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받은 것이 많은데 이것 밖에 못하는 이런 내가 너무 싫습니다. 마지막 남은 길은, 내가 못하는 것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할 수 있는 것을 안 했다는 소리는 듣지 않도록, 내 힘이 닿는대로 최선을 다해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사는 것 외에 우리에게 또 다른 목회의 대안이 있으면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지금도 절대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묵은 땅을 기경하듯이 박차고 일어나서 “나는 평생 이렇게 목회하다가 절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죽는다면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나에게 다른 삶을 주십시오.” 하고 목숨을 걸고 주님 앞에 매달리면, 하나님이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여주실 것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집회를 갔다가 정말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름도 잘 모르는 젊은 선교사인데 아프리카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목회를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이름이 알려지는 선교사는 대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널리 알려진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님이 8000교회를 개척했다고 합니다. 자기 혼자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기 제자들과 함께 8000교회를 세워서 그 교회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예수의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 창피했습니다. 나의 삶은 너무 안일하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큰 사랑은 작다고 생각하고 나의 희생은 너무 크다고 생각하면 살아온 이런 삶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지를 생각했습니다. 비수처럼 내 가슴에 칼을 꽂은 장로의 한 마디 말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솔직히 말해봅시다. 목사님 제자들 중에 제대로 목회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목사님의 제자들이 무슨 목회를 하고 있습니까?”, “미안합니다. 내가 거기까지 밖에 못 키웠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안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나는 확신하는데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기를 모두 던지는 사람에게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