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자를 부르심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녹취자: 이재호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세 번째 나타나신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으나 그 부활이 무슨 의미인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고기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돌아갔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실패하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던지자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때야 말씀하신 그 분이 예수님 이신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마치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 밤새도록 고기를 잡다 실패했지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큰 기적이 일어났던 사건과 데자뷰였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실패한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패한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예수님이 이 제자들에게 하신 일을 크게 4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식탁을 차리셨습니다. 제자들은 그제 서야 예수님인 것을 알아보고 달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서 준비하셨는지 이미 숯불을 피우고 물고기와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이 모습은 어떤 식으로든지 선지자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권세 있게 가르치시고 능력을 행하시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숯불을 피우고 제자들을 위해서 조반을 차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 바로 곁에 제자들은 모였을 것이고 예수님은 그 식탁을 준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잘 익은 생선을 나누어주고 잘 구워진 떡들을 나누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권하셨을 것입니다. 이 모습은 그리스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가족을 위해 아침상을 준비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이 비록 실패했지만 예수님의 마음에는 여전히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의 모진 배신과 도망간 것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상처도 받지 않으셨는지 이렇게 정성껏 식탁을 차리며 그 제자들을 한자리에 모으셨습니다. 성경에서 이 식탁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아무하구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가족들끼리 함께 한 식구로서 식탁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시록에서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도들과 누리는 생명적인 연합을 ‘그는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식탁을 나누는 교제로 표현을 하셨습니다. 그리나 이것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인생이 곤고할 때, 실패의 실패를 거듭할 때, 낙심과 좌절이 계속될 때, 마지막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 봅시다. 언제나 거기 계셔서 실패한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리스도 이외에 신자가 돌아갈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 봅시다. 주님은 오늘 이처럼 실패한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령 충만하고 봉사 많이 할 때만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주님을 배신해서 고기 잡으러 돌아간 이 제자들을 제자들이 아닌 예수님 자신이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실패한 그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코 나쁜 일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끊을 수 없는 가족관계가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실패했을지라도 좌절했을지라도 그 실패한 삶의 현장에 찾아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들을 가족처럼 아침을 차려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좋으신 예수께 돌아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는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님은 그 모든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신 이름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는 부르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를 통해서 아주 훌륭한 신앙의 고백을 받으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는 불후의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라고 고쳐 주셨으니 이는 ‘반석과 같은 믿음’ 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싫어서 버리시게 하신 이름인데 왜 오늘 예수님은 베드로라고 하는 당신이 지어 주신 훌륭한 이름을 내버려두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셨습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이름은 그 당시에 매우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부활 후 세 번째 제자들과 함께 만난 식탁의 자리에서 그 이름을 불러 주고 계신 것이겠습니까? 의미는 이것입니다. 만약에 이 자리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야’ 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반석과 같은 큰 믿음아’ 라고 부른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이름을 불러 주었다면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고 실패했던 베드로는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노라고 다짐했지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실패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이 베드로를 만약에 ‘큰 반석 같은 믿음이여’ 라고 불러 주셨다면 그는 매우 몸 둘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께 그 새 이름을 받기 전에 원래 어린아이 때부터 불렀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찬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불러주신 이유는 실패했지만 그 시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아 주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달픈 인생을 살고 외롭게 느껴질 때에 언제나 불러도 포근한 이름이 있습니다. 엄마입니다. 그 한 단어 속에는 자기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자기를 받아 주시는 분, 자기가 어느 곳에 있든지 자기의 편이 되어주는 이 세상의 유일한 사람이라는 그림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에는 아직 좁혀지지 않은 낯선 간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멀리 떠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맹세를 저버리고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 양심의 가책이 아직도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떠셨겠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가 죽는 데까지 따라 가겠노라고 장담할 때에 이미 그가 배신할 것을 아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배신하기도 전에 이해하시고 그에게 사명까지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1~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복음서의 스토리는 이런 것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비겁하게 배신을 합니다. 그 중에 한 사람만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고난을 받으며 예수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까지 따라옵니다. 더럽혀진 그 사람을 예수님이 지극히 높여서 모든 제자들의 머리를 삼고 교회가 영원히 본받아야 할 제자의 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영웅을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영웅을 바라볼 때마다 도저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위대한 인물로 느끼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사랑을 죄 지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 오히려 당신의 그 큰 자비를 실패한 사람들에게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았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까지 모든 사람을 다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를 배반하게 하신 후에 하나님이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하시는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주저앉은 자를 다시 일으켜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 실패하고 낙심하고 주님을 배신할 때에 누구도 불러주지 않던 이름이었습니다. 주님이 지어주신 위대한 이름은 있으나 그의 삶은 주신 그 이름에 알맞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소외되어 있을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 이 사람을 받아주시며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가까이 계십니다. 신앙은 그렇게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혼자서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을 의지하고 그분의 용서를 의지하는 것이 신앙이니 오늘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는 예수를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렇게 물으신 후에는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이 부분이 “네가 이것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번역될 수도 있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물건이라면 아마도 바다에서 그 새벽에 잡아 올린 물고기를 가리키는 것일 것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혹은 네 육신의 양식이 될 이 물고기를 좋아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으니 이것은 그것도 사랑하고 예수도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조금 더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네가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나 이외의 것들이냐 아니면 나 자신이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중요한 질문을 베드로에게 던졌습니다. 이것은 베드로 한 사람에게 던진 질문이 아니라 그와 함께 실패하고 배신의 길을 걸어갔던 그 모든 제자들에게 함께 던지신 질문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질문입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했니?’ 하고 과거로 물으셨다면 과연 베드로는 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과거의 일을 잊으신 것처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되풀이 하신 것은 이 질문이 갖고 있는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데 그 전에 확답을 받고 싶으셨던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모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성향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성향은 중생과 함께 우리 안에 심겨졌으니 이것은 곧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작용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가장 뚜렷한 일은 우리를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때때로 은혜에서 멀어져 불순종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죄를 짓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용서, 진리의 대한 감각에서 멀어져 세속적인 사람으로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어떤 경우에도 신자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해도 그는 세상을 옛날처럼 온전히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성을 하나님이 구원받았을 때에 그의 영혼 안에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 인생 전체에 달린 질문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전에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 세상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과 세상의 있는 것들을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은 것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혼자 살아가는 그것이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시되었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고는 자신의 모든 불행이 하나님 없이 살았다는 것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며 행복해지려는 데에 불행의 원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를 지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기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껏 살아온 많은 날들의 불행이 자신의 옳은 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불행하게 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고백에 동참했습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생의 모든 불행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버리는 법을 배웠고 자신의 모든 삶의 동기가 하나님 사랑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결국 사랑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올바른 대상을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참 행복이니 오늘 하나님 이외에 사랑하는 것들을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끊임없이 수고하나 가시와 엉겅퀴에서는 먹음직한 열매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메마른 광야를 지나가는 것 같은 곤고한 인생이 계속 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오래간만에 만난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은 베드로의 생애 전체를 꿰뚫는 아주 중요한 실존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인생이 어찌 될지, 우리는 어느 날에 이 인생의 무대를 끝내고 퇴장하고 죽음너머로 들어가게 될지,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들과 언제 이별하게 될지, 내 인생의 어떤 불행한 일이 닥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긴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은 회개가 없는 기독교 신앙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참된 신앙은 반드시 회개를 동반하는 신앙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을 사랑했던 삶을 진심으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사 다시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다시 사랑을 고백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 넷째는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신 후에 세 번이나 반복해서 질문하신 후에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찬양)
내게 오는 많은 양떼 내게 맡겨줄 터이니
사랑하는 내 친구야 나의 양떼를 부탁한다
요한복음 21장은 사실 없어도 되는 장입니다. 요한복음 20장 마지막 절을 보면 요한복음의 마무리뿐만 아니라 4복음서의 마무리로 아주 훌륭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한복음 21장을 부록처럼 여기에 끼어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부록처럼 달린 요한복음 21장의 주제는 오직 한가지 입니다. 실패한 베드로를 지도자로 복귀 시키신 것입니다. 만약에 요한복음 21장이 없었다면 우리는 매우 큰 혼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4복음서가 끝날 때까지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은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고 예수님보다는 목숨을 사랑하여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한 장을 넘기니까 갑자기 사도행전 1~2장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들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은 그렇게 철저히 실패한 제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될 수 있는지 그 근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실패하지 않은 영웅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교회를 이끌어가게 하신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연약한 모든 사람과 같이 똑같이 부족한 사람들, 똑같이 실패한 사람들, 그러나 다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회복된 사람들을 통해 사명자가 되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의 양떼를 맡겼습니다. 여러분들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모두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이 꼭 태어나게 하실 이유가 있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고 나서 이 지구에 있었던 인류의 수가 1천 억 명쯤 된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었지만 존재의 이유가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의 목적을 찾아서 올바르게 살다가 행복하게 죽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허공을 치는 것처럼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왜 태어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채 인생을 살아갑니다. 사명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깊이 예수 날 위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 그래서 자신이 이제는 어린양과 같이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 그래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을 듣고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에게 사명은 보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발견할 때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왜 어디서 용기가 납니까? 고난도 슬픔도 이길 수 있는 힘이 왜 나옵니까?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일이 있고 내가 그 일을 행함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우리 주님의 이름에 명예를 안겨드린다는 확실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 인생에서 겪는 성공과 실패, 기쁨과 좌절, 고통과 환희, 이 모든 것들은 어느 하나도 의미를 가지지 못한 것이 없이 위대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루를 숨 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내 인생이 그 분의 손안에 붙들려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 환희와 기쁨의 삶을 하나님이 베드로에게만 주셨겠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실패하고 쓰러진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삶을 주셨습니다.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고 쓰러진 자를 건져 주십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은 엎드려진 나를 밟고 지나가지만 주님은 엄마처럼 찾아오십니다. 실패한 나를 위해 밥상을 차려 주시고 그리고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면서 내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교정하게 만들고 하나님 이외에 사랑하던 세상에 붙은 욕심을 부끄러워 내려놓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왜 태어났는지, 왜 살아가야 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펼쳐지는 세계는 이제껏 살았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신세계의 삶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길을 지나며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그분이 나를 붙들고 계시는 동행하는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순간을 살아도 영원에 잇대어 살고 죽음과 위험에 에워싸여도 이 질그릇에 보배를 주셨으니 그 생명을 찬양하며 사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머뭇거리기에는 너무나 짧습니다. 그리고 금방 지나갑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 같은 사람을 보내어 여러분들을 인격적으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왜 태어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시려고 말입니다. 엄마처럼 밥상을 차려 주시는 예수님, 있는 모습 그대로 이름을 불러 주시는 그리스도,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 우리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