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만 걷는 섬김은 없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 20:17-21)
녹취자: 김정규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사실상 순교의 길을 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역사의 결국은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지 않고 로마에서 순교하는 걸로 되어있지만, 갈 때의 심정은 그렇게 거기서 성령이 고난을 받게 하신다는 증거가 있었고, 자신을 기꺼이 드릴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밀레도라고 하는 곳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던 길에 불연 듯 에베소의 장로들을 부릅니다. 아마도 그냥 가려고 하다가 꼭 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러고 불러서 유언적인 설교를 남깁니다.
제일 먼저 이 분들을 불러서 자신의 소아시아지방에서의 사역에 대하여 회고를 합니다. 약 3년이 넘는 시간이었는데 아시아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에베소만이 아니라 여러 교회를-지역을-다니며 선교하고 목양한 것에 대해 회고를 하는 것 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꾼으로서 이렇게 짧다면 짧지만 길면 긴 3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면서 난 숨기는 것이 없었다. 나의 모든 삶이 당신들 앞에 드러났고, 당신들이 내가 주님을 어떻게 섬겼는지를 아마 알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사람-사도-가 자기의 고백을 합니다.
첫 번째는, 그 사람이 아시아지방에서 사역이 제일 깊이 기억에 남는 것은 한 없이 ‘겸손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내가 겸손했었다는 것이 아니라, 겸손해지게 하는 환경을 만난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이 겸손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겸손하게 하시지 않는데도 겸손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종종 비굴이 되기 쉽습니다. 제일 먼저 기억에 남는 것은 겸손이었습니다. 그냥 겸손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겸손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삶의 모든 방면에서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터득했던 것입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아시아 지방으로 선교를 나가려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유럽 쪽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리스 쪽으로 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때문인지 성령님이 막으십니다. 아시아 쪽으로 둘러서 저 멀리 가려는데 하나님의 길을 막으시고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이 나타나서 우리를 도우라고 하면서 복음의 진로가 아시아 중국 이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유럽 쪽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막으셨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첫 번째 선교지가 유라시아와 유럽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경험하면서 결국 그는 자기가 가고자 하는 선교계획을 가지고 있을 때는 공부도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정보도 많고. 그런데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오는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겸손, 이것을 깊이 배우면서 일평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생각하면서 사역을 한 것입니다. 첫 번째 배워야 되는 것은 ‘겸손’입니다. 아침시간이라서 제가 긴 설교는 못하지만, 겸손하십시오. 내 사역에 내 섬김에 뭔가 어려움이 일어나고 장애가 생길 때, ‘아이 이놈의 것 힘들어서 못해먹겠네, 글쎄 연말이 얼마 남은 거야, 아유 내려놔야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해져서 내가 삶이 어떤 방향에서 그분을 의지하지 않았는가를 생각하면서 기도의 게을렀던 것들을 뉘우치고, 마음을 쏟지 않았던 것을 뉘우치고, 시스템을 잘 갖춰놓으면 저절로 잘 굴러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고 후회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는 매순간 기도의 눈물로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사역을 하는 사람입니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눈물이며’ 이것은 겸손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은 사도바울은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회심하기 전의 모습을 보면 유대종교 지도자로서 겸손이나 눈물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눈물을 배웁니다.
모든 겸손과 눈물을 깊이 터득하면서 하나님 앞에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본을 따라서 통곡과 눈물로 이 섬김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맘에 들지 않는 많은 사람들보다 당신의 마음에 합당한 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당신의 그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방법을 혈기방자하고 잔인하고 독선적인 이 사람이 눈물을 통해서 낮아지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큰 아픔이고 고통이지만, 그 눈물을 흘리며 우리가 약한 것을 깊이 느낄 때 하나님은 일은 부합니다. 그리고 그런 약한 때의 어떤 일이 잘 되어도 우리는 자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신다. 그렇게 믿습니다.
간절한 소원은 우리 모든 섬기는 사람들이-구역장들, 팀장, 순장, 장로님, 당회, 교역자는 말할 필요도 없고-눈물이 많은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때로는 오해를 받고 모함을 받아도 그 눈물이 그 모든 상황들을 이겨내서 하나님을 앙망하고 바라보도록 만들어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세 번째는 ‘유대인의 간계로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았다’ ‘메도디아’란 단어로 복수로 나옵니다. 한두 번 힘들게 한 것이 아니라 집요하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우에 바울을 죽이기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고 괴롭히는 자들이 늘 있었습니다. 얼마나 사도 바울이 미웠겠습니까? 바울의 선교가 아니면 유대인들의 판이 될 텐데, 그리고 저 개 같은 이방민족들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게 할 수 있는데, 복음이라는 것을 전파하면서 개나 소나 다 불러서 하나님 백성이라고 불러주고 그들을 높이니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역겨웠겠습니까? 옥중행전에서 긍휼분자들이 사도바울을 습격하고자 하지 않습니까? 이런 나쁜 일들을 계속하면서 사도바울은 그들과 대항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관가에 고발-그건 자기 자신이 고린도서에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들이었습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복음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갈 때 그 시험을 수없이 당해서 괴로운 때를 만납니다. 시험이 너무 와서 괴로우면 사실은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죽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을 섬기는 전방에서 그렇게 삶과 죽음사이를 넘나들면서 교회에는 갈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섬김의 최전선에 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 뒤에서 따라오려고 합니다. 데모를 해도 앞에 선 사람들이 대부분 죽습니다. 선발대를 서면 죽을 확률이 뒤 따라오는 후방의 군사들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앞자리에 서서 그 모든 유대인들의 간계로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참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영적으로 변화를 받는 것은 대단한 것 같지만 하나님말씀을 붙들고 꽉 붙어서 그 말씀을 붙들고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러나 일단 마음에서 그렇게 하나님께 진실하고 충성스럽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의 끈을 놓아버리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기 앉아계신 분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주님을 깊이 만나고 깊은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중에 많은 사람들은 떠나서 다시 세상적인 신앙으로 돌아갑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기억하십시오. 세상과의 추억은 1년만 쌓였는데도 잊지를 못하고, 주님과의 추억은 10년이 쌓여도 단칼에 날릴 수 있는 게 죄인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으로 척박하고 양식도 되지 않는 허접한 사료를 먹으면서 힘겹게 인생길을 걸어가는데 거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나는 요새 그런 생각을 아주 많이 합니다. 그러고 어떤 면에서 나도 말씀사역을 하면서 착각하며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은 사람은 물론 전하는 사람까지 자신을 경계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그런 많은 난관이 있었는데도 사도 바울은 주를 섬겼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눈물 나지 않습니까? ‘목사님 제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끊임없이 나쁜 놈들이 있어서 나를 모함하고 교회를 섬기지 못하게 방해를 했습니다. 정말 내가 열린 교회에서 섬기는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는 주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모두라면 그냥 그랬을 뿐입니다. 겸손한 이유는 나를 죽이고 예수를 높이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내 뜻을 꺾고 다른 인간들이 뜻이 사라지고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의 간계로 인한 시험을 참은 것은 참지 않고 보복을 하면 하나님이 일이 안될까 봐 그래서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참은 것은 결국 마지막 섬기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내가 그만둘 거면 뭘 참을게 있습니까? 섬긴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결국은 그 뭐든 난관을 뚫고 주님이 보실 때 너는 그냥 견디고 힘들어하고 눈물 흘리고 괴로워하던 사람. 그것이 아니라 그 모든 걸 뚫고 결국은 주님을 섬겨내고야 만 사람이다. 아멘
그걸 인정을 받는 것 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십니다. 삶의 상황은 고난으로 가득차서 나의 사역의 앞길도 잘 보이지 않는데,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주시는 것 입니다. 그리고 나의 섬김의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지푸라기와 같은 나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구나. 아멘.
그것이 신앙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람들이 사도바울이 무슨 이를 섬겼느냐고 할 때, 오직 하나만 이야기합니다. 교회도 세우고 구제도 하고, 과부들도 돕고 고아들도 돌보고 뭔 일을 안했겠습니까? 근데, 모든 것을 오직 하나로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파한 것이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공중 앞에서 전하면 핍박의 위험이 있습니다. 각 집에서 복음을 전하려면 수없이 많은 집에 다녀야 합니다.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거기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보여주는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집중해야 될 사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회심자들이 넘치는 것. 이미 회심한 사람들은 그 회심의 은혜를 보전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바입니다.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어차피 한번 바람처럼 사라졌다 떠나가는 인생이니 전심으로 그분을 의지하며 우리가 목회할 수 있도록 한마음으로 간절히 뜨겁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