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심방할 때
녹취자: 백지영
교회학교 교사의 가장 본질적인 사명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을 맡았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을 가르치거나 단순히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은 그 영혼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서 구원받지 못한 아이들은 변화를 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되고 구원받은 아이들은 더욱 하나님을 잘 믿어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이 교사의 사명입니다. 이것은 매우,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 여기 모두 모이셨지만 자리에서 모두 일어나 보십시오. 자, 지난주에 교회에 출석하지 않은 교사들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없으시네요. 그러면 지난주에 공과를 가르치지 않은 교사들, 교회 행사가 있거나 개인적인 사정이거나 공과를 가르치지 않은 교사들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여러분들은 모두 공과를 가르치셨지요? 그러면 여러분들 서 있는 교사들 중에서 지난주일 가르친 공과가 무슨 성경책 몇 장 몇 절이었는지를 기억을 못하시는 분 빨리 앉으십시오. 놀랍지 않습니까? 한번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이 많은 교사들 중에 오직 열 명의 교사들만이 지난주에 가르친 성경 말씀 구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충격적입니다. 이 분들에게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자리에 앉으십시오.
아이들이 지금은 교회 나오고 있지만 언제까지 나와 줄까요? 어렸을 때는 엄마가 야단치기 때문에 교회 나옵니다. 좀 큰 다음에는 친구들이 교회 있어서 나옵니다. 중학교쯤 들어가면 엄마가 협박을 합니다. “교회 안 가면 용돈 없다.” 이제는 고등학생만 되도 차라리 알바를 하고 말지하며 엄마 말을 안 듣습니다. 그러면 초등학교 졸업한 학생들 중 얼마가 중학생이 됐는데도 교회 나올까요? 중학교에 나왔던 학생들 중에는 몇 명쯤 고등부에도 나올까요?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초등학교 6학년 때 교회 나오던 아이들 중 몇 명쯤 교회에 남아 있을까요? 전도를 한다고 하지만 여러분들 중 대부분은 지난해에 단 한명의 불신자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아이들이 나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언제 떠날지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들이 나오고 있는 동안에라도 어떻게 하든지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랑으로 따뜻하게 타일러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넣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미 교회에서 배운 교리에 의하면 아이나 어른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믿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들이 돌보고 있는 어린 학생들의 명단을 펴놓고 돌아가셔서 한번 양심에 손을 얹고 이 아이는 구원을 받았을까 한번 체크해 보십시오. 그게 안 되면 불러다 놓고 정말 구원받은 증거가 있는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 앞에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는지, 그분이 정말 믿어지는지, 그리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죄의 유혹을 이기고 있는지, 혹은 진심으로 회개하고 은혜를 받는지 하나하나 물어보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그 아이 엄마하고 얘기를 해 보십시오. 구원받은 증표가 있는지. 그러면 많은 대부분의 교사들은 충격을 받게 됩니다. 너무나 소수의 아이들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아이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서 살라고 하는 것은 만약에 그 아이가 그렇게 흉내를 내면 그것은 죽은 시체에 곱게 화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생명의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교회에 나왔으면 가르치는 시간이 얼마인지 어떤 방식으로 가르칠 것인지는 그때마다 융통성이 있어야 하겠으나 교회에 일단 나왔으면 아이들이 ‘아,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뜻이었구나.’ ‘예수님은 이런 분이셨고 우리를 위해 이런 일을 하셨구나.’ ‘아! 내가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됐구나.’ 그렇게 하고 돌아갈 수 있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교사입니다.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지만 구원받을 수도 있고 구원받은 아이들은 말씀을 깨달아야지만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재미있게 놀 수 있고 교역자들과 끊임없는 새로운 행사를 계획하지만 그것은 이벤트 회사의 정신이지 교회의 정신은 아닙니다.
제가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에 여러분과 같이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을 섬겼습니다. 중등부를 섬기다가 그 다음에 고등부를 갔습니다. 그때도 여러분처럼 분명히 공과시간이 있는데 공과를 안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교회가 공과를 안 가르치고 얼마나 더 중요한 행사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하는 교회에 가장 큰 책임이 있고, 두 번째는 여러분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대학교수입니다. 요즘은 에누리 없습니다. 5월 22일이 석가탄신일이라서 쉽니다. 그러면 에누리 없이 학교에서 언제 보강하겠냐고 통지가 옵니다. 무조건 15시간을 마쳐야 합니다. 무조건 100분 수업 혹은 150분 수업을 15번을 안 하면 학기가 종료가 안 됩니다. 그러면 주일날 어쩔 수 없이 여러분들이 만약에 교회 행사를 하라고 해서 공과를 못 가르쳤다면 그러면 토요일에 저녁에라도 불러 모아서 하나님 말씀 가르쳐야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52주 펼쳐놓고 이렇게 빼고 저렇게 빼고 다 빼고 나면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는 3분의 2도 안 됩니다. 그런데 3분의 2되는 시간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 아이들이 펑펑 웁니까? 아니지요? 자기도 뭘 가르치는지 아직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희미하게 가르치는 적도 많습니다. 잘 가르치는 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6일 동안 세상의 정신으로 살고 주일날도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산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면 겨우 한 30분 설교 듣고 그 다음에 공과공부 한 1시간 하는데 어쩌면 걔네들의 말씀생활의 거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 임무를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공과를 안 가르쳤습니까? 그 전주에도 못 가르쳤을 수도 있지요? 어쩌면 이렇지 않습니까? ‘아, 다행이다. 오늘 토요일은 부담이 없구나. 내일 행사가 있어서 공과를 안 가르치니.’ 혹시 그러는 것은 아닙니까?
삯군 목자는 삯군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이 아니라 선한 목자가 아닌 모든 사람이 삯꾼입니다. 그 삯꾼이라는 말이 유래된 게 있습니다. 요한복음10장에 보면 ‘삯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게 원래 그렇게 나쁜 말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었느냐 하면,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이 양을 칩니다. 그런데 양이 한 천 마리쯤 되면 여기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양이 한 오십 마리밖에 안됩니다. 그러면 양을 키우는 것 가지고는 생활이 안 됩니다.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면서 겸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때에 양을 밥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와 같은 처지에 20마리, 30마리, 혹은 50마리 기르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야, 우리 이러지 말고 사람을 하나 사자. 그래서 우리 대신 이 양떼를 돌보게 하고 우리가 모두 조금씩, 조금씩 갹출을 해서 삯을 주자.” 그래서 고용되어 온 사람이 삯꾼 목자입니다. 평소에는 삯꾼 목자가 선한 목자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맹수가 나타납니다. 그러면 선한 목자는 다윗처럼 맹수를 막대기로 싸우고 물맷돌로 공격하면서도 목숨을 걸고 자기 양떼들을 지켜냅니다. 왜냐하면 양떼는 자기의 재산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너무 사랑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강아지 기르는 선생님들 있습니까? 우리도 한 50년 동안 개를 안 기르다가 요즘 처음으로 개를 한 마리 키웁니다. 말티즈 조그만 것 하나 작년에 데려왔는데 너무너무 귀여워서 우리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보신탕을 먹을까요? 안 먹을까요? 먹겠습니까? 안 먹겠습니까? 먹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먹는 사람들을 그렇게 크게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개를 키우기 전서부터도 안 먹었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예전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말하고 싶습니다. “개를 먹는 것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 먹는 삶이 얼마나 멋있는지 알고 나면 당신도 안 먹을 것이다.” 개는 단순히 성남 모란시장에 가면 한 근에 4천원입니다 토막 내서 팝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개를 저울에 달아보면서 kg 곱하기 4천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는 60만원 주고 사왔지만 지금은 그 60만원하고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족 중 일원이라고까지 말할 수 없지만 - 원래 개는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선의의 대상입니다 - 선의로 대합니다. 그러면 그 당시의 목동들도 마찬가지로 물론 이 양들은 가죽도 벗기고 털도 깎고 때로는 잡아서 고기를 팔기도 하지만 그러나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양떼들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닌 또 다른 이유에서 그 양떼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게 선한 목자입니다.
삯꾼은 평소에는 잘 하다가 뭔가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것이 삯꾼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선한 목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양들을 데리고 놀아주고 그러는 게 아니라 제때 밥을 주는 것입니다. 그게 선한 목자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럼 내가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내가 여러분 교회에 담임목사입니다. 사람이 너무 좋습니다. 친절하고 겸손하고 밥도 잘 사주고 유머도 있고 재치도 있고 그리고 야유회도 잘 다니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우리 집에 와서 많이 도와주고 그런데 주일마다 설교는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저를 여러분들의 목자로 받을 수가 있습니까? 왜 대답을 못하십니까? 그러면 걔네들도 말을 못해서 그렇지 마찬가지입니다. 걔네들의 영혼이 소리칩니다. “선생님, 나 밥도 사 주교 집에도 데려가고 생일선물도 챙겨주고 편지도 써주지만 선생님 내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못 먹어서 죽어갑니다. 선생님 선한 목자 맞습니까?” 들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일 먼저 개혁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달콤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얼마나 재미없게 가르쳤으면 선생님이 공과책만 들고 나타나면 애들이 도망을 가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이 아이들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혼이 변화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고 이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깨닫게 되고 그 말씀이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아이들이 간절히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제일 먼저 기도해야 될 것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고 감동 있게 가르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게 첫 번째 기도제목이고, 두 번째는 그 말씀을 듣고 아이들이 영혼의 변화를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예 밖에 없어서 이 예를 드는 것은 아닌데 하도 제 목회에 인상에 깊이 남았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이 한 700명-800쯤 모일 때의 일이었습니다. 5학년 여자아이 하나가 수요예배마다 엄마를 따라옵니다. 여전도사님이 나무랐습니다. “야, 너는 다 큰 애가 엄마를 이렇게 졸졸 따라다니니?” 그랬더니 얘가 정색을 하고 “전도사님, 나 엄마 따라오는 것 아니에요. 요즘 충성시리즈가 얼마나 은혜로운데요.” 이 앞자리에 딱 앉습니다. 제가 그때 설교를 최소한 90분했습니다. 길면 100분 110분, 빠르면 80분정도 했는데 그림같이 딱 앉아서 수요예배마다 설교를 듣습니다. 그리고 항상 여기에는 손수건이 놓여 있습니다. 설교를 듣다가 유머를 하면 막 깔깔대고 웃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있다가는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습니다. 걔가 초등학교 5학년입니다. 여러분들은 지어낸 얘기같이 들리지요? 그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영혼이 변화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따뜻하게 격려하고 마음을 열도록 데리고 놀아주고 어려운 숙제를 도와주고 그리고 여름이면 시원한 물놀이를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물을 때는 오직 하나 이 아이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이 아이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찬양)
주 여호와 능력의 주 내 영혼의 치료자
말씀으로 고치시네 주는 나의 치료자
오늘은 한번 밖에 시험을 보지 않았지만 다시 똑같이 일어나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지난주에 어른 예배에서 예배드리신 분, 안 드리신 분은 앉으십시오.” 그러면 몇 명 앉습니다. 그 다음에 “지난 주 목사님이 설교한 것이 성경 어디였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시는 분 빨리 앉으십시오.” 그러면 지금처럼 다 앉아버립니다. 무엇을 들었는지 기억을 못하니 그 말씀을 붙들고 눈물로 기도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니 애들이 영혼이 변화되지 않는 방식과 여러분이 영혼이 변화되지 않는 방식은 너무나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불붙어서 그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말씀을 안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멋있는 남자친구만 만나도 친구들 만나면 입이 간질거려서 견딜 수가 없는데 그 멋있는 주님을 만나고 그분께 꽃다발 같은 은혜를 받았는데 아니 그것을 말을 안 하고 베길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예쁜 여자 친구를 만났습니다. 예쁘다고만 그러면 안 되지요. 너무 마음씨가 고운 그래서 정말 오늘날의 김치녀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놀라운 자매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를 만나고 너무 감격을 하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수 있다면 사귀어서는 안 될 사람을 사귀었든지 아니면 그 사랑이 진실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가능합니까? 사랑에 빠져보신 분들은 그게 불가능한 것을 잘 알 것입니다. 대답이 없으신 것을 보니까 별로 경험이 없으신가봅니다. 불가능합니다.
중간 결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라.” 그 뜻입니다. 자, 눈을 감아보십시오. 아무도 안 봅니다. “내가 어른 예배에 참석해서 예배를 드리는데 내가 가르치는 모든 애들이 나처럼 예배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손들어보십시오. 놀랍습니다. 내리십시오. 15퍼센트의 교사만이 아이들이 나처럼 예배드렸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묻고 싶습니다. ‘Who are you?’ 여러분들은 누구입니까? 자기도 좋아하지 않는 하나님을 왜 가르치겠다고 거기 있습니까? 자기도 사랑하지 않는 예수를 가르치고 싶을 리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기뻐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여러분들의 제자들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총체적인 반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영혼을 바꾸는 데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진리의 참된 말씀과 그 말씀을 사랑으로 전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아이들은 변화됩니다. 진리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을 가르치는 모든 아이들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사랑하며 내가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어둠 속에 있는 영혼들 중 누군가는 그 손을 붙듭니다. 그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교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제일 먼저 이 강의를 들으면서 다짐해야 합니다. “내가 주일마다 학생들에게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면 나는 선한 목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제껏 까지 학생들을 맡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기회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고 흘려보낸 여러분들의 잘못을 진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수많은 아이들이 신앙이 생기지 않아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못 찾아옵니다. 만약에 내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말씀 사랑하는 누군가가 교사가 되었더라면 그 아이들은 지금쯤 교회에서 예수 잘 믿고 있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로 결심하는 교사들이 되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심방입니다. 눈을 감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매주 두 명 이상의 학생을 정기적으로 심방하고 있습니다.” 손들어 보십시오. 다섯 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더 낮추어서 “나는 그래도 한명정도는 매주 빼놓지 않고 심방을 합니다.” 손들어보십시오. 다섯 분 손 들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 담임목사님도 심방 안 오시는데요?” 그거는 좀 다릅니다. 저는 교인이 천백 명모일 때까지 모두 등록하면 심방했습니다. 그리고 일 년에 한차례씩 모든 청년들을 심방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서부터는 물리적으로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심방을 해도 따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천백 명모일 때까지 심방했습니다. 천백 명 모이는 반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기껏해야 열 명 정도 모일 것입니다. 그러면 한 주에 한명씩 심방해도 행사 있고 뭐 한 주간 빼고 나면 일 년에 다섯 명도 심방을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만약에 열다섯 명을 돌보고 있다고 하면 일 년에 세 번 만나면 잘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안 해서 목양을 할 수 있겠습니까?
교사인 여러분들도 솔직히 말해서 교회가기 싫은 날 있었을 것입니다. 엄마가 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교회가자.” “엄마, 나 싫어. 우리 교회 가기 싫어.” “그래도 가야지.” “난 너무 싫어. 교회만 가면 나는 스트레스를 받아.” “그래도 참고 이 교회 다녀야지.” “싫어. 엄마, 나 안 갈래.” “가자.” “안 간다니까.” “그래도 가야지. 네가 담임목사인데 안가면 누가 설교를 하겠니?” 아니 목사도 교회 가기 싫을 때가 있는데 여러분들 교회가기 싫을 때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다 그때쯤 되면 심방을 옵니다. 그리고 따뜻하게 격려를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주거나 혹은 따끔하게 야단을 맞습니다. 그러면 ‘아, 이러면 안 되겠구나.’ 그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심방을 안 하는 것은 심방에 대한 교육을 안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돌아가셔서 전도사님에게 목사님에게 겸손하고 정중하게, “우리가 심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육과 실습을 시켜주십시오.” 그렇게 부탁을 드리십시오. 그리고 이제 심방을 가는 것입니다.
저는 서른네 살에 아직 전도사였고, 그리고 서른네 살에 교수가 됐습니다. 물론 저도 바빴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돌보던 고등학생들이 학생들만 80명이었는데, 선생님까지 다 합하면 백 명은 약간 안 되고 90명은 좀 넘었을 것입니다. 교사들은 물론 일 년에 수시로 심방을 하고 그 팔십 명을, 안 나오는 애들까지 합하면 한 90명됩니다. 그 애들을 저는 일 년에 거의 한 명도 안 빼놓고 두 번을 심방했습니다. 겨울수련회를 시작하기 전에 심방을 한 2주 동안 하고 그리고 여름 수련회 가기 전에 두주 심방을 해서 모두 족대로 낚는 것처럼 해 가지고 수련회로 몰아넣었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한 2주 동안 아무 약속도 하지 말고 아침 일찍부터 시작을 해서 밤까지 얘가 어디에 있는지 맞춰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시간표를 짜서. 그나마 만나주겠다는 아이들은 심방하기가 쉬운데 안 만나려고 하는 아이들은 할 수 없이 007작전하듯이 친구들에게 수소문하고 다 연락을 해서 얘가 어디에 있을지 동선을 파악해서 급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하면 한번 떨어져 나간 아이들은 그냥 그대로 떨어져나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바빠도 그때 박사과정 공부하고 교수생활 일주일에 스무 시간 강의를 하고 그랬던 저보다는 바쁘지 않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심방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거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렵다고 생각될 때마다 방문판매원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 물건 하나 팔아서 돈 조금 벌려고 경비원들에게 야단을 맞으며 몰래 아파트 들어가는 사람 꽁무니를 따라 들어가서 층별로 벨을 누르다가 경비실에 연락이 가서 지독하게 모욕을 받고 쫓겨나기도 하면서도 그 사람들은 그 일을 그치지 않습니다. 왜요?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혼을 향한 열심이 그렇게 돈을 버는 열심보다 더 못하다고 해서야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안 교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높은 표준, 도달할 수 없는 표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건 교사로서의 양심입니다. 자기가 맡은 아이들을 결코 심방하지 않고 훌륭한 반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털도 안 뽑고 닭을 먹으려고 하는 것과 꼭 같습니다.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항상 성령 충만하지 않고 항상 예배에 나오고 싶지 않잖습니까? 몇 년에 한번 씩은 교회를 옮기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습니까? 그때 심방은 얼마나 중요한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심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가져야 하는 마음은 두려움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내가 심방을 갈 때 나는 내가 가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거기에 있으니 내가 욕을 먹으면 예수를 위해 욕을 먹는 것이요, 간혹 그럴 리는 없지만 매를 맞으면 내가 예수를 위해서 핍박을 받으므로 하늘의 상급이 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심방을 할 때에는 제일 먼저 심방할 사람의 이름을 놓고 열렬하게 기도한 후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영혼들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방을 갈 때에는 요즘 같은 때는 혼자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남자 둘이 다녀도 좀 곤란합니다. 편먹은 강도의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녀 둘이 다니면 또 그것도 잘못하면 이상하게 비칠 수 있습니다. 아주 애매합니다. 그래서 저는 심방을 갈 때 항상 셋이 다녔습니다. 교역자인 나, 총무 남자교사 하나, 그 다음에 여선생 하나, 그리고 남선생일 경우에는 세 사람이 다 남자가 되니까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총무교사 빼고 서기 여교사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면 항상 섞여 있어서 의심을 안 받았습니다. 여러분 보고 셋이 같이 가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적용은 각각 다르겠지만 정신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심방을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방을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아이와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만나는데 그 집이 예수를 잘 믿는 가정이어서 선생님 오시는 것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면 이 심방은 아주 식은 죽 먹기입니다. 언제 가겠다고 하면 “선생님, 걱정 마세요. 우리 애 잡고 있을 테니까 심방을 오십시오.” 그리고 가면 집안 청소를 깨끗이 해 놓고 과일을 깎아놓고 거실에 상을 차려놓고 기다립니다. 그러면 가서 엄마와 함께 아이에 대해서 나누고 그 아이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엄마보고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고 선생님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도 하게하고, 뭘 질문할지 잘 써가서 하나씩 둘씩 말을 건네서 그 아이의 마음에 있는 것들을 이끌어내서 이 아이의 영혼의 상태가 어떻고 이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영적인 필요와 그리고 목회적인 필요, 가정에서의 필요 심지어 아이들과의 사회적인 필요가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게 목양입니다. 그러면 엄마가 와서 선생님 정말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선생님을 보내드리니 이런 아이들만 줄줄이 있다면 이것은 완전히 영광 받는 심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것도 안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심방 안 하셨다는 분 중에서 교회의 권사님이나 집사님 댁 아이들이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안 하는 심정은 무엇입니까? 혹시 이것입니까? “뭐 그분들이야 원래 잘 믿는데 제가 심방까지 가야됩니까?” 그러면 주일학교도 나올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예배만 드리고 가면 되지 담임선생님이 뭐 필요합니까? 그런데 그런 아이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부모가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하는 집안의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얘는 심방을 받고 싶어 합니다. 이거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걔를 만날 수 있으니까. 집에 가서 방석 놓고 앉아서 아빠 다리 해야만 심방이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아이들은 바깥에서 만나면 됩니다. 제과점에서 만날 수도 있고 교회에서 만날 수도 있고 아니면 도서관 앞에 있는 빙수 집에서 만날 수도 있고 아니면 가까이 있는 대학 캠퍼스에서 소나무 그늘 아래서 만날 수도 있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나 알아내는 것입니다. 세 사람이 간다고 하더라도 저는 어리석게 세 사람이 모두 심방하지 않았습니다. 얘가 그러면 조사실에 가서 다수의 형사들에게 취조 받는 느낌일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저쪽에 선생님들이 기다리고 그리고 나하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혹은 담임선생님이 옆에 있어도 문제가 안 될 같으면 옆에 있고 같이 들어주고 아이의 의사를 존중해 줍니다. “너 전도사님하고 둘이서만 이야기할래? 담임선생님도 오라고 할까?” 물어봅니다. 그래서 아이가 “저는 싫어요. 전도사님하고만 얘기하고 싶어요.” 그러면 “그래 그러면 우리 둘이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분들은 저쪽에서 기도하면서 기다리게 합니다. 선생님하고 셋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면 같이 셋이 앉아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래도 쉽습니다. 심방하겠다는 사람도 의지가 있고 받겠다는 사람도 의지가 있으니까. 더 어려운 사람이 누구냐 하면 도망 다니는 애들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만 드리고 도망을 가거나 아니면 아예 요즘 안 나와 버리고 교회를 끊으려고 하는 애들, 그중에서도 친구들하고는 계속 연락하는 애들은 그래도 쉽습니다. 왜냐하면 걔네들이 정보를 주니까. “주일 오후 세 시에서 네 시 사이에는 백 퍼센트 도서관에 있어요.” 그러면 얘는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시 되면 집에 들어가요.” 그러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아이들을 만나는 것인데 그런 경우에는 만나기가 매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보가 있으니까 그냥 기도하는 마음으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신기하게 만나게 해주십니다. 거기에는 오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너를 오늘 못 만나면 집에 안 들어간다. 내가 너를 반드시 만나고야 말리라.” 그리고 어떨 때는 집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낮에는 추적할 수 없게 돌아다녔다고 해도 밤에 돌아오는 것은 정해져 있습니다. 자기 집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아홉 시쯤 되면 슬슬 걸어옵니다.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풀이 푹 죽었습니다. 교회도 안 나오고 그렇게 주일날 방황하고 다녔는데 곤고하겠습니까? 성령 충만하겠습니까? 당연히 곤고합니다. 딱 기다리고 있으면 저기서 옵니다. 그러면 딱 나타나는 것입니다. 놀라겠습니까? 안 놀라겠습니까? 충격을 받고 놀랍니다. 물론 당연히 예고 안하고 갔으니까. 예고하면 더 도망합니다. 잠수 탑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 마음속에는 이렇게까지 찾아와준 선생님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언제 올지 모르는 나를 이렇게까지 기다려준 선생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언제부터 기다리셨어요?” 하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옆에 선생님이 “세 시간 지났다.” 그러면 그 아이가 앉습니다. 그러면 이제 얘기 하는 것입니다. 그때 절대 이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너 오늘 교회 왜 안 나왔어?” 그러면 할 이야기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왜 지난주에 공과 안 가르쳤습니까?” 이렇게 얘기하면 여러분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얘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고, 그 아이가 관심 갖고 대답해줄만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날이 덥지?” 그러면 대답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아주 우울하면 “예.” 그리고 조금 그래도 말이 하고 싶으면 “너무 더워서 혼났어요.” 얘기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요즘의 기후의 이야기, 지구 온난화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갑니다. 그러니까 심방을 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조건은 상식이 풍부해서 누구를 만나도 다 이야기가 통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아이들이 좋아하는 가수들에 대한 정보 이런 것은 기본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마음이 열립니다. 대화가 오고 갑니다. 그리고 절대 가르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걔는 교회 가야 된다는 것 너무 잘 알고 그리고 주일 지켜야 한다는 것도 너무 잘 압니다. 거기서 “너 똑바로 해. 너 주일 안 지키면 하나님한테 혼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얼마나 곤고하니?” 그리고 알고 있는 그 아이에 관해서 가지고 있는 정보들 중에서 경우에 맞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입니다. 한참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구절 탁 읽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밤이지만 성경 한절 봐도 되겠니?” 그러면 “싫어요.” 그러는 애는 없습니다. “네.” 그럽니다. 딱 펼쳐서 필요하면 딱 켜서 그래서 “한절을 네가 읽어봐라.” 한절을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길게도 연설하지 말고 “하나님은 이렇게 너를 사랑하신다. 네가 너를 위해 기도할게 힘을 내거라.” “다음 주에 꼭 나와.” 그런 얘기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게 꼭 물건 팔러 온 사람 같습니다. 여운을 남기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만나자.” 그러지 말고 “그래. 하나님은 널 사랑하신다. 성령 충만할 때만이 아리라 곤고할 때도 너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미끄러졌던 이야기하고 다시 일어났던 이야기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도하자 그러면 모두 고개를 숙입니다. 그것도 너무 길지 않게 간절하게 기도하면 90프로는 모든 교사가 웁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아이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래서 심방 갈 때는 항상 기본적으로 가지고 다녀야 할 것이 손수건입니다. 그 손수건은 자기를 위해서 쓸 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손수건이라는 것은 원래 남을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아이가 웁니다. 그러면 손수건을 건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랍습니까? 애가 눈물을 닦습니다. “죄송해요.” “아니야 더 써.” 그러면 백퍼센트 “빨아다 드릴게요.” 그럽니다. 그러면 빨아다 줄려면 한번은 나와야 되잖습니까? 낚인 것입니다. 거의 백퍼센트 적용이 됐습니다. 요즘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트렌드가 좀 다르겠지만 기본적인 인간의 영혼의 곤고함, 사랑에 움직이는 마음 이것은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주고, 그리고 항상 선물을 하나 준비하십시오. 너무 크고 부담스러운 것 말고 아주 작은 귤 하나라도 좋고 아니면 예쁜 연필하나라도 좋고 혹은 여행 갔다 사온 기념품 하나라도 괜찮습니다. “내가 이번에 태국 여행을 갔는데 네 생각이 나서 하나 샀다. 천연재료로 만든 비누인데 놓고 쓰면 여드름에 좋다고 하더라.” 주고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가 심방 받은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편지 할 필요가 없지요? 요즘은 문자로 다 오고가니까. 모르겠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편지로 받을 때와 문자로 받을 때 감동이 다릅니까? 요즘은 그런 것 없습니까? 똑같습니까? 다르지요? 우리 때는 문자나 텍스트나 이런 게 없었습니다. 우리 전도사행활 할 때는. 그래서 제가 기본적으로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게 엽서와 가느다란 플러스 펜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맘을 먹고 쓰기도 하지만 예를 들어서 기차를 타야 합니다. 춘천을 갔는데 기차를 타야 하는데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찻집에 앉아서 조용히 교회 안 나오는 아이한테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어떻게 쓰느냐 하면 관제엽서 하나에다가, 그 당시 나는 꽃으로 만든 엽서 그런 거 보내지 않았습니다. 너무 남사스러워서. 그냥 관제엽서에다가 원고지 한 30매 분량을 쓰는 것입니다. 그렇게 쓰려면 거의 돋보기로 안 보면 못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가느다랗게, 많이 쓰면 한 40매까지 들어갑니다. 빽빽하게 씁니다. 진짜 한 시간 반 정도 걸립니다. 진심을 담아서 씁니다. 딱 편지를 받았는데 생전 아무한테도 그런 편지를 받아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딱 보는 것이지요. 버릴까요? 안 버릴까요? 안 버립니다. 당연히 안 버립니다. 아마 평생 간직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문자는? 지워버립니다. 그렇다고 문자를 사용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것은 여러분들의 적용의 문제이고 어쨌든 나는 나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돌아오면 편지를 썼습니다. 조용히 편지를 씁니다. 모든 학생에게 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학생은 정말 도저히 못 만날 학생인데 만났으니까 쓰는 것입니다. 한참을 쓰는 것입니다. 진심을 담아서. 그러면 놀라운 게 뭐냐 하면 이 편지가 저 아이를 변화시키기 전에 자기의 마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얘를 위해 정말 내가 기도안했구나 그리고 정말 진심으로 이 아이를 저 어둠에서 건져내 주어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용솟음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서 사실은 아무리 시간이 있어도 하루에 두통이상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런 편지를. 그리고 보냅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서 얘를 주일 날 저녁 때 심방을 했으면 그러면 주일 날 밤에 쓰든지 그게 너무 늦으면 월요일 날 쓰는 것인데 그러면 얘가 수요일 날이나 목요일에 얘 손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주일 날 만난 감동이 커서 그때는 말은 안 했지만 ‘아, 이 정도면 그래도 교회 한번 나타나 줘야지만 되겠다. 양심상.’ 하다가 망각곡선이 이렇게 휘어집니다. 휘어져서 목요일쯤 와 가지고 이렇게 떨어졌는데 여기에서 딱 엽서를 받으면서 튀어 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발로 걸어 나옵니다. 놀랍습니다.
그러면 한번 보십시오. 집에서 가라고 엄마가 야단치거나 아니면 의무감에 나오는 애 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온 사람하고 예배의 태도가 똑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다릅니다. 얘는 곤고해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방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한 것입니다. 선생님 손수건을 깨끗하게 빨았습니다. 그것만 돌려주는 애는 아무도 없습니다. 반드시 답장이 옵니다. 답장을 써서 같이 가지고 옵니다. 해 보십시오. 백퍼센트입니다. 손수건 떼먹는 애 한 명도 못 보았습니다. 반드시 답장을 써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레터를 썼기 때문에, 요즘 얼마나 예쁜 편지지가 많습니까? 그러니까 써가지고 넣어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기본적으로 이 아이와 이제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지요?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통이 되면 이 아이를 목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도 있고 신뢰도 있고, 어떤 때는 모든 친구 아무한테도 연락을 안 받아도 그런데 내 연락은 받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전도사님, 나에 관한 이야기를 친구들한테 하지 마세요.” 그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손수건하고 갖고 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애들이 선물도 해 가지고 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편지 쓸 이유가 또 하나 생기는 것입니다. 받고, 그 다음에 좀 지납니다. 한주쯤 지나면서 그러면서 수요일 쯤 편지 쓰는 것입니다. “네가 준 선물 정말 잘 받았다. 그리고 우리 신앙 안에서 함께 살아가자.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라 나도 힘든 일 있으면 너한테 이야기 할 테니까 기도해 줄 수 있겠니?” 하고 물음표로 이야기를 마치면 반드시 이 아이 마음속에서 “그럼요. 선생님.”
그것입니다. ‘야, 너 뭐가 틀렸고 뭐가 틀렸고…’ 그게 아니라 걔네들이 진짜 좋아하는 선생님은 들어주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너무 한심하면 그냥 하늘을 보고 한숨을 쉬십시오. 그리고 너무 불쌍하면 그냥 눈물을 흘리십시오. 그렇게 한 시간만 있다가 가도 얘들은 여러분을 만난 게 숨통이 트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게 주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매일 그 아이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놀랍게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도 가운데 역사하시면서 이 아이를 움직이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신앙으로 잘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랍게 은혜 받은 교인이 목사님과 함께 교인들을 돌보듯이 이런 아이들이 자기 친구들을 돌보는 일에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엄마가 열 마디 하는 것보다 선생님의 열 마디가 더 힘이 있고, 때로는 선생님의 열 마디보다 친구의 한마디가 결정적으로 그 사람을 움직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상황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심방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하나 교회 나오지 않던 아이들이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저는 정말 그 기쁨은 새 집을 산 기쁨하고도 비교도 안 되고 어떤 때는 연애하는 기쁨을 능가합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한 어둠 속에 있는 영혼들이 그렇게 주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직까지 “목사님, 잘 모르겠습니다.” 말하고 싶습니다. "Just do it!" 해 보십시오. 그러면 강의를 여기서 두 시간 동안 듣는 것보다 훨씬 더 심방의 본질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물러서지 말고 한번 해 보십시오. 우선 출석부를 펴놓고 심방하기 만만한 애부터 고르십시오. 그리고 그 다음에 난이도를 높여서 이제 도망 다니는 애까지 찾아서 그렇게 추격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이야기는 안 했지만 더 최악의 경우는 누구냐 하면, 아이들로부터도 연락을 완전히 끊고 부모하고도 통화를 할 수 없는 입장이고 완벽하게 잠수를 타버린 경우입니다. 그런 경우 어떻게 할까요? 확실한 방법은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학교는 옵니다. 학원도 끊고 친구 끊어도 학교는 끊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정문 앞에서 하교할 때 거기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약간 숨어서. 반드시 만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편안하게 교사할 때 그렇게 어디엔가 가서 한 영혼이 넘어졌을 때에 그 넘어진 영혼을 위해서 찾아가주고 함께 울어주고 함께 그 상처를 매만지면서 기도해 주는 목자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여러분, 요 젊은 사람들만 있을 때 제가 진짜 존경하던 신앙의 인물이 있었습니다. 18세기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라는 아메리칸 선교사였습니다. 미국사람으로서 인디언들을 선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스물한 살에 회심하고 스물네 살에 선교사가 되고 너무 과로한 나머지 스물여덟 살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신의 일기를 후의 사람들이 출판해 주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그 사람의 일기가 헨리 마틴, 짐 엘리엇 이렇게 근대 역사에서 아주 괄목할 만한 위대한 선교의 업적을 남겼던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 사람이 쓴 일기 속에서 한 구절을 뽑아서 제 나이 서른한 살에 곡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서부터 천천히 노래를 부를 테니까 여러분들은 기록을 해 놓았다가 오늘 강의를 회상하는데 도움이 되시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찬송으로 오늘의 강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찬양)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아무리 박식하고 능란하며 또 심오한 설교와
청중을 감동시키는 웅변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간의 심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핍을
대신할 수는 없노라 대신할 수는 없노라
이번 주일에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마지막일 수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에 우리 아파트와 우리 아파트 옆에 있는 아파트에서 두 명의 청소년들이 투신자살했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한 주일은 그 아이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너무 중요한 주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심방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