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칭찬받는 삶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마 25:22-2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마태복음 23장부터 25장까지에는 최후의 심판과 신자의 종말론적인 삶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25장에는 우리에게 매우 유명한 두 비유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열 처녀의 비유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가 마지막 때에 모든 사람이 잠들기 쉬우니 영적으로 깨어있고 성령 충만 하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면 여기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는 신자의 사명으로서의 삶과 그 자세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II. 달란트를 주심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을 보면 먼저 달란트를 주는 주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의도하셨던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합니다. 그것은 한번밖에 없는 우리 인생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기회들을 선용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경륜을 따라서 그 분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서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라 하는 의미입니다.
부요한 주인은 타국으로 떠나면서 세 종을 불러 각각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이 달란트라는 단어는 여기에서 영어의 탤런트라는 단어가 유래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 달란트의 가치가 얼마나 될까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실 때에 한 달란트는 장정 한 사람이 20년간 일해야 받을 수 있는 품삯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날 노동 시장에서 특별한 기술이 없는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임금을 기준으로 계산을 해도 한 달란트는 7억에서 8억이나 되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또 이 달란트는 금과 은의 무게의 단위이기도 했는데 계산법에 따라서 차이는 있지만 약 20kg에서 40kg이었다고 하니 요즘 금값으로 계산을 한다면 1달란트는 약 10억에서 20억에 해당하는 금의 무게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커다란 단위인 달란트를 이제 한 종에게는 하나를, 또 한 종에게는 둘을, 또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이것은 주인이 누군가와 의논하고서 행한 것이 아니라 주인이 그냥 자기의 깊은 뜻대로 종들에게 각각 양이 다른 달란트를 맡겨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재능을 주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삶은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른 사람과 같은 크기의 달란트를 주지 않으셨을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차피 나의 것도 아니고 나의 삶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들이 신경 써야할 것은 얼마의 달란트를 받았든지 그것을 내가 어떤 태도로 선용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한 재능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많은 기회들을 제공받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는 달란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선용하며 사느냐에 하는 것에 달린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재능이 정말 없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투덜거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인생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탁월한 달란트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비범한 달란트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곡의 노래로 수많은 관중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게 만드는 예술적인 재능, 한편의 그림으로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고 빠져들게 만드는 그런 미술의 탁월한 재능, 그리고 밤사이에 잠깐 쓴 짧은 작품 하나로 수 천 명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연설이나 혹은 문학에 대한 재능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모든 사람에게 그런 재능이 주어진다면 이 세상은 정말 시시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비범한 것이 없을 테니 누구도 누구에 대해서 감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굳이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인생에 대한 매우 미숙한 태도입니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저 역시 그런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혀서 많은 날들을 불편함 속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저는 잊히지도 않습니다. 어린 날 아마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학교 1학년쯤 되었을까요? 생각을 하는데 어느 테너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마음 깊이 열등감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난 알 수 없으나 그러나 내게는 없는 탁월한 예술적인 재능이 저 사람에게 있다는 것에 대해서 깊이 마음이 상하였고 때로는 그것이 시기심이나 혹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는 바람직하지 못한 심리적인 작용을 발견했습니다. 가장 최근에 느낀 깊은 열등감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으면서였다고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 이 사람에게는 이런 놀라운 천재성을 주고 나는 열심히 노력해야지만 겨우 말귀를 알아듣는 이런 사람으로 만드셨습니까?’ 라고 6개월 동안 투덜거려 봤지만 그것은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내게 들려주시는 응답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아멘.”. 누구나 자기에게 합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사실은 모릅니다. 실지로 그 방면의 삶을 살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오랫동안 여러분들 위해 설교자로 섬겼지만 제가 말을 잘 하는 사람입니까? 매우 어눌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저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제가 연설이나 설교에 적합한 사람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친구 세 사람만 모여도 말을 할 수 없는 그런 수줍은 소년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여학생이 거기에 하나 껴있을 때에는 한없이 말을 더듬으며 얼굴이 빨개지는 그런 연설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보니까 그런 재능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써 소명이 입증되고 하였습니다. 누가 압니까? 여러분들에게 어떤 재능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놀라운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것을 발휘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은 자신에게 그런 재능을 썩히며 살고 있는지도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좋은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뭐든지 해볼 수 있게 해주고, 그리고 그것을 도와주고, 그리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그리고 자신 깊은 곳에 묻혀 있는 것들을 이끌어 내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돈이 있고, 생활에 여유가 있고, 사회적으로 안정된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이런 기회를 많이 제공합니다. 그리고 돈이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이런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집안에서 대대로 인물들이 태어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스페인계 미국의 철학자 싼타야나(George Santayana)가 말했듯이 그것은 한 주류 사회의 전통처럼 느껴지는데 그 계급이 그렇게 우수해서가 아니라 교육은 결국은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본권의 하나로서 교육의 균등을 이야기하는 것,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혹은 높은 지위에 있거나 그렇지 못한 서민이거나 모두에게 할 수 있는 한 국가가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아무리 부르짖어도 결코 균등한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말씀 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자신 안에 있는 어떤 달란트의 유무 여부는 실제로 그것을 사용하고 발휘할 수 있는 장이 있을 때 그것의 유무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확인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모든 엄정한 과정을 거쳤는데도 절대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나와는 다른 탁월한 능력이 있다할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나에게 없는 그런 놀라운 재능을 저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훌륭한 달란트를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과 모든 이웃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게 되기를 우리는 기도하며 격려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훌륭한 인물을 본받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고, 그런 모방 없이는 창조적인 삶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책을 읽을 때 그리고 거기서 어떤 위대한 정신을 가진 저자를 만날 때 우리는 그의 추종자가 되는 것이 독서의 목표가 아닙니다. 예술적인 어떤 훌륭한 사람의 재능을 발견했을 때 우리가 단순히 그 예수를 향유하는 사람만 되는 것이 그 예수를 즐기는 궁극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러면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우리가 만약에 그 어떤 탁월한 학문을 가진 사람의 책을 읽고 천 년 전에 쓰인 로마의 위대한 작품들을 읽으며 감동을 받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는 단지 키케로나 그 위대한 문인들의 작품을 읽으며 감동을 받고 그리고 16세기에 쓰인 기독교 강요를 읽으며 칼빈을 찬양하기 위해서 그런 것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 사람들이 그 젊은 나이에 그것을 썼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는 그것을 읽음으로써 그를 능가하는 어떤 정신 속에 살기를 우리는 꿈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술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예술 작품을 감상함으로 우리가 그 작품을 뛰어넘는 작품을 생산해 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사람이 생각하고 간직했던 정신 세례를 딛고 우리만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펼친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를 감상하고, 그 다음에 문학 작품을 읽고 학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배우지만 누구도 나를 규정하는 어떤 틀은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고유한 달란트를 생각할 때에 떠올릴 수 있는 삶의 철학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칼빈에게 한때 몰입했고, 그 위대한 사람을 한없이 존경하지만 나는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칼빈주의자로 불리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거스틴을 죽은 후에 만나고 싶은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꼽지만 그리고 그가 나에게 미친 정신적인 자양분은 이루 말할 수도 없고 그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지만 나는 나의 생전에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자로 불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조나단 에드워즈를 깊이 존경하고 그의 모든 작품을 대부분의 작품들을 높게 평가하지만 그러나 나는 에드워드주의자로 불리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불리기를 원합니까? ‘김남준’, 살아서도 ‘김남준’으로 기억되고 싶고 죽은 후에도 ‘김남준’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나는 제가 죽은 후에도 나의 추종자가 생겨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상을 가진 사람이 누군가에게 그 사상을 공감 받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는 진정으로 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더 많은 사람이 내가 이렇게 추구했던 이러한 자유에 대한 생각과 인간 존엄에 대한 생각,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생각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나의 추종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까? 요지는 이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김남준’이라는 인간을 통해서 희미한 빛이라고 하나님에 대해서 발견했다면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칼빈을 따르는 사람도 아니고, 어거스틴 주의자도 아니고, 더군다나 한 설교자를 열렬히 따르는 추종자도 아니고 여러분 자신, 김 아무개, 박 아무개, 최 아무개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에도 그 삶은 없었고, 여러분 죽은 후에도 그 삶을 살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 한 번 태어나서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 고유성을 하나님이 우리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인간의 삶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지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삶을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가장 충실하게 주체성 있게 사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의 하신 일, 그의 금식, 그의 하나님을 위해 행했던 어떤 전도사역, 그것을 원숭이처럼 흉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하시는 진정한 교훈의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바로 자기를 받아들이는 과정이고 지극히 자유로운 주체로 이 온 우주에 한번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누구와도 내 인생은 비견될 수 없고 그리고 나는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누구도 멸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가장 하찮아 보이는 그 사람도 한번밖에 없는 사람으로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모든 사람에게 주신 달란트는 바로 그렇게 완전히 자유로운 주체로 완전히 자기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서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 모두 각자의 개인적인 인간성을 창조하신 것이고, 그 안에 각자의 독특한 달란트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크든 작든 그리고 그것이 엄청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지 개의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인생이 그 분과의 관계에서 시작되었고 영위되고 마지막에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시간에 여러분들에게 한두 차례 인용했지만 그러나 아무리 인용해도 질력이 나지 않는 한 비유를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의 달란트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우리로 만드신, 나를 나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E. M. 바운즈 목사님은 자신의 책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세 천사에게 직분을 내리셨습니다. 한 천사에게는 왕의 지휘봉을 들려져 한 나라의 임금이 되라고 명령하셨고, 한 천사에게는 주판을 주시며 커다란 사업을 하는 주인이 되게 하셨고, 한 천사에게는 똥 푸는 기구를 들려주어서 너는 똥을 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천사가 각기 구름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올 때 그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랐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달랐다면 그것은 천사가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존재의 하나님 앞에서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누구이든지 나는 모든 사람의 서로 다른 지문처럼 이 온 우주에서 한 번밖에 없는 독특한 인생을 독특하게 살아내기 위해서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달란트의 크기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독특한 존재의 달란트 때문에 여러분들은 찬란하게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거기에서 인생에 대한 진정한 시각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정말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죄악은 자신의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반역하는 삶은 진정한 나의 주체가 아니라 죄의 노예가 되어서 사는 삶입니다. 이런 자신을 우리는 미워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해 규정시키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그리고 온전히 자신이 주체가 된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독특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달란트를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여러분으로 독특하게 태어난 것 자체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놀라운 달란트입니다. 그리고 그 빛깔은 무지개와 같아서 다른 사람은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고유의 빛깔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무지갯빛처럼 다양하게 온 세상에 퍼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달란트의 크기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인이 다시 돌아온 후에는 이 종들을 평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언젠가는 다시 오실 것이며 그때에 우리가 행한 대로 주님이 우리를 판단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때 주님이 칭찬하신 삶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저는 주로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에게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면에서든지 그런 비범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살리에르의 고백처럼 모든 평범한 사람들 중에 가장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 마음에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처럼 되고 싶지도 않은데 그는 주인 앞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평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다 살고난 후에 저는 주님께 그런 평가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 나머지 종이 세 달란트를 맡았더라도 나에게는 거리감이 느껴졌을 텐데 너무 감사하게도 두 달란트였습니다. 평범한 사람, 그냥 그 악한 종을 제외하고는 가장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제가 이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심리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너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이 본문에 관한 설교 중 굉장히 많은 부분을 두 달란트 맡은 종을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이 종을 설교할 때 기분이 가장 좋고 그 설교가 마음에 착착 붙습니다. 왜냐하면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기 때문이고, 평범했으나 마지막 평가는 비범했기 때문에 나에게 또한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나의 생각에 공감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닙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다섯 달란트 맡은 종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이 매일 매일 느끼는 저 자신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성품에 눈을 뜨게 되면서 저는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 아니어도 괜찮고, 그럴 리는 없지만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다섯 달란트 맡은 종보다는 두 달란트 맡은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너무 좋겠다. 왜냐하면 천재들의 비극이 무엇인지 압니까? 눈뜨면 자기만 못한 사람을 보면서 사는 것이 천재들의 고통입니다. 조크인데 안 웃으시네요. 외롭습니다. 천재들의 최고의 고통은 자기만 못한 사람을 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우리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고통이 없습니다. 미숙할 때는 가끔 고통을 받았지만 이제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보면서 늘 즐겁고 그리고 서로서로 발전하는 것이 기쁩니다. 그리고 가끔 다섯 달란트 맡은 종처럼 그렇게 탁월한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저런 사람도 만드실 수 있으시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찬사를 돌리고 그리고 그런 사람 한 사람이 위대하고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 우리 같은 수많은 평범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도 조크였습니다.
III. 주님이 칭찬하신 삶
A. “잘 하였도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두 달란트 맡은 종과 다섯 달란트 맡은 종에 대한 칭찬이 완벽하게 동일했다는 사실이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칭찬은 ‘잘 하였도다’ 였습니다. 영어 성경에 ‘perfectly done’ 이렇게 나옵니다. ‘잘 하였도다’ 라는 말은 ‘주인의 의도대로 모든 일이 잘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개별적인 재능과 기회를 주셨습니다. 결코 우리에게 죄와 악함은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개별적인 재능과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각자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보편적인 인성을 소유하고 있고, 그런 보편적인 인성에 대해서 기대를 거시는 보편적인 성품과 삶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옛 선현들에 의해서도 잘 나타나는데 철학적인 기반도 없는 사람이 흔히 주고받는 말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겠어.’ 라고 할 때에 그것은 직업의 다양성이나 혹은 천재성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살아야 할 삶입니다. 그리고 성품입니다. 그런 것만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각 사람에게는 이전에도 없고 지금도 없고 이후로도 없는 우리에게 독특한 개별적인 성품과 그리고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천연 기념물과 같습니다. 그것을 대치할 수 있는 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비슷한 것들을 많이 만들어내면 만들어 낼수록 진품의 가치가 높아지듯이 여러분도 바로 그런 진품으로 하나님께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 독특하게 창조된 여러분들의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이 남에게 흔히 발견될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지문만이 묻어있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모두 회사 다니면서 돈을 벌고 그것으로 생활을 할지라도 그것은 외형적으로 일치하는 모습이지 실제 그가 그려내는 삶은 같은 회사 다녀 동일한 연봉을 받는다고 해서 똑같은 삶을 그려내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교회 다니고, 똑같은 머리 모습을 하고, 같은 자리에 나란히 앉아있고 키도 똑같다고 할지라도, 같은 성별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려내는 삶은 각각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허락된 독특한 본성과 달란트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두 달란트 맡은 종은 최선을 다해서 그만큼 남겼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것을 남겼을까요? 모릅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은화 므나의 비유는 어떻게 이 사람들이 돈을 남겼는지에 대해서 유추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 달란트의 비유와 므나 비유의 차이점은 달란트는 사람마다 각기 상이하게 달란트가 맡겨졌는데 므나의 비유에서는 모든 사람과 똑같은 양의 금, 은화가 주어집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과 비교될 수 있는 누구도 똑같지 맞지 않은 서로 다른 달란트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술에 의해서 내가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맡았습니다. 혹은 공부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받았는데 나는 두 달란트밖에 안 됩니다. 또 어떤 일에 있어서 다른 사람은 보통 두 달란트밖에 안 되는데 나는 다섯 달란트 받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똑같이 주신 달란트도 있습니다. 24시간이라는 하루는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고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을 때가 있다는 것도 우리의 인생도 동일하게 한정된 기간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인생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달란트를 균등하게 혹은 차이 나게 맡기셨는데 그 맡기신 것을 하나님 앞에 남겨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이고, 더욱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표이기도 합니다. 주인이 맡겨주신 의도대로 ‘잘 하였도다’ 라고 칭찬을 받았는데 이것은 암시 받기로는 누가복음 19장 15절에 이와 같이 말합니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라고 했으니 그들이 돈을 남기는 방식은 장사를 통해서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맡은 종들이 장사하여 그렇게 달란트를 남겼지 않았나? 우리는 추측하게 하는 것입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주인은 이렇게 달란트를 남겼을 때에 매우 기뻐했고, 두 달란트 맡은 종에게 주인은 다섯 달란트를 남기기 기대하지 않았고, 그리고 다섯 달란트 맡은 종에게는 열 달란트나 혹은 두 달란트를 기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동일하게 자신이 받은 것만큼 남기도록 그렇게 기대하셨고, 이 두 종은 그 기대에 부응했기 때문에 주인에게 칭찬 받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라는 말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서 기술에 있어서 훌륭했다.’ 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태도와 마음가짐에 있어서 다름이 없었다고 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은 사명으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대가로 인생의 일부를 떼어내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이 모든 우주의 목적을 바라보고 그 모든 우주와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연 만물 앞에서 관계를 맺는 나 한 사람이 어떤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창조되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개인의 행복과 그리고 이웃과 온 우주, 만물의 평안한 상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에 있어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상태가 바로 좋은 상태이고, 이 의도를 따라서 어떤 일을 수행하고 인생 자체를 영위해 간 것이 주님이 보시기에 ‘잘 하였도다’ 라는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잘 하였도다’ 라고 하는 이것은 단순히 남기기만 하였다는 이유에서 이 종들에게 ‘잘 하였도다’ 라고 주인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주인은 매우 부유하였기 때문에 어쩌면 이 종들이 남긴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 가지고 가산이 좌지우지되는 그런 사소한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주인을 깊이 감동시킨 것은 바로 이 종들이 달란트를 주인이 맡겼을 때에 의도하는 대로 행하여 훌륭하게 자신이 그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훌륭하게 그 목표를 수행하여 많은 것을 남긴 것, 그 자체를 보고 이 주인은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잘 사는 것과 인생의 행복을 혼돈합니다. 잘 살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은 즐거운 인생을 살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수많은 현대인들이 허무한 일에 자신을 헌신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비록 성경의 특별 계시의 빛이 없어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욕망대로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가르쳐준 선현은 동양에나 서양에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어떤 규범에 따라 생활할 것을 요구하였고 그리고 그 삶이 때로는 힘겨워 보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그 체득한 것을 후손들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선현의 글들은 우리에게 항상 감동시키지만 우리가 흉내 내기에는 항상 먼 거리감이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이 익숙해지지 않은 선보다는 오히려 익숙한 악에 기울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복음을 통해, 성경을 통해 알게 되었고 그 잘 사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면 어떤 식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렇게 한 축에는 잘 사는 것이 있고, 그리고 또 한 축에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 있어서 그 두 가지의 균형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 한 인간으로서 행복하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 자체를 잘 살고 그 분 앞에서 ‘잘 하였도다’ 라고 칭찬받는 사람들이 된다면 우리의 인생은 참으로 이미 행복을 누린 인생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더 이상 인생의 방황을 계속하지 말고 이렇게 주님 앞에서 ‘잘 하였도다’ 인정을 받는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착하고”
두 번째는 ‘착하다’ 라는 칭찬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착하고’ 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는 ‘아가도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의 히브리어 동치어는 ‘토브’라는 단어입니다. ‘선한’, ‘좋은’, 때로는 ‘옳은’ 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잘 하였도다’라는 주인의 첫 번째 칭찬이 일에 대한 것이었다면 ‘착하다’ 라고 하는 두 번째의 칭찬은 그 종의 인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착하다’ 라고 하는 이 기준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생각 없이는 무엇으로도 선하다는 기준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자유의지론』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은 넓은 선에서 좁은 선으로 이행하는 것이 악이다.” 살인을 하고 악을 저지르는 그 인간도 그 자신에게는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에 그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인류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악은 없습니다. 그 악을 행하는 그 사람은 그것이 악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아니함으로 악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선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궁극적으로 넓혀서 더 넓혀질 수 없는 외연에까지 이른 상태에서 선악을 판단하느냐에 의해서 우리의 선악에 대한 판단은 올바른 규범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악의 판단의 기준은 당연히 하나님 자신의 존재이십니다.
그러면 도대체 선이란 무엇입니까? 이 형이상학적인 말에 대한 설명에 나는 긴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단하게 살펴본다면 이 선이라고 하는 개념은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고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면 이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충족하셔서 자신에게 결코 모순되지 않으시는 그 분의 존재와 성품이 바로 이 선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 좋지 않은 일인데도 좋은 일인 줄 알고 행합니다. 아직까지도 흡연에 인박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좀처럼 담배를 끊지 못합니다. 그렇게 담배를 피우는 순간의 쾌락은 흡연을 즐기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놀라운 것이라는 사실을 저는 어렸을 때의 경험으로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객관적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나쁜 일인지는 후일 그 습관을 계속해본 모든 사람들은 알게 됩니다. 저는 지금도 한때 코미디언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주일씨가 죽기 며칠 전 그 금연 광고를 찍으면서 했던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폐암에 걸려 마지막 호흡기를 달고 죽어가면서 “여러분, 담배 피우지 마세요.” 그게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 같은 출연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에게 나쁜 데도 좋은지를 알고 우리에게 그것을 행함으로 행복하기를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하게 하는 일들을 행하는 자기 모순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피조물과 관계 속에서 숙고될 때에는 모든 피조물들을 관대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의 탁월한 성품입니다.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너그럽게 대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용서한 사람들을 다시 받으시고, 받으신 사람들에게 다시 당신의 생명을 주셔서 당신의 선 안에서 그 선을 맛보며 그 안에서 숨 쉬고 기동하며 살게 하십니다.
많은 사람과 함께 세상일도 했고, 그리고 주님의 일도 하면서 긴 세월을 살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깨닫는 아주 평범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하나가 있습니다. 어떤 한 가지 주어진 자신의 과업을 위해 치열하게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대부분 주관이 뚜렷하고 자기 일에 대한 확고한 긍지가 있습니다. 이상적인 성품과 생활은 이것입니다. 마음은 둥글고 일은 네모지게 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의 일에 대해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갑갑하게 여기고, 때로는 자신보다 열등하게 생각합니다. 일을 네모지게 해내는 사람은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훌륭하게 해내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아야 하고, 어떤 사람은 관계까지 끊어지면서 사람들과의 이 사랑의 관계에 손상을 입어야 합니다. ‘그런 손상을 입히면서도 그 일이 훌륭하게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차치하고라도 그 사람의 성품이 워낙 주관이 뚜렷하고 긍지가 있으리만치 자기 일에 대해서 치열하고, 치밀하고, 열정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일이 망가지는 것은 차마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서 마음이 둥글둥글한 사람은 얼마나 좋습니까?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줍니다. 그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면 만약에 맡긴 그 일이 육각형의 주사위 같은 것이었다면 그 일을 해냅니다. 그런데 그 일에 반대하는 사람이 나섭니다. 그와 부딪치는 것이 성격적으로 싫습니다. 한쪽 모퉁이를 깎아내 버립니다. 또 다른 사람을 만납니다. 이 사람하고 성격적으로 부딪칩니다. 그런데 도저히 그 사람이 양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주 기분 좋게 양보해서 또 모서리를 깎아냅니다. 결국 육면체로 맡겨진 그 일은 그 사람 손에서 한참 구르는 동안에 둥글둥글한 공같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끝나고 보면 그 사람하고 일을 했지만 일이 된 것도 없고, 안된 것도 없고, 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안한 것도 없는, 그 사람이 다음 일할 때 꼭 생각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생각 안 나지도 않는 그런 존재감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충성스러운 삶, 자신의 과업을 위해서 목숨을 건 사람들은 대부분 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비유 속에 투사하셔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었던 교훈은 이것입니다. “얘들아, 세상 일을 생각해 보거라. 어떤 일을 훌륭하게 해내는 사람은 결코 착하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일을 사명감 속에서 훌륭하게 해내는 사람들은 반드시 착한 사람이 되어 가느니라.” 그러면 여러분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훌륭하게 일을 해냈는데도 저는 착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일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가짐이 잘못된 것입니다. 군자와 같은 지도자는 매우 어려운 과업 하나를 수행해 내면 수많은 동지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눈에 띄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을 등장시켜서 그래서 그 일에 동역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소인과 같이 아주 자잘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그 사람이 어떤 큰 과업을 완수하고 나면 사람들은 마음이 찢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깨어지게 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 사람이 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동양으로 말하자면 저기 은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스스로 인식하는 인생에 있어서 숙제는 두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신, 혹은 자연, 혹은 절대자 앞에서 어떻게 살까?’ 하는 것과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깨끗케 되어서 어떻게 하면 순수한 인간이 될까?’ 이 두 개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그런 인간 존재의 고민거리를 다시 수면 위에 떠올린 사람들이 르네상스의 정신적인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그 절대자 앞에서 살아야 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참 사람다운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 깊은 인생의 고민거리였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면서 참된 사람이 되어가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성품과 존재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아니하고 일에 미친 사람은 바꾸어 말하면 그 존재와 성품에 대한 소명을 일로 가려 버리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중독은 매우 나쁜 것이며 그 사람의 참 존재를 찾지 못하게 하는 마약과 같은 성분을 그 안에 지니고 있음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게으르게 사는 것에 인생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게으름 속에서 얻는 것보다는 잃어버리는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안락한 삶과 편안한 삶을 강조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떤 달콤한 말로 유혹한다고 할지라도 게으름은 결코 우리의 미덕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충성스럽고 열정적인 헌신과 함께 착한 인격이 요구되는데 일은 우리의 성품이 아니고, 우리의 성품은 일이 아닙니다마는 성품과 우리의 일하는 태도는 순환 관계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의식하며 그 일을 잘 해낼 때 그는 좋은 성품의 사람이 되지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아무렇게나 해버리는 데에 익숙해진 사람은 점점 그 일하는 것을 통해서 나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충성스러운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착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C. “충성된 종아”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충성된 종아’ 라고 불러주시는데 이것은 두 가지를 내포합니다. 하나는 신분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성품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여기에서 종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그 종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고 왕국의 소명으로 살아야 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종이라고 번역된 이 희랍어 단어는 ‘둘로스’라는 단어인데 문자적으로는 종이 아니라 노예입니다.
그러면 왜 ‘노예’를 ‘종’으로 번역했을까요? 우선 ‘노예’와 ‘종’의 차이를 살펴봅시다. ‘종’은 주인과 계약 관계 속에서 노동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사람입니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는 이제 이런 잘못된 번역의 시조는 킹 제임스 버전입니다. 1604년부터 16011년 7년 사이에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칙령으로 성경이 번역됩니다. 많은 사람은 이 성경이 이 번역가들에 의해서 최초로 번역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들이 번역한 것 중70%는 이미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 개혁가였던 윌리암 틴데일의 번역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물론 윌리암 틴데일은 희랍어와 아람어, 그리고 히브리어 텍스트에서 여러 가지 번역을 참고하며 자신의 독특한 번역을 완성했을 것입니다. 이때에는 영국 사회의 문맥이 노예 제도가 유지되던 사회였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노예들에 의해서 노동력이 제공되고 사회가 지탱되던 때였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둘로스의 원뜻이 ‘노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슬레이브(slave)’라고 번역하기에는 그들의 양심이 너무 찔렸습니다. 그렇게 번역을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 된 바울은” 이라고 번역을 해야 했을 테니까 자신들이 대우하고 있는 노예에 대한 대접이 너무 혹독했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서 그 단어가 나올 때마다 양심의 찔림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단어를 좀 더 완화된 단어인 ‘서번트(servant)’라고 번역했는데 ‘서번트’는 라틴어 ‘세르부스’ 라는 단어에서 온 것인데 이것은 ‘종노릇’ 혹은 ‘섬김’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서번트들은 주인과 분명한 계약 관계에 있었고, 그리고 계약 관계가 끝나면 종의 관계도 끝났습니다. 그 집안에 머물며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출퇴근하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종은 상당한 자유를 가진 존재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라고 했을 때 그것은 결코 서번트가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슬레이브는 처음부터 자기의 소유인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주인의 소유물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받는 품삯도 없었고, 종은 자신이 자녀를 낳으면 자기의 자녀였지만 노예가 자식을 낳으면 주인의 소유였습니다. 마치 개, 돼지가 새끼를 낳을 때 당연히 그 새끼 돼지, 개가 주인의 소유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규정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설교 초반에는 자유에 대해서 그렇게 열렬히 역설하시드니 이번에는 우리를 노예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에게 적용되는 이 노예는 그 당시 사회적인 노예에게 적용되는 것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노예 되는 것은 몇 가지 길이 있었는데 하나는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서 노예로 팔리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가족의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소위 ‘self selling’이라고 하는 ‘노예 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는 전쟁에 패배했을 때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그들이 노예의 계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가 되었다고 하는 것,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고 하는 그것은 ‘노예의 흔적’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티그마’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할 때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노예가 된 것입니까? 그 노예는 폭압과 그리고 억압에 의해서 강제에 의해서 노예가 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 이끌려서 노예가 된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화를 받은 후 나는 그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이런 사랑을 멀리 떠나서 자유로운 인간으로 사는 것은 속박이요, 이 사랑의 속박을 느끼면서 여기에 매여서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약에서 종이 해방의 때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제 아무 대가 없이 스스로 자신이 해방될 수 있는 은혜의 해가 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제 지겨웠던 노예 살이를 집어치우고 그리고 본토와 친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노예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주인의 손에 이끌려 그 귀를 기둥에 갖다 대고 여기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은 후 이제는 해방의 해와는 상관이 없이 일평생을 이 집안의 노예로 살기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강요나 억압에 의해서는 이러한 서원이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그 서원은 무효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신분은 노예이지만 그 주인과 거의 가족과 같은 사랑의 관계를 누리면서 삽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어디로 가든지 외톨이밖에 더 되겠는가? 이 자비로운 주인과 가족과 같은 관계를 맺으며 그 사랑 안에서 산다면 나는 일평생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이 주인을 위해 노예로 섬기면서 살겠노라 하고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때 이 사랑에 강력하게 사로 잡혀서 그렇게 기꺼이 그 사랑에 감화된 노예의 삶을 자처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의 기쁨을 그리스도 바깥에서 찾고, 우리 인생의 진정한 보람을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에서 찾는 사람에게 어떻게 완전한 자유가 주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일평생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라고 불리는 것을 자처하였던 것입니다. 그에게 그것은 너무나 자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완전한 자유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설계하기 전 먼저 우리는 인생을 깨끗이 예전의 설계를 지워버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는 은혜로운 구원의 빛 아래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새롭게 인식합니다.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을 주로 삼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의 삶이 아니었던 삶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충실한 주체적인 삶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비극은 우리가 우리의 삶에 주체가 되지 않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살지만 왜 그렇게 사는지도 모르겠고, 죽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살고 싶고, 살고 싶지만 때로는 죽고 싶고, 그러면서도 그 심리 속에 깃들여 있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인간으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에 가슴 벅차는 감격은 이것입니다. ‘아, 내가 자유로운 존재로 부름을 받았고, 온 인류 역사에 한번밖에 없는 이 천연 기념물 같은 인생을 내가 주체가 되어서 살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부르셨구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에서 규정하는 주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대로 사는 것, 그리고 내 욕망에 충실 하는 것, 내 하고 싶은 대로 행하는 것 그것이 주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주체일 수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그렇게 자유로운 주체로 흡연하여 폐에 구멍이 나고 그렇게 자유로운 주체로 마음껏 독한 술을 마시면서 위에 구멍이 나고 그리고 때로는 알코올 중독에 이르게 되는데 너무나 자유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타유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자유로운 삶일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중에도 아마 포르노에 상당히 중독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떠나야 합니다. 그 자체가 나쁘기 때문만이 아니라 나중에는 여러분들의 삶을 여러분들이 전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것이 포르노뿐이겠습니까? 여러분이 행하고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나쁜 습관들, 죄악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면서 행하는 모든 삶은 사실은 주체가 아니라 그 죄의 지배를 받으며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들의 노예로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거기에 어떻게 진정한 자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주체된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내 마음이 팥죽 끓듯이 변덕을 부립니다. 어떤 때는 삶의 희망과 기쁨이 솟아 넘치고, 어떤 때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의 나락으로 접어듭니다. 내가 내 인생에 진정한 주체가 되었다면 나는 그렇게 살 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자가 내 앞에 울부짖어도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나보다 엄청난 지위가 높은 사람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나는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는 네 인생을 사는 것이고 나는 내 인생을 사는 것이고 그리고 인생의 이 존귀함은 그까짓 사회의 지위에 의해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 앞에 호흡을 가다듬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미녀들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그것도 얼마나 웃기는 것입니까? 한번 바라보는 것입니다. 30년 동안 계속되는 미인은 없습니다. 세월이 그들의 아름다움을 뺏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잠깐 동안이면 사라질 아름다움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무엇도 내 인생의 기반을 뒤흔드는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를 진정한 주체성을 가지고 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을 너무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이 나의 삶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충성스럽게 사는 것은 자신의 삶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이익이 되기 전에 충성스럽게 사는 그 사람 자신이 최대의 첫 번째 수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충성된’ 이라고 하는 형용사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성품이 어떠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충성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피스티스’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인데 ‘믿을만한’, ‘신실한’, ‘충실한’, 이런 의미를 가진 단어이고 이것에 맞먹는 히브리어 단어는 ‘애메트’인데 이것은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진리 혹은 신실함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공경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성품과 성향입니다. 충성은 단지 일 자체에 대한 치열한 욕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께 봉사하며 살고자 하는 성향이고, 하나님의 우주적인 경륜 아래에서 자신의 인생을 보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의 이 우주적인 경륜을 이루는데 티끌만큼이라도 이바지하기를 바라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제자로서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만족스러운 조건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을 하는 것은 결코 충성일 수 없습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언제나 좋은 길만을 걷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도 꽃길만 걷지 않는다면 인생의 목표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꽃길만 걷는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종종 꽃길만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신념 때문에 그 꽃길을 버리고 가시밭길로 접어듭니다. 멸시와 모욕이 있는데도 영광과 박수갈채를 거절하고 자신의 신념을 따라 하루를 사는 것이 신념을 반하여 천년 동안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행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는 기쁨입니다. 두 달란트 맡은 종에 대한 주인의 마지막 평가를 보십시오. “그 주인이 이르되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하고”(마 25:23)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자들의 편에 서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시간 속에 태어났고 공간을 점유하고 살지만 시간이 다할 때 우리는 공간 속에서도 사라지게 됩니다. 더 쉽게 말하면 공간 속에서 우리의 인생의 지속성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한시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스토아 철학자였고 로마의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의 한 구절은 우리의 마음을 내리치는 채찍이 됩니다. 그는 자신의 그 유명한 책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얼마나 자주 신께서 주신 기회를 받았는지를 기억하라. 그러나 그대는 그 기회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제 그대는 마침내 자신이 우주의 일부분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의 존재가 우주를 주제하시는 그분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시간의 유한함이 그대에게 운명 지워져 있다. 시대의 유한함이 그대에게 운명 지워져 있다. 만일 그대가 정신의 구름을 걷어내는데 시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가면 그대도 갈 것이요. 결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경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었지만 이 세상의 번뇌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최대한 일반 계시를 묵상했을 때 그가 도달했던 기준은 참으로 우리에게 놀라운 마음을 가져다줍니다.
시간의 유한함이 우리에게는 운명처럼 주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많은 시간들을 허비합니다. 돈이 없고 권세가 없고 젊음이 없고,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정신이 어두운 구름 속에 쌓여있어서 애매모호한 상태로 우리의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시간은 이렇게 우리의 정신의 구름을 걷어내는 일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즐기고, 염려하고, 고통하고, 웃고, 그리고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일들을 위해 헌신하고, 그리고 하나 안 하나 마찬가지인 일에 우리의 존재와 그리고 시간의 노력을 퍼붓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마땅히 몰두하여야 할 일에는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최소한 네 가지 질문에 대해서 명료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 어디를 오늘 읽고 있습니까?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요즘의 일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가슴 벅차는 치열한 기도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요즘 읽고 있는 책이 무엇입니까? 요즘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 여러분 중에 상당수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음을 압니다. 이렇게 훌륭한 도서관이 옆에 있는데 커피숍에는 사람이 줄을 서도 도서관에는 줄을 서지 않습니다.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한 잔의 커피가 주는 즐거움보다 진리의 빛이 우리의 어두움에 던져주는 빛은 더욱 더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지 않습니까? 항상 인간이 발견한 진리를 무시하지 말고 그리고 누구에게서 훌륭한 진리를 발견해도 결코 추종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딛고 그 정신세계를 넘어서서 자기만의 독특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 모든 지식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을 경배하고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뛰어넘기 위해서는 밟을 것이 있어야 할 것이고 밟는다고 하는 것은 지식을 섭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진리, 인간의 삶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면서 그 빛으로 우리들이 접하는 사회의 문화와 이 현실을 비평하며 살아야 합니다. 충성된 종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순간 혀를 깨물도록 한 일에 몰두하다가 뒤로 벌렁 나자빠지는 그런 사람의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 많은 사람보다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의 편에 계십니다. 미리암과 아론에게 도전 받던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그렇게 악한 백성들과 함께 한 무리가 되어서 자신의 리더십에 도전하는 미리암과 아론에 마주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말 많은 사람들, 그리고 훌륭한 언변을 가진 사람들 편에 서신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충성하던 모세의 편에 섰습니다. 민수기 1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집에 충성함이라”(민12:6-7)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모세를 친구처럼 대면하여 말하기도 하였으니 그 친밀함은 모세가 타고난 훌륭한 가문이나 탁월한 지식 때문이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을 위해 온전히 충성하사 충성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회고해 본다면 우리가 게으르고 나태하게 자기를 위해서 살았던 날들은 그렇게 가치 있게 기억될만한 날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분투하며 살았던 사람, 주님을 향한 사랑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살았던 충성스러운 삶,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거기에 세우지 않았더라면 망가졌을 사람들을 세우시고 깨졌을 주님의 일들을 다시 재건하시는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 같이 티끌 같은 사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과 자비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충성된 사람의 사람이 되십시오. 충성된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압시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적인 경륜 아래 있으니 우리 인생의 목표는 그 경륜 아래 있고 그 경륜을 이루면서 삶으로 그 안에서 행복하도록 정위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은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 과정입니다. 한순간 한 순간이 모여 시간이 되고, 시간들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가 모여 1년이 되고, 1년이 모여 우리의 일생이 되는 것이니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악하고 게으르다고 평가를 받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인생 전체를 거의 그렇게 살았다는 뜻이고,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인정을 받게 된다면 매순간 그렇게 살려고 힘쓰고 애쓰며 그 안에서 행복을 누렸던 우리의 순간순간의 삶이 집적되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 매 순간은 다시 오지 않고 흘러갈 순간들이니 이 순간들 속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비록 꽃처럼 향기로운 생활이 아니어도 그 안에서 행복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주님의 순결을 느끼며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안에서 가장 주체적인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어떤 욕망도 우리에게 우리를 움직이는 요인이 될 수 없고, 오직 우리를 완전히 자유하게 하시고 우리가 완전한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 때에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의 성품에 맞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인생의 참 보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잘 하였도다, 인격에 있어서 착한 자로다, 신앙에 있어서 충성스러운 자로다 인정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