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섬김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게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7:36-47)
녹취자: 허혜숙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였으니 아마 예수님을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교지도자들과 갈등관계에 계신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마태복음에 보면 문둥이 시몬의 집이었다고 나옵니다. 그러면 두 기사를 종합해보면 아마 이 사람은 바리새인인데 문둥병에 걸렸고 그래서 아마 고침을 받아서 이제는 이스라엘 가운데 생활하게 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안 나오지만 어쩌면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병 고침을 받고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식사에 초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으니 우리는 쉽게 단언할 수는 없으나 그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가족이 된다는 의미가 있었고 식사 이상의 깊은 연대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추측을 해 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피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식사자리에 초대를 받지 않은 한 여자가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이 여자의 이야기가 꽤 길게 쓰여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기념하리라’고 할 정도로 주님이 높은 평가를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이 여자의 이름도 나오지 않고 어떤 출신이었는지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읽은 이 성경의 본문을 통해서 이 여자가 어떠한 섬김을 주님께 드렸는지 나옵니다. 첫째는 침묵하는 섬김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인공처럼 등장하지만 놀랍게도 한 마디의 대사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아무 말이 없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섬기기만 하는 자매로 등장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바로는 사람들은 조금 섬기고 많이 말합니다. 조금 헌신하고 아주 많이 말합니다. 그 말로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평화로웠던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고 자신의 마음도 더럽히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분열에 물들게 합니다.
열한 시 예배가 시작하는데 11시 15분에 교회에 왔다가 축도가 끝나기 전에 도망치듯이 교회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은 교회자체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대부분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많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섬김을 매우 큰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이 많습니다. 그 말 때문에 더 많은 말이 생기고 교회는 때로는 분란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그저 초대받지도 못 한 채 와서 조용히 침묵하며 조용히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향유를 붓고 그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며 섬겼습니다. 제자들이 타박도 했지만 이 여자는 일체의 대꾸가 없이 침묵함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할 때, 내가 주님을 섬기지만 부당한 대접을 받을 때, 우리는 섬기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언어가 끓어오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일체의 평정을 유지하며 침묵으로 우리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여러분도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늘 주님을 섬기시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려움도 있고 마음이 힘겨울 때도 있으나 언제든지 일체의 침묵으로 이 사람처럼 우리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두 번째는 최선의 것을 드린 섬김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있는 여자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뵈었는지 혹은 멀리서 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여자는 주님을 이미 만난 적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식사하는 자리에 초대받은 적이 없으나 예수님을 초대한 이 사람보다 훨씬 더 꼼꼼하게 준비를 해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뵈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향유가 들려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것이 300데나리온쯤 될 것이라고 제자들이 가치를 먹였는데 1데나리온은 당시 장정인 남자가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노동해야지만 받을 수 있는 품삯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침부터 해 질 때까지 노동을 해야지만 받을 수 있는 품삯이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아무 기술이 없는 사람이라도 15만원 일당을 줘야지만 잡부로 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이 너무 많고 급하면 18만원까지 줘야 된다고 하니 그렇게 계산을 하면 약 5400만원어치의 향유가 되는 것입니다. 당시 이 향유는 향품이었으나 재산축적의 수단으로 쓰였습니다. 조금씩 향유를 모으고 그 향유를 언제든지 시장에 가져가면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유동성 있는 재화였습니다.
이 여자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향유를 모으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짧은 성경본문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을 가리켜 죄인이었던 여자라고 나오고 바리새인은 예수를 초대한 사람으로서 이 여자와 함께 이렇게 의사소통을 하는 예수님을 뵈오면서 이 여자가 어떤 죄인인줄을 알았더라면 안 그러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니 이 여자는 많은 주석가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평범하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죄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에, 머리에 박힌 죄인이 두 종류가 있었는데 남자는 세리였고 여자는 창기였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에게 술을 팔고 그들과 함께 정분을 나누는 여자를 종교를 버린 사람들로 생각했습니다. 이 여자가 비록 그런 죄인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 용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여자의 마음속에 신앙이 생긴 것입니다. 어쩌면 이 여자는 그렇게 뭇 남성에게 웃음을 팔고 술을 팔면서 그렇게 조금씩조금씩 모으는 향유를 보며 꿈을 키웠을 것입니다. 이제 이 재물과 함께 이 부끄러운 삶을 모두 벗어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큰 은혜를 통해서 죄의 용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자기가 가진 최선의 것을 우리 주님께 바칠 용기가 생겨났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여자가 바로 인생의 의미도 모르고 살던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의 용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죄 덩어리인 나를 하나님의 아들이 용서해주시고 다시 하나님을 향해 사랑을 받으며 살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결코 가지지 않는 특별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 앞에 아주 크고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나의 죄를 십자가에서 용서해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기억입니다. 하나님이 말로만 듣던 그 위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었고 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심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찬송)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지게 되고 예전에는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향유였습니다. 그 물질을 많이 모으면 자신이 행복해 질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인생의 목표가 예수 사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향유는 예수 없이 살던 지난날의 그 여자의 인생의 꿈이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 그 꿈은 아무것도 아닌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세상 전부를 주고도 살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께 이 향유 옥합을 깨트렸습니다. 그리고 그 분에게 그 향유를 부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인생에 참된 사랑이 이제 예수밖에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이 이상 이 여자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이 없었습니다. 그 최고의 것을 우리 주님께 모두 쏟아 부어버렸으니 이제 이 여자의 마음에 향유가 아니라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받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모든 어려움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주님보다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 자신을 위해서는 최고의 것을 사용해도 주님을 위해서는 최선의 것을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 여자가 드리는 약 5400만 원 짜리 향유를 지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죄의 용서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제 예수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한 여자를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후 110년경 안디옥에는 이그나티우스라고 하는 명망 있는 초대 교구가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강직하고 올곧은 설교자였습니다. 그래서 ‘이그나티우스의 편지’라고 하는 글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옵니다. 로마 황제가 정치를 잘못 하는 것 같으니까 조정에 올바른 간언을 여러 차례 올렸습니다. 미운 털이 박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투옥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디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목회자를 존경했습니다. 신자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불신자들까지도 존경을 표하던 목회자였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그의 스승의 죽음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리고 수많은 서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탄원을 올렸습니다. 이제 로마 조정에서 마음이 많이 움직여 이 훌륭한 목회자를 석방할 조짐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감옥에 갇혀있는 스승을 찾았습니다. ‘선생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열심히 석방운동을 하고 있는데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그러자 이그나티우스는 말했습니다. ‘하지 마십시오. 이제 나는 살 만큼 살았고 이제 나는 주님을 위해서 최선의 것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교’였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최선의 것을 주님께 드리기까지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무엇이 없고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 최선의 것을 주님께 드리며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당신에게 최선의 것을 드리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눈물이 있는 섬김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올 때부터 이 여자는 눈물로 예수 그리스도의 발을 적셨고 그것을 황망히 여겨 칠흑 같은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 그리스도의 발에 떨어져있는 자신의 눈물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일체의 사랑과 존경심으로 그리스도예수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여자의 섬김은 눈물이 있는 섬김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섬기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존재합니다. 아무도 봉사하는 이가 없다면 거기에 교회가 서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신앙이 태만하여 티끌만큼도 교회를 위해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한 구석에 있는 교인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위해 도무지 희생하려고 하지 않아도 이렇게 은혜를 받은 사람은 주님을 사랑합니다. 자기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모퉁이를 눈물로 섬깁니다. 사람의 시선과는 상관이 없이 침묵하며 최선의 것을 드리며 주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섬깁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런 사람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겨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이렇게 식사 자리에서 섬기면서 흘렸던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찬송)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자기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셨다는, 자기가 주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기독교 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던 어거스틴은 자신의 고백록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당신을 너무 늦게 사랑하였습니다.’ 자기가 주님 앞에 큰 사랑을 받고 나니 주님을 모르고 살았던 날들이 너무 한스러웠던 것입니다. 왜 이제야 주님을 만났을까? 더 어린 날, 더 젊은 날, 더 인생의 많은 날을 방황하기 전에 주님을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주님이 자기를 용서해주셨지만 여전히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은혜를 베푸셔도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리 고귀하게 사용하셔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용서를 받은 죄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너는 의인이다 불러주셔도 우리는 함부로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너는 의롭게 되었도다, 아닙니다 주님, 내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나를 의롭게 하신 주님이 의로운 것이니 나의 모든 의로운 것은 주님께 빚진 것입니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라’ 불러주셔도 우리는 감히 내가 하나님 집안의 맏아들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주님의 집에 가장 무익한 종이니이다, 나를 아버지 집에 품꾼 중의 하나로 여겨주시옵소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눈물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입니다.
(찬송)
사랑의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시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고 우리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은혜로 깨끗케 하실 때에 우리의 공로를 보고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하나님이 왜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사랑하셨을까 그리고 내가 살아온 모든 날들이 우리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면서 살았나, 무엇 때문에 주님은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나 이에서 흐르는 눈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하루에 두 번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그는 결코 타락하지 않습니다. 한 번은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는 회개의 눈물과 또 한 번은 자기 같은 희망 없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며 흘리는 감격의 눈물입니다. 오늘날은 울지 않는 세대입니다. 사람은 더 이상 눈물을 흘리며 찬양을 하거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적인 것일 수가 없습니다.
(찬송)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런 주님의 사랑을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살아있는 날 동안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이 보시기에 좋아보이도록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없는 것 보다는 이 세상을 티끌만큼이라도 아름답게 하고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 이 설교를 듣는 모든 성도들이여,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이 이름 없는 여자처럼 이렇게 진심으로 침묵으로서 주님을 섬기고 최선의 것을 드리고 더불어 예스럽게 봉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