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자를 부르심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녹취자: 이솔
I. 본분 해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러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전에 하던 직업인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이 죄는 아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냥 생업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고 예수님의 명령대로 했더니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이것은 마치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과의 만남 사건의 큰 데자뷔였습니다. 누가복은 5장 4절에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대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신 것과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이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비록 당신의 부활을 보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4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A. 식탁을 차리심
제일 먼저 식탁을 차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인줄 알아보고 제자들이 이제 배에서 내려 예수님께로 다가왔을 때 예수님은 이미 어디에서 준비하셨는지 숯불과 떡과 생선을 구워서 아침식탁을 채려놓고 기다리셨습니다. 마치 가족들을 위해 정성껏 식탁을 차리는 엄마같이 그렇게 아침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식탁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아무하고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식탁을 나누는 것은 가족들끼리 할 수 있는 일이고 혹시 다른 사람과 식사를 나눈다면 그것은 이 식사를 통해서 그들이 가족처럼 한 형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신 것은 매우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단순한 식량조달의 방법이 아니라 매일 함께 만나를 거두고 먹으면서 자신들이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임을 기억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약시대에 와서 성찬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바리세인과 지도자들에게 비난을 받으셨던 이유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왜 너희 선생님은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 나는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기 위해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그들을 거절하고 멀리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당신의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함께 식탁을 나누며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대해주시며 사랑해 주셨고, 그것은 바로 죄인을 불러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인도하기 위함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패한 제자들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족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침 식탁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또 예수보다는 목숨을 사랑하여 도망간 이 사람들을 가족처럼 여기며 식탁을 준비하셨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자신의 인생에 어떠한 나쁜 일도 결국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도 나를 버리지 아니 하시고 지키실 것을 믿는 그 믿음이 바로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식탁을 차리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약함과 거짓, 그리고 잘못 때문에 그리스도를 버렸고 멀리 떠났지만 그리스도에게는 끊을 수 없는 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버리고 멀리 떠났던 이 실패한 자들을 위해 아침 식탁을 준비하시므로 여전히 살아있는 가족 관계를 증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이렇게 여러분들을 가족으로 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와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이름을 부르심
두 번째로는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지칭하여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당시 매우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요한은 원래 히브리어인데 ‘야훼 하난’이라는 명사와 동사가 합쳐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 ‘바요나 시몬’이라는 이름은 예수님이 버리게 하신 이름이었습니다.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불후의 아름다운 고백을 남겼을 때 예수님은 ‘이제 네 이름을 바요나 시몬이라 하지 말고 베드로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요나’는 히브리식으로 읽은 것이고 ‘바’는 아랍어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바요나는 곧 ‘요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버리신 이름을 왜 다시 불러주고 계신 것일까요? 어떻게 해서 그 이름이 예수님에게 친근한 이름처럼 불리 울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 그러면서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으니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이었고, 바로 미래의 교회가 이렇게 이 위대한 신앙의 고백의 터 위에 세워질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남겼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그 이름을 밀쳐버리고 옛날 자연인의 이름인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십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때에 베드로를 “베드로야”라고 불렀으면 베드로는 얼마나 낙심했겠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마지막으로는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여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노라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도 버렸고 예수님과의 약속도 저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목숨이 두려와 예수 그리스도를 멀찍이 따라가다가 결국은 버렸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베드로라고 부르는 것은 ‘큰 믿음이여’라고 부르는 것이었으니 어찌 베드로가 얼굴을 들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실패한 기억으로 마음이 찢어지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베드로에게 맨 처음 그를 만나주셨던 ‘바요나 시몬’이라는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결국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받아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호락호락하게 우리의 모든 것을 받아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사람 앞에 각기 의무를 지고 있고 그 의무를 행한 것만큼만 사람들이 우리를 받아 줍니다. 심하면 자신들에게 이용 가치가 끝났을 때 더 이상 사람들은 상대해주지 않습니다. 만나서 기분 좋고 이익이 되고 유익한 사람을 만나려 하지 끊임없이 자신의 에너지를 뺐고 고통을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인간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단 하나의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고달픈 인생길에서 언제든지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엄마라는 이름입니다.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엄마는 우리가 주는 이익이나 유익 때문에 우리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그 자체로 원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입니다.
바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남겼을 때나 신앙의 고백을 배신하고 주님을 버렸을 때나, 그리고 예수를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을 때나, 지금 갈릴리 바닷가에서 다시 만났을 때나 변함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 우리가 있든지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그분의 마음에 그리움이 된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죽는 데까지 당신을 따라오겠노라고 장담을 하였으나 예수님은 그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덜 사랑하거나 심지어 그를 미워하거나 그를 정죄하는 일 따위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배신을 예고하시면서 까지 당신의 사랑이 계속될 것을 가르치셨고 오히려 그렇게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사명을 주실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1절에서 성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복음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한명의 제자는 결국 자살하여 인생을 끝냈지만 나머지 11제자가 있습니다. 그중에 10명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거나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비겁하게 그들에게 의해 회유 당하였으나 딱 한사람이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죽지는 않고 자신의 신앙 고백을 끝까지 순결하게 지키다가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예수님께 뽑혀서 이후에 전개되는 교회의 시대에 우두머리로 임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1장은 우리에게 그런 사람을 아무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20장으로 끝나는 책입니다. 그리고 21장은 부록으로 붙어있습니다. 21장을 뜯어내도 요한복음이 성립하는 데는 조금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실제로 20장 마지막 절을 요한복음을 끝내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처럼 마무리 하였습니다. 그런데 21장이 부록처럼 달려있습니다. 만약에 이 21장이 없다면 우리는 큰 혼란에 직면했을 것 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0장은 요한복음의 마지막장인 동시에 사복음서의 끝장입니다. 거기를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이 임명하셨던 제자들 사도라고 부르던 사람들은 한결 같이 예수님을 팔아먹거나 혹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거나 혹은 예수가 잡히실 때에 자기의 목숨을 예수보다 사랑해서 도망쳤던, 어떻게 보면 배신자들이였는데 사도행전 1장에서는 그들이 지도자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설교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성령의 역사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21장을 부록으로 넣어주셨습니다. 21장은 오직 한 사람의 영적인 리더십의 회복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입니다. 그리고 이 베드로는 자기 개인으로써가 아니라 제자들 모두를 대표하는 하나의 당사자로써 이 리더십의 회복을 경험함으로 사도행전 이후에 나오는 다른 모든 실패한 사도들의 등장도 합리화 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위대한 영혼이 아닌 연약하기 짝이 없는 자들을 불러서 당신을 섬기게 하시므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늘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실패한 자를 불러 당신을 섬기게 하심으로써 오히려 당신이 더 큰 기쁨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베드로 한사람이 그렇게 실패를 모르는 인생을 살아서 단 한사람 그 눈같이 순결한 신앙과 정절로 예루살렘 지도자가 되었다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까이 하기에 너무나 먼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우리가 바라보기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사람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결국은 모든 실패한 사람들을 다시 당신이 직접 찾아오셔서 당신의 손으로 회복시켜주시고 그리고 그 실패 속에서 좌절하며 짓밟힐 사람들을 다시 회복시켜서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들로 세워지게 하셨으니 우리는 그렇게 사람을 사용하시는 방식 하나만으로도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찬양)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외치는 자 많건 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
약한 자를 부르시어 하늘 뜻을 이루신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했던 위대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 모세나 혹은 다윗 같던 사람들, 그리고 신약에서 세례요한이나 바울이나 사도 요한과 같은 자들 말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한 것인데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은 용서를 경험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복은 크게 2가지가 있는데 섭리적인 복과 신령한 복입니다. 섭리적인 복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투자했더니 돈을 많이 벌었다든지, 내가 유난히 미모를 갖고 세상에 태어났다든지, 금수저를 물고 어느 집안에서 출생했다든지와 같은 세상적인 복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영혼에 직접 주어지는 복은 아닙니다. 신령한 복은 하나님이 영혼에 직접 내리시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모든 사람이 어마어마한 부를 누리거나 꽃길만 걷는 것 같은 인생을 살았거나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언젠가는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용서를 통해 경험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신령한 복입니다. 영혼 자체에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큰 복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복입니다. 왜냐하면 그 신령한 복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영광과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분 혼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는 대신 자신은 구차한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도들 가운데 가장 실패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찬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실패했으나 여전히 요한의 아들 시몬의 이름은 그리스도 마음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너무나 쓸모없는 것들과 그분의 이름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우리의 이름은 영원히 새겨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이렇게 우리의 이름 석 자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나 병들었을 때나 쓸모없을 때나 그 이름을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여러분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께 돌아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질문을 던지심
세 번째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히랍어 성경에는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날 더 사랑하는거냐?’고 번역할 수도 있고, ‘네가 이 물고기를 좋아하는 거보다 날 더 사랑하는냐?’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후자는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제 너의 형제들을 많이 사랑해서 실패하고도 이렇게 늘 함께 있는데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15절에서 17절까지 계속해서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이 세 번이나 나오는데 이것은 희랍어에서 각각 다른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가 다르기 때문에 사랑의 의미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그냥 동일한 질문을 다른 언어로 묻고 있는 것이지 그리스 철학에서 나누었던 사랑의 분류법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지나간 과오에 대해서 묻지 않으셨습니다. 저라면 이렇게 질문했을 것 같습니다. ‘죽는데 까지 나를 따라오겠다고 그러더니 아직 살아있구나. 그렇게 큰소리치더니 너는 왜 나를 버렸니?’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현재형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진심으로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렇게 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왜 나를 버렸니’라고 물으시면 역시 대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이 베드로가 예전에 당신을 버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실패했으나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도 진실이라고 믿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 그 구원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심으시는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 사랑에서 완전히 떠날 수 없습니다. 잠시 세상을 사랑하기도 하고 자기의 육체를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구원을 받은 가장 훌륭한 증거는 천사의 말을 하고 방언을 하고 심지어는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확신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으면서 덜 확실할 수 있기 때문에 믿고 있는 확신의 정도도 구원의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 거듭나고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숨길 수 없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신자의 가장 확실한 표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사랑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와 형제, 혹은 친구를, 그리고 성장해서는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자녀들의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사랑의 대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떠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한 바와 같이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을 제시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그것들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자신도 죽음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사랑받고 싶어 하지만 사랑받음으로써 인간성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도 그는 여전히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으로 완성시키는 것은 사랑함으로써 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이렇게 끝없이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그 충만한 단 하나의 사랑으로 가득차서 연약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삶은 이것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아무에게 사랑을 받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신자의 가장 이상적인 삶은 이 세상의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고, 그리고 누구로부터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단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이 사랑 안에서 창조되었고 이 사랑 안에서 사회를 이루고 이 사랑 안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게끔 만들어졌습니다. 이 사랑을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전도는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을 하나님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고 목회는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을 점점 더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목회입니다.
끝없이 솟아나는 샘물 같은 사랑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주님은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만이 우리에게 사랑을 가져다주고 그 사랑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만들어 줍니다. 인생에 모든 혼란은 바로 이 사랑에서 미끄러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인간은 유한하고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을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영원을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영원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고 그러면 잠시 있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용기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은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게 만들고 둘 사이의 어디에 있든지 아무렇지도 않게끔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 때에만 지성과 정서와 의지가 정돈되고 모든 것들이 질서로워집니다. 여기서 떠날 때에 우리는 혼란스럽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만 질문한 것이 아니라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질문하십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말입니다. 이렇게 부르시는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 예수를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D. 사명을 주심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나님은 실패한 자를 통해 다시 섬김을 받고 싶어 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은 실패해 버렸고 베드로라는 이름에 적합하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그 실패한 자를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셨고,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어린 양들을 먹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거저 주는 것이지만 그 사랑에는 계획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창조하신 것은 쓸모가 있으셔서 창조하셨습니다. 여러분 전에도 여러분 같은 사람은 없었고 지금도 없고 영원히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지구위에 남은 단 하나의 희귀종의 객체입니다. 하나님이 쓰실 일이 있어서 여러분을 만드셨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해서 구원받았고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사명은 무엇인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II. 적용과 결론
로마의 어느 교회에 말씀을 전하러 갔을 때 그 교회에 있는 장로님이 저를 쿼바디스 교회에 데려갔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한 골목을 보여주면서 그 골목에서 로마의 대핍박을 피하여 베드로가 황급히 제자들과 함께 도망갈 때 길을 막으시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로마로 걸어 들어오고 계시고 베드로와 일행은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때 나오는 유명한 질문이 ‘쿼바디스 도미네’ 곧 ‘주님이시여, 어디로 가십니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버리고 가는 로마를 위해 내가 죽으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거기서 깊이 회개하고, 예전에 자기가 두려움 속에서 예수를 버렸던 때를 기억하며 로마로 돌아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 교회가 하나 세워졌습니다. 그것이 쿼바디스 교회입니다.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의 끝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잘 걸어가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지만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키셔서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시니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로 돌아가십시오. 충만했던 그 처음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셔서 하나님께 사명을 받고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