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직을 앞둔 그대에게 2
녹취자: 허혜숙
구역원 시절에는 내가 좋은 사람만 만나면 되고 싫은 사람은 피하면 됐습니다. (구역원과 똑같이 행동할 수는 없겠지만) 구역장이 되어도 자신의 말을 잘 따라 오는 사람, 혹은 친근한 사람이 오면 당연히 좋아 합니다. 그런 사람과 밥을 먹으면 좋지만 어떤 사람과는 밥을 먹어도 밥알이 곤두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양이라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랑 전혀 안 맞거나 심지어는 자기를 향해 악하게 행하는 사람도 끌어안고 목양을 해야 됩니다. 교회의 평신도인 경우 ‘아무 아무개 봤지? 성격이 보통 아니야’라고 이야기를 들어도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면 ‘저 양반은 누구누구와는 어울리고 자기는 차별대우 한다’는 평가가 나온다면 이는 치명적입니다. 만약에 그런 평가가 나온다면 그분에게 일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맡기면 사람들의 마음이 찢어집니다. 그것이 중직자로서 살아가는 더 큰 어려움입니다. 목회자는 그보다 훨씬 더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말씀의 깨달음을 주실 때에 쉽게 주시지 않으십니다. 많은 자기 꺾임 속에서 아프면서 하나씩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지하실 교회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 지하실 시절 교회 교인들이 지금의 여러분들보다 믿음이 더 좋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아도 미끄러지고 나면 그 인간이 그 인간입니다. 엊그제 영적 침체에 대한 성경공부를 했는데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이야기합니다. ‘질문이 있습니다’라고 써서 냈는데 채택된 질문 중 하나가 ‘중직을 맡기 전에는 그렇게 순수하고 열심히 하던 사람이 교회에서 직분을 맡고 임직을 하고 난 다음에 이상한 사람으로 변하고, 옛날처럼 열심도 없고 비판적이기만 한데 그런 것은 왜 그렇습니까?’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직분의 타이틀은 우리 영혼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목사도 은혜가 떨어지면 (일반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고, 장로나 권사도 말할 것도 없이 모두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 신앙은 100m를 달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긴 일생을 달리는 마라톤입니다. 문제는 계속해서 우리 믿음이 올라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깊이 자기 자신이 깨어지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일로 굴곡은 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이렇게 갑니다.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을 지켜내야 한다. 이 결혼생활을 살아내야 된다.’고 생각하면 부부가 크게 싸워도 (결혼생활이 파탄에 이르는) 상태까지는 안 갑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결혼이라는 줄을 탁 놔버리면 (무모하게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게 됩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가정 안에서 벌어집니다. 은혜생활도 똑같습니다. 왕도가 없습니다. 임직을 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우러러볼만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그렇게 되고 싶을지 몰라도 저는 기대를 안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는 상관이 없이 내가 매일매일 착한 신자로서 예배 속에서 은혜를 받고, 늘 깨달음에 있어서 눈물이 있고, 그런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 자체가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감동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는 메시지가 너무 큰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이 중직자가 된다는 것에 너무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야 합니다. 항존직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 교회와 운명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안수집사를 세웠는데 건축할 때쯤 되니까 교회를 떠나고, 또 교회에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면 다른 교회로 가버립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왜 그런 마음으로 임직을 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1년 남짓밖에 안 됐는데 이사 갔다고 휙 가버리고 하는 것은 너무 부끄러운 일입니다.
오늘 말씀에 있는 것처럼 구역식구들이 근본적으로 변화가 안 되는 가장 큰 원인은 그 사람들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목표로 삼아도 그대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이는 것으로, 혹은 교제를 나누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사람의 영혼의 깊은 밑바닥을 보면서 사람들을 불러놓고 구역장이 ‘너 신앙생활 똑바로 해라, 또 뭐 해라, 뭐 해라’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깊이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용납하면서 자신 속에는 저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었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물러서지 말고 열렬히 기도하면서 그것을 치고 나가야 합니다. 자기 하나 신앙생활하기에 허덕허덕하니까 도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본질적인 사역을 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앞에 깨어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기적적으로 교수생활을 했습니다. 박사가 아니면 교수를 할 수 없었는데 석사를 하고 논문을 통과하고 정서를 하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정서를 해서 인쇄를 해서 학교에 제출해야 했습니다. 갑자기 전화가 와서 원서를 써가지고 20분 안에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저를 가르쳤던 선생님이었는데 그 동안에 연락을 하거나 하지를 않았던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교수생활이 시작이 됐습니다. 우리 집사람은 늘 그것을 만족스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열렬하게 살아보고 싶은데 교수 부인으로 살기에는 만족해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때에도 우리 집 사람은 열렬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교수들이 짜증날지 모르는데 편한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계속해서 전도사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러던 어느 날 ‘아, 이제 목회에 전념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교수직을 내려놓게 된 것입니다. (사실 교수직은) 너무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그 학교 오너가 저를 너무 좋게 봐 주어서 저한테 제안을 했습니다. 2년 동안 월급을 줄테니까 학교를 떠나서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오던지 아니면 박사 논문을 쓰던지 여기를 떠나 견문을 넓히고 오라는 환상적인 제안이었습니다. 그 때가 1994년도쯤이었는데 제 연봉이 4000만원이었습니다. 지금 4000만원은 그렇게 큰 돈이 아닌데 94년에는 4000만원이 굉장히 큰 돈이었습니다. 총신에서 시니어교수들이 받는 월급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아, 나는 이제 목회를 위해서 모두 내려놓아야 된다. 그리고 목회를 위해서 나 자신을 다 쏟아 부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학교에서 주는 생활비를 받아서 살았습니다. 나는 ‘티끌만큼도 내가 애착을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환상적인 제안에 대해서 사표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표를 내고 미국을 가려고 비자 신청을 했는데 교수라면 바자가 안 나올 이유가 하나도 없었을텐데 무직으로 분류가 되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작가도 아니었고 수입도 없었으며 지하실 교회에서 100만원 받는 것이 수입의 전부였으니 말입니다. 갑자기 닥친 현실 앞에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내려놓고 나니까 너무 허전한 것입니다. ‘아, 그것도 하나의 교만이었구나. 나는 그 어떤 것에도 애착이 없고 그런 것들은 헌 신짝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허전해하는 것을 보니 거짓 이었구나’ 생각이 됐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나니까 용돈을 쓸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우리가 많은 것을 누리고 있을 때에는 마음에 집착이 없고 애착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저 마음의 밑바닥은 사실 자신도 잘 모릅니다.
겸손도 똑같은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잘났다고 내세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은 굉장히 잘난 체 하는 사람에 비해서 겸손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람 대 사람으로서 재니까 그런 평가가 나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만할 수많은 이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에 있어서 열심인 사람이었고, 정통 히브리인이었으면, 가장 엄격한 베냐민지파의 사람이었고, 학문에 있어서는 당대 최고의 스승들에게서 배웠고, 주님을 깊이 만난 많은 경험들이 있었으니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나 설교를 듣는 장로들을 볼 때 어린아이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교만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그 그리스도 앞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정체는 끝없는 죄인이었습니다. 끝없는 죄인이고 자기는 용서받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나니까 그런 것들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에 대한 감격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됩니다.
특히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여성분들보다는 남자 분들이 더 그렇습니다. 장로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면 당연히 교회 일에 신경이 곤두서야 되고 또 마음을 많이 쏟아야 됩니다. 어느 순간에 한 사람의 신자로서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고 가슴아파하고 하는 것들이 스르르 사라지면서 교회의 일들, 그리고 자신이 교회의 어른이라고 하는 것만 남습니다. 그것은 본인을 위해서도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직분은 우리의 신앙을 위로 올려주지 않지만 은혜가 떨어지면 우리를 아래로 잡다 당기는 일은 너무나 쉽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교회 일을 다루다가 보면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도 다뤄야 하고 때로는 설득되지 않은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며 때로는 자기가 대신 욕을 먹을 때도 있고, 또 그것을 소화하기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야 하며 십자가 앞에서 깨트려지고 겸손해져야 하는데, 그런 깊은 경건생활과 말씀 앞에서의 깨어짐 같은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정말 괴상한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그런 중직자들을 많이 봤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항상 경계하면서 살아야 될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은 구역장을 해 봤으니까 잘 아실 것입니다. 구역 식구들 중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을 모두 구역장 혼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한 사람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은 후에 전개되는 인생과 주님을 못 만나고 깊이 고통하면서 전개되는 인생 사이에는 죽음과 삶처럼 무한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들을 보면 그가 불행해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고 또 거기에 놓여있는데도 행복한 삶을 사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계산해도 불행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인생을 너무 비참하게 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갈라놓는 것이 결국은 신앙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사람이 되는 것, 아무리 내가 열심히 목회를 하고 양떼를 돌본다고 할지라도 내가 그 사람들을 모두 좋은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식들을 사랑하고 돌봅니다. 그러나 결국은 우리 마음대로 잘 안 됩니다. 마지막 보험은 이 아이가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가 말을 해서는 안 듣는데 자기가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주님을 만나면 주님이 그 아이를 다루듯이 성도들도 그렇게 주님의 손에 맡겨야 됩니다. 간절히 그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세운다고 할 때 사도는 그 심정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이후로 3년 동안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라’ 여기에서 바울이 자기가 잘난 체를 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살았는데 거기에는 어떤 속임수나 과장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교만해진 이유가 다른 것도 아니고 ‘모든 겸손’이라 합니다. 모든 겸손이라고 하면 겸손의 정도가 깊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무수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마지막에 자기가 떨어지는 지점은 하나님 앞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역장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 ‘아, 나는 진짜 구역장 못해, 이것은 내 깜량이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듭니다. 목사인 저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조명을 받고 목회를 시작한지 35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단 하루도 내가 이 일을 위해 태어났고 이 일은 나한테 너무 딱 맞는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순간도 말입니다. 거기에서 결국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겸손을 가르쳐주십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맡은 영혼인데 그 영혼들이 찢겨나가고 말씀에 반기를 들고 하나님께 저항하고 심지어 자기들에게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고 그렇게까지 나갈 때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구역장도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도 아니라면 이런 생각도 들 것입니다. ‘공부로 보나 집안으로 보나 체력으로 보나 뭐로 보나 너에게 그렇게 죄인처럼 취급받을 사람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동등한 사람이지만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은 종처럼 되는 것입니다. 은혜 덜 받은 사람이 갑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은 기도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네가 죽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돌아가신 이춘표 목사님이 설교 속에 간증을 했는데 시골교회에서 목회를 하는데 장로님 한 분이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 사람 좀 변화시켜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시더랍니다. ‘얘야, 걔는 나도 못 바꿨다 네가 바뀌어라’ 결국은 거기에서 만물의 찌끼 같이 된 자신을 보면서 비참해지는 마음이 갈림길입니다. 거기에서 끝나면 하나님의 일 하다가 뒤로 미끄러지는 것이고 예수를 붙들면 거기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