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립보서 1장 9-11절)
녹취자 : 장미연
I. 들어가는 말
목회가 무엇인지를 목회를 시작하면서 즉시 알게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목사가 되고 나서 목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을 얻기까지 5년의 세월을 보냈고 아직도 명료하게 목회를 이해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 앞에 놓인 이 본문만큼 성경에서 목회가 무엇인지를 포괄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는 구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편지를 쓸 때 사도는 감옥에 갇혀 있었고 이제 그의 신학은 원숙해질 대로 원숙해졌습니다. 제일 처음 율법과 의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던 그는 이제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광대한 신학을 갖게 되었고 그럴수록 그리스도 예수는 그의 사상 가운데 빛났습니다. 그럼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목회에 관해 무엇을 이야기해 주고 있을까요? 우리는 목회의 궁극적 목적과 이를 위한 목회의 세 목표, 그리고 목회의 수단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I. 목회의 궁극적 목적 (빌1:11)
성경은 목회의 궁극적 목적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 함이라” 목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럼 도대체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히브리어에서 “카보드” 혹은 그리스어에서 “독사”(δόξα)라고 하는 이 단어는 ‘영광’을 가리키는데 신학적으로 이 영광은 크게 세 개의 범주를 갖습니다. 첫째는 ‘본체적인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외에 ‘발산적인 영광’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효과를 어느 한 특정한 장소에서 뿜어내는 것입니다. 세 번째 용례가 성경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는 용례이고 또, 오늘 본문이 그 세 번째 용례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효과적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 영광은 사람의 덕스러운 인격이나 행위, 일어나는 어떤 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우리의 인격, 삶, 사역, 하나님이 행하신 어떤 일들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며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영광입니다. 그 인정하게 되는 무리의 수가 더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목회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율법적이고 윤리적인 의로운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덧입히시는 그 의가 충만해져서 그리스도인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면 그런 관계 안에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의 소명에 가장 확실한 표징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 영광이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하게 되기를 그리워하는 갈망. 이것이 목회의 소명을 받은 중요한 표입니다.
III. 목회의 세 목표 (빌 1:10)
목회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그 목회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 목적을 위해서 어떠한 목표에 도달해야할까를 본문은 보여줍니다.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최고의 주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는 것을 가장 기쁘게 여기십니다. 그것을 오늘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극히 선한 것들을 분별하며” 라고 했습니다. 희랍어 본문에 의하면 ‘선한 것’에 해당하는 단어가 ‘디아페로’(διαφέρω)입니다.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be different)’ 혹은 ‘다른 것들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는(be worth more than)’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와 관계되는 것이며 그것을 알 때에 우리는 비로소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분별하며’라는 단어는 ‘도키마조’(δοκιμάζω)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어떤 대상을 긁어봄으로써 그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은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판단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각각 사람은 하나, 하나의 작은 판단들이 연결되어 한 사람의 인생의 여정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목회의 목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진리에 말씀으로 세워서 좋아 보이는 많은 것들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좋은지를 정확하게 판단해낼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입니다.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때 플라톤도 이런 질문을 스스로 제기했지요. “좋은 것이 아름다운 것 보다 더 좋은데 왜 사람들은 좋은 것 보다 아름다운 것에 더 빠질까?” 이 질문은 무슨 뜻이냐면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좋은 것은 치열하게 기도하고 치열하게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게 좋은 것인데 이상하게 덜 좋은 연애에 더 관심이 많잖아요. 이게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이 일치를 안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좋아 보이는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런 거에 현혹되지 않도록 진리의 말씀에 입각해서 서로 무엇이 다른지를 판별해낼 수 있는 사람들을 길러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진실하여”라고 했는데 희랍어로 ‘에일리크리네이스’(εἰλικρινής)라는 단어입니다. 이 ‘에일리크리네이스’는 희랍어에서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가루 같은 것을 넣어서 채로 막 쳐내는 것입니다. 그럼 그 구멍을 통과하는 것은 아래 떨어지고 통과하지 못하는 것은 위에 있어서 버림을 받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의미는 어떤 사물이 있을 때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수 없을 때 햇빛에 비춰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에일리크리네이스’라고 합니다.
그러면 똑같이 햇빛이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서 진위를 파악하고 채라는 것을 통해서 참된 것과 아닌 것을 걸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신학에서 ‘진실’이라고 하는 ‘배룸’이라는 단어는 ‘배리따스’ 곧 ‘진리’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기준이 없으면 진실한 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배룸’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 ‘배리따스’ 곧 진리에 마음과 삶이 합치된 상태가 ‘배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진리에 대한 뚜렷한 관념이 있고 그 진리에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 일치할 때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자신도 가장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구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고민은 자기에게로부터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사람들만이 진실하지 않은 사람을 보면서 가슴아파하고 분노하는 것이지 자신이 그런 진실한 삶을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인생은 너무 덧없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여기에서 신학대학원에 입학해서 공부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앞으로 한 7-8년만 있으면 저도 은퇴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고 온 힘을 다해 기도했고 다시 한 번 신학대학원 3년을 내게 하나님이 주셔도 그 이상은 살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람같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여러분 같을 때에 전 꿈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휙 지나갔습니다. 다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입니다. 나의 진실한 신앙의 인격입니다. 그것만이 남습니다. 이것을 목표로 목회함으로써 자신과 타인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셋째는 “허물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티가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최고급 과일 세트를 보면 크기만 클 뿐만 아니라 사면을 움직여 돌려보아도 흠집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겁니다. 그럼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거지요. ‘과연 흠집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요. 누가 감히 ‘나는 흠집이 없는 삶을 살았다. 혹은 살 수 있다.’ 라고 생각하겠어요? 사도 바울도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던 때에 자기가 죄인중의 괴수라고 생각하고 떠오르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사실과 용서해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 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실질적인 목표라기보다는 programmatic한 목표입니다. 우리는 완벽하게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려낼 수 없어요. 그러나 적어도 동그라미를 그릴 때 이 관념 속에서는 완벽한 원이 존재합니다. 그렇게 우리도 흠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지만 언제나 그 목표는 흠이 없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그렇게 자신이 존재하고 살고 또 다른 사람을 존재하고 살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IV. 목회의 본질 (빌 1:9)
그렇다면 목회의 본질은 무엇일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여.”라고 말합니다. 목회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데 목회의 본질은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기서 이야기하는 아가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어거스틴을 비롯한 교부들은 특히 사랑의 신학을 앞세웠던 어거스틴은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는 사랑의 이론을 펼칩니다. <신국론>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데 그의 논리는 이런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죄인으로서 살아갑니다. 그 삶이 충분하고 또 행복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삶이 만족스럽지도 않고 때로는 죽을 것 같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왔는데 어느 한 순간에 도저히 자기 자신을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았고 믿었습니다. 우리 역시 처음 예수를 믿을 때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행복하려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왜요? 죽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화) 제 나이 14살 2개월 되던 때 교회를 가던 주일 오전 이었습니다. 갑자기 허무함이 밀려오면서 논둑에 엎드려져서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가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가난했지만 가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난 어떻게 살아야하나? 내가 아닌 이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정말 어려서부터 내가 믿었던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그렇게 교회 오래 다녔는데 아무도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통곡을 하며 울고 나서 한참을 울고 눈물을 씻으며 어린 나이의 전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이 있든 없든 난 상관없다. 난 이제부터 무신론자로 산다.’ 그런데 그 후 약 6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매일 죽음을 꿈꿨습니다.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운데 아침마다 일어나 사는 게 무서웠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저는 21살에 주님께로 다시 부름을 받게 됩니다.
자, 말씀드리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설명에 따르면 혼자 살던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의 발로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을 ‘에로스’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주님은 믿음으로 인정해주십니다. 왜요? 인간은 스스로 행복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 사랑과는 전혀 다른 사랑을 하나님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아가페’ 사랑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무한한 사랑을 발견하고 나면 그 사랑 때문에 반응하는 내 안의 사랑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에로스 사랑의 아가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사랑입니다. 더 이상 순수할 수 없는 ‘지순의 사랑’입니다. 영어에 charity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 사랑이 자신 안에 충만해지면 그 까리따스의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아마레 데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게 하는(‘아마레 데오’) 그런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이 있는데 그 사랑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칼빈의 설명은 좀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사랑이 사람 안에서 항상 있거나 항상 가득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전도에 대해 정의하기를 ‘전도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조금 사랑하던 사람들을 불러 일으켜서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하는 것이 목회라고 보면 됩니다. 이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통해서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수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말씀 사역, 나의 모든 목양 사역을 통해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들이 사랑하게 되고 주님을 조금 사랑하던 사람들이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말론카이 말론’ 여기에서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말론카이 말론’ 그러니까 멈추지 않고 그 사랑이 계속 증진되게 만드는 것이 수단이 목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주님을 끊임없이 사랑하는 인격을 갖는 것이 목회의 가장 중요한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삼으시기 전 한 가지만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이었습니다.
V. 목회의 수단 (빌 1:9)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야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이 사랑이 계속 불타오를 수 있을까요? 그것을 오늘 성경은 “지식과 모든 총명”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단어에 매우 유의하셔야 합니다.
지식이라고 쓰여진 단어는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당연히 “기노스코”라고하는 동사에서 온 ‘그노시스’와 ‘에피’가 결합된 것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많은 이야기를 다 생략하고 “에피그노시스”의 뜻만을 말하자면 이것은 어떤 사물에 대한 전체적이고 온전한 지식입니다. 상당한 경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불길처럼 일어나기 위해서는 가르침이 아주 명료해야 됩니다. 이 목회자를 만나기전까지는 하나님과 교회, 세계, 인생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이 희미했는데 설교를 듣고 가르침을 받고 나니까 초점이 딱 맞은 사진처럼 명료해지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런 지식으로써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뭘 해야 되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그런 분명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이 지식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안 합니다. 그리고 아주 형식적입니다. 우선 절대적인 공부의 양이 이런 일을 하기에 어림도 없습니다.
사법고시에 응시하는 고시생들이 기본적으로 평균 읽어야 될 독서량이 하루에 8시간씩 3년이랍니다. 그래야 소위 리갈 마인드가 생겨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학적 마인드는 훨씬 더 많은 독서를 필요로 합니다. 목회자로서 여러분들에게 온 마음을 다해 말하는 것은 지식이 없는 목회자가 진실할 가능성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성도들에 대해서 적어도 성경과 하나님의 관한 한 절대적인 지식의 우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공부하셔야 됩니다. 마치 공부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웃지만 전 하나도 우습지 않습니다. 웃는 여러분들이 저는 우습습니다. 그래서 치열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하면서 지식의 자랑으로 공부하지 말고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치열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그리고 히브리어, 희랍어, 아람어, 라틴어 기본적으로 치열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현대어로서는 영어, 독일어, 화란어, 불어 힘닿는데 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고 하나의 언어를 넘어서면 꿈꾸지도 못했던 지식의 세계가 열립니다. 그리고 치열하게 학과에 충실하면서 열렬하게 공부해서 3학년쯤 돼서 성경을 펴면 성경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치열하게. 공부하다가 기절하셔서 응급실에 실려 가신 분은 모든 의료비를 열린 교회에서 책임지겠습니다.
두 번째 하나가 더 나오는데 “총명”입니다. 총명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아이스데시스”(αἴσθησις)라는 단어입니다. 현대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노에시스”(νόησις)라고 그렇게 기록을 했는데 “아이스데시스” 혹은 “노에시스”라는 단어는 ‘깨닫다’라는 동사에서 온 명사로 ‘인식, 이해, 판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총명이라고 번역했는데 좀 애매합니다. 이것은 판단력입니다. 이성적인 것들이 아니라 이성을 훨씬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아들임으로서 생겨나는 놀라운 판단력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이것은 이성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특별히 “파세”(πάσῃ)라는 말이 앞에 있는데, 칼빈은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모든’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범위’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깊이’에 관계된 것이라고 바르게 주석했습니다. 이 작용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온전한 믿음,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탁월한 믿음으로 획득되는 분별력과 판단력입니다. 그것들이 자신에게 충만하게 넘침으로서 온전한 신학을 할 수 있고 말씀을 가르칠 때에 그 총명에 관한 이해를 북돋움으로써 그 사랑이 점점 더 불타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하나의 그림을 그려 드림으로써 이 설교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마음속에 불을 그려 보십시오. 그럼 탈 수 있는 가연성 있는 물질에는 불이 붙습니다. 지푸라기를 놓고 불을 붙여도 불은 타오르겠지요. 그러나 몇 분이나 갈까요? 한 아름의 지푸라기를 놓고 불을 붙이면 불은 맹렬하게 타오르겠으나 몇 분이나 갈까요? 그래서 지속적으로 우리 속에 타오르기 위해서는 가연제가 필요합니다. 그 타오르는 불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계속 타오르게 하는 가연제가 두 개의 장작이 있는데 하나는 “에피그노시스”고, 또 하나는 “아이시데시스”라고 보시면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진리를 탐구하고 계시를 잘 믿는 믿음이 매일 매일 새로워질 때 성령은 이것을 사용하셔서 점점 치열하게 타오르는 불길로 만드시는 겁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신학대전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해석을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일 먼저 성령은 사랑이시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데려 가신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가장 바라는 것이 진리의 합치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진리로 인도하고 진리의 감화를 받으면 그 사랑은 사람 속에 바람직한 성향을 형성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바람직한 사랑의 성향 안에서 인간은 욕망, 거짓된 탐욕에 붙잡히지 않기 때문에 올바르고 명정한 지성으로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백퍼센트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확신할 수 있는 분명하게 성령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 데려가시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오류에 덜 빠지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시데시스”의 장작에서 매일 매일 성령으로 타오르는 이 불길이 가득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르게 판단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고 흠이 없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목회입니다. 어떻게 준비해야할까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