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의 목회와 전도설교
목회자의 직무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는 기능인으로서 그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목사가 누구인지에 대한 역사적인 정체성에 관한 청교도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목사란,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뿌리고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고 죽어간 사도들의 후예이다.” 이것이 청교도들의 일치된 목회직에 대한 정체성의 이해였습니다. 구약의 선지자이든, 신약의 사도이든 간에 모두 공통적으로 붙들었던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박 총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붙들고 거기에 충성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청교도들이 자기 자신을 소개 할 때 'the servant of the word of God'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칼빈도 이 말을 사용하였고, 존 오웬은 'the servant of Gospel of Christ',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목회자 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말씀, 구약에서 거룩한 경외의 종교가 신약에서 복음에 대한 신앙으로 구체화된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실현하는 것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혼돈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목회자들이 다양한 선교적인 요구에 직면하면서 비즈니스 같은 일들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목회자로서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정체성과 관련된 본류적인 일들이 심각하게 약화되면서 정체성에 혼란이 생기게 됩니다.
목회자의 직무는 무엇일까요? 간결하게 이야기해서 목회자의 직무는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디모데서에서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은 이중적입니다.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혜’, 'sapientia'(싸삐엔띠아)라고 하는 말은 그 당시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용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불신자들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이유이고 목회자들의 중요한 직무입니다. 두 번째는 이미 믿은 사람들을 교화(edification)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교화는 크게 둘로 이루어집니다. 사람 자체를 온전하게 하는 것과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천지창조의 목적부터 시작해서 엄청난 철학적 구도들이 들어있습니다. 핵심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목회자의 직무는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그들을 구원받게 만들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 말씀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이 된다고 할 때 마지막 표준, 목표, 기준은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시려고 했던 인간의 모습입니다. 존 오웬 같은 신학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마지막 목적이 인간을 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에는 어거스틴 사상이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 참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 그 일을 위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 신자가 되어야 참 인간이 될 수 있고, 참 인간이 되면 그 안에서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행복, 가치를 느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한 중간 과정이 필요한 데 그것이 진실한 그리스도인,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의 설교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정리를 하면,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함으로써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앙을 갖게 만들어 구원에 이르게 하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 말씀을 통해 진정으로 온전한 사람, 혹은 온전한 신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선함’이라는 의미는 도덕적으로 착한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따르면 천지창조의 목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 이야기하는 히브리어의 ‘토브’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토브’, ‘선’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선’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선함을 가지고 계십니다. 모든 인간은 ‘선’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기준과 의도에 맞춰서 살아갑니다. 이것을 가리켜 ‘선함’(bonitas)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선’ 안에서 모든 인간과 만물들이 질서를 누리면서 편안한 상태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광과 아름다움을 온전히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시는 목적입니다.
불신자에게 하는 설교가 있을 것이고, 신자에게 하는 설교가 있을 것입니다. C. H. 다드(C. H. Dodd)라는 신약학자가 『사도들의 설교와 그 계승』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에서 신약의 설교를 둘로 나눕니다. ‘케리그마’(kerygma)와 ‘디다케’(didache)입니다. ‘케리그마’는 기독교의 근본을 구성하는 중요한 진리에 대한 외침입니다. ‘십자가, 부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부활과 승천’ 등이 ‘케리그마’입니다. 이것들은 비기독교인들을 위한 공중적 선포(public proclamation)으로 나타났고, ‘디다케’는 이미 믿기로 결심하고 교회에 들어온 신자들을 위한 교화(edification)를 위해 사용되었고, 이것은 'ethic' 한 것이라고 합니다. C. H. 다드는 이러한 구분이 절대적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날의 입장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 두 가지가 분리되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두 개가 꽈배기 꼬아지듯이 계속 같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 5장 2절은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라고 합니다. 케리그마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앞 구절에는 디다케를 이야기 하는데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앞 절을 말하고 뒷 절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말한 게 아니었습니다. 케리그마와 함께 엮어져 나오는 모든 선포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에베소교회 교인들이 받고 있었습니다. 목사의 설교는 ‘오늘은 전도 설교를 해야겠고, 내일은 전도와는 상관없는 설교를 해야겠다.’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회중들이 많이 모였을 때 포커스를 어디에 두고 설교할 것인지는 불신자들이 모인 회중과 신자들이 모인 회중에서 약간 차이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설교하든지 불신자들이 거기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결정적인 증언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케리그마’와 ‘디다케’가 절대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케리그마’에 기초한 ‘디다케’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설교 방식이었습니다. 기독교의 결정적 선포가 이루어지고 그 선포를 받는 사람에게 삶과 도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그 사람의 인격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점에서 목사가 되기 위해 무엇을 갖추어야 할까요? 목사로서, 하나님의 말씀 사역자로서 부르신 소명이 무엇인가 하는 곳으로 우리들을 데리고 갑니다.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목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달라야 하겠지만 그것은 모두 2차, 3차적인 문제이고 제일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매우 특별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목회자, 혹은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소명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학문적으로 가장 훌륭하게 밝힌 학자 가운데 한 분이 김세윤 교수님입니다. 『the Origin of Paul’s Gospel 』이라는 책에서 이 문제를 상세하게 다루었습니다. 핵심을 요약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한 때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유대인에 대해서 결정적 두 가지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학적인 편견과 심리적인 편견이었습니다. 신학적인 편견은 나사렛 예수는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은 선택받은 민족이고 그 외에는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빌라도가 자의로 선택한 형벌이 아니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자 음모로 꾸민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지정한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아주 정교한 신학적 구도가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고 나도 그 영향력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종식시키는 길이 무엇일까?’를 생각할 때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종교화하는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다.”라는 신명기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consensus'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 각인되었고, 이러한 의도가 사도바울에게도 효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남에게 들었으면 잘못 들은 것이라고 여겼을 텐데 자신이 직접 뵈옵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주여, 뉘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제가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 그러면 두 가지 모순되는 'fact', 대척점이 존재합니다. 첫 번째 'fact'는 예수가 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의미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fact'입니다. 사도 바울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의심해도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직접 경험한 사실입니다. 두 개의 모순된 'fact' 속에서 사도바울은 커다란 신학적인 혼란을 경험합니다. 그 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복음에 대한 이해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지성에 벼락을 맞는 것입니다. 목사로 그 길을 걸을 수 없는 사람, 설교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소명의 심장부에는 지성에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사건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의 의미에 일생을 붙들려 사는 것이 숙명이 된 사람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두 개의 'fact'가 조화를 이룰 때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두터운 편견을 깨고 찬란한 복음의 빛을 보게 됩니다. 이것도 사실이고 저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저주 받은 것이 예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전가된 우리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부활한 사람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죽음을 보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녹, 엘리야가 그렇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에서는 모세가 부활하였다고 믿었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거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인정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로마서 1장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두 개는 양립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받은 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한다면 저주를 받은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 개의 background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니즘,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종교적으로는 주다이즘입니다. 그는 많은 학문들을 섭렵한 사람이었고 당대 지성의 물을 먹은 사람이었습니다. 혼란스러웠던 것들에 찬란한 빛이 비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가 나타나면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과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도가 한꺼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원래 천재는 신들린 사람입니다. 남이 써 놓은 것에 토를 달면서 인기를 얻은 사람들은 하청업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무슨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이 천재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없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존 오웬 목사님도 탁월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학자들은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찬사를 동원해서 에드워즈의 천재성을 찬송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vera religione, 두 권을 읽으면서 최초로 하나님이 아니라 위대한 인간의 지성의 크기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한 가지 사실을 이야기 할 때 다지평으로 지식이 들어옵니다. 문학에서도 죽음을 이야기 하고 철학에서도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미학, 생물학, 천문학에서도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모두 의미가 다릅니다. 이런 천재들에게는 지식이 다지평으로 들어오고 꿰뚫으면서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것이니까 범인들은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어떤 것들은 이해하고 나면 거기에서 어마어마한 지혜의 빛들이 압도하는 분위기로 쏟아져 내립니다.
제 나이 15살이었습니다. 만으로는 14살을 넘긴 3개월 되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교회를 가는 길에 논두렁에 엎드러져서 한없이 통곡하였습니다. 그게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추운겨울에 한없이 통곡을 한 다음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왜 그렇게 통곡하고 울었는가 하면 집이 가난하였지만 가난이나 병이나 사춘기의 고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세계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인류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이러한 애타는 물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어 다닐 때부터 이러한 고민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애끓는 고민에 대해서 교회는 아무런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의 설교에도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15살 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생각이 없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진리를 발견했다고는 하지만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 몸부림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교회 가는 길에 엎드려 통곡을 하고 눈물을 닦으며 일어섰을 때 저는 결심하였습니다.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기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교회에 나간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제가 왜 저의 경험을 이 주제와 연결시키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그 아이는 수없이 예배에 참석했지만 왜 교회는 단 한 개의 접촉점도 줄 수 없었을까요?
저는 전도 설교를 이렇게 해야 한다는 세미나 자체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는 전도에 관심도 없던 사람이, 혹은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숫자를 늘리는 성장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던 사람이, 어느 날 ‘이것도 좀 해야 되겠구나.’ 생각하고 하는 것이 전도 설교라면 너무 슬픈 일입니다. 이것은 “목사가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는가?” 하는 자기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목사는 누구인가?” 저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으로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목사는 누구인가?” “목사는 기독 선비입니다.” 선비로서 살다가 선비로서 죽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선비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선비는 청빈합니다. 권력을 손에 넣어도 그것을 수단으로 삼아 돈을 긁어모아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거나 분에 넘치는 의복을 입고 살아가는 것을 혐오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선비를 움직이게 하고 가슴을 뛰게 하고 윤리적인 결단을 내리게 하는 위대한 동기는 처음도 끝도 대의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천명과 연결되어 있고, 이 땅에 있는 인명과도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주는 명령이고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야 할 명령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선비입니다. 선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바로 대의입니다. 헤르만 바빙크의 표현에 의하면 이것은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리얼리즘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대의를 깨닫기 위해서는 전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령을 터득하고자 하는 것은 대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기술입니다. 기술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의는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 대의를 성경 속에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현재 여기 서있는 자기 실존의 천명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인간 속에 실현할 것인가 하는 하나의 웅장한 신학적 구도 안에서 전도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10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잡지사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제 얼굴이 TV나 언론에 소개되는 것을 싫어해서 늘 거절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출판사가 기독교 출판사가 아니었습니다. 일반 잡지사가 왜 기독교 목사를 취재하려고 하는지 물었습니다. 특집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돌아가면서 싣는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이 종교이고, 종교에서도 가톨릭, 불교에 이어서 개신교 순서가 왔는데 편집회의에서 저를 선정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자 두 사람이 왔습니다. 그들은 불신자였습니다. 질문을 하고 제가 답변을 하였습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인간으로 태어난 의미가 무엇입니까?” 15살 때 고민을 했으니 할 이야기는 있을 것 아닙니까? 인터뷰 다 마치고 나서 기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제가 가톨릭 신부님들도 인터뷰를 하고 스님도 인터뷰하고 개신교 목사님들도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스님 같으십니다.” 그당시에 저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간파했습니다. 이 사람들 눈에 가톨릭 신부는 사회 봉사자들 같았고, 불교 지도자들은 철학가 같았고, 개신교 목사는 비즈니스맨 같았다는 것입니다. 비애가 밀려왔습니다.
다시 15살 때 이야기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렇게 통곡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 없이 살아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신 없이 살기 위해 고민을 하였습니다. 이 고민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 문학작품이었습니다. 문학작품을 보니까 외롭지 않았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나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없는데 문학의 세계 속에는 많았습니다. 거기에서 위로를 얻었습니다. 여러 해를 읽었지만 인생 사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문학은 물음표로 시작해서 물음표로 끝날 뿐 우리에게 답을 던져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사상과 철학에 관하여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고등학교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한참 유행했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를 읽었습니다. 니체부터 시작해서 카프카와 같은 실존주의 문학가부터 러셀 등 수없이 읽었습니다. 뭔지도 모르고 몰두해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행복했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습니다. 니체의 마지막을 보면서 ‘그러면 무엇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서 전도하는 사람 없이 스스로 귀의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한 가지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쓰레기 같은 수많은 사상들이 오늘날 설교를 하고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이렇게 큰 도움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후에 인문학을 공부하는데 있어서도 그 때의 토대가 굉장히 유용했다는 것은 말씀드립니다.
결국 대의라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나옵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을 깊이 공부해야 된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문제는 목회자로서 설교할 때 그 설교를 들어야 할 사람은 성경에 대해 ‘아멘’ 하고 눈물을 흘리며 듣는 성도들만이 아닙니다. 제가 이번에 부산을 내려갔는데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젊은 목사님들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15살의 제가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을 하는데 목회자들이 답변을 못 해줍니다. 왜 그럴까요? 한 인간으로서의 치열한 고민이 없었습니다. 저는 수없이 자살을 생각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너무 무서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는 게 무섭다고 하는데 어린 저는 사는 게 무서웠습니다. 오늘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이름 없는 풀포기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릅니다. 베드포드 강가에 있는 물오리를 부러워했던 회심 전의 존 번연처럼 말입니다. 대답을 듣지 못하고 답답하니까 김용옥 씨나 강신주 씨를 비롯해서 인기 있는 철학자 특강에서 펑펑 눈물을 흘리면서 회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회심이 아니라 동양철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회귀입니다. 그리고는 치열하게 공부하면서 토대를 쌓습니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주인으로 삼은 학문이자 사고의 체계입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기독교와 양립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자료가 있습니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Pico Della Mirandola)라는 이탈리아의 철학자가 있는데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유명한 작품을 하나 썼습니다. 26살 때 세계의 모든 철학을 통달하고 세계의 철학자들을 불러서 대토론을 벌이자고 제시합니다. 그가 남긴 역사적으로 유명한 자료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연설”(De hominis degnitate)라는 길지 않은 논문입니다. 여기에는 르네상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관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한없이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어서 자신의 자유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살아갈 수 있는 위대한 존엄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우리가 미란돌라의 사상에 대하여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르네상스의 정신을 집약했다는 이론에는 여지가 없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인간에 관한 두 가지 의미가 내려옵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불결한 존재이기 때문에 신을 향하여 끊임없이 정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실존으로서 인간이 어떻게 타인의 행복에 이바지하며 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선비 사상으로 넘어오면 유교의 중요한 가치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원리를 불러옵니다. ‘수기’(修己)는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성찰과 지식으로 깎고 다듬어서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치인’(治人)은 백성을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비의 이상입니다. 여기에서 ‘치’(治)라는 단어는 권력으로 압박을 하고 무력으로 사람들을 구겨 넣어서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히브리어의 ‘라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왕이 나라를 통치할 때 왕에게는 이상이 있습니다. 국가는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이상이 있습니다. 이상적인 질서에 대한 인식은 한 인간의 고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에 이야기했듯이 천명과 인명을 이해하고 대의를 발견하는 'integrity of the view', 세계관과 인생관에 대한 통합성에 대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런 말을 합니다. “모든 지식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전에는 하나님 안에 있는 사유 속에 ‘이데아’로 존재합니다. 그 관념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표출되었을 때 하나님의 이데아와 창조의 결과가 일치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토브’에 대한 이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치인’을 하려면 ‘수기’가 된 인간이어야 하는데 ‘수기’의 과정은 천명과 인명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비록 선비가 낙향하여 똥을 퍼서 오이 몇 개를 가꾸고 닭 몇 마리를 기르는 사람이라도 그의 마음 속에 우주의 기원이 어떻게 시작 되었고, 인간이 사는 사회는 어떠해야 하며, 왕과 백성과 신하와 정치와 국가의 이상이 무엇인지, 그것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생각이 있다면 그는 이상이 있는 사람입니다. 통합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이상이 없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상 안에서 대의를 깨닫고 철저하게 그 대의에 복종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소인과 군자의 차이입니다.
‘사도’라는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세자가 영조의 눈에 차지 않습니다. 세자를 잘라버릴 궁리를 합니다. 어느 날 왕이 “오늘부터 이 아들은 세자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도승지를 불러서 주청을 올리라고 합니다. “세자는 가망이 없습니다. 폐서인 하십시오.”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날, 그 명령을 받은 신하가 어떻게 합니까? “왕이여, 그러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편지를 쓰고 목매달아 죽습니다. 왕이 그 다음 사람에게 명합니다. 그 사람도 똑같은 유서를 써놓고 죽습니다. “안 되겠구나. 네가 해라.” 그 사람도 목매달아 죽습니다. 그것이 선비의 길입니다. 타협만 하면 왕의 총애를 받고 부귀영화가 기다리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일까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상과 세계관 속에서 천명과 인명을 깨달은 것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대의가 아니라는 판단이 서 있는 것입니다. 그 때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선비가 되는 순간 엄숙하게 죽음에 대한 결단을 합니다. 언제든지 내가 깨닫고 붙들고 있는 대의에 위해 죽을 수 있다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왕과 끝까지 맞지 않을 때 대의를 굽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유배를 보냅니다. 유배된 곳에서 공부하면서 인민들이 올바른 자리로 돌아가도록 글을 남깁니다. 그것이 유배지에서의 삶입니다. 끝까지 해도 안 됩니다. 그러면 사약을 내립니다. 그러면 사약을 받을 때 “이 자식은 왕도 아니야.” 하면서 사약 사발을 발길로 차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정중하게 신하의 예의를 표하고 흰옷을 입고 약사발을 먹고 죽습니다. 소반 위에 펴진 하얀 보자기 위에 펼쳐진 붉은 피가 그 사람은 죽어도 대의를 말합니다. “왕이여, 그것은 옳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대의를 따라 죽음으로 당신에게 말합니다.” 사람은 사라져도 피는 남아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비의 삶입니다.
그러면 목사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성경의 사도들은 지금 이야기한 것들을 극복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주의, 유대주의,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박학다식한 사람이었지만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서 인류의 지식을 통합하여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7세기 개혁신학자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Petrus van Mastricht)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doctrina est viviendi Deo per Christum),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학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결국 한 설교자의 전도를 향한 외침은 자신이 터득한 도에 대한 외침입니다. 전도의 요령이 아니라 자기가 깨달은 도에 대한 각성과 철학을 외치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 대의를 따라 살 수밖에 없고 왜 이 도를 따라 외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도를 따라 슬퍼하고 도를 따라 기뻐하고 도를 따라 죽으면서 자신의 삶의 흔적을 가지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인생을 사는 길이라는 것을 외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다스려서 제자리에 놓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도 부르고 ‘수기안인’(修己安人)이라고도 부릅니다. 가장 질서로운 자리에 인간을 배열할 때 그 안에서 인간은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 행복이 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지혜의 길을 보이는 사람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끊임없는 자기 성숙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전도 설교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왜 여기에 서있는지에 대한 중후한 신앙 고백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