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삶으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86:11)
녹취자: 이경순
우선 3년이 넘는 세월 동안 힘든 신학공부를 마치게 된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후원한 교회와 여러분들의 가족에게도 하나님의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시편의 이 말씀은 아마 졸업하는 여러분들에게 큰 도전이 될 것입니다. 시인은 두 가지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주의 도를 자기에게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이 시의 저자는 다윗이었습니다. 그는 구약에서 가장 탁월한 지성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말한 바와 같이 구약에서 이 사람보다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탁월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였습니다. 그리고 시인이기도 하였습니다. 시편의 대부분이 그 사람에 의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율법만이 아니었습니다. 우주와 자연과 인간의 역사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오늘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입니다. 이 도는 길입니다. 히브리말로 ‘데레크’라고 하는데 이것은 길입니다. 이 단어는 종종 인생의 길을 은유적으로 의미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인생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인생 너머에 있는 진리를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즉 바람직한 인생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가지고 계신 도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정확하게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할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 도를 가르치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이것은 결국 시편 119편 6절에 나와 있는 여호와여 나의 눈을 열어 기이한 것을 보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그 기이한 일을 통해서 주의 도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오늘 졸업하는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은 싫든지 좋든지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공부했습니다. 외적인 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나 이제 어쩝니까? 이제 더 이상 학교에 와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숙제를 해야 할 의무도 업습니다. 더군다나 여러분들에게 시험을 볼 수 있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목회자의 일생은 나무와 같습니다. 자라지 않는 나무들은 죽거나 혹은 분재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길도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나무를 생각해보십시오. 아주 작은 나무일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무 새도 거기 날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가 거목이 되어 보십시오. 잎과 가지와 줄기가 무성해 집니다. 새들이 깃들게 됩니다. 거기 벌레들이 살기 때문입니다. 풍부한 풀들과 식물이 돋아납니다. 그리고 나뭇잎은 떨어집니다. 이것들은 땅을 비옥하게 만듭니다. 거기에 사는 모든 생물들이 그 큰 나무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는 계속 성장하지 않으면 살아있을 수 없습니다. 지구상에 가장 오래된 나무가 일본에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견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나무가 7천5백 년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정말 긴 세월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를 두 번 더 뒤로 물러나도 모자라는 시기입니다. 세 번쯤 가야됩니다. 얼마나 긴 세월일까요? 어떻게 그 나무가 아직 살아있었을까요? 계속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는 목회자는 곧 죽습니다. 설교가 죽습니다. 기도가 죽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일 년만 한번 살아보십시오. 여러분들은 거의 책을 읽지 않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학창시절에 공부했던 것 갖고는 평생 목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은 이제 학업에서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이 목회학 석사학위는 이런 의미입니다. 이제 여러분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준비를 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올바른 신학인지 감을 잡았습니다. 어떤 책이 독초인지 혹은 은혜로운 꼴(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책을 끊임없이 읽으며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5월에 중국 가까운 모처에서 우리 CRTS 졸업생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60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였습니다. 정말 우리는 오래간만에 만났습니다. 그 많은 반가운 학생들을 만나서 제일 먼저 한 이야기가 이 이야기였습니다. 아직도 공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 노동하는 것 같은 목회를 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몸으로 때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진리대로 살아서 진리대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보여주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대부분의 졸업생들이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위로하기 전에 먼저 말했습니다.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공부하는 목회자만이 계속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제 이 졸업과 함께 어떻게 하시렵니까? 지난번 졸업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을 때 이십 여명의 학생들이 THM 원서를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 그중에 오늘 입학식을 하신 우리 졸업생들이 있습니다. 그럼 한번 우리 CRTS 졸업생으로 THM 들어오신 분 한번 일어나 보세요. 공부를 쉬고 있던 분들이 이렇게 많이 오셨습니다. 박수로 환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어떠하시렵니까? 여기서 가르쳐준 것은 목회자로서 가장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깊이 만나야 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을 공부해야합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에 공부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모든 목회자가 진실한 목회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없는 목회자가 진실하게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치열하게 공부하셔야 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진리에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라기보다는 기도하는 시인의 결심이었습니다.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라고 말입니다. 진리에 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행하든지 하나님의 확고한 뜻에 입각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결심을 하나님 앞에 말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이 진리를 가르쳐주시면 그대로 살기를 힘쓰겠다는 뜻입니다. 물론 설교를 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특별히 훈련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설교가 분명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감동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아주 명료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정확한 지식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학문적으로 좀 부족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살았던 사람은 그와 관련된 진리를 설교할 때 어떤 분명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감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가 본문이라면 설교자의 삶은 각주입니다. 저에게 구약을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학생들이 논문을 제출하면 본문을 읽으시기 전에 각주를 먼저 살펴보셨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본문을 아직 다 읽지 않아도 각주를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이 논문을 정성껏 썼는지 알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설교와 설교자의 삶과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비록 설교가 조금 부족했다 할지라도 그 설교가 무엇인지를 삶으로 설명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처음에는 못 알아들어도 결국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본문을 잘 썼다할지라도 각주가 없다면 상상 속에서 그려내거나 혹은 남의 글을 베껴 서 쓴 것입니다. 어찌 감동을 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 선생님한테 배웠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책을 받으면 제일 먼저 각주를 봅니다. 그리고 뒤에 붙어있는 참고문헌을 봅니다.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이 책을 대충 썼는지 아주 철저한 연구로 썼는지를 말입니다. 수십 년 전에 이미 지나간 책들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면 그는 노력을 덜 한 것입니다.
이것을(하나님의 뜻, 진리에 따라 살아내는 것이 중요함을) 시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진리를 가르쳐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가르쳐주시면 그 진리를 따라 행하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가장 잘 알 수 있을까요? 다만 진리를 참고해보고자 하는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은 진리를 가르쳐주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온 삶으로 살아내려고 했던 사람 그 사람은 진리에 대한 이해가 점점 깊어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짧은 연설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을 때 그는 그전까지 긴 시간을 가혹하리만치 산 사람입니다. 그 진리가 그의 인격이 되었습니다. 그의 뼛속 깊이 스며든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진리를 말할 때는 더듬지 않습니다. 그가 진리를 말할 때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지만 자신이 그 진리를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진리대로 사는 사람의 고난과 진리를 거슬리며 사는 사람의 무도(無道)함을 잘 압니다. 그것을 모두 느끼며 설명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을 설득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사람의 이성을 능가하는 진리가 있다는 것을 선포하기도 합니다. 설득과 선포의 두 요소로 사람들을 진리를 향하여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그 전하는 말씀대로 살면 어떤 사람이 되는 지를 보여주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리의 말씀을 배울 뿐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내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때에 멀게만 느껴졌던 진리는(가) 여러분 자신의 마음속에 있을 것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이 모든 것을 아울러 하나님 앞에 한 가지 소원을 아룁니다.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히브리 성경에 ‘쉐른’이라고 되어 있는 이 이름이라는 단어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당신은 하늘에 계시지만 이 세상에는 자기의 이름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보이는 하나님의 명예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것은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과 그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은 완전히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으며 기뻐합니다. 여러분 모두 여러분들의 친구의 이름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떠오를 것입니다. 여러분과 좋은 관계에 있었던 사람은 사랑스러운 느낌을 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 이름을 들을 때 그런 가슴 아픈 정동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시인이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지식을 증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그 지식 때문에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의 길로 행하겠나이다”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진리를 행하는 생활이 없다면 하나님을 경외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알기보다는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입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쁨이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졸업을 하고 목회를 할 것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분도 이미 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정대로라면 여러분들은 2년 뒤에 목사님이 되실 것입니다. 또 전도사님들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목회 하겠죠. 이 세상 어디선가 주님을 섬기며 살겠죠? 그리고 어떻게 될까요? 늙겠죠. (그러면) 더 이상 교회가 여러분들이 필요하지 않은 때가 오겠죠?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죽겠죠. 이런 시간들이 여러분에게는 너무너무 긴 시간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이 볼 때에는 모두 한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생의 덧없음을 아십시오. 제가 여러분처럼 이렇게 석사가운을 쓰고 졸업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이었습니다. 엊그제 같습니다. 그런데 벌써 그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살아 있는 날 동안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모두 지나가는 것입니다. 목회도 지나가고 그리고 목사도 지나갑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이 있다할지라도 일시적인 인연일 뿐입니다. 모두 헤어질 사람들입니다. 천국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없습니다. 영원한 것은 그럼 무엇일까요?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영원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입니다. 그중에 제일이 사랑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여러분들을 이 신학교에 오게 했습니까? 많은 시련을 이기고 이 공부를 3-4년 동안에 마치게 한 그 힘은 어디서 왔습니까? 누가 여러분들을 밀어서 여기에 보냈습니까? 아무도 그런 사람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강권했기 때문에 여기에 왔습니다. 학교 다니는 동안 가난과 핍박과 시련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겠습니까? 저도 여러분 같은 신학교 시절에 대부분을 눈물로 보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참았습니까? 왜 견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목회의 길을 가기로 한 것입니다.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아무 권력이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 복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목회자가 왕보다 높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목회자는 언제나 밟아버릴 수 있는 잡초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장 천한 사람입니다. 가장 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도들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지만 목회자는 죽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삶입니다. 왜 이것을 견뎌야 할까요?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닙니다. 비전이 있기 때문에? 아닙니다. 사명감이 있기 때문에?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한 국면을 보여줄 뿐입니다. 뿌리는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주님을 경외하며 살게 해달라고 마지막으로 간구하였습니다. 간절히 빌었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는 왕이 되든지 노예가 되든지 위대한 철학자가 되든지 그냥 평범한 시골농부가 되든지 목동이 되든지 그에게는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목동일 때도 그랬고 장군일 때도 그러했고 임금이 된 이후에도 그랬습니다. 잠시 흔들렸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거기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리로 말입니다.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렇게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고 싶었습니까? 그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간과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만이 영원히 높으신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나라의 백성들이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었습니다. 모든 육체의 영광은 시드는 풀의 꽃과 같았습니다. 영원히 빛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뿐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누구입니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게 되면 먹지 않아도 배부릅니다. 왜? 그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왜일까요?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목회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졸업과 함께 더 치열한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시련을 만날 것입니다. 박해도 당할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멸시도 당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욕도 먹겠죠? 어쩌면 지독하게 마음고생을 하며 여러분들의 육체가 병드는 것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모든 것을 지탱하게 해주는 힘이 어디서 나올까요? 일에 대한 헌신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때문에 너무 애타하지 마십시오. 염려를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두 눈을 부릅뜨십시오.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외치십시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오라고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십시오. 그리고 용기를 가지십시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서 끊어놓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면서 행복하셨습니다. 자신이 죽어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소원도 이래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목회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경외자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 위대한 경외심은 어디로부터 나옵니까?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들의 마음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경외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그들에게 경외하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려 주기위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모든 삶은 양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되고 신학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그냥 교회를 평범하게 평신도로 섬기고 결혼하고 또 결혼 안하고 이 모든 것들은 삶의 양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그 양상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실하게 주님을 경외하므로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졸업생 여러분들의 앞날에 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재학생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