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16._피택임직자교육 12 (B조 스터디 나눔)
피택임직자교육 12 (B조 스터디 나눔)
녹취자: 백지영
제가 이 말씀에 가슴이 찢어졌던 적이 2005년도였습니다. 회심한 이후로 늘 눈물이 있는 삶을 살아왔지만, 그때 여러 가지 많은 환경과 모든 것들이 있을 그때에 사실은 이 성경구절을 대하게 됐는데, 여기 ‘눈물’이라고 되어 있는 게 그리스어에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눈물 그 자체는 우리가 단수로 잘 쓰지 않지만, 어쨌든지 간에 주석학적으로 보면 사도바울의 연속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모든 눈물과 겸손이며'라고 이야기를 하는, 겸손은 아니고 비참함이지요.
왜 그렇게 가슴이 찢어졌느냐 하면, 사실 사도 바울이 뭐가 부족합니까? 자기는 말을 잘 못한다고 했지만 그가 쓴 글을 보면 우리는 그의 말이 그냥 하는 말이지 진짜 그랬을까 하고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의 설교나 모든 것을 볼 때.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이후로 가장 이후의 기독교 역사에서 성도로서의 최고의 모델도 사도바울이고, 신학자로서의 최고의 모델도 사도바울이고, 선교사로서의 최고의 모델도 사도바울이고,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최고의 모델도 사도바울이고, 어쨌든 이것은 불신자들조차도 기독교가 기독교로 존재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공을 세운 사람은 사도바울이다 그렇게 이야기할 정도로 신약성경의 절반을 쓰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이렇게 ‘눈물과 겸손’을 이야기할 때, 눈물에 담긴 것은 어쨌든 고통이지 않습니까? 그게 하나님을 위한 고통이든 영혼을 위한 고통이든 나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든, 어쨌든 고통입니다. 기쁨의 눈물도 흘리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게 그 기쁨의 눈물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상으로. 그 고통과, 그 다음에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겸비함입니다. 자기 자신이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는 발끝도, 신학자로서나 목회자로서나 성도로서나 저술가로서나 그 사람의 발가락도 좇아갈 수 없는 사람에 불과한데, 이 위대한 사람이 눈물과 비참함을 느꼈다고 하는 그것이 아주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어떤 의미냐 하면, 결국 이것은 재능이 있고 없고, 능력이 있고 없고의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저는 목사가 된 이후로 ‘아, 이거 그만두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솔직히. 너무 강력한 소명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가끔 보면 이런 구역장이나 이렇게 영혼을 섬기다가, 심지어 교역자들도 그렇습니다. 교역자들도 제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도 교역을 하다가 그만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고백하는 게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부족하고 이렇게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되고 내 마음이 이것밖에 안됐는데 내가 감히 어떻게 주의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이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입니다. 그것을 그만두라는 게 아니라, 자기 소명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고 그러니까 모자라니까 그만두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그렇게 비참해지라는 것입니다. 그럼 아까 누가 발표하신 것처럼 모자라는 것이 은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우리가 볼 때는 태산같이 높은, 모든 방면에, 사실 사람이 한 가지를 잘할 수는 있지만 어떻게 그렇게 모든 것을 그렇게 다 잘할 수가 있겠습니까? 거기에다가 인간적으로도 굉장히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파스칼 같은 사람은 인간적으로는 따뜻한, 가난한 자하고 마지막 일생을 같이하기는 하는데 그렇게 따뜻하고 친근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한 비근한 예가 누이가 자기 자식을 그렇게 예뻐하는 것을 보면서 아주 버럭 화를 내고 그러는 어떤 부적응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도 너무 따뜻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마지막 장에 개인이름만 열여섯 개가 나옵니다. 그중에서 하나 설교했지 않습니까? ‘버시를 아십니까?’ 그렇게 이름 하나하나를 거론할 정도로 이 속에서 개인의 정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교인들에게 배척을 받은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적하는 자가 없이 마지막에 산 생애가 없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죽을 때까지. 결국은 뭐냐 하면, 그 눈물과 겸손은 상당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진짜 부족한 사람이 눈물을 많이 흘리고 진짜 못난 사람이 비천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사람이 많은 눈물을 흘리고 비참하다는 걸 느끼는데, 그 사람을 위대하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를 위대하게 볼 때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비참하게 느끼는 사람은 그게 모두 공허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도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자기를 사람들이 너무 칭찬하면 막 소리를 지르고 싶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너희들이 나를 몰라서 그렇지 나는 너희가 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끼면서 저는 갈가리 찢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게 그 통증이 아마 한 2년은 갔던 것 같습니다.
선교사들이 모였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진짜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제가 은혜를 제일 많이 받았지요. 그 선교사 중 한 사람이 우리 교역자하고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들려오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아니 김남준 목사님도 목회하시면서 뭔가 괴로우신 게 있나보지요?” 그러니까 우리 도집사, 우리 도현정실장인데, 언니한테 “언니, 우리 목사님 설교 좀 들어봐라.” 그러니까 언니가 그러더랍니다. “야, 너네 목사님이야 엘리트 길로만 걸어온 목사님이 우리의 이 고달픈 현실에 대해서 얼마나 아시겠니?” 그러더니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 CBS 새롭게 하소서를 듣고 나더니 “야, 너네 목사님도 진짜 고생 엄청 하셨구나."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런 게. 그러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아이고 김남준목사님이야 그렇게 가슴 아픈 일이 뭐가 있을까?" 하는데, 오죽했으면 제가 그랬겠습니까? “저녁 때 잠이 들면 아침에는 세상에서 눈을 뜨지 않고 천국에서 눈을 떴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 2005년도에 아주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그때 제 마음을 이렇게 불로 짖듯이 확 지지면서 지나갔던 그 하나의 진리가 뭐냐 하면 이것이었습니다. “아, 이 눈물과 비참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뭔가 모자라서 느끼는 게 아니구나.” 그러니까 사람과 비교할 때 많이 갖추어진 사람은 눈물을 덜 흘리고 덜 비참하게 느껴지고, 그리고 많이 못 갖추어진 사람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은 거룩한 사람이 “불결하다.”라고 고백하면서 가슴아파하고, 정의롭게 사는 사람이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제가 기도를 이것밖에 못합니다.”라고 가슴 아파하고, 많이 섬기는 사람이 “제가 아무것도 교회를 위해서 하는 게 없습니다.” 그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왜냐하면, 위로는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춰보는 것이고, 가깝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완전함에 대한 지식이 그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게 첫 번째 내용이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한 교회를 부흥시키시고 구역에 놀라운 부흥을 주시고 교구에 놀라운 부흥을 주실 때는, 하나님이 눈물을 병에 담으시는 것만큼 주시는 것입니다. 그 눈물이 차기 전까지는 절대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그 간증을 이번에도 절실하게 경험했는데, 제가 오래간만에 회심집회에 내려갔지 않습니까? 제가 일부러 하기 싫어서 안한 게 아니라 한번 스스로들 좀 해 봐라 스스로들 그러고 했는데, 강사가 떡하니 월요일 날 코로나 걸려서 못 온다고 하니까 그래서 이제 할 수 없이 가게 됐습니다. 부모들이 정말 열렬히 기도했습니다. 몇 년 내로 중고등부 회심집회에서 부모들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수십 명이 회심하지 않습니까? 그게 정확합니다.
모니카가 그렇게 어거스틴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 좀 한번 만나달라고 그 목회자에게 사정을 합니다. 그런데 거절하지요. 지금 제멋에 들떠서 사는 그 녀석이 내가 한마디 한다고 돌아오겠느냐 그러면서 거절합니다. 사랑이 없어서라기보다도 그분은 그분대로 평가를 또 했겠지요. 그런데 사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어서서 하는 말이 그 유명한 말입니다. “설마 눈물의 자식이 망하기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 그게 모니카가 한 말이 아니라 목회자가 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 위해서도 눈물 흘린 것만큼 결국은 아이들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렇게 간절하게 눈물 흘리고 기도를 하니까, 이 녀석이 이번에 열린 신문에도 간증을 실었더라고 그 고등부 애가. 이틀 동안 회심집회 갔다고 거짓말치고 딴 짓하고 까불고 다닌 것입니다. 마지막 날 어거지로 끌려나와 가지고 회심한 이야기를 거기다가 쓴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사실은 임직하기 전에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게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나는 그 설교를 진짜 온 힘을 다해서 했고, 그리고 만약에 내가 그 깨달음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진짜 생애적인 깨달음이었습니다. 사실은 나는 교인들이 50%도 이해를 못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때에 그것과 이 사도행전 20장의 이것이 이렇게 만나면서 결국은 사도 바울이 흘린 이 눈물이 교회와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 비참함이 교회와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자기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 때문에 그 눈물을 흘릴 수 있었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상황을 참아낼 수 있었고, 그렇게 비참하게 시궁창에 구르는 것 같은 그러한 겸비함을 느끼면서도 하나님 앞에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던 이유가 바로, 교회를 붙들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내가 그 손에 붙잡혀 있다고 하는 그것입니다.
지금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제 나이밖에 안 됐는데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오십 좀 넘어서 돌아가셨는데, 여러분들은 기억할지 모르지만 ‘십대들의 쪽지’라는 그것을 발간한 김형모 전도사, 나중에 목사가 됐었습니다.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열정이. 그래서 청소년들이 특히 오갈 데도 없었던 그때에 그 쪽지를 마치 샘터 비슷하게 그렇게 만들었는데, 각계에서 후원도 많이 해서 대단한 사람들이 거기에 기꺼이 기부를 해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전국에 있는 학교에 수십만 부를 인쇄해서 매달 뿌리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분이 한번 나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서, 개척교회 때 와가지고 간증을 하고 하는데 너무 놀라운 게, 자기는 이 사역이 너무 바쁘니까 사실 그 교회에 의해서 사실 교역자사역을 할 시간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하도 중고등부가 안 되니까 가서 장로들이 무릎을 꿇다시피 하면서 사정하고, 절대로 시간 안 빼앗을 테니까 주일날 와서 설교해 주고 주일날만 애들보고 어떻게 신앙생활 하라고 가르쳐주라고, 그러면 일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다고 그랬다고 합니다. 무슨 회의고 뭐고 다 참석할 필요 없다고.
그래서 기도하다가 이분이 갔습니다. 갔는데 하여튼 엄청 고생을 했답니다. 하여튼 지겹게 말을 안 듣는 놈이 있더랍니다. 안 듣는 정도가 아니라 막 대들고 교회의 질서를 다 개판으로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대기를 한 대 날렸답니다. 지금 같았으면 아마 고소한다고 그러고 난리 났을 것인데, 옛날에는 부모들도 교회 다니니까 네가 잘못했으니까 맞았겠지 이 정도로 끝났는데, 이 녀석은 아주 얼굴도 다시 안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내가 전국에 있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는 사람인데 이 녀석 하나를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무슨 체면이 서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열 번을 손 편지를 썼답니다. 그리고 그 열 번을 손 편지를 쓰는 동안에 그 아이를 위해서 전심으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론은 뭐냐 하면, 그 녀석이 마지막에 심방 갔을 때 와르르 무너지면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성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는 뭐냐 하면,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강퍅함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가식으로라도 말을 합니다. 원래 그렇게 마음 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좀처럼 마음을 안 엽니다. 좀처럼 마음을 안 여는데 한번 열면 잘 닫지 않습니다. 그게 남자 성도하고 여자 성도하고 다른 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뭐냐 하면,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문자를 해도 씹고 전화를 해도 안 받고 이러는 사람이 두 종류입니다. 그중에서 30% 정도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으로 이미 관계를 완전히 끊은 사람입니다. 나머지 60~70%는 뭐냐 하면, 자기를 구역의 한 사람, 와서 구역예배를 채워주는 한 숫자로 보지 말라는 사인입니다.
사람들이, 여기도 다 40대 50대이지만 다 외롭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다가가면 반드시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구역장이 된 우리 속에 사람에게 연락을 하고 전화를 하고 심지어는 심방을 가고 하는 그것에 그 사람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것은 두 번째고, 구역의 식구를 채워야 되겠다는 게 앞에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상대방은 벌써 느끼는 것입니다. 이게 진정으로 ‘나’라는 인간 이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가엾이 여겨서 접근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말하자면 자기 모임에 나오라고 찾아오는 것인지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예수사랑은 이것을 앞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나오든지 안 나오든지, 그래서 우리 교회 보면 교회도 나오지 않는데 일 년 이상 매주일 만나서 나중에 예수를 믿게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농담처럼 들어보면 우리 교회에 구역장을 안 시켜줘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던 구역장을 이제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를 해 가지고 시험에 든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영혼에 대한 눈물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뭐냐 하면, 식구들이 열다섯 명이 모두 모여서 구역예배를 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마음으로 기도할 때는 눈물은 안 나옵니다. 기도는 열심히 할 수 있지만 눈물은 안 나옵니다. 그런데 백승태라는 사람 하나를 놓고, 구역원의 한 사람이고 열린교회 한 지체고 내가 아직 출석부에 가지고 있는 구역원이고 그런 것 말고, 인간 그 사람이 너무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 때에만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역예배 나오고 안 나오고, 나와 생각이 같고 다르고 하는 것들은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 눈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를 위해서 흘리셨던 눈물이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리셨던 그 마지막 눈물입니다.
그래서 놀라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구역의 간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부흥하고 있는 구역들, 권사님들이나 이런 분들 보면 아까 말씀하셨는데 교역자보다도 낫겠다 그렇게 느껴지고, 제가 아는 후배 목사님 교회는 2천 명 정도 모이는 교회인데 교역자가 열다섯 명밖에 없습니다. 아니 그것 가지고 2천 명을 어떻게 하냐고 그랬더니, 필요가 없고 와봐야 짐만 된답니다. 왜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심방을 안 하고, 그렇게 등을 떠밀어서 심방을 보내면 하여튼 시험에 들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임목사 허락을 안 받으면 심방을 못 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심방을, 2천 명이나 되는데 담임목사가 심방을 다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권사님들을 뽑아가지고 심방을 시켰답니다. 그런데 자기네는 너무 재미있게 목회를 한다고 그럽니다. 목회자라고 왔는데 심방을 안 하는데 이건 또 무슨 목회자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그런데 결국은 뭐냐 하면, 영혼을 향한 눈물이 있는 구역장들 중에서 존경하는 분들 만나 보십시오. 그러면 그분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뭐냐 하면, 구역을 부흥시켜야 되겠다는 그런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모든 영혼들을 다 불쌍히 여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사람이 불쌍하지요. 그러니까 그 구역식구 하나하나를 영혼으로 보는 것입니다. 거기에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속에서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은 보면서, 때로는 그 정도가 아니라 대들면서 자기의 없는 것을 만들어내고, 자기를 비난하고, 뒤에 가서 욕을 하고, 막 그러는 모함이나 이런 것들을 받을 때, 세상 같았으면 벌써 멱살잡이하고 싸우든지, 아구창을 날려버리든지, 돌려차기를 해 가지고 턱뼈를 날려버리지요. 나중에 경찰서를 가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하고 말지요. 그런데 그 혈기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을 다 죽이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되는 그 고통을 눈물로 승화시킬 때, 거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 죄죽임의 교리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이 아니고는 죄가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누를 수는 있지만 죽일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죄를 좋아하는 자신의 죽음을 함께 경험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아마 가장 거룩하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보면 모세를 꼽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윗을 꼽을 수 있는데, 그 사람이나 사도 바울이나 심성에 똑같이, 거룩한 사람들이 자기의 불결한 것을 한탄했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들이 자신이 교만하다고 자복을 했고, 그런 것을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최고의 전범이 사도 바울,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이었지만 구약에서는 다윗이었습니다.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그 제사, 그것입니다.
그래서 구역장을 하다가 “도저히 나는 아닌 것 같다.”라고 반성을 하면서 그것을 그만두는 사람은, 나중에 잠시 시간이 흐르면 ‘나는 정말 부족하고 못난 인간이다.’라는 가책 자체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한없이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물론 구역장을 하고 있다고 해서 안 미끄러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미끄러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는 목회까지 그만둡니다. 많습니다. 하다가. 그리고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그런 사람들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눈물 흘릴 수 있는 목양의 현장에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영혼을 붙들어주는 하나의 밧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공대원들은 옥상에서 뒤에다가 줄 하나 묶고 벽을 걸어서 이렇게 막 뛰면서 내려옵니다. 특공대원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내려옵니다. 얼마나 많은 훈련에 의해서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붙잡아 주는 줄 없으면 그게 어떻게 되겠습니까? 줄 타고 그렇게 훈련이 됐기 때문에 그 줄 하나가 자기를 안전하게 붙들어주는 것입니다. 목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주님을 위해 눈물을 흘리든지 결국 마지막에는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다가 후회의 눈물을 흘리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살아야 됩니다. 2005년도에 주신 아주 커다란, 제 심령을 단 쇠로 지지고 가는 한 계기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들 임직하실 때, 이렇게 훈련을 받을 때, 마음이 노골노골해지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아주 극소수였습니다.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언제까지 유지하며 살 것인가? 그런데 하나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뭐냐 하면, 안수집사를 잘한다고 칭찬 듣는 사람은 좋은 장로가 못 될 수 있는데, 구역장을 정말 잘한다고 하는 안수집사가 나쁜 장로가 되는 예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장로들은 절대로 구역장을 내려놓으면 안 된다고 하는 원칙이 사실 그래서 세워진 것입니다. 목양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이 양떼를 목양하는 목회자와 함께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지, 그 눈물이 없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마인드 자체가 교회의 리더십을 행사할 수 없는 마인드가 되는 것입니다. 변치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래 주님 앞에 충성하시고, 늘 눈물이 있는 분이면 좋겠지요.
제가 내수동교회 고등부 전도사로 있을 때, 중등부 고등부 햇수로 7년을 있었는데, 그 장로님 아직 살아계십니다. 지금 94세이신데, 제가 전도사로서 설교하러 갈 때 그분이 연세가 65세쯤 되셨는데 중고등부 수련회 꼭 따라오셨습니다. 오셔서 아무 말 안 하고 묵묵히 섬기시고 기도만 하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 당시에 65세 가까이 됐고 저는 35세니까 30살 정도 차이 나는데, 여러분들이 보기에도 30년 이하로 보면 아들처럼, 아들도 안 되지요. 우리 아버지가 스물셋에 나를 낳았는데. 그런데 장로님 저 뒤에 탁 버티고 계십니다. 그런데 저는 단순했습니다. 저는 설교자로 부름 받은 이후에는 거기 대통령이 와 앉았어도 나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내 설교했으니까. 설교가 끝나고 나면 한 번도 예외 없습니다. 한없이 그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눈물을 펑펑 쏟으시는 분은 그 장로님입니다.
그게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안수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 때로는 교회 일에 몰두하고 교회에 깊이 들어와서 일한다고 하면서 그 기본적인 눈물과 겸손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와 가지고 손자뻘 되는 애들을 위해서 그렇게 그 속에서 손을 얹고 눈물로 기도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의 중직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변치 마시고 말씀을, “아, 이제 과제 끝났으니까 이제 더 이상 양심에 괴로울 일도 없구나.” 그러지 말고, 도집사는 네 번째로 다시 또 틀어보라고.
남편이 하도, 부인은 와서 은혜를 받았는데 남편이 은혜를 안 받고 맨날 교회에 가면 교회에서 잘못 돌아가는 것 보면서 욕하고 그러면서도 교회는 가니까, 부인이 얘기를 해도 철벽입니다. 말도 안 듣습니다. 평생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삽니다. 부인이 하도 답답하니까 남편이 들어왔을 때 차 키를 가지고 가서 차문을 열고 카세트테이프 거기에다가 ‘목자와 양’을 탈칵 집어넣어 놓은 것입니다.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카세트테이프를 꺼내놓으면 볼륨을 탈칵 키면 라디오가 나오지만 카세트가 들어있으면 탁 키면 카세트가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남편이 아침에 차를 몰고 가는데 탁 트니까 들어보지도 못한 어떤 목사의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에이씨, 이게 뭐야?” 툭 꺼버렸는데, “그다음에 뭘까?” 궁금하니까 튼 것입니다. 출근하면서 제2의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출퇴근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부딪힐 때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왜 드리느냐 하면, 그 사람에게 아무리 잘 해줘도 마음을 열지만 그것은 인간적으로 마음을 연 것입니다. 그것은 통로에 불과합니다. 그 통로로 예수의 피가 흘러 들어가야지 그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나의 잘 통하는 인간관계 그것 가지고는, 나에게 생명이 없지 않습니까? 내가 어떻게 그를 살려내겠습니까? 그래서 그 통로를 이용해서 어떻게 하든지 신뢰를 갖고 통로를 만든 다음에 거기로 말씀을 흘려서 집어 넣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인격적으로 자연스럽게 그에게 스며들도록, 그래서 말씀과 부딪힐 때 그 사람의 영혼에 변화가 일어나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과 진리에 감동을 받은 사람이 둘이 만났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형제의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앞에 흘려야 될 눈물이 병에 차기까지,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눈물을 가득 채우고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훌륭한 구역장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교회 없습니다. 잘한다는 뜻이 아니라, 장로들을 선택할 때 구역장이 투표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다른 데서는 구역장에게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당회에서 그냥 결정하는 것입니다. 전적인 권한이 당회에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안 하는 것입니다. 구역장들이 가장 잘 압니다.내가 대놓고도 이야기했습니다. “구역장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장로가 되는 일은 없어야 된다. 그리고 그렇게 억지로 될 때, 매우 불행한 일들이 본인에게나 교회에 일어난다. 그래서 구역장들에게 구역장으로서 인정을 받는 사람들 속에서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그래서 구역장들의 의견을 가장 아주 깊은 커다란 무게를 가지고 나는 그분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구역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서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결국은 겸손과 눈물이 요구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잘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