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택임직자 교육 10
녹취자: 황인준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계시록에 일곱교회가 나오는데 각각 일곱교회마다 칭찬과 책망을 주시기 전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자기소개가 나옵니다. 예수님을 다이아몬드에 비유하자면 다이아몬드처럼 단면으로 깎아서 어떤 교회에는 다이아몬드의 이쪽을 보여 주시면서 예수님이 자기소개를 하고 그다음 교회에는 요렇게 돌려서 다른 쪽을 보여 주시면서 설명하시는데, 이것이 그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설교 속에서 설명하였지만, 개성 인삼이라는 말이 있듯이 로마 시대 때는 라오디게아산 안약이라고 하면 경쟁자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고 당연히 그 안약이 제국 전체로 팔리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라오디게아 사람 모두가 다 부유하지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부유한 도시였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아멘이시오’라고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을 보니 이 교회는 사실 아멘과 반대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두 번째로 ‘창조의 근본이시오’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은 예수님이 창조의 근본이시구나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며’라고 한 것은 이 사람들이 충성된 삶을 살지도 않았고 증인의 삶도 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곱교회를 연결하여 메시지를 찾아보게 되면 굉장히 감동적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일곱 교회 중에서 해당 안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그렇게만 살았냐고 한다면 그게 아니라 빌라델비아교회처럼 진짜 충성스럽게 살았던 측면도 있습니다. 이처럼 다면체적으로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일곱교회에 보여 주신 예수님의 자기 계시가 사실 우리 신앙 전체를 입체적으로 비춰보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커다란 도전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너무 괴로워서 교회를 찾으면서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는데 사실 그러한 문제가 잘 해결이 되고 평안해지고 나면 열 명 중 아홉은 고민이 없기에 뒤로 물러나서 다시 또 우리의 마음이 부요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문제를 주시고 문제를 주시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다시 또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깨어있는 신앙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지 발전하면서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가고 상승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보면 사실 좋은 것들은 모두 주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신앙이 망가지는 것은 모두 좋은 것들 때문에 망가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수님도 예전에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분은 하나님인데 사실 솔로몬이 그렇게 똑똑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덜 타락하지 않았겠느냐’는 우스꽝스러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어쨌든 지혜가 뛰어났고 그 지혜를 하나님이 주셨지만, 그 지혜를 사용하는 것은 본인이었습니다. 결국 본인이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할 때, 더 큰 불행을 가져오는 것처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우리에게 올무도 될 수 있고 축복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많이 벌어들인 수입과 물질로써 세상을 사랑하는 대신 선교에 쓰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우리는 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아까 나온 이야기 가운데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2010년쯤에 존 맥아더 목사님이 책을 하나 썼습니다. 그 책 속에 이 문제를 다뤘는데 책으로 나오기 전에 자신이 기고한 어느 잡지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고 합니다. 사실 나는 그 이전에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설교 속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 ‘노예’라고 하는 그 말이 원래 히랍어로 ‘둘로스(δουλος)’인데 이 ‘둘로스(δουλος)’를 영어 성경에서 ‘서번트(Servant)’로 번역했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이 그것을 찾아낸 것입니다. 1611년에 킹 제임스 버전 제1판이 나옵니다. 그때 히브리어를 잘하는 학자들이 모여서 가장 고품격의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서번트’로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체가 맥아더 목사님에 의하면 그 당시 문맥에선 그것을 학자들도 ‘서번트’가 아니란 걸 알았는데 사실은 ‘Slave’로 번역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노예 제도가 있었을 때였기에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은 노예 제도에 대한 가책을 이미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노예라고 할 때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종’보다는 훨씬 더 비참한, 예를 들면 예전에 나왔던 ‘뿌리’같은 영화를 보면 종들이 주인에게 겁탈당하고 살인 당하고 하는 것들은 죄도 아니었습니다. 주인들의 소유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완전히 그런 사람으로 취급받는 문맥에서 노예를 이야기하는 것이 굉장히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종은 한 종류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이전에 식모처럼 그 집에 들어가서 종살이하던 사람, 출퇴근하는 종 등 다양한 종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엄밀히 말해 그것은 계급이 아니라 그 집과 계약이 해지가 되면 그 종은 더 이상 그 집의 종이 아니게 됩니다. 그래서 사실 ‘Servant’라는 말은 원래 ‘둘루스’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타협안으로써 ‘Servant’라고 해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라고 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핍박설이 있는데 핍박받아 상처가 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고 나 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안 보고 이것이 정신적인 특성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런데 나는 전자를 의미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문맥이 할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할례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나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서 네가 인체의 특정 부위를 들이대면서 ‘봐라! 나는 할례를 받았으니 나는 구원받은 유대인이다’, ,‘나는 등에 칼자국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하진 않았을 것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스티그마’라고 하는 게 가축이나 노예에게 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영화를 보신 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SPQR이라고 로마의 군사들은 모두 여기에 SPQR을 새겼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군인이라는 약자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축들에게도 새기고 특히 노예에게 얼굴에 새겼다는 기록도 나오고 그것은 굉장히 잔인한 것입니다. 대개 여기에 새겨서 도망을 가더라도 벗겨보면 몸에 노예라는 신분이 나오고 어느 가문의 문장이라는 것이 파악되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게 새겨진 그리스도 예수의 스티그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다고 하는 나의 정신 속에 지니고 있다. 더 이상 나를 괴롭게 하지 마라’고 딱 잘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도 바울이 항상 자신이 자유인이라고 이야기하고 노예처럼 살지 않았는데 이것은 사람이 로마 시대에 노예가 되는 것은 팔리든지 아니면 포로로 잡히던지 그래서 왕이 상으로 내리든지 아니면 죄를 짓든지 이럴 경우에 신분 격하가 되면서 노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방식은 그런 방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그렇게 하라고 한 사람이 없는데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노예가 된 것입니다. 종이 새롭게 그 집안에 오게 되는데 그 종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같이 종살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기도 낳게 됩니다. 그 아이는 기본적으로 자유인입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가 고용 계약해지하고 나가게 되면 그 아이도 같이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노예는 내가 노예로 들어가서 또 다른 노예와 결혼하고 아기를 낳게 되었을 경우 혹시 내가 해방된다고 하더라도 아기는 그 주인집 소유가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포함해서 아무것도 자신의 소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노예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된 것은, 하나의 운명입니다. 숙명 같은 것인데 그 숙명 같은 필연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서 예수 그리스도는 노예가 되라고 한 적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 자기 자신이 스스로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신약에서 새롭게 나오는 사상이 아니라 구약에서 ‘나의 종, 나의 종’이라고 할 때 ‘에베드(עֶבֶד)’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시대에 따라 여러 칭의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노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고,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자신을 노예라고 자처하게 된 것입니다. 참된 자유인이 되는 길은 노예가 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 어법이 사실 우리들의 현실 맥락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게 되면 여러분들이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지게 되면 간단한 것들이 없습니다. 너무너무 복잡해집니다.
구역을 하고 목회한다고 하더라도 어디 그렇게 우리를 존경하며 모본으로 떠받들며 목양을 받겠다는 사람이 대기하고 있는 구역, 교회가 어디 있겠냐는 것입니다. 항상 한 교회 목자는 항상 성자와 말도 안 되는 사람이라는 두 평가가 항상 엇갈리게 됩니다. 얼마나 다수냐 소수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우리 교회 오래 다니신 분들 기억하실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딸이신 손동희 권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간증하셨습니다. 그분이 자기를 죽인 아들을 입양한 한국 교회의 성자이십니다. 그런데 손동희 권사님에 의하면 너무 교회에서 상처받으셨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 내보내지 못해 안달한 교인이 목회할 때 많았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며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구역에 목양에 아무리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많고 문제를 많이 일으켜도 문제가 복잡한 게 아니라 목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꽉 차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복잡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은혜는 놀랍게 문제를 단순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너무나 복잡하게 보이고 머리가 터질 것으로 보였는데 은혜를 받고 보면 결국, 이 모든 일들은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또,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넘쳐서 모든 교회의 지체들이나 아니면 가정의 가족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나면 문제가 사실은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런 것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시면서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 저도 로마에 가기 전까지는 무슨 이야기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가보니 BC 2세기경 폼페이에 있었던 수도시설을 보게 되었는데 문화사적인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수도가 그 시기에 각 가정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이미 납으로 만든 연관이 제작되어 그 연관이 중앙에서 나오는 커다란 분수대와 같은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연관을 공중에 띄워 각 세대마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요즘은 없어졌지만, 예전에 아파트에서 열면 쓰레기를 버릴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이미 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에 그 시설이 폼페이에 다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연관은 나중에 나왔을 것이고 맨 처음엔 석관이었을 텐데 가보니 연관이 되어 있는 곳도 있고 석관이 있는 곳도 여전히 있었습니다. 석관은 지금처럼 기계가 있다면 파이프처럼 뚫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돌을 파서 물길을 만들고 위에 똑같이 파낸 돌을 엎어 만들었습니다. 이게 뚜껑이 덮인 것도 있고 뚜껑이 안 덮인 것도 많습니다. 그 당시에는 오염의 여지가 별로 없어 덮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여름은 엄청 뜨겁습니다. 뜨거우니 이 돌멩이가 따듯해지고 그 위로 물이 굉장히 먼 거리를 흐르니깐 마지막쯤 도달했을 때는 물을 먹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따뜻해진 물을 받아서 그늘에 놓게 됩니다. 식혀 시원하게 되면 그 물을 마시게 됩니다. 로마의 기후를 보면 여름에 매우 덥지만 건조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햇빛을 가리든지 안 가리든지 습도가 높아 온도 차이가 나지 않지만, 태양 볕 아래에서는 미칠 듯이 뜨거운데 그늘에 들어가면 추위가 느껴집니다. 그러니깐 물을 가지고 그늘에 반나절만 놓으면 물이 시원한 물이 됩니다.
‘너희도 물을 먹을 때, 뜨거운 물이 필요하면 끓여서 먹든지 아니면 차가운 냉수를 먹지 수관에서 오는 물 너희는 못 먹지 않느냐. 너희들의 존재가 나 하나님께 그러한 존재다. 나 그리스도에게 그러한 존재다. 그러니깐 너희들은 덥거나 차갑거나 하라.’ 이것에 대한 흔한 해석은 ‘차든지’는 배교고 ‘덥든지’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사실 예수님이 차라리 배교를 해버리라고 그렇게 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핵심은 ‘너희들이 뜨거운 물을 먹거나 시원한 물을 먹지 둘을 섞어서 미지근한 물을 뜨거운 여름철에 먹진 않지 않느냐.’ 결국 차가운 물, 뜨거운 물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물의 상태이고 미지근하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역겨운 상태입니다. 뜨거운 여름날에 미지근한 물을 계속 들이켠다고 생각해 보면 토할 것 같은 느낌인데 그것을 당시 이 편지가 저 시골에 가는 편지였다고 하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수도시설 자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이기에 이것을 쓴 것입니다. 지금 가보아도 뭉개진 터들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 당시에는 엄청나게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이를 토대로 결국 우리가 왜 미지근해 지는가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처럼 안약을 발라서 너희 눈을 고치고 그다음 옷을 사서 입어라. 지성과 삶이 생활입니다. 생각과 생활이란 의미입니다. 결국 지성의 눈이 먼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너희가 안약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 안약을 발라야 할 사람은 너희들 자신이며, 그 안약은 영적인 안양이라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것은 삶의 행실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하면서 꿈에 벗은 모습으로 있을 때가 있을 텐데 나의 삶에 대해서, 생활에 대해서 반성하게 하시는 때인 것 같습니다. 행실이 성도의 이름에 합당하지 않는 그런 삶일 때 삶의 문제는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여러분들 모두 은혜를 받아본 적도 있고 침체에 빠져본 적도 있을 테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잠겨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넘칠 때는 인생이 단순해집니다. 그런데 은혜에서 멀어지고 나면 인생이 마치 정글에 들어가 길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너무 복잡해져 버립니다. 시험에 들면 제일 먼저 정신서부터 혼란이 일어나게 되고 갈등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삶은 세 가지로 요약하면 아멘의 삶이다. 그리스도는 아멘이셨다. ‘아멘’이라는 단어는 원래 히브리어로 부사입니다. ‘certainly’,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축복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멘, 아멘, 아멘이라고 화답을 한 것입니다. 축복하면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라는 마음으로 ‘확실히 그렇습니다.’라고 동의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아멘의 유래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아멘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즉각적인 순종의 삶입니다.
두 번째는 항상 창조의 근본이 그리스도시라는 것. 그것을 잊지 않으면 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에게 의존하고 있다.’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우리가 예수를 의지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으니 우리가 예수를 의존하면 예수와 함께 우리가 살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만물이 예수께로 나와서 예수께 붙들려서 지금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이 되었으니 예수의 손앞에 붙잡혀 있을 때 우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붙잡은 손이 우리의 영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것들을 주님이 주장하셔서 붙드실 것이다.’ 그러한 확신이 우리에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충성의 원인은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충성되게 살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충성되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증인의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증거 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를 증거 하며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설교의 요약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훈련받으시고 임직을 하시면 정말 본이 되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임직을 하고 나면 모든 사람이 더 잘 보이는 위치에 올라가서 그 사람이 잘 살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지만 잘 못살면 주님께 더 많은 누를 끼쳐 드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좀 숙연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