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택임직자교육 7
녹취자: 이은정
(02:51)조금 참고를 하자면, 저도 똑같이 아버지한테 별로 칭찬받은 적도 없고, 뭐 두들겨 맞은 적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때릴 수 없이 먼 곳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하여튼 별로 좋은 기억이 없었습니다. 서울에서 공부하면서 아버님이 이제 사업차 한두 달에 한 번 올라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 이 무릎 꿇고 여태까지 시험 본 거 찍개로 찍어온 거 다 이렇게 보여드리는 그 정도였습니다. 의식적으로 나는 표현을 많이 하도록 그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그게 자라나는 세대에까지 영향을 줍니다. 우리 며느리가 충청도 사람인데, 우리 집에 시집와서 너무 충격 받은 게 가족들이 서로 끌어안는 거를 보면서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정에 전혀 추어도 충청도에서 그런 문화가 없는데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도 안 한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아주 좋은 가정에서 행복하게 자랐는데 어쨌든 그렇습니다.
근데 나는 좀 그게 좋은 것 같습니다. 표현을 많이 하면서 사는 게 짧은 세상에. 사랑한다는 말 첫 번째로 하니까 “아빠, 왜 그래” 그러지 한 20 번만 하면 그다음에 말 안 하면 “아빠, 오늘 왜 그래” 그럽니다. 성도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도 이렇게 섬기는데, 마음은 안 그러는데 그 표현을 되게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데 그것도 훈련입니다. 그래서 표현을 많이 하십시오. 우리 딸은 한 대학교 가고 나서는 좀 안 그럽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열린교회 마당에서 나를 만나면 막 저기서 달려와가지고 뜨겁게 포옹을 했습니다. 대학교 가고 나서부터 안 그럽니다. 근데 그렇게 표현하면서 살면, 가정에서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시집 장가가서 또 표현합니다. 그런데 안 하면 이제 계속해서 (계속 안하게 됩니다.) 많이 표현하십시오. 숙제입니다. 그다음에 우리 집사님!
(12:46)여기서 내가 한마디 보태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런 경우에 사람이 생각이 많이 변합니다. 나도 젊었을 때는 그런 거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고 엄격했는데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목회를 하고 나 자신이 (많이 변했습니다) 오늘내일 설교가 자유입니다. 그래서 이제 조금 설교 준비하면서 걱정한 게 내가 너무 커다란 자유를 교인들에게 가르쳐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살다 보니까 젊어서 못 보던 인간의 보다 다양한 면들과 그다음에 성경을 이렇게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자유의 가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굉장히 말하자면 협소합니다. 똑같은 얘기인데, 미국의 골프 이야기입니다.
똑같은 예화입니다. 미국에서는 사실 목회자가 월요일 날 가서 가장 값싸게 재밌게 놀 수 있는 곳이 골프장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데 가면 진짜 돈이 많이 드는 것입니다. 근데 난 안 가봤는데 미국에 뭐 디즈니랜드 한 번 입장료가 무슨 뭐 26만 원인가 든다고 합니다. 근데 골프장이 10달러 8천 원 정도였습니다. 그때 8천 원 내지 만 이천 원만 주면 하루 종일 칩니다. 퍼블릭 골프. 그런 거를 가서 이제 막 엄청나게 시험에 들고 그러는 겁니다.
그렇다고 뭐 내가 뭐 골프를 치자는 얘기가 아니라 어쨌든 그런 거에 대해서 훨씬 더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봐야 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도 똑같이 아내하고 필리핀 선교를 갔는데 maid가 둘인 겁니다. 사실 이게 한국에서 선교를 보내줘가지고 우리 교회에서 보내준 건 아니지만, 그래서 어렵다 그래가지고 그 도와주고 그러고 갔는데 maid가 둘인 겁니다. 도대체 사모님은 뭐 하는데 밥하는 사람에다가 청소하는 사람까지 두고 저렇게 사나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그거에 대해서는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또 어떻게 보면 그 사람들 다 교회 지체들인데 쉽게 얘기해서 고용 창출을 해준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여러 가지 많은 것들에 대해서 지침은 이것입니다. 뭐냐 하면 훨씬 자유롭게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근데 그런 오랫동안 인습에 젖어 있는 권사님들 가난하고 힘겨운 세월을 살아온 우리 세대나 우리 윗세대의 그 사람들에게 그런 놀라운 관용을 기대한다는 건 굉장히 쉽지 않은 일이긴 합니다. 그런 걸 스스로 많이 깨뜨리면서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야 된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게 결국은 사랑을 되게 많이 방해합니다. 그 어떤 편견에 사로잡히고 나면 그러면서 딱 사람들을 정죄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얘기 많이 있는데 진도를 나가야 되겠습니다. 조 집사님.
(31:25)물욕은 나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은 물욕이 없으면 돈을 벌 동기가 없잖습니까. 욕망이 없는데, 근데 문제는 사업을 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이 엔진과 같은 것입니다. 그게 없으면 그 사람 사업하면 안 됩니다. 그냥 조용히 수도사가 되든지, 아니면 복지사가 되든지 그래야 합니다. 끊임없이 욕망이 있어도 됩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은 물질을 많이 얻으면 거버넌스가 생깁니다. 지배력이 생깁니다. 근데 그거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은 돈이 결정해 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과 영혼이 결정해 주는 건데, 무엇보다도 사랑이 결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오웬 목사님이 그런 표현을 많이 했는데, 이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은 사람들이 불법으로 침탈해 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그거를 침탈해서 그 다음에 그거를 가지고 자기 거버넌스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만의 왕국을 만드는 거 아닙니까? 그게.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그것을 다시 뺏어서 그러니까 불법으로 총칼로 뺏을 수 없으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을 통해서 뺏어서 그래서 그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버넌스로 그거를 말하자면, 뭐라 그럴까 구조를 다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 돈 때문에 사람들의 지배를 받고 비참하게 되지 않고 이렇게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 고용을 창출해서 그 사람들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인생의 의미까지는 모르더라도 인생을 이렇게 사는 방식도 있구나 라고 하면서 그 안에서 뭔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으며 살아가게끔 만들어주는 그런 것들,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무력이 오히려 너무 없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아까도 얘기한 게 어떤 목사님은 자기는 한 끼에 만 원 이상짜리 밥을 안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속으로 벌써 만 원 이상 먹는 사람은 아주 깊이 정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분이 모든 돈의 면에 있어서 그렇게 철저한가? 근데 밥은 만 원 이상 안 먹지만은 옷은 10만 원짜리 사 입을 수도 있고, 심지어 어느 목사님은 그렇게 청빈을 부르짖는데 자녀들한테 달러를 밀반출하다가 세관에 걸렸습니다. 이런 웃지 못 할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어떤 생각을 했냐 하면, ‘모든 사람은 자유다’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무엇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침범하게 해선 안 된다. 더군다나 내가 가지고 있는 모순덩어리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 그거를 하나의 잣대로 삼아서 그래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미워하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그런 철학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 혼자 조용히 그렇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만 원 이하짜리는 절대 안 먹는 사람도 자기가 그걸 삶의 자유로운 양식이라고 생각하고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서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자유인의 모습이지 그런 거는 진짜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가치관이 매우 혼재한 가운데 살고 있고 그게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기본적으로 인문학적인 성찰이 전혀 없는 가운데 성경이 가르치는 것 가운데 자기 마음에 드는 하나를 붙들어서 그걸 절대적으로 크기를 키워가지고 그걸 방망이처럼 만들어서 그와 똑같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59:39)시간이 거의 갔는데, 그래도 제가 좀 얘기해도 될 것 같습니다. 크게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지고 이렇게 두 개의 물줄기가 내려옵니다. 이게 하나가 forgiveness 그다음에 하나가 sharing입니다. 그래서 이건 둘 다 나눔의 정신인데, 베풂의 정신인데, 하나는 영적인 자선, 그게 사람들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해주옵시고’ 이게 debtor라고 나옵니다. 빚쟁입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누군가가 나한테 잘못하면 내가 갑이 되는 것입니다. 용서해 줄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용서해주는 것 이게 큰 하나의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forgiveness 이게 영적인 자선이고 육적 자선이 쉐어링입니다. 물질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셔야 됩니다.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인 성도의 삶의 기둥과 같은 두 삶입니다. 끊임없이 사람을 용서하고, 끊임없이 베풀고, 근데 이건 또 위로 올라가면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받는 용서, 하나님께서 먼저 받는 물질의 감사, 이게 두 개가 같이 이제 있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 흔히 보면 이러잖습니까? 최고의 덕은. 우리 흔히 오해 하는 것인데, ‘청교도들이 굉장히 청빈한 삶을 산다’ 이렇게 주장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청교도들을 정확하게 말하면, 욕심을 그런 탐욕을 안 가지려고 했던 사람이지 실제로 그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우리가 100% 믿지 않지만, 여러분 고등학교나 대학 때 읽었던, 막스 베버의 청교도와 자본주의 같은 데 이론에 보면 100%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청교도들의 절약하는 정신과 직업 소명 의식이 많은 돈을 벌게 했고, 그런데 그건 자신들이 자기를 위해서 함부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경건한 사람들은 돈을 가지고 죄도 못 짓잖습니까? 그게 자본이 축적돼서 그것이 이제 말하자면 산업혁명의 밑거름이 됐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도래하게 된 원인이 됐다.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청교도들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수도원적인 그런 청교도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건 일부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 굉장히 관대했습니다. 그 대신 방종하게 쓰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경계했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돈을 많이 모으는데 절제를 해서 많이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항상 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그 구제와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에 대해서 베푸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너그러운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걸 하나 교정해드리고 그다음에 우리는 이렇게 흔히 말하는데 이제 제일 좋은 거는 자기에게 인색하고 남에게는 후한 사람이 되는데 사실 그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지나치게 인색한 것도 하나의 정신병적인 집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신앙으로 자신에게 자신이 그런 거를 막 방종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인색하다고 표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대한 애착이나 탐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위에서도 이렇게 보면요, 한번 우리 탤런트 중에서 최진실이 있었잖습니까? 죽었습니다. 근데 너무 고등학교 때 가난해가지고 선생님이 만원인가를 줬답니다. 그랬더니 너무 불쌍해서 그 만 원을 줬는데 그 돈을 가지고 밥을 굶는 집에 최진실이 가서 그걸 가지고 파마를 하고 왔더랍니다. 그런 걸 선생님이 엄청나게 열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건 뭐냐 하면 결국은 자신에게 인색한 사람이 남에게도 자신에게 인색한 사람은, 남에게도 인색합니다. ‘네가 그게 왜 필요해?’ 이런 반응 되게 보이잖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자신에게 인색해지는 것 그 자체도 어떤 정신병적인 집착일 수 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무도 해결을 못 합니다. 어거스틴도 고백록에서 그런 욕심을 갖는 것과 오관에 대해서 다 얘기합니다. 그중에 하나는 먹는 거 얘기했는데 ’먹는 것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그것이 없으면 어떻게 건강을 유지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어느 사이에 나의 탐욕이 되어서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음식을 계속 한없이 갈망하니 그 경계가 어디인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성인이. (그렇게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눈물만 흘리나이다.’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그런 탁월한 사람들도 그 경계를 정하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잘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연합되어서 우리들이 모두 한 몸을 이룹니다. 구원과 함께. 그때 그것이 영적인 연합만이 아니라 모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개인의 자원이 공동체의 소유가 된다고 보는 것이 성경의 사상입니다. 그런데 공동체의 소유가 됐는데 그 원시 공산 사회처럼 그렇게 모든 거를 내놓고 사는 사회는 지금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생각하기에 이것을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것이고, 이거는 공동체의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단순한 물질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sharing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항상 떠오르는 게 나보다 가난한 사람이 이렇게 딱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뭐냐 하면 자기가 share 할 수 있는 대상이 아주 제한돼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나만큼 사는 사람하고 셰어링 할 필요가 없잖습니까. 나보다 밑에 있는 사람이 되잖습니까? 근데 여기서 나오는 셰어링은 그것만이 얘기하는 게 이 사람이 굉장히 시름에 빠졌을 때, 내가 보내는 꽃 한 송이, 저 사람이 굉장히 고민하고 있을 때, 내가 보내는 편지 한 장, 그리고 저 사람이 외로울 때 내가 먹어주는 밥 한 끼, 이런 거는 단순히 빈부의 차이만을 가지고 보면 너무 물질 구조적으로만 이 나눔을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나는 요새 (너무 기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굉장히 근심에 쌓여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가난하고 나는 한 달에 백만 원을 벌고 이분은 천만 원을 벌어. 근데 내가 이 사람에게 share 해줘야 될 위치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십니까? 그러니까 이거를 물질로 딱 때려 박아서 생각하면 안 되고, 그거는 하나의 중심이고, 그 다음 모든 거를 그렇게 사람들에게 나누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적이 있지 않습니까? 최근에 6개월 안에 여러분이 누구를 감동시켜서 눈물을 흘리게 한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그게 나눔의 정신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그다음에 이제 뭐냐 하면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는가, 그랬잖습니까? 그게 이제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600만 원 이상 버는 사람이 60%가 자기는 중산층의 이하라고 생각한답니다. 연봉 7천2백만 원 되는 사람이. 그게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돈이 조금 있으면 예를 들어서 1억 버는 사람이 천만 원을 돕는다고 그러면 100만 원 버는 사람은 10만 원이면 그만큼 돕는 것입니다. 그거를 마음으로 이렇게 기준을 정하고, 그다음에 자기가 돕는 범위 내에서 규모 있게 정해야지, 오늘은 도와주고 내일은 저희가 가서 대출을 받으면 안 되잖습니까. 그건 규모 없는 삶입니다. 그리고 아까 장명숙 집사님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이 문제를 딱 돈으로만 보면 안 되고 정신적인 부유함, 그런 걸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삶의 의지가 다운된 사람들을 향한 나눔, 그런 것도 물질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 가운데‘물은 피보다 진하다’라는 설교를 기억하십니까? 물은 피보다 진하다. 그러니까 ‘Water is thicker than blood’ 라는 설교 제목입니다. 특이하잖습니까? 집사님 무슨 뜻 같습니까? 모르겠구나? 물은 세례입니다. 피는 혈육입니다. 세례로 맺어진 가족은 피를 나눈 가족보다 훨씬 더 진하다. 그게 이제 기독교의 공동체 사상입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한번.
그다음에 현실 교회의 불안전성은 집사님이 얘기하셨는데, 이렇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교회는 개인하고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구제를 잘 한다고 해서 그의 모든 삶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건 아닙니다. 구제는 많이 하는데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버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다음에 먹는 거에서는 진짜 근검절약하는데,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는 잘못될 정도로 많은 지출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이고, 그다음에 차에 대한 집착은 없는데, 집에 대한 집착이 있을 수 있고 집에 대한 집착은 없는데 옷에 대한 집착이 있을 수 있고, 그런 거에 대한 집착은 전혀 없는데 묘지에 대한 집착이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거는 사람마다 다 너무나 다양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냐 하면 결국 교회 자체를 온전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온전하게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아서, 자기 자신이 그 교회라는 인격이 좀 더 나아지는 데 무엇을 이바지하고 있는가 하는 걸 생각을 해야지. 거기서 자기는 타자가 되어서 바깥으로 튀어나와서 바깥에서 교회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런 거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다음에 문제는 뭐냐 하면 아무리 돈이 많고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진다. 할지라도 지난주 설교한 것처럼‘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내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사랑 없이도 모든 것으로 구제할 수 있고, 사랑 없어도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다는 입니다. 그런 고민들을 함께 나눠보면서 우리들이 좀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과 그다음에 sharing 물질뿐만이 아니라 정신, 마음의 여유, 모든 것들에 대한 것들을 함께 생각하면서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남에게 나누어 줄 때, 하나님이 끊임없이 채워주신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울 때 누군가 도움을 받고 돌아가는 사람의 마음보다는 도와주고 돌아오는 사람의 마음이 훨씬 더 깊은 것입니다. 받아가는 사람은 많은 눈물을 흘리지만 그러나 많은 부담을 느낍니다. 이 사람을 도와주고 오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이미 보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오늘 제가 잠깐 기도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