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길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녹취자; 정윤미
나는 오늘 졸업을 맞이하는 여러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여태까지는 여러분이 포구에 있는 배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여러분이 닻줄을 끌고 포구 바깥 망망대해로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학교 3년 혹은 4년 다니는 동안 눈물도 많아 흘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최선의 교육을 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가정과 직장, 혹은 사역 지를 오가면서 많은 어려움 속에서 학업을 마치었습니다. 남몰래 흘린 눈물도 많았을 것이고, 고통도 컷을 것 입니다. 그때마다 아마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을 이겨냈습니다. 우리학교 학생들은 훌륭했습니다.
그렇지만, 여태까지 여러분이 겪은 고통과 어려움은 연습에 불과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학교를 마치고 본격적인 사역의 현장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거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방파제로 둘러싸인 포구 안에서 폭풍이라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망망대해로 나가보십시오. 옆에 보이는 동료들도 없고, 끝없는 바다뿐입니다. 때로는 잔잔할 때도 있지만, 파도가 요동 칠 때도 있습니다. 망망대해에 나가보십시오. 수천 톤의 배도 풍랑이 일면, 가랑잎처럼 요동을 칩니다. 그래서 실제로 어떤 배는 침몰하거나 조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나가는 바로 그 사역의 현장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랫동안 훈련받았던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보내는 것이 이리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라고 말입니다. 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보내시면서, 이리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만큼 전도하고 목회하는 것이 전쟁터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눈앞에 펼쳐진 그런 쉽지 않은 그 미래의 전망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의 소명을 굳건히 하여야 할까요? 첫째는, 고난과 환란당하는 것을 이상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어쩌면 마지막 전도여행이 될지도 모르는 길을 떠나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에 앞날에 커다란 환란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말씀하셨습니다. 그이야기는 반듯이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말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환경입니다.
30년 가까이 목회를 하면서 제가 얻은 지혜가 있습니다. 35년 정도 목회를 하면서 얻은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목회를 하고 사역을 하면서 평안한 일을 만나면,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원래 우리의 길이 이런 길이 아닌데, 왜 이런 놀라운 혜택이 주어졌을까? 이것은 잠깐이겠지, 조금만 있으면 어려움이 일어나겠지”, 그러면서 평안한 가운데 자기 자신을 준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련을 만납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가정에서 고민거리가 생깁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옵니다. 몸에 질병이 생깁니다. 가족들에게 어려움이 생깁니다. 성도들 중에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아 이제 정상이구나, 아 이제 내가 목회를 하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환란과 어려움을 당할 때에 조금도 이상한생각이 들거나 손해를 보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잠깐 평안할 때에 마음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커다란 보너스를 받는 것 같은 감사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한국 찬송가 가운데에 그런 노래가 있습니다.
(찬양)
워창콰일러, 워창콰일러 창창콰일러
나는 그런 찬송을 별로 좋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비현실적입니다. 어떻게 창창콰일러가 가능하겠습니까? 사면이 길입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우셨다는 기록은 세 번 나옵니다. 웃으셨다는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웃을 일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목회의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우울하게 목회를 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목회를 하는 가운데에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때에는 놀라운 방법으로 기쁨을 주십니다. 그것은 세상이 알 수 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에게 좋은 옷이나, 많은 돈이나, 큰 명예나 그러한 감각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열린 교회를 개척하고 2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7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교회를 해서 지금 오천 명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겉으로 보기에 뭐 쪼개지고 하는 그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단 하루도 아프지 않은 날은 없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십여 년 전이었습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매일 저녁기도 했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이 세상에서 눈을 뜨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그러는 순간에도 많은 후배들은 저를 부러워했습니다.
(찬양)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아무도 모르는 자기만의 십자가입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되었습니다. 아침서부터 밤까지 늘 울면서 지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것이 제 나이 오십 세 되던 해였습니다. 40대 후반서부터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오십 세가 되기 전에 주님을 한번 다시 깊이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보지 못했던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예전에 전혀 보지 못하던 지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평안하고 좋은 환경에서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살을 찢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련이 많았지만, 매일 매일 기뻤습니다. 금요일 밤마다 기도하러 산에 올라갔습니다. 말씀을 준비하고 기도하다가 바깥으로 나옵니다, 밤하늘을 쳐다보면, 하늘에 별이 빛납니다.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주 가득히 아름다운 분으로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학문에 더 열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위로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두 배쯤 더 큰 고통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시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라고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그는 이 세상을 영적인 전쟁터로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졸업하는 이 순간부터 가슴에 새기십시오, 어려움이 닥치거나, 시험이 올 때에 이것이 정상적인 우리의 인생이구나!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주 큰 고통과 시련이 몰려 닥칠 때에 아주 크게 정상적이구나.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에게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오늘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기본적으로 이제 졸업과 함께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할 때에 그 신학교를 세우신 목사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 때 우리 한국에는 무슨 동이라고 하는 그 지역이 행정구역상으로 2만 8천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늘 설교할 때에 학생들에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2만 8천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 물 없이 사는 불쌍한 민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들을 위해서 우물을 파라는 것입니다. 한번 마시고, 다시 목마르는 그런 종류의 사마리아 우물이 아닙니다. 영원하도록 솟아나오는 생명의 물이 나오는 그런 우물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결국 교회를 개척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최선을 다해서 신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복음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신학 공부를 하고, 아무 사명도 감당하지 않고, 교회 주위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그러라고 신학공부를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위해 기도했고, 헌신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신학으로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거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사람들을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는 할 수만 있으면, 여러분 모두가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도 하나만이 아니라, 여러 개를 개척해서 최선을 다해서 목회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나는 바랍니다. 절대로 쉬운 길을 가셔서는 안 됩니다. 오늘 저녁에라도 집에 가서 한번 고요히 졸업장을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왜 나를 여기에서 3~4년 동안 공부하게 하셨습니까?” 하고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거라 하고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물론 우리는 교회를 개척할 수도 있고, 학교에서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선교사로도 갈수도 있습니다. 중국에 있는 소수 민족을 위한 선교사로 가는 길은 너무나 훌륭한 일입니다. 또 다른 민족은 어떻습니까?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중국인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제는 이 선교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이던지 간에 명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졸업한 여러분이 용기를 가지고 선교사로 나가기로 간절히 원합니다. 저는 일 년에 한번 씩 캄보디아를 갑니다. 갈 때마다 마음이 미어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많은 중국인들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여기에서 호적에 등록하지 못해서 팔려간 중국인들입니다. 사백 불씩에 팔려간 여러분의 동포입니다. 거의 돌보는 사람 없이 거기에서 하층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어마어마한 빌딩을 세우는 엄청난 사업가들도 중국인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사람들은 중국으로 돌아오기도 쉽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내가 중국인 지도자들을 붙들고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이제 중국 교회가 이렇게 커졌으니, 이제 사람을 보내라. 그리고 가서 그들과 함께 울고, 그들과 함께 사랑하면서 그들에게 예수를 전해라, 난 한국 사람인데도 그 중국 사람들이 불쌍한데, 너희들은 같은 동포인데 불쌍하지 않느냐고, 이야기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무안의 생활비의 삼분의 일이면 캄보디아에 가서 살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기에서 석사 학위만 가지고 있어도, 그쪽의 대학에서 교수로 받아줍니다. 물론 월급은 안줍니다.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중국인들을 위해서 사랑하고 헌신하고 그들을 교육하고 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이 세상에 모든 고통은 하나님을 모르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중국이 앞으로도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한국의 유명한 방송국에서 슈퍼차이나라고 하는 다큐멘터리를 5부작에 걸쳐서 7년인가를 녹화를 해서 그 방송을 했습니다. 저는 그 다큐멘터리 중에서 2편을 눈여겨보았습니다. 미래는 세계가 중국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부자가 될 것입니다. 강대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나는 오히려 정반대로 봅니다. 그렇게 부자가 되고 나라가 강해질 때에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은 방황하고 인생에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걸어온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은혜의 복음은 중국이 미래가 어떠하던 지간에 더더욱 필요한 은혜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난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절대로 무의도식 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멘.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이 사명을 생명을 받쳐서 수행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이 일을 마치려하려면 나의 생명조차도 조금도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물론 이 구절은 사도바울이 순교를 염두에 둔 발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순교의 한 순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복음을 전하는 매순간 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 중 어떤 사람에게는 순교의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중 대부분은 순교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늙어서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순간 순교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런 순교의 정신으로 평생을 섬기면서 사는 것은 더 어려울 것입니다.
목회의 어려움의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신학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룰 수 있는 학문적인 능력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인격적인 연단을 받으면서 교인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자세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아서, 말씀의 좋은 재료들도 캐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리를 생각해 보십시다. 요리사의 기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자기의 음식을 먹는 사람에 대한 애틋한 사랑, 이것이 요리사의 기본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 부정 식품을 만들어서 파는 사람들은 이미 사람이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악한 사람들입니다. 요리를 다루는 기술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의 요리를 먹는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다음에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좋은 재료입니다. 좋은 재료는 특별한 솜씨를 가미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맛이 있습니다. 자 그러면, 목회사역, 혹은 설교에 있어서 좋은 재료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성경이 항상 여러분에게 설교하거나 가르칠 수 있는 재료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설교를 하려고 성경을 하루 종일 뒤져가려 봐도 설교할 재료를 못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은혜를 받아보시면, 그럼 성경을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성경이 소리치면서 튀어나옵니다. “나를 설교를 해주세요, 나를 가르쳐 주세요, 나를 사람들에게 소개해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좋은 재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아무리 신학공부를 많이 했어도, 진정한 신학은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좋은 재료가 마련이 되었습니다. 그다음에 요리솜씨가 필요합니다. 그 요리솜씨가 무엇일까요? 신학을 배운 지식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경에서 가지고 온 재료들을 사용해서 아주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 가지 요건 아닙니까? 자신의 목회사역, 말씀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 말씀 자체에서 깊이 은혜를 받은 그것, 그것을 학문을 사용해서 사람들에게 잘 가르치고 적용할 수 있는 신학지식, 거기까지도 도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여러분에게 겨우 세 번째 것만 주로 가르쳤을 뿐입니다. 교인들을 깊이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가르치기는 했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직접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깊이 은혜를 받고, 그 속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여러분의 개인적인 경건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만 갖추면, 정말 훌륭한 목회가 될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이것이 끝이라면 목회사역은 할 말한 일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무엇 때문에 목회 사역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요? 자신의 말씀을 들을 사람을 사랑합니다. 성경 말씀 속에서 재료를 캐왔습니다. 배운 신학 지식을 가지고 요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잘 요리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이것을 불에다가 볶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불은 켜질 수도 있고, 안 켜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그때마다 다릅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볶아집니다. 맛있게 요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그 요리를 끝내기 위해서 뿌려야할 소스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자신의 피입니다. 하나님이 한 설교자의 마음을 일깨워 사역의 새로운 지평을 보게 하실 때에, 예전에 알지 못했던 신앙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하실 때에,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에 새롭게 눈이 열릴 때에, 어떻게 여시는지 아십니까? 설교자의 심장을 찢으셔서 그 세계를 여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려진 말씀의 세계를 통해 성도들은 감탄을 하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있기까지 설교자는 자신의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고통을 견딜 수 있을 까요?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 고통을 견디는 것입니다. 그때에 사도바울의 고백이 생각 날것입니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내게 더욱 좋으나”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용기입니다. 온 몸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위해 항거하다가 어느 한순간에 장렬하게 피를 뿌리고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명자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역을 하면서, 이 정신을 따라 희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의 큰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여러분이 겪었던 많은 고통과 시련에 대해서 진심으로 위로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앞날에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