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라
(201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신앙적준비(눅1:80) 2011.3.2 대신대 개강수련회 1
2. 지성적준비(눅1:80) 2011.3.3 대신대 개강수련회 14
3. 인격적준비(눅1:80) 2011.3.4 대신대 개강수련회 23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라 1 (2011.3.2 대신대 개강수련회)
1.신앙적 준비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눅1:80)
녹취자: 김경애
성경의 한 인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의 주인공인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아주 짧은 생애를 살다가 죽었고 그의 관한 기록도 사실 그렇게 많이 성경에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 정도로 혁혁한 어떤 목회의 업적을 이루어놓은 것도 없습니다. 설교 몇 편을 남기고 어린 아이에 의하여 청구되어서 헤롯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그 목이 그 어린 아이를 위한 선물이 되었던 그런 비운의 설교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례 요한은 저의 생애에 그 어떤 인물보다도 지울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겨놓았고 그리고 일평생 이 사람을 본받으며 살겠다고 다짐을 하고 이제껏 살아왔습니다.
시간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드릴 수 없지만 이 세례요한은 계시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과 신약 사이를 걸쳐있는 그런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구약에 속한 마지막 선지자이고 또 어떻게 보면 신약시대를 연 첫 번째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예수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도록 하나님께 지정되었고, 이 사람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소개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례까지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요한을 다른 요한과 구별하여 세례 요한이라고까지 부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람은 매우 독특했기에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중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세례 요한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세례 요한이 이 세상에 탄생하는 것과 같은 연결선상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역사는 세례요한을 타고 흘러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알리고 그리고 구원 역사의 봇물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역사는 무엇인가? 예츠카라는 역사가는 말하기를 ‘역사는 역사적인 인물들의 우연적인 특징의 소산이다.’ 라고 그랬습니다. 좀 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알기 쉬운 말로 표현하면 역사라는 것은 어떤 한사람에 의해 영향을 받은 역사다. 그래서 이 역사의 흐름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꼭짓점 삼아서 그렇게 줄로 이으면 그것이 곧 역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역사에 있어서도 통치하시는 주인이시고 이 모든 세계의 왕과 임금들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군인이 되고 전쟁이 일어나고 승리하고 패배하고 하는 이런 역사들 속에서의 인물들만을 기억하지만 이것은 모두 껍질일 뿐이고 하나님은 가시적인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속의 역사 이면에 그 역사의 전개를 통해 정말로 이루어 가시려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구원사’ 라고 부릅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한 역사가 바로 이러한 역사의 흐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이어지고 전개되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에서도 사람들이 사용되어 역사를 전개해나가듯이 구원의 역사에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전개해나갑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우리 잠시 한번 살펴봅시다. 제일 먼저 이제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되고 그리고 구약의 진정한 의미의 선택 백성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 어마어마한 인물이 하난 나타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모세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 여호수아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산맥이 내리달아 내리는 듯하다가 아주 중요한 인물이 또 등장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사무엘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계속 전개되고 그리고 아주 높은 산맥과 같은 거봉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사람이 구약의 최대 인물로서 모세와 쌍벽을 이루는 다윗입니다. 다윗 이후에는 이제 그렇게 커다란 선지자들의 일어남이 흔치않다가 여기저기에서 중요한 선지자들이 등장하고 다시 그 산맥이 떨어지는 듯하면서 기울어서 예수님 오시기 약 400년 동안 정경 선지자들의 역사가 그치고 이제는 그런 험산준령과 같은 거대한 산맥의 흐름이 끊어지는가? 했을 때에 불쑥 나타난 큰 산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차치하고라도 그러면서 잔잔하게 역사가 달려오다가 이제 다시 산봉우리가 시작되고 그 위에 커다란 산봉우리 하나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일어서게 되는데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역사가 잠시 주춤하고 다시 낮아지는가 하더니 이제 중요한 인물들인 속사도 교부들이 나타나고 이레네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중요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리고 다시 그 봉우리는 낮아져서 이제 작은 언덕처럼 흘러가다가 또 다시 기독교 역사에 아주 위대한 한 봉우리가 솟아오르는데 그 사람이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확언하건데 기독교 역사 이천년에 아직까지도 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봉우리를 넘어선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내려가다가 이제 중세에 접어들게 되고 그저 그만그만한 봉우리와 그만 그만한 산들이 이어지게 됩니다. 특별히 걸출한 영적인 인물들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 시대였고 알다시피 영적인 암흑기라고 할 수 있는 중세의 교회의 시대를 지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산봉우리가 급격히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높은 봉우리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마르틴 루터, 칼빈, 존 낙스, 브링거 이러한 거장과 같은 사람들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깎아 지르는 듯한 높은 험산준령들이 생겨나고 이 산맥들이 영국으로 이어지면서 청교도라는 알프스산맥에 비교될 수 있는 수많은 인물들을 낳게 됩니다. 그중에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거봉중의 몇을 꼽자면 윌리엄 에임스, 그 다음에 윌리엄 퍼킨서, 존 오웬, 토마스 구딘 이러한 거봉들이 돋아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다시 역사는 점점 기울게 되고 이 봉우리가 미국으로 건너가 최대의 한 봉우리가 태어나게 되는데 그 사람이 바로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그리고는 그 봉우리가 다시 급격하게 합리주의에 의해서 이제 멎고 다시 언덕이 하강국면에 접어들면서 평탄한 지형으로 내려오다가 영국에서 위대한 인물 한 사람이 태어나는데 그 한사람이 바로 찰스 스펄전입니다. 이런 인물들이 탄생하고 그리고 다시 20세기의 암흑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자유주의와 인본주의 그리고 신비주의 등이 판치는 혼란스러운 양상이 계속되어가고 있습니다. 잠깐 동안 설명했지만 저는 벌써 거의 약 4,000년이 가까이 되는 기독교 4,000년이 넘는 기독교의 역사를 인물 몇 사람들이 이어오면서 기독교의 역사, 멀리 나아가 여호와의 종교의 역사까지 설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바다를 좋아합니다. 바다에 가보면 큰 파도치고 바람 부는 날이 제일 멋있습니다.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바람이 불고 삼킬 듯이 집채 만한 파도가 바위를 때립니다. 그러면 어마어마한 물거품들이 하얗게 토하듯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겨난 물거품 가운데 10분 이상 파도위에 머물러 있는 물거품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사는 방법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상품과 같은 인생이고 또 하나는 작품과 같은 인생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홍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아침에 숙소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가 배달되었습니다. 펼쳐서 읽어보니까 머리기사가 한국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흥미가 있어서 잠깐 들여다보았더니 제목이 그것이었습니다. ‘한국이 쓰다 버린 인터넷을 세계가 쓴다.’ 그러면서 한국은 2012년까지 전국을 1㎇/Sec 1초에 1GB를 전송할 수 있는 그런 Cable을 설치하고 광속보다도 빠른 그런 인터넷을 즐기려고 한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격세지감이 있지요? 어느 날 제가 신대원을 다닐 때 교수님댁에 갔습니다. 교수님이 새로 산 당신의 노트북을 자랑하셨습니다. ‘김전도사님 이 노트북은 미국에서 내가 새로 사왔는데 용량이 어마어마해?’ ‘얼마인데요?’ ‘이 총용량이 80㎆야!’ 지금은 아마 웃을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 모두가 입을 쩍 벌렸습니다. 그때는 노트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간신히 제가 가지고 있었는데 20㎆짜리였습니다. 입을 쩍 벌렸습니다. 지금은 요만한 스티커 하나에 8㎇까지 담기는 그런 시대가 되었으니 우스운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노트북이나 이런 것들은 상품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으면 계속 값이 떨어집니다. 더 좋은 것이 나오면 옛날 것들은 아무 가치가 없어서 밖에 내어놓아도 그냥 안가지고 가고 돈을 동회에 내고 거기다가 딱지를 붙여야지만 겨우 들고 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흐르고 모조품이 많이 나올수록 인기를 끄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입니다. 그런 작품들은 작품이기 때문에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가도 세월이 흘러가고 비슷한 것이 아무리 많이 나온다는 이유 때문에 값어치가 떨어지는 법이 없고 오히려 모조품이 많이 나올수록 진본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끝없이 가격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할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알기로는 여기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회를 지망하는 사람들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복음사역을 꿈꾸고 이 기독교 신학대학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자, 여러분들은 앞으로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겠습니까? 상품과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작품과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작품과 상품의 차이는 뭐냐 하면 상품은 기술자들이 하나의 기계에다가 수없이 찍어낸 것입니다. 작품은 그렇게 찍어낸 것들 중에는 작품이 없습니다. 우리교회에 영국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자매가 있는데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 와서 연주를 할 때 스트라디바리를 가지고 연주를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물어보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가느냐고 하니까 45억이라고 합니다. 바이올린 하나에 말입니다. 뭐 그렇게 놀랍니까? 이런 바이올린은 값이 떨어질 가능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에 정해진 숫자가 있고 해가 지나갈수록 못쓰는 것들이 계속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은 벌써 2, 300년 전에 기술자가 만든 것인데 한정된 수량만을 만들고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명품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기계로 막 찍어낸 그런 제품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하면 여러분 누가 이렇게 물어볼 때 ‘나는 상품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 한 십년 교회와 세상이 나를 쓰고 더 좋은 사람이 나오면 버림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이 여러분들을 상품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대량생산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량생산 말입니다. 대량생산이 되면 그것은 상품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 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본받지 말라고 하는 말이 희랍어로 ‘수스께마띠조’ 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조형물처럼 되어있는 속에다가 다이캐스팅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다가 뜨거운 쇳물이나 혹은 밀랍을 부어서 똑같은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더 쉬운 말로 하면 붕어빵 기계에다가 계속해서 밀가루를 붓고 가운데다가 팥을 집어넣고 돌리면 아줌마가 밀가루를 부어도 그 모습이고 애들이 와서 부어도 그 모습이고 누구든지 거기다가 밀가루를 부어서 굽기만 하면 똑같은 천편일륜적인 붕어빵이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본받는다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수스께마띠조 할 수 있는 길이 오직 둘밖에 없는데 하나는 세상에 의해서 수스께마띠조 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에 의해서 수스게마띠조 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우리들이 대량생산으로 특별한 하나님의 간섭이 없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빚어지지 않고 우리의 의식과 생활과 인격과 모든 것들이 빚어져 나아간다면 당장은 써먹을만한 사람이 될지 모르지만 좀 더 다른 시대가 되면 그 사람은 구식이 되어서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베토벤이나 멘델스존의 음악을 혹은 부르흐의 음악을 들으면서 헨델의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들이 시대가 너무나 변했기 때문에 이제는 이런 것들이 다 쓰레기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명곡의 의미입니다. 온 지구를 뒤흔들고 사람들을 그렇게 감동시킬 때 팔려 나가는 음반들의 유행가의 음반의 수는 명곡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명곡은 그렇게 한 해에 어마어마하게 몇 십 억 원어치씩 팔려나가지 않습니다. 그냥 꾸준히 조금씩 계속 팔릴 뿐입니다. 그런데 그 조금씩 팔려 나가는 것이 100년이고 200년이고 계속되는 것입니다. 베토벤의 운명이나 브루흐의 콘체르토 같은 것들은 아마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애청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타이타닉이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셀렌 디온이 주제가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가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음반도 어마어마하게 팔렸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선전을 틀어도, TV를 틀어도 라디오를 틀어도 온통 그 타이타닉 주제가였습니다. 일 년도 되기 전에 모두 사라져서 지금 그것을 틀어놓으면 분위기가 그렇게 촌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품과 같은 사람이 되면 나중에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하는 것처럼 똑같이 살아가면 남들보다 좀 더 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똑같은 노래를 좀 더 잘 부르느냐 못 부르느냐 목소리로 부르느냐 악기로 연주하느냐 남자가 부르느냐 여자가 부르느냐 아니면 혼성으로 부르느냐 솔로로 부르느냐 하는 문제이지 기본적인 그 곡조는 똑같습니다. 언젠가는 모두 역사에 의해서 모두 버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다가 사라지는데 사실은 역사가 기억해주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그 모든 사람들이 조금씩은 영향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고유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역사를 붙들고 그것과 씨름해서 뱃머리를 돌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성경에서 보면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시는 위대한 구원사역의 전개도 정경 선지자가 말라기로 그친 이후에 이 사람 바로 세례 요한의 출생을 기다려온 역사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요? 역사는 숨죽이면서 세례 요한 한 아이의 태어남을 기다렸고 그리고 이 아이의 태어남과 함께 잠시 멈추는듯했던 역사의 뱃고동이 울리고 힘찬 구원의 역사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이 세례 요한은 사갸랴와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이 아이는 당시의 제도권에서 교육을 받지 않고 아주 어린 시절에 광야로 보내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아이가 자라며’ 라고 되어있는 이 아이가 파이디언인데 원래는 이 파이디언이 5살 이상의 어린 아이들을 가리키는 어린이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사실 성경 여러 곳에서는 이 파이디언이라는 말이 베이비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러니 이 세례 요한은 아주 갓난아이였을 때에 광야로 보내어졌고 광야에서 누가 돌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광야에서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면서 그 속에서 미래의 주님의 일을 할 사람으로 성장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도시에서 이렇게 저렇게 공부하고 학위를 따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교육과정을 밟으면서 제도권에서 인정받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에 보내어졌고 그 광야에서 이 아이는 자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심령이 강하여지고 하나님이 그를 불러 이스라엘의 역사에 세우시는 그날까지 광야에서 그는 철저하게 준비된 사람으로 살았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이 사람이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된 것은 누가복음 3장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대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하던 시기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그에게 임하였을 때에 그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서 불타오르는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의 오심을 예고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수 있는 그런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광야의 목소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의 도래를 통하여 그리스도 오시면 그분을 맞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깊은 회개가 일어나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께서 오시자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는 많은 사람들이 역사 속에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낳다니 그 이름은 요한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이며 자기를 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라고 그렇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역사 속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위대한 인물들은 위대한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과 똑같이 태어났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과 똑같은 성장의 과정을 밟지는 않았습니다. 특별히 준비된 사람들이 특별히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날 우리 교회 청년들이 저를 초청해서 설교시간에 다 듣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누자고 그래서 갔었습니다. 그랬더니 직업, 취업, 공부, 결혼, 연애, 직장생활, 심지어는 애기를 낳고도 계속 직장을 갖는 비결 등등 별의별 질문들이 다 나왔습니다. 그중의 질문 하나가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목사님,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직업을 가져야되는데 어떤 직업을 가져야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신 소명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 몸부림치며 자신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후에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어떤 직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직업이 선택할 기회를 그대들에게 안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준비하고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직업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업이 그 사람을 버려요. 아주 쉬운 말로 이야기하면 먹고살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강력하게 도전했습니다. 내가 오늘 보다는 더 나은 내일이 되어야겠다. 하나님과 역사와 나 자신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 보다는 내일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노력하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예의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허투루 쓰고 흘려보내는 오늘 이 날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더욱이 구원을 받아서 복음 사역을 위해서 쓰임을 받아야겠다고 소망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어떻게 하든지 자기 자신이 철저하게 준비되어서 언제든지 주님이 쓰시고자 할 때에 거침없이 주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자신을 분투하며 끊임없이 노력하며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론을 이정도로 마치고 그렇다면 어떤 준비가 갖추어져야지만 정말 이 역사 속에서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을 수 있을까? 이것을 가지고 삼일동안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첫 번째로 나는 쓰임 받는 첫 번째의 준비가 신앙적인 준비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신앙적인 준비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핵심을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하는 강력한 은혜가 있어야한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좋은 운동화를 신으면 다른 사람보다 빨리 달려갈 수 있고 덜 피곤할 수 있습니다. 좋은 운동복을 입고 그리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달리면 다른 사람보다 좀 더 힘을 낼 수 있습니다. 평소에 훈련을 많이 하고 근육을 키웠으면 다른 사람보다 오래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는 방향을 바꾸어놓는 것은 운동화나 트레이닝복이나 맛있는 음식이나 달리는 사람을 위해 특별히 제조한 건강음료가 그 사람의 가는 방향을 바꾸어놓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한때 사울이라고 불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지성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때도 지성인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고 가말리엘의 문화에서 수학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설교를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광범위한 그리스 문학과 희랍 철학에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놀라운 지성을 갖춘 것이 예수를 믿고 나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도 그는 지성인이었고 역사와 신학과 그리고 유대의 종교를 꿰뚫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없었다고요? 누가 말합니까? 누가 그렇게 말합니까? 그는 뭐라고 말합니까?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불타는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었습니까?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박해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잡아 죽이고 그리고 그들을 핍박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많이 공부한들 방향이 바뀌었겠습니까? 더 잘 먹는 들 방향이 바뀌었겠습니까? 더 높은 사회인사의 후원을 받았던들 이 사람의 방향이 바뀌었겠습니까? 그 방향이 어떻게 바뀌었나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 이것은 아무래도 좀 신학적으로 설명을 드려야겠습니다. 원래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예수는 없었습니다. 이 사람의 눈에는 모든 유대교의 신학적인 전제들이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람의 눈에는 사이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중요한 계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신학적으로 구약을 올바로 알고 있었으면 예수를 만났을 텐데 구약을 비뚤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유대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라고 하는 것은 나타나 보일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들었으면 부인할 것이고 꿈이었다면 부정하면 될 터인데 살아있는 자신을 똑바로 자기 앞에 눈부신 빛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들릴 수 있도록 말씀해주셨습니다.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부인하려고 해야 부인할 수 없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엄청난 신학적인 혼란이 이 천재의 머릿속에서 일어났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일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그것은 신명기서에 의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것은 우리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인데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 그러면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고 살아났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인데 둘 중의 하나가 거짓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죽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확인된 사실이었고 살아난 것은 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 자신이 직접 그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 커다란 두 개의 모순된 신학적 사실이 천재인 이 사도 바울의 가슴 속에 뒤엉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말미암아 인간의 상식으로 깨달아 알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것도 사실이었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것도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문제는 죽음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사람이라면 부활시키실 정도로 하나님이 인정해주셨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도 바울은 그때에 깨닫게 된 것이 바로 대속의 교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신 것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지은 그 죄를 대속하게 하기 위하여 구원받을 자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 짊어지게 하시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대신 형벌을 받아 죽게 하신 것이니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어린 양 희생의 제사를 통해 예표하게 된 바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그의 마음속에는 찬란한 복음의 빛이 밀려들어오게 되었고 눈이 열리며 그는 저 우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영혼 안에까지 한 번에 볼 수 있는 놀라운 안목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의 출생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공부를 하고 신학을 하고 미래의 지도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을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그 만남,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분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핵심이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의 공부와 여러분들의 이 세상에서의 많은 발전들은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밖에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기독교신앙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날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고 회개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으로써는 알 수 없는 것이 구원의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성령이 그의 마음을 조명해주실 때에 그는 비로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이 세상에 알리기 위해 온 하나님의 분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욕을 당하고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거기에서 한사람이 두 가지 엄청난 사실을 동시에 깨닫게 됩니다. 그 첫째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위대한 엄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지극히 높고 위대하시고 거룩하심 앞에서 인간이라는 이 존재가 너무나 부패하고 하잘 것 없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에 의하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아주 더럽고 그리고 무가치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앞에서 떨리는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그런 깊은 두려움 속에서 벌벌 떨며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티끌 같은 존재요,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바로 그런 희망이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영영히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리고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자기 같은 사람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에 하심으로 당신의 품으로 불러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이끌리는 사랑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을 동시에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경험하게 하시는 가운데 죽었던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있는 사물밖에는 볼 줄 모르던 영혼의 눈을 떠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인 것들과 신령한 세계, 하나님 아버지의 아름다움을 보게 만들어주고 동시에 그것들을 통해서 이 모든 우주와 세계의 중심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모두 체험의 깊이는 다르지만 그런 경험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신학교에 들어오셨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풍부한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시고 나는 정말 티끌 같다는 사실과 그 티끌 같은 인간이 모질도록 주님을 대적하고 악을 행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일한 희망이었고 그래서 그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찬양)
나 같으신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 예수의 한분께 매인 신앙입니다. 그래서 오직 그분의 사랑에 매여 이전에 내가 좋아하던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포기하고 날마다 그분께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살든지 죽든지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이라는 청교도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를 많이 닮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미래의 역사를 위해 주님께 쓰임 받을 위대한 준비를 꿈꾸기 전에 제일 먼저 여러분들의 마음에 말씀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키에르 케고르 라는 철학자가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으로 유명해졌을 때 어느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최고의 인생의 고민이 무엇이고 목표가 어떤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 위대한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나의 가장 큰 목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비전을 크게 갖지 말고 그 비전 중에 제일 중요한 비전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합니다. 목회라는 것은 신앙이라는 컴퍼스로 그려낸 원입니다. 신앙이라는 컴퍼스로 그려낸 원이 목회사역이고 그 컴퍼스의 중심점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학과 모든 활동의 가장 중심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평생 사도 바울의 가장 큰 비전은 그리스도와 그리고 부활의 권능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일생의 비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미래에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철저하게 제일 먼저 신앙적인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준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의 최고의 숙제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도대체 왜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쓰임을 받고 목회를 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일까? 이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설교를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세상은 변화되고 있습니다. 교회도 바뀌고 있고 시대도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예전의 목회방식은 이제는 낡은 것이 되어버렸고 새로운 것들을 연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애써야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사랑하고 아는 것은 기본적인 것이지 그것이 어떻게 미래를 위한 준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3학년이시니까 얼마 안 있으면 교회를 하시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세월이 흘러가는 대로 물결이 치는 대로 흔들리면서 밥을 먹고 사는 것은 조금 고달픈 일이지만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도도하게 흐르는 이 불신앙의 역사 속에서 교회를 이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는 것,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피 뿌릴 각오가 되어있는 그런 교인들이 아닙니다. 교인들만 그렇습니까? 내 마음속에도 끊임없는 유혹과 도전들이 있습니다.
제가 회심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한 20평쯤 되는 교인 2, 30명 모이는 교회에서 제가 회심을 하고 그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때 새벽기도가 있었습니다. 그 새벽기도는 거의 살인적이었습니다. 4시 반에 시작하는 것입니다. 4시 5분에 첫 번째 종이 울려 퍼지면 사람들이 그 종소리를 들으며 일어나서 이제 새벽기도를 준비하고 4시 30분에 땡하고 종을 치고 그리고 새벽기도가 시작됩니다. 그때 아주 가난한 동네였는데 뚝방의 무허가 건물에 사는 아줌마가 하나 있었어요. 아줌마라고 그래도 지금 생각하니까 30대 후반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춥고 가난하던 때니까 못 먹어서 그랬는지 늙어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줌마의 일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국화빵을 만들어서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새벽기도를 나오는데 그 추운 겨울에 따뜻한 코트는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허연 스웨터에다가 목도리 하나를 두르고 몸뻬 바지를 입고 털신도 없이 그냥 그렇게 고무신을 신고 그 추운 겨울에 그 먼 길을 걸어서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교회로 오니 밤 11시가 다 되어서 노변에서 장사를 하다가 오니까 그게 보통 신앙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새벽기도를 드리는데 찬송을 부르는데 그 신앙 좋은 집사님이 방석을 깔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데 자꾸 좌로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도대체 가만히 앉아서 예배를 드리지 왜 자꾸 좌로 이동을 하나?’ 그런데 이제 설교가 끝나고 찬송을 하나 더 불렀는데 그 찬송가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맘은 연약하여 죄를 범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 인을 치소서.’ 갑자기 이 여 집사가 통곡을 하며 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방석 밑에서 오천 원짜리가 나왔습니다. 새벽기도를 나왔는데 오천 원짜리가 떨어져있는 것입니다. 그 오천 원이면 당시에 정부미 10㎏짜리를 세 부대 내지는 네 부대를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보니까 일주일을 벌어도 벌 수 없는 돈입니다. 그래서 옆으로 계속 이동을 해서 덮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찬송가를 그 찬송가를 부른 것입니다.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그리고 통곡을 하고 울면서 목사님께 용서를 빌고 그리고 기도를 해주어서 보냈습니다. 가끔 교계에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도덕하게 문제가 되어서 어쨌든 추문을 일으키고 아주 굉장히 큰 문제를 일으키고 비난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알고 보면 그 사람은 언젠가는 너무나 헌신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설교로, 강연으로 사람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철저하게 주님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이 이랬을 리가 없다.’ 아니면 반대로 아니 이렇게 너절하게 문제가 터져서 온통 추문에 휘말리니까 ‘옛날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헌신된 삶을 살았다는 것이 거짓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둘 다 사실입니다. 둘 다 다 사실입니다. 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이 그게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다 잊어버렸겠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에 희대의 사건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목사가 권총으로 사람을 죽이고 2,500만원을 빼앗았습니다. 권총을 그 시대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을 어떻게 사기를 쳤다든지 거짓말을 했다면 말이 되는데 목사가 어떻게 사람을 쏴서 죽이고 2,500만원을 빼앗는가 말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체포당했습니다. 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 교단의 목사님이었습니다. 체포당했습니다. 심문을 하는데 ‘왜 돈을 훔쳤느냐?’ 그 동기에 있어서는 더 황당했습니다.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서 훔쳤다는 것입니다. 형사가 그게 말이 되느냐고 했더니 그 다음에 털어놓는 것이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학교를 다닐 때는 자기보다 훨씬 못한 친구들이 엄청나게 큰 교회를 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이렇게 찌그러진 인생을 사는 것은 교회당 건물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이 위대한 사도 바울이 자기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들을 다 그리스도 예수께 인도하고 나는 버림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노라.’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왕년에 신학교에 와서 이렇게 신학을 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고 그 고생스러운 전도사생활을 하면서 이 신학의 길을 걸어갈 때에 그때에 왕년에 주님을 그렇게 안 만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도 많이 고생을 했고 지금 다른 일은 다 자신이 없어도 고생하는 것은 자신 있습니다. 13년 동안 교육전도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다닐 때에는 한 달에 교회에서 월급으로 70,000원을 주었는데 학교 등록금은 한 학기에 450,000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로부터 다만 200,000원이라도 봉투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에는 소고기하고 돼지고기를 구별할 수 있는 미각을 잃었습니다. 그래가지고 어느 집사님이 어느 날 만났는데 교회에서 살았는데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습니다. 얼마나 추웠는지 잊히지 않는 것이 밤에 조갈이 나서 물 한 대접을 머리 위에 놓고 잤는데 신혼 때였는데 밤에 자다가 너무 추운데 목이 말라서 물을 먹으려고 그랬는데 물이 쏟아지지 않아요. 그래서 눈을 비비고 보니까 땅땅하게 얼었습니다. 옆에서 새색시가 잠을 자는데 콧김이 계속 하얗게 나옵니다. 코는 새빨개졌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몸부림치면서 삽니다. 그것이 주님을 만난 은혜가 없으면 어떻게 그런 길을 걸어가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평생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럽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 속에 옳지 않은 것이 수없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언젠가 그 성경을 희랍어로 읽으면서 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에스타오로마이’ 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이 현재완료입니다. 옛날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지금까지 계속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여러분들은 아직은 나이가 있으니까 실감을 못하겠지만 세월이 좀 더 많이 흘러보십시오. 그러면 사람이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 얼마나 변하는지 깨닫게 되고 아마 여러분들끼리도 20년 후에는 죽어라하고 전화를 해도 못 만나는 사람들이 이중에 나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맨 처음에 겸손함을 잃어버리는 것은 너무 쉬운 일입니다. 그러지 못하도록 자기를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붙들며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왕이든지 위대한 학자든지 그리고 위대한 선교사든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그냥 용서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래서 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눈물을 흘립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라는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의인은 없고 죄인들만 있습니다. 한 종류의 죄인은 아직 용서 받지 못한 죄인이고 또 한 종류의 죄인은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올바른 일을 하면서 길을 걸어가다가는 수많은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역경을 만나고 때로는 올바른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핍박을 받기도 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때에도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안다면 고난을 받을 때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마다 그분을 생각하면서 그래서 나의 고난을 그분의 고난에 투사하여 그래서 그분의 죽음이 내 속에 스며들어 그분과 함께 나는 죽고 그분과 함께 나는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입니다.
저는 일곱 명의 성도들과 함께 지하실에서 개척을 해서 17년을 지내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짧은 세월이지만 어떻게 보면 또 굉장히 긴 세월 같습니다. 왜냐하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유례없는 복을 하나님께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17년 동안 있으면서 가슴 아픈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교회에서 성도들이 막 조직적으로 목회자인 나를 괴롭히고 박해하고 심지어는 내쫒으려고 하고 그런 적은 없습니다. 하긴 언제든지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아마 누가 내쫒으려고 했으면 내쫒기 전에 내가 먼저 도망을 갔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그러셨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길이 쉬운 길이었느냐고 누가 물어보면 나는 전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배고픈 적도 없었고 또 예수를 믿는다고 동네사람들에게 모질게 박해를 받은 적도 없었지만 한 교회를 지키고 있는 것 자체가 끊임없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칠 때마다 그것을 이기면서 17년 동안 살 수 있었던 유일한 비결은 오직 하나입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는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주님도 언젠가 나를 위해 고난을 다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맨 처음 이 길에 들어설 때에 영광을 바라고 들어선 것이 아니고 칭찬을 받으려고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 내 육체에 채우려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고난 받을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리고 정말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예수가 사신 것이라고 고백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주님이 불러주신 것입니다. 신앙이 없으면 지킬 수 없습니다. 많이 공부한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 강하게 붙들린 사람이 아는 것은 좀 모자라고 학식은 좀 부족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면들이 있어도 오직 예수,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신 그 큰 사랑 앞에 붙들려 나를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죽으셨으니 이제 살아있는 나의 목숨은 주님의 목숨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난번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되었을 때에 거기에 UDT대원들이 특수작전을 펼쳐서 사람들을 모두 구해내고 그리고 해적들을 제압한 감동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것을 지휘했던 사람이 UDT의 소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총상을 입었습니다. 그 작전은 성공하고 자신은 총상을 입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아프지 않았습니까? 피격을 당하는 순간 두렵지 않았습니까? 작전명령이 떨어졌을 때 가족들 생각은 나지 않았습니까?’ 그때 그 군인의 대답이 한 주간 내내 내 마음을 울렸습니다. ‘군인이 된 그날부터 저의 목숨은 조국과 민족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다음 주일날 교인들에게 눈물로 물었습니다. 과연 우리보고 고난을 당하고 위험한 일이 있을 때에 거기에 우리들이 헌신하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에 누가 두렵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여러분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날부터 이제까지 저의 목숨은 우리 예수님과 교회의 것이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군인으로 태어나서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으면 그것이 신자로서의 최고의 영광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세상은 변해갑니다. 저의 시대도 새로운 시대였고 여러분들의 시대에는 더 바뀐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목회방법도 필요하고 새로운 지식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의 십자가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붙들려 살아서 주님께 준비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라 2 (2011.3.3 대신대 개강수련회)
2.지성적 준비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눅1:80)
녹취자: 김경애
복음성가를 보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 무디가 만들어내서 보급한 복음성가의 수입이 일 년에 수십만 달러였습니다. 1900년대 초에 수십만 달러면 지금으로 따지면 수억 달러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천만 달러가 넘는 돈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무디는 순수하지 못하다. 결국은 자기가 그렇게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보급한다는 미명아래 찬송가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냐?’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는 한 번에 잘라버리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모든 저작과 출판을 포기했습니다. 그 돈을 받아서 무디가 자기가 가진 것이 아니라 복음사역에 썼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가 보기에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무디가 아니라 문둥이였습니다.
저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주님을 영화롭게 했던 지성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그중의 한사람이 바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18살 때 호르텐시우스를 읽으면서 예지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후 여러분들이 아는 바와 같이 그는 마니교의 그릇된 사상에 빠졌습니다. 지금 보면 마니교라는 것이 그저 이단에 불과했지만 그 당시로써는 최고의 지성인들이 믿는 종교와 철학을 혼합한 체계였습니다. 그래서 아돌프혼하르낙 이라는 독일 역사가는 말하기를 인류 역사에서 우주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설명을 하나의 사상으로 종교와 더불어 통합하려고 했던 시도가 바로 마니교에서 일어났다고 평가할 정도로 당대의 최고의 지성인들은 그 마니교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모니카 여사의 눈물어린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끄러지고 미끄러졌고 그리고 지혜를 구하다가 그는 그릇된 지혜에 빠져버렸습니다. 마니교에 깊이 빠져서 사상에 심취했지만 그것으로써 그의 영혼이 만족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마니교를 가지고 좀 더 연구를 하기 시작했을 때에 거기에는 이상하게 설명될 수 없는, 대답할 수 없는 많은 의문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마니교를 떠나기 위해서 이런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니교신앙에서 모르는 점들을 확실히 알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았고 마니교의 교도들이 이분화 되어있는데 하나는 천도자라는 평신도들이고 위에는 뽑힌 자들 이라고 하는 소위 교역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천도자들 뿐만 아니라 이제 뽑힌 자들과도 교제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게 밀라노에서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자신이 아무리 물어보아도 사람들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마니교의 최고의 지도자를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포르투나투스 라고 하는 사람을 손꼽아 기다렸고 드디어 만나서 그분에게 물어보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너무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부터 그는 이 마니교의 사상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제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회심한 이후에 그는 성경에 착념하면서 마니교의 오류들을 찾아내기 시작했고 그래서 그는 그 마니교도 들과 논쟁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격파해나갔습니다. 지금도 역사적인 기록에 남아있는데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논쟁을 했다는 그 모든 속기록들이 다 남아있습니다. 한 6개월 동안 저는 그 마니교논쟁의 원자료들을 읽으면서 깊이 감동받았습니다. 마지막에는 마니교의 큰 지도자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질문과 답변 논쟁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들까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참된 기독교 신앙의 사수를 위해서 우리의 지적인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 그림과 같은 사건이 1519년 7월 4일부터 14일 사이에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있었습니다. 이때에 역사적으로 이때는 바로 마르틴 루터가 존 에크라는 인문주의자와 논쟁하던 시기였습니다. 인골쉬타트 대학의 교수였던 에크는 논제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에 마르틴 루터의 개혁사상에 대해서 오벨리스크라는 제목으로 그의 의견을 공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벨리스크는 이 십자가 단검의 표시인데 원래 이 오벨리스크는 호메로스의 작품들을 사본 비평을 하다가 원본에는 없는 의심스러운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사본학자들이 표를 매겨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벨리스크라는 이 책 제목은 루터가 95개 조항을 내걸고 개혁신앙을 외쳤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는 의심스러운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마르틴 루터는 곧바로 책을 한권 집필하였는데 그 책의 이름은 ‘아스테리크’ 라는 책이었습니다. 그것은 별표 모양으로 된 사본학의 표시인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천재적인 기억력과 폭포수와 같은 달변, 섬뜩할 정도의 통찰력을 가진 정신의 소유자이자 전문적인 논쟁가인 이 사람과의 논쟁에서 유능하게 참된 개혁신앙에 대해서 변증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만약에 루터가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루터에 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있습니다. 그분이 다니던 학교에 가서 제가 그분의 성적이야기도 들었는데 대학에 다닐 때는 그렇게 별로 공부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대학원에서도 그냥 잘하는 편이었지 천재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그는 학문을 위해서 꾸준히 연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수도사인 시절에 히브리어를 공부하고 싶었는데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을 때에 세 시간 거리에 있는 어느 선배 수도사가 히브리어의 도사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분을 뵈옵고 공부를 가르쳐달라고 간절히 청합니다. 가르쳐주겠다고 그랬을 때에 일주일에 한 번씩 마르틴 루터는 세 시간을 말을 타고 달려와서 공부를 했는데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칠 때에 이날은 마르틴 루터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비를 모두 맞고 공부하러 온 것을 보고 이 수도사가 감격을 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헛된 논쟁에서지지 않고 기독교 신앙을 파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존 에크와의 논쟁에서 결국은 루터에 대해서 어느 증인이 이러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중간키에 걱정과 연고로 마른 몸이라 살갗위로 드러난 뼈들을 거의 셀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제 한창 나이이며 음성이 또렷하여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학식이 풍부하며 성경을 잘 알고 있었다. 희랍어와 히브리어의 정통하여 성경에 관한 여러 해석들을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다.’ 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1703년 존 웨슬리와 같은 해에 태어나서 뉴잉글랜드의 위대한 신앙의 부흥을 위해 쓰임을 받았던 미국의 신학자요 목회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탁월한 지성인이었습니다. 당시 회중교회의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교육을 받았고 세 살 때부터 자신이 사유한 내용을 글로 쓰도록 연습하였다고 합니다. 6살 때 최초의 논문을 발표했고 8살 때에는 유물론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 밝혔습니다.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예일대학에 입학할 때에는 이미 히브리어와 라틴어, 희랍어를 마스터한 가운데 입학했고 4년 뒤에 예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학원과정에서 더 공부한 후 2년 뒤 예일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는데 그때 나이 18세였습니다. 뛰어난 설교자로서 뉴잉글랜드 안에서 침체되었던 신앙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대각성과 부흥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문필가로 청교도적인 칼빈주의 사상을 뉴잉글랜드에 심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탁월한 신앙과 함께 학문적인 준비에 철저히 자신을 기울여 노력한 결과였습니다. 당대에는 뉴턴이즘이 일어나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16살의 나이에 대륙에서 발간되는 과학 잡지의 ‘거미에 관하여’ 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그리고 그는 당대에 누구보다도 목사로서 뉴턴의 물리학을 가장 탁월하게 이해했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의 이단뿐만 아니라 당시에 노도와 같이 밀려들어오고 있는 계몽주의 사조와 더불어서 전투적인 자세로 용사와 같이 싸우면서 기독교신앙을 지켰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제네바에서의 종교개혁을 위해서 섬겼던 순수한 말씀의 증언자들 가운데는 세 사람이 출중하였습니다. 프로망과 비레와 그리고 화렐이었습니다. 1536년 스위스 로잔에서는 종교회담이 개최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과 가톨릭신학자들 간의 이러한 회담은 토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고 그 도시의 지도자들조차도 무엇이 맞는지 헷갈렸기 때문에 양측을 모두 불러 논쟁을 하고난 후에 그 결과에 따라서 이 한도시를 개혁파 쪽으로 넘어가게 하든지 혹은 개혁파를 매장하고 가톨릭을 계속 따라가든지 하는 그러한 중요한 결정적인 시기였습니다. 양측의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이제 화렐의 초청으로 그 회담에 참여했던 칼빈이라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회담이 진행되는 처음 사흘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학문은 좀 못했지만 화렐과 비레가 그들을 상대로 토론하도록 칼빈은 겸손하게 뒤로 물러나있었습니다. 나흘째 되던 날 그 신학토론의 주제는 성만찬이었습니다. 가톨릭 측의 유능한 변론자인 리마르 라는 인물이 등장해서 자신이 준비한 연설문을 주의 깊게 읽어나갔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와 하나님의 영광을 받은 교부들의 교훈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바로 그때에 마른 체구의 창백한 얼굴의 젊은이 한사람이 일어나서 온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은 채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그 가톨릭의 유능한 변론자에게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우리의 칼빈이었습니다. 뜻밖의 인물의 출현에 의아해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칼빈을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거룩한 교부들에게 명예를 돌립니다. 우리 중에 당신보다 교부를 더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부들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도록 조심하여야할 것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존경한 교부들의 저작을 좀 더 철저하게 읽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당신에게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당신이 교부들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를 했더라면 그들의 저작 중 어떤 구절은 당신에게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라고 갈파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준비된 원고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칼빈은 가톨릭 측에 의해 제기된 여러 가지 신학적인 의견들에 대해서 조목조목 나열하며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반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그의 연설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칼빈의 모든 논거들은 철저히 교부들로부터 이끌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소위 개혁파 신학자들이 무시한다고 비난하던 교부의 글들을 통해 가톨릭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이토록 궁지에 몰리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칼빈은 먼저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견해를 인용한 후 주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희랍교부 크리소스톰의 것이라고 밝혀진 설교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상은 요한 크리소스톰의 무슨, 무슨 설교 11장 중간부분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을 인용했습니다. 23장 마지막 부분에서 그리고는 마니교도인 아디만투스를 반박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에서 또한 부분을 인용하며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의 중간부분에 있는 내용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편 98편의 주석에서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으로부터 인용했습니다. 그렇게 인용한 후 그는 말했습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복은 설교의 시작부분인데 아마 저의 말씀드린 이 내용은 8번째 설교문 아니면 9번째 설교문에 나오는 내용일 것입니다.’ 이미 상당히 긴 시간이 흘렀으나 이 젊은 칼빈에게는 고대 교부들의 수많은 저작들로부터 자기네 의견을 개진해나가는 증빙자료로써 그것들을 인용하고 주석하는 일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능숙하게 인용하고 주석해 나아가는 자료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거기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 교부의 저작을 자신들이 신성시하고 있다고 믿는 그 사람들에게도 낯선 저자들까지 동원되었습니다. 토론되고 있는데 문제에 관한 복음주의적인 해석을 입증하기 위하여 칼빈은 아직도 언급되지 않은 방대한 양의 자료들을 엄청나게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기억 속에서 말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집사 신앙록이라는 책에는 이렇게 적혀있고, 다루다누스에게 라고 제목 붙여진 아우구스티누스의 서간론에는 이렇게 붙여져 있습니다.’ 라고 이렇게 언급해가면서 칼빈은 이 모든 것을 암기하며 대답했습니다. 원고도 없이 책도 없이 그는 자기의 정리된 기억 속에서 모든 것들을 이끌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어느 한사람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발표하는 자신의 신앙에 의하여 확신되고 성령에 의하여 칼빈 자신이 감동되고 있는 거룩한 성경의 진리가 학문을 도구로 하여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천부적인 기억력을 통하여 참된 신앙에 대하여 제시되고 있는 비할 데 없는 이 위대한 학문적인 증언들을 들으면서 가톨릭과 개혁파 신학자들은 양측 모두 숨을 죽였습니다. 자신의 고발과 비난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선포하였던 가톨릭의 연사는 이 작은 체구의 창백한 젊은이인 칼빈이 두 눈을 자신의 눈에 고정시킨 채 다음과 같이 승리에 찬 발언을 계속하고 있을 때 그는 완전히 오그라들어버리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교부들에 의하여 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여러분들의 주장은 무례하고 뻔뻔스러운 것이 아닌지 한번 스스로 판단해보기 바랍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당신 자신을 교부들이 쓴 저작의 껍데기도 못 읽어본 사람이라고 인정해야 될 것 같습니다. 만일 당신과 당신보다 앞서 연설했던 사람이 한번이라도 교부의 저작들을 통독했다면 현명하게 침묵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한 수 한 수 밀리다가 마지막에 신학적으로 외통수에 몰리고 말았다는 패배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그것도 자신들이 잘 안다고 자부하던 교부의 저작을 통해서 말입니다.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한 좌중 가운데 칼빈은 토론의 결론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려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부터 은혜에 의하여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진리와 사실 안에서 우리를 결합시켜주는 영적인 교제, 우리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주는 영적인 연합, 이것은 영적인 끈 곧 성령의 줄을 통하여 연합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의 의미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칼빈은 자리에 앉으면서 장시간의 연설로 말미암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완전한 침묵이 그 예배당을 가득 메웠습니다. 이 연설 중 신학적인 이해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일부분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회중들조차 지금 이 젊은 신학자 칼빈에 의해 무엇인가 진리에 대한 결정적인 증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 측의 사제들은 경악에 가득한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고 감히 자신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 유능한 변론자였던 리마르나 꿀로드불롬쉐즈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마침 그때 한 프랑시스칸 교단의 탁발수도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대중들에게 인기를 모으던 유능한 가톨릭의 설교자였고 개혁세력을 반대하던 설교자의 신명을 받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장땅띠 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때였다면 그처럼 웅변적인 설교로 온 교회당을 뒤흔들어놓았을 이 유능한 가톨릭의 설교자는 창백한 얼굴로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의 혀는 그의 목구멍에 붙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충격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바 성령을 거스르는 죄라는 것은 명백한 진리에 반하는 완고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들은바 연설을 따라 내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나는 그동안 무지 때문에 오류 속에 살았고 잘못된 가르침을 많은 사람들에게 퍼트렸습니다. 내가 그동안 무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거슬러 말하고 행하였던 모든 것에 대해 나는 우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백성들도 내가 지금까지 가르쳐온 잘못된 것들에 대해서 나를 용서해주도록 구하는 바입니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와 그의 순순한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성직의 옷을 벗어버리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날 거기에 모인 양측의 토론자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고 직감적으로 그날 칼빈의 연설이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가톨릭의 수도사들을 회심시켰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토론이 끝난 후 그 다음날 아침 로잔은 개혁신앙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매춘소굴은 모두 패소되고 창녀들은 추방당했으며 종교회당 역시 구체적인 결실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매일 그 지역의 성직자들이 개혁신학을 찬성하는 입장을 발표하였고 수도 사역을 하던 80명의 사제들과 수도사 서약을 아직 하지 않은 120명의 사제들이 수개월내에 개혁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 중에서는 로마 교회의 가르침을 가장 완고하게 고수하던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토록 칼빈 앞에서 개혁신학을 비판하던 리마르라는 사람까지 포함되어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칼빈의 철저한 학문적인 준비를 통하여 가능했던 것입니다. 파리에서 이 사람이 공부를 했을 때 그는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교부들의 저작을 읽었고 그는 매일매일 그 공부한 내용을 암기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아침에 일어나서는 그 암기한 것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자신에게 발표해보는 시간을 가졌답니다. 그리하여 22살쯤 되었을 때는 유럽의 최고의 젊은 지성인이 있다면 칼빈이라고 하겠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까지 자신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은혜로운 복음 사역 한가운데서도 언제나 무질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이 무질서를 정돈하고 참된 진리를 보여 질서를 잡아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목회자로서 철저하게 학문적으로 준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신학적인 식견으로 무장되는 이것은 영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실제로 제네바에서 그런 원리가 입증되었습니다. 기로로메 화레는 불같은 정신을 소유한 개혁자였습니다. 교황제도의 폐단을 정죄하고 명백한 명령과 지시를 통해 종교개혁을 진척시켜나갔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이런 개혁정신을 움직인 사람은 요한 칼빈이었습니다. 칼빈의 신학지식은 영적인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고 새롭게 태동한 교회에 형태를 부여하며 개혁신앙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명백하게 정리함으로써 사실상 종교개혁을 위대하게 마무리하였던 것입니다. 칼빈의 이런 도움이 없었더라면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결코 성공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모두 칼빈처럼 된다거나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일생동안 학교선생님이 되어서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일생을 보낼 사람도 있고 목회를 하거나 선교를 하거나 평신도 지도자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 자체는 목회사역에서 문제가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지식을 쌓는 일에 있어서 게으른 학문에 대한 태도는 두고두고 그의 학문뿐만 아니라 신앙에도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이 부지런히 온 마음을 다해서 학문을 위해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강력하게 여러분들에게 충고하는 바입니다.
(찬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아는 것,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아는 것,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아는 것
열심히 공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타고난 이성의 능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젯밤에도 숙소에 있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는 천재로 만들어 주시지 않으셨을까? 천재의 삶이 불행하다고는 하지만 나는 행복하게 백년을 사는 것보다 천재로 5년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아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이 탁월한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잘 가르쳐줄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날 울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고 나는 누구인데 이 사람은 이런 탁월한 천재성을 주시고 나는 그 천재들이 쓴 것을 겨우 이해하는 것도 힘들 정도의 둔재성을 주셨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대답을 안 해주시더라고요. 나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말하는데 부지런하셔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부지런해야 되느냐하면 6시간 이상씩 자는 것은 죄입니다. 여러분들이 젊은 나이에 소비와 휴식에 일찍 눈을 뜨면 여러분들의 인생의 미래는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나이 드신 분들이 무엇인가를 좀 누릴 때 젊은 나도 그것을 누려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소비에 그렇게 빨리 눈을 뜨면 안 됩니다. 나이가 들면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죽음의 그림자가 들어와요.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음식도 약간 나은 것을 먹으려고 하고, 옷도 좀 더 따뜻한 것으로 입으려고 하고, 그리고 잠도 조금 더 편한 곳에서 자서 자기의 생명의 기운을 보존하려고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젊은이들이 본받아서 일락의 기회로 삼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아무데서나 쓰러져서 자고 아무것이나 드십시오.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게 잘하던 아멘을 이 대목에서는 안합니까? 아무데나 쓰러져서 자고 아무거나 먹고 아무거나 입으십시오. 그 대신 아무거나 알지 말고 알아야 할 그것을 놓고 온전히 몰두해야합니다. 여러분들 요새 아이 폰을 가지고 어디가든지 들여다보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제가 60권이 넘는 책을 썼답니다. 나도 안 세어 봤습니다. 그래도 지금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러겠지요? 저 목사님은 인터넷에 얼마나 익숙할까? 일 년에 인터넷에 체류하는 시간이 10시간이 안됩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이 안 믿겠지만 누가 나보고 ‘목사님 사진 좀 보내주세요.’ 그러는데 그게 무슨 소린지 몰라서 아직까지 못 보내고 있습니다. 나도 머리가 있는데 한 15분 배우면 못하겠습니까? 내가 배우기를 거절합니다. 여러분 아직까지 내 개인소유의 디카가 없다면 여러분은 믿으시겠습니까? 가족용으로 하나 사다주었는데 나는 아직까지도 그것을 찍을 줄은 아는데 찍은 것을 어떻게 보는 줄도 모릅니다. 내가 쓴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끊임없이 공부하고 사유하기 위해서 몸부림치기 위해서는 남들이 즐기는 모든 것을 다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온전히 매달려야합니다. 그래서 공부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그럽니다. ‘여보, 당신 몸 상하니까 제발 공부 좀 그만해요. 우리 집은 왜 공부를 하라는 애들은 안하고 하지 말라는 남편은 하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내가 이야기했습니다. ‘여보, 내 얘기 잘 들어. 나는 책을 대할 때마다, 성경을 대할 때마다 나는 껍질밖에 없는 사람이야. 나는 아무것도 내용이 없는 사람이야.’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진리라는 것에 대해서 워낙 무지하기 때문에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로 목회를 하는데 그래서 나의 공부는 마치 들통을 지고 갱도로 내려가는 석탄을 캐는 광부와 같습니다. 그래서 내려가서 남들이 놀고 남들이 쉴 때 새카맣게 코에 탄가루를 묻히면서 열심히 캐내서 그것을 가지고 힘들게 갱도 위로 올라와서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성도들에게 주일이면 거기다가 말씀의 떡을 구워주는데 그것조차도 만약에 하지 않는다면 일주일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목회자가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진리를 나누어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공부하다가 눈물이 참 많이 납니다.
(찬양)
넘치소서.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치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그러나 여러분 목회자라는 이 직업은 정말 고달프고 그리고 어려운 직업입니다. 출근시간도 없고 퇴근 시간도 없고 그 다음에 교회 일하고 내일 하고 구별이 안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목회를 해서 교인들이 늘어나지 않으면 그것 때문에 마음을 졸이고 괴로워하고 교인들이 늘어나면 그 힘든 교회의 건축과 이 모든 것들 때문에 고뇌를 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직업들은 자기가 하는 일 한 가지에 몰두하면 되지만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건축, 금융, 인사, 경영, 경제, 은행거래, 디자인, 미술, 편집, 식음료, 청소, 빌딩관리, 교육, 유아교육, 그 다음에 상담, 가정 사역, 헤아릴 수 없는 별의별 것들이 모두 들어옵니다.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있는 일들이 없습니다. 그런 속에서 시간을 낸다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신학교를 다닐 때는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샀습니다. 일주일 내지 이 주일을 점심을 안 먹고 점심값을 모아서 ‘생명의 말씀사’에 나가서 원서 한권을 사들고 뛸 듯이 기뻐하며 돌아왔습니다. 지금은 책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장로님도 여기에 와 계시지만 책을 많이 사주는 편입니다. 일 년에 1억 8천만 원어치 삽니다. 그런데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책을 살돈이 없어서 눈물이 났는데 지금은 책을 읽을 시간이 모자라서 책꽂이 앞에서 눈물이 납니다. 이 이야기를 했더니 어느 학생이 감동을 깊이 받고 집에 돌아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했는데 ‘목사님은 책꽂이를 붙들고 울었다는데 나는 집에 가보니까 붙들고 울 책꽂이도 없었습니다.’ 책을 안 샀습니다. 굶으면서 책을 사야합니다. 신대원 졸업 할 때까지 제가 3, 4000권정도의 책을 모았습니다. 여러분 굶으면서 책을 사야합니다. 마누라 빼고 다 팔아서 책을 사요. 온 마음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놀고 싶다는 유혹은 특별히 없지만 쉬고 싶다는 유혹을 받는 적은 많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일깨워야합니다 주일날 온몸에 너무 열이 나서 덜덜 떨려서 설교를 한번 했나 못했나? 그랬더니 주일날 설교를 제대로 못하고 밤새도록 앓았습니다. 그래도 월요일 날 9시에 정확히 공부하러 연구실에 나왔습니다. 하필이면 바로 그때 기자가 와가지고 아주 그냥 신파조로 기사를 써서 내보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쉬고 싶고 그리고 시간을 좀 내어서 나 자신을 위해서 쓰고 싶을 그때에 나는 스스로 말합니다. ‘나는 고3이다!’ 고3은 뭐든지 대학을 가야 합니다. 미팅도 대학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어디를 놀러가는 것도 대학교 가서 해야 하고 읽고 싶은 책도 대학교 가면 읽는 것이죠. 그러면 그때 학교 갈 때가 언제입니까? 천당을 가면 대학을 가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무엇을 아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저 가방을 메고 주일 낮 예배 때 저 가방을 메고 항상 설교하러 올라갑니다. 몇몇 교인이 양복에는 그것이 안 어울린다고 가방을 사줄까하고 물어봅니다. ‘나는 가방 많다.’ 그런데 내가 저 가방을 메고 올라가는 이유는 뭐냐 하면 가방을 메고 올라가면서 ‘나는 공부하다 온 학생이다.’ 설교가 끝난 후에 교인들이 은혜를 많이 받을 때도 있잖아요? 그것을 메고 내려갑니다. ‘나는 위대한 설교자가 아니라, 감화를 끼치는 훌륭한 설교자가 아니라 공부하는 학생일 뿐이다. 이제 설교가 끝났으니 다음 설교를 위해서 공부하러 가자.’ 그러면서 저것을 메고 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합니다.
여러분들은 저보다 훨씬 젊고요, 이 젊을 때에 이 젊음은 30년 후에 갚기로 되어있는 지불만기의 어음과 같습니다. 지금 만약에 여러분들이 마구 젊음을 낭비하면 제 나이쯤 되었을 때에 여러분들은 이제 수표가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만기된 약속어음이 돌아오기 시작하는데 그때 여러분 파산합니다. 나는 허세를 부리는, 허세와 위선을 부리는 목회자들을 만날 때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에 있어서 진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모든 위선과 허위와 거짓을 버리고 실력 없이 진실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실력이 없이 진실해진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온 마음을 다해서 공부하십시오. 언제든지 여러분들에게 세 가지를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하십시오. ‘성경은 어디를 읽고 있습니까?’ 두 번째 ‘가슴이 시리도록 하나님 앞에 눈물로 매달리는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요즘 무슨 신학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습니까?’ 라고 물을 때 아주 분명하게 대답할 말이 있어야합니다. 절대 컴퓨터나 매달리고 그것이나 두드리고 있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 같으면 대담하게 컴퓨터를 마당에 놓고 도끼 갖다가 박살을 내면서 말의 모가지를 자르던 김유신처럼 말입니다. 중독성이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컴퓨터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노라.’ 그리고 집어치우세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핸드폰이나 가지고 장난이나 하고 그래서는 절대로 신령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그 바람을 맞으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무릎은 기도하면서 닳고 팔꿈치는 공부하면서 닳아야합니다. 한번 책상에 앉으면 얼마나 공부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한번 책상에 앉으면 몇 시간 동안 안 일어나느냐가 문제입니다. 제가 학생들을 가르쳐보니까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머리가 좋거나 많은 시간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다가도 한번 앉으면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각오를 하고 ‘열 시간 이내에는 내가 안 일어나겠다.’ 하고 오강을 하나 갖다놓고 그리고 먹을 것 갖다놓고 그리고 물하고 빵 한 덩어리면 되잖아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아무거나 먹고 아무데서나 자라고 그랬잖아요. 그렇게 하고 매달리면서 혼신의 힘을 쏟아서 다리가 저릴 정도로 공부를 하십시오. 칼빈은 그 공부에 몰두하면서 거의 건강을 잃어버릴 정도까지 몰두했습니다. 존 오웬 목사는 19살 때 거의 죽을 뻔할 정도로까지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시대를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제발 공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인격적 준비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 1: 80)
녹취자 : 허혜숙
저는 첫째 날 신앙적 준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이는 우리 모두가 복음 사역을 위해서는 먼저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경험이 있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분께 사로잡혀서 우리 인생의 가치가 재편되고 그 가치의 질서를 따라 살 때에 바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생활이 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둘째 날에는 지적인 준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지도자가 무지한 것은 그가 이끌고 있는 공동체의 재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지한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갈 길도 잘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을 인도할 때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잘못 된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기회가 있는 이 젊음의 때에 혼신의 힘을 다해서 열심히 학문을 연마하고 탐구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기회가 옵니다. 오늘 잠을 자는 사람은 꿈을 꾸지만 공부하는 사람은 꿈을 이룹니다. 오늘 헛되게 보내는 오늘 이 하루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며칠 더 했으면 몇 개 더 하겠는데 오늘밖에 기회가 없어서 오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가 되라’는 큰 주제아래 인격적 준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자랐고 누구에 의해 양육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양육을 받았을 것임에는 틀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돌보지 아니하고 그 갓난아이 시절부터 광야에서 생존했을 리가 없고 무엇인가 공부하고 배우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화를 끼칠 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신도시를 찾아서 아파트 옆으로 교회가 옮겨가지만 세례 요한은 모래바람이 부는 광야에서 외쳤는데 도시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모두 모였습니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인파가 이 세례요한이 외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에 보면 헤롯과 이 요한은 정치적으로 서로 적수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이 헤롯을 강력하게 비판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단칼에 이 사람을 죽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이 이끌고 있는 많은 군사들이 있거나 그의 무력이 무서워서가 아니었습니다. 말 한마디면 당장 잡아서 옥에 쳐 넣을 수 있는 권력이 자신에게 있었지만 자신의 권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그의 인격의 영향력 앞에서 그는 굴복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백성들은 이 세례 요한을 참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요한을 직접 대면해 보니 그는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인격의 영향력 때문에 헤롯은 큰 권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고 그를 함부로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인 적수에게까지 인정을 받았던 세례요한의 인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에서 그 긴 세월을 지내는 동안 세례요한이 꿀이나 따먹고 메뚜기나 잡아먹고 돼지처럼 살이 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들사람으로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곳에서 성경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요한에게 임하였고 그의 마음속에 임한 그 불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오랜 세월동안 준비된 그의 인격이라는 그릇에 담겨서 한 시대를 흔들어놓을 수 있는 위대한 사역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오래 사역을 한다고 그 사람이 커다란 영향을 역사에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지극히 짧은 시간밖에 예언하지 못했지만 몇 편의 설교가 한 시대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에 살았던 모든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그리고 모든 사두개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의 영향력을 합해도 이 사람이 남긴 몇 편의 설교가 끼친 영향에는 도저히 미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빨리 선생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오면 아직 학적부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교역자 생활을 시작을 합니다. 물론 그 중에는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히고 사명감이 충만해서 그러는 사람들도 있겠습니다만 많은 학생들의 경우에는 넥타이 메고 전도사님 소리 듣는 것이 나쁘지 않아서 쉽게 교역자의 생활을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썩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학교 다닐 때 특히 학부에 있는 여러분들은 가능하면 교회에서 월급을 받고 생활을 하는데 익숙해지지 말기를 나는 부탁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은 좀 더 오랜 기간 동안 배우는 학생으로 남고 좀 더 오랜 시간 동안 교회에서 평신도로써 생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성숙해 지기 때문입니다.
청년시절에 주님의 은혜를 받고 뜨거운 가슴으로 신학교에 들어옵니다. 그렇지만 들어오고 나서 그는 즉시 교역자가 됩니다. 예전에 마음속에 불타올랐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면서 예전에는 하나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는 재미로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읽다가 무엇이라도 새로운 사실을 깨달으면 그 성경 말씀이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된다고 생활을 했었는데 교역자가 되고 나서는 무엇을 어디에서 듣든지 그것을 설교에 써먹기 위해서 사역에 활용하기 위해서 체득하는 그러한 심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에 들어와서 그것이 깊이 내려가 이 자신의 영혼을 움직이고 자신을 변화시켜서 피와 살이 된 다음 자신의 인격 속에서 이것들이 쏟아져 나와야 되는데 머리로 들어갔다가 저장이 되어서 입으로 튀어나오는 생활을 여러 해 동안 반복 하다보면 사역을 할 때쯤이면 이 사람이 직업적인 종교인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우리 교회에서 할 수 있으면 신학대학원 졸업할 때까지는 평신도로 있으면 좋겠다 했는데 그것이 너무 어렵다 해서 양보를 해서 그러면 신학대학원 2학년 때 까지는 사역을 하지 말고 공부에 올인을 하고 교회에서 교사나 구역장의 직분을 맡아서 영혼을 열심히 눈물로 돌보고, 전도하고, 성경말씀을 사람들에게 잘 가르치는 일에 익숙한 가운데 교역자를 섬기는 위치에 있거라 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 이렇게 해서 그래도 어떻게 그 때까지 참느냐고 그러는 사람에게 한 번 더 양보를 하자면 신대원 2학년 2학기 때쯤 교역자 생활을 시작해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온전히 공부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좋은 평신도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스물 한 살에 회심을 하고 방황을 많이 하다가 그 후에 변화를 깊이 받고 평신도로써 열심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저는 목회에 관한 거의 80%의 많은 방법이나 정신들을 집사로서 주일학교 선생을 하면서 이미 다 배웠습니다. 별로 다를 것이 없고 정신이나 그 모든 자세는 똑같고 다만 담임목사가 되니까 예전보다는 좀 더 많은 일을 다른 위치에서 해야 된다는 것 밖에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저의 교회는 지금 현재 28명 정도의 교역자가 있습니다. 교역자 중의 서너 명은 수습교역자이니까 교역자가 될 지 아니 될지 모르는 사람들이고 25명 정도가 정식 교역자인데 어떤 교역자가 제일 잘 하냐면 우리 교회에서 회심해서 청년시절을 보내고 그러다가 소명을 받아서 신학교에 가고 그러다가 좋은 자매 만나서 결혼을 해서 교육전도사가 되고 강도사가 되고 부목사가 된 사람들이 가장 목회를 잘 합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하나님의 말씀이나 기도 이 모든 것들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되는데 그것을 자신이 체험해 보았을 때 가장 잘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평신도로서 신앙생활에서 교회에 인정을 받았던 사람들이 교역자로서 잘 섬길 수 있고 구역장 잘 하던 여자 성도가 여자 전도사 잘 하고, 교사 잘 하던 남자 청년이 전도사 제일 잘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목회는 현실세계에서 체득되어가고 우리의 신앙인격이 성숙되어 가는데 성도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영국 청교도 역사에서 거목이라고 할 수 있는 존 오웬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사를 세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이 목회자를 교회에 세우심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르치는 말씀대로 믿고 살아간다면 어떤 사람이 될 지를 그 목회자를 통해서 보여주고 믿게 하시기 위하여 목회자를 세우셨다’라고 했습니다. 그보다 조금 전 시대의 사람인 요한 칼빈은 자기의 기독교 강요 속에서 하나님이 보다 완전한 천사와 같은 존재를 교회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 그들 중의 한 형제를 목회자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친히 주님이 모본을 보이고 또 주님을 의지하며 그를 통해 말씀을 배우기 위함이라고 설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말로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하는 그 일도 매우 어렵습니다. 저는 가끔 남의 설교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만 그 중에는 은혜를 많이 받는 설교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저렇게 설교해도 될까? 저 사람이 설교자가 아니라 정수기를 팔러 온 사람이라도 저렇게 연설을 하면 누가 샤겠나?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훈련을 받아야 할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진리에 대해서 투철한 생각을 갖는 믿음뿐만 아니라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해서 풍부히 알고 있는 지식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부지런히 독서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여러분들에게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신학대학원 학생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칼빈주의에 대해서 격찬을 들으면서 이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을 것입니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보수주의 신학을 한다는 신학대학원 학생들이 모인 클라스에 가서 게스트 교수로 제가 강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보수신학을 이야기 하길래 ‘너희들 중에 기독교 강요를 읽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라고 물었더니 60명 정도 보이는 학생들 가운데 그것도 졸업반 학생들 반인데 단 두 명만이 기독교 강요를 읽었다고 대답을 하였으니 기독교 강요 이외의 책들은 얼마나 안 읽었는지가 입증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남들이 하니까 보수주의 개혁주의 그러는 것이지 뭘 알아서 보수주의 개혁주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정말 하나의 세뇌 된 보수주의 세뇌 된 개혁주의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혁주의가 목회를 해서 장사가 될 만하니까 분위기에 함께 떠서 자기도 개혁주의를 이야기하고 칼빈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그렇게 자기 자신이 정리된 지식이 없이 개혁신학을 붙들고 목회를 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보수신학을 가르쳐놔도 밖에 나가서 목회 할 때에는 그저 꿩 잡는 것이 매라고 저 좋은 대로 아무렇게나 목회를 하고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학교에서 배운 것 아무 쓸 데가 없더라 합니다. 언제 배워 봤습니까? 또 배운 것을 가지고 언제 써 봤습니까? 언제 자신들이 배워 봤느냐구요? 언제 진지하게 공부를 해봤고 공부 한 것을 가지고 그대로 설교를 해보려고 그렇게 신학적인 설교를 시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예화집이나 들춰서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긁어모으고 여기저기 우스개소리나 긁어 모아서 사람들에게 관심이나 끌려고 하고 교회나 크게 키워가지고 교인들 타고 다니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일입니까? 본인 자기 자신이 진리에 관심이 없는데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 진리가 배어있을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제가 부탁합니다. 공부를 안 하면 소명 아닙니다. 로이드 존슨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목사의 소명을 느끼시고 계십니까? 책을 싫어하면 아마 그 소명이 거짓일 것입니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매달려야 합니다. 신학대학원 다니면서 제일 혐오하는 학생들이 시간만 나면 과자 부스러기 들고 잔디밭에 모여 앉아 농담이나 하고 자기 담임목사 욕이나 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같은 동급생인데 동생뻘인 사람이 ‘형님, 나는 요새 죽겠어, 우리 담임 목사 때문에 죽겠어,’ ‘왜?’ 어떻게 그것을 설교라고 하고 밥을 먹고 살어? 기적이야 기적’ ‘그런데?’ ‘형 나 교회 좀 소개시켜줘’ ‘왜?’ ‘나는 있지 내가 정말 존경할만한 목사님을 만나면 나 월급 안 받고 내가 오히려 월급 바치면서 교회 봉사 할 수 있어’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애야, 그렇게 훌륭한 목사님이라면 왜 너를 전도사로 쓰겠니?’ 그랬더니 ‘허긴 그래’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미친 듯이 공부해야 합니다. 제가 할 이야기가 꽉 찼는데 제가 참겠습니다. 공부 안 하기로 뜻을 세운 신학생들이 정말 많습니다. 정말 부탁이니 공부하십시오. 쓸모없는 사람들이 됩니다.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쓸모없는 사람들이 되고 다행히 그 사람이 교회를 해서 잘 안 되면 다행인데, 교회를 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신학적인 문제를 일으키든지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키든지 교회를 뒤집어 놓고 조국교회에 큰 누를 끼칩니다. 여러분, 제 이야기를 지나는 소리로 듣지 말고 한 번 도서관에서 옛날에 나왔던 신문들을 죽 읽어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이제 그냥 뭐 하나에 꽂혀서 열렬하게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떠들다가 나중에 교회가 커지고 나면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신학적으로 바르지 않다고 비판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여태까지 한 것은 다 취소 할테니까 용서해 주고 새로 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게 어떻게 취소가 됩니까? 신학적으로 잘 못된 것을 퍼뜨려서 많은 사람들을 오염시켜놓고 이제 와서 지난날의 설교는 모두 다 취소 할테니까, 그것이 취소가 됩니까? 그것이 무슨 이야기냐면 성공을 감당할 수 있는 전라도 말로 ‘깜냥’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지 정 의나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깜냥이 안 될 때 그 때에 성공하면 그 사람에게 오히려 더 큰 불행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 마음을 다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뜻을 세우고 한 학기에 한 키씩 신학지식을 읽으며 소화하겠다 라는 각오를 가지고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 안 하는 친구들하고 어울리지 마십시오.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 사람의 목회자가 교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너무너무 큽니다. 그래서 그가 옳은 것을 가르치든 그릇된 것을 가르치든 성도들은 어린애와 같아서 목회자가 하는 그것을 보면서 따라하고 그것이 옳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철저한 지식을 통해 사상적인 준비를 갖추고 갖춘 그것을 자기 속에 깊이 소화해서 이것들을 자기의 인격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종종 훌륭한 설교를 할 때 여러분들이 잘 아는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면서 ‘저것 어디에서 또 베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아마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설교자의 지적인 능력이 닿지 않는데 자신도 모르는 것을 설교하거나 혹은 그 사람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인격이 용해되어서 전하는 말씀과 하나로 합쳐져 소위 친밀성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는 설교와 그 사람사이의 괴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하는 것이 친밀성을 가지고 진리와 함께 부착 되는 가운데 설교하기 위해서는 설교하는 그 시간에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온 그의 모든 삶의 발자취가 진리와 함께 걸어온 길일 때 그의 설교는 진리를 말할 때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친밀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말씀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적용하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부패한 인격이 끊임없이 주님을 닮아 성결하게 되어 가는 내적인 변화 속에서 성장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목회자가 끊임없이 일생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연단을 받고 그 은혜로 다져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회를 이끌만한 바람직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지도력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처럼 학문을 도야하고 경건을 연마하는 것은 이렇게 신학교나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교회에서 설거지나 하고 쓰레질을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이 하찮고 값어치 없다고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되는 것은 홀로 가는 길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함께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마리의 사슴이 이끄는 천 마리의 사자보다는 한 마리의 사자가 이끄는 천 마리의 사슴들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도자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올바른 신앙의 정신을 불어넣어주고 때로는 그들을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삶을 살도록 기뻐해주고, 슬퍼해주고, 분노하고, 그리고 즐거워해 줄 수 있는 아주 뚜렷한 감정의 구분선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리더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오랫동안 교계에 있고 교역자들을 만나보면서 저는 두 종류의 리더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 종류의 리더들은 소인배와 같은 지도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속이 좁고 자기 이익에 밝고 공동체를 이끌어 갈 때에 먼 안목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에서 이끌어 가기 보다는 자기 아집과 가까운 장래의 현실적인 이익에 사로잡혀서 리더십을 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바른 말로 간하는 사람들을 멀리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만들어 놓았더니 분당이나 짓고 이런 사람들이 자신과 이익을 달리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그렇게 다투고 싸우며 온갖 분쟁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어느 신학교에서 교수님들끼리 커다란 분쟁이 있고 바깥에까지 신학적인 논쟁들이 번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커다란 진리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는 줄 알고 학생들에게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그 학교에서의 교수들의 분쟁이 무슨 원인이냐고 물었더니 어느 학생이 ‘목사님 그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테니스파하고 탁구파하고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지도자들이 되어서는 곤란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교회를 세우고 그렇게 해서 교회가 불행하게도 성공을 거둘 때 그는 마치 자신의 성공을 개인의 성공처럼 생각하고 교회를 마치 기업처럼 생각하고 자신이 그 교회의 사장이나 된 것처럼 행사를 하게 됩니다. 이런 것은 주님의 교회를 이끌어 가도록 위탁한 목회자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인배 같은 지도자들이 군자와 같은 지도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언제나 공동체를 위하여 포기할 줄 알고 그리스도의 심김의 정신이 몸에 베여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어떻게 자신이 희생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전체가 온전하게 서고 나아가서는 이 모든 세계에 있는 보편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 복음의 빛을 드러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 염려하는 마음을 가진 그런 심성 깊은 지도자들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교회와 교인들 놓고 싸움이나 하고 그런 것은 정말 옳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은 전도도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교회를 경영적으로 키워보기 위한 야망에서 그렇게 전도가 이루어지는 것들도 우리는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형 지도자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온전한 생각과 마음으로 주님의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여러분, 교역자는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게를 지고 날품을 팔아서 하루하루를 먹고 사는 사람들로부터 정치와 경제계의 거물까지도 그 사람의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아주 지체 높은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에서 하찮게 취급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사람과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들에게 여러분들이 가르치는 진리가, 여러분들이 가르치는 진리의 말씀이 소위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있어서 ‘noise’ 없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여러분들이 예절바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교역자들 가운데에는 정말 세상 사람들, 교양 있는 사람들 속에 갔었더라면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예의범절이 없는 사람들을 저는 자주 만납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환영을 받지 못하고 고통을 많이 받는데 그것을 주님을 위한 고난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그를 바라볼 때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저희 집은 원래 예수를 믿는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저희와 함께 살던 고모님들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셔서 저는 부모님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데 그 분들 등에 업혀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그 때 두세 살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집을 어떻하든지 예수 믿는 식구들은 전도하고 싶어 했고 그러다가 우리 집안 식구들이 마음이 열려서 그 교회에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우리 집에 심방을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인지 온 가족들이 마음이 합쳐져서 불신자인데도 그 목사님의 심방을 환영하게 되었고 그 전날부터 고기를 사온다, 김치를 담근다 하면서 반찬을 정성껏 잘 준비해서 목사님 일행을 심방을 맞이하였습니다. 은혜로운 설교가 끝나고 식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제 식사를 무리고 잠시 그 목사님이 ‘여러분 이제 교회에 출석하셔야 합니다’ 하고 권면만 하면 모두 교회에 나가도록 마음이 기울어졌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식사를 다 마치고 난 후에 목사님이 아랫목에서 다리를 쭉 뻗으시면서 벌리시더니 등을 벽에 기대셨습니다. 그리고는 한 모금의 물을 입에 넣으시면서 양치질을 하기 시작하신 후에 젓가락을 들어서 이빨을 쑤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가정복음화가 20년 연기되었습니다.
교역자가 되기 전에 정말 좋은 가정에서 그 예절바른 어머니 아버지 밑에서 인간으로서 풍부한 교양을 쌓고 사람 사는 이치가 무엇인가를 배운 교역자들은 몸에 베여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교역자들이 좋은 환경에서 교양 있는 부모님 곁에서 자랍니까? 어떻게 보면 험한 인생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교역자가 되는 예가 적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교육을 받을 데가 없습니다. 더욱이 목사가 되고 나면 누가 와서 감히 ‘목사님, 식사하시고 난 다음에는 두 다리를 벌리고 기대어서 이빨 쑤시지 마십시오.’라고 누가 교인들이 그런 이야기 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교역자에게 이야기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특별 가치는 언제나 보편 가치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하는데 신령한 교역자가 되기 전에 먼저 교양 있는 신사가 되어라’ 신앙을 떠나서 타종교 사람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하더라고 이 신사로서 숙녀로서의 교양과 체취가 풍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양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해 줄 정도로 루드 한 사람들은 교역자로서 적합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안 되면 돈 주고라도 어느 학원에 가서 사람 되는 예절교육을 받고 와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저에게 자기 교회 여전도사 때문에 심각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하여튼 버릇이 너무 없어서 괴롭다는 것입니다. 장로님과 목사님과 그 교회 어르신들하고 어느 집에 심방을 갔는데 제일 먼저 밥상에 턱 앉아서 아 이렇게 많이 차리느라고 수고했다고 그래놓고 젓가락으로 예쁘게 담아 놓은 생선을 제일 먼저 공격해서 막 젓가락으로 헤집어 놓더랍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열렬하게 타는 가슴으로 뜨겁게 전도하고 많은 영혼들을 구원한다면 참겠지만 꼭 그렇게 예의 없는 사람이 영역이 뛰어나다는 함수 관계가 성립하겠습니까? 목사님이 견디다 견디다 교회를 나가달라고 이야기를 했답니다. 여전도사가 될 사람들 예절을 잘 배우십시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먼저 신사가 되어야 합니다. 추후에 흐트러짐이 없이 ‘정말 교양 있는 사람이다’ 라는 그런 평가를 받게끔 그렇게 행동을 해야 합니다. 어디 예절뿐이겠습니까? 교역자의 혈기는 교회를 분쟁에 몰아넣고 많은 어려움들을 가져옵니다. 제가 집사로 교회에 있을 때인데 별로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교육 전도사가 청년들을 데리고 수련회를 갔다 왔는데 무슨 행사를 했는데 안 좋은 사진들이 나와서 교회 전체에 돌았습니다. 결혼한 젊은 전도사인데 어떻게 젊은 교역자가 수영복 차림으로 젊은 여자 청년들을 껴안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느냐고 이것은 덕이 안 된다고 말이 나왔습니다. 그 때 제직회를 하면서 시끄러울 때 그 때 어떤 사람이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와서 ‘너희들이 감히 나를 비판해? 너희들 전부 다 한 번 고소당해 볼테야?’ 펄펄 뛰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 전도사 당사자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 집어넣어 버리겠다고 펄펄 뛰니 자기가 이기긴 이겼지만 그러나 사람들 마음속에 교역자에 대한 인상이 어떻게 남겠습니까? 오히려 자신이 교회에서 비난을 받으면 무엇 때문에 이런 비난을 받게 되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돌아가신 유준표 목사님이 그런 말을 하셨습니다. 시골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데 장로 한 사람이 얼마나 괴롭히는지 죽고 싶더랍니다. 그래서 매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저 장로 좀 바꿔 주십시오. 새 사람 되게 해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했더니 어느 날 하나님이 응답을 해 주시더랍니다. ‘준표야 걔는 나도 못 바꿨다. 니가 바뀌어라’ 농담 반 진담 반 하신 말씀이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교역자의 도리이지 그것이 만약에 마음에 안 들고 억울하다고 뛰쳐나와서 교인들, 양떼들인데 양떼들한테 ‘너희들 그 따위로 하면 전부 다 감옥에 집어넣어 버릴 거야’이렇게 외칠 때 사람들이 그를 정말 목자라고 생각 하겠습니까?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 죠나단 에드워드는 자신의 글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 분도 참 고난 많이 받는 목회를 하신 분이었는데 ‘때로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보다는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말속에 우리에 대한 진실이 많이 담겨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접고 이해를 하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직선적으로 갈기는 것입니다. 그 속에 많은 진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배우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반성해야지 그렇게 혈기를 부리면 되겠습니까? 어느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어느 날 재정부 장로님한테 주의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이것이 뭡니까?’ ‘뭐가요?’ ‘사택에서 돈을 쓰고 교회에 청구가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요?’ ‘개줄 300원이라고 명세서가 들어왔는데 교회에서 목사님 사택에서 개목걸이 사는 것까지 돈을 내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기분이 확 나빴습니다. 그래서 ‘저 그럼 교회 사임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일 오후 교회에서 3시에 당회가 열렸는데 7시에 목사님 사표가 수리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통보를 했습니다. ‘목사님 사표를 낸다고 하셨는데 당회는 기쁘게 받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그 후에 얼마나 커다란 분란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반대의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혈기’ 대신 추구해야 될 것이 ‘인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계셨는데 목사님이 50이 넘으셔서 사모님이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장가를 새로 들 마음은 없으시고 교회의 옆방에 살면서 크지 않은 작은 교회에 목회를 하고 계셨답니다. 그러니 교인들 입장에서 목사님이 밥을 끓여먹는 것을 볼 수가 없으니까 식모를 하나 붙여 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특별히 직업이 없는 청년 하나를 붙여주어서 가서 목사님 아침에 밥을 해 드리고 점심은 스스로 챙겨 드시고 저녁도 좀 해 드리고 빨래가 있으면 빨래도 좀 해 드리고 이렇게 틈틈이 가사를 도와드리라고 교회에서 배려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처녀가 임신을 했습니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점점 배가 불러 온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교회로 가든지 도망을 갔을텐데 애는 무슨 배짱인지 생각이 없는 것인지 그냥 부를 배를 가지고 계속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교인들은 도대체 저 애가 어디서 임신을 해서 배가 불러 저러고 다닐까 그 사람들 속에 목사님의 애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사람들은 좋은 것은 잘 안 믿으려고 하고 나쁜 것은 빨리 믿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이 세계적인 설교자도 아니었으니 교회 안에는 그 목사님의 목회를 못 마땅해 하는 사람도 틀림없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참에 목사님을 내 쫓자고 목사님이 애기를 가졌다고 이 자매가 그러는데 이 목사님을 가만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당회에서인가 제직회에서 그 여자애를 불러서 누구 애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아이가 목사님의 아이라고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퇴직금도 못 받고 한 칼에 잘려서 노회에서는 면직을 당하고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약 5년이 흘렀을 때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결국은 이 처녀가 아이를 낳게 되었을 때 목사님만 그냥 쫓아낸 것이 아니라 이 아이까지 안겨서 교회에서 쫓아 냈고,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이 처녀는 그 때까지 교회에 계속 출석을 했답니다. 그러다가 5년 후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그 부흥회에서 이 여자아이가 큰 은혜를 받고 회개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부흥회 하던 마지막 날 온 교인이 충격을 받을 만한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사실은 그 아이가 목사님 아이가 아니라 목사님과 반대 입장에 섰던 모 집사의 아이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온 교회가 발칵 뒤집히고 당회는 그 목사님을 찾기 위해서 전국을 수소문을 했습니다. 마침 후임으로 오신 목사님이 다른 곳으로 가시고 교회가 비어있었는데 찾다 찾다가 보니까 저 강원도 어디에서 광부로 일하고 계셨습니다. 혼자서 그 아이를 키우면서 광부 생활을 하면서 아이를 길러서 그 아이가 다섯 살이나 되었을 때 당 회원들과 많은 교회의 재직들이 가서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를 하고 그 목사님을 모시고 와서 돌아가실 때까지 성자 대접을 받으면서 목회를 하셨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살다가 보면 도대체 이 목회자라고 하는 것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진리의 말씀을 외쳐서 그 진리의 말씀에 꺾어 진 성도들에게는 그 목사님의 말은 대통령의 말보다 권위가 있고 목사님의 강력한 견책은 자객들이 목에 겨누는 칼보다도 위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목사는 그저 한 인간 목사 일 뿐이고 잔소리하는 교회의 사람일 뿐이지 무슨 권위가 있겠습니까? 설교 시간에 벌떡 일어나서 ‘니가 뭔데 나를 비판 하냐?’고 이야기해도 교회가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당회 불러서 그러지 말라고 치리하는 것 밖에는 무엇을 할 수가 있습니까? 교회 지하실에 감옥이 있습니까? 아니면 사형대가 있습니까? 아니면 교인들을 후려 팰 수 있는 채찍이 교회 지하실에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세상에 보낼 때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에게는 마음의 고생과 고난이 많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도 하지 못할 때가 많고, 들었는데도 못 들은 것처럼 생각해야 될 때가 많고, 보았는데도 못 본 것처럼 눈을 감아야 할 때가 많고,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이 짊어지고 오히려 자신이 손해를 보고 인내하고 참고 그래야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고목나무를 봤답니다. 커다란 구멍이 나무에 뚫려있어서 목사님이 가다가 심방가방을 내려놓고 나무를 어루만지면서 ‘나무야, 나무야 너는 목회도 안했는데 이렇게 속이 비었느냐?’라고 했답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목회자는 힘들고 어렵다고 투정할 수도 없고 행패를 부릴 수도 없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가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죄인들을 향해 인내하신 것처럼 그렇게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깊은 고통과 번뇌, 괴로움과 실망, 배신감 같은 것들이 마음속에 역사할 때 그것이 미움으로 번지지 못하도록 자신을 깊이 다독거리며 오직 그 모든 설움과 안타까움을 주님께 쏟아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고난에서 오는 이 모든 부담감과 어마어마한 위로들을 자기의 목회사역 속에서 쏟아놓을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연들을 안고 입을 다뭅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많고 밤에 홀로 자면서 잠꼬대를 할 경우가 있을지언정 입을 굳게 다물고 오직 마음에 안타까움과 슬픔이 있으면 다윗이 그러했던 것처럼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마음의 아픔과 고통을 오직 그 분께 쏟아 놓습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오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이다
그러면서 머리 둘 곳 없었던 주님이 걸으셨던 그 배신의 길, 그 오해의 길, 그 고난의 길, 그 핍박의 길을 생각하면서 내가 오늘 당하는 이 고난은 주님이 당하신 그 고난에 비하면 티끌 같고 지금 내가 받는 이 부끄러움과 수치는 다가올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교회를 위해서 죽고 또 죽고 또 죽고 또 죽고...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어디 이러한 혈기와 그리고 그것을 부리지 않는 인내 뿐이겠습니까? 교역자의 말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저는 거칠게 그 말을 쏟아내는 상스러운 교역자들을 너무나 자주 봅니다. 농담 속에 올려지는 교양 없는 말은 차지하고라도 교회 안에서조차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렇게 독한 말을 쏟아내고 상스러운 말을 하는 그 목회자는 도대체 어디 있다 나온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것도 한국 교계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본인에게 직접 들었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증언입니다. 목사님이 아주 입이 거친 분이 있었습니다. 장로 하나가 하도 깐죽거리고 말을 안 들으니까 당회를 하다가 ‘나 장로 안하고 사표 내겠습니다’하고 사표를 던져버리고 휙 나갔는데 담임 목사님이 옳다 됐다 하고 우리 당회 다시 하자고 하고 당회를 열어서 두 시간 만에 사표를 수리해 버렸습니다. 그것이 당사자에게 들어가 버렸습니다. 저녁 때 당회를 마치고 교회 계단을 내려오는데 이 장로가 막 뛰어올라오더니 대뜸 하는 말이 ‘야 이 개새끼야 내 사표 수리했다며?’ ‘그래 이 개새끼야 사표 수리했다 어쩔래?’ 하고 있는데 문이 턱 하니 열리면서 부목사가 들어오더랍니다. ‘목사님, 왜 이러십니까?’ ‘저 새끼가 나더러 개새끼라고 하잖아’ 그랬더니 부목사가 ‘목사님, 이 새끼는 나한테 맡기고 가십시오’ 이게 무슨 조폭 이야기도 아니고 무슨 교회에서 야행시를 씁니까? 들으면서 사람들은 웃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제 마음에는 아주 부끄러웠습니다. 지나간 이야기이니까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한 사람은 목사이고, 한 사람은 장로이고, 한 사람은 부목사, 교회의 손발과 같은 지도자들인데 그 사람들이 교회 건물 안에 모여서 이 새끼, 저 새끼, 개 새끼, 이것이 어떻게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집에 가서 그런 폭력을 쓰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목회자들이 폭력을 많이 쓴다고 합니다. 이런 감정들을 절제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쏟아놓아서 피해를 주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서 우리들이 정신과 영혼이 망가진 사람들로서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 마치 씻지 않은 손으로 수술을 하는 것과 같아서 수많은 죄악의 병균들이 목회사역에 스며들게 되는 것입니다.
성실도 문제가 됩니다. 언젠가 제가 교회에 있는데 개척교회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떤 신학생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합동 측에 있는 아무 아무개 신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등록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것 참 안 됐구나’ ‘제 등록금 좀 대어 주십시오. 하나님이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저는 잘 알지도 못하는 이 학생이 그것도 여학생이 대담하게 등록금을 달라고 해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렇게 어려운데 넌 어떻게 3학년이 되도록 학교를 다녔니?’ 했더니 ‘목사님, 저는 정말 기적처럼 학교를 다녔습니다’ ‘왜?’ ‘항상 등록금이 없어서 개학 1주일 앞두고 기도원에 올라가면 항상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이번 학기에는 저 권사님이, 또 다음 학기에는 그 집사님이 등록금을 보태주셔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래,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나겠구나 내가 이번에는 네 등록금을 대어 줄테니 한 마디만 내 이야기를 들어라’ ‘네’ ‘기적으로 사는 것은 이번 학기로 마감을 해라. 그리고 다음 학기부터는 기적으로 살지 말고 상식으로 살아라’ 그리고는 그 때 벌써 17년 전인데 통장으로 30만원을 넣어주었습니다. 아마 그 돈이면 그 학교에 조금만 보태면 등록금이 됐을 정도의 돈 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기적입니까? 구걸이지. 그 긴 겨울밤을 내내 무릎이 닳도록 기도한 것도 아니고 목이 터지도록 전도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팔꿈치가 닳도록 책상에 매달려서 공부에 몰두하느라고 돈 벌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렸다면 우리는 백 번도 더 도와줘야 됩니다. 그런데 볼 TV 다 보고, 놀 것 다 놀고, 무엇 하나 마음을 기울여서 방학 동안에 혼신의 힘을 쏟은 것이 없으면서 1주일 남겨놓고 기도원 올라가서 이 길이 하나님의 길이면 등록금 보태줄 까마귀를 보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는 그것이 여러분들이 아직도 그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들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나의 쓸 것을 스스로 조달하여 텐트를 엮으며 살았습니다. 신학생이 뭡니까? 아직은 교역자도 아닙니다. 교역을 하느라고 온 방학 때 교회에 혼신의 힘을 쏟아서 봉사를 했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게으르게 삽니까?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을 죽을 때까지 이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우리 교역자들에게 철저하게 가르칩니다. 이제껏 목회하면서 우리 교인들에게 이유 없이 교인들에게 밥을 얻어먹은 적이 없고 이치에 닿지 않는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공짜라고 했습니다. 구원 이외에는 다 싫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주유소에 가서 사은품 주는 것도 나는 아주 오랫동안 안 받았습니다. 생수도 주고 그러잖습니까? 그런데 항상 이야기했습니다. 왜 이것을 주느냐 이 돈으로 차라리 기름 값을 덜 받지, ‘받아 가세요.’ ‘필요 없다. 기름이나 제대로 넣어주라.’ 요새는 좀 받습니다. 아쉽더라구요. 물휴지도 좀 받아서 쓰고...
왜 그렇게 하냐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공짜를 아주 불편하고 누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뼈아픈 이야기 하나 해 주겠습니다. 80년대 이야기입니다. 따르릉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목사님, 아무 아무개 교회 아무 아무개 목사님 좀 바꿔 주세요. 목사님 맞으시죠?’ ‘네 제가 아무 아무개 목사인데요?’ 별로 크지 않은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님이었습니다. ‘안녕 하세요 목사님, 전화를 거는 저는 아무 아무개 교회 다니는 아무 아무개 집사입니다.’ ‘네 그런데 저에게 왜 전화를 하셨나요?’ ‘목사님, 사실은 제가 여행사를 하거든요?’ ‘그런데요?’ ‘그런데 제가 10년이 되었는데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아주 큰 사업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목사님, 요즘 극동방송에 새벽에 설교 내 보내시죠?’ ‘네’ 그것이 노회에 돈을 주고 돌아가면서 목사님들이 설교를 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 그 설교를 듣고 제가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목사님 설교가 나올 때만 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짓말이거든요? 그럴 정도로 엄청난 설교가 아니었단 말이예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이 목사님이 감동을 받은 거예요. 자기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는데 교인들도 못 받는 은혜를 방송 청취자가 받았다는데 얼마나 감격적이겠습니까?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10년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던 중에 성령님이 존경하는 목사님들 50분을 모아서 공짜로 성지여행을 보내드려라’ 하더랍니다. 그래서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을 이 명단에 넣으려고 그러는데 좀 허락을 해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뭐 허락이 뭐 감사한 허락이지 이 목사님, 저 목사님 아시는 분들이 꽤 많아서 여행을 시작했는데 최고급 호텔 제일 좋은 음식, 그러면서 거기까지 따라와 가지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모든 시중을 들더랍니다. 그래서 하여튼 모일 때마다 그 집사를 칭찬하고 그 사업체가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거기 모인 50명 목사님 가운데 그 여자가 어느 교회 집사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행사가 어디 있는 여행사인지도 아무도 몰랐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인데 이제 비행기 타고 다음날 아침이면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저녁 때 우리 모두 잠깐 모여서 예배드리자고 해서 그거야 너무 좋으니까 목사들이 모두 모여서 예배를 드리려고 했는데 ‘그 동안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아무개 선생님이 지원해 주신 돈으로 이제껏 성지순례를 하셨습니다. 자, 이제 협조를 하실 것인지 계속 우리 교를 비판을 할 것인지 한 번 각자 갈 길을 서류에 써 보십시오.’ 그리고 난리가 났는데 이미 늦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상당수의 목사님들은 면직이 되고 어떤 분들은 교회도 쫓겨나고 어떤 분들은 아예 미리 달려와서 교회야 노회야 전부 고백을 하고 용서를 받기도 하고 등등 그랬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공짜의 말로입니다.
여러분, 교역을 하더라도 나중에 어떤 사람들이 될 지는 어렸을 때에 다 드러납니다. 그래서 여러분, 무순 있잖습니까? 한 번 씹어보십시오. 무 모양도 아닌데 신기하게 무맛과 똑같은 맛이 납니다. 나이가 어리고 이제 막 전도사 생활을 시작을 해도 부당한 선물이나 그렇게까지 초청해 주지는 않겠지만 생각 없이 교인들이 동정심에서 건내주는 돈이나 이런 것들을 어느 한순간에 ‘제가 이것을 왜 받아야 합니까? 저는 주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은 제가 받는 것이 도리가 아닙니다.’ 할 때에 그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고 거기에서 굽신거리고 그거나 받아서 열심히 챙기면서 그렇게 살아가면 교역자로서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야성의 정신들이 좀 먹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절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여러분들은 공짜를 싫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절대로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인가 혜택을 받으려는 그런 마음들을 온전히 버리고 교역자이기 때문에 특별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이런 생각 자체를 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또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가난하게 목회를 하면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목사가 되고 교회가 커지게 되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집니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가 야박하지 않으니까 생활 할 수 있게 마련해 줍니다. 그런 속에서 자신이 자신의 분수를 잃어버리고 지나치게 부를 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좋지 않은 자기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래서 항상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던 어린 시절을 잃어버리지 않고 여러분들이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희가 신학교를 1년에 약 열 개를 섬깁니다. 그리고 작년부터 해외에 있는 신학교까지 제가 가서 똑같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은 도대체 요즘 시대에 밥 못 먹는 사람들이 어디 있다고 목사님은 다니면서 밥을 사주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희 총신만 해도 점심때면 밥 사먹을 돈이 없어서 물을 마시고 언덕으로 올라가는 학생들이 하루에 150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거저 밥을 주겠다고 와서 먹으라고 해도 자존심 때문에 와서 먹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일만 명이 먹을 수 있는 식권을 제가 개인적으로 사비로 구입을 해서 학교에 주고 그런 학생들에게 나눠 주라고 했더니 1년 동안 다 못 썼습니다. 왜? 그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싶은데 진짜 가난한 학생들은 와서 안 받아간다고 합니다. 그렇게 가난한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것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정말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신대원 다닐 때는 얼마나 가난했는지 한참동안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구분을 할 수가 없게 된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를 갔는데 돼지고기를 시뻘겋게 볶아놓고 돈은 500원 주고 밥을 샀는데 그 식당 아줌마가 상추와 고기를 이만큼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뭐냐고 하니까 밥은 너희가 사 먹지만 이 고기는 20년 전에 졸업한 너희 선배들이 돈을 모아서 오늘 home coming day 하면서 너희들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점심을 어떻게 맛있게 먹었는지 먹으면서 그 때 저는 제 자신과 약속을 했습니다. 나도 교회를 할지 못 할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다음에 내가 만약 목회를 해서 형편이 된다면 꼭 와서 내가 누렸던 것을 우리 후배들에게 누리게 해 줘야 되겠다 약속을 했습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지금 7-8년 째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든지 모릅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돕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일들을 형편이 나아지고 나면 자꾸 잊어버립니다.
여러분들은 벧엘 성서 교재의 저자를 알고 계십니까? 그 분이 오래 전에 이름 없는 교회의 교육 목사였는데 이 벧엘 성서 교재를 쓰고 미국에서 일약 대 스타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내노라 하는 교회에서 이 목사님을 교육 전문가로 모셔가기 위해서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고 드디어 그 중의 어느 한 교회에서 거의 보쌈을 해 가듯이 이 목사님을 납치해 가듯이 데려갔습니다. 그리고는 당대의 최고의 성경교사인 이 분에게 진짜 저 푸른 초원위에다가 그림 같은 돌로 만든 집을 지어주었답니다. 일주일 쯤 지났을 때 이 목사님이 건축업자를 불렀답니다. 그리고는 이 옆에다 양철 지붕으로 헛간을 하나 지어달라고 했더니 그 건축 한 사람이 ‘아니 이렇게 이 모든 것을 다 지어주었는데 이 지저분한 것을 왜 짓냐’고 하니까 ‘그래도 내가 원하니까 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해서 양철 지붕에다가 지어주었는데 알고 보니까 이 목사님이 옛날에 목동 출신으로서 주님을 만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넉넉한 환경에 마음이 부요해 질 때가 되면 아내와 함께 그 지푸라기가 깔려있는 헛간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면서 옛날에 양들을 치고 밤중에 누워서 건초더미 위에서 구멍이 난 함석지붕 위로 쏟아지는 별빛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노래하고 하나님께 감사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겸손의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런 점에 있어서 모본이 됩니다. 비록 알미니안 주의자였었지만 이 사람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검소한 삶을 살면서 자신의 많은 수입들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고아원을 위해 흩고 또 흩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도 정말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외국사람 이야기만 하니까 그런데 한국에 옛날에 남산 위의 해방촌에 목회를 하고 계신 목사님이 계셨는데 김 예진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결국 광주로 끌려가서 모진 고초를 당하고 순교를 당하셨는데 그 이유는 모두 피난 갔을 때 이 목사님은 피난을 가는 대신 삼각산에 올라가셔서 금식기도를 하셨답니다. 그리고 금식기도를 하고 내려오는 길에 산에서 행인을 한 명 만나서 전도를 했는데 이 사람이 공산당 프락치였답니다. 그래서 결국은 체포되어서 끌려가서 그렇게 비참하게 총살을 당했는데 그 목사님이 평소 목회할 때 일화입니다. 그렇게 가난한 교인들이 많았는데 부흥회를 많이 다니셨는데 부흥회에 가서 돈을 받으면 사모님도 끼니가 없어 가난한데 집에 들어오지 않고 그 돈 봉투를 들고 쌀을 팔아서 가난한 학고방 집 하나 하나씩 드나들면서 쌀을 다 나눠주고 자신은 빈 털털이로 들어오셨다는 이야기는 잊혀지지 않는 아주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자의 삶이고 그리고 절제하지 않고는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력이 있고 아주 뛰어난 사람들을 사용하시지만 그러나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들을 더 잘 사용하십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들에게 밥을 담아 준다고 하면 금으로 만들었지만 개밥그릇으로 사용하던 그릇에 물 말아 준 밥을 드시겠습니까? 질그릇이지만 깨끗이 닦아 놓은 그릇에 담아 준 물 말아 놓은 밥을 드시겠습니까? 금 그릇이라도 개가 핥아먹던 개밥그릇에 그릇이 금이라는 이유 때문에 밥 말아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같이 아직 사역을 시작하지 않고 학창에 있을 때에 칼날 같이 새파란 신앙의 양심을 가지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제가 교수 생활을 할 때 학생들이 낸 Report를 받았는데 교수에게는 Report를 읽어내는 동물적인 감각이 있습니다. 400장의 Report를 받았는데도 한 번 스치고 지나갔는데 읽은 것은 정확하게 기억을 합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것 같은 Report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교와 같이 Report를 펼쳐놓고 찾았더니 세 개의 Report가 나왔는데 똑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는 명조체, 하나는 샘물체, 하나는 필기체,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미래의 목회자가 되겠습니까?
제가 작년에 미국에 갔을 때 미국 중부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일어난 일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박사 학위를 다 받고 학교에 교수로 임용이 되었었는데 박사 논문에서 정확하게 한 줄이 근거 없이 베낀 것이었습니다. 그 한 줄 때문에 그 학위를 준 학교에서 그 학위를 취소하고 교수 임용한 학교에서는 한칼에 날려서 교수 임용을 취소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웃깁니까? 어느 날 우리 교회에 잡지가 하나 배달이 되었는데 제 글이 실렸어요. 그래서 이름을 보았더니 제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나만의 착각인가 하고 한 쪽을 펼쳐서 교회 직원들을 불러 읽어보게 하였습니다. 읽은 후에 느낌이 어떤가 하고 물었더니 ‘이거 목사님이 옛날에 쓴 글이잖아요?’ ‘너도 한 번 와서 읽어봐라’ ‘어? 이거 목사님이 쓴 글인데?’ 그 앞에를 봤더니 아무아무개 교수라고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가 신자나 사건 같은 것을 비판 할 수 있는 윤리적인 힘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선생노릇을 하면서 가장 싫어한 것이 대리출석과 컨닝이었습니다. 특히 이 컨닝은 혐오하도록 싫어합니다. 그래서 대학시절에 제가 교수생활 할 때에는 소문이 있었는데 장학금을 어느 학과에서 많이 받느냐는 김 남준 교수의 시험 감독 동선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들어가면 절대로 컨닝을 못하게 합니다. 컨닝을 하면 저는 내 손으로 편지를 써서 가장 엄격한 벌에 처해달라고 해서 학생처로 보내버립니다. 저는 그 정도 가지고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이런 취침들이 아주 많았어요. 나는 너무 부끄럽습니다. 저는 군 생활을 육군 사관학교에서 했는데 육군사관학교는 전통적으로 무감독 고사입니다. 아나 시스템입니다. 홀로 자기들이 시험을 보는데 한 번도 문제가 된 적이 없습니다. 문제가 되면 급우들이 즉시 고발해 버립니다. 고발하면 처벌 받고 더블 백 메고 육군 병장이 되어가지고 전방으로 투입됩니다. ‘너 같이 부끄러운 놈 하고는 이 명예로운 사관학교에서 같이 있을 수 없다.’ 그런 것입니다. 여기는 거기보다 얼마나 더 중요합니까? 미 해군에서는 아예 한 기 전체가 유급을 당해서 한 해 졸업생을 안 내보낸 적이 있습니다. 왜? 외국 학교에서는 기숙사에서 답안을 써와도 책 보고 쓰는 학생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선생이 이렇게 들여다보고 있어도 컨닝을 합니다. 웃음이 나옵니까? 왜 우스우세요? 이 대목이?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런 사람들이 가서 교계를 이렇게 거짓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웃음이 나옵니까? 저는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피가 끓습니다. 제가 총신 신대원 다닐 때의 일이었습니다. 학생들이 하도 커닝을 하니까 뜻있는 학생들이 뭉쳤습니다. 서명운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서명을 했습니다. 주장이 뭐냐면 이것은 성직 학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 근본적으로 뿌리를 뽑자, 어떻게? 만약 컨닝을 하면 당회에 통보를 하고 노회에 통보하고 4대 일간지에 내버려서 아예 그 사람 일생을 매장시켜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 운동을 주도하던 학생들이 열렬하게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어떻게 됐는 줄 아십니까? 그 운동을 주도하던 학생들이 이름 모를 학생들에게 뒷산에 끌려가서 린치를 당하고 이 두 학생은 자퇴서 내고 학교를 그만 둬 버리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보수 신학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날 교계에서 보는 봉투 사건이니 온갖 밀실에서 일어나는 모함들이니 모든 사건들이 전부다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 아닙니까? 신학교 다닐 때 칼날 같은 양심으로 학교를 다녀도 세월이 흐르면 때가 묻어서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정직의 문제는 여러분들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직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복음이지만 죄를 미워하고 회개하는 사람에게 복음이지 여전히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아닙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그 거룩한 나라에 못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거짓말 하는 사람은 못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지금 칼날 같은 양심에 서지 않는 한 20년 후에 얼굴에 개기름 흐르고 번들번들하고 아주 유들유들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그런 정치꾼들이 되기 십상인 것입니다. 이 정직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교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돈 문제입니다. 왜 정직하지가 않습니까? 그렇게 정직하지가 않아서 결국은 정직한 사람들만이 정직의 가치를 알고 그 정직의 가치를 자신이 교회 속에서 복음과 함께 실현하려고 하지 흐릿한 사람들은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고서를 싸게 판다고 광고가 났습니다. 그래서 불러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오페라 옴니아를 비롯해서 몇 권을 샀습니다. 그래 턱 보니까 룰리지 철학사전이라고 나와있어요. 그 룰리지 철학사전이 영국에서 나온 책인데 엄청 비싼 책인데 깎아주지도 않습니다. 열 한 권을 샀는데 제가 560만원을 주고 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서점에도 없고 주문을 하면 주문을 받아서 자기들이 손수 제작을 해서 팩키지로 등기로 보내줍니다. 그런데 150만원이라고 해요. 그래 내가 ‘아니 이 책이 내가 560만원이나 내가 주고 샀는데 이 책이 지금 얼마나 중요한 책인데 누구 허락 받았냐?’고 했더니 ‘아유 그냥 찍는 거죠’ 그래서 제가 ‘당신이 교회 장로라고 하면서 그러면 되느냐? 당신이 하늘나라 갈 때 예수님 오실 때 이런 것이 다 문제가 된다. 그런게 어디 있냐? 법으로 못 하게 되어있고 당장 이것 걸리면 잡혀 들어가는데 거기에다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에게 이렇게 해서 사기로 찍은 이 책을 팔고 돈을 번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 양심이 깨끗하냐?’ ‘이것도 사시죠.’ ‘나는 안 산다. 저작권 끝난 것 이외에는 나한테 팔지도 말고 사지도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물론 옛날에 80년대 이전에 저작권이 시행되기 전에는 법에 걸리지 않으니까 샀지만 그것도 부끄러워서 다른 사람주고 새로 사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정당화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났는데 2천만 원이 없어졌답니다. 어디 갔냐고 하니까 목사님이 선교사를 갖다 줬답니다. 선교사 왜 갔다 줬냐고 영수증 어디 있냐고 하니까 현찰로 갔다 줬으니까 그것 영수증 못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일반 세상에서도 그렇게 하면 그것은 배임 행위입니다. 정직하지 않은 목회자들이 교회를 그런 식으로 운영을 하면서 교회를 도탄에 빠뜨리고 어려움에 빠뜨립니다. 그것이 지도자로서 그 교회의 교인들을 올곧게 살아가라고 가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인터넷이 아니라 누가 들어와 보더라도 볼 수 있게 투명하게 재정을 공개해야 되는 것은 기본적이 아닙니까? 공개해서 쓸 수 없는 돈은 공개 안 해서도 쓰지 말아야 되고, 공개 안 해서 쓸 수 있는 돈은 공개해서도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그렇게 신학교 때 정직이라는 것을 하찮게 생각해 온 사람들이 교회를 그 꼴로 이끌어가서 교회의 도덕성이 이 세상의 친목단체의 도덕성만큼도 못할 만큼 추락을 시켰습니다.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에서 감사 위원회가 있지만 돈 쓰는 부서, 예산 세우는 부서 다 따로따로 있지만 그것도 충분히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공인 회개사 사무실과 그것도 예수 믿는 사람이면 안 되고 일부러 불신자 찾아서 계약을 맺습니다. 일주일 동안 직원들 데리고 와서 우리 교회를 샅샅이 뒤져서 조사를 받습니다. 그리고 책임 질 것 있으면 책임을 집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그 회개사 사무실에서 국가 도장 번호가 찍힌 직인으로 보고를 하고 마지막으로 교인들 앞에서 자기들이 직고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학창에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정말 정직해야 합니다.
학생들이 졸업시험에서 컨닝을 하길래 잡아내서 끝까지 졸업을 안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이 두 학생이 매일 와서 아침부터 진을 치면서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하는데 뉘우치는 눈빛은 전혀 없고 졸업 못할 염려로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용서할 수 없다. 너희에게 개정의 점이 보이지 않는다. 또 개점의 점이 보이더라도 너희가 행한 응당한 죄 값은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랬더니 이 틀째 되던 날 그 중의 한 학생이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나한테 말하는 겁니다. ‘교수님은 의로우십니까?’ ‘나 의롭지 않다. 나는 죄인이고 주님이 용서해 주셨어도 나는 여전히 죄인이다.’ ‘그러면 교수님은 학교 다닐 때 컨닝 한 적 없습니까?’ 눈을 똑바로 뜨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난 의롭지 않다. 그렇지만 니가 나한테 내 신학교 생활 7년 동안에 나에게 컨닝을 했냐고 물어봤는데 내 눈을 똑바로 봐라.’ ‘정말 없습니까?’ ‘한 번도 없다. 나는 그렇게 사는 사람을 학교 다닐 때부터 쓰레기같이 생각했다.’ 만약 제가 컨닝을 했으면 어떻게 두 눈을 똑바로 보고 그 학생에게 대답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나중에 어떤 일을 당할지 어떻게 압니까?
여러분들을 잘 모르시겠지만 고신의 학장을 지내던 한상동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사실은 공부를 그렇게 많이 못 하신 분이고 본과도 못 들어오셔서 예과를 다니셨습니다. 그런데다가 1학년 때 아예 개척을 해버렸답니다. 그러니 그 학교 다니는 것도 힘든데 개척교회를 해서 전도를 하고 교인들 심방을 하고 설교를 하니 그 고생이 이루 말이 아니죠. 그런데 어느 날 시험을 보더랍니다. 다른 시험이면 어떻게 하다하다 안 되면 설교라도 쓰고 나가면 빵 점은 안 줄텐데 하필이면 영어시험이었답니다. 그러니 시험지를 갖다 놓고 이 한상동 전도사가 한 숨을 쉬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I am a boy’가 입력이 안 되는데 나올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학생이 하도 시험지를 보다가 모르겠으니까 썼답니다. ‘교수님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두 아십니다.’ 성적표가 나왔는데 ‘예수님은 100점이고 너는 0점이다’라고 나왔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한 숨을 내리쉬고 내 쉬면서 ‘주여, 주여’ 하니까 옆에 있는 학생이 이상하게 비틀어 앉아서 시험지가 자꾸 자기 쪽으로 오더랍니다. 이상하게 이 사람이 오늘따라 비틀게 앉아서 시험을 보나? 생각해보니 보고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시험지를 덮어 백지를 내고 산에 올라가서 회개를 했답니다. ‘하나님 내가 평소에 어떻게 거짓되게 살았으면 나를 잘 아는 내 옆에 있는 친구가 보여주면 한상동 목사가 배껴 T쓸 정도의 신앙인이라고 생각을 했겠습니까? 제가 이러고도 목회자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날 뒷산에 올라가서 회개를 했답니다. 영어를 잘 해서 한상동 목사님에게 답안지를 보여준 그 사람은 누군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 날 영어시험을 백지를 내고 나온 그 사람이 후에 그 학교의 학장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찬양) 끝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의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 듯이 그 뜻이 이뤄진다 외치며 사나니
그래야지만 외칠 수 있을 때 올곧은 설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례요한은 그렇게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연단되고 연단 된 가운데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졌고 그것이 헤롯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아 떨게 만들었던 일종의 영향력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주 특별한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매우 특별하게 이렇게 인격적인 준비가 되어서 여러분들의 인격 때문에 주님의 말씀이 찬란하게 빛날 수 있게 되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