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레 21:1-3)
녹취자 : 오희열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예수님이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지시하시는 장면에서 나오는 보도입니다. 이 보도에 보면 성막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 성막의 등불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10여 년 전에 이 성경본문을 히브리어로 읽다가 아주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얇은 책을 한 권 쓰게 되었는데 거기서 발견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목회자들에게 주신 아주 본질적인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우리가 누구인가?”, “목회자가 누구인가?” 그리고 “그리스도인 이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들이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제가 지금 현재 우리 교단 기독 신문에 열두 번을 연재하고 있는데, 거기 나온 내용들은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예배는 무엇인가?”, “중생과 회심이 무엇인가?” 이것은 이번 주에 나오는 것이고, 지금 쓰고 있는 것은 “설교가 무엇인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혼란들이 일어나고 저는 이런 혼란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뭐 하는 사람인지를 확고하게 알고 자기 자리에 서는 것, 그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회라고 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본질적인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넘겨보시면, 이것이 바로 성막입니다. 성막이 이런 식으로 되어 있었고, 이것은 번제단이고 물두멍입니다. 여기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는데 3분의 2, 3분의 1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여기가 성소이고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있고, 여기가 지성소가 되고 여기에는 대 제사장들이 1년에 한 번만 들어가게 됩니다. 문제는 여기의 이 가죽이 물돼지 가죽입니다. 당연히 가죽으로 이 덮개를 했을 때에는 창문도 없기 때문에 바깥에서 빛이 절대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막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무엇을 하려고 하면 태양빛이 없기 때문에 불빛이 필요합니다. 이 불빛을 일으키는 것이 등잔불인데, 이 관리는 아론의 자손에게 대대로 부과되어있는 의무였습니다. 확대해서 보면 이렇습니다.
이 성소의 크기가 열두 평정도 되고, 이것이 여섯 평정도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들어가게 되면 여기에 떡상이 있고 등잔이 있고 분향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지성소가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기는 대제사장 이외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실 때 찢어졌다고 하는 휘장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청색 자색 베실로 단단하게 꼬아서 만든 휘장이기 때문에 양쪽에 황소를 매달고 채찍으로 후려쳐서 양쪽으로 잡아당기게 해도 찢어지지 않는 휘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위로부터 찢어지는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다음, 우리들이 이제 아까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니까, 그 제사를 수행하기위한 제사장이 있습니다. 성전, 혹은 성막, 제사장이 있습니다. “구약의 성전은 신약의 교회로, 제사장은 목회자로 발전하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에 대해서는 그런 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고 얘기해야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신학적인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겠습니까?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하나님과 만나는 곳,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곳,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며 주님의 임재를 대면하는 곳,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는 곳, 세계와 교회의 하나님의 뜻이 전파되는 곳, 이런 점에 있어서는 여전히 성전과 교회가 연속성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전은 기본적으로 제사를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성전건축”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개인적으로는 썩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예배당 건축”이라고 해야 합니다. 신약의 교회에서 “교회건축”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보다 더 큰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한 공간을 짓는 것입니다. 혹은 교육을 위한 공간을 짓는 것입니다. 혹은 교회를 위한 건물을 짓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빠지는 점은 제사입니다. 성전에는 제사장이 제사라는 제도가 있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만 교회에서는 말씀과 성령으로 하나님을 만난다는 점에서 다른 것입니다.
그 다음, 제사장은 마르틴 루터같은 사람들이 세웠던 교리는, 만인이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뒤로 넘겨서 휘장의 여기가 찢어진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인데, 여기까지는 제사장들이 들어옵니다. 제사장들은 수가 많았습니다. 당번으로 돌아가면서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으로 섬기는데 이것이 찢어졌다는 것은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제 하나의 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방과 이 방을 가르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이 방에 들어온 제사장들은 더 이상 차별이 없이, 여기에 들어오기만 하면 하나님의 임재와 마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느냐하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셔서 우리를 구속하기 전까지는 이런 구분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모두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제사장들이 되었고, 들어와 보니까 이 휘장이 철폐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우리는 자기 스스로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힘입어서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 그분의 임재와 마주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점에서 이것은 매우 특별한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커다란 영적인 자산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필요할 때,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성령의 은혜를 받고 말씀을 깨달으면 주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 다음, 넘겨서, 데이비드 마틴 로이드 존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쓴 책들이 우리나라에 60권에서 80권정도 있습니다. 꽤 많습니다. 어떤 점에 있어서는 저의 신학과 일치하지 않지만 한국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외국인 설교자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람이 쓴 로마서 강해, 에베소서 강해, 그리고 그 두 권의 책들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목사와 설교’ 등등의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분이 이런 얘길 합니다. “설교자가 누구인가? 분명히 설교자는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처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 이상의 사람이며 다른 무엇이 필요합니다. 설교자의 소명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가 여기서 부각됩니다. 설교자는 설교하기로 결심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설교자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것처럼 목회자의 정체성이,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라고 얘기했을 때,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목사님들, 졸지마시고 여기 보십시오. 아니 왜 여기 와서 조십니까? 집에서 주무시지. 여기 보십시오. 여기 와서 조시는 분은 교회가서 모든 교인들이 예배시간에 졸기를 바랍니다. 저는 못 참습니다. 엊그제 장로님 한 분이 뒤에서 끄덕거리면서 졸기에 소리를 쳐서 벌떡 일어나라고 하고 뒤에 서서 예배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어디 했는지 잊어버렸잖습니까.
우리 모두다 평범하게 살던 사람들인데 단지 설교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과연 선지자들의 후예가 될 수 있는가? 설교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던 사도들의 후예가 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아닙니다. 그럼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종자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씨알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뭐가 씨알이 다른 것입니까? 육신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다르기 때문에 씨알이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가 주님을 깊이 만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 뭐가 문제일 것 같습니까? 뭐가 문제라고 많은 이야기들을 하지만 하나입니다. 목사의 신앙이 문제입니다. 목사가 목회는 열심히 하는데 신앙이 없어서 문제라는 말입니다. 신앙이 있었으면 돈 받겠습니까? 왜 그렇게 공짜를 좋아합니까?
저는 평소의 신조가 “마귀 다음으로 싫은 것이 공짜다”입니다. 이것이 제 신념입니다. 싫습니다. 엊그제도 제가 결혼 주례를 서 주었다고 어떤 장로가 100만원을 봉투에 넣어서 왔습니다. 싫다고 했습니다.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당장 돌려주었습니다.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사유가 분명하지 않는 한 밥도 얻어먹지 않습니다. 왜 얻어먹습니까? 깨끗하게, 성인처럼은 살지 못해도 깔끔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놀랍게 알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위대한 공의에 대해서 깊이 깨달으면서 전율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설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설교하기로 먼저 생각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그분을 위해서 이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를 외치지 않으면 안 될, 가슴 저미는 그 무엇을 가슴에 갖게 된 사람이 목회자여야 합니다. 이것이 소명입니다. 그런 소명이 오늘날 심각하게 흐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후배들에게는 심각합니다. 뭘 조금만 하면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뭐가 그렇게 힘드니?”, “아휴, 힘듭니다.”, “길거리에 가서 풀빵을 굽는 사람에게 물어봐라, 그게 쉬운지 말이다. 힘들다고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공부를 하러 왔는데 제 친구가 목회하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크고 좋은 교회의 부교역자입니다. 교역자들에게 얼마나 대우를 잘 해주는지 모릅니다. 부교역자들에게 4억짜리 전세를 하나씩 얻어주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와서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힘들어?”, “예”, “그래? 내가 그 목사에게 전화해서 방 빼라고 해줄게.” 했더니, “아, 아닙니다!”, “네가 힘들다고 하니까, 내가 그 목사에게 전화해서 좀 쉬도록 딴 데로 내 보내라고 해줄게.”, “아이고, 아닙니다.”, “힘들다고 하지 마라. 이 세상에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 정도 애쓰지 않고 밥 벌어먹는 사람이 세상에 있는지 한번 가서 봐라. 그 정도면 노숙자도 힘들다.”했습니다.
그 다음, 성막의 등불에 관한 규례가 나옵니다. 교회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교회가 아주 간단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유럽에 가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교회당 딱 하나만 있습니다. 교육관 같은 것이 없습니다. 예배당 딱 하나만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잘 지었습니다. 제가 너무 궁금해서 화란의 학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상합니다. 한국에서는 예배공간이 중요하긴 하지만 교회당의 일부이고 교육관이 필요합니다. 각 실이 필요하고 성가대 밥을 해줄 식당이 필요합니다. 카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서는 예배당 딱 하나만 있습니까? 이렇게 해도 됩니까?”했더니, “그런 공간이 왜 필요합니까?”, “주일에 모여서 뭐도 하고 뭐도 하고 교육도 시키고, 어린이 예배도 드리고 해야 합니다.”, “그런게 왜 필요합니까?”, “예배시간에 애들부터 할아버지까지 모두 한꺼번에 와서 예배드립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다 집에 갑니다.”, “그러면 교육은 어떻게 시킵니까?”, “교육은 집에서 시킵니다.”, 집에서 엄마 아빠가 교육을 시키고 특별히 세례를 받기 위해서 교육을 받아야 하면 그 사람들은 평일에 나와서 교육을 받는다고 합니다. 원래 이 신앙교육은 가정에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에 앉아서 하이델베르크 캐터키즘이나 문답서들을 신앙 좋은 부모님들은 지금도 가르칩니다. 엄마 아빠로부터 기독교 사상을 가지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게 되질 않습니다. 사회가 너무 다변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 공동체 이상의 역할을 요구합니다. 교회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이 겪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안정된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많을 텐데 우울증 있는 사람이나 자폐증을 가진 아이들 등, 엄청난 사회적인 문제들이 많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교회에서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신앙 교육도 이제는 집에서 하지 않고 교회에서 다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맡고 있는 역할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점점 약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모든 목회의 중심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말 문제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설교 준비에 많은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편 준비하면 금방 써먹습니다. 이상하게 사례금 주는 날짜는 천천히 돌아오는데 주일은 빨리 돌아옵니다. 그런데 주일 낮만 설교하는 게 아니라 오후예배도 설교해야합니다. 그리고 성실하신 분들은 새벽 설교도 원고로 다 준비하십니다. 일주일 내내 설교를 준비하는 일을 해도 설교를 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수요일, 금요기도회, 무슨 임직식, 무슨 특별행사, 또 가정의 심방을 갈 때도 진짜 성실하신 목사님은 다 준비를 해서 갑니다. 그러면 목사는 월요일 아침부터 시작해서 토요일까지 설교를 준비하는 기계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아니, 끊임없이 설교를 준비해서 바깥으로 쏟아놓는 것도 좋지만 자꾸 뭔가 들어가는 것이 있어야 나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한 3년 목회를 하다보면 매번 같은 얘기만 뱅글뱅글 도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앉아서 성경본문을 읽으면 자기 스스로 서론, 본론, 대지를 자기가 다 꿰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루트를 따라서 계속 설교를 합니다. ‘아, 예화는 뭐가 나오겠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교인들이, “별로 들은 게 없네.” 합니다. 그런 교회에 탁월한 강사가 와서 설교를 하느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이 시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목사가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지식에 대한 총량이 평신도들보다 월등히 많고 설교한 내용은 설교할 내용의 비율에 비해서 빙산의 일각과 같아야 합니다. 빙산을 보면 집채만 한 빙산이 떠 있을 때, 그 밑에 물속에는 그 집채만한 것이 아홉 개가 있습니다. 10분의 1만 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이 아래에 아는 것들이 아주 많이 있어서 항상 설교를 해도 그 중의 일부만 설교를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일주일의 시간 중 상당시간을 독서하고 공부하고 사색하는 일에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헌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TV 를 틀면 평화방송이 나옵니다. 언제나 프로그램이 착합니다. 불교방송이 나옵니다. 언제나 깊습니다. 한자로 나오면서 노스님들이 썰을 푸시는데, 공부를 한 우리들이 듣기에도 상당히 깊이 있는 내용들이 전개가 됩니다. 그 다음에 옆에 보면 기독교 방송이 나옵니다. 언제나 웃깁니다. 코미디언같은 목사님들이 나와서 이야기하거나 아니면 설교를 들어도, 설교학을 가르쳤던 내가 들어도 무슨 소린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충분히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등잔불이 있습니다. 이 등잔불빛이 바로 물돼지 가죽으로 덮여서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아서 완전히 캄캄한 성소를 밝히고 있는 유일한 광채입니다. 이 뜻은, 우리가 교회를 경영함에 있어서 이 세상의 상식이나 경영에 대한 지식 같은 것들도 소용이 되지만 진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 세상의 상식이나 지식이 궁극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니 이게 왜 필요하겠습니까? 물돼지 가죽으로 된 천정에 구멍 몇 개를 뚫어서 햇빛이 들어오면 이런 거 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특별히 이 모든 것을 다 덮어 버리고 오직 감람유를 통해서 나오는 이 밝은 불빛만으로 섬기고 밝히고 탐구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다음, 제일 먼저 이 등잔불로 진리의 빛을 섬기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빛”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히브리말로 “오르”라고 합니다. 이것은 크게 세 가지 용례로 쓰입니다. 물리적인 빛, 윤리적인 빛, 신학적인 빛입니다. 물리적인 빛은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그냥 햇빛, 불빛을 의미합니다. 물리적인, 자연적인 빛입니다. 그리고 “오르”가 도덕적인 빛, 윤리적인 빛을 말하기도 합니다. 다들 형편없이 사는데 어떤 사람이 도덕적으로 살면 돋보이게 되는데 우리가 그런 빛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신학적인 빛은, 단순히 다른 사람보다 잘 사는데서 오는 도덕적인 빛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독특하게 비치는 그 존재감으로서의 빛입니다. 이런 것들이 성경에서 쓰이는 용례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교회를 섬길 때, 바로 이러한 진리의 빛으로 섬기는 것이 가장 큰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경영하다보면 사업도 해야 하고 돈도 빌려야 하고, 조직도 짜야 하고,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목회의 본업이 아닙니다. 목회의 본업은 목회자가 이렇게 성경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를 자기가 받아서 진리를 따라 살고, 진리를 따라 변화되고 그 진리를 내가 먼저 많이 깨달아 알았기 때문에 이 무지한 사람들을 하찮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깨달은 진리들이 이들에게 전해지면 이들도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이런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섬기게 하기 위해서 나를 불렀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그 빛으로만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는 이 진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이 캄캄한 성소의 불빛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어거스틴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저는 이 사람을 저의 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단언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오웬이나 칼빈 같은 사람들로부터도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나를 가장 압도한 사람은 이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교만이 아니라 진실로 말하는데, 태어나서 수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어떤 책은 나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고 내 인생을 바꿔 놓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내가 읽은 책을 지은 사람 누구도 천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냥 나보다 훌륭하다, 탁월하다고 생각했지, 천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안에 속한 사람이나 기독교 밖에 속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칼빈도 저는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천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쓴 책 두 권을 읽으면서 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이 사람은 천재입니다.” 그리고 한 6개월 동안을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이고, 김남준은 누구입니까? 저 사람에게 이런 위대한 천재성을 주셔서 1600년 동안이나 기독교에 영향을 미치게 하여주시고, 나는 한참 몸부림치며 읽어야만 겨우겨우 그 뜻을 이해하는 정도로 만드셨으니 하나님 왜 우리 둘을 이렇게 불공평하게 창조하셨습니까?” 했더니, 하나님이 “네 주제를 파악하라.”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포기했습니다. 그때 저를 무릎 꿇게 만들었던 두 권의 책이 ‘고백록’과 ‘참된 종교’였습니다. 이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진실로 진리보다 탁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일 것이며, 그러나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진리 자체이시다. 진리보다 더 탁월한 것이 있을까?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곧 진리다.”
다음, 자 이제 진리의 빛으로 섬기는데 무엇을 섬기느냐 입니다. 양떼들을 목양을 하는 것입니다. 목양은 목회입니다. 목회가 무엇이냐? 설교하는 것이 목회가 아니냐고 하겠지만 물론 설교도 목회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구역장 세우는 것도 목회이고 뺀질대는 사람 불러서 성가대 밥 지어 주는 것도 목회이고, 목회가 아닌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들은 부차적인 것이고, 목양이란, 양떼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목양입니다. 양떼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목양입니다. 자기를 존경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양떼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목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좋다고 하는 것을 사랑합니까,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을 사랑합니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사랑할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목회의 임무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양떼들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우신 분인데 이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그 아름다움을 가르쳐서 설교해서 이 양떼들로 하여금 풀이나 뜯으며 똥이나 싸던 놈들을 하나님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것, 이것이 목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좋은 점, 하나님이 왜 그렇게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증명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제가 모든 음식을 거의 가리지 않고 다 잘 먹어서 여태까지 교인들에게 먹는 것 때문에 실족시킨 일은 없었습니다. 요즘은 제가 그렇게 별로 많이 먹지를 않는데, 모든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못 먹거나 싫어하는 음식이 없습니다. 개고기 같은 것들은 콜레스테롤이 너무 올라와서 싫어하긴 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정말 웬만하면 먹지 않는 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민물고기 입니다. 먹긴 먹습니다. 썩 내키지는 않습니다. 민물고기 중에서도 쏘가리탕, 메기탕을 끓여서 기름을 싹 걷어내고 거기에 수제비를 뜯어 넣고 끓이는 것은 괜찮습니다. 약간 민물 흙냄새가 나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별로라고 생각하는 것은 붕어찜입니다. 사실 요즘은 옛날처럼 토종 붕어가 별로 없습니다. 그게 전부 월남 붕어 이런 것들입니다. 굉장히 큽니다. 저는 한 번도 돈 주고 사먹어 본 적이 없고, 우리 처갓집 식구들이 그것을 좋아했는데 저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재밌는 것이, 혼자 차를 타고 집회를 다녀오다가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20분 동안 음식 해설가들이 나와서 붕어찜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붕어찜의 주 산지가 어디인지를 말하는데 마침 차를 타고 지나가는 거기였습니다. 팔당 있는 쪽 말입니다. 그 설명을 들으며 “그래?” 했습니다. 그러고는 한 이틀 후에 차를 타고 라디오를 켜니까 똑같은 방송이 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을 듣고 나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 먹고 싶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아, 그렇구나! 이 사람들은 얼굴도 보이지 않고, 붕어를 보여주지도 못하는 라디오 방송에 나와서 붕어가 얼마나 몸에 좋고 맛있는지를 두 번을 설명하니까 일생동안 돈을 주고는 붕어를 먹어본 적이 없는 나의 마음을 움직여서 기회가 있으면 가보고 싶게 만드는구나! 내 설교는 얼마나 후졌는가? 과연 내가 두 번 만에 그렇게 싫어하던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고, 안 믿고 싶었던 예수님을 믿게 할 정도로 할 수 있을까?’ 제가 그때 느낀 것이, 이 사람들은 진짜 붕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이 해설을 하다 말고 옆 사람이 침을 삼키면서, “아, 맛있겠다! 흠, 쩝쩝…”합니다. 이게 목회입니다. 나는 누가 나에게 목회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 정말 하나님은 너무너무 아름다우신 분이야!”해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 신문을 봤습니다. 눈이 부실 정도의 판타지 같은 광경이 있었습니다. 남도의 매화였습니다. 매화가 한 마을에 흐드러지게 핀 것을 멀리서 드론으로 찍었습니다. 판타지 같았습니다. 너무너무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재밌는지, 그렇게 너무너무 보고 싶을 때, 그때 고난주간 사경회를 합니다. 끝나고 가면 다 지고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예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끝나고 보러갈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많이 보았는데, 그 아름다움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런 자연의 세계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학문을 공부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지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보다도 더 많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농축되어 있는 곳이 있는데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입니다. 이 성경을 탐구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경험하고 그것을 잘 가르쳐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양떼들로 만드는 것이 목양인데, 결국은 이 아름다움이 진리의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감격하는 목회자들이 됩시다.
목회자가 매일 그럴 수는 없지만 몇 주에 한 번 정도는 성경을 읽다가 눈물이 확 쏟아져야 합니다. 혹은 신학책을 읽다가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셨구나!’ 해야 합니다. 그때에,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설교준비를 평생 하지 않는 법을 말입니다. 이번 주 설교 준비 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대답이 없습니까? 그런 것은 아무데나 공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 준비를 평생 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드렸습니다.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한 없이 눈물을 흘리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고 나면 설교가 쏟아져 나옵니다.
2002년, 2003년 이때 저에게 특별한 전성기가 있었습니다. 금요일이 되면, 교회에 일이 많아서 아침 일찍은 가지 못하고 오후에 두 시쯤 보따리를 싸서 강원도에 갑니다. 가다가 휴게소에서 뭐라도 먹고 강원도 오대산 앞에 갑니다. 그러면 한 5시쯤 됩니다. 싹 씻고 숙소에 앉아서 빵이나 하나 먹든지 탕이나 하나 먹고 들어와서 책상에 앉습니다. 그러면 6, 7시쯤 되는데 거기서 존 오웬의 원서를 펴 놓고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좀 자야지, 내일 모레 주일인데 설교준비도 하고 자야지.’하면 아침 6시입니다. 밤을 꼬박 새운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아름다움이 그 책속에 엄청나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혼자 웃고 울고 감탄하면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나오는 것입니다. 매주 올라가서 은혜를 받고 내려와서 6개월쯤 설교하라고 해도 두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매주가 아니라 오늘 저녁에 올라가서 은혜를 받고 내려와서 한 열 시간쯤 설교를 하라고 해도 오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설교준비에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었습니다. 요즘 설교 표절 문제가 나오고 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세상 법에 걸리는 것입니다. 저는 표절하지 않습니다. 혹시 표절이 있다면 그것은 우연이거나 그 사람이 내 것을 본 것입니다. 저는 현대 설교자들의 설교집 자체를 읽지 않습니다. 이렇게 공부하고 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나면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한라산에 눈이 막 쏟아졌을 때, 보셨습니까? 볼 수가 없습니다. 언제 가야 멋있는 것을 볼 수 있느냐하면 “통행금지”라고 했을 때 몰래 무조건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몰래 가지 않으려면 눈이 막 쏟아질 때 경찰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입산금지인데 아직은 견딜만 하다고 보고 스노우체인을 했는지 봅니다. 그 앞에서 5만원을 내면 스노우체인을 채워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체인을 채운 차는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30분 정도 지나면 입산금지를 합니다. 그때 올라가 보았습니다. 1100고지를 올라가니까 눈물이 쏟아집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1100고지에 있는 여직원들이 하는 얘기가, “선생님, 이 한라산의 진짜 예쁜 풍경은 우리만 봅니다. 왜냐하면 진짜 예쁠 때는 올라오지 못하게 막기 때문입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것입니다. 이 강의를 다 때려치우고, 그때 얼마나 예뻤는지를 여기서 설명해 보라고 하면 제가 30분을 눈을 감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한 10년 지났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풍경이 그대로 살아나고 눈 냄새까지 그대로 살아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한라산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30분 동안 제가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격하는 목회자의 눈물은 교회를 살립니다. 아무개 장로, 아무개 집사 못된 놈들,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데 이것은 원한의 눈물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 다음으로 넘어가면,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민을 이렇게 피력합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사도바울의 고민입니다. ‘왜 이렇게 교회가 안 될까?, 왜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를 않습니다. 고민은, 어떻게 하면 우리의 말이, 우리의 설교가 순수한 하나님의 진리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고민이 아니겠습니까?
그 다음,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개인적으로는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인이어야 하고,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처럼 책을 읽으셔야 합니다.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 말합니다. “목사님은 도시에 있고, 책도 있고 돈도 있으니까 그렇지요, 여기 우리처럼 시골에서 이렇게 살아보십시오. 책 파는 곳도 없고, 책방도 없고, 읽을 시간도 없고, 책값도 없고…” 시간이야 시골교회가 더 많지 않습니까? 그리고 인간은 자기가 하지 않는 일은 자기가 정말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제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이 동네가 아니고 충청도 쪽입니다. 저를 어느 목회자 모임에서 불렀습니다. 어떤 젊은 목회자가 저를 차에 태워 가면서 자기의 고민을 선배에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뭔가 했더니, 자기가 7년 전쯤에 교인 20명 정도 모이는 시골 교회에 담임목사로 내려왔답니다. 그때만 해도 시골로 내려가는 것을 사람들이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런 자리도 없다고 합니다. 큰 교회에서 부목사를 했는데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쉬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내려와 보니 너무 좋았답니다. 할 일도 별로 없고, 설교 준비도 부담이 없고, 뭘 해 가도 교인들이 좋아하니까 특별히 많이 노력을 할 필요도 없고, 서울에서처럼 설교를 하면 까칠하게 “아무개 목사의 설교가 요새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시골 교회에서는 다들 졸다가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은혜 받았다고 하고 고맙다고 하고 닭도 한 마리 가져오고 하니까 부담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여기서 내가 5년 동안 건강을 회복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나 자신을 훈련해서 도시 목회에 도전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과는, 제 강의를 듣고 자기 자신을 보니까 그런 결심은 간 곳이 없고 그냥 거기에 익숙해져서 살아가고 있었답니다. 월요일이면 친구들과 모여서 족대 들고 가서 고기잡고, 오후에 볼링치고, TV나 보고, 책을 읽어야 할 도전을 느끼지 못하는 게, 책을 읽고 가서 설교를 하든, TV보고 설교를 하든, 오히려 TV보고 가서 TV얘기하면서 설교하면 더 좋아하더랍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그 젊은 목회자가, “7년이 지났는데 지금은 오라는 곳도 없지만 혹시 불러준다고 해도 저는 가서 목회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게 빨리 변하는 사람들의 그 생각을 따라잡으면서 설교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고 했습니다. 신앙은 자기 자신을 훈련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 없어도 하나님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신앙, 그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자, 탐구하고 자신이 진리에 합치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성경의 진리의 빛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목회자가 섬겨야할 사명입니다.
그 다음,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를 밝히고,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해서 예전에 몰랐던 진리의 말씀을 찾아내고 두 번째는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그 진리의 말씀을 잘 깨닫게 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문자를 잘 모르는 사람은, 그것을 깨우쳐서 인간사는 도리를 이해하게 만들어주고 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그 사람들의 수준에 맞게 가르쳐서 그 사람대로 이해하게 하고, 이렇게 해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 이것을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도 목회자가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달에 키더민스터라고 하는 리차드 백스터가 목회했던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곳 목회자들 120명이 모여서 저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리차드 백스터의 동네에 살면서 리차드 백스터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저를 통해서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강의를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때 이 리차드 백스터가 얼마나 철저하게 목회를 했느냐하면, 우리의 목회학에서는 토요일은 심방하는 날이 아닙니다. 토요일은 사람들도 만나지 않고 조용히 있는 날입니다. 그런데 백스터는 아니었습니다. 토요일은 심방하는 날로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설교 준비는 금요일까지 다 해 놓고, 토요일에 아주 가난한 가정, 병든 가정, 무지한 가정들을 쭉 심방하고 오후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자기 양떼들의 형편을 보고 그들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정말 간절하고 뜨거워지는 것이 주일에 열정적으로 설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라고 본 것입니다. 특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목사님이 그곳에서 약 17년 정도 목회를 하셨는데, 중간에 한 10년 정도는 전쟁이 나서 군목으로 종군을 합니다. 그 키더민스터의 가정이 270가정이 넘었는데 맨 처음에 그분이 부임할 때에는 가정예배를 드리는 가정이 한두 집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은퇴, 은퇴가 아니라 청교도 추방령에 의해서 그 교회를 떠날 때에는 가정예배를 드리지 않는 집이 한두 집 있을 정도였답니다. 심방을 가서 질문을 합니다. 온 가족이 모였을 때 어린 아이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리고 “얘야,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이 무엇이지?”하며 교리를 물어봅니다. 그때 이 아이가 또렷또렷하게 대답을 하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대답을 못하면 그 주일을 그 아이의 부모 둘이 예배당 뒤에 서서 예배를 드립니다. 자녀를 잘못 교육시켰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렇게 철저하게 교육시키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자녀들을 무지 속에 방치합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사람들이 잘 깨달아서 새로운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 다음, 진리의 빛으로 밝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두움, 정신적인 어두움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객관적인 어두움입니다. 이것은 몰라서 어두운 것입니다. 알기만 하면 아, 그렇구나 하고 깨닫고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놀라운 것을 보게 해 주소서”합니다. 깨닫지 못해서 이렇게밖에 못 사니까, 깨닫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렇게 살겠습니다. 이런 것을 객관적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주관적 어두움은 예수님이 “이 땅에 보물을 쌓지 말라”고 하시면서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하셨는데, 앞에 말씀드린 것은 배우지를 못해서 그렇지 어둡게 살아가는 것을 자기가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어두움은 사랑 때문에 생긴 어두움입니다. 돈을 사랑하면 사람이 눈이 멀게 됩니다. 돈밖에 모르게 됩니다. 권력을 사랑하면 권력에 눈이 어두워집니다. 그 마음에 아무리 올바른 소리를 해도 안 듣게 됩니다. 이런 어두움을 해결시켜주는 것이 바로 진리의 빛입니다. 이런 일을 목회자가 해야 합니다.
다음, 그래서 이제 이 빛은 원래 생명, 우둔한 사람을 깨닫게 하는 진리입니다. 원 생명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데, 그 생명의 근원, 그것을 깨닫게 하고 우둔한 사람을 깨닫게 하는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진리가 교인들에게 잘 가르쳐지는 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을 깨닫게 하나이다. 아멘”
그 다음 보겠습니다. 진리의 빛으로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기 인간들이 이렇게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진리를 모를 때에는 이런 세계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또 인간들이 사는 이 지구가 나에게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런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무슨 뜻을 가지고 이런 것을 창조하셨는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깊이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세계는 세상대로 있고 자기 좋은 대로 사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밥 벌어서, 남과 경쟁해서 남보다 조금 더 많이 벌고, 좀 더 좋은 것 먹고, 좋은데서 자고, 좋은 물건 쓰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이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이 자연세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지금처럼 자연을 폭압적으로 대하고, 지금 환경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우리가 예전에는 근해에서 잡힌 물고기는 오염이 많이 되어서 위험하다고 했는데 지금은 먼 바다의 고기일수록 위험합니다. 참치는 가까운데서 잡히는 고기가 아닙니다. 먼 바다 태평양에서 잡아옵니다. 태평양 한 가운데,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 다섯 배 정도 커다란, 물 위에 가라앉은 섬이 있습니다. 플라스틱 덩어리 입니다. 그것이 물속에서 600년이 걸려야 녹는다고 합니다. 그게 서서히 분해가 되면서 그 알갱이들을 작은 물고기가 먹고 큰 물고기가 먹고, 큰 물고기들은 아예 그것을 먹이인줄 알고 뜯어 먹습니다. 그 고기들이 전 세계에 퍼지는 것입니다. 엊그제 방송에 나왔습니다. 생선을 먹으면 수은이 위험한데 그 수은의 용량이 가장 높은 것이 참치라고 합니다. 저는 참치가 여태까지 가장 깨끗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갈치 같은 것은 수은이 적다고 합니다. 갈치는 그리 먼 바다에서 사는 고기가 아닙니다. 갈치, 고등어 같은 것 말입니다. 심지어 고등어의 아홉 배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 환경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빙하에 가보고 충격 받고 놀란 것이, 우리가 빙하, 빙하 하는데, 7cm쯤 되는 빙하가 있다면 100m의 눈이 오랜 세월동안 눌려서 그 7cm의 빙하가 된다고 합니다. 빙하가 수백m, 1km쯤 되니까 그 위에 눈이 얼마나 많이 쌓였었는지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하루에 30cm 씩 녹아서 아래로 이동을 하고 그 위쪽은 벌거숭이가 되는 것입니다. 무시무시합니다. 그래서 동해안의 어부들이 헛갈려서 못 살겠다고 합니다. 조상 대대로 서해에서만 잡혔던 물고기들이 동해로 나오고, 대대로 잡히던 물고기들이 어디로 갔는지 씨도 보이지 않고, 참치 떼가 동해바다로 올라온 것입니다. 이것은 수백 년 동안 아예 없었던 현상이었습니다. 이 바다 안에서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욕탕에 들어가면 온탕과 열탕이 있는데 그 온도 차이가 2도 내지 3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열탕에 들어가 보면 미치게 뜨겁게 느껴집니다. 이것을 물고기들은 더 많이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기형물고기들이 생겨나고 심지어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난 그 근처의 고기들에 러시아산이라고 딱지를 붙여서 돌아다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이런 환경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은 너무 무관심합니다. 이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마구 지배하는 것도 잘못 된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소중한 사람, 세계라는 것을 깨달아서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이 안에는 자연적인 질서와 도덕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진리의 말씀으로 깨닫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 다음, 그래서 목회자의 사명은 잘 가르치는 것입니다. 무엇을 잘 가르치느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치고,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자신과 세계 속에 구현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그 진리 때문에 단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것, 그것이 이 진리가 가져다주는 효과인 것입니다.
그 다음, 자, 18세기 독일의 교회사를 봅니다. 에드윈 찰스 다간(Dargan, Edwin Charles, 1852-1930)이라는 분인데, 이 분이 쓴 대표적인 책이 “A History of Preaching”이라는 세 권으로 된 책입니다. 제가 저 책을 번역했는데 저도 저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은 10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설교학 교과서로 쓰일 정도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깊이 감탄한 것이, 어쩌면 이렇게 박식할 수 있을까? 설교뿐만 아니라 예술, 사회, 정치, 경제, 이 모든 역사를 읽으면서 설교가 왜 그렇게 되어 왔는지를 설명한 책입니다. 이 사람이 남침례 신학대학의 설교학 교수였고, 교회에서 교수였습니다. 이 책은 명전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굉장히 순수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정신을 물려받아서 잘 하다가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복음적인 생명력을 교회가 잃어버립니다. 그러자 “교리보다는 삶이다”를 주창하면서 경건주의가 생겨나게 됩니다. 경견주의는 결국 마지막에 설교단이 황폐하게 된 합리주의가 들어오게 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이루어졌던 설교 자료들을 보면 진짜 웃깁니다. 설교 제목이 이렇습니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 주일 설교 제목이었습니다. 부활절에는 “생매장 당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예수님에 부활에 대해서, 예수님이 기절했었는데 죽은 줄 알고 무덤에 넣었더니 찬 기운이 들자 깨어나서 무덤을 뚫고 나온 것이 부활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문화의 즐거움”, “예방주사, 맞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것이 주일 설교 제목이었습니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광, 부활, 십자가, 이런 것들이 모두 이성주의에 의해서 공격당하고 나니까 설교할 주제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토크쇼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주제들을 가지고 설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목회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성경을 잘 믿는 것이고, 열심히 학문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성경을 잘 믿고 어떤 방식으로 탐구해야 할 것인가? 밥 먹고 와서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