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레 24:1-3)
녹취자: 김명진
진리의 빛을 탐구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먼저 그 진리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진리의 빛을 탐구해야 하는데 그 탐구하는 것이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성경을 믿는 것, 다른 하나는 학문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상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잘 믿으려는 마음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 믿으려고 할 때 성경 속에서 새로운 진리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학문으로 더 탐구할 때 풍성한 말씀 사역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의 빛을 탐구하게 되는데 이게 어떤 원리냐면 성경이 이성으로 다 설명이 되는 책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이성과 모순이 되는 것처럼 느끼는데도 그것을 “아멘”하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의심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위대하신 분이라는 인격적인 사랑과 신뢰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성경의 모든 말씀이 잘 믿어지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박윤선 목사님께서 제자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기도 많이 하십시오. 기도 하지 않으면 자유주의자가 됩니다.” 투박해 보이지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실 수 있을 때 성경을 “아멘”하고 믿을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 이것이 흐려지게 되면 성경을 의심하게 되고 이성을 훨씬 더 신뢰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의 빛을 탐구할 때는 믿음이 먼저 나오고 그 믿음 위에서 열심 있는 탐구가 이루어 질 때 타구가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켄터베리의 안셀무스라는 11세기에서 12세기 초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아주 유명한 책이 있는데 『Monologion』이라는 책과 『Proslogion』이라는 책입니다. 이 사람은 이탈리아 출신의 스콜라 철학자이고 스콜라 철학의 시조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켄터베리의 대주교도 했고 현실에서 하나님이 너무나 분명하게 살아계시다는 증거가 우리의 정신세계 안에, 자연세계 안에 충만히 있기 때문에 사실 사심이 없이 우리들이 올바르게 사물을 보기만 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 수 있다고 주장한 신증명을 하려고 했던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이런 말을 남깁니다. 아주 유명한 말입니다. 캔터베리 안셀무스의 『Proslogion』에 나오는 말입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의 높으심을 꿰뚫어 알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저의 지성과 비교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이 믿고 사랑하는 당신의 진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뜻입니까? “내가 이성적으로 이해를 하면 이제 내가 믿겠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믿습니다.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아멘 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이해를 요구하고 이해는 믿음을 요구한다는 유명한 명언을 남깁니다.
목사의 정체성은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것처럼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어간 선지자들의 후예이며 신약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다.
거룩한 학문을 열심히 탐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신학으로 넘어왔습니다. 신학을 열심히 탐구해야 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상하게 신학교를 졸업하면 책을 놓습니다. 책을 읽어도 다음 주에 설교에 써먹을 만한 책을 읽습니다. 그러니까 설교의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설교가 진짜 발전을 하려면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가끔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설교 한 편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물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설교를 준비하는 방법이 둘인데 한 편 한편을 준비하는 것도 준비이지만 저수지 같은 곳에 물을 계속 저장해 놓았다가 가물었을 때에 저수지의 문을 열어서 그 물을 끌어다 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똑같이 설교 한 편을 준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설교자로서 더 깊고 훌륭한 설교를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저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지적인 탱크에 저장한 것도 있고 그 공부한 것을 녹여내서 자신의 인격과 삶이 되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스펄전이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설교를 하고 내려오는 스펄전에게 “얼마나 걸려서 준비한 것입니까?”하니 “평생 걸렸습니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공부를 계속 하셔야 합니다. 특히 여기에 젊은 목회자가 많으신데 공부를 하지 않는 젊은 목회자를 보면 가엾습니다. 앞으로 뭐가 될까? 공부하지 않는 목회자는 앞으로 무슨 희망이 있을까? 왜냐하면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이 진리의 말씀을 전달하는데 아마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몇 년 설교하고 나면 설교 할 것이 없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것을 이기게 만드는 중요한 비결이 성경을 묵상하고 탐구하는 것과 신학을 계속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신학이 학문일 수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신학이 학문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학문은 이성적으로 자명한 논리에서 출발을 하지만 신학은 신앙적으로 믿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진정한 학문이다. 거기에서 내가 논한 지식은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지식뿐이었는데 신학이 그런 일을 하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하게 신학이 진정한 의미의 학문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다음 이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인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학문은 자연 이성의 빛으로 알게 된 원리에서 출발하는 학문이 있습니다. 생물학, 수학 등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더 상위의 빛으로 알게 된 원리에서 출발한 학문이 있습니다. 광학, 기하학에서 출발해서 기하학의 원리들을 받아들이고 광학이 전개가 됩니다. 그런 것은 더 상위의 빛이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음악의 상위 학문은 수학입니다. 그래서 수학에서 이루어진 수열과 조화, 그 법칙대로 작곡을 했을 때 하모니가 나옵니다. 그러면 신학은 여기에 해당되는 학문이 아니라 여기에 해당되는 학문입니다. 계시의 빛에 의해서 주어졌고 그것을 토대로 이루어진 학문이기 때문에 당연히 학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책에 있는 내용 읽음) “신학은 학문이다. 두 종류가 있다. 지성의 자연적 빛으로 알게 된 원리부터 시작한다. 산수, 기하 같은 것이 있다. 상위의 빛으로부터 인식하게 된 원리로부터 출발한 학문이다. 광학은 기하학에 의해 세워진 원리에서 출발하며 음악은 산수학의 원리에서 시작한다. 신학은 두 번째 방식의 학문이다. 상위 학문의 빛 즉, 지식의 근원이신 하나님 그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지복자들, 하늘에 가 있는 사람들의 지식으로 알게 된 원리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음악이 산수학이 지시하는 원리를 잇는 것처럼 신학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를 믿으므로 학문이 된다.
그래서 거룩한 학문을 열심히 탐구해야 하는데 그래서 신학이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러한 지혜, 지혜라는 것은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올바로 해석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해서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학문에 대한 공부도 아울러 해야 한다. 그때에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지식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서 전파하고 공유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과 학문을 탐구하는 자세는 열렬함입니다.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에 여러분이 학문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나님의 종으로써 공부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불충인가를 알게 되면 공부하지 않고 살아 온 젊은 날들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전도는 특별히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다면 전도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만 하는 일입니까? 공부에 탁월한 은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들만 열심히 공부하면 되는 것입니까? 전도회 서점 주인들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세미나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죽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고 물었더니 전도책이 안 팔린다고 합니다. 특히 기독교 서점은 더 죽을 맛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물었는데 서점 주인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우리는 더 도 바라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들에게 책을 사 보라고 준 돈을 다른데 쓰지 말고 그대로 책만 사도 기독교 출판이 이렇게 엉망이 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없습니다. 책 사보라고 주는 돈이 없습니다. 안 받는 것이 아니라 제가 필요한 책이 한 두 권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교회에서 예산을 세워서 사기 때문에 저는 따로 책을 사보라고 주는 돈은 없습니다. 친구 목사들을 보니까 돈을 받습니다. 많이 받는 사람은 한 달에 50만 원, 20만 원, 많이 받는 사람은 100만 원 받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삽니까? 아닙니다. 그냥 돈으로 주니까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에 그것은 잘 못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돈을 주지 말고 책을 산 영수증을 가져오면 돈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은 싫다고, 목사님들이 좋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점 주인들이 하는 말은 “한 교회에 목사님들이 20만 원씩 책을 사면 전국에 목사님들이 5만 명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 출판업계가 살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출판사들이, 서점들이 자꾸 문을 닫습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백선생을 따라서 맛집은 다녀도 어느 서점에 좋은 책이 많은지 보러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짜장면을 몇 그릇씩 사먹어 보기는 하지만 기도에 관한 책은 몇 권씩 사서 보지는 않지 않습니까? 이 집 짜장면이 저 집 짜장면보다 맛있는지 비교는 하지만 책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책을 부지런히 사야 합니다. 열심히 탐구해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공부하십시오. 제가 지방에 내려올 때마다 이야기를 합니다. 공부를 하라고 해도 본인이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충청도지방에 갔을 때 이야기를 했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목사님들끼리 모이십시오. 매주 월요일마다 오전에 모여서 공부를 하고, 오전에는 맑은 정신이니까 오후에는 각자 쉬든지 하고 점심 먹고 헤어지는 것입니다. 그 대신 사모님들도 같이 모이십시오. 사모님들은 모여서 수다 떨고 다과도 드리고 교제도 하라고 하고 목사님들은 이쪽 방에 모여서 공부를 하십시오. 부부가 같이 가야 그 모임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야유회도 가고 하십시오.” 저도 그렇게 독서모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벌써 25년 정도 됐습니다. 매주 모였었는데 이제는 바빠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이는데 그렇게 꾸준히 공부하십시오. 그리고 공부하는 사람들과 노십시오. 그래야 주워들어도 새로운 이야기를 듣지,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과 모이면 맨 날 장로 혼내준 이야기, 새 차 산 이야기, 총회에 갔다 온 이야기밖에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공부하는 사람들과 노십시오. 그러면 뭔가 새로운 것을 듣는 것이 있습니다. 최소한 돌아올 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나는 큰일 났어.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해.’ 그리고 집에 와서 책을 보게 되니까 그것이 은혜입니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모두 선한 목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지 않고도 선한 목사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해서 부풀려 말해야 합니다.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무엇인가 물었을 때 깨끗하게 “나는 잘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공부를 하는 분입니다. 공부를 하니까 그것은 몰라도 내가 다른 것은 안다는 마음으로 깨끗이 모른다고 해야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알겠습니까? 열심히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는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이라는 유명한 사람입니다. 어머니가 안토사람입니다. 20세에 그림 같은 미모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20세에 유복자 크리소스톰을 갖고 홀로 되었습니다. 수많은 귀족들의 유혹이 있었지만 다 뿌리치면서 이 아들 하나를 훌륭한 종으로 키웠습니다. 얼마나 말을 잘 하는지 황금의 입이었습니다. 이 사람 이야기를 하면 길기 때문에 넘어가겠습니다. 이 사람 이야기를 왜 했냐면 10대 때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저도 저 사람의 설교집을 모으는데 30대 때 열심을 내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설교들입니다.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사실상 그리스 교부의 마지막 사람입니다. 아까 그 사람은 황금의 입이었는데 이 사람은 얼마나 말을 잘 하는데 황금의 청산유수입니다. 이 사람의 책은 제가 원서로 두세 권 읽었는데 대단한 책입니다. 법학, 신학, 철학, 의학, 음악들의 토대를 세우고 인식의 원천, 혹은 지식의 원천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앞에 있는 철학자들과 모든 학자들의 학설을 집대성해서 신학적으로 비판해 나가는 책입니다. 정말 굉장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 꼭 읽어 보십시오. 이 사람 책은 번역이 안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굉장한 책입니다.
그 다음은 존 오웬입니다. 이 사람도 젊었을 때 옥스퍼드 출신이었습니다.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건강을 잃어버려서 목숨이 위태로울 때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총신에 2008년과 2012년 두 번 개강식의 강사로 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공부를 하지 않는 후배들에게 집요하게 책망을 하면서 “위대한 종들은 모두 죽을 때까지 공부를 했다. 너희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하면서 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여한이 없도록 공부를 했다. 그러나 공부를 하다가 세 번 쓰러졌다. 빈혈로, 영양실조로 세 번 쓰러졌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22시간 동안 에세이를 했습니다. 밑에 요강을 놓고, 위에 빵 한 덩어리를 놓고 너희들은 왜 그렇게 공부를 하지 않느냐.” 하고 돌아왔는데 어떤 일이 생겼냐면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이 엄청난 도전을 받고 그대로 실시한 결과 마지막에 내린 결론은 ‘김남준 목사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고 우리는 안 되겠다.’ 왜냐하면 여러 사람이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까짓 것 두 번 실려 갔다고 주저앉느냐. 공부하다가 죽는 것도 순교다.”라고 했습니다. 옥스퍼드와 캐임브리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수준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아이는 캐임브리지에 들어갔는데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물리학과에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공부를 시키는지 일 년이면 기숙사에서 두 명 정도가 병원으로 실려 간다고 합니다. 공부를 하다가 너무 지쳐서 내과에 실려 가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하다가 머리가 돌아버려서 정신과로 실려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정신과에 실려 간 것이 아니라 몸이 아파서 내과에 실려 가지 않았느냐. 내과야 뭐 나도 매일 가다시피 하는데 나 같으면 한 번 더 해 보겠다. 다시 힘을 내라. 그리고 친구를 사귈 때도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은 사귀지 말고 공부를 하는 사람을 사귀어라.”, “그러면 공부를 안 하는 사람은 친구로 사귈 수 없습니까?”, “가끔 놀아 주어라. 그 대신 사귀는 것은 공부하는 친구들과 사귀어라.” 그래서 학생들이 쓰러지더라도 공부를 하다가 “으악”하고...
지금 한국 교회는 그런 학생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됩니까? 미래의 한국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고 깊이 신학을 공부한 진실한 목회자 이외에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보겠습니다. 미래의 한국 교회는 아무리 우리나라 국민 소득이 5만 불, 3만 불이 되어도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철저하게 신학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주의 종들을 길러내는 것 외에는 미래의 한국교회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교회 건물이 무엇입니까? 다음에 온 사람이 목회자의 크기가 도토리만해서 사람이 모이지 않고 다 흩어져 나가는데, 영국 교회를 보십시오. 다 비어서 모슬렘에게 팔립니다. 모슬렘에게 팔리는 것이 안타까우면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교회의 십자가를 뗍니다. 외관은 법으로 건드리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교회인줄 알고 들어갔는데 안에 들어가면 연립주택입니다. 다 방으로 갈라서 사람들이 그 안에 사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것을 팔아서 주택업주가 사서 그것을 분양을 해서 팔아먹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제가 시드니에 갔더니 술집인데 술을 마시러 간 것이 아니라 구경하러 갔습니다. 술집이라기보다는 가벼운 음식도 팔고 맥주도 파는 집이었습니다. 딱 들어갔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예배당 그대로 놔두고 땅콩과 맥주를 시켜서 먹는데 평신도들이 앉았던 자리가 가장 싸고 두 번째 비싼 것은 성가대입니다. 그리고 제일 비싼 것은 강단에서 먹는 것입니다. 강단은 여기에서 만 원짜리에 먹는 것을 거기에서는 만 3천원, 만 5천원을 주어야 먹습니다. 사람들이 강대에 올라가서 맥주를 걸칩니다. 그것이 나중의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종이 확실하게 능력이 있으면 돈 없이도 헌금을 걷을 수 있고 건물 없이도 지을 수 있고 차 없이도 살 수 있습니다. 기술이 없이도 기술자를 불러다가 일할 수 있습니다. 능력 있는 목회자를 길러내는 것이 한국교회가 할 일입니다. 이 사람도 죽도록 공부를 하다가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에드워즈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사람은 진짜 엄청나게 공부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천재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결심문을 속에 “한 순간의 시간도 절대로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을 가능한 한 최대로 유익하게 살아라.”
사도 요한을 보십시오. 예수그리스도께로부터 마지막 날 일어날 일들에 대해 계시를 받습니다. 그때에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그랬더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여기에서 울었다는 말이 희랍어 성경에 통곡하는 것입니다. 흐느끼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어 엉엉 우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니까 통곡하면서 울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 두 편 다 넘어가면 찧어낸 기름을 사용합니다. 성령의 역사와 자기 깨어짐을 상징합니다. 순수한 성령의 역사에서 등잔불이 있는데 그 빛이 지성과 진리라면 그 기름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여기가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입니다. 가서 교수들에게 특강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 분이 갓프리 총장입니다. 이 분이 마이클 호친 입니다. 책으로도 익숙해진 분입니다. 우연히 이야기 하다가 조엘 오스틴이라는 인물에게 모아졌습니다. 이 사람은 특이합니다. 지금 교회가 거의 5만 명이 모이는데 예배당을 보십시오. 어마어마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원고도 없습니다. 호텔에 들어가서 TV를 틀었는데 이 사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엉터리, 순 사기꾼’ 그런데 너무 재미있어서 리모컨을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조금 늙었지만 얼굴은 배우 뺨 칠정도입니다. 뚱뚱하지도 않고 호리호리 한 완전 미남입니다. 이야기를 하는데 묘사가 시적이고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입니다. 30분을 듣다가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헌금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른데 이 사람의 신학이 펠라기우스와 번영주의의 상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이 사람이 그런 것을 생각하고 설교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제 말이 궁금하신 분은 인터넷에 들어가서 조엘 오스틴과 레이킴의 인터뷰를 들어보십시오. 거기에서 인터뷰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게 신앙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진짜 성령의 역사가 순수해야지 뭔가 엄청나게 일어나는 것 같아도 순수하지 않으면 그 체험이 우리를 오류로 인도합니다. 순수한 성령의 역사에 의한 신앙의 힘은 지식과 경건의 결합입니다. 기독교의 힘은 사상과 윤리의 힘인데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은혜로 역사 할 때에 비로소 기독교의 큰 중요한 힘과 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지식이 교회에서 정확하게 가르쳐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경건이 결합될 때 그 때에 기독교의 진정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이라고 나오는데 히브리어로 읽으면 ‘쉐멘 짜이뜨 짜이뜨까띠뜨’입니다. ‘쉐멘’은 기름이고 ‘짜이뜨’는 감람입니다. ‘까띠뜨’는 이렇게 꾸미는 것입니다. ‘까띠뜨’는 깨뜨리다, 때리다의 수동 분사 남성 단수입니다. ‘깨뜨려진’이라는 뜻입니다. 감람유를 착유하는 방법은 두 가지 인데 하나는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구 같은 데에 넣고 쾅쾅 찧고 내버려두면 거기에서 기름이 살포시 흘러나옵니다. 그렇게 그 기름을 거두어서 그것을 가지고 기름에 쓰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기름을 찧어서 압착기에 누릅니다. 그러면 기름의 양은 많지만 거기에는 항상 불순물이 섞여 있어서 불을 붙이면 그을음이 납니다. 그래서 이런 순결한 감람유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사역에 있어서 자기 깨어짐의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자기가 깨뜨려짐으로써 거기에서 진짜 교회를 올바르게 잘 밝힐 수 있는 그런 은혜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진리의 진정한 목표는 진리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진리의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탐구를 통해서 진리를 알고 그것을 먼저 자기에게 적용해서 진리에 합치된 삶을 살고 그래서 자신과 이웃을 창조의 목적에 맞게 돌아가도록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것이 순전한 자기 깨어짐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어떤 성경의 진리가 올바로 이해되고 그 이해된 것을 진실하게 체험해서 자기화하는 것, 사도바울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나의 복음이라고 이야기 한 것처럼 그렇게 자신 속에서 진실로 체화된 복음이 나와서 자기가 그 말씀을 따라서 살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도록 외칠 수 있는 체화된 성경의 진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1년 전 쯤 일인데 어느 외국인 교수가 나와 같이 대화를 하다가 자기가 받은 충격을 이야기 했습니다. 자기네 학교에서 석사과정까지 보수적인 신학을 하고 박사과정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는데 자유주의 신학을 배우다가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것입니다. 석사과정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가끔 있었고 박사과정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없었는데 이 신앙이 얼마나 없었으면 이런 것을 발견하게 될 때 엄청나게 무너지고 주저앉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신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실천에까지 이르게 하는 힘으로써의 신학이 필요하다. 그래서 진리의 힘은 자기가 먼저 그것에 의해 깨뜨려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때 그때에 거기에서 놀라운 진리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에 의해서 깨어지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깨어진다는 것은 지능을 잃어버린, 망가진, 죄에 대한 사랑, 자기 의, 내가 잘났다, 종교지도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이 깨뜨려져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깨뜨려져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사랑, 자기 의에 대한 깨어짐입니다.
그 다음은 마틴 루터입니다. 이 사람은 성경의 권위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은혜를 통한 구원을 강조합니다. 이 사람이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한 사람이 신학자가 되는 것은 깨닫고 책을 읽고 사색함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살고 죽고 정죄 받음으로써 신학자가 된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옛날에는 깨닫고 책을 읽고 사색함으로써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면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중세의 하나님 영광의 신학이 아닌 십자가의 신학을 발견합니다. 그 십자가의 신학이 무엇이냐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수치스럽게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하나님이시면서도 죽음을 당하는 그 수치스러운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이 드러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위대한 영광이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까 신학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자격이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죽은 것처럼 자신이 죽고 예수가 그렇게 멸망당한 것처럼 자기가 멸망당하는 것을 통해서 예수와 함께 사는 영적인 비밀이 무엇인지를 터득함으로써 진정한 신학자가 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참 종이냐 거짓 종이냐를 구별할 때 간단하게 고백이 있느냐, 없느냐, 진리의 말씀을 향한 고난이 있으면 참 종이요, 그런 고백이 없으면 가짜라고 못 박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탁월한 표지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이런 간절한 기도하는 마음에서 바람직한 경건들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라는 것은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열렬한 기도가 있지 열렬하게 살지 않는 사람은 기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땀을 많이 흘리는 것이 몸에 좋습니까? 좋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그런데 사우나에 들어가서 숨이 막혀 죽겠는데도 수건으로 가리고 견딥니다. 500ml정도 흘립니다. 그것을 받아서 분석을 해 보면 90%가 물이라고 합니다. 밖에 나와서 물 두 잔을 마시면 도루묵입니다. 그런데 운동을 해서 땀을 흘린 것의 성분을 보면 오줌보다 심한 중금속이 쏟아져 나온 노폐물입니다. 고난은 이런 것들을 밖으로 계속 쏟아내게 만듭니다.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열렬한 기도생활입니다.
지성의 탐구와 마음의 기도, 지식과 경건의 결합을 통해서 자기 깨어짐을 계속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순전한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성경 말씀을 깨닫고, 이 성경을 묵상하고 가르치고 교회 말씀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이 깨어지고 변화될 때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순전한 영혼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의 깊은 변화를 끼치도록 그런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르치고 목회하는 주의 종들이 되어야지 칭찬받는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영광은 큰 교회를 하거나 이름이 널리 알려지거나 무슨 정치적인 권한을 쥐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영광은 자신의 온 마음을 하나님 말씀 탐구에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자신이 먼저 살고 그것을 잘 태워서 자기가 깨달은 진리의 빛을 교회와 세상에 비추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도록 만드는 것이, 그것을 만드는 일에 있어서 성공을 거두는 것이 목회 생활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모든 고통의 궁극적인 뿌리라고 보고 목회자는 이 세상의, 어두운 세상의 무지한 양떼들을 위해 부름을 받은 탁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본질적인 사명은 성도들이 성령의 진리로써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는 그래서 그 성령의 은혜로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도록 변화시켜 주는 것이 목회자의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자신이 먼저 이런 길을 걷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성은 진리를 알게 하고 의는 진리를 따라 살게 하고 은혜는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지하실에서 컴퓨터로 쳐서 복사기에 돌려서 전도지를 돌렸는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들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왔습니다. 제가 쓴 글을 보고 가슴이 무너져서 교회에 왔습니다. “진리를 따라 살고 싶어도 그 길을 알 수가 없고 알았는데도 그렇게 살아갈 힘이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가 그런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고 싶지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고 알게 되었지만 그렇게 살아갈 힘이 없을 때, 아이는 가졌는데 아이를 낳을 힘을 줄 육체의 능력이 없을 때,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목회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여 그들을 아름답고 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 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없어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 각자 자기 지문을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독특한 자기 사명이 있어서 태어났습니다. 그 사람으로서 살아가도록 우리가 돕는 것, 이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이익을 하나님이 얻으시도록 그렇게 돌보는 일이 목회입니다. 이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성령, 은혜로써 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목회자는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신념을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학문을 대한 탐구도 함께 들어있습니다. 열렬히 탐구하면서 그러면서 주님의 말씀의 빛을 내 안에도 충만하게 가지는 것, 두 번째는 열렬하고 지속적인 기도로써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 것, 마지막으로 자신이 그 진리에 합치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서 교회가 떨어지고 교인들이 없고 모든 사람이 없어도 자기가 진리 가운데 있는 행복을 느끼며 사는 그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목회자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