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레24:1-3)
녹취자: 김경애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에서 당신을 섬기는 규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그 성막에서 어떻게 등잔불을 밝히고 또 그것을 관리해야하는지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성막은 이동식 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막은 어떠한 창문도 없이 덮개는 물돼지가죽으로 만들도록 지정되어있습니다. 비록 그 속은 화려했으나 그 겉은 물돼지 가죽으로 덮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바람과 햇빛과 비를 맞으며 그 텐트의 겉모습은 누르퉁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서 사람들이 보기에 그 성막은 어떤 아름다운 것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평범한 천막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천막은 약 18평 크기의 방으로 되어있고, 그 18평 크기는 12평의 방과 6평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큰 방을 성소, 작은 방을 지성소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두 사이에는 휘장이 드리워져있었습니다. 외부로부터 모든 빛이 철저히 차단되었기 때문에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불빛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등잔불이 꺼지지 않도록 성막에서 관리, 유지하는 일을 아론에게 임무로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막에서 주신 그 등잔불에 관한 규례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교회와 목회자,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종들의 본질적 사명에 대해서 살펴보고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는 시대가 바뀌면서 엄청난 많은 일들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일 이외에 다양해진 사회에서 선교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 실로 많은 일들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더욱이 산업화사회 이후에 밀려들어오는 이 경쟁적인 심리들과 그리고 성장 위주의 선교정책들은 목회자들에게 더 많은 일들을 더 열심히 수행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그 본질로부터 멀어지지 않는가 하는 우려를 우리에게 줍니다. 높은 수준의 신학자들은 이제 정치한 학문적인 담론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신학자들은 이전에 우리가 알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목회자들은 다른 구원의 길이 있는 것처럼 가르치기 시작하고 성도들은 예전에 갖던 동기와는 또 다른 동기로 신앙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런 모든 상황들은 합력하여서 악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우리의 교회의 현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물에 떠밀려 내려가는 커다란 빙하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한 사도 바울의 그 강력한 권고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세상의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빛으로 교회를 비추고, 세상을 비추고, 우리 자신을 비추면서 우리들이 참된 신앙의 본질에서 멀어지지 않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탐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왜 하나님이 성막을 만드실 때에 창문을 몇 개 뚫어서 빛이 들어오게 하시지 일체의 빛 없이 가죽으로 덮어버리시고 그리고 거기에서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햇빛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정하신 그 방식으로 등잔불을 키게 하여 주님을 섬기는데 사용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야할 중요한 지침들을 제공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리의 빛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교회를 이끌어 가는 일에 있어서 이 세상의 상식이나 이성의 논리가 도움이 된다는 것은 언제나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이 가장 중요한 우리의 신앙의 규범들을 제공함에 있어서는 이 진리의 빛만이 유효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캄캄하게 어두운 장막 안에 등불이 켜집니다. 밖에서는 거무칙칙하게 보였고 우리의 눈길을 끌만한 좋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성막 안에 들어가 보면 금색, 자색, 청색실로 고이 꼰 휘장들이 있고 그리고 기구들이 있고 찬란한 빛을 드러내며 화려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로 접근할 때 그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예표적으로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든지 신학이든지 우리의 목회든지 수박 겉핥기식으로 해서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을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본질로 들어가게 될 때 인간의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아주 찬란한 아름다움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겉모습으로 볼 때에는 그저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지만 그 신앙의 본질 속으로 들어갈 때에는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은총이 우리의 마음속에 다가오게 되고 우리 같은 인간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사랑하고 또 자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신학을 공부하면 그저 목사가 되기 위한 필요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이세상의 학문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러나 신학의 깊은 내밀한 속으로 들어가면 정말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의 아름다움과 경륜의 탁월함은 우리의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과 그 빛 아래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모든 것 위에 탁월하도록 고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일생의 목표를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기에 접근하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신학에서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목회의 본질에 접근하여 사역해본 사람들만이 이 목회사역이 얼마나 보람되고 아름다우며 그리고 천사도 부러워할만한 영광스러운 직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일이기 때문에 하는 사람들은 일 이상의 재미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만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경륜을 이해하고 자신의 목회사역이 그 위대한 구속과 완성의 경륜을 이루어가는 중요한 하나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목회와 심방, 설교, 교인들을 가르치고 교회를 다스리는 이 모든 일 하나 하나가 우주의 아름다움과 연결되어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를 완성시키는 위대한 경륜 속에 하나의 징검다리가 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 위대한 하나님의 완성의 경륜에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보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잇대어 살 수 있는 놀라운 안목과 그리고 영원을 향한 감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든 복음사역에 있어서의 본질적 요체가 무엇인지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가져오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아온 그 기름을 가지고 불을 밝히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캄캄하게 어두운 장막 안에 등불이 밝혀지고 나면 심지를 돋우고 거기에서 찬란한 불빛이 성막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시야를 열어줍니다. 거기에 켜진 이 찬란한 불빛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진리의 빛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편 119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법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말입니다. 등불은 한걸음, 한걸음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기 위하여 필요한 불빛이고 빛은 길 전체에 두루 비추어 환하게 만들어서 길을 잃지 않게 하기위한 용도의 빛입니다. 그 찬란한 빛과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그 하나님의 인도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개별적인 말씀의 인도를 따라갈 시인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개혁신학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 대단한 긍지를 느낍니다. 그러나 여러분 개혁신학이 훌륭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신학을 따라 믿고, 살고, 목회를 하지 않는다면 훌륭한 내비게이션을 차에 장착하고도 내비게이션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멋대로 운전하는 사람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정보가 아니라 그 정보를 따라서 올바르게 가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은 훌륭한 것이지만 충분히 공부하지 않은 사람 손에 들려질 때에는 아주 독단적인 사상이 되어서 교회의 분열과 분쟁을 일삼는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년에 와서 여러분들에게 집회를 한 것처럼 만약에 여러분들이 제대로 개혁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하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개혁신학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여러분들이 많은 공부에 자신을 헌신해야한다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당부 드리고 싶습니다. 진리의 빛과 상관이 없는 삶을 산 사람들이 강단에 올라가는 순간 성령에 붙잡혀 그 순간만 진리를 토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성이 거의 없는 불신앙적인 기대입니다. 한사람의 외치는 선포가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독일의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가 말한 것 같이 ‘6일 동안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애쓰고 그 진리와 같이 살기위해서 몸부림치는 사람의 증언만이 주일날 선포하는 그 설교가 사람의 소리가 아닌 진리에 관한 증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진리를 얼마나 하나님 앞에 사랑하고 얼마나 그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되어야하는지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목회하고 선교하고 신앙생활 하는 이 사회는 거대한 사상의 조류 속에 떠밀려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조류에 떠내려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법이 없습니다.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이 세상은 거대한 조류가 되어서 흘러가는 것인데 이 흘러가는 조류의 조짐들은 그렇게 상서롭지가 않습니다. 여기저기서 기독교에 반하는 사상과 주장들이 대중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고 그리고 특별히 원한에 맺힌 것 없이도 세상이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비난합니다. 교회가 윤리적으로 저하된 것은 사실이지만 개신교 교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여기저기서 이 기독교에 대해서 심한 욕설과 모욕을 그치지 않는 것도 단순한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조류 그 자체가 기독교신앙이 주장하고 있는 바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은 앞으로 점점 심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이 세상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탐구하지 않고 우리가 믿고 있는바, 우리가 참으로 믿어야할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탐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점점 더 세속의 정신 속에 물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의 도시 한복판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당신을 믿는 신앙의 가치와 그리고 관점들을 이 세상에 전파하여 이 세상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 그분을 경배하는 자리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교회를 세상 속에 두신 것이지 이 세상의 사상들에 물들게 하기 위하여 교회에 두신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라는 추상적인 말 대신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명을 따라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가는 주의 종들이 지성과 그리고 온전한 경건으로 무장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디를 가더라도 들을 수 있는 상식적인 이야기들이 교회에서 선포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간지럽히는 흥밋거리의 이야기들이 교회를 채우고 있다면 거기에는 진리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의 참된 빛은 아름다웠던 것들은 그 진리의 빛 때문에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만들어주고 아름답지 못하던 것은 그 진리의 빛을 봄으로써 그 추함을 이 세상에 드러내 사람들에게 사랑과 미움을 각각 받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참된 설교자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텐타치오가 있으면 참된 설교자요, 텐타치오가 없으면 참된 설교자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텐타치오는 바로 고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예수님이 전했을 때도 모든 사람이 진리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찬란하게 비치는 태양빛이 모든 정상적인 안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상쾌한 빛이지만 안질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듯이 아름다운 음악소리는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는 심금을 울려주는 예술이지만 고막이 찢어진 사람들에게는 거의 고문의 수준에 이를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는 그렇게 망가진 사람들에게는 고통으로 다가가 그들을 아프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그리하여 자신들의 죄를 깨달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능력이고 그리고 진리 안에 거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용기와 그리고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회사역과 복음사역의 본질이고 이것은 목회자의 사명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모든 사람이 하여야하는 일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는 이 세상의 그 빛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복음사역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사역의 본질이 진리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이 교회를 먼저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으로 밝히는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여러분들은 두 가지에 온 마음을 쏟아야 할 것이니 첫째는 성경을 부지런히 탐구하여 잘 믿으려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신앙이 마음속에 충만하여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아멘’ 할 수 있는 그러한 내적인 믿음의 욕구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성향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또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면서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 말씀에 마음이 새로워져 주님의 말씀을 잘 믿고 받아들여 충만한 신앙심으로 이 성경을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을 할뿐만 아니라 앞으로 여러분들이 이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니 부지런히 이 진리의 말씀을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을 펼쳐놓고 읽으면서 어떤 진리를 깨달을 때 이 진리를 오늘 자신이 인류 최초로 발견한 사람처럼 생각하지만 2000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성경을 읽었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여러분처럼 은혜를 받았다고 믿었는데 오류에 빠졌고 어떤 사람들은 참된 진리를 그 안에서 정말 발견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것이 진리가 아닌 것으로 밝혀질 때가 있었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것이 소수의 의견이었지만 진리였던 적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이 진리라고 발견한 이 성경해석의 역사와 신학의 모든 과정에서 생성된 지적인 집적물들을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일반학문을 공부하는 사람과 같은 출발선 상에서 학문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대학을 들어올 때도 성적이 쳐지는 사람들이었고 대학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 세상의 훌륭한 학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만시지탄의 마음을 가지고 공부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이제 신학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강대로 돌진하여 설교나 하기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교역자, 목회자 대접이나 받기를 즐겨하는 일에 여러분들이 익숙해져가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앞날은 매우 부정적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진리의 사람으로 부르신바 된 것을 깨닫고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 때문에 깊이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 예수께 계시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의 사명은 주께로부터 오는 이 계시의 말씀을 받아 적어서 일곱 교회에 보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판단을 받아들이고 교회를 정하고 굳세게 하며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게 하는 것이 이 사도요한의 사명이었습니다. 두루마리가 주어졌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천사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 계시의 책 두루마리의 인봉을 뗄 자가 땅위에서나 하늘에서나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것은 인봉된 채로 있을 것이라는 선포가 들려왔을 때 요한이 100세가 거의 다 된 늙은 사도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기억하십니까? ‘에클레산폴유’ 라고 희랍어 성경에 되어있는데 이것은 큰 소리로 어린아이처럼 방성대곡하며 울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등록금이 없어서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들은 신학교의 고생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목회와 학업 둘 사이에 끼어서 고통을 받고 학업을 하는 길에도 가정에 여러 가지 우환이 겹쳐 정말 이 신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는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은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목회를 하면서 허허벌판에 교회를 세우는 그 마음을 누가 알겠으며 그 흘리는 눈물을 누가 감히 맛보았겠습니까? 성도들과 함께 교회를 짓고 세우는 그 일을 위해서 드리는 그 수많은 기도와 금식의 날들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 모든 것들도 하나에 비유하면 모두 부차적인 것일 것뿐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사도 요한은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 때문에 자기가 한 일들이 잘되지 않는 것 때문에 가족들이 당하는 고통 때문에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는 자신의 무지 때문에 통곡하며 울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인봉을 떼어 요한에게 보여주셨으니 이것은 그의 통곡하며 매달리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고난의 각오를 가지고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쓰신 ‘설교와 설교자’라는 책을 기억할 것입니다. 1970년대에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가서 우리로 말하자면 개강수련회 같은 곳에서 일주일동안 설교에 관해서 강의한 모든 내용을 함께 묶은 책입니다. 그 속에서 설교자로서 그는 설교자가 되려는 학생들에게 충고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자신을 준비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후일 여러분들은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 말보다 비참한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길을 들어선 것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세상의 영광이나 나의 육체의 자랑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권력이나 어떤 힘이나 영광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만큼 절망적인 말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누구도 알아주는 사람 없이 빈들의 피어나는 작은 풀같이 한포기의 풀처럼 여러분들이 지금 이곳에서 자라고 있으나 언젠가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쓰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쓰임을 받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큰 키, 잘생긴 얼굴, 훌륭한 가문, 능수능란한 인간관계의 교제술, 교회경영의 기법들, 이런 것들도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진리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부지런히 탐구하고 그리고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학교시절에는 거의 건강을 헤쳐서 목숨이 위태로워질 정도까지 공부해야합니다. 내가 어느 신학교를 가든지 강력하게 촉구하는 것이 있는데 신학생으로서 6시간 이상 자는 것은 범죄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4시간 정도로 잠을 줄이고 결국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은 불공평합니다. 재능도 같지 않고 가정형편도 똑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 24시간입니다. 그러면 남과 똑같은 조건 속에서 이 모든 역경들을 이겨내고 진리의 사람으로 자리기 위해서는 덜 자고, 덜 쉬고, 덜 놀고, 덜 먹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게 붙들려 매달려서 치열하게 하나님의 학문을 탐구하여야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얼마못가서 남의 설교집이나 찢어서 설교를 하러 올라가는 신세가 될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교회가 항상 진리의 빛으로 밝은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있는 모든 시대의 교회들이 한결같은 빛을 누린 것은 아닙니다. 어느 시대에는 이 보편교회에 찬란한 빛이 들어왔고 어떤 시대에는 이 불이 거의 꺼져 암흑과 같았습니다. 이 세상에 흩어진 작은 지역의 교회도 모두 동일한 빛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교회는 소수의 사람이 모이나 밝은 진리의 빛을 지니고 있고 어느 교회는 다수의 사람들이 모이나 시커먼 어둠속에서 교회가 굴러갑니다. 어느 교회는 진리의 빛도 밝고 많은 사람들이 그 빛을 향유하기도 합니다. 그 빛을 좌우하는 중요한 사람이 바로 목회자요 그가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유장하게 설교하고 성경을 눈앞에 두었지만 그가 성경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그를 붙잡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면서 진리를 사람들의 마음에 달음질하게 하는 그 한순간의 연설을 위해서는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목회자는 그 진리를 자신 안에 체화하고 습득하기 위해서 남들이 춤추고 먹고 노래할 때 금식하고 울어야하고, 남들이 쉬고 잠잘 때 그는 깨어서 몸부림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빛이 교회에 가득하도록 미래를 준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진리의 빛과 함께 찬란한 불꽃이 타올랐고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기름이 제공되었습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 기름은 성령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였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그가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가 배운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설교의 흠이나 잡고 자기와는 견해와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정도의 쓰임밖에는 받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개혁신학을 유지하고 있는 신학교가 극히 소수입니다. 우리가 믿는 개혁신학을 가지고 논문을 써서 통과될 수 있는 학교가 아마 전 세계에 존재하는 개신교 신학교 가운데 5% 내지 3% 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외국을 두루 다니면서 개혁신학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개혁신학을 고수한다는 신학교가 그러한 신학을 따르는 교회들이 거의 기도를 잃어버렸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개혁신학을 할뿐이지 거의 기도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개혁신학과 함께 치열하게 타오르는 복음의 열정과 기도의 불길을 간직한 신학교는 아주 소수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아주 짙은 어두운 그림자를 우리 앞에 드리웁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는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기도를 모르는 사람이 성령의 사람인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것은 이단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정통적인 신앙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열렬한 기도의 사람들이 충만한 성령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미국교회사에서 위대한 기도의 사람 E. M. 바운즈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앨라배마 쪽에서 종군목사로 활동하였고 은퇴한 후에는 실제로 8시간 이상을 기도에 자기 자신을 바치며 기도를 몸소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에 관한 자신의 글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충만한 성령의 기름은 사람 위에 부어지는 것이지 방법과 제도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한 사람의 설교가 단순한 신학적인 자기 표명이 아니라 진리의 불을 머금고 그리고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강대에서 타올라 얼어붙은 땅과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굳게 걸어 잠근 사람들의 마음의 빗장을 부수어 복음의 물결이 그 속에 흘러들어가게 만드는 위대한 능력은 설교자와 함께하시는 성령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깊고 간절한 기도의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제가 신학교의 문을 두드렸을 때에는 모든 환경이 지금만 못하였고 훨씬 더 열악한 상황 속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제가 아침에 제일 부러운 사람은 일찍 학교에 와서 사발면과 김밥을 먹는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했습니다. 지금은 훨씬 여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학생들이 심각하게 기도를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더 심각할 정도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7년 동안 대학 4년, 신대원 3년을 다니는 동안 거의 방학 때마다 빼놓지 않고 한학기가 끝나면 기도원으로 들어가서 한 주간씩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무슨 특별한 기도제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한 학기동안 세속에 묻은 때를 씻어내고 여름에는 여름성경학교를 위하여 겨울에는 신년도 한 해 동안 있을 우리의 목회사역을 위하여 홀로 혹은 친구들과 함께 그렇게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이 일상 늘 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많은 신학생들이 거의 기도하지 않습니다. 심각할 정도로 거의 기도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기의 영적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이 모든 성령의 체험의 부족이 그들의 목회사역을 세속적으로 흘러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이미 나타났고 여러분들이 앞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목회하고 기도하는 신앙적인 수준은 신학교 때에 여러분들이 간직한 것 그것을 뒤로 물러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능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학교 때에 재주나 피우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목회자가 된 다음에 변화되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신학교를 다닐 때 진실하고 기도를 많이 하던 사람들이 목회자가 된 다음에는 교만하게 변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은 그런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나를 변화시키고 나의 말씀사역을 변화시키고 그리고 내가 목양하는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나의 목회사역에 있어서 이 진리의 빛과 함께 역사하는 성령의 강력한 불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기도하고 있는지 되묻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이 기름을 어떻게 공급받았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여기에 쓰일 이 등잔불에 사용되는 그 기름이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이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그 감람유를 만드는 방식을 명기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감람을 가지고 기름을 만드는 것인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반적인 올리브 착유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올리브를 연자 맷돌에 갈거나 절구로 빻아서 그래서 거기에서 흘러내리는 그 기름을 프레스로 눌러서 짜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의 이 기름은 그것이 아니라 감람을 찧어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람을 절구로 찧거나 혹은 깨뜨리면 그것이 부서지면서 거기에서 즙처럼 기름이 흘러나옵니다. 그것을 프레스로 누르지 말고 그것을 그대로 채집하라는 것입니다. 이 압착기에 넣고 착유를 하면 기름의 양은 많이 나오지만 거기에 불순물이 섞입니다. 그래서 불을 붙이면 그을음이 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밝히기에 적합한 불빛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그냥 깨뜨려진 대로 그대로 기름을 채집해서 깨끗한 기름으로 밝은 빛을 내게끔 타오르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찧는 단어는 까띠뜨 라는 단어인데 까따뜨 라는 동사의 피동 남성분사입니다. 까따뜨는 깨뜨리다. 부수다 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신학을 하면서 우리가 진리의 사람이 되고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바로 그 진리의 말씀에 의해 깨뜨려지는 경험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진리의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가 객관적인 자연의 지식들을 사람들에게 감동 없이 전해주는 방식으로 전파되도록 지정된 진리가 아닙니다. 이 진리는 진리가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방식은 목회자가 l 진리를 받고 진리에 의하여 자신이 변화된 다음 그 진리가 자신 속에 토해져 나올 때에는 마치 이것이 자기의 진리인 것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나의 복음, 내 복음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이 감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기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바울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에 어떤 차별성이 있었느냐하면 그런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이 예수의 복음이었는데 그것은 예수의 복음을 객관적으로 배달해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소화하고 체화하여 자신의 진액과 자신의 피와 살이 거기에 묻어서 그것이 쏟아져 나와서 사람들에게 전파할 때 사도바울이 보이지 않고 사람이 보이지 않고 그리스도만 보이게 만든 그런 종류의 체화된 진리였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를 체득하는 방식입니다. 그 진리는 단지 공부를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리는 학업을 통해서만 터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와 학업이 없이 진리를 터득할 가능성은 없지만 그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뛰어난 학문을 가지고 설교를 해도 사람들이 좁쌀만 하게 그를 느낄 수도 있고 그렇게 탁월하게 공부를 하지 못했어도 거대한 거목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진리가 자기 속에 체화되는 정도인 것입니다. 거목으로 만드는 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 자체가 아니라 그 진리를 체화하고 소화하고 그 진리 안에서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고 다시 살아나는 그러한 진리와의 연합의 체험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메디따스 라고 한다면 자신의 온 의식과 삶을 그 지식에 합치되게 하려고하는 것이 메룸 곧 진실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가치관의 기준이 그 진리에 서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이 없이 진실해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간혹 소 뒷다리에 개구리가 맞는 경우로 간혹 진실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런 우발적인 진실을 우리들은 진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신뢰하고 그리고 그 진리를 굳게 붙들고 자신의 모든 행복을 그 진리에 합치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 우리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항상 진리를 사랑합니까? 우리의 삶이 항상 진리에 부합합니까? 우리가 진리를 대할 때 진리가 우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 살았다고 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아첨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만 진리는 우리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린아이든지 어른이든지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삶이 어떤 것이고 진리의 뜻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증거해주어서 진리를 벗어났을 때에는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우리에게 우리의 살을 찢는 것 같은 고통을 주어서 우리로 뉘우쳐 돌아오게 만들어줍니다. 진리에 부합할 때는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주고 고난과 역경을 이기게 만들어줍니다만 진리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우리에게 준엄한 책망을 내리고 그리고 그 앞에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자처럼 엎드러지게 만들지 않습니까? 한 사람의 연설이 짧은 한마디의 말로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그 연설하는 사람이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연설하고자하는 그 말대로 살아온 몸부림의 날들이 있을 때에 그것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매일은 그럴 수 없을지 몰라도 그러나 며칠에 한번쯤은 성경을 읽다가 그 진리의 말씀이 나를 찔러 그 성경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날이 있어야합니다. 채플을 드리다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울부짖는 일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자기가 이 세상의 만물의 찌끼와 같은 인간임을 깨닫고 깨뜨려지는 일들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 사람이 진리의 사람이 되어 목회의 본질적인 사명에 접근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역을 할 수 있을 것이니 이 세 가지를 가슴에 새기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마음으로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