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불꽃처럼 살다 죽다 1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요 1:6-8)
녹취자 : 오희열
아마 목회자가 일생동안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있다면 설교일 것입니다. 사실 목회자들의 다른 문제는 사실 매일 부딪히는 문제가 아니고 가끔 부딪히는 문제입니다. 저는 목회자가 되면 돈 걱정을 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돈과는 상관없는 직업인줄 알았는데, 세상에 태어나서 돈 때문에 울어보기는 목사가 된 다음이었습니다. 교회를 짓고 혹은 교육관을 사면서 고통 받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것이 진짜 힘든 일이구나!’ 하면서 고통 받은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매일매일 부딪히는 문제는 아니고 교회가 커지면서 교회를 짓는다든지, 교육관을 짓는다든지 할 때에 부딪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의 문제는 매일매일 부딪히는 문제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기도는 너무 힘들면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쉬었다가 할 수도 있고 조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설교는 매일매일 의무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주일에 설교를 하면 주일 오후에도 설교를 해야 합니다. 그게 끝나며 수요일이 다가옵니다. 금요일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더욱이 매일매일 새벽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니 요즘은 어떤 풍조가 일어나는가 하면, 주일 설교 한 번만 하고 모든 설교를 부교역자들에게 시킵니다. 명분은, 부교역자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데, 솔직하게 들어가 보면, 여러 가지 일 들을 다 하느라 설교를 주일, 주일 오후, 저녁, 수요일, 금요일, 이렇게 준비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일날 교인들이 많이 모였을 때 한 번만 설교하고 나머지는 부교역자들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제가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그렇게 하면 목회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부교역자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아닌데, 강단 전체의 말씀의 영향력이, 한 담임목사를 통해서 두루두루 흘러가는 것이 주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외국의 어느 교회에 갔더니, 담임목사도 그 사람의 설교가 어떤지도 모른 채 한국에서 인기가 있으니까 불러왔는데, 완전히 신사도 계열이라 설교를 확 하고 갔는데, 설교를 못해서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으면 좋았을 텐데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간 것입니다. 뒷감당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인을 통제할 수가 없게 되었답니다.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아무리 설교가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교회보다는 그 가치가 아래입니다. 이 얘기는 설교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설교이지 교회가 설교를 하기 위한 장소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한국교회에서 개혁주의 설교를 한다고 널리 알려져 있고, 또 많은 분들에게 존경을 받고, 저도 그분의 책을 여러 권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분의 목회와 설교를 듣던 교인들이 교회를 가지 않고 아파트에 모여서 그분의 녹음된 설교를 들으면서 주일을 지켰답니다. 이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론이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도 제법 교회에서 설교의 영향을 끼쳤습니다. 23년 전에 두 번 문 닫고 나간 교회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지하실에 내려가서 볼 수 없는 흉가입니다. 그것을 다 걸레질해서 손수 페인트칠을 해가면서 적금을 깨서 1500만원에 60만원 월세를 얻어서 교회를 하려는데, 동네에 있는 어떤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왔으면, “내가 동네에 있는 아무개 목사인데, 이렇게 교회가 오게 되어서 참 반갑습니다.”라든지, “교회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하든지 해야 하는데, 제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혀를 “쯧쯧…”차며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저한테는 인사도 하지 않고 한다는 말이, “잘못 왔어, 잘못 왔어, 여기는 교회가 안 되는 곳이야. 두 번이나 문을 닫고 나간 자린데.. 쯧쯧..”하면서 혼자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상한 목사가 다 있구나.’생각을 했습니다. 그 교회는 15명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위치도 너무 안 좋은 곳이었고 아파트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신념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사역을 어디서 시작했습니까? 광야에서 했습니다. 아니, 하려면 신도시에서 해야지 왜 광야입니까? 광야에서 외쳤을 때, 처음 외치는 소리는 자기 혼자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영향력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교회가 23년 지내온 동안에, 여러분은 저를 잘 아시겠지만, 저는 제자훈련을 썩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온누리교회 스타일의 찬양집회 신봉자도 아닙니다. 그러면 저는 뭐냐, 저는 이쪽 전라도 이쪽 지역은 저를 그렇게 많이 초청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오기는 왔습니다만 많이 오지는 않고 경상도 쪽은 많이 갔습니다. 고신 쪽, 특히 남도 쪽의 목사님들이 저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 10여전 전에는 매달 내려갔습니다. 최근에는 대구, 부산을 거의 매달 내려가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 중에서 연세 많으신 목사님들이 저를 좋아하십니다. 좋아하는 이유는, 저는 고전적인 목회의 신봉자입니다. 옛날에 우리 선배들이 하던, 열심히 기도하고 심방하는 것입니다. 저는 마케팅교회도 아닙니다. 저는 신학적으로 그것은 이미 아니라고 봅니다. 온누리교회 스타일의 찬양교회, 그것도 아닙니다. 제자훈련도 저는 그렇게 따라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저한테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사도 운동, 그것은 더더욱 신학적으로 아닙니다. 그냥 예배와 설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교회를 일구어 왔습니다. 여러분은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저의 주일 설교시간이 평균 100분이었습니다. 설교만 말입니다. 그리고 짧게 끝나면 90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록은 144분이 주일 설교의 기록입니다. 주일 설교가 아닌 집회에서는 5시간 15분을 쉬지 않고 설교한 것이 기록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어떻게 보면 교회 성장의 원리하고는 정 반대였습니다. 지금 나이가 이렇게 들고 보니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매일 교회에 오면 교인들에게 “그렇게 하려면 교회를 나가라!”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어떤 주일학교 아이 하나가 따라와서 어른 예배에 참석하고 이런 말을 했답니다. “엄마 아빠는 왜 교회 와서 맨날 혼나고 돈만 내고 가?” 그래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일곱 명의 성도들이 지하실에 모여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얼마나 사람들이 모였는지, 설교를 하도 길게 하니까 사람들이 졸도를 했습니다. 산소가 모자라서 임산부들이 졸도를 했습니다. 그래도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설교했습니다. 그러다가 바깥으로 나오고 등등등 해서, 제가 별로 가고 싶지도 않은 평촌에 가서 자리를 잡고 있는데, 저는 강남에서 자리를 잡고 싶었습니다. 강남에서도 이런 청교도적인 설교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슨 뜻인지 저 서울 변두리로 밀어내셔서 갔는데, 한 가지 확신을 얻은 것은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장악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장악되어야 하고 그 말씀에 의하여 장악된다는 의미는 예배가 그 교회를 장악한다는 뜻이고, 그리고 그 예배의 중심에는 당연히 설교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주일 한 번만 달랑 하고 나머지는 전부 하청 주듯이 그렇게 하는 것은 썩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죽으나 사나 한 목회자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자신의 강단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를 바라며 여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최근에 저에게 기독신문에서 신문 1면에 한국교회에 대해서 열두 번을 연재해달라고 제의를 받아서, 이번에 첫 번째가 나옵니다. “기독교인이 누구인가?”로 시작을 해서, 다음주에는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차례대로 신학교육, 심지어는 정부와의 문제까지도 신학적으로 거론을 하려고 하는데,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회심해서 주님을 깊이 만난 교인이 아니면, 현실적으로 목양이 되지 않습니다. 목양은 양들을 돌보는 것이 목양이지, 맹수를 데려다가 가두어 놓는 것은 목양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변화를 받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 설교의 직무라고 하는 것은 너무너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한 시대에 반짝 빛나서, 사람들에게 뭔가 신선한 느낌을 준 사람들 중에는 설교로서만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부터 한 30년 전에 “총동원 전도주일”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게 신기한 것이 한 500명밖에 모이지 않는 교회에서 2000명씩 사람을 모아 놓았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매력을 주지 않습니다. 한때 마케팅 교회가 미친 듯이 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따라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케팅교회를 따라 해서 성공한 교회는 전국적으로 손에 꼽을 정도로 몇 개밖에 안 되고, 그것도 마케팅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름대로 그 교회 안에 그렇게 온 사람들이 무엇인가 들을 것이 있고 변화 받을 것이 있는 교회만 성장을 한 것입니다. 그 교회가 미국에서도 이미 다 기울어가고, 이제는 새로운 사조를 따라갑니다.
우리의 목회가 상품과 같은 목회가 있고 작품과 같은 목회가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는 486컴퓨터가 나왔을 때,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제가 지금 슬라이드식으로 열고 닫는 2G폰을 10년째 쓰고 있는데,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것입니다. 저는 아이폰을 써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여기에 들어있는 컴퓨터 용량이, 아폴로호가 달에 갔을 때의 미국의 세계최고 슈퍼컴퓨터 용량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은 비교도 안 될 것입니다. 제 것은 인터넷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용량이, 로켓트와 우주인을 달나라로 보낼 때, 미국이 가지고 있던 세계최강의 슈퍼컴퓨터의 용량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상품입니다. 상품은 새로운 것이 나오면 계속 버리는 것입니다. 아이폰6가 나오면 아이폰5나 아이폰4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이 상품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의 그림 같은 작품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 값이 계속 올라갑니다.
저는 한 2년 전에 외국에 가서 뭉크의 ‘절규’라는 작품을 직접 보았습니다. 1160억에 팔린 작품입니다. 그거 한 장만 팔면 교회 여러 개를 지을 수 있습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그런데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은, 확실한 것 하나는, 많은 비슷한 것들이 나옵니다. 그런 비슷한 짝퉁들이 나올수록 그 진품의 가격은 계속 올라갑니다. 목회자는 상품과 같은 목회를 해서는 안 되고 작품과 같은 목회를 해야 합니다.
제일 먼저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크게 목회를 해야 하겠다는 그런 야망을 버려야 합니다. 당신은 크게 하면서 그런 말을 하면 말발이 서지 않지 않느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를 크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더 큰 기라성 같은 목회자들이 엄청나게 많으니까 그 5000명이 한 없이 많은 것이겠습니까? 그렇지만 제가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수를 목표로 삼은 적이 없고, 수십 명의 교역자들과 함께 사역하며 살아왔지만 수적인 증가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교역자를 내보낸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역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역자들을 가르칠 때도, 왜 그렇게 부흥이 안 되냐고 하지 말고, 무슨 자세가 잘못 되었는지, 너 기도를 안 한다, 말씀 전하는 게 성의가 없다, 교역자가 예의가 없다, 아니면 헌신이 모자란다, 그렇게 본질적인 것들을 자극해서 자신을 고치도록 만들어주어야 그 목사와 함께 있는 기간이 자기 훈련의 기간이 되지, 무슨 보험회사도 아니고 그래프 그려놓고 세상말로 “족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목회사역의 본질이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오늘 이 세례요한을 거론하는 이유는, 제가 결혼할 때니까 지금으로부터 36년, 37년 전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닮고 싶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마치 아이들의 마음을 확 끄는 아이돌 스타처럼 누가 성경에서 튀어나와야 하는데 없었습니다. 그래도 바울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사람을 만났더니, 그 사람은 다윗이 훨씬 좋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왕이면 부부가 같이 다윗을 좋아해보면 어떻겠냐고 하는데, 그렇게 다윗을 보니까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니까 바울보다 바나바가 더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다윗보다 요나단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지조 없이 왔다리갔다리 하면서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다가 제가 신학교 선생이 된 그 이듬해인 89년도에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아마 그때 제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설교자가 되지 못하고 평범하게, 당시 제가 구약에 빠져있었고, 히브리어, 아카드어, 그런 토판 하나 연구하고 와서 구약교수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잘 풀렸으면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때의 제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인물이 바로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절절히 가슴에 새겨졌는지, 지금은 좀 다르지만 그 당시를 기준으로 이 사람만큼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은 사람이 없었고, 이 사람만큼 나를 울게 한 사람이 없었고, 이 사람만큼 내가 어떻게 살다 죽어야 할지를 명료하게 제시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방학 때, 제가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이름도 없는 청평호수가 보이는 조그만 기도원이었는데 거기에 가서 3박4일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고 물을 때였습니다. 그때 요한복음 이 부분을 폈습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깨뜨려지는 경험을 하면서 그때 깨달은 내용을 작은 노트에 깨알같이 옮기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4절부터 6절까지를 풀어서 나온 책이 이 책입니다. “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설교자”라는 책입니다.
이 세례요한을 보면서 제가 그렇게 커다란 감동을 받았던 이유는, 세례요한은 그 사역의 기간이 아주 짧습니다. 정확하게 얼마라고 우리가 측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예수님이 등장하시기 직전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오실 것을 선포하고 예수께서 등장하시고 이름을 얻으시면서 세례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망하여야 하리라”하면서 스스로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놀라운 사역을 했는데 그 사역의 핵심은 설교를 몇 편 남긴 것입니다. 그리고는 목이 잘려져서 여자에게 선물로 받쳐지고 자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설교자였습니다. 그렇지만 세례요한은 우리에게 목회자가 무엇을 가치로 삼고 살아야 하는가를 아주 명료하게 보여준 한 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자랐는데 이 사람이 도대체 왜 광야에서 자랐는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 사람이 에세네파가 아닐까 하고 생각을 했는데, 아마 제사장 가문에서 당시의 종교 제도권에 대해서 반감을 품고 있던 에세네파 같은 곳으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린 아이 때부터 이 아이를 보냈을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 에세네파에서는 세례 요한 같은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는 전통이 아니라고 나중에 밝혀지면서 학자들은 에세네파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에게는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어쨌든 이 아이가 광야로 보내집니다. 누군가로 인해서 돌보아지고 거기서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았던 것을 보여 집니다. 그리고 거기서 제도권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배우면서 하나님의 깊고 신령한 세계와 접촉하며 선지자로서의 소명을 받는 장면이 누가복음 3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 시대에 설교했지만 구약의 마지막 설교자인 동시에 신약을 연결하는 선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는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위대하고 중요한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연결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이 말라기 이후에 정경 선지자가 끊어지고 약 4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 신약의 위대한 시대를 여는 첫 번째의, 하나의 효시로서 이 선지자를 나타나게 하셔서 구약시대를 마감하고 신약시대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점에서 이 사람은 하나님이 쓰신 아주 중요한 인물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다윗처럼 그렇게 유명한 사람도 아니었고 바울처럼 한 시대를 선교로 뒤흔들어 놓은 사람은 아니었으나 구약과 신약의 고리를 연결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오시는 앞길을 열어주는 회개의 세례를 주었던 위대한 영향력을 가진 설교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우리 목사가 누구인가?” 목사는 “목”을 하는 “사”,선생님입니다. “목”은 목회를 의미하고, “사”는 스승입니다. 전도사는 선비 사(士)를 쓰지만 목사는 스승 사(師)를 씁니다. 이미 학문에 대한 도야가 끝나고 가르치는 위치에 있으면서 양떼들을 돌보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사목”, 개신교에서 말하는 “목회”를 하면서 그 기능이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목사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체성이 중요합니다. 한국사회의 이 모든 혼란은 정체성 때문입니다. 대통령이면, 대통령은 뭘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국민적인 합의가 있고 법이 규정한 것이 있고, 대통령 자신은 그 대통령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명료하게 알고 그 본질에 충실해야 합니다. 교수는 교수, 총회장이면 총회장, 그리고 가장이면 가장, 장로면 장로, 그게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문제는, “목사가 누구냐?”를 이야기하려면, “목회가 무엇이냐?”를 또 이야기해야 합니다. 사실 목사라고 하면 목회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하는데, 이 세상에 목회라는 말처럼 애매모호한 말이 없습니다. 너무 많습니다. 이것은 양떼 한 사람 한 사람을 심방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전도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은행에 가서 돈 빌리는 일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지금은 해외에 까지 사역이 펼쳐지니까 해외 선교하는 일까지 모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엄청나게 애매합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는 사람”이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목회자”라는 사람을 성경에서 보면 누구이겠습니까? 성경에도 물론 목사가 나오고 가르치는 장로 등등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더 선명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청교도들은 명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목회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뿌리고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땅 끝까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다.” 이것이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던 목사에 대한 자기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사실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이 선지자들의 이상을 사도들이 구현한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율법을 통해서 이것을 구현하려고 했고, 이 사도들은 복음을 통해서 구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차이입니다. 그러면 이제 명료해지는 것입니다. 선지자나 사도나 이들이 했던 가장 중심적인 기능은,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율법을 해석하고, 해석된 것을 율법시대가 아닌 바로 자기의 시대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적용을 그냥 차갑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백성들에게 이렇게 살았으면,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시던 그 심경을, 그 동일한 정념을 가지고, 타오르는 정념을 가지고 여기에 적용하는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 중에는 냉담하고 차가운 가슴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를 글 쓰는 사람으로 데뷔하게 만든 책이,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두 달 만에, 한 번에 썼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책을 낼 정도의 레벨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께서 원고를 보시고 이 사람한테 책 한권 내게 해줄테니 원고를 가져오게 하라고 연락을 보내셨고, 그렇게 해서 보낸 원고가 그 원고였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쓸 때는 엄청 부흥을 누렸을 때였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때 제가 발견했던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는 열정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외치는 이 진리에 대해서 이것을 따라서 사람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데,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타락한 도시 한 복판에는 병든 교회가 있고, 병든 교회 한 복판에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예배가 있고, 그렇게 죽은 예배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잃어버린 잠자는 설교단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사회를 당장 우리 마음대로 뜯어 고치 것,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혁명을 일으켜도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를 고치자고 하는데 잘 고쳐지는지 제가 묻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목회자로서 자력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은 지금 우리가 맡겨진 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껏 설교하도록 위탁된 이 강단에서 최선의 설교를 해서 사람들을 변화시켜, 그들이 불의를 버리고 진리를 따라 살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소명감, 이 진리를 전달해야겠다는 소명감에 불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다단계 판매회사나 보험회사 직원들을 만나서 그들의 상품에 대해서 연설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확신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제품을 쓰면 반드시 예뻐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먹고 있다고 보여줍니다. 땅을 꼭 팔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고객들에게 설명할 때 그 침 튀는 열정을 한 번 보십시오. ‘설교를 저렇게 해서 누가 사겠는가?’ 목사님들도 마찬가지고 저도 마찬가지지만 설교를 들을 기회가 없지 않습니까? 특히 주일설교는 자기가 있는 한 자기가 설교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설교를 할 수 없게 목, 편도를 수술했습니다. 그래서 진짜 오랜만에 주일 낮 예배와 오후 예배를 다른 교회에서 드렸습니다. 첫 번째 간 교회는 우리교단이 아닌 장로교 교단의 한 교회였고, 오후에 간 교회는 침례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가서 설교를 듣는데, 교인이 한 400명쯤 모였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모였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젊은, 저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목사가 설교를 했습니다. 계속 설교를 듣고 있는데 설교자로서 맨 처음에는 좀 안타깝다가 나중에는 화가 났습니다. 주의 종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끝까지 계속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말입니다. ‘저 젊은 나이에 왜 저러고 있을까?’ 저는 그날 그 시간에 확신했습니다. ‘이 자리에 하나님은 없다.’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숨결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오후에 침례교회를 갔습니다. 거긴 좀 다르겠다고 생각하고 갔습니다. 오전에 갔던 교회는 설교가 말은 안 되도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주의 종을 잘 대접하면 복을 받는다.” 그런데 오후에 간 침례교회는 한 시간 내내 설교를 들었는데, 나처럼 신학을 전문으로 공부한 사람도 뭘 얘기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너무 산만해서입니다. 도대체 저 사람이 뭘 전달하려고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모르는 내용을 성도들은 얼마나 이해를 했을까? 차라리 그냥 오전에 들었던, 그 화나게 했던 설교가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주의 종을 잘 섬기고 비위를 건드리지 말아야 복을 받는다더라.” 성경적이지는 않지만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역시 장로교가 낫구나.’ 했습니다. 그렇지만 병원에 돌아와서 눈물이 났습니다. 이게 한국교회의 현실이구나! 어떻게 할까? 그리고 마음의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신학교육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바로 이 얘기 입니다.
말씀드리고자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목사는 선지자와 사도의 후예입니다. 그것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선지자들이 어떤 자세로 살았는지, 사도들이 무엇을 자신의 영광으로 생각했는지, 그 생각을 하면서 우리들이 목회를 하고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저나 여러분이나 목회를 하면서 “수”에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목회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제가 박희천 목사님 밑에서 부교역자 생활을 7년 했는데 목사님이 점심을 잘 못 드셔서, “목사님, 왜 이렇게 점심을 잘 못 드십니까?”, “전도사님, 밥알이 모래알 같아서 물에 말아 먹고 있는 중입니다.”, 우린 철도 없어서, “왜 그러세요?”, “교인들이 조금 나왔습니다.”, 그리고 어떤 날은, “오늘은 참 좋은 날입니다.”, “왜요?”, “교인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우리 중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선자지와 사도는 자신의 사역의 중심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위탁하신 진리를 온전히 설교했는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진리를 얼마나 온전하게 외쳤느냐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정도를 입증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가 이런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이 설교사역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소중한 사역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교회는 설교 하나가 요인이 되어서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금이빨 만드는 집회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소동을 하고 모인 적이 있었습니다. 누가 물어봅니다. “목사님, 이빨이 금이빨이 되었다는데 그게 진짜입니까?”, “나는 그 집회에서 금으로 변했다고 믿지 않지만.”, 그랬다면 교회 건축을 얼마나 간단히 하겠습니까? 교인 3천명이 은혜를 받고 금이빨로 변했으면 그것만 하나씩 빼라고 해도 교회를 지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매일 하나씩 빼면 되지 않겠습니까? 전 세계의 금값이 변동할 것입니다. 그것도 믿지 않지만, “백번 양보해서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금이빨이 진짜냐 가짜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진짜라면 아멘! 하고 믿을 것이냐? 거짓 이적들은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이냐? 핵심이 그것이 아니다. 교회는 그런 것을 하는 곳이 아니다.” 그것을 뒤늦게 유럽의 교회들이 받아들여서 금이빨 소동을 벌입니다. 아직도 그것을 하고 있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목사들에게 자기중심성이 얼마나 없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처지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성령운동을 한다고 해서 모두 순복음 교회처럼 되겠으며, 제자훈련을 한다고 사랑의 교회가 되겠습니까? 문화사역을 하고 찬양집회를 하면 온누리교회처럼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될 수도 없거니와 될 필요도 없고, 각자 자기의 그릇에 맡겨진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라고 보고, 하나님이 한 사람을 인정하시는 그 인정하심은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는 크기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크게 더 많이 더 유명하게”, 이것은 예루살렘의 가치가 아니라 바벨론의 가치입니다. 만약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가치였다면, 왜 하나님은 어리석게 로마나 중국을 선택하셔야지 고등학교 세계사에 두 줄밖에 나오지 않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충분했습니다. 그 세계사에 두 줄밖에 나오지 않는 나라라도 그 나라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태동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계시를 전달하는 매개로 삼으셔서 당신이 이 세계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진리를 전달하시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럼 결국 이제는 “크기의 시대”가 아니라 “의미의 시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기의 시대”가 아니라 “의미의 시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하고 있는 교회가 열 배쯤 커진다고 해서 사람들이 나를 갑절이나 더 존경하거나 위대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보다 큰 교회를 목회하는 선배들과 동료, 후배들이 있지만 교회가 크다는 이유 때문에 존경심을 더해보거나 작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을 깔보거나, 저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지자와 사도로서의 정체성 속에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지금 소수의 사람들을 놓고 설교를 하고 있어도 여기에서 설교하는 이 설교가 하나님의 진리를 대언하는 것이고, 그 진리의 말씀을 대언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것이 설교자의 진정한 삶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저기 제주도에 목회자들을 모아 놓았다고 해서 내려가서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를 하는데 제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 친구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40년 넘게 제주도에서 목회를 하는데 목회를 잘 했습니다. 여러분, 제주도에 사람들이 잘 모이지 않는 것 아십니까? 그래도 한 75명 모이는 교회에 가서 열심히 목회해서 한 200명이나 만들었습니다. 그 교회를 20년 가까이 사역을 하고 교회를 옮겼는데 훌륭합니다. 그런데 하는 말이, “김 목사, 여기는 비전이 없어.”, “왜?”, “여기는 전도사 하나를 쓰려고 해도 오려고 하지를 않아.”, “그래도 부교역자가 와야지, 어떻게 장년만 200명인데 부교역자 없이 하겠냐?”, “육지에서 신학교를 다니는데 어떻게 여기로 오라고 하겠냐?”, “장로님들과 얘기해서 사례금은 사례금대로 주고 비행기표 값은 따로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50만원 받아서 비행기 값이 80만원인데 어떻게 하겠느냐?”, 했더니 펄쩍 뛰면서, “어떻게 장로들이 그런 것을 이해하겠느냐?”, “그 장로님들이 이상한 것이다. 신학생이 등록금도 안 주고 50만원 주는데, 비행기 값이 80만원인데 어떻게 와서 봉사를 하겠느냐? 그렇게라도 설득을 시켜서 아이들을 교육시켜야 한다.” 이렇게 교역자도 없고 오려는 사람도 없고, 젊은이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모님과 둘이 있을 때 제가, “어이, 이보게 목사, 없는 젊은이를 어떻게 하나? 당신은 젊은이가 좋으면 여기서 목회를 하지 말고 신촌에서 교회를 개척했어야지.”, “그래도 비전이…”, “목회자가 무슨, 목회자는 선지자의 후예인데 무슨 비전, 얼어 죽을 비전이냐?”, “그러면 당신은 비전이 없는데도 방배동에서 거기로 가서 큰 땅을 사고 교회를 짓냐?”, “비전은 무슨 얼어 죽을 비전이냐?”, 나는 강남에서 계속 하고 싶었는데, 강남에 살 때는 우리 교인들이 전도지를 들고 나가면 거기 전도 받는 사람들이 내 이름을 거의 다 알았는데, 이 평촌 시골로 오니까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우리교회가 뭐하는 교회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무슨 놈의 비전이냐? 교인이 많아지니까 어쩔 수 없이 교회를 크게 할 장소를 구해야 하는데 강남이 워낙 비싸니까 변두리로 밀려난 것이지, 비전은 무슨 얼어 죽을 비전이냐?” 젊은이가 없다고 하는데, 지금이라도 젊은이가 탐나면 올라와서 신촌에 개척하고 한판 벌이든지, 당신이 여기 있는 것을 기뻐하셔서 하나님이 여기로 보내주시고 나는 그 강남에서 쫓겨나서 여기 변두리에 있는 것을 좋아하셔서 할 수 없이 여기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사명을 다 감당해서 선지자와 사도의 후예로 설교를 하다가 사람이 죽으면 하나씩 하나씩 염해서 천당에 보내고 그렇게 하고 교회가 텅텅 비면, “목사님, 이제 다 죽고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을 충성된 사람이라고 보겠느냐, 무능한 사람이라고 보겠느냐? 목사는 별로 은혜를 못 받았는데 사모님이 은혜를 한없이 받아서, “아멘!, 아멘!”했습니다. 사모님들의 믿음이 훨씬 좋습니다. “아멘, 아멘! 그게 우리 비전입니다!” 하는데, 목사님은 별로 동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비전은 무슨 얼어 죽을 비전입니까? 교회의 어떤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옥한흠 목사님께서 평소에 하신 얘기가, 이 시대에 신종 3D직업이 있는데, 대학병원 원장, 대학교 총장, 그 다음에 대형교회 담임목사랍니다. 얼마나 힘들면 그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진짜로 대형교회를 했던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모세, 남전도회원만 67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을 고생을 하고 마지막에 죽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불세출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교인들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를 수없이 느끼고, 항상 존경을 받는 것도 아니었고, 결국은 갔습니다. 죽고 나니까 그리워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모든 것들이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은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외치고 선포한다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농어촌 목회자들도 우리 교회에 와서 훈련을 받고, 우리가 매 여름마다 1500명이 아웃리치를 나갑니다. 그것이 벌써 17년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교회들을 나가서 도왔는데,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하나님이 맡겨주신 가장 중요한 사명이 이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일이라는 가치를 분명히 인식하고 여기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꿈을 꾸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어느 교회에서 하는 프로그램을 따라하면 그 교회처럼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모든 것을 참고하되 지문이 각자 다른 것처럼 자신의 목회를 써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재능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기회를 따라서 최선을 다해서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역에 있어서의 중심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씀드립니다.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에게는 공부가 현저히 부족합니다. 신학교를 다닐 때에도 충분히 공부를 하지 못했고 목회를 시작한 후에는 바빠서 공부를 못하고, 그래서 결국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깊이 같은 것들이 하나님께서 진짜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표준에 미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걸 지금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목회자의 모임으로 모였는데, 저 밖에 서점에서 책을 파는데 어느 목회자가 와서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라는 제가 쓴 책을 만지작거리니까, 옆에 어떤 목회자가 거기 제가 있는 줄도 모르고, “형님, 그 책 사지 말고 빨리 갑시다.”합니다. “왜?, 한 번 보려고 하는데?”, “아니 그 길이 아니라면 그만 둘 겁니까? 빨리 갑시다!” 했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왕 이 길을 걸어갔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가 주어진 한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을 다해서 준비하고 전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설교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설교 준비가 엄청난 노동입니다. 최근에는 설교 표절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한국교회에서 이미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하나님 앞에 부정직한 것과 동시에, 쉽게 말씀드리자면, 석탄을 캐내는 것이 광부의 사명인데, 석탄을 캐오라고 사장이 명령을 하니까, 석탄을 캐낼 능력이 되지 않아서 가게에서 연탄을 사고 부수어서 사장에게 갖다 주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말입니다. 이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직접 맞부딪히면서 고통을 겪는 가운데에,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능력들이 생겨나고 그런 점에서 어찌하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맞닥뜨려서 이 말씀을 캐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동료들이 모였는데, 이 동료들은 그래도 꽤 평생 계속해서 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대형교회 목사들의 설교표절의 문제가 심심치 않게 나오기에 제가 얘기를 했습니다. “어이, 박목사, 우리가 설교표절에서 벗어나는 기가 막힌 방법을 알려줄까?”, “그게 뭔데?”, “설교집을 읽지 않는 거야. 그리고 읽어도 한 200년 전쯤 것을 읽고 절대로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설교집을 읽지 않는 거야.” 저는 설교집을 읽지 않습니다. 읽더라도 400년 전의 존 오웬이나, 300년 전의 조나단 에드워즈, 그리고 500년 전의 칼빈이나 루터의 설교를 읽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준비할 때도 설교집을 놓고 준비한 적은 맹세코 한 번도 없습니다. 만약에 제 설교에서 표절의 문제가 나왔다면 기억의 입력이 너무 선명하게 되어서 자기가 착각을 하고 옮긴 것이지,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표절이 아닙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 너무나 은혜를 받은 다음에, 다시 로마서 성경을 펼치면서 자기 나름대로 설교를 했는데 그 사람의 사상을 많이 받아들이게 되었다면 표절이 아닙니다. 그렇게 따지면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앞서 있었던 위대한 청교도들, 스윈록이나 십스나 토마스 굿윈 같은 사람들의 유장한 저작들을 탐독하고 소화하면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고 양심에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학문적인 윤리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근원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멜기세덱같은 사람이 우리 가운데 누가 있겠습니까?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가 어느 날 다른 목사의 설교를 뒤에 앉아서 듣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깜짝 놀란 것이 자기 설교와 너무 똑같았습니다. 한 줄도 다르지 않고 똑같았습니다. 끝나고 나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당신 설교 준비를 했느냐?” 했더니, “아니오.”하더랍니다. “그건 내 설교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했더니 그 사람의 대답이 스펄전에게 충격이 되었습니다. “내가 딴 사람의 설교를 참고해서 설교를 하긴 했지만 당신의 설교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스펄전도 어딘가에서 읽었는데 자기도 잊어버린 것입니다. 스펄전도 그 사람의 것을 읽고 설교를 했고, 이 사람도 그 사람의 것을 읽고 설교를 했는데, 스펄전은 세월이 많이 흘러서 그 사람에게서 힌트를 얻었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설교를 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정리하고 20분 안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설교는 설교자로 하여금,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설교할 때, 큰 사람처럼 아주 간신히 변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에 관해서 증언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그 요소가 무엇인가? 그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경험입니다. 이것이 설교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자, 이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울이, 여러분도 알다시피 유대 종교지도자가 되기를 꿈꾸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을 했고, 베냐민 지파의 탁월한 열심을 가진 아주 엄격주의적 종파를 따르는 유대인 골수였습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편견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신학적인 편견이고 두 번째는 심리적인 편견입니다. 심리적인 편견은 유대인들만이 모든 민족들 위에 선택받은 유일하게 중요한 민족이고 나머지는 전부 쓰레기 같은 인종들이라고 생각을 했고, 이 인종들 중에서 아주 착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주 특별한 이방인들은 천국에서 물 긷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정도로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신학적인 확신이었는데, 신학적인 편견은 예수는 메시아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대제사장의 공문을 들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직접 음성을 듣습니다. 여기에서 커다란 혼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혼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는데, 나무에 매달려서 죽었습니다.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를 합니다. 그 얘기는, 예수를 죽이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그를 죽이는 사형 방법이 반드시 십자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뒤에는 유대인들의 음모와 사주가 있었습니다. 시킨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꼭 십자가에서 죽이려고 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만 모든 유대인들에게 그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9장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에 의해서 이 사람도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이런 소식을 들었고 자기가 부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직접 뵌 것입니다.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의 사실이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여기서 충격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 예수 죽은 것의 이유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서 깨달은 것이, 놀랍게도 이 죽음이 예수님 자신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부활은, 구약에 보면 유대인들은 모세가 부활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에녹, 모세, 엘리야 같은 사람들은 부활했거나 죽음을 보지 않게 하셨거나, 산채로 하나님께서 그를 승천시키거나 한 사람들이었는데, 인간으로서 자연적인 죽음을 겪게 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엄청나게 인정해주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정죄하신 이 예수가 부활한 게 사실이라면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인데, 인정하실 사람이면 정죄하셨을 리가 없고, 정죄해서 죽이신 사람이라면 부활시키실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여기에서 유명한 대속의 교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인을 위한 죽음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은 더 많이 인정을 받으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공포가 되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 유대교 사상에 가려져 있던 그 어두운 지성을 깨고 찬란한 진리의 빛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을 압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 모든 세계의 창조부터 종말까지 새롭게 전개되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의 물줄기가 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 사상이 농익고 농익으면서 쓴 것이, 교회를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본 것이 에베소서이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우주를 바라본 것이 골로새서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바울이 쓴 서신중에서 가장 심오한 사상적 깊이를 가지고 있는 편지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에게 완전히 붙잡혀 매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복음에 빚진 자로다”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빚 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것을 깨닫고 나니까, 모든 인류에게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력한 내적인 강제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소명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박사 논문에서 잘 서술한 사람이 김세윤 박사가 75년도에 쓴, “Origne of Force Gospel”이라는 논문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커다란 충격을 받으면서 복음전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든 사도들이 똑같이, 정도는 다르지만 이러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신약성경 전체가 여러 사람이 썼는데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서 이것은 어떻게 적용이 되겠습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맨 처음 우리들이 하나님의 종으로 소명을 받을 때, 우리를 움직였던, 그 깊이가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렇게 명료하게 설명하지는 못해도 분명하게 이러한 것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해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가 목회자가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현재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것이 한 번의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목 박혔다”했던 것처럼 매일매일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체험을 우리 안에서 계속 하면서 사는 가운데 설교의 샘이 솟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무엇을 설교하든지 마지막에 그 모든 설교를 관통하는 증거하여야 할 하나의 제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왜냐하면 그분 이외에는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십자가의 영향력 아래에서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지난주에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특이한 집회였기 때문에 제 기억에 남는데, 여러분은 혹시 청교도의 중요한 인물인 리차드 백스터를 기억하십니까? “나는 죽어가는 한 사람으로 죽어가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한다”는 말을 남겼던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회심”, “영원한 성도의 안식”같은 유명한 책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분이 목회한 곳이 영국의 키더민스터라는 곳입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공장제 수공업이 번성하고 산업혁명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리차드 백스터가 목회하던 교회에서 저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그 영국 교회에서 나를 불러서 리차드 백스터가 태어난 것이 작년이 400주년이었습니다. 400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에 나를 초청해서 설교를 듣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작년 9월에 편지를 보내서 11월에 오라는데, 제 일정을 보니 너무 촉박하고 목회 일정이 너무 바빠서 갈 수가 없다고 답장을 했더니, 다시 제안이 오기를 올해 2월에 키더민스터 지역의 모든 목회자들이 모이는데 거기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강의를 해주고, 그 주일에 자신들의 교회에서 설교를 해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곳의 젊은 목사를 저는 모릅니다. 독립교회입니다. 제가 영어로 낸 책이 있는데, 그 책을 한국 선교사를 통해서 받아보고 감동을 받은 후, 그 한국선교사를 통해서 나에게 정식으로 연락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갔습니다. 갔더니 정말 120명 정도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목회 지도자들, 평신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 한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세 번째 지평을 영어로 강론을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셨을 때 얼마나 절절하게 기도하셨는지를 힘을 다해서 열정적으로 설교했습니다. 알다시피 저는 외국에서 유학을 한 사람도 아니고 한 달 이상 살아보지도 않았으니까 제 영어는 어눌합니다. 그렇지만 통역 없이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 강의와 설교를 끝났을 때, 머리가 하얀 노인들이, 그 교회도 기울어 가는 교회라서 얼마 모이지도 않는 데, 제 손을 꼭 잡으며 “은혜를 받았습니다.”했습니다. 그중에 한 할머니는 눈이 새빨갛게 되서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그 연세 많으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악수를 받으면서 제가 느낀 것은, 이 사람들이 영국 부흥의 끝물을 먹은 사람들 즉, 이 복음의 맛을 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영국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합니다. 엄청난 전쟁을 치루고 그때 영국의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영국을 위해서 열렬하게 기도합니다. 두란노에서 나온 하월 해리스의 『부흥』같은 책이 그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독일의 공군이 날아와서 영국을 포격하는데 영국은 이미 마비상태가 되었습니다. 3일 정도만 좀 더 폭격을 계속 하면 영국이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하월 해리스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이 열렬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무 까닭도 없이 공격이 끝납니다. 그리고 다시 영국이 반격하면서 2차 대전 말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때 그 동네마다 가보면,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 동네의 젊은이들이 참전해서 죽은 위령탑들이 동네마다 다 서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겪으면서 눈물로 기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영국교회가 쇠퇴했습니다. 이제는 교회에서 게이 목사들이 목회를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성공회나 비국교도나 모두 다 심각하게 목회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주의 교단에서는 목회자가 없어서 한 목회자가 여덟 교회를 담임해야 월급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유주의화 하고 기울어져 있지만 이렇게 고전적인 복음의 이야기를 하니까 그 옛날의 감각이 살아나면서 사람들의 정신이 일깨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이 주일에 설교를 하고 가신 후에 온 교인이 그 설교의 원고를 읽고 싶답니다. 보내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면 모든 교인이 변화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진리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설교자가 깊이 진리를 맛보고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외치면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 진리를 붙잡는 교인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양떼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 진리와 함께 살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교인들에게 계속해서 진리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서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사명 아니겠습니까?
저는 잘 나가는 목사님들 앞에서 설교해 본 적이 별로 없지만, 시골교회의 목사님들은 많이 만났습니다. 저는 지금도 전라도 순창에 목사님이 계신데 그 목사님을 정말 존경합니다. 그 목사님 얘기만 하면 눈물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에 저희 교회에서 12명의 청년과 장년들을 데리고 그 교회에 전도봉사를 하러 갔습니다. 저도 그 대열에 직접 따라가서 일주일 내내 있지는 못했지만 3일째 되는 날 가서 같이 있다가 설교를 하고 왔습니다. 그곳 목사님은 우리교회가 무슨 교회인지도 잘 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내려가서 자기네 교회에서 전도를 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있던 교회의 인근 동네에 약 450가구가 살았고 여섯 개의 마을로 되어있었습니다. 거기 교회가 딱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이 가서 5일간 있는 동안 한 집 한 집 전도하면서 그 450가구의 사람들의 이름을 다 적고, 우리가 복음을 전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책으로 엮어서 그 목사님께 드렸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전도대원들을 보면서 깊이 회개를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곳에 부임한지 6년이 되었는데, 자기는 한 번도 다 돌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골교회에 있으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하면서 서로 안면이 통하니까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기가 쑥스러웠답니다. 그때 그 교회 교인이 14명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그렇게 해서 깊이 은혜를 받고 회개를 한 후에, 우리 교회와 자주 연관을 가지면서 책도 가져가고 말씀도 같이 나누고 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목사님이 사력을 다해서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불과 우리가 가서 전도하고 돌아온 후 몇 달 사이에 교인이 100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거야 잠깐 그렇게 모였겠지.”, 아닙니다. 최근에 한 2년 전에 목사님께서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 80명의 교인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얼마나 진실하셨는지, 그분은 제가 보기에 교역 같은 것에 준비가 잘 안 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서 정말 자신이 은혜를 받고 회개하고 자기가 말씀에 사로잡히니까, 어눌하지만 그러나 진심이 담겨진 피를 토하는 설교를 최선을 다해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난한 교회에서 봉고 두 대를 사서 매일 새벽 세시에 일어나서 한 대는 사모님이, 한 대는 목사님이 차를 몰고 온 교인을 실어 모아서 한 20명씩 모여 새벽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날 교인들이 오지를 못하니까 목사님께서 걱정이 되셔서 체인을 채우고 봉고를 몰고 나가고 있는데 저쪽에서 노인 한 분이 쓰러져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 웬일이세요?”하고 가보니까 할머니의 신발에 새끼줄을 매여 있었습니다. 믿고 회심한지 얼마 되지 않은 할머니였습니다. “내가 이 나이에 이제 교회를 가면 며칠이나 더 가겠습니까? 목사님. 그래서 교회를 안 빠지고 가려는데 길은 미끄럽고 나는 힘이 없어서 저 언덕을 올라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하며 거기에 앉아서 펑펑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할머니를 붙들고 울었답니다. 그렇게 목회를 하면서 마지막에 암에 걸려 최후를 마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제 가슴에 엄청난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나는 내가 지금 죽으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 그 목사님만큼 칭찬받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가 훨씬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나한테 배웠지만 훌륭한 종이었습니다. 우리가 정말 어떻게 주님의 부름을 받아서 어두운 밤과 같은 세상에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그리고 그 기독교인 중에서 어떻게 부름을 받아서 누가 강요한 일도 없었던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우리가 큰 교회를 하고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이 길에 들어서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너무 커서 이 사람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을 내버려두고는 밥을 먹을 수가 없고, 잠을 잘 수가 없고, 내가 밥을 벌어먹으면서 이 세상에서 일상적인 직업에 종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도 도저히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이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 정신이 흐려지기도 하고 진해지기도 하면서 수십 년의 목회사역을 해 옵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변질되지 않고 매일 매일 갱신되도록 자기와 싸우는 일이 없이는, 설교는 진리에 대한 증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진리에 대한 불타는 마음만 있으면 될 것인가? 이것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군인의 끓는 피지, 미아리 고개를 밀고 들어오는 탱크에 휘발유담은 소주병을 가지고 그 바퀴 아래 깔려 장렬하게 죽을 뿐이지 그 탱크를 뒤집어엎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말씀에 대한 진지한 탐구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일주일에 수없이 되풀이되는 설교를 어떻게 다 헌신해서 준비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식으로 지금과 같이 준비하지 않고도 풍부한 설교를 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제목은 “평생 설교 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점심 먹고 계속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