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불꽃처럼 살다 죽다 2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요 1:6-8)
녹취자: 원수연
제가, 작은 경험이지만, 1993년도 12월에 일곱 명이서 교회를 지하실에서 시작했습니다. 그 때는 아직 학교 교수를 그만두지 않고 하던 때인데 그 때도 일복이 많아서 한 주에 20시간 강의를 하고, 박사과정도 공부하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그 때는 주일날 그런 거 하는 걸 괜찮게 총회에서 놔두었습니다. 주일날 개척예배를 드리는데 오후에 개척예배를 드리기로 하고 오전에 예배를 드리고 개척예배를 드리러 외부에서 손님이 왔는데, 집에 가서 잠이 들었습니다. 제가 개척예배 때부터 지각한 사람입니다. 10분 늦게 와가지고 집사람한테 야단을 많이 맞고, 성도들한테 용서를 빌고,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초창기 부교역자 때는 설교 하나하나를 다 작성했습니다. 설교 한편을 작성하는데, 연구가 모두 끝난 상태에서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데 토요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은 학교강의가 없으니까 학교에 가서, 전도사 때였습니다. 제가 목사안수를 늦게 받았습니다. 교수가 됐을 때도 전도사였습니다. 다 타이프를 쳐서 정리를 해서 원고 설교를 꼬박꼬박 하는 것을 5년 정도 했습니다. 그 원고의 양이, 한 주 원고가 원고지 약 90매 내지 100매였습니다. 그것이 1년이면 50주가 되고 5년이면 250주 정도 되니까 250주 정도에 한 주에 100매 정도 했으니까 25000매 정도 되는 원고였습니다. 그렇게 하고 교회를 개척을 했습니다.
개척을 하고나서 설교를 해보니까 그렇게 원고를 작성해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선배님들도 많지만 우리 후배 목사들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함부로 원고 없는 설교를 하지 말고 일단은 한 5년 정도 성실하게 원고를 작성해서 해라.” 그러면 이 원고 작성하는 것을 통해서 설교의 수사학이나 문장구사, 그리고 논리 같은 것들을 익히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철저하게 원고를 준비해서 설교를 한 5년 동안 했고 그 다음에는 교회를 개척을 했는데 개척했을 때 교회가 여기 3분의 1정도 크기였습니다. 장의자 20개를 딱 놓으니까 더 이상 자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교회가 성도 1000여명이 들어오고 강대상이 멀리 있고 그러면 원고지를 넘기면서 설교하는 게 폼이 나지만 요렇게 앉아서 예배드리는데 여기서 원고를 이렇게 넘기고 있으면 격이 안 맞습니다. 쳐다보고 이야기를 해야 성도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방향을 수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골격만을 가지고 설교를 하다가 그냥 자유롭게 설교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그렇게 설교한 것을 10년 정도 한 다음에 다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땐 어떻게 했냐면 성경 옆에 자잘한 글씨로 설교를 한 대지 3-4개 정도를 적고 그것을 보면서 설교했으니까 사실은 아무것도 없이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요만하게 만들어서 손톱 위에 올려놓고 설교를 하다가 ‘이것도 좀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그 다음에 지금처럼 설교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행히 오늘 제가 하나를 가지고 왔는데 주일마다 약간 크기가 다르긴 하지만 이것이 주일설교 원고입니다. 이렇게 해서 요정도로 하고 그 다음엔 이것을 이렇게 놓고 자유롭게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차례는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하면 저도 어떻게 설교를 했는지 기억을 못하지 않겠습니까? 쓴 게 아니니까. 그러면 그것을 설교를 들으면서 녹음테이프에서 풉니다. 지금이야 뭐 기계가 좋아졌지만 옛날에는 발가락에다가 녹음기를 놓고 딸깍딸깍 스톱스톱 하면서 지체들이 풀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풀어놓은 것을 통계를 냈더니 제가 23년 동안 약 5300번을 설교했답니다. 물론 새벽기도도 포함해서. 5300번을 했는데, 제가 새벽기도를 매일 나가지는 못했으니까, 왜냐하면 예전에는 금요일에 기도원에 올라가면 토요일에 오니까 토요일 새벽기도 안 나오고, 주일은 제가 원래 새벽기도 안 하고, 그 다음에 젊었을 때는 다 했는데 나이 드니까 너무 힘이 들어서 월요일 쉬고, 또 외국에 집회가거나 하면 쉬고, 아프면 못 나가고 하니까, 5300번을 했으니까 엄청나게 많은 양의 설교를 한 것입니다. 1년에 약 250번 정도를 설교를 했으니까 매년 공식적인 설교를. 그 설교를 모두 텍스트로 풀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양이 원고지로 40만매의 분량의 원고가 되어있습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면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기도원을 갔는데 어느 목사님이 기도원에 와서 기도를 하다가 기도원에 있는 밭을 매고 계셨습니다. 옆에 어떤 평신도 권사님이 같이 밭을 매면서, 기도원 일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아이고, 목회 힘들어서 못해먹겠다.” 옆에 권사님이 “목사님, 뭐가 그렇게 힘드세요?” 그러니까 “아니, 도대체 말이야, 힘을 들여서 낑낑 매서 설교 한번 준비해 놓으면 홀딱 써먹고, 홀딱 써먹고 나면 그 다음에 또 금방 설교를 해야 되는데 이 준비를 하기도 전에 다음 주일이 돌아온다.”는 겁니다. 권사님 대답이 너무 걸작입니다. “아니 목사님, 목사님의 사명이 하나님 말씀 전하는 건데 설교 준비하는 게 그렇게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어떻게 목회를 하시겠어요?” 웃었는데, 그런 고백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저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한 번도 ‘다음 주에 뭘 설교하지?’ 하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항상 설교하고 싶은 것이 설교할 기회보다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고, 요즘은 안 그럽니다. 요즘은 주일 다가오는 것이 조금 약간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어저께 같은 경우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네 번을 같은 설교를 하고 저녁 먹고 와서 또 한 번 강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새는 체력적으로 너무 소모를 하니까 주일이 다가오는 게 두렵습니다. 그런데 젊었을 때는 주일날 설교를 주일 낮 예배 때 한 100분하고 오후 예배 때 한 90분하고 그리고 예배 한번 드리는 게 아니고 두 번 드렸으니까 세 번 100분, 100분, 90분 토해놓고 나면 밖에서 저녁 예배에 어느 교회에서 나를 데려가겠다는 차가 와있습니다. 그러면 오후예배 드릴 때 막 교인들 혼내고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도 끝난 후에 각자 주기도문 하고 가시오.” 그러고 “갑시다.” 그러고 나는 바깥에 차를 타고 그 교회를 갑니다. 그 교회에 가서 저녁 대접을 받고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면 교인들이 그 때까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그 때는 젊고 체력이 한없이 솟아났었습니다. 해야 된다고 생각되면 체력이 솟아났고 제가 쓴 책 중에 젊은 시절에 쓴 책의 절반은 밤 12시에서 새벽 4시 사이에 쓴 책입니다. 하루 종일 설교하고, 보통 하루에 설교하는 분량이 여섯 시간 정도였습니다. 다 더하면. 그리고 들어와서 샤워하고 책상에 앉아서 책 펴놓고 다시 공부하고 글쓰기 시작해서 새벽 4시쯤 되면 새벽기도 가서 한 시간 기도하고 돌아와서 두 시간 자고, 그 다음에 다시 일과를 시작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건강을 많이 버렸지만요.
어쨌든지 간에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렇게 설교를 하고 보내면 항상 내 마음속에 ‘이거 어떡하지? 난 할 얘기가 아직 많은데. 일주일을 기다려야 이 사람들을 다시 만나겠구나.’ 그랬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교인들에게 다 쏟아놓을 수 있을까?’ 지금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일 년에 네 번 부흥회합니다. 신년사경회, 신년사경회는 1월 둘째 주, 주일이나 월요일부터 시작해서 금요일까지 5일, 새벽, 밤 이렇게 합니다. 그 다음에 고난주간에 십자가사경회, 이것은 새벽에만 합니다. 예전에는 저녁에도 했습니다. 그 다음에 여름수련회, 그 다음에 가을사경회, 가을 사경회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그러면 23년 동안 네 번을 했으니까 부흥회를 몇 번 한 겁니까? 92번인데 메르스 때문에 한 번 못 가고 제가 아파서 한 번 못 가고 했으니까 90번을 부흥회를 했는데 한 번도 외부강사가 안 왔습니다. 언제나 제가 강사였습니다. 덕분에 강사료는 안 나갔죠. 교회에서. 교인들이 외부강사를 굳이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했습니다.
그러면 언제 설교를 그렇게 준비하냐? 준비합니다. 준비안하는 줄 사람들이 아는데 준비합니다. 특히 요새는 설교를 준비하는데 개척교회 설교 준비할 때보다 두 배정도 시간이 더 걸립니다. 이제 설교가 무엇인가를 알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냐? 그게 지금부터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평생 설교 준비 안하는 비결입니다. 그것을 터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설교 준비에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런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온갖 종류의 영양분이 필요합니다. 갓난아이들. 그 아이들에게는 시금치에 포함되어있는 비타민A나 C도 필요하고, 사과나 과일에 들어있는 비타민C도 필요하고, 또 쌀에 들어있는 탄수화물, 고기에 들어있는 단백질 등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난 지 얼마 안 된 아이의 입에다가 시금치 무친 거나 삼겹살이나 상추쌈이나 아니면 과일을 넣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엄마가 먹어야합니다. 엄마가 먹으면 젖에 그런 양분들이 그대로 고입니다. 엄마가 아무것도 안 먹으면 젖이 안 나옵니다. 엄마가 단백질을 섭취를 안 하면 단백질이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아기를 가졌을 때에는 돼지 뼈 곤 물부터 시작을 해서 각양, 맛있는 게 아니라 아이의 건강에 도움이 될 만한 영양소가 들어있는 먹거리들을 충분히 섭취하고 쉬어야 합니다. 정신을 맑게 해서 양질의 젖이 고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를 데려다가 앞가슴을 펼쳐서 젖을 물려서 아이가 젖을 쭉 빨아먹고 한참 먹고 나면 이놈이 배가 불뚝 나오고 젖꼭지를 탁 토해놓고 누워서 잡니다. 그것만 계속하면 이 아이는 인간으로 성장을 하는 겁니다. 하루에 뱃속에 있는 아기가 일주일에 200g씩 자란다고 하니까 한참 클 때는 태어나서 하루에 20g, 30g씩 늘어납니다. 그리고 쭉쭉쭉쭉 크는 겁니다. 그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데 오늘 설교자들의 오류가 뭐냐면 설교를 위해서 성경을 펴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이드존슨 목사님은 매춘행위라고 했습니다. 직업적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원래 진리라고 하는 것의 전달방식은 사람이 이렇게 있으면 이 진리를 자기가 섭취하고 진리가 이 속에서 다 소화되어서 이런 진리를 전달해주는 형식은 다양합니다. 지금처럼 누가 얘기해서 강의를 들은 것일 수도 있고, 성경을 읽은 것일 수도 있고, 신학책을 읽은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것들도 있겠죠. 그러나 다 들어간 다음에는 이것이 자신 속에 다 소화가 되어서 이게 나올 때에는 이것이 나오는 게 아니라 소화된 것이, 성경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함으로써 나와서 청중들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게 음식물이라면 이것이 젖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자기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감동을 받기를 원하지만 설교자 자신이 성경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는 적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라고 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설교를 들은 사람만이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재미있는 일화에 나오는 것인데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님이 아주 가부장적이어서 부엌에는 절대로 드나들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엌에 가보니까 이만한 항아리가 있는데 계란이 세 개가 있더랍니다. 이게 웬 계란인가 하고 보니까 계란 밑에 돈이 2000불이 있더랍니다. 이게 뭔가 하고서 부인이 들어 왔기에 “여보, 내가 부엌에 가보니까 항아리가 있던데?” “그래요?” “항아리에 계란 세 개가 있고 밑에 2000불이 있던데 그게 뭐요?” “당신이 예배드리러 갈 때마다 당신의 설교를 들었을 때 진짜 저것도 설교일까? 이렇게 생각할 때마다 계란을 하나씩 모았어요.” 목사가 그랬습니다. “아니, 내가 그렇게 수십 년을 목회했는데 세 개밖에 못 모았냐?”고 그러니까 그 밑에 있는 2000불이 계란 판 돈이라고 그랬답니다.
무슨 문제냐면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설교를 들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설교가 많은 사람은 설교할 게 많아서, 준비를 안 해도 된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그렇게, 나는 그런 거 별로 동의 안합니다. 어느 목사들은 금요일은 설교 준비하는 날이라고 그러는데, 그 한 편의 설교를 위해서 심혈을 기울인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자기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교만 준비하느냐고요. 등산도 하고 어떤 목사는 볼링도 하고 그럽니다. 유별 떨지 말고, 그렇게 하지 말고, 정확하게 설교를 하나님께로부터 듣지 않은 사람은 금요일 하루 새벽서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줘도 설교다운 설교가, 시간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제일 중요한 게 뭐냐? 평소에 늘 전도에 불이 붙어있던 목사는 전도에 관한 설교를 특별히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삶 자체가 전도하는 삶이었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전도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많은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던 목사님은 다른 설교는 몰라도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설교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많은 준비가 필요 없습니다. 평소에 끊임없이 성경을 연구하는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성경을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설교를 할 때에 가장 열정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설교하는 주제는 어떤 것입니까? 지금 말씀 드리는 말씀과 기도와 성경탐구,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디모데서에 보면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우리의 설교의 주제는 모든 선한 삶을 다 포괄합니다. 결국 평소에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온전해지려고 몸부림을 쳤고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설교를 들은 사람이 그 설교를 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한번, 같은 목사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우리가 설교를 할 때 온 교회가 눈물바다가 된 적이 있습니까? 두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설교를 성경 속에서 들으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자주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호세아서 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비로소 호세아에게 말씀하시니라”라고 나옵니다. 거기에 ‘호세아에게’라는 부분이 히브리어로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말씀하셨냐하면 ‘호세아에게’ 그랬는데 이것이 영어로 ‘into’ 입니다. ‘호세아 속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이렇게 입으로 토해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이 말씀이 호세아 속으로 들어가서 호세아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변화된 사람의 입에서 다시, 소위 자기화 된 진리가 자기의 언어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주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A라는 메시지를 주셔서 이것을 하나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이 선지자에게 말씀하시고, 이 말씀하신 것을 깊이 체험해서 자기가 먼저 변화되고, 변화된 이 사람이 머릿속으로 모세가 준 이 율법을 자기 시대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여기서 수많은 메시지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설교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셨으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하셨을까? 똑같이 이 사람들도 고민을 했는데 만약에 모세가 우리 시대에 살아있다면, 15세기의 모세가 8세기 혹은 7세기에 다시 나타난다면, 오늘날의 이 사회문제나 정치문제, 신앙문제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까를 궁금히 여기는 것에 대해서 답을 주는 것이 그 당시의 설교였습니다. 이게 선지서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따지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서신서가 있습니다. 사도바울 이후부터 서신서의 내용은 공관복음에서는 모든 내용을 다루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신약시대의 교회라는 세팅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어떻게 될 것인가 등등 많은 문제들에 대한 답을 서신서에서 주고 있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와의 관계는 복음서와 서신서와의 관계와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무슨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리고자 하냐면 우리는 이 서신서를 혹은 선지서를 읽으면서, 혹은 시편을 읽으면서 그것이 만약 그 당시 1세기 문맥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그런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이었다면, 그러면 우리는 이것을 해석함으로써 20세기가 아닌 21세기에 사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이 시대의 현대인들에게 여기에서 답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면 이 때 사람들이 성령의 감화를 받았던 것처럼 오늘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런 시대의 감화를 받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본래 하나님의 메시지에 감동을 받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에게 있어서 설교를 잘 하기 위해서 너무너무 중요한 작업이 뭐냐면 성경읽기라는 작업입니다. 성경읽기.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시잖아요. 성경이야 우리가 늘 읽는 것 아닌가. 성경은 아시다시피 통독, 성경을 하루에 몇 장씩 쭉쭉 읽어나가는 것, 이것은 성경 전체의 맥을 파악하는 데 좋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정독이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씩 하나씩 공부해가면서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제 3의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면 이것은 이것대로 해 나가되 성경에 대한 묵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묵상을 하느냐? 이런 뜻입니다. 성경을 어디를 읽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차례대로 묵상을 해 나가는 방법도 있고, 아니면 창세기 1장, 에스라 1장, 마태복음 1장, 사도행전 1장, 이렇게 하면서 한 장씩 한 장씩 읽어 나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구약은 한두 장씩 읽고 신약은 한 장씩 읽으면서 일 년 안에 성경을 마치는 방법도 있습니다. 정독은 그렇게 해나가면서 옆에 좋은 성경 같은 거, ESV라고 하는 성경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제가 소개했는데 부흥과개혁사에 나왔는데 아주 좋은 성경책입니다. 스터디바이블입니다. 이런 것들을 옆에 두시고 공부하면 됩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묵상입니다. 이것은 구약에 한 장을 하고 신약으로 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를 폅니다. 성경을 이렇게 펼칩니다. 성경이 이렇게 두 페이지로 되어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나누어져 있을 거 아니에요? 여기서는 목표가 성경을 많이 읽는 것, 아니면 하루에 한 장을 묵상하겠다, 이렇게 무모하게 잡으면 안 됩니다. 그러지 말고 정독하고 같이 겸해도 좋습니다. 천천히 성경을 읽어가는 것입니다. 읽어가다가 무엇인가 성경의 이 부분에서 마음에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멈춥니다. 멈추고 다시 돌아와서 성경을 다시 읽는 것입니다. 두 번 정도 다시 읽었더니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게 없습니다. 그러면 그냥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읽을수록 뭔가 이 속에서 메시지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멈추고 반복해서 계속 읽는 것입니다.
이 때 필요한 성경이 뭐냐면 원어성경, 구약은 히브리어고 신약은 그리스어입니다. 물론 아람어부분도 있지만. 그렇게 해 놓고 이것을 직접 읽으시면 좋고, 직접 읽으실 수 없으면 희랍어 성경하고 한글하고 대조되어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 공부할 때보다 도구가 훨씬 좋아져서 많습니다. 인터넷에서도 아예 분해까지 다 되어있는 것들이 나옵니다. 그렇게 해 놓고 무엇을 확인 하냐면 이 번역이 정확하게 올바르게 되었는지를 이것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복수가 단수로 번역되었을 수도 있고 심하면 번역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말번역이. 그러면 이것도 신뢰하기 어려우면 영어번역들을 놓고 대조를 하면서 이게 원래 무슨 뜻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는 작업이 첫 번째는 본문을 확인하고, 두 번째는 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설교를 작성하려고 묵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천천히 천천히 보통, 이것을 다섯 번, 열 번, 심하면 백 번 왔다갔다 하면서 읽으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설교해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교수로 있을 때 누가복음 11장 1절 같은 것들을 세 시간 반 동안에 한 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이 11장 1절을 가지고 한 달을 설교했습니다. 그러니까 묵상의 깊이가 설교의 깊이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상을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시고, 교훈, 그 다음에 우리를 책망하시기도 하고, 그 다음에 우리의 잘못하고 있는 것을 바르게 하시기도 하고, 우리보고 이것이 올바른 길이다라고 의로 교육해주시기도 합니다.
이런 작업들을 다 하면서 여기서 성령이 역사하시면 목사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으면서, 깊이 묵상을 하면서 ‘아, 이 뜻이 무엇이구나!’ 그리고 ‘나는 이렇게 못 살았구나!’ 이런 것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때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설교를 듣는 시간입니다. 사람들은 그냥 묵상한다고 그러면 자기가 끊임없이 생각해내는 것이라고 상상을 하는데 그게 아니라 고요히 하나님의 설교를 듣는 시간이 묵상입니다. ‘메디타티오'라고 그럽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에게까지 굉장히 중요한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현대에 와서 다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맨 남의 설교나 보고 설교하려고 그러는 겁니다. 그리고 솔직히 얘기해서, 보고 즉시 베낄 수 있는 설교는 설교 그 자체가 좋은 설교가 아닙니다. 진짜 좋은 설교는 베낄 수가 없어야 합니다. 너무 깊어서. 심오해서. 그래서 이런 걸 경험합니다.
세 번째는 말씀에 대해서 설교가 이루어지고 반응이 일어나겠죠. 때로는 격려를 받기도 하고, 책망을 받기도 하고,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도 하고, 감사도 나오고, 기쁨도 얻고, 그렇게 됩니다. 여기에서 다양하게 나오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찌릅니다.” 혹은 “주님의 말씀이 송이꿀과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를 기쁘게 하나이다.” 이런 수많은 고백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하면서 네 번째 하는 일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의 기도는 자기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기도제목이 아니라 이 때 설교를 듣고 하나님이 설교하실 때에 자신에게 일깨워주셨던 내용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라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말씀의 설교를 충분히 듣고 난 다음에 감동이 생생히 살아있을 때, 그 때에 눈물을 씻고 즉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자기가 주님께로부터 받았던 메시지들을, 설교를, 감동이 살아있을 때 빨리 메모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주의해야할 것이 이런 원어성경, 이런 것들을 갖다놓고 자기가 은혜 받은 것이 정확하게 성경 본문에 입각한 것인지를 확인을 하고, 예를 들어서 마가복음 1장 1절부터 3절까지 읽었는데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감동이 막 일어나고 회개하고 기도를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가 30분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두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그런 경험을 매일 한 것은 아니지만, 작은 경험들이 많았지만, 한 번 극단적인 경험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1989년도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한창 개인적인 부흥을 경험할 때였는데 그 때 단칸방에 살았습니다. 교수였지만. 아기하고 우리 집사람하고 잠들어있고 제가 같이 잠을 자려고 그러는데 잠이 도저히 안 옵니다. 그래서 밤 10시에 일어나서 단칸방에서 스탠드를 켜고 성경을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묵상한 것이 누가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이었습니다. 이 순서를 따라서 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 은혜 받은 것을 가슴에 새기면서 빨리 메모를 시작했습니다. 노트를 하나 가지고 노트에다가 깨알같이 메모를 했습니다. 메모가 끝났을 때 아침 8시 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밤을 꼬박 새운 겁니다. 그런 극단적인 경험이 아니더라도 깊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자기가 깨어지는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그렇게 한 다음에는 이런 설교노트를 놓고 그것을 막 아무렇게나 정리하는 게 아니라 제일 좋은 방법은 이만한 종이를 갖다놓고 아무렇게나 막 떠오르는 대로 적습니다. 적은 다음에 이 노트에다가 이것을 만약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면 어떤 체계로 전달을 할까? 본문해설이 나오고 두 번째는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A, B, C, …. 그 다음에 3번은 그 때의 제자들이 반응, 그리고 깨달은 사실들을 옆에다 써놓고 혹은 신학책에서 깨닫게 된 내용까지 다 적어서 하나로 만들어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날입니다. 알파데이입니다. 그 다음 날은 또 이렇게 나가는 겁니다. 계속 가는 겁니다. 그런데 읽었는데 특별한 게 없었다. 그러면 그냥 못 적고 넘어가는 겁니다. 다음 날로. 어쨌든 이렇게 쌓입니다. 그리고 설교할 때가 옵니다.
설교를 할 때 어떤 사람은 소위 연속설교라고 그래서 마태복음하고 계속 한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할 수도 있겠죠. 칼빈도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책 전체를 설교하는 것보다는 주제별로 설교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짧은 책들은 다 했고, 새벽기도 시간에는 차례대로 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주일 설교에 저는 성경 한 절을 매우 깊이 다루기 때문에 책 한 권을 놓고 통째로 설교한다는 게 저한테는 굉장히 부담이었습니다. 제 마태복음 설교를 듣고 깊이 은혜를 받은 어느 장로님이 설교를 이렇게 한 절 가지고 깊이 설교하는데 마태복음을 다 설교하면 몇 년이나 걸릴까 계산을 했더니 35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책 한 권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저한테는 안 맞았고, 여러분한테는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한 열 장씩 성경을 읽고 소위 강해설교라고 하는, 족대로 개울을 훑듯이 지나가는 그런 설교는 사실 저의 취향이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설교본문이 한 절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보통 때에는 한 절, 혹은 한 절을 두 주쯤 세 주쯤 나눠서 설교하거나, 설교본문이 아주 길어야 두 절 아니면 세절입니다.
설교를 무엇을 할까에 대해서는 우선 첫째는 성경을 읽다가 이런 것은 성도들에게 가르쳐줘야겠다는 감동이 오는 경우가 있고, 두 번째는 신학책을 읽다가 ‘이런 것들은 성도가 참 무지하구나, 이런 것들을 가르쳐야 되겠다.’ 생각하는 적이 있고, 세 번째는 기도하다 생각이 나는 경우가 있고, 네 번째는 성도들의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도들에게 이런 것은 일깨워줘야 되겠구나.’라고 네 가지 방식으로 무얼 설교해야할 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아무 계획 없이 오늘은 기도에 대해서, 내일은 교회의 덕에 대해서, 모레는 음식 먹는 것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설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뭔가 규모가 있어서 성도들에게 무언가 주제를 가지고 일정기간동안 설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 그러면 기도에 대해서 5주 내지 20주, ‘고린도전서 13장’ 그러면 33번에 걸쳐서 고린도전서 13장을 설교했습니다. 그렇게 한다든지. 뭔가 그렇게 줏대를 가지고 하는 것이 좋지 매주일 성도들이 무슨 설교를 하는지 모르게끔 그렇게 산발적으로 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결정이 됩니다. 그러면 ‘아, 그렇구나! 그러면 기도에 대해서 설교를 해야 되겠구나!’ 그리고 자기의 노트를 뒤져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기도에 관한 본문을 읽다가 은혜를 받은 구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을 찾아서 다시 한 번 성경을 읽고 이 내용을 다시 한 번 회상을 해 보면 옛날에 자기가 은혜를 받은 말씀이기 때문에 다시 은혜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한 번에 다 설교할 수 없으니까 네 번 정도에 나눠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저의 기록을 한 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게 뭐냐면 제가 가지고 묵상노트입니다. 이게 지금 하나로 스카치테이프로 연결되어있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이 민수기에 나오는 한 구절이었는데 간단합니다. 제사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제사에 관한 것을 묵상하면서 깊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아침 8시경이었는데 중간에 잠깐 바깥에 나가서 바람을 쐬고 오긴 했지만 이 정리가 모두 끝났을 때는 밤 11시였습니다. 여기에서 여러 권의 책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정리를 한 다음에, 물론 히브리어 성경 다 보고 저 끝에까지 정리한 다음에, 아마 뒤에 더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 이것을 한꺼번에 다 설교할 수는 없습니다. 너무 내용이 많으니까. 그러니까 이것을 비유한다면 도살장에서 큰 소갈비 한 짝을 뜯어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을 한꺼번에 다 요리해서 저녁식탁에 올려놓을 수는 없으니까 그것을 어떻게 잘라서 여러 번에 나누어서 이 메시지에 합당하게 설교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확대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민수기 18장 3절에서 57절이죠. 맨 위에 세팅, 무슨 뜻이냐면 무슨 배경인가, 모세가 임종을 앞두고 하나님께 받은 당부,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상번제, 번트 오퍼링(burnt offering)이다. 상번제가 뭐냐? 하나님께 규칙적으로 드리는 이스라엘 전체를 헌제자로 하는 번제이며 이는 이스라엘의 본분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크고 중요한가? 첫째, 하나님이 그 상번제를 나의 예물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을 만나는 예를 갖추게 하였다. 나의 식물이라고 그랬다. 이것은 고대 근동의 제물과 구별을 이룬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제사 자체보다 의미를 구현하는 헌신의 삶이다. 나의 향기, 제사를 나의 향기라고 하잖아요. 이것은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을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메모를 해가는 것입니다. 이게 여섯 페이지로 되어있는 것 중에서 확대를 해서 두 페이지를 보여드린 것입니다. 이게 여기하고 연결된 것이고 저쪽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화제가 나옵니다. 저쪽에는 소제가 나옵니다. 소제가 무얼 의미하는가? 밀가루, 낟알로 깨어지는 것, 그러면 그 부서져서 가루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 권의 책이 나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묵상을 깊이 있게 하면, 하루아침에 은혜를 많이 받으면, 적어도 6개월 정도 설교할 수 있는 분량이 됩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이냐면 항상 설교하고 싶고, 설교하고 싶은 내용이 많으면 설교할 기회가 주어져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마지막에 이 설교들을 몇 년 전부터 핸드폰으로 정리를 합니다. 10년 전의 핸드폰입니다. 이렇게 핸드폰에다 정리를 해 놓으면 이거 하나만 들고 다니면 한 교회, 예를 들면 이런 데 와서 한 달 내내 묵으면서 매일 설교하라고 그래도 이 핸드폰만 켜면 설교할 수 있습니다. 보려면 힘들겠지만. 옮겨 적어놓고 설교하면 되는 거죠. 그래서 쌀가마니에 쌀이 가득 차있으면 포크로 찌르면 확 쏟아져 나오듯이 목사의 마음속에 이렇게 하나님의 설교를 들은 은혜들이 가득할 때 이것들이 설교로 조합되어서 나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신이 은혜를 받은 것들을 설교할 때에는 자신 속에 다시 하나님의 은혜가 불붙는 것 같은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게 설교 준비입니까? 아닙니다. 뭐냐면 설교를 위해서 한 것이라 자기 신앙생활을 위해서 하나님께 설교를 들었고 하나님께 설교들은 내용을 자기가 정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최상의 설교 자료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십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설교를 들었으니까, 자기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까, 깊이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그렇게 살아보려고 애를 썼을 거 아닙니까? 기도를 하나도 안 하던 목사가 어느 날 올라가서 기도 안하면 죽일 놈인 것처럼 성도들에게 설교할 때 찔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은 덜 찔립니다. 왜? 자기가 이미 찔림을 받아서 안 그렇게 해보려고 혹은 그렇게 살아보려고 최소한 고민을 한 흔적이 있기 때문에 이게 여기서 묻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미 하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남이 만들어놓은 큐티지 같은 것으로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그 사람이 다 만들어서 이 길로 가라고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목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성경을 놓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계속해나가면 이것이 재미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목사가 누군가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을 때가 희귀하지 않습니까? 저는 교만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렇습니다. 방송에서 설교가 많이 나와도 들으면서 엄청나게 감동된 설교를 듣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자기가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접하면서 어린 아이처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받은 결과가 마음 깊은 곳에 들어갔다가 그것이 다시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젖으로 다시 쏟아져 나와서 성도들에게 먹이는 것이 설교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들어서 그 설교가 소화된 사람은 강단을 장악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올라가서 원고에 특별히 의존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설교를 듣고 자기가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원고를 보며 읽는 것, 이것은 아닙니다. 답답해서 누가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겠습니까? 온 교인들이 설교를 안 듣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면 설교자는 기분이 좋겠습니까?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쳐다보고, 제가 이 이야기를 한장 한장 넘기면서 읽는다면 얼마나 지겹겠습니까? 이야기를 해야죠. 화술도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말하는 것도 계속 발전을 합니다. 어떻게 조리 있게 말할 것인가. 그러고 쭉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다가 예화까지 모두 찾아서 적절하게 준비를 한다면 최상의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교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설교의 내용들이 이렇게 두툼하게 있다, 그러면 언제 어디를 펴도 몇 시간만 여유를 주면 거기서 설교가 작성되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일 어려운 것이 뭡니까? 어디를 설교할까 하고 펴는 거잖아요. 그렇게 펴면 아무 데를 펴도 설교할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나면 그 부분이 그렇게 한 번의 설교로 끝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없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해왔기 때문에 항상 설교할 기회보다는 설교하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요즘은 설교할 기회를 부목사들에게 많이 줍니다. 그렇지만 제가 교회에 있으면서 설교를 안 하는 예는 몸이 매우 아프기 전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금요기도회 설교는 부교역자들에게 주지만 수요일, 오후 주일예배도, 네 번을 설교하고 나니까 오후예배를 설교할 체력이 안 되어서 주지만 그러나 항상 짧게 하라고 강조를 합니다. 그리고 수요예배건 새벽예배건 제가 교회에 나갈 수 있는 때에는 제가 다 설교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설교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경회 같은 것이 있다 그러면 사경회하기 전주쯤에 일정을 다 비웁니다. 그리고 기도원에 들어갑니다. 조용히 앉아서 은혜가 된 이 말씀 중에 어느 부분을 찾아서 다시 정리하면서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그것을 은혜를 끼칠 수 있는 언어로 잘 조합을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노트, 줄쳐지지 않은 하얀 노트를 작은 것, 성경크기하고 똑같은 게 제일 좋습니다. 가지고 다닐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놓고 어디에 가든지 간에 묵상을 하는 습관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설교를 들어라. 이것은 20분 만에 끝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되지 않겠죠. 아침에 젊은 애들 큐티 하듯이 목사가 조용히 앉아서 아침이나 깊은 밤이나 언제든지 간에 자기가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께로부터 설교를 듣는 시간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감화를 받는 시간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거기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새로워지는 시간이 있어야 된다. 이것을 차례차례 작성하면서 나가면 여러분이 빽빽하게 100페이지만 가지고 있다고 하면, 여러분이 한 3년 정도 설교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일단 시작을 하시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목사님이 성경 안 읽으시는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어떤 분들은 박윤선 주석 같은 것을 놓고 읽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메모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산발적으로 하지 말고 이렇게 조직적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것을 로이드존슨 목사님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서 실제로 큰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해나가시는 것입니다. 그 노트만 가지고 있으면 언제 설교하러 오라고 그래도 겁이 나지 않습니다. 펼치면서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성도들에게 적합한 설교를 찾는 것입니다.
설교하기 위해서 성경을 막 뒤지는 것, 그것은 아닙니다. 더 나쁜 것은 인기 있는 설교자들의 설교집을 갖다놓고 그 중에서 어떤 것을 설교할까 찍고 거기다 줄을 치고 그러는 것은 더 나쁜 것입니다. 더 나쁜 것은 이걸 뜯어가지고 설교단에 올라가는 것은 더 나쁜 것입니다. 진짜 있었던 일입니다. 성도가 설교를 듣는데 목사님이 축도를 끝나고 내려오다가 와르르하고 성경이 쏟아진 것입니다. 투두두둑하고 떨어졌는데 보니까 한국교회 이 아무개 목사님의 설교집을 그대로 면도칼로 잘라가지고 올라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죄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평신도도 설교하겠네. 가지고 올라가기만 하면. 그렇게 하면 안 되죠.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지금 이 설교는 한국교회 이 아무개목사가 무슨 책의 제 3장에서 한 내용인데 제가 은혜를 받아서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그러고 설교를 해야지요. 그게 설교자의 양심에 맞는 거죠.
여러분들이 저를 따라하실 필요는 없지만 저는 현대의 설교집을 읽지 않습니다. 한국 영화계에, 그 분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대개 감독 아무개 그리고 촬영 아무아무개 그러고 나옵니다. 그런데 항상 감독 김 아무아무개, 촬영감독 김 아무아무개 똑같이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촬영의 권위자입니다. 그 분이 한번 인터뷰하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자기는 영화를 안 본대요. 충격이었습니다. 영화 촬영하는 사람이 영화를 안 본다는 게 말이 되느냐구요. 목사가 성경 안 읽는다는 거랑 비슷하지 않아요? “아니, 어떻게 영화감독이 영화를 안볼 수가 있느냐?” 그랬더니 자기가 촬영한 건 본대요. 그런데 남이 촬영한 건 안 본대요. 특히 외국영화는 절대 안 본대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각도와 영상이 입력이 되어서 베낀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와, 대가는 다르구나.’ 그리고 무한한 창의력 속에서 각도와 핀트, 이런 것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 하는 얘기가 똑같은 장면이 외국영화에 나왔으면 그건 진짜 우연의 일치지 내가 그걸 보고 베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가슴이 쿵하고 울렸습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설교집을 절대 보지 말라.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보세요. 그런데 무조건 그것을 사회에서 문제가 될 정도로 베끼지는 마라. 그리고 꼭 그대로 할 수밖에 없을 때는 이야기를 하라. 이야기를 하고 해도 전혀 권위에 손상이 되지 않는다. “내가 고든 맥도날드의 무슨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하고 설명을 하면 오히려 성도들이 책 읽는 목사라고 좋아합니다. 슬그머니 자기가 한 이야기인 것처럼 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런 문제가 나옵니다. 이게 성경이고 우리가 성경을 탐구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었을 때 이만큼이 깨달아집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이것을 읽을 때 이만큼이 깨달아지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에 의해 좌우될까? 그게 뭐냐면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지식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모두 지금 같이 오랜만에 목회에서 쉬었습니다. 월요일, 배낭을 메고 미륵산으로 갔습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산에 갔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은 지질학을 전공했어요. 그 중에 한 사람은 식물학을 전공했어요. 그 중에 한 목사는 지리학을 전공했어요. 그러고 가는 겁니다. 지리학을 전공한 목사는 ‘옛날 고대에 여기에 커다란 물이 흘렀겠구나.’ 생각하면서 산을 걷는 것입니다. 지질학은 공부한 사람은 ‘굉장히 신기한 지질이다. 어떻게 이렇게 확 깎이면서 저런 지층은 이런 데서 발견이 안 되고 해변에서 발견이 되는 지층인데 어떻게 여기에 이런 게 있지? 옛날에 이쪽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와, 진짜 신기한 산이다.’ 하면서 걸어갑니다. 식물학을 공부한 친구는 ‘야, 여기는 진짜 굉장히 많은 자생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구나. 이것은 제주도에 가야 볼 수 있는 것인데 여기에 왜 있지?’ 온통 신기한 생각을 하면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따라가는 사람은 ‘어디서 삼겹살을 구우면 좋을까?’ 그 생각밖에 안하는 겁니다.
성경을 꼬부랑 할머니가 한글을 겨우 습득하고 백독한 것과 신학을 공부한 목사가 일독한 것은 다릅니다. 성경이라고 하는 그 자체를 연구하거나 묵상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성경을 바라보는 인간이 자기잖아요. 자기가 이렇게 수준 높게 성경을 바라볼 수 있도록 자기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건 뭐냐면 학문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공부를 함으로써 성경을 볼 때에, 생각 없는 사람들이 산에 놀러갈 때 돼지고기 구워먹을 자리나 겨우 찾는 것처럼 생각이 없이 성경을 읽을 때에도, 그것이 정녕 신기하고 놀랍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이 사람에게 있을 때 성령이 그것을 사용하시면 더 풍부한 성경의 증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목사는 이런 성경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자신이 준비해야할 것인가? 다다음주 첫 시간에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