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와 예배
녹취자: 김경애
이렇게 한미한 사람을 성대한 성회에 초청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세 번의 시간을 주셨는데 첫째 날은 목회자와 예배에 대해서, 둘째 날은 목회자와 설교에 대해서, 마지막 날은 목회자와 기도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을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이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생수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가 마지막에 예수님이 예배에 관한 질문을 이 여자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라고 하고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다시피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미 앗수르에게 멸망당하면서 국제화 삼인 정책에 의해서 혼혈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불결하게 여겨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체 왕래를 하지 않으려고 했고 그래서 그들은 사마리아오경이라는 독특한 성경을 가지고 예루살렘과 상관없이 여호와를 믿는 신앙을 이어갔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오경은 모세오경을 상당히 많이 문자적으로 번역하지 않고 해석학적인 요소들을 가미해서 자신들에게 맞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성소의 중앙화에 의해서 그들은 무엇인가 약속이 있는 장소에서 예배하여야 했는데 예루살렘에는 갈 수 없으니까 그들이 소위 이야기하는 새로운 토착화의 신학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새로운 역사들을 써가는 그 즈음에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큰 뜻을 받들면서 각각 에발산과 그리심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게 됩니다. 그때에 그 그리심 산에서 선포된 축복의 말씀을 그들이 언약의 장소와 관련을 지어서 거기서 예배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여로보암2세 때에 번영한 북이스라엘 왕국의 사람들이 번영한 국가 속에 살고 있었지만 예루살렘에 대해서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던 것처럼 이 사람들도 신앙은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콤플렉스를 가져왔습니다. 이 여자의 질문은 바로 그러한 사마리아 콤플렉스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느니라.’ 그러면서 당신의 오심과 함께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 우주적인 새로운 방식의 예배가 주어질 것이며 그 지정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그러면서 제시하신 것이 이제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 그가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자들이요 그런 사람들이 우리 하나님을 만나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신령이라는 말을 세속과 반대되는 것이고 진정이라는 말은 건성이라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희랍어 성경을 보면 그러한 추측은 번역의 오류에서 오는 우리의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사실을 금방알 수 있습니다. 희랍어성경에 이 부분은 ‘영과 진리 안에서’ 라고 되어있습니다. ‘그 영과 그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영’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진리’ 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새로운 방식의 신약예배가 성령과 그리고 진리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장소나 그리고 그 모든 율법의 틀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오직 진정으로 성령이 함께 하시고 인간이 영으로써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거기에 참다운 진리가 선포되는 예배일 때 거기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이었습니다. 여러 목회자분들께서 이미 알고계신 것처럼 당시에 로마 가톨릭의 예배는 거의 미신에 가까운 예배였습니다. 특별히 주후 7세기가 지나면서 이제 예배는 초대교회 때 생생했던 생동력을 잃어버리고 그 로마 가톨릭의 부패와 함께 이제 이 예배를 사용해서 이제 교회의 기득권자들이 성도들은 교회를 가르치는 교회와 그리고 가르침을 받는 교회로 나누었고 이것이 극대화되면서 이제 여기에 소위 이야기하는 ‘그라티아인휘자’의 교리가 들어오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예배는 전통적으로 하나님 앞에 진리를 깨닫고 성령 안에서 드리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오직 그 미사에 참여함으로써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 속에 주입되고` 그 은혜들이 공적이 되어서 축적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심지어 칭의와 성화까지도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고 그 신비한 성화와 칭의의 은혜를 교회의 주관자들이 한손에 가지고 하나님의 창고를 열어 인간들 속에 나누어준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요소 즉 성령의 강하게 역사함으로 사람들을 새사람으로 만드는 이런 인간 갱신적인 성령의 역사는 과소평가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복잡한 복식들이 들어오게 되고 아예 7세기 이후에는 설교시간 자체가 사라져버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 강독을 비천한 사람들은 알 수 없었던 라틴어로 강독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계속되고 이러한 로마의 교회의 타락상들은 성직의 매매와 종교개혁 전야에 있었던 그 많은 매관매직 사건들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부패한 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이 분연히 일어섰을 때 그들이 제일 먼저 부르짖었던 것은 바로 이 예배의 개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복잡한 전례에 파묻혀버린 이 교회예배의 본질적인 요소인 성령과 진리의 요소를 다시 찾아내기 시작했고 그래서 아주 단순한 형태로 예배를 드리면 예배의 본래의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회복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통해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으로부터 무슨 영광을 받아야지만 영광스러워지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 자체가 사실은 어패가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이 말은 구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카보드’ 소위 이야기하는 영광의 신학과 관계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할 때 그것은 신학적으로 크게 세 가지를 지시합니다. 첫째는 본체적인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탁월하게 위대하고 높으신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가지시는 영광입니다. 두 번째 영광의 개념은 하나님이 이 피조물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탁월한 분 이시면서도 어느 한 장소에 당신이 그들과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현실적인 징표들을 보이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모세의 타지 않는 가시떨기나무에 붙은 불길,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했던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 같은 것들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효과적인 영광인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인간들이 그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경배를 돌려드리는 것, 이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되는 효과 이것을 가리켜서 효과적 영광이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바로 이 세 번째 의미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의 목표가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한다면 예배를 모두 드린 후에 회중들이 모두 ‘아, 우리 하나님이 여기 계시구나! 하나님이 이러한 성품을 가지신 분이었구나! 하나님이 이렇게 존재적으로 탁월하고 위대하신 분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그분을 경배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예배의 목표입니다. 바로 그런 예배의 목표가 우리의 목회의 목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목회의 목표는 에이든 윌슨 토저의 지적과 같이 교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모으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목회자의 영광일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본주의 정신이 교회 속에 침투해온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참된 예배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조지 스윈록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한사람이 예배하는 것보다 두세 사람이 예배하는 곳에서 더 영광을 받으시고, 두세 사람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예배하는 곳에서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실한 예배자라는 전제하에서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종교개혁은 바로 이런 예배의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미사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우리를 위해 희생당하신다는 그 미신적인 교리를 폐기처분하고 생생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되는 그 예배의 목적을 회복하였던 것입니다. 이후로부터 개신교의 힘은 예배의 힘이었습니다. 개신교의 위대한 힘은 사상의 힘이고 은혜의 힘입니다. 사상의 힘은 지성과 관련이 되고 은혜의 힘은 의지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의 힘은 철저한 개신교적 신학, 우리가 왜 가톨릭을 계승할 수 없는지, 그리고 왜 우리가 가톨릭에서 참된 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개신교를 세우게 되었는지 이런 고민들을 이해하게 만드는 지성의 틀입니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개신교 목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의 철저한 힘으로 그 체계적인 사상을 가지고 이제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철저히 가르치는 것이 개신교의 전통이었습니다. 존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 기독교 신앙을 갖고자하는 자가 입교를 거쳐서 마지막에 세례를 받을 때까지 삼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주기도문 1년, 사도신경 1년, 신앙고백 1년을 배워야했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은 얼마나 지성을 중요시했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도대체 기독교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심할 정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난 후 20년 후에 마르틴 루터가 자기의 종교개혁을 지지했던 독일의 시골교회들을 돌아다니면서 마지막에 한 이야기가 우리의 가슴을 찌르지 않습니까? ‘제가 종교개혁을 지지했던 교회들을 돌아다보니 그들은 사랑스러운 돼지새끼들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목회자는 코가 새빨개서 주일날 설교하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라고 보도했습니다. 지금의 형편이 과연 그러합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제대로 그렇게 개신교의 제대로 된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상의 힘, 우리가 왜 하나님은 존재하실 수밖에 없고 교회는 왜 하나님의 교회이고 이 세계는 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위해 지은바 되었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장로교인은 장로교인대로 우리가 왜 장로교인 인가? 감리교인 이면 왜 우리가 감리교인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그런 이유들을 가르쳐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예배시간에 전달되는 설교의 내용이 진리와 사상을 전달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폭포수처럼 재미있는 오프라윈프리 쇼처럼 이런 저런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간지럽게 하지만 스치고 지나가면 진리라는 것이 가슴에 남아야하는데 이런 것들이 거의 없이 예배가 드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교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건전한 개신교의 교리로 무장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개척을 하면서부터 큰 교회에 대한 소망을 없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를 열렬히 바랬던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큰 교회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고 작은 교회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관심사는 교회의 크기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모든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다가 죽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믿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7명이 교회를 개척해서 17년의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4,500명이 모입니다. 누가 저를 쫒아내겠습니까? 제가 개척을 해서 장로들이 모두 저 믿고 예수를 만나고 심지어는 저한테 세례를 받고 장로가 된 사람들이 있는데 누가 저를 쫒아내겠습니까? 그런데도 목회한지 15년 되던 해에 ‘내가 이 설교 시리즈가 끝나기 전에 이 교인들이 나를 내쫒을 수도 있다.’ 는 각오를 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만약에 다수가 나를 이 설교 때문에 나가라고 한다면 나는 나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교인들에게 설교하고 저는 철저하게 교리교육을 시킵니다. 그래서 교리 교육에 와서 교리교육을 4개월 동안 교리교육을 받고 매주 시험을 보고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봐서 통과하지 않으면 집사도 안 시킵니다. 그렇게 합니다. 그때 교리반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외우게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라틴어입니다. ‘스투데오 에루구숨’=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리고 묻습니다. 카테키즘이 되어있습니다. ‘당신들은 이 세상에 왜 태어났습니까?’ 그러면 교인들이 일제히 대답해야합니다. ‘우리는 공부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당신들은 무엇을 공부해야합니까?’ ‘우리가 공부해야 할 대상은 셋인데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에 대해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이 세 대상에 대한 지식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잘 계시되었으므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 대상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당신들의 존재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청교도와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온 영국의 청교도들에게 공통된 신념이 있었습니다. 무지는 죄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힘은 바로 이 체계적인 개신교 사상을 성도들에게 교육시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해서 모든 교인들이 자유롭게 성경을 읽고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도록 하게 하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 위에 성령의 은혜가 부어집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 속에서 항상 같은 효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의 은혜는 우리에게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19세기에 있었던 영국에서 일어났던 교회의 연합운동들, 소위 이야기하는 에큐메니컬운동의 역사를 살펴보신다면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연합운동이 일어나면서 그 모든 연합운동들, 그리고 심지어 미국에서 있었던 빌리 그래함의 불타는 세계로 표현되는 전도운동들, 이 모든 운동들 속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항상 한가지였습니다. What is Christian? 도대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너무나 넓게 잡아서 연합이 촉진되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정말로 교회의 황폐화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정직하게 만약에 우리의 마음에 손을 얹고 누가 그리스도인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신앙에 손을 얹고 그 질문에 대해서 뭐라고 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에 서술하는 것 중에 여러분들이 ‘아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마음속으로 한번 체크해보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호의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 ‘예배에 출석하는 사람’, ‘교회에 와서 기독교적인 문화에 적응된 사람’, ‘개업할 때 예배드리고 장사 시작하는 사람’ 불행하게도 이 모든 항목 속에는 단 한 항목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결정적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한국에서 있을 때 지방에 있는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갔습니다. 그 교회에서 집회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잠깐 차를 마시는데 담임목사님은 어디 가시고 없고 부목사님이 만나서 저에게 자기교회의 자랑을 한없이 합니다. 저는 워낙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참 그렇구나!’ ‘목사님 우리교회가 한참 뜨고 있는 교회입니다. 교인들이 억수로 몰려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서 굉장히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안 좋은 감정이 생긴 것은 아니고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은 나하고 같이 총신대 신대원에서 공부를 했을 것이고 우리 새카만 후배지만 맞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신학적으로 회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죠?’ ‘그렇죠!’ ‘그러면 예외가 있긴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회심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지요?’ 특히 감리교는 그런 확신이 매우 강하지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쭉 감리교회를 다녀서 압니다. ‘회심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지요?’ 그래서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 교회에서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장년교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몇 명이나 담다하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800명쯤 담당하고 있답니다. 800명을 당신이 담당하는데 목회자로서 정직하게 이야기해보십시오. 당신이 회심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개신교의 교리를 가지고 800명의 사람들을 판단할 때 정말 예수를 믿는 사람이 몇%입니까? 그러니까 20% 이라하고 그럽니다. 그래서 내가 그 자리에서 야단을 쳤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나한테 무엇을 자랑하느냐? 나 같으면 골방에 가서 울겠다.’ 교인들이 몰려온다고 그래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니 기가 막히게 몇 백만 불짜리 맨션을 지어놓았는데 거기에 들어와서 사는 사람들이 식인종이라면 그게 문화주택일수 있습니까? ‘회개하고 목회에 대한 생각을 다시 세우도록 하여라.’ 그리스도인 아닙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 그게 결국은 예배의 문제와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예배는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고계신 웨슬리 목사님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모른다면 감리교도일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목회하시던 예배당에 가서 한동안 감회에 젖었고 그 유리창에 써놓은 글씨를 여러분들도 아마 보셨을 것입니다. 그 웨슬리 목사님이 목회사역 중에 가장 중시했던 것이 교인들의 회심이었습니다. 진정한 회개, 삶이 따라오는 분명한 회개, 그래서 오죽했으면 뭐라고 그랬습니까? ‘나는 당신들의 지갑이 회개하지 않는 한 당신들의 회개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까지 이야기했습니다. 분명한 회심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국교회가 감리교뿐만 아니라 장로교 모든 교회들이 전부 다 이제는 그렇게 원색적인 복음을 선포해서 사람들을 회개하고 예수께 돌아오게 하는 이것은 시대의 정신에 안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피를 토하는 설교를 들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고 그래서 예배가 끝난 다음에 흐느껴 울고 자기의 죄를 통회하는 교인들을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회심이 신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미국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중생과 회심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생과 회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단순히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완전히 바꿔놓으신 사건이다.’ 이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존재적인 변화와 그리고 인식적인 변화를 주시는데 존재적인 변화라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던 인간이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리고 인식적 변화라는 것은 예전에는 신령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속하던 것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중생과 회심을 통해 눈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흠뻑 취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이 바로 사랑의 근거입니다. 아름다움을 느끼니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이 교회뿐만 아니라 이 모든 창조 세계 속에서 발견하고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즐거워하고 누리는 것, 이것이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다가오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교인들이 회심을 하지 않으면 사실상 그는 불신자입니다. 그런 불신자를 데려다놓고 ‘착하게 사십시오. 올바르게 사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가 있습니까? 만약에 그것이 가능하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너희는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들이다.’ 라고 선포하시고 왜 그렇게 예수 믿기 전에 우리에 대해서 절망적인 그림을 보여주셨을까요? 그런 생각들을 우리가 정말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결국은 점점 더 이 목회가 이렇게 한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서 새사람으로 만드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양육을 받고 기독교 사상으로 무장됨으로써 이 세속의 사조들과 함께 겨루고 싸우면서 전사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게 하는 이러한 것들이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사실은 회심이 목회의 꽃입니다. 너절하게 목회를 한다고 해서 교인이 안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세속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술은 아닙니다. 뭐가 우스우십니까? 여러분들은 요새 미국에서 불꽃처럼 번져가고 있는 오픈데이즌 운동에 대해서 알고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개방신론 운동입니다. 굉장히 암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데 상당히 진실해 보이는 목회자들이 이것들을 덥석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열렬하게 교회에서 전도하고 가르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모르신다.’ 간단한 교리가 그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당신 자신도 깨달아가고 배워 가신다는 사상입니다.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무슨 새로운 사상인줄 알고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오늘날 인간중심적인 사상들을 이끌어가는 이 시대 속에서 이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역할들을 어떻게 조화시켜볼지 시도하는 것인데 이미 벌써 종교개혁 그 이전의 시대 때에 펠라기우스 아르메니우스 이런 사람들이 이미 다 써먹고 이러면서 폐기처분한 이론들을 오늘 다시 되살려서 교회를 혼탁하게 하고 있으니 결국은 목회자의 가슴속에 이렇게 외쳐야 될 진리가 얼마나 없으면 이런 허망한 세상 사람들도 믿지 않는 풍설들을 교회에서 퍼뜨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우리가 개신교 목사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배의 현실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식으로 교회가 목회가 되니까 그 다음에는 자본주의 정신이 교회 속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을 만나도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만나면 하는 이야기가 만날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교회 땅을 산 이야기, 교인이 많이 모인 이야기, 장로를 혼내준 이야기, 그리고 성지순례 갔다 온 이야기, 그리고 새 차 사준이야기, 그게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그런 것이 싫어서 우리가 예수를 믿겠다고 교회에 회개하고 들어왔는데 교회에 와서 그것들을 다시 모으고 그리고 자랑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면서 더 크게, 더 많이, 더 넓게, 더 높이, 그러면서 소위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목회가지고 자신의 이름을 내는 도구로 삼고 교회가 어느 정도 커져서 이제 경영을 하게 되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마치 교회가 자기 개인의 사업체인 것처럼 생각하고 종교 권력들을 누리는 이런 현상들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지금 수많은 재정적인 불투명성의 문제나 여러 가지 윤리적인 문제로 터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어떻게 목회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목회의 가치는 그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만약에 그것이 크기에 달린 것이라면 하나님의 나라가 크기에 달린 것이라면 하나님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두 줄밖에 안 나오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실 것이 아니라 중국이나 이집트나 로마제국을 선택하셔서 그래서 말발굽 아래 온 세상을 정복하며 주님의 이름을 날리셨어야지 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입니까? 교회의 존재라는 것은 그렇게 세력을 가지고 온 세상을 뒤덮으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감동을 받지도 않습니다.)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믿은 사람들이 많은 수가 되어서 길거리에 모이면 옛날에는 기독교의 세가 대단했다고 대견해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모이면 예수 믿는 자식들이 모여서 저런 짓이나 하고 있다고 욕을 합니다. 코웃음을 칩니다. 교회의 존재의 가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덕적도에서 인천으로 나오는 배를 탔습니다. 저녁 배였는데 두 시간이면 올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딱 중간에 왔는데 폭풍주의보가 내렸습니다. 떠날 때부터 파도가 심했는데 그냥 가더니 중간에 와서 폭풍주의보가 떨어졌으니 빨리 항구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냥 인천으로 가면 될 텐데 배를 돌리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거기가 제 인생의 마지막인줄 알았습니다. 정말 풍랑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 인줄 몰랐습니다. 파도가 치는데 이쪽 파도가 포물선을 그리면서 배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온 사람들이 구명복을 입고 배 밑창에서 데굴데굴 굴렀는데 그때는 제가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기도는 하지 않았지만 ‘아 이렇게 해서 인간이 죽을 수 있구나!’ 그랬습니다. 그리고는 그 폭풍을 뚫고 결국은 캄캄한 밤에 항구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 섬은 전기가 없어서 성당의 신부님이 사비를 들여서 그 시설을 만들어서 기름으로 전기를 땠습니다. 그러니까 몇 시가 되면 딱 불을 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암흑천지입니다. 그런데 우리 배만이 아니라 여러 배들이 피난을 가는데 등대 딱 한 개가 불빛을 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깜박깜박 거립니다. 그 한 개의 불빛 때문에 수십 척의 배들이 안전하게 항구에 대피하는 광경이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잊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저는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신학교 교수생활을 하면서 전도사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일부러 아주 늦게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으로 제가 섬겼던 교회가 서울시내에서 700명 정도 모이는 사이즈의 역사가 한 50년 정도 되는 교회였습니다. 매주 대예배를 같이 드렸습니다. 설교할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국의 저명한 건축가가 지어놓은 예배당이었습니다. 거기서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가 끝날 때마다 그렇게 원통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아니 극장구경을 갈 때는 15분전에 가는데 그리고 무슨 마트에서 바겐세일을 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미리 가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교회는 15분전이 되었는데도 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10분전에도 없고 5분전에는 러시아워입니다. 확 몰려드는데 예배당에 미리 나왔으면 주님을 만나러왔으니까 조용히 눈을 감든지 성경을 읽든지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든지 해야 하는데 이것은 무슨 대합실에서 고속버스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고속버스를 기다리는 마냥 농담을 하고 웃고 떠들고 심지어는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예배드리자는 소리가 묻힐 정도입니다. 그리고 예배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예배가 시작되면 예배위원들이 못 들어오게 막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웃기는 것이 아니 못 들어오면 아주 못 들어오는 것이지 기도시간에는 못 들어오고 찬송시간에는 들어와도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예배시간이 시작되어서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들어오는 것입니다. 드디어 설교할 때가 되어도 계속 들어옵니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에 교회를 가면 목사님이 항상 이렇게 설교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일주일에 두 시간 예배드리면 교인인줄 압니까?’ 그리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중학교쯤 되어서는 바뀌어서 ‘여러분들이 주일에 한 시간 40분 예배를 드리면 교인인줄 압니까?’ 그러셨어요. 요즘 그렇게 예배를 드리면 그것은 목회적으로 아주 현대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교회가 그랬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조건 65분에 칼 같이 마치는 것입니다. 하다가 시간을 못 맞추면 ‘찬송가 5877장 1절만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해서라도 예배시간을 마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시간은 짧아졌는데 예배의 순서는 23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줄어드는 것은 설교시간밖에 없습니다. 설교시간이 23분 남짓하게 줄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모습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간이 설교시간입니다. 그 설교시간에 2층에서 내려다보면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고개를 숙이고 예배를 드립니다. 목사님은 설교 원고를 보느라고 고개를 숙이고 성도들은 무엇을 하는지 하여튼 숙이고 예배를 드립니다. 마치 그 시간이 우리 고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에 대머리 벗어진 교장선생님하고 함께 그 지겹게 드리던 조회시간입니다. 사람들은 그 시간에 이제 이 예배를 견디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시간에 와서 조용히 성경을 읽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주보를 읽습니다. 사실 주보가 왜 필요한지는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갑니다. 물론 주보를 하시는 교회는 하시지만 저는 한 번도 주보를 만든 적이 없습니다. 특별히 행사가 있을 때 이외에는 안 만듭니다. 일어나라면 일어나고 부르라면 부르고 설교하면 듣고 축도하면 끝났는가보다 하면서 가면되지 아니 오늘 부를 찬송을 왜 일주일전에 준비를 해야 합니까? 그것이 왜 필요합니까? 성가대는 어떻게 하느냐고 그러는데 우리는 성가대 없습니다. 단순한 예배를 지향합니다. 그런데 주보에다가 써놓은 것이 잔뜩 많습니다. 그 주보를 갖다놓고 교인들이 읽으면서 이제 예배를 견디는 것입니다. 빨간 펜을 가지고 이미 다 나온 주보인데 틀린 글자를 거기서 찾습니다. 그것을 뭐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도 시간이 남으니까 교회소식을 읽어봅니다. ‘아, 뉘 집이 딸을 낳았구나!’ ‘뉘 집이 사람이 죽었구나!’ 그래도 시간이 남습니다. 아직 목사님은 설교가 계속됩니다. 그 다음에는 헌금통계가 나오니까 헌금이 13,000,000원이 들어왔습니다. 감사헌금을 몇 명이 내었나? 세어보니까 가로로 몇 명, 세로로 몇 명 그리고 나눠봅니다. ‘아이 한사람 앞에 이만 원씩밖에 안했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사람하고 써서 필담을 나눕니다. 도대체 하나님보다 더 높은 어디서 전화가 왔는지 전화기를 들고 그 다음에 예배시간에 수많은 사람을 헤치고 빠져나와서 뒷문으로 뛰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하다가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예배시간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졸다가 성경을 떨어뜨립니다. 나는 신학자로서 그리고 목회자로서 양심을 걸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이 거기에 오신다고 한다면 제가 제일 먼저 오시지 말라고 말리겠습니다. 뭐가 우스우십니까? 거기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하는 말로 삽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죽을 때까지 흰머리가 나도록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 적도 없고 자기는 영광을 돌린 적도 없고 변화된 적도 없는 것입니다. 들어보십시오. 그렇게 예배를 드렸으면 주님을 만난 감격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참회를 하든지 못 만났으면 내가 오죽 거지같이 일주일을 살았으면 이렇게 주님의 집에 왔는데 나를 쳐다보지도 않으실까 하고 회개를 하려면 교인들이 천천히 나갈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뭐 먹고 살 일이 있다고 일시에 일어나서 그냥 밀고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가는 밖에서 그것도 설교라고 했다고 목사가 가운을 입고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하다는 것입니까? 여기가 음식점입니까? 아니 목사를 위해서 교회를 온 것입니까? 무슨 용어를 써도 좀 가려서 써야지 뭐가 감사합니까? 그리고 정상적인 목회자라면 그렇게 설교를 했으면 첫째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둘째는 자기를 후원하고 있는 성도들 보기에 부끄러워서 예배 단에 엎드려서 가슴을 찢고 통회를 해야지 만면에 웃음을 띠고 거기서 그렇게 인사를 하고 그러면 사람들은 이제 돌계단을 내려옵니다. 저 위에서 내려다보면 알록달록한 구슬 같은 교인들이 그 주일 오후의 햇볕이 쏟아지는 계단을 구슬 굴러 떨어지듯이 우르르 쏟아져내려옵니다. 그들이 그렇게 급히 예배당을 빠져나와서 가는 곳이라는 곳이 기껏 해봐야 식당이거나 아니면 바깥으로 외출하거나 쇼핑가거나 아니면 집에 빨리 돌아가서 파자마 바람으로 소파에 누워서 TV나 볼 사람들입니다.
어느 연구소에서 한국을 기준으로 앙케트 조사를 했습니다. 복음주의적인 교회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 100사람을 붙들고 두 가지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셨습니까?’ ‘예.’ ‘오늘 목사님이 성경 어디를 설교하셨습니까?’ 그랬더니 95%의 교인이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중의 50%는 방금 들은 설교가 구약이었는지 신약이었는지도 생각 안 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궁금해서 이 다섯 사람의 연락처를 적어두었다가 3일후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중의 3사람은 3일 만에 잊어버렸습니다. 두 사람만 기억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들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그렇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들이 밟고 있는 것입니다. 저의 17년 목회의 경험을 미루어보자면 사람이 영혼의 변화 없이 계속 교회를 다니면 점점 더 나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론입니다. 여러분들은 전도 안 해보셨지요? 전도지를 들고 밖에 나가서 열렬히 전도해보십시오. ‘안 믿겠습니다.’ ‘나중에 믿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절대로 안 믿는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끝까지 캐들어 가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예수 믿는 것 같지 않는 인간에게 아예 질린 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시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배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깨달음을 받으면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는 그것이 바로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놓는 예배 아닙니까? 그리고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 하나를 잘하면 나머지는 잘못해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하면 나머지를 다 잘해도 그것은 모두 한 것이 아닙니다.
이쯤에 저희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이 낯부끄럽기는 합니다만 한 2년 전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때 교인 중 한사람이 자기 친구가 하도 곤고하게 사니까 열심히 전도해서 가까스로 유혹을 해서 교회에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가정형편은 그저 원만한데 남편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서 이혼서류를 준비해놓고 집에서 다 기록해놓고 도장만 찍기를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 사람이 생전 처음 이끌려 교회당에 들어왔습니다. 하필이면 그날의 설교제목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이었습니다. 제대로 걸렸습니다. 생전에 교회에 나가본 적이 없는 그 사람이 그날 와서 예배를 드리고 펑펑 울면서 회심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자신의 남편을 찾았습니다. 둘이 도장만 안 찍었을 뿐이지 사실은 남남인데 그 관계가 어떠했겠습니까? 아내가 부르니까 ‘이 인간이 또 무엇을 갉으려고 나를 부르나?’ 그러면서 방에 들어갔더니 두 눈이 퉁퉁 부은 자기 마누라가 무릎을 꿇고 ‘여보!’ 그리고 울기 시작하더니 ‘내가 잘못했어. 내가 정말 나쁜 아내였어. 당신이 고생한 것은 모두 나의 못된 인간성 때문이야. 여보, 정말 미안해!’ 그러니까 남편이 ‘그것을 이제 알았니? 인간아!’ 그랬겠습니까? 남편이 주저앉아서 ‘아니야 여보 당신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 가정에 소홀했어. 당신의 마음에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어서 미안해.’ 그리고 가정이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힘입니다. 그런 것 하라고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정말 우리가 가슴에 손을 얹고 정말 우리들이 제대로 목회를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자가 되어본 사람만이 예배에 대한 높은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참 하나님 앞에 비지땀을 흘리며 가슴을 찢으며 회개해본 사람만이 너희도 회개하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먼저 그 하나님의 말씀이 목회자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그를 짓이기고 깨뜨리고 변화시켜서 그래서 그 심령 속에서 그 피를 바르고 진액을 발라서 그래서 쏟아 나와서 사람들의 가슴에까지 다다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의 본질이고 예배의 정수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모여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꺾어져본 교인들은 예배생활이 다릅니다. 우리 교회에 있던 초등학교 학생 하나가 홍콩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두 번 교회를 갔다 오더니 엄마한테 교회 가방을 던지면서 투덜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왜?’ ‘이 교회는 나쁜 교회야. 썩었어.’ ‘왜 그렇게 생각하니?’ ‘애들이 예배를 안 드리려고 해. 하나님을 만나려는 마음이 없어.’ 여러분은 거짓말 같다고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전도사시절에 한 500면정도 모이는 교회에서 청소년들을 가르쳤습니다. 물론 그때도 교수생활을 하면서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이 예배에 큰 부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회심하고 꺾어졌습니다. 그랬더니 그 예배드리는 그 태도가 정말 놀랍게 변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런 회중을 못 만났습니다. 그때 한참 초창기에 불을 받아서 토해놓을 때니까 두려운 것도 없고 마음에 영혼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찼을 때였습니다. 주일날 180분을 설교했습니다. 9시 반에 시작해서 12시 반에 끝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1, 2학년밖에 안된 학생들이 이렇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석고상을 깎아서 180분 동안 앉혀놓은 것같이 쭉 들었습니다. 듣고 나서는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날 이렇게 예배가 무너지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의 풍조가 절대적인 가치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회자들의 핑계입니다. 예배를 이 꼴로 만든 장본인은 그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입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진리를 설교하면 하는 것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어느 작은 교회에 가서 저녁 헌신예배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식사자리에 앉았습니다. 제 앞에는 어느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님이 앉으셨습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셨는데 제가 거기서 실수를 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는데 옛날에는 푯말만 세워놓고 개척을 해도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모이지 않고 2층에 예배당을 돈을 들여서 깨끗하게 해놓고 부족한 것이 없이 만들어 놓아도 사람들이 안 옵니다.’ 그 이야기를 했더니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그렇게 해도 교인들이 안모입니다.’ 그랬더니 이 교수인 집사님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왜요?’ ‘지금도 어느 목회자가 천막을 쳐놓고 교회를 시작했는데 거기에서 우렁차게 진리가 외쳐지더라는 소식이 들리면 나는 지금도 거기에 가서 예배드리는 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총신대학원에서 오랫동안 교수생활을 하시던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신구약 성경 주석을 쓰신 박윤선 박사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이 연세가 많이 드셔서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느 이단에 속한 교파의 대학교수 한사람이 와서 저녁예배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등록은 하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면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6개월쯤 지났을 때 그 교회의 부목사가 넌지시 물었습니다. ‘교수님, 이제 우리 박 목사님 설교를 6개월 정도 들으시니까 이해가 좀 되십니까?’ 그랬더니 이분 말씀이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목사님, 사실 저는 우리 교주님의 말이 맞는지 박 목사님의 설교가 맞는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면서 분명한 확신 하나는 생겼습니다.’ ‘그게 뭡니까?’ ‘자기는 아직 잘 모르지만 박 목사님이 외치는 저 설교내용이 진리일 것이라는 느낌입니다.’ ‘왜요?’ ‘만약에 진리가 아니라면 저 노구를 이끌고 저렇게 피를 토하듯이 외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죠? 우리가 설교를 해서 우레와 같은 박수, 꽃다발을 기다렸다면 우리는 선지자의 후예가 아닙니다. 요즘은 목사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이 희미해졌습니다. 미국을 기준으로 보자면 19세기 중반까지는 목사하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인상이 ‘진리를 믿고 진리대로 사는 사람.’ 그게 목사에 대한 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이후로 그 목사의 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19세기 중반은 산업혁명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그 물질문명과 함께 도시화가 촉진되고 그러면서 이제 목사 자신도 진리를 신봉하고 진리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우리도 혼란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영국 청교도들의 이야기를 빌자면 목사들의 정체성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즐겨 고백했습니다. ‘목사란 누구인가?’ ‘우리 목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를 뿌리며 죽어간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며 순교했던 사도들의 후예다.’ 라는 것이 청교도들의 목회자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요즘 절대로 안 부르는 찬송가를 오늘 특송으로 하셨습니다. ‘복음 들고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80년대 기도원 곳곳에서 울려 퍼지던 찬송가였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찬송을 부르면서 소명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부르지 않습니다. 더 놀라운 변화를 말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교회에서 여러분 자신이 울먹이면서 십자가를 선포해보신적이 마지막으로 언제입니까? 왜 십자가가 오늘날 교회에서 매력을 잃은 설교제목이 되었습니까? 그리고 왜 목회자 자신도 담대하게 선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무거운 주제가 되었습니까? 청교도나 혹은 개혁신학을 따르던 사람들이 외쳤던 ‘Repent or Perish!’ 라고 하는 외침이 왜 오늘날 사라졌을까요? 한국에서도 초창기에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심판의 설교가 설교의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은 그런 설교들이 다 사라지게 된 것입니까? 저희 교회를 가기 위해서 사거리에 잠깐 정차하고 있는데 은색의 교회봉고버스 하나가 획 오더니 딱 섭니다. 교회 마크가 새겨져있고 교회의 이름을 봉고에 써 붙였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신나는 교회’ 도대체 그게 뭡니까? 신학을 그만두고라도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교회는 그런 이름을 붙이고 다니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신나기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마다 써 붙여 있는 소위 상처치유세미나 같은 것들은 모두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인간을 신처럼 생각하는 사람 중심적인 인본주의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세속주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속주의가 교회가 타락하고 죄를 짓고 이러는 것이 세속주의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세속주의의 현상일 뿐입니다. 형이상학적으로 세속주의란 사고의 가치의 판단의 중심을 하나님에게서 사람으로 옮기는 것이 그것이 바로 세속주의입니다. 예전에 선명했던 죄에 대한 인식은 이제는 상처로 바뀌었고 인간의 책임과 의무는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말로 모두 면피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이 실종된 시대가 되었습니다. 죄를 지어도 그것은 자기도 피해를 입은 것뿐이고 자신도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이 보상하여야할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응석하듯이 매달리는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것입니다. 요리사와 같은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 버림받을 설교자입니다. 무엇을 먹고 어떻게 치료를 받아야할지는 환자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필요하면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옷을 벗기고 약을 바른 다음에 재단하듯이 배를 확 가르고 온갖 장기들을 고무장갑을 끼고 들어낼 수 있어야합니다. 종양이 있으면 담대하게 머리를 깎이고 톱으로 윙 소리를 내며 두개골을 열 수 있는 담력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영광 받으려고 목회사역의 길에 들어섰습니까? 성공을 꿈꾸기 위해서 이 길에 들어섰습니까? 왜 작은 교회의 목사님은 큰 교회의 목사님들을 만나면 왜 그렇게 기를 펴지 못합니까? 그것이 복음입니까? 가까운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분이 한분에게 만날 적마다 백도의 인사를 합니다. 무슨 교주도 아니고 목사끼리 그렇게 떠받드나 그랬는데 알고 보니까 한반에서 같이 공부한 신학교 동기동창이었습니다. 한사람의 교회는 200명을 못 넘고 한사람의 교회는 20,000명을 넘었습니다. 나는 같은 목사지만 너무 슬펐습니다. 오히려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 사석이라면 함께 끌어안고 ‘이 자식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냈느냐?’ 그럴 수 있어야하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큰 영광이라고 그럽니까? 여러분 가운데 모든 목회자들은 아마도 성공을 꿈꾸면서 목회의 길에 들어서신 분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큰 교회의 꿈, 목회의 비전이 우리로 하여금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게 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이 세상에서 방황했습니다. 그리고 내 고집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났습니다. 그때 비로소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더러운지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행복하기를 그렇게 원하는데도 불행으로 치달으며 살아가는지 그 원인이 사실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어찌할 수 없어서 부끄러운 자가 되었을 때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그때 깊이 회개했습니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용서받았습니다. 이제는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내 인생은 덤으로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성공이 있는 곳, 대접이 있는 곳, 영광이 있는 곳, 이 세상의 권력이 있는 곳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들이 있는 곳, 그리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이 있는 곳, 주님이 계셨더라면 찾아가셔서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기시고 눈물을 닦아주셨을 그곳으로 나를 보내주십시오. 거기서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주님이 홀로 받으시고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겠습니다.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우리 교회의 어느 초등학생의 고백입니다. 뺀질거리고 절대 회개를 안 하던 아이였는데 어느 날 깊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그렇게 예수님이 구세주로 믿어지게 되었니?’ 그랬더니 ‘아무리 많이 엄마가 말해주고 사람들이 가르쳐주고 전도사님이 설교해주어도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나에게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말씀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실 때 예수님이 믿어졌습니다.’ 우리 목회자와 장로들이 예배를 그따위로 드려도 괜찮다고 우리가 모본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실 리가 없습니다만 1930년대에 북한에서 목회를 하시다가 새벽기도중 공산당이 등 뒤에서 찌르는 대검을 맞고 절명함으로 순교하신 최 원초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한때 집회를 다니셨습니다. 집회를 가면 강사를 위해 그래도 숙소를 마련하고 이불을 새로 꾸미고 그렇게 마련해놓았는데 첫 번 집회를 하고나서는 집에 안 가시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깜짝 놀라서 ‘목사님 왜 안가세요?’ ‘아 오늘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에 은혜를 쪼금밖에 안주셨습니다. 강사로 온 이 종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이 강대에서 엎드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밤을 새겠습니다.’ 강사가 자기네 교회를 위해서 쭈그리고 그 추운 겨울에 오버를 뒤집어쓰고 밤을 새우는데 아랫목에 가서 퍼질러 잘 담임목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목사님이 뒤에 와서 무릎을 꿇고 또 철야를 합니다. 그러니 지금이야 안 그러겠지만 그때의 장로들은 정말 장로들 아니었습니까? 기둥 같은 두 종이 밤을 새우면서 기도를 하는데 자신들이 어떻게 들어가 자랴? 그리고 강대아래 나와서 장로들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집사들은 장로들이 저렇게 모범을 보이는데 우리가 어떻게 가서 자겠느냐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교인들이 나와서 기도하면서 다음 날 집회에 은혜를 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날 그렇게 간절히 매달리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안주시겠습니까? 17년의 짧은 세월을 목회하면서 둔하고 둔한 제가 배운 평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회자의 눈물입니다. 목회자가 침을 튀기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외쳐도 교인들은 미동도 안합니다. 목회자가 땀을 흘려 기도하기 시작하면 교인들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고 목회자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 교인들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합니다. 교인들이 하나님 사랑에 목메어 울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피를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지만 마지막으로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90이 넘도록 살았고 그가 말을 타고 다닌 거리는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라고 합니다. 하루에 네 번씩 일 년에 천이백번의 설교를 했고 그래서 그는 정말 엄청나게 하나님을 위해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목회하던 예배당에 가서 거기를 시찰하던 어느 목회자가 부끄럽게도 안내하는 교인에게 물었답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목회에 전설적인 성공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예배시간마다 하나님이 회중들을 만나주시던 그 감격의 기원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정말 목사님은 그것이 알고 싶으십니까?’ ‘네!’ ‘제가 오늘 분명히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자, 저기가 웨슬리 목사님이 설교하시던 강대입니다. 올라가십시오, 의자를 마주보고 서십시오,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집어넣으십시오.’ 그리고 ‘이제 되었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자, 이제 통곡하십시오.’ 그것이 웨슬리 선생이 늘 이 강대에서 하던 일이었습니다. 예배는 목회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생하게 드러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회개합시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교회당에 돌아가서 건강이 허락하면 토요일에 강대에 엎드려 철야기도를 해보십시오. 저는 한 2년 정도 그 일을 해보았습니다. 거의 밤을 꼬박 샜습니다. 확실하게 주일날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도 나이가 많이 들면 못할 일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리처드 백스터가 고백했듯이 죽어가는 한 사람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생애 마지막 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그렇게 매달리십시오. 그리고 예배에 은혜가 없으면 부끄러워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새롭게 나아간다면 주님이 우리의 예배에도 놀라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은혜를 주시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