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와 설교
녹취자: 김경애
저는 스물한 살에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읽을 때도 있었고 잘 안 읽을 때도 있었습니다만 성경을 읽으면서 저는 아무리 찾아도 나는 이 사람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에 끌리는 인물이 없었습니다. 뭐 교만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대중가요 가수들에게 마음이 꽂히듯이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30여 년 전에 우리 집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했는데 우리 집사람이 자기는 다윗을 아주 좋아하는 팬인데 당신도 다윗을 한번 좋아해보라고 해서 보니까 정말 괜찮은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신약을 읽어보니까 바울이 더 좋은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좀 더 흐르면서 보니까 다윗보다는 요나단이 훨씬 더 좋은 사람 같고 바울보다는 차라리 바나바가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아닐까? 이렇게 지조 없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좋아하다가 한 20여 년 전에 성경을 읽다가 제 마음 전체를 사로잡은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후로도 성경을 읽고 또 여러 인물들을 성경속에서도 만나고 교회사속에서도 만났지만 그러나 이 요한이 제 마음속에 준 강렬한 인상은 언제나 살아있고 그리고 마음이 뒤로 물러설 때마다 이 세례 요한에 관한 기록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마음을 추스르고 그렇게 세례 요한을 만나고 깊이 은혜를 받으면서 세례 요한처럼 순교하게 해달라고 한동안 기도했던 그 젊은 날의 기억들을 곱씹어보곤 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요한복음은 요한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제 이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쳐주기 전에 먼저 서론으로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짧은 구절이지만 이 구절은 목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성경전체에 나오는 몇 구절 안 나오는 중요한 구절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나왔나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자기를 인하여 많은 사람들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는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 라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이것은 세례 요한의 소명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구약과 신약사이에 걸쳐있는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알다시피 구약성경 66권의 마지막 말라기 성경이 끝날 때 세례 요한이 출현할 것에 대해서 예고하면서 성경이 끝나고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알리기 전 먼저 세례 요한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으로 신약성경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례 요한이 중요한 인물인 것은 구속사적으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중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예수님의 언급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자가 난 자 중에서는 세례 요한만큼 큰 자가 없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가 많이 변했기 때문에 변화된 목회의 방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부분적으로는 일리가 있고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의 역사를 이어가실 때 방법과 수단도 사용하시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구속의 위대한 역사를 펼쳐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19세기의 전설적인 설교자 찰스 스펄전 목사님에 대해서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는 태번어클 처치에서 목회를 했고 한창 때에 그 교회는 6천여 명이 모였습니다. 시인, 철학자, 정치가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했고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2층 예배당이 무너져 내릴 정도로 그렇게 초만원을 이룬 교회당이었습니다. 1975년에 한국의 한 목사님이 태번어클 처치를 방문했을 때 그 교회에 45명의 성도들이 주일날 추리닝을 입고 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 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다고 합니다. 자, 그러면 1975년도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5년 전인데 그런 시간들이 십년이상 계속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당한 시간동안 태번어클 처치는 거의 유명무실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쯤은 놀랍게도 일천여명이 넘게 모이는 영국의 아주 중요한 교회로 부상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피더 마스터스라는 목사님이 부임을 했고 그는 아주 엄격한 칼빈주의자였습니다. 제가 다음 달에 그분을 만나기로 했는데 그분이 거기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하면서 탁월한 개혁신학과 열정을 가지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회심하고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여기 미국의 지역으로 말하자면 카운티에서 한사람이 Born Again 했다고 하면 그것은 어마어마한 빅뉴스라고 말하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에서 45명밖에 모이지 않던 교회에 목회자가 가서 일천여명이 넘게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폭발적인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 그 교회가 천여 명이 넘는 가운데 아주 강력한 개혁교회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소위 이야기하는 로버트 슐러가 3P를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Prayer, Park lots, Preaching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이야기를 우리들이 곧이곧대로 다 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크리스털 교회가 지지난달에 파산선고를 받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만약에 방법과 수단의 문제라면 왜 방법이 사라졌고 수단이 사라졌겠습니까? 교회의 위치도 바로 거기고 Parking lot도 많고 모든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교회는 이 세상의 회사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구속의 역사를 이루실 때에 사람을 연결하여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말라기 이후로 400여 년 동안 정경 선지자들의 succession이 그쳤습니다. 그러고 나서 40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신구약의 중간사 시대를 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우리들이 사건을 바라보는 Focus를 하나님께로 옮겨서 본다면 하나님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길과 복음의 길을 회개를 통해 열기위하여 세례 요한 한사람이 태어나실 때까지 당신의 역사를 기다리셨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라는 것은 제도와 방법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제도와 방법은 중요하고 그리고 필요하고 또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목회의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놀라운 기름 부으심과 그리고 탁월한 능력은 인간이 만든 제도나 방법 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 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낳나니’ 라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한이라는 이 말은 원래 히브리어의 가차음입니다. 야훼라는 이름과 한난=은혜를 베풀다. 라는 이 두 단어가 합쳐진 것이 요하네스라는 사람의 이름의 말하자면 원래의 히브리어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자, 혹은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은혜를 베푸실 자 혹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자식, 그런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로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으나 그러나 실제로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갔는가? 라고 할 때 우리는 오늘날의 목회의 기준으로 보면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인물입니다. 몇 년을 사역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주 짧은 시간이었고 아버지가 대제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이 아이는 아주 어린 시절에 광야로 보내어졌습니다. 요한복음 1장 8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가 자라매 심령이 강하여지고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그때 그 아이라는 말이 ‘파이디온’이라는 말인데 원래는 4, 5세 이상의 아이를 가리키지만 누가복음 여러 곳에서 파이디언이라는 말이 베이비라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아이가 아주 어린 시절에 그 부모가 죽거나 혹은 부모의 특별한 반 예루살렘적인 사상 때문에 이제 이 예루살렘에서 교육을 받지 않고 광야로 보내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어떤 사람들에 의해 위탁되어 이 아이가 교육을 받고 신앙이 성숙해지며 믿음으로 자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할 선지자로서 준비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자들은 에세네파에서 이 사람이 자라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에세네파에서는 많은 어린아이들의 유골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독신으로 지낸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에세네파는 아닌 어떤 경건한 무리들, 예루살렘의 진정한 회복을 꿈꾸고 지금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이렇게 이미 잘못되어 있는 이 예루살렘의 종교적인 이 모든 계대들을 거부하는 그러한 재야의 사람들에 의해서 양육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는 아주 어린 시절에 광야에 보내어졌고 그리고 성경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를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는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예언자로 등장하게 되고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누가복음 3장은 말합니다. ‘요한이 빈들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사갸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니라.’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 라는 이 말씀의 심오한 의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계십니까? 여러분들이 비록 희랍어 성경으로 되어있지만 이 신약성경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샤가라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니라.’ 라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여러분들은 반드시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의 첫 번째 소명에 관한 기사들을 염두에 두면서 이 신약성경을 해석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구약에 나오는 소명기사는 대게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누구에게 말씀하시니라.’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임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임하시니라.’ 라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로 하는 히브리어에서 축약형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소위 히브리어로 ‘바이에히데바르엘로힘 알 누구누구’ 혹은 ‘엘 누구누구’ 혹은 ‘베 누구누구’라고 임하게 됩니다. 호세아서 1장 4절에 히브리어 본문에는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데일라트디베르 아도나이 베르쉬’ 라고 나옵니다. 직역을 하자면 ‘맨 처음으로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시니라.’ 라고 말입니다. 특이한 것은 이 소명기사가 갖는 소위 이야기하는 ‘바이예히’ 라는 것인데 하야동사의 축약형입니다. 우리말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있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가 됩니다. 자, 이런 소명기사는 아주 특이한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정말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놀랍게도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세우시는 이 영적인 방법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쩌면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의 신학적인 상관관계에 대해서 궁금해 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 제가 그 모든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시간은 저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만 여러분들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사도행전 6장에서 사도들이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에 나섰다가 교회가 굉장한 어려움을 만나고 그때 비로소 이제 일곱 집사들을 세우는 장면을 여러분들은 아마 여러 차례 보셨을 것입니다. 일곱 집사들을 세운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여야 하리라.’는 것이 일곱 집사를 세우는 하나의 목회적이고 신학적인 동기였습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담당하고 일을 하다가 ‘아 우리 사도들은 기도하고 목회하는 일이 예수님이 맡기신 일이구나! 야 이건 정말 놀라운 발견이다. 그러니 우리는 교회를 구제하는 이런 일들은 집사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이 일에 전념하자. 이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새로운 발견이라고 생각하시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그 일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주요 직무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과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 그것이 바로 선지자들이 맡은 아주 중요한 가장 양보할 수 없는 의무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영국 청교도들이 목사가 누구냐는 정체성에 대해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를 뿌리고 죽어간 선지자들의 후예였다고 말한 것이 근거가 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오늘 금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이야기가 바이예히데바르엘로힘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임하였다는 그것과 무슨 중요한 연관이 있습니까? 많이 말씀드릴 시간은 제게 허락되지 않았고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시대에 태어나면 그는 그 시대의 자식입니다. 여러분 70년대에는 우리들이 머리를 이렇게까지 장발로 기르고 목사님들도 80년대 초까지 그렇게 하고 다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머리를 깎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때에 지금 우리의 두발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사람들이 너는 이북에서 왔느냐고 놀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오늘날은 나팔바지를 입는 청년들이 없습니까? 아무도 안 입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대가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대의 정신입니다. 이 시대의 정신은 사람이 만들지만 또한 그 시대의 정신은 사람을 빚어냅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정신에 맞지 않을 때 그 사람은 튀는 사람이 되고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게 되고 사람들과 소통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자 선지자들도 처음부터 종자가 다른 종자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 태어나서 그 시대에서 교육을 받고 그 시대에서 숨 쉬고 그 시대 사람들과 함께 정신을 나누면 살았던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된 다음에 그의 모습을 보십시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외칩니다. 모두들 먹고 마시고 춤추는 시대에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다고 외칩니다. 다들 좌절하고 주저앉아서 한숨을 쉬고 있을 그때에 이 선지자는 엉뚱하게 기뻐하라 하나님의 때가 가까이 왔다고 낙관주의를 펼칩니다. 뭔가 그 시대와 소통되기 어려운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한 시대에 태어났으면서 그렇게 다를 수가 있습니까? 성전을 자랑스러워하고 그 성전을 영광스럽게 생각할 때에 선지자가 나타나서 ‘저 성전을 닫아버릴 사람이 있었으면 정말 좋겠구나! 저 성전 때문에 우리가 망한다.’ 라고 외치는 인물들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무엇인가 나쁘게 이야기하면 단절이고 좋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신적인 지적들이 주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간단합니다. 그들에게 무엇인가 정신세계 속에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없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라는 추상적인 말로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간단한 구절 하나에 대해서 제가 쓴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한다.’ 라는 책에서 무려 50P를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그 선지자들에게 임할 때 그에게 아주 놀라운 변화는 제일 먼저 지성적인 변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완전히 인생관이 바뀌게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면서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저 그 시대 사람들 속에 섞여서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고 생각하고 습관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따라서 그저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찬란한 진리의 빛이 그에게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입니다. 그 빛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분이 하는 일어 어떤 일인지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었습니다. 그 압도된 그 모습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을 통해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군이 되기 전에 야망을 가지고 선교의 꿈을 꾸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소명의 출발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명의 출발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화로다, 나로 망하게 되었도다. 내 입술이 부정한 자 가운데 있으며 거룩한 하나님을 뵈었도다.’ 라고 하면서 커다란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진노와 오히려 그 끔찍한 커다란 위협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티끌 같은 존재인지를 깨닫고 전능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위엄 앞에 엎드려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전에 그에게 없었던 정신세계의 커다란 변혁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하찮게 보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계신 웨슬리 선생은 영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재미있는 표현을 남기셨습니다. ‘영광이란 그것이 너무나 찬란하게 빛나서 그것 말고 다른 것은 거의 안보이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영광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부정신학적인 묘사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설득력 있는 그런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티끌과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이제 자신의 남은 소망은 바로 이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전해야겠다는 그런 소명에 불타게 되는데 그 소명의 핵심이 ‘다트 엘로 힘’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것이 이 사람 속에 있어서 그 지식이 살아 역사해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호세아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로 다시는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음으로 나도 너희를 버리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트 엘로 힘 그것이 신약에 와서 크리스토로지칼 conversion을 하게 됩니다. 기독론적인 전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Gnosis Christ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 체험은 바로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던 것과 똑같은 체험이었고 바로 그것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사도 바울과 같은 목회자, 선교자, 신학자로서의 순교적인 삶을 살게 했던 그 핵심 Core입니다. 그것을 학술적으로 아주 훌륭하게 밝혀서 탁월한 논문을 쓰고 학계의 인정을 받은 분이 한국의 신학자 김 세윤 박사가 쓴 The origin of Gospel. 이라는 500P정도 되는 논문입니다. 그러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제가 이렇게 긴 서론을 펼치는 것입니까? 요점은 이것입니다. 설교자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직위를 부여하고 교회에서 청빙을 하고 이렇게 됨으로써 설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못 본 하나님을 만나고 남들이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그리스도의 영광을 경험함으로써 비로소 한 사람의 평범한 시대의 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단에 서서 사람들에게 외칠 수 있는 설교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모든 목사는 모두 설교자가 아닙니까? 물론입니다. 설교를 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목사가 설교자는 아닙니다. 물론 설교하고 있으니까 설교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설교자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초창기에 제가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 어느 독자가 저에게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의 책을 보고서야 어떻게 설교자가 되는지를 알았습니다. 당신의 책을 읽으면서 저는 이런 시를 생각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길게 시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 시는 미당 서정주 선생의 ‘국화 옆에서’ 라는 시였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라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하찮게 웃어넘겼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저는 그 시가 대단한 깊이와 그리고 설교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걸어가는 우리의 처지와의 놀라운 Relevancy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가을이면 함초롬히 가을 이슬을 머금은 아름다운 국화꽃이 서로 자태를 뽐내는 국화전시회가 열립니다. 저도 언젠가 한번 국화전시회에 가본 적이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화분 한 개에 180만 원짜리 까지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에 의하면 이천만원까지도 있다는데 저는 그것은 못 보았지만 저는 180만 원짜리는 보았습니다. 국화를 가지고 한국지도를 그려놓은 놀라운 국화였습니다. 수십 개의 국화꽃을 똑같은 길이로 자라도록 그렇게 조절해서 만들어서 활짝 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핀 국화꽃을 보면서 감탄합니다. ‘야, 정말 멋있구나! 이것을 누가 길렀을까? 종자가 무엇이래? 무슨 비료를 주었대? 온실에는 무슨 장치를 했대? 야! 정말 놀랍다!’ 라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국화를 기른 방법과 종자에 관해서 말하지만 이렇게 활짝 아름답게 핀 국화, 거기에는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Behind Story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쩍새가 우는 사연입니다. 이른 봄 이 국화! 아직까지 꽃이 피기는커녕 줄기조차 나지 않고 싹이 나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소쩍새는 밤마다 와서 울었습니다. 소쩍새는 올빼밋과에 속한 야행성 조류입니다. 그리고 그 우는 소리가 아주 기묘하다고 합니다. 낮에는 수풀 속에 있다가 밤이면 그 국화 옆에 와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 국화가 점점 줄기가 자라서 봄이 될 때도 울었고 여름이 되어서 파랗게 자라기 시작할 때도 울었고 가을이 되어서 이제 국화 몽우리가 생기기 시작할 때도 밤마다 와서 구슬프게 울었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늦가을이 되자 이 국화는 마음껏 자랐고 봉우리는 어느 날밤 새벽에 드디어 터뜨리면서 그러면서 활짝 국화꽃이 피었습니다. 국화꽃이 활짝 피기 전 그날 새벽 국화꽃 옆에서 소쩍새는 울다 울다가 피를 토하고 죽은 그날 국화가 피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활짝 핀 국화는 보고 박수를 치고, 씨를 받아가고, 기르는 요령을 적어가겠다고 기자회견을 하듯이 모이지만 그러나 그 국화꽃이 피기까지 봄부터 울다가 마지막 가을에 피를 쏟고 죽어간 그 소쩍새가 죽은 사연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한사람의 설교자가 강단에 올라서서 짧은 한마디의 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 그리고 한 설교자의 평범한 인간의 말이 진리의 증언이라는 찔림을 사람들에게 주기까지 그들은 그의 말재간과 학벌 그리고 성경에 대한 능란한 해석에 대한 기술들을 배우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 뒤에는 그 진리와 함께 죽고 살았던 가혹하리만치 긴 설교자의 외로운 투쟁의 날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신학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학자는 명상과 독서를 통해서 신학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진리에 대해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고통을 통하여 신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오늘 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증거하기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희랍어성경에는 ‘하나님 곁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라고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 곁에 있다가 왔다면 그러면 세례 요한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그는 하나님 곁에 있다 온 사람임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겠지요. 그랬습니다. 그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도시에 교회를 개척한 것도 아니었고 신도시 아파트 입주계획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모래바람이 이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기 시작했고 진리의 말씀을 외치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선포를 듣기위해서 인산인해처럼 몰려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가 주는 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 곁에 있다 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어야합니다. 사고와 언어, 그리고 그 모든 말과 마음의 움직임, 그리고 설교의 목표에 대한 갈망,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 곁에 오래도록 있다가 온 사람이고 천국이 고향인 것 같은 사람 하나님 아버지와 특별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 그 점에 있어서 우리와 비교될 수 없는 친밀함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단지 신학을 공부하고 검은 가운을 입고 강단에 올라간다는 사실만 자신들과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과연 그의 선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어질 수 있겠습니까? 목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이 흔적은 어떻게 생기는 것입니까? 그것은 길게 이야기하면 한없이 길지만 소위 이야기하는 Imago Christ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부여했지만 죄와 타락으로 이 형상이 다 망가져버렸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사람이 태어났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리스도의 형상은 인간 안에 심겨진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본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그런 것들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컴퍼미티 투 God. 이 본받는다는 이 단어가 희랍어로 수수케마티조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들은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에서 이런 본문을 읽으셨을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도록 하라.’ 라고 할 때 ‘본받지 말고’ 의 ‘본받다.’ 라는 단어가 수수케마티조인데 이 수수케마티조라는 희랍어는 마치 붕어빵 틀에다가 밀가루 국물을 부우면 엄마가 굽던 아빠가 굽던 똑같은 빵이 나오는 그런 것을 가리킵니다. Die Casting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시대에 태어나면 그 시대가 그를 Conform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인간을 Conform하는 것이 오직 둘밖에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세상과 그리스도,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세상을 향해 많이 Conform되면 그리스도의 Imago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그리스도에게로 Conform되면 세상으로부터는 멀어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곁에 있던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입니까? 목회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것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혁혁한 선교의 업적을 이룬 선교사가 된다고 해서 소위 이야기하는 Imago Christ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깁니까? 그것은 신앙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목사들은 신앙생활은 이미 기본적으로 다 뗀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이 됩니까? 오늘날 한국의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이 신앙적인 문제들 이런 것들은 신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도대체 교회의 돈을 떼어먹은 목사가 무슨 신학을 주장했기에 그런 일들을 했습니까? 그것이 신학의 견해의 차이입니까? 신앙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온갖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교회를 들쑤셔놓고 난리를 만들어놓습니다. 부정직과 부정한 돈거래, 여러 가지 추문들이 막 일어납니다. 도대체 신학적인 견해를 잘못 택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입니까? 그런 엉터리 같은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안 합니다. 만나는 많은 후배 목사들, 동료 목사들을 보면 정말 저 사람이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일까? 그리고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항상 회개가 있고 통회가 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곁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설교의 원천은 신학 자체에서 나오지 않고 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가 올라가서 기도하라고 설교를 하는데 어눌하기는 하지만 한번 설교를 했는데 모든 교인들이 울면서 예배를 드렸다면 그 목사는 기도하는 목사입니다. 절대로 설교하러 올라가기 전 한번 기도에 관한 설교를 해서 성도들을 울려야겠다고 이 사람 저 사람의 책들을 펼쳐놓고 메모해놓고 올라간다고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번쯤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들을 만나면 제가 늘 하는 말이 ‘야, 신앙생활 열심히 하자!’ 은퇴가 가까운 어느 목사님이 계신데 전화를 드렸답니다. ‘목사님 요새는 근황이 어떠십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 이제 무슨 공부입니까?’ ‘아 은퇴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주님 앞에 갔을 때 제가 혹시 그분 보고 당신 누구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합니까? 열심히 예수에 대해서 배우다가 가야지요.’ 신앙생활을 잘 하셔야합니다. 여러분들이 목사가 목사에게 신앙생활을 잘하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머리털 나고 처음이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목사와 이발사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발사는 빗하고 가위만 있으면 어디가든지 개업을 할 수 있고 목사는 성경, 찬송만 가지고 있으면 어디 가서든지 개업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웃긴다고 그러실지 모르지만 목회를 하다가 하도 힘들 때 교인이 한 천 명 정도 모였을 때인데 이 교회가 쫒아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의 뜻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쫒아내면 내가 가서 한번 이런 교회 말고 진짜 내 마음에 꿈꾸던 교회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 나이가 되었는데 제 마음속에는 전혀 그런 기도에 응답해 주실 리는 없지만 다시 한 번 교회를 개척하면 잘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 많이도 말고 한 20명만 데리고 다시 한 번 교회를 개척할 기회를 주신다면 지금 있는 열린 교회보다도 훨씬 더 성경에 가까이 가있는 그런 교회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뭐가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그래서
(찬양)
널 보는 이마다 주 생각하리. 아멘
사실 이 부분을 좀 더 하고 싶은데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뒤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함이라고 말입니다. 한국에서 한 10여 년 전에 아주 끔찍한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심 판결에서 용의자가 무혐의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2심 판결에서 사형을 받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1심에서 무죄인데 2심에서 사형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판결을 뒤집은 것이 다섯 살 먹은 아이의 증언이었습니다. 현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증거 능력을 인정해주고 그래서 결국은 범인이 정죄를 받았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증인의 자격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증인의 자격은 키가 몇㎝ 이냐? 얼굴이 멀끔하게 생겼느냐? 학위를 어디서 받았느냐? 가문이 어디냐? 아무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현장에 있었던 사람, 이것이 바로 마르틴이언 이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순교자라는 martyr 도 역시 여기에서 나오는 단어라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럼 보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변호하려고 목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되어야합니까? 증인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증인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무엇입니까? 사건 현장에 있었어야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나 사이에 소위 이야기하는 시물라끄르 가 있어야합니다. 어떤 사건이 있어서 그래서 나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한 어떤 사건이 있어서 그 사건에 강력하게 붙잡히고 매인 그런 인물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증인의 자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이 증언이라는 것은 결국은 법정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 법정에서 판사가 판결을 할 때에 어떻게 증언을 해주느냐에 따라서 무죄로 방면이 될 수도 있고 사형언도를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케이스처럼 말입니다.
자 그러면 설교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무엇입니까? 생생하게 예수를 만난 것,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66권이고 엄청나게 많은 교훈들이 여기에 담겨있는데 왜 예수를 만난 그것이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는 것이라고 말합니까? 여러분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이 스스로 답하고 있습니다. ‘그가 증거하러 왔나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우리말 성경에는 빛이라고 나오는데 희랍어성경에는 토포스 ‘그 빛’입니다. 한 빛이 아니라 a light 가 아니라 The light입니다.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기 위해 온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성경이 많은 내용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 이 성경은 한 사람을 중심으로 기록된 모든 기록이고 그 한사람을 중심으로 해석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성경해석에 있어서 신학적 원리입니다. 그러면 그 신학적 원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성경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쓰인 책이지 우리에게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기 위해 쓰인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지식과 삶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Gnosis 그리스도 투’ 거기에 매달려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구도를 가지고 신약의 서신서를 읽으면 아마 탁월한 성경해석의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씨에이치다드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유명한 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도적 Kerygma와 그 발전’이라는 유명한 책입니다. 그 책속에서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약에 오늘날 교회에서 외쳐지는 설교를 사도들이 와서 들으면 충격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기독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설교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에이치다드 이후로 성경에 나오는 이 가르침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Kerygma와 Didache라는 내용입니다. Kerygma는 알다시피 선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에서 사람들에게 설득하거나 타협하려는 내용이 아니라 복음적인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선포이고 특별히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외침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Kerygma와 그리고 또 하나는 Didache인데 이것은 윤리적인 교훈들입니다. 그래서 그 씨에이치 다드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그 분류법을 따라서 이제 성경의 가르침은 Kerygma와 Didache로 되어있고 이 Kerygma는 비기독교인에 대한 public 선포이고 그리고 Didache는 이미 예수를 믿은 사람들을 향한 윤리적인 교훈이라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실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이 구분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개가 또렷이 나누어지지 않는 아주 연쇄적인 방법으로 Kerygma와 Didache가 꽈배기처럼 함께 꼬이면서 신약에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서신서를 읽어나가는 아주 중요한 Kerygma와 Didache의 하모니를 위한 통찰입니다. 여러분들은 에베소서뿐만 아니라 골로새서 그리고 많은 서신서 속에서 앞부분에서는 장중한 교리를 선포하고 후반부에서는 ‘그러므로’ 라고 시작되면서 실천적인 내용들을 교훈하고 있는 장면들을 여러분은 볼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소위 이야기하는 삶의 윤리적인 교훈이라는 Didache가 Kerygma라는 신학적인 토대위에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복음의 메시지를 잃어버린 많은 교회들 속에서 교인들에게 성경 한절을 읽고 ‘선하게 사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을 도웁시다.’ ‘탈북자들을 도웁시다.’ ‘제3세계의 난민들을 도웁시다.’ 라고 설교하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기독교에서 울려 퍼져야할 설교가 아니고 이런 설교를 할 때 교회가 얼마나 비참하게 망하게 되었는지를 19세기의 교회역사는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역사적으로 19세기는 자유주의가 풍비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에 이르러 구 자유주의는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19세기 구 자유주의가 유럽을 뒤덮기 전에 이미 전조는 이미 그 전에 훨씬 더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19세기 중반 이후로부터 본격적으로 자유주의가 시작되었고 신학적 자유주의가 그렇게 시작되기 이전 이미 18세기 중반부터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유럽의 사조는 로맨티시즘인 낭만주의에 접어들었습니다. 이 낭만주의 시대는 이제껏 이성에 의해서 지배되어 오던 모든 사유들을 깨고 인간의 마음속에 부딪히는 감정의 크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였습니다. 이런 낭만주의의 풍조들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것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문학, 심지어는 수학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미 벌써 이때에 뉴턴이즘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와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올라가보면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소위 이야기하는 이성주의 시대가 도래하는 소위 이야기하는 모던이즘 시대의 빗장이 열리던 시기였습니다. 데카르트는 18세기에 나타나서 17세기까지 계속되어오던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존재론적인 사고방식을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인식론적인 사고방식의 구조로 바꾸어 버려서 인간이 모든 만물의 척도가 된다는 사실을 이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데카르트주의의 운동들은 전체적으로 퍼져서 이제 신학의 기본적인 뼈대만 남겨놓고 그리고 모든 내용들은 이성주의로 가득 채우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미학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됩니다. 고틀리 바움가르텐 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이 미학이 창시되면서 이제는 이 모든 세계에 있는 아름다움을 고전적인 미학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게 그 미 자체가 밖에 실제로 존재하고 아름다운 질서들이 있고 그 질서의 원인은 하나님의 통치요,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사상들을 전부다 내팽개치기 시작하고 이제 이 모든 아름다움의 원인이 인식하는 인간 속에 있기 때문이라는 내재적인 관점들을 갖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서부터 이제 이 모든 가치의 체계들이 사람 중심으로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 올라가면 여러분도 알다시피 중세 말이 나오고 그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적인 변화 속에서 결국은 자유주의가 태동되게 됩니다. 이 자유주의는 결국은 소위 이야기하는 신앙으로써가 아니라 이성으로 납득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부정해 버리려고 하는 시도였습니다. 자, 그래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신약성경에서 울려 퍼지던 복음의 선포들의 내용들이 자유주의의 칼날에 난도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다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경이 모세오경도 사라지고 선지서도 사라지고 시편도 사라지고 신약성경도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가죽껍데기 두 장만 남았습니다. 선포할 내용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래서 결국 교회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망했습니까? 이것은 역사 속에 나오는 실제의 자료들입니다. 주일날 울려 퍼진 설교의 제목들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문화의 즐거움’ ‘양들은 가두어 기르는 것보다 방목하는 것이 좋다.’ ‘한 잔의 커피가 주는 즐거움’ ‘천연두 예방주사 맞아야할까? 말아야할까?’ 이것이 실제로 주일날 설교제목이었습니다. 부활절에는 무슨 설교를 했을까요? ‘생매장당한 그리스도의 위험’ 졸리코퍼, 슈파링, 이런 사람들이 이런 설교의 선구자들이었습니다.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루에 600교회씩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은 망해버렸습니다. 그게 결국은 윤리적인 설교, 윤리적인 목회의 최후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역사를 배우면서 우리가 충격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역사를 통해서 아무도 교훈을 받지 못한다는 역사를 배우면서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설교는 오프라 윈프리 쇼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다 끝나고 나면 ‘아, 가슴이 따뜻해졌어!’ 그리고 돌아가는데 그게 죄인들이 변한 것일 수 있습니까? 윤리적인 설교와 윤리적인 목회가 가장 성공하면 길들여진 짐승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일까요? 그러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증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내가 발견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리고 그리스도 이외에는 천하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는 선명한 선포, 그 선포 속에서 저 설교자는 바로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의해 피 묻은 사람이라는 그 외침, 그것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만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만나야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자는 이야기가 좀 더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합니다. 저는 가끔 교회 마당에서 어린아이들을 만납니다. 저희 교회는 예배당의 길이가 72m입니다. 저쪽부터 이쪽까지 오는데 한참 걸립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여러 장소에서 수많은 TV로 예배들 드리게 됩니다. 애들은 내가 나타나면 탤런트가 온줄 압니다. 왜? 늘 TV에서 보던 사람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나를 만나면 악수를 하고는 막 뛰어가면서 ‘야, 나는 오늘 김 남준 목사님 만났다. 진짜로 만났다.’ TV로 본 것이 아니라 진짜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엊그제도 ‘안녕하세요? 목사님!’ ‘어휴 참 착하구나! 너 몇 학년이니?’ ‘초등학교2학년입니다.’ ‘너 회심했니?’ 제가 늘 물어보는 이야기입니다. 얘가 아주 또렷한 목소리로 ‘그럼요, 목사님! 저는 회심했어요. 예수님을 만났는데 7살 때 예수님을 만났어요.’ 우리교회 집사 딸네미가 있는데 밥을 먹다가 초등학교 5학년인데 ‘엄마, 엄마!’ ‘왜?’ ‘엄마는 몇 살 때 회심했어?’ ‘엄마가 대학교 1학년 때 회심했으니까 19살 때 회심했지!’ 이 아이가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놓으면 입을 벌리면서 ‘아니 엄마 그 나이 먹도록 회심도 안하고 뭐했어?’ 그러더니 ‘회심도 안하고 엄마는 어떻게 살았어?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회심했는데’ 그러면서 밥을 다시 먹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