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
“너희는 세상의 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
녹취자 : 오희열
오늘 여러분 앞에 놓여있는 마태복음 5장 14절은 성경에서 우리가 친숙하게 들은 성경구절일수록 사실은 우리가 그 뜻을 오해거나 모르고 있는 경우가 아주 많은데, 이 성경구절이 그렇습니다. 저는 한 3년 전에 이 구절하나로 책 한 권을 썼습니다. 여러분에게 두어 권 놓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책을 썼는데 이 구절은 그렇게 간단한 구절이 아닙니다. 아마 오늘 밤새도록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려도 우리가 다 깨달을 수없는 수많은 내용들이 이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한 권의 책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여러분에게 전달해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했을 때, 우리가 받는 인상은 ‘주님이 우리를 빛이라고 하셨으니까 빛이 되자’고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착한 삶입니다. 흔히 우리는 앞에 나오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는 부패를 방지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빛’은 선교로 생각을 하는데 사실은 앞에 나오는 소금이라는 구절을 부패방지용이라고 해석하는 해석가들은 극히 일부분이고 이것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사회적인 분위기를 고려하여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구약과 신약에서 나타난 소금이라고 하는 것을 모두 해석하면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패방지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해석이 역사적으로 지지받을만한 해석은 아닙니다.
빛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말로써 우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가 이 속에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것이 이것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라는 것은 곡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빛이라고 하는 것은 히랍어로 ‘토포스’인데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라고 하셨을 때, 이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구약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을 때, 여러분이 지금 깨닫는 것과는 전혀 다른 쉐이드(shade)를 장엄하게 느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의 사용은 예수님이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연스럽게 이끌어 나오는 빛에 대한 비유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빛을 ‘고드’라고 하는데 창세기 1장에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할 때의 빛이 바로 이 빛입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들을 주석가적으로 풀어서 카테고리를 나누면 이 빛은 크게 세가지이 실체에 대한 의미입니다.
첫째는 자연적인 빛입니다. 그야말로 물리적인 빛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윤리적인 빛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많이 나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압도적으로 성경에서 많이 나오는 용례이고 기본적인 의미가 세 번째인 신학적인 빛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에서는 하나님의 윤리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성품,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갖게 되는 지식의 빛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과 시편에서는 이 빛이라는 단어가 ‘지혜’를 가리키는 말로 폭넓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는 이것입니다. 왜 교회가 이럴까? 사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신자들의 연합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가 보이지 않으니까 그들의 시각에서 보면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연합입니다. “교회가 왜 그럴까?”라고 하는 말은 건물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공동체의 성격이 왜 이 모양일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입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소위 부흥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많이 헌신해왔습니다. 1950년이나 1960년대부터 일어났던 조국의 복음화 운동과 그 이전에 1920년대 이후에 있었던 운동들은 오늘날과 같이 많은 사람들을 예수 믿게 만든 역사적인 좋은 결과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것이기는 했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반성을 해야 할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자체가 개념설정이 잘못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Church man, 즉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The way of living, 즉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나 불신자들과 완전하게 구별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선교의 방식이었습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있었고 그 시대는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후에 사도들의 제자인 속사도 시대가 있었고 2세기에 변증가들의 시대가 옵니다. 로마의 박해가 1세기 때에는 정치적인 박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복음이 전파되니까 그때부터는 철저하게 철학과 이교도 사상들을 동원해서 기독교 사상의 어리석음을 공격했습니다. 이것이 사상적인 박해의 시대였고 이때에 나타난 사람들이 기독교 변증가들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천재와 같은 사람들이 등장해서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하면서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의 힘을 다해서 기독교를 변증한 것입니다. 그때나온 초대교회 문헌들의 이야기를 몇 토막 해 드리려고 합니다.
당시 문헌 가운데 베드로의 설교라는 문헌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제3자의 눈으로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인상이 나타납니다. “우리 시대에 완전히 다른, 즉 유대인들도 아니고 이방인들도 아닌 제3의 족속들이 출현했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라고 부릅니다.”라고 기록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삶의 방식과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은 판이하게 달랐고 당연히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영웅전’을 쓴 플루타크가 ‘도덕론’이라는 책도 남겼습니다. 물론 불신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이 책에서 이 책에서, 당시 로마 정부에서 이루어지는 법의 심판을 ‘신성한 판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의 신성한 판결을 받기 위해 법정에 출두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한 족속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인상입니다. 오늘날은 어떨까요? 제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가정해도 기독교는 그다지 매력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매력이 없는데 제일 매력이 없는 게 현재 그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이 없습니다. 제가 가끔 TV를 보는데 불교방송을 보면 언제나 깊습니다. 교리강요가 있습니다. 가톨릭방송을 보면 늘 착해 보입니다. 기독교방송을 보면 부끄럽습니다. 그게 목사인 내가 받는 인상인데, 나는 그래도 기독교 옆에 심정적으로 서 있는 사람인데도 그렇게 보이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겠습니까?
초대교회의 전도의 방식은 'Presence', 신자의 현존에 의한 선교였습니다. 이 말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현존에 의한 선교가 무엇일까요? 70살이 넘은 어느 승려가 글을 썼습니다. 제가 목사이지만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웠습니다. 이 스님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시골 친척집에 놀러갔다가 돌아가는데 그 근처에 유명한 절이 있어서 구경하다가 툇마루에 앉았는데 어떤 젊은 스님이 오셔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스님이 이 학생에게 “아이야, 넌 왜 사니?”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선문답이 시작되었고 한 시간 반 정도 대화를 나누고 나서 학생은 서울로 올라와서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출가를 허락해주시도록 간곡하게 부탁하더랍니다. 이 집안은 대대로 가톨릭 집안이었기에 부모님은 대단히 충격을 받았는데 마침 함께 살던 사촌형이 일본 불교를 접한 유학생이었는데, 학생의 부모에게 이제 자각을 하는 시기이니 자기 길을 가도록 두자고 말씀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 후로 학생은 승려가 되었고, 약 60년이 흐른 후에 이 글을 쓴 것이랍니다. 그리고 당시에 학생이었을 때 자기 옆에서 얘기를 나누던 젊은 스님은 성철스님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지금 드리려고 하는 이야기는 ‘존재의 울림’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고안해 낸 말입니다. 자 보십시오. 성철스님이 승려복 하나 입고 나타났습니다. 그의 학벌이나 가문, 사회적 지위나 외모가 어린학생의 마음을 뒤흔들었기에 그 학생이 출가를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존재의 울림이 초대교회시대의 선교의 방법이었습니다. 지금은 매우 심각한 상황입니다. 교회가 너무 중요합니다. 목회자가 너무 중요합니다. 단지 도덕적인 삶을 산다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는 그리스도인을 “쿵!”하는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하면 모두 진리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진리, 그것을 오늘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명사를 주목해봅시다. “너희”라고 했는데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우리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빛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양심이 찔리기 때문에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말씀하셨는데, 흔히 기도하거나 사람들에게 얘기할 때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거짓말입니다. 성경은 직설법 현재로 말합니다. “휘 메이스토 포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직설법입니다. 의심할 여지없는 현재입니다. 그럼 이 모순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신 후에 비로소 그 팔복의 사람들을 향하여 “휘 메이스토 포스 엔 코스모”,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는 것인가 하면 “쿵!”하는 존재의 울림은 웅장한 교회의 건물이나 교회를 얼마나 다녔다고 하는 커리어나 자신이 하나님의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하는 헌신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존재에서 울려나오는 피할 수 없는 강한 외침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심령이 가난하다고 말씀하셨는데 “마카리 호이호이 푸토코이”에서 ‘푸토코스’라는 단어는 ‘파산선고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법원에서 파산선고를 받으면 아무것도 없이 길거리로 쫓겨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무엇이든지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버려진 것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게 천국 시민의 자격이라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천국시민, 하나님나라 백성의 인격적인 첫 번째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가난합니다. 여러분도 고시공부하면서 기도원에 올라가시고 한 번, 두 번 낙방하면서 기도원에 올라가신 적이 있는 분이 계실 겁니다. 그 때 그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가난합니까? 발아래 밟히는 것 같은 비참한 처지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눈물 흘리며 매달립니다. 그렇게 짓이겨진 마음이 ‘푸토코스’의 마음입니다. 애통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기억하셔야 할 것은 여기에서 가난해지는 마음은 하늘의 나라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고, 그냥 우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해서 우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것도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해서 온유한 사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이 맞춰진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주기도문만이라도 제대로 공부하면 이런 식의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께 드리려고 ‘깊이 읽는 주기도문’ 책을 선물로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그런 팔복의 사람이면 이미 빛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빛이 되기 위해서는 사상이 있어야합니다. 원래 기독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사상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 얼마나 웃기는 지 보십시오. “불교에 귀의한다” 이 것이 말이 됩니까, 안됩니까? “기독교에 귀의한다” 이런 말을 사용합니까? 안합니까? 왜 그럴까요? 심각한 것입니다.
어느 잡지회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인터뷰를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얼굴이 신문지상에 나는 것이 싫어서 거절을 했지만 꼭 하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잡지가 기독교 잡지가 아니라 일반 잡지인데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다 돌고 종교계 차례인데 가톨릭도 했고 불교도 했기 때문에 개신교 차례라고 했고 저를 선정했다고 했습니다. 불신자 기자가 한 시간 반 동안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를 포함해서 질문을 했고 저는 차근차근 답변들을 해 주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 기자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많은 목사님을 인터뷰를 했었지만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 않습니다. 스님 같습니다.” 7, 8년 이 지났는데 그 기억이 아릿하게 남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왜냐하면 그 불신자 기자의 눈에 스님은 철학자로 보였고 개신교 목사는 비즈니스맨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사상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인모 씨를 비롯한 비전향 장기수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중의 한 사람을 인터뷰했는데 왜 사인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유가 자신이 살아온 모든 인생을 한 입에 토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사상을 따라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공부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귀의를 한다는 것은 귀의하는 곳이 사상과 인생 전체를 끌어안는 웅장한 진리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가 최고의 귀의처였습니다. 웅장한 사상을 가진 귀의처였습니다. 제가 많은 책을 읽었는데 지금도 열심히 공부합니다. 제 서재가 5만권의 도서관입니다. 그 많은 연구를 통한 저의 고백이 있습니다. 플라톤을 공부하면서는 인간인 것이 감사했고, 어거스틴을 공부하면서는 기독교인 것이 감사했고, 루터와 칼빈을 읽으면서는 개신교인 것이 감사했고, 17세기 정통주의자를 읽으면서는 개혁파인 것이 감사했습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우리들이 기독교를 갖는다고 하는 것은 웅장한 사상을 떠안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세기, 그보다 더 빠른 19세기 중반부터 어떤 커다란 서구 미국 기독교 사회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게 무엇인가하면 무식한 기독교인이 되기로 다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아하고 웅장한 울림이 있는 귀의처로서의 위대한 기독교를 박수치고 불 때는 것으로 끝내기로 한 것입니다. 사회에 대한 견해를 한 번 보십시오. 제가 기독교인인데 정말 분하고 화가 납니다. 봉은사역이 어쨌다는 것입니까? 그게 도대체 한국 기독교의 어마어마한 이슈입니까? 내가 신문사 기자들을 만났더니 3분이 2 이상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는 겁니다. 기독교가 그것밖에 안되냐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들려준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이유는 우리가 진리를 꽉 붙들어도 위태한 때를 맞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진리 그 자체를 부인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를 여기에 150페이지에 걸쳐서 썼습니다. 여러분이 그 이야기를 들으시면 검사님들이지만 충격을 받으실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 닥치는 성적인 자유, 동성애의 문제, 아나키즘, 무정부주의의 문제, 이런 많은 문제들이 있잖습니까? 이것이 어떤 사람들이 우연히 한 번씩 부딪히는 문제들이 아니라 정교한 철학적인 논리를 가지고 어마어마한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로마의 군단에 비유한다면 기독교는 거의 장대를 든 의병의 수준입니다. 주님의 은혜니까 이만큼 지켜진 것입니다.
몇 가지만 간단히 이야기해보자면, 1950년대에 유명한 올더스 헉슬리, 켄 키지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는 문필가로도 이름을 날린 미국의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새로운 사상을 조직하면서 LSD 복용을 합리화한 사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지각의 문’이라는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이 이 세상사에 매여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뭔가 초월적인 점프가 필요한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약물의 복용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사상이 전파되면서 수많은 미국인들이 약물 중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에 일어난 운동들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엔젤리스에서 있었던 대규모 히피운동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말콤엑스의 흑인분리주의 운동, 루터 킹 암살 사건 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이야기하면서 오늘날 이야기하는 많은 도덕적 근거들을 무참하게 부수고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이후에 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실존주의가 등장하면서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데 이미 이런 것은 프레드리히 니체부터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니체는 사상가라기보다는 문필가입니다. 이후에 하이데거가 이것을 받아서 엄청난 지적인 영향을 받아서 폴 사르트르와 같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이 “나는 암미베르노스를 읽으며 진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나의 남은 모든 생애를 남아있는 모든 진리를 떨어뜨리는 데에 헌신하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그가 실존주의를 이야기하면 서 모든 것으로부터 인간의 자유를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충격적입니다. “모든 가치를 제거하고 나면 인간은 완전한 자유다.” 그게 소위 말하는 Geworfenheit, ‘피투성의 존재’입니다. 인간의 의미? 그런 것은 묻지 말고 그냥 이유 없이 던져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말이 예전에는 있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실존’이라는 말은 Existance, 우연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H₂O가 물이 되는 것, 이것이 실존입니다. 본질은 H₂O입니다. 이전까지의 사고방식은 물, 수증기, 얼음으로 볼 때, 그 상태들은 모두 눈가림이고 H₂O의 장난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H₂O가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물이면 물이고, 얼음이면 얼음이고, 수증기이면 수증기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어디서 오고 도덕기준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인간은 이유 없이 던져진 존재이고 매일 맞닥뜨리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Existance’가 최고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Existentialisme’이 된 것입니다. 그런 사상은 결국 기독교에서 보면 모든 도덕의 근거와 모든 것들을 보이지 않는 세계에 두면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있다는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사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1968년에 프랑스에서 있었던 학생운동을 기점으로 전 세계의 철학계는 현대철학시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러면서 여러분이 이야기하는 리오타르 같은 사람들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진리의 근거라는 것들을 모두 부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음악이라는 것은 플랫, 샾이 있고 음조가 있어서 장조, 단조가 나옵니다. 그런데 쇤베르크라는 사람이 나오면서 무조의 음악을 만들어냅니다. 굉장히 그로테스크하고 들으면 짜증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루이쯔 브라우어라는 수학자는 배중률, 귀류법 같은 전통적인 수학에서 부인할 수없는 수학의 원리를 부인하고 수학이 논리적인 학문임을 거절하고 직관에 의한 학문이라고 주장을 한 것입니다. 처음에 이 논문이 나왔을 때는 지도교수가 이 논문을 바닥에 집어던지면 미친놈이라고 욕을 했지만 지금은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론이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프랑스 파리에 가면 빵뗑이라는 지역에 라빌레떼라는 공항이 있는데 길이가 7km쯤 되고 폭이 1km쯤 됩니다. 거기에 가면 35개의 철로 된 빨간 구조물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들이 서로 무슨 연관이 있는지를 살펴보지만 작가는 그것이 아무 연관 없이 그것을 만드는 것이 설치의 목표였습니다. 길이 있고 길을 따라가면 목적지가 안 나옵니다. 사람들이 물어보면 “왜 길이 너희를 목적지로 인도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편견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피터 싱어라는 미국의 교수는 동성애를 뛰어넘는 발언을 했습니다. “결혼은 사람끼리만 하는 게 아니라 소나 개와도 가능한 것이다”고 말입니다. 인간끼리 결혼한다는 것은 진화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도덕적 미몽의 상태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의 현대입니다.
이게 법학도 분명히 뒤흔들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인류는 법의 연원에 관한 이론에 있어서 자연법사상을 실행해왔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최소한 그로티우스라는 법학자가 있었던 때까지만 해도 이런 사상은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후 18세기, 19세기, 20세기를 지나면서 우리들이 다 알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변화가 인간의 사고 속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런 연원을 실존법적으로 가려는 경향들을 제가 보는 것입니다. 이번의 판결 같은 경우 말입니다. 그게 과연 궁극적인 법의 연원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따진다면 2차 대전 때 히틀러가 나치정권에서 공동체의 합의로 법을 만들어 내고, 당시 히틀러의 지지율이 93%였습니다. 베를린 올림픽 때 말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전체주의에 휩쓸리면서 엄청난 비극을 만들어낸 주인공이 되었고 소위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했던 일본의 처사들도 비극적인 결론을 내서 아직까지도 위안부 문제 같은 앙금들을 씻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속에서, 모든 사회를 생각하면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한 말씀을 생각해보시면 이 명령이 얼마나 장중하고 어마어마한 명령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바라보면서 제가 밤이나 낮이나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는 이제 진리와는 상관이 없는 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저 내가 살고 싶고 도달하고 싶은 행복한 상태가 있는데 그걸 예전에는 나 혼자 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지원사격을 받고 싶다는 겁니다.
이게 기독교의 현주소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약 30년 전에 한국 교회에 살아있던 메세지 중에서 오늘날 완벽하게 사라진 메세지가 있습니다. ‘Repent’, 회개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만해도 회개하라는 설교를 늘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인간이 모든 행복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옛날처럼 생각하시면 안 되고 그 생각을 바꾸셔서 우리한테 좀 배우셔서,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하나님 좀 아시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바꿔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착하고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국회도 가보고 몇몇 의원들과 대화를 나누어보고 생각하기를 ‘이런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있는 나라가 왜 이것밖에 안될까? 하긴 이런 분들이 살아계시니까 이만큼이라도 되었겠구나’ 어떤 의원 하나는 법원 하나를 두고 매일 철야기도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착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착한 사회의 영향이 있어, 장중한 사상이 있어서 박종홍씨가 사상에 대해서 사상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상이란 그것과 함께 숨 쉬고 그것과 함께 살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사상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위대한 힘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을 쓴 스토아 철학자였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아주 가혹한 황제였습니다. 그때에 ‘쌍투스’라는 집사가 있었습니다. 그를 잡아서 비참하게 고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넌 누구냐?” 라고 물으면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고문을 받으면서도 그는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했고 그 대답 이외에는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장중한 울림인 것입니다. “내가 기독교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 울림은 사상 없이는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사상에 합당한 삶, 윤리적인 삶입니다. 윤리는 이 세상에서 말하는 윤리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는 세상이 박수를 치면서 기독교인이 착하다고 칭찬을 해도 ‘우리는 관심없다.’고 해야 합니다. 우리의 윤리는 윤리를 추구하는 데에서 오는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더니 부속물로 나왔으니, 마치 온 마음을 다해서 도를 닦았더니 사리가 생긴 것이지 사리 만들려고 도를 닦은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보면 기독교의 위대한 힘이 사상, 두 번째는 윤리입니다. 이 두 가지가 제대로 이 세상에서 발휘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이 둘을 엮어주는 고리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은혜’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영역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강하게, 어떤 사람은 진리로 확신하게 하고 그 진리를 따라 살게 할 때에 그때 그리스도인 자신이 웅장한 존재의 울림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몇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제일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더 철저하게 자신의 지성을 헌신해야합니다. 불신자는 자신의 사상으로 이 세상을 허물어뜨리기 위해서 그렇게 헌신하는데 기독교인은 뭘 하고 있습니까? 철저한 지성의 헌신,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라고 할 때, 거기의 “뜻”이 ‘디아노이아’인데 ‘정신’입니다. 정신을 헌신하면서 공부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지성인들이니 열심히 공부하셔서 사상을 가진 지성인들이 되시라는 겁니다. 두 번째는 아주 뚜렷한 중생과 회심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철저히 깨닫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거듭나는 철저한 영적인 십자가의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필요한 것은 온 마음을 다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기독교의 진리를 자신의 모든 삶 속에 적용해서 살아내야 합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고백을 할 때 이미 예상한 희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심리적인 믿음이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구원이 참된 것이라면 반드시 삶이 따라옵니다. 그러면 삶이 그렇게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철저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입었으니까 그 보혈을 자신의 삶 갈피갈피에 바르면서 기독교인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열렬한 기도의 삶입니다. 오늘날은 이미 하나님에 대한 견해 자체가 이신론에 가깝게 변했기 때문에 인생에 있어서 자신의 삶을 한 순간한순간 자기를 붙드신다는 고백이 희미해져 갑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굳게 붙들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산 위에 있는 동네같이, 등경 위에 있는 등잔불 같이 이 세상에 드러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잘 사셔서 여러분이 계신 곳이 어디든지 거기가 존재의 울림을 들려주는 자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