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는 자 곁에 계신 하나님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섬김과 하나님을 잘 믿는 것 사이에 갈등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 하나님이 나를 여기 세우셔서 섬기도록 세우신 것이 놀라운 특권이었던 때가 있었지만, 어느 시점부터인가 그때와 같은 애틋한 사랑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 둘 사이에 균열이 있으면 하나님 사랑에 마음을 쏟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방해가 됩니다.
저는 회심 후, 31년 동안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왔는데 동일한 갈등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면서 일하면 일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설명을 본문에 기초해서 해결해 보고자 합니다. 섬김은 내적 사랑의 질과 외적인 삶이 양태가 일치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제다카(의)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이 단어는 제덱이라는 여성형 명사에서 파생했습니다. 제다카는 밖으로 드러난 양태이고 제덱은 내부의 본질입니다. 제덱이 있어야 제다카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제덱과 제다카가 일치하지 않으면 그것이 위선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우언한 것은 하나님과 영혼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본질을 보십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나도 거기에 있느니라’ 많이 섬기는데, 하나님이 안 계신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섬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보시이게 일할 뿐입니다.
그러니 다음 말을 꼭 명심하십시오. “사람이 일하면 그는 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랑하면 그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는 단순히 일할 뿐으로 천국에서 상급이 없습니다. 느는 일할 뿐이지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7잘에서 많이 일한 자들에게 나는 너를 모른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큰일을 섬기다가 주님을 크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을 섬기다가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동안 인간은 하나님의 종이지만, 아무리 대접을 못해도 일하는 중에는 “교회에 있는 근로자”일뿐입니다.
평신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의 종이지만 일하기만 하면 양심을 다래서 사적인 사랑으로 그것이 좋기 때문에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나도 거기에 있느니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따름이 없으면 섬기는 것이 아니고 노동을 했을 뿐입니다. 섬기는 것이 아니고 노동을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동안 내면의 사랑의 질과 섬김의 양상이 일치를 이루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자의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섬기는 사람과 함께 합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연합을 이루려는 마음으로 전심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놀이공원에서 엄마를 따르듯이 마음의 경향과 행동의 양상이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모님이 마음이 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97년쯤인가, 박순용 목사님이 외국에서 목회하실 때인데, 와서 집회를 해주고 부부가 함께 쉬다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녀오는 길에 딸이 마중을 나왔습니다. 사모가 반가워서 달려가 아이를 안으려니까 아니는 빙그르 돌아서 뒤에 있던 제 품에 와락 안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사모가 참 무안했답니다. 그게 따르는 경향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합일되지 않으면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따름에는 필연적으로 변화가 수반됩니다. 일의 작용은 영혼의 작용이 아닙니다. 일은 얼마든지 동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섬김은 영혼의 작용으로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섬김의 작용은 정신과 영혼의 작용이 더불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기려다 보니까, 섬김에 적합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나, 말씀의 은혜가 초호도 없이 일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불신자를 교회에서 일하게 해도 일할 수 있습니다. 일을 하면서 영혼이 망가질 수 있으나, 섬기면서 영혼은 세워져갑니다.
(찬양) 섬기면 섬기를 수록 더 귀한 주님
섬기면서 영혼이 망가진 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아주 오래 전부터 서서히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충성되이 섬긴 자의 보상이 영혼의 축복입니다.
저는 24살 총각시절 집사직분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영혼의 상태가 영 엉망이었습니다. 25살 때 깊은 변화가 있었고, 하도 가난한 교회라 주일학교 전도사님이 없어서 대신 전도사 사역을 했습니다. 회상하면 부끄럽지만, 처음에는 토요일에 술을 마시고도 주일날 설교를 했습니다. 그 교회의 주일 강단의 설교가 은혜도 없었고 어디서 채워주는 영혼의 양식 없이 5년간을 섬겼습니다. 교사들도 은혜가 없어 전도사님 말씀도 안듣고 온통 연애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사의 말을 들을 리가 있습니까? 교회를 다녀오는 길에는 시내가 흐르고 그 뒤에 산이 있는데, 산에 오르면 잔디밭이 있습니다. 거기서 많이 울었습니다. “주님, 변화가 없는 아이들, 전도사 말 안듣는 교사… 어떻게 해요?” 그 속에서 저는 목회의 본질을 터득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적마다, 아이들의 회심이 잦았습니다. 아이들이 부활절, 수련회, 여름성경학교에서 통절히 회개했습니다. 거기가 바로 나의 “광야의 신학교”였습니다. 한 선교사님께 두 아이가 있었는데, 둘 다 풍토병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답니다. 원주님들은 모두 신의 저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선교사님도 너무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워서 사역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가 지친 육신을 돌보기로 결심했는데, 자녀들의 유품도 정리하고 여행 짐도 꾸리는 데, 돌연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은 깨달음이 밀려왔습니다.
(찬양)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에 구속에 사랑
그 선교사님이 그 자리에게 팍 꼬꾸라져 그리스도에 대한 크나큰 사랑에 젖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장성해서 선교사가 되기를 바랐는데, 너희는 내 마음에 선교하고 죽었구나!” 도대체 신자에게 나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거기 계시다.” 이것이 신자의 최고의 행복입니다. 주님께서 돈, 명예, 주님 중에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우리는 주님을 고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목회는 신학교도, 연구실도 아니고 섬김의 광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섬기는 영혼에 변화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 위해 일을 접거나 늘리거나 하던지 굳이 상관이 없습니다. 일이 잘되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고, 일이 잘 안되면 계속 양심이 찔리는 영혼의 작용이 있지만 그만두면 급속도록 미끌어집니다.
한때 섬기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점심을 잡수실 때, “식사드세요 목사님” 하면 성도가 적게 나온 날은 “밥알에 모레알 같군요.”라고 대답하시고, 성도가 많이 나온 날은 “안 먹어도 배부르군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에게 무슨 나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좋은 일 뿐입니다.
목회가 사역이 잘 되면 하나님께서 아직 나를 쓰시는구나 하고 목회가 어려우면 하나님께 나아가 참회하게 되니 이것도 좋은 일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일하는 자에게는 나쁜 일 뿐입니다. 일이 잘 풀리면 교만해지고, 일이 잘 안되면 원망만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일할 것인지 택하십시오. 그래서 나는 섬기는 자로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 그게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연합되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제가 열린교회를 섬겼는데 나중에 주님께서 이렇게 평가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네가 열린교회에서 나를 섬겼구나”하는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섬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