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울림이 있는 그리스도인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녹취자 : 장주은
아마도 이 성경은 주후 54년에서 68년 네로 시대에 있었던 대 핍박의 시대에 기록된 듯하다고 봅니다. 특히 이 서신은 로마에서 쓴 것으로 이해되는데 이유는 5장에 바벨론에 있는 교회도 너희에게 문안 하니라, 고 했을 때 그 바벨론이 아마도 로마를 염두에 둔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박해를 받고 있는 실제로 이미 박해의 어두운 구름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한때 죽는 것이 두려워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실패의 경험을 딛고 일어선 믿음의 사람으로서 변절하지 말고 소망 중에 인내하면서 그리스도를 붙들도록 강력하게 권고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의 주제가 소망이라면 2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1장에 나오는 소망이 2장으로 연결되는 고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베드로 전서 2장 6절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리빙스턴, 산돌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모퉁이돌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모퉁이돌이라고 하는 것은 로마 시대로 들어가서 건축을 고려해 본다면 이쪽에서 벽이 이쪽으로 지어지고, 또 한쪽에서 벽이 지어집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이 두 벽이 만나야합니다. 그 두 벽을 만나도록 묶어주는 것이 바로 모퉁이 돌입니다. 피자 형태로 되어있는 모퉁이 돌 위에 한쪽 벽과 또 다른 벽이 얹어져서 그래서 두 벽이 하나의 건물을 지탱하는 완벽한 구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교회가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은 사고방식과 삶의 양태에 있어서 양립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는 모퉁이 돌 위에 얹어져서 하나의 건물인 교회를 떠받치는 아주 강고한 구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성경에서는 그 모퉁이 돌이 그저 둘을 붙들고 있는 모퉁이 돌이 아니라 ‘산 돌’ 이라고 표현함으로서 이 이방인 공동체와 유대인 공동체들이 함께 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만나서 그리스도를 연결점으로 세워질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영적인 연합으로 말미암아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된 곳이 바로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오늘 사회자가 봉독해주신 2장 9절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많은 내용을 가지고 있는 구절을 모두 설교하는 것은 오늘 저의 임무가 아닙니다. 맨 첫 번째 구절인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이것을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기 위해 여기에 서있습니다.
택하신 족속이라고 하는 이 표현은 희랍어로 ‘게노스 에클레크톤’이라는 단어입니다. ‘게노스’라고 하는 이 단어는 한 조상을 가진 후손 혹은 같은 문화를 공유하거나 한 왕의 통치 안에 있는 족속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바로 구약의 요셉 스토리에서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으로 가서 너희들이 누구냐고 문초를 당할 때 우리는 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같은 족속입니다, 라고 이야기 할 때 70인경에서 이 게노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사도 베드로가 쓰고 있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만이 아니라 그 당시에 있는 보편교회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라고 했습니다. 마치 사도가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족속들이 있지만 이 다양한 족속들이 섞여 사는 이 로마의 제국에서 너희들은 산돌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새로운 족속이 되었다, 라고 선언을 하시고 계신 것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의 심각한 위기를 말하고 너나할 것 없이 윤리적인 많은 허물어져 가는 상황들을 보면서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일 보도에서 터져 나오는 교회의 많은 사건들과 교회에 대한 질타들 앞에서 교회는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도덕적으로 많이 애를 써야 한다고 강조하고 노력을 합니다. 성과는 별로 그렇게 뛰어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은 지금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감히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을 위한 미담을 만드는 공동체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도덕적인 공동체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도덕과 세상에서 이야기 하는 도덕은 현저히 다릅니다. 세상에서의 도덕은 공동체의 이익이나 법, 기껏해야 사람의 양심 앞에 사람을 세운 도덕이지만 성경적인 도덕은 거룩함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이 교회를 향해 칭찬을 하고 또 세상이 교회의 도덕적인 상태에 대해서 주목을 한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교회는 그런 것에 대해서 초연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 이 모든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문제들의 핵심에는 항상 그리스도인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정체는 목사의 정체가 모호한 것만큼이나 모호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런 결과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어느 고등학생이 시골의 친척집에 놀러갔다가 절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다리가 아파서 툇마루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는데 저쪽에서 젊은 스님 한분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말없이 그 툇마루 옆에 같이 앉았습니다. “넌 누구냐?” “서울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1학년 학생인데요. 친척집에 놀러왔다가 이 절이 유명하다고 해서 구경 왔습니다.” 그리고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이냐? 너는 왜 사니?” 정확히 한 시간 반의 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학생은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출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 집안은 대대로 카톨릭을 믿는 집안이었습니다. 발칵 뒤집혔습니다. “무슨 소리냐?” 그리고 줄다리기를 하는 가운데 바로 그 때 일본에서 유학을 하던 사촌 형이 잠깐 머물고 있었답니다. 이분은 일본에 가서 일본 불교를 접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삼촌을 타일렀습니다. “이 아이가 다 커서 인간으로서 자각이 생긴 것인데 자기 인생을 살게 놓아주십시오.” 그리고 이 학생은 학교를 그만두고 절에 들어가서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70세가 넘어서 자신의 불교로의 회심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적어갔습니다. 그 때 자신의 옆에 와서 잠깐 앉아서 “너 왜 사니?” 하고 물었던 사람이 성철스님이었습니다. 제가 채플 시간에 왜 불교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한 7년 전에 저희 교회로 어느 잡지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을 우리 잡지에서 인터뷰하고 싶습니다. 언론에 얼굴 알려지는 것을 토할 것처럼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싫다고 말을 하려고 하다가 왜 기독교 잡지도 아닌데서 나를 취재하려고 합니까? 했더니 정치, 경제, 문화, 이렇게 돌아가다가 종교 순서가 되었고 종교도 카톨릭, 불교 돌아가다가 개신교 순서가 되었는데 목사님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반 정도 묻는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예수를 왜 믿어야 합니까?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리고 한 시간 반 정도 인터뷰를 끝냈습니다. 그 다음에 이 사람이 하는 얘기가 저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목사님, 왜요? 제가 불교도 인터뷰하고 카톨릭도 하고 개신교도 많이 인터뷰 했거든요? 그러데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가 않습니다. 그럼요? 스님 같으십니다. 그때 제가 충격을 받은 게, 여러분은 지금 웃지만 저는 온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이 불신자 젊은 기자인데, 스님은 철학자로 보이고 개신교 목사님은 비즈니스맨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불교 방송을 보면 늘 교리교육입니다. 언제 틀어도 깊이가 있습니다. 천주교 방송은 착합니다. 기독교 방송은 어지럽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은 누구였을까? 문헌을 좀 찾아봤습니다. 초대교회의 문헌 가운데 베드로의 설교라고 하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불신자들이 기독교인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인상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아닌 제 3의 족속이 출현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은 어떻게 구별이 되냐 하면 믿는 내용에 의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the way of living',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너무 달랐습니다. 그래서 누가 봐도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구별이 되었던 것입니다.
폴리갑의 순교라는 외경에 보면 또 그리스도인이 누군지에 대한 불신자의 증언이 나옵니다. 우리 시대에는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건한 족속들이 있다. 영웅전을 쓴 플루타크가 도덕론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 당시의 인상을 특히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런 묘사를 남겼습니다. “로마 법정의 신성한 판결의 피고가 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은 선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족속들입니다.” 유세비우스의 멜리토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이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정말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며 경건한 족속들입니다.” 이게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인상이었습니다.
원래의 초대교회 때부터 기독교의 전파 방식은 존재에 의한 선포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과정에서는 성령의 체험도 있고 복음의 선포도 있고 심지어는 기적을 체험하는 사건도 있었을 것입니다. 일단 회심하고 나서 그리스도 교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되고 나면 그 다음에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 자체가 불신자들과는 현저히 구별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살아있는 것 자체가 불신자들에게 존재의 울림이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고안해 낸 표현입니다. 존재의 울림입니다.
존재의 울림이라는 것은 이런 게 아닙니다. ‘아, 내가 이제 개척교회를 시작하는데 죽어도 안 되는데 저 사람은 몇 만 명이 모이는구나. 굉장하다. 그리고 가서 한번 얘기를 들어보니까 저분은 너무 열심히 살았어, 공부도 많이 했고. 저기에 비하면 나는 게임도 안 되는구나. 비참하다, 나도 열심히 해야지.’ 이것은 존재의 울림이 아니라 지위의 울림입니다. 자매를 예로 들어볼까요? 친구를 만났습니다.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정말 예뻐졌습니다. 갑자기 거울을 보니까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입니다. ‘신학만 하지 말고 미용도 해야지.’ 미모의 울림입니다.
존재의 울림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 앞에 섰을 때 한 인간으로서 내가 나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존재의 울림입니다. 그리고 진리에 합치하면서 사는 저 사람이 나보다 훨씬 행복하다, 라고 하는 울림을 자신에게 가져다주어서 자신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 존재의 울림이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10분밖에 안 남았습니다. 10분 후에 마치겠습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그런 존재의 울림이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성철스님만 그런 존재의 울림이 있었겠습니까? 기독교 역사에도 그런 인물 많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정말 좋아하던 작가 중 한사람이 앤드류 머레이였습니다. 그는 깊은 신학과 불같은 청교도의 열정을 공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157cm밖에 안 되는 조그마한 사람이었지만 영적으로는 거인이었습니다. 월트 발로우라는 사람이 그 사람과 만난 인상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아뵈었을 때 그분은 의자에 앉아 무릎에 두 손을 포개고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가자 기쁘게 맞아주었고 우리 모두 그분과 함께 자리에 앉았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하자 그분은 우리를 위해 기도했고 기도하는동안 우리는 하늘나라에 갔고 기도가 끝났을 때 우리는 다시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이런 것이 존재의 울림입니다. 그런 존재의 울림이 있는 목회를 해야 합니다. 미래에 20년 후에 선교 상황은 비관적일 정도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도 끝없이 거침없이 항해하는 교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 교회는 바로 존재의 울림을 들려주는 교회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런 존재의 울림이 있는 목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주 뚜렷한 중생과 회심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 외침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고 사실 교회의 미래를 매우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분명한 뚜렷한 중생과 회심의 초가 강단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영적인 변화를 받고 주님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우심을 발견하는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여러분이 영적으로 깊이 무장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에 단지 지혜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나타남으로 증거 할 수 있도록 여러분 자신이 영적으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서 목회 기술 배운다고 지금부터 가방 싸들고 다니고 공부 안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지금은 깊이 매달려서 하나님 앞에 연단을 받으면서 기도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함의 추구, 간절한 몸부림으로 자신이 온전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여러분이 발버둥을 치는 가운데 서서히 축적되어서 어느 한 순간에 그런 역량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깊은 사상을 교회가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사상이 없습니다. 기독교 진리에 대한 무지는 마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하고 나서 한 20년 정도 흐른 후에 시골교회를 돌아보면서 그 교인들을 가리켜 사랑스러운 돼지새끼들이라고 말했던 것과 아주 비슷한 상황입니다. 아무도 아는 것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의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자기만족적인 종교,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도움을 줄 것인가, 신학이 모두 배제되고 인간에게 만족과 삶의 편의를 제공하는 종교로 전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커다란 책임이 신학이 없는 설교를 강단에서 수없이 쏟아냈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기독교라고 하는 자체가 사상입니다. 이 사상을 가르쳐서 이 세계와 인간과 역사를 볼 수 있는 예전에는 없던 독특한 시각을 주어서 그 철학을 가지고 인생을 살게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하는 목회자 자신이 사상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사상은 여러분이 지금처럼 갈갈이 찢어진 신학의 분과 중에 하나를 들이판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하되 그것을 모두 통합해 낼 수 있는 무엇인가 자기 자신의 몸부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기본적으로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정신적인 전환이 필요하고 그것을 만약에 우리들이 영적인 회심이라고 말한다면 두 번째는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체계적인 지식이. 그래서 지금 여러분이 정말 치열한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상이 쌓입니다.
제가 3년 전에 여기에 와서 수련회를 인도했습니다. 돌아가서 작심을 하고 수련회 내용을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3년을 썼습니다. 그래서 빠르면 12월에 1500페이지짜리 책이 나옵니다.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했다’ 그 책을 쓰면서 많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러분이 너무 불쌍합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여러분이 정말 치열하게 공부하고 우주가 무엇이고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여러분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15살 되던 나이에 주일에 교회를 가던 길이었습니다. 가다가 너무 견딜 수 없이 슬픈 마음에 논둑에 엎드러졌습니다. 2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거기서 온종일 통곡하며 몸부림치면서 울었습니다.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모태신앙은 아니었지만. 그 날이 제가 교회를 끊은 날이었습니다. 돈이 없고 가난하고 이래서가 아니라 도대체 나는 어디서부터 왔는가, 이 세계는 무엇인가, 나는 오늘 왜 살아야 하는가, 제일 무서운 것은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너무 무서운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사람으로 사는 것. 열다섯 밖에 안 된 아이가 길거리를 지나면서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너무 부러웠고 기어 다니는 벌레와 담장 옆에 피어난 꽃들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자살까지도 결심을 했는데 이렇게 삶에 언저리 벼랑 끝에서 몸부림치게 고민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는 한 개도 답을 해준 적이 없었습니다. 물어보지 않았겠습니까?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내가 결국 내린 결론은 이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것은 인생을 잘 사는 것하고는 별로 관계가 없다. 그리고 나서 교회를 보니 온갖 거짓말, 부패, 쓰레기 같은 것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6년 동안 철저한 무신론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제가 교회 다니는 사람 여러 명 교회 안다니게 만들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제 동생입니다. 나중에 회개하고 다시 인도해서 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만.
그러한 것들을 깊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학생같이 그러고 와있는 학생들에게 한 번의 설교로 그런 장중한 빛을 던져주어서 인생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할 수 있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사상을 설교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이 치열하게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올 때 마다 얘기하지 않습니까,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 안하는 사람하고 놀지도 마, 밥 먹어도 공부하는 사람들하고 밥 먹어. 나쁜 사람. 치열하게 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신대원 다닐 동안에 의사가 생명의 위협에 대해서 진지하게 경고할 정도까지는 와야 합니다. 최소한 5년에서 7년의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여기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열렬한 기도생활입니다. 가슴을 찢는 치열한 기도생활 속에서 그 사상이 자신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흘러야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그 모든 깨달은 진리를 자신의 삶의 모든 방면에 적용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서 다음 세대에 우리의 자손들이 어느 교회에 가든지 존재의 울림이 있는 복음의 외침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