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영적부흥 6
적은 능력으로 충성함(계3:8)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오늘 이 시간에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 충성하는 교회를 우리가 한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사실 우리 열린 교회라는 말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주신 그런 교회가 이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서 판단하시기 전에 먼저 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서 넘치는 축복을 우리 주님이 주십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라고 그러셨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온 세상과 그 다음에 천국을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권세를 의미합니다. 그런 권세를 가지신 분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서 열린 문을 두었는데 누구도 이문을 닫을 사람이 없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열린 문을 가지고 이제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하나님의 그 수많은 은혜와 사랑, 넘치는 축복, 이런 것들로 충만해져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많은 축복 가운데 가장 커다란 축복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향해서 문을 여시는 것입니다. 전도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문을 여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수많은 간증을 남기면서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혜가 필요한 사람에게 하늘을 여시면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하늘을 열고 그 빛으로 비추어주시면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만들어주시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하면서도 느끼는 게 내가 하나님을 만난 성경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쉽게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그 뜻을 한번 보여주시는 비추심이 있는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은 쉽지만 전혀 그런 경험이 없는 가운데 설교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고 또 언젠가 닫힐지도 모르는 그런 불안한 상태의 교회 문이 아니라 열려있어서 닫으면 열자가 없고 열면 닫을 자가 없는 이라고 예수님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런 내가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내가 열린 문을 두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놓으신 것을 닫을 사람이 없고 닫은 것을 열 사람이 없는 그런 문을 주님이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스스로 더 이상 열어놓는 것이 싫으셔서 닫아버리는 일들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서 하늘의 한없는 축복을 받을, 또 받는, 또 받고 있고 앞으로도 받을 그런 교회였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모든 것을 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많은 것이 쌓여있습니다. 하늘에 뭐가 있을까요? 땅에는 없지만 하늘에는 뭐가 있습니까? 빨리 말하십시오. 좋은 것은 다 생각납니다. 백화점에 뭐가 있는 것처럼 하늘에 뭐가 있습니까? 평안도 있고, 기쁨도 있고, 그 다음에 위로도 있고, 능력도 있고 다 있습니다. 그래서 여셨습니다. 열면 어떻게 됩니까? 확 쏟아져 내립니다. 부요한 하늘에 속한 것들이 한없이 쏟아지는 장면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에게 평안을 주려고 마음을 가지시고 평안을 확 쏟아부어주시면 인간의 염려와 근심은 모두 사라집니다. 믿습니까? 인간이 평안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지만 평안을 못 얻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담배를 못 끊는 사람들 있습니다. 이 중에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습니다. 왜 그러나 그랬더니 마음에 평안이 없다고 문밖에서,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아무도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을 주님이 주시겠다고 두드리는데 문 걸어 놓고 그 안에서 담배를 피는 것입니다. 그게 평안을 준다고 합니다. 얼마나 평안하겠습니까? 7센티의 평안, 7분의 평안, 다 피는데 7분이 걸립니다. 해본 사람은 압니다. 그것도 다 하고 나면 다시 또 불을 지펴야 되는 평안입니다. 세상에 그런 평안이 있습니까? 그런데 하늘을 여시면 그 하늘로부터 평안이 막 쏟아집니다. 근심과 염려로 가득차서 이제 도저히 어떻게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는데,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막 기쁨이 밀려옵니다. 그러면 기쁨이 확 충만하게 넘치니까 나머지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치유의 능력도 주시고 또 말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말의 놀라운 은사도 부어주십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과의 원만한 관계가 되지 못했을 때 벌어도, 벌어도 지겹게 가난하게 살던 사람이 예수를 잘 믿으면 잘 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나는 그런 것 같습니다. 왜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 성경은 그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술도 먹으면 안 됩니다. 술을 안 먹으니까 싸울 일도, 얻어맞을 일도, 때릴 일도, 음주운전할 일도 없고 벌금 물리도 없고, 사고 날 일도 없고, 담배도 안 피고, 나쁜 짓 안 하니까 돈을 쓸 일도 없고 하는데 일은 부지런히 열심히 합니다. 그러니까 점점 부요하게 됩니다. 그게 축복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건강의 즐거운 마음으로 절제된 생활을 하니까 건강도 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막 부어주십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맛본 열린 하늘을 통해서 쏟아지는 이런 놀라운 축복들은 지금 이야기한 것은 아주 작은 것들이고 정말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들을 하늘로부터 계속 쏟아져 공급을 받는 이런 놀라운 은혜를 빌라델비아 교회가 한없이 받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 교회는 정말 대단한 교회였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얼마나 하나님 앞에 훌륭하게 살았으면 이렇게 하늘이 열려지고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열어놓은 문 누구도 닫을 수 없다. 누군가가 만약에 닫으려고 시도를 하려면 내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말하자면 이런 약속의 보증까지도 받을 정도로 그렇게 주님 앞에 인정받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었을까.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었을까?
몇 해 전에 본문을 보면서 커다랗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이 교회는 대단한 교회였는지 알았는데 그런데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의 성품 하나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라고 말할 때 이 행위는 사실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마음, 그리고 그들의 삶을 움직이고 있는 모든 행동의 핵심부에 총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라고 말할 때 우리 하나가 배우게 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그리고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 서있고 우리 개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든지 간에 우리의 마음, 우리의 행동,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머리이신 그분의 눈앞에는 벌거벗은 것처럼 모두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하나님에게는 전혀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에는 인정을 받는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인정을 못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를 모두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그리고 우리가 지금 어떤 죄 가운데 놓여있고 그리고 그런 죄 가운데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분을 감당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얼마큼 사랑하고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영혼들을 섬기고 살아가고 있는지, 살아가려고 하는지 그 모든 것들이 주님에게는 벌거벗은 것처럼 모두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 진실한 신앙은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그 시선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신앙은 어떤 곳에든지 하나님의 그 시선을 느끼는데 대신에 사람의 시선을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외식하는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그러니까 외식의 지름길은 사람의 시선을 깊이 의식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신앙은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시선을 깊이 의식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보디발의 아내의 집에 일보러 들어갔던 요셉이 동침하자고 하는 그 아내의 유혹을 장면은 바로 요셉이 얼마나 진실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여기 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요셉은 내가 범죄함으로 어찌 하나님 앞에 득죄하리요. 그는 거기도 하나님의 시선이 미치는 것을 깊이 의식했습니다. 하나님은 강단을 바라보실 뿐만 아니라 본당을 바라보시고 유아실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TV앞에 서있는 제 1교육관의 사람들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당연한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불충성하는 삶을 살게 되는 첫 번째 발걸음이 무엇인가 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시선을 자기의 온 삶 속에 따갑게 느끼지 못할 때 그것이 바로 불충성하기 시작하는 첫걸음입니다. 불충성하는 사람, 충성하도록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충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신앙의 세계 속에는 하나님의 시선을 어디서든지 의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마구 행동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장 거룩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하는 기도 시간에 ‘내가 이런 폼으로 기도하면 사람들에게 경건하게 보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람은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합니다. 내가 집에 있을 때나, 홀로 산책할 때나, 직장에 있을 때나, 혹은 술집에 있을 때나, 단란주점에 있을 때나, 실로암 단란주점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거룩하다고 해서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열린 노래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그 간판에다가 주일은 정상영업을 한다고 써 붙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는 이게 바로 진실한 신앙입니다. 이것은 깨어있는 정도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서 본격적인 평가를 내리시기에 앞서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상기시키십니다. 그런데 이런 “내가 네 행위를 아느니” 라는 말씀은 거의 모든 교회에서 말씀하면서 계속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다 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고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내가 안다. 라고 하는 이 말씀이 커다란 위로의 말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안다. 그때 정말 마음에 주님 밖에는 사랑하는 분이 없어서 주님이 좋고 그리고 주님의 집이 사랑스럽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나의 소명이 너무나 귀해서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자신의 인생 속에서 주님만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은 내가 네 행위를 안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넘치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가끔 지체들과 면담을 하거나 그럴 때 만나면 그냥 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한마디 하면 더 웁니다. 그래. 다 안다. 알긴 뭘 알아. 그런데 그 안다는 말의 구체적인 사연은 모르지만 그 마음이 어떤지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다 안다. 눈물이 주르륵 흐릅니다. 만약에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고 주님이 진정으로 유일한 소망이 되시는 것처럼 하나님에게만 마음을 드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님이 내가 너를 다 안다고 말씀하실 때 넘치는 위로와 사랑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 불충성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가 네 행위를 다 안다. 이렇게 말했을 때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뭔가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내가 다 안다. 이렇게 말하면 두렵습니다.
미국에 어떤 사회심리학자가 24명의 저명인사에게 지급전보를 쳤습니다. 선생님 모든 것이 탄로 났습니다. 빨리 피하십시오. 밑에다가 선생님을 지극히 존경하는 한 시민 올림, 그랬습니다. 24명 중에 24시간 안에 9명이 출국했습니다. 뭐가 들통 났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누군가가 다 안다 그러면 겁이 덜컹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보를 보는 순간에 아! 누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해먹은 거 다 알고 있구나. 나쁜 짓 한 거 다 알고 있구나. 우선 이 사람의 충고대로 도망가고 보자. 9명이 출국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얼마나 자기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사십니까? 주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어떤 마음으로 사랑하는지 그리고 또 작년보다 올해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떠한지 영혼을 돌봐도 정말 그 섬김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섬기고 있는지 아니면 마지못해 섬기고 있는지, 건성으로 교회에 나오고 있는지, 이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여기에서 나를 만나주신 것처럼 또한 많은 불행한 영혼들에게 하나님께서 만남을 허락해주시는 복된 장소가 되도록 하나님 자신으로 교회를 지어주시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교회를 채우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지를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일을 하고 사업을 해도 밥벌어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면서 하는지 하나님은 그 마음에 있는 중심, 그 모든 것을 이해하십니다. 어두운 밤 지하 2층 다방에서 작성한 비밀계약서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아무도 못 보게 두 번, 세 번 싸가지고 선물 속에 집어넣어 갖다 준 촌지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얼마가 들었는지도 아시고 수표인지 현금인지도 아십니다. 사람들이 못 보게 단 둘이 귓속말로 속삭이면서 불법을 행한 일들도 하나님은 모두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내 인생을 모두 정말 내 마음을 맑은 유리창으로 끼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은 아십니다. 내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나님밖에는 사랑하는 대상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십니다. 내가 내게 맡겨진 영혼들을 비록 잘 섬기지 못하지만 얼마나 사랑하고 어찌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직분과 부르심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 하는지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 내 마음에 유리창을 끼어주시옵소서.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들만이 바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 라고 하는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성품을 인정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교회는 그러니까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는 너의 행위를 다 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 행위가 어떤 행위였는가 하면 말씀을 지키고 두 번째는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말씀을 지켰다고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잠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것 같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커다란 손실을 입는 것 같은데, 제가 아는 어느 분이 보석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별로 없을 때는 몰랐는데 한참 은혜를 받고 보니까 신앙생활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은혜받기 전까지는 신앙생활은 장난입니다. 농담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나면 정말 정신 차리고 똑바로 안 하면 큰일 나는구나.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주시는 설교말씀이 주일을 지켜라, 그런데 여러분, 보석상은 어느 주일날 장사가 제일 잘될까요? 그렇습니다. 주일은 정상영업을 해야지 돈을 법니다. 그런데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데 일주일 전체적으로 팔리는 매상에 50%이상이 주일날 팔린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그만둘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고민을 하다가 믿음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그 다음에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갔는데 진짜 쪼들리기에 자기는 그렇게 주일날 가게 문을 닫으면 하나님이 토요일 날 두 배로 팔리게 해주실 것이라고,
원래 성경적입니다. 만나를 그렇게 내려주셨습니다. 안식일은 만나를 거두게 못 갔는데 그 전날 두 배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아! 정말 이렇게 성경적으로 이루어지면’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른 날은 똑같이 팔리고 토요일 날만 안 팔리더랍니다. 거덜 나게 생겼습니다. 그래도 유혹을 뿌리치고 꾸준히 주일을 지켰습니다. 날 잡아 잡수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그냥 주일은 안 되는 날이다. 마음을 갖고 열심히 주일을 지켰습니다. 1년 지난 다음에 합계를 내보니까 세상에 놀랍게 흑자가 났습니다. 그러면 좋겠지요? 그게 아니라 결과를 내보니까 역시 가게 문을 열지 않은 것만큼 손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게 돈 통, 집돈 통 모두 집어넣고 총계를 내보니까 작년보다 부합니다. 이상하다. 왜 그럴까? 작년에는 주일날 열심히 벌어서 병원에다 헌납을 열심히 한 것입니다. 큰아들 입원해서 잔뜩 갖다 바치더니 그 다음에는 부인이 뺑소니 교통사고가 나서 줄줄이 돈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출혈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갚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대게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감동을 별로 안 받습니다. 감동은 월요일 날 세배 팔렸습니다. 그러면 할렐루야! 그러는데 토요일 날 단체로 와서 사갔습니다. 그러면 할렐루야! 그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데는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일을 안 지키던 사람이 주일을 지켜야겠다고 마음을 가지려면 그러면 거기에는 희생이 따르고 인내가 필요합니다. 유혹을 이기고 그리고 인내해야 합니다. 뭔가 계속되는 죄로부터 벗어나려고 여러분들이 힘쓰면 거기에서 강한 두려움과 유혹이 옵니다. 그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 거기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 교회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사명은 교회를 크게 만들려고 부흥시키려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작게 만들거나 축소하는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데만 맛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 붙어있다고 그래서 모두 살이 아닙니다. 여기 종기가 나서 고름이 나고 시뻘겋게 핏물이 흐르는데 그것도 살입니까? 누가 종기난 사람을 만지면서 여기 특정한 부위에 살이 붙었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살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것입니다. 진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아갈 때 하나님의 백성의 맛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맛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니 적당히 세상에 섞여서 핍박을 피하고 세상에서는 꿀이 되고 다시 주님의 교회에 와서는 소금이 되고 싶어 하는 이런 사람들은 그 삶의 중심을 뒤집어보면 결핍이 무엇인가 하면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충성을 맹세하는 일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내가 너희와 만날 그때까지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 하신 그 편지를 뜨겁게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점에 있어서 주님의 인정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보실 때 우리의 인격의 특징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인격의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 우리가 다른 면에서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점에서는 뛰어난 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다른 사람이 모두 지키지 않아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이 지킬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꾸 현실적으로 볼 때 현실은 실제에 있어서는 이런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치고 정말 하나님 앞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별로 못 봤습니다. 원칙을 다 이야기를 하면 아멘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 글쎄 현실적으로 볼 때는 실제에 있어서 보면 살아보면 그렇게 사족을 다는 삶이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삶일 수 없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놀라운 합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야 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가치다. 이것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대중적인 합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 교회가 전체적으로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행하는 바가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바에 대함, 유일한 판단이 하나님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행위를 옳고 그르고 내가 기뻐하고 슬퍼한다고 하는 재는 하나님의 그 잣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향해 충성심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일군은 무엇보다도 한 교회에 충성하거나 한 목회자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길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경외심 어린 태도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의심할 여지가 없이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반대로 말하면 너희가 만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결코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리라. 뒤집어서 너희가 계명을 지키면 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너희가 내 계명을 어기면 나를 멸시하는 것이라. 주님을 향한 사랑은 단지 찬양하거나 노래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 남 녀 간의 사랑은 사랑한다고 하면 걱정 마. 네 인생 내가 책임질게. 그리고 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없지만 예수 믿기 전의 일입니다. 걱정 마. 네 인생 내가 책임져, 내가 질 거야.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자, 그것입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데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한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용납하고 참고 그 결합을 풀지 않고 함께 살아가려고 하는 그 모든 삶을 위해서는 피나는 분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지난번에 결혼세미나를 하기 위해서 청년들을 모아놓고 그랬습니다. 독신도 하나님이 주신 삶의 방법이고 결혼도 하나님이 주신 삶의 방법인데 둘 중의 하나만이 삶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독신으로 사는 것도 괜찮다. 그런데 독신의 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러면 결혼해야지 되겠네, 결혼도 비용이 많이 듭니다. 물건 해가는 것이야 빚내서 한번 해가면서 갚으면 되지만 살아가는데 있어서 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러면 독신도 다시 가야지 되겠네. 거기도 비용이 많이 듭니다. 어느 비용이 많이 들까? 그것은 자기 주머니를 계산해 봐야 되고 내가 어느 쪽에 지불할 비용이 많을지 생각을 해보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독신의 소명이 있다고 생각해서 독신으로 살아가더라도 좀 제때 못가서 독신 산다고 그러지 말고 난 소명이 있다. 이렇게 살아가야지 됩니다. 아니 농담이 아니고 정말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나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아니하고 내 젊음과 내 인생을 모두 불태워서 좋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전심으로 지키며 인내하고 시련을 겪으며 내가 홀로 살아가노라면 적어도 나의 소명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받는 것을 보면서 좌절하지는 않겠는가. 그러면서 당당하게 나는 여기에 부르심이 있다고 걸어가는 것은 독신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혼자서 섬기는 것보다 둘이 합동으로 섬기는 것이 더 좋습니다. 우리 함께 손에 손 잡고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경배하고 한사람의 목숨이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서 두 사람의 목숨까지 모두 주님을 위해서 타오르게 한다면 한 동강의 촛불보다 두 개의 색락이 붙어서 타오르면 더 밝은 빛을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소명을 느끼면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결혼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어째든 분명한 사실 하나는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다고 하는 것은 그런 어떤 삶에서 치러야 할 희생과 그리고 이런 깊은 대가없이 단지 사랑하고 사랑을 느끼고 눈물짓는 것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센티멘털리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감성주의와 사랑은 구별되는 것입니다.
저는 책을 쓰니까 광고가 나오면 열심히 살핍니다. 왜냐하면 그런 광고를 나도 좀 써먹을 수 없을까 그래서 봅니다. 그런데 몇 번 눈여겨본 광고가 있었습니다. 카피를 목사인 내가 읽으면서도 가슴이 찡합니다. 그런데 ‘이 광고의 카피를 보고 사람들이 깜박 죽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혼자 눈뜨는 아침”이라는 소설인데 읽어보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히 성경을 읽을 시간도 넉넉하지 않은데 언제 그것을 읽겠습니까. 그런데 그 카피가 아주 사람 마음에 들었습니다. 카피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혼자 눈뜨는 아침을, 뭘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자기 남편은 바다를 보고 싶다면 미친년, 그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내가 바다를 보고 싶다고 그러면 순식간에 나를 바다에 데려다준다고 합니다. 나는 18실 날 딸애의 운동화를 빨면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며 살아온 것인가. 밥상을 차리면서 먹기 좋은 반찬을 아이들 앞에 밀어 넣으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내 인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이제 이렇게 살지 않기로 했다.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외우지 못했는데 아주 진한 카피를 써내려갔습니다. 아주 사람의 급소를 찌르는 그런 카피였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자녀들 뒷바라지하고 남편 밥해주는 사람이 보면 허탈해지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런 게 무엇인가? 내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데 하여튼 순식간에 바다로 데려다준다는 사람, 그 사람이 자기 집에 가서는 자기 부인이 바다를 보여 달라고 그러면 꼴값 한다.’고 할 사람입니다. 그게 사랑인가. 그게 센티멘털리즘입니다.
사랑은 깊은 삶의 헌신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람들과의 사랑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정신을 주님이 아주 놀랍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다가오는 우리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감상주의적인 사랑인지 이게 정말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가지고 삶을 동반하면서 당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그런 사랑인지 주께서는 아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 너무 많이 봤습니다. 자신이 찬양을 하거나 기도하면서 이따금 울컥울컥 눈물을 흘리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감동받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의 전 존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러면 무엇인가? 거기에 대한 답을 여기서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라.”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랑은 센티멘털리즘의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결국은 주님이 이 교회를 대면하실 때 빌라델비아 교회 하면 첫 번째 떠오르는 인상이 있었는데 그 인상은 어떤 교회, 내 말에 충성을 다한 교회, 내 말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교회, 내 진리를 파수하고 지켜나가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기꺼이 잃어버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교회, 주님이 바라보셨던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은 이런 식의 사랑입니까? 아니면 센티멘털리즘의 사랑입니까? 삶이 하나님 앞에 짙은 사랑으로 고백으로 동반되지 않는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들은 말에 잔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삶, 그런 삶이 가능하게 하는 능력,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빌라델비아 교회를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교회를 본받아서 주님 앞에 열린 문을 소유하는 축복받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까? 이런 인정을 받기까지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버리고 걸어갈 수 있는 편안 길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충성심을 가지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날을 눈물로 보내었을까요? 얼마나 많은 날을 남들이 웃고 떠들 때 고난을 받으면서 남들이 이 세상에서 환영을 받을 때 멸시를 받으면서 살아갔겠습니까. 우리가 그런 교회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할렐루야!
두 번째는, 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교회였다. 배신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소극적인 반대의 뜻을 말씀하심으로 적극적인 정반대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다는 이야기는 주님이 정해놓으신 어떤 선을 넘은 적이 없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이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충성을 다한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의 목표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이 교회의 목표는 하나님의 이름을 빛내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이름을 내고 인간의 명예를 높이고 교회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이 교회의 목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데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충성을 다한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충성이 있습니까? 말씀을 지키는 충성, 그 위에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충성이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의 현재의 상태를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부분을 인해 마음을 아파하시고 어떤 부분을 인해서 교회의 교회됨이 손상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이런 것들을 고치고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새로워짐으로 교회를 통해 아버지의 이름이 높이 여김을 받아야 되겠다는 열망이 교회 안에 없으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충성을 다한 교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충성심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섬깁니까? 왜 충성해야지 됩니까? 왜 우리가 가진 달란트를 가지고 그냥 놔두었다가 주님 오실 때 가져가십시오. 내던지지 못하고 왜 그것을 가지고 남기려고 애를 써야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 중에서 어떤 것도 남김없이 다 주님을 위해서 쓰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뭔가 하나님을 섬기고 여러분들을 섬기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 시간에도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 목마르게 우리들이 아버지 앞에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 앞에 모욕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새로워지지 아니하면 그 불결한 교회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를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좀 더 경건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리고 좀 더 이 세상이 도덕적인 세상이 되기를 원하는 그런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날 세상이 돌아가는 것들을 보십시오. 미쳤습니다. 젊은이 청바지 광고를 하는데 10대밖에 안 되는 여자애가 담배를 피워 물고 가랑이를 다 벌리고 낙태수술을 하는 장면이 청바지 선전으로 나옵니다. 부탄가스가 뒹구는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주저앉아있는 환각상태의 그런 사람들의 그림들이 공공연하게 이 세상의 문화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현실을 보면서 아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한 영혼이라도 더 보내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교회는 사랑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주님의 명령입니다. 만약에 채우지 않는 것은 범죄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는 길 외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복음을 듣고 새로워져서 변화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열망은 교회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영혼들을 통해서, 그런 변화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우리의 충성이 이런 열망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 안 하시지요? 우리 교회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데리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오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심각한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책을 읽고 온 사람들,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 우리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 부흥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바꾸어주시기를 기도하는 우리의 기도가 정말 하나님 앞에 진실한 기도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와야 합니다. 이 좁은 공간이 터지도록 메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그렇게 고쳐야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그 일을 게을리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가 무의도식 하는 사람들이 신앙에 안주하기 위해서 자기 위로와 연민에 빠지는 교회가 될 바에야 간판을 내리는 것이 아버지의 나라에 기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안일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불순종하는 삶 한가운데는 반드시 이런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교회가 마땅히 가져야 할 그런 것들이 없는 것입니다. 변화 받지 못하는 영혼들을 향해서 눈물을 흘리고 아파하지 않는 것도 모욕 받는 하나님의 이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을 던질 것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이렇게 주님을 향해서 그 이름을 향한 충성심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우리도 이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장면이 마지막으로 하나 나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습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배반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굉장히 능력 있는 교회가 되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네가 뭘 가지고? 큰 능력으로 이 일을 했다고 말하지 않고 뭐라고?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말씀하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사실은 능력으로 소문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충성으로 소문난 교회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적은 능력이 있었을 뿐입니다. 어쩌면 아마 이 교회는 에베소 교회가 한때 소유했던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구별하여 낸 것, 그런 정도의 영적인 깊은 능력을 소유하지 못했던 교회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은 적은 능력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지키고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위해서 크게 충성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제가 본문을 보면서 부딪쳤던 이유는 그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적은 능력이면 적게 충성했을 것이고 큰 능력이면 크게 충성했을 것이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고,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이니까 거짓말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자기에게 하나님이 주신 능력에 다소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문제를 삼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신들이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서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할지를 안사람들이었습니다. 마귀의 머리를 깨트리고 귀신을 단번에 족칠 수 있는 능력은 없었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그 능력에 범위 안에서 자신들은 최대한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많은 능력을 부어주시는가 하면 이런 사람들에게는 안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부어주신 능력이 지극히 적다는 생각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 또 하나님이 능력을 부어주시지 않기 때문에 내가 이런 식으로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밖에 없다고 하나님을 향하여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사람, 자신의 사역에 열매가 없는 것이 하나님이 능력을 안 주셨기 때문에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하는 후환 무치한 태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능력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달란트를 왜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다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지 그것은 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인의 절대적인 주권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종은 하나를 하찮게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인의 성품을 오해하고 땅 속에 묻어두었다가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두 종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은 두 달란트를 맡은 자기 동료를 보면서 아! 너는 아무 것도 아니고 나는 대단한 사람이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또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은 왜 나는 저 사람의 40%밖에 안 주었을까?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왜 충성할 시간밖에는 그런 것 생각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주님이 적은 능력을 주셨을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수고하고 애쓰면서 열매를 맺지 못했을 때 이것이 적게 부어주신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옳게 보시겠습니까? 오히려 주님이 부어주신 능력이 적다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섬기다가 마지막에는 종의 무익함과 종의 나태함과 게으름이 이렇게 열매 없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하나님 앞에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더 큰 커다란 능력과 무엇인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의 섬김이 부어져야 할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서 이미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 그 건강, 그 물질, 그 기회, 그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충성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이 능력을 주시지 않은 하나님 때문에 뭔가 되는 게 없다는 식의 그런 버릇없는 말투는 당장 집어치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못쓰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사실 능력이 모자라는지 남는지는 다 써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힘을 다해서 사용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역기를 한다고 칩시다. 킬로그램을 정해났습니다. 올릴 수 있을지 못 올릴 수 있을지는 뭘 보면 알 수 있습니까? 들어봐야 압니다. 젖 먹은 힘까지 모두 발휘해서 들으면 드는 것이고 못 들면 못 드는 것입니다. 난 소위 부흥에 대해서 심취하고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비 복음적이고 반성경적인 사고방식들, 이런 것들이 그들의 삶을 아주 깊이 좀먹어가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자기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기억합니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애쓰고 수고한 모든 사람들, 그는 격려하고 그는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온 마음과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두 힘쓰고 애쓰면서도 한구석에 하나님이 부어주심이 필요하다는 고백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에 ‘가가와도요이코’ 라고 하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쓴 유명한 책이 ‘사선을 넘어서’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읽으신 분이 아마 있을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김진홍 목사님하고 비슷한 부분이 있는데 그분보다 훨씬 더 깊이 들어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깊이 들어갔다고 하는 것은 아주 창녀촌, 그 다음에 사회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사각지대 속으로 아주 깊이 들어가셔서 그렇게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애쓰셨습니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변화가 일어납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죄 가운데 쪄 들어서 살던 그런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할렐루야 하고 그렇게 신앙생활로 들어오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무모한 일이 아닌가.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충고도 하고 비난도 했습니다. 그때 가가와도요이코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이들 속으로 들어가서 이들을 붙들고 사랑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 거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입니다. 그 인간을 진정으로 복음의 빛으로 변화시켜서 새사람을 만드시는 것은 가가와도요이코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내가 그를 새사람 만들 능력은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놀라운 능력을 기억하면서 내가 그 영혼, 그 환락가로 내려가서 그 영혼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릴 일은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라는 것입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더 놀라운 변화를 기대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수중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시지 않은 능력을 활용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우리를 비난하실 분이 아닙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 그렇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에게 내려가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사랑하는 것밖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만 변화되지 않는 그들을 붙들고 그 자리로 내려가서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는 것은 이미 자기에게 주신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모종의 변화를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모두 이런 자세로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고 영혼들을 섬겨야 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나는 여러분들에게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능력을 적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무 것도 행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신의 삶, 열매 없이 황무지와 같이 되어가고 있는 자신의 섬김의 모든 현장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 부흥할 때는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장애를 받을 때는 모두 자기의 문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한국 최초로 신구약의 주석을 거의 완간하신 돌아가신 고 박윤선 목사님이 출간하신 기념회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당시로서는 굉장한 업적입니다. 어째든 그 주석은 많은 사람들에게 빛이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좋은 책이 많이 나오지만 그 당시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때 그분의 인사가 아주 인상 깊습니다. 여러분, 이 주석을 읽어나가시다가 은혜롭고 잘된 부분이 나올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읽어가다가 은혜롭지 않거나 잘못 해석된 부분도 나올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책임이 없습니다. 모두 이 종이 게으르고 그 다음에 천학 비재하여 저지른 실수이니 나를 비난하십시오. 이게 바로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은혜가 없습니까?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시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능력이 없습니까? 더 큰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능력이 없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재능이 없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이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보면서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몸부림치면서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애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능력이 적다는 이유 때문에 배반하는 삶을 스스로 선택하거나 배반한 삶을 합리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받은 은혜를 크게 생각하고 자신에게 주신 능력이 어떠하든지 자신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의무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고 충성하며 산 것입니다.
엊그제 어떤 책을 읽다가 보니까 19세기 사람으로 제가 기억하는데 미국에 설교자입니다. ‘포스딕’이라고 하는 설교자가 설교가 무엇인가 그랬습니다.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란 설교자의 피로 듣는 회중을 적시는 것이 설교자라. 섬김이란 무엇입니까? 섬김이란 우리의 섬김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은 놀라운 사랑 때문에 우리의 피로 섬김을 받아야 할 영혼과 교회를 적셔나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섬김입니다. 영혼을 변화시키는 일은 우리 수준에 없습니다. 우리 중에는 누구도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의 키를 한자나 더 크게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영혼을 우리가 변화 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되지 못하는 영혼을 안타까이 여기며 그들의 이름을 부여잡고 변화되지 않은 그들의 영혼의 재앙이 나의 재앙인 것처럼 생각하며 뒹굴며 눈물을 흘릴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힘이 소진되었을 때 당신의 능력을 보이시는 적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자기의 기도하는 자리를 핏방울처럼 떨어지는 땀으로 모두 적시시고 힘을 다하여 기도하신 후에 힘이 다하매 천사가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도왔습니다. 모세가 팔을 높이 들고 기도할 때 노령이 도저히 이 팔을 지탱할 수가 없을 때 아론과 홀을 보내어서 그 팔을 붙들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주권을 가지고 탓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그것을 통해서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싶어 하는 이 마음이 충성된 마음이요, 이 일을 위해서 자신을 바치면서 사는 삶이 바로 충성된 삶인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이런 삶을 택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 문을 여셨습니다. 적은 능력을 한탄하며 죽게 되었다고 주저앉아서 하나님을 원망하였으면 계속 닫아놓으셨을 그 하늘을 적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이름을 배반치 아니한 이 교회를 위해 열어놓으셨습니다.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지만 결국은 열린 하늘의 문을 가진 교회로서 일곱 교회 중에 그 어느 교회보다 뛰어난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정복한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메시지 속에서 오늘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어떻게 충성되게 살아야할지를 배워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