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자를 부르심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5)
녹취자: 조경훈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나타나셨을 때의 일을 적고 있습니다. 장소는 갈릴리 바닷가였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지만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예수님의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아직 몰랐습니다. 그들은 할 일 없이 있다가 옛날의 직업인 고기잡이 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배 오른편에다가 그물을 던져 보거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거다.”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에 데자뷰(기시감)로 다가왔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 일어난 고기 잡는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제일 먼저 알아보고 “아. 우리 예수님이시다” 외치고 물길을 헤치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배에서 내려 기쁜 마음으로 육지로 올라왔으나 예수님을 뵈옵자 그들은 옛날에 실패했던 경험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경상도 말로 뻘쭘하게 예수님 앞에 서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혹시 너희에게 잡은 고기가 좀 있느냐고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오늘 말씀 15절에 나오는 이 사건은 네 가지로 요약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II. 아침을 차리시는 예수님
첫째는 아침을 차리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육지에 올라왔을 때 예수님은 이미 숯불을 피워서 고기와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을 위해 이것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문맥에서 식탁을 차린다는 것은 가족을 위해 베푸는 봉사를 의미합니다. 식탁을 나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가족끼리 식탁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성경이 보여주는 첫 번째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열 두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예수님이 고난당할 때 예수님을 배신하고 버렸습니다. 마지막 요한이라는 제자가 십자가 아래로 돌아오기는 했었지만 모두 한결같이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당신을 부인하고 버렸던 제자들을 예수님은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마치 엄마가 자식들을 위해 아침을 차리는 것처럼 어디서 준비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정성스럽게 피운 숯불과 그 위에 신선하게 구워지는 생선이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고기 잡느라고 지친 제자들의 코 끗에 맛있게 빚은 떡은 향기로운 식탁의 냄새로 다가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인생을 한번 실패했을 때 우리는 그 실패가 가슴 속 깊이 박히고 수많은 음성을 듣습니다. ‘네 인생은 끝났다.’ 사람들도 손가락질을 합니다. ‘저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야.’ 양심이 소리칩니다. ‘너는 이런 죄를 지었잖아.’
그런데 주님은 당신을 배반하기 전부터 열 두 명의 제자들이 한결같이 당신을 버리실 것을 이미 아셨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엄마가 집을 멀리 떠나고 돌아오는 아이들을 위해서 아침을 준비하는 것처럼 그들을 위해서 식탁을 차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잘 살 때나 못살 때나,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당신의 가족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이 식탁을 차리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어떤 힘든 일을 만나고 어떤 시련과 고난이 닥쳐와도 한 가지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인생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신앙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랑이시며 이 세상의 어떠한 일을 만나도 그 사랑에서 나는 끊어질 수 없고, 어떠한 경우에도 나쁜 일을 내게 행하실 수 없는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누구이시겠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 아무 희망이 없어서 누구에게도 기댈 곳이 없는 낙심으로 가득 찬 그때 우리는 조용히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엄마입니다. ‘엄마! 엄마! 나 어떡해?’ 그때 부르는 엄마라는 그 이름은 내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보잘 것 없게 되었든지 실패했든지 무한한 사랑으로 새끼인 나를 품어주는 그 가족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 사랑을 꼭 붙들면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님
두 번째는 이름을 부르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아침을 함께 먹었습니다. 아마 재잘거리고 떠들면서 먹는 아침이 아니라 침묵이 흘렀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반한 것들에 대한 깊은 부끄러움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먹는 아침식사 자리가 불편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없으셨습니다. ‘숯불에 떡을 맛있게 구워서 먹어라. 너도 먹어. 왜 좀 더 먹으라니까.’ 아마 싱싱한 생선을 굽고 가시를 발라 주시면서 그들 앞에 놓아주셨을 것입니다. 먹어라. 먹어라. 먹어라.
제자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무엇인가 해결할 것을 못한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식사를 했을 것입니다. 식사가 모두 끝난 후 예수님은 열 한 명의 제자들 가운데서 유독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베드로 한 사람 때문에 그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에게 말을 거신 것입니다. 그리고 눈길을 끄는 것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사실 그 이름은 예수님이 버리기를 원하셨던 이름이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이제 너의 이름을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하지 말고 베드로라고 하라시며 반석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랍게도 당신이 버리게 한 이름으로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만약에 예수님이 “큰 반석 같은 믿음의 베드로야.” 라고 불렀다면 베드로는 얼굴을 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얘야. 너의 본래 모습은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아니라 요한의 아들이었단다.’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당시에 요한이나 시몬같은 이름들은 돌을 던지면 맞을 확률이 매우 높은 우리나라의 김, 이, 박 같이 흔한 이름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찬양) 이 모습 이대로 날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
우리는 종종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잘 준비를 하고 잘 살고 주님 앞에 떳떳하게 나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원하십니다. 그 주님 앞에 나아가 ‘이것이 나의 모습이고 부끄럽지만 저의 현실입니다. 주님 이 모습이 내 모습이고 이 모습은 제가 되고 싶은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나를 받아주시고 나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라는 기도를 주님은 더 기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허위와 거짓 꾸며낸 것,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받고 갈채를 받을 것 같은 장한 모습을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위선과 거짓을 물리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내가 엄마 앞에 가도 엄마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어린아이처럼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어떠한 경우에도 나를 부인하시지 않는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있는 모습그대로 가도 언제든지 주님이 나를 용납해 주실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 주님께 나아가서 그분을 의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V. 질문을 던지시는 예수님
세 번째는 질문을 던지신 예수님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시면서 위대한 사도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요한의 집안에 시몬으로 태어났어도 주님이 사랑하셨던 것처럼 제자들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일평생 잊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만일 이 질문이 ‘Do you love me?’라는 현재가 아니라 ‘Did you love me?’라는 과거형이었다면 베드로는 감히 얼굴을 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했어? 그럼 왜 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니? 왜 너는 저주하기까지 나를 부인했니?’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옛날 일을 잊어버리신 것처럼 ‘Do you love me?’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전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그렇게 많이 입었지만 예수님보다 자신의 목숨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웠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기까지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깨달았고, 그렇게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여전히 자식처럼 받아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맞아. 내가 예전에는 실패했고 잘못했으나 지금은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어. 예.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행복은 사랑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거꾸로 인생이 불행해지는 모든 이유도 사랑 때문에 옵니다. 올바른 것을 올바르게 사랑할 때 올바른 사랑을 받을 때 행복하지만 올바르지 않은 것을 올바르지 않은 방식으로 사랑하고 그릇되게 사랑을 받을 때 인간은 깊은 수렁에 빠지듯이 불행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저는 스물 여섯 살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때는 오직 주님을 사랑하고 내게 맡겨준 사명을 감당해야 된다는 그 압박감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신학대학교에 다녔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새벽 네 시 반에 기상하고 밤 12시에서 1시에 취침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6년 동안 아이가 없었고 7년 만에 아이가 태어나고 12년 만에 딸이 태어났습니다. 그때는 너무나 바빠서 공부하고 사역하는 것에 몰두하느라 아이들하고 많이 놀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딸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너무 너무 예쁜 것입니다. 지금 그 딸은 스물 여섯이 되었고 직장을 다니고 있습니다. 세 살 네 살 때 아빠 목을 꼭 끌어 앉고 아빠 사랑해라고 말하고, 침대에 아빠하고 같이 자면서 엄마가 올라오면 발길로 차면서 여긴 아빠하고 내가 자는 데니까 엄마는 바닥에 자라고 하고 목을 꼭 껴안고 나는 아빠랑 결혼할거야 라고 말하는데 너무 귀여웠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중학교 가고, 고등학교 가고, 대학교 가고, 직장을 가고 하니까 딸의 관심사가 이제는 아빠가 아니고 다른 것으로 이동합니다. 스물 여섯 살이 됐는데 그래도 매일 리얼 포옹을 하는 부녀는 흔치 않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마음 한구석이 늘 외롭습니다. 얘가 나를 필요로 할 때는 내가 인색해서 시간을 안 내주고, 내가 저를 너무 예뻐하고 사랑할 때는 얘의 마음이 아빠에게서 멀어지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들이 결혼을 하고 손녀를 낳았습니다. 손녀가 너무 너무 귀여운 것입니다. 매일 매일 이 아이를 보는데 연애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새벽기도 나오면 밤까지 집에 안 들어갑니다. 그런데 얘가 태어나고 부터는 점심때쯤 되면 너무 너무 보고 싶어서 직원들에게 나 애인 보고 온다고 하고 집에 갑니다. 가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할아버지에게 뽀뽀하고 사랑하고 좋아합니다. 외국에 출장을 가도 다른 사람 선물은 생각도 안 나고 손녀 생각만 납니다. 선물을 사가지고 오면 얘가 예뻐합니다. 그러다가 미국서 공부하던 아빠가 돌아와서 약 한달 동안 같이 살면서 가족이라는 개념이 이 아이 속에 딱 생겨납니다. ‘이렇게 딱 네 명이 우리 가족이구나.’ 그렇게 되니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제 안중에 없습니다. 그러더니 그 후에는 손주가 태어나서 또 손주가 나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랑이 손주에게 갔습니다. 그런데 두 달 동안 외갓집에 갔다 오더니 할아버지 얼굴을 잊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오라고 하면 비실비실 울어버립니다.
그러면서 딸에게 빠졌던 사랑이 딸이 떠나니까 손녀에게로, 손녀가 떠나니까 손주에게, 그리고 손주마저 떠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우고 있습니다. 2017년 6월 1일생 말티즈 인데 얘는 벨소리만 나면 저에게 달려와서 저를 반가워합니다. 아내 하는 말이 “여보 딸하고 손녀는 당신을 배신했지만 우리 강아지 코코는 배신하지 않을 거야.”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하니까 마음이 싸늘합니다. “아. 이렇게 사랑은 흘러가고 저가 사랑을 했을 때는 내가 그 마음을 모르고 내가 사랑할 때는 저들이 가는구나. 그러고 마지막에 코코야 너 하나 남았구나.” 그날 저녁 산책을 하면서 아주 중요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인간은 결코 사랑 받음으로써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 엄마는 여러분을 너무 많이 사랑합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만한 나이 대에 인생에 부딪히는 수많은 괴로움과 시련, 이런 고민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고 느꼈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은 훨씬 후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사랑해 주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불행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많은 기대는 실망으로 다가오게 되고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 실망과 원망 나아가서는 미움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을 받음으로 인간은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그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오히려 누군가 단 한 사람 만이라고 뜨겁게 사랑하는 그 사람이 오히려 그 사랑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우유를 받아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건강하다는 영국 속담이 있습니다. 진정한 인생의 힘은 사랑을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있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문제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이 내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답이 바로 기독교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떠나도 내가 이 세상에서 아무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해도 나는 충분하다.
(찬양) 이 세상에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날 사랑하는 이는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나는 여전히 우리 주님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 분의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존재이고 내 이름 석자는 우리 주님의 마음에 눈물이 되었다라는 그 마음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직 그런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좀 더 인생을 살아야 오래 살고 부모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부모가 되어서 알게 되면 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우리 엄마 할 때의 그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눈물이 가득 고이고 내가 어떠한 실패를 경험하고 이 세상에서 내동댕이쳐져도 엄마는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줄 것이라고 하는 마음에 그리움이 있습니다. 그런 눈물 나는 그리움을 우리가 몰랐던 시절에 우리 엄마는 우리를 향해 언제나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엄마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려 사신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의 이름 석자가 그분의 마음에 그리움이 되었고 눈물이 되었습니다. 그 사랑을 생각하며 그분께 그런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려도 그분께 사랑을 받고 있는 한 나는 외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 그 믿음이 가져다주는 사랑 때문에 눈에 눈물을 씻고 자기 주변을 돌아보며 자기보다 훨씬 상처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눈물을 씻길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마음에 품고 그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온 인류가 주는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을 주님께로부터 받고 있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엄마에게 그랬듯이 어떤 사람은 그 사랑을 알고 어떤 사람은 모릅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모든 선한 삶은 한 가지 질문에 매달립니다. Do you love me? Jesus said. 나는 그리스도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게 깊이 주님을 만나고 예수님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V. 사명을 맡기시는 예수님
마지막 네 번째 사명을 맡기심입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베드로가 고백하자 예수님은 오직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목양의 사명이었고 베드로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목자직을 맡기신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요한복은 20장을 천천히 읽어보면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복음서의 마지막 마무리가 훌륭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요한복음 21장이 복음서 전체의 부록이라고 부릅니다. 무슨 부록일까요? 어떤 목적과 의도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빼면 안 될 것 같아서 본래의 내용은 아니지만 집어넣은 것을 부록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런 부록이 필요했을까요? 만약 요한복음 20장으로 끝나면 거기까지 비친 베드로의 모습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가고 예수님을 저주하기 까지 부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음 장을 넘기면 사도행전 1장 에서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최고의 지도자로 등장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을 원합니다. 열두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가룟 유다는 제일 나쁜 놈이어서 예수를 팔아먹다가 배 터져 죽었고, 나머지 제자들 10명은 찌질한 겁쟁이라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끌려가실 때 다 도망갔고, 한 제자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면서 신앙의 정절을 지켰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를 예루살렘 최고의 지도자로 삼고 모든 사도들이 그 밑에 졸병이 되는 꿈을 꿉니다. 그런데 성경의 스토리가 그렇게 돌아갔더라면 우리가 예수님을 숭배했을까요? 베드로를 숭배했을까요? 베드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21장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외 없이 실패한 자들, 예외 없이 바닥까지 떨어졌던 사람들, 예외 없이 아무 희망이 없이 죄를 지었고 배신의 길을 갔던 사람들인데 그 중에 우두머리였던 사람을 주님이 다시 회복시키셔서 불러 주십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위대한 사역을 하는 것을 보면서도 베드로를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용서하셔서 다시 사명을 맡기신 하나님을 항상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 나이였을 때 단 하루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죽음을 사모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만큼 사람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자지러질 듯이 무서운 것이 두려운 것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사람이라는 것, 두 번째는 사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 도대체 그 두려움에 근원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니 그것은 하나였습니다. 내가 내 삶에 주체가 되는 것에 대한 무서움이었습니다. 그 주체라는 것이 자기가 왜 사는지에 대한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신의 삶에 주체성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번에 망고식스에서 맨손으로 엄청난 기업을 일으켰던 젊은 사장이 결국 빈 집에서 홀로 자살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그것이 허무에서 죽지 않습니까? 라고 여러분들은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좀 다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스스로 이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아이돌 가수가 되고 싶다.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모든 남자들에게 선망 받는 여자가 되고 싶다든지, 남자가 되어서 돈을 많이 벌어서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2세같이 되고 싶다든지 그런 것 들은 자기가 만들어 낸 욕망을 투사한 인생의 목표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그렇게 데려갑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의 경우는 먼저 너 뭐 할래 물은 것이 아닙니다. 아침을 차려 주시고 가족처럼 대해주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있는 모습 그대로 그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니? 신앙고백을 받으신 후에 주님이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분의 나를 향한 사랑을 깨닫고 내가 그 분께 사랑을 고백하면서 그분이 내가 인생을 무엇 하며 살기 원하는지 그 꿈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쯤 큰 길이 정해져 있어야 됩니다. 내가 일생을 교사로서 살겠다 든지, 무엇을 하겠다든지, 아니면 그것과 상관없이 이러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가겠다든지 그 꿈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수많은 양떼를 베드로의 손에 맡기심으로 그 꿈을 주셨습니다.
VI. 결론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꿈은 무엇입니까? 내가 아니면 이룰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나의 고유한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봐야합니다. 선배들이 이런 가치에 대해서 어떻게 치열하게 고민하며 몸부림 쳤는지를 공부하는 것은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 찬 나날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도 그랬고 예수님이 부활하고 났는데도 아직 예수님과 정식으로 용서받고 회복되는 경험을 못했을 때에도 여전히 그랬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했고 주님이 그에게 새로운 꿈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 교회의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 중에 가장 빛나는 필체로 쓴 탁월한 문학적인 서신이 두 개가 있는데 베드로 전서와 후서입니다. 가장 유려한 문장으로 되어있습니다. 베드로는 큰 핍박을 앞두고 요동하고 있는 교인들에게 그 편지를 씁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굳게 붙들어라. 배반하지 말아라. 그리고 기꺼이 고난을 당해라 라고 말합니다. 옛날에 자신이 경험했던 실패의 경험이 승화되어 나타나는 용기입니다.
제가 삼십년 전에 여러분 같은 고등부 학생들의 전도사였습니다. 그때 사랑하는 어린 지체들과 이 찬송을 부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찬양) 새벽닭 울 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텐데.
많은 인생의 날들 가운데 우리 인생에서 목적 없이 살아온 날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오늘 주님을 만나고 사랑을 고백하고 나니까 주님은 베드로에게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지 사명을 던져주셨습니다. 이 사명을 붙들고 베드로는 일생을 달려갈 푯대를 얻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처럼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왜 나를 여기에 창조하셔서 여기에 살게 하셨는지를 되새기십시오. 일생동안 일평생 따라가며 살아도 후회하지 않을 그 가치를 향해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침을 차려주시는 예수님, 이름을 불러주시는 예수님, 질문을 던지시는 예수님, 사명을 만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