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의 소명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요 1:6-7)
녹취자: 김경애
그렇지만 저는 공부를 나름대로 하면서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플라톤을 공부하면서는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게 많이 깨우침을 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을 공부하면서는 기독교인인 것이 자랑스러웠다면 루터와 칼빈을 읽으면서는 내가 로마 가톨릭 교인이 아니고 개신교신자인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에 17세기 대륙의 개혁파정통주의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쪽의 자료들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분들을 공부하면서는 내가 개신교인 중에서도 특별히 개혁파인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이 읽은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이름이 요한이라고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가 온 이유는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자기를 인하여 사람들로 믿게 하려고 한 석절밖에 되지 않는 구절이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세계의 역사라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이 주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 주권을 행사하시는 방식이 사람을 사용해서 주권을 발휘하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역사는 그 성경에 등장하고 역사에 나오는 인물들을 줄로 이으면 그것이 곧 구속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목회자가 누구인가? 여기서 목회자는 오늘날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목회자와 신학자가 아주 날카롭게 구분되어서 신학을 가르칠 수 없는 사람이 목회를 하고 목회를 절대로 못할 사람이 신학공부를 하는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구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 혹은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를 우리들이 생각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대충 이야기를 해보면 구약성경에서 보면 실질적으로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의 시작을 아브라함부터 보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후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이루어가시면서 민족이 결성되면서 거기에서 모세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아마 구약에서 가장 높은 두 개의 산맥이 있다면 모세라는 산과 그리고 또 하나는 다윗이라는 인물의 산일 것입니다. 어쨌든 모세가 등장합니다. 카리스마에 있어서는 그와 못하지만 여호수아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사무엘도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아마 구약에서 가장 높은 거봉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모세는 율법자였지만 그러나 다윗은 사실은 모세의 율법의 시대에 살면서도 이 사람은 삼천년 전에 우리가 누릴 복음을 상당부분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위대한 사상가요 철학자로서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과 구속의 사랑을 노래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역사의 산맥이라는 것이 올랐다가 계속 가는 것이 아니라 떨어집니다. 올라갔다 떨어졌다 올라갔다 하면서 이제 계속 하강합니다. 그러다가 꽤 높은 봉우리 하나가 나타나는데 이사야 선지자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남아있는 것이 성경밖에 없으니까 성경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자라고 불릴 수 있는 이 사람은 대단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같은 인물들도 등장합니다. 그리고는 구약의 끝자락으로 내려오면서 12선지자 시대의 끝에 말라기가 출현하면서 정경선지자의 시대가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서 신약시대가 열리는데 성령이 강령하고 이때부터는 갑자기 산맥이 치솟으면서 아주 높은 봉우리들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과 신약으로 이어지는 이 많은 봉우리들 중의 하나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 역사적인 인물들의 산맥위에 높이 떠 있는 태양과 같은 분이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할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의 시대가 열리면서 아주 높은 봉우리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중에서 다른 봉우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탁월하게 높은 봉우리가 신약을 대표해서 세워지게 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어거스틴이 회심하고 난 후에 자기의 신학과 사상에 전범으로 삼았던 인물이 구약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였고 신약에서는 바울이었고 그래서 그가 회심하기 직전에 폰티치아누스라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자기가 신약에 있어서 바울에 서가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그 유명한 톨레에게 ‘들어라, 읽어라’ 라는 아이들의 동요소리를 듣다가 영감을 받아서 펼쳐서 읽은 성경도 바울의 서신이었습니다. 로마서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면서 이제 그분이 서구사상의 위대한 수문을 연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도들의 시대가 지납니다.
그리고 교회의 시대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모두 죽거나 순교하고 난후에 속사도교부들의 시대가 열리게 되고 사도 시대처럼 높은 봉우리는 아니지만 수많은 인물들이 산맥을 형성하면서 기독교의 역사를 이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초대교회의 교부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오리게네스, 이레네우스, 테르툴리아누스 이런 사람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완성된 기독교 신학을 가지고 이 사람들의 신학을 내다보면 오리겐은 이 사람이 플라톤의 추종자인지 예수의 제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신학이 플라톤주의로 물들어있습니다. 이레네우스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이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아테나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외쳤지만 그러나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신학에서 쓰는 위격, 스브스딴띠아, 트리니티, 트리니타스 이런 단어들을 약 120개나 만든 인물이었습니다. 실제로 테르툴리아누스의 작품은 대단히 철학적입니다. 본인이 그 철학을 거부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도 철학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왔던 것입니다. 위대한 사상가였습니다. 몬타누스주의자로 최후를 마치기는 했지만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괄목할만한 사람이 동방교부들 중에 황금의 입이라고 불리는 요한 크리소스톰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때가 4세기에서 5세기였습니다.
그 후에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다시는 없을 사도시대 이후에 없을 그런 위대한 사상가가 등장합니다. 아마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도 이후 시대에 최고의 기독교사상가였습니다. 아마 누구도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를 넘어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시간과 영원에 대한 철학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한 관념 그리고 우리바치오보니 라고 불리는 악의 기원에 대한 기독교적인 설명, 선과 악에 대한 것, 이런 것들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특별히 일반 서구철학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비판하는 방법도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서 배운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무시할 수 없는 위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학공부를 하시면서도 특별히 이분의 책 가운데 제가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Confession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이분의 고백론을 100독 이상 했습니다. 지금은 조금 off 되어 있는데 한참 많이 읽을 때는 고백론 전체를 거의 외웠습니다. 무슨 책을 그렇게까지 읽을 필요가 있느냐 성경도 100번을 읽지 못했는데 그것을 어떻게 100번을 읽느냐고 하는데 정말 위대한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끝이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을 쓸 때의 나이가 46세였습니다. 감독이었을 때였는데 그것을 쓴 이유는 아주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너무 존경하기 때문에 자기는 그런 인간이 아니고 쓰레기 같은 놈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 썼는데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더 많이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교만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살아오면서 책을 읽으면서 거의 대부분의 저자들이 저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 번도 누군가 쓴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정말 천재라고 생각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존경하던 존 오웬 목사님이나 조나단 에드워즈나 심지어 칼빈을 읽으면서도 탁월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했지 천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딱 한사람이 저에게 그런 고백을 받아냈습니다.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의 두 권의 책인데 Confession이라는 책과 두 번째 De Vera Religione, ‘참된 종교에 관하여’라는 책인데 두 권을 읽으면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 정말 천재구나!’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아 하나님 누구는 이렇게 천재로 만드시고 누구는 읽어서 겨우겨우 이해하는 사람으로 만드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응답도 있었습니다. ‘너는 그 사람과 종류가 다르다.’ 위대한 인물도 저작을 다 읽으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입니다. 대부분 한글로 번역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로도 번역이 다 되지 않았습니다. 라틴어로 읽는 것인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니까 영어로 좋은 번역이 전집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한 250권 정도의 책을 썼습니다. 읽으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릅니다. 다 읽지는 못했는데 중요한 작품은 거의 다 읽었습니다. 신학공부나 목회를 하면서 성경 이외에 잠시 지적활동을 멈추고 한 1,2년 정도 몰입해볼만한 가치가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그 시간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분의 책을 서울대학교에 있는 어느 학생에게 들었는데 불신자인 교수님이 기독교인인 제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나는 절대 기독교인은 아닌데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 하나는 그 책을 다 읽으면서 무릎을 쳤다. 아, 철학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내가 기독교를 믿을 수는 없지만 철학은 이렇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정말 대단한 작품입니다. 그런 작품을 청소년 권장도서에 있는데 청소년은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오히려 자유의지론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자유의지론은 고백론보다 쉬웠습니다. 이 사람 이야기를 하면 끝이 없습니다. 어쨌든 그랬습니다.
그리고는 어거스틴 사후에 두세기 정도 흐른 후에 사실상 동방교회에 마지막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다메섹의 요한 또는 다마스쿠스의 요한이라는 인물이 등장입니다. 7세기부터 8세기의 사람입니다. 크리소스톰의 별명은 황금의 입이었는데 다메섹 요한의 별명은 황금의 청산유수였습니다. The Golden Street. 이분이 쓴 책을 몇 권 읽었는데 정말 대단합니다. 읽으면서 여러분들이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세상의 위대한 철학들을 전부다 신학 안에서 녹여내서 신학이 그 모든 것들을 말해주도록 그렇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역사시간에 배우는 11세기와 12세기를 살았던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를 신비주의자 정도로 배웠는데 이분은 아주 탁월한 대학자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12세기에 있었던 로마가톨릭교회의 소위 이야기하는 내부적 갱신운동에 헌신되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에게서 우리들이 유산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칼빈에 의해서 우리에게 많이 소개되었던 유니온 쿰 그리스토의 교리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와 같은 것들은 아주 신비합니다. 그런 것들이 학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에게서 받은 영향이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유비를 풍부하게 펼친 아가서에서의 원리가 되는 이런 것들에 대한 기본적인 골격을 이 끌레르보의 베르나르가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학자는 아니었지만 프란체스코 베르나르도네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아시스의 프란시스의 본명입니다. 그러면서 그 시기에 유명한 페트루스 롬바르도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이런 대단한 신학자들이 나타납니다. 13세기에 이르러서는 높이에 있어서는 어거스틴에는 절대로 미치지 못하지만 그러나 산의 크기에 있어서는 결코 어거스틴 보다 작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런 위대한 사상가 한사람이 나타납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이 사람은 가톨릭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개혁파정통주의자들 심지어 영국의 청교도주의자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사실 너무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16세기말부터 1725년이니까 18세기 초까지 보면 종교개혁가들 가운데 토미스트들이 아주 많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주의자들이 많습니다. 그의 신학을 다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신학의 방법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신비적인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요한 타울러 같은 인물이 지나가고 그 다음에 14세기의 존 위클리프, 체코의 개혁가는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가는 존 후스, 그다음에 마르틴 루터 이런 인물들이 나오고 당시대에 산봉우리가 다시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츠빙글리, 멜란히톤, 하인리히 블링거, 볼프강 루스푸루스, 안드레아스 휘페리우스, 피터마터 버미글리, 파렐 이런 인물들이 루터와 함께 같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높이에 있어서는 루터와 비교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역시 영향력과 크기에 있어서는 루터보다 절대로 못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요한 칼빈이라는 인물입니다. 그 후에 개혁파정통주의 시대의 16세기말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데오도로 배자, 퍼킨스, 케커만, 휘치우스, 튜레틴 이런 아주 쟁쟁한 천재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존 오웬도 바로 17세기에 나타나게 됩니다. 리처드 백스터 같은 사람도 나타나게 되고 이런 사람들이 이제 상층부에 있는 위대한 신학자들로서 지성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면 쉬운 설교로서 평민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 같은 사람입니다. 이후에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란시스 튜레틴이라는 인물이 나타납니다. 아주 탁월한 변증서를 쓰는데 데올로기아의 디카에 라는 변증신학학이라는 책을 씁니다. 역사 속에 세권의 중요한 조직신학 책이 있는데 레이드 4인방이 쓴 순수 신학공간이라는 책과 이 변증신학학이라는 책과 그리고 17세기의 화란의 신학자가 쓴 이론실천신학이라는 마스트리히트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이러면서 18세기로 넘어오면서 존 웨슬레나 휘필드 같은 탁월한 신학자들이 나타납니다.
이때 벌써 이미 세상은 엄청나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왜 변하게 되느냐하면 영국에서는 인류 최초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리고 17세기에 파고 들어왔던 데카르트주의가 만개하기 시작하면서 세계의 사상이 이신론, 이런 것들이 계속 전개되면서 이 세계가 하나님이 과학의 법칙들이 발견되면서 사실상 하나님은 법칙들만 만들어놓으시고 당신은 인간세계에 간섭하지 않으신다는 섭리를 철수시킨 신학들이 등장하는데 데이즘이라고 합니다. 이러면서 사실은 계몽주의와 인본주의적인 관점들이 유럽을 뒤덮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도 역시 마찬가지로 사상에 젖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1703년부터 1758까지 살았던 정말 위대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제가 평생에 전착했던 인물로 여러분도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시면 제 생각에는 아마 아우구스티누스나 존 오웬을 공부하는 것보다는 현대의 목회와 사상이 훨씬 더 폭넓은 적응성을 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쓴 책이 지금 예일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책이 700페이지짜리 책이 28권정도 나왔으니까 약 18,000페이지 정도 됩니다. 저도 7년 동안 그 책을 거의 다 읽었는데 그래도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있겠지만 거의 다 읽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책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도 여러분들이 한 몇 년 읽으면서 몰두한다면 이 책 저책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기독교의 사상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19세기와 20세기에 와서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칼빈주의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고 올드 프린스턴에서 활동했던 벤자민 워필드, 헤르만 바빙크라는 신학자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 개혁주의나 복음주의의 주류는 아니지만 그러나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의 칼 바르트라는 인물들이 나타납니다. 어째든 이러한 모든 세계의 역사의 중심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이고 구원의 역사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써내려간 위대한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서두에 드리느냐하면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유장하게 흘러가는 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그 수많은 기독교적인 인물의 역사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물론 우리 중에 모든 사람이 위에 언급한 성경과 기독교 역사의 한 4000년을 어우르는 동안의 역사를 이야기했는데 그중에 언급된 수십 명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될 가능성은 비교적 없을 것입니다.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면서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그들과 나는 어떻게 다르고 어떤 점에서 같은가?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시대는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 어떻게 다른가? 한번밖에 없는 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소설가 최인훈 씨가 광장이라는 책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루하루 살자. 펜촉을 잉크에 찍듯이 하루하루를 내 피를 찍어 진하게 진하게 써가자.’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더욱 그래야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내가 역사를 움직이는 그런 위대한 인물 중에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다가 인생을 살아야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눈물이 납니다. 왜냐하면 어쩜 그렇게 젊은 시절이 금방 지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39살에 열린 교회를 개척을 했는데 21년이 되었습니다. 내 나이가 60입니다. 이제 10년 남았습니다. 박수칠 때 가야지 끝까지 가면 누가 좋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따지고 보면 레임덕이 오고 어쩌고저쩌고 준비하고 그러면 끝난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제 끝났구나! 하지만 여태까지는 공부하는 쪽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려고 애를 썼지만 요즘에는 생각하면 균형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써야할 책이 30,000쪽인데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균형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면 너무 책을 써야겠다는 부담감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책을 막 쓰다가 그만둔 책들이 많은데 이것이 잘못되면 영원한 미완성이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삼위일체도 제가 550페이지를 써놨습니다. 그것도 2년을 썼습니다. 마무리를 해야겠다. 그러다가 갑자기 죽으면 죽도 밥도 안 되니까 빨리 마무리를 해야겠습니다. 제가 30대 때에 여기 전영우 목사님도 만나고 홍 목사님도 학교에서 만나고 그랬는데 30대 중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25년, 30년 가까운 세월이 순간에 지나간 것입니다. 그러면 내 이론은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더욱 생각 없이 살면 안 되고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이 위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보면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그것을 생각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내가 여기서 목회자라는 것은 늘 귀담아 들으실 때 신학을 할 수 없는 그런 목회자가 아니고 여러분도 목회자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누가 저에게 목회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간단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세상 사람들을 설득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겠다는 사람을 계속 사랑하게끔 돕는 사람이 목회자라고 말입니다. 저의 이런 생각은 어디서 왔느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속에서 전도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전도란 무엇입니까? ‘전도란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전도이다.’ 그러면 이제 처음부터 이 신학이라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살기위해서 하는 공부가 바로 신학공부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초대교회부터 쭉 내려온 전통이 무엇이냐 하면 신학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학문의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패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라는 17세기의 개혁가가 이렇게 신학을 정의했습니다. ‘독트리나 에스트 디벤디 데오 베르 크리스툼.’ ‘신학이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의 정의입니다. 이 정의를 그대로 이어 받아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신학이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정의합니다. ‘신학이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다.’ 신학의 삼위일체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회의 소명 다시 말하면 목회의 소명, 신학의 소명이라는 것은 성도로서의 소명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로서의 소명이 확장된 것입니다.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은 기독교인이 누구인가가 아주 혼란스러운 문제가 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누구인가? 지금 구라파에서는 이미 기독교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형식은 살아있지만 이미 대대적인 내용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같아서는 무엇인가 하긴 해야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고는 것은 이미 아주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포기한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사실은 중생과 회심에 대한 설교가 사라지는 이유이기도 하고 전도가 사라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문화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곧 기독교 전도의 사명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바로 우리들이 느끼는 혼란입니다. 그런데 그 신학을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결국 무엇이냐 하면 이 목회로의 소명, 신학의 소명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서 사도 베드로를 만나서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시면서 묻습니다. 무엇을 묻느냐하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을 부르셨습니다. 사랑한다는 동사가 바뀐 것을 가지고 여러 해석을 하지만 그러나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동일한 말의 반복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네가 나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이제 십자가를 지고 마지막에 결국은 양떼를 돌보다가 죽을 텐데 너의 목회의 동기는, 신학의 동기는 양떼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적인 사업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라 나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목회의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동기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은 사랑의 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은 영혼의 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우 특별한 학문의 대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연구하기에 적합한 정신의 상태가 필요하다. 하나님을 연구하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는 마음이 명정한 상태이어야 한다. 마음이 명정한 상태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가 유명한 이런 말을 남깁니다. ‘진정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비록 철학적으로 어거스틴이 플라톤의 철학들을 상당히 받아들였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이 사람이 통렬하게 안타까워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플라톤의 추종자들의 책 속에는 이런 사랑이 없었습니다. 플라톤주의에서 찾는 신 즉 일자라는 존재 토홈 이라는 존재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의 고백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의 글에는 경건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글에는 회개의 눈물과 참회하는 탄식이 없었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해보십니다. 신약성경의 절반을 완성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사실은 우리에게 신학의 어떤 모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사도 바울의 경우에만 특이한 것이었느냐 하면 아닙니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해서 목회자가 되었고, 선교사가 되었고, 신학자가 되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이 사람은 선교적인 꿈을 꾸고, 목회적인 비전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은 자꾸 비전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데 사실은 비전을 물어보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네 비전이 허물어져본 경험이 있느냐는 것을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에 대한 진정한 물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종교지도자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놓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부활사건이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사도 바울은 당시 유대인들의 표준적인 믿음을 따랐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유대인들이 종교지도자들의 사주를 받고 빌라도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합니다. 주장하는 내용을 가만히 보면 너무 재미있습니다. ‘예수를 죽여주시오.’ 라고 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죽여야 하는 방법까지 그대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신명기에 답이 나옵니다. 신명기에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나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미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살았을 때 자기가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퍼뜨렸기 때문에 이 예수가 살아나고 누군가가 이 시체를 치우고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트려서 세상이 어지러워질 것을 이미 예견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모든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죽음이 우연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죽음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싶었기 때문에 그를 죽이는 방법까지도 사주를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 진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심할 수 없습니다. Fact입니다. 더군다나 대화까지 나누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누구십니까?’ ‘네가 나를 핍박하는 예수다.’ 그러니까 예수가 죽은 것도 Fact 이고 살아난 것도 Fact입니다. Fact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했는데 자기가 직접 보고 음성을 듣고 모았기 때문에 둘 다 Fact입니다. 혼란이 온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면 부활할 수 없습니다. 왜? 부활하는 이야기가 구약에도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인정을 받은 사람만이 부활을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거나 말입니다. 에녹, 그들은 모세가 승천했다고 믿으니까 모세의 부활, 엘리야의 승천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나님이 살려내셔야 할 분이면 저주하시면 안 되고 저주한 사람이 아니라면 살리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Fact가 동시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밀고 들어오는데 그 깨달음이 무엇이냐 하면 그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도 맞고, 하나님이 그를 인정해주셔서 부활시키신 것도 맞는 것입니다. 그 저주가 자기의 죄를 위한 저주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한 저주였구나 하는 대속의 교리를 여기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때 사도 바울의 어두운 지성을 찢으면서 찬란한 빛처럼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여태까지 쌓아올렸던 모든 학문과 인생관에 영향을 끼치면서 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지식의 빛이 들어오면서 이 세계가 어떻게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그리스도 예수가 중심이 되시는가 하는 것이 떠오르고 이 세계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의 중심에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사건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학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허접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신학을 하는 사람입니다. 최근에 폴림 이라고 역사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아실 텐데 그분이 청교도에 대해서 공부하셨습니다. 리처드 백스터를 전공하셨고 지금은 반더필더 대학에서 유능한 교수로 재직 중인데 그분은 세인트루이스로 온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파격적인 대우를 하고 붙잡은 것 같습니다.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이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정말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반더필더 대학은 사실은 자유주의 신학교입니다. 반더필더 교수의 논문을 읽어보시면 위험할 정도로 자유주의인데 이분은 옥스퍼드에서 책도 여러 권 나왔습니다. 뚱뚱합니다. 그런 분을 강사로 한번 불러보십시오. 잘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석사과정을 가르치면서 복음주의에서 자란 학생들이 자유신학을 공부하다가 신학을 버리는 예를 가끔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박사과정에서 그런 학생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대학을 잘 나오고, 신학이 있으니까 유학을 오고 아니면 미국 안에 있으면 리폼드나 이반젤리칼에 속한 학교에서 MD부를 하고 PHM까지 하고 목사도 되었고 그 다음에 자유주의 신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움직임이 이미 못 바꿉니다. 교수들은 못 바꾼다고 봅니다. 그런데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생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은 학문의 차원의 문제가 아니고 종교의 차원의 문제이고 신앙의 차원입니다.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적인 기반 자체가 얼기설기해서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혁신학을 공부하고 막 옵니다. 그런데 논리가 이쪽이 훨씬 더 예리한 것입니다. 왜? 이쪽은 신앙과 믿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기대면서 신학을 했는데 여기서는 이것을 아주 부정하면서 하니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누구의 이야기가 더 화려하게 들리겠느냐는 것입니다. ‘아, 다 거짓말이었구나! 성령의 영감? 순 사기구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도 기득권층의 대대적인 사기극이구나! 심지어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도 아리우스가 훨씬 더 맞았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문이 확 열리는 것입니다. 이슬람하고도 만나고 다 만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난 사건이 이 사람의 인생을 뿌리째 흔들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뭐냐 하면 이제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 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중심에 계신 분이시고 온 땅과 만물위에 높아서 이 세상을 말하자면 통치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분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김세연 박사가 숙명과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살 수밖에 없었다는 그것이 그분의 박사학위 논문의 핵심입니다. Origin of Force Gospel 의 핵심입니다. 신적인 강제력에 확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요새 제가 팔복에 대해 책을 쓰고 있는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든지 말든지 논문이나 쓰고 한국에서 학교에서 들어오라고 그러면 가고 학교가 없으면 교회로 가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가슴이 저미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영국교회가 살아나도록, 한국교회가 살아나도록, 하나님의 나라가 오도록, 기도하는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결국은 한사람의 신앙의 깊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에 대한 체험을 핵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학을 공부할 때는 소위 이야기하는 Universality 라는 것과 Particularity 라는 두 가지 라틴어로 말하면 우니베르스따스와 스빽겔리따스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면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니베르스따스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보편교회의 신학입니다. 스빽겔리따스는 무엇이냐 하면 내가 입각점으로 서있는 교파의 신학입니다. 그런데 나는 먼저 일반적인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먼저가 아니라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그냥 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느 교회에 속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장로교회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을 배우고 받아들이고 세례문답을 받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혹은 감리교인으로서 혹은 성공회신자로서 된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좋습니다. 이단만 아니라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빽겔리따스입니다. 여기서 예수를 믿고 하면서 목회의 소명을 받아서 신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학을 공부하고 난 다음에는 이렇게만 하면 안 됩니다. 이 입각점을 자기가 굳건히 가지고 그 다음에 내가 나의 감리교, 성결교, 장로교, 이전에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어떻게 발전해왔는가 하는 보편적인 신학을 이쪽에서 공부를 하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개별성, 특수성에 투사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개별적인 신학을 계속 공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칼빈주의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요한 웨슬레를 공부해야 계속 갈등만 생기지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알미니우스주의자입니다. 그러면 공부해서 이렇게 와서 만나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생기느냐하면 ‘아, 내가 지금 이렇게 이런 나의 교파에 소속되어 신학을 하지만 이것이 다들 성경에 근거한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내려오면서 이런 해석들을 거쳐서 이렇게 왔구나!’ 하면서 무엇이 생기느냐하면 어디까지를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입장이고 수용해서는 안 될 입장인가 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생겨나게 되고 다른 사람과 다른 교파에 대한 이해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의 견해를 확고히 하면서하는 그것이 정상적인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8세기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은 기본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17세기를 기준으로해서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우선 성경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다 할 줄 알아서 그것을 오리지널 텍스트로 거의 외우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동방교부들과 서방교부들 전체의 기본적인 문집 많이 잡으면 더 많겠지만 기본적으로 잡으면 600, 700권 정도를 거의 암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신학의 기본입니다. 그 위에 신학자로서 철학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신학이 철학 위에 있었으니까 철학을 혼내주고 야단쳐서 여왕이신 신학을 떠받들게 만들어 주어야하기 때문에 지금도 도서관에 가면 Seventeen and eighteen century Philosopher of Netherlands 라는 사전이 있습니다. 펴보면 17세기 18세기의 철학자들이 나오는데 신학자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그러니까 데카르트주의가 나왔을 때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학자들도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는데 상당시간이 걸렸습니다. 오히려 신학 쪽에서 그것을 빨리 간파하고 이 사상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이 신학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목회자들 가운데 데카르트를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지력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작도 방대합니다. 이 속의 사고 구조와 판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꽤 어렵습니다. 어쨌든 철학적인 사색의 능력, 자연과학, 존 오웬 같은 경우에는 법학, 이런 인문학에 대한 공부를 하고 그렇게 하면서 이것들을 남들에게서 배운 것들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것을 독창적으로 해석을 해서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빚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해서 그 사건을 통해서 사도 바울도 그렇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 하는 운명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의미를 생각하면 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행복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일들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에베소서나 골로새서 같은 데 보면 사도 바울의 큰 화두가 이신칭의라고 이어지는 개인의 구원이라고 보면 안 됩니다. 이신칭의라는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문맥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사실은 교회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걸쳐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다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왜냐하면 예를 들어서 헤르만 리더스의 Coming of Kingdom의 핵심적인 내용이 그런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결국은 이 교회라는 것은 사실은 어떻게 보면 소멸되어야할 존재로서의 교회입니다 즉 하나님이 새로운 씨앗을 이 세상에 심으시는데 그 한 알의 씨앗이 죽어버려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썩어서 사라지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야기하는 구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실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걸쳐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와 하나님이 완성하시기 위대한 창조세계에 대대적인 쇄신 그것을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 '아나카펠레오오'라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그 유명한 '레카팔레치오 크리스티' 즉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 이라는 장엄한 교리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총괄갱신론이라고 번역하지만 멍텅구리 같은 번역이고 전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번역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이 그런 용어를 만들어내어서 오염시켜서 퍼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가 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냐하면 자, 그러면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것이 결국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썩어져야할 교회와 그리고 그 다음에 완성될 위대한 세계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을 맺고 있다면 그러면 결국은 예수를 믿고 지금 현재적으로 이미 침투해 들어온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But not yet'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있는 이 긴장관계가 하나님의 나라의 소명이라는 측면에서 이 창의와 성화를 이해해야합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완전히 개인의 차원으로 끌어내리고 이것이 사실은 서구가 가르쳐준 자본주의와 결탁되고 개인주의와 결탁되면서 아주 타락한 상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끝입니다. 사실은 애굽에서 보면 홍해를 건너서 탈출한 것이 끝처럼 보이지만 가나안에서 보면 이제 스타트라인에 선 것입니다. 홍해를 건넘으로써 겨우 스타트라인에 서서 39년 동안을 고생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전망들을 보여주지 않으니까 기독교신앙에서 가지고 있는 이 어마어마한 동력들을 어디에 써야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주 나이브하고 유치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과학 공부한 사람들은 창조나 변증하는 것으로 과학자로 끝나는 것이고 사업자들은 돈 많이 벌어서 교회에 헌금하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오늘날 우리들의 기독교가 너무 왜소하고 졸렬한 기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하면 세계관, 인생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강영안 교수님과 자주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솔직히 고백을 하십니다. 철학자들이 세계관 운동을 한다는데 영향력이 아주 미미하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대회로 세계관대회를 한다고 하고 학술대회에 나가봐야 4, 50명 나온 데서 학자들끼리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세계관은 세계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을 모아놓고 가리킨다고 세계관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강의시간에나 생기는 것입니다. 세계관은 세계관이야 라고 말하지 않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자가, 목회자가 그 속에서 모든 세계관이 형성되어 있어서 한 번도 세계관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도 없고 도에베르드나 볼렌호벤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도 그래도 그 설교를 일 년이나 이년 듣고 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형성되는 그것이 세계관입니다. 그것은 바로 목회자가 자기 설교 속에서 이야기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목회라는 것이 빙산과 같은 목회가 있고 풍선과 같은 목회가 있습니다. 풍선은 뭐냐 하면 물위에 풍선을 던지면 다 뜹니다. 보이는 것이 가지고 있는 것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빙산은 1/10정도만 물에 뜹니다. 여기서 비행기를 타고 4시간쯤 가면 아이슬란드가 있습니다. 한번 가보십시오. 저는 가서 감탄을 했는데 어마어마한 빙산 얼음덩어리들이 무너지면서 바다로 떠내려 오는 것입니다. 보면 하나가 커다란 빌딩만 합니다. 감탄을 하게 되는 게 그 속에는 그것의 9배정도의 얼음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설교를 하면 자기 지식의 1/10이어야합니다. 평생 동안 그래야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한 시간 듣고 우습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 말이 돼?’ 그러면서 가서 시비를 거는데 한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도저히 공격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낙심해서 돌아갈 정도가 되어야지 오늘 설교한 것이 아는 것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풍부한 사상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서 세계관과 이런 것들이 세워져야합니다. 그 중심에 누가 있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비밀이라고 말했고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춰져있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이 어떤 상태에 계셨는가에 따라서 각각 나눠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사르코스의 그리스도 육신의 몸을 입으시기 전의 그리스도, 사르코스의 그리스도 육신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 라스겐소스의 그리스도 승천하신 그리스도 그러니까 영원히 아사르코스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작정이 감추어져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분이 살고 고난을 받고 죽으시면서 이 경륜이 펼쳐지고 승천하십니다. 이 비밀들은 여전히 그분에게서 나와서 그분이 이 세계에 간섭하시는 중보적인 역할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시간 속에서 쭉 전개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말하자면 꿈입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아주 깊은 사상과 철학을 가지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을 이 세계와 역사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핵심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Jesus died for us. 더 이상 추격할 수 없는 복음이 Jesus died for us. 세 단어로 요약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를 대표해서 대신 죽으신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를 다시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신다는 것이 더 이상 요약할 수 없는 복음입니다.
그 다음에 들어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결국은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목회의 소명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임하지만 그러나 두 가지는 반드시 공통적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성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의미를 그리고 애성적으로는 그 의미를 깨닫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신학의 가장 중심적인 코아엘레멘트입니다. 이것에 의해서 굴러가는 것입니다. 신학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명료한 지성의 인식이 결핍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난해 내 친구 목사가 하나가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하고 갔습니다. ‘형, 기가 막힌 일이 있어!’ ‘왜?’ 자기교회에 부목사 한사람이 있었는데 60이 다되도록 안 나가고 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본인들도 적당한 나이에 나가서 사역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생활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교회에 눌어붙어있는 것이 되는 것은 서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얘야, 허송세월을 하면 안 된다. 가서 목회지를 찾든지 뭔가 하나님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든지 해야 한다.’ ‘목사님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래도 기본적으로 어디에 가서 박사라도 하나 가져야지 이력서를 내밀면 교회에서 받아주지 우리같이 석사밖에 받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 그런 기회가 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면 목회지는 하나님이 주신다.’ 우리 둘이 대화를 하면서 내린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목회를 하면서 신학을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미국에도 자주 갑니다. 올해도 4월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 학위수여식에 초청을 받아서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너무 가슴 아픈 것이 복음주의적인 신학교인데 유학을 떠날 때 부인하고 끝내고 돌아올 때 부인하고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학교에서도 이 사람들을 통솔하지 못합니다. 언어도 안 되고 또 한국 사람들은 합리적이지 못하니까 ‘어떻게 신학공부를 하면서 이럴 수 있느냐고 하면서 이 학생의 부인이 바뀌었다. 조사해봐라.’ 그러면 한국 사람들은 말하지 않습니다. 덮어줍니다. 이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결국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이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학을 공부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료한 인식, 십자가와 부활사건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와 입장이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여러분들이 여기서 공부를 5년이나 8년씩 했기 때문에 나와 토론을 하자고 하면 내가 이길 자신은 없지만 나야 관심사가 다양하니까 그러나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엔트라이트를 읽으면서 받는 느낌이 무엇이냐 하면 ‘왜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할까?’ 나는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왜 우리들이 여태까지 이해해왔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속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그분이 의를 이루신 그것이 우리가 그분을 의지해서 그 의를 받아서 우리가 의로워진다는 것이 나는 일생을 살면서 너무나 큰 위로가 되었고 기쁨이 되었고 성경을 읽으면서 늘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왜 그것을 부인하려고하는 것일까?’ 그런 의문이 생깁니다. 명료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에 신학을 공부해도 영혼에 대한 아주 절박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아는 친구도 그렇게 신학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자기네 아버지 자기 어머니를 계속 불신자 상태에서 죽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말이 안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의미가 이것이 스탠드 포인트 즉 입각점이 되지 않으니까 그 다음에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오늘날의 자연생태학적 영성신학이라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논문을 이런 유명한 세계적인 학술지에 실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우리는 모르지만 학문적인 가치가 있는 모양입니다. 결국 뭐냐 하면 아바타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죽어서 돌아가는 상태나 소나 돼지가 죽어서 돌아간 상태나 쥐새끼가 죽어서 돌아간 상태나 그 속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하나의 Spirituality를 형성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와 똑같고 스피노자와 아주 유사합니다. 이것이 만약에 옛날에 기독교국가시대에 누가 이런 것을 이야기했다면 다 불태워서 죽였습니다. 어떻게 기독교신학을 하는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하는데 그리스도의 십자와 부활에 대한 의미의 인식이 사라지면 그럴 수 있습니다.
엊그제 제가 한완상 박사를 만났는데 그분의 관측이 정확한지 그것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견해에 의하면 독일의 나치가 일어나서 그렇게 짓밟을 때에 국민의 인기가 92%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니까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뭐냐 하면 실존주의를 받아들인 신학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석을 하셨습니다. 그분도 정치사회학자니까 그렇게 판단하셨을 것입니다. 왜? 역사문제에 대한 인식이 너무 흐려진 것입니다. 새로운 인식이 주어져서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렇게 분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에 대한 것이 무슨 신학을 갖든지 그것이 확고한 역사적인 입각점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면 사실은 그렇게 기본이 흔들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박사과정까지 온 목사가 그것을 공부하다가 신앙을 포기하고 무신론자가 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 혹시 존스 파이크 주교의 이야기를 아십니다. 프란시스 쉐퍼가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 에서 이야기했는데 그 학교가 유니온신학교입니다. 이 파이크 주교가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그 학교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뭐라고 하느냐하면 자기는 떡을 얻기 위해서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신학교는 나에게 돌을 주었습니다. 마지막에 그 사람이 영매의 Spiritualisms에 빠져버립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은 확고한 복음이 사라지면 학교가 정책적으로 복음을 가르쳐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신학교 선생과 목회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아주 분명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그것이 중심이 되어서 기독교적인 지성이 형성된 사람들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거기에서 온 사랑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혹은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속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 이런 것들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대한 인식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봇물처럼 밀려오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에 대한 동의일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경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학과 목회의 가장 커다란 숙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하면 희랍철학의 개념을 빌어서 설명합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혼자 살 수 없어서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데 올챙잇적 시절을 자꾸 잊어버리니까 감격이 사라져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자기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저히 혼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아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거스틴은 비판도 많이 받지만 사실은 의도를 정확하게 알고 이해하면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를 위해 믿은 것이지 하나님을 위해서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나중에 신앙이 들어간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니까 아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에로스의 사랑이 아닙니다. 희랍에서 이야기하는 에로스의 사랑은 무엇이냐 하면 남녀상열지사의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이익이 중심이 된 모든 사랑을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다행히 믿음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아따비따라는 행복론에서 설명이 되는데 악인이든 선인이든,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이런 사상을 찾던 저런 사상을 찾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것은 행복해지고 싶은 것입니다. 거기에는 또 의문이 있는데 뭐냐 하면 어떻게 그 행복이 뭐냐고 하면 말을 못하면서도 현실적으로 행복할 때는 행복을 느끼고 불행할 때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어디서 오느냐는 것입니다.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욕망을 에로스라고 보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도저히 살 수 없으니까 나는 정말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지고 싶은 것이 믿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고 갔더니 거기서 만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에로스의 사랑으로 갔는데 거기서 만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주시기까지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생명은 이 모든 우주보다도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 아가페의 사랑을 만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뭐가 생기느냐하면 그 아가페의 사랑을 받고 보니까 나의 행복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에로스의 사랑을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랑이 생겨나는데 이것은 아가페도 아니고 에로스도 아닙니다. 그것을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 까리따스는 무엇이냐 하면 에로스는 자기 사랑이라면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까리따스는 하나님의 아가페가 내 안에 부어져서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을 사랑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까리따스는 아가페와 에로스의 지평융합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지순애라고 번역하는데 어떤 사람은 애덕이라고 번역합니다. 더 이상 순수할 수 없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언제 처음 하늘을 열고 폭포수처럼 부어지느냐하면 처음 회심할 때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고백하며 부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시간이 있었습니다.
(찬양)
내 평생 사는 동안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목회도 하고 신학공부도 하는 것입니다. 신학공부를 하면서 수시로 신학책속에 얼굴을 묻고 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럴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무슨 신학 책이 모두 감동을 줍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이 그 당시에 새로 나온 요한복음 주석을 평가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아무 이상이 없다.’ 그렇게 뜨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저는 학술 논문지를 읽으면서도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아, 정말 놀랍구나!’ 그 사람은 그 의도를 가지고 쓰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발견하면서 놀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그 두 개를 위대하게 엮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입니다. 그래서 지성을 자극하면서 차가운 가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자극하면서 뜨거운 사랑이 생겨나게 만들고 뜨거운 감동을 주면서 깊은 지식의 세계 속으로 인도하는 그 써피니스입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것을 가리켜서 존재의 울림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프레젠스 이즈 더 베스트 포커니스. 사람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울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전서 2장 9절이 이야기하는 덕을 선포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전도지 돌리는 것만이 선포가 아니라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뭐냐 하면 목회자든 평신도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베드로 사도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고 사도 바울을 어디까지 하라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까지라고 했습니다. 은혜에서 자라가라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은혜가 객관적인 은혜와 주관적인 은혜가 나오는데 객관적인 은혜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값없는 호의입니다. 주관적인 은혜는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원천이 성령입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그 은혜가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은혜가 먼저 나옵니다. 사랑이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지식이 나옵니다. 우리는 흔히 ‘빛과 소금이 되게 하소서’ 그러는데 성경을 보면 뒤집어서 나옵니다. 소금이 먼저입니다. 소금에 대한 해석사를 뒤질 기회가 있었는데 놀라운 것은 그것을 방부제로 해석한 사람은 마이너리티입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고 더군다나 유대 주석가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맛을 내는 것입니다. 정말 맛없는 세상인데 누군가가 녹아서 자기를 희생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살맛이 나는 세상이 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요즘은 자기희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빛보다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이렇게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것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지식으로 보여줄 수 있어서 그 지식의 찬란한 빛 앞에 이 세상의 모든 철학과 인간이 쌓아올린 사상의 금자탑들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찬란한 빛이 그것이 동반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원래 신학은 그것을 하겠다고 시작을 한 것인데 이렇게 이상한 형태로 변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끝낼까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후회도 됩니다. 그리고 30대 중반에 신학이 어떻게 다 통합이 되는가를 알았고 40대 후반 50세에 들어서던 그때쯤에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에 드러나는지를 어느 한순간에 눈을 뜨면서 온 우주가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무슨 지식을 얻어도 나는 하나님을 아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에 한의학을 배우는데 마찬가지입니다. 법학을 해도 세상의 허무한 철학자들이 지껄이고 간 이야기를 들어도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다가 그러다가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그렇게 대단하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내가 당부를 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의미 없는 인생을 살지 말고 의미가 탁월한 길이 있는데 매우 의미가 적은 길을 걸어가도 안 됩니다. 이런 고민들을 하면서 참된 인간의 행복을 보며 함께 가야합니다. 한 시간 13분이 녹음이 되었습니다. 오늘 강의한 것 중에서 질문하실 것이 있으면 두 사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질문1) 요즘
(답변1) 저는 유대교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아니니까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그것은 랍비문학에서도 이야기를 했겠지만 사실은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은 사실은 기독교의 주류 속에 내려오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칼빈이 삐에따스에뜨스켄띠아 라고 하는 구호를 내겁니다. 경건과 학문이라는 구호를 내겁니다. 그런데 그 구호를 내걸었다는 것이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런 경건과 학문에 완전한 일체를 이루는 것이 가장 훌륭한 도엔띠아의 모습입니다. 신학함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칼빈이 종교개혁을 하던 때에 안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당연한 두 개의 구호를 내걸고 그리고 이렇게 제네바의 문장을 보셨을 것입니다. 손이 이렇게 있고 여기에 심장이 얹어져서 꼬레메오 디비오페르도미네 프로프덴스끼에 씽끼아레 ‘여기 이 마음을 진심으로 성실하게 주님께 드리나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칼빈이 보기에는 이미 가톨릭에서 신학을 하는 방식이 이게 두 개로 완전히 찢어져있다는 것인데 물론 그 당시에 경건한 수도사도 있었고 학문이 뛰어난 학자도 있었지만 이 두 개가 아주 아름답게 결합된 신학함의 이상이 무너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은 삐에따스 스켄따스의 구호를 내걸었던 것을 보면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구호를 내걸 때에는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반성이 있기 때문에 구호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한 하나의 강한 반론으로써 펼치는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한 2년 전에 화란에 가서 책을 하나 구했습니다. 저는 그저 까막눈이나 면하고 떠듬떠듬 보는 정도지만 불어로 된 책이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1905년도에 나온 책인데 아주 운 좋게 싼 가격으로 구했습니다. 제네바 아카데미의 히스토리를 다룬 불어책이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다 나옵니다. 개교 초기부터의 역사와 그 다음에 매년 학생들이 얼마가 들어와서 졸업을 했는지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의 출신학교 직업별로 분류되어서 나옵니다. 그중에서 특별히 눈길을 깊이 끌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프랑스의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 가운데 단네오라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제네바아카데미 출신이었습니다. 사실은 프랑스학생들이 주종을 이룹니다. 많을 때는 70%, 80%의 사람들이 프랑스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네오라는 사람이 나중에 훌륭한 신학자가 되는데 이 사람이 와서 공부를 하고 소감을 쓴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17세기의 사람인데 이렇게 썼습니다. 완전히 외우지는 못합니다. ‘내가 그 먼 거리에 떨어져있는 제네바 신학교에 온 것은 단순히 프랑스에는 이런 신학교가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왔느냐? 이렇게 하나님에 관한 최고의 학문을 최고의 선생님들이 사랑과 경건이 완전히 결합된 방식으로 가르쳐주는 학교가 이 세상에는 이 학교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신학함에 있어서 사랑이 없이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것에 충실해야 되는데 이것은 신학을 위한 효용성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전통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서 읽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존 오웬 목사님의 책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쓴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면 사랑한 나머지 육신의 병에 걸릴 수도 있다. 상사병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상사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성경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아주 냉철한 개혁파정통주의자이자 청교도이자 황태자의 입에서 그런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은 고린도전서 8장에 나온 것처럼 우리를 교만하게 하기 때문에 반드시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신학자들의 전통이 사라지는 것이 너무 안타까운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친구가 있는데 동부웨스트민스터의 릴백 총장인데 아직 총장을 하고 있는데 저보다 세 살 정도 많을 것입니다. 정말 그분은 정말 목사입니다. 왜냐하면 같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교회가 요새 이런 좋은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를 하면 즉석에서 God thank you 지어낸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우리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시다. 오, 하나님 이교회에 놀라운 일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주 경건한 인격이 쭉 배어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학입니다. 유대교 쪽의 좋은 그런 이야기가 있으면 책을 내시고 저에게도 가르쳐주십시오. 다른 질문 있으십니까?
(질문2)
(답변2) 우선 들어오는 학생들의 지적인 수준은 20년 전보다 약간 높아졌다고 그러는데 예수를 만난 흔적이 없는 학생들이 들어오는데 그것은 굉장히 좋지 않은 조짐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완전히 쇠퇴기로 떨어져버리면 신학교에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지금 성공회도 모자라서 난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쇠퇴기로 접어들 때 오히려 신학교는 미어집니다. 그것이 역사의 공통점입니다. 옛날에 가톨릭이 타락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도사들이 이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그런 신학교가 없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고 부분적으로 그런 경건한 사람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공부하던 때만해도 그런 스승들이 있었는데 그럴 필요 없고 오히려 역설적으로 신학교가 그것을 하지 못하니까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그런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 존재의 울림이 있는 신학함이 이런 것이구나!’ 나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만날 감탄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신학보다 더 예쁜 것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신학은 참 예쁘다. 그 신학이 얼마나 예쁜가! 그래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까지만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