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사역의 본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세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레 24:1-3)
녹취자: 백지영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이동식 성전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는 약18평 크기의 천막이었고, 그 천막은 두 개로 구분이 되어 있어서 칸이 쳐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6평 크기의 정사각형 방이었고, 또 하나는 12평 크기의 직사각형 방이었습니다. 그 직사각형 크기의 방을 성소라고 불렀고 6평 크기의 방을 지성소라고 불렀습니다. 지성소는 아는 바와 같이 대제사장만이 들어가서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자리였고, 거기는 1년에 한 차례 속죄일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한 죄를 하나님 앞에 속함 받던 자리였습니다. 성소는 대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는 방이었고, 둘 사이에는 황소를 양쪽에 매달아서 채찍질을 해도 찢어질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하게 직조된 휘장이 쳐져 있었습니다. 이 성막은 전혀 창문이 없는 밀폐된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고 위에는 물 돼지가죽으로 덮개를 해서 천정에서도 일체의 빛이 들어올 수 없게끔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소에 들어가서 무엇인가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하는 제사장들은 반드시 거기에 등불을 켜야 했고 그 등불이 켜진 가운데 그 사물들을 분별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보이는 이 성막과 그리고 등잔불, 그 속에서 제사를 드리는 성소의 제사장들의 섬김을 통해서 우리는 목회와 선교에 있어서 본질적인 원리들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치명적으로 중요한 본질적인 사명이 이 안에 내제되어 있고,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신약시대에 이루어질 위대한 선교사역과 목회사역의 본질을 보여주는 예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제일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빛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실 때 창문을 만들어서, 그래서 바깥에 있는 햇빛이 밝히 비추어 그 빛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물돼지 가죽으로 된 휘장이니까 위에는 완전히 닫혀져서 어떠한 빛도 침투할 수 없는 암막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빛을 사용하는 대신 반드시 찌어낸 감람열매로 만든 기름에 불을 켜서 그 불로 사물을 밝혀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표 하는 바가 무엇 인고 하니, 우리의 목회사역과 선교사역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으로 이루어지는 사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복음사역자들이 이 본질적인 사명을 잊고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복음이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이유는, 복음이 바로 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찬란하고 밝은 빛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이 찬란한 빛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빛 전부는 아닙니다. 가장 빛나는 탁월한 빛이고 그 빛을 이해한 후에는 그 빛으로 구석구석 스며들게 해서, 그래서 이 모든 세상을 진리의 말씀으로 밝혀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는데 목회사역과 선교사역의 목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회사역과 선교사역이 무엇인가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관심사와 사역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의 복음사역의 목표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 그들을 진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언제나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이 캄캄한 성막에 한줄기 밝은 등잔불에 불이 들어오면 그것을 가지고 사물을 분별하면서 하나님을 섬겼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들이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목회를 하거나 선교사역을 할 때 이것도 사람을 모으고 물질을 가지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에 경영의 원리도 도움이 되고 인간의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지혜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일에 대한 지혜도 우리들이 부지런히 터득해서 지혜롭게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야 된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의 사역에 본질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일을 효율적으로 하게끔 만들지만, 하나님의 인간을 바꾸어 놓으시는 거룩한 성령의 은혜 그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는 신령한 이 은혜는 제도나 방법 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위에 부어지고 그 사람 위에 부어진 성령의 은혜는 진리를 통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목회사역과 선교사역이 이 진리를 위해 부름을 받은 사역이라고 하는 것을 매우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도대체 목사란 누구인가? 한 4,5년 전에 어느 잡지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기독교 잡지가 아니고 일반잡지인데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해서 기독교잡지도 아닌데 내가 왜 인터뷰를 해야 하나 그러고 있었는데, 교회의 스텝들이 조사를 하더니 선교적인 차원해서 해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그래서 뭐하는 회사냐고 했더니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표지인물로 소개하고 그와 대담을 나누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잡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종교인을 만날 차례가 되었고, 불교 천주교를 돌아서 개신교로 왔는데 목사님이 이번에 인터뷰 대상으로 선정이 되셨다고, 그러면 그러자고 해서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질문하는데 두 사람은 불신자였습니다. 예수를 왜 믿어야 되느냐고 묻기에, 세계가 왜 창조되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지 예수님은 왜 오셨는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진솔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인터뷰가 다 끝난 다음에 그 기자는 자기가 여러 목사님들을 인터뷰했는데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가 않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뭐 같으냐고 했더니 스님 같으시다고, 그러니까 이 불신자 눈에 스님은 철학자처럼 보이고 목사는 비즈니스맨처럼 보인 것입니다. 실지로 자기가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참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우리가 말씀 사역을 한다고 할 때 이것은 진리의 사역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는 누구인가 혹은 선교사란 누구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 저는 청교도들과 개혁자들의 모든 사상을 종합해 볼 때 이런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목사란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피 뿌리고 죽어간 위대한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라고 말입니다. 그 사도들을 그렇게 치열하게 타오르는 전도자로 만들었던 놀라운 능력은, 진리가 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서 자유케 한 경험, 그리고 여기에서 오는 하나님의 사랑, 구원받지 못한 인간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것이 치열한 순교를 무릅쓴 선교사가 되게끔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역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직업이 군인인데, 사람이 호탕하고 남에 대한 배려도 뛰어나고 인물도 잘 생기고 가난한 사람도 구제 잘 하고 유머도 있고 훌륭합니다. 그런데 전쟁만 나면 도망갑니다. 그 사람을 우리는 좋은 군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을 아주 못해도 그래서 까칠하고 늘 사람들과 다투고 힘들게 해도, 전쟁이 나면 반드시 싸워서 이기는 군인이라면 그는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와 선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진리를 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이 본질적인 사역에 헌신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해야 될 것인가? 우선 첫 번째는 성경의 진리를 잘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명제들이 있습니다. 그것들 중에서 참되고 올바른 것은 성경입니다. 성경이 하나님 아는 지식의 엑기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믿고 그 성경에 친숙한 삶을 사는 것이, 많은 학문을 하고 성경은 잘 모르는 사람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아주 친숙하게 가까이 하면서 이것이 자기의 마음속에 깊이 잠기도록 그래서 자신과 성경이 혼연일체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제가 즐겨 쓰는 비유로, 성경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 위에 자신이 서서 자신이 초처럼 다 녹아서 성경 속에 스며든 사람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 모든 사고방식이 성경에 의해서 좌우되는 사람이 될 때, 그때에 그가 무엇을 생각하든지 말하든지 성경의 가르침을 반영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끼리니까 털어놓고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평신도 때 성경 제일 많이 읽었습니다. 신학교 가기 직전에 은혜 많이 받았을 때. 신학교 들어가서는 책에 조금 밀리고, 졸업하고 사역에 들어가면 일에 밀려버리는 것입니다. 실지로 가슴에 손을 얹고 우리 모두 한번 대답해 봅시다. 선교사역에 돈 없고 핍박받고 본국에서 지원 안 해줘서 서러워서 눈물 흘린 것 말고, 최근에 조용히 홀로 앉아서 성경을 읽다가 마음이 그 성경 말씀에 녹아져서 그래서 엎드려서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은 무엇이든지 들어가서 그 마음을 움직인 그것을 쏟아내게 되어있지 들어가서 자기 마음을 움직이지 않은 것은 나오지 않고,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가화(假花), 조화造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질적인 사역에 충실하게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 깊이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항상 내 마음을 움직여서 나로 하여금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도록, 이것을 경험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 혹은 선교가 무엇이냐고 할 때 사역의 성공과 실패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얼마나 정확히 계승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디모데서에 보면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데 이것이 전도와 선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예수를 믿게 만들고, 두 번째는 이미 믿은 사람들은 그 성경 말씀을 가지고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해서, 하나님 앞에 선한 사람이 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그것이 사역의 성공 여부를 잴 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성경의 진리가 우리의 사역을 비옥하게 하고 우리의 목회와 선교에 있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궁극적인 열매를 맺게 한다고 하는 확신이 점점 유실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사역과 선교사역이 끊임없이 비즈니스처럼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의 본질로서 현저히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아주 친숙하게, 성경이 내게 스며들고 내가 성경 속에 스며들어서, 성경의 이야기가 전부 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것처럼 들리고 나의 이야기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성경과 일체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진리를 향한 소명을 완수해 나가는 가장 중요한 길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것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치열하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신학공부를,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전할 수 있도록 치열하게 해야 합니다.
올 4월에 저는 미국에 가서 데이비드 웰스 박사를 만났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웰스의 저서를 읽으신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신학실종, 윤리실종, 거룩하신 하나님, 탁월하신 그리스도를 쓰신 분인데, 미국에서 유명한 개혁신학자입니다. 이분과 제가 교분이 있어서 올 사월에 만났는데, 제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최근에 어떤 사람이 추천서를 써달라는 책을 보내 와서 그 책을 읽어보니까 계속 강조하는 이야기가 복음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철저한 개혁신학자인데 하는 이야기가 자기는 그런 구호를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정말 훌륭하고 그리고 복음이 모든 인간을 바꾸어 놓는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기는 하지만, 그 복음이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을 예수 믿게 만들고 변화시켜서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하나님 앞에 살게끔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이 세상을 복음 하나로 바꿀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정신 자체가 복합적이고 사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한 시대의 정신으로 무장된 사상입니다. 거대한 사상입니다. 그 사상을 위해서 불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사상의 세계에서 그처럼 치열하게 헌신해서 한 시대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엄청난 사상의 집적이 시대의 정신인데 그 시대의 정신이 과연 복음으로 그 시대정신이 바뀌겠는가?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진실하게 거듭나고 회심하여 예수께 헌신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는 치열한 학문에 대한 탐구로 그들에게 이 세상의 정신이 왜 잘못되었는지 오늘날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사상이 무엇인지 정체를 드러내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올바른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서, 철저한 복음의 정신의 피가 흐르는 그러면서도 사상의 골격을 갖춘 용사와 같은 사람을 만들 때 이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식 자체를 아주 멸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가 하면, 지식을 잘 가르치면 지식주의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사람들에게 지식을 가르치지 않고, 그리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만들어 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느끼게 만들어주면 익숙해 져서 보다 더 강력한 그 무엇을 기대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감동받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온갖 건전하지 못한 감정주의들이 기독교 신앙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사님들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저는 선교지를 두루두루 다니면서 선교사님들의 설교를, 그것도 원주민들에게 하는 설교를 들을 기회가 많습니다. 그런데 듣다보면 원주민들하고 언어도 잘 안통하고 하니까 언어를 한다고 하더라도 항상 심플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습니까? 아멘. 할렐루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아멘.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을 주십니다. 아멘.” 이렇게 아주 단순합니다. 이것이 몇 번이야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변화를 줄지 모르지만 그러나 늘 설교가 거기서 발전이 없다면, 과연 성경에서 이야기한대로 그 무지와 오류 그리고 이교적인 사상 속에 아직까지도 때를 벗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 상당한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사역을 했던 사람 가운데 아주 이상적인 선교사상을 저는 앤드류 머레이에서 찾습니다. 영국의 청교도의 정신과 화란의 개혁신학의 정신을 함께 융합해서 선교사역을 했던 사람 중에서 가장 깊이 있는 영적인 저서들을 써낸 사람이 앤드류 머레이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치열하게 공부하고 탐구해서 성경을 통해서 믿은 단순하고 명백한 진리를 학문을 통해서 심화시켜 그것을 사람들에게 올바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복음사역자가 손에서 책을 놓는다고 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 사람은 진리를 전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이므로 항상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기에 적합한 진리를 치열하게 탐구하고 애쓰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심과 노력이 항상 가슴 속에 살아 있어서 진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끓어오를 때, 여러분은 진리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할 말씀이 많을 것입니다. 목사님이 아프리카에 와 보지 않아서 그렇지 그 구석에 처박혀 있으면 어디 책도 살 데가 없고, 물론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결국은 자기가 열렬하게 하고 싶은 것을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구실이고, 자기가 원하면 그 일을 하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탐구하면서 치열하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통해 깊이 감화를 받고 그 다음에는 치열하게 공부하면서 그 진리의 내용들을 심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복음사역자가 설교를 하고, 사역을 하고,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며 살아가는 이것이 일관된 하나의 사상에서 흘러나오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이나 목사님들이 모이면 그저 신세타령이나 하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에 다 털어 놓으십시오. 저는 목회자들과 만나도 교회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는데, 맨날 만나면 하는 이야기가 장로 혼내준 이야기, 교회 땅 산 이야기, 그렇지 않으면 성지순례 갔다 온 이야기, 저는 재미 하나도 없습니다. 모여 앉아서 자기가 새로 깨닫게 된 진리, 그리고 새로 알게 된 지식 이것들을 나누면서 다 대화를 나누고 난 다음에는, “아,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정말 모르는구나. 내가 더 많이 하나님을 알고 싶다.” 그런 마음에 불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선교사로서 가장 커다란 모본을 사도 바울에게서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일생의 비전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아닙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빌립보서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이 무엇인지 알려하여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고 그렇게 엄청난 기적을 행하고 위대한 선교사역을 성취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희미해지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다메섹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기는 예수를 다 알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가 안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의 지극히 작은 일부에 불과하였고,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교회 안에서 그 고난에 동참하는 희생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알게 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비밀을 터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맨 끝에 끝에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이 무엇인지를 알려 하여 푯대를 행해 달려가노라.” 뒤에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알기 위해서 치열하게 성경을 가까이 하고 치열하게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복음사역자들은 세 가지 답을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지금 성경을 어디를 읽고 있느냐고 할 때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는 절박한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이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소원 두 개만 이야기해보라고 당장 들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때 “그것이 무엇이더라?” 그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할 때 명백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주 치열하게 탐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꾸준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마치 공부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 때에 선교사역이 비옥해지는 것입니다. 더 하고 싶은데 마지막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런데 이 캄캄한 성막 속을 밝히고 있는 이 불꽃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감람나무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감람나무는 선택,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이고 예수 그리스도로도 상징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귀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 감람나무 열매를 가지고 거기에서 기름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읽으면서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세멘자크’, ‘세멘’은 “기름”, ‘자크’는 “깨끗한”이니, “깨끗한 기름”입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자이트’와 ‘까띠뜨’, ‘자이트’는 히브리말로 “올리브”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분사하나가 덧붙어 있는데 ‘까띠뜨’라는 분사입니다. 이것은 “부수다. 충돌시켜서 깨뜨리다. 눌러서 깨뜨리다.” 이런 동사인데 이것이 피동 남성분사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숨겨 있는 것입니다.
당시 구약시대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감람유를 채집하는 방법이 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감람열매를 찧은 다음에 압착기에 집어넣어서 프레스로 누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양의 기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억지로 돌려서 압착기로 눌러서 짜기 때문에 기름의 양은 많이 나오는데 불순물이 섞여 나오게 되고. 그래서 불을 붙이면 그을음이 나게 됩니다. 이것은 순결한 기름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찧어낸 기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올리브를 위한 절구에다가 쿵쿵 찧으면 그 사이에서 기름이 흘러나오는데 그 기름을 한 쪽으로 기울여서 받아낸 것입니다. 이 기름은 눌러서 짜지를 않았기 때문에 열매가 으깨어지면서 나온 깨끗한 기름입니다. 그것이 불로 타올라 성막을 밝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보여 주는데, 하나는 성령입니다. 기름이 흐르는 것이 성령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아름답게 불을 밝혀 모든 사람들에게 그 진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올바로 보여줄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역이 성령의 은혜로 깊이 잠겨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와 은혜가 가장 충만하게 나타나야 할 영역이 진리의 말씀을 터득하고 이것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과정 속에 가장 성령의 역사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모든 불건전한 신비주의는 성령의 이러한 특성 다시 말해서 성령이 언제나 진리의 말씀과 더불어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떼어놓을 때, 여기에서 온갖 혼란스러운 주관주의와 신비주의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해석되고 선포되고 사람들의 마음에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고 적용되는 그 모든 과정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날 때 그때에 사람들에게 아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의 말씀 이외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개한 사회를 개명한 국가로 만들고, 아주 미개한 국가를 잘 살게 만들고, 혼란스럽고 부패한 나라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은 복음이 아닌 이 세상의 문명으로도 어느 정도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하던 인간이 복음의 빛을 받고 그 진리에 가슴 벅차는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는 그 일은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게 부어지기를 사모해야 하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우리의 사역 속에 부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최고의 열망의 표현이 기도인 것입니다.
이제는 한 20, 30년 전보다 현저하게 기도를 안 합니다. 교인들도 안 하고 목회자들도 현저히 기도를 안 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역이 점점 아주 복잡하고 바쁘게 움직이지만, 진리가 사람을 깊이 변화시켜서 새 사람으로 만드는 강력한 중생과 회심의 역사가 오늘날 교회에서나 선교지에서나 사위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성령의 강력한 은혜입니다. 진리를 전할 때 그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강력한 은혜가 항상 우리의 사역 속에 풍부한 기름처럼 가득 차 있어야지만 우리의 사역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역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반성을 해 보면 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대화를 하는 경우가 너무 적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것들을 가지고 우리들이 씨름을 합니다. 그런데 함께 씨름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이 올리브 알맹이가 아주 단단합니다. 이것을 깨뜨릴 때 기름이 나오는 것처럼 우리의 말씀 사역이, 우리의 목회와 선교사역이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말씀 사역을 하는 자기 자신의 깨어짐입니다. 거기에서 수많은 말씀에 의한 깨달음과 힘 있는 선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하면서 그 말씀을 통해 말씀 사역하는 자신이 깨뜨려지고, 그래서 깨뜨려진 가운데 하나님이 자신에게 은혜를 주시는 살아 있는 이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시기에 적합한 그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회자와 선교사의 자기 깨어짐, 자기 깨뜨려짐 이것이 그로 하여금 살아 있는 설교를 하게 만들고, 자신의 사역에 대한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을 파쇄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순결한 기름이 흘러나오면 어둡던 성막을 밝게 비추었던 것처럼, 그렇게 자기 깨어짐 속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은 크게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실한 사역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나 자신에게 스며들어서 그것이 나 자신의 피와 살의 일부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뜨려지는 사람은 절대로 그 사역이 피상적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들도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자기의 사역이 성공했다고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깨뜨려지고 진리가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서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그 사람이 충분히 신앙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신학자가 되는 것은 공부하고 묵상함으로 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 진리에 의해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통해서 그 사람이 진실로 신학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전하되, 우리들이 신앙에 대해서는 목사요 선교사이므로 기독교 신앙은 다 마스터하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선교하는 사람들보다 우리의 목양을 받는 사람들보다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목사보다 훌륭한 신앙을 가진 평신도, 선교사보다 훌륭한 신앙을 가진 원주민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점에 있어서는 누구도 더 우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모두 어깨를 겨누고 함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그 분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깊이 깨뜨려지는 자기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어 가셔서 여러분의 목회사역이 기름져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