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차 례
I. 들어가는 말
II. 성막의 등불에 관한 규례
A. 오직 등잔불로 빛을 삼음
1. 진리의 빛으로 섬김
2. 진리의 빛으로 밝힘
3. 진리의 빛을 탐구함
a. 성경과 학문을 탐구함
1) 성경 진리를 잘 믿음
2) 거룩한 학문을 열심히 탐구함
b. 성경과 학문을 탐구하는 자세
B. 오직 찧어낸 기름을 사용함
1. 순수한 성령의 역사
2. 순전한 자기 깨어짐
III. 결론
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레위기 24: 1-3)
I.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에서 당신을 섬기는 규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성막에서 어떻게 등잔불을 켜고 관리해야 되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던 성막은 이동식 성전이었습니다. 그 성막은 어떠한 창문도 없이 해달의 가죽으로 덮개를 만든 텐트였습니다(출 26:14). 오랜 세월이 지나 바람과 햇빛과 비를 맞으며 그 성막의 겉모습은 별로 아름다울 것이 없는 빛깔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멀리서 그 성막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그저 평범한 천막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막은 약 63㎡ 크기였고, 직사각형으로 된 그 천막은 약 42㎡ 크기의 직사각형방과 약 21㎡ 크기의 정사각형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큰 방은 ‘성소’라고 불렸고, 작은 방은 ‘지성소’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두 방 사이에는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성소는 제사장들이 교대로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었고, 지성소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 차례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히 9:6-7). 성막 밖으로부터 오는 모든 빛은 철저히 차단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불빛이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등잔불을 어떻게 밝히고 또 유지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으며, 이는 아론에게 주어진 특별한 임무였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과 같이 목회자의 본질적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운 때에 그 임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침을 제공해 줍니다.
구약의 제사장과 오늘날의 목회자, 구약의 성전과 오늘날의 교회 사이에는 신학적인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공존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을 성취하심으로 성막과 성전, 혹은 제사장들을 통하여 예표하던 바들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목회자는 곧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개혁자들은 만인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세상을 향하여 제사장이 된다는 교리를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에게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적인 번영과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보다 더 큰 의무와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1899-1981)의 지적과 같이, 목회자로 소명을 받은 그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그 이상의 사람입니다.”(“But he is something more than that, there is something further.”)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늘로부터 소명 받은 사람입니다. 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G. Kline)이 말한 바에 비추어 볼 때 성소적 소명이 목회자에게 특별히 주어졌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들의 새 언약 공동체가 이루어졌는데, 목회자는 이 교회가 언약백성들을 재창조 하도록 이바지하도록 특별히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II. 성막의 등불에 관한 규례
오늘날 목회자들은 분량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종류에 있어서도 엄청나게 많은 사역들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기도하는 일 이외에도 다변화한 사회에서 선교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실로 많은 일들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있습니다. 더욱이 산업화 사회 이후에 널리 퍼진 경쟁 심리와 성장 위주의 목회 방식들은 목회자들에게 더 많은 일들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는 더 이상 단순한 예배 공동체가 아닙니다. 역동적인 선교를 위하여 교회는 새로운 정책들을 수립하고 그것을 시행할 조직을 만들고, 그 일에 헌신할 사람들을 모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교회가 사회에 봉사하기 위하여 더 많은 재정들을 모으고 그것을 적절히 분배하고 사용하는 것은 이제 보편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자녀들의 신앙교육은 전통적으로 가정의 몫이었으나 이제 그 대부분이 교회에 위탁되었고, 이를 위해서 교회는 더 많은 교육 프로그램들을 만들고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배를 중심으로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특징으로 삼았던 교회들은 이제 교인들이 현대사회에서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종교적인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될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교회 안에 넘치는 프로그램들과 행사들은 바로 이러한 선교 상황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점점 바빠지고 목회자들은 더 많이 일하지만 신앙의 깊이는 점점 더 얕아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교회의 현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극지에서 떨어져 나온 거대한 빙하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촉구한 강력한 권고는 지금도 유효한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성막의 등불에 관한 규례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일까요?
A. 오직 등잔불로 빛을 삼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의 제도를 가르쳐주셨을 때, 그 성막은 일체의 창문이 없는 구조였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만드실 때에 몇 개의 창문을 내게 하셔서 빛이 들어오게 하시지, 무엇 때문에 지붕을 가죽으로 덮어서 일체의 빛이 없는 성막을 짓게 하셨을까요?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했고, 그 빛이 아니면 어떠한 섬김도 주님께 올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중요한 사실들을 가르쳐 줍니다.
1. 진리의 빛으로 섬김
첫째로, 진리의 빛으로 섬겨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이 빛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말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목회자가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운영해 감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 통하는 상식이나 이성의 논리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점에 대한 신앙의 규범들은 오직 진리의 빛으로만 얻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캄캄하게 어두운 장막 안에 등불이 켜집니다. 밖에서 볼 때에는 거무칙칙해 보였고 우리의 눈길을 끌만한 아름다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겠지만, 막상 성막 안으로 들어가 보면 온갖 색실로 곱게 꼰 휘장들이 있고, 아름다운 기구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등잔불 빛이 비췰 때 그것들은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오직 그 빛으로써만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양빛으로 이것들을 비추어 당신을 섬기게 하시지 않고 오직 당신의 지시한 규례를 따라 만들어진 등잔불을 통해서만 이것들을 비추어 당신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진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예배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보다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다면, 진리는 하나님 자신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워 양떼들을 목양 받게 하신 목적은 목회 사역을 통해 성도들에게 진리(眞理)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 선한 의지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계시는 죄인이 참으로 그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도 바울이 순수한 말씀을 전하고자 애썼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이 진리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따라 살 수 있는 교훈, 그것을 따라 믿을 수 있는 규칙의 형태로 이 진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계명입니다. 목회는 바로 이것들을 탐구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진리의 빛으로 가득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진리를 탐구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자신이 그 진리에 합치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성경 진리의 빛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찬란한 등불의 빛이 비칠 때, 캄캄하던 성소에 온갖 아름다운 기구들과 내부 장식들이 화려하게 드러났던 것처럼 목회자에 의해 밝혀진 진리는 교회를 밝게 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그 진리를 몰랐을 적에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과 그리스도, 교회와 하나님의 성품의 아름다움에 대한 충만한 지식을 갖게 하고 그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피상적인 신앙으로는 진리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파악할 수 없고, 피상적인 목회 사역으로는 하나님의 지혜의 아름다움과 경륜의 탁월함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과 그 성품이 시행되는 탁월한 방식을 깨닫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진정한 예배자가 되게 하는 것이 목회사역의 본질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2. 진리의 빛으로 밝힘
둘째로, 진리의 빛으로 교회를 밝혀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 빛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둔한 사람을 깨닫게 하는 진리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본질에 충실하게 섬겨본 목회자들만이 그 직무가 얼마나 아름답고 고상한지를 압니다. 그는 천사도 알고 싶어 하는 구원의 경륜을 이루는 사역을 자신에게 맡기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벧전 1:12). 목회사역을 단지 일로서 여기는 사람은 단지 일을 성취하는 즐거움 이상을 경험할 수 없겠지만, 그 사역을 신적경륜의 성취로 여기는 사람은 복음사역을 통해 창조와 구속 그리고 완성의 경륜을 이루어 가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전도와 설교, 심방과 교리교육, 교회 운영과 치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과 목적 연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찬란한 태양빛을 받은 구슬들이 각기 다른 찬란한 빛깔을 드러내듯이, 그 모든 섬김들은 하나님의 속성들을 찬란하게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속성과 그 속성의 시행방식을 아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뛰어난 학자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행정에 능한 사람일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중들보다 뛰어나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목회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본질적 사명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근거를 둔 체계적인 사상과 설교로써만 아니라 그 지식 안에서, 그 지식과 함께, 그 지식에 의해서 살아가는 인격과 삶으로써 판가름 나는 것이 목회사역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이 목회사역은 진리의 빛으로써 수행되어야 합니다. 현대정신은 절대적 진리와 도덕적 규범을 거부하는 시대입니다. 오늘날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길 뿐 아니라 인간자신을 신이라고 여기는 시대입니다.
성경 계시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신앙 대신 이성을 계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모든 비인간적인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책임져야 할 인간의 죄는 부적응이나 환경적 결핍으로 이해되었고, 그리스도인들에게조차 구원은 곧 인간이 자아를 온전히 실현하여 행복한 상태가 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조차 기독교는 인간을 그렇게 행복하게 하는 도구로서 이해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러한 현대정신에 깊이 오염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진리의 빛 대신 이 세상 정신의 빛으로 교인들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진리와 개혁교리들은 이미 현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종교적 독선이나 낡은 유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18세기 독일의 교회사를 통해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는 복음적인 생명력을 잃어가고 이성주의가 득세하자 “살아있는 신앙‧새로운 삶”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경건주의가 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반동으로 다시 합리주의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주의(合理主義) 사상을 추종하는 태도는 결국 설교단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때 독일 교회 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설교들이 주일 강단에서 선포되었습니다. “하나의 음료로서의 커피의 가치”,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문화의 말할 수 없는 축복”, “가축들을 축사에서 먹이는 것보다 방목하면 더 좋음” 이외에도 예수님이 결혼하지 않으신 이유를 설교의 소재로 삼거나 심지어 부활절을 앞두고는 “사람이 생매장 당하는 것의 위험”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교회에서 이러한 설교가 선포되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는가 하는 사실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놀라운 초자연적인 역사와 함께 우리에게 계시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과학적 합리주의로 재어보니, 사실성을 입증할만한 눈에 보이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전에 복음 진리라고 믿던 것들을 모두 거부해 버렸고, 그러자 마지막에 남은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좋은 교사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
3. 진리의 빛을 탐구함
셋째로, 진리를 탐구하여야 할 목회자의 사명을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앞길을 사람들의 마음에 예비하도록 부름 받은 세례 요한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요 1:6-8).
목회자는 진리의 빛을 증거함으로써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하고,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은 더욱 온전한 성도가 되게 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이 모든 일을 진리의 말씀으로써 수행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바로 “그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십니다(요 14:6). 목회자가 진리의 빛으로 충만한 사역을 하는 것은 다른 어떠한 세상적인 영광보다 탁월한 것이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에 힘써야 합니다.
a. 성경과 학문을 탐구함
첫째로는, 성경과 관련된 사항입니다. 목회자가 진리로써 사역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수적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잘 믿는 것과 그것을 더 깊이 이해하고 전달하기 위한 신학의 탐구입니다.
1) 성경 진리를 잘 믿음
첫째로,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잘 믿는 것입니다. 신학 함에 있어서 잘 믿으려는 경향은 잘 추론하려는 경향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은 모든 신학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은 이미 믿게 된 것을 부지런히 탐구하여 잘 믿게 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믿는 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미 믿은 바를 알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신뢰하는 지름길입니다. 이미 믿은 바를 앎으로써 지성적인 친밀함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더 깊은 앎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학문 행위가 아니라 신앙고백적 행위입니다.
목회자가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하여야 할 내용은 세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해 주는 삶의 지혜(wisdom of life)입니다. 이 지혜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발견한 지혜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거룩한 지혜의 핵심입니다.
목회자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좌우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어떤 직업도 목회자만큼,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대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목회는 교인들의 영혼을 위하여 진리를 베푸는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아니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가 말씀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의 권위는 단지 종교적 허세이며, 매주일 설교단에 입고 올라가는 검은 가운은 직업인의 유니폼에 불과할 것입니다.
나는 “목회자란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성경과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청교도들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어간 선지자들의 후예이며 신약성경에서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이다.”
이처럼 목회자의 직무가 숭고하기 그지없는 탁월한 것이기에, 그는 성경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잘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많은 책들의 사람’이 되기 이전에 먼저 ‘한 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학교 시절에 여러분은 성경을 많이 읽고, 진리를 발견하고, 자신의 마음을 그 진리에 깊이 담그는 경건한 습관이 몸에 배이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많은 책들의 사람’이 되기 이전에 먼저 ‘한 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거룩한 학문을 열심히 탐구함
둘째로, 신학과 기타 학문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연 신학이 학문일 수 있냐고 묻습니다. 어떤 면에서, 신학은 학문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학문은 이성적으로 자명(自明)한 원리에서 출발하지만, 신학은 신앙적으로 믿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학이 때로는 개별적인 사항들, 예를 들어서 성경의 인물들을 행적 등을 다루면서 믿음의 규칙이나 생활의 교훈들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신학이 진정한 학문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서 내가 논한 (하나님에 관한 일들에 대한) 지식은 오직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지식, 곧 구원하는 믿음을 낳고 양육하며 보호하고 강하게 하는 지식뿐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1274)가 활동하던 당시에도 신학이 믿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학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문에 대한 이러한 오해를 해결하기 위하여 학문을 자연 이성의 빛으로 알게 된 원리에서 출발하는 학문과 더 상위의 학문의 빛으로 알게 된 원리에서 출발하는 학문으로 분류하면서 신학이 바로 후자에 속하는 학문이라고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신학)은 학문이다. 그런데 학문은 두 종류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첫째로) 어떤 학문은 지성의 자연적인 빛으로 인식하게 된 원리로부터 시작하는데, 예를 들자면, 산수학, 기하학 등과 같은 종류의 학문이 그것이다. (둘째로) 상위의 학문의 빛으로 인식하게 된 원리로부터 출발하는 학문인데, 예를 들자면, 광학은 기하학에 의해 세워진 원리에서 출발하며, 음악은 산수학이 지시하는 원리로부터 시작하는 학문이다. 거룩한 가르침(신학)은 두 번째 방식의 학문인데, 상위의 학문의 빛, 이른바 하나님과 지복자들에 관한 지식으로 알게 된 원리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마치 음악이라는 학문이 산수학이 지시하는 원리들을 믿는 것과 같이 신학은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된 원리들을 믿는 것이다.
근대적 의미에서, 학문이란 사물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추론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신학은 학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학은 일차적으로 사물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파악하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관점에서 본다할지라도, 신학이 학문임에 틀림이 없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즉 우리에게 성경의 진리는 이성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졌으나 발견된 성경의 명제들은 논리적인 연결을 이루며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함에 있어서 체계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개별적인 앎은 종교를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그 종교 안에서 획득한 지식을 체계화하고 전달하는 데는 계몽주의의 언어를 사용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 지혜를 발견하고 전달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여야 하며, 또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여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성경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들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b. 성경과 학문을 탐구하는 자세
둘째로, 성경을 믿고 학문을 탐구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열렬한 자세가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파수하고 전파하는 일은 견고한 신앙과 확고한 신학의 체계,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현재적 경험을 통하여 가장 잘 수행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배우고 다음 주일에 쓸 수 있는 자료를 구한다는 마음으로 공부하지 말고 헐벗은 산에 묘목을 심는 마음으로 신학과 필요한 모든 학문들을 공부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신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인내하고 싶을 때까지만 참는 것은 진정으로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무한대의 헌신을 각오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넘나드는 가운데, 영혼의 움직임은 활발해지고 지성의 능력은 강화될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훈련을 받고 있는 여러분들은 명심하십시오. 이 시기에 여러분은 덜 자고, 덜 놀고, 덜 쉬고, 덜 먹고, 모든 시간을 신학과 학문들을 연구하는 일에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황금의 입’(the golden Mouthed)을 가진 설교자로 널리 알려진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c. 347-407)의 탁월한 설교의 영향력은 단지 타고난 그의 웅변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10대 때부터 치열하게 연마해 온 수사학적 훈련과 성경에 대한 연구는 설교의 구조에서 뿐만 아니라 그 내용과 전달 면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황금의 청산유수’(golden-Stream)로 알려진 동방교회의 신학자 다메섹 요한(John of Damascus, c. 675-749)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은 개혁파정통주의 신학의 정치함과 영국 청교도의 경건을 결합하여 영국 뿐 아니라 대륙에 까지 칼빈주의의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습니다. 그 유능한 사람 역시 십대 때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받을 정도로 학문을 탐구하는 일에 온전히 헌신하였습니다.
학생 시절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자신이 태만할까봐 걱정하던 아버지 티모시 에드워즈(Timothy Edwards, 1669-1758)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습니다. “저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 저의 소홀함 때문에 쓸모없이 뒤로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결심문”(Resoluti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순간의 시간도 절대로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을 가능한 최대로 유익하게 사용하자.”
요한계시록 4장을 보면 사도 요한이 말년에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계시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의 사명은 그분께로부터 주어지는 계시의 말씀을 받아서 일곱교회의 사자들에게 편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계시의 두루마리가 주어졌고, 거기에는 요한이 알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있었습니다. 그러나 힘 있는 천사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계 5:2-3).
이 때 백 세 가까이 되었던 늙은 요한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그는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내어 크게 울었습니다.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계 5:4).
사도 요한은 지금 두고 온 교회와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해고도에 유배된 자신의 외로운 처지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할 사명을 받았고, 그 계시는 인봉되어 알 수 없었기에 큰소리로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두루마리의 인봉을 떼어주신 것은 이렇게 통곡하며 매달린 노(老) 사도의 통렬한 울음에 대한 응답이었었던 것입니다. 목회자는 이러한 열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B. 오직 찧어낸 기름을 사용함
둘째로, 성막 안에서 등불을 켜는 데 사용된 감람유입니다. 성경에서 기름 부음은 하나님의 선택을 의미하고, 기름은 믿는 자들이 받게 될 성령을 예표합니다(눅 4:18, 행 10:38, 고후 1:21). 이것은 목회사역에 있어서 순수한 성령의 역사와 철저한 자기 깨어짐의 필요성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좀 더 자세히 설명될 수 있습니다.
1. 순수한 성령의 역사
첫째로는, 순수한 성령의 역사의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성막을 밝히던 등잔불의 빛이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진리와 지성을 예표한 것이라면, 여기에 사용된 기름은 의심할 여지없이 은혜와 성령을 예표한 것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성령의 역사 없이 성경적 경건이 무엇인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에서 순수한 성령의 역사가 사라질 때 불건전한 신비주의의 이단들이 널리 유포되었습니다.
몇 해 전, 나는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방문하였을 때, 로버트 갓프리(W. Robert Godfrey) 총장과 마이클 호튼(Michael S. Horton) 교수, 줄리어스 킴(Julius J. Kim) 교수를 만나 신학적인 대화를 나눴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설교라는 주제로 이어졌고, 최근 미국에서 각광 받고 있는 조엘 오스틴(Joel Osteen)이라는 설교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조엘 오스틴의 신학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최근에 미국 복음주의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조엘 오스틴의 신학을 평가하기를, 후기 영지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 그리고 현대 번영주의의 합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조엘 오스틴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기 영지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를 현대에 재현할 의지를 가지고 그것들을 탐구하며 설교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를 비판하는 박식한 신학자들을 자신들의 교회역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해석해서 그의 설교에 옷을 입혀준 것입니다.
“조엘 오스틴의 신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나는 반문하였습니다. “조엘 오스틴의 설교에 신학이 있습니까?” 그러면서 나는 다음의 한 마디로 이 모든 질문에 답하였습니다. “만약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보십시오. 순수한 진리의 선포가 사라지고, 순수한 성령의 역사가 그치는 교회에서 인본주의와 이교 사상이 진리를 대신하고, 그리고 불건전한 신비주의가 성령의 은혜를 대신합니다. 참된 신앙의 힘은 지식과 경건의 결합에 있습니다. 신학을 가르치면서 경건을 함께 가르치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우리들은 순수한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등잔의 불빛은 열과 함께 비취며, 등잔의 열은 불빛과 함께 방사됩니다. 우리가 한 성경을 믿고, 같은 개혁신학을 배운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목회사역은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성경, 같은 신학을 배워도 그것들을 통하여 경험하는 하나님의 성품의 측면들(shades)들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배우는 신학의 내용 뿐 아니라,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사람됨이 그의 신학을 결정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학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그가 하는 신학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같이 사랑의 신학을 추구할 것입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심취한 사람이라면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이 미학적 신학을 펼칠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만약에 칼뱅과 주권 사상에 이끌린 사람이라면 하나님 주권의 신학을 좋아할 것입니다.
오늘날 개혁신학이 교회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개혁신학의 대의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지 않고는 사람의 마음속에 심겨질 수 없습니다. 목회자는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회 사역은 본질적으로 하늘의 신령한 진리를 타락한 세상에 전파하는 사람이며, 들을 귀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외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실 때 그가 전하는 미련한 하나님의 도는 인간의 지혜를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사람, 곧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2. 순전한 자기 깨어짐
성막을 밝히는 데 사용되는 기름은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이었습니다(레 24:2). 본문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찧어낸’이라고 번역된 ‘카티트’()라는 단어입니다. ‘카티트’는 “깨뜨리다, 때리다”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카타트’()의 수동, 분사, 남성형 단수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감람나무 열매에서 기름을 추출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감람나무 열매를 절구처럼 “움푹 파인 돌에 넣고 찧거나 발로 밟아 기름을 추출”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이보다 더 큰 압착기 같은 것이 고안되었을 때에는 감람나무 열매를 압착기로 눌러서 기름을 추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더 많은 양의 기름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추출된 기름은 압착하는 과정에서 불순물들도 함께 섞여 나와서 성막을 밝히는 ‘순결한 감람유’()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기름은 등잔불을 켤 때 밝지 않을 뿐 아니라 검은 그을음까지 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목회사역에 있어서 자기 깨어짐의 필요성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신학 함이 어떤 효과를 가져다주는지를 보여줍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적용되기까지는 우리를 진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할 수도 없고 살게 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배우는 모든 진리의 진정한 목표는 단지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진리에 합치된 사람이 되고 그러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사는 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실현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혁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그것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올바르게, 효과적으로 전하여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성도들의 영혼을 온전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느 청교도는 말했습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성공하면 듣는 사람의 귀에까지 이르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은 그 사람의 마음에까지 다다른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체험된 성경 진리입니다. 단지 사변적 지식으로서의 신학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실천에까지 이르도록 질서 지우는 힘으로서의 신학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진리의 힘은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깨뜨려진 자로서 전하는 말씀의 힘입니다.
한 사람이 성경을 대면할 때 그는 신학자나 목회자로서가 한 마리의 어린양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에 깊은 감화를 끼칠 때, 그는 두 가지에 대한 깨어짐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바로 죄에 대한 사랑과 자기의(自己義)에 대해서입니다. 이 때 그는 진리와 상관없이 자기 욕망을 따라 살려고 하는 자신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시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다시 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는 한 사람이 신학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신학가 되는 것은 깨닫고, 책 읽고, 사색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살고 죽고 정죄 받음으로써이다
만약 우리가 배우는 개혁신학이 단지 복음주의의 결점을 지적하는 용도 이상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개혁주의의 ‘신학 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위대한 종교개혁자들로부터 개혁신학의 내용 뿐 아니라, 그들의 신학 함의 방식도 함께 물려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의 철학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룩한 확신에 넘치는 칼빈주의, 이 세상의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거룩한 열정에 불붙은 칼빈주의는 어디로부터 옵니까?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주권을 설교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그 주권에 맡기며 살게 하는 순종적 칼빈주의는 어디로부터 옵니까? 그것은 단순히 한 신학자의 사상을 배움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영적으로 변화시켰던 진리의 빛을 자신도 받으며 그 앞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뜨려지는 경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한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가장 탁월한 표지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지식이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는 경고는 신학을 하는 우리들에게도 사실입니다(고전 8:1).
하나님과 성경에 관한 지식조차 거룩한 은혜의 물에 잠겨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마음은 거칠고 메마른 땅과 같습니다. 파릇파릇한 경건의 싹은 기도하지 않는 마음 밭에서는 자라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는 옥토와 같은 마음 밭에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철학은 진리에 관해 말하고, 신학을 그것을 보여주지만, 기도는 그것을 누리게 합니다.
치열한 지성의 탐구와 간절한 마음의 기도 안에서 지식과 경건은 결합 되어야 하며, 하나님에 대하여 배우면서 그분을 경외하는 삶에 대하여 배우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더욱이 소명이 없는 신학공부 안에 체계적이지 않은 학업 습관과 자유주의 신학이 스며들게 되면, 그는 신학교에서 떡 대신 돌을 생선 대신 뱀을, 알 대신 전갈을 갖게 될 것입니다(마 7:9, 눅 11:11-12).
오늘날은 자유주의 신학이 스며들게 되고 소명이 없는 사람들이 신학교에 입학함으로써 신학교는 예전과 같은 기도의 분위기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열렬한 기도는 치열한 신학의 탐구로 냉담해지기 쉬운 그의 마음과 신앙을 보호하고 북돋게 해주는 해독제입니다.
개혁신학자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유일한 외적 수단이자 단 하나 뿐인 보고(treasury)는 성경이지만, 이 말씀이 우리 영혼에 영향을 미치게 만드는 성경에 종속된 세 가지 수단 또한 빼놓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하고 묵상하는 개인적인 노력과 성도들 상호간의 가르침, 그리고 교회의 말씀 사역입니다. 특별히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생각들은 주로 목회 사역을 통해서 성도들의 마음속에 적용됨으로써 밝히 비쳐지게 됩니다. 이 계시의 책속에 있는 아름다운 진리의 빛들을 목회 사역 속에 충만하게 드러내고, 이것을 성도의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아 어디를 가든지 그 진리대로 살고 진리대로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목회자가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목회자의 영광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학문 때문에 박수와 갈채를 받는 데 있지 않으며, 세상의 높은 지위에 오르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목회자인 그의 영광은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말씀에 바치고, 성령 안에서 자신의 모든 삶을 태워 진리의 빛을 교회와 세상에 비추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삶과 외침으로써 그들을 빛이신 그리스도께 돌이켜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III. 결론
하나님은 영원한 지혜와 사랑으로써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인간을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을 향한 신적 지혜와 사랑의 극치입니다. 목회자의 본질적 사명은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로써 그분의 지혜를 알게 하고, 성령의 은혜로써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이 지성으로써 진리를 알도록 하고, 의지로써 진리를 따라 살게 하며, 은혜를 통하여 그렇게 살아갈 힘을 얻게 하여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그렇게 진리를 알고 사랑하고, 그것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가진 선한 의지의 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는 바로 그렇게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여 아름답게 하고, 선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그가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자신을 합치시켜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의 궁극적 원인은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모르는 무지에 있습니다. 목회자는 이 어두운 세상에 자신이 빛으로 살고, 또 많은 양떼들을 빛들로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특별한 사람입니다(빌 2:15-16). 그는 이 거룩한 직무를 진리의 빛과 성령의 불로 수행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성경을 사랑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신명을 바쳐야 합니다. 열렬하고 지속적인 기도로써 성령의 은혜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전하는 한 마디의 설교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거룩한 증언이 되기 위해서는 때로는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 동안 그 진리(veritas) 앞에서, 그 진리에 자신을 합치시키는 진실(verum)에 도달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이렇게 목회자의 본질적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면, 비록 우리가 갈대처럼 연약할지라도 사용하셔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적 번영과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이바지 하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