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와 소명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 희생과 함께 그 예물에 드리되”(레 7: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지난주에 계속해서 화목제의 감사제에 올릴 제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여기에서 유교병이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 앞에 올릴 이 화목 제사에 감사로 드릴 유교병을 제시하셨습니다. 유교병은 아는 바와 같이 누룩을 넣고 만든 떡입니다. 지난주에는 무교병을 감사의 재물로 올린 것을 해석하면서 누룩이 없는 떡을 아버지 앞에 바친 것이 거짓과 꾸밈이 없는 순수한 신앙을 예표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무교병과 함께 하나님 앞에 화목 제물로 올리는 소제의 제물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유교병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유교병이 의미하는 바가 거짓되고 외식되고 더러운 어떤 것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겠죠. 이러한 모순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누룩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전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II. 감사로 드릴 유교병
A. 누룩 있는 떡
신약 성경에서는 15번 누룩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 중의 13번은 부정적인 의미로 등장하고, 두 번의 용례는 긍정적인 의미로 나타납니다. 먼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누룩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첫째는 거짓된 교훈을 누룩이라고 비유하였습니다. 진실 되지 못한 외식이 누룩으로 비유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부도덕한 악행이 누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헤롯은 교사가 아니었고, 종교 지도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생의 아내를 자기의 처로 취하고 이러한 악행들이 온 나라에 두루 번지는 파급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 헤롯의 악행을 누룩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똑같은 잘못이라도 지도자들이 하게 되면 그 효과는 대단합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이 잘못을 하게 되면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저 높은 지도자도 이런 일을 했는데 우리 같은 사람이 그런 일쯤 한다고 해서 무슨 큰 흠이 될까 하고 부도덕한 악행이 나라와 사회에 만연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사용된 용례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용례입니다. 이것은 바로 복음의 영향력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다들 풍족한 시대에 살고 있고, 발걸음 닿을 만한 가까운 곳에 모두 좋은 빵집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그런 빵집도 별로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거기는 우리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돈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집에서 간식들을 해 먹었습니다. 저희 할머니 살아생전에 제게 가끔 해주시던 빵이 있었습니다. 밀가루를 독에서 퍼서 한 두어 바가지 푸고, 그리고 시장에 가셔서 작은 유리병에 담겨 있는 술약, 이스트를 사오십니다. 그러면 그것을 뜨거운 물도 안 되고 차가운 물도 안 되고, 미지근한 물에다가 그 이스트를 타서 녹입니다. 그리고는 물과 함께 그 밀가루를 반죽을 하죠. 그저 한 두 바가지 정도의 밀가루라면 티스푼으로 한두 개 내지 두 개 반 정도를 물에다가 녹이신 것으로 기억이 되요. 그리고 반죽을 합니다. 칼국수나 만두를 빚는, 만드는 반죽보다는 약간 질게 반죽을 하고 그러면 뭉쳐지면 요만한 덩어리가 됩니다. 그거를 커다란 양푼에다가 놓고 뚜껑을 덮은 다음에 저녁때 반죽을 해서 아랫목에다가 밀어 놓고 포대기를 덮어놓고 하룻밤 잡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작은 밀가루가 신기하게 커다란 양푼 가득히 부풀어 오릅니다. 그러면 그것을 다시 밀가루를 넣고 치대어서 숨을 좀 죽인 다음에 그 다음에 연탄불 위에다가 동그란 걸 놓고 두꺼비집을 놓고 위에다가 올려놓고 천천히 익히면 한 시간쯤 지나서 누룽지 같이 바닥이 굳고 위에는 빵이 잔뜩 부풀어 올라 구운 빵같이 되는 것이죠. 아무 맛도 없죠. 소금만 넣고 했으니까. 설탕은 왜 안 넣었는지 모르겠어요. 설탕은 없어서 그랬겠죠.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빵이 참 씹어 먹으면 별 맛은 없는데 꾹꾹 씹어 먹으면 구수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이러한 양과처럼 만든 그런 설탕이 많이 들어간 빵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 터키 빵이라고 그래서 그냥 밀가루만 해서 화덕에 구워서 부들부들 한 빵 아주 좋아합니다. 먹고 싶네. 그런 빵을 할머니가 가끔 해 주셨어요. 그러면 뜨뜻하게 해 놓고 들며 날며 뜯어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그 양푼에 달라붙은 누룽지 같은 그 빵은 정말 더 구수하고 맛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고 집에 가서 한 번 해 보십시오. 다음에 주일날 올 때 한 덩어리 싸다주면 감사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그 가루는 두 바가지나 되는데 누룩은 요만한 병에 들은 것, 그것도 한 번에 다 쓰지 않아요. 차 스푼 두 스푼 반 정도밖에 안되는데 하룻저녁 사이에 그 많은 밀가루를 다 부풀어 올라서 한 덩어리가 되게 만듭니다.
B. 은혜에 대한 감사
이 부풀어 오르는 밀가루를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이라고 한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예수 믿은 사람이 그 술약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과 세상에 영향을 주어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데 이바지 하는 것, 이것을 예표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의 규례 속에 무교병과 함께 유교병을 바쳐 제사를 드리게 하였던 것이죠. 그래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이 표로서 유교병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유교병은 제사를 드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은 내가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하여 이 좋은 가나안 땅으로 너희들을 들어가게 만들어 이 모든 것을 유업으로 누리게 만들어 주었으니 이제 너는 내가 너희에게 베푼 이 모든 구원의 은택을 가지고 너희들은 새 사람이 되고, 새 백성, 새 민족이 되어서 하나님 모르는 열방의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켜라. 마치 누룩이 가루 속에 들어가 한 줌 밖에 안 되는 누룩이 서 말의 가루를 모두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여라. 너희는 소수이지만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 그 표였던 것이죠. 그리고 신약 시대가 되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구원이 완성되고 예수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 진리 이 모든 힘들을 가지고 가루와 같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라고, 그런 사람이 되라고 하나님께서 이 화목제의 제사 위에 유교병을 올려놓게 하신 것입니다.
1. 하나님 나라와 소명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소명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의 정신에 영향을 받아서 이 기독교 신앙을 자기에게 맞게끔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희박하기 때문이에요. 나 좋은 데로 생각하는 기독교의 인상 말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진정한 기독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이 기독교 신앙을 반죽으로 삼아서 세상의 손이 이 반죽을 주물러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지 않는 다른 종류의 기독교를 만든다는 것이에요. 프란시스 쉐퍼라고 하는 사상가는 말하기를 “현대에 있어서 최고의 우상은 개인적인 풍요와 평안이다”라고 말하였어요. 이 지적은 뼈에 새길 정도로 사실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개인적인 풍요, 개인적인 번영과 행복 그리고 안전이에요. 왜 그럴까요? 현대 사상이 심각하게 침투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현대 사상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현대 사상은 이미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영원히 선이고, 무엇이 영원히 악이고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고,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무가치한 것이라고 하는 이 모든 도덕적인 기초를 다 허물어 버리고 부인해 버린 가운데 태어난 것이 현대 사상이에요.
이렇게 복잡하게 얘기 안하고 간단하게 얘기할 텐데 들어보십시오.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만해도 어른들이 큰일 때 만나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돈을 몇 푼 쥐어 주시면서 그러셨어요. “너는 이 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김없이 어른들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너는 정말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는 정말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요즘은 여러분들이 친척집에 가서 그 집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렇게 말해 본적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착하다는 것, 훌륭하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은 개인적으로 부자가 되고, 돈이 많아지고, 지위가 올라간다는 그런 개념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치하는 것이 아니에요. 훌륭한 사람은 왕 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들 중에서도 훌륭한 사람이 있지만 오히려 간신배에게 모략을 당해서 유배지에 가서 쓸쓸히 살아가던 선비들 중에서도 훌륭한 사람은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훌륭하다, 착하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절대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할 때에 나오는 표현들이에요.
저도 오래전에 어느 유머집에서 읽었는데 읽으면서 한참 웃다가 나중에는 우리 한국 현대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여러분들은, 저는 50년대에 태어났어요. 그러니까 50년대가 끝날 무렵에 제가 아직 글을 못 읽을 때니까 몰랐지만 60년대에 제가 초등학교를 들어갔으니까 손만 뻗으면 전부다 50년대 나온 책들이 주위에 즐비했어요. 책 하나를 사서 맨 뒤를 넘기면 항상 모든 책에 의무적으로 써야 되는 의무적인 글귀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무찌르자 공산당”. 우리의 결심 그래놓고 뭐 우리는 공산당을 무찌른다. 쭉 몇 줄씩 써서 모든 책 뒤에는 그게 꼭 매달려 있어야 했어요. 지금도 도서관 가서 50년대 후반에 나온 책들 한번 뒤져 보십시오. 반드시 그 뒤에 있습니다. 그래서 50년대 표어는 “무찌르자 공산당”이었어요. 그게 뭐죠? 공산주의는 싫고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나라다 라고 하는 표시였죠. 그러다가 60년대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는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게 되죠. 시급한 것은 뭐냐 하면 오나가나 사람들이 다 굶는 사람들이에요. 살 수가 없으니까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가서 산에다가 불을 놓고 나무를 없애버린 다음에 그거를 갈아서 거기다가 곡식을 심어 먹는 통에 온 산이 민둥산이 되어가고 있었을 때였어요. 그때 나온 얘기가 뭐냐 하면 “증산 수출 건설” 우리들이 배가 고파도 많이 생산해서 열심히 수출해서 외국에서 돈을 벌어다가 나라를 건설하자 이것이었어요. 어디 가든지 “증산 수출 건설”이었어요. 그러다가 70년대에 접어들게 되죠. 이땐 사회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었죠?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의 꿈을 꾸고 시월 유신을 단행하던 때였어요. 모든 가는 곳곳마다 “유신으로 번영하자”가 구호였어요. 그러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당하고 소위 서울의 봄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삼 김이 치열한 전쟁을 벌이다가 생각지도 않게 노태우씨에게 정권이 넘어갔어요. 이 노태우씨는 그래도 이제까지 내려오던 유교적 관성을 붙들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 이것이 80년대 학교마다 걸린 간판이었어요. 그러다가 90년대에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이 되고, 이렇게 되면서 간판이 붙었던 자리에 새로운 표어가 들어섰어요. “삐삐는 진동으로” 이게 웃을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중대한 변화가 80년대와 90년대 사이에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거예요. 알다시피 여러분들은 70년대에는 성장을 위한 기초를 다지던 때였고, 80년대 나라가 급속하게 잘 살게 되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88년도에 교수가 되고, 그리고 90년도에 중고차라도 가지게 되었으니까 그때 89년도쯤 되었을 때에 목사님이 심방 오셔서 우리 집사람이 “전도사님이 학교에 다닐려고 차를 할 수 없이 산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치스럽게 살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랬더니 그때 담임목사님이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자동차가 사치품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필요한 물건이죠.” 그 연세 드신 목사님이 그렇게 말할 정도가 되었으니까 나라가 70년대 비해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살게 된 거죠. 90년대 접어들면서 우리나라는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라고 하는 가치 기준도 사라져 버리고. 삐삐는 진동으로. 그러면 여러분들은 묻고 싶겠죠? 목사님 그러면 2010년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얗습니다. 쓸게 없어서 그냥 하얀 페인트 칠로 되어 있습니다. 가서 보십시오. 아무 글씨도 없습니다. 왜? 모든 사람이 들어라 하고 해 줄 수 있는 말이 이젠 학교에는 없는 거예요. 이게 이 현대의 정신이에요. 이게 현대의 정신이에요.
이렇게 가치를 절대 가치를 잃어버린 현대 정신이 기독교 속에 스며들어서 기독교 신앙이라는 떡 반죽을 자기 마음대로 주물러서 성경과는 상관이 없는 형태의 신앙을 만드는 거죠. 그게 아주 흉한 모습으로 오늘날 등장하고 있는 것이 번영신학이에요. 예수 믿고 복을 받는다, 예수 믿고 부자가 될 수 있다, 뭐 이렇게 하면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 그 자체를 보다 더 높은 성공으로 오르는 발판 정도로 생각하는, 어떤 사람은 경영학을 의지해서 부자가 되려고 한다면, 어떤 사람은 종교를 의지해서 부자가 되려고 하는 그 사람 중에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택해서 예수를 밟고 성공하려고 하는 그런 종교로 전락하게 된 거죠. 자, 그러면 이렇게 변형된 신앙은 순수한 술약이 아니에요. 순수한 이스트가 아니에요. 종종 모르는 사람들이 술약을 사다가 아주 뜨거운 물에다가 술약을 부어버려요. 들어가는 순간 이 효모가 다 디어서 죽어버려요. 그러면 차 숟가락으로 두 스푼 반이 아니라 한 바가지를 뜨거운 물에 놓고 끓여서 부어버려도 절대 가루는 부풀지 않아요. 오늘날의 교회의 시대를 무엇이라고 규정하라고 무엇이든지 규정해 보라고 누가 제게 말하면 변질된 누룩의 시대라고 말하고 싶어요. 누룩인지 알고 가루에 집어넣었는데 알고 보니까 곰팡이 균이에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정직한 줄 알고 회사에서 고용해 보니까 이 인간이 뇌물 받아 먹고, 탈세하고, 그리고 온갖 부정부패의 더러운 일들을 자행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런 곰팡이들을 사회 구석구석에서 보는 거예요. 기독교 곰팡이들을 보게 되는 거예요. 물론 이 시대가 교회를 비난하는 것 속에는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아 분명히 있어요.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반감들로 무장되어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실제로 교회 안에는 곰팡이와 같은 신자들이 많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이 많고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추문도 함께 퍼지고, 곰팡이도 번식을 해서 세상을 더럽히는 거죠.
짧은 한국의 근대사 속에서 초창기에는 역사를 주도하고 그리고 나라를 일구었던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였어요. 나라가 번영해 지고 난 다음에는 여기저기서 터지는 부정부패의 사건들, 그리고 사회적인 명망이 있고 신분이 높은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실망스러운 추문들 속에 반드시 기독교 곰팡이들이 존재한다는 거예요. 무엇 때문일까요? 누룩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누룩이 아닌 곰팡이가 되어서 떡 속에 들어가 부풀게 하여야 할 가루를 오히려 썩어버리게 하고 있다는 거죠. 이러면서도 세상이 가르쳐준 최고의 기준, 개인적인 풍요와 평안, 개인적인 행복이 최고의 가치이고 나머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시대정신에 물든 나머지 자기가 그런 망령된 삶을 살아가면서 현저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럽게 하면서도 자신의 죄와 자신의 잘못이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반성이 없는 것이죠. 죄를 짓고, 부도덕하게 살면서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자기도 한 사람의 피해자라고 하는 마니교적인 환상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고 있어요. 이런 속에서 교회에 사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오히려 그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이 누룩을 집어넣은 가루처럼 부풀어 올라 떡을 만들고 빵을 만들기에 합당한 반죽이 되는 대신 여기저기서 사회가 썩고 곪으면서 부패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에요.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힘주어 말합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합당한 삶이 아니에요. 그리고 오히려 성경은 그런 삶을 살면서도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진정한 참회와 돌이킴이 없는 신자의 삶은 그 사람이 신자가 아닌 것을 입증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2. 복음의 영향력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를 관찰해 볼 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어디 있는가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로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치우쳐 왔던 것들을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인간의 지성에 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그들이 지식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지성주의를 택했어요. 그러나 지성주의를 택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삶으로써 윤리의 열매를 드러내지 못한 지성주의는 결국은 기독교 신앙의 참 본질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은혜주의를 선택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리와 신학, 사상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거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체험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사상으로부터 동떨어지고 윤리로부터 단절된 은혜주의는 개인적인 만족을 위한 개인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영성으로 소비되었어요. 다시 말해서 개인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영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의 종교적인 만족을 위해서 다 소모해 버렸다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신비주의로 흘러갔습니다. 그런가 하면 윤리주의 사람들이 있었어요. 신앙의 본질은 의지에 있다고 믿으면서 사람들을 윤리적인 삶으로 내몰았습니다. 무엇을 신앙적으로 체험하는지, 그가 기독교의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가치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적은 가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고 “니가 기독교인이라면 이렇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옳은 것을 아는 것과 그 옳은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연관이 있으면서도 구별되는 것이었죠. 다리가 절어서 소아마비로 태어난 사람에게 왜 열심히 100m를 달려 우사인 볼트와 경쟁하지 못하느냐고 책망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는 참 답답한 일이겠죠. 그래서 이 셋 중 어느 것을 신앙의 본질로 알고 추구했던 기독교도 역사 속에서 모두 사라졌습니다. 잠깐 나타나는 반짝이는 불빛과 같았지만 참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보여주는 누룩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지는 못하였다는 것이죠.
참된 기독교적 영성은 참으로 아는 것과 참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힘에 의해서 떼어놓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형태의 신앙이에요. 그것이 사상의 힘이고, 은혜의 힘이고, 윤리의 힘이에요. 사람들에게 우리들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존재가 되어가야 할지를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쳐 내가 그와 함께 살고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 보면 이웃들이 어둠 속에 있다가 빛을 발견하는 것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이게 예수 믿는 누룩과 같은 사람들 속에 섞여 사는 가루와 같은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빛 자체이신 당신 자신께로부터 반사된 빛이에요.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무지하기 짝이 없어요.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성경이 어떤 것인지,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지, 나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이 짧은 인생을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길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이 정신 줄 놓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번 물어봅시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주님과 결혼을 하죠. 세례 예식이죠. 그거를 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하죠. 그래서 세례 문답을 해야 하죠. 세례 문답을 하기 위해 공부하는 게 많습니까? 2종 보통 면허를 따기 위해 공부하는 게 더 많습니까? 그나마 많은 교회들에서는 시험을 보지도 않아요. 그냥 가르쳐 주면서 통과시키는 거죠. 그렇게 해서는요. 2종 보통 면허는 커녕 원동기 면허도 못 땁니다. 부끄럽지 않아요? 내가 예수와 혼인하고 주님의 신부가 되었는데 사람들이 니 신랑이 누구냐고 물으니까 “얼굴은 잘 생겼는데 누군지는 나도 몰라. 그냥 사는 중이야.” “집이 어딘데?” “뭐 서울 어디라고 하는데 가 본적이 없어.” “나이는 몇 살이야?” “겉보기에 30이 조금 넘은 거 같애”. 그게 어떻게 그리스도인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 중에도 아직까지 태만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람으로 지으신 목적에 정면 적으로 위배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에요.
17세기에 영국 키더민스터에서 목회하시던 청교도 가운데 리처드 벡스터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270가정 되는 가구가 살고 있는 키더민스터 마을에 교구에 목사로 부임했고, 그 분이 17년 동안 거기서 목회를 했고 17년 목회한 후에 청교도 대박해가 일어나면서 강단에서 축출 당하셨습니다. 17년 동안 목회를 했는데 갈 때에는 그 270가정 중에서 가정 예배를 드리는 가정이 2가정 밖에 없었는데 17년 목회하고 나올 때에는 가정 예배를 안 드리는 가정이 2가정 밖에 없었다는 유명한 전설적인 목회를 하신 분입니다. 그 분이 쓴 책 가운데 "Mother's Catechism"이라는 책이 있어요. ‘어머니의 교리 문답’이라는 책이죠. 어린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에 무릎 팎에 놓고 엄마와 함께 교리를 배우는 것이죠. 거기에는 엄마가 질문하는 것과 아기가 대답해야 될 내용들이 나란히, 나란히 기록되어 있는 한 60~70페이지 이상 되는 책입니다. 거기에서 이 교리 문답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가야 우리 교리문답 배우자.” 아가가 대답합니다. “엄마, 그게 뭐예요?” 다시 엄마가 대답합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를 알려주는 하나님 말씀이란다” 그러자 아이가 물어요. “엄마 다른 사람들은 그거 안 배우는데 나는 왜 그거 배워야 되요? ” 엄마가 대답합니다. “얘야, 신경 쓸 필요 없다. 그 사람들은 다 짐승이란다. 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것을 배워야 한단다.” 라고 말이죠. 요번에도 미국을 갔는데 한 아이가 4살, 5살 약간 안됐을까? 그냥 “엄마, 이거 뭐야. 아빠, 이거 뭐야.” 아빠 목에 매달려서 “아빠 나하고 같이 있어.”그러고 떨어지지 않아. 내가 그랬어. “지금이 절호의 기회이다. 두 번 다시없는 절호의 기회인데 교리를 가르칠 때다.” 무릎팎에 놓고. 엄마 입에서 아빠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그대로 믿는 나이, 동화를 이야기 하다가 엄마가 우는 시늉을 하면 그 말이 정말인줄 알고 따라서 눈물을 주르르 흐르는 그 나이, 그때에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초월적인 진리들을 가르쳐야 됩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그거를 안 해, 그리고 그 안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 속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가르칠 수가 없는 거예요. 두 번째는 알아도 자기가 그렇게 안 살기 때문에 양심이 아이에게 그것을 가르치도록 허락을 안하는 거예요. 아프더라도 들으세요. 그렇게 자녀를 키우는 사람들은 짐승 하나를 사육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여러분들의 눈에 뜨거운 눈물을 흐르게 할 거예요. 여러분들이 신앙을 가지고 있는 한 눈물을 흐르게 할 거예요. 왜 그렇게 길렀어요? 왜 그렇게 길렀어요? 그러면 차라리 낳지를 말지. 그렇게 자라서 살아가는 아이가 행복할 수 있겠어요? 언젠가 정말 불행한 날이 닥치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때에는 “호세 펠리치아노”라는 가수가 노래했던 것처럼 “가엾은 어머니 왜 날 나셨나요”라고 노래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오늘날 무엇인가 인간으로서, 기독교인으로서 살아야 할 기본적인 노선으로부터 심각하게 이탈한 체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신앙의 껍질들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도, 은혜를 받아도, 기도를 해도 모두 심지어는 윤리적인 삶을 살아도 모두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고, 자신의 평판을 위한 것이고, 자기의 행복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추구하는 것들일 뿐이에요. 이것은 진정한 누룩으로서의 삶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 주신 것은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죠. 우리가 거듭나고 회개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우리들이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혀 주셨어요. 속까지 완전히 썩어 들어간 상태의 죄인이 그대로 내버려 둔체 다만 너는 옳은 사람이다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서 살아가기로 힘쓸 수 있는 사랑의 마음과 예전에는 몰랐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정신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울러 넣어주신 거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안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서 이제는 예전에는 가루 중 한주먹이었던 우리가 변화되어 누룩이 되게 만들어 주셨다는 거죠. 완전한 사람 아니죠. 예수 믿어도 죄 짓죠. 그러나 진실하게 뉘우치면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그 죄를 과거에 지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학대하시거나 차별대우 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께 항상 순종하며 사는 것이 아니죠. 그러나 회개하고 다시 순종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의지의 힘을 주십니다. 이게 은혜죠.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거죠. 그러니 오늘 한 번 이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신앙을 거울처럼 비춰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자, 여러분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많이 주신다면 아니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돈도 주신다면 여러분들이 원하는 소원을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면 그렇게 주시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 어디에다가 쓰시겠습니까? 이것만은 안 됩니다. “목사님 쓰긴 뭘 어디다 써요? 그냥 그걸 누리다가 죽는 것이죠.”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 유교병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정말로 행복해 지는 것은 물질이나 그가 누리는 명예 때문이 아닙니다. 그게 개인적인 행복에 도움은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행복의 본질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나가서 돈 벌고 출세하는 일을 종교 삼아야지 기독교를 믿을 이유가 없는 것이죠.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아무리 예수 믿고 부자가 되고 높은 지위에 올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는 않습니다. 감동은 받을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열심히 믿어서 예수님 때문에 출세했다면 나도 한번 교회에 다녀 보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겠죠.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순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사람들은 자기가 행복해지는 이유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에 행복해지는 기독교인을 보면서 인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부자가 예수를 잘 믿을 때보다 가난한 사람이 예수를 잘 믿을 때, 지위가 높은 사람이 예수를 잘 믿을 때보다, 지위가 별로 없는 사람이 예수를 잘 믿을 때,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 행복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도 그들이 정말 행복한 삶을 살 때 오히려 그들을 보면서 그들은 신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저도 한때 불신자였죠. 그리고 교회에 돌아왔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부자된 사람들 부러워서 교회에 오지 않았어요. 나는 이미 교회 들어오기 전에 이미 그런 것들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교회에 들어와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자기가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자랑할 때 되게 낯설었어요. 세상에서도 정말 가치를 찾아가는 사람들은 저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이야기하는데 교회 들어오니까 내가 예수 믿기 위해서 모두 버린 것들을 교회 들어오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모으면서 높이 쌓아놓고 서로 자랑을 하는 거예요. 이것은 진정한 누룩으로의 삶이 아니에요.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누룩으로서 누룩이 되는 것과 분리되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나서 정말 행복한 때를 되새겨 보면 지식의 밝은 빛이 있고, 행복이 있을 때를 되새겨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복음의 영향력을 많이 미치던 은혜의 시기에요. 내가 예수님을 가르쳐 주고 전도해서 사람들이 막 변화될 때, 불쌍한 사람을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때문에 사랑의 정동을 느끼면서 그를 위해서 희생할 때, 고난과 역경 속에 다른 사람들이 다 타협할 때 믿음으로 올바른 길을 가면서 박해와 시련을 당할 때, 서럽고 아프지만 주님께 매달려 기도하면 언제나 하나님 말씀하시죠.
(찬양)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찌라
‘아멘’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게 누룩이 되지 않고는, 진정한 누룩이 되지 않고는 행복해 질 수 없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은 참된 누룩이 되지 않고는 행복해질 수 없어요. 종종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쾌락을 즐기고, 자기의 배를 우상처럼 섬기면서 행복해 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행복을 항구적인 것처럼 누리면서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이 된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해 주신 그 목적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한 줌의 누룩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우리를 위해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회를 통해서 이런 놀라운 진리를 아는 지식과 은혜를 주신 것이죠.
저는 회심하기 전 삶과 죽음 사이에서 오가며 방황하던 무지한 젊은이였습니다. 이런 미물과 같은 사람에게 예수님 나타나 주셨고, 예수님이 참 진리이신 것을 제게 알려주셨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했지만 주님을 깊이 만나고 진리의 빛을 조금씩, 조금씩 받으며 무지에 깨어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의 지성의 알력은 하나님의 밝은 진리의 빛을 그 일부분이라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미천한 사람입니다. 때로는 진리의 빛이 내 마음에 비췰 때에 아프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밝은 빛이 언제나 좋은 것이지만 안질이 걸린 사람에게는 자지러지듯이 괴로운 빛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아직도 어두움과 무지가 아주 많은 티끌과 같은 진리의 빛을 깨달은 이 한 사람을 통해서도 여러분들이 진리를 맛보고 누리고 예수님을 만나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꽤 많은 분들은 개인적으로 저를 만난 적도 없고 악수도 해 본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내 가까이에서 늘 내 얼굴을 보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합니다. 진리가 우리들을 그렇게 맺어 주었기 때문이죠. 그러면 만약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진리를 모르고 무지 가운데 누룩이 아닌 존재로 살아가는 것과 진리의 빛을 제대로 받고 참된 누룩으로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것 사이에 이 삶의 질이 얼마만한 큰 차이가 있을 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기에 모이는 수천 명의 교인들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진리의 밝은 빛 안에 거하고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정신과 삶 모두가 완전하고 순전한 누룩이 된다면 우리 이 수 천명이라는 숫자는 우리나라 전체의 인구에 비해서 너무 많은 숫자에요. 그러니 어찌 우리가 참된 누룩이 되기를 고민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제 이 세상은 순수한 가루가 아니에요. 거기에는 이미 누룩도 아닌 것들이 퍼져 들어가서 곰팡이를 퍼뜨리고 있는 이런 시대에요. 한편으로 우리들은 뻗어나가 가루를 발효시켜 부풀어 오른 반죽이 되게 하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이 모든 세속주의와 종교적인, 거짓된 종교들의 곰팡이들, 신앙 고백은 참되지만 윤리적인 삶에 있어서는 그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교회 안에 있는 곰팡이들과 더불어 싸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변화된 사람이 되어 예전에는 무지 속에 살았으나 이제는 참된 지식의 빛 아래에서 예전에는 짐승처럼 방종한 삶을 살았으나 이제는 참 사람다운 윤리적인 생활을 위해서 헌신하며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모이면 주님이 말씀하시고,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깨달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돌이킬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은혜를, 올바른 길을 걸어가며 분투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힘을 주셔서 가던 길을 걸어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목제의 감사제의 위에 유교병을 올려 하나님께 드렸던 이유입니다.
C. 희생제사와 함께
이 유교병도 무교병과 마찬가지로 희생 제사 위에 드렸으니 이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고난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에 새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거룩한 고난을 기억하면서 온 마음을 다해 온 힘을 다해 우리가 한 줌의 순전한 누룩으로 가루와 같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우리의 구원의 소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