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는 자의 삶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겸손과 눈물(행20:19) 2001.1.21 주일오후 1
2. 시험과 참음(행20:19) 2001.1.28 주일오후 15
3. 주님을 섬김(행20:19) 2001.2.4 주일오후 29
4.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행20:20) 2001.2.11 주일오후 42
5. 체험된 가르침으로(행20:21) 2001.2.18 주일오후 58
6. 가르칠 내용을 체험하는 삶(행20:21) 2001.2.25 주일오후 68
7. 가르칠 내용①: 회개(행20:21) 2001.3.11 주일오후 88
8. 가르칠 내용②: 믿음(행20:21) 2001.3.18 주일오후 101
9. 복음전도의 모범(행20:22-24) 2001.4.1 주일오후 116
1.겸손과 눈물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20:19)
19절입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이렇게 되어있죠. 오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배경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에다 청해놓고 그래고 그들에게 이제 유언적인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그 권면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사도는 자신이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어떻게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의 업적과 공적을 과시하기 위한 그런 것은 아니고 이 기회를 빌어서 자신으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게 만들었던 그런 구체적인 동기와 그리고 그의 의해 비롯된 삶을 상세하게 그들에게 말해줌으로서 말하자면은 자기가 떠나고 없는 동안에 그들이 다시한번 자신의 모범을 본받아서 양떼를 목양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초가되면은 교사로, 구역장으로, 또 복음반 교사로, 이렇게 혹은 또 지역 전도를 위해서 이렇게 직분들을 받게됩니다. 그런데 참 잘생각해야합니다. 이 직분은 굉장히 귀하고 그리고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참 이상한 교회입니다. 제가 신앙생활하면서 여러교회를 섬겼는데 아주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4-5섯교회 다녔는데요. 그 뭐 대부분의 시절을 사역자로 보냈고 또 집사로 보냈던 시절이었는데 하여튼 교회에서 연말이면은 하여튼 목사님의 마음상해 하시는 광경을 늘 보았습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구역장들이 교사도 마찬가지고 그 연말이면은 꼭 안하겠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 하라고 그러면은 뺀질뺀질하고 안하고 그래가지고 마음상해 하시고 힘들어 하는 것을 늘 보았습니다. 그랬는데 교회를 개척을 해서 지금까지 쭉 하고 있는데 왜그런지 그렇게 구역장들을 되게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구역장, 그래서 아니 솔직히 털어놓고 여러분들에게 이야기를 할께요. 우리 교인들끼리니까. 집사를 안시켜줘서 시험에든 교인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뭐 좀 늦게 시켜준다든지, 그런 것은 거의 없었는데 구역장을 안시켜준다고 자기풀에 시험에든 사람들은 종종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슬리기도 하고 야단도치고 그리고 격려하기도 하고 해서 이제 구역일을 보아왔는데 참 이상합니다. 대부분 저의 경험에 의하면은 백명이 구역장이면은 연말이면은 한 그래도 한20명은 못하겠다고 그러거든요. 그러면은 그 틈세에 이제 새 사람도 기용하고 좀 늘어나면 보충하고 그러는데 이것은 한번되면은 저사람은 좀 그만한다 그랬으면은 좋겠는데. 그런데 하도 거지같이 구역장을 해서 우회적으로 이번에는 좀 쉬면어떠냐 그랬더니 작년에 못했기 때문에 내년에는 한번 잘해봐야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 결론은 못그만두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 그거 왜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될것이 뭐냐하면은 교회에서 섬기는 직분은 참 여러가지입니다. 모든 직분들이 귀합니다. 그런데 다른 직분들은 잘못하면 그냥 일이 안되는데 이 영혼을 직접 가르치는 직분은 잘못하면은 영혼이 망가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책임질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합니다. 저는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엘리의 가문은 생각합니다. 엘리의 가문. 그 사람이 말하자면은 구역장하고 비교하면은 안되겠지만은 제사장이었지만은 당시에 왕도 없는 상황에서 그의 중요한 사명은 사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에게 제사드려주지만은 또 백성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잘 가르치는 사무엘의 전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한때는 잘 감당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한때는 신령했죠.
그런데 그가 그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 가문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으로 교육하지 못하니까 그 집안이 모두다 자기도 죽고 그리고 자식들도 죽고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복음의 시대에 적용시킨다는 것은 힘들겠지요. 뭐 구역장 한해 잘못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뭐 온식구를 데려가시겠습니까. 그렇지만 하여튼 그런 사건을 통해서 이 복음의 시대에 그것을 그대로 적용시킬수는 없지만은 그러나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혼을 돌보고 가르치는 그 사명을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우리느 알수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말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것을 감당해 나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들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려고 하는것이 아니라. 그만큼 이 직분이 중요하고 일이 잘안될 때에는 영혼이 직접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그 얼렁뚱땅 할려고 그렇게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상적으로 영혼을 섬겼던 한 영혼섬기는이의 모범을 사도바울에게서 우리가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말이죠. 자기의 순교의 순간을 앞두고 그리고 이제 이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교회를 밀레도라는 곳으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불러서 자기가 이제 말문을 여는 것입니다. “내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너희중에 있어 어떻게 내가 너희를 섬긴 것을 너희도 다 안다.” 참 우리는 19절을 해석하기전에 벌써 19절 본문을 생각해보기도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게 진짜 하나님 앞에서 영혼들을 섬긴사람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할것이 있다는 자체가.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직 자기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이야기를 안꺼냈는데 이 아시아에 들어온 맨 첫날부터 이제 순교를 향하여 올라 가려고 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가 너희중에서 어떻게 섬겼는지 너희도 다 안다. 이렇게 이야기 할수 있다.라고 하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한번생각해보세요.
한번 이것을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불러일으켜 보세요. 지난 한해동안 내가 이 구역을 어떻게 돌보았는지 그대들도 다 아는 바입니다. 그러면 구역원이 맨날 놀았지뭐. 이렇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어린 영혼들에게 내가 지난 한해동안 너희의 교사가 되어서 어떻게 한결같이 너희를 돌보았는지 너희도 안다. 그럴 때 아니 뭐 후딱하면 주일날 안나온 사람이 저런 이야기를 하나. 양떼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모든 장로들이 눈시울을 붉히면서 자기의 목자인 사도바울의 이 고백을 듣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지금 말은 얼마나 간단합니까?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어떻게 내가 너희중에서 섬겼는지 너희도 아는바라.” 문장은 단 두줄밖에 안되는 짧은 것이지만은 이 고백이 마음에서 흘러나와 듣는 모든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히기까지 3년이란 세월동안 사도바울은 자신을 깍아바친 섬김의 삶이, 고백과 섬김의 삶이 일치하는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고백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제일먼저 총론적으로 배우게되는 것이 뭐냐하면은 영혼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입술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그리고 마음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눈이나, 코나, 귀나, 손으로만 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요? 온마음과 온몸이 교회가 되어서 이모든 것을 다 태워서 이 전인격적으로 그렇게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기억을해야합니다.
(제가 전도사가 된 이후로 한 13년인가 얼마를 전도사 생활을 했는데 말입니다. 한 넉달정도 딱 쉬었습니다. 사역을 쉰 적이 있는데 그 사역을 쉬면서 아주 잠시동안이지만 경험한 것이 뭐냐하면은 이전에 내가 살아왔던 삶과 신앙생활 속에서 가슴을 찢는 애절한 기도의 제목들이 대부분 영혼을 섬기는 것과 관련되있다는 사실을 그 몇 달동안에 금방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은 가슴이 찢어진 것과 같은 기도생활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영혼을 섬기지않으니까. 물론 그때는 영혼을 섬기지 않는대신 그 몇 달동안 아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하루에 한13시간씩 말입니다. 그렇지만 공부를 잘하게 해달라고 마음을 찢으면서 기도가 안나오더라고요. 그런데 그리고 나서 다시 즉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마는 그 기간은 그 기간대로 의미가 있었지만은
여러분 기억해야합니다. 이 교사, 영혼을 돌보는 이 직분은 입술의 봉사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온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헬므터 틸리케라고 하는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가 말하기를 설교자들에 대해서 일주일에 한번 단에올라 설교하는 그의 설교가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증언이 되기 위해서는 그 강단에 올라오기 전에 일주일동안 진리대로 살기위해서 피흘리는 분투하는 6일이 있고나서야. 7일에 올라가서 하는 그의 설교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될수 있다 그랬습니다.
교사나 구역장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 쭈그리고 앉아서 남이 하는 이야기 듣는 것보다는 가르치는 것이 훨씬 폼납니다. 그것이 구역장과 교사의 말하자면은 가장 중최대한 사명인 것은 사실이지만은 그러나 일주일동안 영혼들에 대해서 새카맣게 잊어먹고 그날와서 가르치는 자기 자신의 기술을 과시함으로서 보람을 느낄수 있는 사람은 그 직분 자체를 자기 자랑의 기회로삼는 사람들이지 결코 하나님을 섬기거나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애들이 소꼽놀이하고 장난할 때 학생이 되고싶어해요? 선생이 되고싶어해요? 누구나 회초리들고 분필들고 선생노릇하고 싶어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 그랬으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 안에. 자격이 있던 없던 모든 사람 안에 내제하고 있는 속성입니다. 사도바울을 보세요. 전 삶으로 영혼들을 섬긴것입니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은 하겠다.그러지 말아야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제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사도바울이 여기에서 여러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오늘 몇 개만하고 다음주에 또 계속하겠습니다. 그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눈물과 겸손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것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 히랍어 성경에보면은 말이죠. 어떻게 나오냐하면은 이렇게 나옵니다. 겸손도 복수입니다. 그런데 겸손 자체는 단수인데 거기에 모든 이라는 것이 나왔으니까 복주죠. 그 다음에는 눈물인데 히랍어 성경에는 눈물들,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이라. 그랬는데 시험들입니다. 그리고 또 재미있는 것은 유대인의 간계라. 그랬는데 간계들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고달픈 나날들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눈물들과 모든 겸손이며 유대인의 간계들을 인하여 당한 시험들을 참고. 모든 것이 부정적인 것이 다 복수입니다. 첫째는 뭐냐하면은 모든 겸손입니다. 여기에서 겸손은 히랍어 원어로 보면은 ‘비참’이라는 뜻이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겸손하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기에서 사도가 영혼들을 가르치고 섬기면서 견지해야할 가르치는 자의 첫 번째 자세가 이 비천하게 자기 자신을 낮추는 말하자면은 종의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면은 결코 겸손일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사도는 그저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순서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 아시아에 와서 영혼들을 섬기면서 기억나는 아주 중요한 영혼들을 섬기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덕목들을 순차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겸손이라고 하는 것이 ‘비참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럼 이 겸손이라는 것은 뭐냐 우리들이 흔히 생각할때는 이 겸손이라는 것은 그저 사람들에게 늘 죽어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요. 그러나 잘 기억하세요. 영혼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그런 의미의 겸손을 가지고 영혼들을 가르칠수 있습니까? 그런 의미로 가르칠수 있느냐고요. 아니 그러면 아주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자식들을 교육시킬 때 그런 의미에서 겸손한 마음을 부모가 가지면은 자식들의 교육이 되겠습니까. 어림도없는 이야기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영혼들이 순수하고 고결하여 무엇을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 주시든지 나는 받기를 기다리나이다. 하는 착한 영혼들도 있지만은 깡패같은 영혼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렇게 죽어지내는 그런 겸손을 가지고 영혼을 가르치는 사역에 있어서 성공을 거둘수 있다고요? 그것은 되지도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도가 디모데서에서 성경의 효능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런데 사실 그 성경의 효능이라고 하는 것은 그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을 가지고 영혼들에게 가르치는 자의 그 가르침의 효능과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의 기초 그 자체가 성경이니까. 그러니까 제가 언젠가 한번 교사들에게 강의한적도 있는데. 그 교사가 영혼들에 대해서 해야할 가장 중요한 임무가 성경이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있는 우선적인 효능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는 것, 교훈입니다. 책망은 무엇입니까? 잘못된 길로 걸어갈 때는 야단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입니까. 칼빈의 고백을 이렇게 쭉 읽어보면은 뭐 굉장한 설교가였죠. 그 사람은 정말 천재입니다. 그분이 얼마나 천재인가는 ‘제가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2장인가 3장에다 썻습니다. 뭐 엄청난 천재입니다. 그 얘기를하면은 감동적인데 중복이된까. 아주 굉장히 천재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설교에 대해서 자기가 이야기하는 가운데 특별히 디모데전서 그것을 풀어서 설교하는 가운데 디모데서를 풀어서 설명하는 가운데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면은 그 성경의 효능을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 즉 설교자의 거기에다 맞추서 풀어서 설명을 하는데 그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책망하는 부분을 설명하면서 당신들이 자식이있는데 되지도 않는 짓을 하고 말썽을 부리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패역하게 군다면은 얘야 그러지말지니라. 그래서는 안되니라. 당신들이 그렇게 유순한 말로만 자식을 가르친다면 직무유기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때는 막 그 욕비슷하게 나옵니다. 이놈의 자식 이 후레아들놈의 자식. 니놈이 이따위로 살아서 하나님이 너를 가만히 내버려 두실줄아느냐. 이렇게 야단을 쳐야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책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구역식구 모아놓고 이 후레자식이라고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 얘기가 아니라. 그만큼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겸손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세상적인 겸손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다르냐. 이 겸손은 단지 사람들 앞에 죽어지낸다, 뭐 할말도 바로바로 못하고 그저 마음으로 삭이면서 그냥 그냥 참고 그런다. 그런것만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이 겸손은 근원 자체가 우리가 세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겸손과는 다릅니다.
세상적인 겸손은 뭐냐하면은 나를 이렇게 두드러지게 나타내서 저 사람보다 내가 더 튀게 나타나거나.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자기를 억누르는 것입니다. 그 정도를 세상에서는 겸손이라고 합니다.
(어느 교회에 제 친구가 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에 한번 그 얘기 했나모르겠습니다. 한400명정도 모이는데 주일학교인가 중고등부인가 하여튼 부장장로님입니다. 그런데 교사들을 도 모아놓고 이제 이 전도사도 거기에 갔는데 저녁을 줘서 교사들이 다 먹고났는데 그러더래요. 우리는 겸손해야합니다. 그러더래요. 그래서 교사들이 은혜를 받으려고 마음을 열고 있는데 사실 목사님이 나 보다 나은 것이 뭐가있습니까? 공부도 내가 훨씬더 많이 했고, 돈도 내가 많고, 신앙생활의 뿌리도 내가 더 깊고, 사실 성경도 내가 더많이 아는 것 같다. 그렇지만은 나는 목사님을 높여드릴려고 애를쓴다. 우리는 그렇게 겸손해야되지 않느냐. 그러니까 말이됩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개념에서 따질려고 한다면은 어떤 사람앞에 자기가 겸손해지는 것은 못났기 때문에 주눅든 것이고 누구 앞, 그리고 자기가 진짜 겸손해 지려면은 자기보다 훨씬 뛰어난. 논리가 헤깔렸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논리로 볼것같으면은 자기가 겸손해질 수 있는 사람은 진짜 자기보다 못난사람 앞에서만 겸손해질수 있고 자기보다 잘난사람 앞에서는 준욱든 것이 그게 겸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보다 잘난사람 앞에서의 겸손은 준욱든 것이고 자기보다 못난사람 앞에서의 겸손은 아까 그 분같은 그런 심리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쪽 어느것도 겸손이 아닙니다. 전자는 비굴이고 후자는 웃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겸손은 무엇이냐? 그것은 뭐냐하면은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인지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경험했기 때문에 낮아진 마음. 그래서 그 마음으로 그 영혼들을 대하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적으로 보면은 이렇게 되는것입니다. 결론이 하나님과 및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진정한 경험없이 겸손은 존재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가끔 제가 교인들 때문에 곤고하고 힘들어 하는 그런 동역자들이나 그런 분들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할 때 제가 가끔 그렇게 위로를 하는데 그 가시같이 해가지고 자기를 괴롭히는 그런 사람들있지않습니까. 어느 굉장히 인품이 고매하신 분이신데도 저한테 그래요. 목사님 저보고 사랑이 없다고 그럴지 모르지만은 저는 그 사람만은 도저히 용납이안됩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러겠습니까. 그런데 그런분들을 만날때마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만약에 하나님 몰랐더라면 저 인간보다 훨씬 더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러면은 그 사람에 대해서 좀 생각이 달라질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대 사람에서 오는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철저히 깨달은 사람이 그 안에 있는 주님의 형상을 보면서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니까는 목자로서 말이지 교인들이 잘못할 때 그렇게 하면은되냐고 야단을 치는것과 교만하고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매일 포악하게 그저 막대기 휘두르면서 성질만 부리고 그럴수는 없지만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얼마나 담대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당시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자기는 이제 예수 갖믿기 시작한 아직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던 그런 시절에 말이지. 그 갈라디아서가 초기에 씌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그 베드로가 좀 잘못을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이방 사람들하고 같이 밥을먹다가 유대인들이 오니까 안먹은척 했단말입니다. 그러니까는 어때요. 진리에 어긋났거든요.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책망을 한것입니다. 네가 그리스도인이면서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수 있느냐. 막 직계탄을 날리는것입니다. 이런 이야기 한사람이 그런 것이 통할수 있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을 위한 겸손이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에베소교회 교인들을 이렇게 겸손과 모든 눈물로 섬겼다고 말하지만은 잘못했으면 혼났을 것입니다.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불같은 성격에 말입니다. 가만히 안놔뒀을 것입니다. 아니 그 12제자 가운데 수제자이고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격에 해당하는 그런 최고 지도자를 놓고 그 이방인들과 초신자들이 보는 그 앞에서 막 그냥 직계탄을 날릴정도의 그런 정도의 담대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에베소 교인들이 헛튼짓하고 까불었으면 가만히 내버려 두었겠느냐고요. 막 진리에서 어긋나거나. 바른 신앙을 갖지 않으면은 눈을 부라리면서 야단을 치면서 설교했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이 사도바울이 겸손이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 결국은 뭐냐하면은 그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 앞에서 자기를 비춰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쓸모 없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철저히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을 책망하거나 바르지 않다고 이야기를 해도 어떤 자신이 그따위로는 안산다 라고 하는 어떤 절대적인 우월감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가르치는 자로서 자기를 부르신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 라고 하는 그런 사명감에서 출발한 것이지 그 자체가 교만해 표준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모든 가르침과 섬김 그 밑에 깔려있는 첫 번째 교사로서 가르치는 자로서의 최고의 덕목이 뭐냐하면은 그게 바로 겸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잘들으세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며 그리고 자신은 그 사랑과 은혜 때문에 할말이 없는 지푸라기와 같은 인간이라고 깨달음이 없는 그 인간은 교사로서의 아주 기본적인 자질을 결격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가르치는 사람이되면은 안됩니다. 그 사람은 할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사랑도 모르고 그분 앞에서 우리들이 얼마나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인지를 깨닫지못한 그 인간이 무슨 가르칠 것이 그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이 설교를 들으면서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안된 말이지만은 오늘 저녁에 교구 교역자에게 가서 정직하게 공과책을 내려놓으세요. 태반이 나가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려놓으세요. 여러분 비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영혼들이 망가집니다. 어떻게 영혼들이 우리의 자기 성취나 과시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왜 이렇게 만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있는데 그 밑에 자라나는 세대들을 쳐다보면은 우리 세대가 지나가고 나면은 그 세대에 의해서 더 좋은 교회가 건설되리라고 하는 희망적인 낙관이 잘 안생기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그런 자격을 가진 교사들이 영혼들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 아시아 땅에 타관땅에 와서 그 영혼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면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되는 덕목과 자격이 많았겠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그런데 제일먼저 겸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 죄인들을 구원하지 위해서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앞에서, 그 위대하심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쓸모없는 사람인가. 얼마나 지푸라기와 같은 사람인가.하는 그것을 철저히 깨달은 그 겸손이 마치 혈액과 같아서 영혼들을 위해서 섬기는 모든 섬김의 혈관속에 속속들이 녹아들어야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렇게 산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고백할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산 사람이 아니면은 이렇게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능력 있는 설교자의 설교로 많은 사람이 돌아와서 회심하고 그리고 거기에 함께 하는 어떤 하나님의 강한 능력으로 사람들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만으로는 교회가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촬스 하찌 라고 하는 프린스턴의 교수가 그때가 아마 1930년대쯤 되었겠습니다. 한국에 유엔군 사령관으로 와 있던 하지중장 군정 시대 때 그 사람의 친척인가 그렀습니다. 뭐라그랬느냐 하면은 많은 사람들이 '부흥부흥'하고 자기네 자녀들은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고 부흥이오면은 저놈의 자식이 확변할텐데 그런 생각만하고 사니까. 그것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것은 그것이고 그게 당신들에게는 그 자녀를 그 눈물로 양육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쳐야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그것이고 영혼들이 있으면 그 영혼들을 진짜 잘 가르쳐야됩니다. 그 첫 번째 자격이 뭐냐하면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철저하게 깨닫고 그 복음을 경험하고 자신이 그 거룩하신 하나님과 위대한 십자가 사건앞에서 자기가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이 정신이 무슨 가르침과 그 영혼을 위한 모든 섬김에 실핏줄 같이 모두 배여있어서 그래서 그런 정신으로 영혼들을 섬겨야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삶속에 이런 것들이 배여있습니까? 정말 그래야합니다.
두 번째 눈물들입니다. 사도바울은 전승에 의하면은 키가작고 배가 나오고 머리가 벗어지고 성격이 아주 칼같고 그리고 말하자면은 불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그 사람이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가 하는 것은 벌써 두가지 사건에서 나타납니다. 스데반을 죽이는데 가편 투표할 때 그 의로운 사람이 돌에맞아 죽는 광경을 보면서 그 옷을 지키는 증인이되지않습니까. 그리고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려고 하는 공문을 가지고 달려가는 광경을 봐서 이 사람이 얼마나 차가운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물로 영혼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눈물이 흘러도 그 눈물의 의미가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그 여러분 강팍한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 보았습니까? 이게 모두 마음이 하나님 앞에 확 풀어지면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러움과 응어리가 안으로 안으로 엉키면서도 눈물이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눈물은 그런 종류의 눈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영혼들을 섬기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의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뭐 사도바울이 내가 이래서 눈물을 흘렸고 저럴때 눈물을 흘렸다고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아도 우리는 속속들의 눈물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와같이 영혼들을 섬기는 사람들의 고뇌는 일치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가 흘렸던 이 눈물도 그런 종류의 눈물이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이 영혼들을 섬김에 있어서 흘린 이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을까요? 두말할 필요도없이 첫째는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을 끌어안는 회심을 갈망하는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뻔한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을 끌어안은 회심을 갈망하는 눈물, 한걸음 더 나아가서 두 번째로는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이 눈물은 교회 안에 있는 목회자로서만 섬긴 눈물이 아니라. 선교사의 삶을 산 사람의 눈물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압도적으로 많은 이 눈물의 원인중의 하나는 돌아오지 않고 있는 수많은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 대한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들고 아시아로 들어가기 전에 이미 교인이 되어서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갔을 때 사람들이 모여있는 목회지로 청빈을 받아서 간 것이 아니라. 이제 주님을 믿지 않고 거스리는 이방의 문화 속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교역자들을 모아놓고 하는 이야기는 불행한 목회자는 나로서 끝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령의 열정이 없는 교역자는 우리 교회는 원하지 않는다. 필요 없다 이것입니다. 구령의 열 정없이 단지 기능적으로 교인들을 가르치는 것만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찾아서 가라는 것입니다. 구령의 열정이 없는 교역자는 필요없습니다.
보세요. 여러분 영혼을 가르치는 자들이 어떻게 그 영혼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압니까? 물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 영혼들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지만은 자기에게 말씀을 듣기위해서 모인 영혼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는 자신이 강팍한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하며 다닐때에 그는 비로소 한영혼이 이나마 교회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가르쳐 주시면 내가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앉아있는 이것이 기적에 가까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는것입니다.
(어느날 우리 후배하나가 중고등부를 하는데 와가지고 전도사때.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자기는 교사들 때문에 속상해서 전도사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그러느냐. 그랬더니 자기가 가서 죽어라고 전도해 가지고 애들 긁어모아가지고 각반에 배치시켜주니까. 애가 조금있다가 저 우리 아빠가 이제 교회에 나가지말래요. 그러니까. 교사라는 녀석이 하는짓이 그래 그래도 부모님 말씀도 들어야지. 어떡하겠냐. 우리 서로 기도하면서 때를 또 기다려보자. 가라.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어디에서 나온 현상입니까. 자기가 얻어온 영혼이 아니라서 그런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흐린이 눈물은 전도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사람으로서뿐 아니라. 전도자로서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구역장과 교사들에게 말하는데 여러분들 전도 안하면은 여러분들은 건강한 교사일수 없습니다. 건강한 구역장일수 없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정말 그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게되든지
나는 관계치를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아무리 박식하고 능란한 가르침이 있다고 할지라도 대치할수 없는 것은 그 영혼을 향한 간절한 사랑입니다. 전도해야합니다. 교인이 850명 이렇게 모여도 화요일 전도모이고 토요일 모이는 것 보면은 너무나 슬픔니다. 그게 뭐하는 것입니까. 뭐해요. (대학교에 있을때에 굉장히 어려운데 학교안에 어느 교수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갔습니다.
같이 가던 교수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가 대학시절인데 한번은 자기 과에서 자기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너무 바빠서 안갔데요. 그랬더니 교수가 불러놓고 너 왜안왔냐. 그래서 너무 바쁜일이 있어서 못갔습니다. 그랬더니 교수가 소리를 지르면서 이 나쁜놈의 자식 사람이 죽는 것보다 더 큰일이 어디있느냐. 임마. 그 후로부터는 자기가 상가집에는 빼놓고 간다고 그러더라고요.)
사람이 죽는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있습니까. 우리는 전도자로서 나는 그 말을 적용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1년 12달가도 전도하지 않는 구역장은 자격미달입니다. 감정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들 속에 정말 영혼사랑이 있습니까?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영혼을 가르치는 교사가 될수 있다고 생각을합니까. 떨리는 마음으로 이 집, 저집 벨을 누르면서 사나운 개에게 물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예수 믿으세요. 열린교회에서 왔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 전하기 좋아하는 사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돌보는 사람들은 그 소명의 기초적인 출발 그 자체가 그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갈망, 거기에서 그 성취에서 익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진짜 할수 있으면은 한식구도 구역식구 주지않고 구역장 세우는 것이 좋다고봅니다. 전도해서 구역 만들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그 구역식구들 떠난다. 그러면은 눈물이 펑펑쏟아질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전도해서 데리고 온 영혼인데 그것 떠나겠다.그러는데 오 그래 부모님 말씀도 들어야지 나중에 기회를 봐서 때 되면 믿어. 안되면 할수없고. 그리고 보낼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 구역식구 누구 떠난데요. 남의 교회 이야기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다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자신이 구령의 현장에서 그 영혼들을 위해서 섬기는 눈물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들 구역장. 생전에 전도하나 안하는 그런 구역장 할려면은 그만두세요. 그런 구역장을 통해서 그 교인들이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성경공부 가르쳐준다고 모아가지고 말이지 먹을 것이나 실컷 먹이고 슬그머니 교제 덮고 흩어지는 그따위 성경공부 모임은 해서 뭐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영혼들이 망가지면은 지게될 그 책임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영혼들을 섬기는 사람이 그 영혼들과 흩어졌을 때 그 영혼들을 위해서 절대로 눈물로 기도하지않습니다. 그 영혼들의 절대적인 가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하고 그 영혼들을 향한 주님의 기대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그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삭군일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돌보는 영혼의 그 영혼들도 구할수 없을 것이고, 심지어는 자신의 영혼도 구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의 눈물은 전도자로서의 눈물이었습니다. 세상의 부귀함과 장래가 총망되는 종교지도자의 모든 좋은 전망들을 버리고 그리고 자기를 죄에서 구원하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그분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깨달은 그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회심치 못한 영혼들을 위해 희생하며 흘린 그런 눈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교구 사역자들에게도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구역장들이 말이죠. 어떻게 하든지 전도하게 해야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도를 끝까지 하기싫은 사람은 하도 자기에게 전도하라고 들볶는 그것 지겨워서라도 그만두게 해야합니다. 정말 전도자로서 영혼에 대한 사랑의 눈물이 없는 사람,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가르침이 성공하면 성경에 대한 자기 지식자랑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자그마한 지푸라기와 같은 성경 지식에 대한 자랑으로 자기를 거들먹거리고 구역식구들 모아놓고 옛날에 자기 잘나가던 자기 자랑이나 하는 그런 교사를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그 영혼입니다. 그를 통해서 낮아지신 그리스도 예수의 모본을 배우고 영혼을 향한 그 짙은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눈물을 배우는 그런 관계가 되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 기대하고 있는 그 이상의 삶을 자신들이 먼저 살아야된다는 것입니다. 그와같이 이 사도는 자기 자신이 전도자로서 흘린눈물, 회심치 못한자를 향해서 흘리는 그 눈물이 목회자로서의 눈물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여기에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흘린 이 눈물은 전도자로서, 선교사로서의 눈물입니다.
그리고 이 사도가 흘린 이 눈물은 세 번째로는 아마 자기 자신의 과도한 선교사역과 목회사역속에서 자신을 지키기위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흘리는 눈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아주 확연하게 말할수 있는것입니다. 추측이 아니라. 우리는 그렇게 분명하게 말할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들어보세요. 그가 아무리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고 할지라도 그 교사는, 그 구역장은, 그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영혼을 인해서 눈물흘릴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남의 영혼을 위해서는 눈물을 흘려도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눈물 안흘릴수가 있다. 이것은 이론이지 자신의 영혼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안타까워하고 온전한 삶을 살고싶어하는 그 사람이 망가진 영혼을 보면은 눈물흘릴 수 있고 온전하지 못한 교인들을 보면은 불쌍해서 그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구역장이나 교사들가운데 자신은 이미 통달한 경지에 있는 것 같은 그런 인상을 풍기면서 영혼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종종 있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의 영혼이 죽어있다는 증거밖에는 다른 증거는 되지가않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해져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거룩하다고 생각을 안합니다. 자신은 거룩하다고 생각하지않습니다.
사도바울이 바로 이 사람의 고백이 "내가 잡았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아, 그러면 아주 형편없구만 그렇지않습니다. 온전을 향해서 치달리면서 어찌하든지 뒤에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더 온전해지고 진실해지고 더 거룩해지기 위해서 분투하며 몸부림칩니다. 그런데 그러한 도상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이정도면 성도들이 나만큼만 되면은 그렇게 생각하지않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자기 자신의 성숙과 온전함을 인하여 몸부림 치면서 우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많이 칭찬해줘도 너무 괴롭습니다. 그게 무슨필요가 있습니까. 천하만국 수 많은 사람들이 꽃다발을 흔들며 나 잘랐다고 얘기해도 하나님이 너 못났어 그러면은 끝입니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주님의 눈앞에 사는 교사가 아니면 그러면 어찌 그가 죄인들을 하나님 앞에 세워줄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도바울이 흘리는 이 눈물은 말하자면은 하나님 앞에서 이 과도한 선교와 목회사역의 와중에서 자신의 부패성과 더불어 싸우고 자기를 복종시키는 그런 눈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온전한 성화를 위해서 몸부림치며 분투하는 가운데서 흘리는 그 눈물이었고, 그렇게 자기 자신의 온전함을 위해서 분투하고 눈물흘리는 이 사도바울의 그 모습 자체가 이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는 훌륭한 교제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정말 대단한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살아온 그 사람의 그 삶은 아주 굉장한것입니다. 고신대학에 총장, 학장으로 지내시던 한상동 목사님이라고 계셨는데 76년도엔가 작고하셨는데 그 신학교에 올라가서말이죠. 설교를 하는데 그분이 올라가서 설교하는 주된 주제가 ‘참되게살자.’ 그분이 참되게살자.라고 설교하면은 그 신학생들이 눈물바다가 되었답니다. 그분이 국민학교도 못나왔습니다. 그리고 요즘으로 말하자면은 청강생으로 들어와서 나중에 목사가되었는데 어떤일이 있었느냐면은 그 선교사가 영어시험 문제를 냈더래요.
그런데 그때 벌써 이 한상동 전도사가 교회를 개척해 가지고 교회 개척을하면서 먼길을 통학하면서 이제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때 무슨 자가용이 있어요. 뭐가있어요. 그런데 그 시험문제를 냈는데 다른 과목같으면은 하다가 모르면은 설교라도 한편 쓰고 나오면 아마 60점이라도 줄것아닙니까. 그런데 영어인데 뭐 어떻게해요. 아무리 성령충만해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거지. 아이엠어 보이가 입력이 안되는데 디스이져 어 펜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주여, 주님 부르면 또 뭐해요. 그래 백지를 갖다놓고 주여. 주여 하고있으니까. 옆에 앉아있던 신학생이 삐딱하게 앉아가지고 시험지를 자꾸 답안지를 이쪽으로 자꾸 이렇게 미는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이 순진한 한상동 전도사가 이 사람이 개를 삶아먹고 왔나 이렇게 삐딱하게 앉아가지고 이렇게 자꾸 시험지를 자꾸 밀려서 쓰나. 나중에 한참 생각해보니까 옆에서 한 전도사가 계속 주여. 주여. 하고 앉아있으니까. 이거라도 보고쓰고 낙제라도 면하라고 시험지를 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시험지를 덮어놓고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그리고 뒷산에 가서 펑펑 울면서 그랬데요.
하나님 내가 평소에 어떻게 살았기에 나를 가장 잘 아는 내 짝이 이것을 보여주면 이 한상동 전도사가 그것을 보고 쓸것이라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러는 내가 영혼을 목양해 나갈수 있는 인격이되겠습니까. 그리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보여주는 사람은 영어를 잘했는데 그 누구인지를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시험지 엎어놓고 나와서 0점맞은 그 사람이 후에 그 학교 학장이되었습니다. 그런 삶이 전도사 이전서부터 계속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분에 말년에 올라가서 참되게 살자라고 이야기할 때에 수많은 학생들이 눈물바다가 될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완성을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 모든 아름다운 가르침은 가화조각입니다. 종이로만든 꽃입니다. 시들지않을지 모르지만은 피어본적도 없는 꽃입니다. 생명이없는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은 이 요한이 말이죠. 굉장히 성격이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우뢰의 아들이라고 불리워졌잖습니까. 야고보와 함께 그 얘기는 뭐냐하면은 아주 과격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놀랍게 사랑의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말년에 그분이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하셨거든요. 연세가 너무 많아가지고 이제 설교를 할수없을 때가 되면은 지체들이 부출을 해서 단상에 올라가면은 손을 높이들고 ‘자녀들아 너희들은 서로 사랑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내려오면은 눈물바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게무엇입니까. 능란한 말, 현란한 언어, 그리고 뛰어난 언어 구사력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자체가 사랑입니다. 사람자체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주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에 깊은 감화를 받고 이전에 혈기 충만하고 그리고 폭력적이던 자신의 그 옛사람을 그 십자가 아래 다 묻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되었습니다.
그때까지 그러한 성화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자기 죽임의과정을 지난것입니다. 자기 부인의 그 피어린 과정을 지난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수많은 완성되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의 못된 자아와의 피눈물 나는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후에 그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고 그 존재자체가 그런 사랑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아무리 사랑에 대해서 현란한 이야기를 해도 감동할수 없었지만은 그 할아버지가 올라와서 ‘자녀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느니라.’ 한마디할 때 온 교인들이 그말의 위력을 느끼면서 통곡을 했다는 기야기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뭐 그정도 되었으면 여기에 이러고 있겠습니까. 어디가서 교회를 개척해서 목사가되고 말지. 그러나 잘기억하세요. 직장 다닐 때 저하고 같이 있던 상사 한분이 분재하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어느날 가보았더니 이쑤시게 같은 것이 새파란 것이 요만한 싹이하나 나왔습니다. 그래서 과장님 어 그가 내가 하도 신기해서 잣알 하나를 심었더니 거기에서 나오는데 그것 잣나무야. 그런데 이쑤시게처럼 딱하나 파란 것 하나. 거기에가서 냄새를 맡는데 잣냄새가 났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무슨 얘기냐하면은 아직은 잣나무라고 할수 없는 싹에 불과했지만은 코를 대니까 냄새가 나더라고요. 그것을 보고 누가 잣나무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잣나무의 종자였습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려고하는지 이해할수 있겠지요. 그죠. 그런 성인의 경지에 여러분들이 이르지는 못했죠. 아마 이르지 못하고 죽을것입니다. 그렇지만은 뭐냐하면은 그런 상황, 그런 원리속에서 영혼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그 정신은 그분들은 거대한 거목과 같았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이쑤시게와 같은 싹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질은 같은 것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냄새를 맡으면은 잣나무 냄새가 나야지 그렇지않습니까. 그런 눈물이 여러분들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고 그분 앞에서 자신의 이 부패한 이 생각과 그리고 이런 부패한 성품들이 변화되어 주님을 더 깊이 닮아가고자 하는 그런 몸부림의 눈물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거룩과 그리고 온전함을 위해서 분투하지 않는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교훈은 다 가까입니다. 거짓입니다. 그 가르침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용이 없습니다. 그냥 어디에서 들은 것을 여기에서 듣고 이쪽으로 전하는 것뿐입니다. 기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불행한것입니다.
어떻게 영혼을 가르치는 한사람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그 가르침이 어떻게 해서 기도의 눈물에 흠뻑 젖을수 있나요? 어떻게 해서 차가운 교훈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끈적끈적한 체액이 묻어있을 수 있나요? 어떻게 해서 그의 심장을 터치고 흘러나온 그 피가 그 가르침 속에 속속들이 베이는 가르침의 떡을 먹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완성을 위해서 분투하는 뼈아픈 눈물이 없는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다 가짜입니다. 그런 것은 있을수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먼저 훌륭한 교사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해서 엄격한 선생님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시험과 참음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 20:19)
참 사도바울은 위대한 능력을 가진 사도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영혼을 사랑하고 가르친 교사로서도 우리에게 훌륭한 모범이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범이되는 아름다운 삶은 두말할 필요도없이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감화의 소산입니다. 그는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청해 불렀습니다. 그들은 아마 요즘으로 말하자면은 목사와 같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제 유언적인 설교를 하는 첫부분에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내가 어떻게 너희들을 섬긴 것을 너희들도 아는바일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말이 곧 나의 섬김의 자세를 이러하였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첫째는 겸손이었고 두 번째는 눈물이었다. 말씀을 드렸는데 겸손은 그냥 가치없게 낮아졌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얼마나 고결한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 은총앞에서 한없이 무가치한 존재인 것을 깨닫고 낮아진 그 겸비함 그래서 그 겸비함이 섬김의 시종일관 유지되었다. 우리들도 그런 자세를 본받는다면은 참 영혼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진보가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을 드렸고.
두 번째는 눈물이었는데 그 눈물은 두말할필요도 없이 쏟아지는 눈물인데 바울이 그렇게 능력이 많은 사람으로서 왜 그렇게 눈물을 많이 흘려야했을까. 하는 것이 첫째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 대한 말하자면은 전도자로서의 눈물이었고 두 번째로는 전도되었지만은 아직 변화되지 않고있는 영혼들을 향한 목회자적인 눈물이었고 또 하나는 이렇게 사역을 해나가는 가운데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지키기위한 구도자로서의 눈물이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런 눈물이 마르지 않는 가운데 우리들이 영혼을 돌본다면은 우리도 피패해지지 않고 영혼들도 풍성한 삶을 누릴 것이다. 그러면서 좀 야단을 많이 맞았죠. 그죠. 전혀 생각이 안나는 모양이네. 생각이 안나니까. 상처받은 사람은 없겠네요. 그죠. 아무리 야단을 쳐도 금방 잊어버리니까. 저는 지난주 설교가 마치 제 자신에게 하는 설교같아서 많이 울었습니다. 이상이 지난주 장부책입니다.
이번주 새 장부를 넘겨보니까. 이제 이런 것을 하라고 되어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것과” 그랬거든요. 세 번째로 꼽고있는 것이 뭐냐하면은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영혼을 돌보는 일군으로서 시험을 참는 인내를 보여줍니다. 가르치는 자의 시험과 인내를 보여줍니다. 사실 유대인들만 사도바울을 박해했던 것만은 아닌것입니다. 특별히 이 사람은 유대인들을 직접 상대로한 전도활동보다는 이방인들을 전도활동에 부름을 받은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이미 터를 닦아놓은 곳에는 자기가 가지 않을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은 가르침 자체가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굳이 그럴필요를 느끼지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이방인들을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르신 그 부름에 순종하여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 그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사도바울의 입장에서 보면은 이방인들에게 박해를 받은적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이 유대인들을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첫째는 뭐냐하면은 하여튼 이 유대인들이 안믿을려면은 자기네 땅에서만 안믿으면 되는데 이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당시에 로마사회이니까. 어디든지 다 흩어져서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한곳에서만 모여사는 것은 아니지않습니까. 디아스포라라 그러는데 다 흩어져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들이 종교적으로는 결코 섞이지를 않습니다. 자기의 유대민족으로서의 독특성들을 유지하면서 사는것입니다.
그 때에 이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보면은 그속에 유대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안믿으면은 그만인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니까. 안믿으면 그만인데 자기들이 믿고있는 유대교의 가르침과 사도바울의 가르침이 달랐기 때문에 아주 노골적으로 대적을 하면서 그 선교사역을 훼방을 놓았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상하게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유대인들과 만나서 그들에게 대적함을 받는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실 여기에서 유대인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뭐냐하면은 물론 사도바울이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름없이 영혼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지고 예수의 복음을 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로마서 같은데 보면은 특별히 사도바울이 유대인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과 영적인 깊은 부담감을 피력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뭐라고까지 말합니까. 내 골육지친중 그 유대인들이거든요. 그들중 몇이라도 구원을 얻을수 있다면은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내가 정말 원하는바로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 유대인 동족에 대한 간절하고 애절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것입니다.
왜냐하면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사도바울이 보니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 구약과 유대 종교에서 가르쳐주는 이 모든 지식들이 사실 옳지않은 것도 자기 유대교에서 가르쳐지는 지식가운데 많았지만은 기본적으로는 그 가르침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시는 말하자면은 요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수많은 가르침을 알고있으면서도 정작 그 가르침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못만나고 있는 이 사람들을 보면서 말하자면은 신앙적인 깊은 애정을 느낀것입니다. 그리고 부담을 느낀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아파하고 있는 장면을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지금 걷고 있는 그 불신앙의 길이 예전에 자신이 그대로 걸었던 길이거든요. 그러니까 더 강한 집착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애정의 표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이방인들에게 선교하는 현장에 유대인들이 나타나서 어김없이 훼방을 놓고 고통을 주었던 것도 있지만은 또 한편으로는 동족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애정 때문에 그들의 그 간계한 시험들이 자신에게 더많은 고통을 준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받는 비난이 똑같은 것이 아니라.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비난은 자기를 많이 아프게하는 법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해야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사람들이 끊임없이 사도바울에게 간계를 섰습니다. 간계라고 하는 것은 간사한 계략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간계라는 말도 히랍어 성경에는 복수이고 시험이라는 말도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간계들을 인한 시험들을 참고.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각양수많은 가지각색들의 간교한 꾀를 동원해서 사도바울의 복음사역의 앞길에 덫을 놓았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로 인하여서 견디기 힘든 그런 간사한 꾀들을 끊임없이 경험하면서 그런것들이 이제 자기의 복음 사역에 실질적인 시련, 혹은 시험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고통들을 당해야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봅시다. 사도바울을 유대인들이 왜이렇게 미워하는 것입니까? 왜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의 가는 곳곳마다 나타나서 간사한 꾀한 책략을 사용하고 그것을 통해서 시험의 덫을 만들어서 사도바울과 그 일행에게 고통을 주고 견디기 힘든 아픔을 주어서 심지어는 그들의 생명까지도 앗아갈려고 그렇게 간사하게 꾀를 쓰고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었던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아니 반대로 말해서 왜 사도바울이 그런 고통과 견디기 힘든 간계한 시험들을 견뎌야했던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그런 고통을 당하여야 했던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주님을 믿은 그의 삶에 만약에 목표가 없었다고 할 것 같으면은 이런 시련을 당했을 리가 없습니다. 조용히 자기 혼자믿고 아리비아 광야에서 도나 닦고 지냈더라면 이런 시험을 당했을 리가 없습니다. 아라비아에서 생활을 마치고 그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삶의 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길거리에서나 성중에서나 도시에서나 외각에서나 어디서든지 개인적으로나 혹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공중앞에서나 어디서든지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세주이시며 그분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이 있다는 이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영혼들을 얻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런 간사한 꽤와 시련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편하게 주님을 믿는길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주를 믿을뿐 아니라. 단지 주를 믿을뿐 아무것도 안하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믿는 것이 아니니까 문제입니다. 그냥 얼마나 좋아요. 찬양집회 잘한다는데 슬그머니 가서 앉아서 그거 엔조이하고 또 뭐 성경공부 잘한다 그러면 가서 배우면서 앤조이하고 어디 설교잘한다 그러는데 가서 또 잘듣고 이교회 저교회 다니면서 배불리면서 아무것도 하지않고 살아가는 삶, 고난이 없습니다. 그렇죠. 그러나 여러분들이 만약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서 아 이 감당할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당신의 형상을 가진 당신의 모양을 가진 영혼들에게 퍼부어지는 그 하나님의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몰라서 여전히 어둠속에 살아가고 있는 영혼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그 영혼을 위해서 무엇인가 섬기고자 결심을 하고 그 결심을 실행하기만하면 견디기 힘든 시련들이 다가옵니다. 정도이 차이는 있고 방향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섬기는 이 섬김은 원래 주님이 하셨던 일이고 주님 자신이 눈물없이 영혼들을 섬길수 없다라고 하는 사실, 고통과 아픔없이 아이를 낳은수 없는것처럼 고통과 아픔없이 영혼들을 위해서 진정으로 봉사할수없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당신의 생애를 통해서 친히 입증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영혼을 위해서 봉사할려고 마음을 먹고 그들이 진정으로 참된 신자가되기를 원하는 갈망을 가지고 그의 영혼을 위해서 무엇인가 봉사할려고 할라치면 반드시 이런 시험이 있습니다.
물론 요즘 유대인이 나타나서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러한 간계한 유대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여러분들을 가장 이해하고 사랑해주어야할, 여러분들의 아내나 여러분들의 남편이 그 유대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족중에서 그것을 이해하지못하고 여러분들에게 그런 유대인이 될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여러분들이 섬기는 영혼들 속에 주님을 아는 진정한 지식을 넣어주고 그래서 영혼의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는 악한 영들의 세력은 아주 궁극적인 악날한 유대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온갖 덫과 꾀와 그리고 사술들을 놓아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영혼들을 섬기는 그 현장에서 끊임없는 고통을 여러분들에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영혼들을 섬겨도 그것이 그저 하나의 일인것처럼 생각하고 대충 섬기던 사람들은 그런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영혼을 섬기되 자기가 돌보고있는 영혼의 진정한 변화와 행복을 전심으로 갈구하면서 그러면서 그 영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쏟아부으려고 하는 그런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영혼을 섬기는 그 길이 얼마나 어렵고 힘겨운 길인줄을 압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주님 앞에 변화된 신앙의 세계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아는 가르치는 자와, 그런 세계를 알지못하는 영혼들, 그 사이에는 그러한 골깊은 긴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을 다해서 이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마음을 다해서 이에게 진리를 가르치면서 변화되지않는 영혼을 쓸어안고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는 그 가르치는 자의 삶을 살아본 사람들은 단지 열심히 하기만하면 모든 일이 저절로 잘 될것이라고 하는 이상한 낙관주의는 믿지않습니다. 지금도 살아있어서 사단이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하는 가장 강력한 일은 무엇입니까? 열심히 그 교인들에게 목회를 하고 그 영혼들에게 진리를 먹이던 사람이 어느날 교회 때려치우고 자전차포를 차리는 법은없습니다. 집어치우고 식당 차려놓고 아 내가 오늘부로 직업을 바꿨어 그리고 햄버거 가게 앞에서 나타나는 일은 없습니다. 사단도 그런 것은 일어날것이라고 기대도 안합니다. 무엇을 기대하느냐하면은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집중하지못하도록. 그래서 목사님들도 이렇게 보면은 한가지씩 모두 남들은 모르는 혼자만 아는 그 무거운 짐들을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계속해서 무거운짐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정에서 자기를 잘 이해하지못해서 지는 짐, 또 부인이 영 목회사역에 취미가 없어서 자기를 힘들게하는 목회자가 있는가하면은 부인도 늘 눈물로 기도하고 열심인데 자식이 끊임없이 고통을 주어서 자신의 마음을 갈라놓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식도 괜찮고 부모두 괜찮으면 교인들이 또 인내를 시험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교인이 그렇지도 않고 모든 것이 원만한 사람들도 개인적인 건강이 어려워서 끊임없이 시련을 당하는 사람들도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는 목회자가 있는가하면은 정신적인 어려움을 당하고 신체적인 어려움을 당하는 못회자들도 뭐 수없이 많습니다. 모두 우리들이 싸워서 극복하고 이겨야할 기도의 제목들이기는 하지만은 그러나 항상 그것들이 겨냥하고 있는 목표자체는 뭐냐하면은 가르치는 자들이 그 영혼을 위해서 자신을 집중해서 쏟아부으시는 하나님 의지하면은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하게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흩어놓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유대인들이 놓았던 그 수많은 간교한 덫들, 모함들, 그리고 끊임없는 시련과 도전들, 이런 것들이 그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 진실된 가르치는 자로서 자기를 쏟아부어서 영혼안에 축복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시련이 항상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적과 전투를 한다고 할 때에 이제 상상의 날개를 펴보세요. 특공대원이 되어가지고 얼굴에 검정칠을 하고 그리고 군복을 입고 단창을 잔뜩차고 그리고 총을 들고 그리고 바로 적군의 진지가 있는 그 앞부분까지 갔습니다. 마침 갔더니 진짜 기가막힌 때였습니다. 애들은 밤에 어스름한 시간인데 전부다 흩어져서 여기저기에서 노는 애들도있고 또 환자들을 돌보는 위생병들도 있고 또 뭐 삽이나 곡괭이를 가지고 일하는 사병들도 있는데 그런데 여러분 제일먼저 순식간에 적의 전력을 무력화시켜야지만 되겠는데 누구에게 제일먼저 총을 겨누겠습니까. 앉아서 고스톱치는 사병을 향해서 먼저 총을 겨누겠습니까. 그들을 고스톱치게 놔두세요. 괜찮습니다. 아무리 거기에서 광을 팔아도 그 광 때문에 우리가 죽는일은 없습니다. 놔두는것입니다. 위생병이 있습니다. 위생병이 자기네 병사들을 치료하면 궁극적으로는 그의 치료받는 사람이 살아날것이니까. 또 그들이 다시 입대하면은 우리의 적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2-3년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 위생병들도 그저 하얀까운입고 돌아다니면서 머큐럼바르게 내버려두세요. 누구를 겨냥하겠습니까. 밥하고 있는 사병, 물론 그 밥을 잘해서 밥을 먹이면 적군이 힘을 얻으니까 궁극적으로 적군이 힘이 강해지면은 우리에게 불리하겠지요. 그래도 그 밥먹고 소화시켜서 힘을 낼려면 몇시간 걸려야됩니다. 그러니까 된장국 끊이는 사람들은 끊이게 놔두고 콩밥하는 사람들은 콩밥하게 내버려두세요. 괜찮습니다. 가장 먼저 적의 부대를 괴멸시키기 위해서 집중사격을 가해야될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렇죠 총을 현재 소재하고 뭔가 우리를 향해 위협적인 존재가, 이렇게 총을 메고 있다가 이렇게하면은 위협적인 존재가되지않습니까. 총을 누르면 바로 총알이 날아오니까. 그 사람들을 먼저 저격해버리는 것이 적의 부대를 괴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특공대원으로 간 사람이 한 30명쯤 되는데 저격부대가 전체적으로 100쯤 됩니다. 그러면 사실 싸우면 안되지않습니까. 그래 100쯤 되는데 그중에서 딱 보니까 총들고 즉시 자세만 바꾸면은 우리에게 사격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불과한 30명밖에 안되요. 그럴 때 한명이 하나씩 겨냥을해서 30명을 딱 쓰러뜨리고 나면은 지금 된장국 끓이던 사람이 군복 갈아입고 군화신고 총찾으러 갈려면 한참 걸려야됩니다. 더군다나 그 밥먹고 힘내서 싸울려면 또 며칠 걸려야됩니다. 그러니까 순식간에 지금 전투태세에 있는 사람들만 저격해버리면은 100명의 부대는 30명의 특공대원들 앞에 그대로 괴멸되어버리고맙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니 방위를 갔다온 나도 아는데 현역갔다온 여러분들이 왜 모르겠습니까. 그렇죠. 당연합니다. 사단이 자기의 졸개들을 보내서 간계를 사용하여 저희들을 괴롭혀서 자기의 사역의 마음을 쏟지못하도록 방해를 하라 그리고 투입이 되었을 때 누구를 겨냥하겠습니까.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직접적으로 헌신하고 일하는 교사, 구역장, 이런 사람들을 겨냥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집중적인 사격을 가해서 수많은 간계의 화살들을 맞고 거꾸러지도록 그래서 그의 사역을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게 아주 오래전서부터 계속 교과서적으로 통용되어오는 전법입니다. 그래서 한 교회에 하나님의 진리를 잘 가르쳐서 영혼들의 눈을 뜨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도구들이 모두 사라졌을 경우에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오합지졸입니다. 뭐가 뭔지 쉽게 이야기하면은 비행기가 날아가도 거기에서 폭탄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저것이 적기인지 아군기인지 구별할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무슨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겠는가.
그러니까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말씀드린것입니다. 그리차는 이 직분에 제일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은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그분의 사랑의 감화를 받은사람, 그래서 정말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눈뜬사람, 뭐 완성된 사람일수는 없죠. 그래서 끊임없이 굳 크리스찬이 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이것이 가르치는 자로서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세요. 우리들이 가르치는 직분을 감당해 나가는 것은 너무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여러분도 부분적으로 경험해보셨겠죠. 교역자도 마찬가지죠. 저는 교사를 하면서도 그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교사를 잘할때도 있었고 못할때도 있었는데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계속 줄어드는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교역자가 된 다음부터는 더 심했습니다. 그 영혼들이 자꾸 교회에 안나오는 것입니다. 나오는 애들도 교역자의 양심을 걸고 하여튼 그 영혼들이 잘 되어가고있다.라고 말할수 없는 상태가 계속되어가고 그런 현상들이 나도 저항할수 없게 누룩처럼 번져갈때에 그러면서 보이지않는 교회가 쓰러지는 지체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할 때 그 때 그 고통을 누구에게 설명할수 있겠습니까. 그런 고통과 아픔이 영혼을 직접적으로 돌보고 그들의 변화를 위해서 헌신하지않는 사람들에게는 없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은 매우 엷습니다.
물론 시시때때로 하나님께서 내가 교사도 아니고 구역장도 아니지만은 그러나 내 가족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게 하시고 그의 변화되지않는 영혼을 인해서 안타까워 하게 하실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저 교회에서 교사를 시켰느냐 구역장을 맡았느냐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은 진정으로 영혼을 위해서 지금 기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자기의 가족들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고 있다면은 자기의 가족들을 위한 중보자가된것입니다.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기회만 있으면은 그 가족들에게 가르치고 싶어할것이고 예수의 사랑을 자랑하고 싶어할것입니다. 그런 시련과 아픔이 영혼을 위해서 섬길려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틴루터같은 사람은 당시에 상황이 특별하기는 했지만은 참된 설교자가 누구냐그러니까 고난을 안받으면 다 가짜다. 그랬습니다. 그 당시에 그런 중세시대에 참된 복음을 설교한다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반대자들에게 직면할것이고. 그런 반대자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고 할것같으면은 그것은 참된 것은 외치지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했으니까. 아주 간단한것입니다.
오늘날 방향은 다르기는 하지만은 그러나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을 위해서 아파할줄 모르는 교사. 그는 그의 눈물 흘리는 중보기도를 받지못하는 영혼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입니다. 왜 변화되지않는 영혼을 하나님이 맡겨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며 아파할수 있는 고통을 못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병든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못한 영혼을 끓어안고도 행복할수 있는 가르치는 자는 그 사람 자신이 너무 불행한 사람입니다. 영혼을 섬기고 그 영혼을 진실한 그리스찬이 되게하기 위해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눈물 흘려야하는 이유는 무엇때문이냐하면은 자신의 힘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저 영혼이 변화되지 않는 것이 얼마나 고통이고 아픔인지도 알지만은 그러나 그렇게 아프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자신이 그 영혼을 위해서 해줄수 있는 것이 너무 없다라고 하는 것. 힘을 다해서 복음을 가르치지만 가르친다고 누구나 믿는 것이 아닙니다. 힘을 다해서 그에게 전도하지만 전도받은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온마음을 다해서 그의 영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만 그 영혼이 그 말씀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이에서 할수 있는 일은 아픔을 느끼면서 하나님께 그 영혼의 참된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많이 섬기면 그러면 겸비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아까 찬송부르면서도 앉아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영혼을 위해서 열심히 헌신하고 그 영혼을 위해서 봉사하다가 보면은 결국에는 자기의 섬김을 통해서 그 영혼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되는 것입니다. 나의 섬김을 사용했지만은 그러나 내가 그것을 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변화의 은총이 주어질때까지 아파하며 눈물흘리는 목양의 마음, 그 마음이 영혼을 위해 섬기는 사람의 마음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웬만큼 아프지않으면은 잘 울지않습니다. 그렇죠. 웬만큼 좋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눈물흘리지않습니다. 다음주일날 점심 시간에는 고깃국을 끓여드리겠습니다. 아무도 안울잖습니까. 그정도 기쁨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아픔이거든요.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그 눈물도 바로 그 눈물에 대한 경험과 이 시험에 대한 경험이 연관이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눈물을 이야기하다가 얼핏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유대인들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들,
이 세상 온갖 시험,
내 맘을 흔들고
저 악한 원수들이
안팎에 있으나.
그 고백이 사실입니다. 안락하고 편안한길을 걸어갈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늘을 찢고 내려오는 신령한 기쁨의 감동도 없지만은 또 상대적으로 눈물을 머금어야하는 영혼에대한 아픔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과 같이 정말 그 영혼을 위해서 살고자하고, 그리고 마치 자신이 그 영혼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않으면 주님의 마음으로 그 영혼을 끌어안고 눈물흘리지 않으면은 그 영혼이 영원히 변화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생각하는 마음으로 영혼을 섬길 때 그에게는 끊임없는 고통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을 그런 자세로 영혼을 섬겨야지만 자신이 계속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을 섬기는 이 일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섬기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영혼을 섬기는 일이기도 합니다. 게으르고 나태하게 감당하면 하나님이 영혼을 그렇게 섬겼기 때문에 벌을 내리신다고 우리들이 생각할수 있지만은 그러나 사실을 그렇게 나태하게 섬기는 그 자체를 통해서 섬기는 자 자신의 영혼이 말하자면은 징벌과 방불한 가난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혼을 위해서 섬기는 이 일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큰 축복과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여러분이 알고있고 본받고 싶어하는 훌륭한 그리스도인들 영적인 깊이에 있어서나 주님을 향한 사랑의 정열에 있어서나 아니면은 말씀에 대한 뜨거운 인격적인 사랑에 있어서나, 자기를 버린 헌신과 정절에 있어서나 유별나게 뛰어나서 여러분들의 흠모함을 받을만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그들중에서 영혼을 섬기지않은 사람이 있으면 얘기해보세요. 교회에서 행정이나 잘 움직였는데 그렇게 여러분들이 숭고할정도로 그렇게 아름다운 그런 영혼을 가진사람이 있는가 한번생각해보세요. 없습니다.
내가 존경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없습니다. 모두 영혼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쏟아붓기 위해서 혼신의 사투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싸움이 있었고 지금도 내안에 있는 싸움입니다. 왜그럴까. 참 이상하지않습니까. 그것은 뭐냐하면은 한 사람이 그렇게 뜨거운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하고 뜨거운 신앙의 사람이 될 때에 그 표현은 어떻게 했던지간에 그 중심부에는 그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만남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기하게도 이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사랑의 특징은 뭐냐하면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을 향해서만 묶여있을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차례대로 지켜야할 계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가지 사랑이 하나의 아가페의 사랑안에서 통합되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 주님을 모른는 영혼들이 너무 불쌍하다. 그런생각 언제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안 즉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고 나면은 그 사랑이 진실하기만 하면은 그 형태는 여러 가지일수 있습니다. 교사를 할수도 있고 안할수도 있고 구역장을 할수도 있고 복음반 교사를 할수도 있고 뭐또 그렇게 전혀 하지않을수도 있지만은 그러나 하여튼 중심적인 변화는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깊은 사랑을 경험하고나면은 즉시 가슴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은 뭐냐하면은 무엇인가 영혼을 위해서 섬기고 봉사해야되겠다.라고 하는 마음의 강력한 갈망이 생겨나는것입니다. 이것은 훈련 끝에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속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변화입니다.
어떤 잡지에선가 읽은 기억이나는데 뇌성 소아마비로 일생을 누워지내는 환자가 있었는데 그나마 병이 걸렸습니다. 결핵인가 무슨 병이걸려서 시한부인생이 되었습니다. 죽어가는데 그런데 그에게 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고 변화를 받아서 예수님의 참사랑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말씀을 먹으면서 은혜생활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다들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하면은 이 사람은 너무나 불쌍하다. 왜 몸만 건강했더라면은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았으니까. 주님을 많이 섬길수 있었을텐데 이 사람은 주님을 믿기만하고 지체부자유자로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한체 누워있다가 죽었으니 은혜는 많이 받아지만은 주를 섬길 기회가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누가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을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이 그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아니다. 그 사람이 죽고나서 마지막 시신을 자기가 수습을 했는데 베개 속에 이렇게보니까 얼마나 자주 꺼냈었는지 그 부자유한 손으로 꺼내서 덜덜 떨면서 봤는지 너덜너덜하게 헤져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동네사람, 자기에게 와서 자기를 가끔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있더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보고 써달라그랬는데 그것을 놓고 기도를 한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적혀있는 사람들중에 상당수가 최근에 회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거보세요. 움직일수 있는 능력조차없고 숨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깊이 알고나니까. 영혼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이 생각이났고 그 헌신이 생각이난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들의 참된 구원과 변화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고 그 기도의 응답이 되어가던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끊임없는 간계와 시련을 계속당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을 위해서 진실하게 섬기려하고 그 영혼의 변화가 천하보다도 소중하다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의 가르침이 여러분들의 사역의 중심이 인쳐져있기만하면은 여러분들의 사역에도 이런 시험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속에근심 밖에걱정
늘시험하여도
갈망하는 것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사도바울이 만약에 그렇게 빛으로 나타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났다 할지라도 그가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하고 가르치는자로서 헌신된 생애를 살지않았더라면 그가 그토록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할수 없습니다. 속에 근심 밖에 걱정 큰 시험에 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대로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산다고 할것같으면은 그런 시련이 없습니다. 모진 비바람을 맞는다는 이야기는 그 비바람속에서도 갈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시련의 물결을 헤쳐간다는 이야기는 그 시련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가야할 목표가 있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요. 아픔입니다. 정말 영혼을 위해서 섬기는 그 진실한 사랑, 그리고 무엇인가 자신의 살아있는 이 존재가 영혼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으며 내가 발견하고 내가 경험하고 내가 만난 하나님의 그 사랑이 너무나 크고 그런 주님의 사랑은 나한테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르치면서도 거의 변화시키지못하는 이 영혼을 위해서도 계속되고 있는데 그런데 내 안에 있는 무엇이 그리고 내 밖에 있는 어떤 섬김의 부족한 부분들이 이 복스러운 영혼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고뇌할정도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은 그에게는 반드시 시련이 있습니다. 영혼들에게 몇번 가르치고 변화되지 않으니까 야! 너희 구역의 아무게 왜 그렇게 변화가 안되느냐. 아이! 뭘 그것을 복잡하게 생각하십니까 강팍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칼을 갈고 계실것입니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의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가르치는 영혼들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영혼이 주를 바라보고 복스러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면 모두 누구때문입니까. 주님 때문에 영혼이 변화되지 않고 곤고하게 살고 그리고 아파하면 모두 우리 때문입니다. 교사의 직분 구역장의 직분 영혼을 위해서 섬기는 이 모든 직분은 결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섬김의 임하는 전체적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는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여러분 저는 확신합니다. 변화되지 않는 영혼을 밤마다 끌어안고 아파하며 그 영혼을 위해 흐느껴 수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영혼이 변화되지않고 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아파요.결과는 아부것도 없습니다.그래도 그 흘린 눈물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면류관에 매달리는 보석들이 될것입니다. 그러한 눈물을 받아줄 사람은 세상으로 가버렸지만은 그 눈물은 단지 회심하지못한 그 영혼 보라고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그 영혼을 자기에게 맡겨주신 우리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기 때문에 사람은 가도 주님은 남아계십니다. 이러한 절박한 목표가 있는 사람들은 속으로는 끊임없는 근심과 걱정 밖으로는 끊임없는 위협 그리고 악한 마귀의 사단으로서는 끊임없는 공박을 당합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시련과 어려움앞에 직면하게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영혼을 위해서 일하는 일군으로서 이러한 간계한 시험을 수없이 당하면서 괴로움과 고통을 당했던것입니다.
예수님게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신 다음에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나니까 세 번을 대답하고 나니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이 뭐에요. 네가 젊어서는 띠띠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마음껏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사람들이 너를 띠띠우고 너를 원치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니 이는 그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를 말씀하심이러라. 그래요. 주님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베드로가 실패했지만 실패한것도 진실이었지만은 주님을 사랑한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더니 주님이 어린양들을 맡겨주셨습니다. 그 영혼들을 돌보라는 주님의 명령에 아멘하였더니 주님께서 주님께서 주시는 예언은 너는 죽는다. 박해를 받아서 너는 죽는다. 그것입니다. 그 고난이 우리에게 늘 있는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혼자 잘되어서 주님 바라보고 사는 것 같지만은 여러분의 영혼이 이만큼 자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큰 은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은혜에서 소외시키지 않으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특별한 은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은총은 은총 홀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은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위해서 눈물흘렸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지금 영혼을 돌보면서 경험하고있는 그런 아픔속에서 부족하나마 여러분의 영혼을 섬길려고 몸부림 치는가운데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지금 이 자리에 있게해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잊은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그러한 목양의 관계를 통해서 많은 희생과 눈물로 양육된 사람들이 그것을 본받으면서 자신들도 영혼을 위해서 자신을 허비하고 다써버리는 것을 아깝지않게 생각하며 헌신하는 이 연쇠적인 작용속에서 참된 기독교 신앙이 전수되어서 내려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영혼을 돌보면서 그길이 시험이 많고 걱정이 많습니다. 내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과 환경과 상황으로보면은 내가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구역장이나 하고 앉아있을 때가 아닙니다. 내가 한가하게 이렇게 교사나 하고 있을 그런때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적인 눈으로보면은 그것이 하찮은 일같지만은 천하보다도 더 귀한 나의 영혼을 여기에 있게만들어준 것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런 섬김을 통해서 여기까지 오게된것입니다.
보세요. 여러분들은 가끔 옛날생각하면서 옛날에 내가 주일학교때는 저도 가끔 그런 얘기했습니다. 주일학교때는 선생님들이 나를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고 목사님들이 나에게 복음도 제대로 안가르쳐주고 물론 그 말이 사실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여튼 누구인지를 알수없지만은 분명히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흘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피흘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만큼 서서 하나님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주님의 그 큰 인격을 경험한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부르셔서 이제는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렇게 영혼들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이 목표가 있을때에 끊임없이 시련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런데 잊지말아야될 사실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은 그런 아픔과 고통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보니까 뭐라그랬느냐면은 유대인들의 간계들을 인한 시험들을 어떻게 했다고요. 이렇게 신통치 않은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유대인들이 간계를 써서 나를 시험했으나. 내가 모두 격파하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나를 박해했으나. 다 때려 눕히고 이렇게 표현을 해야하는데. 사도바울이 불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고했습니다. 똑똑한 사람아닙니까. 너희들이 그 구석에서 나를 몰아낼려고 괴계를 꾸며 야 내가 한수위지 이 사람아. 야 모여. 교회에서 저쪽에서 이상한짓 하니까 이쪽에서 모여서 훨씬 이상한 짓을 꾸미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상한짓 하던 사람들이 그냥 깜짝놀라게 그래서 모두 때려눕히게 말이지. 사도 바울은 그런식으로 선교하지를 않았습니다. 사랑의 무저항주의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을 목양하시는 방법이 선지자들을 끊임없이 보내셨습니다. 가라, 패역한 내 백성 목이 곧은 내 백성, 소와 말들도 자기 구유를 알고 주인을 알건만은 내 백성은 나를 모르는 구나. 네가 가라. 그러면서 보낼때에 누구를 딸려보냈습니까. 최신 병기를 가득 메어주시면서 열심히 전해라. 수틀리면 다 쫘버려라. 그러지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그렇게 미워하셔도 선지자들에게는 그 하나님의 백성들을 심판하는 권세를 주시지않았습니다. 그죠. 그런데 보내시는 것입니다. 칼한자루없이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열심히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파토스로 그리고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들으면 다행이고 안들으면 맞아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선지자들이 피흘리면서 죽어갔던것입니다. 이것이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사랑에 무저항주의입니다. 주님 자신은 당신을 거스리는 자들을 저항하시면서 의로 징계하실지라도 우리가 대포를 쏘고 총을 쫘서 사람들을 죽일수 있는 그런 권세를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수많은 간계한 꾀들을 동원해서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의 사역에 홰방을 놓고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사도바울이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대책반을 만든적은 없었습니다.
제가 몇해전에 벌썬 한 10년넘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큰 감화를 받았습니다. 한번 찾아볼까요. 고린도후서 12장 내가 11절을 읽을테니까 여러분들이 12절을 읽으세요.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아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싫으면 그냥 싫다그러면 되는데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권 자체를 뒤흔들어 놓음으로서 그의 가르친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하도 답답하니까 야 나 진짜 사도야. 너희들은 12사도만 사도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그 사람들보다 부족하지가 않아 내 진짜 개인적인 이야기 이기 때문에 안할려고 했는데 그런뜻이거든요. 내가 할수없이 말을하는데 야 나도 그래도 사도다. 그래도 이 사람들이 안믿을 것 같으니까 내가 사도라는 표가 있다. 내가 증명서를 보여주면 너희들이 믿겠지 그런데 그 증명서가 뭐냐 내가 참았다. 내가 사도가 아니라면 이렇게 참을수가 있겠느냐. 그런데 그게 표적과 기사와 능력보다도 더 우선적인 증명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성경구적이 제 인생에 있어서 성화의 중요한 한 계기가되었습니다. 솔직히말해서 우리 같았으면 나 같았으면 그랬을것입니다. 사도가 아니라고 막 그러는것입니다. 그까짓거 그 당시에 사도의 권능이었땠습니까. 이 하면 쓰러져 죽지않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실고 나가는거 보지않습니까. 너희들이 내가 사도가 아니라고 그래 나보고 사도가 아니라는 계네들 제일 앞줄에 서있으라그래 가가지고 한번에 싹, 오주님 시체들을 인하여 영광을 받으소서. 할텐데. 대단한 사람입니다. 나같았으면 당장 뛰어갔던지 아니면은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도바울이 진실한 사도라는 것을 보았고, 들었고 목격했고 경험했고, 확신한다. 100만인 서명운동 쭉해서 너희들 이거보았지 100만명이 나를 서명했는데 고린도교회 조그마한것들 몇 명이서 말이지. 너희들 나보고 사도가 아니라고 하는데 그게 말이되느냐. 한번 해볼거야 앞줄에서 그렇게 해놓고 쫙해서 죽는것은 그만두고라도 절도만해도. 그런데 아닙니다. 사도가 입증한 것이 그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표적과 기사가 사도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것중에 하나였습니다. 더군다나 사도바울과 같이 주님 가까이에서 교제를 누리면서 12사도처럼 살아오지 않은 사람에게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것과 이런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것이 이 두 개가 쌍벽을 이루는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은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내가 그리스도께로 부름을 받은 참된 사도라는 증표가있는데 그것은 뭐냐하면은 인내. 참는 것이다. 나를 유대인의 간계들을 인하여 당한 시험을 비롯하여 믿는 자들로부터 오는 수 많은 박해와 이방인들로부터의 그 생명과 사망을 넘나드는 그 헤아릴수 없는 박해속에서도 ( ? )함을 잃지않고 신앙을 지키면서 너희들을 섬기게만든 이 참음의 근본적인 동기가 내가 만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때문이었다. 참 사도의 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영혼들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우러나온 참음이었다.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부인할 수가 없는것입니다. 사도바울을 그것을 보여준것입니다.
시련, 있지요. 고통, 있지요. 아픔 물론있지요. 왜 나만 이렇게 영혼들을 끌어안고 이렇게 아파하면서 이렇게 살아야하나.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을 기적적인 능력으로 격파하고 심지어는 자기를 비난하는 그 수많은 비난을 그냥 창칼로 진압을 할려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참은것입니다. 그런 자세가 바로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자세입니다.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나 주님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그저 괴로움이 당하면 온몸으로 맞으면서 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사용하셨습니다. 기적과 이적 큰 능력을 주님이 행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을 방어하는데 사용하신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데는 사용을하셨죠.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묶어갈때에 예수님이 무슨 기적을 행하셨습니까. 그러나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떨어진 귀를 베드로의 칼을 맞고 떨어진 그 귀를 붙여주시는 데에는 기적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검과 몽치 그 수많은 채찍으로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는 자신을 보호하는데는 사용하지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냥 참으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주님이 가셨던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양의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을 위해서 섬기는 길입니다. 그 영혼을 위해서 자신이 죽음으로 그 영혼이 살수있다고 믿는 주님 앞에 나는 죽고 내가 죽음으로 내가 돌보는 영혼들이 살수있다고 믿는 이 또다른 종류의 부활신앙입니다. 이게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들, 그 영혼을 위해서 섬기려고 할 때에 끊임없이 다가오는 속에 근심 밖에 걱정 그 수많은 아픔과 괴로움들을 참고 이기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그 자세가 참는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이 참음의 원동력이 어디에서 오느냐. 이 참음의 원동력은 자기 자신의 끝기있는 그 어떤 인간성에서 온다고 생각하면은 안됩니다. 사도바울의 별명이 열혈남아입니다. 홍콩영화 같지만은 혈기충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참는것하고는 관계가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참을수 있었던 것은 뭐냐하면은 자기를위해 참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본것입니다.
어느날 저에게 말씀을 가르침을 받던 어느자매가 전화가 왔습니다. 애들을 둘을 낳았는데 지겹도록 말을 안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말을 안듣는지 그리고 자기가 말안들을 때 얼마나 속상하셨을지. 자기가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참 그러고 보니까 말하는 사람은 은혜가 안될지모르지만은 듣는 나는 은혜가 되더라고요. 야 그래. 진짜. 그 말이 사실일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안되는데 말이죠. 그렇습니다. 주님 때문에 이 열혈남아인 바울이 참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간단하지않습니까. 그 영혼을 섬길려고 하는데 견디기 힘든 고통과 압박들이 다가오고 양심의 가책들이 다가옵니다. 해방되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냥 훌훌 떠나면 되는거지 누가 말려, 지금이라도 공과책 내려놓고 그만두겠다는데 누가 말려요. 누가 법원에 고소를 하겠습니까. 유치장에 집어넣겠어요. 얼마든지 그 속박에서 해방될수 있는 길이있습니다. 속박에서 해방되는 그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도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않겠습니까. 은혜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런데 이런 견디기 힘든 이 시험들을 참게 만드는 그 원동력이 뭐냐하면은 잘들어보세요. 이게 뭐냐하면은 영혼을 가르치면서 그 영혼의 잘됨을 위해서 분투하며 아파하는 사람들에게는 남이알지못하는 은혜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위로의 은혜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애통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그렇게 하지않는 사람들은 경험하지못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신령한 사람들은 신령한 목적, 거룩한 은혜의 사역을 위해서 헌신하다가 아파하기까지 고통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쓰러질만할 즈음에 하나님께서 이제는 내 기력이 다했다. 이제는 내가 도저히 이 영혼들을 감당할수 없다라고 주저앉을만할때에 항상 어김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 내가 네게 가르침을 받는 영혼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랑, 내가 영혼들을 가르치며 바로처럼 살아가는 내 모습을 보며 비웃는 사람들, 유별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해할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사람들은 이해할수 없네
주를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자기의 세상적인 부와 명예를 위해서 낙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위로가 영혼을 섬기다가 낙망해서 뒹구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있습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하나님이 결코 그 사람들을 혼자 버려두시지않습니다. 증명을할께요. 예수님께서 마지막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죠. 너희는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말씀하셨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은 이제 승천해가시고 사도들은 이제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서슬이 시퍼런 로마의 치아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들을 가르쳐 지켜행하게 할수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파송을 하시면서 그게 뭐에요. 볼찌어다 내가 세상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일을찌니라. 집에서 뒹굴면서 노는 사람들에게 그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파하러가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의 탐험가요. 선교사였지않습니까. 남다르게 거룩한 생애를 산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탐사를 취제하던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 사람의 탐사한 상황을 기록을 해서 보도를 하면은 특종기사가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교통도 불편하던 때니까. 그런데 그 리빙스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이 힘겨운 탐험과 선교활동을 이렇게 지치지않는 열정으로 이어올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러니까 그 때에 이 리빙스턴 선교사가 조용히 눈을감고 외운 성경구절이 그것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지니라. 하나님이 고난받는 선지자들을 세상에서 끊임없이 고난받게하시면서 칼한자루 안보내주셨는데 그래도 선지자들이 쓰러지지않고 자기의 사역을 감당해 나갈수 있었던 놀라운 은혜의 비밀이 뭐냐하면은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의 세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일일이 증거를 들자면은 헤아릴수 없습니다. 고난을 받던 스가랴 선지자에게 말세의 환상을 보여주고 포로로 끌려가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곤고해하던 다니엘에게 미래에될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역사와 그리고 이 세상 나라의 허무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주의 복음과 증거를 위해서 박해를 받아 밧모섬에 귀향을 간 절의고도의 섬에 외롭게 있는 요한이 위로를 받을수 있었던 것은 말세에 되어질 위대한 일들과 어린양의 위대한 혼인잔치, 새하늘과 새땅의 장엄한 전망들을 보여주심으로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가르치는 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위로가 있습니다. 영혼을 위해 흐느끼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그 기도에는 눈물이 배어있습니다. 영혼의 참다운 변화를 위해서 땀흘리다 돌아온 그 얼굴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에는 주님의 사랑의 그 영혼을 위한 주님의 사랑과 영혼을 위한 고통이 베어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런 삶이 녹아있는 기도의 제목들을 속달편지처럼 받아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해야합니까. 주님이 우리를 영혼을 돌보는 사람으로 불렀습니다.
지난해에도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수많은 이유와 핑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은 그런 환경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혼을 향한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참는 그 인내가 우리에게 부족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우리를 가르치는자로 불러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의 결핍이라는 것 이외의 다른말로 변명할것이 없습니다. 많이 사랑한 사람은 많이 인내할것이요. 적게 사랑하는 사람은 조금 인내할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여러분들이 돌볼때에 이렇게 시험을 참는 인내로서 주님을 사랑하는 그 참음으로서 영혼들을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여러분 자신을 다 드리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영혼들에게 여러분들을 통하여 위대한 일들을 행하시기를 지금도 계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주님을 섬김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20:19)
우리가 두 주간에 걸쳐서 계속해서 이렇게 가르치라. 즉 가르친 자로서 보여야할 모본이 어떤것이가 하는 그것을 우리들이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또 그 모본은 우리들이 살아야할 삶이기도합니다. 첫주에 저희들이 본 것은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그부분을 우리들이 살펴보았고 진정한 겸손의 의미와 그리고 가르치는 자들에게 있어서 눈물이 있는 사역의 중요성, 그리고 왜 그런 눈물속에서 사역하지 않을수 없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지난주일 오후에는 시간이 좀 길어지기는 했습니다만은 “유대인들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그부분을 설명하면서 영혼을 위해서 섬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끊임없는 간교한 악한 세력과 상황들의 도전들이 있고 그런 속에서 정말 진실한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주를 섬긴것과” 거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앞에 나오는 사도가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에서 히랍어 성경에서 보면은 간계도 복수로 나오고 시험도 복수로 나온다고 말씀드렸죠. 그죠. 그래서 유대인들의 많은 간사한 모략, 사악한 꽤 그런 것들이 많이 있었고 또 그런 것들이 많은 시험을 자신에게 불러왔지만은 그 모두를 이렇게 하늘의 능력을 불러내리는 어떤 권세를 가지고 제압할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렀기 때문에 디모데후서 1장 8절에서도 디모데에게 사도바울이 편지하면서 너는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하나님의 능력을따라, 능력에 비례해서 그런 뜻이되겠죠.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가면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말이됩니까. 능력이 있는데 고난을 왜받습니까. 능력이 있는데 고난을 왜받아요. 핍박할려고 손을들면 한번 손을 들어서 장풍을 일으키던지, 한번 기도해서 뭐 어떻게 무슨 수를 내보면 되겠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능력을 자신의 고난을 피하는 수단으로서는 사용하실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간파를 한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능력을 따라 고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고난도 없습니다. 있지.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생활이 얼마나 고난인데 그게. 구역장 전화해, 교구 교역자 전화해, 그 등살에 이끌려서 끌려나오는 것도 진짜 순교의 고난입니다. 그럴 것입니다. 없다.이것입니다.
그리고 능력을 많이 받으면 우리는 흔히 능력주시옵소서 그러는데 능력을 많이 받으면 그 능력 때문에 고생을 덜하고 많은 성과를 올릴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큰 능력을 받았던 사람들은 고속도로와 같은 길을 좋은 승용차타고 달리는 것과 같은 그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가시밭길 형극의 길을 걸어온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더많이 알면 더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왜 그 하나님 모르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아파하고, 그들에게 무엇인가 자신을 희생해서 그 지식들을 전달해주지않으면 안되는 섬김에 자신을 드려야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능력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쨋던지간에 그런 속에서 사도바울이 그런 많은 간계한 시험들을 인해서 견딜수 없는 그 고통을 당하면서 그가 보일수 있는 가장 중요한 미덕은 무엇이었느냐하면은 참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고린도후서 12장 12절을 예로들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사도바울보고 니가 무슨 사도냐. 그럴 때에 나 진짜 사도다. 증거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러면서 내민 것이 이적과 기사가 아니라. 뭐가 먼저였다고요. 예. 참음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진실하게 이 고난을 참고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면 내가 사도가 아니면은 이렇게 참을수가 있겠느냐. 아주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을 준것입니다.
그런데 잘 참고 인내한 것이 빛날 수 있었던이유는 그 인내를 통해서 고난받으면서도 자기 해야할일을 했기 때문에 그 인내가 빛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진짜 환란을 많이 당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걸어온 이 신앙의 길이 간단한 길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문을 그렇게 열었습니다. 산전수전 화생방전까지 겪으면서 그러면서 제가 이 인생의 굽이굽이 이 환란의 길을 수없이 걸어오고 그 속에서 그 모든 환란을 다 참았습니다. 그런데 신앙은 별로 없었습니다. 이거 누구 놀리는 것입니까. 환란을 많이 겪었는데 제가 다 참고 견뎠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네가 옳다. 그리고 인정을 해주셨습니다. 이래야지만 야! 결국 인내가 연단을 이뤘구나 이렇게 할수있는 것 아닙니까.) 사도바울도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간교한 시험을 당하면서 그 견디기 힘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는 그런 고통스러운 아픔을 당했습니다. 시련을 당했는데 다 참았습니다. 그렇게 참는 것이 빛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 그런 시련들이 바울로 하여금 살지못하게 방해했던 그 삶을 결국은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주를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도바울이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이니” 그러면서 그가 아시아에서 생활했던 3년이 넘는 자신의 전 생활을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도바울의 3년이 넘는 삶의 대부분은 무엇을 위해서 수고한 삶이었습니까? 영혼들을 위해서 수고한 삶이었습니다. 전도하고 그리고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을 부여잡고 눈물을 뿌리면서 그리고 심지어는 성화에서 오는 자신의 거룩한 긴장관계 속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해서 눈물을 흘리고 분투하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삶의 그 외관은 사람들과 관계된 삶이었습니다. 그죠. 자기고 관련되었지만은 그러나 영혼들과 관련된 삶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사람을 위해 수고한 시간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이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사람 때문에 울고, 사람들에게 뭔가를 해주었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는 뭐라고 얘기해요. “유익하던 무엇이든지 공중앞에서나 개인 앞에서나 내가 거리낌이 없이 가르친것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회개를 내가 전파한 것이다.” 그랬습니다. 모두 누구에게 한것입니까? 허공중에서 진공속에서 산 속에서 자기 한자 싸운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항상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의 모든 시간과, 모든 생애, 아시아에서 3년이 넘는 좋은 생애가 사람들에게 쏟아부어진 생애였습니다. 사도바울, 하면 아시아에서 그가 섬기면서 살아온 생애를 상기할 때에 많은 사람은 한적한 기도원에서 혼자서 조용히 누워있는 그림이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경치좋은 수도원에서 홀로 명상에 잠겨있는 그 모습이 아닙니다. 죄와 슬픔, 고통, 아픔, 눈물 이런 것들이 가득한 이방의 신상과 그리고 무지한 종교들로 가득찬 그 도시 한복판을 누비면서 그러면서 사람을 섬긴생활이었습니다. 사람을 섬긴 생애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하면은 자기는 주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이 정신이 가르치는 자에게는 시종일관 유지되어야합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랬대요. 성도가 그 목사님에게 받은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그 말씀의 은혜, 신앙적인 감화가 너무 감사해서 그 목사님이 그 교회를 떠나는데 펑펑 울면서 목사님을 따라오면서 목사님 손을 놓지를 못하면서 그러는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평생 살아도 죽을때까지 목사님을 잊어버릴수가 없습니다. 목사님은 내 생명의 은인입니다. 내가 목사님 못만났더라면 죄와 어둠속에서 제가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목사님이 나를 진리의 빛으로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무엇을해야지 목사님 은혜에 보답할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우리의 신금을 울립니다. 형제여! 그대는 나에게 섬김을 받았지만은 나는 단 한순간도 그대를 섬긴적이 없습니다. 나는 우리 주님 한분을 섬겼을 뿐입니다. 과도히 나에게 대해서 신세를 진것같은 느낌을 갖지마십시오. 모두 주님이 그대를 길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반대로 뒤집어가지고 목사가 나한테 한 것이 쥐뿔이나. 뭐가있어. 주님이 키워주셨지.
어느날 인터넷을 열어보니까. 어느 철없는 형제가 나보고 사랑하는 김남준 형제여. 그러더라고요. 내가 자기보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지. 그 사람은 성경도 안 읽나봐요. 성경에 보면은 사도바울이 골로새서에서도 사도된 나 바울과 그리고 형제의 친구되는.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형제 디모데는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디모데가 바울한테 내 형제 이리 와봐. 이렇게 누가 이야기해요. 모두 쓸데없는 이야기지만 하여튼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제발 그러지마세요. 그러니까 여전도사님들 한테 가서 어이 자네. 그러지말라고요.
그러니까. 어쨋든 그런 원리입니다. 그게 참 우리의 가슴에 많이 와 닫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말도 통하지 않는 코흘리게 애들. 하나 앉혀놓으면은 저리 도망가서 다른짓하고 야단쳐서 하나 앉혀놓으면은 또 도방가고 그러는 녀석들을 무릎을 모으게 만들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렇게 못알아 듣고 주위 산만한 아이들에게 한줄의 복음을 가르칠때에 그것은 철없는 아이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게. 곤고하고 아파하는 영혼들을 한사람을 찾아 나서서 오후에 직장이 끝나면 가족과 함께 쉬어야할 그 안락한 시간에 산동네 길을 오르고 그 다음에 작은 집들을 지나서 어느 허름한 집 벨을 누르고 사람대신 사납게 짖어대는 그 사나운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거기에 두려움속에서 서서 벨을 누르는 그것이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은혜받으면 모두다. 그런 투철한 신앙을 갖느냐 하면은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은 그 섬김의 질에 있어서도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자들이 이런 자세를 견지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인내할수 있었던 그 근본적인 동기가 그게 무었었습니까?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격이나, 아니면은 애국심이나, 동족에 대한 애족심이나, 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전 삶이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있고 또 자기의 전삶이 사람들을 섬기는 삶이었지만은, 그러나 사실 사도바울의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이 정신은 내가 사람을 섬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라고 하는 그 정신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서 당한 시험을 참은 것은 바로 그렇게 주님을 섬기기위한 그 목적을 겨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해야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항상 영혼을 위해서 섬기는 이 일은 정말 그 고통과 아픔은 영혼을 위해서 헌신해본 사람들만이 압니다. 얼마나 그것이 고통스럽고 아픈것인지. 변화되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주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지는지 안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의 운명을 생각하며 슬퍼해본 사람들만이 그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달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영혼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안다는 것입니다. 영혼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단정한 마음으로 ‘우리가 여기 있사오니 무엇이든지 선생님, 혹은 구역장님, 혹은 전도사님, 혹은 목사님 말씀만 하시옵소서 우리 미천한 종들이 듣겠나이다. 그리고 행하겠나이다.’ 그래도 그게 쉬운 것이 아닌데 어디 그렇게 듣느냐는 것입니다. 집중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또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를 않습니다. 또 살았다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산 것을 가지고 자기 자랑의 기회로 삼아서 한편으로는 선한 삶을 살면서 한편으로는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에대한 믿음을 허물어버립니다. 이런 악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그들을 끝까지 섬긴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덕목 두가지를 든다면은 사랑과 진리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이고 진리는 참된 가르침과 그 참된 가르침을 따라서 먼저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진실된 삶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린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자신이 가르침을 받는 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 가르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반드시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삶 이상을 살아가고 있거나 혹은 그렇게 살아갈려고 부단히 몸부림치는 고뇌하는 구도자여야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물려줄 것이 있습니까. 오늘날에 교사나 구역장들이 성경에 대한, 성경에 대해서 가르쳐도 안전할 정도의 많은 지식을 가지고있습니까. 그럴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끼리끼리 앉아서 자격도 안되는 사람들이 하는 그 성경공부는 문제도 많습니다. 은혜는 있는지 모르지만은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내버려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할 것은 무엇이냐하면은. 그렇게 영혼을 돌보는 사람들이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가르침의 중심 내용이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그분을 위해서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이 정신, 이 살아있는 고되의 몸부림이 없는 사람들의 가르침은 그 자체가 이미 죽은것입니다. 죽은것이라고요.
한주일동안 각자 흩어져서 정신없이 살다가 주일날 와서 구역의 식구들을 모아놓고, 또 사랑하는 영혼들을 모아놓고 성경을 펴서 가르칠 때에 그 가르침이 살아있는 가르침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가르침을 받는 영혼들이 보지못하던 그 일주일동안 그 진리의 증거와 함께 고뇌하는 싸움이 있는 개인적인 거룩과 분투하는 삶이 있고나서야. 그 주일날 와서 그 영혼들에게 가르치는 그 가르침이 살아있는 가르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책, 공과책 펼때에 겨우 생각하게되는 기독교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향기가 없는 가화조입니다.
교회 오래 다니고 많이 배우면 화려하게 수식어를 동원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향기가있느냐는 것입니다. 살아있느냐는 것입니다. 잠깐 가르치는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러나 그 가르침이 자신의 이 폐부에서 쏟아져 나와서 자기의 피와 체액을 묻혀서 살아있는 증언으로 눈물을 머금고 흘러나오는 이것은 가르치고자 하는 그 성경 본문그 자체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고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 그 전체를 자신의 삶의 가치로 받아들이고 정말 주님 앞에서 그 구도의 길을 배우는 좋은 학생이되기를 사모하는 이 자신의 이 거룩을 향한 몸부림이 있을 때에 그 가르침이 살아있는 가르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런 것이 없이 주일날 와서 영혼들에게 가르치는 이것은 약장사입니다. 신약구약 약장사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보세요. 사도바울이 자기의 신앙을 이제 자기가 떠나고 없는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전수시켜주는데 제일먼저 무엇이라고 말문을 열고있습니까. “에베소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내가 너희들가운데 있어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말과 혀를 통해서만 기독교신앙을 전수해준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존재로서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것입니다. 그 본을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본이 결국은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주님을 모르는 사람이고, 두 번째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불행한 사람은 존경하는 신앙의 스승이 없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게 산 사람이면 어떻고 죽은 사람이면 어떻습니까. 흠모하는 영적인 맨토가 없는 신앙생활은 유통기한과 제조업체가 표시되지 않은 믿을수 없는 식품과 유사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그모든 가치의 판단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모범을 본적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본받으면서 살아가야될 것인지 그는 제대로 알지못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주님과 직접 대면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항상 거룩하고 경건한 모범은 사람을 통해서 사람에게 전수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교사가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말로 가르치는 것은 이것은 말하자면은 논문으로 말하자면은 본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살아가는 그 삶은 이게 주석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지모르겠지만은 저는 논문을 이렇게 볼때에 저는 제가 연구한 신학의 분야에서는 그렀습니다. 이 논문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느냐? 할 때에는 그 두꺼운 본문을 어떻게 다 읽어볼수있습니까. 각주를 봅니다. 주석을 봅니다. 주석을 몇 개를 읽어보면서 거기에 이어지는 논의들이 치밀하고 논거들이 정확하고 방대하면 이 본문은 보나마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하면은 본문에서 논의되기에는 곁가지의 얘기들이 그렇게 치밀하고 방대할 정도면은 이 본문은 보나마나입니다. 이것 이상입니다.
그러니까 말이 좀 어눌해도 이렇게 자신의 직접적인 삶이 동반될 때에 그 가르침은 아주 놀라운 성과를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것은 단지 가르쳐야 되겠다.라고 하는 의무감이라든지, 내가 이 구역장 노릇을 한달동안 잘해야 되겠다라든지. 일에대한 욕망만을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오늘 사도가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섬겼는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빼버리고 주를 섬겼다.라고 고백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들을 설교자로, 혹은 교역자로, 혹은 구역장으로, 혹은 교사로, 혹은 복음을 가르치는 새신자를 위한 전도자로, 복음반 교사로, 누가 세워주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거기에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서서 가르치고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일은 사람을 위해서 하지만은 사람을 통한 그 모든 일들을 섬김이라고 받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리 주님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가르치는 사람들이 시종일관 그 영혼을 보면서 가르쳐야할 중요한 원칙입니다.
당신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하나님의 형상을 그 속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상을 깊이 사랑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 이두가지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 형제가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영혼이 너무나 궁핍하고 곤고해서 버려두려고 했지만은 막 살아가는 그 형제에게 있는 그 형상이 너무 고귀해서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이 동기가 되어서 그 영혼을 포기하고 섬기지 않을수 없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신앙의 인격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든 그다음에 성경을 가르치던, 교사가되던, 모든 것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격이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신앙의 인격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주님을 사랑한 진실한 인격, 이것이 모든 목양, 모든 가르치는 자의 가장 중요한 자세입니다. 그 다음에 성경을 많이 아느냐 적게아느냐 이것은 그 다음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신 것이 그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결국은 자신이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고 내가 섬기는 이들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결코 그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수많은 시험을 참았던 바울과 같이 그런 인내를 가지고 우리들이 그의 섬김의 길을 다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 사랑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영혼들을 섬기려고 할 때에 견디기힘든 수많은 괴로운 일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정말 생겨납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는 영혼을 섬겨보지 않은 사람들을 교회장로로 안 세운다. 그런 얘기하는 목사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해가갑니다. 왜냐하면은 영혼을 위해서 깊이 고뇌해보지 않은 사람이 목양에 대해서 무엇을 알수있겠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그 목양에 대해서 알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목양을 하는 목사를 도울수가 있겠습니까?
보세요. 사도바울이 오늘 유대인들의 그 사악한 간계와 그리고 그 견디기 힘든 시련들을 다 참았습니다. 그렇게 참을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때문 이냐하면은 그 영혼들을 섬기는 그 일 자체에 어떤 보람이나 성취에 대한 욕구보다는 그 영혼들을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는 전과정이 주님을 섬기는 과정이라고 하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우리가 영혼을 섬기다가 영혼들 때문에 왜 상처를 받습니까? 그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이 사람을 섬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이 사람의 도리를 자기를 향해서 다해주지 못할 때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계가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 생각해보세요. 그것을 생각해보면은 우리의 그런 반응이 옳지않다고 하는 사실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형제가 자기가 가르치는 영혼들이 자기의 마음을 모르고 고통을 줄 때에 단지 사람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그것을 찾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참는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의 참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그냥 유대인 이자식들 두고보자. 내가 죽여버릴거야. 이러면서 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맺힌 것이 없이 사랑으로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단지 사람을 향한 헌신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베푸신 그 사랑이 어떠한지를 알고, 어떠한 사랑을 내게 주셔서 인생의 구비구비 그 많은 길들을 거쳐와서 지금 여기 이 섬기는 자리에 나를 세워주셨는지를 깊이 깨닫고,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느끼면서 하나님 자신께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을 때에 그 때에, 나한테 사악하게 대하는 그 형제의 모습속에서 나를 위해서 피흘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보는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내가 주님을 멀리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값을 치루어서라도 나를 화해시켜서 당신 앞에,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열심을 거기에서 읽게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영혼들에 대한 진정한 인내와 헌신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기억을해야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좋은 구역장이라고 말하고 훌륭한 교사라고 말하고 당신같은 사람 만난 것이 영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은 쉬운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고난이라기 보다는 대접이요. 영광의 기회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들만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싫다고 말하는 사람, 우리가 가르치는 주님의 진실한 가르침에 등을 돌리려고 하는 사람, 아무리 가르쳐도 어쩔수 없는 깊은 패역이 마음속에 뿌리깊게 자라서 스스로 자기를 고칠 수 없는 소망없는 사람들, 은혜를 받고도 한편으로는 그 은혜를 사모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은혜에 대적하는 불쌍한 모든 사람들, 이렇게 자기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이렇게 자기들을 위해서 헌신을 해도 그것이 자기들을 향한 진실한 사랑인줄을 알아주지 못하는 배은망덕한 사람들을 위해서 특히 우리가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오늘 이렇게 죽음을 눈 앞에 두면서 자신의 이런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식의 삶은 매 순간순간 말하자면은 그 순교의 정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시는 것은 매우 큰 일이며. 내가 사랑하는 영혼들이 죽어가는 것은 아주 큰일이며, 내가 죽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입니다.라는 이 신앙 없이는 이런 삶이 불가능합니다. 그래 이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훌훌털고 성령이 증거하시기를 거기에서 환란과 결박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시나.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 곧 이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려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목숨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아니한다. 그리고 올라갈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런점에 있어서 깊이 도전을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자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은 구역원들 앞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 앞에서, 동료 교사들 앞에서, 심지어는 자기 교구 교역자들이나. 혹은 목회가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영성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영성이라고 하는 것의 척도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느낄수 없는 상황에서 그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 영성이아닙니까. 존 오웬은 영성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영성은 많은 사람들이 감지할수 없는 죄에 대해서 감지할수 있는 능력이 영성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 얘기는 뭐냐하면은 하나님을 느끼는 것과 동일하게 죄에 대해서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은 죄도 없습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러한 인식속에서 하나님 면전 의식을 가지고 자기가 영혼들을 섬기는 것, 이 상태가 바로 영혼을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과 동일하게 여겨질수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 상태입니다. 나는 한번 생각해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설교하고, 이렇게 목회하고, 이렇게 구역을 돌보고, 이렇게 영혼들을 위해서 뭔가 분주하게 일합니다. 그것이 이만합니다. 거품처럼 이렇게 큽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하나씩 거두어 내보자는 것입니다. 열심은 있지만 그것이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 것 거두어내보고. 그래도 남아있는 것들은 억지로 한것들은 한번 거두어내보고. 그래도 남아있는 것들은 동기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었느냐 아니면은 교사로서 구역장으로서의 의무감이었느냐. 또 거두어 내버리고 다 거두어내고도 진짜 하나님 때문에 주님의 사랑에 매여서 불쌍한 지체들 속에있는 섬기지 않을수 없는 그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내가 그들을 위해서 겸손해지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위해서 희생을 무릎쓰고, 이러한 진짠 순수하게 남은 그것이 얼마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영혼을 이렇게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대하듯이 섬기지못하기 때문에 수많은 섬김들이 이상하게 우리를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성숙한 사람으로 세워주는 동기가 되기 보다는 자기의 의를 쌓는 그런 도구가 될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을 진실되게 섬기고 사랑해보세요. 교만할수 있습니까? 자기의 목회의 업적이나 자기가 섬겨온 이 섬김의 업적을 자랑할수 있습니까? 정말 자기가 섬기는 영혼들속에 떠오르는 그 수많은 핍절한 영혼, 날마다 주님께 기도하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주려고 하지만은 결국은 내가 그들을 하나님 안에서 약속된 그 풍성한 삶으로 불러들이는 도구가 되기에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지체들은 내가 전하는 가르침을 듣고 은혜로운 삶을 누리고 있지만은 그러나 그러면서도 교만할수 없는 이유는 떠나가는 영혼들도 많이 있습니다. 누가 그들을 위해서 충분히 낮아졌다고 말할수있습니까. 누가 그들을 위해서 충분히 울었다고 말할수 있습니까. 누가 그들을 위해서 할만큼 사랑했다고 말할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우리는 결국은 주님의 도구입니다. 영혼들을 전도하고 그 영혼들을 회심에 이르러 풍성한 삶에 도달하기 까지 잘살도록 가르치는 도구로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가르치는 그 영혼들대신 우리 구역식구 5명 대신 주님 다섯분이 거기에 계시다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삶하고 별로 차이가 없는 삶을 살수있습니까? 이것이 사도바울이 견지했던 가르치는 자의 자세였습니다. 영성이 무엇입니까? 가르치는 자의 영성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어떤 많은 영적인 체험속에서 거들먹거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르치는 자 속에 있는 영성은 말하자면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아갈뿐만 아니라. 그렇게 닮아가면서도 이 풍성한 삶에 들어오지 못하는 수많은 지체들, 그속에 있는 영혼의 곤고함을 보고 아파할줄 아는 흐느끼는 마음, 그것이 곧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희생의 영성입니다.
리차드 백스터의 표현대로 그렇게 변화되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흘릴수 없는 사람은 그 사람 자신이 그 영혼보다 더 불쌍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의 삶에 있어서 자기의 가르침을 받는 영혼 속에서 주님의 형상을 읽을수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향한 섬김이 영혼을 위한 가르침의 동기가 될수 없는 사람들은 주님이 행한 사랑과 사람들을 향한 섬김이 분리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정말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이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꼭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됩니다.
비록 내가 오늘 주일학교, 혹은 유치부 현관에 앉아서 아리들이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고망간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를 하면서 새로오는 아이들을 안내하고 그들에게 주님께 얘기할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준다고 할지라도 그 사소한 일에 종사할 때 자기를 거기에 세워주신 분이 주님이시고 나는 지금 주님을 섬기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 이 신전의식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있는 면전의식이 있어야됩니다. 끊임없이 우리가 섬기는 그 모든 동기들이 정말 나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동기가 되었는지. 되묻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는 자로서의 마지막 생애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서 실질적으로 마지막 남기신 유언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라고 하는 개인적인 기도였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남기신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결국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하면은. 많은 영혼들을 위해서 섬기고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까지 모두 내어주신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를 위한 어떤 인도주의적인 동기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겸손과 눈물의 삶을 살고 인내와 고난의 삶을 성취할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은 아버지이신 자기의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과 헌신이었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섬기셨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슴팎에 상처를 내고 심지어는 당신의 손에 못박았지만은 그것을 통해서 사람을 섬긴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못박는 사람들을 인류들을 구속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리는 중이라는 그 신앙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마지막에 “아버지의 손에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라는 기도를 하게끔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어려우면 어때요? 남들이 내 수고를 좀 몰라주면 어때요? 주위의 사람들이 나의 이 영혼을 위해서 쏟아붓는 수고와 노고를 몰라주면 어때요? 상주지 않으면 어때요? 어차피 우리는 사람 보라고 이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그죠. 사람에게 칭찬, 사람에게 있는 자랑,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받는 융성한 대접을 위해서 우리들이 여기에 들어선 것이 아니지않습니까. 그래요. 많은 희생이있습니다. 남보다 더 많이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해야하고 그리고 영혼들에 대해서 예전에 가르치지 않을 때에는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말고싶으면 말았는데 이제는 출석하지 않는지체들을 보면은 아파하고, 그리고 구역의 모임으로 모이고, 교사회의로 모였을 때 복음반으로 모였을 때에는 마치 영혼들의 실족함이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자기(?)을 느껴야하는 양심의 가책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길은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이 신앙의 인격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희생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과 그 고난을 본받는다.라고 하는 것은 도데체 무엇을 통해서 구체화 될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보십시오. 가르침을 위해서 부름을 받고 영혼들을 곤고한 상태에서 건져내어 풍성한 삶으로 이끌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이 무엇을 통해서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말했습니?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수많은 지체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자기를 허비하고 그들의 영혼의 고통이 자신의 영혼의 아픔인 것처럼 괴로워하고 번민하면서 살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얼마나 사는 삶이 괴로웠으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내게는 훨씬 좋다고 표현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렇지만 내가 너희를 위해서 내가 더 있는 것이 낮다. 관점자체가 자기의 유익이 아니었습니다. 영혼들의 유익이었습니다. 왜냐하면은 그 영혼들을 그렇게 유익하게 하라고 주님이 미션을 주셔서 나를 그 가르치는 자리에 세우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시종일관 같은 자세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힘들 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섬기셨는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죄 없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이 더럽고 천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어떻게 섬기셨는지를 생각해보면 주님이 우리에게 사람의 형상을 입고 낮아지시기 까지 섬기신 것을 생각하면은 우리들이 우리와 비슷하지만 신앙이 조금 없는 사람, 그 수준으로 낮아져서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주님의 성육신의 고난에 비하면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됩니다.
그래서 전혀 우리를 지워야합니다.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이 그 영혼을 아무렇게나 돌보는 것은 주님을 아무렇게나 대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골방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을 위해서 흐느끼는 사랑을 가진 사람은 그들의 눈물은 한알한알 하나님의 나라의 면류관에 보석들이 될것입니다. 그날에 주 앞에 우리가 섰을 때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며 산 것은 그날에 우리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날의 영광은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께서 그 사랑을 안 사람들로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그 영혼을 위해서 어떻게 주님이 그의 영혼에 대해서 품으시는 그 마음을 동일하게 느끼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울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호소하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아파하고, 그 영혼을 위해서 자기의 것을 다 드리는 삶을 살았는지 그것이 그날에 우리에게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바울이 주님을 섬긴 것은 영광스러운 대접과 편안한 환경에서가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영혼을 맡겨주셨을 때에 그 계획을 기억하면서 그 영혼을 주님 섬기듯이 진실하게 섬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들이 늘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고난이 따라 다닙니다. 목회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척을 할 때에는 때거리가 없고 먹을것이 없어서 고난을 받고 경제적으로 교회가 커지면서 그런 고난은 사라집니다. 그러면 만약에 그렇게 되면은 그러면 모든 고난이 사라지는 것이냐. 만약에 목회가 사육이라면 그런 논리가 가능합니다. 또다른 종류의 고난이 계속해서 기다립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지날때마다 옛날의 고난이 훨씬 쉬운것이었다는 사실을 자꾸 느끼게되는것입니다. 왜 이미 지고 승리한 십자가기 때문에 그 십자가가 가볍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있는 것입니다.
하늘 영광 밝음이
모든 것을 이기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그러면서 예수 밖에는 귀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자꾸 깨달으면서 이 가르침의 동기들을 순수하게 하나님이 정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외롭게하십니요. 저는 교역자 회의를 하면서 그 특별히 교사들, 각 구역들의 보고를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상세하게 보고를 받습니다. 그 때에 어느 구역장, 어느 교사가 영혼을 방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은 거짓말이 아니라. 내가 뛰어넘어가서 내가 그 구역장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두가지인데 하나는 그렇게 방치된 영혼들이 불쌍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영혼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돌보고 살아가는 그 사람이 너무나 불쌍해서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보기에는 하잘 것 없는 지체들, 우리의 보기에는 양심에 철판깐 것 같고 막되먹은 교인처럼 보여도 어떻게해요. 주님이 자기를 깨뜨려서 그 영혼의 형상에 피를 바르셨습니다. 그도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향한 사랑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신 분이십니다. 그 사람은 미워할만 하지만은 그 사람속에 있는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그 복음의 빛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고싶어하는 그 사람의 그 형상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우리는 그 속에서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못박혀 죽으신 우리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바로 그 주님이 나도 적절하게 은혜와 진리로 사랑해주시고 돌봐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를 가장 힘들게하는 저 막된 교인보다도 더 형편없는 인간이 되었을텐데 주님의 은혜가 나를 구원했지않습니까. 차이는 그 은혜가 내게는 임했고 저 사람에게는 거절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용서받은 죄인이 되었는데 저 사람은 아직까지도 용서받지못한 죄인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점입니다. 그 차이밖에 무엇이있습니까.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영혼들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영혼들속에 살고 영혼들을 위해서 일하고 영혼들을 섬기고 영혼들을 위해서 자기의 것을 허비하며 살지만은 교사, 구역장, 가르치는 사람, 그는 한번도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노예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가 되어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께하듯이 그의 영혼을 포기하지 않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에 하나님께서 더 많은 영혼들을 보내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런 두려움과 떨림속에서 그 영혼을 보내주신 그 수많은 영혼들을 진실로 사랑하고 그 영혼들을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그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고뇌하고 눈물흘릴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둠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반응을 보이는 영혼들에게 문턱이 닳도록 찾아 가서 예수의 복음을 가르치고 십자가에서 주님이 어떻게 자기를 위해서 죽으셨는지를 가르쳐주어서 강팍한 가슴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말미암는 눈물이 흐르게 하고 교회에 정착한 영혼들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주님의 형상을 본받아가기 까지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서 그들을 빛가운데서 살게하시기 위해서 영혼의 어두운 고뇌속에서 눈물흘리는 섬김이 필요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들의 영혼이 진정한 주님을 아는 지식의 빛이 비치기를 사모하고 눈물흘릴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람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무엇보다도 영혼에 대한 사랑이 현저하게 결핍되어 있습니다. 나는 오늘 목회자의 양심으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그 눈에 곤고한 영혼들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얼마나되나요?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나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경험한 그 복된 예배의 자리에 그 떨어지는 눈물들중에 이렇게 어두움을 물리치고 빛가운데 살게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주님을 모르는 수많은 모르는 영혼들, 심지어는 그중에 일부를 선택하여 하나님이 내게 맡겨 주셨는데 그들의 영혼이 너무 곤고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곤고할 때 함께 곤고해 하시고, 우리가 아플 때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가 고통당할 때 함께 고통을 느끼셨는데 우리는 그 주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혼들이 아파할 때 히히낙낙 하고 어두움속에서 헤매고 있을때에 우리는 스스로 혼자 빛가운데 있다고 뻐기는 삶으로서 영혼에 대한 섬김을 대신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의 가르침을 받지못하는 영혼을 짐승처럼 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들을아니지 않습니까. 오늘도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 영혼들이 우리의 것이라면 포기할수 있습니다. 버릴수 있습니다. 자식도 버리는데요. 그런데 그 영혼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단지 1년동안 혹은 2년동안 우리에게 잠시 위탁한 영혼들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영혼들을 섬기고난 그 결과를 주님앞에 돌려드려야 할 영혼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크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그 은혜를 갚을길은 없지만은 그러나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이 몸부림 칠수 있는 이유는 하나있습니다. 무엇인지아세요. 영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제가 그러한것처럼 여러분도 영혼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불변하시는 주님, 외면하고는 살 수 없는 그 주님의 형상을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반 아이들,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그 구역속에서 보십시오. 지금 조용히 눈을감고 지금 보이지 않는 영혼들을 위해서 내가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 앞에 할만큼 했다고 고백할수 있는 영혼들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가 더많이 섬겼더라면, 우리가 개인적인 유익을 포기하고 더 많이 주었더라면, 우리가 내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있는 시간보다 더 많이 그들을 위해서 부어주었더라면, 무엇보다도 강팍한 내 마음을 찢고 그 영혼들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하고 주님을 떠나 곤고하게 살아가는 그 영혼들의 아픔을 내 온가슴으로 쓸어안고 눈물흘렸더라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많은 영혼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의 빛 아래 살아갈수 있었을것입니다. 우리의 악함과 우리의 게으름이 그리고 주님 앞에 우리의 할 일을 다하지만은 그러나 더 많이 우리 자신을 영혼들을 위해서 쏟기를 마다하는 우리의 인색함이 많은 영혼들을 이렇게 흩어지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가 아플 때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돌봇셨습니까? 한번 두 번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나서 나도 할만큼 했다. 그리고 버리셨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어둠속에 있을때는 어둠으로 죄악의 구렁텅이에 있을 때에는 거기까지 인생의 막다른 길에 있을 때에는 그막다른 골목까지 찾아오셔서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인격적으로 감화시키시고 우리를 녹이셔서 결국은 그 승복을 받아내셔서 그래서 강팍하기 이를데 없던 우리들이 주님밖에는 나의 길이 없고 우리 주님을 떠나서는 살수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하는 인격적인 고백을 받아낸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그 주님의 분신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손길, 그 주님의 도구, 그 주님의 분신이 되어서 눈물젖은 출석부를 가진교사, 눈물에 젖은 출석부를 가진 구역장, 그리고 교역자, 이사람들로서 되어야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섬겨야됩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4.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유익한 것든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20:20)
주일오후마다 가르치는 자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 4주째인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는데요. 그러면 설교를 듣는 많은 사람들은 나는 교사도 아니고 구역장도 아닌데. 전도사도 아닌데. 이 말씀이 내게 어떻게 적용될까? 생각하시는데 넓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모두 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고, 또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삶은 곧 우리 특정한 사람들의 삶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살아가야할 삶인것입니다.
첫날에는 겸손과 눈물에 대해서 말씀드렸고 그 다음에는 시험을 참는것에 대해서, 지난주에는 주를 섬기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앞에서든지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이부분을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에 몇가지 가르치는 자로서 생각해야할 중요한 진리가 나오고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의 눈길을 첫 번째로 끄는 단어는 ‘유익’이라는 단어입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그랬습니다.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이 유익하다는 기준이 무엇이었는가? 이 유익하다는 기준은 그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아주 가르치는 자의 중요한 삶의 방식을 보게되는데 그것이 다름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들은 넓은, 의미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진리를 영혼들에게 가르치는 사람들은 가르침을 받는 자의 유익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복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르치는 사람의 표준과 기준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이 어리고 미숙할 때에는 모든것이 자기가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과 위치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판단합니다. 그것은 결국은 그러한 판단들을 통해서 자신을 유익하게 하고자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하면 자신의 유익과 성경의 진리가 충돌을하면 그 성경말씀을 외곡되게 해석을 해서라도 자신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신앙적인 결론을 이끌어낼려고 하는것이 우리의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부인의 삶에 익숙해져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훌륭한 학생이 되어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선생하면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학생이되어 본적도 없는 사람들이 선생을 하는 것은 옳지않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학생이 되는 기본적인 자세가 무엇입니까?
그래서 제가 늘 이야기합니다. 병원에 가끔 문병을가고 그러면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꼭 그렇습니다. 의사가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시키는데 그 말을 안듣고 다르게 또 어디가서 처방을 받아가지고 엉뚱하게 의사가 안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할려면은 의사 한사람을 찾으세요. 그래서 한사람의 의사를 만나서 그 의사가 시키는데하세요. 그래서 저는 가면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에 오면은 목회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병원에 갔으면 의사가 하라는 데로 맡기고 그 의사를 신뢰하고, 약국에 가면은 약사가 하라는 데로 해야합니다. 그런데 뭐 또 사람들이 안그렀습니다.
제가 저쪽에 방배3동에 살때에 약국이 하나있습니다. 그 약국에 가면은 몸이 왠만큼 괴로워서는 약국에 안가니까. 약국에 갑니다. 그러면 그 약사가 저를 참 좋아합니다. 왜 좋아하느냐하면은 갈때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몸이 이렇게 이렇게 아픕니다. 그러니까 약사선생님 약을 지어주십시오. 그러면 약사가 몇일치나 지어드릴까요. 그러면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알지 내가아느냐. 그런데 사람들은 다 이틀치 지어드릴까요? 그러면 아니오. 필요없습니다. 하루치만 지어주십시오. 그러면 자기가 까운입고 거기가서 약짖지. 그래서 제가. 그것은 당신몫입니다. 그판단은. 나는 당신을 신뢰하니까 약을지어라. 그리고 내게 이러이러한 약을 주고 싶은데 이 약을쓰면은 비싼데 저사람이 하루치가 왜그렇게 비싸냐고 내게 물으면 어떡하나. 그런 염려에서 해방되어서 소신껏 지어라. 그러면은 내가 당신이 달라는대로 돈을주겠다. 그러면은 내 생각에는 하루만 먹으면되는데 꼭 삼일치씩 지어주었습니다. 이틀치씩 남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집 사람이 가면은 1500원 받는데 내가 가면은 3500원을 받습니다. 그 약사가 날 참좋아합니다. 그래도 나는 신뢰합니다. 그 사람이 내가 가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약을 지어달라. 그러면은 간절한 마음으로 내가 지어준 약을 먹고 나아야될텐데 그러한 마음으로 소신껏 지어준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합니다. 그래서 항상 그 사람 처지를 내 처지하고 바꿔놓고 생각을합니다.
그래 내가 설교하러 올라갔는데 저 사람이 오늘은 회개에 대해서 설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아이, 뭐 그런 것을 해요. 다른 것 주세요. 다른 것, 그런다면은 내가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 그런생각을 하는것입니다. 이틀치 지어드릴까요? 그러면은 그것은 나한테 물어볼 필요도없습니다. 만약에 내가 3일을 먹어야될 처지면은 내가 하루를 먹겠다. 그래도 하루먹으면 안됩니다. 3일을 먹으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되고. 하루만 먹어도 될것인데 내가 3일을 먹겠다. 그러면은 하루치 밖에 지어드릴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잘라서 말하는 것이 그것이 당신 전문가들이 해야될일 아닙니까. 이렇게 이야기를했더니 아니 굉장히 오래간만에 이상한 사람 만난것처럼, 신기한 듯이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래 지금도 그렀습니다. 지금은 병원 처방을 가지고 가니까. 그런 것은 이야기할 필요도 없지만은. 옛날 같으면은 항상 그랬습니다. 소신껏지십시오. 저도 소신껏 약값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신뢰입니다. 그것은 판단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그 사람에게 유익한가. 그것을 판단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약을 먹을려고 약국에 갔었어도. 뭐 여기 약사들도 계시지만은 자기가 이렇게 판단해서 뭐 그것을 약을먹어요. 가서 푹뒤집어쓰고 하루자세요. 이렇게 해서 돌려보내야 되는 사람도 있어야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얼마나 신뢰하겠습니까. 뭐 그까짓거 가지고 약을먹어요. 뭐 약이 그렇게 좋은지아세요. 아, 어떤 약사는 그러더라고요. 그뭐 약이 그렇게 좋은것인줄 아세요. 어쩔수 없으니까 먹는거지. 뭐 그 정도가지고 약을먹어요. 자 이거 피로회복제나 하나 줄테니까 먹고 가세요. 그렇게 멋있는 약사들도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은 유익의 기준을 누구에게 두느냐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일까? 이것을 생각하고 그에게 유익이 되는대로 내 삶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왜 나는 그것이 좋으니까. 이것이 지난주 말씀하고 연결이됩니다. 왜 유대인들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누구를 섬겼다고요. 그렇죠.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을 섬긴 것인데 사실은 그 섬기는 것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본다면은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침을 받는사람의 섬기는 자입니다.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보고 그 삶에 자기를 맞출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르치는데 중요한 토대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이냐하면은
여기에서 사도가 “너희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할때에 그 유익이 무슨 유익이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도가 자기의 교인들에게 “너희에게 유익한 것을”이라고 말했을 때에 그 유익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적인 유익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정으로 너희에게 너희의 영혼에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자기가 그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교사, 혹은 가르치는 사람, 영혼을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신경을 써야할것이 무엇이냐하면은 자기에게 가르침을 받는자의 심령과 영혼입니다.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하고 요긴한 것이 무엇인가를 헤라리고 그것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쉬워요? 쉽지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산다. 이것은 쉬운일이 아니고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 비해서 대부분의 경우 모두 신앙적으로 가르침을 받는 사람보다는 뭔가가 뛰어났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의 자리에 서게된 것 아닐까요. 신앙의 면에 있어서나. 지식의 면에 있어서나. 하여튼 모든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은 왜 일반적으로 그래도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의 위치에 섰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가르치는 자에게 가르침을 받음으로서 아직은 유익을 받을수 있기 때문에 가르침을 받을수 있는 위치에 그들을 놓은 것 아닐까요? 그런데 그들이 그 가르침을 받는 영혼들을 섬길 때에는 그의 유익을 위해서 행동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르치다 보면은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려는 사람도 있지만은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이든지간에 그를 잘 가르쳐서 그 영혼에 유익된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고 섬기는 것이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요즘은 많이 안다닙니다만은 집회를 많이 다닐때에 이렇게 생각해보면은 어떤 때는 아주 지쳐서 집회를 갔는데 3일 집회하고나면은 그렇게 먼 거리를 차를타고 오는대도 내 자신이 그렇게 기쁠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하면은 내가 가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해주는데 사람들이 나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을 너무나 기쁘고 고맙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정말 노는일보다 훨씬 쉬운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저 입을 열면은 말씀이 술술술나옵니다. 3시간씩 4시간씩 설교를해도 누가 몸하나 뒤틀리는 사람없고 그저 펑펑울면서 은혜를 받고나면은 사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나면은 사실 여러분 노는 것이 얼마나 피곤합니까. 놀아보tu서 알겠지만은
언젠가 여름휴가를 갖다오는데 코피가 쏟아지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말씀을 전하고나면은 몸과 마음에 생기를회복합니다. 집회부탁이 들어와서 가면은 아! 요번에도 그렇게 준비된 사람만 있으면은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서 가면은 항상 그런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이 앉아서 동물원의 원숭이 보듯이 어디 재주한번 거기에서 피워보아라. 너같은 녀석이 우리한테 와서 설교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그리고 다리 꼬고있는 못되먹은 교인들이 있는데도 있습니다. 그저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수틀리면은 아유. 그래 너희는 나보고 동물보듯이 보지만은 나는 너희들이 짐승같다. 그러면서 와버리면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유익입니다.
양 잃은 목자는
그 양을 찾으러
산 넘고 물을 건너서
빈 사막지났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섬겼지않았습니까.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복음 못들어서 걸신들린 사람들이었습니까. 하나님 없으면은 못살겠다고 회개하면서 배속에서 나온사람 있으면은 손들어보세요. 우리모두 주님없이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원래의 모습인줄 알고 하나님 없어도 하나도 불편한 것이 없다. 그러면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에게 찬란한 복음의 진리를 알게하실 때까지 주님이 우리를 내버려두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다가오시고 끊임없이 역사하셔서 그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승복시키셔서 오늘 이만큼이나마 믿음을 가지고 살게해주셨지 않습니까. 그것이 결국은 주님이 그 유익을 누구에게 맞추신 것입니까. 우리의 유익에다가 맞추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구역장들에게 전도사님들에게도 이야기합니다. 심방을 가면은 저같은 사람이 어떻게 목사님 같은 분의 심방을 받겠습니까. 하고 며칠전서부터 준비하고 좋은 것들을 차리고 기다리는 집들도 있지만은 심하면 문도 안열어주는 집도 있을수 있지않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그렇게 심방을 하면은 환영을 받을지, 배척을 받을지, 아니면은 이렇게 내가 가면은 심방한 것을 보람이 있을지, 없을지, 이런것들을 생각하는 것은 나에게 유익을 맞추는 것입니다. 진정한 목양적인 심방은 찾아가도 냉대를 당할 수밖에 없어도 그 사람에게 내가 가는것이 유익일지도 모른다는 판단 때문에 주님의 마음으로 가는 그 심방이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심방입니다.
말하자면은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맞춰져야합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렇게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새신자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아직까지도 주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심지어는 아직까지도 주님이 누군지를 모르는 우리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보면은 그러면은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회적인 위치에 있어서나, 지식에 있어서나, 인격에 있어서나, 모든면에 있어서 자기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일수 있습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제가 언젠가 직장을 다닐때인데 성경을 이렇게 배포해서 나누어주는 단체하고 연결이 잘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이제 아침에 새벽에 일찍와서 직장 문앞에서 출근하는 직원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기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좋은 성경을 잘 만들어서 나누어주었습니다. 저는 깜짝놀랐습니다. 젊은 대학생들이나 누가 올줄알았는데 새카만 자가용이 그냥 쭉 오더리 턱턱턱스는데 거기에서 기사가 문을 열어주니까 그뭐 사장같은 사람들이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뭐 나이도 늙수그래한 양반들이 벌써 이렇게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돈이좀 있는 사람들은 얼굴이 이런 때깔이 아닙니다. 벌써 풍모가 틀림니다. 그런데 거기에 서서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거기 회장인가 누군가는 그 날 아침에 책임자인 모양입니다. 아이 몇 사람이 늦게왔더니 그 연세드신 분을 야단을치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몇시인줄 알고 말이지. 이제서야 나오느냐고 시간도 못지키느냐고 말이지. 막 야단을치니까. 머리벗어진 할아버지들이 막 잘못했다고 그리고 성경을 나누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저사람들이 누군가 그랬습니다. 다 끝나고나서 그분들은 이제 출근을 하고 거기에 책임자와 차를 마시는데 그 사람들이 다 우리나라에서는 내놓으라는 기업채에서 사장들이고 회장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성경도 자기들이 돈 내어서 찍은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새벽시간에 나와서 출근하는 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보세요. 이런 것이 바로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의 몸속에 배어야할 정신입니다. 내가 무엇인데. 내가 밖에 나가면 이런저런 지위를 가지고 있고 이런저런 사람들이 있고 그래도 교회에 와서 영혼들을 섬길 때에는 그 사람들의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는 섬기는자 처럼 그것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지위와 체면, 사회적인 대접 이런 것들을 다 내려놓고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그 지체 안에서 발견하면서 발을 씻겨 줄수 있는 그런 섬김의 정신, 그것이 바로 가르침을 받는 자의 영혼에 유익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삶의 정신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일도 안하고 말이지. 그렇지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 순교하러 올라가는 이 순간까지 견지했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맡겨진 영혼들 왜 심방안해요? 제가 교인 900명 가까이되도 거의 누가 출석하는지 안하는지 다 압니다. 매주 한사람, 한사람, 출석의 보고가 두시간 반동안에 제가 다 파악합니다. 청년들까지. 그런데 매주. 두주째, 세주째 결석하는 사람들, 왜 여러분 심방하지않고 내버려둡니까? 교회에 온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현저하게 부족해서 도저히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불가능합니다. 그 사람들을 왜 내버려둡니까? 왜 그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바쁘고, 고단하고, 피곤하고, 시간없고, 모두 이런 변명들은 어느 판단에서 나온것입니까. 그 영혼의 유익이 된다.라고하는 면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유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러한 변명과 구실들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초점을 우리에게 가르침을 받는 영혼에게 초점을 맞추어보세요. 그것이 바로 영혼을 섬기는 자가 겸지해야할 가장 중요한 정신중에 하나입니다. 그에게 무엇이 유익할것인가? 우리도 언젠가는 그렇게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부인하며 눈물로 우리의 영혼을 섬기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만큼 큰것이지 우리가 저절로 자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람도 사실은 하니님께로부터 그런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렇게 헌신적으로 해줄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이렇게 계속 내려가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항상 여러분들이 이런 생각을 해야합니다. 자식을 이렇게 들여다보고 효도받을 생각을 과도하게 하지마세요. 사랑은 계속 내려가는 사랑입니다. 과도하게 효도를 기대하다가 조금 빗나가면은 마음에 성처받지 말고 기대를 대폭 줄이세요. 그러면은 조금만 잘해줘도 감동이 될것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노년입니다. 그렇게 하고 항상 어떤 생각을 갖느냐하면은 우리 엄마, 우리 아버지가 나를 아무 조건없이 미래에 내가 그분들께 효도할것이라고 하는 각서한장 받지않고 나에게 계속 아낌없이 배풀고 아낌없이 주시는 생애를 살았던 것처럼 나도 또한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그렇게 산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도 이런 원리는 그대로 통합니다. 그래서 영혼들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고 거기에 오히려 초점을 맞추고 내리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런 것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노라면 여러분들로부터 가르침을 잘 받고 여러분들을 깊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도 있고, 여러분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수있을까? 자격자체에 회의를 품고 마음을 열지않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말아야될 것은 그 사람들 조차도 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섬겨야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 우리 주님의 섬김의 정신이었고 우리 주님의 가르침의 정신이 아니었겠습니까.
우리들이 영혼을 섬기면서 가장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이냐하면은 내게 유익한 것과. 영혼들에게 유익한 것이 자꾸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내게 유익한 것과 영혼들에게 유익한 것들이 자꾸 충돌을 일으키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섬기는 일의 기본은 자기보다는 우리 주님을 훨씬 사랑하는 것이 그것이 가르치는 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유익을 마다 하고 영혼들의 유익을 택하는사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고 영혼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할수 있는 사람,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갈수 있는사람, 그런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요 영혼들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7시에 심방했으면 좋겠는데 그 사람은 11시 넘어서 밖에 시간이 안나요. 그시간에는 내가 집에 조용히 누워서 잠잘 시간입니다. 그래도 내 유익을 포기하고 어찌하든지 그 영혼들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는것이 그것이 유익한 것을 영혼들에게 주는 정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삶의 모든 기준속에서 배여있는 사람, 그래서 자기가 가르치는 영혼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든지 자기에게 없는 것을 줄수 없지만은 자신에게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을 열고 주고 싶어하고, 나누어주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바로 자기의 유익보다는 가르침을 받는 영혼의 유익의 편에 서서 섬기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야합니다.
한번 조용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유익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다고 하면 막혔던 하나님의 그 은혜의 역사가 그저 봇물이 처지는 것처럼 흘러나갈수 있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의 사랑에 대한 집착, 자신의 소유에 대한 과도한 집착, 자기의 시간에 대한 과도한 집착, 그리고 자기의 것은 무엇이든지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의 유익에 대한 강한 사랑이 수많은 섬김의 기회를 헛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맡고 가르치는 영혼들의 변화받을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앗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우리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단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그분은 부유하지만은 가난한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려고 가난한 삶을 택하셨다.라고 하는 그러한 객관적인 선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그 가르침에 스스로 감화를 입어서 끊임없이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고 영혼들에게 유익을 줄수있게끔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은요. 어떤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조금 다른사람에 비해서 덜 탁월해도 부지런히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 영혼들을 찾아다니고, 그 영혼들에게 권면하고 그 영혼들을 섬기고, 상담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돌봐주고, 그렇게 하는 사람들의 구역이나. 클라스가 훨씬 영적으로 건강하게 자라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무릎을 딱꿇고 ‘나는 오직 당신께로부터 주어지는 진리 이외에 소망이 없나이다’. 하는 사람들만 구성되어 있다면은 아마 안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항상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아직 마음의 문을 못여는 사람들도 있고,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중요한 일보다도 자신에게 더급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위해서 가르치는 자,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은 나의 유익을 포기하는 삶, 그래서 그들의 영혼에 진정한 유익을 위해서 섬기고 그들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이타적인 삶, 이것이 바로 가르침의 효과를 증폭시킨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이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내가 너희 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라고 자신의 3년동안의 목회사역을 눈물로 고백하며 털어 놓을수 있었던 그 헌신적인 삶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자신의 사역과 섬김의 이 초점을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자기의 양떼들의 유익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그러한 삶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하번 깊이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우리 주님이 우리보다도 당신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셨더라면 어떻게 죽음을 모르시는 그분이 십자가의 죽음에 자신의 몸을 내어주실수가 있었겠습니까. 만약에 그분이 우리보다도 자기 자신을 훨씬 더 사랑했더라면 아마 결코 십자가를 지실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 자신이 만약에 우리보다도 당신 자신의 유익을 더많이 사랑하고 더많이 추구했더라면 아마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으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실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당신 자신보다도 당신에게 다가오기를 원하는 많은 영혼들, 당신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의 화해로 인도할 우리들의 유익을 훨씬더 생각하셨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속죄의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실수 있으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님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의 생애는 완전히 이타적인 생애였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그분의 삶을 완전하게 모방할수 있는 사람들이 없지만은 누구도 그 삶을 따라가지 않고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전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도 그분의 삶은 철저하게 양떼를 위해서 주어진 삶이 아니었습니까? 그분의 시간은 우리의 것이었고 그분의 건강도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그분에게 주신 복음의 진리도 우리를 위해 예비된 것이었고 심지어는 하늘의 영광을 받으셔야할 그분이 천한 세상에 내려오신 도성인신도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영광의 자리를 버리신 그 생애의 시작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정신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고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살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사죠. 우리가 구역장이죠. 혹은 우리가 복음반의 교사죠. 또 우리가 안믿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사람이죠. 정말 우리가 저를 포함해서 우리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가 그 영혼이 아니었더라면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해본적이 있습니까? 내가 꼭 가져야 할 것을 나 아닌 내가 가르치는 영혼들에게 주어본적이 있습니까? 살점을 내는것처럼 아까운 시간이지만은 영혼을 위해서 그것이 유익하기 때문에 살점같이 소중한 나의 시간을 다른 사람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내어 놓아준적이 얼마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이타적인 희생의 삶이 없이 영혼을 섬기는 우리의 사역에 풍성한 열매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이 받았지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를 가르치는 사람들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많이 주어야합니다. 그것이 가르치는 사람들을 향한 우리 하나님의 뜻입니다.
두 번째로는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가르침중에 하나가 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그랬는데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가르치고“인데 이 꺼림이라는 말이 말입니다. 깨름직하고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주저하지 않고 그런 뜻인데 히랍어 성경에는 이 부분이 이렇게 재미있게 표현이 되어있습니다. 무엇이라고 되어있느냐하면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유익한 것들 중에 어떤것도 뒤에다가 감추어 놓지를 않았다. 무슨이야기입니까? 영혼들에게 유익한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줄수 없게하는 방해요인이 있을 수 있지않습니까.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예를들자면은 그런 것 가르치면은 재미없어. 그리고 핍박하는 그런 박해가 있을수 있지않습니까. 그렇죠. 그리고 또 어떤 것이 있을수 있을까요? 박해는 없지만은 그 영혼에게 무엇인가를 유익을 줄려면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자기가 손해를 보고 희생을 해야됩니다. 그면 자기 사랑도 우리로 하여금 아낌없이 영혼들에게 섬기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소가됩니다. 그런데 이런 많은 방해요소가 있는데 그런 것들에 의해서 제지를 당하지 않고 서슴없이 전했다는 것입니다. 꺼림없이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영어 성경에서는 ‘망설이지않고’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망설임이 없이, 즉각적으로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르치는 자의 진정한 삶입니다. 무엇이든지 그것이 자기에 대한 사랑이든지, 박해이든지, 혹은 가르치는 영혼에 대한 인격적인 실망이든지 무엇이든지 그 어떤 것이라도 그 영혼에게 유익한 어떤 것을 가르치고 증거하는 그 일을 멈추지 못하게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영혼을 가르치는 자가 유지해야할 가장 중요한 섬김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전쟁에 나아가는 사람들은 간편한 복장을합니다. 옛날에 언제쯤 될까요. 18세기쯤되도 그렇습니다. 전쟁하는 그 모습 이렇게보면은 사람들이 좀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들갔지않습니까. 무슨 패션쇼장도 아니고 뭐 꼭 기사도 같은 그런 이런 육군사관학교 예복같은 그런 옷을입고 나오지않습니까. 뒤에 재비꼬리처럼 뭐도 달리고 무슨 폼잡기 경연대회하는 것 같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역사가 흐르면서 군인들의 전쟁의 복장은 점점더 화려해진 것이 아니라. 점점더 단순하고 간편해졌습니다. 그래서 결코 무엇이냐하면은 전쟁을 많이 하면서 사람들이 현대적인 병기들이 발달을 하면서 무엇이 전쟁하는 군인에게 꼭 필요한 복장이냐?라고 생각할 때에 가장 간편하고 날렵하게 몸을 움직일수 있는 복장이 최상의 복장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금과 같이 병기가 발달한 상황에서는 그 까짓것 쇠쪼가리 하나 두개 여기에다가 붙인다고 해서 총탄을 막을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특수한 경우 이외에는 방탄복은 무슨방탄복입니까. 간편한 복장만 입고 그리고 생사를 걸고 전쟁에 임하는 그런 차림새 아니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무엇에도 거침이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이 저 영혼에게 유익이되니 네가 이 일을 영혼을 위해서 수고하라. 할 때에 아멘하고 달려갈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 상황이나. 이런것들이 간편한 복장이어야됩니다. 그래서 실크드레스를 질질끌고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옛날 로마의 공중 목욕탕에 귀족들이 있지않습니까. 그런 모습을 하고 전쟁터에 나타날리는 없지않습니까. 간편하고 그래서 그 어떤것도 영혼을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여야할 그 필요성에 자신을 부흥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 없어야됩니다. 우리가 헌신되다. 헌신되다.라고 말하는데 엉덩이가 무거운 헌신은 없습니다. 무슨뜻인지 아십니까? 기도할 때 빼놓고는. 기도할때는 좀 무거웠으면 좋겠어요. 뭐 한참 기도를 하면은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대답을 하셔야할텐데 대답을 할려고하면은 벌써 가고 없습니다. 뭐는 어떻습니까? 잔뜩 물어넣고. 다 들으시고 네 기도를 듣고 보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말을할려고 쳐다보니까 벌써 가버리고 없습니다. 묵직해야지. 뭐좀 그래도 한참 해야지. 그렇다고 해서 조금하는 것은 기도도 아닌가보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은 좀 한참해야죠. 한참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은 그래도 한참해야됩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말고 영혼을 위해서 헌신했냐?라고 할 때에 그 몸이 무거운 헌신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역장님 누가 어려운 처지를 당했습니다. 심방갑시다. 가야지. 오늘은 힘들고, 내일은 어렵고, 모래는 곤란한데. 글피쯤에는 될래나. 금주에는 힘들고 다음주에는 어렵고, 그 다음주에는 바쁜데 너댓주있다 가볼까. 가야지. 가기는 가야지 누가 안간데나. 그리고 뭉기적 거리를 헌신이 어디있습니까. 군인들보세요. 딱 모아놓고 임무를 부여합니다. 아무게 어디로 누구 어디로. 누구 어디로. 그러면은 어이씨 그러면서 뭉게는 사람없습니다. 예. 예. 총알같이 탁탁 튀어서 자기의 임무를 부여받은 위치로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그것이 헌신입니다. 영혼의 필요에 따라서 민첩하게 움직이는 사람, 그 사람이 헌신된 사람입니다.
교사들하고 주일학교 중고등부 쭉 많이 해보았습니다 뭐 청년부도 해보고 그러면 이제 모아놓고 구역장들이나 교사들을 모아놓고 이제 영혼이 왜 안나왔는지 하나하나 물어봅니다. 어떤때는 다알면서도 일부러 교육적으로 물어봅니다. 얘 어떠니. 3주전에 안나왔는데 2주전에 전화해보니까. 전화를 안받고 그리고 또 한주 나와서 그다음에 누구한테 이야기를 들으니까 어디갔데고 3번째주 또 안나왔기에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했더니 뒷집에 사는 사람이 와서 가르쳐주었습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뒷집에 있는 사람이 가르쳐주고 옆에 있는 사람이 가르쳐주고 소문이 들려왔고. 그것이 정말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섬기는 섬김이냐는 것입니다.
집에서 요즈음 주가 떨어지는 소를 친다.그래도 저녁때가 되어서 네 마리를 치는데 두 마리 밖에 안왔으면은 그냥 내버려 두겠습니까. 어디 뒷집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어디 마실갔다. 그러더라고요. 내일이면은 들어오겠지요. 그렇겠느냐는 것입니다. 개가 나가도 안그렇습니다. 가끔말입니다. 전봇대에 강아지 찾습니다. 그리고 잔뜻 적어놓습니다. 우리 구역원 찾습니다. 집나간 구역원을 찾습니다. 그런 것을 거기에다 붙일수는 없겠지만은 그러나 우리에게 맡겨진 그 영혼들, 그 영혼들이 우리에게 맡겨진 그 순간에는 우리는 그 영혼의 결과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계산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도대채 충성되다는 것이 도대채 무엇입니까? 헌신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영혼의 필요에 민첩히 움직이는 그것이 헌신된표요. 그것이 진정한 주님 사랑의 표가 아니겠습니까. 사도바울이 그러한 삶을 견지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재미있는 세 번째 관찰은 무엇이냐하면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그리고 각 집에서나”그랬습니다. 이 공중이라고 하는 것은 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이곳에서도 전파했고 그리고 각 집에서도 말하자면은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도 하고 개인적으로도 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각 집에서나 라는 말이 히랍어 성경에는 얼마나 재미있게 되어있느냐하면은 집에서 집으로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프롬하우스 투하우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집에서 집으로 그러니까 이 사도사울이 보여준 영혼을 가르치는 자로서의 이 삶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하는 전설적인 설교자의 삶이 아니라. 실재로 그 영혼의 필요를 따라서 이집저집을 찾아다니면서 그 소수의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전파하고 설교했던 그런 사역이었음을 볼 수 있는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도바울의 삶을 오늘날의 목회사역에 그대로 적용할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남습니다. 이 사도바울의 임무자체는 목회자이면서도 동시에 이지역저지역을 다니는 선교사의 삶이었기 때문에. 아마 또 이렇게 연결이 되지않는 부분들이 있을지모릅니다. 그러나 할수 없어서 못하는 것은 할수없지만은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들의 사역의 정신이 되어야한다.라고 하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김은 영혼들의 필요에 따라서 가장 민첩하게 움직이며 그 영혼들에게 만족을 줄수 있는삶,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겠습니까.
언젠가 한번 제기동쪽에를 갔는데 무슨일이 일어난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뭐 수백명이 새카맣게 모였습니다. 그래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왜 저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였느냐? 그랬더니 조용기 목사님이 심방오셨데요. 심방받는 사람은 한가정인데 구경은 수십가정이 모여서 거기에서 구경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심방하기 어려운 목사님이 오시니까. 야 신기하고 그 집이 부러워서 아마 사람들이 많이 모였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분이 어떻게 한가정 한가정을 심방할수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참 기이해보였겠죠. 할수 없어서 할수 없는 것은 할수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자신이 할수 있으면서도 하지않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영혼들이 수십명은 아니죠. 수백명은 아니잖습니까. 수천명도 아니지않습니까. 아직 영혼들의 필요에 따라서 내가 조금만 나 자신을 희생하면 움직일수 있죠. 찾아갈수 있고. 아파할 때 함께 울어줄수 있고, 괴로워 할 때 함께 고통을 나눌수 있고. 물질적으로 필요할 때 나누어줄수 있고, 아파할 때 위로가 되어줄수 있죠. 아직은 그런 여력이 우리에게 있지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할수 없을 그때에 할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책임이 적지만은 그러나 할수 있는 그 때에 하지않는 것은 우리에게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것입니다. 교인이 수만명이 되었을 때에 한가정 한가정 돌아보면서 심방하지 못한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 목사를 혼내실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교인이 몇 십명밖에 안될때도 그렇게 돌아보지 않은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충분히 책망하실수 있습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아직은 할수있지않습니까. 우리에게 젊음이 있고, 아직은 건강이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지는 않지만은 그러나 다른사람들의 신세를 지기보다는 다른사람들에게 배풀면서 살 수 있는 여력을 주셨습니다. 병원에 드러누워서 문병을 받기보다는 문병 다닐 수 있는 팔다리를 주시고 건강을 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깨우침을 받지않으면 교회생활 할수 없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이사람 저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나누어줄수 있는 위치에 있게되었으니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할수있지않습니까.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수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공중앞에서만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주고 전하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 공중 앞으로 나오지 않으려는 사람들이나 나올수 없는 사람들, 공중에 모인 상태로서 그들에게 줄 수 없는 특별한 유익을 위해서 그는 대사도임에도 불구하고 이집 저집, 이 가난한 가정, 저 힘든 가정을 방문하면서 때로는 핍박과 그리고 멸시를 받으면서도 필요를 느끼는 영혼들이 있는 그 곳에 찾아가서 그 영혼에게 무엇인가 유익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했습니다.
나는 오늘 영혼을 섬기는 사람중에 한 사람으로서 영혼을 맡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영혼을 잘 챙기고 그 영혼들이 필요로 하는 곳으로 찾아가고 그 영혼들이 있는 곳에 가서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을 자기의 소질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소질이 아닙니다. 헌신의 유무이지 소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달란트와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돌아오고 한 마리의 양이 우리에 들지 않았는데 목자가 왜 그 한 마리를 찾아서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떠났을까요? 목자가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 양이 내 사랑의 발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그 영혼들, 하나하나의 필요에 따라서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이 가르치는 사람의 중요한 직무인 것입니다. 수백명, 수천명이 우리에게 맡겨진 것도 아니고 불과 몇 명들이 우리에게 맡겨진 상황에서는 우리는 더더욱 이런 사도가 이집에서 저집으로 다니며 그들의 영혼의 필요를 채웠고 그들의 영혼에 유익한 것을 나누어 줄려고 애썼던 이 삶을 깊이 본받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참 그 교사 리바이벌에도 그런 이야기를 썼는데 잘들어보세요. 우리가 돌보던 영혼들이 그냥 그대로 사랑스럽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우리의 품안에 있으면은 너무나 좋은데 그 무슨 이유때문인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서 자꾸 떠납니다. 새로운 양떼들이 오기도하지만은 그러나 떠나는 양떼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떠난 사람들은 모두 이 심장에 철판 깔았기 때문에 떠나는 강팍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못된 목자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난 사람들은 잘 기억하세요. 우리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안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눈물로 기도해도 결국은 돌아오지 않는 양들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산넘고 물을건너 우리가 찾아갈때까지 집에서 집으로 찾아가고 그래서 그들의 영혼에 무엇인가 유익을 주기까지 돌아오지 않는 영혼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달이 지나도 영혼들이 고통하는 그곳에 단 한번도 찾아갈줄 모르는 교사와 구역장은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부실하고 교회의 출석이 불안정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지 않는 영혼들, 그리고 무엇인가 변화가 필요한데도 이상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불쌍한 사람들, 그를 위해서 우리의 많은 것들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옛날에 제가 대학에 있을 때에 교수님 한분이 상을당했는데 교수들이 거기를 찾아갔습니다. 사실 저같이 바쁜 스케줄 속에 사는 사람들은 죽는 것이 계획이 있게 죽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뭐 이렇게 시간 약속을 하고 상이 나는 것이 아니니까. 참 고통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해요. 가야지. 그런데 가면서 어느 교수한분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는 대학에 다닐때의 일인데 자기과에 있는 별로 친하지도 않는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데요. 그래서 자기는 자기의 약속이 여러 가지가 있어서 안갔데요.
그랬더니 뜻밖에도 몇일있더니 지도교수가 자기를 부르더래요. 그러더니 야, 너 누구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왜 안왔냐? 그러더래요. 한 크라스에 학생이 4-50명이고 별로 친하지도 않는데 저는 바쁜일이 있어서 못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교수가 그 자리에서 막 욕을욕을 하면서 야단을 치면서 너같은 놈도 인간이냐. 그러시면서 사람이 죽었는데 그것보다 더 큰 일이 어디있냐. 니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래 니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일이 얼마나 중요하길래 니가 거기를 못오냐 그러면서 거기에서 서서 그냥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공박을 다 당했는데 자기가 고개를 들수가 없더래요.
그 교수가 거기에 제일먼저 가서 더군다나 밤늦게까지 거기에 앉아서 빈소를 지켜주리라고 자기는 생각도 안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가 그렇게 해놓고 바가지로 욕을했는데 그 다음서부터 자기의 인생관이 많이 바뀌었다. 그 얘기를 하면서 자기가보면은 상가집에 찾아가서 저 사람은 뭐 우리하고 별로 가깝지도 않은데 여기는 왜 왔어. 아이 오지랍도넓네. 그런적이 한번도 없더래요. 아무리 먼 사람이라도 찾아가면은 그렇게 고마워하고 잊지못해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무엇이냐하면은 유익을 어느관점에 맞추어서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영혼들의 필요에 민첩하게 그 영혼들이 있는 그 곳으로 움직이면서 사느냐는 이것이 중요한 관건이 되는 영혼을 섬기는 자에게도 반드시 견지되어야할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어가고 병들어가는데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무엇이 있을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주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누구도 자기에게 보내주시는 모든 양떼들을 완벽하게 돌보았다고 말할수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는데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해야됩니다. 그렇죠.
고등학교 다날 때 국민윤리 시간인데 선생님이 유교의 도덕에 대해서 가르쳐주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질문을 하셨습니다. 임금하고 아버지하고, 스승하고 셋이 빠졌는데 그 중에 두 사람 밖에 건질수가 없데요. 그 때 너희들은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애들이 다 대답을 했습니다. 난 우리 아버지 먼저 건져줄래요. 그리고 그 다음에 임금님은 건져주고 스승은 내버려둘래요. 그러는 사람도있었고, 그러니까 선생님이 얼굴빛이 변했습니다. 아, 못된녀석, 또 어떤 학생은 그랬습니다. 우리 아버지하고 선생님하고 건져주고 임금님은 죽게 내버려두겠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 아버지 마음에 안들어요. 선생님하고 임금님은 살려주고 우리 아버지는 떠내려 가게 내버려둔데요. 그랬더니 나올수 있는 답이 모두 나왔는데도 선생님은 너희들이 말하는 그답은 하나도 정답이 없다. 그럼 정답이 무엇입니까. 그러면서 물었더니 두분을 구해내고 한분을 구하다가 죽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정답이래요. 그런데 그때 참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들이 그 영혼을 다 잘돌보아서 나는 이제 내 사역에 여한이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없습니다. 모두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돌아오지 않는 것이 까놓고 이야기하면 우리만의 책임이겠습니까. 그렇지않습니다. 그래도 그 말을 우리가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돌아오지 않으면 주님이 “얘야 그 아무게 영혼이 왜 돌아오지않니?” 목사가 가서 아무게 집사님 당신 구역에 누구는 왜 요즘 돌아오지않습니까? 그 때에 내가 내 구역식구를 지키는 자니이까? 그렇게 대답하면 되겠습니까. 또 더심한 사람은 그는 갈곳으로 갔나이다. 그의 가는 길을 오직주가 아시나니. 그렇게 말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모두 나때문인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있는지. 물론 그 영혼도 강팍함이 있고 있지만은 그러나 그것은 각자가 주님 앞에 해결해야될 일입니다.
주님이 이 부족한 사람으로서 영혼을 섬기는일에 이렇게 복을 주셨는데 내가 더 많이 내 유익을 포기했더라면, 내가 더많이 나를 위해 자기를 버리셨던 주님처럼 희생했더라면, 나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영혼의 잘됨을 나의 보람으로 여기면서 더 많이 죽기를 매인하고 그의 영혼을 위해서 나를 온전히 드렸더라면, 아마 더 많은 영혼들을 구할수 있었을것인데. 그런 고백을 하게됩니다.
몇해전에 감동적으로 전세계를 휩쓴 영화가운데 쉰들러리스트라는 영화가 있었잖습니까. 어느정도나 사실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영화보면서 좀처럼 우는 사람이 아닌데 마지막 장면에서 정말 눈물이 나왔습니다. 결국은 독일인이 유대인들을 포로로 가지고 있는데 가서 군수품 공장을 하면서 그 사람들을 자신의 군수공장에 필요하다고 거짓 서류를 꾸미면서 뇌물을 먹이면서 하나씩 하나씩 빼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을 지배하기 위해서 폭탄을 아주불량 폭탄을 만듭니다. 그러니까 독일인의 입장에서 보면은 참 쳐죽일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사람을 하나씩 하나씩 또 빼옵니다. 얼마나 부패했는지 돈만 더 주면은 한명씩 막 빼주는 것이었습니다. 한명당 얼마 주기만 하면은 빼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전쟁이 모두 끝나고 사람도 다 죽었습니다. 이제는 그 사람이 전쟁시대에 나치의 편에서서 군수품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이제 세상이 거꾸로 되어서 연합군의 추적을 받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 때에 막 울면서 그럽니다. 이 금가락지가 도대체 무엇이냐. 저 차가뭐냐. 이 지팡이, 이 외투가 도대체 뭐냐. 이것 하나면은 몇 명은 더 살수 있었을탠데 그러면서 슬퍼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 장면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그렇다. 주님이 하잘 것 없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조금 섬기는데 그것을 사용하셔서 감당할수 없는 열매를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스스로 자부심을 느낄필요가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돌보고 있는 영혼들이 말씀을 잘먹고 은혜가운데 성장하고 있다면은 그것은 나의 잘남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나같은 인간을 통해서 저런일을 이루셨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우신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적입니다. 더많이 내가 죽고, 더많이 낮아지고, 내 유익을 더많이 포기했더라면 더 많은 영혼을 얻을수 있었을탠데. 그 사람처럼 탄식하는 날이 오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직 주님을 섬길수 있는 기회가 있는 이 때에 우리의 유익을 끊임없이 포기하고 그 영혼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낮은곳에 내려가서 그래서 그 영혼들에게로 다가가서 그 영혼들을 건지고 구원하는 가르치고 그 영혼들에게 도움을 주는 도구로서 살아가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을 돌보는 사람의 마음에 배어있어야할 진정한 사랑의 정신이요. 진정한 섬김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보면은 ”전하고 가르쳤다“라고 하는 말씀이 여기에 나옵니다. 여기에서 전했다.라고 하는 말은 선언했다.라는 의미이고 가르쳤다.라고 하는 것은 그저 가르쳤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가 이렇게 나란히 나오게 된 것을 보면서 우리는 교사로서 가르치는 사람들로서 아주 깊은 감명을 받는 것입니다. 무슨뜻이냐하면은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 할 얘기를 막 쏟아놓고 믿을사람만 믿어라. 안믿으면 너희들 손해다. 그리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디클래어 선언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에 있어서는 설득할수 없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언을 필요로합니다. 누가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의 탄생을 설명할수 있겠습니까? 누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수 많은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을 받고 못박혀 죽으신 그 분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을 입증할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힘없이 죽으신 그분이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요. 여호와였다는 사실을 누가 과학적으로 입증할수 있겠습니까? 그가 죽으셨지만 다시 사셨다는 것을 누가 증명해 보일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선언 이외에는 아무것도 세상을 향해서 제시할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편으로는 말이죠. 영혼들을 꼼꼼하게 돌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엇을 기대해야하느냐면은 이 선언에 강력하고 신비한 하나님의 역사가 깃들여서 이 믿을수 없는 진리가 선언을 통해서 내 마음에 믿어진 것 처럼 영혼들에게도 설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그 영혼들 속에 믿음을 심는 선언이 되기를 우리들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것이 믿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믿음의 역사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분명한 선언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 복음이 가르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역사하고 있어야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홀로 이 진리를 믿지않고서는 살아갈수 없노라.하고 하는 복음에 대한 체험이 이런 선언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가르치는 자에게는 오로지 이 무뚝뚝하고 칼날같은 선언만 존재한다고 해서 그가 훌륭하게 영혼을 섬기는 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디다스코 “가르치는” 여기에서 디다틱이라고 하는 교수학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그래서 이 선언은 아마도 공중에게서나 라고 이어진 것일거고 가르치고는 아마 집에서 집으로라는 말과 이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셨던 방식대로 많은 사람들이 모인 그곳에서 강력하게 진리를 선포하시고 소수의 사람이 모인 그 곳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들에게 하나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고 가르치는 인격적인 가르침을 통해서 그들을 설복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돌보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이런 설복의 불타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는 가르치는 사람이 이렇게 영혼들을 잘 설복하고, 이해를 시키고, 잘 가르치는 좋은 교수자가 될것이 요구가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사람은 부지런히 배우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들고 그리고 좋은 책들을 읽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배우는 학생의 자세를 잃지않는 사람이 될 때에 영혼들을 향한 탁월한 설복의 기술을 소유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11세기의 교부가운데 안셀무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켄터베리아 안셀룸 그 사람이 프롤로기아 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운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단 신앙의 시작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설득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한순간의 복음진리의 비춤으로 하나님의 존재가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놀라운 계시들이 확실하게 자신의 마음속에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난 다음에는 그것을 그치면은 신앙에 절대 발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확신은 곧 회의를 불러옵니다. 그래서 그런 강한 믿음이 들어오고 난 다음에는 확실히 믿기는 믿는데 논리 때문에 내가 이것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은 그러나 그 다음에는 즉시 내가 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가? 그리고 왜 내가 믿는 이 복음의 진리는 참 진리인가? 왜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신앙의 진리들은 모든 사람이 믿어야할 보편적인 진리인가? 이것들을 계속 탐구해 나가야합니다. 그 때에 튼튼한 신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년이 되어도 공과책 이외에는 한권도 책을 읽지않는 그러한 구역장, 그런 교사들은 깊이 삶의 방식을 돌이켜야합니다. 진리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진리를 가르친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옳지않은 것입니다. 진리는 필로소피아 철학입니다. 필로소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의 근본이라면 이 신앙의 근본은 진리 그 자체를 사랑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이 이것이 기독교의 교육이고 이것이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자질중의 하나입니다.
그렇다면은 제가 말씀드린 것은 이것입니다. 이러한 설복의 능력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복음의 진리들을 끊임없이 체험해야 하겠지만은 또 한편으로서는 지적으로서도 잘 다듬어진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많이 듣고 깨닫도록 노력을 해야됩니다. 이번 새가족 말씀 안내 시간에도 뭐 요즘처럼 어려운 상황치고는 엄청나게 팔렸습니다. 테입이 거의 만개 가까이 나갔으니까요.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어림도없습니다. 교구실의 문만 두드리면은 자기가 원하는 설교테입들이 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시리즈만 들어도 그 주제에 대해서 말씀의 빛을 볼수 있는 시리즈들이 누워서 기다리고 있는데 빌려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몇 세트씩 꼿혀있습니다. 전부다 교회에서 돈들여서 교구방 하나당 70-80만원식 들여서 라이브러리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책도 원하는데로 사는 것이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교구의 교역자들이 빌려줄수 있도록 거기에다 다 문고를 비치해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빌려가지 않고 쌓여있는 책들이 많습니다. 물론 무슨 진리의 책을 빌려봐. 사서보지. 그런 사람들 때문에 그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안믿어지지만 하여튼 믿을려고 애를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이 지적으로 성숙하고 열망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예를들자면은 들어보세요. 기도에 대한 책이있다. 그러면은 기도에 대해서 읽습니다. 맨날 그 얘기가 그 얘기네. 그럼 사람은 그저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몇가지 진리만은 이해할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죠. 난 세상에 무슨 골프채 한세트에 500만원 600만원가는 것이 있다고해요. 그것도 싼것이라고 누가 그러더라고요. 나는 그게 도대체 뭐가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뭐 그냥 아무거나 하나 가지고 치면되지 그렇게 여러 가지를 메고 다니는지를 난 이해가 안갑니다. 나무로 만든 것, 쇠로 만든 것, 납작한 것, 둥근 것, 뾰족한 것, 별것이 다있더라고요. 그런데 그것 하나하나가 다 용도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 내가 골프치는 사람에게 아이, 무겁게 뭐 통에다가 10개씩 잔뜩넣고 돌아다녀. 아무거나 맘에 드는 것 하나만 들고 가서 하지 한석봉이가 붓 탓하던가요. 그렇게 이야기하면은 사람들은 나를 아주 불쌍한 사람처럼 처다볼 것입니다. 아이고 여기는 왜 나와 가지고 괜히 잔디밭만 밟고다니나. 그럴것입니다. 왜 나는 그것을 모르니까. 모르니까. 다 그것이 그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아무거나 붙잡고 하나치면되지 폼은 맨날 텔레비에서 엉덩이를 ... 아무거나 신고 그저 때리면 되지. 모르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검입니다.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에베소서 6장에서 이야기하는 검이 이 짧은 칼입니다. 그런데 검인데 말이죠. 잘보세요. 여러분 수술실에 들어가면은 수술할려고 칼을 이렇게 쭉놓습니다. 종류가 얼마나 많아요. 나는 일식집에 한번 가서 깜짝놀랐습니다. 칼이 쭉 꽂혀있는데 칼이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아무거나 잘드는 것 하나가지고 썰면되지 무슨 칼이 이렇게 많느냐. 그러니까 이것은 생선뼈 자르는칼, 이것은 껍데기 까는칼, 이것은 뭐하는칼, 쭉놓여있습니다. 무식하니까. 우리는 그렇게 밖에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다양한 말씀의 칼이 필요하겠습니까. 관우가 들고다니던 그런 청령도 같은 것이 필요한가 하면은, 가까이 접근한 적을 찌르기 우해서는 짧은 단도 같은 것이 필요할것입니다. 그렇죠. 가까이 다가갈수 없고 어둠속에 멀리 있는 적을 위협을 느끼지 않고 살해하기 위해서는 가벼우면서도 쏜살같이 날아가는 표창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칼을들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는 그 칼과 맞부딪혀 싸우면서 적장의 목을 벨수 있는 그런 리본도와 같은 그런 검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죠.
그러니까는 다양한 칼이 무슨칼이 필요할지모릅니다. 그런 것들을 풍부하게 가슴속에 가지고 있을 때에 그 때에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셔서 일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설복하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고 영혼을 쪼개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것을 사용하셔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사다. 구역장이다. 그러면서 있는데 뭘좀 구역원들이나. 교사들을어떻게 좀 하나님이 손좀 보실려고 그 사람 가슴속에 손을 넣어서 찾으시는데 뭐가 있어야지 이가 다빠진 그 부엌칼. 두부도 잘 안잘라지는 그런 것, 하나 언제썼는지 녹지 새빨갖게 난 그것, 그것 하나가지고 맨날 욹어먹으니. 그것을 사용하실려고 하니. 고기를 썰어지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풍부한 가르침의 재료들을 소유하고 영혼들에게 능수능란하게 가르쳐서 그 영혼들에게 유익을 끼칠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이 되기전에 먼저 잘 가르침을 받는 학생의 자리에 먼저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저는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정말 많이 듣고, 많이 깨닫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그 재료를 가지고 삶의 현장에서 고민하고, 거기에서 진리의 대답을 찾고, 하나님의 진리로 자신의 삶속에 적용할 때 어떻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어떻게 승리하게 되는지를 풍부하게 경험할 때에 그 때에 그것을 재료로해서 영혼들을 설복하고 가르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사, 그러한 구역장, 그렇게 영혼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될 때에 그 때에 정말 영혼들에게 유익을 끼칠수 있는 사람들이 되지않겠습니까. 이렇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던 이 바울처럼말이죠.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세워주신 그 주님의 부르심에 정말 보람을 안겨드릴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체험된 가르침으로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20:21)
이어서 사도는 자신이 가르치는 자로서 그 가르침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에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바로 그 가르침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우선 이 핵심적으로 중요한 이 두 가지가 사실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먼저 앞에 나와있는 이 가르침을 받았던 대상들에 대해서 사도가 하고 있는 이야기에 눈길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그러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받은 사람들을 지칭하기를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라고 말하고있습니다. 만약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다른 시대에 했더라면 별로 우리들이 눈길을 주어야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들이 그 시대의 문맥으로 돌아가서 사도바울의 시각으로 이 유대인과 헬라인들이라는 표현을 살펴본다면은 이것은 그의 생애에서는 나란히 언급될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유대인이고 헬라인은 헬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같은 사도행전 20장을 증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바울의 마음속에는, 즉 사울의 마음속에는 두가지 강력한 편견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말씀을 올렸습니다. 하나는 신학적인 편견이었고 또 하나는 인종적인, 즉 심리적인 편견이었습니다. 첫째는 나사렛에서 자라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그 젊은 청년 예수가 메시아일 리가 없다.라고 하는 신학적인 편견이었고 또 하나는 심리적인 편견으로서 유대인 이외의 다른 민족에게는 구원이 없으며 나머지 모든 인간들은 쉽게이야기하면은 인간쓰레기들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당시에 이런 질문을 했다그래요. 하나님이 유대인말고 이방인을 왜 창조하셨을까? 지옥의 불을 지피기 위한 뗄감으로 쓸려고 창조하셨다. 우리가 모두 그 뗄감입니다. 뭐 큰사람은 좀 오래타고 작은 사람은 금방 타겠지만은 어쨋든 그런 뗄감으로 창조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근거가 있느냐. 사실 성경에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을 보면서 우리들이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구원사적인 시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하면은 원래의 구약 종교는 인종적인 편견에 사로잡인 종교가 아니라.하는 것을 기억을해야합니다. 다만 왜 그러면 구약을 들여다보면 유대인들이 그 예수님 시대에 그렇게 인종적인 편견에 사로잡혔는가? 그것은 성경을 통해서 받은 신앙이라기 보다는 그 시대의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려서 민족적인 동질성을 강조하는 그 시대의 정신과 야합한것입니다. 잘보세요. 그것이 얼마나 역사적으로 타당한가.
이렇게 우리가 말이죠. 일본에게 침략을 받은 것이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이 민족적인 동질성을 강화시키는데 굉장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 안하십니까? 지금도 한국하고 일본하고 축구하면은 여러분 누구응원합니까> 그 뭐 말하면 잔소리지. 누가 그러더라고요. 이북한테는 져도 일본한테는 지면은 안된다고. 그래요. 자기네 나라가 이기기를 모두 원하지만은 특별히 일본하고 싸울때는 이것은 이기면 좋다.라고가 아니라. 하여튼 절대지면 안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무엇이냐하면은 왜세에 의해서 압박을 받으면은 어느정도까지는 민족적인 동질성이 강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는 그런식으로 막 압박을 받으면서 바벨론 포로 이후로 한번도 나라를 가져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전 586년에 나라가 망하고나서 마지막으로 시오니즘에 의해서 20세기 중엽에 나라가 창설되기까지는 나라를 가져본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놓고 바벨론에게 포로로 끌려가고 그 다음에 메디아, 페르시아 그 다음에 헬라를 지나서 로마를 지나서. 한번도 나라다운 나라를 가져본적이 없고 계속 압박받고 수탈당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속에서 자신의 민족끼리 뭉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동질성을 가진것입니다. 그리고 또 핍박의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냐하면은 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 유일신 신앙, 이것 때문에 박해를 받은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는데서 똘똘뭉치는 것입니다. 이런 그 시대의 정신의 소산이지 구약성경 자체의 소산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구약성경 속에서는 이렇게 많은 민족을 끌어안는 혈통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적인 공동체와 그 언약관계에 더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통적인 이년이냐. 이년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동체가 유지되었다기 보다는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는 그런 장엄한 하나님의 성품의 경험에 의해서 공동체의 동질성이 유지되어 온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을 향한 경험의 동질성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은 혈통과는 관계없이 구원받을수 있는 많은 길들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것도 신앙을 통해서 들어오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조상의 혈통에도 항상 그 믿음을 계승해 나갈 자식이 있고 그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언약을 받았지만은 그 언약을 배반하고 말하자면은 그 믿음의 공동체에서 떨어져나갈 자식이 항상 함께 태어나는 것입니다. 거의 그러면서 어떤 사람들은 그 믿는 믿음을 전승해서 그 신앙 가운데 있고 어떤 사람들은 떠나서 가는 것입니다. 에서와 같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계속 들어옵니다. 왜냐하면 이제 혈통상으로서는 그런 언약의 자손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도 이제 신앙고백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우리아 같은 사람이라든지. 우리아는 헷사람입니다. 가나안 원수민입니다. 그런데 신앙 고백을 통해서 언제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은 하여튼 들어옵니다. 계속 들어옵니다. 갈렙같은 사람도 가나안 원주민 출신이었는데 혈통과는 관계없이 신앙으로 들어옵니다. 그 다음에 기생 라합같은 경우도 당연합니다. 택한 이스라엘 백성과는 관계가 없는데도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제 애굽에서 출애굽 할 때에는 중다한 잡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한신앙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구스여인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흑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이미 구약성경 속에서도 아주 부인할수 없이 면면히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는 이 성경의 우선적인 관점이 육신적인 혈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혈통이 아니라. 무엇이냐하면은 혈통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그 시대의 신앙을 전승하고 보전하는 통로로 사용된것입니다. 그 혈통에서 태어나도 신앙이 없으면은 하나님이 아낌없이 파서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을 해야됩니다.
그런 구약 신앙의 정확한 인식을 가졌더라면은 그런 편견에 사로잡혔을수가 없는데 그 성경보다는 그 시대의 정신에 영향을 많이 받은것입니다. 그러니까 헬라인은 말이죠. 헬라사람들의 이 사고방식은 또 유대인들의 사고방식하고는 아주 다릅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통합적이고 내면적인데 헬라인의 관심은 외면적이고 분석적입니다. 그래서 이 역사적으로 인류의 정신사를 움직인 이 커다란 서양의 두 흐름이 헤브라이즘과 헬래니즘입니다. 그 헬래니즘을 이 헬라. 히랍사람들이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헤브라이즘 두가지가 커다란 정신사적인 하나의 흐름이됩니다. 그런데 아무튼지간에 그렇게 생각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엄청나게 차이가 났고, 그리고 이 유대인들은 그 굉장한 선민의식속에 빠져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헬라사람들을 이렇게 무시해도 좋을수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었느냐하면은 구시대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가 들어서기전에 나라를 지배했던 그 나라가 마케도니아였습니다. 역사상의 마케도니아. 그 그리스에서 쏟아져나온 문명이 마케도니아의. 이 특별히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서 전세계에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쭉 전파된 문화를 총칭해서 헬레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뭐 각양신화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로마에 나오는 신화들은 모두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런 신화를 배경으로 하고 그리고 헬라, 그릭. 히랍 따 똑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그 히랍에서 생겨난 엄청나게 눈부신 그 문명의 빛을 온세계에 전해야 된다고 생각하던 사도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누구냐하면은 알렉산더대제입니다. 그가 땅을 정복했던 이유는 바로 사명감을 가지고 정복해서 그 헬라의 문화를 사람들에게 이것을 누리게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랬는데 나중에는 헬라 나라가 망하고 히랍제국이 망하고 로마제국이 들어서는 것입니다. 망한 나라인데 정치적으로는 로마에게 정복을 당했지만은 문화적으로는 계속해서 로마가 히랍문화에 빚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이 히랍사람들, 즉 헬라사람들을 이 유대인들이 엄청나게 싫어했습니다. 히랍사람들, 즉 헬라사람들 입장에서 보면은 유대인들은 논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죠. 뭐 기적 이런것만 생각하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은 히랍사람들은 말만 번지르하지 아무것도 신비한 것이 없다.라고 하는 것을 강조를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런 골깊은 편견들이 생겨난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불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셨는데도 베드로가 깨뜨려지기 전까지는 예루살렘교회가 이 헬라사람들, 즉 히랍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야한다.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이 생각을 가질수가 없었습니다.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문맥에서 오늘 이 바울이 이 중요한 복음진리의 내용이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에게나 자기가 가르쳐야했던 내용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보다도 더 진한 신앙의 고백은 로마서에 나오는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에게나 내가 복음의 빚진라로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알수 있느냐하면은 이 사도바울이 가르치는 자로서 먼저 사람에 대한 편견이 부서진 사람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르치는 자로서 매우 중요한 자격가운데 하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대한 편견이 깨뜨려진사람. 그런 편견은 초대교회에서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같은데 보면은 교회에 왔더니 부자들하고 가난한 사람들하고 대접을 다르게 해준것입니다. 부자들이 오면은 예를들자면은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여기로 오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이 오면은 예끼 자리도 없는데 서서 예배를 드리고 가든지 알아서해. 이러한 말하자면은 편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은 그 사람의 가치를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다 두는 사람입니다. 그의 재산이나, 학벌인이나, 소유나, 그런것 때문에 그 가르치는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높아진다. 낮아진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식의 편견과 생각은 세상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런데서 벗어날 수 있는 그런 곳이 되어야합니다.
사도바울이 가르치는 자로서 그것이 깨뜨려진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편견이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한 편견을 깨뜨린 가장 중요한 무기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을 위해서만 죽으셨다고 그가 만약에 깨달았다면은 이 편견을 강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순간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못박히신 십자가를 그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나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신 그 고난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고난이 아니라, 헬라인만을 위한 고난이 아니라, 우리모든 사람을 위한 고난이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를 위한 고난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것입니다. 누구든지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눈을 뜬것입니다. 그리고 보니까 내가 심리적으로는 가장 미워하던, 그리고 불쾌하게 여기던 저 짐승같은 지옥의 뗄감같은 저 헬라인들이 바로 주님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저희들을 위해서 그렇게 피흘려 죽으셔야했던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되자. 그들에 대한 이 존재와 영혼의 가치를 새롭게한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인과 헬라인을 자기가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야할 모든 사람으로서 거명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래야됩니다. 그래서 목회가 어렵고 가르치는 자의 길이 험난합니다. 모두 가르침을 듣고 저 말씀 밖에 없다고 그러면서 저말씀이 하나님의 진리라고 고백을하고 가르치는 자 앞에서 하나님께 모릎을 꿇는 감화와 감동이 있다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참된 진리를 가르쳐도 모든 사람이 그 가르치는 사람을 환영하고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세상에 없는 주님의 사람으로 알지만 어떤 사람은 인간같이 생각도 안하는 사람들이 있을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객관적인 기준인 부자다, 가난하다, 많이 배웠다, 못배웠다, 이런것만 말고 그런 주관적인 기준으로 볼때에도 사람에게 그런 차별이 있습니다. 그것을 정말 뛰어 넘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데 전념하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가르치는 자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받는 사랑의 감화가 진리를 가르치고자 하는 원동력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이냐하면은 뒤에것부터 보겠습니다. “증거한 것이라.”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증거한다’ ‘증언한다’ 증거한다는 말씀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이것이 원래 법정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증언’이죠. 증언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증언하고자 하는 내용을 실재로 경험한 사람이어야합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에 이 가르친 진리는 이제 우리들이 살펴볼 믿음과 회개라고 하는 이것은 단지 누군가에게로부터 전수받아서 전달해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진리의 내용들을 깊이 경험하고 그 영혼들에게 가르쳐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르침에는 세가지의 요소가 모두 골고루 겸비되어야합니다. 즉 무엇이냐하면은 지적인 요소가 있어서 그래서 설교를 듣든지 성경공부를 하고 나든지 아니면은 복음전도를 받고나면은 명확하게 내가 모르던 그 무엇을 나에게 저 사람이 이해시켜 주었다.라는 지적인 내용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무엇이냐하면은 가르침을 다 받고나면은 그 다음에는 그런 가르침의 영향 때문에 예전에 고쳐질수 없었던 나로 고쳐지고 예전에 행할수 없었던 일들을 행하는 의지적인 변화가 뒤따라야지 그것이 성공한 가르침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는 무엇이냐하면은 중요한 것인데 이 가르침 속에는 정서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어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뜻이냐하면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라고 하면은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 그 사랑의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야하고 이런 사람이 되어야한다.라고 하는 실천적인 순종을 촉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은 그러기 위해서는 뭐냐하면은 그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느끼게 만들어주어야합니다. (예를들자면은 거룩한 삶에 대해서 설교를하거나 성경을 가르친다. 그럴 때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그 가르침을 받고나면은 정말 거룩하게 살고싶고, 거룩하게 살지못한 자신이 너무밉고, 그리고 거룩한 삶을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그것에 대한 강한 소원을 갖게 만들어주어야만이 그것이 성공한 가르침이지 그래서 누가 그러더라고요. 십자가 설교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래요. 어느 학생이 편지를 썼는데 그렇게 썼어요. 일년이면 몇번씩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자기도 들었는데 그런데 그런 십자가의 설교를 듣거나 가르침을 받을 때마다 어려서부터 느낀 느낌은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저기가면 십자가가 있으니까 그쪽으로 한번 가보라고 그리고 거기에서 예수님을 만나라고. 무슨 이야기냐하면은 그렇게 가르쳐주는 사람도 자기가 만져보고 경험한 십자가가 아니라. 어딘가로부터 들은 내용입니다. 그렇게 하면 거기에 십자가가 있고 거기에서 예수님을 만나면은 사람이 바뀐다. 그러더라. 증언이 아니라. 변호 내지는 그냥 발언입니다.)
이런 방법이 있지않습니까. 자신이 그 십자가에 떨어지는 그 피 아래서 자신이 십자가의 진리에 흠뻑 젖은채 왜 당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릅니까? 그분이 당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그분이 당신을 위해서 못박히셨는데 왜 당신은 그 십자가 아래에 나오지않습니까. 십자가 아래에서는 이렇게 안식이 있는데 당신은 십자가를 모르는체 살아가면서 영혼에 안식이 있습니까? 이렇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십자가의 감격아래 있고 그것을 듣는사람은 그 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가르침을 받을 때에 그것이 증언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냐하면은 저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A라고 하는 진리에 대해서 말할 때에 그 A라는 진리의 실재를 경험하고 있거나, 혹은 경험했거나, 지금 현재느끼고 있는중이고 나는 거기로부터 소외되었다.라고 하는 분명한 차이점을 느낄수 있을때에 그 때 비로서 깨닫는것입니다.
제가 언제한번 그런말씀 드렸나모르겠네요. 누가 청교도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정확하게 생각이 잘안나는데 이렇게 모아놓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주는데 무릎을 꿇고 우리같이 기도합시다. 오! 주님.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흐느껴 울었다는 것입니다. 말은 안하고 설명은 안했지만은 탄식하면서 자기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자기들을 기도해 주겠다는 사람이 탄식을 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가슴이 찢어지도록 부르는 그 한마디의 탄성을 통해서 자신들은 아직 경험해보지못한 어떤 실재를 이 기도자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그것을 막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함께 기도의 은혜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 신앙에 있어서 체험이 결핍된 메마른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진리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는 것은 물론 필요하지만은 그것보다도 그들이 그 십자가에 대한 진리에 집중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가르치는 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서 자신이 무엇인가 십자가의 진리를 알고있어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억지가 아닙니다. 들어보세요.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보다도 더 풍부한 신앙의 경험의 세계를 소유하고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험, 체험적인 요소가 오늘날 교육에있어서 굉장히 많이 무시되고있습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진리가 있고 그 진리를 체험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무엇이냐하면은 그 진리와함께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진리와 그 은혜 이 두가지가 인격에 함께 영향을 미칠때에 진정한 신앙의 상이 성립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그것이 참다운 신앙의 요소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전했는데 이것은 사도바울이 어디에서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경험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자신이 들은 내용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경험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가르침이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가르침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이 진리의 내용을 잘 준비된 가르침의 내용에 체험을 더해야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체험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충분히 자기의 것이 될 때에 그 때에 기독교의 진리를 가르칠 때에 그것이 증언이 될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화된 것은 굉장히 가르칠 때에 쉽습니다. 체험된 것은 가르칠 때에 물 흘러가듯이 계속 쏟아져나옵니다. 물론 계속 쏟아낸다고해서 그것이 모두 진리는 아니지만은 그러나 어쨋든지간에 체험된 진리에는 그런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항상 기억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오늘 다 설교를 못하겠습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런대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것이 무엇이냐하면은 이러한 진리에 대한 체험을 갖고싶지않은 사람이 누가있겠습니까. 그렇죠. 그러니까는 잘 생각해보세요. 왜 똑같은 이야기를해도 체험한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은 그 이야기를 충분히 전달이 안되었는데도 아주 강력한 힘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어느날 호랑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사람의 연사가 나와서 호랑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호랑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얼마나 이 입심이 좋고 그리고 표현력이 탁월한지 말입니다. 정말 그 호랑이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합니다. 호랑이는 대게 언덕위에 나타납니다. 호랑이가 나타나는 것은 대게 밤입니다. 그렇죠. 낮에는 호랑이가 안나타나죠. 밤에 나타나고 그리고 호랑이가 나타나는 그 언덕에는 대나무가 몇가지 서있습니다. 네 개가 서있는데 세 개는 똑바르고 한 개는 이렇게 옆으로 휘고 그리고 거기에서 눈은 화등잔만하고 위에는 하얀 눈섶이 있고 그리고 양쪽으로 수염이 대여섯개씩 나있고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이 있고 그리고 입을 벌리면은 핏빛의 혀가 넘실대고 이빨이 한 7센티는 되게 기다란 송곳니에 달빛이 어리면서 반짝이고 그리고 하늘위에는 구름이 떠가고 많이 본것아닙니까?
이발소 같은데 걸려있는 그 그림입니다. 이발소 그림, 호랑이들이 딱 이렇게 하고 걸려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자는 것입니다. 막 입에 침을 바르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거뭐 묘사는 섬세한데 사람들이 다 웃는 것입니다. 왜 이발소에서 늘 흔히 보던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파란 하늘에 꼭 달이 떠있습니다. 그런데 그 달은 꼭 보름달입니다. 반은 이렇게 구름에 가려있고 그런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한사람이 딱 올라와서 호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때는 1953년 2월 6.25전쟁이 막바지를 치닫고 있더 때였습니다. 동해안 격전지에서 임무를 부여받은 저는 동반자도 없이 전령을띠고 어두운 밤. 칠흙같은 그믐 태백산을 넘고 있었습니다. 빨리 이 전령의 임무를 감당해야 된다는 일념으로 쉬지않고 뛰었고 온몸에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언덕을 막 넘어서 계곡을 돌아서고 바로 그 때였습니다. 놀라지않습니까. 호랑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는데 앉아있는 사람들이 침을 삼키는 것입니다. 야! 차이는 무엇입니까? 만난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실재로 제가 어렸을때에 들었습니다. 누구한테 그런데 그분이 진짜 호랑이를 만났데요. 그런데 뭐 사실 그것이 진짜 호랑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하늘에뜬 둥근 달만 알지. 그런데 하여튼 그 사람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군인이었는데. 딱 호랑이하고 마주쳤는데, 호랑이가 아닐수도 있다고해요. 사람들에 의하면은 그런데 하여튼 딱 마주쳤데요. 그런데 개들은 그 호랑이하고 마주치면은 오줌을 쌉니다. 지기도 딱 마주섰는데 말로만 듣던 호랑이를 달빛가운데서 마주쳤는데 이것이 호랑이라는 생각이 딱 드니까 온몸이 딱 굳어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확 달려들어서 자기를 잡아먹지도 않고 갈 기세도 안보이고, 그대로 서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막 한없이 길어서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고, 그렇지않겠습니까. 밤길에 이상한 사람만 만나도 놀라운데 그런데 이 사람은 참 담력도있지. 이제 철모를 이렇게 벗어서 들고 있는데 만난것입니다. 그런데 뭐 총을 들벗어서 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고. 바로 코 앞에 있으니까. 그래가지고 그것을 벗어서 돌맹이가 옆에있는 쾅하고 내려쳤데요. 그랬더니 불이번쩍 튀었데요. 그 철모에서 그리고나서 조금있더니 까무러쳤는데 삽으로 이 흙을 퍼붓는 것 같은 흙 세례가 막 날아오더래요. 그러니까 호랑이가 불이 번쩍나니까 뒤로 확 돌아서가지고 그냥 흙을 퍼부은 모양인데 그 사람 이야기가 한번 흙을 던질때에 그것이 한삽퍼서 던지는 거와 같더래요. 그래서 자기는 기절하고 깨어나보니까 호랑이는 자기네집으로 갔더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결국은 무엇이냐하면은 진짜로 그 상황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말이 좀 안맞고 달빛에 대한묘사, 호랑이 수염이 어떻고, 무슨 송곳니가 달빛에 반짝이고, 그런 이야기 하나도 안해도 벌써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은 저것이 폼잡는 것이 아니다. 저것이 똥폼이 아니라. 뭔가 실재가 저 안에 있다. 그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은 가르침의 내용을 경험한 사람들이 갖는 간증입니다. 그 권위에 누가 대들수가 없는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체험위에 풍부한 지식까지 함께 갖추고 있다면은 어떻게됩니까.? 그 권위에 더 대들수가 없습니다. 뒤에가서 궁시렁 거릴수는 있어서 대놓고, 대놓고 이야기해봐야 지식으로 박살나고, 체험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니까. 체험에서부터 자기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수 없으니까 게임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사도바울이 경험했던 가르치는 자로서의 이 내면의 질입니다. 그럼이제 오늘 중요한 요점은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누구든지 가르칠 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르칠 때에도 자기가 그런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데 가르치면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막 현란하게 묘사하면은 자기의 양심이 거짓말 마. 거짓말마. 그렇잖습니까. 하나님이 있지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면 속에서 거짓말. 아 내가 있지 그 사랑에 너무 감동을 받아서 나의 내면의 세계가 감동을 받았어. 그러면 내면의 세계가 나는 받은적 없는데 누가 받았니. 그렇지않습니까. 그런데서 자유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거짓말 하거나 아니면은 위증을 할 때에 거짓말 탐지기에다 탁 대면은 거의 잡힌다면서요. 그러니까 자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자유한 것처럼 훌륭하게 해내는 사람들이 누구냐하면은 배우들입니다. 그런데 그 배우들도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보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무슨이야기냐하면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배우는 만들어 내고자하는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신속히 집어넣는다는 것입니다. 무슨얘기인지 아세요. 들어보세요. 이런것입니다. 슬픈 연기를 한다. 그럴 때 하나도 안슬프면서 눈물흘릴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눈물샘이 망가진 사람 이외에는 그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러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되느냐하면은 가상의 슬픔을 속에다가 신속하게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재로 삼는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눈물흘리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 가난해서 우는 연기인데 그렇게 슬픈 연기를 할 때에는 옛날에 슬프게 죽은 엄마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순간적으로 있지않은 현실을 가공의 현실을 연기해 내기 위해서 이 연기장면과는 상관이 없는 다른 사실들을 신속히 입력시켜서 슬픔의 실재를 불러일으키는 기민한 순발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가르켜서 명연기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3분안에 울다가 3분안에 웃습니다. 참 이것은 대단합니다. 굉장합니다. 이것을 할수 있는 사람은 고도의 연기자와 그 다음에 부흥회에 참석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굉장히 뛰어납니다. 그런데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그 실재하고 있는 경험이 없이 어떤 사실들을 나열하는 것은 가능하지만은 피묻은 진리로서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주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모두 그렇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느끼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히 체험되어서 그 체험과 진리가 하나가 된 가운데 증언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인격과 그다음에 진리를 아는 지식과 함께 어울어 질때에 아주 유장하고 풍부한 가르침이되어서 쏟아져나오는 것입니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몸이
평안히 쉬일곳 전혀없네
걱정과 근심이 어딘들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머리가 희긋하게 나이간 든 사람들이 혼자 조용히 교회당에 나와서 혹은 혼자 조용히 열차를 타고 여행하면서 이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칠 수 없이 지나가는 수많은 우수사력 어떤것들은 가치있는 근심, 어떤것들을 쓸모없는 염려. 이런것들이 막 스치고 지나갑니다. 깊게 패인 주름살, 얼룩진 얼굴위에 눈물이 주르륵 흐릅니다. 그리고 눈을 뜨니까 눈이 찬란하게 반짝입니다. 맞아 이 세상은 내가 정들 수 있는 집이 아니구나. 하나님의 나라에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이 찬송을 부르면은 가슴에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짜리가 이 찬송을 부르고 울고있다고 생각을해보세요. 뒤에가서 뒤통수를 한데 때려줄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밥해 주는데 괴로운 인생길은 무슨 괴로운 인생길, 걱정과 근심이 어딘들없어. 지가 임마 공부안하고 쓸데없는짓 하니까. 학교 가도 걱정. 집에 가도 걱정이지. 뒤통수를 한데. 그 시간있으면 단어나 하나 더외워라. 뭐가 될려고 이러니. 쥐어박아요. 그아이는 그래 물론 부모잘못 만나서 생고생 했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러한 찬송이 뼈에 녹을정도 까지는 안되었습니다. 등록금 몇번 못냈다고해서 그렇게 괴로운 인생길에 대한 정의가 내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고난과 슬픔이 아직 농읽지 않은 것입니다. 농읽지 않은 고난과 슬픔에 대한 느낌은 감상입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 일수록 어때요. 희로애락이 굉장히 빠릅니다. 막 죽을상을하고 7층에서 뛰어내릴려고 하다가도 야, 게임기 사왔다그려면은 와. 인생 다 살것같아요. 그런데 인생을 달관하고나면은 그렇게 안되요. 괴로운 인생길 가는몸이 그래도 10층에서 안뛰어내려요. 왜 간단하게 끝낼수 없는 뭐가 외상값이 인생에 남아있어요. 살기싫어도 살고, 살고싶어도 살고, 서머세트모험이 얘기했듯이 인생을 살면서 젊은 시절에는 막 정면대결만 있는줄 알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발꿈치를 치면서 혹은 끌어안고 비켜가면서 그러면서 인생을 사는 지혜들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원숙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야합이라고 말할지모르지만은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모두 경험에 요소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결합될때에 그것이 참된 증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중요한 것 말한다고 하면서도 자꾸 도네요. 우리모두 그런 증언 속에서 살고싶습니다. 당연하지않습니까. 어떻게 모두 그런 증언속에서 살고싶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영혼들에게 가르치면서, 내가 먼저 그 사랑에 사무쳐서 눈물을 뚝뚝흘리면서 가르칠수 있다면. 내가 신령한 기쁨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기쁨 때문에 나의 얼굴에 만면에 신령한 그 기쁨의 빛이 가득할수 있다면. 내가 성결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성결의 거룩한 삶속에 있는 이 신비하고 아름다운 비밀과 기쁨을 실재로 누리고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말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경험하지못한 사람이 일만마디의 말보다는 한마디의 이야기가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영국을 몇 달 여행한 사람이 영국에 대해서 막 이야기하니까. 20년을 영국에서 산 사람이 한 20분 이야기했거든요. 잘못봤어. 그렇게 얘기해습니다. 잘못봤어. 딱 네글자거든요. 그런데 무참하게 무너지는 소리가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와르르르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20분동안 우리같이 가서 밥이나 몇번 먹고온 사람들이야 와! 황홀해가지고 참 심오하다. 그리고 듣고있는데 한 20분 다 이야기하고나니까. 20년 산 사람이 조용히 커피잔을 내려놓으면서 잘못봤어. 네말로 20분동안의 수만마디의 말을 와르르 무너뜨려요. 그리고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것은 다 쓸데없고 저 사람이 뭐라그러는가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체험한 사람이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칠때도 이렇게 체험한 사람으로서 영혼들에게 가르쳐야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 하나님의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의 실재를 내가 충분히 느끼면서 가르칠수있을까?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가르칠 내용을 체험하는 삶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20:21)
지난 시간에는 21절 중에서 가운데 빼놓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그리고 그 다음에 “증거하는 것이라.”를 먼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죠. 사실은 다 할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가서 끝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라는 말 속에서 지금 우리들이 읽으면은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지만 인종적인 편견에 가득차 있던 바울로서 이 기독교 신앙의 고귀한 가르침을 헬라인들에게도 가르쳐야할 무거운 부담과 사랑을 느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엄청난 일이다. 그 말씀을 드렸습니다. 장시간 동안에 말씀을 드리면서 여러분들의 이해를 일깨웠습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자세는 그런 편견으로부터 잘유로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가르침을 받는 영혼들에 대한 그런 깊은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하는데 그런 사랑을 갖게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만남의 경험이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다음에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그 내용을 제쳐놓고 그 다음에 먼저 설명한 것이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어떠어떠한 것들을 증거했는데 그 증거한 것은 단지 변호하거나, 위해서 말하거나, 변증하거나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주 권위 있게 증거할수 있었다. 그러면서 호랑이 예화까지 다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 아마 가르칠 때에 그런 차갑게 어디에서 주워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권위있는 증거로서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싶을 것이다. 그런 말씀을 드렸고 여러분들은 아멘을 했고 그러면 어떻게하면 이것을 내가 경험한 상태에서 이렇게 권위 있게 증거할수 있느냐. 그러니까 그렇게 권위 있는 증거를 위해서는 내가 그것을 경험해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이것을 경험할수 있겠느냐? 거기까지 하고 다음시간에 하겠습니다. 그랬죠. 그랬더니 여러분들이 에이 그랬습니다. 기억력이 탁월하죠. 그렇죠.
그러면 에이 한 대목에서부터 시작을해서 오늘은 다시 가운데로 들어가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믿음” 그것이 가르침의 내용이었다고 하는 것. 왜 그것이 기독교 가르침의 내용이 되는지에 대해서 이제 여러분들에게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렇습니다. 호랑이의 예화에서 본거와 같이 무엇을 말하든지 자기가 말하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권위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또 하나 생각이납니다. 영국이 뭐 어떻다. 어떻다 그러고 한달동안 가있던 사람이 이야기하니까 20년 산 사람이 그게아니야. 그랬더니 다 뒤집어 졌다 그랬지않습니까. 그렇죠. 그런 것들이 말하자면은 권위인데 우리들이 흔히 생각할 때에 이 권위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권위의 근원은 원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 타락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이 권위의 근원이 하나님이고 그다음에 모든 권위가 그 하나님께 기초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면서 부터는 이 권위의 근원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권위도 있지만은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게 그런 권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인의 후손가운데 에녹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다음에 제일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큰 성을 쌓으면서 그것을 에녹성이라고 불렀습니다. 말하자면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하나님 없이 세운 권위는 거짓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권위를 지탱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느냐하며는 권위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이 예외없이 교회속에도 들어온 것입니다. 권위주의는 나쁜것이지만은 그러나 동일하게 탈권위는 나쁜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런 것은 필요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권위. 그리고 그 권위를 우리들이 생각할 때에는 흔히 뭐 이렇게 어떤 무슨 큰 능력이 있어서 그래서 꼼짝못하게 하는 그런 것이라든지, 무슨 어떤 잘못된 카리스마라든지, 그런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권위의 근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권위의 근원은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권위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 진리대로 살고, 진리를 따라서 성품이 변화된 사람, 그 사람에게 칼 한자루 없고 말한마디로 귀신을 내어쫓을 능력이 없어도 그사람에게는 권위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서 권위를 느끼는 것입니다. 헤롯이 요한을 보고 느끼는 권위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 헤롯은 왕이었고 세례요한은 뭐 그저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피지배 밑에서 목쳐. 그러면 그냥 치는 것입니다. 뭐 그에게 무슨 권세가 있겠습니까. 그런대도 세례요한을 부르면 세례요한이 하여튼 올바른 이야기만 했습니다. 막 들으면 번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헤롯이 막 들으면 막 번민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뭔가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믿음에 가까이 다가갈 가능성도 보여주는 어떤 그런 마음의 작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번민을 막 하는데 그러면서도 고통스러우면서도 이 사람을 멀리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말하자면 권위입니다. 그리고 옥에 가두면서도 그에 대해서 함부로 대할수 없는 그런 어떤 권위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냐하면은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그 사람에게 나타나는 그런 인격적인 권위라는 말입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종류의 권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늘 말씀드리지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거나,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아니면은 그 사람이 가르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만약에 훌륭한 진리를 가르치면 그것은 자기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니까. 외식적인 가르침이오. 자신의 내면의 세계와 일치하는 거짓된 가르침을 가르치면은 그는 가르치는 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하나님의 사람, 혹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사모하며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일 것, 이것이 가르치는 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입니다.
이 체험이라고 하는 것, 어떤 진리. 앞에 내용에 나옵니다만은 그런 진리를 영혼들에게 가르치는데 그 진리가 자신속에 체험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되느냐? 그런데 사실 이 체험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수 있는 것입니다. 체험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지만 인간편에서 이 체험이 하나님의 선물이기는 하지만은 그러나 이 체험을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만은 우리가 이 체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뭐냐하면은 다른 모든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하는 원리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자기가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을 말하자면은 체험하는 것에도 역시 두가지 요소인데
하나는 뭐냐하면은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정확한 앎입니다. 지식이 있고 그 다음에는 그 지식을 우리 개개인에게 강력하게 적용하여 그 풍부한 의미를 체험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그 자기의 편지속에서 베드로후서에서 마지막에서 이야기 하기를 자기의 교인들을 향해서 성장을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과 은혜에서 자라가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이 두가지는 하여튼 이 신앙 전체의 흐름은 커다란 줄기입니다. 예배에서도 진리와 성령입니다. 그렇죠. 기도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기도해야할지를 성경을 통해서 알게되는 정확한 지식과 그 기로를 도우시는 성령의 은혜. 목양의 관계에서도 역시 정확한 진리가 그 목양의 관계속에서 전해지고 성령님의 은혜로서 그 풍성한 삶의 실재를 경험하게 되는 이런 영혼의 변화.
여기에서도 똑같이 그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을 자신이 먼저 정확하게 알고 그다음에 그 안 내용을 주님께서 그 실재를 풍성하게 경험하게끔 해주셔야지만 그것이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은 이런것입니다. 필리핀이나 이런곳, 동남아에 가보니까. 그 선교사 자녀들이 아주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은 한국에서 눈을 보는 것입니다. 너무 어렸을 때 와서 눈이라는 그림도 보고, 그 다음에 TV에서도 내리는 눈도 보고, 뭐 전세계에 소식을 들으면서 눈에 대한 기사도 읽는데 문제는 무엇이냐하면은 거기에서 눈을 볼수도 없거니와 그리고 경험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는 것입니다. 한국에 가서 겨울에 눈좀 한번 실컷 맞아보고 그 눈이 어떤 것인지를 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죠. 그런 열대지방에서 태어나서 그래서 눈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이야기는 많이 듣고 심지어는 펑펑 나리는 눈을 찍은 생생한 필림들을 다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가 눈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과학적인 생각은 정확할수 있습니다. 그렇죠. 눈은 어떻게 해서 오느냐. 수증기가 얼어붙어서 무서워서 떨어지는거다.부터 시작을해서 눈에는 종류가 어떤 종류이고 뭐 눈의 역사가 어떻게 되고 이렇게 다 말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눈이 무엇인가하는 생생한 실재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생생한 실재를 말하는 것은 우리들이 거기에서 기대할수 없습니다. 그렇죠.
그러나 그가 그 눈에 대해서 그렇게만 알뿐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한번 한국으로 날아와서 겨울에 강원도 영동지방에 폭설주의보가 내렸을 때. 대설도 말고, 폭설주의보가 내렸을 때 한번 그 눈속에 갖혀서 며칠 그 산촌에서 지내보고 진짜 허리까지 빠지는 눈을 한번 경험해보고 나면은 이제는 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생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은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들을 이렇게 그 실재를 깊이 경험하도록 만들어주시는 분이 누구냐하면은 성령 하나님입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은혜의 실재를 경험하게끔 만들어주십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이제 대충 아는 이야기인데 그러면 우리들이 이러한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의 내용들을 정말 우리들이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되느냐? 저는 실재적인 지침을 한 세가지 정도로 요약해서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줄려고합니다. 우선 첫째는 뭐냐하면은 내가 가르치고자 하는 어떤 진리를 지금 내가 인식하고 있지않습니까. 그렇죠. 그 인식을 넘어서는 세계가 있을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첫 번째가 무엇이냐하면은 어떤 A라는 진리를 가르치고자 할 때에 내가 하나도 모르면 가르칠수 없을 것 아닙니까. 여러분 보고 히브리어 가르치라고하면 누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럴사람이 물론 있을수 있겠죠. 신학생 중에서는. 없을 것 아닙니까. 왜 모르니까 이것을 왼쪽으로 쓰는지 오른쪽으로 쓰는지 그것도 모르는데 누가 가르치겠다. 그러겠습니까.
그러니까 일단 가르치겠다. 그럴경우에는 그래도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을 자신이 어느정도는 알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가르칠 것 아닙니까. 또 그렇다고 해서 다 알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러니까 A라는 내용을 가르치겠다.라고 그것을 수락할 때에는, 마음을 먹을때에는 내가 어느 정도는 이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이만한 영역인데 사실은 이것말고 내가 알고 있는 이 진리에 대한 다른 세계가. 질적으로 다르다기 보다는 이것보다는 내용이 훨씬 확장된 세계가 있을수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이 없으면은 어떻게 되느냐하면은 계속 설교를 듣듣지, 성경을 읽든지, 책을 읽든지 모범답안 만들어가지고 맞지도 않는 모범답안 만들어서 계속 자기에게 있는 것은 동그라미고 없는 것은 다 틀렸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됩니까. 전혀 신앙에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자기 사상에 맞지 않는 것은 이것을 확 우겨넣어가지고 막 비뚤어지게 해석을해서라도 어거지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다가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성경 읽으나 마나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냐하면은 이단적인 교리에 대해서 아주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은 그 이단적인 교리가 강화됩니다. 먼저 그것을 내려놓아야합니다. 가끔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가 빛을 발견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있지않습니까. 그것은 벌써 무엇이 먼저 시작이되었느냐하면은 자기가 이제껏까지 확신하고 있던 이단적인 이 교리나 사상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라고 하는 마음을 자기고 성경을 읽으니까 변화가 온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 말씀드렸지않습니까. 통일교회 원리 강론을 읽고 제가 두가지를 놀랬다고 했지않습니까. 어쩌면 성경구절을 많이 인용했는지. 첫 번째 놀라고 두 번째는 어쩜 해석이 하나도 안맞는지. 두가지를 놀랐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식으로 해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청교도 시대부터 시작을해서 신앙의 수준을 높이고 그 다음에 영적인 영성이라 그럴까. 자신의 어떤 영적인 지평을 이렇게 넓히는 그런 어떤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사용하던 좋은 방법이 무엇이냐하면은 다른 사람의 건전한 신앙의 경험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아, 그 바람잡는 이야기. 그런 것 말고 엉뚱하게 맨날 자기 뭐 성령하나님이 직통으로 무슨 직통파인것처럼 그렇게 거드름떨고 다니는 사람들의 그런 가치없는 그런 간증말고,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성품을 깊이 이해하게된 그런 것들의 그런 기록들과 그런 경험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굉장히 도움이 되었던것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어느 책에선가 자기의. 자기가 이렇게 설교자가 되게된 그런 놀라운 영적인 변화의 과정을 설명하는 가운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뒷골목의 고서방을 뒤지다가 케케묵고 먼지가 잔뜩쌓인 조나단 에드워드의 전집 두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싸구려로 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읽으면서 조나단 에드워드의 저작들을 접하면서 무엇을 느겼느냐하면은 자기가 한없이 외소해지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대등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나는 이런 의견이다. 너는 이런 의견이다. 이렇게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한 거대한 위인 앞에 서 있는 아주 외소함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경험한 것 말고 굉장히 커다란 신앙의 세계가 존재할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된 것입니다. 그리고 탐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이야기해 주듯이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의 건강한 신앙의 경험, 아무거나는 안됩니다. 나쁜 신앙의 경험은 아주 커다란 독소가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조심해야합니다. 건전한 신앙의 경험들, 그리고 요즘 신앙 위인전기니. 그래가지고 막 쏟아져 나오는데 사실 그것들 중에서도 건전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그 사람이 놀라운 경험을 하기는 했지만은 그러나 그렇게 전기같은 것을 만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면은 좀 옳지않은 그런 사람들도 많이 채택이됩니다. 참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 누가 뜻이 있으면말이죠 돈도 좀 있고 뜻도 좀 있고 그러면은 좀 돈벌생각말고 일평생 주를 위해서 살 훌륭한 사업이 있는데 좋은 풀판사 하나 하세요. 돈벌생각말고 그저 일평생 헌신할 그런 각오를 가지고 말이죠. 돈 많은 사람들은 있어도 귀찮찮아요. 자식들 매일 싸우고 다 있어봐서 알겠지만은 애들 매일 싸우고 거 별로 않좋습니다. 엊그제도 80억대 가지고 있는 어느 할머니 살해당했지않습니까. 생명도 위험하고 그러니까 별로 않좋습니다. 보세요. 누가 제 생명을 노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후원들 하나 만들어가지고 커다란 출판사나 하나 만들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 책만 일평생 꾸준히 찍어내고 죽어도 수십개의 교회를 세우는 것보다 더 훌륭한 영향을 미칠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뜻이 있으면 한번 해보세요.
그런데 그런 경험들을 읽어가는 것이 굉장히 커다란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내적으로 그러면 왜 이렇게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에 대해서 풍부한 경험을 못갖느냐하면은말이죠. 사람들은 생내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내용들과 일맥상통하는 경험들을 이야기 할 때에는 귀에 잘들어옵니다. 잘 들어옵니다. 야채장사를 하는 장로님 한분이 사회를 보면서 그러더래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요한복음 3원 16전입니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도 못알아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즉시 3원 16전이 뭐요. 3장16절이지.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은행에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3장16절인지 모르는데 한사람은 딱 알아듣는 것입니다. 은행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무슨이야기냐하면은 경험이 공유되고 있을 때에는 잘 흘러드는 것입니다.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그 범위에 대해서는 아주 예민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딱 맞으면은 정보가 좌르르르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맞는 이야기는 같은데 틀렸다고 찝어낼수는 없는데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를 계속하면은 짜증이 나는것입니다. 나중에는 신경질이 납니다. 그리고 이해도 잘 안되고 그렇지않습니까. 하여튼 짜증이납니다. 교제를 하다보면 왜 좀 눈치없는 사람들이 있지않습니까. 눈치 없는 사람들이 사실은 신앙없는 사람들 만큼 무섭습니다. 왜 강적입니다. 여러사람을 놓고 이야기를 하는데 다 싫어해요. 저 얘기를 다 흥미가 없어하는데 그냥 혼자 조는 사람 옆에 한사람 앉혀놓고 다 떠나가도 그냥 자기 얘기만 하는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교감할 때에 정보다 막 흘러들어옵니다. 교감되지 않고 딱 끊어지면은 사람들이 그 정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무슨이야기냐하면은 누가 그러더라고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책을 읽으면서 저는 굉장히 감명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1년에 한번쯤은 읽는 필독서인데 누구한테 주었더니 이 사람이 우울증 환자 아니에요. 그러더래요. 그렇게 열열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자신의 마음의 더러움을 인해서 고뇌하고 영혼을 위해서 염려하는 그 모습이 자기에게는 거의 경험이 없으니까. 자기의 경험밖에서의 생생한 경험들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느껴지니까. 이것을 진실된 것이라고 받아들이려면 자기를 자기를 부정해야되고 자기를 긍정할려면 이것을 부정해야되니까. 간단한 것입니다. 뇌르시스 환자같데요. 노이로제 환자같다는 것입니다. 정신병자, 우울증 환자같다는것입니다. 그 한마디로서 이 사람의 모든 일기책은 다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딱 그렇게 닫는것입니다.
그러니까 체험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수도 있고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일도있죠. 그러나 다 올바릅니?. 다 압니까? 다 진실합니까? 다 완전하고 다 권위가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그래서 더 이상의 말하자면은 가르치고자 하는 그 진리에 대한 내용들에 대한 더 심오한 경험의 세계가 차단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된다고요. 첫 번째로 다른 세계가 있을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열어야됩니다.
그리고 제가 언젠가도 그런 비유를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계란이 23일이되면은 병아리가 됩니다. 그 23일이면은 병아리가 되는데 그것 깨어나는 광경 못보셨죠. 정말 재미있는게 신기합니다. 어떻게 되느냐하면은 그것이 이제 23일에 나올수도 있고 24일에 나올수도 있는데 하루 이틀은 차이가 있는데 대개 23인데 나올때는 어떻게되느냐하면은요. 그 계란 속에서 소리가 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병아리가 다 깬 것입니다. 그래서 눈도 못뜨는 상태에서 부리로 껍질을 속에는 다 자기 몸이되고 그리고 자기가 자라는 동안에 먹었으니까. 그것을 깨는 것입니다. 부리로 톡톡톡깨요. 그 때는 이미 병아리로서 완전한 병아리입니다. 그렇죠. 완전한 병아리입니다. 다만 그 알속에 갖혀있다는 것뿐이지 뛰어 다니는 병아리와 똑 같습니다. 몇 초후에는 걸어다니니까. 완전한 병아리입니다. 그런데 부리로 이제 벽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달걀을 탁탁탁 두들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드리고 있는 동안에라고 할지라도 그 병아리에게 그 알밖의 세상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가 가겠습니까. 이해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탁탁탁탁 깨뜨리고 빛이 쫙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뭔가 저 밖에 또다른 실재가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우지직 깨가 밖으로 나오고보니까. 이제는 알속에서 상상할수 없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아리가 깨어나면은 한참동안 이렇게 두리번 두리번거립니다. 모든 병아리들이 두리번 두리번합니다. 그 다음에 엄마쫓아 다니면서 이제 물먹고 모이 주워먹음으로서 이제 삼계탕 되기 전까지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는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마음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아세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 다음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수 있도록 최대한 열린마음의 상태가 무엇이냐하면은 가난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경험을 하기 위해서 우선 첫 번째로 해야될 일은 무엇이냐하면은 자기가 경험한 그 이상의 장엄한 신앙의 세계가 존재할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정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인정을 하면은 그다음에 언젠가는 그 마음이 열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인정을 안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을 먼저 인정해야합니다.
자기가 지금 현재 여기에보면은 가르치는 내용이 회개와 믿음이었습니다. 회개와 믿음을 가르치는데 여러분 모두가 다 회개에 대해서도 뭔가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에 대해서도 뭔가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렇죠. 거의 경험이 없을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경험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그러한 경험이 다가 아니라니까요. 여러분들이 경험한 그 회개가 다가 아닙니다. 회개의 세계도 한없이 이 정도와 깊이에 있어서 넓습니다. 더군다나 회개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느냐. 또 하나님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그를 회개에 으르게 하시느냐. 이런 새새한 부분까지 들어갈 때는 뭐 그것은 어마어마한 세계입니다. 누가 이것을 다 파악했다. 그렇게 얘기할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양한 회심의 경험들을 자기가 다 할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에게 대해서 쭉 열어놓지않으면은 그러면은 자신이 그런 체험의 세계속에 들어갈수 없습니다. 그것이 첫째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무엇이냐하면은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을 머리에 담아서 가르칠려고 하지말고 마음에 담아서 가르칠려는 노력이 필요한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할것입니다. 뭐 체험을 해야지만 마음에 담길 것 아닙니까. 그런데 꼭 그렇게만 말할수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냐하면 체험도 정도가 많이 다르고, 그리고 자기가 직접 생생하게 경험을 해보는 것이 가장 뛰어나지만 그러나 어떤 진리를 그렇게 총체적으로 자기가 생생하게 경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머리로만 담는 것과 마음에도 담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은 이것입니다. 성경에 보면은 문둥병 환자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문둥병. 그러면은 그 시대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증거였습니다. 그 문둥병 환자의 낫은 이야기가 복음서에 나옵니다. 그것을 만약에 예를 들어서 가르친다고 할 때에 문둥병 환자가 있었다. 그런데 고쳐주셨다. 그 뭐 그렇게 문둥병 환자가 있었는데 고침을 받았구나. 니네 문둥병 환자 알지. 옛날에 입이 이렇게 되고, 깡통들고 밥 얻어먹으러 다니고 그러던 사람말이야. 코가 다 뭉게진 사람들 알지. 그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이럴수 있지않습니까. 내가 그 문둥병을 경험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거 한번 가르쳐줄려고 문둥병 환자가 될수는 없습니다. 다음에 그러면 잘생긴 사람 가르칠려면 어떻게 변모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도 문둥병환자가 있구나. 그 사람이 고침을 받았구나.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지만은 문둥병 환자가 자기가 될수는 없지만은 그 문둥병환자가 느끼고 무엇을 생각할것인가. 하는 것들을 이렇게 깊이 감정이입이 되어서 그 문둥병에 대해서 깊이 자신이 마음으로 느끼고나면 거기에서 나음을 받은 것이 얼마나 커다란 기쁨인가. 하는 것들은 헤아릴수 있지않습니까. 무슨이야기인지 전혀 이해가 안가세요. 많이 가죠.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그런 것들을 돕는 것이 무엇이냐하면은 묵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이 거의 포기하거나 잃어버린 신앙의 기술입니다. 그 묵상이라고 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상은 머리에 있는 지식을 깔때기를 통해서 가슴으로 흘러들어오게 하는 방법이 바로 묵상입니다. 깔때기 그것이 묵상입니다. 묵상을 통해서 머리속에 있는 차가운 지식들이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봅시다. 문둥병을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은 문둥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발병의 원인이 무엇이며,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는가. 벤허에보면 여러분 문둥병환자들이 살아가는 그 비참한 모습들 보지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영화를 본다든지 하면서 뭔가 이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차가운 지식을 풍성하게 만들어서 그것을 마음으로 느낄수 있게 해주는 보조적인 방법들을 사용하면 그것이 자신의 완벽한 경험은 아니지만은 거의 자신이 느낄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말씀인지 아시죠. 그것들이 계속 반복될 때에 자기가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들을 체험할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독서를 가르켜서 흔히 말하기를 인생에 대한 간접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모두 다 남이 살아본 인생을 다 살수는 없습니다.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따지면은 성경도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증거한 하나님을 우리들이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은 우리들이 그 다양한 종류의 삶을 다 살아볼 수는 없습니다. 다 살아볼수 없어도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렇게 하나 자기가 가르치고자 하는 어느 진리에 대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자신이 그 진리를 깊이 묵상하고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은 그 어느 순간에 자기가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했어도 그 진리가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배어서 그래서 문둥병자가 된 가운데 말할수도 있게되고, 선지자가 가운데서도 말할 수가 있게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으로 자기가 말씀할수 있는 사람도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바울이라고 해서 예외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모든 삶을 다 살아서 문둥이가 되어본적은 없지않습니까. 그렇죠. 가난하게 되어본적도 있고, 부자가 되어본적도 있고, 헬라인을 사랑했지만은 헬라인이 었던적은 없습니다. 헬라인의 설움이 무엇인지 그들이 얼마나 유대인들에게 따돌림을 받은 사람들이었는지 그것은 모르는지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이 되어서 그들과 하나되어서 사랑을 느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유대인이기 때문에 어려움을 느낀적은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은 말하자면은 이러한 경험의 세계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가 이러한 가르침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무엇이라고요? 그렇죠. 묵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에 대한 내적인 경험을 촉발시키는 묵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세 번째는 뭐냐하면은 자신이 어떤 진리의 내용들을 경험하는 것은 자기가 실재로 그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대로 살아봄으로서 가장 잘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신앙에 어떤 실천적인 특성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학원에서 가르치시지 않고 늘 삶의 자리로 데리고 다니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냐하면은 학과 공부시간 따로 있고 전도하러 가는 시간따로 있고 기도하러 가는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삶을 함께 공유하면서 그 삶의 자리에서 삶의 정황을 제료로 해서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주느냐하면은 기독교의 진리가 이 실천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예를들면은 좋을까요. (예를 들어서 이런 얘기해봅시다. 지금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가르쳤던 내용에 대해서 말하기를 “회개와 믿음이다.”라고 말하고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로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 대한 회개다. 왜 회개의 대상은 하나님이고 믿음의 대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냐? 인제 이렇게 우리들이 의문을 제기할수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원칙적으로 볼때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전체적으로 보면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지만은 우선적으로 보면은 성부하나님을 향한 반역이었습니다. 그렇죠. 성부하나님을 향한 반역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향한 반역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그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지만 여전히 인간이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방법이 무엇이냐하면은 회개입니다. 인간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인간이라고 하는 그 진실한 회개. 그 회개를 행할 때 인간의 반역이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기 때문에 역시 그 회개는 하나님 앞에 하여야할 회개라고 보는 것이 이것이 교리적으로 옳은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은 무엇이냐하면은 그렇게 자신의 죄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지고 자신에게 구원이 이르게되었다.라고 하는 그 고백의 표현이 무엇이냐하면은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죄가운데 헤어날 수 없는 인간인 나 사이에서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 당신만이 나를 구원하실수 있는 유일한 중보자입니다.라고 하는 의탁의 마음입니다. 절대 의존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보십시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 회개에도 가만히보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그리고 회개를 통해서 죄의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의 기쁨에 가득찬 생활을 보면서 내가 정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내가 어떡하면 회개하고 저렇게 복스러운 기쁨의 삶을 살수 있을까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진지하게 자신도 회개하기를 원하면서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회개가 경험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회개시키시고,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순종할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더군다나 이런것들이 회개를 포함하는 어떤 성화의 영역속으로 들어오게되면은 더 말할 나위없이 진실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풍부하게 가르쳐줄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하면은 기도에 대해서 많이 배운사람이라기 보다는 실재로 기도를 많이 실천한 사람입니다. 전도에 대해서 많이 가르칠수 있는 사람은 전도가 무엇인지를 이론적으로도 잘 알아야되겠지만은 동시에 그것 만으로는 불가능 하고 실지로 많이 전도하면서 잃어버린 영혼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사이에서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서 시련을 많이 감당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그러한 사람. 거룩한 생활에 대해서 누가 가장 권위 있게 증거할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거룩한 삶을 살려고 부단히 분투해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할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늘 하나님 앞에서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직분을 감당하고 한번도 중심을 쏟아붇는 그런 어떤 펑펑우는 충성의 경험이 없었던 사람들이 충성에 대해서 이해하게 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개념을 이해할뿐이지. 정말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살고죽는 경험이 무엇인지를 알지못합니다. 사람이 영혼으로 보이고 그 영혼의 위험한 상태를 감지하고 그 위험한 상태를 감지했지만은 내가 그를 위해서 도움을 줄수없다.라고 하는 이 무력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고뇌해보지 않은 사람이 영혼의 변화를 위한 사역자의 내면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외식하지 않고는 거의 할말이 없는것입니다. 그런 지금 말씀드린 모든 영역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영역이 다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이냐하면은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를 따라서 사는 실천적인 삶을 통해서 자기가 가르칠 진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해야합니다.
청교도 가운데 존하외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계시던 때가 언제였느냐하면은 그 올리버크로멜이 정권을 잡았을 때입니다. 그래서 그 올리버크로멜이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집권을 통해서 다시 영국을 개신교로 종교개혁을 하려고 시도했던 그때였습니다. 그런데 다들 그 시대는 청교도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이 올리버크로멜이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궁정 목사를 초취하는데 궁정에 목사니까. 신령한 목사님을 부르기를 원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궁정 설교자를 초취하는데 존하외라는 목사님을 청했습니다. 그래서 시험적으로 우리에게 와서 설교를 해주도록 그렇게 부탁을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얼마나 재미있는 사람인지 대개 인제 초청할때는 미리 성경본문을 주어서 설교를 준비할 시간을 줄것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목사님도 모두 준비해가지고 왔을 것 아닙니까. 왔는데. 예배드리기 직전에 메모에다가 자기가 듣고 싶은 설교의 성경구절을 써주면서 목사님 죄송하지만 준비하신 설교말고 이것으로 설교해주셨으면은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 정확하게 기억이나지를 않는데 흔히 설교되지 않는 본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든지 무슨 이런것들은 늘 설교되는 본문인데 설교되지 않는 그런 본문을 하나 적어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설교준비도 안한상태죠. 엄밀하게 말하면은 탁 펼쳐놓고 그 생소한 본문을 가지고 쉴새없이 설교하는데 2시간을 넘게 설교하고나니까. 그다음에는 이제 그 때 상황은 어땠는지모르지만은 그 정도에서 끝내주셨으면 고맙겠다고 그런 이야기가 들어올 정도였습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지 아십니까. 그 목사님이 그렇게 자기가 준비한 본문말고 듣고 싶은 사람이 불쑥 내밀면서 별로 평소에 설교되지로 않는 성경구석에 있는 구절을 내밀면서 이것을 설교해주십시오.라고 이야기할 때에 펼쳐서 불과 몇분전에 본문을 읽으면서 그렇게 유장한 설교를 할수 있었던 그 비결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말씀에 대한 실천하는 하나님의 백성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풍부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본문에다가 다리를 걸치든지간에 그 본문을 가지고 풍부하게 풀어갈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린 것은 그것입니다. 아까. 하나님의 진리를 가리치는 사람이 지적인 준비도 중요하고 모든 것이 다 중요하지만은 그것만 갖추었다고 해서 그가 정말 진리를 가르칠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그것보다도 더 결정적인 자격은 무엇이냐하면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람이며 또 혹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어서 삶의 전체적인 초점이 주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고백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르칠수록 계속해서 경험하는 신앙의 실재적인 영역에 대해서 경험하는바가 점점 확대되어가니까 생생한 가르침들이 계속 살아나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때인데 목사님이 그러셨어요. 뭐가그랬느냐면은 한교회에서 한 3년정도 목회했으면 참 좋겠다고, 그래서 왜그러느냐면은 3년정도면은 이제 거의 앵꼬가되는데 그리고 그다음에 다른 곳으로 옮기면은 다시 신선하잖아요. 이렇게 쫙.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보고 상당히 고개를 끄덕끄덕들하는데 그런데 사실은 그 이야기도 좀 문제는 있습니다. 무슨 문제가있느냐하면은 물론 이제 한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신선함에 있어서 한계가 있다.라고 하는 것은 인정을합니다.
지혜와 지식에 있어서 무한하신분은 하나님 한분 뿐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게 다가오실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그것을 우리들이 충분히 인정을 하면서도 그러나 이제 이런 것을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진리를 깨닫고 섭취하면서 계속해서 자기가 터득하게 된 진리를 따라서 살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삶전체로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인식의 영역들이 계속해서 확장되는 것입니다. 계속 확장됩니다. 한번 확장될 때마다 성경에 희미하게 밖에 알지못했던 곳에서 막 보화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확장되고 확장되고 그러니까. 무슨이야기냐하면은 평생을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분 성품을 닮고,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이 거룩하고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몸부림치면서 사는, 실천하는 삶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진리를 아는 인식의 집중들이 체험이라는 작용을 통해서 계속확대되어갑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어느 선에서 멎었다. 그럴경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수도 있겠지만은 그러나 이 하나님을 향한 추구가 멎으면은 이 인식의 영역도 멎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사도바울이 그렇게 심오한 기독교적인 지식의 영역 안에서 살수 있었던 그 놀라운 비결이 무엇이냐하면은 그의 일평생의 삶의 추구점이 뭐에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아는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에게서 난 것인데 자기가 어떻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워졌는지. 그리고 자신의 의의 근거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지. 그것을 배우면 배워갈수록 아 이제 그리스도는 내 손안에 있다. 누구 말마따나. 공자가 이제 나에게 다 파악되었다. 그런식의 말은 할 수가 없습니다. 배울수록 배울수록 한없이 한없이 그 그리스도 예수의 존재와 그 성품의 세계가 가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메시지와 가르침들이 계속해서 신선하게 다가올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결국은 확장되는 체험의 영역과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아주 필수적으로 실천하는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삶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기발한 상상이기는합니다만은 4세기 이후로부터 13세기까지 소위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세속으로부터 멀어져서.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명상하고 구별된 분위기 속에서 살려고하는 그 수도원 운동이 일어납니다. 수도원이라고 하는 그 말도 사실은 홀로라는 그 라틴어 단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도를 했는데 그러면은 그렇게 해서 속세로부터 멀어지고 조용히 하나님과의 교감속에서 살고자 했던 수도원 운동이 훨씬 기독교 신앙의 진리에 대해서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들어주었느냐면은 아니 아주 형편없이 이 기독교의 진리를 굽게만들었습니다. 그게 무슨 아시스의 프란시스나 이런 사람들도 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은 그런 계열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별로 가치가 없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가장 커다란 오류가 무엇이었느냐하면은요.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이것은 인정합니다. 종종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보기 위해서 그런 어떤 수도시설이 되어있는 곳에 가서 노동과 묵상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잠시 세속으로부터 잠시 멀어져서 자신을 돌아보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을합니다. 그런것들은 기회가 있으면은 할수있으면은 좋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그런 생활만을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참된 진리가 어디에서 전파되었습니까? 시장바닥에서 전파되었습니다. 분주하게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팔고하는 시장바닥에서, 농사하는 농부들이 있는 곳에서, 맷돌을 갈고 마주 앉아서 맷돌을 돌리는 아녀자들이 있는 그런 곳에서, 병자들이 들끓고, 세리들이 있는 그 부패한 관리들이 있는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이런 곳에서 기독교의 진리가 전파된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부터가 벌써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아닙니까.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들어갈 곳이 없는 사관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뭐 동굴속에 가보니까. 큰 알이 있는데 뭐 거기에서 깨어났다더라는 그런 전설이 아닙니다. 사람들 속에서. 여관에 묶던 사람들이 아주 신령한 사람들이 모인것입니까. 아니 그냥 너절한 죄인들입니다. 그 가운데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벌써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침 자체가 그런식으로 계속해서 치열한 실천적인 삶이 있는 현장에서 그 실천을 통해서 사람에게로 사람에게로 전수되어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 기독교의 참된 진리라고 하는 것은 뭐 거룩한 보자기에 쌓인 진리가 아니라. 이 땀과 피와 눈물 이런것들이 뒤범벅된 진리입니다. 그런 것들이 전수되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들을 너무 도외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자기가 알고 있는 자신이 이미 경험하고 있는 이 신앙의 세계에 대한 인식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가르칠려고하는 진리는 그러한 인식과는 많이 비례한것입니다. 그것을 잘 이해한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서 살려고 분투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진리가 되는지에 대한 아주 탁월한 이해를 갖게끔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르쳐준 말씀을 따라서 분투하고 순종하면서 살려고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커다란 은사가운데 하나가 지식의 은사입니다. 지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음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믿음생활 그 전체를 가르켜서 사실 그것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고 부를수가 있는것입니다.
자 우리 한번 생각을해보세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어떤 연습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왜 가끔 보면은 그런 것 진짜로 경기에서도 하나 모르겠는데 동네에서 뭐 배구시합 같은 것 할 때는 그냥 몇번해봅니다. 네트를 놓고 넘겨봅니다. 그래서 한 세 번쯤 해본다음에 자 지금까지는 연습이고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시작하지않습니까.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잘해도 상관없고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몸을푸는 것입니다. 목적자체가. 그런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에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신학생 세미나 가서도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은 신학교 다니다가 죽으면 목회자로 소명받았어도 신학교 다니다가 죽으면 신학교 다니다가 죽은 그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어떻게 다녔나. 그 내용이 얼마나 조잔한 내용이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뭐 레포트 배껴쓴 것, 그것이 다 문제가되죠. 밥먹듯이 지각한 것, 그것도 문제가됩니다. 교수에게 불순하게 행한 것, 그런것도 다 문제가됩니다. 그런 것을 들고 하나님이 야. 너 이런 것 잘못했다. 너 인생에는 문제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 그런일은 안일어 날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 다빼면은 뭐가있습니까. 삶이. 목회를 해가지고 무슨 한 교회를 크게 성장시켜본적이 있어요. 아니면은 많은 교인들에게 피를 토하면서 설교를 해본적이 경험이 있어요. 그런 것 없지않습니까. 없는데 기회가 안주어져서 못했는데 어떡하느냐는 것입니다. 하기 싫어서 안한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연습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평신도의 삶, 무슨 목회자의 삶, 목회자 후보생의 삶, 교역자의 삶, 담임교역자의 삶, 부교역자의삶, 그런 것은 우리들이 편의상 나누는 삶이지. 그런 것이 어디있느냐는 것입니다. 실지로 들었던 이야기인데 어느 한 교회에서 전도사 한사람이 한 10년가까이 진짜 열심히 했습니다. 뭐 그런 어떤 섬김의 질을 제가 보지는 않았으니까. 다 말할 수는 없는데.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봉사하느라고 쉽게 이야기하면은 더많이 공부할 기회도 별로 잃어버렸고 그리고 또 그렇게 하느라고 또 사람들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많이 배울수 있는 그런 기회도 잃어버렸습니다. 9년인가를 그렇게 봉사를 했다는데. 그랬더니 옆에있는 한 선배가 충고를 하는거에요. 그것이 뭐냐하면은 너 그렇게 살면 후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자기도 몇 년동안 그렇게 해보았는데 떠나고나니까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죠.
저도 한 교회에서 8년동안 전도사생활 할 때에 퇴직금 하나도 안주고 교회그냥 훌훌떠났는데 남는 것은 하나도없습니다. 지금제가 그 교회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엊그제도 제가 갔는데. 그 교회에 잠깐가서 보았습니다. 뭐 그 교회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교회지금 목사님이 누가왔는지도 모릅니다. 뭐 알 이유도 없고 나하고 아무 상관없죠. 그렇죠. 그러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떠나고나니까 아무것도 아니더라. 그렇죠. 그렇게 해서 제가 전도하고 양육해나온 사람들이 거기에서 집사가 되고 뭐 권찰이 되고 뭐 다 그렇게 결혼하고 애들이 성장해서 다 무슨 교회의 제직들이 되었지만은 그들의 섬김을 실재적으로 누리고 있는 사람은 지금현재 거기에서 목회하고 있는 목사님입니다. 누린다 그러면은 좀 우습지만은 어쨌든 표현을하자면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몇10년전에 성경가르쳐주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다고 지금 무슨 설날 때 무슨 과일이라도 몇봉지 사들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까는 그 전도사님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다 그것 허무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은 개인적인 경건의 영역에 있어서든지, 하나님 앞에 사역을 하고 섬기는 영역에 있어서든지, 심지어는 작은 초등학교 학생이나 어린 유치부학생들을 놓고 가르치는 영역에 있어서든지, 아주 더 심하면은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먹일려고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 영역에 있어서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온마음을 쏟아부어서 자기가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자기가 세워주신 부르심에 대해서 감사하며 자신의 전존재를 쏟아부어서 섬기지않은 그 시기는 그 사람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준 것이 없습니다. 우선 몸과 마음을 다 쏟아붇고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일한 것은 자기가 좋아서 한일이거나, 먹고살기 위해서 한일이고. 또 무엇인가 성과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단지 그것을 사용하셔서 일하셨다는 것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지도 않고 성취할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 영혼의 참다운 변화가 일어났어도 그는 그 사람이 칭찬받을일은 없습니다.
제가 왜 진리를 경험하는 일과함께 이것을 말씀드리느냐 하면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뭔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지침이라든지 아니면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된 도덕적 교훈이라든지, 또 거룩한 삶을 살기위해서 어떤것들을 해야된다든지 하는 어떤 의무와 가르침들을 받아들였을 때에 그것을 자신이 그것을 실재로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볼려고 분투하고 노력하는 그런 삶이 수반되지 않고는 결코 그 진리는 개념으로 밖에 파악이되지 않는 것입니다. 거룩해지기 위해서 자신의 죄악됨을 인해서 깊이 아파하고 그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거룩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쳤던 사람들의 기록들을 우리가 읽을수 있지않습니까.
에드워드라든지 이런 사람들의 글들을 읽어보면은 얼마나 거룩해지기를 사모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간절한 실천하는 추구가 없었던 사람들이 거룩에 대해서 무엇을 이야기할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알고 있다면은 백과사전적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이지. 무엇을 이야기할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기독교적인 깨달음의 모든 영역들이 그런 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 사람이 진리의 사람이다. 거룩하고 참된 성도의 모델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다.라고 말할 때에 그에게서 우리들이 지워버릴수 없는 아주 뚜렷한 신앙의 인격의 특징이 무엇이냐하면은 풍부한 경험의 세계입니다. 무슨 세속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신앙의 경험의 세계입니다. 왜그렇게 풍부한 신앙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까?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온전함을 추구하면서 자기가 깨닫고 가르침을 받은데로 살려고 하는 실천적인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몸부림이 체험을 낳고, 그 체험이 그런 몸부림들을 과속화시키면서 그 자신속에 실재적인 변화를 주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에 대해서 풍부한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굉장히 중요한 점입니다.
여러분 혹시 살면서 계속해서 말씀을 듣는데 어느 한순간에 그 말씀을 깨닫는 것이 내 성장을 촉진하지 못하고 이제 멈췄다.라는 느낌이 들때없습니까? 들때있죠. 그렇죠. 가장 점검해봐야 될것이 무엇이냐하면은 실천하는 삶이있는가?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수해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들이 흔히 얘기하는 하나님 앞에 충성이라고 하는 것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그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이라고 하는 것도 그것이 결국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무슨이야기냐하면은 진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이 있고 이 신앙의 참된 특성이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면은 그는 충성스럽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기독교인의 정상적인 삶위에 부가되는 프라스 알파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죄인이 누구이고 성도가 누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성도를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시고 죄인들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그 영혼의 상태가 어떤지를 보았고. 깨달았고 그리고 그러한 영혼의 상태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았습니다. 그런 도움을 받아서 자신이 흑암의 나라에서 광명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게되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빛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깨달을 때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간에 전혀 은혜를 못받은 사람이라면 모르지만은 그것을 깨달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순간 그들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명백한 도우심으로 말미암아서 각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인가 내가 가르치고 있는 영혼들, 그리고 내가 가르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어둠속에 있는 영혼들, 내가 직접 가르칠수는 없지만은 여전히 흑암가운데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알게 해야할 강한 부담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은 누구나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것을 가지고 순종해서 실재로 떨어지면은 입을열어 복음을 전하고 실재로 그들에게 다가가서 하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전하고. 이야기하고. 이렇게 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하면은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깨달은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실천하고 분투하는 광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떠난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초청속에 담겨져 있는 그 진실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터득하게되는 것입니다. 20세기의 뛰어난 전도자 가운데 한사람이 디엘무디죠. 그렇죠. 무식한 사람이 유명한 전도자가된 본보기로 우리들이 늘 그 사람을 사용하는데 그런데 그 사람이 정말 열심히 살았데요. 그리고 막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때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자기는 굉장히 만족하게 여겼고 그 때는 이미 벌써 영국은 자유주의화 되어가지고 교회가 다 죽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에 이 수시로 무디가 영국을 건너갔습니다. 한번 건거가면은 영국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무디 생각에는 자신이 그런 어떤 혁혁한 선교 사역에 성공을 거두었을 때에는 너나할것없이 모두가 어느정도는 자신에 대해서 대견한 마음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자기 집회에 참석한 17살난. 17살이면은 지금으로 따지면은 고등학교 1학년애입니다. 애가 오더니 무디 선교사님 저도 하나님의 일을하는 사람인데 반갑습니다. 무디가 성품이 좋은 사람이어서 아 반갑다고 목사님 제가 목사님 목회하시는 교회에 가서 설교좀 했으면 참 좋겠다고 그래서 참 그런 얘기를 어떻게 서스름 없이 하는지.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한번 봅시다. 그랬어요. 지나가는 말로 그렇게 했는데 어느날 와가지고 나 왔습니다. 연락을 한것입니다. 그 때 당신이 그 설교시켜 준다던 그 사람입니다. 아주 굉장히 찜찜해 했습니다. 17살 짜리가 무엇을 하겠는가.
그러더니 그런데 그 사람과의 만남이 이 무디의 일생전체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사역자로서의 생애를. 그것이 뭐냐하면은 와가지고 요한복음 3장 16절을 설교하는데 7일동안 설교한것입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무아하우스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무슨 7편의 설교가 거기에서 나오겠느냐고요. 그렇지않습니까. 그것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어디 그렇게 많겠습니까. 첫날하기에 이제 끝났나보다 그랬더니 둘째날도 요한복음 3장 16절 그런데 전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그 설교를 다 들으면서 이 디앨무디가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하면은 자신은 체험하나로 뭉뚱그리면서 설교를 했는데 이 사람은 아주 7자루의 선명한 칼을가지고 사람들을 요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놀라운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무디가 단언하기를 무엇이라고 말했느냐하면은 자신은 이 무아하우스 이 어린 무아하우스. 풋내기 무아하우스의 만남을 통해서 예전에는 뭉뚱한 삽자루를 가지고 일했는데 이제는 예리한 연장을 가지고 일할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무디의 경우에는 체험만 강했는데 물론 체험만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은 그랬는데 이 어린 소년이기는 하지만은 당시에는 또 17살이면은 어리지도 않았겠죠. 이 무아하우스의 경우에는 뭐냐하면은 선명한 지식과함께 뭐가요? 풍부한 체험이 녹아들어 간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디가 깨뜨릴수 없었던 사람들을 요리한 것입니다. 강력하게 물론 그렇다고해서 무디가 무아하우스만 못한 열등한 선교자라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너무나도 잘아시죠.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서로를 대신할수 있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잘 탐구해서 그것을 조직화하고 이해할수 있었던 것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 17살밖에 되지않은 이 사람이 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전하고, 그 사랑을 위해 일하고, 그 사랑을 위해서 살고, 그 사랑을 위해서 죽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 방편, 구원받지못한 영혼들의 운명과 구원받은 사람들의 축복에 대해서 자신의 온삶의 실재를 걸고 그것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그렇게 권위있게 설교해서 당대의 그 영국에 있는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우러러보던 그 디엘무디를 그렇게 눈물을 쏟으면서 그 설교를 듣도록 그렇게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전삶을 걸고 주님 자신을 추구하는 집중적인 실천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언제냐는 것입니다. 집사가 된 다음입니까. 전도사가 된 다음입니까. 목사가된 다음입니까. 아니면 구역장이 된 다음입니까.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으면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가 이해하는 지식의 한도내에서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하나님의 명령. 그 이해의 한도내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 반응의 유무가 그 사람이 신앙의 사람인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모든 것들을 들어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그 전도사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때도 제가 그런 충고를 했습니다만은 그러니까. 그런식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무엇을 얻을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한번도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하나님을 섬겨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기회주의 속에서 산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 익히는 것이 결국은 무엇입니까? 교회속에서 살아남는 어떤 처세술 같은 것밖에 더배우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후배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도 보면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뭐냐하면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연습이라고 하는것은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짜 그렇게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치고자 할 때에 그것을 그 증언 자체가 생생하게 피묻은 증언이 되기 위해서 가르칠려면은 말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들을 경험하면서 살아야됩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주의해야 될점이 무엇이냐하면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는 단편적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편적으로 경험되는 것은 항상 위험한 소지를 안고 있습니다. 신앙 자체가 전인적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이런 이야기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신앙에 있어서 이런 영역에 대해서는 쫙 잡고 있다. 이렇게 자부하는 사람들이 가끔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틀렸습니다. 무슨이야기인지 이해가가십니까? 뭐 신문광고 같은데 보면은 기도에 영험한 세계를 경험한분 여기에 오다. 뭐 그러면서 이제 기도에 대해서는 자기가 꽉잡고 있다고합니다.)
그런데 실지로 가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은 균형이 안잡혔습니다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런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것도 목회에 있어서도 거의 마찬가지라고 생각을합니다. 뭐 내가 목회하는 교회에서는 다른 것은 몰라도 구역관리 하나는 꽉잡았다. 그래서 가보면은 항상 균형을 상실했습니다. 무슨이야기인지 아시죠. 신앙에 이있어서도 동일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잊지말고 기억해야될 것은 신앙이라고 하는 이 실재는 어떤 자기가 필요한 한 요소를 집중적으로 추구해서 그래서 그것을 터득할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전 삶과 전인격을 걸고 전방위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함으로서 획득되는 것이지. 말하자면은 통합적이로 총체적인 것이지 이것이 무슨 어떤 신앙이나. 사역이나. 영혼을 가르치는 이 일들이 어떤 경영이 아닌데 어느 한부분이 어떻게 그렇게 그런식으로 해서 될수 있는 성질의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참된 진리에 대해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라고 말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것입니다.
어떤 이런 체험이 진리를 아는 참된 지식을 대치할수 있다.라는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굉장히 위험합니다. 이제 분명한 이해를 필요로 하고 그래서 분명한 지식이 필요하지만은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것들 그 진리의 실재를 깊이 경험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것은 경험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보세요. 경험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식에 대한 욕구는 상당히 많은 경우에 지적 호기심에 그칠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경험에 의해서 자기가 필요로하기 때문에 획득하는 그 지식은 참된 지식이될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어느 잡지에서 보니까. 무엇이 나오느냐하면은 이름도 잊어버렸습니다. 굉장히 희기한 병인데 전세계에 그것을 앓고있는 사람이 뭐 2-3000명인가 하는 그 정도밖에 안되는 병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환자가 없데요. 그것을 간신히 해서 그것을 알아냈는데 그것을 도저히 병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다가 알아냈는데 병원을 믿을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인터넷에 들어가서보니까. 그런 병을 앓고있는 사람들이 동아리를 만들어가지고 정보를 계속해서 주고받고 말하자면은 실험의학적인 측면에서 그런 것들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이렇게 연결이 되어서 계속해서 정보가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병든사람이 그런 사이트에 들어가서 막 정보들을 나눌 때 얼마나 그 지식을 얻고자 하는 것이 간절해지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래서 한번 사람이 아프고나면은 반 의사가되지않습니까. 그렇죠. 위장면 앓은 사람들은 그 위장병에 대해서만큼은 거의 박식한 사람이됩니다. 그렇죠. 집안에 누구환자 한사람이 어떤 병으로 죽으면은 그 옆에 있는 보호자는 그 질병에 대해서 거의 전모를 파악할 정도로 그렇게 반 의사가된단말입니다. 그것이 왜 그렇습니?.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상태속에서 어떤 호기심을 가지고 지식을 체득할 때에는 무엇이 진짜 중요한 지식이고 이 지식이 자신의 신앙속에서 어떠한 중요성을 가지고 어떻게 적절하게 배열되어야 할까에 대한 감각이 현저히 부족합니다.
그러나 어떤 진리를 깊이 경험하고 나고 그 경험한 진리가 자신에게 보다더 구체적인 진리를 요구하고 그것을 체득하기를 원할 때에 그 때에 습득되는 지식들은 정확하게 그것을 배치할수 있는 감각들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해가 안가죠. (하나만 더 자세하게 예를들면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전체적으로 주님을 추구해 가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 가는데 그런데 요즘에 심각하게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하며은 나의 지체들을 사랑하는 삶에 대해서 심각한 결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왜 이렇게 지체들을 쉽게 미워하고, 맺혀있는 것을 쉽게 풀지못하고, 그리고 그것들 때문에 나의 기도가 방해되고, 심지어는 교회의 어떤 공동체를 파괴하는 장본인이 되고,있고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근심시키는 원인이 되고있다.라고 하는 것을 다 파악을 내가 했습니다. 파악을했는데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들어내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공동체를 허락하실 때 그 공동체 속에서 이루고 싶어하셨던 진정한 사랑과 연합의 관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주 풍부하게 깨닫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깊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보니까. 이제 자신의 죄가 실재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고통하고 그리고 그 죄를 뉘우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어떡하면 내가 이렇게 사람을 마음속 깊이 사람을 미워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이 패역에 가까울정도로 굳어진 나의 경향성을 고칠수 있겠는가? 이런 의문이 딱 들고나면은 그것에 대한 치료책으로서 성경이 주어진 이 진리들이 막 굉장히 강력하게 빨려드는 것입니다. 왜 그 진리 하나하나가 자기가 지금 하나님 앞에 죽느냐. 사느냐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으니까. 어떻게 말씀을 슬슬슬 흘려듣고 그렇게 무슨 건들건들 그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 깨달음으로서 자신이 사느냐 죽느냐의 생이 달려있는 문제인데 그렇지않습니까. 더군다나 그런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한 부분에서 자신의 망가진 부분들을 치료하시는 은혜를 보여주실 때에는 그런 것들이 더 간절하고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그대로 살고하는 간절한 추구가 없으면은 결국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가지고 있는 진리자체를 자신에게 입력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것 까지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통합된는 삶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다 쏟아부음으로서 파악되는 삶입니다. 그것이 이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입니다.
산사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면벽을하고 파악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파악될수 있는 기독교의 진리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도 신앙의 실재를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갈때까지만 필요합니다. 가고나면은 다 필요없습니다. 천국가면 이런 설교들을 필요도 없고 저는 아무 쓸모가없습니다. 여기에서처럼 이렇게 그래도 아쉬운대로 써먹을 그럴 유용성이 천국에가면은 여러분들에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 비로소 제가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주던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가르침이 얼마나 일부분이었는가를 거기에 가면 알게됩니다. 성경도 필요없고 주님을 마주 대하면서 우리들이 그 모든 것들을 알게됩니다. 그러나 그 때 까지는 우리에게 이런 지식들이 필요합니다. 경험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경험한 사람에 의해서 추구되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보세요. 세마포 옷과 같이 깨끗하고 티끌하나 묻지않은 사람이 그런 풍부한 진리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피와 땀과 진흙으로 죄인들속을 넘나들면서 이 배인 피골음으로 범벅된 이러한 섬김의 옷, 혹은 영적 전투의 복장을 한 사람들의 손에 빛나는 진리가 들려져 있는것이지. 그렇게 자신을 쏟아붓는 삶과 실천하는 순종없이 기회주의 적인 삶을 산사람들이 그들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많이 준비되어도 하나님은 쓰시지않습니다. 내용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아마 그것을 쏟아부을 기회를 얻지못할 것입니다. 왜그러느냐하면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경외하고 그의 영광에 가슴 사무치지않은 사람이 가르쳐준 그 자랑하는 지식들이 결국은 자신의 지식의 자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설교시간마다 누구얘기 자꾸만 해서 미안한데 나는 그 김영옥씨 그 사람을 보면서 그런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에 깊이 잠겨서 도가 깊이 스며들어본적이 없는 사람같아요. 뭐냐하면은 꼭 생선을 매운탕을 끓이는데 겉에만 살짝익고 속에는 안삶아진 그런 사람같아요. 어떻게 공자가 자기 하수인인 것처럼 그렇게 말해요. 뭐 나는 공자편도 아니지만은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보세요. 이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하라. 가르침을 받은데로 실천하며 살아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당부는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당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신앙의 성장의 문제이고 하나님 앞에서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한알한알 엮어져서 어느날 불연 듯 뚝 잘리듯이 끝나는 우리의 삶의 필름. 그런 순간이 다가오게되면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드려야할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바쳐야할 하나님 앞에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드려야할 것입니다. 기억해야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가르칠 내용①: 회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20:21)
지난 시간에는 가르치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가르칠 때에 자기가 가르치는 가르침이 증거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진리를 경험한 가운데 가르쳐야 된다. 말씀을 드렸고. 또 어떻게 그것을 경험할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드릴려고 합니다. 성경에는 한두가지 가르침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하나님 모르고 살아가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구원에 이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구원받은 이후에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거역할수 없는 요청인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모든 방법과 길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두가지가 아니라. 굉장히 많은 교훈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한국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교파가운데 하나가 다락방 전도를 한다. 그래서 한국 교회를 상당히 소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뭐 이단으로 정죄 되기도 하고 뭐 사과문을 내기도 하고 여러 가지 많은 논쟁들이 있었습니다만은 그들의 가르침을 보면은 실지로 그들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가르침 중에는 사실 십자가가 강조되고 전도가 강조됩니다. 그래서 “전도를 위해서 설교하는 그 설교가 아니면은 설교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은 어느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까 성경에 있는 전체적인 계시의 유기적인 성격을 놓친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도리다.”라고 하는 것은 틀림없지만은 “그것 이외에는 설교될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을 잘 모르는 단견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느냐하면은
지질학자들은 어떻게 말을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은 우리들이 그저 중고등학교 때까지 배운 지리실력을 통털어서 이야기를 해보자면은 땅은 산이 있고 그 산이 쭉 퍼지면서 생기는 것이 땅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은 우리나라도 이렇게 놓고 보면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산맥인 태백산맥이 있고 그 태백산맥이 이렇게 내려오면서 급히 내려오면서 동해가 되고. 그것들이 이제 서서히 구릉으로 내려오면서 강원도를 형성하고 그리고 경기도가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만약에 파악한다. 그러면은 지도를 갖다놓고 산맥의 형태를 파악하고나면은 그 산맥의 형태가 인체의 뼈대와 같아서 그 뼈대위에 살이 붙은 것이 곧 평지가 붙어있는 모양과 같아서 그 국토를 형성하고 있는 뼈대인 산맥을 보면서 국토의 형태 그리고 땅이 가진 특징들을 파악할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도 성경속에는 다양한 교훈들이 있지만은 산맥처럼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줄기차게 흐르는 큰 흐름이 있습니다. 그 흐름을 파악하지 않고 성경을 읽으면은 많이 성경을 읽어도 신앙생활에 도움이 잘 안됩니다. 그것이 교리적인 뼈대이고 그 교리적인 뼈대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 대한 증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를 보여주는 교리적인 뼈대. 그 뼈대를 타고 그 다음에 평야가 흘러나오듯이 여러 가지 도덕적인 가르침들이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기 때문에 성경의 근본적인 교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제 성경의 근본적인 교리 이외에는 다른 것들을 설교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교리라고 하는 것이 그 교리 자체를 말하는 것도 되지만 그 교리가 다른 가르침속에 다 배어서 적용되어 있을 때에 그 때 그것이 건전한 기독교의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맥락에서보면은 아까 말씀드린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쉽게 생각하면은 “국토를 가로지르는 그 산맥은 땅이고 평지는 땅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다 땅입니다. 다만 그 산맥들이 골격을 이루면서 그 산맥으로 아래 흐르는 언덕과 들판 평야로 이어지면서 땅이 형성되듯이 성경속에 흐르는 그리스도와, 십자가, 구원사건. 이런 것들이 교리적인 뼈대가 되어서 줄기차게 흐르는데 모든 가르침들이 그 흐르는 물줄기와 아주 유기적인 연관을 가지고 가르쳐지고 이해될 때에 그것이 참된 기독교적인 가르침이 되는 것이지. 그것이 단절된 상태에서 가르쳐지면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니까. 이제 그런 사람들은 한 극단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의 교리도 기독론이나, 아니면은 구원론과 만나고 또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관한 교리들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성화의 삶하고 연관이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기적으로 흐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을 여기에서 요약을 해서 뭐라고 그랬느냐하면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다.”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문맥상으로 보면은 사도바울이 지금 회상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무엇을 회상하고 있느냐하면은 이 아시아에 들어와서 그의 삶은 전도자로서의 삶이 었습니다. 왜냐하면은 믿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아시아에 들어와서 그의 삶은 일차적으로 전도자의 삶이었습니다. 그 전도자의 삶을 지금 회상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로서 그가 가장 안 믿는 사람들에게 늘 가르치고 설교했던 주제와 그것을 전파한 방식에 대해서 오늘 회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전파한 방식이 뭐냐하면은 증거였다. 참고 모든 것을 견디고, 시험을 이기고 많은 사람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내가 다 참고 그리고 내가 어떤 말씀을 전했는데 그 말씀을 전할 때에 삼자적인 변호자로서 전한 것이 아니라. 가르치고자 하는 그 교리를 내가 직접 경험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들에게 전파한 것이다. 그것이 지난주까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들에게 증거한 내용이 무엇이었느냐하면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무엇을 알수 있느냐하면은 우선 가르치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에 가장 우선적으로 가르쳐야 될것이 뭐냐하면은 “우리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이 두가지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르쳐야할 가장 중요한 가르침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즉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이 두가지를 합쳐서 교리적으로 회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회심의 적극적인 요소와 소극적인 요소가 있는데 소극적인 요소가 회개이고 적극적인 요소가 믿음입니다. 그 회심이 두가지로 이루어지는데 회개는 회고적인 것이고. 믿음은 전망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옛삶을 돌아보면서 깊이 뉘우치는 것이 회개라고 할것같으면 새롭게 이제 예전에 사랑하고 믿었던 것들을 버리고 자신의 사랑과 믿음을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 드려서 그분 안에서 안식을 얻는 전망. 이 두가지가 합쳐진 것이 회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회심은 원칙적으로는 한번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구원과 관련해서는 한번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 아이들에게는 기대할수 없습니다. 갓난 아이들. 어렸을 때 죽은 아이들에 대해서는 기대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얘기할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아니하면” 여기에서 물이라고 하는 것은 물세례가 아니라. 물과같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불과같은 성령, 이것이 다 비유입니다. 물 곧 성령, 불 곧 성령.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아에 들어갈수 없다.” 이것은 어린 아이든지 노인이든지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 거듭나는 것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수 없습니다. 갓난 아기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셔서 인간의 죽었던 영혼을 새롭게 살리시는 이 중생. 이 거듭남의 역사에서는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거듭나야 할 필요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 회개와 믿음은 일반적으로 의식이 있고 지각이 있는 사람들에게 기대할수 있는 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회심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성경에서 제시하지 않습니다. 중생은 예외가 없는데 회심은 이제 회심하지 못한체. 갓난 아이인데 난지 몇칠만에 죽었다. 그러면 그 아이가 무슨 회심을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경우가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예외없이 이 회심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지각을 가진 사람이 되게 되면은 그러면 반드시 이 회심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이 이렇게 이 회심에 대한 어떤 뚜렷한 격렬한 회심을 경험할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그것은 아닙니다. (예를들자면은 아주 어렸을 때에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려서부터 자라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자기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라고 하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고 그것을 믿게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아주 강력하고 뚜렷한 회심의 경험을 통해서 구원 얻는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은 회심을 했느냐? 안했느냐? 라고 하는 그런 것이라기 보다는 구원은 사실은 자격의 문제라기보다는 결과의 문제입니다. 결과가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를들자면은 어떤 한 사람이 비록 아주 강력하게 인생전체가 뒤집히는 것 같은 회심의 경험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지금 구원받은 증거는 그런 경험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이 회심의 체험자체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이런 종류의 회심이 아니면은 회심이 아니고. 이런 종류의 회심을 나이들어서 못했으면은 구원을 못받았다. 그런식으로 제시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회심의 기억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지금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람,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거룩해 지고자 하는 열망, 이런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충분히 입증되고 그런 것들이 삶속에서 나타나면 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 우리들이 의심할 필요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무에 철을 따라서 잎이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데 주렁주렁 열매가 달려있고 그 열매가 점점 빨갖게 익어가는 가을에 단지 뿌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그 나무가 죽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결과가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게되면은 제일먼저 그에게 가르쳐 주어야할 것이 이 회심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그 회심의 교리는 두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회개에 대한 교리와 또 하나는 믿음에 대한 교리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은 인간이 하나님의 징벌아래 있다.라고 하는 것을 가르킵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 그 자체가 무엇인가 죄를 짓고 청산해야 될것이 있는 상태 그리고 지속적으로 거스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상태에서 돌이켜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사람이 범죄해서 죄인이 되어있는 상태를 여기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에게 이런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그런데 이런식으로 하나님께 대해서는 회개를 하고 2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서는 믿음을 갖는다. 그러면 성령은 도대체 어떻게 된것이냐? 그런 의문도 나오고 똑같은 한 하나님이신데 왜 그것을 나누어서 이분께는 회개를 보여주고 저분께는 믿음을 보여주어야되느냐? 예수 앞에서는 회개하면 안되느냐? 하나님을 직접 믿으면은 안되느냐? 이런 의문이 나올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답이되는 것입니다. 뭐냐하면은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구원의 사역은 삼위일체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창초로부터 구속에 이르는 전체과정 속에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함께 역사하시지만 어느 하나님이 더 주도적으로 역사하시는가? 그것에 따라서 구원 전체의 사역에 따라서 그것은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것입니다. 세계를 창조하실 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요한복음 1장에는 “말씀이 없이는 이 세상이 지어진 것이 없다.”라고 말할 때 그 말씀은 성자시라는 것입니다. 그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름을 갖게된 성자시라는 것입니다. 그 성자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이거죠. 그런데 또 창세기 1장에 가보면은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이 그 위에 위를 감싸시면서 창조된 세계전체를 닭이 알을 품듯이 이렇게 감싸면서 새로운 세계가 새세계가 이렇게 창조되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창조하는 그 일도 성자와 성부와 성령이 함께 하시는 일이고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보내시고, 성자가 오시고, 성자는 성령으로 잉태되시잖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구속의 사역에 있어서 이처럼 구약에도 하나님 아버지가 살으시고 성결의 영으로 죽은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며 살아나신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시잖습니까. 이렇게 구원의 전 사역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사역이십니다.
그런데 창조의 경우에는 하나님 아버지. 즉 성부하나님이 창조에 있어서 창조의 세계를 디자인하고 창조 세계에 있어서 그것을 인이셔티브를 쥐고 주도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우리를 대속하시는 그 사건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주도권을 쥐고 자기 스스로 자신을 드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힐수 있는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죽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해서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에 우리를 적용시키셔서 구원받게 하는 일에 있어서도 주도적인 역할은 누가? 성령이 하시는 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성령이 계신곳에 성부와 성자가 계시고 성부가 계신곳에 성자와 성령이 계십니다. 모두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어떻게 그분이 역사하시는가에 대한 균형잡인 이해를 갖는 것이 아주 좋은것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이메일속에 베니힘이라고 하는 저자의 글들을 계속 읽어야되느냐고 누가 질문이 올라왔는데 그래서 제가 12권인가 사서 거의 읽었는데 그분같은 경우에는 유대인으로서 이제 성령을 체험하고 개신교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전도자가 되었는데 상당히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그런데 그분의 어떤 성령의 역사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문제지만은 교리적인 체계에 대해서 상당히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들자면은 어떤 식으로보느냐면은 절대적인면에 있어서 성경 위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는데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가 죄짓지 않고 순결한 하나님의 아들로 남을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성령의 덕분이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만약에 그와 같이 하지않으셨다면은 그러면은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범죄했을 것이다. 그러면은 그런식의 교리 진수를 만약에 한다면은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성령이 함께 하시는 우리들이 범죄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성경은 아주 명백하게 성령이 함께 계실때만 그분이 겨우 하나님 되신다고 말하지 않고 순결하신 하나님 자신이라고 성경이 얘기하고 있습니다. 또하나 중대한 의문은 뭐냐하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충만한 성령속으로 들어가신 것은 언제냐하면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충만한 성령이 그에게 임하십니다.
물론 이제 충만함은 또 나타납니다. 시험을 당하신 후에 그 시험을 모두 이기신후에 다시 충만해진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 때에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그때입니다. 그러면은 그렇게 해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시험을 이기셨을 때에 그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그러면은 어떻게 되야지만 그분이 완전히 무죄하실수있냐? 성령이 어느정도 그분과 함께 하셔야지만이 그분이 무죄한 삶을 살수있느냐입니다. 그런식으로 교리를 진술하는 것은 아주 무지한 것입니다. 그런식의 뒤틀린 교리의 체계가 책전반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런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으니까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쨋든지간에 우리나라 한국의 도서시장은 말이죠. 슈퍼에서 온갖 약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들이 와서 그냥 아무거나 가지고 갈수 있게끔 되어 있습니다. 책에 대해서 판단이 없는 사람들이 책을 만들어내니까. 그런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책은 아주 잘못된 책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향해서 아주 도움을 주지 못하는 책입니다. 그런 책들에 빠진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읽어보면은 성경자체를 어떻게 해석하면서 성경에 관계된 진리들을 풀어가는 것들이 아니라. 수많은 체험들로 엮어지면서 그 체험 속에서 진리를 찾았다고 말하고 그것을 입증할수 있는 성경구절들을 찾아내어서 맟추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은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산 것으로 충분하니까 여려분들은 사지 마시고 다른 책들, 좋은 책들을 사서 보도록하세요. 그렇게 말하면은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그렇게 보면은 안됩니다. 그러면은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면은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보면은 예수님이 범죄하지 않고 일생을 사셨던 것이 순전히 성령의 덕분이라면은 그러면은 그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하고 똑같이 다를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럴수 없습니다. 그분은 두 번째 아담이시고 죄없는 분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는 했지만은 그러나 그분하고 아담하고 같은 수준의 흙으로 빚어진 그런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몸은 그것을 입으셨을 뿐이지. 그 안에 하나님의 신성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양성의 교리중에서 이 신성이라고 하는 것은 순전히 성령이 여기 계셨던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은 예수님이 우리와 무슨 차이가 있느냐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교리입니다.
이와같이 창조로부터 심판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역사하시지만은 각각 그 삼위가 각각 시점마다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나타나죠. 그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지만 일차적으로 위대한 권능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이렇게 생각될 때 우리가 언뜩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부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타락했을 때에 이 세상을 구원해야할 구원 계획에 대해서 디자인 하신분도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들이 그런 디자인을 하신분 하고 생각할 때 우리는 일차적으로 누구를 생각합니까? 성부하나님이 그것을 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구원역사의 위대한 순간마다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은 예수 그리스도이신 성자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고 성령은 그를 잉태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항상 같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그 순간에 하나님이 거기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해서 인간이 지은 죄를 구속하고 그리고 용서해서 화해의 길을 열려고 하나님이 작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떻하든지 인간을 죽여버릴려고 하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을 죽도록 말리는 이런 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완전히 신파지 성경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그림을 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그 사건을 디자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도록 자기의 몸을 내어주신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그 사건에 대해서 우리에게 증거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지금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보좌우편에서 간구하시고 성부하나님은 지금도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하나님은 지금도 죄인들의 마음에 찾아와서 2000년전에 죽은 나와 상관없는 그 나사렛의 젊은이의 죽음이 바로 하나님의 죽음이며 그 하나님의 죽음안에서 나의 죽음이 종식되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성령하나님이 우선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령에 대해서 우리들이 많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어느부분을 찬송할려고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삼위하나님께 각각 돌려드리는 영광을 돌려드릴 때 삼위중에 어느 하나님께 주도적인 영광을 돌려드리도록 찬송의 제목으로 삼아야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복음성가나 찬양보면은 거의 성자일변도 적으로 나가거나, 심지어는 아예 성령 일변도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성부, 성자하나님은 구약시대부터 지금까지 많이 영광을 받았으니까. 이제 좀 쉬시라. 그러고 이제는 성령하나님께 좀 보충해드리자”고 이것이 넌센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영광돌리는 것이 무슨 애들에게 무엇을 나누어주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보같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회개를 가르쳤는데 회개를 증거했는데 그 회개가 하나님께 대한 회개였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하면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에 그것이 일차적으로는 창조주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는 누구입니까? 우선적으로 성부하나님입니다. 그분 앞에서 가장 커다란 책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성령님도 성자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우선적으로 우리들이 범죄한 것, 그러니까 우리의 조상이 범죄하고 우리가 그 죄책을 물려받고 태어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 없이 산 인생에 대해서는 제일먼저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하면은 우리의 죄와 타락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성격이 뭐냐하면은 나쁜짓이다. 유아적인 가르침에서는 죄란? 나쁜 것이다. 그러지않습니까. 그런데 실재로 나쁜 것이 존재하느냐고요. 대부분 인간들이 “나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전부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렇죠 몇번밖에 안가보고 그런 이야기하면은 우습지만은 어느 음식점에 딱 들어갔더니 뭐라고 써붙어있느냐 하면은 “밥을 남기지 마십시오.” 이렇게 써놓으면은 좋은데 아주 흉칙한 글씨로 뭐라고 써놓았느냐하면은 “밥을 버리면 천벌을 받습니다.”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무서워서 식사를 못하겠어요. 그 글자체도 꼭 마귀체. 시커면 붓글씨로 하여튼 피흐르는 것같이 써놓았습니다. 아니 그렇게 할것이 뭐가있겠습니까. 거기 들어오는 사람도 다 지각이 있는 사람들인데
(예를 들자면은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밥을 남기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먹을만큼 뜨십시오.” 좋은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밥을 버리면 천벌을 받습니다.” 그것이 공짜로 주는 식당이라면은 그래도 좀 이해가 갑니다. 아니 내돈 내고 내가 먹고 내가 남기는데 어떻게 그렇게 험하게 쓰느냐고요. 그래서 일부러 한번 남겨보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그런식으로 하느냐고요. 뭐하다가 그 얘기가 나왔습니까. 상대적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몇번가니까. 아무대도 그런 것 써붙인데 없습니다. 주문을 했는데 그릇을 대여섯 그릇을 가지고 왔는데 주문이 잘못들어 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가지고 가서 쓰레기통에 다 부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지역에 있고 어느 문화에서 사느냐에 따라서 상대적인 것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 오늘 아침에는 우리 아들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니네 학교에서 머리 길게하고 다니면 깍고 그러느냐” 그랬더니 막 깍는데요. “그거 왜그러는지 모르겠다. 자유롭게 하고 다니도록 내버려두지” 그러니까 또 그래요. “그럼 애들이 다 물들이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물들이면 어떠냐? 물좀 들이라고하지.” 보세요. 우리 막 미친 사람처럼 하고 다녔잖습니까. 뭐 빨강머리. 초록머리. 노랑머리. 심지어는 애들이 하얀머리까지 하고다니고 그것도 모자라서 하양. 빨강. 초록 이러고. 그것은 완전히 대가리지. 그리고 꼭 닭대가리처럼 해가지고 그리고 자기가 뭐 꿩이나. 되는 것처럼 말이지. 그런데 조금 참으니까 이제 다 끝났습니다. 그 시대가 지났습니다. 지금은 유행이 뭐냐면은 까망머리 그리고 막 볶은머리가 유행이더니 요즘은 다 풀어서 곱슬머리도 다 풀어서 똑바로 펴는 것이 유행입니다.
다 상대적입니다. 머리 기르고 싶어서 안달을 하지않습니까. 그래서 세상에 그런 경찰도 없었습니다. 경찰이 자 하고 가위 하고 들고 다니면서 미니스커트 길이재고 이거 장발 자르고 세상에 그랬습니다. 그래서 생활화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누가 기르는 사람이 누가있습니까? 법이 허용을 해도 안기릅니다. 그거 다 자꾸 변하는 것인데 그렇지않습니까? 아니 머리 기르는 것이 악이라면은 18세기 사람들 이렇게 기르고. 예수님도 머리를 기르고 다녔습니다. 그것은 어떡하느냐고요. 그러니까 좀 인내심을 가지고 겉모양 말고 사람 그 자체를 볼수있도록 놔두세요. 애들 머리 물들이고 다니고 바지 막. 괜찮습니다. 교회에 와도 자꾸 동물보듯이 그렇게 보지마세요. 아니 내가 안그러는데 괜찮습니다. 몇 달만 기다리면은 다 벗어버리고 그저 잘해봐야 한 10년만 기다리면은 안그러고 다닙니다. 10년 되어서 아이 낳는데 그러는데 여기 닭대가리 처럼 그렇게 하고 다니겠습니까? 교회에서 집사가 되었는데 그렇게 하고 다니겠느냐고요. 하고 다니라고 해도 안합니다. 다 한때입니다.
상대적입니다. 굉장히 많은 것들이 상대적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것들 다 본질적이 아닌것들에 대해서는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뭐 한 6개월전인가 어느 신문사에서 인터뷰를 와가지고 오늘날의 이 젊은이들의 머리문화, 염색문화 이런것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얘기하면서 시작하기 전에 “목사님 같이 고루한 세대는 이해를 못하시겠지만” 그렇게 하면서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한 1시간동안 이야기를 하는데 나중에는 감당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아이 우리는 보수적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은 목사님의 생각을 다 수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그만둬라.” “머리를 막 노랑물을 들이고 고대를 하고 이러고 다니는 것이, 이것이 말하자면은 민족적인 아이댄티티를 말살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원래 흑발직모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민족적인 아이댄테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은 한국민의 민족적인 아이댄테티가 겨우 까만머리카락 하나로 확인이 되는 것이라면은 나는 그것 버리겠다.” 그랬습니다.
그것이 뭐그렇게 중요하느냐. 그렇다고 해서 다음주에 모두 머리에 물들이고 오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무리 기대해봐도 제가 닭대가리 처럼 하고 여기에 올라오는 일은 없을것입니다. 이대로가 좋습니다. 그러나 이해를 하자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이렇게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1967년에 윤복희씨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신세계에 나타났을 때에 다 “미친년”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다 그 사람 뒤쫓아 가고 있습니다. 누가 뭔저 가느냐. 나중 가느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슨 사회에 그렇게 어마어마한 악영향을 끼친 것은 아닙니다. 벌거벗고 다닌것고 아니고 그러니까 그런면에서 무엇이 본질적인가 본질적이 아닌가에 대해서 폭넓은 정신을 가지고 문화도 보고 사회도 읽어서 본질적인 신앙에 있어서는 아량을 버리고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좀 그런 것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실지로 어느 지체가 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요지를 말하면은 그것입니다. 지금 그 자매가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형제인지 자매인지는 잘 기억이 안나는데 익명으로 썼기 때문에. 요지는 이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다니는 것이 좀 야하게 하고 다니는데 유난히 이 교회가 경건해서 그러는지 자기한테 눈길을 많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 나오고 싶은데 너무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나는 그렇게 심각하게 안쳐다볼테니까. 나와라.” 자꾸 그런것에 있어서도 숙달되어야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 본질적이 것에 있어서는 제발 아량을 버리고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량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악이라고 생각을 하고 부도덕하다.라고 생각을하면은 그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는 것은 인간이 죄를 지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는 이런식으로 문화에 따라서 얼마든지 신축적으로 왔다. 갔다. 할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죄고. 절대적인 악입니다.
그것은 뭐냐하면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고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해서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것은 뭐냐하면은 죽음입니다. 영혼과 육체의 공통적인 죽음입니다. 그 형벌을 약속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즉시 그와 함께 그 속에서 자연적인 방법으로 출생하는 모든 인간들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딱 태어나면서 그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다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노도 잘 생각해야 하는 것이 죄를 지은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마치 이를 갈고계신 분인 것 처럼 이런식으로 묘사를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잘들으세요.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도 죄를 짓고 또 하나님을 믿지않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원수처럼 생각하시면서 “언제 저놈을 잡아죽일까?” 이를 갈고 계시는 분으로 묘사하시는 것은 말하자면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하나님은 죄인, 하나님을 믿지않은 불신자와 그리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죄인들을 향해서 분노를 가지고 계시다.라고 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러한 하나님의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어떻게 이해를 하고 생각해야 할것인냐? 하는 이 문제가 나오지않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생각을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어떤 감정을 묘사할 때에 항상 하나님께 그 성품밖에는 없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해석을하면은 교리적인 오류에 도달합니다. 그러니까 그 성품말고도 하나님에게 다른 성품들이 많이 있는 것을 함께 고려하면서 그것을 해석을 해야지만 다른 성품을 가지고 이야기 할 때에 나오는 결론과 충돌을 일으키지않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세요. 인간을 향해서 하나님이 죄를 짓고 아직 구원받지 못한 인간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이를 갈고 계시는 그런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 하나만을 강조한다면은 그 교리적인 진술은 1차적으로는 얼뜻보기에는 맞을지모르지만 그러면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즉 죄가 주홍과 같이 붉을지라도 그 인간들의 죄를 양털과 같이 희게하시는 열방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그 선교적인 성품. 이런 사랑의 성품은 설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식으로 해석을 해버리고 나면은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를 하고 생각을 해야되겠느냐. 그런데 사실 그러면은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를 않하고 있느냐면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에서 말하기를 뭐냐면은 “본질상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전에 진노의 자녀였다.”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었다.” 로마서 1장에서도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화급히 복음을 전해줘야 한다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이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지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성경전편에 흐르고 있는 아주 어마어마한 교리입니다. 그렇다면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교리를 두고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혼란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이 균형을 잃고 한쪽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를 위해서 하나님이 이를 갈고 계시고 쓸어버리시는 그런 진노하시는 하나님. 아니면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저 인간들이 죄를 짓고 범죄하고 하나님을 안믿으며 살아가도 사랑이라는 그 교리의 창살에 갖혀서 돌아오라고 눈물만 흘리다가 인간이 지옥에 들어가시는 것을 지켜보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 그런식으로 묘사를 하는데 이것은 모두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어떤 하나님의 한 성품을 우리에게 적용해서 교리를 만들어 낼때에는 다른 성품에 대한 교리까지 고려하면서 입체적인 고려속에서 그 교리를 진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설명이 되느냐하면은 이것입니다. 보세요. 왜 이것이 말이 안되느냐하면은 만약에 하나님이 범죄한 인간에 대해서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하나님이라면 성부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라면 왜 인간의 구원을 위한 디자인을 하시겠습니까? 이미 아담과 하와에게 먹으면 정녕죽으리라.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 먹고 ( ? )그 법칙에 따라서 그대로 적용해서 영혼도 죽이시고 육체도 죽이시고 그냥 창조세계를 모두 거두어 버리시면 끝나는 것인데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범죄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거기에서 태어날 수많은 후손들까지 생각하시면서 그 더럽혀진 혈통을 통해 태어날 소망이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실 그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디자인하시느냐 이겁니다. 이 자체가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인이 회개하지않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불신자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라고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하면은 하나님이 가장 강력하게 미워하시는 것은 뭐냐하면은 자기가 창조한 세계의 창조를 무의미하게 하기 위해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은 뱀도 마찬가지이고 인간도 마찬가지고 그 피조물들은 죄를 이 세상에 들어오게 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잠식하며 죄에의한 지배가 가능하게 만들어준 말하자면 도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만 차이가 뭐냐면 뱀은 비인격적인 도구였는데 인간은 인격적인 도구였습니다. 인격적인 도구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지게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고 그리고 자기의 창조세계를 망가뜨린 인간들이지만은 그 인간들을 사랑하고 계시지만 그러나 자신의 창조세계에 대한 도전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그렇기 때문에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하나님이 이 죄인들에 대한 진노를 설명할 때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다 다르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절대적이고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상대적입니다. 무슨얘기냐하면은 돌이키면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적합한 비유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의사인 아버지가 자기에게서 암에걸려 태어난 아들을 수술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여기 배를 이렇게 불어나게 만들고 있는 심각한 암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그 암세포와 자기 아들의 몸 자체가 분리가됩니까? 안됩니까? 분리가 안되고 그 세포는 혈관을 타고 각처에 퍼지고 있는 중입니다. 분리가 안됩니다. 분리가 안되는대도 분명한 것은 자기 아들의 몸속에 암이 퍼져있지만은 그 암덩어리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과 그것을 가지고 있는 암세포에 오염된 자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은 같아요? 달라요? 다르죠. 적절한 비유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니고 있지만 그러나 그 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다릅니다. 그렇게 하면서 ( ? )교리를 진술하면 이제 하나님의 성품전체가 어우러져서 어느 각도에서 그 교리를 진술하든지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것을 생각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또 동시에 죄와 죄인을 항상 구별해서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 어떤 면에서 그것이 완전히 구별이 안되느냐하면은 이 죄 자체가 거역할수 없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죄는 자신의 불신앙적인 선택의 행위들을 통해서 죄가 계속해서 또다른 형태의 죄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는 원죄고 하나는 자기가 짓는 도덕적인 자범죄입니다. 두 개가 함께 인간속에 있는 부패성과 연합하면서 끊임없이 인간속에서 이 죄가 양성되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보면은 이 사람이 죄를지고 있는데 순전히 원죄만있고 자기가 지은죄는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태어났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 아이가 아니라면은 이렇게 장성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 두가지 죄가 다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죄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구별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지고 있는 그 죄에 대해서 인간이 스스로 책임을 져야한다라고 하는 사실을 성경이 강조해서 이 두가지가 이 죄와. 죄인 이 두관계가 나뉘어지지 않는 관계처럼 또 동시에 같이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런 관점에서 보면은 하나님의 하나님이 죄를 향한 진노는 절대적인 진노이고 그 죄를 선택하고 그 죄와함께 어쩔수 없이 연관을 맺고 있는 이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을 돌이키게 하시는 진노입니다. 돌이키게 하는 진노입니다. 그런데 이제 전혀 돌이킬 가망성이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제 땅을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그 죄의 영향자체를 소멸시켜버리시는 것입니다.
요즘 서구에서 구제역에 걸린소를 잡아태워서 죽이는 장명들이 나오지않습니까. 그것이 미워서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소를 통해서 계속 전파되는 구제역을 차단하기 위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상태에서 어쨌든 인간이 죄가운데 태어나서는 죄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다르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런 불신자들에게 전해주어야할 가장 우선적인 교리가 뭐냐하면은 죄의 성격과 그리고 그 죄와 그 죄인 자신이 어떻게 떨어질수 없으며 그런 사람위에 무엇이 머물러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그것이 달콤한 사랑의 교리보다 가장 중요하게 그들가운데 이해되어야 할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이 복음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자신의 영혼의 위험성에 대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의 비참함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안되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말해도 복음을 아무리 말해도 자기에게는 그것이 기쁜소식이 되지않은 것입니다.
자기가 본국에서 지명수배가 되어서 1억원짜리 현상금이 붙었으며 잡히는 날에는 사형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돌아 다니는 사람에게 수배해제 통지서가 기쁨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주 정확한 비유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돌아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배해제 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기쁨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뭔가.” “너를 이제 수배에서 해제시켜준다” 그 사람이 자기가 수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러면은 벌금도 물고 죽임을 당해야된다는 사실을 다 이해하고 그 후에야. “야! 이거 큰일날뻔 했구나.” 이것이 나오는 것이지. “수배해제” “이게뭐야.” “왜 나한테 이런 것을 보내는거야.” 그러면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슴조리면서 막 도망을 다니면서 경찰의 추격을 받으면서 가족도 못만나고 주민등록증 없이 고속버스도 못타고 그 고생을 하던 사람, 어느 한곳에 가서 사람구실을 못하던 사람이 수배해제가 내렸다면은 그 통지서를 붙들고 펑펑울 것 아닙니까. 그것아닙니까.
그러니까 오늘날 복음이 복음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원인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들은 거듭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제일먼저 가르쳐야 될 것은 뭐냐면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위험한 상태.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끌어오르는 분노, 죄는 미워하고 죄인들은 사랑하시지만 그 죄인이 끝까지 돌이키지 않으면은 그를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어쩔수 없이 죄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야합니다. 그리고 회개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깊이 인정하고 그 모든 죄가 자기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면서 하나님 앞에 주님 없이 살았던 지난 날들을 깊이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살아있는 가르침에는 반드시 이렇게 사람을 뒤흔들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세워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회개케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롭게 하는 이것이 이 세상에서 먹고, 입고 사는 인생의 모든 목적보다도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하구나. 라고 하는 것이 대해서 눈뜨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다음주에 또 말씀드리겠습니다만은 그러나 이 회심은 성경이 항상 믿지않는 자들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회심이 새롭게 경험되어서 반복적으로 체험이 되어야합니다. 그 때에 우리의 삶이 순결해 질수 있고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받을 상태에서 돌이키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단 한번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우리들이 계속 자신이 죄를짓고 또 하나님은 우리를 멸망으로 데려가시지는 않지만 죄를 지어서 우리의 마음이 무겁고 더러워지고 오염될 때 그 때마다 자기가 예전의 죄인으로서 어떤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었으며 어떻게 내가 죄를 뉘우치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서 이 죄의 사함을 얻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다시 구원받은 이후의 죄를 회개하면서 그 회심의 경험을 자기속에 새롭게 할 때 그 때에 능력있는 신앙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보세요. 사도는 제일먼저 믿지아니하는 이 아시아에 들어가서 생명을 걸고 핍박을 받으면서 그들에게 일관되게 가르칠려고 애썼던 교리가 바로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있는 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돌이켜야 할것인가 하는 이 교리를 가르친 것입니다. 그 문서선교부에 가면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한 7-8개쯤 아니10개쯤인가 되어있는데 그것을 한번 잘 들어보면은 제목은 상당히 우울할지 몰라도 내용은 전혀 우울하지않습니다. 보시면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될 때에 그것을 배경으로 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이 왜그렇게 엄청나게 빛나는 일인가 하는 것들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살아있는 가르침을 받는 영혼들에게 배풀어줄수 있는 이런 체험있는 교사들 가르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가르칠 내용②:믿음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20:21)
21절을 지금 한 4주째 보고있습니다. 지지난 시간이 “증거한다.” 그러니까 영혼들에게 무엇인가 가르쳐야할 내용이 있는데 그것이 제대로 증거되기 위해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한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증거가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그 증거할 내용이 무엇이냐? 물론 많은 것들을 가르쳐야 하지만 제일먼저 우선적으로 가르쳐야 될 내용이 무엇이냐?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었는데 지난 시간에 회개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회개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 그래서 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왜 이 회개를 하나님께 대한 회개라고 말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이 회개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 이것에 대해서 장시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죠.
오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 회개와 믿음, 이것은 신자가 되는 양날개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진정한 성화의 생활로 나아가는 양 날개가 회개와 믿음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이 회개와 믿음이 이루어지는가는 별개의 문제이고 어쨌든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개를 합쳤을 때에 회심이라고 말하는데 이 회심이 일회적인 회심도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회심의 경험들이 우리에게 반복되는 것도 우리가 회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회개는 알겠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도대체 무엇이냐? 우선 제일먼저 살펴볼 것은 도대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두 번째는 왜 그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인가? 그리고 세 번째는 어떻게 이 믿음을 사람들에게 가르칠수 있을 것인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세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는데 우선 첫째는 도대체 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어느 책에서 어떤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는 가운데 믿음에 대해서 설명 하면서 이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추락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망하는데도 당신이 오늘 비행기를 타는 것은 당신이 이 비행기를 타면 안전하게 도착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칼을 든 이발사에게 비누칠을 잔뜩하고 목을 맡길 수 있는 것도 내 목을 이렇게 맡겨도 이 사람이 칼을 가지고 내 목에서 춤을 추지만 그러나 목을 따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결론이 뭐냐하면 고로 이 세상에서의 생활도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면서 그렇다면 신앙의 세계에는 오죽하겠느냐. 이런식의 논리를 펼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전적으로 방향이 잘못된 접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발사에게 거품을 잔뜩 칠하고 서슬퍼런 칼날이 목에서 춤추는 것을 느끼면서도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아니라. 이 세상에 돈 주고 이발을 할 때에 면도 하려고 비누칠 해놓고 목을 따는 면도사가 거의 없기 때문에 확률적으로 그런 일들이 일어날수는 있지만 실지로 일어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맡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확률의 문제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물론 떨어지는 비행기도 있습니다. 떨어지는 비행기도 있지만 잘 가는 비행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제가 수백번을 비행기를 탔는데 아직 한번도 안 떨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카이 다이버인데 무엇을 사러 갔느냐하면은 낙하산을 사러 갔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싼 것을 달라고, 그러는데 보니까 아무래도 이 제품이 신빙성이 없어요. 그래서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저, 아저씨 이것 만약에 안 펴지면 어떻게 해요?” 그랬더니 그 주인이 하는 말이 대단해요. “ 아이, 요즘 어떤 세상인데 염려를 하세요. 안 펴지면 가지고 오세요. 바꿔드릴께요” 누가 가지고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뭐에요. 확률의 문제입니다.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성경에서 구원 받는 조건으로서, 또는 구원받은 백성들이 유지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전혀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믿음에 대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고 판단을 하고 확률적으로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을 역사하게 하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와서 막 두려워서 떨였죠. 그것은 뭐가 시킨 것입니까? 믿음이 시킨 것입니다. 아주 이상한 논리지만 믿음이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아까 이야기한 그런 종류의 믿음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왜 이정도 물이 넘실대고 갈길이 막히고 뒤에서 저 정도의 군대가 몰려오면 모두 죽는다. 그것이 상황이 보여준 믿음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너희는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라.”
더 재미있는 것은 도단성에서 일어났던 엘리사의 일 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시종 게하시를 보고 기절을 한 것입니다. “주여! 큰일났습니다.” 왜 “아람 군대가 우리를 동그랗게 겹겹이 에워쌓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보니까 저정도 군대들에게 에워쌓이면 이 작은 성은 함락된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런식의 믿음은 믿음이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가져야할 믿음을 향유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기도하고 눈을 뜨게 해주니까 무엇을 본것입니까. 그들이 성을 에워싸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영안을 떠서 보니까 그것보다도 더 많은 하늘의 병거와 불말, 불병거들이 그들을 호위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본다면은 우리들이 아까 이야기하는 확률로서의 그런 믿음은 진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구원받기 위한 조건으로서 혹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계속 유지해야 할 그 믿음을 실재로 갖게 하는데 방해가 되는 적이 오히려 많은데 그 믿음을 연장선상에서 이 신앙세계의 믿음하고 이야기 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넌센스라는 것입니다. 성질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막연히 잘 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 이것을 가르켜서 믿음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정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믿음은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가 믿음이 아닙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혹은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주장하는 논리에서는 믿음을 자기 암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거울 앞에 서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돈이 많다.” 그러면은 부자가 된다는 그런 논리입니다. 그러면은 그런 논리를 신앙의 세계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말이죠. 아주 인본주의적인 것입니다. 그러면은 못생긴 사람이 거울을 보고 “잘났다.” 매일 그러면은 진짜 잘나지는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잘 났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것을 응답이라고 볼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 그리고 자기 암시, 확률, 이런 것들은 모두 믿음이 아닙니다. 그 이외에도 믿음이 아닌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렇지만 대표적인 것이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 하는 확률의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 그리고 자기 암시 이 세가지를 대부분 다 믿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 있지않습니까. 아들이 시험을 보았는데 합격할줄 믿고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뭐 감사헌금을 드린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짜증날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바치는 것이니까 좋은 것인데 그것은 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직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 시험을 보아놓고 붙은줄로 믿고 감사헌금을 드린다는 이얘기는 뭐냐하면 하나님에게 협박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까지 헌금을 냈는데 우리 아들을 떨어뜨리시면 하나님 망신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들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사랑해요.
제가 있던 교회에서 이제 11월 학력고사 볼때쯤 되면은 꼭 고3 아이들을 모아놓고 기도회를 합니다. 왜 그 때 특별히 기도를 해야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기도회를 합니다. 꼭 그것을 목사님이 저에게 인도를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조목 조목 기도 제목을 목사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한 10여년 해온 행사였습니다.
뭐 처음에 출발 할 때에 배탈 안나고 건강한 것부터 시작해서, 교통편부터 시작해서, 컨디션, 그 다음에 첫 번째 딱 떠오르는 생각이 정답을 찍을 것부터 시작을해서, 정말 수험생의 필요성을 모두해서 마지막까지 기도제목을 열 몇가지를 합니다.
그것을 순서적으로 쭉 기도하는데 어느날 제가 한 기도제목을 하나 더 제한했더니 그 후로부터 그 한 기도제목이 첨가되었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아, 그것 참 좋은 기도제목이다.” 그랬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붙든지 떨어지든지 이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더 깊이 믿게되도록.”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믿으면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나 자기 암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제 믿음이 뭐냐? 이 믿음은 뭐냐하면 신앙의 세계에서 이 이야기하는 믿음은 절대 의존적인 마음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믿음이 절대의존적인 마음이다. 그럴 때 그런 절대의존적인 마음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그것은 뭐냐하면 이런 생각을 해보시면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에 대해서 잘 가르쳐주신 최초의 풍부한 교훈이 사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거기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느냐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장 16절을 말씀하시기 전에 그 문맥이 뭐냐하면은 광야에서 모세가 놋뱀을 든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를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는다.
그래서 두 사건을 이렇게 구약에서 일어난 사건을 신약에서 다시 언급을 하면서 구약에 있는 사건과 연결을 지을 때에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 “모형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런식으로 성경을 설명을 하면 이 두 개가 신앙적으로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중요한 얘기 할테니까 들어보세요.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뭐냐하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서 불뱀에게 물립니다. 두가지 설이 있는 그 불뱀은 불처럼 빨간색의 뱀일 것이라는 것과 하나는 물면 불타는 것 같은 그런 통증이 온다. 그래서 불뱀이라고도 하는데 결론은 독입니다. 뱀의 맹독에 의해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취유책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죽어가니까 모세가 안타까워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그래서 나무에 장대에 높이 달아라.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살 것이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병원차가 지나가면 이렇게 쳐다보면 기분나쁘게 뱀이 나옵니다. 그렇죠. 보셨죠. 막대기 같은 것에 뱀이 칭칭 감겨있는 장면 보이지않습니까. 그것이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치료라고 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면서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높이 들리신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이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모형이라는 것은 무슨뜻이냐하면은 구약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이 사건 자체로서 그 사건이 일어난 구약시대의 의미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약에 일어날 어떤 사건을 바라보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더 선명하게 진전이 되어서 구체적인 실체로 나타나는 것이 신약의 사건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구약에 나타난 모형적인 사건은 영화의 장면과 같고 사실 영어나 독일어, 불어, 독일영화 같은 것 보면은 모르지않습니까. 뭐 전혀 동의가 안되시는데 왜 모르냐는 뜻인데 좋습니다. 나만 모른다고 쳐요. 모르는데 그 밑에 자막이 나옵니다. 이 장면은 뭐뭐뭐뭐 하는 장면이다. 그러면 “아, 그거구나,” 그러죠. 그 때에 놋뱀에 물린 그 사건은 외국 영화고 그 밑에 나오는 자막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이 모형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보면 여러분 속에 이런 생각이 들것입니다. “아, 그런식으로 성경을 푸는분들을 분명히 많이 만났는데” 그런 생각이 들죠. 그렇죠. 그런 것을 풀때마다 늘 드는 느낌이 뭐냐하면 굉장히 심오하다.라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조심해야 될 것은 뭐냐하면 그런식으로 성경을 푸는데 아까 같이 이렇게 구약에서 일어나고 신약이 구약의 그 사건을 신약자기 안에 있는 사건과 연결을 지으면서 관계가 있다고 말할 때에는 두 사건을 연결시키면서 해석을 해야지만 이 신약의 의미가 확연하게 들어나고 이 빛을 받으면서 구약의 이 사건이 의미가 풍부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그렇게 짝이된 사건이 아니라. 여기서건 저기서건 한군데서만 일어난 사건인데 그것을 가지고 계속 상상의 날개를 펴면서 풀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교회의 강단을 다 버린 것입니다. 한번 실화를 예를 들께요.
(전도사 1년차 일때인데 제가 있던 교회에 어느 부흥사님이 오셨습니다. 전문적인 부흥사니까 펄펄납니다. 그런데 그 노아 방주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데 뭐 은혜로왔습니다. 그런데 감동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쭉 설교를 하는데 그 교인들의 눈빛을 보니까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주일 예배시간에 40분 설교도 못 견디던 이 위인들이 아주 재미있어서 막 빠져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성경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비둘기를 날려보내는데 감람나무 잎을 물고 옵니다. 비둘기가 날아 갔는데 감람나무 잎을 물고 온 것입니다. 그 설교가 막 절정에 달했을 때 “여러분 이 감람나무 잎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런데 그것을 누가 아느냐고요. 그 심오한 것을. 쉬운 것을 물어봐야 알지. 우리교회 담임 목사님도 눈만 깜박깜박하고 계셨습니다. 그분도 모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는 이야기가 뭐냐하면 비둘기는 성도이고 이 감람나무 잎은 감사헌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었으니까 다행이지, 그 감람나무 잎이 파란색이기 때문에 만원짜리여야 된다. 그랬으면 아마 더 뒤집어졌을 것입니다.)
방식은 똑같은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이 그 감람나무가 헌금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연결시킬수가 없습니다. 하나만 있기 때문입니다. “감람나무가 뭐냐?” 그러면 “그냥 감람나무입니다.” 그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비둘기가 성도라 그러는데 그것이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고요. 이것이 히브리어에서 또 그 비둘기는 요나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고요. 물론 그 비둘기를 가지고 신약을 막 뒤져보면은 또 뭐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억지입니다. 사건을 이쪽에서 풀던지 이렇게 동치될수 있는 사건이 일어나서 해석학적인 연관을 갖던지 할 때에 해석을 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해석을 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냥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더 재미있는 것은 뭐냐하면은 여리고로 내려가는 그 강도만난 사람이 있지않습니까.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그러면서 이제 쭉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벌써 역사가 굉장히 오래된( ? )부터 벌써 있던 일인데 그런데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거의 죽게되었는데 뭐 레위인도 지나가고 사람들 다 지나가는데 사마리아 사람이 와서 그 사람을 매고 주막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그 동전 두잎을 주면서 “이 사람을 내가 돌아올 때까지 봐달라.” 그래서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와서 주리라.”
그런데 막 설교하다 말고 그런데 “이 주막이 뭡니까?” 주막이 무엇입니까? 술파는 집인데 그분은 그것이 아닙니다. 꽤 유명한 분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주막은 교회입니다.” 그 왜 하필이면 교회나 술집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긴 내가 어디 지나가다 보니까 “실로암 달란주점” 문 앞에는 “주일도 영업합니다.” 그런데 그런 주막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거기에서 심오하다. 그랬는데 “동전 두잎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한잎은 구약 한잎은 신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엊그제 인터넷에도 누가 글을 썼는데 뭐 기도의 세계에 대해서 누가 가르치는데 제사장의 기도 또 무슨기도 무슨기도 하면서 기도에는 4단계 5단계 쭉 나누는데 그것은 자기 생각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런 것이 어디있습니까? 자기 느낌을 얘기하는 것이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느낌을 가지고 성경속으로 들어가서 우겨 넣으면서 끄집어 내는 것입니다.
성경에 고물을 입혀서 끄집어 내는 것입니다. 흙덩어리에다가 팥고물을 입혔다고 해서 그것이 떡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식으로 들어가는 해석이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습니다. 뭐가 그렇게 심오하다. 그래서 혹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당신이 십자가에 인자가 높이 들려야 하리라.” 하면서 그것은 아주 의심할여지 없이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십자가 사건과 놋뱀이 들린 사건을 같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무엇과 연관시켰느냐하면 너희들이 인자가 높이 들릴 때에 그 인자를 믿어야한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
그런데 그 믿음이 어떤 것이냐하면 놋뱀 사건이 있었을 때에 다리가 퉁퉁부어서 부기가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쳐다보면서 구원을 얻었을 때에 그것을 바라보는 그 마음이 믿음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이든토져 같은 사람은 믿음을 “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보는 것” 믿음을 “주시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시”는 뭐냐하면 힐끗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온 희망을 걸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시”입니다. 그런 믿음의 주시라는 것입니다.
불뱀에 물려서 이제 치료약도 없이 모두 죽어가는데 쳐다보지 않은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쳐다본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냥 그들이 쳐다보았을 때에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겠느냐고요. “아이, 그것을 쳐다본다고 낫나.” 그리고 이렇게 쳐다보는 이런 것이 아니라. “이제 이 광야에서 죽어가는구나. 이제 나는 아무 희망이 없다.” 그리고 막 맹독이 퍼지면서 심장을 압박하면서 죽어가는 그런 상황인데 유일한 희망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그 믿음이 믿음이 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나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놋뱀을 쳐다본 그 행동 그 자체가 무엇이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적인 마음입니다. 사실 잘 생각해보세요. 뱀에게 물려서 죽을 지경이 되어서 무슨 이상한 약물을 갖다 주면서 이것을 먹으면 낫는다든지, 바르면 낫는다든지 그렇게 하면 논리적으로 말이되지만 지금 뱀에게 물려서 퉁퉁부어서 죽어가는데 눈이 뒤집히는데 “저 장대에 높이 매달린 구리뱀을 보면은 산다.” 그것이 타당성이 있느냐고요. 논리적인 타당성이 없습니다. 그것을 바라볼 때에 그 행위 자체가 자기를 자동적으로 어떻게 구원할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상식적인 인간이면 할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를 그 질병상태에서 고침받을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보증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절대 의존적인 마음, 하나님께 대한 절대 의존적인 마음이었다는 것이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또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확률이나, 자기 암시,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 이런 것들이 아니라. 절대 의존적인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생에 있어서 어느 한 부분에 대해서 거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가 걸린 믿음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믿음이 필요하고 또 가능합니까.
그것은 앞에 나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다루었던 것이 뭐냐하면 인간이 누구인지를 성경을 통해서 정직하게 발견하게 될 때에 그가 깨닫게 되는 바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벌아래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미루어볼 때에 인간은 정죄 되었다는 것, 그리고 어떠한 희망도 없다는 것,
그런데 단 하나 유일하게 그 진노를 피하고 진노를 피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가졌던 그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로 돌아갈수 있는 유일한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셨는데 그것이 무엇인고하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두가지로 설명을 할터인데 구원과 관련시켜서 일회적인 믿음으로 보는 경우에는 이 믿음은 자신은 하나님 앞에 정죄되었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그분만이 자기를 구원할수 있으며 자기는 모든 희망을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행동에 소망을 둔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을 두방향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구원얻는 조건으로서의 믿음을 설명 할 경우에는 자기는 하나님 앞에 정죄 되어서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죄인인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심판받을 상태에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며 다시 살아나셨는데 이제 내가 그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하나님과 사랑을 나눌수 있는 관계로 돌아갈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 못박히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행동을 의지하는 길 밖에 없다.라고 하는 전인적인 믿음. 이것이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 ? ) 인간의 어떤 선행이나. 혹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자기를 수양해서 사는 것이나. 인류를 위해서 박애정신으로 산다거나.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다소나마 인간의 번뇌를 극복하게 할 수는 있지만은 그러나 궁극적으로 진노 아래 있고 하나님의 형벌아래 놓여있는 나의 상태를 궁극적으로는 개선할 길이 없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비유가 좋은 비유같습니다. 지금 생각이 났습니다. 들어보세요. 사형수들이 여럿있습니다. 모년, 몇월, 몇시에 사형을 당하게 되어 있는데 한 사람은 계속 대굴대굴 구르면서 지금 석달째 울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다니. 내가 죽다니. 나 죽으면 우리 엄마는 어떡하나. 우리 아빠는 어떡하나. 우리 애들, 우리 부인은 불쌍해서 어떡하나” 그러면서 대굴대굴 구르면서 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사람은 거의 돌았습니다. 자기가 칼에 목 잘려 죽는 생각을 하면서 벌벌벌 떨면서 자다가 경기를 합니다. 한 사람은 거기에서 오락기구 같은 것을 못 가지고 놀게하니까 밥을 주는 것을 밥을 모아가지고 윷을 만들었습니다. 진짜 그렇게 한다는 군요. 윷도 만들고 공기도 만들고 다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나누어서 윷가락을 만들어서 친구하고 같이 계속 재미있게 노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함으로서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너무 고상합니다. 창문도 없지만 창살을 이렇게 보면서 “죽음아. 내가 오려느냐?” 이러면서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시 한편 쓰고 저녁에 잘 때 시 한편 쓰는 것입니다. 자기네 마음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러나 “죽음아 네가 오려느냐?” 그런다고 해서 “너처럼 이렇게 나한테 초연한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가겠니?” 죽음이 그렇게 말해주지를 않습니다. 모두 같은날 목잘려 죽었습니다. 아주 정확한 비유였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 하면서 막 몸부림을 치든, 아니면 초연하게 살든, 아니면 그것을 잊어볼려고 쾌락에 몰두하든, 오락이나 하면서 재미있게 살든지 그것은 각자 자기가 선택할 문제이지만 그러나 그 어떠한 것으로도 정해진 죽음의 형벌은 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 의존적인 마음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자기 나름대로 평정을 누리면서 이것이 인생의 고통을 이기면서 사는 길이요. 이것이 진노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런 위기를 피하면서 사는 길이라고 말을해도 그것은 모두 잠시 어떤 임박한 죽음에 대한 공포나 이런 것들을 잊거나 소화시키면서 걸어가는 삶의 한정된 방식이지 궁극적으로 형벌아래 있는 인간의 형편을 개선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 십자가를 보면서 깊은 의존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 그래 맞아” 내가 그 동안에 내가 인생에 대해서 느끼는 이 엄청난 공포,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보면서 내가 하나님의 정죄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느꼈지만 어떤 때는 미친 듯이 뒹굴면서 울고 어떤 때는 오락을 하면서 잊어볼려고 하고 어떤 때는 초연한척 하면서 다가오는 죽음을 향해서 시를 한편 쓰기도 했지만 어떤 방식으로 기다리든지 그것은 기다리는 방식일뿐 그 형벌은 피할수 없었는데 그 피할수 있는 길을 단 하나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못박혀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그 구속의 행동의 의미를 알고 그것에 우리의 모든 소망이 있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입니다. 그 사건을 우리보고 반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니 그러니 너도 죽어야 한다." 그것이 아닙니다. “믿는다.”라고 하는 것은 아까 얘기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좋은 일을 하셨구나. 참 괜찮다.“ 그런 어떤 동의가 아니라.
진정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을 토대로 삶과 모든 것들이 다 재편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자, 주식사서 연단받으시는분 많다면서요. 하나님이 주가를 가지고 성도를 성화에 이르도록 연단하십니다. 보세요. 저는 주식투자를 해본적이 없습니다. 한번 딱했는데 뭐 학교에 있을 때 교수로 있을 때 어느날 학교에 갔더니 난리가 났습니다. 김교수 빨리 가서 주민등록 등본 떼어다가 주식 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포철이라고 국민주가 나오는데 30만원어치만 사면은 3년뒤에 150만원이 된다나. 200만원이 된다나. 그것은 당연히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살려면 자기를 사달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순진해서 아, 그거 3년뒤에 150원이 된다는데 열심히 조퇴하고 가서 주민등록증을 떼어서 34만원 주고 사서 3년 뒤에 30만원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구나.” 그러면서 다시는 주식에 손대지 말아야지 그랬습니다.
그런데 건전한 투자야 하나님 앞에 무슨 잘못이 되겠습니까만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그것은 탐욕입니다. 그런데 어쨌든지 그런데 주식하는 사람은 모두 그 바닥까지 내려간 주식이 있는데 내가 주식 전문가인데 누군가가 와서 내게 믿음을 주었는데 저것이 몇일내에 상한가를 치고 지금 5000원 밖에 안가는 주식이 1년 안에 60만원까지 올라간다고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온전히 믿게 된것입니다.
그래 어떤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아, 지금 5000원짜리가 1년뒤에 60만원이 되는구나. 오, 그렇구나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러겠느냐고요. 무엇부터 보는지 아세요. 그냥 통장털고, 그것도 안되면 친구들에게 빌리고, 그것도 안되니까 집 팔고, 그다음에 저당 잡히고, 그다음에 알거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리고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아니 돈을 가지고 4-5% 받으려고 통장에 넣어놓는 사람들을 보면은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너무 불쌍한 것입니다. ”왜 저렇게 사나“ ”지금 투자하면 1년 뒤에 떼돈을 버는데“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불쌍해 보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살수있을까.“ ”참 무지목메한 인간들을 어떻게 해야되나.“ 그러면서 자기하고 아무 상관이 없으면서도 주식투자 하라고 막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런쪽으로 진짜 영혼을 구했으면은 상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같이 망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그게 진정한 믿음입니다. 삶을 제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못박혀 죽으셨구나.” “오, 그랬구나.”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이발소에 들어가서 면도사에게 거품 바르고 칼이 막 춤을 추는대도 ”잘 깍아주겠지 설마 목을따랴. 내가 닭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닌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반드시 삶을 제편하고 가치관을 다시 세우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면은 전적인 의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과 관련된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제 구원과 관련시키지 말고 구원받은 이후에 지속되어야할 믿음은 어떤것일까? 이것은 뭐냐하면 믿음에 기초한 연합을 유지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뜻이냐하면은 잘들어보세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자기는 하나님의 정죄아래 있는 죄인이며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의지하는 것 밖에 아무 희망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입니다. 그 절대적인 믿음을 한순간에 경험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그 믿음이 영적인 세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서 경험됨으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그 믿음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그러지않습니까. ”야, 믿음으로 살아라.“그것은 확률을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아라.“ 그것은 미래의 어떤 희망적인 기대를 갖지. 안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말라는 그런뜻이 아닙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아라.“ 그 얘기는 뭐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을 때에 그분의 구속 행동만이 정죄받은 나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다.“라고 그분을 전폭적으로 의지했던 그 연합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가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대 왜 그것이 도대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냐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는 이미 앞에서 이야기 드렸습니다.만은 정죄받은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유일한 희망이 뭐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행동입니다.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수 있다.라고 하는 절대의존적인 마음. 그것 이외에는 하나님 앞에 정죄받은 그 인간이 그 정죄를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깨뜨려진 그 화해를 복원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다시 복원시키며 살아갈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그 이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잘들어보세요.
이제까지 조국교회가 잘못 가르쳤다라기 보다는 덜 가르쳤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텐데 정확하게 안가르쳤기 때문에 신앙이 아주 뒤틀리게된 아주 중대한 문제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저를 포함해서 여러분들 대부분이 구원받은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명확한 그림이 없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세월을 허송했습니다. 물론 단편적으로는 많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안받았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구원받았으니까 감사하면서 살아라.“ ”예수님이 너 직분 주셨으니까. 충성스럽게 감당해라.“ ”교회 잘 섬겨라.“ ”너 돈도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좀 잘 바치면서 살아라.“ 이런 식으로 단편적인 이야기들은 많이 들었고 또 그것이 어느정도는 사실이지만은 그러나 어떤 것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단편적인 것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단편적으로만 존재할 경우와 단편이 체계를 이루어서 자리를 갖출경우에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구원을 얻을 때에는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강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기전에 우리는 정죄아래 있는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 심판을 피할 수가 없고 그리고 천하에 어떤 이름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신적이 없기 때문에 안된다. 그것을 성경이 분명히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굉장히 강조된 것입니다. 이것은 참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아주 극도고 강조된 것은 아주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대부분 어디에 집중되어 있으냐하면은 정죄의 상태에서 구원을 얻는 상태로 넘어가는 한 수단으로서만 제시가 되는 것입니다. 일단 그렇게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은 이제 이 믿음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오는 믿음을 뭐냐하면은 하나님과의 실재적인 영적인 관계는 매우 부실하고 이 영적인 기초조차 굉장히 허술함에도 불구하고 신앙이라는 이 이름을 가지고 미래에 자기가 이루고 싶은 꿈들에 대해서 투영을 시키면서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동입니다. 인격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데 내가 구원을 얻고보니까 이제는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이제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믿고 나서 이 일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구원받고나니까 의식의 변화가 오는데 ”내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하나님이 막으시면 끝이다.“ 그것은 우리모두 동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뭐냐하면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것을 이루어 주실 것을 굳게 믿는다.”라는 식으로 대입을 시키는 것, 그리고 이렇게 내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도 꼼짝 못하실 것이라는 식의 논리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공공연히 그런 것들에 대한 성경사례가 전파 되면서 제가 죄죽임의 교리를 설교 하면서 먼저 믿은 사람의 잘못된 사고방식이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사례를 보면서 ”진짜 성경의 이름으로 저런 것이 믿음일까?“ 생각했던 사람들이 담대하게 그것을 실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하면은 신앙이 점점 더 비인격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처음 주님을 믿고 자기가 정죄의 상태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구원 받을 때에는 진짜 인격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아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수 있을까.“ ”내가 무엇인데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시나.“ 눈물을 펑펑 흘리고 그 사랑에 마음이 녹는 것입니다. 인격적이지 않습니까.
일은 자기가 저질러 놓고 ”주여! 믿습니다.“ 쌍ㅅ을 세게 발음하면 주님이 밀어주실 수밖에 없으니라고 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인격적인 신앙입니다.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의 욕망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막 가르치는 것은 선동입니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진실하고 인격적인 신앙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번 시간에 정리를 좀하세요.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고. 모든 믿음은 인격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반론을 제기하고 싶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믿었기 때문에 기적을 본 경우, 그리고 그런 무조건적인 믿음에 대해서 굉장히 강조한 것을 많이 볼수 있기 않습니까? (예를들면 무화과 나무가 마른 사건이라든지. 아니면 너희들이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은 산을 명하여 옮기라 할지라도 옮길 것이라. 뭐 그런 믿음이라든지.)
그런데 그것도 말이죠. 그 하나만 보면은 안되고 그 믿바닥에 흐르고 있는 메시지 자체는 뭐냐하면은 일관된 주장입니다. 여러분들이 나가다가 저기에 관악산이 두 개가 서 있는데 저것이 떠서 과천으로 가라고 아무리 믿어보세요. 그것이 되나. 한번 시험해 보세요. 되나. 금강산 갈 것 뭐가 있습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굳게 믿어서 설악산으로 오라 그래서 설악산으로 가면 되지.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 믿음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해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사기가 어디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은 모든 믿음은 하나님의 인격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성품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저 등이 떨어지리라고 믿는다.“ 이것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격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산이 옮겨진다면 내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어떤 일을 위해 역사하실수 있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인격과 행동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우리를 위한 행동과 성품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하는 이유는 뭐냐하면은 일차적으로 사도바울이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면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어떻게 복음을 체험적으로 가르쳤는지를 말하다가 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을 구원얻게 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진리는 그들은 정죄되었다고 하는 것과 그래서 하나님 앞에 돌이켜 회개해야 된다는 것과 그리고 그렇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고 하나님과의 연합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주셨는데 그 유일하신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고 그가 행하신 유일한 구원의 길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돌아가면은 이 얘기입니다. 그런 종류의 믿음이 구원 받을 때만 필요하고 구원받은 이후에는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일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그 빽 하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무슨 일이든지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밀어주실 것이다.”라는 식으로 그런 식으로 미래의 자기의 희망에다가 신앙을 투영시키면서 사는 그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무엇이 있어야 되느냐하면은 두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그것은 뭐냐하면은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은 가질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확신을 주셔서 그래서 우리가 미래의 어떤 꿈들을 꾸게하실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나라의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데 방법자체는 사람들에게 소원을 주심으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목회하기 싫다는 사람에게 이런 교회를 맡기시지 않습니다. 목회자게에 개척교회 할 꿈을 주시니까 교회 깃발을 올리고, 올리니까 예정된 사람들이 오고, 온 사람들이 변화되니까 교회가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으니까 교회에서 섬기고 싶고, 섬기게 되니까 더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기니까.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원을 통해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소원이 그냥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와는 상관이 없이 자신 속에 발산이 되어서 미래에 대한 어떤 적극적인 희망으로 투영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면은 큰일 할 때만 믿음이 발동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을 새로 시작할 때나, 아니면은 무슨 거창한 일을 할 때에만 믿음이 발동되는 사람들이 있지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바로 그런 비인격적인 신앙의 신뢰입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은 미래에 무엇을 하고 살든지, 어떤 일들을 하던지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인격적인 교감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들을 우리의 마음 속에 소원을 주셔서 그래서 그 소원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삶이어야합니다.
그런 속에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무시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비인격적인 자신의 어떤 비젼이나 이런 것들을 선동하고 이런 것들에 대해서 미래에 희망적인 생각을 암시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을 쓸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뭐냐하면은 인격적인 연합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십자가의 피로 아직 구원 하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때에는 전망적인 믿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은 나는 지금 정죄 아래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내 코 앞에 닥쳤는데 나는 이제 희망이 없다. 나의 모든 희망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나를 대속하기 위해서 길을 열어놓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 행동에 있다.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그 일에 나의 전생애의 소망이 있다. 그리고 주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내가 그분을 믿으면 그분이 나를 구속하시리라고 확신한다. 이것은 전망적인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원받고 나면은 그다음에 필요한 것은 뭐냐하면은 회고적인 신앙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사건을 통해서 정죄받은 상태에서 내가 구원을 얻게 된 그 사건을 끊임없이 회고하면서 그 때에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회개의 마음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인 의뢰의 그 정신적인 영적인 연합을 그리스도 예수와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사경회 때 이야기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의 반복성과 현재적 경험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구원받은 나의 전삶과 가치 판단에 영향을 주는 요소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 안에서 산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큰 사건 터뜨리고 주님이 뒷감당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여러분들의 똘마니입니까. 사건은 자기가 터뜨리고 뒷일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영혼들에게 가르쳐야 할 가장 큰 중요한 진리, 우리가 그것을 체험해야할 가장 중요한 진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바로 그런식으로 그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경험하고 그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반복적인 믿음의 경험들을 배웁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었지만은 그런 연합 속에서 반복적인 경험 속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 속에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절대 의존적인 마음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이루셨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행하셨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나를 위해 행하셨다. 그래서 나의 모든 희망은 그분이 나를 위해 행하신 그 일에 있다. 그것을 통해서 그분이 보내신 하나님의 성품을 내가 경험한다.” 그런 속에서 연합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신 그 일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감격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더 큰 감격이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영혼들에게 가르쳐야할 가장 중요한 것인데
마지막으로 그것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되느냐 하면은 그 믿음의 세계를 우리들이 경험하면서 살아 갈 때에 그것을 잘 가르칠수 있는 것입니다. 즉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구원을 가르친다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통해서 구원의 실재 속에서 살아가는 비밀이 무엇인지. 그 믿음의 실재 세계에 대한 경험이 없거나 말라버린 사람이 믿음에 대해서 가르친다는 것은 아주 건조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맥락에서 이 믿음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러한 두가지 믿음의 세계.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절대 의존의 마음, 그리고 구원받은 이후에 그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고 그분과 교제를 나누며 그 구속행동의 반복적인 경험 속에서 살아간 풍부한 체험의 세계가 있었기 때문에 믿음에 대해서 증거한 것입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믿지않는 사람들에게만 이 믿음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이 믿음을 가르쳐서 감동을 주고 삶의 변화를 줄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가르침을 받고 가르치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9.복음전도의 모범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개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2-24)
사실 오늘 읽은 이 22에서 24절의 이 말씀은 에베소 교회에 온 장로들에게 과거에 일어난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마지막 사도바울의 이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볼때에는 마지막이 아니지만 하여튼 여기에 나온 22서부터 24절 까지의 이 메시지는 과거를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기에게 일어날 일들을 전망하면서 말하고 있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사실 굳이 밀레도에서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청해서 오게 하여 유언적인 설교를 들려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사도는 여기에서 말합니다. “자신은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 "메임을 받았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도 어쩔수가 없어서. 자기도 어쩔수 없는 어떤 저항할수 없는 힘에 의해서 내가 이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간다. 이 얘기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가르치는 자.“ 혹은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서의 삶에 있어서 사도바울의 어떤 소명의 핵심부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주입된 강제력에 의해서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살 수밖에 없는 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성령이 증거하시기를 많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 그래서 순교의 위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정직하게 증거해 주시지만 그러나 내가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가르치는 자로서의 삶에 대해서 한가지 투철하게 배울수 있는 것이 있다면 복음전파의 열정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이죠.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큰 감화와 은혜를 입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 말씀에 대한 왕성한 욕구가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서 책도 읽고, 설교도 듣고, 예배 시간마다 빠지지 않고 참여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욕구가 왕성 할 때에는 사실 뭐 주일날 안나오면은 죄가 된다든지 뭐 수요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은 벌받을 것이다.라는 그런 생각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은혜가 충만하고 진리에 대한 갈망을 가질 때에는 무슨 주일날 예배 안 나오면은 벌 받고, 무슨 축복을 못받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읽어야 되느냐? 안 읽어야 되느냐? 안읽으면은 그것이 죄가 아니냐? 그런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증이 생기니까 그 말씀에 은혜를 받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또 예배에 참석해서 설교를 듣고 누가 성경을 가르쳐 준다. 그러면 열심히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다 보면은 이제 하나님을 아는 지식들이 쌓여갑니다. 은혜의 체험도 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도 이제 더해져 가면서 그러면서 한 사람의 영혼속에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 줄만한 것들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또 하나님께서 어김없이 기회를 주십니다. 교사로 섬길 기회를 주신다거나, 또 구역장으로 섬길 기회를 주신다든지, 하나님께서 하여튼 무엇인가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이제 가르치는 자가 되고나면 또 복음반 교사가 되거나. 뭐 어쨌든 가르치는 자가 됩니다. 그러면 정말 정말 힘이 납니다. 힘이 나서 그래서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날수록 열심히 영혼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더 배워서 가르쳐 주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교사 처음 했을 때 하여튼 그렇게 신날수가 없었습니다. 교회에 가는 것이 너무너무 신이났습니다. 우선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선생님 소리도 들어보고 말이죠. 그리고 예전에는 목사님이 부르실 때 ”어이, 어이“ 부르셨는데 선생이 되고 나니까. ”김선생. 박선생“ 깍듯이 불러줍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도 나 총각 때 이야기입니다만은 그러니까 너무 좋습니다. 대접을 받는 것만 좋은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고 할 때 너무 좋은 것입니다. 또 가르쳐 주었을 때 그 신기하고 나 같은 사람이 말도 되지 않은 말도 가르쳐 주었는데 그 가르침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그 영혼을 변화시켜 주실 때 기쁨을 여러분들 이해할수 있습니까?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때 신기합니다. 야, 진짜 어떻게 신기한지. 나같은 인간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초등학교 다닐 때 연을 만듭니다. 연을 만드는데 그 연을 만드는 것이 사실 힘듭니다. 그런데 내가 만든 연이 공중에 떳을 때. 그 때 세상이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어떻게 내가 만든 연이 뜰수가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하늘로 올라갈 때 야, 이것은 신기합니다. 이것은 아마 비행기를 만들어 놓은 사람도 느낄수 없는 감격을 초등학교 때 느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야,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어떻게 기적적으로 믿었는데 내가 가르치는데 저 영혼들이 변화된다. 내가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칠 때인데 이제 은혜 받고 나서 얼마 안되었을 때였습니다. 애들이 5-6학년이 었습니다. 그런데 여자 애들은 어렸을 때부터 여자 애들이 은혜를 잘 받아들이더군요. 그런데 남자들은 벌써 그 때부터 강팍해서 말이죠. 그래서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먼저 따먹어서 이제 심리적인 속죄 의식이 남자보다 뛰어난 모양입니다. 은혜를 잘 받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예배는 물론이고 공과 공부시간이 되면은 어떻게 부산을 떠는지 도대체 성질이 나서 가르칠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붙잡아 놓고 야단도 치고 그랬는데 그렇게 공과공부를 끝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는 말이죠. 어떻게 눈물이 나는지. 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되는데 저 듣지 않습니다. 잘 가르치는 것은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은 어떻게 잘 가르칠수 있겠는데 듣지 않는 것은 내 노력으로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고 지나왔는데 어느날인가 말이죠. 이상하게 아이들을 7-8명 모아놓고 그리고 여기 서서 성경을 가르치는데 그 때는 애들을 가르치는 학습교제가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이것 들고 공과책 하나 노트에다 메모해서 와가지고 이제 설교처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7-8명을 놓고 그 생애 최초의 경험이었습니다. 잊어버리지도 않습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만난 사람 이야기 였습니다. 그것을 쭉 가르치는데 애들이 그 공과공부를 내가 신학교도 안나오고 총각이었는데 그리고 또 교회당이 이렇게 조용합니까. 손바닥만한 교회당에서 빠글빠글해서 우리는 저 구석으로 가서 거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 만난 이야기를 해주면서 그 공과를 노트에다 써가지고 온 것을 그저 어눌하게 보면서 그러면서 가르치는데 아니 이 아이들이 뭐가 잘못되었는지 그 총각 선생의 공과 이야기를 들으면서 애들이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최초의 경험이었습니다. 그 때에 이것이 너무 신기했습니다. 내가 설교를 하면서도 그런 감격을 벼로 맛보지를 못했습니다. 하여튼 신기합니다. 그 때 제가 아주 굉장히 충격을 받은 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나는 내 생각에는 내가 선생이지만 나는 그저 교회학교를 돕는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나같은 인간을 사용하셔서도 직접 그 영혼을 변화시켜주는 그러한 도구가 되게끔 사용하실수도 있구나. 그것을 보면서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그 우는애 중에 하나는 입을 열면 그 아이의 숨소리 빼놓고 모두 욕인 아이가 한명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무엇을 주어서 좋을 때에도 욕을 하면서 좋다는 것을 표현하는 아이입니다. 내가 여기에서 신선한 강대상에서 내가 그것을 다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너무 좋아도 뭐라고 뭐라고 욕을 한후에 ”좋아죽겠네.“ 그런데 그애다 완전히 폭탄 맞은 애처럼 그렇게 찌그러진 상태에서 막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느냐면 ”야, 하나님이 이렇게 사용하실수도 있구나“ 그러니까 저는 말이죠. 여러분들의 성경공부 시간이 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이 차이 때문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차이난다고 모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사람이 얼마나 깊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에 감동된 가운데 가르치느냐에 따라서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런것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좋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용하신다. 그런데 이것이 계속 되었으면 좋겠는데 어느 한 순간 가면은 그런 경험을 다 가지고 있는 가르치는 사람들인데도 교사가 구역장들인데도 어느정도 수명이 다하고 나면은 그 다음에는 아주 차가워집니다. 그러니까 규칙을 따라서 이미 내용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가르치고, 그다음에 봉사하고 이렇게 기능하는 일은 훌륭하게 하는데 무엇인가 초창기 때에 지금보다 성경을 아는 지식도 떨어지고 가그치는 기교도 훨씬 미숙하던 때에 있었던 그 썸씽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 무엇인가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기름치지 않은 기계 돌아가듯이 그렇게 건조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사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역장에게만 일어나는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에 봉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제 4월 20일날 안수집사하고 권사님들이 임직하는데 그것입니다. 처음에 신앙생활 할 때에 그런것들이 그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충성이 입증됩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투표를 해서 교회의 일꾼으로 세웁니다. 안수집사로도 세우고 혹은 권사로, 혹은 장로로 세웁니다. 그런데 세우고 나서 시간이 흘러가면서 처음 신앙생활 할 때 가지고 있었던 그 무엇인가 뜨거움, 형식은 옛날보다 오히려 더 세련되었고 그리고 더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데 있어서 더 효율적인 사람이 되었는데 처음 주님을 믿고 변화받을 때 있었던 그 무엇인가가 사라져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가워집니다. 그리고 사람은 영적이던 사람이 아주 육적인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요즘은 조금 잠잠하는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교회의 뜨거운 이슈가 뭐냐하면 ”장로를 임기제로 해야 한다.“ 그러니까 장로들은 들고 일어나서 그럴려면 ”목사도 임기해라.“ ”너희나 나나 마찬가지인데 임기해라.“ 이렇게 해서 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전부다 쓸데없는 논의입니다. 중요한 것은 몇 년을 하느냐. 안하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왜 그러면은 그렇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을 때에 몇 년동안은 그렇게 무엇인가 가슴속에 무엇인가 불붙는 것이 있고 그렇게 해서 성도들에게 인정을 받아서 장로가 되고 뭐가 되었는데 왜 그러면 몇 년 지나고나면 목회자나 교인들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느냐. 그 원인을 찾아서 근본적인 처방을 내려야지.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해서는 알될 사람은 1년도 해서는 안됩니다. 해도 될 사람은 50년을 해도 문제가 안되는 것입니다. 전혀 동의를 한하시는 표정인데. 그런데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사실 그 정체가 무엇일까요? 사실 영적인 침체라고만 말하기에는 기간이 너무 길고 그리고 또 타락이라고 말하기에는 신앙생활의 기본이 흐트러지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뭐냐하면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구체적인 권한을 가지고 교회를 운영하는 일을 돕는 사람들이 영혼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면은 안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은 여기에서 영혼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가슴이 사라지고 나면은 차가운 하나의 경영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이 교회의 일꾼들은 그것이 교사일수도 있고 구역장일수도 있고 혹은 복음반 교사일수도 있고 혹은 전도자 일수도 있습니다. 무엇일수도 있고 또 어느 한두 사람을 위해서 섬기는 사람일수도 있는데 하여튼 어떤 상황에서 섬기든지간에 그것은 상황의 문제지만은 근본적으로 그 사람들 마음속에 계속해서 불붙고 있어야 할것이 뭐냐하면 영혼에 대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러면 처음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아서 말씀을 가르치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을 때에는 불붙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불붙는 그런 마음들이 사라지고 영혼에 대한 진실하고 간절한 사랑들이 사라진 가운데 말하자면 가르치는 자의 직무 자체가 다 딱딱하게 굳어진 하나의 기능으로 변하는 것입지다. 그 때에 사라지는 것이 뭐냐하면 영혼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가르치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교사의 삶과, 가르치는 자로서의 삶과, 전하는 자로서의 삶이 합일이 되어야합니다.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제가 교사 리바이얼 이라는 책에서 이야기 할 때 ”모든 교사는 교사가 되기 이전에 먼저 전도작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만약에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단지 가르치기만 할뿐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이 될 때에는 영혼에 대한 사랑이 급속히 식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구역장이나, 교사나, 복음반 교사나, 이런 모든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제도속에서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고 할지라도 신앙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말하자면은 하나님의 말씀인 이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사는 전도자로서의 삶이 신앙생활속에 자연스럽게 한 부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그 사람 마음속에 불붙는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합니다. 전도하는 교사와 전도하지 않는 교사의 중요한 차이점은 뭐냐하면 전도하는 교사는 자기가 가르치는 영혼들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뜻이냐하면은 잘 가르쳐 주는데 가르침을 받기 싫어하고 뒤처지는 사람들을 그냥 아주 가볍게 출석부 작대기 그어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한영혼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 살다가 교회에 전도 되어 와서 1년 2년 교회에 다니는 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하는 것을 자신의 전도의 경험이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놓아줄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서 새롭게 전도해 오는 사람은 1-2년 다니다가 다시 그만 두겠다. 그러고 교회를 떠나겠다고 하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들만 지금 밖에서 우리의 전도를 기다리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속썩이는 사람들 다 내보내버리고 회사에 속썩이는 사원들 내보내버리고 신규 공체하듯이 다 털어버리고 그리고 차라리 밖에 나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전도해서 교회에 데리고 오면되죠. 그런데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지않고 세상에 있을 때에는 한때 복음을 간절히 받아들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1년 2년 지나고 나니까 이제는 마음에 감동이 식어지면서 하나님을 떠나고 싶어서 이제는 교회에 자꾸 안나오고 결석하고 그리고 출석가지고 속썩이고 만나기만 하면은 뭐 떠나야 되겠다는 이야기 하고 나 잘라달라는 이야기 하고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 전도하지 않고 밖에 있는 사람들도 똑 같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데려다가 1년 2년 신앙생활 할 때까지 그 선생이나 교역자의 마음에는 사실 수많은 눈물과 피가 흐른 것입니다. 피묻지 않은 교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들간에는 ”난 혼자서 믿었습니다.“ 그런데 혼자 믿은 것 같아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는것입니다. 전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압니다. 그리고 그 일이 얼마나 눈물나는 일인지도 알고 그리고 그렇게 해서 전도받은 영혼들이 양육되어서 한 사람의 신자가 되는 것이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모든 교사들은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사람은 모릅니다. 그것을 모릅니다. 교회에 발을 끓고 신앙을 다 버린 사람을 찾아 가서 그를 위해 중보기도 하고 그를 위해 눈물흘리고 그를 위해 설득하고 그를 교훈하고 해서 그에게 감동과 감화를 주어서 다시 신앙생활 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심방을 통해서 경험해본 사람들은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영혼 하나가 교회에 나오지 않을 때 이것이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교를 인하여 당한 시험들을 참고 주를 섬긴것과 그리고 유익한 것은 공중 앞에서나 개인 앞에서나 꺼림이 없이 전하고 곧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헌신적인 인생을 살면서 영혼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고 집념을 가지고 그 영혼들을 섬길수 있었던 이유는 뭐냐하면 사도바울이 한편으로서 살았던 전도자적인 삶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단순한 목회자가 아니라. 선교사 이면서 목회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의 현장에서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증거하고 곤고하고 연약한 자들을 심방하고 그 영혼들을 돌보는 영혼을 위해서 섬기는 실천적인 전도자로서의 삶의 현장이 있었기 때문에 그 영혼들에 대한 포기할수 없는 열정을 계속 유지할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재로 저는 전도사 시절에 교사들을 데리고 심방을 하면서 교사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여러차례 경험을 했습니다. 교사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목양을 하는 저 자신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전도를 하고 영혼들의 곤고하고 여러운 사정을 파악하고 그들을 찾아 나설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다시한번 영혼에 대한 사랑과,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 영혼들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는가 하는 인식들이 분명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전도자적인 생활이 가르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항상 가르치는 사역과 함께 동반되어야 할 삶의 일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있고, 영혼을 가르치는 것에 대한 사명도 받고 그 영혼들을 섬기고 그렇게 하면서 부름을 받아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 나가다가 어느 한 순간에 깊이 침체에 빠지고 그리고 더 이상 내가 영혼들에게 가르칠 재료들을 남았지만 그 가르침들이 처음의 가르침과 같이 생기를 띄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에 그 때에 다시 한번 그렇게 가르치는 교사들이나, 구역장, 복음반 선생, 이런 모든 가르치는 사람속에 회복되어야 할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전도의 열정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의 곤고한 사정을 헤아리면서 직접 찾아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심방을 정의하기를 심방이 제대로된 목양적인 심방일 경우에는 심방을 엄밀하게 말하면 전도에 가깝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구원 못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예수 믿게 만드는 것만 전도가 아니라. 신앙을 거의 포기할 상태에 놓여 있는 사실상 신앙을 버린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워서 하나님 믿게 만드는 것도 아주 훌륭한 전도입니다. 전도의 결국 마지막 목표는 그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라. 그 영혼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 까지가 전도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날에 믿음의 선배들이 전도 이야기를 할 때에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지 않았습니까. 집사가 전도하면 집사 될 때까지 끝까지 전도해라. 그 사람이 집사될 때까지 그 사람을 붙들어 줘라. 장로인 네가 전도했으면 그 사람이 너와 같이 장로될 때까지 책임을 져라. 네가 교사면은 네가 전도한 사람이 교사가 될 때까지 네가 책임을 져라.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지 않았습니까. 투박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뭐냐하면 단순히 전도라고 하는 것은 한 영혼을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해 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영혼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 갈수 있도록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것까지 포함해서 우리는 그것을 한 사람의 진정한 복음화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실천적인 삶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급속하게 식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합니다. 정말 우리들이 말이죠.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나, 구역장, 복음반 교사, 무엇으로 부름을 받았든지 간에 우리가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 전도자로서의 열정을 계속유지하고 있을 때에 우리들이 비로소 훌륭한 교사가 될수 있는 것입니다. 보세요. 우선 그것은 두가지 방면에서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데 우선 첫째는 뭐냐하면 실재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나, 구역장이나, 이런 사람들이 열심히 전도할 때에 그 때에 그렇게 영혼들에게 전도하고 그리고 복음을 전하면 자기가 섬기고 있는 그 위치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전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사역에 있어서 큰 유익을 얻을수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열명을 모아놓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 낫겠는냐. 단 5명 이라도 모아놓고 잘 가르쳐서 변화받은 신자가 되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당연히 후자에 찬성표를 던져야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 가르치는 교사나 혹은 구역장, 혹은 복음반 교사가 맡아 있는 영혼은 그 사람이 어떤 마음과 사명감을 가지고 가르치느냐에 따가서 각기 따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지. 쉽게 이야기하면 10명을 놓고는 한 사람에게도 신앙적인 영향을 끼칠수 없었던 사람에게 두명을 준다고 해서 펑펑 우는 감동을 끼칠수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입니다. 똑같이 영혼들에게 영향을 미칠수 있다면 그러면 열명을 가르치는 것 보다는 5명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 훨씬더 많은 목양의 혜택을 영혼들에게 줄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구역도 마찬가지고 주일 학교도 마찬가지고 중,고등부도 마찬가지고 적정선을 아이들이 넘으면 빨리 교사를 물색하도록 당부합니다. 왜그러느냐면 한 사람이 돌보는 능력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충분히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거꾸로가 저절로 성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영향력,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혜,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 그 신앙의 인격, 이 모든 것들의 총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세요.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가장 훌륭한 열매는 무엇이냐하면 가르치는 영혼들이 잘 자라고 많은 영혼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좋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르치는 사람에게 주신 최대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있어야 가르치지. 저는 아직 열린 교회를 하면서는 그런 경우를 보지 못하였는데 예전에 교회를 섬기면서 답답한 것이 뭐냐하면 유년주일학교를 하는데 년말에 가면은 한반은 없애야합니다. 선생밖에는 남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할수 없이 한반이 없어지면서 두반이 합쳐집니다. 갈라질 때에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갈라졌는데 1년이 지난 다음에 한반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출석에 남아있는데 다 안나오는 애들입니다. 그래서 할수 없이 두 번이 합쳐집니다. 구역도 합쳐집니다. 심할 때는 3개의 구역이 합쳐져서 다시 하나의 구역으로 됩니다. 그렇죠. 그가 어떤식으로 사역을 하였던지간에 마지막에 그렇게 자기에게 맡겨진 클라스와 자기에게 맡겨진 구역이 사람들이 거의 모두 사라지고 두세 구역을 합쳐서 한 구역으로 만들어 주는 상황이 될 때에 우리는 그들의 사역을 ”성공적이었다.“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고도 성공적인 사역이라고 말할수 있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희기하고 일반적으로는 우리는 그렇게 말할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만 잔득 모아가지고 다시 3-4개 쪼개졌다고 해서 그 구역이 성공한 구역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양과 질이 모두 함께 하나님 앞에 보기에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를 하는 교사나, 구역장, 복음반 교사나. 이런 사람들은 늘 자기가 가르칠 영혼들을 자기 스스로 공급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능력 주셔서 전도하지만 자기가 스스로 공급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열매를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수고한대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각오를 하고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텐데 맡아서 아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은 전도지를 들고 나서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할려고 애를쓰면서 ”내게 복음을 듣고 내게 영혼을 붙여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전도자의 마음을 가지고 교사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열매를 많이 맺을수 있겠습니까? 아니면은 ”나는 오는대로 가르칠뿐이다.“라고 마음을 먹고 ”오는 사람 막지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그런 사람들이 열매를 거둘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가르치는 교사나, 구역장 이런 사람들이 충성되는 전도자로서의 열정적인 헌신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사람임을 입증할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기억을 해야합니다. 정말 그런 면에서 복음을 전도자로서의 삶을 함께 가지고 있는 가르치는 교사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자기의 사역속에서 맺을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큰 유익은 뭐냐하면 전도를 해서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해도 자기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자기가 믿고 있는 이 복음에 대한 가치와 감격들을 새롭게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는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정말 새로워집니다. 우리는 생각보다도 쉬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도 식어지기 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진공 상태에 있는 마음이 아니라. 수시로 공격을 받고 위협을 받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격을 받고 위협을 받는 그 마음이 언제든지 쉽게 도전을 받을수 있고 언제든지 쉽게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영혼을 향한 간절한 열망, 이런 것들을 언제든지 빼앗길수 있는 그런 조건속에 살고있습니다. 그 때에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교사들은, 가르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재충전을 받습니다. 그래서 내가 믿고 있는 이 복음에 대한 감격, 내가 믿고 있는 이 신앙에 대한 깊은 감격, 내가 믿고 있는 이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확신들을 점점 스스로 강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인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영혼을 향한 진실한 기도가 언제 가장 잘 나옵니까? 복음을 전하고 나서 수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받아들인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영혼들을 위한 기도가 절로 나오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게 믿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가 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전도하면서 비로소 ”목양 받으면서 살아가는 이 영혼들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가르치는 자로서의 사도바울이 보여주는 삶이었습니다. 그런 삶이 가르치는 여러분들의 삶속에서 계속 반복되어야 할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잘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또 심지어는 그 위에 영적인 변화를 통해서 오랫동안 하나님 없이 살아오던 사실상의 분신자와 다름없는 삶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이켜서는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가만히 생각해보면은 지금 우리들이 그렇게 구원받고 변화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데 아직까지도 그런 은혜로 들어오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아직까지도 옳게 전해주는 사람이 없고 옳게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굉장히 커다란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영혼을 가르치고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더말할 나위 없거니와 비록 그렇지 않은 처지에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늘 꺼지지 말아야 할 것은 영혼에 대한 관심입니다. 믿지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또 정말 변화받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주님을 믿고 진실한 신자로 변화되고 구원 얻은 자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고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그 영혼들을 바라보고 그 영혼들에게 쉬지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변화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여태까지는 교리반을 하면서도 그저 열심히 레포트 쓰고 출석하면은 점수를 주고 교리반을 졸업을 시켜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기서부터는 그렇게 합니다. 매일 전도하게 합니다. 책도 더 두꺼운 것으로 업그래이드 했습니다. 기독교 신학개론으로 업그래이드했습니다. 그리고 쉽게 이야기하면은 이런 교육이 제가 깊이 반성을 한것입니다. 이런식으로 해서 교리만 열심히 가르쳐주고 그리고 이제 그 사람들이 모두는 아니지만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이 교사도 되고, 구역장도 되고, 복음반 교사도 되는데 그렇게 하고 가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말하자면은 하나님의 말씀인 교리를 많이 배워서 영혼들에게 가르쳐 줄수는 있을지 모르지만은 말하자면은 ”전도자로서의 삶을 심어주는데 있어서는 성공적이 아니었다.“ 라고 하는 반성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여튼 점점 까다로워지니까. 사실 어떻게 보면 힘들기는 한데 그래도 그렇게 훈련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영혼들에게 간절히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생애를 잃지말아야합니다. 그것이 무슨 날이 있거나 무슨 행사가 있어서 우르르 나와서 전도지를 돌리는 그것도 소중합니다. 왜 다음주부터 해야되니까.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러면 사람들이 나오겠습니까. 그것도 중요합니다. 집중적으로 누군가가 많이 전단지를 돌리고 그리고 예수를 믿게끔 그렇게 만들어야합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것과 함께 강조되어야 할 것은 뭐냐하면 무슨 행사를 하고 동원을 해서 몇월 몇째주에 전도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삶 자체가 전도할 기회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러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 비싼돈 들여서 전단지 말들고 그러는 것 교회 홍보할려고 그러는 것 아닙니다. 교회를 홍보해서 무엇하겠습니까. 홍보가 아니라. 그렇게라도 어떻게 몇만장이라도 찍어서 사람들에게 돌리면 그것을 보고 그래도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한번에 30-40명됩니다. 많으면 5-60명되고. 또 더 많으면 몇백명도 됩니다. 그렇게 해서 여기에 와서 한번이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정말 복음을 듣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을수 있는 기회를 사람들에게 주고 싶어서 그 많은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아주 굉장한 것입니다. 대구에 내려갔을 때 인쇄업을 하는 어떤분이 이야기를 하는데 전체적으로 나와있는 통계가 10만부의 전도 전단지를 뿌리면 1명이 등록하는 것으로 통계가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10만부 믿어지십니까. 아까 보여드린 빨간 전단지정도 10만부를 인쇄할려면은 제생각에 약 450만원 정도 들어갑니다. 그것을 뿌리면 1명이 등록한다는 것이 한국의 현재 통계라는 것입니다. 인쇄업자가 이야기 하는 것이니까 얼마나 정확하겠습니까. 그래도 그런 것을 따지면 그렇게 몇만장을 돌렸을 때에 몇10명 나오는 그것도 굉장히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그 일도 누가 해야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사람들에게 그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해서 믿든지 안믿든지 그 결과는 하나님께 의탁하고 충만한 성령의 은혜안에서 무엇인가 그들에게 말하지 않을수 없는 그 복음의 진실을 말하는 자세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복음을 듣고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외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이 고백했듯이 하나님께 대하여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서 굳게 믿는 것 그분을 진실로 믿는 것, 그래서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을 믿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살던 사람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 이외에 무슨 희망이 또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칼빈이 고백했듯이 천사들에게도 맡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이 직접도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먼저 믿은 우리들을 통해서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게끔 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성장에 대한 논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성장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저의 논지는 이것입니다. 성장이라는 말의 사용이 가능하도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목표는 될수 없고 결과여야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하면 여기에서 참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에 대한 진실한 사람으로 새 사람을 찾음으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결과가 교회의 성장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들은 교회의 목표를 성장으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는 없습니다만은 저와함께 7년동안을 이 교회에서 생활을 해오시면서 여러분 금년의 표어라고 하는 것을 들어보신적 있습니까? 금년의 교회 성장의 목표에 대해서 들어보신적 있습니까.? 다 바보같은 생각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고쳐지는 변화의 힘이 없는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재앙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그들에게 참된변화 받을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진정하고 참된 변화가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영혼들을 보내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은혜받고 하나님 앞에 변화된 성도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음식점에 들어가서 국수 한 그릇만 맛있게 먹고와도 친구, 이웃, 가족들을 데리고 가서 먹이고 싶어서 어쩔줄을 모르는데 옛날에 저의 친구 하나는 ”자장면을 정말 맛있게 하는 곳이 있다.“ 그러면서 먹으러 가자고 의정부까지 끌고 갔습니다. 가다가 나는 ”안간다“고 ”내가 무슨 자장면을 먹으러 의정부까지 가느나고 바쁜데“ 그래도 한번 가봐야지 후회를 안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후회했습니다. 음식 한그릇을 맛있게 먹어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서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될지를 깨닫는 자신의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그들이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리고 무엇인가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않겠습니까.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은 나의 영혼이 변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데 그렇게 은혜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전도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워낙 강력하게 역사하면 그렇게 될수도 있겠지만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보면은 우리 안에는 오랫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살지않은 익숙해진 생활이 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함으로서 사람들에게 티를 내고 튀고 그리고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한다든지 박해를 받는다든지 아니면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찍힌다든지 이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훈련도 필요하고 또한 동시에 자극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금 자극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여러해 전에 전도에 대해서 ”우리의 소위가 옳지 않도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면서 은혜받은 사람이 복음을 전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아주 큰 은혜가 넘쳤습니다. 성도들이 많이 눈물을 흐렸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주에 9명 전도해 왔습니다. 그 때는 그것이 굉장히 큰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모임의 숫자가 작으니까. 그것이 결국은 언제든지 할수 있는 일입니다. 언제든지 할수 있는 일이었는데 그리고 마땅히 해야될 일이었는데 가슴이 뜨거워진 것과 뜨거워지지 않는 것 사이에 그런 놀라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가슴이 뜨거우지고 ”내가 받은 이 은혜가 얼마나 큰가. 그리고 이 큰 은혜를 받은 내가 이 은혜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이런 은혜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죽은채고 살아가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내가 이 복음을 전해서 그들을 주님을 믿게 만들지 아니하는 것은 내가 소위가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는 분명한 인식이 없이 사니까. 매일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사람들이 와서 예배 드리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서는 안된다.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성장에 목표를 삼는 것은 잘못되었지만 깊이 우려하는 바는 뭐냐하면 성장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일어나면서 동시에 전도를 할려고 하는 모든 노력 자체가 마치 사악한 성장의 욕구인 것 처럼 오해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마음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교인들을 전도하러 보낼때에 ”하나만 데려오면 헌금이 얼마인데“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은 정말 교회가 성도들을 삶의 현장으로 파송하고 전도하도록 전도자의 삶을 가르치면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는지 그것은 하나님만이 증인이십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성장에 대한 논리와 성장에 대한 열망은 비판받아야 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전도하면서 사는 삶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지 간에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 되어야할 섬김이고 열정입니다. 그래서 그 기류가 아주 미묘합니다. 그래서 이 전도하는 교회들을 아주 상당히 곱게 안봅니다. 전도하지 않고 점잖게 앉아있는 교회들을 성장에 대한 헛된 욕망이 없고, 그리고 신사적인 교회라고 생각을하고 또 열심히 전도하도록 성도들을 동류해서 복음을 전하고 하는 이것을 모두 성장을 위한 교회의 욕망이 표출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는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있을수 있다고 해서 우리들이 전도에 대한 강조점을 포기하고 그리고 전도의 사람으로 우리가 자극되어서 세상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시는 그 세상 끝까지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된 삶을 포기한다.라고 하는 것은 애를 목욕을 시켜놓고 물이 더러우니까 애까지 함께 수체구멍에다 버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50년 60년70년대에 이렇게 이어왔던 조국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많은 것을 비판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은 6-70년대에 그 교회의 성장일변도에 말하자면 이 근대화의 욕구에 맞물린 교회의 경영방식들이 오늘날 이렇게 이 세상을 향해서 무기력한 교회의 모습을 낳는 중대한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그렇게 비판하면서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교회가 그들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것은 문제가 되었지만은 그러나 50년대, 60년대, 70년대. 그 전후로는 일제시대를 포함해서 하나님 만나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나의 동포를 그리스도께 인도해야 되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비난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덕에 예수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 하는 순간에도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릅니다. 60-70년대에 있었던 근대화와 맞물린 그런 성장 위주의 교회의 운영방식들이 문제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말아야 될 것은 그들이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이 내가 전파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그들을 예수 믿게 만들어야 된다. 라고 하는 그 열망은 비판받을 것이 없습니다. 나는 오늘도 생각합니다. 오늘도 제가 초등학교 때 길거리를 지나가고 시장바닥을 지나면서 벽돌 몇장 올려놓고 까만 치마저고리 입고 눈물을 흘리면서 땀을 뻘뻘흘리면서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하는 그러한 전도부인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압구정동에, 신사동에, 그리고 뒷골목에 어디에서든지 옛날같이 하얀 치마저고리에 까만 치아저고리에 머리에 쪽튼 그런 할머니가 다된 아줌마들 말고 젊고 생생한 부인들 중에서도 쓰레기통 거꾸로 세워놓고 올라가서 ”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알았고 그것을 간절하게 전할 사람들이 우리는 필요합니다. 전도의 방식은 달라질수 있습니다. 그렇죠. 옛날처럼 서서 메가폰을 들고 외친다면은 지금은 당장 경찰이 와서 붙잡아 가고 벌금 내게할지 모릅니다. 방식은 달라질수 있습니다. 컴퓨터를 통해서 하든지 이메일을 통해서한든, 편지를 통해서 하든, 전화를 통해서 하든, 만나서 하든 무엇을 하든 달라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 안에 이 복음전파의 열정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구시대를 보고 깊이 배워야합니다. 일제시대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 ? )가서 교회를 세우고 거기의 영혼들을 향한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 우리가 그 열정을 어떻게 비난할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중국에 가서 아직까지도 중국은 제가 활동한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다 이야기 할수 없는 정도의 상황입니다. 그런정도로 부자유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 쪽에 있는 지도자의 이야기를 하나 들으면서 제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실제 최근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것들은 거기에는 기독교 잡지도 없고 방송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전해지지도 않습니다. 목격한 증인에 의해서 지하교회로 지하교회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선교단체나 거기에서 자생한 그리스도인들이 젊은이들을 가르쳐서 전도자로 전 중국에 파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뭐냐하면 불과 두세달 가르쳐서 파송하는 것입니다. 예수믿기 시작한지 불과 6개월도 안되는 사람들이 파송을 받는 것입니다. 그중의 한 단체가 있는데 규칙이 뭐냐하면 결혼하면은 무조건 그만 두어야하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까지 전파하는데 상상이 안갑니다. 서너달을 훈련시켜서 건국에 흩어져 있는 중국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사명을 주고 파송식을 하고 그리고 훈련을 서너달 받는 기간동안 두가지를 하나님 앞에 열열히 기도하는데 내가 어디에 가서 복음을 전해할지와. 누구와 함께 짝이 되어서 복음을 전할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끝나기 전에 응답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자매가 기도를 하니까. 또 한자매를 하나님이 동역자로 붙여주셨고 그 십대의 두 소녀가 기도하는 가운데 어느 마을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파송이 되었습니다. 파송식 할 때 주는 선물이 있는데 기차표 한 장입니다. 그것도 돌아오는 표는 없고 가는 표만 주는 것입니다. 물론 돈도 없고 양식도 없고 물론 거기에서 그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맞이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래서 이 두처녀가 기차에사 딱 내렸는데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가보지 못한 동네였습니다. 내리니까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당장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누구를 찾아야 되느냐하면은 예수믿는 사람을 찾아야합니다. 예수믿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전도를 해보면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저녁때부터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얼마나 헌신된 사람인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 동네에 왔다. 그러니까 이 동네에 이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데 딱 6명이 예수믿는다고 가르쳐 주면서 그 6명 중에 내가 한명인데 내가 당신들을 보호해 줄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와함께 있으면서 복음을 전파하자 그래가지고 동네어서 떨어진 산속으로 들어갔는데 가난하게 사는 집인데 6식구다 사는데 이 아주머니 혼자 예수는 믿는 것이었습니다. 나머니는 다 믿는 식구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서 밥을 먹고 있으려니까 하루저녁이 지난다음부터 남편부터 시작해서 눈치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눈치를 주니까 할수 없이 눈치밥을 안먹기 위해서 낮에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나서 저녁때가 되어서는 씻고 밥을 먹은 다음에 동네로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동네 식구들을 하나씩 불러모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믿은지 6개월도 안되는 그 사람들의 입에서 뭐 그렇게 엄청난 진리에 대한 증언이 쏟아져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믿은지 6개월밖에 안되는 그 아이들의 입에서 그냥 정직한 복음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죄인인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는 그 사랑을 알고 나니까 그 사랑을 모르는 당신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이 동네에 우리 친척도 없고 우리 동기간도 없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여기 파송되어 왔다. 거기에서 사람들이 녹으면서 전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녁때 마다 자기에게 복음을 전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우우죽숙처럼 생겨나는데 6개월만에 2000명이 전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이제 본부에 연락을 하기를 뭐냐면 이제 사람들이 다 전도를 받고 하나님을 믿는 자녀가 되고 나니까 모이고 싶어합니다. 설교를 할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예수를 믿고 나서 기도를 하고 전도생활 열심히 하다가 이제 문제가 생기는데 그것을 다룰 능력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중국에는 선교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중국은 선교사와 동시에 한곳에서 딱 고정을 하고 영혼들을 돌볼 목회자의 필요성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선교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나니까 이제 목회자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벌써 사람들은 이제 그것을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아주 많은 식학교들이 생겨나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학교들은 20명을 넘으면 안됩니다. 공안에 즉각 적발이 됩니다. 적발되면은 그대로 처분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작은 규모의 신학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데 사람들이 너무 거기에 들어와서 공부하고 배우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고 지나가면은 지하교회의 지도자들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지도자들이 생겨나는데 그 지도자들의 수준이라고 하는 것이 그저 진실하게 전도를 받아서 주님 사랑하는 초보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너무나 목회자로서는 목회자의 삶과 전도자의 삶은 또 판이하게 다릅니다. 전도자의 삶은 계속 다니면은 똑같은 것을 말하면은 되는데 목회자의 삶은 그것이 아닙니다. 폭넓고 깊게 그 영적인 문제들을 다루어야됩니다. 그런데 그럴만한 사람들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하면 이제 한국에서 목회를 하는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돌아 다니는 선교사 말고 목회하는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자라고 하는 것이 목회하는 사람 밑에서 목회를 받으면서 목회자가 생겨나는데 계속 복음만 전해주면서 계속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자들은 계속 생겨나는데 목회를 할수 있는 사람들이 안생겨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런 하잘 것 없는 젊은이들을 사용하셔서 그런 위대한 일들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뭐냐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복음전파에 다금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예수믿기 시작하면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일을 혼자 이루지를 아니하시고 가장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마지막으로 차표한장 있는 것 역무원에게 주고 쓸쓸히 저녁녘에 가보지도 못한 동네에 내려서 오늘은 어디에서 잘지도 모르고 어디에서 생활해야 될지를 모르는 떨리는 가슴으로 그 지차역을 내린 그 하잘 것 없는 두 자매를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그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무엇이든지 하실수 있는 분이었는데 오병이어를 놓고 축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 남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더 감동을 받았던 것은 자매하나가 있는데 그 자매도 역시 똑같이 전도받은지 얼마 안되서 기도하면서 이제 전도를 나갔습니다. 그 자매들 하고는 정 반대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박해를 하고 사람들이 받아들이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묵을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데 신기하게 기온이 따뜻했던 모양입니다. 남쪽이라서 그래서 너무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핍박만 받아서 기진해서 배가 고파서 언덕에 올라가보니까 신기하게 선인장 같이 생긴 작은 그런 풀같은 것들이 있는데 그것이 그렇게 맛있더래요. 그래서 그것을 계속 따먹으면서 거기에서 6개월인가 얼마동안을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아까말씀드린 자매들과 같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성과는 못이루었지만은 그러나 거기에서 약속한 기간동안 열심히 전도하고 열매들을 맺었습니다. 그리고나서 많은 은혜를 받은 다음에 이 자매들이 다시 돌아온 후에 그 전도하던 것도 너무 감격적이 었지만은 자기는 거기에서 만나를 먹고 산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먹고 살아서 그 생각이 너무나서 다음에는 시간을 내서 동역자들과 함께 일부러 거기를 갔는데 그 계절에 갔는데 열매가 맺히지를 않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보고 물어보니까 그 후에도 계속해서 그런 열매를 맺히지를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이 자매들은 확신하기를 자신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해에만 그런 열매를 그 언덕에다가 내려주셨다고 그렇게 확신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런데 자기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놀라운 이야기들이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불과 6-70년 전에는 그런 전설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온 헌신적인 전도자들에 의해서 이 땅에 교회들이 서게 된 것입니다. 한국에 있는 그리그도인이 중국 교회를 돕기 위해서 지하교회에 있는 많은 평신도들과 함께 대담의 시간을 갖다가 중국에 있는 한 성도가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공산당의 핍박을 피하고 그리고 가난과 결핍속에서 그래서 이렇게 예수를 믿는 것이 우리의 십자가인데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은 지금 잘 살고 어떻게 예수를 믿든지간에 나라에서 핍박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십자가가 있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 있습니까? 정말 있습니까? 내가 잘못해서 나 스스로 당하는 고통이나 힘든 것 말고, 십자가가 있습니까?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솔직히 말해서요.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자유롭고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사는 시대에는 자원해서지지 않으면은 거의 십자가 없는 인생을 살수도 있습니다. 영혼을 섬기라면 게으르게 섬기고 복음을 전하라면 불순종하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하면 그게 너무 힘들고 자기가 깍여나가는 것이 아파서 그만두고, 이런식의 회피하는 인생을 살면 우리의 십자가가 있겠습니까. 전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큰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나라는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국도 우리나라 처럼 자유롭게 않습니다. 완전히 우리나라는 개척교회의 천국입니다. 아니 주인만 빌려주면 일이없습니다. 2층에다 세우면 어떻고, 학교를 빌려서 하면 어떻고, 지하에다 하면 어떻게 텐트를 치고하면 누가 뭐라고합니까. 미국만 해도 동네에 교회하나만 들어올려고 해도 온 동네가 공청회를 해야지 내 땅 가지고 내가 교회를 짓는대도 어림반푼어치도 없습니다. 온 주민이 도장을 찍어야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2층에도 십자가, 이것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아이고, 저 이층교회. 아니 지하실에는 왠 교회가.” 그러지 마세요. 거기에서 벗어난지 우리도 2년밖에 안되었습니다. 나는 너무 감사합니다. 나도 교회하기 전에는 나도 눈살찌푸렸던 사람입니다. 내가 예수믿기 전에는 나를 대통령 시켜주면 내가 저것 다 정리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복음을 전파하고 이렇게 우리들이 교회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살아보니까 이층교회에 개딱지처럼 붙어있는 그 교회가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야, 저 교회에도 목회자의 눈물이 베어있겠구나.” 지하실에 있는 저교회, “야, 저교회도 목회자가 많이 울겠구나.” 세워진 교회 “온 교인들이 피많이 쏟았구나.” 이렇게 하면서 하나하나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예전에는 감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2층교회에 붙은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다고 하는데 무엇을 지금 알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을 알고 있느냐고요. 이 도시에 있는 불신자들의 수에 비하면은 교회의 수는 택도없습니다. 이것 가지고는 되지도 않습니다. 아직까지도 교회보다 다방이 많지않습니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뭐냐하면 교회가 거미줄같은 교회가 되면 안됩니다. 줄쳐놓고 파리 날아와서 붙기를 기다리는 그런식의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대목에서 “아멘”을 해야지 그렇게 해서 어떻게 날아들어온 교인하나 붙들어서 말이지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 2층에 있는 교회들 돈이 없어서 십자가도 제대로 칠하지 못해서 퇴색되어가는 교회들을 바라보면서 너무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신앙의 자유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언제든지 남산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빨간 네온싸인이 가득합니다. 그것은 문제가 있을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서 있을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교적인 은혜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을 모두 감사하면서 우리들이 안타깝게 기도해 주어야하는 것은 뭐냐하면 만약에 이 땅에 있는 그 수많은 교회들 2층에, 3층에 지하에 한건물에 두 개씬 세게씩 있는 교회들 그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할 것은 저 밤하늘에 새빨갖게 빛나는 저 교회들이 모두 저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거기에서 진실한 성도의 삶을 살고 그리고 거기에 출석하는 모든 교인들이 지금 하나님 없이 한없이 부패하고 타락한 이 도시의 영혼들에 대해서 가슴아파하며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도자의 삶을 살기를 그런 교회들이 되기를 우리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련된 교회의 경영이나. 그리고 교회의 건물이나 교회의 조직체계 이런것들을 가지고 전도할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이 오니까 물론 우리들이 잘 돌보아야합니다. 조직도 필요합니다. 그렇죠. 그리고 그들을 더 잘 돌볼려니까 교역자의 수도 지속적으로 늘어나야합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 잘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섬김이 필요하니까 직원들의 수도 늘어나야합니다. 그리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혹은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교회에 들어오니까 그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잠시라도 편안하게 거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말씀을 들을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죠. 곤고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상담도 해주어야 하고 물질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에게 구제의 손길도 펼쳐야죠. 그러나 잊지말아야 할 것은 그것은 성도들이 오니까 일어나는 것이고 우리들이 그런 모든 것들만을 믿고 우리들이 복음전파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흩어져서 주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에 대한 전도에 대한 마음을 잃어버린다면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주신 교회의 성장도 거두어 가실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계속해서 은혜받은 성도들이 모여서 주님의 은혜에서 소외된 지체들을 기억하며 손잡고 중보기도하고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인해서 가슴아려하는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그렇게 해서 한 영혼이 주님을 믿고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한없이 기뻐하고 좋아하고 그 지체들이 진실한 신자로 살아가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해 주고 이러는 끊임없는 실천 섬김들이 전도의 섬김들을 통해서 계속 잇대어 질때에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이지. 정말 그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우리들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전도하는 이 일에 우리들이 정말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들은 먼저 영혼을 사랑하고 그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먼저 스승이 될수 있는 삶을 살아 갈 때에 가르침을 받는 영혼들에게 영혼을 위해서 사는 진실한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줄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가르치는 자의 삶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