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을 받는 자의 삶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성경을 배우기를 기대하라Ⅰ(딤후3:15下) 2001.1.24 수요예배 1
2. 성경을 배우기를 기대하라Ⅱ(딤후3:15下) 2001.1.31 수요예배 17
3. 살아있는 성경말씀(딤후3:16上) 2001.2.7 수요예배 38
4.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딤후3:16上) 2001.2.14 수요예배 51
5. 교훈을 기대하라(딤후3:16中) 2001.2.21 수요예배 72
6. 책망을 기대하라(딤후3:16下) 2001.2.28 수요예배 91
7. 바르게함Ⅰ(딤후3:16) 2001.3.14 수요예배 110
8. 바르게함Ⅱ(딤후3:16) 2001.3.21 수요예배 134
9. 의로 교육받기를 기대하라(딤후3:16) 2001.3.28 수요예배 147
10. 의로 교육받기를 기대하라(딤후3:16) 2001.4.4 수요예배 165
11. 온전하게 행하기를 기대하라Ⅰ(딤후3:17) 2001.4.18 수요예배 180
12. 온전하게 행하기를 기대하라Ⅱ(딤후3:17) 20014.25 수요예배 196
1.성경을 배우기를 기대하라Ⅰ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下)
기독교신앙에는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관계의 종교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우선적인 것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인데 그 구원을 받는것도 가르침이 있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있을 때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받은 이후에는 그 사람이 정말 온전한 사람으로 장성해서 그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심으로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께 구원의 보람을 안겨 드리는 삶을 살기위해서는 그는 끊임없이 가르침을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저는 분명히 이번주부터 시작되는 이 주제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치명적으로 중요한 그런 진리들이라.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3장에 보면은 이 3장을 이야기하기전에 이 디모데 전후서 이것은 바울이 옥중에서 디모데에게 쓴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썼는데 이미 목회자로서 목회자에게 편지를 쓴것인데 이 편지를 받을 때에 디모데는 에베소 지방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에베소 교회는 사도행전 19장에서 바울의 전도여행 때 생긴 교회인데 우상이 아주 들끓던 그런 도시였습니다. 거기에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마술하던 책까지 가지고 와서 다 불사르면서 그러면서 부흥을 경험하고 생겨난 그러한 교회입니다.
그렇지만 이 디모데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일천하여 사실 이 교회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건강의 어려움까지 포함을 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이 때에 바울이 이 편지를 보낸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3장에서 특별히 마지막 때가 되면은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아주 지루할정도로 상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이것도 아마 우리에게는 시대를 분별하는 아주 놀라운 지혜를 가르쳐주는 성경의 본문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런 놀라운 마지막 때에 될 일들을 보여주는 것은 바울이 디모데로 하여금 그가 겪고 있는 목회적인 어려움이 단지 그만의 것이 아니라. 때의 징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줌으로서 한편으로는 그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또 한편으로는 경계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쭉 세상에 어떻게 변할 것을 이야기하는데 사실 거기에 나타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의 본을 따라가서 세상과 짝하는 삶을 살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그리고 이어서 교회안에 있는 어려움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된 교훈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와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일천한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광경을 쭉 묘사하면서 이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하는 15절에서부터 17절까지 성경에서 아주 유명한 성경자체의 효능에 관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문맥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쭉 하다가 성경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아주 놀라운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지금 세상, 마지막 때에 세상의 악한 세력들과 불신앙의 사조가 얼마나 다양하게 나타나서 그래서 얼마나 기승을 부릴 것인지를 1절에서부터 아주 상세하게 묘사해갑니다. 우리들이 만약에 그 말씀에 담겨져 있는 의미에 대해서 영적인 지각을 가지고 이 본문을 읽는다면은 그러한 세상의 마지막 때에 일어날 절망적인 상황, 그리고 불신앙이 창궐할 어떤 세속주의적인 상황, 그리고 사람들의 그 강팍함과 그 악함, 변화되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것, 심지어는 경건의 모양만 남기고 내용 모두를 전부다 세상에 양보하는 세속주의적인 풍조, 이런 것들이 너무나 큰 나머지 사실 좌절을 느낄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엄청난 세상의 불신앙과 교회안에 있는 불신앙에 야합하는 사조들에 대해서 쭉 설명을 했는데 거기에 대한 대응은 그런 것들은 너무 복잡한데 복잡하고 가지도 많고 굉장히 여러 가지인데 그 모든 세상의 사조에 대한 대응은 오직하나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아니 여기에 나와있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그렇지 성경입니다.
그 성경하나를 가지고 그 모든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그 엄청난 대적들 그리고 수많은 불신앙의 현상들, 막 뭉개구름 처럼 피어나고 해일과 같이 밀려오는 그 모든 세상의 불경건하고 비관적인 그런 사조들에 대해서 그런 것들이 주는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에 대해서 유일한 대안을 하나 딱 내미는데 그것이 성경 오직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14절이상을 그 이야기를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다 사용을 하고 마지막에 2절을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3장을 마칩니다. 이것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리라.
세상의 풍조는 막 변하고 그리고 막 해일처럼 일어나서 신앙을 가진 우리를 단숨에 쓸어버릴 것 처럼 막 난리를 쳐도 대안은 오직 하나입니다. 뭐냐하면은 무엇입니까? ‘성경, 그래서 우리가 성경 신앙을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확신이 있습니까? 이 세상의 수많은 거짓된 풍조와 그리고 바람앞에 등불같은 연약한 나를 단숨에 삼키고자 유혹과, 거짓과, 박해와, 시련, 그리고 수많은 죄악의 물결들이 일렁거려도. 그래도 그 모든 것과 싸울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하나다. 이 신앙이 기독교신앙입니다. 이것 없으면 여러분들은 아주 잘하면 외식하는 신자입니다. 결코 여러분들은 진실한 서울시민은 될수 있을지 모르지만은 진실한 신자는 될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길수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부패를 이길수 없습니다. 절망적인 죄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쩌다가 이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때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결코 이길수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을해야합니다. 이것이 성경신앙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성경사랑은 하나님 사랑이라고 말해도 좋을정도로 그렇게 유일한 대안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생명의 원천입니다. 시대시대마다 인간들이 직면하는 문제가 모양이 다를수 있습니다. 본질은 같아도 모양은 다를수 있습니다. 그렇죠. 유혹받는 것도 좀 다를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을 위협하는 외부적인 환경에도 변화가 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은 어느 시대건 간에 그 모든 것을 대하여 싸울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성경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사랑하는 신앙이 보편화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신앙이 보편화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그렇지 때문에 결국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아주 부실하거나 병들거나 아니면은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지난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 아직 아주 명백하게 육에속한 그리스도인이었을 때, 명백하게 여러분들이 형식적인 신자로서 살아가고 있을 때, 그 때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물론 여러분들은 고정적으로 교회에 출석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교회일을 열심히 했는지 교회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칭찬할수도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어느정도 반듯하기 때문에 아주 근실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의 참된 맛을 알기까지는 여러분들의 영혼속에 풍성한 삶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있었습니까? 성경의 맛을 알기까지 여러분들이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간다.라고 하는 느낌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모두 완전한 신자는 될수없지만은 그러나 죽은 신자는 안될수 있습니다. 죽은 신자가 되지는 않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하면은 살아있는 신자의 특징이 뭐냐하면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비우면서 자신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미 잡았다함도 아니요.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라.” 주님이 자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불러주신 그 놀라운 사랑의 부르심을 기억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이 하나님의 그 뜻에 온전하게 살아갈려고 살지못했을 때에 강한 자극을 느끼면서 아파하고 살았을 때에 너무 감사해서 그 죄를 이기고 실패를 딛고 일어선 것에 대해서 다시한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되는 이것, 이것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 하천이 있었습니다. 큰 하천, 중량천으로 이어지는 그 하천인데 장마철에 물이 납니다. 물이 막 쏟아집니다. 큰 물이 지나가고 나서 물이 조금 빠질때되면은 뭐 애들이 애들할 것 없이. 어른은 더 합니다. 막그냥 빈대떡 부칠 때 걸러먹는 채, 또 삼태기, 하여튼 바구니 비슷하게 생긴 것은 다 가지고 어디로 나가느냐하면은 개울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기를 잡는데 그냥 개굴창에 들어가가지고 족대를 가지고 누비고 그러는데 아니 그 고기잡는 어른들을 이렇게보니까. 이 땜비슷하게 이렇게 펑퍼짐하게 이렇게 내려와요. 콘크리트가 물이 이렇게 둑을 막아서 물이 고인다음에 이렇게 내려옵니다. 그런데 수면밑으로 해가지고 지면으로 이렇게 내려가면 맞닫게되었습니다. 깊지 않습니다. 무릎정도로 온 그런 정도인데 그런데 이제 물이 이렇게 줄줄줄줄 빠르게 내려가는데 애들은 고기잡느라고 그것 가지고 막 쑤시고 다니는데 아이 진짜 고기 잘잡는 사람들은 삼태기가 이렇게 된 것을 거꾸로 딱 놓고 가만히 기다립니다.
그러면 이제 물이 줄줄줄 흐르죠. 그러면 담배피우면서 노는 것입니다. 친구들하고 얘기도하고 발로 꽉밞고 있으면서 한참 있으면은 이놈의 고기들이 그 삼태기 속에 오글오글 모여있습니다. 그냥 거꾸로 들어가지고 비닐 봉지에다 집어넣고 또 갖다 집어넣고 한참 놀다가 기다리면은 고기가 새카맣게 모입니다. 물을 거스려서 막 올라가다가 그 삼태기에 전부다 모이는 것입니다. 그냥 막 몸부림을쳐도 못올라가는 것입니다. 한놈이 모이니까 뒤따라오고 또 뒤에오는 애들은 앞에서 계속가니까. 그게 길인줄 알고 또가고 또가고 또가서 이제 매운탕 동창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가끔 가다가 왜그랬는지는 모르지만은 죽어가지고 벌렁 드러누워요. 고기가 그러면 배가 위로 올라옵니다. 허였게 물에뜬 고기들은 사정없이 물을 타고 밑으로 내려갑니다. 그게 살아있는 물고기와 죽은 물고기의 차이입니다. 사도바울이 참 진리를 말한것입니다. “내가 잡았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그러죠. 그러니까 누군가가 나는 진실한 신자다. 그 순간 그것은 가짜입니다. 사기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내가 어느날 딱 올라가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참된 목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야 이제 드디어 돌았구나. 계속비실거리더니 드디어 돌았구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없습니다. 누구도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 처럼 “다 이루었다.” 이렇게 말할수 있는 사람이없습니다. 주님 이외에 아무도 그말할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더 온전해지고, 그러니까 진실한 신자가 될려고 막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그래서 온전해지면 온전해 질수록 자신속에 진실한 신자가 되지 못하게 하는 그 내면의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몸부림을 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그런 사람들은 그러면서 말하자면은 거룩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그냥 막나니와 같은 그러한 거룩해져가는 사람과 정반대의 짐승과 방불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은 그는 자신이 무엇인가 굉장히 된 것같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또 예를 들어보면 설교를 제가하면서 그런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께서 한꺼풀 한꺼풀 열어서 진리의 경지속으로 이렇게 들어가게하실 때, 그 때에 이제 이정도면 내가 이제 어떤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서 경지에 도달했구나. 그런 생각이드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설교하던 때에는 제가 아주 확연하게 이야기할수 있는데 처음설교를 시작하던 때에는 잘하고 싶다라고 하는 소원은 지금보다 더 강했을지는 모르지만은 그러나 절망하는 것은 설교사역이 계속되면서 더 많이 절망하였습니다. 진짜 어느순간에는 아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내가 주님 앞에 설수 있는가 그런 절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되요. 그러면서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온전케 될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영혼을 돌보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영혼을 돌보면서 교사들을 이렇게 시켜보면은 1년은 좀 해매요. 1년은 잘해볼려고 하다가 해매는데 이제 2년쯤 되면은 몸에 붙기시작하면서 꼭 이렇게 획일적인 공식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은 대게 그냥 경험이 대부분의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에 한 2년차정도 되었을 때가 생산성이 제일 좋습니다. 그게뭐냐하면은 영혼들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2년 3년 하면은 영혼을 돌보는 것도 기술적인 측면이 있으니까. 점점 잘 돌볼수 있게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정도면 이제 내가 교사로서 올때까지 왔다. 그렇게 얘기할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제 하라. 이것입니다.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 선한 목자의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부족함이 영혼을 잘 보살피는 것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괴로워하고 아파합니다. 주님이 피흘리고 값주고 사신 그 영혼들인데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결함과 부족한 점들이 영혼을 만족스럽게 섬기지 못하는데 작용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못견디게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뻔뻔한 목자는 어떤 생각을합니까.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어디있어. 나만한 사람 만난 것도 너희들이 복이지. 다른데 가봐 죽이라도 먹나. 그래도 나는 가끔 태우기는 하지만은 밥 비슷하게 주잖아.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게 결국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워서 가르침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은 결코 좋은 교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야야됩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자들에게 책을 쓰면서 항상 마지막에 강조하는 것이 뭐냐하면은 좋은 설교자가 되는 비결은 좋은 청취자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 설교를 하든지 좋게 청취를 하는 것입니다. 아주 모범적으로 청취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청취하기를 기대해 주는 그런 자세로도 흔들리지않게 청취하는 것입니다. 그런 청취의 자세를 하나님 앞에 가져야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모두가 두가지 관계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뭐냐하면은 하나님 앞에서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고 그리고 또 영혼들 앞에서는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지 않으면은 제가 무엇으로 여러분들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저의 신앙, 저의 말씀에 있어서 생명력, 말씀을 깨닫는 지혜, 모든 것들은 내 구주이시며 스승이신 우리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습니다. 그분 앞에 배우는 학생일뿐입니다. 그분앞에서는 아주 초라한 동급생 중에서 가장 초라한 그러한 학생일뿐이다. 라는 생각을 항상 가져야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말이죠. 그러한 모든 것들을 가늠하게 하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실려고 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 이외에는 우리에게 계시가 없습니다. 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고 우리를 성도에 이르게하는 참된 계시가 존재하지않습니다. 성경이 유일한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니까 참된 신자로 가르침을 받으며 변화되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여러분, 이모두 이 삼자가 공통된 관심사를 가져야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이 가르치실려고 하니까 가르침을 받는자는 그것을 받아서 자신이 기쁨으로 소화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다시 동일하게 성경을 가르칠려고 애를쓰고 또 그 밑에서 배우는 사람들은 성경을 사랑하고 배울려는 마음으로 배워야됩니다.
국어를 가르치는데 국어시간에는 수학책 펴놓고 수학풀고. 수학시간에는 사회책 펴놓고 읽고 사회시간에는 만화책보는 그런애들 있죠. 그런 애들은 공부못합니다. 머리속에서 혼란이 일어납니다. 학생들을 가르쳐보면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머리도 좋겠지만은 머리보다도 관심사가 일치하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 빨아드립니다. 그래서 왜 중고등학교때 보면은 애들이 특히 여학교에서는 더합니다. 한문선생님을 좋아한다. 그러면은 그 아이는 몇 년동안 한문은 거의 만점입니다. 뭐 한문이 좋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선생님이좋으니까 관심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한자라도 알아야지만 가가지고 뭐라고 뭐라고 물어볼수있지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냥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쭉쭉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거룩한 본문을 우리들이 하나씩 집기전에 먼저 이것을 생각해보세요. 우리 사이에 그런 일치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여기 세워서 여러분들에게 가르치라. 그러는 것은 나를 자랑하게 하기 위함이나, 아니면은 아주 이제껏 누구도 발견해내지 못한 아주 독창적인 신앙의 길을 여러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저를 여기에 보낸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여러분들에게 신제품을 소개해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힘안들이고 신앙생활 하는길을 보여줄려고 저를 여기에 세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여러분들에게 가르치게 하기위해서 세운것입니다. 그 가르침의 방법이 때로는 설교도하고, 때로는 상담도하고, 때로는 이렇게 집회도하고, 때로는 책을 읽게하기도 하고, 때로는 테입을 듣게하기도하고, 구역공부 교제를 쓰기도하고, 혹은 무슨 편지를 보내기도하고 뭐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은 그러나 마지막 하나님께서 그 모든 섬김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데리고 가실려고 하는 곳은 어디냐하면은 성경의 숲속으로 여러분들을 데리고 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마지막에 목회자가 목회를 전심으로 목회한 다음에 그 목회가 주님 중심이었느냐 아니었느냐는 뭐 사택을 몇평에 살았느냐. 무슨 차를 무슨차를 타고 다녔느냐. 뭐 개인의 통장에 돈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그런 것 가지고 입증하는 것은 그것은 아주 유치한 방법입니다. 유치합니다. 그런것도 가늠이 될수있겠죠. 그냥 주님을 위해서 살면서 거의 모든 것들을 주님을 위해서 사용을 했으니까. 입증될수 있겠죠.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은 그가 죽고나서도 그 성도들이 남아서 그 목사님 좋았는데 그 목사님 좋았는데, 그러고만 앉아있으면 그는 성공한 목회라고 생각을 안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은 사람은 가도 성경은 남는법, 그래서 그 성경을 더 성도들이 사랑하게되었고 그래서 성경을 깊이 사랑하고 그 진리를 깊이 끌어안으면서 살게된 그 결과. 그것이 그의 목회가 하나님 중심의 목회이었는지 인간중심의 목회이었는지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만히 보세요. 성경 보다는 어떤 목회자의 지도력에 대해서 더 찬사를 보내는 그런 시대 아닙니까. 제 느낌인지는 모르지만은. 누가 막 그 교회라고 하는 조직을 이끌면서 커다란 것들을 성취해내면은 엄청난 박수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말하자면은 좋은현상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입니다. 나의 사랑하는책 그 찬송가에 보면은 어머니는 사라져도 무엇은 남아있습니까. 성경입니다. 예수 세상계실 때 저는 그 찬송부르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왜 울었느냐하면은 저는 그런 어머니를 못두었거든요. 그렇게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찬송을 부를수 있는 그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 그래서 울었고 또 하나는 뭐냐하면은 정말 인생에 있어서 화려한 이름, 그리고 뛰어난 명성, 그런것 없어도 자녀들에게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그러면 딱 생각이 나는 것이 뭐냐하면은 낡은 성경과 돋보기 항상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우리의 모든 삶을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춰보시려고 했던 분, 세상을 향해서는 성경대로 살아가지 않는 세상을 향해서는 성경대로 살지않는 것 때문에 슬퍼하며 아파하며 중보기도 하고, 교회를 보면서는 교회가 성경의 진리대로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끼시고, 성도들의 삶을 보면서도 성경대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성도들을 바라보며 보람을 느끼고, 그 성경으로부터 멀어지는 교인들로 인해서 아파하던 그런 부모로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박수갈채를 받는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몇 년전인가 한번 무슨 우리나라 유수한 신문사입니다. 저도 참 순진했죠. 김남준 목사님 귀하. 귀하가 우리 신문사에서 뽑은 현대사를 움직인 인물 뭐 몇 명가운데 한명으로 선정이되었데요. 뭐 그런 얘기 들었을 때 기분 나쁘고 뭐 화나고 그럴리는 없잖습니까. 나는 뭐 움직인 것도 없고 그냥 여기 가만히 있었는데 움직였데요. 움직였데니까는 움직였나보다 그랬죠. 그러더니 뭐냐하면은 사진하고 당신 이력하고 그리고 뭐 본관하고 쭉 써가지고 그렇게 해서 제출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또 굉장한 것인줄 알고 열심히 써서 보냈죠. 그랬더니 다 보내고났더니 그 다음에 팩스로 다시 왔습니다. 교정을 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야! 이거 확실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모인데니까. 이런것도 자세하게 하는구나 그랬더니 그 다음에 뭐냐하면은 조금있더니 책한권이 덜렁왔습니다. 그러더니 진짜 두툼하고 칼라로 되어있는데 움직이는 사람들 1000명인가 몇 명이 거기에 나왔습니다. 아는 사람도있고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습니다. 그래서 야! 그래도 이런것도 주는구나. 그랬더니 맨뒤에보니까 13만원 빨리 부치세요. 편지가 써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서부터는 다시는 안봐요. 오면은 그 자리에서 다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그까짓 때에 남아서 도서관 구석에나 그거 누가 보지도않는 것 꽃혀있으면 그것 뭐하겠습니까. 그것아닙니다.
정말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살려고 분투하며 살다가 죽은 사람이었다. 그것이 성도로서 가질수 있는 가장 영예로운 말하자면은 평가입니다. 믿습니까.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성경신앙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늘 중심에 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사랑합니까? 청교도 가운데 라져스라고하는 목회자로 제가 기억이되는데 교인들이 하도 성경을 많이 읽으니까. 어느날 설교를 하다가 자기혼자 원맨쇼를 하는거죠. 하나님에 대해서 이제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성경을 주고 그 성경으로 참된 성도가되고 나를 섬기라고 하였거늘 너희가 그렇게 성경을 안 읽는단말이냐.’ 자기가 또 ‘잘못했사옵니이다. 하나님.’ ‘너희가 그렇게 성경을 안읽겠단말이지’. ‘아닙니다. 하나님’ ‘너희들이 그렇게 성경을 안읽겠다면 내가 오늘 너희성경을 다 빼앗아 가겠다.’ 그 원맨쇼를 하는데 진짜 대대적인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교인들이 다 뒤집히는것입니다. 자기 성경을 붙들고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찮게 여기고 이 생명의 말씀인 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막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그런 역사의 한장면이 나옵니다.
오십 몇년도에 말이죠. 그 소련이 서슬이 시퍼래가지고 잡아죽일 때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일 때. 성경 전체는 러시아에서 구할 수는 없고 신약성경 한권이 우리나라 돈으로 57만원 정도였되었답니다. 여러분 요즘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극동 방송국에 보면은 새벽시간에 아세아 방송을 통해서 성경을 불러주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거 왜 그러는지 아십니까. 중국에 있는 성도들이 성경이 없습니다. 성경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님도 성경 몇권 가지고 가셨습니다. 중국에 가시면은 거기에 있는 지체들이 무엇을 선물해주랴. 그러면은 신앙있는 지체들은 다 성경을 너무나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조선족들이, 성경을 너무나 갖고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때요? 성경은 뭐 집에 대여섯권 없는 사람 거의 없을것입니다. 그렇죠. 심지어는 성경이 얼마나 많은지 교회 로비에도 잔뜩 쌓아놓았습니다. 성경 안가지고 예배 드리러오면, 저것은요. 불신자용입니다. 교인으로서 그것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아주 수치스럽게 생각을해야됩니다. 불신자가 들어왔다가 가지고 들어가는 용입니다. 아주 특수한 경우에쓰는 것입니다. 성경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좋은 혜택속에서 사는데.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정말 성경을 사랑합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다가 가면은 우리의 자녀들이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보시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그렇게 회상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매일 계돈 장부나 들여다보고 가계부나 만지던 그 어머니가 생각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이 성경을 깊이 사랑하는 이것이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지녀야할 중심적인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탁 들어서면 어떡하든지 이 성경과 친숙하게 만들어줘야합니다. 그래서 그 성경을 사랑하고 그 성경과 함께 그 성경을 위해서 살도록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이것이 교회의 본분이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이렇게 그 가르침의 관계를 통해서 세상의 지혜나 그런 것들을 배우려고 하지말고 가르침의 관계를 통해서 성경을 배우려고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애를쓰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래야될 이유는 무엇이냐하면은 그래야될 이유가 쭉 나오는데 이것이 이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그 가르침의 관계를 통해서 무엇을 배우고자 하여야하는가 하는 목록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뭐냐하면은 성경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느니라.” 그랬으니 첫째는 성경을 통해서 누구를 배우기를 갈망해야됩니까? 그렇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기를 갈망해야됩니다. 이것이 사경회 때 선포된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절대 다른 것들을 배울려고 애를써서는 신앙이 진보하는데 도움이 덜되거나 혹은 신령한 사람으로 그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성경 속에는 아주 뚜렷하고 더 중심이 되는 진리가 있고 그리고 그 곁가지로 나가는 작은 것들이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이것입니다. 한반도 허리를 가르고 흐르는 두 개의 강이있습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지류가 이렇게 양수리에서 만나서 쫙 갈라지면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이렇게 양수리에서 만나지않습니까. 이제 남한강과 북한강이 있습니다. 그 강을 보세요. 막 엄청나죠. 그것은 다른나라에 가도 그런 정도로 폭이넓고 물의 양이 풍부한 강을 만나기가 쉽지않습니다. 정말 엄청난 강입니다. 그런데 그런 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강줄기에 달라붙는 수많은 하천이 있고, 하천을 다시 맞닫는 개천이 있고, 개천을 맞닫는 실개천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작은 물줄기들이 헤아릴수없이 수없이 모여서 개천을 이루고 그 개천이 하천을 우리고 그 하천이 다시 강을 이루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도 그렀습니다. 성경도 남한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남한강과 북한강처럼 그렇게 아주 중심되고 두드러진 진리가 있고 그리고 거기에 합류되는 작은 지류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중심적인 두드러진 진리, 이것이 그 중심이 누구시냐하면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우선적으로 항상 성경을 읽으면서 항상 관심이 이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가? 거기에 초점을 맞춰서 창세기에서부터 계속 읽어갈 때에 성경속에 커다란 맥이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난주에 그 사경회를 하면서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씀을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잘배워야됩니다.
왜냐하면은 성경에서 그분을 가장 풍부하게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들어보세요. 이게 성경입니다. 여기에서 재료를 쫙 꺼내가지고 설교를 만듭니다. 혹은 성경공부를 만들수도 있습니다. 그죠. 책을 만들수도 있고. 들어보세요. 여기에서 가르침을 쭉 뽑아서 이렇게 해서 재료를 해서 이것을 만들어요. 설교도 만들고 성경공부도 만들고 가르침을 만듭니다. 이것이 여기에서 이렇게 뽑아낸 것과 여기에서 이루어진 것이 이게 질적으로 일치를 할 때에는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가르침을 받은다음에 성경을 들어가서 보면은 이게 이쪽으로 들어왔고 이것이 이쪽으로 다시 들어가서 성경을 딱 볼때에 성경이 더 잘 이해가됩니다.
그런데 들어보세요. 일부는 여기에서 올라왔는데 다른데서 이질적인 것들이 들어온것입니다. 설교나 혹은 가르침을 만드는데 있어서 원리적으로 여기에서 이렇게 들어온 것이 또 다른데서도 들어옵니다. 그러면 어떻게되냐하면은 질적으로 성경과 일치를 안할 것 아닙니까. 부분적으로 일치를 안할것아닙니까. 질적으. 그러니까 이것을 통해서 사람이 가르침을 받고 이것을 치워버리고 성경을 들여다보면은 이것을 통해서 받았을 때는 뭔가 받는 것 같았는데 이것을 치워버리고나면 성경과 가까이 안다가가는 것입니다. 무슨말씀인지 이해가가십니까.
여러분들에게 내가 궁금한 것이 그것입니다. 뭐냐하면은 1주일이면은 설교를 다른 것 다 그만둔다고 치더라도 4번만 듣는다고쳐요. 그러면은 1년이면은 200번 정도를 듣는데 10년이면은 2000번입니다. 20년이면 4000번이고 30년이면 6000번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무엇을 다루고 있던지간에 못알아듣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평범한 상식으로 거의 반이상 그래도 내용은 이해가 되는 어떤 주제가 쓰여진 책을 가지고 6000번정도의 강의를 했다고 그러면은 이책이 무슨책이든지 그 내용에 대해서 거의 상당한 식견과 지식을 가져야되는 것이 정상아니겠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되는 가장 커다란이유는 무슨 말씀이냐하면은 그 설교나 가르침은 친근해지는데 그것과 아무리 친근해져도 내가 성경과 친근해지지 않는다면은 그것은 문제가 있는것입니다. 아까같은 원리에서 말이죠. 아까같은 성경에서 원리가 나오고 다른데서도 나와서 이것이 이질적인 때에는 이것을 치워버리면은 성경이 눈에 안들어오는 것입니다. 한번의 설교로 성경 전체에 대해서 눈을 확 뜨게끔 그렇게 해줄수는 없을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하나는 뭐냐하면은 성경자체속에 흐르고 있는 주된 중심적인 뼈대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기 때문에 성경을 가르치는 가르침이나. 설교나 모든 것에 있어서 중심이 여기에 성경 전체에서 이야기하는 중심과 여기에서 중심이 일치를 해야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작은 것을 맛보았을 때 이것을 통해서 깨닫고 치우면 성경을 대했을 때 성경을 보는눈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무슨얘기인지 아세요.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없이 윤리적이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가르침이나. 설교에 익숙해지면은 성경과는 점점 거리가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가 성경의 중심인것처럼 설교와 가르침에 있어서도 중심이어야하고 삶에 있어서도 그리스도 예수가 중심이어야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신앙적인 가치를 위해서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면서 내가 죽어야하리라. 할 때에 그 동기가 그리스도가 아니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내가 내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할것입니다. 아니 말도안되지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수있느냐. 내어줄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이도 그럴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 철저하게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 그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은 사랑없이도 얼마든지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습니다.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얼만든지 그런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깊이 배울려고 애를써야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여러분들을 가르쳐주는데 예수에 대해서 거의 가르쳐주지 않고 세상에 대해서만 많이 가르쳐주면 일단은 그 가르침에 대해서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가르침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2장에 기록된바와 같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래서 설교를 통해서, 성경읽기를 통해서, 구역의 공과를 통해서, 나보다 신앙이 좋은 사람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배울려고 애를쓰는 것이 뭐냐하면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것이어야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제 좀 수준이 낮은 반문이기는 하지만은 이런식으로 질문을 할수있잖습니까. 목사님, 아니 이렇게 살아가다가 신앙의 선배들에게 교회생활에 대해서 물을수 있고, 그 다음에 도덕적인 판단에 대해서도 물을수 있고, 영적인 생활에 대해서도 물을수 있는데 그 때 내가 알고싶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 때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그것을 내가 알고싶은데 그래서 그런것들을 배우는데 그러면 그런 것들도 잘못된것입니까. 그런것도 있고 또 하나는 뭐 목사님 설교하는 것도 보니까. 항상 그리스도 예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던데요. 어떤 때보면은 미움에 대해서 용서에 대해서도 말하기도 하고, 또 기도에 대해서도 이야기도하고, 뭐 외식하는 삶에 대해서도, 심지어는 가족의 사랑이라든지 이런것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말하는데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의 증언이 아니면은 설교일수가 없다. 그렇게까지 말할수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까지 기대할수 있습니까. 거기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뭐냐하면은 적용은 다를수 있는데 그것을 끌어내오는 중심적인 감화의 원천이 성경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 예수여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말이죠. 너희가 왜 싸우느냐? 마음을 하나로 합해라. 왜 그렇게 싸워가지고 세상사람들이 너희들보고 무엇이라고 하겠느냐. 예수믿는 사람들이 왜 그것밖에 못하느냐. 이런식으로 다짜고짜 그렇게 심지어는 그러고도 너희들이 말이지 사람이라고 할수있느냐. 이런식으로 다짜고짜 그들을 어떤 윤리적인 교훈으로 데려가는 법은 없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무슨일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하여튼 무슨일이든지 너희들이 마음을 합하고 그렇게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더 낮게여기고 그렇게 하나되라하는 권면을하면서 뭐라그래요.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 에베소서 5장에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생축과 제물로 드리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도 그를 본받으라. 계속나옵니다. 그게 결국은 뭐냐하면은 모든 아름다운 도덕적인 교훈, 모든 아름다운 단정한 모든 교훈들, 거룩한 삶을 살게하는 모든 교훈들이 결국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그 지식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각도를 가지고 사도바울의 서신을 읽어보세요. 특히 사도바울의 서신을 읽어보세요. 사도바울뿐만 아니라. 서신서는 다 마찬가지인데 그러면 기가막히게 풀립니다. 그 중심에 항상 뭐가 있느냐하면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감화, 그분의 인격에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기쁨, 그리고 그분의 인격과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많이 알고 싶어하는 갈망, 이것이 배우는 자로서의 사도바울 속에 있었던 간절한 열망이었습니다. 성경이 이 열망을 체워준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러해야만 했습니다. 아! 내가 이 가르침을 받으면서 진짜 장성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섭취하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이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죠.
다이어트 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식품이 대게 어묵, 그 다음에 시래기, 그런거 아닙니까. 그거왜요. 영양학적으로 시래기 같은 것은 한사발씩 먹어도 변만 굵게 나올뿐이지 영양이 남지를 않습니가. 거의. 간단합니다. 제가 몸무게를 줄일 때 식사를 해봐서 아는데 저녁때 밥먹으면 안좋다. 그렀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야채는 괜찮습니다. 순 야채만 해서 거기에다가 간장만 끼얹어서 먹으면 제가 몇번 실험했습니다. 배가 뻥뻥하도록 먹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뛸것같습니다. 오히려 아침되면은 그것이 소화가되면서 오전시간에 굵은 것을 배설해주거든요. 그러니까 그 밑에 묵었던 것까지 쫙 내려오면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에 튀김이나 닭고기 이런 종류를 같다가 그렇게 배가 뻥뻥하도록 먹고자면은 아침에 에누리 없습니다. 막 견딜수 없는 두통과 연탄가스 먹은 것 같은 통증이 이 속에서 음식물이 썩으면서 그래가지고 이 가스가 혈관속으로 용해되어서 들어가가지고 뇌 활동을 지장을 주는 것입니다. 아주 불쾌한 아침을 맞이하게됩니다.
보세요. 비유가 적적할지는 모르겠지만은 아무리 많이 들으면 뭐합니까. 아무리 열심히 배우면 뭐합니까. 그래서 영양가가 별로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조금들어가있습니다. 코딱지만은 조금, 그리고 대부분이 전부다 다 아주 감동적이기는 하고 뭔가 우리에게 삶에 있어서 지혜를 주기는 하지만은 그러나 가르침의 소재라기 보다는 엣세이의 소재로 적합한 그런 이야기들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것들을 사람들이 참 좋아합니다. 왜그러느냐하면은 그리스도가 많이 들어가면은 너무 진하데요. 그래서 먹기가 좀 부담스러워 진다는 것입니다. 그럴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그 속에 많이 들어가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결국은 무엇입니까? 너 죄인이야. 너 회개했어? 너 회개안하면 너 가는데는 한군데밖에없어. 너진짜 변화될래 안될래. 너가 날 사랑해. 안 사랑해. 너 참된 신자냐 가짜 신자냐. 너 하나님 사랑하냐. 안하냐. 그사랑이 진짜냐. 가짜냐. 그 사랑의 순도가 얼마나되냐. 예수님이 너를 사랑하신 것 기억하냐. 감동하냐 안하냐. 왜 안하냐. 예수님이 너를 위해서 죽으셨는데 너는 감동도 안하는데 그게 인간이냐. 이런 식으로 복음을 끊임없이 끊임없이 우리를 파해치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 그 속에는 강한 능력과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논리도 정연하고 그리고 깨끗한 삶을 살라고하는 결단의 촉구도 아주 깍듯하고 모든 것들이 딱 단정하고 딱 다릅니다. 그런데 그 속에 그리스도가 거의 없거나. 양념처럼 약간 들어갔다면은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수 없습니다. 여러분 감동이라는 것이 얼마나 잘밀려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저는 요즘들은 좀 덜한데 옛날에 영화구경 가면은 왜 이렇게 박수치는 습관들이 있었지않습니까. 주인공이 막 달려간다. 그러면 막 박수치는 생각이 전혀 안나시는 모양인데 막 박수를 칩니다. 얼마나 감동을 받았으면 박수를 치겠습니까. 요즘은 아무도 박수치는 사람없습니다. 아무리 잘해도. 그런 감동입니다. 그런 것 보고 감동을 느껴서 막박수치는데 그게 뭐가 남는게있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우리 자신을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쳐서 우리를 새사람되게끔 만듦으로서 우리의 영혼에 참된 변화가 일어나면은 그 파장이 우리의 정서에 와 닫는 것입니다. 그 파장이 우리의 정서에 와 닫아서 우리의 정서가 막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뜨거운 감격도 흐르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어떤 감격하고 그러는 그 정서는 반드시 우리의 영혼 깊은 곳을 두들겨 부수고 고칠때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텔레비젼을 보면서 가슴이 찡하면서 눈물이 핑돌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이 없으면 그거 어디 인간입니까. 목석이지. 그렇잖습니까. 그런 것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르침 속에 그리스도 예수가 들어가 있지를 않으면은 감동은 우리에게 줄수 있을지는 모르지만은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우리의 영혼은 고칠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배우도록 간절히 사모해야합니다.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간절히 알기 원하네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원하네
그래서 제가 아주 실제적인 제안을할께요. 어디 사경회시간에 제가 시간이 없어서 못했는데 자신의 영혼의 참된 변화에 대해서 지리멸렬하다고 느끼는 분들있죠. 그런 분들은 모든 신경을 좀 잠시 끊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세요. 내가 변화의 근원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더 알기를 원합니다. 내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 가르쳐주시옵소서. 그리고 실재로 그리스도에 관해서 설교를 듣고, 책을 읽고, 성경의 구절을 이해하고 하면서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신가 배우면서 배우는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 예수가 직접 만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세요. 얼마 못가서 여러분 반드시 그분을 만날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전심으로 예수에 대해서 배우기를 원해야합니다.
그러니까. 이 기독교 교육은 언제 다이나마이트 같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느냐하면은 그리스도 예수를 생생하게 만나서 성경의 진리를 깨닫게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예수를 내게 가르쳐주시옵소서. 하고 목말라 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칠 때에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 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됩니다. 한순간의 가르침이 그의 인생 전체의 방향을 바꾸어놓습니다. 바꾸어 놓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대학원다닐 때 방글라데시에서 온 형제가 하나있었는데 한국 여자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자매하고 결혼을 해서 다시 방글라데시로 갔는데 아주 독실한 이슬람교도였습니다. 코란을 3분의2를 다 외웠답니다. 구두점까지 그 열심은. 이교도만도 못해요. 우리는 진짜입니다. 자기네 동네에 코란을 완벽하게 외우는 사람이 여럿있답니다. 여러분 아세요. 이슬람교도들은 대부분이 다 바일얼링규얼합니다. 2개국어를 합니다. 아랍어를 따로 배우는 것입니다. 왜? 코란을 오리지날로 읽기위해서. 평신도들이. 전쟁중에 폭탄이 날아와도 그거 옛날에 기도했잖습니까. 다섯 번씩. 그런 정도의 열심인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기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왜 그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바뀌었습니까. 그리고 인제는 그 동족들로부터 다 따돌림을 받고 그 동족들을 선교하기 위해서 사랑하던 동족들로부터 박해를 각오하고 떠나게 만든 그 중심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이슬람 교도들의 그 낙후된 경제적인 환경 때문에? 아닙니다. 이슬람교도들의 어떤 말하자면은 문맹에 가까운 무지를 계몽하기 위해서? 그게 아닙니다. 이슬람국가에 대한 사랑이나. 충성심 때문에? 아닙니다. 자기에게 학비를 대주는 선교사의 어떤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깨닫고 나니까. 알라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이 참된 가르침이라는 사실도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고나니까 그게 모두 이해가되고 그리고 얼마나 자신들의 과거의 그 신앙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자기 조상이라고 말해도 그것이 얼마나 말하자면은 신앙이 잘못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게된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뭐가 그렇게 해준것입니까? 그렇죠. 예수 그리스도에대한 교훈이 그의 인생을 그렇게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자였고, 그것도 완벽하게, 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어떻게 완벽하게 알수있겠습니까. 그렇지만은 제가 말씀드리지않았습니까. 커다란 잣나무의 잎파리를 하나 따서 씹어보아도잣나무 맛이고 잣을 찢고 거기에서 잎싸귀 하나가 날아와서 그것을 씹어보아도 똑같은 맛입니다. 그래 완성에 있어서는 다르지만은 이게 말하자면은 질적인 일치입니다. 비록 내가 만난 그리스도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자면은 위대한 사람들이 만난 그리스도처럼 그렇게 장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데체 무슨. 몇 년에 선생님 몇 명이나 나오겠습니까. 그렇지만은 나는 작게 만났고 저 사람들은 크게 만났지만은 그러나 둘사이에 질적인 일체감이 있는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것이 가르치는 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사랑도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사랑은 그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표징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기전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으신것입니다. 인격적인 그분과의 만남의 경험없이 어떻게 그분을 인격적으로 사랑할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 것처럼 똑같이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해야합니다. 제가 언젠가 책에도 한번 썻는데 화란에 그 화란태생의로서 아브라함 카이퍼라고 화란 수상까지 지내던분있죠. 그분이 벤자민 워필드 헤르만 바빙크와 함께 세계3대 칼빈주으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원래를 그 당시를 휩쓸고 있었던 합리주의 사고에 깊이 젖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것이 이제 말하자면은 유럽을휩쓴 아주 대중적인 인기를 모은 그런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은 깨어있는 지성인의 상직이 합리주의 사상이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초자연적인 것들을 부인하고말이지. 그런 것을 부인하고나니까 성경에서 설교할수 있는것이라고는 겨우 착하게 살아라는 어떤 그런 윤리적인 공고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당시 대다수의 설교자들이 그랬으니까 그 사람도 이제 ( ? )막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막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당을 걸어나오는데 어느 한 노파가 목사님 손을 꼭잡으면서 목사님, 오늘 설교참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음주에는 십자가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 대해서 내게 설교를 좀해주십니오. 그런데 그 노파 사진까지도 제가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인지 나왔더라고요. 그런데 뭐 그 노파가 한번 한 이야기가 그 대단한 설교자에게 무슨 영향을 미쳤겠습니까. 그 다음주에도 또, 그 다음주에도 또, 똑같이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수없이 이제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할것이 있겠느냐고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이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하기 위해서 성경을 탐고하다가 그 사람이 합리주의를 버리고 하나님 절대주권을 믿는 아주 복음적인 칼빈주의자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변화를 통해서 말하자면은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 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소위 얘기하는 영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모든 복음사역자 중심에 그리스도 예수의 체험이 없는 신령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것은 위험합니다. 가짜입니다. 가짜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위험합니다.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경험을 통하지 않는 신령함이라고 하는 것은 이교적인 것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이름은 가졌지만은 아니란말입니다. 신비중의 최고의 신비는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성육신,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이 오늘도 우리속에 오시는 신비, 그리고 우리와 하나되신 신비, 그리고 우리와 그 연합속에서 우리가 그분안에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신 삶을 살아가게하는 이 비밀, 이것이 가장 커다란 신비라는 사실을 기억을해야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르침을 받을려고 하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배우기를 갈망해야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주님에 대해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배우기를 갈망하야합니다. 뭔가 그분깨로부터 그분에 대해서 비춰주는 어떤 그 빛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기대해야합니다. 그분을 아는 것만큼 우리의 삶이 거룩해지고 우리의 기도가 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지식이 변하고 거룩함에 있어서 중보의 정도가 변화는 것,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신앙입니까? 정말 성경을 사랑하십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그렇게 말할수있습니까? 성경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동반자가 되고있습니까? 성경이 없는 세상 생각할수 없으리만치 성경이 그렇게 사랑스럽고 늘 여러분 가까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성경을 통해서 무슨 가르침을 통해서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배우고자 하는 착한 학생이 되고 있는지 오늘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영원히 영원히 우리들이 배워야할 가장 중요할 주제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의 의는 율법에서 난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난 의라. 그런데 사실 그리스도의 의라고 하는 그리스도 곧 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그렇게 율법을 알기를 원했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알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깨닫고나니까. 말하자면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된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볼수 있는 그 말하자면은 중요한 통로입니다. 그랬는데도 사도바울이 그 다음에 그렇게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 많이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잡았다 함도 아니요.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라.” 그리고 막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려가도 그것에 있어서 진보를 줄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 뭐냐하면은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삶에 있어서 놀라운 진보를 주는 것입니다.
시간은 갔지만은 내가 한가지만 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추상적인 이야기가될까봐. 그러는 것입니다. 보세요. 여러분 일평생을 살아오는데 아! 나는 이제 버림받았어. 나같은 인간을 하나님께서 상대안하실거야. 나는 이제 막가는 인생이야. 그랬던 사람이 무엇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런 양심의 모는 송사를 뿌리치고 아니야. 세상 사람들이 나를 다 손가락질하고 그리고 온 율법이 전부다 일어나서 죽일놈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아니야.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용서받은 정죄함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야.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할 때 그것은 무엇을 통해서 알수있습니까. 그렇게 정죄의식속에 몸부림 치던 사람이 복권을 10억짜리를 맞으면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수 있겠느냐고요. 순간적으로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어! 이것봐 복권 맞았잖아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는 않은거야. 그러나 몇시간 안갈 것입니다. 돈쓰고 나면은 그다음에 다시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나. 그런 생각이 들것입니다. 죽다가 살아났다고 칩시다. 죽다가 살아나도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이구 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다 죽었는데 나를 살리셨구나. 그렇게 생각하지만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아이고 진짜 운이좋았구나. 그렇게 생각이 진전이 안됩니다. 그런데 언제. 죽다 살아난적도 없고 복권이 맞은적도 없고, 돈벼락을 맞은적도 없고, 횡재한 적도 없어도 어때요. 예수님을 만나서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보면서 예수님이 나같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신, 그런 성품을 가지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 십자가에서 흘리는 그 보혈이 자기를 흠뻑 적시는 것을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권이 맞고 죽을고비를 수없이 넘겨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수 없었던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와는 상관도 없는 시대에 일어났던 그 십자가의 죽음의 사건을 통해서 거기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성품을 그것을 깨닫고 경험하는 그 순간에 그 수많은 양심과 율법과 악한 영들의 송사를 뿌리치면서 주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배우기를 사모하는 학생들이 되어야합니다. 학생들이 되어야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간절히 하나님 앞에 우리 목사님이, 우리 구역장이, 우리 선생님이, 우리 어린 아이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잘 가르칠수 있도록 그리고 자기도 알지못하는 분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늘 그 경험 속에서 가르치도록 그것을 위해서 늘 기도해야합니다. 제가 총각집사 때인데 여름성경학도교도 하고 그럴 때인데 제가 이제 설교를 하러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딱 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그 두 강도와 함께 매달리는 장면있지않습니까. 그 때는 신학도 공부하지 않았었는데 설교가 아우러졌겠습니까. 겁이없으니까. 그냥 덜렁 올라갔죠. 그런데 그때 일주일인가를 금식을 하고 그리고 올라가서 그날 인제 그 집회의 마지막날인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성경학교 새벽시간에 성경을 펼찌고 설교를 하는데 그게 진짜 성령의 감화죠. 설교를 하도 못하니까. 주님이 이렇게 보시다가 하도 딱하니까 무엇을 말해야될지를 모르는데 얘들아 예수님이 우리 같이 못된사람을 위해서 강도자식들과 같이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것을 이야기하는데 그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강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박혔어. 그리고 내가 거기에서 막 울었습니다. 울었는데 애들이 선생이 올라가서 설교를 하다가 우니까. 처음에는 애들이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순간 성령께서 강하게 아이들을 감동시키니까 아이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펑펑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이야기 할려고 하느냐하면은 체험하지 않은 사람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설교보다는 체험하고 있는 사람의 투박한 설교가 훨씬 그 영혼에게 그 직면하고 있는 내용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역사합니다. 물론 체험도 하면서 묘사도 그림같으면 아이 그거 누가 싫대요. 그게 더 좋지 그러나 하여튼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들은 항상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속에서 가르쳐야됩니다. 그리고 배우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배우기를 간절히 갈망해야합니다. 설교를 듣던, 공부를 하든 무엇을 하든간에 내가 듣기 원하는 것은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요.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해서 무슨일을 하셨나요. 내가 어떻게 그분을 위해서 그분의 마음에 맞게 살수있을까요. 내게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가르쳐주세요. 간절히 사모해야합니다. 그 사모함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가르침이 올바른 가르침인지 올바르지 않은 가르침인지 여러분들이 아주 쉽게 구분할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 모두가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간절히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서도 보면은 지금 사도바울이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하느니라.” 이때에 이 편지를 받는 이 디모데가 전도하다 만난사람의 그런 상태, 그래서 믿을까 말까하는 회의의 언저리에서 방황하고 있는 젊은이가 아니었습니다. 어리지만은 목회자였습니다. 목회자한테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하면은 성경은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하는 지혜가있다. 그러니까 이 에베소 지방에서 온갖 곤경에 휩싸여서 목회하고 있는 이 목회자인 디모데도 누구에 대해서 더 알아야할 필요가있었습니까? 그렇죠.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더알야할 필요가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훌륭한 목회자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고 할것같으면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뭐 말할 필요가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그렇게 그리스도를 알게해주는 그것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는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가르침은 성경을 토대로 그리고 그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는 거기에 촛점이 맛추어진 교훈이 될 때에 그게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권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알고싶어하는 학생입니다. 내 영혼의 참된 변화를 위해서 성경에 두드러진 진리라고 하는 이 예수 그리스도, 주님 자신에 대해서 내게 가르쳐주시옵소서. 설교를 통해서, 가르침을 통해서, 내가 그 분을 알기를원합니다. 내가 그분을 바로 깨닫기를 원합니다. 내가 그분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그 지식의 숲속으로 하나님 나를 데려가주시옵소서 간절히 사모하면서 기도할 때에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이처럼 가르치는 자들을 통해,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배우기를 갈망해야합니다. 믿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2.성경배우기를 기대하라Ⅱ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下)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신앙의 성장이 없는 사람들, 심지어는 성장은 고사하고 신앙자체가 아예 생기지않는 사람들, 성화는 고사하고 거듭남 조차도 없이 수년간, 혹은 수십년간을 교회다니다가 인생의 날개를 접는 사람들은 매우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 구원받고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충분히 제공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의 심판은 그런 기회를 전혀받지못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크다고 말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도 잘 가르쳐야 되지만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하면서 그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됩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여러분 교회에 다녀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지난시간에 말씀드린 것이 뭐냐하면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이 가르침의 관계를 통해서 이 성경을 배우기를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배우고 성경과 친숙해지고, 성경대로 사는 것들을 배우기를 기대해야합니다. 성경을 배우기를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 속에서 다루고 있는 가장 앞도적인 큰 주제가 무엇이라고요? 그렇죠.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지난시간에 성경을 배운다고 하는데 왜 많은 사람들이 성경 공부를 수없이 하러다니면서도 신앙에 있어서 진보가 없거가 심지어 아주 심한경우에는 성경을 그렇게 많이 배웠는대도 거듭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질수 있는가. 거기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그것은 성경이 다루고 있는 압도적인 주제인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를 못했기 때문에 성경을 많이 알아도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혹은 그 구원 안에서 성화되어가는 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신 진정한 목적을 실현하지 못하는 것이라. 말씀을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지난시간에 아주 상세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아주 결정적으로 중요한 내용이니까. 지난설교에 못오신 분들은 오늘 문서선교부 가다가 한 20개 복사해놓으라 그랬으니까. 가서 하나씩 가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가르침, 그리스도 예수를 배우기를 원하라. 그러면서 제가 지난시간에 아주 적절한 비유를 들었는데 영화에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영화를 본다면은 그럴수도 없지만은 본다면은 아마 굉장히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될것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보고 그 영화에서 주인공 하나가 어떻게 되는지만 계속 쫓아가보면은 영화 줄거리는 꾀게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 원리에 의해서 성경이 다루고 있는 중심적인 주제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증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는 커다란 산맥을 더듬어가면은 그 산맥이 있고 산맥아래 작은 산들이 있고, 산이 아래로 깔아지면서 들판들이 생겨난 것 처럼 아주 정확한 비유입니다. 산맥이 있으면은 산이 달려가고 그 산맥이 달려가면서 아래로 작은 산들을 만들지않습니까. 산이 가라앉으면서 펑퍼짐하게 되면서 언덕들이 나오고, 언덕이 주저앉으면서 들판들이 나오지않습니까. 그리고 그 산맥의 줄기를 타고 강들이 흘러가지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가 만약에 그 산맥의 원줄기 달음질치는 그 산맥의 거대한 봉우리의 연결이라고 한다면은 성경은 거기로부터 쭉 펼쳐져서 산아래까지 펼쳐진 그 산과 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맥을 쭉 누비면은 그 산하를 다누비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산하를 누비지못하고 이골짜기 저골짜기에 가서 밥이나 해먹고 삼겹살이나 구워먹고 와가지고는 그 산이 어떻게 산맥이 어떻게 산을 형성하고 한 나라 국토의 뼈대가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강이 그 산맥에서 발원이 되는지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주인공을 모르고 영화를 보는것과 같은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배우기를 기대하되 그 성경을 통해서 이제 강론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누구를 배우기를 기대해야 하느냐하면은 누구?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기를 기대해야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겨울사경회는 그 여러분들의 어떤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 아주 결정적인 설교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을 지금 전보다 모두 풀어서 지금 제가 급한데로 책을 낼때까지는 시간이 걸리니까 이렇게 바인더로 해가지고 이렇게 읽어볼수 있는 강의안으로라도 만들려고 지금 작업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겨울사경회때 테입을 저녁 것을 사서 꼼꼼히 다시 들어보세요. 그러면 아마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극복할수 없었던 여러분들의 영적생활에 그 성장안되는 그 질병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깊이 깨닫게 될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배우기를 갈망해야합니다. 기대해야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가져야할 중요한 자격이 뭐냐하면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체험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거나 가르치는데 있어서 아주 결정적인 자격입니다. 그가 사도바울이 구약성경을 얼마나 잘 알고있었습니까. 종교지도자의 길을 걸어갈려고 하는 사람인데, 단지 그의 지식이 그것뿐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은 그것으 쓰레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 그 구약의 지식 한가운데를 달음질치고 있는 산맥을 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구약에 나오는 그 수많은 가르침들이 어떤 것이 중요하고 어떤 것이 중요하지 않은지가 제자리를 다 잡아가면서 말하자면은 하나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식의 체계를 갖게됩니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지적인 자질들이 거기에 가미가되었습니다. 그렇지만은 하여튼 그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것입니다.
올라오기 전에도 제가 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설교자라는 책을 읽다가 올라 왔는데 거기에서 시종일관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그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체험이 어떻게 설교자의 선포에, 삶에, 사고에, 사상에 영향을 주는가 하는 문제들을 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책들도 여러분들의 자신에 어떤 영적인 돌파구를 찾는데 있어서 어떤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결국 영적 생활의 원리라고 하는 것은 설교자나 설교를 듣는 사람이나 목자나 평신도나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면 목사처럼 충만해지고 목사도 기도안하면 아주 나쁜 평신도처럼 가라앉아서 침체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제발 부탁을 드리는데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애를쓰고 아무리해도 소용이없습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핵심적인 그 문제를 붙들고 거기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추구하면서 거기에 대해서 무엇인가 정답을 찾으려고 하는 구도의 정신을 가져야됩니다. 그래야지 여러분들의 영적인 삶에 변화기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배우기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을 통해서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배우기를 사모해야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가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되는가 하는 지식들은 가르침을 통해서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가르치는 것을 내가 경험하는 것은 이것은 또 가르치는 사람만의 영역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자기 자신이 그 가르침을 토대로해서 끊임없이 그 그리스도 예수를 추구하며 경험해야될 또다른 영적인 과제입니다. 그렇지만 하여튼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가르치는 자로부터 성경을 배우기를 기대해야합니다. 다른 세속적인 지식이나. 이런 것들이 아니라. 성경을 배우기를 기대하라. 그래서 가르치는 자의 중요한 자격중의 또하나는 성경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어야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배우기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하면은 무슨 요소가나오죠. 성경은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무엇을 이르게한다. 믿음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기대해야할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은 성경을 배우기를 기대해야하는데 그 성경을 통해서 믿음을 갖게되기를 기대해야합니다. 우리는 흔히 성경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다보면은 사람들이 논리를 고추새우면서 그러면서 따지고 들면서 말하자면은 논쟁을 하는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그 논쟁을 하는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되기는 굉장히 힘듭니다. 성경에 있는 진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거기에 부복하는 마음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열리는 계시이지 논리의 칼을 가지고 싸우자고 덤벼드는 사람들에게 열리는 계시가 아닙니다. 그것을 기억을해야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슨 김영옥씨가 요한복음 주석을 쓰겠다고 그러는데 요한복음이 절도할려고 그러시죠. 써놓으면 굉장히 이상한 책이 될것입니다. 그런식의 주석은 통일교회 신자들도 다 썼습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구라파 가면은 교회 안 다니는 신학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믿는 신학자,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믿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밥을 벌어먹고 삽니다. 아이러니죠. 그죠. 그렇지만 하여튼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쓰면쓰지 왜 못쓰겠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그렇게 따지면은 나는뭐 금강경 주석을 못쓰겠습니까. 쓰면쓰지. 그런데 그게 얼마나 웃기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죠. 하나님의 계시는 그렇게 해서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은 객관적인 논리의 칼을 가지고 찢을려고 덤벼드는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게 닫쳐진 책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깊이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신뢰하면서 정결하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내게 말씀하시든지 내가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살겠습니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린아이에게도 이 하나님의 말씀이 놀랍게 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해야합니다.
그런데 이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기대해야할 것은 뭐냐하면은 성경을 배움으로서 자신이 믿음을 갖게되기를 기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에 이르기를 기대해야 하고. 그죠. 그리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은 더 훌륭한 믿음을 갖게되기를 기대하면서 가르침을 받아야합니다. 우리교회는 좀 낮다고 할수있을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오늘날의 소위 얘기하는 그룹성경 공부라는 것이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인 사람입니다. 제가 젊은이들 속에서 경험한 그룹성경 공부들을 보면은 성경을 배운다.라기 보다는 서로의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가치가 없는 일은 아닙니다.만은 그러나 잘생각해보세요. 성경말씀에대한 깨달음의 깊이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삶을 나누면 삶을 나누는 것을 토대로 해서 더 깊은 성경의 통찰로 나아갈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나 기본적으로 성경에 대한 사랑과 깨달음이 아주 박약한 사람들이 모여서 삶을 나눈다 그래봐야. 무엇이 거기에서 나오겠습니까. 하나의 말하자면은 마실가 가지고 객담늘어놓은 것밖에 더되겠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그러니까. 정말 신앙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사실 그런 분위기를 견딜수가 없습니다. 엊그제도 저에게 인터넷에 이메일로 편지가 하나왔는데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눈을뜨고 나니까. 도저히 참기힘든 것이 교회의 청년부 성경공부라는 것입니다. 예배 끝나고나서 모여앉아서 성경은 뭐 배우는 것은 쥐꼬리만큼 배우고 이얘기 저얘기 일주일동안 자기 살았던 신변잡기들 한참 들어놓고 떡볶기나 먹고 집에가는 것인데 자기는 정말 견딜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알고싶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알고 깨닫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자세를 가져야되는 것입니다.
그래 우리는 믿음을 갖게되기를 기대해야합니다. 설교를 듣든지, 성경을 공부하든지, 무엇을하든지 간에 빼놓지 말아야할 기도제목은 내가 이러한 가르침의 관계를 통해서 더 좋은 믿음을 갖게되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해야하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이 도대체 무엇이냐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그러니까 페이스인 지져스 크라이스트입니다. 직역을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주 엄격하게 말하면은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안에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인 ‘안에’ 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그 믿음의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랍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럴 때에 그 빌리브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인 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라고 할 때에 그 전치사가 예수님이 있고 그 안에 무슨 믿음이 요만한 것이 있는 그런 개념이아니라.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안에라고 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과 대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은,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제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이나.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분이 믿음의 위대함을 설명하는 가운데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믿음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수있습니까. 당신이 이발소에 가서 칼을든 면도사에게 목을 내어밀수 있는 것, 믿음이 시킨 것 아닙니까. 믿음이 어떻게 그렇게 목을 맡길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수많은 비행기가 공중에서 떨어지는데 당신은 오들도 비행기표를 끊었습니다. 그래도 당신 비행기는 떨어지지 않을것이라 하고 믿음때문이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풀면서 믿음이 없이는 우리는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그러더라고요. 그러면 그런 믿음으로 표샀다가. 그날 비행기 떨어진 사람은 어떻게됩니까.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확률의 문제입니다. 무슨말씀인지 아십니까. 교통사고 나는 것을 보면은 자동차키 집어던지고 싶지않습니까. 비참하게 사고나는 것을 보면은 그래도 사고 안나고 목적지까지 타고 다니다가 폐차하는 차가 박치기해서 파산해서 사람죽여버린 차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나는 거기에 안속하겠지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행기 떨어지는 비행기도 있는데 목적지 도착하는 비행기가 그래도 훨씬더 많으니까 그럴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타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확률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무슨이야기입니까. 그런데 비행기가 어느날 4대뜨면은 3대떨어지고 한 대만 도착한다 그러면은 타겠습니까. 타겠느냐고요. 나부터도 안타지요. 안가고말지. 왜 가겠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이발소에 들어갔는데 목을 내밀면은 두사람중에 한사람이 목을 배었다. 그러면은 누가 그것을 면도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확률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자기 암시를 하면서 믿는 것, 그것은 아닙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믿음을 촉진하기 위해서 병이들어서 피골이 상접한 사람이 거울을 갖다놓고 너는 났는다. 너는 났는다. 매일 그랬더니 그랬더니 나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성경에서 가르치는 믿음입니까. 되지도않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믿음은 믿음인데 성경이 그런 믿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한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 대한 믿음입니까. 그렇죠. 여러분들은 참 탁월합니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하나를 어쩜 그렇게 잘아는지 모릅니다. 깨닫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신앙’ 혹은 ‘믿음’이라고 하는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행하신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신앙입니다. 다시 말할께요. 신약 성경에서 ‘믿음’ ‘신앙’ 그러는 것은 아무거나 되리라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 이야기하는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에대한 신앙입니다. 이것이 신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의 뼈대입니다. 그것을, 그런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신앙 때문에 나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 이것이 신약이 이야기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 없이는 그런 하나님의 은총없이는 내가 살수없습니다.라고 하는 그 고백이 나오는 것, 그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배우기를 기대해야할 첫 번째 것이 그리스도이고 그 다음에 두 번재 것이 뭐냐하면은 신앙입니다. 신앙을 기대해야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이 신앙이 생겨날 것, 혹은 자신의 신앙이 더 강해질 것을 기대해야합니다. 그리고 실재로 그러한 성장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두 번째로 한단계 더 나아가서 생각을 해봅시다. 믿음의 대상이 있는데 그리스도 예수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전적인 신뢰다. 이렇게 정의를 하고나면 이해가됩니다. 그러면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에대한 전적인 신뢰가 믿음이라고 할것같으면은 그 믿음이 가르침의 관계를 통해서 자란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런 신뢰에도 말하자면은 정도가 있을 것아닙니까. 그런 정도에 있어서도 온전한 신뢰를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로역정에 보면은 믿음씨가 출발을 할 때에 전도자의 이야기를 듣고 출발을 할대에 따라오는 사람이 둘이있었습니다. 약함씨와 고집씨입니다. 둘이쫓아오는데 그런데 고집씨는 도로 가버리고 아 나는 거기 못간다. 그러면서 좁은 문으로 가라그러는데 난 거기 안간다 그러면서 가고, 약함씨는 계속 쫓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려움을 만나니까 약함씨는 속히 뒤로돌아 가버립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약함이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데 그 믿음이 아주 여린 믿음입니다. 그러니까는 핍박이 오거나 환란이 오거나 어려움이 오면은 금방 사라져버리는 일시적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믿음이 여기에서 가르침의 관계를 통해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의 그런 연약한 믿음이 점점 강성하게 자라서 그래서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뿐만아니라. 지속적인 성화의 삶으로 이어질수 있는 풍성하고 강력한 신앙을 갖게되기를 가르침의 관계를 통해서 기대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냥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출석생활을 제가 이야기를 하는데 예배만 그렇게하면은 안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것뿐만 아니라. 구역에서 성경을 공부한다든지, 새가족반 성경공부를 한다든지,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는다든지 할 때에도 동일하게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구역출석,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성경읽기,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설교듣기, 그런 것은 다 나쁜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 척결해야될 것들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여러분들이 새가족반을 성경공부를 할 때에 정말 내가 이 공부를 통해서 더 좋은 믿음을 갖게되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모임에 참석하면은 여러분들의 믿음이 훨씬더 좋아지리라고 생각을합니다. 그냥 성경공부 교제끼고 아 이교회는 왜 교인되기가 이렇게 힘드나 투덜되면서 왔다갔다.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교제값만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은 안됩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설교를 듣고 있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단순한 지적인 만족이나. 기독교신앙에 대한 전문가의 한 견해를 청취해보고자 여기 앉아있는 것이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동시에 또한 교육적인 측면에서 보면은 내가 여기에서 이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서 이 예배드림을 통해서 내 믿음이 강화될 것이다. 약함씨와 같이 신앙의 길에서 돌아설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노라면 내 신앙이 강해질 것이고 나는 또한 그렇게 아주 강하고 훌륭한 신앙을 갖고싶습니다. 그런 갈망들이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어린 아이에게도 그것을 가르쳐야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야합니다.
어떤 과업을 수행할 때 왜 그것을 행하는지를 아는 사람과 왜 그것을 행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그 과업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는 엄청나게 다른것입니다. 사명감은 나중의문제고 그것을 알고있냐. 모르고 있느냐는 엄청나게 다른것입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기찻길 옆에서 살았습니다. 오막살이는 아니었지만은 오막살이 비슷한데서 살았습니다. 그래 나는 어렸을때는 기차가 붕 달려가다가 길이 이렇게 두 갈래로 갈라지면은 카브를 트는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헨들을 그랬더니 그것이 아니라. 기차는 그냥 달려갈 뿐입니다. 기관사가 고작할수 있는 것은 킥하고 그리고 한번 서는 것 뿐입니다. 그것은 누가 하느냐하면은 이 기관사들이 나와가지고 스케줄에 의해서 이번오는 차는 부산으로 보내야되겠구나. 그러면은 이것을 쫙 잡아당겨서 철커덩하고 바꾸는 것입니다. 요즘이야 다 오토로되었겠지만은 그때는 손으로 잡아당겼습니다. 눈보라가 쌩쌩부는 날에도 나와가지고 후레쉬 들고 나와서 잡아당긴 것입니다. 그러면은 이쪽으로 부쳐놓으면은 쭉오다가 이쪽차는 부산으로 가고 이쪽차는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그래 이거 하는 사람이 이것 하나를 하는것에 따라서 1000여명을 태운 이 열차가 부산으로 갈수도 있고 저쪽으로 갈수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면은 이것 함부로 못할 것 아닙니가. 졸다가 한날 안하면은, 그거 아무러면 어때 막대기 하나 왔다 갔다. 하는 것인데. 그러면은 어떻게되는 것입니까. 그것 졸다가 딴짓해가지고 앞에 멀쩡이 있는데 길을 안바꿔 놓은것입니다. 그래 뒤차는 길이 열려있는줄 알고 전속력으로 달려서 들이받는 사고가 몇 년에 한번씩 일어납니다. 수십명씩 죽습니다.)
그러니까는 자신의 과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으면은 이것 하나가 천여명의 생명을 좌우한다는 것을 알면 실수못합니다. 알아도 실수를 하는데 그러니까 가르치는 사람들은 먼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하면서 가르침을 받아야 될것인가에 대해서 분명하게 생각해야합니다. 그래요. 말씀의 은혜안에 거합니다. 은혜의 말씀안에 거하고 말씀안에서 견고해지고 싶고, 말씀안에서 성장학고 싶고, 말씀안에서 복을받고 싶고, 그러면은 금년에는 하나님의 말씀과함께 새출발을 하자. 좋다. 이얘입니다. 어떻게 말씀과함께 새출발하느냐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신들이 어떻 태도로 설교를 듣고 어떤 태도로 가르침을 받고 어떤 태도로 성경을 배우고 읽고야 할지에대한 분명한 의식이 없이 어떻게 말씀과 함게 한해를 살아가야겠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이 자라기를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1년 2년을 설교를 듣고 그렇게 많은 성경공부를 하고 가르침을 받았는데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고 할것같으면은 그러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영양가가 없든지 아니면은 가르침은 무지하게 많은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든가 아니면은 그 가르침은 훌륭한데 가르침을 받는 여러분들이 기대하는 바 자체가 완전히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신앙이 자랄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잃어버리든가 아니면은 양쪽이 다 문제가 있어서 형편없는 사람들인가. 어떤쪽으로든지 간에 그 불행한 상황은 여러분 자신들의 몫입니다. 불행한 상황은 여러분 자신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들의 영혼을 책임지겠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여러분 자신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러나 여러분 자신의 것이기도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 여러분 자신안에 있는 영혼의 운명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뇌하지 않으면은 누가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영혼의 운명에 대해서 목사가 고되하는 것만으로 충분하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들의 자신의 영혼의 상태와 염려에 대해서 고뇌하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여러분 자신이 고뇌해야합니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그 믿음씨가 어떻게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결별하면서 천로역정을 떠나게되었습니까. 전도자가 와서 자기를 가르쳐주기 전에 그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막 고뇌하는 것입니다. 온 가족들 아무도 따라오지 않아도 버려두고 구도의 길을 떠나는것입니다. 황소 뒷발질에 우연히 날아온 돌맹이 하나맞고 개구리가 쓰러지는 것같이 그 신앙에 있어서 어떤 요행심을 기대하면서 그저 용한교회, 설교잘하는 목사, 능력있는 기도원, 찾아 다니는 사람들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속에 있는 그 믿음이 성장하지않고 있다면은 여러분들이 정말 성경의 가르침을 받고있는가. 누구를 통해서든지 성경을 가르침을 받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성경의 진리를 정말 배우기를 원하고있는가. 그것을 생각하세요. 누가 열린교회에 와서 그러더래요. 되게 힘들다. 새가족반 하면서 코피가 났다는 것입니다. 교리만하면서 우황 청심환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하면은 어떻게 신자되는 것이 이렇게 힘드냐는 것이었습니다 약간의 반발심이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게 힘들어서 예수를 어떻게 믿겠느냐.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렇게 힘들이고 예수를 믿지않으니까 세상이 이꼬라지라고. 끊임없이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살피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더 온전한 믿음을 갖게되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믿음에서 자라나가고 있다라고 하는 증거는 무엇인지아세요. 배포가 커지는 것과 신앙이 좋아지는 것을 혼돈하면 안됩니다. 중요한것입니다. 배포가 커지는 것과 배포는 나쁜단어가 아닙니다. 배포가 커지는 것과 그 다음에 신앙이 자라는 것을 혼돈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신앙아닙니다. 신앙이라는 미명하에 아주 커다란 일들을 펑펑터트리는데 그 동기자체는 뭔가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이고 진실한 사랑, 그런것들이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하나님도 꼼짝못한다.라고 라는 사상이 우리에게 유행하고 있지않습니까. 좀 너무 심했나요. 내가 아주 꽉 믿어버리면 하나님이 꼼짝못하신다. 그 믿음 앞에서는 하나님도 항복하신다. 그런데 사실 그런 경우에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그것은 배포입니다. 배포가 커지는 것입니다. 쉰소리 뻥뻥치는 것 있지않습니까. 그러니까 왜 그런것들을 왜 혼돈합니까. 아 지금 굉장히 중요하고 실재적인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게 혼돈합니까.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그렇게 믿음이라는 미명하에 배포가 확커진 사람이 쉰소리 뻥뻥칠때에 여러분 자신이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정죄되는 것 같으면서 준욱이 드는 것을 경험해본적이 없습니까? 있죠. 나는 많습니다. 되지도 않는 이야기하면서 아, 어떻게 그게 그렇게 되냐. 그러면은 아 믿음이 하나도 없어가지고 말이지. 천하가 다 주님의 것이고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수 있는데. 하나님이 무슨 사고친애들 해결사임니까. 뒤처리반입니까. 그렇게되는 경우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라고 말하면은 아예 아무말도 못하지않습니까. 그게아닙니다. 뭐냐하면은 그런 혼란은 어디에서 오느냐하면은 참된 신앙과 배포가 커지는 것을 혼돈하는 것은 어디에서 오느냐하면은 이 믿음의 대상이 자기가 하고싶은 일이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의 소원이 믿음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고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행하신 일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전적인 신뢰여야됩니다. 그것이 여기에서 페이스 인 지져스 카이스트라고 기록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이유입니다. 그것을 기억을해야합니다. 나는 얼마나 믿음이라고 하는 미명하에 벌어진 웃지못할 황당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좋은 믿음을 갖기를 갈망해야합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믿음의 내용은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행하신 일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전적인 신뢰여야합니다. 보세요. 지금 성경, 그다음에 그리스도, 그다음에 믿음까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모두 그 삼격형에 있어서 그 중심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을 기억을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했느냐하면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하느니라.“ 그랬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여기에서 이제 도데체 구원이 도데체 무엇이냐. 그게문제입니다. 구원이 무엇이냐. 사실 성경이 구원을 이야기할 때 아주 다양하게 이야기합니다. 특히 구약에서는 굉장한 어려움과 위험에 처해져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막 구출해주시는 것, 이것은 구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제 신약에 들어와서는 구원이 그런쪽보다는 구원의 영적인 측면이 육적인 측면보다 훨씬더 많이 강조가됩니다. 신약에 와서 물론 구약에서도 그런 것이 안나오는 것은 아니지만은 더더욱 신약에서는 그런것들이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할 때에 구원은 이제
첫째는 뭐냐하면은 아쥐 쉽게 이야기하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에는 죄인이었던 사람이 용서를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권세를 얻게되는 것. 그것은 즉각적인 구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구원을 그것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또하나 성화의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칭의의 구원, 의롭다 칭함을 받는 이 구원은 즉각적이지만은 성화의 구원은 점진적입니다. 그리고 이 두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나누어지는 것이아닙니다. 그래 우리들이 흔히 구원을 이야기 할때에 우리가 어렸을때에 목사님께 늘 질문했던 것이 뭐냐하면은 믿으면 구원을 얻나요. 그게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믿기만 하면은 구원을 얻는다 그랬더니 그러면은 죽기 직전에 꼴까닥 하기전에 주님을 믿은 사람들도 구원을 받나요. 이런 식으로 질문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은 그렇다고 대답을합니다. 이것을 확 확대시켜서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은 확실하게 주님을 믿고 영접한 후에 성화에 있어서는 즉 삶에 있어서는 거의 불신앙의 사람인 것처럼 살아가도 구원은 받는구나 이런 식으로 논리를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식의 질문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진사람들은 대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진짜 구원을 받아서 그 마음속에 하나님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에 대한 깊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교제를 소유하게된 생명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식의 질문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운 질문인지를 압니다. 그래 말이면은 다하는게 아니지않습니다. 질문자체가 매주 욕이될 경우가 있습니다. (옛날에 고등학교 다닐때인데 영어선생님이신데 키가좀 작으셨습니다. 그런데 아주 실력있고 아주 활기차고 그러셨는데 그런데 선생님이 여름방학때가 되니까 니네들 방할 때 놀지말고 캠핑을가라. 그게 참 좋다. 그랬더니 가많히 있으면될 것을 앞에 있는 아이가 손을 들더니 선생님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뭐냐. 탁 일어나던. 캠핑많이 다니면 키커져요. 그러더니 좀 있다가 선생님이 좋은질문 했으니까 너 나와봐라. 나오니까. 막 코피터지게 맞았습니다. 그때는 또 마음대로 때리던 때였습니다. 개패듯 팼습니다. 그리고 나서 정신없이 때리고 나서 들어가라. 들어가고 나서 니가 맞은 이유를 이제 설명하겠다. 그게뭐냐 캠핑이 키크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는지를 알면서 키작은 나에게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하기를 내가 하는 모든 기도가 기도가 될수 있다고 생각하지말자. 입만벌리면 그게 모든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자.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맞춰서 기도를 해야지 그것이 기도이지. 그냥 쏟아만 놓고 간절한 마음만 싣는다고 해서 모두 기도가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질문할 때 하나님이 듣고 계시다고요. 그것을 염두해두고 질문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상하시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기껏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원해 주겠다고 초청해주었더니 안믿고 계속 탱탱거리고 놀다가 마지막에 가서 아멘.하고 구원받을수 있는 길은 없습니까. 그러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아야된다면 충분히 지옥에 가시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은 그렇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성화의 구원입니다. 이 성화는 인격적인면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삶의 측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선한일들을 주님 사랑하는 동기로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구원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이 두가지를 모두 내포한다고 생각합니다. 두가지 다. 그러니까 이것도 사실입니다. 성경이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의 상태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만들어준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면서도 우리가 여기에서 좀 이해가 되지않는부분이 이 편지를 받을 때 디모데는 목회자였는데 설마 지금 사도바울이 제가 목사가 되기는 했지만은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을걸, 그리고 지금 복음을 소개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슨이야기냐하면은 두가지 모두를 내포하는데 16절 이하에 이어지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함. 이모든 것들을 쭉 고려해볼 때에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구원이 둘다 이야기하면서도 이 디모데에 관한 개인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후자에 오히려 무게가 실린것입니다.
그러면서 3장 16절 이하에서 이 성경이 가지고 있는 성화에 있어서의 효능에 대해서 강력하게 변증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이 성화의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는가 하는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즉시 거룩해지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사는것이 성도의 본분이고 그가받은 구원의 진실성을 입증하는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면은 “믿음으로 말미암다 구원에 이르게하는 지혜가 있게한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한다.” 그러는데 히랍어 성경에보면은 구원이 쏘테리아인데 그 앞에서 사용되는 전치사가 에이스인데 인투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뜻이냐하면은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정지된 영역인데 대게 이제 전치사를 사용할때에 이제 인은 삼격전치사이고 에이스는사격 전치사인데 인 그럴때에는 정지개념입니다. 그리고 삼격전치사입니다. 그리고 사격전치사는 이동개념입니다. 다시 말하면은 무슨 뜻이냐하면은 그리스도를 믿는것이다.라고 하는 이것은 하나의 정지된 개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하는 것은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한다. 구원이 있는데 구원속으로 인투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속으로 구원에 이르는데 막 열심히 해서, 말하자면은 그 야구선수가 막 뛰어가다 베이스를 탁 타치하듯이 저기 구원이 있는데 막 가다가 간신히 구원을 탁 건드리면서 이르렀다. 이것이 아니라. 구원이라고 하는 하나의 실재속으로 그것을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그렇게 하도록 지혜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성경이. 이것을 묵상해보면은 얼마나 이 성경의 언어가 정교하고 그림같은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세요. 다시 설명할께요.
구원이라고 하는 실체가 이렇게 있는데 가서 간신히 텃치를하면서 골인. 홈인 그것이 아니라. 구원이라고 하는 그 실체가 있는데 그것을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텃치하는 것이 아니라. 푹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구원속을 향하여 들어갈수 있도록 그렇게 지혜롭게 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성경이. 자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이제 더듬어봅시다. 그러면 여기에서 무엇을 하나 알수있느냐하면은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인동시에 또한 성경은 믿음을 갖게하는 수단이되는 동시에 또 하나는 뭐냐하면은 이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이라고 하는 그 실재속을 깊이 뚤고 들어가서 그 실재를 경험하게 하는 놀라운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수 없네
그 이름 속에있는 비밀을
나는 말할수 없네
한때 널리 불리던 복음성가죠. 그죠. 제가 참 좋아하던 찬양인데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수 없네. 예수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 사람들 건축자의 버린돌처럼 사람들이 버렸지만 그 이름이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할수 없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말안하겠다. 극비다. 그 이야기가 아니라. 형언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받는 그 사랑은 알 사람이 없다. 누가 그러더래요. 아, 아무게 엄마. 그래 예수믿으니까 어때? 말할 수가없어. 전혀다른 세상이야. 말할 수가없어. 말할수 있습니까?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독점적인 사랑을 말할수 있습니까? 구원에 이르기까지 그 고통속에서 방황하던 영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비춰오는 성경의 찬란한 복음의 빛을 받고 주님을 만난 감격에 가슴벅차던 그 체험, 그것을 말할수 있습니까? 말할수 없습니다. 그래 우리는 주여! 그렇지않습니까. 그 비밀을 성경은 어떻게? 알게해준다는 것입니다. 알게해줍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굉장히 은혜를 받았습니다. 구원에 간신히 이르게하는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뚫고 나가게하는 지혜. 이렇게 구원속에. 구원이라고 하는 실재속으로 쑥 들어가게하는 지혜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성경을 배우기를 기대하는데 성경을 통해서 첫째는 그리스도 두 번째는 믿음 세 번째는 무엇을 기대해야한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구원의 참맛을 알게되기를 기대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참맛을 알게되기를 기대해야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아닙니까. 예수믿고 교회생활 하면서도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생활 하는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그냥 교회에 갈때에는 오는것이 목표이고 예배 시작할때에는 끝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아니 지하에 내려가서 밥먹는 것이 목표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여튼 빨리가서 앞자리에 줄서는 것이 목표일수도 있습니다. 이런것입니다. 뭐 그러니까 어때요. 예수를 믿어도 아주 건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행복해 보이지가 않습니다. 무슨 행복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래요. 요즈음 교회에 나오면 스트레스만 팍팍 쌓인다고. 무슨 스트레스가 그렇게 쌓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교회에가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기쁨이 없이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애들이 항상 부르는 찬송가운데 이런 찬송이있습니다.
햇빛 같은 기쁨
빗줄기 같이
금광 같은 기쁨
우리 모두 함께
찬양하세
뭐 이런 찬양이 있었습니다. 썰렁해요. 제가 잊어버렸는데 어떻게합니까. 어떻게 햇빛같이 쏟아지는 기쁨, 빗줄기 같이 금광 같은 기쁨. 금광을 발견하지않습니까. 캐도캐도 금이 계속나옵니다. 그런 기쁨이 막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그 사람이 나는 말할수 없네. 나는 말할수 없네. 그래서 제가 어느 책에서 그런 얘기를 그런 얘기를 했지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나는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람,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게 어떤 사람입니까. 그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이거뭐 10년 20년 30년 교회를 섬기면 무엇합니까. 집사가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서 내 말한마디에 교회가 움직인다. 그래 자기 말 한 마디에 교회가 움직여서 뭐하는 것입니까. 움직이면 뭐하느냐고요. 자기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교회만 움직이면 뭐합니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습니까. 정말 구원의 실재를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건조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기쁨, 하나님이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하시다니 왜 그렇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실까? 내가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을 해왔지만은 그러나 그 역사와 전통을 통해서 영광 받으신다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아파하고 쏟아지는 구원의 은혜, 그리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구원받은 자녀의 한없는 축복, 이 세상의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수 없는 고귀한 이름이 우리주 예수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어떻게 성령께서 도우시고 그들을 거룩한 성화의 길에서 이기며 살아가게 하시는지를 이 모든 실재를 깨닫는 놀라운 일들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성경을 배울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기억이 안나는데 어느 청교도가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지 스윈록이 얘기했나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 교인들은 무신론자이다. 사실상의 무신론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도 불가능하고, 그 구원의 실재를 맛보게하는 성화의 진전도 불가능하고, 자신의 마음을 지키면서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도 불가능하고, 자신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죄와의 승리도 불가능한데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거부하고 성경의 진리를 배우고 터득하기 위해서 애쓰는 노력을 그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사실상은 무신론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훌륭한말입니다. 무신론이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그러면 우리들이 한번 알수있지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질문을 또하고 싶을것입니다. 그러면 왜 오늘날에는 책도 엄청나게 많고 성경공부 교제도 많고 설교도 있고 뭐 구역공과 안하는 교회가 어디있으며 사실은 늘 그런 가르침의 기회가 있는데도 왜 지금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는 신자들이 너무나 적은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그렇죠. 그런 도전적인 질문들이 있을수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질문들입니다. 그것도 결국은 이런식으로 답변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말이죠. 안타까운 것이 뭐냐하면은 성경공부가 많아도 진짜 교사가 성경을 가르쳐야되겠다.라고 하는 이 갈망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 앞에 서는 성경공부가 얼마나되는냐는 것입니다. 모여 앉아서 성경은 펴놓았는데 진짜 거기에 모인 모든 성경공부하는 가족들이 이 모임을 통해서 내가 성경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고 그 성경의 배움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야되겠다.라고 하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첫째는 가르침의 내용자체가 성경보다는 성경이외의 것들이 많고 그런것들이 성경을 대신하고 있으면은 아무리 많은 것들을 가르쳐져도 거기에서 새사람이 나오지않습니다. 민방위 교육가서 거듭났다는 사람보았습니까. 새마을 교육가서 회심한 사람보았느냐고요. 삼청 교육대에 가서 주님 만난사람 보았습니까. 새사람은 그렇게 해서 새사람이 되는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진지하고 풍부한 양의 가르침이 있고 열정적인 교육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가르침의 내용의 중심이 성경이 되지 아니면은 지금 제가 말씀드린 그런 복된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생각해야될 것은, 쉽게 설렁설렁 이야기 꺼리나 잔뜩 늘어놓은 그런 책들을 읽는 것을 좋아해가지고는 여러분은 신앙에 성장이없습니다. 생각을해보라고요. 그렇게 생각하지않습니까. 뭔가 이렇게 자기로하여금 책을 읽던지 가르침을 받을때에 진리에 직면하는 부담을 떨칠수없게하는 그런 교육의 자리에 앉아야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아세요. 왜 아멘을 안합니까. 이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진리를 대면하게 하는 그런 부담을 떨칠수 없게하는 그러한 교육의 자리에 서야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변화됩니다.
그러니까 평양 대봉교회 길선주 목사가 설교하는 그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무엇을 이야기하느냐하면은 막 길선주씨가 설교를하면서 온몸이 불붙는 것처럼말이죠. 성결의 영으로 불붙는 얼굴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니까. 그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견디다 견디다 너무나 괴로우니까 떨치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분히 있을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뛰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라 그러느냐하면은 조금있다가는 아까뛰쳐나갈 때보다도 훨씬더 근심어린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있으니까 더 무서운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그 말씀을 듣고 회심을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부담스러웠으면 떨치고 뛰쳐나갔겠습니까. 그런데 다시 돌아와서 그런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은 가장 훌륭한 가르침은 뭐냐하면은 가르침을 받고난 다음에 가르친 그 사람이 생각나게되는 그 가르침은 썩 좋은 가르침이 아닙니다. 가르침을 받고 난 다음에는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가르치는 사람도 없고 설교한 사람도없고. 오직 성경의 진리 하나가 내 앞에 남아서 설교는 끝나고 가르침은 끝났는데도 끊임없이 나에게 말하는것입니다. 네가 이런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갔느냐. 네가 진정으로 거듭난 크리스찬이냐. 네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크리스찬이냐. 이렇게 집요하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르침을 가르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 가르치는 사람들이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그런 정직한 성경의 진리를 대면하기를 사모해야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으면은 절대로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지않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재미있는 얘화나 들으면서 한시간 마음이 시원하도록 그저 설교를 앤조이하다가 간다. 여러분들은 너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희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하니까 성경에 대한 참된 가르침이 결핍되어 있으니까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냥 구원이라는 것에 대해서 늘 이야기를 들을뿐입니다. 예수 안믿으면 지옥간데. 어 그래 맞아 그렀대. 히히히히 너 지옥가겠네. 그런식입니다. 아주 냉소적이되는 것입니다. 이런식의 경박함들은 모두 구원의 실재를 경험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배우지않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특히 여기에서 지금 이 문맥에서 이 구원은 성화의 구원이라는 쪽에 무게를 싣고 봐야될텐데 그렇게 본다고 할것같으면은 성경에대한 가르침이 없이 구원받은 이후에 그 사람이 그 풍성한 성화의 구원의 세계속에 들어가서 자신의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자신의 삶이 하나님을 섬기는 진정한 종된 삶의 그 비밀을 터득하게된다. 이것이 가능햐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있을수 없는 일이고 가능하지 않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보세요. 우리들이 깊이 존경하고 삶이 성결한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기도를 굉장히 열열히 하는데도 성결한 삶을 살지않는 사람은 있을수 있는데 성결하고 진실한 삶을사는 사람들은 모두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왜? 그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만 구원의 실재속으로 쑥 들어가서 그 비밀들을 경험할수 있는 그런 자리로 나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항상 사모하고 갈망해야할바가 뭐냐하면은 순수한 성경의 가르침을 배움으로서 자신들이 그러한 구원의 실재를 경험하는 세계속으로 들어가도록 그것을 갈망해야 하는것이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성경이 성도의 신령한 축복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성경이 그리고 있는 삶과 나 자신의 삶이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약속된 성화의 축복을 내가 어느 정도나 누리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진리의 말씀을 정직하게 배우고 그 말씀의 빛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성찰하려고 하는 진지한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기대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정도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집사가 되었다는 사람들이 심방가서 호세아서 그러면은 신약서부터 구약까지 어쩔줄을 모릅니다. 성경내용은 고사하고 성경의 순서, 물론 순서를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성경과 생소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것입니다. 그런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의 어떤 실재를 깊이 경험한다.라고 하는 것은 기대하기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훨씬낫죠. 그런데 조금만 설교가 논리적이되고 좀더 깊이만 있어지만은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입니다. 추리 영화볼때는 눈이 빨개서 들어다보면서 노트까지 해가면서 보면서 말이지. 그렇게 보는 사람이, 모르면 옆에 사람에게 물어보면서 제가 아까 나와서 사람죽인 그사람 맞아. 가만히 있어봐. 가르쳐줘. 이렇게 하면서 보는 사람들이 조금만 어려워지면은 아. 끊는소리가 들립니다. 딸칵. 지적활동을 딸각 끄는것입니다. 에너지가 들어가니까. 야 체력소모가된다. 그러면서 딸각하면서 끄는것입니다. 그리고 맨 어디서 재미나는 얘화나 들고말이지. 그런 이야기나 뭐 요절복통하는 이야기를 하면은 그 때는 딸칵하고 켜고 한번 들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또 무슨 성화가 어떻고 구원의 도리가 어떻고하면은 딱칵 또 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되는 것입니까. 계속 그렇게 동물과 같은 영혼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진전이 있겠습니까.
하여튼 한심해요. 정말. 세례를 받는 순간이 되었는데도 무슨 배짱인지 세례문답 외우지도 않고옵니다. 뭐 우리교회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고 옵니다. 운전면허 보러갈때에는 빨갖게 색칠하면서 공부하는 사람이, 쉽게 이야기하면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이 혼인예식이 사실 2종 보통 면허따는 것보다못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심한이야기입니까. 사실이죠. 그런 사람들이 성경의 차례가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그럼 사람들에게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서 그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이게 무슨소리인지를 도대체 이해가 안가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절대 안됩니다. 보면은 말이죠. 정신이 멍하고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차있는 사람들보다는 아주 열열히 따지면서 입에 거품을물고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비판하던 사람들이 급격하게 회심을 경험하고 주님께로 돌아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합니다.
벤허라고 하는 그것을 쓴 사람도 그렇지않습니까. 최대의 반예수적인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자기가 알아야되겠으니까. 성경을 읽는데 3분의 2를 성경을 읽고나서 무릎을 딱꿇고 나의주 나의 하나님. 그리고 고백을 한것입니다. 무엇을하다가. 성경을 보면서 어느것으로 꼬투리를 잡을까 하면서 캐가는데 그게 뭐가 켜져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켜져있는것입니다. 지적인 활동이 켜져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느순간에 성령으로 건드리시니까. 그러니까. 그래도 무릎을 꿇으면서 나의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하는 벤허라는 영화를 만든것입니다.
저는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 지을수 있는 가장 심각한 범죄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이것을 찰칵하고 끄는것입니다. 그는 이것은 딱 끄는 그 순간 하나님을 버리는것입니다.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진리로 저희를 거룩하게 해달라는 것이 예수님의 기도였고. 그 진리를 통해서 저들을 하나되게 해달라는 것이 예수님의 간구였는데 그런 진리에대한 참된 깨달음들에 대한 스위치를 꺼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거룩에 이를수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진정한 하나됨의 그 신비속으로 들어갈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안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래서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느낀것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선하심을 확신하고 그 선하신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핍절한 자기 자신을 그 풍요로운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게 하실수도 있다라고 하는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커다란 범죄를 해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항상 회복의 신앙이 있습니다. 왜 견딜수가 없는데 주님의 사랑을 맛보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자신의 마음이 열려졌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성품에 빛을 비추어주실 때에 그에게 번뇌하는 마음, 돌이키는 마음, 주님의 사랑없이 살아갈수 없다라고 하는 자기고백.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말하자면 변화받도록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끈 사람들은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그들은 구원에 이르지못했다고 할것같으면은 그들은 결코 거듭날 수 없을 것이고 그리고 특히 성인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결코 구원에 이를수 없을것이고. 그리고 그들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은 그는 구원받은 것 때문에 조금도 행복하지 않는 우울함과 갈등으로 가득찬 생애를 마감할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갔습니까. 그렇게 묻겠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건 물론 사랑하시죠. 그런데 하나님이 안 사랑하시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이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들이 알아야됩니다. 느낄수 있어야됩니다. 우리들이 경험할수 있어야됩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인가 그분을 향한 진실한 신앙의 반응을해야합니다. 그때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회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다음에 깜짝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오래도록 나를 찾으시고 부르셨구나. 그죠. 내가 그 부르심을 거절하고 내멋대로 살았구나 그것을 깨닫는것입니다. 그때도 그런 사랑을 받은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그런 사랑을 받는것이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거의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것입니다. 회심하고 주님을 사랑하게되니까. 이제 주님의 그 사랑에 대해서 자신이 사랑으로 반응할수 있는 사람이된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것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에 있어서 진전이 없는 사람들, 잘들으십시오. 잘들으세요. 신앙에 있어서 진전이 없는 사람들은 계속 육신에속한 그리스도인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사람들, 교회오래 다녀도 구원의 확신이 거의없는 사람들,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고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데 해당되는 여러분들가운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마음을 기울인것이 컴퓨터 윈도우 95배우기 위해서 마음을 쏟은 것 만큼도 안쏟았고. 바둑을 처음 배울 때 그것 바둑배우기 위해서 마음쏟은 것, 운전을 배우기 위해서 처음에 그저 차만 보면 운전을 하고싶고 그거뭐 1단 2단 3단이 어떻게되는지 그것만큼도 마음을 써보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눈에는 믿음없음이고 당신 경외함이 존재하지 않는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해야합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기관들과 구별되는 이유는 뭐가있습니까. 이 교회가 아주 유일하게 구원받지못한 사람들을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할수있는지 지혜를 가지고 있는 기관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그 거룩한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갈수 있는지에 대해서 진리를 소유하 유일한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만 그 진리가 위탁된것입니다. 어디가서도 터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치 예배의 참석은 필수고 성경을 배우는 것은 선택이고.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더더욱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그런식의 사고방식은 그것은 거의 반무신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해서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자동차 한 대를 사도 하루종일 운전을 어떻게 하는지 거기에 있는 편의 장치를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메류얼을 읽지않습니까. 좋은 차는 더 두껍습니다. 오토가 많으니까. 이렇게 부껍습니다. 컴퓨터 한 대를 샀는데 메류얼이 이렇게 두껍습니다. 600페이지입니다. 읽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 이 땅에 있으면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함께 누리면서 살아가도록 초대된 이 구원의 은혜의 세계속에 들어온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이 현재적인 구원을 우리들이 누리면서 살수있는가에 대해서 서너장의 매뉴얼도 읽을려고 하지않는 사람들이 풍성한 삶속으로 들어갈수 있다면은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눈을들어 하늘보라.
어두워진 세상중에
외치는자 많것만은
생명수는 말랐도다.
참된 진리의 말씀의 가르침도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도 그것을 간절히 섭취하고 이 핍절한 삶을 넘어서서 그 풍요로운 그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고자 갈망하는 교인들도 더 적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합력해서 이렇게 그 비참할 정도록 악한 상황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조국교회에서 태반이 넘는 사람들이 그까짓거 30분도 안넘는 주일설교 달랑 듣고 주일예배 한번 드리는것으로서 신앙생활을 끝냅니다. 그나마도 그 한시간 예배드리는 그 속에서 펑펑우는 복음에 대한 감격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경험하게되는 그 풍요로운 신앙의 경험이 존재하느냐. 진실한 참회의 영으로 뉘우치면서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예배당의 문을 나서는 그런 깊음 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예배에 달랑 한번참석하는 것을 그것으로 신앙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어디가서 뻔뻔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 여기에서 성경에서 오늘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구원의 그런 실재속으로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들어가본 사람들이냐는것입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고보 부족한 것 없이 살아가는 오늘날의 이 핍절한 상태를 바라보시면서 우리는 과연 이러한 초라한 구원을 위해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셨는가. 손과발 못박히시고 자기의 고결한 옥체를 찢으신 그 피저린 고난이 겨우 이런식의 삶,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주일 오전예배 출석생활 겨우 이런 것을 위해서 이루어진 고난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때에 기가막혀서 말이 안나옵니다. 정말 우리는 큰일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선명한 진리의 가르침, 성경을 뜨겁게 사랑하는 설교자. 성경을 뜨겁게 사랑하는 교사. 마지막 순간까지 집과 땅과 모든것을 다 잃어버려도 나의 사랑하는책 비록해어졌으나. 성경의 진리를 그렇게 뜨겁게 온몸으로 사랑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그 성경에 대한 진리를 통해서 구원의 실재속에서 살아고 있는 이 생생한 교제를 온몸으로 보이면서 온삶과 인격 그 자체가 교제가 되어서 그래서 저 핍절한 영혼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성경을 잘 가르쳐서 그리스도 예수와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갖게하고 거룩한 구원의 실재속에 들어가게 하는것이라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그 영혼을 위해 눈물흘리고 그들을 진실되게 가르치는 교회. 그것이 주님이 세우실려고 했던 교회의 모습입니다. 또 들려주십시오. 다시 들려주십시오. 새롭습니다. 날마다 주예수 크신 복음을 또 들려주십시오. 나는 아직 변화될려면 멀었습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필요합니다. 오래전 선조들이 듣던 그 말씀, 그 피묻은 복음,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증언, 그것이 담긴 하나님의 성경, 그속으로 나를 데려가주십시오. 내가 그 진리의 말씀을 알고싶습니다. 그 말씀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되고 싶습니다. 그 말씀대로 살고싶습니다. 그런 갈망하는 마음을 단 몇주만이라도 갖는다면은 놀라운 영혼의 변화가 일어날것입니다. 무엇을 갈망하십니까.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그래 성경 잘 가르치는 사람에게 성경을 배워서 무엇을하시렵니까? 감동적인 설교를 듣고 마지막에 여러분들이 무엇을 터득할려고합니까? 은혜를 받고 여러분들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시렵니까?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싶다.라고 하는것도 결국은 성경을 알고 싶다.라고 하는 커다란 소원으로부터 흘러나온 바램이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바램이어야합니다. 그런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게 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배우는 학생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갈수 있도록 충분히 너희를 지혜롭게 만들어준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성경이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어떻게 우리를 지혜롭게하느냐. 특히 시편에 보면은 성경말씀이 자기들을 지혜롭게 한다.라고 하는 것을 굉장히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죠. 그러면 성경이 어떻게 우리를 지혜롭게 하느냐. 마지막으로 잘들어보십시오. 성경이 어떻게 우리를 지혜롭게하느냐. 요즘은 한글 못읽는 사람들이 거의없습니다. 그죠. 그런데 옛날에 저희들이 초등학교 다날때만해도 한글을 못읽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군대가서 편지써오면은 그것을 들고 동네 이집저집 찻아다니면서 읽어달라 그러는 사람들도 있었고 대필해달라는 사람들도있었습니다. 그런데 드물기는 한데 어떤 할머니들이 있었느냐하면은 여러분 기억나실것입니다. 전혀 까막눈인데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성경을 읽어야된다. 그러는 것입니다. 예배드릴때마다 성경을 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은혜는 받았는데 이게 글자는,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까막눈이 갑자기 눈이떠지는 것은 아니지않습니까. 그래 요한복음 3장 16절 늘듣는것입니다. 그거 외우라 그러면은 잘 외웁니다. 하도 은혜를 많이 받아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3장 16절을 어떻게 찾아놓고 아 이것이 16이라는 숫자가 써있으니까. 이게 이게 하자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아, 이게 이자구나. 이러면서 한자한자 깨우친 할머니들 여럿보았습니다. 그러니 그분들의 어떤 지적인수준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미약합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것이 그렇게 교육을 별로못받고 언문도 못깨우치는 사람들인데도 삶을 살아가는 지혜에 있어서는 대학을나온 신새대 여성하고 비교도 안될정도로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 부랑무식한 할머니들이말입니다. 훨씬 지혜롭습니다. 얘야. 그렇게 해서는 안되느니라. 이렇게 사람들을 타이르는 것이 굉장히 호소력이 있고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지혜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을 다른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관계가 있을수도 있지만은 경우에 따라서는 별로 관계가 없을수도 있습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하나 어떤 사물과 삶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이고 지혜는 이 모든것들을 꽤어서 활용하는 원리에 대한 터득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은 지식이 구슬이라면은 지혜는 이것을 이렇게 꽤는원리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이 많고 지혜가 없으면은 그 지식을 가지고도 오히려 자신의 삶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범죄를해도 많이 배운 사람들의 범죄가 더 악날하고 교묘합니다. 그리고 더 의도적입니다. 그러나 무식한 사람들의 범죄는 아주 우직하고 어리석을 정도로 아주 바보스럽습니다. 그리고 투명합니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걸립니다. 그러나 인제 그래도 지식이 좀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지혜가 뛰어난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물의 내용에 대해서는 모르지만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고 그리고 삶에 대해서 어떤 태도로 반응을 하면은 다음에는 그 태도가 어떤결과를 가지고 온다라고 하는 그런 것들에대한 지혜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런 지혜들을 갖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은 내가 이렇게 건조하고 매마른 생활속에서 저 깊은 비밀이있는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갈수있는가. 그것은 사실 지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은 그러나 지혜의 문제입니다. 그렇게 지혜롭도록 우리를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주 비밀스럽고 은혜로운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게되는 놀라운 일들을 터득하기 위해서 수십만권의 책을 읽고 수많은 사람들의 강연을 듣고 히브리어 헬라어를 줄줄 꾀어야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러면 이제 어떻게 성경을 통해서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비밀에 가까운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지혜를 갖게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게뭐냐하면은 이 성경에는 어떤힘이 있느냐하면은 진실된 태도로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불어넣어주는 책이 신비스러운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성경말씀을 잘배우고 그 성경말씀 속에서 은혜를 받으면은 반드시 그의 인격속에 독특한 특성이 생겨나게되는데 그게뭐냐하면은 말씀의 원주인이신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됩니다. 말씀의 원주인이신, 이런 말씀을 하신 원재로 그런 경외함이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근본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고 사랑하니까. 그분의 성품에 대해서 많이 알게됩니다. 그분의 성품에 대해서 많이 아니까. 그러니까. 아 이렇게하면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구나. 그리고 이렇게 하면은 사람들보기에는 옳지만은 하나님이 꾸중하시는구나. 이렇게 하는것은 사람들의 눈에는 거스리지만은 아,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시는구나. 이런 것들을 터득하게되는 것입니다. 무슨뜻인지 이해가가시죠. 그런것을 터득하게하는 것입니다.
(직장생활 이렇게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상사사 전보발령을 받지않습니까. 최고 책임자가 예를들면 내가 뭐 어느 부서에 근무를 하는데 장관이 새로웠습니다. 그러면은 사람들은 특히 고위관리들은 이제 무엇을 제일 궁금해하느냐면은 저 장관이 어떤 사람일까를 제일 궁금해합니다. 어떤 사람일까. 그런데 다행히 근처에 아주 직장생활하는 사람들은 실감날것입니다. 다행히 근처에 새로온 자기사장, 혹은 부서의 장관을 잘아는 사람이있어요. 잘안다고해서 너니 내니하고 지내는 인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가까이에서 모셨기 때문에 그분의 성격이나. 성품 일을 추진하는 방향, 이런 것들을 잘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이거죠. 그 사람을 불러서 같이 이야기를 해보면은 그 사람주위로 사람들이 새카맣게 몰립니다. 그리고 밥을 사주면서도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합니다. 왜 내일이면 당장 그분과 맞닥드릴텐데 어떤 성격의 소유자냐.
그러니까 이야기를 해주는 것입니다. 야 전에모신 우리사장, 혹은 우리장관은 사람이 이렇게 왜 좀스럽잔아. 아주 정확하고 정밀한 것을 좋아했잖아. 그런데 이분은 내가 모셔보니까. 그런분이 아니라. 통이굉장히 커서 예전에 하던것을 그대로 안전하게 답습하는 사람들을 점수를 줄 때 아주 최하위점수를 준다는것입니다. 실패를 하더라도 창의적으로 도전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좋은 자리를준다. 그러더라. 그러면은 이 지식하나가 그 이제껏까지 3년4년을 복지부동하면서 살아왔던 그 직장생활에 대한 패턴을 완전히 바꾸고 사고의 방향을 바꾸게만들지않습니까.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가죠. 그리고 새로오신 이 최고 책임자는 옛날에 그 사람은 뭐 이렇게 가끔 봉투도 갖다주면은 챙기고 그랬는데 이 사람은 내가 옛날에 모셔보니까. 누가 봉투를 가지고 와서 받아가지고 갔는데 그것을 받아놓았다가 누구한테 받았다고 이름써가지고 감사원에 보내서 모가지 날린사람이야. 그러면 그 말한마디 듣는 순간에 새로오시면 뭐 산삼이라도 한박스 사가지고 갈까. 그러던 마음이 완전히 싹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실력으로 승부하자 그러는것입니다. 더 예를 안들어도 이해를 하겠죠.
그러니까 자기 상사가 가지고 있는 성품과 인격적인 특성이 무엇인가를 이해를 하고나면 그 직장사회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살아가야될지에 대한 전체적인 말하자면은 지혜가 생겨나는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구체적으로 그분이 무슨 색깔을 좋아하고 무슨옷을 좋아하고 뭐 무슨 목소리를 좋아하고, 뭐 취미가 뭐고 그런 것은 몰라도 괜찮습니다. 커다란 원리는 이미 알게된것입니다. 그 원리를 가지고 딱 보면은 그러면은 그렇게 뇌물이나 가지고 가가지고 비벼가지고 이렇게 해서 뭐 덕을보고 어떻게 출새할려고 하는 그러면 안된다고 하는 것은 벌써 알지않습니까. 그러면 벌써 1000만원 봉투가지고 가서 기분나빠할 사람은 사과 한괴짝 가지고 가도 기분나빠합니다. 그러니까 케이스 케이스에 대해서 다 예를 들지않아도 이미원리가 나옵니다. 저사람은 올곧은 사람이기 때문에 뇌물하고는 담쌓은 사람이고 잘못했다가는 뇌물 때문에 날아간다. 그거 원리가 하나 생겨납니다. 그것 지혜가 하나 생겨납니다.)
똑같은 원리를 신앙의 세계에다 대입을 시켜보세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것을 잘 알고나면은 그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식은 많이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아는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싫어하신다. 그럴 때 어떤 바보가 아 그것은 큰 거짓말이나 싫어하시지 적은 거짓말은 아주 좋아하실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바보가 어디있습니까. 똥차에 큰똥도 똥이고 바가지의 똥도 똥이지. 그것 말하나마나 아닙니까. 그러니까 답이 다 나온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되는지를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자기를 보이십니까. 여호와는 자기의 친밀함을 자기를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보이십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칼빈도 그의 기독교 강론에서 처음시작하면서 아주 단정해서 말하는것이 뭐냐하면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하고 예배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하나님을 알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자기를 보여주신다는것입니다. 하나님 어떡하면 나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고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지식으로서는 너무 일천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주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이신지 충분히 알지못합니다. 하나님 제가 가르쳐주시옵소서. 그리고 성경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아주 흡족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성경을 연구하는 것과 지식의 자랑으로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의 그 차이는 하늘과 땅입니다. 그 진보에 비교할수 없는 차이가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이 그런 얘기를했습니다. 청교도가.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상사병에 걸릴수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인간들에게 성경이 과연 얼마나 보일까. 왜냐하면은 성경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한 경험을 가진사람들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경외함이 하늘로부터 어느 순간에 뚝 떨어지는 것이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냉담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무지하고 주님을 사랑할모르는 부랑당 같은 인간들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신앙의인격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아는 참된 신앙의인격으로 변화되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서 듣고 깨닫고 그 성경을 인하여 변화를 경험함으로서 그 짐승과 같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참된 도리를배우고 그분의 사랑의 성품을 터득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자기의 성품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나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 마음에 합당하고 올바르게 사는 것인지를 터득하게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기대하면서 성경을 배울것을 성경의 가르침을 받는자들에게 강력히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런 기대, 그런 자세를 가져도되고 안가져도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자세를 갖지아니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알수도 없고 믿음을 소요할수도 없고, 그리고 그 아름다운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갈수도 없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성화의 길을 걸어갈 진실한 지혜를 소유할수조차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의 하나님 없는 사람과 다름없는 무신론자의 삶밖에는 우리에게 남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이 이야기를 정말 피로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은 아무리 선포하는 복음의 내용이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그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경을 배우고 그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그리고 믿음과 그리고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는 경험과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이 성화의 삶을위한 지혜를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면은 그것은 언제나 길가에 뿌려진 씨앗과 같이 될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살아가면서 지은 작은 몇가지 불순종과 죄들, 이런 것들도 굉장히 심각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수많은 불순종들을 그런 수많은 죄, 그런 수많은 유혹들, 이런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고 하는 강력한 자기의 욕구를 통제할수 없는 궁극적인 기초가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 점이 시인이 우리의 신앙생활속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자신이 늘 우리와 자신을 다스리고 싸우는데 있어서 패배를 경험하게되는 것입니다.
왜 성경을 배우려고 하지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지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거룩한 실재속으로 들어가보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사는 성화의 삶의 지혜를 얻지못합니다. 우리는 늘 더듬이가 잘려버린 귀뚜라미와 같이 눈먼장님, 소경과 같이 지팡이 조차 잃어버리고 낭떠러지 앞에서 방황하는 그 소경과같이 그렇게 위험한 인생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나는 왜 그 이름이 아름다운지를 아직 경험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는데 나는 노래할 정도로 기쁜 은총이아닙니다. 이런 가난하고 핍절한 영적인 생활들은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믿음과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는 경험과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성화의 삶을 살게되는 이 지혜를 배우지않는한 이런 핍절한 삶은 계속됩니다.
하나님이 변화받지못한체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향해서 가장 강력하고 시급하게 여러분들에게 외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는 성경을 배우라. 성경을 통해서 내 아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라. 그 성경을 통해서 너희의 신앙이 성장하게되기를 갈망하라. 그 성경을 통해서 내가 너희에게준 이 구원의 아름다운 실재속으로 들어가 그 실재를 맛보기를 사모하라. 이 성경을 통해서 너희들이 거룩한 성화에 이르는 지혜를 터득하는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신자들이되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강력하게 외치는 음성입니다. 무엇인가 지금 기억해야됩니다. 왜 이제껏까지 여러분들의 삶에 있어서 신앙에 있어서 변화가 없었다면 이런 말씀을 토대로해서 근본적으로 성경과 진리를 대하는 여러분들의 태도를 정말 갈아엎어야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은혜의 실재속으로 여러분들을 들어가게 하실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살아있는 성경말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강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上)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느니라. 그러면서 성경의 유용성을 먼저 말한 다음에 그 다음에 오늘 이 16절 상반절에서는 왜 성경이 그렇게 놀라운 효능을 가지고 있는지, 즉 성경이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 진것이길래 그렇게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해주고,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게하고, 또 우리게에 그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놀라운 지혜가 있게하는지에 대해서 그 이유와 근거를 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성경에 있어서 아주 굉장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설교를 못들으신 분이 있으면은 특별히 지난시간 설교를 꼭 가시는 길에 문서선교부에서 구해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잠시 소개를 하자면은 가르침을 받는 자는 성경을 배우기를 기대해야 된다는 것을 총론적으로 첫시간에 말씀드렸고 둘째시간에는 그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첫째시간의 내용이 신앙에 있어서 성경의 중심성이라고 할것같으면은 둘째 시간의 내용은 성경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중심성입니다. 그리고 셋째시간. 지난 수요일에는 믿음과 그리고 그 다음에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그리고 어떻게 성경말씀을 통해서 신자가 지혜로와 질수 있는가에 대해서 지난 수요일날 잔인하게 긴 설교였죠. 그죠. 120분을 설교를했습니다.
그렇게 아주 놀라운 성경의 효능이 있는데 가르침을 받는자는 가르침의 관계를 통해서 그런 영적인 일들을 기대해야 하는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갔는데 기껏해서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나 하고 그리고 이런저런 잡다한 일상사의 이야기나 주어듣고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뉴스거리나 이야기를 듣다가 돌아가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는 매우매우 불행한일입니다. 아주 굉장히 불행한일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결핍된 생활을 계속하는 것에 대해서 가르치는 자는 물론이거니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도 책임을져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렇게 놀라운 일들을 기대하는 것이 가르침을 받는자가 기대하여야할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면은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기대할수 있느냐.? 어떻게 그게 성경을 통해서 그것도 아주 옛날에 쓰여진 그 성경을 통해서 오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받고 그리고 또 믿음을 갖게되고 그리고 그 구원의 위대한 실재속으로 들어가고. 그리고 또 신앙생활의 놀라운 지혜를 얻게되는 이런 놀라운 역사가 어째서 성경을 배울 때에 나타나는냐. 그것이 바로 오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니” 이부분은 사실은 많이 의역을 한것입니다. 원해 히랍어 성경에보면은 무엇이라고 되어있느냐면은 파사그라페 페어프리스토스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이 무슨뜻이냐하면은 파사는 모든 그라페는 쓰여지는 것, 이거죠. 그래서 그것은 기록된글. 그러니까 거룩한 글입니다. 모든 기록된글, 그것은 성경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성경은 왜 여기에서 모든 성경이라고 말했을까요? 이 성경은 한권이 아닙니다. 한권이 아니라. 66권입니다. 물론 이것이 쓰여질 때는 구약성경밖에는 없었지만은 이것이 한권이 아니라. 몇권이라고요. 66권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어째서 한권이냐? 하나로 묽었으니까 한권이죠. 그래 이66권의 책이 엮어져서 하나의 라이브러리가 된것입니다. 66권의 책이 묶어져서 하나로 도서관처럼 장서가 된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모든이라고 쓰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페어프리스토스라는 말인데 페어는 페어스 즉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프리스토스( ? )라는 동사에서 온것인데 훅하고 불어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셨다. 그러니까 직역을하면 모든 책들은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신 것이니.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말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니.” 그랬거든요. 그런데 이제 이부분을 보면서 여러분 성경 어디가 생각이납니까. 아이고 여러분은 확실히 참 뭐 하나를 가르쳐주면은 하나 다 아니까. 그래서 어딘고하니 창세기에보면은 말이죠. 창세기에 2장에보면은 말이죠. 몇절인고하니. 7절입니다. 7절을 보면은 여러분은 성경을보시고 이제 히브리어 성경에서봅니다. 이렇게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 ? )빚으셨다. 토기같은 것을 빚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 ) 그 사람을 ( ? )티끌로 빚으셨습니다. ( ? ) 그 땅으로부터 취한 흙으로, 그 땅으로부터 취한 티끌로, 혹은 먼지로 그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 ? ) 후! 하는거죠.( ? ) 그의 두코, 그러니까 한코가 아니라. 코구멍 두 개에다가 함께불어넣어 준것입니다. 함께, 하나만하면 이쪽으로 불어서 이쪽으로 나올까봐. 두코구멍으로 후! 이렇게 불어넣으시고 또 무엇을 불어넣으셨느냐 하면은 ( ? ) 생명의숨을 그의 두코 속으로 하나님이 불어넣으셨습니다. 코속으로입니다. 그러니까 코 속으로 쑥 들어가게 훅! 불어넣으셨는데 그것이 뭐냐하면은 생명의 숨을 하나님이 불어넣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심할 여지가 없이 이 디모데후서를 쓴 이 사도바울은 아주 명백하게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는 그 과정을 염두에다 두고 이 페어프리스토스라고 하는 히랍어 동사를 택해서 쓴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사람을 창조하는 그 과정과 똑같은 것을 이 사도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은 얼마나 하나님의 인간창조와 맞물리는 또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 무엇인고하니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굉장히 중요한 진리를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어서 된 것이다.라고 할 때 이것이 결국은 무엇이냐하면은 똑같은 내용이 창세기 2장 7절에 나오는데 하나님이 아담의 코에 훅! 하고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까. 결과가 어떻게되었다 그랬습니까. ”생령이된지라“ 그랬는데 그 생령이라는 것은 조금 번역이 이상한 것이고 산 사람이된지라. 그렇게 번역을해야지 마땅한것입니다. 대체 무슨뜻이냐하면은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아담을 다 빚으셔서 완벽한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놓으셨는데도. 그는 단지 흙덩이에 불과했습니다. 티끌의 덩이에 불과했는데 하나님께서 후!하고 생명의 숨을 그 코 깊숙히 불어넣으시자 그 사람은 산 사람이 된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유비인가 한번보세요.
그래서 이 글은 사람이 이렇게 적은 하나의 문학이란 말입니다. 편지요. 글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글들을 하나님께서 대버려두시지 않고 그 글들이 이렇게 적혀나아갈 때 하나님이 그 글이 그냥 글로서 적혀나아가게 내버려두지 않고 그 글속에다가 훅!하고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은 것이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경험한 모든 사람들에게 가슴깊이 와 닫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고 하는 간증입니다. 그 간증이 없으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라고 하는 그 강력한 체험이 깊을수록 그는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대한 체험이 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은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성품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경험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조금만 생각해보면은 참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이 성경책은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2000년전에 쓰여진 책입니다. 빨리쓰여진 책도 주후50년 이후이고 그리고 늦게 쓰여진 책도 95년 이전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전체적으로 볼 때 전부다다 1세기 쓰여진 책들이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이고 그저 정확하게 이야기 한다고 하더라도, 약 19세기전에 쓰여진 책인데 1900년전에 우리 나라가 어땠는지 한번 생각을해보세요. 그 때에 쓰여진 그 수많은 문헌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생생하게 와 닿을수 없습니다.
근데 합리주의가 확 발언하고 일어나면서 과학이 발달되고 신지식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인제 이 성경에대한 회의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이 볼테르라는 사람도 이야기를 하기를 이 성경은100년이 체 가지 않아서 이 지구상에서 거의 고문서처럼 사라질것이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00년후에는 그렇게 말하던 그 사람 집이 성서공소가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책을 보급하는 사무실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후에 오히려 성경은 더 많이, 지금도 러시아나 혹은 중국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간절히 성경을 원하는지모릅니다. 우리가 못보내서 그렇지. 얼마나 성경을 간절히 원하는지모릅니다. 이처럼 인간의 모든 사고를 뒤엎고 하나님의 말씀이 많은 사람들에게 시대를 초월해서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도 결국은 무엇을 보느냐하면은 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물리적인 힘으로 착고에 채우고 수갑을 묶어서 좁은 감방에 가두어서 그 사람이 거의 돌아다니 못하게 만들어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두어 둘수는 있습니다. 그죠. 그리고 그를 윽박지르고 협박하고해서 먼곳에 추방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영향을 받지않게 잠시동안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살아있는 한 결국은 그 속박을 풀고나면은 다시금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들어내고 자신의 존재를 통해서 다른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되고야 말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잠시는 인간의 과학적인 사고방식이나, 미신, 그리고 아주 가혹한 편견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을 잠시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못하도록 덮어둘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은 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영원히 이 성경을 가두어두는데 성공한 나라는 없습니다. 어디든지 이 성경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모든 사람은 아닐지모르지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스스로 그 성경속에서 구원의 길을 찾으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던져주었습니다.
어느정도 정확한 역사인지는 모르지만은 교회에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에의하면은 그 대동강변에서 토마스목사가 순교하고 죽을때에 유품으로 던져놓은 그 한자성경이 한국사람 손에 의해서 거두어져서 이 종이도 좋고하니까 쭉쭉 찢어서 벽에 쭉 벽을발랐는데, 한사람이 그렇게 가지고 가서 벽에 붙여놓고 드러누워서 이렇게 사람 잠자는 모양세가 있지않습니까. 항상 드러누우면 이렇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렇게 돌아누웠는데 불편해서 도로 돌아누웠는데 그 장면이 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을 경험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뭐 초대교회에는 그런 간증들이 수없이 비일비재합니다. 누가 그것을 지금처럼 잘 풀어서 설명해주는 설교자나 목회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성경혼자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 낡은 성경책 한권속에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여기에 들어있으며 이 책을 읽으면 내 마음속에 전혀갖지 못했던 하나님 아버지에대한 믿음이 생겨날 것이며 내가 이 성경을 통해서 구원의 위대하고 신기한 실재속으로 들어가게 될것이며 그리고 어떻게 지혜롭게 믿고 주님을 섬기며 살아야되는지 모든것을 알게된다고 말할때에 누가 그 얘기를 믿을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이 믿을수 없어도 그러나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살아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경험하게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가난하고 절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원하고 그 말씀 속에서 길을 찾기를 원하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은 수많은 답을줍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의 위대한 실재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세월이 많이 흘러도 불변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리고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는 신앙을 갖게하는 하나님의 포기할수 없는 영원한 방편입니다. 이 세상끝날까지 이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방편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에 귀를 귀울이고 깨닫지 않는한 그는 계속해서 어둠가운데 해맬 수밖에 없을것이며 그는 끊임없는 회의속에서도 아무런 해답을 찾을수가 없는 이 어두운 의심의 길을 지나가게 될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신앙에 대해서 갖는 모든 의문들이 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 신앙을 가질때에 비로소 그 성경이 이처럼 우리에게 위대한 구원의 실재와 믿음을 갖게 만들어주고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끔 만들어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새롭게 눈뜨게 될 때마다 역사는 놀랍게 변했습니다. 이 종교개혁시대 때, 종교개혁의 그 놀라운 영적인 각성들이 어떻게 일어나게되었는지 아십니까? 중세시대에 교회에서 성경 그 자체는 철저하게 평신도들이 접근할수 없도록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성경을 번역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 이 성경은 오직 교회안에서는 라틴어로만 읽혔습니다. 사실 그런데 라틴어도 원본이 아니라. 번역입니다. 히브리어와 히랍어를 고집해서 그것으로만 읽었다그러면은 이해가가는데 그것이 아니라. 라틴어로만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성경 그 자체를 사람들이 접근하지못하고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일은 오직 사제들만이 담당할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르치는 교회에 속하는 사람들만 성경에 직접적으로 접근할수 있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 성경에 직접적으로 근접하는 것들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위대한 일을 시작하셨는데 그것이 뭐냐하면은 사람들이 성경을 보게끔 만들어 준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있었던 르네상스 운동을 통해서 일어난 고전에 대한 연구의 바람과함께 이 식견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이 히랍어를 공부했습니다. 고전에 대한 관심이 불러일으켜지면서 히랍어, 히브리어, 그리고 사라진 고대어들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운 지식을 가지고 이제 성경을 보기 시작했는데 성경을 보고나니까 이 성경의 가르침이, 성경을 통해서 자신들이 직접적으로 파악하게되는 가르침과 당시 카톨릭에서 자신들에게 가르쳐주던 신앙생활사이에 좁힐 수 없는 엄청난 간격이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이 이 성경을 번역을해서 사람들에게 읽히기만하면은 그들이 사도적인 신앙을 되찾는데 도움이 될것이며 그것이 이 잘못된 신앙을 무너뜨리는데 강력한 힘이되리라고 하는 그것에 착안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번역했고 그렇게 성경을 번역한 선구자들을 카톨릭교회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화형에 쳐했던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대하고 그것으로부터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을 받는 것을 두려워했다.라고 하는 것은 자신들의 신앙의 체계와 그 체제 그 자체가 얼마나 자신이 없는 체제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마틴루터와 칼빈같은 사람들이 새롭게 일어나서 그래서 이 종교개혁을 시도하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개혁신앙으로 돌아오게되었습니다. 그렇게 놀랍게 개혁신앙으로 돌아오게된 그 첫 출발이 역시 어디에서 왔느냐하면은 마틴루터도 마찬가지고 칼빈도 마찬가지고 개인적으로 고전을 연구하다가 그 사람들도 원래는 카톨릭 신자였지만은 성경 그 자체를 접하면서 커다란 체험을 하게된것입니다. 그들의 체험의 공통점이 뭐냐하면은 여기에 지금 기록된것과 똑같은 공통점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갖게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게된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성경의 주인공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신앙을 갖게되고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게 되고나니까 영혼의 참다운 자유가 주어지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그 뛰어난 학문적인 지혜와 성경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한 그 탁월한 영적경험이 결합이되면서 자신들이 알고 그 동안 배워온 성경전체의 지식에 찬란한 복음의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한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쓰여진 최초의 이 기독교가 무엇인가? 하는것을 변증한 책이 기독교강해입니다. 그책은 얼마전에 신문에보니까 천년동안 세계를 뒤흔들어놓은 10권의 책가운데 한권입니다. 그런데 지금보면은야 그럴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들지만은 그 당시에 완전히 캄캄한 카톨릭하에서 가르침을 받고 태어난 사람들밖에는 존재하지 않던 그 시대에 그렇게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독자적으로 거의 변증을 한것이것입니다. 그런데 그 변증한 그 모양의 기독교 신앙의 틀을 지금 우리들이 거의 벗어나지않습니다. 특히 장로교는말입니다. 왜 그것이 사도적인 신앙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칼빈에게 그런 놀라운 자양분을 재공해준 것이 무엇이냐하면은 성경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게 그러면 칼빈자신도 성경 그 자체를 들여다보면서 성경속으로 들어갔느냐하면은 그것은 아닙니다.
칼빈은 파리에 있는 동안에 생명의 위협을 느낄정도로 공부에 무지하게 몰두했던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좀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법조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법률공부를 시켰는데 이 배우는 것은 286이고 머리는 586이니까 컴퓨터로말이지. 그러니까 자기 배우는 것으로는 성이안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하면서 법학말고 주변의 학문들을 갖다가 광범위하게 스스로 공부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말하자면은 신학을 공부하게됩니다. 그때 이미 22살 때 이미 법학을 공부하고 있을때에 파리의 많은 생각있는 사람은 유럽에서 최고의 지성인이 있다고 할것같으면은 이 젊은 칼빈일 것이다. 그렇게 말할정도로 이 사람은 아주 철저하게 학문을 한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그 뛰어난 고전어 실력을가지고 라틴어와 헬라어, 히랍어 실력을 가지고 이 로마의 교구들과 헬라의 교구들, 그 양쪽 작품들을 광범위하게 읽어가다가 커다란 사상을 가진 한 산맥을 만나게된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하면은 역사에 나오는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입니다. 그 어거스틴을 발견하면서 그 어거스틴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사상을 보는데 그 사상이 너무나 성경을 기초로한 신앙사상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그 놀라운 신앙의 사상이 철저하게 성경을 기초로 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성경 그 자체의 중요성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은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갔는데 엄밀하게말하면은 어거스틴을 통해서 성경으로 돌아갔다고 말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광범위한 교구들의 작품들을 섭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비쳐 흐르는 말하자면은 신앙사상의 물줄기들을 이해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어떻게 신앙사상들이 곁가지로 나아가고 그 본류를 유지하면서 내려왔는가. 그리고 자신이 배우고 있는 그 시대의 카톨릭 신앙이 얼마나 그런 사도적 신앙을 계승한 속사도 교구들과 그 교구들의 신앙으로부터 멀리 이탈했는가 하는 것들에 대해서 깊이 깨닫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그 다음에 이제 제일먼저 이 칼빈을 비롯해서 루터를 비롯해서 이런 종교개혁자들이 제일먼저 카톨릭에 대해서 제기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면은 무엇이 성경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말이죠. 이 카톨릭은 선이 분명하지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뜻이냐하면은 구약성경은 이미 정해졌고 신약성경도 이미 어거스틴이 살았을 때에 27권으로서 확정이되었습니다. 그래서 39권과 27권 66권으로 확정이 되었는데 카톨릭이 애매모호하게 취한 태도는 뭐냐하면은 그 위에 성경과 비슷한 형태로 그 시기 전후에 쓰여진 외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의 형태로 되었지만은 그러나 일반적인 문학에 속하는 작품들입니다. 그 여러분들이 보면은 공동번역성경 뒤편에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런 외경을 성경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의 근거를 이야기하는데 아주 복잡한 논쟁이좀 나옵니다. 그런데 어쨋던지간에 종교개혁자들이 확신하기에는 교회는 그 책들을 참고로 해서 어떤 경건서적 정도로 읽었을뿐이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가진 성경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역사속에서 부단히 확인합니다. 그리고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이제 성경으로 돌아온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카톨릭에서는 왜 그런 외경을 성경으로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인정하지않는 것이 왜 그렇게 차이가 나느냐하는 문제가 나오는데 이것이 이런 이야기가됩니다. 성경은 결국은 해석되어질 때에 그 풍부한 진리를 들어냅니다. 그런데 해석되는데 이것을 해석하기 위해서 해석의 원칙을 가지고 해석을 해야됩니다. 그렇죠. 원칙을 가지고 해석을해야된다는 것입니다. 대게보면은 성경은 정확하게 하나인데 이단치고 성경을 부인하는 이단이 거의 존재한적이 없습니다. 그 얘기는 무슨이야기냐하면은 그리고도 그 이단이 자신의 나름대로의 교리를 견지할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성경은 뭐 어디나 같으니까. 해석을 이상하게해서 자신들의 교리를 지지하는 것으로생각했습니다. 통일교에서 발행되는 원리강론이라는 그 책자를 제가 보면서 깜짝놀란 것이 뭐냐하면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책가운데 그렇게 많이 성경을 인용한 책이 별로없습니다. 그런데 또 그렇게 틀리게 인용한 책을 본적도 없었습니다. 하여튼 회개망칙한 그 해석을 거기에서 다 보았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생각을 할수있을까.? 할정도로말이죠. 단 한구절도 정확하게 해석한 것이 없고 다 이상하게 해석을 해서 묶어놓으니까 성경 구절로 엮어놓은 그 책이 전혀 기독교와는 다른 이교를 설명하는 책이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하면은 해석의 ( ? )있어야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얘기 잘들으세요.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인데 어떤 집사님이 원고지를 한800매는 되겠더라고요. 이렇게 된 것을 써 들고와서 목사님 이것을 책으로 낼려고 그러는데 좀 간수를 해주십시오. 그래서 누구냐? 그랬더니 신학교에 지금 들어온 1학년 학생이래요. 그런데 그 때가 4월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3월 5일날 입학했으니까. 1달도 안되었는데 교수도 못쓴책을 학생이 벌써 쓴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게 무엇이냐하니까.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이 성경에 대해서 깨닫는 것이라고, 그리고 펼쳤는데 하여튼 놀라와요. 성경구절이 어쩜 그렇게 많고 그 다음에 이게 물 흐르듯 써내려간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이렇게 쭉 읽었습니다. 그런데 뭐냐하면은 자기깐에는 뭔가를 체험하고나서 물 흐르듯이 성경이 쫙 꾀이는 경험을 한것입니다. 꾀여지는 경험을 한것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어느 한순간에 은혜를 받고나니까 쫙꾀여지더라는 것입니다. 성경구절도 수없이 막 생각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막 그리고는 풀어서 삐뚤삐뚤한 글씨로 한 800권을썻는데 남편이 제일먼저 읽더니 이 책은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을 위해서 반드시 출판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집을 팔아서라도 출판해줄테니까 빨리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책을보는데 읽을 가치도없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말도되지 않는 내용인데 끝없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대게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성경푸는 것을 보면은 뭐라그럴까요. 하여튼 진짜 신들린것처럼 풀어나갑니다. 그렇죠. 그런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들이 어떻게 되느냐하면은 자기가 뭔가를 신앙의 어떤 진리들을 체험하고나면은 성경을 보는 눈이 열였다라기 보다는 어떤 것들을 체험하고나면은 그것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모든 신앙을 설명하려는 성향이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아세요?
(예를 들자면은 병을낮는 신유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그것이 신앙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사건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살아있는 교회와 죽어있는 교회를 잴때에도 신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는 산교회이고 안일어난 교회는 죽은교회입니다. 계속해서 빌기나하고 병원에나 다니고하는 이런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그냥 약 안먹고 벌떡벌떡 일어나는 사람은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넘겨보면은 성경전체가 낮는다는 이야기투성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질병을 주신다는 것 밖에는 눈에 안들어오는 것입니다. 제가 한때는 제자훈련에 미쳤던 때가 있는데 그 제자훈련에 한참 미치고나서 제자훈련이 꼭 전부다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은 그것을 마태복음서부터 보는데 성경전체가 제자훈련 교제였습니다. 제말씀 이해하겠습니까? 또 예수를 믿으면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큰 복을 받는것이 신앙에 있어서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경전체가 복받을 이야기입니다. 복이라는 단어가 5000번도 더 나옵니다. 책장 넘길때마다 그리고 모든 복은 다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다라고 그렇게 생각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둘째시간에 이번 사경회때도 마찬가지고 뭐를 강조한것입니까? 성경의 중심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체험에 붙잡히지 않고는 성경을 바르게 볼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마지막에 그 책을 다 보고나서 이 다음에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려면 출판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막 야단을 쳤습니다. 그게 무엇때문입니까? 원리가 잘못된것입니다. 보세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자 여기를 보세요. 보시면서 설명을 들으면 더 실감이납니다.
성경을 해석합니다. 도구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해석하는 도구가되는 원리들을 성경자체 안에서 끌어왔으면 원리가 성격적입니다. 그 성경자체에서 끌어온 원리가 성경적입니다. 그 원리를 가지고 이 성경 자체를 해석하니까 원리와 해석되어지는 성경 그 사이에 충돌이 존재하지않습니다. 무슨말씀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그러면 더 설명드릴께요. 반대로 원리를 만드는데 성경에서 원리를 끌어낸 것이 아니라. 성경과 성경 이외에 있는 자료들을 섞어서 그 속에서 원리를 만들어내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경우에는 이 해석이 해석을 하는 원리 자체가 성경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닌부분들이 많이 있으니까 내용상에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충돌을 일으키다가보면은 뭐냐하면은 성경이 명백하게 그 이야기를 안하고 있는데도 그 자기가 원리속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이 속에 강제로 집어넣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연옥설이나. 그 다음에 마리아가 무죄하다는 이론이나. 그 다음에 뭐 죽은후에 사람에게 두 번째의 찬스가 있다.라고 하는 그런 교리나. 이런 모든 것들이 전부다 다 성경자체가 아니라. 외경에 나와있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함께 섞어서 원리를 만들어 가지고 성경을 해석할려고 하니까 다른 이야기들이, 다른 해석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잘못된것입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종교개혁자들이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 뭐냐하면은 무엇이 성경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생명을 걸고 오직 구약39권과 신약27권 이외에는 성경이 아니다. 그것을 주장한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종교개혁자들의 공식적인 선포와 도전이 있을때까지 카톨릭은 그 때까지도 외경이 자신들의 성경이다.라는 고백을 안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있고나서야 그 후에 우리는 이 외경도 제2의 경전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신앙고백속에 집어넣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자신들이 믿고 있었던 교리들을 성경적으로 검토하기를 거부하고 그 전통을 계승하기로 다짐한것입니다. 그러면서 카톨릭과 개신교는 다시 만날 수 없는 갈림길을 걸어가게 된것입니다.
제가 왜 이말씀을 드리느냐하면은 보십시오. 무지와 편견 그리고 교육을 통해서 잠시 성경을 덮어놓을수는 있었지만은 그러나 때가되니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접한 사람들속에 그 놀라운 신앙적인 확신들이 다시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생겨나게된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 말씀에 접하는 사람들을 생명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해서 그 사람들을 움직인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그렇게 캄캄하게 어두운 암흑의 시대속에서 찬란한 사도들의 그 신앙을 역사속에 복원 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모든 사람들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강력히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었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성경을 탐구하려고 하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교리하나를 발견하게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어떤 사람의 마음의 밭에 떨어지느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뿌리는 비유를 기억해보십시오. 길가에 뿌려진 씨도 문제가 있는씨가 아닙니다. 그것도 완전한 씨입니다. 그리고 돌짝밭에, 가시나무 떨기속에 뿌려진씨, 옥토에 뿌려진씨, 씨에 있어서 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모두 다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길가와 같은 마음밭에 뿌려진 그 말씀은 마치 그 말씀이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그대로 후 날아가버린 것입니다. 옥토에 떨어진 그 씨앗은 과연 그 말씀이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으며 생명력이 있다고 하는 것을 그 놀라운 성장과 열매를 통해서 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들이 먼저 이 성경에 대해서 배우는 중요한 진리하나가 하나님의 이 성경말씀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문제는 이 말씀의 씨가 어떤 밭에 떨어지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그 말씀이 가지고 있는 내제한 생명력과 운동력을 아주 믿을수 없을만큼 놀랍게 들어내 보여줄수도 있고, 전혀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어려서부터 성경을 안 사람이 디모데말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아는 사람들이 디모데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배우고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듣고 접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납니까? 들은 모든 사람이 믿음이 생깁니까? 들은 모든 사람들이 거룩한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는 신앙의 감격을 맛봅니까? 성경을 접한 모든 사람들, 어려서부터 성경에관한 이야기를 동화처럼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는 은혜의 경험들을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의 숨으로되어서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데 신기하게도 그 말씀은 그럴마음으로 접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역사합니다. 저는 참 이 신앙이말입니다. 특별히 이 진리를 깨닫는 이 신앙이 확실히 그 인간의 학문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뼈져리게 깨닫는 것이 뭐냐하면은 대학을 나오고, 박사가되고, 세상적으로는 참 샤프하고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의 깨닫지를 못합니다. 물어보면은 매일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국민학교도 체 못나온 사람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죠. 성경을 읽다가 한글을 배우게된 할머니 이야기있죠. 기가막히게 성경을 읽어요. 그래서 성경 전체에 대한 아주 탁월한 이해를가져요. 이것이 결국은 뭐냐하면은 이 신령한 지혜라고 하는 것은 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지식이라는 것을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지만은 그러나 그것에만 매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첫째로 받는 지금까지 이 성경이 이처럼 하나님의 후! 불어넣는 숨을 불어넣은 성경이기 때문에 말씀 자체가 살아있고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그 교리를 우리들이 먼저 배웠습니다. 지금 첫 번째로 그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어떤 적용을 할수있게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은 성경이 그렇게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은 생명력있고 능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것같으면 여러분들은 아주 분명하게 두가지를 다시 생각해야합니다.
첫째는 뭐냐하면은 그 하나님의 성경말씀을 정확하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로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침을 받는 여러분들의 마음이 그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기에 적합한 마음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스스로 검토해 봐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닫는 일을 게을리하는 것, 설교를 부주의한 마음으로 듣거나 흘려버리는 것, 신앙생활의 어떤 의문이 생겨나면 그 대답을 성경에서 찾으려고 하지않는 태도, 이런 모든 태도들은 그 마음이 옥토와 같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그것은 길가와 같은 마음이거나 혹은 돌짝밭과 같은 마음이거나 혹은 이 가시나무떨기와 같은 마음입니다. 성경자체에 대한 그런 태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그분을 사랑하기보다는 세상의 재물과 이익에 대한 염려, 그리고 핍박과 고난일 올 때에 견고하게 마음을 지키며 믿음으로 살아야되겠다라고 결심하지 못하는 나약함, 이 모든것들이 여러분 마음속에 떨어진 그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한 생명력을 가지고 여러분속에 그렇게 뻣어 생명력있는 나무가되어서 자라지못하게하는 중요한 원인이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말입니다. 이러한 신비의 세상이 존재하지를 않는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정결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헌신되고 그리고 겸비하게 주님 앞에 엎드려져 ‘나는 무지하오니 내 눈을 열어 아버지의 법을 보게해주시옵소서 가르쳐 주시기만하면 주님의 뜻대로 살고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들어보세요. 그렇게 해서 깨달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피흘리기까지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다가 온사람들에게는 성경이 더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보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런 신비한 책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읽을때마다 이 성경은 새책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진부하다.라는 느낌을 받는 것은 자신의 영혼이 진부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영혼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우리 신학고 다닐 때 목사님이나. 신학교 교수중에 어떤분들이 매삼주오를 늘외쳤습니다. 매일 석장을 읽고 주일날 다섯장을 읽으면은 1년에 한번 성경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는 그런 정도의 양을 읽는 것이 충분했습니다. 그래 사실 규칙적으로 꾸준히 읽지도 않았지만은.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리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나니까. 도저히 매삼주오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을 열고 깊이 목상을하면은 불과한 두세절에서 한 2개월치의 설교의 분량이 막쏟아져 나오는데 그렇게해서 석장을 읽으려면은 24시간 성경만 붙들고 있어도 진도가 석장까지 나갈수가 없습니다.
무슨얘기냐면은 이 얘기입니다. 사과가 있는데 빨갖고 탐스럽게 익었습니다. 그래서 야 좀 먹어봐라. 그랬더니 한번 맛보아서 어떻게압니까? 그말은 맞습니다. 한번 맛보아서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람이 한번만 맛본 사람이고 이 사람은 다섯 번 맛본 사람입니다. 그래 옆에 있는 사람은 한 20번을 맛을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셋이서 이야기를 하는데 표현은 좀 다른데 이 사람은 한번 맛보고 이 사람은 다섯 번 맛보았다니까 다섯배의 어떤 농도의 차이가나야되는데 비슷합니다. 이 사람은 20번 맛보았다니까 20배의 차이가 나던지 아니면 10배라도 차이가 나야되는데 다 비슷합니다. 왜 어떻게 맛을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비슷합니까. 사과를 깨끗이 씻어서 깨물지를 않고 혀바닥으로 계속핥은 것입니다. 한 사람은 한번핥고 옆에 사람은 다섯 번. 그 옆에 사람은 20번 혀바닥이 갈라지도록 핥았습니다. 그것이 무슨 차이가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금 생각난 비유인데 나는 왜이렇게 비유만 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내가 생각해도 기가막힌 비유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끊임없이 접한것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책을 껴들고 무슨 성경공부, 이 성경공부, 저 성경공부, 수없이 돌아다닌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핥은것입니다. 한번 핥은사람보다는 다섯 번 핥은 사람이 더 혀다닥에 차가운 맛을더 많이 보았겠죠. 그리고 열번을 핥은 사람들은. 그것 아무리 핥아봐야 무슨 차이가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핥으면 천도복숭아하고 그 다음에 도마토하고 사과 사이에 구별을 해낼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별이된다면은 그 사람은 진짜 특별한 사람입니다. 물론 감각으로 구별하지 미각으로 구별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맛을 보았다고하는 것은 20번 핥지않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냥 쫙 깨물면은 신맛이 느껴지면서 침이 확 솟아나면서 꽉 깨물면은 그 사과즙이 쫙 뭍어서 떨어지면서 우직하고 씹히는 그 싱싱한 사과의 그 맛, 끝나고 가서 꼭 하나먹어야지. 그 사과의 그 맛은 그것을 느꼈을때에 진짜 맛본 것이 아닙니까. 그렇죠.
신학을 공부해요. 이것이 제 경험입니다. 그냥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계속 성경에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사야는 누가썻고, 이사야는 어느시대이고 여기 나오는 히브리어는 무슨뜻이고, 계속되는데 그거 계속 이것 핥을뿐이지 그것이 막 가슴을파고 들어오면서 야! 이것이 진짜 살아있구나 하고 느껴지지를 않는것입니다. 실재가 느껴지지 않는것입니다. 그러나 가르칠때는 무엇이라고 가르쳐요. 하나님의 말씀은 죽어있고 움직이지도 못하나니. 그렇게 가르칠수는 없지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정말 운동력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것입니다. 육적인 상태에서는 그 정도밖에는 접근이 안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냥 하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여러분이 이 이상 모든 진리에 대해서 이렇게 써야되는 것아닙니까. 여러분들이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눈이 빨개지도록 공부를하고 여러분들이 구원이 무엇인가하는 하나의 교리에대해서 수없이 핥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맛을볼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핥아서 구원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아무리 핥는 그것만을 가지고 배울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은 좀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어느날 우리 구원의 주인이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지를 깨달으면서
광명을 얻었네.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펑펑쏟아지는 구원의 감격속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부르면서 구원이 무엇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야기해야. 성경에 대해서 그런 경험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은 ( ? ) 성경에서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잠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은 하나님이 후! 숨을 불어넣으신 인격적이고 살아있는 말씀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건성으로 덜렁덜렁 교회나 다니고말이죠. 그리고 건멋이나들고 이렇게하면서 형식적인 교회생활하고 말입니다. 이렇게하면서 생각이 없는 신앙생활을하니까. 아무리 그런 인간들을 모아놓고 성경공부를 가르쳐도 계속해서 아주 성공해봐야 아주 혓바닥으로 그 성경을 계속 핥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못하는 것입니다. 시인들이 성경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꿀과같고 송이꿀 보다도 더 달다.” 이 히브리 사람들이 얼마나 이 성경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옛날에 그 자녀들에게 이 성경을 가르칠 때 말이죠. 꿀을가지고 성경의 글씨를 쓰면서 가르쳐주었습니다. 찍어먹게하는, 애들이 얼마나 재미있었겠습니까. 찍어먹으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달구나 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그 말씀의 실재속으로 들어가면서 그 말씀의 생명력과 운동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깨닫느냐하면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전에는 꿀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찍어먹으면서 꿀이라. 그랬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제는 정말 자신의 영혼의 양약과 같고 꿀과같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경험하게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체험을했건, 여러분들이 무슨 은혜를 받았건, 그 은혜를 통해서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가지않는 은혜는 그 은혜가 아니거나 가치가 아주 적은 체험입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나니까 즉각적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이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에대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대한 경험입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우실 때, 나도 눈물이 흐릅니다. 말씀속에서 하나님이 분노하실 때, 나도 주먹을 불끈쥐는 것입니다. 말씀속에서 하나님이 아파하실 때, 나도 가슴을 쥐어뜯는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으로 살아있고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됩니다.
오늘 이 상반절 전체를 우리들이 보지는 못하지만은 다시한번 요약을하자면은 이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셨다.라고 하는 것은 마치 흙으로 아담을 빚어놓으셔서 숨을 불어넣으시니까. 살아서 뛰어다니는 사람이 되었던것처럼 인간이 써내려가는 그 기록에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시니까. 생명력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속에서 그렇게 사람들을 움직여서 위대한 기독교의 역사를 창조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살아있고 운동력있는 말씀으로 역사하지않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듣고 깨닫는 말씀이 정직한 성경의 해석이냐?라고 하는 문제와 또 하나는 우리의 마음밭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잠제적인 그런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위대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이 옥토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력을 펼치고 운동력을 발휘할수 있도록 그 하나님의 말씀을 수납하는 착한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수시로 듣고 일시적인 감동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키지만은 수시로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읽기 싫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을 읽기싫고. 그 말씀을 해석해서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책읽기싫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상세히 풀어서 가르쳐주는 설교가 듣기싫은 것입니다. 이것은 불행한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한번 이 시간에 아주 확신을 가져야됩니다. 우리를 변화시킬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참된 말씀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살아있는 말씀이 되었고 그 말씀이 진짜 살아있어서 우리 개개인의 영혼속에 위대한 일들을 행하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어야합니다. 옥토와 같은 마음이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역사할 때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지만은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역사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준비해야하는 측면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말씀하시면 그것을 잘 받아들이려고 하는 착한 마음,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변화되기를 갈망하는 마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의 진리에 접할때에 이런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들을 위해 행하실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영감된 하나님의 말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上)
지난주에 이어서 설교하고 있는 3장16절 상반절 즉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하는 이 구절은 성경중에서도 특별히 성경의 영감론이라고 하는 교리를 세우는 아주 중요한 본문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영감교리는 왜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난시간에 이 본문으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그 위대한 교리를 해설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셨다”라고 하는 것, 즉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는 말이 세오프니스토스 즉 숨을 불어넣으셨다. 원래 의미가 그런 것인데 그것을 아담의 창조와 연관시키면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빚으시고 흙더미에 불과한 그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그가 살아있는 인격적인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 자신의 생기가 불어넣어져서 된 것이며. 따라서 성령이 그 말씀에 역사하실 때에 깨닫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놀라운 증거를 보여주시고 그리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얼어붙은 사람들의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 그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서 주님의 사랑이 물되어 흐르게 하는 방법이며 황폐한 땅에 씨를 뿌려 열매를 맺게하고 숲이 우거진 아름다운 동산으로 변하게 하는 변화의 위대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숨결이 불어넣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이 직접적으로 경험하면서 그 말씀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야할 위대한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시간에는 사과의 비유를 말씀드리면서 침이 상당히 많이 고이셨다고 여러분이 그러시더라고요. 또 벌써 잊어버렸지뭐 무엇을했는지. 그래서 사과를 혀로만 계속 핥아서는 그 사과의 맛과 토마토의 맛을 구별할 수 없는 것처럼.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숨결이 불어넣어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남을 갖게하는 은혜의 역사를 동반할 때. 그 때에 우리는 그 사과를 확 깨물어서 시고 달콤한 맛을 경험하는 것처럼 그런 차이가 있다.라고 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드디어 그런 것들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을 받을려고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본문 위에 세워지는 위대한 영감교리에 대해서 말씀드림으로서 이제 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림으로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이 성경은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앙을 가져야한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사람에 의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바울서신은 바울이 기록했고. 베드로의 편지들은 베드로가 기록을했습니다. 물론 바울의 편지들 중에 어떤 것들은 바울이 직접 기록하지를 않고 바울이 불러주고 다른 사람이 대필한 것도 있지만은 어쨌던지 간에 다 쓴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은 하나님이 글씨는 쓰시는 장면이 몇군데 나타납니다. 생각나는대로 우선 3개만 이야기해보면은 우선 첫째는 십계명을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십계명을 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다니엘에 가면은 “메네메네 대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씨를 벽에다 씁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이 쓰셨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습니다. 이상중에 보인 것이니까. 그렇지만 하여튼 그것이 나오고 또 하나 이제 쓰신 기록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쓰신 것입니다. 땅에다가 무엇이라고 쓰신지는 알수없는데 하여튼 땅에다가 뭐라고 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글을 쓰시는 그 상황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이 성경의 기록들은 모두 분명히 역사적인 기록들이고 사람에 의해서 기록된 글입니다. 사람에 의해서 기록된 글이니까. 그 사람이 저자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부인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수 있겠느냐? 이미 벌써 사람이 하나님이 뭔가를 깨닫게 하셨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아주 정확하고 오류가 없는 것일 수 있지만은 그것이 이 인간의 감각속에 담겨서 깨닫게 된 것을 인간이 기록할 때에는 인간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타이프 치고나면 오타가 많이 나오고. 썼는데 정육점을 주유소라고 잘못쓰는 경우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다른생각 하다가. 그렇죠. 그러니까 얼마든지 그런 오류가 나올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윗줄을 보고 석깔려서 아래줄을 보고 그대로 배끼는 수도 나오고 얼마든지 오류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일수 있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의문은 이러한 회의는 벌써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회의가 이미 벌써 15세기경서부터 제기되기 시작되었고 그리고 이제 18세기 19세기 20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우리나라 밖에 있는 구라파의 대부분의 신학교에서는 성경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전제로해서 논문을 쓰면은 90%이상의 학교에서 논문이 통과가되지 않을정도로 사람들은 이미 이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안믿는 세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 세상의 문학작품이 그러하듯이 이것도 역시 인간의 기록이기 때문에 완전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제 비트겔슈타인 같은 그런 언어학자는 이 문제를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쭉 접근을 하면서 이런 논리를 펴는것입니다. 뭐냐하면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계시가 완전하고 깨끗하다고 할지라도 그 인간의 언어라고 하는 그 그릇 자체가 완전하고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 담기는 즉시 그 계시는 말하자면은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는 깨끗하고 순수할수 있어도 이것이 계시로 존재하는 동안에는 깨끗한데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 불완전하고 부패한 언어로 그것을 표현할 때에는 그 순수한 계시를 그대로 100%깨끗하게 해줄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비유를 하자면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 더러운 그릇에다가 금강산에서 길어온 깨끗한 물을 담았다고 하더라도 물을 부을 때에는 그 물이 깨끗한 물이지만은 이 그릇이 더러운 그릇이면은 담기는 그 즉시 그 물이 먹을수 없는 더러운 물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기록사이에 그런 불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은 이제 그럼 우선 만약에 그 말이 옳다고 받아들여지면 이제 이 신앙의 세계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어떻게 되느냐하면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완전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신앙이 무너지게되면은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하면은 이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신앙생활을 위한 가이드에 지나지않습니다. 참고 자료에 지나지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슨뜻이냐하면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절대적인 원칙, 절대적인 규칙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어떻게 받을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제각기 생각할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교리의 역사를 보면은 이 구원의 있어서 교회가 항상 일치된 의견을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오직 그리스도로서만, 오직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받을수 있다는 것이 사도들의 신앙의 사상이었다고 할것같으면은 카톨릭 시대에 와서는 이제 믿음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인간의 행위의 도움을 받아야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죽으신 그 죽음으로서는 우리가 구원 받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인간의 행위와 인간의 이 조건쪽으로 많이 가고. 심지어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입어서도 구원을 받을수 있다는 사상까지 나옵니다. 그러다 그것이 다시 종교개혁 시대에 와서 아니다. 오직 인간은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 의를 전가하심으로서 우리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라고 하는 “오직 믿음으로서”라는 신앙을 다시 세우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로도 계속해서 모든 기독교가 한결같이 그 유산을 계승했느냐하면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때문이냐하면은 각기 이 신앙의 어떤 절대적인 어떤 규칙들이 성경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자체가 신앙의 한 가이드 정도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참고할 뿐이지 그 다음에는 자신의 이성에 의해서 이제 나름대로 논증하고 추구하면서 신앙의 도리들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혼란입니다. 그것 뿐만아니라. 모든면에서 그런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되면 또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 성경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이야기가 섞여져있다. 그래서 어떤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어떤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도덕적인 교훈 같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설명이나. 수치, 지명, 지리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파괴하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문서설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이 한 책을 썼다라기 보다는 이미 존재해 있는 잡다한 옛날 자료들을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각기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 자료들을 배열을 해서 만들어놓은 문헌들을 여러 세대에 걸쳐서 편집한 것이다. 뭐 그런 이야기부터 시작을해서 아주 굉장히 많은 성경자체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책이라는 사상을 부인하는 다양한 이단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다양한 이단들을 여러모로 설명을하면은 한이없을 정도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이 성경에 대한 신앙은 이런 것입니다. 여기 이야기 하는 인간이 그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정을합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기록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록하신 것은 아니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첫째는 뭐냐하면은 불러쓰기 식으로 하나님이 불러주시고 인간이 받아쓰는 식으로 성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 이 디모데후서라고 하는 것도 처음에 시작은 목회자인 사도바울이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쓰여질 때에는 그 쓰여질 때는 사람들이 편지가 딱 오는 그 순간에 디모데가 딱보고 야! 이것은 성경말씀이고 구약성경 뒤에가서 붙어야할 책이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주고받은 편지였습니다. 이 편지를 쓸 때에 사도바울의 경험, 학문, 인품, 그 다음에 지식, 문체, 교육의정도 이런 것들이 모두 반영되어서 써내려간 것입니다.
누가는 직업이 의사였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써 내라고 누가복음을 써 내려가는데 뭐 눈에는 뭐가 잘보인다고 의사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는 가운데 특별히 어떤 것들에 관심이 많았을까요? 병을 고치는 장면에 대해서 관심이 참 많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는 두리뭉실하게 나와 있는 병명들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아주 구체적인 의학용어들이 등장을합니다. 그것은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느냐하면은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것이라기보다는 이 성경을 기록할 때에 인간의 재능이나, 지식, 배운정도, 학식, 관심 이런 것들이 모두 반영이 되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신약의 레위기라고 불릴정도이니까. 유대인들의 제사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책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제사를 한번도 지내본적이 없는 이방사람이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것을 받아서 그렇게 적었을리는 없고, 구약의 제사를 잘 알고 있는 히브리인이 썼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청교도들이 그 저자를 사도바울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불러쓰기 식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불러쓰기 식으로 되었다면은 이 성경이 성경책별로 어떤 특징이 없고 그리고 모두 거의 획일적이었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물론 제가 쓴책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언젠가 잡지가 한권 날아왔습니다. 그런데 잡지를 이렇게 툭 넘겼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페이지가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한 10줄쯤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깜짝 놀랐습니다. 어쩜 이렇게 내가 쓰는 글씨쓰는 투로 쓰는 사람이 있을까? 너무 똑같게 쓴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누군가 그리고 앞을 막 펼쳐보니까. 김남준입니다. 이 사연이 어떻게 된고했더니 어느 잡지사에서 저에게 이런 주제로 글을 써주십시오. 하고 원고를 가지고 갔는데 내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에 기분이 나쁘기는 하지만은 나는 쓰느라고 썼는데 내 글의 논지가 그 잡지사의 방향하고 안맞은 모양이구나. 그러면서 싫으면 관둬라. 내가 글을 발표를 못해서 안달이 난 사람도 아니고 그만둬라. 그런데 1년이나 지난다음에 나왔습니다. 예고도 없이 그러니까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탁 보는데 야, 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내 얘기하고 똑같은가. 하고 보니까. 틀림없습니다.
책을 20여권썼으니까. 그 책마다 다 똑같지가 않습니다. 하나는 기도, 하나는 진리에 대해서, 하나는 부흥에 대해서, 하나는 용서에 대해서, 하나는 십자가에 대해서 뭐 다양하게 썼습니다. 그래도 펼쳐놓고 보면은 다루고 있는 주제는 다르지만은 거기 이렇게 6-7줄 읽어가보면은 제 책을 읽었던 독자들은 즉시 이것이 저의 글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않습니까. 주제는 다르지만은 그렇게 그런 의미에서 성경전체가 만약에 하나님이 불러주셨다고 할것같으면은 거의 그런 의미에서 같아야합니다.
물론 로마서 주제는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기록을 하고 있고. 또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누구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기록이 되어서 쓴 글의 촛점은 분명하지만은 그러나 마치 깊은 기도를 경험하라. 하고 십자가를 경험하라. 두 개를 비교할 때 주제는 달라도 이 흐르는 글의 분위기가 같듯이 모두 똑같아야할 것아닙니까. 그런데 안그렇습니다. 바울의 글은 아주 논쟁적이고 논리적입니다. 그렇죠. 그리고 베드로의 글은 아주 강하고 확신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고. 그렇죠. 또 누가는 히랍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헬라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인인데 당시 로마의 공용어가 헬라어기 때문에 헬라어를 배워서 헬라어를 하는 사람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제시대 때 살았다고 하더라도 일제시대 때에 몇 년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 일본어를 신뢰하기 힘들듯이. 그런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처음서부터 히랍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헬라어에도 크게 여러 가지 방언이 있지만은 대표적인 방언이 두 개가 있는데 코인의 방언과 아티카 방언입니다. 코인의 방언은 그 당시 일반인들이 쓰던 평민들이 쓰던 공용어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히랍어 성경입니다. 그 언어로 쓰여졌습니다. 아티카 히랍어는 이것은 뭐 플라톤이든지 소크라테스라든지. 이런 사람. 히랍 철학자들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유클리티의 기하학이라든지. 이런 것을 읽을수 있는 말하자면은 고급 헬라어입니다. 클레식할그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히랍사람이기 때문에 코인의 헬라어보다는 훨씬더 풍부한 히랍어 실력을 지녔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문체가 유려하면서 그러면서 고전적인 그릭어를 이렇게 쫙 구사하면서 써내려갑니다. 그래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어렵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의 차이가 만약에 불러주는 것이었다.라고 하면은 존재할 수가 없다고 봐야합니다. 그렇죠. 그런데 이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릇된 주장가운데 하나가 어떤 것이 있느냐하면은 성경은 어떤 하나님의 어떤 신적인 영향력으로 되었다.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태어날 때에 아주 천재적인 달란트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땅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깊이 존경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누구냐하면은 존경한다라기 보다는 하여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누구냐하면은 대하소설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뭐 보통 비상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저는 봅니다. 그 수백명의 인물들이 등장을 하면서도 30권 40권 써내려가면서도 그 인물들을 다 이렇게 입체적으로 얽어매면서 그 스토리를 전개해갑니다. 우리같으면은 1권쓰고 3권쯤가면은 1권에서 뭐라고 그랬는지 생각이 잘 안날텐데. 그런데 그것을 기가막히게 연결을시켜서 말하자면은 수많은 실타래처럼 얽힌 이야기들을 풀고 엮어가면서 그러면서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그 하나의 저술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정말 굉장합니다. 편지만 길게 쓸 수 있는 사람만해도 나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을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런 어떤 천재적인 것. 예를들면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같이 이 사람이 천재적인 것을 주어서 그래서 그 천재성을 가지고 작곡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이러듯이 그런데 그것은 어때요. 연습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연습하면은 조금 어느 정도까지는 할수 있겠지만은 제가 지금 이 나이에 목사 그만두고 아무리 테너를 연습을 한다고해도 파바로티만큼 할수있겠습니까? 웃으시는데. 비웃는 것입니까? 모르죠. 어렸을때부터 했으면은 그 사람을 능가했을지도 모르지만은 하여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천재성, 평범한 사람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탁월한 천재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이런 종교적인 저술들을 기록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은 이제 어떤 곤란한 문제가 생기느냐하면은 아무리 천재라고 할지라도 완벽한 천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그도 인간인데 그가 가지고 있는 죄악된 성품과 유한한 인간의 영향력이 어떻게 그의 저술활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이제 설명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모든 그릇된 교리들을 버리고 우리가 신앙하고 있는 교리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뭐냐하면은 이 성경을 기록하는 기록자들이 성경을 기록해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 성경을 기록할 때에 저자들이 내가 지금 기록하고 있는 이 편지가 후대에 구약성경 39권 뒤에 들어가서 2000년 2월쯤 되면은 열린교회에서 설교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까지는 몰랐지만은 그러나 이것을 기록해 나아갈 때에 사도바울이 수많은 편지를 썼지만 그러나 성경으로 체택될 그 편지를 쓸 때에는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하는 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셔서 그래서 그 신적인 영향력 아래서 이 글을 썼고 성경을 쓰는 동안에 그런 신적인 영향력 아래 있음으로 흔히 인간이 일반적일 기록활동을 할 때에 받을수 있는 여러 가지 많은 불리한 점들, 생각의 착오나, 생각은 올바르다고 할지라도 기록을 잘못 옮긴다거나 하는 이런 실수들을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그들을 보호하셔서 완전무결하고 순결한 계시가 인간의 언어활동에 의해서 위축되거나, 좌절되거나, 외곡되지 않고 그대로 기록으로 흘러나올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감의 교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생각에 있어서만 영감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런 생각을 계시를 받아서 그 계시를 인식하고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실 때 의도하셨던 뜻을 그대로 전달할수 있는 지상에 존재하는 최상의 언어를 선택할수 있도록 하나님 자신이 직접적으로 간섭하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 없으면은 제가 설교하는 것처럼 한글, 한자, 한단어를 말하면서 이것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어떻고, 우리말 번역은 어떻고 히랍어 성경에는 어떻고 이것이 직접 번역하면 이 한글 성경과는 어떤 차이가 나고, 전치사가 앞에가 있는데 없는데 이런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모두다 이런 신앙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보기에는 무익하고 너무 쓸데없는 일입니다. 그렇죠. 아니 대강 흘러가는 뜻만 알면되지. 그렇지않습니까.
여러분 그 동아일보를 제가 펼쳐놓고 왜 이 기사에서 대통령께서 라고 안쓰고 대통령이 라고 묘사를 했을까? 이것을 가지고 한시간씩 설교할 필요가있습니까? 필요없죠. 그렇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은 그것은 어짜피 기자의 이야기고 거기에는 오류가 있을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대충읽고 전체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요지만 이해하면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사상적으로만 영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상을 전달하는 한글자, 한단어의 선택에까지 하나님의 강력한 간섭하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그렇게 세새토록 살피면서 탐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하고 신앙에 있어서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만 하나님의 숨결이 불어넣어진 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고 그 말씀이 풀려질수 있고, 그 말씀이 드러내 보여주기 원하는 것을 설교할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언어 하나 하나를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최적의 단어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계시를 그 시대의 인간들에게 들어내 보여주실수 있는 그런 최상의 간섭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정확하게 말하면은 성경의 “저자”라는 말을 잘 쓰지않습니다. 저자는 뭐냐하면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않고 독자적으로 쓴 것입니다. 남이 쓴책을 풀어서 슬슬슬슬 쓰는 것을 저서라고 말하지않습니까. 그것은 하나의 편집이나, 혹은 편술, 혹은 이렇게 풀어서 썼다. 이렇게 쓰지. “저자”라고 할 때에는 많은 것들을 보고 들었지만은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생각속에서 다 용해되어서 다시 새롭게 쏟아져나올 때, 창작일 때 그것이 저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성경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기록자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말에 있어서 기록자라고 말할 때에는 그냥 마치 속기사들처럼 불러주는 대로 적는 사람이 기록자라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기록은 아니고 그런 독창성을 가지면서 자신의 지식과 교육의 정도와. 인격, 성품, 언어구사 이런 것들이 반영이 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결코 독자적으로 쓴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그를 저자라고 부르지 않고 오히려 기록자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향아래 쓴사람.
성경이 약 1500년에 걸쳐서 쓰여진 방대한 책들의 장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라이브러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이 시대와, 저자, 신분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통일성을 갖는 이유는 무엇때문이냐 하면은 기록한 사람들은 그렇게 신분도 다르고 시대 역사적 배경 모든 성격도 다르고 다 다르지만은 그러나 그들을 움직였던 숨을 불어넣으신 그 하나님이 궁극적인 저자이신데 그분이 한분이시기 때문에 다양성과 함께 그 속에는 뭐가 존재하느냐하면은 통일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영감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성경의 기록자가 성경을 쓰는데 있어서 성경을 쓸 때 인간의 그 유한한 인간의 약점이나. 죄악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가 순수하게 그 언어활동을 통해서 기록으로 남을수 있도록 성령의 특별한 감동, 감화, 그런 보호하심이 바로 교리에서 이야기하는 영감입니다. 이런 영감의 결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된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에는 사람들의 눈을 그렇게 끌지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죠. 아마 디모데가 사도바울에게로부터 받은 그 편지를 잘 보관했겠죠. 그리고 또 어떤 부분들은 풀어서 교인들에게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왜 개인적으로 온 편지들을 이렇게 풀어서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을 가능성이 많으냐하면은. 또 실재로 그렇게 많으냐하면은 이제 구약의 시대가 끝나고 성령께서 오시고나서 새로운 신약의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알다시피 여러분 구약의 신앙과 신약의 신앙이 신학적으로 연관은 되지만은 그러나 굉장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이질적이라기 보다는 그만큼 말하자면은 구약의 제사와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구약의 신앙과 그리스도 예수와, 성령과, 그 다음에 은혜, 복음을 중심으로 한 신약의 시대는 그만큼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방향이 다르지는 않는데 말하자면은 그 종교의 질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질적이라기 보다는 질적으로 그렇게 현저한 차이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이 신약의 신앙의 도리를 구약만으로 모두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들이 살아가다가 뭐 아주 그냥 깜짝 놀랄만한 충격적인 일을 만나거나 감당할수 없는 큰 슬픔을 당하거나 아니면은 주체할수 없는 기쁜일을 만나도 그것을 표현하기가 힘이드는데 하물며 구약시대의 율법을 중심으로 하고 그리고 제사를 중심으로 한 그 구약적인 신앙에서 성령이 오심으로서 이제 하나님 자신의 은혜와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는 이 어떤 생명의 풍성한 역사가 있는 신약의 시대의 영적 종교의 시대가 열렸을 때에 그 새로운 시대의 이것을 이것 가지고 설명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설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약을 가지고 이렇게 설교를하면서 이해가 되는 이유는 신약의 빛을 가지고 구약을 다시 비춰보면서 그것에서 복음의 도리들을 찾아가지고 신약을 조명하니까. 그것이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이지. 신약의 전기불을 가지고 구약을 밝히니까. 구약에서 아주 밝은 빛이 다시 나오면서 신약을 다시 이렇게 비춰주는 것이지. 이 신약의 빛이 없다.라고 할것같으면은 구약 자체의 그 시대에 묶여있는 그 생각만으로는 이 신약시대에 경험되고 있는 이 엄청난 새로운 신앙의 이 질을 설명할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르침의 필요를 엄청나게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보석과 같이 권위 있는 가르침을 주는 중요한 증언이 무엇이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것은 사도들의 말입니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제 신약의 도리들을 설명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역사가 흐르면서 사도들이 쓴 글도 이것보다는 훨씬더 많습니다. 그리고 사도들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쓴 글중에서도 이것보다 훨씬더 엄청나게 많은 신앙에 관한 문서들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이런 것들이 역사가 흐르면서 이렇게 하나님이 숨결을 불어넣어서 감동시켜주심으로 하나님의 순수한 계시가 인간의 오염된 언어작용에 해를 받지않고 순수한 계시로 기록된 책들은 이 시대가 흐르면서 점점점점 더 두각을 나타내면서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이 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간이 아니면은 제가 설명할수 없으니까. 좀더 자세히 설명할께요. 그렇게 해서 이 성경 27권이 확정된 것입니다. 그래서 확정된 것은 5세기경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에 이것을 확정하는 종교회의에 말하자면은 위원장쯤 되는 사람이 어거스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흔히 생각하기에 이 성경을 확정한다. 그럴때에는 돌아다니던 성경중에서 막 이렇게 골라서 야, 이것이 좋겠다. 그리고 딱 해놓고 앞으로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그랬을 것 같은데 그것이 아니라. 이미 이전에 27권이 신약27권이 거의 확정이 된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은 벌써 400년이상 흘러가는 역사속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강력한 권위를 가진 책들은 신기하게도 그 글을 읽거나 그 글을 풀어서 설명을 할 때에 놀라운 신앙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심의 역사, 은혜의 역사,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 의해서 경험을 본 사람들은 성경이 그 당시에 신약성경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 풍성한 신약시대의 새로운 신앙의 실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권면하거나, 설교하거나, 말할 때에 권위 있게 인용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어떻게 증거가 나타나느냐하면 좀 복잡한 이야기가 될지모르지만 들어보세요. 이런 기회가 아니면 말할 수 없으니까. 이런 것들을 입증하기 위해서 학자들이 어떻게 하느냐하면은 1세기 이후에 이제 속사도들에 의해서 쓰여진. 그러니까 사도들 바로 제자들이 속사도입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폴리갑 같은 사람들, 사도들의 바로 뒤를 이은 사람들이 속사도들 입니다. 그 사람들을 교부라. 그 때부터 그 이후에 쓰여진 글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래 그 글들이 아주 탁월한 열심을 가지고 사람들이 모읍니다. 로마의 교부들의 문헌과 그다음에 그릭어로 쓰여진 헬라 교부들의 문헌들을 히랍 교부들의 문헌들을 모읍니다. 어마어마하게 방대합니다. 그것들을 이렇게 모으는데 그것을 모아놓고 이제 엄청난 작업이죠. 거기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주고받는 신앙의 논문이나. 교리를 해명하는 글이나. 사람들에게 권면하는 편지속에서 누구의 글, 어떤 글들이 인용되는지를 샅샅이 조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용되는 빈도수를 다 조사를 하는데 이 성경이 이미 초창기에서부터 압도적으로 많은 회수가 인용이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느냐하면은 누구 한사람이 이것을 39권 뒤에다 이렇게 붙이지는 않았지만은 아직 이미 사람들속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글들이라고 하는 사실들이 사람 모두에게 점차점차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27권 신약성경이 이것이 신약입니다.라고 선언을 했을때에는 사람들이 아이, 말도안되. 그중에서 이책 이책 이책. 나는 그 이름도 모르는 책인데 어떻게 성경이 될수있어. 저쪽 교회에서 우루루 들고 일어나서 아, 우리는 그런 것 성경으로 받을수 없습니다. 그럴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두다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정확한 표현은 이런 표현입니다. 교리사적으로 볼때에 카톨릭과 개신교에서 가지고 있는 중요한 성경에 대한 교리의 차이는 뭐냐하면은 카톨릭은 교회가 도장을 찍음으로 성경이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경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성경위에 있습니다. 교회가 이것은 성경이다.라고 인정을 해주면 그것이 성경이 된다.라고 교리입니다. 아주 극단적으로 말하면은
그러나 개신교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 카르타고 회의에서 27권을 확정된것에 대해서도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어떤 표현을 쓰느냐하면은 그 때에 신약의 성경은 이책 이책 이책, 27권입니다.라고 교회가 도장을 찍었지만은 그것은 이미 교회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성경의 27권의 목록에 대해서 교회가 무릎을 꿇고 승복을 한것이라는 것입니다. 확인을 한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적합할지 모르지만은 아이가 점점점점 자라면서 우리 집에 돈다 갖다 주고 쌀도 사주는 그 아저씨가 아버지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처럼 커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지. 어느날 초등학교 들어갈때쯤 되어서 “어이 당신 내 아버지로 인정함” 그러므로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지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성경도 그러한 역사를 거쳐왔습니다.
그래서 좀 어려운 책이기는 한데 로만 가이슬로와 닉스가 쓴 성경일반 총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문서 선교부에 이야기하면은 갖다줄수 있습니다. 그런데 읽는데 좀 인내가 필요할것입니다. 한 600페이지쯤됩니다. 제가 번역한 책인데 현존하는 소위 이야기하는 성경이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에 대한 이론에 대해서는 최고의 책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야보다는 한10배쯤 어렵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데 그런데 한번 머리를 싸매고 읽어보면은 도움은 되리라고 생각을합니다. 아주 굉장히 복잡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어쨌든지간에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제 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것입니다. 그러면은 그것이 이것이란말이가. 이런얘기죠. 그런데 이제 그것은 성경의 원본이 그렇다는 교리입니다. 그러면은 도대체 우리는 또 미궁에 빠지게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것은 어떻게되는 것입니까. 우리말성경은 어떻게되는 것입니까. 그렇죠. 그것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원본이 있었는데 원본은 지금 현재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아마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원본을 하나님께서 남겨두셨으면 틀림없이 우상숭배하기 좋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마 엄청나게 숭배했을 것이다. 존재하지않습니다. 광야에서 높이 쳐들었던 놋뱀까지 가지고 숭배를 했던 사람들이니까. 만약에 이 성경의 원본이 남아있다. 그러면은 아마 엄청나게 존중했겠죠. 그러나 존재하지않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에게 이런 중대한 의문이 떠오르게됩니다. 도대체 그러면은 그 원본이 없는데 그 원본을 그렇게 이것이다.라고 말할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냐하면은 사본의 역사입니다. 성경의 원본이 여기있었는데 여기에서 배껴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런데 그 당시로서는 성경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특히 구약이나. 신약 모두 마찬가지지만은 왜그러느냐하면은 제대로 성경을 가지고 있을려면은 양피지에다 써야됩니다. 그런데 그 양피지에다가 쓴 것을 성경책 하나가. 무슨책, 무슨책 할 때 무슨서, 무슨서 하나할 때 그것이 두루마리가 어마어마합니다. 그것을 만약에 구약성경 39권만써도 창고로 하나가득입니다. 리어커로 하나 가득도 되고 남습니다. 리어커가지고는 안됩니다. 마차정도에 실어야 될정도로 그렇게 엄청난 분량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는 성경을 가지고 있는다.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배끼는 것입니다. 배끼는데 지금처럼 복사기가 있어나. 아니면은 무슨 타이프가 있어서 대량으로 찍어낼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사람이 손으로 배껴서 써야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어떤 곳에서는 사람들을 많이 모아놓고 한꺼번에 배끼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본들은 불러줘서 배끼는 그런 사본들도 있습니다. 그러다 어떤 사람은 불러주니까. 불러줘서 배끼면 가장 빨리 배낄수 있지않습니까. 빨리쓰죠. 그 대신 뭐냐하면 어때요. 사본의 질이 떨어지겠죠. 그렇죠. 그래서 불러주니까. 또 어떤 사람은 그 불러주는 것을 이렇게 하다가 딴짓하는 것입니다. 마귀도 그리고 뭐 짐승도 그리고 그런것도 발견됩니다. 어느 학교에 가든지. 내일숙제 뭐다. 받아써. 그러면 거기에다 엉뚱하게 무슨 자기 먹고싶은 호떡. 꿀사탕. 이런 것을 쓰는 아이들이 있듯이 그런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이 사본들은 아주 경외심을 가지고 옮겨졌습니다. 그것을 쓰는 것을 하는 사람들이 옛날의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주된일이었습니다. 기가막히게 펜촉으로 깨알같은 글씨들을 옮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신앙이 굉장히 강했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렇게나 옮기면 된다.라고 생각을 안했습니다. 아주 정성껏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갈려져나오면 그 다음에 또 하나를 가지고 많은 새끼를 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러면서 계속하면서 수없는 역사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만해도 가장 가까이 발견되는 구약성경 전체가 있는 사본이 주후10세기 이상 올라갑니다. 주후 10세기 11세기 이하로 내려가지를 않습니다. 물론 쪼가리 쪼가리 발견되는 것은 이제 그 전시대에도 나옵니다만은 그런 정도로 희기합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러면은 어떻게 원본을 추적할수있느냐. 그런데 신기한 것이 그렇게 사본들을 쭉 놓고 비교를 해보면은 놀라울 정도로 시대도 다르고 배껴진 지방도 다른데 놀라울정도로 그 사본이 기가막힌 일치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수백가지가 되는데 중구난방으로 제각각 틀린다면은 우리는 아주 엄청난 혼란에 빠질것입니다. 그것을 다 비교를 하면은 아주 기가막히게 일치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에서 몇백분의 일은 틀립니다. 아주 분명히 틀리고 틀린 것 가운데 대부분은 별로 문제가 안되는데 “예를들면은 성경이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동일한 정도의 무게있는 진리를 싣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말씀인지 아시죠. 모든 말씀이 진리지만 그 성경 각 구절이 모두 똑같은 분량의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죠.) 그러니까 그렇게 작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그러한 본문 그래서 단어하나를 바꾸어놓든지 옳게 이렇게 집어넣든지 별로 우리의 신앙에 이 근본적인 것들을 흔들지 않을 본문들이 대부분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것들이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하는 분문들 가운데 서로 다른 것들이 나타날 수 있는것입니다. 그 때에 이제 그 수십가지 사본들이 있고 그 사본들이 있고 또 번역본들이 있지않습니까. 다른나라어로 번역된 것. 그것은 분명히 원래의 택스트가 있으니까 번역했을거 아닙니까. 그것을 다시 거꾸로 히랍어나. 히브리어로 번역을하면은 무엇이 나올까가. 나오지않습니까. 언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비교를 할수 있으니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은 이 번역본이 참고했던 원래의 히랍어 성경이나. 히브리어 성경에는 어떻게 되어있을 것이라는 거꾸로 유추가 가능합니다. 그것까지 최대한 동원되어서 그것을 서로 논쟁을 붙이면서 합리적인 비교의 과정을 통해서 원본이 이랬을 것이다.라고 추적을 하는 학문이 사본학입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하나 하나를 그렇게 엄청난 논쟁을 통해서 확인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원본이 무엇인지 알수없을 정도로 불일치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택스트를 택해서 쭉 읽어나가고 그것이 정당하다고 보면서 논쟁이 있는 부분들은 다른것과 비교해가면서 검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은 이 성경을 해설하고 깊이있게 성경속에서 가르침을 찾아내는데 있어서 이 성경의 원어를 알아야된다는 것은 아주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개인적인 경건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는다면은 그렇지않지만 이렇게 설교를 하거나. 성경을 전문적으로 가르친다.라고 할 경우에는 너무나 너무나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 신학생 세미나 가서도 신학생들에게 원어공부 안한다고 엄청나게 많이 도전을했는데 그리고 나서 열심히들 한다는 소식도 들리는데 굉장히 열심히 해야합니다. 나중에 설교할 사람들이 히브리어하고 헬라어 공부 안하는 것은 칼없이 집게로 수술할려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누구를 잡을려고말이지. 그렇게 해서 성경의 다양한 번역본들과 사본들을 놓고 거기에서 합리적으로 다 판단해서 논쟁이 되는 부분에 있어서는 원본이 이랬을것이다.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선택할수 있도록 그렇게 말하자면은 원어를 다룰수 있는 풍부한 지식들을 소유해야하는 것입니다.
고맙게도 이제 모든 사람들이 그런 사본을 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 중에서 어떤 꼭 필요한 사본은 우리같은 사람이 가면은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보여주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근처만 가도 쫓아내는 그런 중요한 자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진한번 못찍게하는 한번 찍을 때 어마어마한 돈을 내야하는 그러한 진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이 세계에서 거기의 자료에 접할수 있는 사람이 손가락으로 꼽을정도로 한정되어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것을 사진으로 찍고해서 전문적으로 검토해서 성경의 그 아래에다가 아주 깨알같은 주를 달아요. 그렇게 해서 이렇게 보면은 깨알같이 주를 쭉달아요. 그래서 여기에 있는 장치들을 보면서 이제 여러 가지 수십개의 혹은 수백개의 사본들과 역본들이 어떻게 다를지를 판단하면서 원래의 성경의 원본이 어떤기록에 가까웠을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 다음에 이제 본문이 확정되고 그것을 번역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분명히 이야기해야 할 것은 사본을 기록하는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은 있었겠지만은 그러나 그것은 영감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잘못 배낄수도 있다.라고 보는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본에 의해서는 우리들이 영감의 결과는 뭐냐하면은 오류가 없는 정확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이 되었다고하는 것입니다. 원본에 있어서는 인정하지만 사본에 있어서는 그것을 인정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대로 그 수많은 사본들이 거의 완전한 일치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사본은 곧 원본이라고 말을해도 거의 문제가 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다음에 여러분들이 한다리 더 건너가서 그러면 번역본은 어떻게되느냐는라고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영어성경도 있지만은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신앙생활의 토대를 이 한글성경 특별히 그중에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개역성경 이것을 보고있습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 성경번역을 몇번을 시도하고 다른 출판사에서도 번역을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손댄 출판사마다 다 밑졌습니다. 왜냐하면은 사지를 않습니다. 왜 아니 하나님의 말씀이 한번 확정이 되었으면 됐지. 아니 이것이 뭐 또 바뀌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을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보면은 참 나쁨니다.
특별히 성경을 그 시대의 언어에 맞게끔. 지금 이 성경에 보면은 우리들이 모르는 단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것들을 이렇게 맞게끔 여러분 이런 단어 이해합니까. 연부년. 모르죠. 그다음에 초달. 이해안가죠. 설, 악인의 설이 내게 미쳤나이다. 이해가가느냐고요. 안가죠. 종용히라는 말 아세요. 하나도 모르죠. 네 개 이야기했는데 아무것도 몰라요. 이처럼 세월이 흘러가면서 언어가 자꾸 바뀌니까 사실 이것도 그 시대의 언어를 이렇게 따라잡아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처음에 선교를 받을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하고 움직일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아주 확고한 신앙을 받아서 성경을 인용하다가라도 조금이라도 잘못하면은 무슨 엄청난 죽을죄를 지은사람처럼 이렇게 신앙이 들어갔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것을 아무리 바꿀려고 해도 바뀌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외국에 있는 교회에서는 다릅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에 주보에다가 NIV라고 이렇게 써있습니다. RSV. 수없이 많으니까. 그런데 공부를 하고 성경을 공부하는데 있어서는 그런 번역본들이 많은 것이 도움을 줄지는 모르지만은 단순하게 신앙을 갖는데 있어서는 이렇게 하나가 압도적으로 많이 이용되는 것이 세상에 설교자들에게는 너무 편하다는 것입니다. 편하고 그 다음에 성경을 볼때에 NIV성경을 들고갔는데 이 교회에서 오늘 예배를 드리는데 킹제임스버젼으로 낭독을할지, RSV로 낭독을할지, NASB로 낭독을할지 아니면은 LB로 낭독을할지 가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펼쳐놓으면 틀린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옆에 원어 성경이 나오고 원어를 이해하고 양쪽으로 대조가 되어 있어서 서로 비교를할수 있는 실력이 있다면은 혼란이 없겠지만은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참 하나님이 도우셔서 그런지 이것 이외에는 안되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 가지 번역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다 참고용입니다. 뭐 더군다나 그 번역들 중에서도 신뢰하기 어려운 번역들도 있으니까. 뭐 필요하면은 오리지날 택스트놓고 비교하면은됩니다. 그러면 이제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 그러면 도대체 우리보고 이 한글성경을 믿으란말입니까? 말란말입니까? 이얘기입니다. 이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번역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완벽하게 원본을 계승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글의 정서나, 문화적인 배경이나, 언어 그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대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미국말도 하고 한국말도 하는 사람을 만나서 누루퉁퉁을 번역해보라하면은 도저히 못합니다. 누루퉁퉁. 히쭈구리. 도저히 번역을 못합니다. 그래가지고 외국에 이민간 사람들이 제일 불편할 때가 언제냐그러니까. 아팠을때가 제일 죽을지경이래요. 왜냐하면은 자기가 영어를 잘해도 한국에서는 너무 편하대요. “어떻게 아파요?” “아우 쑤셔요.” 그러면 의사가 “어떻게 쑤시지요?” 그러면은 “콕콕콕콕쑤셔요.” 어떤때는 “쿡쿡쿡쿡쑤셔요.” 어떤때는 “욱신욱신그래요.” 욱신욱신 그러는데 이것이 번역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언 캄퍼터블. “불편해요.”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풍부해요. 우리는 또 민족이 워낙 정서적인 민족이잖습니까. 빨갖다. 벌겆다. 불그스름하다. 발그래하다. 시뻘겆다. 새빨갖다. 얼마나 많은지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표현들을 이번역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번역이 될 때에는 어거지로 이것을 우겨넣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하면은 의미중의 일부는 깍여나간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오리지날 택스트를 보면서 이것을 이렇게 복원해 줄수 있는 것입니다.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한계는 모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성경이 번역될 때 만해도 우리나라에 히랍어 히브리어를 전문적으로 잘하는 학자층들이 아주 얇았던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 커다란 하나님의 섭리이기도 하고 은혜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무엇이냐하면은 이 성경을 번역할 때에 구약은 히브리어 그다음에 구약의 또 적은부분 일부는 아람어로 되어있습니다. 히브리어, 아람어, 히랍어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번역을했는데 그 때에 다른데서 이것을 어떻게 번역을했나. 할 때에 메인 택스트로 가장 무게있게 활용한 것이 뭐냐하면은 킹제임스버젼이었습니다. 1611년에 제임스 왕이 영국에서 시켜서 그것을 번역을 한것인데 잘들어보세요.
요즈음 무슨 말씀버젼학회라고 있어가지고 킹제임스버젼 성경만 그 제대로된 성경이고 다른 것은 다 제대로된 것이 아니다. 그래가지고 또 이번에 영어성경 킹제임스버젼을 한글로 옮겨서 그것이 완전한 성경이라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전부다 거짓입니다. 말하자면은 그런식으로 절대화할수 있는 번역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초창기에 히브리어와 히랍어를 공부하면서 특별히 히브리어를 공부할때에 한10개이상 되는 10개가 뭐에요. 한25개되는 성경을 다 펼쳐놓고 대부분이 영어성경입니다. 그리고 이제 히브리어 본문하고 대조를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이 킹제임스버젼이 완벽한 번역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그 때 제가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완벽할 수가 없죠. 왜 영어하고 히랍어는 벌써 어족자체가 굉장히 많이 다릅니다. 그리고 한쪽은 셈족언어이고 한쪽은 인도유럽형 계통의 언어이니까. 언어의 체계자체가 확 다릅니다.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런 오히려 히랍어의 영향을 훨씬더 많이 받았다고 봐야합니다. 영어는 그런데 이 히브리어는 벌써 쓰는 방향도 다르고 이 언어의 사고 개념같은 것들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그 번역이 정확하게 번역한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상대적입니다. 25개의 번역들을 쭉 비교해보면은 어떤 번역은 이 번역보다 잘되었고 어떤 번역은 이번이 이번역보다 높고 이렇게 각자 각자가 점수를 따로따로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존재했던 영어번역 가운데 가장 오리지날 택스트에. 성경원본에 접근한 번역이었다는 평가를 받을수 있는 번역이 킹제임스버젼 그 초판이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영문학은 전공하는 사람을 갖다줘도 그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면은 그것을 번역을 잘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때문이냐하면은 히랍어와 히브리어 성경의 원문을 설령 뜻이 잘 안통하더라도 그대로 번역할려고 무지하게 애를썼습니다. 그대로 번역할려고 무지하게 애를쓴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히브리어 같은 경우에는 소위 제편에 의하면은 단회성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가다가 이렇게 낭떠러지 같이 이렇게 딱 꺽어집니다. 물 흘러가듯이 그렇게 흘러가지를 않고 뚝뚝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대로 그 속에 존재합니다. 그러니까는 그런 것들로 인해서 영어로 번역하는데 엄청나게 애로를 겪는것입니다. 그래서 영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 있어서 이 킹제임스버젼을 공부하는 것은 거의 필수입니다. 특별히 이사야서 같은 것은 말이죠. 그것을 번역하면서 시같은 것은 끝에 나오는 운까지 맞추면서 번역을 했으니까. 아주 굉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번역이 그대로 가장 그것을 번역하던 사람들이 말하자면은 이 성경말씀이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성경에 대한 강력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단어 한전치사 하나가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번역이 그 신앙의 토대위에서 기록되었으니까 얼마나 훌륭하냐고요. 예를들자면은 영어성경에 리빙바이블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하면은 뜻만 대충 통하게 주르르 번역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학력이 좀 낮은 사람들이 친근감을 가지고 성경을 읽게끔 풀어선 쓴것입니다. 그런것을 가지고 단어 하나 하나를 설명하면서 영어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한다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정확한 번역이 아니니까. 그냥 뜻만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니까.말이죠. 그런데 킹제임스버젼을 그렇지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훌륭한 성경을 이것을 번역을할 때에 주된 택스트로 사용을 하고 그리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대조를 하면서 성경을 번역한 것입니다. 결과 그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에 이 성경은 그냥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간섭하고 은혜를 배풀어주신 뛰어난 작품이라고 저는 단언하는 바입니다. 뛰어난 작품입니다.
이것은 진짜 하나님의 한국교회의 선교의 역사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간섭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뛰어납니다. 그래서 제가 이 시간을 빌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을 보다가 제가 종종 원어 이야기를 하면서 이 번역을 고치라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제가 염려되는 것은 가끔 그 얘기를 할 때마다 여러분들이 “아 역시 이 한글성경은 믿을수가 없구나.” “이것을 보면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파악한다는 것은 참 불가능할 정도구나.” 이런 마음을 갖게될까봐 조심스럽습니다. 그런 원어에 대한 이야기 없이 해설해 나아갈 때에는 거의 완벽하게 같은 것입니다. 문제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풀어서 설명할때는 대게 의도가 둘인데 하나는 드물기는 한데 아주 명백하게 번역이 잘못되었을수가 있습니다. 그 때 그것을 바로잡고 그런데 아주 소수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잘못 번역되지는 않았는데 예를들면 욱신욱신, 노르끼리, 뉘리끼리, 뭐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면은 원어로 풀어서 설명하면은 번역된 한글로서는 감지할수 없는 더 풍성한 뉘앙스들을 이렇게 전해받을수 있을 때 그 때에 인제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가끔 설교중에 한다고해서 여러분들이 “아! 역시 이 한글성경은 믿을수가 없구나.” “베고나 자면은 딱맞는 베개용 밖에는 안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도 은혜를 받고 그리고 신앙생활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제 성경에 기초를 해서 설교를 해서 교리를 세우고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을 확립한다.라고 할 때는 그럴때에는 이제 그런 세밀한 분석과 비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설교자가 아니면 또 누가 그것을 해주겠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뭐냐? 이 한글성경이 하나님의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거의 문제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역이 되었는데도 이상하게 성경을 읽으면 내가 히브리어 모르고 헬라어를 몰라도 가슴에 확 다가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은혜받았을 때에도 히랍어 성경 없고, 히브리어 성경없어도 이것을 보면서 은혜 받았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펑펑울고, 이것을 보면서 회심하고, 이것을 보면서 주뜻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그리고 이것을 가르칠때에 사람들이 변화받고, 주님 만나고, 새로워졌습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거라도 읽으세요. 읽고 가끔 성경의 원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쓸데없거나. 그렇게 쓸데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은 안되고 오히려 얼마나 중요하면은 거 우리가 알아듣기 어려운 원어 이야기를 하면서까지 이 성경을 설명하려고 수고할까. 그렇게 생각을하고 거기에 주의를 집중해서 들여다보면서 거기에서 한글성경이 놓치고 있는 메시지들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것들이 너무나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 성경은 신뢰할수 없다. 그런생각은 가질 필요가 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되요. 성경의 원본은 그렇게 영감되었고 사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원본에 가깝게 배껴졌고. 그래서 성경이 있게되었고 그리고 이것을 번역한 때에도 한글성경의 경우에는 이처럼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의 간섭, 섭리적인 하나님의 간섭이 있으셔서 이 히브리어에 까막눈이고 헬라어 쓰는 글자. 알파베타 간마밖에 몰라도. 그래도 이 한글성경을 읽으면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고, 변화받을수 있고, 그럴수 있게끔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감동으로 된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보면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에서 이것이 숨을 불어넣으셨다. 그랬는데 여기에서 숨을 불어넣으셨다. 아니에요. 후니마토스. 후니마라고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영입니다. 그러니까 숨, 바람, 영 같은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후!하고 하나님이 불어넣으셨을 때 아담의 코에 후!하고 바람을 불어넣으셨을 때에 후!하고 불어넣으신 것은 뭔가를 전달하시는 방편이었지. 뭐 바람을 집어넣으실려고 설마 그랬겠느냐는 것입니다. 후! 하는 것은 어때요. 영과 생명을 전달하는 수단이 있지않습니까. 그렇죠.
마찬가지로 성경이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신 바되었다. 그랬을 때에 그렇게 숨을 불어넣는 하나님의 활동을 통해서 성경을 기록자들에게 영향을 강력하게 끼치는 성령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 영향 아래서 기록을 하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의 원저자는 성령이라고 말할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이치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은혜를 받고 성령의 은혜 아래서 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는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계속증폭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성령님께서 은혜와 진리를 내게 알게하셔서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깨달을 때에 예전에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었을 때는 깨달을수 없었던 진리들을 이 원 저자이신 성령께서 나에게 아주 풍부하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잘 들으세요. 여기에서도 우리들이 극단에 치우치면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직통파들 있죠. 요즘 그런 이상한 교리를 가진 이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오늘 나보고 지하철 타지말고 직장까지 걸어가라고 말씀하셔서 걸어왔습니다.” 심지어 어떤 가정주부는 수펴마켓 진열대를 지나면서 “성령님 내가 사야될 물건을 가르쳐주십시오.” “이것입니까?” “아닙니까?”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잡채를 할려고 사왔는데 집에 와보니까. 간장도 사고, 고기도 사고, 뭐 그 다음에 시금치도 사고, 다 샀는데 당면은 안가르쳐 주셨습니다. 잡채거리는 다 사왔는데 당면은 빠졌습니다. 거기에도 무슨 심오한 뜻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제 신앙의 형태가 어떻게 되느냐하면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강력하게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면은 펼쳤을 때에 성령이 성경의 원저자이시고 성령이 이 성경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라고 하는 그 사상은 맞는데 거기에 너무 치우친 나머지 해석의 활동이나. 성경에 대한 이해는 상관없고 탁 펼칠 때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그것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은 말이죠. 18세기까지만해도 성경 펼치기가 유행이었습니다. 진짜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웃겨요. 펼쳤을 때 뭐가 나오느냐가 오늘의 운세라는 것입니다. 누가 그랬다고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슨 결혼을 위해서 기도했데나. 뭘 기도해서 일주일을 금식을하고 이렇게 성경을 탁 펼쳤데요. 그랬더니 성경구절을 이렇게 눈을 감고 탁 펴서 집었는데 “이에 나가서 유다가 목매어 죽으니라.” 이렇게 나오더래요. 이것은 내가 지성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혈기가 많이 개입을 해서 헛집었나보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을 금식하고 다시 탁 집었더니. “너는 속히 행하라.” 그것과 거의 유사한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맞습니다. 성경의 원저자가 성령님이시니까. 성령님이 성경의 뜻을 가장 잘 가르쳐주실수 있다. 그것은 틀림없이 맞는 교리인데 그러나 이제 그 쪽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다보니까. 성경을 명목상으로 가장 존중하는 직통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 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영적인 사람일수록 영적인 말을 아주 신중하게 사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들 가운데도 그런 것들은 하나의 영적 교만이라고 생각하는데 꺼뻑하면은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런말 굉장히 많이 쓰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언젠가 보니까.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이 말하니까. 이 사람도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면서 둘이서 싸우더라고요. 말씀을 서로 다르게 해주셨는 모양입니다. 논쟁이 막붙어요. 그러니까는 그런 것들을 조심해야죠. 살다가 보면은 하나님이 단순히 내가 이렇게 깨달았다.라고 표현하기에는 미흡할 정도로 하나님이 강력하게 무엇인가 내게 보여주셔서 나를 전폭적으로 굴복시키시는 때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루에도 스물 댓번씩 일어나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과시입니다. 과시. 어느날 성경을 읽다가 깨달았는데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셨는데 그 정도만 되도 알지않습니까. 그런 것을 이야기 할 때마다 항상 사람들이 막부풀리지 않습니까. 감동이 왔으면 감동이 왔다. 막 찌르면서. 뒤집으면서 하는 온갖 용어들을 다 사용하는 사이에 인제 거기에 많은 허풍들이 붙게되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진실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경계해야합니다.
그래서 제가 몇주전에 제가 신학교 교수할 때에 어떤 부인이 신학교 들어온지 한달도 체 안된 사람이 책한권 써가지고 와서 나보고 추천서 써 달라. 그러는 이야기 들었지않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런분들이 성경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존중심은 대단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쉽게 이야기하면은 그런 그릇된 자신의 어떤 잘못된 체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여기에도 그런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시다가 오시는 분이 있는데 역사적으로 보면은 이단에 속한 교회일수록 성경 이외에는 못읽게합니다. 왜냐하면은 성경이 아까 그런 교리를 아주 극대화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이제 어떻게 되겠습니까. 너도 성경이 와서 성경에 대해서 가르쳐주시고 너도 성경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는데 그런데 거기의 교주를 가장 강력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가르쳐 주시는데 그것은 교주에게 가르쳐 주신 그 테두리 안에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합니다. 그러니까 책을 못읽게합니다. 그런데 이단에 속한 교회들이 특히 그런다는 것입니다. 더 심한 것이 카톨릭 이었습니다. 성경도 실질적으로 못읽게 했으니까. 성경을 읽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날 이 신교가 교파도 갈라지고 교회가 통일성이 없다보니까. 뭐 제각각이 어떤 때는 창피할 정도로 이상한 사람들이 들고나와서 말도 안되는 이야기하고. 비도덕적인 이야기를 하고 그러는데 그것은 일부분이고 오늘도 개신교 교인들이 매일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그 은혜를 깨닫고 이렇게 매주 세 번의 예배에 거의 300분 가까운 예배를 드리면서 3-400분의 예배를 드리면서 1년이면은 수100시간씩 예배를 드리면서 성경을 풀고 그 속에서 은혜를 받는 이 엄청난 영적인 자산들을 감당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런식으로 성경을 극단적으로 성경을 하나님이 저자시라는 사실은 분명한데 성령님만 나에게 가르쳐 주시면은 모든 것을 이해할수 있다.라고 하는 그런 극단적인 사고로 가면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이제는 뭐가 필요하느냐하면은 하나님이 후!하고 성령으로 감동시켜주심으로 성령 자신이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 속에 원 저자가 되어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성령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성과 문학 이런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기록하셨기 때문에 그 껍질들을 싸고 있기 때문에 그 껍질에 대해서도 함께 탐구를 하고 공부하는 것이 성경에 대한 충성입니다. 무슨말씀인지 아세요. 이것을 이해해야합니다. 그래서 그 두가지를 함께해야합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것은말이죠. 그러면 이제 교리를 공부한다. 그것은 성경의 얽개를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됩니다. 성경이 잘 풀어지는 설교 해석을 듣는다. 해석이 담겨져 있는 설교를 듣든다.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경건 서적을 통해서 성경을 보고 경험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또 성경 하나 하나를 풀어놓은 말하자면은 무게있는 글들을 읽음으로서 성경에 대한 교리적인 지식과 신학적인 지식의 지평들을 넓혀간다. 이런 것들은 모두 훌륭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또 껍질일 뿐입니다. 껍질속에 담고 있는 그런 언어의 껍질이 성령이 저자라시는 그 사실을 싸고 있는 껍질들입니다. 그러니까 아까처럼 다 필요없다. 다 인간적인 쓸데없는 책들이다. 그리고 성경을 대하는 성령이 직접 말씀해주신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극단이고 이렇게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영혼속에 가르쳐 주실때에 성경의 참다운 의미를 이해할수 있다.라고 하는 것을 배격한체 부지런히 탐구하고 성경을 공부하면 자신이 성경을 이해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것은 또 한쪽에 치우친 극단이라는 것입니다. 양쪽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뭐가 필요하느냐하면은 성령의 은혜와 그다음에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이 함께 만날때에 그 때에 우리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성경이 어떤 성경말씀이 실재삶속에서 진리로 경험되는가. 하는 것들을 하나 하나 터득해가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렇게 하면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다운 그런 성화의 자리에 이르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배우면서 성령께서 그 말씀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심정과 그 열망을 경험하게 해주시는 성령의 강력한 은혜의 경험 없이 성경을 자신이 충분히 공부를 통해서 습득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계속 사과를 핥으면서 부사와 홍옥의 차이를 구별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차갑고 혀에 무엇인가 만져진다라고 하는 것. 이외에는 말할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기억을해야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런쪽으로만 치우쳐서 이 지식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아까와 같이 아주 쓸모없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아무리 존중히 여기고 이 성경말씀을 신주 떠받들들 한다고 하더라도 그 풀려서 해석되어지는 그 과정들에 대한 이해가 없고, 지식이 없고, 교리에 대한 아주 심각할 정도의 빈약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해야합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리에 대한 그 공부가 아주 필수적입니다. 교리반 불러모아놓고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 교리에 대해서 물어보면은 대부분 이 머리속에 아무것도 들지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안들었다는 이야기는 여러분 이런 생각해보셨어요. 설교를 무지하게 많이 들었는데 하나도 쌓이지를 않는다. 그런 생각해보적 있죠. 그렇죠. 그것이 모두 설교가 다 설교답지 않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성경자체를 이해하는 이 교리적인 얽애가 없기 때문에 마치 선반없는 곳에다가 책 걸어놓은 것처럼 다 떨어지는 것입니다. 산더미처럼 쌓여서 쓸모없는 것입니다. 뭔가를 많이 보기는 보았는데. 경험도 하고 은혜도 많이 받았는데 자기가 믿는 이 신앙과 복음의 도리에 대해서 통일된 진술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꺼내쓸수 없는 지식은 지식이 아닙니다. 보세요.
또 알고 있는 교리는 대부분이 이단들이 심봉했던 교리입니다. 옛날같으면 화형당할 교리들만. 그런 것을 신앙이라고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옛날에 태어났으면 모두 불타죽었습니다. 사형당하거나. 교회 감옥에 갖혀있을것인데 말이죠. 이렇게 훨훨 다니면서도 그 아무것도 안들은 것을 자랑처럼 생각하면서 말이죠. 무엇이든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본적이 없습니다.” “모르겠는데요” “잘몰라요.” “신앙생활을 20년을 했지만 전 그런 것 초보입니다.” 그러면 언제 초보를 면해요. “아는 것이 없습니다.” 구도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아는 것이 없다. 그러면은 말이되냐고요. 풀빵 장사 3년을 해도 풀빵에 대해서 할말이 있는데. 얼마나 지적인 기관이 취약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리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해야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할려고 애를써야합니다. 그리고 이 신앙의 도리에 대해서 체계적이로 이해할려고 노력을 많이 해야합니다. 그것이 거룩한 삶을 사는 가장 중요한 기초가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영적인 삶은 반드시 지식이 기초가됩니다. 구원의 은사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은사는 지식입니다. 지식이 참된 것일 때에 그의 경건도 참된 것입니다. 누가 인터넷에다가 아시스의 프란시스의 경건의 가치에 대해서 물어왔는데 거의 가치가 없습니다.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는 가치가 높죠. 누가 그렇게 아버지가 그렇게 부자인데 옷까지 다 벗어주고 그리고 뛰쳐나와서 가난한 자들과 함께 거의 헐벗으면서 그들을 위해서 살겠습니까. 그렇죠.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의 이 거룩한 경건에 있어서는 거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배울수 있는 것이 별로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지식에 기초하지 않은 경건입니다. 참된 지식이 기초하지 않은 예배라는 것은 모두 열광주의입니다. 아니면은 차가운 지식주의입니다. 아니면은 신비주의 이런 것은 하나님과 별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식이 없는 무지한 상태에서 쌓아올린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마지막에 결국은 자기 좋은 대로 인생을 살았을 뿐이지 주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박수갈채를 치고 존경을 한다고 말할지라도 하나님의 평가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그렇지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세요. 잘들으세요. 구원받은 이후에 성도의 최고의 행복과 의무와 목표는 뭐라그랬습니까? 성화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 성화의 삶을 지금 이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뭐라그랬느냐하면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고 모든 선한일에 온전케 하려함이니라,” 이것이 성화의( ? )입니다. 그 성화를 이야기하면서 무엇을 이야기 했느냐하면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이어서 다음주부터 설교할텐데 그 성경이 가지고 있는 그 가치에 대해서 말하기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그러면서 성화에 있어서 이 성경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식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의 원 저자이신 성령님의 강력한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진리를 깨닫는 이 인격적인 체험, 이것이 없이는 성화가 없습니다. 집을 팔고, 자신의 인생을 신학교에 푸신하고, 별 난리를 다해도 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입니다. 자기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지식없이. 인터넷에 한번 여러분 “담임목사께”라는 란에 들어와서 ( ? ) 거기에 그 편지 들어온 엄청나게 많은 양의 신앙적인 질문을 보세요. 그래서 그 들어오는 질문들을 제가 다 따뜻하게 답변을 해주지만은 따뜻하게 답변하고 그런 아픔들을 제가 긍휼히 여깁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은 말이죠. 신앙의 세계에서 90% 이상이 유치원 질문입니다. 이 기본적인 성경의 진리를 알면은 질문 될수도 없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떡해요. 그 수준에 내려가서 답을 해줘야 되지않습니까.
그런대도 사람들이 그렇게 무지하고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 아주 희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삶전체가 완전히 무너져서 짖눌려 있는데도 그런대도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 자신의 무너진 경건과 거의 포기상태에 들어간 거룩한 삶을 다시 구축할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안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허우적 거리고 일어나면 그 다음에 거룩한 삶이 나오겠느냐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똑같은 작용들의 연속을 보여주는“그대의 질문을 보면은 그대의 수준으로서는 그대의 고민을 풀기에는 하나님의 복음과 성경의 아는 지식이 매우 희박하거나 거의 없기 때문에 지금 답을 해줘도 당신이 이해하기 힘들다. 이런 책들, 이런 테입을. 듣고 다시 편지를해라.” 그것이 내가 빠져나가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럴정도로 성경에 무지한 상태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을 이 사회에 적응하려고 하는 노력의100분의 1만 발휘를 한다면은 여러분들의 삶은 몰라보게 바뀌어 질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일간 스포츠를 읽는 시간만큼만 성경을 읽고 탐구하는데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이 나라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텔레비젼을 보고 쓸데없는 일에 사용하는 시간만큼 뛰어나게 성경을 풀어서 설명한 책들을 읽고 설교테입을 듣고 그러면서 말씀을 하나씩 둘씩 공부해 나간다면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형식적인 신자들이 사람 사람이 모여서 서로 수다나 떨고 마실이나 다니는 그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거룩한 책들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하고 토론하고 자신의 신앙의 도리들을 세워간다고 할것같으면은 더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신앙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인 정보의 양이 투입될 때에 신앙 사상이 생기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데서 무슨 초등학생 중에는 공산주의자도 없고 민주주의자도 없습니다. 그냥 학생일뿐입니다. 배우는 그냥 애들일뿐입니다. 그냥 애들입니다. 이북에 있는 애들이나. 남한에 있는 애들이나. 소련에 있는 애들이나. 다 애들입니다. 어린아이들입니다. 거기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지적으로 축척되어가면서 공산주의자도 되고, 민주주의자도 되고, 사회 언동가도 되고, 자본주의자도 되는 것아닙니까. 기본적으로 그렇게 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는 항상 모든 관심이 여러분들이 기억을하세요. 책을 읽든지 누구의 강연을 듣든지. 아니면은 테입을 듣든지 누구의 간증을 듣든지간에 모든 초점이 무냐하면은 저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의 이치를 내가 어느 정도나 내가 깨달을수 있게끔 도와주는가. 거기에 대해서 “예”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거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의하면은 “그 빛”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빛” “그는 빛이 아니요”라고 할 때에 그 “빛” 더 라이트가 아니라. 어라이트입니다. 그 빛이 아니라. 한빛입니다. 어떤 빛입니다. 빛이 얼마나 유사한 것이 많습니까. 희생적인 이야기 조금만 이웃을 도와주는 이야기를 하면은 가슴이 뭉클해요. 모두 한 빛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지칭되고 있는 그 빛은 그 한빛이 곧 그 빛이 아니라.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도 글을쓰는 사람이지만 독서를 하는 것을 보면은 미래가 암담합니다. 모두 자극적인 것, 흥미위주 그리고 뭐 이렇게 아주 사람을 깜빡하게 하는 것, 아주 뭐 사람을 엔조이하게 만드는 것. 이런 것들을 탐닉하는 것입니다. 책을 읽고나면은 항상 초점자체가 이 글의 저자가 성경을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는가? 그리고 이 글을 읽고나면은 내가 성경을 얼마나 더 이해하게되는가? 그리고 이 글을 읽고나면은 덮었을 때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싶고 성경에 대해서 자신의 무지를 통탄하게 해주는 책인가? 이런것들이 그런 책들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어집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대답할수 없는 책들은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성경을 점점 혼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실지로 독서를 잘못했기 때문에 거의 성경을 읽을수 없는 신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 얘기 하잖아요. 꿀꿀이 죽통보다는 돌머리가 훨씬 낫습니다. 아무것도 안들은 사람이 이상한 것을 들을 사람보다는 훨씬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들어가기만 하면은 변화가되니까. 그러나 뜸물통에다가 아무리 생수를 부어도 돌로된 바가지에다는 생수통이 되지만은 뜸물통에가는 아무리 생수를 부어도 뜸물에 지나지않습니다. 섞였어 도저히 변화되지 않습니다. 거의 사람을 막 영적으로 황폐하게 만듭니다. 슈퍼마켓 가서 “성령님 이 미원살까요?” “케찹 살까요?” 그러지말고 차라리 서점에 가서 기도를하세요. “이책 살까요?” 그것은 오히려 좀 그래도 좀 낫다고 생각을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한가지 확신을 분명하게 가져야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고 틀림이 없으며 나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 우리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그리고 이 말씀을 무시하면 나는 교회에 다니는 무신론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그 신앙말입니다. 요즘같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신앙을 이어가고 있는 이런 시대에는 더더욱 이런 성경신앙이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교훈을 기대하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中)
지난시간에는 성경이 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인지에 대해서 증거했습니다. 지지난 주에는 성경이 영감되었다는 것은 후!하고 숨을 불어넣은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그 말씀이 살아서 우리에게 역사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의 인격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지난 시간에는 긴 시간에 걸쳐서 왜 사람이 쓴 성경이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일수 있는지에 대해서 성경의 영감교리를 중심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 시간 두 시간에 이루어진 설교가 매우 중요함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합니다. 그것을 토대로 오늘 성경은 성경자체가 갖는 주된 효능을 네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함”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두가지 목적을 이루는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일을 행함에 있어서 온전케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는데 그 긴 이야기를 요약해서 말하면 그것이 성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15절을 설명할 때에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에서 이 구원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예수믿고 하늘나라에 가는 구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는 오히려 성화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면서 에이스쏘테리아 그래서 그 구원에 이르게 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번역대로 구원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이 정확한 히랍어 성경이라고 말씀을드렸습니다. 그래서 구원이라고 하는 그 은혜로운 세계의 실재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놀라운 지혜를 성경이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드린것입니다. 그러니까 3주치 설교를 여러분들이 꼭 듣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설교를 들으시기바랍니다. 그래서 16절 성경의 4가지 효능을 한주에 한가지씩 네주를 하고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17절을 해서 마무리를 짖도록 하겠습니다.
자, 첫 번째 성경의 효능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교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성화를 통해서 깊고 심오한 신령한 구원세계의 실재속으로 들어가는 놀라운 일을 하나님의 말씀이 하게 해 주는데 그런 성화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4가지 성경의 효능이 성화의 삶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활용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교육하는 것 이 네가지의 효능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이제 이 교훈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설명하기에 앞서서 지금껏 말씀드린 이 구도를 놓고 볼때에 구원받은 사람이 있는데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의 그 은혜로운 세계에 실재속으로 3주전에 안오신 분들을 위해서 자꾸 반복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올려면 계속 나오세요. 안나올려면 관두고. 무슨이야기냐하면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번역된 이 성경의 부분이 히랍어 성경에는 구원이 있는데 그 구원에 이렇게 간신히 손을뻗어서 도달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속으로 인투입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하나의 큰 실재에 간신히 이렇게 도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실재속으로 이것을 뚫고 들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고 하는 은혜롭고 신령한 실재가 있는데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령하고 은혜로운 세계의 맛을 쭉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령한 세계속에서 신령한 은혜의 맛을 보고는 구원받은 사람에게 제시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이라 그랬습니까.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이 구원받은 신자에게 기대하시는 최고의 중요한 삶의 목표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성화입니다. 뭐 하나님의 영광, 선교, 목회, 사명감당, 죽도록 기도, 충성 이것은 전부다 그 밑에 내려오는 작은 항목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공식을 설교듣는 내내 기억해야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뜻은 무엇이냐하면은 성화입니다. 그리고 그 성화와 즉각적인 구원과 성화라고 하는 점진적인 구원이 합쳐져서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입니다. 그리고 뭐 하나님의 영광, 선교, 사명, 뭐 그런 것 모두 교회 봉사잘하고 그런 것은 모두 그 아래에 나오는 것입니다. 성화속에서 성화라고 하는 큰 틀에서 보아야될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화의 삶이 없으면은 그는 구원 받았어도 결코 행복할수 없습니다. 그리고 거룩해질수도 없고, 그리고 죄와 더불어 싸워 이길수도 없고, 그리고 이 지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은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화에 이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데 그 구원받은 사람을 성화에 이르게 한다.라고 할 때에 무엇 없이는 안된다는 것입니까? 성경에 나온대로 말해보세요. 무엇이 없이는 안된다는 것입니까? 모든 성경없이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을 향해서 성화의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요구인데 그 요구에 부흥하기 위해서는 성경없이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없이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성경도 로마서만 가지고 되느냐? 어떤 사람은 계속 요한계시록 집회만 쫓아다니는데 성경 똑바로보세요. 모든 성경입니다. 성경읽기표대로 읽다가 레위기 나오면 건너뛰는 사람이 있는데 레위기도 성경입니다. 또 시편만 읽는사람이 있는데 그뒤의 잠언도 성경입니다. 그러니까 모든성경입니다.
물론 모든 성경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결정적인 증언을 같은 분량으로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두 담고있습니다. 그리고 필요없는 성경은 하나님이 주시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이 성화에 이르게하는데 있어서 무엇없이는 안된다는 것입니까? 그렇죠. 모든 성경 없이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년 365일 지나가도 성경거의 읽지않고, 설교를 통해서 은혜받는 일은 더더욱 상상도 못할 일이고, 뭐 성경을 해설한 어떤 책들을 뭐 이렇게 읽으면서 은혜를 받는다.라고 하는 것은 뭐 성경도 안읽는 사람이 그런 것을 읽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성화의 삶을 기대한다.라고 하는 것은 돼지가 사우나 하기를 기대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어떠한 진전도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자신이 진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면은 그것은 익숙해지는 교인으로서의 생활이지 거룩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대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성경없이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죠. 성경이 여러분 집에 대여섯권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다 좀 갖다놓으세요. 집에다 두면 뭐해요. 여기에다 갖다두면 도둑이라도 혹시 집어가서 예수믿을지 아세요. 갖다두세요. 누구든지 다 성경을 몇권씩 가지고 있습니다. 뭐 예쁜 것 나오면사고. 뭐 구역장 되었다고 하나 선물로받고, 성경퀴즈대회에서 이겨서 상받고 그렇죠. 그런데 많이 있어도 성경을 끌어안고 있다거나 베고 잔다거나 책꽂이에 잔뜩 꽂아논다고해서 영어성경, 독일어성경, 새번역성경, 한글성경, 모두 있다.고해서 그것이 모든 성경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해줄 것 같으면 나같으면 전재산을 팔아서 빨리가서 성경을 사다가 서가를 가득채우겠습니다.
무슨 성경이 원적외선 벽돌이아닙니다. 그것을 집에다 갖다놓으면 거기에서 신비한 방사선이 나와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느냐. 아닙니다. 성경을 늘 파는 서점 주인이 입에도 담을수 없는 욕을하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매일 모든성경을 만집니다. 한글성경, 영어성경, 번역성경, 원서, 그런데 수없이 만지고 팔고 포장하고 그래도 그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뭐 짐승도 알 수 있는 이야기아닙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믿을 때 신문에 나와서 하는 이야기가 그 얘기입니다. 나는 그런 이야기하는 사람은 꼴도보기 싫습니다. 아! 이 어두운 밤하늘에 십자가는 많은데. 많은데 어떻다고요. 참된 교회는 얼마나될까? 자기같은 사람이 교회에 다니고 있으니 참된 교회가 될 리가 있나. 참된 교회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참된 신자가 들어있으면 그것은 참된교회입니다. 말씀드리지만은 고급 아파트 속에 식인종이 산다고 생각할 때에 그것이 문화주택이 될수 있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하면 뭐합니까. 그렇게 개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성경을 대면하고 그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하나님이 변화시켜서 구원받은 사람을 향한 주님의 최고의 기대인 성화에 이르는 삶을 도모해 볼려고 힘쓰느냐 이얘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에세이를 썼는데 예수믿는 사람들 막 욕을 하면서 자기도 예수믿는 사람으로 욕을하면서 ‘나는 누가복음이 앞에 있는지 마태복음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요즘 예수믿는 것들 못됐더라. 그러면서 교회는 오래다녀도 인격적으로 변화가 없고 막 그래요.’ 그 글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했습니다. 당신은 혹시 인격적으로 갖추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거다. 누가복음이 앞에 있는지 마태복음이 뒤에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인격적으로 예수믿는 다른사람보다 고상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만져주셔서 고상한것이냐 이얘기입니다.
성경이 스리그도인으로 하여금 성화에 이르게하는 필수불가결의, 절대불가결의 도구입니다. 성경없는 삶은 성화가 없는 삶입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삶은 거룩해지기를 포기한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실재로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현실을 보자는 것입니다. 정말 말씀을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이렇게 이 성경이 아니면은 이 성경의 진리가 아니면은 내가 하나님 앞에 새로워 질수도 없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될수도 없다.라고 하는 그 아주 절대적인 인식을 가지고 이 성경의 진리를 대하느냐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감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주님께 많은 축복을 받고 영광을 돌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거나 들으면 우리도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이 솟아나지않습니까. 솟아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다로 여러분 주님을 닮은 사람의 진정한 행복과 주님을 닮지못하는 사람의 비참한 삶을 대조해서 말하면 여러분 같이 착한 교인들은 즉시 가슴이 확 무너지면서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그런 소원이 확 솟아납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은혜, 말씀의 강력한 자극, 그리고 자신의 그 인격적인 상태와 영혼의 상태의 실재를 보여주는 들어내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대한 경험, 이런 것들을 아주 쉴새없이 경험하면서도 그것은 마치 부르릉 하고 시동을 걸다가는 꺼져버리고 꺼져버리는 발동기와 같은 그런 처지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모든 그런 하나님을 향한 선한 결심이 순간의 감상으로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깨달아서 그 말씀의 도움을 받아 성화의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사실상은 무신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는 아주 깊이 기억해야합니다.
그런데 그 성경이 말이죠. 4가지 효능을 가지고 역사해서. 그래서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거룩하게. 선한 행실을 행함에 있어서 완전하지 않은 사람을 완전하게. 인격적으로 조잡한 사람을 아주 거룩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바꾸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4가지 효능중에 첫 번째 효능이 무엇이냐하면은 교훈입니다. 히랍어 성경에는 디다스 칼리아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언어적으로보면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디다스칼리아.라고 하는 말은 디다스코라는 말에서 왔는데 디다스코는 가르치다.입니다. 특별한 뜻이 없습니다. 가르치다. 교훈하다.입니다. 그리고 디다스칼로스는 선생입니다. 디다스칼리아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그 디다스코라는 말이 어디에서 왔느냐하면은 다오라는 말이있습니다. 다오를 중복해서 강세형으로 만드니까 디다스코라는 단어가된 것입니다. 중복해서 강화한것입니다. 다오는 뭐냐하면은 배우다.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하면은 이 디다스코 가르치다.는 말이 히브리말로 림메대입니다. 림메대는 마라드라는 말을 중복해서 강세한 것입니다. 그런데 라마드는 뭐냐하면은 배우다.입니다. 무슨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 얘기를 하느냐하면은 히랍어에든지 히브리어에서든지 배우다가 기본동사인데 그것을 강세형으로 강조해서 중복을하니까 그것이 가르치다.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사람의 머리속에 혹은 히랍사람들의 머리속에 무엇과 무엇이 일맥상통한다고 보는것입니까.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이 일맥상통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좋은 선생이 누구입니까? 잘배운 학생입니다. 그렇죠. 왜 틀림없습니다. 가끔 신학생들이 저한테 좋은 목회자가 될려면 어떻게합니까? 그때 아주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좋은 목회자가 되기 전에 먼저좋은 평신도가 되어야합니다. 평신도는 많이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렇죠. 신앙을 잘배우면은 잘 가르칠수 있는 사람이됩니다. 이처럼 히브리 사람들이나 히랍사람들의 사고속에서 이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은 어떻게보면 전혀 대치되는 활동인데도 이것이 서로 통하는 것이라고 보는것입니다.
왜 기질적으로 천성적으로 선생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간에 쥐뿔도 몰라도 하여튼 가르치는 위치에 서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렇죠. 그리고 항상 무엇을 하든지간에 가르치는 것에 그 자리에 서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충분히 학생이된적이 있는 사람일 경우에는 그것은 하나의 소명감에서 비롯된 것일수 있는데 충분히 학생되지 못한 사람이 많이 선생되려고 할 경우에 그 사람의 가르침은 항상 나쁜 가르침입니다. 좋은 선생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조국교회의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잘, 뜨겁게,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고 자신의 온 인격으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너무 소수라는데 교회의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왜그렇게 소수입니까? 많은 사람이 참된 학생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그런 경험들이 매우 박약한 가운데 급하게 선생이 되기 때문에 충분히 소화되지 않은 것들을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교훈이 어떻게 성화의 삶을 이루는데 필수적이냐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디다스 칼리아.라고 하는 이 “교훈”은 무엇인가?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교훈을 발견할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발견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교훈, 책망, 바르게함, 의로교육함, 이것은 성경자체가 가지고 있는 그 효능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는 벌써 이미 “성경은 너로 하여금 지혜가 있게하느니라.” 이렇게 이야기를 해놓고, 그 다음에 여기에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교육하게한다.라고 할 때는 벌써 이 상황 그 자체는 사람이 사람을 성경을 이용해서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하고 의로교육하는 목양의 상황입니다. 무슨말씀인지 이해가갑니까. 그것입니다. 그런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그 교훈이 그로 하여금 성화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느냐하면은 성경만 있으면 충분히 신앙생활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우리들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성경의 입장을 발견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가르침을 발견하고 감격하고 자신의 삶을 고치고 책망을받고 이러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어날 수 있는데 그것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화시키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방금 예수믿은 사람이 성경을 대면하면서 성경읽기 하나만으로 성화에 도달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너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네가 걸었던 길을 이미 좋은 학생으로서 걸어온 사람이, 혹은 목회자가 사람에게 혹은 보다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그 사람에게 기독교의 신앙은 이것이고. 우리들이 살아야하는 삶은 이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이 풍성할수록 그 사람이 아주 속히속히 성화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성화되어 간다. 그럴 때에 개인적인 성경읽기는 오히려 설교나 가르침과 함께 나가야되는 수단이지 성경 하나만 있으면은 무인도에 가더라도 거룩한 진리속으로 들어갈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을 기억하세요. 그래서 성경을 누군가가 그에게 잘 가르쳐서 그래서 이것이 신앙이고, 이렇게 살고, 이런 사람이 되어야한다.라고 하는 가르치주는 교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런 가르침이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 우리를 성화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그 가르침이 무엇이어야 하느냐하면은 성경의 가르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여서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서 그 말씀앞에 자기의 부족한 모습을 보고, 깨뜨려지고, 성령의 은혜로 자신의 마음이 녹고, 그래서 자신의 지난삶을 회개하고 그리고 자기가 이제껏 이렇게 살아온 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인지를 깊이 깨닫고 그리고 고쳐 나가야겠다.라는 결심을 가지고 새삶을 살려고 시도할 때에 그 때 그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갈수 있는것이지. 와가지고 배살을 잡고 웃고, 그리고 코미디하듯이 그렇게 예배드리고,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나 하고, 그렇게 하다가 돌아가면은 말은 많이 주어졌고 교훈은 많이 주어졌는데도 그 사람을 성화되어 가는 사람으로 만들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입니까. 가르침은 있는데 불행하게도 그 가르침의 재료가 뭐가 아닙니까. 성경이 아닙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역사를 볼 때에 이러한 교리를 입증한 역사가 소위 이야기하는 60년대에 일어났던 부흥운동들이라고 봅니다. 그래도 그 초창기에는 말입니다. 이것이 아주 성경자체에 대한 풍부한 해설은 없었어도 그래도 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함께 죽고 산다는 정신이라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어떤 신앙의 정신까지도 사라지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많은 가르침들이 주어지는데 불행하게도 성경 하나 하나를 풀어서 그 속살을 헤치면서 그러면서 그 속에서 진리를 캐내어서 가르치는 가르침의 관계를 통해서 성경의 진리가 가르침을 받는 영혼들 속으로 들어가게하는 이러한 일들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없이 가르침은 무성했지만은 말하자면은 가르침을 통해서 풍부한 성경의 진리가 흘러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열심은 있는데도 성화되어 가는 변화가 매우 불만족스러운 그러한 교회의 상황들을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그런 사람들이 거의없고 1000명이 모이는 교회에서도 부흥회를 하면은 한600명 모이면은 많이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리를 불어도, 애곡을해도 울지도 않고 춤추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방석들고 늘 보따리 싸들고 부흥회만 쫓아 다니는 꾼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죠. 많이 집회에 참석하고 소위 이야기하는 은혜라는 것들을 많이 받아도 그래도 사람들이 성화에 이르는 참다운 변화를 보기 힘든 것은 무엇때문이냐하면은 교훈은 많이 있는데 불행하게도 그 교훈이 뭐가없어요? 성경의 진리를 거의 안담고 있어나. 아니면 아주 희박하게 담고있었습니다. 그래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들이 발견하게 되는 것은 무엇이냐하면은 교훈은 교훈인데 성경이 교훈이라고 하는 활동을 통해서 교훈하는 사람의 인생관이나, 교훈하는 사람의 어떤 가치관이나 이런 것들이 전해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성경의 진리가 전해지는 것이어야합니다. 잘보세요.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의문이 들것입니다. 아니 왜 우리에게 그 교훈을 해주는데 왜 그 교훈을 그러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꽉 채워서 하지. 왜 그 영양가도 없이 그렇게 말은 많고 성경의 진리는 조금밖에 없거나, 거의 없어서 포식을 했는데도 결국은 우리 자신이 성화에 이르도록 변화될 수는 없는 그런식의 가르침을 우리에게주는가? 그렇게 말할수있지않겠습니까. 그런 의문에 제기될수 있습니다.
제가 그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도 썼습니다만은 제가 좋아하는 음식가운데 하나가 제육볶음입니다. 얼큰하게 야채놓고 돼지고기 넣고 볶은 것, 그거 밥에다 이렇게 얹어가지고 비벼먹으면은 맛있습니다. 어느 제육볶음 전문이라 그랬어요. 그래서 전문이니까. 잘하겠지 그러면서 들어가서 제육볶음 달라. 그랬는데 돼지고기가 그 까짓게 한저름에 몇십원이나 하겠습니까. 아좀 넉넉하게 넣고 볶아주면 얼마나좋아요. 아무리 저어도 푸성귀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는 이름을 제육볶음이라고 하지말고 돼지고기로 양념한 야채볶음이라고 해야합니다. 양파, 에궂은 양배추만 잔뜩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젓가락을 내려놓으면서 내가 이집에 다시오나봐라. 그리고 나왔는데 말하자면은 그런것입니다.
가르침이 많이 있어도 그 가르침을 통해서 성경의 진리를 집어넣어야지 개인의 객기어린 결단, 가치관, 난 그렇게 안살아. 그런 얘기많이 듣지않습니까. 그런 어떤 영웅주의적이 자기삶, 이런것들을 전파하는 것은 용서할수 없는 악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을 먹은사람들이 당장은 힘을 낼지모릅니다. 힘을내고, 그리고 아주 강력한 힘을내고, 아니면은 무슨 용기가 확 솟아날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그 신앙이 아니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사람의 이 눈빛이 이 먹는 것하고 비슷합니다. 그 어떤 사람을 한번 만났는데 예수믿는 사람의 인상이 저렇게 험악하고 눈빛이 저렇게 무언가 이렇게 안좋은 것에 이글거리는 그런 눈빛이었습니다. 그래 먹는 것 이야기가 나왔더니. 아이 역겨워서 이야기를 못했습니다. 뭐 도마뱀이 맛있고, 겨울에 개구리가 맛있고, 고양이 내장이 어떻고, 아, 자기가 쥐도 잡아먹어보았다 그러고. 그런 것 하도 이상한 것을 먹으니까 눈빛이 그렇게 야생동물처럼 이글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이야기를합니다. 그런 것을 먹을때는 당장은 힘이 확솟는것입니다. 솟는 것 같습니다. 당장은 힘이 확 솟는 것 같은데 그것이 정상적인 건강의 회복을 기초로해서 솟아나는 힘이 아닙니다. 마약같은 것을 먹었을 때에 힘이 납니다. 운동선수들 도핑테스트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주 괴력적인 힘이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상적인 기능에서 오는 힘이 아닙니다. 그러니까는 그것이 정상적인 신앙에서 오는 힘이 아닙니다.
여러분 2차대전의 역사같은것보세요. 나치치하에서는 이 음악가들이 이 음악 한두곡을 가지고 독일 청년들을 순식간에 용감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나치군대에 입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음악으로 여러분! 여러분도 그런적 있죠. 요즘은 안그러는데 옛날에 3류극장에 들어가면은 자막 막 이렇게 오가면서 ‘동해물과 그것 나오지않습니까. 항상 손을 이렇게 해야됩니다. 그러면은 여러분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들어요. 내 생명 조국을 위해서 바칠까. 말까.’ 건강하고 정상적인 그런 가치판단이나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제가 늘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하지만은 한번도 실행해본적은 없지만은 제가 약간의 음악과 조명을 사용하도록 허락하면은 한10분 안에 여러분들을 내가 다 울릴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씀을 정확하게 깨닫고 우는 것과 그렇게 해서 우는 것 사이에 외관상의 차이는 거의 없습니다. 말씀의 은혜받을 때는 눈에서 설탕물이 쏟아지고 그렇게 해서 울리면은 소금물이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똑같은 눈물이 쏟아지고 콧물이 쏟아지는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입니까? 그렇게 분위기를 통해서 쏟아지는 그 눈물은 아무 의미가없습니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해독입니다. 왜냐하면 참되고 순수한 회개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된 은혜에 대한 갈망이적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은 거짓된 어떤 정서적인 경험과 참된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로 말미암는 그 진정한 은혜의 경험들을 혼돈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어때야하는가?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신앙의 도리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인간적인 많은 말의 교훈을 들을때에 그 사람의 사상이나 인생관에 혹빠지지 말고, 저 사람의 저 교훈속에서 내가 발견할수 있는 성경의 진리는 무엇일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성경이어야합니다.
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을합니다. 60년대 70년대초에 부흥사들, 성경을 설교중에 대여섯번 흔드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이렇게 딱 잡고 ‘말씀대로’ 그런데 사실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구호를 가지고 ‘말씀대로 살자’ ‘성경대로 살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재 너의 삶에 있어서 너의 판단은 이것이고 세상의 안목은 이것인데 성경이 말하는 너의 인생은 이렇다. 그리고 그 성경이라고 하는 빛을 가지고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볼수있도록 비춰주고 그 사람이 대보고 싶은 인생의 길이를 잴수 있도록 성경을 정확하게 풀어서 측정해줄수 있는 그러한 가르침이 필요한것이지. ‘말씀대로 살자, 그리고 펑펑울고 실재로 그 말씀을 기초로 해서 막 그 성경의 진리가 가득찬 가르침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것같으면은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의미의 종교적인 이념집단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흔들고 ’이 진리의 말씀대로‘를 외쳐도 성도들이 그 가르침을 받는 자신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정확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사모하지 않는다고 할것같으면은 그런 구호나 그런 구호에 대해서 아멘.하는 함성소리가 의미가 없는것입니다. 하여튼 80년대는 궐기대회의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뭐 하여튼 제가 그 때에 직장생활을 했는데 후딱하면은 공문이 날아오는데 7미터짜리 현수막 들고 여의도 광장으로 빨리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부지런히 업자한테 주어서 써가지고 7미터면 길이는 또 얼마나 길어요. 그것을 들고 가는것입니다. 그것이 몇 달에 한번씩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제가 돌아서면서 욕을욕을했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하는것인가. 무슨일이 하나 일어날 때마다. 그냥 대통령 외국한번 갔다올 때마다 그것을 들고 거리로 나가고말이지. 이런 비민주적이고 원시적인 사회. 그것이 무슨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산주의가 미우면은 그것을 수십억원일텐데 그것을 프렌카드른 해들고 한번쓰고는 다 쓰레기통에 버리는데 그것을 들고 머리에 띠를 두루고 뭐 때려잡자. 죽여버려라. 밟아버려라. 그렇게 하느니. 공산주의가 왜나쁘고, 민주주의 사회가 왜 우월한지를 오히려 그들에게 정확하게 10분이라도 가르쳐주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왜 거품으로 가득차고 외식하는 신자들이 교회안에 가득차게 되었는가? 쉽게 이야기하면은 진실된 신앙의 태도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진실을 논한다.고 하는 것은 진리의 근원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진리의 근원을 버린 사람이 논하는 진실은 의미가없습니다. 그 진실은 아마 자신의 양심일 것이고 그리고 자신의 가치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아무리 현란하고 풍부한 가르침이라도 그 가르침 그 자체에 현옥되거나 빠져서는 안되고 그 가르침을 통해서 흘러들어오는 성경의 교훈에 깊이 잠기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러한 교훈의 관계를 통해서 거룩의 사람이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느정도로 답답하느냐하면은 성경을 조금만 자세하게 설교를 해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어려운 첩보영화 그런 것은 잘 이해하면서. 나는 학교 선생까지 했어도 진짜 어떤 때는 이해를 못하겠는데. 매일 물어봅니다. 여보, 여보 저거 어떻게된거지. 야 저거 어떻게된거냐. 어느나라 사람이 좋은나라 사람이냐. 그런데 그런 것은 그렇게 기가막히게 알고, 고스톱도 한두번만 가르쳐주면은 펄펄나는 사람들이 그 왜 조금만 성경을 자세히 풀기시작 하면은 그 연탁가스 먹은것처럼 머리아프다. 그러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결국은 무엇이냐하면은 이것을 끄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잔소리 정도다.라고 생각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말씀듣고 변화받기 전에 누구설교를 단 한편이라도 집중에서 들어본적이 있습니까? 책한권이라도 한번 꼼꼼히 과연 이것이 그러할까?라고 생각하면서 읽어본적이 있느냐는말씀입니다. 변화받지 못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이냐하면은 성경자체를 설교하는 설교를 단 한편도 집중에서 들어본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이 변화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책도 맨 가치없고 우리의 영혼에 유익이 되지 않는 것들은 막 빨려들 듯이 읽어도 영혼에 유익이 되는 것은 서너장을 넘기면은 덮고 더 이상 읽지못하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하는 것입니다.
교훈속에 성경의 교훈이 들어가고 그 교훈을 통해서 인간의 말과 표현을 통해서 성경의 진리의 빛을 비춰서 성경자체를 깨달아 알게 해주는 이것이 우리를 성화에 이르게 하는 참된 가르침인데 그런데 그것을 잘 배우려고를 하지않습니다. 깨달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말은 많아도 그 많이 가르치는 사람들이 성경의 진리에 깊이 젖고 그 성경앞에서 진실한 학생이 충분히 되어본적이 있어야하는데 그것도 넉넉하지 않은데다가 그다음에는 그런 것이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받는 사람들이 그것을 감사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르쳐면 주신다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옛날에 무협지나 그런것을보세요. 수염이 길고 이상한 지팡이든 할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한수만 가르쳐달라고 하면 일부러 “너같은놈 필요없다” 그러면은 거기 앉아서 통곡을하면서 거기있습니다. 그러다가 여름이되니까 비가내리고 가을이되니까 낙엽이 떨어지고 겨울이되니까 눈이오는 그런 영화도 있습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앉아 있어서 선생님을 감화시켜서라도 내가 한수라도 배워야 되겠다.라고 하는 그것이 구도의 정신이었습니다. 구도의 정신이 교훈을 통해서 도를얻고자 하는 정신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자체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가득차게된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이냐하면은 이 교훈을 멀리하고 감각에 빠진것입니다. 어떻게 교회에 와서 엔조이할까? 뭐는 좀 엔조이할까? 어떤 행사를해서 좀 엔조이를 할까? 어떤 사람하고 만나서 한번 즐거운 시간을 가져볼까? 그런 것이 전혀 필요없는 것이 아니지만은 그런 것이 주가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가벼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도없는 사람들이 막 열열하게 찬양부르고 말이죠. 그 미친 듯이 찬양하고 말이죠. 그런 엔조이 하는 요소와 감각적인 것들을 따라가느라고 조용히 하나님의 교훈을 받으면서 그 속에서 도를 깨우치는 이 기독교의 유산을 버린것입니다. 그런식이 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사람들이 가서 전도해서 데려다가 뭐하느냐하면은 다 자기대로 똑같은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영국에 건너간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건너가서 제일먼저 지은집이 무엇인지아세요? 첫 번째 지은집이. 교회당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무엇을지었어요? 그리고 병원을 짓고, 그리고 그 다음에 자기집들을 지었습니다. 그들은 삶에 있어서 무엇이 주된것이냐를 안것입니다. 첫 번째는 피조물인 인간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그 경배가 경배다운 경배가 되기위해서는 삶이 경배가 되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전심으로 찬양하며 예배드리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교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짓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는 이 교회를 구석구석 돌아보면서 한숨을 쉬고는했는데 어림없습니다. 우리 헌금많이 해서 교회크게 짓는다고 뭐 욕하고 그러는데 그것을 그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위해서 할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교회지을 돈으로 가서 쌀 사서 가난한 사람 나누어주는 일도 좋은 일일지모르지만은 한번 먹으면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하면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울수 있는 좋은 환경을 교회에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1층에 내려가서 쭉보면서 유치부 전도사들 보고 제가 그랬습니다. 여기에서는 교육이 안된다. 이 환경적으로 말이죠. 제 얘기 잘 들어보세요. 교육적인 관점에서. 환경적으로 어린 영혼들이 사람들이 자기를 존중히 여기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할수만 있으면은 환경을 통해서 느낄수 있는 그런 상황에서 양육되고 자라야지만 그것이 사람이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렇게 이야기하겠죠. 아. 뭐 옛날에는 비새는 천막 그런데서도 뭐 거룩한 사람이나왔고, 그래요. 그것을 누가 몰라요. 누구는 비 새는데서 안살아보았습니까. 나도 물 많이 퍼보았습니다. 개척교회있을 때. 그런속에서도 성도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물펏기 때문에 성도가 나온 것이 아닙니다. 비새서 거룩한 성도가 생긴다면은 나 이 지붕 당장 뜯어버리고 호수갖다가 물뿌리면서 예배드릴 것입니다. 아주 무지함입니다.
잘보세요. 사람들을보면은 말이죠.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서 이를 악물고 가시밭길을 헤치면서 자수성가한 사람. 공부도 많이 하고 자수성가한 사람. 그것은 훌륭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남다른 의지도 있을 것이고 고난을 극복하는 슬기도 있을 것이고. 인내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강인함이 있을 것입니다. 본받을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버려야될것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을해야합니다. 존중히 여김을 받지못하면서 살아온 것, 그렇게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하면은 가르침을 통해서 성경의 풍부한 진리를 접하려고 하는 배우는 사람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 중요성은 어느 정도냐하면은 가르치는 사람이 정확하게 그 가르침의 관계를 통해서 성경의 진리를 그들에게 심어야한다.라고 하는 것과 그것과 똑같은 정도로 중요한 자세입니다. 그러니까 제 얘기 잘 새겨들으세요. 여기에서 설교자가 일평생을 설교를했는데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사상을 전하다가 숨을거두었다. 그러면 그 인생은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에서 선포되고 하나님이 가르칠려고 했는데 내가 그것을 깨달으려고 하는 구도의 정신이 없이 그냥 흔들흔들하면서 신앙생활 했다.라고 하는 것은 목회자가 되어가지고 하나님 말씀이 아닌 인간의 말을 평생에 전하다가 죽은것과 똑같이 나쁜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이 지적하심에 있어서 늘 빠지지 않고 지적하셨던 것이 무엇입니까? 듣지않고. 그런데 이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어떤 지적인 활동을 계속하면서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통해서 도가 무엇인지를 깨우치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마땅한 존재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마땅한 삶을 살고있는지를 검증하고 자기를 고치고 이런 것들이 싫은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흔히 사람들이 지적활동자체를 안하는 것이라고 생각을하는데 절대 그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왜 빛을 싫어해요. 빛을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빛이 싫어서 빛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빛을 싫어하는 것입니까? 어두움의 행실을 사랑하니까. 빛을 싫은 것입니다. 우리가 맨처음에 교회를 개척을하는데 교회 자리 하나를 보았는데 푹 들어가는 지하실이었습니다. 돈가진 수준에 딱 맞아요. 그래서 거기를 들어갔는데 지하가 텅비어있고 옆에 퇴패이발소 하나다 딱있어요. 그래도 우리가 이쪽으로 이사를올려고 한다고 하니까 무슨 당구장이라도 들어오는지 알고 이발소 아가씨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잘생각하셨다고. 아, 정말 잘 오셨다고. 그런데 무슨 장사를 하실려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장사가 아니고 교회당이다. 그러니까 안색이 싹변하면서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무슨상관이 있느냐. 주인하고 얘기하는 것이지. 그랬더니 주인하고 얘기해서 우리가 들어오면 자기네가 나가게 돈빼달라. 그럴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건것입니다. 그거 왜그래요? 만약에 옆에 술집이 들어온다. 그러면은 환영했을까요? 안환영했을까요? 술집들어서 거기가면 딱맞잖아요. 교회들르고 거기 갈 사람은 없습니다. 거기에서 나와서 교회 들어올사람없고.
그러니까 교회가 빛입니다. 내려가는데다가 십자가 딱 걸어놓으면은 그 이발소 들어갈 맛이 싹달아나는 것입니다. 그것도 새빨간 십자가 걸어놓으면은 그리고 밑에다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의 정하신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니리“ 딱하나 적어놓으면 밥맛 달아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싫어서가 아니라. 자기의 이 그릇된 행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싫어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단지 이 지적인 스위치를 끄는 이유는 무엇때문이냐하면은 삶전체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주님의 뜻대로 살면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끝없는 기쁨과 끝없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냐하면은 좀더 정확한 말씀. 좀더 자세한말씀. 좀더 우리들이 이해할수 없는 삶의 갈피갈피를 파헤치면서 우리의 모습들을 보게 만들어주는 그 능력있는 하나님의 말씀. 이런 것들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되는 것입니다. 지적 호기심이 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상황이 그것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거룩해지고 싶은데 은혜의 세계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예전에 발견할수 없었던 내 속에 내재하는 부패성을 보는 것입니다. 사단의 도전이 더 교묘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싸울수 있는 무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싸움을 싸우는데 재래무기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좀더 좋은 무기 그리고 좀더 나의 이 상황을 세새히 파해져서 이 더러운 것들을 도려내고 참된것과 거짓된 것들을 갈라놓아줄수 있는 그런 더 분별력있고 더 새미한 말씀, 그것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는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이렇게 가르침을 받는 관계를 통해서 어떤 한 사람의 사상을 전수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주들이나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잡지사에서 와서 저에게 목회철학이 무엇이냐? 그래서 나는 그런말은 대단히 불경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없다. 이것은 내 사상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을해다.된다고 저는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집에 가훈이 없습니다. 애들이 써달라 그러면은 너희 엄마한테 가서 아무거나 써달라.그래라. 지금도 나는 애들이 써놓은 가훈을 외우지 못합니다. 그것은 왜요?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것인지. 철학. 그래서 그런 철학이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성경위에서 그 철학을 가지고 그 성경들을 자기가 필요한 것들을 찾아내서 원리를 이렇게 조직을 하면서 하게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에게 그런 것이 있었을까요? 목회철학이라는 것이. 금년표어 그런 것이 있었을까요. 그런 것 없습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랬더라면 오직 성경으로서. 모든 성경으로서라는 표어가 나오지 않았을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구호는( ? ) 모든 성경으로 그리고 오직 성경으로서 그것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하든지 성경의 진리들을 깨닫기를 원하는 그런 것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질이 나쁜 교인들이 있습니다. 질이 나쁘다는 것은 사람이 뭐 악날하다든지. 비도덕적이라든지.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신앙이 건강하지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은 얘기만 꺼내면 오늘 아침에 성령님이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큰 감동을 제게 주셨는데 바로 그 순간이 주님께서 내 마음에 이렇게 강력하게 말씀하시기를. 심지어 어제 어디갔더니 1년동안 계속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이야기냐하면은 성경자체는 별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런식의 표현을 통해서 혹은 그런 것이 진짜 있다.고 생각을하면서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을 하고 기반을 두면서 살아가는 이 신앙생활은 반석이 그리스도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절대 이것은 추방해야합니다. 버려야합니다. 얼마나 그것이 처음믿는 교인들에게 아주 나쁜 본을보여주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그것을 흉내내는 것입니다. 회심한지 몇칠 되지도 않는 사람이말이지. 그것을 보면서 흉내내는 것입니다. 주께서 오늘 아침에 제게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왜 그렇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성경을 깊이 사랑하면서 그러면서 이 진리의 교훈을 통해서 성경의 가르침들을 자신의 영혼속에 수시로 채우고 그 가르침의 관계를 통해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영혼의 내밀한 감격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식으로 자신을 과장해야할 필요를 느끼지않습니다. 진짜 엄마 아빠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는 애들을 밖에 나가서 애들이 야, 우리 아빠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 364일 두들겨 패다가 하루 막 선물갖다가 안긴 것을 자랑하는 아이들이 그런 것들을 통해서 자기 아버지의 사랑. 엄마의 사랑을 이야기할때에 그냥 조용히 웃고만 있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우리의 신앙의 기반이 정말 성경입니까? 우리가 정말 성경의 진리를 앙망하고 하나님의 이 성경의 말씀을 배우고 그 교훈을 통해서 성경의 진리를 내 마음에 채워서 그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과의 만남만이 참되고 건장한 내 영혼에 만남이다.라고 하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경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없는 모든 체험들이 아무쓸모 없는 경험이다.라고 하는 그 확신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교훈은 바로 그런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전하지만 그 말 자체가 자기의 자랑이나 이념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로 꽉 채워져 있어서 사람의 가르침은 단지 그 성경의 진리를 전달해주는 도구에 지나지않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런 가르침을 깊이 듣고나면은 그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생각나고 그 사람을 흠모하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말씀을 통해서 나를 만나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게되고 그리고 그 진리의 살아있는 능력을 더욱 신뢰하게되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어디를 가서 성경을 공부한다든지 하는 것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해야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다든지 하는데. 좋은 설교. 좋은 가르침은 여러분들이 그 가르침들을 듣고났을 때에 여러분들로 하여금 성경에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가르침이 좋은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신기하게 다 듣고나면은 성경을 가까이하고 싶고. 그리고 그 성경의 진리를 더많이 알고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가르침이 그것이 좋은 가르침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해야하는 것닙니다.
오늘날 그러나 한번 보십시오. 이 깨닫지 않으려고 하는 무지한 교인들의 모습은 실로 아주 절망적일 정도로 두텁습니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편재해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목사님들을 만났는데 제가 주일낮에 80분 내지 90분 심하면은 100분정도 설교한다. 그러니까 너무 부러워해요. 왜 부러워하느냐하면은 사람들이 그때까지 가만히 있는 그것을 부러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웃는데 제가 여러 목회자에게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면은 어떻게되느냐하면은 당회에서 들고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설교줄이라고. 정식으로 날라온데요. 도대체 무엇을 할려는 것일까요? 그렇게 해서 무엇을할까요?
물론 긴 시간의 설교가 반드시 깨달음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그 사람들이 가지고있는 65분 예배끝이라고 하는 그 공식속에 정말 하나님께 그들의 예배를 드리는 시간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생활에 치명적으로 유용한 그런 교훈을 받고 그 교훈을 통해서 성경의 참된 진리가 자신을 거룩하게 할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우리들이 그런 반응속에서 읽을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님을 믿어도 영혼의 참된 변화가 너무나 드물게 일어나고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인 성화속에서 하나님과의 행복한 교제를 누리면서 사는 사랑의 사람들이 얼마되지 않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지금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한 4배쯤 더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신앙이 무엇인지? 참된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루를 사람답게 살수있다면 내 인생의 나머지 부분을 버려도 좋습니다.라고 말할수 있는 그런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이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나요? 우리에게 이제껏 살아온 삶을 통해서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면서 과연 저 사람의 삶을 보니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이렇게 인정할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혹시 많은 사람에게 오히려 하나님을 야비하신 분으로. 그리고 비윤리적인 하나님으로, 그리고 신앙의 열심과 부도덕이 항상 공종하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우리들이 하나님께 대한 외곡된 상을 심어주었다고 할것같으면은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하나님께 원수로 갚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화의 요구가 절대절명의 요구입니다. 이것 없이는 거룩해질려고 하는 노력없이는 그는 결코 행복해질수 없습니다. 성화를 위한 희생을 피하는 사람들은 결코 행복의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데 우리는 어떻게해야되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이 땅이 진리의 순수한 가르침으로 가득차기를 우리들은 깊이 고대해야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말씀을 먹고 자랐느냐. 그런 것을 물어보지않아도 교회 다녔다고만 하면은 당연히 풍부하고 그런 어떤 깨끗한 진리의 말씀속에서 자랐을 것이라고 기대할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우리는 사모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이 이 성경의 말씀에 대한 이런 태도에 대해서 아주 엄청나게 다른 태도들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설교에 깊이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이해하고 해득하려고 하는 정말 의지적인 노력을 가져야합니다. 교인들이 많아지니까. 저는 잘 모르는데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은 예배 시간에 주일날도 조는 사람들이 가끔있다. 그러는데 정신차리세요. 그렇게 하면은 여러분 큰일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이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영혼이 진실하게 변화될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하나님 앞에 다 떠내려 보내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교훈이 없기 때문에 변화되지 못한 삶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일생을 산다음에 어떻게 주님 앞에 서실려고합니까?
그분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아들을 주셨는데,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서 여러분들을 그 피로 씻으셨는데,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에 대한 무례이고,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 열망하는 옆에 있는 지체들에 대한 견딜수 없는 배반입니다. 그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들이 이러한 타성이 젖어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은 무엇을 말해 주느냐하면은 삶과 하나님의 진리의 교훈에 대한 갈망이 이것이 수면관계에 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 거룩한 교훈을 통해서 성경의 진리들을 자신속에 받아들이는 것을 사모하지 않는 이 삶자체는 어느 한부분이 망가진 것이 아니라. 삶전체가 하나님을 떠난 삶입니다.
그래서 정말 여러분은 그것을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면서 틈만나면은 성경읽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깨달은 것들을 정리하고, 그리고 그 깨달은 것에 대해서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성경의 진리를 들려줄수 있는 책들을 읽고, 책들을 사고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됩니다. 마치 그것을 위해서 돈을버는 것처럼 여러분 책사고 좋은 책들을 사는 그 일에 아주 열심을내야합니다. 그래서 한 10년정도 신앙생활 하면은 150권 정도 들어가는 이 책꽂이에 그저 한 3년에 한칸씩정도, 하나씩쳐서 서너 서가정도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도서들로 꽉채워져 있어야합니다. 그것을 자식들에게 손때묻은 성경과 함께 물려줄수 있어야됩니다.
정말 한번생각해보세요. 하나님! 주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신 십자가의 그 은혜는 내가 죽어도 갚을수가 없는데 그리고 죽는것도 내 마음대로 죽는것도 아니고 주님이 대려가셔야지 죽는것이니까. 그 때 하나님이 대려가실 때까지 여기에서 살아야되겠는데 그렇다면은 대안은 하나입니다. 잘 사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잘 살고 싶을 때에 그러한 강력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두가지입니다. 그것은 뭐냐하면은 정확한 지식과 그렇게 살수 있게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능력입니다. 두가지입니다. 그것을 구하지않습니다.
위로부터 쏟아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우리 마음대로 할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는 단지 기도할뿐입니다. 그렇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기도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고 기도하지 안하는 사람들, 기도할수록 문제가 많습니다. 요즘은 그런 사람이 별로없는데 전에 제가 지하실에 있을 때에는 등록하면은 항상 제가 먼저 심방했으니까. 상담하면은 어떤 지체들에게는 “내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기도하지말아라.” 너무나 이 신앙이 틀어져 있어서 기도하기만 하면은 무엇인가 희안한 것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도 사랑 안하는데 개꿈꾸고 지나간 그 형상은 잊을수가 없는것입니다. 그것 붇들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 그것이 무슨 의미가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해석을 해주면은 뭘하느냐는 것입니다. 의미가 없는데. 성경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사모하는 마음과 열심히 사라진 이 현실에 대해서 우리들이 깊이깊이 개탄해야합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정말 사모함이 되어야합니다. 그렇게 성경의 진리로 조직된 이 교훈을 통해서 우리를 거룩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 그리고 진실한 인격을 가진 예수의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워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성경을 사랑하지 않으면은 그렇게 만드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이처럼 성경의 그 진리로 조직을 해서 교훈하고 가르치는 것이 가르치는 자의 중요한 임무이니까. 가르침을 받는사람들은 그러한 교훈을 받으려는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한 사람이 성경을 사랑하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자고로 틀림없습니다. 그는 성경을 많이 읽었을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자신의 자랑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을뿐입니다. 책을 많이 읽었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항상 그 읽고 깨달은 그 진리가 자신을 파고 들어와서 자기를 변화시키는 그런 것이아닙니다.
요즘 설교시간에 누구를 이야기해서 좀 안되었습니다만은 그 김영옥씨 특강하는 것을 보지않습니까. 나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그래야됩니다. 내가 무슨 성경도 다 모르는데 금강경을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는 모릅니다.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이 맞는지. 뭐 그 사람보고 아니라고 사명감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 이야기가 맞는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뭐냐하면은 그 사람이 그런 강의를 하는 것은 잘 안어울린다..라고 하는 것은 여러차례 느꼈습니다. 왜냐하면은 계속들을 때 박식하다.라는 것은 느껴지는데 소인이 군자를 강의를 강의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계속드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는 강의를 하다가 공자얘기를 하면서 공자는 그래도 4대성인 아닙니까. 그런데 공자가 아무리 몰라도 자기만큼 모르겠습니까. 그래 공자가 자기한테 점수를 좀땃대요. 그 얘기는 자기는 공자보다 훨씬 높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노자도 그렇고 공자도 그렇고 그런 사람을 제일 경멸했을거라고요. 그런 소인배는. 그렇지않습니까. 나는 그 내용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을 못하겠습니다. 불교신자도 아니고 도교를 전공한 것도 아니니까. 그냥 나는 유보하겠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공자나 노자 사상을 배웠다 그러는데 노자나 공자나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서 만들어 낼려고했던 그 제자는 아닙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소인배가 군자를 가르치고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히히낙낙하는 그 모습이 내가 보기에는 강의 내용자체는 모르지만은 어떤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는 사랑받을수 없는 장면이라고 하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들이 오늘날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하는 우리의 집회 때마다 예배 때마다 끌어오르는 나는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수 밖에없습니다. 주님은 나의 전부입니다. 지루할 정도로 찬양속에서 고백한 것들이 순간의 고백으로 끝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뭐에요. 가장 커다란 이유가 아니라. 이유의 전부는 무엇이냐하면은 성경의 진리에 대한 깊은 사랑과 그것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는 성경적인 교훈의 빛 아래서 살지를 않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거의 일순간의 경험으로 그치는 것입니다.
나는 노자가 누구인지 잘모르고 공자 그분도 잘모르지만은 그러나 아마 노자나 공자나 누구든말이죠. 그 제대로 만나가지고 그 가르침이 인간 김영옥을 이렇게 파헤치면서 통과했다면은 그것도 종교인데. 파헤치고 지나갔다면은 물론 우리들이 들을 때에 군자가 떨리는 마음으로 군자가 어떻게 사는것인지를 겸허하게 가르치는 그 보습을 볼수있을 것이고 느낄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는 이 종교의 세계를 거친사람들이 나눌수 있는 그런 감각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수많은 복음의 가르침에 닳고 닳사람과, 하나님의 피묻은 복음이 그의 심장을 찌르고 관절과 골수를 가르면서 지나가는 경험을 한사람이 어떻게 같을수가 있는냐는 것입니다. 같은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참을수 없는 경박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같이 부도덕한 인간들이 볼때에도 역겨울 정도로 경박한 이 경박함이 완전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드리는 예배와 그리스도인의 삶, 교리, 그리고 그 고백. 속에서 그 경박함을 함께 보실때에 그 완전하고 거룩하신 그분의 마음은 얼마나 상하시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알게된 전능하신 하나님이 고작 그렇게 무시당하실수 있는 하나님이십니까? 그분의 존귀와 위엄과 영광과 거룩하신 그 성품들에 있어서 그분이 그렇게 업수이 여김을 받으실 수 있는 분이시냔말입니다. 그럴수 있는 분이아닙니다.
그런 견디기 힘든 모든 경박함 자기 중심적인 신앙생활과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 세속주의와 청산하지못한 이 세상의 성공주의와 거룩한 복음을 믹서해보려고 하는, 이런 모든 야뱌위적인 시도들이 결국은 다 어디에서 나온것입니까? 우리 한사람 한사람. 오로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을 가르치는 교훈을 통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할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 확신을 잃어버린데서 오는 것아닙니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오늘도 부족하지만 땀흘리고 피흘리고 애써서 조국교회의 한 모퉁이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마음 다해 섬기면서 꿈꾸는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국민소득 3만불의 고소득 사회를 우리가 꿈꾸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주님을 알지못했던 사람들의 마음에는 분명히 주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지식이 심겨지고, 주님이 누구신지를 이미 알았던 사람들은 그 지식과 함께 임하시는 거룩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고, 자신의 삶의 전 영역에서 여호와의 주 되심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부복하는 것을 행복으로 아는삶, 그분을 너무나 존경하고 그분의 위엄을 너무나 두려워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을 너무나 보람으로 알기 때문에 삶의 지극히 작은 한부분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의 빛아래서 검증하고 그분의 진리를 따라서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꿈꾸는 나라가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한 나라입니다.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 온세상에 가득해지는 것입니다. 작은 불순종으로 가슴을 찢고. 넘치도록 주를 위해서 살고도 그렇게 살게해주신 주님의 은혜앞에 자신이 드렸던 작은 헌신이 그것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지못하는 겸비한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그래서 삶의 어느 한 부분도 대충살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며 살아가는 세상.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꿈꾸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해지는 세상입니다.
교회밖에 있는 세상이 우리가 이렇게 되기를 사모하면서 그 이유하나 때문에 구원받고도 아직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그일을 위해서 전도하고. 그일을 위해서 영혼을 사랑하고, 그일을 위해서 영혼들에게 가르치고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들을 굳게믿으면서 오늘도 변화되기에는 강팍한 영혼들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꿈꾸는 세상을 먼저 우리 자신속에서 구현해 보여줄수 있어야 되지않겠습니까. 그래야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 능력의 주
내 영혼의 치료자.
말씀으로 고치시네
주는 나의 치료자.
곤고한 여려분의 신앙생활은 어디에서 떨어졌을까요? 커다란 범죄가. 아닙니다. 고통스럽기 짝이없는 여러분의 상황의 삶의 상황의 시작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하니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그러한 느낌은 시작이 어디에서 왔을까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교훈을 기뻐하지 않는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 어린아이가 젖을 사모하는 것 같이 그 표현을 베드로가 썼지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만 보더라도 그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분명합니다.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쓸수가 없습니다. 아직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서 엄마가 품에 딱 안으면은 눈도 못뜨는 아이가 꽃봉오리 같은 입술을 벌리고 막 흔들면서 젖꼭지를 찾습니다. 그리고 물고 강력하게 빨기시작하는 것입니다. 생명처럼. 진짜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진리의 말씀을 찾고자 하는 눈을 감고 꽃봉오리 같은 입술을 내밀고 혀를 늘어뜨리고 그 엄마의 젖을 눈을감고 볼을 부비면서 젖꼭지를 찾는 그런 어린아이들과 같은 그런 갈망이 숨질 때 되도록 유지되어야합니다. 그것이 주님사랑입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예수께서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킬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과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동일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당신께로부터 교훈을 받기를 원하는 그 마음과 당신 자신을 필요로 하는 마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해야합니다.
여러분들의 곤고한 신앙생활과 그리고 출발이 어디인지를 모르지만은 하여튼 잘못된 뒤틀린 이 신앙생활의 시발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전에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인격을 알게되었을 때 여러분들이 어떻게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교훈으로 채워질 때 기뻐했는지를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마치 하나님의 진리를 듣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 같았습니다. 세상도 없고 나도없고 오직 부귀영광과 그리고 모든 환경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 영혼에 다가오셔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주시고 내 오래된 부패와더불어 싸워 이길 수 있게 만들어주신 유일한 힘이신 진리의 성경말씀을 교훈해주기를 사모하는 마음에 여러분들의 눈은 빛났습니다.
손수건 없이 예배를 드릴수 없었고. 진리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으로 적은 깨알같은 글씨가 여러분들의 성경책 모서리를 새카맣게 매웠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버릴수있습니까? 하나님은 손에 잡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누가 하나님을 버릴수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버릴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훈을 버린 그 사람이 하나님을 버린사람입니다. 주님의 진리를 싫어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매달리며 몸부림쳐 봐도
인간의 힘만으로는 어쩔수가 없네
주여 잡아주소서 나를 이끄소서
아무리 몸부림치고 발버둥쳐도 진전이 없지 않습니까? 영혼의 기갈을 면할수 있던가요? 행복해지던가요?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을 되찾을수 있었던가요? 영혼의 회복에 다른길은 없습니다. 진리되신 참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훈에 다시 여러분들의 굳은 마음이 젖고 그리고 그 진리의 말씀이 깊이 스며들어서 여러분들을 새롭게할 그 때에. 그 때에 여러분들은 멈추었던 성화의 생활에 놀라운 진전을 볼것입니다. 죄와 불순종과 견딜수 없는 상황으로 난파된 것과 같은 신앙생활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사람은 여러분들을 세울수 없어도 말씀은 여러분들을 다시 세울수 잇습니다. 그리고 짐승과 같았던 사람들을 다시 성자와 같은 거룩한 세계로 데려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책망을 기대하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下)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책망받을 것을 기대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책망”이라고 하면은 우리는 흔히 야단치는 것으로만 생각을합니다. 그렇게 생각할때에 우리들이 책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있을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에 관해서 좋은 얘기 듣기를 원하고 자신에게 좋은 이야기 해주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고자합니다. 우리들이 마음속에 “책망”그러면은 우선 야단치는 사람의 이 분노가있습니다. 그런 분노가있고. 그 분노는 바로 자신의 인격에 대한것이죠. 그런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야단을 치는 것, 그 때에 그 속에 어떤 교훈이 담겨있든지 간에 그것과는 상관없이 일단 책망을 받는 사람이 인격적인 무시나. 모독을 느끼지않으면서 책망을 받는 것은 책망하는 사람이 보통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은 쉽지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망받을때는 자존감이없어지고 그리고 야단치는 사람이 그 책망하는 사람에 의해서 자신의 인격이 무시되는 것 같은 느낌들을 갖는다 이얘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어떤 진리가있으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어떤 행동이나, 어떤 사건이나, 성품이나. 이런것들에 대한 묘사가 혹은 정의가 있으면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것과 실재 우리의 삶속에서 경험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먼저 구별해낼수 있어야 한다는 이얘기입니다. 다기 말하면 “사랑”그러면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이 사랑의 개념을 가지고 성경속으로 그냥 들어가면 안됩니다. 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다르니까. 그것을 그 두가지를 차별되게 이해를해야합니다. 왜그런지 설명을드릴께요. 왜그러느냐하면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것이고 또 좋은 개념이지않습니까. 그렇죠. 그리고 그 사랑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또 인간속에 내재되어있는 한 본성이기도 한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에게 올바른 사랑을 가르쳐주셨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죄가들어오고 타락한 이후부터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처음에 사랑을 가르쳐주셨어도 그 사랑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행함에 있어서 또 사랑에 대해서 생각함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인간은 죄와 그리고 부패성에 의해서 그런것들을 다 오염시켰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상태에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그런 사랑이라고 하는 것들이 상당히 비슷하게 느껴질수는 있지만은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아주 굉장히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책망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책망도 우리들이 이 죄많은 세상에서 미워하기 잘하고 솟구쳐오르는 분노를 억제할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 살아가고 있고. 이런 사람들 속에서 경험되는 책망이라는 개념을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책망이라는 개념으로 바로 이해를 하면은 그러면 안됩니다. 딱아내야합니다. 그런것들을. 그런데 이것이 성화문제와 관련이되는데요. 설명을 들어보십시오. 어떤게 관계되느냐면은 인간속에는 비록 하나님을 믿는 자녀라고 할지라도 이 죄된 부패성들이 이 안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또 그가 살아가는 환경이 그렇게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는 그런 순전한 사랑을 따라서 그 사랑을 실천하며 그렇게 살아갈수 있도록 그렇게 환경적으로 도와주지를 않습니다. 상황이. 그러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 자녀라고 할지라도 언제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사랑, 또 우리가 이 세상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실재적으로 경험하는 사랑, 그 사이에 차이가 많이 있을수가 있다는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자가, 그 하나님의 자녀가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그 사랑에 아주 근접하게 살아가서 자신의 삶에서 경험되는 많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은 삶이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그 원래적인 도덕적인 생활과 아주 가깝게 일치하게 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지속적으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슨뜻이냐하면은 여전히 내 안에 죄와 부패성들이 있고 사랑이라고 하는 본성은 하나님께 받았지만은 그 사랑이라는 본성에 이기적인 욕망. 세속적인 욕심, 그 다음에 성경적이 않은 그런 생각, 이런것들이 막 뒤섞여서 잘못된 사랑을 할수 있는 그런 부패성들이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살아가서 진리와 성령으로 계속 씻겨지면서 새워질때에 그 때에 우리는 사랑을 해도 아가페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가는 그런 사랑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게되는 그런 사랑으로 다가오게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 이해하실수있죠. 그렇죠. (예를들면은 성경적으로 볼때에는 자녀를 책망해야되요? 책망하지 말아야되요? 그래요. 그러니까 오늘날의 교육의 큰 문제가 뭐냐하면은 인간에 대해서 너무 낙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녀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징계가 없으면은 그러면은 자녀의 일생을 망치기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은 이 자율적인 교육을 이야기하지않습니까. 책망하지 말아야된다. 경책하고 징계하지 않는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 너그러워지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잘들어보세요. 아주 굉장히 중요합니다. 안중요한 것이 없지만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너그러워지는 것은 전혀 별개입니다. 무슨이야기인줄 아세요. 그러니까. 이얘기입니다. 아무리 자녀를 향해서 너그러워져도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은 그 너그러워지는 것이 방종을 조장합니다. 적절히 징계를 해도 징계보다도 더 뛰어나게 자녀를 사랑하면은 문제가 덜되고. 문제가 거의 안됩니다. 무슨말씀인지 아세요. 그러니까 오늘날의 교육의 문제는 무엇이냐하면은 사랑이라고 하는 의무가 있는데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책망이 없는 너그러움으로 대신할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때에 그것을 아니라는것입니다. 그것은 절대아닙니다. 인간을 우리들이 너무나 낙관적으로 보는것입니다. 너그럽게 자율적으로 하게하면은 인간이 자율적으로 잘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해를 해야하느냐.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할때에 책망그러면은 우리들은 대부분 책망 그러면은 그것은 격정적인 분노가 동반된 자기의 감정의 배설이 담겨진 그런식으로 공격을 많이 의미한단말입니다. 그러니까 책망이 우리는 인격적인 책망을 얼마나 들으면서 자랐는지 한번생각을해보세요. 그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이 애들을 참 사랑했는데도 요즘은 좀 덜할것입니다. 우리 자랄때만해도 그 욕이 얼마나 험한지모릅니다. “빌어먹을 놈의 자식.” 그 자기 자식이 빌어먹으면은 그렇게 좋겠습니까. 심지어는 “육실할 자식.” 그 동원할수 있는 모든 언어를 동원해서 자녀들을 막 욕하고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일수가 없습니다. 비인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대한 깊은 이 피해의식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하여튼 이 신앙의 세계에 들어와서도 책망받는 것을 아주 질색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책망받는 것을 아주 질색으로 생각하고 책망하면 곧 그것이 자기를 향한 무시라고 생각을 하고 공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것들을 일체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의하면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자채가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에 이르게 하고 구원얻은 사람들은 성황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성경을 주셨는데 그 목적에 도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네가지 성경의 기능과 관련이 있는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하면은 바르게 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책망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로 교육한다고 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이 오류에 빠질수 있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책망을 이 신앙의 세계에서 책망이라고 하는 이 기능을 성경의 기독교 교육의 기능을 자신이 받아들이려고 하면은 그러면 그 사람은 결코 성경에 의해서 양육받을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기억을해야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책망보다는 은혜로운 이야기를 많이 해서 성도들을 북돋고 격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런에 그것을 우리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우리 마음대로 정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경은 너희를 향해 이런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런 기능을 다함으로서 너희들을 거룩한 성도로 만들어 간다. 그런데 그것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교육함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교훈이 그러하니까 성경의 교훈이 그러하니까. 그 성경을 잘 이해하지못하는 사람에게 그 성경을 잘 터득해서 내가 사람에게 그 성경을 잘 가르쳐준다고 할 것 같으면 그 교육이 제대로된 가르침이라면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네가지 기능을 그대로 전수받아서 필요에 따라서 교훈, 책방, 바르게함, 의로교육함. 이러한 성경의 효능이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대로 바휘될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이것이 성경적인 교육이지 그렇지않습니까. 성경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와있는데 그 중에서 내가 원하는 것만 끄집어내서 그 중에서 다시 상대방이 원하는 것만 나누어주는 그런 교육은 잘못된 교육이고 참된 진리로 접근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교육시킬 때 제일먼저 훈련시켜야 될것이 바르게 책망을 받는 것을 교육을 시켜야합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기억을해야합니다. 성경은 요리책이 아닙니다. 자기가 먹고 싶은 것들을 물어보면은 가르쳐주는 요리책이 아니라. 성경은 어떻게 보면은 우리 영혼의 의학서적입니다. 여러분 저는 수술 가운데서도 모든 수술을 제가 직접 현장을 본적은 거의 없지만은 그러나 수술가운데 상상하면은 제일 끔찍한 수술은 뇌수술같습니다. 톱으로 썰어서 뚜껑을 거두어내고 그리고 그 중의 뇌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뚜껑을 씌우고 해서 다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잘보세요.
이 성경속에는 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삶이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영적인 면에서 육적인 면에서 아주 총채적이로 아주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고 그 가르침 하나하나가 미세한 심줄과 핏줄 하나도 연결되어서 이 하나의 진리의 체계가 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지가 원하는 부분만을 따내서 자기가 가르침을 받고 자기가 책망받는 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은 가르침을 받지않기 위해서 포기한다고 할것같으면은 그러면 그렇게 해서 체취해내서 얻어진 가르침으로 조성된 한 사람의 기독교신앙이 정상적인 신앙일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주 과하게 이야기하면 이단에 근접한 신앙이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말이죠. 더더군다나 이것을 설교로 연장을 시킬때는 둘이 성경공부로 하면서 막 “너 그따위로 살면은 되냐고” 이렇게 야단치는 사람은 별로없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설교를 하나다보면은 책망을 하게되는데 이것을 많은 사람들이 설교자다 자기들을 향해서 인심공격을 한다라고 생각을하는 것입니다. 물론 설교자도 사람이니까. 상황에 따라서 그러는 수도 있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은 안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은 그렇게 하면은 안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에서 진리의 말씀을 증거할때에는 사사로운 감정을 배재하고 설교하는 사람이 그 말씀증거의 정서가 본문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정서를 그대로 들어내는 그런 통로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쨋든지간에 뭔가를 야단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극한 거부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특별히 아예 안들을려고 하든가 뭐 반응도 여러 가지입니다. 안들을려고 하든지 아니면은 슬그머니 일어나서 나가든지 아니면은 딴 생각을 하든지 별의별 반응이 다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는 성도들은 아주 분명하게 말해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을 받는 사람으로서 가르치는 사람에게 책망을 받을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그래야지만 그가 진리에 접근할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성경을 아주 충실하게 설교하고 본문 곳곳을 누비면서 아주 깊이 있는 말씀을 전하는데 여러분중에 그 누구도 그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책망하신다고 느껴본적이 없는 사람들, 그 사람은 지금 대단히 심각한 오류에 빠져있습니다. 그 설교자가 잘못된 사람이고 아니면은 듣는 사람이 이해를 못하고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거나 둘중에 하나입니다.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성경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그래도 증거한다면은 반드시 책망을 받는때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여러분들이 다 올바릅니까? 물론 대체로 올바를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올바르지는 않습니다. 정결하시죠. 그러나 완전히 정결하지는 않습니다. 은혜안에 있죠. 그러나 부패는 없습니까.? 진실하죠. 사악한 마음이 들때는 없습니까? 빛과 어두움.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든지 여러분들은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망을 받을수 없다면은 그렇게 성경을 정직하게 구석구석 설교했는데 늘 좋은 이야기만 있고 책망은 없다.라고 할 것 같으면은 그는 정직한 설교자라고 말할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도 혹은 책망을 잘못 알아듣고 자신을 향한 칭찬으로 오해를하거나 뭐 그런 중대한 오해가 있던지 둘중에 하나이지 그럴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가지 점에서 이 책망은 피할 수가 없는데 우선 첫째는 모든 신자들이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아는것과 행하는 것과. 믿는것, 그 다음에 도덕적인 삶에 있어서 모든 것에 있어서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 책망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가르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자신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사랑할수 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서 그들을 정직하게 책망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에게 있는 흔한 오류가운데 하나는 책망을 하는 설교를하면은 그것은 사랑의 원리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바보같은 생각입니다. 전혀 그렇지않습니다. 설교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책망할 때 순간적으로 분노하거나. 말하자면은 어떤 개인을 미원하는 사적인 감정에 사로잡힐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설교자의 미숙의 문제입니다. 설교자의 미숙의 문제이고 인격적인 미성숙의 문제이기 그렇다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을 받는사람에게 책망을 받아야할 의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절대로 기억을해야합니다.
그런데 그 좀 오늘날의 이런 상황들을 보면은 정말 실망스러울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해야하는가. 그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늘 목양을 받거나 혹은 가르침을 받으면서 신앙생활 하다가. 그래서 그 가르침을 통해서 거듭나기도 하고 성화의 은헤도 경험하고, 목양도 경험하고 하면서 신앙생활하다가. 한가지만 마음에 안들고 수틀리면은 다 허물어버리고 그 다음에 뛰쳐나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계 자체를 아예 허물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뭐냐하면은 하나님 없이 살겠다라고 하는 마음의 또다른 한 표현입니다. 그렇게 하면은 안되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무엇을 가르침을 받아야 될것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분명한 의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그 가르치는 직분과 사명, 설교하는 직분과 사명이 사람 앞에서 사람을 향해하는 사명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는 직분이요. 사명이라고 생각을해야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나를 좋다고 해도 하나님이 나를 싫다고 하면은 싫은 것이 정답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실패했다고 저를 조롱해도 하나님이 보실때에 실패하지 않았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은 후자가 정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심각할 정도입니다. 너무나 책망받을줄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야단을 칠라그래도 많은 가르치는 사람들이 겁부터 먼저납니다. 내가 이것을 야단치다가 아예 나중에 야단칠 사람조차도 사라지는 것 아닌가.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아주 목회 시작서부터 깊은 의무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야단을 쳐야한다라고 그래서 이제 때로는 불러놓고 야단을 칠때도 있습니다. 아주 심하게 야단을 칠때도있습니다. 나는 그런 야단을 맞아본적이 없는데 그뭐 그렇게 야단맞은 것 부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뭐 개인적으로 그 야단맞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목회자인 나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 그 사람과의 어떤 개인적인고 인격적인 관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명하셨고 또 그에게 어떤 의무를 주셨는가. 양자가 그것에 대해서 충실해 질때에 우리의 좋은 관계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두 사람이 모두 하나님 앞에 서있지 않는데 둘이 뜨겁게 사랑하고 좋은 그 관계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교회는 사회의 사교단체가 아니지않습니까. 거룩해하심을 입은 무리들이 이 속에서 목양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고 더 온전해져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 그러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닙니까? 그렇죠. 여러분들의 인생의 선배로서 제가 여기에 서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은 무슨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뭐 어려운 가정적인 사건들을 제가 해결해주기 위해서 여기에 서 있는 것도아닙니다. 물론 그런 사건에 개입할수도 있습니다. 개입할수도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하는데에 내가 그렇게 개입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이되니까 개입하는 것입니다. 어떤때는 깊이 개입을합니다. 그렇지만은 늘 목회자가 해결사로서 여러분들에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가 무슨 서비스업이 아니지않습니까.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한 업입니다. 그런데 그 책망받을 줄을 아주 모르는것입니다.
그런데 잘보세요. 성경에보면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서 그 하나님 앞에 타락했을때에 나타나는 아주 뚜렷한 표가 무엇이냐하면은 하나님의 책망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책망을하십니까. 재앙을 통해서 하시거나 재앙을 통해서 하시기전에 제일먼저 재앙을 통해서 내려 부으시는 것은 사실 책망이 아니라. 그것은 징계입니다. 쉽게이야기만은 “이 자식이” 그러면서 자기 자식들을 야구방망으로 두들겨 패는 것은 그것은 책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 죽이는것이지. 책망을 하실때는 하나님께서 누구를 내려보내시죠. 선지자를 내려 보내셔서 막 책망을합니다. 그런데 안들어요. 귀를 딱 막고 안들어요. 그래도 선지자가 더 영역있게 외치면은 귀를 막아도 들립니다. 마음에 양심에 찌릅니다. 그러면 어떻게하는겁니까.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세인들에게 분노하시면서 책망하시면서 설교하신 가운데 그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피흘리는 후예들이라고 묘사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피흘린 그 후예들이라고 묘사를 했습니다. 그 사람을 많이 죽여도 살인 그자체가 하나님 앞에 나쁜것이지만은 선지자를 미워하고 죽인죄는 굉장히 큽니다. 그것은 왜그렇습니까? 선지자가 고매한 신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다가 상대방을 죽인다든지 화가나서 다른사람을 살인하는 것은 그 개인적인 인간관계의 문제에서 비롯되었을수도 있지만은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해주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선지자를 죽인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이야기냐하면은 이 인간을 죽여서라도, 선지자를 죽일 때에 그는 하나님을 향해 칼을든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를 죽일때에 그는 말하는 선지자를 죽였을 때에 그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도록 그분의 목에 칼을 겨누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살다가 살인하고 범죄하는 이 사건은 무엇인가 이렇게 회복될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건이지만은 선지자를 죽여버리고 그를 미워하는 그 사건은 하나님을 향한 최종적인 배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싫다라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무엇이냐하면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이 범죄한 관계를 조금도 개선할 용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배교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는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든지 아니면은 전쟁이라든지 아주 커다란 사건을 그 징벌의 사건을 말씀하실 때마다 빼놓지 않고 지적하시는 그들의 가장 커다란 죄가 무엇인지아세요. “듣지아니하였으며”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셨는데 그것이 한 40년후에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서 성취됩니다. 완전히 예루살렘이 도륙을 당합니다. 피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 주후70년에 있을 예루살렘의 로마에 의한 멸망을 예수님께서 예고하시면서 하신 그 비유적인 말씀. 독백처럼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치 어미닭이 병아리를 모음과 같이 암탉이 자기 새끼들을 모음과 같이 내가 너희들을 얼마나 모으려고했는냐.” 그래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이 흩어진 자기의 백성들을, 위험한 자기의 백성들을 범죄해서 도망 다니는 백성들을 일렇게 암탉이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같이 이렇게 모으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그 모으시는 그 모음. 그것이 문맥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 정황이 공중에 날아 다니는 솔개나 매. 이런 것을 상상하세요. 시골에서 많이보지않습니까. 솔개가 딱 뜨면은 엄마닭이 아주 비상입니다. 막 소리지르면은 철딱서니없는 병아리 새끼들은 돌아다니면서 모이나 주워먹고 놀다가 엄마가 워낙 난리를치니까. 그때에 두리번두리번 하는 것입니다. 막 부르면 쫙 날개아래도 들어옵니다. 참 신기합니다. 닭 잡아서 통닭보면은 날개가 이만하지않습니까. 그리고 또 그만한 날개속에 수십마리 병아리가 다 들어갑니다. 참 신기합니다. 닭이 이기겠습니까. 그런데도 무엇입니까. 나를 헤치기전에는 우리 새끼들을 우리 병아리들을 어찌할수 없다.라고 하는 어머니로서의 사랑과 보호의 본능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흩어진 병아리와 같은 백성들을 그렇게 모으려고 하시는데 그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지금도 여러분들이 유리하고 방황할 때에 하나님이 그 품안으로 모으셔서 이 세상의 풍랑과 시련이 여러분들을 헤치지 못하게 하고 우는 자사와 같이 두루다니며 믿는 자라도 삼킬 듯 울부짖고 있는 사자로부터 여러분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모으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주셔서 그 음성으로 여러분들을 돌이키게 하고 자기에게 돌아오시게 하는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소리를 듣기 싫어서 선지자를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지금도 뭐 전 세계에는 말씀을 바르게 전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은 요즈음 우리 나라에서는 잘 안죽입니다. 그렇지만은 근거없이 그가 증거하는 전체적인 말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은채 계속해서 자신의 양심을 자극하거나 아니면은 자기의 이 마음에 거스리는 아픔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증거한다고 해서 그 이유 때문에 설교자를 미워하는 것은 또다른 종류의 살인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무서워서가아닙니다. 원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이렇게 목양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무엇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데 그것을 부정확하게 판단을해서 “난 저런식으로 설교하는 것 싫어.” 뭐 이것은 제 얘기만은 아닙니다.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거야.” 아니면은 “왜 저렇게 모션은 저렇게 오바를 많이 하는거야.” 그런식의 “길기는 또 왜그렇게 길어.” 이런식으로 어떤 판단을하면서 안듣겠다고 마음을 먹고 마음을 접었을 때에 그 때에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목양을 받을수가 있겠습니까? 그 진리를 통해서 깨닫고, 새로워지고, 거룩해 지기를 사모하지 않는 것이 무슨 목양이 존재하겠으며 그 목양을 받지않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거룩한 성도로 살아갈수 있도록 그를 격려하고 그를 고무시키는데 이 교회속에서의 이 목양의 관계를 가르침의 관계를 하나님이 사용하실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목자없이 혼자 유리방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보통 심오한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지않는 한 책망받을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렇죠. 가끔씩이라도 여러분 하나를 놓고 막 격열하게 소리를 지르면서 그렇게 살지않으면 안된다는 사람을 여러분 개인적으로 어디에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뒷집 아저씨가 와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합니까? 누가 이야기 하겠습니까? 이것은 성경전체의 역사를 통해서 아주 정나라하게 입증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깊이 공경하고 그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을 때에는 그 뚜렷한 특징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간에 그것을 아주 달게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쳐가고 새롭게 되어져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이 기능이어야됩니다. 오늘날 또 가르침을 받지않을려고 하는 사람들의 또하나의 변명거리라고할까요. 그런것들은 무엇이냐하면은 가르치는 사람의 어떤 도덕적인 삶, 한두가지를 가지고 다 소용없다고 매도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예를들자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가르치는데 “저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자신이 그렇게 입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같아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응하기는 너무 싫거나 너무 힘들어요. 그래 너무 힘든 것은 나중에 싫어집니다. 계속힘든 것은 나중에는 싫어집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마음에 자유함이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한데 들으면 들을수록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가 순종해야되는 것은 분명한데 자기는 거기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서 순종하기가 너무 힘들고 힘든 것이 계속 자극을 받으니까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가르치는 사람의 어떤 도덕적인 결함을 발견하거나 혹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경진리의 외적인 어떤 문제들을 하나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에는 그 하나를 딱 발견하면서 저런 사람이었구나. 그런데 “내가 저 사람이 하는 저 이야기는 내가 안들어도 나는 문제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대표적인 변명인데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뭐냐하면은 인간적으로 가르치는 가르침과 그 사람을 사용해서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분간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설교하는 이 내용이 한 인간이 인생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견해이거나. 혹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에 대한 한 사람의 경험담이라면은 여러분들은 순종해야할 의무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선택의 나름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증거되고 설교되는 하나님의 말씀, 누군가에 의해서 자신에게 가르쳐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고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인식할수 있다면은 그 말씀에 대해서 순종할 의무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해야합니다.
이제는 책망을 받는 쪽에 대해서 많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 가지로 말씀드렸지만은 결론은 무엇이냐하면은 “책망을 받는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피할수 없는 의무이고 만약에 그가 책망받지 않으려고 하거나 실재로 책망을 받지않고 살가간다면 그의 신앙생활은 매우 잘못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크게 두 번째로 책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책망 그러면은 어떤 옳은 이야기에다가 감정을 실어서 듣는 사람에게 강력하게 호소함으로서 때로는 인격적인 모독도 동반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강한 자극을 주어서 아픔을 느끼게 만들어서 그로 하여금 어떤 특정한 일이나. 행위로부터 돌이키거나 마음을 바꾸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책망이라고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보면은 책망이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책망이라는 단어가 히랍어도 “엘렘코스”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엘렘코”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 “엘렘코”라는 말에서 온 영어가운데 “엘렘틱스”라는 단어가있습니다. “엘렘틱스”는 적합한 번역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엘렘틱스”는 이런 것입니다.
뭐냐하면은 선교학의 일종인데 그저 구차하게 우리말로 번역을 하자면은 비교종교학, 선교적인 목적에서 행하는 비교종교학정도 됩니다. 뜻이 그런데 그것이 무슨뜻이냐하면은 종교를 연구하는데 순수하게 인류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종교를 연구할수 있습니다. 종교와 문화를 연구할수 있습니다.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종교를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럴경우 우리들이 종교의 우열을 가린다고 하는 것은 아주 우수운 것입니다. 서양철학이 위에 있느냐. 동양철학이 위에있느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바보같은 질문입니다. 그것은 기초자체가 다릅니다. 인식론 자체가 다르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접근해 나가는 것에서는 가치의 유무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한 종족이 가지고 있는 문화현상으로서의 종교를 연구를해서 그 종교가 그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어떻게 해서 그 종교가 철학적으로 사상적으로 오늘날 그들의 삶과 연관이 되었는가를 유기적으로 밝혀내면은 그러면 그 종교학의 목적은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앨렘틱스적인 종교학은 다른 것이 무엇이하면은 모든 문화가 인리가 있지만은 모든 종교가 그 문화속에서 생겨난 것이지만은 그러나 이 엘렘틱스적인 그 접근은 어떻게 다르느냐하면은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그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구원을 받는다.라고 한는 기독교적인 인식론에 토대에서 여러나라의 종교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니까 이 기독교적인 관점을 그대로 유지를 하면서 각 나라의 종교를 보는것입니다. 종교를 보면서 그 종교를 연구하는 것을 엘렘틱스라고합니다.
그럼 엘렘틱스는 막 파괴하는 것이냐?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엘렘틱스의 목적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현상과 그 종교현상 배위에 있는 종교사상 그리고 그것이 영향을 미친 인생관과 우주관 세계관에 대해서 연구를 하되 일반학문에서 하는 것과는 다르게 분명한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설명을해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과 그다음에 타당성 혹은 비 성서적인 성격들을 갖다가 이렇게 들어내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그 공격을해서 부셔버린다기보다는 그것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다 해부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엘렘틱스의 결과를 사람들이 보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 세계관, 인생관, 그 다음에 신관 이런것들이 사고방식들이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절대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비춰서 그들이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진리의 내용들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서 그들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그 종교를 통해서 보는 인생관과 세계관들을 교정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 종교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확신을 흔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내려놓게 만드는데 그것이 엘렘틱스의 목적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이제 이해가 훨씬 쉬워졌으리라고 봅니다. 이 엘렘코스의 뜻이뭐냐하면은 성경에 우선적으로 많이 쓰이는 우선적인 뜻은 무엇이냐하면은 “익스포즈”입니다. 들어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막 “공격하다.”라는 의미보다는 “들어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으로부터 책망을 기대한다.라고 할 때 이것은 인심공격적인 폭격을 기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뭐냐하면은 그가 미쳐알지 못했던 진리들을 들어내면 그 빛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그러한 성경을 들어내는 비춤이 없었더라면 발견할수 없고 볼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것을 보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옳지않다.라고 한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면서 인격적으로 회개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중요한 교리 하나에 도달하게되는데 그것은 뭐냐하면은 기독교 신앙교육의 세계에 있어서는 성경의 진리를 들어내보여줄수 있는 사람들만이 성경적인 책망을 할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가십니까?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교리적으로 보면은 이 책망이라고 하는 것이 죄에 대한 책망이고 불순종한 삶에 대한 책망인데 그것을 책망하시는 본래의 임무는 누구에게 있으십니까? 성령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 죄를 책망하게 하시는 일, 그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아주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책망이라고 하면은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야지만 책망이라고 생각하는데 조용히 하는 책망도있습니다. ”계속 그렇게해봐“ 애들은 그것을 더 두려워합니다. 막 잔소리하는 엄마보다는 ”내가 보고 있다.“ 안방에서 안경쓰고 신문보면서 바자마 바람으로 앉아있는 아버지가 한마디 하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그것이 책망입니다. 그러니까 어떻하든지간에 가르치는 사람들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책망하려고 할 때에 그 사람을 자신이 책망한다는 생각보다는 성경의 진리를 그들에게 밝히 비춰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깨달아서 성령에 의해서 자신이 책망받고 있음을 강하게 느낄수 있도록 그렇게 해주는 것이 가장좋은 책망의 방법입니다.
(비유를하자면은 이런것입니다. 뭐냐하면은 아이가 아주 더럽고 지저분합니다. 어른들은 이미 어랬동안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이런 냄새가 난다고 하는 것은 얘가 발도 안씻었고 지금 옷은 더럽운 것이 묻었고 하는 그런 것들이 다 보입니다. 담배많이 피우는 사람들이 모인 다방에만 식구가 갖다와도 방안에만 이렇게 들어와도 벌써 담배냄새가 나는데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그 어린 아이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어두움이 자기를 충분히 감추고 있다고 생각을하는 것입니다. 혹은 또 실지로 모르거나. 그 때에 성경의 진리를 그에게 잘 가르쳐주는 것은 불이 들어오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성경의 진리를 아주 잘 가르쳐서 그를 이해시키면은 찬란한 빛이 들어오면서 이 아이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정말 부모님이 자기를 나무라실만한 몰골이구나 하는 사실을 아주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책망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잊지말아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책망은 하나님의 모든 칭찬과 마찬가지로 어떤 하나님의 정서가 묻어있지 않은 책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그 가르치는 사람의 어떤 정서는 말을 하기전에 벌써 그 사람이 무엇을 교육하고자 하는지를 느끼도록 만들어줍니다. 아직 말을 안했습니다. 가르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르칠려고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눈물이 주르르흐릅니다. 그 뭐 예수님의 생애에서 웃기는 이야기를 할려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아니지않습니까. 눈물을 흘리면 벌써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뭔가 예수님에 관해서 슬픈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픈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아직 말 한마디도 안했는데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 사연도 없는데 막 웃음이 나와가지고 말을 잊지못하는 것입니다. 그속에 무엇이 있는 것입니까? 웃기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인간이 무슨 말을 전달하든지 간에 느낌이 없이 즉 정서가 담겨지지 않고 말할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 가짜입니다. 음식점에 들어가보면은 요즘은 다 촌스러워서 거의가 다 치웠습니다. 그 맨 처음에 나왔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해깔렸게요. 음식점에 딱 들어갔는데 어디서 나는지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아무도없습니다. 그래 이렇게보니까 요만한 유리 상자에 한복입은 애들이 둘이서 이 문이 열리면 센서에 의해서 이렇게 열면은 목소리는 저위의 스피커에서 납니다. 그래 나중에는 화가납니다. 뭐 나갔다가 무엇을 두고와서 또 들어갔다가 두 번인가를 했는데 문을열면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아참 차에다 두고왔구나“ 하고 나가는데 ”안녕히가세요.“ ”또오세요.“ 나중에는 막 짜증이납니다. 그 유리상자를 확 던져버릴까보다. 인사를 하기 싫으면 그만이지 어떠한 감정도 그 속에 없습니다. 그렇죠. 기계음만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로봇들이 말하는 것, 그런 것. 똑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뭔가 진리를 전달해 주실 때에 그렇게 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죠. 하나님은 정서가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뭐냐하면은 사랑입니다. 보세요. 차를 타고 비오는 날인데 쭉 지나갑니다. 그런데 저도 옛날에 오토바이를 따봐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압니다. 그런데 남자애 하나가 오토바이를 몰고 뒤에 또 자기하고 비슷하게 생긴 남자녀석 하나를 태웠는데 다행히도 모자는 썻습니다. 그리고 달리는데 비가 막 억수로 쏟아부을 때는 오히려 덜 위험합니다. 이 도로가 깨끗이 씻겨나가서. 그런데 제일 위험할때가 언제냐하면은 보슬비 내릴 때 오랫동안 먼지가 쌓인 것이 이것이 페이스트가됩니다. 질척질척한데 그런데 이제 쫙 미끄러집니다. 그런데 막 태우자마자 부응하고 떠나요. 그런데 ”저거 저거 위험한데“ 그런데 꽈당하더니 오토바이는 저리 나뒹굴고 둘이서 막 나뒹구는데 한사람은 일어나고 한 사람은 못일어났습니다. 한참 있더니 일으켜 세우는데 무릎에서 바지가 다 찢어지고 피가 철철흐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이야기가 붕떠날 때 ”아니 비오는날 저렇게 타면 위험한데“ 꽈당 넘어졌을 때 나도 모르게 ”거봐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약에 그애 아버지였다면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계네 아버지가 거기에서 ”저러면 안되는데“ 꽈당 그랬어요. 우직끈 하고 피가줄줄 흐르는데 ”거봐라. 아버지가 뭐라그랬니“ 한참 있다가. ”일어났네“ 그럴수는 없지않습니까. 사랑이 없으니까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사랑이 있으면은 익사이팅합니다. 조금만 잘해도 너무 신이나고 조금만 못하면은 너무 가슴이 아프고 축구보면은 잘알지않습니까. 독일하고 영구하고 축구하는데 우리가 누구 응원할 필요없습니다. 자기네들끼리 빨리 끝내면 되지. 그렇지않습니까. 결론만 나면 되지. 그러나 우리 선수들이 축구할 때는 그래도 밤새도록 응원을 하지않습니까. 우리가 여기에서 응원을 한다고해서 거기에서 더 잘하는 것은 없겠지만은 그래도 다른 나라사람들은 꼴을 먹든지. 꼴을 집어넣든지. 자살꼴을 넣든지 그것도 스포츠인데 신경안씁니다. 그런데 우리는 페스하다가 하나만 공을 흘려도 어쩔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막 흥분을 해가지고 원드컵한번 하면은 TV가 20-30개씩 깨진다고해요. 소주가 많이 팔린데요. 하도 화가나니까. 그거 왜그래요. 다 관계가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책망하고 야단치실 때에 그 속에 어떤 정서가 없이 야단치신다면 만약에 그것이 가능하다면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불가능합니다. 그래 여러분들을 위한 감정을보면은 압니다. 그러니까 가르치는 사람들을 할수만 있으면은 그 정서를 자신이 그대로 담은 마음에서 진리를 가르칠 때에 그 가르침이 강한 호소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뭐냐하면은 가르칠 사람의 가르칠 내용, 그 자체의 체험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설교하면서 실실웃으면서 설교한다면은 그것은 완전히 코미디입니다. 그렇죠.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하면서 아주 굉장히 기분나쁜투로 비아양거리면서 ”하나님이 뭐 당신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요“ 뭐 이런식으로 이야기하면은 누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느끼겠습니까. ”당신같은 사람들 조차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말되” 이런식으로 비아양거리듯이 그렇게 가르치면은 누가 그것을 받아들일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 책을 처음에 쓸 때에는 잘 몰랐습니다. 어떤 때는 책을 막 쓰다가 막 격정이 쏟아납니다. 그러면 한꺼번에 수십매씩 써 내려갑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렇게 가만히 보니까. 표현에 있어서 비아양거리는 것은 정말 나쁜 것입니다. 비인격적입니다. 책망을 할려면은 정직하게 폭격을 하든지 아니면은 이해를 하든지 해야지 그렇게 비아양거리면은 아주 나쁜것입니다. 보세요. 그렇게 비아냥거리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하지않습니까. 정말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런 비유가 여러분 적합할지 모르겠는데 토치램프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하면은 속에다가 석유나 휘발류를 넣어서 석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펌프질을 많이 하면은 압이놓아집니다. 그래서 그것이 이렇게 딱 쏘면은 그것이 분무가됩니다. 분무가되어서 퍼져나오는데 그 때 이제 거기에다 불을 붙이면 불이 붙습니다. 그런데 이 노즐이 차갑게 식었을 때에는 펌프질을 많이해도 분말이 미새해지지않거나. 아니면은 직선으로 찍하고 기름줄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노즐이 상당히 뜨겁게 달아올랐을 때에는 약간만 펌프질을 해도 아주 미세한 분말로 확퍼지면서 불이 붙습니다.)
내가 왜 이 설명을 드리느냐하면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깊이 감격하고 있는 이 따뜻한 마음의 상태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은 이 정서와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기가 그 가르침을 아주 입술에다가 기름을 바른 것 처럼 그렇게 아주 자연스럽게 많은 양을 내보낼수가 있습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체험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느끼는 정서는 분노의 정서인데 사랑을 이야기할려면은 말을 계속더듬는 것입니다. 훌륭한 가르치는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자기가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에 담겨진 하나님의 정서와 이 말하자면은 정서적인 일치. 공감을 이루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아주 호소력있게 사람들에게 가르칠수 있고 그것들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하면은 책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우리를 책망하려고 하실 때에 그 책망속에 하나님의 어떤 정서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서도 아주 획일적이지가 않습니다. 어떤때는 하나님이 막 흐느끼시면서 책망하십니다.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이 아주 격렬하게 진노하시면서 책망하십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돌아오면은 이렇게 너를 용서해준다라고 한는 기다림을 보여주시면서 책망합니다. 그런 다양한 성경본문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정서를 설교자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그대로 가지고 가르치고 전하는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주 영적으로 아주 고취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감화를 많이 받은 상태에 이르게되면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과 가르치는 자기 자신사이에 말하자면은 영적인 일체감을 발견하게됩니다. 그래서 우리 지난 주일에 예레미야를 보았습니다만은 예레미야가 그 예루살렘이 망한다음에 1장에서부터 계속해서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지않습니까. 그 때에 예레미야가 느끼고 있는 그 견디기 힘든 고통은 자기의 가족들을 잃어버린 고통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자신은 살아있지않습니까. 예레미야는 성품상 이 세상에서 어떤 알락한 삶에 대한 어떤 비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 같이 그렇게 울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하면은 하나님의 마음인 동시에 그 하나님 앞에 서있는 심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입니다. 그 양자사이를 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구약을 강해하면서 늘 강조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면은 참된 선지자의 내면의 세계와 참된 제사장의 내면의 세계는 거의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에스겔 같은 사람이 그런 것을 보여줍니다. 제사장의 후예이면서 또 동시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두가지로 내면의 세계사이의 어떤 충돌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향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진리이다.라고 아주 간절히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동족의 멸망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줄 때는 백성들이 생각하기에는“ 저 인간은 우리와 반대편에 서서 우리를 공격한다”고 생각을하는데 일단 그 선포가 끝나고나면 그 다음에는 즉시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 편에서 하나님께 호소할수 있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편에서서 말씀을 전하면서 볼때에는 백성들에 수많은 죄와 그리고 그것을 인해서 아파하고 고통하시는 하나님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옹호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어떤 때는 그들이 원수인 것처럼 그렇게 퍼붓습니다. 그다음에 그 순간이 딱 끝나고 나서 그 다음에 스위치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이 딱 끝나고나서 순간적으로 그 백성들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커다란 진노를 눈앞에 두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으로 어찌 돌이킬수 없을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가버린 자기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돌이킬 수밖에 없는 이 백성들의 죄성과 함께 연약함을 동시에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돌이켜야할탠데 이들에게 그렇게 돌이킬수 있는 힘이 없는것입니다.
그러니까 호소하면서 예레미야 애가를 “우리를 옛적과 같이( ? )편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은 희망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할 때에는 오히려 하나님을 만류합니다. 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 한번 이 백성들을 돌아보아달라고. 그 막 애원하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를 막 수시로 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자들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의 세계속으로 들어간 하나님의 자녀들의 두 마음입니다. 그래서 진짜 이렇게 영적으로 아주 깊이있어지고 그리고 영혼을 깊이 사랑하고 충만한 하나님과의 교제속에서 살면 그 하나님께서 자기의 가르침을 받는 그 영혼들이 얼마나 불쌍한지를 보게해주십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렇지 않은데 저 사람을 보면서 기도할 때에 마음이 부서지는 것같은 아픔을 느끼게 만들어주시는데 아주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이 그 사람에 대해서 느끼고계신 그 마음이 감정이입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그 어떤 교통입니다. 영적으로 교통하니까. 그러면서 그것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그 사람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그를 향한 어떤 진노하시는 마음 그런 것들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 사람과 이 교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보세요. 영적으로 아주 깊이가 있고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속에서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교통함이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통입니다. 그냥 돈만 나누어쓰고 먹을것만 나누어먹는 것만 교통이 아니라. 진정한 교통은 이런 것입니다. 흐른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교통이 있는 사람은 그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거스리면서 살면은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사실도 알지만은 동시에 그런 진노를 모르고 그가 그렇게 홀로 서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마음아파 하시는가. 하는것까지 같이 보는 것입니다.
교통이 없는 사람은 “아, 그자식 아무리 가르쳐도 돌이야. 안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영적인 교통함이 있는 속에서 진리를 가르치는 것에 중요성과 그 가치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은 아가페의 사랑의 핵심이라고 말할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를 흐르지 않는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그것은 아가페의 사랑이 아닙니다. 다시 설명할테니 들어보세요. 진정한 아가페의 사랑은 그 사랑받는 사람을 향한 일방적으로 쏟아붇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자신과 교통이 가능한 사람이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아가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보여주신 아가페의 사랑이 그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은
다 체험하셨네
자 여러분 아주 명쾌하게 이해되도록 제가 도와드릴께요. 한번 보세요. 그 복음서에 보면은 하나님이 바리세인들을 향해서 진노하시면서 말씀하시는“화있을진저” 하는 장면이나오지않습니까. 마태복은24장의 뒤편으로 넘어가면서 막 쏟아져나옵니다. 그렇죠. 그러한 책망을 들었던 그 인간들이 나쁜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니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끌고가서 못박은 사람들이 나쁜사람이었습니까? 우열을 잴수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면은 말이안되지않습니까. 자기를 십자가에 끌고가서 못박는 간악한 로마병정들을 포함한 그 못된 인간들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무엇이라 그랬습니까? “주여 저희는 저희 하는 것을 알지못하나이다. 저희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죠. 그렇죠. 그러면은 아니 바리세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시면 안됩니까? “저 인간들은 아는 것이 별로없어서 그렇습니다. 아버지 저들이 무식해서 용감합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실수 있지않습니까? 그런데 왜 달라요. 그런 의문을 별로 안가져보셨죠. 그것이 바로 잘들어보세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오가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두가지 마음이 한분이신 예수님 자신안에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둘이 충돌을 일으키는 것같지만은 절대 충돌이 아닙니다.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시죠.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인간들을 책망하시고 진리를 가르치십니다. 그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인간들을 대신해서 그 죄를 모두 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없는 자신의 육신의 몸에 하나님 아버지의 진로를 푸실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에 당신이 이렇게 죽어가시면서도 자기를 못박은 이 수많은 죄인들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은 자기가 당하는 것과 같은 이런 형벌을 당할것이라는 사실을 느끼시면서 그들이 당하게될 그 형벌을 자신이 당하고 있는 형벌보다도 더 현격하게 느끼면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가는 것입니다.
한번도 여러분들을 책망하지 않는 사람이 여러분들을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늘 책망만 하는 그 사람이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서있는 사람이라면은 때로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책망하시고자 하는 정서를 여러분들에게 아주 충실하게 전달해 주면서 진리의 말씀을 밝히 들어냄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부끄럽게 하고 여러분 자신으로하여금 여러분들의 상태와 여러분들의 행하는 일들에 대해서 가슴아파 하도록 만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면은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늘 여러분들 편에만 서고 하나님의 편에는 설 수 없는 사람, 늘 그럴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 정말 한번 그를 통해서 가르쳐지는 그 가르침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주 현격하게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을합니다. 그러니까 그 선지자들을 보면은 아까 그 예수님의 마음을 설명한것과 똑같습니다. 자신의 온몸을 던지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마치 자신이 그 백성들 보호하는 것 같이 팔을 벌리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내가 너희 백성들을 다 쓸어버리겠다.” 그러니까 “차라리 생명책에 기록된 내 이름을 지워주십시오” 그것만은 안됩니다. 그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느 한순간에는 어떻게해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칼든자를 일어나게해서 사람들을 쳐죽이고 하는 그런 끔찍한 사건들을보게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순간에 하나님의 편에서 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두가지가 사랑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사람, 하나님께서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워서 여러분들이 불러서 이 자리에 세워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피할수 없이 소명을 주셔서 여기에 섯습니다. 일차적으로 충성해야할 대상은 나를 여기에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야속한 이야기지만은 이쯤해서 여러분과 해어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은 눈물을 훔치면서 해어져야합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 정도겠습니까.? 우리 모두 순교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면은 저는 여러분들에게 도망가는 길이 아니라. 죽으러 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렇지않겠습니까? 그렇죠. 그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한 교회안에서 하나님의 주되심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가르침을 관계를 핵심으로 하는 이 목양의 관계는 사람과 사람의 거래관계로 만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절대 안됩니다. 이것은 목회자도 하나님을 만나고 피할수 없는 부르심 때문에 진리를 전해서 사람들을 깨우치지 아니하고는 배길수 없다.라는 소명감 때문에 듣는 사람들도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이 그 가르침을 통해서 주님을 만난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목양의 관계가 형성이 되어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런 속에서 둘사이에 끼어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은 둘사이에 끼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하면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하나님편에 서야 한다는 우선적인 소명과 그리고 그 소명자체가 영혼들을 사랑하고 그 영혼들에게 무엇인가 도움을 주는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점에서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을수가 없는 사랑, 그러니까 소위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들에게 가르치는 소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우편배달부식의 소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마치 법원에 통고장을 전달해주는 사람처럼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법원에 와서 확인 되어서 통고장을 전달해 주는 사람이 사랑이 있겠습니까. “당신 언제까지 집 안비우면 강재철거한다” 그것딱 통고하러 온 것입니다. 아무런 느낌이 있을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지고 있는 책망의 기능입니다. 아주 굉장히 큰 기능입니다. 왜 굉장히 큰 기능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자 제가 여러분들에게 물어볼태니까 한번 여러분 마음속으로 답변을 해보세요. 주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고 아무렇게나 살 때에는 불문에 붙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허하고 난 다음에도 여러분의 일생을 이렇게 한번 보세요. 이제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진리를 알았고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주님이 없다고 안믿어진다고 말할수도 없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은 하나님이 나를 회복시키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할수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핑계할수 없게되었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다 알고도 살아 온 여러분들의 삶을 이렇게 돌아볼 때에 정말 여러분 생각할 때에 “아참 나도 내가 생각할때에 대견하다” 이렇게 살아온 날들이 얼마나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렇죠.
여러분들도 여러분이 대견하지( ? )“내가 살아온 많은 날들이 결함이 있다”라고 말하는데 완전하신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여러분들의 삶을 지켜보실 때에 하나님이 고치고 싶으신 부분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럴 때 “책망”이라고 하는 중요한 성경의 수단없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바르게 하실수가 있겠습니까? 의로 교육하게 할수있습니까? 불의를 깨우치지 않고 어떻게 의를 경고하겠습니까? 그렇죠. “잘못되었다.”라고 하는 것을 그에게 보여주지 않고 그 잘못된 것이 계속될 때에, 굳은 것이 계속될 때에, 다가올 위험한 결과에 대해서 그에게 말하지 않고 어떻게 바르게 해줄수 있겠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금연학교에 가보셨습니까? 담배를 안피우니까 가볼필요가 없겠죠. 그런데 저는 그 필름을 잠깐 보았습니다. 그런데 금연학교에 딱 집어 넣으면은 담배피우는 사람은 나쁜사람이다. 뭐 교도소에는 담배피우는 사람이 많다. 그런식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를 보여줍니다. 담배맛이 뚝떨어지게만들어줍니다. 아주 혐오감을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이 폐속에 수십년간 담배를 피워서 니코친이 떡처럼 달라붙었는데 아스팔트 까는 것처럼 달라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 건강한 사람의 폐와 비교를 해보면은 하나는 완전히 간장계장이고 이것은 완전히 아주 발간 아주 신서한 쇠소기의 그 차이입니다. 차마 볼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말하자면은 간장에다 절여놓은것과 같습니다. 안죽고 살아 있는 것이 아주 신기합니다. 그것을 볼 때에 얼마나 기분나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토한다고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여주지 않고 그 담배를 싫어할 수 있게할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마약 보여주면 되겠네요. 마약. 그럴수 없지않습니까. 제 얘기는 이것입니다. 뭐냐하면은 굽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고 어떻게 바르게 하도록 그를 인격적으로 설복할수 있겠으며. 그 불의 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그 불의한 삶을 계속할 때 다가올 엄중한 위험을 그에게 알려주지 않고 어떻게 돌이킬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죄에 대해서 사람들을 책망하는 것은 독약이든 병에다가 부모가 독약이라고 써놓은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 약에다가 시골에서 가끔 농약 먹고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용기문제입니다. 거의 80%가 용기문제입니다. 물약이 남으면은 남았어도 그 농약 병에다가 담아 놓으면 인식할건데 그것을 콜라병에다 담아놓습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사이다병, 참기름병에 담아놓는것입니다. 목마르니까. 이렇게 헤매다가 술도좀 취하게 되면은 아, 웃목에 혹은 마루 저 구석에 누가 먹다 남은 콜라를 시원한 구석에다 놔뒀네. 그리고 뚜껑을 따서 쭉 먹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하게 “잘못했다.”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 없이 쉽게 이야기하면은 책망이 없이 어떻게 바르게 하고 의로교육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분별력이 있고 행동거지가 아주 올바르게 교육받은 애들은 어떻게 내가 행동하니까. 부모가 나를 좋아하더라. 보다는 더 많이 어떤 것을 받았느냐하면은 이렇게 하면은 안된다. 나쁘다를 많이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폐를 안끼칠려는 이 자중하는 마음을 갖게된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신앙의 세계에서는 더더욱 말할것도 없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을 조금만 들여다보면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 인간인지를 알지않습니까. 그렇죠. 조금만 우리를 축복해주시면 우리는 모든 축복과 성공이 자신이 이룬 것처럼 그렇게 교만한가 하면은 하나님이 조금만 야단을 치시면 그러면 아주 이제는 다시 안볼것처럼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아기도 하고 혹은 졸지에 무신론자 처럼 행동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고 계속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적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좌로 갔다. 우로 갔다. 가운데는 가끔 지나갈뿐이지 항상 좌측으로, 우로갔다합니다. 그렇죠. 너무나 교만해서 방종이 흐르거나 아니면은 너무나 좌절해서 낙심해서 하나님께 차마 나오지 못하는 그런 마음을 갖거나 그래서 이것이 갈지자로 오가면서 가끔 중심에 걸치는 것입니다. 그런 연약한 존재가 우리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계속해서 우리를 바로 잡아 주셔야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끊임없는 이 죄된 욕망과 부패성들 주님이 우리를 책망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를 사람 만드실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책망을 싫어하는 그러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이렇게 보면서 참 마음이 아픕니다
. 목회자 앞에서 무엇을 잘못해서 바가지로 혼내고 저는 혼내는 은사가 좀 있나봐요. 그래서 청년들 할 때도 별로 혼을 내지는 않지만 뭐가 잘못됐다. 부르면은 아주 바가지로 혼을 내서 정신이 번쩍들게 만드는데 그런데 그렇게 야단을 맞을 때에는 그러겠죠. “당신이 뭐 나에게 성경을 가르치기는 하지만은 나한테 뭐 그렇게 맺힌 것이 많냐?”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야단치고 돌아서서 흐느껴 우는 마음 알아요? 우리 하나님이 그런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에 대해서도 아느냐고요. 야단 맞을 때는 보고있지만은 돌이켜서서 혼자서 흐느낄 때에는 그것 누구한테 공개하는 장면이 아니잖습니까. 만약에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막 융단폭격하고 인심모독적으로 야단을 치면서 그러한 분노만 있을뿐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의 영혼에 대한 아픔과 눈물이 없다면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가학주의자”입니다. 그럴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이나는데 중학교 애들을 제가 중등부 애들을 가르칠때인데 수련회를 갔습니다. 갔는데 별로 그렇게 은혜를 못받았습니다. 심사가 영 편하지 않았는데 갔다와서 이틀째인가, 삼일째 되는날 우연히 알게되었습니다. 이놈들이 집회 다 끝난 밤중에 그 뒤뜰에 가서 쭉 둘러앉아서 밤배를 피운 것입니다. 요즘 같았으면 제가 좀 다르게 처리를 했을텐데. 그리고 주일날 이제 다 남으라. 그랬습니다. 3학년이 그랬는데 “1-2학년은 집에 가라.” 그러고 “3학년만 남아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제가 히브리서 12장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서 쭉 읽은다음에 그 다음에 “너희들이 어떻게 거기가서 그 거룩한 수련회에 가서 아무리 은혜가 좀 없었다고 하더라도 거기가서 어떻게 뒤뜰에 가서 담배를 피우고 그럴수가 있느냐?” 그러면서 이제 “내가 너히들을 다 잘못 가르쳐서 그렇다.” “그러니까 날 먼저 때려라” 그리고 엎드려 뻣쳤더니 한 놈이 저벅저벅 나오더니 대걸래로 막 패는 것이었습니다. 10대 맞았습니다.
“나오라.” 그래도 애들이 한참 안나와요. 그러더니 다섯 번, 여섯 번 그러니까. 한쪽에서 애들이 우는데 한녀석이 나오더니 아 10대를 때리는데 사실은 그냥 지나가면서 해본 이야기인데 아주 막 어른되서 맞아본적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맞았으니까.” “담배피운 녀석들 하나씩 나와.” 그러니까 하나씩 하나씩 나왔습니다. 그래( ? ) 그랬는데 여선생도 그래. “몽둥이를 가지고 오라” 그랬더니 남자선생이 요만한 대까치를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여선생이 그것을 들고 선샌이 내려오니까 그것을 딱 뺏더니 “이것도 막대기라고 가지고 와요.” 그러면서 자기가 가더니 대걸래를 확뽑아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내가 맞았다는 것이아닙니까. 그래가지고 궁둥이를 붕붕 소리가 나게끔 팼습니다. 그렇게 하고 그 바닥에 엎드려서 우리가 펑펑 울었습니다. 제 마음에 그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영혼들을 변화시키시고 돌보시도록 하나님이 내게 사명을 주셨는데 얼마나 내가 못났으면은 너희들이 오죽 변변치못한 목회자를 만났으면은 나하고 같이 가르침을 받은지가 1년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변화되지 않아서 수련회 갔다온 다음에 은혜를 나누기는커녕 담배를 피웠다고 몽둥이 찜질을 해야된 이런 상황이 되었겠느냐. 그것을 생각하고 막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한놈이 “전도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그래요. 그 상황에서 질문이 나와요. 지금. “뭐냐” 그랬더니. “저도 때려주십시오.” 그래서 “야 너를 왜 때리냐.” 그랬더니. “제네들은 수현회 가서 딱 한번 피운애들이 저기 많은데 저는 수련회에서는 진짜 안피웠습니다. 그런데 가기전에는 제네들보다 훨씬 많이 피웠습니다.” 어떻게 해요. 때려달라고 애원을 하는데 또 때렸습니다. 그리고 또 붙들고 울고말이죠.
그래서 보세요. 이것이 그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이 책망속에는 어떤 한순간에 나타나는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체를 읽으려고 하면은 안됩니다. 하나님이 어느순간에 그 준엄하게 심판을 경고하시고 책망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실 때 그 때는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 아버지의 따사함과 우리를 향한 모든 기대가 일순간에 다 사라진 것 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진노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또 한편으로 우리를 돌이키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피를 토하듯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선포하고 돌아서서는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원하지만은 그러나 돌이킬줄 모르는 그 백성들을 인해서 펑펑우는 그러한 영혼사랑의 세계를 아울러 간직한 사람이 진정으로 책망할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을 받을 때에 한사람의 신실함과 신앙의 깊이는 그를 향한 진실한 책망을 어떻게 소화할수있느냐? 이것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인격의 영향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합니다.
저로 ( ? )료를 다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만은 저에게 깊은 감화를 끼치신 어느 목사님이 설교중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길선주 전도사가 있던 교회에서 길선주 전도사 설교하던 그 교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어디에서 설교를 했는데. 장로 한사람이 예배시간에 조금 늦었데요. 헐레벌떡 온거죠. 그런데 이 전도사가 이제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 장로님 서시오.” “장로가 되어서 모든 교인들에게 본이되어야지. 이렇게 예배시간에 늦게오면 됩니까? 거기에 서서 예배를 드리시오.” 요즘은 아마 전도사가 올라가서 그런 이야기 했다가는 큰일날 것입니다. 그렇죠. 당장 짤릴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가 또 그 장로님 기도순서 였습니다. 거기 서서 예배를 드리라고 했으니까. 앞에도 못나오고 거기에서 기도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펑펑울면서 “제가 교회의 장로로서 불비하여 이렇게 예배의 모범이 되지를 못해서 사랑하는 그 종의 마음을 저렇게 아프게 해드렸습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펑펑울면서 기도하니까. 온 교인도 울고 전도사님도 울고. 그분이 조만식 장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성경에 기초한 정직한 교훈으로 책망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화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설교자가 설교시간에 신경질을 내는 것만큼 천박한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인격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책망을 잘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을 어떻게 다듬어 새롭게 만들고자 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해아리는 사람이 될 때에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고 모든 선할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온전케 하려 함이라.”고한 이 기독교 교육의 목적이 신앙교육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깊이 있는 신앙의 인격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책망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거룩케하시는 주님의 은혜의 수단에 깊이 참여해서 거룩의 사람들로 빚어져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같이 기도합시다.
7.바르게함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지난시간에는 성경의 효능중의 하나인 책망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마땅히 이렇게 책망 받을 것을 기대하라. 한 사람의 신앙의 성숙은 책망하는 성경의 말씀,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할 때에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는지에 의해서 그 사람의 신앙의 성숙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에 책망을 거부한다면 성경의 교훈으로 책망할 때에 그것을 거부한다면 그에게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둘중의 하나의 마음을 들어내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마음으로 책망받기를 거부한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책망인데 그것을 받아 들이기를 거부한다면은 그것은 오직 두가지 동기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책망 받기에는 너무 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든지. 그런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 돌이킬 수 없는 교만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두 번째는 잘못된 것은 알지만 “누구도 날 건드리면 죽어” 그런 태도입니다. “누구든 수틀리면 없어” “하나님, 마찬가지야” 이런 태도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배교에 가까운 태도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한 한달동안 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들어보십시오. 두리뭉실한 설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꼭 무엇하고 똑같으냐하면은 스토리 얼렁뚱땅 한 영화 본 것하고 똑같습니다.
여러분 어떤 영화는 보면은 아주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어떤 영화는 반을 보았는데도 본건지 안본건지 짐작이 안가는 영화가 있지않습니까. 오죽 영화를 떡같이 만들었으면 반을 보았는데도 옛날에 봤는지 안봤는지 모르겠는거에요. 생각이 안날정도로 만들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죠.
얼렁뚱땅한 이런 가르침들은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지금도 생각이 나는데 옛날에 할머니 하고 같이 살때에 하여튼 할머니가 시키는 일 가운데 두가지는 제일 하기 싫은 일이었습니다. 실타래 붙잡으라는 것하고, 젊은 사람들은 무슨 소리인가 할 것입니다. 그렇죠. 실을 구멍가게에서 타래실로 팝니다. 이렇게 꽈져있습니다. 꽈배기 하고 똑같이 팝니다. 그것을 갖다가 이렇게 붙들고 있으면은 할머니가 이런 실패에다가 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립니다. 그리고 실이 질이 안좋아서 가다가 꼭 끊어집니다. 그러면 또 이어요. 감을 때 이쪽 감을 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잘풀립니다. 그래 다른 곳을 쳐다 보고 그러면은 이것이 안됩니다. 야단을 치죠. 그것이 아주 제일 싫고, 그리고 하다 하다 내가 싫다. 그러면 할머니는 할수 없이 발에다 놓고 혼자하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하면은 마늘 찢는 것, 마늘.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은 요즈음은 카터기에 갈아서 쓰더군요. 그런데 이만한 마늘을 깨끗이 씻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만한 절두통에다 넣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한번치면은 다 박살이 날 것 같은데 야! 이게 사실 목회를 하고나니까. 그 마늘생각이 더 납니다. 이것이 능력으로도 안되고 힘으로도 안됩니다. 힘으로도 안되고 능력으로도 안됩니다. 이것이 세게 내려친다고 해서 부서지는 것이 아니고 하여튼 친구들은 다 부서져서 떡이 되었는데 거 몇놈은 말이지 끝까지 도망다닙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화가 나면 요것 하고. 딱 겨냥을 해서 딱 때리면 딱 튑니다. 그러다가 그 마늘찐 것이 튀어 올라서 눈에 들어가봐요. 죽을 맛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하도 화가나면은 그 마늘 하나를 딱 잡고 그리고 절구통으로 딱 치는데 그것도 안맞아서 손을 때립니다. 그러면 더 약이오르죠. 뭐 하여튼 그렇게 안 찌어집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마늘 같습니다. 그래서 진짜 어쩜 그렇게 빚나갑니까. 그러니까 뭐냐면은 한번 딱 맞아가지고 뻑하고 마늘이 찢어지면 그 다음에 그 마늘이 곱게 빻아지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한번 맞추는 것이 어렵습니다. 의심이 되면 오늘 저녁에 한번 집에가서 해보세요. 그리고 “아! 목사님의 심정이 이 심정이겠구나.” 틀립없습니다. 그러니 이게 얼렁뚱땅하는 가르침 가지고 그 이렇게 깊이 파고들어 가겠느냐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게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렁설렁 이렇게 넘어가는 그런 대충 끓인 설렁탕 같은 그런 말씀교육 가지고는 인간이 변화가 안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영혼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곧 검이지않습니까. 검이데 이렇게 장식용 칼 가지고는 안됩니다. 칼도 한두 자루가 아니라. 그냥 막 창고에 수천자루 수 만자루가 곶혀 있어야 됩니다. 아주 삼국지에 관우가 들고다녔던 긴 칼말이죠. 그래서 그냥 한번 휘두르면은 그 칼에 목이 수없이 떨어지는 그런 칼부터 시작해서 아주 작은 부위를 찌를수 있는 아주 작은칼, 심지어는 묵직해서 휙 던져서 장거리에서 표적을 맞출수 있는 예리한 표창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칼들을 다양하게 준비하고 있어야합니다.
부엌칼 가지고 여러분 수술실에 나타난다면 환자들이 다 도망간다고요. 도둑이 들어왔는데 벌써 똑같은 칼인데 이 생선 회집에서 쓰는 칼하고 부엌에서 주부들이 쓰는 칼하고 그리고 애들 소꼽장난에서 쓰는 칼하고 병원에서 사람 수술하기 위해서 쓰는 칼하고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예리한 칼과같은 말씀으로 여러분 자신의 신앙의 상태와 여러분들의 마음과 여러분들의 삶을 해부 한다고 할 것 같으면은 여러분들이 물론 신앙생활 잘하겠죠. 그런데 다 잘합니까? 나나, 여러분들이나 다 잘하면 자기가 하나님이지. 그렇지않습니까? 책망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든지 하늘나라에서든지 천사들을 포함해서 누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참된분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런 것 필요없다. 하여튼 “나는 뭐 나를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딱따거리고 무엇을 잘못했다고 따지고 이러는 것 싫다 내가 교회까지 와서 그런 소리를 들어야되느냐.” 교회니까. 그런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다른데 가서 누가 그러겠느냐고요. 누가. 심지어는 자기 기분에 따라서 책망하는 설교에 대해서는 귀를 닫아버리는 이런 사람들은 아주 돌이키기 힘든 잘못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가 않다고 할 것 같으면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설교사역을 하실 때에 굉장히 많은 책망을 했습니다. 그렇죠. 성경을 볼 때에 우리들이 감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편견에 치우치면 안됩니다. 성경은 책망에 대한 말씀이 창세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을 해서 계시록까지 잘 나옵니다. 그만큼 인간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인간이 많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을 때에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해줄 수 있는 통로를 가지면서 산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아니면은 불행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막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이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식을 낳아서 하고싶은 대로 하게 하라고 요즈음 그렇지않습니까. 한번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내버려 두면 뭐가 되겠는가. 짐승이 될 것입니다. 짐승도 구제역에 안걸리는 그런 짐승. 그런 짐승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나쁜 그런 짐승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이런 것은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 조심해야 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책망할 때에 순수하고 정화된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시키는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책망을 해야지 사감을 가지고 하면은 안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따발총 들고 올라 왔다고 막 갈기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자격이 하나님의 사람이여야합니다. 그것이 아니면 안됩니다.
무슨 얘기냐하면은 가르치는 자기 자신이 온전한 신자가 되기를 원하는 그런 완성된 사람은 아니지만은 온전한 신자가 되기를 원해서 하나님 앞에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비로소 잘 가르칠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 해야합니다. 완전할 수는 없죠. 그러나 그런 갈망을 가져본 사람들이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학생이었던 사람이 좋은 선생님이 될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조국교회의 기독교 교육의 제일 큰 문제는 뭐냐하면은 학생은 되어본적도 없는 사람들이 많이 선생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학생이 되어본적이 없는데 그런 사람들이 많이 스승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기독교의 진리를 영혼들에게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내가 만약에 여러분과 같은 처지라면은 나는 “누구에게 목양을 받으면서 신앙생활 할까?” 할 때에 결코 좋은 책 많이 썼거나. 큰 교회 섬기거나 외국에서 학위를 많이 받아왔거나, 친구가 다닌다고 해서 나는 그 교회에 나가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고 나가겠습니까. 그분이 얼마나 좋은 신학교에서 얼마나 훌륭한 학문을 갈고 닦아서 어떤 학위를 가지고 유학을 했는지 그런 것 보다는 그분이 그분의 목회자로서의 경력보다는 신자로서의 경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확합니다.
그래도 오늘날 조국교회에서 이렇게 깊은 신앙적인 감화를 끼치고 있는 소수의 목회자들을 보면은 그분들의 공통점이 뭐냐하면은 목회 잘 할려고 고민한 사람들이 아니라. 젊은 시절에 좋은 신자 될려고 고뇌했던 사람들이 그래도 비교적 건강한 목회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완전하지 못한 인간들이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 책망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것은 더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책망을 어떻게 소화해 내는가. 그것이 그 사람의 신앙의 성숙과 앞으로 성숙해질 가능성에 대한 아주 훌륭한 잣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뭐 할얘기는 많이 있지만은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하면은 “바르게함”이거든요. 문맥을 따라 얘기하면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바르게 하기에 유익하니” 그 얘기입니다. “바르게함” 이것이 무슨뜻일까? 이것이 “애판노르도시스”라고 하는 히랍어 단어인데 “호르도오”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호르도”라는 단어는 뭐냐하면은 “펴다”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보면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칠 때에 18년동안 귀신들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등이 다 구부러져서 그래서 앓고 있던 사람인데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니까 이 구부러진 등이 똑바로 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쓰여진 단어가 “호르도오”입니다.
그러니까 굽어진 것은 똑바로 펴는 역할을 무엇이 한다. 성경이 한다. 그러니까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하라? 굽은 것을 교육을 통해서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의 굽은 것이 똑바로 펴지기를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교육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인간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굽은 인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뭐 많이 맑아지고 있다고 그러지만은 맨정신 가지고는 한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을 사람은 없습니다. 아주 왠만큼 민물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다음에야 그거 먹지 않을 것입니다.
한참 한강이 심각할 때에는 고기를 잡아서 보여주는데 진짜 기형입니다. 등이 굽었습니다. 지느러미. 이쪽 지느러미가 하나 없는 놈. 그 다음에 종자가 너무 변형이 되어서 알아볼수 없는 그런 물건이 되어있는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뭐 여러 가지 원인을 꼽지만은 결국은 환경파괴에서 온 것이 아닙니까. 정상적으로 그 물고기들이 먹고 호흡해야 할 환경이 안되고 먹고 마시는 그 생태계 속에 어떤 화학적인 성분이나, 중금속 성분같은 것들이 과다하게 투입이 되어서 그래서 물고기를 체질을 바꾸어놓고 그것이 유전자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굽은 물고기가 알을 통해서 다시 굽은 물고기를 낳고 이러는 이상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아닙니까.
그런 물고기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인간에게 있어서 정상적인 것을 기대할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어느 정신과 의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살아서 돌아 다니는 사람은 76%가 정신이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것이 경미해서 그렇지. 그러면 도대체 정상적인 사람은 얼마나 되느냐?. 자기는 4명에 1사람 밖에 없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도가 아주 심하면 병원에 입원하는 것입니다. 철창신세를 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보세요. 죄가 들어온 이후로부터는 그 죄로 말미암아서 인간이 가지고 있었던 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파괴된 것입니다. 아주 철저하게 파괴된 것입니다. 파괴되었는데 자기만 파괴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정상적으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누리면서 살아갈 때에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살아갈 때에 그런 세계가 아닙니다.
어떤면에서 그러느냐하면은 우선 첫째는 말이죠. 영적인 면에서 그런 세계가 아닙니다. 죄가 들어와서 삽시간에 인간의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고 그리고 이 세상은 공중권세 잡은 자에게 넘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하자면은 마귀의 강력한 영계가 마귀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세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영적으로 옛날과는 다르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서 저주를 받게된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사이의 조화가 깨뜨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연과 인간이 이렇게 친화적으로 지낼수가 없고 뭔가 이렇게 자연과 인간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생기는 그런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변화는 인간 자체의 변화인데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범죄하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난 다음부터는 인간속에 있는 이 영적인 세계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이 뭐냐하면은 인간의 영혼이 죽은채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파괴되었습니다.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은 아주 뭐 거의 사라졌다고 말해도 좋을정도로 현저하게 사물을 보는 눈들이 파괴되었고 그리고 의식의 구조들이 외곡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그 후에 인간들을 구원하시죠. 그래서 거듭남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생명의 원리를 심으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는데 그래서 우리 속에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세계를 철폐하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새로운 생명으로 역사하게끔 하신면에서 인간들은 변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성령이 오시게 됨으로서 이제 편만한 마귀의 지배는 끝나고 이제 이 세상이 성령에 의해서 통치받는 시대가 되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아직 완성된 승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환경적으로도 변화가 왔고 내면의 세계에도 변화가 왔는데 둘다 완전한 타락하기 이전의 그 변화의 상태로 돌아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에서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뭐냐면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아올 때에는 더말할 나위도 없고 더말할 나위도 없이 굽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살아야할 도리가 이런 것이라고 정해놓으시고 이런 관계 속에서 살도록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셨는데 인간이 그러한 하나님의 임제의 은혜 속에서 살 수 있는 특권을 잃어버린채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무지한 어둠가운데 살다보니까 자기가 이렇게 굽는 것입니다. 잘못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릇되어 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굽게될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도 문제가 될 수가 있고, 심지어는 삐뚤어진 사랑을 받는 것도 그 사람을 굽게만듭니다. 뭐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이 있을수 있습니다. 원래 사람과 사람이 이렇게 믿으면서 살아야 되는데 부모로부터 아주 많이 거짓된 것들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이제는 결혼을 했는데 남편도 믿지 못하고 아내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 것들이 모두 무엇입니까?
그런 상처를 받은 것에 대해서 그 사람을 비난할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죄로 말미암아서 이토록 세계가 철저하게 파괴되고 후에 태어날 인간들이 이렇게 철저하게 숙명적으로 굽은 삶을 살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아담과 하와가 미리 알았더라면 그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아닙니까.
죄가 몰고올 어마어마한 그 결과에 대해서 인간들은 다 알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왜 복음이 되느냐하면은 세상은 아무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굽은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큰 빌딩을 짓고 그 다음에 바다를 매꾸어서 토지를 넓히고 곡식을 많이 심어서 더 많이 거두고 그것을 저장해서 다른 나라에 팔아서 금과 은을 사들이고 무기를 사들이고 더 높은 빌딩을 짓고 더 호화로운 공원을 만들고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모두 이 인생의 죽음과 함께 모두 끝나는 문제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 본질적인 시각에서 보면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운명적인 상황 이것이 절망적이라고 과연 말해도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아무 희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그들을 보고 그 영혼들에 대해서 깊은 사랑을 느껴야 하는 것이 이것이 진정한 아가페의 사랑의 출발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오직 희망이 있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그리고 하나님의 제창조의 세계속으로 들어오는 것. 이외에는 희망이 없다.라고 하는 그 확신 그것이 모든 소명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을 이미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을 이미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도 역시 같습니다. 어떤 점에서 같으냐 하면은 그들은 먼저 주님을 믿기전에 이미 굽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얘기하겠죠. “저는 모태신앙인데요.” 그 모태 신앙이라는 것이 “못해” “나는 아무것도 못해” 그런 신앙입니다. 기도도 못해. 찬송도 못해. 봉사도 못해. 그런데 그 모태 신앙이라고 하지만은 그러나 다윗이 잘 말해주지않습니까. “나의 모친이 죄악중에 나를 잉태하였으며” 그것이 뭐 자기 엄마가 간음죄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뭐냐면 자신의 그 죄에 사로잡인 삶속에서 회복을 경험하는 가운데 인간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깊이 깨닫는데 그것이 뭐냐면 자신의 죄악의 뿌리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는 그 순간에 푹 심겨진 뿌리가 아니라 자신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아주 강력하게 흐르고 있는 무엇으로도 끊을수 없는 죄의 줄거리들을 본 것입니다. 그것을 더듬어 올라가보니까 어머니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런 반박이 허용이 안되죠. 또 그렇지 않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신자로서 오래 살다가 예수를 믿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게 벌써 굽어있는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은 어린 아이의 작은 동작을 보면서 그 아이의 사람됨을 안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 어린 아이도 벌써 이미 ( ? ) 교육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삼세 이전에 인간의 기본적인 토양이 되는 인격형성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3-4세때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 위에 세워져 가는데 그것은 이미 선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것이지 어떤 결정적인 영향이 주어지지 않는한 그것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기에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일찍 그런 것이 형성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속에서 그렇게 굽은채로 살아오던 사람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도 그 사람이 굽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입증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입증이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시죠. 그래서 예전에 없었던 놀라운 은혜를 받으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대해서 펑펑우는 감격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크시고 놀라운 사랑에 눈을 뜨고보니까 정말 이 세상에 있는 것이 덧없다고 하는 것을 느낍니다. “돈이나 벌어서 밥이나 먹고 살면서 죽느니보다는 내가 복음을 전해야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해야되겠다. 그런 생각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떠한 헌신을 생각하든지 간에 그러한 미래에 대한 생각이나 비젼이 오늘의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자랑을 다 버리고 미래의 순결을 꿈꾼다고 해도 단지 인생의 목표를 바꿨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졸렬한 인간이었는데 갑자기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미래에 대해서 내가 꾸고 있는 꿈이 아니라. 실재로 내가 살아가던 삶의 이 방식이 옛날의 삶의 방식과는 달라야합니다.
그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옛날에는 주님 몰랐을 때는 우리의 육체의 안목과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과 육체의 자랑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고 알게되면서부터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생각만 바뀔뿐만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살아계셔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나를 살게하시고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나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하고 의로 교육하게 하시는 끊임없는 말씀의 작용들이 동반된 가운데 살아가는 지속된 삶을 통해서 서서히 나의 잘못된 그런 굽어진 것들이 펴지는 것입니다.
뭐 와장창 충창 충창창 그러면서 한번에 와르르 무너져서 뭐가 다 깨진다. 물론 그래요. 기본적인 것은 그렇게 해서 깨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모두 깨뜨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비유를 들어볼께요. 아주 기가막힌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건물 허무는 광경을보셨죠. 요즘은 과학이 발달해서 웬만한 건물은 폭약을 장치해서 빵 터트리면은 그냥 그대로 기가 막히게 주저앉습니다. 그래서 흙더미 쌓아놓은 것처럼 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것은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도심에 밀집되어 있어서 도저히 이렇게 정상적인 방법으로 허물어뜨릴 수가 없는 그런 대형 건물을 파괴 할 때나 씁니다. 외국에서도. 그러면 일반적인 경우는 뭐냐하면은 그냥 아직까지도 원시적으로 부수는 것입니다. 어떻게 부수냐하면은 커다란 추를 매달은 포크레인 같은 것들이 와서 그것이 막 작업하는 것 같아도 아무데나 두들기다가는 자기가 흙더미에 깔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느 부위가 있어서 딱딱딱 때립니다. 그래서 포크레인으로 걸어서 확 잡아당기면은 2-3층짜리 빌딩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그러면 끝난 것입니까? 그것을 누가 싣고 가느냐고요. 주저앉기는 했는데 여전히 저런 기둥 속에 콘크리트 속에 그 철근이 단단히 박혀있습니다. 톱으로도 안잘라집니다. 가지고 가라, 그래도 못가지고 갑니다. 그다음에 어떻게 해냐되느냐하면은 두두두두하는 그것 있지않습니까. 그것이 수십대가 달라 붙어서 이상하게 두드리는 것입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그리고 나서 결국은 어떻습니까. 저런 기둥을 다 부셔서 앙상하게 만들어서 철근만 남게 만듭니다.
그 철근을 포크레인으로 들어서 한쪽에다 놓습니다. 그래도 어떤 것은 도저히 기계로 안됩니다. 그러면은 헤머를 가지고 인부들이 가서 결국은 돌맹이들을 다 만든 후에야 포크레인이 실어서 트럭이 날라가고 그 현장이 철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공학을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철거 비용이 상당히 든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쓰레기라고만 해도 그 비용이 어마어마할텐데 철거를 한다니 엄청난 비용이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비유하면됩니다. 한번 와르르 무너지는 것도 필요합니다. 한번이 아니라. 가끔 와르르 무너지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 이제는 완전히 무너졌다. 난 이제 없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인간이 누군지를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도 성립해야되지 않습니까. 그 와르르 무너져서 이렇게 무너질수가 없다. “나는 이제 모든 것이 끝이다.” “나는 다 무너졌다.”
그러면 반대로 여러분들이 한번 하나님의 강렬한 사랑에 잡혀서 펑펑우는 사랑의 감격이 있고나면 평생 하나님만 사랑하고 사느냐고요. 그럴 것 같으면 열린교회에 벌써 10000명이 넘었습니다. 10000명이 넘었다고요. 내가 진짜 목회를 하면서 인간이 얼마나 못되먹은 존재인지를 철저히 깨닫게 되었고 교인들이 나를 얼마나 성화시켰는지 아십니까. 진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죠. 어쨌든지간에 성화되었으니까. 여러분들도 아마 천국에 가면은 상이 많을 것입니다. “김목사를 성화시킨 공로.” 진짜인지. 진짜 그럴까? 아마 그런 상이 있다면은 굉장히 받으면서도 부끄러울 것입니다. 그렇죠. “주여 나를 성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우리 목사님 성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아니지않습니까. 아닌 것을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지않습니까. 그렇데 그것이 의미가 없습니까. 아니죠. 의미가 있죠.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를 않네
하나님의 사랑이 확 밀려와서 우리를 펑펑울게 만들고 그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피 묻은 사랑 앞에서 세상에 자랑하던 헛된 것들을 다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하고 내려놓는 한번의 강력한 신앙의 경험은 그에게 가보지 못한 신앙의 세계를 보여주는 경우입니다.
어느 작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랑의 고백의 표현은 뒤로 물러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죠.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사랑의 고백의 표현은 뒤로 물러가는 법이 없습니다. 계속 앞으로 전진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이 그렇게 강력한 경험이 있고나면 그 짧은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그 순간에 자기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이 밀려들어 오는 그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고. 그분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고. 그분을 다 사랑할 때에 내 마음과 삶이 어떤 상태가 되는지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험이 끝까지 자기의 신앙에 있어서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로 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거기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에스라서 3장에 보면은 에스라에게서 두 번째 성전이 건축될 때에 스룹바벨의 성전이 재건될 때에 그 때에 젊은이들과 노인들이 함께 모입니다. 그리고 성전이 완전히 없던 가운데 새롭게 세워지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첫 번째 성전이 파괴 되고 그다음에 그 성전이 모두 파괴된 가운데 다시 세워지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파괴되었고. 다시 세우는데 그 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보면서 노인네들은 펑펑울고 젊은이들은 기뻐서 환호성을 지르는 것입니다. 왜 젊은이들은 솔로몬 성전의 그 영광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늙은이들은 솔로몬 성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성전은 이런 것이다.”라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주 훌륭한 예증이 되지않습니까. 그런 것이란 말입니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지않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필요합니다. 꼭필요하고 와르르 무너지는 그런 신앙의 경험들이 가끔 있어야합니다. 꼭필요한데 어떤 사람들은 문제가 뭐냐하면은 매일 그렇게 무너지기만은 고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몇번만 그런 일이 있고 안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를 고치시는 이런 것들은 너무 시시하고 아주 자잘한 은혜라고 생각하고 그런 것들은 아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와르르. 와르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력한 경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런식의 인생 전체가 뒤바뀌는 것같은 와르르 무너지는 무너짐이 매주 계속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보세요. 뭐냐하면은 그런 무너짐이 정상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가오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은 그런 무너짐이 매주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이것은 설교의 능력이나 가르치는 사람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계속해서 그런 일이 일어 난다면 예전에 무너졌던 그 무너짐이 정상이었는가? 그것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은 커다란 건물이 있는데 와르르 하고 한번 어마어마한 먼지를 내면서 한번 무너졌습니다. 두 번째는 그것보다는 작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무너지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무너지는 것은 무엇을 하기위한 과정입니까? 다시 세우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회개 자랑하지 말고 회개 후에 다시 건축되어 가는 새로운 신앙생활을 자랑해야합니다. 아, 무지하게 깨뜨려 졌다고. 아니 깨뜨려 졌으면 무엇합니까. 그 위에 똑같은 집을 지었는데. 뭐하냐고요. 나중의 형편이 처음 형편보다 더 나빠졌어요. 그렇게 되면은 안됩니다.
그러니까 강력하게 와르르 자기를 부수고 들어오는 은혜. 그것만이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라. 자잘하게 자기를 부수면서 들어오면서 자기를 온전한 사람 만드실려고 하는 이 말씀에의한 자기 부서짐. 이런 것들이 모두 소중하다는 생각을 기억해야합니다.
실재로 책망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도 될 정도로 완전하게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러나 생사를 걸고 목에 칼을 들이대야할 정도로 잘못하던 사람들이 그런 지적앞에 깨뜨려지고, 깨뜨려지고, 깨뜨려지고, 온전하게 살려고 애를쓰고 몸부림 치는 가운데 실제로 그 사람은 현저하게 오류가 줄어든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아세요.
우리 국민학교 입학식 때 가면은 그 나도 1학년이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1학년 때는 잘 못랐습니다. 그런데 2학년, 3학년이 되고나면은 1학년 애들이 오죽하면은 학교 앞에서 “1학년딱지 코딱지” 그러면서 놀렸습니다. 여기에다 이렇게 수건하나 붙이고 1학년 애들이 들어오는데 옛날에는 또 여기 버짐도 있고, 코도 흐르고, 뭐 여기에 하얗게 꽃핀 애들고 있고, 하여튼 참 추접스러운 애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애들이 입학식이라고 3월달에 들어와서 운동장에 서서 “나비야. 나비야” 하는 것보면은 참 꼴같죠. 그 때 선생님께 야단 맞는 것이 무엇입니까?
학교와서 집에 가겠다고. 그 때에는 유치원도 없었는데. 막무가네로 우는 애들이 있습니다. 학교 왔는데 집에 가고 싶다고 우는 애들고 있고, 코 여기까지 내려와서 훅하면 도로 쫙 들어가죠. 코 흘리는 애들이 저는 제일 싫었습니다. 그 때에. 그런데 국민학교 1학년 때 야단을 맞는 그것을 3학년만 되도 거의 같은 이유로 야단을 맞지 않습니다. 그만큼 학교 규율속에서 사람이 고쳐져 간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 생각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계속해서 똑같은 수준에서 무너지는 것은 무너짐이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거짓 무너짐이라는 것입니다.
진실한 무너짐이면은 고쳐집니다. 고쳐지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어쨌든 고쳐지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자기를 완전히 부수고 들어오는 생애적인 하나님과의 만남만이 자기를 고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잔잔하게 들어와서 자신의 이 예민한 양심을 찌르고 자신으로 하여금 가책을 느끼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부족을 보게 만드는 이러한 은혜에 대해서 이제는 성숙한 반응을 하면서 자기가 온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아직까지 인간이 덜 되었을 때는 작대기가 날아와서 뻑하는 소리가 나기 전까지는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성숙하고 나면은 눈짓만 해도 왜 선생님이 혹은 부모님이 내게 대해서 저렇게 야릇한 눈총으로 쳐다 보는지 자기가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끼는 것이 바로 부엇입니까?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책망이 어렸을 때에는 “너 그 따위로 살래” “그러고도 인간이야” 막 이런 식으로 삿대질을 해야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책망이라고 생각 되는데 이제 신앙이 성숙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인격적으로 “그러면 안된다” 이렇게 얘기 해도 그것을 아주 강력한 책망이라고 받아들일수 있는 것이 이것이 성숙해 가는 신앙의 인격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인간이 항상 바르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린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서 인간은 이렇게 굽어 있습니다.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시지만은 거기에 대해서 항상 우리들이 올바르게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기도 하고 말씀은 정확히 파악을 했는데 그 말씀이 자신의 내면의 세계 속에 깊은 영향을 주도록 그렇게 그 말씀을 새기지 못하기 때문에 기회를 놓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각기 자기 모양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가 필요합니까? 바르게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이 바르게 하는 대상이 무엇이냐. 그것이 결국은 두가지입니다. 크게 세가지라고 말할수 있는데 하나는 뭐냐하면 이 생각을 지식면인 면입니다. 이 지식적인 면에서 바르지 못한 생각들을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가치관이 전혀 바뀌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은 뭐냐하면 가장 커다란 문제가 뭐냐하면은 지적인 문제입니다. 지적인면에 있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사고에 변혁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기의 사고가 이렇게 굽었는데 성경이 이렇게 똑바르면 성경을 잘못 해석을 해서라도 이 성경이 자기의 굽은 사고를 지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말씀 드렸지않습니까. 신앙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 병 낫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성경을 들여다 보면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병 낫는 이야기 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께로 부터 쏟아지는 물질의 축복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면은 복이라는 단어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복이라는 단어가 5000번이나 써 있습니다. 복 얘기 밖에 안나옵니다. 이 책 자체가 복덕방 처럼 보입니다.
땅 좋아하는 사람들이 땅 얘기하면은 성경 전체가 땅에 대한 약속과 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땅 얻는다는 이야기.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굽은 생각으로 성경을 공정하게 깨닫고 그것에 의해서 자신의 생각이 펴지는 경험들을 해야지만 이것이 변화가 되는데 성경에 교훈이 이런데 이것을 이렇게 붙였다고 해서 이것이 성경의 교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것을 잘못된 성경에 대한 해석을 의지해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신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내면에 있어서. 그것은 안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내가 생각하는 것과 성경이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라고 하는 생각과 항상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 하나가 “옳다.”라고 생각할 때에는 부단한 성경의 검증을 거쳐서 이것이 성경이 지지해 주고 있는 지식이라고 하는 확고한 확신을 가져야합니다. 그 때에 그 확신이 비로소 의미가 있는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봅시다. “아니 뭐가 그렇게 복잡합니까?” 그럴지 모르지만은 잘 들어보세요. 왜 이렇게 이 문제가 중요한지를 보세요. 망가진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서 고쳐지는데 반쯤 고치다가 끝난 사람은 차라리 고치는 것을 시작하지 않은 사람 보다도 불행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무슨이야기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특히 왜 암이나 종양 같은 것을 수술을 하지않습니까. 그 때는 의사들이 판단을 아주 신중하게 합니다. 연령, 그다음에 상태. 이런 것을 모든 것을 보고 그다음에 수술을 할것이냐? 놔둘 것이냐를 판단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어떤 일이 있습니까. 수술을 할려고 쫙 벌려보니까. 어마어마 하게 퍼져 있습니다. 그러면 도로 꿰매고 닫습니다. 건드리면은 암세포들이 퍼지면서 더 촉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사람 한사람이 “암과 싸우지 말라.” 그런 책도 냈지 않습니까. 젊고 건강한 사람일수록 아주 엄청난 병의 기세가 퍼져나간 것입니다.
무슨 얘기를 제가 하고싶으냐면 이 얘기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둘있었는데 모르는게 약이라고 하나님도 모르고 그냥 짐승처럼 동물적인 즐거움 속에서 취해서 살다가 심판을 받고 죽는 것입니다.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사고에서 행복하는 것입니다. 모르는게 약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 있어서는 다시 이런 종류의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나와서 그렇게 애굽을 그리워 했는데 단 한명도 애굽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있었지만 애굽으로 돌아간 사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택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그러므로 남은 선택은 주님이 구원받은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셔서 주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기업을 누리게 하시는 그 의도를 파악하고 그 뜻대로 살아서 신령한 행복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행복 속에서. 이것 말고는 제삼의 길은 없는 것입니다. 후딱하면 “그렇게 믿으려면 세상으로 돌아가라”고 말하지만은 사실은 그것은 문학적인 표현이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갈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길 밖에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에 물을테니까 아주 정직하게 대답을 해 보십시오. 광야에서 우상을 섬기다가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아서 눈을 부릅 뜨고 죽은 이스라엘의 시체들이 애굽의 땅에서 진흙을 이겨서 벽돌을 굽던 사람들의 삶보다 행복 했다고 말할수 있습니까? 대답을 못해요.
행복 했더라면 그들이 그렇게 돌아 갈려고 애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족이 없었습니다. 뭐가 없는 동안에는? 거룩이 없는 동안에는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성화입니다. 피나게 하나님께 자기를 복종시키며 진실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사실은 자기를 노예처럼 복종시켜서 그런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자신을 왕의 행복을 누리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모든 불순종과 방황은 이 두길 말고 다른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것을 분명하게 해야합니다. 이것이 지금 이 한절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전체적인 구도를 제가 여러분들에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 대한 이 하나님의 요구를 가르치지 않은 것은 참된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그런데 굽었습니다.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 안에 부패한 성품이 남아 있습니다. 부패한 성품이 남아 있어서 계속해서 우리 안에 이것이 새로 태어난 영적인 사람의 욕망이 있고, 과거부터 나를 이끌어온 육적인 욕망의 사람이 내 안에 공존합니다. 그래서 한쪽으로는 그렇게 신령하게 성화되어 가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또 한쪽으로는 하나님 모르면서 살던 옛날의 욕구대로 살아서 내 자신의 육체를 즐겁게 해야 되겠다.라는 욕구가 공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비유를 제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면서까지 제가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세례 받고 4년동안 담배 피운 이야기 했지 않습니까. 안끊어지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철야기도 가서 펑펑 울고 눈물 닦으면서 화장실에서 담배에 불 붙이는 그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조금도 과장이 없습니다. 눈물은 눈물이고 담배는 담배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옛날부터 눈치 챘습니다. 그것이 뭐 하나님이 진노하신다. 그렇게 까지는 생각을 안했지만은 “하나님이 안 기뻐하실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깨달았고. “이것이 많은 위선을 조장한다.”라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로지 내 육체의 욕구가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것입니다. 내려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담배 한 대를 딱 피우는 순간 “하나님 하고 이제 끝났고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혜와 죄악이 신자의 마음속에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비록 내 안에 성령님이 계셔서 함께 하셔도 그것이 충만한 은혜로 나를 지배하지 않는 동안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내가 여전히 굽어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완전히 모를 때 하고는 정도가 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계속 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막 살 때는 누가 나를 책망하는 사람. 세상 사람들이 누구한테 책망을 받겠습니까. 누구한테 책망을 받겠느냐고요. 어느정도 성장하고 나면은 누가 그를 책망하겠습니까. 더군다나 권세도 있고, 돈도 있고, 지위도 있으면 누가 감히 그 사람에게 책망을 하겠습니까. 일평생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짐승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신앙의 영역에 들어오면 여러분들이 사장을 하다 왔던, 회장을 하다 왔던, 학교에서 교수를 하다 왔든 누구든지간에 뭐가 하여튼 말씀에 의해서 잘못 되었다. 그럴 때는 떡을 만드는 강단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굉장히 동의하기가 힘들다는 표정인데. “그런 식으로 믿어보세요. 좋은날이 있는가.”
그러니까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정직한 책망, 말씀에 의해서 우리를 바르게 하는 정직한 가르침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것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대접받는 그리스도인, 영광받는 그리스도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그리스도인, 교회에 와서 어른노릇 하는 그리스도인 일지는 모르지만은 “진실한 신자가 되겠다.”라고 하는 그 욕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묻고 싶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무엇을 원해서 여러분들이 이 깊은 밤에 이 자리에서 장시간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때문 입니까? 정말 진실한 신자만 될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아멘” 해야합니다. 정말 진실한 신자만 되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괜찮습니까? 지금보다 더 가난해 져도. 지금보다 지위가 더 낮아져도. 세상 사람들이 박해를 해도. 그것입니다.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그래서 그것을 입증하듯이 이 성경 마지막에 이 문맥이 끝나는 그 부분이 뭐냐하면은 “온전케하려 하심이니라.” 그것 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지금 뭐에 대해서 생각했느냐면은 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믿기 전에는 굽는 것이 거의 정상이었고, 예수님을 믿어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 은혜가 충만한 지배 아래서 살아가지 않은 동안은 여전히. 그래도 과거와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굽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그 굽은 것이 뭐냐? 그것을 바르게 해야 하는데 그 바르게 할 대상이 뭐냐를 이야기 하면서 첫째 뭐라고 하였습니까?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들어보세요. “제이엠 케인즈”라고 하는 경제학자가 경제학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유명한 격언을 남겼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웜하트 쿨헤드” “가슴은 사랑으로 뜨겁고 그리고 머리는 차가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얼렁뚱땅 해서는 안 되고 이것도 하나의 과학이니까 정밀한 분석에 의해서 이 경제학문을 세우고 그리고 또 이 세상은 만약에 경제의 논리 이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은 인간 세상은 굉장히 비참해질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만약에 이 목회를 경제논리로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가 얘기 하는 것처럼 천원 헌금하는 5명이 오는 것 보다는 만원 헌금하는 1명이 오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질이 속 썩이는 사람. 한사람을 위해서 일곱시간 8시간 심방을 하고 3-4번 교역자들을 보내는 것보다는 “안할 사람은 가라.” 그리고 할 사람들을 불러서 교회를 하면은 좋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 경제의 논리를 가지고 교회를 한다면은 그것이 소금 창고지 그것이 무슨놈의 교회라는 것입니까. 그렇지않습니까.
그런 것이 있듯이 경제도 결국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이 경제적인 이런 제도들을 세우고 학문을 연구 하면서도 항상 잃지 말아야 할 것이 뭐냐하면은 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 경제적인 약자를 보호하기 이해서 때로는 경제의 효율성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그 인간을 위한 학문이라는 사실을 잊지말아라. 하면서 웜하트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우리도 똑 같습니다. 그래 사람들은 정 반대입니다. 머리는 펄펄 끓고 가슴은 차갑습니다. 머리는 전쟁 중입니다. 폭발 직전입니다. 온갖 잡동사니가 다 들어가서 그 속에서 북새통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 해도 그 뜸물통에 생수 붓는 격입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뜸물통에 생수를 부어도 그 뜸물로 밥 말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부어도 안됩니다. 그러니까 우선 이 굽어진 것을 인정 하면서 이것이 바르게 펴지기 위해서는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되느냐면은 지식이 바르게 되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탐구 정신이 없는 신앙생활은 죽은 것입니다. 켄터베르의 대주교였던 안셀무스가 쓴 “플로스로기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최근에 번역이 되어서 나왔는데 제가 쭉 읽어보니까 그 얘기가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왜 이 진리를 묻는가를 설명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식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을 때는“아멘”하고 믿을 수 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멘”하고 믿은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믿기는 믿었는데 내가 왜 이것을 믿을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끔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들 가운데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 그게 무엇입니까? 뜨거운 가슴을 가지라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쿨헤드가 되어야합니다. 탐구의 정신을 가져야합니다. 왜 핍박이 가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길로 걸어가는 이 살벌한 상황 속에서 “나는 왜 하늘의 소망으로 넘치는가.” 이제 누군가가 “왜 그렇게 소망이 넘치느냐고 물을 때에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그것을 예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 만으로는 안되고 쿨헤드가 되어야 합니다. 탐구의 정신이 없는 신앙생활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그는 결코 거룩해 질수 없습니다. 그는 결코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탐구의 정신이 없는 사람들이 경험 했다고 하는 은혜에 대한 수많은 경험들이 그를 거룩하게 만드나 보십시오.
“신령한 은혜의 체험들을 많이 한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기적을 많이 체험하고 불을 많이 받은 사람이 저렇게 개떡같이 살수있을까.” 그런데 여기에서 답이 다 풀리는 것입니다.그럴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탐구의 정신을 가져야합니다. 특별히 이런 점에 있어서 젊은이 들에게 내가 말하는데 120분 정도의 설교를 들을 수 없다면은 천국은 여러분들이 가기에는 너무 높습니다. 리차드백스터가 얘기 했듯이 너무 높습니다. 항상 신앙생활 할 때에 이 쿨헤드, 탐구의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자기가 왜 이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가 왜 이 말씀을 받아들여야하는가, 자기가 왜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자녀로 서 있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표는 무엇이고, 죄에 대해서 이기는 비결은 무엇이고 나의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에 대한 집요한 탐구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제껏까지 어떻게 배웠습니까. 정반대로 배워온 적이 많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토를 다는 놈은 나쁜놈이다.” “무조건 아멘해라” 그런데 그 아멘이라는 것이 인격 속에서 우러나오는 “아멘”이어야지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아멘이되지. 마음 속에서 끊임 없이 일어나는 회의와 무지를 감추기 위한 아멘이라면은 그것은 공산당의 구호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탐구의 정신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거의 없고 그리고 자신의 혼란스러운 신앙생활을 정돈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한 지실을 얻고자 하는 탐구의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건강하고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 하는 것을 우리는 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인간적인 열심히나, 성취욕, 남에게 인정 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교회를 섬기고 움직이는 사람적인 열심은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열심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식이 먼저 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이 무지 속에서 헤어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무지는 거의 악입니다. 대부분이 악입니다. 거의 틀림없이 무지는 악입니다. 악한 본성이 지혜의 빛을 싫어하고 죄악된 성미들이 그 진리의 빛이 비춤을 받기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어두움의 일을 더 사랑합니다. 그 지식이 곧게 펴져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잘 심겨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선 선명하게 사랑이다. 그러면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은 어떤 것이고, 이것이 내면에 정리가 되고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어떤 것인가? 이 둘 사이에서 차이를 발견하는 경험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사람은 이 굽은 지식이 펴져가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시편에 보면은 특히 119편에 보면은 “주의 말씀을 깨닫기 전에 야경이( ? )전에 눈을 떳나이다.” 그런 고백이 나오지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이 머리에 “쿨헤드” 차가운 머리에 담겨지는 것이라고 하면은 이 말씀이 빨려 들어오는 구멍은 눈입니다. 성경을 읽는데 게슴츠래해서 수면제 용으로 읽는 사람들에게서 깨달음을 기대할수 없습니다. 넉장 읽을 것 한 장을 읽어도 좋으니까 제대로 읽으십시오. 무릎을 꿇고 부복하는 마음으로 단 한줄을 읽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시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읽으라는 것입니다. 몇번 읽었다고 떠들고 다니지 말고 100독을 했니. 200독을 했니. 얼마나 그 말씀이 자기를 변화시켰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조금만 교리적으로 설교하고 논리적으로 설교하면 그 복잡한 첩보영화도 다 이해하는 양반들이 조금만 논리적으로 설교하면 “아이구 어렵다. 우리같이 나이든 사람은 이 교회 안되겠어” 그렇게 해서 만남하는 데를 찾아요. 여러분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은 우리의 굽은 지식이 절대로 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는 뭐냐하면 하나님이 무엇을, 어떤 굽은 것들을 바르게 펴기를 원하시느냐면은 인격입니다. 물론 이 지적인 것이 인격속에 들어 간다고 말할수도 있지만은 그러나 그것이 인격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토대가 되기 때문에 따로 빼서 첫째라고 말씀을 드린것입니다. 둘째는 뭐냐하면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여기에 의해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뭐냐면은 인격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삶의 행위입니다. 그것을 고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격을 “바르게 한다.” 그것은 결국은 무엇을 말하느냐면은 인격적으로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굽어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게 신경질을 잘내십니까? 굽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왜 그렇게 사람이 천하태평입니까? 그것도 어떻습니까? 굽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그렇게 게으릅니까? 보통 사람들의 수준을 뛰어넘습니다. 게으름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그것도 무엇입니까? 굽은 것입니다. 왜그렇게 낭비벽이 심해요? 그것도 굽은 것입니다. 그렇게 절제가 없어요? 그것도 굽은 것입니다. 왜 그렇게 남을 의심을 잘해요? 그것도 굽은것입니다. 왜그렇게 포악해요? 그것도 굽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마려워서 못사는 사람있죠? 그러니까 그냥 수시로 이것을 움직여서 일정량을 쏟아 놓아서 기력이 소진 해야지만 하루가 끝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굽은 것입니다. 정상이 아닙니다. 정신질환의 일종입니다.
어떤 사람은 반대입니다. 전혀 붙임성이 없고 같이 있는 사람이 힘겨울 정도로 무관심 내지는 무뚝뚝. 무뚝뚝은 너무 좋은 말이고 사람을 기피하는 그런 성경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굽은 것입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해아릴 수 없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쭉 나오는 9가지 성령의 열매. 그것을 반대로 뒤집어서 생각을 해보세요. 그런 것이 다 굽은 것입닙니다.
인격입니다. 그렇게 굽어진 것들이 다른데서는 안 펴집니다. 그것을 펼려고 하면은 그 사람과 원수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여러분이 아무라도 딱 붙들고 “너 성질이 왜 그모양이냐?” 이렇게 몇번만 이야기 하면은 다시 안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막 칼을 들이대면서 그 사람을 고칠려고 하면은 거의 대부분이 실패합니다. 불가능합니다.
저하고 상담하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알콜 중독자 였습니다. 그런데 하도 술 때문에 비참하게 살아가니까. 하루에 10병을 먹어야 된데니까. 안죽고 살아 있는 것이 용하죠. 가족들이 경찰에 신고를 해서 그렇게 해서 가족들 동의서를 써서 2년 반동안 술 못먹는 수용소에다 가두었습니다. 집안에서 돈 내고. 가족들의 실락같은 희망은 뭐냐하면은 2년반을 안먹으면 다른 것은 몰라도 술은 못먹겠지 그랬는데 그 사람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나오는 날부터 이제껏까지 먹기 시작한 것입니다. 뭐가 없기 때문입니까? 술을 먹으면 자기가 망가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기도 아는데 방법자체가 비인격적이니까 자기 자신속에서 2년반동안 나를 이렇게 집어넣은 놈들에 대한 원망 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에 대해서. 그리고 끝나기만 기다렸다가 나오자마자 술을 퍼먹은 것입니다. 그리고 알콜 중독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안고쳐집니다.
여러분 한번 여러분 자신을 잘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사소한 버릇하나도 안고쳐집니다. 좀 지저분한 이야기지만 제가 아주 나쁜 버릇이 하나있었는데 양치질을 하고 그리고 칫솔을 한손에 든 다음에 물을 품어서 그 물로 뱉어서 칫솔을 닦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누구한테 배웠느냐면 우리 할머니한테 배웠습니다.
여러분 다 웃지않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결혼 하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되도록 저도 그랬습니다. 지금은 거의 안그러는데 지금도 그것을 의식을 해야지 안그러지 완전히 고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가 왜 그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물이 아까운 시절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 얼마나 지저분합니까. 이쪽으로 닦고 그리고 이것을 이렇게 내려서 칫솔을 잡고 물을 마신 다음에 그것을 여기에다 이렇게 뱉는 것입니다. 그런 습관하나. 그것이 30여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도 안고쳐집니다. 그래야 할 객관적인 이유는 환경적으로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물 없는 사막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대도 안고쳐집니다.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안고쳐지는지. 고쳐지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인격에 뿌리를 둔 이 일관성 있는 행동인 경우에는 정말 안고쳐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되느냐면은 반복되는 행동이 습관을 형성하는데 그다음에는 그 습관을 거스리면 고통이 일어납니다. “아이, 이거 밑천이 다 나오는데”
또 하나 버릇이 있는데 잠 잘 때 손을 항상 이렇게 하고 자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란 것이 무엇이냐면은 어느날 우리 아들 하고, 딸 하고 둘이 누워서 자는데 둘이 이렇게 하고 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자면 이것이 편합니다.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팔이 아프고 불편합니다. 이것이 편합니다. 이것이 나도 기원이 언제쯤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초등학교 때인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고쳐지는데 아마 이것은 누구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동도 아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결국은 이렇게 하다가 죽을 것입니다. 안고쳐진다는 것입니다. 정말 안고쳐집니다. 우리의 인격에 토대를 둔 그런 행동들, 인격의 특성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요번에 신학교 선교대회에 가서도 제가 강의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신학교 들어간 것이 지금으로부터 20년이 넘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한 것이.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뭐냐면 20년전에 진실한 사람들은 지금도 거의가 진실합니다. 20년전에 “제는 왜 저렇게 기도도 안하나.” 그 사람은 지금도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20년전에 신학교 1학년 때 뭐 과대표를 해볼까? 뭘 가서 해볼까? 하고 그러던 애는 지금도 총회 사무실에서 왔다. 갔다합니다. 똑같습니다. 수준만 바뀌었을 뿐이지 똑같습니다.
그 때에 진실하고 성경밖에 모르고 하나님 앞에 그러던 사람들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지간에 딱 수소문 해보면은 다 아는 것입니다. 지난번 카나다에 갔을 때도 소식 들으니까 15년이상 헤어지고 못만났는데 “그 사람 참 진실한 사람인데” 그러니까 “아! 맞습니다. 그 사람 정말 목사입니다.” 15년을 안보았는데도 15년전에 만난 나와 15년후에 만난 그 사람의 증언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변하는 것입니다. 좋은쪽도 이렇게 안변하니 나쁜쪽은 얼마나 더 안변하겠습니까. 더 안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인격을 고치는 바르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죄가운데 행하는 반복적인 생각이 행동을 낫습니다. 행동이 반복 되면서 습관을 낫습니다. 습관이 계속 쌓이면서 인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 인격이라고 하는 큰 것이 형성되고 나면은 그 속에서 삶이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것을 거스릴 수가 없습니다. 정말 힘듭니다.
여러분, 그런 것 있지않습니까. 그 사람이 야비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데 이상하게 자기가 아주 굉장한 너그러운 사람인 것 처럼 일시적으로 자기를 과시할 때 그 역겨움 아십니까? 참을 수 없는 역겨움입니다. 그리고 아주 인정머리 없고 아주 박정한 사람인데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 것 같을 때 닭살 돋음에 대해서 아느냐고요. 야비한 사람은 야비한 대로 행동할 때 딱 어울립니다.
그래서 나는 텔레비젼이나 영화를 보면서 나는 영화배우들의 성격을 거의 알아맞출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원래의 모습을. 그것은 뭐냐면 가장 실감나게 하는 연기가 ( ? ) 그런데 아주 뛰어난 배우면은 우리에게 역을 할 때마다 우리에게 착각을 불러 일으킬수 있겠죠. 그런데 그런 뛰어난 배우는 정말 여러해 후에 한두 사람씩 밖에 안나오더라고요. 평소에 막 연기하면 어눌한데 막 집어던지고 성질부릴 때에 실감나면 그 사람은 꼭그렇습니다. 틀림없이 100%입니다. 그렇게 아주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변화시키느냐고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절망적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생긴 것은 어떻게 자기가 그런 야비한 사람이 된대는 누구탓입니까? 부모 탓이라. 그래도 결국은 자기 탓이지 않습니까. 이제 와서 누구 원망 하겠습니까. 자기가 자기 성격을 그런식으로 그렇게 만들어 갔는데 만들어진 자기라고 하는 이 인격의 제품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에프터써비스를 할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릴께요.
자기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만든 자기 자신의 일그러진 인격을 자기가 생산 해 놓았지만은 환견에 의해서 영향도 받았지만은 그러나 인간이 무슨 떡고물이 아닌 다음에야 인간도 자기의 자기됨에 대해서 인간은 최종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얼굴 값을 해라.”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까지 된 것은 인간이 할수 있는데 그 망가진 자신의 인격에 대해서 인간은 스스로 에프터써비스를 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주장입니다.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고 했느냐면은 성경은 그것을 바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면은 성경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금방 이렇게 질문을 할 것입니다. “아이, 성경을 몇권째 샀는데” “나는 여전히 그 ( ? )이던데요”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권수를 세면 대한 성서공회에서 나온 것부터 비롯해서 온갖 출판사에서 나온 각종 스터디 바이블을 다 가지고 있는데 심지어 읽을줄은 아직 모르지만은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까지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베고 잔 낮잠이 몇번이며 그랬는데 변화되지 않던데요?”
그렇죠. 당연하죠. 성경 이 자체속에 어떤 화학적인 영향력이 없는바에야 이것이 사람에게 영향을 주느냐고요. 성경이 사람을 바꾸는 방법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감화”입니다. “감화” 감화에 의해서 그가 바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감화에 의해서 그가 바르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굽은 인격을 바르게 한다.” 그럴 때에 성경이 감화를 통해서 그를 바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성경을 아무리 많이 사가지고 다니고, 읽고, 심지어는 공부를 하고, 심지어는 신학교를 다녀도,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사람이 바르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화를 통해서 바르게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 감화가 어떤 감화입니까? 인격적인 감화입니다. 인격적이고 신령한 감화에 의해서 그 사람의 마음이 바뀌고 그 마음이 그 사람의 인격을 바꾸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이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감화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지식으로만 배울 때에 쌓이는 것은 교만입니다. 지적인 교만입니다. 감화가 무엇인지 아시죠? 권위주의는 우리를 저항 할수 있게 만듭니다. 그렇죠. 무슨 “까불어” 하고 꽉 누르면 우리가 반항 할수 있게 만듭니다.
그런데 감화는 어떻습니까? 예. 그런 폭력이 없는데도 우리를 그 발 앞에 엎드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감화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감화인데 방식 자체가 우리의 인격에 깊은 내면세계를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여기에서 인격적인 감화라는 것을 다시 한번 말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성경에 이렇게 써 있으니까. 까불지 말고 믿어.” 하는 것은 그것은 단지 진리가 옳다는 것 만으로는 그 사람의 그릇됨을 바꿀수가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뭐냐면은 감화입니다. (비유를 하자면은 이런 것입니다. 중학교 3학년 때인데 제 친구가 자살을 했습니다. 자살을 했는데 뭐 고뇌가 많았습니다. 늘 이렇게 고뇌에 차서 다녔는데 무슨 약을 먹었는지 모르겠는데 온 몸이 파랗게 변해가면서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위를 다 세척을 해내고 그리고 무슨 주사약을 놨는데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주사약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은 뻔합니다. 해독제입니다.)
우리가 그 동안 오랫동안 하나님 떠나서 비록 우리가 구원 받은 사람이더라도. 그러니까 두가지가 겹쳤습니다. 구원 받기 전에 살아 왔던 삶의 방식, 구원 받고도 은혜 가운데 살지못했기 때문에 자기 멋대로 살아온 삶의 방식. 이런 것들이 우리의 인격을 만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은 한번 인격화 되고 나면 그 인격은 자기와 쫙 달라 붙는 것입니다. 발에 잘 맞는 신발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신어야 편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겨먹은 대로 생각해야지만 머리가 복잡하지를 않고 그렇게 생겨먹은 생각대로 시키는대로 해야지만 편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뭐냐면 인격화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굽은 그 인격이 바르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되느냐면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가 그의 내면의 속에 흘러들어와서 그래서 이렇게 굽게 만들 수 밖에 없는 그런 요소들을 파괴해야합니다. 내면의 세계속에 들어가서 생각도 파괴하고, 그의 잘못된 정서도 파괴하고, 그의 잘못된 빗나간 의지도 파괴해서 확신을 허물어 버리고 그리고 성경에서 진정으로 바라는 성도의 성도됨이 무엇인가? 하는 것,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기대하고 있는 나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배우며 그것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면서 옛 사람이 무너지고 새사람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시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얘기 했듯이 와르르 한번 무너졌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가 새 사람이 된 것처럼 생각 하면은 안됩니다.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한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로 만족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기를 원하는 이 간절한 갈망을 유지해야 된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무엇때문입니까.
바로 성화의 이런 특성 때문입니다.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깊이 들어가서 그래서 나를 이렇게 굽게 만들기까지 장시간의 시간이 걸린 것처럼 은혜가 오랫동안 그 속에 스며들어서 그래서 나 자신의 이미 인격화된 이 굽은 삶들을 해독시켜서 그래서 새로운 삶을 위한 변화된 인격을 만들기 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런 것입니다. 그를 변화시키는 말씀의 순도가 아주 높고 변화 되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있고, 그리고 예전에 자기를 굽게 만들었던 불순종 하고 잘못 살아가던 삶의 방식을 결별 할려고 몸부림 치고 새로운 방식에 순종하는 삶을 받아들인다면 그 기간이 짧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분명히 진리는 진리인데 90%는 세상 이야기고 10%는 성경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다가 변화 되고는 싶은데 그렇게 되면 되고, 말면 말고, 이런 정도이며, 그리고 한쪽으로는 변화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한쪽으로는 자기를 그렇게 굽게 만들었던 삶과 결별 하지를 않고 계속 옛 방식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쪽에서는 조금씩 조금씩 고쳐져 가면서도 한쪽에서는 어떻게됩니까. 또 더 많이씩 더 많이씩 굽어져 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근본적인 상태는 개선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도 답답해서 하는 이야기인데 들어보세요. 설교를 들으면서 “내가 듣는 이 열린교회에서 설교가 너무 완전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무슨얘기냐하면은 보세요. 온전해 질려고 목표를 세울 때,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온전하게 살수있느냐는 별개의 문제고 목표의 설정자체가 같아야 합니다. 그렇죠. 우리같은 인간보고 성경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으라는 것이 그것이 말이 되는 명령입니까? 말이되요? 안되요? 되지도 않은 명령입니다.
그런데 그 명령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정도로 거룩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런일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무엇입니까. 목표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미 이루었다.함도 아니요. 이미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그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화의 특성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바르게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르게 되어질 때 우리의 사고가 이렇게 온전하게 되어질 때 그 기쁨이 어떤 것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아마 여러분 중에 대다수는 아마 경험 했을 것입니다. 옛날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새로 듣는 이 성경적인 생각이 충돌을 일으킵니다. 처음에는 막 갈등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허위라는 사실을 알고 와르르 무너집니다. 그러면서 진리의 빛이 확 들어올 때에 그 기쁨에 대해서 아느냐고요. 그 지식의 바르게됨과 함께 막혔던 하나님과의 교제의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참된 지식을 타고.
그러니까 진리에 의한 무너짐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보상이 반드시 있습니다. 자기의 못된 인격과 조각난 성품을 인해서 안타까워 하면서, 막 아파하면서 자기가 부서지는 사람들, 그 부서짐을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부서진 사람만이 경험 할수 있는 하나님과의 친교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잘못된 신앙의 인격을 애통해 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 해본 사람은 압니다. 그 때에 항상 사람의 인정은 없어도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가 있습니다. 이모습 이대로 받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깊이 깨뜨려지는 기도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맞아 너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 일찌감치 천국을 포기해라.” 그러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 쓸모없습니다. 주님의 이 놀라운 은혜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변화되지 않는 인간입니다. 내 인격은 굽었습니다. 내 안에는 아무것도 선한 것이 없습니다. 내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주님이 보여 주시면 보여 주실수록 내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살아오던 이 삶이 굽은 인격 속에서 나온 것인지를 보여주면 보여 줄수록 하나님. 저는 정말 절망합니다. 이제는 너무 비참합니다.” 그리고 깊이 애통하며 주님의 얼굴과 은혜를 구하고나면 하나님의 한없는 위로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합니까.
늘 깨어있으라.
잠들지 말아라.
주님과 동행하라.
주 오실 그날에
흠 없기 원하노라.
그러면서 자신의 이 인격에 변화를 주도해 가는 당사자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힘이 없지만 주님의 성령이 나를 이 거룩하게 만들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을, 욕구를 그치지 아니하시고 그 열심이 나를 거룩하게 하실 것이다”
그 확신이 들면서 그런 깨달음 속에서 아파하기 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놀라운 위로가 들어오고 그런 부단한 자기 깨어짐의 과정을 통해서 이것이 펴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 닮은 신앙의 인격, 온전한 신앙의 인격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바르게함Ⅱ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성경을 가르치는 교육을 통해서 바르게 될 것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지난 시간에 책망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지난시간에는 바르게 함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억을 하실는지 모르지만 “바르게 한다.”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굽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굽은 것을 바르게 펴는 것이 기독교 교육입니다. 신앙교육이라는 것입니다. 신앙교육이라고 해서 꼭 둘을 앉혀놓고 성경 공부를 시키는 것이다. 교회학교에서 과정을 이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신앙에 있어서 교육적인 기능모두를 통털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무시되고 있는 것이 예배에 있어서 교육적인 기능인데 그런데 이렇게 예배를 통해서 가르침을 받는 것도 역시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굽은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그 문제를 보는 구도가 성화의 구도에서 보아야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나오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는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이미 믿은 신자들에 대한 성화의 교육에 있어서 성경의 중심성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성화의 구도에서 이 바르게함이라고 하는 성경이 가진 교육적 기능을 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결국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격에 있어서 굽은 것을 바르게 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삶의 습관이나 생활의 방식, 즉 행동. 행동이 누적되어서 생활의 방식이 잘못 굽어진 것들을 펴게해 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통해서 기대해야 할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굽은 인격을 바르게 펴는 것에 대해서 장시간에 걸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는 이제 또 하나 굽은 것을 바르게 펴는 것이 굳어진 삶의 습관. 즉 삶의 방식. 이런 실재적인 행동의 문제들을 바로 펴는 것에 대해서 성경이 어떻게 기여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성경을 배움으로서 그런 것들을 펼 것을 기대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화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즉 인격이 거룩해져 가는 것과 실재적인 삶의 생활이 거룩해져 가는 두 가지가 동시에 함께 성화의 대상이 되고 있다 라고 하는 것, 어떤 의미에선 그것이 성화의 대상의 전부입니다마는 이것은 아주 통찰력 있는 성경의 지적입니다.
잘 보십시오. 한사람의 인격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의 생활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이 인격과 행동하는 이 행동은 결코 두 개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 어떤 행동이 시작될 때에는 우발적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충동적으로 자기 속에 있는 지배적으로 흐르고 있는 성향은 담배를 거부하는데 어느 한순간에 호기심으로 담배를 피울수 있습니다. 그렇죠. 그러면 여러분 담배를 피우면 처음에는 담배 피우는 것을 경험하면서 어른들이 왜 이 비싼 돈을 내고 이 고통스러운 일을 계속해서 자기의 콧구멍을 굴뚝으로 만들까. 도저히 이해가 안갑니다. 그렇게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일을 했는데 그러한 것들이 반복되어 가면서 이 사람의 존재 자체가 담배와 친화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좋은 비유라고 생각이 되는데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어떤 행동을 할 때에 이 사람속에 있는 지배적인 성향이 그 일을 기뻐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그것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계속해서 우발적으로 반복되다보면 그 다음에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그 행동에 대해서 친화적인 성격을 갖게됩니다. 그러면 ‘친화적인 성격을 갖게된다.’라고 하는 그 자체가 존재 자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격의 핵심아닙니까. 그래서 이 두가지가 분리가 안됩니다. 그 두 개는 순환하면서 계속 돌아가는 것입니다.
삶의 방식. 생활하는 습관들이 인격에 영향을 주고 그 인격이 생활의 방식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가 계속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를 들어서 이런 경우가 있을수 있습니다. 자기가 옳지않는 어떤 행동과 습관에 대해서 깊이 젖어 있는데 그 행동을 통해서 큰 고통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 사람 자신의 인격에 깊이 호소하는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에는 행동의 영향을 받습니까. 안받습니까.
오늘 설교가 조금 어렵습니까.? 저는 그 세계에 여러분만한 회중이 없다고 저는 행각합니다. 가당치 않다는 듯이. 좀 이렇게 설교 내용이 어려워지면 우리를 향한 목사님의 기대가 한없이 크구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긍지와 자부를 가지시면 됩니다. 아무것도 몰라서 걱정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입니다. 다시 풀어서 설명을 할태니까 이해를 해보세요. 이것은 논리적인 이해가 필요하니까.
자 보세요. 내가 담배를 습관적으로 피웁니다. 담배야 죄가 아니지만 아무튼 담배를 계속 피운다든지. 아니면은 노름을 합니다. 혹은 물건을 이렇게 훔칩니다. 그러다가 그 행동에 제약이 걸리는 때가 있습니다. 물건을 계속 훔치다가 주인에게 잡혀서 반쯤죽었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창피하게 경찰서에 가서 붙잡혔더니 부인이고, 엄마, 아빠, 처가집 식구들까지 다 와서 나오는 날 두부를 먹었다. 완전히 개망신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도둑질 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제 말이 맞죠?
담배를 피웠는데 계속 담배를 피웠는데 나는 그 담배가 잘 받는데 어느 날 신체검사를 받았더니 죽을려면 담배를 계속 피우라고 의사가 아주 무시무시한 선고를 했다. 그럴 경우에는 무슨 그 사건이 내 양심에 커다란 자극을 주지 않았어도 공포 그자체가 그 행동을 멈추게 합니다. 그렇죠.
그런데 반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것도 아니고 담배를 피우다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도 아닙니다. 노름을 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간 것도 아닌데 그런데 무엇인가 어떤 성경의 가르침이 내게 다가와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옳지 않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아직 걸리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 얻어맞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을 강하게 내 양심에 호소해서 그 내 인격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아주 강력한 감화를 주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담배 맛이 옛날의 그 담배 맛이 아닙니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면서 ‘이러면 안되는데’ 그러는 것입니다. 도둑질 하면서도 옛날같이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를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행동의 제약을 받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교 교육은 이것을 노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겨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행동 그 자체를 제악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을 하면서 쉽게 이야기 하면은 도벽이 있는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고치기 위해서 계속 도둑질 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방조하는 상태에서 매일 불러다가 도둑질이 나쁜 것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가르치는 것 보다는 그래서 무엇인가 폭발적인 인격의 감화가 일어나서 도저히 물건을 훔칠수 있는 완전히 개방된 상태인데도 훔칠수 없도록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흔히 기대할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그런 교육을 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실재적으로 물건을 훔치면은 커다란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어떤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아니면 생활 자체를 통제해서 더 이상 그런 범죄를 실천에 옮길 수 없게끔 이렇게 제악하는 상태에서 그에게 도둑질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서 인격에 감화를 줄려고 하는 이것이 최상의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이 교육이 신앙적이 안되는 것은 아무리 잘 가르치려고 교회에서 애를 쓴다고 하더라도 교회에서 그 마음속에 생수를 쭉 부어주면 가정하고 학교에서 거기에다 뜸물 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어느 아이가 육교 밑에서 엄마하고 실갱이를 하는 것입니다. 엄마는 육교 밑으로 빨리 뛰어가자 그러고, 국민학교 다니는 아이는 이쪽으로 올라가자는 것입니다. ‘얘가 왜 이렇게 말을 안들어?’ 그러면서 손을 확 끌면서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마를 따라서 거기를 건너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교육적으로 얼마나 혼란을 느끼겠습니까.
학교 옆에서 불량식품 사 먹지 말아라. 그러는데 엄마가 데리고 가서 사주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분명히 분리수거 하라고 가르쳐 주어서 열심히 분리수거 했더니 엄마가 확 섞어서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수 집어넣으면 뜸물 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이 무지무지 하게 중요합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요번에 나도 집에 가서 배웠는데 아담이 만약에 한국 사람이었으면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따먹기 전에 먼저 뱀탕 해 먹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흥미로운 문제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수십 년 읽으면서도 그런 묵상은 도저히 못했는데. 그 확실히 천부적인 사람들이 따로 있습니다. 분명히 뱀이 유혹할 기회를 못 가졌을 거라는 것입니다. 보자마자 집어넣고 끓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환경입니다.
그래서 환경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웨슬리가 그렇게 교육 사업에 열을 내었던 이유가 무엇이냐면 처음에 그 사람은 그런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구령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실재로 사람들이 구원받고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거룩한 삶의 맛을 알고나니까 자기의 자녀들을 가정과 교회에서 생수를 넣어주면 학교에서 뜸물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우리의 신앙이 이 자손들에게 전수될 수 없겠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서 학교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초등학교 이런 식으로 해서 다 만들었습니다. 그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진자 무엇인가 일반 교육에 있어서도 아주 혁명적인 발상이 요구가 되는데 하물며 교회 교육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없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정상적인 신인이 아니라 아주 경건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겠느냐. 우리의 후손이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럴 때 이것은 진짜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집안을 이야기해서 안됐지만 나는 우리 애들을 제도권의 교육에 집어넣는 것에 대해서 나는 반대합니다. 특히 우리 아들도 나는 우리 집사람이 허락만 했으면 나는 학교 안 집어 넣었습니다. 차라리 대한학교에 집어넣자. 그래서 검정고시 보게 하자. 왜
여기에 선생님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뭐 선생님들을 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만큼 교육의 환경이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요번에 집회 간 데도 보니까. 아파트 바로 앞에 러브호텔입니다. 그러니까 아파트 주민들이 프렌카드를 써붙여 놓았습니다. ‘등하교 길에 러브호텔 이것이 왠말이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 속에서 아무리 잘 가르치면 뭐합니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데.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이 가야합니다. 그 신앙교육을 받는 사람들을 위한 바람직한 교육환경의 개선의 문제와 그리고 가르침을 줄때에 보다 정확한 성경의 가르침과 강력한 성령의 은혜로 사람들에게 그런 환경들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강력한 임펙트가 교육 속에서 나타나도록 그렇게 두 가지가 같이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격적인 성화의 문제와 그리고 삶을 고치는 이 실재적인 실천과 행동의 성화의 문제. 이두가지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거룩한 삶을 삽니다. 야비한 사람이 야비한 짓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이 세사 위해서 살 때 신나고,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 위해서 살때에 삶에 보람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제 보세요. 인간이 굽어진 인격과 삶의 습관들을 바르게 펴기 위해서는 때로는 자기를 부인하는 피나는 도전과 그리고 실천하려고 하는 경건한 의지가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굽어지고 잘못된 습관이 몸에 베이는 것은 그렇게 피나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망가진 사람이 고쳐지는 것은 진짜 하늘로부터 강력한 역사가 필요하지만 사람이 망가지는 것은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삶을 위해서는 피비린내 나는 분투가 필요하지만 방종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냥 육체의 욕심이 하자는 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냥 굽은 상태로 가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내적인 부패성의 문제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환경의 문제 이런 모든 것들이 다 함께 작용을 하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모두 망가지는 것이고 믿은 후에는 모두 펴지기만 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인간들이 굽습니다. 당연히 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에 인간들의 평가는 굉장히 상대적입니다. 보세요. 사람들과의 거래관계에 있어서 샘이 깨끗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돈 꾸어가고 질질 흘리고 안 갚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문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절대로 거래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런 샘이 칼같이 깨끗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까다롭습니다.
좀 이렇게 너그럽게 널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돈 빌려주고도 빌려 주었는지 잘 생각도 못하고 꾸어가고도 자기가 꾸어갔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좀 너그럽습니다. 널널합니다. 자기가 돈 빌리고도 빌린 것은 죽어도 안주고 빌려준 것은 죽어도 쫓아가서 받는 사람들은 그것은 특수인간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과 약속했을 때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사람 있지않습니까? 그런 사람치고 다른 사람이 시간을 안 지키는 것에 있어서 넉넉한 사람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아주 칼같이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그 약속을 어기는 사람을 인간으로 생각지를 않습니다. 사람으로도 안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경의 정신이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 하나는 좋지 않습니까? 어쨌든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인류 사회의 보편적일 도덕률에 비추어 볼 때에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도덕률이 그것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너그러운 관용을 배푸는 도덕률이 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것이 자기가 잘 지키는 도덕률에 대해서는 아주 강조점을 많이 두고 못 지키는 것에 대해서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뭐가 선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정 반대편에 있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약속시간 잘 안 지키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 사람은 약속시간을 잘 안지켜요. 짜증이나요. 그런데 내가 늦어도 저 사람은 허허 웃습니다. 늦었어요 ‘두 시간 늦은 것 가지고 뭘 그래?’ 그리고 뭐 더 심하면 “안 오데? 기다리다 갔어.” 화도 안 났어요. “미안해.” 그러니까 “뭐, 그까짓 것 가지고..?” 그런데 그 사람도 늘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누가 좋은 사람입니까? 잴 수 없습니다. 어떻게 잴 수 있겠습니까. 제일 좋은 것은 나는 칼같이 자키고 다른 사람은 한2-30분 늦어도 ‘아이, 그럴 수 있지 뭘 그래?’ 그러는 사람이 있느냐고요. 실재로 존재를 하느냐고요. 자기가 저 사람을 그렇게 너그럽게 생각해 줄 수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에는 자기에 대해서 먼저 너그러운 후에 그다음에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습니다. 절대 저쪽 먼저 너그럽고 그 다음에 나한테로 오지 않는다고 이것은 특수 인간들에게나 가능한 것입니다. 그 신앙이라는 그것을 추구하는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아가페의 사랑과 모두 연결이 됩니다. 이런 미묘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내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논리가 뭐냐면 하나님 모르는 채 살아왔을 때 우리가 다 망가진 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런 면에서 사회의 보편적인 도덕률에 올바르게 행동하고 처신하면서 살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데 반대편이 그런 식으로 상대적인 것이 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쪽을 잘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또 한쪽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아주 비참한 운명입니다. 이것의 균형을 잡을 줄을 모릅니다. 이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이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결코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그것도 절대적인 원칙은 아닙니다마는 어쨌든지 간에 탐욕을 버리고 낭비하지 않고 검소하게 살아가는 것은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좋은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대체로 자신에 대해서 인색한 사람이 남에게도 인색합니다. 돈 아껴서 열심히 검소하게 살아가는데 남을 도와줄때도 역시 인색합니다. 자기가 아껴서 자기 위해서 미래를 간직하는 것입니다.
‘나는 안그러는데’ 지금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것이 성화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잘난 것이 아니라. 원래는 안 그랬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고쳐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하나님이 뭔가 그 사람을 만지고 지나가지도 않았는데 자기는 자기를 위해서는 아주 검소하게 살면서 남을 위해서도 아낌없이 쏟아붓는 그런 사람을 보았습니까? 있을 수는 있지만은 그러나 거의 만날 수 없습니다. 자기 가까운 사람들에게 넉넉한 사람이 먼 사람들에게도 넉넉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좋은 거냐는 것입니다. 안 좋지 않습니까? 저 쪽에서 보면 이쪽이 안 좋은 것입니다. 사람이 이런 관계가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면 그러면 그런 일이 없겠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고 살아가도 그렇게 됩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첫째는 인간의 부패성의 문제가 해결이 안됩니다. 크게 많이 죽기는 했는데 그 부패성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굽고자 하는 경향성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또 하나는 그나마 구원받은 후에 계속해서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말씀의 신령한 영향아래 살아가면 그런 경향성이 남아있어도 그런 경향성이 실재로 나를 굽게 하지 못 할 터인데 우리가 항상 은혜아래 살아갑니까.?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신령한 영향력 아래 절대적인 그 자극을 받으며 살아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부패한 경향성들이 우리가 생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굽어지는 경향성들을 계속 유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굽어가는 것입니다. 잘못되어 가는 것입니다.
물론 인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고 행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굽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제 작년에 영국에 갔을 때 떠나오려던 그 전날인데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영국에 로이 클레맨스라고 하는 아주 영향력 있는 설교자가 있었는데 영국에서 1000명 가까이 교인들이 모인다고 하니까 뭐 장난이 아닙니다. 책도 여러 권 내고 그런데 그 사람이 남자 친구하고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그게 뭐냐하면 게이 남자친구하고 동성연애하고 도망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수 있습니까? 그런 영향력 있는 목회자가? 그 때 제가 즉시 이야기 한 것이 뭐냐하면 “그 사람 옛날에 게이였죠?” 틀림없습니다. 대학 때 게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열렬하게 목회하고 글을 써서 영국교회의 중진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떠날 때 메모지에 남겨놓은 것이 뭐냐하면 ‘내 인생의 최고의 실수는 목사가 된 것이고 두 번째 실수는 결혼한 것이다.’ 그리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목회자로서의 헌신이나, 이런 것들이 거짓이었느냐. 거짓 아닙니다. 진실한 것이었는데 속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을 좋아하는 옛날의 그 성품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은혜가 고갈되면서 강력하게 발동이 걸리면서 강한 굽어짐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죄에 대한 완벽한 승리하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완벽에 가까운 승리는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이겼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났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요즘은 많이 뜸해졌는데 뭐 ’치유 세미나’ ‘치유학교’ 그런 것 굉장히 많지않습니까? 뭐 그런 사역이 상당히 가치가 있는 사역이라고 생각하고 또 성경적인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사역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한계를 털어놓은 것이 뭐냐하면 기수가 거듭되어 가면서 치유 받아가지고 내보내었는데 그래서 엄청난 간증을 하고 갔는데 한 1년 있다가 다시 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아 옛날에 내가 치유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치유가 안되었더라 내가 착각했더라.’그러면서 다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치유라고 하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 상당히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화의 교리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치유 없습니다. 무슨 놈의 치유에요. 치유는 무슨 치유.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에게 있는 어떤 부패한 문제, 이런 것들에 대해서 완전히 결별하고 내가 어떠한 조건, 어떠한 상태에 살든지 간에 그 병은 다시 도지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그 마음의 질병 혹은 부패한 육체의 습관과 완전히 결별한 치유, 그런 것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불완전한 삶을 살아가다가 결국은 자기가 돌이켜서 어느 한순간에 이제는 내가 치유되었구나 생각한 것이 진정한 치유였고 완전한 치유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영원히 똑같은 케이스는 발생하지 말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무엇을 착각하고 있는지 잘 들어보세요. 치명적인 중요한 교리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꼭 무엇처럼 생각하느냐면 간염같이 생각을 합니다. B형 간염 같은 것은 항체가 생기면 다시 간염 걸릴 가능성은 없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항체를 얻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주사도 맞고 약도 먹고 별일을 다 합니다. 그런데 나도 그 항체가 안 생겼습니다. 생기기를 원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안 됩니다. 생기기만 하면은 한번도 간염에 걸리지 않고 간염반응에 대해서 양성이 나오지 않는 음성 환자들 보다 훨씬 좋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영원히 B형 간염하고는 결별한 것입니다. 죽을 때 까지 안 걸립니다. 소위 이야기 하는 치유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치유에 속지마세요. 그런 종류의 치유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누구, 어떤 능력이 있는 설교자, 어떤 능력이 있는 목회자도 여러분들에게 그런 치유를 안겨줄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성화교리에 대한 무지입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어느 한순간에 그런 문제에 대해서 치유를 받고 평생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영혼이 골병이 드는 일 없이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것은 은혜 가운데 살아서 그런 것입니다. 또 다른 면에 있어서 문제가 드러났다고 하더라도 그 면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은혜로서 지켜주셨거나 그런 것입니다. (지금 기가 막힌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막 사람들이 그렇게 자지러질 듯이 힘들어하는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미움의 문제가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예를 들자면 제가 어느 교회에 수련회를 갔을 때는 수련회 마지막 날인데 얼굴 맛이 완전히 간 형제 하나가 다가왔습니다. 완전히 영적으로 눌려있는 상태였습니다.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자기는 청소년기 이후로 이 하체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못 보냐고 그랬더니 보면 자신의 온 마음이 자지러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혼자 자위행위를 많이 하면서 거기에 대해서 강력한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사단이 이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이 하체가 아주 불결하고 더러운 인간이라 그래서 이것을 자기 몸의 일부이면서도 하체 자체를 아주 더럽게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손도 못 대고 그리고 만지는 것은 물론이고 보지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장구한 세월이 흘러간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미움의 문제, 그 다음에 자신의 성에 대한 혐오, 예가 굉장히 많지만 그 두 가지 밖에 없어서가 아니라 대표적인 것을 예를 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있을 때 그것은 잘못된 반응입니다. 미워했는데 어느 날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깊이 회개하고 그렇게 내 부모나 내 가족이나, 내 친구나, 누군가를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한 것에 대해서 깊이 뉘우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동일한 행동의 습관이 오래 계속되어서 형성된 것일수록 그런 의미의 치유는 더욱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기간 동안 수십 년 동안 부모님을 미워하며 살다가 어느 날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지적을 받고 진짜 뼈에 사무치도록 자기가 부모님을 미워한 죄를 용서하고 마음속에 화해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부모님을 미워하는 문제가 자신의 영혼을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를 언제든지 여건만 형성되면 다시 미워할 수 있는 균들은 우리 속에 배양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자신의 인격 안에 배양되어 있는 것입니다. 남아있습니다. 어느 정도 진실인지 모르지만 암세포를 거의 다 가지고 있다는 군요. 그런데 10만개를 넘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된다는 군요. 보세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세포의 수가 워낙 많고 그 세포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암세포 서너 개 가진 사람보고 암 환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잠복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형제가 지었던 그런 성적인 불결에 대해서 깊이 치유 받고 성의 축복성에 대해서 강의를 듣고 하면서 이제는 자유로움을 얻었다고 쳐요. 그런데 어느 여건이 형성되면 다시 자신의 그런 성을 혐오할 그런 경향성들을 잠재시켜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치유라고 말할 때에는 그 치유가 뭐냐면 그 문제에 억눌림을 당해서 거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이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는데 그 얽매임에서 이제는 자유로울 수 있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현격히 저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없는 것입니다.
전에는 폐병이 걸려서 ‘헤, 헤, 헤, ..’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참 있다가 보니까 다 나았습니다. 달리기도 할 수 있고 괜찮습니다.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 깔려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생활에 영향을 안줍니다. 여건만 형성이 되면 다시 기승을 부리면서 발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희망을 보면 생생하게 나옵니다. 죄 아래로 자기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예수 믿기 전의 경험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거룩한 소명을 받고 불꽃과 같은 전도자로서 살면서 그 삶의 와중에 그것을 같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제 이 성화의 다이나믹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결정적으로 미움이나 이런 억눌림을 결정적으로 깨뜨리는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과 함께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계속해서 그것이 더 이상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일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세요.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상과 같은 논의들을 통해서 이제 우리들이 이런 굽어지는 것에 대해서 명백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굽어진 것들을 염두에 두고 여기에서 바르게 함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 굽어짐에 대한 성경적인 용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패역’입니다. ‘패역’, 히브리말로 ‘마슈부’입니다. 그것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패역은 최대한으로 악화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제 순서가 어떻게 되느냐하면 처음에는 불순종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속에 있는 지배적인 경향성이 아니라 어떤 우발성에 의해서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회적인 불순종인데 그것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입니다. 불순종 하는 습관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패역은 습관보다도 더 지나간 것입니다. 지나가서 어떻게 되냐면 이 습관화 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그 일에 대해서 강한 집착을 갖게 되어서 습관이 인격화된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보세요. 우발적인 행동으로 불순종 할 때는 그것을 못하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습관이 되었을 때에는 그것이 반복되어서 악한 습관이 되었을 때에는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하면 굉장히 불편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패역이 된 다음에 그것을 못하게 하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면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그다음에는 2단계가 사람이 술을 마시고 두 번째는 술이 술을 마신다, 술이 술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 속에 있는 술이 밖에 있는 술 보고 ‘빨리 들어와.’ 그런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어떻게 됩니까. 술이 내 몸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우발적으로 먹고 그다음에는 좋아서 먹고 세 번째의 경우에서 먹는 그 술은 고통을 덜기 위해서 먹는 것입니다. 안 들어가면 몸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달래기 위해서 먹는 것입니다. 아주 기가 막힌 비유입니다.) 나는 비유만 잘하는 것 같아요. 전체적인 것은 잘 못하는데.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들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 가지의 문제를 세 종류의 단계마다 성경을 가르쳐서 사람에게 감화를 끼치는 것이 다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우발적으로 술을 먹으려고 하는데 성경이 ‘안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훈입니다. 그 교훈을 통해서 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것을 선택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습관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강한 감동과 신령한 자극을 받으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것을 안 먹으면 불편한데 먹으면 경험하게 될 마음의 불편함이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안돼는데... 이러면 안돼는데..’ 그리고 먹었을 때에 느끼는 불편함이 훨씬 더 커지는 것입니다. 선택을 안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패역의 경우에는 문제가 좀 다릅니다. 패역의 경우에는 이것을 안먹으면 이것을 빨리 집어넣어 주지 않으면 이 속에서 경험되는 고통이 너무나 큽니다. 워낙 크기 때문에 웬만한 자극을 그 인격에 주지 않으면 이것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느끼는 양심의 가책보다는 이것을 안먹었을 때의 고통이 더 큰 것입니다. 그래서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패역이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자신도 그것을 어떻게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그것을 펴느냐?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옷을 입고 나갔는데 살짝 흙이 묻었습니다. 그것은 물에다 집어넣고 비누로 살살 비벼 빨면 됩니다. 그런데 작업복 같은 것을 몇 달을 입고 자동차 밑에 들어가서 일을 해서 기름때부터 땀, 먼지 등이 섬유 올올이 깊이 배인 것입니다.
그것을 새탁기에 돌려봐야 소용없습니다. 새카맣게 그냥 나옵니다. 거기에다 강력한 효소분해 세제를 집어넣고 아주 따뜻한 물에다 풀어놓고 한 하루정도 놔둡니다. 실컷 분해 작용이 일어나서 거기에서 때 국물이 쭉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빨래를 합니다. 그러면 하얗게 됩니다.
머리 좋은 여러분들은 금방 눈치를 채시겠죠? 그렇죠. 그런데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답답한 것이 신앙적으로 사실 이런 패역이 없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비교적 적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면 늘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쉼 없이 받으면서 늘 자주 깨뜨려졌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해서 습관이 되려고 하면 왕창 깨지면서 막 아파하는 것입니다.
또 그런 선택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습관이 될만하면 탁 깨뜨려지면서 하나님이 그것을 슬퍼하신다는 사실을 알면서 대굴대굴 구르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해서 잘못을 하기는 하는데 그것이 정착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볼 때는 굉장히 기분 나쁜 일입니다. 뭐 좀 될만하면 털어버리는 것입니다. 뭔가 이렇게 패역의 나무들을 심어서 좀 자랄만하면 회개의 삽을 가지고 와서 퍼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완전한 사람은 아니죠. 그러나 결정적으로 영적생활을 무기력하게 하는 굽음은 적다는 것입니다. 오류는 있는데 순간적인 패역은 적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하면 이 사람이 그런 종류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의 그런 패역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진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깊이 아파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이 어느 정도 다듬어집니다. 그전에는 짐승처럼 막 나가던 사람이 다듬어집니다. 그리고 뭔가 자리를 잡는 듯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착각하기를 자기는 이제 다 나았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낫기는 뭐가 개코가 나아요? 낫기는 뭐가 나아요? 그것이 그렇게 금방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데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이제 자신은 완전히 치료가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뭔가 자신이 이렇게 주님을 향해서 엄청난 삶을 살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굉장히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제 혼돈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회개하고 그렇게 결정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만났는데 그렇게 놀랍게 인생에서 깨뜨려져본 적이 없는데 아니 그 패역이 뭔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도 해결이 안 되었습니까?” 안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도록 장시간 동안 은혜 아래서 그것이 녹아서 해체되어야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경향성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과 똑같은 하나의 단순한 욕망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소위 이야기하는 ‘고침’, 소위 이야기하는 ‘자기 치유’, 이런 어설픈 것들, 그것이 그 사람을 더 심각하게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문제를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을 수 있는데 그것은 결국은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것을 바르게 하는데 한번에 강력한 충격으로 즉시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첫 번째 케이스에. 두 번째 케이스에는 몇 번 반복되는 그런 것으로서 습관을 고칠 수 있는 것이 있고 세 번째 같은 경우에 이것은 아주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회개치 아니하면 하나님이 칼을 갈으심이여“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어떤 피의 보복을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되느냐하면 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는 문제를 즉각 즉각 회개하고 깨뜨려지면서 청소하고 지나가지 않으면 그런 무서운 문제로 발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죽임의 교리’를 진술해 가면서 자기를 성찰함에 있어서 반복되는 악한 습관이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이 죄죽임에 있어서 첫 번째 가장 투명한 점검사항입니다. 그것이 있으면 거기에 집중적인 폭격을 퍼부어야합니다. 그것이 있고는 모든 문제들이 궁극적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안목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삶을 이렇게 보세요. 틀림없이 반복되는 실패의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다른 면에서는 개선이 있는데 어떤 문제에 있어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 속에 얼마나 삶이 굽어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격은 물론이고, 그 방면에 있어서 그것은 가슴이 저리도록 잘못했다고 울부짖는 이런 것, ‘해야 되는데...’ 그것 한번이나 두 번가지고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절대 안 됩니다. 한 사람의 영적인 상태가 활기에 넘치는 것은 한순간의 회개나 강한 은혜 받음에 의해서 될 것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산에 있는 교회에 집회를 오래간만에 갔는데 새벽에 일어났는데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진짜 부흥사들은 진짜 존경할만 합니다. 막 토할 것 같았습니다. 도저히 설교를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부목사님에게 그랬습니다. “내가 빨리 들어와서 쉬지 않으면 아침 마지막 설교를 못할 것 같으니까 새벽설교 한 10분만 할테니까 끝나자마자 나를 태워다 나를 숙소로 데려다 달라”
그런데 그런 날은 꼭 길게 하는 것 알지 않습니까? 설교를 하는데 입술이 덜덜 떨려서 도저히 말을 못하겠어요. 그런데 10분정도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확 열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시간을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끝나고 나서 언제 내가 토할 것 같이 아팠느냐 하고 싹 없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막 은혜가 솟아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끝나자마자 간다 그래서 아침 먹겠다는 사람들 약속 다 취소하고 저쪽에서 지금 가방 들고 나 올 때를 기다리는데 나는 거기에 앉아서 기도를 한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자기는 기다려도 나는 기도가 될 때 기도하는 것이 낫지. 그러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 갈 때부터 “성령의 감화대로 한다.” 그래야지. 그래서 기도를 다 하고 갔습니다. 몸과 마음이 새롭게 됩니다. 그럴수 있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가 다운되었던 우리들을 활기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세요. 아주 개고기 같은 삶을 살던 그리스도인이, 개떡 같은 삶을 살던 그리스도인이 한번 영적인 상태가 이렇게 거의 죽어있었습니다. 활기가 없고 그런데 와서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 말씀을 들으면서 박살이 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죄를 막 토설하고 울고불고 하면서 생기를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펑펑 흘립니다. 그의 상태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령해 진 것은 아닙니다. 이해가되십니까?
‘신령함’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상태의 문제가 아니라. 한사람이 신령하다 그럴 때 “오, 형제는 진짜 신령하네. 몇 시간(?)”그렇게 물어보지 않습니다. 장구한 세월동안 하나님을 추구하고 수많은 경건의 투쟁 속에서 육체의 요구를 이기고 살아온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는 질 때도 있었고 그 사람처럼 방방 뜨면서 회개할 때도 있었고 쓸어안고 씨름을 하면서 아파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과정일 뿐이고 한번이 그 사람을 활기 있게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신령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극복하고 이겨서 그 패역을 고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르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년 동안 그냥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생활하다가 사경회 때 와서 무슨 빚잔치 하듯이 다 털어놓고 그리고 은혜 받고 나서 자기 새사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1년 2년 3년 4년 살아오면서 그것이 굽어진 경향성이 되었는데 그것은 한두 번 울고불고 했다고 해서 그렇게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 다시 얘기할 테니 들어보세요. 요한복음 15장 38개의 설교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듣고 또 듣고, 듣고 또 듣고 그래야 됩니다. 지금 성화문제에 대해서 그 정도로 상세하게 다룬 책이 원서로는 많이 있지만 여러분들이 지금 어글어글하게 손에 넣을 책이 없습니다. 들으세요. 내려가서 문서선교부에 가서 주라고 하세요. 하루에 한 개씩 세 번 정도만 들으세요. 그래봐야 100일밖에 더 되요?
그래서 우선 중요한 것은 뭐냐면 이 굽어진 것과 바르게 하는 것에 대해서 지식으로 아주 완전하게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인 투쟁보다 더 먼저 되어야합니다. 아니 뭐 적을 알아야 싸우지. 좋다고 막 살아가는데 퓽~하고 화살이 날아오는 것입니다. ‘뻑’하고 맞는 것입니다. ‘그래 나는 싸워볼 거야.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나는 피 흘리기 까지 싸울 거야.’ 그러면서 청룡도를 휘두르는데 원수는 뒤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막 칼춤 추는데 그렇게 몇 주일 흔들다가는 자기 풀에 지켜서 퍽 엎드려져서 헉헉 그러는 것입니다.
우선 지식으로 먼저 무장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집에 도둑이 들어왔다 그러면 여러분은 제일 먼저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도둑이 들어와서 부스럭거린다면 무엇부터 하시겠느냐고요? 그렇죠. 칼 찾고 설치다가는 푹 찌릅니다. 불부터 먼저 켜야 합니다. 도둑은 어둠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중요합니다. 우선 처절하게 싸워서 ‘나는 거룩하게 될거야.’ ‘나는 진짜 성화, 내 평생의 숙제.’ 그러면서 눈물 흘리지 않아도 좋으니까 우선 깨달으세요. 깨달아서 그 문제에 대해서 우선 지식으로 정리를 하세요. 그렇게만 이라도 하면 자기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가 보입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지식적으로 정리를 잘 해놓고 투쟁을 해서 그것과 싸우지 않으면 하나님이 가만히 안 내버려두시죠. 많이 깨달았으니까 그대로 충성하면서 살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쨌든지 간에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굉장히 미묘하고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문제입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그냥 쉽게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면 이제 중요한 것인데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나는 상당히 그 굽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의해서 고쳐졌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안 고쳐진다고만 자꾸 그러시는데 나는 지금 예전에 그런 패역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겠는데 그 패역이 지금 고쳐졌는지 안 고쳐졌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시험할 방법이 없습니까?” 이렇게 묻고싶을 것 아닙니까?
답변을 해주겠습니다. 뭐냐하면 속에 있는 어떤 패역한 굽음은 그것이 완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는 동안에는 있는 증거는 뭐냐하면 자극할 때, 어떤 잘못된 것에 대해서 자극할 것 아닙니까? 예를 들면 미움도 잘못이고 아니면 물질에 대한 탐욕이나 뭐 그런 것도 잘못입니다. 여러 가지 많이 있는데 보세요. 자극을 받을 때에 패역이 거의 고쳐졌으면 자극을 할 때에 자신 속에 패역까지는 가지 않은 문제들을 자극할 때와 거의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이 패역이 남아있는 상태에서는 겉으로는 문제가 정리된 것 같아도 남아있는 상태에서는 자극에 대해서 다른 동일한 감정보다도 그 패역의 문제와 관련된 감정이 아주 센스티브합니다. 무슨 얘기냐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역시 습관성 식품으로 예를 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술하고 담배하고 있는데 둘 다 끊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몇 달째 안했습니다. 동일하게 술이 이렇게 보여서 ‘야. 이것 먹어봐라.’이렇게 해주지 않는 한 적극적으로 가서 사 먹지는 않을 정도로 절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담배도 마찬가지고 그랬는데 술은 진짜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담배는 그 정도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모르지않습니까? 그 때 똑같은 정도로 자극을 했을 때에 그런 경향성들이 거의 빠져나갔을 경우에는 자극을 1정도하면은 10정도의 반응만 오는데 그런 패역된 것들이 남아있을 때에는 1정도를 자극을 할 때에 100의 흡수성이 오는 것입니다.
자, 예를들어보죠. 내가 형제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긴 세월동안 형제를 미워했습니다. 그러니까 몸에 깊이 베인 패역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그것을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그리고 사랑하면서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뭔가를 나에게 자극을 주는 것입니다. 탁 자극을 줄때에 내가 미움의 문제가 걸리지 않는 다른 사람이 여기 있지 않습니까? 두 사람이 다 똑같은 정도로 나를 자극하는데 이 사람이 패역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이 되었으면 이 사람이 나를 자극할 때에 반응하는 것 정도라든지 조금 더 반응하는 정도인데 이것이 해결의 문제가 아직 남아있을 경우에는 이 사람이 딱 자극을 할 때에는 ‘기분 나쁘다 왜 그러지?’이정도의 반응인데 미움이 남아있는 사람이 자극할 때는 옛날의 그 원한이 확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반응을 내면 속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해결이 안 된 것입니다. 적절하게 이해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결국은 이런 문제에서 결국은 이런 상태에서 이것을 온전히 펴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뭐냐면 성경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감화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성품에 감화를 받으면서 그 감화가 계속해서 자신의 이 굽은 패역에게 계속해서 신령한 영향을 공급하면서 인격과 결탁된 악함들이 이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어떤 상태가 되느냐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상황까지 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인지 생각을 해보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완전할 수 없고 늘 실수하고 그리고 때때로 불순종하지만 그것들을 즉시 즉시 털어버리는 깨뜨려진 심령, 깨어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조명을 받을 때에 주님의 심정을 제공받으면서 그것을 즉시즉시 아파하고 깨뜨려 버릴 수 있는 깨어있는 상태, 그것이 지속적인 패역으로 자신의 불순종이 아주 질병적인 패역으로, 고질적인 패역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낙비와 같은 은혜도 필요하지만 진짜 필요한 것은 그 은혜가 소낙비든 이슬비든지 간에 계속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번 이렇게 전성기를 경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때에 어떤 전성기가 필요하지만 그런 어떤 일생에 몇 번 일어나는 강력한 부흥에 버금가는 경험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계속해서 은혜의 영향력 아래서 깨뜨려지는 자기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런 패역에 흐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성경에 의한 감화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러면 보세요.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내게 하나님께서 영혼을 맡기셨는데 내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그에게 신령한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서 그래서 그가 그 신령의 은혜의 영향력 아래서 오래도록 살아가도록 만들어야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입장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무엇인가 자신의 오류, 패역에 대해서 나를 가르치는 사람이 보여주고 다 알게 해 주고 거기에서 무엇인가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를 한두 번 정도 경험했다고 해서 자신이 그런 패역의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로운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시작일 뿐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거기에서 자라가면서 자신 속에 있는 그런 것들이 다 빠져나가면서 거룩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바뀌어 가야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분량에 맞게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새기고 그 은혜를 주신 계획들을 생각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데 언제나 무게중심이 자신을 이렇게 성화해 가는 것에 실려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태권도 같은 것 할 때 자세를 취할 때 뒷발에 6정도의 힘이 가고 앞에 4정도의 힘이 가라고 가르칩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이 그렇게 성화되어가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중심을 두고 그리고 이것이 자기를 지탱해 주는 한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그냥 어느 한순간에 회개의 은혜를 한두 번 경험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뭔가 이렇게 이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자신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꿈에 부풀린 사람이 되어서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은 끝났고 이제는 내가 일해야 될 때다.’그러면서 자기를 던지는 사람이 얼마나 무모한 사람들인지 보아야합니다. 사실은 어떻게 보면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오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다시 한 번 여러분들에게 강조하는 바는 뭐냐면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난 다음부터는 두 기둥 성화의 문제와 성령의 문제 이 두 개를 아주 굳게 붙들어야합니다. 내가 지속적으로 성경진리의 영향아래 살아가지 않으면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없다.
이렇게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의로 교육받기를 기대하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인간은 종종 자기 보기에 좋게 하기 위해서 식물이나 동물에게 잔인한 행동은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분제상에 가보면은 여러분도 아마 보신적이 있을텐데 작은 소나무 같은 것을 아주 병풍처럼 멋있게 펼쳐져서 그림같은 소나무로 만들어 놓은 것을 아마 보실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야생에서 자연적으로 그렇게 성장하는 것을 떠다가 분제를 만든것도 있지만은 그러나 우리들이 시중에 가서 싼값으로 구할수 있는 대부분의 분제는 작은 나무 묘목에서부터 그 허리에 굵은 구리 철사줄 같은 것을 감아서 나무 가지줄기를 자기가 만들고 싶은 모양대로 이렇게 휘게 만들어서 계속 성장하도록 프레임을 거기에다 붙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거기에다가 성장 억제제를 계속 주입을하면 세월이 많이 흘러도 나무가 생존은 해 있지만은 그러나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난쟁이와 같이 그렇게 작은 분제가 되는 것입니다. 한번 그렇게 구리 철사로 만든 프레임에 의해서 틀이짜지고 한번 모양을 갖추게된 나무는 나중에 어느정도 성장한 후에 그 구리철사를 다 벗겨내도 그대로 성장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이것은 이중적인 적용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와 타락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우리의 굽어진 인격이나 우리의 삶에도 적용이 가능하고 오랫동안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면서 주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잘 가르침을 받고 양육을 받는 건설적인 일에 대해서도 적용이 가능하다.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본문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 의로 교육 받기를 기대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성경의 효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사람들을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교육하다.”라고 하는 이 단어는 앞에 나오는 “교훈”이라는 단어와는 다릅니다. “파이데이아”라는 단어인데 여기에서 “파이디언”이라고 하는 “어린아이”라고 하는 말이 나왔고, 원래 동사는 “파이듀오”입니다. 이것은 “어린아이를 양육하다.” “어린아이를 기르다.”라는 뜻인데 많은 곳에서 훨씬 더 많이 발견되는(?)“징계하다”입니다. “파이데이아”라는 말이 “징계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난의 주에 보면은 “교육 하기에‘라고 해놓고 1이라고 하는 각주에 숫자를 먹여놓고 밑에 난에 주에다가 ”징계“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징계“라고 하는 말은 번역을 그렇게 해놓고 보면은 우리가 얘기하는 이 징계는 사실 보복의 의미가 참 많습니다. 그렇죠. 사실 징계 할 때에 거기는 보복적인 의미가 훨씬 더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번역도 사실은 ”파이데이아“라는 말을 정확하게 옮기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주 좋은 단어가 생각이 났습니다. 요즘은 거의 잊혀져가고 있습니다만은 저희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학교에는 ”훈육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선생님이 ”훈육주임“이었습니다.
대게 훈육부 선생님은 대게 택권도도 좀 하고 골목에서 학생들이 덤벼들어도 때려 눕힐수 있을 정도, 그런 분들이 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중,고등학교 시절만해도 선생님들을 뒤에서만 그렇게 욕을했지 아, 사실 선생님이 부르면 꼼짝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요즘처럼 교실에서 선생님께 대들고 멱살을 잡는다든지 자기들을 혼냈다고 해서 골목에서 벽돌로 머리를 때리는 이런 황당한 일은 우리 시절에는 생각할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하여튼 그 때에 쓰여진 단어가 ”훈육“이라는 단어였습니다. ”훈육“은 가르칠 훈자와 기를 육자로 되어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순수하게 가르치고 기른다.라고 하는 의미가 아닌 것으로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훈육“그러면은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개념은 ”징계한다.“라고 하는 것은 훈육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현상입니다.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징계라는 말은 번역을 해놓고 보면은 너무 좁고 그리고 교육이라는 말은 너무 넓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월이 흐르면은 그 뉘앙스가 바뀔수 있겠습니다만은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언어적인 뉘앙스에서는 훈육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이상 적합한 말을 국어사전에서는 찾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훈육” ‘우리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 번역을 해 놓으면 조금 마음에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훈육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여기 “파이데이아”혹은 "파이듀오” 그 동사의 원형이 되는 "파이듀오’가 가지고 있는 가장 폭넓게 쓰인 “징계하다”라는 뜻을 포함 하면서 그러면서도 “어린아이들을 가르쳐서 교육적인 의도에 맞게끔 아이들을 세운다.”라고 하는 교육적인 배려까지 모두 포함 할수 있는 가장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훈육이라는 말이 어느정도 여러분들의 마음에 다가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어쩌면은 오늘날의 신세대들에게는 그런 종류의 선생님들이 거의 없으니까. 아마 훈육이라는 말이 그렇게 가슴이 안다가올지 모르지만은 어쨋든 “훈육”그러면은 약간은 강압된 듯 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강압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교육이 목적인 약간은 군대식이 가미된 그런 강도 높은 요구를 동반한 그런 교훈, 단순한 지적인 전달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과 삶 전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그것들조차도 바르게 해 주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교육. 그것을 훈육이라고 우리가 정의를 하자는 것입니다. 국어사전도 동의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훈육이라는 말을 정의할 때 그 말이 가장 적합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의로 훈육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의로 훈육을 받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저는 먼저 훈련의 내용을 먼저 설명하고 그다음에 그 훈육의 방식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그랬는데 희랍어 성경에 의하면 “의 안에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뭐 번역이 대동소의 합니다. “의로” 의 안에서 누군가를 훈육하기에 성경이 적합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교육에 있어서의 중심성에 성경이라고 하는 점에서 볼 때에 의로 훈육 받기를 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훈육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내용과 방식인데 첫째 내용이 무엇이냐? “의”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의”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의”는 지난 사경회 때 여러분들에게 히브리서 3장 15절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는 가운데 거기에서 거론했던 우리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의는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의로운 생활입니다. 그리고 그 의의 기준을 성경이 제공해 주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생활이 철저하지 못한 이유들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교육의 부제에서 찾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시대가 옛날보다 훨씬 더 악해졌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과거 농경사회 보다도 현대의 산업사회가 훨씬 다변화 되고 서로의 이익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기 때문에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 하나님의 법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의 대부분의 변명의 밑에 깔려 있는 것은 뭐냐하면 “이제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는 그리스인이 살아야 할 삶의 표준인 그 자체를 어김없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이제는 생각하기 힘든 시대다. 그러니까 그러지 말고 삶에 있어서 상대주의를 택하자.”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살아라고 하는 모본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주님의 희망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지 그것이 우리의 삶속에 그대로 실현되기까지 주님이 기대하신 것은 아니다.
그리고 현실에 있어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도덕적 상대주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변명일 뿐입니다. 보다 더 정확한 오늘날의 문제는 무엇이냐면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라고 하는 의에 대한 분명한 기준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는데 오늘날 기독교 교육의 위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절대적인 의가 무엇이냐? 그리고 어떠한 것이 우리의 삶의 표준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우리의 삶에 있어서 과연 절대적으로 우리의 삶의 옳고 그름을 잴 수 있는 그런 표지가 있느냐고 하는 것에 대해서 점점 상대적이 되어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성경의 고전적인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라고 믿는 우리들은 오늘 우리들이 여러 주간 동안 상고 하고 있는 이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17절을 통해서 보는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은 우리의 모든 믿음과 삶, 그리고 신자의 모든 행위의 절대적인 표준이 된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의로운 삶이라고 하는 명백하고 분명한 기준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반론을 제기합니다. “2,000년전 혹은 3,500년 전에 쓰여진 이 성경이 오늘 이렇게 변화된 세상가운데서 어떻게 우리에게 절대적인 표준이 될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성경이 쓰여질 때에 볼 수 없었던 사회의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성경이 과연 이렇게 변화된 세상에 대해서 충분히 말하고 있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술은 그때부터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치고 그 훨씬 후에 생겨나게 된 담배에 대해서는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또 그 훨씬 후에 생겨나게 된 마약에 대해서는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그 당시의 사람들이 보았으면 이것이 뭐하는 것이냐고 물어 보았을 컴퓨터 이용과 그리고 컴퓨터와 관련된 사이버 범죄에 대해서는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어떤 분이 그런 말씀을 오래전에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상당히 유명하신 분이었는데 황당합니다. 중,고등부 학생들을 데리고 그 교회에서 수련회를 갔다가 한 학생이 죽었습니다. 그 고별설교 현장에서 교수님이셨는데 교회 안에 중,고등부 제도가 있는 것에 대해서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도 없는 중고등부를 누가 만들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중,고등부가 없죠. 중,고등학교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따지면 뭐 성경에 수련회에 가서 죽으라는 이야기는 있습니까? 고별 설교를 그런 식으로 하라는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분이 상당히 인테리면서도 혼돈하고 계시는 것은 뭐냐하면 물론 신학을 안 하셨으니까 그렇겠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명백하게 이것은 이것이다 라고 가르쳐주는 것만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의 정신에 의해서 정확하게 해석된 어떤 현상에 대한 진단들, 가르침들, 그러니까 성경 하나 하나에는 없지만 그러나 성경 전체의 정신에 미루어볼 때에 아주 명백한 가르침. 이런 것들이 성경에 기초한 권위를 가진 성경적인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믿고 있죠. 그러나 안식교인들을 비롯한 많은 이단들이 삼위일체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는데 특히 여호와증인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삼위일체라고 하는 표현이 성경자체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그 말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특별계시라는 말은 성경에 나옵니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용어를 가지고 말할 문제가 아니라. 성경전체가 어떤 한 가지 상황에 대해서 통일된 가르침을 주고 있을 때 그것은 성경과 거의 같은 권위를 갖는다고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성경은 많이 배우고 성경을 많이 익힌 후에는 그 성경적인 사상의 안목을 가지고 자기가 처해진 사회와 그 시대의 교회를 해석하고 분석해서 그래서 거기에서 참된 어떤 신앙의 도리들을 찾아내는 작업들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자체만을 달달달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단에 속한 교파에 몸담아 보신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단의 대부분의 특징이 뭐냐면 성경 이외에 아무것도 읽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해석하고 그 성경을 자신들의 어떤 교주가 아니라. 성경 자체를 해석하고 그 성경 속에서 어떤 사상을 가미해서 그 사상의 눈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자신들의 해석에 의해서만 신앙의 기준을 삼고 삶의 표준을 삼도록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지금과 같이 성경이 기록될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것 처럼 보이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있어서 의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기준이 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달나라를 여행하고 먼 화성에 집을 짓고 우주적으로 오고 가면서 사는 그런 세상이 온다고 할지라도 이상한 갑옷 같은 것을 입고 우주 공간을 둥둥 떠다니면서 서로 손잡고 음악을 듣고 컴퓨터로 채팅을 하는 시대가 온다고 할지라도 과학의 그런 발전과는 상관이 없이 성경의 가르침은 영원히 빛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의로운 생활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알수 있는 사실 하나는 결국 기독교 교육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삶을 살게 하는 대에 목적이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존재와 분리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성경이 동시에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일정한 도덕률을 사람들에게 강조하고 정신을 세뇌시켜서 어떤 식의 삶을 살도록 인간들에게 강압하는 그러한 방식의 세상의 이데올로기 교육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서 자신의 성품이 주님을 닮아가고 인격적으로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고 그렇게 주님을 닮아가는 인격 속에서 흘러나오는 삶, 그 자체가 주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서 기대하시는 의로운 생활의 기준에 부합하는 삶을 살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죄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보여줄수 있습니까? 어떻게 죄와 그리고 타락이 가득한 부패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통해서 우리들이 걸어가는 이 삶, 이 길이 올바른 길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수 있습니까? 우리가 함께 사회생활을 하다가 보면 누군가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죠. 물론 짝을 빨리 찾기를 원하는 그런 이성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목마른 사람들은 그저 얼굴만 번듯하게 생겨도 가슴이 쿵쿵 뛰고 어떤 특별한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가 뉘 집 아들이고, 뭐 성이 뭐고, 머리 속에 뭐가 들었는지 그런 것은 나중문제고 흰죽사발이 허였게 생겼으면 그러면 그 준수한 외모에 마음이 쿵쾅쿵쾅 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볼 때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고 우리들이 그런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 나면은 우리들이 어떤 사람이 얼굴이 예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어떤 인생의 세계에 대해서 알고 싶다든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영화 보면서 얼굴 반듯한 그런 여성이나 남성이 나올 때에 여러분들이 그 사람에 대해서 뭐 이렇게 그 사람과 같은 인생의 세계 속에 들어가 보고 싶다든지 그런 것 있습니까? 그런 것 아니지않습니까? 그냥 우리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물론 가끔 TV나 영화프로를 보다가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약간 정신병적인 현상이고 정상적인 상황은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정확히 분별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분별함으로서 우리가 비로소 이제는 주민등록증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통해서는 어떤 인상만을 받지만은 그러나 결국은 한 사람의 가슴 속에 인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반반한 얼굴이 아니라 하얗고 길쭉한 얼굴이 아니라 무엇입니까? 나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하며 살아갈 때, 그리고 내게는 없는 그 어떤 내면의 세계가 있는 것을 발견할 때, 그 때에 그 사람들이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결국은 세상 사람들이 그런 방식을 통해서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선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 우리의 의로운 삶입니다. 의로운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쉬운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모두 편안하게 다른 삶과 어울려서 지낼 수 있는데 의로운 길을 택했기 때문에 외톨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죠.
이 세상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정치적인 주관이나 신념을 따라 살다가도 가정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부귀와, 영화, 혹은 물질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미운 물건이 되어서 불행하게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물며 이 부패한 세상과는 거스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을 따라 살도록 요구하시는 의로운 생활의 성경적 기준을 우리들이 받아들이고 그와 끊임없이 부합하는 삶을 살려고 의로운 삶을 살려고 분투 할 때에 우리들이 고난과 박해를 당하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소수이고 주님을 거스리는 죄인들이 이 세상에서는 절대 다수입니다. 아직도 핍박이 있습니다. 아직도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될 의로운 삶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살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기준, 이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물론말이죠. 의로운 생활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아주 정확한 기준을 우리들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충만하게 채워진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신앙의 감화들이 우리 속에 없다고 한다면 그 삶을 우리가 살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불가능 합니다.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어떤 것들, 그리고 신앙의 감화가 가득하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의 표준이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우리들이 그 삶을 살수 있을 것 같아요? 없을 것 같아요? 없습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서 실지로 들은 이야기입니다. 돌아가면서 간증을 하는데 한 집사님이라는 사람이 나오더니 자기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연말에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증할 정도가 되니까 많은 사람들이 “야, 진짜 놀랍다.” 무슨 축복을 받았나. 그랬더니 하나님이 자기에게 너무 놀랍게 5천 만원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이 5천만 원을 주셨을까. 복권이 맞았다는 이야기인가.”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건물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사겠다고 계약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5억 정도 되는 것이니까 5천만 원을 계약금으로 받았습니다. 그랬는데 그 사람이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서 그 건물을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계약을 해지해 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법으로 보면 그것을 해지해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해지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계약 위반입니다. 그것은 계약한 사람이 갖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은 이 사람이 그 사람도 그렇게 부자는 아닌데 조그만 건물 하나를 살려고 5천만 원을 동원을 해서 계약금을 주었는데 이 계약을 이행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와서 계약을 해지해 달라고 사정을 했더니 “법대로 하자” 그리고 계약을 해지해 주지 않아서 5천만 원을 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웃지를 않는 것 보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축복관에 대해서 상당히 동의하시는군요.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일까요? 물론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 말고 성경의 법도 과연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저는 전도사 시절에 가난하게 세 들어 살던 집에서 경매를 받은 사람에게 쫓겨나본 적이 있습니다. 법적으로 우리는 보호 받을 수 없습니다. 주인은 어디 갔는지 찾을 수 없고 집은 경매로 넘어 갔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부는 눈보라 치는 겨울인데 당장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디로 가냐?” 그러니까 그것은 자기네가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순순히 말을 들으면 이사비용이라도 주지만 안 나가면 국물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법적으로는 아무리 하소연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쫓겨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의로운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이런 경우는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사람이 5억을 주고 5천만 원 계약금을 받았는데 자기도 그 돈을 가지고 다른 것을 살려고 5천만 원을 갖다가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계약을 못 지키니까. 자기도 이 계약을 못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나한테 뜯기고 나는 저 사람한테 뜯겨서 그래서 중간에서 결국은 날아가 버려서 계약이 파기되었다. 그러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예를 들어서 그 사람 때문에 손해 볼 수가 없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와서 계약을 해지해 달라고 그럴 때 그 사람이 해지해 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단 2%도 안하고 왔을 것입니다. 누가 해지해 주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안됩니다. 그러면 자기 돈인데 그 때에 그것을 돌려주면서 “나는 그리스도인 입니다.” 이것은 노력 없이 번 돈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솔직히 그 사람의 손해를 통해서 얻게된 획득된 그런 재물이지 않습니까.
그것을 축복이라고 간증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물건을 줍거나 돈을 주은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길거리에서 그런 돈을 주어서 아이들은 경찰서 갖다 주자고 그러는데 안 갖다 주는 사람 여럿 보았습니다. 물론 돈이 워낙 적으니까 귀찮아서 그랬겠지만 현행법상으로 물주이탈물 횡령죄입니다. 그렇게 세상의 법을 하나님의 법보다 높이 생각을 한다면 그러면 모든 방면에 있어서 그렇게 세상의 법을 하나님의 말씀의 법보다 철저히 지키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니거든요. 세상의 법과 하나님의 법이 있을 때 자기의 편한대로 골라가면서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의로운 생활이라고 하는 기준이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일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표준이 무엇이냐고 지금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느냐. 안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표준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의 표준이 그런 경우에 무엇이라고 말할까? 이것을 즉시즉시 판단할수 있는 그것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생활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표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모든 방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적당주의 삶이 되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늘 신앙의 어떤 원칙을 이야기하면서 항상 즐겨쓰는 부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현실적으로” “요즘세상에” 이렇게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은 “당신은 그러면 성경에 있는 모든 의로운 생활의 기준을 다 지킵니까?” 지금 제가 그 얘기를 할려고 하는 것이 나닌지 여러분도 알고 있지않습니까.
우리가 모두 그 기준에 부합하며 사는가? 살지못하는가? 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신앙이 어리고 또 신앙이 성숙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데 대해서 동의하는 한 기준이 있는데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는 의로운 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변명을 하면서 시대가 이러는데 현실적으로. 세상이 이렇게 어려운데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십시오. 세상이 부도덕 하기 때문에 도덕적인 요구는 증가됩니까? 감퇴됩니까? 세상이 부도덕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으로 살아야할 책임이 훨씬 더 큰 것입니다. 모두 환한 세상에는 환한 대낮에는 환한 불이 그렇게 필요가 없습니다. 어둡기 때문에 밝은 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빛을 비추어 주어야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생활, 의로운 삶입니다. 한번은 길거리에서 돈을 주웠습니까. 오래된 옛날입니다. 65만원을 주웠습니다. 경찰서에 가지고 갔더니 그 경찰관이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주워서 가지고 오는 것은 괜찮은데 “아, 정말 골치 아플 때 있다.” 그러면서 웃어요. 왜냐. 10원짜리를 들고 국민학생이 서너명이 “이거 주웠다.” 그러면서 가지고 온데요. 그런데 그것을 “거기에다 놓고 가라.” 그러면 법적으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꽤 여러장 되는 서류를 써야됩니다. 점유이탈물 습득의 건에 대해서 빽빽하게 주민등록증이 몇번이냐?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이 주민등록번호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것을 다 적어서 1년 14개월동안 영치하고 있다가 주인이 안 나타나면 통지를 해서 “이제는 이 점유 이탈된 이 물건이 당신 것으로 되었으니까 세금을 내고 이것을 찾아가라?고 해줘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0원짜리 들고와서 그러니 어떡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수 없이 써서 주기도 했는데 “이것이 아닌데” 그러면서 자기도 굉장히 답답하다고 그렇다고 해서 “아저씨 이것 길거리에서 주었는데요” 그리고 가지고 온 것을 “야, 너 가져” 그럴수가 있느냐고요. 교육상. 그런 우수운 이야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의로운 삶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한 아주 명확한 선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서 똑같이 살아가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법도 지켜야됩니까? 안지켜야됩니까? 하나님의 법이 지키라고 할 때만 지키는 것입니다. “지키면 안된다” 그러면 지키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법이 인정해 주니까 세상의 법이 가치 있는 것이지 인정을 안해주면 그것은 휴지입니다. 그래서 순교가 나오는 것 아닙니까.
오늘날에 부도덕한 사회와 타락한 세상, 불의한 이 세상이 결국은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기준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명백한 기준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북에서 내려온 학생이 대담을 하는 가운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자신들이 남한보다 역사적인 정통성에 있는 민족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일제에서 해방이 딱 되고 나서 기준을 세워서 일제에 거역한 사람들은 그 사람이 아무리 유능해도 다 처단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새 나라를 새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한 너희들은 뭐냐?” 일제에서 부역해서 먹던 사람들이 ( ? )그대로 들어오고 유능하고 똑똑하고 줄이 있다는 이유로. 그 사람들이 2공화국. 3공화국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분명한 의로운 생활의 기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그것을 실천하면서 살아갈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통해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 안믿는 자신들과 굉장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인데 보세요.
그런데 그런 생활이 이렇게 지식. 어떤 것이 의로운 생활인가 하는 뚜렷한 기준.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하면 그런 삶을 살고자 하는 열정적인 감화, 이 두 개만 있으면 되느냐하면 그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제가 한 증거를 대볼까요? 여러분 옛날에 처음 하나님 만나고 은혜 많이 받았던 때 있죠?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세상의 영광과 자랑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그 사랑 때문에 열열해진 적 있었죠? 그래서 영혼을 섬겼을 수도 있고 이런저런 일도 봉사했을 수도 있죠? 그렇죠. 그런데 그 때 순수했습니까? 안순수했습니까? 순수했죠. 열정이 있었죠.
그런데 이렇게 돌아보면은 왜 그렇게 부끄럽습니까. 왜 그렇게 창피하냐이거죠. 물론 그 순수한 그 열정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죠. 부엇인가 아쉬운 점들이 많았습니다. 내가 열심이 있다고 해서 열심이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독선적이 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한가지 옳은 것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막 극단화 시키면서 얼마든지 화평가운데 할수 있는 일들을 수많은 적들을 만들고 사람들을 상하게 만들고 그리고 독선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적 있지않습니까? 전혀 없는 모양이군요. 나는 많았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후회하지 않지만은 그러나 적용에 있어서 “왜 그랬을까?” 적용에 있어서 지금 만약에 내가 그 상황을 만난다면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도 함께 하나님을 섬길수 있었을텐데. 혹은 지금 내가 그 상황을 만난다면은 오히려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함께 그러면서도 내가 나의 가고자 하는 주님 안에서 내가 발견한 그 목표를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이 사람들을 격려하고 함께 데려갈수 있었을텐데 라는 그런 아쉬움들이 생각나면서 얼굴이 빨개지는 적 있지않습니까? “아, 진짜 그 때 열심은 있었는데 내가 왜 그렇게 미숙했을까?” 좋게 얘기하면 미숙하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왜 혼자 저 잘난척 했을까? 그런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무엇입니까? ( ? ) 적용의 문제입니다.
그런 것들은 선명하게 의로운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는 지식과 그 다음에 열정 이것 하나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훈련되면서 그러한 것들을 경험하는 그런 훈육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들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그 진리대로 살고자 하는 신앙의 감화가 있을 때에 정말 훌륭하게 그 감화를 의로운 삶에 적용시키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기쁨 속에서 살아갈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속히 회복 되어야 할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라고 하는 것이 “주님의 말씀대로 살자.”라고 하는 것이 어떤 운동권의 구호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구체적으로 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자.” 구체적으로 뭐냐는 것입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는 것입니다. 펄펄 붙는 애국심도 문제지만은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라를 위해서 살것인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이번에 중국에 갔는데 한국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나는 갈때마다 물오봅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있는 어느 한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에 대해서 막연히 택시를 탔는데도 그래요. 투덜대는 것이었습니다. “니네는 왜 그렇게 잘 살고 우리는 왜 이렇게 못사냐” 그러면서 하늘이 공평하지도 않다고 투덜대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사람” 그러면 “잘사는 사람”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보편적인 중국사람이었는데 기이하게 놀란적이 있다는군요. 그것이 언제냐면 IMF때였다는군요. 그런데 사실은 중국 사람만 놀란 것이 아니라. 전세계 사람이 놀랐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금 모으기 하는 것을 보고. 세상에 그런 민족 없습니다.
외국에서 빚 빌려다가 풍족풍족 쓰고 거덜 낼 때는 언제고 인제는 거덜났다. 그러니까 장롱에서 애들 돌반지까지 다 빼와서 그거 바칠려고 줄서서 있는 것을 보면서 중국사람이 한국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 있는 메스미디어들이 그것을 소재로 해서 중국사람들에게 교육을 많이 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봐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는 이해가 안간대요. 자기네는 나라가 그렇게 거덜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면은 돈 가지고 가서 금 사서 모은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에서는 돈도 믿을수 없고, 정부도 믿을수 없으니까 믿을수 있는 것은 금밖에 없다. 그래가지고 금을 사서 모을 것이라는 거였습니다. 그것이 공통된 중국 사람의 정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덜났다.” 그러니까 빚얻어다 풍족풍족 쓸때는 언제고 전부다 장롱에서 꺼내서 우리도 갖다 팔았습니다. 그렇게 전부 그것을 녹여서 금괴를 만들어서 컨테이에다 채워서 태평양을 건너 가는 것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한숨을 쉬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이거 진짜 괴이한 민족이구나.“
우리 민족은요. 진짜 세계에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과 상대해 볼수록 정말 사랑스러운 민족입니다. 좀 이렇게 일관성은 없고 좌충우돌 하지만 참 그런 백성은 없습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그것을 순진하게 다 꺼내 가지고 달러, 외국 여행갔다가 몇 십불 남은 것 까지 다 들고 와서 다 바꾸면서 그 애들 돌반지를 녹여서 컨테이너에다 싣고 그것을 수출하는 것을 보면서 미국에 갔을 때도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미국 사람들이 기이한 눈빛으로 그 동양의 한 나라를 쳐다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이한 눈빛으로.
분명한 사실 하나는 뭐냐하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인가 다를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을 향해 쏟아지고 있는 비난을 보면은 알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잘못하면 세상은 굉장히 많이 분노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많이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말은 안해도 상당히 기대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기대하지“ 그러면서 물어보면 자존심이 상해서 ”굉장히 기대한다.“ 이렇게 말 못하지만 그러나 실망하는 것을 보면 기대하는 정도가 어떤 정도인지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죠.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결국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요구에 맞추어서 사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진실한 성도가 되어서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입은 백성들에게 주님이 기대하시는 삶을 살아드릴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런 삶을 살까? 그렇게 오랜 세월을 고민하면서 나의 욕망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고 세상의 법과 하나님의 법이 충돌할 때 세상에서는 우리들이 외톨이가 되어도 주님의 법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깃발을 들면서 살 때 그런 지속적인 삶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수 없는 그러한 삶의 한 방식을 우리들을 통해서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깊이 사랑하고 그 가르침 속에 젖어 살던 사람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을 만났다고 해서 옷깃을 여며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여미면 됩니다. 이모습 이대로 살면 그러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남다른 존재로 보이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돈 좋아하는 세상에 그 뇌물을 마다하는 사람, 요즘처럼 이런 세상에 자기의 이익을 버리고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세상 사람들이 보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교육을 통해서 우리들이 기대해야할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교육은 삶의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삶, 사람, 이것은 다 같은 말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교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믿음이 좋다는 말처럼 오해되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믿음이 좋다.“ 그러면 대게 어떤 것입니까? 황당한대도 잘 믿는사람, 그리고 도저히 생각할수 없는 것도 그 사람은 믿음으로 한번 모험을 던져보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것도 믿음의 개념일수 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믿는 사람, 교회에서 굉장히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우리가 믿음이 많다.“라고 할 때 그 믿음이 많은 사람의 삶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지 전체적인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전체적인 모습은 뭐냐하면 내면과 외면의 삶이 일치된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된 그런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메스컴이나, 이런 많은 기독교를 비아양거리는 이런 잡지들을 보면은 나는 한번도 ”불교신자가 어떻게 그럴수가 있냐?“ 그런 이야기를 별로 읽어본적이 없습니다. 그것 왜그런지 나는 기이합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조상신을 그렇게 여러해 동안 섬겼다는 사람이 어떻게 생활이 그 모양이냐?“ 그런 것을 읽어본적이 없습니다. ”대대로 무당을 한다며 어떻게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무당의 집안이 그럴수가 있느냐?“ 그런 얘기를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도덕적인 삶을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을 비아양거리고 욕할 때 마다 속으로 얼마나 가슴 아픈지 모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기대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쟁이야. 너마저 으으으“ 세상은 그렇지않습니까.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옛날에 총신에서 학장을 지내시던 박윤선 박사님이 계셨습니다. 저는 생전에 그분의 강의는 못들었습니다만은 그분 가까이에서 보신 많은 분들이 있지만 학교에서 회의가 있는 날에는 항상 회의 장소에 성경을 들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교 운영방안에 대해서 한참 이야기 할 때에 옳으냐? 그르냐를 이야기 할 때에 이 어른은 항상 “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성경에서는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살펴보도록합시다.” 그러면서 성경을 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삶에 땀이 배어 있지 않는 설교, 그 설교를 하는 설교자를 여러분들이 용납할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여러분들이 용서하고 안하고는 상관없지만은 주님이 ( ? ) 할수 없겠죠.
그러면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터득, 그리고 주님의 진리와 교훈에 대한 깨달음, 하나님의 은혜가 지식이 우리의 마음속에 쌓이는 모든 과정들은 철저한 그 깨달음과 깨우침 갈피 갈피 사이에 땀과 피와 눈물이 배어 있으면서 삶이 용해된 교훈들이 쌓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죄에 대해서 남다른 뛰어난 감각들을 가지고 있고 판단력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똑같이 죄 가운데 가득찬 세상에 살면서 성결해 질려고 몸부림 쳤던 사람들이 그런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는 그 의로운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제시하시는 삶의 표준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도부터 우리가 비난을 받고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어깨가 무거운 것입니다. “아, 정말 우리는 등불이구나. 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언덕 위에 높이 서 있는 동네이구나” 그러면서 우리들이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그런데 이제 두 번째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다.”그랬는데 그러면 “훈육한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결국 그리스도인의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의 어떤 독특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육은 어떻습니까? 교육 받는 사람들을 향해서 몇가지 잘못된 견해들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뭐냐하면 교육받는 사람들 속에 있는 가능성을 너무나 많이 믿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 절망적인 부패성 보다는 교육을 통해서 이끌어 내어서 에드케이션이란 말 자체가 “이끌어 내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에드캬레” 그래서 뭔가 속에 있는 선한 것들을 이끌어 내어서 그들을 잘 성장하게 할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들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서 과신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하면 교육의 목표자체가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행복입니다. 교육의 목표 자체가 그런 식으로 설정되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분명하게 성경의 계시에 의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어떠한 삶, 어떤 사람으로 이 사람을 만들어야 되겠다.라는 표준보다는 그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 그다음에 그 사람 자신이 그 교육을 통해서 이렇게 행복해 질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 속에서 교육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인본주의적인 교육의 성격입니다. 물론 그것들 가운데 우리들이 모든 것들이 다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오늘날 현대 교육자들이 생각하는 그런 생각에 성경은 그렇게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자신안에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별로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교육의 시점은 뭐냐하면 인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부패성과 죄악된 이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깊이 깨닫고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세울수 없으며 다른 사람도 순수한 인간의 자력으로는 그 사람을 새 사람 만들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겸비하게 인정하는대서부터 진정한 기독교 교육은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볼 때 기독교적인 교육의 시작은 절망과 함께 시작된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교육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이 끊임없이 그 영혼을 위해서 수고하고 그 영혼에게 교훈하고, 그 영혼에게 책망하고, 그 영혼에게 바르게하고, 그 영혼에게 의로 교육시키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가지가 없으면은 그 사람이 이런 교육을 통해서 새사람이 될수 없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그 교육에 있어서 기대되는 하나님의 은총은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기대만 하고 있는 요행심으로 바라는 은총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람을 새사람 만들고자 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실수 있도록 끊임없이 우리들이 섬김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섬김들을 사용하셔서 은총을 내리시고 그래서 그 사람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훈육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교육은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교훈이라고 하는 것, 그다음에 책망이라고 하는 것, 그다음에 바르게 한다.라고 하는 것 모두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기준이 있으니까. “이런 삶은 잘못된 것이란다.” “이런 삶이 바른 것이란다.” 라는 교훈이 있는 것입니다. 기준이 있으니까. “너는 잘못했다.” “너는 잘했다.” “이렇게 하면 안된다.” 하고 야단을 칠수 있는 것입니다. 기준이 있으니까. “너는 인격이 굽었다.” “너의 삶은 습관이 잘못 굳어졌다.” 그러면 “이것을 바로 펴야된다.”라고 말할수 있는 것 아닙니까. 모두다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독교 교육에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기대해야 할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뭐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의로운 생활 속에서 그런 의로운 생활을 위해, 혹은 그 의로운 생활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육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가능성을 끌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훈육은 때로는 하나님의 징계도 있습니다. 그래서 징계라고 번역이 된 것입니다. 징계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단을 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격려해 줄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훈육하는 사람에게는 훈육 받는 사람의 상태에 의해서 변호되거나 외곡될수 없는 아주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때리고 징계를 해서 그 자기가 가지고 있는 교육의 목적에 부합하게 이 교육받는 사람을 거기에 부합하게 만들려고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따뜻하게 격려를 해서 그쪽으로 데리고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벌을 주기고 하고, 어떤 때는 상을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상담을 하기도 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가지만은 그러나 하여튼 분명한 것은 그런 교육시킬 사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훈육의 목표 이것은 교육받는 사람의 상태에 의해서 이렇게 좌우될수 있는 가변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우리들이 중.고등학교 때 그것입니다. 참 그 때 왜그랬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는 중동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하복이 원래 덥습니다. 애들이 이것을 이렇게 내 놓고 다니는 것이 정상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그것이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애들은 그것을 집어 넣는데요. 이것을 바지를 벗어서 뒤로 한번을 딱 접은 다음에 혁띠를 해서 돌리고 가운데는 우리학교 마끄가 세겨진 바클을 끼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집어 놓고 다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덥기는 했지만 그렇게 집어 넣고 다니는 것이 옛날부터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 놓고 다니겠다고 싸우는 것입니다. 싸우는데 어떻게 싸우는지 아십니까? 학교 문에 들어설 때만 딱 집어 넣고 그것도 구겨지지 않게 혁대를 널널하게 하고 그리고는 들어가기만 하면 그냥 꺼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구겨지면 다시 펴고 그러면서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웃기는 것이 이것이 원래 내 놓고 다니는 애들은 집어 넣느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내 놓고 다니라고 매일 교문에서 훈육부들이 두들겨 패고 그래도 그렇게 얻어 맞으면서도 하여튼 줄기차게 내 놓는 것입니다. 집어 넣으라는 학교에서는 내놓느라고 난리고, 내 놓으라고 하는 학교에서는 집어넣겠다고 난리고,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기준이 있을 때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가르쳐만 주면 그것대로 살겠다.” 그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거스리며 살고자 하는 강력한 죄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중생에 의해서 꺽이고 은혜를 경험하고 신앙 안에서 살면서 그런 것들이 굉장히 무력화 되기는 했지만 영적인 관리를 잘못하면 다시 그런 경향성들이 득세하면서 우리를 그런 곳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에 목마르면서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거스리면서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어떡하니 잘 믿어야지. 이것이 하나님의 표준인데 어떻게 할래? 좀 살래? 너무 가혹하다고. 에이, 이 정도는 해야되는데 에이, 좀 깍아줄게.”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책망합니다. 그래서 언젠가도 말씀드렸습니다만은 칼빈의 설교를 쭉보면서 책망하는 것에 대해서 칼빈 자신이 그 부분에 대해서 설교한 부분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이야기합니다. 설교자가 자기와 같은 목사가 교인들이 잘못살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아이고 그러면 안되지. 아이고 그러면 안되는데” 그렇게 하면 부모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말이 그 당시에는 또 교육이 엄했을 때 아닙니까. “당신 아들이 말하자면 후래자식 처럼 산다고 생각을 해봐라.” 꼭 그렇게 표현이 나옵니다. 못되게 살고 마치 부모에게 한없는 불명예를 안겨주고 산다고 생각해봐라. 그래도 당신이 “오오, 너 왜 그렇게 살았니?” 이렇게 이야기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못되먹은 자식, 후래자식 같으니 너는 애미 애비도 없냐?” 하면서 야단을 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렇게 욕을 먹어야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러한 어떤 목양에서 오는 어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그런 갈망에서 오는 그런 책망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누군가가 그냥 자기 인간적인 고뇌, 권위에 의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가지고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루시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었나.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참된 복음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후에 우리는 물론 항상 하나님의 감동과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항상 사랑과 하나님의 모든 온유한 목소리로만 우리들을 인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크게 징계하실 것 같이 위협하는 음성으로 우리를 야단치십니다. 그 앞에서 벌벌떨면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기도합니다. 그리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 우리의 풀죽은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시면서 어깨를 두들기시고 우리를 다시 일으키셔서 어그러진 길을 버리고 바른 길을 걸어가도록 이렇게 훈련시키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렇죠.
때로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호소 하시고 때로는 불붙는 음성으로 우리를 책망 하셔서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감동시켜서 우리를 녹이시고 우리를 움직이십니다. 그렇죠. 우리도 자녀들을 그렇게 교육해야 합니다. “열정적으로 뜨겁게 사랑하고 열열히 책망하고 그러면서 무엇인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이 자녀들을 길러야되겠다.“라고 하는 그런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냥 너그럽기만 한 것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네 마음대로 살아라고 내버려 두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이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그렇게 징계도 하시고 책망도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녹이기도 하시고 이러면서 전체적으로 우리를 훈육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를 훈육하십니까? 소위 이야기하는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이 교정되었다.”라고 하는 간증들이 많지않습니까. 그런데 그 간증의 대부분은 항상 뭐냐하면 환란이 꼭 옵니다. 그래서 얼마나 신앙심이 깊은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것은 이 환란에 대한 경험이 얼마나 많으냐. 그것도 좋은 의미의 환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얻어맞은 그런 환란이 얼마나 많으냐가 그 사람이 관록인 것 처럼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가정을 허물어 뜨리고 사업을 박살 내시고 다니던 직장을 쫓겨나서 지하도를 유리 방황하게 만드시고 어쩌면 애들이 차에 치어서 반신 불수가 되어서 병원에 입원하게 만들고 고속도로에서 차가 굴러서 언덕으로 7-8바퀴 굴러서 병원에서 온 몸에 기부스나 하고 그렇게 하고야 겨우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부끄러운 간증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말이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이 가득찼을 때 우리가 성경의 어떤 깨달음을 통해서 이제껏 까지 내가 생각해 왔던 것들이 잘못 되었으며 이 잘못된 생각이 기초한 나의 삶이 우리 주님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아프게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에 통증이 전해옵니다. 그렇죠. “내가 왜 이렇고 살았을까?” 그러면서 막 아파합니다.
그것이 고속도로에서 언덕으로 서너바퀴 구른 것 보다 덜 아픕니까? 무슨이야기를 할려고 하는지 금방 알수있죠. 이 훈육이라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에 인격적인 감화를 통하지 않고는 훈육이 안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때리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그것이 훈육이 될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은 없습니다만은 어느 성도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기도하던중 집안에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속으로는 감사했습니다. “저 어려움을 통해서 저 사람이 깨닫겠구나” 기대하는 마음으로 불러서 얘기하면 “아, 많이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신앙으로 끌어갈려고 그러는데 평소에는 비관적이던 사람이 또 환란을 당하고 나서 어떻게 낙관적인지 “어이, 그런 어려운 일을 당하고 났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파요.” 그랬더니 “아, 목사님 저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뭐 이 긴 인생 사는 동안에 무슨일은 안 일어나겠습니까.” 그래서 그냥 해여졌습니다. 얘기가 되야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습니다. 막 슬퍼하면 내가 그렇게 이야기 해 줄려고 했는데. 보세요.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화를 통하지 않고는 훈육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레미야나, 호세아나, 미가나, 아모스나 이런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슬퍼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너희들은 어떻게 그렇게 내 마음을 모르느냐“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게 전달되었습니까?
그리고 나는 교육의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진정한 감화가 없다고 하는 것은 성경 들고 다니는 무신론자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움직이느냐는 것입니다. 감화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를 움직이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훈육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 말씀에 은혜를 받기 시작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 만들려고 하시는 그 열심히 격렬합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될래?“ ”너 내 사람될래?“ ”되겠으면 한번 해 보고“ ”뭐 안되면 내가 내년에 오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강력하게 훈육하시는가를 알게 됩니다.
야단치셔야 될 때 야단치시고 그리고 우리가 아파할 때 우리의 눈물을 씻기시고 피흘릴 때 우리를 싸매시고 하나님이 열열히 그 교육에 참여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을 깨닫게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다운 감화가 있을 때 이렇게 우리를 훈육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깨닫고 진짜 그 훈육을 받아서 그래서 주님 앞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모르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라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7)
3장 16에서부터 17절 까지는 모두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말 성경이 몇 군데는 좀 미숙하지만 그러나 제대로 번역을 했다고 봅니다. 특히 마지막에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 이 부분인데 대체로 잘 되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말 번역에서 “이는” 이라고 하는 번역은 대게 영어의 for정도 약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를 번역할 때에 대게 “이는” 이런 식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희랍어 본문에서 보면은 “신화”라는 접속사가 사용 되었는데 이것은 매우 강한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뜻이 잘 안 사는데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숨이 불어넣어 졌고. 유익하다. 무엇을 위해서. 교훈을 위해서 그 다음에 책망을 위해서, 그 다음에 바르게 함을 위해서, 그다음에 의 안에서 훈육하는 것을 위해서 모두 유익한데,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느냐하면은 그 목적이 뭐냐하면 지금 나오는 17절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기에 유익하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이냐하면 하고 아주 강한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인데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그리고 모든 선한 일을 위해서 온전케 하기 위하여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또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온전케 하기 위해서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 안에서 훈육하는 일이 필요한데 그것을 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시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훈육하기에 아주 유익한 책인데 그것을 그렇게 하는 궁국적인 강한 목적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는 것, 이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온전케 한다.”라는 번역이 아주 기가 막힌 번역이라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히랍어의 “알티오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히랍어에도 “온전하다.”라고 하는 것을 가르키는 여러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퍼팩트”가 아닙니다.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결점이 없는 완벽한 그런 것이 아니라. 충분히 준비된. 그런 정도의 의미입니다. 잘 갖추어진 그런 의미입니다. “완벽하다.”라는 말하고는 느낌이 다릅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여기에서 이제 그러면은 결국은 이것이 성경은 제일 처음에 3장 15절에 의하면“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하면 이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또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 이렇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것은 성화의 목적하고 아주 일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 두가지의 목적인데 하나는 구원과, 또 하나는 성화입니다. 성화는 다시 두가지 목적으로 나뉘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해지고, 그다음에 그가 선한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온전해지는 것. 이것입니다. 이것으로 집약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시간이 있으면 15절서부터 이 시리즈가 시작된 것을 다시 한번 쭉 들어보면 이제 15절에서 이야기 하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라고 하는 것도 어떤 의미인지 좀더 명확해 지리라고 봅니다. 지금 반복할 시간은 없습니다만 어쨌든 꼭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오늘 하나만 보고 다음시간에 마지막을 보겠습니다. 첫째는 뭐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게 한다.” 혹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갖추어지게 한다.” 이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조금 의아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갖추어지게 한다.” 그럴경우에 하나님의 사람이 굉장히 엉성하고 불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똑같은 단어가 디모데전서 6장에 씌어졌습니다. 거기에서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향해서 “너 하나님의 사람아” 그러면서 이제 신앙의 정절을 당부하는 그러한 호소를 합니다. 11절인가로 기억을 하는데 “너 하나님의 사람아” 그“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 히랍어로“안트로 포스투 데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구약에 배경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이쉬 엘로힘“이라고 하는 개념입니다. 똑같이 번역을 하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신약에 나타난 어떤 개념들을 거의 예외없이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약성경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경책을 이렇게 신약만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 있습니다. 문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어느 주일학교에서 ”성경의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시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런일이 있을 수 있느냐?“ 그랬더니 ”이것보세요.“ 그러면서 보여 주는데 기드온에서 나온 신약성서와 시편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 아이의 성경은 그것만 들고 다녀서 항상 신약성경하고 마지막에 시편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구약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구약을 모르면 신약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구약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경을 쓴 사람치고 구약을 무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약 속에서 살던 사람에 의해서 신약이 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무엇인가가 나오면은 히랍어에서 어떤 것이 나오면은 그것에 대해서 동일한 동치어라. 그러는데 같은 언어적 값을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가 무엇인지를 찾아서 두 개를 비교한 것이 아주 필수적입니다.
그러면 이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이 별로 안나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폭넓게 흩어져서 나옵니다. “이쉬 엘로힘” “엘로힘”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상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신약에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개념은 어떤 개념이냐? 여러 가지로 묘사될 수 있는데 우선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 그럴 때에 우선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는 하나님의 마음에 의해서 전적으로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선지자들이나. 이런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으로 많이 불리워졌습니다. 내면의 세계에 있어서는 그리고 영적생활에 있어서는 경건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쉬 엘로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번역될 때에 “거룩한 사람”이라고도 번역됩니다. 경건에 있어서 그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역면에 있어서는 이쉬 엘로힘은 강력하게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 “이쉬 엘로힘”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울고 구석에서 쭈구러져서 삼류 소설에 나오는 휴지 같은 그런 인생이 아니라. 뭔가 이렇게 상황을 제압하고 이해되지 않습니까.? 모세를 생각하면 되지않습니까. 어마어마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는데 믿음으로 그 상황을 제압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사역적인 특성입니다. 그것을 신약에서 그대로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이 디모데를 얼마나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알수 있습니다. 자기가 복음 안에서 낳은 자식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정말 얼마나 귀하게 보았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이 디모데를 생각할 때에 ”아, 그 사람은 ( ? ) 하나님의 사람이다“. 내면의 세계는 하나님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고 육신은 좀 연약하지만 그러나 경건에 있어서는 거룩의 사람이고 사역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려서 상황을 제압하는 그런 권위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재미 있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온전하지 못하냐는 것입니다. 아니 “세상이 사람을 온전하게 한다.” 그러면 말이 됩니다. 아직 다가오는 느낌이 없습니까.?세상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며 망가진 신자를 온전하게 하며 그렇게 말하면 말이 됩니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야!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한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아주 충격적인 교훈 두가지를 받는 것입니다. 그 첫째는 뭐냐하면 하나님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서 기대하시는 바가 얼마나 높은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기대하시는바가 얼마나 높은가. 그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구원하신 백성들에게 거시는 기대가 얼마나 높은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는 적용되지 않을까요.
(예를들자면은 인격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막나가는 인생을 살던 부모들 말고 아주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고, 아니 그런 것 다 집어치우고 그러면 부모가 좋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고 주님 밖에 모르고 일생을 산 거룩의 사람입니다.
그 때에 자라나는 자식을 보면서 그 신앙의 만족이 되겠습니까. “얘야 좀더, 좀더 은혜를 받아라.” “좀더 신중한 사람이 되어라.” “ 좀더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되어라.” “좀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어라.” “야, 그만하면 되었다.” “너 여기에서 더 온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거시는 기대가 이 정도 된다면은 그것은 절대 놀라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뭐냐하면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의 사람" 이것이 단순히 구원받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이 표현이 디모데를 두고 하는 이야기일수도 있겠다.
디모데전서 6장 11절에 가면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는 디모데 너 조차도 온전하게 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온전케 될 필요에 있으니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한번 손들어보세요. “목사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는 사람은 손들어보세요. 야! 실망했습니다. 하나도 없군요. 아, 여기 몇사람 손을 들었네요. 머리를 긁을려고 손을 들었는지. 그런데 그 사람도 온전케 되어져야 될 필요가 있다면 이 마음도 하나님에 의해서 온전히 지배되지 않았고, 그리고 경건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그 거룩한 교제속에서 살지 못할 때가 많고 또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에 그 상황을 뚜렸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지로서 제압할수 있는 그러한 사역적인 권능도 갖추어지지 못한 우리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은 얼마나 더 온전케 될 필요가 있겠는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죠.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여기에서 이제 세 번째로 그래서 결론적으로 얻는 중요한 가르침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이 비록 그가 뛰어나게 경건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는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권능을 소유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아직까지도 불완전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제가 여기에서 말씀 드리는 “불완전하다.”라고 하는 것은 고쳐져야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놓고 우리들이 그 다음 전개를 해봅시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고쳐지지 않는지는 제가 바르게함을 설교 하면서 많이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죠. 저의 버릇까지 공개 하면서 안고쳐지는 것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은 우리는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난 다음부터 우리 인간들은 세가지 점에서 근본적으로 인간이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선 첫째 조건은 뭐냐하면 인간속에 내제하고 있는 불완전성 입니다. 물론 인간은 이 세상에 창조될 때부터 창조될 때는 완전했지만 그러나 그 완전은 절대적인 완전이 아니라. 항상 깨뜨려질 수 있는 그런 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불완전한 정도가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의 세계의 깊은 부패성과, 파락한 경향성들이 내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환경이 좋고, 그 다음에 모든 것이 문제가 없는 상황에 그 사람을 둔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속에 내제하고 있는 잘못된 본성 때문에 죄가 없었던 시대처럼 그렇게 똑바르게 아름답게 자랄수 없는 그런 결함을 가진채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얘를들자면은 이런 것입니다. 등이 심각하게 굽은 물고기가 알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알을 수정을 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그 등이 굽은 물고기가 사는 더러운 오염된 물이 아니라. 아주 맑은 물, 전혀 환경적으로 문제가 없는 일급수에서 그것을 부화를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잠시 후에 아주 예쁜 치어들이, 작은 새끼고기들이 생겨났습니다. 자라나는 동안에 그들의 부모는 더러운 물을 먹고 중금속을 먹으면서 등이 할아버지 때부터 굽었습니다.
그런대 얘네들은 몇대를 거쳐서 그렇게 살아왔던 비정상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악한 조건들로부터 완전히 해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급수 깨끗한 물에서 온도와 수온을 비롯해서 모든 것이 최적의 상황에서 부화를 한 것입니다. 그래도 문제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죠. 있습니다. 국민학교 학생이라도 알아 맞출수 있는 대답입니다. 왜냐면 그 문제는 환경적인 문제는 없지만 내재하는 유전적인 문제가 벌써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런 존재로 태어났다는 점에서 똑바르게 성장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성장할수 없다는 것이 첫째이고.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는 뭐냐하면 외부적인 환경입니다. 외부적인 환경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 똑같은 것을 가지고 다시 비유를 들겠습니다. (엄마, 아빠가 맑은 물에서 사는데 거기에서 새끼가 부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치어가 된 다음에 그 치어들을 떠다가 아주 중금속으로 오염된 물 속에다가 집어 넣었습니다. 태어날 때에는 유전자 상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살아가는 환경이 이번에는 중금속과 아주 독한 물질로 오염된 물속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죽지는 않는데 살기는 사는데 이렇게 될 경우에 또 문제가 됩니까? 안됩니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에는 어떻게 된 것입니다. 이런 비유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때도 등이 굽은 상태에서 태어나고 그 다음에 놀게된 그 물도 아주 오염된 더러운 물 속에서 외부적인 한경을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인간이 정상적으로 성장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것보다도 원인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 원인하고도 밀접한데 사람이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기 전에는 이 우리의 영혼자체를 지배하는 것이 악한 영들의 세력이 지배를 합니다. 그 악한 영들은 기본적으로 그래서 ( ? )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한 자들의 마음을 복음의 광체가 비추지 못하도록 가리고 있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그 악한 영들의 세력이 이 불신자로서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 속에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악한 영들의 세력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하나님과 친화적인 관계에 있을 수도 없고, 또 있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가지면에서 모두 결함을 가지고 있는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이 그의 성장,하면서 살아오는 그 과정이 잘못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반드시 잘못됩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제기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믿으면 낫지 않습니까?” 낫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5-60살이 되도록 그가 예수를 안믿고 자신의 육신의 안목에 좋은대로 아무렇게나 살다가 나이 한 5-60이 되어서 겨우 예수 믿기 시작했다. 그럴 때에 그 사람과 어려서부터 신앙이 들어가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수시로 살면서 성장한 사람의 사이에는 비교할수 없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이 성화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 그리고 풍부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이런 것들을 경험 하면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이런 시대에는 그렇게 늦은 나이에 예수를 믿어서 예수님 닮은 어떤 훌륭한 인격을 갖춘채 한 10년 후에라도 인생을 하직 한다. 라고 하는 것은 거의 보기드문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 변한 것입니다. 조금 술도 좀 끊고, 담배도 좀 끊고. 못끊은 사람도 많지만. 그래도 하여튼 그렇게 하고 주일날이면 교회에 나오고 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 사업을 한다, 직장 생활을 다닌다. 세상살이를 하면서 살아왔던 그 40년 50년 60년 동안에 몸에 베인 그 삶을 왠만한 은혜 아니고는 결별할수 없습니다.
굵은 것 몇가지는 결별하지만은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 바탕 속에 흐르고 있는 그런 것들은 그대로 가지고 살다가 결국은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말할수 없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격렬한 체험이 없다고 할지라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어려서부터 살아온 사람들은 너무 축복된 사람들입니다.
뭐 어떤 사람들은 그러더군요. 너무 어렸을 때 은혜받으면 아이가 너무 빨리 종교적이 된데요. 그것은 김영옥씨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출처를 알고 이야기를 해야지. 그래서 종교적이 안되면 무엇을 기대하고 싶습니까.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기독교 신앙 교육은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렇게 종교적인 아이덴디티를 잃어버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렸을 때 사물을 판단할수 없을 그 때에 순수하게 받아들일 때에 그 때에 신앙을 아주 확실하게 심는 것입니다.
이 교회의 역사를 보세요. 영적인 인물로서 한 시대를 움직였던 많은 사람들이 10대 중반 혹은 10대후반 늦어도 20대 초반에 극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크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30이 넘어서 40이 되어서 예수를 만나고 무슨 큰 일을 한사람이 물론 없지는 않겠습니다만은 흔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데이비드 브레이너도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칼빈도 25섯으로 기억이됩니다. 그리고 또 누구입니까. 찰스 스펄젼 목사도 16살인가. 아주 확실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경험하고 17살부터 목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선교역사를 보면은 아주 더 분명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어렸을 때 그리스도 예수를 확실히 경험하고 확 심겨지면 아주 분명합니다. 나라가 썩고 문제를 일으키면은 젊은 그 청년 대학생들은 막 길거리로 튀어 나갑니다. 그리고 분신자살 하고 뛰어내리지 않습니까. 그것을 잘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쨋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은 그것이 안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그렇게 대모하고 “독제정치 물러가라.” 그러던 사람도 이제 나이좀 먹어 가지고 자기 사업이나 하고 있고 직장생활 하고 있으면은 대모할라 그러면 자식 생각나고 마누라가 생각나서 못합니다. 젊었을 때에 그리스도 예수를 확실하게 만나고 그리고 놀랍게 변화된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아주 분명하게 주님을 위해서 삽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에 신앙이 들어가서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체험을 가지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이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믿고 거듭나고 나면은 일단 우리 속에 우리를 지배하던 악한 영들의 세력들은 파멸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그런데 그래도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우리가 그냥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으로 충분한데 주님이 오셔서 처음에 주님을 영접할 때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 안에 생명의 원리를 심으신 것 까지는 좋은데, 이것이 늘 똑같은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입니다. 내가 은혜 가운데 잘 살고 성령이 충만하면 주님이 내 안에 풍부하게 살아계셔서 생명이 풍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면서 내 안에 여전히 부패성들이 남아있어도 그것을 누르면서 훌륭하게 죄를 이기고 유혹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내제하는 부패성, 그리고 또 환경적인 어려움,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어떤 부패한 경향성 이런 것들이 자꾸 나를 잘못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해도 어떻게 하느냐면 내 안에 은혜의 세계가 있습니다. 은혜의 세계는 잘못되려고 하면 그다음에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요.” 그러면서 회개합니다.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생깁니까. 생각이 많아지다가 행동으로 옮겨지고 행동이 반복 되면서 그것이 습관이 됩니다. 습관이 계속 반복 되면서 그 사람의 인격을 형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나쁜 것들이 그렇게 고착될 수가 없습니다. 뭐가 이렇게 행동으로 옮겨지기 전에 벌써 마음 속에 생각이 일어날 때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 나쁜 사람인데. 왜 저 사람을 저렇게 미워할까.” 예배드릴 때도 마음에 걸리고 그렇다고 해서 만나서 한번 골목에서 쥐어박은 것도 아닌데 누가 돌아다니면서 “저 자식 나쁜 자식이야.” 그러면서 욕하고 다닌것도 아닌데 사회의 도덕적인 통념으로 볼 때에는 내가 비난받을만한 일이 없는데
그런데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는 예민해져서 저 사람을 미워하는 이런 생각하는 것.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런데 나는 자꾸 미워하고 싶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면 가책이 되고, 기도 드리면 가책이됩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할때는 가책이 됩니다. 그러나 할수 없이 회개 합니다. 또 설령 그런 생각이 계속 되었다가 행동으로 옮겨졌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은혜를 거의 다 털어버린 사람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은. 내가 굉장히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한판 붙었습니다. “진짜 너 그럴거야.” 교회 안에서 한판 붙는 모양을 많이 보았습니다.
한번은 제가 있던 교회인데 아저씨 둘이서 멱살을 잡고 “이세끼, 저세끼” 그러면은 따귀를 때리면서 싸웠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하고 보았더니 한 사람은 강도사고 한 사람은 그 교회의 버스 운전기사 였습니다. 그런데 둘이서 막 싸우는데 “네가 운전기사면 다야.” 그러니까 이 사람은 “네가 강도면 다야.” 그러면서 둘이서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싸웠다고 칩시다. 안수집사 하고 전도사 하고 싸우는 것도 보고, 골고루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생각이 계속 저 사람이 마음에 안드는 것이 계속 있었으니까. 싸우지 평소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한번 말 잘못 했다고 그렇게 주먹을 휘두르면서 싸우겠습니까. 계속 미워하다가 그저 억누르지를 못했는데 펑 터지니까. “자식” 그러면서 때리고 여기에서 피가 쏟아지고 그래서 성도들이 막 비명을 지르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그 싸울때는 분을 못이겨서 싸웠어도 그다음에 계속해서 그것을 계기로 깡패의 길에 들어서는 사람은 없지않습니까. 그것을 통해서 “나의 달란트는 깡패다.” 그러면서 들어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무슨 깡패가 타고나는 것이 아니고 도둑이 타고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상하게 자기는 아무 재주도 없는데 싸워보니까 이게 잘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달란트구나.” 그러면서 몇번 행사를 하다보니까. 다음에는 괜히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은 근질근질 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 은혜 안에 있을 때는 그럴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뻣쳐서 “이 사람이” 그러면서 주먹이 달렸다고 할지라도 저녁때는 교회에 와서 대성통곡합니다. “하나님, 강도사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입니까. 사람을 패라고 강도사를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를 감당하라고 강도사를 만들어 주었는데 강도같이 사람을 팼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흠뻑 회개 하고나면 그 다음에는 자기가 그렇게 한것에 대해서 깊이 후회가 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이것이 고착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은혜 안에 살아갈 때에 그런 것이지. 사람이 은혜를 딱 접고나면 그런 생각이 안드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면 아니 뭐 기도가 되야지만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앞에 죄송한 생각도 들도 하나님이 야단치시는 음성도 들리지 그냥 아예 기도 자체가 안되고 아예 기도자체를 잊어버리면서 산지가 여러해 지난는데, 그것은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지못할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망가진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을 통제 못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우리가 반복적으로 악한 생각을 해도 가책을 별로 못느낍니다. 그것을 행동으로 계속 옮겨서 습관이 되었는데도 후회라든지 아픔이라든지 이런 것이 거의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매우 적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그것이 인격화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제 시편 1편에서 이야기 하는 악인, 죄인 이런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오랫동안 같은 행동을 되풀이 하면서 습관화 되어서 악을 행하거나 죄를 짓는 것이 말하자면 자신의 존재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망가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이제 설명이 가능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가 없고, 그나마 좋은 환경 속에서 아주 주위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랄 경우에는 좀 덜 망가지고 그리고 집안도, 집안의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성품도 망한대다가 환경도 아주 고통스러워서 거기에서 아주 갈등과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은 아주 확 굽어버립니다. 그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이렇게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벌벌 떨고 자신이 행복해 질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고,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무엇인가 기여해 주는 사람을 위해서는 생명까지 바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면서도 이 세상이 행복하고는 거리가 먼 세상이 된 이유가 바로 망가진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살기 때문에 부딪치니까 사람들이 또 망가진 자식들을 낳고, 그들이 망가진 자식들끼리 또 결혼을 해서 또 망가진 사람들을 낳고, 또 그 망가진 사람들이 부딪치면서 이 갈등으로 가득찬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죄가 몰고온 참혹합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들은 그렇게 제쳐놓고 믿는 우리들은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기 전에 우리들이 많이 망가졌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계속해서 은혜 안에서 살면 두가지 작용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더 망가지지를 않습니다. 아까 같은 그런 원리에 의해서 더 망가지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하면 풍성한 은혜 안에서 살면 이제 서서히 옛날의 잘못된 것들이 고쳐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아주 절대적으로 여기서부터는 망가지는거고, 여기서부터는 안망가진거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죠.
또 한쪽으로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회복이 되면서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또 이 습관이 이렇게 잘못해서 베일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수 있습니다. 안고쳐지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도서관을 가서 공부를 하는데 시립도서관입니다. 앞에 있는 학생이 공부를 하는데 그 때 나는 고등학생이고 앞에 있는 학생은 중학생인데 와!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귀에다가 카셋트를 꼽고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옆에 사람이 다 들리는데 다리를 달달달달 떨면서 왼손으로 볼팬을 돌리면서 수학문제를 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못해서 “야, 나는 너 때문에 도저히 공부를 못하겠다. 여기 있는 사람이 다 동감이다. 꼭 그래야 되느냐. 그러지좀 말아라.” 그랬더니 “예 알았습니다.” 30분 지나서 또 나중에는 책상까지 덜덜덜덜. 그러더니 나중에 쉬는 시간에 불렀습니다. “야, 너 형이 하지말라. 그러면 하지말지 왜 자꾸하느냐.” 그랬더니 자기가 하소연을 하는데 자기는 버릇이 그렇게 들어서 특히 수학공부 할 때는 쾅쾅 울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다리를 덜덜 떨고 볼팬을 돌려야지만 이 수학이 풀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아이를 딱 못하게 하니까 고통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뭔가 그래도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내에서 최소한 비슷한 행동을 할려고 애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볼팬을 만지작 거린다든지 아니면은 다리를 덜덜 떨지는 못해도 발가락을 꼼지락 거린다든지 하여튼 무엇인가를 할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안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도 계속해서 은혜 안에 살면 고쳐져 가는데 은혜 안에 살지 못하면 망가지는 정도가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을 때보다는 좀 나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여전히 예수 믿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망가질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그리스도 예수를 경험하고 그리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정말 좋은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가 노는 물이 어떻게 해야지만 좋은 신자가 되는지를 가르쳐 줄수 있는 가르침이 거의 없는 물에서 놀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고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진실한 신자가 되고싶다.” 라는 아주 사무치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은 보증수표가 아닙니다. 며칠 있다가 사라져버릴수도 있고, 몇 달 계속되다가 식어질수도 있고, 오히려 그것이 우리들의 경험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애절하고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다가 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식고 다시 회복되기도 하다가 식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경험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지를 가르쳐 주는 지식도 부족하고 또 주님을 위해서 좋은 신자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 어느 순간에 식어지고 말이죠. 그런 상황에서 무엇인가 신앙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을 잘못 알았을 때 그 때 그 사람은 굉장히 다른 방면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TV에서 나온 할렐루야 기도원 사건도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을 저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러나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전혀 거듭난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가. 거기에는 분명히 거듭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거듭났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는데 그만 그가 접하는 가르침들이 아주 기독교 신앙을 심각하게 외곡시키는 가르침에 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잘못된 신앙으로 쭉 들어간 것입니다.
제가 어느 신학교 나가서 강의를 하고 있을 때인데 이단에 속한 학생이 그 신학교에 와서 강의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학교는 이단에 속한 신학교는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런 것 저런 것을 몰랐습니다. 저녁을 한번 꼭 사고 싶다고 그래서 괜찮다고 몇번을 이야기를 했는데 그래도 꼭 한번 사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그래서 가서 저녁을 먹는데 한참 맛있게 반쯤을 먹었는데 자기가 사실은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아주 명백하게 이단에 속한 교파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저의 강의를 듣고 많은 인상을 받고 그리고 나름대로 은혜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책도 소개를 해 주고, 쭉 다 설명을 해주니까 아주 굉장히 공감을 했습니다. 그리고 깊이 “교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더니 마지막이 문제였습니다. “그래도 거기에서 받은 은혜가 너무 큰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마지막에는 저를보고 자기네 그 이단 신학교에 와서 좀 강의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강사료는 많이 줄테니까. 그래서 제가 “되었다.” 그리고 안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입니다. 일단 그런 것들이 잘못 들어와서 확 굽어지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그런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거듭난 사람이라고 해서 단숨에 거룩하고 경건한 습관만 몸에 배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안좋은 습관들이 몸에 배일수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경향성들이 계속 성장할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깊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는데 그때 망가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나기 전에는 망가진 상태가 절망적이고 거듭난 후에도 은혜 안에서 살 때는 괜찮은데 은혜 안에서 살지 못할 때에는 계속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망가져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기억을 하셔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지 못하면 우리들이 거룩해져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망가져 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주 적극적으로 망가져 간다.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틀림없습니다.
우리들이 몇해에 걸쳐서 사경회를 하면서 5번 정도인가를 제가 다룬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호세아서에 나오는 패역을 이 문제와 관련지어서 여러분들이 좀더 진전을 보고 싶으면은 그 호세아의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알자.” 1.2.3.4.5까지 모두 들으세요. 특히 그중에서 4번을 좀 들으세요. 5번을 듣는데 거기에서 이야기 하는 “마쉬부”라고 하는 패역도 결국은 뭐냐하면 그런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백성들이었지만 신앙을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지 않으니까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패역된 생활이 깊이 몸에 배어서 이제는 어떤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자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하나의 노예가 된 가운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제 버려야지만 하나님의 물밀 듯 밀려오는 사랑을 경험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패역들이 빠져 나가고 고쳐지는데 고쳐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살지 못하면은 우리들이 단지 은혜만 없는 것이 아니라. 망가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딱 두가지입니다. 고쳐져 가고 있는 중이든지 아니면 망가져 가고 있는 중이든지 둘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는, 살아오면서 어느 한 순간에 확 하고 쏟아지는 은혜를 받는 것도 필요하지만 신앙생활의 참된 모습은 뭐냐하면 계속해서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굳이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만은 뭐 좋은 분입니다. 그분이 쓴 책들이 좋은 책인데 깊이면에서는 좀 그렇습니다. 요번에 인터넷에도 누가 들어왔던데 굉장히 널리 팔린 책인데 그 책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설명한 가운데 그분이 이런 잘못된 판단을 하셨습니다. 뭐냐하면 청교도들을 언급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우리들이 흔히보는 리잘루션 조나단 에드워드나 이런 사람들의 결심문, 그다음에 매일매일에 대한 어떤 반성. 이런 것들을 보면서 이렇게 엄격하게 자기를 체크 하면서 살아가는 이 생활이 노예와 방불한 생활이지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수 있겠느냐.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영적인 깊이를 들어내는 대목이라고 저는 여겨집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실재로 그렇게 청교도들이 엄격한 규칙속에서 살아 갈 때에 진짜 그들이 노예와 같은 삶을 구하기 위해서 그런식의 선택을 하면서 살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의 경험을 보면은 이것이 아주 분명해집니다.
뭐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깊은 은혜 속에서 살지 못할 때에는 삶에 대한 생각이 아주 단순하고 말하자면 유치하다. 그럴까. 아주 철이 없습니다. 삶에 대한 생각이,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깊은 은혜 속으로 들어가면 마음속에 어떤 갈망이 생기느냐면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한 삶을 살고 싶은 갈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조나단 애드워드 처럼 살수 없을까“라고 하는 그 책에서도 보면은 애드워드가 그런 고백을 하나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온전한 성도가 단 한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그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기 위한 어떤 갈망이나, 명예욕이나 그런 것들이 아니라. 심지어는 하늘나라에 가서 상 받을 어떤 그런 욕망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살고 싶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에게 그런 마음이 있지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아멘을 해서 지원을 해야되지 않습니까.
제가 기도하면서 눈물이 날 때에는 최근에도 발견한 사실인데 뭐 이렇게 공포가 느껴지거나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한테 요절나지“ 그래서 눈물을 흘린적은 거의 없는 것같습니다. 요번에 우리 열린신문에 보면은 어느 자매님이 간증을 썼는데, ”전에는 율법으로 시부모님을 섬겼는데 변화를 받고 보니까 복음으로 부모님을 섬기는 비밀을 알았다.“ 아주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안 읽었죠. 여러분 한번 읽어보세요. 그런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의 두려움 이런 것 때문에 눈물이 나고 그런적은 없는데 항상 한가지를 생각을 하면은 그렇게 슬프고 눈물이 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면 즉시 들어오는 생각이 “나는 이렇게 살면 안되. 주님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베풀어 주셨는데 아, 나는 이렇게 살수 없어. 교회도 잘 다녀야지. 내가 잘 다니나? 주의 일 충성해야지. 내가 오늘도 충성했나? 기도 많이 해야지. 내가 오늘다 기도했나? 친구들을 용서해야지. 내가 용서했나?” 이것이 멍애냐구요. 이것이 노예의 삶이냐구요. 절대 아닙니다.
그런 삶을 요히려 주님의 은혜 안에 있는 성도들은 즐깁니다. 그 속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오늘은 왜 이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 양반은 상당히 잘못 본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을 살 힘도 없는 사람들에게 “살아라.” 강요하고 “이것도 안살면 인간도 아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것은 노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은혜 속에 있는 사람들이 더 훌륭하게 살아야합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을 합니다. 저는 그 시절에 스물 몇살에 변화 받고 예수를 믿은 다음에 조나단 애드워드가 누군지. 뭐가 누군지 알기는 무엇을 압니까. 그런데 똑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나면 이렇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가장 강하게 움직이고 나로 하여금 언제나 하나님께로 받은 은혜만 생각하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가책이 되게끔 만드는 성경 구절을 써서 우리집 사람이 증인입니다. 부엌에, 찬장에, 책꽂이에 심이저 화장실에 다 붙이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회개하고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바쁜 직장생활 속에서 지키기 힘든 경건생활과 싸우면서 노트를 만들어 가지고 “내 기도는 어느정도 만족스럽게 했는가? 성경은 만족스럽게 읽었는가? 그리고 내가 깊이 죄 지은 일이 없는가.?”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도 그런 노트를 만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래 나중에 세월이 많이 흘러가고 신학을 하고 보니까 내가 원조가 아니라. 나보다 먼저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뭐냐하면 그분은 전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런식의 삶을 예속되는 것 같은 노예적인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금욕주의자입니다. 고행주의자고 그것은 출발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목표를 세워놓고 그 목표대로 못 살았다 그럴 때 막 나를 정죄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못 살았을 때에는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잘 살았을 경우에는 또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무슨 “나는 이렇게 살았으니까. 이정도 살았으니까 너 한번 볼래 너 이 노트대로 살수 있어.“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에 있다면 그것을 바리세인입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뭔가 이렇게 중대하게 잘못된 시각에서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보세요.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아보라고요. 그 은혜에 사로잡혀 보라고요. 그러면은 전혀 우리가 누가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더 온전해지고 싶고 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싶은 것입니다. 더 주님을 섬기고 싶고, 그리고 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놀랍게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말이죠. 한두번의 통곡하는 눈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을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의 계기는 마련될수 있겠죠. 그런데 기억하세요. 뭐냐하면 옛날에 여러분들이 어느 계기가 있어서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래서 복음의 이치를 알고, 그리고 시각이 딱 잡혀서 이것은 잘못된 신앙이고 이것은 깊이가 없고 이것은 올바른 길이고 알았다고 해요. 그런데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저절로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겨우 길일 뿐이고 그 속에서 깊이 하나님과 교류하는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은혜의 세계 속에서 서서히 내 자신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그러한 자신의 패역들, 그리고 온전하지 못하게 굽어있는 모습,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 주님을 믿지 않을 때에 굽어졌던 그 잘못된 인격들, 여기에서는 주로 인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품과 인격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 다음에 잘못된 사고, 죄악된 습성, 이런 것들이 서서히 빠져 나갑니다.
요음에야. 목욕탕이 집집마다 다 있고 왠만큼 사는 시대가 되었지만은 옛날에 한번 섯달 그믐날 목욕탕이 만원입니다. 그런에 명절을 맞아서 때를 벗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면 그냥 새카맣게 반들반들한 가난한 동네의 애들이 그 목욕탕에 옵니다. 그것을 보면은 피부가 벌써 색깔이 다릅니다. 먹구름이 온 몸에 지나갑니다. 그러고 있을 때에는 그 몸과 때가 혼연일체가 되어 있습니다. 신토불이입니다.
그런데 이놈들을 이제 아빠가 탕속에다 집어넣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빠가 못 나가게합니다. ”얼마 주고 들어왔는데 벌써 나갈려고 하느냐.” 그러면 거기에서 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 20분 있다가 밖으로 나오면 때가 퉁퉁 불어서 아까는 때와 몸이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는데 이제 그 표피에서 불어서 벗겨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수건을 말아서 때 수건하고 한번 이렇게 잡아 당기면은 국수같이 밀려서 떨어짐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도 하여튼 제일 싫은 것이 그 뜨거운 탕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좋습니다. 그것도 이제 역사가 말해줍니다. 그런데 아주 싫었습니다. 그래서 목욕만 보내서 같다 오면은 할머니가 보내시는데 제일 먼저 말씀하시는 것이 “왜 이렇게 빨리왔느냐.” 그랬습니다. 두시간도 안되었는데 벌써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다음에 종아리를 겉어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다. 혼연일체가 되어 있던 몸을 그것을 푹불어서 다 벗겨내야 되는데 그것이 싫으니까 첨벙 들어갔다 나와서 비누만 칠하고 나오니까 이것이 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면서 다 말라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오히려 목욕하러 갈 때보다도 더 상태가 안좋아져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단을 맞곤했습니다.
몸에 붙은 때도 물속에 들어가서 한참 담궈야지만 이렇게 혼연일체가 되었던 것이 벗겨져 나오는데 하물며 우리의 어떤 악한 경향성 이것은 어떤 생내적이기도 하거니와 또 외부로부터 들어 왔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오랫동안의 사고와 반복되는 행동의 인격 속에서 계속해서 굽어져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복음에 대해서 밝은 생각을 가지고 판단과 이런 것들이 올바르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뭐냐하면 은혜 안에서 사느냐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인지는 여러분 기억하시죠. 은혜가 성경에서 두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하나는 객관적으로 쓰인때는 하나님이 배풀어부시는 그런 은혜입니다. 또 은혜는 뭐냐하면 신자 안에 남아 있는 하나님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영적인 감각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예민해집니다. 은혜가 사라지고나면 예배시간에 계속 졸고, 그리고 하여튼 놀 때는 그렇게 신나는데 “성경봅시다.” 그러면 사람들이 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가 떨어지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이 안에 계속 역사해야합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을 향해서 따뜻한 징계와 은혜의 교제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깨뜨려지고, 변화되고, 새로워지고, 말씀 하실 때에 반응하고, 기도할 때에는 눈물이 나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때에 기쁨이 샘솟고, 하는 이런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일들이 계속 되어야지만, 오래 지속되어야지만 망가진 우리 자신들이 고쳐지고 새로운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망가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입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거의 맛보지 못한 아주 건조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진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경험한 다음에 영적인 생활이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나니까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이 뭐냐하면 내가 아무것도 느낄수 없었던 돌맹이와 같고 얼음장과 같은 내 마음에 이런 놀라운 느낌, 그리고 은혜의 경험들이 생겨났으니까 나는 이제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겨우 때 불리는 것입니다. 물속에 들어가서 때 불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산 세월의 길이가 얼마나 많은데 그것이 어떻게 몇주간, 한두달, 이렇게 뭔가 이렇게 자기가 예전에 느끼지 못한 것을 느낀다고 해서 자기가 완전히 새사람이 된 것같이 그렇게 생각합니까.
요즘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60년대 70년대 한참 많이 그랬습니다. 무허가 신학교가 굉장히 많이 난립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왜그렇게 신학교를 들어 갈려고 그랫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보면은 깡패였던 사람들이 목사가 되고 그런 일이 많지않습니까. 물론 그래도 아주 놀랍게 변화가 되어서 진짜 훌륭한 목사님이 되신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그런 사람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럴 때는 그런 것을 너무 성급하게 자랑하면 안됩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살인범 하나가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사람을 죽였는데 무기징역인가 받았습니다. 일본까지 도망을 가고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모범수가 되어서 감옥속에서 전도를 받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새 사람이 되어서 주간지에도 나오고 우리나라의 그래도 꽤 알려진 글쓰는 어느 여류작가가 그분의 일대기를 소설로 냈습니다. 그 후에 일입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몇번 교제를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 만나면서 “이 사람은 좀 아닌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워낙 저보다 나이도 많고 하니까. 또 경력도 있고 하니까. 굉장합니다. 깡패의 오야분이 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애인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가서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리고 신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다. 그러면 다 알았습니다. 별명이 딱부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학교를 갔는데 학교가 쥐죽은 듯이 조용했습니다. 그래서 “야, 이것이 왠일이냐.” 그랬더니 조금있으니까 어디에서 막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기숙사 쪽에서 들리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더니 막 의자가 날아다니고 와장창 다 깨지고 학교의 직원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어디 숨었는지 없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딱부리 그 사람이 소리소리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집어 던지고 유리창이 깨지고, 그것까지는 신학생이 화가 엄청 났나보다. 그것까지는 이해가 갔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가만히 들어보니까 “무슨놈의 신학교가 이렇게 사랑이 없어, 기숙사비 몇 달 못냈다고 나가라 그래” 그러면서 다 때려부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러면 신학교도 자기네가 돈을 내야지만 밥도 해주고 불도 때주는데 기숙사비를 몇 달 못내니까 아마 싫은 소리를 했나보죠. 다 때려 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까지는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하나가 이해안가는 것, 퓽하고 날아오는데 진로 소주병이 날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있다가 계단에서 기어 올라 오는데 완전히 술에 만취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분이 자기가 감옥에서 예수를 믿고 전도하는 이야기를 해 주는데 진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출옥 되어서 아무도 오라는 사람이 없는데 예수의 사랑에 미쳐서 강원도 쪽에 밞으면은 눈이 부릎까지 빠지는데를 혼자 헐떡이면서 걸어가서 주일이면 몇군데씩 다니면서 그렇게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차가 있어서 뭐가 있어요. 그러면서 막 예수의 사랑을 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거짓이었느냐면 거짓이 아니고 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옛날에 그 사람이 술먹고 알콜중독 되지 않고 폭력을 쓰지않고 그렇게 포악한 범죄를 하면서 살던 사람이 아니었으면 기숙사비 안냈으니까. “너 나가라.” 그럴 때에 그 사람 마음에도 “무슨놈의 신학교가 이렇게 사랑이 없어.” 그랬다고 하더라도 혼자 집에가서 베개 뒤집어 쓰고 열받았지 그렇게 난리 안칩니다. 그것이 다 하던 가닥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심겨진 것 없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소망이 없는가. 아닙니다. 더 은혜 속에서 살면, 그것이 빠져 나옵니다. 그리고 자기고 죽고 그것이 다 빠져 나가면서 자기도 죽고 그런 혈기도 죽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되게 하실려고 하나님이 무엇을 사용하신다고요. 성경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 갈 때에 그런 망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더 이상 망가지지 않고 예전에 망가졌던 자신의 성품과 인격을 고쳐나가는가 그것이 뭐냐하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 안에서 훈육을 받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뭐 어떤 벼락치는 것 같은 역사가 일어나서 무슨 피노키오 새사람 되듯이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종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간증이 있으면은 대부분이 뻥튀긴 것입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것이지. 전체적으로 그럴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들으면서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은혜 가운데 살면서 그 말씀을 깨달았을 때 그 말씀이 교훈하는 것입니다. “얘야. 이렇게 살아야한다.”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내가 여태까지 살았던 것과 너무 다릅니다. “아, 이것이 사람이 사는 길이구나.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가야할 길이군요.” 그러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막 책망을 하셔요. “ 너 그렇게 사니. 잘못되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나게 해서 그 사랑을 욕보인 자신의 죄를 미워하고 후회하고 뉘우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강력하게 책망해서 그의 마음에 양심에 뜨거운 가책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 아니구나” 마치 어린 아이들이 성냥을 달라고 그러다가 한번 성냥불에 데어본 다음부터는 성냥불을 죽어도 안받겠다고 도망가고 울 듯이 그렇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 감화를 받으면서 나는 이렇게 가고 싶은데 지속적인 감화를 통해서 그것이 곧게 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 안에서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훈련을 받으면서 참되고 의로운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이고, 어느 시절에 그런 식으로 은혜를 받아서 수십년 묵은 그 망가진 사람이 고쳐지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진짜 은혜 안에만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빚으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새사람이 됩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훈육함을 받는데 있어서 자신의 마음을 많이 닫고 있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지 이것을 활짝 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마음껏 빚게 내버려 두기만하면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기만 하면 얼마나 빨리 사람이 변해가는지 모릅니다. 놀랍게 변해갑니다.
여러분 그런 얘기 가끔 듣지않습니까. 단 한번 설교 듣고 은혜 받아서 뒤집어지면서 수십년 동안 먹었던 술 끊는 사람도 보지않았습니까. 그렇죠. 그것보세요. 에스라의 부흥회를 보세요.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하면서 사람들이 깊이 감화를 받아서 수문앞 광장에서 막 울고 그리고 돌아가서 어떻게합니까.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해서 아이들까지 낳아서 가족관계가 형성이 되었는데 보따리 싸가지고 다 돌려보내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와 영혼에 미치는 작용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강력한 말씀의 은혜로 새로워지는 역사를 일정기간동안 계속해서 경험한다. 그럴 때에 그 사람은 얼마나 놀랍게 빠르게 변화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거룩에 이르는 다른길은 없습니다. 무슨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무슨 산신령처럼 그렇게 하다가 뿅해서 갑자기 완전히 이상한 사람이 되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식의 성화는 성경에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니라.
사도바울 자신이 말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니라.”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그런 감동과 감화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그 4가지 작용을 통해서 더 이상 망가지지 않을뿐만 아니라. 망가진 옛사람의 잘못된 것들이 쫙 고쳐나가면서 어떤 사람이 되느냐하면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한 사람, 그래서 주님이 당신을 꼭닮은 하나님과의 거룩의 친교속에서 살고 한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기쁜,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말씀에 의해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훈육함을 받는 이런 다이나믹한 그런 경험들을 여러분들이 만약에 못가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거룩한 진전은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뒤로 후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동과 감화 속에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훈육함을 받는 이런 작용들이 여러분들에게 사라지고나면 여러분들은 성장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제 급속하게 여러분들이 뒤로 물러가면서 옛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죽었던 옛본성들, 기질들이 계속해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까 말씀드린데로 주님을 믿는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속히 망가져 가는 경우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되겠습니까. 우리들이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은혜없이 우리들이 어떻게 온전한 사람이 될수 있겠습니까. 부단한 자기 깨어짐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자라고 있는 이러한 어떤 변화들, 우리들이 어떻게 경험할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굉장히 잘되었습니다. 다음주에 마친 사경회입니다. 심각하게 신속하게 여러분들이 회복해야 할것이 뭐냐하면 기약도 없는 환경과의 싸움, 소용 없습니다. 죄와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미각을 회복하고 그 말씀에 의해서 감화를 받으면서 때로는 책망, 때로는 교훈, 때로는 바르게함, 때로는 의로 훈육함, 이런 것들을 받는 작용들이 여러분들 속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만이 여러분들의 소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 작용들이 여러분들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으면 지금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계속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며 그리고 지금 하나님을 위해서 쓸모없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쓸모없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허울밖에 남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고나면 짐승같은 마각을 들어내고야 말것입니다. 두렵지않으싶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좇아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합니다. 그래서 정말 은혜 안에서 살고,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는 그런 신령한 삶을 계속 사는 그런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1.온전하게 행하기를 기대하라Ⅰ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함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하려 함이니라.”(딤후3:17)
가르침을 받는 자의 삶, 마지막은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되기를 기대하라.”입니다. 15절부터 16절까지 성경의 유용성에 대해서 말한 다음에 그 궁극적인 목적이 17절에 보면 두 가지로 나오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두 번째로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고,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궁극적인 목표이고 성화가 바로 이것으로 이루어진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그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를 통해서 자신의 인격이 온전해 지기를 기대해야 한다.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입니다. 선한 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기에 선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이웃에게 보탬이 되는 착한 일이라는 그런 뜻이 됩니다.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본이 되는 착한일,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착한 일들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선한 일이라.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특별히 여기에서 성경의 효능을 이야기 하면서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한다.”라고 할 때에 이 선은 우리들이 사회 통념상 부르는 선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굳이 표현을 구체화 한다면 우리들이 사화통념상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기준에 의한 선을 육적 선이라고 말한다면 성경에서 특히 이 디모데후서에서 성경의 효능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이 선은 영적 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육적선, 영적선, 이렇게 나누는 것이 좀 이상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들어보면 이런 식의 구분도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서 이해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사회통념상 우리들이 받아들이는 선은 그 기준 자체가 누구냐면 자기와 이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한없이 고통을 주고 이웃에게도 한없이 고통을 주는 선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혹시 누군가가 그렇게 고통을 받더라도 후일에 누군가가 그것 때문에 행복해 질수 있다면 또 선이 될 수 있습니다.
사화통념상 어쨌든 이 선은 궁극적으로 사람, 자기와 이웃에게 유용하고 행복을 주는 그런 것이 선입니다. 그러니까 기준자체가 자기 자신, 혹은 기껏 해봐야 이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의 세계에서 이야기 하는 선, 즉 영적 선은 그것도 물론 포함하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선과 악에 대한 관점 자체가 사람이나 혹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하는 데에 있습니다. 많은 삶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부분은 하나님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사회 통념상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겹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겹치는 것은 아니고 아주 겹치지 않는 부분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에게 말씀하신 여러 가지 당부 가운데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걸어가는 사람이 뒤를 돌아보지 말 것에 대해서 권면하시면서 아비가 죽어서 장사지내게 된 사람이 “내 아비를 장사지내고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랬더니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그랬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만약에 부모가 죽었는데 그 부모를 자기가 내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르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죽은 자기 아버지를 버려두고 당신을 따르는 것을 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것은 문자 그대로 “죽은 아버지는 내팽개치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 마음속에 있는 장례를 지내고자 하는 효성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따를 수 없게 하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 속에 전적으로 임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저항의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이 뭐냐면 육신의 가족들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집착보다 훨씬 강한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에게 시험 삼아서 “죽은 너희 아버지는 영혼이 죽은 사람들에게 장사 지내게 내버려두고 너는 나를 좇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 사람이 진짜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취하는 사람인가? 취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것을 시험하시고자 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아야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또 해석을 잘못해서 내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 교회는 아니고 그 교회의 근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열열히 믿는 신자였습니다. 같은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버지가 지금 막 임종을 했는데 자기는 구역예배 갈 시간이 되었다고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에게 맡겨놓고 그리고 형제들이 울고불고 막 택시를 타고 당도를 하니까 임종을 지켜보던 그 누님은 간곳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디 갔느냐 그랬더니 구역예배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 가족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리고 더 웃기는 것은 그렇게 해서 막 욕을 할 때 그것을 거룩한 핍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알려면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적용을 해야지만 문제가 없는데 그런 식으로 잘못 적용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그런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의 선은 어떻습니까? 자기 아내나, 자식이나. 부모를 잘 돌보는 것이 이 세상에서 선이지 않습니까? 또 예수님께서도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버려야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미워해야 한다. 히브리식 표현인데, 히브리 사람들의 표현에 의하면 아주 사랑하는 것과 그것보다 덜 사랑하는 것을 두 개를 비교할 때는 하나는 사랑하고 하나는 미워한다고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사랑이 하나라고 보는 것입니다.
“쇠고기를 사랑해? 돼지고기를 사랑해?” 왜냐하면 예를 들어서 “광우병 때문에 돼지고기를 사랑하고 쇠고기는 미워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그것 하나만 사랑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 표현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선의 기준과 성경에서의 선의 기준이 맞지를 않습니다. 또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박해 같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선이 어떤 것입니까? 무엇이든지 확신 있게 신념을 따라서 살고 하늘의 복을 받아서 이 세사에서 행복하고 평안하게 사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박해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선의 차이를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는 가운데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런데 그 심령이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다 깨뜨려진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다 깨뜨려진 사람은 복이 있나니.” 갈기갈기 다 찢어진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복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죠. 성경은 그것을 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애통하고 아파하고 가슴 아파서 뒹구는 사람들을 세상에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켜가는 것입니다.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그러나 안 겹치는 부분도 많습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다음에 두 번째 설명에 겹치는 부분도 기초가 다릅니다. 겹치는 부분도 (예를 들자면 도둑질 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인들만 가지고 있는 계명이 아닙니다. 그렇죠. 법에도 나오고 어느 나라에서든지 다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도둑질을 장려한다. 그런 나라는 없습니다. 도둑질을 다 미워합니다. 성경에서도 미워하고 그러나 기초 자체는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도둑질 하지 말라.”라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남이 애써서 벌어놓은 것을 침범하지 말아라.’ 그 사람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도둑질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단지 저 사람이 벌었으니까 침범하지 말라는 정도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도둑질의 동기인 탐욕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제재를 가하지 않으면 그 사람들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실수가 없습니다.
살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죽여도 좋다는 법을 가진 나라는 없습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할 때 왜 개, 돼지, 소는 그렇게 두드려서 잡아서 먹으면서 사람은 죽이지 말라고 할까요? 그것이 왜 그러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하는 이유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한번 잘 생각을 해보세요. 여러 가지 많이 있겠지만 우선 첫째는 무엇일까요? 죽이면 그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서 더 이상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명이 종식되는 것이 생명이 이 땅에 남아있는 것보다 그 사람을 위해서 매우 불행하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렇게 죽임을 당하므로 말미암아서 사회는 수많은 혼란에 빠집니다. 여러분 옛날영화, 사극영화 같은 것을 보면 항상 칼을 든 사람이 죽어라고 쫓아다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버지 죽인 원수 발자국 하나 그려가지고 쫓아다니는 얘기 나오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만 죽이면 여한이 없다면서 쫓아다닙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은 또 다른 원한을 부릅니다. 그 원한이 복수를 일으키면 사회전체의 구조가 불안해지고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그러니까 죽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그렇게 죽임을 당할 때 살아있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불안정한 삶을 살면서 사회에 미치는 영향, 파장, 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이 죽음 앞에서 당하게 되는 자기의 고통과 주위의 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고통, 이런 모든 것을 고려할 때에 그것은 악하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살인하지 말라. 그럴 때에는 결국은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살인 그 자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그 형상을 인간 스스로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월권행위입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것은 월권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겹치는 부분이 있어도 윤리학적으로 기초가 다 다릅니다. 그 기초가 다른 것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그것이 영적 선과 육적 선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고 할 때에 그 하나님이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시는 방법이 세 가지인데 우선 첫째는 동기를 새롭게 하심으로서 선한 일을 행하는데 온전케 만드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앞에서 다 말씀드린 것을 여기에서 요약을 하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같은 선이라고 기초가 다른데 그 육적 선이 영적 선과 아무리 겹쳐도 도저히 함께 가질 수 없는 구별된 기초가 영적 선에는 있는데 그 영적 선이라고 하는 것의 기초가 뭐냐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자, 무엇 때문에 신자가 거룩하게 살아야합니까? 무엇 때문에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합니까? 왜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살고 말씀이 금하고 있는 일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살기 위해서 많은 희생, 때로는 죽음조차도 감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또 자기 가족이나 이웃을 위한 행복도 아닐 때가 있습니다. 그렇죠. 그러면 무엇 때문에 신자가 그런 어려움을 당해야하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적으로 볼 때에 인간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추구점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행복은 언제나 인간이 자신의 본분을 알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긴 결과입니다. 그 때 인간이 드디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행복도 육적인 관점에서 본 그 선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기복신앙을 가지고는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기복신앙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주님을 잘 믿으면 반드시 이 세상에서 육적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는 번성하고 번영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하는 신앙이 그것을 믿고 그것을 기대하는 신앙이 기복신앙, 혹은 구복신앙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으로 설명이 안됩니다.
예를 들자면 주님을 너무나 영화롭게 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애썼던 믿음의 사람들이 그 시련을 극복하고 나중에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아서 그래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죽어라고 고난을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사람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을 버리고 현실과 야합한 사람들은 육적인 관점에서 보면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다가 죽었는데 주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애를 썼는데 마지막에 돌아온 것은 형장의 이슬로 남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위해서 선한 행실을 하려는 사람, 그 하나님 앞에서 선한 행실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동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면 영적 선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선한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요한복음 15장을 설교하면서 종과 친구의 이야기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죠. 그것을 설교하는 가운데 상세하게 여러분들에게 해설을 했습니다. 뭐냐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 없이 단지 하나님의 일에 열심히 몰두하는 것은 그것은 종으로서 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계에서 종입니다. 좋은 의미에서 종이 아니라. 일 자체의 노예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일을 그러면 그만 두어야 되겠다는 것은 노예처럼 섬기지도 않으니까 그것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면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진전이 없는 사람들이 단지 열심히 일하는 것은 하나의 주님께서 정말 원하시던 당신의 친구, 당신의 사랑하는 가족과의 관계가 주님이 원하시던 관계인데 그런 관계 속에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종처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렇게 가족관계로서 섬김의 정신에 있어서 종처럼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런 관계가 단절된 가운데 노예처럼 일을 일하고 일 자체 안에서 성취감을 맛보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일생을 살아도 열심히 일하면서 살았지만 그러나 주님을 섬긴 날들로 기록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자기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가르침을 받는 자의 마음속에 이런 영적 선을 회복시켜줍니다. 다시 말하면 선한 모든 행실을 행하는 행동을 하는 선한 생활을 해 나가는 근본적인 동기요. 이유가 되는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회복시켜주는 놀라운 힘이 성경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그냥 처음에는 안 그랬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냥 차갑게 일만 남아서 ‘이것은 내 일이니까 내가 이것을 안 하면 교회에서 사람들이 욕하겠지 내가 이것을 안 하면 교회가 안 돌아가겠지.’리고 꾸역꾸역 하는 것입니다. 아무 기쁨도 없고 아무 은혜도 없습니다. 그냥 꾸역꾸역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러 가지 회의를 갖는 것입니다. ‘야,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이렇게 일을 해서 뭐하나? 마음에 아무 기쁨도 없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의식도 없고, 그냥 꾸역꾸역 해 나가는데 야, 이거 내가 무슨 일의 노예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 해서 뭐하나?’그리고 또 그만둡니다. 그만 둬 보면 하나님과 관계가 확 가까워지느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근본적인 그 문제는 일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관계의 현주소를 일이 있을 때는 일 때문에 들어나고 일이 없을 때는 일이 없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갑니까?
안 가는 것 같은데. 제가 오래전에 설교하다가 그런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까? 제가 결혼하기 전입니다. 은혜를 조금 받기는 받았을 때인데 성가대를 했습니다. 그 교회의 문을 맨 처음 두드렸을 때 제일 해보고 싶은 것이 성가대였습니다. 우선 옷도 한 벌씩 주지 않습니까. 그리고 로얄 박스에 앉혀주고 특별석에 앉고 그리고 예배시간에 일어나서 찬양하고 그런데 되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 때 나일론 옷에다가 하얀 후드 두르고 되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세례받기 전까지는 또 안 된다고 해서 빨리 세례를 받았는데 그런데 그 성가대를 하는데 말이죠.
그리고 나서 처음 주님을 만나서 막 은혜 생활하다가 이제 침체에 빠졌습니다. 아, 그런데 주일학교를 가르치고 그리고 성가대를 했습니다. 아니 예배 시간만 되면 성가대 연주만 끝나고 나면 그 다음에 설교시간입니다. 그런데 내가 졸면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내가 이해를 합니다. 제가 왕년에 많이 졸았습니다. 그냥 조는 것이 아니라. 잠이 나를 덮습니다. 한참 예배를 드리는데 나의 코고는 소리에 놀라서 스스로 깨었습니다.
그런데 이 눈 끝이 천근만근 주저앉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안티푸라민을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녔습니다. 여러분 안티푸라민을 눈 위에다 발라보았습니까? 어떤 현상이 생기는지 잘 모르겠으면 오늘 집에 가서 한번 말라보세요. 오늘 밤에 잠은 다 잘 것입니다. 막 여기에다 안티푸라민을 한번 바르고 나면 막 불이 납니다. 한번 해보시기를 저는 강력하게 권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 때 제가 내린 결론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내가 이렇게 예배 시간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은 틀림없이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분석을 했습니다. 우선 첫째는 뭐냐면 고단한 직장생활, 그것이 첫 번째이고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면 다른 사람처럼 11시 예배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 나도 그러지 않을 텐데 이 주일학교가 내게는 문제였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8시 30분에 와서 주일학교를 열심히, 열심히는 뭐 열심히에요? 그냥 꾸역꾸역 그렇게 가르치고..
그런데 그 주일학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잘 가르치는 사람들은 피곤하지가 않습니다. 왜냐면 잘 가르치면 그 가르침이 여기에서 나갔는데 이것이 다시 자기 귀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자기를 리프래쉬 시키는데 논리도 안 맞고 어거지로 가르칠 때는 하여튼 가르치고 나면 온통 피로감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 가르쳤으니까 피곤하죠. 그러니까 이 예배시간에 이런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한 6개월 정도 되었나요. 주일학교를 쉬었습니다. 쉬어 보았는데 잠이 더 잘 옵니다. 성가대도 안하고 그것도 안했는데 더 아주 푹 잠이 오고 예배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제가 어렴풋이 어린 신앙이었지만 느낀 것이 뭐냐면 ‘아, 이것은 일의 다과의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예배 드리는 그 모습자체로서 내가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관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구나.’그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비유로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몇 번 말씀을 드렸을 것입니다. 이 교회의 역사에 보면 아주 탁월하게 신령했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세 가지 책을 즐겨 읽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책, 또 하나는 자연의 책, 그리고 또 하나는 인간의 마음의 책. 이 세 가지 책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책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연의 책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아이, 나는 왠지 봄날에 이 벚꽃이 만발하고 그 분홍색 벚꽃이 눈송이처럼 날리면 나는 성질이 나.”이러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도 안양에 아침에 일찍이 심방 같다가 가서 수술하는 형제 또 늦게 가서 수술복 입고 수술실 까지 들어가서 마취직전에 있는 형제 기도해주고 그리고 왔는데 올 때 우리 양전도사님 차를 타고 이렇게 꽃밭을 한번 돌아주었습니다. 너무나 좋았습니다.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조금도 짜증나지 않습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렇습니다. 시골출신이던, 서울출신이든, 할아버지든, 할머니든, 이제 아름다움하고는 거의 결별할 것 같은 노인들도 그냥 소녀처럼 좋아하는 것입니다.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좋은 숲 속에 들어가서 명상을 하고 하나님을 찾으면서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신령한 만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죠. 뭐 예를 들자면 찰스 스펄전 목사, 아름다운 호수 가에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자기의 이 통풍을 치료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했던 예나, 마틴 로이드존스가 그렇게 자연을 즐긴 것이나, 또 조나단 에드워드가 말을 타고 숲 속을 달리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이야기나,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모두 그런 숲 속에 들어가는 사람이 모두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명상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갈망하고 그러느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숲을 주어도 속에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 숲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생각하면서 주님을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심히 결핍되고 없는 사람들은 숲 속에 들어가면 불판에 삼겹살 생각이나 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육체를 가진 인간이니까 너무 많이 짐이 무거워지면 그러면 영적생활에 영향도 받고 또 시간이 없으니까 실지로 경건의 시간도 줄어들고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런 개연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일이 있고 없고에 다린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그분과의 관계에서 쏟아지는 생명의 은혜가 있는 사람들은 일이 넘치면 넘칠수록 정말 자신 같은 사람을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일하게 하신 다는 것에 대해서 한없이 감사합니다.
그래서 윗필드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썩어서 죽기보다는 닳아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그랬습니다. 나이 먹어서 썩어서 없어져 버리기보다는 닳아서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식의 삶에 대한 사모함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강한 소원을 가지고 그렇게 되고 싶은 것입니다. 아니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생명의 은혜가 흐르면 일이 없으면 일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깊이 명상할 수 있고 그리고 깊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점검하고 그리고 그분과의 개인적인 교제 속에서 주님의 만져주심의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일이 있으면 일이 있어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고 없으면 일이 없어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없으면 기도 많이 하고 그리고 성경 많이 읽어서 너무나 좋고 일이 있으면 일을 위해서 쓰임을 받아서 너무 좋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좋습니까?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과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이 서로 막히지를 않고 서로 유통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가능하기도 하고 가능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능하지 않을 때에 그 사람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이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뭐 여러 가지가 있지만 캐들어가면 뿌리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신앙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그 말씀을 통해서 4가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받게 되면 그런 받는 과정을 통해서 이 사람 속에 고갈되어버린 영적 선을 위한 기초, 즉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인격적인 사랑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가운데 확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섬김의 동기를 순수한 사랑으로 다시 가득 채워서 주를 위해서 살고 주를 위해서 일하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토요일 날도 섬김 영광의 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임직을 하는데 그런데 이런 것들이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어떤 직분을 만들어 놓고 어떤 삶을 거기에 고정시킨다고 하는 것이 필요하면서도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수시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면 죽을 때 까지 자동으로 성령 충만 그런 것 없습니다. 교사가 되면 그 교사로 임명장 받는 그 순간에 뭔가 휙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그것이 계속 불붙고 뜨겁게 마지막에 교사를 은퇴할 때 까지 그러는 것 없습니다. 그런 것 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개인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런 관계에서 수시로 변동이 있는 사람을 “당신 영원히 장로요.” “당신 영원히 목사요.” “당신은 영원히 죽어도 집사요.” 이런 식으로 임명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 일이냐고요.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런데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목사입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목사는 죽어도 목사라고, 목회를 안 해도 목사, 아니면 죽어도 묘비에 목사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집사는 안 그렇습니까. 마찬가지지. 한번 저렇게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면 죽어도 권사 죽어도 집사입니다. 계속해서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그런 직분이 주어지면 거기에 맞는 임무들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교회가 이 사람을 안수 집사로, 장로로, 권사로 이렇게 세워줄 수는 있지만 교회가 그 사람을 계속해서 성령 충만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게끔 교회가 무슨 물리적으로 그에게 무엇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본인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직분을 받으면서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경고한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이렇게 내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열심히 헌신된 마음으로 나 자신의 신앙이 바로 서는 것이 이 교회와 깊이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세워야 되겠다.고 하는 근본적인 의지, 그리고 그런 경건의 기초,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믿음의 비밀, 이런 것들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되면 안 됩니다.
주위에서 시켜줘도 본인이 고사를 해야 됩니다. 한국교회야 안 시켜줘서 탈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러면 이 세상의 누구도 계속해서 그런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그 동기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그것이 되도록 항상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고갈되기도 하고 다시 체워 지기도 하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뭐냐면 한번 고갈되고 나면 그것이 거의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집회 나가면 제일 속 터지는 것이 뭐냐면 여기에서 설교하면은 설교를 안 듣는 사람들이 4부류가 있는데 첫째는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 저 뒤에서 사람만 새어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부교역자들, 거기에서 사람들을 안내합니다. 세 번째가 그 교회의 장로님 권사님. 권사님은 좀 낫습니다. 교회 직분자들, 그리고 네 번째가 그 교역자의 부인들, 유아실에서 아기나 보고 있거나 아니면 와도 먼 산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를 위한 사경회입니까? 그 네 부류의 사람들만 변화되면 다른 사람 하나도 안변해도 교회는 성장하고 변화됩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그런 것을 해봐야. 그것이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에 대한 회복이 없이 계속 이렇게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은 일의 노예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런 식의 섬김은 아무 상급이 없습니다. 무슨 상급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말이죠. 여기 케치 프레이즈에서도 볼수 있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이 한국 교회의 커다란 문제는 뭐냐면 교회의 직분의 교직화형이라는 것입니다. 직제화 현상, 관료 조직화 현상, 이런 것들은 빨리 타파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입니다. 어느 교회의 임직식에 갔더니 안수집사를 세우면서 “여러분들은 이 교회의 어른들입니다.” 새파랗게 젊은 30대입니다. 그런식으로 바람을 넣어서 그 교회가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섬김은 삶입니다. 무릎을 꿇고 성도들의 발을 씻기고, 그렇다고 해서 성도들이 진짜 발 닦아 달라 그러면 안 되겠지만 그런 정신입니다.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가득해서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성도들을 위해서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 가는데 자신이 필요하면은 엎드려서 자기의 등을 밟고 지나가는 징검다리가 되겠다고 하는 그런 정신이 직분자의 정신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30대밖에 안된 사람들을 이제 교회의 어른이라고 띄워서 그렇게 해서 그 사람들이 몇 년 있다가 장로 되서 뭐라 그러겠습니까? 굉장히 커다란 누구 말마따나 담임목사는 고용사장이고 장로들은 대주주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있고 의식이 있는 젊은이들과 참신한 신자들은 자꾸 이 교회에 대해서 지긋지긋한 염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방식이 그대로 들어오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들에게는 고유한 일이 있고 그리고 또 당회가 구성되면 그 장로님들에게는 교회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직분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을 결정한다고 해서 자기 자신이 신분 상승한 것 같은 그런 식의 세속적인 사고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대접이나 받으려고 하고 말이죠.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근본적으로 그 속에 배어있는 것이 그리스도 때문이어야 합니다. “나는 이전에 핍박자요. 포행자였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기셔서 나를 주님의 복음, 하나님의 교회를 수종 드는 일군으로 삼으셨는데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영광인가 주님을 위해서 낮고 천한 자리에서 성도들을 섬기고 무거운 짐을 내가 스스로 짊어지고 그렇게 살아가겠다.”라고 하는 섬김의 정신이 깊이 배이고 그리고 성도들은 이런 직분들을 사람들이 갖게 될 때에 “축하합니다. 경사 났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앞에 와서 봉투가지고 와서 또 돈을 받고 무슨 선물을 갖다놓고. 이것이 무슨 회갑집입니까? 잔치집입니까?
제가 목사안수 받을 때의 일입니다. 선배목사님들이 나를 안수를 하시는데 저는 제가 가르치는 제자들과 함께 안수를 받았습니다. 내 옆에 앉은 목사님 둘이서 하는 소리가 뭐냐면 안수할 때 이렇게 머리에다 손을 얹고 하는데 안수 한 다음에 통성기도를 합니다. 등을 펑펑 때리면서 하는 이야기가 아주 제가 생생하게 들었습니다. 개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네들 끼리 이야기를 하는데 “야! 세상에 목사안수 받으면서 눈물 한 방울 안 나오냐?”그러면서 등을 펑펑 때리더니 “울어라. 임마. 울어!”너무너무 슬펐습니다. 그리고 그냥 꽃다발이 수없이 날아왔습니다.
그것이 누가 한 사람이 목회의 길을 걸어간다 그러면 옆에서 “야, 어떻게 저 길을 걸어가려고 하나?”그러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씻는 성도는 하나도 안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아무도 이 길을 십자가의 길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사안수 받는다니까 “야, 이제 서러운 시절 다 지나갔구나.” “너도 이제 개업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교회를 구멍가게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슬펐습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기쁘죠. 그렇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것이 있습니다. 이제는 목사다. 제가 아시다시피 목사안수 받은 지 몇 년 안 되었습니다. 제가 목사안수 받은 지 몇 년 안 됐다 그러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교회 개척하고 한참 있다가 받았습니다. 그것도 언젠가는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릅니다. 왜 이 교회는 축도를 안 하느냐 그래서 내가 아직 목사안수를 안받았다 그러니까 안수도 안받은 사람이 왜 교회를 해? 그러면서 등록도 안하고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그 때도 안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이 뭐냐면 그러한 것들을 이렇게 보면서 근본적으로 우리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처음에는 안 그랬잖습니까?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서 일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근본적인 처음 정신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렇죠. 왜 우리가 그 시골 길, 먼 길을 걸어서 주일학교 한번 가르치러 갈려면 30분씩 40분씩 걸어가야 되는데도 그 살을 에이는 것 같은 추운날씨에 꼭두새벽이면 나가서 영혼들을 가르치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렇게 기뻐하면서 그 영혼들과 울고 웃게 만들었던 그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입니까. 무슨 대접이 있습니까.? 이렇게 하면은 나중에 내가 연단을 받고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그런 기대입니까. 그런 기대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예수님이 좋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주님 사랑하고 영혼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그 마음으로 가서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했던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온전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동기 면에 있어서 그것이 온전하게 된 상태입니다. 쉽죠.
주님을 향한 그런 진실하고 선한 동기들이 식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풍조들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파고들어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자기를 들어내고 높이고자 하는 그러한 교만한 마음과 자만심들이 그것이 이제 교회에 와서도 그런 것들이 고개를 듭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고개를 들 때에 그런 것들이 어느 한순간에 단숨에 송두리째 뿌리뽑혀버리고 다시 처음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그래서 정말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오리다.’
숨질 때 하는 말 이것 일세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그리고 확 채워집니다. 그래 이제 교회의 교역자들이 많고 직원들도 많습니다.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지 않아도 함께 일하는 지체들은 많습니다. 내가 쳐다볼 때 제일 가슴 아픈 사람입니다. 무능력한 사람입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볼 때에 너무 마음 아픈 사람은 이 불성실하고 요령을 가지고 섬기는 사람들 왜 그러느냐 하면은 그들의 영혼에 그들의 그러한 태도가 그들의 영혼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렇게 사람 앞에서만 쉬운 길을 찾고 눈가림으로만 하고 이렇게 살아가는데 그 속에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있는가? 그리고 그분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랑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골의 어느 교회에 지방에 말씀을 전하러 내려갔는데 돌아가신 목사님을 교인들이 그렇게 그리워하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가신 목사님을 그렇게 그리워 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목사님한태는 참 썰렁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그랬느냐. 그랬더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살아계실 때에는 그분이 그렇게 귀한지 몰랐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들 투덜거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대에 뒤지고 감각도 없고 뭐 유학도 안 갔다 오고, 매일 고리타분하고 그렇게만 생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렇게 믿어서 되느냐고 매일 잔소리 하고 그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지나가고 보니까.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전도사 때부터 나와서 그 교회에서 이틀에 한번씩 나와서 철야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분이 정말 답답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워하기에는 너무 거룩한 당신이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그분은 하나님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시장의 물가도 모르고 쌀이 한말에 얼마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그냥 그 목사님 그러면 딱 떠오르는 것이 그 목사님은 그냥 하나님만 좋아하고 교회만 좋아했습니다.
어떤 때는 이틀씩 나와서 철야하는데 어떤 때는 철야도 안하시고 교회 와서 실컷 주무신데요. 그래서 “ 목사님 기도도 안하시는데 뭘 교회에서 주무세요? 편하게 사택에서 주무시지.”그랬더니 “ 아니, 나는 여기가 제일 좋다.” 그러시더래요. 그것이 그분을 향한 최고의 존경의 표현입니다. 하나님 밖에 모르는 목사, 주님 밖에는 사랑하는 것이 없고, 교회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던 교역자, 그것이 그 당시에는 세련되지도 못하고 감각도 없고, 요령 피울 줄도 모르고 그러니까 구닥다리라고 욕했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이제 철이 들고 보니까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영적 선에 기초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근본적인 동기들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어서 동토와 같이 얼어붙은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그 얼음장 밑으로 시냇물이 흐르도록 만들어줍니다. 결국은 그 따뜻한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의 바람을 통해서 사람들을 뒤엎고 있던 그 얼음들을 녹이시고 또 녹이시고 또 녹이셔서 결국은 그 흙바닥을 드러내고 거기에 꽃피고 그리고 아름다운 향기가 흩날리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봄 동산처럼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한 사람에게 깊은 감화와 은혜를 끼치고 그를 새 사람으로 만드는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일으킬 때 수많은 사람들은 씨앗이 떨어져도 결코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동토의 땅과 같은 그 마음에 놀라운 변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씨 떨어지고 꽃피고 열매 맺도록 하나님이 놀랍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들어보세요. 잠깐 그런 영적 선의 기초를 즉 우리가 행하는 선한 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기초해야 하는 그 영적 선의 기초를 가끔 잃어버리는 때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그 말씀을 제대로 가르쳐주면 그 말씀을 통해서 변화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항상 뭐가 있습니까? 희망이 있습니다.
고집대로 영죽을 험산 세상이
왜그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말씀의 감화가 확 오면 자기가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불쌍한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다 버립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느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에 놀라운 감화를 일으켜서 하나님 이외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고백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과 사랑하고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을 기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 이제껏 까지 하나님을 도저히 기쁘시게 할 수 없었던 그저 일에 매여서 일을 위해서 허우적거리던 그 사람을 정말 예수위해 살고 주님 위해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우리 주 위해서 복음 전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전 삶이 하나님 앞에 열납될 수 있는 향기로운 제사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놀랍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하는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 사람을 그 사람의 섬김을 온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 여러분 가운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하고 살아갑니다. 그렇죠.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교역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교사나 구역장도 아니고 그저 아무것도 교회에서 하는 것이 없는데요.” 그러면은 직장일이 주의 일입니다. 오늘 집에서 밥 안태우고 맛있게 밥해먹은 것도 주의 일입니다. “목사님 제가 새가족 부원으로 그저 하는 것이라고는 아침에 나와서 저 꽁다리 맨 끝에 서서 ‘안녕하세요?’. 그리고 인사하는 것 밖에는 없는데 그것도 주의 일입니까.?” 그럼 주의 일이죠. 그것도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있습니다. 한번 점검해 보세요. 정말 주님의 사랑이 그것을 시키고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그것을 하게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 때문에 그것을 하고 계십니까. 주님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주님이 너무나 좋고, 그리고 일평생 주님을 섬기는 것이 즐거워서 지금 임직을 합니까.? 생각해보세요. 그 일을 행하면서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하겠죠. 그렇죠. 말로 표현은 못해도 대답은 하겠죠.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속에서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서 자신의 최선의 것을 매순간 순간 드리면서 사는 것, 그래서 주님에게는 유익과 기쁨을 드리고 자신은 고난을 받는 것, 이것이 충성스러운 삶입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변화들을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받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모든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너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신이 많은 일을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이 섬기는 많은 일들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새로워지고 있는가를 점검하면서 “이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다시 하나님 앞에 엎드러지고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입어서 다시 자기가 이렇게 소생되어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전되지 못하니까 한번 일의 노예가 된 사람은 계속해서 주님의 친구로서 살아가기는 포기하고 일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무엇인가 섬기고 계실탠데 한번 그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섬기고 있는 그 일이 영적 선을 기초로 하고 있는 그런 섬김인가? 만약에 그런 것들이 결핍되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이 무엇인가를 섬기고는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무엇 때문입니까? 원인이 무엇일까요? 정말 환경 때문일까요? 순전히 환경 탓일까요? 아니면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영적인 한계일까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죠.
제가 여러분들에게 언젠가 그런 말씀드렸죠. 너무 일이 많아지고 오라는 데는 많으니까 지금이야 가야할지 말아야할지 생각하면서 결정을 하지만 그 때는 그냥 안가면 마음에 자유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라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까? 항상 능력도 없는 사람이 한 가지만 하면 좋은데..” 그리고 침체에 빠졌었는데 어느 날 생각했습니다. “야, 내가 할 일이 없으면 얼마나 슬플까?”
그러면서 어느 선배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현직에 계시는 연세 드신 목사님인데 자기가 아주 사랑하는 친구인데 한번 만났는데 그러더래요. “나 설교한번만 시쳐줘, 응?” 막 우시면서 “내가 사례금 안받고 해줄께.” 얼마나 외로웠고 얼마나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이 컸으면 그렇게 펑펑 울면서 “나 너무 외로워 죽겠어. 나 설교 좀 하게 해줘. 나 사례금 안 달라 그럴게. 나 한번만 시켜줘” 아주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아 내가 저렇게 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가슴아프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정말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섬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지 모릅니다. 섬기고 싶어도 적절하게 섬길 기회를 찾지 못해서 섬기고 싶지만 또 능력이 없어서, 섬기고 싶지만 또 시간이 없어서, 건강이 허락을 안 해서 심기지 못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가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택해서 나에게 일을 시키시고 나에게 주님을 위해서 선한 일을 행하며 섬기면서 살아가게끔 만들어주신데요. 야, 얼마나 감사합니까?
‘야, 오늘도 주님이 나를 쓰시려나? 그러고 하루에 오늘은 뭐도 하고 뭐도 하고 해야 되는데 하는 것도 많고 행사도 많고 하, 진짜 지긋지긋하다.’ 그런 것이 아니고 ‘오늘도 주님이 나를 쓰시려나?’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가운데 침체에 빠지지 않는 비결은 그것입니다. 꼭 해야 될 일이라고 판단하면 항상 이것을 하기 때문에 못하는 일들에 대해서 연연해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렇습니다. 심방 보내면 매일 심방가면서 “아, 공부도 못하고” 하면서 투덜댑니다. 공부하라 그러면 “아, 영혼도 못 돌보고” 기도하라. 그러면 “아, 뭐도 못하고 뭐도 못하고..”러면 그것 하라 그러면 기도도 못하고 일평생을 살면서 한번도 하나님 앞에 감사 못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맡겨 놓으면 이것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이것 때문에 못하는 이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경험입니다.
작은 교회에서 청년부하고 고등부하고 맡겨주었는데 고등부 막 하다보면 청년들이 막 떨어져요. 그러면 막 고등부 애들 심방가면서도 아 사실 청년들을 심방해야 되는데 청년들을 다 놔두고 이러면서 그다음주일에는 청년들을 찾아갑니다. 그러면 ‘아, 고등부 애들 이것들 회심도 안하고 그랬는데 어떡하나?’ 그것이 알고 보니까 나 깐에는 뭔가 살아있는 신앙의 아픔을 가지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굉장히 바보 같은 생각이며 하나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을 합니까? 심방을 가야 됩니다. 안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꼭 가야합니다. 그러면 책을 못 보는 것입니다. 책 못보고 기도 못하는 것 공부 못하는 것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심방에 날 쓰신다. 얼마나 감사하냐. 내게 기회를 주셨다.’
오늘 아침에도 병원 수술실에 가면서 가니까 문을 잠그고 수술실 들어가서 이제 안 보내 주더라고요. 그래서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금쪽같은 시간을 한 시간을 왔는데 저 문을 열어주시옵소서.”그리고 기도하고 들어가게 해달라 그러니까 나만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다 뒤집어쓰고 요것만 요렇게 내놓고 들어갔더니 누워있던 사람이 놀래서 의사가 왔는지 알고 “나야.”눈만 이렇게 나왔습니다. 칼 가지고 온줄 알고 이렇게 쳐다보았습니다.
‘같은 시간에 기도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을 털어 버려야 합니다. ‘아, 하나님은 곤고하고 수술하러 들어가는 영혼을 위해서 나를 보내시는구나. 나 이외에 누가 갈수 있으랴. 하나님이 나를 써주시니까 너무 감사하다.’ 그러면서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을 놀 때만 적용하면 안되겠죠. “아 오늘 일반 은총 속에 쉬게 하시려나 보다. 일년 365일 늘 이렇게 낮잠 자게 하시는구나.” 그러면 안 됩니다. 주의 일을 행할 때에 우리가 어떻게 모든 것을 알겠습니까?
제가 어디 중국인가 어디를 가서 강의를 하다가 그저 내 생각에는 목회자는 어전시간에는 교회 강단에서 보냈으면 좋겠다. 빠르면 한9시 10시 늦으면 12시까지는 그랬으면 좋겠다. 누가 강의를 듣는 청년이 “목사님은 오전에 어디 세미나나 집회는 절대 안 나가시겠네요.”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다. 간다.”“그러면 깨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어떻게 나하고 싶은 대로 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면 나는 어떤 삶에 대해서 더 좋아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깨고 들어와서 하나님이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라” 그러실 때 그것은 내가 해야 될 일이면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며칠동안은 새벽에 기도하게 하시더니 오늘 아침에는 말씀 전하게 하시는구나.’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그러면서 위로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항상 여기 써 주시니까 감사하고 또 여기 가면 여기에 써주시니 감사하고 아까 제가 경험했던 것의 정반대입니다.
이렇게 써주실 때는 저것 때문에 오만 인상이 다 찌그러지고 가슴이 녹고, 또 여기 써주실 때는 이것... 어떻게 모든 것을 다하면서 살수 있겠습니까? 늘 감사하면서 그러면서 우리가 힘이 없어서 못하는 것은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다 못하는 것은 주님이 아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면 우리들이 얼마나 일하다가 죽었느냐는 절량양(?)이 아니라 얼마나 순수한 동기로 주님 사랑하느냐 입니다. 하다못해 교회 앞에서 휴지하나를 줍고 벽에 낙서하나를 지워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면서 살았는지 그것이 주님 마음에 기록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정말 무엇을 주님이 시키든지 내 안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 차서 주님이 내 마음에 있어서 내가 무엇을 섬기든지 나의 이 꿈지럭거리는 이 섬김, 이 느려터지고 열심 있지도 못하고 유능하지도 못하고 어줍지 않은 나의 이런 섬김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신다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그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때문에 여러분 마음은 가득 차고 충만합니까?
바로 그런 것들을 회복시켜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하는 역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으면 우리에게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회복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불 들어오지 않던 우리의 섬김은 컴컴합니다. 그 캄캄한 암흑 속에서 갈등도 생기고 원한도 생깁니다. 그러다가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화를 받아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본분이라는 사실이 확 깨달아지고 나면 그 어둡고 캄캄했던 우리의 섬김의 방안에 불이 환하게 들어옵니다.)
언제든지 주 뜻대로
사용하여 주소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두 가지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2.온전하게 행하기를 기대하라Ⅱ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7)
가르침을 받는 자의 삶에 대한 마지막 부분으로 왔습니다.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는 이 마지막 구절을 지난 시간에 해설하면서 여기에서 말하는 ”선한 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세상의 관점과 성경의 관점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을 드렸고 두 번째는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온전케 되도록 성경이 우리를 만들어 주느냐? 할 때 첫째는 우리가 섬김의 동기를 새롭게 해 주심으로서 성경이 우리의 섬김, 선한 일을 행하는 동기를 새롭게 해줌으로서 우리로 선한 일을 행하는데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선한 일을 위한 동기를 새롭게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두 번째로 이 성경이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온전히 행하게 하는 두 번째 방법은 무엇이냐하면 지혜를 줌으로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 줄뿐만 아니라. 또 한편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섬길 때에 그분께 많이 영광을 돌릴 수 있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지혜로 가득 찬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성경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를 가진 사람이 이 땅에 있는 자신이 영감을 받아서 쓴 이글을 읽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헌신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면서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적은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경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영적인 선을 행하며 살아간 사람들의 발자취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성경을 살펴보십시오. 성경에는 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누구도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믿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큰 은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은혜와 함께 하나님 앞에 커다란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분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주님을 섬기면서 맞이하고 있는 다양한 어려운 상황들은 처음 우리에게 나타난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모든 주님을 올바로 믿고 잘 섬기기 위해서 겪게된 많은 어려움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미 경험한 어려움이었습니다. 환난이나 시련은 물론이었거니와 핍박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적인 어려움이나 경제적인 궁핍함, 거기에서 오는 마음의 가라앉음, 침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의 배신이나 인간으로부터 오는 실망, 건강의 위협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좌절을 느끼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가 오늘 처음 겪고 있는 어려움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서부터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모든 선한 일을 행하며 살기 위해서 애를 쓰던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던 일이었습니다. 공통적으로 경험하던 사건들이었습니다. 모두 그런 일들을 겪고 경험하면서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이 그러한 환경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믿음을 따라 살면서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쓸 때에 그들이 어떻게 놀랍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갈수 없게하는 수많은 환경들을 극복하고 승리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 놓여서 시험을 당하거나 위기를 맞거나 심지어는 너무나 감사한 일이 있을 때에는 우리와 유사한 상황에 처한 성경의 인물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그런 유혹, 그런 시련, 그련 핍박, 그런 고난, 그런 궁핍을 견디면서 어떻게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야 말았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상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커다란 유익이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까다로운 상사를 여러번 만난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까다롭게 구는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어느 직원이 자기하고는 회사로 따지자면 대리하고 지점장쯤 될까. 은행으로 따지자면 한참 높습니다. 얼마나 사람을 한없이 괴롭히는 그런 사람있죠. 전혀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사람을 막 피곤하도록 괴롭히는 그런 관리자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도 그렇게 자기를 병신취급하고 그러니까 화가 나서 지렁이도 밞으면 꿈틀한다고 그만 두겠다고 맘먹을 다음에야 뭐는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술직 직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군화를 항상 신고 다니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하도 화가나니까. “에이씨 나가 그만두면 될 것 아니야” 그러면서 발로 책상을 뻥찼는데 뚫고 발이 들어가버렸습니다. 합판으로 관리자 책상이니까 아주 근사하게 되었는데, 뻥 찼는데 우지직 하더니 발이 쑥들어가서 안빠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정도의 사람들을 여러번 만났습니다.
은혜받지 못했을 때는 뭐 매일 직장 끝나고 돌아가다가 술이나 퍼마시는 것이 일이었지만 은혜를 받고나서 그런 사람을 만나서 제가 오늘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성령충만하다고 해서 열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은혜 충만하다고 해서 상처가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받습니다.
그런데 그 대신 우리가 은혜 가운데 살고 성령이 충만하면 마치 면역력과 저항력이 왕성한 신체에 상처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신체가 건강하면 애들이 뛰어놀다가 쫙하고 피가 쭉흐릅니다. 그래도 질질 울고와서 머큐럼 한번 바르고 그냥 코를골고 한번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딱지가 딱 굳고 3-4일 지나면 긁어서 딱지 떼고나면 새살이 돋고 씩씩하게삽니다.
그런데 이제 신체의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기면 확 긁히면 이것이 낫지를 않고 계속해서 문둥병처럼 허여스름하게 계속해서 고름이 끼는 것입니다. 약을 발라도 안낫고 애를 먹이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처는 성령충만해도 마음 상하는 것은 상하는 것이고 열받는 것은 열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운데 사는데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만납니다. 그래 열을 받습니다. 그 때 제게 한없는 위로와 도전을 준 사람이 누구냐하면 요셉입니다. 요셉을 그렇게 사랑하게 된 이유중에 하나가 그것입니다. 나는 성경에서 직장생활을 잘한 사람의 모범을 요셉하고 다니엘로봅니다. 그런데 사실 다니엘은 사실 비교하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국무총리를 하던 그런 사람이니까. 사실 우리하고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나중에는 국무총리였지만 처음에는 종처럼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이 처음부터 왕궁에서 그 왕의 상에서 나는 진미를 먹으면서 이렇게 시작한 사람이니까 우리하고 별로 그렇게 공통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런 공통점들을 많이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모범을 잘 읽어가면서 그사람의 모범을 생각해 가는 가운데 이것이 자꾸 묵상을 많이 하니까. 이것이 뭐냐하면 심리적으로 내가 요셉이 된 것같은 착각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장에서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여기가 애굽이려니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부인은 못만났습니다. 그런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실재적인 지혜들을 많이 얻게되었습니다. 왜그러느냐면 이 세상의 사람들, 자기의 생각으로 쓴 책들도 다 읽고 감동을 받으면 그것을 간접경험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래서 자기가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미리 살아보고 살아본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닥쳐올 새로운 경험에 대해서 준비하게 하는대 하물며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더더군다나 우리와 똑같은 정신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찌하든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려고 했던 우리와 비슷한 삶의 정황에 놓여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승리한 기록들을 보면서 우리들이 감화를 받고 거기에서 오늘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야 할것인가 하는 실재적인 지혜를 얻을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하고 사귀면 지혜로워집니다. 정말입니다. 그 사람이 어떠한가를 볼려면 네가지를 잘 판단하면됩니다. 그 사람이 어떤지를 볼려면 그 사람이 어떤 교회에 다니는가를 보면압니다. 교회가 아니올시다면 그 사람이 아니올시다일 가능성이 참 많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하면 어떤 여자, 혹은 어떤 남자하고 사느냐입니다. 정말 거룩하고 훌륭한 아내나 남편이 아니올시다인 아내나 남편하고 사는 경우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잠시입니다. 헤어지든지 변화되든지 자기하고 똑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든지 셋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친구를 어떤 친구들을 사귀느냐를 보면압니다. 친구들이 영 아니올시다면 그 인간도 아니올시다입니다. 직접 볼필요도 없습니다. 거의 맞아 떨어집니다. 유유상종이니까. 네 번째는 뭐냐하면 무슨 책을 잘 읽는가 그것을 보면압니다. 맨날 옥중에서 일어나는 일, 뺑기통 이런 책이나 읽는 사람들은 ( ? ) 사람입니다. 실재로 그런 책들이 얼마나 범죄를 조장하는지 모릅니다. 이 네가지를 보면은 거의 압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러니까 성경속에서 결국은 우리들이 일생을 살면서 주님의 성경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고 구원을 받고 그리고 날마다 주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가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성품을 본받고 닮은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면 되어 갈수록 우리의 삶의 이유와 목표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 땅에 사는 모든 인생의 날들이 주님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하며 살수 있는 기회입니다. 딱 하나입니다. 그렇죠.
내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그렇게 감화를 받은 사람이 그다음에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그러면서 하나님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깊이 만나고 성령의 진리를 통해서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은 사고가 크리어합니다. 아주 깔끔하고 그리고 선이 아주 분명합니다. 그래서 종종 너무 속이 좁고 폭이 좁다. 외골수라는 비난을 듣는데 성경속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 중에 외골수 아닌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오늘날은 지금 외골수여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다양해서 문제가됩니다. 신앙생활도 하고 싶고 세상 맛도 보고 싶고, 소금도 되고 싶고 설탕도 되고 싶고, 등불도 되고 싶고 또 자기를 감추고도 싶고, 자기를 드러내고도 싶고 또 감추고도 싶고, 교회에서도 존경을 받고 싶고 세상에서도 인정을 받고 싶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정말 이기고 승리하는 사람이 되고싶고, 또 세상나라에서도 말하자면 분깃이 있는 사람이 되고싶고,
그리고 세상 나라에서는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내가 산 것 아니요. 하고 오직은 뺐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그것은 좋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싫다고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나도 살고 예수도 내 안에 살아계시다.” 그러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외골수입니다. 하나님이 깊이 한 영혼을 강하게 만지고 지나가실 때 그 때에 그 영혼속에 남겨진 흔적은 뭐냐하면 다른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지 내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다. 그것입니다. 그것 하나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들이 오늘날 고민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사실 죽음이 우리 문앞에 다가오면 대부분은 그 의미가 사라지는 고민들입니다. 그렇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할까? 하는 많은 고민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만지고 지나가신 사람의 흔적을 가진 사람의 아주 분명한 삶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기록으로 성경이 가득차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침을 잘 받으면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어려움,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갈려고 할 때에 당하고 있는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어떻게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야 말것인가에 대한 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그 섬김의 기초가 올바를 때에는 성경에 대한 깊은 사랑이 토대가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면은 성경이나 이런 것들은 다 제쳐놓고 그냥 열심히 일만하는 사람들이 있지않습니까. 그것은 기초가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최선을 다해서 섬기면서 살아갈 때에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그에게는 절대적으로 지혜가 필요하다.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려고 할 때에 그것이 가장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갈수 있을지. 환난이나 어려움이 오면은 어떻게 그 어려운 여건들을 극복하면서 결국은 주님을 섬기다 산 사람으로 평가될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성경이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 성경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대한 깊은 사랑이 없이 그냥 일만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신앙의 기초로 삼는 사람들은 아주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그로 하여금 섬기면서 살아가게 하는 근본적인 감화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섬기면서 산 모든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주님을 잊어버리고 섬기면서 살아온 자신의 의로운 삶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차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굉장히 조심해야 될 부분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은혜체험인가요. 그런 시리즈가 있습니다. 1.2모두인데 특별히 2에서 그것을 다룬 것 같습니다. 시리즈 2에서 그 두 시리즈는 여러분들이 꼭 한번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한 3-4년 전까지만 해도 열린교회 오면은 그것이 필수코스였는데 거기에보면 어떤 테입이 나오느냐하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들. 이라는 테입이 3개인가 몇 개나옵니다. 그런데 그 세 개에서 다루고 잇는 내용들이 여러 가지 내용들이 나오는데 그중의 하나에서 이런 것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 굉장히 신기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산다고 살았는데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을 못만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섬기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을 못만나게 하는지는 여기에서 다시 장황하게 설명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여튼 그런 결과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바른관계 속에서 ( ? )져야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풀어헤쳐서 깨닫게 하는 놀라운 지혜를 성경은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갈수 있는지에 대한 실재적인 지혜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하나는 인물들에 모범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고 또 하나는 인물들의 모범을 통해서 발견할 뿐만 아니라. 또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직설적인 교훈들을 통해서 누구의 모범이 없어도 성경에 전체적으로 나오는 우리에게 주시는 직설적인 교훈이 있지않습니까. 이것을 해라. 이것을 하지말. 또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는 어떤 것들을 하라고 명령하시거나 혹은 하지말라고 명령하시면서 그 명령을 어길 때에 어떠한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그 명령에 준행할 때에 어떤 축복들이 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시는 부분들이 나오지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통해서 설득됨으로서 우리가 지혜를 얻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여튼 한가지만 기억해두면 됩니다. 주님을 열심히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은 없다. 그러면 일단 건강한 섬김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기초가 잘못되었던지 동기가 잘못되었던지 하여튼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깊이 사랑하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가 사랑해야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속에서 섬기며 살아간 사람들, 그리고 섬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계명들을 통해서 실재적인 지혜를 공급받으면서 하나님을 효율적으로 섬기는 그런 말씀에 의한 감동의 세계를, 감화의 세계를 유지하면서 선한 행실에 힘쓰는 그런 사람들이 진정으로 올바른 주님이 받으실만한 선한 행실의 사람이라고 말할수 있는 것이다.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무한한 지혜를 제공해줍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살아보지도 않은 일에, 경험해보지도 않은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적절한 대답을 얻고 하나님 앞에 해결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썩 그렇게 가슴에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몇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믿음이 식어지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자기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노라면 여러분들의 가슴은 식어지고, 가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지고 의지에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는 이 의지가 움직이지를 않고 작동을 안하고 굉장히 힘이드는 것입니다.
자기의 취미생활을 위해서는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별 것을 다 하고 중노동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서 뭐좀하십시오. 그러면 뭐 "피곤합니다." "힘듭니다." "아이, 내가 어떻게 매일 주일마다 일찍 가서 아이들을 가르칠수 있을까. 뭐 주차 관리하느 것도 하루이틀이지 내가 매일 어떻게 그런 것들 할수있을까." 심지어는 교회 청소니 하여튼 무엇인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아주 무한한 부담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지가 병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군인이 군인정신이 충만하면 나라가 부른다. 그러면 바로 일어나서 총들고 나가서 싸워야지, 그런 정신이 사라지고나면 누가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려고 하겠습니까. 정신이 없는데
마찬가지로 신앙이 식어지면 가슴에 열정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식어지고 의지도 작동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는 의지가 작동을 잘 안하는 그런 영혼의 상태에서는 그와 정반대로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주 신속하게 의지가 굴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반대입니다.
그래서 성령에 충만하게 잠겨서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는 의지가 신속하게 움직이는데 그래서 은혜받은 사람들을 일 시키기가 제일 좋습니다. 왜냐하면 뭐든지 순종할 준비가 되었으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은혜 안받은 사람들은 뭐좀 시키려면 정말 치사합니다. 상전모시듯 해야지만 합니다. 그것이 왜그렇습니까. 의지가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뿐만아니라. 이 지성도 병듭니다.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그래서 영적인 침체나 어두움이 찾아오면 이 지식도 병이들어서 판단력이 사라지게됩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서 정서, 의지, 지성 모든 것들이 다 병들어 있는 마비상황에서 어느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깊이 깨뜨려지면서 회개를 경험하게됩니다. 그리고 영혼의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때에 전체에 변화가 옵니다. 우선은 심령에 변화가 오면서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정서를 회복하고 그리고 의지가 도저히 내가 할수 없었는데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싶다.라고 하는 강력한 의지의 욕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도 또 하나는 뭐냐하면 여태까지는 이렇게 혼란스럽게만 보이던 문제들이 아주 깨끗하게 보이지않습니까. (예를들자면 텔레비젼에서 이렇게 무슨 추적60분 같은 것 할 때에 일부러 카메라를 이렇게 해서 희미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것을 마치 카메라 초점을 맞추니까 이것이 상이 또렷하게 보이듯이) 내 심령의 변화가 일어날 때에는 희미하게 보이던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이나 내가 놓여있는 이 삶에 대한 정황이나 생각이나 이런 것들이 또렷하게 정리되면서
오늘 내가 당하고 있는 이 어려움은 "아, 이렇게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찾아온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대한 처방은 내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제껏 내가 부모를 원망하고 형제들을 원망하고 뭐하고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잘못된 고난에 대한 잘못된 반응이다." 그러면서 착착착 정리가 되면서 또렷하게 딱 “내가 왜 지금 이 상황에 서있게 되었나.”라고 하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이해가 되시죠.
그런 것들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을 때에 오랫동안 나 자신에 대해서 볼수 없었던 나를 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다시 지혜를 찾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총명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이 총명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판단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날에 보면은 지금이야. 다들 왠만하면 고등학교 이상 나왔고 이제는 정말 강남같은 곳은 대부분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옛날에 그렇게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많지 않을 때 교회에 한글도 겨우 성경을 읽다가 터득한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으신데 그런 분들이 굉장히 고매한 인격을 가지고 비록 학식은 없지만 얼마나 인간이 살아가는 이 삶의 도리와 신앙인들이 걸어가야할 인생의 대의에 대해서 얼마나 그렇게 지혜롭게 잘 알고 계신지 모릅니다.
그런 것들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지적인 학문들은 별로 없어도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선한 행실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풍부한 지혜를 공급받는 것입니다. 지식은 없지만 명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총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리에 대한 판단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이런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는 사람들을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실재적인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말이죠. 지식은 이 세상에서 배우는 지식이든지 혹은 심지어는 성경의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이 칼이라면 지혜는 팔과같습니다. 그 팔에 지식이 딱 붙들려서 어떻게 쓰여지느냐에 따라서 그 지식이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고 하나님을 욕되게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고 유학을 가고 싶어하고 그래서 학문을 더 많이 공부하고 싶어하고 전에는 학문에 뜻을 세운사람들만 그렇게 많이 공부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냥 평범한 회사생활 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모두 그렇게 더 많이 공부하고 그리고 사회활동 하기를 원합니다. 그런 어떤 지식의 축척에 대한 갈망을 비판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한 지식의 축척에대한 갈망에 단 반만이라도 이런 참다운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어떻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행실로서 그분을 섬기면서 살아갈수 있을까?” 그리고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참된 인생의 대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이 삶의 근본적인 지혜를 얻기를 갈망한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엄청나게 많이 우리의 인생에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을 이렇게 가만히 보면은 처음에 이렇게 멀리서 볼때에는 모르죠. 뭐 그저 기도할 때 펑펑울면서 기도하고 뭐 말씀들을 때 혼자서 아멘. 아멘. 하고 열광적으로 믿으니까 “야. 진짜 열열한 신자구나.” 나중에 가까이에서 사귀어보면 완전히 허당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때문입니까. 감동이 있고 뭔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감동을 받는다.”라고 하는 것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성경을 깊이 사랑해서 어느 한순간에 그냥 말씀이 확 들어가서 펑펑울고 또 다시 냉담하게 몇 년을 지나고 뭐 어느 때 와서 다시 고꾸라지고 하는 그런 것 말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인격적인 영향력 아래서 자신의 인격의 참다운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누구이며, 자기가 일평생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야 할것인가에 대한 그런 실재적인 지혜들로 그 사람의 마음에 가득차지 아니하면 우리가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열정이나 어떤 순간적인 감격이나 이런 것들을 너무 많이 신뢰하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되느냐하면 성경에 대한 깊은 사랑속에서 오래도록 그 성경의 영향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 무지막지한 막 되어먹은 인간이, 정말 짐승같은 그 인간이 변해서 하나님 앞에 사리를 분별할줄 알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처신할줄 알고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답게 주님을 사랑하면서 주님을 온전히 섬기기를 기뻐하는 그리고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지만 자신이 놓여있는 이 삶의 상황에서 결국은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로 나타날 것인가.라고 하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깊고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성경에 깊은 사랑을 가지고 살아온 그런 사람들 아니면 그것은 신뢰할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실재로 사람들을 이렇게 만나고 달아보니까. 소용없습니다. 뭐 어머니학교 나온 사람도 가정을 버린 사람이 있고, 아버지학교 나와서 마누라 두들겨 패는 사람도 있고 무슨 제자훈련을 받고 나서도 갈라지는 부부도 있고 심지어는 둘이 손잡고 새벽기도 나와도 갈라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은 뭐냐하면 오랜동안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속에서 사는 사람, 그 사람들을 우리들이 신뢰할수 있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변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목표를 가지고 고뇌하면서 어떻게 내가 놓여진 삶의 상황에서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고야마는 사람으로 나타날 것이가. 그것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고민하면서 사는 그런 사람들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결혼한 사람들은 이제 결혼했고 결혼 안한 사람, 형제 자매들 여기 많이 있지않습니까. 언제한번 결혼 세미나 한번 하면 참 좋겠는데 신랑하고 신부를 고를 때 수박고르는 것하고 비슷합니다. 서울 사람들이 수박을 고르는 것에 대해서 무엇을 알아요. 남이 수박 들고 귀에다 대니까. 자기도 한번 대보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가 나요.? 무슨 수박 속에 태아가 들었나. 그것이 다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이 잘 익은 수박인가 하는 것을 분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잘 고릅니다. 몇가지 방법이 있는데 내가 이것이다. 그리고 고르면 수박장수가 따드릴까요.? 그러면 내가 고른 것은 딸 필요가 없소. 그리고 집에 와서 갈라보면 새빨갖게 익었습니다.
뭐 그렇게 경외에찬 눈빛으로 쳐다보세요. 간단한 것입니다. 수박을 귀에다 대고 꽉 누르면 짜짜짠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납니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납니다. 그 소리가 많이 날수록 좋은 수박입니다. 그리고 뒤집어서 밑에가 약간 노른색이 많이 있으면 안되고 손바닥 반만하게 있으면 좋은 수박입니다. 그리고 이제 딱봐서 까만줄이 아주 선명해야합니다. 그리고 꼭지를 봐서 꼭지가 말라비틀어지지 않고 싱싱합니다. 다섯 번째는 껍질을 눌러서 껍질이 탱탱해야합니다. 그러면 잘라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가지고 와서 칼을 대면 짱하고 나갑니다. 고르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잘 판단해야되는데
그런데 그것을 판단하는 것을 다른 것으로 하지말고 제일 중요한 판단이 뭐냐하면 그 사람이 어떤 가문의 사람인가, 공부를 얼마나 했나, 키는 얼마나 되나, 몸무게는 얼마나 나가나, 그런 것은 나중문제고 하나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열열한가도 보지 마세요. 그것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만났을 때 불붙었을지 누가 알아요. 결혼하면 그 다음날 꺼질지 누가알아요. 실재입니다. 그러니까. 그런것도 너무 신뢰하지 말고 그리고 무엇을 보느냐하면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의 감동속에서 살아온 사람인가. 하나님의 진리에대한 깊은 사랑이 있는가. 그리고 그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왔고 지금도 살아가고 앞으로도 살아가기를 즐거워한 사람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세요. 그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무한한 감화를 받으면서 그 사람이 아주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속에는 그 한사람이 정말 지혜롭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한두가지 힌트를 얻는 것 가지고는 안되고 자기가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과 온전하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선한 일을 행하는 이 두가지는 분리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마음에 쌓인 것에서 선이 나오고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담겨있는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 두가지가 분리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절대로 쉽게 사랑에 빠지면 안됩니다. 예배의 감격에는 빨리 빠져야되는데 사랑은 천천히 빠져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볼때에 번쩍하고 오는 “쾅” 하고 오는 감정 이런 것들을 신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오래도록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신뢰하지 마세요. 걸출한 영적인 사람들도 그런 순간적인 느낌들을 신뢰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런 것을 깊이 보면서 아무리 그 사람의 환경에 좋고 놓여있는 모든 것이 좋아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으로 다듬어진 과정이 거의 없는 사람들은 굉장히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천장이 아무리 좋아도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잘 깨닫고 그 말씀을 통해서 실재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갈려고 하는 동기를 가진 이 사람들이 끊임없는 지혜를 공급받으면서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무한한 지혜를 성경을 통해서 공급받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선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은혜를 받고 주님을 섬긴다고 그러면 처음의 뚜껑은 은혜가 땋는데 뚜껑따고 쏟아지는 것은 모두 옛날의 기질들, 그런 것들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개척교회를 하다가 개척교회가 뭐 교인들이 열댓명 모인다는데 뭐 돈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자기는 그래도 올바르게 해 본다고 조그만 개척교회일 때 집사님 한 사람을 세워서 회개를 맡겼는데 회개를 맡겼으면 목사님을 잘 도와서 일을 했으면 좋은데 아무것도 별로 해보지도 못하던 사람에게 회개를 맡기니까 자기가 마치 교회의 무슨 권세를 쥔것처럼 목사님이 무엇을 하겠다고 하면 시시때때로 비토를 놓으면서 돈을 안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예배 끝난 다음에 잠깐 들어와 보라고 한방 날렸는데 한주먹에 이빨이 네 개인가 여섯 개가 옥수수가 확 빠졌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뚜껑은 여시지만 처음에 우리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을 섬기려고 할 때는 그다음에는 뚜껑은 하나님이 열어도 역시 기질이 나오는 것입니다. 막 휘몰고 사람들이 자기 뜻대로 안되면 성질부리고 그러던 것이 다 노출하면서 섬겨오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또 많이 실패하죠.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하나씩 둘씩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점점 온전해 가지 않습니까. 그런 작용이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작용이 안일어 난다는 것입니다. 일어 난다고 하더라도 하도 부딛히다가 아무도 자기가 그렇게 할 때 받아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제서야 고치는 것입니다.
그 때 들이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몇십명쯤 될 것아닙니까. 그 나머지 부딛친 수많은 사람들이 다 자기의 실습교제아닙니까. 그러니까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실재적인 지혜를 공급받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모든 사람들은 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때에 그 말씀을 통해서 지혜로와 질수 있다.라고 하는 것을 기대해야합니다.
내가 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받고 말씀을 통해서 우둔한 나를 지혜롭게 하시지 아니하면 나는 정말 하나님을 잘 섬길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 제일 고통스러운 사람은 무지하고 게으른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하면 무지한데 충성스러운 사람들. 이 사람들은 진짜 좀 안충성스러우면 좋겠습니다. 무지한대 충성스러운 사람, 열정이 있는 사람은 걱정스럽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항상 이야기 할 때 지혜와 충성을 언제나 같이 이야기합니다.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게 만든 것이 지혜입니다. 그 두가지가 함께 오는 신앙이 감화입니다.
그것을 알아야합니다.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세상의 슬기, 속된 지혜가 아니라. 신령한 지혜. 거룩한 하나님을 신령하게 섬겨가는 일에 있어서 참된 지혜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공급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온전케 하시느냐하면 충성되게 하심으로서 온전케 하십니다.
보세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 ? )온전케 된다.라고 하는 것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윤리와는 좀 다를때가 있습니다. (예를들자면 전쟁이 났는데 몇월 몇일 몇시까지 적군이 퇴각하는 다리를 폭파시켜라. 그러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그냥 폭파만 시키면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결과 폭파를 했느냐. 못했느냐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적군이 건너지 못하게 했느냐. 못했는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항상 이루어진 일의 결과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의 법입니다. 그렇죠. 그러나 성경의 법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냐하면 이 일을 이루어라. 주님이 명령하셔서 이루었어도 이 이룬 것이 정말 나에대한 진실한 충성된 마음으로 이것을 했느냐. 그것은 또 여전히 문제로 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는다.라고 할 때 그것은 일의 크기를 가지고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앞에 드렸던 개인적인 진심에서 우러나온 헌신된 충성, 그것을 가지고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는 선교적인 여건이나 여러 가지 지역적인 여건이나 이런 것들 때문에 특히 외딴 섬이나 시골벽지에서 목회하는 분들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구조적으로 도저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할수 없는 상황속에서 목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죠. 그런 사람들에게 교회의 크기를 그 사람의 충성도인 것 처럼 칼을 들이대는 것은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작으면서도 아주 아름다울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코 하늘 나라에서의 상급도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성취했느냐에 의해서 그렇게 상급받는 것이 아니라고봅니다. 문제는 뭐냐하면 항상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해야하느냐하면 일의 크기를 가지고 주님을 감동시키려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어떤 생각을 하면되느냐하면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아무리 여기에서는 세기적인 사건을 만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는 새발의 피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 규모에 감동한다.라고 하는 것은 만약에 감동하시면 그 하나님은 우리를 대단히 실망시켜드리는 하나님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드리는 것은 무엇이냐하면 그가 어떤 일을 가지고 어떤 정도의 성취를 남겼느냐가 아니라. 그에 대한 태도 그것에 대한 마음,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어떠하였느냐.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제 주님의 말씀으로 자신이 점점더 거룩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어가고 그럴 때에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분명한 삶의 목표를 갖게되는데 그런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때 그렇게 살아갈 때 부딪치는 어려움이 뭐냐하면 처음에 하나님께로부터 깊은 사랑을 경험하고 인격적인 감동을 받은 다음에 이것이 나의 사명이리라 하고 생각을 하면서 감당해 나갈때에는 항상 그 모든 일의 출발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에대한 사랑으로부터 출발할 때에는 그것이 하나님께 대해서는 사랑이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충성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충성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항상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식어지고 부패해지면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아주 게으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개선지자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도록 명령을 받았는데 주변의 민족들의 강력한 항소와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잠시 중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느 순간에 학개 선지자가 나타나서 그들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그들이 모두 말하는 것이 뭐냐하면 “지금은 상황이 어려우니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때가 안되었다.”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좋은 집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뭐냐하면 그들속에 처음에 그렇게 악조건을 뿌리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고토로 돌아가겠다고 작정한 사람들, 고난과 많은 박해가 기다리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위협을 무릎쓰고 그 감격속에서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서 이 예루살렘 고토로 돌아온 사람들의 마음이 식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짓다가 말아서 거의 무너진것처럼 되어버린 그 성전의 모습을 보며서 이 선지자가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이렇게 게으르고 나태나니 결국은 너희들의 심령은 썩었고 그리고 너희들은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보다는 너희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그 황무한 성전을 보면서 그들의 심령의 상태를 헤아리며 강력하게 탄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루살렘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커다란 감동과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말미암아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강력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 70여년동안이나 살던 삶의 터전을 뿌리치고 그리고 무슨 이민족의 수많은 박해가 기다리고 있는 거기에 죽음을 무릎쓰고 가겠다고 손을 든 사람들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강력한 감동을 입었던 사람들도 그 감동이 영원하지를 않고 언제나 그렇게 충성된 마음이 식는다는 것입니다. 식기만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모든 선한 일을 행하며 충성스럽게 살아갈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게할려고 우리들의 심령에 이런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충성심들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가 이제 주의 일을 합니다. 그런데 구역장으로 부름받은 사람은 구역장을 꾸역꾸역 해나갑니다. 교사를 맡겨준 사람도 교만하게 살살거리면서 교회를 살살살살 해나갑니다. 처음에는 뭔가 이렇게 강한 하나님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렇죠. 정말 하나님의 은혜의 감동이 있고 말이죠. 금년에도 구역장을 시켜주니까 몇사람은 막 뛸 듯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고 저마음 한 1년만 가면좋겠다.” 그렇게 좋아합니다. 왜 분명한 하나님의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것이 식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계속 은혜를 받고 영향을 받을수 있는 사람들은 어느순간에 그런 사랑하는 마음이 식은 사람속에 “충성되게 주를 위해서 살아야되겠다.”라고 하는 헌신된 마음을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확 불어넣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경의 가르침의 영향을 받을 때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됩니까. 저도 그런 것 해보았습니다. 회심하고 나서 10월달에 회심했는데 1월달부터 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성경의 목차도 잘 모르는데 어쨌든 교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 안가서 다 기운이 빠지고 그리고 토요일이면 술퍼먹고 주일날 가서 애들을 가르치고 말이죠. 그래도 주일날은 꼭나갔습니다. 가서 가르치고 그랬습니다. 막 가르치는데 양심이 막 찌르는 것입니다. ”야, 뭘 그렇게 복잡하게 말하냐. 나처럼 살지말아라. 그렇게 말하면되지.“ 그랬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교사생활은 하죠.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교사의 직분은 모두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강력한 감동을 주시니까. 그다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느냐하면 하나님 앞에 맡은 직분은 변함이 없는데 그것을 대하는 충성스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당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공과책 놓고 계속 하품만 했는데 그런데 은혜를 받고 하나님이 충성된 마음을 회복시켜주니까. 주일날 영혼들을 가르치고 들판길을 걸어서 집에 올때는 바람이 막 불면 눈물이 막 흐르는 것입니다. “누구도 거듭나지 않았고, 누구도 거듭나지 않았고, 나는 어떻게 할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해야되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 절대로 저절로 회복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일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야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도 항상 어떤 원리를 가져야되느냐하면 그런 것입니다. 우주선을 보면 우주 비행사들이 유형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 ? )나와서 허공을 막 이렇게 유형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항상 뭐가 달려있습니까. 생명줄이 달려있습니다. 거기에서 산소도 공급받고 그리고 필요하면 거기에서 잡아당겨서 사람들이 이동하고 그렇지않습니까. 그것이 끊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원히 우주속에 빨려들어가서 미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자기가 능력에 따라서 더 많이 일할수도 있고 더 멀리 나가서 일할수도 있지만 그러나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감화와 은혜를 받으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충성되게 살아갈수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수시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의 동기를 잃어버리고 형식적으로 주님을 섬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강하게 역사해서 자신의 심령을 뒤집고 다기 순수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충성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동기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회복시켜주심으로서 우리가 주님의 모든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들이 잊지말아야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결국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거의 전부라고 말을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말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죠.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고 그 말씀에 강력한 영향력을 받으면 그 말씀이 원하는 것은 그 사람을 통해서 무엇이든지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를 받는 통로가 딱 그치고나면 그는 무엇을 하던 사람이라도 결국은 아무것도 할수 없는 사람이됩니다. 왜냐면 화요일날 우리들이 여리고전도 하는 날이 아닙니까. 우리 전도사님이 싱글벙글했습니다. 왜냐하면 열린교회 여리고전도 이래로 제일많이 나왔습니다. 그 영향이 무엇이겠느냐. 주일오후 설교때 뭘하는 것이 있느냐고 그랫더니 찔려가지고 “나는 화요일이라도 전도지들고 사당동을 누비겠습니다.” 그말이라도 하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라고 우리모두 그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것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이 주어지면 도저히 할수 없다고 생각되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말씀이 시키는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한결같을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죠. 우리 주님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식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 앞에 변함없이 충성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래야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재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변함없이 충성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많지않습니다. 우리는 정말 질그릇 같이 연약한자입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님 없이 살수없으면서도 그러나 또 주님만으로 만족하며 살지 못할 때도있었잖습니까.
대체적으로 우리가 살아오면서 충성되게 살아온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어느 순간에 가서는 도저히 자기 안에서 자기도 어찌할수 없는 자신의 내면의 투쟁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주님 앞에 정말 헌신적으로 자기가 마땅히 구원의 은혜를 입고 이제까지 받은 사랑에 부합하게끔 그렇게 주님을 충성되게 섬기면서 살아야되는데 안그런적 많습니다. 그렇죠. 그럴때마다 결국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감화를 받고 그 말씀의 영향력 아래서 우리의 충성된 동기를 회복하는 변화가 수시로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은 열열하게 섬길지 몰라도 언젠가는 미끄러져서 주저앉은 사람들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저는 16,17절 두절인가요. 뭐 굉장히 여러주 동안 설교를 했습니다. 거의 석달이상 한것같은데요. 여러달을 설교를 했는데 결국은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발견하는 사실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가 아니면은 우리의 신앙생활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도 없고, 심지어는 그 구원의 거룩한 실재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거룩한 체험도 없고, 무엇을 행하며 살아야 될지에 대한 교훈도 없고, 그다음에 그릇된 길로 걸어가면 뭔가 이렇게 가책을 받고 책망을 받으면서 자기를 돌이켜야 된다.라고 하는 그런 분명한 실재적인 말하자면 책망도 없고 굽었던 사람은 계속해서 굽은채 살아가고 바르게 하지 못하니까. 그다음에 의로운 생활이 무엇인지 이것도 분명하지를 않아서 세상의 가치기준에 놀아나는 사람이 되고 결국은 인격적으로도 주님 앞에 온전하게 되지도 못하고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도 되지 못하고 섬겨도 정말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동기에서 지혜롭게 충성되게 주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나타나지도 못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 자체가 신앙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을 안한다는 것입니다. 뭐가 없으면 성경이 없으면 성립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여러지체들을 만나면서 이 세상에서 굉장히 불행한 사람들중의 하나가 뭐냐하면 예수님을 믿고나서 영적인 기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그가 어마어마한 사명을 가진 사람인 것처럼 말하자면 조작을해서 황당한 헌신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도록 막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은 결국은 아주 굉장히 망가진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만나고 이제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해야되는데 그런 토대가 없이 막바로 이제 막 예수믿고 이제 막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어마어마한 사명을 받은 사람인것처럼 암시를 주어서 굉장한 사람처럼 헌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실재적으로 영적인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진리에 딱 직면하고나면 그다음에 자기가 이제껏까지 쌓아온 이런 헌신이나 섬긴, 비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되는데 그것을 싹쓸어버리고나면 내안에 그리스도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인정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없애면 자신의 인생 자체가 다 날아가는 것인데 그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면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이대올로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서 정말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고 주님을 아는 지식에 기초해서 주님과의 풍성한 사귐이 있고 거기에서 날마다 신령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그 성품을 통해 우리들이 주님을 닮은 사람으로 변해가고 거기에서 오는 그 풍성한 애너지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끝없는 감화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살지 못했던 날들을 깊이 참회하면서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고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헌신된 생활을 통해서 주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이 새롭게 배워가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다라고 할 때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끊임없이 가책을 받고 그리고 우리가 그릇행할 때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책망을 받고 그 말씀에 의해서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지 못한 삶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고 새롭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뜨거운 감화와, 동기, 은혜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자극을 받으면서 살아갈 때 그 때가 충성스럽게 살아갈 때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셨는데 그것을 충성되게 섬기면서 살아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혼을 맡겨주었는데 한달, 두달 석달, 네달이 지났는데 다 떨어져나가고 거의 영혼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대도 방치된채 내버려두고 있다면 그 영혼들을 돌보도록 사명을 받은 그 사람이 깊이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내면적으로 여러 가지 이유를 대도 결국은 변명할수 없는 것은 결국은 그가 병들어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해서 하나님의 사람의 사람됨과 그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이 섬김의 삶은 분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가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고 무엇인가 선한 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주님께 기쁨을 드리도록 사명을 받은 사람이 그 일이 거의 병들어가고 있고 실패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태연자약 할수 있다면 그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깊이 병든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분명히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놓히고 있을 것이며 주님의 말씀에 의한 깊은 감동과 감화, 그 은혜가 사라진 상태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정말 새롭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십시오. 결국은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섬기면서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 “너는 나를 섬기며 살아라.” 모든 선한 일로 나를 섬기면서 살아라고 명령하시는 그분은 다 이미 그럴 권리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무지한 우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셨고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거룩한 구원의 실재속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주셨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이 끊임없는 작용을 통해서 우리를 온전한 사람 만들어 가시려고 일체 오래참으심과 긍휼과 자비로 우리를 돌보고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위해서 이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드릴수 있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우리가 가진 젊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 하여튼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의 주제권이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로 인정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 만이 우리의 인생의 진정한 기쁨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들이 충성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우리들이 주님밖에 모르고 살아간 날이 얼마나됩니까. 주님밖에 모르고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영혼,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이 고유한 직분 이외에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일생을 살았습니다. 살아온 날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어떻게 사랑하라는 것입니까. 결국 이 사랑은 성경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결국은 그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살아갈수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서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을 때 우리들이 어떻게 그냥 있을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어떻게 그냥 대충 살아갈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주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이 살아가면서도 우리의 영혼이 만족을 누릴수 있다면 주님이 우리의 섬김을 받지 못하는 주님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그런 주님의 사랑을 받고도 하나님을 안섬기면서 살아가면서도 만족을 누릴수 있는 우리의 영혼의 병든 것이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보십시오. 결국은 하나님이 성경을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주시고 그 성경을 그렇게 사랑하고 그 성경의 영향력 아래서 궁극적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열망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삶을 살아가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만족시켜주는 어떤 아름다운 삶을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도록 그것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우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크고 놀라운 사랑을 주셔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시고 구원 이후에도 상한 갈대를 꺾지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에 불을 끄지아니하시는 그런 마음으로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시는 그분의 마음을 결국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렇게 지금은 비록 다 망가진 인간이고 지금은 비록 다 죄악속에서 뒹굴어서 흙투성이가 된 인간이지만 내가 내 아들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서 다시 이 메마른 영혼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으면 이제 혹시나 나의 이름을 짓밟고 살아온 나날보다는 앞으로는 내 명예를 위해서 일할 날들이 더많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시지 않았을까요.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면 인생을 무슨 재미로 살려고합니까.
보십시오. 성경을 주신 이유도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선한 행실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아게 하실려고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을 위해서 충성되게 살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끊임없이 하나님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은혜를 더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 신앙의 특성은 일단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고 순종하면서 실천하는 가운데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생생하게 경험하게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지않았습니까. 주님의 그런 사랑을 받은 그런 사람들에게 인생에 있어서 대안이 무엇입니까. 이미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때에는 끝없는 목마름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는 것, 우리 이미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세상도 지나가고 그 정욕도 지나가고 오직 남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간 사람의 삶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셨습니다. 결국은 주님 섬기면서 살아가게 하기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모든 선한 일을 행한다.” 그랬는데 여러분들이 행하고 있는 선한 일은 어떤 것입니까.? 제가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도전한적이 있죠. 주님이 내가 너에게 무슨 소원을 들어주랴. 네 마음의 애절한 소원이 무엇이냐. 물을 때에 그 소원을 즉시 말할수 없는 사람들은 병든 사람입니다. 오늘 대답해보세요. 주님이 오늘 나타나셔서 “사랑하는 내 딸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의 가슴을 찢으면서 이루어지지 않으면은 가슴 저미는 그런 가슴아픈 기도의 제목이 뭐냐.? 내가 오늘 너의 원한을 풀어주리라.” 말할수있습니까.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오늘 내 마음아시죠. 오랫동안 내 가족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제는 내 마음에 원한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그것을 뭐 저한테 물어보십니까 이미 다 아실터인데 이루어주시옵소서.” 그럴수 있는 사람은 정말 선한 일을 행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충성된 사람입니까. 얼마나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끊임없는 말씀의 감화속에서 끊임없이 충성의 동기를 새롭게 새롭게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하나님 내가 맡고 있는 영혼들에게 변화를 주십시오. 내가 맡고있는 이 영혼들에게 부흥을 주십시오.” 아니면 “변하지 않는 내 자신, 나를 고쳐서 새 사람이 되게 하시든지 아니면 오늘 나를 데려가십시오. 변하지 않은 나와 더불어 싸우면서 이제 내자신을 위한 기도의 제목이 원한이 되었습니다.” 무엇인가 있어야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심령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경이 위로가 됩니다. 고난이 닥치고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된 삶을 살다가 시련을 만나면 성경속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갈길을 알지못하면 성경속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지혜를 공급받습니다. 수많은 적들에게 둘러쌓여서 소심해지고 이제는 자기도 주저앉아서 “하나님이여 이제는 나의 도움이 끊어졌나이다.” 라고 말할 때에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용기를 얻게되는 것입니다. 일만명의 대적이 나를 에워싸고 수많은 사람이 다 나의 적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이 일을 행해, 섬겨 주님을 기쁘게 하리라고 하는 결단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성경에 대한 깊은 사랑, 여기로부터 오는 진실한 감화가 없이는 구원도 불가능하고 성화도 불가능합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합니다. 정말 우리의 영혼의 질병의 상태에 대해서 우리는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까.? 정말 우리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우리들이 정직한 근심을 가지고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 구원의 거룩한 실재 속으로 들어 가도록 만들어 주고 있습니까.? 비할수없이 크신 이 구원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새롭게 알아가는 기쁨이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무지한 여러분들의 마음이 깨뜨려지고 정말 지혜로운 교훈을 공급받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책망을 받아서 여러분들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말씀의 작용이 여러분들에 있습니까.? 굽은 여러분들의 성품과 굽은 여러분들의 생활의 습관을 하나님의 말씀이 고치는 감동의 역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강력한 영향을 받아서 불의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고 의로운 길을 걸어가면서 고난을 받는 이런 삶들이 계속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주도 단 한주도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단 하루도 말씀의 은혜가, 하나님의 말씀의 깨우침이 우리를 만지고 지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신속히 짐승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히.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꿈꾸는 교회는 여러분들과 같이 젊은이들로 붐비는 교회가 아닙니다. 정말 젊은이들이 교회에 많이 모인다는 것은 그것이 기회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가는지는 여러분들이 머리가 희긋희긋한 노년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 때에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눈물 흘릴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으면서 ”하나님 정말 나는 무지한 사람입니다. 나를 교훈해 주시옵소서. 나는 허물투성이인 사람이니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도 나를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를 바르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로 하여금 불의한 삶을 버리고 의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여주셨습니다.“ 이런 말씀의 미각을 그대로 간직한채 그 말씀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성도들로 살아간다면 여러분들의 노년은 지금보다 훨씬 거룩한 노년이 될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내 일평생 말씀과 함께 말씀을 사랑하며 말씀과 함께 울고 말씀과 함게 웃고 결국은 말씀과 함께 태어났으니 내가 결국은 성도로서 이 말씀과 함게 죽으리라. 한줄의 하나님의 말씀을 이행하기 위해서 기꺼이 나의 피를 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를 위해서 내 목을 드리울수 있다.”라고 하는 그런 각오를 가지고 일생을 살아가는 이것이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실수 있는 모든 삶을 살아드릴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의 삶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