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는 자에게 깃들어야 할 정신
(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가장 큰 의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고전11:1) 2003.2.17 교직원예배 1
2. 세 가지 조심할 것(눅21:34) 2003.3.3 교직원예배 6
3. 온전함을 추구함(레13:56-57) 2004.9.14 교직원예배 9
4. 모든 섬김엔 거룩이 배어 있어야 합니다(레2:13) 2004.8.31 교직원예배 16
5. 순결한 기름으로 밝히라(레24:2) 2004.9.30 교직원예배 20
6. 맡은 자들의 충성(딤전1:12) 2004.7.6 교직원예배 27
7. 남들이 해보지 못한 충성(눅13:8) 2003.6.23 교직원예배 32
8. 충성과 숙련(잠22:29) 2004.5.4 교직원예배 36
9. 부르신 자의 의무 : 연구함(출35:32) 2004.8.24 교직원예배 40
10.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5:3) 2003.2.3 교직원예배 44
11. 한계를 넘어야 모본이 생깁니다(행20:35) 2003.2.24 교직원예배 51
12.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눅1:17) 2004.6.23 교직원예배 56
13. 항상 기뻐하라(살전5:16) 2003.3.17 교직원예배 59
14. 쇄신과 쇄심(민7:79) 2004.10.5 교직원예배 61
15. 어리석은 자의 입술의 잠언(잠26:7)) 2003.6.2 교직원예배 66
1. 가장 큰 의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
글로 쓴 것 보다는 그림이 우리 지각에 호소하는 바가 크고 그림보다는 움직이는 영상이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가 큽니다. 그래서 점점 더 실제와 같은 영상의 요구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미래를 예고하는 분석가들의 예고가 항상 맞는 것은 아닙니다. 비디오가 나왔을 때 사람들이 감탄을 하면서 영화관이 문을 닫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비디오의 보급과 함께 영화 산업은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또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읽히는 것 말고 보이는 것, 보이는 것에서 움직이는 영상을 보니까 욕구가 계속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관객들이 투표를 해서 영화 스토리를 만듭니다. 어떤 남자와 여자가 헤어지는 장면에서 영화가 끊어지면서 이 사람들을 계속 헤어지게 할 것인지, 나중에 만나게 할 것인지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찬성 반대 버튼이 있어서 누르면 전자 장치로 입력이 되서 통계가 나와서 해피앤드로 가든지, 반대로 가든지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이런 많은 기법들이 동원되면서 영상 산업이 엄청나게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미래 학자는 아니지만 예고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짧은 시일 안에 이 영화관의 모든 시스템들이 바뀔 것입니다. 지금은 눈에 보이고 들리는 정도지만, 이미 벌써 그런 장비들이 나왔는데 트램블링 시스템이라는 것이 나왔습니다. 오디오에 떨리게 할 수 있는 진동 장치를 컴퓨터에 장착해서 화면에 탱크가 지나가면 거기에 맞춰서 지축이 뒤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파도가 치면 그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들이 보편화 될 것이고, 그런 정도가 아니라 시험적으로 끝나고야 말았지만 입체영화에 대한 것들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고, 어쩌면 화면 같은 것이 실제의 사람들이 거기에서 연극하는 것처럼 화면을 구성하는 첨단 기법들도 발전될 것이라고 봅니다. 향기가 난다든지 시장 골목을 지나가면 시장의 냄새가 난다든지 빵가게 옆을 지나가면 빵 냄새가 난다든지 하는 현실과 거의 방불한 것들이 연구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서 그런 것들이 영화관에 다 도입이 될 것입니다. 아마 인간의 욕망은 종말이 오는 날까지 이런 점에 있어서 끝이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것들이 일반은총적 차원에서만 그런 욕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신앙적인 차원에서도 이러한 욕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을 원하고, 보는 것보다는 자기가 실제로 경험하고 그렇게 된 사람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에도 썼지만 목회자의 설교가 본문이라면, 삶은 주석입니다. 논문을 볼 때 저는 주석을 제일 먼저 봅니다. 주석을 몇 개만 읽으면 이 논문이 수필처럼 쓰여진 것인지 아니면 깊은 연구 속에서 쓰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말은 어눌할 수도 있고 유창할 수도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조리 있고 논리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해서 논리가 부족하고 더듬거릴 수 있습니다. 물론 훌륭한 것은 논리도 뛰어나고 언변도 유창해서 한번 진리에 관해서 증언하면 다른 사람들이 입을 다물 수 없게끔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언변의 능력과 구재의 권세, 지혜의 말씀의 놀라운 은사, 이런 것들이 있다면 말할 수 없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마다 가진 정도가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삶을 보면 그 말이 남의 것을 베껴온 것인지 아니면 정성스럽게 써내려간 말인지 그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먼저 믿은 우리는 우리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편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보이는 삶을 보면서 사람들은 보다 쉽게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알아가고 배워갑니다. 우리의 입을 열어서 흘러나오는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증언과 그 탁월한 교리들은 귀를 기울여서 시간을 투자해서 잘 들으려고 하지 않지만 우리의 삶은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눈에 띕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가 누구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는 것들을 알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숨을 수가 없습니다. 산위에 있는 동네이고 말 위에 둔 등경과 같아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구역장이면 구역장이기 때문에 구역원들의 시선을 받고 목회자이면 목회자이기 때문에 양떼들에게 더 많은 시선을 받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 앞에 자기가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러한 본보기가 되기 때문에 그는 말로만 하나님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더 많이 자신의 삶으로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디오보다는 비디오가 훨씬 사람에게 파고드는 힘이 있듯이 -대중적이듯이- 그렇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야기 하는 가운데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했습니다. 사실 처음 예수를 믿으면서는 이 구절이 상당히 걸림이 됐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교만할 수 있을까. 감히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기가 그렇게 완전하다는 말인가’하는 떨쳐 버릴 수 없는 생각이 어린 제 가슴에 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생각들을 바로 잡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모본이 되는 효과가 있다고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될 것을 우리들이 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이 온전해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그 사람의 신앙을 바로 세워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가문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 사람의 신앙도 훌륭해지는 법은 아니고 아무리 경건한 부모를 만났어도 그 부모의 경건한 신앙이 자녀에게 물려진다고 하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자기 자신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받은 변화, 그 은혜, 이것이 그 사람의 신앙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우리는 또 한편으로 항상 도성 인신된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경건한 신앙의 사람을 통해서 보면서 자기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대조해보지 않은 사람의 경건한 삶이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온전할 수 있을까 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조건 자기를 본받으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자기가 본받은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누구도 자유하게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사도 바울이 교만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가 이 짧은 한마디의 말을 이 결정적인 시점에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에게 전하기까지 그는 실로 헤아릴 수 없는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인생의 목표 전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의 자만이나 우쭐거림이 아니라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를 자신의 인생의 목표로 알고 전심으로 그분을 본받아서 그분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이 자신의 전체를 건 과업이었고 목표였고 어떤 의미에서 인생에 있어서 존재의 이유였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이 본받을만한 모본적인 요소를 지닌 사람이 될 수가 있었으니 사도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한 것은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자기를 빚어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드신 그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하는 말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소망이 무엇이었습니까? 빌립보서에서 그는 말하기를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하노니’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때 바울의 심중에 있었던 간절한 소원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어가고 계신 것처럼 또한 자기를 바라보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하나님이 크게 사용하실까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 마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모두 다 역사 속에 쓰임 받았던 그 걸출한 인물 중 한사람 같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목회를 하면 조용기 목사님이나 소위 말하는 이 시대의 성공했다는 목회자가 될 수 있겠으며 여러분들이 만일 평신도의 삶을 산다면 정말 모든 세대가 기억해주는 그런 탁월하게 쓰임 받아서 큰일을 한 그런 사람이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사업을 하는 사람이면 여러분들이 모두 다 벤자민 프랭클린처럼 쓰임을 받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긍심을 가질 만한 일도 아닙니다. 주님이 필요하셔서 어떤 사람은 큰 그릇으로 또 어떤 사람은 작은 그릇으로 어떤 사람은 금그릇으로 어떤 사람은 은그릇으로 어떤 사람은 놋그릇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일이 아니라 ‘정말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모본이 있는가 그래서 찬송가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를 보는 이 마다 주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모본을 우리들이 보여주고 있으며 그 모본들이 세월이 흘러갈수록 점점 우리 안에 뚜렷해지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두 틀을 함께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닮고 싶은 틀이고 하나는 태어날 때 찍힌 틀입니다. 그래서 영화에서 보면 두 그림이 오버랩 되면서 과거가 현재에 회상되거나 현재가 과거로 넘어가거나 젊은 시절이 나이 많은 시절로 변화되는 기법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갈수록 내가 가지고 태어난 틀들은 점점 부식되어서 희미해지고 내가 닮으려고 했던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은 우리 안에서 더 선명해져서 말과 행실과 마음과 정절과 충성과 그 모든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런 사람으로 정말 우리가 변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기의 교인들에게 특별히 장로들을 겨냥하면서 ‘양무리들의 모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완성되어서 완제품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있다면 그들이 잘못된 기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서 주님이 일하시면서 그 은혜로 우리들을 날마다 새사람으로 빚어가고 계시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모본을 자신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기까지 그가 살았던 삶의 방식을 생각해 보십시오.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아름다운 모본과 엉터리 같은 자기 자신의 삶의 틀들을 비교하면서 헤아려볼 수 없이 많은 날 동안 선교 사역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보다 더 많이 자신의 부서지지 않는 모습을 보며 아파하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본성을 닮지 못하는 자신의 미천함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자기와 같은 죄인을 살리신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그 오래 참으신 사랑 때문에 감격하고 몸 둘 바를 몰라 하던 진통의 세월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고린도교회는 사도바울의 대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전도해서 교회를 세웠는데도 ‘정말 바울이 사도라고 말할 수 있느냐’하며 사도바울의 아펐을 쉽(?)에 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도전하는 무리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런 무리들에게 수많은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는 이 말,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단순한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쟁론의 상대가 되는 경지를 뛰어넘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맺고 있는 그 아름다운 관계 안에서 안식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자가 다 신자입니까? 조선시대에는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는데 남자를 볼 때 선비들은 군자와 소인의 이분법으로 나눈 것이 아닙니다. 가장 훌륭하고 고아한 삶을 살았던 사람을 ‘성인’이라고 분류했습니다. 도덕적으로 정말 다듬어지고 겸비하고 학문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온 세대와 세대를 거쳐서 왕조가 바뀌어도 추앙을 받는 사람들이 ‘성인’이었습니다. 그 밑에 ‘대현’이 있었습니다. ‘the great wise man’입니다. 그리고 3단계가 ‘군자’입니다. 그 밑에 평범한 사람 ‘속인’ 그리고 맨 밑에 ‘소인배’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일반 은총 차원에서 학문을 연구하던 선비들도 사람이 다 같은 사람이 아니고 학문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해도 그 서생들이 다 같은 계급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인과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현과 같은 사람이 있고 군자와 같은 사람이 있고 속인이 있고 상대하기 힘든 소인배가 있다고 하는 것, 명색이 다 글을 배우고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렇게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그 존재도 똑같은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구원 받아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획일성만을 강조하지 말고 사람이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한번 바라봐야 합니다. 정말 내가 성도인가, 정말 내가 신자인가, 정말 내가 신자도 못되고 겨우 교인 쯤 되는가, 아니면 그 밑에 거의 종교인 수준인가 하는 수없는 레벨들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극상품 포도나무가 되기를 추구하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했던 것처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본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성화의 상태를 비교하면서 자기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마음먹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필요 없고 이 문제는 철저하게 자기와 하나님과의 문제이기 때문에 자신의 최상의 본분이 자기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이 두신 참된 인간의 형상을 자기 속에 본받으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께 가장 커다랗게 드릴 수 있는 예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들이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해서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전하는 하나님에 관한 증언을 들으면서는 깊이 감동을 받았는데 여러분들의 삶을 보면서는 사람들이 절망할 수 있게끔 만드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저렇게 사는 것이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길이구나.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하는 낙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삶을 우리들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담론, 논쟁, 지식,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가지만 그런 것들이 정말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도록 고칩니까? 정말 얼마나 우리들에게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경건하고 아름다운 모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렇게 주님을 본받고 바라고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세 가지 조심할 것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21:34)”
보통 때에는 보통 조심하면 되지만 특별한 때에는 특별히 조심해야 됩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너희 마음이 둔하여 질 것이다’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구절을 보면서 특별한 죄인들의 타락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안 그렇다고 보는데, 첫째는 여기에 나와 있는 내용 자체가 그렇게 특별한 죄에 빠지는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별로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방탕 이야기가 나오는데 극단적인 방탕을 염두에 두셨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통제가 되어지지 않는 흐트러짐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술취함이라고 했는데 당시 술은 음료였습니다. 다음에 세 번째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 진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타락입니까?
두 번째로는 예수님의 이 당부를 받은 사람들이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이 세운 제자들이 설마 그렇게 극단적인 삶을 살아가는 타락의 무리들이라고 생각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을 잘 믿고 따르는 신실한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그런 위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경고라는 것들은 우선 첫째 방탕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 생활이 통제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마음의 방탕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제에 의해서 질서를 유지하고 있을 때 그 질서 속에서 죄가 식별되고 죄악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거하기에 적합하지 않는 프레임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모든 인식들이 정돈 되어서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말씀에 대한 감각이나 자기 성찰 같은 것들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정사’에 대해서 우리들이 늘 강조합니다만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이 ‘정사’를 합니까? ‘정사’를 하는 것이 힘든 노동이기 때문에 ‘정사’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은혜 아래 통제가 안 되고 무질서하게 흐트러져 있기 때문에 그런 흐트러진 마음으로는 정사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은혜에 의해서 가지런하게 되어있는 통제된 사고의 질서를 가지고서만이 자기의 삶이 흐트러졌는지 바르게 되었는지 어느 부분에 죄가 침투했는지 하는 것들을 파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마음의 방탕한 상태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성찰을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자마자 만들어놓은 것이 무질서입니다. 그리고 이 무질서는 죄가 거하기에 아주 적합한 환경이고 마귀가 역사하기에 아주 좋은 상황입니다. 무질서속에서 영적 암흑은 촉진되고 그 무질서 속에서 사람들은 지적인 눈멂이 계속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항상 긴장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거룩한 긴장은 우리의 육체에 해를 주지 않습니다. 예방의학자 황성주박사가 ‘스트레스가 건강에 좋다’는 책을 냈는데 그 책을 읽어보고 나서 참 놀라웠습니다. 그분의 지론에 의하면 스트레스가 두 가지가 있는데 거룩한 스트레스와 세속적이고 육욕적인 스트레스가 있다고 했습니다. 육욕적인 스트레스는 건강에 계속 해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스트레스는 말할 수 없이 우리의 육체에 활기를 불어넣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죄를 사용하셔서 은혜를 넘치게 하시는 것처럼 그 스트레스를 사용하셔서 우리의 감각으로 하여금 깨어있게 하고 육체에 새 힘을 준다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도 스트레스입니다. ‘내가 죄인이구나’하며 몸부림칠 때의 억눌림이나 찔림 같은 것보다 더 강력한 스트레스가 어디 있겠습니까? 심하면 혈관이 터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회개 때문에 건강을 해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긴장이라고 다 같은 긴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마지막 때에 경건하게 살고 바르게살기 위해서 신앙의 허리띠를 졸라매는 종류의 텐션을 가지고는 건강이 해쳐지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들을 끌러버림으로서 물밀 듯이 죄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이런 일들은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이 항상 거룩한 긴장 속에서 신령한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속박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의 마음속 성향이 얼마나 육적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연주할 때에는 현을 탄탄하게 해서 연주할 수 있도록 해놨습니다. 보관할 때는 다 풀어서 보관합니다. 그래서 팽팽한 시간 동안에 연주하고 쉬는 시간에는 풀어둡니다. 그것이 방탕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 길입니다.
두 번째는 ‘술 취하지 말며’입니다. 취한다는 의미 자체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살아야할 정상적인 질서를 무너트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육신의 게으름 때문에 잠을 많이 잔다든지 자기의 특별한 취미에 깊이 빠져서 취한다든지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력은 급속히 쇠하게 되고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흐트러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항상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죄에 취해서 판단을 잃어버린다든지 육신의 안일함에 취해서 죄를 인식하는 것들을 잃어버린다든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염려입니다. 염려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인 동시에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 독초를 뿌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염려가 없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저는 교회를 지으면서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옆에서 저를 보니까 교회를 건축하는데 잠시 동안 걱정을 많이 하는 것 같더니 어느 한순간이 되니까 완전히 자유해지더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일은 열심히 하는데 염려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물론 생각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염려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을 썩이고 우리의 심령에 쓴물이 나오게 하고,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역자들이나 직원들이나 모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인데 한숨쉬는 것은 굉장히 나쁜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복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이 다 낙심해 있는데 연설 한마디로 사람들 속에 소망을 충만하게 불어넣는 것입니다. 낙심할 게 뭐 있습니까? 염려할 게 뭐 있습니까? 하나님께 다 맡겨야 합니다. 지상 최대의 사건이 죽는 것 밖에 더 있겠습니까? 죽으면 할렐루야 하나님의 품에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자기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부실함의 틈 사이로 물이 스며들 듯이 염려가 스며드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며 나의 분깃이시니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만 있으면 무슨 염려가 있겠습니까? 교회 짓는 일이 엄청난 일이었지만 힘이 좀 들었지 정말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기쁨으로 끝까지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제가 회개했지만 염려는 안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앞으로 어떻게 합니까?’하는데 저도 생각은 계속 되지만 염려는 안합니다. ‘주님이 다 아신다’하고 맡겨야 합니다.
이렇게 염려스러운 상황일 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을 성취해드리기 위해서는 염려할 만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때에도 우리가 하나님과의 단단한 연합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요즘 제가 복음을 깊이 묵상하면서 처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엎드려 기도하면서 ‘하나님, 저는 어쩌면 이렇게 복음에 무지합니까? 저도 좀 가르쳐 주십시오. 여태까지는 어떻게 살았는데 이제는 이런 상태로 더 이상 살아봐야 하나님께 별 영광이 안 되겠습니다. 역사상 당신의 복음을 보존하기 위해서 눈을 열어주었던 몇 안 되는 사람들과 저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제가 그 사람들보다 공부를 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똑같이 구속하신 하나님의 자녀인데 차별하지 마시고 제 눈도 좀 열어주십시오. 제가 없어서 못하는 것은 못하지만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해서 그분들이 울었던 자리에서 저도 울고 그분들이 성결하게 살고 싶어 했던 자리에서 저도 성결을 소망하고 그분들이 무릎을 꿇어 하나님 앞에 엎드려졌던 자리에서 저도 엎드려져서 진리를 탐구할 테니까, 그분들이 얻은 모든 것들이 자기가 지식의 전쟁터에서 긁어모아온 그 탈취물은 아닐 것 아닙니까? 주님이 어떻든 열어주시지 않았습니까? 제게도 한번 열어주십시오’ 정말 그렇게 마음이 비참해질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그 하나님의 영광된 복음을 아는 사람인가’
오늘 열린 신문에 보니까 3교구 청년 지체가 글을 썼더군요. 새가족공부를 하라기에 ‘내가 여태껏 신앙생활 했는데 무슨 새가족이야. 신앙생활하면서 그런 정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어’하며 공부했는데 ‘물어보는 이 모르는 것뿐이요 대답하려니 아는 것이 없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새벽에 ‘정말 제 스스로에게 무엇인가 하고 물어보니 모르는 것뿐이요 대답을 해보자니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가난한 그릇을 안고 이제까지 목회를 하는데, 우리가 핍절한데 어떻게 영혼들에게 풍성한 삶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도와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염려할 새가 있습니까? 이 소중한 시간에 불붙는 믿음을 가지고 경주마처럼 들판을 가로 질러도 모자라는 때에 의기소침하고 어린 아이 같이 염려하면서 바보같이 자기의 심령을 죄와 근심에 내어주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확신과 신념에 불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훌륭한 사역을 감당해 나가는,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그런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3. 온전함을 추구함
“빤 후에 제사장의 보기에 그 색점이 엷으면 그 의복에서나 가죽에서나 그 날에서나 씨에서나 그 색점을 찢어 버릴 것이요 그 의복의 날에나 씨에나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에 색점이 여전히 보이면 복발하는 것이니 너는 그 색점 있는 것을 불사를지니라”(레13:56-57)
여기서는 문둥병에 관한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어떻게 보면 재미없는 책이지만 기도하면서 읽으면 많은 그 안에서 성화와 관련된 진리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도전이 되었던 말씀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지금 여기서는 의복에 문둥이 병의 병원체가 묻어서 곰팡이처럼 번져가는 그 상황을 염두 해 두고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일차적인 조치는 빨아내는 겁니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그 다음에는 그 부분을 찢어내는 것입니다. 그래도 안 되면 그걸 모두 다 불 태워 버리는 것이 그 의복에 문둥병이 발하는 것 에 대한 조치에요. 그런데 의복을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을 하는 이유는 뭐냐면 의복이 늘 자신이 입고 다니는 거니까, 의복이 불결하고 거기에 병원체가 묻으면 시간의 문제는 있지만 그렇게 금방 결국은 자기를 더럽힐 거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문둥병이 발병하여 문제가 되면, 그러면 그는 진중에서 거하니까 그는 공동체 전체에 그 문둥병을 누룩과 같이 퍼뜨릴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만약에 의복을 관리를 잘못해서 그 사람 자신이 문둥병에 오염이 되면 똑같은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엔 그것을 치료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다 안 되면 그를 그 공동체에서 떼어내서 홀로 거하게끔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의복은 일관되게 성도의 행실로 묘사가 됩니다. 예를 들자면 창세기 35장에서 야곱이 벧엘 로 올라 갈 때 결단을 하고 의복을 바꿔 입은 사건이나, 여기 나오는 의복에 대한 이야기나, 또 계시록에 가면 계시록까지 안가더라도 복음서에 보면 예복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나, 그리고 계시록으로 가면 아주 명확하게 세마포를 입은 성도들이 있고 그 세마포 옷은 성도의 의로운 행실로 묘사가 됩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우리들이 풀어볼 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은 성도의 행실이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오염이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고 성도가 해야 할일은 뭐냐면 오염되지 않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오염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오염되면 자기는 오염됐는데 이 오염된 것 을 다른 사람에게 오염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불가능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죄에 감염이 되게 되면, 죄 자체를 미워하거나 죄 자체에 대한 격렬한 저항 같은 것들을 자기 자신이 상실하고 친화적으로 지내니까 다른 사람에게 그것이 오염되는 자체를 그렇게 대단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죄에 대해서 너그러우면서 죄에 빠진 다른 죄인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다. 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이제 이렇게 오염이 될 때 최선을 다해서 그 오염을 제거하려고 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빨아보고, 안 되면 찢어내고, 안되면 불태울 요량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깊은 명상 속에서만 자신의 죄를 발견하려고 한다 이거 에요.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응답을 받음으로서만 죄를 파악하려고 한다. 라고 하는 것 이것입니다. 물론 그 방법은 탁월하고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뒤엉킨 삶을 살고 있나 하는 것들이 파악이 안 될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해서 주님 앞에 자기의 참 모습을 보게 해주시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지금 드러나지 않는 나의 죄를 내가 파악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 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해주십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나 이런 것들을 구하는 기도는 정욕으로 잘못 쓰려고 구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내 안에 있는 죄를 보게 해 달라고 기도 하는 것은 거룩해 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기도이기 때문에 제 경험에 의하면 정말 잘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도를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안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해보십시오. 불과 며칠 기도하지 않아도 진지하게 기도만 한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만약에 이렇게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응답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아마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이 보여주신 바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현저히 결핍되었기 때문에 그럴 거 에요. 그런 순종의 의지만을 가지고 순종에 대한 디자이어 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들어 주십니다. 응답해주십니다. 한번 해 보십시오. 다른 기도는 몰라도 그 기도는 정말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기도는 그런 죄를 확인하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기도해도, 그런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도 그런 죄가 가지는 심각성은 자신이 삶을 꼼꼼하게 성찰할 때, 그때에 그 죄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 놀랍게 파악이 된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비유를 들자면 우리가 가진 문둥병의 병원체는 어떤 시약에 의해서 검사가 되어질 수 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은 그러나 우리 몸 가까이에 문둥병의 병원체가 붙어있다 라는 것이 시약을 통해서 확인이 되어진다면 그 심각성을 보기 위해서는 직접 그 문둥병 의 병원체들이 의복이나 우리의 몸의 일부에 붙어서 흉악하게 번져가는 것을 파악할 때에 그때에 비로서 심각성이 생기고, 그리고 이 상황을 개선하고자하는 의지적인 결단이 생기게 되는 거지요. 그렇게 될 때 우리들이 삶을 꼼꼼하게 성찰해보면 우리의 죄가 어떻게 쉽게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지가 파악이 된다. 라고 하는 것 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어제 행해졌던 설교가,뭐 전혀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3부 예배에서는 어느 정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 같아요. 저에게는 굉장히 커다란 도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 진리들을 깨달았을 때. 그게 뭐냐면 우리들이 은혜에서 뒤로 미끄러져서 부패하게 되는 것이 적극적으로는 우리가 기도 안하고, 말씀에 은혜가 없고, 이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뒤로 물러가면서 부패하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사실 쉽게 우리의 삶을 돌아가 보면 말이지요. 은혜에서 미끄러질 때 그 기도생활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그런데 절실하게 기도가 필요해지는 상황이 되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현실적으로 이미 벌써 마음에서 미끄러졌기 때문에, 말씀의 은혜가 막 부어져야할 중요한순간이 이 죄에서 미끄러지는 때 아닙니까? 그래서 찬송에도 나오잖아요? (내 발이 죄악에 빠질 때~ ) 그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붙들어주시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 할 때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은혜에서 이탈되어서 부패하게 되면 마음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잘 못 받는단 말이 에요. 그러면 적극적으론 우리가 그렇게 기도 하지 않고 말씀의 은혜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데 사실은 그렇게 은혜에서 미끄러질 때기도가 꼭 필요한데 기도가 안 되고 말씀에 은혜가 절실한데 말씀의 은혜가 없을 때 그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 하지 않아서 그렇다, 말씀을 보지 않아서 그렇다, 이렇게 틀린 이야긴 아니에요. 맞지요. 맞는 이야기 인데 순환논리에요. 거기에서 뭐가 대두가 되냐 하면 개별적인 자신의 삶이 대두가 되는 거 에요.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떨어질 수 없이 하나로 연관되는 거 에요. 아마 지금 다루는 것처럼 총체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진 않았지만 깊은 기도를 경험하라, 기도마스터, 아니면 새벽기도 같은데서 이런 내용을 여러분 기도 했을 거 에요. 한 사람의 기도는 그 사람의 삶을 능가할 수 없고,또 그 사람의 삶은 기도를 넘어설 수 가 없다 그러지요? 그래서 삶이 진지하면 기도도 진지하고 삶이 열정적인 사람은 기도도 열정적이고, 삶이 태만하고 부주의 한 사람은 기도도 역시 허공을 친다 이거에요. 그래서 가끔 제가 직원들을 만나면 개인적으로 그런 충고를 합니다.“네가 교회에 와서 행하는 대부분의 일이 너의 가장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 되게 하라. 그것이 교회가 일을 잘하는 비결이기 전에 교회일 을 하면서 네 영혼이 사는 비결이다.” 사실은 그게 가슴에 깊이 와 닿도록 직원들이 이해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별로 못 받았어요.
그런데 그렇게되면 은혜에서 뒤로 미끄러지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릴게요. 일을 하는 그것이 자기 자신의 가장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 되게끔 하라는 거지요. 그러면 그것이 단지 일을 잘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기도가 자기 자신의 영혼을 부패로부터 보호하는 껍질이 되는 것이 에요. 그래서 그런 것 이 없이 그냥 일을 해 나가기만 하면, 일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익숙해지니까. 아마 여러분들, 직원들도, 교역자도 마찬가지고 처음에 발령을 받았을 때기도 많이 했을 거 에요. 왜냐하면 한번도 해보지도 않은 일이고. 잘 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되고, 또 잘 못해서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염려도 있고 그랬을 거 에요. 그렇지요? 그런데 지나다 보니까 별거 아니잖아. 다 하는 거잖아요. 그러면서 이제 기도를 안 해요. 그래서 삶의 초점과 기도의 초점이 완전히 분리되기 시작하는 거지요. 그러면 그다음에 성화생활은 아주 급격하게 힘을 잃어버리게 되요. 그리고 일을 하는 그것이 경건에 대해서 파괴적인 요소가 되어서 덤벼드는 거 에요. 그래서 이제 거기서 지적인 혼란이 오는 거 에요. 뭐냐면 자기의 영혼의 상태가 이렇게 망가진 것이 내가 이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자기가 그 일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찾는 것을, 신앙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거든요. 그래서 거기서 완전히 원아웃 되 버리는거 에요. 거기서 막차를 타는 거 에요. 그리고 영혼을 회복의 시기를 알 수 없는 깊은 침체로 들어가게 되는 거 에요.
그러면 마음속에 하나님을 위해 섬기는 일들에 대한 반감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 에요. 그러니까 일을 대할 때마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거 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라는 게, 그걸 마치 자신의 영혼에 커다란 피해를 주는 독극물처럼 생각을 하는 거 에요. 그리고 종교적인 룸팬 으로 전락을 하는 거 에요.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게 없어요. 빈둥빈둥 노는 거 에요. 그리고 영혼의 회복을 구해! 될 리가 없지요. 모세를 하나님이 민수기 12장에서 그렇게 인정해 주셨을 때, 그 모세를 인정해 주신 이유가 뭐였어요? “내 종 모세는 너희와 같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하였음 이니라”모세가 그 점에 있어서 탁월하게 그 결합 점 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모세만이 아니에요. 요셉, 아브라함, 모세 비롯한 걸출한 믿음의 사람들이 이미 구약시대에 그 접촉점, 비밀들을 찾아낸 사람들이에요. 사도바울에게서 그가 하고 있는 사역이 영적인 성장을 방해하고 영혼에 하나님 앞에 깨어 사는 영적인 올바름을 방해하고 하는 것들을 읽어 낼 수 있습니까? 오히려 고린도 후서 1장에서는 그것 때문에 그 영혼에 놀라운 쇄신이 일어나잖아요? 그래서, 그저께 행해졌던 설교가 사실은 한 달 동안 해야 될 건데 그 요약을 해서 한꺼번에 던져버린 거지요. 그런데 사실 제가 이런 비밀들을 깊이 터득하게 되었을 때 제 성화의 삶에 있어서 한 날개를 다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이였어요.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묵상하고 있어요. 우리의 삶의 온전함이 없이는 우리자신의 존재의 온전함이라고 하는 것이 없어요. 이 둘을 순환관계에요.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 삶이 존재를 형성하고 존재가 삶을 산출하는 거지요. 그래서 존재는 삶의 원인도 되고 삶이 존재의 원인도 되는 거 에요. 두개가 같이 흘러가는 거 에요. 분리되고 나면 급격하게 부패하는 거 에요. 누구도 그걸 막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하고 있는 주된 일 에 있어서 거의 기도하지 않거나 기도 하더라도 그것이 거의 초점이 되지 않는 그런 상태에서 삶의 초점과 기도의 초점이 완전히 일관된 가운데살아가는 삶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지 언젠가는 그 사람을 망가뜨려요. 어떻게 망가뜨리냐 하면 이렇게 망가뜨려요. 실패하면 일도 망가지고 사람도 망가져요. 그래도 좀 나은 경우는 어떻게 되냐면 자기 자신이 기도하고 자기 자신의 신앙을 어느 정도 지키려고 애는 쓸 수 있는데 문제는 뭐냐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이 온전하게 완수가 안 되는 거 에요. 그러니까 일 자체를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거나, 영혼을 파괴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애정을 주지 않는 거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행하는 모든 삶에는 온전함이라고 하는 열매가 없어요. 시간의 문제이긴 하지만 언젠가는 온전함이라는 열매가 없는 그 망가진 삶이 그를 덮치지요.그리고 하나님 일을 그렇게 했는데도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깊이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복음적인 교리에 비춰볼 때 사실은 불가능하다 이거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의 정신을 봐도 뭐냐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열매를 보면서 사랑을 더 해주시는 거 에요. 그 열매를,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자기 자신이 마음을 드려서 믿음과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는 원리에 의해서 그렇게 수행되지 않고 무조건 업적으로서만 이뤄놓은 그 열매를 보며 하나님이 그를 더 많이 사랑해 주신다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러면 재능 있는 사람들이 가장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겠네요. 그렇지 않아요. 능력이 많은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소외됐는가 하면, 미련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이야긴가. 그게 뭐냐면 온전함을 추구하는 거 에요. 그중에 하나의 요소일 뿐 이 에요. 온전함을 추구하는 거 그래서 온전함을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이지요? 우리 이렇게 예배드리잖아요. 지금. 한 주일 마다 예배를 드리잖아요? 그런데 예를 들자면 그런 거 에요. 내가 주인 낮 예배시간에는 온전한 예배자이지만 직원예배시간에도 온전한 예배자인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거에요. 그 생각은 결국은 개별적인 의무를 온전히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 없이는 반성이 안 된다. 라고 하는 거지요. 개별적인 의무를 온전하게 수행하고자 하는 목표가 없을 경우에는 반성이 안 된다. 라고 하는 거지요. 목표자체가 없고 그냥일이 이뤄지면 되는 거지요. 그런 경우는 그 일에 대해서 그 사람이 깜짝 놀라거나 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될 땐 언제냐 하면 일이 몹시 틀어져서 아주 심각하게 문제가 되었을 때,그때만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는 거지요. 나머지는 생각이 없이 이뤄지게 되는 거지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 시대 때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 이였잖아요. 그것뿐 만이 아니지요. 예배를 이야기 했지만 예배뿐만이 아니지요. 하다못해 예배당을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한번 한다고 하더라도, 유리창을 한번 닦는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온전함을 추구하고자하는 것이 목표가 될 때 그때 비로소 반성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렇게 일을 하면 그 결과를 현장을 한번도 본적이 없고 일한 성과가 서류로만 남아도, 우리 같은 사람은 이렇게 서류를 보면 현장에서 그 일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이루어 졌겠는가? 온전함을 추구하는 가운데이루어 졌겠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서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알 수 있는 거지요. 자신의 영혼은 너무나 잘 아는 거지요. 그러면 왜 그렇게 온전함이라는 것이 중요한가?여기 지금, 의복에 요만큼 문둥병의 병원체가 누룩처럼 번졌거든요. 그걸 왜 그렇게 빨아요? 이게 지금 내 몸을 찌르는 것도 아니고, 당장 위해가 되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왜 이렇게 빨아요. 빨아도 안 지워지니까 찢어내요. 왜 그래요. 그래도 해결이 안 되니까 옷을 벗어서 다 태워버리고 그만 못한 옷을 입어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고 목표가 무엇 때문이에요? 모세에 의해서 제시 되는 게 뭐냐면 문둥병이 몸은 물론이거니와 의복, 너희의 거하는 처소, 가까이에도 오지 말하라 이거에요. 그 온전함에 대한 목표가 있으니까 이렇게 치열하게 찾아내는 거지요.
그러면 그런 온전케 하고자 하는 목표가 없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거기에서 이제 그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정신이 사라지게 되는 거지요. 그리고 그냥 일만하면 되는, 그런 식이 되어버리는 거지요. 그런데 그건, 그런 식으로 섬기는 그 자체가 하나님 에게는 말할 수 없는 모욕이 에요. 그리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죽어라고 일생을 일해도 하나님을 한번도 섬겨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이거지요. 보세요. 온전함을 추구하지 않아요. 매일 매일 일을 해 나가요. 해나가요. 그리고 한달이 되면 우리가 생활비를 받아요. 그렇게 살아가요. 그게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섬긴 것이 되냐 이거지요. 제가 학교에 있을 때 항상 이야기 한 것이 그거에요. “내가 여러분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치지만 히브리어를 가르쳐서 먹고사는 거나, 서울시내 내려가서 학원 차리고 영어를 가르쳐서 먹고 사는 것이나 글자 모양만 틀리지 뭐가 틀리냐?” 이거에요. 하나가 없으면 다 똑 같은 거라 이거 에요. 설교해서 먹고사는 거나, 풀빵을 팔아서 먹고 사는 거나, 다 마찬가지다 이거에요. 뭐가 없으면? 그 자신이 살아있는 삶, 여기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래서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감! 그리고 그일 전체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되겠다. 라고 하는 소명의식! 이것이 없으면 결국은 무얼 해서 먹고 살든지 그냥 자기가 먹고사는 것에 불과하다는 거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당연하지 않아요? 그러면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모두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되겠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간에 주님의 그 놀랍고 특별한 사랑을 입어서 여기까지 기가 막힌 사연을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으니까 이제 내일 죽더라도, 일년 후에 하나님이 나를 데려 가시더라도 진짜 주님을 잘 섬기고 나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주님 마음에 기쁨이 되도록 그렇게 살고 싶다.
그런 소원이 웬만큼 하나님을 강하게 만난 사람들 속 에는 다 그 소원이 있어요. 그런데 이제문제는 뭐냐면 잘 들어 보세요. 그 정신이 매일 매일 만나는 개별적인 삶의 의무에 적용되지 않으면 그건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서 죽을 때 까지 실현이 안 되는 거 에요. 실현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실현이 안 되는 거 에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날마다’ 라는 부사가 많이 나오지요. 날마다, 이게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도 날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어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했어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뭐라고 노래했어요? (아침 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이하생략!) 하나님 앞에, 고난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신실하게 파수하니까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보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처음에 이것을 깨달았을 때 굉장히 커다란 충격 이였어요. 이야기를 하면 한없이 깁니다만 조금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 안 에 자기를 속이는 기능이 있다. 라고 하는 거지요. 그것은 뭐냐면 순간순간 이렇게 기도할 때 마음이확 밀려오면서 진짜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이 주님의 손에 의해서 구원 받고, 교회라고 개척을 해서 오는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이 죄를 짓고, 그리고 불결하고, 더럽게 살았는데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셨구나. 이제 진짜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다. 나의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리고 싶다.그때 마음이 쭉 녹아내리는 거 같잖아요?
그런데 그때 그렇게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뼈 속 깊이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는 정신 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을 했으니까 내 삶 전체에 이것이 배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지요. 그런데, 굉장히 여러 해 동안 속았어요. 특히 초창기에 하나님을 만나고 미끄러질 때 굉장히 많이 속았어요. 여러분들이 속는 이유 중에 하나가 뭐냐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내 생명주님께 드리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내 생명주님께 드리리. 그렇게 마음에 쭉 녹아내릴 때 항상 동반되는 마음의 감정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심적인 수납의 감정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신다. 라고 하는 감정이 에요.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있고,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리고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진실하고, 그리고 이런 주님을 향한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고 그래서 결국은 나의 삶 속에 이런 것 들이 다 배어 있어서 일생을 살고나면 부족하지만 하나님만을 위해서 달려온 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아주 흔하게 저를 속이던 방식 이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는데 하나님이 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어요. 뭐냐면 벌거벗은 모습으로 있는 저 자신을 보게 하셨어요.
깨달은 게 뭐냐면, 죄의 속임의 작용이 은혜의 경험 속에 까지 파고드는 구나. 은혜는 우리를 속이지 않지만은 그 은혜를 해석하는 우리 안에 있는 죄가 그 은혜를 그릇 해석하게 만드는 거 에요. 정말 충격이었어요. 그리고 나는, 정말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은데 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깊고, 넓고, 심오해요. 정말 이에요. 우리가 가보지 못한 은혜의 세계가 비 할 때 없이 많아요. 비밀이,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다하다 뭐라고 했어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의 부요함이요.” 욥이 뭐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그 놀라운 행사 신묘막측 하기가 이를 때 없다”고 고백을 했어요. 죄의 역사도 그런 측면을 기지고 있는 거 에요. 그래서 개별적인 의무에 마음을 싣고 그 속에서 온전함을 추구하려고 해야 해요. 온전함을 ! 그것 없이는 안 되는 거 에요. 온전함을 추구하라구요. 그래서 그 개별적인 삶이, 내가 오늘 교회를 위해서 봉투를 접는다. 봉투를 접는 이 개별적인 삶이 다른 것과 연결이 안 되고 딱 하나 끊어져서 하나님을 향해 드려지는 훌륭한 꽃다발이 되게 해야 한다 이거에요. 그런 삶의 연속 속에서 그 사람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향기롭고 아름다운 삶이되는 거 에요. 여러분 제가 언제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 한적 있지요. 하루에 더도 말고 20번만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면, 여러분 성화의 삶의 엄청난 진전이 있을 거라고 말씀 드렸지요?
그런데 실제로 실험을 해 보시면 알지만 20번을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부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 에요. 자기가 특별한 은혜의 상태에 있지 않는 한 가능하지 않다. 라고 하는 것을 발견 하게 되는 거 에요. 왜 그런지 아세요? 인생전체가 하나님 앞에 온전해 지고자하는 목표는 서있는데, 목적은 서 있는 데 개별적인 상황에서 온전한 목표가 없는 거 에요. 온전하게 일을 수행하고, 그리고 온전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겠다.라고 하는 개별적인 목표가 없는 거 에요. 목표가 없으면 어떻게 되요? 하나님을 향해서 전폭적으로 의지해야할 갈급한 필요를 못 느끼게 되는 거지요. 보세요. 한 이틀 동안 어떤 특정한 일을 하는 데 그 일이 잘 이뤄져야 된다. 그 일이 안 이뤄지면 큰일이다. 라고 하는 목표를 가진 사람과 어떻게 하든지 되기만 하면 된다. 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차이는 굉장한 거 에요.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어떻게 발견하게 되냐면 하나님이 당신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지만 겨우 하나님을 의지 하는 거 에요. 그러니까 자꾸 환란이 생기는 거 에요. 그리고 보통자신의 재능으로 해결할 수 없는 큰 일이 자꾸 생기는 거 에요. 그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표라고 생각하면 안돼요. 진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의 평범한 삶 속에서도 충분히 하나님을 의지해야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거 에요. 제가 교사 리바이벌 속에서 심방에 대한 것을 잠깐 적었는데, 그런 경험을 비춰보면 영혼에 대해서 우편배달부식으로 쪼르르 갔다가돌아와서 보니까 없데요. 전화해도 안 받데요. 그런 심방에는 없는 효력이 목양 적 심방에는 있어요. 그 영혼을 찾아가고, 그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 끝까지 찾아내고, 그 심방이 이뤄지기를 기도 하고, 그리고 그 심방이 영혼을 향한 지극한 사랑 속에서 그 한번의 심방이 그 영혼의 마음을 움직이는 심방이 되게 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다보면 그 심방 속에 나를 성화 시키는 요소가 깃들여 있는 거 에요. 이거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개별적인 의무 하나하나에서 온전함을 찾고, 그리고 어떻게 이일이이뤄져야 되겠다.라는 온전함을 찾고 거기에 대해서 절박한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성화의 삶에 큰 도움을 주고 이런 문둥병과 같은 부패한 것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 깃들어서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 이거지요. 그리고 그런 온전함이라는 목표를 가질 때 여기 묻어 있는 문둥병의 열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지요. 온전해지고자 하는 목표가 있으니까 이게 보이기 시작하는 거지요. 그래서 그것들을 털어내고자 하는 결단을 갖게 되는 거 에요. 그 결단이 결국은 단계로 구분 지어지는 데 깨끗하게 빨거나, 과감하게 찢어 내거나, 아니면 불태워 버리는 거 에요. 그런 것이 바로 우리의 성화의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자세라고 하는 것 이지요. 나는 여러분들이 제가 받은 깨달음 이상의 깨달음을 누릴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여러분들이 서있는 그 자리에서 일평생 산 다음에 주님을 섬겼다.한순간도 나를 섬긴 적 이 없다. 라고 하는 그런 평가를 받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 모든 섬김엔 거룩이 배어 있어야 합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2:13)
제사에 관한 규례를 알려주시면서 반드시 소금과 함께 예물을 드리도록 이렇게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것이지요. 이 소금이라는 것이 도대체 뭘까? 구약에 보면 여기 이외에 특별히소금 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아주 밝히 드러내 주는 구절이 잘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러면신약으로 넘어가면 예수님이 제일 먼저 말씀 하시지요.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 빛과 소금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빛이 먼저가 아니라 소금이 먼저이고 그다음에 빛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금은 썩어가는 이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사회개혁 활동이고, 빛은 진리와 성령을비추는 빛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이다. 이야기 하는데, 그렇게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둘 다 똑같이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이렇게 말씀 하셨을 때 이거는 이미 당신 앞에 있어서 팔복설교를 듣고 있는 제자들의 현 상태를 이야기 하는 거 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앞으로 어떻게 되라, 말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현 상태를 직설법으로 말씀 하시는 거 에요. 그래서 이빛, 그다음에 소금, 둘 다 그 말을 듣는 사람들안에 있는 현재적 본질을 가르치는 말이에요. 그리고 이 둘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나뉠 수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본질을 두 가지 각도에서 본 것이다. 이거지요. 그런데 소금이란 것 이 뭘까? 소금은, 결론을 이야기하면 사회개혁, 활동, 썩지 않게 세상을 보호해주는 어떤 역할을 함으로서 방부의 역할을 하는 그런 것 이아니라 이 소금은 거룩 이에요. 그리고 거기서 이야기 하는 이 빛은 거룩의 또 다른 측면인 현자의 삶을 가르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현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그 사람 안 에 있는 진리의 빛을 가르치는 거 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해석을 해놓고 보면 어설픈 도덕주의가 이 성경구절에 개입할 이유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거룩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사랑 이 에요. 그리고 그 거룩의 본질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다. 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원래 이 거룩은 그 하나님의 초월적인 성격과 초월성과 도덕적 반증성 을 의미하는 것이에요. 그러나 이것은 본성적 거룩 이에요. 그래서 ‘나 여호와는 거룩하다’. 라고 말씀 하실 때 는 본성적 거룩, 혹은 본체적인 거룩, 혹은 실효적인 거룩, 이게 내가 거룩하다. 그러니까 너희도 거룩하라. 그러면 그것은 거룩에 대한 인식이 인간의 삶 속에 적용되는 거 에요. 두 가지 점에서 그렇게 적용된 인간은 거룩하다고 말 할 수 있는데 성경적으로 볼 때 모든 거룩은 하나님의 본성이 거룩의 근원 이 에요. 다른 것은 아무것도 거룩한 것이 없어요. 하나님의 본성이 거룩하신 것 이 에요. 그 본성과 관계되고 그 본성에 의해서 터치 되는 거 에요. 모든 것들이 거룩한 거 그래서 에드워즈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길 했어요. “모든 거룩은 하나님의 본성이 원천입니다.그리고 하나님 이외의 것들 이 거룩하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 본성으로부터말미암아 흘러나온 어떤 것 때문에 그 연관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도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본성을 그러내 주시는 수단 이였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람이 없는 이 세상을 거룩하다고는 말하지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거룩한 것은 하나뿐이니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영혼을 주셔서 당신 자신의 신령한 성품을, 성품의 일부를 직접 인간으로 하여금 감지하게 하신 거 에요. 그렇지요? 하나님이 아름다운 우주와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그건 하셨을 뿐이고 거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남겨 두시진 않으셨지요.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의 일부를 감지한자가 되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남겨두신 거 에요. 그러니까 얼마나 인간이 거룩한 존재인가 이거지요. 그런데 그런 거룩의 흔적을 가지고 거룩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그 본성적인 거룩에 의해서 반응하는 그 거룩을 하나님 앞에 나타나 보여야할 때 의미가 있는 거 에요. 그런데 그 거룩이 뭐냐면 첫째는, 하나님의초월하심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자인가 하는 것을 느끼는 거 에요. 초월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래서 거룩한 신자의 마음에는 항상 뭐냐면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시고 그리고 자기는 정말 티끌만도 못한 아주 미천한 피조물이다. 라고 하는 그 피조물로서의 겸손함이 있는 거 에요. 그래서 자신이 하찮음을 보면서 자신이 도저히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고 하나님의 탁월한 위엄과 그 위대하심과 그 하나님의 지고하게 높으신 그 하나님의 존재를 보면서 그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는 사실에 대해서 두 가지 느낌을 동시에 받는 거 에요. 뭐냐면 존재의 크기의 격차에서 오는 절망감과 그리고 동시에 그 무한히 크고 위대하신 그 하나님을 내가 아버지로 부르며 살아갈 수 있다는 대서 오는 사랑, 이게 바로 경외란 말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그의 도덕적인 완전성이에요. 하나님이 눈에 안보이고 거룩으로 부터 떠난 다음에는 우리가 조금 남에게 사랑을 베풀 때에는 우리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자긍하게 되고 대견스럽게 느껴져요. 그러나 주님의 그 거룩의 빛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무한한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지요. 정말 무한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는 거 에요. 그래서 그 무한하신 하나님을 뵈면서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만 무한한 뿐 아니라 나의 사랑은 결함이 많고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완전하고 위대 하시다. 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 에요. 그때 내가 감히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위대한 사랑 앞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교만 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 되는 거지요. 그게 적용된 거룩이 에요. 그런데 이런 모든 삶을 견제 하게 만드는 그 원동력이 뭐냐면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이에요. 왜? 그 온전한 사랑은 그 하나님이 이 모든 세상과 자기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완전한 계획을 모두 받아들이게만드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에 그런 거 에요. 그래서 하나님 만 사랑하며 살아야 된다. 라고 하는 이것은 이성적으로도 논증이 된 거 에요. 그래서 언젠가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있는 가운데 참회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깊이 깨닫게 됐어요.뭐냐면 어느 한순간에 커다란 논리의 틀로서 이 세상에 인간이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는 그 이성적인 틀이 쭉 밀려 와요. 수시로 하나님 사랑하지 않은 것을 눈물 흘리며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랬지만 그렇게 지성적으로 확 밀려와서 도저히 이 사학한 머리를 굴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 또 다른 대안이 없다. 라고 하는 이성적 인식이 논리의 틀을 가지고 밀려올 때 내 인생을 살면서 정말 드물게, 드물게 말이지요. 어떤 의미에서는 최초로 그 거대한 하나님 앞에 이성적 설복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더라 구요. 그리고 ‘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의 부요함이요.’ 그 후로부터 말이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면서도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 여러분들을 포함해서 이 세상에 있는 누구든지 간에 그 사람이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는다. 라고 느껴질 때 그렇게 불쌍할 수 없어요. 그는 대단히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의 결국은 수고와 슬픔, 그리고 눈물과 불행뿐 이 에요. 사랑은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모두 받아들이게 만들어서 자기의 삶 중 에 티끌같이 작은 부분 이라도 충신적인 합치, 코디얼 어그리먼트 안에서 일치를 이루기를 원하는 갈망을 가져요. 때로는 뼈를 깍아서 라도 때로는 살을 찢어서라도 나를 그 총체적인 합치, 보편적인 하나님의 선에 한 일부분으로서 완전한 일치를 하는,그래서 나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밝은 빛 이 흐려지지 않게 되길 원하는 그 소원을 갖게 되는 거 에요. 그러면서 마음에서 며칠동안 혼자 부흥회를 했어요.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이하 생략!)놀라운 그 은혜가 그런데 이 거룩이 바로 그런 거라는 거지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고 이 세상의 지고의 가치로서 가지고 계신 그 모든 계획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나니까 이 세상의 가치가 지배하고 총체적선이 아닌 일부의 선을 따라서 살아가는 악한 모든 삶과 내가 불일치를 이루는 거 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끊임없이 나를 그 불일치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모든 관계 와 관계 속으로 나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모든 영향력과 접촉으로부터 자신이 끊어져야 될 거 아니에요. 그래서 히브리어로 거룩이 ‘카도시바’ 라는 거 에요. ‘카도시바’ 이 ‘카도시바’ 란 말은 끊어내다. 그래서 분리되는 거 에요. 의미가 그런 거 에요. 그런데 그런 구별에 대한 가치가 그 구별된 하나님 앞에서의 주님의 창조의 목적을 다 살고 전심으로 그 분을 사랑함으로 그 분이 나를 이 세상에 지으신 그 아름다운 계획을 따라 살아드리는 것이 최고의 가치다. 라고 믿는 그 반응적인 거룩이 모든 삶의 구석구석에 소금이 각 예물에 깊이 배었던 것처럼 그렇게 배어 있어야 된다구. 그때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삶이 되는 것 이 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 중 에 하나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섬기면서 살아가는 데 그런데 그 소금이 없는 그 섬김의 구석구석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래서 끊임없이 자길, 부분적 가치의 체계 속에서 만족하며 살게 하려는 이 세상에 대한 사랑,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유혹을 끊어버리고 그 ‘코디알 벨유’ 충심 적 가치를 따라서 살려고 애를 쓸 때 그것이 바로 거룩이 에요. 그런 것 이 바로 섬기는 구석구석 배어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섬김에 포장 되 쌓인 그 거룩을 받으시는 거 에요. 그래서 오늘 여기 뭐 에요. 분명히 예물을 드리잖아요? 예물은 커!왜? 송아지, 수소, 뭐 이런 거 아니에요. 큰 예물이에요. 소금은 일부야! 그런데 오늘 뭐라고 했느냐하면 소금을 드릴지라. 마치 그 크고 화려한 예물은 소금을 하나님께 전달하기위한 포장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거 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내가 주렸느냐? 피나, 짐승의 고기나, 피나 그걸 내가 탐하겠느냐? 이 세상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걸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어요? 옛날에 우리교회 다니던 지체가 있었는데 아버지도 부자야. 아버지도 부자니까 아들도 부자잖아요? 사실은아버지 집에 어떤 의미에선 얹혀서 사는 거지. 다 아버지 꺼 잖아요? 그런데 그중에서 한 달 동안 일을 해서 번 돈 거운데 50만원 봉투에 넣어서 아버지가 자기보다 훨씬 부자지요. 그런데 처음으로 “아버님! 이젠 저희가 아버님께 용돈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게 이달치 용돈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렇게 웃으면서 좋아하더라는 거 에요. 그래 다 자기 꺼 에요. 그리고 받는 건 자기한테 더부살이 하는 거 거기서 50만원 꺼냈어도 자기 돈 꺼낸 거 아니에요? 그런데 따로 구별해서 봉투에 넣어서 “ 아버지 이거 아버지 용돈입니다.” 아버지는 500만원도 더 있어! 그런데 그렇게 좋아 하더라는 거 에요. 하나님도 그거에요. 여러분을 통해서 일을 하시잖아요? 하나님 혼자 하시려면 못하겠어요? 되어라! 그러시면 되잖아요.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물질을 바치는데 하나님이 만약에 갖고 싶으시면 있어라! 그러면 편안할거 아니에요. 무슨 이야기냐면 거룩이 배이지 않은 모든 헌신은 하나님 앞에 정말 의미가 없어요.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것이 모욕거리가 되는 거 에요. 그래서 이 말씀을 며칠 전에 묵상하면서 깊은 은혜를 받았어요. 그게 뭐냐면 우리의 모든 섬기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 자체가 이게 모두포장지야. 진짜 주님이 받으시고 싶은 건 뭐냐면 우리의 살과, 고기, 핏덩어리, 이런 걸 하나님이 받으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배어 있는 거룩! 그걸 하나님이 받으시고 싶어 하는 거 에요.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수치스러울수 가없어요. 왜냐면 살아온 날 동안 섬긴다고 섬기며 살아온 그 많은 순간들이 대부분이 이런 거룩이 없이 그냥 꾸역꾸역 섬겨서, 되든지 안되든지 스케줄 따라서그냥 가면서 살아온 삶이에요. 만약에 내가 그래서 주님의 나라에 갔을때 거의 코피가 나도록 그렇게 허우적거리며 인생을 살았는데 주님은 난 너로부터 섬김을 받은적이 거의 없다. 이렇게 말씀 하시면 이땅에서 오늘 주님을 섬기기위해서 고단하고, 피곤하고, 때로는 병들고, 때로는 억눌리고한 이 모든것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허무한 것이 될까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이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일속에서 창출되는 것이 아니거든 그렇지요? 예물은 준비가 됐는데 소금이 없어요. 그러면은 그걸 그냥 드리면 그게 어떻게 되겠어요. 하나님이 제사에 있어서 다른데에서도 그렇지만 제사에 있어서 만큼은 하나님 앞에 변이라는 것이 있을수 없어요. 율법에 따라서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오히려 제사를 안드릴때 보다 더 진노 하실수가 있는 거 에요.그렇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거룩을 드려야 되는데 그건 일속에 묻혀있는게 아니에요.바깥에서 풀빵이나 붙혀서 팔고 그러다가 교회에 와서 갑자기 설교하게 됐다고 해서 그 일속에 거룩이 묻어 있는것이 아니라 이거에요. 어떻게 해야되겠어요. 우리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하나님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를 끊임없이 현재적으로 깨달아야 하는 거 에요. 그러기 위해선 뭐에요. 교만을 끝없이 회개 해야되는 거에요. 교만한 마음을 죽이고 교만을 깊이 회개하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요.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가 하는것을 깊이 인식하게 되는거 에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이제 그 겸비한 가운데 거룩을 배워 나가게 되는 거 에요. 그래서 섬기는 섬김을 시작 할때, 그하루의 섬김을 마쳤을때, 주님이 소금을 받으셨을까? 거기에 소금이 있었을까? 그것을 깊이 생각해야 해요. 그때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가 우리에게 다가올수 있는 것 이지요. 기도 하겠습니다.
5. 순결한 기름으로 밝히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레24:2)
성막에 관한 규례를 모두 가르치신 후에 모세에게 특별히 성소의 등불을 밝힐 기름을 모우라는 명령을 내리시고 있는 광경입니다. 성소에 등불이 있고 그 등불에 기름이 밝혀진 것은 계시의 빛과, 그리고 자신을 태우며 타들어가는 그런 헌신을 계시의 빛과 그 계시의 빛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을 동시에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을 사람들에 의해서 의심할여지 없이 이 성소에서의 자기를 태우며 타들어가는 이 등불의 찬란한 조명은 성도와 그리고 제사장들의 기도의 헌신으로 예표 되어집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지식의 밝은 빛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 이였으며 기도가 불태워지는 그곳에 있는 진리의 감화만이 참으로 그 사람을 지혜롭게 하고 총명하게 만들어 준다고 하는 것이지요. 세월이 많이 지나가도 언제나 이 진리는 동일하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을 펼치던, 신약을 펼치던, 교회 역사를 펼치던, 또 우리 자신의 삶의 역사를 반성해보던,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바치는 기도생활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사람들의 해로움에 대해서 존 오웬 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더 뛰어난 학문을 소유한 사람 이였지만 그는 공부에 미쳐서 목회를 게을리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주일동안의 대부분의 모든 날들을 과도한 연구에 소진하고 목회를 위해서는 딱 하루만 바치는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목회의 본질은 우리의 지성과 우리의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분께 바쳐짐으로서 성취되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당대 최고의 지성인 이였고 복음적인 진리가 무엇인지 의회에서 확신이 서지 않을 때에는 이 사람을 불러서 성경적견해가 무언가 물어보았기에 그는 18세기 복음주의 신앙의 신탁이라고 불리어졌습니다. 그런 탁월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지성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위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소진하고 목회를 위해선 단 하루만을 바치는 사람들을 메마른 목회의 현장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 기도의 부족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성경에서 성막의 제도를 말씀하신 후에 그 속에 계속 타 올라야 할 찬란한 빛, 그것은 계시의 빛 이였습니다. 성소에 만약에 그 등불이 없었더라면 캄캄해서 제사장이 자기 직무를 수행할 수가 없었을 것이에요. 두꺼운 해달의 가죽에 지붕이 덮여있고 그 안에는 또 청색, 홍색실로 두껍게 짜서 만든 커튼과 그리고 여러 가지 장막들이 덮여있었습니다. 당연히 햇빛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성소를 밝히는 것은 오직 그 등불하나였습니다. 그것이 빛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세상에 암시하는 바가 너무나 많지만은 그 중에 일부만을 오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에 의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차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이 성소, 주님을 대면하는 이 성소에는 태양빛이 필요한 게 아니라 감람을 태워 빛나는 찬란한 빛이 필요했던 것처럼, 교회는 세상 속에 있지만은 천정을 째고 들어오는 세상의 빛에 의해서 운영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찬란한 계시의 등불이 교회 안에 가득 찰 때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요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태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 엊저녁에 편지하나를 이 메일로 받고 마음이 참 많이 아팠습니다. 일본사람이 제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짧은 편지였지만 그는 그 편지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일본사람입니다. 천만 다행으로 한국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목사님 교회 인터넷에 들어와서 설교를 듣고 큰 은혜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우리 일본은 어느 교회를 가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이야기로 기득 차있습니다. 진리의 빛 대신 세상의 빛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 설교를 일본말로 더빙해서 송출해 주실 수 는 없는지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가장 커다란 고통입니다. 오늘날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지붕과, 그리고 벽을 두꺼운 해달의 가죽이나 덮개가 아니라 유리로 바꾸려고 하는 시도들을 너무나 많이 하고 있습니다. 바깥에 있는 태양 빛, 세상의 빛이 너무나 환하게 교회에 들어왔기 때문에 계시의 등불조차 필요 없을 것 같은 그러한 교회를 구현해 가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까스로 어떻게 계시의 빛을 조금 비췬다고 할지라도 그것보다는 천정을 통해서 들어오는 찬란하고 눈부신 이 세상 지혜의 빛이 성소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런 때 태어나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있고 말씀사역을 수종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교회의 가장 큰 영광은 성도들로 붐비거나 아니면 많은 자본을 가지고 움직이는 회사 같은 곳이 되는 것도 교회의 영광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오직 하나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찬란한 계시의 빛이 어두운 성소를 가득 채울 때 그것이 바로 교회의 영광입니다. 물 돼지의 가죽 같고, 그리고 염소 털 같고, 태양에 쩔은 천막과 같지만은 성소 안에 찬란한 계시의 빛이 기득할 때 거기 주님이 계셨습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를 우리들이 힘써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섬기는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그런 계시의 빛이 교회 안에 가득할까? 도다 더 궁극적으로는 그런 계시의 빛이 교회 안에 사라지지 않게 하는 힘이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옥한음 목사님이 ‘이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라는 책을 쓰셨어요. 그 책을 한번 읽어 보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세요. 당신이 처음 교회를 시작할 때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능한 사람 하나가 있었다는 거 에요. 평신도인데 계시록을 첫 장부터 마지막장까지 완벽하게 외운 신자였다는 거지요. 그래서 계시록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사람한테 물어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걸어 다니는 성경 이였다고 그래요. 그런데 목회를 해 보니까 너무나 강퍅하고,단단한 마음을 가져 도무지 깨뜨려져 본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들이 계시의 빛이 성소에 찬란하게 비취기 위해서는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해야 합니다. 나는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들을 비롯해서 미래의 조국교회를 이끌어 가야할 젊은 목회자들이 성경 그 자체를 연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한 사람이 진실하든, 덜 진실하든, 목회에 있어서 탁월한 아이디어가 있든, 그 일에 있어서 좀 부족하든지 간에 성경 그 자체를 연구하려는 진지한 탐구자세가 결여된 것은 정말 그 목회의미래 사역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에 깊이 능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어와, 히랍어, 아람어, 그리고 그 성경을 해석해 왔던 역사인 라전어 와 그리고 고이언 트립과 그 많은 성경이 번역되고 전승되어 내려왔던 그 수많은 성경이외의 언어들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조목조목 풀어내어서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성경 그 자체가 빛을 발하게 하는 그런 놀라운 탐구의 작업은 물론 모든 사람의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마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될 능력은 없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자기 자신이 성경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 이해하고 그것을 습득하기 하기위해서 자기 각자에게 주어준 수준에서 진지하게 노력하고 그 탐구의 초점이 성경 계시여야 한다고 하는것은 양보 할 수 없는 전재 인 것입니다. 난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진실하고 헌신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성경 그 자체를 사랑하고, 그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그는 정말 선한목자 일수가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들이 있는데 그 양들을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지 꼴을 준비하지 않는 목자가 어떻게 선한목자 일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부지런히 성경과 신학을 탐구하고, 또 목회자가 그렇게 되도록 교회가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성소의 빛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그 찬란한 계시의 빛은 감람유를 태우는 그 소화를 통해서 그 빛이 찬란하게 빛났으니 이것은곧 성소에 비취는 계시의 빛이, 기도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감람을 찧어낸 기름, 이라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어로 쉐맨 자이트 라고 하는 단어인데 쉐맨은 기름을 의미하고 자이트는 감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감람나무는 아주 존귀한 나무의 대명사였고 가시나무가 저주를 상징하는 것 이였다면 이 감람은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하는 것 이였습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그 기름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세울 때 부어졌던 그 기름이며 그것은 곧 성령을 상징하는 것 이였고 따라서 이 감람유는 그들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그런 기름 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역시 감람나무로 비유되었으니 이는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선택하시고, 축복하신 메시아를 표상하는 것 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 보면 그 감람유를 가지고 감람유를 모든 성도들에게서 모우라고 하는 것 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 보면 ‘찧어낸’ 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느냐하면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 그것을 켜기 위하여 내게로 가져오게 하라. 여기에서 ‘찧어낸’, ‘찧어’라고 읽는 단어는 히브리말로 ‘카티트 ’라고 하는 단어인데 영어로 표현하자면 ‘찧어’라기보다는 깨뜨려, 라고혹은 두들기어 라고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직역을 하자면 감람을 두들겨 깨뜨린 그 기름을, 그 순결한 기름을 켜기 위해서 내게로 가져오게 하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약간의 은어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감람유를 감람에서 기름을 짤 때는 먼저 올리브씨앗을, 올리브열매를 두들깁니다.그래서 그것을 탁탁탁탁 다 터트려 깨고 깬 그것을 모두 집어넣고 기름을 짜는 그 틀에다 넣어 강한 압력을 가해서 그것을 꽉 눌러 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치 볶은 깨를 틀에다가 놓고 그리고 커다란 프레스로 꽉 눌러서 거기에서 기름을 짜듯이 그렇게 감람유를 만드는 것 이지요.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소에 쓰기 위해서 가져오도록 지시하시는 감람유는 그렇게 프레스에다 넣고 꽉 눌러서 짜낸 그기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이지요? 그 기름 짜는 틀에다 넣고 꽉 짜기 위해서 먼저 그 감람을 두들겨서 깨뜨렸는데 아직 짜기 직전의 깨뜨린 상태에서 자연적으로 흘러나온 기름, 그것을 모아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바치고 그 바쳐진 기름을 가지고 여호와의 성소에 등불을 밝히는데 사용하라고 명하는 것이지요. 그 무슨 이유로 하나님이 그렇게 복잡하게 명령을 하셨을까요? 평범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름을 쓰는 그런 방식으로 똑같이 프레스 에다 집어넣고 꽉 짠 그 기름을 가져오라고 하시면 그만 이신데 왜 열매 하나를 깨뜨려서 아직 무르기 전에 거기서 흘러나오는 기름을 채집해서 그것을 가지고 오라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 이였을까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순결한, 순결한 이라는 말, 히랍어로 ‘짜끄’라고 하는 말이 첨가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번 탁! 하고 깨뜨렸는데 그 감람열매에서 기름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기름은 순수한 기름이지만 깨뜨려진 열매들을 모두 모아서, 그래서 껍질을 포함해서 프레스에다 놓고 꽉 짰을 때 거기에는 억지로 나오는 기름도 포함 되 있을 것이며 그래서 거기에는 순수한 감람나무의 열매가 눌려서 나오는 기름 이외에 거기 붙어있는 여러 가지 불순물이 눌려서 함께 섞여 나오는 그런 어떤 종류의 액체가 포함 되 있을 거라는 거지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기름의 순도가 떨어지게 되고 기름의 순도가 떨어지게 되면 불을 붙일 때 그름이 나거나 불꽃이 밝게 빛나지 않는 결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름은 하나님의 성소에 바쳐지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생각을 한거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깨뜨려서 드리도록 그렇게 요구했다, 라고 하는 것 이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배우는 것으로서 오늘 설교에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순전한 기도이여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기도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이고 청구의 기도와 성화의 기도가 따로 없이 그것이 어떤 기도이든지 간에 우리를 성화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은 하나님은 어떤 경우이든지 순결한 기도를 원하시는 것이지요. 이 순결한 기도는 기도제목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그 제목을 보십시오. 얼마나 순결한 기도의 제목 이였습니까? 그러나 억울한 과부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그 제목은 순결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 이였습니다. 성소에 올라가 미친 여자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던 한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의 제목은 아들 하나 낳게 해 달라고 하는 지극히 세속적인기도였으니 그 기도의 제목만으로 볼 때는 성결한 기도의 제목이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의 순결함은 그 기도의 제목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어떻게 불순한 동기 없이 드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연약하니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한 신자로 하여금 주님을 찾을 수 없는 그 영혼의 상태에 있는 그 신자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기 위해서 섭리 가운데 육신의 고통을 허락 하게도 하시고, 환경의 어려움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 처음에는 고통 때문에 기도가 시작되지요.그것은 순결하지 않은 기도 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작용이 일어나면서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그의 기도는 점점 순결한 기도가 되어져 갑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설득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움직이거나, 심지어는 하나님을 협박을 해서라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도에 뛰어들었지만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고정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며 바뀌어야할 존재는 자기를 대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고 있는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기도의 제목은 순결해 가기 시작하고 그의 기도의 내용 또한 순결해 지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고통 때문에, 자신의 문제를 위해서 하나님께 매달렸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기도의 상태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 이지요. 오늘날 우리의 목회사역의 성공을 위해서 비는 많은 기도들이 저는 응답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동기가 순결해지지 않고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순결하게 변화되는 일 없이 단지 사역의 성공을 위해서 비는 많은 기도의 제목들은 하늘을 오르다가 떨어지는 화살과 같습니다. 문제는 기도의 순결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순결함이라고 하는 것. 그것 없이는 누구도 그 기도를 통해서 찬란한 계시의 빛이, 맑고 밝게 빛나는 그런 경험을 할 수가 없어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허물과 부패한 오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이 기도는 시편 131편8편 3절에 기록된바와 같이 우리의 영혼을 장려하셔서 주님이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영적 쇄신의 수단입니다. 사람이 부패하고 연약해도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기도가 순결해지면 기도가 그 사람을 쇄신 시킵니다. 그런데 기도가 도무지 순결해지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정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많은 교역자와 직원들이 교회를 섬긴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성소에 참다운 계시의 불빛이 비취지 않고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순결한 기도로 바쳐지지 않는다면 그 섬김이 어떻게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냥 세속적인 직업처럼 우리는 그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일생동안 살아도 우리는 주님 앞에 단 한번도 하나님을 섬긴 것으로 기록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저는 며칠 전에 이 본문을 대하면서 정말 큰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정말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 그리고 얼마나 철저한 것인가? 한번 반성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에게 순결한 기도가 있습니까? 시간을 따라서 때우듯이 마음의 바침이 없는 형식적인 기도가 일반화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여러분들이 얼마나 경험 할 수 있겠습니까? 순전한 한 사발의 기도는 불결한 한 트럭의 기도보다도 하나님에게 더 훌륭한 것이며 그리고 우리를 바꿔놓는 탁월하고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이 감람나무 열매에서 기름이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그 감람열매가 깨뜨려져야 했습니다. 눌려서 꽉 짜여진 상태에서 나오는 기름이 아니라 탁 하고 깨뜨렸을 때 흘러나온 그 기름 이였습니다. 기도는 처음에는 내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도는 됩니다. 기도는 처음에는 우리에 의해서 시도되지만, 시간이 흐르면 우리가 기도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의 기도로 하여금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처음엔 하지만 나중엔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기도를 하는 데 하다가 결국은 마지막 끝나는 순간까지도 하다가 기도가 끝난다면 그 기도는 정말 생명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합니다. 그어나 시간이 흐르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안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기도는 자기 깨뜨려짐 속에서 흘러나오는 기름과 같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시도하지만 마지막 끝날 때 까지도 기도가 되는 경험 없이 하다가 끝나는 이유는 자기 깨어짐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것입니다. 자기 깨어짐이 없이는 결코 기도가 되는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는 기도는 필요하기는 하지만 하는 기도는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하는 기도는 우리가 노력해서 하나님 앞에 나가기를 원하는 마음을 행동에 담지만 정작 우리를 깊이 변화시키는 기도는 되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하지만은 되는 경험이 없이 기도를 하다 끝나는 이유는 뭐냐면 우리 안에 있는, 우리를 되게 하시는,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그 수많은 인도에 저항하는 강력한 자아들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들이 깨뜨려지지 않은 채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기도를 하지만 되는 경험을 거의 못하고 하는 가운데 끝납니다. 그래서 하늘의 은혜의 기름이 우리에게 부어지기도 전에 우리의 기도는 끝나고 기도시간은 지키지만 그 속에 하늘을 찢고 찬란하게 부어지는 은혜의 빛이 우리 안에 죽어야 할 심령을 죽이고, 다시 살려야 할 심령을 세포가 돋게 하여 다시 살게 하는 영적소생의 감격들은 잃어버린 채 형식적인 교회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너무나 많은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철로 역정의 길에서 낙오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너무 많은 기대를 걸지 말아야하고 그리고 날마다 우리의 몸은 여기에 있으나 매순간 주님의 부르심을 귀 기울여 들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 언제든지 우리 앞에 하늘가는 밝은 길이 놓여 있음을 믿고 그렇게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깨뜨려지지 않는 수많은 자아들은 기도를 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기도의 사역에 강력한 저항을 계속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기도 가운데 나타나야할 강력한 은혜의 능력과 성령의강력한 영양과 우리를 쇄신시키는 영적인 소생의 작용들은그 수많은 깨뜨려지지 않는 자아의 저항 속에서 힘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흐트러져 버립니다. 이 모든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점점 능력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고 기도의 형식은 가지고 있지만 능력을 상실한 기도 생활을 이어가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은 기도의 의무를 무시하는데 까지 나아가는 징검다리를 놓습니다. 그래서 이 자기 깨어짐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받는 비결입니다. 여인의 향유의 옥합이 깨뜨려졌을 때 향유의 향기가 온방을 가득하게 채웠고,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이여자의 행한 일이 복음이 전해지는 그곳마다 증거 되게 하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모세에 의해서 바위가 깨뜨려지자 거기에서 거침없이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목말라 죽어버리게 된 그 사람이 에낫골 에서 물을 마시고 소생하게 된 것도 그 땅이 터지고 샘을 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심령도 자기 자신이 깨뜨려지는 그곳에서 무수한계시의 빛, 은혜의 세계를 아는 지식의 빛, 하는 걸로 시작했지만은 되는 걸로 이어지게 만드는 기도의 은혜의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그러나 우리 주위를 보십시오. 기도를 시작했지만 그러나 자기 깨어짐 속에서 기도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일년이 지나도 거의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렇게 자기 깨어짐도 없고, 자기를 부인하려는 노력도 없고, 제 십자가를 지려는 헌신도 없고, 예수의 뒤를 따르려는 결단도 없는 사람들이 힘겨운 이 세상의 자원으로 신령한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 그 처량한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평화를 위해 일하나 그들의 마음엔 평화가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나 그들 속에는하나님의 사랑이 증거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선한 삶을 가르치나 자신은 진정 선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따라 사는 찬란한 은혜의 기쁨이 없습니다. 얼마나 커다란 불행입니까? 모두 자기 깨어짐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한 사람의 사역자가, 한사람의 신자가, 자기 깨뜨려짐이, 그의 영적 생활 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기도생활은 급속하게 메마르기 시작합니다. 온갖 식물과 아름다운 열매를 내던 신앙의 정원에는 가시와 엉겅퀴가 가득하고 심겨진 나무 사이로 소리를 내며 흐르던 시냇물은 소리를 그치고 그리고 메마른 풀들이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이 자기 깨어짐은 두 가지에 대한 깨어짐이니 하나는 죄에 대한 깨어짐이고, 또 하나는 죄에 대한 사랑에 대해 깨어짐이고, 또 하나는 자기 의에 대한 깨어짐입니다. 순간순간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수많은 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기 안에 일어나는 모든 정욕에 대한 관대한 처분, 이런 것 들은 마음을 점점 더럽혀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 깨어짐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캐나다 여행을 하고 있는 동안에 너무 몸이 좋지를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한 주간 동안 지내면서 계속 내 마음속에 드는 의문이 그것 이였습니다. 왜 우리는 어쩌다 한번 깨어질까? 우리의 몸과 마음에 달라붙는 죄와 수많은 정욕의 찌끼는 마치 아이들이 지남철을 땅 바닥위로 끌고 다닐 때 거기에 달라붙는 쇳가루와 같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정말 오랜만에 한번씩 밖에 깨뜨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탁월한 믿음의 사람들, 정말 참된 신자가 되기를 끊임없이 탐구했던 성경과 역사, 우리 지신들 주위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단히 깨어지는 삶을 실제로 살았습니다. 저 자신의 신앙의 경험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기 깨어짐이 늘 기도 속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이 무시로 주님을 찾는 일이 불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슬펐습니다. 언젠가는 밤중에 고민을 하다가 핸드폰을 만져보니까 거기에 한 시간에 한번씩 경보음을 울리는 장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장치해 놓고 속으로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이제 이 정각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리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리라 그렇게 해서 하루에 최소한 16번 정도 기도한다면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이 이 스피릿쳐 마인디드냇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핸드폰의 벨 소리는 정확했지만 제 마음이 거기를 훨씬 따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아직도 나의 지성과 은혜로 발견 할 수 없는 수많은 알려지지 않은 죄들이 깊고 푸른 바다 밑에 있는 암초와 같이 잠재되어있고 나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해도 그것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는 옛 자아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그 사실을 생각하면 슬픕니다. 주님을 진실 되게 사랑하고, 그리고 지금이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기꺼이 주님 앞에 가겠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죄를 사랑하고 있고 그 사랑에 대해서 뜨려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더더욱 그것이 객관적으로 인식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인식되었다고 하더라도 인식하기만 할뿐 그것을 구체적으로 파멸하려는 죄 죽임의 실제적인 노력이 없는, 그래서 파악했다가는 물러서고 확인 했다가는 다시 양보하는 그런 날들이 계속 반복되는 것은 마치 히랍 신화에 나오는 탄탈로스의 신화와 같지 않습니까? 제우스의 아들로서 자기의 아들을 네오풀류스라고 하는 신에게 재물로 바쳤다는 죄목 때문에 제우스에 의해 깊은 물속에 던져졌고 거기에서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려고 수면에 입을 대면 수면이 낮아지고 배가고파서 코앞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기 위해 팔을 벌리면 나무가 멀리 도망 가버렸다고 하는 일이 무한이 되풀이 되었다고 하는 그 탄탈로스의 신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주님이 필요해서 기도하지만 탄탈로스의 신화처럼 그 물을 마실 수 없고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에 대해서 수없이 이야기 하고 계시의 양식됨에 대해서 말하지만그 양식을 차마 먹을 수 없는 처지에 우리들이 놓여있어서 늘보고 즐거워하고 늘 만지면서 즐거워 할뿐 단 하나도 내 자신의 음료가 되지못하고 식물이 되지 못하는 가운데 말씀과 은혜를 말하고 사는 그런 크리스찬 탄탈로스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모두 죄에 대한 진실한 깨어짐, 죄에 대한 사랑에 대해 깨뜨려지고 하나님 없이 스스로 설수 있다고 하는 자기의 에 대한 깨어짐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일 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유럽에 가면은 얼음으로 지어진 호텔이 있어서 일년 전부터 사람들이 예약을 하고 완전히 얼음으로 된 호텔에서 하룻밤 잔다고 합니다. 얼음으로 그런 큰 건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절대로 그 바닥이 차갑고 단단해서 얼음을 얹어 놓으면 강력한 냉각력으로 그 얼음덩어리가 바닥에 붙어있어야 하고 위에 얼음을 얹으면 외기의 차가운 온도가 두개의 얼음 사이를 강력하게 접착시켜야 합니다. 주님 없이 쌓아 올려지는 자기의 의가 계속 건축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얼음같이 차가운 마음이 되어야지만 자기의 의를 쌓아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 바닥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가끔이라도 녹아내리는 일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건물은 쌓아올려지면 무너지고, 쌓아 올려지면 다시 파괴되는, 그런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기의 에 대해서 깊이 깨뜨려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생활이 순결한 기도 생활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개의 메시지로 충분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메시지를 세 번째로 보탠다면 이것은 기도에 있어서 자발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일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이나 어떤 여건에 의해서 프레스로 짜내듯이 바쳐지는 그런 기도가 아니라 주님이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삶의 비참함과 그리고 그 허물을깊이 자각하면서 환경이 나를 압박하지 않고 누가 나를 기도로 휘몰아가는 사람 없어도 보좌 앞으로 나가는 자원하는 기도생활을 이 깨뜨려진 감람유, 감람열매, 그리고 거기서부터 흘러나오는 기름에 의해서 이 사실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서로 권하고 격려합니다. 목양의 관계 속에서 격려하고, 심하면 다그쳐서 그로 하여금 기도의 짐을 지게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외적인 도움은 기도하러 가게 할 뿐 그가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 할 때 진실로 그가 기도하는 것은 자원하는 심령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그것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흘러나온 기름은 누가 억지로 눌러 짠 기름이 아니고 자기가 깨뜨려 졌을 때 스스로 흘러나온 기름 이였으니 거기엔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께 메여서 그 은혜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자기 발로 걸어서 보좌 앞에 나아가 어린 아이처럼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는 그 기도는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 입니까? 죄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자기의의 더러운 신발을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뿌리신 보혈로 뿌리신 그 핏길 을 걸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 그 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자신의 인생의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기대하며 자신을 그분의 손에 의탁하는 하나님 의존적인 기도의 자원하는 태도는 얼마나 아름다운 태도입니까? 그 기도가 그 사람의 마음의 성소에 찬란한 계시의 빛이 깃들게 합니다. 계시의 빛이 깃들게 합니다. 그래서 그를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너무 좋은 계절입니다. 겨울은 게으르기 쉽고, 봄은 육체의 피곤을 이기기가 힘들고, 여름은 체력적인 소모가 많아서 몸을 가누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을입니다. 몸과 마음이 힘을 얻고 주님 앞에 마음을 부어 매달리기에 아주 적합한 시간입니다. 이때에 여러분들이 모두 깨뜨려진 감람열매 같은 사람들이 되어서 거기에서 흘러나온 기름으로 성소의 그 계시의 빛을 밝히는 그런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맡은 자들의 충성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1:12)
얼핏보면 이해가 좀 안갑니다. 직분을 맡기신 것은 다메서에그로 가는길에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사도로 직분을 받았고 그가 충성된 삶을 산것은 그 이후 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가 뭐라고 고백하냐면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 그렇게 보면 마치 일하는것 보고 하나님께서 직분을 맡기신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이것은 두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 줍니다. 우선 한가지는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줍니다. 무슨 뜻이냐면 우리에게는 현재, 미래, 과거가 있어서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현재를 보고 미래는 우리가 알수 없는 영역으로 남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현재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하나님에게는 미래도 없고 과거도 없다 모두 현재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시간관속에서 현재적 과거, 현재적 현재, 현재적 미래라고 하는 독특한 표현을 씁니다. 마치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태백산맥을 넘어가노라면 대관령 굽이굽이 70여 굽이가 넘는 길을 좌로 돌고 우로 돌면서 올라 갑니다. 산 모퉁이를 돌기 전에는 그 산 모퉁이를 지난후에 무슨 광경이 펼쳐질지 알지못하고 봉우리를 넘기 전에는 봉우리 넘어 어떤 세상이 있을지 파악할 수 없지만 비행기를 타고 태백산을 넘는 사람에게는 그 자동차의 현재와 미래와 과거가 한꺼번에 보이듯이 말하자면 그런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미 사도 바울을 택하셨을때 그가 충성되게 하나님을 위해 섬길것을 아시면서 그에게 사명을 맡겨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실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산다’라고 하는것은 어떻게 보면 성화의 영역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또하나 이것이 보여주는 사실은 바울 자신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이 인식하고 있는 것과 바울이 인식하고 있는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여겨’하는 이것은 사실은 법적인 영어로 보면 ‘간주한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간주한다’라는 말은 뒤집힐수 없는 말이지만 그것이 꼭 그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몇월몇일까지 신청서를 내지 않는 사람은 이러이러한 혜택을 받을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혜택을 받고 싶은데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서 못낼수 있는데 그것을 모두가 해야되서 일을 처리할 수 없으니까 낸 사람은 혜택을 받고 싶은 의사가 있는 사람이고 그 혜택을 내지 않는 사람은 혜택을 받을 의사가 없는 사람이다. 법에서 ‘간주한다’라고 하는것은 뒤집힐 수가 없는 용어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복음을 위해서 사노라고 살았지만 그렇게까지 충성되지 않은데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다고 보셨다 라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은총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단이 아무리 정확하고 공의롭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충성스럽다고 인정해 주시는 일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총적인 요소가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십시오. 주님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마태복음 25장에서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님이 그렇게 이야기 했을때 맡은 종이 정말 정확히 보셨습니다. 정말 저야 말로 충성된 사람이 아닙니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정말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산 사람일수록, 모두 정말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산 사람 일수록 주님이 “너는 참 잘하였도다. 내게 충성 하였구나” 이렇게 말씀하실때에 오히려 그러한 주님의 칭찬을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은총속에서 자신에게 부어지는 분에 넘치는 은혜를 읽어냈던 것입니다. 사도의 ‘나를 충성되이 여겨’라고 하는 이말은 비로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 낼수 있는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서 목회사역의 직분을 맡겨주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는 충성된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삶은 충성된 삶입니다. 하나님이 원하고 바라는 삶은 충성된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맡은자들에게 구할 것이니 충성이니라. 맡은자가 나를 충성스럽게 해주십시오. 충성스럽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체가 주님입니다. 주님이 맡은자 들에게는 그가 충성될것을 구하신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정확하게 의미를 풀이 하자면 사명을 맡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들이 충성된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를 원하시나니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충현교회가 거기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사명을 맡은 사람들은 충성되게 나타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충성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맡겨주실 때 충성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결국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그런 충성스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것, 그렇게 용서 받기 전에는 아무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죄인이었으며 지금 고단한 사역의 길을 걸어가지만 이 자리가 내가 이세상에서 태어나서 서 있을 수 있는 최고의 자리요 가장 적합한 자리라고 하는 인식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충성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충성할 수 없습니다. 충성스런 삶을 살게하는 동기가 미래을 위한 비젼, 자신의 꿈에 성취에 대한 갈망, 그런 것 들이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오늘 충성스런 삶을 살아가게 하는 동기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이어야 합니다. 오늘 디모데오전서 1장이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충성한 것은 자신의 사역의 성장이나 위대한 선교의 꿈이나 사역의 성공을 통해서 자기에게 돌아 올지도 모르는 어떤 좋은 대우 때문에 마음이 충동을 받고 자극을 받은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그렇게 충성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뒤에서 말한바와 같이 미쁘다 이말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하러 이세상에 임하셨다 함이로다. 내가 죄인중에 예수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고 주의 용서를 받지 못했더라면 살았을 그 삶과 그리스도를 만난 그 이후에 이어가게 되는 사명의 삶 사이의 간격을 생각할 때마다 그가 충성 이외에 충성되게 주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것 이외에 다른것을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화) 주나라 시대때 고사에 의하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이 전쟁터에서 이기고 많은 장수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주연을 베풀고 왕이 사랑하는 애첩들에게 그 전쟁터에서 자기를 위해서 목숨 바쳐서 충성한 장군들에게 술 한잔씩 따르도록 명했습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바람이 불고 촛불이 꺼지면서 온 연회장이 어두움으로 변했습니다. 그때 왕이 가장 사랑하는 애첩 하나를 어느 장수가 희롱을 했고 자기를 끌어안고 어둠속에서 희롱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증거를 대기위해서 장수들이 머리에 꽂는 뭐하나를 이렇게 뺐습니다. 그래서 모자를 쓰고 있는데 뭐 하나를 이렇게 뜯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다시 불이 켜지고 정상으로 돌아오자 애첩이 왕께 호소하면서 모자에서 끈을 띠었는데 이사람이 바로 나를 희롱했습니다. 온 연회장이 갑자기 차가운 어름장같이 무서운 분위기로 변했습니다. 있을래야 있을 수 없는 일이 취중에 일어 난 것입니다. 그때에 주왕이 우리 연회를 계속 하십시다. 우리 모두 모자를 벗고 연회를 계속 즐기십시다. 그 후에 전쟁이 일어나고 적군의 공격을 받아서 주왕이 도망을 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전쟁터에서 왕을 죽이기 위해서 적군들이 애워싸서 치열하게 공격을 해올때 온 몸을 던져서 얼마나 많은 화살을 맞았는지 온 몸에 화살이 박혀서 고슴도치 처럼 되었습니다. 왕이 그 광경을 보다못해 일단 전황이 다소 수습된 다음에 그렇게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맞고 쓰러져 있는 그 장수에게 다가가서 눈물을 흘리며 내가 누구관데 네가 이렇게 네 몸을 다 버려서 내 목숨을 구했느냐 하고 말할 때 그 장수가 죽어가면서 왕이 붙잡아 주는 손을 의지하면서 그런 고백을 남겼던 “전하 저는 그날밤에 왕의 애첩을 희롱한 장수입니다. 취중에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행했고 그리고 저에게 죽음이 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왕이 나를 용서하시는 그 순간부터 제 목숨은 왕을 위해서 사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 마음속에 내가 목사도 아니오 그리고 전도사도 아니오 주님의 일을 훌륭하게 감당해 나가는 유능한 일꾼도 아닌 나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용서받은 한 사람의 죄인일 뿐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구속의 사랑을 덧입어 용서받은 그 순간부터 내 목숨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도록 그렇게 용서받은 목숨이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지만 내가 산것이 아니오 주님의 은혜로 내가 그렇게 된 것이다. 그것 없이는 누구도 충성된 삶을 살수 없습니다. 자기 직무에 충성된 모든 사람들은 거칠고 난폭해 지기가 쉽습니다. 자만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충성하면서도 착한 사람이 될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의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을 많이 배운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착해 질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은혜의 세계, 주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고 나는 그분께 용서받은 존재일 뿐이다 라고하는 인식을 가지면 충성되면서도 착한 삶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그 인식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또한 구도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이 사역만 잘하는 노예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잘하면서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서 섬기며 또 섬기면서 아주 xx해서 가고 큰 목회의 업적들을 이루면서도 언제나 주님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나 때문에 주 예수께서 큰 고난을 당하셨도다. 그렇게해서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질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역에서 오는 어떤 더러운 욕망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정말 지배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충성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인식을 하면서 사는것 그것이 충성된 삶을 사는 밑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충성된 삶을 사는 또하나의 비결은 내가 이일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그런 인식을 여러분들이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섬기고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며 살아가는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크고 무거운 짐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짐을 지어주시는것 자체가 은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짐을 지고 주님앞에 살아가는 것이 특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습니까? 구원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동참합니까? 은혜를 경험한 모든 사람이 진리의 빛 가운데 살고 있습니까? 진리의 빛을 깨달은 모든 사람들이 사명을 따라 충성스럽게 살아 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한순간 우리가 지고 있는 이 짐이 무거운 의무일 뿐이라고 생각되는 그 순간 우리는 멍에를 매기는 했지만 그리스도에 의해서 배우는 일이 불가능한 그래서 우리가 이 일 아니면 할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가는 이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축복된 일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예화) 에스더계에 있을때 저희가 교인들을 데리고 교인들과 함께 야유회겸 기도회를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박목사님 친구분 쯤 되시는지 자세한 관계는 알수 없는데 두분이 잘 아는 사이인것 같습니다. 그분이 나오셔서 목사님이신데 말씀 한마디를 하시고는 별로 잘하지도 못하시는 찬송을 하셨습니다. 가시고 나서 박목사님이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사람이 변했어.” 그래서 “왜 그러세요?.” 그렇게 자존감이 있고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안하던 사람인데 사역에서 모두 은퇴하고 나니까, 박목사님이 교인들을 이끌고 온다하니까 나도 교인들에게 말한마디 하게 해주고 특송 한번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은퇴하고 사역에서 모두 손을 놓은 목사님들이 하는 일들입니다. 옛날에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은퇴하신 목사님이 자기 친구 목사님한테 전화를 걸어서 “나 니네 교회가서 설교 한번 하게 해줘, 사례금 안 받을테니까 나 한번 설교 한번 하게 해줘, 외로워서 살 수가 없어”
여러분 정말 메뚜기도 한철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맡겨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이일은 우리 모든 것을 쏟아 붓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힘겹고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천사들 흠모하는 일이고 섬기도록 부름 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은 거기 있을때 가장 존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자기를 여기에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는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 붙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보같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일이 과연 미래에 자신에게 보탬을 줄지를 생각하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해서 충성되게 섬기는 그일이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며 걸어가는 일꾼들이 그 치열한 유혹속에서도 자신을 순결하게 지킬수 있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부패 속에서 자기를 보호 할 수 있겠습니까? 사역이 진척이 없으면 좌절해 뒤로 물러가 부패하게 되고 잘 성공하면 교만해서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질 위험이 있는것이 사역자 아닙니까? 그런속에서 자기를 보호하는 비결이 무얼까요? 자기를 다 쏟아붇고 충성스럽게 사는 삶 그것없이는 안되는 것입니다. 정말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충성스럽지 않은 모든 삶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를 통해 섬김을 받지 못하는 하나님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자기를 구원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그사람이 불쌍한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에게 보상을 해 주십니다. 오늘 이 사도 바울이 그렇게 충성된 삶을 사는 가운데 받은 보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능가하게 하는 하나님, 능하게 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정말 주님을 위해서 충성되게 살려고 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감당하려고 애를 쓸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를 능가하게 하시고 아주 유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알게 하시고 없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새로 부어 주셔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동안 목회적인 상황이 저에게 침체적인 요인이 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면서 수시로 일어 날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것이 뭔가 끊임없는 부조화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예화) 아주 비근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설교를 하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나도 은혜를 받아서 가슴이 녹음면서 정말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이 모든 연단들을 감당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인생을 정말 이 연단을 통해서 순전하고 주님이 받으심직하게 살아야겠다 하고 눈물이 흘러 내립니다. 설교를 끝내고 내 방으로 올라가다가도 난간을 붙잡고 눈물이 그렇게 쏟아 집니다. 그러고 나서 비서실로 들어가면 김실장이 따라 들어와서 “목사님 난관을 어떻게 할까요? 빨리 대답을 해주셔야 합니다. 공사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뭐가 이렇게 사는게 복잡한가.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받고 그것을 좀 간직하고 매달릴 시간도 있고 은혜로운 분위기인데 갑자기 눈물을 씻으면서 이것은 이렇게 하고 이것은 돈이 비싸니까 알아보고... 그리고 끝나고 나면 그것과 또다른 상황이 전개가 됩니다.
그런것들이 그런 유사한 상황들이 처음에는 굉장히 많이 힘이 들었습니다. 마치 설교를 하고 은혜를 끼치고 은혜를 받는일은 본업처럼 느껴지고 그림을 그리고 전화번호를 불러지고 공사를 의논하고 이런저런 일을 이야기하고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할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보수적인 일처럼 생각 되었습니다. 어느 한순간에 그런 깨달음이 옵니다. 아니다. 이 모든 일들은 통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일이 땅을 파는 일이든 흙을 파는 일이든 똥을 푸는 일이든 교회 마당을 쓰는 일이든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내게 없는 것 말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주님이 맡겨주신 모든 일들을 최고로 잘하시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드려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점점 유능해져 갑니다. 어떤 사명을 감당할 때에 목숨을 걸고 끝까지 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일에 부딪치게 됩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사역을 하면서 이제 순교에 따라 다가오는 그때 아닙니까? 편지를 쓰면서 그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유능한 인생 이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 유능함의 비결이 주님이 자기를 능하게 하셨음이 내가 유능하게 주님을 섬길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께 사명을 받았는데 그냥 그 자리에서 많은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 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일년 이년 섬기면서 사역이 원숙해져가고 원숙함 가운데서 자기의 사역의 꽃을 피울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그렇게 쏟아 부어서 자기의 사역을 찬란하게 꽃피운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부르심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7. 남들이 해보지 못한 충성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눅 13:8)
저는 본의 아니게 다른 목회자들에 비해서 훨씬다른 사람들의 교회를 많이 방문해야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여러교회들을 봤습니다 국내에 있는교회는 물론이고 해외에 있는교회들 선교들이 목회하는 교회들을 보고 그리고 서울에서 목회하는 교회도 보고 큰교회도보고 아주 작은교회도 가봤습니다 그런데 너무 가슴아픈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것보다는 훨씬 많은교회가 변화도 없고 성장도 없이 정체되어있다는것입니다 단순히 경영적인 측면에서 교회가 활발하냐 크지냐 성장하냐 라고 하는 그런 관점이 아니라 비록 교인수가 늘어나지않아도 살아있는교회는 살아있는 표지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정체되어있다는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정체되어있는 교회에 가보면은 예외없이 정체된 사고를 가진 목회자가 그가운데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교회는 선교적인 환경이 않좋습니다 아파트도 없고 농촌이고 서울이지만 변두리고 찾아오는 교인의 학력도 낮고 또 뭐 기타등등 여러 가지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런것들은 모두 구실일뿐이고 일꾼의 가슴속에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도전하고자하는 살아있는 의식이 너무나 없는거죠 그러니까 변화가 되지않는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상황이 너무 가혹해서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할수없다는 고백을 시킬 요령으로 우리를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환경에 직면할때가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런상황에 놓여있을때는 처음에야 누가 진취적인 생각을 않햇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에이 그냥 설렁설렁하면서 밥이나 먹지 만약 있다면 그사람은 천벌받을 사람이죠 처음에는 않그러습니다 처음에는 시도를 합니다 그리고 잘 될거라고 믿고 그리고 의욕도 갖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1년,2년이 지나고 3년 한교회에서 담임목회를해서 10년,12년이 지나도 몇가지 수없이 노력하고 도전을 했는데 상황이 가로막아 도저히 않될때 그때에 자신도 모르게 그환경에 길들여지는거에요 이것이 가장 무서운것입니다 그렇게 환경에 긴들여지고나면 그안에는 절실한 영성이라고 하는 것 그런 것은 없어요 너무 심한 예기인지 모르겠지만 성령받지않아도 할 수 있는 일반적인일을 하면서 밥을 먹으면서 사는거에요 나는 이번에 제주도 내려갔었습니다 그래서 주일 저녁에 저녁예배를 드릴려고 차를 몰고 한시간을 다니다가 세교회를 찾았는데 전부다 문이 굳게 닫혀있고 저녁예배시간이 몇시냐고 물어보려고 그래도 사람을 마날수없어서 결국은 저녁예배를 못드렸습니다 지금 무교회지역은 너무비참합니다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더 심각합니다 목회자 자신이 뭘해도 않된다는 생각에 가득차있습니다 설교준비 하나마나 왜 늙은이 들이니까 그리고 젊은이들이 없기 때문에 뭘 만들어도 않되고 그리고 사람들이 우상숭배로 쩔어있기 때문에 아무리 전도해봐라 되나 이런생각들로 꽉 차있습니다 그런사람들은 아주 쓸모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여기 성경에 보면 과원지기 예기가 나옵니다 공통적으로 모든 주석가들이입을 모은 것이 그것인 아마도 예수님 자신에 관한 비유였을거다 왜냐하면 3년도 일치하고 등등에 대해서 그래서 어떻했습니까?3년동안 농사를지었는데 소출이,열매가 없는거죠 여기보면 충성스런 과원지기인데 노력을 안했겠습니까? 땅도 파고 거름도 주었겠죠 가지도 자르고 물도주고 온갖노력을 다해도 3년동안 했는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정도면 상황앞에 굴복할정도가 됬잖아요?이제는 않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과원지기는 주인이 이제 짤라버리자 그랬더니 과원지기 이야기가 뭐냐하면 됩니다 필요한 것 시간입니다 된다라는 확신에 차있는거죠 그리고 어떻하냐하면 내가 두루파고 거름을 주리니 일년후에 다시 열매가 맺는지 봅시다 그때에 잘라버려도 좋지않습니까?그런데 두루파고 거름을 주는일이 않해본일이에요? 아니에요 다 해본일이에요 근데 3년동안해도 않됬지만 이번에는 이번에는 하면 될거라는거죠 이게 뭐냐하면 충성이에요 잘들어보셔요 할수있는데까지 하는 것은 충성이 아나야누가 그런예기하되요 하기싫을때까지만하는 것은 그것은 참는 것,인내하는것이아니에요 상황이하게 하는데 까지만 하고 그 이상은 않하는 것 그것은 충성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때에 충성스런사람들은 모두 이 신앙안에서 낙관을 가지고있는사람이에요 예전에 똑같은 방법으로 다 해봤지만 않됬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하려고하는 방법도 예전에 한것과 꼭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내가 하려고 하는 그 일 위에 하나님께서 이번에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시면 이번에는 될 것이다 그러나 확신에 불타는 마음, 이것이 신앙안에서 가지고있는 낙관이에요 제주도는 심각합니다 거기는 선교가 않되는 데라고 생각합니다 전도가 더 이상 않되는데라고 생각합니다 육지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교회나가는거지 지금도 토배기들은 시집갈 때 비단보자기에 살아있는 뱀을싸서 보냅니다 거기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씨족에서 단절을 이야기합니다 아는 목사 한사람이 청년부지체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비행기를 타고 내려갔는데 그렇게 인사를 하다가 목사라는 그순간에 상가집에 들어오지를 못하게 해요 그런 무서운 거죠 그래서 만나보면 안된다는거야전도해도 않된다는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여때까지 않됬다고 해서 이번에 않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러면 하지말자는 예기다 그러면서 4년전에 임실예기를 쭉했어요여기서 임실예기를 모르는 사람도 많이 있을거에요 교회가 12명 모이던 교회였어요 오백호되던 마을에 15명쯤 갔어요 9개마을에 500호가까이를 명부를 만들면서 복음을 전한거에요 너무나 많은사람들이 영접하는거에요 대부분에 사람들이 영접을 하는거에요 물론 그중에 대부분은 젊은이가 아니라 할머니할아버지에요 그런데 그교회가 목요일날 내려갔는데 그교회 최초로 70명80명이 모였어요 그리고 내려온다음에 그교회가 100명이상 모이는교회가 되었어요 그목사님이 거기가서 우리들이 복음전한는 것을 보면서 솔직히 회개를 한거에요 자기는 6년이 됬지만 일주일이면 다돌 수 있는 이 마을을 나는 한번도 다 돈적이 없다 우리온다음에 그목사님이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기시작한거에요 그래서 수많은사람이 온고 겨울이면 그목사님이 봉고를 몰고가서 노인네를 실고오고 한번은 노인네가 안와서 예배시간이 임박해서 갔더니 그 고무신에다가 쇠꼬락지를 묶어서 미끌어지면서 언덕위를 올라오고 미끌어지면서 울고있더래요 나는 교회가고싶은데 몸이이렇게 약해서 미끌어져서 교회를 못간다고 할머니도 울고 목사님도 울어요 왜 안된다고 그래요 결국은 안된다는 예기는 하기싫다는거죠 더 많이 수고하며 더많이 기도하고 더많이 헌신하는데 일을 이루어보겠다는 최상의 목표가 되면 나머지는 쓰레기에요 중요한게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뭐라고그래요 배설물같이 여긴다고 말하고 내 일을 위해 나를 허비한다 허비한다는 것은 쓸모없는것들을 허비하는거죠 소중한 것은 허비하지않아요 그목표가 너무 고상하고 귀하면 나머지는 전부다 하찮은것이되어요 그리로 쏟아붇는거죠 어떤사람은 그렇게 하고 어떤사람은 거기까지 않갔니다 차이가 뭡니까? 한사람은 충성된 사람이고 한사람은 안충성된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땅을 내려보시면서 참 어떻게 생각하실까 제가 거기 제주도마을을 이렇게 돌아보면서 마음에 눈물이 가득고였어요 세상에 이렇게 할일이 많은데 정말 우리는 뭘하고있나? 나는 확신해요 그마을에가서 아무리 핍박이 심하고 우상숭배가 심하다할지라도 누군가가 가서 피눈물을 뿌리며 죽겠다고 하면은 하나님은 반드시 영혼들을 붙혀주십니다 목회에 비전이라는 것이 뭡니까? 그것은 무슨교회를,그러것이 아니에요 여기 목회자가 많이 있는데 젊은사람들이 않온다이거에요 그래서 이번에도 우리 의논을 할려고하는데 시골에 갈 목회자를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모집을 하겠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집을 할때 특별히 시골선교에 사명감이 있는사람을 모집을 하고 교회에서 1년내지 2년동안을 혹독하게 훈련을 시켜서 그래서 그 훈련을 통과하면 교회에서 보내고 노후까지 책임진다 영원히 우리교회에서 책임진다 아이들을 대학까지 가르쳐주고 애들이 서울에서 공부할 방이 필요하면 서울에다가사택도준다 당신부부는 거기서 충성을 해라 거기서 목회끝나고 않되면은 우리교회에서 원로목사로 모시겠다 그래서 죽을때까지 평생노후를 보상하는거죠 그리고 파송하는 최초의 교회가 되고싶어요 그리고 거기가서 후고의 염려가 없이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부으면서 매달려요 생사를 걸고 그럴사람이 없다라는거죠 왜그러냐? 거기 목회자들의 이야기는비전이 없다 비전은 무슨 얼어죽을 비전이냐 당신은 비전이 있으니까 지하실교회에서 지상교회로 지상교회에서 평촌으로 온 것이 아니냐 비전없다 비전은 무슨 얼어죽을 비전이냐 나는 지금이라도 교인이 반으로 줄으면은 별관판다 본당넓어서 뭐해요 별관팔어벌이지 그래서 선교에 보태쓰든지 선교비로 쓰든지 하지뭐로 그렇게 하냐? 사람들이 모이니까 어쩔수없이 그일을 하고 어쩔수없이 영혼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그렇게 해야되지않냐? 그러면서 이제 우리들에게 맡겨진사명 우리들에게 맡겨진 사역을 감당해 나가면서 그러면서 어떻게 하든지간에 우리가 진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을 충분히 극복하고 넘어설 수 있다 그런 것을 가져야해요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않았는데도 하나님의 은혜로 흘러간사역은 우리가 한사역이 아니에요 물론 충성을 다해서 일을 이루어진때에도 우리힘으로 한것처럼 생각해서는 않되죠 그런생각들을 깊이 가지고 그리고 나아가야하는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것처럼 두로파고 거름을 주리니 여태까지 다 해온일지만 그러나 다시시도하는거죠 무엇보다도 목표에 대한 가치의식을 분명히 해야해요 그리고 그 가치가 정말 큰것이고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이것은 내모든 것을 다 허비하더라도 너무나 필요한 것이다 비전이 다른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들도 도시에만 목회할 생각하지말고 어디로 가든지 거기서 한명을 붙여주면 한명, 세명을 붙여주면 세명,거기서 그 영혼들의 변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다가 그들과 함께죽는 것이 그것이 목회의 비전이에요 오늘 우리들을 한번 보십시오 제가 교회를 바라보면서 너무 고통스럽게 느꼈던 하나는 뭐냐하면 너무 약해! 뭐냐하면 끝까지 자기가 맡은일을 수행하려고 하는 그 무모할정도에 그 가치의식에 불타는 헌신,3년동안을 두루파고 거름을 주고 노력을 해봤는데도 이번에는 될 것이다 거기에 기대를 걸고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 그런 자세, 그것이 너무너무 필요하다는것이죠 이렇게 자기를 쏟아붇는 오전히 몰입된 헌신, 어떤상황이 부디쳣을때 그 상황에서 뒤로 밀리지 않는 강인함,이런것들의 지속적인 행사없이는 여러분들이 결코 발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이땅에 이렇게 많은 그리스도인이 함께 살아가도 이렇게 지도자가 없는지 아셔요? 그런 인고의 세월,각고로 자신을 깍아서 바치면서남들이 모두 물러서는 그 경계선상에서 몸부림치면서 두루파고 거름을 주면 이번에는 될것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헌신하면 메달리는 자기희생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생겨나지않는것입니다 그냥 남들이 걸어온길을 걸어온사람들은 결코 지도자가 될 수없어요 한사람의 설교자가 한편에 설교를할때에 불꽃을 보여주기위해서는 그는 설교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숱한 날을 가혹할정도로 고통속에서 보내야해 그때에 비로소 한편의 설교를 통해서 진리의 불꽃이 무엇인지를 보여줄수있어요 하나님의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얼핏비치는 도전을 주는 것은 그에 존재에 편린을 보여주는것이지만 사람들이 그의사고방식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고방식은 정말다르구나하고 하는 순간의자극을 얻을수있을때까지 그는 수없이 많은 세월을 신앙적으로 생각하고 영적으로 살아왔어야된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은 우리가 걸어가는 모든 삶의 길이 발자국만 남기는 길이 되면 않되요 성화에 면에서 그렇고 사역에 면에서도 마찬가지, 인격적인 성숙에서도 그렇고, 어떤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많이 성숙해집니까?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끊임없이 자기의 부패성과 싸우면서 피흘리는 사람,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데 모두 내가 멈추고 싶은 시점까지는 다른사람들도 와! 다른사람들이 멈추고 싶은 시점까지는 나도 가! 그런데 내가 이제는 더 이상 할수없다라는 시점에서는 나만 그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그 생각을 하는거죠 거기서 그시점까지 가는 그 지점이 사람마다 어머어마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거이 비슷해 왜? 어떠사람은 가도된다 안간다 아에 갈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렇치, 모두가야한다는 마음을 갖게 되면은 끝까지 가는 지점은 모두 비슷해, 거기까지 가는거죠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주님을자기를 왜 거기에 세웠는지 아는 사람은 그 이상을 간다 그게 너무 소수에요 너무 소수에요 그거에요 그래서 남이 간지점까지 까지 간사람은 남이 멈추고 싶은 지점에서 자기도 멈추고 싶은거죠 그런데 거기까지는 쉬어요 근데 그다음에서는 살을 찟는것같은 고통이 시작이되요 아무도 안가본길이기 때문에, 교과서도 없어요 참고서도없어요 그리고 메달리는거죠 요한 웨스리가 목회하던 교회를 돌아보던 사람이 가이드하는사람에게 물었어요 웨슬리 선생님이 그렇게 훌륭한 사역을 하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실수있었습니까? 그랬더니 그가이드가 그 목회자들을 데리고 그 유명한 훼슬레에 구멍뚤린 마루판으로 있는곳으로데려갔어요 여기가 웨슬레 목사님이 이렇게 무릎팍에 의해서 마루가 페이도록 기도한곳입니다 그런데 들어가보십시오 들어가보았어 무릅을 굷으십시오 무릅을 굷어서요 손을 모으십시오 솝을 모았어엎드리십시오 엎드려서 자! 이제 우십시오 자 이제 우십시오 이게 웨슬리 선생님의 사역의 비결이었습니다 자 이제 우십시오 사역자들이 눈물이 없어 그이유가 무엇때문이지 아셔요?남이 멈추고싶은 그곳에서 자기도 멈추면은 눈물이 없어요 눈물절대로 않납니다 찌저질뜻이 아파야만 눈물이 나죠 그것을 넘어서는거죠 하나님은 우리모든사람들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셔요 그래서 누가 남들이 간지점에 가서 멈추는지 그이상을 갈망하면서 하나님께 메달리는지 하나님은 모두 알고계셔요 남들이 멈추고싶은지점까지 가는 것 그것은 직업상의 노력일뿐이지 헌신아니에요 그건 충성아닙니다 충성은 그 이상이에요 그 놀라운 비유가 달란트 비유에서 나오죠 한달란트 두달란트 다섯달란트맡은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와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종아 두달란트맡은사람에게, 다섯달란트맡은사람에게 있는 그무엇이 한달란트맡으사람에게는 없었어요 그도 수고했어요 그런데 그것은 뭐냐하면 일상적으로 그냥 할 수 있는 수고였어요 그러나 나머지 두사람에게는 다른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지 않는그이상의 무엇이 있었어요 그것을 보시고 착하다고 충성되다고 인정하시고 나머지는 악하고 게으르다고 예수님이 평가하셔요 저는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역의 길이라고 접어들어서 복음사역을 위해서 목회자로, 교회의 직원으로,일군으로 수고한 너무나 많은 사람들가운데 상당히 많은사람들이 사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냥 직장에 다니는것같이그냥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던 사람이라고 인정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해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눈물이 가득 고여있는거에요 그 가득고인 눈물로 자신의 부패성을 이기고 사역의 과정에서 오는 수많은 유혹들을 이기면서 그 신앙의 외길을 걸어가는거에요 그것없이는 어떠한 거룩도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뢰의 마음도 있을수없는거에요 그러니까 이세상에서 아무리 기쁘고 좋은일이 있어도정말 하늘나라만큼 그리운 것이 없는거죠 저는 지금도 생각해요 지금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서 주님나라 오라고 하시면 얼마나 행복할까 망서릴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문제는 하나님이 얼마동안 이세상에서 더살기를 원하시니까 그때까지 정말 충성스럽게 살아가야지, 일을 이렇게 시켜보면은 출발조차 않하는사람도 있고 늦어 출발히 항상, 그다음에 가고싶은데 까지만 가는사람이있고, 세 번째 갈수있는데 까지만 가는사람이 있어요 세 번째사람이 두 번째사람보다 훨씬 낮죠? 그런데 마지막 내번째 마지막사람이 있는데 갈수없는데도 길을 만들어서 가는사람이있어요 그 사람이에요 프론티어에요 그 사람이 바로 파이어니어에요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앞에 충성스런사람입니다 상반기가 지났습니다 하였든 참감사한것도 많고 그렇지만 하였든 하나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하반기에 시작을 다시 조직도 정비되고 일군들도 더 정비되고 들어오고 이렇게 정리가 되겠지만은 마음을 다잡고 정말 충성스럽게 그래서 주님이 원하셔도 출발도 하지 않는 그런사람이 되지말고 가고싶은데까지 가다가 그만두는 사람도 되지말고 갈수있는데까지만 가고 더 이상 가지 않는 사람도 되지말고 마지막에 두루파고 거름을 주리니 상황은 모든 것은 끝났고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말하는데 오히려 더가고싶어하는 길이없으면 길을 만들어서라도 가서주님이 자신에게 위탁하신바를 최종적으로 성취하고자하는 그런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 충성과 숙련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
우리들이 흔히 충성되다 그러면은 그 개념이 좀 애매하고 모호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충성 그러면 떠오르는 것이 뭐냐 하면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이 불꽃처럼 확 그렇게 산화해 버리고 싶은 그런 내적인 강력한 감화 이런 것들을 먼저 연상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원동력인 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는 일이 애국심 하나만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듯이 충성스런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렬한 헌신된 마음이 구체적이고 아주 현실적으로 우리의 삶을 통해서 구현되어야지만 그 사람이 진정으로 충성된 삶을 살수 있는 것이에요. 성경은 충성을 이야기 할 때 내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외적으로 이야기 하기도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충성된 사람은 성품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착한사람입니다.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것은 항상 따라 나와요. 또 그는 동시에 충성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이것은 충성이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내적으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착한사람이고 뜨거운 헌신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바깥으로 흘러나와서 하나님 앞에 참 헌신된 삶을 살아가는 데 아주 지혜롭고 조직적으로 살아가는 거 이게 하나님 앞에서 매우 중요한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후자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리고 대게 또 후자를 잘하는 사람들은 또 전자가 약해요. 또 전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후자를 하찮게 생각해요. 내가 누구라고 이야기 할 순 없는데 교회에서 협동간사들을 여럿 썼습니다. 협동간사는 교회에 오래 동안 적어도 이년이나 사년 이렇게 오래 동안 교회에 봉사할 형편은 안 되고그저 육 개월이고 일년이고 꾸준히 봉사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맡겨준 거 아니에요? 그래서 야간에 경비를 세웠는데 지금은 야간 경비 안섭니다만 경제적으로도 곤고하고 또 앞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교회에서 그렇게 하나님 섬기는 것도 연습하면 좋겠다. 그래서 그 지체 말고도 다른 사람 할 사람이 있었는데 굳이 내가 불러서 한번 해봐라 그래서 섬겼어요.근데 참 말씀의 정리도 잘되고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도 있고 그래요. 근데 섬김이 너무 실망스러워요 경비를 육 개월 을 넘어서 구 개월 쯤 했는데 스위치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그게 결국은 뭘 이야기 하냐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서 얼마나 헌신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모르지만은 그렇게 지혜 없는 사람은 오래 그렇게 살아도 결국은 천한 자 앞에 서서 일을 하게 되는데 어떻게 구 개월씩 경비를 섰는데 교회 스위치 전부다합해 봐야 백 개 도 안 되는데 그걸 모르냐 이거에요. 그리고 늘 밤이면 이렇게 돌아다니다보면 불이 켜져 있어요. “얘야 저거 좀 꺼라” 온 스위치를 다 만져도 못 꺼요. 그런 것은 왜 그러냐 하면 본인이 그러한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그런 거 에요. 그럼 나는 묻고 싶은 거지요. 그럼 뭐가 중요하냐 이거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너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겨라 그리고 거기에 세워주셨어요. 그리고 은혜를 주셨어요. 그랬더니 우리의 마음이 감화가 됐어요. 그래서 정말 주님이 소중해 잘 섬겨야지 그리고 마음을 먹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그러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이고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다른 사람이 하고 있는 일과 어떻게 관련되고 그리고 내 일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가 유익을 얻고 그렇다면 내 임무는 무엇이고 이 임무를 어떻게 수행해야하고 또 수행해야하는 많은 방법 가운데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가 그걸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그걸 중요하다고 생각을 안 하면 난 묻고 싶은 거 에요. 뭐가 중요하냐 이거에요. 무엇이 중요하냐 이거에요. 우리 신앙이 너무 추상적이에요. 그중 하나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 아닙니까? 하나님께 대한 사랑!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철학가의 정의처럼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한 대상을 향해 끓어오르는 마음의 정념이 에요. 하나님을 향해서 그런 끓어오름은 “파도스”가 있어요. 정념이 있어요. 마음이 그분에게 기울어져요. 그러면 그것이 진실한 거라면 그러면 반드시 그것이 삶으로 나타날 거 아니에요? 사랑하면? 옛날에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데요. 첩을 거닐었다 이거지요. 옛날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잖아요? 이 사람이 어느 순간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 에요. 조강지처가 나를 더 사랑하나~(신던 구멍 난 양말을 꿰맨 후 실밥을 끊는 것의 차이를 보고 본 부인과 첩 두 사람 사이에있는 사랑의 차이를 느꼈다는 이야기 이하 생략!) 무엇인가 사랑이 꼭 있으면 그것이 구체적이어야 해요. 그게 요한 사도가 요한 일서를 쓰면서 답답했던 것도 바로 그런 거였고 그다음에 야고보 선생이 야고보를 쓰면서 답답했던 것도 바로 그런 거였다 이거지요. 너희 믿음이 살아 있으면 보라 이거지요. 그거는 충성스러운 것이 아니에요. 마음에 끓어 나오는 정념으로만 그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다 그래 봤겠지요? 저는 어렸을 적에 예수를 안 믿었으니까 그 옛날에는 참 좋은 영화 참 많이 나왔잖아요? 지금도 기억이 나요 중학교 삼학년 땐가 나탈리우드가 나오는 그 초원의 빛이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그 주인공 여자가 너무 좋아 사랑을 느껴서온 몸에 열이 날 정도로 뜨겁게 좋아해 일주일 동안 앓았다는 이야기 이하 생략! ) 그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사랑은 단순히 끌어 오르는 정념이 아니라 그것이 구체적으로 삶으로 나타나서 연결고리와 함께 이어지는 거 에요.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은 그런 정념으로서의 사랑은 바람둥이들도 다 할 줄 아는 사랑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충성스럽다 할 때 바로 그런 거라 이거지요. 근데 여기에 보면 뭐라고 나왔냐 하면은 네가 자기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네가 자기 사업! 사업 이라는 게 이게“ 멜라카토” 라고 나오는 데 이게 일입니다 일! 네가 자기 일에 근실한 “마히르” 라는 단언데 무슨 뜻 이냐하면 익숙한 “스킬훌” 그런 뜻이에요. 익숙한 아니면 잘 훈련되어진 혹은 기술이 충분히 몸에 배여서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는 그런 뜻이 에요. 그러니까 몇 단어가 번역이 빠졌는데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면 네가 자기의 일에 충분히 익숙해진 사람들을 보았느냐 이 사람은 그의 일들로 말미암아 왕 앞에서 섬길 것이요. 하찮은 자 앞에서 섬기지 아니 하리라. 히브리 본문을 직역하면 그렇게 돼요.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면 그 하나님 앞에 충성되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 일에 대해서 아주 익숙해지는 것을 반드시 포함한다. 라고 하는 것이 에요. 반드시 포함한다. 라고 하는 것 이 에요. 반드시! 그래서 사람의 속은 겉을 보고알고 그리고 두 가지가 불일치하는 적도 있지만은 그것은 잠시 그럴 수 있지만은 장기간 동안 그럴 수 없고 그런 사람을 통찰할 수 있는 분별이 약한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통찰이 깊은 사람은 그것을 숨길수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 사람이 정말 하나님 앞에 충성되다. 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자기 일에 대해서 익숙한 것으로 나타나야 돼요. 익숙해지지 않은 사람은 충성스런 삶을 살았다고 말 할 수 가 없어요. 우리들이 연장이나 도구의 역사를 보더라도 모두 이일저일 떠돌아다니면서 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연장이 발달된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일에 계속 매달려서 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발달 된 거 에요. (지금으로부터 이십 오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여러분들은 술하고 상관이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은 옛날에 보면 은 그 진로 소주 같은 것들이 이렇게 뻥하고 이렇게 맥주처럼 따게 돼있고 대게 그것도 없으니까 이빨로 따다가 이빨 부러지고 그랬지요. 근데 어느 동네에 술꾼이 하나 있었는데 매일 소주를 너 댓 병을 먹는 거 에요. 뚜껑 따는 것이 없어서 힘들고 불편해 하며 고민하다가돌려 따기 쉬운 플라스틱 뚜껑을 만들어 특허 내서 부자가 된 일 ! 이하생략! ) 보세요. 그 사람이 맥주마시다포도주 마시다소주마시다콜라마시다 그랬으면 그게 그렇게 나왔겠냐 말이에요. 그렇게 되겠어요? 한 가지 일에 계속 종사하게 하다보니까 그렇게 생겨나게 되는 거 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자기가 하고 있는 그 일에서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는 근실한 “마히르” 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 에요. 그래서 정말 그 갑갑한 게 뭐냐면 구 개월을 경비를 하면서 스위치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그렇게 섬겨서 어떻게 하겠냐 이거에요. 한 부서를 맡아서 교육을 해서 육 개월 팔 개월 이 지났는데도 좍 모으면 오십 명도 안돼는 자기지체들 이름도 못 외워요.얘 엄마가 누군지도 몰라 그건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가 무엇을 이야기 하던지 간에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자기에게 그 일을 맡겨주신 하나님에 대한 소명감이 없는 거지요. 소명감이 없으면 그럴 수 있어요. 그런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생각은 대게 뭐냐면 이거는 훈련이요. 준비일 뿐이고 더 근사한 일을 맡겨주면 더 훌륭하게 해 낼 수 있을 텐데 라고 하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어요. 영국 속담에“ 숲에 있는 새 두 마리 보다는 손 안에 있는 새 한 마리가 훨씬 낫다 ”하는 속담이 있어요. 하나님께서도 마찬 가지 에요. 미래에 많이 잘하는 거 그거 말고 지금! 지금 할 수 있는 거 미래에 못하는 거를 하는 거보다도 하겠다는 각오를 하는 거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거 중요한거지요. 한 가지 일에 일년 이년 삼년씩 종사 했으면서 자기 직무에 대한 수첩 한권 없는 사람들은 각성해야 한다 이거지요. 업무를 인계하려고 해도 물려줄게 없어요. 워낙 익숙해서 모든 것을 꽉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한번도 마음을 쏟아 본적이 없는 거 에요. 그렇게 해서 그 기계처럼 자기가 매일 매일 되풀이 되는 일만 알뿐 거기서 일 미터만 벗어나도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다른 사람의 일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그리고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최선의 효율적인 업무의 수행인지 이런 것들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이 하는 거지요. 그것은 그냥 일이니까 일로서 계속 해나가는 거뿐 이 에요. 그러면서 그 사람 자신의 성품을 나태하고 게으르고 발전성이 없는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 에요. 그렇게 되면 안돼는 것이 에요. 그래서 오늘 여기에 보니까 왕 앞에 섬길 것이요. 그랬거든요. 여러분 옛날에도 요리를 하는 그 일은 천한 일이였어요. 요즘이야 안 그렇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천한 일이에요. 그러나 모든 요리사들이 꿈이 뭐냐면 왕의 요리사가 되는 것 속주라고 그러지요. 왕의 요리사가 되는 것 보통특권이 아니에요.옛날에 조선시대 때나 어느 시대 때나 의술을 행하는 사람의 최고의 영예가 무엇일까요? 어의가 되는 거지요. 왕의 의사가 되는 거지요. 그렇잖아요. 옷을 짓는 사람의 최고의 꿈은 무엇일까요? 어의를 봉제하는 사람이 되는 거 에요. 왕 앞에 섬기는 거 에요. 그래서 자신의 지위와 이런 모든 것들이 함께 존귀해져 간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 에요. 이 세상에서 그러한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자기직무에서 전문적인 일을 한 사람들도 하물며 그렇게 되는데 하나님의 나라에서 어떻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들이 우리 자신이 하여야 할 직무가 무엇이고 그것이 다른 사람의 일들과 어떻게 연관이 되고 그리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길이 무엇이고 그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빠지기 쉬운 위험이나 오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새새하게 알고 있는 것 이것은 끊임없는 마음을 쏟아 붓는 실천과 그리고 그에 관해서 더 많이 알고 싶어 하는 진지한 탐구 없이는 그런 발전이 주어질 수 없는 것이에요.매일 매일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감상에 흐르는 추상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돼요.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영혼을 향한 사랑도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돼요. 구체적으로~ 얼마 전에 인턴들이 모여서 같이 공부를 했는데 다들 진실한 사람들이지요.영혼 사랑하고그래서 내가 물어봤어.당신 뭐하는 사람이냐 중등 부를 담당하고 있데요. 몇 명모이냐 한 오십 명 모입니다. 자네는 뭐하냐. 유년 부 합니다 한 사십 명 모입니다. 자네는 뭐 하냐 청년부인데 한 이십 오명 모입니다. 그중에 회심한 사람이 몇 명쯤 되느냐 그리고 회심했지만 미끄러진 사람이 얼마쯤 되냐 그리고 회심하고 열렬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 전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냐? 아무도 대답을 못해요. 그래서 내가 반문을 했어요. 그러면 그들을 어떻게 섬기냐?저 사람 회심을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르는데 그 어떻게 섬기느냐? 기도 할 때 그러면 어떻게 기도 하냐?회심 못한 사람을 위해서는 저 사람이 죄를 이기게 해 달라는 기도도 소용이 없는 기돈데 어떻게 기도 하겠느냐? 일주일 만에 가서 다 조사를 해 가지고 가서 왔어요. 그 뭐냐면 가장 많이 회심한 지체들을 거느리고 있는 사역자가25%야 나머진10% 미만이야 자신들도 그 통계를 보면서 놀라는 거 에요. 우리의 영혼사랑도 구체적이어야 해요. 정말 사랑하며 우리가 그것을 알고 섬기고 사랑하고 이런 것이 필요하다 이거에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돼는 것이 에요. 그래서 자기일 에 있어서 아주 숙련된 사람이 되고 그래서 그걸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이 자리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서있는 것 보다는 내가 서 있는 것이 하나님께 훨씬 더 많은 영광을 돌릴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 보다는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하나님께 훨씬 유리하다 그런 생각을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일이 없어요. 예전에 나도 목사되기 전에는 하고 싶은 일 도많았고 되고 싶은 것 도 많았지만은 이제는 이거 하나 밖에 없어요. 이거 하나를 잘하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인생이고 잘 못하면 다른 거 다 잘해도 하나님 앞에 허무한 사람이 에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고민해야 돼요. 늘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래서 결국 “마히르” 한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세요. 어떻게 높이실지는 난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이 반드시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셔요. 그래서 존귀하게 만드셔요. 그래서 훌륭하게 하나님을 섬기도록 만들어주시는 거 에요.
9. 부르신 자의 의무 : 연구함
“금과 은과 놋으로 제작하는 기술을 고안하게 하시며”(출35:32)
비록, 이동식 성전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성막을 계시해주시고 그 제도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와서 이제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지시하셨기 때문에 성막을 지어야 된다.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커다란 감격에 가득 찼을까요? 굉장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애굽 에서 430년을 사는 동안 성소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동식 성전이긴 했지만 돈이 없어 이동식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계속 약속의 땅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이동식 성전을 짓는 것이고 자신들이 선택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 해 준 것 이니까 그것 때문에 콤플렉스를 느꼈을 리는 없지요. 그것 보면 참 하나님이 무리가 없으신 하나님이세요. 그지요? 만약에 그거 말뚝 박아서지으라 그랬으면 그거 짓고 허물다가 볼일 다 봤을 텐데 ‘이동식 성전을 지어라’. 그들이 이 명령을 듣고 감격했을 이유는 사실은 성막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막을 만들게 되면 그 성막 때문에 만나게 되는 하나님! 거기에 그들의 가장 큰 기쁨의 원인이 있었을 것이에요. 근데 그 하나님이 제도 해 주신 그제도가 그렇게 간단하진 않아요. 그렇게 그냥 아무 기술이 없는 사람이 그냥 말뚝 박고 광목 두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였다 이거지요. 그래서 꼼꼼하게 그 제도를 지시해 주시는데 전문적으로 숙달된 사람이 아니면 지을 수 없는 그런 성막 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자연이 무엇이 필요했겠어요. 물자와 사람이 필요했겠지요. 물자는 모세가 선언을 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없이 물질을 하나님 앞에 드렸어요. 그래서 ‘이제 그만 가져와라 ’할 정도로 금과, 은과, 놋과 많은 성막에 사용되는 모든 것들이거둬졌어요. 문제는 뭐냐면 그걸 가지고 짓는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그 사람 중에 오늘 여기에 두 사람이 등장을 하는 거 에요. 브살렐이 나오지요. 그담에 그 뒤에 보면 오홀리압 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어떤 사람 이였는지 우리들이 상세히 알 수 없지만 그러나 하여튼 이 사람들이 성막을 짓는 일에 있어서 매우 탁월하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린 여기서도 하나 발견하게 되는 게 뭐냐면 아무리 많은 물질이 있어도 사람이 그 물질을 사용할 때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돈만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나라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물질보다 중요한건 좋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제 보면 이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그냥 내 팽겨두시면서 알아서 하라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이 이 모든 사람을 사용하셔서 자기의 일을 이루시는 거지요. 마치 물질을 실 삼고, 그담에 이 사람들을 바늘 삼아서, 당신이세우신 성막 건축의 계획을 마치 헝겊 삼아서 그 물자를 실로 이 사람들을 바늘 삼아서 한 땀 한 땀 이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수를 놓아가시는 거 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물질만 채워 주실 뿐 만 아니라 이 사람들에 대해서도 전폭적인 것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우선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필요한 사람을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이 부른 것을 느끼게 만들어주셨고, 하나님이 지명하셨고 그래서 그들을 부르셨고 뿐만 아니지요. 그들을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하게 채웠습니다. 재주 있다고 다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잘 합니다. 왜? 하나님은 그 성령, 성신의 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뜻과 생각을 하나님께 굴복시키시고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탁월한 재주에도 불구하고 성신이 그에게 충만하게 하시므로 그 뛰어난 재주 때문에 하나님 앞에 교만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이 브살렐과 오홀리압 을 성신으로 충만하게 하셨어요. 지명하셨지요, 부르셨지요, 성신으로 충만하게 하셨지요, 그다음에 지혜를 주셨지요, 지식을 충만하게 하셨지요, 총명을 더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사람 들은 모자란 것이 없는 사람들이 된 것이 아닙니까? 물자가 모두 준비됐지요, 하나님이 지명하셨지요, 주님이 부르셨지요. 그들을 주의 신으로 충만케 하셨지요, 그래서 그들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해서 그들로 하나님의 손안에 붙잡힌 사람들이 되게 하셨지요, 그 위에 지식과, 지혜와, 그리고 그 위에 총명까지 충만하게 더하게 하셨으니까 이제 그들에게 모자라는 것이 없잖아요? 일만 하면 되잖아요? 그지요? 일만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중요한단어가 하나 나오지요. 뭐 에요? 그렇지요. 연구에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들을 연구하게 하셨어요.부르신 것은 하나님 혼자 부르셨어요. 지명하신 것은 하나님이 누구하고 의논해서 지명하신 것이 아니라 혼자 지명하셨어요. 혼자 부르시고, 하나님 혼자 성신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하나님 혼자 지혜를 주시고, 혼자 지식을 더하시며 혼자 총명 을 보태주셨어요. 그런데 이 연구는 하나님 혼자 하시지 않는 거 에요. 오히려 동기만 제공해주시고 이 브살렐과 오홀리압 을 기지고 스스로 연구하게 하신 거 에요. 여기서 우리들은 두 가지 이해되지 않는 의문 두 가지를 만나게 되는 거 에요. 첫째는 뭐냐면 이 사람들이 당대에 최고로 뛰어난 명장들 이였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이들과 필적할 고수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구가 필요했느냐? 당연히 필요했다. 이거지요. 여러분들이 이 승부의 세계를 보면 정말 치열합니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사람들은 피나는 노력을 해요. 많은 사람들의 고백이 뭐냐면 그때가 행복하고, 그때는 몸부림쳐도 외롭지가 않았는데 정상에 홀로서서 그 정상을 지키는 일은 정말 외롭고 고통스럽다. 이미 오래 된 일입니다만 일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가 있습니다. 설국이라고 하는 아주 뛰어나게 감성적인 소설을 쓴 가와야다 야스날 이라고 하는 작가였어요. 그분이 동향인으로서, 그것도 문학상을 받고 일시에 세계적인인물이 되었으니까 일본인들의 사랑과 관심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연일 잡지 ,신문에 인터뷰와 그 사람의 얼굴로 일본 언론이 한 6개월 동안 도배를 했어요. 그런데 노벨상 받은 지 얼마 안돼서 죽었어요. 자살을 했어요. 그런데 원인을 아무도 모르는 거에 요. 주위에 누가 옆에 있으면서 평소에 죽어버리겠다는 어떤 비관의 낌새 같은 걸 눈치 채지 못했어요. 그런데 가까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이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너무 부담스러워서 죽었다는 거 에요. 자살 했다는 거 에요. 그러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정상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막 몸부림치는 동안에는 덜 외로워요. 목표가 있고 상대 적수는 하나니까. 그런데 정상에 오르고 나면이건 앞에서 자기를 치고 들어올지 뒤에서 올지 좌우를 돌아봐도 몰라요.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 거 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기업을 생각해 보세요. 기업이 정상에 오른 기업일수록 어마어마한 돈을 연구 개발에 투자하는 거 에요. 나는 작년에 시에틀 인가 미국에 가서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들으신 적이 있을 텐데 스위스는 여러 가지 산업 중 에서도 정밀공업, 그리고 관광, 그리고 약 업, 의약, 제약으로 먹고 사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스위스 로쉬 라고 하는 제약회사가 있는데 엄청난 회사지요. 그래도 난 그 정도라고 생각을 안 했어요. 시에틀 에 연구소가 있는데 박사급 연구원만 3200명이 한 장소에서 근무를 해요. 약을 만드는 데도 아니고 약을 생산하는 데도 아니에요. 순수하게 신약개발을 연구하는 팀이 3200명 이 에요.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인가요? 이제까지 미친 듯 이 노력해서 차지한 정상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피나는 노력이 에요. 그러니까 그 로쉬 에 책임 연구원으로 있는 그 형제가자기네 로쉬 는 똑같은 조건에서 신약을 개발한다고 할 때 다른 회사의 3분의 1기간이면 만들어 낼 수 있데요. 왜냐면 축척된 실험 데이터 베이스 가 어마어마하다는 거 에요. 그걸 활용을 한다는 거 에요. 그러면서 정상의 자리를 지키는 게 그런 헌신을 요구하는 거 에요. 그런 점 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당대 최고의 장인 이였지만 연구를 필요로 했다 이거지요. 두 번 째 는 뭐냐면 하나님이 그렇게 많이 부어주셨는데도 또 연구가 필요했습니까? 물론이지요. 지명하셨지요. 부르셨지요. 성신으로 충만하게 하셨지요. 그리고 그들을 지혜와 지식과 총명으로 무장 시키셨어요. 모든 걸 준비 해 놓으신 거 에요. 그런데도 연구가 필요 했습니까? 물론이지요. 필요 한거에요. 이게 성화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커다란 적용 점 을 주는 거 에요. 저는 지난번에 죄가 우리를 속이는 것 가운데 하나가 과거에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 하시는 선명한 경험 때문에 미래에 대해서 안일하게 낙관하는 것이 죄의 훌륭한 속임수 중에 하나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보같이 많은 사람들이 뭐가 잘 안되는 데도 하나님이 나를 소명해 주셨는데, 하나님이 나를 주의 종으로 만드셨는데,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셨는데, 하나님께서 잘하게 해 주실 거야! 이건 바보 같은 생각이라 이거에요.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지명하셨지요, 부르셨지요, 성령을 부으셨지요,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가득 넣어주셨어요. 그래도 연구해야할 의무는 별도로 남아 있는 거 에요. 그걸 안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럼 충성스럽게 산 사람이 하나님 앞에 상 받을 이유가 없잖아요. 다 주님 건 데 주님이 부르시고, 주님이 주시고, 주님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다 했는데 하나님 혼자 하시고 하나님 혼자 상 받으셔야지. 인간을 그 상 받는 일에 참여시킬게 뭐가 있어요.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니까 말이지요. 그냥 성화를 위해서 몸부림치며 분투한 사람이,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다 주님이 다 행하셨습니다. 그래야지 그게 이치에 맞는 거지 탱탱이 놀고 연구도 안하고 그냥 부르셨다는 이유 때문에 안일하게 생각을 갖고 그냥 덜덜거리면서 살면서 다 모든 게 주님의 은혜고, 주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무를 회피하기 위해서 주님의 주권을 노래하는지 몰라요. 바보 같은 사람들이에요. 주권사상은 그런 게 아니 에요. 그러면 뭐란 말이에요. 그래 이들을 연구하게 하시는 거 에요.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몰라요. 연구하게 하시는 거 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 에요?연구하면 지명하시고 하나님이 부르신 것, 성신으로 충만하게 하신 것, 지식과 지혜와 총명을 더하여 주신 것, 이 모든 것들이 찬란하게 타오르는 거 에요. 그건 주님이 주신 것 이고 이제 주님이 주신 소명, 주님이 주신 성령, 성신의 충만함, 주님이 주신 지혜, 총명, 지식이 모든 것들은 연구라고 하는 불이 당겨짐으로 말미암아 찬란하게 타 오르는 거 에요. 그래서 치열하게 연구 하는 거 에요. 연구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과업을 효과적으로 훌륭하게 수행을 해서 나를 그 과업으로부르신 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수 있을 것인가? 그걸 고민하는 거.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내는 거 에요. 그게 연구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부지런한 탐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자원들을 찬란하게 타오르도록 만드는 그 일에 많이 헌신한 사람들은 충성된 사람들 이 에요. 그런 데 주님이 다 주셨는데 그 일을 잘 헌신하기 위해서 최선의 좋은 것을 찾는 이일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은 악하고 게으른 사람이다 이거지요. 그것이에요. 그래서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충성되이 살면 그러면 그에겐 항상 전문가적 기질과 정신이 부산물로 생기는 거 에요. 무엇을 하든 하다못해 교회에서 똥을 푸더라도 전문가적인 기질이 나타나는 거 에요. 그리고 남이 알지 못하는 탁월한 방법들이 생겨나는 거 에요. 그래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비결들을 터득하게 되는 거 에요. 비유를 하자면 이런 거 에요. 재단에 불타서 찬란하게 타오를 수 있는 탈것들이 다 올려놓아졌어요. 지명하심, 부르심, 성령의 은혜주심, 지혜, 지식, 총명, 이런 것 들이 다 위에 올렸어요. 연구에 의해서 그게 불 붙혀 져야 하는데 성냥을 한통씩 줬어요. 그런데 이걸 켜는데 성냥이 수백개비가 들었어요. (불 붙을 가능성이 없는 젖은 성냥개비를 계속해서 켜는 것은 불을 켤 의지가 없다는 비유 이하 생략!)이건 뭐냐면 불 붙게 할 욕구가 현저히 부족해서 기존에 하던 잘 안되는 방법을 버리고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 일을 해야 되겠다. 라고 하는 것이 그 마음에 없는 거 에요. 그 차이에요. 그래서 날이 갈수록 우리가 주님을 잘 섬기게 되면 순전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과 함께 효과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도 같이 터득하게 되는 거 에요.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에요. 탐구하세요. 부지런히 탐구하고 절대로 안일해지지 말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해야 해요. 나는 이번에 신문한쪽 부분에 나와 있는 어느 인터뷰를 읽고 마음 이 숙연해졌어요.(의과 대학생이면서 미스코리아에 당선된, 하버드로 유학가게 된 자매의목표를 세우면 자신을 극한까지 내모는 자신의 의지가 오늘을 있게 했다는 인터뷰 내용 이하생략! ) 노력하는 모든 사람이 그 자매처럼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만약 에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대와 소망을 따라서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부복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신을 극한까지 내모는 헌신된 삶으로 하나님 앞에 충성한다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많이 달라질까?
10. 양무리의 본이 되라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대체적으로 글보다는 말이 훨씬 호소력이 있고 또 말보다는 그림이 훨씬 호소력이 있고 그림보다는 실물이 훨씬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역자들이, 특히 목회자들이 주님께로부터 부여된 가장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는 진정한 신앙생활이 무엇이고,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또 그분을 섬기고 그분을 추구하면서 살아가야하는지를 자신의 전존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 이것은 단상에서 설교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이 배교에 관해서 방대한 글을 쓰는 가운데 배교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 중 하나가 목회자들의 나쁜 본보기, 정확하게 말하자면 먼저 믿은 사람의 그릇된 본보기가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배교에 떨어지는 데 있어서 담대한 마음과 편안한 마음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믿은 우리들, 특히 목회 사역에 종사하고 있는 우리들이 우리의 삶 자체가 유리 항아리 속에 들어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서 자꾸 은폐하는 부분들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삶을 모두 뚜껑을 열고 노출을 시켜도 자신이 전하는 설교와 자신이 살아가는 삶 사이에 격차가 거의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어디 숨어 있다가 완성된 다음에 나타나는 것은 없습니다. 성도들이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의 설교의 강도는 계속 높아져 가거나 아니면 형편없이 추락해서 성도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용인해주는 쪽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후자를 택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가장 커다란 이유는 목회자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은혜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너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그 부족함과 결함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면서 그 연약한 부분들 속에 오히려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줄 수 있는지를 자기가 알고 있다면 끊임없이 새로운 차원의 신앙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코 주저앉아서 성도들의 잘못된 삶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나 신앙의 실패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만드는 일은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종으로 부르신 그 목적에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설교 속에 깃들이는 번뜩이는 정신, 그리고 바쁜 일속에서 정신없이 살면서도 그 속에 흐르고 있는 한줄기 풍성한 섬광과 같은 빛, ‘수많은 사람이 뭐라고 떠들고 노래를 불러도, 욕을 하고 박해를 해도 나는 내 갈 길로 간다’고 하는 도도한 목회의 흐름 같은 것들은 spirit이 없으면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정신, 선명하게 그 사람 속을 흐르고 있는 정신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들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저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유비를 선지자들에게서 발견합니다. 선지자들이 처음에 소명을 받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부랑아와 같이 형편없는 사람들을 골라서 당신의 선지자로 부르시지는 않았겠지요. 신앙이 좋고 특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뢰하는 마음이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그 시대의 자식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함으로 말미암아 그 진리의 경험을 통해서 아주 선명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로 그들을 바꾸어놓으십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난 영광의 경험이 그들의 말과 그들의 모든 선포 속에 배어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으로 넘어오게 되면 교회 전체를 마치 선지자를 부르시는 것처럼 부르시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 나타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그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선교적으로 보면 선교를 위한 사건이라고 해석하지만 설교사적으로 보면 설교자들을 세우시는 사건입니다. 그 말과 선포에 분명한 정신을 갖고 불을 가진 사람들을 세우시는, 설교사적인 전환점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의 경우에 그것 하나만을 가지고 선지 사역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을 경험한 이후에 그 일부의 사람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주의 말씀을 외치면서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중요한 이유가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삶입니다. 고난 받고 박해 받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확증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들이 담대하게 ‘예수님은 그리스도다’ 선포하고 ‘너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선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고민은 그런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역의 무게와 거의 똑같이, 어떤 면에서 보자면 사역보다 더 많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참된 신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세상에서 ‘genuine Christian’, 진짜 순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그분의 마음에 한없는 기쁨이 되고 내가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께 한없는 영광이 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살 수 있겠는가.
늘 말씀드립니다만 다 떠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도 떠나갑니다. 어떤 때는 타의에 의해서 떠나기도 하지만 자의에 의해서 버리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도 원하고 내가 원해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모두 놓고 가는 것입니다. 만났던 사람들도 다 헤어지고 심지어는 부부도 다 갈라집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목사로서, 한사람의 사역자로서, 그 모두 잠시 쓰고 지나가는 임시적인 것들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남는 것은 한사람의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추구하고 살았는가 하는 발자취만이 남는 것입니다. 사역도 그런 구도의 선상에서 구도자로서의 몸부림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양떼들을 향해서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많이 설교해도 너희들이 진정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감은 잡았지만 진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 그러면 내가 진짜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마’하며 삶으로서 자기 자신을 설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베드로가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하는 것은 지도자로서 교회를 어거하고 조직을 이끌어가고 통할하고 하는 기능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라고 가르칠 때 그것을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만으로는 목양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자기 자신이 본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진정한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어떻게 사람들을 용서하고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절제하고 어떻게 헌신하고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몸부림치는가 하는 그 모든 것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가장 커다란 사명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의 삶은 감추려고 애를 써도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결국은 다 드러나게 되어있고 바보같이 자기의 삶에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하는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의 가정이 울타리가 없이 모두 개방되어서 버릇없이 교인들이 드나들고 쓸데없이 마실 오는 기분으로 목회자의 집을 드나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신앙에 보탬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열 발자국쯤 떨어져 있는 것이 참 좋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접근할 수는 없으나 접근할 수 없다고 해서 그 모든 벽이 안 보이는 벽으로 은폐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가오지는 않되, 결국은 모든 사람이 다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찔림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우리들이 살아서 보여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 하는 것, 한 개 분야에 있어서 뿐 아니라 모든 부분에 있어서 정절과 열정과 사랑과 수고와 절제와 인내와 덕과 선한 일과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신실함과 아름다움과 모든 겸손에 있어서 그렇게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양떼들에게 살게 하고 싶은 삶, 우리 안의 양떼들이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그 희망을 자신의 삶 속에 투영해서 자기 자신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요량을 하고 자기 자신이 그것들을 해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양무리의 본이 되라’고 하는 것은 ‘봐라, 내가 본이다’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과시적인 의미에서 지시된 명령이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너희의 존재가 본이 되는 존재가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무엇을 만들면 샘플이라고 합니다. 업자들이 샘플을 보여줄 때에는 정성껏 만들어줍니다.
고기를 사러 백화점에 갔는데 고기가 좋아 보이기에 똑같으려니 하고 포장해달라고 해서 썰어가지고 온 것을 봤더니 틀렸습니다. 샘플로 내놓는 것은 아주 좋은 것을 골라서 내놓는 것입니다. 과일가게나 고기 가게를 가면 저는 쇼윈도우에 전시된 것을 그냥 삽니다. 과일도 밖에 내놓은 것이 제일 좋고 속에 들어가면 등급이 떨어집니다. 물건을 만들거나 팔 때에도 샘플은 그렇게 잘 만들어서 놓고 그것과 똑같이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역시 샘플만큼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바로 그런 샘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믿고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지를 삶의 다양한 환경 속에서 모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단하고 용기를 내고 연약함과 더불어 싸우고 살아가는 삶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온전해지려고 애쓰지 않으면 우리는 이렇게 모본을 보이는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금년 한해에도 우리 자신의 신앙에 뛰어난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들은 물론이고 목회자의 아내들까지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전보다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모든 거룩한 삶에 있어서 진보가 있고 말씀에 깊은 은혜 가운데에서 예전에 극복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들의 한계를 극복해 갈 수 있는 그런 승리의 흔적들이 모이고 모여서 우리를 더 온전케 하고 그 온전케 된 우리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정말 자신과 목회자 사이에 존재하는 신앙의 깊은 차이, 인격의 격차 같은 것들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기 자신이 빚어지고 새롭게 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 들어서 특별히 그런 소원이 정말 간절해집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genuine Christian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가 말할 때만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형식적인 신앙이 난무하는 그런 도시 교회의 한복판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참된 신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그래서 예수님을 생각나게 만들어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의 일에 모두 성공하고 우리 자신에게 실패한다면 정말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열린 교회를 목회한 후에도 그렇고 열린 교회에서 목회하기 전 부교역자로 섬길 때도 그랬고 도중에 사역에서 물러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역을 하다가 실패하면 교회도 영적으로 손해를 보지만 실패한 사역자의 영혼은 교회가 당한 손해와는 비교될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아주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모두 이기든지 모두 지든지 둘 중의 하나인 제로성 게임이지 중간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알고 사역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중간에 사역에서 영혼의 많은 손해를 보고 물러나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치명적으로 중요한 특징은 사역에 있어서의 수고를 개인의 신앙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것이 공통점입니다. 그래서 사역은 사역이고 자기 개인의 신앙은 신앙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둘 다 실패하지 않으면 일에는 성공하고 자기 신앙은 실패하게 됩니다.
사역에 있어서 무수한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도 우리에게는 어려움이지만 때로는 인격적인 부딪힘도 어려움이 됩니다. 담임 목사님께 잘한다고 격려를 받으면 힘이 생기지만 ‘왜 그렇게 밖에 못하느냐’고 하면 마음이 위축되고 마음이 상합니다. 또 사역을 하면서 비교의식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누구는 그렇게 잘하는데 나는 왜 모든 방면에서 저 사람만 못할까’하는 여러 가지 것들이 안팎에 우리에게 고통이 되는 요인들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역을 하면서 함께 거들어주는 동역하는 지체들-구역장이나 부장, 부감, 교사들-이 주는 고통도 또 만만하지 않습니다. 너무 괴롭고 가슴이 아픕니다.
이 모든 것들을 자신 개인이 십자가로 승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성화를 통해서 보다 온전한 성숙으로 자기를 이끄는 도구입니다. 그렇게 모두 승화시키면 그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환경에 의해서 증오심을 품거나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는 고백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몸이 연약해서 건강이 안 좋은 것까지라도, 모든 것, 진짜 그 자체만을 놓고 볼 때는 개똥과 같은 것들도 모두 신앙을 가지고 십자가로 승화시키고 나면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더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데 그렇게 유익하게 기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일과 신앙이 연관이 안 되는 것입니다. 단지 일꾼으로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에서 실패하고 사역에 있어서도 축복이 없는 것입니다. 혹은 사역에 있어서 축복이 부어져도 그렇게 생활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사역에 부어지는 모든 축복이 여러분 자신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여러분 젖혀놓고 여러분 사역에 복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양심이 압니다. 하나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하는 마음으로 사역에 복을 주시는지 혹은 하나님이 사역을 잘 되게 하시는데도 나는 항상 그 사역에서 뭔가 소외된 느낌을 받는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통해서 내려온 축복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역자도 하나님 앞에 소중한 영혼이지만 그에게 딸린 수많은 영혼들도 하나님 앞에는 너무 소중한 영혼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자기가 모든 것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처럼만 생각해도 안 됩니다. 그것을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런 십자가를 기쁘게 지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벗어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그 삶의 전 과정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신앙 생활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가끔 교역자들을 보면 사역과 자기 신앙 사이에 갈등관계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미성숙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죤 오웬이 자기의 책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는 비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 뛰어난 사람이 그 박학하고 거룩의 세계를 경험한 그 사람이 일 속에 깃들여져 있는 위험을 모르기 때문에 바보같이 일을 열심히 하면 믿음이 좋아진다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 같은 그런 십자가로 승화시키는 신앙이 있으면 주님을 열심히 섬기면서 믿음이 놀랍게 강화되면 나의 신앙과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 사이에 어떤 틈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틈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는데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역을 감당해 나가면 사역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우리 자신이 아주 튼튼하고 건강한 크리스천이 되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역을 지위라고 느끼면 안 됩니다. 그리고 피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피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십자가가 안 됩니다. 십자가의 특징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이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셨고 내가 그것을 짊어지고 가야만 한다는 것이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살면서 너무 힘이 든 어느 그리스도인이 ‘예수님 내 십자가만 이렇게 무겁습니까’하고 불평을 했더니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자기를 데리고 천국을 가셨데 끝도 안 보이는 어마어마한 창고같이 큰 방에 십자가가 수십억 개가 매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십자가 너무 무거우니까 거기에 벗어놓고 네 마음이 드는 것을 한번 골라봐라’하셨습니다. 어떤 십자가를 골라도 자기 것보다는 가벼울 것 같아서 자그마한 십자가를 골라서졌더니 너무 무거워서 내려놓고, 가벼운 것을 골라 맸더니 이번에는 길이가 길어서 땅에 끌려서 걷기 불편하여 벗어던지고, 크기도 작고 가볍고 안성맞춤인 십자가가 있기에 골라졌답니다. ‘주님 이것을 지겠습니다’하고 몇 걸음을 걸어가다 보니 나무 십자가에 옹이가 튀어나와서 등뼈를 눌렀습니다. 너무 아파서 벗어 놓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저 구석에 있는 십자가를 져보니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이것을 지겠습니다’했더니 예수님께서 ‘그것이 아까 네가 벗어놓은 그 십자가다’했다는 예화입니다.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사람은 남의 십자가를 보고 부러워하는 사람과 남의 십자가를 보고 자만해 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도 다 힘듭니다. 다른 사람도 다 질만 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 십자가가 딱 맞아서 지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동정심을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다른 사람이 이해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 상해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믿음의 비밀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사연입니다. 한 이불 덮고 자는 아내도, 나를 배속에서 낳아준 우리 엄마도, 나를 너무 사랑하는 내 자식도,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모두 그런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그래서 맡은 사역이 잘 되고 모든 일에 어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는 것 같아서 우리들이 부요해 질 때 어김없이 짊어지는 그 십자가를 우리들이 경험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우리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이 십자가를 지고 우리들이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영성이 깊은 사람들은 그 십자가가 아주 무겁고 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 그 비밀이 아주 많은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것을 자기 혼자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 한분이시라면 그것으로서 충분히 족하다고 하는 위로를 얻으면서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때 하늘 위로가 영혼 속에 넘치기 때문에 힘에 진하도록 그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해 주님을 알아가는 방법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게 되면 굳이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그는 본입니다. 불꽃처럼 살려고 애를 쓴다고 해서 불꽃처럼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genuine Christian이 되면 그는 저절로 불꽃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본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금년 한 해 동안도 그런 아픈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체들이 모두 사라지고 사역의 현장이 모두 흩어지고 무릎을 꿇으면 견딜 수 없이 자기 자신이 광야의 한복판에 서있는 것 같은 때, 조력자도 없고 누구 돕는 사람도 없이 십자가를 지고 서있는 것 같은 그런 거룩한 고독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 한분 앞에 정말 가슴 아프도록 매달리고 거기에서 위로와 능력을 경험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아파해야 합니다. 아주 많이 아파해야 합니다. 그래서 병든 조가비만이 진주를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썩어 들어가는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은 삶 자체가 결코 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본이 될 수 없을 때 그의 모든 삶과 사역에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금년 한해 우리들이 살아갈 때 이런 모든 고통들을 자기의 십자가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조용히 그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 비밀스러운 사연들을 기록해나가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삶을 보며 진정한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11. 한계를 넘어야 모본이 생깁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나니”(행20:35상)
사도 바울이 유언에 가까운 고백 속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본을 보였나니’는 복사하다는 원어적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복사해서 너희에게 범사에 대해서 보여주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범사에 대해 보여준 복사판 가운데 어려운 사람을 돕고 물질적 이기심에 빠지지 않기를 사도가 거론한 것입니다.
존 오웬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힘써야 할 가장 커다란 의무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영국의 엄청난 배교의 원인 중 하나가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고 또 하나는 지도자의 악한 본을 따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꾼은 걸어가고 앉고 일어서는 삶 전체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지나가는 존재의 모습에서 수많은 칼이 날아가서 성도의 마음에 꽂히기도 하고 수많은 꽃향기가 날아가서 사람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 것이 보 모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인간의 몸을 입혀서 이 세상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인간이 걸어가는 모든 과정을 걸어가게 하시고 그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교육학적인 효과는 참으로 사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예수님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로 해서는 잘 알아듣지 못하니 실현식 교육방법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 하셨을 때 죄가 들어온 이후 세상이 망가졌을 때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고 어떤 사람으로 살기 원하시는지 최종적인 본보기를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은 이 땅에 안 계십니다. 양떼들은 여러 가지 연약함으로 성경 속에서 예수님의 살아계신 것처럼 감화를 받으면서 깨뜨려져 가는 삶을 잘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본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에 의한 목양이 거의 필요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런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들 특별히 목회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확실하건데 자기가 전한 말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 것보다 존재하는 자체로 효과를 끼치는 본 때문에 후에 하나님 앞에 받을 심판이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들이 단 위에 서서 성경은 거짓말이다, 성화란 없다. 하나님은 중요한 분이 아니다 신앙은 세상에서의 성공보다 훨씬 더 사소한 것이라고 설교할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삶으로는 우리가 수시로 그렇게 설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는 내가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는 것을 삶으로 설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의 심각성은 매우 고도의 영적 세계를 지닌 사람이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거짓된 선포들을 사후에 읽어내고 이것이 다른 영혼들에게 미치는 효과를 정직히 인정하면서 죄책을 통감하고 뉘우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치열한 정사 없이는 이 일이 불가능합니다. 은밀한 죄와 사소한 행동 속에서 그릇된 삶의 동기를 간파 할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 정사도 작용하는 것입니다. 인식은 하지만 인식을 종합해서 화면에 띄울 수 있는 장치가 없이는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사를 아무리 많이 해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틀과 능력이 없이는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정사도 없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런 것을 살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차단해서 정직하게 회개하는 일은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내어 쫓고 많은 일을 하여도 그것은 거짓 선지자의 변명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본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경하는 스승이 없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의 정신사를 거슬러 가면 멜기세덱처럼 정신사에 신기원을 이룩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 딛고 일어선 스승이 있습니다. 그것이 일류 정신사의 물줄기입니다. 신앙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 본받을 스승이 없는 것 때문에 많이 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그러나 그 후 생각을 바뀌면서 총체적인 스승을 찾지 말고 부분적인 스승을 찾자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겸손의 부분에서 깊이 존경하고 어떤 분은 다른 면에서 동의할 수 없지만 희생적인 사역의 모습을 존경하고 스승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죽은 사람 가운데 스승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전 이 세상에서 보이는 스승이 없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책을 펼치면 무릎 꿇고 싶은 위대한 산맥을 만납니다. 죽었으나 그들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사로잡혀서 일평생동안 그리스도를 본받으면서 산 사람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가 그런 본을 꺼쳐야 합니다.
본을 끼친다는 것은 본을 만드는 것입니다. 본이라는 것은 틀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 보면 ‘본받지 말고’ 라는 말은 주물을 만들어서 국화방처럼 찍어내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한 시대의 사람들은 똑같은 틀에 의해서 찍혀 나옵니다. 거의 같은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그런 사람을 볼 때 부분적으로 어떤 모습을 본받을지 몰라도 그 틀이 자기와 거의 같기 때문에 본받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본받는다는 것은 자기와는 다른 틀인데 그 틀이 훨씬 더 좋은 틀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틀은 부수고 그 사람의 틀에 맞추어 만들어 지려고하는 것이 모본을 끼친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틀을 만들려면 한계를 뛰어넘는 치열한 고통과 자기 부서짐과 자기 몸부림 속에서 아주 조금 다른 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치열한 부서짐의 삶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깨드려지고 불가능을 뛰어넘으려는 집요한 몸부림,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삶의 존재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서 이루려는 피어린 몸부림에서 다른 틀을 형성해야 합니다. 마치 긴 세월동안 천둥 번개가 치고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더니 가을에서야 국화꽃이 핀 것처럼 치열하고 남이 모르는 몸부림 속에서 다른 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틀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참사람이 되어가기도 힘들고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고 신앙 생활도 잘 못했는데 저 사람의 틀을 보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저렇게 되기를 원하시는구나 나도 저렇게 되고 싶구나 하나님을 아는 탁월한 지식과 경건, 그리고 아름다운 인품이 대단하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일 뿐이고 그렇게 되기까지 혼자서 광야의 길을 지나야 했던 영적 순례의 발자취는 감추어진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 색칠만 다르게 한 같은 틀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런 틀을 가지고 있으면 진심으로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여러분의 제자가 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향기가 나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밑에는 원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같은 똘마니들이 제자라고 모여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 의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서가는 것이지 똘마니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서가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사역이라는 것은 우리의사람됨보다 다소 못할 수는 있어도 우리의 사람됨보다 뛰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역은 우리의 존재 안에 갇히고 우리의 존재는 사역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 모본을 보여야할 영역의 첫째는 그리스도를 본받은 인격적이고 존재적인 측면에서 모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는 사람마다 주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연약합니다. 어느 한 순간에 나를 보는 사람마다 예수님이 생각나게 해야지 결심을 한다고 해서 다음부터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고 점진적인 성취의 과정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를 보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런 사람, 그런 목회자가 되고 싶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매우 소수의 사람만 그렇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중에 하나가 그리스도를 많이 닮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같은 인격과 존재를 보면서 자기가 아직 참신자가 되기는 멀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때의 충격은 신앙의 추구점을 옮기도록 만들어 주는 변화를 가져옵니다. 목회자에게 아부하고 돈이나 얼마 내고 교회 섬긴다고 다니는 교만시 살아가는 사람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말이 아니라 자기와는 비교되지 않는 거룩함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신앙의 목표가 잘못되었고 자신이 매우 허한 길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깊이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영향을 끼치면서 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변화되지 않는 인격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깊이 괴로워하고 다른 사람이 흔히 하지 않는 고뇌 속에서 자기 속에서 하나님이 세우는 창조와 갱신이 내면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결과 모본을 본받으면서 짐승 같은 자신을 보면서 깨트려집니다. 물론 그것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완전할 수도 없고 완전할 필요도 없습니다. 계속해서 변화되어 가면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준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 그분의 참사람 되심을 본받으면서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지 못하는 것으로 깊이 아파하고 고통해하는 자기 깨어짐의 통증이 없으면 악한 모본을 끼치는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자기를 보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 실망하고 그 신앙을 포기하게 되는 이런 배교적인 효과가 있는 모본을 가지게 됩니다. 역사상의 많은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살아있는 동안 이런 모본을 보여야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효과가 있는 사람은 일제시대 우리의 역사만 봐도 많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과 같은 세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길 바라느냐 고 물으면 마음속에서 끌어오르는 열망으로 ‘주님과 닮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가져가서도 좋습니다. 짐승처럼 100년을 살기 보다는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는 참된 신자로 그런 인격으로 한 달을 살고 싶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우리에게 자기 깨어짐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자기 깨어짐의 아픔을 십자가화 해서 그리스도와 동화되어가는 그리스도를 추구를 통한 그리스도의 영적 연합의 비밀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그런 세계가 있습니까?
일이 우리를 절대로 거룩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망가트려 갈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황폐해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의 모든 사역은 밥벌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영광은 성도들의 존경이나 천국의 상급이나 우리가 받을 보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런 섬김과 사역의 과정을 통해서 주님을 닮아야한다는 필요를 강력하게 느끼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정말 우리에게 있습니까?
역사에 보면 그런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맥체인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가면 설교하기도 전에 성도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얼굴에서 빛나는 찬란한 광체를 보면서 하나님을 금방 뵈옵고 나온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해지는거룩의 빛 앞에서 그가 만나고 온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면 그를 만나고 온 저 목사님이 저렇게 거룩할까하고 죄에 대해서 각성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맥체인의 글을 몇 번 읽어보았습니다. 20대 중반도 지나지 않는 새파란 애가 불이 살아있습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정말 주님을 닮고 싶다는 성결의 불과 주님의 위해 말씀대로 살아야겠다는 진지한 불이 살아있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 모본이 이 시대에는 너무나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아닌 것들이 신앙의 자리에 들어오고 참된 것들이 거짓된 것들에 의해서 축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걸고 예수를 본받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역은 거기에 비하면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흔한 것입니다. 깊이 있는 그런 고독 속에서 주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자기 자신이 스스로 존재와 인격에서 모본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모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관한 것을 이야기 하다가 사도 바울이 자기가 모본을 끼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순례선교자였기 때문에 사례금을 받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거액의 헌금을 관리하면서도 일체의 깨끗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르심을 받아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양보할 수 없는 목표 때문에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헌신의 특징이 나타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많이 희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있어서 모본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자신의 본분과 일에서 그것을 통해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목표의식 때문에 다른 것들을 미워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모두 하찮게 여기는 그런 가치 체계를 지닌 사람이어야 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에게 깊은 감화를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정직한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헌신은 본받기에 충분합니다. 교회를 서 너 번은 지었는데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돌파하는 비결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먼저 자기 것은 자기의 몸만 남겨두고 모두 판다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도 남기지 않고 교회에 바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성도들이 저처럼 헌신하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를 가로지르고 지나가면서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건축헌금 설교를 하면서 교회에 부흥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제가 다른 것은 동의가 안가도 그 부분에서는 깊이 동의 합니다.또 다른 목회자는 사모님이 공항에서 경찰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외화 밀반입니다. 지금부터 10여 년 전이었는데 그 당시 돈으로 4억 2천만 원이었다고 하니 엄청난 액수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다니는 성도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기가 너무 마음이 아픈다고 한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이 자식이 외국에서 밥벌이도 못하고 사는 것이 불쌍해서 수퍼 하나 정도는 차려줄 수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목사님이 이제는 모본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성도가 한 달 전에도 그 목사님이 설교에서 ‘우리 부부는 이제 다 바쳤습니다. 재산이라고는 우리 몸밖에 없습니다. 고회에서 내치면 우리는 오갈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라 고 했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면 반드시 일을 그르칩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 부모에 대한 사랑, 부부간의 사랑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종속되 되어야 할 것이지 독립적인 가치로 존재해서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할 치열한 열심을 나누어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아내도 사랑하고 자녀도 사랑하고 이 나라도 사랑하고 내 건강도 챙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l
또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치열한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치열한 헌신을 통해서 모본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 줄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탁월한 모본을 보면서 과연 예수님이시니까 하면서 바라보며 즐거워할 뿐이지 그 주님을 따라갈 생각을 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 모본에 도저히 도달할 수없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마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본받을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그렇게 되어야합니다. 가장 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소진하고 분투한 사람이 한사람이라면 내가 그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 마음을 가슴에 세기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매 순간에 철저한 자기희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게으름을 마귀처럼 미워하고 다른 사람이 뛰어넘을 수 없는 치열한 열심 속에서 사는 가운데 한계는 극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범사에 내가 모본을 끼쳤나니’ 라는 고백은 이런 삶의 모든 전주곡이 있는 다음에 흘러나오는 말입니다.
우리가 모본을 보일 영역은 내가 잘하고 특기 있는 것이나 흥미 있는 일이나 재능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총체적인 스승이 아니라 부분적인 스승일 뿐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정상적으로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총제적인 모본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두 영역에서 모본을 보이려면 절대적으로 주님을 닮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에 범사에 그분의 모본을 본받으려는 치열한 열심 속에서 살아갈 때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열렬하게 추구하고 굴복한 체살아오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몸부림치는 날이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자기의 욕망과 게으름과 육신의 소욕에 고삐 잡힌 사람이 나라 아니라 담대하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내적인 영혼의 자유를 힘입어서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주님 앞에 나가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12.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눅1:17)
세상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은 영적인 일이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당신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방법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셔서 그 일들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고 무한한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지만 인간은 결점이 많고 언제나 문제가 있는 존재에 의해 하나님의 일이 많이 방해를 받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이루시려고 하실 때 항상 사람을 찾으셔서 그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지요.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이 일하실수 없다 고하는말은 성립하지 않지만 통상적으로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고 싶으신 일을 당신이 귀히 여기시는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 것이지요. 그런 점 에서 볼 때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실로 오래 기다리던 당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 이였습니다. 세상 적으로 보면 큰 학벌이나 문벌, 뛰어난 것이 없지만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이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 이였고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그 시대에 보여준 몇 안돼는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 이였으며 또 예수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는 훌륭한 선구자였습니다. 아마 선지자들 가운데 이 세례요한처럼 짧게 사역을 하고 죽은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주후 이십칠 년경에 소명을 받았다고 치고 아마 길면 삼년, 짧으면 일이년 사이에 사역을 마치고 주님의 품으로 갔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의 중요성은 성경에 있어서 그의 중요성은 그의 인생의 길이와는 같지 않습니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들을 충분히 이루어 드린 생애를 산 사람 이였습니다. 구약성경은 다시올 엘리야를 바라보며 예언으로 끝맺었고 신약성경은 예수 오시기전에 이 메시아의 앞길을 예비한 광야의 목소리를 소개하는 것으로 신약성경이 시작이 되지 않습니까? 훌륭하게 자기의 사역을 감당한사람 이였다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그 일을 감당했던 내적인 자원이 있었는데 그것을 오늘 성경에는 심령과 능력, 이 두 가지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이라고 했으니 세례 요한이 어떠한 기적도 행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엘리야로 비견될 수 있는, 엘리야라고 하는 구약의 최대의 능력 있는 인물을 거명하면서 이 사람을 소했던 이유는 비록 기적을 행한 일은 없지만은 그러나 이 세례요한이 말씀 사역을 통해서 보여줬던 능력이 얼마나 크고 강력한 것 이였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강한 능력을 가진 사람 이였고 그래서 엘리야와 비견됐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과 함께 심령을 이야기 합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뜻을 따라서 능력을 주셔서 그를 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자랑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이거니 혹은 헛된 능력에 불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능력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지고 심령이 하나님에 의해서 온전히 장악된 사람!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진짜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속해서 도전을 받는 부분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려고 하는 세상의 욕심과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랑, 헛된 욕망과 죄들이 우리의 마음을 겨냥하는지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계획은 하나님께 있으나 정말 그 일을 감당할만한 능력을 소유한 그런 사람들이 그런 능력을 주시도록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지만 그들의 심령이 그런 능력을 받기에는 합당하도록 깨끗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맡기 만한 사람들을 못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주하고 고단한 일과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을 향해 고정되고 그리고 온전해 지기를 힘써서 노력을 해야 하고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그곳에 능력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특별히 이제 넉 달 이상 동안의 ‘인턴쉽’ 과정을 마치고 이제 다시사역으로, 배우면서 사역을 하고자 하는 여러분들은 더더욱 이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합니다. 모든 신령한 능력은 정결해지는 심령 그 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통찰과 어두운 시대를 분별 할 수 있는 영적인 집관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를 이해하는 영적인 통찰력, 이 모든 것들은 결국은 마음이 하나님 앞에 다 바쳐진 사람, 그 사람의 마음위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집중된 삶을 살면서 이 세상의 덧없는 것들에 대해서 과감하게, 정확하게, 그것들의 가치와 유한함을 파악할 수 있어야하고 그래서 변천하는 세상 속에서 불변하는 복음 진리를 붙들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에요. 세례요한이 이렇게 엘리야와 방불 하는 능력을 소유해서 예수님께로부터 여자가 난 자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다. 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정도가 되기 위해서 그가 받았던 훈련을 생각해보세요. 광야에서 삼십년 가까운 세월을 외로움과 치를 떠는 고독 속에서 그렇게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처절한 훈련 속에서 그의 심령은 순결하고, 강하고,뜨거워져 갔습니다. 그래서 이윽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그에게 부어 주실만한 그런 심령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이 거룩한 능력과 그리고 이 위대한 역사를 하나님 앞에서 펼쳐 보일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선택된 것이 에요. 근데 많은 사람들이 능력을 받아서 그 찬란한 사역의 꽃을 피우고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를 원하지만 그 이면에는 사실은 적은 고통으로 큰 사역의 성과를 거두기를 원하는 그런 정신적인 사행심도 어느 정도는 깃들여 있는 것이에요. 그런 사역의 꽃을 피우는 것에 대해서는 갈망하는 마음이지만은 그런 능력을 받기에 적합한 심령이 되도록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장구한 세월동안 광야에 엎드려서 사람들에게 그 이름도 잊혀 버린 자 된 것처럼 그렇게 외로움 속에서 자기 자신의 심령을 연단하고 준비하는 그 일에 헌신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는 너무나 소수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열정은 있으나 스스로 하나님 앞에 제대로 준비 되지 못하기 때문에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하는 많은 섬김과 일들이 많은 수고와 노력들을 폐기처분 되게 하고 부실한 성과를 거두도록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가치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알려진 사람이 되는 가 어떤 대접을 받으면서 살고 무엇을 누리고 어떠한 지위에 앉은 채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 거기에 우리의 인생의 가치가 달린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그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되고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졌으며 그가 놓인 삶의 지위와 환경, 고난 받는 상황이나 형통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가까이 하시고 사랑하시며 그리고 그를 인정해주시는가에 사실 우리의 인생의 참다운 가치가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 보다 더 뛰어난 것은 여러분들이 한사람의 신자로서 보다 더 깨끗하고 정결한 심령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모시며 살아가는 영적생활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좀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고 더 진지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어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날마다의 삶을 여러분들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부르신 사람들이 자기를 완성하고 또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는 지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지요.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좀더 특별한 사람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 수천 명을 모아도 할 수 없는 일을 한사람의 특별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만족하게 이루시지요. 그런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세우고 싶어 하시지요. 그러기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지금도 엘리야의 능력을 받을 만한 엘리야의 심령을 가진 사람을 오늘도 찾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심령을 가진 사람들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길 바랍니다.
13.항상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살전5:16)
기뻐하라는 것은 명령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뻐하라고 어떤 사람에게 명령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즉시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불가능한 것을 명령으로 삼은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명령을 성경이 주는 이유는 그 명령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망가진 것을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기뻐하라고 해도 기뻐할 수 없고 기도하라고 명령해도 기도할 수 없고 순종하라는 명령에도 순종할 수 없는 것을 보면서 성경은 어떤 부분이 자기에게 망가졌는지 보게 하면서 그 명령이 이행이 안 되는 것을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그 명령으로 인해 우리가 즉각적으로 순종하리라고 예상하면서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뻐하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뻐하라고 명령해서 우리가 기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명령을 받은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데 기뻐할 수 없는 것을 보면서 자기 안에 무엇이 망가졌는지 보라는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행복으로 인한 만족감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기쁨입니다. 그것이 토대입니다.
얼마 전 터기에 가서 선교사집회를 인도하는데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 막막하였습니다. 생각은 많이 했지만 결정을 못하고 공항까지 가서 지내면서 선교사들과 나눈 대화가 나누었습니다. 그곳은 몇 달 전만 해도 선교사 600명에 교인 700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놀랍게 은혜를 주셔서 선교사가 700명이고 교인이 3000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다른 선교사가 인도하는 교회에 교인으로 나가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사역자체가 선교하기를 기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역이 없기 때문에 자꾸 선교사들이 침체에 빠진다는 말을 들으면서 죄죽임 교리를 말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망가지면 그것은 결국은 우리 밖으로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속에 위장이 문제가 생기면 얼굴에 무엇이 나면 피부만 치료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쁨이 없는 삶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선교사들도 사역이 없는 밖의 문제가 안으로 들어와서 침체가 되는 것 같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영적인 생명이 적정한 신앙의 원리를 따라서 역사하면 상황이 우리를 그렇게 흔들릴 수 없습니다. 말씀에 깊이 심취해서 말씀을 받고 나의부족으로 씨름할 때는 상황 때문에 내가 곤고하다 외롭다고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쁨은 더더욱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우리 영적인 생명이 충만한 게 살아있고 거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다는 분명한 것이 있으면 아주 기쁘고 충만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래전 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가르쳐준 선생님이 말씀하신 신방에 있어서 성공의 비결이 기쁨으로 충만한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신방을 가는 집이 모든 것이 잘되고 만족하는 집보다는 어떠한 문제가 있어서 낙심한 집이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심방 오는 자들의 얼굴이 신령한 기쁨으로 활짝 피면 설교를 하지 않아도 심방 받는 신자들이 자기 안에 없는 것이 저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쁨이 우리에게 있는지 깊이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비천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교회에서 만나게 해주시고 하나님을 섬기게 해주셨습니다. 깜깜한 세대에 이만큼이라도 복음에 대해 알게 해주시고 신앙으로 살게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자신이 기뻐할 수 없는 이유를 한번 적어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내가 이러이러한 일로 인해서 기뻐할 수 없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기도의 제목이 있는지 보십시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항상 기뻐하고 여러분 속에 기쁨이 깊이 넘쳐야 합니다. 그래서 까다로운 사람도 사랑으로 대하고 바쁜 일과 속에서 여유를 잃지 않는 모든 것이 내면의 기쁨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영적인 기쁨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풍성함을 우리가 먼저 누리고 기쁨으로 가득찬 삶을 살아서 곤고한 사람이 우리를 보면 저분들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하는 지체들이 되길 바랍니다.
14. 쇄신과 쇄심
“그의 헌물도 성소의 세겔로 백삼십 세겔 무게의 은 쟁반 하나와 칠십 세겔 무게의 은 바리 하나라 이 두 그릇에는 소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채웠고”(민7:79)
오늘 여기에 나온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짓도록 명령하셨는데 그 명하신대로 성막은 모두 완성하고 그 완성된 기념으로 각지파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드리는 헌신 을기록 하고 있습니다. 모든 지파가 각각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금으로 된 여러 가지 성전에서 쓸 기구들을 드리고, 그리고 또 번제물을 드리고, 그리고 또 속죄제물을 드리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여기에 나와 있는 이 소제물 은 하나님 앞에 특별히 바쳐진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이 소제는 가루를 곱게 빻아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였는데 이렇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소제는 피 없이 드리는 제사이기는 했지만 이 소제는 단독으로는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법이 없었고 반드시 동물제사와 함께 하나님 앞에 드려졌으니 피 없는 제사는 없다고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소제는 곡식을 가느다랗게 빻아서 그래서 그 가루를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된 것 이지요.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소제를 드리되 왜 곡식을 낫 알로 그냥 드리지 아니하고 그 곡식을 곱게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드렸을까?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후에 이 성막이 지어지고 여기에서 섬기게 될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과 더 넓게는 하나님과 언약관계 속에 들어온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을 보여주는 예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많은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을 나는 이 헌신을 크게 쇄신의 헌신과 쇄심 의 헌신으로 나누어서 말씀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쇄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쇄자는 한자에서 가루로 만든다 할 때 쇄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곡물을 분쇄한다. 이렇게 표현 하지요. 쇄신을 요구 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사명을 주셔서 부른 우리 모든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쇄신 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잘게 부숴 가루로 만든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 쇄자를 보면 옆에 돌 속자에 옆에 군사 졸자를 사용을 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덩어리가 되어있던 바위를 잘게 부숴 조그맣게 만드는 것이 바로 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당신의 특별한 사명으로 부르시고 넓게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고 이 세상에 아직 살아 있는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명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쇄신을 요구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자기를 부서뜨리는 열심이 없이 인생을 사는 것은 그 자체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매우 더러운 것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더러운 것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논문, 신앙을 결정하지 못하는 것의 불합리성이라고 하는 논문을 썼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믿을 것 이냐 말 것이냐 하는 미결정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었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분이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는 명백하게 아직 이 세상에 살아있고 우리에게는 매우 분명하게 바로 이 시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과업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앞에 놓여있을 때 그것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쇄신의 삶을 살아야한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 그리고 개별적인 삶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무엇을 통해서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고, 자기를 부수는 열심이 없이 태만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구역 질 나도록 더러운 것이에요. 그것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 앞에 아주 커다란 불결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회를 하고 교역을 하거나 교회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혹은 직장이나 가정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늘 구합니다. 그의 도우심과 은혜를 하나님 앞에 늘 간구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과연 그런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우리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하실 때 천사가 내려와서 예수님의 힘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때는 예수님이 기도를 시작하실 때가 아니라 자기를 다 쏟아 부어서 진액을 흘려내실 그때에 천사가 와서 예수님을 도와주었습니다. 옛말에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도리를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 이지요. 하나님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이런 속담을 만들어냈지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모두 절대자의 도움을 기대하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 고 인정하지만 진정으로 하늘의 도움을 기대하기위해서는자기에게 주어진 과업을 위해 쇄신의 열심을 다하며 살아야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지파별로 새롭게 지어진 그 회 막 속으로 나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 그 곱게 빻아온 가루를 하나님 앞에 드리며 어떠한 마음을 갖게 되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곡식을 빻아서 어떤 요리를 하게 되면 특별히 떡이나, 혹은 빵이나 이런 것을 만들게 될 때 그 가루가 고급이라고 하는 것은 우선 원곡, 원래의 곡식 알갱이가 특별히 좋은 종자이고 실해야 하지만 두 번째로 그 가루의 품질을 좌우하는 것은 그 가루가 얼마나 정밀하게 분쇄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기억이 없겠지만 옛날에 떡 방앗간에서 이렇게 갈래 떡을 뽑는 시설이 충분하지 않았을 때 시골에서는 절구에다가 ~( 맛있는 떡을 먹기 위해선 최선을 다해서... 이하 생략! )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과업을 맡아서 행할 때 그때 쇄신의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들에게 맡겨진 일중에는 모든 일이 쇄신의 열심을 가져야지만 성취되는 일은 아닐 거 에요. 그렇지만 그렇게 곱게 자신이 빻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바쳐진 섬김은 질이 낮은 섬김이 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섬길 때 섬김의 양과 크기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섬김의 질도 보셔요. 하나님은 능력이 모자라셔서 당신이 하실 수 없는 일을 여러분들이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당신의 일이 이뤄지기만 하면 감지덕지 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섬김의 크기와 양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섬김의 질을 보세요. 그리고 절대로 그 양은 질을 대신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 쇄신이 될 때, 그때 그 질은 매우 높고 그리고 뛰어난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로는 곱게 빻아진 이 가루는이제 그 회 막 에서 그 하나님을 섬길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 회 막 과 관련을 맺고 있는 모든 하나님의 모든 언약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쇄심 의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쇄심 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에요. 우리는 종종 시간이 흐를수록 일은 익숙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일에 익숙한 사람들을 종종 만나고 유능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이 섬기는 그 일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해택을 받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 안에는, 그 일을 행하는 자신 안에는 그런 기쁨이 없습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은 그 설교를 통해서 감격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생애적인 변화를 받는데 설교자 자신은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전혀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경우나 혹은 TAPE 을 들은 사람은 주님을 만나고 인생이 바뀌는데 TAPE 을 수 천 수만 개를 만들면서 전혀 바뀌지 않는 사람이나, 또 책을 만들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은 생애 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망가진 인생이 고쳐지는데 수 없이 책을 만들기만 할뿐 전혀 자신은 고쳐지지 않는 사람이나, 인터넷에 설교를 올려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애 적으로 주님을 만나는데 그러나 자신은 그 매체와 거의관련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라거나, 혹은 자신의 교역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받고 생애 적으로 주님을 만나지만 자신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보내는 통로가 될 뿐 자기 자신은 그 은혜에 젖지 않는 그런 교역이나 일일이 매거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자 죠지위필드가 그 사람이 바로 야외설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람이었고 초창기에는 그것이 약장수 같다고 그래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습니다. 세속적이라는, 그러나 이미 그의 세대에 거리설교가 보편화되었고 수많은 회심 자 들이 거리설교를 통해서 나왔습니다. 지금의 미국으로 그가 설교하러 갈라치면 자기가 그동안에하던 일을 항상 챨스위슬레 에게 맡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때 그 챨스위슬레 가 이 미국에 가있는 죠지위필드 에게 쓴 글을 보면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깊은 생각에 잠기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있었을 때와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지 않고 나를 도구로만 사용하셔서 역사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너무 슬픕니다.’ 그 얼마든지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원인이 무엇일까요? 쇄심 의 헌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쇄심 의 헌신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마음의 깨어짐, 이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긴 많은 사람들에게는 항상 쇄신 의 열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런 쇄심 의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가운데서도 가장 진실하게 섬기고 돌보아야할 섬김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수시로 쇄심 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죄와 악함을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자기 자신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가루가 되도록 자신의 마음이 부셔진 사람의 내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던 거지요. 실로, 실로 가장 악한 것은 쇄신도 없고 쇄심 도 없는 아주 게으르고 나태한 삶이에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 그 자체로서 이미 매우 불결한 삶이에요. 그러나 그 다음 나쁜 것은 쇄신은 없고 열심만 있는 삶입니다. 그는 일하고 있으나 다만 일 할뿐이에요. 사람이 일하면 그는 일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깨뜨려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가 일할 때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가장 염려되는 것은 바로 여러분자신들의 영혼이에요. 여러분들의 일은 누구도 여러분 아니면 해 낼 수 없는 일은 아니에요. 여러분이 떠나면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보낼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누구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요. 교회는 언제나 누구와도 헤어질 준비가 되어있어요. 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지키셔요. 그러나 걱정이 되는 것은 교회의 일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영혼이에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와는 아무관계가 없는 사람이 얼마든지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거지요. 쇄심 이 있습니까? (우리 죄악과 강팍함~ 찬양 이하 생략!) 쇄심 이 필요해요. 쇄심 이 필요하다구. 그것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거 에요. 곱게!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이일을 그 섬김의 번 제단 그 앞에는 항상 마음이 잘게 잘 부셔져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드려진 그 심령이 있을 때 하나님은 그 섬김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시면서 받으시는 것이에요. 한 사람이 섬기는 일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과 섬기는 사람 그 자신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절대로 나뉘어 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이 드리는 모든 예물은 하나님 앞에 불결한 것이고 그가 행하는 모든 종교적인 의무는 하나님의 시선을 끌지 못해요. 그러나 사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발견하게 됩니까? 주님을 섬기면서도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죄의 소원들을 발견하게 되요. 손으로는 창조의 목적을 따라 섬기면서 마음으로는 그 창조의 목적을 이탈하고자해요. 입술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자랑하나 마음속에서는 그 구속의 감격을 거스르며 살려고 한다 이거에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쇄심 이 필요하다 이거에요. 쇄심, 그래서 마음이 잘 깨뜨려지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받으심 직한 제물이 되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이 가루를 곱게 부순 채 그냥 하나님 앞에 드린 것 이아니라 거기에 기름을 섞었습니다.의아한 느낌이 들지요? 기름을 섞었으면 반죽이 될 거 아닙니까? 고운 가루위에다 액체인 기름을 부었으니까 반죽이 될 거 아니에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가루에 기름을 섞는 방법이 있습니다. 가루에 기름을 섞는 방법은, 가루에다가 기름을 넣어서 가루를 이렇게 섞으면 그러면 마치 물을 넣고 밀가루를 흔든 것처럼 덩울 덩울 한 멍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걸 곱게 채에 치지요. 그러면 가느다란 가루가 내려옵니다. 굵은 거는 채에다가 더 손으로 문지르면서 치면 다시 매우 가느다란 가루로 분쇄되어서 내려옵니다. 그걸 더 가느다란 채에 거릅니다. 그렇게 반복할수록 가루의 형태는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입자하나하나마다 기름기가 배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게 뭐가 유익하냐? 그렇습니다. 가루를 기름을 섞지 않고 그냥 물로만 반죽을 해서 굽게 되면 그 가루 반죽에 열을 가하면 수분이 증발하지요. 그러면서 입자가 익으면서 엉기게 됩니다. 그래서 딱딱하고 거친 음식이 되지요. 그러나 기름으로 반죽을 하게 되면 거기에 열을 가하게 되면 입자 사이사이에 배어있던 기름 때문에 입자하나하나가 엉기면서도 그 입자 사이사이에 기름이 흘러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열을 가해도 물로반죽을 해서 구운 떡처럼 딱딱해지지 않고 기름이 배어 나오면서 매우 감미롭고 부드러운 그런 음식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쇄신하는 열심, 그 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성령의 은혜에요. 두 말 할 나위 없이 기름은 성령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모든 헌신 그 안에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어느 교회 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가 갈라지고 대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예배시간마다 서로 예배가 끝나고 나면 의견이 다른 쪽 이 함께 다투고 싸우는 광경이 교회에 벌어졌고 회의 때가 되면 고성이 오가면서 욕지걸이가 오고갔습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교회의 현실을 너무 가슴아파하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그렇게 교회가 갈라지고 싸우는 광경을 보면서 너무 가슴 아파하고 친구들을 만나서 교회의 안타까운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렇게 하다가 마지막으로 자기의 안타까운 마음을 보이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 행동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광고시간에 교회 앞에 나와서 주일 대 예배시간에 활 복 자살 했습니다. 칼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요. 헌신이지요. 문제는 무엇입니까? 성령이 없어요. 성령님에 의한 헌신은 그런 식으로 헌신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거 에요. 혈과 육에 속한 헌신만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에요. 그 혈과 육이 성령의 은혜에 깊이 사로 잡혀서 그 잘게 부서진 쇄신과 쇄심 의 헌신 그 입자하나하나 마다 성령의 기운이 스며들어야 해요. 깊이 스며들어야해. 그래서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기뻐하고, 하나님처럼 기대와 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아파하며 하나님처럼 섬겨야 된 다구. 그런 성령의 은혜가 필요한거 에요. 요즘 저에게는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뭐냐면 우리들이 성화에 관한 설교를 많이 듣고 거기에 몰두하다보니까 우리들의 생각이 많이 구체화되긴 했지만 또 좁아져서, 그래서 우리의 영혼의 모든 상태는 오직 성화에만 달렸다고 생각을 하는 거지요.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에 있어서 그러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자신이 깨뜨려지고 성화의 삶을 사는 것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이러한 내재적인 사랑의 경험 외에 초월적인 사랑의 경험도 이야기해요. 그래서 날마다 죄와 더불어 싸우고 신실하게 살려고 애를 쓸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이 모든 노력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그 말할 수 없는 주권과 은혜 속에서 우리에게 부어지는 부흥과 방불한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들, 그걸 하나님 앞에 구하게 됩니다. 성령의 기름 부우심이 우리의 쇄신하는 삶, 쇄심 하는 삶 구석구석에 배어서 그래서 그 성령님의 마음으로 우리들이 생각하고, 행하고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정말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을에 그런 삶을 살아서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도 하나님 앞에서 매우 복되고 여러분 자신도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제 많은 성도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셨습니다. 1900명이 넘는 성도들이 예배를 드렸는데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안 든 이제 내년에는 우리들이 3000명 시대 로 접어들게 됩니다. 장년교인! 얼마나 많은 헌신이 필요할까요. 지금도 제가 새해를 계획하면서 눈이 짓무르도록 생각하는 것은 뭐냐면 사람이 누구일까? 어떤 사람을 사용해야 할까? 어떤 사람이 준비된 사람일까?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고, 그리고 우리의 헌신은 보다 더 깊어져야하고, 그리고 보다 지혜로워져야하고 보다 친밀해져야합니다. 얼마나 많은 헌신이 우리에게 필요하겠습니까? 30%의 교인이 는다고 해서 교회당이 30%느는 것 도 아니고 행정직원이나 교역자가 30%늘고 사모가 30%느는 것 도 아닙니다.그러면 더 일이 많아지고 더 유능해 져야 됩니다. 더 많이 자기를 부셔야하지요.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부수고 성령의 은혜가 우리 구석구석 배이 는 그 일이 점점 더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는 것 이지요. 하나님이 은혜주시는 때에 그 은혜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여러분들은 자신을 각별히 살피고 정직하게 자기 자신의 영혼을 가장 근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그래서 쇄신의 삶, 그리고 쇄심 의 삶, 그리고 그 부셔진 모든 마음과 육체의 헌신의 그 입자 구석구석에 까지 배이 는 성령의 은혜, 이것이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섬기면서 살아가도록 만드는 중요한 요건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섬기며 살아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5. 어리석은 자의 입술의 잠언
“저는 자의 다리는 힘 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잠 26:7)
불행히 소아마비에 걸리게 되면 다리가 오므라들게 됩니다. 그때에 보호 장구를 무거운 것을 착용을 하고 어려서부터 힘들게 훈련을 계속하면 절기는 하지만 다리를 땅에 딛고 걸어 다닐 수는 있습니다. 근데 그게 소아마비 걸린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어려서부터 차고 다니는 아이들이 거의 없답니다. 그래서 빼버리는데 빼버리게 되면 운동부족으로 한쪽다리만 쓰게 되면서 한쪽다리가 퇴화되면서 오므라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목발을 집고 다니게 되는 것이죠.
잠언이 이미 그때도 그런 장애상태에 있는 사람을 이 지혜자가 많이 본 것 같아요. 그 다리를 보면서 한 다리는 전혀 걸어다니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 채 그냥 지면에 떠서 목발 집고 걸어 다니는 사람거기에 달라 붙어있는 것 그것을 보았던 것이죠. 다리의 용도는 두개를 땅에 딛고 균형도 잡고 달려가기도 하고 올라 갈 때는 교대로 힘을 주면서 높은 곳을 오르기도 하고 내릴 때는 아래로 쏠리는 체중을 두 다리가 균형을 잡으면서 내려가기도 하고 하는 것이 다리의 역할인데 한 다리는 전혀 그런 일에 도움을 못 주면서 그냥 이렇게 매달려있는 것 그것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근데 재미있는 게 어리석은 자의 입술의 잠언이 그러하다. 잠언은 지금 지혜자가 기록하고 있는 이런 내용입니다. 주옥같은 내용이죠. 근데 그것이 어리석은 자의 입술에는 있어요. 입술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면구약의 하나의 관용적인 표현인데 항상 말을 한다. 그런 얘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입술에 두며 마음에 두며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상태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그 잠언을 입에서 계속 외우고 흘려보낸다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얼핏 성경의 증언과 모순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전체적으로 가르쳐주는 것은 어리석은 자는 지혜로운 말을 좋아해요 싫어해요 싫어하거든요 근데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는 거예요. 어리석은 사람도 등급이 있어 가지고 그렇다 말입니다. 진짜 속 자체가 모두 잘못되어서 지혜로운 말 그 자체를 완전히 그 싫어하고 내적으로 그것에 대해서 강력한 반감을 가질 정도가 되면 그것은 굉장히 심각한 어리석음의 상태고, 근데 어떤 어리석은 자는 지혜로운 말씀을 좋아한다는 거예요,
근데 왜 그러면 그 사람의 입술에 달린 지혜로운 자의 잠언을 저는 자의 다리가 힘없이 달린 것 같이 그렇게 묘사하느냐 그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입술로만 좋아하는 거예요. 입술로만 그러니까 잠언이라고 하는 것 지혜로운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그 사람에게 들어가서 그 사람을 변화시켜서 그 사람의 일부가 되도록 그래서 그 사람과 함께 하나가 되에서 그 사람이 지혜로운 말씀을 깨닫지 못했더라면 살았을 삶과는 다른 그런 삶을 그 지혜로운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 이것이 참으로 잠언을 소유한 것 참으로 지혜로운 말씀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거든요.
근데 여기에 나오는 가상적인 어리석은 사람은 말하는 것은 좋아해요.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과 같아요.그런데 그 사람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혜를 사랑하는 것 이아니라 지혜를 말하고 지혜를 지적으로 이해하고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자기의 양식으로 삼아서 다이제스트해서 자기 속으로 들어가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그런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자체를 엔조이하는 것입니다. 껌처럼 씹고 뱉는 그런 것을 좋아하는 거죠. 여기에 훌륭한 묘사가 계시록으로 넘어가면 사도 요한이 천사가 두루마리를 주고받아 먹으라. 해서 받아먹으니까 입에서는 굉장히 단데 뱃속에서는 견디기 힘든 쓴 장면이 나와요. 그게 결국은 무엇을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변화되면 하나님말씀자체가 달고 그것이 즐겁고 그것을 통해서 기쁨을 누리고 지적인 즐거움을 누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적어도 내가 이런 말씀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자기의 지적 포만감 내지는 영적 만족감 같은 것이 있다 이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는 방식은 아니에요. 양식은 그것을 씹어서 껌처럼 씹다가 뱉는 것 이 그래서 맛을 보고 엔조이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을 먹고 말씀이 자기 속에 들어가서 작용을 일으켜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그 말씀을 먹은 사람이 변화되어 가는 성품에 있어서 일체가 이루어지는 작용이 있을 때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복 있는 사람이다 하는 것이거든요.
저는 실지로 청교도를 공부를 하면서 청교도를 좋아한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근데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삶이 전혀 청교도적이지 않아요. 어느 출판사에서 청교도에 관한 책을 써내는데 그 판권을 허락을 안 받고 해적출판을 한 거예요. 이해가 안가잖아요. 청교도의 신앙의 특징하나가 정직인데 그것을 출판하면서 해적판으로 출판을 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은 굉장히 이해하기 힘들죠. 왜 그런가 하면 로이드존스 목사님도 청교도 신앙에서 얘기 했지만은 그런 위험이 항상 우리에게도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청교도 사상 종교개혁신학 이런 것들을 이해하고 섭취하는 것은 지적인 노력만 있으면 되요. 피 흘리고 땀 흘릴 이유가 없어요. 그러나 일단 그 말씀대로 실제로 살아가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그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수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씨름하고 개척해나가야 하는 것 입니다.
목회는 이렇게 하면 된다고 가르쳐주고 그 다음에 교회 개척은 이렇게 하면 된다고 가르쳐 주지만 그것은 하나의 가르쳐 주는 로드맵일 뿐이지 실제로 자기가 그 상황에 부딪쳐서 스스로 사역이 무엇인지를 배워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러한 지식을 자기가 소화시켜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껌처럼 씹는 정도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진짜 거기서 그 말씀이 자기 속에 들어가서 변화시켜서 자기가 정말 성품이 변화되는 그런 것들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엊그제 박 봉진 목사님이 왔어요. 지금 6개월쯤 됐는데 할 만한가 폭삭 늙었어. 몇 명이나 모이냐. 열 명이나 모이나 백 명 모인다고 하면 팔십 명 모인다는 얘기니까 열 명 모인다고 하니까 가족하고 몇 명 더 나오는 모양이야 어렵지 어렵다고 해요 교회를 개척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요.
내 자신이 교만하고 그러지는 않았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 누구한테 말은 안했지만 우리 집사람한테도 말은 안 했지만 혼자 그런 생각을 했어 오죽 못났으며 일 년이 되도 2백 명도 못 모이나 열심히 하면 일 년에 한 삼백 명은 안 모일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후~ 근데 참 겸손하게 하시는데 참 힘들더라고요. 그렇게 예배시간에 은혜 받고 그러는데도 일 년에 육십 명 칠십 명도 될까 말까해.
그때 얘긴데 목회자 특강을 많이 다니잖아 목회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한참 열나게 강의를 하다가 갑자기 마음속에서 강의가 딱 중단이 되는 거야 마음속에서 소리가 들려 네가 할 말이 있냐. 저속에서 너는 너나 잘해라 마음속에서 야유같은 것들이 들려요 그게 뭐냐면 결국은 우리가 개념적으로 아는 것과 자기가 맞닫뜨려 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어. 겸손해지지 한국교회 이게 잘못되고 담임목회 이게 잘못됐고 부목사 때 다 애기했지 어때 겸손해지지 정말 겸손해져 정말 하나님 의지할 수밖에 없는 거여 여기서 얘기하는 지혜로운 자의잠언은 그렇게 자기가 체험해서피를 뿌리고 눈물을 뿌리면서 얻어진 그런 자기만의 지식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되는 것이 입술의 있는 잠언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근데 그 삶을 살지 않는 거에요. 엔조이 하는 거예요 자기는 순교는커녕 희생할 각오도 없으면서 순교자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고 그리고 자기는 그렇게 정직하게 진실하게 목회하지 않으면서 누구누구 옛날에 목회 훌륭하게 하신 분을 자기가 존경하는 것 하나 때문에 자기가 거의 기분과 같이 된 것같이 생각한다든지 이런 영적 자만심 이런 것들은 지혜자의 말에 의하면 자의 다리가 그냥 달려있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의 입술에 달린 잠언도 그러하다.
토속적인 우리말로 말하자면 어리석은 자에게 잠언은 개발에 편자니라 편자는 뭐냐면 말 우리 어렸을 때는 그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어. 편자 이렇게 써 붙여놓고 말이나 노새를 갖다가 메달아 놓고 다리를 들어서 쇠로 굽을 붙여 주는 거야 말은 발톱이 크니까 거기다가 쇠를 붙여주면 발톱이 덜 말테니까 쇠를 붙여주고 거기다 못을 박아서 깨끗이 해주는 거야 개발에다 그걸 박을 수 있느냐 하는 거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자는 그 사람이 잠언을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도 그 사람은 절대로 그것대로 살려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개발에 편자와 같은 것이다 하는 것이죠. 그럼 마지막 결론으로 그러면 지혜자가 이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했는데 지혜자가 기대했던 잠언을 소유하는 방법은 무엇이냐 그것은 입술에만 매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잠언을 깊이 이해하고 그 다음에는 그 잠언을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만하지 말고 실제로 그 잠언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행하고 실천하고 그래서 이 지혜가 도달했던 지혜의 깊은 본체에 자신도 도달해서 그것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이렇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전수 받은 잠언 성경을 통해서 전수 받은 지혜 이런 것들은 잘 그려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보면 그림을 통해서 이해를 할 수 있잖아 그러나 실제로 자기가 살아서 그 잠언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은 끊임없는 실천과 고독한 헌신을 요구하고 그렇게 하고 나면 그런 사람이 잠언을 이해하는 것은 마치 그림으로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산수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물이 흐르고 새들이 노래하고 그리고 풀잎들이 있고 이슬들이 맺혀있고 그리고 벌레소리들이 들리고 시냇물이 재잘거리며 내려가는 소리도 들리고 심호흡을 하면은 그 숲속과 개울에 공기까지 느껴지는 그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그 사람도 후에 새로운 잠언을 써내려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지혜가 풍부해 지는 것입니다.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이 정도로까지 낮아지고 내려가기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이나 하나님말씀에 대한 모든 지식에는 항상 피상적인 면이 따라 다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사모하기만 하지 말고 그 말씀을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면서 느끼는 지적인 포만감에 만족하지 말고 오히려 그 말씀을 여러분 마음속에 깊이 역사해서 삶으로도 다른 잠언을 써내려 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섬기는 자에게 깃들어야할 정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