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
(2003-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그리스도와 성례전적인 고난(골1:24) 2003.7.21 교직원예배 1
2.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라(갈2:20上) 2003.3.24 교직원예배 6
3.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잠2:6) 2003.9.15 교직원예배 9
4.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잠2:6) 2003.9.15 교직원예배 13
5. 책망과 사랑(렘31:20上) 2004.2.17 교직원예배 16
6. 순결하게 하는 연단(욥23:10)2004.5.18 교직원예배 19
7.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하심은(고후1:8~9) 2004.4.20 교직원예배 21
1. 그리스도와 성례전적인 고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한때 고난을 받는 영역이 교회만은 아닙니다. 교회 밖에서 우리가 고난을 받으며 살아가야할 영역이 참많고 그리고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잘 이기고 승리하면 주님의 영광을 많이 드러내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을 우리들이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환경적으로 보면 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받으며 섬겨가는 많은 일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간과했어. 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서도 불구하고 거의 교회를 섬기지 않고 그리고 자기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임을 들어내면 충분하다 그래서 교회에서 불을 붙여서 나가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노력하면 될뿐이다라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그만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주셨을 때 그 사람들이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 때 그곳이 어디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죠.
그렇지만 그것도 견해가 치우치면 안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방법, 즉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서 원래에 이 땅에 존재하고 싶었던 그런 인간, 인간을 중심으로 한 그런 회복된 세상을 세우심에 있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 바로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는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균형을 가져야돼요 한편으로는 바깥으로 아우트리치해서 그래서 뻣어나가서 전도도하고 그다음에 세상의 잘못을 꾸짓기도하고 상처받은 자를 끌어안기 도하고 하면서 그렇게 세상 밖으로 뻣어나가기도해야하고 또한 편으로는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많은 신자들을 밖같으로 뻣어나가는 이 사역 때문에 돌보지 못하는 일이 없어서도 안 돼요 그래서 그 영혼들을 잘 돌아서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 교회에 자기 자신이 강건해지고 튼튼해지는 길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그런 강한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나가는데 그때에 교인들이 늘어나고 성숙된 신자가 자라나고 하는 것을 교회에 몸집이 늘어나는 것을 비유한다면 몸이 반신불수에 걸리거나 수전증에 걸리지 않고 온몸이 골고루 피와 신경이 통해서 그리고 근육을 뭉쳐져서 힘차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어가는 궁극적인 요인은 그 교회 각지체속에 흐르는 성령의 은사에요 그것을 통해서 일하시는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크면 크게 일할 수 있어요 그러나 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비만이 되면 안 돼요 비만이 아니라 정상적이 성장이 되고 그다음에 성령이 은사가 강하게 흘러서 각지 체들이 성령 안에서 컴뮤니케이선을 이루면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겨나가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된다. 라고하는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신학성경에 나오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들의 생애의 대부분의 관심을 교회에 기울이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교회에 기울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의 그런 교회에 대한 깊은 헌신이 이들이 목회자였기 때문에 관심자체가 교회에만 있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전혀 아니다 그 안에는 평신도도 있고 집사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주님을 만 난후에 대부분의 관심을 교회에 기울 인것입니다. 거기에 쏟아놓고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받치면서 살았던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바로 사역자이기때문이 아니라 교회의 직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교회에 모든 마음을 기울이고 그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도록 마음 졸이고 눈물을 흘리고 무릎을 굴고 물질을 드리고 재능을 헌신하고 시간을 바치면서 살아가는 삶이 정상적인 삶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가끔한 적있죠 교회를 잘 섬기는 그것이 곧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동의어가 될 수 있는 그런 교회를 만들어 가야한다 성도들의 많은 섬김과 수고들을 가지고 교회가 다른 방향을 가서 많이 섬겼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과 상관이 없는 죽은 섬김이 되게 하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교회의 수치라고 할 수 있어요. 개론을 그렇게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면 오늘 사도바울이 신학적으로 아주 의미심장한 발언을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가운데 체우려하노라 이런 생각이 들죠.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고난이 부족하다는 말인가? 모자란 것이 있다는 말인가 예수그리스도에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 대속의 형벌이 예수님에 의해 다 치러지지 않고 뭐가 남았다는 말인가 지금도 예수그리스도는 고난을 받는가? 사실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어요 사실이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을 충족했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충분했는데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본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거죠 그리스도는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 몸이야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 치르신 고난과 그 고통은 충족했는데 그래서 그 구속의 공로를 힘입어서 그 머리에 붙어서 이루어진 교회는 완전하지 않아 그리스도는 완전한데 거기붙어있는 교회는 절대완전하지 않아 어떤 면에서 완전하지 않을까요? 죄로부터 용서를 받았고 이제는 은혜에 의해서 지배를 받으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자유를 얻었지만 여전히 이 부패성과 죄가 남아있는 인간들이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서 그래서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완전하지만 교회는 완전하지 않아 더군다나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하늘나라에 모인 천상에 교회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남아있는 불완전한 전투적인 지상의 교회를 가르키는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신자들이 항상 순결하고 완전한 삶을 사냐 아니거든 불결이 있고 죄에 지기도하고 또 이기기도하는가하면 미끌어지기도하고 미끌어지기도하는가하면 일어서기도해요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지불하신 희생과 고난을 충분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지불한 희생과 고난은 충분한 것이었지만은 그러나 그리스도께 지불하신 고난은 충분했어도 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구속을 받은 이 지상에 있는 전투적인 교회, 이것은 결코 완전한 교회가 아니에요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어떤 마음을 주시느냐하면 어떻게 하면 이 지상에 잇는 온전하지 않는 각종 연약함에 죄에 영향을 받고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교회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불완전한 교회를 어떻게 하면 온전하게 할 수 있을까를 하나님이 은혜주신사람들로 하여금 고뇌하게 하셔요.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서 헌신하게 하신 거죠 이것은 마치 신자 개인의 성화의 문제와 같이 이 교회에 성화의 측면에서 볼 수 이것은 이미 붙잡았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음도 아니요 그래서 마지막 주님께서 지상의 악의 세력들을 타파하시고 우리 모두를 부활하게 하셔서 영화롭게 하시고 그리고 최후의 천상에 아름다운 교회를 성취하실 때까지 계속되어야될일인데 이 일을 위해서 천사들이 이일을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그렇게 교회가운데 매달려서 똑같이 불완전하고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붙어있는 교회라 고하는 몸을 불완전하게 하는 사람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 일꾼들을 통해서 그 교회를 온전하게 하신 거죠 그러니까 어떤 결론이 나오냐하면 우리자신이 온전히 성화되려하는데 이게 너무 안 되어 괴로운데 우리를 또 우리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불 완전한 교회를 온전하게 하는 기일에 우리를 사용하셔서 온전하게 하시려고해요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계획,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신학적으로 바라보면 도저히 말도않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나도 형편이 없는데 어떻게 내가 섬겨서 나 같은 형편없는 혹은, 나보다 훨씬 나은 성도들이 있는 불완전한 교회를 온전하게 해서 완전하신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지체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그렇게 만들 수 있느냐 불가능하다 그래서 결국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요? 내가 그부르심을 따라서 많이 수고하고 많이 애를 쓰고 많이 헌신하지만 그러나 늘 울어도 눈물로써 이일을 이룰 수 없고 내가 늘 믿어도 믿음으로 이일을 성취할 수 없고 그래서 결국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예수께로 부어지는 그 온전케하시는 은혜를 하나님 앞에 갈망하게 되어요.
그래서 이러한 사상이 바로 여러분들이 들었던 목자와 양속에서 나타나는 이야기인데 그게 뭐냐 하며 불완전한 목회자를 세우셔서 불완전한 사람들을 온전하게 하는 사명을 주신것입니다. 그것은 붙잡았담도 아니요 이미 온전히 이루어담도아니요 라는 고백을 가지고 끝까지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되는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일군들이 고난을 받게 되는것입니다. 그때에 그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고난은 이 미성취 되었어요 내 고난이야 내고난 인 동시에 또 교회에 고난인데 교회의 고난이데. 그리스도는 교회와 분리될 수 없는 머리이시라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말해요 그러니까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정의하지면 이 고난은 그리스도의 본체적 고난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성례적인 하나 됨의 고난이란 말입니다.. 성례적적인 하나님의 고난이에요 그런데 이고난의 신비가 뭔냐하면 그렇게 하나님의 일군들이 이 교회를 위해서 애를 쓰고 수고하는 가운데 받는 많은 고난을 그리스도와 성례전적으로 하나 되는 가운데서 그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화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아서 정말 아름다운 일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 고난의 아픔 때문에 그 사람이 썩는다는 말이야! 썩는다. 무슨뜻인지 알 수 있어요? 그 사람이 부패해져간다 그래서 이게 그리스 도안에 고난이든 그리스도밖에 고난이든 이고난자체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훌륭한 하나님의 방법이잖아요 그러나 고난 그자체속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럼 뭐냐? 그 고난을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내가 법아들이냐에 따라서 이 고난이 나를 순결하고 거룩하게 만들수도있고 혹은 이고난이 나를 썩게 부패하게 만들수도있어요 그래서 죄와 은혜에 지배에서 그런 예기를 했잖아요. 어떤 고난은 순결한 고난이 있어요. 예를 들자면 내욕심과 상관없이 주님의 말씀을 잘외칠려고 하다보니까 여러 가지 고난을 에매하게 당해! 그것은 순전한 고난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죄를 지었어. 나쁜 일을 했어 잘못했어. 그래서 그 결과로 고난이 찾아와 그러면 이 두 고난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거아니에요?베드로 사도도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뭐냐 하며 에매이 고난을 당하는 것과 그다음에 당연히 지가 잘못해서 받는 고난이야 이 두개는 차이가 있어 그래도 받아들일 때 이렇게 순전하게 다가오는 고난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성례전적으로 하나 되지못하고 이 고난 때문에 계속 고통하고 하나님께 불평하는 삶을 살면 이 고난은 순전한 고난인데 이상하게 이 고난은 그를 썩게 만들어서 더 이상 이런 고난을 끌어안고 아파하지 않는 망가진 사람이 되어버리게해요.
그렇지만 자기가 잘못하고 죄를 지어서 어떤 결과를 받게 돼 그래서 너무 비통해 그런데 이 고난을 보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와 성례전적인 하나됨속으로 들어가 그래서 구속에서 이 고난 때문에 막 아파하면서 구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그리고 그 고난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말하자면 클라이스트 리얼라이제이션을이루어가는거죠 그렇게 되면 이것이 아주 불결하고 그런 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계속해서 그를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리스도와 하나되게만드는 그런 놀라운 나를 변화시키는 도구가 되어요. 그런 훌륭한 도구가 되요 그래서 양태면 에서 보면 은 이쪽은 고난은 굉장히 순전한 고난이었는데 나에게 성례전적 하나됨속에서 이것들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내속에서 고갈되어버리면 이것이들어와서 이게 아주 순전한 고난인데도 이게 가슴속에 들어와서 부패성과 역어지면서 마음에 온갖 불평과 고통, 불순종과 죄를 만들어내는 훌륭한 도구가 되요 그래서 분명히 의롭게 고난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고난 속에서 반드시 승리하느냐 그것은 아니다 데마가 세상을 사랑해서 전도 여행 중에 도망가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그렇게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전도했었는데 근데 세상을 사랑해서 도망가잖아요. 주님을 위한 순전한 고난이 그가 성례전적으로 그것들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니까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다가 사람이 부패해져서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바울을 버리고 도망가게 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요.
그래서 항상 어떤 생각을 가져야되냐하면 이 비유를 하자면 이런것입니다. 나는 항상 위가 안 좋은 사람들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느끼는 사람인데 이 위가 나쁘면 모든 병의 근원이 되요 결국은 전 주의에서 폐결핵으로 죽는 분도 보고 그랬는데 결국은 마지막은 어떠해서 비참하게 되나 그랬더니 약을 먹어도 소화를 못시키는 거야 그러니 해결이 없는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어떤 병에 걸려서 이약이 굉장히 좋은데 그렇다 고할지라도 내가 이약을 먹어서 소화를 시키지못하면 그 약이 독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에요 우리들이 주님을 섬기면서 당하는 고난이 성례전적인 의미에서 본체적이 아니라 성례전적인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되는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가 참여하는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직분이에요 천사들도 허락받지 못한 그런 특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정말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끝임 없이 내가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영혼을 섬기면서 받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 섬기기위해서 이 한길로 가려고할 때 방해하는 많은 것들이 아픔으로 작용이 괴로움으로 작용하는데 그 괴로움과 아픔을 끝임 없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도구로 삼기위해서는 우리자신속에 우리들이 고난을 당할 때 끝임 없이 그리스도와 성례전적으로 하나 될 수 있는 이 은혜로운 해석의 세계가 존재해야하는것입니다. 이게 평신도들이 이해하기쉽게 평소에 사용했던 말로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현재적경험이란 말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무엇을 생각해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번갈아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죠. 바로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신 것을 고난 속에서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와 하나될때 이 고난은 나의 개인적인 고난인데 훌륭하게 이것을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더욱 결속되도록 만들어주고 그리스도를 더욱 소중히 여기도록 만들어주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더욱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훌륭한 도구가 되여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의 육체가운데 채우노라 이런 방식으로 교회를 섬김 다면 어떻게 되겠죠? 섬기면 섬길수록 그가 거룩해지고 섬기면 섬길수록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섬기면 섬기수록 그리스도와 더욱 온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지않을까요? 그자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진실한 성도가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죠. <이러한 성례전적인 해석의 세계가 마르지않도록하기위해서는 끝임 없이 모든 이제까지 알고 있던 모든 성화의 방법, 은혜를 불러일으키고 은혜를 유지하고 은혜를 부패시키는 모든 정욕과 유혹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이 제 것까지 여러분들이 모두 배운 그 모든 것을 활용해서 힘써서 그리스도를 붙들고 자기 자신의 마음을 지키면서 매일매일 참회와 그리고 회개로 자기를 씻어내고 위로부터 내리는 신령한 은혜의 영향이 여러분들을 늘 어루만지도록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야한다>
그때에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일도 잘되고 그이를 해나가면서 여러분도 더 순결하고 성숙해지고 그렇게 해나가면서 여러분도 더 주님과 연합을 이루고 그렇게 하면 교회도 더 온전해져서 그래서 결국 그 교회로 여러분의 섬김을 통해서 온전해진 가운데 온전해진 교회가 더 온 전하게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세우는 역할을 하게하는 거죠 그자체가 너무 아름다운 삶이에요 그래서 이처럼 개인적으로 경건 속에서 주님을 닮아가는 일이 어떻게 성례전적으로 교회에 들어와서 하나가 되어서 그래서 이 좋은 신자가 되어가는 일과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는 일이 불리 되지않는가를 깊이 이해하면서 사역을 하게 될 때 여러분들이 사역 속에서 끝임 없이 온전해지는 것을 경험하고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런 마르지 않는 성례전적인 세계를 여러분들이 소유하면서 매일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上)
오래도록 생각을 하고 묵상을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성경구절이 종종 있습니다. 이 구절도 제게는 그런 것 중에 하나였습니다. 신앙생활 초기에는 사도 바울의 이러한 경우를 위대한 회심이 가져다준 상태라고 생각했습니다. 확실하게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를 믿었음으로 더 이상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 산 것이고 그런 이유로 인하여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후에 이 깨달음은 확장되었습니다. 희랍어 성경을 보면서 이 구절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완료형이라는 것을 보면서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상태의 결국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인데 지금도 계속 자기에게 영향을 주는 사건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에 깨달은 것처럼 강력한 회심이 가져다준 강력한 결단뿐만 아니라 십자가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지금도 자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현재적 상태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바울이 정화되어지고 처음 회심에 가졌던 주님 자신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목표가 늘 분명해 졌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와서는 이 본문이 다시 한번 새롭게 깨달아졌습니다. 우리들이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과거의 사건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들도 회심하였고 ‘내가 산 것 아니요’라는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었는데 그 십자가에 못 박혀있는 고백이 우리에게는 일관되게 지속되지는 않는지 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서 그 내면을 모두 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는 정말 그리스도께 붙잡혀 살았고 우리가 보기에는 적어도 일관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살아간 생애를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그 비밀이 무엇인가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서 하나 되는 것을 계속해서 누리며 그리스도의 과거적 고난 그리고 그 앞에서 일어난 자신의 일회적 회심을 계속 보존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는가 입니다. 무엇으로써 그것이 가능했는가 입니다. 촉매제가 필요합니다. 불이 타오를 때 그 불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계속 연료를 넣어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그 연료가 무엇이었는가 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대할 때 예수님이시니까 사도이니까 그들은 믿음이 훌륭하였으니까 이렇게 하고 넘어가는 것은 우리의 영적 생활이나 성경의 이해를 위해서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규명해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였기에 그는 계속해서 그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며 살았을까 입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회심의 위대함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회심이 그에게 그리스도 예수가 자신의 모든 삶과 인생에서 중심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것은 사실이고 그런 분명한 경험 없이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회심의 강도가 이와 같은 삶을 규정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즉 우리가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회심의 경험만으로도 사도 바울과 같은 살을 삶을 살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 중 한 명이 다윗일 것입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누렸던 계시의 깊이는 탁월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은 티끌 같은 존재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이고 인생임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그 다윗은 타락하였습니다. 그럼으로 사도 바울과 같은 강력한 그리스도의 경험을 하고도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이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누리면서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 자신이 만나는 모든 고난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것을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기회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게 해주시고 그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계시의 탁월함으로 보여주셨지만 그것만으로는 하나님도 그를 안전하게 완전하게 붙들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살면서 적절하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고난에 처하게 합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는 위대한 감격은 순간에 사라져도 고난은 계속 남아있었습니다. 그것은 안팎에서 계속되는 것입니다. 자기안의 죄성과 육신의 연약함에서 오는 한계와 사역에서 오는 수많은 난관이 그에게 고통을 더해 주었고 바울은 그 때마다 그것을 적절하게 해석하였고 그 해석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경험하였고 자신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고난이 일체가 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신이 감당하고 자신의 고난을 그리스도가 감당하는 연합을 통해서 그의 죄성을 누르며 그리스도와 자신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경험하면서 성화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행복하게 사는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고난 받게 하려고 안달하는 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은 행복하였습니다. 환경으로 인해 행복 하는 것이 아닌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환경이 우리의 믿음의 여부에 따라서 보석과 같이 귀하게 우리를 다듬고 성화시켜서 우리를 주님과 하나 되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체들이 교회에서 봉사하거나 일하면서 투덜대는 소리를 들으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일은 하고 있는데 주님과의 관계가 없으면 자신의 영혼이 많이 망가집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는 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주 부끄럽게 드러납니다. 그러면 교회 공동체에도 적지 않는 누를 끼치게 됩니다. 그렇게 불평하고 투덜대는 이유는 자기 안에서 그런 것들을 십자가화 하고 자기가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신앙의 세계가 고갈되었다는 말입니다. 경영은 인위적으로 물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이 흘러갈 수 잇도록 물고를 터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터주면 물이 흘러가는데 그것을 붙들고 그 물이 거꾸로 낮은데서 높은 곳으로 흐르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한편으로 경영적 차원에서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해결해 가고 한편으로는 믿음으로 잘 소화해서 신앙으로 인내하면서 해결을 해가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셨고 그것을 활용하면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과 대적하고 자기 영혼을 파괴하는 위험한 일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무엇을 하든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하고 거기에서 오는 기쁨과 어려움을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으로 승화시키고 십자가화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훌륭한 방편은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일들을 십자가화 함으로 그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거기서 얻는 기쁨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 확인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성실한 자세, 열정이 아니라 그 하고 있는 일을 위해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느냐가 입니다. 일을 신앙적으로 소화하고 십자가로 삼는 여력을 가지고 있는지 입증해야 합니다.
교역을 하면서도 비교역적인 일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셔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기도의 관심사와 일치해야 합니다. 그런 일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확신이 덜할 수 있기 때문에 단지 일로 그치고 직업적인 태도로 떨어지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일을 위해서 깊이 기도하고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일을 어떤 사람에게는 저런 일을 맡게 주셨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일꾼으로서 존귀함이 일의 종류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맡겨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이 미션의 원천임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하셔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불만이 생기고 일을 소화할 수 없습니다. 급기야는 일이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죄는 속삭입니다. 그러나 사실 일은 우리를 망칠 힘도 없고 우리를 선하게 할 수 있는 힘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매체이고 우리 자신의 부패성으로 타락하고 물러나며 우리 자신의 신앙에 의해서 견고함과 정결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여러분들이 많이 기도해야 하고 순간순간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을 주님이 당하는 고난으로 승화시켜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열린 공간에서 빵을 굽고 커피를 타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이 만약에 당신의 말씀을 이 녹음기에 녹음을 하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이 만약에 사찰이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고 항상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이라는 자긍심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사람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헤아리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그분의 눈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늘나라에 가면 이 설교를 마음 깊이 이해할 것입니다. 그 나라에는 이 세상에서 서열이 큰 사람이 높은 사람이 아니고 이 교회 안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순서가 그 나라에서 똑같이 중요한 순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나라에는 이 세상에서는 알려지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후에 주님의 일을 하면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산 것이 아닐 수 있었습니다 는 고백이 여러분 속에 살아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3.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잠2:6)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더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지혜가 많이 필요하다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지혜는 통합적입니다. 그래서 세상사는 지혜가 따로 있고 하나님 섬기는 지혜가 따로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지혜가 따로 있고 하는것이 아니라 전부 통합되어있는 하나의 지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혜의 근본적인 뿌리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고 거기에서 솟아나서 그것이 우리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 학문적인 영역, 실제 우리 거룩한 생활을 위한 지혜, 이세상에서 참으로 이치를 깨닫는 지혜 이런것들이 전부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혜는 구원의 은사 다음으로 지식의 은사와 함께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어떻게보면 이 지식은 지혜의 하위개념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지혜라고하는 그 틀안에 지식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있고 지식은 없는 경우가 거의 없고 지혜는 거의 없으면서 지식만 있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런점에서 볼 때 지혜가 지식의 상위개념이라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그 지혜를 여호와께서 주시고 지식과 명찰을 그 입에서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식해야할 것은 그 모든 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충성스럽게 살게 해달라고는 기도를 많이 하는데 지혜롭게 살수 있도록 도와달라고는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충성과 함께 늘 따라 다니는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필요에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자가 누구며 지혜롭고 중성스럽다 이것이 짝으로 계속 구약부터 신약까지 달음질치면서 짝으로 항상 움직입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가 떼어 놓을수 없는 관계에 있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게으름 시리즈를 설교하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문이 돌줄기를 따라서 도는것 같이 우리도 어떤 섬김으로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정해진 틀안에서 규칙적으로 계속 움직이고 그 이상의 발전이 없는것은 게으른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일에 대해서 싫증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동안 해오던 것들을 그냥 반복할뿐 더 이상의 진전이 없는것은 하고있는 일 자체에 대한 실증이 가져다 준 결과입니다. 일에 실증을 느껴도 성실하면 일은 열심히 하는데 목회와 그일을 끝내는 것이지 그 일을 통해서 좋은 결과를 맺으려고 하는 열렬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섬겨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돌줄기를 따라서 문이 도는것 같은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 앞에 충성스럼고 일과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정해진 시간안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더 많이 하나님을 섬기고, 섬기는데 있어서 내면적으로는 그 섬김의 동기가 점점 더 순수해지고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이 있다면 결코 하던 일들을 계속해서 답습하지만 아닐것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왜 했는지도 모르면서 그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앞에서 일이 이루어졌는데 단순히 힘들고 귀챦다는 이유로 그 일조차 그만둬 버리는 그런 일들은 안할 것입니다.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순수하게 섬기고자 노력할수록 자신이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꿈꿀것이며 짧은시간에 더 많이 하나님을 섬기려고 할수록 그는 보다 좋은 예언자 보다 꼼꼼한 계획 이런 것들을 찿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은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 더 많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것을 보시고 그런 의미로 말씀 하셨습니다. 과실을 많이 맺으면 하나님도 많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것도 어떤 의미이고, 하나님 자신 안에 어떤 성격이 있냐면 종교적으로 당신안에 있는 것을 안에만 있지 않고 밖으로 expression해서 흘러나오게 하고 싶은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서 존재론적인 측면에 있어서 정적인 이해와 동적인 이해를 한꺼번에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듭난 사람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거듭나는 것만을 원하시는것이 아니라 거듭난 새 본성이 거기서 흘러 나와서 그것이 삶으로 expression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있었던 본성이 창조를 통해서 밖으로 흘러나온 것처럼 거듭난 사람의 본성이 밖으로 흘러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충성될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들을 데리고 일하시면 당신이 더 많이 바깥으로 흘러나오게 하실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지혜는 말할수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근본적이지만 그러나 때로는 마음은 영적이어도 해결할수 없는 것을 작은 지혜가 쉽게 해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변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우리 이야기해서 안됐음니다만 예로 들자면 그런것입니다. 복사기를 갖다놓았는데 사람들이 그것으로 복사하는것은 별로 못 보았습니다. 복사기 사용량이 줄은것 같기도 하고... 사무실에 있으면서 계속 어려운 한달에 복사지를 40포 이렇게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 8천매 만매 정도 쓰는 것입니다. 돈도 엄청나고 가보면 항상 복사하다가 버려진 찌꺼기들이, 복사 잘못한 것들이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잘 좀 쓰라고 해도 사람들이 협조를 안하고 자꾸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내 마음속에 복사지가 나를 괴롭히는것을 용서하게 해달라고... 그런데 그런 기도가 정말 응답이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날 나오면 또 괴롭히니까... 그래도 이렇게 해서 가져다 놓으니 오래 기도해서 풀리지 않더니 풀리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와서 카드 사가지고 와서 카드 끍고 하니 복사기 잘못 복사한것 돌아오는 일이 없습니다. 한번 실수하면 30원이 날라가니까 똑바로해서 필요한것만 딱 해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하는것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항상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엊그제 아직까지 붙어 있는지 모르지만 사무실에 보니 사무실 물품은 절대 사용할수 없습니다 라고 써 붙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지나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누가 빌려 달라고 했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빌려 달라고 안했는데 사무실 물건 쓸 생각도 마시오를 써붙여 놓았습니다. 나는 빌려 달라고 안했는데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나를 배타하는것처럼 내가 빌려달라 한적도 없는데... 그러면 그냥 써놨다가 빌려달라고 하는 사람한테만 보여 주든지 나는 빌려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사무실 물건 쓸 생각도 마시오 써 붙여 놓으니... 그래서 지혜가 좀 더 진전을 하면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급히 뭘 해야 하는데 호치키스 하나를 빌리고 싶다 그래서 사무실에 왔는데 쓸 생각도 마시오 라고 써 놨다면 그 때 느낌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한번만 더 생각하면 막 사람들이 괴롭히니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러면 안되겠다. 질서가 없다. 그래서 생각도 마시오 써붙여 놓았는데 조금만 더 생각하면 나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그렇게 급한 사람들도 쓸수 있는 그런 방법이 없을까 생각을 하면 가능해 집니다. 물은 흘러가려고 하고 흘러가려고 하는 물은 흘러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내놓고 막아야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지하 방배동 교회에서 물이 새서 막았는데 예배 끝나고 나서 보니까 물이 못 흘러가게 막았더니 내가 건축에 대해서 모르니까 막았더니 몇일 지나고 나니 물이 안 생기는구나 해서 내가 역시 잘했다 하고 상당히 자부심을 느끼는데 몇일 있다고 보니까 벽 전체의 테두리가 젖어있는 것입니다. 물이 흘러가는 길을 열어 놓지않고 막아놓으니까 그 물이 벽에 차면서 올라온 것입니다. 그러더니 전기 코드에서 물이 줄줄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합선이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 내가 깨달은것이 뭐냐면 물은 흘러가려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갈 길을 내놓고 막아야지 갈 길을 안내놓고 막으면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말고 책상 요만한것을 남겨서 돌아 다니는것 있는데 하나를 내놓고 나무 상자로 예쁘게 짜서 줄로 매달아서 호치키스, 가위 몇 개 이렇게 위험하지 않은것 놓고 비즈니스 데스크, 필요하신 물품은 여기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기서 호치키스도 찍고 가고 가위도 좀 쓰고 가고 그렇게 해놓으면 와서 뭘 좀 쓰려고 하는데 사무실 물건 쓰실 생각 마시오 그러지 말고 필요한 물건은 비즈니스 데스크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쓰시고 제자리에 놓아 주십시요. 그러면 얼마나 친밀하게 느끼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무엇인가 일을 하고자 하실때에 우리가 그일이 잘 이루어지도록 도우면서 하나님 섬기면서 최선의 결과를 내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게될 때 그때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예화) 신학사상면에서는 동역의 어려운 면을 가지고 있지만 xxxxx는 정말 중국 선교의 역사에서 엄청난 xxx입니다. 사상적인으로는 경건주의의 후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젊은 사람이 영어를 탁월하게 잘 했습니다. 그래서 그 원서들을 통해서 경건주의 물들을 먹은 것입니다. 나중에 경건주의가 약간 신비주의 쪽으로 가기는 하지만 그래서 바람직한 요소가 섞여있긴 하지만 사역은 별로 못해서 아주 젊은 나이에 투옥되서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글로 지금도 중국에서 그 사람 글들이 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한번 전도대를 구성을 하면 1년에 한번 몇 년에 한번 대규모 전도대를 구성을 해서 중국 대륙을 관통하면서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전도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수천명씩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전도를 잘할수 있습니까? 전 아직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하여튼 영혼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을 구원받게 하여야겠다는 열망이 가득하고 그렇게 실천을 하니까 시작할때는 잘몰랐던 지혜들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렇게해서 열매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한번 더 생각을 하고 최선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이, 빠른시간에 xxxx한 마음과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봉사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전에 모시고 있었던 박 희천 목사님이 몇 달에 한번씩 당신 간증을 똑같은 간증을 되풀이 했습니다. 50년대, 60년대쯤에는 xxxx한 그 목사님이 한국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시는데 널리 알려져 있었고 특별히 어린이 사역자들을 위한 강연을 참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고백이 전도사로서 어린이 목회를 700명까지 할때니까 혼자서 대단한 것입니다. 그것도 50년대 60년대 일이니까 말입니다. 영혼들을 어떻게 잘 가르칠것인가를 가지고 고민을 하다 보니까 하나님이 놀라운 지혜를 주셨고 그 지혜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는 기회를 나중에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서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열망은 그 사람을 점점더 지혜롭게 만들어 갑니다. 한사람이 하나의 일을 맡고 오래도록 그 일에 xx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사람보다 뛰어나게 그 일에 있어서 지혜로와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충분히 그렇게 섬기지 않았다고 하는 반증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항상 더 많은 열매 더 좋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고 싶어하고 그러면 예수는 끊임없이 자기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점검하고 평가할수 있는 그런 마음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특히 직원들 그리고 교역자들 인턴쉽 마찬가지이겠지만 항상 자기가 하고있는 일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말고 더 좋은 방법이 있을것이다. 이것말고 더 잘할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섬기면서 당하는 어려움을 그 어려움속에서 효율적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열매를 맺는 그 방법들을 터득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서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많은 영광을 얻을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 조나단 에드워드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몇가지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하나는 그의 철저한 삶입니다. 그래서 식생활에 있어서 엄청난 절제를 하였고 공부하기에 좋고 사고하기에 방해되지 않는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예를들자면 기름기 있는 음식은 먹고나면 소화 시간이 오려걸려서 시간을 뺏겨야 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두통이 일어나기 때문에 사고를 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적활동에 도움을 주는 음식으로 섭취하려고 애를 썻고 그 대목에서 참 많이 찔렸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은것을 먹지 뭘 하기에 적합한 그것을 먹습니까? 얼마나 하나님 중심적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뭐냐면 메모를 하는데 외출을 할때에는 메모지를 핀으로 꽂고 외출을 합니다. 생각나면 여기서 바로 꺼내서 적는것입니다. 지금은 자동차니까 차안에서 적을수 있는데 그때는 말이었습니다. 가다가 멈추고 서서 적고 했습니다. 지금도 xx에 가면 xxxxxx에 들어가면 조나단 에드워드가 쓰던 성경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빽빽하게... 그것을 만약에 그사람이 다 집필하고 죽었더라면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책이 나왔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결국 뭐냐면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지혜를 터득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인생을 경영하는데 있어서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능력을 가지고 많이 훌륭하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내가 30년 40년 살아오면서 터득한 노하우는 이것이다 하는 히든카드가 하나씩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부디 여러분들이 자기가 맡은일을 잘 돌아보아서 하나님께서 더 많은 지혜를 주셔서 더 많이 열매를 맺을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4.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5:32)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잇고살아가거나 적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신앙의 진리들은 참많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곤고함 그리고 우리들이 주님을 섬겨나가는데 있어서 에 힘없음, 그런것들인거든요 그런 것들이 결국 여러모로 환경, 우리의 상황 그런 것들로 핑계되지만 그러나 결국 궁극적으로 보면 은 사실 성령충만하지않기 때문입니다 정답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계실 뿐 아니라 끝임 없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떤 성령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계셔서 역사하시는 이런 삶이 진정으로 복된 삶인데 그런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을 오늘 성경이 말하고있는것이죠 그것이 뭐냐 하며 하나님께서는 그 순종하는사람에게 이런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신다고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결국 성령은 우리 안에 이미 오셨지만 오신 그 성령님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당신의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죠. 가장 좋은 것은 우리가 늘 순종하며 살면 되는데 우리 중 누구도 그런 삶을 산다고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며 끝임 없는 회개 속에서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다시 성령이 충만하게 우리 안에 역사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은 어떻게 순종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것과 관련이 되는냐는거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도 마찬가지고 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귀신이 역사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모두 만찬가진되, 이 적합한 마음의 환경이 될 때에 거하게 되요 근데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의 틀이 되기 위해서는 그 순종하면서 삶아가는 사람의 마음의 틀이 성령께서 충만하게 영향력을 발휘하면 우리 안에 계시기에 가장 접합한 틀이에요 그러니까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는 신자의 마음의 틀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나를 버리고 주님의 뜻이 가장 중요하고 크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그다음 두 번째는 성령님이 자신 안에 계시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자신의 마음의 더러움들을 끝임 없이 씻어내고 그렇죠? 한순간의 자신의 육체의 정욕을 만족하는 것보다는 내안에 계신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않기위해서 치루는 절제나 희생을 훨씬 더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한 마음의 틀 자체가 순결한 삶을 가져오는 것이죠. 순종하는 삶을 가져오는 것이죠. 그 안에서 성령님이 충만하게 계셔서 역사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마음에 틀들이 순종하는 틀과 일치가 되는 것이죠.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불순종속에서 마음의 틀들이 죄에 자꾸 적합한 틀로 일그러지고 변화되는 것이죠. 사람의 모습으로 볼 때는 매일 교회나 오고 출근하고 그다음에 예배 참석하지만 그러나 그 마음의 틀이 어떠한지는 하나님이 너무 잘 아셔요. 그리고 정직해지면 자기 자신도 알게 되요 그다음에 잘아는사람이 자기 자신이에요 벌써 자기의 마음의 틀이 바뀌어가고있는 것을 안다는 거죠 물로 모를수도있어요 그렇지만 무엇인가 영적이 삶을 살고자 노력해보면 안다이거죠 내가 지금 영적으로 잘못됐는지 않됬는지 몰라! 기도해 보면 마음이 쏟아지지 않아! 그 사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도라고 하는 섬김과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틀 자체가 이미 안 맞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렇죠.
그러니까 기도가 어려워지는 거죠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이 틀이 잘못되어있다는 것을 알죠.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들어도 무엇인가 감화가 없고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자극과 신령한 변화 가없어요. 그런 것들이 결국은 자신의 마음의 틀들이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있는것이죠 그런 삶들이 계속해서 반복될 때 성령께서 계속해서 슬퍼하시면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지만 충만하지 않고 그러는 가운데 마음의 틀 자체가 죄와 불순종, 죄가 거하기에 적합한 틀이 되고 그런 마음의 틀에서 자연스럽게 불순종하는 삶이 흘러나와요 그렇게 불순종하는 삶이 일상화되면 그것이 패역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마음과 삶의 경향성자체가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그런 악한 경향성으로 변화되버리는거죠 그러면 결국 아주 쉽게 조련히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성령께서 충만하게 역사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이 되는 거죠 그것이 바로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이야기했나? 마음으로의 범죄는 마음으로 진실로 회개하면 씻어낼수있는데 그것이 흘러넘쳐서 삶을 흘러나와서 실행이 되고나면 그다음에는 마음의 진실한 회개로 그것을 씻어낼수없어요.
그래서 마음의 이끌어짐과 그 이끌어짐이 삶으로 포출 되어서 미끄러지는 것, 마음의 하나님을 거스르고자하는 소원이 있는데 그 소원이 바깥으로 나와서 진짜 하나님을 거스른 것, 그것은 절대로 같은 것이 아니에요 다윗의 경우를 보자이거죠 그가 간음하고 죄를 범했잖아요. 인간이니까 언제든지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잖아요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 때는 마음을 씻어낼수있어요 기도 속에서 그러나 일단 범죄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다음에 이것은 마치 배속에 있는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배속에 든 아이는 아이 낳고나서, 아이를 가진 자매들은 너무 힘들어서 빨리 낳으면 좋겠다고 하면 어른들이 항상 하는 예기가 “그래도 뱃속에 있을 때가 편하다! 나봐라!” 나보면 완전히 한사람이 생겨난 것입니다. 지 울고싶을때 울고, 밥달라그럴 때 밥달라 그러고 그리고 보첼때 보체고 오줌 눌 때 오줌 누고 독살 때 통사고 지 마음대로 가요 그러면서 자라는데 이아이가 점점 자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제는 부모마음되로 자라주는 것이 아니에요 어릴 때는 때리고도 하는데 다 커버리면 자기멋되로 하는 거죠 그것에 대해서 부모가 책임을 져야되요 그러니까 다른 거죠.
그런데 어떤 관계가 있냐하면 마음에서 삶이 나오고 삶이 또 마음에 영향을 미쳐 그래서 항상 상투압 현상처럼 그 삶과 마음의 틀이 일치하려는 경향이 잇는 거야! 자꾸 일치하려는 경향이 있는 거죠 그렇게 달라질수없는거죠 일치하려해요 그래서 내가 내 책 속에서 그런 예기를 했어요. 삶이 기도를 능가할 수 없고 기도를 넘어서는 삶도 없다 그게 왜그러냐하면 기도자체가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과 삶이 항상 수평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삶이 뛰어나면 기도도 따라오고 그다음에 삶이 처지면 기도도 가라않고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수평을 이루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순종하지않는삶을 살아가는 신자들은 하나님께 어떤 좋은 것도 얻으려고 생각하지말아야해요 그래서 자기의 완고한 고집을 가지고 신앙생활해나가는 사람들은 정말 불상한 사람들이에요 오히려 부족하고 실수도 있고 그렇다고 할지라도 수시로 하나님 앞에 깨드려지면서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마음과 자신의 삶전체가 새롭게 변화되는 사람이 너무나 필요하고 그런 사람이 정말 하나님께서 새롭게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실때 그 은혜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죠.
그래서 그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복종의 자세가 되어있어요 무엇을 주님이 명하시는 간에 복종의 자세가 되어있어요 그러고 또 하나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자세가 되어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늘 자기 깨어짐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수시로 자기뜻되로 행하려고해요 그리고 내적으로 자기를 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을 해봐요 그러기 때문에 수시로 자기를 하나님 앞에 꺾고 하나님 앞에 복종하고 순종하고 살려 고하는 그런 마음을 않갖는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볼 때에 진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살아갈 때는 항상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순종의 자세가 있어요. 그래서 많이 순종하면 살아갈 때는 많이 아팠어요. 왜냐하면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붙드는 과정에서 나의 육신은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거든 그리고 내듯이 없는 것은 없거든 항상 인간이라 고하는 것은 에드워드가 이야기했듯이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서 호, 불호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 이렇게 객관적으로 딱 중간에 있는 경우는 없어요. 전도합시다. 열열이 하고 싶든지 하기 싫든지 둘 중에 하나지 딱 중간에 있고 그런 것은 없어요. 오늘 기도합시다.
그러면 하고 싶든지 하기 싫든지 둘 중에 하나지 중간은 있지 않다. 그런데 나는 하기 싫은데 주님은 원하셔 그러면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깊은곳속에서 그렇게 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기싫어하는것들이 깨트려져야해요 그래서 땅에 정상 적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생태계가 완전히 바뀌어져요 다른 식물들이 생겨난다고 무슨예기지 알죠? 식물학자가 그런 예기를 해요 사막에 있는 선인장 가시가 입사귀가 진화되어서 그렇게 된 거라 고해요 그러니까 환경에 적응하는 식물이 생겨나는 거죠 우리도 마찬가지죠 하나님 앞에 늘 깨뜨려져서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그러면 불순종하면서 살아가기 적합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각양 많은 열매들의 맺는 거죠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날마다 이것들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그런 신앙생활이 되어야하는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늘 순종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서 그래서 교회를 섬길 뿐만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넘쳐서 그렇게 살아갈수있어야됩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여러분을 아주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우리같이 기도하겠습니다.
5.책망과 사랑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렘31:20上)
에브라임이라고 하는 말은 지파중에 하나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또한 제유법적으로 북왕국이스라엘지파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였습니다. 에브라임지파가 제일 강성했고 그 지파가 왕국이 갈라질때에 중심적인 지파였기 때문에 북왕국이스라엘을 에브라임이라고 이렇게 별명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건 사실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애정어린 애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에브라임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책망에 관해서 상기시키는 거죠.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남왕국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그런 가운데 북왕국은 이미 벌써 심판을 받았거든요? 그것을 상기시키면서 그 역사적인 의미를 이 유다 백성들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라 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주전 722년에 사마리아의 함락으로 말미암아서 북왕국이 망하지만은 사람의 눈으로 보면 멸망이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에 대한 책망이었습니다. 그 보이는 왕국의 껍질을 다 깨뜨리고 부수시죠 이건 유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고 이제 그 속에서 영적인 왕국을 건설해 나갈 그런 하나님의 남은 자들을 모으시는 그런 광경이 보이는 거죠 그렇게 하나님이 책망하셨을때 모든 북왕국이스라엘의 신앙있는 백성들 남왕국유다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모두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이다라고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아주 깊은 신앙을 가지고 그 파멸당한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남은자를 모으시고 여호와의 종교를 재건하시는 하나님의 그 구원의 섭리를 읽어가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예외였겠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멸망이었고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극소수의 사람중 한사람으로서 북왕국이스라엘의 멸망과 남왕국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멸망의 경고의 역사를 새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그것은 하나의 책망이다. 하나님이 관계를 멸하시는게 아니라 책망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새 백성을 만들고 싶어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책망할 적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래서 이 생각한다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또다른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속에 깊이 생각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라고 하는 또다른 표현입니다. 이스라엘과는 비교될수 없는 큰 나라들이 세상에는 많았고 하나님의 역사의 일반법칙에 의해서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나라들의 흥망성쇠가 무한히 반복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망하고 멸망되는 혹은 다시 흥하고 일어나는 그 이스라엘과는 비교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왕국의 흥망성쇠하는 역사에 대해서 하나님은 깊이 마음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그 굽이치는 역사의 물줄기속에 조각배처럼 떠있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의 역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는 것이죠 그 이유는 무엇때문이냐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역사가 택하지 않은 수많은 백성들의 역사보다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죠. 제가 전도사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드니 그중에 어느 학생 하나가 그런 얘길해요 전도사님 사회책을뒤져보니까 이스라엘 이야기는 두줄밖에 안나오는데 우리가 왜 그 두줄밖에 안돼는 역사를 교회에 오면은 마치 온 세계의 역사가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배워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고등학교 역사책에 두줄밖에 안나오는 그 이스라엘의 역사를 우리들이 이렇게 깊이 66권의 책을 가지고 공부해야되는 이유는 그 역사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흘려보내는 매개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흘려보내는 매개체 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공부하게 되는 것이죠 수많은 왕국의 흥망성쇠의 역사는 주님이 깊이 생각하신 역사가 아니였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깊은 사랑을 가지고 지켜보신 역사는 선택된 백성들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 하면서 살아갈 때 가장 나쁜 신앙습관중 하나가 자기에게 좋은 말만 듣기를 좋아하는 그런 태도입니다. 지도자가 될 수록 그럴 가능성이 참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면 주위에 아첨하는 사람들이 출세를 하게 되죠 바른말을 하는 사람들을 귀향을 가게 되고 방관하는 사람들로 가득차게 되는 것이죠 이런 것은 올바른 신앙의 태도가 아닙니다. 자기를 하나님앞에 부단히 세우려고 하는 사람은 항상 관심이 자기의 번성과 번영, 과거에 이룬 성취에 대한 찬사보다도 오히려 그의 더 큰 관심은 하나님앞에 바르게 하고 싶다라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조언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충고가 자기를 하나님앞에 바르게 세우는데 유익이 될 수 있도록 사용하고자 하는 그런 맘을 갖게 마련이다는 것이죠
사람으로부터 오는 충고나 혹은 사람으로부터오는 도전, 그리고 조언이 그렇게 소중하다고 할껏 같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충고나 도전이 우리에게 얼마나 크고 소중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저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특권을 공부하는 가운데 그 하나님의 자녀됨의 특권중에 하나가 하나님께 징계받는것이라고 하는 뭐 지극히 우리 히브리서를 통해서 알고있는 그것을 오웬이 자기의 책속에서 자녀됨의 특권속에 넣었을때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다. 그것은 참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일이긴 하다라고 이렇게 생각은 했지만 그것을 감히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됨의 특권이라는 타이틀하에서는 사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라고 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거룩한 믿음의 삶을 살아갔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일에는 일평생 칭찬받으면서 살아도 칭찬받는 일에는 익숙해지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책망받는 일에는 익숙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간혹가다 쪼끔씩 잘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가끔 하시는 그 칭찬 몇번되지도 않은 칭찬에 벌써 길이 들고 익숙해져있고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치시는 책망에 대해서는 적응이 되지 않고 있다고 하면 우리는 너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아갈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사는 것이죠 그래서 항상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그 책망하시는 손길앞에서 그렇게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를 야단치실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불붙는 마음을 압니다. 그게 철든 자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경건한 사람들의 충고를 통해서 혹은 구체적으로 목양을 하는 목자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책망이 주어질때 그것을 아주 달게 생각하고 오히려 그 뼈아픈 책망속에서 자기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로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자기를 깊이 생각하는 마음을 읽는것. 그것이 성숙한 신앙의 표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했던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사랑만 많이 경험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은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경험을 용서라는 체험을 통해서 경험했습니다. 용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오가 필요했고 그들이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서 죄의 용서를 놀랍게 경험하기 까지 때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혹하리만치 오랫동안 암흑과 같은 터널을 지나는 하나님의 회초리가 있었습니다. 그 매를 잘 맞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필요를 느꼈고 그 어둠의 터널을 지혜롭게 지낸 사람들이 하나님의 용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의 어떤 은총도 보이지 않는것 같은 어두운 그 양심의 가책의 터널속에서 율법의 송사를 받으면서도 굽히지 아니하고 자기의 죄를 위해 대신 죽은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용서의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을 체험적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보다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로 이런 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앞에 칭찬받는데는 익숙해지지 말고 일평생 칭찬을 받으며 살아왔어도 주님이 칭찬하시면 부자유스러워하고 몸둘바를 몰라하고 오히려 하나님이 야단을 치시고 책망하시면 거기에는 깊이 익숙해져서 그래서 그 한번에 책망으로 마음이 상하거나 하나님의 관계로부터 오히려 이탈할 굳은 마음을 갖는 대신에 이렇게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하나님께 회초리를 맞는 이것이 내가 얼마나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됨의 특권인가하는 것을 깨닫고 그 간절한 책망속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그 열렬한 사랑을 느낄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예전보다 더 바르게 예전보다 더 순결하게 그렇게 하나님을 따르고 살아가는 그런 제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6. 순결하게 하는 연단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이 시간에 우리 기도할 때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번주에 있을 온가족 교회오늘날을 위해서 정말 회심의 복된 역사를 우리에게 주시도록 우리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성경 욥기 23장입니다. 제 10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저희들을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부르셨 사오니 저희들이 주님을 예배하기에 적합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로 하나님 앞에 비춰지도록 저희들을 도와주십시오.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오셔서 주님이외에 아무것도 저희들에게 사랑하는 것들이 없게 하시고 그래서 생사 간에 저희들을 구속하시고 주님의 자녀로 삼으시며 우리들에게 새 삶을 허락하시고 생명주신 주님을 일체 높이며 처음 회심 할 때에 마음에 품었던 주님의 영광을 향한 아름다운 헌신의 마음들이 우리 안에 살아있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저희들이 이 말씀을 잠시 상고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에 영혼에 찾아오셔서 우리의 어두워진 마음을 쇄신시키고 세상에 재한 사랑과 덧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어두워진 우리의 마음에 문을 밝히셔서 저희들이 언제나 선명하게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주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게 해 주시옵 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의로운 사람이 당하는 고통을 이야기할 때 대명사는 욥 이고 죄가 운데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았던 신앙의 대명사는 다윗 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고난을 당했지만 욥은 의로운 사람으로서 고통을 받는 대명사가 되었죠. 그래서 마치 그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그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애매하게 당하는 고통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더 큰 하나님의 섭리 속 에서 보면 물론 이 욥은 띄어난 사람이며 순결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래서 그 믿음을 하나님이 사단에게까지 칭찬하시고 인정하신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더 큰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보면 하나님이 이 욥에 커다란 고난을 통해서 욥이 알지 못했던 자신밑바닥에 깊이 잠재해 있던 그 죄와 더러움들을 깨닫게 하신 거죠. 욥은 처음에는 자신이 죄 없이 고통을 당한다고 하나님과 그리고 새 친구들 앞에서 항변하였지만 오늘 이후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고백에서 보면 고백 속에서 욥은 놀라운 인식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가 나의 가는 길을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여기서 정금은 예로부터 많은 제련을 통해서 순도 높게 정제된 그런 금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도가니에 7번 연단한 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많이 연단하여 정제할수록 아주 값진 은이 되니 그것을 가리켜서 순은 이라고 말했던 것이죠. 욥은 예전에는 자신의 신앙이 금과 같은 신앙인 것으로 만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치열한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 안에 아직도 자기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리고 시편 19편 12절에서 말했던, 자기도 할 수 없었던 그 많은 작은 죄들을 그 고난과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성화의 교리나 우리를 하나님께서 성화되도록 다루시는 그 손길이 가혹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더욱 깊이 깨닫고 보면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더 정결하게 하시려고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아마 그것이 쇳덩어리였다면 7번 9번 재련해서 순수한 쇠를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금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치열한 재련의 과정을 통해서 더 순도 높은 정금을 만들어 값있게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우리도 알지 못하는 우리 안에 있는 많은 부패함과 그리고 헛된 것들에 대한 집착과 사랑, 이런 것들은 일상적인 일들로는 토해내어 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때로는 폭풍가운데 도 지나게 하시고 흑암을 통과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백처럼 물 가운데로 온 불 가운데를 지나게 하십니다. 그 속에서 치열한 연단을 통해서 가해지는 뜨거운 불을 통해서 자기와 하나 되어있던 거짓의 찌기들을 토해내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한 일반적인 섬김 속에 깃들여 있던 신앙을 자신의 입신양명의 복으로 삼는 옳지 못한 욕망들을 쏟아내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두루뭉술한 고백 속에 담겨있던 하나님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을 뱉어내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십니다.
더 많이 연단되어서 순도가 높아진 금 일수록 더 치열한 단련이 필요하고 그런 과정이 아니면은 그 사이사이에 녹아있는 부패한 불순물들을 쏟아내실 수가 없고 구별하실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물가지고도 씻겨 지지 않고 불가지고 태워지지도 않는 일평생을 살아온 나조차도 내안에 그런 것이 있었는지 않지 못하는 그것을 쏟아내게 하십니다. 치열한연단의과정을 통해서 그때 신자는 아픕니다. 그러나 조각가의 칼에 깎이지 않고 곡예 하는 형상을 이룰 수 있는 조각목이 없고 치열한 불결에 데이지 아니하고 순도 높은 금이 될 수 있는 금붙이가 없듯이 하나님께서 진실한 성도마다 더 연단하셔서 그들을 순전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형상을 보시고 싶어서 그래서 우리를 그렇게 연단하시죠. 그때 빚으시는 주님의 손길에 의미를 깨닫고 그 연단하시는 목적에 자기를 맡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순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잔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얼마나 많이 당신을 나타내고 싶어 하시고 그리고 순결하게 하시고 싶어 하시는 지를 깨닫는 사람들은 오늘 이 욥의 고백에 동참하게 되죠. 치열한 풀뭍불로 연단될 때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여도 뒤로 돌아가고자 하여도 양옆을 살펴보아도 그가 계시지 않는데 치열한 풀붙물은 지속됩니다. 그래서 욥이 고백하죠.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한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하고 말이 예요. 기도하겠습니다. 주기도문으로 마치겠습니다.
7.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하심은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1:8~9)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염려를 많이 하고 있었는데 에바브로디도가 와서 고린도교회가 많이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그이야기를 듣고 이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다시 한번 편지를 쓰지요. 전서에서는 책망이 많이 나오는데 이 후서에서 위로가 많이 나오는 이유도 에바브로디도 에 의해서 들려오는 소식에 사도바울의 마음이 많이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이듭니다. 그러면서 고린도전서를 시작할 때와는 달리 어조 자체가 아주 그 연민에 찬 그런 어조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 과 일행이 얼마나 연약한 자들인지 그리고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그걸 필역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자신들이 고난 받는 것을 고린도교회의 편한 신앙생활과 대조시켜서 자랑을 하거나 과시 하기위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을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육로의 위험과 해로의 위험과 춥고 배고픔과 옥에 갇힘과 돌에 맞음과 그런 모든 고난들이 바로 대부분이 아시아에서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경험한 고난의 행적을 사도행전이 빠짐없이 기록했을 순 없겠지요. 건너뛰면서 기록되었어도 아시아에서 사도바울이 당한 고난의 사건을 사도행전에서 세 개 나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으면서 돌에 맞는 장면이 사도행전 14장에 나옵니다. 사실 그 사도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사실 돌에 맞아 죽는 그것은 시위대의 돌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판단에 의하면 은 그렇게 돌로 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의 법정 적 행위에요. 율법에 의해서 판단을 받고 너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는 것이 율법의 이치다 하면서 신앙을 가장한 열심 으로 동족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서 죽는 거 에요. 이 모든 것이 고통스럽지 않은 것이 없지만은 돌에 맞아 본 사람들은 이해를 합니다. 정말 너무나 고통스러운 거지요. 온 몸을 돌로 맞고 그리고 율법을 완성하고 그 요구를 이 죄인들을 위해 다 이루시고 죽으신 그 예수를 믿어서 이제는 그 율법 으로 부터 자유해지도록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한때는 자신을 선생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에게 조차도 따돌림을 당하고 아시아에까지 와서 이제 그것도 자기가 그렇게 뼈저리게 사랑하는 동족들에 의해서 신앙적인 심판으로 그 돌에 맞아서 핍박을 받으며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사도의 마음의 고통은 돌에 맞은 육신의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것 이었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흘렸던 그 많은 눈물은 만약에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이방인이요 외인 이였다면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기울어가는 유대역사의 마지막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정말 구약에서 예레미야처럼 민족을 사랑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정말 그렇게 민족을 사랑한 인물 이였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핍박과 고난 이였습니다. 그때에 그의 많은 눈물과 고통스러운 아픔은 아마 육체 에 가해지는 고통에서 온 것 이라기보다는 마음에서 온 고통 이였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지요. 바울이 그런 소망을 인하여 핍박을 받았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귀신들린 여종을 치료해주고 투옥을 당한 사건 이였습니다. 이 귀신들인 사람을 고쳐주고 투옥을 당했으니 그 귀신들린 자를 통해서 유익을 얻었을지는 모르지마는 그러나 그 사람이 그렇게 비참하게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고 귀신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저주받은 자와 같이 사는 그 사람을 끌러주고 그리고 정말 자유케 하였는데 그것 때문에 사도바울이 핍박을 받고 그리고 투옥을 당하게 되지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복음을 전하니까 은장색들이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니까 신상을 만들어서 파는 것을 이 신상은 모두 헛것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이 제일이다 그러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니까 자신들이 파는 그 은장색의 모든 수공업을 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이 커다란 반박을 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결국은 핍박을 받고 그리고 에베소에서 그 폭동 속에서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무엇 때문 이였습니까? 만약에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나고 아라비아 광야에서 수도나 하고 살랐더라면 아마 이런 박해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에서 주님이 자기를 만나 주셨을 때에 주셨던 말씀 일어나 네 발로 서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너는 임금들과 권세 자 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망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오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주님이 그 명령을 주신거지요. 그리고 그는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아라비아에 가서 그 복음을 전했고 그리고 충실한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전도자의 삶을 사니까 그는 많은 회심 자를 만나게 되었고 회심 자들을 만나게 되니까 헌신 자들을 모을 수 있었고 그래서 자기의 사역을 조직화하고 그리고 전도의 계획을 세우고 그리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해지는 곳에 교회를 세우고 교회가 세워지니까 일꾼들을 세우고 그리고 또 교회가 세워지고 일꾼들이 있으니까 다른 곳에서 사역하다가 다시 돌아와서 교회를 돌아보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교리를 작성해서 그들에게 돌려 읽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목회를 하게 되니까 가난한 교회도 있었고 부한 교회도 있어서 부한 교회의 돈을 모아서 흉년을 만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도 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 그것을 완수 하고자 섬김의 길을 가고자 했더니 사도 바울이 많은 환란과 핍박과 그리고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고백에 의하면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니까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시기로 작정하셨고 그 뜻 은 변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아주 확실한 사인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철저하게 사로잡힌 것을 발견한것입니다.. 살 소망 까지 완전히 끊어 진 것을 발견한거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우린 참 행복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은혜가 눈물의 전주곡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 그랬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아니고는 누구도 자신의 사명은 인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을 분명하게 인지하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거져 주시는 것이지만 비로서 그 은혜가 아무렇게나 그냥 내게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특별한 사명을 발견하게 하시고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그 사명의 길을 가야하고 그리고 사명의 길을 가는 동안에 자기의 사람들이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신자에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싶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철저한 자신의 무능을 깨닫게 하는 거 에요. 그래서 조금도 자기를 의지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큰 감화를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은혜는 눈물의 전주곡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그렇게 고난을 감당하면서 사명을 위해서 그 길을 걸어가는데 사용하지 않는다고 치면 그 은혜는 아주 손쉽게 우리 안에서 부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고 바라시는 그 뜻을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섬기기를 원하시지만 은 그러나 고난 없는 섬김은 없어요. 절대로 없습니다. 언제나 고난이 있어요. 엊그제도 어느 목사님 한분을 만나서 그랬어요. 누가 나보고 목회가 뭐냐 이렇게 묻는다면 마음과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 것 그것이 목회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지극히 지극히 평범한 세상에서 지극히 세상적인 사람들과 함께 지극히 낮은 이 세상을 위해서 많은 세상 일 들을 사용해서 일을 해요 그렇지요. 돈을 만지고 빌딩을 사고 옷을 해 입히고 물자를 구입하고 조직을 하고 예산을 세우고 사람을 파송하고 전부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방식 아니에요? 그런데 목회의 성격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눈물이 그렁그렁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세상적인 일을 하면서 이 세상으로부터 가장 멀어지게 되는 것 그것이 목회에요. 그래서 정말 이 땅에 남아 있는 가족이나 그리고 남아있는 교우들이나 그리고 나의 형제자매 들 이나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죄의 영향이 종식되지 않은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세상 속에 깃들여져있는 본래적인 한계와 고통 때문에 그렇게 눈물이 그렁그렁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사명의 길을 걸어가던 모든 사람들은 저 높은 곳을 사모했던 거지요.
그래서 눈물이 없고 다시는 고통이 없는 곳을 날마다 사모했던 거지요. 사실 오늘 이 사도 바울이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 그랬을 때 사실 이것을 절망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것은 뭐냐면 자신들이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데서 오는 한계지요. 오히려 사망선고를 받고나면 그 이후에 주어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기쁜 소망을 가질 수 있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기위해서 우리가 받은 은혜대로 각자 세워 놓으신 그 섬김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세요. 그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아서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에요. 순풍에 돛단 듯이 진행되어가는 그러한 섬김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한 사람 이였습니다. 아나 신약시대에 바울만큼 예수님을 사랑 한사람이 없고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진실로 예수의 뒤를 따랐고 그리고 그분의 분신처럼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분이 우셨던 곳에서 울고 그 분이 고난 받으셨었을 그런 장소에서 핍박을 당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밖에 없는 사람 이였지요. 그런데도 매정하게 하나님은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이 여겨지도록 그렇게 만드신 거지요. 그걸 통해서 이 사도바울이 한 가지 고난은 많았으나 그 고난을 통해서 배운 것은 딱 한가지였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절대로 절대로 자기나 또 다른 것을 의지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려하심이니라 하는 그 사실을 배웠던 거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강인한 지도력을 가지고 자기의 사역을 주도하였지만은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약한 사람 이였습니다. 아주 약한 사람 이였습니다. 그래서 흐느끼듯이 가장 미말의 가장 작은 종처럼, 만물의 찌끼와 같이 매 순간을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리고 자기를 그 죄에서 구원하신 그 주님을 의뢰했어요. 그런 경험을 사도 바울이 일평생 하면서 살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견딜 수 없는 그런 고통의 경험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오늘 예수의 죽음을 경험했다고 하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이렇게 나오잖아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이게 누구에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첫 번째 죽은 자는 누구였지요? 예수님 이였지요. 그리고 그와 함께 죽는 자들 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다 이것입니다.. 이게 사도바울이 그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과 부활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을 함축하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그렇게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철저하게 죽을 고비에 직면하면서 비로서 자신들이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들이고 그리고 이렇게 해서 그분이 우리와 함께 죽었고 우리가 그분과 함께 못 밖혀 죽었다 하는 것이 실현되는 것을 경험한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 사망선고를 받은 것 같은 그 고난 속에서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된 거지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또한 우리도 예수와 함께 죽으면 그와 함께 다시 살리실 것이다 하는 소망을 갖고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된 것 이지요.
그래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에게 맡겨진 사명의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 당하는 어려움이나 희생 힘든 고통을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돼요. 그것이 목회이든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던 가정이든 이 사회든 심지어는 자신의 부패성과 싸우며 분투하는 삶의 여정에서 오는 고난이든지 간에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에게 고난이 남아있고 우리에게 죽음의 위협이 드리운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밖힌 사람들이요. 또 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도 걸어가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미말의 찌끼와 같이 여기시나보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도가 발견했던 것처럼 그 속에서 우리도 다시는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 하게 하렴이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뢰가 없으면 온전한 자기 부인도 없고 그리고 온전한 믿음도 없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도 존재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그런 것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신앙에 있어서 대단한 요소가 아닐지 모르지만 때로는 자기를 많이 신뢰하는 우리들을 그 인생의 바다에서 난파당하게 하시고 외로운 광야 에 내동댕이 처진 외로움을 당하게 하시고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깊은 고통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느끼게 하시면서 까지 우리의 가슴속에 심어주고 싶으신 그 보석과 같은 그 덕목이 바로 주님을 향한 전적인 의뢰에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뢰 그래서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오만해 지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것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우리를 능하게 하신 하나님이라고 우리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라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찬미했습니다. 이런 삶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또 요구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하면서 섬기든지 간에 우리를 의뢰하지 말고 정말 주님의 도움 없이 우리가 이 자리에서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하는 절대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의 심령도 순결해 질수 있을 것입니다
섬기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