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과 섬기는 자의 영혼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심령으로부터의 섬김 1 (롬1:9) 2005.7.20 수요예배 1
2. 심령으로부터의 섬김 2 (롬1:9) 2005.7.27 수요예배 13
3. 섬기는 자의 영혼 (요14:21)2005.8.10 수요예배 25
4.예수의 죽음의 흔적 (갈6:17)2005.8.17 수요예배 39
5. 회심치 못한 자를 위해 울라 (애1:16)2005.8.24 수요예배 54
6. 섬길수록 깊어지는 사랑 (고후2:4)2005.8.31 수요예배 65
7.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길, 순종 (벧전1:22)2005.9.14 수요예배 73
8. 지식과 은혜 (행18:24-26)2005.9.21 수요예배 85
9. 은혜와 체험 (행18:27-28)2005.10.5 수요예배 99
1. 심령으로부터의 섬김 1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1:9)
오늘 사도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 진솔하게 고백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바로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중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심령이라고 함은 인간의 정신작용에 가장 깊은 좌 소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 깊은 곳, 심령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지금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이 섬김도 또한 심령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작용이 동기가 되어서 지금 이 로마서를 적어 내려가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일평생 사는 동안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섬기며 살아온 많은 날들 가운데 심령으로 주님을 섬기는 날들이 얼마나 적은지는 우리 자신도 너무나 잘 압니다. 심령으로 주님을 섬기며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이고,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은 그저 일로서 주님을 섬깁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하는 일이 없이 무위도식하며 신앙생활 합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섬기는 것이 없이 무위도식하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깊이 각성하고 하나님 앞에 깨어나지 않으면 그들이 구원받은 사람인지도 보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고 십자가의 은혜의 감격이 있는데 어떻게 무위도식하면서 교회에 와서 교회 출석하는 정도로 그렇게 인생을 때우며 살아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아무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실은 아무 일도 안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심령으로 세상을 섬기는 사람들이고 자기의 육신의 정욕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제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으니 이를 더 중히 여기거나 혹은 저를 더 경희 여김이라. 고 말씀이죠. 그러니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단지 하나님을 안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대신 무엇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섬기고, 자신의 정욕을 섬기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해서 적대적인 행동도 서슴없이 살아갑니다. 그들의 범죄는 대담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용기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죄인을 담대하게 만드는 죄 안에 깃들여 있는 죄의 영향력이 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말고도 주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러나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하지만 그러나 일할 뿐이고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없습니다.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기가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알고,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한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나는 감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특별한 사람이다. 라고 하는 자부심을 느끼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사람, 그래서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요, 아무 쓸모없는 흉악한 죄인인데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그 피로 구원해주셔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용서받은 죄인이라고 하는 인식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때에 항상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됩니다. 자기와 같이 부족한 죄인을 불러 섬기는 자리에 세워주신 것을 감사하며 섬기게 되죠. 이 때 그는 당연히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죠. 심령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렇게 섬기지 아니하고, 단지 일로서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섬기면서 점 점 더 거룩하고 진실한 신앙을 가진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또 어떤 섬기면 섬길수록 완악하고, 그리고 강포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죄를 전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거룩한 사람을 살도록 가르치고 또 그렇게 섬기도록 부름 받은 교회를 위해서 일하지만 자신은 점 점 더 진실해지지도 않고, 점 점 더 성결해지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많은 은혜들을 자신을 통해 흘려보내는 도구가 되기는 하지만 자신은 그 은혜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 점 점 되어갑니다. 급기야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바쁜 일이 자기의 신앙을 이렇게 망가뜨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로서 감당해오던 그 일을 그만둡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이 정말 거룩하고 진실한 성도가 되어가는 방향으로 삶의 관심이 바뀌느냐? 하면 거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을 열심히 할 때는 일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닮을 겨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일을 그만두고 나니까 둑이 터지듯이 묶여있던 마음의 수많은 정욕들이 밀려와서 오히려 하나님을 형식적으로나 섬길 때보다도 못한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리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아마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성결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부지런히 활동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감당해 나가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추문들을 발견하게 되고, 오히려 교회에서 매우 헌신되었다고 칭찬을 받는 사람들 속에 있는 그 많은 악들이 지체들을 실족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이런 일들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가 예루살렘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에 겪었던 에스라 시대의 한 사건은 이 일에 좋은 예증이 됩니다. 70년 가까운 세월동안 포로생활 속에서 잔뼈가 굵고 삶의 기반을 잡은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예루살렘에서 부귀와 영화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신앙 때문에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부귀와 영화가 기다리기는커녕 주위에 있는 수많은 족속들이 끊임없이 전쟁을 걸고 죽음의 위협을 가해왔습니다. 그래도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화시키자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충성심으로 그들은 포로시대에 정착했던 삶의 기반을 뿌리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잠시 평안한 시절이 오게 되자 그들은 이방 여인들과 음란한 혼인생활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리고 많은 자식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끔찍한 모든 부정한 일에 있어서 백성의 두령들과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꾼들이 으뜸이 되었다는 소문이 이제 이 에스라의 귀에 들려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산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런 대표적인 악에 빠져서 뒤로 물러가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우리들이 단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어떠한 태도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나는 그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이며 나는 그 하나님을 그분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나의 심령으로 섬기노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의 섬김의 자세가 그를 초인적은 헌신의 삶을 사는 가운데서도 그가 하고 있는 일 때문에 뒤로 미끄러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과 더 긴밀한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의 길을 걸어가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마지막에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 이르기까지 주님과의 교제는 점 점 깊어져갔고, 그리고 순교의 순간이 다가올수록 그는 자신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더욱 철저히 느꼈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욕망을 버리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속히 만나볼 영광스러운 소망의 마음은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진전하는 그의 성화의 삶은 바로 그가 하나님을 섬긴 자세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고, 무위도식하는 신자는 매우 나쁜 그리스도인이고, 그리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평생 하는 일 없이 사는 사람이 정말 구원 받은 신자인지는 두고 가 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니더라도 주님을 섬기되 단지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없고, 그저 일로서만 주님을 섬기노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은 바쁘게 많이 일했지만 하나님은 그 섬김을 받으신 적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다이나믹 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며 산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놀라왔습니까. 그 섬김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울고 웃었습니다. 환희와 좌절,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습니다. 그리고 작열하듯이 터지는 유혈들을 경험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한껏 영광을 받으시는 때였습니다. 그 속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과 더불어 즐거워하며 고통하며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았고, 그렇게 분투하며 사는 동안에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그들 속에서 영글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런 놀라운 경험들이 있기 위해서는 그 섬김이 모두 형식적인 섬김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진실함,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는 그 아름다운 진실함이 그들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섬김 속에서 주님과 함께 울고 웃는 일치된 삶을 살수 있었고, 이러한 삶의 진전이 그들의 성화의 진전에 탁월한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고백한 것처럼 그가 무엇을 하든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섬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그 아들의 복음 안에서" 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명백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라고 하는 이야기는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그 놀라운 복음, 그래서 이제는 아무도 자신의 의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값없는 구원의 은혜 때문에 주님께 용서받게 되었다는 그 놀라운 기쁜 복음 그 안에서 주님을 섬기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 오늘 사도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라고 할 때에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라고 하는 것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혜택을 받은 자기 인식을 나타내는 것이죠. 주님을 끊임없이 섬기면서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인식은 나는 감히 하나님의 일군이다. 라고 하는 교만한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는 주님의 파트너이고 하나님도 나 없이는 당신의 일을 못하신다. 라고 하는 우월한 자만심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긴 세월을 사도고 수많은 영혼들을 섬기며 전무후무한 전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만은 마지막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순간까지 가지고 있었던 자기 인식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 로라." 고 하는 자기 인식이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할 때 이 괴수는 "프로토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영어로 퍼스트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인들을 죄질의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서 세운다면 자신은 그 첫 번째가 될 것이라는 자기 인식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자신이 지은 그 죄가 뛰어나다. 라고 하는 상대적인 인식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절대적인 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죄질과 자신의 죄질을 비교할 필요조차 거절하는 절대적인 죄인으로서의 자기 인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항상 2자신이 한 일은 잊어버렸습니다. 자신이 훌륭하게 완수했던 복음사역의 성공,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아깝지 않게 여기며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던 많은 희생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주님을 몸이 닳도록 섬기면 섬길수록 그의 마음속에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자기에 대한 인식은 '나는 한 때 죄인 중에 괴수였다.' 라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주님을 거시려 살던 그 더러운 죄인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바로 복음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따라서 사도가 '아들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긴다.' 고 하는 것은 바로 구속의 감격 안에서 그 은혜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감사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그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구속의 놀라운 감격이 그 사람 안에 항상 있었고, 그것이 섬김의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는 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이제는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무엇도 전문적인 지식이 없으면 섬기기 힘든 그런 시대로 접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20년 전만하더라도 교회가 성장하면서 이렇게 전문적인 사역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사람들이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양한 방면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변하고 복잡하고 전문화되는 시대일수록 그런 전문화되고 다변화되는 시대에 대한 교회에 대한 선교전략도 역시 전문화 되고 다변화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팔방미인 같은 사람이 아니라. 한 가지에 소명을 느끼면서 오래도록 전문가가 된 사람,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점점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전문적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구속받은 은혜에 대한 감격을 대신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전문적인 지식이 있고,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보다도 더 뛰어난 가치는 주님을 섬기기 전에 먼저 섬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신의 내면의 속에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라고 하는 이 찬송은 존 뉴턴이 작시한 것입니다. 그는 원래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사냥해서 노예로 파는 아주 악독한 노예 상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그를 늘 기도하면서 키웠고, 어머니는 그가 이다음에 훌륭한 목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일찍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가 새장가를 든 후에 이 뉴턴은 비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배를 타고 무역을 하는 동안에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 그리고 죽음의 어마어마한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는 배 밑창에 엎드려져서 "하나님이여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배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기도를 드리고 난 후에 배가 파선되었지만 그는 기적적으로 표류하다가 4주 만에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굳세게 믿어지게 되었고, 그리고 자기와 같이 노예상인이었던 이 악독한 죄인조차 용서해주신 것이 바로 이 땅에 있는 모든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라는 사실을 전파했습니다. 80이 넘었을 때에 육체의 기력이 많이 쇠해지게 되었고, 사람들이 그에게 이제 더 이상 사역을 더 많이 하지 말도록 사랑으로 권했습니다. 그 때 그는 말했습니다. "아직까지도 내 입을 움직일 수 있도록 나를 악독한 노예 상인에서 구원하여 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일꾼으로 삼아주신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내가 어찌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이죠. 그런 구속의 큰 은혜의 감격이 필요합니다. 그것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무엇이든지 하여튼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면 지금 곧 회개하고 돌이켜 서서 무엇이라고 주님을 위해 섬길 일들을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지금 주님을 섬기고 있는 중이라면 여러분들이 그 섬기고 있는 중에 여러분들이 이런 구속의 감격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있는지 깊이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사도는 그런 구속의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놀라운 구속의 감격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깊이 회심하며 주님께 돌아오던 처음 회심이나, 혹은 그 회심의 경험이 새로워지던 또 다른 회심의 순간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들은 그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크신 은혜는 비 할 대 없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적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고백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말했을 때에 그 말이 여러분의 입술에서 나오는 건성의 언어였습니까? 그럴 리가 없죠. 항상 모든 기도는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습니다. 심령 깊은 곳에서 나는 진심으로 죄인이요. 쓸모없는 더러운 죄인이며 오직 나를 구원하신 이 놀라운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베푸신 것이며 나의 구원을 인해서 그분만이 영광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은혜는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종류의 은혜이고, 그리고 자신을 모두 갈아 드려도 갚을 수 없는 놀라운 은혜라는 인식이 여러분들 속에 없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구원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은혜의 감격이 있었을 때에 그 감격이 머문 자리가 바로 여러분들의 심령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은혜의 감격이 있었을 때에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모든 것이 감격이 머물던 그 심령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하면서 항상 마음이 먼저 하나님께 바쳐졌고, 그래서 주님의 일이 잘 되면 말할 수 없이 신령한 기쁨이 마음속에 가득했고, 그래서 주님만을 위해서 주님만을 사랑하며 순전하게 살고 싶어 했고, 주님의 일이 잘 되지 않을 때에는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했고, 그래서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아주 연약한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든지 저렇게 되든지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니 그것 때문에 여러분들은 또한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주님의 일이 잘 성공하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갔고, 주님의 일이 잘 되지 않으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여러분 속에 있는 온전하지 못한 섬김의 동기를 뉘우치는 가운데 여러분들이 더 순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누렸던 영혼 안에서의 신령한 성화의 작용입니다. 그렇게 섬기면 섬길수록 주님께 싫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더욱 사랑스러웠고, 그래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셔서 이 쓸모없는 벌레와 같은 인간을 구속하셔서 천사에게도 맡기지 않는 복음의 비밀을 맡기시고, 주님이 몸소 피 흘려 구워하셨던 영혼을 섬기는 자로 우리를 불러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왕의 궁정에서 천 날을 지내는 것 보다 하나님의 집에 문지기로 있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런 섬김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있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유명한 책, "참된 신앙" 이라고 하는 책에서 이런 신앙의 원리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문장을 그대로 외울 수는 없지만 거의 동일한 내용일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영혼으로서 섬긴다면 제일먼저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를 섬길 것이며 자기가 아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이 하나님을 섬기는 그를 섬길 것이며 마지막에는 가장 낮고 비천한 본성이자 실제인 자신의 육신까지도 영혼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를 섬길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끝부분을 읽으면서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처음 안 사실은 아니지만 대부분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만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서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있고, 액스트라가 있죠. 액스트라는 일당 한 5만원쯤 받고 와서 뛰어다니다가 사라지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은 수만 명의 사람들이 동원되어도 대포 소리만 나면 모두 쓰러집니다. 주인공은 총알도 피해가고 대포에 맞아도 살아납니다. 주인공입니다. 왜? 작가가 이미 주인공은 죽이지 않고 끝까지 살려두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그 영화를 만드는 가운데 동원되는 모든 사람들은 그 주인공의 생존에 기여하는 것이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주인공이 살아있는 것이 빛날 수 있다면 액스트라 수만 명은 대포와 함께 한방에 죽어도 관계가 없다는 것이죠. 어차피 진짜 죽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습니다.
심령으로 하나님을 깊이 섬기게 되면 그 사람 안에 주신 하나님의 생명이 그를 섬깁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제가 여러분들에게 상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주님이 신자 안에 두신 신령한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표현 방식에 의하면 그것은 곧 신자 그 자신 안에 있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어떤 일들을 할 때에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위해 마음을 모두 쏟으며 주님을 섬길 때 성령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봉사하십니다. 이 정도만 설명해도 여러분들은 무슨 이야기 인지 분명히 알 수 있겠죠?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아, 목사님 성령님이 그래도 하나님이신데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봉사하시다뇨. 그것은 약간 신성 모독적인 성경 해석이 아닙니까? 우리가 성령님을 섬겨야죠."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에서 사도가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신다고요? 도와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했습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를 봉사하시는 것,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은 성령님이 능력이 모자라고 혹은 우리가 성령님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기 위해서 당신을 위해서 봉사할 때에 봉사하는 주체를 성령님이 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주체로 삼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영혼을 누가 구원하죠?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 누구시죠? 성려님이 거듭나게 하시죠. 성령님이 혼자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도를 통해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니 영혼을 구원하는 섬김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성령님이 아니라. 우리가 주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로 그런 일들을 위해서 섬길 때에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치가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았는데 그 은혜를 너무나 쉽게 잃어버릴까요? 그게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그러면 섬길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가 혹은 에드워즈의 표현대로라면 우리 안에 주신 성령님이 그렇게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를 기뻐하시면서 은혜를 계속 불일 듯 일어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많이 받아도 마음을 바쳐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소극적인 의미에서 자신에게 주신 성령을 소멸하는 중입니다. 처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주님을 열심히 섬길 때 우리의 마음에 불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모두 다 아시죠. 놀라운 불이 있습니다. 이 속에서 계속 신령한 불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 바쳐서 섬길 수록 이 불은 점 점 더 강력하게 타오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항상 계속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가보면 일은 열심히 하는데 이 속에 불이 없어요.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생명, 곧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냐면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생명은 곧 성령의 은혜가 우리에게 역사하기를 멈추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향해 섬기던 우리의 섬기는 자세가 흐트러지는 일들이 먼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열렬함이나,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열렬함이나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이런 열렬 함들이 감퇴 되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만드는 어떤 잘못된 행실이나, 우리의 습관, 마음의 올바르지 않는 태도 이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서서히 그런 것들이 불을 끄는 것입니다. 물론 커다란 범죄가 일어날 경우에는 단번에 불을 끌 수 있지만 커다란 범죄가 아니더라도 빗방울에 바위가 패이듯이 시간이 서서히 지나면서 복음 안에서 주님을 섬기던 그 열렬함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 안에 있는 이 신앙의 열렬함, 주님을 섬길 때에 마음을 온전히 드려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위해 봉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점 점 더 그 충만함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길수록 더 뜨겁게 사랑하고 더 순결한 삶을 살고 싶어 하게 됩니다. 그것이 불붙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서서히 끄게 만드는 어떤 잘못된 것들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점점 오랫동안 계속 되는 동안에 이 불은 점점 식어지고, 잘못된 행동들은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리고 점점 대담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결국 어떻게 되느냐면 이 속에 있는 불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그리고 그 일에만 봉사하는 것입니다. 심령은 이미 마귀를 향해, 혹은 세상을 향해 정욕으로 가득 차서 내어 준바 되었고, 마음은 하나도 드리는 것 없이 형식으로만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능력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요. 단지 섬길 뿐이지 태도만 섬길 뿐이지, 그러나 그 속에서 이미 심령을 바쳐서 섬기는 사람들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를 도와주는 이런 작용들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나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을 심령으로 섬기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금석 하나를 오늘 저녁에 여러분들에게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그것을 가슴에 품고 기도해보세요. 그리고 자기 전에 여러분 자신을 성찰해보세요.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직접적으로든지 간접적으로든지 주님을 섬기고 있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일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지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처음에 저희 교회가 새 가족 사역을 세우기 위해서 애를 쓸 때 잘 하고 있는 교회들을 탐방하기 위해서 부산까지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어느 여 전도사님이 새 가족 사역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 전도사님에 대한 그 부목사님의 소개는 탁월했습니다. 그분은 정말 새 가족을 위해서 태어나신 분입니다. 구역장과 스탭들을 모아놓고, 그리고 새로운 신자들은 어떻게 돌보는지 점검을 하다가 그 일꾼들이 제대로 새 가족을 돌보지 않는 것이 발견되면 그 여전도사님이 책상 앞에 엎드려서 엉엉 울었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내주신 영혼들인데, 우리가 새 가족을 그렇게 섬길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 마음이 곧 뭐냐면 그분은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섬기고 있는 일이 잘 안 된다고 판단이 되었을 때 그분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던 것이죠. 그래서 거기에서 쏟아져서 눈물이 흐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의 아픔을 전수받은 상태입니다. 그 일이 사람마다 각기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 가족의 일일 수가 있고, 어떤 사람은 이미 나온 성도들을 돌보는 그런 사역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사역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저런 사역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사역이든지 간에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깊이 잘못될 때에 여러분들은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합니까? 그리고 그런 안타까움을 느끼도록 만들어 주고 있느냐고 지금 제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에게 그런 일이 있습니까? 세계 평화를 염려할 때는 눈물이 안 흐를 수 있습니다. 정치가 제대로 되기를 원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 가슴 저미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도 있고 또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직접적으로 맡겨진 중요한 사명, 그것이 있다면 그것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만들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의 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왜냐면 원천이 모두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그 섬김도 심령으로부터 우러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는 영혼의 울부짖음을 불러오는 그 외침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입술에서 나옵니까? 머리에서 나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지 않습니까. 똑같이 그 기도의 영이 바로 봉사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사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며 심령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에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를 섬긴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미련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는 일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착념하는 일이 없이 기도하는 그 기도가 가증한 것이라면 주님을 섬기는 그런 마음을 바쳐 주님을 섬기는 섬김의 갈망이 없는 사람들이 은혜를 갈망하는 것은 외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받아서 어디에다 쓰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어거스틴은 사람이 만약 창조주 하나님을 자기의 창조주 하나님을 진심으로 그의 글의 원문의 표현대로 라면 영혼으로 자기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섬긴다면 제일먼저 그 안에 주신 하나님의 생명이 그를 섬길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속에서 보면 특히 사도행전에서 보면 사도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함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 때에 세상이 그들을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두들겨 패고 모욕하고 그리고 죽였습니다. 그래도 누구도 굴복하지 아니하고 그 속에서 더 강력한 능력이 역사해서 오직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눈을 부릅뜨고 선포하면서 죽어갔습니다. 그런 놀라운 힘들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 사람들을 그 사람 안에 주신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놀라운 역동적인 능력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비밀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인지 모릅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마음에 감동이 와서 섬기고 싶을 때는 섬기고, 말고 싶을 때는 집어 치우고, 마음이 바쳐질 때는 바쳐지는 것이고, 안 바쳐지면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게 섬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섬김의 자리에서 미끄러지고 일관되게 하나님을 섬겨야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들이 그런 불충성한 사람들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모두 망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려면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들은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만은 옛날에는 교회에서 교회를 지으면 교회 앞에다 종탑을 하나씩 만들고, 그리고 손으로 잡아 당겨서 종을 쳤습니다. 그러다 차인 벨이 나왔고, 전자 차인 벨이 시끄럽다. 그래서 법으로 금지를 하니까 결국은 교회마다 아무도 종치는 곳이 없는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교회에서 그 종소리가 울리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교회를 짓게 된다면 종은 꼭 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교회에 기쁜 일이 있을 때 종을 치고, 그리고 위급한 일이 있을 때 종을 치고,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할 때 종을 치고, 그렇게 하죠. 제가 어렸을 때에 다니던 교회에도 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을 이제 새벽에 종 치는 것이 큰일이죠. 왜냐면 4시 30분에 새벽기도를 하는데 초종이 4시 5분에 종을 치고, 그리고 제종이 25분에 종을 칩니다. 그러니까 이제 4시나 4시 5분에 종을 치는 것은 새벽 기도시간이 가까웠으니까 일어나라는 종이고, 25분은 이제 곧 예배가 시작된다는 종입니다. 무슨 기계가 있었던 때도 아니니까 꼬박 그 시간이 사람이 나와서 종을 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느 교회에서 그 종을 치는 일들을 너무 힘든 일이니까 돌아가면서 이제 집사님들이 종을 치는 일들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중에 어느 집사님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을 종을 치게 되었는데 이분에게 선한 마음을 주셨어요. 그래서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서 3시쯤 일어나서 목욕재계하고, 그리고 이제 양복을 입고 그리고 그 추운 겨울날 그 종탑 아래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데 이 종 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도록 도와주시고 또 이 종소리를 들을 때에 주님의 집으로 달려 나오고 싶은 마음을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 하면서 초종을 치고 제종을 칠 때까지 다시 기도하다가 종을 치고 했는데 그렇게 기도를 하면서 이 사람이 일주일 동안 크게 은혜를 받아버린 것입니다. 심령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를 받으면서 이 사람이 영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만 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려주게 되었는데 이 사람이 그 종 밑에서 서원을 해버린 것입니다. 평생 동안 종을 치겠다고 서원을 했습니다. 그런 종류의 간증이 당시에는 아주 많았습니다. 종 줄 붙잡고 은혜 받은 사람들의 간증이 아주 많았어요. 그 사람 손에 붙든 것이 거룩한 종 줄이었기 때문에 은혜 받은 것이 아니라. 쓰레받기를 들고도 그 자세로 하면 은혜를 받습니다. 변소에서 똥을 퍼도 그 자세로 똥을 푸면 은혜를 받습니다. 왜? 사람의 보기에는 종 줄을 잡은 것은 고상해보이고 강단에 올라가서 성경책을 붙잡은 것은 더 고상해보이고, 빗자루를 집거나 똥 지개를 진 것은 좀 비천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다 사람보기에 그런 것이고, 그 모든 일을 맡기신 분이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 보시기에는 마찬가지 일입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소자 하나에게 냉수를 준 것도 결단코 상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그러니까 얼마나 큰일을 하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큰일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떠한 자세로 그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작은 일을 하더라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 심령으로 자기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 제일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섬겨요. 그래서 우리로 더욱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하늘 은혜의 자원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충만하게,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어거스틴은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 그는 자신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이 자기를 섬기게 된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저는 사실 마음으로 무릎을 쳤습니다. 그렇구나. 이것은 바로 우리들이 날마다 경험하는 일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그래요. 교회 개척을 하는데 선배들이 어떻게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안 가르쳐주고, 믿음으로 하라. 그러더래요. 그래서 "믿습니다." 를 계속하고 믿음으로 교회 개척의 문을 열었더니 낭떠러지였다더군요. 그런데 사실은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개척을 해 보면 참 놀랍습니다. 저도 맨 처음에 열림 교회를 개척할 때 저의 인생의 계획표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냥 아주 톡 떨어놓고 말씀드리면 신학교 교수로 있었으니까 생활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없었고, 이제 교수생활이 마음의 성에 차지 않으니까 목회를 해야 되겠다. 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좋은 장로님들이 있고, 잘 정리된 교회에서 그저 너무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고 한 4-500명 정도 되는 교회에서 나를 오라고 하면 좋겠다. 그러면 가서 한번 진실하게 말씀으로 성도들을 기르면서 교회를 한번 세워봐야 되겠다. 그런데 아무도 오라는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내려갔습니다. 한 200명만 되어도 갈 터인데 그래도 오라는 데가 없어요. 그래도 학교에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갈등이 생길 때마다 '아이, 그러면 한 100명만 되어도 가야지'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서도 오라는 데가 없고 하나님이 직접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직접 교회를 했죠. 적금 넣은 것 1500만원 깨뜨려서 그래서 지하 25평 교회가 두 번 깃발을 세웠다가 문 닫고 간 교회에서 물 퍼내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니 남들은 교회 개척에 간증 수기도 많더군요. 뭐 돈 많은 장로님이 도와주셨다느니. 기도 많이 하시는 권사님들이 포진해서 자기를 도왔다는 이야기, 뭐 형제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서 뭐 했다는 이야기. 저는 그런 간증 하나도 안 나타나요. 원래 그런 간증하고 거리가 멀었으니까 그랬는데도 참 놀랍더군요. 그렇게 하고 일단 시작을 하니까 하나님이 하여튼 어디에다 숨겨놓으셨는지 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섬겨서 어떤 사람은 종탑을 해 놓겠다. 어떤 사람은 의자를 사 놓겠다. 어떤 사람들은 강대를 가져오겠다. 어떤 사람은 앰프를 사놓겠다. 또 뭐 앰프를 사주고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자기가 와서 이문 남기지 않고 봉사하겠다. 심지어는 등 달아주겠다는 사람, 그래서 아, 이것이 맨 처음에 내가 혼자서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총동원령을 내려서 도와주셔요. 이것이 우리들이 늘 경험하면서 사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살면,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이런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주셔요. 선교사 한 분이 선교회를 운영하면서 어려운 일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 저에게 돈이 필요합니다." 1억이나 넘는 큰 돈을 구하지 못해서 쩔쩔매고 기도하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친구한테 전화가 오더니 지금 빨리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무슨 일인가 하고 급히 갔더니 1억원이 든 통장을 주더래요. 당신 좋은 사업에 쓰라고 그래서 이게 웬 돈이냐고 했더니 어느 성도가 와서 며칠 전에 놓고 간 것인데 기도하다 보니까 당신 생각이 났다고 빨리 가져가라고, 하나님을 심령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이런 간증이 밤새도록 해도 끝이 없을 정도로 너무 너무 많은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예비하시면서 돕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돕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선배 중 한 사람이 옛날 구 러시아에서 선교사를 했는데 하여튼 웃다가 눈물이 나는 간증을 하더라고요. 자기가 섬기고 있는 동네에 한 그리스도인이 있는데 선교사에게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더니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뭐 돈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했데요. 기도를 하다가 은혜를 받으니까 이 사람이 통성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거기를 순시하는 케이지비가 있었데요. 자기 구역에서 같은 시간에 매일 기도소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뭘 기도하나. 그랬더니 뭐 50 루불 만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하더래요. 그래서 이 사람이 하루는 가서 그랬데요. 내가 그것 줄테니까 내 구역에서 제발 기도 좀 하지 말라고, 내가 걸리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그래서 50 루불을 줬데요. 그랬더니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할 수 없이 감격하면서 그랬데요. 하나님 응답해 주신 것은 감사한데 다음부터는 케이지비 통해서 응답하지 말고 직접 응답해주시라고, 말이지. 심령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섬기면 어쩌면 내가 그렇게 주인공이 되는지 몰라요.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도와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셔요. 하다가 안 되면 까마귀를 보내서라도 떡과 그리고 물을 날아다 주시면서 힘을 얻게끔 만들어주셔요. 그런 놀라운 간증이 있어요. 아마 이렇게만 이야기 하면 하나님을 섬겨본 여러분들은 모두 다 알 것입니다.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항상 두려움이 없어요. 왜냐면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심령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아직 활용은 하지 않고 있지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이 땅에 있는 모든 자원들이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쓸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그 모든 것들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자기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지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이런 놀라운 은혜가 있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주인공처럼 대접해주셔요. 그리고 자기가 생각지도 않았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섬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을 보면 안 그럴 때도 있습니다. 심령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섬기는데도 물질이 없거나 돕는 사람이 없어서 고난을 당하고, 혹은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우리의 일들을 어렵게 만들어서 우리가 고통당할 때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맞는데 그런데 이런 이야기입니다.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그를 섬기지만 항상 운수대통한 사람처럼 고속도로를 가는 것처럼 그렇게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고난이 하나도 없었겠네요. 아닙니다. 오히려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항상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을 당하며 공격을 당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무도한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의로운 시인은 고통을 당하였고, 자기 안에 있는 부패한 자신의 본성을 보면서 울어야 했고, 주님의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많이 수고하는데 돕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려야했습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은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에 우리를 돕는 것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도 돕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이치가 성립됩니까? 이런 이론에 의해서 바로 그것들도 우리를 돕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아무리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막힘없이 저절로 될 때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겸비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많지 않습니다. 다윗이 누구였습니까? 상한 심령을 가지고 일생을 산 사람 아니었습니까. 그런데도 그가 승승장구하다가 결국은 넘어지죠. 이것이 인간입니다. 베드로가 고난 받으시겠다는 주님의 예고를 들으면서 죽는데 까지도 내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할 때 그 고백이 거짓말이었습니까? 진심이었죠. 그런데 실패하죠.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바쳐 심령으로 그분을 봉사하시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어떤 일들이 안 되게도 하셔요. 그래서 심령을 바치면서 주님을 섬겨요. 많은 돕는 사람들이 나타나 때로는 재능으로 나를 위해서 봉사해 주고, 물질로 나를 위해 봉사해주고, 기도로 나를 위해 봉사해주고, 그래서 내가 그 모든 일을 이루는데 있어서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주님이 보여주셔요. 수많은 돕는 자들이 나를 도우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서 외롭지 않게 해주셔요. 그러다가 가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타나요. 하늘의 도움이 끊어진 것처럼 자원이 주어지지 않는 어려움을 만나게 되요. 그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게 되죠. 승승장구 할 때에 경험하지 못했던 비참한 자기 비하를 경험하고 그리고 자기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세상에 대한 소망을 끊어버리게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그 때 세상에 대한 헛된 사랑이 사라져요. 그리고 심령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데 방해가 되는 영혼의 찌끼와 때들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것도 우리를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순전한 사람이 되게 해 주니까.
지금 좀 지났으니까 평정한 마음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언젠가 교육관을 샀죠. 참 빠른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면서 계산기를 두드리니까 아, 이것은 땅 집고 헤엄치기 였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기도하기보다는 마음에 감격부터 먼저 했습니다. 그리고 일을 진행하는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일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에 하여튼 막혔습니다. 그때 까지는 몰랐습니다. 사택에서 3층 창문을 열면 그 창문에서 바로 교육관이 보였습니다. 매일 거기에서 창가에 두 팔을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어떤 생각이 드느냐면 아, 이 일을 내가 목숨을 걸 정도로 이렇게 중요한 일인가? 어느 한 순간에는 그 일을 한 것을 마음 깊이 후회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 기적은 나타나지 않더라고요. 순리로 하나님이 되게 하셔요.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얻은 결론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그 교육관 사 놓고 마지막 잔금 지불할 때까지 아주 급속한 성화를 이룬 것 같았습니다. 결국 나 하나가 하나님 앞에 좀더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내 심령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나를 많이 사랑하시지만 불 가운데 튀기기도 하시고, 뜨거운 물에 끓이기도 하셔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섭리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모두 지난날들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 풍랑 인연하여서
주께로 갑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는 심령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 것입니다. 주님이 그것을 사용하게 해 주시고 또 그것을 사용해주시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이 일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할 우리들을 고쳐놓으셔요. 그래서 그 일을 하기 전에는 주님 앞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던 사람들을 주님 앞에 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온전한 사람으로 주님이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가장 낮은 본성이자 실제인 우리의 육체까지도 우리를 섬기게 하느냐?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심령으로부터의 섬김 2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롬1:9)
지난 시간에는 이제 우리가 읽은 구절전체를 설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중에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이것을 가지고 지난 한 시간에 설교를 했고, 오늘도 같은 부분을 가지고 설교를 하겠다고 약속을 드렸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라는 것을 살펴본 후에 그리고 우리는 이제 우리의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교부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통해서 적용하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만약에 우리가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래서 설교할 보람을 항상 느껴요. 잊어버리는 것이 제게는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쁜 것입니다. 자, 설교를 듣기 전에 그 말씀을 위해서 기도 할뿐 아니라. 들은 후에 그것을 숙고하고 자신의 마음에 적용하지 않으면 삶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 안에 계속 울려 퍼지게 해야 합니다. 자, 그렇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섬기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까? 첫 째는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섬기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에 두 번째는 뭐라고 했습니까? 자신 밖에 있는 세상의 모든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섬긴다고 말씀드렸죠. 그러면서 풍부하게 예를 들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고 섬기려고 하면 뜻하지 않았던 도움들이 찾아오게 되어서 마치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대접해주신다. 그런 말씀드렸죠.
오늘이 지난주 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세 번째로 뭐냐면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를 섬깁니다. 사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주님을 섬기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커다란 방해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떤 것들이 방해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열심히 섬기려고 하는데 돈이 너무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가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충분히 섬길 수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을 섬기는데 방해가 됩니다. 자원이 많아서 주님을 위해서 섬길 좋은 계획을 가졌을 때 자원 때문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의 섬김에 날개를 단 것처럼 정말 환상적이겠죠. 또 뿐만 아니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해도 함께 동역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기가 참 어렵죠. 뭐 그뿐만 아니죠. 우리들이 잘 섬기려고 해도 끊임없이 우리를 핍박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참 어렵겠죠.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방해요인이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방해요인이 아닙니다. 이런 모든 것 보다도 가장 중요한 방해요인은 바로 우리 자신의 육신입니다. 우리 자신의 육신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방해된다. 라고 할 때 이미 그 육신은 중립적인 육신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은 영혼의 상태에 따라서 육적 육신으로 기울기도 하도 영적 육신으로 기울기도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의 상태에 많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죄의 지배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탕욕과 더러운 정욕에 물들게 되면 우리의 육체는 육적 육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에 우리 육신보고 ‘너 올바로 살자.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자.’ 이렇게 타이르면 힘을 얻은 우리의 육적 육신이 말을 안 들어요. 그게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옛 본성과 새 본성이 있습니다. 이것을 새 사람이라고 말하고 혹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고 이것은 옛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새 본성과 옛 본성이 있습니다. 새 본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셔서 거듭나게 해주심으로 우리 안에 심겨놓으신 그런 천적 본성입니다. 그런 새 본성입니다. 그 본성은 은혜를 좋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옛 본성은 끊임없이 죄를 좋아하고 하나님을 거시리고 살며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방종한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뭐냐면 둘 다 육신과 손을 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옛 사람도 우리의 육신과 손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 안에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살고 내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실제적으로 삶으로 산출 될 때 우리 안에 있는 죄 성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비유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이런 것 있잖아요. 여러분들이 언제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요.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게 되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과 관계 있는 모든 것을 다 사랑하게 되요.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하나님의 말씀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교회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람들도 사랑하고,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되요. 마음이 그렇게 꽉 찼어요. 그런데 그것으로 만족이 안돼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만족이 되죠. 이것을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사랑을 밖으로 산출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밖으로 끄집어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예배해요.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니까 봉사해요. 하나님의 지체들을 사랑하니까 그들을 섬겨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웃들을 사랑하게 되니까 그들을 위해서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 표현되어서 밖으로 나올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놀라운 기쁨으로 타오르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것과 똑같이 죄도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을 싫어하는 것, 그런 것만으로는 만족이 안돼요. 그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할 때에 기쁨이 막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잉태된 지는 끊임없이 신자를 마음속에 밀어붙이면서 그것이 생산되어서 나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죄가 쏟아져 나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쏟아져 나오려면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합니까? 육신이 있어야죠. 예를 들면 아, 진짜 저 돈을 내가 좀 가졌으면 저기 있다는데 훔칠까? 육신의 도움을 안 받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가 있습니까? 발이 가고 손이 움직이고 머리를 쓰면서 온 몸이 그 일을 위해서 협력해야지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렇잖아요. 돈을 훔치는 것 사람들이 불노소득이라고 하는데 불노소득 아닙니다. 얼마나 고생하는데 진짜 조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생하는데요. 육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고, 은혜가 있어요. 그러면 그것들을 우리의 삶의 행동을 통해서 그래도 표현해야지만 우리 안에 기쁨이 충만해지잖아요. 또 그것이 하나님 앞에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의 도움 없이 어떻게 합니까. 영혼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났어요. 그것까지는 할 수 있어요. 그들을 위해서 열렬히 기도하는 것도 육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교회에 가야죠. 무릎을 꿇어야죠. 눈물이 쏟아져야 되요. 두 주먹을 불끈 쥐어야 되요. 목이 쉬도록 울부짖어야 되요. 복음을 전하는 것은 더 필요하죠. 자기가 차표 사서 차타고 그 불신자들이 있는 그 곳에 가야합니다. 온 몸이 화합해서 그 일을 위해서 기여해야합니다. 그래야지만 결국은 복음이 전해지는 것 아닙니까. 영혼을 향해서 사랑하는 마음들이 표현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서로 육신을 사용하려고 다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면 이게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잠겨있을 때에는 우리의 육체가 죄에게 잘 종노릇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죄가 시키면 우리의 육신이 말을 잘 안 들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시키면 우리의 육체가 말을 잘 들어요. 사람들 별로 그렇게 가 보지는 않았지만, 가본적도 딱 한번 입니다. 옛날에 직장 다닐 때 출장 가서 평신도 때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저의 자의로 들어간 것은 아닌데, 나이트클럽 같은데 있잖아요. 출장 가서 어쩔 수 없이 따라 가서 저 구석에서 콜라만 먹다 왔어요. 그런데 텔레비전 같은데서 보면 시커먼, 그리고 컴컴하고 촌스럽게 불은 번적번적 돌아가고, 그리고 거기에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가락이 나오고 사람들이 막 술 먹고 춤추고 그러잖아요. 우리는 거기에서 한 시간 있는데 5만원씩 준다고 해도 사실 못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굉장히 많은 돈을 내고 거기에 가요. 마치 날 파리들이 변소 간에 꼬이듯이 그렇게 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때요. 싫어요. 그런 분위기 자체가 싫어요. 사람들은 거기에 꼬입니다. 결국 뭐냐면 우리의 육체가 오랫동안 그런 것들을 싫어하는 영혼의 성향 속에서 육체가 살았기 때문에 갑자기 육체를 그런 곳에 집어넣으면 육체도 싫어하고 우리의 영혼도 함께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육체가 우리의 내적인 영혼의 상태에 의해서 길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반대의 경우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충만한 은혜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 안에 적당히 하나님을 향한 싫증과 반감 같은 것들을 가지면서 그냥 적당히 때우듯이 신앙생활을 했어요. 그러면 결국은 우리들이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쇠약하고, 그다음에 우리 안에 죄는 왕성하게 되요. 그래서 죄의 지배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우리가 교회도 뭐 성경도 읽는 것처럼 흉내도 내고 그러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우리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가 이미 죄로 기울고, 육체도 남이 보이는 곳에서는 안 그랬을지 모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육체가 상당히 이런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육체가 거기에 길들여져서 종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에 내가 뭔가를 깨닫고 그리고 내 영혼이 “너 그렇게 살지 말자. 여태까지는 육신을 섬기면서 그렇게 살았지만 성경에도 보니까 죄에 져서 육신의 종노릇하지 말고,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위한 의의 병기로 드려야 되지 않냐? 이제 주님을 섬기자.” 그런데 육신이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최대의 난관입니다. 우리 지난시간에 공부했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맞기셨어요. 명백하게 하나님이 시키셨어요. 하나님이 그 일이 꼭 이루어지기를 원하셔요. 그리고 꼭 필요한 일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입니다. 그러면 자원이 모자라서 못하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게끔 도와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일하면서 그런 것 많이 경험하잖아요. 그렇죠. 하나님께서 그렇게 놀랍게 힘을 주시고 도와주셔요. 그래서 그 일들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그런 밖에 있는 자원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밖에 있는 자원들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을 통해서 섭리 가운데 우리에게 보내주셔요. 뭐가 문제냐면 자기 자신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의 육신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이 육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그런데 이 육신이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그러한 의지, 뜻에 이 육신이 잘 순종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된다고 말씀하였습니까? 노예를 다루듯이 다루어야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게으름”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그래서 어떻게? 새벽에 일어났는데 영혼이 말하는 거죠. “야, 새벽기도 시간이다. 육체야 기도하러 가자.” 육체가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혔을 때는 “응, 그래 가야지.” 그리고 벌떡 일어나서 갑니다. 와, 이제야 새벽기도 시간이 다가왔구나. 그리고 벌떡 일어나서 갑니다. 그런데 빠졌어요. 그래서 말을 안 들어요. 그러면 “야, 가자 새벽기도 시간이다.” 영혼은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어요. “야, 새벽기도 시간에 가자.” 오랫동안 게으름 속에서 살아왔어요. “아, 나 어제 대게 늦게 잤거든 아, 너무 피곤한데 가도 분명히 졸거야. 아, 너무 아픈데” 그 때 영혼이 “그래 아파” 그러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쓰러져서 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요? “빨리 일어나지 못해 이 못된 놈” 그리고 마치 남인 것처럼 영혼을 다루어야합니다. “예수님은 임마 너보다 더 고생하셨어. 죽으면 썩을 놈의 육신이야. 빨리 일어나 새벽기도 가다가 순교했다는 사람 못 보았다. 빨리 일어나 그냥 일어 날거야, 쥐어 터지고 일어 날거야” 이러면 육신이 통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그렇지 못하잖아요. 그리고 또 아무리 우리가 은혜로 충만하다고 할지라도 육신 속에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성질들이 육신 속에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육신 자체 안에 그런 성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부분에 있어서는 이 새 본성에 의해서 우리의 육신이 통제를 받지만 아무리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새 본성이 가득 차 있더라도 우리의 옛 본성은 남아서 발악을 하면서 우리의 육신의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너무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불타는 네 영혼에 대해서 지사충성하지 말라. 너만 손해다. 그리고 옛 사람이 우리의 육신의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자신의 책 속에서 뭐라고 하느냐면 “신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 일생동안 달고 다녀야 할 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묵은인간이다.” 묵은인간을 평생 달고 다녀야합니다. 누구도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묵은인간을 계속해서 달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을 굴복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려고 뜻을 세웠는데 여러분의 육신에 의해서 마음에 세운 그런 뜻들이 꺾일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도 교회 아래 사무실에 가면 여러분들이 써낸 “평생 새벽기도” 작성서가 누워있습니다. 그런데 실천 안 하는 사람 상당수가 있잖아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하나님 앞에 약속하고 말이죠. 아주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지금 그 사람들이 “아, 내가 그 때 그것을 써 낸 것은 대단한 실수였어.” 그 때는 몰라서 평생 새벽기도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오니까 그것이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이에요. 그것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그렇게 새벽기도를 평생 해야 된다든지 그것은 잘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변했기 때문에 지금 안 하는 것입니까. 아니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새벽마다 설교하는 사람 별로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그것도 아니죠.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 뭐 그때는 6시에 퇴근했는데 지금은 8시에 퇴근하고, 그 때는 건강했는데 지금은 썩음, 썩음하고 아니 글쎄 다 좋은데 그것을 한 마디로 하면 무엇입니까? 육신의 반항에 굴복한 것입니다. 육신이 협조를 못하겠다. 그러니까 양보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말이죠. 나이가 들면 자연적인 육신의 쇠태가 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명의 그림자가 빠져나가고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와요. 옛날에는 저도 100미터는 14초 2까지 뛰어보았습니다. 지금 내가 지금 16초 안에 못 뛸까.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막 웃어요. 10미터에는 그렇게 뛸 수 있을 거예요. 오늘도 나아는 목사님을 한분 만났는데 자기는 뛰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데 의사가 뛰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나이 들면 마음에 의욕이 있어도 하면 안돼요. 그런 것들이 다 찾아와요. 이런 것들이 아주 교묘하게 작용해서 우리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자꾸 가로막아요. 어떤 때는 그것을 선을 긋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앞으로 적어도 몇 년이나 더 섬길 수 있을까? 모르지만 뭐 그래도 뭐 30년이고 얼마고 더 섬겨야 될 것 아닙니까. 낭비하지 말고, 체력을 잘 안배해서 그래도 마지막까지 잘 섬겨야지, 한 10년 동안 이불속에 드러누워 있다가 겔 겔 대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해서는 체력을 안배해야지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큼만 섬겨 야지. 진짜 누가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핑계를 대는 것인지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없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잖아요. 그런 모든 것들이 전부다 합력해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할 때 우리의 육신이 반항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그러면 우리 육신을 통제해야 되겠다. 그런데 문제는 그 우리의 육신을 통제하는 것은 그냥 저절로 바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통해서 우리의 육신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우리를 위해서 육신이 반항하지 않고,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하려면 그러면 결국 우리의 영혼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야합니다.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 변화가 일어나야합니다. 그러면 육신은 따라오는 것입니다. 저기를 조깅하려고 가다 보면 캄캄해서 잘 보이지도 않지만 밤중에 나와서 농구하느라고 난리입니다. 땀을 비 오듯이 쏟으면서 농구하느라. 난리입니다. 그 사람들보고 비 오듯이 교회에 와서 청소 좀 하라고 하면 할까요? 안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농구는 왜 하는 것입니까? 이 속에서 자기가 좋으니까 하는 것입니다. 똑 같습니다. 우리의 이 내면의 이 작용들이 그렇게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좋아하도록 이렇게 변화시키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면 영혼에 이런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 올바로 섬긴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것은 뭐냐면 인간의 전존재를 걸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뭐냐면 이렇게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또 그런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려는 경험이 우리에게 없지는 않지만 우리가 항상 일생을 그런 마음의 상태로 있다가 죽는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이런 마음이 수시로 이탈하려고 합니다. 그것과 더불어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이런 것을 어떻게 도와주느냐? 이런 얘기가 되겠죠. 자, 오늘 사도는 뭐라고 했느냐면 “심령으로 섬기는 나의 하나님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 남다르다는 것을 사도가 밝히고 있는데 “심령으로” 혹은 어거스틴의 표현에 의하면 자신의 온 영혼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신의 온 영혼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육신도 자기를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심령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긴다. 그러는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그렇게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죠. 건성으로 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을 하기는 하는데 마음에 하나님께 이 섬김을 통해서 영광을 돌려드려야 되겠다든지, 아니면 이 개별적인 의무를 이행할 때에 그 의무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 매순간 순간 그 의무에 충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되겠다. 라고 하는 소명감이 없이 그냥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덜렁덜렁 하면서 얼마든지 일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일하는 방식이 두 가지로 나뉩니다. 생각이 없이 그냥 일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일을 하면 그렇게 하는 일을 통해서는 이렇게 일을 하고 의무를 수행하는 이 모든 과정이 그 사람의 내면을 새롭게 하는 쇄신의 작용을 갖지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렇게 마음을 바쳐서 온 영혼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없이 섬기면 그가 일은 하지만 그가 그렇게 일 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의 내면의 세계가 쇄신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면서도 심령은 싸늘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섬기면서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나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서 받으시는 영광 같은 것 거의 없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쁨이 없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라는 책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잠깐 썼습니다. 만은 어느 신도시에 있는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뭐 교인 300명밖에 안 되던 교회가 갑자기 교인이 1000명, 1200명 1300명 늘어나는 것입니다. 뭐 주위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교인들이 막 몰려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교인들을 맡아 있는 교역자들이 점점 돌봐야 할 교인들이 많아지잖아요. 거기에 있던 어느 부 목사님이 그러더래요. 오늘도 잔뜩 쌓인 새로 들어온 교인들의 카드를 받으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온 것이죠. “아이 씨, 왜 하필이면 우리 교회로 다 몰려오고들 난리야. 다른 교회도 많은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선교사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서 사역을 하는데 거기에 있는 흑인들이 너무나 속을 썩이는 것입니다. 거기에 상당수의 사람들은 회심했는지 안했는지 구분도 잘 안간데요. 선교사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가 똑 속상한 이야기를 막 하는데 그 중에 어떤 선교사가 무의식중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아이, 검둥이 새끼들 또 난리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매순간 주님이 나를 부르셨고, 그리고 이 일은 비록 가장 세상적인 일처럼 보여도 결국 이 사명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고,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 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어거스틴의 표현대로라면 영혼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온 영혼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그럴 때 그런 표현입니다. 그런 식으로 섬기면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하나, 하나를 섬기는 그 과정을 통해서 이 신자의 내면의 세계에 쇄신하는 작용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이 시간에는 어떻게 쇄신하는 작용들이 일어나는지를 여러분들에게 입증하겠습니다. 에베소서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의 기능을 세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 째는 뭐냐면 지성, 혹은 생각이라고 하는 기능이고, 두 번째는 총명입니다. 세 번째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지성 혹은 생각은 빛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다음에 총명은 그것을 판단해요. 그리고 마음은 그것을 적용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육신을 사용해서 마음에 일어난 작용을 행동으로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보는 우리 영혼의 대표적인 세 기능입니다. 첫 째는 지성, 혹은 생각이라고 하는 기능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생각은 하나님께 안 가고 있어요. 다른데 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자기를 어느 교회에서 설교하러 와 달라고 불렀어요. 기도원에 휴일 날 공휴일 날 기도원에 청년들을 모아놓을 테니까 와서 설교를 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설교가 굉장히 예상 밖으로 길어졌어요. 그랬더니 저 뒤에서 상당히 여러 명이 안절, 부절 하는 것이었어요. 그래도 하여튼 설교를 다 마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전부다 이 속에 극장표를 하나씩 넣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몇 시까지 딱 끝나니까 끝나자마자 점심 안 먹고 막 뛰어나와서 우리 모두 버스를 타면 그 시간에 가서 공연인지, 뭐 극장인지 볼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왔는데 돈을 상당히 주고 표를 샀는데 이 설교가 길어지는 것입니다. 중간에 도망칠 수는 없고 그래서 불안해하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죠. 예배는 드리고 있는데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입니다. 콩밭에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요. 그런 식으로 드리는 그 예배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예배를 통해서 매우 특별히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는 한 이 사람의 영혼 속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그의 내면의 세계를 쇄신시키는 작용 같은 것들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은혜 받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손으로는 상당히 신령한 일을 하고 있는데 생각은 계속 세속적인 생각으로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제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겨요. 어거스틴의 표현으로라면 영혼으로서 하나님을 섬겨요. 그 마음 깊이 바울의 표현대로 라면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내면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어린 영혼들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어린 영혼들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봐요.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이 사명을 맡겨주셨다. 그래서 오늘 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데 어떻게 하든지 이 아이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야 될 터인데 그것을 사모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 표정 하나 하나에 의해서 마음이 움직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영혼의 입을 쫙 벌리고 말씀을 먹으려고 해요. 그런 영혼들에게는 진짜 가슴을 풀어 헤쳐서 나오지 않는 젖도 꽉 짜서 먹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어야 할 처지인데 딴청부리고 막 돌아다니고 그러면 마음에 안타까움이 생겨서 ‘하나님 저들의 심령을 붙잡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도록 해 주십시오.’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날 것 아닙니까. 그것이 심령으로 섬기는 것이잖아요. 그렇게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서 개별적인 의무를 이행할 때 하나님이 자기를 거기에 부르셨으며 이 일을 잘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면 이 지성의 작용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지적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죠. 항상 고정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정신 쇠락해져서 무엇이 헛된 것이고 무엇이 정말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헛된 것들에 대해서는 세상이 아무리 중요하게 생각해도 ‘그 까짓것 아무려면 어때 그 까짓게 무슨 문제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하찮게 생각하는 것도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들이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우리의 생각, 혹은 지성에 안개가 끼게 되요. 그러면 눈이 멀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에 어두움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이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미쳐서 생각이 눈멀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것은 밖에서 생겨난 요인 때문에 내가 눈을 뻔히 떠도 못 보는 것이 어두움이고, 눈 먼 것은 빛이 환한데도 눈을 감고 있으니까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렇게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우리의 생각 속에 이 어두운 그림자가 내립니다. 그래서 뿌옇게 흐려져서 사물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어떤 사물을 딱 볼 때에 아 이것이 뭐구나. 하고 정확하게 느껴요. 이 사물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도 정확하게 느껴요. 두개 간격이 좁고 거의 일치될 때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헛된 것을 위해서 애를 써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막 저렇게 살아요. 저렇게 살면 안 된다. 인생을 저렇게 살면 마지막에 반드시 불행하게 된다. 이 생각이 은혜에 사로잡혀서 총명할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 일의 시작을 보면서 마지막에 그 일이 어떻게 될지 일의 모든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논리적인 추리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죄 가운데로 들어오게 되면 이것이 비늘이 가려 지면 이것이 안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면 금방 망하는데도 마치 나방 같은 것들이 날 파리들이 불을 보고 날아들어서 부딪혀서 확 타버리듯이 그렇게 날아드는 것입니다. 동료들이 거기에서 수없이 타 죽는 것을 보면서도 미친 듯이 날아들어서 불에 타서 재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런데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서 쭉 섬겨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우리의 생각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헛되고 의미 없는 것들을 생각하고 그것들로 머리를 꽉 채웠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생각이 허탄한 것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그 일에 미친 듯이 골몰하면서 거기에 생각을 모두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다고 보면 이런 것들이 다 사라져버리고 생각이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에 집중하게 되고 생각이 사물을 보면서 올바로 판단할 수 없게 만들었던 그런 비늘들이 벗겨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이해가 잘 안가죠. 쉽게 이야기할게요. 자, 아웃리치들을 많이 갔잖아요. 은혜들을 많이 받고 오시더라고요. 간직을 잘 하세요.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간직을 잘 해야 합니다. 장사해서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저녁때 장사하고 미천 가지고 가서 한잔 퍼먹고 낭비해 버리면 그 다음날 똑같이 알거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해야합니다. 그런데 아웃리치 갈 때 까지만 해도 별의별 생각이 많았습니다. 아, 어떻게 이 여름철에 무엇을 해서 먹고사나, 로부터 시작해서 머리가 긴데 빨리 미장원에 가서 잘라야 되는데 돈은 없고, 뭐 무엇이 어떻고 옷이 어떻고 옷을 입다보니 배는 너무 나왔고, 하여튼 잡다한 생각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가서 복음을 전해도 구원받지 않는 영혼들을 보고 그 영혼들을 어떻게 하든지 주님께로 인도해야 되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해서 영혼들을 섬기고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고 가서 일을 해 주고 도랑을 쳐 주고 뜸을 떠주고, 막 이렇게 일을 하다보니까 그런 헛된 것들에 몰두하던 생각들이 싹 정리가 되면서 그러면서 다 보이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결국 우리가 주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 그것이 문제구나. 우리가 도시에 사느냐. 시골에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진짜 어디에 살든지 얼마를 살든지 우리도 조금 있으면 저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될 것인데 어떻게 되든지 간에 정말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주님을 잘 믿고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구나.’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철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딱 생각이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다음에 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총명이 있다고 했죠. 총명은 뭐냐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어두운 곳을 확 비치는 라이트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고, 성령을 통해서 비치는 하나님의 말씀. 그것을 보고 아, 저기에 빛을 비추니까 저기에 돌 맹이가 있네. 하고 딱 지각하는 것은 생각입니다. 저기에 돌 맹이가 있는데 계속 차를 몰아도 될까? 넘어갈 수 있을까? 아니면 부딪힐까? 이것을 판단하는 것은 총명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총명은 우리가 은혜 아래 있으면 총명이 증진되고 우리가 죄 가운데로 빠져들게 되면 이 총명이 빛을 잃으면서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잘 믿으면 점점 더 총명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되어 가는 중에서도 특정한 죄에 빠지거나 이렇게 되면 우리의 총명이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총기가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때로는 정말 좋은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정말 멍청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그런 일들을 그것도 일이하고 판단하고 행할 때가 있습니다. 총명이 이렇게 가변적인 것입니다. 은혜의 상태에 있으면 총명이 증진되고 그렇지 않으면 이 총명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우리들이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요. 그러니까 아주 놀랍게 쏟아지는 은혜와 사랑의 감화를 받으면서 말할 수 없이 생애적인 변화를 받으면서 은혜 안에서 기쁨과 환히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말씀에 끊임없이 깨뜨려지면서 나가면 총명이 맑죠. 그런데 우리가 안 그럴 때도 있거든요. 그냥 교회에 나오기는 나오는데 뭐 은혜가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된다고도 말할 수 없고, 그냥 애매모호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서서히 우리의 신앙생활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뒤로 미끄러져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 주님을 믿고 회심했을 때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그러면서 이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게 되요. 그때에 마음도 주지 않고 대충대충 하나님의 일을 섬긴다면 그 은혜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생겨나게 된 이 총명의 상실이 복원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새 마음을 하나님이 주셔요. 그래서 내게 맡겨진 이 일만이라도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잘 해야 되겠다. 마음을 먹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해요. 그런데 이상하게 어려움이 자꾸 생겨요. 이 일은 분명히 하나님이 맡기신 일인데 어려움이 자꾸 생겨요. 그 때에 어떤 사람들은 ‘아이, 그렇게 힘든데 관둬 내가 하는 일이 주의 일이 그것 하나뿐이야. 관둬’ 그리고 집어치워버려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이것이 분명히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인데 왜 이렇게 어려움이 자꾸 올까?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될까?’ 그러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제가 하나님 보시기에 뭐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내가 이 일을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는데 내 안에 그릇된 동기가 있습니까? 내 안에 주님 내가 모르는 은밀한 죄가 있습니까? 하나님 정말 고치고 싶습니다. 주님의 축복이 있는 사명을 감당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요. 그러면서 마음을 쏟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총기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내가 지금 오늘 돈이 조금 더 있고, 돈이 더 없고,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고,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사이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판단력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판단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총명에 마음을 다해서 온 영혼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그렇게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총명이 영향을 받으면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세 번째는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항상 기도 많이 하다가 그냥 마음이 불붙는 심령을 주셔서 아멘. 그것은 정말 제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는 주의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가서 감당하느냐면 그것은 아니거든요. 어떤 때는 구레내로 가는 시몬처럼 억지로 주님의 주님이 내게 주신 일을 해야 될 때가 또 있는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 십자가 지고 가는 것 너무 불쌍해서 뭐 아니 그냥 구경하려고 온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붙잡아서 예수님이 자꾸 쓰러지니까 병정들이 붙잡아서 예수님의 십자가 네가 져라. 그래서 억지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괜히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은 것입니다. 사실 자기는 무슨 예수님과 한패도 아닌데 그런데 성경은 그 정도로 얘기하고 끝나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그 사람이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요. 그리고 인도의 어느 지방에서 순교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것이 사실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우리들이 실제로 생활해보면 어떤 때에는 내가 자원해서 그것을 하겠습니다. 그런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다보니까 나에게 짊어져서 나오지도 못하고 들어서지도 못하고 그냥 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런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맡겨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마음이 그 일을 못 따라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맡겼을 때에 기다렸다는 듯이 온 마음을 확 쏟아 붓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맡아가지고 한번 해볼까. 이래요. 어려움이 생기면 그만둘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격려를 해서 환경이 좀 나아져요. 그러면 또 해보지 뭐, 그러다가 또 어려움이 생겨요. 아이고, 역시 난 안돼. 이러면서 오고 가기를 1년씩 2년씩 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그만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역자들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오가는 것입니다. 이 동안에는 어떻게 되느냐면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지만 내 마음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하도록 마음이 그 일에 딱 붙어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의 상태였는데 그 때에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렇게 건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안 돼지. 내가 많은 일로 주님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이것 하나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데 내가 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섬겨야지. 그러면서 마음을 기울여요.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겨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처음에는 강제적으로 맡아서 어쩔 수 없어서 했는데 그렇게 섬기다가 보니까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사실은 처음 회심을 하고 흔들리지 않고 쭉 신앙생활을 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회심을 경험하고 아주 잠깐 동안 회심의 은혜를 경험한 다음에 죄의 지배에 떨어져서 정신 못 차리고 방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가 되었는데 직장에서의 일인데 나를 누가 찾아왔어요. 나를 잘 아는 자매였습니다. “교회 다니시죠.” 그래서 “다닌다고” “아니 그러지 말고 점심시간에 우리 모여서 성경 공부를 하는데 당신이 오면 참 좋겠네요.” 그래서 한 번 가보았습니다. 그래서 가보았더니 컴컴한 창고에 의자도 없이 신문지 이런 것, 보따리 싸놓은 것 그것을 깔고 앉아서 거기에 앉아서 무슨 성경공부 교제 하나 펼쳐놓고 자기네들끼리 공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어떤 형제가 그것을 가르쳐줘요. 그래서 봤는데 하도 사정해서 끌려갔는데 그렇게 마음이 끌리겠습니까. 그래서 갔는데 그저 그래요. 그리고 다시 오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어요. 그 때 나는 전도 받을 입장은 아니었지만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교회는 다니지만 매일 담배나 피우고 그러니까 방황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 사람들이 잘 보았죠. 그래서 불신자와 비슷한 신자인가, 그러면서 사명감을 가지고 접근을 하니까 같이 성경 공부를 하자. 그래서 할 수 없이 점심시간이면 안가고 와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두 번. 세 번 따라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재미있어요. 그리고 은혜는 받았지만 사실 그렇게 체계적으로 성경공부를 안 해 보았는데 평신도가 가르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실력이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기에서 이렇게 만나고 그 성경을 공부하고 찬송도 부르고 그러니까 괜찮아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는데 갑자기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형제가 아파서 직장을 몇 달 동안 못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뭐라고 하느냐면 당신이 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담배 피우고 다니는데 무슨 성경을 가르치나 그랬는데 전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시작 시간이 되었으니까 가르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뭐가 들어간 것이 있어야지 나오지 뭐 알기는 뭘 알아요. 그것도 남 앞에서 그런 것 무시당하고 그러면 대게 싫어하는 성격이거든요. 집에 가서 자습서를 놓고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부해서 새카맣게 써서 가서 되지도 않는 이야기 한 것이죠. 그런데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겨야 되겠다. 그런 마음 없고 어떻게 하면 이번 주에 가서 망신 안 당하나. 사실 성경도 한번 다 못 읽었는데 그냥 고민하면서 새카맣게 써 가지고 가서 했는데 그런데 자기네들은 그래도 은혜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사실 은혜를 끼치려고 그것을 한 것이 아니고 망신을 안 당하려고 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사는 동안에 말이죠. 나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 창고에서 공부하는 가운데 사모님도 두 사람 나왔고, 목사도 거기에서 두 사람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죠. 그런데 그렇게 하는데 말이죠. 가르치다 보니까 같이 기도하게 되고 그러면서 진짜 은혜를 받게 되는데 나중에 어떤 생각이 드느냐면 마음이 막 뜨거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진짜 이 모임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영혼의 변화를 받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직장에 갔는데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자꾸 전도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직장 동료인데 야간에 신학교에 들어갔으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그러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내 마음이 변화되어야 되겠다는 의지는 없었지만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이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다 보면 마음자체에 쇄신의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너무 세속적이고 더러운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뭐냐면 몸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데 마음이 세상에 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가운데 붙어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런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쇄신의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이 허탄한 것을 벗어버리고 진짜 생각이 받아들여야 할 것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잘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총명이 다시 회복되어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다시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뜨거워지게 되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어요. 이것이 합쳐져서 육신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받지 못했을 때에는 좀 모이자고 그러면 무슨 핑계가 그렇게 많은지 몰라요. 낚시 하러 갈 때는 새벽부터 떠나면서 말이죠. 그리고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게 되면 그다음에는 육신이 말을 잘 들어요. 그런데 그 육신을 끌어오는 것이 우리의 영혼이잖아요. 영혼의 이 세 기능에 하나님을 심령으로 섬기면 이 영혼의 기능 전체에 이런 놀라운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의 속사람이 새로워져서 육신을 끌고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이 그렇게 영혼의 놀라운 은혜가 일어나게 되니까 우리의 육신으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할 때 협조하지 않았던 육욕, 방탕, 허탄한 욕심, 쓸데없는 생각, 마음의 더러움,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정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이 하나님을 섬기려고 할 때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육신의 발목을 잡는 그 힘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왜? 영혼에 쇄신이 일어나니까. 그래서 결국 그 육신이 하나님을 잘 섬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면 하나님을 막 섬기려고 하는데 우리의 육신이 말을 안 듣고 속에서 갈등이 생겨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이것을 꼭 내가 해야 되나 이런 갈등이 점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일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리고 나같이 부족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이렇게 섬기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놀라운 기쁨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만한 은혜 속에서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은 영혼이 명령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아멘. 하는 것입니다. 새벽 기도시간이다. 빨리 일어나라. 그러면 벌떡 일어나는 것이죠. 야, 이제는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시간이다. 가자. 그러면 기쁘게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어떠한 저항감도 없어요. 오히려 육신이 항상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저렇게 의욕에 넘쳐서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데 내가 다 따라서 후원해줘야 하는데 내가 육신의 힘이 약하니까 내가 어떻게 하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오히려 협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온 영혼으로 진심으로 섬기게 되면 우리의 부패한 이 육신도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에게 협조하면서 우리와 함께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런 놀라운 내적인 쇄신들이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경험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너무나 많이 했기 때문에 영혼이 망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표적이잖아요. 얼마나 고난에 넘치는 삶을 사셨습니다. 휴식이 없는 삶을 사셨잖아요. 사도바울도 역시 휴식이 무엇인지 모르는 고단한 삶을 사셨잖아요. 그래서 두 분의 영혼은 하나님과 항상 함께 붙어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냥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갔는데 거기에서 찬양 인도자가 찬양을 쭉 인도하는 데 나이도 어려요. 나이도 한 21 많이 먹어야 22. 23밖에 안 되어 보여요. 어린 청년인데 찬양을 하면서 자기가 찬양을 인도하는 사실을 잊어버렸어요. 사람들이 많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찬양을 인도하면서 수시로 자기도 모르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의 찬양을 받아주시옵소서. 우리 심령을 주의 것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찬양을 막 부르다가 어느 순간에 또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영혼들이 마음을 열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니까 그 사람 자신이 찬양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건성으로 따라 부르던 거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찬양은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찬양할 때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섬김 속에서 그것이 나타나야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찬양하고 경배하고 그렇게 섬길 때에 아까 그 청년의 경우에 그렇게 해서 밤새도록 찬양을 인도했다고 칠 때 하나님의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영혼이 피곤하고 지치겠어요. 새 힘을 얻겠어요. 두말할 필요도 없잖아요. 영혼에 새로운 작용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우리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한번 섬긴다. 라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겠는지, 그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과, 시련, 결핍과 가난 속에서도 주님이 주신 일을 끝까지 감당하게 할 수 있었던 그런 올곧음은 말이죠. 생명 끊어진 그런 올곧음이 아닙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그 섬김 안에서 하나님과의 놀라운 교통함, 그런 섬김 들이 그 속에 있습니다. 그 의무들을 이행하면서 거기에서 수시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영혼이 새로워지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기의 즐거움을 따라서 생활할 때에는 어쩌다 마음을 고쳐먹고 주님을 한번 섬겨보려고 하면 우리의 육신이 그렇게 벋치면서 협조를 안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혼이 바뀌어서 우리의 육체가 우리를 충분히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의 육체가 협조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하늘을 오르는 것과 같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를 앙모하는 자에게 끊임없는 새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영혼의 새 힘뿐만 아니라. 육신에도 놀라운 새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새로운 원기를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일의 종류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느냐?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심령을 다 드려서 영혼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우리 안에 이미 주신 하나님의 생명도 우리를 섬겨요. 우리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과 자원들도 우리를 섬겨요. 심지어는 신령한 우리의 욕망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하는 우리에게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던 우리의 육신까지도 변화되어서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우리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넘치도록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며 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그 섬김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주님을 섬기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날마다 새로워져요. 그 은혜로 날마다 변화되어요. 그러면서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그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새롭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요. 얼마나 놀라워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일생동안 섬기며 살지 않고는 우리의 영혼이 부패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죽는 순간까지 놓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거기에 매달리며 주를 위해서 살려고 할 때에 그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도 우리 밖에 있는 모든 자원과 사람도 심지어는 그렇게 뻣뻣하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우리의 신령한 요구를 따라 순종하지 않던 우리의 육신까지도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이렇게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절대로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의 말씀을 먹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 무위도식 하는 사람입니다. 결국은 그 속에서 썩어요. 부패합니다. 냄새나고 더러운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섬겨야합니다. 가만히 은혜 받은 그 자리에서 사방을 돌아보세요. 주님이 지금 여기 계셨더라면 무릎을 꿇고 섬기셨을 그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세요. 반드시 있습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이웃에서 어디에서든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던 그 일들이 그리고 거기에서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가세요. 거기에서 죽기까지 충성하겠노라고 다짐하세요. 그리고 일생동안 걸쳐서 충성하겠노라고 다짐하지 말고, 그런 총체적인 고백에 만족하지 말고 매일, 매일 한님 앞에 자신의 최선의 것을 드리면서 살았는지를 점검하고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다 드려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세요. 그러면 거기에서 여러분이 주님을 섬기지 않을 때에는 육신을 이기기가 너무 힘들다. 라는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까. 야, 어쩌면 이 육신이 이렇게 모질고 질길까. 아무리 말씀을 깨달아도 죽지 않는구나. 아무리 내가 교리를 많이 터득했어도 내가 내 육신을 억제할 수가 없다. 이런 생각할 때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진실하게 마음으로 섬기면 육신이 굴복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주님을 섬기는 자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섬기는 자의 영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를 나에게 나타내리라. (요14:21)
두주 동안 로마서 1장 9절을 가지고 우리들이 심령으로 섬길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계속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에 우리의 영혼이 어떤 변화가 있는지 다시 말하면 섬김과 섬기는 자의 영적 상태에 관해서 오늘 우리들이 수요일 마다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의 배경을 보자면 예수님께서 특별히 13장에 오셔서 이제 예수님이 곧 제자들을 떠나서 아버지의 집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셔서 이제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다시 제자들에게 보내실 터인데 그 성령님이 제자들을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고 또 그들에게 보혜사가 되신다는 말씀을 하는 맥락 속에서 오늘 이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어쨌든지 보혜사 성령님이 누구인지 어떻게 오시는지, 이런 것들은 몰랐지만 제자들 입장에서는 자신도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온 세상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그리고 핍박을 받는 때가 있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연약한 자기들을 두시고 가버리신다고 하니까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면서 근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4장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렇게 그들을 위로하시면서 다시 성령님이 오셔서 이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해주셨던 것과 똑같이 성령님이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해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 하신 다음에 그다음에 나의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그러면서 “나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전까지는 계명은 하나님의 계명뿐이죠. 이 때는 신약 성경이 없을 때이니까 더더욱 제자들에게 계명 이렇게 말씀하시면 이 계명은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그 계명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예수님이 왜 분명히 율법의 일점 일 핵이라고 변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남김없이 완전하게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그냥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면 되지. 왜 굳이 여기에서 오해를 살만하게 나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제 구약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계명과는 별도의 또 다른 계명이 존재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제 구약의 계명과 신약의 계명 사이에 존재하는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함께 이해해야합니다. 구약에도 계명이 존재하고 또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진 이제 신약에도 계명이 존재합니다. 이 계명이 이제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런 말씀입니다. 연속성이라고 함은 이 구약에 나오는 율법 속에 나오는 이 계명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계명의 정신 사이에 어떠한 차이점도 없다는 점에서 이 두 계명은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여쭈어보았습니다. “계명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하고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돌 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이 자체가 구약에 나오는 계명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약의 계명과 예수님이 주신 신약의 예수님의 계명 사이에는 근본적인 정신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똑같은 정신으로 율법에 있어서 근본적인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그 안에서 통일된 가운데 똑같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 이 두 계명은 나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계명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 여러분들에게 여쭈어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서 참된 신자가 되면 누가 제일 커다란 덕을 보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자가 되면 제일 많이 덕을 보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 자신의 영혼은 물론 살고, 그리고 또 나는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때로는 어렵다고 할지라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옛 자아. 자기 사랑의 본성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고통을 이기면서라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런 정신 하에서 볼 때에 절대로 이웃 사랑의 계명과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이 서로 나뉘어 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관계가 은혜를 공급해준다. 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랑과 은혜의 공급은 그로 하여금 모든 하나님의 계명에 외출 적으로 순종하게끔 만들어주고, 그렇게 순종하도록 만들어줄 때에 그의 삶을 통해서 자비의 혜택이 이제 이웃들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꿈꾸셨던 삶이고, 동일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다는 점에서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연속성, 즉 구약에 나타난 이 계명과 신약에 나타난 이 계명 사이에 불연속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구약에 있어서 이 계명과 신약의 계명이 이처럼 놀라운 연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계명은 질적으로 매우 다른 계명, 즉 질적인 불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불연속성이 뭐냐면 구약에서의 이 계명은 신약에서의 계명과 달리 이제 우리를 율법에 묶어두는 계명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제 이 계명은 언약을 기초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에는 이제 크게 행위 언약과 은혜의 언약이 있습니다. 행위 언약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신 것이 대표적인 언약인데 인간의 행위를 담보로 해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고 그 언약 관계를 통해서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한 조건들을 유지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 행위가 바로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언약 관계가 파기되고, 그러니까 거기에서 언약 관계를 파괴한 인간들이 그것에 대한 책임을 깊이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와 많은 고통들이 들어오게 되었고, 인간이 결국은 불멸하도록 창조된 존재들인데 죽음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되어서 영육간의 죽음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행위 언약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뭐냐면 이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맺은 언약 속에서 즉 시내 산 언약 속에서 주어지는 행위 언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행위 언약은 모세와 맺은 언약이 모두 행위 언약이 아니라. 모세가 맺은 언약 가운데서 하나님이 특별히 제사를 어떻게 지내도록 명령하신 계명,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통영 되는 민법들, 소가 사람을 받으면 어떻게 하고, 누가 누구를 때려서 이를 부러뜨리면 어떻게 하고 등등의 이러한 시민생활을 규제하는 민법들, 이 두 가지는 행위 언약입니다. 이러한 언약 속에는 행위를 담보로 해서 인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 언약들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느냐면 첫 번째 행위 언약인 에덴에서의 행위 언약을 통해서 이제 인간은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파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가 우세하게 지배하게 되었고, 인간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선을 행하고 싶어도 행할 수가 없는 절망적인 존재가 된 것이죠. 그런 존재에게 어떻게 그렇게 지키기 힘든 행위 언약을 또 주셨는가? 그 이유는 목표자체가 그것을 지키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요구에 부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절망함으로서 결국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자기들을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가 개입되어야 하겠다. 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위 언약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바로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모세의 언약 속에는 이제 이러한 행위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죄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 죄와 더불어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은혜를 공급해주지는 않습니다. 이 율법이 바로 신약에서 바울 사도가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는 그 율법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율법이라는 말은 이것 말고 또 다른 뜻으로 쓰입니다. 그렇게 쓰이면 이러한 행위 언약의 율법이 아닌 은혜 언약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 언약들은 곧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우리와 언약을 다시 맺으시되 행위를 담보로 맺으신 것이 아니라 .언약을 맺으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로 약속하시고, 그 은혜를 통해서 그들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는 그런 종류의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가시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좀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더 이상 쉽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여러분들이 은혜를 못 받으면 하나님께 순종하기가 싫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은혜를 많이 받고나면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염려하는 착한 마음들이 생겨나요. 그러니까 그 은혜가 바로 그 은혜 언약에서 이야기 하는 은혜가 바로 그런 종류의 은혜를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으로 언약이 맺어질 뿐 아니라. 또 그런 주관적인 은혜를 하나님이 은혜언약 안에 있는 백성들의 마음에 힘으로서 집어넣어주셔서 그래서 그것들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게끔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은혜 언약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금방 혼란을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도대체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 언약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까? 행위 언약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까? 둘 다 막 들어온다. 그러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답이 어떻게 될까요? 은혜 언약 아래 있는데 행위 언약적 율법이 그들에게 남아 있어서 그것을 보면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되니까 사실은 행위언약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 언약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성격이 이제 이해가 되죠. 그래서 결국 율법이 이것을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 라고 되어 있지만 그것을 통해서 나는 도저히 이것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참회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눈물 흘리고 회개하며 제사를 드리러 나가면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는 수단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제사는 행위 언약 안에 있겠어요? 은혜 언약 안에 있겠어요? 당연히 은혜 언약 안에 있는 것이죠.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뭐냐면 잘 들어보세요. 이 은혜 언약 안에 행위 언약은 우리에게 죄를 이길 힘을 주지를 못해요. 그래서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할 때에 선악과를 보면서 두려워 떨 수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이길 힘은 거기에서 공급받을 수 없었습니다. 또 모세를 통해서 행위언약의 율법을 의식법과 민법들을 주셨지만 그것을 보면서 결국은 난 도저히 지킬 수 없어 이 율법을 그대로 따른다면 나는 죽임당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인간이야, 그러니까 나는 주님의 은혜에 호소할 수밖에 없어, 하나님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제사를 드리러 나가게 할 수는 있지만 그 율법이 그에게 힘을 주어서 그것을 지키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언약 안에는 그렇게 힘을 주는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 언약은 인간이 타락하면서 바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것은 행위언약이지만 타락한 다음에 뱀을 저주하시고, 하와를 책망하시고, 아담을 책망하시면서 마지막에 이제 땅을 저주하시고 다 하신다음에 여자의 후손이 태어날 터인데 그러면서 여자의 후손이 그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 여자의 후손이 마태복음으로 넘어가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예수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은혜언약이 들어오는 것이죠. 은혜 언약을 안 주셨다면 하나님이 아예 인간을 안 구원하시려고 하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 언약에 면면히 계속 이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그리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시내 산에서 더 많은 은혜 언약들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제사나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은혜 언약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이런 행위언약 안에도 계명이 있고, 그리고 은혜 언약 안에도 계명이 있습니다. 계명은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부입니다. 그런데 율법 중 행위 언약 안에 있는 이 계명은 즉 좁은 의미의 율법 속에 들어있는 이 계명은 우리에게 은혜와 힘을 주지 못하는데 그런데 넓은 의미의 율법, 곧 은혜 언약과 자신에 대한 총체적인 계시 속에 깃들여 있는 이 계명은 우리에게 그런 놀라운 힘을 준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힘을 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거룩하다. 그러면 너희들이 거룩하지 않으면 나를 못 볼 것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계명이거든요. 거룩해라. 그런데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불러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주시는 약속 속에 주어진 계명이기 때문에 이 계명을 읽고 숙고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지금 신약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는 것과 똑같이 그래 주님이 우리를 주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선민으로 택하셨으니 이제 주님이 우리를 거룩하라고 부르신다. 그래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거룩하게 살자. 라고 하는 놀라운 결심과 은혜들이 이 속에서 솟아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이러한 좁은 의미의 율법인 행위 언약 속에 나와 있는 이 계명, 넓은 의미의 율법인 하나님의 흠 없는 총체적인 자기 계시와 또 은혜 언약 속에 들어있는 이 계명, 이 모든 것들이 구약 속의 옛 계명 속에는 함께 있는데 새 계명 속에는 이제 이런 것들이 빠져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언약 안에 있는 계명만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불연속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뭐냐 여기에서 예수님이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라고 말씀하시면서 은혜 언약 안에 있는 계명을 보다 명시적으로 구체적으로 이제는 나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의 계명이 뭐냐 그 해답을 13장 24절이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뭐라고 되어 있느냐면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리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계명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주신 나의 계명이었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계명이었단 말입니다. 바로 그것을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구약에 나오는 모든 계명들 중에서 신약으로 연속될 수 없는 연속들을 계명들을 제거하시고, 구약에 있는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계명이 예수님에게 와서 아주 분명한 새 계명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또한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이며 그리고 예수님 자신의 계명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계명이었습니다. 그 계명이 결국은 사랑으로 섬기라는 계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인 뿌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뿌리에서 흘러나온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복음서를 보면 마태복음 같은 곳에서 예수님이 윤리적인 삶을 굉장히 많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것을 놓고, 그리고 이렇게 윤리적으로 살지 않으면 너희가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7장이잖아요. 택한 자들에게는 “너희는 내가 갇혔을 때에 찾아와 위로하였고, 내가 주릴 때에 먹였고 목마를 때 먹였고, 헐벗을 때 입혔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에게 한 것이 아니라 이제 사람들에게 한 것인데 형상의 원리에 의해서 예수님 자신에게 한 것이 된 것입니다. 지체의 원리에 의해서.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안 했기 때문에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 칭 의의 교리의 측면에서 보면 이 본문이 굉장히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존경하는 우리 박 윤선 목사님 같은 분도 주석에서 이런 문제를 가지고 아주 굉장히 어려워하시면서 주석해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신 칭 의의 교리는 뿌리로부터 열매를 바라보는 관점이라면 그러면 예수님의 관점은 열매와 겉모습을 통해서 뿌리로 들어가는 관점입니다. 어느 쪽으로 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죠. 사과나무를 심고 “봐라 반드시 사과 열매를 틀림없이 맺을 것이니 봐라. 그런 것과 사과 열매 맺은 것을 보고 이 나무 캐봐라. 반드시 사과나무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벼운 윤리적인 접근으로 예수님의 열매의 계명들을 풀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사랑 속에서 산다면 그는 은혜가 있을 것이고, 그 은혜는 반드시 외출적 삶으로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흘러나오지 않으면 그는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흘러나오는데 이 흘러나온 열매가 뭐냐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델이 뭐냐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 사람들을 어떻게 섬기셨는지를 보면 그 모델들이 나오는 것이죠.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그런 삶을 구현하게 하기 위해서 흉내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당신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선을 베푸셨나요? 그렇지 않죠. 당신의 제자들만 이렇게 한 동아리로 묶어 놓고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셨나요? 그렇지 않죠. 제자들을 각별히 사랑하신 것은 아니지만 심지어는 당신께로부터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고 다시는 당신을 찾아오지 않을 사람들, 어떤 의미에서는 마지막 날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칠 사람들인 줄 아시면서도 그들을 섬기시고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을 위대하다. 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섬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 곧 이 사랑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맺어지는 그 관계를 통해 우러나오는 원천이며, 그 원천은 반드시 이웃을 향한 윤리적인 삶으로 열매를 맺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난 주일에 설교한 것처럼 끊임없이 자기 안에서 은혜를 받았어도 자기중심적으로 살고자 하는 자기 사랑이 있으니까 이것을 부인하면서 끝까지 싸워서 소극적으로는 자기를 비우고, 적극적으로는 이웃을 위해서 헌신함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어 가는 것이 이것이 신자의 섬김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고쳐나가시고 그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섬김의 계명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 째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곧 무엇이냐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그 계명을 따라서 사는 그 일에 있어서 꼭 필요하다 이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믿음이 왜 그렇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이 본성깊이 뿌리박힌 자기 사랑을 비우고, 그리고 부당한 자기 사랑을 비우고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산다고 하는 것 이것은 항상 우리가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는 논리로 우리에게 설득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시죠. 항상 그렇게 설득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저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을 위해서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라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실까? 이해가 안 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주의 사명을 맡은 사람들이 고난이나 어려움을 당할 때 다 이해를 합니까? 이해를 하는 때도 있지만 이해가 안 되는 때도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해가 안 되도 이렇게 고난을 받으면서 이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 결국은 나의 영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어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이론적으로는 설득이 안 되는데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믿으니까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믿음은 대로는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지만 논리적으로는 왜 이렇게 어려움을 당해야 되는지 설득할 수 없지만 성경에서 그런 일이 있을 것이고, 그런 일이 올 때 너는 기뻐하면서 참아라. 고 명령하시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설득이 안 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에 대한 신뢰 때문에 아멘 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결정된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니까 우리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그 속에서 보이는 것들로 인해서 현혹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논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멘. 하고 믿으면서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가다 보면 결국은 마지막에 답이 나오게 되고 나중에 뒤를 돌아보게 되면 아, 정말 그래서 내가 잘 참았구나. 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필요한 것이 뭐냐면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왜 사랑이 필요하냐면 다른 사람을 섬긴다. 라고 하는 말 자체가 원래 원어 적으로 보면 노예가 된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에 서비스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 서비스라는 말이 라틴어에서 쎄르브스는 노예입니다. 그러니까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섬긴다. 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노예가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라틴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희랍어에서도 히브리에서도 똑같습니다. 히브리어에서도 “아바드”가 종살이 하다 섬기다. 봉사하다. 라는 뜻이고 거기에서 나온 명사 “에베드”가 종입니다. “오베드”는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밭을 경작할 때도 아바드라는 말을 썼는데 명사가 되면 봉사, 노예 살이, 이런 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남을 위해서 봉사한다. 섬긴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낮아져서 노예처럼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가장 웅변적으로 증거해주신 것이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그래서 신약에 그 유명한 기독론적 서술인 그림같은 그 기독론적 서술인 빌립보서 2장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은 버리시고, 오히려 자기를 낮춰 종의 형체를 가져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종의 형태로 종처럼 낮아지셔서 인간의 모양을 하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어요. 그래서 종처럼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섬기시고 하나님을 섬기고, 스스로 그렇게 종이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사람들을 섬기실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종처럼 낮아지기 전에는 사람을 섬기실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은 종이 된다.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자기의 소유, 자기의 꿈, 자기의 미래 이런 것들을 모두 다 포기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송가 중에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네.” 그런 찬송이 있죠. 그 찬송이 원래 그것을 지은 사람이 미술을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었데요. 그 미술을 그렇게 좋아하는데 우리들이 생각하기에는 미술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될 것인데 어쨌든지 이 사람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결국은 그 미술보다는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된다는 요구에 직면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내가 그렇게 사랑하던 이 미술도 버릴 수 있습니다. 라는 그 은혜를 받으면서 그 찬송이 나왔다고 합니다. 어쨌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렇게 낮아져서 종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비워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이렇게 되셨지만 우리는 철저하게 자기 사랑을 비워야합니다. 우리는 인간이니까 돼지가 되고 다람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이렇게 살지만 진짜 비워야 될 것은 우리의 형체와 모양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사랑을 철저하게 비움으로서만 비로소 우리들이 이웃을 섬기는 자, 교회를 섬기고 나 아닌 다른 사람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를 철저하게 비우고 인간이 모두 자기중심적 이기적 욕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그것을 덜어 내버릴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결국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가득 차지 아니하면 그것을 덜어낼 수가 없는 것이죠.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관건이 되는 문제입니다.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평생을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불러서 목회자로 삼으실 때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자기 사랑을 덜어내지 않으면 그래서 그 마음이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 차지 않으면 그가 생각하는 것, 욕망하는 것, 꿈꾸는 것, 가지고 있는 비전, 살아가는 삶, 모든 것들이 전부다 부패하고 속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속에 있는 자기 사랑이 그의 눈을 흐리게 해서 올바른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또 그 속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켜서 그 욕망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이 마음에 어두움들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런 물체가 있어요. 이것은 그냥 물체일 뿐입니다. 그렇죠. 이 물체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자기가 생긴 그대로를 보여주면서 여기 존재하는 것이죠. 그러면 이것을 우리의 감각능력, 육신의 눈이 이것을 딱 봅니다. 그러면 이 상이 우리이 뇌에 가서 맺힙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각하는 감각능력도 오류가 없는 것이죠. 이것을 보는 거죠. 오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을 종이인데 컵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해석을 잘못한 것입니다. 눈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 문체도 문제가 없고, 그것을 본 감각능력도 문제가 없어요. 그것이 우리의 지성에 가서 딱 하고 맺힙니다. 우리의 대뇌에 가서 그 상이 맺힙니다. 그것도 문제가 없죠. 존재도 있는 그대로를 보여줬고, 감각능력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이 지성 쪽에서 이것에 대한 해석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성은 영혼 안에 속해있는 것입니다. 이 지성 속에서 해석의 작용이 일어나요. 그런데 이 지성은 영혼 안에 속해있어요. 영혼 안에 세상 사랑도 함께 들어있습니다. 세상 사랑에 의해서 영혼이 물들어버리면 지성도 그 죄의 영향에 의해서 무뎌버립니다. 해석할 때에 똑바로, 똑바로 보여주고 전해주었는데 해석을 여기에서 비뚜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엉뚱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해석을 잘못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잘못이 누구에게 있느냐면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속에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뭐냐면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세상의 야망 이런 것들이 이 영혼에 영향을 미쳐서 지성에 미쳐서 올바르게 판단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죠. 그런 사랑에 물들게 되면 이 정서가 부패해서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할 수 없죠. 그것이 의지에까지 미치게 되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위해서는 뭔가 몸에 장애가 있는 것처럼 명령을 다 알아도 잘 안 움직이려고 하고, 자기 욕망을 위해서는 아주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다 망가지잖아요. 그러니까 그것들을 모두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은 뭐냐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꽉 채우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계명들을 생명처럼 여기면서 그것을 자기 사랑을 비웠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계명을 받아들이게 하지만 사랑은 그 계명을 위해서 수고하게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 새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웃을 서로 사랑하라. 서로 섬기라고 하는 그 계명입니다. 그렇게 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이 뭐냐면 이 대상과 계명이 분리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믿음의 대상은 계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죠. 그렇죠. 믿는다. 라고 할 때 그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하나님이 어떻게 하라고 계명을 주셨는데 왜 내가 이 계명을 꼭 지켜야 되는지 잘 설득이 안돼요. 그리고 이 계명을 지키면 꼭 내가 손해를 볼 것 같은데 그런데도 왜 이 계명을 지켜야 되는지 설득이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고, 나를 사랑하시고, 이제까지 나를 인도해주신 것을 내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신뢰하게 되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도 이상하게 받아들이기가 힘든데 이상하게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그분을 신뢰하게 되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이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믿는다. 라고 할 때에 믿음의 원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믿는 것은 분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명령 모두에 대해서 아멘. 하나님이 너 ‘이렇게 살아라.’ 그러는데 아이고, ‘요즘 어떤 세상인데 그렇게 살라고 하세요.’ ‘이렇게, 이렇게 지켜라.’ 그러니까 ‘보세요. 누가 지키나 아마 예수님도 요즘에 오셨으면 아마 못 지키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네가 나를 믿느냐?” 그렇지만 저는 주님의 계명은 믿을 수 없지만 주님은 정말 굳게 믿습니다. 존재할 수 없다 이거죠. 그것은 자명하잖아요. 아, 목사님 저는 그 사람 믿어요.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일차적으로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그 사람의 말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을 믿어요. 그런다면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얼마 있으면 죽을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밤에 잘 때 코 고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말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분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을 비워내려면 하나님을 사랑해야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해야죠.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사랑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이죠. 똑같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에 보면 청소년기에 비뚤어 나갈 때 아버지에 대한 반감 같은 것, 엄마에 대한 반감 같은 것이 들 때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버지가 싫으면 아버지 양복도 싫고, 누가 어느 녀석이 그러더래요. 아버지가 항상 때릴 때에는 아버지 혁대로 때렸데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나간 다음에 혁대를 끄집어내서 밟아버리더래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미우면 아버지에게 속한 모든 것이 싫고, 아버지가 멀 리가 걸어오는 발자국도 싫고, 기침 소리도 싫고, 그리고 코고는 소리도 싫고, 심지어는 냄새도 싫은 것입니다. 사랑스러우면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요.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자기를 비울 때에 채워지는 사랑이고, 그렇게 사랑이 가득 찰 때 이웃을 섬길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이 사랑이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사랑과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예수님이 주신 계명에 대한 사랑이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대한 직접적인 사랑은 가끔 사람들에게 감추어질 수 있어도 계명에 대한 사랑은 노골적으로 그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주님을 감상적으로 사랑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니지만 감상적으로 사랑한다면 거기에는 어떤 비용도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많은 고난도 당해야 하고 희생도 겪어야 합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계명에 대해서 그 사람이 충성하는 것만큼 예수님께 충성하는 것이고, 계명을 사랑하는 것만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믿음과 계명은 대상과 그 구체적인 계명들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섬기려면 이 믿음과 사랑, 예수님께 대한 굳센 신뢰,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기 사랑을 비우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부당해보이고 근엄해 보이는 명령이 이것이 결국은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하는 믿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이것이 필수적으로 있을 때에 비로소 이웃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을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믿음과 사랑 안에서 섬기게 되면 이웃들이 혜택을 입고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죠. 이 모든 것들은 다 섬기는 사람 밖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공평하신 하나님은 이 섬기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이죠. 그런데 이 섬기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축복하실 때 이 축복이 크게 두 가지로 주어져요. 하나는 하나님이 이들에게 섭리 적으로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지금은 어렵고 힘들어도 자기 사랑을 퍼내고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채운 가운데 고난을 받으면서라도 이웃을 열심히 섬기고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어서 그들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섭리 속에서 복을 주셔요. 그러니까 이것은 정말 놀라운 간증입니다. 그래서 아주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 메아리처럼 갚아주십니다. 정말 그래요. 그래서 정말 놀라워요. 그래서 내가 전도사님들이나 부목사님들에게 늘 얘기하는데 열린 교회에서 사역할 동안에 마음과 뜻을 다해서 주께 하듯이 섬겨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섭리 속에서 복을 주시는데 당신과 똑같은 사람을 이다음에 목회할 때 주신다. 어느 교회에서 전도사님이 하도 봉사를 하는데 요령을 피우고 제대로 봉사하지 않으니까 담임 목사님이 그랬데요. 너 나가서 이다음에 목회할 때 그만 두고 꼭 너 같은 놈들만 부 목사로 모여라. 그랬어요. 갚아주셔요. 그래도 갚아주십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니까 또 남의 얘기처럼 웃죠. 타락한 본성이 여기 구역장들 있죠. 잘 하세요. 구역장들 있는데 구역 원들 있잖아요. 구역 원 잘 하세요. 매일 구역장 속 썩이고, 그리고 말이지 구역장 괴롭히고 매일 전화나 하게하고, 그렇게 하면 여러분 나중에 구역장 할 때 꼭 그런 구역 원들이 가득 모이기를 진심으로 축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가 가르친 제자가 전도사가 되었는데 그래요. “그래 너는 어떻게 하냐?” 그러니까 “목사님 목사님이 전도사였을 때 제가 했던 것처럼 우리 애들이 꼭 그래요. 그래서 곤고해요.” 그렇습니다. 물질로서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이 핍절한 각운데 굶는 것 보았습니까? 특별한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갚아주십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또,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그 바쁜데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그들 참 섭리 속에서 높여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그들을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섭리 속에서 그들을 복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도 더 큰 축복이 있는데 이것은 금방 찾아와요. 섬기는 사람들의 영혼위에 하나님이 직접 내리시는 영적 축복입니다. 섬기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영적 축복을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번에 여러분들이 아마 제가 하는 이 설교를 실감했을 것입니다. 이번에 아웃리치 안 간 사람은 빨리 집에 가셔서 땅을 치세요. “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땅을 치세요. 여러분들 아주 매우 중요한 은혜 받을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제는 더 아웃리치 계획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마지막에 영주 갈 때 전혀 안 간다. 그러던 사람이 소문을 듣고 여러 명이 후에 자기도 가겠다. 그래서 대원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얘기가 무엇입니까? 자, 가서 땀을 흘리면서 그 가난한 사람들을 일주일 동안 섬기고 나니까 마치 가을에 먹은 보약이 그다음 봄에나 효력을 나타내듯이 그렇게 땀을 흘리면서 수고하고 물질을 드려서 애를 쓰면서 섬기니까 그러니까 한 1년쯤 있다가 영혼이 따뜻해지면서 은혜가 되던가요? 아닙니다. 섬기는 즉시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영적 축복을 섭리 적 축복과 함께 그들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렇게 볼 때에 초인적으로 헌신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시종일관 충만한 가운데 살 수 있을까? 하는 그 비밀이 뭐냐면 자기를 다 버리는 섬김 속에 사는 사람들은 섬김 안에 하나님이 매순간 오셔서 그 영혼들을 어루만지시는 비밀스러운 성령의 작용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몸 바쳐서 섬겨보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도 이 설교를 들으면서도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 기껏해야 잔뜩 타락하다가 그러다가 손들고 옵니다. 그랬더니 와장창 깨뜨려지고 회심했다더라. 그런 이야기나 듣지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시는 것입니다. 어떨 때? 섬길 때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섬기는 자의 영혼에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려서 잘 섬기면 하나님 앞에 막혔던 거도의 문이 열려져요. 그렇게 눈물이 말라붙었던 가슴에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기 시작해요. 영혼을 사랑해야 된다고 수없이 귀에 더덕이가 앉도록 설교를 들었는데도 자기 영혼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남의 영혼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집니다. 영혼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들의 영혼 속에 쑥 들어가서 어루만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녹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악하던 사람들을 바꾸어놓고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섬기면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확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냥 그 돌 같은 가슴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깊이 하나님이 그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느냐면 그렇게 고농도의 설교를 들어도 변화되지 않던 인생들이 말이죠. 가서 마음을 다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영혼들을 섬기게 되니까 그때서야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 신앙은 말이죠. 실천하는 섬김 속에서 잘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체험 속에서 이해가 잘 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모든 것을 다 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왜 곤고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으면 곤고할 이유가 없죠. 고난이 오면 그 사랑을 의지하면 됩니다. 누가 나를 괴롭히면 그 하나님 앞에 고자질하면 됩니다. 내가 힘이 부족하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오면 그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주의 도움을 구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자신을 자원으로 삼아서 살아가게 하는 그것이 뭐냐면 사랑이라고 하는 통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셔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면 그 사랑 받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나쁜 일도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을 이런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 사랑을 비우고 철저히 헌신하면서 살아갈 때 그 때 하나님께 이런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뭐냐면 이렇게 되면 섬기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냐면 섬기는데 형식적으로 섬겨요. 그래서 의무감에 못 이겨서 마지못해서 형식만 섬기는 형식, 이럴 경우에는 이 섬김이 영혼 안에서 우러나온 작용을 동반하지 않기 때문에 많이 섬겨도 그의 육체가 피곤하고 그럴 뿐이지 감정말 새로워질 뿐이지 이 사람의 영혼을 새롭게 하지 못해요.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섬김만이 그 사람의 영혼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교리를 여러분들에게 말한 것 기억나죠.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잘 섬기면 그 섬기는 과정을 통해서 신실한 사람이 되어가지만 한 사람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충성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점점 나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간다고 여러분들에게 교리를 말씀드린 것 생각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섬기는 자세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섬기면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섬기는 사람들의 영혼에 주어지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이 축복은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입니다. 처음에 내가 이런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 영혼을 만져주시는 많은 영적인 축복과 은혜를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이후에 내가 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고, 똑같은 곳에서 섬긴다고 할지라도 올바른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주님이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 따뜻한 손길을 느끼면서 항상 그 마음이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는 감격 속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너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섬기는 그런 자세들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마지막으로 이런 식으로 물어보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아무리 섬겨도 이렇게 영혼을 어루만져주시기는 커녕, 집안 일도 계속 꼬이고 돈도 안 생기고, 곤고 위에 고난이 겹칩니다. 이것 확실히 잘못된 섬김이죠?” 그렇게 물어보면 저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대답하고 싶겠죠. “이렇게 섬기느니 차라리 안 섬기는 것이 낫겠죠.” 그때 나는 대답이 달라집니다. 이렇게 섬기는 것보다는 안 섬기는 것이 낫다는 말 까지는 맞을지 모르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올바로 섬겨라. 그것마저도 집어치우고 그리고 그다음에 가고 나면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하나님을 향해서 열심히 섬기던 자리에서 이탈되고 나면 그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싫증과 게으름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육신은 정욕을 따라 살아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주일 학교 교사할 때는 주일 잘 지키다가 교사 그만두고 나면 주일날도 잘 안나오는 사람들도 생겨나지 않습니까. 열린 교회는 별로 없지만 그러나 그런 것도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보아왔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난 사람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올바르게 섬겨야합니다. 섬기면서 고민해야합니다. 왜 하나님이 나는 이렇게 섬기는데 나를 만져주심이 없을까? 회개하고 성경이 이야기 하는 진실한 섬김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일의 종류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느냐 이 본질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무위도식 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영혼이 순결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은혜를 받았음에도 무위도식 하면서 살아가는 신자의 영혼에 건강함이 깃드는 것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오늘 이야기 나왔으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에 못 한번 박을 테니까 아프더라도 정신 차려서 들으세요. 여러분, 처음에 그냥 갈급하고 괴로워 하다가 교회 와서 말씀을 들으면서 봇물 터지듯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 있죠.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옛날에 나에게 이런 진리를 안 가르쳐 주어서 어둠 가운데 살게 하였을까? 아, 원통하다 내가 더 잘 깨달았으면 주님 앞에 영광 돌리면서 살았을 터인데” 그래요 영혼이 보이기 시작해오. 영혼들에게도 막 사람들에게 교회를 소개하고 말씀을 깨닫게 해 주고 싶고, 전도하고 싶고 그러죠. 2년쯤 지나봐, 그다음에 시들해지죠. 3년쯤 지나가. 그러면 어떻게 되죠. 다른 교회 가지도 못해요. 귀가 이만해져서 그래서 어디 가서 들으면 ‘아니, 저것도 설교라고 하고 밥을 먹나,’이런 생각이나 하고 못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 교회 얘기해서 사실 안 됐습니다. 만은 모든 것들이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죠. 어쨌든지 간에 합리적으로 민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보다가, 담임 목사 한 사람이 쥐고 흔들면서 하는 것을 보면 속이 꼬여서 안 되는 것입니다. 결론은 뭐예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교회 안 구석에 이러고 앉아서 늙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살쯤 된 다음에 수염이 나기 시작하고 등이 굽기 시작하고 기침을 콜록콜록 하기 시작하고, 눈이 퀭하고 한 60센티밖에 안 되는 키에 말이죠. 그리고 지팡이를 찾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뭘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다가 인생을 그렇게 낭비할 시간이 있습니까. 지금, 총알 같이 흘러가는데 얼마나 빨리 흘러가는데 여러분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아마 10전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무섭게 흘러가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런 침체에 빠져서 몇 교회만 방황하면 인생 종치는 것입니다. 70세. 80세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갔을 때 도대체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부름 받을 때 ‘너는 태어나지 아는 것만 못했었구나.’ 이런 평가를 받으면 여러분 얼마나 신나겠어요. 정말 좋겠느냐고요. 가슴에 깊이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이것은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만을 놓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은 그래도 좀 나아요. 세 살이나 되어서 늙었으니까. 오자마자 한 살 때부터 늙어간 사람도 있죠. 그렇게 하면서 귀만 커져서. 뭐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전부다 쓰레기 같은 신앙생활 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받은바 은혜를 가지고 진짜 주님이 여러분들의 영혼에 애닮아 하셨던 것처럼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애닮아 하면서 섬기지 않으면 안돼는 여러분들의 본업이 있느냐고요. 먹고 사는 것 말고, 먹고살고 애들 치다꺼리하고 그런 것 말고, 본업이 있느냐고요. 정말 이것이 내 사명이다. 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녹는 그런 것들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아닌 이웃들이 여러분들의 덕을 보게 되는 그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서 계셨을 그곳에 여러분들이 서 있는 그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반드시 여러분들은 부패해져가고 여러분들의 영혼은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각성하고 깨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슬퍼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세요. 마음이 부패하고, 하나님을 그 마음으로 섬기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되요. 섭리적인 축복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도 계속 되는 일이 없이 꼬이는 것입니다. 그렇죠. 번영하는 때도 있습니다. 신앙 버리고 사명 버렸는데도 번영하는 때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던져버리시기 위해서 높이 드신 것입니다. 뭔가를 반드시 깨뜨리고 싶으면 이렇게 던지지 않죠. 진짜 깨뜨리고 싶으면 높이 들죠. 그 때는 들려 올라가면서 좋다 그러는 것입니다. 높이 올라가면 높이 올라갈수록 냅다 던져지면 다 깨지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죠. 영혼에도 곤고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없어요. 그러면 그다음에는 마음이 부패하니까 불평과 불만들이 생각나고, 섬겨야할 이웃들을 헐뜯고 말이죠. 그리고 봉사하고 세워 줘야할 이웃들을 쓰러뜨리고 이렇게 하면서 죄 위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를 세우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계속 허무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지 그 사람들 안에 있는 은혜가 사라진 죄의 경향성들은 역사하게 마련이거든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 자신이 총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 영혼 자체도 하나님 앞에 에드워즈의 표현대로라면 손끝에 든 거미처럼 하나님 앞에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면서 변화되기를 하나님께서 고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막 살면 큰일 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계속 살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이고, 지금 하나님은 내 영혼 안에 어떻게 일하시고 계시고,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은 지금 나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가지고 계시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말을 토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든,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든, 주를 위해 희생하든, 주를 위해 무엇을 바치든, 봉사하든, 결국은 하나님께 그대로 열납 되고 그것들 앞에서 여러분들은 언젠가는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하나님 앞에 자세히 직고해야 됩니다. 생각해야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설교되고 있지만 여러분 그것을 덮어버리면 안 됩니다. 기도하세요. 하나님 앞에 ‘나는 공부도 많이 못했고, 건강도 별로 안 좋고, 돈도 없고, 남 보기에는 쓸모없는 사람 갔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쓰시겠습니까. 그러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즉시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섬겨야 될지 보여주세요. 그런데 그렇게 전심으로 내가 필요하다면 하나님 나를 써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너무 희박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해보세요.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해주시고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해서 섬겨야합니다. 그때에 여러분들의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난주에 두 번 설교한 주일 설교하고 만나는 것입니다. 신자가 온전히 자라 간다. 라고 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는 지식에 있어서 자라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랑에 있어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지금 이것이 사랑에 있어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섬기면서 사랑에 있어서 쭉 자라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무엇이고, 예수의 사랑으로 자기 이기적인 사랑을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옛 사람이 계속 죽으면서 그래서 심령이 성결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말씀으로서 깊은 사랑의 인격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면 그 사람의 과거는 캐볼 필요가 없습니다. 가시밭길을 걸으면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가시밭길을 걸어오면서 마음을 다 바쳐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 사랑을 받아온 사람입니다. 사람이 인격이 조잡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고, 사람이 아주 야비하고, 여기저기에서 거친 짐승 같은 냄새가 나면 이 사람은 뺀질거리면서 일생을 걸어온 것입니다. 깨뜨려져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섬기세요. 무엇이든 간에 주님이 나를 필요로 하신다. 느낄 때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만 주신 달란트라. 지나가면 받을 수 없는 달란트라고 생각하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로 영혼을 채워주십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영혼을 보시면서 주님이 사랑스러워서 눈물을 흘리시죠. 그래서 어두운 이 세상에 살면서 남들은 다 몰라줘도 이 망가진 이 땅 어느 한 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그렇게 주님을 섬기는 사람, 나보다 못 배운 사람들을 위해 지식의 빛으로 섬기고, 나보다 하나님 말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말씀의 지식으로 섬기고, 나보다 물질이 적은 사람들을 위해 물질로 내가 가난하게 되면서 사람들을 섬기고, 그리고 나보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내 건강한 몸을 바쳐가면서 섬기고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더 많이 사랑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예수의 죽음의 흔적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
사람이 살다보면 언제든지 하나님이 특별히 우리를 깨우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우리에게는 참 복입니다. 매일 성경 읽고 기도하고, 교회에 봉사하고, 특별히 뭐 하나 하나님 앞에 빠뜨리는 것이 없는데도 어느 시점에 딱 도달하고나면 진흙탕에 빠진 바퀴가 겉돌고 차는 안 가는 같은 그런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렇고 특별히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고 영적인 진보의 삶을 살던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하나님이 특별히 오셔서 우리를 거기에서 끌어내어 주시지 아니하시면 거기에서 제아무리 바퀴가 돌아가도 답이 안 나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저도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그런 때였습니다. 게으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탁월한 어떤 범죄에 빠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뒤로 미끄러져서 다치고 치우고 싶은 그런 패역한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고, 또 기도가 꽉 막혀서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다 되기는 되는데 진전이 안돼요. 사람이 물이 천천히 흘러내려오는데 처음에 출발할 때 힘차게 헤엄을 쳤더니 물을 제법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가서는 몸부림을 치는데 더 이상 못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뭐가 필요하냐면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우리의 영혼을 만져주시는 그런 축복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기도해야합니다.
저는 요즘에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셔요. 가슴을 열고 막 쏟아져 들어오는 진리의 빛을 소화해 낼 수 없을 정도의 그런 빛들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아파요. 너무 아파요. 오늘 사도바울이 그 사람은 사도가 아니라고까지 이야기 하는 이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얼마나 괴롭혔으면 그러겠습니까. “더 이상 나를 괴롭게 하지 마라.” 하는 말이 뭐냐면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 그렇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껏 잘 살아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사심 없이 한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11년 동안 목회하는 동안에 게으른 적 거의 없었고요. 남보다 덜 자고 더 많이 일했습니다. 스스로 6시간 이상 자면 범죄하고 생각했으니까요. 하나님은 저에게 돈도 많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한번도 내 것이라고 생각해 본적 없습니다. 그리고 다 뿌렸습니다. 내게 주어진 사역, 한번도 큰 교회 부러워해본 적 없고 교회를 세우고 11년 달려온 동안에 후회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때로는 내가 목사지만 너무 목사의 일 같지 않은 일, 돈을 몇 10억씩 빌려와서 이자를 갚지 못해서 펄펄 뒤고 성도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돈을 빌려달라고 하고 이렇게 할 때에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걸어왔습니다. 대의에 있어서 사심 없이 걸어온 것 같아요. 요즘 그 빛들이 막 쏟아져 들어오는데 그 빛을 보면서 제가 얼마나 잘못된 사람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모두 얘기할 수는 없지만 오늘 한 가지만 얘기하자면 우리 가운데 주를 위해서 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다. 여기 조 목사님이 자기 위해서 사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이민한 목사님이 자기 어머니를 위해서 사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그러는데 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요. 누가 우리 중에 자기 영광 위해 살고, 그리고 섬길 때에 자기 이익을 섬기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번에 깊이 깨닫고 있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대의에 있어서 하나님께 모두 바치고 살아온 삶,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대의에 있어서 희생하면서 살아온 삶, 그런 것 원하시는 것 아니에요. 대의에 있어서 물질에 대한 사랑 없이 명예에 대한 사랑 없이, 그렇게 사는 것,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다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뭐냐면 중요한 것은 이 예수 죽음의 정신이 구체적인 삶 속에까지 핏줄처럼 스며들기를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대의에 있어서가 아니라. 대의는 물론이고, 전체적으로는 물론이고, 구체적으로 아주 구체적인 개개의 의무의 이행, 구체적인 개개의 삶 속에 예수님이 날 위해서 죽으셨고,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저는 이 예수 죽음의 정신이 거기에 깊이 베이시기를 원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니까 신앙생활이 헛바퀴가 도는 것 같아요. 안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대의는 이루어져 있어요. 바퀴는 돌아가요. 그런데 그 정신이 아주 구체적으로 먹고 자고, 눕고 오줌 누고, 똥 싸는데 까지 예수 죽음의 정신이 깊이 베이기를 원하셔요. 하나님이 그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정말 살아온 내 자신의 모습, 그리고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내 모습,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대의에 있어서는 주님을 위해서 살고, 구체적인 대 있어서는 나를 위해서 살고, 그러면 (?) 주님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의 정신,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서에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면 “예수 죽인 것을 날마다 내 몸에 짊어진다.” 날마다 자기가 하고 있는 그 일속에 예수는 죽으셨고, 그리고 날 위해 고난 받으셨고, 그리고 그분은 아무것도 사랑하는 것이 없고, 그랬다는 것,
며칠 전에도 어려운 일이 있어서 기도를 간절히 하는데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져요. ‘얘야, 나는 아무것도 아끼는 것이 없었단다.’ 십자가에서 그런 것을 깨닫고 나면 대의에 있어서 주님을 위해서 살았다는 것으로 주님 앞에 자기를 세울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요. 주님이 많은 물질 주셨지만 목회하고 나서 저는 더 가난해졌습니다. 받은 사례금 보다 더 많은 돈을 교회에 드렸기 때문입니다.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그리고 몇몇 학교에서 교수로 오라고 하기도 했지만 거절하고 목회의 한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것이 대단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우리의 대의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 예수 죽음의 정신, 내가 너를 위해 다 버렸고, 그리고 나는 너를 위해서 죽었다. 그 정신이 베어야합니다. 그리고 보니까 살아온 모든 삶 중에서 단 한 조각도 온전한 삶이 없습니다. 다 잘못되었습니다. 밤잠을 안 자고 분투하며 살아온 것도 잘못되었고, 무슨 헌신이든지 간에 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구체적인 삶 속에 예수 죽음의 정신이 없는 것을 여러분들이 보고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그랬습니다. “아니,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신앙생활을 할까? 가서 때려주고 싶다. 어떻게 그렇게 애절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였는데 저렇게 사나. 왜 저럴까?”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다 나한테 먹은 것입니다. 대의에 있어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도 구체적인 삶 속에서 내가 예수의 죽음의 정신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다른 많은 지체들도 구체적인 삶 속에서 예수 죽음의 정신이 배기지를 않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은 대체로 주님을 위해서 사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세 혈관 끝까지 예수를 위해서 구체적인 삶 속에서 예수 죽음의 정신을 가지고 살되 그 모세 혈관 끝에서 예수의 생명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여러분들에게 못 보여주고, 못 가르쳐준 것입니다. 결국은 병든 많은 환자를 모아놓고, 대체로 건강한 약을 지어줬지만 구체적으로 그를 질병에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약은 지어주지 목회를 내가 11년을 했구나. 그래서 교회 안에는 이렇게 회심하지 못한 지체들이 많고 회심했던 지체들은 이기심으로 다시 뒤로 물러가고, 여러 가지 많은 이유를 말하지만 결국은 내가 예수 죽음의 정신으로 구체적인 삶 속에서 피 절임의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구나. 그것을 요즘 아주 뼈아프게 깨닫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사도 바울이 “이제 이후로는 더 이상 나를 괴롭게 하지 마라.” 그리고 그 교인들과 한번 붙어보려 하지 않고, 피해가듯이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후로는 더 이상 나를 괴롭게 하지 마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이 흔적, ‘티그마’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주석 가들이 여러 가지로 이야기 하지만 대체로 두 가지 해석입니다. 하나는 자기 안에 이루어진 인격적인 예수의 형상이라고 보는 사람들과, 또 하나는 핍박을 많이 받아서 난 몸의 물리적인 상처를 보고 말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데 후자의 해석이 유력합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5번이나 맞고, 돌로 침을 당하고 심지어는 성 밖으로 내던짐을 당했잖아요. 그러니까 그 흉터와 상처가 온 몸에 다 베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면 그가 대의에 있어서만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더라면 몸에 상처가 있었을 리가 있습니까. 대의에 있어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을 뿐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삶 속에서 예수 죽음의 정신을 따라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피할 수 있는 박해도 당할 수밖에 없었고, 모면할 수 있는 위기도 감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늘 사도에게 자기 몸에 남은 예수의 흔적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번 몸을 더듬어 봅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나. 대의에 있어서 그저 편안한데 까지만 예수 위해 한 사람인데 온 몸에 무슨 흔적이 있겠습니까.
머리와 손 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 내셨네.
가시로 쓰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거기에서 용을 쓰면서 뽑아내는 하나님의 말씀, 거기에서 몸부림을 치면서 쏟아내는 헌신, 거기에서 몸부림을 치면서 쏟아내는 목양의 지혜. 이것이 금이 될 수 있겠습니까. 기껏해야 동이나 철이겠죠. 그리고 나니까 정말 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누굴까? 우리 주님 앞에 갔을 때 “너 어떻게 살았니?” “대의에 있어서는 주님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실제의 삶에서는 어땠냐?” “이럭저럭 섞여있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한번 예수의 흔적을 좀 보자.” 그러실 때 우리는 아무 흔적이 업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그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누리고 살았던지 어떤 지위를 얻었든지 얼마나 큰 사역의 업적을 이루었든지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울까요. 예수의 사람에게 예수의 흔적이 없는데 그가 가지고 있는 것, 해놓은 것, 누렸던 것, 그것이 자랑 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그대들의 목자이지만 이런 것은 닮으면 안 됩니다. 모세혈관 까지 여러분들의 심장만 예수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세혈관까지 예수의 것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매일 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은 우리의 피, 우리의 가슴 저미는 눈물 이런 것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런 빛을 받으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정말 길을 잘못 왔구나. 그냥 좋은 목사님 만나서 착한 성도로 신앙생활이나 할 사람이 여러분 같이 좋은 사람들의 영적인 부모가 되었어요. 그래서 마음이 아픕니다. 나아지게 하시겠죠. 그렇지만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많이 일하고, 또 시간 정해놓고 기도하고 그 이상 이어야합니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많이 일하라는 뜻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먹고 마시고, 숨쉬고 교제하고, 그 모든 것 속에 예수님의 죽음의 정신이 베어 있어야합니다. 모세 혈관까지 예수님의 그 죽음의 정신이 베어있어서 예수님은 전부이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정신이 거기에 베어 있어야합니다. 그 베지 못한 것을 아파하고, 그래서 손가락을 베면 거기에서 예수의 피가 흘러야합니다. 다른 물이 나오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예수 죽음의 정신 속에서 그 죽음의 정신이 나의 아주 구체적인 삶 속에 베어있어야지만 거기에서 내 안에 주님이 사시고, 그 죽음의 정신으로 거기서 내 안의 나는 죽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그리고 저처럼 온전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 온전해지십시오. 그리고 그대들 자신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나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섬김과 섬기는 자의 영혼5(회심치 못한 자를 위해 울라)
녹 취자: 손 미자
성경말씀: 예레미야애가 1:16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우리들이 영적인 침체는 항상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영적인 침체에도 두 가지가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상적인 영적 침체는 항상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침체란 하나님 앞에서의 영혼의 활발한 힘을 잃어버리고 죄의 힘이 우리 안에서 융성해진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영적인 침체 상태는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미 시험에 들어있는 상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면 시험은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기에 어려운 상태에 있는 모든 상황을 시험의 상황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 시험을 매우 좁게 해석해서 죄악에 떨어지기 직전까지 간 것을 시험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분께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에 어려운 상황에 있는 것, 특별히 내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순종하기에 어려운 상태에 있는 것 마음이 나뉘거나, 갈리거나, 혹은 욕심에 물들어서 순발력 있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시험에 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적인 침체는 우리의 삶에 거룩한 활기를 앗아가고, 영적인 침체는 결국 우리를 보다 더 깊은 시험으로 데리고 가고 다가오는 유혹이나 시련 앞에서 거기에 저항할 수 있는 모든 힘들을 잃어버리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넘어지게 하는데 그 시험의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침체는 바로 이런 일에 보탬이 되기 때문에 영적인 침체 우리가 이렇게 부르면 그것이 나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상적 침체 말고, 매우 특별한 침체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영혼의 거룩한 침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거룩한 침체라고 부르는 이유는 침체되는 원인이 앞에 있는 일상적인 침체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예레미야 애가는 남 왕국 유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맙니다.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까지 쳐들어 와서 성을 훼파하고 성전을 파괴했을 때 그 때에 예레미야가 눈물로 이 시를 적은 것입니다. 그는 불우한 시대에 예언자로 활동하도로 소명되었고, 그는 기울어져 가는 유다 역사의 마지막 비탈길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멸망의 길로 가기로 작정한 것처럼 선지자를 통해 주어지는 거듭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예레미야를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바벨론의 군대의 말발굽아래 온 나라와 도성이 짓밟히게 되었고, 거룩한 성전이 훼파되어서 마치 겁탈당한 부녀자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는 흐느끼면서 이 예레미야 애가를 적어 내려갔습니다. 공교롭게 이 예레미야 애가는 “애 카”라는 히브리말로 시작하는데 그것은 “슬프도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애가는 1장에서 예루살렘이 모두 파괴되었을 때 일어난 상황을 눈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모두 파괴되고 성전까지 모두 훼파된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흐느끼며 통곡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훼파된 상황이 되었는데도 자기 장롱 밑에 감추어준 보물을 끌고 나와서 그래서 거리를 두루 다니며 양식을 구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나라가 망하던 말든, 하나님의 나라가 모욕을 받든 말든, 성전이 훼파되든 말든, 그들은 결국 자신의 일신의 영달을 위하고 생명의 연장을 위해서 양식을 구하러 다니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환난이 있기 전까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고,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이 너에게만 말씀하시더냐. 하고 시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비 신앙적 낙관주의에 근거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실 것이며 예루살렘은 영원할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썩은 뿌리를 붙잡듯이 그릇된 희망을 붙들고 신앙이라는 이름 하에 그들은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버텼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에 썩은 뿌리는 그들을 끝까지 붙들어 줄 수 없었고, 벼랑 끝에 매달려 붙들고 있었던 그 썩은 뿌리는 부러져 나가고 수많은 백성들은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나라는 정말 커다란 환난을 만나고 언약의 백성들이 이제 이 민족의 말발굽아래 나라를 잊어버린 이런 상황이 되었는데 많은 백성들은 저 먹고 살기에 바쁜 삶을 살았습니다. 극단적인 이기심들이 작용한 것이죠.
그러나 오늘 여기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상황 속에서 깊은 영적인 침체에 걸려있는 것을 봅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말하기를 “내가 이를 인하여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른다고” 고백을 했고,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여 소생할 자가 없다고 절망적으로 표현하면서 이제 나라가 망해서 이리저리 흩어져 다니는 이러한 고아들을 생각하면서 더욱 더 눈물을 쏟아놓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는 자신의 고백에 의하면 자기를 위로할 자가 없고,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킬 자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영혼의 깊은 침체와 낙심에 빠져든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가 이렇게 흐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예레미야에게서 과연 영적인 활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놀라운 영적인 원기, 강력한 파워 이런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 눈물을 물 쏟듯 쏟으며 그의 영혼은 매우 곤고하고 침체에 빠졌고, 그리고 사면을 돌아보아도 누구도 위로할 수 없고 심지어 하나님도 자신을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고, 바울의 표현대로라면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로 여길 정도로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이것을 이렇게 부르는 사람을 보지 못했지만 저는 이러한 것을 거룩한 침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침체는 섬김과 관계가 있고, 그리고 그러한 거룩한 침체는 또한 섬기는 그 사람의 영혼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고 하는 것을 오늘 이 시간에 말씀드리면서 교리를 하나 소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거룩한 침체는 일상적인 우리의 침체와는 달리 원인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흐느끼고 통곡하면서 우는 것은 이산가족을 보는 슬픔이나, 나라를 잃은 백성이 될지도 모르는 많은 민족의 흩어진 사람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인도주의적이고, 애국주의적인 눈물이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 땅이 파괴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이 모든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싫어하는 원수를 들어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역사를 주관하는 지존 자 이시고, 나라와 나라를 분리시키기도 하고 합치시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고 다시 세우시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 민족에게 내어주셔서 그들이 말발굽으로 짓밟고 그 나라를 지배하고, 성전을 훼파하도록 허락을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더럽혀지는 것은 언약 백성의 이름이었고, 언약백성과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기는 하지만 지금 현실은 하나님을 안 믿는 자들이 언약백성의 땅에 들어와서 모두 파괴하고 점령하고, 거룩한 것을 조롱거리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흐느끼며 울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 때문에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걸리게 되는 영적인 침체의 원인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침체에 걸리게 하는 원인들은 대부분 우리 자신의 욕망이 좌절될 때에 우리들이 영적인 침체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혹은 욕망이 좌절되거나 혹은 욕망대로 살아서 우리의 영혼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될 때 우리는 점점 침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들이 비록 그것이 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얼마나 많은 것을 욕망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잠시 있다 지나가는 것들에 대한 많은 욕망들이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우리의 영안을 흐려놓고, 우리의 판단의 총명들을 가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많은 욕망들은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솟아나고, 또 현실적인 상황에서 그러한 욕망들이 좌절되는 것들을 봅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서 우리들이 침체에 걸릴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의 욕망이 좌절되고, 어려움이 생기고 할 때 침체에 걸리게 되는데 이런 침체들은 우리들에게 항상 좋은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이런 침체라고 할지라도 신앙으로 극복하면서 그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십자가 삼아서 하나님께 매달리면 영적인 침체로부터 극복될 수 있지만 거기에 머물게 될 때 우리는 영혼의 깊은 침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낙심 가운데 경험 하는 침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들이 좌절되었을 때에 겪는 영혼의 침체, 이 세상에 속한 일들이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우리의 믿음이 식어지면서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의존의 마음이 식어질 때 찾아오는 침체. 이런 모든 침체들은 우리의 영혼을 갈아먹고, 우리의 건강한 영혼을 파괴해서 주님의 은혜를 부패하게 만드는 요인들입니다. 이러한 침체 속에 들게 되면 우리는 급격히 영혼이 생기를 잃어버리고, 좀더 많은 경우에는 우리들이 보다 깊은 시험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이 준비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침체에 빠지게 되면 생생하게 들려오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게 되고, 그리고 기도도 할 수 없게 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떤 확신과 응답 같은 것들이 늘 있었는데 영적인 교통에서 오는 이러한 확신이나 응답 같은 것들이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의 영혼의 처지는 마치 더듬이가 잘려버린 귀뚜라미처럼 어디로 뛸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런 오리무중의 사람들이 됩니다.
이러한 영혼의 침체 속으로 우리들이 얼마나 자주 빠져 들어가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의 침체 속에서 신령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보다는 그런 침체 속에서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그러면서 더 깊은 죄 속으로 우리들이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물론 또 다른 경우는 침체의 원인 자체가 매우 거룩한 것이 원인이 되었는데도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선교사들이 종종 자신의 침체에 대해서 이야기 하죠. 선교사역을 하고, 그 선교사역을 잘 이루어야 되겠다. 라고 하는 열망을 갖는 것은 나쁜 일 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뜻대로 되지 않고 어려움이 찾아올 때 영혼의 침체가 오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거룩한 침체는 목적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에서 오는 침체인데 그러면 그렇게 해서 침체의 이유만 정당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면 항상 그 침체는 거룩한 침체입니까?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인이 비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이름을 위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짜 거룩한 침체가 되기 위해서는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가 달라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주위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주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섬기다가 영혼의 침체에 빠지고 시험에 들게 되고 결국은 영혼이 부패하게 되는가 하는 것을 너무나 자주 봅니다. 처음에 맨 처음에 그를 침체에 빠지게 했던 원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이었고, 주의 나라를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가 자기중심적이고, 부패한 욕심과 야합될 때 그 때에 비록 그로 하여금 침체에 빠지게 한 원인은 아름답고 좋은 것이었지만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영혼을 쇄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부패하게 하는 효과를 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잘 돕던 사람들이 시험에 빠지게 되면 그 속에서 아주 악한 모습들을 그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것이 시작은 좋은 이유로 고난을 받았지만 그러나 나중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들이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거룩한 침체가 되지 못하고 영혼을 부패하게 하는 침체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이 거룩한 침체는 어떤 것인가? 우선 그 침체에 빠진 이 자체가 예레미야의 선지자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그리고 백성들이 흩어져서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고 성전이 약탈되어서 다 무너진 것과 같은 상태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이 모두 파괴되어버린 그 속에서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너희에게는 내 마음에 있는 것 같은 근심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라. 하나님이 골수에 불을 보내셔서 내가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고 말합니다. 그런 골수에 사무치는 불, 그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고 모든 만 백성위에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민족임을 보여주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그것과는 정 반대의 효과를 이 이방민족들에게 나타내고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모욕거리가 되었고, 그 백성들의 이름은 수치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예레미야가 깊이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렇게 흐느껴 울면서 통곡할 때에 예레미야의 이 마음은 녹아내리는 것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침체에 빠뜨리는 원인만 거룩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도 거룩한 믿음의 마음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민족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의 영광만이 드러나야 하는 민족이라는 사실이 예레미야의 마음을 깊이 찔렀고, 지금 훼파된 예루살렘 성과,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이러한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프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거룩한 침체는 믿음으로 그 침체의 원인을 받아들인 그런데서 오는 경험입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져버린 현실을 깊이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을 부인하고, 거짓 희망을 찾거나 그러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했습니다. 그 인정한 것은 바로 이 백성은 불의한 백성이고, 이 백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이 무서운 진노는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하나님의 판단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서있는 중보자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구원의 중보자는 아니지만 중보자적 마음을 가지고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모든 선지자와 예언자의 공통된 특징이었습니다. 이 선지자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달해주는 사람이고, 이 때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나아갑니다. 동시에 이 선지자는 백성들의 상황을 살피고 그 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고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중요한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는 것과 그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 6장에서 사도들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일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새롭게 찾은 것이 아니라. 구약 선지자들에게서 그 영혼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나아갈 때에는 주님의 선명한 계시의 말씀을 그들에게 선포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상황과 타협할 이유도 없고 상황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말씀을 굳게 만들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다 또 한편으로 백성들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을 때에는 이제 완전히 하나님께만 보냄을 받은 선지자의 마음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백성들과 한 형제로서 같은 시대를 살면서 그들의 고민과 아픔을 모두 헤아리고 그들을 진심으로 주 안에서 사랑하는 그런 한 형제 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선지자의 영성은 제사장의 영성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흐느끼면서 통곡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두 중보자의 위치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범 죄 한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찢기듯이 흐느껴 우는 그 선지자의 고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하고 예루살렘이 파괴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그것으로 사명이 끝난 것이었다. 라고 할 것이면 아마 예루살렘이 나라가 망했을 때 선지자는 하나님과 같은 편에 서서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늘로부터 오는 예언자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취하여진 한 형제요, 연약하기 짝이 없는 한 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도 슬플 줄 알고, 기뻐할 줄 알고, 민족을 사랑할줄 알고, 이 모든 정서를 함께 가진 그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평범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특별히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성령을 주셔서 택하셨을 뿐이지 그의 본 바탕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가 슬퍼하고 기뻐하고 아파하고 때로는 실수하고 허물이 많은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놀던 거리가 바벨론 군대들의 말발굽아래 짓밟히고, 자기가 사랑하는 이웃집 사람들이 칼과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하고, 친구들이 포승에 묶여서 끌려가고,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고, 그렇게 추억이 어린 예루살렘 성전이 부서지는 광경을 목격할 때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이기 이전에 그 시대를 살고 있는 한 백성으로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깊이 아파하면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그는 눈에서 물같이 눈물이 흘렀다고 말합니다. 이 물은 많이 흐르는 하수나 혹은 개울 같은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눈물이 그 눈에서 한없이 흘러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깊은 침체에 빠져서 어떠한 위로도 발견할 수 없고,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킬 아무런 사람도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도 느껴지지 않는 그런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그 시대를 향한 예언자의 눈물이었으며 그 마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특별히 이 눈물은 눈물이 눈에서 물같이 쏟아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이 거짓 눈물이 아닌 한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이 물같이 녹는 일이 먼저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3장에 보면 비슷한 말씀이 또 하나 나오는데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는 가운데 눈물을 시냇물처럼 쏟아놓는 장면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 예레미야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이든지 간에 사람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큰일들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반드시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기도의 사람들을 사용하시지 아니하시고 특별한 기도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위대한 일들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기도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기쁠 때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모든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예레미야는 멸망을 향하여 치닫는 이스라엘의 역사 한 복판에서 온갖 고난을 다 받은 사람이었고, 그 고난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한 것, 그것 때문에 예레미야는 갖은 핍박과 박해를 다 받으며 고난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졌을 때에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리하고, 그 자녀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유리방황하게 되었을 때에 이 선지자는 마음이 녹으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쏟아놓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정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일중에 가장 고결한 일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한 기도의 제목에 마음을 고정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유가 되어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으로서 하나님 앞에 온갖 영혼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물처럼 그 마음을 쏟아놓는 것 이것입니다. 비록 그가 허물이 많고, 죄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신앙의 지식이 다소 부족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하나님 때문에 우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 때문에 상황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 주님의 이루어지지 못하는 뜻 때문에,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마음이 물같이 녹고, 눈에서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는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께 최대한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업적 통해서 받는 어떠한 일의 영광보다도 그렇게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며 기도하는 그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더 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던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모두 춤추고, 먹고 마시는 때에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들은 슬퍼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남들은 모두 일상적인 날이라고 생각하는 날들을 특별한 날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눈물로 매달리며 마음을 물같이 쏟아놓았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시간들을 섬기면서 살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많은 시간을 주님을 위해 일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을 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적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없이 인간이 하는 10년 동안의 일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는 신자의 섬김, 단 하루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위대한 일은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1장에서 3장에서 계속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혼미하게 된 유리하고 방황하게 된 바벨론 군대들에게 잡혀가게 된 이스라엘 백성, 특별히 그 자녀들을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서는 아이들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다 자란 이스라엘 세대는 자기들의 죄 값을 스스로 하나님 앞에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른들, 부모가 아니면 신앙에 대해서 배울 길이 없고, 여호와의 참 종교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는 많은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이 부모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고 한번도 겪어 본적이 없는 무서운 전쟁 통에서 여기저기서 피 흘려 죽어가는 시체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같은 시대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말할 수 없는 연민의 정을 가지고 이 어린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시냇물처럼 쏟아 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는 나아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할 때에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못하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일치하게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소명을 받은 것은 아주 어렸을 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10세 미만의 때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게 된 것과는 상관이 없이 진짜로 자기 자신이 나이가 어린 소년, 히브리어로 “나 아르” 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어린 소년을 가리킵니다. 이런 어린 때에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추측이 만약에 사실이라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소명 받았던 때를 생각하면서 지금 부모들의 죄를 인해서 끌려가고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수많은 예루살렘의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동료의식을 느끼며 더더욱 애통하였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국적인 예언으로 치부되었고, 사람들은 그의 입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그 시기가 괴로웠으면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고 결심을 하였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에 사무쳐 골수에 불붙는 것 같아서 그 말씀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선지자가 거룩한 침체에 빠진 이유였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러한 교리를 묵상하면서 최근에 이런 반성들을 우리 모두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인생사들, 우리 마음에 다가오는 근심과 걱정, 그리고 슬픔과 어려움,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울해지고 눈물 흘리는 때는 종종 있지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물어볼 때 하나님의 영광, 특별히 다른 사람의 영혼을 기억하면서 눈물 흘린 때가 얼마나 있는지 우리에게 한번 정직하게 물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아웃리치를 간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지 몰랐지만 그냥 하다가 안 되어서 그들을 붙들고 우니까 그들도 함께 울며 주님을 믿기로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머리에까지 도착하고 가슴에서 나온 말만 그 사람의 가슴 속에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이렇게 영혼을 위해서 깊이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우리 이웃의 영혼, 그리고 내 자식의 영혼, 그리고 함께 있으나 아직 회심하지 못한 구역의 식구들과 내 주위에 있는 지체들의 영혼을 보면서 정말 우리들이 눈물 흘린 적이 있습니까? 더욱이 그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러서 위로받기를 거절하고 싶을 정도로 눈물이 흐른 적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혜를 모아서 교회를 운영하고 그리고 주어진 물질과 사람을 사용해서 효과적으로 경영해서 교회를 잘 세워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지혜가 필요하고, 그리고 인간적인 계획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의문이 필요하고, 그래서 누구보다도 이런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잘 돕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도 하나의 정신이 밑바닥에 깔려있지 않으면 모두 인간의 기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진실한 눈물, 교회에 찾아왔으나 자기 스스로를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울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현저한 무지 속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지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울지 못할 터인데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의 아픔처럼 느끼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 그들을 교회에서 만나는 것이 저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 영혼의 처지를 자신의 영혼의 처지처럼 느끼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면 그 모든 교회의 경험에 의한 아름다운 지혜와 물질, 사람의 헌신은 부끄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어디에다 사용해야 될지 방향을 정해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고정된 마음이고,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을 위한 말할 수 없는 눈물이요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최근에 묵상 가운데 몇 달을 지나면서 저 마음에는 이러한 은혜가 현저히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솔직히 고백 드리면 변화되지 않는 많은 성도들을 보면서 마음에 낙심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그 성도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결론은 얼마나 강퍅한 심령을 가졌으면 그렇게 설교를 듣고도 회심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솔직하게 몇 번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같은 본문을 묵상하면서 저는 그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래 물론 그들의 마음이 강퍅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네가 만약에 이렇게 더 많이 예레미야처럼 울었더라면 내 유창한 말로 회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예배시간마다 만져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회심하였을 것이다.” 라고 말이죠. 개인적으로 제 마음 속에는 할 수만 있으면 언제든지 이 일을 위해서 헌신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할 수만 있으면 한 1년 정도 외부의 집회도 더 절제하고, 그리고 마음을 다 모아서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마음을 모아서 이 불쌍한 비 회심 자들을 위해서 헌신해야 되겠다. 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처음 받았던 때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호심의 교리를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렇게 울어야 된다고 가르쳐주지도 않아도 우리의 마음 안에 영혼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엄마를 위해서 울었고, 우리 아버지를 위해서 탄식했습니다. 우리 혈육들이 아직도 주님을 모르고, 그리고 내 동기간들이 교회를 다니지만 주님을 못 만났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의 가슴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미어지는 것 같았고, 우리의 심령은 쥐어뜯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우리에게 위로가 없었고,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줄 그 무엇도 없었습니다. 좋은 음식이나 그리고 멋진 옷, 그리고 화려한 장신구 같은 것들이 그렇게 심장이 찢어질 듯 아픈 우리의 마음을 달래줄 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은 주님께 고정되었고, 우리는 우리의 가족과, 그리고 우리 지체들을 위해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항상 입버릇처럼 목양의 영광은 회심이요. 회심의 영광은 영혼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한번도 잊어 본적은 없는데 왜 이렇게 우리의 가슴은 냉랭할까. 물론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죠. 그러나 모자랐습니다. 현저히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최근 어느 지체가 목사님 많이 변하셨습니다. 제가 제일 많이 반성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렇다. 그 말이 맞을 것이다. 한번도 교회가 이렇게 큰 것에 대해서 교만해 본적도 없고, 더 많이 교회를 키워야 되겠다는 야망을 가진 적도 없고, 저는 늘 이 꿈을 이야기 하듯이 제가 목사가 되었을 때에 꿈꾸는 교회는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한 1-200명 모이는 교인들 데리고 그냥 오손 도손 신앙생활 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돈을 꾸러 은행에 돌아다니고, 땅을 사고, 건물을 사고, 그런 것도 목회에 소명을 받았을 때 꿈꾼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너무 싫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했죠. 그리고 게으르지 않았고, 그리고 한번도 물질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목회 한적 없고, 그런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늘 보십시오. 다른 교회에 비해서는 작은 비율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많은 영혼들이 우리의 예배당을 회심하지 못한 채 밟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에 많은 위로를 주셨습니다. 청년부 예배에도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옆에서는 많은 친구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혹은 바닥에 꿇어앉아서 흐느끼며 통곡하는데 옆에 있는 어떤 청년들은 문자 메시지를 날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현재의 모습입니다. 정말 우리가 주님 앞에 갔을 때에 이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모든 할일을 다 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은 공정하고 정확하십니다. 눈물 흘리며 그 영혼들을 위해 많이 아파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시는데 그 위로의 방법이 회심하는 사람들을 허락하십니다. 목사님이 초심을 잃어버리신 것 같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며칠 동안 가슴에 떠올랐던 그림이 바로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전도사 때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을 만난 후에 영혼들을 위해 늘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시간의 길이가 지금보다 길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질에 있어서 훨씬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금요일이고, 토요일이고, 모여서 선생님들이 둘러앉아서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면 한밤을 꼬박 새우며 우리는 울었습니다. 곤고한 영혼들, 교회의 마당은 밟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못한 영혼들, 주님께 안기기도 두렵고, 그리고 세상으로 돌아가기도 무서워하는 그런 비 회심 자들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했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하고 집에 돌아가서 아침에 샤워를 할라치면 왼쪽 가슴이 파랗게 멍들어 있었습니다. 그래 맞아, 그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우리가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서 사실 불쌍한 것은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마음껏 눈물 흘려주지 못하는 우리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개하는 영혼은 눈물이 강물에 떠내려 오는 것입니다. 많은 중보기도의 눈물,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스스로 울 수 없는 영혼들을 위해서 우는 큰 눈물이 쏟아지는 중보의 기도 속에서 부흥은 일어나고 영혼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추수됩니다. 사실 인간의,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만은 영혼이 하나님 앞에 진실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자각하고 그 죄를 피를 토하듯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품에 안기게 되는 그 일은 그 장소에 하나님이 성령으로 임재하지 않으시면 절대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마음을 보십시오.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엎드려 마치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처럼 통곡하며 울고 있습니다. 먹을 양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난리 통에 잃어버린 이산가족을 위해 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이렇게 나라가 망하면 선지자 직분도 감당하지 못할까봐, 직업 떨어 질까봐 우는 것도 아니고, 그의 마음속에는 방황하는 영혼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우리들이 그래도 은혜 받은 사람들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인데 우리 중자기 영광 위해서 사는 사람 있습니까? 물질에 눈이 어두워서 죄를 짓는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 대부분이 다 그런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영광 보다는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육체의 만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대체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예레미야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망한 나라 한복판에서 방황하는 어린 백성들을 보며 통곡하는 이 그림은 구약의 예수님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레미야는 한순간 엎드려서 이렇게 눈물을 흘렸지만 예수님의 정신은 일생동안 이 통곡의 정신으로 눈물을 시냇물처럼 쏟으며 사신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다. 그분의 가슴을 그렇게 녹아내리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게 바로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이름이며 이루어지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의 한없는 고단함이 주님의 마음에 이런 눈물과 탄식을 가져왔습니다. 그로인해 그분의 가슴은 늘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 각양 많은 은혜를 주셔서 예수 믿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당신의 마음을 가지고 당신의 삶을 계승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그렇게 해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마음을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번 눈을 들어서 여러분의 가족들 중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 함께 교회에 속해 있으나, 그래서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그러나 회심치 못한 영혼들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처지는 얼마나 가련한 처지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그가 왜 주님을 안 믿었는지에 대해서 이제 핑계 댈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비 회심자로 남아있는 것은 우리들이 마음을 물같이 녹이는 이 기도가 우리 속에 충분히 흘러나와 교회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교회 안에 회심하지 못한 모든 영혼의 비참한 상태의 공범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이미 들어와 회심하고 중생하지 못한 영혼들을 위한 눈물이 없는 사람들이 밖에 나아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과연 얼마나 영혼에 대한 간절한 정신을 가지고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우리는 자문해 보아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이 비 회심 자들을 위한 깊은 관심을 갖고, 그들의 영혼의 위태로운 상태를 깊이 인식하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께 다 바쳐진 마음의 사람, 죽기까지의 마음의 사람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큰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회심시키시는 이 위대한 역사는 죄를 책망하고 거듭나게 하시는 중생의 놀라운 역사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영혼을 돌이켜 회개하게 하고, 그 마음은 물같이 녹아지게 해서 죄에 대해 두려워 떨고 하나님께 속하게 만드는 이 일은 오직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무엇보다도 모이는 시간마다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하셔서 그 회심치 못한 영혼들을 계명하시고, 그 지성을 조명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감화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인 것과,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공로 아래로 피해 새 삶을 살아야 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실 수 있도록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시도록 우리들이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급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실로 이러한 일들에 대한 제안은 긴급동의와 같은 것이고, 그리고 이 모든 일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예레미야와 같은 마음이 되어서 그 마음을 물같이 쏟아놓으며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이 일생을 살지만 마음에 남은 하나까지 다 바쳐서 주님을 섬기는 순간들이 얼마나 적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은혜 받으면 대체로 주님을 위해서 살지만 그러나 구체적인 삶 속에 예수 죽음의 정신이 깃들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회심하지 못한 영혼의 비참한 상태를 마치 자신이 당한 영혼의 상태인 것처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마음을 물같이 쏟아 내리는 사람, 그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이러한 거룩한 침체는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탁월한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속된 것에 대한 욕망을 그 눈물로 씻어가 버립니다. 잠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즉 잠세적인 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많은 자잘한 사랑들이 우리의 영혼을 오염시키고, 그래서 우리로 마땅히 울어야 할 바를 위해서 울지 못하도록 오염된 영혼으로 만듭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의 신자가 가슴에 멍이 들도록 두들이면서 구원받지 못한 이 민족을 위해 울고, 구체적으로 회심하지 못한 내 주위의 지체들을 위해서 가슴을 뜯으며 하나님 앞에 통곡하고 탄식할 때 그 녹아내리는 가슴 안에 세상의 정욕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물질에 대한 탐욕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비 신앙적인 방법으로 출세해보려는 야망 같은 것들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의 쾌락을 도모하려는 정욕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뜨거운 눈물에 모두 쏟아져 내리고 녹아져 내려버립니다. 그래서 이러한 침체는 우리의 영혼의 찌끼들을 모두 쏟아내 버리는 배출구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느냐에 의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갑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잘 섬기면 섬길수록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요. 잘 못 섬기면 그 잘못된 섬김 때문에 우리들이 나쁜 사람이 되어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강력한 요청입니다. 아니 요청이라기보다는 우리교회의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강력한 꾸지람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많은 은혜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보이고 내 사랑을 보였는데 너희들이 내 마음으로 영혼들을 섬겼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더 예수 죽음의 정신으로 영혼들을 위해 마지막까지 통곡하고 탄식 하셨던 예수의 마음으로 그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린다면 그들의 심령이 아무리 돌 같아도 하나님이 녹이실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아무리 쇠 덩어리 같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은 불보다 뜨거우니 그 마음을 녹이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는 회심하지 못한 아내를 위해 많이 기도하다가 아내의 회심을 본 사람도 있을 것이고, 굳어진 남편을 보며 많이 애통해 하다가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남편을 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의 눈물 흘리는 회심을 본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직장 동료를 전도했는데 그가 주님을 만나고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는 그 눈물의 회심을 본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주님이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기뻐하시는 기쁨은 그것의 천배도 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레미야의 마음을 본받아서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일부인 것처럼 그렇게 기도해야합니다. 여러분들이 일생동안 회심하지 못한 영혼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항상 마르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영혼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모두 우리에게 얽매이기 쉬운 많은 욕심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야망들, 그리고 육체의 정욕과 물질에 대한 탐심들을 모두 버리고 그리고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도의 제목을 찾읍시다. 그리고 우리가 그 영혼들을 위해서 많이 울어줍시다. 특별히 그 사람이 우리의 가족이라면 우리 때문에 그들이 회심하는 것처럼 우리가 교사라면 내가 그들을 울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강퍅한 영혼으로나마 회심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구역장이라면 우리 구역 원들의 회심치 않은 영혼의 상황이 모두 내가 울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매달려 기도하는 가운데 여러분들의 마음을 녹이셔서 여러분들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실 것이고, 깨끗한 마음과 영혼으로 드리는 기도를 받으셔서 하나님이 돌아올 가능성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던 완악한 영혼들도 돌이켜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영혼을 깊이 사랑하며 그리고 그들의 허물과 잘못을 보지 말고, 그들이 아직까지도 우리 곁에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이런 눈물의 중보기도를 받아본 적이 없는 것에 대해서 그 영혼들에게 깊이 속죄하는 마음으로 우리들이 주님의 심정이 되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하나님이 반드시 여러분들이 흘린 눈물을 씻겨주실 것이고, 슬픔과 고통의 날 대신 기쁨과 환희의 시간들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 모두가 빛 가운데 살면서 우리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교회는 바로 그러한 복된 삶을 위해서 하나님이 세워주신 곳입니다. 충성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회심치 못한 자를 위해 울라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애1:16)
우리들이 영적인 침체는 항상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영적인 침체에도 두 가지가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상적인 영적 침체는 항상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침체란 하나님 앞에서의 영혼의 활발한 힘을 잃어버리고 죄의 힘이 우리 안에서 융성해진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영적인 침체 상태는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미 시험에 들어있는 상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면 시험은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기에 어려운 상태에 있는 모든 상황을 시험의 상황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 시험을 매우 좁게 해석해서 죄악에 떨어지기 직전까지 간 것을 시험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분께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에 어려운 상황에 있는 것, 특별히 내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순종하기에 어려운 상태에 있는 것 마음이 나뉘거나, 갈리거나, 혹은 욕심에 물들어서 순발력 있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시험에 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적인 침체는 우리의 삶에 거룩한 활기를 앗아가고, 영적인 침체는 결국 우리를 보다 더 깊은 시험으로 데리고 가고 다가오는 유혹이나 시련 앞에서 거기에 저항할 수 있는 모든 힘들을 잃어버리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넘어지게 하는데 그 시험의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침체는 바로 이런 일에 보탬이 되기 때문에 영적인 침체 우리가 이렇게 부르면 그것이 나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상적 침체 말고, 매우 특별한 침체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영혼의 거룩한 침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거룩한 침체라고 부르는 이유는 침체되는 원인이 앞에 있는 일상적인 침체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예레미야 애가는 남 왕국 유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맙니다.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까지 쳐들어 와서 성을 훼파하고 성전을 파괴했을 때 그 때에 예레미야가 눈물로 이 시를 적은 것입니다. 그는 불우한 시대에 예언자로 활동하도로 소명되었고, 그는 기울어져 가는 유다 역사의 마지막 비탈길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멸망의 길로 가기로 작정한 것처럼 선지자를 통해 주어지는 거듭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예레미야를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바벨론의 군대의 말발굽아래 온 나라와 도성이 짓밟히게 되었고, 거룩한 성전이 훼파되어서 마치 겁탈당한 부녀자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는 흐느끼면서 이 예레미야 애가를 적어 내려갔습니다. 공교롭게 이 예레미야 애가는 “애 카”라는 히브리말로 시작하는데 그것은 “슬프도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애가는 1장에서 예루살렘이 모두 파괴되었을 때 일어난 상황을 눈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모두 파괴되고 성전까지 모두 훼파된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흐느끼며 통곡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훼파된 상황이 되었는데도 자기 장롱 밑에 감추어준 보물을 끌고 나와서 그래서 거리를 두루 다니며 양식을 구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나라가 망하던 말든, 하나님의 나라가 모욕을 받든 말든, 성전이 훼파되든 말든, 그들은 결국 자신의 일신의 영달을 위하고 생명의 연장을 위해서 양식을 구하러 다니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환난이 있기 전까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고,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이 너에게만 말씀하시더냐. 하고 시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비 신앙적 낙관주의에 근거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실 것이며 예루살렘은 영원할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썩은 뿌리를 붙잡듯이 그릇된 희망을 붙들고 신앙이라는 이름 하에 그들은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버텼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에 썩은 뿌리는 그들을 끝까지 붙들어 줄 수 없었고, 벼랑 끝에 매달려 붙들고 있었던 그 썩은 뿌리는 부러져 나가고 수많은 백성들은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나라는 정말 커다란 환난을 만나고 언약의 백성들이 이제 이 민족의 말발굽아래 나라를 잊어버린 이런 상황이 되었는데 많은 백성들은 저 먹고 살기에 바쁜 삶을 살았습니다. 극단적인 이기심들이 작용한 것이죠.
그러나 오늘 여기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상황 속에서 깊은 영적인 침체에 걸려있는 것을 봅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말하기를 “내가 이를 인하여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른다고” 고백을 했고,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여 소생할 자가 없다고 절망적으로 표현하면서 이제 나라가 망해서 이리저리 흩어져 다니는 이러한 고아들을 생각하면서 더욱 더 눈물을 쏟아놓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는 자신의 고백에 의하면 자기를 위로할 자가 없고,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킬 자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영혼의 깊은 침체와 낙심에 빠져든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가 이렇게 흐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예레미야에게서 과연 영적인 활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놀라운 영적인 원기, 강력한 파워 이런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 눈물을 물 쏟듯 쏟으며 그의 영혼은 매우 곤고하고 침체에 빠졌고, 그리고 사면을 돌아보아도 누구도 위로할 수 없고 심지어 하나님도 자신을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고, 바울의 표현대로라면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로 여길 정도로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이것을 이렇게 부르는 사람을 보지 못했지만 저는 이러한 것을 거룩한 침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침체는 섬김과 관계가 있고, 그리고 그러한 거룩한 침체는 또한 섬기는 그 사람의 영혼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고 하는 것을 오늘 이 시간에 말씀드리면서 교리를 하나 소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거룩한 침체는 일상적인 우리의 침체와는 달리 원인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흐느끼고 통곡하면서 우는 것은 이산가족을 보는 슬픔이나, 나라를 잃은 백성이 될지도 모르는 많은 민족의 흩어진 사람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인도주의적이고, 애국주의적인 눈물이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 땅이 파괴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이 모든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싫어하는 원수를 들어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역사를 주관하는 지존 자 이시고, 나라와 나라를 분리시키기도 하고 합치시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고 다시 세우시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 민족에게 내어주셔서 그들이 말발굽으로 짓밟고 그 나라를 지배하고, 성전을 훼파하도록 허락을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더럽혀지는 것은 언약 백성의 이름이었고, 언약백성과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기는 하지만 지금 현실은 하나님을 안 믿는 자들이 언약백성의 땅에 들어와서 모두 파괴하고 점령하고, 거룩한 것을 조롱거리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흐느끼며 울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 때문에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걸리게 되는 영적인 침체의 원인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침체에 걸리게 하는 원인들은 대부분 우리 자신의 욕망이 좌절될 때에 우리들이 영적인 침체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혹은 욕망이 좌절되거나 혹은 욕망대로 살아서 우리의 영혼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될 때 우리는 점점 침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들이 비록 그것이 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얼마나 많은 것을 욕망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잠시 있다 지나가는 것들에 대한 많은 욕망들이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우리의 영안을 흐려놓고, 우리의 판단의 총명들을 가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많은 욕망들은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솟아나고, 또 현실적인 상황에서 그러한 욕망들이 좌절되는 것들을 봅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서 우리들이 침체에 걸릴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의 욕망이 좌절되고, 어려움이 생기고 할 때 침체에 걸리게 되는데 이런 침체들은 우리들에게 항상 좋은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이런 침체라고 할지라도 신앙으로 극복하면서 그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십자가 삼아서 하나님께 매달리면 영적인 침체로부터 극복될 수 있지만 거기에 머물게 될 때 우리는 영혼의 깊은 침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낙심 가운데 경험 하는 침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들이 좌절되었을 때에 겪는 영혼의 침체, 이 세상에 속한 일들이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우리의 믿음이 식어지면서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의존의 마음이 식어질 때 찾아오는 침체. 이런 모든 침체들은 우리의 영혼을 갈아먹고, 우리의 건강한 영혼을 파괴해서 주님의 은혜를 부패하게 만드는 요인들입니다. 이러한 침체 속에 들게 되면 우리는 급격히 영혼이 생기를 잃어버리고, 좀더 많은 경우에는 우리들이 보다 깊은 시험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이 준비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침체에 빠지게 되면 생생하게 들려오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게 되고, 그리고 기도도 할 수 없게 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떤 확신과 응답 같은 것들이 늘 있었는데 영적인 교통에서 오는 이러한 확신이나 응답 같은 것들이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의 영혼의 처지는 마치 더듬이가 잘려버린 귀뚜라미처럼 어디로 뛸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런 오리무중의 사람들이 됩니다.
이러한 영혼의 침체 속으로 우리들이 얼마나 자주 빠져 들어가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의 침체 속에서 신령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보다는 그런 침체 속에서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그러면서 더 깊은 죄 속으로 우리들이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물론 또 다른 경우는 침체의 원인 자체가 매우 거룩한 것이 원인이 되었는데도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선교사들이 종종 자신의 침체에 대해서 이야기 하죠. 선교사역을 하고, 그 선교사역을 잘 이루어야 되겠다. 라고 하는 열망을 갖는 것은 나쁜 일 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뜻대로 되지 않고 어려움이 찾아올 때 영혼의 침체가 오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거룩한 침체는 목적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에서 오는 침체인데 그러면 그렇게 해서 침체의 이유만 정당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면 항상 그 침체는 거룩한 침체입니까?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인이 비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이름을 위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짜 거룩한 침체가 되기 위해서는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가 달라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주위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주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섬기다가 영혼의 침체에 빠지고 시험에 들게 되고 결국은 영혼이 부패하게 되는가 하는 것을 너무나 자주 봅니다. 처음에 맨 처음에 그를 침체에 빠지게 했던 원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이었고, 주의 나라를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가 자기중심적이고, 부패한 욕심과 야합될 때 그 때에 비록 그로 하여금 침체에 빠지게 한 원인은 아름답고 좋은 것이었지만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영혼을 쇄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부패하게 하는 효과를 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잘 돕던 사람들이 시험에 빠지게 되면 그 속에서 아주 악한 모습들을 그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것이 시작은 좋은 이유로 고난을 받았지만 그러나 나중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들이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거룩한 침체가 되지 못하고 영혼을 부패하게 하는 침체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이 거룩한 침체는 어떤 것인가? 우선 그 침체에 빠진 이 자체가 예레미야의 선지자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그리고 백성들이 흩어져서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고 성전이 약탈되어서 다 무너진 것과 같은 상태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이 모두 파괴되어버린 그 속에서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너희에게는 내 마음에 있는 것 같은 근심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라. 하나님이 골수에 불을 보내셔서 내가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고 말합니다. 그런 골수에 사무치는 불, 그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고 모든 만 백성위에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민족임을 보여주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그것과는 정 반대의 효과를 이 이방민족들에게 나타내고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모욕거리가 되었고, 그 백성들의 이름은 수치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예레미야가 깊이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렇게 흐느껴 울면서 통곡할 때에 예레미야의 이 마음은 녹아내리는 것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침체에 빠뜨리는 원인만 거룩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도 거룩한 믿음의 마음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민족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의 영광만이 드러나야 하는 민족이라는 사실이 예레미야의 마음을 깊이 찔렀고, 지금 훼파된 예루살렘 성과,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이러한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프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거룩한 침체는 믿음으로 그 침체의 원인을 받아들인 그런데서 오는 경험입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져버린 현실을 깊이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을 부인하고, 거짓 희망을 찾거나 그러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했습니다. 그 인정한 것은 바로 이 백성은 불의한 백성이고, 이 백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이 무서운 진노는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하나님의 판단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서있는 중보자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구원의 중보자는 아니지만 중보자적 마음을 가지고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모든 선지자와 예언자의 공통된 특징이었습니다. 이 선지자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달해주는 사람이고, 이 때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나아갑니다. 동시에 이 선지자는 백성들의 상황을 살피고 그 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고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중요한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는 것과 그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 6장에서 사도들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일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새롭게 찾은 것이 아니라. 구약 선지자들에게서 그 영혼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나아갈 때에는 주님의 선명한 계시의 말씀을 그들에게 선포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상황과 타협할 이유도 없고 상황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말씀을 굳게 만들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다 또 한편으로 백성들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을 때에는 이제 완전히 하나님께만 보냄을 받은 선지자의 마음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백성들과 한 형제로서 같은 시대를 살면서 그들의 고민과 아픔을 모두 헤아리고 그들을 진심으로 주 안에서 사랑하는 그런 한 형제 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선지자의 영성은 제사장의 영성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흐느끼면서 통곡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두 중보자의 위치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범 죄 한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찢기듯이 흐느껴 우는 그 선지자의 고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하고 예루살렘이 파괴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그것으로 사명이 끝난 것이었다. 라고 할 것이면 아마 예루살렘이 나라가 망했을 때 선지자는 하나님과 같은 편에 서서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늘로부터 오는 예언자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취하여진 한 형제요, 연약하기 짝이 없는 한 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도 슬플 줄 알고, 기뻐할 줄 알고, 민족을 사랑할줄 알고, 이 모든 정서를 함께 가진 그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평범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특별히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성령을 주셔서 택하셨을 뿐이지 그의 본 바탕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가 슬퍼하고 기뻐하고 아파하고 때로는 실수하고 허물이 많은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놀던 거리가 바벨론 군대들의 말발굽아래 짓밟히고, 자기가 사랑하는 이웃집 사람들이 칼과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하고, 친구들이 포승에 묶여서 끌려가고,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고, 그렇게 추억이 어린 예루살렘 성전이 부서지는 광경을 목격할 때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이기 이전에 그 시대를 살고 있는 한 백성으로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깊이 아파하면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그는 눈에서 물같이 눈물이 흘렀다고 말합니다. 이 물은 많이 흐르는 하수나 혹은 개울 같은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눈물이 그 눈에서 한없이 흘러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깊은 침체에 빠져서 어떠한 위로도 발견할 수 없고,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킬 아무런 사람도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도 느껴지지 않는 그런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그 시대를 향한 예언자의 눈물이었으며 그 마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특별히 이 눈물은 눈물이 눈에서 물같이 쏟아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이 거짓 눈물이 아닌 한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이 물같이 녹는 일이 먼저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3장에 보면 비슷한 말씀이 또 하나 나오는데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는 가운데 눈물을 시냇물처럼 쏟아놓는 장면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 예레미야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이든지 간에 사람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큰일들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반드시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기도의 사람들을 사용하시지 아니하시고 특별한 기도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위대한 일들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기도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기쁠 때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모든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예레미야는 멸망을 향하여 치닫는 이스라엘의 역사 한 복판에서 온갖 고난을 다 받은 사람이었고, 그 고난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한 것, 그것 때문에 예레미야는 갖은 핍박과 박해를 다 받으며 고난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졌을 때에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리하고, 그 자녀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유리방황하게 되었을 때에 이 선지자는 마음이 녹으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쏟아놓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정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일중에 가장 고결한 일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한 기도의 제목에 마음을 고정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유가 되어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으로서 하나님 앞에 온갖 영혼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물처럼 그 마음을 쏟아놓는 것 이것입니다. 비록 그가 허물이 많고, 죄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신앙의 지식이 다소 부족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하나님 때문에 우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 때문에 상황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 주님의 이루어지지 못하는 뜻 때문에,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마음이 물같이 녹고, 눈에서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는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께 최대한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업적 통해서 받는 어떠한 일의 영광보다도 그렇게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며 기도하는 그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더 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던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모두 춤추고, 먹고 마시는 때에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들은 슬퍼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남들은 모두 일상적인 날이라고 생각하는 날들을 특별한 날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눈물로 매달리며 마음을 물같이 쏟아놓았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시간들을 섬기면서 살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많은 시간을 주님을 위해 일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을 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적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없이 인간이 하는 10년 동안의 일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는 신자의 섬김, 단 하루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위대한 일은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1장에서 3장에서 계속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혼미하게 된 유리하고 방황하게 된 바벨론 군대들에게 잡혀가게 된 이스라엘 백성, 특별히 그 자녀들을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서는 아이들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다 자란 이스라엘 세대는 자기들의 죄 값을 스스로 하나님 앞에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른들, 부모가 아니면 신앙에 대해서 배울 길이 없고, 여호와의 참 종교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는 많은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이 부모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고 한번도 겪어 본적이 없는 무서운 전쟁 통에서 여기저기서 피 흘려 죽어가는 시체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같은 시대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말할 수 없는 연민의 정을 가지고 이 어린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시냇물처럼 쏟아 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는 나아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할 때에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못하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일치하게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소명을 받은 것은 아주 어렸을 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10세 미만의 때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게 된 것과는 상관이 없이 진짜로 자기 자신이 나이가 어린 소년, 히브리어로 “나 아르” 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어린 소년을 가리킵니다. 이런 어린 때에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추측이 만약에 사실이라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소명 받았던 때를 생각하면서 지금 부모들의 죄를 인해서 끌려가고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수많은 예루살렘의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동료의식을 느끼며 더더욱 애통하였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국적인 예언으로 치부되었고, 사람들은 그의 입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그 시기가 괴로웠으면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고 결심을 하였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에 사무쳐 골수에 불붙는 것 같아서 그 말씀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선지자가 거룩한 침체에 빠진 이유였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러한 교리를 묵상하면서 최근에 이런 반성들을 우리 모두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인생사들, 우리 마음에 다가오는 근심과 걱정, 그리고 슬픔과 어려움,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울해지고 눈물 흘리는 때는 종종 있지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물어볼 때 하나님의 영광, 특별히 다른 사람의 영혼을 기억하면서 눈물 흘린 때가 얼마나 있는지 우리에게 한번 정직하게 물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아웃리치를 간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지 몰랐지만 그냥 하다가 안 되어서 그들을 붙들고 우니까 그들도 함께 울며 주님을 믿기로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머리에까지 도착하고 가슴에서 나온 말만 그 사람의 가슴 속에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이렇게 영혼을 위해서 깊이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우리 이웃의 영혼, 그리고 내 자식의 영혼, 그리고 함께 있으나 아직 회심하지 못한 구역의 식구들과 내 주위에 있는 지체들의 영혼을 보면서 정말 우리들이 눈물 흘린 적이 있습니까? 더욱이 그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러서 위로받기를 거절하고 싶을 정도로 눈물이 흐른 적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혜를 모아서 교회를 운영하고 그리고 주어진 물질과 사람을 사용해서 효과적으로 경영해서 교회를 잘 세워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지혜가 필요하고, 그리고 인간적인 계획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의문이 필요하고, 그래서 누구보다도 이런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잘 돕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도 하나의 정신이 밑바닥에 깔려있지 않으면 모두 인간의 기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진실한 눈물, 교회에 찾아왔으나 자기 스스로를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울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현저한 무지 속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지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울지 못할 터인데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의 아픔처럼 느끼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 그들을 교회에서 만나는 것이 저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 영혼의 처지를 자신의 영혼의 처지처럼 느끼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면 그 모든 교회의 경험에 의한 아름다운 지혜와 물질, 사람의 헌신은 부끄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어디에다 사용해야 될지 방향을 정해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고정된 마음이고,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을 위한 말할 수 없는 눈물이요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최근에 묵상 가운데 몇 달을 지나면서 저 마음에는 이러한 은혜가 현저히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솔직히 고백 드리면 변화되지 않는 많은 성도들을 보면서 마음에 낙심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그 성도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결론은 얼마나 강퍅한 심령을 가졌으면 그렇게 설교를 듣고도 회심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솔직하게 몇 번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같은 본문을 묵상하면서 저는 그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래 물론 그들의 마음이 강퍅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네가 만약에 이렇게 더 많이 예레미야처럼 울었더라면 내 유창한 말로 회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예배시간마다 만져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회심하였을 것이다.” 라고 말이죠. 개인적으로 제 마음 속에는 할 수만 있으면 언제든지 이 일을 위해서 헌신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할 수만 있으면 한 1년 정도 외부의 집회도 더 절제하고, 그리고 마음을 다 모아서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마음을 모아서 이 불쌍한 비 회심 자들을 위해서 헌신해야 되겠다. 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처음 받았던 때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호심의 교리를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렇게 울어야 된다고 가르쳐주지도 않아도 우리의 마음 안에 영혼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엄마를 위해서 울었고, 우리 아버지를 위해서 탄식했습니다. 우리 혈육들이 아직도 주님을 모르고, 그리고 내 동기간들이 교회를 다니지만 주님을 못 만났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의 가슴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미어지는 것 같았고, 우리의 심령은 쥐어뜯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우리에게 위로가 없었고,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줄 그 무엇도 없었습니다. 좋은 음식이나 그리고 멋진 옷, 그리고 화려한 장신구 같은 것들이 그렇게 심장이 찢어질 듯 아픈 우리의 마음을 달래줄 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은 주님께 고정되었고, 우리는 우리의 가족과, 그리고 우리 지체들을 위해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항상 입버릇처럼 목양의 영광은 회심이요. 회심의 영광은 영혼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한번도 잊어 본적은 없는데 왜 이렇게 우리의 가슴은 냉랭할까. 물론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죠. 그러나 모자랐습니다. 현저히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최근 어느 지체가 목사님 많이 변하셨습니다. 제가 제일 많이 반성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렇다. 그 말이 맞을 것이다. 한번도 교회가 이렇게 큰 것에 대해서 교만해 본적도 없고, 더 많이 교회를 키워야 되겠다는 야망을 가진 적도 없고, 저는 늘 이 꿈을 이야기 하듯이 제가 목사가 되었을 때에 꿈꾸는 교회는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한 1-200명 모이는 교인들 데리고 그냥 오손 도손 신앙생활 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돈을 꾸러 은행에 돌아다니고, 땅을 사고, 건물을 사고, 그런 것도 목회에 소명을 받았을 때 꿈꾼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너무 싫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했죠. 그리고 게으르지 않았고, 그리고 한번도 물질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목회 한적 없고, 그런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늘 보십시오. 다른 교회에 비해서는 작은 비율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많은 영혼들이 우리의 예배당을 회심하지 못한 채 밟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에 많은 위로를 주셨습니다. 청년부 예배에도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옆에서는 많은 친구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혹은 바닥에 꿇어앉아서 흐느끼며 통곡하는데 옆에 있는 어떤 청년들은 문자 메시지를 날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현재의 모습입니다. 정말 우리가 주님 앞에 갔을 때에 이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모든 할일을 다 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은 공정하고 정확하십니다. 눈물 흘리며 그 영혼들을 위해 많이 아파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시는데 그 위로의 방법이 회심하는 사람들을 허락하십니다. 목사님이 초심을 잃어버리신 것 같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며칠 동안 가슴에 떠올랐던 그림이 바로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전도사 때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을 만난 후에 영혼들을 위해 늘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시간의 길이가 지금보다 길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질에 있어서 훨씬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금요일이고, 토요일이고, 모여서 선생님들이 둘러앉아서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면 한밤을 꼬박 새우며 우리는 울었습니다. 곤고한 영혼들, 교회의 마당은 밟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못한 영혼들, 주님께 안기기도 두렵고, 그리고 세상으로 돌아가기도 무서워하는 그런 비 회심 자들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했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하고 집에 돌아가서 아침에 샤워를 할라치면 왼쪽 가슴이 파랗게 멍들어 있었습니다. 그래 맞아, 그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우리가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서 사실 불쌍한 것은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마음껏 눈물 흘려주지 못하는 우리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개하는 영혼은 눈물이 강물에 떠내려 오는 것입니다. 많은 중보기도의 눈물,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스스로 울 수 없는 영혼들을 위해서 우는 큰 눈물이 쏟아지는 중보의 기도 속에서 부흥은 일어나고 영혼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추수됩니다. 사실 인간의,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만은 영혼이 하나님 앞에 진실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자각하고 그 죄를 피를 토하듯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품에 안기게 되는 그 일은 그 장소에 하나님이 성령으로 임재하지 않으시면 절대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마음을 보십시오.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엎드려 마치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처럼 통곡하며 울고 있습니다. 먹을 양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난리 통에 잃어버린 이산가족을 위해 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이렇게 나라가 망하면 선지자 직분도 감당하지 못할까봐, 직업 떨어 질까봐 우는 것도 아니고, 그의 마음속에는 방황하는 영혼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우리들이 그래도 은혜 받은 사람들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인데 우리 중자기 영광 위해서 사는 사람 있습니까? 물질에 눈이 어두워서 죄를 짓는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 대부분이 다 그런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영광 보다는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육체의 만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대체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예레미야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망한 나라 한복판에서 방황하는 어린 백성들을 보며 통곡하는 이 그림은 구약의 예수님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레미야는 한순간 엎드려서 이렇게 눈물을 흘렸지만 예수님의 정신은 일생동안 이 통곡의 정신으로 눈물을 시냇물처럼 쏟으며 사신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다. 그분의 가슴을 그렇게 녹아내리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게 바로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이름이며 이루어지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의 한없는 고단함이 주님의 마음에 이런 눈물과 탄식을 가져왔습니다. 그로인해 그분의 가슴은 늘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 각양 많은 은혜를 주셔서 예수 믿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당신의 마음을 가지고 당신의 삶을 계승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그렇게 해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마음을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번 눈을 들어서 여러분의 가족들 중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 함께 교회에 속해 있으나, 그래서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그러나 회심치 못한 영혼들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처지는 얼마나 가련한 처지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그가 왜 주님을 안 믿었는지에 대해서 이제 핑계 댈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비 회심자로 남아있는 것은 우리들이 마음을 물같이 녹이는 이 기도가 우리 속에 충분히 흘러나와 교회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교회 안에 회심하지 못한 모든 영혼의 비참한 상태의 공범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이미 들어와 회심하고 중생하지 못한 영혼들을 위한 눈물이 없는 사람들이 밖에 나아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과연 얼마나 영혼에 대한 간절한 정신을 가지고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우리는 자문해 보아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이 비 회심 자들을 위한 깊은 관심을 갖고, 그들의 영혼의 위태로운 상태를 깊이 인식하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께 다 바쳐진 마음의 사람, 죽기까지의 마음의 사람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큰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회심시키시는 이 위대한 역사는 죄를 책망하고 거듭나게 하시는 중생의 놀라운 역사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영혼을 돌이켜 회개하게 하고, 그 마음은 물같이 녹아지게 해서 죄에 대해 두려워 떨고 하나님께 속하게 만드는 이 일은 오직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무엇보다도 모이는 시간마다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하셔서 그 회심치 못한 영혼들을 계명하시고, 그 지성을 조명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감화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인 것과,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공로 아래로 피해 새 삶을 살아야 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실 수 있도록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시도록 우리들이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급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실로 이러한 일들에 대한 제안은 긴급동의와 같은 것이고, 그리고 이 모든 일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예레미야와 같은 마음이 되어서 그 마음을 물같이 쏟아놓으며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이 일생을 살지만 마음에 남은 하나까지 다 바쳐서 주님을 섬기는 순간들이 얼마나 적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은혜 받으면 대체로 주님을 위해서 살지만 그러나 구체적인 삶 속에 예수 죽음의 정신이 깃들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회심하지 못한 영혼의 비참한 상태를 마치 자신이 당한 영혼의 상태인 것처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마음을 물같이 쏟아 내리는 사람, 그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이러한 거룩한 침체는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탁월한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속된 것에 대한 욕망을 그 눈물로 씻어가 버립니다. 잠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즉 잠세적인 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많은 자잘한 사랑들이 우리의 영혼을 오염시키고, 그래서 우리로 마땅히 울어야 할 바를 위해서 울지 못하도록 오염된 영혼으로 만듭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의 신자가 가슴에 멍이 들도록 두들이면서 구원받지 못한 이 민족을 위해 울고, 구체적으로 회심하지 못한 내 주위의 지체들을 위해서 가슴을 뜯으며 하나님 앞에 통곡하고 탄식할 때 그 녹아내리는 가슴 안에 세상의 정욕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물질에 대한 탐욕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비 신앙적인 방법으로 출세해보려는 야망 같은 것들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의 쾌락을 도모하려는 정욕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뜨거운 눈물에 모두 쏟아져 내리고 녹아져 내려버립니다. 그래서 이러한 침체는 우리의 영혼의 찌끼들을 모두 쏟아내 버리는 배출구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느냐에 의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갑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잘 섬기면 섬길수록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요. 잘 못 섬기면 그 잘못된 섬김 때문에 우리들이 나쁜 사람이 되어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강력한 요청입니다. 아니 요청이라기보다는 우리교회의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강력한 꾸지람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많은 은혜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보이고 내 사랑을 보였는데 너희들이 내 마음으로 영혼들을 섬겼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더 예수 죽음의 정신으로 영혼들을 위해 마지막까지 통곡하고 탄식 하셨던 예수의 마음으로 그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린다면 그들의 심령이 아무리 돌 같아도 하나님이 녹이실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아무리 쇠 덩어리 같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은 불보다 뜨거우니 그 마음을 녹이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는 회심하지 못한 아내를 위해 많이 기도하다가 아내의 회심을 본 사람도 있을 것이고, 굳어진 남편을 보며 많이 애통해 하다가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남편을 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의 눈물 흘리는 회심을 본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직장 동료를 전도했는데 그가 주님을 만나고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는 그 눈물의 회심을 본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주님이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기뻐하시는 기쁨은 그것의 천배도 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레미야의 마음을 본받아서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일부인 것처럼 그렇게 기도해야합니다. 여러분들이 일생동안 회심하지 못한 영혼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항상 마르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영혼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모두 우리에게 얽매이기 쉬운 많은 욕심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야망들, 그리고 육체의 정욕과 물질에 대한 탐심들을 모두 버리고 그리고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도의 제목을 찾읍시다. 그리고 우리가 그 영혼들을 위해서 많이 울어줍시다. 특별히 그 사람이 우리의 가족이라면 우리 때문에 그들이 회심하는 것처럼 우리가 교사라면 내가 그들을 울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강퍅한 영혼으로나마 회심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구역장이라면 우리 구역 원들의 회심치 않은 영혼의 상황이 모두 내가 울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매달려 기도하는 가운데 여러분들의 마음을 녹이셔서 여러분들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실 것이고, 깨끗한 마음과 영혼으로 드리는 기도를 받으셔서 하나님이 돌아올 가능성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던 완악한 영혼들도 돌이켜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영혼을 깊이 사랑하며 그리고 그들의 허물과 잘못을 보지 말고, 그들이 아직까지도 우리 곁에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이런 눈물의 중보기도를 받아본 적이 없는 것에 대해서 그 영혼들에게 깊이 속죄하는 마음으로 우리들이 주님의 심정이 되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하나님이 반드시 여러분들이 흘린 눈물을 씻겨주실 것이고, 슬픔과 고통의 날 대신 기쁨과 환희의 시간들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 모두가 빛 가운데 살면서 우리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교회는 바로 그러한 복된 삶을 위해서 하나님이 세워주신 곳입니다. 충성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섬길수록 깊어지는 사랑
성경말씀: 고린도후서 2: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쓰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2:4)
우리들이 주님을 어떻게 섬기느냐에 따라서 우리 자신의 성품, 그리고 우리 자신의 영혼,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이 함께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한번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저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에 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많이 섬기면 마음속에 사랑이 점점 더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많이 섬기면 마음속에서 사랑이 마르는 것 갔습니까?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을 참 열심히 섬기는 것 같고, 그리고 일을 유능하게 해내서 일이 점점 더 그 사람을 많이 필요로 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사랑이 그 마음속에 별로 없는 것 같은 것이 느껴지는 일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다가 그런 생각할 때가 있죠.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감격을 하면서 하던 그 일이 이제는 그냥 하는 일이 되었고, 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새로워지게 만드는 영적 쇄신의 힘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냥 묵묵히 일이니까 일을 하는 그런 경우가 우리에게 아마 없다고 말을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아, 그러면 정답은 일을 하면 할 수 있도록 결국은 마음속에서 처음 사랑은 점점 식어지는 구나.’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을 많이 하고 열심히 봉사할 수록 원래 있던 그 사랑의 따뜻한 경험이 사라지고 독선적이고 마음이 굳어지고 그리고 완고하고 자기 의에 사로잡히고 이런 사람이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섬기면서 오히려 그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성도를 사랑하게 되고, 이렇게 온유한 인격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모세 같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처음에는 그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고, 지존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를 써서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삼아야 되겠다. 할 때에 똑바로 서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는 못한다고 대들던 사람이었잖아요. 그런데 나중에는 그 온유함이 지면에 승한 그런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요한도 마찬가지죠. 우뢰의 아들이라고 불리 울 정도로 과격하던 사람이 주님의 사랑에 깊이 감화를 받아서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라고 말할 수 있게 까지 된 것은 그가 평생을 예수 섬기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인가? 오늘 이 문제를 풀기 전에 다시 한번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신앙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명상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그 명상 속에서 자신을 그 진리의 빛 안에 비춰보는 일을 쉬지 말고 계속 할 때에 우리의 이성이 그 이성의 원초적인 광명이신 진리의 예수를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더 많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 여러분 자신의 성찰을 위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나는 어느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인가? 하나님을 많이 섬기고, 봉사할수록 마음이 온유하고 부드러워지고 녹아내리는 것 같은 마음이 되어서 주님의 손에 의해 잘 빚어지는 그런 온유한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섬기면 섬길수록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왜 그런지 주님의 일을 하는 모든 것이 그냥 하는 것이고, 그냥 일일뿐이고, 그리고 내가 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 자꾸 사람이 나를 방해하거나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미워지는 그런 형태의 마음으로 변해가고 있는지 오늘 한번 심호흡을 하면서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나 관대하시 때문에 인식 자체가 자기 사랑의 너울에 씌워있어서 그래서 우리 자신을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매일 매일 자기 깨어짐의 삶을 살아야지만 예수의 흔적을 가진 신자가 될 수 있다고 지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죠. 우리 중에 그렇게 아름다운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면서 예수의 흔적이 남는 사람으로 살다가 주님 앞에 가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 자기 깨어짐이 안 되는 이유가 뭐냐면 진리의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어야지만 반성도 하고, 참회도 할 터인데 자기 사랑의 너울에 가려져서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항상 눈이 멀게 마련입니다. 누구든지 사랑을 하면 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하면 눈이 멀게 되는데 자기 사랑을 하면 자신의 단점과 부족한 점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이 뭐냐면 진리의 빛입니다. 진리의 찬란한 빛이 우리의 자기 사랑에 빠져서 생겨난 이성의 어두움을 이길 때 그 때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발견하면서 우리들이 추루한 자신의 모습을 버리고 완덕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델리우서 어거스틴은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주 명료하지만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랑이 진리를 붙잡습니다.” 까리따스 노빛 베리탓뎀 “하나님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 있을 때에 그 사랑이 진리의 빛을 붙잡는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어느 경우에 해당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많이 섬겨도 이성의 원초적인 광명인 진리의 빛이 여러분들을 비추어서 그대들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게 만드는 그 진리의 빛의 역사가 없으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깨뜨려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시간들이 흘러가고 나면 우리가 맨 처음에 하나님을 향해 섬김을 시작했던 동기와는 달리 섬기면 섬길수록 우리들이 점점 기능적이 되어가고 그리고 그 섬김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게 되어서 원래의 그 섬김 속에 담겨있던 참 사랑의 정신이 감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울은 정 반대의 경험을 하였습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나에게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서 너희에게 눈물로 편지를 썼다. 그랬는데 이 편지는 아마 고린도전서와 후서 말고 또 다른 편지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지금은 그것이 분실되었다는 것이 대부분의 신학 주석 가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그 편지 속에서 사도바울이 아주 간절하게 이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도덕하고 불신앙적인 행동에 대해서 엄중하게 책망했던 것 같습니다. 그 후에 이제 사도바울이 빨리 고린도교회에 가서 이 문제를 바로 잡으려고 했는데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서 고린도교회에 빨리 갈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고린도후서에서는 그렇게 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그 때 갔더라면 이 불같은 성미에 교인들을 가만히 안 두었을 터인데 어쩐 일인지 하나님이 막으셔서 교회에 어려운 일이 생겼는데도 한숨에 고린도 교회를 달려갈 수 없고, 상당한 시간동안 고린도교회를 방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에 후에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니까 바울의 그 편지를 받은 후에 고린도 교회에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회개해서 자신의 행실을 고치고, 교회가 새롭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참 그래서 교회는 누구의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참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교인들이 방종할 때에도 하나님이 그 교회를 붙드셔서 그들을 돌아오게 하시고, 목회자가 힘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이 신비하게 목회자를 붙드셔서 교회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 하면 여러분들 웃으실지 모르지만 나 담임목사 아닙니다. 나는 항상 부목사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부목사들이 우리는 어떻게 하나. 그러는데 나는 같이 부목사입니다. 당회장님이 알아서 하시는 때가 참 많습니다. 주님이 그랬으니까 그 많은 비바람을 맞으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이렇게 보면서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를 보면서 김 남 준 목사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항상 오늘부터 그렇게 생각하세요. 우리 목사님은 영적인 부목사, 그리고 담임 목사님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목회를 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울이 거기에서 많이 마음이 녹아내린 것입니다. 그 못돼 먹은 교인들, 엄청 많이 야단을 쳤는데 그들이 너무 많이 가슴 아파 하면서 회개하고 교회가 새로워졌다. 그랬더니 바울이 마음이 녹는 것처럼 아픈 것입니다. “아, 내가 너무 심하게 야단을 쳤나.” 그러면서 위로의 편지를 쓴 것이 고린도후서입니다. 벌써 1장부터 어조자체가 틀립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이 이런 궁금한 생각이드는 것이죠. 그러면 사도바울은 우리와 다르게 어떻게 섬겼기에 이렇게 섬길수록 사람의 마음이 굳어지고, 형식적이 되고, 하나님의 일을 일로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변화된 심경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 변화된 심경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뒤에 고백이 나옵니다. “너희를 사랑함이다.” 고린도교회 교인을 그렇게 지독하게 야단을 치고도 그들이 가슴 아파 하며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그렇게 쓰라려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사도바울이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보이는 눈앞에서 종아리를 걷어서 피가 맺히도록 때리고, 그리고 아이를 야단을 쳐서 내어 쫓은 다음에 방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와 같은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그러잖아요. “목사님 설교시간에 너무 야단치지 말라고” 그런데 정말 가슴 아파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가 없죠. 왜냐면 결국은 교인들을 야단을 쳐도 자기 새끼잖아요. 그러고 보면 이중적인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누군들 그렇게 야단을 치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야단을 치면 결국 그것은 자기를 야단치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밖에 신앙생활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겠습니까. 그러니 돌아서면 많이 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일꾼의 부 성적 모성이라고 부 성적 모성이 잘 나타난 곳이 바로 선지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는 앞에서는 피 절인 음성으로 그들을 책망하고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을 칼날 같은 경고의 말로 토해놓고는 돌아서서는 그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한없이 아파하며 우는 사람입니다. 사도들이 그 마음을 나누어 가졌고, 오늘 바울이 그 마음을 나누어 가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이 고린도교인들을 향해서 섬기면 섬길수록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바울의 마음속에는 그들을 향한 사랑이 이 속에서 농익어 갔습니다. 그리고 정말 친엄마의 마음이 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들이 착하고 좋은 일을 해서 바울을 많이 도와준 것이 아니죠. 부자 교회였거든요. 항구도시니까 헌금도 많이 안 했습니다. 그래서 헌금 이야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게도니아 교회는 가난했지만 많이 헌금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런 점에서도 인색했습니다. 잘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도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해서 이 마음속에서 그 모자라는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랑이 이 바울의 마음속에 불일 듯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사도의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잖아요. 섬기는 가운데 사도의 마음과 영혼 안에서 이러한 작용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며 궁금한 것은 어떻게 해서 그러면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은 같은 사람들을 오래 섬기다 보면 마음이 무디어지고 굳어지는데 어떻게 해서 이 사람은 고린도교회를 이렇게 섬기면서 그들의 악행과 못된 행실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을 향한 사랑이 친어머니처럼 이 가슴속에 절절이 베인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그 원인을 오늘 우리는 세 가지 단어에서 발견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환난과 애통과 눈물입니다. 먼저 이 뒤에 나오는 눈물이 바로 이 사도바울로 하여금 고린도교회 교인을 피같이 사랑하게 만들었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들의 못된 행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친어머니의 마음으로 사랑하도록 만들어준 것입니다. 이것이 눈물입니다. 그래서 이 눈물은 정말 고귀한 것입니다. 영화배우가 흘리는 거짓눈물 말고 우리 이기적인 사랑이 흘리는 욕정적인 눈물 말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흘리는 이 눈물은 고귀한 눈물입니다. 그래서 저는 눈물이 많은 성도들이 오래도록 방탕한 길을 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한 성도가 말씀을 듣든지 기도를 하든지 혹은 주님을 위해서 영혼을 섬기든지 그 어느 한순간에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분이 손에 붙여주신 영혼들에 대한 애정 때문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그 순간 그것은 성도의 지상생애에 있어서 가장 고결한 순간입니다. 오죽했으면 챨스스펄전 목사님은 자신의 설교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마른 눈을 가진 성도의 눈에는 하늘나라가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 세상의 욕망, 자기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영상이 맺혀지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한 지고지순의 사랑,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린 것입니다. 그것이 가려지니까 진리를 파악하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물은 그것을 닦아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눈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모본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눈물 흘리신 생애였습니다.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통곡하며 우신 장면이 두 번 나오고, 흐느끼면 눈물을 흘리신 장면이 한번 나옵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하나님 앞에 섬기면서 쏟아놓는 이 눈물은 섬기는 그 사람을 섬김 받는 사람보다 더 먼저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섬기면서 흘리는 이 뜨거운 눈물,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섬기면서 흘리는 뜨거운 눈물은 섬김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섬기는 자기 자신을 먼저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 고단한 섬김 속에서 누구도 적어내려 갈 수 없는 노역의 연대기적인 삶을 살면서 그 일속에 파묻히면서도 이렇게 막나가던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친어머니와 같은 깊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섬김이 눈물을 가진 섬김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눈물이 왜 흘러내렸는지 오늘 성경은 두 단어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환난과 그리고 또 하나는 애통이었습니다. 그는 환난을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성경에서 말하기를 그 환난도 큰 화난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1장 서두에 보면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당한 고생을 언급하면서 내가 너희가 우리들이 당한 이 고생을 모르기를 원치 아니한다. 그리고 환난과 큰 시련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그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자들같이 되었으니 이는 오직 하나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고백으로 이 유명한 서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환난은 사도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이었고, 애통은 사도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이 환난은 환경의 변화를 인해서 당하게 되는 큰 고통과 어려움이었습니다. 뜻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다면 환난이 일어날 때 그 물결에 떠밀리면 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화난은 그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바울이라는 배가 쪼개질 것 같은 커다란 압박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하면서 살면 형통한 길만 있다고 어떤 사람이 가르쳐주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순종하며 걸어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탄한 길을 주신다기 보다는 주님이 동행해주십니다. 순종하면 탄탄대로를 주신다기 보다는 주님이 우리를 인정해주셔서 우리 편이 되어주십니다. 그래서 환난을 만나면 그 환난을 극복할 지혜와 힘과 능력을 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말하기를 감당할 시험밖에는 당한 것이 없으니 그런 시련을 당할 때에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거나 피할 길을 내어주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많은 성도들, 뜻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주님의 길을 가려는 많은 성도들은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뜻을 세우고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섬기려 해보십시오. 그러면 얼마나 많은 환경들이 그렇게 섬길 수 없도록 자기를 방해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뜻을 세우고 주님을 섬겨보지 않았을 때에는 그까짓 것 뭐 그렇게 힘들겠나. 라고 생각하지만 뜻을 세우고 영혼을 섬기고, 교회를 섬겨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그렇게 하게 하지 못하는 많은 방해요인들이 매우 큰 힘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은 때때로 자기가 올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데도 이런 환난이 다가오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환난이 되어 다가오기도합니다. 바울이 그러한 두 종류의 환난을 모두 겪으며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 사도에게 이런 가슴 아픈 환난과 시련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1장에서 고백하는 바와 같이 자기를 전혀 의미하지 말고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셨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히려 바울은 성도를 섬기면서 봉사의 직무를 감당하면서 이런 큰 환난을 당했을 때에 그 환난 때문에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는 순수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어갈 수 있었습니다. 환난은 크고 자신은 약하니 마음이 굳어질 수가 없고,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모든 환난이 모든 섬기는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죠. 어떤 사람은 섬기다가 환난이 오기 때문에 마음이 굳어지고, 사명의 자리를 떠납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는 이 모든 환난을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환난을 당했을 때에 이 환난이 자기에게 미치게 된 영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모든 환난과 시련을 십자가 삼아서 짊어지고 예수 죽인 것을 자신의 몸에 짊어질 기회로 삼았더니 그의 마음에서 끊임없는 눈물이 흘러냈고, 그것이 사도의 마음을 점점 어린이처럼 순결하게 만들어서 오히려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진 것이 예수의 생명이 그 몸에 나타나게 되는 기회가 되었고, 그래서 결국은 예수의 흔적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 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위해 뜻을 세우면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괴롬과 죄만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그런 환난이 없으면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볼 수 없습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 세상의 향취를 좋아하고 죄와 부패에 젖은 몸인데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 섬기도록 뜻을 세울 때 순풍에 돛단 것 같으면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이 우리를 내버려두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인데도 예수님만 사랑하고,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돌아가 그분만을 섬기려 하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이 환난을 주십니다. 그래서 시련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즐거운 일을 많이 만나도 항상 그렇게 섬기며 살아가는 동안에 이 세상의 본질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얼마나 기뻐요. 자기가 사랑하는 양떼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오랫동안 나왔지만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지도 못한 살코기와 같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회심해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 그들이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사랑으로 자라가, 점점 어른스러운 성도들이 되어가요. 기뻐요? 안 기뻐요? 얼마나 기뻐요. 그래도 세상일뿐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괴롬과 죄만 있는 이 세상의 상태를 뒤엎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너희들이라.” 그랬잖아요. 그랬는데도 뭐라고 합니까. “나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내게는 더 좋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합하고 정말 잘 섬기려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환난을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영원한 자신의 위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셔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만 의지하게 하십니다.
폭풍우 흑암 속
헤치 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두 번째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이 그렇게 오랫동안 섬기면서도 그 마음이 굳어지지 아니하고 점점 더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마음에 애통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흘린 많은 눈물은 이 애통의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팔복 산에서 가르치시기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이 위로는 사람으로부터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내려오는 신적인 위로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서 비롯되는 위로입니다. 애통하는 자에게는 이런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이 애통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을 견지한 나머지 그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육적으로 고통스러워하며 애통하는 자기 사랑의 애통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런 사람은 위로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도가 여기에서 마음에 가득히 느꼈던 애통, 이 “큰” 이라고 하는 형용사는 두 단어 모두에 걸리는 것이니 그 가슴 속에 있었던 큰 애통,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그 견디기 힘든 커다란 애통은 바로 신령한 이유 때문에 느끼는 애통이었으니 자신의 부족과 지체들 속에 있는 죄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 보면 이 고린도교회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에 빠졌는지 심지어는 그 중에 아비의 아내를 여인으로 취하여 간통하는 사례까지 있었다고 하니 계모와 통간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바울의 귀에까지 들려오고 교회는 그런 사람을 대책 없이 내버려두고 많은 성도들이 그 행실을 당연히 생각한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사도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많은 주석 가들은 여기에서 이 애통함이 바로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쓸 때에 책망하게 만들었던 그 도덕적인 문제 때문에 느끼는 아픔이라고 해석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을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가 정말 유기적이고 영적인 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끔찍한 죄를 상상이나 했습니까. 그들이 죄를 짓도록 도와준 일이 있습니까. 그들의 죄에 참여했습니까. 바울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죄인데도 부족하지만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고, 자기와 한 지체이기 때문에 오늘 한 몸으로 사도가 이렇게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애통함이 바울로 하여금 많은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민족이 불쌍한 것은 힘이 없고 돈이 없어서 미국보다 작은 나라가 되고, 중국보다 작은 나라가 되어서 불쌍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이 민족을 위해서 울어주지 않기 때문에 불쌍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 그들이 회개를 안 해서 불쌍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서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불쌍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이 미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사셨고, 그렇게 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33년의 생애 특별히 공적인 부름을 받아서 사신 3년의 생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까지 그분의 가슴은 이런 영혼들에 대한 애통함으로 미어지는 가슴을 가지고 사신 생애였습니다. 그 마음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그 마음으로 주린 자를 먹이시고, 그 마음으로 무지한 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마음으로 이 동리, 저 동리를 다니며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교회가 이런 주님의 심정을 대신해서 이 땅에 있는 방황하는 수많은 양떼들, 유리하고 고통 하는 영혼들을 거두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 애통함이 있습니까? 정말 이 애통함이 있습니까? 그래서 이번 주간에 집회에 가서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애통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시선을 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아파하고 애통하는 사이에 그 간절한 애통의 이유를 신원해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마음 가지고 사는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엄청난 섬김 속에 자기를 소진했던 사람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거룩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죄악을 볼 때에 분노에 가득 찬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가 자신의 죄라고 느끼는 통절한 애통함이 그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우는 사람들을 위한 눈물이기도 했고, 울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대신 흘리는 눈물이기도 했습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그 눈물이 사도의 마음에 사랑을 영글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섬길수록 점점 사랑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섬기면서 영혼을 이렇게 사랑했습니까? 이렇게 마음속에 부실한 영혼들을 향한 애통함이 우리에게 있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그냥 일하도록 부름을 받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예수처럼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분의 마음을 먼저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말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이런 견디기 힘든 애통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고, 사랑의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애통함이 있습니까? 영혼을 향한 이러한 깊은 애통함, 큰 환난을 우리의 육체를 고달프게 하거니와 이러한 애통함은 우리의 마음을 녹이고 뼈를 부서뜨릴 정도로 우리를 깊이 찌릅니다. 우리를 애통하게 하는 이 뼈저린 통증은 죽음의 고통과 비견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이 뼈저린 고통, 죽음의 기운처럼 느껴지는 이 고통이 우리의 뼈 속을 파고들고, 우리의 심장을 관통하고, 우리의 핏줄을 통과하고, 우리의 신경 하나, 하나에 꽉 찹니다. 그 때에 우리도 알지 못했던 우리 안에 있는 이 탐욕적인 사랑, 예수 이외의 다른 것으로 만족하려고 하는 마음, 우리 안에 있는 이기적인 욕망과 그리고 육체에 대한 욕심들이 그 죽음의 기운에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눈물을 통해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사랑이 뼈 속 깊이 스며들었던 사람들이 그렇게 스며드는 애통하는 죽음의 기운을 통해서 모두 죽고 나니까 섬기면 섬길수록 강퍅해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영혼을 사랑하는 친어머니 같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우리가 양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섬기는지도 중요하지만 진짜로 섬기는 우리와 섬기는 우리의 마음, 그리고 섬김의 봉사까지 모두 하나님 앞에 연납될 만한 그런 종류의 양질의 섬김이 될 때에 하나님이 그 섬김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참아야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참아야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랬거든요. 그래서 거기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참는 것입니다 환난의 고통과 애통의 아픔을 모두 참으며 눈물을 쏟아내고, 그 속에서 그 눈물로 마음의 더러움을 닦고, 그리고 끊임없이 예수만 바라보고, 잠시 세상에 살면서 해할 길을 다가다가 눈물 흘림을 며칠을 더 당하고 행할 길을 다 가다가 끝 날에 나를 오라하실 때 영광 중에 나아가리라. 이런 고백을 가지고 매일 살아야합니다. 그 끊임없는 환난과 애통의 눈물 속에서 우리의 시민권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합니다. 그래서 항상 이 땅에 것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고정하고, 잠시 머문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도록 우리들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 또 참고, 인내하고 견디면서 그러면서 많은 눈물 속에 주님을 섬기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순전한 사랑의 사람들이 되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7.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길, 순종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1:22)
우리의 육신은 죄가 들어온 다음에 많이 약해지고, 그리고 처음 창조될 때에 아름다운, 그리고 영광스러운 기능을 많이 잃어버린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그 죄 때문에 죽음에 복종되고,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환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며 본래에 가지고 있었던 아름다운 기능들을 저해 받게 되었습니다. 원래 우리의 몸은 죄가 들어오지 아니하였더라면 불멸할 몸이었지만 죄가 들어오고 나서 우리의 육체는 많이 약하여지고 그리고 죽음과 변질에 종속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육체가 그런 연약함에 굴복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육체 자체는 부패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에서 물리적으로는 부패에 종속되지만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육체가 부패하였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육체가 아니라. 육체가 담고 있는 영혼이 오히려 더 문제가 되는 것이죠. 즉 부패한 삶은 부패한 육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영혼으로부터 나오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영혼이 부패하면 부패하게 기능이 육체를 지배해서 그래서 그 육체를 가지고 죄를 짓고, 악을 행하며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과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의 영혼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 하는 그것이 육체를 사용해서 우리의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간에 육체는 그 영혼에 종속되어서 그래서 그 영혼의 상태대로 부패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선한 행동을 하기도 하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이제껏 배워오고 또 성경에 자주 보면 “육신에지지 말고, 육신이 연약하여 육신의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이런 성경말씀도 많이 나오고, 또 우리가 그런 설교도 많이 들었는데 그러면 그것과 지금 육신은 영적으로 부패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이 말씀을 어떻게 연결시켜야합니까? 라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하나의 상징적인 말이죠. 그러니까 “너희가 육신에지지 말고” 하는 것은 육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 안에 있는 성향 중에서 부패하려는 성향이 바로 육신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죠. 육신으로 육신에지지 말고 영으로 육신을 이기자. 하면 우리 안에 편안하게 부패하고자 하는 성질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육신이라고 하는 말로 은유되고 있는데 그렇게 우리 안에 부패하려고 하는 그래서 부패한 대로 육신을 사용해서 부패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영혼 안에 있는 성향에지지 말고, 새롭게 되려는 성령의 성향이 이겨서 그래서 거룩함을 이루라는 그런 뜻입니다. 이처럼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에 대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믿기 전에는 모두다 영혼이 더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더러운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되면 영혼이 깨끗함을 얻게 되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서 죄를 용서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타락하고 부패하려는 마음의 성향을 하나님께서 쇄신시키셔서 그래서 우리 안에 성령을 따라 날마다 새로운 사람이 되어 가려고 하는 그런 성향을 우리 안에 심어놓으신다는 점에서 우리는 영혼이 깨끗하게 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주님이 단번에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셨어도 여전히 우리 안에는 이렇게 부패한 성품들이 남아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더럽게 한다고 하는 것이죠. 영혼이 그렇게 더러운 상태가 되면 그러면 우리의 삶이 당연히 더러운 삶이 되어서 우리의 몸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이죠.
여러분 더럽다는 뜻이 무슨 뜻 같습니까? 더럽다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뭐가 더러운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죠. 너무 기분나빠하지 말고, 제 이야기를 좀 들어보십시오. 지금 외국에서 부지런히 연구하고 있는 과학적 연구가 하나 있는데 식량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 식량문제를 효율적으로 연구하는데 그 동기는 뭐냐면 언젠가 이제 이 생태계가 많이 황폐해지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식량을 조달할 수 없을 때가 온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굶주림의 문제가 매우 심해질 것인데 그러면 그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그런데 똥을 사용해서 식품을 만드는 연구가 부지런히 일각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 학자들의 논리에 의하면 먹은 것 중에서 35% 정도만 체내에서 사용했고, 65%정도의 영양은 그냥 똥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똥을 제 처리를 해서 그래서 식품을 만들어서 다시 그 남은 그 65%의 영양분을 활용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아무리 싸도 먹고 싶은 마음은 없죠.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 더러운 데서 어떻게 그것을 먹느냐? 그러면 그 사람들은 그것이 왜 더럽냐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한번 여기 어린이 대공원에서 똥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그 대신 똥 전시회를 하면서 그 포스터에 사람들을 똥 보러 오라고 포스터에 초청을 하면서 뭐라고 케치프레이를 하느냐면 “똥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생각에 똥 침을 박아주마” 그리고 똥 전시회를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장에 혹시 어떤 분들은 복숭아 같은 것에 대해서 엄청난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 있죠? 심한 사람은 복숭아 생각만 해도 두드러기가 돋기 시작합니다. 그 털이 닿으면 말할 것도 없고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 복숭아가 더 더러울까요? 아니면 어린 아이들이 눈 똥이 더 더러울까요? 그렇죠. 벌써 논리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기준은 없습니다. 똥은 옆에 있어도 문제가 없는데 복숭아만 있으면 이것은 큰 일 나는 것입니다. 피부과에 가야하니까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도지면서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도 미추의 문제도 기준이 정해지지 않으면 누구도 뭐는 더럽고 뭐는 아름답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럽다. 라고 하는 의미는 이 성경적으로 보면 이 더럽다. 특별히 어떤 도덕적인 것들에 대해서 말할 때 “더럽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정해준 자리를 이탈한 것은 다 더러운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거기에 있는 것 그것이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자신도 주위에서 사람들을 보면서 많이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있는 은혜 많이 받은 성도가 언제 제일 아름다운지 생각해보세요. 돈 많이 벌었을 때, 아니면 능력 있는 남자에게 시집갔을 때? 그런 것 아니죠. 그가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거기에 서 있을 때 너무 빛나고 아름다워요.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그 사람이 거기를 이탈해요. 돈도 많아졌고, 지위도 높아지고, 얼굴도 화장품 많이 발라서 예뻐졌어요. 그런데 예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있어야 될 상태와 자리에서 이탈했을 때 더러운 것이 됩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들이 예뻐요? 더러워요? 예쁘잖아요. 그런데 제가 방배동 지하 예배당에 있을 때 그 때도 목양 실이 조그마한 것이 하나 있었거든요. 그런데 거기에서 막 글을 쓰고 있는데 참새가 한마디 날아 들어왔습니다. 환기통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차라리 쥐가 나아요. 책꽂이 뒤에 떨어져서 퍼덕퍼덕 하는데 정말 소름끼쳐요. 지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너무너무 싫어요. 그 때도 책이 많았기 때문에 책꽂이를 전부다 나사못으로 연결해서 흔들리지 않게 했는데 할 수 없이 그것을 다 뜯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새를 꺼내서 나는 안 만지고 누가 해줘서 밖으로 날려 보내고 그리고도 지워지지가 않아서 걸레질 하고 그다음에 청소기 돌리고 생난리를 했습니다. 그 때 생각한 것이 뭐냐면 야, 이것이 더러운 것이구나. 오늘 영혼이 더럽다. 그래요. 어떻게 영혼이 더러워져요. 영혼에 똥을 바를까요. 하나는 물질이고, 하나는 영적인 것인데 그것이 발라지겠습니까? 그렇다면 뭐가 더러운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셨을 때, 또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을 때 만들어 놓은 그 영혼의 상태에서 변질되고 이탈된 것, 그것은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러운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서 더러운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삶을 눈여겨서 잘 보면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잘 알 수 있는 것이죠. 또 어떤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영혼의 상태는 더러운데 그 더러운 것이 아직 밖으로 안 흘러나왔어요. 그래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분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죠. 그러니까 이렇게 영혼이 더러운 상태에 이르게 될 때가 우리 많이 있는 것이죠. 이러한 영혼의 상태가 더러워질 때 이 영혼의 상태를 깨끗케 하는 방법이 무엇이겠느냐? 이거죠. 우선 방법이 무엇 이느냐를 따지기 전에 그러면 그렇게 깨끗한 상태가 된다.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영혼이 원래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셨을 때 그 최초의 회심의 상태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주셨을 때에 우리를 그 상태로 돌아가게 만들어주셨던 그 영혼의 좋은 상태,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자리와 위치를 지키고,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그 상태로 돌아가는 것, 그러면 깨끗해지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뭐냐면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회개할 때 영혼이 깨끗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잖아요. 그렇죠. 우리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큰 축복이 뭐냐면 무한한 용서의 약속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의 약속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누리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깨달았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돈이나, 쌀, 명예, 이런 것들을 통해서 물질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이 최고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던 동기는 죄 가운데서 자신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높은 수준에까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죄의 용서가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합니다. 심리적으로도 마찬가지죠. 우리 자신이 불순종하고 은혜가 떨어져서 죄 가운데 있을 때는 어느 순간에 우리들이 자신이 불결하다. 라고 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깊이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고 통회하고 나면 그다음에 자기 자신이 깨끗해졌다. 라고 하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깊은 회개와 그리고 이에 따른 하나님의 용서, 이에 따른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은 우리의 영혼의 더러움을 제하여 깨끗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회개가 가지고 있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 되면 우리들이 마음이 변질 되었던 마음이 다시 전일성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처음 만드셨을 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안전한 것은 아니지만 언제든지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지만 변질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죠. 그러니까 무로부터 창조된 모든 것들은 원래는 전일성을 가지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부패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로부터 창조된 모든 것은 원래의 전일성, 즉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그것이, 그것인 것, 설명 몇 번 드렸죠. 물이 제일 좋은 물은 어떤 물입니까? 물에다 무슨 미원 타고 설탕타고 이런 물이 좋은 물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물 인것, 그것을 우리들이 제일 좋은 물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바로 전일성으로 꽉 찬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이 좋으실까?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사람인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제일 좋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을 때는 각각이 다 그랬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사람이었습니다. 그다음에 별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별이었습니다. 물은 그냥 물이었습니다. 산은 산이었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먼저 다 해주신 말씀입니다. 놀라운 것입니다. 물은 물일 때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산은 처음부터 끝까지 산일 때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일 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다 무로부터 창조되었죠. 무로부터 창조된 것은 처음에 아무리 그렇게 그 자체가 꽉 찬 전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굴복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에는 이 현상이 더 심각하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깊이 회개하게 하시면 그러면 이 신자의 영혼 안에 있던 영혼이 아닌 것,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제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야기 하면 더 많이 나가지만 오늘은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이것에 제거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원래에 하나님이 그렇게 그것이 그것인 것으로 창조된 것들이 죄로 인해서 다 망가졌는데 우리 영혼도 똑같이 그렇게 망가진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전일성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꾸 부패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이 더러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상태와 위치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이런 것들을 깨끗하게 씻어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해 줍니다. 회개를 안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회개를 안 하면 계속 나빠지기만 할 뿐이고 원상태로 돌아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는 전체가 다 부패해서 그래서 온통 그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살려고 하는 그런 결과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언제나 이렇게 영혼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여기에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해서 오늘도 그런 삶을 살아가라는 법은 없습니다. 회개하고 영혼이 깨끗해지면 예전에는 더러운 영혼이었기 때문에 더러운 삶을 살았지만 이제 그 영혼이 깨끗하게 되면 그 깨끗한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순전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아무리 흉악하고, 더러운 죄인이라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그 영혼을 정결하고 깨끗하게 씻으시면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다시 정결하고 깨끗한 삶을 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신자에게는 수시로 재생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새로운 삶을 살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자주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회개하는 사람들은 조금 부패하다가 다시 회복되고, 조금 이탈했다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회개를 늘 자주하는 사람은 회개하기도 쉬워요.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늘 회개할 때는 회개가 잘 되어요. 조금 잘못해도 아침에 조금 잘못했는데 밤이면 반드시 회개를 하게 되요. 또 저녁 때 잘못했는데 그날 밤에는 그냥 잤더라도 새벽에 나오면 회개가 되요. 그런데 이제 회개를 안 하잖아요. 그러면 회개가 잘 안 돼요. 회개를 자기도 굉장히 하고 싶은데 하고 싶어도 안 돼요. 그래서 어떤 때에는 회개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자기가 흉내를 내보기도 하거든요. 인상을 써보기도 하고 가슴을 쳐보기도 하고, 그다음에 우는 소리를 내보기도 하는데 그게 모두 외모로는 그렇게 되는데 중심 속으로 그것이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너무 많이 왔어요. 돌아가기가 힘든 것입니다. 변질이 조금 되었으면 다시 회복되기가 쉬운데 많이 변질 되었어요. 그래서 다시 돌아가기가 힘든 것입니다. 여러분, 몸의 상처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냐면 조금 상처가 나면 사실 불순물만 안 들어가게 소독만 해 줘도 아물어요. 그런데 너무 많이 심하게 상처가 나게 되면 그러면 자력으로 그것이 회복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죠. 그런 이치입니다. 그래서 늘 자주 회개하는 사람들은 조금 변질하다가는 다시 전일성을 회복하고, 조금 이탈했다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늘 조금 변질 되고도 하나님 앞에 가슴 아파하고, 자기 자리를 살짝 이탈했는데도 너무 죄송스러워하면서 회개를 하는 사람들은 늘 애통하면서 살아야 되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는 사람들이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영혼의 깨끗함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회개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데 있어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나오는 것이 뭐냐면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을 깨끗케 하여” 그랬잖아요. 진리에 대한 신자의 순종이 그의 영혼을 깨끗하게 한다는 교리를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본문을 오늘 다 설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간략히 요약하자면 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또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이 진리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영혼이 깨끗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우리들은 회개를 하는 것이 영혼이 깨끗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하는 것만 깨달았지 실제로 순종하는 삶이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한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많이 생각해보지 않은 교리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시간에 어떤 식으로 순종이 우리의 영혼에 작용하여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자가 순종하는 것은 무엇을 가지고 순종하는 것일까요? 신자가 물론 말씀을 가지고 순종하죠. 그런데 말씀이 아무리 그에게 제시되고, 또 그에게 깨달음까지 주었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가 없으면 순종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죠. 그래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그에게 제시되고, 그래서 지성으로 그것을 인식해요. 아, 하나님의 진리가 이것이구나. 지금 나에게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살지 말고, 저렇게 살라고 명령하시는구나. 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하여 가지고 계신 뜻과 의지를 깨닫게 되죠. 그러니까 말씀을 많이 들어야합니다. 말씀대로 다 살지 않아도 하여튼 말씀을 많이 듣고 들을 때 마다 그 말씀을 잘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영혼을 깨끗하게 할 순종에 이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쨌든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태까지 무관심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의지와 그 뜻을 진리를 통해 깨닫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나는 여태까지 이렇게 살아왔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살면 안 되고, 저렇게 살아라. 고 말씀하시는구나. 하는 그런 진리를 내가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 진리를 깊이 깨닫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요. 이것이 순종보다 먼저 오는 것입니다. 그 은혜는 구원에 관련지어서 볼 때는 이미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고, 그렇죠? 왜냐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기를 바라고 계시니까 성령님이 그리도 또 성화의 측면에서 보면 내가 그 말씀을 깨달을 때 하나님이 이미 내 안에 그런 은혜를 성령님을 통해 주셨지만 또 다른 은혜를 나에게 주시죠. 그래서 나로 하여금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고 저렇게 살아야 되겠구나. 하는 그 뜻만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내 마음에 은혜를 주셔서 그렇게 거기에 순종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를 움직입니다. 우리를 움직일 때 우리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깨닫게 해주신 뜻을 따라서 내가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 라고 아멘. 하고 순종을 하려고 할 때 우리들이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람이 순종하고도 자기를 자랑할 수 없는 것은 순종에 앞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고, 또 누구도 자신이 불순종하고 나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위해 역사하지 않았다. 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깨닫게 하고 은혜를 주셔도 자신이 진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선한 의지가 없으면 순종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면 보석처럼 소중한 것이 뭐냐면 선한의지 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세상을 창조하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래서 내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드리고 싶다. 라고 하는 이 착한 의지가 바로 선한 의지입니다. 이 선한 의지가 인간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보석처럼 소중한 것이고, 그 선한 의지가 그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만들고, 그 선한 의지가 결핍되었을 때 그 사람이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선한 의지가 그 사람 안에 간직되고 있을 때 그를 선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이 선한 의지가 결핍되었을 때 그 사람을 악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그것이 아니라. 목사님 선한 사람은 선한의지를 품고 있고, 악한 사람은 악한 의지를 품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악한 의지라는 것 자체가 선한 의지가 빠진 것만큼 악한 의지가 되는 것이지 또 다른 것이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을 향해서 신실한 신자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온전한 이 영혼의 선한 상태가 모자라면 모자랄수록 그 모자란 부분은 악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비유가 막 생각났습니다. 여기를 어둡고 캄캄하게 하고 싶어요. 그러면 캄캄하게 하는 무엇을 가지고 들어와야 할까요? 그것이 아니라. 불을 끄면 캄캄해지는 것이죠. 그리고 불을 켜면 캄캄한 것은 사라져요. 그러니까 캄캄하다. 라고 하는 것은 어두움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사라지면 있지만 빛이 있으면 없어지는 것입니다. 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이 실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선한 의지가 빠져나가면 그러면 어둠처럼 악이 들어오는 것이고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하고, 마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는 마음이 꽉 차게 되면 악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선한 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또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아이, 목사님 오늘 설교를 헛갈립니다. 언제는 또 지성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그러시더니 또 이제 와서는 갑자기 의지가 제일 중요다고 그러니 이게 지금 강조하시는 것입니까?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가 지성만 중요하다고 그랬겠습니까. 정서도 중요하다고 했지.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속된 사랑으로 꽉 차 있으면 속된 삶을 살아요. 신령한 것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차 있으면 신령한 삶을 살아요. 뭐는 안 중요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에는 한번 의지를 한번 강조해보자.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잘 들으세요. 지성을 통해서 무엇인가 진리를 깨달으면 이것이 중요해서 왜 그렇게 중요하냐면 이것을 통해서 의지가 빚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성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한 이유가 뭐냐면 한번에 의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통해서 타고 들어와서 그 생각의 손길을 어루만져서 의지가 빚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전히 이것이 중요한 것이죠. 그런데 마지막에 실제적으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 그리고 남는 것이 뭐냐면 의지가 남는 것입니다.
자, 좋은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둘 다 엄청나게 가난하고 빚에 쪼들려서 돈 때문에 둘이 다 죽어버릴까 라고 생각할 정도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둘이 같이 벤치에 앉았는데 똑같이 유혹을 받았는데 뭐냐면 돈 꾸러미 두개가 앞에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둘이 다 똑같이 유혹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은 훔쳐가지고 가고 한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가서 경찰서에 신고를 했습니다. 한 사람은 죄를 지었고, 한 사람은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의지의 문제입니다. 한 사람은 그렇게 유혹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그 돈이 너무 필요한데도 이 속에 유혹도 받았어요. 유혹을 받으니까 어떻게 되요? 가지고 가라고 의지에게 지성이 조르는 것입니다. 빨리 가지고 가라, 그러면 너 먹고 살수도 있고, 그렇게 괴로운 것도 끝난다. 그리고 막 의지를 향해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냐면 “나는 그럴 수 없어. 주님을 믿는 사람인데” 그래서 범죄를 안 했어요. 또 다른 사람은 똑같이 그렇게 막 받은 것입니다. 유혹을 받은 정도도 똑같다고 가정을 합시다. 막 받았어요. 얼른 주워서 주머니에 넣고 도망갔어요. 누가 한 것입니까? 그 사람 자신의 의지가 그것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우리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는가? 우리는 뭐 환경이 어쩌고, 유혹이 심하고, 나도 어쩔 수 없고, 그것은 다 핑계입니다. 마지막에는 그 의지가 그 모든 일의 장본인 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은 선한 의지를 끝까지 고통을 받으면서도 간직한 것입니다. 그 선한 의지는 이전에 깨달은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빚어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똑같이 유혹을 받았는데 한 사람은 그것을 꼭 지킨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그 사람은 공격을 받을 때 지키지를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순간에 그 선한 의지가 뭉그러지면서 그러면서 결국은 악을 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한 의지가 없으면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선한 의지가 없어도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진정한 순종이 아니라. 외식으로서의 순종입니다. 즉 무슨 뜻이냐면 성도의 공적인 의무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과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마음 깊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선한 의지가 없어도 주일날 교회에 나올 수 있고 예배는 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 사람이 주일을 지킨 사람이고 예배에 참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수준만큼 마음을 다 드려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예배를 드릴 때에 단지 참석이 아니라. 마음을 다 드려서 하나님께로부터 그 예배를 통해 내려오는 은혜를 자신의 영혼 속에 깊이 흡수하는 이것은 불가능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께서 순종이라고 보시느냐하면 그것을 순종으로 보시지 않는 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선한 의지가 없으면 순종할 수 없고 기껏해야 순종하는 것처럼 흉내를 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 선한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고, 그 선한 의지를 잘 지켜서 순종하면 순종하는 그 순종을 통해서 영혼이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잘 안 해 보셨겠지만 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의 경험을 잘 떠올려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을 입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혹을 받을 수 있죠. 어떤 성적인 욕망으로 자신이 더러워지는 유혹을 받든지, 아니면 물질에 대한 어떤 탐심 때문에 유혹을 받든지. 혹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안 하려고 상당히 마음이 기울어지다가 어떤 계기가 있어서 전적으로 그것을 포기하고, 그리고 자기가 힘들어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되겠다. 라고 결단을 내린 적이 여러분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이렇게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으십니까? 받죠. 유혹을 받을 때는 자신이 막 혼란스럽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는데 딱 뿌리치고 나면 이상하게 하나님께 놀랍게 가까이 다가가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이러한 교리에서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문제를 회개를 통해서만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선한 의지를 부패하게 내버려 뒀다가 다음 사경회 때 끝장을 한번 보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는 사경회인데 그 기다리는 의미가 달라요. 물론 이제 은혜는 받아야 되겠다고 그러기는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것을 좋게 보시지 않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그 자체 안에 소명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은혜를 받았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살아야 되거든요. 안 살고, 그냥 있다가 나중에 한번에 회개하고 그러면 다시 깨끗해 질것이다. 또 성경에도 나오잖아요. 죄가 많이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정말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하나님 앞에 늘 자기 깨어짐 속에서 우리들이 뉘우치면서 회개를 함으로서 우리들이 영혼이 깨끗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잘 되려면 삶의 순종도 같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이제 그런 회개와 그다음에 이 선한 의지, 그리고 순종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회개를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죠. 회개는 깊이 했는데 그래서 진심으로 자신이 깨뜨려졌는데 은혜는 없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회개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력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게 되면 복원되는 것이 무엇이냐면 선한 의지가 복원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자기가 깊이 깨뜨려지고 아주 진심으로 회개를 했는데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회개했는데 딱 눈물을 씻으면서 “나 이제 죄 지으러 가자.” 이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크고 작은 회개를 하고 나면 항상 그 신자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하는 선한 의지가 복원이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죄로 인해서 영혼이 더러워지고 부패해서 그래서 이것들이 상해졌어요. 상했었는데 이것이 회개하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니까 선한 의지가 다시 복원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복원된 다음에 이것을 잘 간직하고 살아야지만 그 선한 의지를 활용해서 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궁극적인 회개의 열매거든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계획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선한 의지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영혼이 부패해지기 쉬운 것처럼 똑같이 그 영향을 받는 이 선한 의지도 시시각각으로 상하고 부패해지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선한 의지를 자기 자신이 잘 간직하고 은혜에 의해서 회복된 선한 의지의 선한 상태를 보존하기를 힘써야합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금방 미끄러지고 타락하고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패한다. 라고 하는 것은 이 결국은 영혼이 부패하는 것이고, 영혼의 부패는 의지의 타락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상당한 자연복원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지나다니다가 콱 긁혀서 못 같은 데 긁혀서 살이 뚝 떨어져 나가고, 피가 막 낭자하게 흘러도 그래도 이렇게 잘 씻고, 그리고 약 좀 이렇게 바르면 괜찮습니다. 다시 복원됩니다. 괜찮아요. 안 죽습니다. 심지어 이것을 잘라내도 안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골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골은 연 두부처럼 되었는데 그것 한 숟가락만 떠내어도 죽는 것입니다. 죽거나 아니면 바보가 되거나, 아니면 병신이 되거나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연 두부 같은 골을 이렇게 딱딱한 케이스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다가 벽에 부딪혀서 쾅 소리가 나고 별까지 번적이는데도 이 순 두부는 안 상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것이 뚜껑이 열려서 여기 연 두부가 이렇게 되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새가 날아가다가 똥만 싸도 그 사람은 죽어요. 하나님의 경륜이 놀랍잖아요. 왜 그 순 부두를 여기에다 가슴처럼 달아놓지 않으셨을까요? 지나가다 툭 치면 죽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뭐 하나 쿡 찔리면 헛소리 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단단한 케이스에다 집어 넣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한 의지가 바로 그렇게 강하면서도 또 부패하기 쉬운 연약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은혜 받고 눈물을 펑펑 흘리고 “그래 진짜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그리고 갔는데 집에 가면서 우리의 마음이 많이 유혹을 받고 근심에 휘둘리고 하면서 다시 주일이 되기 전에 곤고해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수요일 날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내 마음 속에 있었던 그 선한 의지가 감퇴되는 것을 우리들이 경험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잘 보존하고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기는 하지만 우리들이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서만 이것은 지켜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리가 성립하느냐면 하나님은 가치 있는 사람이 자신의 선한 의지를 보존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보호해주신다는 교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 선한 의지를 끝까지 간직하고 살아야 되겠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애쓸 때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그 선한 의지를 보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을 깨닫고 교리적으로 탁월하게 정리된 것 너무 귀합니다. 그리고 생애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의 체험을 가지고 있어서 은혜의 세계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요. 최고입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명백한 소명을 경험했고,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소중하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가 없으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선한 의지가 없으면 나머지는 모두 부끄러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많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그 진리에 대한 심오한 세계를 하나님이 경험하게 해주셨어요. 저 사람만큼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한 탁월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어요. 지식도 놀라워요. 하나님도 수없이 만났어요. 그런데 선한 의지가 없어요. 의지가 악해요.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실 때 더 더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은 무지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요. 하나님을 못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요. 은혜의 세계를 모르니까. 그렇게 살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다 알고, 다 경험했고, 다 맛보았고, 다 이해하고 있어요. 그러니 선한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이제 말씀을 듣고 회개를 합니다. 사경회를 해서 은혜를 받아요. 마지막에 남는 것은 뭐냐면 지성의 빛을 통해서 하나님이 많은 것을 깨닫게 하셨지만 이것들은 수단일 뿐이고, 이것들이 마지막에 빚어서 우리의 가슴에 딱 남겨주는 것이 뭐냐면 선한 의지를 남겨주는 것입니다. 다 망가졌던 것을 다시 선한 의지를 다시 탄탄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이 순 두부 같은 골이 이 케이스 속에 들어가 있듯이 자기가 그것을 보호하고 이것을 어떤 일이 있어도 안 빼앗기고 잘 지키려고 그렇게 해야지 그렇게 말랑말랑하고 얼마든지 상할 수 있는 그것을 뚜껑 열어 놓고 그냥 들고 다닙니다.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도 몇 달 후에는 아주 부패한 사람이 되어서 있는 것입니다. 회개한다고 하고 막 가요. 그리고 또 받으면 또 그러고 말이죠. 그것이 반복이 되면 나중에는 회개 자체가 힘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우리의 삶을 곰곰이 살펴보세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선한 의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왔습니다. 은혜 받으면 항상 어떤 마음이 생기느냐면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한 의지가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래서 어떻게 해요. 말씀의 밝은 빛이 계속 필요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부어지는 것이 계속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자원으로 받아서 마지막에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를 간직하는 것입니다. 선한 의지를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얼마나 공격을 받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유혹이 오죠. 그래서 하나님 말고도 즐거움의 원천이 또 있을 수 있다고 우리에게 유혹하죠. 그래서 거짓된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어서 거짓된 즐거움에 빠지게 하죠. 그뿐만 아니죠. 또 시험이 오죠. 염려가 생기죠. 염려로 말미암아 마음이 갈라져서 썩은 물이 스며들어서 우리의 연 두부 같은 선한 의지를 부패시켜요. 그뿐만이 아니죠. 때로는 고난이 오죠. 막 고난이 옵니다. 우리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괴로움이 심하고, 그것이 아무리 올바른 일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라도 고난이 많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경건으로 그 고난을 소화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그러면 우리의 선한 의지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사는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이 미끄러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그런 거잖아요. 고난이 너무 커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선한 의지가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많이 우리의 선한 의지를 지키고, 그래서 진리에 순종하려고 애를 써야 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요즘 한 둬 주 동안 미국에 가 있는데 둘째 날인가 집회를 하는데 성가대의 찬양을 듣고 제가 그렇게 많이 울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 성가대가 찬양을 부르는데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그 소망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어둠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그 “때로는 넘어져도.” 넘어질 때 있죠.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맞다. 내가 선한 의지를 버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나를 이 깊은 유혹의 계곡, 시련의 바다 한 가운데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주님이 나를 지켜 주실 거야 그러면서 그 소망 더욱 굳세어라. 주가 지켜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성도들, 믿음으로 살았던 모든 성도들 중에는 우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알았던 성도들도 있습니다.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보다 더 몰랐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들은 훌륭한 성도가 될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보다 말씀을 더 많이 깨닫고, 은혜의 세계를 더 많이 보았는데도 훨씬 그 사람만 못한 신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까요? 차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주신 선한 의지를 한 사람은 잘 지키면서 날마다 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영혼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했고, 어떤 사람은 많은 지식의 말씀과 은혜의 세계에 대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새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를 간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미끄러짐은 누구에게도 핑계를 댈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미끄러진 것입니다. 마지막에 그 선택은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저는 이 말씀이 오늘 우리 교회에 있는 여러분들이 꼭 가슴에 새겨야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예전에 주님이 은혜를 많이 주신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특별히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정말 특별히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선한 의지가 있나요? 물론 여러분들은 많이 얘기하시고 싶을 것입니다.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물질 문제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주위에 있는 누가 나를 심히 열 받게 했습니다. 가정에 문제들이 계속 꼬였습니다. 몸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리고 내게 있는 많은 결점과 약점들 때문에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할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하면서 살지 않을 때에 주님이 아무리 큰 은혜를 통해서 놀라운 선한 의지를 여러분 속에 다시 만들어주셨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지키고 간직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생애적인 회개를 해서 한번에 끝장을 보려고 그런 생각 하시지 마시고, 오늘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가도 여러분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선한 의지가 생겨날 것입니다. 주시지 않은 선한 의지는 보존을 못한다 할지라도 주신 선한 의지라도 보존하세요.
추운 겨울에 모닥불을 피울 때에 어떻게 피우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피우지 않습니다. 조그만 성냥개비 같은 그러한 나무들을 갖다놓고 불을 붙이고 그 위에 솔가지를 놓고 작은 가지를 차곡차곡 놓으면서 불을 붙여서 나중에 커다란 장작을 올려놓고 불을 피웁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회복시켜주시는 그 작은 선한 의지가 작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불씨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키려고 해야 합니다. 마지막에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갔을 때 “내가 너에게 많은 은혜를 주고, 그리고 수시로 너에게 선한 의지를 회복시켰는데 왜 이렇게 나를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살았느냐? 왜 이렇게 불순종했느냐?” 이렇게 물으실 때에 “하나님 제가 너무 힘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돈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고생할 일들이 너무 많이 생겨서 그랬습니다. 주위의 어떤 사람들이 나를 열 받게 해서 그랬습니다.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엄마는 나만 미워했습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그런 변명에 귀 기울이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마치 하와가 자기의 의지로 선악과를 따 먹고 뱀 때문에 자기도 피해를 받은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 변명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선한 의지를 깊이 간직하세요. 그것이 여러분들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여러분들이 예전에 쓰레기 같은 죄인들이었고, 정말 부랑아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지금 선한 의지를 간직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정말 귀하게 보십니다. 그리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유명한 사람이 아니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너무 사랑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런 선한 의지를 간직하고 순종함으로 매일, 매일 영혼이 깨끗하게 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넘친다고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정말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8. 지식과 은혜
성경말씀: 사도행전 18:24-26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행18:24-26)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아볼로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후일 사도바울과 함께 고린도교회를 섬기기도 했고 그래서 고린도교회는 아볼로파 라고 하는 무리들이 생겨날 정도로 그렇게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입니다. 파를 만든 것이 잘 한 것이 아니지만 어쨌든지 영향력을 그렇게 끼쳤다는 것은 우리들이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라는 곳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습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지방에서 태어났는데 당신에 이 알렉산드리아는 헬라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로마제국 이전인 희랍의 즉, 헬라의 알렉산더 대제가 이 그리스에 있는 문화를 창달하기 위해서 북아프리카에다 도시 하나를 세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커다란 도서관도 있었고, 여기에서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통용하던 만국 공용 어인 히랍어로 번역하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번역된 히랍어 구약성경을 가리켜서 70인 역 이라고 부릅니다. 7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이제 왕실의 제정 적 지원을 받으면서 히랍어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 바벨론 포로시대 때에 흩어져 살게 된 모든 유대인들 중에서 태어난 후손들이 이제 히브리어를 못하는 후손들이 많이 태어나게 되었고, 그들이 사용하고 있던 만국 공용어인 히랍어로 번역을 해서 읽혀야 할 유대인들의 필요와 또 그런 계기를 통해서 헬라의 문화를 모든 이방 사람들에게 널리 선향 하고자 하는 히랍의 그리스의 문화정책과 함께 맞물려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실 역설적으로 볼 때에 알렉산드리아는 그런 아주 유서 깊은 그런 학문과 학예의 도시였습니다. 거기에서 태어난 유대인 중에 아볼로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오늘 설명하기를 이 사람은 학문이 뛰어나고 또 성경에 아주 능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도를 잘 깨달은 사람이었고, 일찍부터 하나님의 도를 제대로 배운 사람이었고, 또 열성을 가지고 그것을 정확하게 전파하던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제 예수에 관한 것을 전하는 것을 듣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사도바울의 동역 자들이 그 사람을 보고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느껴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도를 잘 풀어서 그에게 가르쳐 주었더니 그가 많은 것을 배우게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역사하는 훌륭한 말씀 사역자가 되었다. 라는 이야기를 우리가 읽은 그 성경 구절과 그 뒤편에서 이 모든 것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두 시간에 걸쳐서 이 본문과 다음 본문을 시간이 되면 두 시간 안에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다루게 될 중요한 주제는 우리가 이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연구하고 깨닫는 것과 그다음에 성령을 통한 은혜로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들을 살펴보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이성적으로 이런 모든 것들에 관한 생각들을 정리해서 지식과 체험 사이에 있는 관계들이 우리들이 논구해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 아볼로에 대해서 첫 번째로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학문에 능한 사람이다. 그랬는데 히랍어 원문에 보면 학문들에 능한 사람이라. 이렇게 번역될 수도 있고, 말들에 능한 사람이다.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뭐라고 했느냐면 말들이 많고, 혹은 학문들이 많고,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이 사람은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말이라기보다는 학문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단수도 아니고 복수가 되어서 학문들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도시 자체가 학문의 도시였기 때문에 아마 거기에서 풍부한 지적 자양분을 섭취하면서 수많은 학문들, 그래서 인간의 지성의 세계를 다루는 많은 학문과 지혜들에 대해서 아주 깊은 학식을 가진 그런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이죠. 그가 그런 학문의 지혜. 이런 것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또 두 번째는 성경에 아주 능한 사람이었다고 그렇게 오늘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학문에 능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학문에 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성경을 능숙하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도움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죠.
여기에서 이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학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그런 학문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학문은 이성의 기능을 활용해서 그것을 가지고 이치를 탐구하고 논구해 가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학문이 세워지고 또 학문을 배우는 사람도 똑같이 그런 지성을 활용해서 이성적으로 그것을 탐구함으로 학문을 전수받게 되는 것이죠. 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록해주신 이 계시의 말씀인 성경책을 이해하는 것도 그 사람이 얼마만한 지성의 그릇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이 성경에 대한 이해가 좌우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성경말씀 자체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지만 그 계시의 말씀이 기록될 때에는 아무렇게나 기록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 주신 그 계시를 인간의 이성을 사용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 중에 인간을 매우 특별한 이성을 가진 피조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제일 하등한 것은 존재만 있을 뿐 생각하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 스스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그냥 생명이 있을 뿐 생각하거나 이러지는 못하는 것, 풀 같은 것 화초 세 번째는 생명이 있어서 움직일 뿐만 아니라 감각기관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느끼는 것, 동물 같은 것, 그다음에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피조물이 이성을 가지고 있어서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감각기관을 가지고 감각할 수 있고, 그리고 또 사물이 무엇인지를 식별하고, 인식할 수 있고, 그것을 지성으로 판단할 수도 있고 나아가서 사랑할 수도 있는 그러한 능력을 함께 가지고 있는 피조물이 인간과 천사입니다. 인간과 천사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맨 위에서부터 하나 둘 셋 넷 차례로 되어 있는데 이 모든 피조물들이 각각 위에 있는 피조물들을 위해서 봉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가장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이 만약에 뒤집히게 되면 우리들이 굉장히 마음에 거부감을 갖게 되고 말할 수 없는 두려움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풀을 뜯어먹는 양떼들. 그림이 좋아요? 나빠요? 좋죠. 동물을 잡아먹는 식인 나무. 동물을 잡아먹으면 식인이 아니지. 식 동 인가 어쨌든지 그런 것 있잖아요. 곤충을 잡아먹는 것 같은 식물, 그런데 만약에 그런 식물이 실제로 언젠가 곤충보다도 훨씬 큰 동물들을 잡아먹는 그런 식물들도 있다고 해요. 들쥐나. 이런 정도겠죠. 그런 것은 어떻게 생각해요. 환타지아 같은 것에 나오잖아요. 식물이 코끼리를 잡아서 뜯어먹는다.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이지만 혹시 그런 것이 있다고 한다면 굉장히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입니다. 인간이 타고 다니는 말. 이상해요? 안 이상해요? 이상할 것이 없죠. 그런데 사람을 타고 다니는 말. 썰렁하죠. 그다음에 소를 잡아서 맛있게 요리해 먹는 인간. 불쾌해요. 불쾌하면 갈비집 장사가 안 되죠. 그런데 인간을 방금 짐승이 뜯어먹었다. 그러면 굉장히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죠. 이런 인식은 인간이 최고다. 라고 하는 자만심에서 비롯된 그런 인식이 아닙니다. 불교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질서입니다. 하위의 피조물이 상위의 피조물을 이렇게 섬김으로서 쭉 만물의 질서들이 올바르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학문은 바로인간에게 주신 이 시성을 사용해서 학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학문을 많이 하게 되면 학문 자체에 대한 지식을 가질 뿐만 아니라. 학문을 공부해가는 가운데 학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이성의 능력이 증대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성의 능력이 증대되면 성경을 볼 때에 계시의 많은 분량을 담을 수 있는 지적인 그릇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신학교 다닐 때 어느 교수님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 어머님이 아주 연로하셔서 수 백 번도 더 보셨다. 그러나 자신은 지금 신학자이지만 성경을 어머니만큼 많이 읽지도 못했는데 그 어머니가 항상 성경이 무슨 뜻이냐고 자기에게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어머니는 그렇게 수도 없이 성경을 읽었는데 성경을 많이 읽지 못한 아들에게 늘 물어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신학 박사이기 때문에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비록 어머니만큼 읽지는 못했지만 아들은 어머니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해서 이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엄마가 백 번 읽은 것보다도 아들이 한번 읽었을 때 더 깨닫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성경을 물어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볼로는 그렇게 학문을 출중하게 많이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이성의 그릇에 성경 잘 배워서 그 성경에 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 전체 속에서 성경에 능한 자라고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에스라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는데 율법에 능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성경을 보통 달통하지 않으면 쓰지 않는 그런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아볼로가 얼마나 성경에 박식하고 박학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성경에 능한 사람이 되었느냐 하면 일찍부터 그 하나님의 도를 배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그런데 배웠다. 라고 하는 히랍어 단어가 “카택케메노스” 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뭐냐면 우리말로 하면 교리문답이라는 단어 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울 때에 성경을 문답식으로 배웠다. 이런 뜻입니다. 성경을 문답식으로 배운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이게 성경에 세례교육 같은 것은 문답으로 되어 있잖아요. 문답으로 해서 진리를 터득하는 이 방식은 아주 오래된 방식입니다. 히랍의 역사에서 보면 주전 6세기 내기 5세기정도부터 내려오는 방법입니다. 그 사람들의 생각에 무슨 생각이 있느냐면 진리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때에 혼자서 다다다다. 하고 떠들어서 그냥 책 한권 써서 내 놓는 것은 이것은 진정한 교육일 수없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이 배우려고 하는 사람도 할 얘기가 있는데 그래서 이치를 깨닫는 것이 대화를 통해서 이렇게 깨달을 때에 이 사람이 원하는 쪽으로 지식을 가르쳐 주어야지만 이 사람이 진리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인지. 이 사람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입을 봉하라고 하고 혼자서 쭉 해서 수없이 며칠 동안 얘기해서 딱 끝나고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이런 것은 참다운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자들의 공부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히랍의 철학자나 이런 사람이 글을 쓸 때에 대화 식으로 쓴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 무엇은 어떻습니까? 선생님” 그리고 물어보면 선생님이 쭉 얘기를 해요. 그리고 선생님이 물어봐요. 그러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그러면 저는 뭐 어떻습니다. 그리고 쭉 한참 이야기 하면 그래 내가 다 들었다. 그런데 사실은 너의 말에는 이런 문제가 있다. 이러면서 진리를 풀어나가는 것입ㅂ니다. 그런 방식이 기독교로 그대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오게 되어서 이제 걸출한 교부들, 어거스틴 같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아주 중요한 진리를 가르칠 때에 그렇게 요리 문답식으로 요리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이치를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 가르쳐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방식이 이미 이 때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를 그런 식으로 배운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배웠다는 것은 무슨 얘기냐면 그냥 성경을 많이 읽으면서 부딪히는 대로 뭐 되나 안 되나 그냥 많이 읽어가지고 뭔가를 자기 나름대로 쓰레기더미 쌓아놓은 것처럼 잡다한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요리 문답의 결정적 특징은 무엇입니까? 체계를 갖춘 지식을 소유한 것입니다. 요리 문답을 배우게 되면. 교리를 배우게 되면 그런 놀라운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카텍케메노스 이 단어는 결국은 이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배웠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그냥 무조건 성경을 읽어서 이것, 저것 하여튼 뭔지는 모르지만 산더미처럼 지식을 소유하게 된 잡동사니 같은 지식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 교리적으로 정리된 지식을 이 사람은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교리를 부지런히 공부하라고 제가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교리를 하나, 하나 잘 터득해서 공부해 나갈 때 성경을 올바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리를 배우지 않고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그 성경을 읽는 유익이 그렇게 뛰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리의 뼈대를 가지고 성경을 보게 될 때 성경에 대한 인식들이 놀랍게 향상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반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번 9월 달에도 교리 반 모집한다고 하는데 만원되기 전에 빨리 들어가세요. 교리 반 공부하기 전까지는 설교를 들을 때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겠다고. 하긴 나도 뭘 듣는지 모르겠으니까 피차 마찬가지겠지만 그러던 사람들이 교리를 배우고 나서는 설교가 재미있어졌다고 얘기합니다. 설교가 어렵다고 그러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혹 가다 있거든요. 그 어렵다는 의미는 세 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도 설교가 어렵다 생각되어지면 이 서너 가지 중에 어느 케이스에 해당되는지 한번 보세요. 첫 째는 뭐냐면 설교자가 말을 어렵게 하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던 단어들이 많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면 그런 단어들 많이 쓰잖아요.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지식적으로 어렵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어렵다는 뜻이 무슨 뜻이냐면 말은 다 알아듣겠는데 그게 무엇을 얘기하는지 깊은 뜻을 잘 모르겠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면 영적으로 깊다는 것입니다. 자, 얘를 들자면 초등학교 1학년 아이를 앉혀놓고 “인생이 무엇이냐?” 그 말 다 듣죠. 귀 뚫렸으니까 한국말이니까 다 듣죠.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오늘 내가 너에게 3시간 동안 가르쳐주겠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어디서 오는 것일까? 3시간 동안 얘기해도 얘는 하품만 하고 하나도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뭐냐면 말은 못 알아들을 말이 하나도 없는데 그 말 속에 담겨있는 참다운 의미가 무엇인지를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렇죠. 달걀 속에 있는 병아리에게 바깥세상을 아무리 가르친들 병아리가 다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병아리가 나가보지 않고 다 알겠습니까. 그런데서 오는 어려운 것이고 세 번째는 자기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끔 설교가 처음부터 마지막에는 설교가 어려워서 교회를 떠날 때까지 설교가 항상 어려웠던 적이 있는 사람은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없죠. 그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문제죠. 그렇지만 더 문제인 사람은 누구냐면 설교가 쉬웠다. 어려웠다. 하는 사람입니다. 시기에 따라서 설교가 쉬웠다. 어려웠다. 이것은 무엇에 달린 것이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깨닫고 그렇게 자기도 살려고 애쓰면 설교하는 사람의 지성적인 관심사와 듣는 자신의 지식적인 관심사가 일치해요. 그러면 설교가 쉬워져요. 그런데 이것이 안 맞아요. 나는 지금 놀고 싶고, 게으르고 싶고,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하고는 거리가 먼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하고, 그 쪽으로 가는데 계속해서 너는 왜 하나님을 안 섬기고, 사느냐. 인간이 하나님을 안 섬기는 이유가 뭐냐? 어떻게 하면 잘 섬길 수 있냐? 섬기려고 할 때 무엇이 장애가 되느냐? 그런 장애를 어떻게 극복하고 결국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느냐? 이런 것들을 계속 상세하게 파해지면서 앞으로 진전할 때 그 사람은 짜증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지금 대합실에서 부산가는 열차가 언제나 오나 하고 고대하고 있는데 자꾸 아이스크림 사 먹으로 계속 소리치고 돌아다녀서 방송 소리가 안 들릴 정도가 되면 짜증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나는 지금 추워서 아이스크림 먹기 싫은데 통하나 들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지나가요. 한번만 하고 갈 줄 알았는데 한바퀴 돌고 또 와서 또 돌고 또 돌고 계속 그러는데 나중에 결국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 시끄러워” 한마디 하고 말 것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되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 어렵다. 라고 하는 의미는 상당히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그래서 잘 들으세요. 사랑이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하나님의 진리를 점점 더 많이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진리를 사랑하게 되고 그 진리가 쉬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이 사람이 성경을 공부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이 사람의 그런 정도만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또 하나는 뭐냐면 성경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때에 여기 보면 “자세히” 라고 그러는데 “아크리보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정확하게” 성경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데 정확하게 가르쳐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사람은 성경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경을 정확하게 가르쳐주었고, 또 예수에 관한 성경의 진리를 제대로 가르쳐준 것입니다. 성경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도 이 사람이 충분히 깨닫고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적인 성경해석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 사역자로서 손색이 없는 그런 자격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이 뭐냐면 이렇게 학문을 통해서 이성적인 능력이 뛰어나게 되면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도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볼 수 없는 그 성경 속에 나오는 진리에 대한 인식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에 보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성경을 아주 사랑하던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 깊이 만나고 성경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들 여러분들 중에서도 상당히 있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렇지만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성경을 끔찍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두고 배워야 할 만큼 탁월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뭐냐면 이렇게 이성적인 능력이 함께 뛰어날 때 바로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 같은 사람이잖아요. 신약성경 27권중에서 절반가량을 기록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전격적으로 만나고 그 경험이 정말 놀라운 체험이기는 하지만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사도바울이 유일한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것보다도 더 커다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기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만이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나머지 제자들도 사도바울 못지않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었고, 또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육체로서 예수님과 접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령한 세계에 대한 경험이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던 그 경험보다도 못 미친다고 말할 수 없고, 또 그들이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알려고 했던 노력이 바울의 그것보다 훨신 못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그랬어도 이렇게 기독교의 진리들을 조직적으로 서술해서 그래서 이후에 기독교의 모든 진리가 체계적으로 세워지는데 이바지한 사람은 바울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탁월한 학문을 통해 갖추어진 이성적인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지만 이 사람은 학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에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성경의 주인공이 되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또 고치시는지를 아주 조직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는 그러한 탁월한 능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그 사람이 남긴 글이 신약 성경중의 절반이 되어서 그 사람이 죽었어요. 우리 중에 누구도 바울을 본 사람이 없고, 그 사람이 놀랍게 사역을 해서 수백만의 사람을 예수 믿게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그 수백만의 사람들 중 단 한 사람도 지금 살아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죽었습니다. 만약에 그가 이렇게 글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면 세월이 흐르는 것과 함께 전설처럼 그 이름 두 자만 남고 모두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탁월한 이성적인 능력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놀라운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한 탁월한 인식이 생겨난 것입니다
제가 잘 쓰는 비유인데 비유를 하자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아마 100볼트 들어오는 전기에다 220볼트 전구를 꽂아 본적 있을 것입니다. 어떤 효과나 나타납니까? 분명히 전구에는 100 와트라고 쓰여 있는데 아주 빛이 희미하죠. 왜? 전구는 220볼트의 강한 전기가 흘러야지만 빛을 발하게끔 만들어졌는데 흐르는 전기는 절반밖에 안되는 희미해요. 그러니까 희미하게 비치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는 한 10촉 정도밖에 안될 정도로 희미하게 비춰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이 220 볼트로 되어있는 전구가 여기에 한 1000개쯤 있어요. 100와트짜리 10만 촉광이잖아요. 그런데 위에 흐르는 전기가 110볼트에요. 그러면 아마 여기에다 1000개를 꽂아놔도 아마 예배드리기가 힘들 것입니다. 이정도의 빛이 안 납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기 공사를 해서 이 110와트짜리를 220와트짜리로 확 올려버렸어요. 그 때에는 어떻게 될까요. 10만 촉광의 빛이 비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얘기냐면 여러분 머리에 있는 것 같은 것이 약 330개정도 있는 정도의 빛을 내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빛은 330개정도가 안되고 48개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330정도 비친다. 그러면 아마 여러분 얼굴에 있는 솜털까지도 보이는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빛이 환하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많은 학문들을 통해서 이성의 능력이 아주 발달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 이성을 가지고 구약성경을 연구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그렇게 연구했는데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 예수님을 만나게 되니까. 그 지적인 능력들이 확 살아나면서 다른 사람은 도저히 진술해 낼 수 없는 그런 기독교의 놀라운 진리들을 학문의 체계 속에서 이렇게 조직화해서 로마서와 같은 에베소서와 같은 갈라디아서와 같은 그런 교리서들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 작품의 가치가 오래도록 계속 되어서 사람들이 그 작품을 보고 기독교의 참된 진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하기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입니다.
작년에 한번 신문에 이런 것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1000년 동안 세상을 움직인 10권의 책,” 1000동안 책이 한권 나왔는데 그 책이 1000년 동안을 세상을 움직인 책입니다. 그중의 한권이 뭐냐면 칼빈이 쓴 “기독교 강요” 라고 하는 책입니다. 그 책이 1000년 내에 발간되어서 지금까지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책이랍니다. 책 한 권이 유럽 전체를 다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만들어서 오늘날의 개신교를 세우게 된 원동력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루터는 일을 일으켰지만 뒷감당을 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는데 칼빈이 일어나서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참된 개혁신앙을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세울 때 그도 물론 50세 중반의 나이에 죽었지만 열심히 설교하고 그랬지만 그러나 그래도 그는 작은 한 도시에서 목회한 목회자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가 쓴 책이 지금 이렇게 수많은 나라들을 깨우고 사람들을 깨워서 그 책이 카톨릭에서는 당연히 판매금지서적이 되었죠. 가지고 있기만 해도 하여튼 벌을 받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 책이 들어가는 곳마다 이 나라가 뒤집히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한번 읽고나면 뒤집히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 생각해보십시오. 당시에 카톨릭이 잘못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칼빈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칼빈은 루터에서 맨 처음에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매우 근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루터를 흠모해서 “내 영의 아버지”라고 까지 부를 정도로 그렇게 개혁사상을 갖게 되요. 그런데 그렇게 완고한 카톨릭 사상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 그렇게 뒤바뀌게 되는 놀라운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요? 많은 사람들이 카톨릭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카톨릭 신앙이 왜 잘못되었는지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물려주시려고 했던 참된 신앙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그 시대에 많지 않았습니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칼빈 한 사람이었다. 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가 왜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 성경을 그 기초부터 잘 깨달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학문이 뛰어난 이성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통해서 놀랍게 기독교의 진리들을 쏟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칼빈은 이미 벌써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지만 16세기 때 사람이지만 그렇지만 지금도 아직까지도 살아있어서 그래서 지금도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한 권의 책이 수십만 종류의 끼친 영향보다도 더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 뭐냐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이성적인 능력입니다. 그것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이 바로 아볼로에게 이러한 놀라운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능력은 이 칼빈뿐만 아니라. 더 뒤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토마스 아퀴나스나. 어거스틴이나. 이런 놀라운 사람들을 통해서 전개됩니다. 물론 그들이 깊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만 하나님을 그렇게 깊이 만난 것은 아닙니다. 뭐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그분들이 만난 것보다도 더 놀라운 하나님을 만난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체험만 가지고 말하면 그러나 그들에게는 탁월한 이성적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진리를 그렇게 조직적으로 그렇게 진술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선 이것을 중간에서 결론을 내리면서 여러분들에게 적용을 하자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때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 하고 믿는 것도 아주 중요하죠. 그래서 견고한 믿음, 그러니까 아주 좋은 신앙을 갖기 위해서 아주 필요한 세 가지 이성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첫 째가 뭐냐면 성경의 권위에 대한 분명한 인정,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아주 분명한 인정, 그 성경의 권위를 “아멘” 하고 믿는 분명한 인정, 두 번째가 뭐냐면 견고한 믿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를 때로는 자신의 이성으로 그것을 모두 논구할 수 없을 때에라도 그것을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 그다음에 마지막 하나는 뭐냐면 이성에 대한 신뢰. 이성을 깊이 신뢰하면서 그것들을 추론해 갈 때에 그 때에 이 사람의 신앙이 아주 지적으로 견고하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바는 뭐냐면 이 세 가진, 성경만이 정확하고 유일 무오 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성경은 틀릴 수가 없다. 라고 그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인정,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함께 살고 죽으리라고 하는 자세. 두 번째는 신앙. 견고한 신앙. 내가 비록 모든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면 “아멘” 하노라. 라고 하는 주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그다음 세 번째가 뭐냐면 하나, 하나 아멘하고 믿은 진리의 내용들을 과연 그러한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 그렇게 하면서 그것들을 추론해 갈 때에 여러분들의 신앙이 아주 견고한 신앙을 갖고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여러분들이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말씀에 대해서 많이 깨달아 알면 알수록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궁금해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답변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동의가 별로 안 됩니까? 그래서 역설적으로 진리를 많이 깨달은 사람들이 더 이상 그 진리를 이해하기 힘들어서 침체에 빠질 때 오히려 더 심각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이 아주 어렸을 때는 의문을 품는 내용들도 어려요. 그래서 답이 금방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다음에 질문하는 내용들이 매우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대답해주기 쉽지 않습니다. 아주 탁월한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모를까.
자. 아이들이 3-4살 되었을 때 궁금한 것이 무엇입니까? 애들이 한참 자랄 때 항상 자 쓰는 말이 그것이죠. “엄마 이게 뭐야?” 하고 물어보죠. 뭐든지 궁금하면 “엄마 이게 뭐야?” “어, 이것은 뚜껑이다.” 그렇게 호기심이 많아서 자꾸 물어봐요. 그러면 이 세상의 누구든지 다 답변해줄 수 있어요. 그런데 사춘기쯤 들어가서 “엄마” “왜?” “나 질문하나 할께” 그러면 또 “이게 뭐야” 그러면서 물어볼 줄 알고, “아, 그래 네가 물어보는 것 중에 내가 모르는 것이 있겠니?” “인생은 왜 이렇게 고달파?”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대답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것 아닙니까. 신앙의 수준도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 대답이 잘 안되는 것이죠. 그리고 어떤 것들은 몇 년 동안 대답을 못 얻은 채 그냥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신앙은 그런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서 누수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기도를 많이 해도 극복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성경에 관한 교리들을 공부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리를 공부해 나가는 가운데 이 지성적인 능력들이 계속 확대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교리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흩어져 있는 진리들을 인간의 이성을 사용해서 그 진리들을 성경진리에 맞게끔 쌓아올려서 체계화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평소에 논리적인 생각을 많이 하고 논리적인 훈련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교리를 배우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요. 왜냐면 한번에 기독교가 무엇을 묻느냐? 이렇게 물어보면 하나님도 믿지만 예수님도 믿지, 또 성령님은 안 믿나? 교회도 믿어, 그리고 교회만 믿나 목사님도 믿어야지. 이렇게 얘기하다 보면 중구난방으로 얘기해서 그 사람이 석 달 열흘을 떠들어도 듣는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들었는지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에 나온 진리들을 많은 진리들을 꺼내어서 하나씩, 하나씩 꺼내어서 분류를 하고 정리를 합니다. 그러면 이해가 잘 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집안도 마찬가지로 이사 가서 이삿짐을 확 풀어놓으면 진짜 살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며칠에 걸쳐서 정리해서 책은 책대로 도자기는 도자기대로 그다음에 화초는 화초대로 다 정리해놓고 나면 질서가 잡히면서 집안에 들어섰을 때 참 예쁘고 정돈이 잘 되었다. 라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리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교리를 공해 가야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렇게 이성적인 능력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많이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바로 이 아볼로가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웠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운 그 위에 학문도 가지고 있어서 그 모든 것들을 잘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혹시 그런 생각해보신적 없습니까? 저 사람하고 나 하고 똑같이 교회에 다니고 어떤 면에서는 내가 더 많이 다녔는데 뭘 물어보면 왜 나는 그렇게 대답을 못해주고 저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잘 대답을 해 줄까? 그것은 단순히 성경만 많이 읽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교리에 대한 지식들을 잘 갖추게 될 때에 그런 놀라운 지식들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식을 가지고 이제 세계와 그리고 교회와 역사와 자기 자신의 삶과 이 모든 것들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하고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이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신앙생활에서 보면 지성, 지식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참으로 건강한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열렬해지려고 노력하지 말고, 잘 깨달으려고 노력해야합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깊이 체험만 하려고 몸부림 칠 때에 그 때에 그런 사람들이 체험하게 되면 체험을 해도 오히려 그 체험을 한 것 때문에 신앙이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린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 자신이 아무리 하나님을 향해 열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관심자체가 진리가 무엇일까? 그리고 참된 그 진리가 어떤 것일까? 거기에 온 신경과 마음이 집중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것도 사실은 정확하게 말하면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진리를 깨달아가는 그 노력을 기울이면서 성경을 살피고 자신의 마음과 삶, 사랑의 대상, 진리에 대한 깨달음, 모든 것이 이렇게 하나가 될 때에 그 때에 그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 속도가 매우 빨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성적인 능력도 계속해서 확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랍게 학문에 대한 이해와 이런 것들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삶의 이치에 대해서 명료한 이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볼로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이 아볼로에게 있어서 뛰어난 것은 뭐냐면 여기는 “열심으로” 라고 하였습니다. 열렬한 마음을 가지고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가르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열정도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진리를 향해서 열정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체험이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인가 체험하지 않으면 그런 열정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서 뭐라고 하느냐면 “열심으로” 그랬습니다. 열심을 가지고 성경을 가르치던 사람이었고, 또 성경을 가르치되 유대인들 종교지도자들이 가르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관심사가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예수에게 있었습니다. “예수에 관한 것을 중심으로 하여서 성경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가르친 성경은 무슨 성경이었을까요? 구약성경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늘 익숙하게 이해하고 있던 성경책이 구약성경이었고, 당연히 히랍어로 번역된 그 70인 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을 쭉 보면서 그 당시 유대인들을 아직도 눈이 가려져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고 생각을 안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구약을 읽어도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러니 얼마나 이해가 잘 가겠습니까.
자, 내가 이런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럴 일은 별로 없지만 여러분들이 만약에 영화를 보다 영화 끝나는 시간까지 주인공을 잘못 착각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영화가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영화시작하자 마다 15초 만에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 영화가 이해가 되겠습니까. 이해가 안 되잖아요. 똑같은 원리입니다. 성경 속에서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잘 모르고 그리고 성경을 읽은 사람들은 가려져서 그 성경의 진정한 의미가 파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볼로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그 성경에 있어서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하는 것에 대한 명백한 이해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을 쭉 보면서도 관심사가 어디에 집중되었느냐면 예수님이 누구신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에 집중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성경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또 제대로 구약을 이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거기에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쭉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진리를 듣던 사람들 가운데 한 청중이 있었습니다. 브기스길라와 아굴라 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잘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그러나 사도행전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에 이 사람들이 탁월한 능력을 소유했던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천막을 기워서 먹고 사는 일들을 그냥 함께 돕는 그런 정도의 수준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두 사람은 부부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설교를 들었는데 이 이성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사실 아볼로와 비교한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되죠. 평범한 시골 사람들이었고, 아볼로는 대 학문의 도시에서 지성적으로 잘 훈련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볼 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풀어 설명했다고 했습니다. 앞에 보면 똑같은 단어가 또 나오는데 “자세히 사람들에게 예수에 관해서 가르쳤다.” 그런데 그렇게 자세히 가르친 사람을 불러다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더 자세히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무슨 뜻이냐면 이성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못지않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 사람에게 있어서 중대한 결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요한의 세례만 알 뿐이더라.” 요한의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이 세상에 온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의 임무는 예수 오시는 앞길을 예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실 일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었고, 또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요한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였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오실 예수에 대해서 많이 가르쳤지만 사실 제대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세례요한 그 이후에 세례요한이 가르치고 소개했던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에 그분이 어떤 분이시고, 특별히 그분의 부활과 승천을 보고, 그것을 경험하고 그리고 더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부어주셨는데 그 성령을 부어주신 성령강림에 성령세례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것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지식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보다 뛰어났지만 그러나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그들이 충만한 성령의 세례를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서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깨닫게 된 놀라운 진리들이 있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되리라.” 고 할 때에 사실 그 증인의 주체는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증인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학문에 있어서는 아볼로에 미치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오신 그 성령님의 그 임하심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아주 탁월하고도 신비한 그리고 영적인 체험과 지식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볼로가 한 이야기가 틀린 것은 아니었는데 더 거기에 섬세하고 정말 생명적으로 중요한 그러한 것들이 그 속에 빠져있다. 라고 하는 것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볼로를 데려다가 자신들은 학문에 있어서는 아볼로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자신들이 깨닫게 된 성령이 증거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체험적인 증거를 통해서 말씀의 새로운 도를 풀어주었을 때에 아볼로가 말할 수 없이 놀라운 유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말하자면 신앙에 있어서 경험적인 요소입니다. 신앙에 있어서의 경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놀라운 인식을 가지게 해 줍니다. 기독교 안에서 일어난 모든 경험이 다 가치 있는 경험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주위에도 보면 유난히 꿈 얘기 많이 하는 사람들 있죠. 옛날에 개척하고 나서 몇 년 있다가 하여튼 나를 굉장히 괴롭히던 자매가 한명 있었습니다. 하여튼 일 주 일에 한번씩 면담하자. 그러는데 나중에는 막 도망 다녀요. 그런데 신기해요. 예배시간에는 설교를 들으면서 눈물을 펑펑 흘려요. 안 흘릴 때도 있지만 흘릴 때도 있어요. 그런데 얘기 하는 것 보면 30분을 더 인내하고 들어줄 수가 없어요. 처음부터 시작한 것이 꿈 얘기에요. “목사님 제가 꿈에 산에 올라갔거든요. 하얗게 눈이 쌓여있는데 매화 가지가 이렇게 있는데 두 마리의 새가 거기에 앉았더래요. 한 마리는 울고 한 마리는 가만히 있는데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래서 제가 그 옆에 개 없디? 인내심을 가지고 한 1시간을 들어도 그런 식으로 늘 헤매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우리 교회 다니는 어느 지체가 자기가 한번 상담해 보겠다고 하면서 만난 다음에 그랬대요. 숨소리만 빼고 다 쓸어버리라고, 아무것도 다 틀렸다고 다 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 사람 있잖아요. 유난히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물론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꿈을 통해서 뭔가를 보여주시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있잖아요. 할 수 있으면 의미가 좀 있는 것 같다고 하더라도 혼자만 알고 있으세요. 혼자만. 신앙이 어린 사람이 그렇게 꿈 얘기 하는 것을 듣고 그러면 자기도 꿈꾸게 해달라고 그럴 것 아닙니까. 그래 매화가지에 두 마리 새가 앉아서 하나는 울고 하나는 안 운다. 무슨 뜻이냐? 요셉에게 가서 물어봐라. 내가 그랬습니다. 그 사람이 전공이니까. 그래서 내가 그 매화가지에 앉은 두 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내가 알 수 없지만 네가 왜 그렇게 헛소리를 하는지는 내가 안다. 성경의 진리가 없어 그 속에 그래서 아무리 울고불고 팔짝팔짝 뛰어도 넌 다 헛것이다. 그래서 항상 신앙에 있어서 앞서갈 부분은 가슴이 아닙니다. 심장을 앞세우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부터 앞세우고 가요? 머리부터 밀고 가야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손이 앞서가도 안 됩니다. 항상 머리가 앞서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점에 있어서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눈”이라고 하는 단어가 저 아프리카에 가면 존재하기는 존재하는데 한 단어밖에 없습니다. 왜 어차피 본적도 없으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쓰니까 그냥 하나 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몇 개나 됩니까? 함박눈, 싸락눈, 진눈개비. 제가 보기에는 다 합쳐서 세 개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또 뭐 있습니까? 그런데 북극에 있는 에스키모 인들에게 가면 눈에 관한 단어가 80개가 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눈에는 눈이 겨울 한철만 오니까 세 개 정도로만 분류하면 충분할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냥 눈 속에서만 살아요. 그러니까 아침에 내린 눈 틀리고, 점심 때 내리는 눈 틀리고, 석양 받으면서 내리는 눈 틀리고, 캄캄할 때 내리는 눈 틀리고, 그다음에 그 눈의 차이가 다 보이는 것입니다. 왜? 풍부하게 체험하니까 풍부하게 그런 것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말의 풍부함은 체험의 풍부함에 달린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면 조금 체험했을 때에는 남들이 쓰는 말을 그대로 써도 충분해요. 왜? 체험이 표현 밑에 있으니까 항상 무엇을 써도 그것으로 충분해요. 그런데 체험이 워낙 많으면 그것은 꼭 다 큰 아이가 애가 바지 입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자꾸 틀어져요. 왜냐면 내가 느끼는 것은 너무 많은데 이정도의 표현가지고 다 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색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언어로 사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느낀 것이 없을 경우에는 사색이 안 되는 것입니다. 묵상하라. 그러는데 은혜 받는 사람이 묵상을 잘해요? 침체에 빠진 사람이 묵상을 잘 해요? 침체에 빠진 사람은 궁리를 잘 하지 신앙에서 도망칠 궁리, 죄지을 궁리, 궁리를 잘 하지.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지만 묵상이 잘 되는 것입니다. 자꾸 이 생각이 새로워지고 진리를 찾아가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깨달아가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체험하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글을 설교준비를 하는데 그 때는 글 쓰는 사람도 아니고 설교 준비하는데 고민이 뭐였느냐면 설교준비를 원고를 다 썼습니다. 한 5년 동안 썼고, 지금도 그 원고들이 남아있는데 뭐 한편 설교 작성하는데 24시간씩 걸렸습니다. 그런데 써놓고 나면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체험이 이것보다 더 커요. 그러니까 뭐냐면 성이 안 차요. 그러니까 뭐냐면 자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자꾸 새로운 표현들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언어에 있어서 발전을 거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체험이 지식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이 체험에 영향을 주고 체험이 지식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학문에 있어서는 아볼로와는 비교도 안 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 사람들은 성령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가르침정도만을 이해하고 있는 이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신비와 부활의 신비, 그분의 고난의 깊이 그다음에 다시 오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증거 하시는 성령의 그 인 치시는 그 위대한 역사 같은 것들에 대한 풍부한 복음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볼로를 불러다가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다 가르치니까 아볼로가 전혀 자신은 생각도 못해봤던 새로운 세계에 눈을 확 뜨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의 세계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뜨는 역사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결론적으로 우리들이 간절히 추구해야 될 것이 뭐냐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뭐냐면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가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공부한다. 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한편으로 부지런히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교리를 부지런히 공부해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죄 죽임의 교리” “죄의 속임의 교리” “마음 지킴의 교리” 이런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충분히 익혀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느냐면 그냥 모일 때마다 박수나 치고, 두 손이나 흔들면서 할렐루야. 그런 것이나 하면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쿨헤드 웜하트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그런데 이것이 뒤집어집니다. 머리는 뜨겁고 가슴은 차게 머리가 뜨거워서 폭발할 지경입니다. 뭐가 오만 잡동사니가 다 들어서 끓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성경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그 교리를 하나씩, 하나씩, 계속 공부해가야 합니다. 여러분보다도 공부하기 좋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냥 테이프만 틀어놓으면 계속 그냥 공부하잖아요. 그것이 책으로 쓰 여진 것을 읽으려고 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또 책으로 된 것은 없나? 퓨리탄 라이브러리에 가면 전부 있는데 도서관 한 번도 안간 사람 있죠. 회개하시오, 간사가 아침부터 나와서 밤에까지 근무하고 그것 다 여러분들이 내는 헌금가지고 운영되는 것인데. 왜 안가요? 교회가 5-6000명이 되어서 저런 도서관을 못 가진 교회가 얼마나 많은데 왜 안가요? 다른 교회 교인들이 와서 좀 빌려달라고 하더라고요. 아무거나 가지고 가서 읽으면 되는데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공부해서 지성적으로 발전해 가야합니다. 두 번째 뭐냐면 열렬히 기도하면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구해야합니다. 그래서 그 항상 마음속에 사라지지 말아야 할 기도가 있습니다. 더 많은 빛을 내게 주시옵소서. 진리에 대한 경험을 주시옵소서. 개꿈 못 꾸어도 상관없어요. 내일 일 몰라도 괜찮아요.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10년 후에 어떻게 되어있을까? 가끔은 궁금하겠지. 그런데 뭐가 그렇게 궁금해요.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지 10년 후에 뭐가 되어있는지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그래 10년 후에 제가 뭐가 되어있을 것 같습니까?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것 같아요. 사랑받겠네요.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10년 후면 지금보다 훨씬 나이 먹을 수 있겠죠.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핵심 가치가 아닙니다. 문제는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고 살아가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서 지성적으로 계속 성장해야합니다. 그래서 뭘 하나를 알아도 설 알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치밀하게 깨달아 알아서 그것도 지적으로 잘 성장하고 그리고는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성령님의 은혜 주시기를 기도해야합니다. 그 성령님의 은혜를 통해서 그 성경의 의미를 더 깊이 체험하게 해달라고 성경과 동떨어진 체험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통해서 내가 배운 성경의 진리를 체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 때에 체험을 통해서 진리를 붙들게 되고 진리를 깨닫는 것을 통해서 체험을 사모하게 되는 것 입니다.그 때에 믿음이 더 견실하게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점점 더 더 많은 탄탄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단한 음식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더 건강하게 훌륭하고 좋은 신자로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만 유익을 줄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머리를 싸매고 몇 년 동안 고민해도 풀리지 않아요. 좋은 신앙의 선배를 만나서 물어보니까 10분 설명하는데 모두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속아서 살았구나. 미쳤구나.” 나는 요즘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오늘도 예배 오기 전에 우리 집 사람하고 저녁을 먹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보 난 참 큰일 났어? 왜? 이제야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여러분이 들으면 좀 낙심하겠죠. 평생 동안 저 사람 설교 들었는데 이제 와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좀 이해가 된다고 하니 옛날에는 어떻게 했을까?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허튼 것 안 가르쳤으니까. 그런데 이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조금 눈이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끊임없이 이 지성적으로 헌신해야합니다. 그것이 마음을 바치는 삶입니다. 그래서 10년 20년씩 고민해도 풀리지 않았는데 15분 설명하니까 모두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아, 내가 그 긴 세월을 속아서 살았구나.” 여러분 그런 탄식한 적 있죠. 아, 내가 미쳤었구나. 이런 진리를 옛날에 예수 믿을 때 사람들이 내게 안 가르쳐 주었을까요? 그거야 그쪽 사정이지 내가 왜 안 가르쳐 주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러니 중요한 것은 과거는 흘러갔으니까 깨달은 지금이라도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이 어떻게 보면 복잡한 것 같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간단한 것입니다. 지성을 열심히 사용해서 참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입니다. 참된 것이 무엇일까? 참 진리가 무엇일까? 그것을 부지런히 이성을 사용해서 성경의 진리를 깨달아가고 교리를 배워가면서 진이 무엇일까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무엇일까요?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그 진리가 가르쳐주는 대로 사는 것일까? 고민하면서 이 마음속에 착한 의지를 가지고 올바르게 살려고 많이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선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자기가 있어야 될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 본분을 찾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이 미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진, 선, 미, 이 세 개는 모두 신앙 안에서 통합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의 관심사는 진리에 깨달은 인간의 삶의 관심사는 선에 그리고 이 진리를 깨닫고 선을 찾아가는 이 존재의 관심사는 미에 그래서 진, 선, 미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찾아갈 때 그 사람이 가장 올바른 길을 찾아가고, 그리고 그렇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가장 맞게끔 선한 삶을 살아가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그런 삶을 자기 자리에서 존재하고 살아가는 그 사람이 하나님이 보실 때 탁월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진리입니다. 진리가 없으면 의지가 있어도 선한 삶을 살아갈 수 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전도지에다 그렇게 한번 썼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해도 그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러면 자기가 그렇게 살수 없다.” 살수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진리가 있고, 그다음에 선한 삶이 있고, 그 결과로서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우리가 끊임없이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아가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 통합적인 목적을 위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그는 이 세상에서 정말 빛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사회적인 지위와 그다음에 그가 가지고 있는 재물의 다과에 상관없이 그가 있는 그 자리에서 바로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때요. 이 세 가지 일을 하는 것, 그런 존재가 되는 것 자체를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인간인 우리에게 주신, 신자인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특권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누구도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관심 갖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번 여러분 주위에서 예수 안 믿는 사람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으면 한번 꼽아보세요. 없습니다. 관심사가 그런 것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남보다 돈 많이 벌고, 더 많이 신나게 놀다가 다른 사람 다 죽을 때 자기는 살아남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그 진리에 부합하는 선한 삶을 살까? 그래서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 정말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 때 거기에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특권처럼 생각하고 아주 기쁘게 생각해야합니다. 진리를 깨닫는 그 일을 노동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 해야 할 기도가 뭐냐면 세상의 모든 보화보다도 그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왜 노력하지 않습니까. 마음에 충분히 내키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진리를 찾아서 목말라 한다는 느낌은 안 듭니다. 간절히 그 진리를 찾고자 목말라 해야 합니다. 그 때에 여러분들이 선한 삶을 살 수 있고,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 은혜와 체험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행18:27-28)
아볼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성경에 아주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자세히 풀어서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이 아볼로는 당시 유대인의 영안을 덮고 있던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볼 줄 모르는 율법적인 성경 관에서 벗어나서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읽을 줄 아는 그러한 열린 눈을 가진 그런 말씀사역자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구약 속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사람들에게 상세히 풀어서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아마 당대에 이만한 말씀사역자. 설교자를 만나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눈에 띄었습니다. 학문적으로, 이성적으로는 이 아볼로와 비교될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에 아볼로가 가르치는 그 말씀의 가르침 속에 무엇인가 중요한 것 한 가지가 빠졌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불러다가 다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성경을 천천히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들이 의문을 갖게 됩니다. 아볼로는 이미 학문이 출중하고, 그리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고, 더군다나 거기에서 유대교적 신학적 편견을 벗어나서 그리스도 예수를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에게 더 가르쳐 줄 것이 무엇이 있었을까? 라고 하는 것이죠.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으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볼로는 학문에 있어서 뛰어나고 그 위에 성경 또한 잘 연구한 사람이었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경해석을 하는 당대에 손색이 없는 훌륭한 말씀사역자 였지만 그런 신실한 신앙, 그리고 그런 성경탐구, 성경 탐구에 도움을 주는 떠 그러한 이 세상의 학문들에 대한 많은 지식으로 찾아낼 수 없는 그 진리가 그 성경 속에 숨어있다. 라고 하는 것이죠. 비록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처럼 세상 학문에 뛰어나고, 성경을 그 사람만큼 많이 연구하고, 그 사람만큼 성경을 많이 가르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근본적으로 이 아볼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나니까 그 전하는 말씀을 통해 전달되는 것 속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성경을 대하면서 찾아내었던 진리는 빠져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학문에 있어서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성령을 깊이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성경을 읽어도 이 문자만으로 이해할 수 없고 학문의 얼개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성령 받은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의 표현들을, 그 진리들을 그들은 알아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그것으로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아볼로가 성경 연구를 통해서 알고 있는 것 거기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그 내용이 빠져있었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가르침을 통해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는데 문맥상으로 볼 때에 이것은 그냥 단순한 깨달음이었던 것이 아니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성경 가르침을 통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경험했던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이 아볼로가 틀림없이 경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증거가 오늘 읽은 “은혜와 말미암아” 라고 하는 구절입니다. 그래서 이 일이 있고난 후에 아볼로의 말씀 사역은 변화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세상의 학문도 뛰어나고 성경도 많이 알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건전한 성경 해석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이제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만남을 통해서 그 위에 하나도 보태어졌으니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냥 눈에 보이고 그리고 그냥 귀에 들리는 것, 이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내면의 세계로 체험한 것을 평면적인 말로 설명을 해서 그 사람들에게 똑같은 체험을 갖게 한다는 것은 많은 언변과 뛰어난 말 재주, 그리고 기가 막힌 묘사, 이런 것들을 사용하면 어느 정도는 그것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 체험을 평면적인 말을 통해서 그 사람이 체험한 사람과 똑같이 느끼게끔 해준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죠. 물론 이제 묘사가 아주 뛰어나면 상당히 그런 것을 느끼게 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언젠가 한번 설교하다가 그런 얘기 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10분 안에 침을 돌게 해 주겠다고 하면서 제가 사과에 대해서 쭉 이야기 하니까 여기저기에서 입맛을 다셨던 기억나세요? 말을 아무렇게나 하면 아직 보지도 않고 씹지도 않은 사과인데 어떻게 입에 침이 고이고 신물이 나오겠습니까. 그 정도가 되려면 묘사를 아주 정확하게. 또 한번 해 볼까요? 정확하게 해서 그 언어가 아주 언제적소에 적 시간에 딱 배치가 되고, 이렇게 되서 말을 듣는 순간에 연상이 되어서 진짜 이렇게 꽉 씹을 때 사과껍질이 어금니에 눌리면서 그 빨간 껍질이 파란 과육 속으로 들어가면서 거기에서 거품을 먹은 신물이 쭉 흘러나오고 이것이 침샘을 자극해서 이빨 사이로 쫙 나오죠. 그렇게 묘사를 해야지만 이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체험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죠. 누가 그래요. “아니 애기 낳으면 얼마나 아파?" 그러니까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나 보면 알아”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어. 그런 것입니다. 체험의 세계라는 것이
성령님은 성경에 원 저지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니까 성경의 원 저자가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원래 저자가 성령님이시니까. 성령님의 은혜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이제 우리가 극단으로 가면 안 됩니다. 즉 기록된 말씀을 몰라도 성령을 체험하면 성령님이 성경의 원 저자이시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놀랍게 알 수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즘도 신문에 가끔 보면 황당한 책들이 나옵니다. 뭐 자기가 꿈인지 생시인지 하늘에 갔는데 주님이 천국을 보여주시고 지옥에 가니까 문이 세 개가 나오고 뭐 빨간 문. 파란 문, 이러면서 여기는 노랑 모자 쓴 사람이. 이러면서 한없이 상상의 날개를 펴고 가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중에는 세 부류가 있다고 봅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완전 사기꾼입니다. 다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면 이것은 진짜 속이는 영에 의해서 미혹된 사람입니다. 세 번째 사람들은 뭐냐면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혜를 받기는 받았는데 이제 말씀에 워낙 기초가 없으니까 그다음에 성령이 우리에게 강하게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깨닫게도 하시고 또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생각이 떠오르게도 하시고, 뭐 성령님이 그러실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 지점부터 매우 미묘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성령님이 나에게 생각나게 해 주시는 것인지. 그냥 생각이 난 것인지. 왜?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 없이도 우리 살아가면서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사라졌다.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러잖아요. 개똥만 봐도 생각이 떠올랐다가 뭐 소똥만 봐도 사라지고, 이것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거품처럼 솟아나는 생각 속에 살고 있잖아요. 그래 성령을 받아서 성령님이 움직이셔서 생각나게 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성령님의 감화는 받았지만 생각은 생각대로 떠도는 것인지. 그것을 누가 그렇게 경계를 명확하게 그을 수 있겠습니까.
신학교에 있는데 하루는 어느 좀 나이가 든 신학생인데 자매입니다. 나를 그렇게 목매도록 만나겠다고. 나는 그렇게 뭐 사람들 만나는 것 그렇게 별로 안 좋아하고, 학생들 그러니까 그랬는데 어쨌든 뭐 막 무가네로 왔습니다. 그래서 뭘 나에게 상담할 것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신학교에 입학한지 이제 석 달되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책을 한 권 썼는데 교수님이 한번 보시고, 좀 저에게 조언을 좀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원고 뭉치를 이만큼 책 한권 될 분량을 내려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의 날개를 펴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3분의 1은 맞는 이야기이고, 3분의 2는 순 엉터리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죠. 책을 내지마라. 책이라고 하는 것은 천 권을 읽어야지 한 권을 쓰는 것이다. 당신 지금 신학교 입학한지 3개월 되었는데 무슨 책 쓰는 것이 그렇게 급하냐? 그래서 이제 타일어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원고를 읽으면서 내가 느낀 것이 뭐냐면 진짜 성령님의 은혜를 경험했어요. 그런데 성경도 모르고 신학도 모르고 전에 사전적으로 하나님과 그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서 아는바가 워낙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면 비유를 하자면 자동차에 시동은 걸렸어요. 들입다 밟으니까 이게 뭐 속력은 나는 거에요. 그런데 뭐냐면 길이 어딘지를 모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 다니는 것이죠. 길이 이렇게 표지판이 되어있으면 그 길을 따라서 쭉 가면 성능이 좋아서 차가 잘 나가면 나갈수록 빨리 달릴 수 있겠죠. 원하는 목적지에 올바르게 빨리 갈 수 있겠죠. 그런데 그 표지판이 없어요. 그러니까 도로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데나 막 다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써낸 것들을 읽는다고 칩시다. 은혜를 못 받으면 본적치기인데 누군가가 받고 정신이 멍할 정도로 은혜를 받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그러면 그것이 이 속으로 들어갈 것 아닙니까. 그래서 들어가면 이 속에서 얼개를 형성해요. 그 얼개를 가지고 성경을 보는데 성경의 얼개하고 그 얼개하고 틀려요. 그 얼개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성경을 다 비비꼬아서 다 이상하게 해석을 해야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얼개에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이 있고, 성경을 해석할 때 이 해석하는 원리가 이 속에 있어야 되는데 이것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나온 것이 원리가 되어서 여기에 존재하게 될 때에 성경 자체와 성경을 해석하는 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틀을 통해서 성경이 잘 해석되어서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만남을 통해서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는데 아까 그 신학생하고는 틀린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왜? 학문에 뛰어나고 지성적인 기반이 갖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 내용 자체를 잘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경 해석을 견지 하고 있는 사람인데 성령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길은 지성에 의해서 닦여졌는데 성령을 깊이 경험하고 나니까 이 닦여진 성경 해석의 길속으로 풍부한 생명의, 역사나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아볼로가 경험한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를 아볼로가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아가야로 가게 되니까 그러니까 이제 사도가 편지를 써서 거기에 있는 제자들에게 이 아볼로가 가면 이것은 정말 좋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니까 영접하라. 그리고 그 사람을 영접했더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기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똑같은 길이었습니다.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난 다음에 성경해석이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갔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거 하니라.” 내용이 무엇입니까? 아까 이야기 한 그것과 똑같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성경을 풀어서 자세히 전한 것이 바로 이것과 똑같잖아요. 똑같은 방식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 성령님이 저자다 되어서 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그 성경의 내용에 대한 가장 확실한 의도를 누가 알고 계셔요? 성령님이 알고 계셔요. 지방에 어디 집회를 갔는데 잠깐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데 내 책의 내용을 놓고 두 사람이 언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틀린 사람에게 그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얘기 했더니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 내가 저자인데 저자가 그것이 아니라는데 저도 참 우길 때는 대게 우기거든요. 어떤 일이 있었느냐면 옛날에 전도사 시절 때 교사하고 같이 심방을 하다가 무슨 일인지 하여튼 그 교사의 집을 몇 명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내 기억에는 전 정거장에 내려야 되는데 한 정거장을 더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도 잠깐 잊어버렸죠. “아니다. 여기에서 내려야 된다.” 그러니까 한 정거장 더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야. 내가 분명히 기억이 나는데 여기에서 옛날에 내렸었는데 그러니까 나중에 한참 있다가 답답하니까 “전도사님 우리 집인데 전도사님이 잘 알겠어요. 제가 잘 알겠어요. 오늘 아침에도 내가 여기에서 나왔는데” 그러니까 할 말이 없더라고요. 아무리 우기기를 좋아해도 그렇게 얘기하는데 할말이 없죠. 그래요 저자가 아니라는데 네가 왜 우기냐? 마찬가지로 이 써진 성경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를 누가 가지고 있느냐면 성령님이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을 누구를 불러서 요한복음 1장 1절의 뜻이 이런 것이다. 이렇게 가르쳐 주시지 않잖아요. 그러면 성경 말고 또 성령의 감동으로 된 주석이 나올 것 아닙니까. 그것은 한 권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책 쓸 필요도 없이 그런데 성령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성령을 깊이 경험하고 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성의 한도 내에서 그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이죠.
한 10년 넘었어요. 한 십 삼, 사년 되는데 성경을 읽다가 어떤 내용이라고 시간이 없어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성경을 읽다가 깊이 은혜를 받았어요. 깊이 감동을 받았는데 요즘도 가끔 그럴 때 있거든요. 절대로 저를 용서하세요. 교만한 것은 아니고 어떤 느낌이 들 때까지 읽느냐면 매일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끔 가다가 그러는데 이 성경이 기록된 이래로 성경이 최초로 내 앞에서 옷을 벗는구나. 그리고 성령님께서 이 성경이 쓰여진 이래로 이 구절만큼은 나에게 가장 풍부하게 가르쳐주신 것 같구나. 이런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 느낌이 어떤 느낌이냐면 이제 산이 있어요. 쭉 펼쳐져 있어요. 그런데 이 산이라고 하는 것이 참 신기한 것이 높은 산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이 줄이 장창 올라 다니는 것이 아니잖아요. 뭐 태백산맥에 있는 줄기 같은 것은 다 1000미터씩 넘는 것이니까. 거기 뭐 사람들이 남산처럼 달토록 올라 다니는 그런 산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참 신기 한 게 그 비행기를 타고 높은 곳에서 보면 특히 겨울에 나뭇잎이 안 떨어졌을 때 잘 안보이고,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늦가을이나 겨울에 올라서 비행기를 타고 밑을 내려다보잖아요. 그러면 어쩜 그렇게 뭐 일년에 사람 몇 사람 올라올 것 같지 않은데도 누가 일부러 닦아 놓은 것도 아닌데 길이 선명하게 산자락을 끼고 등성을 타고 나 있습니다. 동의가 됩니까? 산에 그런 길 난 것 말이죠. 올라가 봤어야지 알지. 산에 그렇게 길이 아주 또렷하게 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누구나 산에 올라가게 되면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사람들이 걸어간 그 길로 계속 갑니다. 그 산은 그런 줄 알고 계속 걸어갑니다. 한참 걸어 가다보면 얼마나 밟고 다녔는지 머리가 벗어져서 전부다 대머리가 되어서 길이 쭉 난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잖아요. 교회에 한 20년쯤 다니면 뭐 성경 펼쳐서 요한복음 몇 장 몇 절 읽으면 아, 몇 절부터 몇 절까지 이렇게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 비유, 아, 그것 뭐 서론으로 시작해서 그다음에 남편을 불러오라. 그다음에 두 번째도 너 남편이 아니다. 그러니까 회개하라. 아, 그리고 예화 몇 개 나오고, 그것이 듣는 사람들이 그것을 다 끼워놓으면 그것을 따라서 설교도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대동소이 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삼주를 연속 헌신 예배를 드렸는데 삼주를 각 다른 강사를 모셨데요. 그런데 참 그것이 억지로 한 것도 아닌데 삼주 강사가 각각 다른 사람이 왔는데 성경본문이 똑같고 그다음에 설교제목도 같고 설교 내용도 똑같아요. 그러니까 온 사람은 지난주에 그랬는지도 모르고 설교하고 가고, 또 마지막에 온 사람은 자기가 설교하는데 왜 이렇게 썰렁할까, 그리고 갔데요. 그런데 그래서 어떤 분은 그래요. 그것 분명히 어디에서 배겼을 것이다. 그러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물론 그랬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안 그랬을 가능성이 더 많다고 봅니다. 우선 뭐냐면 목사가 그렇게 설교를 배겼을 리가 적다고 보고, 또 배길 정도의 가치가 있으면 엄청 은혜로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썰렁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아니라. 우연의 일치이기는 하지만 성경을 읽고 그분이 설교자로서 이만큼 성경구절을 읽고, 1. 2. 3 이정도로 대지를 뽑았는데 그것이 사실 너무 똑같고 일단 대지만 똑같으면 그다음에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거의 비슷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렇게 해서 하는데
또 산이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러니까 밟고 지나가서 대머리가 벗어져서 길
이 계속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참 이상해요. 그 길로만 계속 운명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면 성령님이 남들이 다 걸어간 길 말고,
또 다른 것을 보여주세요. 다른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옆으로 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가는 길이 그 길만이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밟고 다녀서 그 길로 길이 난 것이지
사실은 가보지 않은 길도 많잖아요. 그래서 하도 많이 밟고 지나가니까 이제 햇볕 바짝 나
는 날은 산이지만 이렇게 밟으면 먼지가 푸석푸석 나는 것이죠. 먼지 나는 산길을 타박타박
걸으면서 재미 되게 없죠.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저 숲 속에서 소리가 들려요. 그래서
이게 뭘까? 그리고 한 발짝 이렇게 들여놔요. 다른 사람들은 계속 밟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탁 들어갔는데 벌써 코끝에 스치는 바람이 그 대머리 벗어진 길에서 느껴지던 그 공
기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나는 것입니다. 한 발짝 더 이렇게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조금
더 들어가니까 소리가 점점 들려요. 아, 그런데 못 걸어갈 길이 아니라. 안 걸어간 길입니
다. 너무 좋아요. 요즘 저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밤중에 대공
원에 가서 잔디를 밟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잔디야 좀 아프겠지만
밟을 때 기분이 참 좋아요. 그렇게 카펫을 밟은 것처럼 잔디를 밟으면서 들어가는 것입니
다. 조금씩, 조금씩, 들어가는 것입니다. 흠, 아, 신선한 숲의 냄새가 나요. 어느덧 얼마만큼
들어왔나. 이렇게 보니까 그 대머리 벗어진 그 길이 보이지를 않아요. 그리고 사람들의 소
리도 이제 들리지 않아요. 그 때쯤 되어서 숲 속에서 나오고 있는 소리가 느껴지기 시작하
는 것입니다. 그 대머리 벗어진 길을 걸어갈 때에는 이 숲의 소리가 있다는 것을 몰랐는데
그 길에서 벗어나서 숲 속에 들어와서 사면이 숲에 갇히고 나니까 이 숲 속에서 고유한 소
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여기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바람에 잎 새들이 나부끼는 소
리가 들려요. 끝없이 펼쳐져 있는 잔디밭, 사이사이로 뻗어있는 큰 나무들이 보여요. 고개를
들어보니까 흔들리는 나무 잎 새 사이로 아침 햇살이 쫙 비치면서 그 나무사이를 비집고 떨
어지는 아침 햇살에 풀잎 끝에 달려있는 이슬방울들이 영롱하게 빛나면서 다이아몬드를 확
뿌려놓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흠, 아,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 함이로다.
왜 말씀을 그렇게 들어도 그렇게 곤고한 삶이 계속되는지 아십니까? 왜 매일 매일 아주 풍
성한 진리를 곁에 놓고, 책을 읽고 설교를 듣고 공부를 하고 성경공부 1권 2권 3권을 해도
영혼이 핍절해지는지 아십니까? 말씀은 만지작거리고 말씀은 공부하는데 원 저자가 말씀을
안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머리까진 길로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또 빨리 가기는
왜 그렇게 빨리 가요. 무슨 성경 많이 읽으면 하늘나라 가서 상준데요. 그리고 뭐 100독 했
느니. 50독을 했느니 하면서 자랑이나 하고, 말이죠. 그렇게 가면 아무 유익을 못 얻는 것
입니다. 거기에서 그 잔디밭을 지나고 나니까 점점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아무도 본적이 없는 막 엄청난 호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잔디밭을 지나
누구도 방문해 본적이 없는 미문의 호수가 확 나타나요. 그리고 거기 잔잔한 호수에 그 숲
의 아름다운 정경이 그대로 어려요. 하늘에 구름이 떠가요. 아침 햇살이 호수에 은물을 깔
아 놓은 듯이 반짝이면서 비치기 시작해요. 그다음부터는 하여튼 대머리까진 길을 걸어갈
때마다 계속 숲 속만 쳐다보는 것입니다. 어디 나를 부르는 그 진리의 숲 속에서의 또 다른
음성이 없을까? 그러면서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문자로 써진 성경 자체는 우리에게 가려다 줄 수 없습니다. 문자로 기록된 성경의 진리 그 자체는 매우 뛰어난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원저자와의 만남이 없이는 이런 풍부한 성경 자체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그 일에는 실패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도 어떤 분들은 꼬박꼬박 성경을 읽는데도 왜 그런지 그것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고양되고 성경을 읽고나서 은혜로 충만해지는 이런 느낌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여러분들 가운데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사는 것은 개떡같이 살면서 기도하러 가서 은혜는 은혜대로 받아야 되겠다. 그러면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는 기도가 됩니까? 안 되죠.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지금 살아가는 모습이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지 않으면 기도가 안 되죠? 그렇죠. 아니 아멘 해 보세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마음과 삶, 행동 이런 것들을 기뻐하지 않으시면 기도가 안 되죠? 기도가 안 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거두어 가시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이 안 깨달아집니다. 때로는 그것이 5년 6년 7년 씩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런 시간의 길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마음을 기뻐하시고, 내 삶을 기뻐하시면 성경을 펼 때마다 한번도 그냥 덮게 하지 않으십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하나님이 덮게 하지 않으십니다. 가슴이 터질 듯 기쁘게 하시거나 찢어질 듯 아프게 하시면서 마음에 가죽을 도려내게 하시거나 그래서 심령에 할례를 받게 하시거나 지식적으로 도저히 깨닫지 못했었는데 쾅 하고 지성을 깨뜨리면서 새로운 진리들을 발견하여 부르르 떨게끔 만들어주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모든 것들을 다 각각 따로따로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삶은 삶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기도는 기도대로, 그다음에 성경 읽는 것은 성경 읽는 것대로, 섬김은 섬김대로 제멋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들이 일어나요. 기도는 하는데 자기 깨어짐이 없고 또 성경은 읽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저자이신 성령님이 오셔서 어루만져 주실 때에 그 성경 속에 깊은 비밀들을 터득하게 되는데 그것을 못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한번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최근에 설교를 듣거나 아니면 성경을 펼쳐서 조용히 읽다가 정말 주님의 임재를 느낀 적이 언제인지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성경을 읽다가 너무 가슴이 벅차서 이 성경을 가슴에 끌어안아 본적이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성경을 통해서 조명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나를 비춰서 내 죄악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에 너무 아파서 성경을 끌어안고 눈물 흘린 적이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또 성경을 통해서 곤고한 인생길을 걸어가는 나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그 감사의 눈물을 한없이 흘리며 감격한 적이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별로 없다고요. 그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무엇으로 이 세상을 이기겠습니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의 어두움의 주관자들인데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곧 성령의 검을 가지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뭔가를 여러분들에게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할 때는 항상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은혜를 주시고 싶으셔서 여러분의 마음의 창고에 손을 쑥 집어 넣으시고 전부 뒤지는데 뭐가 많이 손에 감촉이 느껴져요. 확 꺼내보니까 새카만 먼지가 잔뜩 묻어있어요. 어떻게 여러분들을 도와주실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죄와 유혹이 밀려와요. 그런데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요. 성령님의 은혜를 구했더니 성령님이 그 사람 가슴에 손을 쑥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다다닥 만져보니까 큰 칼부터 시작해서 예리한 날을 가진 칼부터 시작해서 크고 작은 종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칼들이 있는 것입니다. 아, 저 원수는 단검으로 물리치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주님이 그 속에서 단검을 집으셔서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수가 다가올 때 한번에 던지면 이기잖아요. 그런데 손을 집어넣으셔서 뒤져봐도 먼지밖에 안 잡히는데 먼지가지고 싸울 것은 아니잖아요. 끊임없이 성경을 읽어야합니다. 설교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자기는 성경을 읽지도 않고 설교를 통해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그렇게는 안 됩니다. 성경을 꾸준히 읽는 것은 성경의 전체의 통일성을 이해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개별적인 부분을 다루는 성경의 진리들에 대해서 풍부한 이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열어서 깨닫게 하시는 그 분이 누구냐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최근에 제가 그것을 아주 깊이 느낀 것이 신년 사경회 때입니다. 사실 11월 12월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는지 연말이라고 그랬는지 몸이 거의 파 짠지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준비하러 한적한 곳으로 물러갔는데 하여튼 처음이었습니다. 하여튼 성도들이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주 뚜렷하게 느껴졌습니다. 월요일 저녁에 도착해서 얼마나 주일날 설교하고 지쳤는지 그냥 이렇게 말씀도 펴지 못하고 혼자서 쓰러져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부러 좀 늦게까지 잤습니다. 그리고 이제 기도를 하고 아침에 성경을 폈습니다. 그런데 매일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지 않고 설교 준비부터 한다는 것이 좀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래서 설교 준비가 제일 급하지 성도들이 가서 뭐 개인 경건생활 하고 오라고 나를 여기에 가라고 한 것이 아닌데 하면서 성경을 펼쳐서 그래도 그냥 내가 요즘 민수기를 묵상하고 있으니까 민수기를 계속하자. 그리고 이것부터 하고 설교준비 해야지. 그리고 성경을 쫙 폈는데 호흡이 멈추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어 보이는 성경구절, 민수기 28장 3-5절이죠. 그 뭐 번제가 있고, 그다음에 소제는 가루를 빻아서 드리고 기름에 섞어라. 수없이 읽었지만 한번도 감동받은 적이 없는 성경구절인데 한번도 감동받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오전 내내 두절만 읽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감당이 안돼요. 이렇게 읽어가지고는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우선 밥을 먹고 힘을 좀 내야 되겠다. 그리고 읽기를 멈추고 그리고 요기를 하고 산책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마치 눈이 펑펑 쏟아지더라고요. 유혹을 뿌리치고 들어와서 다시 성경을 펼쳤습니다. 저녁때까지 다 두절을 못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녁때부터 깨달은 것들을 깨알 같은 글씨로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그날 밤에 다 정리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밤 11시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너무 지쳐서 안 되겠어요. 그래서 그냥 자고 그 다음날 아침에 본문을 대하는데 또 똑같이 가슴이 벅차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읽어서 될 일이 아니다. 좀 숲 속에 들어가서 기를 마시고 와야 되겠다. 그리고 기도하고 숲 속에 들어가서 다시 또 공기를 마시고, 그리고 와서 다시 적었습니다. 이틀을 메모를 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신년 사경회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발견한 것의 3분의 1밖에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사경회를 한 10일은 해야 될 것 같았습니다. 적어 놨다가 중요한 것은 그래도 했습니다. 너무 상실감 느끼지 마세요. 어쨌든지 전제까지 갔잖아요. 그리고 덮어 놓고 요즘 제가 그것을 다시 만지고 있습니다. 번제, 소제, 소제에서 자기 깨어짐 나오죠. 전제에서 순결의 문제가 나오고 번제는 헌신이 나오고 그런데 다 번제 빼고, 그다음에 이쪽에 나오는 것 빼고, 중간에 나오는 소제, 소제에서 앞부분 빼고, 자기 깨어짐 그 부분만 가지고 설교한 비율로 보면 한6분의 1정도 될 건데 그 부분만 가지고 지금 글을 썼는데 한 330 페이지짜리 썼습니다.
그것이 결국 뭐냐면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님이 말씀을 쭉 풀어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 때에 굉장히 풍부하게 진리가 막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무슨 생각을 하느냐면 “아, 주님이 말씀을 기록하신 이후로 이것이 최초로 내 앞에서 이 성경이 옷을 벗는구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자만이 아니라. 그러나 그것도 더 많은 깊이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제 두 가지를 철저히 한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한탄하게 될 것 같습니까? 우선 뭐냐면 첫 째는 무엇을 한탄하느냐면 지성의 그릇이 작구나. 내가 더 많은 지성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연구했더라면 아마 이정도 준비했는데 이만큼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면 그렇게 철저히 준비했더라면 아마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런 느낌이 옵니다. 또 하나의 한탄은 무엇입니까? 성령님의 은혜를 내가 체험했지만 이보다도 더 강하고 놀라운 성령님의 은혜를 내가 경험했다면 그러면 아마 더 놀랍게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매일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얼마나 좋은 것이 아니라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매일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죠. 그렇지만 어쨌든지 그렇게 하나님께서 한번만 성령의 감동으로 열어주시면 짧으면 10주 길면 한 30주 정도 설교할 수 있는 내용들이 그 속에서 쭉 솟아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많이 주실 때는 화가 나죠. 왜 주일은 평일 한번 주일 한번 이렇게 돼야지 이게 일주일 만에 주일이 오느냐는 것이죠. 이것 언제 다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으면 이게 뭔 일주일이 바람 같이 지나가서 또 설교해야 돼요. 탄약 떨어졌는데 빈총 들고 나갈 수도 없고 말이죠. 이것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언젠가 한번 청교도 존 오웬의 책을 한 10여 년 전에 딱 펼치는데 우연히 펼쳤는데 거기에서 뭐가 나왔느냐면 아주 그 아 한마디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서 초라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게 되면 상사병에 걸려서 마음이 상하고 육체까지 쇠약해질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성경이 보이면 얼마나 보이겠는가?” 나는 사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나는 진짜 주님을 사랑해서 살빠진 적은 없거든요. 그런데 그리고 나서 굉장히 충격을 받고 시편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게 다르게 다가온 것입니다. “아, 내가 주님을 사모하는데 주님이 나에게 응답하지 않으면 내가 참새와 같고, 당아새와 같고, 내 마음이 냉과리와 같으며 내 몸이 수척하여 내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이것이 난 그냥 이렇게 폼 내려고, 문학은 좀 이렇게 부풀리잖아요. 그렇죠. 아, 고생 조금 했는데 아, 죽을 뻔 했어. 그러잖아요. 그리고 조금 힘든 일 했는데 아, 죽을 뻔 했어. 뭐 그러잖아요. 그리고 조금 힘든 것 했는데. 생애적인 어려움을 만났다. 그러면서 항상 이렇게 부풀리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 시편이 그런 것만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서 느끼게 된 것입니다. “아, 그랬구나.” 그러니까 그다음에는 어떻게 변해요. 나도 그것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까지는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론이 성립하느냐면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진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싶어 하다가 만나면 행복해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진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사랑하면 못 볼 때에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와야합니다. 사랑에 빠져 본적 있습니까? 사랑에 깊이 빠지게 되면 이 세상에 어떤 형벌도 그것보다 더한 형벌은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사랑에 깊이 빠지고 나면 제일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뭐냐면 보고 싶은 것.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 보고 싶은 그 마음은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족이 되지 사탕 줘도 해결이 안 되고, 밥을 맛있는 것을 사줘도 해결이 안 돼요. 혹시 왜 연인들이 이별하고 헤어질 때 손수건 같은 것 선물로 주고 떠나잖아요. 이것이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생각이 더 납니다. 좀 많이 보고 싶다가도 이것을 보면서 아이고, 손수건이라도 봤으니까. 됐지.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을 보면 더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보이는데 보고 싶은 적이 없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죠. 헤어져 보면 압니다. 사랑 하는지 안 하는지.
그러면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느냐면 그 말을 했던 그 존 오웬 목사님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먹구름이 끼고 뭐 그럴 때가 영적인 거인이었다고 할지라도 없을 수는 없잖아요. 그도 인간일 뿐인데 그렇죠. 그런 속에서 우리는 그냥 하나님 못 만나면 못 만나나보다. 요즘 내가 맘에 안 드시나보다. 나하고 안 놀라고 그러시나보다. 그러면 나는 나대로 놀면서 기다려야지. 그러면서 가는 것이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잖아요. 내 솔직하게 얘기해서 여러분들 가운데 영혼의 침체에 빠져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것이 너무나 괴로워서 주님이 나를 만나주시지 않으면 내가 살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괴로워하면서 오직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이 영혼의 침체에 빠진 사람 가운데 내가 몇 퍼센트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매우 적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면 그런 마음이면 그분들이 결국은 다 주님을 만나요. 왜냐면 주님이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면 우리도 하나님이 좋지만 하나님도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을 등지면서 사는 것 원하지 않으십니다. 눈물로 간절하게 우리를 돌아오라고 하시는 그 마음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영적인 거장은 그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편 130편에 그 강해 같은 이런 것들은 말이죠. 그분의 철저한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다하였는가? 그분의 은총이 다하였는가?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그러면서 온 몸이 핍절하도록 말라가는 그 고뇌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사랑의 깊이 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 속에서 그런 사랑의 세계를 맛보게 하시는 분이 누구냐면 성령님입니다. 성경의 원저자이십니다. 성경의 원저자이십니다. 성령님이.
아볼로가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최고의 말씀 사역자가 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요한의 세례 밖에는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의 놀라운 도리를 깨달은 가운데 성령의 강력한 은혜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가 말씀 속에 펼쳐져 있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도 걱정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깨닫는 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으면서 은혜는 받고 싶어 해요.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마귀에게는 아주 훌륭한 밥입니다. 왜냐면 처음부터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은 마귀가 눈독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 원래 자기 뜻대로 사니까. 그렇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없고, 은혜에 대한 사모함도 없는 사람은 이미 훌륭하게 마귀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열심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또 은혜는 사모하면서도, 그러면서도 뭔가 가슴에 부딪히기만 하면 기꺼이 온 몸을 던져서 헌신할 준비다 되어 있으면서 그러면서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에는 관심이 현저히 적은 사람, 밥입니다. 개꿈만 몇 번 꾸게 해주면 사람 완전히 돌아버려요. 뭘 봤다. 이겁니다. 놀랍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 얘기를 할 것이니 들어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이제 많이 주의 말씀을 깨닫게 된 사람들이 있어요. 주위에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아주 뛰어나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매일 매일 은혜를 받고, 또 설교를 들으면서 교리적으로 잘 정리되고, 지식에 있어서 뛰어나게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말씀 지식 안에서 성장해 가고 있는 사람이 이상한 꿈 자구 꾸는 것 보셨습니까? 비몽사몽간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것 보셨습니까? 그리고 흔히들 말도 안 되는 표현이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나로 무슨 행동을 하게 하시는 것, 그런 것 경험했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통하실 때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네십니다. 이 지성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다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속죄함을 받은 다음에 당신의 인격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아주 놀라운 통로가 뭐냐면 하나님이 그의 지성에 말을 건네십니다. 그래서 이해시키셔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해된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깨닫고 싶어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더 깨닫게 주셔요. 더 이치를 깨달아요. 하나씩, 하나씩, 하나씩, 깨달아 가면서 주님의 마음속으로 깊이,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비입니다. 그런데 늘 무엇을 봤다. 그러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사람 앞에 갔을 때 대게 기가 죽어요. “나는 그런 것 못 봤는데.” 그렇게 봐서 보여주는 것 중에 새것이 있나요? 누가 그러더군요. 공무원인데 부정행위를 해요. 그런데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큰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제도적으로 그냥 습관적으로 사람들이 해 오니까 자기도 그렇게 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꿈에 보여 주시더래요. 자기가 아주 똥으로 뒤범벅이 된 그 길을 계속 해서 걸어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꿈을 거푸 두 번 꾸고 나서야. 자기가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정말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구나. 아니 성경만 펴 보면 도둑질 하지 말라. 나오는데 거 뭐 그렇게 힘들게 똥구덩이 속에 들어가서 그것을 깨닫느냐는 것입니다. 잘 들으세요.
성경을 통해서 읽다가 “뇌물을 받지 마라. 도둑질 하지 마라. 마음의 탐심을 물리치라.” 이것을 깊이 깨달은 다음에 이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결단한 사람이 개꿈 두 번 꾸고 비몽사몽간에 그 식은땀 흘리면서 깨닫는 사람보다. 더 영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은 사람입니다. 오죽 답답하면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똥통으로 데리고 가시겠어요. 얼마나 말이 안 통하면 그러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옛날에는 학교 다니면 항상 형이 동생을 가르쳤잖아요. 동생을 놓고 이제 가르치는데 더하기 빼기를 아무리 가르쳐도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손가락 발가락을 가지고 가르치면 답을 잘 알아 맞춥니다. 그런데 그것은 한계가 있잖아요. 이게 20개 밖에 안 되잖아요. 20이 넘으면 이제 다른 식구의 발가락도 빌려와야합니다. 그냥 이렇게 7자 하고 10자를 썼을 때 17이라고 대답하면 이게 더 수준 높은 교육입니다. 이것이 그리고 그렇게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사람들은 설령 개꿈을 꿔서 그런 것을 봤다고 하더라도 얘기 잘 안합니다.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성경에 명백하게 나왔는데 오죽 답답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깨닫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깨닫게 하신다. 그럴 때 그런 사람을 온전케 살게 하기 위해서는 24시간 재우셔야합니다. 왜? 깨닫게 해줘야 할 것이 너무 많으니까. 절묘한 묘사네. 24시간 꿈을 꿔도 주님이 가르쳐 주시고 싶은 내용을 다 가르쳐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종교 심리적으로 그런데 왜 사람들이 그렇게 멍청하게 그렇게 그런 쪽으로 가려고 하느냐? 그것이 종교 심리적으로 어떻게 되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놀라운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면 이 종교심 안에는 정서적 욕구가 있습니다. 영적인 욕구 이외에도 정서적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채워 져야합니다. 그때에 마음이 행복해지고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서적 욕구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예를 들면 신앙생활 하는데 하나님이 너를 사랑해. 다 알았어요.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설득이 되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돼. 그래서 온 힘을 다해서 살았어요. 진짜 객관적인 표준으로 볼 때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삶을 다 했어요. 만족이 됩니까? 안 돼지. 만족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주님의 사랑을 더 느낄 수 있어야죠. 이것들이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성경을 통해서는 그런 것을 느낄 수가 없고 신비한 체험으로 들어가야지 그것을 겨우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분리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함정에 빠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중세의 그 부패한 종교상들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롭게 새운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꿈베르보오” 신앙입니다. 이 꿈은 라틴어로 함께 라는 뜻이고, 베르보오 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뭐가 말씀과 함께 라는 것입니까? 성령님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매일, 매일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은혜로서” 무슨 뜻입니까?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뛰어난 학문과 성경의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기독론적 해석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쳤지만 그러나 은혜로서 가르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은혜 받은 사람에 의해서 성경에 풀려지고 해석 될 때 같은 은혜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또 그를 통해서 은혜를 받게 된 아볼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가르치니까 은혜로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성령님께서는 자기를 경험하고 원저자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을 아주 친근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이렇게 쓸데없이 그냥 나불나불 하게 떠들고 그런 성격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어떤 곳에 가면 몇 년 만난 사람들처럼 막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책 읽은 사람들이 많을 경우 그렇습니다. 뭐냐면 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굉장히 많이 읽은 것입니다. 최근에도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저의 책을 2권 빼놓고 다 읽었데요. 그래서 제가 그 사람 손잡고 가서 서점에서 두 권 못 읽었다는 것 사줬습니다. 참 나도 지독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이야기가 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굉장히 나에게 호의적인데 질문을 하는데 대답을 하기가 싫어요. 너무 엉뚱한 질문이거나 가치가 매우 적거나, 아니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 장시간 동안 이해를 시켜야 될 경우, 말을 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많이 책을 읽은 사람은 이미 원저자와 대화를 나눈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질문을 하면 간단하게 대답해도 많이 알아듣고 많이 이야기를 해도 요점을 파악합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성령님도 성경의 저지이시기 때문에 제 마음하고 똑같으셔요. 그래서 당신 책을 많이 읽고 당신과 대화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뜻을 더 많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서 성령의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서 말씀의 진면목을 보게 된 것입니다. 숲 속에 들어갔다 나오게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력하게 유대인들을 이겼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누구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성경을 추가로 배운 것이 아닌데 세상의 학문과 지성만을 가지고 탐구할 때에는 파악될 수 없었던 놀라운 진리들이 이제 이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난 다음에 성경을 논증할 때에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다보면 좀 의아한 느낌을 갖게 하는 성경의 기사가 하나 나타나죠. 예수님이 12살 되셨을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다가 가족들과 헤어지죠. 3일 만에 가족들이 찾아가 보니까 3일 동안 예수님이 뭐하고 계셨습니까? 성경의 박사들과 함께 성경을 토론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그냥 간단하게 “그래 예수님이니까. 그렇지” 그러면 성경이 재미가 없는 것이죠. 12살 밖에 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는 성경을 손에 들고 갈 수가 없었거든요. 머리 속에 다 암기하지 않으면 토론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 긴 시간동안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과 토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느냐면 예수님께서 성경을 많이 사랑하셔서 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뭐냐면 12살 밖에 되시지 않으셨지만 얼마나 깊이 하나님께서 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 때문에 이 성경의 숲 속을 누비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생애에서 설교된 것 가운데 지극히 일부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모두 구약의 숲 속에서 터득하게 된 예수님의 구약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그것들이 체험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도 적용이 되는 비밀입니다.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주님을 만나고 싶지 않으세요? 주님을 찬양하고 싶지 않으세요? 주님을 보고 싶지 않으세요? 주님을 만져보고 싶지 않으세요? 성경을 사랑해야 합니다. 정말 사랑해야합니다. 그러니까 이것 하나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설교를 듣다가 어렵다. 라는 느낌이 올 때 있죠. 그중에 하나가 뭐냐면 설교자가 이미 자기의 체험을 훌쩍 뛰어넘어서 또 다른 체험을 이야기 할 때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같이 체험했으면 정말 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요즘도 우리 교회에 그런 지체들이 많은데 전도사 때인데 청년부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자매 하나가 맨 앞자리에 앉았는데 그 때가 주기도문 강해를 시작하던 날이었습니다. 그 주기도문 강해를 우리 교회에서 두 번 정도 했지만 꾀 길거든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것을 가지고 3주를 했거든요. 그게 사실 교회에 오래 다닌 애들도 지루하게 느껴지는 성경 강해일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자매가 눈이 또 워낙 커요. 처음 왔는데 계속 우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못 들어요. 펑펑 울면서 고개를 못 들어요. 그래서 내가 “아, 은혜 정말 많이 받은 애 하나 데리고 왔구나.” 그랬더니 이게 불교신자래요. 교회 생전 처음 나온 거래요. 첫날. 그래서 “이해가 되냐?” 그랬더니 “그럼요.” 뭐 느끼는 것 없습니까. 무엇이 여러분들에게 결핍되어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실화입니다. 불교 신자래요. 그런데 친구의 손에 이끌려서 처음 전도되어서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우리 교회에 온 것입니다. 어려서는 뭐 교회에 왔다. 갔다. 했는지는 내가 확인을 안했으니까 나는 몰라요. 그런데 어쨌든지 나왔어요. 첫날 잊어버리지도 않아요. 1992년 9월 5일 입니다.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짜 나의 말씀생활 속에 성령님이 계신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이것은 해야지 끝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얘기를 안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결국 여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논증한 결과 매우 중요한 적용 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내가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내가 이성을 가지고 아무리 성경을 진지하게 탐구를 해도 그것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만 가지고 안 된다. 그것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아주 꼭 필요하고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죠. 우리가 그래서 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그렇죠. 그러한 말씀에 대한 접근에 대해서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님이 자신 속에 와 주셔야 된다. 예배드리는 그 시간, 설교를 듣는 그 시간에 성경을 펴고 읽는 그 시간에 교회에서 수없이 묵상 집을 만들고, 성경 공부 교제를 수없이 만들지만 이것은 오직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것을 붙잡지 않으시면 그렇게 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잖아요.
그러면 결론은 무엇입니까? 성령님이 오시면 되겠네요. 여러분들이 갈 수는 없으니까 성령님이 오시면 될 것 아닙니까. 어떻습니까. 해 보세요. 그래서 내일도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 읽으실 것 아닙니까. 오늘 가셔서 기도하시기를 “아, 하나님 우리가 오늘 설교를 듣고 보니까 이제야 알았습니다. 왜 성경을 읽어도 왜 이렇게 맹숭, 맹숭,하고 설교를 들어도 아무 느낌도 없고, 진짜 뭐 깨닫는 것도 별로 없고, 왜 그런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아이고, 성령님이 안 오셔서 그런 거군요. 오세요.” 내일부터 그리고 자 보세요. 내일 오시나. 한번 실험해 보세요. 오시나 한번 해보세요. 오실 것 같아요? 안 오실 것 같아요? 그게 무엇입니까. 무슨 성령님이 여러분들의 꺼봉이 아닙니다. “아, 전 몰랐어요. 저는 그냥 성경 읽으면 되는 줄 알았어요. 성령님이 오셔야 된데요. 빨리 오세요.” 그런다고 성령님이 오실까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오셔요. 내가 여러분 보고, 마당에 있는데 “아, 목사님 다리가 너무 아파요.” “아무데나 앉아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예쁜 옷 입고 와서 그 땅 바닥에 앉겠습니까. 어떻게 오시냐고요. 여러분도 어디 가서 앉을 때는 의자 한번 털고 앉는데 그 마음에 어떻게 오시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신앙의 모든 것들이 조각조각 떨어진 것이라. 이것이 전부 다 하나로 다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오셔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쭉 모으고 먼저 회개해야합니다. 우리가 말씀의 홍수 속에 살면서 이렇게 떡칠하듯이 이렇게 말씀의 풍요 속에 살면서 이렇게 떨칠 하듯이 이렇게 말씀을 하찮게 여기고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해야합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말씀을 대하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깊이 통회해야합니다. 그리고 정말 주님이 오셔서 말씀해주실 수 있는 마음의 상태, 그리고 말씀해주시면 동의해주실 수 있는 방향으로 여러분들의 삶이 움직이고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누가 설교가 어렵다. 뭐 말씀이 어렵다. 그냥 다 지워버려요. 거짓말이다. 그러면서 변화되지 않으면 여기에서 코미디를 하지 않는 한 다 어렵습니다. 변화 되면 쉬워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한번 딱 부러지게 얘기해봅시다. 말씀이 말씀대로 가고,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붙어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말씀이 굽어서 그래서 사람 가는 길로 따라가야 되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한번 여러분들에게 시험해 보기를 원합니다. 진짜 왜 내가 성경을 읽을 때 주님이 오시지 않는가? 내가 왜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그 말씀을 깨달아지지 않나? 성령님이 안 오시기 때문이구나. 내 마음에 더러움을 회개 합니다. 성령님이 동의해 주실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말씀의 저자이신 성령님이 인정해주실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회개해보세요. 그리고 마음을 씻어내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깨끗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주님의 은혜를 갈망합니다. 간절히 마음을 모으고 기도해보세요. 하나님이 반드시 말씀을 대할 때 찾아오셔요. 그래서 정말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십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생각하지 마세요. 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섬김과 섬기는 자의 영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