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도구, 성도들의 섬김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성도의 섬김 (벧전 4:10) 2005.6.29 수요예배 1
2. 예수님의 섬김 정신 (요 13:14) 2005.7.13 수요예배 14
3.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길(엡4:11-12) 2005.7. 17 주일예배 20
4. 성도로 섬기게 하심은(엡4:13) 2005. 7. 24 주일예배 29
5. 지식으로 자라게 하라 (엡4:14)2005. 7. 31 주일예배 44
6. 사랑으로 자라게 하라 (엡4:15)2005.8.7 주일예배 63
7. 영적 성장과 교회 성장1(엡4:16) 2005.8.14 주일예배 80
8. 영적 성장과 교회 성장 2: 참된 회심의 필요(엡4:16) 2005.8.21 주일예배 91
1. 성도의 섬김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4:10)
사랑이 많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복된 수요일에 우리를 불러 주시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이처럼 저희들이 마음을 들여 예배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이시간도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해 주시고 그래서 저희로 그 뜻을 깨닫고 주님께 순종하며 나갈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그 충만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신앙생활하면서 우리가 받는 큰 축복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이 은혜라는 말은 크게 두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객관적인 모든 좋은 호의 이런 것들을 은혜라 그러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혹은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같은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게 베푸신 그런 객관적인 호의를 나타낸 것이죠. 그런데 또 이 말이 신자의 주관적 경험과 관련해서 사용될 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에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신학자는 이 은혜라는 것은 복잡하게 말할 필요없이 그냥 성령님이시다, 이렇게 간단하게 말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받아라는 것은 성령을 받으라는 이야기고, 은혜안에 살라는 것은 성령 안에 살라는 것을 말하고 은혜가 있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성령님과 함께 신앙생활하는 것을 가리키는 거다, 그렇게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주관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인격적인 성품의 영향이 우리 안에 미치는 것, 이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요새 은혜가 떨어졌구나 하는 것은, 이렇게 주관적으로 내 마음에 있었던 하나님의 성품의 영향력이 내 안에서 소명되고 있다는 그런 뜻이죠. 그래서 우리가 은혜 안에 삽시다, 그런 이야기는 그런 하나님의 성품에 은혜로운 영향력 아래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그 은혜의 힘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고 또 그 은혜의 힘 때문에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인격을 가졌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진실한 참회를 하고 성화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객관적인 호의로서의 은혜를 통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주관적인 은혜 안에 살지 않으면 우리가 절대로 좋은 신자가 될 수 없고, 절대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기쁘게 누리며 생활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자주하는 말이지만, 신자가 되고 나면,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어요.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 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물고기에게 있어 물과 같은 것이죠. 물을 떠나서 물고기가 금방 죽는 것은 아니죠. 큰 물고기 같은 것은 꺼내서 바닥에 던져나도 한참 살아요. 오래 삽니다. 그러니 그 물고기는 물을 맡으며 그 물을 아가미로 뱉으면서 산소를 흡수하면서 체내에 작용을 하며 사는 피조물인데, 물이 없이 그렇게 아가미를 벌떡거리는데, 살기야 살죠. 그런데 사는 것이 오죽하겠어요. 우리가 숨을 안 쉰다고 죽습니까? 숨 안 쉬어도 죽지 않아요. 한참동안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래서 물고기도 보면 물이 없이 바깥에다 두면 움직이기도 하고 살아있기도 하지만 정상적인 삶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물고기를 물에 넣어주면 얼마나 자유로게 헤엄 치며 도망을 갑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살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그 삶이 오죽하냐 이거지요. 은혜 안에서 신자가 살면, 그 은혜를 누리면서 기쁘게 신앙생활 하잖아요. 아, 뭘 첨 듣는 얘긴것 처럼 그런 표정을 짓나요? (웃음) 그렇게 은혜 안에서 사는 거에요. 그런데 그 은혜를 누가 주세요? 누가? 하나님께서 주시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여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어느 성경에 보니까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 나와요. 각양 은혜를 맡은 청지기처럼........그럼 여기에는 지금 이 은혜를 누가 준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문학적 상상력이 없어요? 내 얼굴을 쳐다보면 무슨 답이 나와요? 성경을 봐야 답이 나오지. 이런 각양 은혜를 누구 맘대로 주고 처리를 한다는 겁니까? 성경을 보면 알잖아요. 참 답답하네.청지기, 청지기........청지기가 이런 각양 은혜를 맡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어서, 물론 청지기 것은 아니지만, 그가 그걸 맡아서 막 나눠준다 이거예요. 사람들에게......사실 이 말을 여러분 교리적으로 동의할 수 있어요? 여러분들이 받은 은혜 담임목사가 준 거예요? 왜 대답을 못해요? 그렇게 말하면 교리적으로 잘 못 된 겁니다. 그래서 가끔 식사를 하러갔을 때 교리반을 안 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그래요. 목사님 우리에게 오늘 은혜를 많이 좀 주세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그런게 어딨냐? 그걸 나한테 달랄 게 아니라, 우선 열심히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어야 할 일이지......
이건 분명히 문제가 있는 성경적 표현이죠.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각양 은혜를 청지기가 맡아가지고 있다 그말이에요. 그런데 이 청지기가 누구에요? 일차적으로는 베드로의 편지를 받고 있는 교인들이고, 이걸 적용하면 오늘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를 향해서 각양 은혜를 너희들이 맡아가지고 있고, 너희들이 나눠주는 거다......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적 생각으로는 이 표현이 선뜻 수긍이 되기 힘들죠. 오늘 이제 이러한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것을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본론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놀라운 작용을 하죠. 이 세상에서 신령한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성품, 존재, 그리고 우리 영혼의 세계.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이런 것들에 대해 아무 관계도 없던 사람들로 하여금 이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안 믿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만들고 창조의 목적과 상관없이 살던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만듭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어요. 이게 바로 은혜가 하는 일이에요. 이게 바로 은혜가 충만한 교회에서는 항상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 그 교회에 들어와서, 하나님이 안 계시는 줄 알았는데, 여기 계시는구나 하는 인격적 영향력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은혜가 하는 일이에요. 은혜는 교회 안에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밖에 나가 생활할 때도 그 은혜를 역사하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꺠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꼐 돌아오게 만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요. 이게 하나님 은혜가 하는 일이에요. 그 뿐 아니죠.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예수 믿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뉘우치고 돌아오는 것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은혜를 받으면 관심사가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니다. 어떡하면 내가 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까. 어떡하면 내가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떡하면 내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많이 받았으니, 내게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삶을 살까? 그래서 신자들 속에 이런 하나님 은혜가 계속 역사하게 되면 점점 더 착한 신자가 되어갑니다. 그래서 비록 자신에게 큰 재능과 많은 재산이 없어도, 어느 구석에 갔다놔도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죠. 하나님 은혜는 이렇게 놀라운 것인데 이건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예요. 이건 분명한 거예요. 인간이 이런 은혜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이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주시는데 하나님꼐서 성삼위일체의 이러한 은혜를 주시는 일에 함께 관여하시는 거예요.
성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주시는 데 있어 하나님이 함꼐 관여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은혜의 원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 은혜를 주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분이 하나님이세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고 우리들은 더러운 죄인들이기 때문에 은혜를 주실 수가 없고, 또한 우리들이 비록 죄를 용서받은 자녀가 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주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좋은 것들은 흠 많고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받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불결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거룩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인 경우에도 마찬가지고, 또 이미 우리 같이 구원받은 사람들이라 할 지라도 구원의 원 주인은 하나님이시지만, 그걸 우리에게 주실 때는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서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죠. 하나님 은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섬김, 우리의 찬양 하나님을 향한 헌신 모든 것들도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께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섬김이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무리 훌륭하고 크고 깨꿋하다 할지라도 완전하신 하나님이 받으시기에는 모두 불결해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그 피로 깨끗케 되어서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원주인은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데 이것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분이 성령님이에요. 그래서 그 성령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신자안에 느껴지는 모든 곳에는 항상 성령님이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은혜의 원저자, 그리고 이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하게 하시는 공로, 또 그 은혜를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전달해주시는 분, 모두 누구에요?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은혜를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을 모두 찬양하는 것이 맞다, 이거예요. 은혜의 원저자이시고 우리 같은 사람에게 은헤를 주시도록 지정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랑과 또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 같이 공로 없는 죄인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가 우리에게 이르도록 공로를 제공하시고 우리를 위해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양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우리 속에 전달해 주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 그 교통하심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찬송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이 놀라운 은혜는 원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해주시는 것이니 사실은 인간이 만들고 인간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오늘 어떻게 말하느냐 하면 각양 은혜를 맡은 청지기다........이 청지기가 누구예요?일차적으로는 이 편지를 받는 수신자 그리스도인 들이고 그것을 적용하면, 우리가 그 사람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청지기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것도 한 종류가 아니라 아주 여러 종류의 은혜를 너희가 맡아가지고 있다. 이건 분명히 원리적으로는 은혜의 원저자가 성부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로 성령 하나님의 작용으로 우리에게 전달 되는데, 여기서는 마치 우리가 그 은혜를 나누어 주는 듯, 창고의 책임자처럼 얘기하는 거예요. 교리적으로 잘못된 거죠. 성경이 잘 못 기록했을리 없으니, 그 사이의 무슨 나름의 논리가 있을 거예요.
여기서 각양 은혜를 맡은 청지기라는 말은 하나의 은유에요. 그래서 이 글을 쓸 때 베드로 마음 속에는 부잣집, 재물이 많은 집의 청지기를 생각한 거예요. 이 청지기는 신분은 종인데 막 부려먹는 종이 아니라, 그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는 종류의 직책을 가진 종이에요. 비근한 예로 엤날 보디발의 집에 끌려간 요셉을 생각해 보면 될 거예요. 그가 처음에는 종으로 끌려갔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 주인에게 사랑받고 인정 받더니 그 집의 총무가 되었다고 했잖아요. 주인의 신임을 많이 받아 주인이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겼어요. 애굽이라는 큰 나라의 시위대장이니 포도대장이나 경호실장 급인데 거의 장관과 맞먹는 대신의 직책을 가진 사람이니 집에 식솔은 얼마나 많겠으며 종들 객식구, 그들을 먹여살릴 재물, 창고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 모든 것을 요셉에서 맡긴 것이죠. 그래서 신분은 분명 종이지만 다른 종과 다른 레벨이었죠. 그는 비록 종이지만, 주인을 대리해서 주인의 종을 관리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에 주인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 그가 보디발의 아내를 설득하면서 호소한 게 뭐였죠. 당신 남편이 나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리고 권한 주지 않은 것은 단 두 개인데, 아내인 당신과 자기가 먹는 음료였다. 먹는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므로 종들에게 손을 못 대게 한 것이죠.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나에게 맡겨주셨다. 이런 신임을 받고 있는 데 어떻게 내가 여호와 앞에 듣죄하겠느냐 그렇게 설득하는 장면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청지기예요. 청지기는 창고의 열쇠를 갖고 있어요. 곡식을 비롯, 각양 많은 물건들이 들어있고 그렇게 권세있는 집안에서는 그렇게 물건을 사다 보관도 하지만 들어오는 것도 많을 거 아니에요. 그런 것들을 다 정리해 놓고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니 그것으로 집안의 재산권을 행사한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 보면 땅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소작을 주잖아요. 수백명, 혹은 수천명의 사람들이 자기땅에서 붙여먹고 살잖아요. 그러면 그들을 절대 함부로 대하지 않았아요. 그 노동력이 없으면 자기 땅이 황무지가 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는데 경상도 사는 사람 데려가 소작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곡식을 잔뜩 거두어 들이면, 관리를 하면서 만일 소작인이 불이 났다던가 어려운 일을 당해 곡식이 없더라, 하면 인간적으로 그냥 주기도 하고 꿔주기도 하면서 잘 관리해 나갔던 거예요. 그런 것들을 주인 명을 받아 출납한 사람들이 청지기에요.
그러니 그 창고 안에는 물건이 한아름 쌓여있어요. 물부터 시작해서 곡식, 동, 철 심지어는 농기구까지 다 있다 이거죠. 그런 많은 물건이 들어있 창고를 관할하는 사람의 그림을 머리에 그리면서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냐하면 너희가 바로 그 창고를 맡은 청지기다......여러분 동의할 수 있어요. 대단히 담대하시네.....이게 바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신비에요. 그래서 하나니은 은혜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시고 그 은혜를 공급하시도록 공로적 토대를 만드신 분은 성자 예수님이시고 그것을 작용케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지만, 이것ㅇ르 사용하실 때 섬김의 역사를 사용하셔서 이런 은혜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사용하셔서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이 늘 불순종하며 방황하며 살아. 그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하잖아요. 은혜를 주시고 싶어하셔요. 그를 위해 죽으셨어요. 그를 위해 작용할 준비가 되어 있으셔요. 그런데 언제 그런 작용이 일어나요?내가 찾아가 그를 위해 기도해 줄때, 내가 찾아가 그렇게 살지말고 그렇게 곤고히 살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가르쳐줄 때, 무엇으로든지 그를 섬겨 그가 있는 자리를 떠나, 하나님께 은혜 받는 자리로 돌아오라고 봉사할 때, 하나님이 나를 통해 그 은혜를 전달하시니까 나를 그 은혜의 창고 맡은 청지기라고 불러 주시는 겁니다. 은혜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시고 그 은혜를 공급하시도록 공로적 토대를 만드신 분은 성자 예수님이시고 그것을 작용케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지만, 우리가 바로 그 은혜를 전해주는 주님의 도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서 그 혜택을 다른 사람들이 계속 보는 은혜 확산의 역사가 나타나는 겁니다.
사도가 오늘 뭐라고 말하냐하면 각양 하나님의 은혜,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 종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성령님의 은혠데 그 성령이 은혜를 주실 때, 나타나는 방식이 다양하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 받으면 물질을 주님 앞에 바치고 싶어 어쩔 줄을 몰라요.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재능을 하나님 앞에 바치고 싶어해요. 또 어떤 사람은 과거의 죄를 버려요. 어떤 사람은 죄를 버릴 뿐 아니라 새로운 섬김을 계획해. 아주 다양한 방향으로 은혜의 역사가 나타난다 이거예요. 이런 다양한 은혜가 청지기와도 같은 섬김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러니 어떻게 됩니까? 섬기는 사람들을 통해서 은혜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실현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섬기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거예요. 여러분, 집에서 텔레비전 보고 놀다가 은헤 받는 사람 봤어요?항상 성도의 섬김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요. 그래서 사람들이 은혜 구할 때도 포괄적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신 그 부담으 f가지고 은혜를 구하는 거예요.
교회를 수리하면서 하나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사람들은 어떻든 이 교회를 지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때, 그들이 기뻐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데, 전도하는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전도할 때 놀라운 은혜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하지 않겠어요? 내가 온 마음과 물질을 드려서 선교하는데, 그 사람의 가장 간절한 소원이 뭐겠어요. 선교하는 그곳에 성령의 은혜가 나타나기를 구하지 않아요? 그래서 가끔 교회에서 보면 어떤 일이 있어요?사람들이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는 관심을 안 가져주고 각자 자기 일만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같고 은혜를 구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가끔은 섭섭하고, 내가 이렇게 섬기는 데 왜 나를 위해서는 더 많이 신경써주고 기도하고 기억하지 못하나 하는데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우리가 모두 하나님을 섬기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일이 얼마나 많겠어요?다녀보면 정말 하나님을 섬길 일이 많아요. 인간의 직업이 3만 4천가지래요. 그 중에는 포스터의 그림 안에 그려진 콧수염 지우는 일도 있대요.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기 위해 섬길 수 있는 일도 얼마나 많을 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노숙자에게 밥을 퍼다 먹이는 사람부터, 멀리 가서 복음 외치는 사람, 그 복음 외치는 사람을 위해 밥해주는 사람, 그런 밥하는 사람이 시장보러 갈 때 차를 모는 사람, 오지에 가서 비행기를 운행하며 선교사들을 나르는 사람,,,,,,헤아릴 수 없는 종류죠.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섬김들이 합쳐져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거죠. 그 중에는 갈 곳없는 노인들의 똥걸레를 빠는 일도 있다 이겁니다.
각기 하나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에요. 내가 하는 그 일에서 많이 봉사하세요. 어떤 사람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처럼 이렇게 목회를 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이렇게 설교할 때, 쓰기 좋으라고 이 설교집 만드느라고 애쓰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며 은혜를 구하며 사는데 각자는 하나 하나 돌아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그 부속들을 하나 하나 맞춰가셔서 하나님이 자신의 나라를 일구어 오셨습니다.
그래서 심성이 곱고 하나님을 향한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편협되지 않고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칭찬하고 기뻐하는 겁니다. 내가 이 일을 하는데 사람들은 왜 이 일에 관심이 적을까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뜻대로 잘 엮으셔서 사용하신다는 넓은 시야를 가질 필요가 있어요. 다른 사람도 이해하고 격려하고, 돕는 것, 너무 아름다운 거죠. 뭐라구? 너는 해외 선교를 한다고? 나는 국내 전도 사명을 맡았는데......한국도 안 믿는 사람이 많은데 왜 달라 쓰며 외국을 가는 거야>? 그러면 아직 깨어지지 않은 속이 좁은 사람이죠. 늘 그런 사람 만나면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줘요. 아직 깨뜨려지지 않은 육에 속한 혈기가 많은데 변화시켜 주십시오....누구하고 똑 같아요? 그정도까지 된다고 말할 수 없지만, 요나의 후예들이죠. 왜 니느웨로 안 갔어요? 가면 얻어 맞아 죽을까봐 안 간 거 아니에요. 주님 명령을 목숨 걸고 불순종한 거 보면 그정도 용기는 있는 사람이거든요. 왜 안 갔냐하면 그들이 회개하는 게 싫은 거예요.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얼마나 괴롭혔는데....그 앗수르를 심판하시겠다는 데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거예요. 신난다. 일본이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자꾸 우길 떄,일본에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기면 깨소금이다 그런 것처럼. 그러면 안 되거든요. 아직 어려서 그런 겁니다. 잘 몰라서 그래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은혜를 입고 그게 싫다 이거예요. 이 참에 하나님 한번 빌려서 평소에 유감 많던 앗수르 청소 한번 하고, 이 땅을 저희에게 주시나....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주신 것처럼. 그걸 꿈꾸는 거죠. 만일 그렇게 하라고 주었으면 요나는 니느웨 가서 순교라도 할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거든요.
그렇게 넓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열심히 섬기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너도 하나님이 세운, 사람, 너도 하나님이 세운 사람, 그렇게 모두를 축복하면서 나와야 해요. 아멘.....그래야 됩니다.
저 사람은 말이지 새가족은 도와주지도 않고 헌가족만 챙긴다고 ....헌가족도 가족이잖아요. 헐었으니까 잘 챙겨야죠. 새것만 챙기면 되요? 그러면서 나가는 거에요. 그리고 섬김을 볼때마다 촉복해줘요. 그게 메아리가 되어 돌아와요. 메아리가 되어....어떤 때는 제자들을 만나거나 하면 마음에 안 들때도 있거든요. 그런데 누가 그 사람 어떠냐고 물어볼 때도 있어요.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아, 거 인간 안 됐지. 그렇게 얘기하고 싶지요. 그런데 그래봤자 유익이 뭐가 있어요? 가만히 생각하고,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면 또 그것도 오해가 많잖아요. 야 너에 대해 물어보니 김목사가 할 말이 없다더라......그래서 어떻게 지혜롭게 말할까? 별로 안 좋은 거 말고 그 형제 뭐 그렇게 썩 훌륭한 거 말고 괜찮은 거없을까? 고민하다 말해주는 겁니다. 그 사람 제가 완전히 다는 모르지만 이런 점은 참 훌륭해.....이렇게 하고 나면 몇 년 지나 별로 친하다고 생각도 안 한 사람이 장가 간다고 편지도 와. 왜 그러냐 했더니 몇 년 간 돌고 돌아, 야 내가 김목사님 만났는데 니 얘기 하더라. 너를 그렇게 칭찬하더라. 사실, 칭찬한 게 아니라 좋은 것만 얘기한 거죠. 그렇게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세요. 그러면 메아리가 되어 자기에게 돌아와요.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은혜가 역사하면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잖아요. 그런 은혜를 마치 하나님이 마치 창고가 가득 쌓아두셨는데 저자는 성부 하나님이시고 공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담당하시고 작용하게 하시는 성령님 위에 우리가 섬기는 그곳에서 삼위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은혜의 작용이 일어나게 하시는 거예요.
결국은 청지기가 창고를 열고 물건을 꺼내줄 때는 멀리서 보면 그 사람이 주인같잖아요. 자기 마음대로 꺼내주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사실 그 청지기는 창고 물건 주인이 아니예요. 그리고 자기 맘대로 꺼내주는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너는 이렇게 해라, 그러면 예 하고 가서 나눠줄 만큼 나눠주고 다시 창고를 잠그는 게 청지기의 임무라구요.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는 도구가 된다 하더라도 조금도 자만할 이유가 없어요우리는 은혜의 원저자도 아니고 그걸 제공할 수 있는 공로를 제공한 사람도 아니고 그것을 실제적으로 사람들 마음 속에 일으키는 작용을 하게 하는 사람도 아니에요. 우리는 다만, 그런 은혜가 사람들에게 전달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한 거예요.
비유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주님이 삽으로 많은 쌀을 확 퍼서 줄 때, 주님의 손에 붙들린 바가지 정도 되는 게 우리다, 그런데 이 바가지 역할을 잘 하면 주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퍼서 나눠주는 것이죠. 우리는 이 은혜의 원저자도 아니고 공로자도 아니고 작용자도 아니지만, 퍼서 나눠주실 때 도구가 되는 거에요.
얼마나 감사해요? 우리가 주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그런 은헤의 역사가 나타나서 성도들에게 은혜를 도저히 받지 못하던 성도들이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은혜를 받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그를 위해 기도해 주니까 변화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던 사람들이 변화 되는 것, 우리가 기도해주고 권면해주고 우리가 모본을 보이고 격려하고 칭찬하니까 전혀 주님을 섬기지 않던 사람들이 주님을 섬길 마음을 가지게 되고 거기서 기뻐하게 되는 거예요. 성도의 사명은 뭐냐? 청지기의 사명은 뭐냐? 그렇게 앉아있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일으켜 모두 손잡고 이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퍼주시는 도구가 되도록 살아가게끔 일으켜 세우도록 청지기인 우리가 해야될 일이란 것입니다.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받았다고 위세나 부리고, 온 지 오래 됐다고 처음 온 사람들을 경홀히 대하고, 먼저 교회 온 사람들이 뺑뺑 둘러싸서 담임 목사에게 진을 포진하고 이런 것들은 모두 비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청지기의 사명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든지 될 수 있는 사람들인데,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섬기지 않는 사람들, 또 그렇게 섬길 수 있는데, 아까와 자기의 자원을 주님을 위해 쓰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하나씩 일으켜 자기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전해주는 도구가 되는 삶을 살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청지기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일으켜 세워주고 그렇게 하나님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교회에서 나온 통계에 의하면 교인 중 10%만 봉사한다고 나와있어요. 나머지 90%는 그냥 교회 나와 예배드리고 가는 거예요. 그 이상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어때요?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수가 없죠. 여러분들은 교회가 성장하고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시면 어떡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주 많은 일을 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에요. 하나님의 일이 그렇게 많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섬겨야 할 일들이 이 세상에 그렇게 많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많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어찌되어요. 자원이 업속 섬길 사람이 없어 못하는 겁니다. 못하는 것......때로는 자원이 있는데 열심 이 부족하거나 생각이 부족해 못할 적도 있는 거예요.
우리 이번에 해외로 국내로 아웃리치 가지요. 지금 거의 600명 가까운 사람, 600명이 뭐야, 700명 가까운 사람이 이번에 가지요. 진작 했어야 해요? 아니면 너무 빠른 일인가요? 이 일이 교회가 개척하자마자 했으면 안 될 일이었을까요? 너무 했어야 하는 일이죠. 그런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핑계가 아니라. 할 수가 없었어요. 할 수가.......왜? 돈도 없고, 무엇보다 각 사람이 그렇게 헌신되어서 선교를 할 정도로 자기를 준비한 사람들이 없어요.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 할까요? 그렇게 몇 십 만원씩 내고 해외 나갈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어때요? 진작 했어야 하는 일인데 교회가 자원이 없고, 사람이 없어서 못하는 거예요. 그러면 질문을 이렇게 하죠. 지금은 꼭 해야하는 일인데 안 하고 있는 일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많죠. 많지요. 제가 엊그제도 교역자 수련회 가서 교육계 봉사하는 분을 우연히 만나 그분과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는데, 지금도 제가 꼭 하고 싶은 게.......아이들이 지금 이게 정상적인 교육이 아니거든요. 그러잖아요. 그래서 지금도 너무 하고 싶어요. 하나님께서 기회만 주시면, 초등학교도 하고 싶고 중학교도 하고 싶고, 고등학교도 하고 싶어요. 대학교는 하고 싶지 않겠어요? 돈 조금 정부한테 받고서 휘둘려서 말이지, 성경도 못 가르치게 하고 그런 학교 말고, 진짜 우리 힘으로 피 땀 흘려 학교를 세우고 우리가 돈을 선겨하는 마음으로 바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길러내는 교육사업, 하고 싶어요. 그리고 너무 해야할 일이에요. 그런데 못 해요. 왜요? 아직 능력이 안 돼요. 왜 이렇게 믿음이 없습니까? 미안해요. 믿음이 없어서. 미안한데 시간이 필요해요. 엄청난 돈이 들어요. 뭘 하면 못하겠어요.
그런데 어때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섬기는 사람이 많아지면 해야될 일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우리가 아마 지금도 돕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그 팜플렛만 보면 그렇게 마음이 아릴 수가 없었어요. 배를 한 척 인가 두척 가지고 교회를 세울 수가 없잖아요. 낙도에는.....아니 무슨 12가정 있는 섬도 있고, 10가정 모여있는 섬도 있는데, 거기 어떻게 교회를 다 세워요. 우리 나라에 섬이 삼천 몇 백개라는데.....어떻게 다 세워요. 그러니 그 사람들이 전도대원들을 심고 두루두루 다니면서 섬마을에 다니면서 순례로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아, 요새는 또 한 선교 단체가 생겼는데, 너무 시간이 걸려, 그래서 비행기를 하나 만들었어요. 그래서 물에서 비행기를 띄워서, 수상비행기를 만들어서 수상스키가 아니고, 수상 비행기, 그걸로 마을 마다 다니면서 그걸로 전도지도 돌리고 위해서 기도도 해주고 그런다고 합니다. 다 해야 될 일이에요. 뭐는 할 일이 아니겠어요? 며칠 전에는 미국서 나온 잡지에서 보니까 길거리를 방황하는 청년들, 교회에서 아무리 찬양집회를 하고 꽹과리를 쳐 봐야 걔네들 오겠어요? 길거리가 좋은 애들인데. 그런데 한 교회에서 그 애들을 위해 아주 지성으로 기도하면서 그애들에게 말하자면 먹을 걸 들고 가고 이러면서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눈물겹게. 그거 우리가 해야될 일이에요. 그런데 그거 뭐 얼마나 많은 자원이 필요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하겠어요?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부어져야 해요. 은혜의 창고에서 은혜가 계속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불을 붙이고, 그래서 다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되고, 그래서 은혜에 소외된 사람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발을 씻기는 마음으로 섬길 때 거기 또 은혜의 불씨가 퍼지는 거예요. 거기서 또 벌떼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어나. 그렇게 하면서 온 세상이 불 붙기를 바라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라 이겁니다. 그 마음이라 이거예요.
그러니 하나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는 도구라고 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두려운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살면서 하나님을 얼마나 섬겼느냐 하는 것은 이런 은혜의 불을 이 메마른 땅에 어떻게 붙이면서 다녔느냐 이거예요.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기업을 하면서 불을 붙이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불을 붙이고 사람을 고치는 사람들은 그 치료를 통해 은혜의 불을 붙이고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쓰는 걸 통해서 그 은혜의 불을 붙이고 무엇을 하든지 간에 섬기는 그 일을 통해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그 사람이 아무 것도 섬기지를 않고 살아간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아주 중대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그 비밀 자체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그 계획과 하나님 자체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섬겨서.....그래서 여기서 뭐라 그래요? 봉사하고.....봉사하라는 거예요. 봉사가 뭐예요. 종노릇한다는 거예요. 디아코니아예요. 원어는 식탁에서 사람들에게 서빙을 하는 노예의 행동을 지칭하는 거예요. 그걸 하라는 거예요. 그걸 하는 그곳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사람들에게 전파된다는 것이에요. 전파된다 이거예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왜 이런 은혜를 주셨어요? 왜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밝은 빛을 보게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만드셨습니까? 왜 죄를 회개하고 옛삶을 버리게 만드셨습니까?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의 양심의 가책을 덜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그냥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어둠 가운데서 여러분을 건져내셨습니까? 베드로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너희를 그 어둠 가운데 불러내신 것은 너희를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덕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그렇게 불러내신 거라 이겁니다. 너희를 그렇게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로 불러 주신 것이다, 그겁니다. 삼아주셨다 이거예요. 그러니 덕을 선포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 소식을 들은 사람, 그비밀을 깨달은 사람들이 다시 주님을 위해 섬기고 싶은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벌떼처럼 섬기는 사람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들을 펼쳐나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할 일이 많아요. 이 세상에. 달려가서 무릎 꿇고 흐느껴야 할 이 세상의 구석들이 너무나 많이 있고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헌신적인 섬김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주일날 나와 달랑 예배드리고 수요일날 와서 달랑 나와 예배드리고,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다 이거예요. 심지어 자기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도 별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질 않아요.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은혜를 유지하겠으면,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그 소명대로 살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렇게 산다면, 살아있으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예요.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이 땅에 살려주시고 더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합니까? 그렇게 하니까 사치스러운 일 가지고 고민하고, 사소하고 마음이 상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목숨걸고 그러다 보니 정작 주님을 위해 바칠 목숨은 없는 상태가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어요?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모이면, 어떻게 되나요? 사람이 살 좀 찐다고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점 키로수가 늘잖아요. 그리고 뭐 좀 쪄도 무슨 문제겠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살 찌는 걸 그렇게 염려하고 걱정하나요? 뭐 좀 적당히 먹고 운동하고 균형을 맞춘 생활을 하면서 뼈도 튼튼해지고 근육도 붙고 키도 자라고 튼실해지는 것은 문제 없어요. 여러분, 빠짝 마른 가정주부들이 가사노동을 하면 얼마나 힘이 들어요. 그런 사람들 열에 여덟은 뼈에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왜? 뼈가 좀 써금 써금 해도 근육이 튼튼하면, 힘줄로 버티는데, 살이 없어, 그러면 딱 가죽과 뼈사이가 아주 가까워서 뭘 하면 그 힘이 그대로 뼈로 가서 뼈가 자꾸 망가지는 거야. 그러니 살 좀 찐다고 무슨 문제에요. 교인이 늘어나는 것은 나쁜 것 아니에요. 아까 말씀 드렸듯이 2-30명 모이면 못하던 일 하잖아요. 우리도 2-30명 모일 때는 새가족반 못 만들었어요. 몰라서도 못 만들었겠지만, 아마 우리 교회 같은 식의 새가족반이었으면 썰렁하다고했을 거예요. 새가족위원이 100명인데......전 교인인 30명인데 어떻게 그걸 똑같이 흉내낼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교회가 교인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 목표가 될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섬기면서 가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종 노릇 하면서 사람들을 섬기지 않는다는 거예요. 섬겨서 다시 은혜의 불을 자신 안에 불러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 안에 불러 일으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창고 안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데, 그걸 안 한다 이거에요.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죠. 몸이 부는데, 그냥 계속 살이 찌는 거예요. 정말 미국 가끔 가면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절망스런 생각을 들게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부축을 받으면서 간신히 음식점에 들어와 혼자 두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왜 그렇게 많이 먹어요? 그저 먹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어휴....정말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거예요. 어쩔 수 없어 그렇게 살겠지만, 동맥경화, 지방간, 콜레스테롤 과다, 콩 팥 기능 약화, 하여간 모든 문제가 다 생겨나는 거죠. 그렇게 한 170 키로 된 사람이 있다 칩시다. 뭘 하겠어요? 앉아서 자기 발톱도 못 깍는다는 거예요. 지방이 너무 많아서 굽혀지지도 않아요. 서서 발끝도 안 보이고. 덩치는 큰데 그 사람은 오히려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런 교회가 되고 싶으세요? 사람 억수로 몰려와서, 회심도 안 하고. 또 회심한 사람들은 뺀질대며 봉사도 안 하고 받은 바 얼마 안 되는 은혜는 며칠 안 돼 썩어버리고, 여기 저기 널부러져 앉아 있고, 교회에서 말이지, 똥이나 싸는 식으로 신앙생활 하고.....그래서 뭐하겠어요? 그래서 교회가 커지는 것은 재앙이에요. 정말 말라기에 나오는 대로 누군가가 성전 문을 닫는 사람이 있으면 좋겟다고 주님이 생각하실 거예요. 그렇게 해서 교회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교회가 세상화되는 거죠. 나가 싸울 려면, 다윗 보세요. 그 청년이 몸짓이 얼마나 컸겠어요? 골리앗은 키가 9척이라 했는데, 그 어마아마한 사람하고 싸워 이겼잖아요. 힘으로 이긴 게 아니에요. 온 몸이 행동할 수 있도록 한 곳에 모아져서 기능을 하잖아요.
제가 지난 주 설교하면서 많이 울었잖아요.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고 났더니 내가 너무 성도들을 마음 아프게 했나보다 하며 마음 속으로 제가 아렸어요. 이런 교회가 될 줄 알았으면 내가 이 거룩한 사역에 손 대지 않았을 것입니다....저는 진심으로 한 소리였지만, 여러분들이 굉장히 마음에 상처를 받았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미 한 설교를 사과는 할 수 없지만, 저도 굉장히 설교 소겡 그런 얘기를 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예요. 그렇지만 사실은 그것은 상당히 진심이에요. 그런 건강치 않은 모습들을 보게 되는 겁니다. 너무 마음이 아프죠. 그렇게 계속 삼 천명, 사 천명, 오 천명 사람 늘어나고 해 보세요. 그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어중이 떠중이 모이는 교회를 통해 영광 받지 않으세요.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예전에는 방탕하고 교만하고 제멋대로 하고 살았지만, 베드로가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그때로 족하다 생각하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 그래서 은혜를 주시려고 하시니까 그 은혜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도구가 되어서 쓰러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죽은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살리고 딴 길로 걸어간 사람들 마음을 움직여 함께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만드는 도구 이런 도구들로 살아가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거죠. 그러니 분명히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거에요.
여러분들이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시간은 장마철에 빨래 말리기 위해 잠깐 나는 햇볕같은 시간이에요. 나중에 여러분 은혜 많이 받고 하나님을 섬기고 싶다 그래도 자리가 없어요. 섬기자니 힘이 없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선한 은혜의 창고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섬기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많이 섬기면 진심으로 섬기면, 예수님이 세워준 그 자리에서 사랑의 마음으로 섬기면 은혜의 창고가 열려요. 거기서 은혜가 흘러나와 그래서 핍절하던 영혼들이 그 은혜를 먹고 다시 일어서는 거에요. 하나님은 헌신을 사용해서 이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마지막으로 성경을 보니까 어떻게 섬기느냐 했더니,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원래 이 은사라는 말은 선물이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연적 은사도 있고, 신령한 은사도 있어요. 내가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 자연적 은사죠. 하나님 말씀을 잘 가르칯 수 있는 지식의 은사가 있다. 신령한 은사죠.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양한 은사들을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은사들은 우리 것이 아니에요.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에요. 비유를 하자면 청지기에게 곳간을 맡기면서 곳간에 있는 쌀들을 퍼내어줄 때는 이 바가지로 퍼 내 주어라 그리고 창고에 있는 피륙을 잘라줄 때는 이 칼을 사용하거라, 하면서 빌려준 연장과 같은 것이에요. 주님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실 때는, 그걸 어떻하라는 것이죠. 그 도구를 가지고 청지기의 일을 잘 해서 주인의 집에 유익을 끼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반드시 여러분들을 죄 짓게 만들거나, 하나님 의지하지 않는 교만한 신앙생활을 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렇죠? 그래서 내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다, 라고 생각해야 되요. 여기서도 균형이 필요하죠. 우리가 올바로 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해주시죠. 복 주시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좀 부해지기도 하고, 지식이 없던 사람들이 좀 지식을갖게도 되며, 지위가 낮았던 사람들이 지위가 높아지기도 해요. 그렇죠?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은혜롤 주신 것이에요. 그런 것들을 또한 우리가 누리며 살 수 있어요. 그래서 아주 가난한 지위에 있을 때는,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지위가 좀 높아지면 차를타고 다닌다. 괜찮아요. 가난했었는데, 하나님께서 내 사업에 복을 주셔서 물질을 많이 주셨다. 그래서 예전에는 사글세도 못살아 전전 긍긍했는데, 이제는 아파트 사서 이사를 하고 문패 붙여도 죄 짓는 거 아니라 이거죠. 예전에는 하루 세끼 씩 밖에 못 먹어 두끼 먹고 살았는데 하나님이 물질 주셔서 여유가 있어지면 좀 낫게 먹고 살 수 있는 거에요. 예전엔 런닝 셔츠도 기총 소사 받은 듯 구멍뚤린 것 입었는데나중에 여유가 있어져서 좀 나은 옷을 입게 되었다, 죄 짓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항상 기억할 것은 지나치면 안 돼요. 그리고 항상 기본적인 것들을 잊어버리면 안 돼요.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것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 이시다. 나로 누릴 수 있게 하셨지만, 결국 이것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야지만 강물처럼 흘러가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거예요. 사람 다 마찬가지에요. 이기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거 다 자기건데......그거 왜 줘요? 갖고 있으면 자기 건데. 달라는 사람 있어요? 물론 있죠. 그러나 눈 한번 질끔 감으면 그 사람에게 내가 나워주어야 한다는 법이 어딨냐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살면 안 돼요.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사들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은사들을 거두어 가시거나, 아니면 그 일에 보응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사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뜨려지는 거예요.
그래서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가슴에 손을 얹고,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특별한 은혜가 있는데, 나에게 무슨 은사가 있을까 생각해 보세요. 자연적인 것이든 신령한 것이든. 아무리 찾아도 나는 뭐 성령의 특이한 능력같은 건 없는 것 같다. 다만 나는 그저 왜 그런 지 사람이 서글하고 붙임성이 있어서 처음 오는 사람 더풀 더풀 말도 잘 걸고 그런다....그러면 새가족반 해요. 새가족반.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예요. 그런 사람 많지 않아요. 교회 안내 위원이라고 세워 놓았는데, 무슨 똥 씹은 사람처럼 맨날 인상쓰고 있으면 사람들이 얼마나 부담 스럽겠어요. 나는 목사님, 뭐 그 사람처럼 발랄하지만, 않고 사람 앞에만 서면 정신이 없고 아무 것도 못하겠습니다. 그래도 뭐 찾아보세요. 저는 뭐 조직력이 있어서 교구 임원을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그래도 뭔가 있을 거에요. 저는 왠지 쓰레질 하고 걸레질 하는 게 그렇게 즐거워요.....청소해요. 토요일에 와서. 주님을 섬기는 거 아니에요. 왜 없어요. 반드시 있어요. 너무 너무 귀해요.
오래 전에 읽었는 데도 아직 마음에 감동이 사라지지 않아요. 전에 한번 했는데 오늘 다시 할래료. 어떤 소녀가 불치병에 걸려 죽어 드러누워 있었어요. 그래서 누군가가 가서 복음을 전했더니 거기서 예수님을 영접한 거예요. 그리고 나서 병상에서 죽기만 기다리며 실의에 빠져 살던 자매가 정말 기쁨으로 가득찬 생활을 한 거예요. 그래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위로하러 온 많은 사람들을 오히려 격려하는 거예요. 그리고 진짜 기쁨으로 가득찬 삶을 사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러는 거죠. 제가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었는데 제가 뭐 할 일이 없을까요? 그랬더니 그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던 일행 중 한 사람이 일어나서 그러는 거예요. 이렇게 자매님이 아픈데 뭘 섬길 일이 있겠느냐, 그저 평안히 주님께 감사하며 하늘나라 가시라고. 그래서 이 자매 모르니까 말이죠. 얼마 후에 그렇게 죽었어요. 죽고 나서 가족들과 사람들이 시신을 정리하는데, 베개 맡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누런 종이 한 정이 나오더래요. 그걸 보니까 동네 사람들 이름이 빼곡이 적혀있드래요. 놀라운 것이 뭐냐하면, 거의가 다 최근에 회심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뭐예요. 기동도 할 수 없고 누워만 있는데, 그 자매가 내가 뭐롤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 생각하니까 이런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동네 많은 사람드링 생각이 나요. 그래서 이름을 적어놓고 보면서 계속 기도했는데, 그 기도 하나 하나가 그대로 응답 된 거예요. 어쩌면 그렇게 그 동네에서 최근에 회심한 사람과 그 베개속 명단이 그렇게 일치해요? 그 자매가 죽지 않고 베개를 베고 드러누워서 메모를 할 수 있고, 그 메를 들고 기도할 수 있는 것 자체도 그 자매에겐 봉사였던 것이에요.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 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람
은사가 없다구요? 없어요? 있어요.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은사예요. 목숨 끊어지지 않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오늘 여러분들이 주님을 섬기지도 않고 흘려보내는 이 오늘이 바로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했던 내일이에요. 어떻게 살아야 겠어요? 섬겨야 합니다. 뭐든지 주님을 섬기세요. 그래서 잠자리 들때는, 오늘도 하나님 힘들었지만, 오늘도 주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고백하게 하세요. 그것만 남아요. 딴 것은 모두 지나가는 거예요. 딴 것은 모두 사라지는 거예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렇게 주님 잘 섬기다가 주님께 가면 주님이 굉장히 친숙해 보일 거예요. 늘 섬김 속에서 뵙던 분이니까. 어떻게 보내시려고 해요?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 같이 기도할 때, 하나님 주님이 우리에개 주신 은혜가 너무 큽니다. 우리가 값없이 구원의 은혜를 받았고, 구원 받은 후에 베풀어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은사였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이 자원으로 주님 섬기는 대신 나 섬겼던 것 용서해 주시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 섬기며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기도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섬김 정신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기도하겠습니다. 고맙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일께서 삼일 동안도 주님의 은혜의 날개아래 지켜 보호해주시고 우리를 사랑해주셔서 이처럼 복된 수요예배에 저희 나와 평안한 가운데 경배하고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힙니다. 오늘 이시간에도 우리의 굳은 마음에, 또 세상 염려와 근심으로 상처난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님의 거룩한 은혜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어떠한 사랑으로 사랑하셔서 여기까지 주님의 손에 의해 이끌려나와 주님을 섬기며 신앙생활 하게 되었는지 깨닫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 온전히 새로워져서 하나님 앞에 날마다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가게 하시고, 주께서 우리에게 생명주셔서 이땅에 살게 하는 동안에 우리가 망가진 이 세상의 한구석을 고치는 주님의 도구가 되어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며 살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에 우리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 말씀이 양약이 되게 해주옵소서. 그래서 병든 영혼은 고치시고 상한 심령은 주께서 싸매시며 그리고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되게 해주셔서 실패한 자에게 희망을, 상처받은 자에게 위로를 베푸시는 주의 도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도 처음 시간부터 마치는 시간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제자들 발을 씻기신 그 유명한 사건입니다. 무엇 때문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신 이 일을 듣고, 이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행위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위를 해석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주 혹은 선생이 되어 너희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섬기는 자가 되라, 내가 이렇게 행한 것은 너희도 이렇게 행하게 하려하여 내가 본을 보인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발을 씻기는 이행위는 유대인들이 생활과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쪽 지방은 비가 적게 오게 늘 건조한 지방입니다. 그래서 풀이 흔하지 않고 물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샌달을 신고 다닐 때 많은 흙먼지가 들어오게 되죠. 그러면 제일 먼저 남의 집에 방문하게 되면 찾아온 손님에게 그 집에서는 발 씻을 물을 제일 먼저 줍니다. 그리고 발을 씻는데, 혹은 발을 남이 씻겨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종이 하는 역할입니다. 종이 상전의 지시에 따라 온 손님의 발을 씻기는 것이죠. 그러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겠다고 수건을 들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니 제자들은 깜작 놀란 거죠. 그 모습 자체가 하인의 모습이기 때문에 주님, 왜 이러십니까?이일은 하인이나 하는 일인데 어찌 주님이 그런 모습으로 발을 씻기려 하십니까? 그래서 베드로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발을 씻기시려 할 때 적극적으로 말렸습니다. 왜냐하면 종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발을 씻기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이런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결국 제자들 모두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제자들이 아직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그때에 항상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에 행한 일들에 대해 해석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제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제자들만 모였을 때 그 비유에 대해 해석해 주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일에 대해 제자들에게 해석을 해주신 것입니다. 그 해석의 내용이 바로 내가 너희들의 발을, 내가 주와 선생이다, 너희들이 아는 바와 같이 나는 주와 선생이다. 그건 맞다, 그런데 너희들의 발을, 하인들이나 하는 발 씻기는 일을 내가 했다 그러면 내가 너희들이 나를 일컬을 때 주 혹은 선생이라 하는 사람인데 그러한 내가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일평생 동안 제자들의 발을 도맡아 씻기셨습니까? 대답을 해 봐요. 아니죠. 예수님 그렇게 하지 않으셨죠. 한번만 씻기신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이런 생각 안 들어요. 초지 일관하셔야지, 한번 발을 씻기기로 마음 먹었으면 일체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계속 씻기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발 씻기는 일은 예수님 담당이셨어야지, 그러면 오늘 날 우리들이 생각할 떄, 예수님은 한번 하면 끝까지 하시는 분이다. 발을 한번 씻기신 후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번도 거르지 아니하고 열두제자의 발을 모두 씻기셨다 하면 감동 받을 텐데 왜 안 그러셨나요? 그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제자들의 발을 돌아가실 때까지 씻기실 수는 없었던 거예요. 뭐 심술이 난 건 아니지만, 여러분 이렇게 말을 할 마음은 안 드세요? 그렇게 시간 없으신데 한번은 왜 씻기시나? 더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이 많다면 그 설명도 답이 안 되네요?한번은 왜 씻기시나요? 그 시간에 다른 일 하시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심술이 난 건 아니지만, 논리적으로는 그런 반문도 가능하죠. 이것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이 있습니다. 일생동안 계속 발을 씻기시기에는 예수님이 맡아 하실 다른 일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섬김에 집중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그분 만의 사명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이 사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발 씻기는 담당으로 일생을 사실 수는 없었죠. 그러면 한 번은 왜 씻기셨는가? 이것은 왜 예수님께서 주님이시고 선생이신데, 종처럼 발을 씻기셨는지 예수님이 직접 설명해 주셧어요. 그것은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내가 본을 보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 발을 씻기는 이 일은 예수님이 한번만 하셨지만, 그것은 예수님 안에 일평생 계속 존재했던, 이 땅에 있는 자기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에요. 그것이 한번 발을 씻기는 그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 마음 속에 있는 정신이 무엇인지 한번 보여줌으로써 ,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흐르고 있는 그 정신을 이해하고 그 정신을 본받아 자신들도 살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행하시 모든 은헤로운 섬김 속에는 예수님의 정신이 나타나 있어요.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이 행한 일을 보면서, 행한 일은 그 한번이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님의 정신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큰 감화와 감동을 받죠. 그러면서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로 그 모든 정신이 우리 삶에 흐르게 하고자 하는 그런 감동을 느끼는 것이죠. 이것이 그 정신의 중요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 속에 흐르는 정신을 보이기 위해 많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지만, 한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예수님 속에 있는 그 정신을 보여 주신 겁니다. 일평생 예수님이 발씻기는 담당으로 살지는 않으셨지만, 발 씻기는 일이 아닌 다른 모든 일을 행하면서 사실 때 그 속에 흐르고 있던 예수님의 정신, 마믕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섬김의 정신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섬긴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희랍어로 디아코노이아, 디아코니아 라고 하는 단어인데, 원래 하인들이 주인들이나 청한 손님들을 위해 식탁에서 봉사하는 것을 가르키는 단어였어요. 그래서 식탁을 위해 봉사하는 하인의 섬김을 지징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에요. 섬긴다 라는 것 자체는 자기를 매우 낮추는 자세가 없으면, 일은 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섬기는 것은 불가능해지는 것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섬기면서, 섬기기 전에는 신앙이 별로 없었는데, 섬겨요. 한가지씩 한가지씩 부족하지만 성도들과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믿음이 자라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섬기기 전에는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이상하게 섬기면서 그 사람의 단점이 드러나요. 지도력이 없는 것, 우유부단한 것, 돈에 대한 계산이 명확치 않은 것, 속이 좁아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는 것, 사람들과 융합 못하는 것, 등등의 단점이 드러나고 그나마 얼마 안 되던 신앙도 털어먹어요. . 똑같은 일을 맡겨 주었는데 오히려 어떤 사람은 그 일로 섬기면서 점점 주님의 사람이 되도록 성화되어 가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오히려 신앙이 뒤로 물러가게 되는가 , 그래서 결국은 섬기는 것들을 다 집어던지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가는가 그걸 잘 분별해야 합니다.
무엇때문일까요? 이것이 결국은, 섬기면서 신앙이 좋아진 사람들은 그야말로 섬기는 자로 섬기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점점 신앙이 돈독해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야말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한 거죠. 그런데 일을 하다보면 그 일에는 항상 장애가 있게 마련이고, 방해요인들이 생기게 마련이죠.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문제일 수도 있고 상황과 환경을 통해 오는 것일 수도 있죠. 그런데 일을 하다보면 그런 어려움이 오게 될 때 섬김의 정신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일로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렇게 물러가게 되는 것이에요. 이것은 우리들이 반드시 터득해야 할 원리에요. 우리들이 만약, 어려움이라는 건 늘 있지 않겠어요? 이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그 일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십자가에요. 누가 나를 다 좋다고 말하겠고, 심지어 내 자식, 한이불 덮고 자는 내 아내도 내가 하는 일이 싫다고 할 때가 있는데 누가 내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때, 모든 사람이 어떻게 그 일이 잘하는 일이고 그 일이 최상의 것이라고 평가해 주겠냐 그겁니다. 목표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고난을 받는 삶이에요. 때로는 많이 헌신하고 수고하는데 사람들로부터 핍박과 박해를 받아요. 그리고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려 할 때 시기하는 사람도 많이 생겨나죠. 왜 그런지 몰라요. 늘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잘 극복하지 못하고 일로서만 대하다가 이런 어려움이 올 때 수시로 미끄러지는 사람은 마귀의 표적이 되는 겁니다. 무슨 일을 맡겨만 놓으면, 처음에는 큰 일을 할 듯하다가도 어려움이 오게되면 사람들과 크게 다투거나 마음이 갈라지면서 공통체의 평화를 꺠요. 그리고 결국 자신도 시험에 들어요. 반복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의 일생은 쓸모없는 일생이 될 것 아니에요.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받고 주님이 쓰실 수 있는 그 자리로 불러주셨지만 그 어디에서도 마음을 다해서 마지막 승리를 얻을 때까지 섬겨본 적이 별로 없어요. 그러면 그 사람 일생은 아주 쓸모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번 극복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괴로움과 어려움이 올 때 그것을 극복하는 정신을 터득했고 실제로 그 정신을 어떻게 자기 삶 속에서 구현해서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하신 그 고난 속에 오늘 날 자신의 고난을 투영시키며 그렇게 성례전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을 터득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세요. 그래서 무엇인가 섬길 떄 하나님이 그 일을 평화로운 가운데 이루어가시면 하나님을 찬송하고,괴로움과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그것 떄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신의 악함을 주님 앞에 깨닫게 되고 그 일을 통해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그 속에서 자신의 다듬어지지 않은 신앙의 인격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깨뜨려질 기회를 터득하게 되고, 생각지 않은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을 때 이제껏 그 일을 수행해 오던 자신의 섬김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더 지혜로워지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는 섬길 수록 점점 더 주님 앞에 소중한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동시에 섬기면 섬길 수록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 한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주님께 제대로된 어떤 섬김이 우리에게 있는 지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아침에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벌써 이렇게 꽤 긴 인생을 살았는데, 살아온 모든 날들이 후회되는 날 밖에 없어요. 주님이 비천한 인생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은혜를 주셨는데, 섬겼다고 스스로 일기장에 기록할 수 있는 날이 너무나 없어요. 어떤 때는 섬김의 기회를 주셨는데도 도망을 다닌 날들이었고, 어떤 날은 섬김의 기회를 주셔서 섬기긴 했는데, 온 마음을 다하지 않았어요. 두 마음을 품고 섬겼으니 나는 섬겼지만, 주님이 그 섬김을 받아셨을 리 없죠. 또 어떤 땐 두 마음을 품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괴로운 일이 많고 시련과 고난이 많아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진척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면서 이제 인생은 석양을 향해 가는데, 아 어떻게 할까?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섬기는 삶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섬기는 삶 주님을 섬기길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섬기는 삶
내가 이렇게 안일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이 세상에는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며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우리의 안일한 삶이 하나님 보기에 부끄러운 것은 물론이려니와, 지금 이 시간도 자신의 시간과 자원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쓰는데, 더 많이 섬기지 못하는 것 때문에 흐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도 우리는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하나님꼐서는 우리가 이렇게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죠.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모두 이렇게 주님꼐 일을 맡아도 일이 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이 섬김이 되기 위해서는 오늘 예수님의 마음 속에 흘렀던 이러한 섬김의 정신이, 예수님 마음 속에 흘렀던 이 정신이 우리 속에 함께 흘러가야해요. 그래야지만,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망가진 이세상을 고치는 예수님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 들어 개척하고 나서, 정말 몇 번 안 되는 시간인데, 제가 여러분들을 많이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아주 많이 하게 됩니다. 오늘 이렇게 나와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은 아마 교회에서 또 충성스럽게 섬기는 그룹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마음에 흐르던 이 섬김의 정신이 없어요. 원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은 후에 마음 속에 분명 이런 섬김의 정신이 흘렀어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처음 은혜를 받고 주님의 크신 은혜롸 사랑을 경험한 다음, 여러분들이 얼마나 주님을 섬기며 살려고 애썼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그 바쁘게 사는 와중에도 틈틈이 하나님께 봉사하고자 했죠. 그 일과에 바쁘고 쉬기도 바쁜 시간에 교회에 와서 교회당을 청소할 때 얼마나 기쁨이 넘쳤습니까? 영혼 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신문을 들고 다니고 자기 부서를 섬기기 위해 아까운 시간을 쪼개 주님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마음 속에 흐르던 섬김의 정신이었어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줄 떄는 정말 종 같으셨잖아요. 제자들의 종 같지 않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물러갈 지어다 하면서 귀신들린 자들을 쫓아낼 때 얼마나 위엄에 넘쳤습니다. 병든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실 때 얼마나 위엄에 넘치셨습니까? 거기서 우리가 종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까? 팔복산에 올라 수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때 우렁찬 목소리로 하늘 나라의 비밀에 대해 말씀하실 때 예수님의 그 모습이 종의 모습입니까? 노예의 모습입니까? 선지자나 혹은 선생이나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그 모습은 그저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이었을 뿐, 이런 종의 모습은 병든 자를 고칠 떄나 천국의 비밀을 위엄있게 설교할 때나, 죽은 자를 살리실 때나 주린 자들에게 그 손으로 떼어 물고기와 보리떡을 먹여주실 때나항상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죽기 까지 노예처럼 복종하면서 사셨습니다. 그 정신이 예수님의 마음 속에 항상 흐르고 있었습니다. 위엄있게 천국의 복음을 선포할 때도, 예수님의 그 마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이 바보같은 인간들에게 내가 한 수 가르쳐줄까, 그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내가 진리의 말씀으로 이 목자잃은 양같이 고생하는 영혼들을 섬겨서 저들 마음안에 하나님 나라 오게 할 수 있을까.....그러한 섬김의 정신이 그들에게 알아듣지 못하는 답답한 무리들에게 천국비밀을 선포하게 만들었습니다. 병들었다고? 내가 몸 한번 고쳐주지, 인심 한번 써주지, 그런 마음으로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큰 능력과 은혜로 그들을 섬겨서 그들로 저 흉악한 질병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예수님 마음에 흐르던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면 그 은혜의 마음을 가지고 섬기는 자가 되어서 봉사해야 합니다. 이 봉사를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님 섬김의 정신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계획을 세우고 어떤 사람은 실행을 하고 어떤 사람은 실행 되었는지 확인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시하고 어떤 사람은 그 지시를 따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나눈 것이에요. 그 속에 흘러야 할 섬김의 정신은 동일해요. 성도들의 발을 씻기는 것같은 그런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종의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에요.
여러분, 신자가 좀처럼 영적으로 회복이 안 되고 교회 계속 다녀도 이상하게 죄의 지배아래 깊이 갇혀서 특별히 범한 두드러진 되가 없는 것 같은 데도 이상하게 밑도 끝도 없는 영혼의 곤고함에 시달릴 떄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러분들이 오늘 살펴본 이 지혜와 관련해 하나 확인할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섬기도록 주신 그 많은 은혜를 섬기지 않고 묻어버릴 때 그때 영혼의 깊은 침체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매우 슬퍼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마음은 달란트 맡은 종들의 비유에서도 나타나죠. 한 달란트 맡은 종이 잘못 한 것이 무엇입니까? 맡긴 돈을 허랑방탕하게 써버린 탕자 같이 산 것도 아니고 땅에 잘 묻어 놓았고, 동기는 그거라도 잘 보존하려고 묻어 놓은 거 아니에요? 그런데 결국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싫어하시는 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죠. 그렇게 하나님꼐 은혜를 많이 받고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많은 재능과 자원도 주셨는데 섬기지 않고 살면 하나님꼐 사랑받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결국 하나님 말씀의 참된 빛도 그 영혼 앞에서 점점 사라져가요. 그 영혼은 부패하게 되요. 섬기셔야 되요. 무엇을 하든지 섬기셔야 되요. 그것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는 일이 아니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섬겨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름없이 빛도 없이 끊임없이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떄 하나님 주신 은혜들이 부패하지 않고 내 속에서 계속 살아역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한 예수 섬김의 정신이 여러분들에게 계속 강물 같이 흐르고 그 정신이 여러분들의 모든 섬김 속에 배이게 하여야 합니다.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내가 비록 하나님 앞에 큰 재능도 없고 남이 받은 것 같은 큰 은사도 없지만, 그러나 나에게는 이 일 만큼은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 말고 내가 하도록 세워주신 그 일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자나깨나 마음 속에 그 일이 있고, 내게 맡겨주신 본분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 섬김을 통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확인합니다. 그 섬김의 자리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만약 그런 섬김의 자리가 없다면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만약 그 자리가 있다면 충성되게 시종일관 무릎을 꿇고 제자들 발을 씻기던 예수님의 이 종된 섬김의 정신이 그 섬김 속에 배여들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영혼도 잘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 기도할 떄 하나님 이 사간에도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를 이 큰 은혜와 사랑 입었으니 주님 섬기는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3.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길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심이라”(엡4:11-12)
사도 바울은 세 번에 걸쳐서 전도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세 번째 전도여행을 마친 후에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그리고 가이샤라는 곳으로 끌려가서 거기에서 2년 동안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후에 그는 로마로 후송되게 되는데 다시 로마로 끌려가서 2년 정도 가택연금 상태에 있게 됩니다. 에베소,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이네개의 성경은 바로 로마에서 가택연금이 된 구속 상태에서 쓴 성경들입니다. 대단히 활동적이고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신의 모든 육체의 힘을 아끼지 아니하였던 이 사도에게는 이 연금 상태에 있는 것 자체가 매우 커다란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약 4년 동안이나 이처럼 구속당하거나 혹은 연금 상태에 있는 동안에 흩어진 교회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게 하셨고 기도하는 가운데 복음의 이치들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렇게 깨달은 놀라운 기독교의 진리들을 서신의 형태로 각 교회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는 가택연금 상태에서 쓴 성경이지만 관심이 기독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였고 그리고 이 에베소서는 교회론입니다. 교회가 무엇이고 그리고 그 교회가 어떻게 세워져 가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그런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사도는 늘 그러하듯이 1장과 2장 그리고 3장에서 기독교 교리에 위대함을 설명하고 4장까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그리고 5장과 6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삶에 대해서 말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바로 이런 것을 배경으로 해서 기록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여기에서 사도는 이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워놓으시고 교회에 많은 직분들을 허락하신 것을 여기에서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의 직분과 그리고 섬김에 대해서 11절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교회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를 구속하심으로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 하나 구속하심으로서 그 머리에 연결된 지체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교회의 모든 몸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서 이 땅에 있는 교회의 머리만 되셨을 뿐 아니라 하늘에 있는 모든 교회의 또한 머리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한분을 머리로 해서 천상에 있는 교회와 이 땅에 있는 교회가 모두 하나로 통일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모든 지체들의 머리가 되셔서 그래서 그 모든 지체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지시를 받는 통치의 머리가 되시고 또 유기체로서 모든 교회가 머리와 함께 연합을 하여서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시고 싶으신 일들을 이루어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적으로는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백성들로부터 시작해서 그리고 미래에 구원을 얻을 하나님의 백성들까지 장소적으로는 내가 살고 있는 이곳뿐 아니라 이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주를 믿는 자녀들, 그리고 이 땅뿐만 아니라 천상에 이미 하나님을 믿고 하늘나라에 간 사람들과 원래 하늘나라에 있는 천사들까지 포함해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우주적으로 모든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천사와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리고 그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지역에 있는 작은 교회는 보다 더 크게 이렇게 우주적인 교회 안에 속해 있는 한 지체로서의 또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독립적으로 한 교회를 이루고 있지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다 하나이고 이 세상에 주를 올바르게 고백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있는 교회가 모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교회라고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 모든 교회들이 한 몸이 되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겼고 또 지금 섬기고 있는 중이고 앞으로도 섬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교회만이 아니라 눈을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들을 자신의 교회처럼 생각하고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한 몸이요, 한 지체라고 생각하는 우주적인 인식들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선교도 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하고 중동에 가서 선교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우리 교회의 교인으로 만들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일이 소중한 이유는 그렇게 그들을 전도해서 그곳의 교회에 다니게 하고 거기서 교회를 이루게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주님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 일을 위해서 많이 헌신하고 수고함으로서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든든히 서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교회에 많은 일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게 다양한 직분들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교회에 세우십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에 세우셨다고 그러면서 혹은 사도로,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보니까 이 에베소 교회 하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12사도는 어느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벌써 이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지만 에베소 교회라고 하는 하나의 교회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말씀드린 것 같은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 우주적인 교회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주적인 모든 교회를 가리키는데 그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세우시고 또 선지자들을 세우시고 이 때에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과도기적으로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가르쳐주었던 선지자의 역할을 일부 수행하게 됩니다. 선지자들을 주셨고, 또 목사를 주셨고 그리고 교사들을 주셨고 복음 전하는 자들을 주셨고 이렇게 많은 여기 다 거론되지 못했지만 무수하게 많이 섬기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섬긴 자들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셨는데 어떤 방식으로 주셨을 것 같습니까? 한 사람 한 사람 그 일에 합당한 은사, 그 일에 합당한 지식 그 모든 것들을 주심으로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교회에 합당한 일꾼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목사일 수 없고 모두 다 교사일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그 큰 나라는 이렇게 한 가지 재능만을 가지고 지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을 집을 지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집이 이렇게 보면 단순해보여도 사실 이 집을 짓는 데는 한 사람이 모두 집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수십 가지의 자기 밖에 못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집을 짓는 것입니다. 이전에 제일 먼저 설계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계를 하는 일들은 다른 사람들이 설계할 수 없습니다. 그것만 연구한사람들이 설계하고 그 다음에 땅을 파고 지나가면 콘크리트를 붓고 그리고 거푸집을 다 떼어놓고 나면 그 다음에 전기공사를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전기공사를 하고 지나가면 그 다음에 배수관을 집어넣고 이렇게 난방을 하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그리고 난방을 한 사람들이 지나고 나면 천정을 치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벽을 쌓는 사람들이 오고 그리고 지나가면 그리고 미장을 하는 사람들이 오고 미장을 하는 사람들이 가면 칠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칠하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집을 지을 때도 이렇게 많은 사람의 재능이 필요하듯이 교회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지어가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도 이처럼 많은 섬기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다양한 직분들이 거론이 되고 그리고 여기에 기록되지 않은 더 많은 직분들이 있었고 또 필요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나는 그 많은 은사를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많은 사람들이 이 직분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게 되는데 그러면서 이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지어져가게 되는데 이런 많은 섬김과 다양한 직분들이 있지만 사실은 그 모든 직분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개인에게 주신 재능을 따라서 하나님이 직분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일로 봉사하는가를 가지고 자기 자신의 자존감이 좌우되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목사일 수가 없습니다. 한 교회에서 설교를 잘 하는 사람들은 한 두 사람이면 됩니다. 그러나 영혼들을 하나하나를 잘 돌보는 사람은 한 두 사람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또 교회에는 영혼을 잘 돌보고 설교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가야지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교회에 살림살이를 잘 할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교회가 10-20년 후에 어떻게 될까 전략을 세울 줄 모르고 유창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해도 그러나 매일매일 교회에서 필요한 일들이 있습니다. 청소하고 교회가 매일매일 운영되어나가는 일상적인 봉사를 하고 하는 일들도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그 일들을 위해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각각 그들만의 은사를 주셔서 그 일에 가장 적합하도록 그를 준비시키셔서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양한 직분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직분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매일매일 살아갈 때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직분이 다양하지만 그러나 두 번째로 그 모든 직분들은 통일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섬기는 직분은 다양하지만 목적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양한 직분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통일된 목적입니다. 여러분, 손목시계를 사서 뒤 뚜껑을 한번 열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열어보면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죽은 시계가 아닌 한 작동하고 있는 시계라면 그 톱니바퀴가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톱니바퀴가 움직일 뿐 아니라 거기에 또 작은 실락같이 되어 있는 추 같은 것들이 있어서 그것들이 또 같이 움직입니다. 왕복운동을 하는 것, 진자운동을 하는 것, 회전운동을 하는 것 많은 부속품들이 시계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톱니바퀴와 여러 개의 줄 같은 것들이 이어져서 왕복, 진자, 그리고 회전운동을 하면서 그 모든 다양한 움직임을 산출하는데 그것이 마지막 목적하는 바는 하나입니다. 이렇게 시계를 분침과 시침과 초침 세 개를 잘 움직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시계를 이렇게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그 속에 있는 모든 부속들이 기여하는 것입니다. 속에 있는 부속 가운데 이 목적을 위해서 기여하지 않는 부속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부속이 있다면 거기에 넣을 필요가 없는 부속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직분들이 있지만 그 직분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직분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아직 미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비유적이 표현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왜 이런 비유가 적합한가 하면 우리의 몸, 사지백체는 머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머리와 연결되지 않은 사지백체는 죽은 것입니다. 머리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사지백체가 모두 연결이 되는데 이 모든 사지백체의 움직임들은 뇌에 의해서 장악이 됩니다. 그래서 뇌가 팔을 내리라 그러면 내립니다. 나무를 붙잡아라. 그러면 붙잡습니다. 두 손을 들어라, 그러면 드는 것입니다. 이 뇌가 시키는 대로 이 모든 것들이 움직입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 이 뇌가 말하는 데도 이게 잘 마음대로 안 움직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몸 자체에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정상인 상태에서는 뇌가 명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머리와 몸의 관계로 비유하시는 것이 아주 적합합니다. 또 하나는 머리와 몸이 떼어질 수 없이 붙어 있습니다. 즉 잘라진 머리만 있는 것이 사람일 수 없습니다. 또 머리는 없고 몸만 있는 것도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잇는 곳에 교회가 있고 교회가 있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둘을 서로 떨어트려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을 목을 잘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머리가 명령하면 몸이 순종한다고 하는 것을 사역, 혹은 통치의 측면에서 설명한다면 지금 말씀드린 머리와 몸을 떼어놓을 수 없다고 하는 이 측면은 몸의 유기적 측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바로 그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그리스도께 붙어 접붙여져 몸이 된 사람들은 결코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떨어져나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생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교회를 몸으로 비유하는 것이 아주 적합한 비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영적인 비유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미완성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 자체는 미완성일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완성된 몸이십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영적인 몸인 이 교회는 미완성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3장 마지막에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지어져가느니라. 즉 교회가 아직 공사 중인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아직까지도 완성되지 않아서 서서히 하나씩, 하나씩 붙어서 완성되어가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이런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그럼 언제 그리스도의 몸이 완성될까? 이것은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계속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몸은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완성되어갈까요? 첫째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전도해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게 되면 그러면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지게 됩니다. 눈에 보이게 끔은 이 땅에 있는 어느 한 교회의 교인이 되지만 눈에 보이지 않게끔 영적인 측면에서는 이 우주적인 모든 교회에 한 일원이 되어서 거기에 붙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예수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 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한번 붙은 사람이 떨어져 나가지는 않습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가끔 보면 상당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것 같았는데 배교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배교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모든 교훈을 모든 총체적으로 저버리고 이교도가 되어버리거나 완전히 불신자로 전락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 동안 그렇게 살다가 죽어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는 정말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한순간에 예수님을 버렸구나. 그래서 배교자가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사실은 겉보기에는 그가 예수님을 많이 믿은 것 같고 참된 교인이었던 것 같지만 그러나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들은 다시 주님을 멀리 떠나서 배교할 수 없고 상당히 믿는 사람처럼 가까이 다가갔지만 완전히 변화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적이 없는 사람들만 떨어져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떨어져나간 것이 아니라 붙은 적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견인의 교리입니다. 그래서 한번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신 사람들은 영원히 자신에게 접붙여두신다. 그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붙었다, 다시 찢어졌다, 붙었다. 계속 사람들이 계속 그런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그리스도의 몸일 수가 있겠는지, 그리고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또 다시 붙는데 어느 시점에서 죽느냐에 따라서 구원문제가 결정이 될 것이 아닙니까? 붙었던 순간에 죽으면 구원받고 떨어진 순간에 죽어버리면 구원을 못 받고 이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한번 구원하신 사람에게는 당신에게 접붙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이제 계속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그 사람들이 교회에 이렇게 계속 붙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교회가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자, 그러나 이제 보십시오. 그렇게 교회가 지어져가지만 그러나 한번 예수 그리스도께 붙여진 그 사람들이 그것으로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화: 얼마 전 칼에 손이 크게 베면서 상처를 입게 되었는데 떨어진 살점을 상처자리 에 붙이고 행여 붙을까 싶어 여러 번 소독하고 관심을 갖는 가운데 처음에는 살 점이 검게 변해서 소용이 없나 했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뜻밖에 그 자리에 살점이 붙어 원래의 모습으로 치유가 되었다는 내용)
이것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우리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도되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붙었습니다. 그러면 살이 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붙은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색깔도 틀리고 그리고 감각도 별로 없는 것처럼 아직 온전한 교회의 일원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교회의 모든 가르침과 섬김을 통해서 이 사람들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그때 완전히 이렇게 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를 세우는 것이 통일된 목적인데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것,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희랍어 성경에는 아주 재미있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희랍어 본문을 읽어드릴 수는 없지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로 교사로 주셨으니 왜냐하면 성도를 여기는 단수로 나오는데 복수로 나옵니다.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을 위해서 그런 것을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할 때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을 위해서 이런, 이런 직분들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어디 어디로 라고 하는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가 나옵니다. 그것은 Into Ace라고 하는 전치사인데 목적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섬김의 일을 위하여, 섬김의 속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성도를 온전케 하려고 이런 것을 주셨고 그리고 또 교회의 몸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해석을 해보면 아까 말씀드린 것같이 그리스도의 몸을 점점 더 온전하게 세우는 이것이 바로 많고 다양한 직분들을 주신 한 가지 목적인데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이 온전하게 세워지기 위해서 두 가지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인데 그 첫째가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뭘 깨달을 수 있습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졌는데 접붙여지기만 하면 그 사람들이 성도가 되는 것인데 성도는 구원받은 무리들이니까 그럴 때 예수께 접붙여지기만 하면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온전하다는 것입니까, 온전하지가 않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온전하다가 할 것 같으면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서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성도들은 이제 이 죄악 된 세상에서 구별되어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된 것은 사실이고 그리고 틀림이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들이 온전한 성도가 된 것은 아닙니다. 성도가 되는 것은 한순간에 되는 것이지만 온전한 성도가 되는 것은 끊임없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대들이 온전한 성도들입니까? 왜 대답을 안 하십니까? 온전한 성도들입니까? 끊임없이 온전해져가는 중입니다. 누가 감히 아, 나는 한 3-4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온전한 성도가 못 되었거든, 오늘 아침에 겨우 됐네. 이제는 성도가 다 온전케 되었다. 더 이상 온전해질 필요가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된 성도가 이 땅에 있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제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그러면서 한일 곧 뒤에 있는 일은 잊어버리고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쫓아가노라. 그랬습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온전해지다가 그 다음에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온전함에도 상대적인 온전함이 있고 절대적인 온전함이 있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온전함은 있을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온전함을 가지고 이야기한다고 그러면 얼마든지 여러분들도 온전한 성도일수 있습니다. 왜? 예수를 믿고 신앙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도 안 다니고 교회에 와서도 끊임없이 지체들에게 고통을 주고 끊임없이 악을 행해서 교회에 아픔을 주는 성도들에 비하면 여러분들은 목양을 잘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름답게 믿음 생활을 하면서 나아가는 이런 모든 것들이 여러분 보면 하나님 앞에 매우 귀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상대적으로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누구도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제외한 아무도 온전해진 상태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주님 앞에 성화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성도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성도를 온전케 한다. 온전한 성도들 안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온전한 인격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온전케 되었습니다.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존재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닮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온전함의 좌표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인간의 유일한 모본입니다. 타락 이후로 온전한 인간의 유일한 모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이시니까 그리스도인이 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자녀이며 한 아들로서,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힘입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잘못 해석해서 예수님이나 우리나 모두 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 아들 되신 것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들 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성격이 틀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직접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기는 했지만 한 사람입니다. 그 한 사람으로서 온전하신 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것은 그분의 인격 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온전한 성도가 되어간다고 하는 것은 제일 먼저 온전한 인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틀 안에 우리들이 깨트려지고 녹아져서 부어져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찍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옛날에 학교 앞에 보면 붕어빵 틀이나 혹은 국화빵 틀을 만들어놓고 거기에다 주전자에 밀가루 물을 타서 거기에 밀가루 물을 넣고 팝을 집어놓고 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 똑같이 생긴 국화빵이나 붕어빵이 찍혀서 나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찍혀서 나오는 데가 둘이 있습니다. 신앙이 없거나 우리가 온전한 은혜생활을 못하면 세상이라는 틀에 찍혀서 나옵니다. 세상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성화되려고 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닮은 모습으로 찍혀서 나옵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를 닮는 인격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이 되어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인격으로 변해갑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자기의 지난 모든 죄를 회개하고 이제는 예수님 이외에 구원 얻는 다른 길이 없다고 굳게 믿고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 구원 얻을 것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의지로서 깊이 동의하고 마음으로 깊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원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의지합니다. 그래서 구원에 이릅니다. 그렇습니다. 주께로 돌아옵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 순간 그의 인격이 진짜 예수님 닮은 인격으로 변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성격이 폭압적이고 독선적인 이런 사람은 예수 믿고 변화되어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돈에 대해서 아주 예민하고 10원 하나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기질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펑펑 울면서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았어도 물론 이제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마음이 있기는 있지만 여전히 돈에 대해서 예민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허영심이 많고 사치하던 사람들은 그렇게 회개하며 예수님 믿은 후에도 여전히 사치한 기질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주님을 믿고 변화되어가는 데 그런 인격적인 변화, 이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격자체가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온전해진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많이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온전한 성도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마음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온전해진다고 하는 것은 나누어지지 않고 우그러지지 않은 동그랗고 완전한 마음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을 다하여 라고 할 때 하나님께 다 드려진 마음이 온전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 그렇게 회개해서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도 그 사람이 실제로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 속에 남아 있는 악한 욕망을 죽이고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는 마음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끊임없이 쇄신되어가면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이처럼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끊임없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고 끊임없이 깨트려져서 그 인격이 예수를 닮아갈 때 그때 성도들이 온전한 성도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도와 그 다음에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를 비롯해서 아직 여기에 다 기록하지 않은 많은 직분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 직분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합력해서 마지막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면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온전한 인격을 가진, 온전한 마음을 가진 성도들로 변화시켜서 예수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일을 이룬 집단적으로는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함께 들으면서도 변화되어 가지만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을 인내와 사랑을 가지고 돌봄으로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 앞에서 온전한 마음과 인격을 가진 사람들로 빚어져가도록 끊임없이 돌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을 누가 할 것인가?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하는데 그런데 이런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하는데 그런데 이 직분은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공식적인 직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소수의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의 예를 드는 것이고 모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섬기도록 그렇게 명령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뒤편에 나오는데 그것은 봉사의 일을 하게 함이라 섬김의 일을 하게 함이라 섬김의 일 속으로 향하여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 그래서 성도들이 그렇게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이 일이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 그래서 섬기면서 그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이 다 된 후에 그 다음에 섬기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교회에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온전한 성도로 세우기 위해서 많은 섬김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봉사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 이제 에루곤 다이코니아라고 하는 것인데 이 디아코니아라고 하는 것이 바로 옛날에 노예들이 밥상을 차리고 사람들에게 식사하기 위해서 식탁을 베풀어주는 것, 여기에서 섬기는 그 식당에서 섬기는 그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야말로 봉사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섬김입니다. 섬김 중에서도 아주 노예적인 섬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종의 자세로 봉사하는 것, 어떤 대가나 이런 것들을 바라지 아니하고 자기의 마땅한 의무라고 생각하고 종의 자세로서 봉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디아코니아입니다. 그런 일들을 하는 것, 그래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함으로서 교회가 점점 더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그러면 이제 보십시오.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은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끊임없이 아직 그리스도의 몸이 완성되지 않았으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을 전도해서 그 그리스도께 접붙여지게 하는 일들을 위해서 수고해야지 됩니다. 이것이 밖에 있는 세상을 향해서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고 두 번째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이 애쓰고 수고해서 그들로 하나 되게 해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지기는 했지만 아직 온전해지지 않은 성도들을 위해서 봉사해야합니다. 바로 그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많은 재능들을 성도들에게 주셔서 그들에게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접붙여진 성도들이 온전한 예수님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돌봄과 섬김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 일을 잘 함으로서 교회가 참으로 교회되게끔 올바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세워졌습니다. 계속 그리스도의 몸에 새로운 지체들이 구원을 받아서 접붙여짐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이 점점 완성되어가고 또 성도들은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들을 성도다운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 끊임없이 수고하고 봉사해서 그들이 점점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는 점점 큰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온전하게 되면 될 수록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잘 복종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움직이면서 교회가 뭘 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셨던 그 일들을 계속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예전에는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던 예수님이 하셨던 그래서 예수님이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는 했지만 많이 일하시지 못하고 적게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커다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몸인 교회가 전 세계적으로 흩어진 곳에서 예수님이 거기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일들을 훌륭하게 해나가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됩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져야 합니다. 접붙여진 모든 사람들이 성도의 사랑스러운 헌신을 통해서 참된 신자가 되어갈 때 그때에 예수님이 명령하시면 잘 움직이고 예수님께 단단히 붙어 있는 몸이 되는 것입니다. 접붙여지기는 했는데 성도들을 잘 섬겨서 온전한 성도가 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이제 지체부자유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손을 내밀어라 그러시는데 손이 뒤틀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섬김이 필요할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장난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녀를 길러본 사람들은 압니다. 젊었을 때 그렇게 활동적인 자매들이 아이를 하나 낳으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몇 년 동안, 그렇지 않습니까? 오직 그 한 아이를 위해서 헌신합니다. 그렇게 안 하면 그 아이가 사람이 아닙니다. 또 둘을 낳게 되면 이때는 눈물이 납니다. 연년생으로 셋을 난 사람을 내가 봤는데 정말 혹독합니다. 오죽 했으면 어느 자매가 목사님, 여호와의 기업이 왜 그렇게 고달픕니까? 하나님의 기업이 상급이라고 그러는데 왜 그렇게 고달픕니까? 고달픕니다. 셋을 낳아서 한번 시달려보십시오. 그렇게 집중적으로 아이를 위해서 일생 기간 헌신하지 않으면 그 애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나아만 놓고 아이들을 길거리에 내팽겨 놓고 아이들이 죽겠습니까. 누가 데려다가 밥이라도 주겠지. 그런데 사람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하나 영혼들을 그런 마음으로 돌봐야 됩니다. 이것은 사도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선지들의 일이 아니고 목사의 일만 아니고 교사들의 일만 아니고 전도사들의 일만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 일을 위해서 수고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교회를 만들려고 마음을 가지니까 얼마나 많은 일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위해서 정말 수고하고 애를 쓰는데도 돌봄을 받지 못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래전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졌는데도 여전히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된 몸으로서 작동하지를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세우기위해서 여러분들이 무엇을 봉사해야 되는지를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몸인 이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세워주셨고 나는 적어도 이 일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늘 이 섬김이 나에게 있어서 기도제목이 된다고 하는 그 섬김이 무엇인지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이런 식으로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나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그러면 아주 나쁜 신자가 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신앙이 잘못됩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인 교회에 접붙여지기 위해서 여러분 알지도 못하는 많은 사람이 여러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땀 흘리며 수고했습니다. 하나님만 아십니다. 여러분은 모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만한 신앙을 갖고 자라기까지 여러분들은 이름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기도하고 땀 흘려 헌신하고 밤이나 낮이나 끊임없이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면 올바로 교회생활을 하고 참된 신자로 자랄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베풀어준 그 많은 섬김을 먹고 그 섬김을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만큼이나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섬김을 위해서 수고하기에 적합하도록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런 은혜를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교회의 머리인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들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내 몸을 값 주고 피 흘려 나의 몸을 삼았는데 네가 이 몸인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하고 물으실 것입니다. 아무 것도 섬기지 않고 주일날 와서 예배만 드리고 그렇게 해서 신앙생활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예배드리고 돌아가서 파자마 바람으로 벌렁 누워서 TV나 켜고 주일날 하루 종일 뒹굴뒹굴 놀다가 육신은 편안하게 쉴지 모르지만 월요일 날 다시 일터로 나갈 때 곤고한 영혼을 가지고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예수님의 심정이 되어서 무엇인가 내가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을 통해서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이 일에 기여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그런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의 사람이 되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온전히 세워 가는데 보탬이 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성도로 섬기게 하심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오늘 우리들이 이 본문은 지난 중에 설교된 그 본문과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본문에서는 우리들이 성도를 온전케 하고 또 모든 봉사의 일을 하게 함으로서 교회의 몸을 세우기위해서 하나님이 교회의 많은 직분들을 주셨는데 이렇게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성도들을 섬기게 되어 그 성도들이 어떻게 되기까지 섬겨야 되는지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방금 본문을 읽었듯이 주님이 교회를 세워놓으시고 교회에 많은 직분들을 주셔서 다양한 섬김으로 성도들을 돌보게 하시는데 그것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여 또 모든 봉사의 일을 하게 해서 교회를 세우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도들을 온전하게 돌보는데 그 목표가 오늘 성경에서 상세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에 있어서 하나가 되게 하고 또 온전케 되고 또 그리스도의 충만한 상태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성도들을 돕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에 많은 직분을 주신 이유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은 세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라고 하는 몸을 세우시는데 성도들의 섬김을 사용하셔서 이 교회란 몸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끊임없이 복음이 전파되어서 각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접붙여진바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접붙여진바 된 몸으로서 교회는 서가고 그리고 접붙여진바 된 그 몸에 성도들의 섬김을 통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한 신자가 되어갈 때 그때 비로소 교회는 온전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이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진 몸인 동시에 또한 끊임없이 세워져가고 있는 과정에 있는 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머리로 해서 점차 세워져갑니다. 바로 이 일을 하나님이 홀로 하지 않으시고 성도들의 섬김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이 일을 이루어가시니까 교회와 성도가 자신, 곧 그리스도의 몸인 이 교회를 위해서 잘 봉사하면 지혜롭고 충성스럽게 봉사하면 교회는 점점 교회다운 교회가 되어가고 그 교회는 하나의 큰 몸으로서 세상에 나아가서 주님이 하시고 싶으신 일들을 교회를 통해서 마음껏 하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몸인 교회를 세워나가시는 방법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에 많은 직분들을 주셨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복음 전하는 자들과 그리고 목자와 교사들을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당시보다도 더 많은 직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많은 직분을 가진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끊임없이 복음을 전해서 교회에 접붙여져 몸이 되고 접붙여져 몸이 된 어린 신자들을 잘 돌보아서 온전한 신자가 되게 함으로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 세상을 고치는 일을 하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교회를 다닐 때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느 일에 만들어진 단체에 가서 유익을 누리는 그런 방식으로 교회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는 그런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학원 같은 곳이 대표적입니다. 건물이 있고 거기에 돈을 받고 잘 가르치는 직업적인 사람들이 있어서 학생들은 거기에 와서 잘 배우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헌금으로 수강료를 내고 그리고 목회자들이 직업적으로 봉사하는 교회의 일꾼들에 의해서 신앙을 교습 받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이 아주 광범위하게 번지고 있습니다. 헬스클럽 같은 곳은 장소가 있고 기구가 모두 마련되어 있고 시스템이 되어 있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정한 강습비를 내고 가면 거기에서 운동을 시켜주고 살을 빼게 하고 그리고 좋은 식단을 짜주고 그래서 우리의 몸의 건강을 돌보아줍니다. 우리의 의무라고는 가서 정해준 강습료를 내면 됩니다. 그러면 그것에 반대급부로서 그 서비스를 우리들이 받고 유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이런 식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도 매우 잘못된 생각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그가 좋은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학원을 다니고 혹은 헬스클럽을 다녀도 우리는 그야말로 그 학원이나 헬스클럽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구개자로서 일정한 목적을 위해 거기 참여하고 끝나면 나올 뿐입니다. 거기는 어떤 지체로서의 몸의 연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강제적으로 조약을 맺고 들어간 직장이나 단체, 혹은 군 생활이나 학교, 이런 것들은 훨씬 더 강한 구속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거기에 가입한다고 해서 그 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맺어지는 이 교회는 아주 유기적이고 영적이고 생명적인 관계 속에서 맺어지는 그런 하나의 막입니다.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면 그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신비에 의해서 낯선 신앙생활밖에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입장은 명백해졌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 접붙여집니다. 그 성도는 아직 아이로 말하자면 갗 태어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돌봄이 필요합니다. 많이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누가 돌보아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아주 명백하게 말합니다. 그렇게 처음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어린 신자들을 성도들로 돌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의 일꾼들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사도와 선지자, 복음전도자와 목사와 교사는 그들을 직접 섬기고 돌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성도들을 잘 섬겨서 그 성도들로 하여금 한편으로는 온전한 사람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온전하지 못한 신자들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섬김으로 준비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런 직분들을 세우셨습니다. 결국은 방법만 다를 뿐이지 하나님이 교회의 많은 직분 자들로 성도들을 섬기게 하게하고 성도들로 또 자기보다 더 어린 성도들을 섬기게 해서 전체의 구성원 전부가 섬기는 자로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그렇게 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교회의 제도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맨 처음 주님을 믿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어린 신자들 시절에 성도들을 통해 돌봄을 받고 그 성도들을 통해서 사랑을 받아서 그 섬김 속에서 자라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가정에서 태어나서 양육되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금방 아이를 낳아놓고 눈도 뜨지 못하는 아이에게 너 먹을 것은 네가 벌어오라고 그러는 부모는 없습니다. 일어나서 그 아이가 기어 다닐 때, 걸어 다닐 때, 뛰어다닐 때, 심지어는 자기 생각을 가지고 학교에 다닐 때조차도 네가 먹을 것은 네가 벌어오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때까지 부모들은 계속 봉사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맨 처음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들은 회심을 했기 때문에 신앙의 열심이 있을지 모르지만 판단하는 것이 미숙하여 어린아이와 같고 안정감이 없습니다. 안정감이 매우 적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조잡한 교훈과 세상 풍조에 쉽게 흔들리는 것이 어린신앙을 가진 신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사랑으로 잘 돌보고 진리의 말씀으로 잘 먹이고 그래서 그로 온전한 신자가 되도록 자라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이런 식으로 돌봐줄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면 기저귀도 차고 똥도 쌉니다. 그 아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한 아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전적인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열 번, 혹은 스무 번씩 기저귀를 갈아 채워주고 그 다음에 젖병을 들고 살면서 아이를 물려주고 밤에 잘 때도 불침번을 서다 시피하면서 아이를 돌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라지 않고 긴 세월이 흘러도 계속 그 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매우 더러운 것입니다.
(예화: 고등학교 시절 한집에 세 들어 살던 어느 부부의 딸이 얼굴도 예쁘게 생겼는데 아이가 상체는 자라지만 하체가 자라지 않아 엄마가 엎고 다니고 기저귀를 갈아 채우는 비정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아이였을 때는 그런 것이 예쁘지만 나이가 들 면서 그런 행동은 더러워지는 것이라는 이야기)
어린 아이들은 똥을 누는 것도 귀엽습니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은 아이의 건강상태를 알기 위해서는 아이가 똥을 눈 것을 새끼손가락으로 찍어서 먹어봤습니다. 혀끝에 대보면서 이 아이의 건강을 체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이 안 좋다. 아니면 소화가 잘 안 된다. 이런 것들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나이가 한 40이 넘은 사람이 얼굴에 주름까지 생기기 시작한 사람이 커다란 이불만한 기저귀를 차면서 똥을 싸면서 온 방을 돌아다닌다고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것은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더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안에 그런 신자들이 아주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렇게 더러운 곳입니다. 더럽다는 그 개념이 무엇인가 하면 마땅히 있어야 할 장소를 벗어나거나 마땅히 그러해야 할 상태를 벗어났을 때 더러운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이 교회에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본인들의 책임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교인들을 잘 키워라. 그렇게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당사자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본인 자신이 영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해서 어른스러운 신자가 되어야지 되겠다고 끊임없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의 의무입니다. 그러니까 본인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 그 사람들을 제대로 섬겨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도 이마에 주름이 굵게 잡혔는데도 역시 여전히 새카맣게 더러워진 우유병을 들고 기저귀를 차고 썰썰거리고 기어 다니면서 일을 만듭니다. 그래서 온갖 더러운 것들로 교회를 채우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 사람을 제대로 붙들고 제때 우유를 먹여주고 똥도 닦아주고 운동도 시켜주고 더러우면 목욕도 시켜주고 그렇게 하면서 사랑하면서 잘 돌보았더라면 그 사람이 지금쯤 아주 훌륭한 신앙을 가진 장성한 교인이 되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교회에서 그 영혼을 돌보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다른 일에만 신경을 많이 쓰고 정작 교회로서 유모처럼 해야 할 그 일에 심령을 다 기울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혹은 기울였지만 그렇게 섬기는 사람들이 매우 소수였기 때문에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의 영적인 욕구를 다 채우는 섬김을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해택을 받지 못해서 나이가 다 들어도 기저귀를 차고 다니면서 똥을 싸는 그런 더러운 교인들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나님 책임이 아닙니다. 본인의 책임이고 그리고 교회의 책임입니다.
먼저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그런 돌봄을 받으면서 교회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렇게 자란 다음에는 자신이 섬김을 받으면서 그렇게 컸던 것처럼 또한 자신보다 어린 신자들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유모의 마음으로 그렇게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건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만약에 이 모든 일들이 단지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고 일하는 교회의 일꾼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생각하는 교회에 있어서 영혼을 돌보는 이 목양적인 기능을 성경에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성도들이 그 목양의 기능을 담당하도록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는 목회자가 하지만 영혼을 돌보아서 자기가 자란 것처럼 주님의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이 목양적인 돌봄은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부여받고 있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오늘 이 에베소서가 바로 그렇게 해서 교회가 세워져간다고 한다고 하는 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가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이고 또 성도들이 그렇게 성도들 서로를 섬기면서 사랑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면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워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우리 안에 들지 못한 양떼들의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그래서 그 영혼들을 교회에 접붙이고 접붙인 그 어린 신자들을 사랑으로 잘 돌보아서 믿음이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자라게 해서 그래서 그들이 성숙한 교인들이 되어서 다시 자기와 같이 어렸던 교인들을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어린 교인들을 섬겨서 그들을 다시 성장한 사람으로 다시 만들고 그들이 다시 섬기고, 섬기고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몸인 교회가 끊임없이 접붙여지고 참다운 교회가 되어가는 비결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헌신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성도들을 통해서 교회의 몸을 온전하게 해 가는데 그런 섬김이 구체적인 목표가 무엇인가? 오늘 성경이 그것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것에서 하나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들을 섬기는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복음 전하는 자들과 목사들과 교사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성도들을 온전한 신자가 되게 하고 모든 섬김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온전한 신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돌보는데 그 구체적인 목표가 무엇인가 하면 그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있어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바로 태어나면 그 아이를 한 일주일 동안 우리들이 신생아라고 부릅니다. 아이가 아주 작은 아이들의 경우에는 뭐 1킬로도 안되는 아이가 태어나서 사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매우 희소한 경우고 그래도 아이가 태어나면 보통 2킬로 이상에서 태어나고 또 아이가 큰 아이로 태어나면 4킬로가 훨씬 넘는 아이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아이가 태어나서 그래서 엄마의 젖을 먹으면서 이 아이가 점점 자라기 시작합니다. 건강한 아이의 경우 하루에 약 20그람씩 몸무게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10일이면 200그람이고 100일이면 약 2키로 그램 정도가 늘어나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아이가 몸집이 커지게 될 때 어느 부분이 커집니까?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만약에 2키로 몸무게가 불었는데 그 모든 살이 머리만 2키로가 커졌다. 그러면 가분수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장애아가 되지 않겠습니까? 희귀한 병이기는 하지만 어떤 아이를 보니까 비정상적으로 간만 계속 자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굉장히 고통스러워합니다. 간이 뼈 속으로 안 들어가고 밖으로 돌출되어버려서 간만 한없이 크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자란다고 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백일 만에 2키로 정도 몸무게가 불어난다고 하면 그것은 아이가 키도 자라고 얼굴도 커지고 코도 커지고 그리고 이 속에 있는 장기도 커지고 장기를 보호하고 있는 갈비뼈도 커지고 모두 커지는 것이 골고루 커집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상적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께 접붙여져서 교회가 되고 접붙여진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앙이 잘 자라면서 교회의 온전한 몸이 이루어져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입니다. 그 지체로서 각자 성장해서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지역교회, 개 교회를 놓고 이야기를 하자면 큰 교회도 있고 작은 교회도 있는 것입니다. 한번 묵상을 해보십시오. 굉장히 역동적입니다. 어느 교회는 영적으로 매우 작습니다. 접붙여진 사람 수도 적고 작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키가 도토리만큼 작습니다. 또 어떤 교회는 그것보다는 크지만 아주 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비록 몸은 크지 않지만 교회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 잘 자라서 그래서 단단한 근육질의 몸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렇게 규모는 크지 않지만 주님의 명령대로 빨리 빨리 움직입니다. 그리고 힘이 있습니다. 아주 크지 않지만 그러나 자기의 몸집에서는 힘이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들을 훌륭하게 감당해나갑니다.
요즘 우리들이 논의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아무리 국민소득이 높아져도 강대국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땅도 작고 인구도 벌써 작습니다. 강대국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인구가 많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떤 것을 꿈꾼다고 지금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강대국은 절대로 못되지만 강 소국이나 강중국은 됩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십니까? 새로 나온 용어입니다. 진짜입니다. 이미 벌써 강 소국이 어딘지 다 나와 있습니다. 강 소국, 혹은 강 중국에서 가장 모델케이스가 아일랜드입니다. 나라의 규모는 크지 않는데 알차고 단단하고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무시할 수가 없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교회도 그런 교회가 있습니다. 또 어떤 교회는 굉장히 큽니다. 몸집은 굉장히 큽니다. 수만 명이 모입니다. 그런데 발걸음 하나도 자기 힘으로 못 움직여놓습니다. 왜냐하면 뼈는 별로 안 자라고 온통 살집입니다. 비개덩어리입니다. 그래서 한번 움직이려면 크레인이 동원되어야 할 정도로 자기 몸도 감당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외국에 나가서 언제 한번 보니까 그 나라에 400몇 키로가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인데 참 끔찍합니다. 외출을 한번 하려면 기중기가 동원이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서지를 못합니다. 가만히 누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놓고 그는 계속해서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몸집의 교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더 좋은 경우는 몸집이 굉장히 큽니다. 그리고 든든합니다. 그런데 130키로, 140키로씩 이렇게 나가는데도 옛날에 무하메드 알리 같은 권투 선수를 보면 130키로 그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보고 권투 평론가들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나비처럼 날아가서 벌처럼 쏜다고 그랬습니다. 계속해서 15라운드 내내 나비처럼 날아다니듯이 뛰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의 130키로 하고 차원이 틀린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됩니다. 크면서도 비계 살이 하나도 없고 모두 근육으로 똘똘 뭉쳐져 있습니다. 130키로가 되는데도 달리기를 하면 100미터를 한 12초에 끊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된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굉장히 많은 주님의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다양한 교회의 모습이 있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열린 교회는 어떤 모습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고 그것을 좀더 확장시켜서 전국의 교회는 세계의 교회 속에서 어떤 모습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좀더 확장시켜서 지금 현재 21세기에 존재하는 이 시대의 교회는 지금 역사상에 나타났던 18-9세기의 교회와 어떻게 다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의미 깊은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각자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지체로서 주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아. 그러면 나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되겠네요.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고 계속해서 말씀을 섭취하고 은혜를 받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주를 닮아 가면 이런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되겠네요. 왜 이 하나 됨이 깨트려질 것이 아닙니까? 내 많은 내 주위에 있는 지체들은 지금 게으르게 주저앉아서 주님을 닮아가려고도 하지 않고 열렬히 말씀을 사모하지도 않고 자기 깨어짐 속에서 순결하게 되어가지도 않는데 나만 신앙이 쑥쑥 자란다고 할 것 같으면 마치 이 손가락이 길어지는 것 같이 그렇게 될 게 아닙니까?
사실 그런 염려는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닮아가고 은혜로 충만해지고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간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많이 닮은 신자가 될지라도 우리가 그렇게 주님을 잘 믿는 신자가 되어간다는 이유 때문에 교회의 하나 됨이 깨트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런지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고 복음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았습니다. 어떻게 주님을 영접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지기는 했는데 복음에 대해서 현저히 무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에 진전이 별로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젖먹이고 우리에게 어떻게 주님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 갖는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참 신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돌봄을 받지 못해서 우리들이 심히 뒤로 미끄러져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신앙생활인 것을 알고 교회와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진리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참된 이치를 깨달으며 우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자신의 영혼 속에 들어와 자기 안에 있는 많은 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서 다시 역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내 안에 있는 성령도 나를 섬겼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동안에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우리들의 믿음이 점점 자라게 되었습니다. 다른 지체들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영적으로 쭉 성장해서 정말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하나 됨을 깨트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그는 지체들과 상관없이 혼자서 신앙이 자라는 법은 없습니다. 영향을 받고 영향을 미치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한 지체의 성장일 뿐 만 아니라 몸 자체의 성장을 함께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전도를 누가 합니까? 교회가 오래 다니는 사람들이 전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증인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에 오래 다닌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 중에 상당히 많은 수는 양계장에서 아예 오래 되어서 못 낳는 닭같이 교회 한구석에 와서 이러고 있습니다. 그런 닭들을 양계장에서는 다 사료만 없애니까 모아서 처분합니다. 그것을 ‘폐계’라고 합니다. 대게 쌉니다. 지금도 저 변두리 시장에 가면 파는데 아예 거기는 닭이라고 그러지 않고 폐 계라고 합니다. 그리고 팝니다. 5마리에 만원, 쌀 때는 한 마리에 1500원 밖에 안 합니다. 먹는데 대단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빨도 안 들어갑니다. 왜 하도 늙어서, 알을 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니 얼마나 늙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보통 압력솥에 넣고 삼기 전에는 이빨도 안 들어갑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이 은혜가 떨어지면 꼭 폐 계 닭같이 됩니다. 그는 전도를 안 합니다. 새로 믿은 사람이 전도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누가 전하는가? 새로 믿었건 오래 전에 믿었건 지금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십자가의 구원의 감격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은 전해집니다.
내가 어두움 가운데 있어서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는 영혼을 위해서 아무 것도 섬기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내가 변화되고 보니까 옛날에 나처럼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합니다. 그들에게 성경 한 구절이라도 읽어주고 싶고 책 한권이라도 주고 싶고 설교 테프라도 하나 건네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주고 싶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자기가 예전에 그 속에서 살아보았고 그것이 잘못된 삶이고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해드린 생활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곧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서 그를 섬기게 하면서 성장을 합니다. 당연합니다.
이번에 아우리치 하면서 여러분들이 선교지에 많이 가셨습니다. 또 지금도 또 아프카니스 탄을 떠났습니다. 중국 무안에도 갈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갑니다. 선교를 간 것은 그 사람들이 갔습니다. 가서 생전 처음으로 이방인들에게 역사하시는 주님의 애달픈 구원의 열정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진심으로 섬기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돌아오면 절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많이 잘 통하는 친한 친구에게 가서 자기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돌아오게 하시는데 사용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에게 영향을 주어서 자기에게 있는 것 같은 이방인의 영혼을 위한 주님의 마음을 전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선교에 동참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주님 앞에 온전한 신자가 되어가려고 하고 주님을 잘 믿고 섬기려고 애를 쓰면서 이 사람이 성장하게 되면 혼자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서 다른 지체들의 몸이 그 사람을 통해 도움을 저절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함께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계속 성화되어야 합니다. 여태까지 나만 혼자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이렇게 잘 성화되면 열린 교회가 불균형이 될까봐 염려하셨던 분들, 오늘 신학적인 오해를 푸시고 충분히 성화되십시오. 아무리 많이 성화되어도 이 교회는 성화되는 여러분들 때문에 기형이 되지 않으니까 안심하고 성화되십시오. 주 안에서 자라가십시오. 그런데 그렇게 자라는데 그 자라는 것이 하나 되어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되는데 무엇에 있어서 하나가 되는가 하면 첫째는 믿는 것에 있어서 하나 되고 둘째는 아는 것에 있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내용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내용이 있어야지만 믿을 수 있습니다. 참된 지식이 없이 믿는다는 것은 그것은 공상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분명하게 있을 때, 그때 아멘 하고 우리들이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믿는 것에 있어서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 믿음에 있어서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우선 첫째는 믿는바 내용에 있어서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는 각기 주님을 만난 계기도 각각 틀리고 이 교회에 오게 된 상황도 각각 틀립니다. 온 시기도 모두가 상이합니다. 그렇고 또 여기에 와서 많은 교역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웁니다. 그들마다 받은 은사가 틀리고 가르치는 방식이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우리는 또 교역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뿐만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배우며 목양을 받습니다. 목양적인 돌봄을 받습니다. 그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웁니다. 그런데 이 모든 배움과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사람은 각각 다르지만 그러나 신앙은 같은 신앙을 배워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교회의 중요한 구성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한 믿음 안에서 같은 세례를 받고 한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하나의 신앙 고백 안에서 주님을 믿고 섬겨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둘째로 이 믿는 것은 내용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까 이 믿음이라고 하는 자체가 우리가 아직 이성적으로 충분히 납득이 안 가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 때문에 우리들이 권위로 주어진 하나님의 명제에 대해서 아멘 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 안에서 하나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다 믿음이 자라고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주님을 향한 주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그 신앙이 깊어가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깊어갈 때 주님의 말씀 모든 것을 아멘 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처음에는 그렇지 않지만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다가 사람이 굉장히 믿음성이 있으면 오해할만한 말을 해도 상대방이 그 말을 바꾸어서 들어서 그래서 이해를 합니다. 왜냐하면 말로 나타난바 된 표상을 자기의 마음을 상하게 할만한데 그 사람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워낙 뛰어나니까 이 사람의 마음이 이렇지 않다고 하는 것을 내가 이해하면서 받아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종의 믿음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배우고 깨달음으로서 이런 것들이 깊어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진리를 맡아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를 끊임없이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빛을 품은 교회로서 성도들에게 그 빛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나누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을 때는 어떠어떠한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하나님의 견해를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교회에 와서 말씀을 배우면 아주 정직하고 명백한 빛이 있어서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를 아주 선명하게 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커다란 건물이나 많은 성도의 수, 잘 갖추어진 조직, 이런 것들에 의해서 교회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진리의 빛을 얼마나 많이 소유했는가. 그래서 그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줌으로서 그 교회 안에서 사람들의 영혼에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고 그 눈을 뜨게 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가지고 똑같이 인생과 교회와 역사와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목회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처럼 성경에 진리의 말씀을 들어내서 그 빛으로 성도들에게 많이 비추게 하고 비침을 받은 성도들 마음속에서 그 빛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보존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목회 사역의 핵심입니다.
자동차 하나를 사도 자동차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서가 두꺼운 책 한 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참으로 인간답게 살아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비결이 무엇이고 그 안에서 내가 행복해지는 비결이 무엇인가 하는 설명서가 이 책 한권 정도라면 너무나 약소한 것입니다. 너무 적은 분량입니다. 작은 분량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자동차를 운행하는 것은 그 설명서면 더 이상 부교제가 필요 없지만 이것은 엑기스만 모아놓은 축약본입니다. 그래서 이것 하나하나를 풀어서 더 상세하게 의미를 해결해줌으로서 성도들은 참으로 우리가 누구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내가 이 세상에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고 그 안에서 내가 행복해지는 비결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책과 설교, 그리고 성도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성도들을 돌보는 사역,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들의 영혼을 향한 모든 섬김 속에는 따라서 이 진리의 빛이 구석구석에 가득 배어 있어야 합니다. 실로 이 진리의 빛이 없는 모든 영혼의 사역은 인간적인 사역일 뿐입니다. 모든 것은 성도들에게 이 진리의 빛을 나누어주기 위한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쓰는 사람이 누구일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다만 돈만 많이 가지고 있다면 그가 기꺼이 해봐야 돈 가지고 섬기는 일밖에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만약에 가진 것 없고 높은 지위가 없어도 진리에 많은 빛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사람들에게 그 진리의 빛을 나누어줄 수 있는 현자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의 영혼을 위해서 봉사하고 진리의 빛으로 그를 섬기면 그 진리의 빛은 그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하나님의 영적 축복의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리 떨어져있던 짐승과 같은 사람의 회심케 해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 도구가 되게 하고 짐승과 방불한 삶을 사는 무지한 사람을 일깨워서 주님의 경건한 성도의 길을 걸어가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을 위해서 쓰임 받는 신자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의 빛을 많이 받고 그 진리의 빛을 가슴에 소유하고 그 빛이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장 중요한 사명은 이렇게 진리의 빛을 끊임없이 비추어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성도들은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성도들에게 그들 혼자서는 찾을 수 없는 교회에 대해서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성도는 자기가 알지 못했던 죄에 대해서 목회를 통해서 깨닫게 될 때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지를 깨닫고 주님 앞에 깊이 참회하며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하는 가나한 마음이 됩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복중에서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로버트 머리 맥체인 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말하기를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고난이 오면 그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더 많이 배우게 될 것이고 시련이 오면 시련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더 붙들게 될 것입니다. 죽으면 기쁨으로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많이 배워서 그런 진리를 깊이 머금은 성도들이 되기를 원하는 구도의 갈망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 진리 안에서 여러분들이 더 온전한 성도가 되어가야 되겠다는 성숙에 대한 갈망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을 때는 한때는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1-2년 지나면서 시들해지고 그리고 이제는 다시 죄의 지배 아래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고 칩시다. 그 잘한 게 뭐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자마자 주저앉아서 엎드려 자고, 어떤 사람은 100미터 달려가다가 주저앉아서 놀고, 어떤 사람은 300미터쯤 땀 흘리며 뛰어가다가 들어 누워서 자고, 어떤 사람은 500미터쯤 뛰어가다가 고무신 거꾸로 신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다 같은 사람들입니다.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차이가 별로 안 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믿음이 아니오. 구원을 얻는 데까지 이르는 그 믿음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가야 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눈물이 흐르십니까? 그 눈에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그 눈에 눈물이 흐르는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합니까? 한 성도가 무릎을 꿇고 마음을 쏟으며 눈물로 기도하는 간절한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결정체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그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두 눈이 보다 깊은 진리의 말씀을 알기 원함으로 반짝일 때 그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하나님, 내게 소원이 있습니다. 나의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여주십시오.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과 같사오니 주여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진리를 향해서 빛나던 눈동자를 가졌을 때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나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어주십니다. 그래서 나를 고치십니다. 전에는 빚어지지 못한 엉터리 같은 죄인이었는데 주님의 말씀의 칼로 우리를 깎으시고 그 말씀의 검으로 우리를 찔러 우리를 도려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원하는 간절한 갈망의 눈빛이 흐려질 때 그 눈에서 눈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욕에 이글거리는 세상사랑의 눈빛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명백한 진리입니다.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진리입니다. 성경을 어디 읽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지금 한 주간 동안에도 계속 끊임없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지금도 무릎을 꿇으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기도의 제목이 어떤 것입니까? 하나도 더 보태어서 지금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내가 아니면 이 섬김을 누가 할 것인가. 나는 이 섬김에 바쳐진 사람이다. 라는 그 눈물로 간구하지 않을 수 없는 섬김의 현장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절한 갈망, 그 안에서 내가 지금 무엇을 배우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는 이 믿음,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곧 여러분들이 절대로 온전한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언젠가 매일매일 여러분들을 섬기기 위해서 막장에 내려가서 하루 탄을 캐 와서 교회의 붙을 때는 광부의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좀 배우고 깨달았다고 하지만 절대로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그 은혜의 세계, 기독교에 대한 지식은 광대한 세게 속에서 얻어낸 부스러기 같은 작은 지식에 불과합니다. 겸비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탐구하고 그 진리를 아는 빛을 더 많이 받고자 하는 간절한 사모함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않습니까?
저는 지난 주간에도 어거스틴을 읽으면서 저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느꼈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이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나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척박한 것인가. 이런 내가 이 많은 여러분들의 선생이 되는 것이 가할까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같은 고백에 동참해야 한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선생도 그러한데 하물며 학생인 여러분들은 더 많이 그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배불러 하는 성도들을 볼 때마다 어김없이 마음에 떠오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일년에는 몇 번씩 나가고는 해외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질이 좋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너무 순수합니다. 정말 눈망울은 촉촉이 젖어있고 무엇이든지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주기만 하면 그대로 살고 싶어 하고 그런 사람처럼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의 빛을 받지 못해서 방황하는 많은 영혼들을 봅니다. 특별히 중국 땅에서 그런 영혼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아이들 중에도 밥을 잘 안 먹는 애를 둔 부모들이 있는데 불쌍합니다. 아이가 밥을 안 먹습니다. 그래서 하여튼 밥을 한 숟가락을 먹이려면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 아이에게 통 사정을 해야 합니다. 의사들은 3-4일만 굶기면 치료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제 발로 와서 먹게 되어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 그 아이를 덜 사랑하는 남의 부모가 하는 이야기지 진짜 부모는 그 어린아이들이 3-4일씩 굶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합니다.
난 여러분들을 보면서 종종 그런 것을 느낍니다. 그때마다 많이 슬픕니다. 가끔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집회할 때 영혼들이 빨려들 듯이 마치 눈을 크게 떠서 나 자신을 삼키려는 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지체들을 봅니다. 넓은 주택이 없고 좋은 차가 없고 넉넉한 사례금이 없어도 그 곳에서 목회를 한다면 나는 날마다 마음은 천국일 것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셨던 사람들, 그리고 주님이 그토록 나누어주고 싶어 하셨던 하나님의 말씀, 그것들을 가슴에 가득 담아서 그래서 눈감고 혀를 내미는 그 많은 어린 새끼들에게 먹인 그 엄마의 기쁨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젖이 퉁퉁 불어도 어느 자식은 먹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너무 슬픕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갈망하고 배워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믿음의 내용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믿는지, 왜 믿는지, 주님이 정말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그 신앙이 무엇인지 배워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 되어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는 것입니다. 믿는 것이 믿음의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아는 것은 그 믿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체험을 통해서 그것들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불에 대한 그림과 불에 대한 설명을 많이들은 사람과 한번 불에 데어본 사람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경험의 차이입니다. 개념이 경험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경험으로 이어지지 않은 개념은 항상 피상적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함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공동체로 자라가야 합니다. 풍족한 공동체는, 믿음의 공동체는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많이 가진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 와서 방황하는 영혼들이 인생의 의문점에 대해서 물어보면 바로 대답을 얻을 수 있는 풍부한 신앙과 인생에 대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지식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서 성도는 하늘양식을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사역은 바로 그런 것들을 창고를 열고 많은 성도들에게 나누어주고 성도들은 그것을 마음에 담아서 그것을 저장해서 곤고하고 상한 영혼들에게 그 진리의 빛을 또한 나누어줌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을 경험하면서 교회는 하나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것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같은 교회에 다녀도 영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된 지체들은 자기(?)와 비슷한 영혼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때 한없이 그 대화가 깊어지고 성도의 교제가 촉진됩니다. 그리고 그 교제가 끝나고 나면 항상 그렇게 살고 싶다고 하는 간절한 갈망이 생겨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함으로서 하나의 공동체로서 진정으로 하나의 공동체임을 사람들이 함께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함께 예배를 드리며 함께 은혜를 받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감으로서 상관없던 사람들이 이제는 모두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하지 않고 모든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마음이 늘 갈라지던 사람들이 함께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공동체로서의 연대의식들이 생겨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진짜 몸이고 한 지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 사람의 아픔이 나의 고통이 되고 저 사람의 즐거움이 내 마음에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크게 두 번째는 온전하게 하시는 것,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시는 것이 이 섬김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온전케 된다고 하는 그 말이 희랍어로 보면 “다 자란 남자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다 자란 남자, 안드라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남자로서 다 자란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도 하는 말이 야, 너 다 컸구나. 야, 너 몰라보겠다. 네가 아무개 틀림이 없니. 길거리에서 만나보면 몰라보겠다. 일년 사이에 이렇게 많이 컸니. 우리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어른들보고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형제 오랜만이야. 어구, 많이 컸네. 30살 때 만나보고 35살 때 만나보니 5년 만인데 몰라보겠어. 거리에서 만나면 누가 알아보겠어. 30살 때는 요만한 어린애였는데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6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 들어갈 때쯤 되어서 중학교 1학년 가서 신체검사를 할 때 147센티쯤 되었습니다. 2학년 때 재보니까 157센티였습니다. 3학년 때 재보니까 167센티였습니다. 그 후로 여태까지 7센티밖에 안 자랐습니다. 그러니까 많이 양보하더라도 20살까지만 자라지 그 다음부터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다 자란 남자,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온전케 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어린신자들은 우선 지적 기반이 취약합니다. 그래서 거짓된 교훈에 쉽게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립니다. 모든 것이 미숙하기 때문에 판단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자랐습니다. 이제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항상 어린아이들보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왜 대답을 못합니까? 항상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린아이들보다 훨씬 순결합니까?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직장에 가려고 가방 들고 나갔다가 PC방에서 밤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애들은 그렇게 합니다. 이게 바로 어른과 아이의 차이입니다. 그러면 PC방에서 하는 게임이 재미가 없어서 그렇지 재미있다고 느끼는 어른은 직장에 가다가 가방 들고 PC방에 가서 밤새지 않습니다. 그런데 애들은 학교 가다가 그렇게 합니다. 이게 바로 성숙과 미성숙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절대적으로 순결한 사람이라든지 뭐 티가 없고 흠이 없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다 자란 사람입니다. 다 자란 사람이 되기까지 성도들이 섬기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많은 직분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오늘 그게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충분히 자라서 이제는 누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교회에 나오고 자기가 헌금생활하고 그리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또 필요하면 헌신하고 그리고 말씀을 듣고 반응하면서 교회 구석구석을 섬기고, 조국을 섬기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헌신하고,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 순결한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죄에 넘어지는 때도 있고 이기는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별개의 문제고 일단 그렇게 자리가 잡힌 성장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 갔는데 전화로 심방을 하는데 아고, 요즘 집사님 몇 달 동안 교회도 못 나오시고 바쁘신가보지요? 그게 말이나 되는 통화입니까? 아니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것까지 챙겨주어야 할 교인이 어떻게 집사는 됐는지. 집사님, 요즘 주일날 교회도 못 나오시고, 앞뒤가 안 맞습니다, 집사라는 것은 이제 그런 것을 뛰어넘어서 봉사해야지 될 사람인데 상습적으로 교회를 빠져서 교역자들이 전화해서 제발 주일 날 교회를 잘 나오라고 챙겨주어야 할 이 사람이 풀 그라운드의 사람인지, 안드라의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내가 오늘 여러분들을 찾아가서 그래, 오늘 점심을 먹었고, 네, 목사님, 볼일은 봤고? 네, 볼일을 볼 때는 잘 휴지로 처리해서 손에 묻지 않게 휴지통에 잘 버려야지 된다. 그리고 손을 깨끗이 씻고, 내가 이렇게 충고하면 여러분들은 아마 나를 사람 볼 듯이 안 할 것입니다. 왜 너무 창피하니까. 그런데 사실 제가 틀린 게 하나도 없습니다. 밥을 먹었으면 일을 봐야지 되고, 일보면 손을 닦아야지 되는 것이 당연하니까. 틀린 이야기를 한 게 아닌데 그렇게 자존심 상한 것은 왜 그렇습니까? 영 수준에 안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다 자란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을 그렇게 대우해주는데도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형제, 요즘 왜 주일날 못 나오지? 그런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영적으로 나이가 몇 살인데, 내가 아직까지도 교역자들에게 주일날 교회에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체크를 당해야 하는 그런 사람일까? 수치스럽지 않습니까? 얼굴에다가 뭐 뒤집어쓴 것 같이 그렇게 모욕스럽지 않습니다. 육신적으로는 그렇게 느끼면서 영적으로는 그런 것을 못 느낍니까? 영적으로 그런 수치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육적이어서 그런 것입니다. 육신적인 사람이라서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사람들에게는 신령한 자존감이 없습니다. 육적 자존감은 있는데 신령한 의미의 자존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매일 남의 기도의 응답에 쫓겨 다닙니다. 끌려 다닙니다. 내가 기도하니까 자네 이렇게 하래. 그래, 저 사람은 믿어. 난 아니던데. 그래. 오락가락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바로 미성숙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나오면서 매일 기저귀차고 교회에 나온 지 3년, 5년씩이나 되었는데 기저귀나 차고 다니고 매일 가서 숟가락에다 자기가 밥 퍼먹고 김치 먹으면 되지, 교회에 다닌 지 몇 년이 되었는데 숟가락에다 침 발라서 거기다 밥 담아서 거기에 김치 먹으면 되지, 이빨로 잘라서 혀로 씻어서 거기 얹어서 그것을 무릎을 기어 다니면서 그거라도 하나 먹으라고 그러니 참,
그거 아니면 사경회 참석하십시오. 무슨 새 가족공부 꼭 나오십시오. 무슨 세미나 있는데 말씀 들으십시오. 너무 좋은 분이 오셨는데, 그게 그것이 아닙니까? 내가 오죽 했으면 그랬습니다. 내가 이렇게 죽으라고 사경회를 하는 이유는 사경회가 필요 없는 교회가 되는 것이 꿈이어서 그랬습니다.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진짜, 말씀에 대한 사모함만 가지고 있으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매 주일 이렇게 드리면 되고 그것도 모자라면 저녁 때 예배 만들어서 또 드리면 되지, 사경회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오죽했으면 하겠습니까? 사경회서 말씀한 것이 주일 말씀과 뭐가 틀립니까? 뒤에 현수막 하나 붙이면 됩니다. 꼭 우리 집에서도 사경회를 할 때는 반찬을 잘 해줍니다. 강사라고, 매일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 교인들이 점심도 사줍니다. 그때만 사줍니다.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보고 수치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상태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번에 대한 내적인 설명입니다. 이번이 외적인 성장을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내적 성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어떻게 하든지 간에 중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꼭 키 가지고 따지는 것은 아니지만 정상적인 경우에 그렇게 자라서 한 1미터 65쯤 되었다고 그러면 어째든 가발이라도 써서 밖에 나가면 어른 취급을 할 것입니다. 아직 고등학교 다녀도 수염이라도 좀 나니까 그렇게 되지만 진짜 어른입니까? 어른이 되기 위해서 내적인 것들이 꽉 차야 합니다. 어른스러워야 합니다. 그래야 어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내적인 것은 그리스도의 충만의 상태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꽉 차는 것이 그것이 목표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성화되고 주님의 은혜로 가득 찬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푯대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나침판도 없고 분도기도 별로 없고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사람들이 맑은 하늘이 있을 때 배를 띄웁니다. 바다에 나가서는 북극성을 바라보고 노를 저었습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그런데 북극성에 가고 싶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정신병자지, 그게 무슨 은하철도 999입니까? 바다를 헤엄치는데 어떻게 그게 갑니까? 그런데 그것이 좌표가 되어서 똑바로 가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충만의 상태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간다고 할 때 예수님을 바라보고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가지만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그 예수님께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마치 북극성을 바라보고 노를 젓는 사람이 계속 저면 북극성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도착할 지점이 아니라 좌표로 삼아야 할 지점입니다. 그것을 보고 똑바로 가면서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가다가 보면 주님처럼 될 수 없어도 주님이 가게 하시고 싶으셨던 그 길을 따라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주는 내적인 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꽉 찬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난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 시대는 너무 가볍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거목과 같은 교인들이 자라기를 기대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언젠가 내가 조국 교회를 생각하면서 마음이 아팠을 때 쓴 비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묘목과 같은 교인들과 분재로 가득 찬 조국교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야지 됩니다. 분재. 그것 우스운 게 아닙니다. 언젠가 한번 갔더니 어느 가게 요만한 분재가 있는데 600만원을 달라고 합니다. 뭐가 그렇게 비싸냐고 한줌 밖에 안 되는데, 선생님 그 나무가 600년 된 나무입니다. 사실 600년이 되었는지 60년이 되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것을 누가 600년 동안 지켜봤겠습니까? 나무 테로 알겠습니까, 자기네들 말로는 600년이 되었다고 그러니 그런가 하지, 아니 그게 정상적인 땅에서 소나무가 심겨진지 600년이 되었으면 지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런 거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거목이 동산 하나에 한 200그루만 있으면 큰 숲을 이루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분제를 뭐 하는지,
오래 예수를 믿어도 분재와 같은 사람이 되고 지금 믿어도 자라지 않아서 묘목과 같은 사람이 되고 그런 나무들로 산이 가득차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비가 한번 오면 다 쓸어내려갑니다. 분재가 600년이 되었으면 뭐하고 천년이 되었으면 뭐 합니까? 땅을 움켜쥐고 있는 땅이 없는데, 그 산을 지켜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묘목이 아무리 개수가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뿌리가 10센티도 안 내려가서 비에 쓸려내려 가면 전부다 흙더미 속에 한꺼번에 쓸어내려 가버리고 산은 허리가 깎여서 그래서 낭떠러지로 변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래서 얘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좀 깊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고가 깊고 투철하고 진지한 열심을 품고 그래서 맑고 깊고 올곧고 푸르게 그렇게 자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깊이 있게 마치 일주일동안 열심히 찾다가 포기할 예수님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끊임없이 주님을 알아가는 것, 그래서 온전한 성도가 되어가려고 할 때, 그때 얼마나 아름다운 때가 되겠습니까? 크면서도 주님의 분부에 민첩한 종 같은 교회, 그래서 세상 끝까지 가서 주님의 마음으로 병든 자 고치고 저는 자 일으켜서 눈 먼 자에게 빛을 주고 우는 자에게는 눈물을 씻겨주는 그런 주님의 분신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원대한 꿈을 위해서 그 목표를 이루도록 섬기라고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셔서 교회의 한 지체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런 목표를 가지고 주님을 섬겨갈 때 그것이 이 세상에서 주님을 섬긴 훌륭한 사람의 발자취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지식으로 자라게 하라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4:14)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성도를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의 많은 직분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진리를 교회에 의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온 힘을 다해서 성도들을 주 안에 다 자란 성도들로 세워 가시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다 자란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섬기고 또 이 세상에 나아가서 세상을 주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오도록 섬기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을 잠깐 해설하면서 사도가 어떻게 해서 이 14절을 이야기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는 바로 앞에서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 성도들을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이라고 말하면서 왜 성도들을 그렇게 세워야하는지를 말하는데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이제 예수님을 방금 믿고 교회에 접붙여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아직 어리기 때문에 이미 세상에 여러 가지 유혹이나 잘못된 교훈에 의해서 요동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어린 신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교회에 나온지 얼마 안 된 신자들만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는 것과 교회에 다녔다고 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래 다녔어도 신앙이 자라지 아니하면 역시 이렇게 쉽게 흔들리고 요동치는 신자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기분을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고 세상 유혹에 따라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런 모습이 바로 어린신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어린신자들을 교회가 돌보아서 장성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다 자란 혹은 장성한 신자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지식 안에서 자라가는 것, 또 하나는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것 이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지식 안에서 자라가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다음 시간에는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림으로서 교회가 어린 신자들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어린신자는 늘 주변의 여건에 의해서 요동할 수 있는 소지를 가지고 있는 어린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들이 돌보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들을 붙잡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가 그들을 붙들어줍니다. 그래서 아시아에 들어와서 3년이 넘게 목회하다가 예루살렘 순교의 핍박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면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에베소에서 온 장로들을 향해서 그들에게 한 유언적인 설교 속에서 언급했듯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와 곧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그들을 붙들어줄 때 그들이 비로소 요동하지 않는 신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풍부하게 먹이고 성도들이 그 말씀을 먹고 잘 자라게 될 때 교인들이 감정이나 인간관계에 의해서 신앙이 요동치는 그런 교회생활이 아니라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주님의 그 말씀의 은혜에 붙들려 든든히 서서 주님의 뜻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성숙한 교회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렇게 어린신자들이 성숙한 신자로 자라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먹어야지만 그가 성숙한 신자로 자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성도를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고 성도의 중요한 사명은 그 말씀을 잘 먹고 성장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누가 교회고 누가 성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 자신이 교회의 일부이고 또 교회는 성도와 한 몸이니 성도와 교회가 나누어지는 것 자체가 사실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결국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먹으면 어린신자에서 점점 자라나는 성숙한 신자가 됩니다. 성장한 신자가 된다는 것은 교회에 익숙해졌다거나 교회의 이치를 잘 알게 되었다거나 목회자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많이 알게 되어서 교회에 아는 사람이 많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성숙해졌다고 하는 것은 진리의 말씀이 신자의 마음속에 많이 들어가서 주님의 말씀으로 점점 꽉 차서 어른스러운 성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바로 자기 속에 있는 그 쌓아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더 어린 성도들에게 먹이는 역할들을 하는 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시의 말씀을 저장하시는 창고를 이 땅에 세 개를 두셨습니다. 하나는 원천적인 창고인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창고는 목회사역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슴 안에 말씀에 풍부한 저장고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성도의 마음 안에 말씀의 저장고를 두셨습니다. 목회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이 성경의 진리의 말씀을 드러내서 그 드러낸 것을 목회사역이라는 활동을 통해서 확 펼쳐서 그래서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서 성도들의 마음의 창고에 그 말씀을 집어넣는 것이 목회사역입니다. 그냥 어울려서 놀러 다니고 교제나 하고 그런 것이 목회사역이 아니라 목회사역은 근본적으로 진리의 말씀을 끊임없이 펼쳐서 그 말씀을 계속 소생하게 해서 그래서 그것을 여러 가지 통로를 사용해서 성도들의 마음에까지 그 말씀에 이르게 해서 그 말씀을 성도들의 가슴속에 넣어주는 그 사역이 목회사역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창조되어서 진리가 계속 쏟아져 나오는 이런 말씀의 새로운 탐구와 말씀에 대한 깨우침이 없으면 그 많은 전달의 도구가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전달의 도구를 많이 만들면 뭐하겠습니까, 퍼서 줄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제도 우리교회의 집사님을 몇 분 만나서 저녁을 먹으면서 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의 노셈텐 교회에 23년 목회하면서 떠나갈 때 고별설교에서 이야기하듯이 목사로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그리고 그 말씀을 연구하며 묵상하며 기도하고 목사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신경 쓰지 않게 그렇게 도와야한다. 그래야지만 여러분들이 시간이 흘러갈수록 점점 더 풍성한 말씀을 공급을 받아서 은혜 받은 신자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멘을 하십시오. 그렇게 11년을 가르쳐도 눈치가 없습니까?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아주 구체적인 방법을 이야기하겠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데 필요한 여건을 갖추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탐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알아가는 그런 신령한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이 말씀에 풍성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끊임없이 탐구해서 펼쳐서 이렇게 풍부하게 목회사역에 할 수 있게, 이것을 갖다가 기회를 짜내어서 각종 통로를 만들어서 성도들의 마음속에 깊이 넣어주어야 합니다. 한번 넣어준 것이 사라지지 않고 그 속에서 계속 역사하도록 그렇게 돌보는 것이 목회사역입니다. 그 해택을 받으면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쌓여서 역사하면 여러분 신앙이 점점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성한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아주 건강하고 튼튼한 어른과 같은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몇 시간동안 어린아이의 비유를 이야기하면서 자라지 않는다면 얼마나 슬픈 것인가 이야기했더니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나는 해당이 없다. 나는 그래도 그러지는 않다. 나는 그래도 옛날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내가 얼마나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났는데... 내가 묻고 싶습니다. 요즘도 자라고 계십니까? 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접붙여져서 교회의 지체가 되자마자 성장을 안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젖병을 든 상태에서 늙어갈 것입니다. 한때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은 4살에서 늙어갑니다. 한때 조금 더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은 7살에서 수염이 나기 시작하고 그리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 시작합니다. 뭐가 차이가 있겠습니까? 좀 나을 것입니다. 7살 쯤 되었으면 자기 손으로 지팡이 짚고 백발을 휘날리면서 화장실을 갈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것도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갓난아기, 젖병 문 3살짜리 할아버지, 7살짜리 할아버지, 9살짜리 할아버지, 할머니 그렇게 모인 교회가 어떻게 이 세상을 섬기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영적으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왜 성장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아무리 성장하려고 애를 쓴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풍성하게 솟아올라서 여러분 마음속에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이 쌓이지 않으면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리 새로운 말씀이 쌓여지고 좋은 전달의 도구가 생겨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려하지 않고 말씀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면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7살쯤 자랐다고 해서 교만해지고 그 콩알만한 지식으로 처음 믿은 사람들을 판단하고 그리고 먼저 예수 믿은 동료들을 판단하고 하는 이런 죄에 빠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유아상태에서 이미 노파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이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는 깊고 무한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가는 것이 성장하는 것인데 이렇게 성장하지 못하도록 이 영적으로 어린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대적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세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의 궤술입니다. 이것은 내가 주님을 믿으려고 하는데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악한 친구들, 혹은 악한 이웃,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가족, 모든 사람이 도구가 되어서 사람의 궤술로서 나를 참다운 신앙의 길을 따라 가려는 구도의 길을 가려는 나를 흔듭니다. 그런데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서 어른스러워지면 주위에서 그런다고 해서 유혹에 빠지거나 넘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무리 부패성이 남아 있고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름, 그리고 쾌락을 좋아하는 즐거움이 있어도 직장에 가다가 가방을 들고 그것도 오락실에 가서 그것을 두들기다가 직장에 안 가는 성인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애들은 그렇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똑같이 다 부패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미 어른은 어른스러워졌기 때문에 그렇게 유치한 일로 인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궤술에 의해서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영적으로 어린 신자들입니다. 방금 예수 믿기 신자들은 물론 그렇고 또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고 하더라도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은 모든 신자들은 모두 이렇게 사람의 궤술에 의해서 신앙의 길에서 이탈할 위험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간사한 유혹입니다. 여기에 간사하다는 형용사가 붙었습니다. 유혹은 항상 결과를 우리에게 다 알려주지 않고 생각을 속이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유혹은 우리에게 다가올 때 유혹에 지면 죄에 빠지고 죄에 빠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혼이 파괴되고 그 후에 하나님의 형벌이 뒤따르게 될 텐데 그 모든 것을 한번에 다 보여주면 그 유혹에 넘어질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그런 모든 것을 다 감춥니다. 그리고는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고 그 유혹에 넘어질 때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유익만을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달콤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거기에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간사한 유혹이 올 때 누구든 마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에 누구도 나는 이미 모든 이 세상의 유혹을 초월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혹을 받으실 수 없는 분이셨지만 우리는 유혹을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없는 것을 집어넣는 것이 유혹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잠재되어있는 것을 이렇게 꼬드겨서 끌어내서 강한 힘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이 유혹입니다. 자극을 하지 않으면 훨씬 죄를 덜 짓게 됩니다. 그런데 자극을 받습니다. 그랬더니 이 속에서 그것들이 끌어내어지는 것입니다. 끌어내어지는 가운데 우리 안에 죄의 힘이 강화되어서 우리의 마음의 경향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경향성으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간사한 유혹에 누구든지 넘어질 수 있는데 그러나 성숙한 신자들은 많은 지식의 말씀에 의해서 유혹이 오면 유혹의 마지막에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끝을 잘 압니다. 그리고 은혜가 누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신자들은 은혜의 힘이 얇습니다. 그리고 지식이 적기 때문에 어떤 유혹에 빠질 때 마지막에 나타날 모든 위험스러운 결과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래서 넘어지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늘 유혹에 넘어져서 미끄러지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들으면서 영적으로 날마다 자기가 깨트려지고 성장해가는 사람들은 유혹을 늘 받아도 늘 뿌리칩니다. 이깁니다. 그리고 마음을 지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넘어집니다.
세 번째는 세상교훈 풍조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죄를 지으면 반드시 우리에게 죄책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죄를 일단 받아들이게 되면 죄는 가만히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죄책감을 무디게 만듭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어떤 죄를 짓게 되면 죄책감들이 감소됩니다. 또 어떤 경우에 이 죄책감이 감소되는가 하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때, 그때 우리는 죄책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수십 명이 건널목 양쪽에서 가뜩 서서 한 사람도 움직이지 않고 빨간불이 켜지기를 기다릴 때 씩씩하게 혼자 뛰어간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우르르 건너갑니다. 그때는 사실 똑바로 서있는 것이 멀쑥합니다. 혼자 잘난척하는 것 같고, 그래서 망설이다가 할 수 없이 맨 마지막에 남들을 쫓아갑니다. 이런 것입니다.
세상의 교훈의 풍조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합니다. 그때는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처음에는 믿음을 지키고 살다가 믿음이 식으면 그런 사람들의 생각에 동요하면서 신앙의 길에서 미끄러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말씀이 계속 쌓여서 어른스러워진 성도들은 마음속에서 기도가 잘 안될 때도 있고 그리고 세상 유혹에 마음이 끊을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전반적으로 생각이 올바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옳은 일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는 인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행해도 그것은 원래 그런 것이야. 성경에 사망에 이르는 길은 넓은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문이 좁고 길도 협착합니다.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하셨잖아, 이렇게 스스로 타이르면서 세상의 교훈의 풍조에 안 밀립니다. 그런데 어린신자는 밀립니다. 그렇게 해서 넘어집니다.
이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단에 넘어지는 신자들이 어떤 신자들입니까? 꼭 이단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 확 박혀서 정신이 완전히 빨려가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진리를 가르칠 때 눈이 희멀겋게 되어 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만 꽂히는 것입니다. 왜 진리와 비진리가 동시에 한 사람의 인격에 꽂힐 수가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자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진리에 의해서 꽂힘을 받았던 사람들은 비 진리의 사상이 날아올 때 그렇게 꽂힐 수가 없습니다. 잠시 그럴까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꽂히지는 않습니다. 꼭 그런 사람들만 골라서 꽂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단에 미친 듯이 빨려드는 것입니다. 그게 모두 진리의 말씀 속에서의 그 말씀 안에서 변화 받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밀려가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하면 지식 안에서 성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지식으로 자라가게 해야 합니다. 영적 성장의 두 요소가 있는데 지식의 성장과 사랑의 성장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지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기독교 인식론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가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식론적 기초가 되기를 나는 여러분들에게 바랍니다. 그리고 집중해서 듣기를 바랍니다.
우선 우리는 이 문제를 거론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이렇게 했습니다. 보라 우리가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되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사람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형상과 모양이라는 단어, ‘셀렘’과 ‘데모테’라고 하는 이 히브리어 두 단어와 단어는 다르지만 거의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편적인 개혁주의자들의 견해입니다. 그래서 이 셀렘과 데모테, 곧 형상과 모양은 눈에 보이는 외관적이 형상이나 모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존재 자체가 순결한 영이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형체를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가시적 형태가 없는 분이 외관적인 형상을 우리처럼 만들자고 제안하셨다고 하면 사실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형상, 혹은 모양이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형상, 혹은 모상, 혹은 형상이라고 하는 이 이마고데이 라고 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이 말은 하나님의 영적이고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핵심적인 말로 요약을 하면 이것은 영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 가운데는 뭔가 생각하고 지각할 수 있는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동물들이 식물에 비해서 훨씬 발달한 감각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물들도 생각하고 심지어는 듣고 말하고 그리고 의사표시를 하기도 하고 또 혹은 동물들도 자기 난 새끼들을 사랑하기도 하고 하는 일정한 정신적인 기능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이것은 지성에서 비롯된 지능도 아니고 그리고 영혼에서 비롯되는 기능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들을 육체를 만드신 다음에 육체 안에 그 육체가 보호를 받으면서 효과적으로 생존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주신 지각기능들입니다.
여기에 시계가 있습니다. 째깍째깍 소리를 내면서 시계가 움직입니다. 초침이 움직입니다. 이 시계는 이렇게 일초에 째깍째깍 하면서 일초에 한편씩 초침이 움직이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계를 없애버렸습니다. 아예 소멸시켜버렸습니다. 그때에 우리들이 이렇게 물을 수 없습니다. 시계는 사라졌지만 째깍째깍 하던 그 기능은 어디로 간 것일까?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능은 그 존재 안에 갇혀 있습니다. 존재가 소멸되면 그 기능도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시계라고 하는 존재물은 사라졌는데 째깍거리는 그 기능만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왜? 그 기능은 이 시계 속에 있기는 하지만 이 시계와 같은 실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기능입니다.
그래서 기능은 실제가 사라지면 기능도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도 하나님께서 그런 기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그런 기능을 주셔서 숨쉬고 먹고 마시고 보고 하는 그런 기능을 주셨습니다. 그런 기능을 주셨지만 육체가 소멸되고 나면 그 기능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영혼은 그런 기능이아니라 실제입니다. 그래서 육체가 소멸되고 나면 영혼이 딱 남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게 영혼입니다. 인간의 지성은 영혼이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한 기능 중에 하나입니다. 실로 이 지성 때문에 사실은 영혼이 영혼 될 수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을 육체로만 창조하지 않으시고 영혼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 영혼과 더불어 교통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런 진술은 교리적으로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이 영적인 교통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따라서 이 진술이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의 고통을 찰떡 두개가 있는데 그것이 달라붙는 것같이 묘사를 한다면 그런 식으로 교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을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영혼은 당신 자신이 창조하신 것이고 창조하신 것이지만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셨지만 하나님 자신을 나누어주신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나누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것 영혼조차도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 창조된 영혼 안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안에만 있는 도덕적 성품과 기능을 그 속에 넣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것을 넣어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혼이 하나님과 완전히 동질의 것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피조물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 자기 자신의 존재요, 실제입니다. 그 둘 사이에는 완벽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찰떡 두개가 붙는 것 같은 그런 식의 연합이나 혹은 융합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영혼이고 영이신 하나님은 따로 존재합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어서 그 영혼 안에 하나님의 성품과 비교될 수 있는 여러 가지 탁월한 특성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 안에는 하나님에게는 있지만 인간에게는 볼 수도 없는 그런 것들이 하나님에게는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인간의 영혼은 영이신 하나님과는 비교될 수 없는 종류의 또 다른 영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처럼 선과 악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판단하고 아름다움을 찾고 하는 것은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은 완전하지 않고 영원하지도 않고 그리고 무한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과 하나님이 공유하지 않은 특성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었으나 영이신 하나님 자신을 나누어주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으로서 하나님의 특성을 소유하고 있으나 그러나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영과 본질의 것을 이루는 영혼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제 여기서 그러면 인간의 영혼과 영이신 하나님이 교통한다고 할 때 그것은 영적 교통임에 틀림이 없는데 그런 영적 교통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는 그 문제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또 다른 영혼인 인간과 더불어 교통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통로가 바로 지성입니다. 지성을 사용하셔서 이제 영이신 하나님이 영혼인 인간 사이에 교통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성령을 통해서 하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성을 통해서 이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그 지성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시고 그 지성을 통로로 당신에 관한 지식을 소유하게 하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신적 생명을 인간에게 부으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교통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유한한 인간이면서도 끊임없이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잇대어 살게끔 만들어주신 것이 바로 영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그 안에서 지성은 어떤 위치가 있는가? 이 지성은 영혼의 향도입니다. 말하자면 영혼을 기관차에 비유한다면 맨 앞에 있는 기관실이 지성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러한 지성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가 물을 때 하나님의 본질은 지성과 의지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성과 의지가 하나님의 본질이듯이 인간도 역시 이 지성과 의지가 본질입니다. 그래서 영혼 안에서 사물을 지각하고 판단하는 이 지성과 기능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아주 놀라운 요소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한 사람의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을 때도 이 지성이 영향을 받고 그가 중생했을 때도 영향을 받고 중생한 이후에 은혜 가운데 있을 때도 지성이 영향을 받고 물러가서 죄에 빠졌을 때도 이 지성이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성은 다시 아주 쉽게 표현하면 우리들이 지금 흔히 지성적인 사람이다. 지성을 소유한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여기서 지성이라고 포괄적으로 이야기할 때 이것은 지적 능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지적 능력은 다시 둘로 나누어지는데 그것이 이성과 총명으로 나누어집니다. 먼저 이 이성은 뭔가 하면 사물 하나하나에 대한 지식을 기초로 그 개별적인 사물과 사물 사이에 연관관계를 파악하고 추론해낼 수 있는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혹은 일과 일 사이에 있는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결말을 추적해낼 수 있는 추론하는 능력을 가리켜서 이성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지식이 많으면 이성이 점점 더 힘을 얻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물 하나하나의 특성에 대해서 배우지 않고는 인간관계를 파악할 수없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 있는 상호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사물 하나하나의 특성을 파악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파악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지성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기초로 사물끼리의 연관관계와 논리적인 연결들을 파악해내고 추론해내는 것은 이성적인 능력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이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들은 모두 인간의 이성이 일구어낸 위대한 업적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이성은 죄로 말미암아서 많이 망가졌지만 그러나 그 중에 상당부분은 건재합니다. 어제도 신문에 보니까 쏘아올린 인공위성이 화성에서 북극지방에 가서 분화구 하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직경 32킬로미터 깊이는 2킬로미터 되어 보이는 분화구가 정말 궁금했습니다. 또 물같이 파란 물질이 고여 있습니다. 물은 아닐 텐데 도대체 뭔지 상당히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일들을 인간이 해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인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들이 점점 더 눈부시게 발전해서 1-200년 후에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놓을지 걱정입니다. 걱정되는데 한편으로는 기대도 됩니다. 놀랍게 발전하는데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 안에 주신 이성적인 능력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없는데서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인간에게 주신 능력들을 개발해나가면서 황무지와 같은 이성의 영역들을 자꾸 넓혀갈 때 그때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리적인 이해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으면 지금도 우리들이 원시시대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학교도 안 다니고 직장도 안 다니면서 그냥 그늘아래서 벌거벗고 뒹굴면서 과일이나 까먹고 뱀하고 놀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어도 아마 도심은 발달했을 것이고 도로, 항만, 배, 비행기 아마 이런 과학기술이 지금보다 훨씬 눈부시게 발달했을 것입니다. 좀 썰렁하실 것입니다. 굉장히 눈부시게 발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처럼 지혜로운 사람들이 살면서 불편을 못 느꼈을 리가 없습니다. 도구들을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발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성적인 능력이 인간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끊임없이 사물과 사물사이의 이치를 터득하면서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그렇게 우려하면서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런데 왜 그렇게 성경은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 비관적으로 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궁금증이 안 드십니까? 그럼 그렇게 이성이 좋아서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그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러면 얼마나 놀라운 기술이 발달되겠습니까? 이렇게. 이게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이런 놀라운 것들이 발달되는 게 결국 인간의 이성의 힘에 의해서 발달되는데 성경이 왜 그렇게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 비관적으로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유를 설명하겠으니 잘 들어보십시오. 그 이유는 이게 지금 이렇게 인간의 이성이 고도로 발달되어서 놀라운 지적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모두 자연적인 이성입니다. 그래서 죄가 들어온 다음에 영혼이 파괴되면서 어두움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이 예전에는 신령한 것도 파악할 수 있고 자연적인 것도 파악할 수 있는 이런 폭넓은 스코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서 이쪽이 허물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것은 파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합니다. 그래서 상상도 못했던 거리에 인간이 아닌 우주선이 날아가고 그 우주선이 비쳐서 지구로부터 몇 억 광년까지 있는 곳에 사진을 보냅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샘플들을 채집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시험합니다. 이런 일들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주선도 날아갈 수 없는 몇 억 광년 떨어진 곳에 별들의 폭발까지 다 찍어냅니다. 그리고 우주의 신비와 비밀들을 다 밝힙니다. 어떻게 우주가 생성되었고 은하계와 태양계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이런 것들을 밝혀냅니다. 놀라운 과학기술이 발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들을 만드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바로 옆에 있는 사실인데 이것은 파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연적인 이성으로 이것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이것을 다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이런 신령한 사실들을 파악할 수 있는 이성의 기능들이 좌절되어버린 것입니다. 파괴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우주 끝까지 가는 기술이 발달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너무 간단명료한 사실에 대해서는 이해를 못합니다. 파악을 못합니다. 그게 바로 성경이 인간의 이성을 그렇게 비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이 위대하다고 말하지만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 혹은 지적능력의 힘만을 가지고는 죄로 말미암아 망가져서 인식할 수 없는 신령한 진리들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서 우주 끝까지 가는 우주선을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이 단순명료한 사실은 자연적인 이성의 추구를 통해서는 파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이제 이쪽 지식이 반쪽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로 필요한 것은 이 세상이 창조된 물건과 물건 사이의 관계가 어떠할까? 그리고 이것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일으킬까? 이런 것들을 이해하는 지식보다도 더 치명적인 지식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셨구나. 그리고 언젠가는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구나. 이런 것을 아는 것이 곧 치명적인 지식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문제가 일어납니까? 지금 현재 21세기에 우리의 중상층 정도의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누리고 있는 물질적인 안락의 수준이 17세기의 왕족들이 누렸던 물질적이 향유와 거의 비슷한 수준입니다. 지금 여기에 왕족들이 쭉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지금 아주 부유층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그 삶이라고 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삶의 질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얘기할 때, 그 삶의 질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질이 아니라 육적인 질에 있어서 그런 놀라운 삶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도 내가 어느 집사님과 얘기했는데 어디에 가면 아파트 한 채에 35억씩 하는 그런 동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거기에 다단계 판매하는 사람이 나도 이렇게 다단계 판매를 하면 나같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많은 따르는 수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거기에 입주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반상회를 하는데 한사람은 한번도 그 사람을 안 부릅니다. 한번 왕따를 시키기에 그 사람이 앞집에 가서 아니 왜 내가 여기에 엄연히 여기에 입주를 했는데 반상회 때 나를 안 부르고 너희끼리 반상회를 했는가 하니까 당신은 속물이라고 그랬다고 합니다. 가만히 돌아와서 자기가 왜 속물일까 생각해보니까 딱 한번 거기에 사는 주민들에게 주차장에 자기가 직접 내려가서 캐달락 차를 끌고 나오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십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이 차도 이 집도 다 과시용이지 네가 진짜로 부자이기 때문에 이것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지하주창까지 내려가서 끌고 오는데 30분씩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전혀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내가 안 하니까, 기사가 하니까.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안 가십니까? 그렇게 해서 내가 그랬습니다. 35억이면 그런 돈을 가지고 그런 집에서 살면 불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뛰어내릴 수도 없고, 그 돈 가지고 책이나 사면 얼마나 사겠습니까? 한 10만권을 사서 원을 풀 텐데. 책이나 사놓고 매일 그것이나 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산다고 해서 삶의 질이 옛날에 농촌시대보다 진짜 행복의 질이 높아졌는가 하면 여러분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처럼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도 그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자연적 이성의 한계입니다. 아무리 발달해서 인류를 편안하게 살게 해주고 120세, 150세를 살게 해주고 이제 질병으로부터 완전한 세상으로 만들어준다고 해도 고문이지 행복이 아닙니다. 죽을 때가 되면 적당히 죽어야지, 안 죽고 150살까지 살면 뭐하겠습니까? 무슨 좋은 일을 많이 보겠다고, 그렇게 해서 도달해지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럼 우리에게 있어서 그럼 이성은 어떤 이치를 갖는가?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성에 대한 올바른 이치 판단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오늘 내리겠습니다. 그것은 영혼이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고 어두움이 들어와서 자연적 이성밖에 없습니다. 자연적 이성밖에 없을 때는 그것이 아무리 고도로 발달해도 우리의 영적인 삶의 질을 풍요롭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것에 대해서 소경이고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에드워즈가 표현했듯이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가지고 인간이 태어납니다. 하나님과 불화합니다.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하나님을 미워하면서 태어납니다. 자연적인 이성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자연적인 이성이 추론해 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거듭나게 하시면 성령님이 그 사람 안에 내주하시게 됩니다. 그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일종의 빛입니다. 그래서 그 빛은 세상의 빛이기도 하고 또한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빛이기도 합니다. 그 비추시는 성령님께서 끊임없이 인간의 영혼 안에서 비추십니다. 그러면 인간의 지적인 작용들이 새로워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자연적인 이성으로는 도저히 추론해낼 수 없는 신령한 것들을 성령께서 빛을 비추셔서 이제 죽었던 이성의 또 다른 영역들을 열어주시니까 그것들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파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성의 지능이 자연적인 이성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세계를 알 수 있는 이성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까는 분명히 이성을 가지고는 신령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고 그랬는데 지금은 또 어떻게 이성이 신령한 세계를 파악합니까? 그러는데 그것은 이렇게 설명이 됩니다. 아까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적인 능력이라고 함은 이성적인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는 영혼이 죽음의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영혼이 죽음의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은 그냥 영혼의 기능이 모두 소멸되어 있다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의 영혼이 죽어있습니까, 살아 있습니까? 아니 큰 소리로 대답을 해보십시오. 불신자의 영혼이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죽었는데 그 영혼이 활동을 합니까, 안 합니까? 활동을 안 하면 생각도 못하고 지성도 활용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죽었다고 하는 의미는 몸이 죽은 것 같은 그런 죽음을 영혼에 대입시키면 안 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영적인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정도의 개념을 내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신령한 생명, 그러니까 하나님에 관해서 반응할 수 있는 신령한 생명들이 결핍된 상태, 두 번째는 하나님과 신령한 것에 대해서 적대적인 반응밖에는 보일 수 없는 것, 세 번째는 신령하고 또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이 제거된 상태, 이런 것들이 영적 죽음의 요소들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누가 죽어있다고 그래서 불이 나간 것처럼 지성의 기능도 영혼에 소속되어 있으니까 모든 것이 다 사라져버렸다고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무식한 소리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 있으니까 이제 신령한 것들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이 살려내신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의 이성은 절대로 비중생자의 이성과는 틀립니다.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신령한 세계에 대한 이성적 이해를 갖게 됩니다. 이것은 조금 있다가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성입니다. 두 번째는 총명입니다. 총명은 어떤 사물들 배후에 있는 진실을 통찰해내는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보다 공부도 훨씬 더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똑똑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도 나보다 많습니다. 잘 살고 얼굴도 몇 번 뜯어고치더니 예뻐졌고 괜찮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그 사람에게 인간아, 인생을 왜 그렇게 사나. 참 답답하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이성적인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삶의 총명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철학에서 오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성의 빛이 없는 사람은 짐승하고 똑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짐승은 들판에서 풀 뜯어 먹으면서 짐승처럼 살고 인간은 전철타고 자가용타고 다니면서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예쁜 옷 입고 도시 속에서 짐승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설교시간에 짐승이라고 이야기할 때 심오한 철학적인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짐승처럼 사는 것입니다. 총명이 사라졌으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할 때 이 총명이 날로 빛납니다. 그런데 이 총명도 그 다음에 이성도 가변적인 상태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성 중에서 신령한 것들을 파악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들은 능력, 그다음에 영적 총명은 끊임없이 가변적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됩니다. 중생하기 전에는 생각이 잘못되어 있어서 올바르게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것들을 볼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자꾸 이것들이 가치 없고 허무한 것에 굴복하면서 살아갑니다. 아무 쓸모도 없는 일에 미친 듯이 몰두하면서 생각이 거기에 온 에너지를 쏟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미친 짓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안 믿었던 사람들도 본성적인 깨어짐에 의해서 인생의 허무를 직시했던 많은 사람들도 그런 삶을 미친 삶이라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총명은 어두워져서 그래서 판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굳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은 부패해서 허탄한 것에 몰두하고 마음은 굳어지고 총명은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절망적인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중생시키셔서 생각이 맑아지면서 이제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생각하고 파악할 수 있는 성도의 역할을 하고 총명이 밝아져서 사물을 깨닫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강남이 특별한 구역이 되는데 그래서 어제도 이야기하는데 대학을 가도 강남 사는 애들끼리 모여 다니고 우리도 옛날에 강남에서 살았는데 옛날 교회가 강남이었습니다. 강남 같지 않은 강남이지만 그러나 하여튼 그러니까 비교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네끼리 성을 쌓고, 전에는 집이라는 것이 편안하게 사는 것이 목적인데 이제는 수질관리학 차원에서 접근합니다. 그래서 아파트 하나를 지어서 그 안에 물을 만듭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실 것입니다. 물 좋은 동리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물이 틀린 사람들이 못 들어오게 바리게이트를 치는 것입니다. 이게 이상한 쪽으로 문화가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어떻게 하면 집을 투자해서 떼돈을 벌고 그리고 어떻게 해서 아이들 가정교사를 붙여서 성적을 올려서 특목고를 보내고 그래서 인류대학을 보내고 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것들은 자연적인 지성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허무한 것이라고 딱 보는 것이 총명이 없이는 못 보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가치는 그렇게 끊임없이 부를 위해 애쓰고 신분의 상승을 노력 하는 것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을 딱 간파하게 만드는 것은 오성입니다. 총명이 하는 역할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 속에 기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믿음과 이성의 문제가 여기서 나옵니다. 자, 그럼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이성이 정말 이처럼, 지성이 이처럼 하나님의 뛰어난 선물이고 그리고 이 지성의 커다란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교통하실 때 뭐 꿈이나 무슨 이상이나 뭐 이런 것을 통해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전달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일차적으로는 인간에게 인간의 지성을 통해서 전달해주시는 것입니다. 지성이 바로 하나님 자신을 전달해주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표현하기를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을 향해 말을 거신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지성의 뚜껑을 닫아버린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할 수 없는 먹통수화기를 가진 사람과 똑같습니다. 인간의 지성에 하나님께서 말을 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성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원래 이 기독교의 위대한 전통은 지성적 종교입니다. 지금은 다 엉터리가 되어버렸지만 어쩜 그렇게 지성의 스위치를 끄고 신앙생활을 하는지 나는 이해가 안 갑니다. 그렇게 지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든 지성, 이성적인 능력을 가지고 모든 것을 추론할 수 있는가 하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것을 과학으로 입증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도 그런 것들이 다시 되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 믿어라. 그런데 자연적인 이성은 반항을 합니다. 하나님이 안 만드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증거를 내가 아무리 추론해도 파악이 안 된다. 이럴 때 그것을 굴복시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믿음은 비지성적인 행동이 아니라 초지성적 행동입니다. 초지성적 행동은 역설적으로 가장 지성적 행동입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자연적인 이성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추론해 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시라고 하는 사실이 굳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이 나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깊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내가 창조했단다. 그러니까 자연적인 이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없는데 이 사람이 아멘! 나는 자연적인 이성으로 그 사실을 추론해 낼 수 없지만 내가 살아계신 것이 분명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분명한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자연적인 이성으로는 추론할 수 없어도 당신의 신실하심을 근거해서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멘에 자기 자신의 모든 존재와 영혼의 운명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어떻게 해서 지성적인 행동이 되는가? 그게 궁금하실 것입니다. 궁금하다고 그러십시오. 지금 내가 설교하는 게 여러분같이 젊을 때 신앙생활하면서 제가 치열하게 고뇌하던 부분을 제가 엑기스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웬 철학가인가 하지 말고, 이 토대가 없이는 이 기독교 신앙이 설 수 없는 토대를 지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성으로 믿어지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해서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나는 이성으로는 승복이 안 되지만 믿습니다. 라고 이성을 뛰어넘어서 자신을 그 사실에 온통 자신의 영혼에 운명을 맡기는 행동이 어떻게 그게 지성적인 행동일 수 있는가? 궁금하실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왜 그런가 하면 자연적인 이성이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 하나를 파악하는 것은 지성적인 것입니까, 비지성적인 것입니까? 지성적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어떤 철학자는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내가 알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 이성이 있는데 자연적인 이성으로서는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다. 라고 결론을 내게 하는 것도 자연적인 이성으로도 얼마든지 추론이 가능한 지성적 결론입니다. 그러면 존재하는 사실과 내가 파악한 사실 사이에 격차가 있는데 그럼 이것은 무엇인가 기초해서 받아들여야지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존재가 믿어졌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믿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것이 믿어진다고 하는 것과 그분의 말씀이 믿어진다고 하는 것은 분리되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불가지론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앙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신앙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왜? 지금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이 성경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그분의 신실하심을 기초해서 아멘 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오늘날 지성적인 행동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이해가 안 간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 내가 들었던 것이 어렸을 때 모든지 뚜껑을 열어서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다 만지게 하는데 하나는 절대로 못 만지게 하는 것입니다. 약병입니다. 먹으면 큰일 나니까. 어린아이가 그것을 먹으면 큰일 나니까 못 만지게 합니다. 그런데 지금 2살도 안된 아이에게 이 약의 성분을 설명해주면서 영어로 쓰여진 부작용 해석까지 해주면서 이것을 먹으면 몸에 화학적인 어떤 반응이 일어나서 네가 어떻게 죽는가를 설명해도 이 아이가 이해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만지기만 하면 엄마가 때려줍니다. 안 만졌다고 그러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가 그런 동안에 애가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왜 받아들이는가 하면 평소에 엄마가 자기를 사랑해주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엄마가 자기를 젖을 먹이고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모두 엄마의 존재가 자신에게 의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엄마가 그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럼 안 합니다. 그럼 그 행동이 비이성적인 행동입니까? 엄마를 아는 지식이 없이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주 강력하게 논파해서 모든 이성적인 철학자들을 굴복시킨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울레스 어거스틴입니다. 이게 가장 지성적이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적인 행동입니다. 자, 이 계시가 있으니까 믿으라.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이것에 만족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오늘 어떤 신앙에 한 명재를 말하겠으니 여러분들이 믿으면 아멘! 이라고 큰 소리도 대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믿으십니까? 아멘! 그런데 내가 하나 더 묻고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멘이라고 하신 분들만 대답을 하십시오. 여러분은 금주에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감격하셨습니까? 그럼 이상하잖아요. 자, 이제 이 두 가지 질문을 했는데 이것이 매우 분명한 실마리가 이 문제들을 풀어나가게 해줍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성경을 보면 알기 위해서 믿는다는 표현이 나오고 그 다음에 알아서 믿게 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자, 천지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자연적인 이성의 추론으로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아멘 하고 믿는 것입니다. 이성을 뛰어넘어서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성을 기초로 지성적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거기에 멈추고 나면 신앙이 깊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감격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아주 대표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천년 전에 골고다에서 매달려 죽으신 그 십자가가 이천년 후를 살고 있는 나를 구원한다고 하는 이것은 이성적인 능력이 파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성적인 능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어떤 바보 같은 사람들이 돼지 피와 예수의 피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고 묻는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신학교 교수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묻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능력으로는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매달려 흘린 피가 지금 내 마음을 적셔서 날 구속했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능력으로는 파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분명하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믿어지니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아멘하고 믿으면서 거기에 자신을 다 던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웃는 사람들은 비이성적인 결단이라고 얘기하고 나는 그래서 지성적 결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 더 물어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그 보혈이 오늘 여러분과 상관이 있습니까? 아멘! 하고 대답을 하신 분들에게 내가 또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나 주간도 그 보혈의 그 놀라운 은총에 감격하셨습니까? 그러면 왜 첫 번째 질문에 아멘소리가 컸는데 나중에 작아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이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아멘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물론 그거 하나 받아들인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기독교의 총체적인 진리가 아멘 하고 받아들이면서 거듭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신자의 의무는 어떤 것인가 하면 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까? 그것을 여러분들은 물을 것입니다. 아니 이성이 어떻게 그런 것까지 규명해나갈 수 있나. 할 수 있습니다. 왜? 거듭나기 전에 이성은 자연적인 이치밖에 깨달을 수 없는 이성입니다. 그것도 불안전합니다.
그런데 거듭나게 하신 다음에는 우리 안에 성령님이 오십니다. 마치 빛으로 오셔서 끊임없이 우리들이 자연적인 이성으로 볼 수 없는 신령한 영역으로 그 빛을 비추어주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파악하게 하는데 그것을 파악하는 것도 이성입니다. 다시 이 부분을 얘기하겠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빛을 비추십니다. 그 빛으로 신령한 세계들을 보게 하십니다. 그것을 파악하는 것도 지성을 통해서 파악하고 그것과 그것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 관계를 추론해나가는 것도 역시 이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 안에는 이성의 능력이 놀랍게 확대가 되는 것입니다. 파악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그러면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옆에 있는 불신자 증명해봐, 그렇게 합니다. 그냥 믿어. 그런 것은 다 쓸데없는 것이야. 내가 다 믿는다니까. 그럼 그 친구가 너나 믿어. 그러고 나서 시간이 흐르는데 처음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감격하고 이 불도 하나님이 만드셨대. 너도 하나님이 만드셨지. 나도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생산지가 같구나. 그러면서 서로 좋아했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이 지나고 나니까 더 이상의 기쁨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이유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아멘으로 받아들인 다음에 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성적인 탐구가 없었기 때문에 감격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 하나를 새롭게 깨닫게 될 때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 놀라운 기쁨과 영적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똑같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커다란 전제 하나를 아멘으로 받아들일 때 그렇게 큰 은혜의 빛이 들어온다면 그것을 이성적으로 추론해서 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수밖에 없었는지, 천지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는지, 그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죄가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고 하나님이 왜 나 같은 사람을 창조하셨고 이 세상에 마지막은 어떻게 될 것인지 이런 것들을 하나, 하나 추론해나갈 때마다 똑같이 영적인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함께, 그러면서 은혜가 계속해서 증폭되는 것입니다. 지식이 있는 곳에 성령이 역사해서 그 빛이 찬란하게 드러나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결단을 내리고 자기를 그 진리에 확 던진 사람은 모두 불을 확 피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후에 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창조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이성을 통해서 끊임없이 추론하고 지성적으로 탐구하지 않는 사람은 한번 불을 펴고 가만히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불이 처음에 아무리 강렬하게 타올랐다고 해도 시간이지나면 결국은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정말로 순간적으로도 못하게 삽니다. 말이 되나 모르겠습니다.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났는데 진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요즘 살아갑니다. 그래서 회심의 크기를 자랑하지 말고 보존하시는 은혜를 자랑하십시오. 그래서 불이 확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었습니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불이 확 타서 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구나. 그래서 아멘, 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증거를 막 들이대도 다 필요 없습니다. 아! 내가 믿는다고 아멘, 나는 그 사실에 나의 모든 것을 다 던집니다. 하나님, 나는 믿습니다. 은혜의 불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냥 있지 않고 그 다음에 생각을 합니다. 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까? 그리고 탐구해갑니다. 이게 교리에 대한 탐구입니다. 탐구해가는 사람은 뭐와 똑같은가 하면 계속 장작을 그 불에 던지는 것입니다. 하나 깨달을 때마다 장작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이 계속 타오르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최근까지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16회독을 했습니다. 요즘은 죄와 은혜의 지배를 아침마다 읽고 있는데 16회독을 하는 가운데 열흘이면 한번 정도씩 제 1장을 읽게 됩니다. 천지 창조에 대해서, 그것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사실에 대해서 그렇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은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상이, 아! 그렇구나. 지금도 내 마음속에 불순종과 죄를 품고 사는데 아! 내가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위대한 세상에 지푸라기 같은 존재구나. 여러 번 울었습니다. 이성적으로 그런 것을 하나, 하나 깨달아갈 때 은혜의 불이 계속해서 붙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다시 경험하게 해주세요. 그러는데 경험 안 됩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감격이 안 됩니다. 경험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에 대해서 새로운 도리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때에 확 불이 붙으면서 감격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의 중요한 의무는 일평생을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해서 공부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신앙의 길을 쭉 걸어가는 그 길이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신학자가 되어가는 길입니다. 제가 신학을 원래 옛날 영어에서 디비니이치(?)라고 했습니다. 그 디비니이치가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신학자로서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요즘 신학공부 하는 것처럼 빨리 가서 공부하고 대학가서 교수되고 싶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과 이성이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성적으로 밝아져서 다 추론해낼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임시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주님을 만나고 나면 더 이상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때는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보니까. 믿음도 있고 또 소망도 있습니다. 그런데 소망도 이제는 필요 없습니다. 다 성취되었으니까 마지막에 남는 것은 지식에 기초한 사랑만이 남는 것입니다. 그때는 누구도 변명할 수 없게끔 심지어 지옥에 있는 사람들도 왜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고 그분을 높일 수밖에 없는지 그것을 알게 됩니다. 신자의 성화의 삶은 그것을 연습해가는 삶입니다.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지성을 그 길이 무엇인지에 집중시키면서 그것을 탐구하는데 모두 쏟으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 축을 놓치고 다른 곳에서 만족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면 미친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번성하는 것 같으나 마지막에는 벤 풀이 마른과 같이 그렇게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게 구도의 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런 놀라운 지성들을 최고도로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으로 하여금, 지성으로 하여금 골몰할 바에 전적으로 골몰하도록 만들고 그래서 그 모든 지성적인 능력을 총동원해서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거기에 합당한 삶을 찾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은 그 지식만 동떨어진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항상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삶의 문제를 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신학함의 정신이고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삶의 노정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교리적으로 하나님이 정말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빛에 의해서 압도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그런 분인지 몰랐는데 하나님이 나라는 존재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탁월하고 위대하신 분이구나. 딱 깨닫게 되었으면 그것을 적용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것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그 앞에 엎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는 주 앞에 티끌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고 말합니다. 주의 거룩하심을 깨달았다. 진정으로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럼 그 사람은 깨달은 그 순간 그 지식에 빛에 의해서 압도당하고 엎드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까? 나는 짐승과 같이 비참하고 더러운 인간이오니 오! 하나님 나를 구원하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드워드가 말한 대로 모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반드시 삶에 관한 교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삶의 교리입니다. 제 표현대로 더 정확하게 묘사하자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삶의 교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끊임없이 배워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자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나무와 같은 사람으로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몇 주 동안에 갓난아이와 같이 누워서 우유병이나 빨고 기저귀를 차고 이제 늙어가서 이제 수염까지 난다고 그랬더니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난 교회에 와서 말씀에 은혜를 받고 성장도 하고 그랬는데,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5살에 멈추었습니다. 그래서 5살에 멈추어서 백발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지팡이를 짚기 시작합니다. 꼭 우유병을 빨고 누워서 백발이 된 사람이나 5살에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서 지팡이를 짚고 사는 노인네나 차이가 뭐겠습니까? 문제는 멈추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뭐가 들어오는가 하면 이제 지식과 체험의 문제가 들어옵니다.
그래서 참된 지식은 반드시 영적인 변화와 함께 다가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우리가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혼자 역사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신자의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서 그래서 그 빛을 비추어주십니다. 이 빛은 영광의 빛입니다. 신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영적인 빛입니다. 이 빛이 비출 때 우리는 이 빛에 의해서 여태까지 평범하게 보던 모든 사물들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감각들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신령한 연결들을 볼 수 있는 이치를 터득할 수 있는 총명들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성장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누가 어린 신자들을 섬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신이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끊임없이 가르침을 받으면서 성도로 자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도 어폐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교회인 것을,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원천적인 샘은 성서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의 원천입니다. 목회사역은 이 원천을 끊임없이 끌어내는 것입니다. 반석을 터트리니까 샘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반석 아래 하나님께서 샘을 주셨습니다. 원천이 성경입니다. 그것을 목회사역을 통해 터트립니다. 확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목회사역입니다. 이 쏟아져 나온 것들을 여러분들이 모두 마음에 담아 그래서 계속해서 쌓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꽉 채웁니다. 그러면 이제 처음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교회에 나온 어린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창고에 거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나누어서 놓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 사역에 교역자만 동참한다는 것은 성서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원천은 성경입니다. 그 원천적인 것들을 터트려서 드러내는 것은 목회자의 첫 번째 징후입니다. 이것들을 드러낸 것들을 성도들이 섭취합니다. 섭취된 말씀의 지식들을 사람들에게 다시 말씀으로 나누어주는 이 말씀 사역에 동참하는 것은 목회자만 아니라 모든 평신도들이 함께 공유해야 될 사역입니다.
형식적으로 그럼 왜 많은 교회들이 왜 못합니까? 평신도들이 도대체 가슴에 말씀이 담겨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목회사역이라는 자체는 그것을 드러내서 사람들 속에 심어주는 것이 목회사역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속에 그런 말씀의 세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와서 오래 되어서 틀이 잡혔기 때문에 성숙한 신자이지 진리로 가득 차서 성숙한 신자가 아니라면 그가 무슨 사역을 한들 그가 어떻게 그 영혼들에게 그 진리를 심어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목회사역의 본질이 그 진리를 전달해서 가슴속에 심어주는 사역인데 어떻게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달하는 모든 도구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처음 와서 새 가족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속에 신앙을 넣어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 새 가족 위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에 대한 부담이 없이 와서 말씀을 듣고 설교를 통해 은혜 받고 신앙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이제 계속해서 신앙이 자라서 여러분들도 그런 돕는 도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적용을 하자면 두 가지입니다.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빛을 내게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계속 받으면서 그 말씀의 빛에 의해서 이성이 새로워지고 그래서 그 지식의 빛에 의해서 은혜를 받으면서 여러분들이 새 사람으로 계속해서 변화되어가는 가운데 진리를 아는 지식들이 쌓아져가면서 여러분들이 온전한 성도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죽기 전날까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그 진리를 깨달으려고 여러분들이 탐구해야 됩니다. 탐구의 정신을 가지고 듣고 흘려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을 가슴에 두고 그 말씀에 생명을 걸고 그 말씀대로 살고 그 말씀대로 죽으려는 결단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살고 와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자기의 지식을 통탄해야 합니다. 그리고 배워나가야 합니다. 도서관을 만들어나도 한번도 가지 않고 그렇게 게으른 신앙생활을 해서 어떻게 여러분들이 좋은 신자가 될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직업이어야 합니다. 직업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아니라 왜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 내 안에 있는 이 어두움이 이 빛에 의해서 물러가도록 끊임없이 지식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지식에 가득 차서 날마다 깨트려지면 그가 스쳐지나가기만 해도 어린 신자들에게 빛이 막 들어갑니다. 진짜 참 신선한 모습은 저것이구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냥 지나가기만 해도 빛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들은 진리를 아는 지식을 가지고 그 진리의 빛이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섬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지식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현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지식의 빛이 없을 때 그들이 살 수밖에 없는 비참함에서 벗어나서 그래서 이 지식의 빛으로 어떻게 하든지 그들을 섬겨서 그들이 더 지식 안에서 온전한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과 세상 교훈의 풍조에 밀려서 요동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굳건히 붙들고 성장해나가서 언젠가 그들도 어린 신자들을 섬기는 그런 사역에 동참할 수 있도록 그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그 말씀으로 성도들을 섬기려고 하는 그 결단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든든히 서가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사랑으로 자라게 하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해설하기 전에 지난 시간에 설교된 내용을 잠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이 오늘 설교를 위해 유익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워놓으시고 교회에 사도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목사와 교사들과 같은 직분자들을 주셨습니다. 이런 직분들을 주시고 교회를 돌보게 하심은 성도들로 하여금 온전한 교회를 세우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이런 일들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런 교회의 직분들로부터 섬김을 받아서 이제 주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해가고 주님의 온전한 신자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데 유익을 얻게 됩니다.
교회를 통해서 성도는 일정한 섬김을 받고 이 섬김을 통해서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성도는 섬김을 받는 위치에 있는 동시에 또한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어린신자들을 믿음 안에서 자라가도록 섬겨야 할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가 성도들을 잘 섬기는 것은 이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닮도록 자라가게 하기 위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성도가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 영적성장을 통해서 교회는 점점 더 온전한 교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질 때는 미숙한 어린아이와 같은 신자였지만 교회의 이런 섬김을 통해서 점점 더 어른스러운 신자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섬기는 자고 누가 섬김을 받는 사람인가 하는 것은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어린신자였을 때는 교회로부터 이렇게 섬김을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믿음 안에서 성장해서 어른스러운 신자가 되어가지만 그렇게 어른신자가 된 후에는 물론 어른스러운 신자가 되어가는 도중에도 자기보다 훨씬 어린신자들, 예수 안에서 방금 접붙여진 신자들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교회는 점점 더 튼튼하고 온전한 몸이 되어서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가 섬기게 될 때 죄와 타락으로 인해서 망가진 이 세상은 좀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회복하게 될 것이고 창조의 계획대로 이 세상이 고쳐지게 됩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 망가졌던 자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재창조될 때 하나님이 그 신자의 마음에서 영광을 받으셨던 것처럼 똑같이 그가 섬기는 교회에서 그렇게 회복되어지는 창조의 모습을 보며 영광을 받으시고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이 교회의 섬김을 통해서 그렇게 고쳐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그렇게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의 소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자가 교회를 온전케 하는 요소가 되기 위해서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자란 어른스러운 신자로 성장해가야 합니다. 그 성장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신데 많이 성장하면 예수님께 도착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목표로 삼고 가면 우리들이 어른스럽게 성장한 신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망망 바다에 배를 띄운 뱃사람들이 밤길에 노를 저으며 북두칠성을 목표로 하고 항해하는 것은 북두칠성에 도착하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그것을 따라가면 온전한 항해를 할 수 있고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잡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북두칠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을 목표로 놓고 우리들이 온전히 성장해갈 때 그런 영적 성장 안에서 각 사람은 어른스러운 신자가 되고 어른스런 신자들이 모인 다 자란 성도들이 연합 안에서 교회는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성장한다고 하는 것, 한 사람의 신자가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를 온전하게 하는 요소가 되도록 개인적으로 영적성장을 한다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 지난 시간부터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내용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데 그것이 지성이고 이 지성은 성장을 통해서 신자는 어른스러운 신자가 되어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런 지성 안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사물의 이치를 추론해낼 수 있는 이성적 능력, 즉 능력과 또한 총명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 총명과 이성을 통해서 깨달아진 진리들이 또한 우리의 마음에 적용될 때 우리들이 그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신자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 모든 지성을 사용해서 그래서 철저하게 헌신함으로 이성적으로 추론해가고 주님을 아는 교리적 지식들이 성장해가게 될 때 그 사람이 바로 정말 예수님을 닮아가는 장성한 신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한번 여러분들에게 오늘 이 영광스러운 본문을 설교하기 전에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그 내용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적용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냥 건성으로 교회만 다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매우 쓸모없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그리고 주님의 말씀의 이치를 이성적으로 깨달아가기 위해서 철저하게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제일 먼저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여기에 마음이라고 하는 단어는 희랍어로 ‘누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우리의 지성을 모두 포함하는 정신작용이 함께 포함된 마음입니다. 그러니 지성적인 헌신이 없이 주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헛되고 힘이 없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생애적인 은혜를 받고 복음을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지성이 깨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를 깨달아가는 그런 도에 대한 깨우침이 멈춘다면 여러분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늙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늙고 어떤 사람은 5살에서 7살에서 10살에서 늙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국은 모두 늙어가고 쇠퇴하게 되어갑니다. 그러므로 초롱초롱 빛나는 두 눈을 가지고 처음에 주님을 만날 때 진리의 말씀에 사로잡혔던 것처럼 부지런히 진리의 말씀을 탐구하는 그런 학생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지런히 책을 읽고 부지런히 설교 말씀을 반복해서 성취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고 애를 쓰고 이렇게 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교리들을 알아갈 때 지적으로 성장하는 교인들이 되어서 그래야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접붙여진 어린신자들을 섬길 것이 아닙니까?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어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15절에서는 드디어 이 지성적 성장 말고 또 하나의 성장을 이야기하는데 사랑의 성장입니다. 본문을 잠깐 해설하고 설교를 하겠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는 사도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여 범사에 그리스도까지 자라게 할찌라 그는 머리시라” 말입니다. 즉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그리스도까지 자라라. 다시 말하면 신자 안에 있는 사랑의 성장이 곧 영적 성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안에서 계속 성장하게 될 때 그 사람이 튼튼한 그리스도인, 다 자란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렇게 충분히 성장한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서 교회는 점점 더 예수의 몸으로 든든히 서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 안에서 잘 자란 신자가 될 때 그 사랑과 지식이 함께 어우러져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막 접붙여진 성장하지 않은 어린 신자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잘 돌보아서 그들을 또한 사랑 안에서 성장하게 됨으로서 지금은 우리의 도움을 받아서 그 섬김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자라가지만 잠시 후에 우리를 통해 받게 될 그 사랑과 지식의 성장을 통해서 또한 이제 다시 예수를 믿게 될 어린신자들을 섬기게 될 사람으로 우리와 함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교회가 계속 성장하게 될 때 교회는 아주 큰 사람이 되고 그리고 튼튼한 사람이 되어서 어린교회가 할 수 없는 큰일들을 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이 세상에 파송해서 주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되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 하셨을 그 일에 수종들게 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를 세우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이 이 망가진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이 어두운 세상에서 불꽃처럼 사시고 마지막에 불꽃처럼 죽으셨던 것처럼 그렇게 다 자란 교회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교회 자신과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 철저히 헌신하다가 이 세상에서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썩어지는 것, 그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교회는 못 박히고 보이지 않는 교회가 예수가 부활하신 것처럼 다시 부활하고 영광스러운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처럼 영적으로 성장한다고 하는 것은 곧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자 안에 있는 사랑이 점점 성장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중요한 대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사랑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지성적으로 계속 성장해가야 할 필요를 지난 시간에 말씀드리면서 신자가 이렇게 성장해가지 않으면 세상의 궤술과 그리고 또 이 간사한 유혹과 그리고 세상 풍조와 교훈에 떠밀리기 때문에 지성적으로 철저히 헌신하고 성장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참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신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똑같이 신자 안에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대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자기 사랑이라고 할 때 이 자기는 좋은 의미에서의 자기가 아니라 나쁜 의미에서의 자기입니다. 이 자기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려고 하는 거듭난 자기, 새롭게 심겨진 새 본성으로서의 자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자기 사랑에 있어서 이 자기는 옛 성품에 있어서 자기,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고 그분을 의존하고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 자신을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의 기준이 되려고 하는 자기, 자기를 만족시킴으로서 말미암아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그런 의미에 있어서 자기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신은 피조물이라고 하는 이 존재론적인 질서를 허물어트리는 자기이며 동시에 자기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자신은 그분의 손으로 지은바 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분이 가장 중요하시고 자기는 그분이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에 기여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는 가치론적인 질서를 허물어트리는 주범으로서의 자기입니다. 그러니 이 자기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깨트려지기 전에 내 안에 있어서 내 인생에 주인 노릇했던 그 자기입니다. 그 자기 사랑이 신자 안에도 남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였을 때 우리는 깊은 회심을 경험했고 이 회심의 경험은 자기 깨어짐을 동반했습니다. 이때에 자기 깨어짐이 바로 그런 유의 자기입니다. 그 자기 깨어짐 속에서 바로 이제 예전에 자기가 사랑하던 그 옛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자기를 통해 이 세상에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의 계획을 따라 살기로 다짐하는 새 본성이 심겨졌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새 본성, 혹은 거듭난 본성이라고 이야기하고 혹은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본성이라고도 말을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자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피조물의 새 본성입니다. 이 새 본성이 심겨짐과 함께 옛 본성은 성령에 의해서 파괴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깨트려진 파편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생활을 잘 하면 이 파편들은 더 잘게 부스러져서 자기 사랑이 우리 안에 자리를 잡을 수가 없지만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나님 안에서 게으른 신앙생활을 하면 이렇게 부스러졌던 조각난 자기 사랑들이 똘똘 뭉칩니다. 점점 큰 힘을 발휘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해달라고 욕구를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부패한 옛 본성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같이 훌륭한 믿음의 사람도 옛 본성이 자기 속에 늘 있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고백했을 때 바로 그렇게 쳐서 복종시켜야 했던 자기가 바로 이 옛 본성입니다. 신자 안에도 이런 옛 본성이 살아있습니다. 어떤 때는 새로운 본성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자. 이웃을 섬기자. 사명을 자 감당하자. 천국을 바라보며 살자.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예수 위해 바치자. 희생하자. 하고 새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가장 좋은 신자라고 할지라도 새사람의 목소리만 들려오는 내면의 세계를 가진 신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또한 부패한 옛 사람의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너 혼자 그렇게 희생할 필요가 없다. 너 먹을 것도 챙기라. 예수님 믿는 것은 부업이다. 네 인생의 즐거움을 누려라. 네 재물은 네 것이다. 네 명예를 고귀하게 여기라.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최고다. 남의 주머니에 있는 것이 널 지켜주지 못할걸.’ 이런 옛 사람의 목소리들이 계속 들립니다. 문제는 사람마다 들려오는 이 두 목소리에 비율이 틀릴 뿐이지 가장 좋은 신자도 이런 육신의 옛 본성의 목소리를 듣고 가장 나쁜 신자도 새 성품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문제는 새 본성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를 우리들이 들으면서 그대로 살고 순종하는 우리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는 비결이고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신자의 삶을 사는 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옛 본성이 들려오는 옛 본성에 의해서 외쳐지는 이 수많은 목소리들은 우리들이 용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옛 본성의 작용, 즉 그의 요구, 그의 경향, 혹은 그가 원하는 바를 생각과 마음과 온 삶에서 부정하는 것이 바로 자기 부인의 삶입니다. 이 자기 부인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소극적인 측면이고 또 하나는 적극적인 측면입니다. 자기 부인의 소극적인 측면은 자기 사랑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노라” 하고 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 즉 옛 성품으로부터 발휘되는 그 정욕과 그 야망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회심하게 되었을 때 바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예전에는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주인인줄 알고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제일 좋은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것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사랑했고 그것에 거치는 사람들은 미워하면서 죄를 지으면서 죄를 지으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이 살아온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바로 그렇게 자기만 사랑하고 산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그 탁월한 희생과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그 큰 고난이 바로 자기와 같이 쓰레기 같은 인간의 죄를 위해서 못 박히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이제껏 까지 사랑하며 살아온 자기가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사랑스러워지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던 자기와 결별하게 되었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옛 본성을 미워하는 영혼의 최초의 작용이 중생과 함께 시작된 것입니다. 거듭나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은혜가 식어졌고 그래서 죄가 다시 사랑스러워지게 되었을 때도 다시 회심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최초의 회심의 경험이 새로워지면서 다시 그 죄를 미워하게 되고 이제는 자기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착한 신자로 다시 변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우리는 자기 부인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자기가 대단한 인간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중요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을 보면서 자기는 버러지와 같은 존재이며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것도 좋은 표현입니다. 버러지 가운데는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버러지도 많은데 자신은 그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이 되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고 그것도 부족하여서 예수 믿은 후에도 계속 불순종하여서 예수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 앞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자기를 비우게 됩니다. 아, 나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것을 깊이 깨닫습니다. 아, 정말 나는 가치 없는 인간이구나. 가치 없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 해로운 존재였구나. 그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때에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허무한 것이라고 하는 자기 사랑을 비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일생을 여러분들이 살아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좋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는 세상 사랑을 하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아온 날들이 있을 것입니다. 신자가 된 다음에도 그렇게 산 사람들이 여러분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굉장한 것으로 생각이 되어서 주님의 은혜로 멀리 떠나 세상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옛 성품에 순종하면서 시키는 대로 정과 욕심을 따라서 다시 살았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남겨 주었습니까? 그렇게 옛날에 불순종하면서 죄 가운데 살았는데 그래서 육체의 욕심대로 정욕을 따라서 살았는데 그것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어떤 유익을 남겨주었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남겨준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영혼에 깊은 고통과 하나님과의 화목의 깨트려짐을 남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그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죄의 지배 아래로 깊이 데려가서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그 아름다운 연합을 상실해버린 사람들이 지금도 여러분과 함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산 삶이 우리에게 그렇게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고 오히려 상처만 남겨두었다고 한다면 오늘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게으르게 나태한 가운데 영적인 성장 없이 살아가는 이 삶도 결국은 헛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 요한이 말하기를 이 세상도 지나가고 그 정욕도 지나간다고 그 허무함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지금은 은혜로부터 멀어진 가운데 하나님 앞에 애쓰고 있다고 할지라도 한때 하나님을 잘 섬겼던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지금 은혜 가운데 있으면서 충만하게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살고 또 옛날에도 주님을 잘 섬겼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무엇인가를 남겨주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어려운 풍랑 속에서도 거미줄 같은 믿음이라도 붙들고 예수를 위해 살겠다고 이 주일에 교회를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습니까? 주님을 섬기며 살았던 날들에 여러분들이 받았던 은혜가 여러분들을 영적으로 성장시켜서 여기까지 데려온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여러분들이 이렇게 영적으로 성장하고 은혜를 받고 예수를 위해 살면 오늘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이 앞으로 여러분들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되어서 또한 여러분들을 붙들어줄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 요한이 또한 말하기를 “정욕도 지나가고 세상도 지나가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섬기면서 살았지만 여러분들이 기억도 못하는 많은 열매들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통해 맺게 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섬기고 나서도 잊어버렸지만 섬기면서 그 많은 씨앗들이 여러분들을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 가운데 맺혀서 그래서 그들이 신앙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비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예수의 사랑을 알게 되면 자기의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깨닫게 되고 자기 사랑을 비우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 사랑을 비우며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붙잡은 삶은 오래도록 우리에게 결실을 맺게 해주지만 자기 욕망을 따라서 자기를 비우지 않고 살아간 육체의 욕심을 추종하는 삶은 아무 것도 남겨지는 것이 없이 영혼에 죽음만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적극적인 또 다른 측면은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그것이 바로 자기부인의 적극적인 측면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를 퍼내고 나면 그 안에 하나님 사랑이 가득 고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사랑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웃을 위하여 헌신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질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원래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사랑을 부인하는 것이고 자기 옛 성품에 대한 사랑을 부인하고 나면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새롭게 태어나게 되는데 왜 그것이 이웃을 향한 헌신으로 나타나는가? 이렇게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 이치는 이렇게 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은 옛 성품에 속한 자기든지 하나님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결국 이기적인 자기 사랑 안에 있든지 혹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 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려고 하는 옛 사랑이 깨트려지고 나면 자기를 비우게 되고 그렇게 비운 그 자리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사랑으로 뭉쳐진 사람이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깨어짐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 들어오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 들어오게 되면 그는 비로소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또 이렇게 질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 주위에 보면 비록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진 신자는 아니지만 워낙 이기심이 없고 불의한 이웃을 보며 헌신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그럼 자기 깨어짐 없이 어떻게 이웃을 위해 살수 있습니까? 라고 물어보시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사랑의 뿌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자기 사랑의 뿌리는 하나이지만 그 자기 사랑의 뿌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밖으로 나와서 열매를 맺는가 하는 것은 사람마다 매우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사랑의 뿌리가 아주 돈에 대한 지독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웃을 위해 몸으로 좀 봉사하고 그리고 이웃으로부터 좀 오해를 받거나 하는 것 개의치 않지만 돈을 조금 이라도 자신에게 손해가 내게 하려면 이웃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돈에 손해를 안 보려고 하는 물질적인 애착이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심하면 돈 때문에 부자간에도 소송을 하고 형제도 칼로 찔러 죽이는 짐승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 자기 사랑의 뿌리에서 돈에 대한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해서 비교적 너그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데 그저 나눠 쓰면서 살자. 그리고 동생들도 나누어주고 부모들도 잘 공경하고 그렇습니다. 그 대신 자존심을 건드리기만 하면 죽여 버릴 듯이 미움을 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경우에는 자기 사랑의 뿌리는 아까 그 사람과 똑같은데 본성의 빛이 각각 틀리기 때문에 이 사람은 자존감이 자존심이라는 그쪽으로 자기 사랑의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그래서 돈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누구든지 내 자존심을 건드리기만 하면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습니다. 죽여 버려 하는 쪽으로 자기 사랑이 발현된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해서도 너그럽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자존심 상하는 것도 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오랫동안 쓰던 물건 하나에 손만 대면 죽어라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정신병 증세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똑같습니다. 돈에 대해서는 너그럽습니다. 그리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있어도 인간이 살다가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너그럽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 하나에 손댄다든지 무슨 옷을 잘 개어났는데 동생이 입고 갔다든지 뭐 어떻게 했다든지 하면 관계가 뭐고 다 깨트려버릴 정도로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자기 사랑으로 표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비록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왜 그런지 그 사람의 본성이 무슨 영향에 의해서 이웃을 위해서 많이 봉사하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을 느끼는 성품이 된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자기 깨어짐이 없어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도 결국 넓은 의미에서 보면 자기의 옛 자아가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그 옛 자아가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니까 결국은 그것도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이웃 사랑은 모양은 비슷할지 모르지만 동기 자체가 다릅니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지기 전에는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과 생명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집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마땅히 생각해야 할 바, 자기를 높게 평가하는 것들을 버리게 됩니다. 이런 성향들을 버리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깊이 깨닫게 될 때, 그때 이 신자는 자기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새로워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의 형상입니다. 그 사랑의 형상이 중생과 함께 새로워지게 될 때 이 신자는 자기의 눈으로 보아왔던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됩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되 그냥 창조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우리 인간 안에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는데 이제 이 사람들이 그냥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영혼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사람을 구분합니다. 이 인간들은 나를 대단히 사랑하는 인간들, 그러니까 사랑스럽습니다. 이 인간들은 나를 죽어라 미워하는 인간들, 다 죽여 버리고 싶어, 나는 미워해, 이 인간들은 아무래도 관심이 없는 인간들, 왜 지들이 나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이렇게 사람들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기가 깨트려지고 나면 이제 그런 구분이 거의 사라집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 자기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이 겉 사람의 껍질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 안에 지금은 거의 죽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보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저 형상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내가 바로 저런 형상을 가지고 저렇게 사람들을 미워하고 사람들을 대적하며 살았는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셨구나. 그렇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부모를 사랑하게 되고 자녀를 정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조금이라도 지적인 이해가 깊으신 분들은 이런 질문을 또 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럼 목사님, 그런 것은 짐승들,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자기 자식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하는 것들 보이지 않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추론해서 도달하는 도덕적 결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세계를 보존하시기 위해서 거의 그 모든 피조물 속에 본성적으로 심어놓으신 하나의 법칙입니다. 짐승들이 자기 새끼를 낳아서 즉시 잡아먹는다면 세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고기들이 새끼를 낳아서 자기 새끼를 보호하지 않고 낳아놓고 도망가 버리면 그 새끼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식인종이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낳은 사람을 잡아먹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종족은 궤멸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동물적 본성 안에 종족의 보존을 위해서 심어놓으신 하나님의 형상과는 상관이 없는 생존의 본능입니다.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태계를 보존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인간 안에 있는 사랑과 비교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 안에 주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중대한 모독입니다. 그것은 본능과 본성입니다. 이것은 이치를 통해서 깨달아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새로운 경향성으로서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죽으실 때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보면서 아버지께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탄원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예수님의 눈에는 이놈들은 나를 못 박은 놈들, 이 놈들은 나를 못 박으라고 외친 놈들, 이 놈들은 망치를 들고 내 손에 못질한 놈들, 이렇게 나누었더라면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이런 자기 비움이 있고 나면 이처럼 이웃을 위해서 철저히 헌신할 수 있는 그런 경향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면 그 해택을 사람들이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아내가 은혜를 받고 놀랍게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면 가족들, 특히 남편들이 제일먼저 해택을 받습니다. 남편이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되고 나면 그 부인이, 자식들이 제일먼저 해택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이웃이 해택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해택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제 우리들이 사랑으로 자라야 한다는 사실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우리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자라가야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지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만 있는 특성인데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동물에게 있는 사랑을 흉내 낸 것 같은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형상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동물적 본성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안에 주신 이 사랑은 매우 고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 이 형상을 물려받은 인간은 지성에 올곧음 속에서 그리고 이 마음에 모든 경향성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그런 경향성을 사랑하는 그런 경향성을 가진 사람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서 그 형상들이 깨트려지게 되었을 때 지성의 거울이 깨트려져서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고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모두 더럽혀져서 이제는 사랑해야 할 것들은 미워하고 미워해야 할 것들은 사랑하고 주종관계의 전도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수많은 악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생산된 그 악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들을 인간세계에 산출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모든 악과 고통에 에워싼 채 신음하며 산 존재가 되었고 결국은 인간은 한편으로는 죄를 끔찍이 좋아하고 그것을 추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죄와 악 때문에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순으로 가득 찬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 우리 안에 있는 부서진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을 받은 이 거듭남과 회심의 사건은 바로 이렇게 우리의 죄의 원흉이던 자기를 보좌에서 끌어내려서 십자가에 못 박고 십자가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왕관을 씌워서 우리의 보좌 앞에 앉게 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좌정하시며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리심으로 이제 우리 안에 사랑이 주인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옛 본성으로부터 들려오는 부패한 목소리가 맨 처음 매우 작았지만 은혜가 떨어지면서 거기에 순종하고 자기 부인의 삶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 그 목소리는 점점 커지게 되었고 옛 성품은 왕성하게 되었고 새 성품들은 점점 힘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들이 자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깨트려져야 할 필요가 여기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지고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앞에 깨어지는 것입니다. 이 깨어짐은 바로 자기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사랑, 곧 죄의 뿌리인 옛 자기에 대한 사랑에서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고통을 느끼고 깨트려지고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옛 성품은 그 죽음을 경험하고 새 성품은 예수 안에서 다시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 안에 주신 이 사랑은 계속해서 성장해갈 수도 있고 그 다음에는 이것들이 파괴되어갈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영적으로 성장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랑을 까리따스라고 말합니다. 이 까리따스는 바로 하나님을 향한 지고지순의 사랑이고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자기에 대한 사랑은 꾸삐뜨다스입니다. 이것은 부패한 욕망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이 꾸삐뜨다스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까리따스가 계속 살아서 우리 안에 가득하게 될 때 그것이 진정한 영적인 성장입니다. 영적인 성장은 교회에 오래도록 출석하는 것, 그런 것들이 영적인 성장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정을 받아서 권찰이 되고, 집사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는 것 그런 것들이 영적인 성장이 아닙니다. 한 교회에서 아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도 영적 성장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한 교회에 오래 눌어붙어 앉아서 터줏대감노릇을 하는 것도 영적 성장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또 한권 두 권 성경을 공부해서 열권 스무 권 뛰게 되고 이 반에서 저 반으로 옮겨 다니면서 가방 끈이 길어지는 것도 영적 성장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 일 저일 섬기면서 섬김의 요령이 늘어나는 것도, 아는 사람이 많이 생기는 것도 영적 성장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영적 성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들입니다. 영적 성장은 바로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을 가져다주는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이것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은사는 하루아침에라도 없던 은사를 우리에게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사를 갖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런 방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은혜는 우리 안에 거하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영향력의 경향성입니다. 이것들이 우리 안에 계속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랑 안에서 성장해갑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은혜 받은 가장 확실한 열매는 신령한 은혜의 가장 확실한 열매는 사랑의 인격입니다.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성장한 성도, 다 자란 어른스러운 성도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기이한 것들을 많이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체험하지 못한 신비한 경험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목사도 같지 못한 또 다른 은사들을 여러분들이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은혜의 사람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사람만이 사랑의 사람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사랑이 순종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들이 사랑과 순종에 관계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께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많은 계명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배드리기 전에 우리들이 이 계명을 따라 살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그 계명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도 알고, 또 그 계명을 행하면 은혜가 충만해진다는 것도 알고, 그 계명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것도 알고, 계명대로 살면 영생의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도 압니다. 또 계명대로 살지 못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싫어하시고 계명대로 살지 못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깨지고 영혼은 파괴되고 곤고하고 하나님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계명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자기가 그것을 싫어하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행한 순결한 사랑인 이 까리따스의 사랑은 부패한 자기에 대한 사랑과는 공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로를 적대시하며 내어 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여러분들의 자신의 삶을 한번 반성해보십시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지체들을 보십시오. 누가 하나님 앞에 잘 순종하며 삽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순종하면서 삽니다. 순종하면서 살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입에 발린 거짓말입니다. 마치 진정으로 결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룻밤 자기 위해서 계속 사랑한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그런 바람둥이의 입술에서 나오는 고백과도 같은 것입니다. 더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격적인 특징은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그래서 성도들도 보면 누가 잘 순종하는가 하면 교회에 오래 다니고 성경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격이 좀 못 되도 잘 깨어지는 사람들이 더 많이 순종하면서 삽니다. 태생이 좋은 사람보다 많이 깨어지는 사람이 많이 순종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그 깨어짐이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사랑의 대적인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늘 눈물을 흘리며 회개 속에서 깨트려지는 사람들은 속에서 계속 사랑하는 자기 사랑이 자꾸 부서지는 것입니다. 그게 아프니까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자기 사랑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고 하나님 사랑이 새로워지니까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은총과 사랑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은총이라고 하는 것은 공로가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일방적으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많이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의무와 순종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이 사랑으로 강권하시는 이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시오,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자신이 대단한 존재이고 상당히 중요한 존재라는 생각은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고 귀하다고 말씀해주실수록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은 자기는 쓸모없는 인간이요, 만물의 찌끼와 같은 인간이라는 인식을 계속 갖게 되고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런 속에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자기의 비참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 대한 더욱 더 의존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의 정의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절대의존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하나님께 베푸신 이 모든 사랑이 쓸모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이요, 그 놀라운 해택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더욱더 주님께 의존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님께 의존적으로 되는 핵심적이 되는 핵심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의존적인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일방적인 은총이 자신에게 주어질 수가 없는데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가능하도록 만들어주신 공로의 원인이 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이 내가 지은 모든 죄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던 간악한 모든 사악한 것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고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만족을 드렸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사랑은 하나님 사랑이고 하나님 사랑은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쓸모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그분의 은총을 의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자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놀라운 것은 교회는 바로 이런 사랑을 배우고 또 가르치는 곳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교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은 것처럼 너희도 또한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나를 좀 본 받으십시오 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즉시 마음속에서 저 설교자가 교만해지지 않았나 하고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언명도 우리에게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법 합니다. 정말 사도 바울다운 충고를 하려면 애들아, 나는 죄인 중에 괴수요, 아무 것도 아니란다. 나쳐다보지 말고 예수만 바라보라고 말했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그렇게 말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영적 우월감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감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사랑을 가르침으로 각자를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시는 한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은 보고 배우는 것을 통해서 습득되어지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회복해주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랑이 성장해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맨 처음에는 회심하기 전에 자기만을 사랑하며 살던 사람이었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도 그 하나님이 우리를 뼈저리게 사랑하셨다는 사실도 몰랐고 또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누군가가 복음을 우리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 죽고 다시 사셨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실 수밖에 없으셨는지, 그리고 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나의 구원의 기초가 되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 사람의 복음전도를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번도 하나님의 사랑을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 말만 듣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본 것처럼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게 되었으니 이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복음진리를 사용하셔서 성령님이 역사하여 그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주니까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자신들의 죄를 보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감화를 주시니까 사랑하던 죄를 미워하게 되었고 미워하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감화적인 변화가 그 속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 안에 최초의 회심과 함께 주어진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고정된 사랑이 아니라 이후에 어떻게 학습되는가에 따라서 점점 더 성장해서 그 사랑의 분량이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이 사랑이 계속 쪼그라들어서 마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변할 수가 있습니다.
요즘은 의학이 발달해서 많이 줄어들었습니다만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소아마비에 걸린 학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한반에 꼭 1-2명씩은 꼭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아마비에 걸렸던 사람들도 두 종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다리를 좀 절기는 하지만 그러나 힘들게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걸어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이나 혹은 휠체어, 혹은 목발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중요한 차이가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소아마비가 걸려서 다리에 이상이 오고 다리가 짧아집니다. 이때에 질병을 발견하고 치료를 하면서 여기에 무거운 보조기구를 댑니다. 가짜 발을 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혼자 그 무거운 보조도구를 한쪽 다리에 채운 채 부지런히 한쪽 다리를 사용해서 걷기 시작하면 다리의 길이는 짧고 길어서 차이가 나고 발육상태도 다르지만 언젠가 시간이 지나서 보조기구를 풀게 되면 절뚝거리면서라도 혼자의 힘으로 걷게 됩니다. 왜냐하면 비록 소아마비라는 질병이 찾아오기는 했지만 이후에 부지런히 운동을 할 수밖에 없는 보행생활을 했기 때문에 힘줄이 생기고 다시 피가 통하고 뼈가 계속 자라서 그래서 그로 하여금 절뚝거리면서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걸어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귀찮아서 보조도구를 아예 하지 않으면 처음에는 편합니다. 무겁지 않으니까. 그리고 목발이나 휠체어의 도움을 받으면서 생활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은 평생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생활합니다. 왜냐하면 한쪽 다리가 불편하기 때문에 사용을 안 하니까 이 다리가 말라서 오그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 바짝 올라가서 붙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리 잡아당겨도 땅 아래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쪽 다리가 발육이 되지 않고 힘줄이 퇴화되고 뼈가 쇠퇴하고 그리고 살이나 근육 모든 것들이 다 쇠퇴해서 결국 사용할 수 없는 다리로 퇴화되고 맙니다. 그러면 일평생 자기가 자기 두 발로 걷지 못하고 휠체어나 목발을 의지하면서 다른 사람의 신세를 져야 하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이 차이입니다. 우리 안에 주신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그런 사랑을 주셨지만 그 사랑이 계속해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라가기 위해서는 학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 믿자마자 사랑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학교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한마디로 얘기해서 소갈머리가 없습니다. 아주 이기적인 사람들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장로라는 인간도, 집사라는 사람도, 목사라는 인간도 모두가 이기심으로 뭉쳐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직분을 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갗 거듭나서 예수 믿고 교회에 들어왔는데 전부다 소갈머리 없는 인간들로 가득 차 있고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습니다. 그때에 이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받았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것들을 적용시켜보려고 하는데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전부다 이기심으로 뭉쳐진 아주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학습이 안 된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는가 하면 소아마비 환자처럼 한쪽 다리가 위로 올라가 붙어있는 것입니다. 아주 매우 그 사람이 특별히 노력을 한다든지 뭐 특별히 자기 일을 깨트리기 위해서 다른 방법으로 훈련하지 않는 한 그 교회 속에 묻어서 그냥 덩실덩실 흘러가면서 살면 똑같이 그런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잘 들으십시오. 오해하지 말고, 그래서 사람이 망가지는 것이 세상에서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망가집니다. 세상에서 뭐 얼마나 새사람이 되겠습니까? 세상은 원래 타락한 이후로 계속 죄와 슬픔이 많은 곳이고 못된 인간들이 모여서 사는 세상인데 거기서 잘 되어봐야 얼마나 잘 되겠습니까? 교회에 왔을 때 세상하고 전혀 다른 분명히 세상 속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인데 이들이 모이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질 때 그때에 여기서 세상에서 오랫동안 묶었던 때를 여기서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트려지고 이렇게 세상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여기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가 그런 사람들에게 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보여줌으로서 사랑이 학습되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영광을 버리고 구유에 오셔서 바로 들것에 실려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면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안 하셨습니다. 그리고 33년 동안이나 일생을 사셨습니다. 멸시와 모욕을 당하시면서 예수님에게는 너무 긴 생애을 사셨습니다. 해택을 입은 죄인들에게는 짧은 생애였지만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게는 너무나 긴 생애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제자들에게 학습을 시켜주시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어떻게 죄를 미워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선에 속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을 위해 어떻게 참아야 하는지,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내해야 하는지,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그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무릎을 꿇고 섬겨야 하는지 사랑으로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멸시와 모욕을 당하신 생애를 사셨습니다. 이게 바로 도성인신의 생애입니다.
그러면 오늘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누가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그것을 배운다고 그랬는데 지금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으면 여러분들은 가르치는 위치입니까, 배우는 위치입니까? 대답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답을 가르쳐주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처음 예수를 믿고 예수께 접붙여진 갓난아이 신자일 때는 이제 배우는 입장입니다. 그러니 이제 시간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한편으로 배우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의 모본을 보여주어서 참된 사랑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섬김의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점점 더 많이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 10-20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잘하십시오. 좀 본을 보이십시오. 장로님도 이런 설교를 좀 똑바로 듣고 그리고 희생하십시오.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이 본분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려고 자기가 애를 많이 썼습니다. 관심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아무개 집사 신앙생활을 잘하더라, 소문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영안을 위해서 그렇게 애썼는데 그렇게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바라보는 수많은 어린 신자들에게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깨닫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돌아오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실족시킨 사람은 예수님이 너 그따위신앙생활을 해서 많은 사람을 실족시켰도다. 그렇게 말씀하실 때 내가 뭘요? 내가 뭐 많은 사람들을 실족시켰습니까? 내가 가끔 잘못한 적은 있었지만 내가 언제 다른 사람 신앙생활을 한 것을 딴지건 것이 있습니까? 이러고 따지지만 반대로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자라가지 못하는 것을 인해서 회개하며 성장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너 뿐만 아니라 네가 선행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내 사랑 안에서 자라게 했구나. 그때 깜짝 놀랍니다. 나는 그런 것 관심 없고 나는 그냥 나만 잘했을 뿐인데,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도전을 받는다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이미 잘 알고 있고 행하고 있고 일상화된 것들을 똑같은 것을 보고 있을 때는 도전받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잘 지키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아무개 집사 요즘 주일 계속 잘나와. 어구, 도전되네. 나도 주일을 잘 지키는데, 그런 것은 없습니다. 자기가 못하는 것, 몰랐는데 그 사람을 보고 깨닫게 된 것, 알기는 했지만 그 사람처럼 하지 못했던 것을 그 사람을 보고 깨닫게 될 때 그때 우리들이 도전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향해서 계속해서 자라가는 사람들은 무엇을 행하든지 범사에 그 사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웅변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도전을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참다운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 복음을 듣고 자기 사랑을 못 박았는데 이제 이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런 신자들의 철저한 섬김을 통해서 거기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될 사명이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듣고 그러니까 목사님이 잘하십시오. 장로님이 본을 보이고 안수집사님들이 똑바로 좀 하라고 이렇게 하라고 이 설교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들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바로 그렇게 보여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기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자녀들에게 백 마디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되어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라고 아무리 사탕발림으로 이야기하고 협박하면서 이야기를 해도 여러분들이 모본을 안 보이면 자식들이 뒤에서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아, 저 이중인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의 공적인 두 가지 임무에 대해서 칼빈 선생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배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임무를 망각하고 세상살이가 힘들면 집어치우고 주일날 어깁니다. 안 나옵니다. 그리고 무슨 마음이 상한 일이 있으면 예배에 수시로 빠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본을 보인 감화는 한두 번 가지고는 사람들의 가슴에 안 새겨지고 그릇된 모본은 한번의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가슴속에 남겨둡니다. 여러분들이 1년 52주를 빠짐없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보고 자녀들이 ‘주일을 정말 저렇게 지켜야지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한번 주일을 지키지 않고 사소한 일로 예배에 불참하는 것을 보면 그러면 그것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3-4년 후에 주일을 잘 지켜야지 된다고 할 때 저, 인간 자기는 필요하면 수시로 빼먹으면서 저, 위선 그렇게 떠오릅니다. 애들이 아직 어리니까 대놓고 여러분들에게 말은 못하지만 이미 여러분들이 보여야 할 모본이 아닌 다른 것을 아이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주일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할 때 자식들의 가슴에 그것을 깊이 심어주어서 나처럼 불순종하게 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한 것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교회생활을 하면서 한번 얼마나 잘못했는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심지어 수시로 예배를 빠지고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바칠 십일조도 제 멋대로 사용해서 그렇게 허비하고 예배 시간에 와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는 그런 오만한 예배로 그렇게 하면서 끝날 시간이나 들여다보고, 설교 중에 무엇이 선포되었는지 관심이 없고 설교의 시간의 길이나 가지고 논하고 쓰레기 같은 신앙생활을 해서 어떻게 여러분들이 사람이 될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사람이 안 되는 것은 적은 문제입니다. 이제 믿기 시작한 신자들이 그대들을 보면서 망가지고 있는데 그 형벌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렇게 신자들을 파괴시키고 어린신자들을 넘어트리는 것은 곧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고 예수의 몸을 해치는 일입니다.
입증되었습니다. 사울이 언제 예수님을 핍박했습니까? 언제 예수님을 보기나 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니까 다메섹 가는 길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어린 신자들에 대한 그 고통을 주는 것이 바로 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여러분들이 느끼기나 합니까? 지극히 교회에서 어린 소자 하나가 실족하고 믿음에서 이탈해서 영혼의 상처를 받을 때 우리들은 웃고 떠들지만 예수님 교회 한구석에서 우십니다. 왜? 당신의 몸이니까. 다 당신의 몸이고 당신의 자식들입니다. 그래서 아픕니다. 그래서 그 연약한 애들을 교회에 보내면서 이 어린신자들을 너희가 어머니의 마음이 되어서 잘 돌보고 진짜 사랑 안에서 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본을 보여라. 뒷돈을 내가 다 대마.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데려다가 못 보여줄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와서 이렇게 예배드리고 끝나기가 무섭게 도망가고 일주일 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하지 않고 그리고 심지어는 교회에서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위도식하면서 생활합니다. 몇 사람들이 뼈심 들여서 모두 봉사하고 애를 쓰면 상전처럼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쓰레기와 같은 신앙생활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변화되기를 기대하느니 차라리 영혼이 없는 짐승을 앉혀놓고 설교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삽니까? 왜 그렇게 삽니까? 예수님이 과연 그런 삶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거룩한 교회를 우리 가운데 세우시고 영혼들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까? 여러분들과 같은 신자를 만들기 위해서 무위도식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양식 삼아 무위도식하는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교회를 여기에 세우셨습니까?
우리가 처음 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복음의 비밀을 깨달았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 그분이 자기의 살을 다 찢어서 이 교회를 사셨다고 할 때 교회의 아픔이 내 아픔이었고 지체들의 고통이 나의 쓰라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시간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고 내 섬김을 통해서 사람들을 세우신 하나님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그 섬김의 자리에서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신 예수의 모본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화목 된 사랑을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깨닫고 복음 안에서 깨트려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죄와 슬픔이 많은 세상, 끊임없이 세상의 유혹을 받고 육신의 정욕의 유혹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연약한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분주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이 고단하기 이를 때 없는 와중에서 이 세상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변천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불변하는 십자가의 사랑을 붙들고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매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그런 사랑을 보여주는 곳이 교회고 우리 모두에게 그것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지 목사는 보여주고 우리는 그분을 쳐다보면서 판단이나 하면서 사는 위치에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관점은 성경적 관점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이 사랑을 보여줄 것입니까? 누가 이런 사랑을 가르쳐줄 것입니까? 누가 이것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이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 그 은혜 앞에 깨트려본 적이 없는 사람,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안 사람들, 그래서 주님의 섬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람들,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종처럼 낮아지도록 쓰레기가 같은 죄인들을 섬기셨던 예수님의 그 개별적인 섬김을 본 사람들, 그 사람들은 모두 이 모본을 어린 신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여러분들이 더 많이 죽으십시오.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여러분들이 더 많이 희생하시고 주님께 복된 축복을 더 많이 받은 여러분들이 더 많이 자기의 소유를 주님을 위해 내놓으십시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자가 이렇게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못 받은 사람처럼 살았던 것, 행동했던 것이 깊이 아파하고 그래서 아직까지도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옛 자아에 대한 사랑을 인해서 주님 앞에 죄송스러워하고 그리고 자기도 깨트려진 적이 없는 옛 자아를 오늘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아달라고 애원하고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다시 깨트려져서 그래서 주님의 참된 사랑의 모본을 따라서 눈에 보이는 모든 성도들이 자기를 섬겨야 할 종들이 아니라 자신이 그 모든 성도들을 섬겨야 하고 그 모든 성도들이 주님처럼 보이는 그런 섬김의 삶을 살아갈 때 교회가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가 될까요? 주님이 그 교회를 찾아오시면 떠나고 싶지 않으실 것이고 주님이 그 교회를 향해서 아끼고 싶으신 것이 아무 것도 없으실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마음을 품고 주님을 싫어하는 이 세상을 향해서 교회가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모든 것을 나누어주고 핍박을 받겠지만 그때 예수님처럼 그들을 위해 축복하고 결국은 교회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지만 그대에 자기를 못 박은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님처럼 저들은 알지 못해서 저렇게 하니 하나님이 저희를 위해서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세상에 밀알로 썩어가고 썩어가는 밀알을 통해서 그 씨눈에서 싹이 나와서 온 땅에 예수가 가득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분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렇게 사랑 안에서 자라서 그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들로 성장해가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 영적 성장과 교회 성장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6)
본문을 설교하기 전에 먼저 이 본문이 자리한 배경을 잠깐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 안에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목사와 교사와 이런 많은 직분을 가진 사람들을 교회에 세워주셨습니다. 그들도 한때는 성도였는데 주님 안에서 잘 자라고 주님이 특별히 그들에게 은사를 주시고 사명을 주셔서 그렇게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섬기는 사람들인가 하면 성도들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성도들이 세상에 있을 때 그 사람들을 전도해서 교회에 접붙이고 접붙여진 사람들이 아직은 미숙한 교인이지만 이런 교회의 직분자들이 열심히 사명을 감당해서 이 성도들을 돌보고 자라게 하면 이 성도들이 성장을 하게 됩니다. 이 성도들이 온전한 교인으로 성장을 하게 될 때 예수의 몸인 이 교회는 튼튼한 몸이 되고 그래서 이 교회가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을 때 하게 하시고 싶으셨던 그 일들을 교회로 하여금 감당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교회가 든든하게 서기 위해서는 성도가 온전한 사람들로 자라야 하는데 성도의 온전한 자람이라고 하는 것은 곧 영적성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영적이고 신비한 예수의 몸이기 때문에 성도가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든지, 공부를 해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든지, 아니면 골골 하다가 인삼 보약을 먹고 몸이 튼튼하게 되었다든지 그런다고 교회가 튼튼해지고 부유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접붙여진 상태에서 성장된 사람으로, 다 자란 사람으로 성장해갈 때 교회는 튼튼한 교회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두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지식에 있어서의 성장이고, 또 하나는 사랑에 있어서의 성장입니다. 지식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그런 종류의 신앙적 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적 지식은 학교에서 습득해서 공부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지식을 체험 속에서 습득하게 될 때 이 사람의 지식이 점점 자라가게 되고 그렇게 됨으로 그 사람이 이제 예수 안에 접붙여져서 태어난 갓난아이가 같은 상태에서 점점 튼튼한 어른으로 자라가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영적성장의 요소는 사랑인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많이 회개하고 교회에 와서 접붙여졌다고 하더라도 마음 안에 여전히 부분적으로 자기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런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뚤어진 자기 사랑의 크기는 성도마다 다 다릅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생활을 잘하면서 그러면서 깊이 하나님 앞에 은혜 가운데 사는 성도들은 이런 비뚤어진 자기 사랑이 매우 적고 또 그렇게 은혜 가운데 살지 못하고 되지 못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자기 사랑이 이 안에서 점점 커져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접붙여진 신자가 되었는데도 마치 옛날에 예수님을 모를 때처럼 자기만을 이기적으로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육신의 정욕을 쫓게 되고 많은 욕망들과 야망들이 그 속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내버려두면 영적으로 계속 성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줄어들어갑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은 깨트려지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속에서 계속 점점 더 나무가 자라듯이 성장하게 될 때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사랑의 성장이고 이것이 곧 영적성장의 핵심적인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고 세상을 향한 사랑은 자기 속에서 깨트려지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자기 안에서 계속 새로워져갈 때 그때 우리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자가 이렇게 성장하게 될 때 교회는 탄탄한 다 자란 어른과 같은 몸이 되어서 어린아이의 시절에 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을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때 하나님께서 그런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은 점점 그 교회의 섬김을 통해서 행복한 세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각 성도들이 지식과 사랑 안에서 성장을 해야 하는데 성장하도록 목표가 있습니다. 뭘 바라보고 성장해야지 될 것인가 하는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면서 배우면 예수님만큼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또 자기 사랑을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언젠가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왜 그에게까지 가라고 부름을 받는가? 그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망망한 밤바다에 나침판도 없이 배를 띄울 때 북두칠성을 보고 항해를 합니다. 그럼 바다에서 날아서 북두칠성에 도착한다는 것이 아니라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마치 그리로 가는 것처럼 계속 가다가보면 올바른 항해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지식과 사랑에 있어서 성장이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를 해서 가게 될 때 우리들이 지식에 있어서 사랑에 있어서 이렇게 자라게 됩니다. 그런 지식과 사랑을 가지고 교회에 접붙여진 성도들을 섬기는 것,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이게 지난 한 사 주간 동안 종합적인 내용입니다.
그것을 토대로 오늘 성경은 또 다른 이야기를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교회를 돕는 성도의 섬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교회가 성도의 도움을 입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이 예수 안에서 접붙여져 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워낙 미숙한 신자이기 때문에 이제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직분자들과 성도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점점 주님의 사람으로 자라가게 되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즉 성도로 교회 안에 접붙여지게 되면 그 성도는 교회의 도움을 받으면서 다 자란 어른스러운 신자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게 되면 이렇게 교회의 섬김을 통해서 신자가 되어가던 이 신자가 이제는 교회를 돕는 성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붉은 산에 묘목을 쭉 심어놓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묘목이 점점 자라게 됩니다. 벌거벗은 산이라고 할지라도 풀들이 있으니까 거기에 습기가 있고 또 거기에서 생태계의 분해 작용들도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나무가 어렸을 때 심겨지면 그 나무는 산의 도움을 받으면서 나무가 점점 자라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나무가 시간이 흘러서 점점 큰 나무가 되면 그 다음에는 산 때문에 나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무 때문에 산이 살게 됩니다. 엄청나게 커진 아름드리나무가 되고 나면 그 뿌리들이 나무키보다 더 멀리 땅속에 퍼지면서 산에 있는 흙들을 움켜쥠으로서 사태가 일어나거나 산이 무너지지 않도록 그 장마와 폭우 속에서 산을 보호합니다. 또 그렇게 뿌리를 멀리 퍼트리니까 나무가 튼튼하게 자라서 어마어마한 잎사귀를 매달게 됩니다. 그것들이 뿜어내는 산소가 온 산에 퍼지면서 동물들이 호흡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가을이 되면 그 잎이 모두 떨어져서 그 산 아래 모두 깔리게 됩니다. 이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부엽토가 되어서 이 낙엽들이 비료를 땅에 공급해줍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열매들이 맺히니까 열매들이 떨어지고 그 열매들을 먹기 위해서 짐승들이 오고 짐승들이 와서 배설을 하고 그것들이 거름이 되고 그리고 짐승들이 있으니까 벌레들이 모이고 이렇게 하면서 생태계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무가 어렸을 때는 나무가 산에 신세를 지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제 산과 함께 살아가는 나무가 됩니다. 그래서 산을 섬기는 나무가 되듯이 성도도 믿음 안에서 튼튼하게 어른스러운 성도로 성장해가면 이제까지는 교회의 도움만을 받았지만 이제는 교회 속에서 상당부분 교회를 섬기는 성도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시점을 명확하게 줄로 그을 수는 없지만 신앙이 성숙하고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면서 성도는 이제 일방적으로 교회의 도움만을 받다가 이제는 교회를 부분적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게 됩니다. 이제 이렇게 교회가 성도의 도움을 입게 되는데 오늘 성경은 그 도움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마디마다 도움을 입느니라,” 그에게서 그는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그분이 북두칠성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분을 본받는다고 할 때 그것은 그분 자신이라기보다는 그분의 지식과 그분의 사랑의 본을 가리키는 것이고 예수님 자신은 영적으로 북두칠성처럼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교회의 몸으로서 모든 성도들을 하나로 연결지으시는 머리가 되셔서 그래서 교회에 좌정하고 계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장하게 되면 교회의 일방적인 도움을 받던 위치에서 상당부분 교회와 공존하며 교회를 섬겨서 그 섬김을 통해 교회를 튼튼한 교회로 세워가도록 도움을 주게 되는데 이런 도움이 성도 각 사람 자기 자신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을 많이 섬겼으면서도 자신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무엇으로 교회를 섬겼든지 간에 그것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자신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그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원천으로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었으니 자신은 심부름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많이 섬겨도 자기를 자랑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섬겨서 교회를 돕게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님이 원천이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에 지식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게 되면 그 지식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도 몰랐고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야 되는지도 몰랐었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그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건강한 몸이 있어서 주님을 섬기게 되었다면 이것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들입니다. 또 우리가 만약에 물질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서 성도들을 잘 섬겨서 연약한 성도들을 꼭 붙들어주었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사랑도 원천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원천이 되셔서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내가 사랑으로 성도들을 섬겨서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모든 것들을 베푸는 원천, 곧 은혜의 원천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있는 이 모든 자원들을 사용해서 교회에 유익을 끼치고자 하실 때 예수님이 직접 그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섬김의 방법, 즉 도움의 방법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 도움의 방법이 바로 성도들의 섬김, 성도들의 섬김을 통해서 예수 안에 있는 그 은혜가 전달되게 하심으로서 각 성도들을 섬겨서 온전한 교회가 되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자,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물질도 있고, 시간도 있고, 재능도 있고, 또 남이 알지 못하는 지식도 있고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 것들이 우리 각자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정말 교회의 유익을 주도록 사용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 각 사람 각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셔야 됩니다. 은혜를 주시지 않는데 이 어려운 세상에 누가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 앞에 바치겠으며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시간을 다 사용해도 모자란 바쁜 세상에 누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시간을 떼어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에게 준 모든 자원을 자기를 위해 사용해도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 우리 인간인데 누가 자신의 자원을 떼어내서 자기는 결핍 때문에 고통을 느끼면서 다른 사람들이 그 자원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데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사랑이 되어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은혜의 원천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각 사람 각 사람에게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 때문에 자기의 사랑이 깨트려집니다. 은혜는 항상 자기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작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가 우리 안에서 확 일어나게 될 때 그때 내게 주신 많은 것들을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서 섬기는데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은혜를 많이 받은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교회는 그 성도들이 교회를 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병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런 은혜를 각 성도들에게 주심으로서 그래서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그 은혜의 도움을 성도들의 섬김을 통해서 흘려보내심으로 온 몸이 핏줄과 힘줄로 연결되어서 힘을 발휘하게 되듯이 모든 교회의 지체들에게 이런 작용을 하게 하셔서 교회답게끔 움직이고 행동하고 생각하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오늘 성경에서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그에게서부터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몸은 한 가지 동작을 머리가 명령하면 손으로 하는 동작인데도 온 몸 모두가 그 명령을 받들고 손이 움직여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손에게 내린 명령이니까 눈인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든지, 손에 내린 명령이니까 귀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귀가 잔다든지, 발은 움직이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조금 움직이든지 많이 움직이든지 상관없이 대뇌가 손보러 이것을 집으라고 명령하면 온 몸의 마디마디들이 대뇌의 그 명령을 받아서 가서 이것을 잡아오는 것은 손이 하지만 모든 기능들이 전부다 손이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모두 함께 기능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몸의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우리의 몸으로 비유해서 설명하는데 아주 기가 막힌 설명입니다. 그렇게 해서 각 마디마디마다 다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심장에서 피를 펌프질을 하면 그 심장의 피가 뼈를 싸고 있는 살 사이사이에 있는 수많은 굵고 가느다란 핏줄을 통해서 각 마디마디 하나를 타고 손끝에까지 전해집니다. 그리고 머리에서 하나를 명령하면 마디 하나하나가 당기고 움직여서 동작을 할 수 있도록 힘줄들이 살 갈피갈피에 붙어서 마지막 손가락 마디 끝까지 힘줄들이 연결이 됩니다. 신경다발을 통해서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연결이 되면서 대뇌가 명령하는 것을 이행할 수 있도록 기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회 안에서 보면 어떤 사람은 매우 중요하고 큰 일로 섬기는 것처럼 느껴지고 어떤 사람은 작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섬기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중요하고 큰일에는 서로 참여해서 중요한 그 일을 거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만 작고 하찮은 일을 그것이 작고 하찮다는 이유 때문에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서 교회를 온전케 하는 이 일은 크기 자체가 곧 중요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몸의 한 부분, 한 부분 모든 것들이 그런 원리를 가지고 이루어져있습니다. 무릎 아래부터 발목에 이르는 뼈는 덩치는 매우 커다란 뼈이고 큰 것이지만 잘라져도 살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에 어떤 기관에 보면 비록 무릎 뼈나 발목뼈처럼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매우 작은 한점의 살만 뜯어내도 즉시 생명을 잃게 되는 치명적인 몸의 부위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있어서 일의 크기가 곧 치명적인 중요성의 크기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 하나 하나를 다 연결해서 그래서 우리의 몸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활동하게 하듯이 하나님의 주권을 가지고 각 사람들에게 은사와 은혜를 주셔서 섬김의 자리를 갖게 하셔서 교회를 섬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똑같이 사용하지는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은 금 그릇처럼 사용하시는 사람도 있고 질그릇처럼 사용하시는 사람도 있고 또 질그릇이지만 크게 사용하시는 사람이 있고 금 그릇이지만 작게 사용하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자신의 중요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우리의 다양한 섬김의 그릇을 통해서 하나로 모두 엮어 결국은 교회를 온전한 몸으로 세우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기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원천적으로 모두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의 분량에 따라서 직분과 사명을 주시고 그 사람이 그 일을 가장 적합하게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 가지 직분과 사명을 주셔서 교회를 섬기게 하시는데 그 중에 하나도 필요 없는 것이 없고 그 모든 주님이 주신 섬김은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의 지혜 가운데 하나로 묶어져서 그래서 큰 기계가 움직이듯이 교회가 움직이면서 예수 안에서 사람들을 접붙이게 만들고 접붙여진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잘 자라도록 어른스러운 신자로 성장하도록 만들어주는 섬김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여기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각 성도들의 섬김입니다. 그래서 어느 몇 사람이 열심히 섬기고 나머지는 그냥 교회에서 해택을 누리는 그런 삶을 통해서는 교회가 온전해질 수 없고 그 사람 자신도 온전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많이 섭취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아무리 많이 경험하고 은혜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우리 안에는 그런 것들을 끊임없이 밖으로 흘려내어 보내서 주님이 주신 은혜와 지식대로 살게 하는 이 순종의 마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 성도들은 자기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지식과 말씀을 통해서 사랑을 공급받으면서 섬기게 되고 그런 섬김의 실천을 통해서 더 많은 새로운 빛들이 가슴에 와 닿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깨닫게 되고 또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만을 깊이 살펴보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이기심이 있는 사람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자기가 정말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정말 용서하기 위해서 자기를 많이 희생하고 애써볼 때 그때에 비로소 자기 안에 아직까지도 이기심이 많고 자기사랑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깨트려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많은 사랑과 지식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스스로 순종하며 섬기는 실천이 없이는 신앙생활은 딱 멎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떤 몇 사람들이 열심히 섬기고 그리고 나머지는 그 해택을 누리면서 그 모든 서비스를 받으면서 교회생활을 하면 그 사람들은 반드시 부패하게 됩니다. 자신이 순종하는 삶, 사명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서 자기를 버리는 희생의 삶, 이런 것들이 없다면 얼마 동안이나 말씀을 들으면서 계속 신비한 은혜를 받을 것 같습니까?
또 어느 한순간에 예수님의 사랑이 자기 마음속에 부어져서 자기가 정말 이기적인 인간이고 나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못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그 깨달은 바를 가지고 자기만도 못한 사람들을 섬기는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이 없이 그런 사랑에 대한 깊은 감동과 깨어짐이 얼마나 오래갈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래가지 않습니다. 저의 목회경험으로는 6개월을 넘지 못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많은 성도들은 그런 깊은 사랑과 지식의 깨달음을 가졌을 때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성도들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을 감동시켰는데 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불이 내 마음에 와서 내 심령에 불을 질렀는데 어떻게 내가 타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뜨게 되면서 그러면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 저기도 내 섬김이 필요하구나. 내가 이것을 섬겨야지 되겠구나. 이런 마음들이 이 속에서 계속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가 그런 성도들의 섬김을 통해서 세워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만큼 11년 동안 세워져왔습니다. 이것은 몇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노력했기 때문에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 말할 수 없는 많은 이름 없는 성도들의 자기를 버리는 많은 희생,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 자기 사랑이 깨트려지는 성도들, 진리의 빛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무지한지를 깨달은 성도들, 그런 사람들의 많은 헌신을 통해서 교회가 이만큼 세워져온 것입니다. 교회는 아프고 상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들이 더 많이 지식의 빛을 받고 사랑의 깊은 감동을 체험하고 그래서 구석구석 더 섬겼더라면 그렇게 아픈 부분이 적었을 텐데 우리들이 그렇게 다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아픈 부분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아파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찢으신 그 살과 흘린 피, 그것을 보면서 아파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많은 은혜를 받은 한 사람 예수 믿고 큰 복을 받은 몇 사람, 교회에서 큰 직분을 받은 몇 사람, 이런 사람들이 아니라 각 성도들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께 붙어있는 한 마디마디이니까 그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어지는 은혜를 전달하는 섬김의 도구들이 되어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일생을 잘 살고 나면 마지막에 교회가 하나 남는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그는 교회 하나를 섬겼다고 그러지만 사실은 교회 하나를 섬긴 것이 아니라 그 교회를 하나를 섬길 때 그는 하나님과 이웃과 온 세상을 섬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그런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마디가 되어서 자기 교회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그 하나의 섬김을 성실하게 자기를 바쳐 희생하면서 봉사할 때 거기에서 은혜 받은 성도들이 태어나고 은혜 받은 성도들이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재능을 드려서 그래서 사면에서 예수의 사람답게 살게 됨으로서 세상이 고쳐지니까 교회를 섬겼는데 세상을 섬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각 마디마디인 성도들을 통해서 은혜의 원천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은혜를 흘려보내시는 방법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내려온 것은 거의 없습니다. 모두 누군가의 섬김을 매개체로 해서 여러분들에게 그런 은혜가 전해진 것입니다. 오늘 와서 여러분들이 바로 은혜 받지 않고 지붕도 낮고 어려운 환경이지만 그러나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워낙 길게 해서 힘들기는 하지만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장소를 만들기 위해서 헌신했고 돈만 들인 게 아니라 눈물로 기도하면서 섬겼습니다. 그 사람들의 이름을 지금은 기억도 못합니다. 누군가 섬김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여기에 앉아있습니다. 오늘 설교자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깨달으면서 은혜를 받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이 나에게 먼저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이 나에게 직접 주신 것은 아닙니다. 우선 성경을 놓고 연구를 했는데 누군가가 은혜를 받고 이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책을 만들기 전에 어려운 원문 성경을 놓고 철저히 번역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설교준비는 제가 했지만 원고를 이렇게 정리해준 지체들이 있고 저 뒤에 앉아계신 분들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이 화면을 통해 많은 성도들이 장소가 가진 열악함에 구애받지 않고 말씀으로 접하기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하기 때문에 TV를 통해서도 교육관에서도 예배를 드리며 말씀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짚어 보면 모든 우리가 받는 은혜가 성도들의 섬김이 없이 우리에게 곧바로 날아온 것은 거의 없습니다. 염통에서, 심장에서 뿜어낸 피가 우리의 몸 어디에든지 흘러갈 수 있지만 그러나 반드시 핏줄을 타고 흘러가게 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누구에게든지 모두 흘러들어갈 수 있지만 그러나 성도의 섬김을 통해서 그것을 통로로 해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은혜를 흘려보내시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식을 주님께로부터 받았을 때 자기 스스로 생각했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말씀을 오래도록 탐구한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어깨를 딛고 나아가서 더 많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섭취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이만큼 성장했고 성장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가슴을 풀어서 그래서 그 젖을 먹일 수 있는 유모의 위치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다른 성도들의 섬김이 없이 내가 이렇게 자랐다. 내가 이렇게 사랑한 사람이 되었고 이렇게 주님을 아는 많은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자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교회의 한 지체라는 사실을 망각한 자랑입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깊이 그것을 깨닫고,
그래서 교회의 이상적이 모습은 단 한 사람이라도 섬기지 않은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모두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모든 성도들이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이고 내게 이미 주신 많은 은혜와 은사를 가지고 내가 무엇을 섬길 수 있을지 하나님이 내게 많이 주신 것이 바로 내가 많이 섬기도록 하나님이 불러주신 소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건강한 몸이 있으면 그 건강으로 교회를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물질이 있으면 교회를 섬기라고 주신 것이고 시간이 많으면 시간으로, 재능이 많으면 재능으로 무엇으로든지 하나님을 섬기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모두가 교회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세워주신 자리를 알고 비록 사람들이 나를 많이 알아주지 않아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섬기는 그런 신앙생활을 할 때 교회도 건강해지고 그 사람의 신앙도 건강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렇게 성도들 각 사람이 모두 하나하나의 마디가 되어서 교회를 섬기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데 그러면 성도가 어떻게 되어야지만 이런 하나님의 기도대로 섬길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바로 은혜 아래 있어야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몸이지만 몸에 붙어 있는 각 지체인 우리 성도는 단순한 교회의 기계적인 부속품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또 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그 모든 사람들 하나하나가 연합이 되어서 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적인 교회의 한 마디 한 지체가 되었을 때 그 지체의 마디마디 하나로서 교회가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할 때 그런 예수님의 명령에 순응하면서 어떤 식으로든지 기여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놀라운 은혜에 붙잡힌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원천이신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오는 은혜에 깊이 사로 잡혀서 그래서 무지의 어두움이 물러가고 이기적인 자기 사랑은 못 박히고 예수님 사랑이 내 안에서 계속 부활하게 될 때 그때 나는 그런 원천이신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오는 모든 명령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게 되고 또 그런 은혜가 나를 통해 공급할 때 그 은혜를 다른 지체에게 그대로 흘려보낼 수 있는 훌륭한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생각해보면 전혀 어려운 논리가 아닙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들이 지금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정말 신실한 삶을 살려고 합니다. 신실하게 살지 못할 때는 우리가 예수님의 지체가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죄와 욕망에 시달리고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육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는 우리가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때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아픔을 주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 뾰루지 하나만 나도 이렇게 곪아갑니다. 그러면 머리가 터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그리고 목에 가래토시가 섭니다. 그리고 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곪은 것은 이 뒤에 있는 목 부분 한군데서 그저 밤톨만 하게 곪았는데 이게 모든 것에 고통을 주니까 책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온 몸에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은혜가 떨어지고 계속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고갈된 삶을 살면 이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옆에 있는 지체에게 고통을 주고 연결된 많은 우리의 온 몸에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 온전히 섬기고 일할 수 없도록 그렇게 자꾸 방해를 하면서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런 것들을 잊어버리지만 주님께서는 모두 기억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고통을 줍니다. 은혜가 떨어져도 우리는 예수 안에 접붙여진 지체입니다. 그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지체가 어떤 지체인가 하면 끊임없이 교회에 고통을 주는 지체입니다.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는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접붙여져서 그래서 주님의 사람으로 잘 자라게 해서 그래서 성도들을 섬기게 해서 교회를 튼튼하게 세워가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그를 불러주시고 교회에 접붙여서 예수의 몸이 되게 하셨는데 지금 정 반대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많은 아픔들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면서 고갈된 영혼이 회복되고 그리고 자기를 끊임없이 사랑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똘똘 뭉쳐진 이기적인 사랑 때문에 자기가 계속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회개합니다. 그랬더니 오랫동안 마음에 가지고 있던 자기의 사랑이 깨트려지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야단을 치고 설교자가 혼을 내도 깨닫지 못했는데 말씀을 듣고 나서 깊이 생각하고 나니까 마음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깊이 깨닫게 됩니다. 예전에는 내가 뭘 나를 사랑했나. 생각했지만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신 십자가를 생각하니까 그런 예수의 자기 버림의 정신이 나의 삶 구석구석에 배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깊이 회개하게 됩니다.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제일먼저 그런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고 교회는 커지고 그리고 일은 얼마나 많아지는지 너무 힘이 부치고 그리고 몸도 날마다 쇠해가는 것을 느끼고 그런데 제 마음속에 아침에 이런 질문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정말 내가 이렇게 11년 정도 된 시간에 이렇게 미친 듯이 살아온 정말 내 신앙이 성장하고 있는가? 앉은뱅이 같은 신앙생활을 버리고 믿음에서 자라가라고 교인들을 닦달하지만 나는 성장하고 있는가? 잘하고 있는가? 지금도 마음에 간절한 소원은 어제 저녁에도 어느 지체와 마당에 앉아서 이야기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도 간절한 소원은 아주 훌륭한 목사님 밑에 가서 한 사람의 이름 없는 성도가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 정말 그러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책을 써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일이 아니고, 외국을 두루 누비면서 설교를 해서 많은 사람들을 예수 잘 믿게 만드는 그런 크고 엄청난 일이 아니더라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깊이 감격하면서 거기가 어디든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해서 섬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무슨 재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자원들을 우리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예수의 은혜에 깊이 사로잡히지 않으면 그것이 예수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낮아져서 무릎을 꿇고 그렇게 성도들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다 되었다.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너무 많이 자랑하지 말고, 이번 주간에도, 오늘 주일 아침에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아직 자만심에 빠져서 그렇지 교회 안에는 아픈 부분들이 참 많습니다. 제가 내게 꿈꾸던 교회는 이런 교회가 아니었다고 말했더니 많은 성도들이 마음아파하고 저에게 항의성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그랬는데 사실 제 중심은 그런 것입니다. 언제쯤 되면 우리들이 우리가 이루고 싶어 했던 교회는 이런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교만한 날이 올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눈을 들어서 보면 아직까지도 교회의 아픈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분적로는 그것이 나 때문입니다. 그것들을 보면서 우리들이 아파합니다. 그것을 보면 사실 정말 제가 꿈꾸던 교회는 그런 아픔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더 마음이 아픈 것은 우리들이 그것을 아픈 것을 아픈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비된 마음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만심을 버리고 그리고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과 교회를 돌아보고 교회가 건강하고 교회의 아픈 부분들을 우리들이 없도록 우리들이 온 몸을 다해서 그렇게 교회를 섬겨야 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먼저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 나아가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그리고 아직까지도 깨어지지 않은 단단한 자아의 껍질, 아직까지 주님 앞에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는 나의 이 세상의 지혜, 나의 육신적인 생각, 진심으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내 인생에 가장 곤고한 날에 하나님을 찾았던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은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정말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 안에서 내가 정말 자라가고 있는가? 그것을 저도 깊이 반성하고 여러분들도 반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인생에 있어서 너무나 곤고할 때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살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로 돌아와서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돌아왔을 때 이런 일을 꿈꾸면서 내가 돌아온 것이 아니라 다만 혼자서 이 어두운 세상을 사는 것이 견딜 수 없어서 그래서 한 마리의 상처받은 양으로 손들고 예수께 갔습니다. 그런 나를 이렇게 사랑하리라고는 그때 생각하지도 않았거니와 상상하지도 않았습니다. 항상 손들고 왔습니다. 지금도 가난한 교회에서 회심한 그때가 떠오릅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리고 여러분들은 저를 뒤이어서 그렇게 이 교회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빌어서 여러분들에게 간곡하게 겸손하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해 꼭 기도해주기를 바랍니다. 제가 정말 주님께 돌아와서 그리고 열린 교회를 맨 처음 세웠을 때 그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는 영혼들을 위해서 교회를 세울 때 그 초심을 지키도록 그리고 끊임없이 그리로 돌아가도록 제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저를 위해 더 많이 기도해주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목사라서 기쁜 것이 아니라 그대들과 한 몸이기 때문에 기뻐해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대들 자신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어떻게 주신 생명인데, 주님이 어떻게 주신 이 구원의 은혜인데 우리들이 섬기는 것이 없이 무위도식하면서 일생을 산다면 그 날에 우리들이 어떻게 주님을 뵈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날이 언제인지 속히 오기를 사모하지만 그 날에 이를 때까지 주님이 세워준 자리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괴로울 때나 기쁠 때나 주님을 늘 섬기다가 주님 앞에 가서 주님을 즐거워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 영적 성장과 교회 성장 2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6)
오늘 이 시간에는 이제 지난주에 이어서 성도의 영적성장과 교회의 성장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본문을 살펴본 뒤에 말씀을 계속 찾아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지난 시간에 읽은 본문 바로 뒤이어서 나오는 구절들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성도를 나무에 비교하고 교회를 산으로 비유할 때 성도가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게 되면 어려서는 교회의 도움을 받지만 자라면서 교회의 도움을 주는 성도가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마치 산에 심은 묘목이 어렸을 때 산의 도움을 입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나무가 자라 큰 나무가 되어감에 따라 산에 유익을 주는 마찬가지 이치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는 이제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접붙여져 그래서 지체가 되어가고 지체가 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지식이 자라고 끊임없는 은혜생활의 실천을 통해 자기 사랑을 버리고 그리스도 사랑에서 성장하게 될 때 영적으로 어른스러운 신자로 자라게 됩니다. 성도 각 사람이 이렇게 어린 신자로 자라게 될 때 교회는 튼튼한 몸이 되어서 이 땅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훌륭하게 섬기는 주님의 도구가 됩니다.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을 돌보아 끊임없는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밖으로 섬겨서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고 치유하는 도구가 됩니다. 이런 안팎의 섬김이 모두 합쳐져서 지존하신 하나님을 향해 교회는 경배를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의 한 지체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가 이 땅에서 행복해지는 비결이고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는 모든 성도는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고통과 그리고 시련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 생활을 잘 하게 될 때 그 교회라는 산에 심겨진 나무처럼 튼튼하게 자라서 산이라고 불리는 교회의 도움을 주고 자신은 그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자신의 기쁨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불행하게도 이런 복음적인 그림이 보여 지는 바를 따라 교회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오늘 여기에 나와서 설교해주는 여러분들은 비교적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또 자기 교회 목사가 그렇게 말 안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정말 성경과는 거리가 먼 교회생활을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해도 이게 영적으로 성장하지를 않습니다. 성장하지 않으니까 마치 곪고 멍들고 심하면 암이 걸린 세포가 되어서 교회 전체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줍니다. 그러면 자기는 내가 혼자 신앙생활을 잘 못하는데 왜 나에게 보태어준 것이 있어, 나는 내 신앙 내가 알아서 하는데 뭐 보태준 것이 있어. 라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기 혼자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전체에 고통을 주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고통을 주는 것은 예수님을 칼로 찌르는 것과 똑같은 해로운 행위입니다. 악한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주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될 때 개인적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우리 각자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나라는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서 이 교회에 한 지체가 되어 있는데 건강합니까? 아니면 곪아서 다른 지체에게 통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되었습니까? 심하면 망가지고 썩어가서 다른 지체까지 상하게 하는 그런 원인이 되고 있습니까? 이것은 절대적으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적인 문제이고 이것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잘못된 신앙의 상태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하고 아프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바라보실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내기 위해서 흠 없는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해서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방황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주님의 몸에 접붙여져서 한 살, 한 뼈, 그리고 한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붙여놓으신 것은 여러분들이 이제 예수의 몸에 흐르고 있는 그 피를 잘 받고 영적으로 성장해서 이제 그리스도의 몸에 자연스러운 일부분이 되어서 그래서 각 몸에 지체로서 자기의 몸을 감당하면서 주님의 몸을 세우고 주님의 교회로 하여금 세상을 섬기는데 보탬이 되고 그 안에 여러분들을 행복하게 하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정반대로 그분을 그렇게 아프게 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많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 자신도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찌르고 아프게 하고 나면 그 고통과 아픔은 반드시 여러분 자신에게 돌아와서 그래서 여러분 자신도 전혀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제 교회가 세워지는 방식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정리하고 있습니다. 즉 은혜의 원천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서로 섬기게 되면 그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는 각 지체가 연락하고 상합해서 그래서 분량대로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간다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에서 우리들은 “연락하고 상합하여” 라고 되어 있는 이 성경구절을 통해서 성도의 연합의 교리를 먼저 발견하게 됩니다. 연락하고 상합한다고 하는 것은 대체적으로 하나하나 따로 있지 않고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그렇게 한 교회의 성도가 되기 전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로따로 떨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혹시 예수 믿기 전에 이웃처럼 친구처럼 지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육신적인 사이일 뿐 영적으로는 여러분 하나하나가 따로따로 떨어진 존재로서 상관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맨 처음 우리인간을 그렇게 상관없이 따로따로 떨어진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실 때 크게는 달과 별, 우주의 천체와 같이 커다란 것들도 창조하시고 새나 풀, 물고기 심지어 미생물같이 아주 작은 것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각각 종류가 다르게 창조하셨지만 그것들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모든 것들을 영적인 연결로 하나가 되게끔 묶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뿐만 아니라 우주에 있는 사물들, 그리고 육안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영적인 연결을 이루어놓으셨고 이 영적인 연결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충만한 영광을 그 통로를 통해 흘려보내셨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각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마다 기다랗게 연결된 성들이 있었고 창조가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연결된 선들 속에 찬란한 불빛들이 들어오게 하셔서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세계의 창조물들이 당신 자신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빛나고 거룩한 세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연결이 피조물 모두에게 있었고 하나님이 처음 창조한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에게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모든 피조의 세계가 각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게 되었고 가족과 같은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나하나는 각자 자기의 목적을 따라 창조되었지만 하나하나의 물체와 사물, 그리고 생물들은 각각 고유하게 기능하고 작용을 할 때 그 모든 움직임들이 하나님의 충만한 지혜와 권능 안에 있었습니다. 하나하나는 개별적인 목적을 가지고 작용하고 활동하고 있지만 그 모든 존재와 작용들은 하나님의 신령한 지혜 아래서 모두 연결이 되어서 창조의 원래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이 모든 관계들이 다 끊어지고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짐승과 짐승이 물고 뜯고 자연으로 인해서 인간이 피해를 당하고 인간에 의해서 자연이 파괴되는 이런 약육강식, 갈등과 고통들이 피조세계 속에 가득 들어오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인간의 범죄 때문에 하나님이 내리신 피조세계의 형벌이었습니다. 죄는 인간이 지었지만 그러나 이 모든 세계가 인간을 정점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원천인 그 인간이 타락하고 죄에 물들게 되자 모든 피조세계도 연결이 끊어지고 죄로 물들게 되고 창조세계와 인간 안에 깃들었던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은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 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믿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기 전에 각각 상관없이 따로 떨어진 존재들이 된 이유도 바로 이런 죄와 우리의 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상관없이 살고 우리 각자는 자신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위치에 있는 양 자기의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면서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인생의 진실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복음을 통해서 가르칩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파괴한 죄의 장본인이며 이 죄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고통과 다양한 시련들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죄와 그 죄로 말미암은 고통 때문에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었는데 예수님이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늘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몰랐지만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 복음을 전해주었고 그 복음은 우리의 영혼 안에 들리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밝은 빛을 비추어주셔서 우리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하셨고 그래서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고백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온 것,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 창조주를 몰라보았던 죄를 모두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시고 우리를 회개시키셔서 그래서 구원해준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진노의 자식, 저주의 아들이 아니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게 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각자 따로따로 떠돌던 원수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한 가족, 한 지체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 가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상관없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렇게 교회 안에서 접붙여놓으시게 되면 그들을 영적으로 다시 타락과 함께 상실했던 영적인 연결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래서 아무 상관없던 사람들인데 이제 교회에 와서 서로 영적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모두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몸이 될 때 원천이신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은혜가 흘러들어옵니다. 들어온 은혜가 이 사람에게 부어졌는데 이 사람에게 부어진 은혜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섬기게 하는 다른 사람을 돕게 하니까 그 사람에게 그 은혜가 흘러들어갑니다. 그래서 교회 전체가 이 은혜를 누리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마지막 날에 주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이렇게 연결된 사람들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끌어올려서 모두 구원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되고 지옥의 형벌에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분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이처럼 경기도 안양시 평촌 땅에 이렇게 세워진 열린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건물이 아니라 일정한 장소에 이렇게 모두 모인 사람들의 이 연합,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교회에는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도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럼 그것은 어떻게 생각해야지 됩니까? 묻고 싶을 것입니다. 항상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눈에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사이에 항상 불일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이처럼 교회에 등록하고 나와서 한 교회의 형식적인 식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교회는 참으로 그 사람이 영적으로 회심하고 거듭나서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항상 눈에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보다 큰 것이 일반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이런 사실들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어부가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그물을 던졌는데 많은 고기들이 걸렸습니다. 그 고기들을 어부가 모두 다 취하는가 하면 그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고기, 못 먹는 고기, 고기같이 생겼지만 사실은 고기가 아닌 것들 다 가려서 집어던져버리고 진짜 쓸 수 있는 고기들만이 그 그물을 통해서 어부에게 거두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거두어지게 된 것이 보이지 않는 교회라면 오만잡동사니가 그물에 다 걸려올 때 그것이 바로 보이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이런 궁금증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마귀의 자식들이 섞여 있구나. 진짜 거듭나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성도는 그만두고 그를 신자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신자를 모욕하는 것이 아닌가. 그를 교인이라고 불러주는 것도 사실은 성경적으로 볼 때 옳겠는가. 이런 의문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역사적으로 많이 고민하던 천재적인 교부 한 사람이 있었으니 터틀리므스 라고 하는 교부였습니다. 이 사람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신학적으로 많이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보이는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교리로 판단할 때 어느 정도는 이 사람이 아직까지도 회심하지 않았고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교인이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교인,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접붙여진 진정한 우리의 지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느 정도는 가려낼 수는 있겠지만 인간이 그 모든 것을 완벽하고 최종적으로 가려낸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낸 것은 소위 이야기하는 홀 클라이스트의 교리라고 하는 것, 즉 이렇게 눈에 보이는 교회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을 비록 그들 가운데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은 그들 모두를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그들의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교회가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교리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이미 교회에 나오기 전에 개인적으로 전도를 받고 깊이 회개하고 거듭나서 그래서 교회에 온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많은 성도들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에 왔습니다.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서, 혹은 유교가문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너무나 싫어서, 혹은 친구의 이끌림에 의해서, 사는 것이 너무나 외롭고 힘들어서, 여러 가지 이유에 있어서 교회에 이끌리어 오게 되었고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니까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신자가 되기로 주님을 영접하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주의 자녀가 되어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졌습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교회의 교인으로 속해 있었지만 후에 진정으로 회심하고 변화되어서 참다운 교회의 몸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경우라고 말할 수 있고 이것이 일반적인 신앙의 과정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간에 한번 우리가 가슴에 손을 얹고 우리들의 교회를 돌아보십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교인들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교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지 않고 죄인들을 회개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가 현저히 사라지게 되면 눈에 보이는 교인들 중 대부분이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는 그분의 몸에는 접붙여진 적이 없는 그런 교인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교회를 들어 올리실 때, 이렇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를 들어올리실 때 그렇게 거짓으로 회심하지도 않고 교회에 나와 있으면서 붙어 있던 사람들은 부스러기가 되어서 그 참된 교회로부터 모두 떨어지고 그들은 불신자와 좀더 나은 대접을 받지 못한 채 하나님의 심판에 처해질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참 신자가 되고 그리스도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될 수 있는 훌륭한 기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진정으로 거듭나고 회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교회에는 붙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에 살 같게 접붙여지지 못한 신자들을, 그 영혼의 상태들을 마치 교회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들을 깊이 끌어안고 사랑하며 그들의 영혼이 깨어나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처럼 자녀들의 손을 붙들고 교회에 나오는데 사실은 자신만 회심하고 자녀들은 회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함께 교회에 다녔지만 그 손을 놓고 한 사람은 지상에 남고 한 사람은 주님의 손에 이끌려 하늘로 들림을 받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교회에 나왔지만 나는 주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부르심을 받아 회심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이끌려 올라가게 되고 아내는 남았다고 생각해보고 또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교회에 나와서 눈에 보이는 교회에는 소속할 수 있도록 편입을 시켜드렸는데 거기까지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었는데 마지막 날에 자녀인 나는 구원을 받아서 주님의 손에 이끌려 들림을 받고 원로한 부모님들은 이 땅에 남아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많은 이 세상의 날들을 헛된 것들을 위해 수고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 내 딸, 그리고 사랑하는 내 아내와 회심하지 못한 내 남편,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내 동기간들인데도 보이는 교회에 등록되었다는 사실로 만족하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회심에 이르도록 기도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는 연합을 이루어 한 교인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인 보이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바로 가장 시급히 해야 할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먼 곳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와 똑같이 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함께 예배를 드리지만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 여러 가지 이유로 주님을 만나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사람들, 그렇게 출석하는 것이 자신의 공로를 쌓는 교리고 그리고 그렇게 예배생활 하는 것이 바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인 것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 어리고 무지한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는 많이 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기는 성도들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로 온 은혜는 이처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연결하고 또 상합시켜서 한 몸이 되게 만드는 놀라운 일을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서 구원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구원의 은혜는 성도들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은혜를 이야기하게 되는데 구원의 은혜와 성화의 은혜입니다. 한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진짜로 한 지체가 되어서 접붙여지게 됩니다. 이것은 원리적인 연합이고 이렇게 접붙여진 그리스도의 지체가 이제 그 연결을 잘 이루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화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졌다고 할지라도 그가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성령의 은혜 속에서 깨트려지고 변화되고 새로운 은혜 속으로 들어가야지만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상태에서 진짜 자연스러운 예수의 몸이 되어서 머리이신 예수님이 명하시는 대로 순종할 수 있고 또 머리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다른 모든 지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또 다른 지체로 존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락되고 상합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하나님의 모든 사랑의 마음으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을 살피십시오. 제가 여러분들에게 눈물로 권하는데 여러분들의 손을 가슴에 얹고 여러분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어떤지 헤아리십시오. 나는 지금 그대들을 야단치는 것이 아니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영혼이 마치 나의 영혼인 것처럼 내 마음에 손을 얹고 여러분들에게 사랑으로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보십시오. 여러분, 정말 거듭났습니까? 진정한 회심이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열린 교회의 교인으로서 만족하지 말고 진짜 여러분들이 예수님께 접붙여졌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몸이 되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신랑이시며 나는 주님의 신부이며, 그분은 내 안에 있고 나는 그분 안에 있고, 나는 그분께 접붙여졌고 그분은 나의 살이오, 나의 피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잘 살 때도 있고 조금 못 살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허물이 있을 때도 있고 순종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정말 여러분들이 한점의 살로서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들인지 여러분들에게 진정으로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들일까? 그래서 진짜 영적인 몸인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살로 붙어 있는 사람입니까? 그래서 여러분 영혼 안에 예수의 피가 흐릅니까? 그래서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사랑의 물이 흐르고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신경, 핏줄, 하나님의 물, 성령의 진액이 흘러가고 있습니까?
어제도 몇 분 장로님을 만나서 내가 물었습니다. 장로님들은 우리 교회에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있으리라고 봅니까? 한 20%쯤 될 것입니다. 한분은 15%쯤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믿는 길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이 주님께 접붙여지지 못한 것을 변명할 수 있을 것이고 목회자인 우리들이 여러분들을 사랑으로 돌보지 않았다면 교회에서 버림받았기 때문에 후회하는 거듭날 수없었고 회심할 수 없었다고 주님께 변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매순간 하나님은 수많은 지체들을 위해서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고 그리고 많은 말씀으로 구원의 길이 무엇이고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며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예수가 없으면 희망이 없는 죄인들인지를 하나님이 가르쳐주셨습니다. 11년 동안 저는 매번의 설교가 인생에 마지막인 것처럼 설교하려고 애써왔고 그대들의 영혼이 나의 영혼인 것처럼 때로는 야단치고, 때로는 눈물로 호소하며, 때로는 사랑으로 타이르고, 때로는 논리적으로 따지며 여러분들의 회심을 촉구했습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회심하지 않고 아직까지 구원받지 못해서 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지지 않다면 몸에 접붙여진 지체처럼 살려고 하는 모든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지 않은데 그것이 애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 지난 주간에 있었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몇 분 아신다고 그러는데 우리 교단에 소속된 총신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저를 조교수로 청빙을 했습니다. 나는 목회가 바빠서 그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랬더니 학생들이 목사님의 교회를 본받고 싶은 교회로 여기고 있으니 일주일에 50분씩 쉬는 월요일 날 오셔서 무엇이든지 좋으니 가르쳐주시면 조교수로 대우를 해드리고 교회인 이 대학에 교수로 저희들이 대우를 해드리고 그래서 오랫동안 원로하시도록 우리 학교와 연관을 갖게 해드린다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거절했습니다. 세 번, 네 번 부탁을 했고 그리고 행정적인 절차까지 고쳐가면서 저를 그렇게 불러주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총장님을 비롯해서 4분의 위원들이 와서 여기에 와서 교회를 돌아보고 저를 면접까지 하고 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며칠 전에 마음에 뜻을 세웠습니다. 저는 그렇게 한번 청빙을 받은 것으로 영광스럽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제의를 받은 목회자가 한국에서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서 격려를 해주었고 그리고 축하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전에 기도하면서 저는 마음으로 결심했습니다.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왜 안 갔는가 하고 제게 묻는다면 회심하지 않은 그대들 때문에 아직은 내가 교회를 그렇게 마음이 갈려서 섬길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 가서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힘을 다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고 회심하지 못했을 때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지 못했을 때 임하게 될 두려운 심판에 대해서 힘 있는 대로 설교했고, 사람들이 잘 설교하지 않는다고 하는 지옥에 대해서도 많이 설교했고, 사람들이 잘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그 말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서도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도 마음이 굳어져서 돌아오지 않은 지체들이 많이 있고 그들 때문에 그들의 남편이 울고, 아내가 아파하고, 자식들이 매일 철야를 합니다. 그런 나에게 교수가 무슨 의미가 있겠고 그리고 결국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묵상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 애쓰고 수고했지만 내가 충분히 울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내 품에 회심하지 못한 자식들이 이렇게 많습니다. 내 죄입니다. 예수 죽음의 정신이 나의 삶 속에 다 배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자식들이 아직까지 회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에 형식적으로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많이 죽겠습니다. 제가 더 많이 죽고 그리고 여러분들을 위해 늘 울었지만 모자랐나봅니다.
교회의 몸에 대한 영광스러운 교리가 있으면 뭐합니까? 여러분들이 거기에 접붙여지지 않았는데 그 영광이 그대들과 뭔 상관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그렇구나. 내가 11년 동안 영혼들을 위해서 살았고 그리고 늘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말하거니와 난 그대들로부터 물질을 취한 적이 없고 그리고 명예를 위해서 여러분들을 목양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예수 죽음의 정신이 나의 가슴속에 다 십자가에 못처럼 박히지 않으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남의 이야기처럼 듣고 회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결론에 저는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동안이나 저를 여러분들과 함께 있게 하실지 또 이 땅에서 살게 하실지 나는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도 기도했습니다. 얼마를 살게 하시든지 내 이 땅에 살아있는 날 동안 영광은 학교 교수도 아니고, 유명한 저술가도 아닙니다. 나의 가장 큰 영광은 여러분들의 회심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이름뿐인 교회에 소속된 것으로 만족하며 예수와 상관없는 여러분들이 참으로 회개하고 불 꺼진 등불과 같은 여러분들의 영혼에 예수의 생명의 빛이 흘러가고 죽은 자와 같은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하나님의 영생의 빛들이 쏟아져 들어가 그대들이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그것이 목회자인 저의 마음입니다. 내가 죽어 여러분들에게 그런 회심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전적으로 접붙여진 이 아름다운 회심이 남이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대들의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 많이 울고 아파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죽여서라도 그대들을 참다운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달라고 나는 그리스도 예수께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라도 여러분들에게는 용서와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매달리는 것까지만 내가 할 수 있지 회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대신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진실한 선포를 듣고 나는 눈에 보이는 교회에 속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는 속한 적이 없고 그리고 정말 그리스도께 떨어져 있었던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그리고 정말 예수께 접붙여져야지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며칠동안 하나님 앞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나의 목회지고 포도원인데 여러분들이 그렇게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셨는데 나의 불충함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에게 그런 놀라운 구원의 기쁨들이, 거듭남의 놀라운 기쁨들이 쓰여 지지를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야단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여러분들에게 회개를 하라고 닦달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여러분들에게 유언처럼 말합니다. 그대들은 회심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저의 이 말을 받아들이십시오.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매우 쉬운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아,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나는 너무나 긴 세월동안 눈에 보이는 교회에 덜렁거리며 다녔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껍데기는 새사람이 되었지만 속은 늘 옛 사람 그대로였습니다. 하나님, 나는 내 자신의 힘으로는 내가 새로워질 수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오늘 오셔서 이 불쌍한 탕자와 같은 저를 용서해주시고 구원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여러분들을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여러분들은 참으로 영생을 얻는 그 기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고 나면 하나님께서 아주 놀라운 은혜를 여러분들에게 주십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접붙여지게 될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누리고 있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예수께 접붙여진 참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가지가 될 때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구원을 얻은 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들은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고난이 오면 예전에는 혼자 괴로웠지만 이제는 내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그 예수님이 나를 붙들고 동행하십니다. 폭풍우 흑암 속을 지날 때도 그 주님이 동행하십니다. 시련과 고통의 불 가운데를 지날 때도 예전에는 혼자 갔지만 지금은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주님의 크신 사랑을 알아왔고 그리고 이 미천한 종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이 교회를 세운 초심은 큰 교회, 명성이 있는 목회자, 좋은 사택, 분에 넘치는 사례비, 그리고 큰 자동차를 타기 위해서 이 교회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 처음 마음이 회심하지 못한 채 유리하고 방황하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저를 불러주셨고 그것은 제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제가 이 마음을 일생동안 품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여러분들은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어느 지체가 와서 저에게 목사님, 너무 많이 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화가 났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정말 제가 많이 변했습니다.
우리 죄악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사람이 내게 와서 백번 변했다고 말해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나를 부른 게 아닙니다. 내가 부름 받은 게 자기들이 무슨 보탬을 주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비추어보니까 정말 변했습니다. 그래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직까지도 교회 속에서 발견하는 많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 어떻게 회심은 간신히 했지만 은혜아래서 미끄러져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얼마나 있어야지만 그 사람들이 모두 회심해서 참답게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마지막까지 이렇게 눈물을 흘리다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때 내 마음속에 깊이 다가왔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는 물욕도 없이, 명예도 없이, 취한 것 없이, 받은 것 없이 섬겼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정말 순종하던 그 초심으로부터 멀어진 것이 저 지체들의 눈에 보이면 사실은 그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성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안 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깨달은 경험이 그것입니다. 긴 세월동안 한번도 회심하지 못한 영혼을 위해 기도한 적 없고 그들의 영혼을 생각할 때 아프지 않을 적이 없지만 그러나 정말 예수 죽음의 정신으로 우리의 살 속까지 다 배어서 그들이 회심하지 못한 고통이 우리의 몸에 난 종기와 같은 고통처럼 우리의 몸을 찌르고 아프게 하는 그 질병의 고통처럼 느끼며 기도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많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렇게 슬픈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제가 여러분들에게 거짓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사랑하는 우리 믿음의 선생인 사도 바울이 서신 속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내 자랑이오, 내 기쁨이며 면류관인 너희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목회자의 영광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슨 자리를 탐내겠습니까? 무엇이 그에게 필요하겠습니까? 그의 양식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고 그의 기쁨의 면류관은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맺으면서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부탁합니다. 우리 기도합시다. 그리고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을 남의 영혼처럼 생각하지 말고 회개하라고 왜 믿음이 없냐고 닦달하지 말고 그리고 깊이 끌어안고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대신 울어주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정말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부담을 느끼고 생각을 한다는 것과 가슴을 찢는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은 시간동안 더 가치가 적은 일에 몰두하는 시간동안에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가슴을 찢고 피를 토하는 기도를 드렸더라면 그래서 내가 기도하다가 무릎이라도 상하고 심장이라도 터져서 혼절을 했더라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영혼들에게 빛을 주셨을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기도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영혼처럼 사랑하고 마치 교회는 그들을 위해서 울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아직 회심하지 못한 여기에 있는 신자들에게, 교육관에 흩어 있는 신자들에게 나는 오늘 주님의 모든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오늘 진실한 경고, 그리고 진실한 초청을 받아들이십시오. 눈에 보이는 교회에 나오시는 것이 행복하십니까? 그리고 아직까지 구원의 확신이 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그 분명한 표징이 없이 매일매일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많이 아파하면서 그러면서 초심으로 돌아갈 터이니 그대들도 초심으로 돌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더 이상 피하지 말고 그리고 왜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내가 왜 교회에 나올 수밖에 없는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는지 배우십시오. 그리고 깊이 여러분들의 죄를 회개하고 더 뉘우쳐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참다운 신자가 될 때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해주실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이 그렇게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 보이지 않는 교회로 접붙여질 때 하늘에서 천사들이 일어나 춤을 출 것이고 땅에서는 모든 성도들이 손을 들고 할렐루야 기뻐 찬송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정말 회심하고 참 교회에 접붙여지는 성도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의 도구, 성도의 섬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