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이 필요할 때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영적 전쟁의 때에 (시110:3) 2005.2.2 수요예배 1
2. 기꺼운 헌신자들 (시110:3) 2005.4.6 수요예배 13
3. 이슬같은 주의 백성들 (시110:3) 2005.4.27 수요예배 19
4. 주께서 부르실때에 (사6:8) 2005.5.4 수요예배 30
5. 추수할 일꾼을 부르심 (마9:37)2005.5.11 수요예배 39
6. 주를 위한 고난은 특권입니다. (행5:41)2005.5.18 수요예배 44
7. 사명을 위한 분투(빌1:30) 2005.5.25 수요예배 52
8. 헌신 중의 고난 (고후1:9)2005.6.1 수요예배 63
9. 썩기 위해 사는 밀알(요12:24)2005.6.8 수요예배 75
10. 뒤돌아 보지 않는 섬김 (눅 9:29)2005.6.15 수요예배 80
11. 죽기까지 지는 십자가 (눅 9:24)2005.6.22 수요예배 90
1. 영적 전쟁의 때에
성경말씀: 시편 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 도다. (시110:3)
오늘 우리가 본 이 시편 110편은 시편의 분류가운데서 전쟁 시 라고 분류되고 혹은 메시아 시편이라고도 분류됩니다. 110편은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신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성부 하나님이 성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윗 왕국시대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 이제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복음과 은혜로서 이 세상을 정복하시고 마지막에 당신에게 굴복하지 않는 이 세상을 심판하심으로 다윗의 위가 영원하리라고 하는 그 언약의 실현을 그리스도의 왕권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에 저항하려는 수많은 세력들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죄가 이 땅에 들어온 후로 구원한 백성들을 모아 그들로 교회를 이루게 하심으로서 이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하나님의 본거지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에 있는 모든 악과 그리고 그것에 원인인 사단은 이 교회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세워진 이후로부터 끊임없이 애써왔고, 그리고 미친 듯이 역사 속에서 이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몸부림 쳤지만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권능과 사랑, 그리고 신비하기까지 한 하나님의 지혜로서 교회들을 지켜오셨습니다. 결국 비록 이 땅에 세워진 교회는 겨자씨 같고, 그리고 작은 한 줌의 누룩 같았으나 결국 그 누룩, 겨자씨와 같은 작은 하나님의 나라의 씨앗인 교회는 점점 흥왕하게 되어서 결국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도록 정리되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시편 110편 3절은 우리들이 너무나 사랑하는 성경구절이고, 웬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는 그런 성경구절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우리의 입술에 매우 익숙해져 있는 이 성경구절이 번역에 있어서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 3절의 번역을 먼저 바로 잡고, 그리고 몇 주에 걸쳐서 이 3절을 수요일 마다 설교해 나갈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들이 제가 읽는 동안 필기도구가 있으면 준비하셔서 성경 가장 자리에 써 놓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3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 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 3절의 번역이 많이 잘못된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대로 번역한다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조금씩 끊어서 번역을 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백성이 기꺼이 (헌신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신은 무엇, 무엇 하기에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혹은 기꺼운 마음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헌신이라는 말은 말하자면 삽입한 것입니다. 보역한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은 무엇, 무엇 하기에 기꺼운 마음입니다. 언제냐 하면 ‘데욘’ 어떠한 날에 여기 보면 그랬는데 여기에 보면 권능의 날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권능의 날이 아니라. 당신의 용사의 날에 당신의 백성은 기꺼이 헌신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 놓고 그다음 나오는 구절은 설명이죠. 거룩한 위엄 안에서 당신의 백성은 당신의 용사의 날에 기꺼이 헌신하려고 합니다. 언제부터냐면 새벽의 자궁으로부터 그러니까 새벽이슬 같은 청년이라는 말은 전혀 잘못된 번역입니다. 여기에서 끊어집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면 당신의 백성이 새벽의 자궁으로부터 그러니까 꼭두새벽부터 그렇게 번역하면 딱 맞을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이 새벽의 자궁으로부터 거룩한 위엄 속에서 당신의 용사의 날에 기꺼이 헌신하려고 합니다. 거기에서 딱 끊어집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문장에 강한 쉼표가 있어서 거기에서 일단 끊어지고 그다음에 뭐가 나오느냐면 레카 당신을 위하여 탈 이슬입니다. 야르드데카 당신의 어린 아이들은 당신을 위한 이슬입니다. 이것이 정확한 직역입니다. 그러면 이제 직역하고 나니까 말이 잘 안 통하니까 제가 해설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은 꼭두새벽부터 거룩한 위엄으로 당신이 용사인 날에 즉 뭐냐면 전쟁의 날에 그런 뜻입니다. 당신의 전쟁의 날에 기꺼이 헌신하려고 합니다. 다시 한번 당신의 백성들은 꼭두새벽부터 거룩한 위엄으로 줄서서 당신의 전쟁의 날에 기꺼이 헌신하려고 합니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문장이 끊어지지 않았으니까 당신의 백성은 꼭두새벽부터 거룩한 위엄으로 줄서서 당신의 전쟁의 날에 기꺼이 헌신하려고 하고, 당신의 어린 아이들은 이것은 갖난 아기만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젊은이들을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젊은이들은 당신께 대하여 이슬입니다. 혹은 당신의 젊은이들은 당신을 위하여 이슬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 대충 여러분들이 번역은 바로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설교를 시작 하겠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권능의 날에 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이 히브리 성경에 뭐라고 했느냐면 “데이온 헬레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헬레카”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뭐냐면 “헬” 혹은 “하일” 이라고 하는 단어의 뒤에 “주님의” 라는 그 인칭 접미가 붙은 것입니다. 원래는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용사”입니다. 그런데 이 용사는 뭐냐면 하나님의 용사의 날에 그랬으니까 하나님이 소유한 어떤 용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용사가 되시는 날에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 전체에 흐르는 용사 사상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용사 사상이라는 것이 뭐냐면 “하일” 이라는 말은 원래 고유한 원어적 의미는 싸움에 나가는 무사, 힘센 장사 이런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용사들이 많으면 나라가 강성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인구조사를 한 것도 바로 이런 용사의 수를 헤아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 자신이 이스라엘의 용사라는 사상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언약 백성들에게 용사라고 하는 이 사상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던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당신을 용사, 전사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 자신을 소개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느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나서 이제 가나안 까지 가게 되는데 그 가나안 까지 가는 길은 이렇게 아무도 살지 않는 그런 무인지대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다니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부산을 가도 뭐 수천 개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과 몇 개 밖에 길이 없습니다. 아무 땅이나 가면 되는데 왜 길이 몇 개 밖에 없습니까. 아무 땅이나 갈수 있으면 그것은 비행기 타야 가지 땅을 어느 바보가 태백산맥 넘고, 소백산맥 넘고,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부산까지 가겠느냐는 것입니다. 안 가잖아요. 마찬가지로 통행하는 것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통행하려면 기본적으로 물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땅이 넓어도 지나가는 여정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 루트를 따라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다 미족들이 이미 살고 있어요. 남의 나라 땅을 다 밟고 지나가야합니다. 피할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쟁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재해도 물론이거니와 그것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전쟁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전쟁을 만나게 될 터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보증은 뭐냐면 떡을 늘 공급해 주신 다든지, 물을 공급해 주신 다든지 그런 정도의 약속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나 여호와가 그 전쟁에 개입한다.” 이것입니다.
지금 북한이 중국에 대해서 굉장히 썰렁해 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중국에 있는 외교부 부장이 북한을 방문해서 그 군사협정을 우리는 이제 폐기해야 되겠다. 그런 것입니다. 왜? 시대에 뒤떨어진 것입니다. 당신네가 만약에 전쟁 상태에 들어가면 중국이 자동으로 개입하게 되어 있는데 그 협정을 이제 우리 그만 끝냈으면 좋겠다. 그것은 보통 아주 중요한 맹방이 아니면 채결하지 않는 약조입니다. 상호방어조약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뭐냐면 내 백성이 내가 준 언약의 땅을 향해 가는데 그들을 누군가가 공격하면 그것은 곧 나를 향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내가 자동적으로 개입한다. 하나님이 그 전쟁에 개입하시면 하나님이 용사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하나의 은유적인 표현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계시해주실 때 항상 우리 주순에 맞게끔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실제로 전쟁에 개입하시는데 사실 모든 천지만물을 주관하시고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시는데 하나님이 무슨 그 쩨쩨하게 무슨 갑옷을 입고 내려오셔서 칼을 들고 적장과 한판 붙어보시겠습니까. 그것 아니잖아요. 그런데 전쟁이라는 문맥에 익숙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렇게 설명해 주셔야만 아주 이해가 쉽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용사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용사되심은 전쟁의 역사에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용사되심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용사되심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면 망가진 이 세상을 하나님이 구약 시대 때에 부분적으로 고치시다가 이제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이제 이런 식으로 해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않겠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시리는 수많은 대적들을 본격적으로 토벌하시기 위해서 토벌대의 총 사령관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류의 모든 이 세상의 구원받을 사람들의 모든 죄를 위해 대속하셔서 구원받은 백성들을 당신의 품으로 다 부르셔요. 부르셔서 부르신 그 사람들을 용사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의아해 하겠죠. “어, 아니 예수님은 우리보고 양떼라고 하셨는데 목사님은 왜 갑자기 우리 보고 용사라고 하나 부담스럽게 양이야 풀이나 뜯으면 되지 용사는 칼을 갈아야 되는데” 그런데 항상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라는 그림은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 따뜻하게 돌봄을 받고 그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라고 하는 면에 있어서는 무엇입니까? 그렇죠. 양입니다. 그래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서 주님이 보여주시고 싶으신 것이 뭐냐면 우리는 목자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다. 그분께 붙어있고, 그분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있는 존재이다. 그것을 설명하실 때는 씩씩한 군인을 묘사해서 설명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잖아요. 지금 설명하시고 싶은 것이 주님께 전적으로 기대고 의지하는 것을 묘사해야 되는데 혈혈단신으로 남아도 작열하게 싸워야할 군인의 그림을 가지고 들어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총 메고 돌아와서 “소대장님 나 외로워요.”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없잖아요. 그래서 여러 개의 비유로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니까 어느 하나를 가지고 전면적으로 하면 안 됩니다.
약간 빗나갔지만 성경 해설에 관한 것이니까 예를 들어서 하나 설명해주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그 구절을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금을 화학 기호로 표시한 다음에 소금이 뭐하는데 쓰는지를 백과사전적으로 다 연구해서 소금을 소금에 대한 것에 다 적용해버린 것입니다. 많이 넣으면 너무 짭니다. 조금 넣으면 조금 싱겁습니다. 알맞게 들어 가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이 너무 많아도 짜고 너무 적어도 싱겁고, 그래서 적당히 섞여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다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금은 집어넣으면 다 없어져서 국에 넣으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면서 막 수 십 가지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꽝입니다. 그것은 뭐냐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소금이라는 백과사전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데 사용되는 그 한 가지 기능에 집중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슨 풀면 없어지고, 너무 많이 넣으면 짜고 이런 것을 설명하시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총체적으로 그렇게 끌고 가면 안 됩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힌트를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해석의 원리를 잘 모르면 성경을 보면서 계속 공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쨌든지 그 용사로서. 양떼라는 측면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뭐냐면 용사의 측면을 갖는 것입니다. 뭐라고 합니까. 에베소서 6장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의 어두움의 주관자들에 관한 것이라.” 거기에 나오는 그 “씨름”이 “탈레” 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탈레는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경기입니다. 드라마나 아니면 영화 같은데 보면 엄청난 장사들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그다음에 여기에 띠를 띠고 권투 같은 격투기를 하잖아요. 그래서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하는 그런 격투기 있잖아요. 거기에 동원된 그 장사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씨름, 씨름이 그냥 삽바 메고 이렇게 넘어뜨리면 승리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씨름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씨름이라고 번역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격투는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한쪽이 죽기까지는 끝나지 않는 그 싸움으로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용사의 개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의 개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믿음의 방패, 원의 투구, 의의 흉배,” 등등의 이 무장들이 쭉 등장하잖아요. 그것이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은 너무 나약한 삶을 살아요. 주일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면서 우리들이 기도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자신의 죄에 대한 진지한 참회, 그리고 잘 살았어도 그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라고 하는 진실한 인정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삶에 대한 통절한 참회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헌신되게 살았던 삶을 그 공로는 하나님께 돌리고 그리고 잘못 살았던 삶에 대해서 통절히 회개하는 것과 그다음에 아주 비참한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가운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도 일주일 동안도 죄만 짓고 살았습니다. 아무것도 잘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일주일 동안 살아온 모든 사연이 그 하나님 앞에 지극히 이 세상에 나아가서 원수들에게 짓밟히고, 그냥 기를 못 펴고 살다가 와서 하나님 앞에 고자질 하고 감상의 눈물을 흘리는 그런 식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그런 용사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용사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곧 뭐냐면 하나님이 용사가 되시는 날에 하나님이 언제 용사가 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쟁의 위기가 있을 때에 바로 그 때에 당신의 백성들이 기꺼이 헌신하려고 하옵나이다. 여기에서 분사형태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있는 중입니다. 진행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이 딱 터졌는데 수많은 당신의 백성들이 헌신하려고 합니다. 전쟁이 나면 그다음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겨납니까? 전쟁이 나면 헌신하는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생겨나요. 줄지어서 자원하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꺼이 그 전쟁에 있어서 헌신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고나서 수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자원해서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을 때 미국에서 유학하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입대하기 위해서 조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쟁의 날에 기꺼운 헌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돌아간 것입니다. 그들이 왜 그랬을까요? 그런 것을 보면서 “아, 역시 미국 사람들이 위대해, 이스라엘 민족은 매우 특별하고 우월한 민족이야”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이 세상의 누구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는 뭐냐면 두 나라의 공통점은 뭐냐면 자기의 백성들에게 이 나라가 최고의 나라라고 하는 것을 심어주었습니다. 생각만 심어준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의 백성인 것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을 갖게 했습니다. 난 목회자이지만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배달의 민족이 어쩌고, 저쩌고, 뭐 반만년 무구한 역사가. 다 쓰레기 같은 얘기입니다. 배달의 민족 아니면 어떻고, 주문의 민족이면 어떻고. 배달하건 주문하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순수한 단일 민족이 어떻고, 단일 민족은 무슨 놈의 단일 민족입니까. 수없는 민족들이 지나갔는데, 그리고 단군 신상 같은 것이나 세워가지고 민족을 하나로 만들려고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나라도 경쟁력으로 승부를 하라는 것입니다. 진짜 정말 걱정입니다. 젊은이의 83%가 다시 태어나면 이 나라에서 안 태어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눈물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미국 사람들은 다시 전쟁이 일어나도 그렇게 합니다. 민족의 우수성, 민족은 무슨 민족입니까. 수없이 많은 민족들이 섞여 있는데 그러니까 국민의 위대성, 그런 것 아닙니다. 자기네 나라라는 상품이 전 세계에서 제일 좋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실제로 역사에 나타났습니다. 2차대전 때 이 사람들이 전쟁에 개입했죠. 그래서 독일 전선으로 이태리전선으로 투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원래 잡다한 민족이 모인 나라입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지원해서 배치해서 전방에 보내다 보니까 아니 자기네 청년들 중에 자기 고향사람들과 싸우는 이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왔는데 군은 미국군이 갔는데 독일 이태리 군이 전쟁하려고 갔는데 가보니까 자기네 마을입니다. 그래도 미친 듯이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승리를 위해서 싸웠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혈통 같은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와중에 얘기하면 미개한 나라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 나라가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지켜줄 수 있는 나라이고, 이 나라 안에서만 내가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수 있고, 존중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 라고 믿는 그 믿음이 그렇게 하게 한 것입니다. 가끔은 아주 탁월한 미치광이 같은 정치 지도자들이 나타나서 실상은 너무 그렇지 않은데 순간적으로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치 같이 아니면 파시스트들 같이 아니면 일본의 군국주의자들과 같이 지금의 북한같이 이렇게 그 백성들을 통합해서 순간적으로는 그 백성에게 우월감을 심어줄 수 있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얼마 가지를 않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면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히려 더 깊은 자괴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이 땅의 백성인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여러분들이 이 나라를 그렇게 만들어야합니다. 우리의 후손은 그 우리가 단군아래 한 핏줄이니까. 우리가 여기에 산다. 그러지 말고, 너 가고 싶은 대로 가 봐라. 그래도 이 나라에 살고 싶은 영어를 못해서 이 나라에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니라. 영어를 다 하고 별것을 다 해도 이 나라가 가장 자기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믿는 요령이 없고, 그리고 명민함이 없어서,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냥 이 땅에 붙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두루 다녀봐도 이만한 나라가 없다. 이 곳에서 나는 가장 잘 인간답게 살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고,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고, 그렇다. 라고 하는 확신을 줄 수 있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들이 그렇게 이 나라를 위해서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한 차원을 뛰어 넘으면 여호와의 전쟁의 날에 당신의 백성들이 기꺼이 헌신하려고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 나라보다 더 행복해 질 수 있고, 그 나라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으면서 사는 것 보다 더 기뻐할 수 있는 어느 나라에 여러분들이 속하고 싶은지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 할 것이 없으니” 그랬을 때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그 백성으로서의 최고의 자부심입니다. 숙명적인 선택의 기쁨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 속한 사람이면 그 나라가 가장 행복한 나라이고, 그 나라 안에서만 가장 즐거울 수 있으며 그 나라 안에서만 가장 참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의 전쟁의 날이” 무슨 이야기냐면 그렇게 내가 그 안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다고 믿는 그 나라가 전쟁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 때에 필요한 것은 기꺼이 그 전쟁을 위하여 헌신하고자 하는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본격적으로 이 땅에 임하기 시작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딱 오심과 같이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침투해서 미래에 이루어질 새 세상, 새로운 세상, 곧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의 나라 속으로 침투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나라는 아닌데 아직까지도 우리는 세상 나라에 살고 있는데 주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본격적으로 하늘나라의 실제적인 통치들이 역사를 파고 들어와서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것을 혁혁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평생을 귀신에 메여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 앞에 그 귀신들이 쫓겨나가고 질병에 놓여서 고생하던 사람들이 그 질병의 놀라운 나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축사와 병 고침, 그런 어떤 의료행위 내지는 국민보건의 기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임재의 현재적 통치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에 메여서 고생하고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귀신을 나가게 하고 절망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유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어두운 세상 속에 파고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이 세상의 나라는 오는 세대와 그리고 지금 현재의 세대와 그리고 앞으로 오게 될 하나님의 나라의 세대가 함께 섞이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맛보기로서 이미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실현된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그 은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임재의 통치, 그 속에서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승리하신 위대하고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미 우리 안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전에는 어때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들은 철저한 자원의 부족을 느끼면서 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있는 자원하나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혹시 또 본성의 빛에 의해서 지혜를 받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자원만을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늘의 자원이 필요하다 하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깨닫게 해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전에는 도저히 만져 볼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었던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위대한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의 효과들을 우리 자신에게 가져다주신 것입니다. 하늘의 자원을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기게 하시고 인생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희망을 갖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해 주시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의 자원들을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현재 우리를 통치하고 계시는 효과, 이것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도록 처음에 원천적인 원인을 제공하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이것들을 우리에게 임하도록 그렇게 기초를 놓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가 우리 안에서 실현되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이러한 그리스도의 예수의 구속의 공로로 인해서 하늘나라의 통치가 우리 자신에게 이미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 끊임없는 죄의 요소가 있고, 그리고 우리를 대항하는 악한 환경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를 엄습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이미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믿음의 원리를 따라서 살면 넉넉히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역사하는 죄의 힘도 크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그 은혜의 원리를 따라서 살고, 순종하고, 믿음으로 행하려고 하지 않고, 그 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현재적인 통치의 승리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승리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이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마지막 때 전체가 진짜 싸움의 날이 된 것입니다. 왜? 예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죄 아래서 사망의 지배를 받으며 거기에 복종하는 삶을 살았는데 은혜가 부어진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각 사람 속에 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해서 이 어둠과 죄악의 세력들과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와 사단의 권세는 거기에서 자기의 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치열하게 신자들과, 신자들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소멸하기 위해서 다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서 우리에게 주신 충족하고 놀라운 승리를 이야기 했던 사도 베드로가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으르렁대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나는 이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 검을 주러왔다. 내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고, 그다음에 불을 주러왔다. 그러면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염려하겠느냐” 그렇게 타는 듯한 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계획을 따라서 살려고 하면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 밖에 있는 이 세상의 옛 체재들과 싸워야합니다. 치열한 영적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날 나약해진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에는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영적인 전쟁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희망은 인간적인 위로의 차원으로 떨어졌고, 모든 것들을 철학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와서 자신의 인생의 곤고한 사정을 하나님 앞에 아뢰고, 그리고 인간적인 따뜻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연약한 공동체로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의 비극과 오늘날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근원들이 단지 이 땅의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인 인생의 결론이 착한 인도주의자의 삶을 살면 된다는 식으로 가르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영적인 현실은 무시해버리고 그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만이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눈에 보이는 인생사의 현실을 위해서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자기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에 이 기독교는 모두 인간의 상식의 차원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눈을 열어서 우리들이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것, 우리 개인은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에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끊임없이 죄의 세력과 싸우고, 그리고 자신의 삶을 파괴하려고 하는 악한 원수들, 마귀와의 싸움에 헌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서 영안을 열고 한번 보면 여러분 은혜 받은 자의 삶 주변에 얼마나 악한 영의 세력들이 집결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미 죄에 항복하고 굴복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마귀도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잘 되어가니까 누군가가 은혜를 받고 변화가 된다더라. 어느 교회가 성령이 역사하셔서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간다고 하더라. 그 때 본격적인 공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깨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자신의 삶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그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성화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진실한 자기 깨어짐과, 참회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끊임없이 순종하며 살려고 애를 쓰는 그래서 점점 더 예수의 모습을 닮아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 그 이상의 참된 그리스도인이 그 이상의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기독교가 수도종교와 다른 것이 무엇인지 나는 묻고 싶습니다. 성경이 그려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보고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발견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결해져요.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주님을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죄에 대한 사랑을 버려요, 그리고 그 깨뜨려진 본질 속에 성령의 끊임없는 부으심이 역사해요. 그래서 깨어진 본질 깊이깊이 스며들어서 그의 본성을 거룩하고 진실하게 변화시켜요.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신자가 착해져가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용사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성결한 사람이 아니면 결코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신령한 능력의 사람일 수 없습니다. 신령한 계시에 관한 빛 거룩한 능력, 그리고 사단의 끊임없는 공격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투쟁,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이 모든 것들은 순결한 마음에서 생겨나는 작용입니다. 불결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담대함, 그리고 이러한 용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단호함, 이런 것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리고 있는 착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마지막은 뭐냐면 이 땅에서 완성되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를 인해서 아파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그래서 그들로 영적으로 강한 사람이 되게 하셔서 그래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해 가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 땅을 이렇게 내려다보시면서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계집애 같이 찔찔 짜는 그런 신자들뿐이라면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죠.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분초라도 그분이 우리를 붙드시는 그 은혜의 작용이 없이는 우리는 우리다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많이 의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렇게 의존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약하지만 세상 앞에서는 강합니다. 또 그래야합니다. 지금 이 마지막 시대는 이러한 전쟁의 날입니다. 1907년에 평양에 대 부흥이 있기 전에 1906년도에 기도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선교사들이 모여서 회개하게 됩니다. 그 때에는 핍박도 별로없이 순조롭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때였습니다. 물론 백성들에게 핍박을 받았지만 정치적으로는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이 1900년대 초니까 한국은 사실 거의 짐승과 다름없는 그런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더군다나 일제 감정기였으니까 말하면 뭐합니까. 그런데 미국에서 온 선교사, 케나다 에서 온 선교사들은 그 자기 본국에서 그 화려한 생활 도구들 다 가지고 오고 심지어는 피서지까지 다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역이 계속해서 힘을 잃고 실패로 돌아가는 선교사들의 보고가 잇따랐습니다. 그 때에 와서 그 성경 공부 모임을 가지면서 기도모임 속에서 선교사들이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더니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놀랍게 부어주셨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날은 전쟁의 날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110편에서 이미 예고된 바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전쟁의 날에 여호와께서 용사가 되시는 그 전쟁의 날에 당신의 백성들이 기꺼이 헌신하려고 합니다. 혹은 기꺼이 헌신하려고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마지막 때에는 여러분 보기에 다 사람들이 마지막 때에는 부패하게 살고, 세상과 타협하고 사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안일하게 살고 있는 동안 이 지구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이 보석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기꺼이 이 전쟁의 날에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 위해서 나아옵니다. 모두들 먹고 마시고, 춤추고, 평안하다고 생각하며 휴식하는 이날에 하나님께 사랑받는 특별한 종들은 그 날에 울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리고 평안한 육신의 생활이 아니라. 부패해 가는 이 땅의 영적인 현실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그 영적인 현실을 타파하고자 용사가 되어서 싸우시는 하나님을 따르려고 한단 말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이 신앙을 통해서 도움을 좀 받아야 되겠다. 이것은 맨 처음 초보적인 신앙일 때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는 사랑스러워 보일 수 있죠. 제 혼자 힘으로 씩씩하게 살아가면서 죄악 가운데 지내던 백성들이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인생을 살수 없다고 생각하고, 주님 앞에 나와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겠습니까.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외로워서 살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 있는 자원이 부족한데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은혜의 자원이 모자란데 내 능력으로는 여기에서 이 갈급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주님 어떻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주님 앞에 매달려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를 내버려두신 적이 없습니다. 마음이 녹도록 간절히 기도하시면 하나님이 그 연약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해주시죠. 그래서 제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은혜의 경험을 하면서 깊이 깨닫는 것이 왜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을까? 나는 솔직히 엄마가 될 때가 더 많은데, 그리고 우리가 이제껏 살아온 것도 그런 하나님의 섬세한 보살핌입니다. 그 은혜를 힘입어서 우리들이 쓰러지지 않고 여태까지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있을 때에는 한없이 약해져도 괜찮습니다. 주님을 깊이 의지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깊이 의지한다는 것은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만 온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이것은 연약한 것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연약해지지만 이것은 의존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연약해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죠. 그래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에게 힘이 된다. 말씀하시고, 우리를 다시 이 세상으로 보내시죠.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수시로 주님 품에 안겼다가 또 세상으로 가고,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또 이 세상을 향해 갑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주님 품으로 회기 하는 것과 그 주님 품에서 세상으로 파송되는 것 사이에 끊임없는 반복이 바로 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한쪽밖에 없으면 은혜의 충전이 안 됩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고난을 받는 분명한 삶의 현장, 투쟁하는 삶의 현장이 없는 은혜의 경험들은 금방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은혜들을 잘 보존하는 껍질입니다. 여러분 “우왕청심원” 같은 약은 좀 귀하잖아요. 물론 더 비싼 약도 많지만 그래서 가끔 몸이 안 좋으면 먹습니다. “우황청심원”의 공통점은 뭐냐면 그것을 초 같은 것으로 봉했습니다. 그래서 습기나 이런 것들로 인해서 부패하지 않도록 봉하고 따고 나면 다시 하얀 종이가 나오고 혹은 비닐 같은 것이 나오고 그다음에 노란 황금색으로 가루로 입혔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짜 약 성분이 나오잖아요. 그렇게 해야지만 귀한 약품이 오랫동안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알약처럼 만들어 놓았다면 어떻게 될까요? 몇 달 지나고 나면 돌 맹이처럼 딱딱해져서 복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약효도 모두 날아가 버리고 말 것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그분의 품에 안겨서 경험하는 은혜의 경험입니다. 그 은혜의 달콤하고 아름다운 경험은 어떻게 보존되느냐면 의무를 따라서 충성되게 살아가는 분투하는 삶 속에서 그 은혜가 가장 잘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끊임없이 깨뜨려지는데도 본성이 잘 안 바뀌는 사람들 있죠. 정답은 뭐냐면 깨뜨려지는 것은 자주 깨뜨려지는데 그 본성의 변화는 깨뜨려짐으로만 충분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령의 은혜 속에 살아서 그 성령의 은혜가 그 깨어진 본성 속에 스며들어야합니다. 왜? 본질이 바뀌는 것은 부서뜨린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돌 맹이를 잘게 부수어도 돌 가루입니다. 사람을 아무리 부수어져도 그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은 뭐냐면 그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어진 후에 스며드는 성령님의 은혜가 그 본성을 변화시킵니다. 성령님의 본질은 하나님께 친근하고 신령한 것들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깊이 깨어진 본성 사이로 스며들어서 그를 쇄신시키면 그러면 그러한 성령의 본성이 그 속에 스며들어서 새로운 본성을 재창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지를 않아요. 그러면 뭐 끊임없이 깨어지는 경험은 하는데 지속적으로 은혜 가운데 있지 않으니까 그다음에 점점 더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런 성령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셔도 모든 사람이 지속적으로 은혜 안에 있고 싶어 하죠. “아, 내가 맛만 보고 다시 주님을 떠나야지.” 그런 계획을 가지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그렇게 깨어져도 지속적으로 성령의 은혜를 간직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삶이 말하자면 올곧지 않습니다. 그래서 깨뜨려지고 은혜를 받았는데도 올곧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깨어짐을 통해서 자기에게 알게 하신 의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본분을 따라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삶이 그렇게 올곧지 않으니까 계속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은혜가 부패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실제적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이런 원리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은혜의 경험이 아무리 소중하고 달콤하고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은혜에 대한 자기만족적인 삶을 살라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아닙니다. 은혜는 그 자체가 이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소명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거저 주시지만 계획이 없이 은혜를 주신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러한 은혜의 경험만을 엔조이 하려고 하고 도무지 하나님이 자신에게 왜 이러한 은혜를 주셨는지를 생각하고 거칠고 황무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아가야 되겠다. 라고 하는 집요하고 철저한 헌신이 없습니다. 그러면 금방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설립하고 10년 넘게 설교사역을 했으니까 별의 별 회중들을 다 만나요. 말씀을 듣고 은혜 받은 사람은 그런 사람을 못 만났겠습니까? 아니면 말씀을 듣고 강력한 반감을 느끼면서 교회 문을 박차고 나가는 사람은 못 만났겠습니까? 어떤 교인은 목사님 설교만 듣고 있으면 짜증이 난다고, 그런 사람은 못 만났겠습니까. 설교를 듣다가 분을 내면서 벌떡 일어나서 교회 문을 박차고 나가는 사람도 보았고, 말씀을 듣고 한없이 기뻐하는 사람도 보았고, 설교를 듣다가 절도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설교를 맛보는 사람들, 설교를 즐기는 사람들은 그들이 받는 은혜는 아주 단시간 안에 끝나요. 그리고 그 말씀을 인해서 오히려 그 심령이 아주 딱딱하게 굳어져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사람은 그래요. 처음에 와서는 말씀이 은혜가 많이 되었고, 심령을 막 수술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목사님 설교가 점점 변하더래요. 그래서 나는 항상 그러죠.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듣는 네가 더 많이 변해갔을 걸,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죠. 그렇게 은혜를 받으면서 삶이 변하지 않는데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 살아야지.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같이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바로 이것입니다. 은혜가 얼마나 좋아요. 오죽했으면 베드로가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우리 여기에서 살겠습니다.” 그 때 산 아래에서는 이 사람들이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초월적인 은혜를 주신 것은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고도 이 치열한 영적 전쟁의 날에 하나님이 용사가 되어서 친히 우리의 전쟁에 개입해주시는 이 전쟁의 날에 기꺼이 헌신하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아오는 그 희생과 헌신이 없다면 이것은 반드시 부패합니다. 얼마를 가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눈” 이라고 하는 말이 우리나라에는 너 댓 게 밖에 없습니다. 함박눈, 싸락눈, 짓 눈 개비, 또 뭐가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런데 에스키모인들 에게는 80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우리 눈에는 세 가지 정도밖에 안 보이는데 그 사람들 눈에는 80가지로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끊임없이 눈을 체험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피 흘리기까지 헌신하는 삶의 고난 받는 충성스러운 삶의 현장이 없으면 그 말씀이 다 그 말씀 같아 보이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경험되지 않으니까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새로운 삶의 장을 펼쳐가면서 그러면서 평범하게 이해되었던 진리들을 계속 깨닫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여자보다 강하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이것 이해 못할 사람 있으면 한번 손들어보세요. 그것은 세살 먹은 아이들도 무슨 뜻인지 다 압니다. 무슨 뜻인지 알죠. “어머니는 여자보다 강하다.” 엄마가 남자인가? 아니잖아요. 무슨 뜻인지 다 알잖아요. 그런데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시집가서 애들 낳고 그 애들을 위해서 고생고생하면서 그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그 아이들을 위해서 살려고 희생하고 수많은 고난의 골짜기를 넘을 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가슴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뼛속 깊이 스며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현장이 가져다주는 진리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 세상에 일반적인 진리에 대해서도 그렇다면 하물며 오묘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몰라요. 그리고 호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요. 처음에는 은혜를 받죠. 왜? 그렇게 은혜를 주셔야만 그 사람이 변화되니까 은혜를 받죠. 변화돼요.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되요.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 않아요. 고난 받는 자신의 삶을 피해요. 하나님이 용사가 되어서 우리의 전쟁의 싸움에 개입하시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는데 자신은 전쟁을 위해서 헌신하지 않아요. 눈을 떠서 한번 보세요. 끊임없이 하나님을 위한 좋은 뜻들이 공격을 당해요. 주님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헌신해서 세워놓은 그 일이 그 뒤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헌신적이지 못한 삶을 통해서 계속 무너져요. 승리하던 선교의 현장이 그 뒤를 이어서 피 흘리기까지 하나님을 위해서 싸워야 되겠다. 라고 하는 용사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후배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승리하던 현장들이 무너지기 시작해요. 복음의 승리가 들려오던 그 수많은 삶의 현장 속에 파괴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섬김의 현장도 한번 보십시오. 앞서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피 흘리기까지 헌신하고, 눈물을 흘리며 헌신할 때에는 그 곳에서 마귀가 거꾸러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능력과 증거들이 그 현장에서 나타났습니다. 뒤따라간 사람들도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 뒤를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헌신하기 위해서 그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선명한 영적인 싸움에서 지기 시작했습니다. 껍질은 남았지만 이 속에서 이미 모두 내용이 부패해져버려서 이 속에서 이미 내용이 부패해져버려서 신령한 승리, 하늘나라의 승리를 알려주는 아름다운 향취들이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애써서 섬기는 것이 다 이런 것이라고 위로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맡겨진 사명도 망가지고 그 일을 위해서 게을렀던 사람들의 영혼도 파괴되어 버려요. 그리고는 다시 거기가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가 나타나지 않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있는 그곳에는 영적인 승리의 흔적들이 나타나요. 하나님이 그렇게 축복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용사로 개입하셔서 그들과 함께 싸워주시는 그 현장에는 반드시 자신의 섬김의 그 현장을 전쟁터라고 생각하고, 죽기까지 기꺼운 마음으로 헌신하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단 한 사람이라고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자기를 쏟아 붓고 헌신하려고 할 때 거기서 하나님의 축복의 증표가 나타납니다. 한 사람이 그냥 일하면 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거기에서 죽고자 하면 거기에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교회가 어두운 세상을 고치고 망가진 세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신 자원들을 끊임없이 이 땅에 나누어주면서 강물처럼 흘러가야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흘러가기 위해서 때로는 수많은 전쟁에 동원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용사로서 산 사람들의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의 삶의 발자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피 흘리기까지 자신의 삶의 현장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그 현장이 영적인 전쟁터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을 다 바치며 지사충성하고 헌신하는 삶을 사는 사람, 그 사람들의 영혼만이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는 것입니다. 순결한 삶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기꺼운 헌신자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 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아오는도다. (시110:3)
이 성경 본문이 번역이 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지난번에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미 한 설교지만 조금 여러분들에게 정리를 해 드리고 그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미 우리가 읽었는데 그 성경 구절을 보면서 제가 히브리어 성경에서 해석해 드리는 것을 들으시면서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한번 메모를 하면서 대조하시면 오늘 설교를 듣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이렇게 나오는데 우리의 성경에서는 이렇게 나옵니다. “주님의 힘의 날에” 혹은 “주님의 용사의 날에” 그래서 주님이 용사가 되신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지난 시간에 상세하게 용사 사상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고, 결론은 주님이 용사되심, 주님이 힘이 있는 용사가 되시는 그 날은 곧 여호와의 전쟁의 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주의 용사의 날에 주님의 백성들이 기껍습니다.” 기껍다는 우리말 알죠. 즐겁게 무엇 무엇을 하고자합니다. 하여튼 무엇이든지 기꺼워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꺼워합니다. 어떻게 그러느냐면 “거룩한 옷을 입고” 그러는데 옷이 아니라. “거룩함의 위엄 안에서 그리고 그 문장이 쉼 표에 의해서 딱 끊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전체적으로 번역하면 ”당신의 용사의 날에 거룩함의 위엄 가운데 당신의 백성들은 기꺼워합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 무엇을 하려고합니다.’ 그런 뜻이죠. 그다음에 그리고 거기에서 쉼표로 딱 끊어지고 그다음 문장이 나오는데 그다음 나오는 문장이 뭐냐면 새벽의 태 여자의 모태, 자궁을 이야기합니다. 새벽의 자궁으로부터 혹은 새벽의 자궁에 그런 뜻입니다. 새벽의 장궁으로부터 당신의 자녀들은 당신을 향하여 이슬입니다. 혹은 당신을 위하여 이슬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시입니다. 이것을 딱 떨어지게 번역을 하려고 하면 안 되고 시는 약간 말이 잘 안 되잖아요. 말이 약간 안 되어야 시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제 연결을 시키면서 정확하게 해석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여호와의 전쟁의 날에 하나님이 용사가 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싸워 주셔야할 날에’ 무슨 뜻이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어떤 상황이 벌어져서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혹은 그 언약 백성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떤 무리들이 일어나서 그 백성과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하는 그 날에 그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꺼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이 전쟁에 나가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그 전쟁을 위해서 나아오는 이 전쟁의 상황의 모습을 머리에 그리면서 시인이 이 시를 쓴 것입니다. 전쟁의 날에 군대들이 어떻게 합니까? 게 떼처럼 막 땅 강아지처럼 땅에 깔려서 그냥 돌아다닙니까? 그것은 오합지졸이죠. 그것이 아니고 백성들이 중무장을 하고, 막 칼과 창을 들고 그리고 앞에는 이런 강력한 무기들이 가고, 그리고 그 백성들이 항오를 지어서 열을 지어서 쭉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의 백성들이 전쟁하기 위해서 나오는 것은 모두 창과 칼, 그리고 큰 전쟁의 도구들, 이런 것들이 군대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자비 한가 라고 하는 것은 전쟁의 역사를 살펴보면 여러분들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전쟁은 꼭 이겨야 할 필요가 없는 전쟁이라고 하는 전쟁은 존재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거기에는 무슨 규칙이고 그런 것도 필요 없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다수의 적군을 살상하고 아군을 보호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의 지략들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시무시한 전쟁의 도구들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과학과 인간의 모든 지혜가 모아져서 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무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날 강대국들이 그렇게 미친 듯이 과학을 연구하고 무기를 만드는 것이 요즘에 생겨난 일이 아닙니다. 옛날부터 그랬습니다. 모든 인간의 지혜의 영향이 모두 모여서 총화를 이루는 것이 어디냐면 무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군데들이 쭉 항오를 지어서 전투하기 위해서 걸어온 모습을 보면 그 군대가 강한 나라의 군대인지, 아니면 하찮은 나라의 군대인지 벌써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군대들이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병사들과 함께 전쟁으로 나아옵니다. 그것이 뭐냐면 그들의 위엄입니다. 나라도 없는 오합지졸과 같은 백성들은 그냥 삽도 들고 나오고 뭐 부엌칼도 들고 나오고, 곡괭이도 들고 나오고, 심지어는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으면 꽹과리라도 치면서 나오잖아요. 그런 것들은 위엄이 없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성경은 뭐라고 말하느냐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위엄은 그런 창과 칼이 아니라. 거룩함의 위엄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전쟁하고자 하는 백성들과는 구별된 그 거룩함의 위엄가운데서 백성들이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군대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주님의 교회가 위기를 맞이하고 큰 어려움 속에 있을 때에 다시 말해서 영적인 전쟁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 때에 그러한 영적인 전쟁에서 싸워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자 하는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갖춰야 할 가장 훌륭한 무기는 거룩함입니다. 왜냐면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고백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곧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싸움은 전적으로 영적싸움, 거기에서는 거룩함이 요구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그 백성들이 기꺼워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용사가 되어 주셔서 싸워주셔야 하는 그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꺼이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시편110편 3절에서 그리는 이 전쟁의 맥락이 뭐냐면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친전입니다. 전쟁 가운데 친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왕이 용상에 앉아서 군대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왕이 직접 갑옷을 입고 투구를 입고 걸어 나와서 그 전쟁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국운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면 내 왕국이 살고, 내가 이 싸움에서 진다면 내 왕국도 없고, 나도 끝이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왕이 좀처럼 중요한 전쟁이 아니면 친전을 안 하죠. 이것이 그런 친전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강림하셔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싸워주시는 날에 그분의 통치를 받는, 그분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친히 임하셔서 우리 중에 계시면서 싸우시는 그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찌 헌신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런 이야기입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에 한 설교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다음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새벽의 태” 태는 탯줄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자궁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새벽의 자궁으로부터 당신의 자녀들은 당신을 위하여 이슬입니다.” 이것을 시적으로 풀면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새벽의 자궁, 이라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냐면 아주 우리말로 쉽게 번역하면 꼭두새벽이라고 번역하면 됩니다. 무슨 얘기냐면 태양이 어두움 속에서 확 이렇게 떠오르는 그것을 마치 태에서 아이를 낳는 것처럼 이렇게 연상하면서 시를 쓴 것입니다. 그와 비슷한 것이 뭐냐면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고 고대 근동에 있는 사람들의 사유 속에서 이 달, 한 달, 두 달, 하는 이것이 “호대쉬” 입니다. 그런데 이 “호데쉬” 라고 하는 단어가 “하다쉬”라고 하는 단어와 같습니다. “하다쉬”는 뭐냐면 ‘새것’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생각했느냐면 달이 한번 떠오르고 기울어져서 초승달부터 시작해서 그믐달까지 해서 싹없어져 버리잖아요. 그다음에 다시 반대쪽에 그믐달에서 초승달로 넘어가잖아요. 고대 근동의 사람들은 이 달이 지난번 그 달이라고 생각을 안 하고 새달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달은 죽고 새로운 달이 태어난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똑같이 아침마다 태양이 떠오를 때 이것이 새로운 출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태로부터 그것이 마치 아이가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붉은 노을을 뿜으면서 해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새벽의 자궁으로부터” 이것은 뭐냐면 아이를 낳은 것을 연상하는 시어 적 표현입니다. 문학적으로. 그러니까 우리말로 번역하면 좀 맛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어쨌든지 꼭두새벽부터, 그렇게 번역하면 맛은 좀 없지만 의미는 그런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꼭두새벽부터 당신의 자녀들은 ‘옐러드’ 라는 단어인데 이것을 우리말 성경에서 ‘청년’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청년이라기보다는 원래 이것은 젖 먹는 아이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더 넓은 뜻으로 쓰이면 자녀 모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나이 많은 부모가 그 자식을 볼 때는 ‘옐러드’라는 것입니다. 아이다. ‘옐러드’가 아이를 낳다. 그런 뜻입니다. 여기에서 뭐냐면 앞에 나오는 “주의 백성” ‘암메카’라고 하는 단어하고 같은 뜻입니다. “당신의 백성들” 그러다가 똑같은 말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 뒤에 가서 “당신의 자녀들이”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청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언약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고 있는 언약 백성들 모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오는 이것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청년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새벽이슬 같은” 그러는데 “같은”이라는 말은 더더욱 안 나오고, 청년이라고 해서 청년들이 제일 좋아하는 성경구절입니다. 이것이 사실 자기네만 이슬 같겠습니까. 우리도 이슬이지. 몰라요. 내가 젊었으면 해석을 새롭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너무 구분해석입니다. 그것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청년이 아니더라도 이슬입니다. 이슬이 조금 쭈글쭈글 해서 그렇지 이슬입니다.
자, 이제 그러면 봅시다. “주의 자녀들은 꼭두새벽부터” 이것은 벌써 무엇을 의미합니까? 꼭두새벽부터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미 벌써 전쟁에 나온 백성들,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하면 20세부터 60세까지가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나이입니다. 거기에 참여한 모든 언약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청년이 아니라. 그 많은 사람들이 꼭두새벽부터 하나님 앞에 이슬이다. 이슬은 조금 있다 설명하겠습니다. 꼭두새벽부터 쫙 헌신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입니까? 전쟁을 위해서 그러니까 이 전쟁은 어떻게 해요? 도망가다가 헌병에게 붙잡혀서 강제로 끌려온 전쟁이 아니라. 이 전쟁에 나온 언약백성, 하나님의 모든 자녀, 주의 그 모든 자녀들에게 있어서 이 전쟁은 생사를 건 매우 중요한 전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우리를 불러주시잖아요.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면 우리는 아주 신나죠. 영원히 멸망될 수밖에 없는, 이미 멸망 받았던 그 비천하고 비참한 백성의 처지에서 하나님께 이제 구원을 받았습니다. 정말 신나죠. 이제는 정죄함도 없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리고 이제 지옥에도 안 가고,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한번 나를 구원하신 것을 취소하지도 않고, 날마다 나를 도와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그러니까 아주 너무 즐거운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 밖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베푸시는 은혜 안에는 반드시 소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죄 악 된 세상에서 멸망의 자식으로 살다가 지옥을 갈 것이냐? 천국을 갈 것이냐? 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제는 그 모든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서 생명의 나라로 옮겨진 백성이 되었지만 그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여전히 망가진 이 세상이고,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수많은 대적들이 자기 안에, 그리고 자기 밖에 온 세상에 가득히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끼리는 기가 막히게 서로 연결이 되어서 어마어마한 대군을 형성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이루려고, 회복하려고 하는 그 창조의 목적을 방해합니다. 그 수많은 백성들이 그렇게 수많은 이 세상의 것들이 그렇게 대적합니다. 그 때에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이제 하늘나라 군대에 입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 점에 있어서는 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의 신자가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사는 사람이 있고 충성되지 못하게 사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얼마나 그 전쟁에 기여하기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며 하나님 앞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자기의 유익을 버리고 희생하느냐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헌신이요. 충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여러분들이 오늘날 군대 생활 하고 있는 그 관점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쭉 보면 전부다 영창감입니다. 이렇게 군대생활을 해서 그 군대에 붙어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어느 자리인지도 알지 못하고, 심지어는 예수 믿은 지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자기가 발령 받은 곳이 어디인지도 몰라요. 그것이 바로 사명 없이 사는 사람 아닙니까? 왜 살아요? 사명이 없는 사람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못 만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괜히 사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살아있는 것이죠. 인간의 목숨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하찮고, 내일 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기약할 수 없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저희 집사람 큰 오빠가 돌아가셨는데 며칠 전에 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바쁘니까 일체 손위 처남이지만 못 갔습니다. 그런데 왠지 올해는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 갔습니다. 선물 하나 들고, 그래서 잠깐 같이 점심 먹고, 담소하다가 나왔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이었습니다 .아침까지 잘 먹고, 횡단보도에서 차가 와서 들이받아서 직사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안에 병원에서 바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뭐 60도 안 되셨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몰랐을 때에는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죠. 주님을 못 만났으니까 사명도 없고, 왜 사는지, 이 세상이 왜 존재하는지, 내가 무엇을 기여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그것을 몰랐죠.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죠. 물론 자기 깐에는 아무렇게나 살지 않고, 정성들여 살지만 결국은 뭐냐면 자기 자신을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죠. 그것이 얼마나 허무 한가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시잖아요. 그렇게 우리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박 윤선 목사님이 자기의 생애에 쓴 자서전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제도 내 날이 아니고 내일도 나의 날이 아니다. 오직 나의 날은 오늘 하루 지금 살아있는 순간일 뿐이니 매 순간 나는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인생의 신조였습니다.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은 불현듯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을 예수 믿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지 다 배우게 해 주셨습니다. 희미하게 깨달을까봐 아주 분명한 교회를 만나서 그래서 아주 자세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깨뜨려지고 나니까 그다음에 하나님이 왜 자기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부르셔서 주님의 자녀 삼으셨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발견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그것을 깊이 깨닫고 나면 그다음에 무엇이 떠오르죠.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셨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뭐냐면 사명입니다. 그런 사명으로 나를 부르신 것을 느끼는 것이 소명입니다. 그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명감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살아있는 인생입니다. 그가 비록 많은 부를 누리고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고 그리고 많은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발견하고 그러한 사명에 매여서 누구를 위해서 내 무엇을 헌신하며 살아야 될지 그렇게 살아야 하는 위치가 어디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진짜 살아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 박수갈채 받고, 사람들에게 존귀함을 받는 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인간의 영혼에 있는 깊은 외로움이나, 그 영혼이 홀로 있는 그 상태를 달래줄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도 예수님 믿는 어느 여 배우 한 사람이 자살했습니다. 그 사람의 자살을 놓고 그 사람 구원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그러면서 나보고 몇 번 물어보는데 그것이 뭐 그렇게 궁금해요. 그것이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부러운 것이 뭐 있습니까. 꽃같이 젊은 날에 다른 사람과 비교될 수 없는 미모를 갖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박수갈채를 보내고, 그렇게 하면서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가 왜 그래요? 그런 것들이 절대로 우리의 영혼에 참다운 위로를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한번 여러분들이 구원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입대한 군인이라고 생각을 하고 생각하세요.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적극적인 공격적인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신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아주 명료하게 이야기 하고 있는데도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데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항상 자기는 마치 병원에 입원한 환자인 것처럼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환자가 어떻게 그렇게 죄를 지을 때는 힘이 그렇게 세요. 그 악을 행하고 죄를 지을 때는 용사보다도 힘이 세요. 그리고 불리할 때만 항상 자기를 중환자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꾸로 의에 대해서는 병자요. 죄에 대해서는 펄펄 뛰는 용사로 자기를 간주하면서 사는데 이것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해주신 목적에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오늘 여기에 있는 언약 백성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주의 자녀들이 꼭두새벽부터 전쟁터에 새카맣게 나아오는 것, 아주 명료하게 눈을 뜨자마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자신의 신분이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 분명한 인식을 아주 또렷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백성들은.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모두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한결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 정도는 다르고, 삶의 상황은 상이하지만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과 은혜를 받지 않은 성도가 어디 있습니까? 성도라는 이름 자체가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다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붙들려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그런 사랑을 받아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디에다 세워주셨습니까? 그리고 지금 그 세워주신 그 자리에 있습니까? 그리고 그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싸우시기 위해서 강림하는 그 날에 여러분도 그 전쟁에 목숨을 걸었습니까? 정말 걸었습니까? 그래서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의 백성이 열렬하지 않은 것은 큰 병입니다. 열렬해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받은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 완수한 그 일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하나의 의무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많은 부가 없고 부유하지 않고, 높은 지위 없고, 주목해주는 사람 없어도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귀한 사람이고 큰 사람입니다. 주께서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 주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알고도 항상 게으르고 나태하며 마지못해서 그 일을 행하는 싫증난 사람들 중에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동행해주시던 사람, 삶의 어느 구간에서든지 항상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해주신 은혜의 간증이 살아있는 사람, 그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주님을 위해 주님을 위해 목숨을 걸던 사람이었습니다. 남달리 주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남이 받지 못한 사명을 깨달았고, 남이 받지 못한 그 사명을 받고, 거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열렬하게 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주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태도를 보면 정말 우리가 왜 하나님을 못 만났는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3. 이슬같은 주의 백성들
성경말씀: 시편 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 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 도다.(시110:3)
두 번이나 오늘 읽어드린 3절을 설교했기 때문에 다시 이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되풀이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제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 중에서 오늘 설교함으로서 3절을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나아옵니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사실 히브리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있지 않고, “새벽의 태, 혹은 새벽의 자궁으로부터 새벽의 태로부터 주님의 자녀들이 당신을 위하여 이슬입니다. 혹은 당신에게 대하여 이슬입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제 우리들이 우리말의 성경에서 바로 잡아야 될 것은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이” 아니라. “새벽의 태로부터” 그러니까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새벽인데 새벽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퍼지는 것이 새벽 아닙니까. 그것을 출산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의 태로부터 이것이 태를 열고 어두움이 밝음을 잉태하는데 이것이 이제 태를 열고 나오면서 이 빛이 발하면서 이제 어두움이 물러가고 아침이 오고, 정오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태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아직 캄캄한 꼭두새벽에 이렇게 번역하면 딱 맞는 것입니다. “아직도 캄캄한 꼭두새벽부터 주님의 자녀들이 당신을 위해서 이슬입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하나 바로 잡을 것은 “새벽이슬 같은 청년이 아니라. 아직도 캄캄한 꼭두새벽부터 이제 새벽이 조금 밝으려고 하는 아직은 어두운 면에 있어서는 밤이나 진배없는 바로 그 시간부터 당신의 청년들이 아니라. 주님의 자녀들이 그러니까 이것은 여기 나오는 ‘옐레그”라고 하는 단어가 원래는 갓난아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갓난 애기가 전쟁터에 나올 리가 없죠. 그러니까 여기에서 청년이라고 하는데 청년이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에 “나아르” 라는 단어가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청년이라기보다는 포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서 젊은 청년도 포함되고 나이든 사람도 포함되고 이스라엘에서 보면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나이가 20세에서부터 60세까지 입니다. 병들지 않은 그 사람이 용사로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범위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그 사람들이 이제 주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언약 백성이잖아요. 그 사람들이 이제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디를 나온다는 것입니까? 전쟁터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용사가 되시는 그 날에 주님이 친히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셔야 하는 바로 그 날에 주님 혼자 싸우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단수가 아닌 복수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이 구속하여서 태어나게 하신 주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자식들이 주님 앞에 이슬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결국 여기에서 무엇을 보여주느냐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제 전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 때는 전적인 헌신이 필요하잖아요.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국가에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그 싸움이 놀면서 해도 되는 싸움이라면 쉬지만 국운이 걸린 싸움이라고 할 것 같으면 나라에 있는 모든 자원을 다 동원해서 그 전쟁에 쏟아 붓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국운을 건 전쟁에는 종종 왕이 친전을 나가는 것입니다. 이 문맥이 바로 그 문맥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다시 들으세요. 그 왕이 친전을 나가는 것입니다. 왕이 그 용사들 중에 한 사람이 되어서 나아가니까 그것이 뭐냐면 왕이 생사를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 전쟁은 국운이 걸린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왕이 무슨 좀도둑이나 잡으러 그렇게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국운이 걸린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전쟁에 지면 내 용상도 없고, 왕위도 없다. 왕가 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이 친전을 나가게 되면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왕이 이 싸움에 생사를 걸었는데 옛날에 누구처럼 녹음기 하나 켜놓고 자기는 도망가고 말이죠. 이런 지도자들은 썩은 지도자들입니다. 거기에서 왕이 친전을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나라에 있는 모든 자원 중에 최후의 자원이 무엇입니까? 왕의 생명입니다. 그것도 왕이 전쟁터에 내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군대를 위해서 화살촉을 만들고, 창을 만들고 그러는데 뭐 수지가 안 맞습니다. 단가가 안 맞습니다. 뭐 쇠 덩어리를 들고 오려면 너무 힘듭니다. 뭐 아이고 더운 날에 그 쇠를 불을 때서 녹입니까. 땀이 너무 많이 납니다. 이게 됩니까? 안 됩니까?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거의 반역죄에 가까운 것입니다. 우리도 말이죠. 하나님 앞에 섬기면서 살아갈 때 우리가 언제 하나님 앞에 헌신을 안 할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이 “야, 이제 너희들 너무 많이 헌신해서 이제는 내가 헌신이 필요 없다. 그러니까 좀 한 서너 달 동안 방탕하면서 쉬어라.” 하나님이 그러시는 때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생애도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애 내내 쉬지 일하셨습니다. 왜? 주님의 탄식하심이 그것 아닙니까. 눈을 들어서 세상을 보니까 희어져서 추수하게 된 것입니다. 어죽 답답했으면 뭐라고 합니까? 야, 너희들 제발 기도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추수할 일꾼 좀 보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라. 그러니까 당신이 하나님이시면서도 당신 자신이 해야 되는 일인데도 다 못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고 헌신을 안 해도 좋을 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의 삶을 떠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사명을 감당해 나가려고 하다가 보면 그것이 개인적인 차원이든지 교회적인 차원이든지 국가적인 차원이든지 가정적인 차원이든지 간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특별히 헌신하게 하시는 그런 지점들이 있다고 하는 사실만큼은 우리들이 부인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그런 때가 바로 뭐냐면 하나님이 친전을 나서시는 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하나님이 자주 자주 이스라엘을 격려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은 먼저 가나안으로 들어가라. 위험이 모두 제거되면 내가 뒤 따라 갈께. 그러시지 않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앞서 행하리니” 하나님이 먼저 가십니다. 그리고 뒤에 백성들이 쫙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친전 개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친히 나서셔서 특별히 커다란 싸움을 벌여야 하는 그런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펼치면 끝이 없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설명 드리자면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적 삶에 있어서 왜 하나님이 그 공동체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가는 길을 항상 똑같은 강도로 헌신하면서 민민하게 가게 하시지를 않고 왜 때로는 평탄한 길을 가게 하시다가 이런 고 바위가 나오게 하시고 그리고 때로는 그 불을 통과하게 하시고, 물을 통과하게 하시고 왜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경험하게 하실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해서 가나안까지 정복해가는 역사를 보면 아니잖아요. 매일 전쟁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죠. 그러나 매일 평탄한 길을 걸어간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죠. 만나를 먹으며 감격하고 메추라기를 먹으면서 즐거워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게 계신데도 그러한 것들을 당하게 하십니다. 이것을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사랑하시던 그 때가 바로 가나안에 입성하던 때인데 그 때는 왜 그렇게 치열한 전쟁들이 있었습니까? 물론 여리고 성 같은데서 기적 적인 승리를 주시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지 전쟁을 겪잖아요. 전투하면서 나가잖아요. 담대하게 싸우면서 나갑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밋밋하게 인도하시지 않으시고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친전하셔서 용사가 되어주시는 그런 날들이 있게끔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제 여기에서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어떻게 사용하시냐면 어떤 특별한 헌신이 요구되는 영적전쟁의 상황, 특별한 헌신이 요구되는 위기 앞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그런 기회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기회를 통해서 내가 이렇게 개인적으로 기도하고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지만 내가 동떨어진 내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언약백성으로서 한 공동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그런 것들을 계기로 해서 진짜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은 이 지체들을 지체로서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6.25참전 용사시거든요. 지금도 상이 군인이십니다. 전투하다가 총에 맞으셔서 그분은 직접 참전을 하셔서 북한군 포로도 잡아보고, 다 경험을 했으니까 생생한 증언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면 명령이 떨어지면 몇 월 며칠 몇 시까지 너희 부대는 저 고지에 있는 적군이 점령하고 있는 저 지역이 전략적으로 너무 중요하니까 저기를 탈환해야 된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연대별로 명령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연대에서 계획을 짜는 것입니다. 저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연대에서 대대, 대대에서 다시 중대, 다 임무를 배치해서 모든 활약을 총동원해서 거기를 공격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산에 그렇게 사람들이 숨어서 전쟁을 하는데 사실 대포를 쏴서 그 적군을 점령하다고 하지만 그것이 사실 적군에게 피해를 입힌다고 하지만 그 사람들은 바보입니까. 숨을 만큼 다 숨죠. 더군다나 어두운 밤이 되면 누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마지막에 폭격은 퍼붓는다고 할지라도 마지막에 그 전투상황을 정리 시키는 것은 역시 위험을 무릎 쓰고 보병들이 가서 총 들고 고지를 점령하고 깃발을 꽂음으로서 전쟁이 말하자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상식이잖아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느냐면 돌격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제 우리 생각에는 우리가 보는 6.25 영화 같은데 보면 중대장이나 소대장이 막 총알이 쏟아지는데 이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액스트라와 주인공의 차이는 액스트라는 소리만 나도 죽고 주인공은 폭탄이 터져도 안 죽어요. 그런데 어쨌든지 그런 주인공이 막 비 오듯 폭탄이 쏟아지고 총알이 날아오는데 나를 따르라. 그러면서 돌격 앞으로 하잖아요. 그것은 만화에나 나오는 것이고, 실제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면 지휘관은 항상 뒤에서 남아요. 왜? 탈영병들이 나오니까. 죽고 사는 문제니까. 그러니까 이제 뒤에서 돌격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다가 막 뛰어간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인지 진짜 폭탄이 머리위로 떨어지지 않는 한 절대로 총에 맞지 않을 장소로 순식간에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그 바위 위에 거머리처럼 딱 달아 붙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앞으로 전진을 해야지. 전진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 전진, 돌격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건빵인가 뭘 꺼내서 먹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상황이 어쩌다 한번 경험하는 상황이 아니라. 너무 오래 경험하게 되면 만성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 우리 아버님이 한번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투 중 잠시 휴식 시간이었는데 다 쓰러진 어느 집에서 잠이 들었데요. 그런데 폭탄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폭탄이 떨어지는데 도저히 잠을 깰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파편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발로 차면서 주무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담대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전쟁 속에서 만성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까먹는다는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뭐냐면 그 옆에 누가 딱 달라붙어서 “나도 하나만 달라” 그러면 줄까요? 안 줄까요? 안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왜 줍니까. 그러다가 이제 중대장이나 소대장이 나중에 안 되겠으면 거기를 겨냥해서 총을 쏜다는 것입니다. 맞히지는 안는데 그 근처에다 갈기는 것입니다. “이놈의 자식들 공격안하면 다 총살이라고” 그러면 할 수 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막 뛰어가는데 우두두둑 날아와서 옆에 있는 동료가 막 만신창이가 되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지는 것입니다. 건빵도 못 얻어먹고,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면 거의 정신이상에 가까울 정도로 동료애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말하자면 복수심에 불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막 이제 거의 정신이상 상태가 될 정도로 거의 전쟁에 말려들면서 그러면서 흔히 만화에서 나오는 그런 장면들이 실제로 연출되는 것입니다. 그 때는 목숨이고 뭐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그 전쟁을 수행하면서 이제 동료들이 형제나 부모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거기에다 비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전우애 입니다. 그래 전우애는 전쟁 속에서 전우애가 엮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이 공동체를 밋밋한 길을 걸어가게 아니하시고, 어떤 특별한 난관의 섭리 속에 부딪히게 하셔서 전쟁의 날 같은 것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모든 영적이고 물질적인 자원을 쏟아 붓지 않으면 안 되는 난관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전쟁의 날입니다. 그 때에 다 쏟아 부으면서 거기에 헌신할 때 그 때에 교회가 뜨겁게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사소한 문제들을 털어버리고 그리고 뜨겁게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매진하는 가운데 공동체의 영성을 쇄신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목사님 아니 그러면 교회가 그렇게 어려우면 온 교인이 빠짐없이 그렇게 뜨겁게 한 마음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요.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하나가 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정말로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930년대에 미국의 신학교에서 학생들이 9명이 모여서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부흥을 위해서 기대했데요. 9명이 시작한 기도회가 나중에 교수들까지 모이면서 300명이 모이는 기도회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느냐면 지도를 딱 가리키면서 하나님 이 나라에 부흥을 주셔야 됩니다. 그리고 정말 피를 토하듯이 한 마음이 되어서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신기하게 하나님의 역사가 손가락을 따라서 역사하더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면 온전히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서 어떤 위기의 상황을 만나고 혹은 위기가 아니더라고 정복해야할 특별한 상황을 만나게 되었을 때 거기에 참여하면서 한 마음이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영혼의 놀라운 축복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말하자면 올바르지 않은 마음을 품고 이탈하게 될 때 그 때 자신이 깊은 영적인 손해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때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뭐냐면 여기에 나오는 “주의 자녀들” 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뭐냐면 청년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나아갈 수 있는 성인이 된 모든 남자들을 가리켜서 그 사람들이 주님 앞에 이슬입니다. 깊이 마음 깊은 곳에서 헌신하기로 작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꼭두새벽부터 나와서 생명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려고 대기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잊혀지지 않는데 어느 날 지하실 교회에 있을 때 예배당에 갔는데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풍덩하고 빠졌습니다. 그러니까 한 40센티는 꽉 찬 것입니다. 종종 있는 일이었으니까. 지금 보면 미련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물에 빠지면서 발을 담그고 새벽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물을 푸자고. 그런데 그 때 만약에 전기가 올랐으면 우리 다 순교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물이 쏟아지는데 그 때 교인이 몇 명 안 되니까 뻔하잖아요. 그래서 전화를 하면 즉시 달려올 사람 몇 사람만 연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사람은 즉시 달려올 줄 알았는데 새벽에 전화를 했는데 9시쯤 왔어요. 물을 다 푼 다음에 그래서 무슨 일이 있나보다. 그랬더니 나중에 며칠 지나서 안 것인데 물이 찼으니까 빨리 나오라고 소식 듣고 나서 면도하고, 샤워하고, 아침 챙겨먹고, 구두까지 닦아 신고, 그리고 나온 것입니다. 여기에 나온 “새벽의 태로부터 주님의 자녀들은 주님에게 이슬입니다.” 라고 한 이 말의 정 반대입니다. 아직 어두운 꼭두새벽이 아니라. 동이 다 터서 싸움이 종결될 때에 그때도 구두끈을 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복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의 전쟁에 기꺼이 자신을 헌신하려고 하는 모든 것을 다 바친 자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벽의 태로부터 그들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새벽의 태로부터 그때부터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이슬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가 여기에서 많이 배우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솔직히 마지못해서 의무로 주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는 헌신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벌써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태도들을 보면 알잖아요. 이것을 마지못해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일을 잘 성취해서 주님이 이 일을 통해서 더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어 하시는 더 큰 일을 이루실 수 있도록 거기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 본인도 알고,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들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누구 사람에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이 하나님이 더 크게 이루시려고 하는 그 일에 기여하는 그런 일이 되기 위해서 애지중지하는 마음, 그 마음이 필요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벌써 틀립니다. 그렇게 하는 것과 그렇게 하지 않는 그것은 너무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 많은 노력을 그 일을 위해 기울였는데도 이렇게 그것을 기꺼이 잘 완수해서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겠다. 라고 하는 의지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많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수많은 노력들이 폐기처분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자원들이 낭비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달란트의 비유에서 보면 그렇게 잘 충성되게 주인이 맡긴 달란트를 사용해서 많이 남긴 종들이 주인을 만났을 때 주님이 제일먼저 한 칭찬이 무엇이었습니까? “잘 하였도다.” 그들은 잘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따라온 그것이 무엇입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 두 가지는 동떨어진 칭찬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늘 하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특별히 사역자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오늘도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가 뭔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그르쳐요. 그래서 일을 망가뜨려요. 그러면 돈, 시간 모든 것들이 손해를 보지 않습니까. 내가 마음 아파하고 염려하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이렇게 하려고 하다 가져가다가 떨어뜨려서 깨뜨려져서 수포로 돌아갔어요. 그러면 그 때 내가 안타까운 것이 뭐냐면 이 일 하나가 망가졌기 때문에 들어간 비용이나 손해 때문이 아니라. 저 사람 속에 있는 이렇게 잘 떨어뜨려서 깨뜨리기를 좋아하는 그런 경향성들이 있는데 저것이 안 고쳐진 상태에서 계속 일을 하면 장소만 틀려질 뿐이지 계속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생을 살면서 그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지금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나라의 한 모퉁이를 섬기고 있는데 사실 자기는 그런 생각을 가졌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계속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일생을 살았는데 마지막에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렇게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너 왜 그랬니? 진짜 네가 세상에 있는 날 동안 네가 손대었기 때문에 나는 하늘에서 계속 근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평가를 받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잘 이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잘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도 그런 안타까움을 어떤 사람들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래서 잘 들으세요. 적어두어도 좋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맡겨주셨을 때 그것을 하나님 앞에 잘 감당해 나가면 그 개별적인 의무를 잘 감당해 나가는 가운데 그 사람이 착하고 충성된 인격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결함이나 문제들 때문에 그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도록 자기를 방치하면 일을 그렇게 잘못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이 점점 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 죽임의 교리에 있어서 개별적인 의무 수행에 있어서 죄를 죽이는 비결이고 은혜를 강화하는 비결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물론 무슨 교회에서 일꾼을 세울 때도 마찬가지고 혹은 교역자나 직원들을 우리가 섬길 수 있도록 우리가 부르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워낙 잘 갖추어진 사람들을 우리들이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와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럴 때 있잖아요. 전문적인 지식은 있는데 신앙이 영 아닐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나는 전문적인 기술을 신앙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분명히 부족한대도 그 사람을 그 임무를 부여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어떤 기대를 거느냐면 이 사명을 감당해 가는 가운데 이 사람이 지금은 부족하지만 온전해져서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일에 있어서 저 자신이 산 증인이잖아요. 제가 뭐, 저는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제가 지금 방금 아침까지 광주에 있는 한 800명 직원이 있는 그 병원에 가서 제가 집회를 하고 왔습니다. 그 집회를 하는데 집회하면 늘 목사가 하는 것이지만 그 관부들을 모아놓고 하는 특강이 있었는데 그것이 경영과 지도력에 관한 특강이었습니다. 설교가 아니라. 그것을 꼭 해달라고 요청을 해서 가서 경영에 대해서 사실 웃기죠. 무슨 목사가 경영에 대해서, 경영과 간부들의 지도력에 대해서 제가 강의를 했는데 하여튼 저도 좋았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도 너무 좋아서 하루만 더 있다가 가라고 하는 것을 수요예배 때 열린 교인들이 기다리기 때문에 가봐야 한다고 하고 뿌리치고 제가 왔습니다. 잘했죠. 그런데 거기에서도 얘기하는 그것입니다. 뭐냐면 그렇게 말이죠. 아무것도 저는 진짜 할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거기 1년에 매출액이 500억이 넘고, 직원이 800명이나 되는데 사실 우리 교회는 거기에 비하면 대형 마트와 구멍가게 정도 밖에 안 되잖아요. 그런데 내가 그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끊임없이 분투하면서 자신의 임무를 최고의 품질로 완수하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은 조직에 도움이 안 된다. 그런 사람들이 만약 조직에 리더가 되면 그 조직은 부패한다. 그런 사람은 그냥 일당이나 벌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한다. 문제는 뭐냐면 기꺼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것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내가 모든 것을 다 수행하겠다. 그런 것입니다.
몇 해 전에 봄페이 유물전 여기에서 한 것 기억나시죠. 그 봄페이 유물전에 나온 화보들을 보면 눈길을 끄는 그것이 두 개가 있습니다. 봄페이는 페스비우스 화산에서 한 8킬로 이상 떨어져 있는 도시였거든요. 그런데 그 화산이 폭발하면서 그 재가 날아와서 순식간에 확 묻혀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우리를 참 가슴 저미게 만드는 두 점을 제가 보았습니다. 하나는 뭐냐면 그 화산재가 일시에 확 덮어서 사람들이 그냥 이러고 죽은 사람, 자다가 죽은 사람, 뭐 쭈그리고 죽은 사람, 불 떼다가 죽은 사람 뭐 별 사람이 다 있는데 그것이 그대로 딱 묻혀버려서 석고처럼 굳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뜨거운 재에 묻히니까 살은 다 타지만 이질적인 물체가 재에 묻혔으니까 그 부분이 이렇게 덩어리가 응고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두 개 중 하나가 뭐냐면 엄마가 어린 아이를 꼭 끌어안고 죽은 것입니다. 엄마도 죽고 어린 아이도 죽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뭐하는 사람인지는 모르는데 창을 꼿꼿이 들고 죽은 것입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임무에서 이탈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꼭 끌어안고 결국 이 아이에게 피해를 안 주기 위해서 이 아이를 꼭 끌어안고 죽은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정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특별히 그렇게 창을 들고 꼿꼿이 죽은 그 병사를 보면서 그랬습니다. “야, 정말 우리가 이런 헌신이 필요한데 자기에게 맡겨주신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예수가 나를 위해 생명 버리셨으니. 이것이 나의 무덤이 된다고 할지라도 내가 여기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꼿꼿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이런 사람, 주님이 얼마나 사랑하실까? 우리가 이렇게 게으르고 나태하게 사는데도 이 교회가 유지되어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만큼 서 가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못 살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나는 이번에도 집회에 갔다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감동을 경험했습니다. 뭐냐면 목사님 한분이 계시는데 우리 교회에도 한번 모시려고 합니다. 우리 후배 목사님인데 무슨 새 생명 운동을 한데요. 뭐 목사가 되면 열심히 설교하고 그러는데 그것이 뭔가 그랬더니 한번 가 보시겠느냐고 해서 피곤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점심 먹고, 거기 갔어요. 정말 감동을 받았습니다. 산 속에다 그 복지 가들이 조금씩 내 돈을 가지고 집을 예쁘게 지어놓고, 거기에 누가 와 있느냐면 말기 암 환자들이 한 15명이 와 있었습니다. 꼭 암 환자만 받는 것이 아닌데 아무튼 말기 암 환자들, 병원에서 다 종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면 거기에 와서 그 공기 좋은데서 와서 요양을 하는 것입니다. 이분이 하는 말이 뭐냐면 그냥 요양을 시키는 정도만 되어서 안 되고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또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고쳐서 그래서 이들이 전이적으로 치유가 되게 하는 것이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와서 제일먼저 배우는 것이 뭐냐면 예전에 자기를 가슴 아프게 했던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모든 사람들을 마지막 꺼져가는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 인사가 누구를 만나든지 “사랑합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것이 인사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운동하고 산책 코스가 있습니다. 거기는 완전히 청정 지역입니다. 그리고 거기 텃밭에서 기른 채소나 이런 것들을 가지고 완전한 생식으로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여 앉아서 찬양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뭐 좋은 유행가도 같이 부르고 안 믿는 사람들도 오니까. 그러면서 함께 모여서 체조하고, 그리고 서로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하고 말이죠. 그런데 병자로서의 얼굴에 근심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이 사람들이 여기에서 치유되기를 바라지만 치유가 안 된다고 하더라도 정말 이 사람들에게는 행복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1달 만에 죽는다고 선고 받았는데 6개월이 되도록 안 죽고 그리고 이 사람이 죽음을 너무나 두려워했었는데 그 속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들을 배우면서 그렇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그리고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지론이 뭐냐면 사랑에 닫는 세포는 암도 이긴다는 모토입니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겨우 15명인데 그 사람들이 내는 돈이 내가 보기에는 밥 값 밖에는 안돼요.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일의 크기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거기에 세워준 자리. 그래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것들을 당신이 큰 꿈을 가져라. 그래서 이런 것을 하나만 만들지 말고 우리나라 전체에 한 20개 만들어서 콘도처럼 체인을 만들어서 여기 와서 한 6개월씩 있는데 얼마나 지겹냐. 그래서 1개월 있는 다음에 제주도로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 있다가 답답하면 지리산으로 이동하고, 이러다가 전국한번 돌고 서울로 다시 건강해져서 돌아오면 그러면 우리 교회에 와서 등록하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랬더니 바로 아, 그러면 좋겠네요. 그래서 그러면 좋겠네요. 아니라. 꼭 그렇게 되어야 된다. 그런 큰 꿈을 가져라. 그러면서 많이 격려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한번에 안 된다. 왜냐면 당신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이 있겠느냐. 그것이 집만 지어주고 환자들만 데려다주면 다 그렇게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발을 씻기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있는 물질적인 자원으로만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헌신하고 그 교인 15명밖에 안 되도 그들 하나하나를 죽으면 시체를 묻으면서도 말이죠. 그러면서 그러는 것입니다. 진짜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최초로 인간답게 사는 것을 여기 와서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나는 암 말기는 아니어도 나도 와서 한 1달쯤 살아봤으면 좋겠다. 그랬습니다. 그 자리에서 진짜 무공해로 만든 야채를 그 자리에서 음식을 해서 주는 것을 먹으면서 말이죠. 정말 밝아지는 것을 느껴요.
나는 지금 해야 될 하나님의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진짜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고, 주님이 일꾼이 부르셔요. 얼마나 많은 곳에서 일꾼을 부르시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벽의 태로부터 이슬처럼 주님 앞에 나와서 헌신하기를 대기하는 그런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정말 몰라요. 그러면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자신의 삶을 아무것도 아닌 헛된 것에 낭비하면서 인생을 죽입니다. 그런 인생이 있으면 남이나 주지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고 그렇게 살아서 하나님 앞에 이다음에 주님을 어떻게 만나겠습니까. 그 큰 은혜를 받고 그렇게 안일하게 살고, 자기 사랑에 빠져서 부패한 날들을 보낸 후에 그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는 다 망가뜨리고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어떻게 창조의 목적에 기여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말이죠. 기꺼운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주께 하듯이 나를 세워주신 이 자리가 주님이 나에게 세워주신 자리고 내 생명이 이 사명과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살기를 원하는 한 이 사명을 버릴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이 생명 사명 사상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이 생명 사명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의 의의와 존재의 의의를 이 사명 속에서 찾았습니다. 그것과 함께 죽고 그것과 함께 살기를 결심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을 다 동원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말이죠. 속았습니까? 그들은 갔으나 많은 열매들을 맺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바로 생명 사명 사상입니다. 내가 아니면 이룰 수 없고, 이 일을 이루기 전까지는 내가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여러분들의 가슴 속에 없다면 여러분들은 아직 충분히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일이 큰일이어야 될 필요는 없습니다. 지극히 작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작아 보이는 그 일에 생명을 걸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그 헌신과 생명 사명 사상이 나사처럼 더 세미하게 얽혀져서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굴러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거기에 기요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진짜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친밀한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같이 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린 아이처럼 두려워 떨면서 주님의 손을 의지해서 자신의 부족과 잘못으로 인하여 사명이 망가질까봐 노심초사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과,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자기 사랑에 빠진 그 악하고 게으른 자녀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동일하게 취급하시겠습니까.
그러면 마지막으로 여기에 나오는 “이슬” 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것은 크게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 하나는 뭐냐면 수가 많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새벽에 나가서 이슬을 보신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슬은 어느 한 부분에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슬이 온 지면에 모두 내립니다. 작은 물방울이 쫙 깔려서 새벽에 이슬이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여호와의 전쟁의 날에 기꺼운 마음으로 헌신하겠다고 꼭두새벽부터 나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원자가 있는지 말하자면 땅을 온통 뒤덮을 정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전쟁의 날에, 주님이 친전하시는 그 날에 나. 주를 따르겠노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광경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래서 말이죠. 잘 들으세요. 모두가 게으르고 악하게 살아가고 주를 위해서 헌신하지 않는데 한 사람만 뼈가 부스러지도록 주님의 일을 하는 것, 그것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만 헌신할 뿐 아니라 나와 함께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처럼 헌신하면서 살아가게 만들어야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하느냐면 진짜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 게으르고 주님을 향해 태만하게 살아갈 때 독야청청하면서 혼자만 가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명 자가 아닙니다. 사명자게에게는 자신 안에 있는 불덩어리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붙여줄 수 있는 능력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제가 충성 시리즈를 방배동 교회에 있을 때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여러분들이 꼭 한번 다시 들어보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통찰들이 굉장히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상당수가 인격이 착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설교 한 적이 있습니다. 독선적이고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결국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충성한답시고 꽤 많이 수고를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뒷받침이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내가 충성스럽게 가잖아요. 사람들이 그것을 따라오지를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충성스럽게 가기는 가는 것 같은데 자기같이 안 따라오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갖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피땀 흘려 교회를 섬기는 가운데 지들이 하는 것이 뭐가 있어. 이렇게 적대적인 감정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면 소인배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전통적인 말로 하자면 군자가 아닙니다. 소인배입니다. 진짜로 큰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처럼 살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가슴속에 자기 속에 불타고 있는 이 비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번에도 어떤 광주에 있는 지도층 인사 한 분을 만났는데 식사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소인은 규제요. 작은 사람은 죽을 때 재물을 남기고 죽고, 중이는 유명이요. 그보다 좀 큰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죽고, 대인을 유인이라. 큰 사람은 사람을 남기고 죽습니다.” 자기 닮은 사람을 남기고 죽습니다. 그러면서 그분 설명이 예수님이 대표적인 분이십니다. 사람을 남기고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 속에 자기와 똑같은 사람,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슬이 온 지면에 잔뜩 퍼진 것처럼 그렇게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의 전쟁의 날에 주를 위해서 헌신하기 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여러분 잘 들으세요. 뼈아픈 얘기니까. 교회에서도 일을 맡겨보면 교역자든지, 집사든지, 누구든지 다 마찬가지입니다. 눈 덩이처럼 사역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전혀 그렇게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무엇을 하나 맡겨주면 이 사람이 일을 해 나가면서 계속해서 좋은 사람이 뭉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그 사람에게 맡기기 전까지는 눈에도 띄지 않던 재능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 주위에 모이면서 눈 덩이처럼 뭉쳐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해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든 일을 하나 해 놓고 나면 처음에는 두 세 사람이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1-20명 되는 많은 일꾼들이 거기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 섬기는 자입니다. 그래서 진짜 좋은 신앙의 인격과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주 어려운 일을 하고 위기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사람을 함께 세워줍니다. 그런데 이게 정 반대의 소인배들을 만나게 되면 “야, 이것 일 같이 해봐” 그리고 10명을 모아놓으면 마지막에 일을 다 끝내지도 못한 채 산산이 사분 오일 찢어져서 마지막에 편 가르기 해서 자기 똘마니 몇 명 남겨놓고 다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산산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뭐냐면 속이 좁은 지도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일을 맡기면 교회에 해가 됩니다. 그런 분들은 자기 자신의 인격의 변화를 위해서 깊이 기도하고 자기 자신을 그런 일들을 통해서 돌아보아야합니다. 그래서 이 통이 큰 지도자를 위기를 극복하면서 일꾼들을 세워주고 속이 좁은 지도자는 위기가 한번 오면 분열이 일어나면서 똘마니 남겨 놓고 모두 적수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슬” 이라고 하는 말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많은 주의 사람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후레시니스’ ‘신선함’ 입니다. 여러분들 아침 이슬을 한번 보신 적 있습니까? 아침에 이슬을 보면 이슬에서 냄새나는 것 아십니까? 풀 냄새가 나면서 이슬 나름대로 독특한 습기를 머금은 공기의 냄새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신선함 입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의 일을 주의 전쟁의 날에 싸움을 하겠다고 나왔는데 구태 의연한 자세가 아닙니다. “애이, 맨 날 하는 싸움 오늘도 한번 가서 해 볼까.” 그리고 말이죠. 발이나 차고 그리고 돌 맹이나 차면서 나오는 마치 밥 벌어 먹기 위해서 할 수 없이 공사판에 끌려가는 인부같이 그렇게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 주영 씨가 자기의 자서전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구멍가게를 하면서 아침마다 구멍가게의 문을 열 때 설레는 마음으로 열었데요.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날까?”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우리도 아침마다 교회의 문을 열 때 그런 마음으로 열어보자. 교회의 문을 열면서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어떤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그리고 영혼의 변화를 주실까. 오늘 내가 살아가는 날 동안 어떤 사람을 만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실까? 내가 오늘 영혼을 섬기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영혼을 위해서 기다리셨던 어떤 놀라운 역사를 나를 통해 펼치실까? 이런 기대감을 시작되는 ‘후레시니스’ 신선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어때요? 전쟁에서 패배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위기에 부딪힌 이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실 친전하시는 왕에 의해서 이루어질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면서 나아온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신선하다. 라고 하는 것은 순수한 것을 의미합니다. 전혀 순수함. 여러분 기억나시죠. 집사 되고 나서 제일 처음 여기에 나와서 기도하던 때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때 제일 잘 했습니다. 왜? 거기에는 진심이 있었습니다. 두려워 떠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선함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적을 이기는 그런 뒤덮음 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양이 많다는 이야기와 통용되지만 이슬이 내리면 온 지면을 뒤덮는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온 지면을 만나가 뒤덮은 것처럼 온 지면을 다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왕이 친전하시는 이 전쟁의 날에 헌신하기 위해서 나온 사람들의 이 전쟁에 임하는 이 사람들의 이 전의, 그리고 이 사람들이 전쟁에 임하면서 가지고 있는 승리를 위한 열망, 사기 이런 것들이 적군을 뒤덮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슬이 땅 전체를 뒤덮은 것처럼 보면 이슬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다 뒤덮은 것입니다. 이런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께서 헌신이 필요하다고 부르시는 그 전쟁의 날에 새까맣게 나아가는데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 전쟁에 대한 기대와 그리고 사기 이런 것들이 가득 차서 반드시 우리들이 이 일을 이룰 수 있다. 라고 하는 확신이 가득 찬 기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배에 오면서 일제 시대 때 있었던 일, 역사를 잠깐 보았는데 말이죠. 그 일본 천황 히로이도가 정오에 4분 10초 정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것을 전체에 방송이 다 나왔습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그 방송 나오자마자 “슛 골인” 하는 것처럼 “와,” 그렇게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4시간 내지 5시간 동안 잠잠한 것입니다. 어떤 청년들이 미리 알고 “와 우리 해방되었다.” 그리고 막 소리 지르니까 그 동네 어른들이 경망스럽게 까분다고 말이지 조용히 있지 못하느냐고 야단치는 기록들이 나옵니다. 그러다가 4-5시간 지나면서 형무소 문이 열리고 이제 정치범들이 형무소에서 출옥되기 시작하니까 그 때 이제 거리가 술렁거리기 시작하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게 꿈꾸고 기다리던 광복인데 그렇게 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이 이러한 위대한 전쟁을 해야 할 놀라운 헌신이 필요한 날에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그런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뭐냐면 하나님이 이 전쟁에서 친히 함께 하시고 우리가 왕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우리의 왕은 이 전쟁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의 부족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그것이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앙이잖아요. 그들이 자신들보다 강하다는 것은 여호수아와 갈렙이 부인했습니까? 그들의 보고가 틀렸습니까?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 같다. 사실 좀 과장이지만 그들이 기골이 장대하고 요세도 탄탄하고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 없다. 그랬더니 여호수아와 갈렙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렇게 얘기했습니까? 맞다. 그것은 사실이야. 그러나 우리만 가서 싸우라고 하면 우리가 이길 수 없을지 모르지만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주님이 이 일을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면 반드시 할 수 있다. 그러면서 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한 얘기와 똑같은 것입니다. 남북 전쟁을 하면서 말이죠. 우리가 두려운 것은 적군의 숫자나 무기가 아니다.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정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기뻐하신다면 원수들이 아무리 많은 군대들을 거느리고 있고, 좋은 병기들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는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이 전쟁을 이기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꺾을 수 있어도 하나님은 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이런 기백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벌써 중요한 것은 뭐냐면 이게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냐? 그리고 이 일이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냐?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이 일로 부르셨느냐? 우리가 거기에 아멘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만왕의 왕이신 그 주님이 친전하시는 그 전쟁에는 패배함이 있을 수 없다. 라고 하는 그 신앙을 가지고 우리가 그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죽으면 작열한 죽음이요.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이기면 우리들이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 적용을 해보세요. 여러분 이 교회가 향우 10년 동안 이제 이 세상을 흘러갈 때 이런 때를 수없이 만날 것입니다. 이제껏 우리들이 헌신한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더 큰 차원의 헌신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이미 그런 일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패배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마음에 두려워하는 실망적인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믿는 그래서 그 전쟁의 승패에 자신의 전 모든 자원을 걸고 거기에 헌신하는 300명의 기드온의 용사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더 많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마지막 날에 그런 모든 하나님의 전쟁에서 승리의 주역들이 되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통해 어찌 영광을 받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4. 주께서 부르실때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이 장면은 그 유명한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는 부분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라고 해서 모두 다 똑같은 선지자가 아닙니다. 신약의 사도라고 해서 모두 다 똑같은 사도들이 아닌 것은 오늘날 성도라고 해서 똑같은 성도가 아닌 것과 유사하죠. 그래서 구약시대에도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저는 대게 그 선지자들은 최소한 A급 선지자, B급 선지자. C급 선지자 이렇게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급수가 무엇을 의미하냐? 모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 모두 충성되게 산 선지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 그래서 그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에 있어서 선지자들이 각각 차이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중에서 이 이사야 선지자 같은 사람들은 예레미야 선지자나 혹은 에스겔 선지자 등과 어깨를 겨루는 A급 선지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탁월한 신학적인 깊이를 가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깊이를 가진 선지자였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사도바울이나 요한 사도나. 그다음에 베드로나 이런 사람들이 A급 사도라고 말할 것 같으면 그 사람들은 탁월한 신학적인 깊이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사람들이죠. 꼭 주님이 불러주신 12사도 속에 들지는 않지만 그러나 야보고서를 쓴 야고보 선생 같은 사람들은 직접적인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성경을 썼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은 사도바울과 어깨를 겨루는 사도로 우리들이 자리매김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열린 교회 성도들은 닫힌 교회 성도들과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죠. 전혀 웃지를 않으시네, 찔리시나보죠. 그래서 다 다른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 이사야 선지자는 제가 별명을 하나 붙였습니다. 별명이 뭐냐면 “하나님 영광의 신학의 선지자” 입니다. 그래서 모든 선지자들이 대부분 근본에 있어서는 그러했지만 특별히 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그 사무치는 갈망이 그 책 전체에 배어있습니다. 66장이나 되는 엄청난 분량에 하나님의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중요한 선지자인가 하는 것을 알 수 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사야 선지자는 그렇게 탁월한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에 사로잡힌 그런 선지지 이었는데 왜 그러면 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을 소유하고 그 신학이 그의 모든 선포 속에 배어있는 그래서 그의 메시지를 다른 모든 선지자들과 구별하게 만드는 그런 메시지를 소유한 사람이 되었을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소명의 체험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모두 다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똑같이 사역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미가 선지자 같은 경우는 가난한 자를 향한 긍휼을 외쳤죠. 아모스 선지자 같은 선지자는 의로운 삶을 외쳤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사랑의 사연을 외쳤죠. 학개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전의 신학의 선지자였죠. 이렇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다양한 강조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을 했는데 그것은 마치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계신 광대한 성품을 균형 있게 이해는 하지만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메시지를 따라서 외칠 때에 어떤 선지자는 흐느끼는 사랑을 어떤 선지자는 불같은 공의를 어떤 사람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긍휼을 어떤 선지자는 얼음같이 돌같이 탄탄한 믿음을 그렇게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으면서 사역을 했던 것입니다.
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을 소유하게 된 것은 그의 소명의 체험과 결정적으로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이 시간에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이 선지자의 소명, 혹은 사도의 소명도 마찬가지도 일생동안 그 선지자나 사도가 외쳤던 그 메시지는 그의 소명의 경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다 논증할 수는 없겠습니다. 만은 신학의 예를 하나만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의 일생의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입니다. 기독론과 구원론이 중심이 되는 메시지를 전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의 경우는 그 강조점이 유사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사랑의 동기였다고 하면서 사랑이라는 신학적인 구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모든 사역을 풀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각 약간은 차이가 나 보이는 다양한 시각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각각의 사도들의 다른 글의 성경을 대하면서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의 다양성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사도바울이 사울이었을 때에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니까 제일 먼저 충격 받은 것이 자기 유대인들이 죽인 그 예수가 사실 그리스도였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충격이었고, 그리고 유대인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던 또 다른 방식의 구원, 즉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는 그래서 의롭다 함을 받는 그 구원이 존재하는 구나. 하는 이 두 가지 기독론과 구원론이 최고의 충격이었죠. 그래서 일생동안 사도 바울은 그 두 가지에 매여서 외치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그리고 그를 믿는 자 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그 이외의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에 도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외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구주로서의 일생을 전파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똑같이 오늘 이 이사야 선지자도 똑같습니다.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생각해보세요. 맨 처음에 소명이 임할 때에 어떻게 하죠. “고멜을 아내로 취하라” 그러죠. 그를 아내로 취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남편인 자기를 떠나서 타락하고 방탕한 그 여자를 물질을 가지고 가서 구속해오는 과정을 되풀이 하는데 이것이 소명과 함께 주어졌습니다. 거기에서 이 선지자는 뼈 속 깊이 타들어가는 그 사랑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언약백성을 향한 타락한 백성들을 향한 접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이 얼마나 절절한지, 뼈마디까지 타들어가는 것 같은 그런 절절한 사랑이 가슴 깊이 미친 듯이 파고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외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하나님의 사랑을 외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똑같이 소명체험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명 받을 때에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 가서 스랍 가운데 스랍은 천사의 이름입니다. 천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찬란한 엄위로우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경험입니까. 비천한 인간, 시인의 고백과 같이 티끌과 같은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뵈옵는 것, 그분의 일찍이 경험하적이 없는 찬란한 임재를 뵈었는데 그 임재는 곧 영광이었습니다. 충만한 영광이 가득하고 그 앞에서 이 찬란한 영과의 빛을 받으면서 이 선지는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의 찬란한 영광은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든지 인간에게 두 가지 부인할 수 없는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첫 째는 뭐냐면 자기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크기에 있어서, 위대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끝이없이 무한하고 영원하고 위대하고 광대한 분이시며 자기는 그 하나님 앞에서 정말 바람이 부는 티끌과 같은 존재이고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광이 신자들에게 가르쳐주는 경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본 사람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그분만이 온 땅과 하늘위에 충만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못 만나니까 인간이 교만해지는 것이지 하나님을 만나면 교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큰 산, 그 앞에서 이렇게 서 있어도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데 끝이 없으신 거룩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게 될 때 우리가 우리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죠. 정말 나라는 존재가 돌에 낀 이끼,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 발밑에 구르는 돌 맹이 하나, 그리고 흔들리는 풀잎 끝에 붙어있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벌레 그것 하나보다 내가 나은 것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한 앞에서의 유한은 큰 유한이든지, 작은 유한이든지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한 앞에서는 큰 유한이든지, 작은 유한이든지 그 상대적인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모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자기가 어마나 비천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자가 존재와 관계가 있다면 후자는 도덕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더럽고 비참한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요즘은 그래도 제가 넥타이를 가끔 바꿔 맵니다. 그래서 이게 교회에 있으니까 그럴 것 아닙니까. 꾀 제재 하게 나타나면 “아이고 저 목사님 요즘 무슨 근심이 많은가? 뭐 또 교회에서 밥도 잘 못 먹여주나” 그럴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밖에 나갈 때는 항상 깔끔하게 하고 돈도 주머니에 좀 넣고 갑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가서도 이렇게 얻어먹고 이렇게 게기고 원래 그러지도 않지만 나는 안 합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말이죠. 학교 다닐 때도 넥타이 하나 매고 다녔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나중에는 넥타이가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래서 저는 진한 색 넥타이를 좋아했습니다. 요즘은 좀 밝은 것을 매는데 그것도 사실 매고 싶어서 매는 것이 아니라. 학교 다닐 때는 그것도 누가 하나 사다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있으면 그래도 첫 월급 탔다고 하나 사다주고, 뭐 생일이라고 하나 사다주고, 그래요. 그런데 한 10개 사다주면 7개는 마음에 별로 안 들고 3개는 마음에 들고 그래요. 그런데 밝은 것을 방에서 매면 괜찮아 보여요. 눈도 나쁘니까 사실 뭐가 묻었는지 안 묻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이제 이것을 매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면 햇볕이 들죠. 그래서 보면 김치 국물도 떨어지고, 기름도 좀 떨어지고, 사람이 이것을 보면 주일날 식사를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이렇게 반찬이 골고루 떨어져 있습니다. 할 수 없이 다시 들어갑니다. 어떻게 해요. 벗어서 넣고 다른 것을 맬 수밖에 없잖아요.
영광의 효과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치게 되면 전에는 자기의 결점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제법 참 괜찮다고 생각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영광의 빛이 쫙 비치게 되면 그 때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이 생각나게 됩니다. 그 빛 앞에 비쳐보니까 자기가 너무 불결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너무나 불결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언젠가 그 전도사 시절에 수련회를 갔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더니 애들이 막 기도해요. 2시간 3시간씩 그렇게 울면서 기도를 해요. 그래서 “그래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의 느낌이 어떠냐?” 그랬더니 그중에 하나가 그래요. “전도사님 저는 죄악 덩어리에요.” 평소에 야, 덩어리는 그만두고 죄의 부스러기라도 섞인 것 같다. 그러면 그 동의하겠습니까. 저 사이비 전도사 사람 잡는다. 그러지. 그렇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쫙 비치고 나니까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또 겸손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로 그 영광의 빛을 경험하면서 이 두 가지를 경험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는 하찮은 존재이며 더러운 인간이라는 것을 깊이 경험합니다. 그러니까 사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보았다. 라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은혜의 특권 아닙니까. 그런데 선지자는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어쩌면 좋을까?” 왜 그렇습니까? 나는 너무 비참하고 더러운 죄인인데 그 순결하고 위대한 하나님을 내가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느냐. 그 하나님은 순결하고 위대하신데 나는 너무나 더럽고 비참한 죄인인데 그것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아,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 두려워 떠는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말이죠. 이런 경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주님 만난 사람의 표입니다 .사도바울이 사울이었을 때에 다메섹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그 때에 “할렐루야. 야, 신난다. 나는 진짜 은혜 받았다. 나같이 주님 만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해라.” 사도바울이 사울이었을 때에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까? “주여 뉘시니이까?” 사울아, 사울아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거기에서 사울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그분의 찬란한 임재의 영광 속에서 두 가지를 똑같이 경험한 것입니다. “아, 나사렛에서 태어나서 우리들에게 하찮게 여김을 받으며 죽어갔던 그 예수가 정말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셨구나. 그리스도셨구나. 그분의 위대함 앞에서 다메섹을 향해 달려가는 자신이 아주 아무것도 아닌 지푸라기와 같은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빛으로 나타나신 찬란한 탁월하심 앞에서 자기는 쓰레기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자기가 다 부서지고 무너진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먼지 얼어나야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날 말이죠.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이런 좋은 뜻을 세우고, 그리고 그분의 일을 하려고 우리들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애쓰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참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이 진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동기와 맞아 떨어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주님을 위해서 비전은 품었지만 그분 앞에 무너져본 경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무너져서 그분의 임재의 영광 앞에서 자기는 티끌 같은 존재이며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자기는 비천하며 불결하고 더러운 죄인일 뿐이라고 하는 자기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가 도저히 끊임없는 비전을 품는다고 할지라도 진짜 그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나타내기 위한 동기에서 헌신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너져 본적이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선지자로서 부름을 받기 전에 철저히 무너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에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자들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을 뵈었음이로다.” 그러면서 자기 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찬란한 임재의 영광과 자신의 미약하고 비천한 사이에 존재하는 이 무서운 존재적인 격차를, 도덕적인 격차를 인해서 탄식하고 통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천사 중에 하나가 날아와서 재단 숯불에 있는 그 숯을 날아다가 이사야의 선지자의 입에 지진 것입니다. 한번 그 뜨거운 숯불로 입술을 지지는 광경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확 지지니까 입술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생각을 하죠. “왜 하필이면 입술을 지졌을까?” 선지자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제유적 표현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세례를 줄 때에 물로 성부와, 성자와, 그리고 또 성령의 이름 속으로 세례를 주노라. 할 때에 이 물의 의미는 깨끗이 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머리만 씻으면 된다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몸 전체를 그 물로 씻는데 그중에 대표로 머리에다 물을 뿌리는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의 백체의 모든 것이 그렇게 지져져야 되는데 거룩한 불로 지져져야 되는데 그 모든 것을 다 지지지를 않고 이사야의 입술을 지진 것입니다. 이것이 뭐냐면 이제 이사야가 이 사건이 있고나서 소명을 받아서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 선지자로서 가장 중차대한 임무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을 입술로 전파할 때 살아있고,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입만 깨끗하다고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백체는 한꺼번에 더럽고 한꺼번에 깨끗한 것이지 입만 깨끗할 수는 없잖아요. 뭐 양치질 하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어떤 영적인 정결에 있어서는 사지백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중에서 대표적으로 입술을 지진 것입니다. 온 몸이 다 그렇게 지져져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 핀 숯이라는 것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 숯을 화재로 집어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일차적으로 심판을 의미합니다. 거기에 재단에 있는 그 숯불이 무엇을 가리킵니까? 번제로 드린 짐승을 거기에다 던져서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심판입니다.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면 그렇게 함으로서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입술을 지지시는 것입니다. 정결케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심판을 통해서, 그리고 정결케 됨을 통해서 이제 이사야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죠. 그러면서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제 네 죄를 사함 받았도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깨끗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들려오는 음성이 “누가 우리가 위하여 가며 우리가 누구를 보낼꼬?” 그러면서 여기에서 소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헌신의 소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치를 이루는지 보십시오. 은혜의 경험 안에는 이미 소명이 포함되어 있다고 제가 여러 차례 설교했죠. 은혜 안에는 이미 소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자기의 비천함을 깨닫고 자기의 심판과 정결케 됨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의 죄 사함을 얻게 되는 일련의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거든요. 하나님의 은혜를 격고 나니까 바로 그 안에서 누구에게도 들려지지 않던 이 하나님의 음성이 이 선지자에게 들린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며, 우리가 누구를 보낼꼬?”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지금 하나님이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사랑하는 선지자에게 보여주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에 당신의 놀라운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영광을 많이 보여주셔서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면 할수록 역설적으로 그것은 할일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이 각 사람을 이사야 선지자처럼 불러주고 계시다. 라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며, 우리가 누구를 보낼꼬?” 이것은 단순히 거리적으로 멀리 있는 그런 것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순간 우리는 다시 그 자리로 파송된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현실적으로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영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믿은 순간 우리는 다시 우리가 원래 머물러 있던 그 삶의 자리로 파송된 것입니다. 단순히 이것은 거리적 개념이나, 지리적 개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배도 있지만 대부분 이스라엘 유대민족들에 대해서 예언을 했습니다. 그가 장기적으로 어디를 간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선지자가 되고 나니까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로 다시 파송이 되어서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해야합니다. 가서 옛날의 그 가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은혜를 받고 다시 파송 받은 곳이다. 교회, 원래 내가 계속 다니다가 내가 좀 변화를 좀 받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은혜 받은 그 순간 다시 파송된 것입니다. 있는 자리로 파송된 것입니다. 그 파송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떤 심정입니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며, 우리가 누구를 보낼꼬?” 우리가 파송되기 전까지는 그 자리가 어떻게 있었다는 것입니까?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쳐다보면 말이죠. 주님을 만난 사람들, 지금도 주님을 만나고 있는 사람들은 두 눈빛이 반짝이는 소명감이 있습니다. 하다못해 교회에서 물걸레질을 하고 청소를 하고, 평범하게 직장에 다녀도 주님께서 다시 나를 여기에 파송해주셨다. 라고 하는 소명감이 있습니다. 이 소명감이 없는 삶은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삶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까. 자기 밥 벌어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지. 그는 일평생을 살아도 한번도 하나님을 섬긴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냥 이 세상에서 살았고, 그리고 일하고 그러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은혜 안에 이미 엄중한 소명감, 엄중한 소명이 그 은혜 안에 이미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여러분들이 다시 한번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를 돌아보세요. 교회든지, 가정이든지, 학교든지, 직장이든지, 어디든지 주님의 향기가 어딘들 필요 없겠으며 망가진 세상이 어딘들 없겠으면 망가진 세상 어딘들 고쳐지지 않아도 되는 영역이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모두 다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그를 하나님이 파송해주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주님이 나를 그렇게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주님의 그 영광 앞에서 나의 비참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고 나에게 이 사죄의. 은혜를 내리셔서 구속의 은혜를 베푸신 것은 주님이 나를 여기 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그랬구나. 그러면 자기가 여기 지극히 작은 섬김 하나를 위해서라도 여기에 서 있는 그 자체가 아주 엄청나게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초심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너는 가서 이 복음을 전하라.
내 호산나 항상 널 지키리.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께 소명을 받아서 “너희는 만천하에 가서 이 복음을 전하라.” 그럴 때에 그 영광의 부르심을 얻고 떠났을 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도시라고 더 좋아했을까요? 시골이라고 싫어했을까요? 공부 많이 한 엘리트들이 모인 곳이라고 신났을까요? 일자무식한 사람들이 산다는 산골 마음에 간다고 짜증났을까요?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어디에 파송 받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나를 거기에 파송하셨는가?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렇게 파송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사야 선지자가 애끓는 심정으로 순교에 이르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셨던 중요한 중심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영광스러우신 하나님, 이렇게 찬란한 임재의 영광을 온 땅에 비추신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가진 세상, 구겨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면서 담대하게 온 마음과 온 뜻을 다해서 담대하게 외치고, 외치고, 또 외치고, 그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영광스러우신 분임을 자기가 그 발 앞에 엎드려 인정했던 것처럼 세상이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해주기를 꿈꾸면서 외쳤던 것입니다. 어떻게? 죽기까지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소명을 느낀 사람들의 삶은 반드시 헌신 적이어야 합니다. 헌신하지 않으면 자신이 막 망가지지 시작하는 것입니다. 헌신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막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장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막 깨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본을 누가 잘 보여주셨을까요? 그렇죠. 예수님이 가장 잘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죠. 특별히 공적생애로 들어가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으로 그분을 기름 부어서 한량없는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런 은혜를 입은 그분이 본격적으로 소명 속으로 들어가게 되셨습니다. 거기에는 고난의 가시밭길 이었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며 가는 길에는 고통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사행심 어린 신앙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이 복된 길이지만 순종해도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의지해도 괴로움을 당할 때는 당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이 이길 힘을 주시죠. 고통이 넘쳐도 위로가 고통보다 크면 살수 있죠. 그렇죠. 고난이 너무나 아파도 거기에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기쁨이 고난을 능가하면 사도바울처럼 옥 속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죄수의 몸이 되어서도 옥 밖에 있는 사람보고 기뻐하라고 편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우리는 말이죠.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걸어가도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것을 이상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그 점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 보면 그분의 별명이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이시요.’ 그분의 별명은 아멘이셨습니다. ‘아멘’ 나도 여러분들의 별명이 아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 일생동안 아멘이셨느니라. ‘아멘’ 아버지가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아멘” 생애를 사셨던 분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 거룩 하사
주님 나라 임하시고
뜻이 이루어 지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일생동안 맨 처음 드린 세 가진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그 일을 위해서 먹고. 그 일을 위해서 자고, 그 일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그 일을 위해 병든 자를 고치고, 그 일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그 일을 위해서 박해를 받고, 그 일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헌신 하신 것이죠.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자리는 어디입니까? 어디였습니까? 지금은 모르신다면 옛날에는 어디였습니까? 그리고 지금 그 자리에는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을 보내려고 한 그 자리에 여러분들이 그 자리를 비우면 그 자리는 비어있습니다.
난 어제 토요일 날도 우리 관리실에서 보고를 받는데 마음이 짜릿했습니다. 여러분, 생생하게 기억하시죠. 교회가 이쪽 저쪽해서 관리해야 되는 것이 4000평 가까이 되는데 청소할 사람이 없습니다. 도저히 안 되고 간사들이 밤 12시까지 일하면서 관리실장이 “목사님 아무래도 이제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청소 용역업체를 불러서 청소를 시켜야 되겠습니다.” 그 때 제가 그럴 수밖에 없다면 그렇게 해야 되겠지만 내가 정말 목회를 잘못해서 그러니까 나에게 시간을 좀 달라. 그리고 기도하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시리즈를 했죠. 사람들이 너무 와서 사람에 치여서 어떻게 토요일 날 청소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1년 밖에 안 지났습니다. 토요일 날 다시 보고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교인들이 이제 청소하러 잘 안 나와요. 어떻게 하죠?” 아, 우리는 왜 이렇게 살까?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가진 것 모두 다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 주소서.
나의 맘 나의 몸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그런데 왜 자꾸 도로 가지고 가느냐는 것입니다. 한번 드리고는 다시 찾아가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이 나를 여기에 세워주신 자리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여기에 서라고 소명을 주셨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서 있다가 다시 돌아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 자리에 서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지금 내가 죽기 싫어하는 그 자리에서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내가 죽기 싫어하는 그 자리에서 죽으셨고, 나의 몸, 나의 맘 바쳤다가 다시 찾아온 그 자리에서 주님이 피를 흘리셨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이 피를 흘리셨습니다. 돌아가세요. 다시 거기로 돌아가세요. 처음 주님을 만났던 곳, 그래서 눈물을 흘리고 주님이 나를 만나주셔서 주님이 나를 여기에 세워주셨다고 고백하던 거기에, 그 자리, 섬김이 있고, 십자가의 고난이 있고, 눈물이 있고, 아픔이 있고, 동역 자들과의 땀이 있고, 씨름이 있고, 찢어질 것 같은 고난이 있던 그 자리로 돌아 가야합니다. 거기에 있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축복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가 없죠. 우리 모두가 만약에 그렇게 주님이 맨 처음에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섬기도록 세워주신 그 자리, 우리가 항상 잘 하는 것은 아니죠. 그러나 잘하고 못하는 것은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에 세워주신 것보다도 더 큰 가치는 아닙니다. 거기에 서서, 우리도 서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존귀 영과 모든 권세는 주님이 받으시고, 고난이 올 때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갑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합니다. 눈을 들어서 한번 도처를 바라보세요. 우리가 몸과 마음 드렸다가 다시 찾아온 그 자리가 비어있고, 파송 받아서 충성스럽게 서 있던 자리에서 도망치고 탈영하고 나니까 그 자리에 원수들이 점령해버렸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수는 없죠. 우리 회개합시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세워주셨던, 은혜를 주셔서 우리에게 감당하라고 부르셨던 그 처음 하나님이 세워주셨던 그 자리로 돌아가고, 버려두고 떠나왔던 그 섬김으로 다시 돌아오고, 몸과 마음, 다시 훔쳐왔던 것, 다시 주님께 돌려드리고,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스럽게 보시겠습니까. 기도합시다.
5. 추수할 일꾼을 부르심
이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마9:37)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를 사도 삼으셔서 세상에 파송하시게 된 배경을 묘사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마태복음은 이 10장이 아주 중요한 분수령이 됩니다. 10장 2절까지는 제자들이었는데 이제 이 10장은 사도로서 보냄을 받게 되고 이제 그렇게 됨으로 이제껏 예수님 가까이 있으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던 학생의 신분이었던 제자들이 이제 이 10장은 계기로 능력과 권세를 받아서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에 나아가서 예수님이 하시던 그 일들과 연장선상에 있는 그 일들을 행함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10장은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되고 예수님의 생애에서 분깃점이 되는 이 사도 세우는 이 장면에 배경으로서 9장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보셨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보시고” 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은 히랍어로 “이도니” 라고 하는 단어인데 무엇인가 사물이나 혹은 사람의 배후를 꽤 뚫어보는 그런 통찰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어떤 영적인 시각으로 예수님께서 무리를 바라보실 때 그 무리들은 그 무리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이 아프셨습니다. “민망히 여겼다.” 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은 원래 히랍어 원어로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혼의 자리가 창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말로 표현한다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더라. 정도의 표현이 되는 것이죠.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무리를 보시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을까요? 물론 그들의 헐벗은 생활, 굶주린 삶, 이런 모든 것들을 보면서도 예수님께서 가슴이 아프셨겠죠. 그래서 그들을 먹이고 또 그들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짜 예수님의 마음을 뼈저리게 아프도록 만드셨던 것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였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예수님께서 직관하시자 예수님은 그들의 영혼의 상태를 주목하셨고, 그렇게 예수님이 그들의 영혼의 상태를 보셨을 때에 그들의 겉모습도 불행하고 불쌍했지만 영혼의 모습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유리하고 고생하는 그런 영혼의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히랍어 의미로 보자면 내동댕이쳐지고 누군가에 의해서 괴롭힘을 당하는 그런 상태로 그들이 버려진 채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만은 그들이 이러한 영혼의 버려진 상태,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마치 그 모습이 목자 잃은 양같이 이리저리 유리하며 맹수들의 밥이 되고 있는 그 양떼와 같이 유사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은 찢어지게 아프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은 이 때만 계속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이 마음은 우리들이 도처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이 마음을 이 세상에 살면서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녀의 특징은 부모의 마음을 아는 것이죠. 그리고 좋은 자녀의 특징은 그 부모의 마음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마음을 풀어드리며 사는 것이 참 자녀의 본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런 마음을 지금 이 세상을 향해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조금만 영적인 눈을 떠서 그래서 이 세상에 버려진 것처럼 괴롭힘을 당하며 고생하며 유리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보면 주님의 찢어지시는 그 마음의 고통이 전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그 때처럼 헐벗은 사람들이 있고, 지금도 그 때처럼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들에게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가 없어서 가무는 곳에 비라는 우리들이 찾아가서 내려 그 땅을 비옥하게 하고 우리가 물이라면 목마른 자들에게 우리가 떡이라면 굶주린 자들에게 그렇게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 시대에 그러했듯이 지금도 먹고 입는 문제로 괴로운 사람들만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먹고 입는 문제가 해결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은 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지고 이 세상을 곤고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결국 죄로 말미암아 철저히 망가졌기 때문에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어도 영혼이 망가졌고, 그 결과로 인해서 성품이 깨뜨려져서 망가졌기 때문에 계속해서 유리하고 고생합니다. 그것이 불행한 일인지 알면서도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경향성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무너지고 망가집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교회 안에 그래도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으며 거미줄 같은 신앙이나마 붙잡고 그 말씀에 의지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고쳐지지 않은 망가진 사람들이 있고, 은혜로부터 멀어져 유리하고 다시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물며 이런 목양의 그늘을 벗어난 이 세상, 주님의 참된 목양의 터전을 등지고 떠나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 그런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는 유리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많이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예수님께서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밀농사 같은 것을 지으면서 이제 다 희어져서 그래서 이제는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렇게 모든 낟알들이 다 맺혀진 상태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빨리 거두지 않으면 이제 쓰러져서 제때 추수기를 놓치면 많은 곡식에 손상을 입을 것 같은 그런 모습으로 이 세상이 예수님의 눈에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예수님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이 세상을 바라볼 때 부러운 것도 많고 사랑할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고, 마치 이 세상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들이 그렇게 세상을 보지 않습니까. 그 세상에서 누릴 혜택, 그 세상에서 맛보게 될 기쁨, 그 세상에서 얻게 될 즐거움에 정신이 팔려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바라보실 때 희어져 추수하게 될 영혼들이 눈에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해매이나
정말 그렇게 헤매는데 그들은 누군가 건져줄 사람이 필요한데 주님이 오실 날은 가까운데 희어져 추수하게 된 영혼들, 누가 사랑으로 다가가서 예수의 마음으로 그들의 영혼을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사람들, 누가 주님의 마음으로 다가가서 그들의 볼에 흐르는 슬픈 눈물을 닦이고 그들을 끌어 안아줄 때 우리의 품에서 나를 좀 도와달라고 흐느낄 그런 농익은 열매와 같은 수많은 영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게으르신 적이 없고, 안일에 빠져서 나태하신 적이 없죠. 그래서 그분은 생애 내내 자기의 고열과 진액을 짜서 바치는 그런 지고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제가 설교했듯이 그분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땀의 생애였고, 눈물의 생애였고, 피의 생애였습니다. 왜 그렇게 조금도 쉼이 없이 마치 죽으시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죽고 싶어서 갈망하는 사람처럼 예수님이 그렇게 자신을 혹사하시면서 사셨을까요? 변변히 먹지도 못하셨고, 좋은 잠자리도 없이 왜 그렇게 사셨을까요? 급해서 추수할 것이 너무나 많으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진액을 짜서 바치는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한번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면서 자기의 진액을 짜셨던 예수님의 생애와 우리의 삶을 한번 비교해보십시오. 우리가 무엇이 하는 것이 있습니까. 어떤 때는 저녁이 되면 교회 마당에 주저앉아서 울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하루는 왜 그렇게 빨리 갈까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이, 마치 태양이 바퀴가 달린 것처럼 쏜살같이 하늘을 가로질러 지나갑니다. 다시 오지 않을 하루가 사라져 가는 것이죠. 그러면서 우리의 젊음도 지나가고 우리의 인생이 날도 사라져갑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분투하듯이 토열의 삶을 사셨던 것이죠. 그분도 사람의 몸을 지니셨으니 고단하면 쉬시고 싶고, 주리면 잡수고 싶고, 목마르면 목을 축이시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체의 게으름과 나태함이 없이 주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그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다 드린 그런 토열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악함은 이런 주님의 삶을 보고 감동을 받지도 않고 가책을 받지도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되” 그랬습니다. 추수철이 되면 농부의 타는 마음을 여러분들은 얼마나 아십니까? 다 작물이 익어서 이제는 벼가 누렇게 고개를 숙여서 이제 낫을 기다리고 있는데 일손을 구할 수 없어서 쩔쩔매다가 그만 가을비가 갑자기 쏟아지면서 물이 불어납니다. 그래서 잘 익은 그 벼가 막 쓰러지면서 물에 잠깁니다. 그때 농부의 마음이 어쩐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언젠가 한 해 그런 일이 있었죠. 농부가 나와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자기 논을 보면서 우는 것이 사진에 나왔습니다. 이것이 농부의 심정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어떠시겠습니까. 그렇게 추수할 것이 많은데 일꾼이 어떻다고 하셨습니까? “일꾼은 적다.” 그랬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일꾼은 적었고, 지금 우리 시대에도 일꾼은 적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으시겠죠. “그 때는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 안 되었으니까 이해가 되지만 오늘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데 일꾼이 적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됩니다. 왜냐면 예수 믿는 사람은 많지만 십자가 지는 사람이 너무 없기 때문입니다. 연말이면 교회의 팀을 짜면서 부목사님들이 한숨을 계속 쉽니다. “목사님 일꾼이 너무 적어요.” 일꾼을 세울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당을 드나드는 사람은 수천 명이지만 그러나 이 세상을 희어져 추수하게 될 밭으로 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동참하면서 이 세상에 예수님이 하신 그 일에 뒤를 이어서 그 곡식을 추수할 사람들이 너무 소수입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들, 혜택을 입으려는 사람들은 많아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기를 버리려는 사람들은 너무 소수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추수하게끔 희어진 그 곡식들이 그냥 이 들판에 방치되어 있는 것이죠. 그들 하나, 하나도 주님이 위하여 값 주고 사시고 피 흘리신 영혼들인데 그들이 그렇게 버려져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웃으며 지나칠 수 있어도 그들의 영혼의 주인이신 그 주님의 마음은 어떨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주님의 이 탄식 소리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되어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다음에 주님께 가면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이 어떤 지위를 누리고 얼마나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사람들에게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지는 하나님의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그것은 삶의 한 양태이기 때문이죠. 주님 앞에 갔을 때에 그 때에 자랑은 이 세상에서 내노라하는 그 자랑과는 틀려요 그 때에 주님 앞에서의 자랑거리는 망가진 이 세상을 바르게 고치고 희어져 추수하게 된 그 고생하고 유리하게 된 그 영혼들을 위해서 내가 무엇으로 하나님을 섬기다가 왔는지 그것이 주님 앞에 중요한 관심사가 됩니다. 그때에 여러분들 주님 앞에 가서 무어라고 말하실 수 있겠습니까. “주님 저는 이 세상에서 이러 이러한 직업을 가졌지만 그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방식이었을 뿐이고, 사실 일생을 살아오면서 나의 관심을 하나님의 영광이었으면 그 하나님의 영광이 그 이름이 드러나기 위해서 저는 이러 저러한 일에 종사하며 거기에서 희어져 추수하게 될 그 밭에 서서 제가 여름날에는 뜨거운 태양 볕을 무릎 쓰고 모를 내었고, 가을에는 굽힌 허리를 차마 펼 시간이 없이 낫질을 하며 익을 곡식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힘주시는 이는 주님이시오니 주님이 홀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섬김의 장이 여러분들에게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에게 두각을 나타내는 자리, 존귀를 받고 영광을 받고 또 하나님의 일꾼이기 때문에 혜택을 받는 자리에는 모이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병든 자 고치기 위해 먼 길을 떠나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기 위해 가난한 동네를 찾아다니시고, 영적으로 눈먼 자를 뜨게 하기 위해서 진리의 떡을 떼어 그들의 입속에 넣어주시던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난한 동네를 누비며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거기는 언제든지 희어져 추수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너희 아버지에게 좀 간청해라. 일꾼이 너무 적으니 하나님 우리에게 일꾼을 주셔서 예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심정으로 희어져 추수하게 될 영혼들을 거두어들일 수 있도록 주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태어 달라고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보여주신 섬김의 모본은 그야말로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섬김의 모본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던 성도들, 가슴 저미는 하나님의 사랑에 녹아내리는 심정을 경험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생애를 통해서 수많은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일생을 사시면서 자기의 것이라는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이 자기를 다 바치신 생애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발자취는 하늘가는 밝은 길이었고, 그분의 살아간 족족은 영원한 나라를 위해 이 땅에 모든 것을 투자하는 생애였습니다.
제자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분이 보고 아파하시던 이 세상을 보며 주님의 마음으로 아파하고, 그래서 주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 그리고 그 일중에서 우리에게 맡기셨을 그 일을 위해서 주님의 분신처럼 그분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 이 땅에 있으면서 주님의 마음으로 섬겨서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그것이 제자의 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이 탄식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일꾼은 심히 적다.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먹이셨습니까. 얼마나 많은 영혼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셨으며 얼마나 많은 외로운 많은 영혼들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굶주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주님이 먹이셨습니까. 많이 뿌리셨습니다. 그분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일꾼이 심히 적었습니다. 지금 시대에도 똑같이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올바로 아는 사람들은 그 사랑이 내게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까지 섬기시면서 모본을 보이셨던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인 것 같이 너희들도 행하라”는 교훈이 아니었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아픔도 경험하십시오. 주님 때문에 많이 기뻐했고, 행복했다면 이번에는 주님과 함께 죽음도 배우십시오. 그래서 예수 가셨던 길을 나도 가시에 찔리며 걷고, 예수께서 우셨던 곳에서 나도 울고, 예수님이 통곡하셨던 곳에서 나도 통곡하면서 주님을 섬겨야합니다. 그래야 사랑을 받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주를 위한 고난은 특권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력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 니라.(행5:41)
5장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사도들이 다른 제자들과 함께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당하게 된 핍박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고 능력 있게 전했더니 많은 병자가 낫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변화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런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자 유대인들은 사도들을 핍박했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그들을 그 옥에서 풀어주었고, 옥에 갇혔던 줄 알았던 사도들은 다시 거리에서 예수의 복음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사도들을 가두었고, 살기등등하게 위협하면서 다시는 그렇게 전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협박했으나 사도들은 오히려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한번 생각해보라.” 고 말이죠. 할 수 없이 그들은 이 사도들을 매로 때려서 그래서 풀어 주었습니다.
오늘 여기에 나타난 사도들이 보인 이 반응은 바로 그 때에 보여준 반응입니다. 사도들은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고 매를 맞으면서도 오히려 기쁨이 충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헌신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마지못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세워주신 자리에 그냥 견디면서 서 있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서 헌신한다고 할 때에는 맡겨진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위한 큰 헌신입니다. 끊임없는 유혹, 그 사명의 자리에서 떠나게 하는 많은 환난 그리고 끊임없는 고난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신앙이 흔들리고 그리고 마음이 자신의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에 그 때에 그것과 싸우는 일 없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 있는 다는 것 그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 앞에 커다란 사명을 감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헌신은 그렇게 자기의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것, 그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헌신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안으로는 끊임없는 연약함과 더불어 싸워서 주님이 자기를 원래 세워두신 그 자리를 지키고, 밖으로는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에너지들을 동원해서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서 거기에서 맡겨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헌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사람은 끊임없이 분투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이 분투하는 삶은 크게 두 가지 방면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는 자신의 내적 부패성과 연약함,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려는 자기 자신을 발목 잡고 있는 자기 안에 있는 내제하는 죄와 더불어 끊임없이 싸웁니다.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기질,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나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그 자기만의 약점이 되는 기질들과 더불어 끊임없이 분투하고 싸우지 아니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밖에 있는 환경과 더불어 끊임없이 싸우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 주님을 섬겨야 되겠다. 라고 마음먹으면 우리는 진공상태에서 아무런 방해나 저항 없이 그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예전에 있어나 혹은 지금 역사하고 있거나, 혹은 앞으로 계속 떠오르게 될 수많은 난관과 방해와 더불어서 분투하며 싸워야합니다. 그런 분투와 투쟁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헌신 되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끊임없는 분투와 헌신 속에서 어떤 상황이 도래할줄 모르는 환경과 더불어 싸움으로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사명을 완수해갑니다. 그것이 신자를 겸손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의 변화와 시련, 고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헌신된 삶을 살려고 할 때에 닥칠지 모르는 끊임없는 외부적인 압력과 위협, 핍박,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에 대해서 자신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 안에서 계획하고, 그분 안에서만 자신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고난과 환경의 변화는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며 사는데 있어서 주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필요로 하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으로는 자기 자신의 내적인 부패성과 싸우고, 밖으로는 환경과 더불어 싸우는 삶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헌신의 삶입니다.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죽이고 또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를 소진하는 삶, 이것이 바로 헌신의 삶입니다. 그래서 이 헌신의 삶에는 반드시 자기 부인이라고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부인하지 아니하고는 자기를 헌신하는 삶을 살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헌신의 삶이 진정으로 헌신의 삶이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삶이 기쁨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들은 기뻐해야할 일이 없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동족과 그리고 가족들로부터도 박해를 받거나 혹은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복음을 전했지만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싫어했고, 그 일로 인해서 그들은 미운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도대체 기뻐할만한 환경이 어디에 있습니까. 기뻐할만한 조건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고, 가족을 잃어버리고, 소유를 빼앗기고 끊임없이 투옥 당하는 삶이 반복 되었는데 기뻐할만한 이유가 이 세상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에는 그들이 기쁨으로 충만해서 핍박하는 자들 그 앞에서 떠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쁨이 충만하고, 그들은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헌신하는 삶의 꽃입니다. 자신의 모든 자원과 노력, 힘과 지혜를 드려서 주님을 섬기지만 그것을 아름답게 피워서 향기 나게 하는 그 꽃은 그 일을 기쁨으로 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책을 읽어보니까 인간의 이 얼굴은 약 80몇 개의 근육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기쁜 일이 생기면 근육 하나, 하나에 깃들여 있던 그 기운들, 긴장감들이 다 사라지면서 그래서 새로운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기쁨이 있는 사람은 인상이 선하게 보여요. 오늘 우리들의 큰 문제는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분투하는 삶을 사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들이 잃어버린 단어중 하나가 기쁨입니다. 여러분들의 생활 속에서 고단하게 주님을 섬기는 사역 한 복판에서 다른 사람이 여러분들을 볼 때에 기뻐하고 또 기뻐하더라. 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기도할 때마다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우리의 사명, 다 이루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게 하는 내 일생일대 절명의 그 무거운 짐, 주님이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가 바로 이 일을 위해서 나를 부른 그 소명, 이런 것들 앞에서 진지해지는 그리스도인들은 꽤 있습니다. 그리고 힘을 다해서 그 일을 잘 이루어보려고 하는 좋은 마음을 가진 신자들도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적지 않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일을 행할 때에 그 일이 자신에게 넘치는 기쁨이 되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성경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십자가, 무거운 짐, 등등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을 위한 사명에 동참하는 것 그 자체가 연약 백성의 특권이면, 우리들의 분깃이요, 우리들의 기쁨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고단한 인생길에서 육체의 욕망대로 사는 일이 아니라. 나를 죽이고 끊임없이 이 사명을 이루기를 방해하는 환경과 더불어 분투하며 싸워야 하는 이 고단한 생활은 무거운 짐임에 틀림없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짐이 아무리 무겁고 괴롭고 고통스럽더라도 우리는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도들이 아무것도 기뻐할 이유나 조건이 없는 상황 속에서 핍박을 받으면서도 말할 수 없이 기뻐하였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우리는 이들처럼 많이 고난 받지 못해도 잃어버리고 있는 기쁨을 이들은 우리보다 갑절이나 더 많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그 피 저린 고난을 받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왜 그럴 수 있었을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고난의 가시밭길을 가게 만들고, 핍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담대히 예수의 이름을 전하게 만들었고, 그리고 오늘 그 핍박을 받으면서도 남들에게는 없는 놀라운 기쁨을 소유하고 그들 자신이 주님을 위해 바치는 헌신을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무거운 의무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우리가 만약에 이 비밀스러운 섬김의 실체를 파악하게 된다면 우리의 섬김은 얼마나 아름다운 섬김이 될까요. 우리의 섬김은 얼마나 기쁜 섬김이 될까요. 도대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렇게 기쁘게 하였을까요?
그래서 두 번째로 성경은 말합니다. “고난 받기에 합당한자로 여기심을 인하여 기뻐했다.” 그들은 그들이 이런 깊은 고난 속에서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뻐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시선이 이 세상에 있지 아니하고 자기들을 인정해주시는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면서 실의에 빠지거나 낙심하거나, 비교의식을 느끼게 되거나 혹은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속에서 기쁨을 잃어버리게 되는 이유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때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이 일을 섬기도록 헌신하도록 보냄을 받았던 처음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그 헌신의 대가가 신통치 않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 스스로 낙심하거나,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상실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포도원에 품꾼을 불렀습니다. 오전부터 시작해서 일 끝나기 한 시간 전까지 여러 사람을 불러서 일을 시켰습니다. 아침 9시에 나온 품꾼은 하루를 일할 수 있다는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이유 때문에 아주 기쁘게 하루를 일했습니다. 그리고 일 끝나기 1시간 전에 온 품꾼도 날이 다 저물어가서 이제는 일할 기회가 없는데 자신에게도 일할 기회를 줬다는 것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그 기쁨은 모두 다 동일했습니다. 끝나고 나서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하루의 일당을 주었을 때에 그 순간 처음 이른 아침에 품꾼으로 왔던 그 품꾼의 마음에 기쁨이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번에는 비교의식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가장 나쁜 습관중 하나가 자신에게 세워주신 이 자리를 최고의 자리. 그리고 주님이 나를 여기에 세워주신 것에는 매우 깊은 뜻이 있으면 살든지 죽든지 여기에 세우신 이 자리에서 내가 승부를 해야 되겠다. 라는 정신을 갖는 대신, 까치발을 높이 들고 다른 사람들, 자기보다 훨씬 쉽게 일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대접을 받고, 이름을 높이고, 자시보다 훨씬 더 많은 보람을 느끼고, 자기보다 고상한 일인 것처럼 생각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보면서 비교의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명으로부터 미끄러지는 전초적인 현상입니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많이 모아놓고,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느냐 묻지 아니하시고, 한 사람 베드로를 놓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사랑한다고 고백했더니 젊어서는 네가 띠 띠고 네가 원하는 대로 다녔지만 나이가 먹어서는 다른 사람들이 너를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순교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 조금도 자신이 순교해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 섭섭하거나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했을 리가 없습니다. 순간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던 저 요한은 어떻게 될까? 예수님은 신경 쓰지 말라. 그러셨습니다.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 질까
뉘 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다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신의 십자가를 질 때에 그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갈 때에 그 사람이 가장 탁월한 사람이 되고, 또 그 길을 걸어갈 때 그 사람이 가장 선한 사람이 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사명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저 사람이 무슨 사명을 받았던지 나하고는 상관없다. 문제는 내게 주신 사명입니다. 두 개를 비교할 필요도 없고, 내가 저 사람보다 얼마나 더 많이 손해를 보는지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렇게 박해를 받고,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기뻐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인정해주고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매 맞고 박해를 받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짧아서가 아니라. 주님이 다른 사람들을 돌봐주시다가 시간이 모자라서 우리를 고난 속에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로 이 고난을 당하게 하신 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 특별히 인정받아서 뽑힌 사람들이다. 라고 하는 그러한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고단하게 감당해 나가야할 우리의 사명이 있다고 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섬김의 자리가 있다는 것, 그래서 그것 때문에 아파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그것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혹은 그것 때문에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신앙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은혜주시 않으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소명을 느끼게 하신 것 보았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소명의 기초는 사명을 느끼는 그 부르심의 기초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제일먼저 사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은혜를 주십니다.
사도바울의 회심도 보십시오. 주님이 다메섹이로 가는 바울을 불러서 야, 그것은 너의 일이 아니라. 이런 일이 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신 다음에 은혜를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먼저 영혼의 깊은 어두움 속에서 돌같이 굳어진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울을 주님이 만나주셔서 그를 꺾으셨습니다. 뜨거운 주님의 사랑으로 돌 같은 그 마음을 녹이시고, 정오의 햇빛 같이 찬란한 진리로 그의 영혼의 어두움을 밝히시고 지성을 조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목 놓아 울게 만드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주신 후에 하나님이 사울에게 당신이 그를 부르신 참 소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모두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주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대한 자기만족을 위한 용도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 주시는 것은 그냥 우리를 즐거워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엔조이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렇게 은혜 자체를 엔조이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은혜를 주심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사명을 느끼게 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은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기대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으며 그 은혜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을 향해 가지고 계신 뜻과 계획이 우리가 생명을 바쳐 이루어야 할 소명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자에게 이러한 특별한 사명을 주실 때에 고난이 따라 온다고 하는 것은 부인할레야 부인할 수 없는 정확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일평생을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서 분투한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일평생을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 있어서 그것을 생명처럼 부여안고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푸른 풀밭 위를 힘없이 거닐며 산책하는 그런 인생을 산 사람 중에 사명 자는 없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정말 이 땅에서 자기의 삶이 나그네라고 고백하며 살아야 할 정도로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시시때때로 그들을 위로하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환경을 능가했던 것은 틀림없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모든 사람들을 풀밭과 같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잔잔한 물가로만 인도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당신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 당신에게 말할 수 없는 많은 은혜를 입은 사람들, 잔잔한 물가가 아니라. 폭풍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푸른 초장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지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 죄 많은 세상이 자기의 집이 아니요. 자신의 신자로서의 정체성은 이 어두운 세상에 나그네일 뿐이라고 고백하게 만듭니다. 목적지도 없고 가야할 행선지도 없이 그저 방랑이나 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인도할 동행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비바람이 부는 나그네 길, 눈보라와 폭풍이 몰아치는 그 고단하고 위험한 나그네 길에서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가야할 목적지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인도해줄 동행자를 열렬히 구합니다. 한번 그의 손을 잡으면 그는 자신의 목적지에 도달할 때 그 잡은 손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삶에 대해서 탐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목적지가 없습니다. 그냥 이 세상에서 너무 많이 잘못 살아서 하나님 앞에 크게 혼나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니까 자기의 손을 이끌어 인도해줄 그런 주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이 세상을 가르쳐주고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세상에 목적을 둔 선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을 즐길 친구가 필요한 것이죠. 그러나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사람,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너를 불렀고, 내가 너를 이미 알았노라. 그렇게 주님이 말하실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이 사명의 크기가 아니라. 그 사명을 맡기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도들이 그 모진 핍박 속에서 매를 얻어맞고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아이 씨, 다른 사람들은 예수 믿어도 편하게 잘들 사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죽도록 투옥 당하고 매를 맞는 거야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지도 않나보지. 그렇게 생각했더라면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그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해 핍박을 받고, 매를 맞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들을 인정해주시고, 아무나 이 고난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들이 이렇게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특권입니다. 오늘도 무릎을 꿇고 가슴 졸이지 않을 수 없는 사명이 있는 것, 오늘도 생각하면 가슴이 저미는 것 같아서 그 사명 앞에서 나의 부족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 고통이 있는 것, 내게 맡겨주신 양 떼가 있어서 내 눈에 눈물이 흐르는 것, 가야할 내 사명의 길이 있는데 내 안에 죄가 많고, 내 안에 어두움이 많아서 괴로움 속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그래서 마음이 녹는 것처럼 아프고 내가 이 모습으로 어떻게 이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으며 이 모습 이대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마지막 날에 내가 어떻게 주님을 뵐 수 있을까?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는 그래서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그래서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매일, 매일, 주실 예수의 은혜를 앙망하면서 어린 아이처럼 주님께 목말라 하며 살아야 하는 이 고난에 넘치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닙니다. 큰 축복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무엇을 합니까? 은혜를 받으면 어디에다 쓰겠습니까? 은혜를 하나님이 주시면 그것을 어디에 사용하시려고 합니까? 스스로 억매이던 마음이나 풀고, 그리고 심기나 편안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 특권입니다. 아무에게나 주님이 주시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핍박 받는 분들 있죠. 그것 아무에게나 주는 것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말씀하셨습니다.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뻐하지 않았죠. 왜 나 혼자 이 무거운 가시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 내 십자가를 왜 이렇게 유난히 크고 힘들까? 왜 하나님은 나만 이렇게 고생을 시키실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사도들은 고난이 넘쳤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께 대한 기쁨도 넘쳤는데 쥐꼬리만한 작은 고난을 받으면서 오히려 불평하며 우리의 마음이 부패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처음 주님을 향해 가지고 있던 아름답고 순수하기 짝이 없는 어린 아이와 같은 그 맑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푸르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병들고 벌레 먹어서 주님께 받아 들여 질만 하지 않고 그런 마음으로 일하는 섬기는 섬김은 이미 누룩이 가득 차서 주님께 드리기에는 너무나 부적합한 곰팡이 핀 섬김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전혀 받으실 수 없는 곰팡이 핀 섬김을 섬기면서도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제대로 대접해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했죠. 그러는 동안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처음 은혜 받을 때 살아있던 예수의 십자가가 사라졌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생애를 사시면서 가난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 부요하신 그분이 가난해지신 것을 보고 가슴 떨려하던 그 십자가의 감격이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주가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고 죽으셨으니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면 살리라고 믿던 이 일사각오의 신앙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빛바래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경험이 우리 안에서 사라져가지 않았습니까.
언제나 어두움을 찢고 우리의 영혼에 비치는 밝은 계시의 빛 대신 너절한 본성의 빛, 그것만을 가지고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했습니다. 시시때때로 하늘을 열어 충만한 성경의 은혜로 우리를 지혜롭게 하시는 그 신령한 지혜를 힘입기 보다는 이 세상에서 닳고, 닳고 또 닳은 세상을 섬기는 일에 하도 많이 써 먹었던 그 세상 지혜만으로 주님을 섬기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나를 위해서는 너그럽고 후하고, 많은 것을 투자하면서 주님을 위해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 인색하며, 두 마음을 품어 육신의 일을 도모하면서 자신의 남는 재물로, 쓰다버린 시간으로 주님을 섬겨보려고 했던 그런 순간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섬긴다면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의 역사를 보십시오. 주니께 가까이 하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이 친구처럼 대해주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여호와께서 당신의 친밀함을 늘 보여주셔서 동무처럼 대해주시던 사람,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며 그 삼위일체의 친교의 빛을 나누어주시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악하고 게으른 신자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곰팡이 핀 섬김으로 주님을 괴롭게 하면서도 자신이 엄청난 일을 수종 들고 있는 것처럼 자기 의에 빠져있는 신자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기에게 사명을 주신 하나님 때문에 그 사명을 귀하게 여기고, 인정해 주는 이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자신은 잊혀지고 예수만 기억되게 하기 위해서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는 그분께 드리고 멸시천대 십자가를 즐겨지던 사람, 그들이 예수님의 친구였고, 하나님의 가족이었습니다.
정말 우리의 시선이 주님께 있습니까? 세상에서는 이름이 없고, 세상에서는 빛이 없어도 그분이 내 이름을 기억해주시고 그 나라에서 내가 섬긴 이 일이 예수의 이름을 빛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충분합니다. 나를 무명하게 하는 그 휘장 뒤에서 높아지신 예수의 이름을 보며 충분히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라는 이 신앙의 고백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오늘 사도들은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감사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 모질게 두들겨 맞아서 피가 흐르는 육신을 끌면서 그들 앞에서 나오면서도 그들의 마음에 하늘의 기쁨이 가득 찼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들은 외칠 수 있었습니다. “너희가 나의 육신 밖에 멸할 수 없으니 나는 단지 육신을 멸할 수 있을 뿐인 너희보다 영혼과 육체를 아울러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섬기겠노라.” 외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생각해보라고. 거꾸로 타이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 지나갑니다. 젊음도 지나가고 육체의 욕심도 지나갑니다. 자난 날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육신의 즐거움을 따라서 살다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쁨을 맛보고 그 달콤한 쾌락 속에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때에 그것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뭐가 남았습니까? 지금 남은 것이 있습니까? 모두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입니다. 오직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그렇게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살고 현실에 안주했던 세월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하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분투하며 섬겼던 삶들, 날마다 나를 죽이며 내 안에 예수를 살게 하던 그 분투하던 삶, 영혼들을 끌어안고 깊은 밤, 이른 새벽에 남모르게 흐느끼던 그 영혼의 몸부림치는 해산의 고통, 모두 버리고 간 사명의 자리에서 마지막 깃발을 붙들고 마치 난파되는 배 위에서 필사의 힘으로 그 배를 건져보려고 몸부림치는 마지막 선원처럼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목 놓아 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경험하고, 그분의 사랑을 알았던 그 경험들은 세월이 많이 흘러갔어도 아직까지 우리의 가슴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남아있습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나라에 간 뒤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말하기를 믿음도 소망도 다 떨어지지만 사랑은 영원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우리가 섬깁니까? 정말 섬기되 그분 한분의 평가만을 생각하면서 그분만을 즐거워하며 섬깁니까? 그래서 우리의 섬김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의 섬김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합시다. 그리고 주님이 나를 원래 맨 처음에 세워두셨던 그 자리가 어디인지 한번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이 떠난 그 자리는 여러분이 돌아가기 전까지는 항상 비어있습니다. 은혜를 주신 성도들이 자기 자리를 비운 것을 바라볼 때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얼마 남지 않은 이 짧은 나그네 인생길에서 섬기십시오. 안일하게 놀다 지나간 날은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고, 오히려 그런 날들은 여러분들은 죄로 데려가고 부패를 조정할 것입니다. 허리띠를 동이고 잘 섬기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제 네가 이 세상에서 많은 눈물을 흘리고 고생을 했으니 이제는 내게 와서 쉬어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는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긴 사람이구나.” 칭찬하실 때까지 흔들리지 마십시오. 고난이 올 때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인정해주셨기 때문에 수천 수많은 사람 가운데 택하셔서 바로 그 고난 받는 자리에 사명을 이루게 하시려고 두셨습니다.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변함없이 끝까지 주님이 우리를 위한 섬김, 그 안에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 사명을 위한 분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투(빌1:30)
강릉에 가면 남대천이라는 개울이 있습니다. 강이라고 하기에는 좀 작고 개울이라고 하기에는 좀 큰 하천인데 그것이 동해 바라도 맞다 있습니다. 가을철이 되면 많은 언어들이 그 남대천을 거슬러 모천으로 돌아오는 통에 강릉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가을에는 연어 때문에 즐거워합니다. 거기에서 이제 알을 낳고 그러기 위해서 올라오는 것이죠. 이 언어에는 회기 본성이 있어서 자기가 태어난 그 모천을 본성적으로 파악해서 돌아오는 습성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알에서 깨어난 그 치어들이 이제 떼를 지어서 하천을 따라 내려가고 바다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사실은 치어들이 바다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벌써 많은 물고기들에 의해서 먹히고 죽습니다. 바다로 나가면 더 큰 물고기들이 많으니까 그 물 기고들이 많이 희생되죠. 용케 살아남은 놈들은 이제 넓은 바다를 헤엄쳐 가면서 쑥쑥 자라서 북태평양까지 휘돌아서 그래서 다시 성어가 되어서 남대천으로 회기 하는 것입니다. 그 회기 하는 연어들의 행렬은 참 엄청납니다. 큰 것은 1미터가 훨씬 넘는 그런 연어도 있는데 그런 것들이 이제 떼를 지어서 올라오게 됩니다. 그들의 모천으로의 회기의 본능은 참 눈물겨울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이제 치어였을 때에는 그 개울이 넉넉하게 컸지만 이제 성어가 되어서 덩치 큰 몸이 되었을 때에는 사실 그 큰 고기가 헤엄치기에는 넉넉한 하천이 아닌데도 자기가 돌아 가야할 목적지이기 때문에 미친 듯이 헤엄을 쳐서 그 하천으로 올라옵니다. 여기저기 낚시꾼들이 던진 미끼의 유혹이 있는데 그것을 피해야 하죠. 그리고 공장에서 내려 보낸 폐수와 생활 오수들이 모천으로 회기 하는 이 연어들을 전혀 반기지 않는데도 누가 시켰는지 그들은 모천을 향해서 열렬하게 회기 합니다. 남대천에는 그런 지형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때때로 높은 폭포가 나타납니다. 그러면 폭포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연어는 폭포를 거슬러 올라서 그 모천으로 가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바위덩이에 던져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며 폭포수 물살을 거시리고 결국은 폭포를 뛰어 넘어서 그래서 모천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산다고 할 때에 목표를 가지고 살지 않으면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아마 고생은 있을지 모르지만 고난이라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이 고난은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겪어야 하는 고통을 가리켜서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 목표가 주님 안에서 정해진 목표라면 그 고난은 고스란히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되는 것이죠. 왜냐면 그 목표를 주신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달려가느라고 당하는 많은 고통들은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 편지를 적을 때에 옥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형의 집행을 기다리는 미결수의 몸으로서 이제 이 옥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왜 사도가 옥에 갇혀서 내가 지금 당하는 고난, 내가 지금 싸우는 이 싸움이 너희에게도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서 보는 바다. 이렇게 고백할 정도로 고난을 당하여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데로 되는대로 인생을 살았더라면 사도가 오늘 이 옥 속에 갇혀서 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물로 편지를 썼을 리가 있습니까. 사도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그 목표를 따라서 살려고 할 때에 수많은 저항을 만난 끝에 사도는 옥에 갇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그 길로 가려고 하면 우리는 반드시 그 좋은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저항요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사단의 역사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서 거스르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하는 이 세상이 거세가 반항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과 어울려 짝하고 세상이 끄는 대로 살면 세상은 우리와 또 우리가 속한 하나님께 대한 반감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우리의 삶의 목표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할 때 그 때 세상은 우리를 향해서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고난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의 고백에 의하면 “예수를 믿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수뢰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데는 무슨 힘이 듭니까.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믿고 그분을 온전히 의지하는 데는 사실 우리의 희생이 많이 따르지 않습니다. 복음의 빛이 비춰서 그래서 우리가 어두운 마음의 눈을 뜨게 되어서 예수 안에 있는 구원 이외에 아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그분에게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온 몸을 맡기는 것 비용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지옥에 갈 영혼이 천국으로 옮겨가는 이러한 혜택만을 우리게 하기 우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는 반드시 목표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시면 나에게는 그 은혜 안에 은혜를 따라서 살아야 할 소명도 함께 주어진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 제가 운동을 좀 많이 했습니다. 한 12킬로를 걸었습니다. 6킬로쯤 걸어갔는데 교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님을 만나러 왔다는 것입니다. 누가 왔는데 그러니까 수녀님이 오셔서 목사님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신부님한테 가시지 왜 목사님에게 오셔서 그래서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꼭 목사님을 만나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라고 해라. 그리고 6킬로를 60분이 되어야 걸어오는데 40분 만에 뛰어오다 걸어오다. 그러면서 왔습니다. 그래서 왔더니 나를 만나기 위해서 저기 대전에서부터 일부터 하루를 내서 그렇게 오신 어느 수녀님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로 나를 찾으셨습니까? 그랬더니 너무 너무 뵙고 싶었데요. 그래서 보시라고, 그러면서 왜 그렇게 보고 싶었습니까? 그랬더니 지방에서 우리가 설교 방송을 내보내잖아요. 그것이 참 귀한 사역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바뀝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가 우연히 들었답니다. 그런데 진짜 이분이 쭉 간증을 하는데 생애적인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수녀원에서 그 설교를 11시가 되면 딱 나오는데 그 때 아주 정 자세로 앉아서 모든 설교를 필기를 하면서 듣는데요. 그런데 매번마다 자기가 펑펑 울면서 그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노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저의 눈길을 끈 것은 거기가 아니라. 그다음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으니까 하나님이 자신에게 자꾸 예전에는 잘 못했던 일을 하라고 그러시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라. 그들을 돌봐라. 그래서 사실은 자기가 돌보고 있는 교인 가운데는 가정이 다 파탄 나고 망가져서 이제 가정이 거의 해체 되어버린 그런 가정이 있는데 하나님이 자꾸 찾아가라. 그러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가려고 마음을 먹으니까 그 가족들에 대해서 그렇게 가슴 아픈 마음이 생겨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고 그다음에 가서 자기가 받은 은혜를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고 가르쳐 줬더니 그 사람들에게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안 믿는 남편들이 주님을 믿겠다고 하는 이러한 말하자면 변화의 역사들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그 얘기를 하면서 결론이 뭐냐면 하나님이 저에게 은혜를 많이 주셨는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는 반드시 그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가게 하시고 싶은 그 목적지가 있는 것입니다. 이루고 싶으신 그 일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괜히 은혜 받으려고 하는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쓸데없이 은혜를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괜히 은혜를 받으려는 적이 있습니다. 괜히 라는 것이 뭡니까? 은혜를 왜 받으시려고요. “아이고 컬컬해요.” 막걸리를 좀 드시지. 무슨 얘기냐면 불편한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그래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은혜가 떨어지면 아주 극단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살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나만 해도 어떻게 해 보겠는데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구하는 자체가 다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 입장에서는 우리에게 그 은혜를 주실 때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 계획은 그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에게 목표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는데 지성이 부족하거나 판단이 모자라서 혹은 은혜를 일시적으로 받았지만 이 속에서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이 아직도 우세하기 때문에 감히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은혜에 담긴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완고함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그 은혜는 금방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들으세요. 은혜를 조금 받았기 때문에 얼마 안 가서 은혜가 소진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은 은혜를 많이 받았어도 그 은혜를 올바로 관리하지 아니하면 은혜로부터 금방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에 되로 하나씩 만나를 거두게 되어 있었잖아요. 그래서 일용할 양식만을 거두어 오게 되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욕심이 많아서 배나 가지고 오잖아요. 그러면 신기하게 남은 것들은 어떻게 돼요? 벌레가 생겨서 썩어서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던 심령이 그 은혜에 담겨진 소명대로 살지 아니하면 그 은혜를 받았던 마음이 금방 부패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부패에 대해서 사경회 때 했죠. 그렇게 부패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을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은혜를 주신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금방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반드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또 섬겨야 하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 사명이 바로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목표로 놓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은 바로 이것이다. 나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나로 하여금 이런 사람이 되고, 이런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나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다. 그 사명,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목표는 수시로 발전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갔을 때 제일 먼저 부름을 받은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집에서 이방에서 끌려온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단번에 애굽을 맡긴 것이 아니라. 마당이나 쓸면서 사는 마당쇠의 역할이 맡겨졌습니다. 그러다가 그 집의 총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다보니까 그 집안 전체를 돌봐야 하고, 나중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나라 전체를 돌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을 때에 그 은혜 속에 처음에는 작은 사명을 주십니다. 그것을 훌륭하게 감당해나가면 그다음에 더 큰 은혜를 주시면서 더 큰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더 큰 은혜를 주시면서 더 큰 사명, 그러면서 이것이 계속해서 진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되어서 섬길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물리적으로 큰 자가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점점 당신에게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더 많이 영광 돌리며 섬길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에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잘 깨닫고 받은바 은혜를 그 소명에 부합하도록 섬기는 일에 사용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존귀해지는 비결인 동시에 자기를 그렇게 은혜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을 하나님 앞에 정말 아름답게 사는 길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쓸모없는” 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성도들에게는 물론이고 후배들에게도 이야기 할 때 그렇게 계속 사는 것이 큰 죄악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계속해서 살면 나중에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 특히 신학교 다니는 젊은 교역자들에게는 항상 당부합니다. 그렇게 공부 안하고 열심히 이것저것 한다고 뛰어다니면 그것이 죄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렇게 오래 살면 나중에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 그 얼마나 슬픈 것입니까.
또 우리 자손들,
다 주를 기리고
옛 성도들같이
긴하게 하소서.
그 찬송 속에서 무엇을 기도하고 있습니까? 또 우리 자손들이 다 주님을 찬송하고 훌륭한 옛 성도들, 구름 같이 허다한 믿음으로 살았던 성도들처럼 주님 앞에 요긴한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기도입니다. 우리의 모든 후손들은 주님 앞에 요긴한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쓸모없는 사람들이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런데 은혜는 소명을 소명은 목표를 가져다줍니다. 목표를 따라서 살려고 할 때에는 많은 고난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강물이 흘러가면 그 널찍한 튜브 나 물 위에 띄워놓고 벌러덩 누워서 밀짚모자 하나 뒤집어쓰고 떠내려가면 힘들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헤엄을 쳐서 그 강을 거슬러 오려고 몸부림치면 비로소 그 물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려고 하면 그 때는 엄청난 저항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저항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첫 째는 뭐냐면 반대편에서 오는 저항입니다. 뭐냐면 주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거룩하게 살려고 하면 이 세상에서 끊임없는 유혹이 역사합니다. 주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외부적인 핍박이 따라와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마음으로만 살짝 간직하고 세상에서 고난이 올 때 언제든지 그것을 버릴 준비를 하고 살면 고난이 덜 와요.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 은밀하지 않고 노골적이면 세상은 대놓고 우리를 박해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역 방향에서 오는 고난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역방향에서 오는 그 엄청난 고난을 당하면서 박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한 부분 하지 말라고 명령할 때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면 지금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을까요? 만약에 사람들이 싫어하는 눈치를 보이면 복음을 더 이상 전파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하고 철회했더라면 이런 핍박을 받아야 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사랑하는 사도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이 복음을 들어야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 복음을 듣고 이 세상의 헛된 일들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라고 하는 신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신념대로 살았습니다. 그것을 외쳤습니다. 온 몸으로 보여주고, 온 몸으로 그렇게 살고, 온 몸으로 그것을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신앙 고백이 이처럼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목표에 대해서 노골적인 신앙의 고백이 되니까 세상도 사도를 노골적으로 박해했습니다. 결국은 투옥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지체들의 곁을 떠나서 외로운 감옥 속에 내쳐진 바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 방향에서 오는 고난입니다. 그리고 나는 감히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이 믿음대로 살려고 하는 나를 싫어한다는 것을 느껴보지 못한 그리스도인을 참된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시로 시기를 따라 변절하고 세태를 따라 수시로 야합하는 그런 신자들에게는 이런 고난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온갖 시련
내 맘을 흔들고
저 악한 원수들이
안 밖에 있으나
수없는 원수들이 에워싸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너무나 커요. 은혜가 큰 만큼 소명도 분명합니다. 그러니 목표도 확실하죠. 그래서 그 목표를 따라서 살려고 분투하는데 내가 분투하면 분투할수록 나를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저항하는 이 세상의 세력, 내 안에 있는 부패한 정욕의 역사하는 힘은 강해집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 주님의 은혜를 못 받았을 때보다도 더 많은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외로움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이 쏠리트티듀 이 외로움이라고 하는 고독은 아주 중요한 탐색의 대상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외로운 고독을 느끼지 않는 신자는 신자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참된 신자들은 모두 이렇게 목표를 부여받고 그 목표를 따라 살려고 하면 역방향으로부터 오는 엄청난 고난, 시련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고난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역방향으로부터 오는 고난이 아니고 같은 방향으로부터 오는 나와 함께 가는데도 그것이 고난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비유가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흘러가는 강물에 배를 띄우고 아무 노도 젖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배는 물과 싸우지 않습니다. 왜냐면 강물이 움직이는 것만큼 순리대로 배가 움직이니까요. 그러나 강물은 시속 2킬로미터로 가는데 같은 방향으로 가지만 배가 10킬로미터로 가고자 할 때에 늦게 흘러가는 강물은 빨리 가고자 하는 배를 가로막게 되지 않습니까.
저는 인생이 80이면 중간이 40세 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생의 계획을 그렇게 세우면 나중에 뒷돈을 다 못 댑니다. 무슨 뜻이냐면 나이가 들게 되면 모든 힘과 이 자원을 활용하는 능력이 젊은이 때와 같지 않습니다. 저도 하나님께서 남다른 건강을 주셔서 잘 살아왔습니다. 신학대학원 다닐 때 우리 같은 동급생들이었지만 저보다 연배가 아래니까 늘 나보고 형, 그랬는데 그 중에 어떤 전도사님이 그랬습니다. “형님 나는 형님만 보면 정말 좌절돼? 왜 좌절이 되니?” 그랬더니 “어쩌면 그렇게 끄떡없이 건강하냐는 것입니다. 그래 나는 이틀 밤 정도는 삼일 밤은 모르지만 이틀 밤 까지는 끄떡없지 어제도 내가 17시간 에세이를 썼다. 끄떡없었습니다. 그 때는 내 건강이 흘러가는 강물이고 내가 가고자 하는 추진력이 배라면 항상 배가 속도를 내도 강물도 워낙 빨리 흘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안 그래요. 강물은 8킬로쯤 흘러가는데 가고 싶은 속도는 20킬로입니다. 그러면 몸이 배겨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 후에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것이 이런 것이 아니구나. 80세까지 산다면 중간은 40세가 아니고 30세입니다. 더욱이 그것을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지식과 총명, 인생을 사는 지혜. 이런 것들이 이제 나이가 많아서 많이 축적되면 그 지혜를 가지고 어느 정도 보충은 할 수 있지만 그러나 80인생의 중간 기점을 수학적으로 40세라고 끊는 것은 그야말로 멍청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30세쯤이 중간입니다. 여기 30쯤 된 청년들 있죠. 반 산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 것 아닙니까 “목사님 장가도 안 갔는데 반이라뇨.” 그것은 댁의 사정이고 어쨌든지 반 왔습니다. 벌써. 그러니 얼마나 속히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그뿐만 아니죠. 우리들이 함께 주님을 섬기면서 일해 갈 때에는 혼자 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다 같이 갑니다. 같이 옆에 있는 모든 돕는 지체들, 동역하는 지체들이 같은 방향으로 안 가는 것이 아니고 같은 방향으로 가는데 열심히 모자라요. 시속 4킬로밖에 안 가요. 나는 목표를 세우고 시속 20킬로로 달려가서 빨리 저 목표를 완수하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서 주님을 위해서 달려가고 싶은데 그 때 함께 손잡고 가는 사람들이 짐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것이 같은 방향으로 가면서도 당하게 되는 고난입니다.
사도가 그런 사람이었잖아요. 주님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 때문에 소명을 확실하게 깨달았어요. 이제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온 몸이 은혜 안에 있을 때는 그 위에 순종했어요. 그런데 육신이 연약했습니다. 그렇죠. 특히 무슨 이유때문인지 모르지만 눈이 잘 보이지 않은 이 눈병으로 인해서 바울은 많은 고생을 했고, 그것이 얼마나 자신에게 고통이 되었는지 사단의 가시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같은 방향으로 가면서도 자신에게 저항을 느끼게 만드는 이런 요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이제 한 1년 혹은 2년에 걸쳐서 좀 뭐가 우리를 깊이 깨어서 일어나게 할 수 있는 좀 큰 작품을 써서 성경을 열어 보여야 되겠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이제 무엇을 써야 되나. 그러면서 고심했습니다. 그 때 느낀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을 잘 써서 이제껏 사람들이 보지 못한 말씀의 세계를 열고 그래서 주님의 뜻을 알게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합니다. 그 열정은 가슴 속에 타올라요. 아는 것이 너무 없어요. 이것은 단지 여러분들에게 겸손하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입니다. 진짜로 아는 것이 너무나 없고, 계획이나 여러 가지 산란한 일이 있어서 며칠만 탄광의 막장에 내려가지 않으면 그러면 더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아주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비감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세계는 이렇게 깊고 오묘한데 그리고 나는 그것을 펼쳐서 이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갈망도 있고, 또 그런 사명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아는 것이 너무 없습니다. 그래서 소명은 분명히 느끼는데 그것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다 어떤 것입니까? 같은 방향으로 가고는 있지만 가고자 하는 목표에 못 미치는 나 자신의 능력이 저항이 되는 것입니다. 역방향에서 오는 저항이든, 같은 방향으로 가면서도 작용하는 저항이든지 간에 이 모든 것들이 우리들에게 고난을 가지고 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이런 고난을 잘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지난주에 고난 받던 사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주께서 자기들이 그렇게 고난을 당하며 매질을 당하고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거기를 떠나오면서 그들은 기쁨으로 주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아, 주님이 우리를 감히 당신을 위해서 고난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해주셨구나. 야,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냐,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이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은혜를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고난을 특권처럼 생각합니까. 특권은 무슨 얼어 죽을 특권이냐. 은혜 받을 때는 우리 모두 헤헤 거리다가도 그 은혜 속에 담겨진 사명을 깨닫게 하셔서 힘겨운 자리에 우리를 세워놓으시면 금방 고난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그것을 특권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만 혼자 왕따 시키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슴없이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걷어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걷어 치워버린 것과 함께 그에게 주셨던 은혜도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슴에 잘 새겨보세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세워주신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살아있습니다. 반짝 반짝 빛나요. 진리의 말씀을 탐구하기 위해서 반짝 반짝 빛나요. 뿐만 아닙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해서 우리만 할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만져주시고, 자기를 복주시기 위한 갈망으로 눈이 반짝 반짝 빛나요. 그것만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해서 기왕에 주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것이니까 하나님께 정말 보탬이 되고 영광이 되게 해야 되겠다. 라고 하는 갈망 때문에 두 눈이 반짝 반짝 빛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보다 자신과 유사한 사명을 맡고, 자신보다 훌륭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게 배웁니다. 그래서 잘해요. 그래서 제가 항상 가슴에 새기는 말이 있습니다. 충성되기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충성이 그의 삶의 모습이라면 착한 것은 인격의 상태입니다. 잘 한 것은 그 일을 주님의 마음에 충분히 들도록 효율적으로 해낸 지혜로운 상태입니다. 이것이 세 가지가 삼위일체가 되어야합니다. 그렇잖아요. 도움은 별로 안 되지만 충성스럽지 않다고 말하기 힘든 사람들, 교회에 꼭 있잖아요. 표현이 너무 어려워서 이해를 잘 못하죠. 풀어보겠습니다. 진짜 열심히 한다고 말할 수밖에는 없지만 왠지 쳐다보는 사람이 흡족하지 않은 경우 있잖아요. 이것은 잘못했도다. 충성된 종아. 말도 안 되네. 잘은 못 했도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지혜가 없이 충성만 있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에 근심을 끼치고, 충성은 없고 지략만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가 없습니다. 둘 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잘 하는 것을 택할 것이냐? 충성됨을 택할 것이냐? 그러면 내가 그렇게 얘기합니다. 둘 다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 우리 교역자들에게 물어보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무슨 사역을 합니까? 예. 저는 청년 사역을 합니다. 그러면 제가 물어봅니다. 당신은 우리나라에서 어떤 청년 사역자를 가장 존경하고 당신의 사역 지를 누가 사역하고 있는 사역 지처럼 만들고 싶습니까? 우리나라에 없다면 외국에 누구입니까? 우리나라도 없고, 외국에 살아있는 사람 가운데 없다면 죽은 사람 가운데 누구 있습니까? 물어보죠. 그래서 대답을 못하고 멈칫멈칫 하면 나는 그렇습니다. 당신은 배우려고 하는 자세가 결핍되어 있다. 가끔 그렇게 테스트를 합니다. 무슨 사역을 합니까? 예, 저는 청소년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그 사람이 완전한 모델일수는 없지만 당신이 무릎을 꿇고 배우고 싶은 사람이 각 방면에서 5명만 이름을 한번 대 보십시오. 그것을 댈 수 있다는 이야기는 충성될 뿐만 아니라. 잘 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가을부터 우리 교역자들도 또 장로님들도 그렇고 구경을 더 많이 시켜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국내에서 사역을 잘 하는 교회들도 우리들이 계속 스터디를 했죠. 그런 스터디도 더 하고 필요하면 외국에 나가서 그런 우리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싶어 한 분야에 있어서 탁월하게 사역하고 있는 그런 곳들을 우리들이 돌아보아야합니다. 그래서 제가 브리핑 해 주는 외국의 잡지들을 보니까 깜짝 놀랄 정도 입니다.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사역해서 엄청난 열매를 거두는 미국의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끼니가 간 곳없는 그 빈민들을 찾아서 눈물겹게 사역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지구 곳곳에 있더라고요. 보면서 야, 정말 하나님이 멋있구나. 하나님은 구석구석에서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기는 사람들을 그렇게 두셨습니다. 배워야합니다. 정말 배워야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 사역을 하면서 이제 말씀을 캐기 위해서 막장에 내려가느라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저는 부족하겠지만 이제 자라나는 교역자들과 교회를 섬기는 장로님들, 안수 집사님들, 권사님들, 많이 보셔야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눈물겹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속히 바람처럼 지나갑니다. 연습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몇 년 더 섬기고 나면 다시 한 번 섬길 기회를 달라고 주지 않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데려가 버립니다. 또 죽음이 우리를 데려가지 않아도 우리가 섬기던 모든 자리를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우리는 지켜만 보아야 하고 기도만 해야 하는 상황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한 순간순간이 얼마나 귀한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여기에 불러 놓으셨고, 그리고 그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로 여러분들을 속죄하셨습니다. 칠흑과 같이 어두운 길에서 방황하던 여러분들을 인격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그래서 큰 은혜를 주셨고, 그 은혜를 주셨을 때는 소명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각자 여러분들에게 세워주신 자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일로. 어떤 사람은 적은 일로, 어떤 사람은 이런 일로, 어떤 사람은 저런 사역으로 부르셨죠.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의 크기와 종류가 아니라. 그 일이 무엇이든지 그 사명을 맡기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를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는 타들어가는 초 동강처럼 금 그어진 시점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불러가 십니다. 이 교회에 있어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그 금까지 타 들어가면 하나님이 거두어가십니다. 그런데 감사할 줄도 모르고 온갖 불평과 불만, 자기 연민, 세상사랑, 욕심 이런 것에 빠져서 정신 못 차리고 주님이 주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 타들어간 시커먼 가슴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살아간다면 이다음에 주님을 어떻게 만나시려고 그러십니까. 감사할 줄도 모르고, 그 어두운 죄악의 길에서 주님이 어떤 사랑을 주셨습니까. 우리를 거기에서 건져내셔서 빛 가운데로 오게 하시고, 영혼의 어두움과 지성의 무지 속에서 주님을 더듬어 찾지도 못하던 우리에게 복음의 빛을 비춰주셔서 그래서 주의 뜻대로 살게 하셨는데 감사할 줄도 모르고 불만, 불평, 원망,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심지어는 대적하는 마음, 은밀히 자기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려고 하는 더러운 마음, 시기하고 암투하며 미워하는 그러면서 자신의 소명의 자리를 떠나서 휘청거리는 삶을 살다가. 그것 나중에 여러분들이 살아온 모든 삶, 어두운 그늘 속에서도 여러분들이 지체에 대해서 내뱉은 한 두 마디의 표독한 말. 교회를 거시리고 지도자를 거시리고 참된 목양의 그늘 아래 들어오지 않고 이리저리 휘돌면서 분쟁을 일으켰던 그 모든 삶, 하나님이 활짝 벗겨내셔서 심판 날에 빛 가운데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 때 어떻게 그것을 감당하려고 그렇게 살아요.
사명이 무엇입니까? 왜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까? 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만나주셔서 여러분들을 그 자리에 세우셨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에게는 목숨을 주고라고 이루어야할 사명이 여러분들 속에 불타고는 있습니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눈을 감을 수 없는 어떤 인생의 목표가 여러분들 속에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과 함께 울고 웃고, 분노하고, 기뻐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여러분들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보세요. 희어져 추수할 밭이.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 상한 영의 탄식소리가 들려오나요. 그 사명을 위해서 우리 각자를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다양한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불타고 있습니까? 너무 슬퍼하죠.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는지 그런 심정을 헤아려보세요. 결국은 그렇게 썩어버리려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까. 거기에 세워 주셨냐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시는지 여러분들에게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그래서 하나님께서 물 붓듯 은혜를 부어주신 사람들이 주님의 마음에 슬픔이 되었을 때 주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해서 남이 만나지 못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그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이 건져내셨는데 그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명도 없이 성도의 거룩한 행실도 없이 벌거벗은 채 감사함도 없이 원망과 불평, 분쟁과 정욕, 이런 것들이 뒤 엉클어져서 몸만 주일날 교회에 들락날락 하면서 직분이랍시고 맡아가지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주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시겠습니까. 한번 착한 성도로 돌아가서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세요. 나는 여러분들에게 눈물로 권합니다. 한번만 착한 성도로 돌아가서 그 주님의 마음을 정직하게 한번 헤아려보세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정말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많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 목표를 따라 살아가려고 할 때에 만나게 되는 사도가 오늘 고백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도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에게만 그런 싸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빌립보 교회 교인들과 같이 평범한 신자들에게도 그런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왜? 바울이 받은 은혜와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 받은 은혜가 크기와 시기는 다를지 모르지만 그것이 같은 동질의 은혜입니다.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주어진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부어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푸라기와 같이 연약해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들에게 착한 마음을 주셔서 그래서 망가진 이 세상 어느 구석에선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어린 아이처럼 붙들고 사명을 붙들고 그 소명을 따라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그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잘 감당하게 하시려고 그 하나님께서 은혜를 구하면 은혜를 주시고, 환경이 어렵다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환경을 열어주시고, 자원이 부족하다고 투덜대면 하나님께서 자원을 공급해주시죠. 건강을 달라면 건강을 주시고 하나님이 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그 많은 은혜의 자원들, 이 땅에 있는 많은 복의 자원들을 사명을 이루는데 사용하지를 않아요. 은혜는 은혜대로 표류하다가 은혜 받은 마음은 부패하기 시작하고, 사명은 사명대로 팽개치고 그다음에는 그 부르심을 벗어버리고 육적인 삶을 살아가면 하나님이 너무 슬퍼하셔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혹시 계속해서 은혜를 조금씩 받으면서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살면 마지막에는 제가 제일 싫어하는 표현,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어떻게 될까요? 아끼는 자 없이 죽었더라. 입니다. 그런 분투하는 싸움이 성도들의 가슴 속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뭐라고 하느냐면 ”너희가 본 바요. 또 들은 바니라. 내게도 있다“ 내게도 이런 싸움이 있다. 지금 내가 사랑하는 지체들의 곁은 떠나고 돌봐야 하는 목회 지를 떠나서 그리고 도와줘야 하는 선교지로부터 격리되어서 이처럼 좁은 공간에 갇힌 채 살아야 하는 이 영화의 몸이 된 이 신세 자체도 결국은 내가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싸우고 또 싸운 결과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 상황과 타협하고 하나님 앞에 변절하지는 않겠노라고 하는 사도의 결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에게 은혜를 주셨을 때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 곧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하는 것, 그것이 그의 사명이었고, 그의 사명을 향해서 느끼고 있는 이 사도의 소명이 목숨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요즘 종종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는 생각합니다. 그 때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했던 것처럼 목사와 교인들도 심판 날에 예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큰 분쟁이 있어서 에드워즈가 목회하던 교회처럼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대립이 생겼을 때 그 날에 주님 앞에 모두 서서 행한 모든 것을 심판을 받고 누가 옳았는지 거기에서 판단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이 계시지도 않는 것처럼 이어져 가는 삶이 주님이 은혜를 주셨는데도 그 은혜를 받은 적이 없는 것처럼 여러분들에게 그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주신 사명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도 그런 것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흔들리며 살아갑니다. 주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이 어떠셨습니까. 그 일에 있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본은 어떤 모본이었습니까.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죠. 예수님에게 자신의 생명이 귀했나요?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 귀했나요.? 예수님에게 이 세상에서 환영받고 이 세상에서 누리는 영광이 소중했나요?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소중했나요? 물어볼 필요도 없죠. 그래서 정말 이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결한 생명이 예수 안에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 생명보다도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그 사명이 소중했기 때문에 그 사명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 예수님의 별명은 충성된 증인이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충성된 증인이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도처에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 세상을 보셨고, 그리고 이 세상 속에서 자기의 살을 갈아 자기의 피를 즙 짜 주님 앞에 드려야할 그런 헌신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수시로 만났기 때문에 세상 자랑과 육신의 안일과는 상관이 없는 지극히 헌신된 삶을 예수님께서 사셨던 것입니다.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가슴에 손을 얹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은혜 받은 사람입니까? 한 번도 은혜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까? 주님이 어두움 가운데서 여러분들을 건져주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지금도 그 어둠 가운데 하나님이 팽개쳐 두셨습니까? 그렇게 건져주셨다면 그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들의 영혼 속에 정오의 햇살처럼 비쳐올 때 그 은혜 안에서 깨닫게 되는 소명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게 은혜에 감격하는 여러분들은 주님이 어디에 세워두셨습니까? 그리고 거기에 제일 처음 섰을 때 여러분들이 얼마나 떨었습니까. 한편으로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그 큰 은혜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지푸라기 같이 연약한 인간에게 맡겨주신 이 엄청난 사명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나는 비록 약하나 이 사명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라고 하는 절박함 때문에 얼마나 두려워 떨었습니까. 그리고 거기에서 얼마나 주님의 은혜를 구했습니까. 우리는 쉼 없이 있기도 했고, 생명을 거두어 가셔서라고 나를 세워주신 이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다 이룰 수 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그 마음입니까. 어두운 길에서 주님을 만나고 돌아섰을 때 그 마음입니까. 처음 사명을 맡겨주셨을 때 두렵고 떨려서 나는 아이같이 어리니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이 함께 하심만을 내가 구합니다. 하며 어린 아이처럼 주님의 은혜를 구하던 그 마음입니까. 우리 생각합시다. 정말 생각합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서 행하고 있는 소위가 어떠한지 깊이 생각합시다. 이 싸움이 이 거룩한 싸움이, 사도 안에 있었던 싸움, 빌립보 교회 교인 안에 있었던 이 싸움, 그 싸움이 우리 안에도 있는지 살펴봅시다. 사명을 이루려고 하지만 그것을 못 이루게 저항하는 환경과의 부단한 싸움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너무나 쉽게 굴복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주신 사명대로 살아가려고 할 때에 우리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시급한 만큼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 환경의 어려움 때문에 분투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 삶에 있어서 간절하고 처절한 기도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에 생명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슴을 찢는 간절한 기도, 뜨거운 눈물이 흐르게 하는 가슴을 쥐어뜯는 기도, 진액을 쏟아내게 하는 신음 소리가 담긴 탄식, 부르짖어 하늘을 찢고 충천한 화염처럼 보좌에 다다르는 그 애닮은 기도는 신앙의 위인들만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가장 어린 사람,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 그래서 사명의 자리를 발견한 사람, 그러나 자신이 혼자의 힘으로는 그 사명을 도저히 이룰 수 없다고 믿는 사람, 사명은 고귀하고 엄숙하지만 내 힘으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고 믿는 사람, 그래서 주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찢어진 가슴을 가진 사람, 그 사람들이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우리들이 오래 예수를 믿고 그렇게 은혜를 받아도 왜 그렇게 신앙의 인격이 개떡 같습니까. 왜 변하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이게 살살이처럼 고난을 피하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어느 책을 잠깐 읽는 가운데 포도가 우리 몸에 얼마나 좋은지를 기록한 자료를 보았습니다. 너무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실험실에서 쥐에게 발암 물질을 주사하고 나서 한 쥐는 포도를 먹이고, 한 쥐는 포도를 안 먹였는데 포도를 먹인 쥐는 발암 물질을 주입했는데도 암이 치유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평균 수명이 15일 밖에 안 되는 곤충에게 포도만 열심히 먹였더니 25일까지 수명이 늘어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포도 속에 있는 그 성분이 가장 많이 들어있는 과일이 사실은 포도가 아니라. 블루베리라고 하는 과일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많지 않지만 외국에는 많습니다. 보랏빛의 작은 알갱이로 되어있는 블루베리입니다. 그런데 그 블루베리가 그런 물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농장에서 기른 블루베리와 야생에서 홀로자란 블루베리가 모양은 똑 같은데 그런 이로운 물질이 들어있는 차이가 1대 5입니다. 모양은 똑같은데 집에서 자란 블루베리에는 그런 좋은 성분이 1밖에 안 들어있지만 야생에서 홀로자란 블루베리에는 5배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많은 식물학자들의 이야기는 뭐냐면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농장에서 기르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보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가 안 오면 주인이 비행기를 타고 물을 주든지 무슨 펌프로 해서 물을 주든지 물을 주는 것입니다. 벌레들이 막 못살게 하면 약을 뿌리고, 또 땅이 너무 척박해서 잘 안자라면 비료를 주고 이러면서 바람이 오면 막아주고 이러면서 저절로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 없어요. 투쟁이 없어요. 몸부림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이로운 물질이 적게 밖에 생성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생에서 던져진 블루베리를 누가 보호해주는 사람이 있어요. 며칠씩 비가 안 내리고 태양 볕이 내리쬐면 말이죠. 그 뿌리가 오그라들면서도 자기 자신의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서도 그 악한 환경과 싸우는 것입니다. 바람이 광풍이 몰아지면 가지가 꺾이지 않기 위해서 뿌리가 땅을 움켜잡고 씨름을 하면서 그런데 비가 엄청 쏟아지려고 하면 그 비를 맞으면서도 버티는 것입니다. 이렇게 몸부림친 가운데 제철이 되면 그 모든 고난은 이기고 몸에 이로운 물질을 농장에서 기른 블루베리보다 5배나 더 많이 함유한 아주 탐스러운 과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싸움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싸움을 통해서, 싸우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체는 영적 전쟁이고, 그 신분은 전투하는 군인입니다. 남의 나라 땅에서 전투하고, 군인은 싸우는 군인과 같습니다. 이 세상이 주님을 위해서 섬겨야할 세상이지만 순례자로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수많은 싸움, 이 싸움이 바울 안에 있었고, 빌립보 교회 교인 안에 있었습니다. 이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는 여러분 안에 이 싸움이 있어야 할 차례입니다. 이 싸움을 잃어버린 사람은 하나님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타락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문에 날만한 엄청난 죄를 저질러야지 타락입니까? 아닙니다. 이 싸움 없는 삶이 바로 타락한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읍시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주님이 은혜를 주셨을 때 여러분들에게 주신 그 사명의 자리가 어디인지 헤아려봅시다. 그리고 그리로 돌아갑시다. 그래서 우리 거기에서 죽읍시다. 기도하겠습니다.
8. 헌신 중의 고난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1:9)
목표가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고생은 있지만 고난은 없습니다. 왜냐면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가치 있는 어떤 목표를 찾아 나가는 가운데 당하게 되는 고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표가 없이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고난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고생할 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는 그 주신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 은혜를 주셨다고 하는 것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에는 우리에게 맡기고 싶은 일이 있어서, 사명이 있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인데 그 사명을 따라 살아야 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던 사람들은 아무도 평탄한 인생을 살다가 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도 많이 누렸지만 그러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분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배불리 먹고, 좋은 환경에서 편안히 지낸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편안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 주신 고난은 때로는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입지 못하는 그런 고통도 허락을 하시지만 때로는 먹고 입고 마실 것이 충분히 있어도 그것으로서 통증을 덜어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깊은 고난을 통과하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일을 이루신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항상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이고, 그리고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우리가 아니면 이루어드릴 수 없는 그 고유한 사명,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신 그 자리에서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셨다고 하는 것을 명심하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이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한 당연한 본분이기도 하고, 또 주신 은혜를 간직하면서 사는 비결이기도 하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에 그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살아갈 때 그 때가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고난이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거기가 가장 행복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 고린도 후서는 신약의 예레미야서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꾼, 바울과 그 일행의 고생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그의 일행에게 행하신 놀라운 은혜, 사역의 와중에서 일어난 수많은 기적과 위로, 이런 것이 늘 있었죠. 그래서 사도행전은 바로 바울행전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하나님이 바울을 덜어서 사용하셔서 나라와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동토의 땅의 빗장을 끌러 하나님의 생명의 복음이 흘러들어가게 하신 도구로 쓰임 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그는 비록 겉모습으로 보기에는 천막이나 기우면서 다니는 그러한 볼품없는 사람에 불과했지만 영적인 면에서 보면 그는 진짜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도 더 위대한 일들을 하는 사람 아닙니까. 세계 선교에 불을 지핀 사람이고, 그 불을 로마제국 곳곳에 가서 날라서 붙여버린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게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는 탁월하고 뛰어난 사람이었고, 그리고 신약 성경의 절반가량을 쓴 사람이었습니다. 지성이면 지성, 설교의 능력이면 능력, 그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면 은사, 선교의 전략이면 전략, 교회 행정이면 행정,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불세출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복음 사역은 혁혁한 성공을 거두었죠.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그 위대한 인물이 뭐라고 고백을 하느냐면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는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절망을 느꼈다.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챤키에르 케고르라고 하는 철학자는 자신의 “죽음에 이른 병” 이라고 하는 책에서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죽음은 절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절망이야 말로 인간을 죽음으로 이끄는 가장 무서운 질병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런 절망을 사도바울이 그 위대한 인물이 느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살 소망이 끊어졌다.”는 것은 외적인 환경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다.”고 하는 것은 내면의 세계에서 느끼는 극한 절망감을 뜻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 위대한 능력을 가진 사도가, 산자도 죽게 하고 죽은 자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하늘의 권세를 가진 이 위대한 사도가 왜 이렇게 오늘 이 서신 속에서는 가장 지푸라기처럼 연약한 사람이 되어서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다. 가장 연약한자처럼 고백을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왜 그런 고백을 하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우리들이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바울이 가지고 있는 삶의 목표가 그로 하여금 이렇게 살 소망이 끊어지게 하고 마음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줄로 알게끔 했습니다. 왜 이렇게 고생을 했습니까.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에는 전도가 총망 되는 전도지도자의 길을 걸어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모든 백성들이 가지 편이었고, 가족과 친척도 자개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생애에 자기가 세운 계획과는 상관이 없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거꾸러졌습니다. 자기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 그 놀라운 구원의 사랑을 경험하자마자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이방인과 임금들 앞에서 나를 증거 하기 위해서 택한 나의 그릇이다.” 은혜와 함께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은 푯대라고 불렀습니다. 사명은 푯대입니다. 자기가 가야할 그 푯대입니다. 그것이 아주 젊은 나이에 그 소명을 받고, 그리고 반백의 노 사도가 되어서 형 집행을 기다리는 순간까지 육신의 눈은 점점 쇠약해져도 마음속에 또렷치 정해진 그 인생의 푯대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사도가 오늘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깊은 고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불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세상이 끌면 이끄는 대로 이 세상에 인간의 풍조가 떠밀면 떠미는 대로 그렇게 조각배처럼 살았더라면 이 사람에게 이런 무서운 고난이 있었겠습니까. 물론 괴로운 인생길이니까 고생은 했겠죠. 그러나 아마 이렇게 무서운 고난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는 무엇이라고 표현했느냐면 “살 소망이 끊어지고” 비유를 하자면 길을 따라서 동굴로 깊이 들어갔는데 실오라기 같은 빛 하나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절망스러운 환경 속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에는 깊은 고통을 통해서 이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도 끊어졌구나. 라는 낙심을 불러올 정도로 마음의 고립감을 느낀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습니까. 그에게는 이루어야할 사명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토마스 왓슨이라고 하는 설교자의 책을 이렇게 읽어보니까 거기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결정적인 표가 여럿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뭐냐면 자신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든 사람들 중에 최상의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최상의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열매 중에서 극상품 포도, 이렇게 맺혀도 포도, 저렇게 맺혀도 포도인데 최고의 포도가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의 인격적인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사명을 맡겨주시면 최선을 다해서 하여 최상의 결과를 맺고 싶어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바울을 살 소망이 끊어지게 만들었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절망에 이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토마스 왓슨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은 늘 절망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늘 깨뜨려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때요?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모든 선, 모든 은혜, 그리고 모든 자원, 모든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고,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분만을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열렬히 기도하면서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그런 열렬한 기도 속에서 살지 못하는 이유는 기도생활에 게으르기 때문에도 우리가 그렇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음속에 목숨을 걸고 성취하여야 할 목표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 속에 피와 눈물과 땀이 베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할 때 그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열렬하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기도할 수 있기까지 살아온 그 삶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만큼 기도하고, 기도한 만큼 사는 것이니 삶은 기도를 능가할 수 없고, 기도는 삶의 수준 안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오늘 우리에게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런 사명이 있습니까? 그래서 다 이루지 못하면 잠을 이룰 수 없고, 먹을 수 없고, 그리고 마지막에 주님이 오라고 부르셔도 눈을 감을 수 없는 목표가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사도로 세우실 때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생각해보세요. 사실 우리 교회가 그 마음 때문에 세워지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함이라.”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으면 제자들에게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는데 일꾼이 적으니 너희는 아버지께 기도해라. 그래서 추수할 일꾼들을 많이 보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라. 그러시면서 열두 제자를 사도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니 사실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기에 있는 그 많은 세상의 수많은 사람과 일들이 사실은 예수님처럼 자기들 가까이 와서 섬겨주고 만져주고 눈물 흘려주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처럼 자기들 가운데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주기를 바라는 그 세상입니다. 그 세상에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사명의 자리로 보내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은혜를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에 은혜를 부어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은혜를 부어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큰 잘못은 뭐냐면 그 은혜에 목말라 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은혜에 목말라 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은혜 주시고 싶으셔서 어쩔 줄 몰라 하시는지 우리들이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해 어린 아이처럼 손을 내밀며 자기를 도와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기를 여종이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종이 상전의 손을 바람같이 그렇게 바라기만 하면 그의 모든 연약한 것을 받아주십니다. 심지어는 그의 많은 죄도 용서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 그 창기와 더러운 세리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아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주님께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갈망하지를 않아요. 정말 은혜를 갈망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은혜를 주신 사람들이 그 은혜를 아주 부패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셨으면 그 은혜를 간직하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분투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가 그들 속에서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의 부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주신 은혜를 계속 활용해서 은혜 주실 때에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감당하려고 할 때에 그 은혜가 그 안에서 계속 역사하는 것입니다. 힘 있게 역사하고, 능력 있게 역사해서 그래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사용을 안 해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면 우리에게 영적인 은혜만을 주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건강도 주시고 사명이 남아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가시지도 않습니다. 이 땅에 살게 하십니다. 모두 죽어도 그 사람은 살아있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생명도 주시죠. 그뿐입니까. 하늘 은혜도 주시지만 동시에 이 땅에 있는 지위도 주시고, 심지어는 우리에게 물질도 주시잖아요. 남다른 재능도 주시잖아요. 그런데 그것들을 본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을 때 주셨던 사명을 위해서 쓰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변했어요. 처음에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받으려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용납되기만 하면 최고였습니다. 내 아들로 용납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하나님이 복을 내리십니다. 그래서 하늘의 자원과 이 땅에 있는 자원들, 건강과 생명까지 많이 소유하게 되죠. 그런데 그 많은 것들을 소유한 다음에 맨 처음에 주님이 사명을 주신 그대로 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은혜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미끄러져 있고, 예전에는 마음속에서 소명에 불타던 사람들이 이제는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이 불붙는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사도를 보십시오. 포기하지 않고,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복음을 증거 하는 그 일을 위해서 자기를 바치려고 하니까 살 소망이 끊어지는 절망적인 환경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에는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같아서 아무 희망이 없는 절망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불굴의 올곧음을 가지고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목표를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그것이 큰 고난이 되어서 이 바울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했습니다. 목표를 포기하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을 그 목표가 있으니까 절대로 죽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이 카톨릭 신앙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서 그러면서 진짜 예수님이 우리에게 물려주시려고 했던 참된 신앙이 무엇일까를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윌리엄 팅데일 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최초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그 행동은 어마어마하게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모든 신자들은 직접 성경을 대할 수 없고, 오직 교회의 사제가 풀어주는 성경을 그대로 믿으면 되는 수동적인 신앙이 요구되었습니다. 결국은 당국에 체포되어서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워낙 비상하고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조정에서 압력을 넣었습니다. 회유했습니다. “그러지 마라. 너는 아깝다. 한 번만 성경을 번역한 것은 잘못된 것이었고, 이제는 그 일을 하지 않겠노라는 말만 하면 그러면 너를 살려주겠다.” 그 때 윌리엄 킹데일은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여러분보다 늘 판에서 소를 몰고 다니는 소년들이, 농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아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번역되어져야 했습니다. 나는 주님의 일을 했다고 굳게 믿고 주님이 내 편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순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 산 방식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었던 마틴루터가 젊은 독일황제 칼 오세에 의해 부름을 받고, 신문을 받기 위해서 보름스 의회에 섰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거기에 섰습니다. 그러면서 “제발 그렇게 싸우지 말고 우리가 한 모든 것들을 철회하고, 그리고 다시 이 카톨릭과 평화하게 지내고 그렇게 하라.” 그 때 마틴루터가 거기에서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나도 달리는 어찌 할 수가 없나이다. 오,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업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바로 사도행전에서 유언을 남기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에 한 그 말 아닙니까. “나는 이제 심령에 메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거기에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그러나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목숨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로 그런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히브리서 11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옥에 갇히고 칼에 베이고, 창에 찔리고, 불에 타서 죽기도 하는 그 극심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들이 그 고난 속에서 산화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얼마나 변절하기 잘하는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도대체 나는 묻고 싶습니다. 오늘 날 도대체 신앙의 지조라고 하는 것이 존재나 합니까? 믿음의 정절이라고 하는 것이 진짜 존재 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세상과 악수하고, 예수의 허리에 창 찌른 이 세상과 아직 그 피가 그 손에서 식지도 않았는데 그 손잡고 야합하고, 말이죠.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신앙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도 변절하고 신앙의 지조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을 무슨 연약함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에게 있어서 사명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그리고 아주 귀찮고 너절한 것이 됩니다. 그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 인류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가끔 걸어가는 그런 드라마의 소제 같은 것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사명이 쓸데없는 것이 될 때에 그 사명을 버린 그 사람 역시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가슴에 한번 손을 얹어보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이전에 받았던 그 놀라운 은혜, 어둠 속에서 헤매다가 주님을 만난 그 크고 놀라운 은혜, 그리고 부패한 길을 걷는데도 지금도 오래 참으시면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기억해보십시오. 도대체 그 은혜를 자격도 없는 우리들에게 부어주셔서 주님이 어디에다 우리를 세우 놓으시려고 했습니까. 그 은혜를 부어주셔서 주님이 우리를 어디에다 두시고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을 보고 싶으셨기에 그런 은혜를 주셨습니까. 또 그렇게 참으셨습니까. 거기가 어디입니까? 난 나아가서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거기입니까? 그래요. 사도바울도 때로는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에는 사형언도를 받은 것 같았으니 우리가 같이 연약한 사람들이야 다 잘 감당할 수 없겠죠. 그래서 어떤 때는 넘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주저앉기도 하겠죠.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신발을 거꾸로 신고 하나님이 세워주시지 않은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거친 바다 험한 산
피가 맺혀도
십자가 내가 지고
끝내 이기리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일할 때도 있고, 쉴 때도 있고, 먹을 대가 있는가 하면 잘 때도 있습니다. 기쁠 때도 있고, 눈물이 쏟아지는 때도 있습니다. 뛰어갈 때가 있는가 하면 주저앉아서 흐느끼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것이 되든지 간에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사명을 따라서 산 날짜만이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는 날들입니다.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사명의 자리에 여러분들이 있습니까. 지금도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내게 맡겨주신 그 사명, 그것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면 살 소망이 끊어진 것 같고, 그리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그런 사명의 자리가 있습니까? 바로 거기에 여러분들이 계십니까? 날마다, 날마다 그 사명의 자리 앞에서 가슴을 졸이고, 자기가 외소해지는 것을 느끼고, 그리고 그 사명의 자리 앞에 서기만 하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요. 다윗이 고백했던 바와 같이 “나는 사람이 아니요. 벌레라.” 그런 고백이 나올 정도로 만물의 찌끼와 같이 여겨지는 그 눈물 나는 사명의 자리가 있다면 여러분들은 아직까지 주님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일어나시면 됩니다. 그리고 힘을 내시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분이 죄는 없으시고, 순결하신 분 아니었습니까. 사명의 자리에 들어설 때에 성령의 능력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 능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놀면서 사명을 감당해 나가신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뛰어난 은혜, 비할 때 없이 그 성령의 능력을 받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애는 그야말로 피어린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안일하고, 게으르고, 세상을 사랑하며 살다가도 그분이 가신 고난의 세월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 않습니까.
주님 가신 길
골고다의 길
외롭고 무서웠던 길
하늘을 향해
기도하시던
버림받은 주님의 영혼
오, 나의 주님 용서하소서.
죄인 위해 고난 당하셨네.
주님이 가신 길이 그런 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눈물 나는 사명이 아직 있습니까? 정말 있습니까? 그것이 있습니까? 바울이 바로 그런 것이 있었기 때문에 살 소망이 끊어진 것입니다. 가야 하겠는데 그 사명의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어려움이 생기니까 살 소망이 끊어진 것입니다. 왜? 사명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면 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명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면 살았으나 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서 육신이 살 소망이 남아있어도 영혼이 살 소망이 끊어지면 살 소망이 끊어진 것입니다. 마음에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나는 우리가 부족해도 말이죠. 좀 지력이 모자라고 재능이 좀 부족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 우리들이 좀 모자라도 이런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맡겨주신 그 작은 사명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성도들이 교회 구석구석에, 이 세상 구석구석에 그리고 주님이 세워주신 삶의 현장 곳곳에서 그래서 끊임없이 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나는 죽어도 좋으니 주님이 내게 주신 이 소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죽었던 인간을 살려서 여기에 나를 세워두셨으니 이제 제가 여기에서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죽을까봐 두렵습니다. 나에게 힘이 없습니다. 능력을 주시옵소서. 은혜를 주시옵소서. 나보다도 더 유능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파한다면 그 기도 속에서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까지 받는다면 그런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버려두시면 그분이 하나님이실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옛날부터 사면을 두루 살피시면서 그러면서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사람, 전심으로 자기를 찾고, 그리고 당신이 주신 사명을 당신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완수하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그가 막대기 같아도 하나님이 그 막대기 들어서 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로서 눈빛이 살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눈빛이 살아있기 위해서는 생명을 다 주고라도 이루고 싶은 사명, 그리고 목숨과 바꿔서라도 반드시 그 사명이 이루어지기를 방해하는 것들을 물리치고자 하는 간절한 사모함이 있어야지만 이 눈에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흐르는 눈물에 씻기셔서 그 눈이 초롱초롱한 구도자의 눈빛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유혹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세상 자랑과 자랑에 마음이 빼앗기지 아니하고, 의연하게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대들이 그 자리로 돌아가세요. 그대들이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있는 곳이 주님이 있어라. 고 하는 곳이 아니면 주님이 원래 여러분들을 세워두시려고 했던 그 자리는 비어있습니다. 거기로 돌아가세요. 그 자리로 돌아가서 은혜 주실 때에 주님이 맡겨주셨던 사명을 감당해 나가면 속삭이면서 기도해도 하나님이 다 들어주십니다. 그 자리를 떠나고 나면 피를 토하고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실 수가 없습니다. 정말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위대한 능력,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뢰의 마음, 그분을 의지하는데서 비롯되는 담대함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적어도 나는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처럼 유능하지 않고, 세상의 어떤 사람들처럼 이 땅에 많은 자원을 가지고 하나님을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끌 정도로 괄목할만하게 섬기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주님이 나를 만나주셨을 때 세우신 그 자리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끝까지 살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울고, 이 자리에서 웃고, 이 자리에서 살 소망이 끊어지고, 이 자리에서 사형선고 받고, 이 자리에서 내적인 부활을 경험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귀하게 보실까요. 바로 이런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사도는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이렇게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으로는 사형선고를 받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이러한 고난을 통해서 그들에게 정말 가르쳐주시고 싶었던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께 대한 절대의뢰의 마음입니다. 바울도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고, 뛰어난 영적인 인물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도 사람입니다. 그러니 은혜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또 교만해질 위험도 많은 법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 보십시오.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일 하는 사람이 교만하지 예배만 드리고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사람들이 가끔 교회의 회의에 나타나서 교만을 떨던가요? 뭐 그런 것 없습니다. 자칭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만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사도 바울이 자기 입으로 그런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내 몸에 사단의 가시가 있었는데 뭔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마 눈병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같은 것도 사도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 더디오 라는 사람이 바울이 불러주는 것을 배 껴서 쓴 대필 편지입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가 커서 내가 교만해질까봐 사단의 가시를 내 몸에 두었는데 이것을 내 몸에서 떠나가기를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는데 뜻밖에도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주님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은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 가시를 빼어주시지를 않으셨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부러 우리를 고생시키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많이 사명을 감당한 뒤에도 사명만 감당하고 우리는 중고품처럼 망가진 사람으로 내동댕이쳐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때때로 그렇게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는데 순풍에 돛 단것처럼 우리를 놔두시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큰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환경의 소용돌이로 우리들이 충격을 받고 큰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경우도 있죠. 그러나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런 환경적인 고난을 주시지 않으셔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교회 버스가 가다가 벼랑 아래도 굴렀습니다. 그래서 기사가 죽었습니다. 성도들이 많이 다쳤습니다. 그래서 그 기사를 장례를 치루기 위해서 버스는 망가져도 공장에 들어갔으니까 봉고를 타고 갔는데 이번에는 봉고가 탱크하고 부딪혔어요. 그래서 사람이 또 죽었어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놀랍죠. 그렇죠. 그 때 그 교인 중에 한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확 들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가 있어 우리가 잘못했기에 하나님이 이런 무서운 시련을 우리에게 주실까. 그래서 장례 지내고 오다가 또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어떻게 됩니까. 온 교회가 근심하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해달라고 빌며 주님 앞에 매달리게 되잖아요. 제가 아는 교회 하나는 예배당이 홀라당 불이 나 버렸습니다. 의자도 하나 안 남고 다 타버렸습니다. 여건이 안 되어서 홀딱 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온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했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이 눈에 보이는 교회당은 홀라당 탔는데 성도들의 마음속에 있던 원래 다 타버렸던 예배당이 다시 지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갔더니 예배당은 아직 불에 그슬린 흔적이 많이 남았는데도 목사님이 성령 충만해요. 하나님이 너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왜? 이것은 주님이 불을 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들이 너무나 안일하게 살았던 것에 대해서 회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버스 굴러서 사람 안 죽고, 예배당 불타지 않아도 가슴 아파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이루지 못해서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를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죠. 말이라고 하겠습니까. 다 철이 안 드니까 하나님께서 한 번씩 달구시는 것이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오늘 사도바울이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아, 왜 우리가 사명을 감당해 나가려고 하는데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환경에 도달했을까? 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이 다가와서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절망감을 느끼게 하실까? 그러다가 깨달은 것입니다. 아, 진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주님 밖에 없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죽은 자를 다시 살릴 능력을 주셨어도 우리가 의지할 것은 그 능력이 아니라. 그렇지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 주님이 우리에게 좋은 교회를 주셨어도 우리가 의지할 것은 교회가 아니고, 목회자를 주셨어도 우리가 의지할 것은 목회자가 아닙니다. 좋은 직장을 주셨어도 우리가 의지할 것은 직장이 아닙니다. 돈을 주셨어도 우리가 의지할 것은 물질이 아니고, 그리고 진짜 우리가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우리의 사명과 우리의 신앙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명 지는 병들었는데 그 사명을 맡은 사람의 영혼은 순결하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사명 지는 그 사람의 영적인 건강 상태를 보여주는 대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깊이 헤아리면서 이렇게 영혼의 상태가 잘못된 것에 대해서 환경에 핑계를 대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근심 걱정 때문에, 어려움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말고, 우리가 얼마나 사명과 함께 분투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삶 아닙니까. 그분이 마지막까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어 가시면서도 애지중지 하셨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너희를 위해 죽어야 되겠다. 그럴 때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말렸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예수님이 책망하셨잖아요. 그분의 모든 관심은 마지막 십자가를 지는 그 순간까지 오직 십자가에서 이루시려고 하는 아버지의 사명을 완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말 중에 한 마디가 무엇입니까? “다 이루었다.” 그 말씀을 마치고 운명하셨습니다. 내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하고 죽으셨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때에 우리가 우리의 모든 생각을 굴복시켜 그분의 뜻을 따르게 되죠.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을 진심으로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데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느껴지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읽은 죠나단 에드워즈의 책에서 죠나단 에드워즈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마음이 없이 형식적으로 주님을 공경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꼭 끌어안으면서 주님의 가슴에 칼을 찌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형통할 때에는 감당하지만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그것을 팽개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어려운 때를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해서 교만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들을 보면서 참 좋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도 나의 복이다.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의 직분에 대해서 그렇게 탐내는 마음이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할 만한 대도 너무 겸손해서 제가 뭘 하겠냐고, 그러면 그만 두라고 말이죠. 이래요. 그런데 사람들이 안 그래요.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은 거기에 걸맞게 교회에서 지위를 가져야 되니까 또 탐내고, 또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라도 한번 서 보려고 그래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뭐냐면 그런 마음을 갖는 것 까지는 이해가 안 되지만 그래도 된다고 해야지 들을 테니까. 거기까지는 인간적으로라도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직분과 사명을 맡은 다음에 그다음에 희생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죽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죽여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하세요. 처음부터 안 해야지. 아니 그렇게 힘들게 맡아가지고 그리고 어려운 일이 생기고 무거운 짐을 져야 할 때에는 훌훌 벗고 안 해요. 그러면 나는 이상합니다. 그것을 안 하는 것이 10년 20년 걸려서 입증될 것도 아니고 아니 금방 맡아서 금방 안 할 것을 그러면 왜 그것을 직분을 덜컥덜컥 맡아요. 집사 시켜주겠다고 하면 집사 하겠다고 말이죠. 뭐 하라고 하면 뭐 한다고 말이죠. 아니 왜 그렇게 해요. 나는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너무너무 이해가 안 가요. 도대체 왜 그렇게 하십니까. 저는 주님이 보실 때에 그 요나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요나는 사명을 감당을 안 하겠다고 도망을 갔지만 이것은 하겠다고 가서 안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요나의 잘못은 단지 니느웨로 가는 배를 안타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것이 잘못이지만 그렇게 직분을 맡고 고난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배표를 니느웨로 가는 표를 끊고, 가서 외치라고 하니까 그 니느웨 성 앞에서 돗자리 깔고 배 깔고 드러누워서 자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놀리는 것입니다. 사명을 줘서 배표 끊어서 요나가 다시스 갈 때 자기는 니느웨 표 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존경하겠습니까. 야, 저 사람은 정말 순종하려는 사람이구나. 순종은 무슨 개 코나 순종이에요. 니느웨 가서 돗자리 깔고 성벽에 드러누워서 그늘에서 퍼질러서 자는데 그것 하나님 놀리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교회에서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장로를 세우면서 교회를 위해서 순교하겠느냐고 서약을 받았답니다. 무서워서 어떻게 장로가 되겠어요. 그런데 그 정신은 우리들이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뭡니까.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겠습니까. 만은 그러나 그 분이 가신 길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분이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예수님도 죄가 없으신 분이었는데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꽃가마 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셔서 예수님의 목만 십자가에 매달리게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피나는 고난과 외로움 가시밭길 같은 시련,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배신과 그리고 절대절망의 고독들을 느껴요.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누가 옆에 있어드렸습니까. 제자들 중에 누가 있었습니까.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투성이가 된 채 돌에 맞고, 침 뱉음을 당하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갈 때 도대체 그분 옆에서 이마에 흐르는 땀이라고 씻어준, 핏 물이라고 씻어준 인간들이 있었습니까. 제자들이 있었습니까. 다 도망갔습니다. 그분 혼자 가셨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가셨습니다. 그런데 왜 사랑스러우신 주님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고난당하시게 하셨을까요? 우리에게 사명의 길이 무엇인가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죄 없으신 분이었지만 아들도 우리와 똑같은 연약함을 가졌기 때문에 아들이신 예수님도 그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또 히브리서에 의하면 “받은바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셨다고 하셨습니다. 불순종 하실 수 없는 분이셨지만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최고의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무엇에 대한 순종, 자기를 통해서 사명을 이루시려고 하는 순종을 배우나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생애는 언제나 우리에게 눈물을 줍니다. 그분의 생애를 많이 묵상하는 것은 우리의 생애를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독립하려고 하는 인간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이 왜 기도하지 않는지 아십니까? 자기 굴복하기 싫어서 그래요. 진짜 예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사람은 기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이루고 싶은 사람들, 나는 죽어도 내 위로 주님의 뜻을 실은 마차가 밟고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나를 죽이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실은 주님의 마차가 나를 밟고 지나가도록 내가 내버려둘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목숨을 건 사명 자와 변절하는 사명자의 차이점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면서도 여러분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나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이제 세월이 곧 지나가는데 아침마다 죽음을 보지 않습니까. 이제 금방 지나갑니다. 그 때 주님을 어떻게 뵈려고 그러십니까. 긴 세월 주님이 오래 참으시면서 살려주시고, 하늘 은혜 주시고, 이 땅의 자원주시고, 재능 주시고 높여주셨더니 결국은 사명은 팽개치고 자기 좋은 대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주님 앞에 가서 인생을 회개하여야 할 시간에 돌아보니까 주님을 위해서 산 날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적은 날이고 대부분의 날들은 자기의 욕심을 따라서 살았어요. 내가 산 동안에 주님의 사명 지는 죽었어요. 그래서 비참한 나의 사명 지를 보세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네 면류관이 뭐냐? 황금으로 만든 것이냐, 천국의 진주로 박은 것이냐. 오색영롱한 보석들로 박은 것이 네 면류관이냐. 그것이 아닙니다. 내 면류관은 너희들이다. 내가 눈물로 말씀을 전하고 땀 흘려 기도하고 생명까지 주어서 예수 우리 가슴에 피 바른 것처럼 너희 영혼들을 위해서 내가 피를 짜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고, 돌봤는데 그 때 너희들이 나와함께 주님 앞에 모두 한 사람도 실족하지 않고 그렇게 같이 서 있다면 그것이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이야기 입니까? 주님 앞에 서 있을 때 자기가 맡았던 사명의 자리의 열매를 그대로 가지고 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에게 우리가 죄가 특별히 있는 것도 아닌데 또 혹은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이 우리를 데려가시거나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명을 감당해 나가려고 하는 우리가 그 사명 지 앞에서 겸비해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생각 안 하면 내가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은데 그 사명을 생각하면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나는 벌레라. 나는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아무 데를 돌아봐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요. 무엇으로도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는 그런 막다른 살 소망이 끊어진 자리에 데려가시고, 마음으로는 깊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이 예전에는 나를 그렇게 위로해 주는 사람도 많았는데 하나님이 때로는 외톨박이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예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의 자리에서 그렇게 분투하면서 예수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기쁘지 않는데 어떻게 세상을 사랑하겠습니까. 살아온 인생길이 모두 시시때때로 주님의 위로가 있었지만 눈물 흘리며 걸어온 나그네 길인데 피 쏟으며 걸어온 순례자의 길인데.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가진바 욕망은 이것이니 이 슬픔 많은 세상을 떠나서 주님과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분을 이 세상에서만 보고 안 뵐 분이 아니라. 이 죽음의 휘장을 걷고 지나가서도 마지막에 골인하여야 할 지점이 내게 사명을 맡기신 그분의 품속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그렇게 버려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 가슴 아프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주셔서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어둠 속에서 버려두어야 마땅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건져내셔서 하늘 은혜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착하게 삽시다. 착한 사람이 되십시오. 능력 많이 없어도 착한 사람이 되십시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러셨잖아요. 능력 많이 없어도 착한 사람 됩시다. 우리가 세계적인 인물이 안 되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나 착한 사람 됩시다. 그래서 정말 주님 보시기에 예쁜 사람, 긴 인생 살지 못했어도, 그리고 역사에 위대한 일을 이루지 못했어도 이 땅에 살아있는 날 동안 어린 아이처럼 주님이 맡겨주신 작은 사명을 생명처럼 생각하며 그렇게 삽시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바로 그랬고, 우리 교회가 그 교회 닮기 위해서 열린 교회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으니 보라 내가 하늘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내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말씀하셨잖아요.
자,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두고 온 사명 지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지금 있는 자리가 사명지라면 처음 그 사명을 맡았을 때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 마음으로, 그 마음으로, 그 섬김으로 돌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 썩기 위해 사는 밀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수요일마다 주님 앞에 헌신하는 삶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배경을 좀 말씀드리고 본격적으로 본문을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점점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 뿐 아니라. 가르침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진리의 말씀을 듣고 변화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헬라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까지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예수님이 유대인이고, 그 유대인으로 태어나셨고,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전하셨지만 헬라인들이 직접 찾아와서 예수님을 뵈옵겠다고 할 정도니까 이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심사는 일반적인 관심의 정도를 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는 태도도 보면 와서 빌립에게 청하고, 또 빌립이 안드레에게 청하고 몇 번 다리를 넣어서 그래서 많은 인파에 에워싸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던 예수님에게까지 그들이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뵙고 싶어한다고 그렇게 간청을 드렸습니다. 사실 이것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나사렛 동네에서 자란 젊은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그 말씀을 듣고 감화를 받고, 하나님을 만나고 또 변화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긍휼에 가득 찬 아름다운 사역, 예수님의 마음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그들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의 울타리를 넘어서 헬라인까지 그 복음의 빛을 보게 되었고, 그들이 정말 무시하는 유대인중에 한 사람인 예수님께 까지 와서 그분을 뵈옵기를 원하고 또 그것을 간청 드렸을 때에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당연히 무엇인가 예수님께로부터 도를 깨치고자 하는 마음, 또 예수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았다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것이 예수님께 영광이 되고, 관심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이러한 문맥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반응을 보여주셨는데 “이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그랬습니다. 바로 하필이면 그 시점에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예수님 많은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뵈오려고 왔습니다. 얘야, 이제 나는 영광을 얻을 때가 왔구나. 이 대조를 한번 곰곰이 묵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영광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 갈채를 받는 그런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신 영광은 사람들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고 높임을 받는 그런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이 관심을 가시지는 영광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은 곧 무엇을 통과한 영광이냐면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한 영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자가 영광을 받아야 할 때가 왔다.”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할 때가 가까이 왔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런 의문이 생기죠.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그 피 어린 십자가의 고난이 영광을 얻을 때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죠 어떻게 그렇게 되겠느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비참한 고난이요, 고생이었지만 예수님은 감히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위대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죽음에 복종시키는 것 자체를 한편으로는 치욕이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면에서 당신 자신이 영광이라고 생각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받으실 그 고난, 율법아래 태어나시고, 금생의 비참함을 맛보시고, 사람의 몸을 입으셔서 인간의 멸시받을 모든 죄를 지고, 죽으신 것은 분명 수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인 자신이 인간의 구원을 위한 아무도 이룰 수 없었던 구속의 대업을 이루는 것, 그것은 분명히 영광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영광은 예수님이 그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후에 경험하게 될 부활의 영광까지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광은 또한 그렇게 예수님이 멸시와 욕을 당하며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을 성자께서 그것이 자신에게 영광이라고 생각하셨을 때에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자기를 바친 그 아들을 진짜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죽음 가운데서 살리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무릎을 꿇어 주라 부르게 하셔서 온 우주를 다스리는 당신의 대리자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영광이고 주님이 지금 그런 영광가운데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이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정말 영광의 관점이 이러한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살 때 영광의 관점이 정말 이런 관점입니까? 나같이 아무쓸데 없는 인간이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서 희생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그렇게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주와 함께 다시 살리라. 그런 내세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이 현세에서 충성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히포의 감독을 지냈던 교부 어거스틴은 자신의 중요한 한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인간의 오성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을 가로막는 세 가지 중요한 장애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생의 자랑 “암비시오” 라고 하는 이것은 유래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교만, 라틴어로 “스페르비아” 라고 하는 자기 교만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정욕에 사로잡히거나 교만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의 참다운 진리의 도를 깨우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만에서 이생의 자랑이 나오고, 이생의 자랑이 쓸모 없는 헛된 영광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중에 정말 사람으로부터 받는 인정과 칭찬, 절대적인 사명을 받았음에도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대접을 받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상대적 비교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는 이러한 모든 것들은 바로 그가 참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육신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겨난 것입니다. 한 때는 많이 불렀던 찬송이지만 오늘날은 거의 잊혀져 가는 찬송이 있습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그래서 심지어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주신 직분을 돈을 주고 사고, 그리고 그것을 개인의 명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이 영광을 받아요. 이런 것은 모두 부끄러운 것이고, 이런 것들을 지향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이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같은 책에서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아무리 진리를 많이 보여주셔도 신자가 그 진리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지식적인 허세입니다. 지적인 허세. 자기 자신이 지식이 있는 사람처럼 포장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이러한 경향, 이러한 경향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진실한 사람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지. 진리는 교만한 사람이나, 허세로 가득 찬 사람에 의해서는 파악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허세, 그리고 주님을 조금 섬기면서 자신을 드러내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이 세상에 있는 자신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이런 허세들이 위선들이 우리 안에 많이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너무나 슬픈 것입니다. 이런 허세, 헛된 영광에 대한 욕망과 자랑, 탐심,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 자신이 하나됨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그렇게 영광을 받아야 될 때가 왔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그러면서 오늘 설교하려고 하는 본론으로 들어가십니다. 제자들이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시죠.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으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밀도 그렇고 벼도 그렇고, 특히 땅콩 같은 것을 잡수기 전에 반을 쪼개보십시오. 그러면 속에 신기하게 배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씨눈이죠. 그것이 쌀에도 있고, 밀에도 있고, 뭐든지 있는 것입니다. 씨눈이 있어서 배아가 있어서 그것을 땅에다 묻으면 말이죠. 이제 썩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껍질이 썩죠. 껍질이 썩으면서 껍질만 썩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층에 나오는 쌀알이나 땅콩 같은 것들이 썩기 시작합니다. 썩으면서 그 속에 있는 씨눈, 배아가 삽니다. 그래서 그 껍질 속에 있는 우리들이 곡식으로 잘 활용해서 사용하는 그것들이 땅에서 썩으면서 그 씨눈이 자라는 동안에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고 씨눈이 자라서 그래서 다 먹고 나면 싹이 나는 것입니다. 싹이 나면 햇볕에 의해서 탄소 동화작용을 하면서 거기에 나온 뿌리로 양분을 스스로 자가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점점 커다란 줄기가 나와서 그래서 이삭이 되고 거기에 열매가 달리고, 혹은 나무가 되는 큰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는 것입니다. 모든 씨로 심는 식물의 원리가 다 그러합니다. 여러분 감자는 안 그렇습니까. 감자도 농사지어서 심을 때에는 감자를 아무렇게나 깍두기 썰 듯이 썰어서 심는다고 그것이 나는 줄 압니까. 어림없습니다. 감자를 쪼개서 심는다는 것을 어디에서 배웠다고 하더라도 할 때에 양파 썰 듯이 감자볶음 하는 것처럼 썰어서 땅에다 집어 넣어보십시오. 그것이 되나. 안 됩니다. 항상 자를 때는 감자의 씨눈을 보면서 4등분을 하든지, 3등분을 하든지. 그것은 자기 마음인데 씨눈이 있는 쪽으로 해야합니다. 그것을 잘 태운 재에다 잘 섞어요. 그래서 날을 잡아서 흙에다 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거기에서 씨눈이 한 두 개만 있으면 그 씨눈이 거기에서 발아하면서 싹을 내요. 그러면 거기에 매달린 감자는 뭐하죠. 그 씨눈 한 줄기가 나와서 자라는 동안에 썩으면서 그것이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양식이 되어서 다 썩을 때쯤에는 밖에 줄기도 나오고, 그 다음에 밑에 뿌리도 나왔어요. 그러니까 사실은 어떻게 보면 이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이라고 하는 말씀 속에 사실 모순이 있죠. 죽는 것이 아니죠. 어차피 씨눈만 생명을 가진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곡식을 씨눈을 다 턴 다음에 한번 심어보세요. 나겠는가. 그것은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씨눈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것이 아니라. 씨눈이 제 역할을 하고 죽지 않고 계속 살게 하기 위해서 옆에 붙어있는 낟알이 죽는 것입니다. 낟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 사실은 그 낟알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는 그 속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영생의 개념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죠. 씨눈이 있는데 낟알은 어차피 생명이 없는 것 아닙니까. 썩어요. 그래서 씨눈이 자라요. 씨앗을 내요. 그 씨눈이 또 자라고, 그러면서 계속해서 생명이 이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매달린, 밀 알, 낟알의 사명은 그 밀 알의 씨눈을 살리기 위한 양식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썩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밀 씨눈을 달고 있는 밀 낟알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씨눈이 아니라. 밀 낟알을 가지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 우리가 만약에 이러한 농사짓는 이치를 잘 이해한다고 하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주신 감동이 우리에게 살아날 것입니다. 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으셨어요.? 안 죽으셨어요?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으셨어요? 안 죽으셨어요? 그러나 그분은 없어지셨어요? 계속 살아 계십니까? 살아 계십니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러면 우리 물어봅시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면 죽어요. 안 죽어요. 죽는 것이지 그러나 그렇게 죽은 우리가 영원히 없어져요. 다시 살아요. 이러니까 이것이 그 밀의 농사의 원리하고 너무 일치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는데 사실은 또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는 것입니다. 죽는 것은 분명한데 그런데 또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설명하시기 위해서 이 한 알의 비유를 든 것은 너무 적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일 먼저 일차적으로 당신 자신의 십자가의 고난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 자신의 고난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이라. 지칭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은 아주 하잘 것 없어 보이죠. 인류의 모든 시대를 사는 동안에 사람의 죄의 크기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면서 병든 자를 고치셨으나 모든 병든 자를 고치신 것이 아니죠. 주린 자를 먹이셨으나, 모든 주린 자를 먹이시지는 못하셨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셨고, 아파하는 자들을 싸매셨으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그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생애는 한 알의 밀과 같은 생애였습니다. 이 세상의 죄와, 슬픔, 이 세상의 모든 악과 고통의 크기에 비하면 예수님 자신은 아주 작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예수님이 당신 자신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거니와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게 되면 당신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맺히게 될 하나님의 나라의 많은 구원받은 열매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치가 어떻게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면서 사셨을 때에 예수님 혼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있었지만 아직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화육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부터 성령의 권능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들의 섬김은 이후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에 의해서 나타날 섬김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사도들에게 성령이 오시기전에 주신 그 능력은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표였습니다. 본격적으로 세상을 고치는 위대한 역사는 이후에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성령이 이 세상에 오셔서 강림하사 그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무엇을 통해서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이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예수님의 그 부활은 무엇을 통해서 가능해졌습니까? 예수님의 그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의 강림하심을 떼어놓을 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로 엮어져 있는 구속 사건입니다. 그래서 히폴리투스라고 하는 히랍의 교부는 자신의 섬김 론 이라고 하는 글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이제 목회자로 서품을 받는 사람을 향해서 기도할 때에 이런 기도를 드리도록 지시했습니다. “이제 이 목회자에게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원래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한량없이 부어주신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받은 이 성령을 사도들에게 충만하게 부어주셨으며 사도들은 주님이 부어주신 이 성령을 교회에 충만하게 전달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서게 되었으니 이제 이 목회자에게도 바로 사도들에게 베풀어주셨던 그 성령의 능력을 베풀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러한 십자가의 죽음, 그 죽음으로부터 이어지는 부활, 부활로부터 이어지는 승천, 승천과 함께 임하게 된 성령의 강림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충만한 성령의 능력으로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교회를 세웠습니다. 거기에 많은 신자들이 모였습니다. 그 진리와 예수님께로부터 부어졌던 충만한 성령의 능력이 그들에게 부어졌을 때 그들이 이 세상에 나가서 무엇했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속 살아 계셨으면 하셨을 그 일에 뒤를 이었습니다.
10. 뒤돌아 보지 않는 섬김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 9:29)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한다.”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짧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주님이 가지고 계신 여러 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엿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그 나라 안에 살아가는 백성들, 그들의 사명,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섬기며 살아야 하는 그 선심의 의무, 이런 모든 그림들을 이 짧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이죠 우선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그러시면서 따르겠다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고, 구체적인 대답을 안 하셨습니다. 또 한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너는 나를 따라라.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그 사람은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내가 가서 장사를 지내고 나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예수님께 와서 스스로 말하되 나는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만은 내가 먼저 가서 내 가족에게 작별을 하게 허락해주십시오. 그러한 사건 끝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아는 유명한 말을 한 것입니다. 그 말씀은 바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 말씀하시면서 이들의 태도를 꾸짖는 동시에 주께 부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헌신을 위한 주님의 부르심에 응해야할지를 주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제 몇 가지 해석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가 무엇이냐면 우선 첫째로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오는데 한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더니 대답을 안 하시고, 당신 스스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렇게 말씀하신 사람이고,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지명해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뭐라고 했느냐면 “나를 쫒으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세 번째 나오는 사람은 주님이 부르셨다. 라는 말씀은 없는데 자기가 스스로 주님께 와서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만은 내가 집에 가서 작별 인사나 하고 와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세 사람의 경우가 각각 다른 경우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예수님께 “나는 예수님을 쫓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그러면 따라와라. 따라오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에 관해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그냥 끝내셨을까? 하는 것이죠. 사실 우리들이 이렇게 추측은 해 보지만 사실 이 문제 하나를 가지고 이 사람의 구원의 문제까지 연결을 시켜서 생각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일 겁니다. 아마도 추측건데 나는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스스로 믿음이 있다. 이렇게 생각해서 예수님을 따르겠다. 그랬을 때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고 깃들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서 네가 나를 따라온다고 하지만 나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나는 머리 둘 곳 없는, 나를 따라와 봐야 이 세상에 있는 권세와 재물, 좋은 명예, 이런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살 것인데 그래도 네가 나를 따르겠느냐. 예수님이 이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 같아요. 그리고 뒤에 아무 이야기도 없는 것 보니까.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엄격한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는 이 사람의 사기가 꺾였던 것으로 판단이 된다. 이 얘기입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은혜를 받든지 혹은 하나님께 어떤 특별한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되면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섬겨야 되겠다. 라고 하는 결심을 한번쯤은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주님의 뒤를 따라간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되고 특별히 그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며 그 뒤를 따라가는 제자의 길에 얼마나 큰 고난이 있는지를 알고 나면 주님을 따를 결심이 꺾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꼭 구원을 받았다. 못 받았다. 할 문제가 아니라. 구원을 혹시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비록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처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을 때에 주님의 뜻대로 주님을 섬겨야지. 하는 결심이 생겨나는 것은 진실한 것이지만 실제로 그 섬김의 자리로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 자리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섬기기를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섬기기를 원하시는지 우리의 섬김 속에서 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의 믿음이 그것을 감당할 처지가 못합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가고 주님을 위해 헌신할 마음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세상에 대한 사랑과 미련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 것이 이 세 사람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니 처음 마음이 움직여서 나 예수님 따라가겠습니다. 거짓이나, 위선,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한번 큰 소리 쳐본 것, 그런 것 아닐 수 있습니다. 진실한 응답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도 예수님이 내게 맡겨주시려고 하는 그 일이 정말 무엇인지 진수를 들여다보고, 그리고 거기에서 예수님처럼 섬기려고 하는데 예수님이 거기 계셨더라면 섬기셨을 그 섬김의 본의 무엇인지를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알게 될 때 그 때 비로소 그가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 그렇게 머리 둘 곳조차 없고, 그리고 깃들 곳도 없는 버림받은 생애를 사신 예수님만 따라가기에는 이 세상에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거기에서 스스로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습니까. 처음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셔서 크든, 작든 어느 자리에 세워주셨을 때 정말 예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니 또, 내가 받은 은혜가 많고, 또 내게 기도해도 응답을 내리신 주님의 사랑이 있으니 나도 무엇인가를 섬겨야 되겠다. 그리고 내가 주님을 섬기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순간은 얼마든지 진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 제가 주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 그 사람의 마음 속에 가식이나, 위선, 없을 수 있고요. 또 이렇게 예수님을 따라가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예수님을 따라가면 사람들이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해줄 걸, 이렇게 예수님을 따라가면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지위를 높여주시지 않겠어. 이런 세속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고도 주님이 사명을 맡겨주셨을 때 아멘,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헌신의 길을 가는 일은 한번의 진실함을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이 사람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다고 했을 때에도 어느 정도야 고생할 것을 각오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도 주님이 사명을 맡겨주실 때에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한번 잘 해보겠습니다. 우리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믿음으로 주님을 생각하는 심정으로 우리가 그렇게 대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마지막까지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헌신하는 것은 그렇게 어느 한순간 깊이 감동을 받고 아멘, 하는 것만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다. 라고 하는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여우도 굴이 있거든,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를 찾다가 해가 지면 돌아와서 편히 쉬고 깃들 그 둥우리가 있거든, 그러나 나 예수는 그런 누추한 굴도, 그리고 깃들 수 있는 잠시의 편안한 안식처도 없단다. 그것이 바로 나의 삶이고,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나의 참 제자들은 나처럼 이런 길을 걸어가야 한단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이 사람은 아주 진정으로 주님의 심정을 읽을 수 있었고, 또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잖아요.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이 설교를 들으면서 이렇게 반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예수님을 따라 가야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또 그 사람이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죽으실, 그 구속 주라는 사실까지는 몰랐다고 할지라도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는 것을 보셨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 착한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서 긍휼에 넘치는 섬김으로 종처럼 사셨던 그 예수님이 나는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이 불쌍하지 않은가. 예수님이 그렇게 머리 둘 곳이 없다면 나 같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동행해 드려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따라야 되지 않겠는가. 맞아요. 지금 여러분들이 대답하고 있는 그것이 정상적인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목사도 임직을 할 때에는 임직 식을 합니다. 저도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안 받으려고 하다가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안수 받을 날은 다가오는데 자신이 없어요.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요. 그리고 순결한 신부도 아니에요. 또 그렇게 잘 살 용기도 없어요. 한 주전에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는데 한 주간 동안 특별히 기도하는데 어느 날 새벽에 하나님께서 저의 영혼을 한번 안수 받기 전에 만지고 지나가셨어요. 그것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얼마를 울면서 기도하다가 그 날 새벽에 주님이 선명하게 내 마음에 떠오르게 하신 메시지를 가지고 지은 시가 바로 “십자가 아래서” 라는 시입니다. 그 목사만 그렇습니까. 장로도, 집사도, 교회의 많은 일꾼들 임직 하죠. 강도사도, 임직 하죠. 또 그런 것 아니라도 교회에서 직분을 맡겨줘서 처음 그것을 받을 때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감격하고 눈물을 흘립니까. 두 손을 꼭 가슴에 모으고, 주님이 나 같은 죄인에게 이런 사명을 맡겨주셨는데 내가 잘 감당하고 싶습니다. 누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진짜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정신으로 섬기라고 하는지 그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 그 때에도 그런 진지한 믿음과 눈물이 필요해야지 내 가는 길에는 머리 둘 곳 없는 길이란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 그러니까 저는 주님과 동행해야합니다. 만약에 주님이 존귀함과 영광을 이 세사에서 받으신다면 저는 안 쫓아가도 됩니다. 멸시와 욕을 받으시고,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신다고 하시니 저라도 주님 옆에 있어 드려야 되지 않습니까. 이런 믿음이 이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진실하게 응답했지만 이 사람은 헌신의 삶 예수 따르는 삶에 있어서 실격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이 지명하여서 부르셨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이 그렇게 지명해서 불렀습니다. 이 사람이 마침 집에 상을 당했습니다. 부친상을 당했죠. 공교롭게도 상중인데 예수님이 “너는 나를 따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예수님께 부탁했죠. “예수님 내가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이 장례를 모두 마치고 나서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에 예수님이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비 인격적인 말씀을 하시죠. “죽은 사람은 죽은 자들에게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쫓으라.” 이거죠. 그러니까 죽은 자는 바로 이 사람의 아버지를 가르치는 것이고,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라는 것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육적으로 죽은 그 사람의 아비를 장사하게 내버려두고, 그리고 너는 나를 따라 오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죠. 전도사 때에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이 명령을 그대로 실천한 어떤 성도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다니는 성도는 아니었고, 우리 교회에 다니는 성도와 동기간이었는데 어머니가 오랜 병고 끝에 운명하셨습니다. 아직 시체가 따뜻해서 온 가족이 살을 에이는 슬픔 속에 잠겨있는데 이 집사 님은 구역 예배가 있다고 툴툴 털고 나가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혼돈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교인이 그것을 보면서 진짜 그 집사 성경 말씀대로 실천했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에게 장사하게 내버려두고 너는 나를 쫓으라는 말씀을 실천했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인간이 딸이 되어서 그럴 수가 있을까?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저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짓이야. 제가 섬기던 교회의 담임 목사님도 그 상황을 보면서 헛갈리셨던 모양입니다. 한번은 아주 심하게 나무라면서 말씀하시고, 또 잠시 후에 설교하실 때는 굉장히 본받으라고 설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장단에 춤을 주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는데 여러분들 중에도 이런 성경 말씀을 옳게 해석을 못해서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은데 오늘 여러분들에게 대강의 뜻만 알려드리지 않고, 이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또 여러분들의 삶에 실질적으로 이것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여러분들에게 알려줌으로서 하나님 앞에서도 진실하게 살고, 사람 앞에서도 덕을 쌓는 슬기로운 성도들이 되는데 보탬이 되게 하려고 합니다. 실제로 제가 부교역자로 몸담던 또 다른 교회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도 자매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교회에 일이 있다고 며느리가 성경 찬송 들고 장례식장에서 빠져 나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발칵 뒤집히고, 그 일로 남편의 마음이 깊이 상해서 이후 부부 사이에 불화가 그치지 않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둘 다 예수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 힘들었습니다. 남편은 “당신이 어떻게 며느리가 되어 가지고 시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온 가족들이 애도하는데 어떻게 성경 찬송 혼자 들고 검은 곳 입고 그리고 교회에 일이 있다고 하면서 나갔다가 대 여섯 시간 있다가 들어올 수 있느냐.” 그랬더니 부인이 하는 얘기가 뭐냐면 “당신의 신앙의 문제가 바로 그거다. 우리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되지 않느냐 여기 봐라. 분명히 여기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했는데 당신이 거기에 붙어 있다고 해서 지옥 갈 분이 천국 가고, 천국 갈 분이 천국을 못 가시냐. 이미 죽은 사람은 모두 끝난 것인데 그러면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명이 더 중요하고, 이것을 하는 것이 신앙이다. 당신이 나를 아무리 구박하고 시집 식구들이 나를 안 본다고 해도 나는 예수님이 더 중요하지 여러분 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하다.” 남편이 혼란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틀린 것 같은데 뭐라고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그래요. 이것은 죽은 사람을 하찮게 여긴다거나 그 다음에 죽은 사람의 정 같은 것, 사랑 같은 것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유물적으로 말씀하신 증거라거나 혹은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 장례식 같은 것들은 전부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을 잘 이해하시고, 평생 잊어먹지 않게 해드리기 위해서 제가 또 다른 예수님의 비유하나를 도입해서 이 문제를 풀 테니 한번 여러분들이 마음을 열고 들어보십시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부자인 젊은 관원이 예수님께 와서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라고 묻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여러분도 아마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죠? 전혀 본 기억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 마시고, 기억이 나시죠? 그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등등 십계명을 말씀하시니까 이 사람이 갑자기 희색이 돌면서 “아, 제가 그것이라면 다 지켰습니다. 그러면 이제 제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겠군요.” 이런 뜻으로 말했을 때에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빈 털털이가 된 후에 넌 나를 쫓으라. 그러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렇게 안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까? 못 얻는다는 것입니까? 못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오기 전에 가지고 있는 재산이 얼마든지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빈 털털이가 된 다음에 그 다음에 예수님을 따랐습니까? 그러면 영생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러면 오늘 예수님이 그 부자인 젊은 관원에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구원의 교리하고는 지금 사뭇 다른 것입니까? 이것을 그대로 실천했던 역사적인 인물이 아시스의 프란시스입니다. 12세기경의 사람입니다. 그는 포목상을 하는 아주 부자인 아버지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전쟁에 나갔다가 땅에 떨어진 복음서를 받아들고 읽다가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전심으로 예수님을 추구하는 수도자가 됩니다. 그러다가 이제 이 복음의 참 뜻을 깨달은 다음에 아버지가 포목상을 맡겨주니까 그 물건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보니까 이 아이가 실성을 해도 보통 실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그 아들을 금치산 선고를 법원에 제시하면서 아들이 더 이상 자기의 상속자가 아니라는 것을 법원에서 확인을 받았어요. 법정에서 이제 “선언을 내렸습니다. 너는 이제 내 아들이 아니다. 너는 이제 이 사람의 아들이 아니고 상속권이 없다.” 그리고 딱 떨어지니까. 그 때에 그 모든 사람이 보는 법정에서 자기 옷을 모두 벗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버지에게 주면서 “아버지 받으십시오. 이 옷도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주신 돈으로 산 것입니다. 내게는 이제 하늘 아버지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아는 아시스의 프란시스의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해석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러면 아까 잠깐 언급한 것, 그러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왜 그러면 그 부자인 젊은 관원에게 “나를 믿어라. 그러면 값없이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다 나누어주고 넌 나를 쫓으라. 그러면 된다.” 이 사람이 심히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그렇게 하셨으면 이해가 될 것인데 예수님이 그렇게 안 하셨습니다. 그 사람에게만 유독하게 진짜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알거지가 되어서 날 따라야만 너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셨을까요? 조지 엘드 라드 라고 하는 신약 학자 한 사람은 이 부분을 자신의 책 속에서 아주 명쾌하게 주석을 합니다. 그런데 그 해석이 가장 제가 만난 해석 중에서 정확한 해석입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리고자 하는 진지한 갈망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데 그 무엇이 그로 하여금 복음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재물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순간까지 재물에 대한 집착과 사랑 때문에 발목이 잡혀서 주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 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최소한 네 가지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첫 째는 뭐냐면 예수님 이외에는 어떠한 구원의 길도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구원을 얻는 길이 아닙니다. 또 높은 사람이 된다거나, 아니면 사람들에게 아주 인자한 사람으로 기억된다거나 이런 따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절박하게 모든 것을 다 주고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사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것. 두 번째는 뭐냐면 의지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입니다. 의지가 그것을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 그 다음에 세 번째로 마음이 그것을 깊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네 번째가 뭐냐면 온전히 의뢰하는 것입니다 .마치 높은 벼랑에서 주님 이제 저를 주님께 맡깁니다. 그러면서 몸을 던지는 것처럼 주님이 자기를 받아주실 줄 알고 자기의 몸을 던지는 것처럼 이렇게 주님 한 분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자기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돈에다가 그것을 어느 정도 걸고 있는 것입니다. 일부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찾아오는 그 관원을 보는 즉시 정확하게 아셨던 것입니다. “아, 네가 그렇게 간절히 영생을 얻기를 사모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너의 마음 속에는 복음의 왕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그 무엇인가가 있구나.” 예수님이 딱 보시니까 물질에 대한 집착과 사랑이에요. 이것 때문에 여기 구원 얻는 길이 일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주님을 의지로서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해요. 이것 때문에 마음으로서 온전히 승인하지 못해요. 이것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내가 의뢰할 분은 오직 우리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정확하게 짚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죠. 돈이 아무리 남아 있어도 그것을 전혀 의지하지 않고 정말 주님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내가 정말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하는 사람에게 왜 그것을 다 갖다 다른 사람을 나누어주고 알거지가 되어 라고 말씀하겠습니까. 아니 예수 믿고 나서라도 돈이 좀 남아 있어야지 헌금도 하고 가난한 사람도 좀 구제하고, 봉사도 좀 할 것 아닙니까. 당연하죠. 그러면 이제 해석이 되죠. 이 사람은 지금 무엇이 발목을 잡고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가히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아버지에 대해서 천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수가 없는 것이죠. 그것을 정확하게 딱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다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안 그렇습니다. 나도 그 전도사 시절에는 그 두 사건을 놓고 헛갈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두 번째 사건부터 제가 판단이 섰습니다. 이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절대 그런 것 흉내내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면 구역예배 안 나와도 되요. 가서 그 돌아가신 것을 마지막에 자녀로서 책임을 가지고 잘 감당하죠. 그대신 술 퍼먹고 절하지는 마요. 그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자녀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 하고, 그 어머님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아파하는 동기간들을 위로하는 일에 있어서 으뜸이 되라는 것입니다. 왜? 어머니니까 돌아가신 아버님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이 사람에게는 ( ? ) 그런 사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너는 나를 쫓으라” 말씀하시니까.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이 사람이 “예수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노름이 너무 좋습니다. 한 3년만 화투 더 치다가 예수님 따르겠습니다. 이랬더라면 우리들이 저 사람은 진짜 잘못되었다. 이렇게 딱 판단을 금방 내릴 수 있죠. 그런데 얼마나 놀랍습니까. ”너는 나를 쫓으라.“ 그러니까 슬픔에 가득 찬 목소리로 눈물이 가득 차서 ”예수님이 저희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이 따르라고 하시는데 제가 불순종할 수가 있겠습니까. 먼저 가서 내 아버지 장례 다 지내고 오겠습니다.“ 이럴 때에 여러분 솔직히 말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동정하는 마음 안 가질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인륜에 대한 예의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따르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이 그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이 보신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이 물 따라서 가는 때 항상 말도 안 되는 죄만 우리의 갈 길을 가로막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어서 예수님 일 하기 싫다. 돈을 안 줘서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쥐뿔도 생기는 것이 없는데 내가 왜 이렇게 고생스럽게 일하랴. 놔둬라. 이런 일만 생기기 때문에 사명을 감당 못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너무나 칭찬 받을 의무인 것처럼 너무나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일을 행할 때에 도덕적인 사람이 되고, 하고 사람다운 도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그러한 인륜에 속한 일 조차도 때로는 거기에 대한 집착이 매우 커져서 그래서 주님보다 우리가 그 관계를 더 사랑하고, 그 일을 더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따라 헌신하지 못하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모든 사람과 평화하고, 예수님이 제일 싫어하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고르반 이라고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부모를 공경하라. 하나님께 다 바쳤습니다. 그래서 고르반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바칠 것이 없죠. 이런 태도를 예수님이 제일 싫어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부친이 죽었다고 하는데 장사 지내러 가지 말라고 그렇게 획일적으로 말씀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그렇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죽은지 3일이 되어서 장사 지내어 무덤에 뉘었을 때 예수님이 가서 왜 이 쓸데없는 일을 하고 나사로를 장사지냈냐고 소리소리 지르셨습니까?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기시면서 눈물을 흘리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예수님의 정신하고, 이런 상황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이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주님께로부터 사명을 맡고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려고 할 때에 그 때에 그럴듯하게 여러분들의 그 사명과 헌신을 가로막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한번 보십시오. 물론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섬기고 일을 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다른 의무들은 아무렇게나 해버려도 된다. 라고 말할 수는 없죠. 교회에서 내가 이 직분을 맡았으니까. 가정을 안 돌아봐도 되고 직장에서 놀아도 된다. 이런 논리는 성립되지 않죠. 어차피 내가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니까 사람들에게 거짓말이나 해서 돈은 좀 얻어다가 주님 일 하면 그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모든 삶의 영역이 주님을 섬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입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귀했겠죠. 그러나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 그것을 위하는 마음을 능가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왜냐면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이지만 그 사명을 맡겨주시고 헌신을 바라시는 분은 바로 지존하신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잘 해야합니다. 모든 것을 잘 해야하지만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모두 올무가 되고 우리가 섬기는 모든 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팔에다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그리고 땅까지 질질 끌리는 그런 긴 옷을 입고, 달리기 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버려 두고 간편한 차림으로 오직 주님이 자신을 부러 주신 그 사명에 대한 헌신이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며 달려가는 그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도덕적으로 너무나 당연해 보이고 사람들이 생각할 때 전혀 비난할 것이 없는 일들에 대한 관심, 거기에 대한 애쓰는 것, 헌신, 그런 것 한번 반성해보십시오. 혹시 그렇게 당연해 보이는 의무에 대한 헌신 때문에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손해나고 있지 않습니까. 심하면 여러분들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하는 도리를 행하기 위해서 오히려 지존하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직접 명하신 그 사명은 망가지고 있지 않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예수님이 부르셨다는 기록도 안 나오는데 제가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가족에게 가서 제가 작별 인사를 하고 오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그랬더니 예수님이 그것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러면 정말 싹수없이 사라지라는 것입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니죠. 그러면 무엇이죠. 이 사람이 마음 속에 두 마음이 싸우고 있어요. 예수님을 뵙고 예수님의 행하시는 가르침을 받고 감화를 받으니까 이제 이런 세상에 살아서 무엇하랴. 내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것이 보람된 일이 아닌가. 이런 마음이 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역시 똑같이 가족에 대한 사랑이 복음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에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위한 첫 번째 사람이 자기를 위하는 이기적인 사랑 때문이었다면 두 번째 세 번째 사람은 모두 자기가 아니라. 다른 가족들을 위한 애정이 그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윤리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죠.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잠깐 가서 가족들에게 인사하고 오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 마음 안에 있는 주님을 능가하는 사랑이 그를 복음의 왕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을 예수님은 보셨습니다. 그래서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뜻이 뭐냐면 인사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네가 정말 나를 따르려거든 가족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너는 구별된 사람으로 나만을 위해 헌신해야 할 사람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부르고 계신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만약에 주님을 위해 온전히 따르고자 할 때에 가족들에게 인사하십시오. 문자 적으로 실천할 이유가 없습니다. 중요한 의미입니다. 가족뿐만 아니라. 그 어떤 좋은 것을 향한 사랑도, 그를 주님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합니다.
어느 전도사가 있었습니다. 그 전도사가 늘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모두 끊었는데 하나 못 끊은 것이 있는데 야구에 대한 사랑이다. 그 전도사가 오전 예배를 드리고 나서 막간에 잠시 교회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더니 청룡기쟁탈 야구대회 하는데 그 주일 날 교회 사람들이 잠깐 집에 가서 텔레비전을 보는데 거기 나와서 막 응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교인들이 다 보았습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질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손에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자, 소가 밭을 갈아요. 뒤에 쟁기를 짚습니다. 여러분 한번 쟁기질을 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하도 어렸을 때에 꼭 한번 시골에서 쥐어본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소가 쟁기를 갈지만 그 쟁기를 붙잡은 사람은 엄청난 힘이 듭니다. 소는 앞으로 가기만 하지 방향을 잡아주는 것은 사람이 합니다. 깊이 쟁기를 박고 소를 목면 소가 가는데 가만히 놔두면 소야 저 가고 싶은 곳으로 갑니다. 그야말로 말 갈데 소 갈데 가는 것이죠. 그러니 가는 사람이 똑바로 쟁기를 들고 밭이랑을 따라서 똑바로 가고 있는지 주위를 집중하면서 밭을 오가며 갈아야지 씨를 뿌릴 때에 제대로 된 밭이 되는 것이죠. 이랑이 똑바로 나야지 거기에 모종도 하고 뭐 밭을 가꾸기에 좋지 이게 아무렇게나 한번 나보십시오. 어떻게 밭을 가꾸겠는지. 그런데 그것을 잡고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일자로 가도록 해야 되는 그 쟁기를 든 사람이 뒤를 돌아볼 때 이것이 어떻게 갈아지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떠오르지 않습니까. 우리 중에서 사명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좀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명을 죽어도 감당하지 않는 사람이 우리에게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자리에 있습니다. 힘들어서 때로는 주저앉을 때도 있고, 낙심할 때도 있지만 그 자리에 있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전심을 다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전심을 다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까. 그렇게 전심을 다하지 않으니 거기에서 진짜로 온전히 십자가를 지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가끔은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고, 주님을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건 것은 아니죠. 그러니 거기에 자기 죽음이 결핍되어 있죠. 그러면 거기에 주님이 다시 사실수가 없죠. 그러면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사명을 맡고 직분을 맡아 가지고 있는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을 다 쏟아 부어서 마치 그 일을 위해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그렇게 자기의 사명을 감당해야합니다.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신자입니다. 이렇게 자신 있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씀하시기까지 예수님이 살아오신 생애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분의 취미생활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분이 어떻게 여가생활을 지내셨죠. 그분이 이 세상에 계시면서 어떤 호강을 누리셨습니까. 주님의 생애 전부는 예수님께 바쳐졌습니다. 그리고 위해서 온전히 다 드려진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고, 멸시와 욕을 당하신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도 아파하시거나 비굴해 지시지 않으실 수 있는 비결은 그분이 당신의 사명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육신의 부모가 계셨죠.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모친, 마리아에 대해서도 제자 요한 에게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또 예수님이 목자 잃은 양 같은 우리들은 또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아마 그분이 십자가를 지러 골고다 언덕에 올라 가시면서도 우리들이 얼굴이 그분에 눈에 밟히셨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 되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 가시면서도 당신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따라오는 여인들에게 설교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사랑하셨죠. 그러나 그분에게 있어서 마지막 사랑, 모든 사랑은 당신의 가족들에게도 심지어는 우리에게도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분의 사랑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 독차지하실 수 있는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신 적이 없습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어둡고 더러운 세상에 내려오신 이후로 마지막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실 때까지 한 걸음으로 같은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수는 없을까요. 주님의 그 발자취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한번 생각해봅니다. 사명의 자리에 서 있고, 또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 사명을 붙들고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처럼 거기에 모든 건 것은 아니죠. 그래서 우리의 섬김에는 순결함이 없고, 우리가 섬기고, 봉사하기는 하지만 하늘을 가르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이 없습니다. 자기를 다 드려 제물이 되고, 정결한 마음이 되어서 주님께 자신의 사명 이외에 없는 것처럼 자기를 다 바쳤을 때 그 때에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타오르는 하나님의 은혜의 불길이 있습니다. 잘난 성도, 수 만 명이 90% 헌신하는 것보다는 못나고 이름 없는 성도 한 사람이 100% 자기를 다 드릴 때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도 눈을 뜨자마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의 생애는 아무것도 남김이 없이 아버지께 다 드리신 생애였지, 모든 것을 다 바치신 헌신적인 섬김의 생애였죠.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남김없이 자기를 다 드리신 예수님의 그 희생을 보면서 우리의 불결한 섬김과 그분의 순결한 헌신을 비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섬기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탈영하는 것보다야 낫죠.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담은 몇 년만이라도 이 세상의 누구에게도 바쳐본 것이 없는 그런 종류의 섬김, 자기를 다 드리는 그런 섬김, 자리의 고혈과 진액을 짜서 그 즙을 바치는 것 같은 그러한 섬김,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랬더라면 이 세상은 더 많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을 것이고, 우리는 이 조잡하고 야비한 인격에서 예수의 형상을 더 많이 본받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바로 그런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었고,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케 되는 축복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야 할 때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다 버리셨습니다. 그 자기를 다 버린 사람 때문에 우리들이 구원을 얻고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고 있으니 이제 이번에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들을 세워주신 그 사명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거기에서 깊이 생각하셔야합니다. 예수님이 왜 겟세마네 동산에 엎드려 땀이 피가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까. 그냥 우리에게 한번 기도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시범을 보이시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신음하셨나요?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헌신이 아니었습니까. 주님이 엎드리신 것이 겟세마네 동산이었고, 올라가신 곳은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우리에게도 엎어져야할 겟세마네 동산이 있고, 매달려 죽어야할 골고다 언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지 입니다. 주님이 은혜 받은 우리를 세워두신 그 자리 주님의 참 사랑과 은혜를 많이 깨달은 우리들이 붙들어 세워주신 그 자리 거기가 바로 겟세마네 동산이고, 거기가 바로 골고다의 언덕입니다. 거기에서 피 흘려야 하고, 거기에 못 박혀 우리 자신을 드려야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최고의 영광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에 대해서 소홀하게 살고,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우리 자신을 바치지 않는 그런 인색한 삶을 살다가 그 날에 주님의 얼굴을 무슨 면목으로 뵈올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세워주신 자리가 어디든지 정말 그 때에 우리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았던 삶을 계속 살면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겼구나. 내 손으로 섬기는 동안 네 볼에 흐른 눈물을 닦아주고 싶구나.”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런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구름 이 세상은 속히 지나고 죽음의 휘장 너머에서 주님을 뵈올 날이 옵니다. 여기서 주님을 위해 많이 죽은 사람들은 그 날에 살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를 위해서 많이 눈물 흘린 사람들은 주님의 그 손길로 그 눈물의 씻김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을 위해 많이 고난을 받고, 모욕을 받은 사람들은 그 날에 칭찬 받을 것입니다.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 괴로운 일이 많고, 사명을 감당해서 헌신하려고 할 때에 우리의 발목을 붙드는 괴로운 일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 예수 바라보십시다.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마지막 날에 받을 그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바라보십시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상관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본 받아서 우리도 잠시 겪는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상관치 말고 주님이 우리를 세워주신 곳이 어디든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예수 위해서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헌신하는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1. 죽기까지 지는 십자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4)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 가운데 매우 유명한 말씀, 그 바로 뒤에 나오는 성경의 보도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에 관해서 예언하신 후에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고 말씀입니다. 이것은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아주 중요한 지침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라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아주 중요한 지침이 되었습니다. 그 지침은 다름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려면 세 가지가 이행되어야 하는데 첫 째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이 자기 부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신 뜻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욕망을 갖거나, 혹은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 자신의 성향들을 부인하는 것이죠.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이 첫 번째이고, 그 다음 두 번째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 신자들을 성숙하게 하시고 또 당신이 우리에게 이루실 그 일들을 위해서 신자들을 그 사명을 위해서 무거운 짐을 지는 십자가로 그들을 부르십니다. 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이제 두 번째 요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가신 그 발자취를 뒤쫓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항구불변 하게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간다. 모두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부르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목표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고 그 목표를 따라가는 태도가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는 그러한 삶이어야 하고, 또 자기의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진 삶이어야 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좇아가는 삶이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생활 속에서 아무리 목표설정이 잘 되고 또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이 분명하게 적립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계속해서 추구해나가는 삶의 방식이 올바르게 정립되지 않으면 그렇게 올바르게 설정된 삶의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근하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도 모르고 주님의 뜻을 모르면 그러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제멋대로 자기의 길을 걸어가게 되죠. 이럴 때에는 우리들이 올바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죠. 그러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깊이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깊이 은혜를 받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둡던 눈이 밝아져요.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되고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때에 자신이 살아가는 이 삶은 잘못된 삶이고, 자기가 지금 허우적거리며 살고있는 이 삶이 지향하는 목표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이제 삶의 목표가 바뀌게 되죠. 누구든지 은혜를 받기 전까지는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받아야만 마음의 어두움이 물러가고 눈에 비늘이 벗겨지고, 쓸데없이 사랑하던 것들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게 될 때에 마음의 창문이 열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부르시는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부르시는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그 순간에 그것을 깨닫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 목표를 따라서 살아갈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참다운 목표도 모르고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도 못 잡으면서 방황하고 있는데 이제 이 사람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자기가 있어야 될 사명의 자리가 어디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 깨닫게 되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변경될 수 없는 인생의 목표가 정립되었고,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만이 인생이 참되고 가치 있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자기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살리셔서 그래서 놀라운 은혜가운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사명을 주신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각 그 사명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를 많이 받고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되어서 자기 자리에 서 있고, 어떤 사람은 주님을 위해서 더 많이 희생할 각오는 되어있지만 어떤 사람은 여전히 한 가정의 주부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자리에 세워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로 섬기면서 직장에서 이런 저런 일로 하나님께 봉사하면서 어떤 사람은 망가진 가정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사명을 받아서 각기 자기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것만해도 놀라운 은혜입니다. 정말 놀라운 은혜입니다. 자기가 서야할 자리를 깨닫는다는 것 자체. 인간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행복이요. 축복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보면 자기가 있어야 될 사명의 자기가 어디인가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은혜를 받고 고면 이제 하나님이 나에게 이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이 바로 이런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그 사명감을 느끼면서 그 자리에 서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봉사할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정말 자기가 어디에 쓸모 있는 사람인지를 몰랐는데 하나님이 사명을 주셔서 그 사명을 감당하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나를 이렇게 필요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창조하셨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그 때 그 사람이 얼마나 기쁠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있어야 될 사명의 자리가 무엇이고, 또 어디인가 하는 것을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깨달은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모두 그 사명의 자리에서 오래도록 서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던가요? 아니잖아요. 그것이 문제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명의 자리에서 오래도록 그 사명을 감당하고 오래도록 그 사명의 자리에서 자리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사람들보다는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고, 또 마지못해서 그 사명의 자리에 서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명의 자리에 서서 끊임없는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은혜의 충전을 경험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속에 있는 많은 자원들을 그 속에서 빼앗기고 고갈되고 하는 것들을 경험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처음에는 나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던 사명의 자리인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로 하여금 자유롭게 신앙생활 하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올무가 되어서 내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이죠. 무엇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 때는 사명을 인해서 그렇게 기뻐하던 사람들이 그 사명을 감당하다가 도중에 실족하고 뒤로 미끄러지고 그리고 그 사명에서 다시 나태해지고, 하는 그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를 우리들이 한번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또 나를 위해서 잃고자 하면 그가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 많은 진리가 담겨있어서 이 한 시간에 이 모든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살펴볼 주제와 관련해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 집어보자면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쫓는 것과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 즉 나를 쫓을 것이니라.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과,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저의 판단으로는 이 십자가는 절대적인 십자가와 상대적인 십자가로 나뉘어집니다. 절대적인 십자가는 자기는 티끌만큼도 잘못이 없지만 주님을 섬기려고 애를 쓰다보니까 할 수 없이 당해야 하는 고난을 우리는 절대적인 십자가로 저는 부릅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같은 경우는 절대적인 십자가죠. 왜냐면 만약에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 감당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전파하지 아니 하셨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을 이유가 없죠. 또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너희들이 그 예수를 전파하는데 그렇게 하지 마라. 이렇게 명령을 받았을 때 우리는 그래도 예수님을 전해야 되겠다.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가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러면서 그들에게 굽히지 않고 복음을 증거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보였을 때에 핍박을 당한 것들은 그래서 고난을 많이 당하고 피투성이 되었던 것은 모두 상대적인 십자가가 아니라. 절대적인 십자가입니다. 자신은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주님을 위한 목표를 가졌기 때문에 애매히 고난을 당하여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절대적인 십자가입니다. 상대적인 십자가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잘못과 허물, 그리고 굳이 우리가 주님을 잘 믿겠다는 목표를 세우지 않아도 당하게 되는 많은 고난과 괴로움을 우리들은 상대적 십자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대적 십자가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이나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지낸 모든 시련과 고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종류의 십자가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주님을 닮은 성숙한 인격으로 변화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 사상입니다. 그런 십자가를 지면서 살아야만 그 사람이 비로소 예수를 쫓을 수가 있다. 주님을 따라갈 수가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사실 주님이 어디를 가셨기에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따라간다는 것은 장소 적인 개념이 아니라. 주님이 가지신 그 정신과 같은 삶을 살수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진다. 는 이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이 특별히 아끼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고통이 없는 인생의 길을 허락하실 것 같지만 그러나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 십자가를 지고 인생의 길을 걷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인간으로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한 지혜가 이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사랑해주시는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원을 아낌없이 누리고 십자가의 고통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만사 형통한 길을 걸어가게 하고 사람들에게 떠받드는 높임을 경험하게 하고, 다른 어떤 고통과 괴로움이 없는 만사 형통한 삶을 허락해주셨다. 고 한다면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은 얼마 안 가서 주님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보면 주님을 잘 믿다가 고난이 어려움이 와서 낙심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하나님이 너무나 형통케 해주셨기 때문에 뒤로 물러가서 부패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고, 후자가 더 절망적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주님께 징계를 받음으로 당하게 되는 많은 고난도 역시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셔서 그 사람을 신실한 신자로 빚으시려고 하는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주님을 잘 믿고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큰 대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님께 이렇게 뼈아픈 징계를 받아서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을 일을 잘 하지 않습니다. 늘 순종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의 교회와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영혼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영혼들을 사랑하고, 자기를 하나님 앞에 많이 드리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십자가 없이 이 세상에서 평탄한 길만 허락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는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모두 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졌다고 생각해도 안 되고, 또 어떤 사람이 형통 하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삶과 신앙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상급이라고 생각해도 안 됩니다. 이러한 얄팍한 공식으로 통하지 않을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올바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책망을 받으면서 고난의 십자가를 진 적도 있지만 어떤 때는 하나님을 잘 믿고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데도 마음이 기도하면 늘 찢어지는 것 같고, 눈물이 마르지 않는 고난의 십자가를 진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당신이 많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이런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주셔서 은혜의 동산에서 사명을 그들에게 부여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사명 없고요.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 치고, 눈물을 흘리며 지고 가야할 사명의 십자가가 없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히 하나님이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명을 지워주시니 그 사명이 어찌 십자가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명은 그 자체가 십자가입니다. 뿐만 아니죠.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사명을 따라 살려고 할 때에 많은 고난을 주십니다. 왜 그러는지 아십니까? 우리들이 은혜를 많이 받아서 사명을 감당해 나갈 때 늘 형통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교만하게 되죠. 은혜 안 받은 사람들이 교만해지는 종류와 은혜 받은 사람들이 교만해지는 종류가 다릅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의 교만은 아주 교묘하고 특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들과는 은혜로 교통하실 수 없기 때문에 교만한 마음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없고, 또 영광 받을 수 없는 교만한 마음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많이 보여주셔도 그 마음으로 그 뜻을 받아들여 주님이 원하는 곳으로 흘러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사명을 맡긴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들로 하여금 고난의 십자가를 많이 지게 하심으로서 사명을 감당해 나가지만 자기가 의지해야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은혜를 많이 받고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이 사명을 감당해 나가면서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게 하심으로서 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달아 사랑하지 못하게 하시고, 또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보상이나 보람 대신, 그 모든 것, 뒤에 계신 사명을 자기에게 맡기신 하나님을 직접 갈망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도 이 고난의 십자가를 많이 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사랑과 친교의 은혜도 크지만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앞에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살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삶입니다.
그러면 왜 어떤 사람들은 사명을 맡아서 끊임없이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명을 맡았는데도 믿음도 자라지 아니하고 사명도 자라지 아니하고 이렇게 앉은뱅이 같은 신앙이 되다가 결국은 거기에 주저 앉아버리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주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그 십자가를 진 태도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태도는 둘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그 십자가를 지고 죽겠다는 태도이고, 또 하나는 그 십자가를 지고 살겠다는 태도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여기에서 나오는 이 두 번째 목숨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의 이 목숨을 가리키는 것보다는 주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영혼의 복 받은 상태입니다. 거기에서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 같은 곳에 보면 경건한 시인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원을 호소하지 않습니까. 영혼이 짓눌리고 죄의식의 고통을 받을 때도 나의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호소하고, 원수와 대적을 만나 고난을 당하거나 환난의 폭풍우를 만날 때도 나를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지 않습니까. 이 구원의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과 평화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는 상태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는 복 받은 상태, 그것이 바로 시편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구원이었습니다. 신약에 들어와서도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 하나께서 자기들을 구원하셨다고 할 때에도 역시 불신상태에서 구원하는 경우도 구원받았다고 말하지만 낙심하고 어려움을 많이 당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것 같다가 다시 복 받은 하나님 앞에서의 아름다운 신앙생활의 상태로 돌아오게 된 영적 축복을 물질적인 축복을 가리켜서 구원이라고 이제 표하기도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낙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받은 우리에게는 모두 사명을 주시는데 그 사명은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나에게 맡겨준 그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짊어지고 나아가다가 어떤 사람은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복된 상태로부터 멀어지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놀라운 복 받은 상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저는 우리 직원들 속에서도 그런 것을 참 많이 보는데 별로 그렇게 은혜를 받기는 받았어도 늘 이렇게 좀 힘들어하고 살아요. 잘 기도하면서 격려해서 이제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해요.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신앙이 아주 좋아지고 가슴이 뜨거워져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주 주의 일을 하기전보다도 더 충만한 가운데 감사가 넘치는 신앙생활을 해요. 그러면 어떻게 되요. 자기 마음 속에서 감사와 기쁨이 막 넘치니까 모든 성도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자기 동료들에게도 항상 마음에 여유가 있어요. 그러면서 관용을 베풀고 사람들에게 친절히 하니까 기도가 막힐 일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기도시간에 더 많은 복을 주셔요. 기도가 잘 되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니까 마음에 이 쓸데없는 정욕적인 사랑들이 물러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일체의 사모함으로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마음 속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마음들이 이 속에서 계속해서 생겨나니까 하나님 앞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셔요. 그래서 계속해서 신앙이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볼 때에도 하나님이 동행하는 사람이 저런 것이구나. 그리고 나도 저렇게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생겨나죠. 반대도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셨는데도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늘 자기 사랑 속에 빠져서 시험에 들고, 일을 하기는 하지만 처음에 있었던 사명감 같은 것은 간 곳이 없고, 그냥 일로서 꾸역꾸역 그 일을 하다보면 영적인 소화불량에 걸려요. 그래서 결국은 은혜의 자리에서 멀리 미끄러지게 됩니다. 온갖 정욕과 육욕들이 마음에서 살아나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셨던 그 고유한 사명에 대한 그 감사함과 탁월한 인식은 사라지고 일로만 남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일이라고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서 그래서 결국은 영혼이 아주 망가진 사람으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오냐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목숨을 구원할 것이요. 하나님 앞에 그렇게 복 받고 사랑을 받는 상태,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 때 목숨을 걸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어서주신 그 사명에 대해서 목숨을 거는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난을 많이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시련의 고통가운데 처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계속해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어떤 무슨 말을 하고 또 그 사람이 무슨 자랑을 자기 자신에게 관해서 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사명감이 불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대게 심령이 병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이 충만한 사명감으로 불타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에게 사명을 맡기신 그 현장도 병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순결한 것도 두 종류 다 순결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도 순결하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그 방식도 순결해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은혜 받기를 원하고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건강해야 한다면 이것만 건강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그 사명의 자리도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겨 가는 그 모습도 아주 건강해야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맡겨주셨든지 간에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서 건강한 사명지를 소유하게 되고 우리의 건강한 사명지는 곧 우리의 영혼의 건강함에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자리가 어디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오늘도 교회학교 교역자들이 상반기 평가를 쭉 하는 가운데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번 정직하게 우리의 마음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내가 섬기는 이 사명의 자리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가? 우리는 둘 중에 하나가 되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게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있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이 사명의 자리에 놀라운 축복이 있든지, 혹은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이 사명의 자리에서 축복이 없다면 무엇이 이런 축복을 앗아가 버렸는지 하나님 앞에 결단하면서 그것을 알려달라고 제일 먼저 알아야 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사명을 맡은 사람은 자기인데 다른 사람이 알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사명의 장본인이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그것을 알게 하셔서 그래서 내가 그 맡은 사명의 자리에서 주님이 내게 축복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이유가 어떤 것이라면 그 이유 때문에 내가. 나를 바꿔서라도 내게 무엇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슬퍼하신다면 그것을 다시 찾아오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신다면 칼로 도려내서라도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서 사명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께서 내가 하는 일을 기뻐하신다고 하는 그것을 보여주셔야지 물론 십자가는 있을 수 있습니다. 고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한 알의 밀 알 중 씨눈이 아니라. 낟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씨눈만 살면 됩니다. 그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도대체 왜입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의 섬김에 축복이 없고, 나의 사명의 자리가 이렇게 병들었습니까. 나이게 말씀해주십시오. 내가 살을 베어서라도, 뼈를 깎아서라도, 내가 하나님 뜻에 맞추겠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 이것이 바로 정말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그 구약의 역사가운데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거의 없는데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내가 저를 통하여 내 일을 다 이루리라.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도대체 이새의 다윗이 양이나 치고 살 때에 무엇을 보신 것입니까. 무엇을 보셨기에 내 마음이 합하다. 라고 까지 말씀하신 이유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마음에 합하다. 라는 말이 “아하레 레브”입니다. “아하레” 라는 말은 전치사로 뒤에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영어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번역한다면 이렇게 번역하면 됩니다. ( ? ) 하나님의 마음에 뒤따라오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 이 사람이 히브리 원어 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마음을 앞세우고 가면 그 마음을 그대로 빼 닮은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나누어주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이 그것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 아이는 이 소년은 내 마음에 뒤따라오는 아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내 마음을 뒤따라오기 위해서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든 것들을 그것이 아무리 자신 속에 살 깊이 박혔다고 할지라도 칼을 넣어서 파내어 그것을 잘라내어 버릴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 사람이라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찰스 하든 스펄전 영국 설교자는 말하기를 자신의 기도 속에서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하나님 내 몸에 흐르는 피 중 단 한 방울이라도 당신을 기뻐하지 않는 피가 있다면 뽑아버려 주십시오. 출혈시켜주십시오. 내 몸에 살 중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살이 단 한 점이라도 있다면 하나님 그것을 도려내어 주십시오. 나는 전부 주님의 것이 되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맡겨주셨을 때에는 그런 자세여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역에 복이 없을까. 무엇 때문에 복이 없을까. 방법이 뭐가 잘못되었을까. 이것은 나중 문제입니다.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의 어떤 부분을 기뻐하지 않으실까.? 그래서 왜 강물이 가득히 물줄기가 흘러야할 내 섬김의 강이 물이 모두 마르고 바닥이 드러나게 되었을까? 왜 하나님의 축복 없이 이렇게 퍽퍽하고 힘겹게 마치 이 세상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처럼, 억지로 되지 않는 일을 위해서 애쓰는 사람처럼 그 희망도 없고, 비전도 없이 그렇게 매일매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이것에 대해서 깊이 회의를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깊이 회의를 느끼고 가슴아파 해야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자신의 사역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데도 자신이 사명을 감당해나가는 잘못된 태도, 그 섬김 속에 깃들여있는 이기적인 욕심, 더 많이 희생하지 않고 하루하루 그냥, 그냥 넘어가려고 하는 안일함, 이런 것들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무슨 큰 문제가 되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리고 자신의 사역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없는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하기보다는 환경의 탓으로 돌리고 사람들이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환경과 여건의 탓을 하고 이렇게 하면서 불평과 불만으로 자신의 마음이 가득 차게 되면 두 번 하나님 앞에 죄 짓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사역과 섬김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마음 속에서 그 일을 향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날 모든 기독교 사역 자 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만약에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 자기에게 맡겨준 사명의 열심히 부동산 투기하는 사람들의 열심의 십분의 일만 따라간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엄청나게 많이 변했을 것입니다. 어디 땅값이 오른다. 더라. 그러면 서울에 앉아서 드러눕는 것이 아닙니다. 차를 타고 번질 나게 지방으로. 그 골짜기로 내려가서 그 땅을 답사하고, 주민들을 만나보고 거기 땅 시세를 알아보고 그것을 적어오고 말이죠. 그러면서 미친 듯이 투기를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요. 또 그 정보에 따라서 얼마나 신속히 움직이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런 열심히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이 우리의 섬김의 현장을 바라보실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요. 우리가 그 길로 걸어가서 사명의 자리에 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떠밀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를 떠밀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축복이 우리를 떠밀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었지만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가슴을 녹여서 예수의 사랑이 우리의 심령을 녹여서, 주님이 우리에게 강요해서가 아니라. 그 사랑이 우리를 녹여서 우리는 주님 앞에 갔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사용해주시옵소서. 이것이 내게 지어주신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섰습니다. 사람이 불러서 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거기에 파송 하신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들은 처음에 그 하나님을 향해 가졌던 그 두려움과 그리고 기쁨으로 가득 찼던 열심을 잃어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그 사명의 자리에 서서 밥이나 먹고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우리의 눈에는 눈물이 마르고 가슴속에는 불이 사라졌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지가 어떻게 되든지 별로 관심도 없이 매일 매일 그냥 살아갑니다. 그러는 동안에 마음속에서 주님도 사라집니다. 그러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무엇이 남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신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때는 그 자리가 아무리 낮고 천한 자리라고 할지라도 주님이 세워주신 사명의 자리에 서 있을 때. 그때 그는 거기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면 거기에서 주님을 향해 사랑을 품고 잘 감당하려고 애를 쓰기만 하면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거기에 있습니다.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중에 환난과 어려움이 와요. 어떤 때는 도저히 온 땅이 어두움으로 가득 찬 것 같아서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어요. 앞을 봐도 길이 보이지 않고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아도 그 길이 나타나지를 않아요. 좌우를 돌아보아도 어두움으로 가득 차서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왜냐면 거기가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이고,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하신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책임지고 인도해주셔요. 거기에서 기도하면 다른데서 피를 토하며 기도한 것보다도 거기에서 웃으면서 하는 기도를 하나님이 더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업죠. 왜? 하나님이 내 편이신데, 하나님이 나를 여기 있는 것을 기뻐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는데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빛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겠어요. 최악의 경우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그러면 그것은 큰복을 받는 날이죠.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울어야 할 필요도 없고, 가슴 졸여야 할 필요도 없는 안식으로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거기에 서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것에 대해서 깊이 애통해야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사역을 돌아보세요. 섬김을 돌아보세요. 거기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지를 확인하고, 그것을 물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안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둘 다 하기 싫으니까.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기도 싫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없이 마음껏 방탕하게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 원수처럼도 살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정쩡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애매 모호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에 있는 것은 같은데 한 발만 걸치고 한발은 세상에 걸치고 그리고 온갖 즐거움은 세상에서 맛보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형식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왼쪽 한발도 떼고 세상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요절날까봐 무서워서 그것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됩니까. 끊임없이 돌아가지도 못할 애굽을 보면서 그리워하다가 약속의 땅도 못 얻고 광야에서 눈을 부릅뜨고 죽은 그 수많은 믿음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싶으면 그것을 택하세요. 그런데 나는 묻고 싶어요. 그런데 그것이 정말 행복할까요? 진짜 행복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음껏 세상으로 달려간 것도 아니고, 오른발 하나는 세상으로 내밀었는데 왼발 하나는 사명의 자리를 찍고 있어요. 그런데 세상에서도 기쁨을 누리고, 또 사명의 자리에서도 기쁨을 누리려고 하는데 사실 그것은 그의 희망사항일 뿐이고, 실제는 세상에서도 마음껏 행복해보지 못하고, 그리고 또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나가는 신령한 기쁨도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는데 한 명이라도 돌아갔습니까. 못 갔잖아요. 이미 벌써 떠나온 길입니다. 못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굴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일에 대해서 기도를 해도 말이죠. 이렇게 자기의 생명을 다 바치면서 사명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은 기도가 살아있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 수 있어요. 왜냐면 살고 하는 것이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명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니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정직하게 자기를 세워주신 그 사명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없다. 라는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자꾸 회피합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결단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뭔가 몰려야지 결단을 하는 것이지. 사람이 그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데 왜 결단을 합니까. 여러분, 성품이 원래 우유부단한 사람들이 결단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한번씩은 가끔 하죠. ”아, 이제는 자자." 그러면서 자는 것입니다. “와, 먹자.” 이런 정도는 합니다. 그런데 결단을 합니까. 무엇인가 꿈이 있는 사람, 그리고 쓰러져 죽어도 가다가 죽어야할 목표가 있는 사람들만이 결단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결단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에게 힘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실망하고 지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고, 고난 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이신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에 대한 여망을 불어 넣어줄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이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 속에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오늘도 교회 학교 교역자들을 놓고 얘기했습니다. 물어요. “당신은 무슨 부서를 담당하는데 내가 하나 물어보겠다. 누구처럼 되고 싶으냐? 이 시대에 누구처럼 되고 싶어요? 당신이 어린 아이들을 돌본다면 누구처럼 되고 싶어요. 내가 그렇게 바라보고 본받을 만한 사람, 그렇게 제대로 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 같다. 그러면 네가 스스로 만들어 낸 사람은 누구냐? 그러면 지금 그대말고 그대가 되고 싶은 사람은 누구냐? 그 사람을 정말 그리워하느냐. 죽은 사람이라도 좋다. 그러면 내가 한번 더 물었습니다. 만나고 싶지 않으냐? 그 사람이 만약에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한번 가서 만나보고 싶지 않느냐? 그립지 않으냐? 이런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것이 뭐냐면 에너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이 사명을 목숨을 걸고 감당해 나가겠다고 하는 사명감이고, 주님이 내게 맡겨준 이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승리해야 되겠다. 라고 하는 그런 불붙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어, 그 사명 잘 되어야 되는데. 어허, 요즘 왜 이러지? 좀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이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의 사명을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여러분 한번 기억해보세요. 그분에게 있어서 사명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들을 다시 하나님 앞에 살리는 것이 그분의 사명 아니었습니까.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 그분의 뜻 아니었습니까. 그 분의 목표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신 그분도 아버지께 빌었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 빌었습니다. 왜? 그분도 죽는 것은 싫었습니다. 무서우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당신 자신의 목숨보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우리를 위해 맡겨주신 구원의 사역을 이루어야 할 사명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그렇게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한 알의 밀 알로 썩으셨더니 이렇게 많은 우리들이 열매를 맺게 되어서 예수 때문에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씨앗을 보면서 예수님을 기뻐하신 것 아닙니까.
우리의 사명은 어떻습니까. 한 때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 많이 받고, 구원받지 못한 우리 가족, 내가 그 가정에 파송 된 선교사라고 생각 했죠. 그래서 은혜 많이 받을 때는 하나님이 내 생명을 거두어서 우리 가족을 구원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불붙는 마음을 가진 적도 있었죠. 마치 사도 바울이 구원받은 이후에 구원받지 못한 자기의 골육 지친 을 인해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내가 내 민족, 내 골육지친 중 몇이라고 구원 얻을 수 있다면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것이 자기의 원하는 바로라. 고 고백하던 그 사도바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죠. 처음 주님이 우리에게 직분을 주셔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저런 일들을 맡기셨을 때 처음 그렇게 직분을 맡을 때, 처음 그렇게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떨렸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두려웠죠. 감격했죠. 나같이 더러운 죄인을 하나님께서 무엇이관대 이처럼 사랑해주시고, 그리고 이 사명의 자리에까지 세워주셨을까?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구원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나를 충성 되이 섬길 것이라고 미리 생각하시고, 그리고 천사도 부러워하는 사명의 자리에 세워주셨을 때 우리들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께로 모아졌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이 몸의 살을 찢고 내 살의 뼈를 갈아서라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 사명을 마지막까지 잘 감당해서 주님 앞에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칭찬을 받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고 우리가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그 마음입니까. 그래서 우리의 사명지가 살아있습니까. 성도가 이 세상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주위에서 예수를 위해서 작열하게 날마다 죽는 사람들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초고의 축복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재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렇게 날마다 예수를 위해 죽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자신의 사명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재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사명을 잘 감당하고 십자가를 지면서 그 사명을 향해서 날마다 죽었던 때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예외 없이 똑같은 경험을 가슴에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경험,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 많이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자기의 허물을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지 깨어짐을 경험하고 자기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섬김의 길은, 자기 죽음의 길, 주님 사심의 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은 고난을 만나요. 그 때에 우리가 받는 놀라운 위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 혼자 십자가를 지고 다른 사람들은 편히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그 십자가가 너무 무겁게 느껴져요.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서 그렇게 고난을 받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가 생각나요.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 때에 갑자기 이 십자가가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는데 이미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나는 예수와 함께 죽었는걸,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십자가를 지고 영혼의 고통을 당하고 마음에 시련을 당해도 주님이 지신 십자가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위로가 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세상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 속에
빛으로 남게 하소서.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 속에서 놀라운 찬양이 메아리 치는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마음에 큰 고통 사라져. 그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전 날의 한숨 변하여 노래가 되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생은 살같이 흐르고, 주님 만날 날은 성큼 다가오는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나의 안일과 사랑, 이 세상에 속한 욕심, 내 정욕,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연연하다가 주님 앞에 죽은 자로 발견될까요. 아니면 나는 죽고 주님은 사시게 할까요. 어쨌든지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들이 일생동안 살았던 모든 삶은 주님 앞에 찬란한 빛 앞에 드러날 것이고, 오늘 왜 이렇게 살았는지를 반드시 변명해야 될 것입니다. 뭐라고 변명하시렵니까. 하나님께서 그대들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를 왜 떠났냐고 물으시면 어떤 말로 변명하면 주님이 그럴 수도 있었겠다. 내가 잘못했다. 라는 대답을 받아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는 답은 천사도 생각해 낼 수 없습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생각해보십시오.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진정으로 사는 길은 자기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자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빛이 교사입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는 여러분들에게 불망의 감화에 대해서 설교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이 세상의 현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왜냐면 복음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이 우주의 이치가 무엇이고, 인생이 어디로부터 어디로 가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빛을 제대로 가르쳐 줄 수가 없습니다. 빛이 학문이라고 말하는 철학도 그것을 바로 가르쳐주지를 못해요. 오직 이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복음의 빛을 받은 사람들이니까. 그 빛을 가슴에 가지고 현자의 삶을 살아서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이 빛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둠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을 나누어주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감화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이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을 넘나드는 삶을 산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 얘기입니다. 한 사람이 진리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배우기만 하면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사람이 증거 하는 진리에 관한 증언이 듣는 사람의 마음에 불이 붙게 하기 위해서는 감화를 끼치기 위해서는 자신이 전하는 그 진리를 향하여 죽고 다시 살아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명을 맡은 사람에게 생사를 넘나드는 몸부림이 없는 것은 더러운 것입니다. 무엇을 하나님이 맡겨주시든지 그것을 짊어지고 내가 죽으면 이 사명이 다시 살리라. 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몸부림치며 생사를 넘나드는 “하나님, 내가 사명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에게 보여주셔서 나를 거기에 세워주셨습니다. 나는 죽어도 주님 당신의 사명은 스스로 이루십니다.” 그것이 바로 진짜 은혜 받은 성도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너무나 많이 하기 때문에 뒤로 미끄러진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일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서 영혼의 침체의 늪에 빠져버렸다는 소식을 들어 본적 있습니까. 안 그렇습니다. 사명을 감당할 때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요. 사명을 감당할 때 거기에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고 십자가에 못 박혔던 자신의 옛 사람은 죽고 주님이 심으신 새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잖아요. 그러니까 말이죠. 하나님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고 나태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한 모든 기도는 가증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 마음이 없는 사람이 누가 사명을 잘 감당한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이 기도에 귀도 안 기울이신다고 그래요. 안 그렇잖아요. 우리가 잘 하려고 하는데 어떤 때는 못 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까 나는 나 중요한 대로만 걸어갔지 하나님의 사명 같은 것들은 개떡처럼 생각하며 걸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내가 은혜 받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이렇게 팽개친 불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뼈를 깎는 아픔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빌면 거기에서 주님이 그 음성을 들어주셔요. 그래서 다윗도 그 범 죄 한 가운데 고백하잖아요. “행악 하는 무리들이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정말 개떡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불결하고 더러웠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이제는 내가 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순종의 길로 다시 돌아올 때 하나님이 그를 깨끗이 씻어서 다시 사용하셔요. 베드로 보세요.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예수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고 도망갔는데 그가 하나님을 버리셨습니다.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그를 깨끗이 씻어서 그래서 다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의 영광스러운 사역을 보면서 누구도 베드로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왜? 깨졌던 사람입니다. 그 깨진 그 사람을 붙여서 다시 사용하신 우리 예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걸레 같았던 사람들이 변하여 주님 앞에 충성스러운 성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렇잖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다 지나갑니다. 이 세상의 즐거움도 지나가고, 세상의 번영도 사라집니다. 남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았던 삶의 발자취 그것은 남습니다.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저녁에 저나 여러분을 부를지 모르죠. 어제도 오늘도 성도 한 사람의 가족, 하나님이 불러 가셨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오늘, 내일,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저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때에 오늘 주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신다면 여러분,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번 말해라. 그럴 때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다가 왔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가진 재물 많지 않고, 높은 지위 없어서 신문에 나게 주님을 섬기지는 못했지만 조국 교회의 한 모퉁이, 인류 역사의 한 귀퉁이에서 알아주는 사람 없어도 인정해주는 인간들이 없어도 주님 바라보며 섬기다 왔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지금 주님이 부르셔서 땀이 묻은 몸으로 그냥 달려왔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 하기 위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대속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살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는 그 앞에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주님이 죽으셔서 우리를 살게 하셨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죽어서 주님이 사실 차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헌신이 필요할 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