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
(201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2 (2011.02.06 주일오후설교)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3 (2011.02.13 주일오후설교)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4 (2011.03.13 주일오후설교)
1. 헛되지 않은 섬김(고전15:58) 2011.1.30 주일오후 1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5 (2011.03.27 주일오후설교)
2. 마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잠17:3) 2011.2.6 주일오후 7
3. 죽음을 초월한 소원(고후5:8-10) 2011.2.13 주일오후 15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6 (2011.04.03 주일오후설교)
4. 큰 산의 봉우리 아닐지라도(롬16:12) 2011.3.13 주일오후 22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7 (2011.04.10 주일오후설교)
5. 위기를 견디게 하는 믿음(고전15:30-31) 2011.3.28 주일오후 30
6. 희생과 덕으로 섬김(롬16:3-4) 2011.4.3 주일오후 36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8 (2011.04.17 주일오후설교)
7. 심령에 매임이 있습니까?(행20:22-24) 2011.4.10 주일오후 41
8. 어떤 일꾼을 원하실까? (1)(요21:16) 2011.4.17 주일오후 48
9. 어떤 일꾼을 원하실까? (2)(행1:24-25) 2011.4.24 주일오후 57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 66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2 (2011.02.06 주일오후설교)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3 (2011.02.13 주일오후설교)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4 (2011.03.13 주일오후설교)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5 (2011.03.27 주일오후설교)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6 (2011.04.03 주일오후설교)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7 (2011.04.10 주일오후설교)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8 (2011.04.17 주일오후설교)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9 (2011.04.24 주일오후설교)
1.헛되지 않은 섬김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I. 본문해설
II. 세상 사랑에 빠진 신자들을 위한 처방
III. 신자의 유일한 보람: 주의 일에 힘씀
- 세상과 육체의 유한함을 앎
- 구원과 영적 생명의 가치를 앎
- 교회의 영적 번영과 하나님의 나라
IV. 강하게 하시는 은혜
A. 인간의 연약함
- 흔들리는 신앙, 소명, 삶
- 은밀한 게으름과 싫증
C.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
- 혈과 육의 강함이 아님
- 강하고 견고하게 하는 은혜
III. 결 론
2.마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 17:3)
I. 본문해설
II. 섬김, 마음으로 나옴
III. 마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
A. 자연적으로 가치 없음
B. 연단하시는 하나님
- 불과 같은 고난과 시련으로써
- 바꿈, 강화, 바름, 사랑
III. 섬김으로 자기 마음을 앎
IV. 결론
3.생사를 넘어서게 하는 소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8-10)
I. 본문해설
II. 생사를 넘어서게 하는 소원
A. 하늘나라를 사모함
-담대할 수 있는 이유
-더 좋은 안식을 사모함
B. 주님이 계셔 좋은 나라
-사랑은 지속됨
-지상에서 주님을 기뻐함
III. 심판대 앞에 서는 그 날에
A. 홀로 서게 되는 그날에
- 무리들로 인한 담대함을 잃음
- 진실하고 꾸밈없이 자신을 봄
- 자신이 걸어온 모든 길은 한번에 앎
B. 몸으로 행한 것을 받음
- 그리스도를 통해 심판하시는 하나님
- 생명과 사망으로 판결하심
IV. 잠시 세상에 머무는 동안
V. 결 론: 무위도식하지 말라
4.큰 산의 봉우리 아닐지라도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롬 16:12)
I. 본문해설
II. 단 한 번 등장한 사람: 버시
A. ‘버시’라는 이름: 페르시스
B. 바울에게 기억된 이름
1. 많이 수고 한 사람
-주의 일에 수고함
-주안에서 수고함
2. 사랑 받은 사람
-하나님께 사랑 받음
-성도들에게 사랑 받음
C. 큰 봉우리는 아닐지라도
III. 결 론:
5.위기를 견디게 하는 믿음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0-31)
I. 본문해설
II. 위기를 피할 수 없는 섬김
III. 날마다 죽는 믿음
- “주안에서 가진 바...나의 자랑”
- “단언하노니”:
1) 분명한 사실
2) 확실한 가치
IV. 결론: 바른 싸움을..
6.희생과 덕으로 섬김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3-4)
I.본문해설
II.브리스가와 아굴라
- 몇 해 전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 만난 폭동
A. 목숨을 내어 놓은 사람
B. 모든 교회에 덕을 끼침
IV. 결론
7.심령에 매임이 있습니까?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
I.본문해설
II. 섬기는 자의 담대함
- 무슨 일을 만날지 모르는 불안함 환경
-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음
- 사명 완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함
III. 심령에 매임이 있습니까?
- 일에 매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매임
- 그 매임이 마음에 지배력을 행사함
- 그 마음으로 충성스럽게 살아가감
IV. 결론
8.어떤 일꾼을 원하실까?(1)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요 21:16)
I. 들어가는 말
II. 어떤 일꾼을 원하실까?
A.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
-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딤전 3:9)
B. 지혜로운 자
-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행 6:3)
C.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딤전 3:4)
D. 헌신된 자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딤후 2:4)
III. 결론
9.어떤 일꾼을 원하실까?(2)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제 곳으로 갔나이다하고”(행 1:24-25)
I. 들어가는 말
II. 어떤 일꾼을 원하실까?(2)
A. 선택하여야 할 자
1. 충성된 자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딤전 3:11)
2. 믿음의 본이 되는 자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3. 잘 다스리는 자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
B. 피하여야 할 자
1. 새로 믿은 자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딤전 3:6)
2. 잘 다투는 자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딤후 2:24)
“구타하지 아니하며...”(딤전 3:3)
3. 인색한 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4. 더러운 이를 탐하는 자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딤전 3:8)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딤전 3:3)
5. 말에 진실성이 없는 자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 고...”(딤전 3:8)
6. 잘못된 습관에 인박인 자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딤전 3:8)
III. 결론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 66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2 (2011.02.06 주일오후설교)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3 (2011.02.13 주일오후설교)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4 (2011.03.13 주일오후설교)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5 (2011.03.27 주일오후설교)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6 (2011.04.03 주일오후설교)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7 (2011.04.10 주일오후설교)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8 (2011.04.17 주일오후설교)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9 (2011.04.24 주일오후설교)
1.헛되지 않은 섬김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하였나이다 (고전 15:58)
녹취자: 김인철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고린도전서 중에서 특별히 부활장으로 알려진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사도는 부활의 영광스러움과 그리고 그 확실성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이 교회에 쓴 것은 크게 세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그 도시에서 분쟁하는 정신이 교회에까지 침투하였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도시의 불경건한 부도덕이 교회 속에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부활이 없다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길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이유를 덧붙인다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은사로 말미암는 많은 분쟁과 나뉨 이 네 가지 이유 때문에 사도바울은 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II. 세상 사랑에 빠진 신자들을 위한 처방
우리는 여기에서 이 세상 사랑에 빠진 신자들을 위한 아주 분명한 처방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에 결코 그러한 거짓된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우게 된 것은 아테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것을 느낀 후입니다. 그는 거기에서 철학적인 변증으로 많은 사람들과 논변했지만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를 믿을 뿐이었고 일상적으로 사도바울이 경험하던 커다란 복음을 부흥을 보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질 대로 가난해진 사람들만이 예수를 믿을 뿐이었고 일상적으로 사도바울이 경험하던 커다란 복음의 부흥을 보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질 대로 가난해 진 가운데 찾은 그 다음번의 전도여정이 바로 이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이 고린도에 왔을 그때에 사도바울을 심히 떨렸고 자신이 약한 것을 느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중대한 결심을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굳게 다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과 그의 능력과 그의 부활과 영광이 복음 선포에 있어서 대 주제를 이루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 안에 깨뜨려졌고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시는 항구도시로서 국제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번화한 성읍이었고 이 성읍은 로마시대 때 비로소 번성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그리스 시대 때부터 아주 커다란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거기에 가 보면 국제 무역상들이 물건을 거래하던 거대한 시장바닥이 여전히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는 물질로 흥청망청 했습니다. 그리고 여유로운 경제생활을 토대로 한가하게 이론을 따지고 철학을 궁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은 학파를 형성하고 제자들을 몰고 다니며 논쟁을 하고 이렇게 하면서 그들은 삶을 살아갔습니다. 이런 번성 속에서 도시는 성적으로 타락했고 그리고 이 성 적인 타락과 거짓된 종교를 함께 묶은 아프로디테를 섬기는 그런 우상의 제사를 드리는 곳이 있었던 곳도 바로 이 고린도였습니다. 이런 도시속에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놀랍게 변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커다란 부흥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도바울이 떠난 후 은혜에서 미끄러지게 되었고 그때 이들은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도시에 영향을 끼쳐야할 교회는 도시에 영향을 받으면 세속화되어 가고 있었으니 그 도시의 모든 문제들이 교회 속에 그대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분쟁하는 이 도시의 정신이 교회 속에 들어 와서 파당을 만들게 되었고 심지어는 그리스도파라 게바파라 바울파라 나누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는가 하면 돈을 사랑하는 도시의 정신이 교회 속에 들어 와서 가난한 자들을 없이 여기고 부자들은 헌금에 인색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도시에 있는 정신은 그것 말고도 교회에 침투하게 되었으니 그 도시에 두루 퍼졌던 음란한 풍조들이 교회 속에도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이제 사도바울이 전해 주었던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대의인 부활의 교리를 포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지만 세상 사랑에 빠져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짜증나는 일입니다. 이 세상이 살기 좋고 무엇을 먹고 마시고 즐기든지 이 세상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말해야지 그들에게 위안이 되지 만약에 부활이 있고 부활 이후에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 오늘 이 사람들이 벌이고 있는 사치스러운 잔치 상과 세속적인 쾌락의 삶은 이미 정죄를 받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린도교회 교인 중 부활을 부인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꽤 긴 분량을 할애해서 부활의 당위성과 이 부활의 확실성 그리고 그 영광을 이 15장에서 아주 아름답게 이제 갈파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이제 이 고린도전서에서 부활의 영광스러움과 당위성에 대해서 모두 진술하고 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제시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부활이 반드시 있고 그 날에는 우리가 각각 다시 주님앞에 살아나게 될 것이니 그리하여 어떤 자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인간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이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 하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신자의 유일한 보람이 주의 일에 힘쓰는 것이라는 것을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들은 넉넉한 도회지에서 항구에서 무역으로 얻은 많은 수입으로 그들은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있었고 그리고 그것은 곧 그들에게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신앙 없이 부자되어 보십시오. 믿음 없이 시간의 여유가 있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여러분이 높은 지위에 올라 보십시오. 미끄러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고 타락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도바울을 이렇게 세상 사랑의 미몽에 빠져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세상과 육체의 유한함을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 육체의 목숨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여름 한철에 확 피어나는 들풀과 같아서 잠시 후 가을이 올 것이요 그리고 그것은 모두 말라 검불이 되어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뿌리 까지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니 이듬해에는 다시 풀이 나는 것처럼 우리는 영광스럽게 부활하게 될 것이며 땅 위에 나는 풀은 그 이듬해에 다시 난 풀도 이듬해 가을에 시들지만 우리의 부활은 다시 사라난 후 소멸되지 않는 영광스러운 부활체가 될 것임을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과 육체의 유한함을 알게 될 때에 구원과 영적인 생명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진리의 밝은 빛이 비추어 주지 않으면 우리는 불행하게도 영혼은 내팽개치고 육체만을 물고 빨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육체에 대한 사랑의 끈끈이에 붙어서 결국은 우리의 영혼도 함께 물속에 가라앉는 그러한 처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이 세상이 고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셔도 이 세상이 우리의 정을 둘 수 있는 마지막 본향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도 인생에 대하여 상당히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다행인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태어났으면 그 다음에 좋은 것은 일찍 죽는 것이다 그 다음 세 번째 좋은 것이 있다면 부지런히 영혼을 훈련하여 건전한 영혼과 건전한 몸을 가지고 인간의 도리에 맞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의 마지막 행복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이 세상이 얼마나 유한한지를 알았고 그래서 그것들은 정말 덧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했는데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이 세상의 끈끈이에 찰싹 달라붙어서 마치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산다면 그 어찌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바로 내세신앙의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한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조선땅에 전해졌을 때 핍박과 환란을 능히 이기면서 신앙을 지탱하게 만들어 주었던 두개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믿음과 부활 믿음이었습니다. 종말과 함께 우리가 부활할 것이라고 하는 종말 부활 사상이었습니다.
III. 신자의 유일한 보람: 주의 일에 힘씀
오늘 보십시오. 여러분이 오늘 이렇게 살아 있지만 그러나 살같이 빨리 흐르는 세월 속에서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죽음으로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몸을 통해서도 이렇게 우리의 날들이 가까워 온 것을 경험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를 파고 들어오는 죽음의 기운 때문입니다. 젊었을 때 친구들을 만나면 인사가 “너 재미 좋아?” “잘 지내?” 이런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가끔 친구들 오래간만에 만나면 “건강은 괜찮어?” 그것이 질문입니다. 믿는 친구이든 안 믿는 친구이든 전화 하면 하는 질문입니다. 인사가 그렇게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런지 아십니까? 죽음이 기운이 스며들어 오는 것을 자신의 육체 속에서 느끼기 때문에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더 나이가 많아져 아주 늙으면 뭐라고 질문할지 궁금한데 “오늘도 살았어?” 그렇게 물어 볼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세상을 무시하는 파괴적인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되지만 세상을 적당하게 올바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 세상이 헛된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어야 합니다. 바람같이 자나 가는 세상 이라는 것을 밑에 깔고 있어야지만 세상을 올바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 해 되었는데 터키쪽으로 선교사 집회를 나갔을 때인데 집회가 끝나고 딱 이틀이 남는데 이틀 동안 저를 데리고 박물관에 갔습니다. 박물관에 갔는데 지금도 생생한데 사람이 남자인데 이렇게 오그려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전시해 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우그러진 사람들을 우리들이 보기는 하지만 대부분 미라 아니면 뼈만 남지 않습니까? 그런데 살이 그대로 있는 사람이 발견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르려져 있는데 얼굴도 있고 다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있었냐고 했더니 사막에서 발견이 되었는데 2,500년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물기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그냥 북어처럼 말라 버린 것입니다. 살과 근육과 모든 것이 말라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일부러 미라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부검을 했는데 창 같은 것에 찔려 죽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화살이나 창 같은 것에 찔려서 어디가 찔려 죽었다고 검시가 다 나왔습니다. 그렇게 쓰러 졌는데 모래 바람이 불어서 썩기 전에 말라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육까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무로 된 관 같은 곳에 누워 있는 것입니다. 원래는 관에 안 있었던 사람인데 관을 만들어서... 관도 아니고 무슨 함지박 같은 것을 만들어서 거기에 누워 있는데 키는 1m65cm 정도 된다고 하는데 오그라들어서 내가 보기에는 1m10cm가 될까 말까 합니다. 조그맣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얼굴 표정 까지도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한참 쳐다보았습니다. 정말 바람같이 허무 한 것이 인생이구나 하는 것을 그 바짝 말라비틀어진 그 시체를 보면서 느낀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누구든지 죽으면 그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조막만한 마음과 그 정신 속에 수많은 욕망과 거짓된 속임과 이런 것들이 있어서 그렇게 하나님 창조하신 세계를 어지럽히고 자신의 삶을 어지럽히고 다른 사람의 삶을 불행하게 하고 하면서 일생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것을 가져다 마루 한 복판에 놓고 매일 한 번씩 거실에서 쳐다보면 정말 반듯한 삶을 살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나 인간의 허무함을 보여 주는 것일까? 저는 굉장히 충격이었습니다. 처음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이세상과 육체가 얼마나 유한 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다시 한 번 많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신자는 바로 이러한 인생의 허무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의 지루함에 대해서 눈 뜬 사람들입니다. 원래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은 한번 경험하면 잃어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의 유일한 보람은 주님의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일은 교회의 영적인 번영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교회의 영적인 번영이란 무슨 뜻인가 하면 교회가 영적으로 강해지는 것입니다.
(예화) 아침에도 군대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만 그 군대의 수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숫자로 전쟁에 승부를 내는 전쟁이 아니라 소수의 단출한 군인을 가지고 대군과 맞서 싸웠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투에서도 입증이 된 것입니다. 알렉산더가 이끄는 4만 대군과 페르시아의 26만 대군이 만났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것이 싸움이 됩니까? 절반도 안 되고 6분의 1도 안 되는 전쟁인데 거기에서 페르시아가 전멸을 합니다. 그래서 마케도니아가 이깁니다. 그래서 결국 페르시아가 망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용기입니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장된 숙달된 군인들 이런 사람들이 전쟁을 수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도 UDT/SEAL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나라 군인들 가운데 미국 해군이 인정해 주는 유일한 해군 부대입니다. 그렇게 인간이기를 포기할 정도로 무서운 훈련을 받습니다. 그래서 거기는 들어가기도 힘듭니다. 체격조건이 안 되면 안 받아 주고 또 훈련을 들어가도 수료하는 비율이 아주 낮다고 합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훈련을 받은 사람이 제대로 된 군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인 군사로 불렀습니다. 그러면 그런 군인들이 제대로 된 군인들이 교회에 있을 때 그때 그 교회가 영적으로 번영한 교회입니다. 큰 건물이나 화려한 치장 그런 것들이 교회의 영적인 번영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난주에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저의 친구 목사님이 있는데 그 집을 제가 몇 년 전에 간 적이 있습니다. 사모님이 “목사님! 우리 아들을 위해 기도 좀 해 주세요!” “왜요?” 그러니까 “우리 아들 때문에 저는 머리가 아파 죽겠습니다.” “왜요?” “우리 아들 군대에 보냈거든요” “그런데요?” “애는 군대가 너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제대를 안 하겠답니다.” 그래서 그런 아이가 어디 있냐고 했더니 병으로 갔는데 군대가 너무 좋아서 열심히 군대생활을 하니까 너 제대하지 말고 말뚝 박아라 했다 합니다. 그래서 부사관 시험을 봐서 부사관이 된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제대해서 복학을 하고 자기 일을 하는데 이 아이는 제대를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사, 중사 이렇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더니 그 다음에는 이번에 만나서 물어 보니까 그 아이가 대위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니 어떻게 쫄병으로 들어가서 대위가 되냐고 했더니 하사관이 되어 너무 열심히 하니까 부대에서 학교를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3사관학교에 가서 수료를 하고 소위로 임관을 했습니다. 전 부대에 쫄병으로 들어가서 소위로 임관한 사람은 그 아이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위가 되고 지금은 대위가 되었다고 합니다. 나이가 30이 되었는데 아직도 장가를 못 갔다고 며느리 하나만 구해 달라고 하는데 혹시 여러분 가운데 마음이 있으면 이 시간에 응모 하십시오. 그렇게 장교가 되었는데 소대장 때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전국 최우수 소대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주일 휴가를 주고 제주도로 여행을 보내 주었는데 네가 그렇게 좋은 소대장이 된 것은 좋은 부모님 덕이라고 부모님도 제주도 여행 같이 하라고 티켓을 끊어 주어서 다른 아이들은 군대 가서 돈 보내 달라고 난리인데 이 아이는 엄마 아빠를 제주도에 비행기로 모셔다가 관광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빠 목사가 이렇게 보니까 어차피 군대가 너무 좋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고 군대를 많이 아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군대는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만이 최고가 아니라 보직을 잘 받아서 요직에 있어야지만 승진도 잘 되고 진급도 하고 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주워듣고 이제 집에 온 아들을 앉혀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들아! 아빠가 들었는데 군대는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보직을 잘 골라 가야지만 장래성도 있고 승진도 하고 그렇게 높은 계급에도 오를 수 있다더라” 하니까 아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빠를 쳐다보더랍니다. “아빠!” “왜?” “아빠는 아빠가 보기에 내가 편한 직장, 많은 월급, 높은 지위를 나라가 보장해 주기 때문에 제가 군대생활을 한다고 생각 하세요?” “그럼 뭐냐?” “아빠! 나는 대한민국의 군인입니다. 군인은 나라를 위해 살고 나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보람입니다.” 라고 말하더랍니다. 너무 창피해서. 이 녀석이 27살 때 소대장을 했는데 소대원들에게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를 보여 주더랍니다. 소대원들이 사랑하는 우리 아버님께 라고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얼마나 자기 소대장을 존경하면 자기 소대장에게 편지를 쓸 때 Dear My Father 이렇게 편지를 썼겠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께! 그것이 진짜 군인입니다. 그렇게 해서 철저하게 무장된 사람 그것이 군인입니다. 그런 군인들로 교회가 가득 차는 것이 교회의 영적이 번영입니다. 저는 이렇게 나라를 보면서 걱정을 최근에 많이 했는데 두 가지 감동을 받으면서 많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무장된 정신과 기술과 모든 것들이 갖추어진 군인들이 많을 때 그것이 결국은 강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영적인 번영이라고 하는 것은 수 없이 모이는 사람의 숫자나 헌금의 크기 그리고 교회의 세속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뛰어나다는 사람, 정치인이나 아니면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나 오늘 우리가 뉴스 시간에 본 유명한 탤런트가 교회에 등록 했다고 해서 그것이 번영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영적인 번영입니다. 그것이 가장 우리들이 사모해야 할 바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자들을 강하게 만드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IV. 강하게 하시는 은혜
A. 인간의 연약함
인간은 강한 것 같아도 지극히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인간의 연약함은 늘 흔들리는 신앙, 불확실한 소명, 방황하는 삶 이런 것들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파고드는 은밀한 게으름, 선한 것에 대한 싫증 이런 것들 때문에 인간은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표류하는 인생을 살고 주님이 자신에게 준 사명이 무엇인지 앎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는 생활을 계속 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강하게 하십니다.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혈과 육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굳세게 만들어 주십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지 못했을 때에는 핍박이 두렵고 믿음을 따라 살 때 잃어버릴 것들을 염려 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강하게 붙들고 나면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주는 담대함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굳게 붙들고 의지하면서 살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믿음의 위인들처럼 우리들은 존경하고 쳐다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매일매일 주님의 은혜에 붙들려 살았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그들이 강한 사람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다른 종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은혜에 사로 잡혀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 거기에 우리의 강함의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
B.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까? 스스로 강하다고 믿는 사람에게 은혜룰 주시지 않고 하나님은 자기가 약하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을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받는 가장 아름다운 마음이 무엇인가 하면 약한 마음입니다.
(찬양) 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 하소서 아이같이 어리니 나를 도와주소서
Ⅴ. 결 론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의지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금년 한해 흔들리지 않는 섬김의 삶을 한번 살아 보십시오. 주님이 맡겨 주신 것이 무엇이든지 굳게 서서 예수가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매일매일 약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붙들려 살면 우리는 약하지만 우리를 붙들고 계신 주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능히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2.마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잠 17:3)
녹취자: 김인철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잠언의 말씀은 특별히 연단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은을 연단하고 금을 연단하는 이야기는 고대의 재련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이야 과학이 발달 했으니까 특수한 기술로 금들을 뽑아내고 하지만 옛날에는 금이 함유되어 있는 광석을 잘게 빻아서 그래서 부유법이라고 해서 거품을 일으켜 특수한 방법으로 비중이 다른 물질이 물속에서 각기 다른 떠내려가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이용해서 가로로 빻아서 그래서 부유법에 의해서 거품을 일으켜서 금 성분이 있는 낱알들을, 광석의 낱알들을 모으고 그렇지 않을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흑연으로 만든 도가니에 넣고 강한 불에 녹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녹게 되면 거기에서 불을 견디지 못하는 물질들은 타 버릴 것이고 액체 상태가 되어 쇠는 녹았는데 모래 같이 녹지 않는 것은 밑으로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걸러내고 붙이고 또 연단을 하고 또 녹여서 또 붙이고 이렇게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서 순도가 높은 금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이 금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수급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금을 만드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금붙이를 만들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부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화에 보면 마이다스의 손도 나오고 하지만 결국은 실패 합니다. 오늘날 과학에서는 그것이 입증 되었는데 금을 만들 수 있는데 모든 원소의 변화는 열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금이 생성되려면 50억 도의 온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지금 현재 인간의 힘으로는 50억도 까지 그렇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금이 나오게 되는 거니까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사금들이나 광석들을 채취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은과 금의 이야기가 함께 나오는데 그래서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풀무 없는 도가니도 쓸모가 없고 도가니 없는 풀무도 쓸모가 없으니까 도가니든 풀무든 이 모든 것들은 이제 강력한 열을 일으키는 기구가 풀무이고, 바람을 계속 보내서 열을 일으키는 화로를 이야기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거기에 올라가 있는 것이 도가니입니다. 그 두 가지는 결국은 재련을 하는데 사용되는 물건들을 이렇게 은유적으로 표현해서 도가니가 은을 연단하고 풀무가 금을 연단한다고 이렇게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를 들면서 여호와는 사람의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II. 섬김, 마음으로 나옴
여기에서 우리들이 섬뜩하게 다가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왜 사람이 금을 연단하고 은을 연단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금가루가 함유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함유되어 있는 광석으로서는 별로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금반지 하나만 주면 그런 광석이 들어 있는 돌멩이를 몇 트럭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치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연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신다고 했으니까 연단되지 않은 인간의 마음은 거의 무가치 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결국은 성경이 우리에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러니까 사람에 따라서 도덕에 잘 길들여져서 나름대로 반듯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그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을 통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중생이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것이라고 가르쳐 드렸는데 그렇다면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일어나는 최초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벌써 오래 지났지만 2003년도인가 마음지킴이 시리즈를 했던 기억이 나고 나중에 책으로도 공부를 했는데 다시 한 번 읽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교리에서도 볼 수 있는 것 같이 결국은 자연적인 마음은 하나님 앞에 별로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을 끊임없이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긴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성도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아침에도 설교를 했지만 고결한 사람이 사회적인 지위가 좀 낮다든지 옷을 싸구려를 입었다든지 화장품을 좋은 것을 못 써서 얼굴에 주름이 많다고 해서 덜 고결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야비한 사람이 외제로 치장을 하고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해서 갑자기 고결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 고결과 야비함이라고 하는 것은 살가죽이나 껍질이나 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외모를 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결국 한 사람의 가치는 마음의 가치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히 언약백성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연단해서 그래서 아주 좋은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화) 과일을 보면 최상품이라고 해서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도 저는 기억이 선명한데 1999년도에 우리 교회가 노회에 처음 가입을 할 때인데 노회 시찰에서 일 보는 서기 목사님들이 전부 다 우리 후배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가입을 하는 입장에서 그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농협에 가서 과일을 아홉 박스를 샀습니다. 하나씩 시찰에 소속된 사람들 주고 인사를 하려고... 그리고 그것을 끌고 진짜 인사를 다녔습니다. 운전해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해가 9월이었는데 복숭아가 풍년이 든 해였습니다. 복숭아 중에서도 황도였는데 4.5Kg 한 상자에 여섯 개 밖에 안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4.5Kg 한 상자에 여섯 개 밖에 안 들어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못 보았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풍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한 박스씩 주고 우리 교회가 이제 노회에 가입하게 되었으니까 잘 부탁드린다고 하고 인사를 드렸는데 3년 동안 사모님들께 인사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이 보내 주신 그것이 정말 맛있었다고 3년 동안 인사를 받았는데 그 후에도 그것을 사러 나가 보았는데 그런 제품이 안 나왔습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극상품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크기가 거의 700g정도 됩니다. 복숭아 하나의 무게가...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는 없었습니다. 그 후에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이 최 극상품의 과일입니다. 그러면 심하면 그런 것 한 개를 주면 그보다 아주 못한 것을 한상자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에 제가 안 가보아서 모르는데 예전에 우리 아버님 살아 계실 때 와서 그랬습니다. 우리나라 배가 최고더라 대만에 가 보니까 우리나라 배 좋은 것 하나 값이 대만 배 한 박스 값이더랍니다. 슈퍼에 나와 있는 것이. 그렇게 극상품을 그렇게 탁월한 것입니다.
III. 마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
A. 자연적으로 가치 없음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성도 만드셨을 때 여러분은 오늘 아침에 바리새인들처럼 나는 토색도 안 하고 불의도 안 하고 간음도 안 했는데 참 대견해 어떻게 그 어려운 환경 속에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리고 이레에 두 번씩이나 금식을 했을까? 그리고 자기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칭찬하는데 이것을 청교도들은 자기 아첨이라고 불렀습니다. 셀프 플렉토리라고 해서 자기 아첨이라고 불렀습니다. 잠언에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너희의 좋은 점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 칭찬하게 하고 내 입으로는 하지 말거라 했습니다. 그 당시에도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았으면 이 뒤에다가 하도 열이 받아서 그렇게 섰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아무리 그렇게 칭찬을 해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극상품의 성도로 만들고자 하는 그런 강한 소원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한 성도는 그러한 척도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지켜보게 되니까 항상 내가 나인것이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사라지고 자기가 대견해지는 순간 마음은 부패한 마음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섬김도 마찬가지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성실하고 변함이 없는 사람은 지혜가 조금 모자라도 성실하게 합니다. 변함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도 있으면 더 좋을 것입니다.
(예화) 중국에 간 자매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 인데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5,000만원을 들여 인테리어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 중국에서 5,000만원 들인 인테리어는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목수 한사람의 품삯이 그 당시에 그 지방에서 5,000원밖에 안 했습니다. 그런데 책꽂이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니까 중국 목수를 불렀더니 좀 좋게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만들어 주겠다 해서 재료는 내가 사다 줄 테니까 몇 일이면 되느냐 했더니 열흘을 만들어야 책꽂이를 만들 수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아니 지금 농담합니까? 한국에서는 하루면 만드는데 무슨 열흘 걸려서 만드냐 했더니 열흘 걸려 만들어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면 당신이 가서 물건 사다가 만들라고 했더니 소식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는가 하고 가 보았더니 이렇게 두꺼운 나무를, 책꽂이만한 나무를 사 가지고 와서 책 들어갈 자리를 파내고 있더랍니다. 그러니까 보름이 걸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도 답답하니까 관두라고 내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게 해서는 안 쓴다고... 그것을 정교하게 파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꽂이 모양으로 구멍을 뚫어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실한 사람은 요령을 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일합니다. 일이 그 사람의 마음을 말해 줍니다. 이것은 정확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일이 그 사람을 말해 줍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고 따라서 그 사람의 섬기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마음속으로 상당히 높은 가치를 부여 했던 사람이 하는 일을 보면서 그 사람이 하찮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릴 적도 있고 얼핏 보기에는 하찮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 사람의 일하는 것을 보면서 그 사람이 정말 뛰어난 가치를 지닌 선한 사람이라고 하는 바뀐 판단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섬긴다고 할 때 결국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 그 공경의 시작은 물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두려움과 사랑에서 출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지금 마음속에서 깊이 솟아났다는 말이 사실일 수 있겠습니까? 공경한다고 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섬김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부모를 마음 깊이 공경한다고 하면서 부모가 어디가 아픈지 밥은 먹는지 마는지 돌아가신 것인지 주무시는 것인지 판단도 여러분이 안 하고 있다면 그것이 부모를 향한 공경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님만 생각하면 마음이 미워집니다. 그런데 돈은 절대로 보태어 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거짓말입니다. 허위입니다. 공경하고 사랑하면 반드시 섬김이 뒤따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을 공경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궁극적인 모습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삶의 양상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학교 선생님 하면서 어떤 사람은 공무원이 되어서 어떤 사람은 목회자가 되어서 어떤 사람은 군인이 되어서 어떤 사람은 장사꾼이 되어서 사업가가 되어서 그렇게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삶의 양상이고 그 자체가 자신의 삶의 이유이고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자기를 주인 삼은 삶입니다. 제가 요즘 청년집회에 가기만 하면 아주 간절하게 호소를 합니다. 제발 학교 선생이 되거라 믿음이 있는 너희들이 학교 선생이 되거라 간절하게 호소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어렵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교육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때 예수 믿는 사람이 가서 직장이라고 밥벌이 한다고 하고 다니면 안 됩니다. 제가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교육계에 계신분하고 한번 대화를 나누었는데 우리나라 학교 선생님들의 봉급이 OECD에서 세계7위라고 합니다. 굉장히 높은 수준입니다. 그런데 저는 잘 몰랐는데 최근에 미국에 가서 유명한 교수님들의 연봉을 보면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적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학교 선생님이 된다든지 군인이 된다든지 목회자가 된다든지 이렇게 되는 경우에는 우리는 왜 차별대우하냐 그렇게 이야기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보람을 느끼면서 사는 사람들이 나라에 있을 때 그때 그 나라,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그것이 결국은 안전하고 올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 선생이 되라고 많이 제가 채근을 합니다. 그래서 어렵기는 한데 어려우니까 기회입니다. 쉬우면 너나 나나 다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간절히 기도해서 들어간 다음에는 직장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선교지이다 목회지이다 라는 사명을 가지고 온 마음을 다해서 학생들을 사랑하고 그 아이들을 굳게 붙들어 주면 지금도 그 아이들이 열렬하게 따릅니다. 여러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되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상들을 만드는 작업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돌이라든지 누구 깃발 들면 거기에 미친 듯이 따라가지 않습니까?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하나의 특징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용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신령한 입장에서 보면 그런 깊은 감화를 끼치면 아이들은 온 마음을 선생님께 줍니다. 그리고 따르는 것입니다. 솔직히 그렇게 마음이 선생님에게로 기울어진 아이들에게 종교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좋아 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선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에서 학교를 직접 하는 것 그 다음에 예수 믿고 돈 많은 장로님이 학교를 설립하는 것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누가 가르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결국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직업과 모든 역할들은 다양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 때문에 그런 직업에 매진하는 그것이 종교개혁가들이 생각했던 직업소명의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내가 공무원으로 살아간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내가 사업가로 살아간다고 하는 그런 자부심과 이런 것 들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믿음생활입니다. 그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연적으로는 우리의 마음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본성적으로 사람이 좋은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보탬이 되고 좋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공경하는 그 일에 있어서는 자연적으로 사람이 좋은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을 향해서 일치된 사랑의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자 달란트가 있어서 그 달란트를 따라서 우리를 쓰시지만 그렇게 쓰시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자연적으로 은사가 있는 사람이 악기를 연주한다면 잘 할 것입니다. 신앙이 별로 없고 음악을 잘하는 사람의 연주가 신앙이 깊고 피아노 쳐 보지 못한 사람의 연주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자연적인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자연적인 좋은 점 위에 신령한 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B. 연단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온전한 섬김으로 당신을 봉사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는 일을 하지만, 일을 통해서 일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일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바꾸어 가시면서 새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무슨 일을 맡든지 간에 거기에 대한 책임의식이 직장생활보다 책임의식이 떨어진다면 회계하여야 합니다. 저는 한 달에도 몇 번씩 이 사람들이 이런 서류를 가지고 와서 사장에게 결재를 맡으면 과연 직장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결재서류를 한 달에도 몇 번씩 도장을 찍습니다. 교회이니까 도장을 찍어 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강한 책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준 일이기 때문에 비록 교회에서는 녹을 먹지 않고 그리고 그 일을 자기가 하지 않는다고 해도 위협을 가하거나 손해를 끼칠 사람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섬기는 여러분이 이 만큼이라도 해 주는 것을 교회에서 고맙게 생각해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여러분은 신앙의 수를 한참 잘못 두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세상의 일과 교회의 일이 나누어져 보일지 모르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모두 한마음에서 흘러가는 일입니다. 보이는 교회와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고 충성스럽게 봉사할 수 없는 사람들이 회사나 직장에 가서는 아주 진실하게 봉사 한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은 결국은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화) 언젠가 교회 행정실을 지나가는데 여러해 전 일입니다. 누가 매직펜을 네모난 판대기 하나를 행정실에 써서 붙여 놓았습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5-6년 전입니다. 호치키스, 볼펜, 스카치테이프, 메모지 이런 것들을 행정실에서 빌려달라고 하지마시오 그리고 느낌표를 콱 찍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원들을 불러서 야단치지는 않았는데 이야기를 했습니다. 똑같은 팻말을 붙이는데 왜 그렇게 붙이냐? 사람들이 어차피 필요하니까 와서 빌려 달라고 하는데. 그 당시 사람들이 이천 명이나 넘는 사람이 와서 너나 할 것 없이 달라고 하면, 수천 명이 와서 그러면 일이 안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는 것은 너무 까칠하지 않느냐? 그래서 나라면 이렇게 하겠다. 호치키스, 볼펜, 연필, 칼, 메모지 등은 어디어디에 비치되어 있으니 거기에 가서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부탁하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똑같은 말인데 얼마나 좋습니까? 결국은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지나다니면서 그것을 보면서 마음에 불끈 솟아오르는 언어가 있었단다.” “그것이 무엇인데요. 목사님?” “내가 언제 빌려 달라고 그랬냐? 이런 마음이 들더라.” 빌려 달라는 사람만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다 보라고 하니까. 내가 언제 빌려 달라고 했나 지들한테. 그런 마음이 들더라.
생각을 항상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그것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결국은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이 섬김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교회의 일을 하면서 회장은 쉬울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직원이 3만 명 모여도 훨씬 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해!” 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해!” 그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얼마나 어렵습니까? 직장에서는 “해!” 그러면 됩니다. 화나면 “관둬!” 라고 하면 됩니다. “잘했어!” 그러면 돈을 더 주면 됩니다. 진급을 시켜주고. 그러면 됩니다. 그런데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아십니까? 굉장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연단되고 새로워 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이들까지 합해서 수천 명 모이는 교회가 굴러갈 때 여러분은 주일날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참 편하고 단순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일주일동안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예배만 간단히 드리고 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활할 수 있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봉사하고 희생해야 하지 오늘 여러분이 교회에서 받은 작은 인쇄물 하나, 밟은 카페트 발자국 하나 그리고 여러분이 앉아서 예배드리는 좌석 하나 그리고 편안하게 귀에 들리는 음성, 눈에 가득 차게 들어오는 시원한 화면 어느 하나를 위해서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수고와 땀이 알알이 엮어져서 여러분이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지금 제 마음속에 일주일 내내 기도는 했지만 마음의 근심 걱정이 많습니다. 이것을 전부 뜯고 보강 공사를 해야지 된다고 의뢰를 했는데 이렇게 두꺼운 600페이지짜리 세권으로 보고서가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중간 설명을 받았는데 장로님들이 의논을 시작하고 있지만 보통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끊임없는 섬김 속에서 우리들이 유익을 얻으면서 교회 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이 규칙대로 움직이지 않고 책임을 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설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그래서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일일 담임목사까지는 못하겠지만 일일 행정실장이나 관리실장도 한번 해 보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일이 많은가? 해도 해도 끝이 없이 먼지를 뒤집어써도 한없는 것이 일입니다. 규칙대로 정확하게 움직여도 너무너무 힘든데 여러분이 책임이 없이 일을 한다든지 나태하게 일을 한다든지 아니면 이렇게 일을 하는 것이 커다란 도움인지를 생각하라는 듯이 여러분이 적선하듯이 교회 일을 하면 마음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연단하십니다. 연단은 즐겁고 좋아서 계속 즐거운 상태가 계속 되는 것은 우리가 연단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극장 구경 가서 깔깔대고 웃으면서 영화관에서 연단 받았다고 이야기 하지 않고 고깃집에 가서 혁대를 풀고 실컷 먹으면서 기분 좋다고 하면서 생고기로 연단 받았다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연단이라는 것은 싫은 것입니다. 자기의 본성으로 기쁘지 않은 것 그런데 필요한 것 그래서 그것은 우리의 고난으로 다가오고 시련으로 다가오고 아픔으로 다가오고 때로는 상처로 다가 옵니다. 그런 끊임없는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은 바꿀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질그릇 같이 연약했던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만들어 주시는가 하면 굽고 어그러졌던 우리의 마음을 올바르게 만들어 주시고 포악하고 잔인했던 우리의 마음을 사랑의 마음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어려움을 만나거나 난관이 부딪힐 때 아주 쉽게 “그러면 제가 그만 두지요” 그런 사람들이 어디 가든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을 주신분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시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마지막에 주님 앞에 이렇게 일했습니다 라고 주님 앞에 서서 말해야 할 사람도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의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믿음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믿음이고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IV. 섬김으로 자기 마음을 앎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섬김으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도록 날마다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몰랐던 마음을 우리가 한 일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이 어떤지를 알게 되고 또 우리의 마음을 보면서 우리의 일을 알고 우리의 일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일을 보시면서 영광을 받으시는데 못 하실 것이 없으신 하나님에게 우리가 한 일이 무슨 그렇게 큰 감동이 되겠습니까? 문제는 그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보여 드렸던 우리의 마음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화) 지금은 은퇴하신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이 자기의 설교 속에서 언제 한번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도 할아버지에게 들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부잣집 어른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동안 오랫동안 자기 집에서 일했던 종들을 놓아 주기로 한 것입니다. 이제는 너희들도 그동안 많이 봉사했으니까 너희들도 자유롭게 가서 너희 집을 일구면서 살아라 하고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그랬더니 몇 명이 있었는지 지금 잊어 버렸는데 종들에게 마지막으로 정성스럽게 가느다란 새끼를 땋아 오너라 했더니 어떤 사람은 정성껏 탄탄하게 꽤 길게 짜 가지고 오고 어떤 사람은 평소에 하던 짓대로 설렁설렁 짜 가지고 짜다 말고 가지고 왔습니다. 어차피 주인이 몇 미터를 짜라고 지시 한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만하게 짜 가지고 오고 어떤 사람은 요만하게 짜 가지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돈 괘를 하나 가지고 와서 열더니 너희들이 가지고 온 세끼에 이 동전을 엮어 가지고 가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별로 감동이 되지 않습니까?
V. 결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좋은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가 금년에 우리 장로님들하고 목회자들에게 간절히 부탁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그동안 교회 열심히 운영하여 왔고 제법 기술도 많이 쌓였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앞서 가는 분야도 있습니다. 그것은 저도 인정을 합니다. 그리고 주위에서 칭찬도 듣습니다. 예를 들자면 경리 같은 것, 회계제도 같은 것은 칭찬을 받습니다. 새가족도 그렇고... 그런데 제가 목회자들에게 수련회 때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지 말자 그리고 올해 우리가 정말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모든 섬김에 우리의 기도의 눈물이 배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정신으로 돌아가자. 물론 잘 합니다. 잘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잘 하면 잘 하는 그 위에 우리들의 눈물의 기도를 보태어서 그래서 우리의 섬김 한올 한올에 우리의 진심이 배어 있게끔 그 기도의 눈물,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눈물들이 배어 있게 하자. 일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으니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주님을 사랑함으로 일을 하고 일을 하면서 우리도 변화 되어서 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예쁘고 사랑스러우며 또 우리 자신도 주님 보시기에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되도록,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3.죽음을 초월한 소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5:8-10)
녹취자: 김인철
I. 본문해설
고린도후서는 구약성경의 예레미야서라고 불리웁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 있다는 뜻입니다. 고난이 많게 되면 인간은 죽음에 대하여 자주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세상살이가 천국 같으면 천국을 생각하지 않고 세상살이가 지옥 같을 때 천국을 많이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이 4장에서는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여기에서 받는 이 고난은 장차 누리게 될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이야기 하면서 5장에서 죽음대신 부활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에게 죽음은 종착역이 아니라 거쳐 가는 곳입니다. "어디가세요?" "나 기차 타러가" "어디를 가시는데요?" 라고 하면 "부산 가요" 라고 이야기 하지 "광명역 가요" 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광명역은 부산을 가기 위해서 가는 과정일 뿐이기 때문에 "저 기차 타러 가요" "어디를 가시는데요?" 하면 부산으로 간다고 이야기 합니다. "어디 가세요?" "저 비행장에 나가요" "그래요 어디를 가시는데요?" "김포공항이 아니라 인천공항이요" 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미국으로 갑니다" 아니면 "영국으로 갑니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에게 있어서 사도뿐 아니라 성경 자체가 죽음은 완전한 거룩함으로 가는 한 과정이라고 신자의 경우에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가 여기에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이야기들이 1장에서도 나오고 4장에서도 나옵니다.
II. 생사를 넘어서게 하는 소원
A. 하늘나라를 사모함
그 생사를 넘어서게 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 소원이 무엇인가 하면 하늘나라에 대한 사모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의 담대함에 비밀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실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가야 할 나라는 하늘나라라는 그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담대하지 못한 것은 대부분 두려움 때문이고 두려움의 대부분은 집착입니다. 집착이 우리로 하여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원하지 않는 것을 떠맡게 될까봐 그렇게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성경을 보면 사도들이 하늘나라에 가서 쉬고 그리고 생명수가 흐르고 그리고 온갖 과일들이 있고 그런 쉼의 그림이 있기 때문에 사실은 그곳을 좋아했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을 넘어가 보면 이런 사실들이 분명해 집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도 사실은 두려워 떨고 숨어 다녔습니다. 그러다 사자 같이 강한 사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서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덧입혔기 때문에 담대해지고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인데 거기에는 확신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 확신적인 측면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는데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주님이 다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살아 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가 다시 사신 것이 사도들에게 왜 그렇게 커다란 담대함, 확신, 그다음에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결연함 같은 것을 줄 수 있었던 근거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과 똑같이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고 하는 소망 때문에 하늘나라를 그리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이 궁극적으로 바라고 간절히 원하는 것은 사실은 중간상태가 아니라 완전히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영혼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육체까지 완전히 덧입혀서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살아나게 하시는 그런 영광스러운 소망의 날들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늘나라에 대한 진정한 사모함이 사도에게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어렵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 하늘나라에 대한 사모함으로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은 모두들 이 땅에 코 박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만 생각이 많지 하늘나라에 대한 그리움이라든지 아니면 하늘나라에 대한 사모함 같은 것이 별로 없이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하늘나라가 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그리움이 되었던 것은 생명수가 흘러서도 아니고 과일이 있어서도 아니고 12개의 진주문이 있어서도 아니고 황금길 유리바다가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이 그곳에 계셨기 때문에 그 나라가 좋은 나라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이 자기 선배 목사님께 전화를 해서 요즘 지내시냐고 무엇을 하고 지내시냐고 하니까 예수님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그러세요?" 하니까 아니 이제 갈 날이 다가 왔는데 어느 날 덜컥 죽어서 주님을 만났는데 주님이 자기를 못 알아보고 자기도 주님을 잘 못 알아보면 무슨 망신이겠습니까? 그래서 열심히 공부 하다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알았을 때 죽어야지만 만나자 마자 내가 공부하던 그분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은 대부분의 소망을 이 땅에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골몰하고 애쓰지만 사실은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생각과 이 땅에 대한 생각이 두 날개처럼 균형을 이룰 때 올바르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너무 사랑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게 나타납니다. 자녀들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방식이 잘못된 사랑이기 때문에 사실은 너무나 사랑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항상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것과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한쪽으로 치우쳐서 이 세상은 모두 쓸모없는 인생이고 하늘나라만이 그리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예배드릴 때까지는 좋았는데 세상에 나아가는 것 자체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그렇게 패하고 돌아 올 것을 확신하면서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온전한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B. 주님이 계셔 좋은 나라
그래서 오늘 사도바울이 그 죽음을 초월하는 소원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고 부활에 대한 소망인데 그것은 결국 주님이 계셔서 좋은 나라 그곳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지 않습니까? 믿음도 성취되고 소망도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사랑은 영원하다. 그래서 그 사랑은 계속해서 지속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조금 차이가 나지 않겠습니까?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 아닐까요? 같은 자동차를 타고 길을 가는데 안개가 많이 내렸을 때 심하게 내리면 전에 우리 인천에 살 때 보면 김포 쪽에 안개가 내리는데 1미터 앞도 안 보입니다. 그러면 깜빡이가 안 보입니다. 깜빡이를 앞차가 켜고 가도 3미터만 벗어나면 안 보입니다. 할 수 없이 빵빵 누르면서 차들이 갑니다. 소리를 내면서 계속 클락션을 누르면서 그리고 천천히 갑니다.
그런 것이 이 지상에서의 삶이고 그래서 안개속의 주님을 가끔가끔 보면서 주님의 아름다우심 때문에 기뻐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면 하늘나라에서는 그런 안개 낀 그림자나 이런 것들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보면서 마주보는 것처럼 그래서 사도바울이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 옛날에는 동경 아니면 석경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희미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마주 대하며 보는 것처럼 주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하여 다 안다고 할 수 없겠지만 그런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방식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사랑하는 이 속에서 우러나오는 정동들은 똑같은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나 이 땅에서나... 다만 사랑에 있어서 고통과 슬픔의 요소들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매이고 사랑을 건설적으로 사랑한 적도 있지만 그 사랑이 오히려 올무가 되어서 분량 이상의 집착을 가져오고 자기 자신의 영혼에 해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방식은 달라도 그 본질은 똑같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던 사람들은 하늘나라가 매우 가본 곳처럼 익숙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바로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삶이 계속될 것이니까 말입니다.
III. 심판대 앞에 서는 그 날에
A. 홀로 서게 되는 그날에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 모두가 심판대 앞에 서는 날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다 라고 말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결국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혼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홀로 서게 되는 그날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그 길이 옳지 않은 길인 것 같아도 많은 사람하고 함께 걸어가면 이상하게 든든하고 양심의 가책도 줄어듭니다.
(예화) 수십 명이 서서 건널목 양쪽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혼자 건너는 것은 굉장히 얼굴이 뜨겁지만 여러 사람들이 막 건너갈 때에 슬쩍 건너가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습니다. 굉장히 좋습니다. 신호위반을 하고 교통위반을 해도 다른 차들이 위반하면 심리적으로 그렇게 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 같이 지키면 건너면서 굉장히 두렵습니다.
또 반대로 옳은 길을 걸어갈 때에도 여럿이 같이 가면 힘이 나고 확신이 더 하는데 옳은 길이라고 내가 생각을 하는데도 막상 가려고 나설 때 나 혼자밖에 없으면 두려움이 엄습하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은 마지막에 우리들이 주님 앞에 설 그때에는, 부활해서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때에는 무리들로 인해서 옳지 않은 것에 담대함이 생긴다든지 옳은 길인데 홀로 가기 때문에 두렵고 떨린다든지 그런 것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B. 몸으로 행한 것을 받음
다 반드시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그 몸으로 개개인으로써 그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을 누차 강조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아서 매일매일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늘 하던 일이니까 하나님 앞에 위선이나 허위, 꾸밈, 거짓 이런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은 진실한 것이 무섭지만 하나님 앞에서 늘 자신이 말씀에 비추어서 완전한 삶을 산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씀의 빛을 비추어서 하나님 이것을 제가 잘못했습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몰랐는데 오늘 말씀을 깨닫고 보니까 저에게 이런 나쁜 것이 있었습니다. 정말 너무나 오랫동안 저는 이것을 달고 다녔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삶속에서 일상화 된 사람들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도 그것이 늘 하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은혜가 깊어지게 되면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신비한 음성을 들려주시지 않아도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 신비한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이 너는 이런 사람이고 이런 것은 잘 했고 이런 것은 잘못했다라고 판단해 주실 때 에 신앙심이 깊으면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그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똑같은 권위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모두 각자 주님의 심판대 앞에 홀로 서게 될 때 그때 우리는 진실하고 꾸밈없이 자신을 보면서 살았다면 주님의 그 눈빛을 매일매일 성경 속에서, 설교 속에서 주님의 일을 하면서 의식했던 사람들에게는 그 눈빛이 새로운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과 꾸밈, 허위 그런 것들이 늘 일상화 되어 있어서 한 번도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주님을 불러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날은 얼마나 두렵고 두려운 날이 되겠습니까? 더욱이 주님 앞에 섰을 때에는 주님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 온 인생의 모든 날들이 한 번에 불현듯 밀려 와서 우리 눈에 모두 한 번에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직전까지 가 본 사람들은 거의 공통적인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죽기 직전에 일생에 일어났던 수많은 일생이 필름처럼 아주 짧은 시간에 스쳐 지나갑니다. 더 놀라운 것은 무엇인가 하면 죽음의 칼날 앞에 서게 되면 미운 사람도 없고 헤어지기에는 너무 목이 메는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가 죽음이라는 알고 직면 하게 되면 자기 인생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큰 섭리라고 생각 합니다.
(예화) 저는 의학은 잘 모르지만 한번 의사 선생님 설명을 듣는데 그랬습니다. 인간의 몸에서 엔돌핀이 나오는데 죽는 그 순간에 다량의 엔돌핀이 분출해 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는 그 순간에 남들이 보기에는 저렇게 아프다가 고통스럽게 죽는구나 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마지막 남은 엔돌핀을 쏟으셔서 막상 죽는 그 사람은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말 할 수 없는 기쁨 속에 죽도록 그렇게 만드신다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사실인지 모르지만 의사가 이야기 하시니까. 신뢰할 수 없는 것이 그 분이 죽어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있습니다. 한때 우리 청소년 지났을 때에 아이들이 목매는 놀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끈 같은 것으로 대들보에 매고 목을 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에 그렇게 쾌감을 준다고 합니다. 본드를 흡입한 것처럼 쾌감을 준다고 합니다. 그러다 어떤 아이들은 발판 같을 것을 놓고 하는데 어떤 아이들은 좀 더 깊은 경지에 들어가려다 결국은 죽는 아이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약물들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들이 걸어 온 모든 길을 한 번에 알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자기가 정말 혼자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제가 설교 하면서 그렇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영혼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시는데 그것을 못 받게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의 환경이나 심지어 우리의 죄도 아니고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직면하면서 하나나님 앞에 목마르게 매달리지 않는 갈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수시로 하나님 앞에 홀로 서 본 사람은 정말 얼마나 이 신앙의 길이 외로운 길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늘 신앙 안에서 함께 하는 형제들이 있고 자매들이 있고 그리고 동료들이 있고 함께하는 길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한분 앞에 자신이 섰다고 할 때에는 그 자리는 아내도 같이 서 줄 수 없고 남편도 같이 서 줄 수 없습니다. 각자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신앙의 세계에서 늘 느꼈던 사람들은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날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모자라고 부족하면서도 늘 의지하던 주님이 마지막 날 홀로 선 그 심판대 앞에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몸으로 행한 것을 우리들이 받을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주재권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행하실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얻고 은혜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들이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올려 드리는 모든 좋은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올려졌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심판도 구원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 심판이 신자와 불신자들에게는 각각 다른 의미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에게는 이것이 사망의 부활로 똑같이 부활하는데 한 사람들은 심판 당하기에 적합한 몸으로 다시 덧입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누리면서 영생하기에 적합한 몸으로 다시 덧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선악간의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라고 할 때 주님을 섬기지 않고 아무렇게나 살았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형벌이 내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그 동일한 심판대에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어떤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덧입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심판대이고 또 좁은 의미에서는 우리가 그 신비한 방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두 알 수 없을지라도 확실한 사실 하나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든지 주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 왔고 그리고 주님이 구원받은 우리에게 주신 소명은 당신과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시는 것이었는데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들은 살았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자신들이 살아 온 삶의 모든 발자취가 그날 주님 앞에서 모두 우리도 알고 주님도 알도록 드러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고 그리고 거기에서 뼈를 깎는 고통이나 커다란 심판은 없겠지만 그러나 아주 분명하게 주님 앞에 정말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더 큰 영광으로 주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 영광에 다소 덜 미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는 것까지는 우리들이 추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주님은 우리에게 많이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를 천국에서 지옥으로 던져 버리시지는 않으시겠지만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우리의 마음에 가장 충만한 기쁨이 가득차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매일매일의 삶을 부끄러움이 없이 주님을 섬기는 날로 우리의 생애에 기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위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만날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도 아니 될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우리들이 온전한 마음으로 나아가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이 우리 주님과 관계 된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주님을 의지하고 매일매일 살아가는 가운데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우리들이 주님을 섬기며 살아갔던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이 주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우리의 기쁨은 정말 크고 완전한 기쁨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차이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우리들이 주님을 잘 섬기고 이 땅에 살아가는 날 동안에 소원이 우리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 된다면 그날에 주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위로요 기쁨이 될 것이라는 것 그것은 우리들이 분명히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잠시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 우리 인생의 길이 나그네 같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속히 지나가는 것입니다.
(예화) 지난주에 누구에게 편지 한통을 받았습니다. 김남준 선생님께 하고 편지가 왔습니다. 저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는데 들여다보니까 총각 때 주일학교 가르쳤던 학생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가만히 햇수를 꼽아 보니까 그때가 25살 때였으니까 엄청난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몇 주 전의 일 같은데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33년 가까운 세월이 벌써 흘렀습니다. 가만히 헤아려 보니까 그 아이도 나이가 40대 후반이 되었을 것입니다. 같이 늙어 가는 처지입니다. 연락만 주시면 너무 보고 싶다고 달려오겠다고 하는데 세월이 이렇게 빨리 지나 가는구나.
지금은 우리들이 기력이 남아 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젊어서는 네가 원하는 대로 뛰어 다녔으나 하는 것처럼 우리가 아직 기력이 남아서 나 원하는 대로 다니고 있지만 그러나 그런 기력이 없어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그래도 주님을 부족하나마 끊임없이 섬기며 살았던 사람들은 언제든지 기쁘게 이 세상과 작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본향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니까 말입니다.
IV. 잠시 세상에 머무는 동안
그래서 여러분은 잠시 머무는 세상 동안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해서 살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살라고 보내신 것임을 깊이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무위도식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놀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이 당신을 얼마나 섬기다 왔느냐고 물으실 때 여러분이 무위도식 했으면 그 질문에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왜 놀아요? 할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눈만 뜨면 너무너무 할일이 많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보기에도 안타까운데 이 세상을 창조하신 주인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을 바라보실 때에는 얼마나 안타까우실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금년에는 절대 놀지 마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봉사하십시오. 그래서 지위가 높아지고 생활이 나아져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주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옛날에 카터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되고 나서는 달랐을 텐데 되기 전까지 그 대통령의 당선자가 되었는데도 주일학교에서 봉사하고 아이들 신발을 정리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V. 결 론: 무위도식하지 말라
그러니까 그런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때 그것이 정말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놀지 말고 뭐든지. 오늘도 교회를 이렇게 내려다보면서 정말 너무나 할일이 많구나... 저 복도에 있는 소파는 왜 저렇게 더러울까 누가 가져다 세척제로 깨끗하게 걸레질만 해줘도 깨끗할 텐데 오는 곳 가는 곳마다 발걸음 걸음마다 얼마나 일이 많은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주님이 아직 건강을 주시는 동안에,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동안에, 눈을 볼 수 있을 동안에, 들을 수 있는 동안에. 오늘도 아침에 열린 방송 뉴스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 할머니들 머리 하얗고 건강도 잃어버리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데 아이들이 가서 찬송을 불러 주면 그렇게 좋아 하실 수 없습니다. 누가 찾아가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아니면. 그런 사람들 찾아가서 충심으로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기쁨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렇게 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금년에 놀지 마시고 뭐든지 주님이 물어 보시면 언제나 근무 중이라고 말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여러분이 일 하기를 바랍니다.
4.큰 산의 봉우리 아닐지라도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롬16:12)
녹취자: 김인철
I. 본문해설
오늘 로마서 16장은 사실 15장으로 로마서가 끝나는데 16장은 부록처럼 붙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바울은 약15명이 넘어 2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그들의 안부를 전하기도 하고 또 그들에 관한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 다메섹으로 달려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넣으려고 하던 살기등등하던 사울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야말로 목회자인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대목입니다.
II. 단 한 번 등장한 사람: 버시
그런데 오늘 사도바울이 이모저모로 거론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이 16절에서 거론되는 버시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 사람은 단 한번만 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누구인지도 알 수 없고 또 이 사람이 어디에서 태어나서 무슨 사역을 해서 그렇게 교회에 유익을 끼쳤는지도 사실은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사용하실 때 큰 산 봉우리 같은 사람들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는 그런 커다란 봉우리들로 이어 온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금 읊어 볼까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나서 이제 그만 그만한 산들로 계속 내려오다가 모세라는 큰 인물이 구약에 나타나게 됩니다. 구약의 큰 봉우리가 둘이 있는데 모세라고 하는 봉우리하고 다윗이라는 봉우리입니다. 거기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사무엘이라는 꽤 높은 봉우리가 있고 그 사이사이를 작은 봉우리들이 채우는데 그 봉우리들이 모세의 산자락 아래 내려오면 여호수아를 비롯해 갈렙과 같은 봉우리들로 이어지고 달려 내려오면서 평지가 이어지다가 큰 봉우리가 나타나는데 그 봉우리는 앞으로 나타날 더 큰 봉우리의 예고편이었습니다. 그 봉우리가 바로 사무엘입니다. 그리고 정말 높은 다윗이라는 봉우리가 나타나고 거기에서 다시 낮아지기 시작하면서 작은 봉우리들로, 그래도 꽤 높은 산맥을 이루게 되는데 그 사이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이제 8세기의 선지자들 그리고 10세기 이후에 주전 8세기의 선지자들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는 별로 그렇게 높은 산이 없이 이어져 내려오게 됩니다. 그래도 몇 개의 봉우리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예레미야나 에스겔 그리고 이사야 같은 봉우리들이 나타나고 그러면서 점점 평지로 내려오는가 싶더니 그 다음에 신약에 와서 아주 큰 봉우리가 하나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그리고 그 봉우리는 이제 다시 나타날 봉우리의 예고편이고 그 봉우리는 사실은 봉우리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구약과 신약 전체를 휘감는 커다란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로 계속 달려 내려가다가 얼마 안가서 사도바울이라고 하는 다윗과 비견될 수 있는 높은 봉우리가 나타나고 그러면서 사도들로 이어지는 높은 봉우리들로 계속 되다가 속사도 시대에 내려오면서 좀 더 높이가 낮아지고 그 후 변증가들로 내려오면서 낮아지고 이러면서 달려가다가 이제 4세기 5세기경에 아주 뛰어난 기독교 역사에 봉우리가 나타나는데 그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역사의 봉우리들이 어어져 가고 그렇게 오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마르틴루터나 칼빈이라는 봉우리들이 나타나고. 더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계속해서 그런 봉우리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나타나게 됩니다.
지금 이야기를 쭉 읊었지만 몇몇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실은 그 몇 안 되는 봉우리에 해당된다고 여러분이 말하기에는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평촌에 살면서. 그래서 저는 항상 시골교회 목사라고 하는데 평평한 촌마을에서 그렇게 목회를 하는데 우리가 그런 높은 산과 같은 인물일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그렇게 산처럼 높은 인물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큰 봉우리 하나가 높게 서고 나면 그 다음에 높은 봉우리들은 굳이 높은 봉우리가 되려고 하지 않아도 그 큰 봉우리 어깨에만 붙어 있어도 사람들이 감히 바라 볼 수 없는 아주 높은 봉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높은 분으로부터 신앙을 배우고 거기에서 감화를 받게 되면 자기는 의도하지 않았어도 꽤 높은 봉우리가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교회의 역사에서 더 많은 봉우리들은 그렇게 산을 찌를 듯 구름을 뚫고 올라간 그런 봉우리들은 몇 안 됩니다. 그리고 정말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얕은 언덕 같은 무수한 봉우리라고 말할 수 없는 땅들이 이어지면서 기독교 역사의 산맥을 이루어 가는데 우리는 그렇게 흘러오는 거대한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감히 봉우리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그 산맥에 붙어 있으니 산의 한 줄기에 속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고 그런 점에서 비록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그 뜻이 높은 구름을 뚫고 올라간 봉우리와 같은 인물들의 그것과는 감히 비견될 수 없지만 낮아도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의 한 줄거리에서 태어나게 하신 뜻이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A. ‘버시’라는 이름: 페르시스
그런 점에서 이 버시라고 하는 이름은 사실은 그렇게 우리들이 모두 우러러 보는 하늘 높이 솟은 위대하고 높은 그런 봉우리 같은 인물이 아닙니다. 한번 딱 나타나고 사라지는 인물입니다. 그러면 이 버시가 무슨 뜻일까요? 옛날에 한번 찾아 보니까 아무 뜻도 없습니다. 이것이 희랍어 성경에 페르시스라고 나옵니다. 페르시스는 무엇인가 하면 페르시코스라고 하는 단어의 여성 명사입니다. 여성형입니다. 그래서 페르시코스는 무엇인가 했더니 그냥 페르시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 이름이, 버시라는 이름이 무엇인가 하면 페르시아 여자라는 뜻입니다. 진짜 페르시아 여자인지 아니면 자기 엄마가 페르시아를 워낙 좋아해서 붙인 이름인지 엄마가 시집을 온 것이 페르시아에서 왔기 때문에 이 아이는 피가 조금 섞였지만 고향 생각에 경상도 사람이 아이를 낳아서 문둥이라고 이름을 짓는 것처럼 그렇게 한번 지어 본 것인지 그것은 모릅니다. 누가 권위 있는 해석을 내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별 볼일 없는 여자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제대로 된 자기의 독특한 이름 하나 없이 그냥 경상도 여자, 전라도 총각 이렇게 불리었으니까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라면 이름을 그렇게 불렀겠습니까? 이름이 촌스러운데 높은 자리에 올라가니까 이름도 바꾸어 버립니다. 그리고 별로인 사람이 그 이름을 가지고 안 바꾸고 고집대로 가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됩니다. 예는 들지 않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자이건 남자이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페르시스라고 하는 이름은 보통명사로도 사용될 수 있는 페르시아 여자 그런 사람입니다.
B. 바울에게 기억된 이름
1. 많이 수고 한 사람
그런데 오늘 사도바울이 사랑하는 이라는 말을 붙이면서까지 애정이 넘치는 마음으로 버시의 이름을 부르니까 사실은 자기도 잘 모르는 페르시아 여자를 부르면서 그렇게 애정을 표현했을 리는 없고 이것이 결국은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정말 높게 하늘을 향하여 솟아 오른 산과 같이 교회를 움직인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 하나가 죽은들 교회 역사가 바뀌겠습니까? 살아 있는들 교회 역사가 바뀌겠습니까? 아마 커다란 호수에 물방울 하나 튄 것처럼 우리 한 사람 없어도 역사는 흘러 갈 것이고 그리고 호수는 여전히 물이 고여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단 한번 등장한 버시 이 사람의 사명은 산과 같이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이 사람의 소명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각각 우리를 당신의 쓰심에 합당하게 만드십니다. 하늘에 빛나는 별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찬란하게 빛나서 아름다운 별은 어두운 밤하늘과 덜 빛나는 무수한 별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밝게 빛날 때에 그 밝은 빛남이 아름다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찌 우리 모두를 금 그릇을 만드시겠으며 어찌 우리 모두를 아주 큰 그릇으로만 만드시겠습니까? 국을 담아 먹는 그릇은 넓적하고 커야 되고 물을 마시는 그릇은 동그랗고 길어야 하고 간장을 찍어 먹는 것은 작고 납작해야지만 제격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쓰심에 합당하게 만드셨으니 높은 산이 아닌들 우리가 스스로 한탄하고 불평할 이유가 없고 낮은 언덕과 같이 이름 없이 그 산맥 줄기에 붙어 달려오는 한 언덕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불평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삶의 가치는 그런 외향적인 크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로마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바울에게 버시가 어떻게 기억되었느냐 하면 곧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이 버시라는 페르시아의 여자가 어떻게 기억되었는가 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이 짧은 본문에 의하면 사도바울에게 이 버시라는 여자의 이름은 많이 수고한 사람으로 기억이 되었습니다. 본인에게는 섭섭한 이야기이지만 이 편지를 받은 드루배나나 드루보사가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조금 걱정이 됩니다. 필사자의 실수가 아니었다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거라 그리고 바로 그 다음에 주 안에서 똑같고 수고하고도 똑같은데 거기에 부사 하나가 붙었습니다. 많이 수고 했다 드루배나나 드루보사도 훌륭한 일꾼이었지만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는 버시라고 이름을 부르게 되면 바울의 마음속에 그리움처럼 남는 인상은 언제나 주님을 위해서 넘치도록 고생을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바울을 위해서 고생을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에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이름은 흔한 페르시아 여자라는 이름이었지만 그이 삶은 흔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안일한 것을 좋아하고 태만한 것을 좋아하고 자기의 편함을 위해서 힘든 것을 싫어하는 삶은 일반적인 삶이고 아주 보편적인 생활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위해서 온 힘을 다해서 수고하는 삶은 결코 보편적인 삶이 아닙니다.
(예화) 교인이 많이 모이면 일꾼이 많을 것 같지요? 절대 아닙니다. 오래전에 제가 7만 5천 명 정도 모이는 교회에 집회하러 갔습니다. 그곳에 가서 제가 일꾼들에게 제일 큰 고민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 보았더니 교사가 모자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인이 7만5천명이고 10명중 한사람만 봉사를 해도 교사가 7,500명이 되는데 왜 모자랍니까 라고 물었더니 아이들은 많이 데리고 와서 교회학교에 보내는데 교회학교에 와서 선생으로 봉사 하겠다는 사람은 희귀하기 때문에 언제나 일꾼이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깨닫는 사실은 주님을 믿는 사람은 많아도 다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고난도 받으려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만 그랬습니까?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가 핍박을 받고 고난을 많이 받을 때에 자기를 버려두고 간 사람들도 있었고 세상을 사랑해서 자기를 떠난 사람도 있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니 사도바울 주위에도 즐거울 때는 함께 사도바울과 즐거워했지만 고난이 올 때는 그 쓰디쓴 고통의 잔을 마시기 싫어서 세상으로 돌아가거나 사명을 꺾고 다시 제 갈 길로 가려고 했던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아마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는 이 버시가 많이 수고한 여자로 기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얼굴 예쁜 자매, 부잣집 자매, 돈 잘 쓰는 자매, 키 크고 성형수술 많이 한 자매 그렇게 기억에 남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학력도 알 수 없고 나이도 알 수 없지만 버시 페르시스라는 이름이 들려 올 때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는 화려했던 페르시아가 떠 오르는 것이 아니라 밤이나 낮이나 주님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 나도록 자기를 바쳐 희생하고 수고했던 버시의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주 안에서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주안에서라는 이 어구처럼 신비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주님과의 은혜로운 연합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 밖에서 일을 하면 일을 합니다. 잘 될 때에는 주안에서 일하는 사람이든지 주 밖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든지 표가 안 납니다. 그런데 주 밖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일을 하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뻗쳐오르는 혈기를 통해서 그 사람의 섬김이 예수 안에서의 섬김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이단의 교파에 속했다가 극적으로 그곳에서 나와서 복음으로 다시 돌아 온 어떤 사람이 저에게 직접 간증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자기도 한때는 눈이 멀어서 그 이단에 속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단을 전하고 또 상당한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같이 모여서 자신들이 거의 하나님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그랬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라고 의견을 냈습니다. 그랬더니 잠시 후에 자신들이 하나님 같은 사람이라고 알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성질을 내면서 피를 보아야지만 정신을 차리겠소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에 이 형제의 마음속에서는 확 하고 깨어나면서 그러면서 자신이 무엇인가 바르지 않은 길을 걸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 일을 하면 합니다. 왜냐하면 일이니까. 무엇이든 주위의 일이 일이지 불공입니까 염불입니까? 그것도 일입니다. 하라면 왜 못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항상 잘 되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도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항상 잘 되는 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안 될 때 그때 그 사람이 정말 예수 안에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인지 예수 밖에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욕설과 고성이 오가고 헐뜯고 비방하고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사람들을 모함하고 모욕하고 음해하고 하는 이런 일들은 어두움의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도 주 안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성도의 마음 안에 가득할 때 주님의 일을 잘 할 수 있을 때에는 감사의 찬송이 우러나오고 그 일이 잘 안될 때에는 마음속에서 눈물이 흐르고 그리고 나의 어떤 부족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일의 어려움이 생겼는지를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뉘우치고 돌이키고 회개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일꾼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면 자기 뜻대로 일이 잘 되어 나갈 때 그 모습은 그 사람의 진면목이 아닙니다. 일이 안 될 때 어려울 때 그를 돕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홀로 있을 때 그때 그 사람이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이면 이깁니다, 견딥니다, 참습니다, 인내합니다, 희생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드린 것 같이 우리가 무슨 일로 주님을 섬기든지 간에 주님의 명료한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성가대 밥 하는 사람들도 맨날 솥뚜껑을 열 때마다 주님의 그 물음이 쟁쟁하게 울려 퍼져야 하고 교회에서 쓰레질 하고 청소하는 사람들도 언제나 그런 음성이 울려 퍼져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마음속에서 주님 안에 있는 신앙이 주님을 섬기는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라고 하면 잘 안 되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순풍에 돛달듯이 그렇게 형통하게 가면 그것은 주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러면 세상에 못난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잘 하는데 당신을 그렇게 못 하셨어요? 늘 반대자들에게 에워 쌓이고 생명처럼 아꼈던 제자들에게 배신당하시고 버림받으시고 왜 그런 일들을 예수님이 당하셨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인생 속에 이 버시는 주 밖에서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수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예화) 그래서 목회자들을 만나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한 사람이 입을 열어서 자기 교회 자랑을 하면 그 다음 사람은 더 자랑하고 서로 경쟁하는 것 같다가 한 사람이 힘든 이야기 하면 그 다음사람은 더 힘든 이야기 더 힘든 이야기 하는데 그것이 꼭 무엇하고 똑같은가 하면 남자들이 군대 갔다 온 이야기 하는 것 하고 똑같습니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한 사람 이야기 끝나면 야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이야기를 하고 그 사람이 끝나면 그 다음사람이 그것은 군대도 아니지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다 한 사람이 너희들은 고생했구나 나는 병장 달고도 별처럼 다녔단다 하고 자기가 아주 군대에서 특별대우 받은 이야기를 하면 정색을 하고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별 둘처럼 살았어 헌병들이 나를 지나갈 때마다 경례를 했어. 당연하죠. 운전병이었으니까. 똑같습니다. 그런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한숨을 쉬면서 힘든 이야기를 하면 그러다 어느 한 사람이 목회가 다 그런 거지 뭘 하고 이야기를 하면 다들 그래 맞아 뭐 그렇게 엄청나게 신나는 일이 있으려고.
(찬양) 뉘게나 다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예화)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 여러분은 우리 주님의 마음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이 될까요? 예수님까지 기어 올라가지 않아도 목회자인 저의 마음에 또 사랑하는 동역자들의 마음에 여러분은 어떤 이름으로 기억이 될까요? 제가 전도사일 때 섬겼던 목사님이 그때 아마 연세가 지금의 저 보다 조금 더 드셨던 것 같습니다. 항상 옛날이야기를 잘 하셨습니다. “아무아무개” “예” “참 그 사람이 저를 많이 연단시켰습니다.” 그것은 나쁜 사람을 그렇게 돌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러던 사람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찾아가서 “아무개가 교회를 떠났습니다. 목사님 제가 한번 찾아가서 잘 권면해서 데리고 올까요?” 했더니 목사님이 “전도사님이 저 보고 사랑이 없다고 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그 사람이 가는 것이 정말 감사합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러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으로 기억에 남을까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기억에 남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려울 때가 오거나 힘들 때가 오거나 그러면 옛날 기억들이 떠오르고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짧은 기간이라도 저와 함께 이 버시처럼 많이 수고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아마 주님도 그런 마음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우리 주님께 어떤 사람으로 기억이 될까요? 별로 수고 아니한 사람, 수고 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 늘 교회에 부당을 끼치고 힘들게 했던 사람, 늘 회의 할 때마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었던 사람 그러나 자기 자신은 추호의 희생이 없었던 사람 이런 사람들로 우리의 이름이 기억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 일까요? 그런 이름으로 주님의 마음에 기억될 때까지 꾸역꾸역 살아야 했던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팍팍하고 버거운 인생 길 이었을까요?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화) 잠언에서 지혜자는 충성스러운 자는 주인에게 추수철에 한 사발 얼음 냉수와 같으니라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추수를 별로 해 보지 않으셨죠? 저는 직장 다닐 때 늘 자원해서 추수 봉사를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도시에서 편하게 살던 사람은 할 것이 아닙니다. 무지하게 힘이 듭니다. 줄로 서서 나란히 벼를 낫으로 베고 나가는데 이것은 꾀를 부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옆의 사람들이 계속 앞으로 전진 하니까... 그러니까 벼를 잡아당기면서 낫을 훌켜서 벼를 자르는데 하루 했는데 부드러운 손에 물집이 양손에 오른쪽 손은 낫을 들었기 때문에 왼손은 벼 잎사귀를 붙들었기 때문에 물집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햇빛이 쨍쨍 나는 날에 추수를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벼가 마르니까. 그때 목이 타 들어 가는 것 같을 때 얼음이 둥둥 뜬 한사발의 생수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디 고기나 갈비나 생선회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고기 먹다가 없으면 야채 먹을 수 있고 생선 먹다가 맛이 없으면 고기 먹을 수도 있는데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대신할 것이 없습니다.
그 얼마나 그림 같은 표현입니까? 충성스러운 자는 그 주인에게 추수철에 한 사발 얼음냉수와 같으니라. 오늘 아침에도 설교 준비를 마치고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비록 높은 산은 아니고 그리고 주님 앞에 위대한 인물은 못되어도 비록 높은 산은 아니고 위대한 인물은 아니어도 그저 있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은 없고 높은 봉우리 같은 인물은 아닐지라도 주님이 있으라 한 그곳에서 주님의 작을 뜻들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한 사발 얼음냉수와 같다면 그것이 주님의 마음에 얼마나 커다란 기쁨이 되겠습니까? 그것이 하나의 작은 시골 교회일수도 있고 작은 구역일수도 있고 쓰러져 가는 가정일 수도 있고 혹은 직장일 수도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이든지간에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수고를 많이 하는 사람들, 여름 추수철에 한 사발 얼음냉수와 같은 사람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2. 사랑 받은 사람
어찌 이 의미 깊은 본문의 뜻이 여기에서 멈추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사랑하는 버시라고 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보면 사랑 받은 사람이라고 수동태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버시는 열심히 많이 일하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난돌이 정을 맞는다고 예배 시작하고 왔다가 헌금 달랑 내고 축도하기 전에 도망가는 교인이 다른 교인들에게 싫어함을 받는 경우는 없습니다. 알아야 싫어하든지 좋아 하든지 할 것 아닙니까? 예배 시작하고 들어 왔다가 축도하기 전에 도망가는데 누가 그를 알고 미워하겠습니까? 대부분 미움을 받는 사람들은 그저 남보다 특별하게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할 때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저 와서 한구석에 앉아서 은혜 받을 때는 아무도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집사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됩니다. 그리고도 꾀를 피우고 자기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름에 어울리는 생활을 하지 않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발 벗고 열심히 주님을 섬기려고 하고 자신의 물질을 바쳐서 봉사하려고 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수종 들려고 애를 써 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미워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시기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경우도 있고 하나님의 일을 하자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진리를 위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면 그러면 욕을 먹는 것이 당연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전혀 욕을 먹을 필요가 없는데 너절한 신앙의 인격 때문에, 분명하지 않은 물질 문제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지혜 없음 때문에,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는 독단적인 행동 때문에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것은 사랑 받는 사람의 할 일이 아닙니다. 어찌 주님을 위해서 애를 쓰던 인물이 페르시아 여자 한 사람이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능력의 사람이었고 말씀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목이라도 내 놓을 만큼 하나님을 위해 동역하겠다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 버시는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성도들에게도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도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깊이 기억에 남았던 것입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이 한 교회에서 20년이 넘게 목회를 했다고 합니다. 시골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교회에서 목회를 했는데 아주 큰 교회에서 그 목사님을 삼고초려하여 자기네 교회 담임목사님으로 모셔 가겠다고 했습니다. 이 목사님이 기도를 해 보고 하나님이 그 길이 좋으시다면 내가 가겠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목사님이 가신다는 것을 당회에서도 그저 아쉽지만 허락을 해 주고 교회도 조용하더랍니다. 그래서 이제 이삿짐을 수레에 다 싣고 그 임지로 가는 그 날 사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온 교인들이 마당에 나와서 마지막 목사님을 배웅하는데 이제 교회 마당에서 인사하고 헤어지려고 했더니 앞에서는 소달구지가 이삿짐을 싣고 임지로 가고 목사님을 그 뒤를 따라 걸어가고, 심방 가방을 들고 가는데 온 교인들이 따라 오면서 울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쯤 갔을 때 이 목사님이 같이 울면서 그랬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성도들을 버리고 내가 무슨 영광을 얻겠다고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까 하고 생각을 바꾸고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종신하겠노라고 번복을 하고 그 교회에서 평생 목회를 하고 임종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위해 충직하게 살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사랑을 받는 것, 하나님께 사랑받기 위해 사람을 버리는 것도 아니요 사람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도 아닌 상태에서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며 주님을 섬기는 섬김의 길을 간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저는 직원과 교역자들에게 종종 말합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거라 그 대신 남들을 통솔하는 지도자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거라 매력이 있고 함께 밥이라도 먹고 싶은 사람이 되거라 라고 말합니다. 이 버시는 충성한다고 하면서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사람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자매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만이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사랑을 받고 지금 멀리서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바울에게서도 사랑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런 성도들이 되었으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C. 큰 봉우리는 아닐지라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찌 모두 몇 세기 기독교 역사에 한번 나올만한 큰 산봉우리 같은 인물이겠습니까?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큰 봉우리가 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보탬을 줍니까? 하나님이 쓰시고 싶어서 어떤 사람은 높은 산처럼, 어떤 사람은 높은 봉우리처럼, 어떤 사람은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앝은 언덕처럼 사용하십니다. 그것은 주님의 주권이고 우리는 어떤 일로 주님을 섬기고 얼마나 주님을 봉사하든지 간에 마음속에서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 주 안에서 많이 수고 하였구나 내가 정말 안일했었구나 너의 수고를 내가 안다 그렇게 인정받을 수 있다면 진리를 훼손하지 않고 인간들에게 사랑을 받고 그리고 또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우리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게 하시고 싶어 했던 그 삶이 아닐까요?
III. 결 론
우리의 삶이 하찮은 것 같고 우리가 주님 앞에 살아가는 인생이 한줄기 희미한 그림자와 같이 느껴질 때마다 버시를 기억합시다. 페르시스라는 이름 같지 않은 희미한 이름을 가지고도 성경에 올라 주님의 마음에 사도바울의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 이름이 되는 것처럼 우리 비록 이름 없고 빛도 없이 섬기고 아무나 오를 수 없는 큰 봉우리 같지 아니하다 할지라도 이렇게 주님의 마음에 기억된다면 주님이 우리를 불러 주신 구원의 부름에 어찌 누가 되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이런 아름다운 작은 섬김의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위기를 견디게 하는 믿음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0-31)
녹취자: 김인철
I. 본문해설
오늘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의 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영광스러운 전망을 사도바울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이유는 고린도 교회에서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부인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눈에 보이고 현재 사는 이 세상이 전부 이겠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얼마나 세속적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복음이 아니다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이렇게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애쓰는 사도바울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번 가면 안 오는 세상인데 그냥 먹고 마시면 끝나는 것을 이것을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안타깝게 복음을 전하고 몸부림치겠느냐 이것은 바로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펼쳤습니다.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죽으셨으며 부활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것은 또 무엇이냐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이야기 하다가 이제 사도바울이 사도바울 서신에서 유명한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는 그 유명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자신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에 그렇게 복음을 전했을 때에 이 사람들이 감격하며 십자가 복음 앞에 엎드려졌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바울이 전해준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고 세속주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사도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편당을 만들고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무리들이 수다히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II. 위기를 피할 수 없는 섬김
사도바울이 이렇게 고린도 교회를 혼내는 편지를 쓰게 된 것도 결국은 사역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능력이 많으면 하나님의 일을 쉽게 할 것 같아도 절대 그런 법이 없습니다. 능력이 많으면 하나님이 능력에 맞게 큰 일을 맡기셔서 거기에서도 많은 고난을 당하게 만드십니다. 적으면 적은대로 고난을 크면 큰대로 고난을 당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섬김이라고 하는 것은 위기와 어려움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남들 섬기는 것을 보면 폼도 나고 남들 섬기는 것을 옆에서 보면 낭만적으로 보이고 나도 저런 일을 섬기면 참 멋있겠다 그렇지만 실제 들어가서 그 일로 섬겨 보면 거기에는 자신을 다 바쳐서 헌신해 본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가슴앓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슴앓이가 없다면 그것이 어떻게 섬기는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화) 제가 이번에 가게 된 또 하나의 계기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목사님 한분이 600명 정도 목회를 하고 있는 제가 보기에는 아주 목회자로서 건실하게 목회를 하고 있는 분입니다. 조선족이신데. 책을 읽고 은혜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오셨다고 합니다. 오셔서 예배에 참석을 하셨답니다. 하여튼 주일날 예배를 여기에서 드렸는데 목사가 되고 나서는 가장 감격적인 예배를 드렸답니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자기는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그렇게 은혜를 받았는데 목사가 된 다음에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은혜 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간곡한 편지를 썼습니다. 자기네 지역에 와서 말씀을 한번 전해 달라는 것 이었습니다. 그것이 작년 1월의 일 이었는데 도저히 달력을 놓고 들여다보니까 갈 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못 간다고 하다가 그리고 또 동생 되는 분이 찾아와서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뭐라고. 그래서 내년에나 봅시다 했는데 내년이 그렇게 금방 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약속을 했으니까 갔습니다. 가서 많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일꾼들하고 그곳 사역자들을 놓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분이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떼를 맡겨주시고 교회를 맡겨 주셨는데 정말 잘하고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원래 일 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자기 혼자 하다 보면 이것이 정말 잘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진짜 하나님을 섬겼던 불꽃같이 섬겼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만나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는데 밤에 한숨도 못 잤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하나님은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로서 교회가 정말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는데 그런데 주님을 간절히 원하시지만 우리가 간절히 원하지를 않습니다. 위기를 피하고 힘든 것을 피해 가고 편안한 것을 택하고 좀 더 자자 좀 더 눕자 손을 모으고 좀 더 졸자 이렇게 하는 동안에 타협하고 뒤로 물러서서 주님의 일이 병들게 되어 간다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다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을 섬길 때 어려움이 없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일이 아니고 세상의 사람의 일입니다. 주님은 가장 영광스러워 보이는 면류관과 같은 일 속에도 십자가를 숨겨 놓으셨습니다. 가시와 채찍질로 뒤범벅이 된 피 같은 주님의 고난이 가득 찬 사역 속에도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Without cross, no crown’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습니다. 오늘 교회가 세속화 되면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뭇 잊혀지는 것이 정말 복음의 진수를 이야기 하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죽도록 충성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요즘 거의 못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30년전 만해도 교회의 구호였습니다. “죽도록 충성하자!” 이제는 임직식 때나 주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월이 흘러가도 복음이 불변한 것처럼 우리는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뜻인가 하면 편안하고 좋은 길을 가다가 어느 한 순간에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죽도록 충성하는 그것은 실제로 매일매일 죽는 삶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화)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 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일을 하는데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여름철인데 소방관이 시원한 물을 뿜으면서 다녔다고 합니다. 저것 하면 정말 좋겠다 해서 그것을 했더니 겨울이 왔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없어 졌지만 옛날에 동네마다 소방 타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9층 높이 같이 굴뚝 같이 생긴 것이었는데 그것이 동네에서 제일 높았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높은 빌딩이 많아서 의미가 없습니다. 거기에 올라가서 겨울에 있으니 난방도 없는 때에 온 바람이 들어오니까 덜덜 떨리는데 저기에 보니까 세탁소가 있는 것입니다. 세탁소에 다리미를 돌리는 사람이 너무 편해 보이는 것입니다. 김을 씩씩 뿜으면서 스팀다리미로 다림질을 하는 것이. 당장 소방서를 때려치우고 그 다음에 취직을 했는데 여름이 왔습니다. 이번에는 쪄서 죽겠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주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가 주님의 일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뜻을 세우고 일을 해도 사람들 때문에 속상하지 않는 사람들은 돈이 없고 그리고 돈 걱정 안 하는 사람은 사람들 때문에 속을 쎃고 사람 걱정도 없고 돈 걱정 안하는 사람은 자기 건강이 나빠서 속을 끓이고 온 어려움들의 연속 속에서 파도를 헤치듯이 그렇게 자기의 일들에 뜻을 세우면 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량 같이 주님을 섬기는 그런 직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도 그런 직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도 열심히 주님을 찬송하고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을 위해 기도해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공부해야 합니다. 천국에 가서도...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매일매일 배워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남들이 볼 때에 다 그렇지 거기에는 무엇이든 고난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도 그것을 잘 이겨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감격해서 직분을 맡고 2-3년이 지나기 전에 집어 치워 버리고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차고 그렇지 않으면 미끄러져서 신앙이고 뭐고 다 팽겨쳐 버리는 그런 망나니 같은 삶은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III. 날마다 죽는 믿음
오늘 사도바울이 그 비밀을 말합니다. 내가 단언 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했습니다. 날마다 죽는 믿음이기 때문에 그 많은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섬김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예화) 우리나라에서는 석유를 시추하는 시추선들을 만듭니다. 굉장히 비싼 배입니다. 배 한척에 거의 1조 5천억, 2조 5천억씩 한다는 그런 배입니다. 어느 정도인가 했더니 9천 톤 정도 하는 배인데 길이가 3,4백 미터 되는 큰 배입니다. 그런데 그 배가 바다 위에 떠서 시추하는 드릴이 내려가는데 11km 바다 속까지 굴착을 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거기에 쇳덩어리를 집어넣어서 11km 바다 속을 판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17m 파도가 와도 50cm이상 흔들리지 않고 판다고 합니다. 여러분 파도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면 큰 배고 작은 배이고 의미가 없습니다. 파도가 치면 모두 가랑잎처럼 출렁거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17m이상 파는데도 그 배가 흔들리지 않고 그렇게 11km까지 드릴을 넣어서. 거기에서 배가 출렁 거리면 드릴이 다 부러질 텐데 어떻게 그것을 피할 수 있느냐 했더니 그것이 참 신기 했습니다. 물에 잠긴 부분에 수십 개의 작은 조정 장치를 달아서 파도가 이렇게 치면 이쪽에 있는 모터가 돌아가면서 배를 올립니다. 이쪽은 끄고 또 배가 이렇게 한쪽이 기울면 반대편에 있는 모터가 돌아가서 배를 올리고 반대쪽 모터를 꺼서 배를 낮추고 이렇게 이것을 정밀하게 컴퓨터로 조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7m 파도 위에서 배가 가만히 서 있는데 우리가 볼 때는 저것이 조용히 있구나 하는데 밑에서는 수많은 기계들이 정신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사실인지는 몰라도 백조가 물에 가만히 떠 있는 것 같아도 발에서는 불이 난다도 합니다. 미친 듯이 물갈퀴 짓을 해서 물에 떠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저 사람 편안하게 목회도 하고 편안하게 주의 일도 하는구나 나도 저렇게 쉬운 일을 맡겨 주시지.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 밖에서는 폼이 나 보여도 물속에서는 백조의 물갈퀴가 너덜거리도록 미친듯이 발바닥에 불이 나서 그렇게 우아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의 원리입니다. 그 물갈퀴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오늘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이렇게 못되게 굴어서 사도바울에게 혼이 나지만 이 편지를 들어 이 교회를 책망하기 전에 틀림없이 사도바울은 주님께 용서를 비는 기도를 올렸을 것입니다. 내 속으로 난 세끼들인데 이 모양밖에 안 되어서 예수님의 교회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것이 모두 종의 죄입니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빌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타고 난 훌륭한 믿음 주님의 일에 타고 날 때부터 은사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날마다 죽노라 라는 고백 속에서 그래서 자기를 버려서 온전히 주님을 존귀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 때문에 아직까지도 주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이리 날뛰고 저리 날뛰고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봉사 안 하고 게으름 피우고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을 가진 인간들이 있어도 교회가 무너지지 않고 쓰러지지 않으면서 운영되고 오늘도 하나님이 회심하는 영혼들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하나님의 교회 한 모퉁이 맡겨 주신 일들을 감당하면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라고 했습니다.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이것이 무슨 뜻일까 궁금합니다. 표현이 아주 애매합니다.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너희가 비록 잠시 복음에서 미끄러져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부끄럽게 하였지만 그러나 사도바울에게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여전히 복음 안에서 배 아파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화가 나도 사도바울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사도바울은 언젠가 이 교회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자랑하던 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내가 너희들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런 자랑을 두고 내가 단언을 한다,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너희들을 정말 사랑하는데 그리고 내가 너희들을 정말 귀하게 생각하는데 그 모든 것들을 두고 내가 너희에게 정말 단언하여 말한다는 뜻도 되고 또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이런 의미도 됩니다. 지금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어떤 문제를 일으켰습니까? 돈 많다고 자랑을 하면서 서로 부한 것 가지고 물질 사랑, 성찬의 문제도 나옵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가 찢어지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 부한 사람. 그렇게 해서 너희들이 서로 자랑하고 또 지식이 많다고 자랑을 하고 은사 가지고 자랑을 하고 하는데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 그러면 너희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오! 사도바울이 우리보다 돈이 더 많데” “사도바울이 우리보다 더 은사를 많이 받았구만” “사도바울이 우리보다 아는 것이 많데”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나의 자랑은 다른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매일 죽는 것이다. 너희들은 그런 것 없지? 나는 매일 죽는다. 단언 하노니 나는 매일 죽는다. 사도가 능력이 모자랐습니까? 지식이 모자랐습니까? 은사가 부족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함량미달이었습니까?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과 그의 이름으로 하여금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충성스럽게 주님의 일을 섬기면서 살도록 만들어 주었던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IV. 결론: 바른 싸움을..
작은 일이라도 주님의 일을 맡아서 섬기다가 골치 아파지고 힘들어 지면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잘 나가는 것 그것이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편안 합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옆에 나타나면 “자기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이 나한테 시비나 걸고 매일 비난이나 해! 이런 경우 없는 놈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원래 그런 것인데 그동안에 특별한 은혜로 편안하게 지냈다 이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냥 원래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일 년에 한 번씩 죽는다고 말하지 않고 임직식 때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매일매일 죽어야 할 일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죽으면서 그의 신앙과 영혼이 강건하여져서 그래서 세상에 있는 사람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날마다 주님 의지 하면서 그렇게 살아 갈 수 있는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날마다 주님의 사명을 맡은 그 자리에서 물러가지 말고 아플 때 주님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힘들 때 나같은 인간을 다루시기 위해서 주님이 얼마나 피곤하셨을까 생각하면서 잘 인내한다면 주님이 사명을 마치는 그 날에 여러분은 일을 했지만 주님은 여러분을 데리고 일 하셔서 여러분을 예수 닮게 만드실 것입니다. 정말 오늘날은 정말 충성스러운 사람들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말 쉽지 않습니다. 정말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하나님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함께 해 주십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예화) 이번에도 갔는데 그 목사님이 자기네 교회 자랑을 하면서 은혜롭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보니까 땅이 우리교회 넓이 하고 똑같은 땅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도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장만을 했습니까 했더니 저 구석에 있었는데 기가 막힌 땅이 있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살 돈은 없고 성도가 200명이 될 때인데 하나님 우리는 돈도 없는데 저 땅 꼭 주십시오. 저곳에 교회를 짓고 영혼들을 전도하겠습니다. 하고 눈물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봐도 나올 기미가 안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어느 목사님이 그곳에 다니러 왔다고 해서 그래서 한번 만나서 말씀을 전하게 하고 자기네 교회 계획을 보여 주면서 그분 마음에는 이분이 좀 도와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얼마냐 했다 합니다. 일억육천만 원쯤 달란다고 했더니 그 교회도 그렇게 큰 교회가 아니니까 “어휴 힘들겠구먼!” 하고 가시더랍니다. 그러더니 간지 몇 주 되었나 한 달도 안 되었는데 연락이 오더니 돈 보낸다 그러더랍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했더니 “통장으로 일억육천만 원 보내니까 그 땅 사서 교회 하십시오.” 하고 돈을 보냈다고 합니다. 장로님들은 그렇게 돈을 보냈으니까 이 교회가 마치 자기들이 세운 자기교회처럼 생각이 되어 가지고 개인 경비를 들여 불이 나게 그 교회에 와서 교회를 언제 지을 것이냐, 교인은 얼마 모이냐, 재정보고 해라, 선교 보고 해라 하더랍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담임목사님이 들어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이제 이 목사님이 들어갔더니 당회에 모두를 모아 놓고 그러더랍니다. “우리가 바다 건너 불쌍한 사람들이 신앙생활 하는 것 보면서 헌금할 때 언제 사람을 보고 했냐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헌금을 한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이제 와서 땅을 좀 사 주었다고 교회를 어떻게 경영하냐, 교회돈은 혼자 갖는 것이 아니냐 전도는 열심히 하냐 그렇게 조사를 한다면 그것은 정말 자본주의의 거친 태도이다 이 시간부로 그대들은 그 교회에 가지도 말고 오지도 말고 너희는 우리교회에 편지도 하지 말고 목회를 어떻게 한다고 말하지도 말고 하나님 한분 앞에서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해라 이상 끝” 그리고 흩어 졌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자기는 평생 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꿈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당신을 위해서 죽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무릎을 꿇을 때 마음이 약해지십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이 작은 일을 맡겨 주면 봉사 하면서 일은 조금 하고 말은 왜 그렇게 많습니까? 그렇게 쉴 사이 없이 많이 쏟아 놓는 말을 무릎 꿇고 눈 감고 했으면 아마 이야기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기도는 조금 하고 말은 되게 많습니다. 대표기도 나와서 시간 잡아먹고 길게 기도 하는 사람들 공통점은 개인기도 별로 안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때 한번 한을 품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하도 대표기도를 오래 하니까 뒤에서 바지를 확 잡아 당겼다고 합니다. 10분이 지났는데 기도가 안 끝나서 바지를 확 잡아 당겼더니 목사님 손목을 딱 때리고 10분을 더 기도 하더랍니다. 그렇게 할 말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기가 안 죽으려고 하니까 문제이지 나는 매일 죽노라 하는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이 생각지도 못하는 일을 주십니다. 기적 같은 은혜를 주십니다. 여기 이렇게 바닥에 앉아 예배를 드리니까 저는 정말 옛날 생각이 납니다. 이 교회당을 살 때 40억을 달라고 하는데 통장에 1,500만원이 있었습니다. 계약금을 가지고 오라는데 몇천만 원 가지고 가면 되냐고 했더니 3억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3억이 어디 있습니까? 간절히 하나님 앞에 정말 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40억이나 되는 땅을 계약금 가져다주고 2억 가져다주었더니 이 할아버지가 통장하고 인감도장하고 다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더니 다 넘겨주면서 이것 그냥 명의 넘겨 가고 이것 가지고 어떻게 대출을 받든지 어떻게 해서 갚으라고. 교회가 떼어 먹겠냐고. 저는 목사라도 이 교회를 다른 교회에 팔아도 저는 그렇게는 안 합니다. 그것이 법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도장 받아서 명의 옮겨 버리고 우리는 그런 것 없다고 하면 그만인데. 팔아 버려도 그만이고. 법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의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지도자로 그렇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갔다 와서 재직 몇 사람이 눈물을 글썽이며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상상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40억짜리를 돈 3억 주고 그 다음에 2억을 중도금으로 주고. 2억짜리 중도금이 어디 있습니까? 10억은 줘야 하는데 하도 없으니까 법적으로 중도금을 주면 계약을 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알고 수를 써서. 그것 무슨 2억을 받느냐고 나중에 한꺼번에 주면 되지 했는데 그래도 이것은 받으셔야 합니다 하고. 저기 빌딩을 살 때도 그랬습니다. 1억 중도금으로 주었습니다. 이것 받으셔야 된다고 했더니 돈을 마련할 대책은 있습니까 해서 처음에는 자존심을 세우느라 “예 있습니다.” “있어요?” 물어 볼수록 목소리가 계속 작아집니다. 주머니에서 도장을 꺼내 이것 내 인감도장이니까 가지고 가서 교회 앞으로 명의이전 하시고 이것을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대출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갚으세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목사님들 만나서 이야기 해 보면 그것은 기적이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디 끝전을 안 주었는데 끝전 받고도 그 다음날 가서 명의이전을 해 주는 것이지 어디 끝전도 안 주었는데 40억짜리를 겨우 돈 3억 받고 그것을 가져가라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정말 하나님 앞에 매달리니까
(찬양)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그런데 조금만 힘들면 우리는 그만 둡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의 역사를 못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5년, 10년 섬겼는데도 간증거리가 별로 없습니다. 그냥 교회에서 돈 받아다가 자기 할 일 하고 굴러 가는대로 굴러 갔을 뿐이니까 애달프게 마음을 찢으면서 기도 한 것도 없고 자기의 혈을 팔아서 주님 섬긴 것도 별로 없으니까 기적도 없고 그냥 상식선에서 움직인 것입니다. 간증이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원래 간증이라는 것이 자기를 다 버릴 때 일어나는 기적을 보면서 거거에서 간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맙시다. 지금은 여러분 돈 많은 사람이 대접 받고 지위가 높아야지 어디서 기죽지 않고 얼굴이 이뻐야지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만 마지막 이 세상의 덧없는 인생살이가 걷히고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주님을 위해서 온 몸이 상처 난 사람들 마음에 피멍이 들었던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이 됩시다.
6.희생과 덕으로 섬김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롬16:3-4)
녹취자: 김인철
I. 본문해설
사실 로마서는 15장이 끝입니다. 16장이 부록처럼 덧붙여 있는데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그들이 안부를 전하거나 또 그들에게 안부를 묻도록 성도들과 교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여기에 브리스가와 아굴라 라는 사람이 문안 인사에 등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있는데 그들에게 문안을 하라고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섬김의 특징을 사도바울이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희생과 덕으로 섬긴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희생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도바울 자기를 위해서 그 두 사람이 목이라도 내어 놓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밖에서 사도바울에게 충성했던 것이 아니라 오늘 보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도바울을 섬기되 목숨을 내어 놓을 정도로까지 사도바울을 사랑하며 섬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 편지를 쓰기 여러해 전 사도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활동을 할 때 만난 사람들이었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여 사도바울의 청중이 되었을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의 동역자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큰 폭동을 만나서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는데 주석가들은 아마도 이 에베소서에서 폭동을 당해서 사도바울이 죽을 뻔 할 때에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보호에 힘입어서 구출을 받은 사건들을 두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닐까 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서는 이제 이 고생을 회고하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생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이러한 고생속에 있을 때에 사도바울이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도움을 받은 것 같습니다.
II. 브리스가와 아굴라
A. 목숨을 내어 놓은 사람
이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하나님 교회의 중요한 일꾼들이었는데 목숨을 내어 놓을 정도의 굳센 신앙으로 바울과 동역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이 관용구처럼 늘 이야기하니까 목숨을 내어 놓는다는 것이 쉬운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여러분 그 목숨을 내어 놓는다고 하는 것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죽은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살았고 그래서 사도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생의 환란과 시련이 많이 오고 세상에 살고 싶지 않을 때 한번 죽는 것은 우리 모두 꿈꾸어 보는 일이고 또 마음을 먹으면 실제로 죽을 수도 있으니까 사람들이 자살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죽을 정신으로 사는 것은 살 정신으로 죽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이익에 밝고 정말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셋째주에 투표를 한다고 하는데 미리 이야기를 해 봐야 자꾸 잊어 버릴 테니까 셋째주에는 이 설교를 중단하고 어떤 일꾼들을 뽑을까 설교하고 그리고 투표를 하려고 합니다. 정말 드뭅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들은 정말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만 직분에 합당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대접 받기를 좋아하고 희생하기를 싫어하는 것은 오늘의 일 만이 아니라 사람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있었던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능력이 있는 전도자였고 목회자였고 신학자였고 선교사였고 했으니까 아마 사도바울을 존경하며 따르는 사람도 구름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아주 중요한 사람으로 기록이 되었고 오죽했으면 나의 양떼들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당당하게 나의 동역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의 동지였다 라는 것입니다. 참된 양떼로서 바울에게 목양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동역자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동역자가 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먹고 가르침을 받으면서 훌륭한 목양관계를 이루는 양떼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우리 성도들을 언제까지나 세월이 많이 흘러도 한강 풀밭에서 풀이나 뜯고 그리고 어슬렁 거리면서 다니면서 한가로운 삶을 사는 양으로만 그렇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말씀의 유익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잘 자란 후에는 우리들이 용사와 같이 하나님의 일에 동역하는 일꾼들이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양떼이면서 양떼를 능가하는 사도바울의 동역자가 되었고 자신의 목회자가 위기에 처하여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이게 되자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깊이깊이 아로새겨 남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일생동안을 한 교회에서 살아도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인상을 남겨 놓고 죽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한 사람이 이런저런 인상을 남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인상이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지지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이러한 특징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잘 새겨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인상들을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사람들에게 남겨 놓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월이 많이 흘렀고 여러 해동안 함께 교회생활을 했는데 성도들에게 남긴 인상이라고는 말만 많은 사람이라는 인상 이외의 아무것도 남기지 못합니다. 사실 그 사람이 말만 했겠습니까? 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만 많은 인상을 남기게 된 것은 그의 인격과 삶의 대표적인 특징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지워지지 않고 어떤 인상이 사람들에게 또렷하게 남았습니다. 늘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남았습니다. 기도만 했겠습니까? 성경도 읽었을 것입니다. 기도만 했겠습니까? 교회 봉사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이런 인상을 남겨 놓기도 합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이라는 인상 말입니다. 기도하는 모습도 잘 안 떠오르고 또 열심히 성경을 공부한 그림도 떠오르지만 그러나 누구 했을 때 마음에 남는 인상은 충성스러운 생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나 칭찬을 받으나 흔들리지 않고 주님이 세워주신 그곳에서 자기의 할 일을 묵묵히 하면서 살던 충성스러운 사람이라는 인상이 남지 않겠습니까? 바람직한 인상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은 충성스럽다는 인상, 열렬한 기도의 인상, 기도의 사람이라는 인상, 헌신적이라는 인상 그런 것 하나도 안 남고 자기의 이익에 밝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겨 놓을 수 있습니다. 돈에 인색하고 사람들에게 얻어먹기는 해도 밥 한번 사지 않던 구두쇠였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오래오래 남겨 놓을 수 있습니다. 그 인상이 정확합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만 살았겠습니까? 베풀 때도 있었고 기도는 안했겠습니까? 말씀의 은혜를 받을 때도 있었고 교회 봉사는 안했겠습니까?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것이 인색함이었기 때문에 세월이 많이 지나도 사람들 속에 그런 부정적인 인상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 속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불멸의 기억의 흔적을 남겨 놓았으니 희생하는 삶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을 위해서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을 정도의 깊은 헌신을 이 사람이 했다면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전혀 희생하지 않고 이용만 하다가 사도바울을 향해서만 이렇게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는 헌신을 맹세했겠습니까? 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본성에서 흘 나오고 그 본성은 자신도 숨길 수 없는 마음과 정신의 경향이고 그것으로서 행동이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목회자에게 그리고 모든 성도들에게 보다 더 귀하게는 우리 하나님 께 여러분은 희생한 사람으로서 기억이 되고 있습니까? 언제나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고 그래서 남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했던 사람, 자신의 이익과 교회의 유익이 충돌을 할 때 언제나 자신이 덕을 입기 보다는 교회의 유익을 끼치도록 그렇게 주님을 섬긴 사람으로 성도와 목회자의 마음속에 기억으로 남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희생하며 섬기는 사람들은 점점 적어집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가 그렇게 신앙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는 이런 것을 비인간적이라고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자기의 목이라도 내놓을 것처럼 그렇게 헌신하는 모든 사람들을 찾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렇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주님이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B. 모든 교회에 덕을 끼침
뿐만 아니라 이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모든 교회에 덕을 끼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이 사람들을 향한 고마움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자신의 선교사역에 있어서 죽을 고비를 당했을때에 목이라도 내놓을 모양으로 자기를 보호해 준 이 사람들이 언제나 생각이 났습니다. 사도바울이 죽는 것이 두려워서 이 사람들이 이렇게 감사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도 충분히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보호해주어 자기의 목숨까지 내놓으려했던 이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 이렇게 내 목회자, 내 교회, 내 가정, 내 사역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일에 있어서 무관심하거나 배타적이기가 일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도바울과 섬기는 사역위에 자기의 목까지 내놓을 마음이 있고 희생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이러한 자신의 아집에 갖힌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사람들에게 감사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이 세운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단지 사도바울을 보호해준 사건 하나 때문에 이방인의 모든 교회가 그들에게 감사한 것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삶이 수많은 교회에 끊임없이 덕을 베푸는 삶이었기 때문에 직접 자신과 상관이 없는 이방인의 모든 교회들도 이들에게 덕으로 섬김을 받는다는 이 은혜를 기억하면서 이 사람들에게 또 이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향한 사랑과 감사의 정이 넘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어 구원을 받게 하시고 이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의 자원과 이 땅의 자원들을 주셨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주님이 주셨는데도 자기가 스스로 얻은 줄을 알고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데에 그 모든 자원들을 사용했지만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은 후에는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에게 하늘과 이 땅의 복으로 채워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강물처럼 흘러 사람들을 적시고 혜택을 입게 하기 위해 베풀어 주신 은혜 였다 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덕으로서 베풀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도 매우 불행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이렇게 사랑으로 교통하고 물질로 교통하고 흘러가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들을 불러 주셨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이렇게 희생적인 섬김으로 목회자를 보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덕으로 섬김으로서 모든 이방의 교회들조차도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 까지 덕을 끼치며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얼마나 사람들에게 덕을 끼쳤는지는 그가 잔치할 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장사될 때에 나타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승이 죽으면 문상을 안 가도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간다고 합니다. 그것은 덕을 끼치지 않고 권력만 휘둘러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의지하는 이 없이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때 정말 자신에게 많은 덕을 입었기 때문에 그 은혜와 하회와 같은 사랑에 감사해서 그 초상집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인물이 바로 덕스럽게 인생을 산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이 가보지도 못한 많은 이방의 교회들까지도 그들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도록 덕을 끼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들의 섬김의 넓은 정신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좁고 좁아서 자기의 가족들에게는 인심을 얻고 구역식구들에게는 인심을 얻어도 교구 사람들에게 조차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가 하면 교구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아도 교구 울타리만 넘으면 누구도 좋아 하는 사람이 없는 그런 사람들도 교회에는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덕으로서 섬기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래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마다 긍휼이 여기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자기의 것을 희생하여 사람들에게 베풀고자 하는 이러한 덕으로서 섬기되 흔들리지 않는 섬김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의 은혜를 입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도 정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교회 곳곳에 두셔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가 망나니 같은 교인들이 많아도 그런 사람들이 기둥처럼 섬기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은 정말 잠깐 지나갑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불현듯 아무도 우리에게 함께 주님을 섬기자고 부르지 않는 날이 옵니다. 정말 잠깐입니다. 그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주님을 섬길 기회가 주어지고 그것이 끝나고 나면 죽음이 우리 앞에 놓이고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게 됩니다.
(예화) 전도사 생활을 하던 때 교역자 한사람이 그분도 진실한 사람인데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랬을 것입니다. 신방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안 나온 것을 담임목사님이 더 잘 알고 담임목사님이 오히려 전화를 해서 권면을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역자들이 모두 간 다음에 저하고 둘이 남았는데 집에 가기 위해 보따리를 싸시면서 저한테 그런 것은 아니고 혼자서 울먹거리며 말씀하셨습니다. 저렇게 하나님과 영혼을 섬기다가 잠시 후 주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주님을 만나면 무엇이라고 변명을 하려고 저렇게 태만하게 영혼들을 돌볼까? 라고 말입니다.
Ⅲ. 결론
정말 잠깐이면 사라질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저는 장로님들에게도 늘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딱 7년만 합니다. 그러니까 더 시간이 없습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싸움이나 하고 다툼이나 하고 마음이나 토라지고 해서 주님의 일을 그르치면 두 번째 기회가 오지 않는데 주님 앞에 가서 우리가 뭐라고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참아야 합니다. 희생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도록 그렇게 베풀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이고 또 주님이 우리에게 감당하라고 주시는 분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주님이 어느 자리에 세워 두셨든지 간에 그 직분을 너무 좋아하지 말고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기쁨을 얻기 시작하면 그것은 영혼에 빨간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실하게 희생하고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교회 일꾼으로 세울 때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7.심령에 매임이 있습니까?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2-4)
녹취자: 김인철
I.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성령의 강력한 감화를 따라서 선교여행을 떠날 때 유언처럼 남긴 설교 속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밀레도라는 곳에 도착하였을 때 에베소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밀레도는 항구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에 있는 교회의 장로들을 오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비운 교회들을 이 장로들이 돌볼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왔을때에 아시아에 들어 온 첫날부터 내가 너희 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니 하면서 자신의 고생한 이야기와 그리고 구김이 없이 주님을 섬겼던 것에 대해서 증언하였습니다. 당연히 이제 이렇게 위험한 예루살렘으로 어쩌면 순교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곳에 사도바울이 가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 길을 즐겁게 가도록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에베소 교회 사람들이 이렇게 큰 어려움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후에 그 교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 아파했습니다. 아직은 그때까지 되지 않았지만 에베소에서 온 장로들의 생각도 거의 같은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럴 때 사도바울이 오늘 우리가 읽은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II. 섬기는 자의 담대함
여기에는 섬기는 자의 담대함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여기에서 ‘보라’ 라는 단어는 구약에서는 ‘힘내’ 희랍어에서는 ‘이두’ 등등으로 나오는데 영어에서 ‘Be hold' 라는 단어입니다. 뭔가 범상치 않은 일들이 뒤에서 언급될 때 감투사 같이 쓰이는 그런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범상한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내가 무슨 일을 만나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성령이 명백하게 증거 하기를 환란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성령이 증거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는데 사도바울도 인간이니까 고생은 피하고 싶고 시련은 비껴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인간이면 누구나 다 고생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고백을 하고 있는 바울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의 담대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좀 담대하여야 합니다. 그 담대함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지혜가 없는 담대함은 조폭들이 사용하는 담대함입니다. 지혜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담대함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일을 이루고자 하는 그 사명,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그것을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쟁을 해서 승리를 하는 것이 낫습니까? 아니면 전쟁을 안 하고 회담을 해서 말로 해서 전쟁을 막고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들을 챙기는 것이 낫습니까? 전자 입니까 후자 입니까?
(예화) 그래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데네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를 만들었는데 포세이돈이 왔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가 하면 “나를 섬겨라 그러면 내가 언제나 너희에게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마”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확 쏠렸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더니 아데나라는 시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뭐라고 했는가 하면 “나를 섬기면 전쟁이 없게 해 줄게” 라고 했습니다. 누구를 찍어 주었겠습니까? 그래서 아데나가 된 것입니다. 아데나가 그 사람들의 신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명을 완수할 때 희생도 안 하고 고생도 안 하고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켜듯이 이루어지는 방법이 있으면 당연히 그것을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 되고 어려움을 감당해야할 상황이 올 그 때에 사명을 완수하는 그것을 가장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나머지는 그것을 위해서 희생을 기꺼이 하겠다 라고 하는 것에서 담대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신이 안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차원은 조금 있다 이야기 하고 우리 일반 사회의 차원에서부터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예화) 엊그제 제가 열린교회에서 30살 먹은 청년 30명과 3시간 동안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것도 직업 하나만 놓고. 세 번에 걸쳐서. 직업, 결혼 등을 묶어서 책을 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대들은 누구를 부러워하는가? 이런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습니까? 일 조금하고 돈 많이 받고 동료들하고 똑같은데 동료들하고 비교가 안 되게 대접을 받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을 좋은 직장 다닌다고 하지 않느냐 했더니 맞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틀렸습니다. 자기 생긴 것에 합당한 대접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평의 원칙이지 회사사람이 어디 눈먼 회사를 만나서 100만원이면 실컷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사람인데 500만원을 주었다 그것은 일시적인 행운일 수 있지만 그 사람 자신에게도 그것은 행복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가 시장가격이 100만원밖에 안 되는 사람인데 예를 들어 200만원을 받고 일을 했다 그 직장사람이 눈이 멀어서 그 사람이 100만원 가치밖에 안 되는 사람을 200만원에 쓰고 있는 동안에는 행운이겠지만 그 직장을 떠나서 다른 직장을 가야 할 때에는 이제는 down grade가 되지 않으면 갈 때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한 것입니까?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모든 방면의 사람들이 요즘은 자기희생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기 교회 공사를 하는데 명색이 3억5천 짜리 공사입니다. 저는 공고를 하면 우르르 몰려 올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엄정하게 심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3곳의 업체에서 왔습니다. 한참 현장 설명을 했더니 “뭐가 이 조그만 교회에서 그렇게 까다롭고 조건이 많고 복잡합니까? 우리는 안 합니다.” “왜요?” “너무 어렵습니다.” 그리고 털고 가버렸습니다. 그 다음 회사는 “우리는 힘들어서 못해요” 하고 가버렸습니다. 경쟁할 수도 없습니다. 한사람밖에 안 남았습니다. 뭐냐 하면 자기네 하던식 대로 할 테니까 나머지는 교회에서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냐 우리에게 맞추어서 해 주어야지. 식당에 가면 주방장이 짬뽕을 잘 하니까 여기에 온 사람들 모두 그것만 먹고 가라 하면 되겠냐 나는 볶음밥 먹고 싶은데. 그래서 제가 더 치열한 경쟁사회가 되어서 회사마다 치열하게 경쟁을 해야지만 나라가 발전합니다. 뭐냐 하면 사람들을 이렇게 써보고 사회에서 일해 보면 꼭 자기가 맡은 일을 이루어야 되겠다 라고 하는 열의와 에너지가 없습니다. 아주 현저하게 부족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게임 좋아하는 사람이 게임에 몰두하고 바둑 좋아하는 사람이 바둑에 몰두하고 화투질 좋아하는 사람이 화투질 하면서 정신 몰입하고 자매들이 드라마 보면서 몰두하는 것처럼 그런 정도로 일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되면 되고 말면 말고. 하면 하고 말면 말고. 원자력 발전소를 하다 사고가 생겨서 멈추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 하나가 그 어마어마한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는데 멈추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물론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전기의 질이 제일 좋은 나라입니다. 그리고 전기 시스템이 우리나라처럼 잘 되어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쪽에서 발전소 하나 돌리면 동네에서 나누어 쓰는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라 은행처럼 전국에서 발전한 전기가 다 모여서 컴퓨터로 조합을 해서 배분을 합니다. 저 발전소가 툭하고 끊어져도 다른 발전소 남는 전기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엄청나게 과학화된 시스템입니다. 그래도 어쨌든 그 하나가 멈추었다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왜 멈추었는가 했더니 누가 거기에 드라이버를 빠뜨리고 갔습니다. 수많은 생명을 다루는 기계를 다루는데 어떻게 그렇게 했습니까? 이것은 실화인데 저와 같이 있던 교수 한 사람이 이야기 하는데 그 사람이 아는 어느 부인인데 그 신문사에도 아는 사람이 많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인데 수술을 했는데 계속 배가 아프다고 해서 X-RAY를 찍어 보니까 붕대하고 가위를 그냥 놓고 꿰맸다고 합니다. 붕대는 자칫하면 거기에 놓고 꿰매기가 쉽다고 합니다. 피가 막 나오면 속에 붕대를 집어넣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피하고 엉켜서 잘 안보여서... 물론 성실한 의사는 안 그러겠지만 급한 약속이 있었는지 얼른 꿰매고 갔는데 그렇게 황당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평신도든지 직원이든지 교역자든지 아니면 외부와 만나서 협력하는 사람이든지 보면 잘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 잘 설명을 해 줍니다. 이렇게 하면 되지 않냐? 저의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시큰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래서 일이 안 됐습니다 라고 온 것이 사실은 하고 싶은데 안 되서 온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은데 안 되는 이유를 만났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가르쳐 주니까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냥 그럼 안 되겠구나 이래야 하는데 그러면 길이 있지 그러면서 가르쳐 주는데 고생을 해야 되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점에 있어서 자녀들을 가르칠 때나 우리 자신을 훈련시킬 때 강하게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제가 기가 막힌 성공법을 하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다음 세대는 이렇게 일반적으로 집요함이 사라진 시대에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살아 갈 것이기 때문에 성공하고 잘 나가는 사람은 절대 흔들거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절대 없습니다. 무슨 게임을 하나 해도 챔피언이 된 사람들은 미친 듯이 매달려서 무엇인가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것은 소수의 사람들이고, 자녀들이나 여러분이나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근성을 가지고 끝까지 해내야 되겠다 라는 강한 성취의 동기를 가지고 있으면 대접 받습니다. 정말 대접 받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는데 일이 잘 되지 않습니다. 엊그제도 제가 직원들에게 싫은 소리를 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면 된다 이럴 때는 이렇게 하면 어려움을 극복하고 해낼 수 있다 라고 설명을 잔뜩 하는데 그러면 “예 알았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여야 하는데 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내가 이렇게 친절히 가르쳐 주는 것이 별로 마음에 안 드냐?” 그런 일이 두 번 세번 반복되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의욕에 넘쳐야 됩니다. 더욱이 우리는 세상에서 밥 먹고 돈 벌고 그런 사람도 의욕에 넘치는 사람들을 찾는데 우리는 사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의욕에 넘치고 이 일을 이루어 내겠다 라고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BBC 방송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여왕폐하가 나와서 연설을 하는데 뭐가 끊어 졌다고 합니다. 그것이 전기입니다. 이쪽선과 저쪽 선을 잡고 30분을 버텼다고 합니다. 이쪽과 저쪽을 잡고 있으면 아무리 샌 전기가 와도 인간이 괴롭기는 하지만 죽지는 않는 것, 플러스 마이너스 잡고 있으면 타 버리는데 똑같은 것 잡고 있으면 괜찮습니다. 물론 기분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희생입니다. 해내야 되겠다 라는 간절한 마음 그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담대함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해내야 되겠다 라는 그 마음이 담대함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다 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하고 하나님의 일을 해 옵니다. 재능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정말 희생은 많이 하는데 돈은 절대로 희생을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돈도 희생을 할줄 압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어려움을 견디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머리도 좋고 물질도 헌신하려고 하고 판단도 똑바로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아무리 똑바른 판단을 해도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똑바른 판단에 동의를 해 주는가 하면 세상을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똑바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외롭고 소수일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새들이 가을이 되면 줄지어 날아갑니다. 기러기들이... 누가 선생님도 없는데... 줄 서라고 땅바닥에 내려놓으면 줄 서겠습니까? 모이 줄 테이까 줄 서라면 서겠습니까? 그런데 하늘을 날아 갈 때는 기가 막히게 줄을 서서 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앞에 날아가는 새가 우두머리인데 뒤따라가면 약 20%정도의 힘을 줄일 수 있습니다. 공기의 저항을... 그 뒤에 따라 오고 따라 오고 가는 것입니다. 앞에 가는 새는 제일 힘든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누구든지 쉬운 길을 가려고 하지, 편안한 길로 가려고 하지 누가 어렵고 힘든 길을 가려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때 그것을 버티고 견딜 수 있는 내적인 힘, 정신의 힘 그런 것들이 이제 한 사람의 선한 의지의 크기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사람들이 안될 때에는 비난하지만 잘되었을 때 꼭 칭찬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길을 따라 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담대함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내게 맡겨 주신 이 일들을 꼭 완수하여야 되겠다 라는 마음, 그것이 너무 중요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세 이런 것 들이 바로 그런 담대함을 갖게 만들어 주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너무 고귀한 가치이기 때문에 더 많이 희생을 해서도 이것은 이룰만한 값어치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서 담대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담대함을 가져다주는 내적인 원동력이 무엇인가 하면 심령의 매임입니다.
III. 심령에 매임이 있습니까?
오늘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분명히 한 성령이 두 가지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모순된 일입니다. 한 성령님이 모순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한 성령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 결박과 환란이 너를 기다린다. 그런데 한 성령이, 같은 성령이 또 다른 일을 하는데 올라 갈 수밖에 없는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 매임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노회가 마음대로 까불고 하다가 밧줄로 꽁꽁 묶어 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동물처럼 밧줄로 꽁꽁 묶이면 매여서 자기 의지대로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화) 코 뚫은 송아지 같은 것입니다. 송아지가 코를 안 뚫으면 삼부자가 감당을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쁘고 해서 코를 못 뚫어주면 꾸역꾸역 먹고 갑자기 커집니다. 목에 개처럼 걸고 이리와 했는데 한번 잡아채면 밧줄 붙들고 있던 사람이 쓰러질 정도로 기운이 셉니다. 그런데 코를 뚫으면 어린아이가 잡아 당겨도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코를 뚫어 착해진 것이 아니라 코가 아파서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매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매이는 방식은 어떤 것일까요? 땡겨서 아파서 끌려갑니까? 아파서 주님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픈 것도 다른 방식으로 아픈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줄은 줄인데 사랑의 줄로 묶는 것입니다.
(찬양)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 주소서
여러분 정말 사랑해 보셨습니까?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무엇을 느끼는가 하면 저 사람하고 나 사이에 운명같은 줄이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안 드는데 이상하게 자존심 상하게 낮에는 마음이 상했는데 저녁때가 되면 왜 그런지 말 안하고 있는 것이 불편하고 인생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 하는 속에서 녹는 자기 정화작용이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이 뭐냐면 사랑의 줄에 꽉 매인 것입니다. 부부가 일생을 살면서 우리는 절대 부부싸움 안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연단을 받아서 부인이 엉터리 짓을 해서 인간이 이럴 수도 있구나 하고 충격도 조금 받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안 보려고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저 인간이 저런 면이 있었구나 정말 싫다 그만 살어!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용서하고 이해하고 이러는 가운데 사랑의 줄이 계속... 그런데 그것이 너무 심하면 안됩니다. 진짜로 보기 싫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남성 성도님들 부인들에게 잘 하십시오. 그것이 보험입니다.
(예화) 노인 요양병원에 60대, 70대, 80대, 90대 아저씨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두 한대씩 얻어맞고 모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 왜 그랬냐고 하니까 60대가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달라고 했더니 때렸다고 합니다. 70대 보고 왜 그랬냐고 하니까 아침에 이쁜 옷을 입길래 어디 가냐고 했더니 때렸다고 합니다. 80대는 왜 그랬냐고 했더니 아무것도 안하고 숨만 쉬었는데 때렸다고 합니다. 90대 할아버지는 당신은 왜 그랬냐고 했더니 숨도 안쉬고 살아만 있었는데 때렸다고 합니다.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결점과 잘못한 것이 부인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넘어 버린 것입니다. 살기는 사는데 사랑의 줄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너무 힘에서 연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뚝하고 끊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정도가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당할 수 있은 한도 내에서 연단을 받으면서 용서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끊어질 수 없도록 아주 질긴 사랑의 줄로 묶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고운정으로만 드는 정이 끊기 어렵습니까? 미운정 고운정 든 것이 끊기 어렵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 입니까? 오늘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집에 가면 남편들을 보는 눈이 달라 질 것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할 때 지금은 미운 정을 들게 하는 중이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사랑의 줄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그리스도는 잘못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사실을 우리가 예수님을 용서하고 미운정 고운정 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잘못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시키기도 하고 고난 속에 두기도 하고 깨닫게 하기 위하여 시련도 주십니다. 그런 과정을 모두 밟으면서 그런 과정을 모두 거치면서 주님의 성품을 오해 했다가는 바르게 알고 또 조금 알았다가는 더 많이 알고 희미하게 알았다가는 더 분명하게 알고 하면서 인격적인 주님 사랑의 줄로 묶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나를 처음에는 내 마음에 맞게 나를 다루지 않으면 삐쳤습니다. 그런데 이제 연단을 많이 받으면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나에게 애정을 표현하실 수 있다고 믿고 삐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랑의 줄로 굳게 묶여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매이게 되면 나의 이해를 초월하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성령님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분명하게 말하는데 그 고난이 줄 고통과 괴로움에 대한 생각보다는 주님이 그곳에 나의 불쌍한 동족들이 있어서, 너의 불쌍한 동족이 그곳에 있으니 그곳에 가서 네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하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성령님이 주셔서 묶였는데 이 묶인 것이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나 나의 주 그리스도께 받은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하면 나의 목숨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겠노라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제 다다음주에 선거입니다. 다음 주에 어떤 일꾼들을 뽑아야 될지를 제가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굉장히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뽑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조금 돈이 없고 공부를 많이 못했어도 주님의 은혜에 매인 사람 그래서 잘못했다고 용서도 빌 줄 알고 그리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섭섭하게 했다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줄도 알고 맺힌 것을 풀 줄도 알고 자기의 자존심을 주님의 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할 줄 알고, 이러한 사람... 하나님의 은혜의 줄에 매여 있어서 어려운 것인지 뻔히 아는데도 그 길을 가려는 사람...
(예화) 언젠가 구체적으로 제가 말씀을 못 드리겠는데 말하면 다 알 수 있는 단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중에 어떤 사람이 그런 것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에 처해서 중요한 결정을 하여야 하는데 그 결정을 한다는 것은 결국은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쳐서 원망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면 누군가 피해 보는 사람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성격적으로 그런 사람이 아니면 누가 그런 일 좋아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을 잘 처리해 주리라고 생각하는데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어쩌면 그렇게 마른 땅만 밟으려고 하는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제가 초등학교 때 우리 집에 테리라는 개가 있었습니다. 바둑이 잡종이었는데 이 개는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 개는 정말 개입니다. 개는 비가 오면 온 동네를 싸돌아 다녀서 시커멓게 하고 옵니다. 그런데 이 테리는 비가 오면 마른땅만 밟습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 입니까? 자기 자신이 명예를 지키고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피 묻히지 않기 위해서 정당하게 하여야 할 것을 회피하는 모습을 우리들이 마른땅만 밟는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그런 직분을 맡으면 안 됩니다. 무관으로 아무 직분 없이 편안하게 살면 누가 손에 피 묻히라 물 묻히라 그런 이야기 안 합니다. 그러나 그런 직분을 맡았으면 자기는 지도자이기 때문에 필요하면 칼을 번쩍 들어서 사람들을 베일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권이 따르고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IV. 결론
오늘 사도바울이 심령의 매임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 사람도 고린도후서 1장에서 그렇게 고생한 이야기, 특별히 에베소에서 고생한 이야기를 털어 놓았을 때 그때 이제 인생 말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또 결박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칼에 찔리고 돌멩이에 맞고 그런 일들을 끔찍이 겪으면서 살아 왔는데 또 그것을 당하고 싶겠습니까? 사람이 그런다고 하면 너는 무엇을 몰라서 그런다고 하는데 성령님이 명백하게 증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묶였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줄에 묶였습니다. 조금 교회 일을 하다가 혈기 부리는 사람들, 조금 희생하고 일이 잘 안된다고 힘들어 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문제는 여러분 심령에 매임이 있습니까? 정말 사람을 보고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정말 주님 때문에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살려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일을 한다는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을 마감했을 때 우리를 잘했냐 못했냐 판단할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시키셔서 여기에 있는 것이지 사람이 불러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주님께 굳게 매여서 그래서 사람에 매인 것이 아니라 주님께 굳게 매여서 그 사랑의 줄에 붙들려 매여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일에 매인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묶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붙들린바 되어서 그 매임이 마음의 지배력을 행사해서 그 마음으로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 갈 때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충성스럽게 보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곳에 있어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8.어떤 일꾼을 원하실까? (1)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21:16)
녹취자: 김인철
I. 들어가는 말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실 때에 베드로를 불러서 물어 보신 질문이 나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말씀입니다. 이것은 모든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깔려야 될 일입니다. 교회도 사람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일을 하려면 당장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보다 돈이 있고 재주 있고 힘이 있는 사람이 써먹기 좋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일꾼을 그렇게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함부로 선택을 해서 쓰고 나면 나중에 그 결과가 교회에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교회가 일꾼들을 쓸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무시하고 돈 있고, 일 잘하고, 성품 좋다고 사람을 계속 쓰면 그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면 그 사람들이 교회에서 일꾼들로서 교회를 움직이는 기관실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진짜 은혜 받고 변화 받은 성도들은 그 아래서 묵묵히 봉사 하는데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일꾼을 세울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II. 어떤 일꾼을 원하실까?
A.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꾼들을 원하실까? 오늘은 성경을 찾으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9절입니다.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 라고 했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는 일꾼을 뽑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전제하여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신앙이 있다고 해서 예수님 만나서 예수님 사랑한 적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지도자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인 수천 명 가운데 정말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눈꼽 만큼도 예수님 사랑해 본적도 없고, 사랑하지도 않는 교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누가 그렇게 오래도록 교회에 나와서 출석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겠습니까? 정도는 다르지만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났고 또 어느 정도는 사랑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를 뽑을 때에는 그렇게만 가지고 뽑으면 안 됩니다.
(예화) 여러분 미국 사람들을 보면 정말 이율배반적이다 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법무부 장관 청문회에 한사람이 올라갔는데 여성 이었습니다. 그런데 떨어 졌습니다. 떨어진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불법체류자를 식모로 썼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주일을... 그런데 그 불법체류자를 고용하는 것은 미국에서 일반화 되어 있습니다. 켈리포니아 저쪽으로 가면 어마어마한 호도밭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것 불법체류자들이 아니면 씨도 못 뿌리고 거두어 들일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단속을 기술적으로 잘 한다고 합니다. 만약에 추수하여야 할 때에 단속을 해서 잡아가 버리면 농민들이 보따리를 싸야 합니다. 수백 명이 포진해서 정리를 합니다. 그것이 뭐가 그리 큰 죄이겠습니까? 자기들은 늘 하는 짓인데... 그리고 성에 대한 의식도 굉장히 자유롭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도자를 뽑을 때에는 완전히 다른 기준을 가지고 뽑는 것입니다. 이율배반이라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나는 비록 이렇게 너절하게 살아도 너 같은 사람의 지도력 아래서 우리는 살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주민등록지 한번 이리저러 부동산 때문에 안 옮겨 본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하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해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기가 그렇게 이 다음에 지도자로 부름을 받을지 몰랐을 것입니다. 미리 알았으면 자기 관리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심지어 옛날에 어느 재벌은 신문에 났는데 건강보험료를 안내서 그렇게 하고 마지막에 지도자가 될 때에는 생각지도 않던 것들이 뛰쳐나와서 그것이 걸려 넘어지고 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단지 나라를 사랑하고 정치적인 포부가 있고 이런 것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냥 일 하게 두고 지도자를 뽑을 때에는 더 높은 기준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깨끗한 양심입니다. 그러니까 사람 자신이 약간 사람들을 속이고 거짓말하고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안 해 하는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뽑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교회를 망치는 것입니다.
(예화) 그래서 엊그제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교회 일을 열심히 챙기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들도 있고 교인들도 있습니다. 열린 공간에 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까... 상당히 급료를 교회에서 받아 갑니다. 이 사람들은 세금을 안 내느냐 했더니 세금은 안 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법에 안 내도 되느냐 했더니 그건 아니고 세금을 내야 하는데 그냥 받아 가는 것도 얼마 안 되니까.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러면 교역자들도 사실은 법상으로는 안 내도 되는 세금인데도 법리적으로 볼 때 내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 되어서 일 년에 육천만원이나 거두어서 세무서에 갖다 주는데 그러면 그 사람들도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인데 일관성이 있어야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질타하신 것을 거꾸로 하자면 약대는 삼키고 말하자면 하루살이는 토해내는 격이지 그렇게 해서 대부분의 많은 교역자와 직원들은 그렇게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정직하려고 세금을 내는데 작은 일에 있어서는 내버려 두어서 그것이 섞여 가지고 일관성이 없는 것이 되는데 그것이 말이 되느냐 할 가치가 있으면 다 하는 것이고 할 가치가 없으면 큰 것도 하지 말고 목에 칼이 들어 와도 안 하는 것이지 그런 것이 어디 있냐 다시 정리해라 해서 정리해서 이번에 세무서에 보고했습니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 교회에서 가짜 계약서 쓰는데 그것이 무엇이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 무슨 영수증을 꼭 제대로 된 것을 받아야 하느냐 그냥 백지에 하나 써서 주고받으면 되지... 그리고 교회에서 물건을 구입했다고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청탁으로 몇 십만 원 가지고 온 것을 내가 받았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냐? 그런 사람들이 일꾼을 하면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그것은 교회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 되고 부끄러운 것이 됩니다. 제가 언제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소유에 대해서 정말 동양 사람들 특히 중국사람들하고 한국사람들은 소유에 대한 관념이 정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그런 민주교육을 제대로 받은 구라파 사람들은 내 것이 아니면 다 남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의 것이 아니면 다 내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어린아이들이 걸어 가다가 길거리에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 졌는데 모아서 나무 밑에 세 개를 모아 놓고 가더랍니다. 그래서 하도 신기해서 “떨어 졌는데 가지고 가지 왜 나무 밑에 버리고 가냐?” 했더니 “아저씨 이것 우리 것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나라 한번 보십시오. 강남에서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단속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밤중에 뭘 가지고 가서 유실수들 다 털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먹고 싶으면 마트에 가서 사 먹지 지나 가면서 감 하나 매달려 있으면 얼마나 보기 좋은데 그것을 털어 가지고 자기네 가서 혼자 먹겠다고... 좋지도 않습니다. 매연 잔뜩 묻은 것 인데 잘못 먹으면 암이나 걸리지... 그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지도자 뽑으면 안 됩니다. 큰일 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깨끗한 양심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그런 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마다 분쟁이 나서 문제가 되면 대부분 그 문제가 장로이든 목사이든지 간에 돈 문제가 걸리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제가 아는 어느 교회에서 너무 은혜로운 것입니다. 영수증이고 없이 그냥 아멘 할렐루야 하면서 통과 하면서... 나중에 이것이 문제가 되어서 법정에서 싸움이 벌어 졌는데 그때 목사님이 하는 이야기가 법정에서 진술을 하면서 통곡을 하며 우는 것은 기록을 남겨 놓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지도자가 되려면 아주 선명한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뽑으면 안 됩니다. 돈 빌려가서 잘 안 갚는 사람들... 그 다음에 사람들에게 자꾸 치근덕 거리면서 기대려는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지도자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도자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괜찮습니다. 지도자는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뽑으면 안 됩니다.
그 깨끗한 양심과 함께 중요한 것이 있는데 믿음의 비밀입니다. 비밀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남들은 잘 모르는 것입니다. 혹은 신비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신비는 무엇입니까? 내가 보기는 보았는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믿음의 신비를 맛본 사람입니다.
(찬양)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조금 은혜를 받으면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고 싶고 많이 은혜를 받으면 조용히 혼자 일생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런 비밀을 가진 사람을 일꾼으로 뽑아야 합니다. 그런 것 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그런 것을 별로 못 가지고 있으면서도 떠버리기를 좋아해서 무엇인가 굉장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고 많이 받았는데 내색을 기질적으로 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화하고 그가 행동하는 것을 보면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이 교회당을 수리 하면서 제가 추억에 많이 잠겼습니다. 거의 다 끝나 가는데 아직 안 끝났습니다. 일주일 안에 안 끝날 것 같습니다. 밖에 까지 마무리를 하여야 하는데... 그런데 교회에 안 믿는 일꾼들이 70명이 들어 와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더랍니다. 우리가 진짜 교회에 안 다니지만 성심으로 우리가 교회를 수리 해 드리겠습니다. 왜 그러는가 했더니 자기가 일을 마치고 보따리를 싸서 가려고 하는데 그 지저분한 예배당에 어느 연세 드신 할머니는 안 되었고 아주머니는 조금 지난 그런 60세 조금 넘으신 분이 오셔서 교회가 엉망이니까 앉을 자리도 없는데 두 손을 모으고 서서 그렇게 눈물로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일하는 일꾼들 안전을 위해서 기도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곳을 많이 지어 본 일터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래서 일당을 받아 가면 된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와서 그 할머니 기도 하는 것을 보니까 내가 여기를 정말 성심껏 잘 일을 해 주고 가야지 나도 복을 받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분이 거기에 와서 기도 할 때 내가 이렇게 폼 잡고 기도하면 저 자식들이 많이 좀 깨닫겠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믿음의 비밀이고 자기만이 아는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에는 일꾼들 불러서 교회 수리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 정말 신비한 것입니다. 주님의 몸이... 여기에서 교회를 지을 때 쓰레기 처리비가 삼천만원이 들었습니다. 한 트럭이 30만 원쯤 되니까 150트럭 이상이 나간 것입니다. 어마어마합니다. 어느 교인이 기도를 하는데 저 쓰레기가 저렇게 나갈 때 내 마음의 쓰레기도 함께 치워 달라고 하나님께... 그런 것들이 믿음의 비밀입니다. 마음속에서 솟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깨끗한 양심, 그러면서도 동시에 믿음의 비밀이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지도자로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고난도 이기고 역경도 이기면서 그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B. 지혜로운 자
더 하고 싶은데 다음으로 넘어 가겠습니다. 사도행전 6장 3절입니다. ‘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이것은 사도의 말입니다. 여기에서 요구 되는 것은 지혜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라는 것은 성경이 지혜를 이야기 할 때 두 종류를 이야기 합니다. 영적인 지혜와 자연적인 지혜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을 하자면 신앙의 지혜와 일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이 모두를 사실은 함께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지혜는 하루 아침에도 생길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마음대로 숯구덩이에 빠져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눈이 열리면서 나는 죄인일뿐이구나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 분명하게 살아 계시구나 그리고 나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구나 그러면서 십자가 앞에 깊이 회심하고 나면 또렷하게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 가지고 죽고 못살던 사람이 이제는 그것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이런 생각의 변화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당연히 그런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사람의 기본인데 당연 합니다. 그렇지만 지도자는 그것만 가지고 안 되고 일의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예화) 무슨 뜻인가 하면 총을 잘 쏘는 군인이 총 잘 쏘는 순서대로 별을 단다면 군대가 설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왜냐하면 총을 들고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들에게는 총을 잘 쏘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만 별을 달고 전쟁을 지휘하는 사람에게는 총을 좀 못 쏘아도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더 잘 할 수 있어야지만 군인들을 많이 죽이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도자의 특성인 것입니다. 오랫동안 농사를 지은 사람이 농림부 장관을 하고 운동 많이 한 사람이 체육부 장관을 하고 그냥 가정 하나밖에 모르던 사람이 가정복지부 장관을 한다면 나라가 되겠습니까?
사람을 뽑을 때 일을 해 나가는 일머리가 있는지를 보고 뽑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주님을 사랑하는 것, 깨끗한 양심과 믿음의 비밀 이런 것 없어도 일만 잘 하면 된다 이런 사람을 우리가 뽑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앞의 조건들이 갖추어졌고 일을 잘 하는 사람은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많이 아는 사람들이 잘못을 더 많이 합니다. 요즘 지능적인 사기수법을 보면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담임목사를 옆에서 보든지 좌로 보든지 우로 보든지 보이스피싱 같은 것에 걸릴 사람입니까? 그런데 저도 걸린 적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 상황이 와도 또 걸릴것 같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목소리도 비슷하고 지금도 그것이 보이스 피싱이었다는 사실이 80% 정도 확신이 가지만 믿고 싶지 않습니다. 저에게 잘 해 주었던 사람이었으니까... 지금도 목소리가 그 목소리였는지 흔들리는 것입니다. 일을 잘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잘못 머리가 사용될 때 그런 것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고, 깨끗한 양심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믿음의 비밀이 없는 사람이면 그리고 일을 잘 알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앙이 있고 난 다음에는 지혜로운 사람을 골라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교회처럼 이렇게 안수집사 때까지는... 안수집사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지만 위원회 같은 것을 맡겨 주면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꽤 크게 일을 하여야 하고 장로님이 되면 우리교회처럼 이렇게 많은 일들을 장로님이 할 수 있도록 믿고 맡기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엄청난 일들을 장로님들이 맡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머리가 없으면 교회 일꾼들을 데리고 일을 할 때 교회 일꾼들이 지도자로서 동의를 해 주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을 잘 할 수 있어야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자들을 멸시 하시고 오히려 미련한 자들을 하나님이 더 높이시는 것처럼 말을 하는데 거기에서 지혜롭다는 것은 자칭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지혜에 대하여 말을 하는 것이지 일을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절대 큰일을 맡기면 안 됩니다. 그러면 커다란 낭패를 끼치게 됩니다. 저는 요즘 신문을 보면서 제일 불쌍한 정치인이, 정치인도 아니지만 통상교섭 본부장입니다. 저는 그 사람을 좋아 했습니다. 왜냐하면 외국에서의 평에 의하면 그분 같은 전문가가 많지 않다고 합니다. 아주 능수능란하게 FTA를 해 나가는데 밑에 사람들이 받쳐주지 않는 것입니다. 번역을 어떻게 그렇게 해서 우리가 보아도 말도 안 되는 번역인데 우리에게 해 달라고 해도 그렇게 안 했을 텐데... 그것을 어떻게 그것까지 지도자가 끝까지 다 챙깁니까? 던져주면 아랫사람들이 밤을 세든지 목숨을 걸고 번역을 하다가 과로를 해서 피를 토하고 죽는 날이 오더라도 해 놓아야하는 것이지 그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라에서 먹여 주고 입혀 주고 따뜻하게 해 주고 모든 것을 다 노후까지 책임을 져 주는데 그런 무책임한 행동들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분노가 마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 가 없습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떡이 될 리가 없는데 완전히 공부 좀 하고 오라고 강기갑 의원에게 소리를 질렀더니 그 양반이 당신은 공부를 잘해서 번역을 그 따위로 해 놓았냐고 쏘아붙여서 분란이 일어나고...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말 지혜 있는 사람들을 뽑아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장로나 안수집사나 권사님을 뽑을 때 저 사람이 우리 구역장이라면 내가 잘 따를까? 저 사람이 우리 교구의 회장이라면 내가 잘 따를까? 저 사람이 우리 회사의 사장이라면 내가 잘 따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일머리가 있는지를 보고 그리고 그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일을 잘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거칩니다. 왜냐하면 방해 하는 요인들이 많은데 그것을 해내야 되니까... 직원들을 뽑고 일꾼들을 뽑을 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은 둥글고 일은 모나게 하는 사람들을 좋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없는지 알면서 자꾸 강조만 하는 것입니다. 일을 반듯하게 해 내는 사람들은 까칠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상처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은 해 내는데 일을 잘 해 가지고 왔을 때 마음속에 또 몇 사람이나 이 일로 찌르고 왔을까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둥근 사람은 다 좋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안 좋은 사람은 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손에 맡기면 되는 것도 없지만 안 되는 것도 없지만 또 된 것도 없습니다. 하나 안 하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하고 잘 지내는 것입니다. 일을 해 나가야 하는데 저 사람이 원하지 않으면 거기에서 스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둥글둥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있으나 없으나...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일 시키려고 데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이 어울려서 살아가니까 모나지 않고 너무너무 좋은 것입니다. 청소를 시키면 뒤에 누구를 보내서 다시 한 번 청소를 하여야 하고 어디를 갔다 와서 일을 처리 하라 하면 반드시 일을 제대로 했는지 확인 하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결국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안수집사를 뽑을 때 조건이 무엇입니까?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과부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데 그 사람 수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보통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잘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 지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똑같은 이야기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그렇게 사람들에게 돋보이게 부탁할 수 있는데 마음을 다 긁어 놓고 만신창이가 되게 만들어 놓고 그제야 미안하다고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 지도자를 뽑을 때 사람들이 몇 사람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 인간은 아니야” 하고 여러 사람들이 대답하면 지도자로 뽑아 주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판단이 다 틀린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가랑잎에 바늘을 찾는 것처럼 아주 희귀한 경우입니다.
C.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
디모데전서 3장 4절입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찌며’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가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영적으로 잘 회복하고 은혜를 받고 하면 교회 일꾼으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예화) 언젠가 교회 일꾼으로 세우려고 했더니 찾아와서 “목사님이 저의 과거에 대하여 모르셔서 그러는데 제가 아무도 모르는데 목사님께만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왜요?” 했더니 “제가 한번 과거에 이혼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와서 정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괜찮습니다. 투표해서 당선이 되면 임직 하십시오. 충분히 회개 하였고 그리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하나님 안 믿을 때 일어난 일이고 이제 그대가 새 삶을 찾고 충성스럽게 살고자 하니 그냥 임직하십시오.” 하고 충고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분명한 개전의 정이 보이는 상당한 회개의 기간이 필요하고 교회에서 만약에 책벌을 받았을 때에는 징계에서 해벌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일 잘하고 성품이 좋다는 이유 때문에 별거하거나 아니면 이혼하거나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하거나 이러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그렇게 함부로 지도자로 세우면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기 집을 잘 다스린다 하는 뜻은 무엇인가 하면 부인이고 아이들이고 눌러서 꼼짝 못하게 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여기 다스린다는 것은 아주 자애로운 왕이 자기의 나라를 덕성스럽게 잘 다스리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질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화) 오늘 제가 그것을 유아세례 받는 형제자매들에게 서약을 받으면서 울컥하고 마음이 올라 왔는데 왜 그랬는가 하면 저것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울 텐데...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고 아이와 함께 기도하며 우리 거룩한 종교의 모본을 몸소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그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 서약을 해서 그 짐을 지는 것인데... “애야 이렇게 하나님 사랑해야 한다” “이렇게 믿어야 한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하고 아이에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몇 해 전에 유치부에서 마음지킴의 교리를 가지고 신년에 부흥회를 했다고 합니다. 집에 가서 엄마가 짜증을 내니까 딸이 그러더랍니다. “엄마! 또 마음을 못 지키는 구나” 모본이 되겠습니까? 그것이 일생동안 얼마나 독약과 같은 서약인데 그것이... 그래서 저는 할 말이 많습니다. 유아세례 받고 아이들 끝까지 회심 안 하는 부모들 아직까지도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항상 찌를 때 그것입니다. “이 아이를 위해 기도한다면서요?” “이 아이와 함께 기도한다면서요?” 우리 거룩한 종교의 모본을 아이에게 힘써, 몸소 실천 해 보이겠다고 소싯적에 약속하고 아이 안고 와서 유아세례 받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헌신 했습니까? 아직까지 회심 안 하고 있는데... 아이가 회심 안 했으면 그대라도 대신 회심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 것입니까? 찌르는 칼입니다. 집안을 잘 다스리는 지도자여야 합니다.
(예화) 그래서 자녀들을 보셔야 합니다. 어느 날 친구 목사님이 아주 난감하게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참고로 잘 들으십시오. “목사님 이런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왜요?” 했더니 교회에 장로가 있는데 두 번째 딸을 시집을 보냈는데 첫 번째에도 너무 힘들었는데 첫 번째 아들이 불신자인 자매와 결혼을 한 것입니다. 당연히 교회에서 못하니까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한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담임목사가 주례를 서지 못합니다. 만약에 거기서 주례를 서면, 실제로 그렇게 해서 노회에서 징계를 받아서 면직까지 된 목사가 있습니다. 못 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헸겠습니까? 예식장에서 10만원 주고 빌려서 했든지 아니면 누구를 데려다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거기에 하객으로 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봉투 받은 것이 있으니까 가야 합니다. 그것이 뭡니까? 그렇게 한번은 넘어 갔는데 두 번째 또 같은 상황이 벌어 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하는데 제가 치리 하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치리를 안 하면 나중에 교인들이 대들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상황이 안 벌어져서 자신 있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상처 받을 사람이 없어서. 어느 날 괘씸하다고 화를 내면서 치리를 하는 것도 상처가 되니까 불러서 먼저 이해를 먼저 시키라 고 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치리를 받은 것이 당신을 보호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치리하고, 아이들도 치리를 하여야 하는데 아이들은 교회를 안 나와 버리니까 치리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옛날 초대교회에는 부모 모두 치리를 했고 그 아이들도 교회의 회원이면 다 치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치리를 받은 것이 무서웠으면 불신결혼을 하겠다고 우기겠습니까? 심지어 어느 교회는 불교신자를 데려 와서 장가를 가겠다고 하는데... 참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기에 치리를 해야지만 당신도 살고 장로도 살고 교회도 살지 내버려둬서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이렇게 했지 않았냐 하면 분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치리 했을 것입니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는 교인들이 마음에는 이것이 결국은 저런 사람을 지도자로서 깊이 인정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기 전에 가정을 잘 다스리는 지를 보고 그리고 뽑으시면 됩니다. 꼭 검토하여야 합니다.
D. 헌신된 자
마지막 디모데후서 2장 4절입니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예화) 군대에 가면 5분대기조 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비상이 걸리면 5분 안에 출동을 하는 대기조입니다. 그 대기조에 걸리면 밤에 잘 때 군화의 끈을 매고 자야 합니다. 왜냐하면 완전군장을 하고 5분 안에 차량에 탑승해서 출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5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짧은 시간입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군장을 다 벗고 내복 바람으로 모포 덥고 자고 있다가는 그것을 꾸리고 나오는 동안에 상황이 종료됩니다. 굉장히 힘듭니다. 5분대기조는 돌아가면서 하는데 머리 위에 완전군장을 다 놓고 군화까지 다 신고 옷을 입고 잡니다. 비상이 걸리면 다 튀어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들은 흔히 누가 교사를 5년째 한데 아니면 국내전도 파트에서 7년째 봉사를 한데... 물론 대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흔들림이 없이 맡은 그곳에서 꾸준히 오래도록 있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냥 오래 있었다는 것만 높이 치지 말고 그 사람이 얼마나 헌신되었나 하는 것도 봐야 합니다. 열렬하게 헌신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열렬하게 헌신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이 일을 하기는 하지만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전쟁이 나면 돌격 하면 사람들이 총을 들고 뛰어 가는 것은 영화에서 찍는 것이지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군사로 다니는 자가 얽매이는 자가 없나니’ 라고 했습니다. 군대에서 하사관 이상이 되면 영외생활을 많이 합니다. 군인 아파트를 지어 주면 밖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비상하면 다 뛰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시크릿 가든을 계속 보고 있거든요 이것 끝나면 가겠습니다.” 라고 하면 군인이 아닙니다.
(예화) 지하실 교회에 있을 때인데 새벽기도회에 가보니까 물이 나와서... 물이 수시로 나왔습니다. 영적인 물만 나온 것이 아니라 진짜 물이 그렇게 솟아나서 무릎 아래까지 차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른 물부터 퍼야 합니다. 그때는 정말 미련했습니다. 그 물을 다 잠그고 거기에서 새벽설교를 30분, 40분 했습니다. 그러다 만약에 전기코드까지 물이 차서 전기 오르고 하면 집단 감전 합니다. 그것을 잘한다고 올라 와서 물이 있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그때는 힘도 있었으니까 설교도 길었습니다. 요즘 저 보고 설교가 짧아 졌다고 많이 변했다고 하던데. 그렇게 끝나고 나서 온 교인에게 연락을 해서, 모두 한 것은 아니고 그래도 전화하면 달려올 사람들에게 전화해서 와서 같이 물 좀 같이 푸자고 하는데. 그때 저를 열심히 따라 다니던 청년이 있었는데 “네” 하고 온다고 했는데 안 오는 것입니다. 물을 거의 풀 때 되니까 나타났습니다. 물을 푸는 것이 너무 힘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아침이라도 먹으러 가자했더니 “저 먹고 왔는데요” 그래서 짜증이 확 났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밥 먹고 세수하고 발 씻고 그리고 온 것입니다. 그런 사람 지도자 시키면 안 됩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능력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일을 못하는 사람이 있고 가르쳐도 잘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지런 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자세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부지런해야 합니다. 자기생활에 얽매여서 호출을 하면 뭐가 안 되는데요. 우리가 당회 구성한지가 지금 6년 되었습니다. 장로님들을 모이라 했는데 개인적으로 잘 못나온다 그런 것 거의 없습니다. 그런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대통령 되기 전에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려고 하니까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충현교회에서 김창현 목사님이 당회장 하실 때인데 당회에 두 번인가 빠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곧바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앞으로 한두 번만 더 빠지면 당회에서 제명하겠다고 했습니다. 유세기간 중 바쁠 때에도 당회를 하면 칼 같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군인입니다. 자기생활에 얽매이지 말아야지 교회를 위해 사명을 주었는데 한번 모이자 한 것이 무슨 상관에게 사정하는 것처럼 그래야지 나타나 주는 사람들 절대 평생토록 지도자 써 주면 안 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기가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면 스스로 고사하고 자신이 이 조건에 적합하지 않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얼마나 지도자가 되는 것이 헌신을 요구하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III. 결론
그래서 여러분 다음 주에 뽑을 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기본이고 깨끗한 양심, 믿음의 비밀 그 다음에 지혜롭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가정을 잘 다스리고 언제든지 부르면 달려 올 수 있는 사람들을 지도자로 뽑으시기 바랍니다.
9.어떤 일꾼을 원하실까? (2)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 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행 1:24-25)
녹취자: 김인철
I. 들어가는 말
저는 지난 오후예배시간에 어떤 일꾼을 원하실까에 대하여 네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간단하게 복습을 하고 오늘 공부를 하겠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요한의 아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주의 일꾼이 되어야 하는데 제일 먼저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깨끗한 양심과 함께 불법하고 법도에 어긋나는 일 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고 상관없어 하는 이런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서 나름대로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만 교회에서 쳐 주느냐 그런 말 하면 안 됩니다. 지혜가 없어도 우리의 지체이고 사랑하는 형제입니다. 그런데 지혜가 없으면 지도자는 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머리가 나쁘면 손이 고생합니다. 세 번째는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 이어야 합니다. 집안은 신앙이 없고 자녀들도 불신앙이고 한데 그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잘못된 일을 하여도 처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그러면 티가 별로 나지 않는데 교회의 지도자가 자기 집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더 큰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하게 됩니다. 네 번째는 헌신된 자 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을 하지만 하나님의 일이 뒷전인 사람들... 그렇다고 충성되지 않은 사람은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충성되지 않아도 귀한 지체이고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눈 형제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네가지가 지난시간의 설교내용 이었습니다.
II. 어떤 일꾼을 원하실까?(2)
다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오늘 어떤 일꾼을 원하실까? 오늘 성경에 보면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가롯 유다가 가 버렸는데 12사도가 맞아야지만 열두지파, 열두 사도 이렇게 구원의 계획들이 이루어 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열둘을 채우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가 그렇게 배가 터져서 자살해서 죽어 버렸으니까 이제 채워야 하는데 이 채우는 사람이 참 놀랍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누구를 채워라 하시면 좋을 텐데 교회 투표를 통해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이 시대는 예수님이 직접 하시는 시대가 아니라 성령님이 오셔서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여 일들을 결정해서 나가게 하는 그런 교회의 질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사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모든 사람을 놓고 투표를 한 것이 아니라 유스도 라는 요셉과 맛디아라는 사람을 선택한 것입니다. 둘은 누가 이런 사람이 하면 좋겠다고 했을까요? 당연히 아마 사도들이 회의를 해서 이런 사람 정도면 한번 투표해 볼만 하지 않을까 하고 올렸으니까 우리도 먼저 당회에서 일꾼들을 잘 살피고 투표에 회부하는 이런 것들이 성경적으로도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스도와 맛디아라는 사람을 올렸는데 사실 이 두 사람은 두 사람중 사도로 맛디아가 가입을 했지만 이상하게 맛디아의 행적은 뒤에 나오지 않습니다. 유스도가 몇 번 나오는데 그 유스도가 이 유스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추가로 된 사도들의 행적이 특별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어쨋든 일꾼을 택할 때 사도들과 함께 기도할 때 기도제목이 무엇인가 하면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라고 기도했습니다. 뭇사람이라는 것이 누구일까 궁금한데 저의 생각에 일차적으로는 맛디아와 유스도의 마음일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마음 중 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서 사도의 직무를 하겠습니까? 또 하나는 이제 투표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다 아시는데 하나님이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우리 중에 되어야 할지 올바른 판단을 이 모든 뭇사람들이 가질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그런 종류의 기도였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많이 하고 일꾼을 뽑는 것도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A. 선택하여야 할 자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잘 기억나게 하기 위해서 어떤 일꾼을 잘 택하여야 할까? 그것 두 가지만 이야기 하고 어떤 사람은 안 되는가? 하는 것을 여섯 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꼭 교회의 일꾼이 될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손해를 보는 경우는 별로 없고 해서는 안 될 사람을 잘못 뽑아서 교회가 고생을 하고 성도들이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꾼을 뽑을 것인가도 고려하여야 하지만 어떤 사람을 제외하여야 할까를 성경에 입각해서 잘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꾼을 원하실까 네 개 말고 두개만 더 가르쳐 드리고 피해야 할 사람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3절입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세상에서의 리더십과 교회의 리더십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리더십은 돌격 하고 명령을 하면 그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 사람이 월급을 주고 그 사람이 지위를 높여 줄 수도 있고 해고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따르라 하면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리더십이고 그래서 세상의 리더는 항상 의무를 줄 때에는 의무만 주는 것이 아니라 권한도 많이 줍니다. 그래서 책임을 많이 진 사람은 권한도 많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들면 “너 그만 둬”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권한도 있고 “다음에 네 월급을 두 배로 올려 줄게” 이럴 수 있는 권한이 있고 과장쯤 하다가 부장이 되면, 부장쯤 하다가 만약에 상무가 되면 이것은 대령에서 별 하나가 올라가면 99가지의 대우가 바뀐다고 합니다. 샐러리맨들의 꿈은 승진입니다. 그런데 너 승진시켜줄게 이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그렇게 권한을 줍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는 그렇게 권한이 별로 없고 영적 권한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 말하자면 세상의 직분과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보스와 리더가 다른 것은 리더는 몸소 실천하면서 앞서 가는 사람이 리더이고 보스는 의자에 앉아서 명령하는 사람입니다. 돈과 권력을 지고 명령하는 사람이 보스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지도자가 될 사람들은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쳐서 주님의 일들을 하게 만들어 주고 자신이 본이 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돈이 많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다 그런 사람 우리교회에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아도 내가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저 사람의 본보기에 내가 동의 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먼저 생각하여야 합니다. 믿음의 본이 되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십시오 라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디모데전서 5장 17절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당시에는 장로가 두종류가 있었는데 가르치고 다스리는 장로가 있었고 그것이 바로 오늘날 목사입니다. 그리고 가르치지는 않고 다스리기만 하는 장로가 있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장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대한예수교장로회라고 했더니 장로교에서 장로가 중심이라고 하는데 그 장로라는 말이 엘더가 아니라 프레스피터 라는 말인데 그 말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가르치고 다스리는 사람인 목사 그리고 다스리기만 하는 장로 이 그룹을 합쳐서 장로회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가슴을 뜨끔하게 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라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뜻 입니까? 장로들이 있지만 모든 장로들이 공평하게 존경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잘 다스리지 못하는 장로는 무시해도 좋습니까? 무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뽑은 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아무것도 아닙니까? 아무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장로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스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에서 다스린다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집안에서 가정주부들이 살림을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것이 너무 자잘해 보이면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는 흔히 다스림 하면 죽어, 돌격, 나를 섬겨 이런 것들을 다스린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정복이지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스리는 것은 나라 속에 있는 많은 기능들을 조화를 이루면서 해 나가게 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고 그것이 믿음생활입니다. 그러면 조화를 이루면서 이렇게 모든 것들을 넓게 보면서 그러면서 조화를 이루면서 이렇게 교회를 질서를 잡고 균형을 이루면서 다스리는 이런 것이 교회를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저도 교회학교 교역자를 많이 해 보았는데 교회학교 교역자와 선생님들이 좋아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제직회에 가서 목소리 세게 내서 돈 많이 타 오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어느 부서를 맡을 때 균형을 잃고 그 부서에 충성하는 사람은 그러면 그 사람들은 그것은 자신의 일에 충성하는 것이지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그런 감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오늘은 이 부서를 했는데 다음에 저 부서하면 그 다음에 이 부서를 무시하고 저 부서를 후원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온전한 교회 섬김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잘 다스린다는 것은 교회에 어려운 일들이 생겼을 때에 탁월한 식견과 인생을 살아 온 지혜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으로 어떻게 처신하여야 될지에 대하여 생각 하면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에 무슨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생기니까 이 지체가 너무 괴로우니까 장로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장로님 제가 교회에서 이러이러한 부도덕한 일을 경험했는데 교회가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어떻게 해야 될 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랬더니 이 장로님이 “그런 것을 왜 우리 당회에 와서 이야기 안 하고 언론기관에 가서 해야지” 그래서 언론기관에 가서 이야기를 했더니 기자가 그것을 신문에 터뜨려 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큰 시험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뽑아서는 절대 안 되는 사람을 장로로 뽑았기 때문에 교회가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루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잘 다스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안 되고 잘 다스리는 장로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지혜롭게 잘 다스려서 하나님의 교회를 은혜롭게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두 배로 존경하여야 합니다. 그런 것 못 하는 장로들보다 두 배로 존경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차별대우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러면 안 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님들은 집사들이 밥을 가져다주고 못 다스리는 장로님들은 서서 타 먹으라 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마음속으로 깊이 공경하고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B. 피하여야 할 자
그러면 이번에 드디어 피하여야 할 자, 어떤 사람을 피하여야 하는가? 디모데전서 3장 6절입니다.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여러분 새로 믿은 사람은 절대로 교회에 큰 직분을 맡기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새로 믿는 사람이 가능합니까?” “왜 불가능하죠?” 하니까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교회 정관에 보면 우리 교회 장로가 되려면 다른 교회에서 장로가 되서 와서 이적을 한 다음에 3년이 지나야 하고 또 집사가 된 지 5년이 지나야 하는데 집사가 된 지 5년이 지나려면 그러면 집사가 되기 전에 코스 밟고 2년이 지나면 7-8년 이렇게 걸리는데 새로 믿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 새로 믿었다는 정의가 교회에 처음 나왔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듭나지도 못하고 회심도 없이 10년을 예수 믿다가, 20년을 예수 믿다가 나이가 50세가 되었는데 51세에 사경회에 나와서 회심을 했습니다 그러면 52세에 장로를 시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은 지 일 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 출석은 22년째인데...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절대로 그렇게 계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신앙의 연륜은 있지만 교회 출석의 연조는 없습니다. 교회 출석을 오래 하고 변화가 없으면 오래 할수록 사람들이 나쁜 사람입니다. 오히려 처음 믿은 사람들이 순수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불교 믿다가 설교를 듣고 전도를 받아 회심을 한 사람이 있는데 저를 만날 적마다 두 손 모아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너무 놀라운 것이 매주 감사헌금을 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가는데 감사하지 않고 나갈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시켜 주면 그것이 법인지 알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목양하기가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변화 받지도 못하고 20년 교회 출석하는 동안에 싸움질 하는 교회, 목사 내 쫒는 교회, 장로 내 쫒는 교회, 집사하고 장로하고 멱살을 잡고 싸우는 교회, 소송하는 교회, 온갖 교회를 다 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뭐라고 하면 “저것 또 수 쓰는 구나!” 이렇게 마음들이 다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오래 교회 다닌 것이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나쁜 것만 더 많이 배웁니다. 학교도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가서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도 좋은 사람이 되지만 공부 안 하는 아이들은 공부에도 뒤지지만 다른 것에 관심이 가서 이상한 것을 잔뜩 배웁니다. 그래서 여러분 6학년 아이들이 중학교 가서 받는 충격이 인생 통 털어 최고의 충격이라고 합니다. 일시에 팡 터지면서 초등학교 때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중학교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혼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새로 믿은 사람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해 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디모데후서 2장 24절입니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그리고 디모데전서 3장 3절입니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 하며 이것이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그때도 주의 종이라고 하면서 술 먹고 때리는 친구들이 교회에 있었습니다. 아니 없었으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겠습니까? 있으니까 하지... 참 대단합니다. 그래서 잘 다투는 사람들은 절대 지도자로 세우면 안 됩니다. 안수집사나 권사나 집사 때 머리 잡고 싸우는 경험이 있는 여성집사는 상당한 기간이 지나기까지는 절대로 권사시키면 안됩니다. 무슨 이유때문이든지간에 심하게 개 싸우듯이 싸운 경험이 있는 집사는 안수집사 시키면 안 되고 안수 집사 때 그런 사람은 충분한 시간이 흐르기 전 까지는 절대로 지도자 시키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어 봅니다. “목사님 그럼 하나님이 사람마다 각기 다른 본성으로 창조하셔서 다른 것이 아름답다고 하셨는데 어떤 사람처럼 느긋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좀 빨리빨리 하고 뒤끝은 없어도 성격이 불같아서 추진력이 있는 사람들은 못마땅한 사람 만나면 싸울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교회도 나오지 말라는 말 입니까?” 교회 나오세요. 그리고 그 성질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지 않으면 어디 가서 환영을 받겠습니까? 나오십시오. 누가 교회를 나오지 말라고 합니까? 나오시고 열심히 국수도 드시고 다 하십시오. 그런데 한 가지만 하지 마십시오. 안수집사, 권사, 장로 그것은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아예 안 시켜 준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기다립니다. 당신이 변화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그래서 그 성질 머리가 변화될 때까지... 변화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투면 안 됩니다. 정말 많이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성도이기 때문에 차마 말을 못하는데 기가 막힌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잘 싸우는 사람은 잘 싸웁니다. 한번 물면 놓지 않습니다. 전도를 그렇게 했으면 정말 천국의 수많은 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대단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투는 사람, 회의를 하거나 무엇을 하거나 말투 자체가 전투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도자가 되면 안 됩니다. 계속 분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냥 가만히 계십시오. 충분히 변화될 때까지. 끝까지 변화가 되지 않으면 지도자 되지 말고 평신도로 계시다가 교회에서 장례식 지내 주시면 됩니다. 우리는 잘 다투고 다혈질적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교회에 덕을 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 다음에 구타는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이 구타는 교회에서 성도 때리는 자를 장로 세우지 말고 집사 세우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도 있기는 있었겠지만 희귀했습니다. 그러면 구타는 대게 어디에서 행합니까? 집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예화) 이것은 그 집사에게서 직접 들은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목사님 하는 일에 계속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을 불러서 “어이 박장로! 뒤뜰로 끌고 가서 저 자식 혼좀 내 줘!” 그러니까 진짜로 데리고 가서 때리더랍니다. 우리 교회 강윤석 목사님이 전도사 시절에 교역자 회의를 하는데 담임목사 없는데 수석 부목사님이 교역자들이 모두 모였는데 “어이 윤석이!” “어이 태웅이!” 이렇게 사람 이름을 부르더랍니다. 끝나고 나서 겸손하게 “목사님! 저희들이 개인적인 사석에서나 윤석아 그래도 다 받아들이겠는데 공식석상이나 혹은 성도들과 같이 있을 때에는 전도사 혹은 목사라고 불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가만히 있더랍니다. 끝나고 잠깐 교회 뒤뜰로 오라고 하더니 원 투 스트레이트 발로 밟고 무릎을 꿇리고 “네가 교회 조직의 쓴 맛을 볼래?” 그렇게까지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있기 위해서는 결국은 양자택일을 하여야 하는데 자기도 그 목사처럼 운동을 해서 한판 붙든지 아니면 떠나야 되는데 후자를 선택해서 피난 온 교회가 열린교회였습니다. 한 번도 안 맞았습니다. 절대 때리는 사람 지도자가 되면 안 됩니다.
세 번째 고린도후서 9장7절입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이 말씀에 찔리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래도 찔려야지 약이 됩니다. 지도자 중에 피하여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인색한 것입니다. 인색은 다른 것에 인색하다는 것이 아니라 물질, 돈을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인색한 사람들은 절대로 지도자로 뽑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인색하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지 않거나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에 있어서 아주 가난한자처럼 행세하는 것을 가리켜서 인색함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 인색함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입니까?” 정도가 아닙니다. 정도가 아니라 이것은 이 세상 사회에서 보편적인 통념으로 인정을 하는 것이고 또 자신의 양심도 스스로 증거를 합니다.
(예화) 엊그제에도 유명한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비서실로 전화가 왔습니다. “저 아무개 D 출판사인데요” “그런데요?” “이상해요” “왜요?” “김남준 목사님 보시라고 우리가 전집 새로 나온 것 한질을 보내 드렸는데 교회에서 반송을 했어요” 그렇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비서 간사가 저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돌려 보낸 적이 없는데 누가 돌려보냈는지 나의 뜻을 잘 알고 돌려 보낸 것 같다. 전화해서 우리 목사님은 구원이외의 공짜는 싫어하십니다 라고 전화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은 이미 목사님이 구입하셨기 때문에 두질이 필요 없습니다 선한 일에 쓰십시오. 그렇게 전화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인색하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는데 돈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것을 아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공짜를 좋아 합니다. 인색한 사람들은 공짜를 아주 좋아합니다. 저는 인생을 살면서 아주 인색하면서도 그 다음에 절대로 공짜를 바라지 않는 사람을 만나기는 만났는데 아주 드뭅니다. 그리고 대게 인색한 사람들은 혜택에 아주 민감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심정인데 그러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인색하다고 할 때 교회의 규칙이 따로 있는 것이겠습니까?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 인색한 사람이다 후한 사람이다 다 있습니다. 인색한 사람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계속 밥을 얻어먹으면서 자신은 계속 운동화 끈만 매고 있는 사람... 그것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유가 너무 없다든지... 그러면 그런 모임에 어울리면 안 됩니다. 어울리지 마십시오. 여유가 있으면서도 아깝다 3분만 면피하면 돈 10만원이 굳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두 번 그렇게 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생을 그렇게 살면 외톨박이가 됩니다. 아무도 그 사람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따돌림을 당합니다. 그런데 본인이 따돌림을 받는 것 조차도 개의치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 인색한 사람들은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 할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돈 없는 사람은 장로도 되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어도 마음이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예화) 제가 신대원 다닐 때 급우가 하나 있었는데 나이가 많이 든, 저도 노장에 속했는데 저보다 훨씬 더 연세가 많으신 분이셨는데 이분은 벌써 은퇴 했습니다. 이 분은 회의할 때마다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힘들어 하고 기숙사 회장을 했는데 회의 한다고 모이라고 해서 학생들이 모였습니다. 6월25일이 들어 간 한 주간 동안 기숙사에서 밥을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황당해 했습니다. 일주일동안 밥을 굶어야 되니까... 6.25인데 일주일 정도는 금식하여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말은 비슷하게 맞을 수 있지만 사실은 동의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면 현충일에도 일주일 금식해야 됩니다. 그렇게 힘들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많이 왕따 시켰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에 친구들을 만났을 때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형님이 조금 개념이 없고 판단력이 흐려서 우리를 힘들게 하였지만 하나는 있는데 그것은 정이 있어” 선교사로 수 없이 파송 되는데, 동창생들이 1반부터 5반까지 있었으니까... 다 찾아 가지고 파송 받는 날 가서 축하하면서 “나는 선교 못하지만 네가 선교지 가서 고생을 하겠구나” 하고 항상 봉투를 쥐어 주는데 항상 만원 아니면 이만 원이었습니다. 요즘 물가에 만원을 어디에 씁니까? 우리는 만원밖에 못낼 정도면 그냥 접어 버립니다. 못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왜냐하면 자기는 가난하지만 인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것이 선교지에 가서 그 형님 생각이 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0만원씩, 20만원씩 봉투에 넣어서 예배시간에 선교 헌금 한 사람은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꼬깃꼬깃 봉투에 주었는데 열어 보니 10만원 수표나 들어 있는지 알았는데 뜯어보니까 만원이 들어 있더랍니다. 아프리카 선교 가는데 보태어 쓰라고 만원을... 그런데 그것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하니까... 그것은 인색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교회에는 제가 양심을 걸고 이야기 하는데 장로를 뽑으면서 물질을 염두 해 두었다면 제가 성을 갈겠습니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고 그리고 다행인 것이 부자들이 우리교회에 별로 없습니다. 조금 사시는 분들은 있는데 부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자라 하면 한 달에 십일조 일억씩 해야지 부자라고 말할 수 있지... 그런 분이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천 만원 십일조 하시는 분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부자들이 가끔 오는데 은혜를 못 받고 갑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인가보다 하고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도 참 감사합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가난해도 장로 될 수 있고 안수집사 될 수 있고 권사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인색한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화) 부산에 집회를 내려갔습니다. 갔는데 교회 목사님이 아주 내성적인 분입니다. 수줍은 듯이 “목사님 오늘 점심 드시고 저하고 해운대를 산책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네 저 해운대 좋아 합니다” 해서 가자고 해서 산책을 하는데 “목사님 제가 속병이 생겼습니다.” “왜요?” “정말 너무너무 교인들이 저를 괴롭힙니다.” “왜요?” 하여튼 무엇을 해도 그렇게 장로님들이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위로해 주느라 그런 것입니다. “장로님은 장로님대로 교회를 생각하셔서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목사님 생각은 무슨 개코나 생각입니까?” “왜요?” “아니 세상에 장로가 어떻게 추수감사 헌금을 이천 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시비를 걸려고 그런 것은 아니고 위로를 해 주려고 그런 것입니다. “아니 뭐 가난하면 그것도 큰 돈 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목사님 가난하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부산시내에 빌딩이 두개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어떤 인간입니까?” 이것은 기본적으로 인색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묻을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 온 환경이 있기 때문에 워낙 가난한데 자수성가해서 돈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 인데 이름만 대면 다 아는 한국의 모그룹 회장이었답니다. 그 회장의 아들이었는데 외국에 출장을 가니까 당연히 제일 좋은 호텔을 얻어 주고, 작은 방에서 못 잡니다. 왜냐하면 외부에서 손님이 오거나 할 때 격이 떨어지니까...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이백만 원, 삼백만원짜리 방에서 잡니다. 그런데 직원이 가보니까 팬티, 양말을 라지에이터 위에 널어놓았더랍니다. “회장님 왜 그러십니까? 하나 사 입으시든지 세탁에 맡기면 그 다음날 가져 올텐데” “우리 아버지가 이러셨거든... 이것이 내가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안돼.” 세탁비를 보면 이집 세탁비가 우리 백화점에서 이 팬티 하나 값하고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라 온 사람이면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교회의 장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은데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인색한 사람도 우리 형제입니다. 우리 지체입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섬겨 주어야 합니다. 직장에서는 그런 사람을 무시해도 교회에서는 무시해서는 안 되고 365일 따라 다니면서 밥값 한번 안 내도 따뜻하게 사랑하고 계속 먹여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도자는 하지 마십시오. 본인도 괴롭고 보는 사람도 괴롭습니다. 리더쉽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스개 소리로 당회에서 마지막 인선작업을 여러 차례 회의 하고 결함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 “아무개 어떻겠습니까? 당회원 여러분?” 그러다 마지막에 물어 보는 것이 “밥값은 냅니까?”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인색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마지막으로 물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지도자가 되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로 머무르면 됩니다.
네 번째 디모데전서 3장 8절입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 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디모데전서 3장3절입니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네 번째 피하여할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더러운 이를 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더러운 이’ 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는 이익입니다. 이익이 무엇입니까? 정당하게 사업을 하거나 장사를 해서 남기는 이익금이 ‘이’입니다. 또 사업을 해서 ‘이’를 남기지 않아도 어떤 일을 해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면 그것은 명예의 ‘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그 ‘이’가 깨끗한 ‘이’여야 합니다. 세금을 탈세해서 축적한 ‘이’, 세법을 피해 편법을 사용해 얻은 ‘이’, 재판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습니다만 이번에 한판 붙었는데 어떤 사람이 외국에 회사를 만들어 놓고 한국에는 사무실 하나만 얻어 놓고 그리고 엄청난 일년에 1조 가까이의 돈을 사업을 해서 매출을 했으면서도 세금을 4,000억 이상 안 내서 국세청에서 적발이 되어 고발이 들어갔습니다. 4,000억이라고 제가 들었습니다. 미국같은 경우 그 정도가 되면 그 사람은 그냥 몇십년 형입니다. 인생으로 다시 재기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렇게 세금에 대해서 무서운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남자가 바람을 피고 나쁜 짓을 하면 인간이 참 못됐군 이정도로 끝나지만 세금을 떼어 먹으면 사회에서 추방하고 영원히 매장시켜 버려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있던 회사 하나가 공중분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는 조세정리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사업을 하다 보면 너무 어려워서 조금씩 이렇게 하고 세무조정도 하고 이렇게 사는 거죠” 하십시오. 그런데 교회의 지도자는 되지 마십시오. 그것이 사업에서 살아남는 법이라고 생각을 하고 가끔은 목사인 저를 불러서 목사님은 현실을 모른다고 가르치려는 사람이 있는데 제가 언젠가 한번 혼내겠습니다. 그렇게 목사가 간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떻게 목사가 이야기를 하면 머리가 숙여져야지 “목사님은 뭘 모르셔서 그러는데” 라며 가르치려고 합니까? 예수님이 오셔도 그런 말 태도로 하겠습니까? 저도 사회생활을 할 만큼 했고 장사도 해 보았습니다. 그런 말 태도가 어디 있습니까? 목사님은 현실을 모르셔서 그러는데... 얼마나 현실을 잘 아십니까? 그러면 제가 진리에 대하여 설교할 때 여러분 항상 진리의 창으로 찌르면 찔림을 당하고 피 흘리고 회개해야지 현실의 방패로 막습니까? 그러면 교회에 왜 나오십니까? 친구들 있는 곳으로 가시지... 그러나 세법이 불합리 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리고 정직하기가 너무 어려운 요소가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쩔 수 없고 자신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고 이 정도는 주님도 양해 하시리라 생각되면 건전사회가 될 때까지 하십시오. 저는 안 하겠습니다. 그 대신 그렇게 하시는 동안에 많은 덕을 보시는데 그 덕으로 만족하고 교회에서 지도자는 하시지 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지도자가 되는 순간에 많은 세상 사람들이 들여다봅니다. 몇 년 전에 신문을 보면서 저는 이렇게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성격이어서 보도를 접할 때도 미디어와 재야의 정보를 섞어서 섭취하려는 사람인데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사기를 하고 횡령을 하고 이런 것을 낼 때 아무개 장로 이렇게 내는 것이 이해가 안 갑니다. 목사를 내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목사 자체가 성직이지만 직업이니까... 아무개 사장하고 낼 수 있는데 장로는 사회적인 지위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회사에 가면 부장이고 집에 가면 아빠인데 교회 장로는 교회법을 이야기할 때나 장로 이지 일간 신문지에 장로라고 이름을 내서... 그것도 좋은 일에는 그런 것을 안 냅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왜 이렇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가 된 사람은 더러운 ‘이’를 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더러운 ‘이’ 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윤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사업을 하고 돈을 버는 것 그런 것은 안됩니다. 그러면 그런 것이 무엇입니까?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윤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사업을 하고 돈을 버는 것, 제가 ‘자네 그 길을 가려나’에서 썼는데 실제로 제가 목사님에게서 들은 이야기 인데 그 교회 여전도회 회장 직업이 미군 기지촌에서 창녀 포주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여전도회가 될 수 있는지 그 사람도 자기 직업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와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십일조도 꼬박꼬박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때는 저도 젊은 나이였지만 과연 그 십일조를 주님이 의미 있게 생각하실까? 왜냐하면 돈을 버는 방식에 대해서 주님이 동의를 안 하시는데 그 십일조가 하나님께 열납될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안됩니다. 사람을 속이고 이렇게 해서 사업을 하고 돈을 버는 것 옳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피눈물이 나도록 엄청난 고리대금업을 해서 그렇게 하는 것 옳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수입 자체가 정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직업에 귀천이 없는데 그것이라고 해서 먹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십시오. 하는데 지도자는 되시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특별히 교회를 상대로 해서 사업을 하게 될 때에는 가슴에 깊이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교회를 상대로 물건을 납품한다든지 공사를 한다든지 아니면 기계를 설치 해 준다든지 해서 댓가로 돈을 받을 때에는 교회를 상대로 과도한 이익을 남기려고 하는 것은 탐심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무조건 공짜로 하라고 하는데 저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의 원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게 교회와 거래 하여야 하고 헌신된 마음으로 할 수 있어야지 하나님이 그 사업에 복을 주십니다. 거기에 어떤 이익이 개입이 되는 것은 안 됩니다. 옳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설교하면서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서로 사람마다 건축위원장 하고 싶어 한다고... 왜 그렇게 힘든 일을 하려고 하나 했더니 그 수많은 업자들에게 받는 리베이트 때문에 그렇게 건축위원장 자리를 탐내더라 라는 것입니다. 전부 그런 사람들 절대로 거듭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거듭난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그럴 수 있겠습니끼?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다섯 번째 디모데전서 3장8절입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여기에서 핵심은 일구이언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업과 관련해서 말을 덧붙이자면 교회하고 거래를 할 때에는 손해는 보지 마십시오. 그러나 어디에 가서도 많은 이익은 남기지 마십시오. 아주 조금 이익을 남기고, 아예 이익을 남기지 않고 봉사하면 더 좋습니다. 그러나 손해를 보는 것은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더 큰 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는 말의 진실성이 없는 자들하고는 이야기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지도자가 되면 안 됩니다. 누가 이야기 하는데 “우리 교회에서는 재직회 때마다 전 과정을 녹음 합니다.”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몇 시간씩 하는데 녹음을 합니까?” "왜냐하면 꼭 다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치를 해 놓고 녹음을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일구이언 하는 사람들에게 하도 고통을 받고 질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입 가지고 두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도자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교회도 나오지 말라는 이야기 입니까? 나오십시오. 아무 문제없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잘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되지 마십시오. 지도자는 한번 말을 뱉었으면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시인할 줄 알고 깨끗하게 승복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8절입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인 박인다는 것은 습관적으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억지로 술을 마시고 그 다음에는 있으니까 마시고 세 번째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네 번째는 술이 사람을 마시고... 그렇게 해서 술에 인 박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지도자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술만이 아닙니다. 요즘 피해가 굉장히 많습니다. 엊그제 신문에 보니까 40세가 넘은 50세 가까이 된 사람이 게임중독에 빠져서 휴일이면 9시간씩 컴퓨터에 매달려서 거의 미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런 잘못된 습관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 지도자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청년들이 뜨끔 할 것입니다. 여기서 집사도 못하겠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목사님 컴퓨터에 게임이 있어 재미있어서 이렇게 빠지는데 그러면 교회도 나오지 말라는 말입니까? 나오십시오. 컴퓨터에 재미가 빠지니까 더더욱 교회에 나와서 말씀에 재미를 들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도자는 되지 마십시오. 청년부 교역자들 여기에 계신지 모르지만 절대로 구역장이나 팀장 이런 일꾼을 그런 사람으로 세우면 안 됩니다. 음란물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습관적인 사람들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 범죄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지도자 세우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런 것 보는 사람은 절대로 지도자가 되지 말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직업인 사람도 있습니다. 음란물 심의 위원회에 있는 어느 집사는 아침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그것만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녁에 퇴근할 때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토할 것 같은데 그것이 직업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것을 정신 차려서 들여 다 보는 동안에 청소년은 걸러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직업인데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다음에 직업을 얻을 때에는 다른 것을 얻어 보십시오. 그것 말고... 그러니까 그런 잘못된 습관에 인 박인 것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이 습관은 운동이나 스포츠, 오락 이런 것들에 대한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잠깐 드리고는 명색이 그래도 안수집사인데 감쪽같이 사리지는 데 한 달이면 몇 번씩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어디에 갔나 했더니 텔레비전에 봄볕에 경마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뉴스 하는데 거기에서 경마표를 들고 와와 하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잘못 뽑으면 안 됩니다.
III. 결론
새로 믿은 자, 싸움 잘 하는 자, 인색한 자, 더러운 일을 탐하는 자, 말에 진실성이 없는 자, 잘못된 습관에 인박힌 사람은 피하시기 바랍니다.
흔들리지 않는 섬김을 위하여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