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들
(201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11월 5일
목 차
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 2013.10.21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
2. 말없이 섬기며(막14:1-9) 2013.10.22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4
3. 단 한사람의 증인(요19:32-34) 2013.10.23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8
4. 울며 누구를 찾느냐(요20:15) 2013.10.24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2
5. 비참한 처지는 영광의 기회입니다(요9:1-7) 2013.10.25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5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들 1 (2013.10.21.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녹취자 : 김세나
우리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부족한 모든 것들을 마지막에 추적해 들어가면 거기에서는 결국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베드로가 만나는 이 장면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치명적인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요한복음은 20장에서 끝나면 딱 맞는 성경입니다. 그런데 21장이 부록처럼 덧 붙여져 있고 이것은 순전히 베드로, 한 사람을 회복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회복시키심으로써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배반하였던 이 사람이 어떻게 모든 사도들 위에 높임을 받아서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지도자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21장은 복음서 전체와 그리고 이후에 펼쳐지는 사도행전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 4개의 마지막을 이렇게 실패한 사람을 불러서 그래서 다시 회복을 시켜 하나님이 그를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지도자로 삼으신 사건은 그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아주 심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복음을 훌륭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시다시피 베드로는 모든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일치하게 부인하였던 사람이고, 베드로는 자기 동료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뿐 아니라 죽는 데까지라도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호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갔지만, 그러나 멀찌감치 따라갔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이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났는데, 그때까지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개인적인 대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없이 어디에서 준비하셨는지 숯불을 피우고, 거기에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또한 생선도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렇게 식탁을 준비하며 제자들을 기다리셨습니다. 모두 침묵 속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밥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가족관계, 형제 됨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밥을 먹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에 있었던 진실한 관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의 마음은 양심으로 요동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해 주시고, 실제로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얼마나 오래도록 신실하게 사랑하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 분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같이 죽는 데까지 따라가기는커녕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양심이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부인하였느냐? 네가 죽는데 까지 라도 나를 따라 오겠다고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이렇게 물으셨다면 아마 시몬 베드로는 그 질문 자체에 대해서 깊이 절망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 할 말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멀찌감치 서 따라가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것에 대해서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변명을 한들 사람을 향해서는 변명이 가능하지만 어떻게 완전하신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 앞에서 변명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그렇게 물으시지 않으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범죄 한 베드로는 마음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한 양심의 가책이 요동치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마음에는 베드로가 행한 이 잘못에 대한 기억이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베드로를 바라보시면서 이 아이가 사실은 요한의 아들 시몬이었고, 내가 그를 불렀고, 그리고 그가 나와 함께 하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사랑한 사람이었는가.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에 있었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추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록 실패했지만, 이 베드로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남아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시기 위해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책 속에서 ‘신자의 마음속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주님을 향해서 살고자 하는 착한 의지가 사라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는, ‘죄를 지을 때에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착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와 불순종하고자 하는 의지 두 가지가 함께 싸우는 것이지, 그래서 후자가 이긴 것이지 전적으로 하나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는 이 질문에 위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시나이다’ 이것이 얼마나 진실한 대답이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네가 나를 사랑하는데 왜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느냐, 이렇게 물으시면 베드로는 대답할 말이 없었고, 주님은 그 두 가지 모순에 대한 어떤 변명을 기대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셨을 때,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십니다. 제가 비록 주님께 불순종하였지만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속에 당신을 향한 사랑을 일깨워 주시고 싶으셨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너를 구원하였고 네가 나의 사도이고 너의 갈 길은 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결국 허물 많은 너를 내가 예루살렘의 첫 번째 지도자로 삼으마. 그러니 너는 네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나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일깨워 내가 세워준 그 자리로 돌아가라’고 베드로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침체에 빠지고 신앙이 희미해지면 수많은 문제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사실은 그 문제라고 하는 것이 진짜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깊이 캐 들어가 보면 결정적인 것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많은 상급을 주셔서 항상 평탄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그러한 좋은 길만 걸어가도록 만들어 주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한 사람들은 산속에 숨어 있어도 시련의 길이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을 주실 때 사명도 함께 주시지 즐거워하라고 사랑만 주시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평탄한 길을 걸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항상 그들은 시련의 길을 가야 했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기도 하였고 혹은 하나님이 주신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려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멀리 떠나고, 그리고 핍절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속을 두드려 보면 거듭난 여러분의 마음 안에는 우리 주님을 향한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일깨우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조용히 기도하며 예수님의 그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모든 불만족과 고통은 사실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의 부족이나 혹은 환경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 마음이 무엇인가 잘못된 것과 섞여 있고 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어렵고 가난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에도 여러분이 잘 견디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로부터 최고의 신앙의 고백을 들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모든 사도들이 횡설수설 할 때 그 시몬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 이름을 시몬이라 하지 말고 베드로(반석)라 하라. 그 반석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리라’ 이것은 사실 베드로를 교황 삼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로 베드로의 그 반석과 같은 고백을 기초로 삼아 그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의 시몬은 예수님이 버리라고 하신 이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묻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맨 처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했던 그 때를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위대한 사도로서가 아니라, 요한의 아들인 아주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오늘 예수님 앞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 그리고 하나님의 큰일을 하는 사람, 그리고 이런 저런 직분을 맡고 사람들에게 존중히 여기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매일 매일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힘입으며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이라고 보고, 그렇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수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고 그리고 여러분이 수없이 많은 기도제목이 있는 것 같아도, 마지막에 그것은 하나로 수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나빠 보이는 것들도 사실은 우리에게 감사의 조건이 되고 우리에게 나빠 보이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는 정말 행복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경회 기간을 통해서 새벽마다, 저녁마다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그리고 사랑입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을 이전보다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십시오’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실패하고 스스로 예수님 앞에 나아올 수 없는 이 시몬 베드로, 정확히 말하면 요한의 아들 시몬을 찾아 오셨습니다.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이 실패한 요한의 아들 시몬의 마음을 두드릴 때 이는 자기 안에 있는 이 고백을 주님 앞에 쏟으며 다시금 주님을 사랑할 결심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실패한 베드로를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의 위대한 지도자로 하나님이 다시금 세우신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을 새롭게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들 2 (2013.10.22.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2.말없이 섬기며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 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막 14:1-9)
녹취자 : 김세나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베다니 나병 환자의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신 것으로 나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당시 나병은 율법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현재 나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이 방문하실 수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 사람은 나병에 걸렸다가 나중에 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고쳐져서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살기를 허락을 받았고 그래서 예수님이 이 가정에 방문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 나오는 시몬이라는 사람 이름이 그 당시 아주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이 사람은 혹시 나사로의 친척이거나 혹시 아버지가 아닐까 하고 추측을 하지만, 무슨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이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이 예수님을 자기의 집에 초청한 것은 아마도 예수님이 그 나병을 고쳐주셨기 때문에 감사해서 예수님을 초청한 것이라 해석을 합니다. 가능성이야 풍부하지만, 정확하게 그것이 근거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들이 상상에 맡길 뿐이지, 성경은 더 이상의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으로서 비난의 표적이 되셨던 예수님을 자기의 집에 모셔서 그래서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는 것은 초청한 사람, 나병 환자 시몬에게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의 표적이 되고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이단처럼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다 계산을 한 시몬이 예수님을 자기의 집에 초청하였다고 하는 것은 참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주인공은 베다니의 나병 환자 시몬이 아니라 거기에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섬겼던 한 여자가 바로 이 본문의 주인공입니다. 이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식사 하실 때 와서 향유를 부어 예수님을 섬겼고, 이것은 얼마나 고귀한 섬김이었는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여자가 온 천하 어디에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기억되리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의 주님을 향한 섬김의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도 매우 유용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오늘날은 조금 섬기고 많이 자신이 드러나기를 바라고 또한 아주 작게 봉사하고도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높여지기를 바라는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 사건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진정한 섬김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보여줍니다.
제일 먼저 이 여자의 섬김은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온 섬김이었습니다. 누가 이 여자에게 예수님을 이렇게 이렇게 섬기라고 강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온 섬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타율적이고 억지로 지어진 십자가 같은 섬김이 아니라 스스로 예수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지를 알고 섬긴 그러한 봉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 여자로 하여금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값진 섬김을 다하게끔 만들었겠습니까? 틀림없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마태복음 혹은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기사를 미루어 볼 때, 이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용서를 받은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이 여자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와 주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깁니까? 돈 많은 사람이나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크다는 것을 안 사람, 십자가의 사랑에 깊은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섬기기 마련입니다.
두 번째로 이 여자의 섬김의 특징은 말이 없는 섬김이었습니다. 이 긴 사건의 기록 중 이 여자의 대사는 하나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또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의 이야기는 모두 등장하고 시몬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그러나 이 여자의 대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침묵하는 가운데 자신의 확신을 따라서 주님을 섬겼을 뿐입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일을 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보다 말이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매우 슬픕니다. 왜냐하면 일을 많이 하면서도 말이 없어야지, 작게 일하면서 말을 많이 만들어 함께 섬기던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을 실족하게 한다면 때로는 그 일은 아니한 것만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대부분 교회가 시험에 들 때 주일날 잠깐 교회 나왔다가 얼굴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시험에 들게 된 적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시험을 일으킬 힘조차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주 교회에 얼굴을 보이고 이 일 저 일을 하면서 왔다갔다 움직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일은 많이 해도 기도는 많이 해도 봉사는 많이 해도 말이 없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항상 어려움들을 기도 속에서 이겨내고 사랑으로 극복해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게 되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인배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모아 편을 가릅니다. 그런데 군자는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 한 뜻이 되게끔 만듭니다. 이렇게 침묵하는 가운데 사람들을 주님을 위해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사람,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섬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 번째로 이 여자의 섬김은 매우 소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 바친 섬김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향유를 가지고 와서 그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 광경을 보면서 화를 내면서 서로 말하기를 ‘어찌해서 이 여자가 이 향유를 쓸데없이 낭비하는가. 이 향유를 만약에 시장에 내다 판다면 300 데나리온 이상은 받을 것이고,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이 여자를 책망하였습니다. 아니, 오늘 사람들이 하는 말로 이 여자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섬기는데 제자들이 보태준 것이 있습니까? 왜 남의 일에 나서서 이 여자를 책망하고 있었겠습니까? 300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들이 받는 300일의 품삯이었으니까, 쉬는 날 하루를 제외한다고 치면 1년 치 수입이었습니다. 오늘 그저 막일 하는 사람들이 하루에 한 10만 원 정도, 8만 원 정도 번다고 치면 이 향유는 2,400만원에서 3,000만원 가치가 있는 향유였습니다. 그것을 식사하시는 예수님께 한 번에 부어 버렸으니 이 사람들이 낭비라고 말하는 것도 일리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해 주신 그 은혜와 그 놀라운 사랑이 너무 컸기 때문에 이 향유를 부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이 여자의 이 향유는 이 여자가 일평생 모아놓은 재산의 전부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께 한 번에 부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이 얼마나 놀라운 헌신입니까? 교회에서 보면 교회에도 자주 나오고 말도 잘 하고 열심히 섬기지만, 절대로 물질적으로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헌신이 아닙니다. 이 여자는 자기의 소중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거기에 그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고 그것이 발까지 흘러내려왔습니다. 그래서 그 발을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씻겨 드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교회의 중요한 일꾼을 뽑을 때마다, 이번에는 그렇게 강조해서 설교한 기억이 안 납니다만, 그 분의 신앙이나 인품, 가정, 모든 것을 보면서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물질로서 헌신하지 않는 인색한 사람들은 절대로 지도자로 뽑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물질을 잘한다 치면 신앙이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물질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교회를 진실하게 헌신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우리는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 액수가 얼마인지 우리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성향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질에 대해서 아주 심하게 인색한 성향을 가진 사람을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무시하지 않습니다. 존중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그리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되지 말라. 그렇게 물질이 아까운 사람들은 그저 지도자 아래에서 지도자의 인도를 따르며 그렇게 제한된 범위 안에서 자기의 섬김을 다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소중한 향유를 주께 부음으로써 자기의 사랑이 이제는 세상의 물질에 있지 않고, 주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이 여자의 헌신은 옥합을 깨뜨린 헌신이었습니다. 옥합에 가두어져 있는 동안 이 향유는 어떠한 향기도 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순간 온 집안에 이 향유의 향기로 가득하게 되었고 그것은 우리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었으니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당신이 잠시 당하게 될 십자가의 고난으로 말미암는 죽음에 대한 장사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이 여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염두 해 두면서 이 일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당신에게 기름 붓는 이 여자의 헌신이 결국 당신의 죽음을 예비하는 장사의 한 수단으로 하나님께 열납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이 복음이 전파되는 어느 곳에서든지 그를 기억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무엇입니까? 복음이 전해지는 곳 마다 신앙의 신수가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그들도 따라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지만 당신의 죽음을 예비하듯이 이렇게 향유를 부어 당신께 바치는 이 여자의 섬김을 고귀하게 여기셨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짐짓 가난한 사람들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여자를 꾸짖는 제자들을 나무라시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만 이렇게 나를 섬길 수 있는 때는 이 때 밖에 없다’라는 의미로 말씀하시면서 이 여자의 편을 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위해 깨뜨려지는 사람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렇게 깨뜨려짐으로써 이 세상과 자기 보다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게 만들어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네 가지 섬김, 자원하는 섬김, 말이 없는 섬김, 소중한 것을 바친 섬김, 옥합을 깨뜨린 섬김,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동기에서 비롯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자기 같은 죄인을 용서하고 새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사랑,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이 여자의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어제 새벽,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한 질문을 하셨다면,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통해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신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이 여인처럼 아름다운 섬김으로 돌아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도록 은혜를 달라고 주께 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들 3 (2013.10.23.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3.단 한 사람의 증인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2-34)
녹취자 : 김세나
우리가 읽은 이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군인들이 와서 예수 그리스도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온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확인 사실 한 것입니다. 즉,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분명하지만 확실히 죽이기 위해서 그의 옆구리에 창을 찔렀고 거기에서 피와 물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35절에 보면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원래 이 증언이라는 말은 법정에서 사건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재판의 영향을 주기 위해서 본대로 자신이 목격한 대로 재판장에게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그 현장을 목격하였기에 오늘 이렇게 그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마태복음 25장 26절에 보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게 기도하고 내려오신 후 잡혀 가실 때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모두 다 도망갔고 그래서 그 성경 구절에는 예수께서 잡히실 때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기까지 그를 가야바의 뜰에 이르기까지 따라왔습니다만, 결국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기 전 이미 예언하신바와 같이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 홀로 고통을 당하며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마리아와 그리고 글로바의 아내, 여인들이 십자가에 따라오기는 하였지만 예수님이 사랑하였던 제자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어떻게 그 중 한 사람인 요한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목격하고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가 쏟아지는 것까지 생생하게 보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찌른 창은 폐와 옆구리를 뚫고 심장을 터뜨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물과 피가 모두 쏟아져 나오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고난의 광경을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복음서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십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네가 오늘 나와 낙원에 있으리라’ ‘보소서 여자여 아들이니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를 버리시나이까’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고 죽으십니다. 그 때 세 번째 말씀인, ‘보소서 여자여 아들이니이다’ 할 때에는 그 때 사도요한이 그 십자가에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그가 당신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면서 그 사랑하는 제자에게는 당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25장 26절에 나오는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하는 기록과 그 십자가 아래에 사도요한이 있었다는 성경의 기록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요한이 다른 모든 사도들과 함께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가 그 제자들 중 유일하게 다시 십자가 앞으로 돌아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요한이 십자가 앞으로 다시 돌아오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그렇게 그날에 있었던 사건을 재구성하지 않고는 제자들이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하는 마태복음의 기록과 오늘 여기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가 쏟아지는 광경을 보았다는 이야기, 십자가에서 남기신 예수님의 세 번째 말씀을 받든 그 기록을 조화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모든 제자들 중 유일하게 이 요한은 자신이 예수 버린 것을 깊이 뉘우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왔다고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왔을 때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기는 하였지만 운명하지 않고 의식이 있으셔서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왔을 때 이 요한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다른 모든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 버리고 도망간 것을 깊이 후회하였을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사람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셨고 특히 나이 어린 사도요한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식탁을 나누실 정도까지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아마 이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체포되어 가실 때 창칼을 들고 나타났던 무서운 로마의 군인들을 보면서 아마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체포되어 끌려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났고 그는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천국의 복음을 가르쳐 주셨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기로 다짐합니다. 이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달려갈 때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던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지 세 시간 만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고 세 시간 동안 어두움이 지속된 후 죽으셨으니 오전 9시에 매달려 오후 3시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 여섯 시간 사이에 언제 일곱 마디의 말씀이 주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마지막 남기신 ‘내가 다 이루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은 3시 직전에 하셨을 가능성이 높고 앞에 있는 다섯 마디의 말씀은 그 9시부터 3시 가까운 어느 시간에 배치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 다섯 마디의 말씀을 3시간 동안 모두 말씀하시고 긴 침묵이 흐른 후 죽음을 눈앞에 놓으신 그 때에 ‘다 이루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두 마디의 말씀을 남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얼마 되지 않아서 충분히 의식이 있으시고 십자가 아래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력이 있을 때에 돌아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의 뜰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가득 모였습니다. 더욱이 이때는 유대인의 최대 명절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예루살렘에 모인 이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순순히 죽을 것이냐, 기적을 일으키고 스스로를 구원할 것이냐 하는 것은 최대의 뉴스거리였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고, 그리고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였던 빌라도는 개인적으로는 예수님이 무죄한 사실을 확인하였지만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도록 예수님을 내어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 가셨고 거기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두 명의 다른 강도와 함께 매달려 십자가의 사형이 확정된 것을 보면서 모였던 수많은 유대인들은 이제 골고다 언덕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이 때, 어린 사도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생각하며 예수님을 혼자 체포되어 처형되도록 내버려두었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요한이 가는 길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그 골고다를 내려오고 있었을 것이고 인파를 해치며 그 요한은 사람들을 거슬려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나누었던 사랑의 기억들이 이 사람 요한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로 돌아가게 만들었고, 그래서 이 요한은 사도들 중 유일하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그 때에 예수님을 뵈온 유일한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잠시 불신앙으로 그리고 핍박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버렸지만 그는 즉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십자가 그 아래로 돌아왔을 때 이상하게 예수님과 나눈 또 다른 대화들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때 사도요한의 마음은 얼마나 가책으로 방망이질 하고 있었겠습니까? ‘너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일생동안 너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주신 예수님을 버렸다. 그리고 예수님 홀로 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버려두고 너는 너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배반하였다’고 하는 양심의 가책이 그의 마음을 심하게 두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로 돌아온 이 제자에게 어떠한 말로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이 요한에게 부탁하심으로써 예수님이 비록 당신을 버리고 멀리 도망갔으나 그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옳고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신앙이 식어서 혹은 은혜가 떨어져서 혹은 이 세상의 유혹에 이끌려서 잠시 주님을 배반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고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요한이 예수를 버리고 멀리 도망갔다가 마음에 요동치는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왔던 것처럼 우리도 또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특히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리고 사도들이 모였을 때 이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창에 찔려 물과 피를 흘리시는 광경을 목격했던 유일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어 끌려가시면 죽는 데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리라고 장담하였던 베드로는 요한에게 마지막에 어떻게 계셨는지 설명을 들을 때까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찬양)
새벽 닭 울 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 텐데
아마 모든 제자들 중 베드로는 유일하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시는 광경을 목격하였던 요한의 간증을 들을 때마다 그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죽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계십니까? 아니면 이 요한과 다른 제자들처럼 주님이 고난을 당하실 때에 멀리 떠나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잠시 예수를 버렸던 요한이 회개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을지 모르는 핍박과 커다란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매달려계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갔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요한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예수를 버렸지만, 잠깐 동안 주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였지만 즉시 깨닫고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갔던 것처럼 여러분도 이렇게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된다면 주님은 언제나 거기에서 여러분을 맞아 주실 것입니다. 당신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당신께 돌아올 때 그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자기의 육신의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 예수님께 모두 돌아와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들 4 (2013.10.24.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4.울며 누구를 찾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요 20:15)
녹취자 : 김세나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첫 번째로 나타나신 사건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아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금요일에 죽으셨고 그리고 토요일은 유대인의 규례에 의해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지난 그 첫날 새벽 일찍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와 보니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았고 그래서 이 여자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먼저 제자들에게로 달려가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말하되 ‘사람들이 돌아가신 주님을 어디에 옮겨두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이 입으셨던 세마포는 거기에 개켜 놓았는데 예수님은 없으셨습니다. 결국 두 제자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마리아 홀로 남았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는데, 울면서 허리를 굽혀 다시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누군가가 그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천사였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 마리아는 ‘돌아가신 우리 주님의 시신을 어디에 옮겨 두었는지 내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하고 돌이켜 보니 예수님이 서 계셨는데 아직 예수님인지 잘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이나 막달라 마리아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확고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마리아는 틀림없이 그 분이 동산을 지키는 사람인 줄을 알고 ‘만약 당신이 우리 예수님의 시신을 어디에 치웠으면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그 분의 시신을 가지고 가야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마리아야’ 하니 그때서야 마리아는 그 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붙들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그러면서 ‘내가 곧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전하거라.’ 하고 예수님이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큰 기쁨 속에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기도 하셨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사건의 첫 번째 목격자인 막달라 마리아의 첫 번째 일이었습니다.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기왕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시려면 사도 베드로나 여기 나온 대로 요한이나 이런 사람들에게 먼저 보여 주셔서 그래서 사도들이 권위 있게 후세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첫 번째 그 모습을 우리가 뵈옵고 우리가 그 일에 증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해 주셨어야 질서가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작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와서 무덤 속까지 들어가 살필 때에는 천사도 나타나지 않고 예수님도 오시지 않으시더니 이 두 사람이 다 살피고 돌아간 후에야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마치 당신의 첫 번째 모습을 사도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하는 이 여인에게만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막달라 마리아가 달려가서 사도들에게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할 때 겨우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사도들의 그때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는 무엇인가 모순처럼 보이는 이 사건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첫 번째 부활의 모습을 유명한 사도, 큰 권능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인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으시고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은 죽었어도 시체를 찾으러 온 이 여자,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의 시체를 찾다가 오히려 예수와 한 패로 인정을 받아 커다란 위험을 당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덤밖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울고 있는 이 여자, 마리아에게 첫 번째 당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어쩌면 이 여자는 심각한 죄를 지은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이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해 주셔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 여자였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옥합에 가득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 부었던 여자였습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그래서 열두 사도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도망간 그 때에도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 아래에 서 있던 몇 명 안 되는 여인 중 한 사람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와 같은 신앙의 사실은 계속됩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들을 만나 주십니까? 어떤 사람들에게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영광을 부여주시겠습니까? 당신의 은혜로운 모습을 어떤 사람들에게 보여 주셔서, 이 여자처럼 절망 속에서 예수님의 시신조차 사라져버린 무덤에서 통곡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쁨을 주시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바로 다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찾는 사람,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찾는 사람에게 당신의 이 영광을, 은혜로운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 거의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예배드리고 그리고 하나님을 때로는 섬기기도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 중 일부를 우리 하나님께 드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신앙에 있어서 결핍되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주님을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간절한 태도, 주님을 만나야 되겠다고 하는 거룩한 갈망,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의 은혜 아래 다시 돌아가야 되겠다고 하는 간절한 몸부림,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갈망의 태도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간절히 당신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말씀하셨고,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떡을 달라는 자에게 돌을, 생선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전갈을 주실 리가 없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으로 가득 찬 한 마디의 기도는 그러한 갈망이 없는 수천 마디의 기도보다도 더욱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갈망을 간직하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그 갈망과 사랑이 모든 신앙과 기도, 예배, 섬김, 자신의 순종하는 삶, 이 모든 것의 동기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정말 하나님이 바라는 신앙생활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쏟으며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홀로 두지 마시고 고아와 같이 우리를 버려두지 마시고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하나님을 섬기는 이 일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런 저런 어려운 일들을 우리가 해결할 능력이 없으니 하나님이 꼭 부활의 능력으로 이 일들을 이루어 달라고 우리의 마음을 쏟으며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기까지 매달려 기도하던 때가 얼마나 드믄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아무런 갈망이 없이 그저 교회에 나왔다가 그리고 아무런 주님과의 만남도 없이 돌아가는 사람들은 물론 주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러한 사람들을 보면서 눈물이 나오지 않는 우리들도 주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오늘 이 여자는 간절히 주님을 찾았고 그리고 비록 사랑하시는 주님이 다시 부활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예수님은 떠나 가셨어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이 여자의 마음 가운데 남아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안식 후 첫날, 엄밀히 말하면 아직 어두웠기 때문에 사실은 안식일이 끝나지 않은 그러한 때에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의 시체를 찾아 왔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하는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이시지만 당신은 떠났어도 이 여자의 마음속에 당신을 향한 사랑이 있어서 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올라오는 이 여자를 바라보시면서 그리고 예수의 시신조차 사라진 무덤 앞에서 통곡하며 우는 이 여자를 보면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정말 이 세상에서 이 여자와의 만남의 순간부터 지금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활의 영광 가운데 있는 줄도 모르고 예수님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눈물 흘리고 있는 여자를 보시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죄인이라고 일컬어지던 이 비천한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첫 번째로 목격한 사람ㄹ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당신을 갈망하는 사람,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보여주시지 않으셨던 당신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절망의 무덤 앞이 변하여 소망으로 바뀌도록 만들어 주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의 삶에 오셔서 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절망 가운데 있던 마리아의 마음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이 밀려들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자신도 또한 부활할 것이라고 하는 영광스러운 소망의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자신이 주를 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였고, 주님이 자신에게 이러이러한 말씀을 하였노라고 담대히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무덤 밖에서 시체조차 없어 울고 있던 마리아같이 절망으로 가득 찬 삶의 상황은 아닙니까? 사면을 돌아봐도 희망이 없는 상황은 아닙니까? 이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 능력의 주님, 모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절망을 소망을 바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새로운 삶으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갈망을 가지고 주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비참한 처지는 영광의 기회입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요 9:1-7)
녹취자 : 김세나
예수님께서 길을 지나가다가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물론 그 때에 제자들도 함께 따르고 있었고, 그래서 제자들도 함께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묻기를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났는데 이것이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의 죄 입니까? 혹은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이렇게 여쭈어 보았습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질문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인간의 불행에 대한 관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인간의 불행을 만나면 그것을 즉시 죄에 대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라고 하는 획일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였던 소경이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의 불행은 죄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부모의 이야기를 끌어들인 이유는 이 사람이 어른이 된 다음에 소경이 되었으면, 죄를 이 사람이 많이 지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보로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겠지만,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은 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불행을 바라보는 관점 가지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 낳을 때부터 소경이 되었으니까 이 아이는 나면서부터 죄를 저질러서 거기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것이라고는 볼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 그렇다면 부모가 죄가 있어서 그것이 자식에게 물려갔구나.’ 또한 얼핏 보면 성경에서 ‘나를 사랑하는 자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겠지만 나를 미워하는 자는 3-4대까지 벌을 받으리라’고 하신 모세의 율법을 보아도 어느 정도 부합하는 해석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발언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인간의 불행에 대한 관점이었고 제자들도 이러한 관점을 계승하면서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이 사람의 불행에 대한 전혀 새로운 해석을 이제껏 듣지 못하였던 새로운 해석을 내 놓았습니다. 그것은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것은 죄 때문이 아니다. 더욱이 이 사람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려 하는 것이다.’고 완전히 새로운 해석을 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이 당하게 된 불행이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해석을 예수님께서 내놓으신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구약에 나오는 성경의 많은 기록들이 설명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한 유대인의 관점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해석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당하고 있는 불행이 어느 관점에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어떠한 커다란 불행이 죄와 상관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지 않습니까? 우선 원초적으로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해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도 소경으로 태어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모든 불행과 고통, 이 모든 것들은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더렵혀진 하나의 징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소위 징후, symptom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콧물이 나고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고 목이 붓고 기침이 자꾸 나면 그것은 하나의 징후입니다. 감기에 걸렸다라고 하는 징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인류가 이 죄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하는 징후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러한 것 중 하나가 인간이 당하게 되는 불만족과 고통, 인간관계의 파괴, 질병, 이러한 것들이 죄의 한 symptom, 징후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피할 수 없는 설명입니다.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고 그리고 이 부모가 어떤 죄를 저질러서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났는지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한 간단하지 않은 것은 그러면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지 않은 모든 사람이 이 사람보다 훨씬 의로운 사람인가, 예수님은 단연코 그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솔로몬 망대가 무너지면서 18명이 깔려 죽는 참사가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공식을 들이대면서 거기에 죽은 사람들은 특별히 죄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때 깔려 죽은 사람들이 죽지 않은 사람들보다 단연코 죄가 많아 죽은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불행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회개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회개할 책임이 더 많다는 것으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것을 죄와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그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실의 의미가 단순히 죄라고 보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이러한 불행한 사람을 통해서 어떤 일을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이 이르렀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사람을 소경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이라고 하는 새로운 해석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지금이야말로 이러한 일을 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계시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이 세상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 드러내야 할 시간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을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일평생 소경으로 태어나서 앞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불편한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고 어느 시대이든지 이러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환영을 받은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당시 장애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구걸이나 하면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8절에 보면 그가 걸인이었던 것을 보았던 사람이 이르러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직업도 역시 빌어먹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근본적으로 이 사람의 인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구걸하면서 사람들의 자비에 기대어 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소경에서 눈을 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을 고치시는 방법입니다. 단순히 우리의 외적인 여건만을 개선시켜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고치시고 우리의 삶의 방향을 본질적으로 고치시는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경에서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그 사람은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해서 씻었더니 내가 보게 되었습니다.’ 아주 정확한 사실을 이 맹인은 유대인들에게 고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한 일이었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이 사람은 이제 나면서부터 소경이었고, 그래서 그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네가 그렇게 앞을 못 보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너의 죄, 네가 너무 어려서 죄를 지을 수 없다면 네 부모가 죄가 많아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자. 이것은 이 사람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자신의 죄 때문이었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혹은 부모의 죄 때문이었다고 손가락질하면서 이 사람을 멸시하였을 때 과연 일평생 소경으로 살아와서 교육도 받지 못하고 길거리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구걸이나 하면서 살던 이 사람에게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겠습니까? 살만한 세상이었겠습니까? 맛깔 나는 세상이었겠습니까? 아마 틀림없이 맛을 잃은 소금 같이 무미건조하고 아무 맛도 없는 고통스러운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이 나타나셨고 제자들이 자신이 일생동안 들어온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 그의 귀를 의심케 하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선언이 들려왔습니다. ‘아니다. 이것은 이 사람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이 이 불행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얼마나 근본적으로 인생의 길을 바꾸시는지 어떻게 하나님이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한 소제로 사용하시려고, 다시 말해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는 도구가 되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이 사람을 이렇게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귀를 의심케 하는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친히 오셔서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며 그의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된 자를 고쳐 밝은 눈으로 아름다운 이 세상을 보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 때 이 사람에게 있어서 세상은 더 이상 불행하고 아무 맛도 없는 우울한 세상이 아니라 살만한 세상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어 새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맛없는 세상에 소금으로써 하신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예수님이 이렇게 이 세상 속에 관심도 받지 못하고 버려져 있었던 한 사람,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찾아 오셔서 그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눈먼 자를 뜨게 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자신도 고침을 받고 새 인생을 살게 되기를 갈망하는 소망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소금으로써 이 세상에 오신 모습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절망과 어두움, 그리고 죄와 고통 밖에는 없었던 사람들의 삶이 소망과 용서, 은혜, 이러한 것들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고, 이러한 점에서 보면 불행하고 고통스러울수록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기적, 용서와 더 놀라운 사랑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바로 이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고 우리는 바로 예수님이 이렇게 이 세상에서 불행과 고통 속에서 있었던 사람들, 삶이 무미건조하고 괴롭기만 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어 자신의 불행을 재해석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게 하셨고 우리에게 바로 이 복음을 들려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소금으로 하셨던 그 일을 뒤 이으며 살게 하신 그 부르심에 충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세상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명의 영역이 되어야 하고 여러분이 이렇게 충실한 소금으로써 살 때에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이 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고 자신의 불행을 죄의 결과로만 알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하시는 위대한 일들을 나타내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여러분이 주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며 여러분 주위에 있는 이렇게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것처럼 불행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여러분 자신이 섬기고 그들의 인생을 바꾸도록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