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할 일군을 부르심
“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태복음 9:35-38)
I. 본문해설
우리들이 읽은 이 성경 본문은 복음서에 있어서 획을 긋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고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 10장 1절을 기준으로 이전까지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학생처럼 데리고 다니시며 가르치신 시기였다면 이제 이 10장에서 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도로 세우심으로 그들을 이 세상에 나아가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이 하시던 일들을 뒤잇도록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신 사건은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의 교회를 통해 이루어질 당신의 지속적인 사역을 보증하는 단서가 되었습니다.
II.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사역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부분은 이렇게 예수님이 제자를 사도로 파송하셨을 때에 어떤 마음으로 파송을 하셨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삼중 사역으로 제시됩니다. 선포하고, 가르치고, 모든 약한 자들을 고치고 돕는 섬김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삼중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생애 중에 계속하신 사역이었습니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설교를 통해 천국의 복음을 능력 있게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말씀을 더 깨우쳐 주어야 할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교육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뜨게 해 주시는 사역이었습니다. 병들고, 주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 가까이 다가가셔서 병을 고쳐주시고,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고, 삶의 문제에 개입하셔서 그들의 육신의 피로를 채워주신 섬김도 예수님의 생애 중 두드러진 사역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삼중 사역은 사도들에 의해서 계승이 되고 사도들에 의해서 계승된 사역은 다시 성령 강림 이후에 이루어진 교회에 전수되어서 그래서 교회가 바로 이 사도성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신 그 일을 뒤이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열린 교회가 창립된 지 16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주일에 이 본문을 설교 본문으로 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 성경 말씀으로 열린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해서는 교회는 생겨난 지 17년이 됐습니다. 1993년 12월 둘째 주일인 12일 날 7명의 성도들과 함께 개척 예배를 드렸고 1년 뒤인 1994년 12월 둘째 주에 창립 예배를 정식으로 드렸으니 그렇게 따지면 16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죠. 1993년도에 저는 신학교에서 선생이 된지 횟수로 5년째 되는 해였고, 학교에 나아가 봉사하고 주일은 지역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섬기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11월 첫째 주로 기억이 되는데 어느 날 잠자리에 들었는데 머리가 초롱초롱하고 잠이 오지 않아서 기도를 하려고 침대 아래로 내려와서 침대 발치에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대게 잠이 오잖아요. 그래서 그러면 올라가 자려고 기도를 시작했는데 더 초롱초롱해 지면서 기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제게 주신 말씀이 생각나게 하신 말씀이 바로 이 구절이었습니다. 성경을 펴 놓고 기도한 것은 아닌데 어느 순간에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고, 그 사람들이 떠오르자 마음속에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 당시에도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있었고, 또 영혼을 섬기고 있었지만 이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직접 교회를 개척해서 영혼들을 찾아서 교회에 채우며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자랄 수 있도록 봉사해야 되겠다라는 강한 압박이 마음속에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의 인생의 계획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면 큰 교회는 차례도 안 올 거고, 또 별로 그렇게 필요도 없고, 100명이나 200명 정도 모이는 자그마한 교회에 가서 목회자로서 평생을 마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는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침까지 기도를 하고 나서 좀 자고난 다음에 간밤에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마음속에 지워버렸습니다. 아마 이것은 그저 내 마음이 기도로 뜨거워진 순간에 일어난 오버하는 생각이겠지. 내 꼴에 무슨 개척이랴. 그 다음날 밤에도 똑같이 그렇게 기도를 할 수 밖에 없게 되었어요. 똑같은 일이 있고 삼일이 그렇게 되풀이 되고 난 후에 우리 집 사람 불러서 아무래도 하나님이 나보고 교회를 개척하라고 그러시는 것 같다 그랬더니 우리 집사님은 너무 뛸 듯이 기뻐하면서 이름은 ‘내가 미리 지어놨다’고 그래요. 그래서 ‘아니 교회를 내가 개척할 생각도 안했는데 어떻게 당신이 이름을 미리 지어 놓냐?’ 그랬더니 ‘아 1년 전에 기도를 하는데 우리가 교회를 만약에 개척을 하게 된다면 이름을 열린 교회로 해야지’ 그런 마음이 기도하는 가운데 들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왜 그러냐?’ 그랬더니 ‘하나님이 하늘을 활짝 열어주셔서 하늘의 복을 부어주시는 그런 열린 교회가 됐으면 참 좋겠다’ 그러고 성경을 찾아보니까 계시록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기록이에요. 그래서 잘됐다 ‘당신이 지어놨다고 하니까 그러면 그 이름으로 하자.’ 그래서 열린 교회가 된 거지. 무슨 심오한 뜻이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열린 교회 간판을 달게 되었는데 12월 첫째 주에 그런 경험이 있고 나서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지인들이 모여서 그러면 우리가 한번 주님의 뜻이라면 기도하면서 교회를 개척해 보자 그러고 11월 15일 날 저녁때 우리 집에 모여서 첫 번째 준비 모임을 갖고, 그리고는 12월 12일 날 교회를 얻어서 수리를 끝내고 의자를 갖다놓고 개척 예배를 드렸으니 번갯불에다가 콩을 튀기는 것 같이 그렇게 빠르게 진행이 되었던 것이죠. 그 예배당을 얻은 자리는 사당역에서 한 300~400m 떨어진 골목길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 옆에 아주 쪼그만 건물의 지하였는데 앞의 교회 두 교회가 거기서 개척을 하다가 문을 닫고 안 되서 이사 간 그 예배당 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갔을 때는 예배당인줄 알 수가 없게끔 아무런 형체가 없어서 우리는 교회가 거기서 하다가 문 닫고 간지를 몰랐어요.
그런데 어떤 성도가 ‘예배에 감격에 빠져라’ 라는 책을 읽고 교회에 전화를 해서 우리 교회를 물어봤대요. 그래서 상세하게 알려주었더니 사당역에 와서 빨간 벽돌로 지은 큰 교회당을 찾았는데 아무데로 없더래요. 지하실에 있으니 그렇게 보일 리가 없겠죠. 그래서 전화를 다시 해서 골목으로 오는데 이상하게 자기가 옛날에 다니던 교회로 자꾸 인도를 하더란 거죠. 그래서 알고 와보니까 자기가 옛날에 다니다가 없어진 교회, 그 교회로 자기를 데리고 가는데 그 교회가 열린 교회였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예배가 시작이 되고 7명이 모여서 첫 주에 예배를 드렸는데, 그 다음날이 월요일이고 새벽인데 생각해 보십시오. 주일에 계속 설교하고 그 다음에 밤늦게까지 집회를 하고 개척한다고 그러고 나서 월요일 새벽이 되었으니 몸이 부서지는 것처럼 피곤했습니다. ‘아이 어차피 가봐야 새벽기도 교인 아무도 없을 텐데 아우 오늘 하루 그냥 잘까, 그러다가도 이게 개시인데 그렇게 하면 되겠나’ 그래서 이제 새벽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예배당에 나왔는데 문이 열려 있어요. 그래서 이상하다 누가 와서 새벽에 문을 열었나 이러고 열어보니까 8명의 교인들이 새벽기도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날 안 나갔으면 그게 무슨 망신이에요. 그래서 가서 새벽예배를 감격 속에 드리면서 열린 교회가 시작이 된겁니다.
정말 열심히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했고, 하나님이 제게 말씀을 주셨을 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열린 교회에 보내주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나는 그 느낌이 굉장히 좋은 건줄 알았어요. 그리고 나중에 사람들이 오긴 오는데 정말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사람들만 계속 왔어요. 그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모습은 목숨을 건 예배였어요. 그 먼데서 지금은 내가 이렇게 힘이 없고 시간이 없어서 오래 설교를 못하잖아요. 예배가 계속 늘어나니까. 그때는 그냥 예배의 시작시간이 있었지만 끝나는 시간은 아무도 모르고 주님만이 아시는 시간이에요. 그래서 어떤 때는 11시에 예배가 시작을 해서 2시 10분에 끝난 적이 있었어요. 그래도 모든 성도들이 시간이 그렇게 간 줄 모르고 예배를 드렸고, 그저 보통 11시에 시작해서 1시 10분에 끝나는 것이 통상적인 예배 시간이었습니다. 그 길고 길게 계속되는 설교, 그리고 그거를 그렇게 끝까지 설교를 듣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경청을 하고 그랬습니다. 계속 성도들이 와서 12월 12일에 개척을 했는데 1월 셋째 주에 30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정말 이게 기도를 해 줄 필요도 없을 정도로 예배당에 올 때에 이미 반쯤은 교인이 되어서 쓰러질 듯이 예배당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교회 와서 믿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은 없고 설교 테이프이나 책을 읽고 곤고한 인생을 살다가 이제 이 교회의 교인이 되기로 결심을 하고 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설교가 그렇게 은혜로울 수가 없었고, 그리고 힘이 날 수가 없었어요. 열심히 받아먹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다 누가 혼자 졸면 설교를 중단하고 혼을 냈어요. 그래도 아무도 웃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진지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러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몰랐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은혜가 떨어져 보니까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비로소 알 수 있을 거 같애. 정말 고생하고 유리하는 사람들, 그리고 목자 없이 오랫동안 살아온 막 되먹은 교인들이라는 거를 많이 깨닫게 해주셨어요.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반쯤 고쳐진 채 교회를 떠났고, 그 중의 어떤 사람들은 많이 고쳐져서 하나님의 새로운 사명을 따라 제 길로 갔고, 일부는 교회에 남아 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막 다루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나면 사람들이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꼭 예수님의 이 마음을 품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어요. 그래서 먼 곳에서도 차를 몇 번씩 갈아타고 교회에 와서 토요일이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했고, 복음을 전하다가 큰 개에게 물려서 쩔쩔 매기도 하고, 그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욕을 먹기도 하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했고 금요일이면 교회 의자를 모두 치우고 은박지를 깔고 전 교인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서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구원의 은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배반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면 갓난애가 무릎을 꿇고 다니면서 휴지를 뜯어서 교인들 눈물을 하나씩 다 닦아주었는데 그게 대학에 올해 들어간 우리 딸이 어렸을 때 한 일이었어요. 세월이 그렇게 많이 흘렀죠. 그렇게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힐 때 어쩌면 사람의 살아온 인생의 과정과 예수님을 믿게 된 모든 경로는 달라도 한 마음을 품게 하시는 것이었어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할 때 품으라고 명령하는 사람은 복수였지만 품게 하고자 지시하는 그 마음은 단수였어요. 사람은 달라도 같은 마음을 품고 주님의 교회와 그리고 성도들을 섬기게 하셨던 것이죠. 그래서 정말 온 마음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래서 그들의 직업은 예수 믿는 거였고, 그들의 생업은 하나님의 일 하는 거였고, 그들의 직장은 교회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렇게 일주일이면 최소한도 주일,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 네 번을 나와야 해요. 왜냐하면 금요일은 금요기도, 그 다음에 토요일은 전도가 여리고 전도가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성도들마다 교회 가까이 이사 오는 게 최고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어요. 왜냐하면 워낙 비쌌거든요. 그래서 서울 변두리에서 방 네 개짜리를 포기하고 교회 가까이에 오면 반 지하에 방 두 개 정도 얻을 수 있을 정도 밖에 안 될 정도로 그래도 마음을 다해서 어쨌든 교회 가까이 오고 싶어 했고, 그리고 성도들이 하나님을 거기에서 섬겼습니다.
물론 그때에도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섬겼던 것은 아니죠. 우리는 언제나 과거를 미화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때에 모든 사람이 그랬고, 그때 있었던 사람은 자기들이 다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얘기하는데 내가 다 아는데 안 그러는 때도 있다는 것을 내가 다 아는데, 그런 때도 있었고 안 그런 때도 있었고, 그런 사람도 있고 안 그런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다만 지금보다는 비율적으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으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마음을 품어 당신의 나라를 섬기는 것을 자기의 업으로 알았으니 이는 그들이 워낙 인생의 벼랑 끝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 이 한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공통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III. 예수 섬김의 동기
A. 버려진 영혼들의 상태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이런 삼중 사역으로 영혼들을 섬기셨는데 그 예수 섬김의 동기를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버려진 영혼들의 상태, 그것을 직시하시는 예수님의 영적 통찰이었어요.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니’ 그랬는데 이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눈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영적인 통찰이에요.
1. 고생하고 유리함
그렇게 예수님이 직관적인 통찰력으로 백성들을 보았을 때 그들은 고생하고 유리하고 목자 잃은 양같이 방황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 주위에는 항상 가난뱅이만 몰려다녔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영혼의 상태를 두고 1차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목자 잃은 양떼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교적인 민족이었습니다. 당시에 유대교가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인 율법사들과 사두개인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 백성들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지도자로 있으면서도 이 백성들의 목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버려진 자처럼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비참한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유리하고 고생한다’고 나오는데 이 고생하고 유리한다라는 단어가 희랍어 성경에는 완료형 분사 수동태 남성 복수로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스스로 고생하고, 스스로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괴롭게 하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이고, 누군가가 그를 버렸기 때문에 버림받은 채로 이리저리 떠돌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일생을 통해 맞서 대적해 오셨고, 사도들에게 큰 권능을 주셔서 제압하게 하신 사단이었습니다. 이 영적인 세력들이 백성들을 붙들고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서 그들은 고생하고 유리하고 목자도 없이 방황하는 그런 양떼들이 되었습니다.
B. 민망히 여기신 마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바라보신 그 마음이 오늘 성경에 ‘민망히 여기신 마음’이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에스프랑크니스테(ἐσπλαγχνίσθη)라고 하는 이 희랍어 단어도 수동태인데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자리가 인간의 심장에 있다고 믿지만,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창자 안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등가번역을 하면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으니’ 라고 번역을 하면 가장 온전한 번역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의 찢어지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 백성들에게 천국 복음을 설교하고, 그들을 친절하게 가르치고, 그들을 섬기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9장은 다른 장보다도 유난히 고통 받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장입니다. 중풍 병으로 고통하고 있는 병자가 고침을 받는 장면이 나오고, 마태라는 사람이 허무하게 세리 노릇을 하면서 예수님도 모르는 체 살아가고 있었다가 주님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묻는 장면이 나오고 딸이 죽었기 때문에 애통하는 아버지가 등장하는가 하면 평생을 앞을 보지 못하고 살던 소경이 눈을 좀 뜨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매달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일생동안 귀신이 들려서 말을 못하고 벙어리가 된 비참한 사람의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이 모든 것을 앞에 둔 이유는 예수님이 당신의 그 큰 능력으로 사도들을 세우실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상황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서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는 바로 그렇게 고통에 얽매여 있는 인간들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 듯 아픈 사랑의 마음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에나 그제에나 하나님이 개척한 때에나 이렇게 교인들이 많이 모인 지금에나 원리는 꼭 같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사랑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은혜를 주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살을 찢고 피를 흘려 구원해 주셨다는 은혜의 감격에 넘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이 마음이 전달됩니다. 누가 말로 설명할 수 없어도 이 마음이 전달됩니다.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그 순간 내게 있던 마음은 이 마음으로 흡수가 됩니다. 그래서 전에는 내 행복을 위해 살던 사람인데 이제는 예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고, 전에는 내가 기뻐야지만 행복한 인생이었는데 이제는 나는 슬프고 고통을 당해도 우리 주님이 행복하면 그것이 복된 삶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지금처럼 이렇게 큰 예배당 아니고 작은 지하실의 공간이었지만 지금보다도 더 풍성한 주님과 은혜의 만남을 누린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주일이면 두 번씩 물을 퍼야 하는 지하실 공간을 하나님과 사랑의 밀애를 나누는 비밀스런 공간으로 여기고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보이는 교회 속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마음을 드렸고, 눈물 흘려 기도하면 방황하고 고통 받는 수많은 지체들의 얼굴이 떠올라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자신을 내어주며 섬기지 않으면 안 될 강제력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누구도 인정해 주는 사람 없어도 처음부터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자 길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도와주는 사람의 도움을 전제로 그 길에 부르심을 받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교회 창립한지 16주년을 지나면서 지금은 이전과는 비교될 수 없는 좋은 환경 속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전보다는 비교되지 않는 많은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의 아름다움은 모이는 성도의 숫자나 그들의 직업의 높고 귀함이나 혹은 건물의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영광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같아서 인간의 아름다움이 영혼의 아름다움이라면 교회의 아름다움도 역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영적인 연합의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는 우리 주님의 심정이 있듯이 이렇게 그리스도의 연합을 구현한 교회의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제자를 파송하신 마음이고, 자기의 사랑하는 양떼들과 같은 제자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신 것 같은 마음이었으며, 당신의 교회를 이 세상에 사도성을 주셔서 파송하시는 주님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없이 방황하는 영혼에 대한 고통 하는 눈물이었으며 그리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16년의 세월이 지나며 우리들은 예전과는 다른 풍족함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가 그때보다 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교회라고 과연 확신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마음이 주님과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맨 처음 주님을 믿으며 결심했던 때처럼 예수 믿고 그 분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생애의 전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살아계셨더라면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가슴 아파하셨어야 했을 그 영혼들을 하나님이 교회에 붙이셨으니 우리는 교회의 일부가 되어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수받아 아무도 울어주지 않는 그 영혼들을 위해서 예전처럼 눈물 흘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해 자기를 모두 버리신 십자가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으니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셨으니 우리는 또한 이런 은혜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상태에서 주님 곁에서 주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도록 그들을 돕고 섬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날 복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복의 최종적인 소비처가 되도록 부르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부르셔서 우리와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전달해 주는 이 신령한 복 속으로 들어오게 되기를 사모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복을 받음으로 행복해 지는 사람, 이 복의 최종적인 소비처가 됨으로써 행복해질 사람들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고 이 복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도구가 됨으로써 우리는 그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7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지금도 면면히 이 교회 안에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저의 마음속에, 성도들의 마음속에 아로 새겨주셨던 이 진리의 말씀이 운동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17년의 세월을 지나며 간절히 돌아보면 어떤 때는 이 정신이 강하게 소용돌이치던 때도 있었고 약해지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마음을 다시 한 번 솟구치게 하셔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고, 기독교 신앙의 본체로 돌아가서 사사로운 것들에 목숨을 걸지 않고 오히려 이 중요한 본질에 우리의 생명을 걸어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도구들로 살아가도록 우리는 소명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고 입을 모든 것과 아름다운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모든 복을 최종적으로 소비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복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가나안에 들여보내신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계획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그 모든 수단들을 잘 사용해서 이방의 빛으로 나타나야 했고,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여야 했습니다.
나는 오늘 우리들에게 이렇게 교회를 주시고, 함께 의지하며 사랑할 지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살아온 인생 중에 여러분과 함께 해온 날들이 가장 행복했고, 가장 아팠지만 가장 보람 있는 날들이었음을 삶의 이 강 건너 저편이 이른 후에도 나는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얼마가 됐던 우리의 남은 일생을 교회와 함께 하며, 변절되고 주님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거짓된 배신으로 되갚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매일매일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십자가의 그 진한 사랑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교회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하도록 피에 용솟음침과 그리고 그 피에 솟구침이 있어서 그 피에 젖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우리의 마음에 간직하고, 이 복음의 본질을 오고 오는 세대에 전하고 지금 있는 이 세대에 전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우리의 교회 중 일부가 아니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지체들이 이 예수 섬김의 동기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될까? 주일학교 학생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에도, 중고등부 학생들이 함께 모이며 찬양할 때에도, 성인들이 모여서 구역에서 하나님을 위해 기도할 때에도 언제나 이 눈물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고생하고 유리하는 영혼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고, 아직도 옛날 우리처럼 고생하고 방황하는 양떼들이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그 영혼들이 나의 영혼인 것처럼 아파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통증 때문에 무엇이든지 그들을 위해 이바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신적인 강제력에 사로잡힌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승천 하신 후에 영적으로 다시 임재 하셔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후에 이루실 그 교회의 몸이 당신과 함께 한 운명에 참여하며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될지를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까지 당신 자신의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볼 수 있도록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고통 받는 수많은 영혼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고통 받는 자신의 처지를 궁극적으로 고칠 수가 없는 무능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상의 자원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자원의 문제였고, 영적인 자원을 삼위의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지 못하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세상의 자원의 부족이 아니라 죄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 하는 이 세상의 궁극적인 대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의 용서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께 사로잡혀서 죄를 이기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이렇게 성도들을 품어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말씀으로 먹여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 부름 받은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와 관계가 없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그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을 불러서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섬기게 하셨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영혼들이 고생하고 유리하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생명이라고 기꺼이 바치고 싶어 하는 헌신을 주셨기 때문에 그 성도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과 눈물의 기도와 자기를 버리는 전적인 희생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세워져 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교회에 부어주셨습니다.
IV. 추수할 일꾼을 부르심
예수님께서는 큰 능력을 당신의 열두 제자들에게 부어주셨지만 그들끼리 이 일을 하라고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일군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그 큰 능력을 주시면서도 너희 혼자 하지 말고 할 일이 너무 많으니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나라의 한 모퉁이에서라도 영혼을 구원하는 이 일에 봉사하도록 소명을 느끼는 것은 바로 사도들의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오늘 교회가 세워진지 16년이 지나는 이 뜻 깊은 주일에 다시 한 번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나는 그때에 교회에 있지도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알리요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 일은 반복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삶의 벼랑 끝에서 돌이킬 때 여러분들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십자가의 사랑, 여러분들을 위해 자기를 찢으시기까지 내어준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바치고 싶어 했던 그 헌신의 마음이 바로 주님의 교회를 세운 그 마음이었고,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의 그 크신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이 믿음의 길, 신앙의 길을 가기로 결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충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보면 여기도 사람, 저기도 사람 교회 건물에 비해서 너무 많은 성도들이 있는 것 같지만 구원받지 못한 세상을 향하여 보면 거기에는 이 교인들의 숫자는 너무나 작은 숫자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눈물의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고, 땀과 그리고 눈물이 섞인 복음의 전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기꺼이 버려 그들의 영혼을 위해 수고하고 분투할 사명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벌레 같은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그 사랑으로 세워진 이 교회에서 우리들이 정말 예전엔 누군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우리의 신앙의 선배 동료들이 우리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예수님의 가슴이 찢어지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 빌고 우리를 섬겼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의 사람이 된 것처럼, 이번에는 우리들이 그 은혜를 입은 그대로 예수님이 사셨던 그 모본을 본받으면서 그렇게 영혼을 위해 헌신하며 살도록 부름 받은 추수할 일꾼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V. 결론
온 마음을 다해서 이렇게 추수할 계절에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셨으니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좋은 은혜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육적인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이 복음을 전파하고, 예전에 여러분처럼 주님이 없어서 하나님 사랑을 몰라서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죽음의 계곡을 바라보며 절망하는 인간들을 위해서 우리는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당연한 보람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17년, 16년 의 세월을 지난 이즘에 다시 한 번 지하실에서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던 그 부르심을 새삼 느끼면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사랑 깊이와 넓이를 다시 한 번 현재적으로 경험하고 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 고난을 받으면서라도 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참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우리와 함께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섬기는 이 아름다운 전도자의 삶을 살도록 우리 모두 헌신하기로 다짐하는 창립 주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