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자의 세 가지 성숙 2
(소명,지성,열정)
여기서 오늘 세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소명의 성숙입니다. 소명은 소명이지 소명이 성숙 되어가나 하는데 사실입니다. 그래서 처음 목회사역과 관련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래서 내가 이제는 피할수 없이 하나님이 불러주셔서 영혼을 위해서 살아야겠구나 하는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사실입니다. 바울로 말하자면 다메서에서 예수님 만난 체험같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정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이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인가를 꺠닫게 되고 영혼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다른것을 도저히 할수없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명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씨앗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의 씨앗입니다. 씨앗이 부족합니까? 아니죠. 씨앗은 씨앗으로 충분합니다. 씨앗은 씨앗으로 충분하지만 그 씨앗이 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씨앗이 싹이나고 잎이나고 줄기가 나서 꽃이피고 열매를 맺는게 씨앗의 완성입니다. 씨는 완전하지만 완성된것이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이 평범한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사역을 망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어떻게 생각하냐면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셨다, 그래서 나는 소명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아니라 합니까? 맞습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실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세상에는 소명을 받은 사역자는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는 사역자는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실제로는 안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명이 자라가는 것, 소명이 계속해서 성숙해가는 것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명은 낭만이 아닙니다. 낭만이 아니고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 소명이 계속해서 자랍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 소명은 계속해서 성숙해 자랍니다. 그래서 처음에 예수님을 만나고 커다란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두가지 충격을 받는데, 하나는 신비적인 편견이 깨어진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중심적인 모든 생각에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학적인 충격을 받는데 그것이 뭐냐면 어떻게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메시아가 나오실 수가 있느냐?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꺠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것이 깨뜨려지면서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소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명이 자라 간다는 것입니다. 성숙해 갑니다. 여러분들도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에 의하면, 하여튼 여러분 모두 소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그랬고, 여러분 이전에도 그랬고... 마음을 실어서 사역을 하지 않으면 난 항상 소명을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대놓고 이야기를 합니다. 소명이 아닌것 같다. 다시 기도를 해봐라. 왜냐하면 사실 그런 사람이 많으니까... 여러분만이 아니라 다른사람들도 저는 그렇게 다루었습니다. 여러분도 소명을 모두 다 받았다 하지만 항상 동일함으로 소명이 불탔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뭐냐면 아까 이야기 했듯이 소명을 받았으니까 목회자 될 사람하고 결혼을 했을꺼 아닙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냥 밥하고 빨래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았다 하는 것이, 각오를 하고 하나님 앞에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것이 아니라 우리속에서 소명의 성숙이 그침에, 소명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 한번 받는 것이지만 소명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다시 재현되고 성숙되어 나아가는 이 모든 것들은 어디에서 비롯되냐 하면, 그렇게 변화되는 모든 것들은 우리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성화라고하는 큰 물줄기를 타고 가서 역사가 그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을 생각할 때 다메서에서 만난 체험 하나만을 이야기 해서는 안됩니다. 그 후로 분투하면서 소명이 성숙해 갔던 것들을 함께 이야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명이 성숙해 가는 방식이 뭐냐면 처음 받은 소명이 계속해서 성숙되어 가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이 그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마치 빛이 모두 모아져서 한곳으로 비칠때에 열이 나듯이, 그렇게 뭔가 모든 것을 집약해서 하나의 초점을 모아서 몸부림 치면서 나아갈 때, 그런 하나님의 추구가 소명을 더 뜨겁도록 만들어 주고, 또하나는 소명을 자신의 삶속에서 구체화 시키는 지혜를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를들면 신방하는 이야기를 하는데, 같이 사역을 해야 합니다. 아이가 있고해서 어려운 면도 있지만 기본적인 정신이 항상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신방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모들이 대개 교회학교 신방할 때 낮에 가는데, 낮에는 항상 자모들이 혼자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신방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피드백이 나한테 들어왔습니다. 혼자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들 여성도들이 아이들 데리고 혼자 있는데 신방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같이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방을 안해본 사람은 신방을 할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별로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방을 계속헤서 영혼들을 만나본 사람들은 신방을 피할때는 어떻게 해야하고, 아파트 신방을 할때는 어떻게 해야하고, 그리고 신방을 가서는 어떤 예의를 갖춰야 되는지를 항상 터득하게 됩니다. 소명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찿고 추구하려고 하는 간절한 추구속에서 소명에 대한 열정적이긴 하지만 구체적이지 않았던 소명이 구체화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세상에 있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서 살고싶다.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것인데, 그렇게 꿈꾸면서 전사적인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 장렬하게 죽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목회사역은 그런게 아닙니다. 영혼들을 위해서 살다 죽고 싶다할 때, 학교 초등학교 앞에서 순교할 일이 벌어지느냐 하는게 아닙니다. 그렇게 장렬하게 죽는 그런일이 안 일어납니다. 문제는 뭐냐하면 가서 솜사탕이라도 만들어 아이들 나눠주고, 그 다음에 전도지 나눠주고, 그 아이들 마음에 호소할 수 있는 전도지를 만들까, 그리고 아이들이 왔는데 어떻게 xx할까, 무슨 교재를 만들까, 그 다음에 이 아이들을 어떻게하면 진정한 변화에 이르도록 할 수 있을까, 이렇게 그것에 필요한 일들을 가지고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쉽게 하나님을 향해서 가지고 있었던 결정적인 소명들이 식어버리고, 회사원이 회사일 하듯이 되어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추구속에서 소명이 성숙되어 가는 것들을 빼고나면 얼마든지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태까지 사역을 10년동안 해오는 동안 사역을 그렇게 밖에 못하느냐 하는 것 때문에 내가 나무란 적은 있지만 한번도 그것 때문에 미워하거나 한 적은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대부분 내 마음속에서 가슴 아팟던 것들은 하나님을 찿지를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능력이 다 똑같습니까? 어떤사람은 못 할 수 있습니다. 어떤사람은 입만 열면 청산유수인데 어떤사람은 어눌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사람은 탁월한 조직력이 있어서 잘하는데 어떤사람은 두배이상 시간이 걸릴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참으면서 기다려 주는것이 사랑입니다. 가르쳐주고 가끔은 야단은 치지만 바르게해서...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아 소명이 성숙되어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가슴속에 있는 최고의 소명의 경험은 날마다 신학교 가겠다고 무릎 꿇었던것 밖에 생각이 안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합니까? 지금 하고있는, 하다못해 솜사탕이라도 만들고 틈만나면 불어가지고 아이들 모아서 복음전하고 봉고를 타고 다니면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아파트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전도하는 이것이 진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모든 섬김속에 피처럼 배어있어야 하는것이 소명의식입니다. ‘솜사탕을 만들어도 나는 예수님 대신 이것을 만들고 있다. 가서 아파트 문을 두르리면서 나는 예수님 대신 이집에 서있다’라는 소명의식이 필요한데 소명이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으니까 자꾸 퇴화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세상일이지 소명입니까?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기쁨 같은것을 발견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바로 소명이 없는 성숙의 삶입니다. 이것을 해서 진짜 성공하면 겨우 그사람이 기술을 익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기술을 익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모두 밥 벌어 먹자고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이해 할 수 없는게 뭐냐면 교역자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추구해야 하는데 어느 새벽에 나와보면 목회자가 25명 사모가 15명 쯤 되니까 40명입니다. 그중에 아이가 너무 신생아라서 젖 먹일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고 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래도 거의 다 보여야 하는데 새벽에 안보이는 얼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걱정 됩니다. 왜냐하면 월요일이 휴무 인데 잘 생각해 보세요. 여기는 좀 틀리지만 월요일은 휴일이고, 금요일은 밤 늦게까지 기도했으니까 토요일날 안 나오는 사람 많습니다. 거의 다 안나옵니다. 주일날 새벽기도 안나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해가지고는 기도의 끈을 계속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월요일이 휴일이니까 월요일날 거의 전멸입니다. 나는 솔직히 이야기해서 어떨때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까지 내가 해야하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들이 기도 안해도 나는 내 목회 해 나갑니다. 끌고 갑니다. 왜냐하면 내 목회가 여러분들에게 메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연약하고 이렇게 담임목사가 살아있어서 올바르게 하라고 지도를 하고 훈련을 받는 목회사역의 초년병 시절에 그렇게 자기를 이기지 못하고 환경에 의해 쉽게 꺽이는 사람이, 더군다나 지금 방학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일까? 그리고 여러 가지 착오가 있었겠지만 보고서 받아보면 한사람도 빠진 사람이 없습니다. 이해가 안가는 것입니다. 그건 아니죠. 6시 15분에 기도해서 7시면 집에 돌아가는 그 보고서가 계속 나온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추구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서, 그런 속에서 날마다 가슴속에서 충만하도록 영글어 가는 소명의 성숙을 기대 할 수가 있겠는가? 생즉사 사즉생입니다. 살려고 한즉 죽고 죽고자 한즉 삶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목회는 매순간 생명이 있는 목회입니다. 그래도 영혼들이 변화가 안됩니다. 여러분 주위에 보면 동역자들이 많은데 한번 물어 보세요. 진짜 여러분의 친구도 좋고 선배도 좋으니까, 정말 가슴이 녹아 내리듯이 피를 토하듯이 그렇게 사역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까? 그러면 그사람들은 그렇게 사역하기가 싫을까요? 안해서 못하는게 아니라 못하니까 안하는 것입니다. 울부짖는 짐승들은 많지만 산을 울리는 사자의 울음 소리는 산사람 마음은 낼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자가 왜 사자 울음을 낼수 있습니까? 사자이니까 사자 소리를 낼수 있는 것입니다. 사자만이 낼수 있는 것입니다. 소명이 성숙되어 가는데 그런 성격이 있는것이 소명입니다. 간절한 추구속에서 소명이 성숙되어 갑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좋은 교화라고까지 말할 수 없지만 체제가 잘 정돈된 교회에서 사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구석구석을 보면서 이교회는 왜 이렇게 머리가 나쁜가 생각한 적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이냐하면 만약에 환경까지 안 받쳐주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 핑계거리들이 수없이 생겨나게 됩니다. 정말 매순간 죽노라하는 정신으로 하나님을 찿아야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찿냐하면 살려고 시작했으니까 사역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신다고 하는 것들을 연관지으면서 영적 사고력을 가지고 계속 하나님을 찿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의인들을 보내주시면 응답해 주셨구나 안 보내주시면 내가 어떤 부분이 하나님을 아프게 하고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것이 성공주의 입니까? 성공주의 아닙니다. 하다못해 닭을 치는 사람도 달걀을 몇 개나서 병아리가 몇 마리가 깨었나에 관심이 많은데 하물며 영혼을 치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추구가 이 혈공과 같이 흘러가서 피처럼 자신의 모든 사역속에 배어야 합니다. 그 기도 생활을 보면 정말 하품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에게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들어보십시오 이렇게 철저하게 훈련을 시켜주는 교회니까 그 정도 새벽기도 생활하지, 교역전도사는 나와도 되고 안나와도 되는 그런 교회라면 여러분 거의 안 나올것 같습니다. 사모들은 이루 말 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우리교회에서 상당히 신뢰하고 사랑하는 자매가 있는데 누구라고 이야기는 안하겠는데, 언젠가 하나님 앞에 훌륭하게 쓰임받겠지만 정말 대단합니다. 첫아이를 가졌는데 아이가 속에서 죽었습니다. 그것을 병원에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전도하는 날 이었습니다. 전도하러 나왔습니다. 곤고하고 어려워서 칭찬하지 못한적도 있지만 가장 힘들고 어려운일이 생기니까 새벽기도 나오는데 그 추운겨울에 간난애기를 업고 새벽기도를 나왔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울면 그아이를 어두운 교회당에서 업고 걸어다니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 비장함이 있어야 합니다. 환경을 자꾸 이야기하면 환경은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역의 결과도 중요하게 생각하시지만 사역의 결과보다 그 사역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하나님 더 소중하게 보십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소명을 이야기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추구가 없을때 나는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 소명이 성숙되어 가지 않는 그 목회자 밑에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고통받고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면 아내들이라도,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고 하듯이, 그런 상황에서 칼을 빼든 여호와의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갈란 선지자의 가는길을 막았던 그 여호와의 사자같이 그렇게 해야합니다. 그런데 거듭 내가 이야기 했지만 평소에 목회자의 아내가 목회자 보다도 피나는 결단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그 위급하고 중요한 때에 남편의 목에다 칼을 댈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더 방만하게 살았는데 “당신 그렇게 살면 안돼”라고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 합니까? 그러니까 목회자의 아내는 나무 뿌리와 같습니다. 묻혀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에, 일생에 몇 번 그런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열렬하게 찿는 사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반기때는 안그랬는데 상반기때는 그 결과를 모두 펴놓고 모든 교역자들이 집에 돌아와서 어느 교역자의 아내의 이야기는 무서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인할 수 없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목회사역에 그대로 반영이 되는지, 상반기나 하반기나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전심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 은혜안에서 성숙되어 가도록 도우시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소명도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맨 처음 예수님 만났을때 고백이 뭐였습니까? “아! 예수님이 그리스도 구나 그 분이 다시 살아나셨구나 이 분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 구원 받을수 없구나”라고 생각됐지만 사도가 된지 25년 30년 흐른 다음에는 소명이 어뗗게 변모했습니까?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성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계를 품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일에 온전히 매진하고 그속에서 하나님을 찿는 사람들이 그 세계를 품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약사 반 목회자들은 자기가 받는 대우, 그 사역을 통해 보장받는 미래, 인간적인 연줄, 이런것들 때문에 사역을 하고 그런것 때문에 격려를 받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안에 불을 지르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격려를 받습니다. 그래서 소명이 성숙되어 가야합니다.
두 번째는 지성의 성숙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전하는데 결국은 우리의 지성의 그릇에 담겨진 것이 우리의 마음으로 내려와서 우리의 영혼에 흘러들어가 변화를 일으키고, 다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지식이되고 우리의 마음에 불을 붙여서, 그래서 그것이 뼈 속에 사무친 불이 되어서 우리의 입을 통해서 눈물을 머금고 터져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도서관에 가만히 들어앉아서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오는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인류역사 이래로 바울처럼 복음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단순한 복음을 책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1년동안 안식년을 받고 공부에 전념할 기회가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인류역사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서신을 연구하다 죽어 갔습니다. 어떤사람은 바울 서신에 나오는 디카이어쓴매를 연구하다가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약에 나오는 아가페를 연구하다가 죽었고 에로스를 연구하다가 죽었습니다. 30년,40년 연구하다가 죽었습니다. 어제 웃으면서 이야기 했지만 하버드의 쉬인 케이트라고 시인을 일평생을 연구하다가 마지막에 은퇴한 사람이 있는데, 일평생을 케이트를 연구했는데도 케이트에 대해서 큰 산의 바닥에서 기는 기분이라는데 케이트는 26살에 죽었습니다. 내가 이야기 하고싶은 것은 지성이라고 하는것이 공부를 통해서 오는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에 대해 아는 이 지식들이 반드시 책상앞에서 공부하는 그 공부만을 통해서 오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추구하는 전 삶에서 체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번에 영혼의 싫증을 다루었습니다. 오웬이나 청교도에서 배낀게 아닙니다. 다들 소용이 없습니다. 도대체 밑도 끝도 없는 나의 영혼에 활기를 갉아 먹는 요소가 뭔가를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깨닫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성경이 말한 지식들이 쭉 펼쳐지면서 이 끈에 이어서 나오게 됩니다. 이틀밤 준비하고 말씀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양한 체험을 하게 하시고 사역을 하는 과정에서 사역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사람됨에 대해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이해를 많이 갖게 해 주십니다. 이성적인 것들입니다. 지성적으로 많이 깨달음을 얻게 하시는데 그런것들이 이성이라는 그릇에 담기게 됩니다. 그래서 그 그릇이 크면 많이 담김니다. 그래서 똑같은 산수를 이야기 해도 일평생 수학만 공부하면서 늙은 사람이 이야기 하는 산수와 틀립니다. 학원에서 선생님이 이야기 하는 산수와 틀리듯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에게는 어떤 능력이 있어야 하냐하면 신학을 통해서 학문을 통해서 신앙을 이해하고 성경을 이해해서 그것을 밖으로 쏟아내서 삶으로 산 다음에 자기가 살았던 삶을 다시 주워 모아서 신학화해서 밖으로 정리된 지식으로 토해 놓을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지만, 섭취해서 토해낸것을 다시 섭취해서 밖으로 또 토해내고, 정리된 신학을 토해내고 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가운데 주님을 아는 지식안에서 자라나고 실제적인 학문으로 공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하나는 성경 자체를 아는 지식입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면서 성경을 연구해 가는 것입니다. 이번에 인턴쉽 들어온 자매가 한명 있는데 박 윤서 박사 주석 신구약을 두 번을 완독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칭찬을 해 줬습니다. 여러분도 못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의 일반에 대해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가 나오냐 하면 “목사님 이 성경이 무슨 뜻이에요?”라고 물어보면 “거기는 내가 설교를 안해봐서 잘 몰라” 설교를 할 기회가 되면 연구를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공부를 안해 모릅니다.
두 번째는 복음의 비밀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것은 거져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처절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통해서 그 복음의 비밀을 체득해 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학문적인 성숙입니다. 그러니까 공부해야 합니다. 제가 학교 다닐때 하루에 50개씩 단어 외웠습니다. 전철을 타고 다니면서 거의 25에서 50개씩 단어을 외웠습니다. 지금은 10번도 못찿습니다. 안들어 옵니다. 제대로 봤는데 안 들어 옵니다. 그래서 기회가 항상 있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공부해야 합니다. 지금도 청교도들을 공부하면서 느끼는게 뭐냐면, 이번에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쓰면서 제가 몇 달동안 전체를 훓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책에 뭍혀 지냈는데 너무나 지성적으로 박약하다는 것을, 진짜 울고 싶을 정도로 이런 척박한 지성으로 어떻게 하나, 그래서 너무 후회가 되었습니다. 특히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것들이 탄탄하게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표준적인 책들을 꾸준히 읽어야 합니다. 금방 써 먹을 수 있는 책들 말고 표준적인 책들을, 감동을 주는 경건적인 서적들 말고 표준적인 신학 서적들을 꾸준히 읽어 가면서 지적으로 자기자신을 쌓아 가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한주일에 300페이지라도 책 읽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씨름해야 합니다. 그래서 공부 안하는 것 보면 걱정됩니다. 결국 실력이 없으면 진실해질 수 없습니다. 정면으로 승부할 수가 없습니다. 기업활동을 해도 건강한 기업은 정면 승부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되는 기업을 뭔가 속여서 돈 벌 생각을 합니다. 목회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력이 있어야지 정면승부가 가능하고 그래야 진실해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 나는 정말 부족하다.”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은 그 면에 있어서는 부족하지만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하나님 앞에 사랑할만한 건덕지가 있어야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실력을 부지런히 쌓아가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성숙되어 가야합니다. 돈 많이 없지만 한 달에 두세권이라도 책을 사서 하나씩 하나씩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읽어 나가야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오후에는 스터디를 했는데 미국에서 3년을 배웠는데, 거기는 매일 학교를 가는데, 여기는 일주일에 한번씩 세시간 공부하고 가는데 신학을 공부 한 것으로 오엠을 본것이 아니라 오엠을 공부 한 것으로 거꾸로 신학을 보니까 이제 신학이 보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게 원래 이런 것이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계속 들으면서 말씀에 의해서 정리가 되어가고 거기에 이성적인 그릇이 커지고 여러분들이 나 이상의 체험을 하게되면 전혀 다른것들을 다시 쏟아내어서 회중들의 영혼에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획을 세워서 꾸준히 성경을, 설교를 들어가면서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도 성실하고 부지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난번에도 그 이야기들 때문에 내가 마음이 상해서 내가 뭐라고 xxxxx 내가 이야기를 했더니 그거 가을 기도 사경회때 교회에 돈 지불하라고 하고 한 세트씩 다 가져갔는데 레포트 안 내지 않습니까?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도들이 헌금한 돈으로 그거 한세트씩, 나는 그거 지시한적도 없는데 와르르 가져가고 그것 듣고 레포트 내라 했는데 안내지 않습니까? 한사람도 안 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준비 되어야 옳지않나 하는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연구해 가야 합니다. 내가 박성도 목사를 보면서 되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대목들이 그런 것입니다. 박성도 목사는 좋은 일류대 나온 사람도 아니고 신학교에서 4년 공부하고 2년 공부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신뢰할 수 있게끔 성경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많이 듣고 탐구 했습니다. 그러니까 영혼들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진지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게하면서 성숙되어 가야 합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아까 곽혜정 전도사도 이야기 했지만 열린교회 사역이 힘들다고 소문이 난 모양인데... 학교에서 힘들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누가 가서 그런 소문을 퍼트렸습니까? 본인들이 다 퍼트렸죠. 나는 중요한게 뭐냐면 초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너무 시간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장담하는데 지금이 가장 한가 합니다. 더구나 이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여러분 장년 교역자 사역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사역을 놀면서 하는것은 아닙니다. 내가 앎니다. 장년교구 사역은 더 장난이 아닙니다. 장년교구 교역자들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체력이 튼튼해야 합니다. 그런데 김용수 목사 같은 경우는 체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테니스 코치 였습니다. 무쇠입니다. 그런데 건강이 못 배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월달에 오랬동안 몸이 안좋았습니다. 몸이 못 견디는 것입니다. 무쇠라도 깍여 나옵니다. 오죽했으면 내가 응급실에 몇 번 실려 갔겠습니까? 그러면 좀 헐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데 그렇게 안 됩니다. 왜냐하면 돌아보지 못하는 영혼들을 한번 생각 해 보십시오. 맡겨진 영혼들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기르던 개 한 마리가 밖에 나가서 안 들어와도 잠이 안오는데 주님이 맡겨 주신 양떼들인데...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보면 알지만 강요한 사육이 아닙니다. 그래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목회라는게 승진을 하려 하는 것입니까, 특별 보너스를 타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열린교회 사역이 힘들다는.. 나는 힘들게 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정석이 무엇인지 가르쳤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역 이외의 요인으로 시달리지 않도록 나는 여건을 해결해 주려고 몸부림 치면서 살아 온 사람입니다. 지금도 교육관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러분 교육부서 다 가지도 못하고 유아부, 유년부, 유치부는 못가고 여기만 가는데, 유초소중고 다섯 개로 가는데 계산을 하니 한달에 천만원이 들어 갑니다. 그러니 일년이면 얼마 입니까? 일억 이천만원입니다. 작은교회 일년 예산입니다. 그런데 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라나는 세대들의 교육이 천만원이면 한주 사용하는데 얼마입니까? 평일날은 그곳에 가는거 아니지 않습니까, 교역자들은 다 이곳에 있는데... 그럼 주일 하루 사용하는데 250만원입니다. 그런데 얻어 줍니다. 특별 헌금을 해서라도 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또 에어컨 달고 다 시설 하려면 1억이상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추운데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키즈랜드도 만들어놔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것 뜯어 갈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것 가지고도 돈도 안되고 계산이 안됩니다. 그래도 간다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성금이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해서 사역을 합니다. 바쁘죠 바쁜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러니까 못 견딜 정도로 그렇게 엄청난 부담을 안고 살아 갑니다. 그러나 대충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월요일 쉬자, 재충전 하고와서.. 어저께 만났던 이들은 처음으로 월요일날 쉬어보니까 뭘 해야 좋을지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차차 익숙해 질거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쉬자 그정도는 아닙니다. 열린교회 사역이 힘들다고 이야기 하지말고 다른교회 없는 것도 공평하게 이야기 해야 됩니다. 나는 이번해에 급한 불만 끄면 교역자 휴양소 하나 만들어 줄려 합니다. 그래서 가까운데서 주일날 사역 끝내고 나서, 아이들 다 데리고 차 타고 가서 국은 냉장고 다 넣어 놓을테니까 쌀도 놔 둘테니 김치나하고 몇 개 기지고 가서 끓여 먹고, 거기서 푹 쉬고 비디오도 내가 넣어 줄테니, 큰 텔레비전도 넣어 줄테니, DVD도 놔 둘테니 아이들하고 보고 즐겁게 쉬고 기도실도 만들어서 기도도 하게하고 그리고 다 갔다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이야기냐면 쉬는것도 사역을 위한것이니 쉴때 푹 쉬고 그래서 월요일날 나오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목회 수련회를 그래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푹쉬고 사역해야할 그 시간에 집중적으로 쏟아부어서 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하면 언제 시간이 나는가 하는것이 문제인데 피 뿌리면서 사역하는 마음으로 공부하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사역 해야 합니다. 내가 너무 잘 앎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것이 김윤복 교수님께 구약을 배웠는데, 구약 이스라엘사하 소선지서 주해등 그분이 강의하는 것은 선택 과목에서 구약전공해서 다 들었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 교회에서 학교 다니는 전도사 한테 장년 4구역씩 맡겼습니다. 거기에 청년부 주일학교를 맡았는데 성격이 대충하는 성격이 아니라 너무나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어쨋든 새벽기도 안 나왔다간 난리 납니다. 폭탄입니다. 금방 전화가 와서 “너 새벽기도 안나오고 전도사가 자빠져 자!”하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 심장병까지 걸렸습니다. 한의사가 진맥을 해보더니 신토가 망가졌다고 했습니다. 심장을 싸고있는 껍질 말입니다. 스트레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해서 학교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부하고 싶어 미치겠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고 하는 이야기가 “2학년 까지는 전도사 하지 말라고 했쟌아! 그런데 본인들이 한다면서... 나는 2학년이라 못합니다 했어야지, 한다고 했쟎아 누가 억지로 하라고 했냐고... 그러니 이제는 감당을 해야지... 그래도 많이 봐 주는 것이다.” 옛날에 박헌준 목사 같은 경우는 에누리 없어도, 그래도 자기 일만 하게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고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치겠는 것입니다. 수업시간에 책을보면 눈물이 펑펑 쏟아집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너를 신학교 보내서 교수로 만들어 주마, 가서 가르쳐라’라고 하나님이 응답하셨는데 머릿속에 뭔가 들어있는 것이 있어야 가서 가르칠거 아닙니까? 오죽했으면 구역공부 하는 시간에 그 책을 펼쳐놓고 ‘야다, 아도나이, 베트, 레바비’ 히브리 말로 수없이 썼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아신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냐하면 역설적으로 뜨거운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쪼가리 쪼가리 남는 시간에 버려 버리는 시간이 없으니까 시간을 구체적으로 활용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화장실에서, 차안에서, 전철타고 갈때는 히브리 단어를 외우고, 학교에 일찍 가서는 성경 읽고, 틈틈이 쉬는 시간에는 즉시 책 펴놓고 신학책 읽거나 원문 성격 강독해 나가고, 그렇게 하면서 살았습니다. 10미터 이상은 뛰어 다녔습니다. 나는 내 친구 전도사들보다 덜 휴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학문적으로 얻은것은 소량에 불과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소명이 성숙되어 가는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피할수 없이 해야 되는 일은 감사히 해야 합니다. “아! 나를 신방하게 해 주셨구나...” 내가 한때 그런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신방 갈때는 공부 해야 되는데, 공부 할때는 신방 가야 되는데... 기도할 때는 책좀 봐야 하는데, 책볼때는 기도도 안하고... 그러니까 하나도 감사 한게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날 내가 무슨 책을 읽었는데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힌트를 얻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공부를 하고 싶다, 신방을 안 갈수 있느냐? 그럼 안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 수 밖에 없으면 딱 덮어놓고 “어휴! 내가 그렇게 공부하면서 신방 못해서 부담을 느꼈는데 드디어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구나!” 그렇게 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과 성경의 인접한 학문, 그리고 여력이 다으면 언어, 특히 영어를 자유자재로 읽을수 있도록... 장난이 아닙니다. 습득하고 허락하면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희랍어와 희브리어, 기회가 되면 라틴어 까지 띄엄띄엄 읽을수 있도록 준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뭐가 될까? 뭐가 될지 얼마나 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려고 몸부림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능력이 있으면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입도선매해서, 2학년 짜리 입도선매해서 2년 동안 생활비 대줄 테니까 졸업하고 5년 동안 사역해라 하면 좋은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처지가 안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지금이라도 책에 손을 놓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해서 지적인 성숙을 이루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열정의 성숙입니다. 열정의 성숙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혼들의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랑이 없이 목회 사역에 들어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역을 하면서 그 사랑이 점점 식는 사람이 있고, 사역을 하면서 열정이 불붙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후자가 드물고 전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탄 흔적이 있는 사역자는 많아도 타고있는 사역자는 소수입니다. 그래서 불꽃처럼 타올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안에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열정, 영혼들을 향한 열정, 자신의 거룩을 향한 열정을 한편으로는 도전시키고 한편으로는 증진시키는 방법들을 터득해 가야 합니다. 그 열정이 계속해서 식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싫증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 열정이 급속하게 죽어 갑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잘 지키면서 자기자신의 마음이 미끄러지고 생각이 방탕한대로 놓여지고하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역자들이 저녁시간에 일찍이 사역 끝내고 들어와서 벌러덩 들어 누워서 텔레비전이나 보고하면 안됩니다. 나는 애들 없으면 텔레비전 안 봅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고갈됩니다. 뉴스는 가끔 볼 수밖에 없지만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저녁시간을 그렇게 보내면 안됩니다. 열렬하게 타 올라야 합니다. 그리고 위에서는 열정이 식어지게 하는 것으로부터 자기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 이렇게 냉랭하였지만 함께 모여서 사역에 대해 서로 교제하고 나누고 하다보면 정말 뜨거워집니다. 차라리 그런 쉬는 시간이 있으면 같이 모여서 교제를 해야 합니다. 이 가정, 저 가정, 같이 신방을 하고 놀러가고... 여러분 그런것 합니까? 서로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가족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오늘은 우리 한번 저집에 가서 같이 교제하자!” 그렇게 한 두가정 모여서 사역을 어떻게 했는지, “아!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더라, 아! 정말 배울만 하더라, 우리는 이런것도 있었다“하면서 같이 모여 앉아서 기도하고... 하나님이 전도사님 사역에도 복을 주시고 우리 사역에도 복을 달라고...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에도 보면 우리 장로들 투표도 하고 했는데, 물론 다 자격을 가진 사람들을 뽑았겠지만 인간미가 있고 따뜻하고 착한 사람들을 사람들이 좋아 합니다. 악한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밥이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예를들면 ”똑바로해!“ ”그것 밖에 못해!“ ”동작봐라!“ 이것만 하면 여러분이 나를 좋아하겠습니까? 가끔 손이라도 잡아주고, 가끔 밥이라도 같이 먹자고 하고, 오늘처럼 우리집에 올라가서 매운탕이라도 끓여 먹고해야 인간미가 느껴지고 따뜻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열정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은혜에서 부패해서 미끌어지게 하는 요소들과 싸워야 합니다. ‘마음을 잘 지키고, 내가 서있는 자리는 하나님이 세워준 자리이고 피 할수도 없고 피하고 싶지도 않은 자리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불태전에 각오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랬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여기 사역하면서 저기 넘나보고, 저기 사역하면서 여기 넘나보고... 그렇게 사역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열정이 계속 타오르기 위해서는, 불이 활활 타오르기 위해서는, 연료가 계속 있을 동안에만 타오르는 것입니다. 난로에 펄펄 불이 붙는다고 치면 장작 안 집어 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꺼집니다. 계속 집어 넣으면 계속 타는 것입니다. 집어 넣는 동안에는 며칠이고 타는 것입니다. 결국은 뭐냐하면 계속 자신의 열정을 유지하게 하는 말씀의 은혜가 여러분 안에 있을때 열정이 계속 성숙되어 가고 단련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번에 장년 사역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새해 사경회 정말 그렇게까지 기대를 안했는데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주셨고, 또 어떤 사람은 생리적으로 자기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고백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통xx가 되어서 그것이 불이 붙어서 오래도록 타오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타오르면 그 불 때문에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정말 새로워 지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은혜의 열정에서 계속 성숙되어 가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말씀에 열렬히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할때 열정이 계속해서 불붙고 성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뭔지도 모르고 불이 붙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까 이야기한 지성적으로 성숙되어가고 소명에 있어 성숙되어 가면서 그 열정이 심장에서 뿜어주는 피가되어 그 열정이 여러분의 사역과 인격, 섬김, 심지어는 사고방식에까지 베어서 여러분들에게 열렬한 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렇게 할때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나하고 영원이 있을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징그러워서 싫습니다. 얼만큼 있다가는 달리 해어지게 됩니다. 그래야지만 다른사람이 혜택을 볼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번달이나 다음달은 아니겠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마치 독수리처럼 벼랑 끝에서 그렇게 자라서 세끼가 자라면 둥지를 떠나야 하는데, 안 떠나면 내가 밀어서 절벽으로 던져 버릴 것입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돼서 가고 싶습니까? 털 나오다 말고 털 뽑힌 닭처럼 그렇게 추락하듯이 둥지를 떠나고 싶습니까? 아니면 진짜 그 절벽을 선회하면서 늠름하게 한 마리의 독수리가 되어서 그렇게 여러분들이 부르심을 받은 곳으로 떠나가고 싶습니까? 어떻게 되고 싶습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달린 것입니다. ‘매 순간 순간을 정신없다 힘들다, 그리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하면서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할 바에는 사역을 정리하고 한가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차라리 분량에 맞는 사역을 하면서 사십시오. 여기는 이해를 구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보병학교나 삼군사관학교나 간부후보생 학교가 아니라 육사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들로 하여금 나같이 불행한 목회자가 되는 전철을 밟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도도 못하는 전도사, 전도사가 되었는데도 무엇을 설교해야 되는지 모르는 전도사, 왜 성도들을 교회에 모으는지도 모르는 전도사, 일생을 어떻게 살다가 죽어야 되는지 모르는 소명은 있지만 무엇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그 소명을 실현을 해야 되는지 모르는 그런 사람으로 여러분들이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던져진 하나의 기회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찿고 추구함으로 열정의 성숙을 이루어 가고, 말씀에 계속해서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열렬하게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역자 자신이 불을 지닌 사람이, 골수에 사무친 불같이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외길을 걸어가면서 틈나는 대로 공부하고, 틈나는 대로 인저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고, 사역에 만나게 되는 무거운 모든 짐들을 지면서 예수 죽인것을 몸에 짊어지는 비결을 배우고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한번도 나의 지성의 빈약함이나 공부하지 못한것, 하나님 앞에 온전한 인격을 못 가진것을 가지고 목회 환경이라고 핑계된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비겁한 것입니다. 정말 몸부림 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나는 그 몸부림의 흔적만 있으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치밀하지 않으면 가르쳐서 치밀하게 만들고 성격이 모나면 야단을 쳐서 다듬어서 사용하고 그리고 대담한 결단력이 없으면 훈련을 시켜서 담대함을 만들어 줄 용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2004년도에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보실 때 , 여러분들이 거기 있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해야 합니다. 좋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러한 사람, 그러한 가정, 그러한 사역이 되어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 되어가기를 바라고 이번 한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많은 복을 부어 주시기를 바라고 건강을 잘 관리해서 사역에 어려움이 없도록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