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역자의 세 가지 성숙
(인격,영성,사역)
그러면 이제 부부세미나 잠깐 이야기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하는 이야기는 수련회때 나온 이야기, 오늘 반성하면서 나온 이야기, 또 일년동안 여러분들하고 같이 지내면서 느낀 이야기를 종합 한 것입니다. 가장 좋은 말은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서 직접 이것은 미이 이야기다 라고 해주면 가장 좋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단둘이 만나야 하는데, 생각은 참 많이 했었는데 그렇게 까지는 시간을 낼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아주 시원하고 좋겠지만 잘 안되고 같이 있는데서 이것은 누구 이야기다 하면 자존감도 상하고 할테니 지금 나오는 이야기 속에서 자기 이야기를 찿으셔서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커다랗게 세 항목으로 나누어서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려 합니다. 성숙의 문제를 가지고 오늘 한 30분동안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첫번째는 인격적 성숙입니다. 여태까지 사역하면서 늘 그런것들이 있었지만 지난 한해를 사역하면서 저 자신을 물론 포함해서 xxxx, 인격적으로 얼마나 목회자가 되기위해 미성숙해 있는가 하는것을 발견한 대목이었습니다. 모두 그런것은 아니지만 언뜻언뜻 발견되는 착하지 않은 인격, 그러니까 교역자가 되려고 하면 먼저 착해야 합니다. 그래서 착한 인격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아주 가장 중요한 표 중에 하나입니다. 착한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착한 인격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이 자기를 왜 구속하셨는지를 깨닫게 되니까, 하나님이 왜 창조 하셨는지를 알게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면서 주님이 원래 자기가 있었더라면 참 좋았더라 할 그 자리로 돌아가는데에서 생겨나는 인격입니다. 이런것들이 정말 모자란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교회가 작았을 때에는 덜 느꼈는데 많아지면서 그런것을 느꼈습니다. 심지어 교역자들끼리 나 보는 앞에서 언쟁을 하고 하는 실망을 보면서 표면에 얼마나 착하지 않은 것들이 있을까 하고 개인적으로 야단을 치기도하고 화해하고 잘 융합하게 하기도 했지만 이런것들이 내가 부끄러운 것들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혈기를 부리고 혹은 동역자에 대해서 안 좋은 이야기를 하고 차가운 경쟁감을 갖고하는, 부분적으로나마 그런것이 찌꺼기로 남아 있다고 하는것은 여러분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찿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착하지 않으니까 인격적인 유연성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뭐냐면 요즘 노대통령처럼 자기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 모인다는 것입니다. 아주 가장 졸렬한 리더쉽 입니다. 리더는 있다가도 나오겠지만,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가 가지를 펼치고 있는데 ‘참새만 날라와라, 까치가 날아 오면 죽여버린다’하는 나무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나무에 깃드는것 아닙니까? 그렇게 깃들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착한 인격입니다. 그래서 정말 착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 가까이 갔을때에 그 목회자에게서 비로소 자기가 용납되는것, 그리고 그 목회자에게 가까이 갔을때 그에게서 비로소 기다려 주는것이 무엇인지 이해해 주는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깨닫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착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인격적인 성숙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주님이 아시기 때문에 때로는 주님이 우리가 정상적인 은혜로써 이렇게 인성적인 면에서 성숙되지 않을때 하나님이 여러 방법으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입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서 착해질 때가 언제인가 하면 악한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볼때 착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고난 가운데 있을때 주님이 위로해 주실 때, 그 고난중에 받는 위로를 통해서 정말 따뜻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보면 우리가 몇 번의 투표를 했는데 안수집사들도 하고 장로들도 하고 권사 투표도 하고...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뛰어난 사람보다는 착한사람에게 표를 던집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유능하고 뛰어나도 사람들은 차가운 사람들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따뜻한 인성을 가진 사람... 그래서 언젠가 한번 설교하면서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 되라!’ 그런 것입니다. 그런 착한 인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다듬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성이 점점 착해지고 진실해 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듬으실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려는 의지는 있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그렇게 안되는것은 연약한 것입니다. 의지력으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하는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인간미도 착한 인성도 자기가 계속 착해지고 싶을때, 착한 사람의 흉내를 낼때, 착한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때, 인격적인 성숙이 촉진 되는 것입니다. 그런면에 있어서 훨씬 우리가 향기로워졌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옳게 산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착한사람이 아니면 너무 맑은 물에 고기가 살지 못하는 것처럼 주위에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을 보내달라고 계속 기도하는데 있는 사람도 떠나는데 사람들이 와서 자기 주변에 모이겠습니까? 모인다 해도 거의 자기와 코드가 같은 사람입니다. 그렇게해서 아주 편협하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인격적인 성숙이 금년에 이루어져서 사역에 그런 인격적인 감화가 넘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두번째는 영적성숙입니다. 영혼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려면 마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들을 이렇게 보면서 여러분들은 의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의 은혜생활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현저하게 마음을 못지키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어떤 마음의 방탕함에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님 앞에서도 저것이 느껴지니 자기보다 더 약한 지체들과 함께 모여서 살 때에는 얼마나 방탕한 마음일까? 마음의 방탕이라고 하는것은 생각나는대로 말하고, 떠오르는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싶은대로 마음을 먹는것이 제가 말하는 마음의 방탕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라고 하는것은 마음지킴이의 교리에서 우리가 다 터득한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절대로 영적인 성숙이 없습니다. 흔들리는 컵에 물을 부을수 없는 것처럼 영적인 변화의 은혜는 하나님 앞에 심지가 굳고 견고한 마음 속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먼저 잘 지키는 것이 영혼의 변화에 이르는 첩경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려야 합니다.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서... 지체들을 대할때나 사역의 어려움을 만날때나 나한테 꾸지람을 들을때나 어떤때이지간에 하여튼 그 마음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엎지른 물을 다시 담을수 없는 것과같이 한번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마음을 지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다음에 다시 마음을 지켜야하는데 대부분 내가 마음을 지키지 못할 때 내 영혼에 피해가 옵니다. 그런데 그 피해는 금방 복구가 안될적도 많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마음을 흐뜨려서 나중에 다시 정신을 차려야겠다 하는데, 쉽게 이야기해서 아이들이 한번 까지면 며칠이 걸려야 낳는것처럼, 심하면 여름에 땀이나서 곪는것처럼 병원에 가야 낳지 연고를 발라서 낳지 않습니다. 그런데 까지는것은 1초도 안걸립니다. 아차 하는사이에 까지고 나서 아이들이 “으아악!”하고 울어버립니다. 그런데 아무는것은 3,4일씩 일주일씩 걸립니다. 그것입니다. 마음을 안지키는 것은 찰과상을 입는것과 같습니다. 그렇게해서 입게되는 영혼의 손해는 복구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 지키면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할 때 무슨 문제가 나오냐 하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굉장히 슬픈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망을 마음에 품고 있는것도 하나님께서 싫어 하시지만 이것이 밖으로 산출되서 말로 나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더 죄송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더군다나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표출해서 살아간다고 하는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원망을 품고있으면 반드시 그것은 사람과 환경을 향한 원망인데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반드시 이어집니다. 분리가 안 됩니다. 그리고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되면 즉시 오는게 마음의 굳어짐 입니다. 마음이 총체적으로 굳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벌써 영혼의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냐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화) 제가 3,4살 먹었을때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있었는데 우리 신학교 대학원에서 다시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설교 시간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는 연초에 교역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그렇게 이야기 한다고 합니다. “첫번째 봉급이, 생활비가 다음주에 들어갑니다. 받아 보시면 앎니다. 그런데 받아보고 나서, 세상에 이것 밖에 안 줄까 하는 마음이 드신다면 그해 목회사역의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노인네가 어눌하게 하신 이야기 이지만 깊이 공감이 갔습니다. 말씀하고자 하는 요지는 무엇인가 하면 교역자의 마음에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사라질때 xxx에게 먹일수 있는 꼴들을 그 마음에서 기러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고 나면 기러낼 수가 없습니다. 내가 좋은점을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좋게 이야기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사라고 하는것은 하나님을 향한 칭찬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좋지 않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좋은 칭찬을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할수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좀 확대해서 해석했지만 그것 받아보고 나서 “아! 이것밖에 안주나”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재정 장로들을 향한 원망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연줄연줄 이어져서 하나님께로 가고, 그렇게해서 마음 깊은곳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자랑할수 없는 교역자가 일년동안 사역에 있어 무슨 열매를 맺을수 있겠습니까? 그런 고백을 그렇게 어눌하게 목회적으로 둘러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귓전에 생생합니다.
무엇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항상 언로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내가 교역자나 아니면 팀장이나 데리고 일하면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정보를 감추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아주 싫어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꾸 정보를 감추면 신뢰가 안됩니다. 그래서 보고도 안 믿어지고 그 다음에 ‘잘 되고 있읍니다’라고 이야기해도 몇 번 정보를 감추는 것이 느껴지면 ‘잘 되고 있습니다’ 이야기 할 때 “그것말고 내가 모르는 것 한번 보따리 풀어라...” 마음속에 항상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몇사람 표현에 의하면 목사님 마음을 불편하게 안해드리려 합니다 하는 배려도 있을수 있지만 그것은 자기자신이 그런 정보가 알려짐으로 말미암아 자기자신에게 어떠한 누도 돌아오지 않을때 이야기이고 그 이면에는 부정직이라고 하는것이 개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엊그제 목회자를 지낸 직원들한테 내가 가서 이야기 했는데 “너희들은 목사님한테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언제든지 해라” 팀장을 통해서 이야기 하고 잘 안되면 나한테 이야기 하고... 그래야지만 서로 동의할 수 있는 한도내에서 사역을 잘 해나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는 이야기가 언로를 타고 들어오면 내가 뼈 아프고 그래도 언로를 타고 들어오면 교회나 이런것들을 올바르게 해야 되겠다 라고 하는데에서 들어오면, 그런 여러분들의 정직한 정보인지 혹은 원망과 불평인지 하는 것들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깊히 인원적으로 여러분들이 누구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여러분들에 대해서 염려하는 마음으로 “목사님 이런것은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혹은 “목사님 우리 교구의 발전을 위해서 이런 것은 목사님이 알고 계셔야 되겠습니다”하는 것은 괜챦지만 아무리 교구를 그딴식으로 운영하냐고 하는 불평을 여러분들의 지체들이 선호도하면 여러분들이 매우 특별한 사람이 아닌한 사랑과 신뢰가 함께 현저히 떨어지게 됩니다. 그것을 나는 우리 사람들끼리는 덜한데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들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것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기를 가로막는 방해물들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원망과 불평이 없도록 해야 됩니다. 바른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정직함이 나는 좋습니다. 그렇게하면서 영적으로 성숙해 가기 위해서는 자기의 목회 상황을 영적으로 생각하는것에 대해서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고방식 자체가 교구나 혹은 부서에서 일이 일어나고 때에 따라서는 해괴한 일도 일어납니다. 정말 동의할 수 없는 일도 일어납니다. 작년, 재작년 처럼... 그러면 이것이 정말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되어 있다라고 하는것, 그런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내게 각성해 주시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이해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하고 끊임없는 사람을 향한 원망, 변명, 핑계 이런쪽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십자가 없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하면 절대적으로 영적으로 성숙되지 않습니다.
(예화) 그래서 옛날에 믿음의 선배들이 늘 하던 말씀이, 옛날에 내가 모시고 있던 박희천 목사님이 교회에서 회괴한 일이 일어 났습니다. 그분이 시간을 칼같이 아끼는 분인데 그때는 일개 교역 전도사에 불과 했지만 “목사님 저좀 만났으면 좋겠습니다”해서 평일날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사택에서 걸어 나오셔서 “무슨 일 입니까?”하고 이야기 보따리를 쭈욱 풀었습니다. 한 삼십분 이상, 한시간 가까이 이야기해서 다 끝났습니다. 고로 “교회가 상당한 위기에 처해 있으니까 목사님도 기도하시고 우리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몇가지 저는 행정적으로 올바로 잡는것이 아마 교회에 좋을것 같습니다”하고 이야기를 끝내려 하니까 그 시간을 아끼는 그분이 “전도사님 바람이 차가워서 무릎이 너무 시려운데 우리 그러지말고 저기로 내려 갑시다.”해서 “커피숍에 가서 따뜻한데서 좀더 이야기를 나한테 들려 주십시오.” 쭉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마지막에 괴로운 표정을 하시면서 “다 제 잘못입니다. 교회의 목회자가 전데 교회에 안 좋은 일이 있다면 그것이 저를 보고 하나님이 깨달으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교회에서 그런일이 있을수 있습니까?” 그런면서 눈물이 글썽글썽 하셨습니다.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 전도사가 지체 잘못 돌봐서 그런 해괴한 일이 일어 났구나. 차차집사 그놈은 도대체 월급 받아 먹고 뭐 하는 것인가?” 그렇게 하지 않고 “다 제 탓입니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수없이 만나는 목회적 상황속에서 번영할때나 혹은 쇠할때나 어려움을 만날때나 지체들이 죽어갈때나 지체들이 미끄러갈때나 영혼들을 하나님이 안보내 주실때나 자신에 관한 비난이 들릴때나 맡겨진 일들이 자꾸 무너질때나 어떤때 이든지간에 그 상황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러한 상황을 해석을 하고 이것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영적으로 성숙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까 몇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렇게 하는것이 옳다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하는것과 진짜 마음을 실어서 그렇게 하는것은 같은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목회적인 상황을 하나님 앞에서 매어져 있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화룡정점과 같은 사건의 영적 성숙에 있어서... 그 서번트한 기도, 그 마음을 모두는 열렬한 기도를 통해서 그 찌끼들이 빠져나가고 그다음에 xxx했던 은혜의 틀들이 복음되고 원망과 불평으로 흐뜨려졌던 영혼의 현들은 다시 가지런하고 팽팽한 줄이 되어서 다시 내려 퍼질수 있도록 복음이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것은 막고 그것을 안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보면서 매우 마음 아팟던 것이 교역자들이 안 나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새벽기도부터...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갑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갑니다. 일년 사역을 열심히 하느라고 했는데 여러분들이 잘 안왔습니다. 사역을 잘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포교한다고 신발이 닳도록 돌아 다녔는데 이제는 나 싫다고 자꾸 미끄러 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잘못 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능력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배력도 모자라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도 미성숙 합니다. 말씀에 있어서도 정리가 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공부를 가르쳐도 잠자던 영혼에 얼음물이 쏟아지는것 같은 충격도 못 줍니다. 그런사람에게 맡겨놓은 나도 책임이 있습니다. 또 어쩔수 없이 그런사람 밖에 없으니까 썼쟎습니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사역하면서 한번도 무능하다는 능력 때문에 사역을 그만두게 하거나 그런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 안나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새벽에 나와서 한번 보십시오. 교역자가 25명이고 사모님이 15명이어서 40명입니다. 간난아이 가지고 있는 사모 빼낸다고 하더라도 아마 30여명의 사람은 나와 있어야 하는데 안 보입니다. 그런데 더 신기한것은 교역자들이 보고서에는, 거짓말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수도 있고 하겠지만 모두 다 새벽기도 한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해가 안 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다가 7시반에 나오는 사람도 있고 9시 출근이니 8시에 나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안 나온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사는지 정말 이해가 안갑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자기반성을 이야기 합니다. 저는 마음의 성함이 없고 저는 늘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는데도 제가 부족하고, 그것이 6개월 만에 1년만에 계속 늦을수 있냐 하는 것입니다. 열렬하게 그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떨치기 위해서 서성치 않고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슨 은혜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영적으로 시간이 흘러도 성숙이 안되는 것입니다. 개념만 많이 쌓이는 것입니다. 성숙이 안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영적 뢴트겐 사진을 찍어서 영적 영력을 그래프로 비교해 보면 여러분들이 깜짝 놀랄것입니다. 여기 수석 부목사 두명, 그다음에 가장 오래된 목사 하나, 나이 가장 많이 먹은 목사 하나, 새로운 전도사, 이런것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런것과 상관없이 각자 어떻게 하나님을 열렬하게 추구하면서 살아왔는냐에 의해서 영적성숙의 그래프가 다 각기 하나님 앞에 달리 나타나는 것입니다. 두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항상하는 이야기가 유난히 담임목사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그때마다 이야기 하는데 “눈치보지 마라. 내가 니 예배드리는데 한번 갔다고 해서 뭐 그리 쩔쩔매냐 하나님 눈치 그렇게 보면서 산적 있느냐? 그랬으면 니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좀 의연하고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고 간구하고 매달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사역도 보면, 획일적으로 말할수 없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애달프게 기도하는 사역자들의 부서나 교구가 부흥하고 성장합니다. 그런 영적이니 몸부림이 있는 사람들이 뭐가 잘 안될때에는 마음속에 긍휼히 여기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요인이 있겠지, 결함이 발견되도 “내가 잘 타일러서 좀 고쳐보라고 그럴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지난번에 사역 끝나고나서 몇사람에게 통보했습니다. 제가 직접하지 않고 우리 조목사한테... “담임목사님한테 들었는데 아무래도 너는 목회소명이 아닌것 같다. 다시 기도해보고 길이 아니라고 확신이 들면 새 길을 찿는것이 어떻냐?” 울고불고 뒤집어 졌습니다. 왜 하나님이 말씀하실때는 안들려가지고, 조목사가 가서 이야기 하니까 뒤집어 집니까? 그래서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 병든 목초지, 유리하는 영혼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많이 말씀 하셨겠습니까? 옆에서 보는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픈데... 얼마나 많이 말씀 하셨겠습니까? 한번도 그렇게 xxxxx 않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이야기 하니까 그것이 도구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기도원을 간다 뭘 한다하고... 왜 그렇게 사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중요한것은 뭐냐하면 기도생활입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이야기 하는것이 육체니까 연약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쉬는게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자주 반복되면 안됩니다. 이겨도 몸부림치면서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남편이 새벽기도 안나가면 꺠워서 내려나야 합니다. 같이 그렇게 자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래서 월요일이 휴일이되면서 더 염려가 됩니다. 월요일은 거의 초토화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주일날 새벽기도 안나옵니다. 월요일도 안나옵니다. 토요일도 안나옵니다. 기도생활의 맥이 끊어집니다. 그렇게 우리 기도생활해도 2,3일 안하면 벌써 기도 자체가 어설퍼 지는게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기도하려고 하는 기꺼이 자체가 이속에서 점점 뒤로 물러납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너무 교역자들을 못살게 구는것이 아닌가 그래도 사실은 조목사도 알고 박목사도 알지만 한번 이야기 안했습니다. 처음에 사실 직원들까지 닥달을 했는데 이야기 안했습니다. 요즘에 와서 정말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그런 결과가 자꾸 나타납니다. 안 나타날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역을 하면서 나한테 정말 눈물이 빠질 정도로 나한테 야단을 맞은 몇몇의 교역자들은 그 이유가 대부분 왜 교인이 그것밖에 안나오느냐 그래서가 아니라, 새벽기도 안나와서 나한테 바가지로 혼나는 것입니다. 모 전도사는 나한테 혼나고 나서 그 충격이 1년이 지났는데도 헤어나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계가 울리면 반사적으로 튀어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생각이 듭니다. 나는 괜챦습니다. 새벽기도에 여러분이 꽉차면 내가 기분 좋아 하는것은 없습니다. 나는 목회할 수 있고 막말로 이야기해서 여러분들이 뒤로 탱탱 놀아도 열린교회는 갑니다. 어렵겠지만 교회가 문을 닫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헤어질날이 가까워 오는데, 나하고 헤어질것 아닙니까, 몇 년인지 모르지만 차례대로 차례대로 하나씩 둘씩 옷벗고 나갈것 아닙니까? 이제 못 만납니다. 이런 모임 있으니까 저도 한번 의자라도 놓고 와서 앉겠습니다 하면 못들어오게 합니다. “이제는 둥지를 날라 갔으니까 하나님 앞에 소신껏 살아라.”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예화) 독수리가 태어 났습니다. 그래서 그 독수리가 태어나면 솜털만 가득하고 깃털부터 털이 나기 시작해서 털이 붙고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어미가 둥지에서 떠밀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살아나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어깨에 힘이 붙으면서 날개짓을 하면서 살아 옵니다. 그래서 어느날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언젠가 하나씩 떠나 보내야하는데 떠날때에 어떤 모습으로 떠나고 싶습니까? 솜털이 있고 겨우 날개짓을 해서 자기 몸하나도 가누지 못해서 서서히 서서히 땅으로 내려 앉는 그런 독수리, 머리 하나 털이 좀 있고 깃털만 있고 몸통하고 목덜미에는 아직까지 털도 나지 않아서 마치 털 뽑아 놓은 닭처럼 그렇게하고 떠나서 목회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둥지에서 떠나라 하니까 큰 날개짓을 하면서 아직 체구는 적지만 배운 그대로 그 절벽 아래로 내려다 보면서 멋있게 선회하면서 늠름한 모습으로 자라서 그렇게 둥지를 떠나고 싶습니까? 어떻게 떠나고 싶습니까? 나는 여러분 모두를 그렇게 떠나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서 내가 목회를 하는 교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훌륭하게 사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의지가 충만합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 시간이 필요하다면 시간을 쓰고싶고 돈이 필요하다면 돈을 투자하고 싶고 환경이 필요하다면 여건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해마다 반복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을 찿지 않는것은 내가 도와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성숙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역에 있어서 익숙해 지는 것은 영적으로 성숙할 때 비로소 빛날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이렇게 비유하면 됩니다. 모서아에게 들린 검은, 노련한 무사는 아무 검이나 손에 들지 않습니다. 필승의 보검을 찿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검이 잘 다듬어져도 그것을 흔드는 무사가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훈련되어 있다라고 할때는 얼마나 훌륭한 검을 들었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여러분들이 좋은 내용을 배운다 하더라도, 그렇게해서 여러분들이 가서 사역을 한다해도, 휘두르는 기술을 발휘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하고 새벽기도 6시15분에 나와서 7시15분에 들어갔다는 기록만 잔뜩 써서, 그렇게해서 사역의 복이 없는것은 당연합니다. 영적으로 성숙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말씀드리고 싶은데 갈등을 희망적으로 일으키는 것을 투쟁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죄가운데 살려는 고집과 하나님 앞에서 변화받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의 귀천하다 라고 하는 속성 사이에서 이해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갈메이의 표현에 따르면 인내와 고집사이의 경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대오각성해야 합니다. 작년에도 우리들이 이런시간을 가지면서 연초에 기도하기로 결심했었는데 놀랍게 표시가 남니다. 상반기와 하반기의 사역을 그래프로 놓고 보면 정확하게 상반기에 2/3사역을 거두었고 하반기에 1/3이었습니다. 충격적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것과 안하는것이 얼마나 그렇게 커다란 차이가 있나 하는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역적 성숙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역에 있어서 성숙되어 간다고 하는것은 단순히 목회 기술이 늘어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목회 자체가 기술만으로 불가능 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격적 성숙과 영적성숙, 그다음에 사역의 지식이 함께 어우러져서 사역을 해나가는데 그것이 너무 훌륭하게 해나간다는 것을 사역적으로 성숙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기술만 배워서 빠끔이가 된 사람을 보고, 그런 사람을 보고 우리들이 사역적으로 성숙했다고 그런말을 쓰지 않습니다. 사역적인 성숙은 인격적인 성숙과 영적성숙, 지적성숙 이 모든 것들의 토양위에서 마지막에 아름답게 적용되어서 꽃 피우는 것이 사역적 성숙입니다. 사역적 성숙을 이루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을 정해야 합니다. 마음을 정한다는 것은 내가 서있는 이 자리, 피할 수 없고 피하기도 싫고 대치할 수 없는 가장 좋은 자리입니다. 이대로 계속 있으면 앞으로 나오지 무슨 댓가가 주어질까 그런것 말고, 여기 서 있어서 나중에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실지 여기를 발판으로 나를 어디로 뛰게 하실지 그런것 말고 여기는 피할 수 없이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준 자리이고 피하기도 싫고 피할 수도 없고 내게 있어 더없이 소중한 자리이다. 그리고 내 인생은 여기에서 이순간에 가장 아름답게 빛나야겠다 하는 영광스러움이 자기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우스운 이야기가 되도 말입이다. 저는 솔직히 그런적이 없습니다. 저는 한길을 가면 미친듯이 거기 엎드려서 5년, 7년, 8년 이렇게 있다가 기도하고 하나님이 응답하시면 그냥 갔고, 가면 그것밖에 없는줄 알고 또 사고 그랬는데 요즘들은 안그렇습니다. 심지어 같이 사역을 했던 사람들의 고백에 따르면 처음에 들어와서 교회를 떠날때까지 계속 고민하는 내용이 내가 꼭 여기에 있어야하나 입니다. 오는날부터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와서 마음이 정해지기 전에 어려움이 생기니까 여기 내가 계속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계속하다가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축복을 해 주시면 성경에서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성품하고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면을 두루 살피시면서 전심으로 자기를 찿는자들에게 당신도 그런 사람을 찿으셔서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 중대한 범죄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기쁨은 항상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기쁨과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묵상하는것과 하나님이 하신일을 묵상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서 하신 일 들을 생각하고 하신 일을 통해서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곳에 함께 흐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행하신 일을 기뻐하는 사람은 자기를 향해 행하신 일도 하나님이 기뻐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마음을 정해 가야 합니다. 그렇지않으면 정할수 있는 것을 찿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확실히 하는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세우셨다, 피할수 없는 소명이다, 뿐만 아니라 피하기도 싫은 소명이다, 언제까지 주님이 아신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기를 쏟아놓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한교회에서 봉사하면서 다른교회에 가본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허락을 안해주기도 했고 나자신이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른교회 전도사들은 부임 할 때 요구조건을, 전도사들도 대담하지만, “토요일하고 주일날만 나오겠습니다. 수요예배는 제가 두루 다니면서 배우겠습니다”하는데 그사람들이 많이 배웠지만 지금 나보다 목회를 더 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없이 설교 연구를 하고 목회 연구를 하고 다녀도 그렇게 해서 목회 연구를 하는것은 아닙니다. 사역적인 성숙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마음을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까 이야기 했듯이 하나님이 나에게 이 교구를 맡겨주신 것은 피할수 없는 부르심이며 또 피하기도 싫은 부름심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사역적 성숙에 있어서 부부의 연합이 밑거름이 된다는 이야기는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역을 하면 정말 가정을 팽겨치기가 쉽상입니다. 저도 그런 오류에 빠진적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것은 얼마나 아내와 'heart to heart'로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지, 이 방식이 뭔가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해 특강을 장시간에 걸쳐 했는데, 하고 있는지 한번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왜 이렇게 중요하냐면 아내가 어린아이를 기르면서 기도에 전념하는것이 어렵습니다. 영혼의 싫증이 남아있고 육체도 힘들어서 게을러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가져다 주는 정보는 자극을 합니다. 그런데 안 가져다 줍니다. 그러면 기도로부터 물러나는 아내의 영적인 게으름과 정보를 제공해서 자극하지 않는 남편의 태만이 합세를 하면서 그냥 평범한 가정주부가 되는 것입니다. 회사원의 아내처럼 말입니다. 그렇게해서 아내의 영혼이 남편의 발목을 잡고 있으면 그것은 마치 물에빠진 아내를 발목에 걸고 수영해서 강을 건너는 것과 똑같습니다. 요번에 어느 교역자가 나한테 선물과 함께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는 간단합니다. “목사님 우리 아내를 변화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습니까? 내가 변화시킨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변화시켰지만 이 교회와서 변화 되었으니까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몇 번을 이야기 했습니다. 변화된 아내와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복 입니까? 그러니까 끊임없이 정보를 공유하면서 부부가 이야기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같이 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마 교구의 성장이나 분석을 남편으로부터 보고서 받아서 보았겠지만, 안 보았으면 이번에 숙제이니까 샅샅이 보십시오. 보면 여러분 경악할 정도로 깜짝 놀랄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부부가 마음을 합해서 섬긴 그때와 그렇지 못했던 끈이 놓여 졌던 때가 어떻게 똑같은지 여러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역이 성숙해져 갑니다.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청년교구 교역자들 불러서 이야기 했는데, 물가에 내 놓은 어린아이 같습니다. 전부다 주위에 자매들입니다. 장년교구는 안그렇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미끄러지는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문이든지 사역이든지 기초가 항상 튼튼해야 합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이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것을 느낌니다. 학문적이 기초가 기본적인 소양이 탄탄해져야 합니다. 사역적 성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기본적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성숙되어 가야 합니다.
또하나 이야기하고 싶은것은 교역자들과의 관계입니다. 절대로 서로를 경쟁상대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회사나 사회의 이익단체에서 통용되는 개념입니다. 여러분들이 1교구를 사역하고 있고, 2교구 장년을 사역하고 있고, 청년을 사역하고 있고, 또 교회학교를 사역하고 있는 이런 차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고하는 공통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서로를 한 하나님의 자녀라고하는 가족으로 의식하는 것이, 그런 경쟁관계에서 생각하는것 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한 하나님의 자녀다, 선한 의미에서 잘 하고 있는 교구를 보면서 분발하고 “내게도 저렇게 축복을 주십시오”, “내게도 저렇게 지도력을 주십시오”하고 기도 할 수는 있습니다. ‘은혜를 주십시오’하고 기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경쟁상대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들 보면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배우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깊이 생각했습니다. 나는 목회를 잘 하고 있는것 같은데,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자라온 교회 환경에 비하면... 그런데 어느날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모두 좌충수 일 수 있다. 그래서 금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가장 성경적인 목회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목회자들의 명단을 찿아서 탐방을 하고 싶습니다. 나도 가서 보고 싶고 여러분도 보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한번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서로에게 배우는 자세들이 현저히 부족하다라고 하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아까 어깨너머로 배웠다고 누가 이야기 했는데 그러지 말고 대놓고 배우십시오. “어떻게 그 교구는 전도를 그렇게 많이 합니까? 내가 국수 한번 살테니까 한수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어떻게 성경을 잘 가르칠 수 있는지 한수 가르쳐 주마, 아니면 어떻게 교구를 조직하면 좋은지 내가 가르쳐주마.” 잘 보십시오. 교역자들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내가 누구에게 한번 배우면 내게 배운 그사람이 나에게 와서 가르쳐 달라고 말할 때 자존감이 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 이상합니다. 목회자들의 세계는 누가 잘하면 그것을 깍아 내립니다. 그리고 그것이 별것이 아닐꺼라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모들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물어보고 대화해야 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안에서 한 지체가 하나님을 잘 섬겼던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요즘 회사에서 하고있는 마케팅 기법입니다. 그래서 어느 성공사례를 만들어서 그것을 이 사람은 이론가가 아니라 물건을 팔다보니 잘 된 것입니다. 이것을 분석하는 사람이 이론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론을 만드는것 가지고 그렇게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체험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그것을 확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마케팅 기법입니다. 똑같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이니까 여기서 일어난 좋은일이 전파되서 함께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면에서 자주 교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제하면서 사역이 잘 성숙한 이야기. 하나님을 알아 가는 이야기, 그런것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에는 모두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배우고 싶은 마음보다 많습니다. 목사들이 귀는 작고 입은 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가르쳐주고 싶으면 먼저 배워야 합니다. 가르쳐 달라고... 그러면 가르쳐주는 기회가 옵니다. 그렇게 함께 공유하면서 배워나가길 바랍니다. 혹시라도 내가 3교구는 5교구에 가서 어느 항목에 대해 배워오라고 이야기해도 자존감이 상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5교구보고 4교구가서 배워오라고 할수도 있으니까 그렇게해서 함께 공유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사역적인 성숙이 이루어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역의 성숙은 결국은 여럿이 함께 일하는 것이지만 제일 중요한것은 지도자입니다. 지도자가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되어가는 것입니다. 박스에다가, 시계를 뭘로 만듭니까? 유리, 쇠, 페인트, 가죽등을 통에 넣고 백날을 흔들어 보십시오. 시계가 됩니까? 될리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조직이 어떤 조직이 되어서 어떤 기능으로 가고 싶다고 하는 구도가 없는 조직이 굴러가고 나니까 “아 바로 그거야, 내가 그렇게 됐으면 하고 바랬었거든, 야 이거 진짜 됐네”하는 이러는 법은 없습니다. 이런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절대로 상황은 그려놓은 한계 안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지혜를 사용하셔서 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력이 중요합니다. 지도력을 이야기 하기전에, 어떤식으로 지도력에 칼을 쓸 것인가 이야기 하기전에, 그 지도력이라고 하는것이 결국은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떄문에 이런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비정한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지도자는 항상 사랑에 넘쳐야 합니다. 이것이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정말 나를 소중히 생각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우유부단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최악의 리러쉽입니다. 조직을 망가뜨리는 리더쉽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상황이 벌어지면 철저히 분석해서 그 상황속에서 내가 이 조직을 어떻게 이끌고 가야 겠다는 분명한 판단력이 서 있어야 합니다. ‘함께 의논합시다’하고 회의할때는 자기속에 이미 결론을 어떻게 내고 싶은가가 서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참고로 잘 듣는 것인데, 참고로 들었는데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이야기가 나오면 내 마음속에 있는것을 접고 결심을 번복하는 것입니다. 밖에서 보면 번복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별다른 이야기는 없지만 이야기 한 것들을 전부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강화시킬수 있는 소재로, 협력할 수 있는 소재로 바꿔서 가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함께 모여 있을때는 네모나게, 네모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을 있을때는 둥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괜챦아 그럴수도 있지 다 약한데...” 그런데 공적인 자리에서는 칼 같이... 밤을 세워서라도 해놔야 합니다. 피가 나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유부단한 리더쉽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아주 떳떳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해하지 마시고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느조직 어느사회에 가서 살더라도 나와같이 만나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인기 투표를 하면 항상 1위를 하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살아 가자. 인기를 끌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뜻이 아니라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야 합니다.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덕을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 옆에 있으면덕을 보는게 아니라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경쟁상대로 생각하고 차갑고 자기사역에 이용하려고 하고 자기 필요할 때만 찿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강물은 흘러 갑니다. 강물이 땅을 적셔서 열매를 맺는 그런 의지는 없습니다. 강물은 물이고 물은 높은데에서 낮은데로 흘러 갑니다. 그래서 생태계가 형성 됩니다.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이 나를 많이 이용합니다. 짜증이 납니다. 언제도 한번 교회에서 행사를 치루고 갔는데 어느 목사님이 전화를 하셔서 급한일인줄 알고 전화를 받았더니 “목사님 접니다” “아 예 어쩐일 이십니까?” “이번에 우리교회에서 목사님들이 모입니다.” “왜 모입니까?” “우리 공부하는게 있어서 모입니다.” “그런데요?” “목사님 새로 쓴 책 30권만 보내 주십시오” “왜요?” “내용이 너무 좋아서요” 그래서 당황했습니다. 어려우시면 할 수 없고, 나눠 주고 싶으면 자기가 돈 주고 사서 나눠주지... 그것을 왜 나보고 내라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이것은 경우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또 한다면 하지 않습니까? “목사님 그것은 경우가 아닌것 같습니다.”하고 딱 끊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다해서 그 목사님하고 등지지 않게 처세 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물이론 이라는 것인데... 그 순간에 두 개의 감정이 교차 했습니다. 강물이론이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흘러가는데 누가 나를 이용하고 싶다는 구나. 그래 이용 당하자. “아 목사님 그것이 뭐 어렵겠습니까? 제가 가서 보내드리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너무 어려운 부탁을 해서...” “걱정마십시오. 제 책을 사랑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합니다. 보내드릴께요” 지금 이렇게 생각해보면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용하겠다면 좀 당하지 뭘 그럼니까? 이용 좀 당하면 어떻습니까? 좀 가지고 놀겠다면 가지고 놀라 그러죠. 사람들마다 다 어수룩한 사람이 없으니까 좀 바보같은 사람들도 한사람 지나가야지 뜯어 먹구 살것 아닙니까? 뜯어 먹는다는게 이상한 표현이지만 그런 강물과 같은 생각으로 우리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덕을 보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가 나왔는데 직원들이 누구 편인지 아십니까? 설교 잘하는 목사 편이 아니라 착한사람 편입니다. 개도 자기 이뻐해 주는 사람이 오면 달려오고, 만나기만 하면 발로차고 깡통 던지는 사람이 오면 문뒤에 숨어서 짖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비정한 리더쉽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따뜻하고, 빈말이라도 따뜻하고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절대로 우유부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혼란스럽다가도 지도자가 그렇게 하는것이 아니지, 이사람들아 너는 이리로 흘러가고 너는 저리로 흘러가고 이일은 이렇게하고 저일은 저렇게 한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제일 좋은것 같은데 더 좋은 생각이 있으면 이야기 해봐라. 없으면 한 3개월 해보고 다시 이야기 하자. 그러니까 돌아 나올때는 시원해 져야 합니다. 그런데 어수선한것 같은데 한번 회의를 하고나오면 더 머리가 터지는 것 같은, 머리에 쥐가나는... 나중에 어떻게 생각이 드냐면 조직에 대해서 반감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데리고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일을 해 낼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것들을 자꾸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리더쉽입니다.
세번째는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일관성이 있는 리더쉽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해 나갈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지킬려고 무한히 애를 써야 합니다. 그중에 대표적인것 두가지를 이야기하면 결혼식에 내가 주례를 서지 않으면 안가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개척하면서 지금까지 지켜온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문제라고 생각 안 합니다. 엊그제 대구에 아는 목사는 자기 장로님 아들인가 딸인가 결혼한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토요일날 결혼이 또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토요일날 주일을 준비해야 될 목사가 비행기를 타고 여기와서 한건 치르고 또 서울로 진입해서 거기서 또 한건 보고, 주례 서는 것도 아니고 하객으로...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일관성 있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돌집 같은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를 변경하려면 공고를 해서 하고 누가 보더라도 공평하고 불평부당한 리더쉽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나 하면 여러분들 너무 좋아하고 존경하고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좀 멀리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한걸음 띠어 놓아야 합니다. 너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띠어놔야 합니다. 속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불평부당하지 않게끔 공정한 리더쉽을 가져야 합니다. 교역을 하면서 중심적으로 옆에서 자기를 돕는 사람이 필요한데, 필요한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예수님도 3명, 12명, 72명 이런 원리로 사람들을 두시면서 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되냐면 그렇게 가까이 교역자 곁에서 목사님을 돕기 때문에 그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관계에 편중된 관계를 누리고 있다고 지체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런것들이 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비근한 예로 김경해 전도사님 같은 경우도 기독교 신학교 다닐때 열심히 나를 따라 다니던 학생 이었습니다. 장로회 회직원론인데... 그래서 알다시피 열린교회 세우기 전에 교회에서 일년동안 강좌도 하고 그랬습니다. 열렬하게 따라 다녔고 강의시간표까지 좌지우지할 정도로 열심히 따라다녔는데, 방학때는 만나서 같이 공부도 하고 그랬는데... 그러니 교수실도 자주 드나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이 점수를 받았는데 김남준 교수님 점수가 너무 짜다, 그래서 맨날 김교수 따라다니던 저 반장은 아마 점수가 잘 나왔을거다 했는데 F학점 줬습니다. 왜냐하면 적용기간내에 레포트를 하나도 안냈습니다. 그때 주위에 있는 사람이 의외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렇게 가까이 다니니까 A주고 이렇게 했다면 그 사람 한사람이 좋아하는 대신 주위에 있는 사람이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칼 같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뢰를 얻는 사역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꼼꼼함과 조직력입니다. 유유부단이 전체적인 방향에 대해서 빨리 정하지 못함이 우유부단이라면 꼼꼼함이 모자라는 것은 세밀하게 챙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도력에 있어서 대담함과 꼼꼼함을 어떻게 조화시키냐 하는 문제입니다. 대담함이라고 하는것은 방향을 설정할때에 사용자는 큰 방향을 설정할때에 하는 말이지, 아니면 시대를 졸업하는 사람이 대범하게 졸업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깨알같은 수를 놓아서 자수를 놓는 사람이 대담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 끊어하고 끊어버리고, 아 건너뛰어... 이렇게 하면 작품이 되겠습니까? 섬세해야 합니다. 시계공장을 할것인가? 빵 공장을 할 것인가? 직장을 다닐것인가? 회사를 차릴 것인가? 뱡향의 문제입니다. 이때는 꼼꼼함이 한계가 있습니다. 어떻게 꼼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빵공장하고 시계공장하고 똑같지 않은데... 하나는 밀가루고 하나는 쇠인데... 그것은 자기가 깊이 생각하고 모든 지혜를 동원해서 어느 순간에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래서 지도력을 이야기 하는 데에서 기독교 적인 신앙의 세계 밖에서도 글을 쓰는 사람들의 에스프리(영감)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자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들도 영감있는 지도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길이 이길인데, 두길이면 이렇게 갈수도 있고 저렇게 갈수도 있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는것입니다. 어느 한쪽이 이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여기서 결단을 내리지 않을수 없다 하고 내리는 것은 담대함입니다. 담대함의 방향을 설정할때에는 꼼꼼함이 필요가 없습니다. 담대하게 내려야 합니다. 그 다음에 방향을 설정하고 실제로 그일을 해가는데 있어서는 꼼꼼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길을 하나하나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는 이야기가 여러분들 노트가 깨알 같아야 합니다. 그래서 새캄해야 합니다. 항상 체크해야 합니다. 하나씩 하나씩... 직장생활하면서 여러 상사들을 보셨지만 그 분들이 나를 그렇게 좋아했던 이유가 뭐냐면 기록이었습니다. 항상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 주는 것입니다. 다 잊어버렸습니다. 당신이 삼일전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것을 지시했고 이틀전에는 현관 문 앞에서는 이것을 지시했고 어제 아침에는 사무실에 들어와서 문을 열고 나가면서 이런 지시를 했습니다. 본인도 잊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알아보니까 이건 되는것이고 이건 안되는 것이고 요것은 기다리면 된다.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확인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꼼꼼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누수 현상이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작할때는 거의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뭘 해라’해서 했는데 검사도 안하고 보자는 이야기도 안하니 그다음에는 해 그래도 검사 안할지도 모르지 하면서 두 번 말 안하면 안 합니다. 그리고 왜 안했냐하면 핑계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조직의 타성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두서없이 몇가지를 이야기 했지만 방향을 설정하는데 있어서는 대담하고 그리고 일단 일을 해 나갈때는 철저하게 꼼꼼하게 챙기고 지시한것은 확인해서 내가 원하는대로 가고 있는가 확인을 늘 해야 합니다. 마지막에 최상의 결과를 맺을수 있도록 리더쉽을 행사하면서 사역적인 성숙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내가 당부하지만 여러분들이 정말 금년 한해에 하나님이 복 주실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이 정말 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여러분들의 사역이 너무나 아름답게 그렇게 사역이 무르익어서 전성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태까지는 연습기였고 도약기였고 2004년은 전성기가 되어서 앞으로 몇 년을 전성기로 구가해 갔으면 합니다. 그러다 전성기가 쇠퇴했으면 좋겠다라는것이 아니라, 구가하다가 잘 여므러서 한사람씩 가서 열린교회보다 더 훌륭하게 교회를 하면서 사역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장 이달의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하나님 앞에 훈련의 기간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