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 6:17)
순서상으로 하면 오늘 여러분에게 7계명을 설교해야지 맞습니다만 이번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맞는 설교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하는 불후의 아름다운 고백을 남긴 그 결론 부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 사건을 사도바울은 오늘 자기의 실제적인 살아가는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십자가는 잊힌 적이 없고 그리고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에 대해서 많이 들었고 알고 있고 지금도 자신들의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가 서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배우게 되는 사건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결코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교리와 우리의 믿음을 위한 사건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사로잡히고 삶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이 재현되는 것이 아니면 신앙은 십자가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만약에 전통적인 교리를 믿고 살아가는 보수적인 신앙만을 자랑하고 우리가 만약에 이렇게 남다른 보수적이고 성경적인 교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사도는 웃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놀라운 능력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듣고 봤고 그리고 본 바를 어떻게 우리의 삶속에서 구현하고 그 정신에 우리의 삶이 사로잡혀서 그 진리가 우리의 삶속에 타오르는 삶을 우리가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라 볼 때 오늘날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 잊힌 진리가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이 되면 보십시오. 서울의 거리는 온통 붉은 십자가에 물들여져 있습니다. 술집과 다방의 네온보다 훨씬 더 많은 십자가가 서울 전역을 붉게 물들여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직도 이 도시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불빛이 반짝이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공로와 보혈에 의지한 능력이 이 도시를 휩쓸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붉은 십자가의 모든 물결들은 하나님이 이 도시를 예감이 입각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는 정도의 붉은 등불처럼 우리의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 모든 것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십자가의 정신을 따라 살아서 말과 색깔의 십자가가 아니라 삶으로 고백하는 그런 핏빛 십자가의 삶을 통해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오늘 바울이 편지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 갈라디아 교회는 잘못된 신앙에 빠진 이단적인 가르침을 쫓고 있는 교리의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고 사도를 통하여 교회의 터를 높게 했던 굳건한 복음의 진리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그 십자가만이 우리의 구원과 구속을 위한 충족한 조건이라고 하는 사실들을 잃어버리고 복음 진리의 터에서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사도는 늘 자신의 서신 속에 사는 인사말조차 없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 첫마디부터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말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가슴 저미는 어조로 사랑의 장을 기록했던 같은 사도의 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잘못 나가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그는 분노하며 경고를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흐느껴 울게 되었고 그러다가 감격하고 감격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가운데 그는 중요한 말을 하게 됩니다. 뭐라고 말했습니까?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나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거짓 선생과 믿음이 약한 신자들이 이렇게 거짓된 교훈에 빠지고 하나님의 참된 복음의 도를 흔들어 놓고 잘못된 복음으로 교회의 터를 다시 세우려고 한다고 할지라도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내 몸의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십자가의 복음, 자기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가르쳐준 십자가의 복음은 그들이 와서 인간의 공교한 말로 사람들을 꼬이고 가르치는 그런 사고의 조작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만들어낸 그런 철학이나 사상이나 고함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만들어 놓은 사상, 인간이 공교히 연구해낸 고안에 자신의 삶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사도는 오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복음은 내가 몸소 살았던 복음이니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였던 십자가의 도는 그 도로 말미암아 내 인생을 하나님 앞에 살아 왔다. 이제는 그 진리를 따라서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예수의 흔적을 내가 내 몸에 지니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았던 사람들은 그런 삶을 동경하기만 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영혼 속에서 남이 못 만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그 하나님이 우리같이 소망이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어떤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행했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이었습니다. 불꽃처럼 산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 싶어서 그런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살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그들의 마음속에 역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아니하고 베길 수 없는 그 무엇이 그들 속에 역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향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놀랍고 위대한 사랑, 언제나 자기를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앞에서 자기를 부인 할 수밖에 없었던 모든 사람들은 항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온 몸으로 느꼈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은 먼저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누구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천하보다 귀한 영생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그러나 그 사랑이 여러분들의 삶을 주관하고 그 사랑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하는 놀라운 마음의 역사가 오신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며 남이 알지 못한 것들을 보았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와 진리 앞에서 값싼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마음의 감동을 자주 받는 사람들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혼 깊은곳 에서 흘린 그 눈물을 가지고 자기가 흘린 눈물에 책임을 지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을 부르셨지 감성적인 사람들을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셨지 단지 감동받기만 잘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며,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를 위해 사신 것처럼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 종종 절기 때마다 감격하고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한 것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을 향해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너희들이 뭘 믿는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참 복음이 아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삶을 보라. 나는 너희에게 십자가를 전해주었고 나는 그 진리를 따라 살아왔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내 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시기까지 주님의 몸에 지녔던 독특한 흔적들을 나는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귀한 복음을 증거하고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는 온 몸으로 자신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어느 한순간에 인생의 마지막에 당신을 몸을 우리를 위해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의 태어난 사건부터 시작해서 모두 하늘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온 사건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기까지 그의 인생 그 자체는 이미 우리를 위해 자기를 모두 버릴 십자가의 생애를 겨냥한 준비로서의 일생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온 인생의 마지막 결국이었음을 기억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그 구속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생을 살면서 겪었던 몸의 모든 상처, 몸의 모든 고난의 흔적을 함께 겪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몸에 어떤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처럼 순결을 요구받는 시대에 살지 않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나아가서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고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사랑을 말해도 우리를 향하여 미친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우리의 생명을 내놓으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시대이든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살아갈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몸에 가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사도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스티그마’, 이 ‘스티그마’는 바로 고대에 노예들이 많이 있어 도망 다니니까 노예 등 뒤에 그 집의 독특한 표시가 되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쇠로 만든 인장을 새겨서 노예가 태어나면 그 노예 등에 찍는 것입니다. 불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가축도 그렇게 화인을 찍는 것입니다. 비누로 씻어도 그리고 때수건으로 밀어도 지워질 수 없는 ‘스티그마’ 그 흔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십년 혹은 이십년을 예수를 믿으며 여기 왔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흔적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 그 흔적이 우리의 삶속에 어떻게 나와 있는지 오늘 사도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에게 진정한 구원과 자유와 풍성한 삶을 주기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예수를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의 능력으로 살려 내셨습니다. 하늘의 위해 한 기운이 그의 육체를 감싸고 누구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신비하고 장엄한 부활의 능력이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살려 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가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두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광경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누구도 경험한 적이 없는 하늘의 위대한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사셨으나 도마 앞에 내미는 그 손에는 여전히 십자가의 못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의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를 위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흘리셨던 그 거룩한 물과 피를 쏟아내게 만들었던 허리에 굵은 창 자국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였던 제자들은 만지고 또 보았습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은 이후에 ‘예수의 흔적을 어떻게 하면 몸에 남길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며 일생을 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같은 죄인을 찿아 오셔서 핍박자요 포행자이었던 이 세상에서 죄인 가운데 계신 비천한 인생의 목숨을 살리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그 사랑 때문에 그는 이전에 자랑하던 모든 것들을 버렸습니다. 한때는 유대인의 가문에서 태어난 것도 자랑했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는 사실도 자랑했습니다.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레를 받은 것도 자랑했고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에 그는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얼마나 고상하고 놀라운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그 놀라운 사랑에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인생의 참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로 나 같은 죄인에게 밑졌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찬송)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아서 광명을 얻었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자기를 위해 피 흘린 그 구속의 놀라운 사건을 깨닫는 그 순간에 사실은 죽었던 인생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을 위하여 사노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인생의 사실은 시체와 같은 인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말로는 의를 말하고 생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말하였지만 그 삶 자체는 죽은 자와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사랑이 이 사람의 자랑거리를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십자가를 자랑하며 살기 시작하자 그는 이제 그의 평생소원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 놀라운 사랑이 이 마음에 있기에 그 사랑이 움직이는 대로 하나님 앞에 살아드리는 것이 마음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 때 그는 피할 수 없이 자기 몸속에 쌓여가는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안지 1년 혹은 2년, 10년,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올해도 고난 주간이 어김없이 찾아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놀라운 구속의 사건, 우리 같은 죄인들이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알면서도 영화롭게 하지도 않을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매년 맞이하는 이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중에 진정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내 몸에 남기며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았던 인생의 시간들이 얼마나 됐는지를 오늘 우리는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누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지금은 또 보좌 우편에 앉아서 누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까?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아계신 그리스도 예수께 우리가 “주님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 주님의 유일한 소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좋으신 주님은 무엇이라 대답해 주시길 원하십니까? 홀로 받으셔서 그리고 지금 그 지극한 영광 가운데 계신 그분에게는 아무 소원이 없으십니다. 오직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여러분들과 제가 그렇게 예수님이 사셨던 것처럼 그렇게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인생의 날 동안에 십자가를 자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마치 하늘 보좌 우편에서 주님이 우리를 자랑하듯이 말입니다.
(예화) 한 5년쯤 넘은 것 같습니다. 그때도 꼭 이때였습니다. 서른다섯이 되던 해였습니다. 고난주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 이로서 저는 주님이 이 세상에 사셨던 것보다 2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35년의 세월을 반성해 보니까 어느 한 순간도 그때처럼 그렇게 살았으면 하나님이 참 좋아하시겠다는 인생의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남은 35년, 한 70까지 산다고 치면 앞으로 35년 남은 후에는 더 잘 살 수 있는 자신이 있느냐 하면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머뭇머뭇하는 사이에 상황은 끝나고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오가는 길에 주님이 우리를 호출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여러분 오늘 이 고난주간을 향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 고난주간에 초상집처럼 노래도 안 듣고 구경도 안가고 근신하는 것만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고난주간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이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은 다 하나님의 뜻이고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만을 위하여 부활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새롭게 깨닫고 결심하는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또한 주님을 섬기는 사역의 일생에 있어서 흔적을 가진 것 그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예수의 흔적이라는 것이 아마 사도가 매를 맞고 핍박을 받아서 몸에 난 상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그는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알고 사역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온 몸에 수많은 매를 맞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남다른 몸의 상처와 채찍에 맞은 상처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또한 이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하는 예수의 고백을 통해 그가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난 이후에 어떻게 그 인격이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갔는지를 암시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하고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명의 길이 있을 때 그것을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피해간다고 하는 것은 정말 쉬운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게 걸어가는 것이 났지 피해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 고달프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단지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위대하고 훌륭한 선교의 업적만을 이룬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알고 난 후에 매일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자신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인격적인 변화의 과정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알았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자기를 십자가에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우리의 육신 우리의 이 방종하게 살려는 우리의 삶이 우리의 인격을 여전히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전에 율법 아래에 있을 때에 자신을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 닦고 다듬었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노예처럼 다루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싫어하는 자신의 삶,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알되 그 사랑을 닮으면서 그 사랑을 닮기 위해 지불하여야 하는 인격적인 성화, 인격적인 거룩함에 연단의 과정을 걸으며 지불해야 하는 고통을 치르기 싫어하는 방종한 자신의 육신과 인격을 쳐서 복종 시켰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그분이 자기를 위해서 어떻게 죽으셨는가를 알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없었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었습니다. 주님을 닮고 싶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처럼 그 인격의 위대함처럼 어느 한순간에 다가와서 교만과 아집과 편견과 독선과 위선 속에서 살아가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인격 앞에 자기가 완전히 녹아졌던 것처럼 그렇게 위대하고 거룩한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닮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십자가는 역사합니다. 우리가 살면 십자가는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헌신의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탁월한 헌신을 통하여 세계선교의 위업을 이루는 것보다 더 큰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알고 싶었습니다. 예수를 닮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면 닮을수록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는 주님을 위해서 살지만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를 소유하지 못한 파산한 사람들의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사도는 감히 갈라디아 교인에게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한 이것은 인격 속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 열 린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여러분 하나님 앞에 기도도 많이 해 왔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예수의 냄새가 날 때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나아갈 때에 여러분들이 왠지 그리스도 예수를 닮은 사람인 것처럼 여겨지고, 널 보는 이마다 주를 생각하게 되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 자신을 죽이는 일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우리가 매일매일 삶속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죽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는 언제나 우리가 죽는 그 자리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도는 오늘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이미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이시고 우리의 삶의 최고의 가치라고 하는 사실, 그것은 이미 말로서 이야기 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나는 이미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믿어왔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살아 주셨기 때문에 이제 나와 예수 그리스도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으니 너희는 더 이상 거짓된 복음으로 나의 전파한 복음의 도를 흐리지 말라고 사도는 오늘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도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 도에 붙잡혀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인격에 한없이 매료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의 신비함에 감화되고 그래서 어찌하면 나같이 모나고 나같이 이기적이고 더러운 죄인이 예수의 십자가의 그 참된 사랑을 그 인격을 닮아갈 수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사모해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이 사도는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라고 말함으로 말미암아 미래에 사도가 어떻게 살 것을 우리에게 암시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지, 흔적을 가진 것은 지금이고 그 흔적을 남긴 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지만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런 괴롭힘으로 내 삶의 목표를 바꾸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주님을 위해 살 것인가 하는 인생을 바꿔 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나는 지울 수 없는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흔적을 가지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 이외에는 내 인생의 참된 자랑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가 전해준 복음을 훼방하고 어리석은 또 다른 구원의 도가 있다고 가르치며 사람들을 유혹하는 이 모습을 보면서 사도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의 참된 사랑 앞에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고 오로지 구원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만 비롯한다는 사실을 인간들이 인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는 바로 그 점을 간파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하나님만을 높이고 우리의 삶의 서막이 이루어진 모든 축복과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기 보다는 우리를 높이고 우리의 의를 의지하며 살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쐐기를 박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육체를 자랑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말고는 자랑거리가 없다. 이전에 그렇게 살았고 지금 그렇게 살고 있고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살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길을 여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우리 안에 드러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이번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산에 내려갔습니다. 저는 마산이 전라도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 사람들한테 욕먹었습니다. 마산도 모른다고 그런데 마산이 바닷가입니다.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거기 갔는데 400명 이상 많이 모였습니다. 대구에서 부터도 왔습니다. 내려가는 날부터 최악이었습니다. 너무 몸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는데 숙소에 갔다가 늦었는데 저녁집회 하러갈 기운이 너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죄송한 이야기지만 오늘은 초반전이니까 한시간쯤 하고 재충전을 하고 내일부터 승부를 걸자 했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고 신기합니다. 올라가서 기도하고 설교하는데 15분쯤 지나니까 온몸의 병이 다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시작했는데 닷새를 했는데 ‘다 같이 기도합시다.’ 했는데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교회였습니다. 정통 장로교회 그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느낀 것이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 열린 교회만 사랑하는지 알았습니다. 모든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이 감싸고 사랑하셔서 돌 같이 굳어졌던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팔십 할머니들이 앞자리에 앉아서 은혜를 받습니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왜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처럼 불순종하기 일쑤이고 자기 마음대로 살기 일쑤이고 하나님이 은혜 주셔도 자기 뜻대로 살고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주일 동안 제가 열린 교회 없는 동안 새벽기도도 나오시고 수요예배에 은혜 많이 받으셨다고 하고 다 좋은데 일주일 동안 여러분 얼마나 부단히 내 몸속에서, 여러분의 삶속에서 예수를 위해 살고자 하는 자아와 여러분 맘대로 살고자 하는 자아가 치열하게 투쟁을 했느냐 하는 것을 살펴봅시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순간에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아가 아니라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아가 오히려 승리를 거두고 개가를 부르는 것들을 종종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실패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인데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말랐던 우리의 심령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에 우리의 많은 허물과 죄악과 무지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리는 불꽃과 같은 삶을 살게 되기를 기도하고 간구하는 예수의 그 공로와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집회를 나가보면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 사랑은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이러한 놀라운 사랑을 사도 바울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평생소원이 어찌하든지 그렇게 자기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앞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죄를 향해 죽고 하나님의 의를 향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의로운 삶을 선택하고 방종한 삶을 미워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기 때문에 자신을 죽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매일매일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경회를 여는 이유는 사람들을 한번 불러다가 눈물 흘리기 위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이 아니면 우리가 얼마나 소망이 없는 존재인지를 말하고 오늘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어서 오늘 예수의 인격과 참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복된 삶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일을 계획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우리는 방종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우리에게 육신의 태만과 무지와 방탕함 속에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을 닮아가지 않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인격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변화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십자가의 진리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가 간직했다고 고백했던 이 세상의 어떤 사상과 생각에도, 또 이 세상 자체도 흔들어 놓고 바꾸어 놓을 수 없었던 그런 삶의 이정표를 제시해 주었던 삶의 능력 그 자체였던 예수의 흔적을 우리 몸에 나눠 갖게 된 그런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답게 그리고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살아 있는 날 동안에 기회 있는 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음을 외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