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사회에서의 진리의 전달자로서의 신자의 역할
오늘날 기독교가 어느시대 보다도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개신교 가운데에는 많은 종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개혁 사상을 이어 받았다고 하는 정통 장로교회를 비롯한 교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두가지 어려움인데 하나는 자기가 물려 받은 신앙의 고귀한 유산을 자기가 확신있게 붙들고 살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올바른 진리를 고수하는 교회가 후기 근대주의라고 하는 사고를 따르는 오늘날 현대인들로부터 점점 매력을 잃어가고 있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세계화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세계화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장벽이 높이 있었는데 그러한 장벽들이 제거가 되고 전세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개방성을 갖게 되는 것을 가르켜서 세계화 라고 이야기 합니다. 따라서 이 세계화는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 문화, 종교, 예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개방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도 수없이 30년 전이면 생각지도 못했을 텐데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이 외국을 드나들면서 외국에 있는 문물들을 받아들이고 또 거기에서 배운 지식들을 여기에서 활용하는 이런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관은 일방적으로 자기를 열고 다른 사람만 들어오라고 하는 개방성이 아니라 자신도 남 속에 들어가서 타자와 자기가 서로 얽히는 이런 종류의 상호교통적인 개방성입니다. 이런 개방성은 철저하게 자기실현을 위한 개인주의를 가지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포스트라는 것은 후 라는 뜻이고 모더니즘은 영화에서 마든이라면 현대를 가르키지만 사상사에서 모더니즘은 현대주의가 아니라 근대주의입니다. 이 근대주의라고 하는데 이 근대주의를 언제부터 근대주의라고 하느냐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견으로 나뉘어지지만 1590년에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태어 납니다. 이 사람은 그렇게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철학자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쨎든 독특한 생각을,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관점들을 그 시대에 제공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중세시대까지는 신과 진리가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던것이 이 데카르트는 진리 그 자체가 신과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진리도 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진리 조차도 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진리는 신이 아니지만 신이 창조한 진리는 자명하기 때문에 인간이 판명한 지식과 존재의 이치에 대한 발견은 신뢰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데카르트가 모든 생각을 객관적으로 생각하던 것을 이제 인간이 그 모든 진리는 신에 속했지만 진리가 존재 하는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라는 것을 파악을 해야 하는데 파악하는 것은 결국은 사람이지 신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진리를 이해하고 인식하는데 있어서 주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1724년에 태어난 칸트라는 사람에게로 이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제껏 신앙의 영역이 있고 과학의 영역은 신앙의 영역에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을 했는데 신앙의 영역은 인간이 학문을 통해서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줄을 그어 버리고 신앙은 신앙일뿐이고 학문은 학문일뿐이다 라고 줄을 긋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칸트의 태도가 그 당시에 계몽주의가 일어나면서 인간의 이성적인 근거를 가지고 신이 존재한다는 허구성을 지적하던 것들로부터 기독교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칸트 자신도 이렇게 신앙의 세계 그 자체는 있고 없고 간에 그것은 학문적으로 연구할 대상이 아니다 라고 제거 함으로서 이제껏까지 모든 학문의 왕좌의 자리에 있던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 완전히 학문의 세계에서 추방을 당하고 종교의 영역으로 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중세까지는 결국은 하나님의 은총이 모든 인간을 지배한다고 믿었고 그 은총은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받아 들이고 거기에 순종하면서 배우는 가운데 이 세계와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데카르트 이후로 절대 기준으로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고 이성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성경이 왜 진리냐 인간이 그것을 진리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진리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성을 우리 모두를 다스리던 왕좌에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고 신앙이 있었는데 이것을 끌어 내리고 인간이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것이 진실이고 진리이다 라고 믿고 인간의 이성을 그 왕좌에 올려 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이성으로 성경을 이해해서 이해가 되고 이치에 맞는 것은 진리 이지만 이치에 안 맞는 것은 예전 같았으면 믿음을 주옵소서 하고 하나님 때문에 그것을 믿었는데 이제는 그것을 믿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성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는 인간들에게 최상의 가치는 인간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앙을 끌어 내리고 이성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 놓고 인간이 어떻게 하면 교회의 악재로부터 벗어나서 인간이 행복할 수 있을까 라고 하면서 문화를 창달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인간이 생각하고 결정하고 인간의 이성을 믿으면서 과학을 연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과학도 발달하고 많은 진전을 이루었는데 결국은 근본적으로 인간 자신의 어떤 행복을 가지고 왔냐 하면 사실을 그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의 커다란 세계대전을 겪고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재와 인권유린, 질병, 기아 이런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에게 무슨 생각이 들게 되었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를 팽개치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이성이 최고다 라고 생각하고 왕좌에 인간의 이성을 올려 놓았는데 결국은 믿었던 이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 세계는 인간은 너무나 불행하게 하는 세계다 라고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것이 철이 들게 된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성을 그렇게 믿을 수 없으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이성을 끌어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시를 끌어 내리고 이성을 올려 보냈는데 이성도 왕 노릇을 시켜 보니까 마지막에 이루어진 세상이 개판이더라 그래서 이성의 멱살을 잡아서 끌어 내리면 누군가를 올려 보내야 하는데 올려 보낼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근대주의에서는 이성이 왕좌에 올랐지만 최소한 신앙을 버린 사람들었지만 최소한 뭐가 있었나 하면 이성이 끊임없이 보편적인 가치와 진리의 기준들을 찿아가면 그러면 거기에는 무엇인가 분명하게 근원은 알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이루는 어떤 도덕의 근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그래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확신이 무너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이성주의 아래 형성된 가치의 체계들 선, 도덕, 윤리 이런 모든 것들이 전면적으로 거부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1900년대부터 시작되었던 실존주의 철할입니다. 그래서 사르트르 같은 사람들은 일평생 한 일이 무엇이었나 하면 진리를 허물어 버리는 일, 사람들이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거짓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동의해야 하는 일반적인 원칙으로서의 도덕 그런것이 없다 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가장 단순한것 어떤것일까요? 예를 들자면 사람이 태어나면 결혼을 하고 부부 관계에 정절을 지키고 그리고 나라가 있고 나라에 충성하고 나라는 백성을 보호하고 하는 이런 종류의 모든 기본적인 도덕들 조차도 모두 그 가치를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2차대전이 일어나면서 더 심각해 졌습니다. 2차대전이 일어난 그때에 2차대전이 일어난 그 파괴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특히 유럽에서의 파괴는... 그런속에서 결국은 해체주의라고 하는 또는 허무주의라고 하는 사조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것은 특히 문학과 언어에 큰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여태까지 우리는 개 하면 저사람하고 나하고 개에 대해서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언어가 서로 소통이 되었는데 이 사람들은 언어가 갖는 객관적인 의미 조차도 전부다 부인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 나는 나대로 이야기 하고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 이야기 하기 때문에 의사가 분명하지 않다 그래도 이 의사가 소통되는 것은 어떻게든지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살려고 하는 인간의 자비심어린 노력 때문에 의사가 소통되는 것이지 언어 조차도 객관적인 아닌 것이다 상대적인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후기모더니즘이라고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원주의적인 사고를 들여오게 됩니다. 다원주의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하면 어떤 하나가 진리의 근거가 아니라 이것도 진리가 될 수 있고 저것도 진리가 될 수 있고 각자 각자 알아서 자기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따라 가면서 살면 된다 라고 하는 주의입니다. 어차피 없으니까 이 사람들이 하는 진리는 저 사람에게는 진리일 수 있는데 나에게는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에게는 진리일 수 있는데 그 사람에게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진리이냐? 진리는 원래 없기 때문에 굳이 자기가 살아가기 위해서 이것을 진리라고 생각 하면 되겠다 하고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믿는 그 가치는 진리를 돋보이게 하고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을 편안하게 해 주면 그것이 다른 사람이 다 거짓이라고 말해도 내가 진리라고 생각하면 진리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해도 말이 안되죠? 그런 생각을 오늘날 이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정치적인 배경을 보면 20세기에는 제국주의가 발달하게 됩니다. 제국주의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한 나라가 자기나라의 영토를 식민지를 통해서 계속 넓히면서 다른 나라에 대해서 배타적인 독점권을 갖는 것을 제국주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국주의는 산업발달과 관계가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영국부터 시작을 해서 공업화가 이루어지는데 이제 산업화를 통해서 수공업으로 하던 것들이 공장제 공업으로 변모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손으로 만들던 것을 이제 대량 생산을 통해서 원가를 아주 낮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싼값에 질 좋은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건들이 팔려 나갑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런 구조를 돌리기 위해서는 일꾼들이 필요한데 그러니까 돈벌이가 농사를 짓고 양을 치고 하는것 보다는 도시에 와서 노동자로 사는 것이 훨씬 더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농지를 버리고 목축업을 버리고 공장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산이 더 촉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돈을 벌어, 도시에서 돈을 버니까 돈을 쓰고 돈을 쓰니까 그 돈이 돌면서 또다른 물건을 만들어 내어 촉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생산 능력은 많아서 많은 물건들을 생산했는데 이것을 국내에 다 파는데에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국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외국에 그 물건을 팔수있는 나라에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 우리는 싫다 그런식으로 너희와 교제하고 싶지 않다 하면 대포를 들고 와서 문을 열어라 만약에 문을 안 열면 다 갈겨 버리겠다 문을 열면 들어와서 물건을 팔고 자기들이 물건을 팔고 그곳의 노동력을 이용하고 자원을 가져다가 공장을 돌리기에 협조하는 사람들로 무력으로 제압해서 정부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친일파, 친러파, 친독파, 프랑스파 이런식으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경제적인 산업의 목적을 위해서 이런 제국주의가 발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량생산을 위한 산업화는 필수적으로 생산수단의 발달을 가져 왔습니다. 설비의 기계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몸으로서 품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과 기계를 가지고 생산수단으로 이용을 해서 엄청나게 많은 재화를 찍어내는 계급이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르조아와 프로레타리아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노동자와 자본가로 나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산업화 이전에는 수공업 생산이 이루어지고 이것을 만들어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겠다 하는 생각은 없고 그냥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파는데 그 사람들이 아름아름 이웃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한양에서 집세기를 삼아서 부산까지 가서 팔면 원가가 안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해서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 파는 것입니다. 재화의 교류를 통해서 사람들이 서로서로 아는 인간 관계가 유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서 재화의 흐름을 매개로 친화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산업화가 진입 되면서 엄청난 원자재의 공급과 노동력, 생산설비, 그 다음에 대량생산된 물건을 움직이려면 도로 같은 것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도와줄 수 있는 운송수단도 있어야 하고 그리고 이것들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인프라가 구축이 되어야 합니다. 시골에는 이런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시로 모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의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옛날에는 이것 하나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철판을 두드려 깍고 이것을 동그랗게 파고 해서 나무 깍고 해서 만들었는데 이것만 만드는 집에서 받아 오고 나무만 깍는 집에서 받아 오고, 치는 이 줄만 만드는 집에서 받아 다가 조립을 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 사람이 이것을 만들어서 시장에 파는데 옛날 같으면 혼자 하면 되는데 이제 산업화 사회에 들어서게 되면서 이사람 이사람 이사람 이사람이 전부 똑같이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도움이 없으면 이 사업을 내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누구 한사람이 절대적이고 나머지는 다 따라오는 사람이라고 하는 옛날의 사고방식 가지고는 사업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생각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는 산업화 사회에서 생산 활동을 계속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가치 상대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것들이 대게 유럽에서는 18세기에 시작이 되고 미국에서는 19세기 중반 우리나라는 20세기 중반부터 시작이 되었다 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렇게 하면서 예전에는 부자 나라가 몇나라가 있고 가난한 나라들 뿐이었는데 최근 50년 동안에 중국을 비롯해서 동남아 국가들 특히 싱가폴, 말레이시아, 한국, 일본 그리고 대만, 태국 이런 나라들이 급속한 성장을 이루면서 선진국들에게 이제는 아주 중요한 매력이 있는 시장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매력이 있으니까... 또 그 후진국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엄청난 구매력을 가지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시장에 진출하지 않고는 경제 자체를 확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서로 공생하는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나라가 크다고 무조건 우습게 보는 상황이 아닌 이러한 시대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생산공장의 현지와 복합적인 기능의 산업화, 더욱이 다국적 기업이 등장하면서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국산품 애용이라는 것도 별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영국의 롤스로이스가 전통적인 영국의 자동차 회사 였는데 외국으로 넘어 갔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하면 우리나라 같은 경우도 보면 쌍용자동차는 중국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아직은 그런일이 없지만 중국에서 생산되어서 중국 마크를 붙이고 들어오는 현대차가 있다면 외제를 사용하는 길이 애국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현재 있는 차를, 자기나라의 차를 사는 것이 오히려 논리적으로 보면 실질적으로 보면 그 나라를 위한 행위가 아닌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산업들이 복합적으로 엉키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같은 사업을 하는 사람끼리 경쟁을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생수를 파는 사람의 경쟁에서는 또다른 생수를 파는 회사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이키의 경쟁상대는 누구냐? 당연히 우리는 나이키의 경쟁상대는 리복 같은 회사일것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일본의 게임 회사인 닌텐도 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게임에 빠져 미치니까 트레이닝복을 안 사는 것입니다. 운동화를 안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가 보아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이 정치적인 이상을 바꾸어 버리는 일이 일어 났다고 합니다. 작년에 중국에서 물권법이 통과 되었는데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여태까지는 좀 심한 이야기지만 내가 회사를 운영하는데 잘 되면 당에서 뺏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해서 당한 한국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냐하면 내가 경영하고 있고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회사는 나라도 뺏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뺏어 가려면 정당하게 보상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 물권법은 결국은 자본주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유재산 제도를 정식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유재산 제도를 정식으로 인정하면 자본가가 생겨 나는데 그런데 사실은 그 이전에 중국 공산당의 원조인 모택동이 자본가들을 이 잡듯이 다 잡아서 프로레타리아 세상으로 만들었는데 언제가는 양의 탈을 쓴 이리떼 같은 자본가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반듯이 등장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는데 오늘날 중국은 그 이리떼들이 먹여 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많은 자본가가 나와서 큰 재산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 자본 아래서 수 많은 인민들이 취직을 해서 밥을 먹고 살고 그들의 생활이 개선이 된다는 사실을 중국 정부가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공산주의라고 하는 자신의 정치적인 이상을 경제적인 상황이 완전히 바꾸어 놓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어쨎든 이러한 세계화의 상황은 누구도 이 세계화 안에서 내가 최고다 그리고 다른 모든 인간들은 다른 모든 나라들은 아무것도 아니라 이럴수가 없는 구조의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고 세계화가 진행이 됩니다. 한국의 세계화는 정치와 경제 두가지를 축으로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오랜 독재로부터 민주주의로 가는 것이고 경제적으로는 예전에는 나라가 발전할 때 국가가 다 정해 놓으면 돌격 앞으로 하면서 경제가 발전 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해서는 발전 할 수 없다 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국가 기획에 의한 발전주의 모델에서 자유시장 경쟁체제로 발전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하는 일이 요즘은 계속 외국에 다니면서 우리나라에 제발 투자를 해 주십시요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계속 하는 것이 대통령의 일이고 국무총리의 일 입니다. 도지사가 되면 도지사가 무슨 심오한 철학을 가지고 도정을 펼치는 것이 아니고 그런것 필요 없고 외국의 자본을 많이 들여와서 공장을 크게 짓고 거기에서 공장을 짓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우리가 팔아 먹고 그러면 공장을 지어주는 회사가 돌아가고 돌아가면 그 사람들이 돌아가서 거기에서 쓰고 쓰면 그 돈을 번 사람들이 또 다른 물건을 사기 위해서 쓰고 이렇게 경제가 돌아가고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이제는 그것을 능력있게 하는 도지사가 도지사가 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하냐면 예전 같으면 나는 내 나리에서 밖에 장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회사를 해도 내 나라 바깥에서는 할 수 가 없기 때문에 세금이 많고 환경이 어려워도 운명이려니 하고 사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세계화가 되어서 각 나라에서 오라고 손짓을 합니다. 그러면 이제 사업을 할 때 우리나라, 싱가폴, 중국, 일본, 태국등 다 비교를 해 보아서 어디에서 하면 제일 싸게 물건을 생산하고 편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서 거침없이 이 나라에서 보따리를 싸서 저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경쟁에서 치열하게 살아 남으려면 우리도 국제적인 표준에 맞추어서 다른 나라에서 줄수 있는 모든 혜택들을 주고 다른 나라에서 누릴수 있는 모든 유익을 나누어 주어야지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눈치껏 빨리빨리 하는 나라가 많은 사람이 투자하기에 적합한 매력이 있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것들이 세계화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은 예전 같았으면 나라가 갖혀 있어서 이 안에서 우물안 개구리처럼 돌아가던 사회의 모든 구조들이 이제는 세계의 기준에 맞추면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한국의 경제적 세계화의 취지는 정치, 문화, 사회 이런것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1998년 IMF전에는 회사에 다니면 거기가 평생 직장 이었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은 아버지 월급봉투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만 일 하라고 내 쫒는것 그것은 아주 부도덕하고 나쁜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98년도에 큰 비용을 치루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회사에서 짤렸다고 해도 온 가족이 회사 찿아가서 울고불고 하는것 없습니다. 짤렸냐? 좀 빨리 짤렸네? 그냥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짤리는 것은 짤렸고 돈은 좀 받았냐?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버지 혼자 벌어서는 안되고 아들도 아르바이트하고 딸도 아르바이트하고 아내도 하다 못해 파출부라도 하고 이렇게 하면서 함께 벌어 먹고 사는 사회라는 것이 인식이 된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에 월남전 참전 여부를 두고 나라가 분열이 됩니다. 그래서 이 정치 지도자들의 결정에 항거해서 젊은이들이 죽음을 무릎쓰고 데모를 합니다. 이 1960년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 권위주의가 무너지게 됩니다. 한국은 그런 권위에 대한 무너짐 그것이 언제 일어나게 되었나 하면 1980년대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국회의원이면 사람들이 굉장하게 생각을 하고 그 사람과 얼굴을 마주 본 것 만으로 영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한참 국회가 개판이던 시절에는 실제로 비행기를 어느 국회의원이 탔는데 의원님 이리 오십시요 하면서 앉으니까 옆에 앉았던 사람이 다리를 꼬면서 "에이씨! 오늘 재수 되게 없네!" 그러니까 국회의원이 뱃지를 슬그머니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50년전 상황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선생님이 "야! 너 이리와!" 하면 달려가서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걸레 빨아와" 하면 가슴이 뿌듯해서 그것을 들고 가서 아무도 안 시키고 선생님이 나를 시켰다 하고 집에 가서 "엄마! 오늘 선생님이 나를 심부름 시켰어" "그랬니?" "걸레 빨아 오라고 했어!" "선생님이 너를 예쁘게 보시나 보다" 그런데 요즘은 "야 너 이리로 와봐라" "싫어요!" "너 숙제 안 해왔으니까 저기서 손들고 서 있어" 하니까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못하겠는데요!" "왜 못하니?" "어제밤에 숙제 안 했다고 엄마 한테 혼 났는데 한번 혼났으면 됐지 내가 여기와서 또 혼나요!" 정말 놀랍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중동고등학교를 나왔는데 학생들을 개 패듯이 학교에서 때렸습니다. 그래도 잠시 선생님 욕하고 해도 그 선생님 그렇게 좋아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1984년도에 그랬다고 합니다. 엊그제 스승의 날에 저의 고등학교 은사님을 만났는데 왜 19년이나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하셨습니까? 여쭤보니 계기가 있었는데 어느날 교무실에서 자기 후배 교사가 말 안듣고 못된 녀석을 몽둥이로 몇 대 때렸다고 합니다. 두어번 때렸는데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선생님을 때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선생도 성깔이 있으니까 주먹으로 때린 것입니다. 둘이서 권투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학교가 옛날의 학교가 아니구나 그러고나니 더 이상 이 학교를 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근무하고 싶은 마음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80년대에 일어난 일입니다. 70년대 까지는 그럴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이러면서 결국은 어떤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냐하면 이제 사람들의 생각이 굉장히 개인주의화 된 것입니다. 잘 들어 보십시요. 80년대 민주화 항쟁이 있고나서부터 박정권의 독재 그리고 전두환정권, 노태우 그리고 80년대 민주화 항쟁까지 거쳐 오면서 너무나 많은 상처들을 백성들이 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뭐냐하면 국가에 대해서 우리를 잘 살게 해주고 지켜줄것이라는 기대 보다는 잘 감시하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것이 뭔짓을 하는지 지켜보고 감시해야할 존재가 된 것입니다. 국가가... 그러면서 나라 전체를 지탱하고 있던 도덕적인 기반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설교시간에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1960년대에는 학교 앞에 증산수출건설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70년대에는 유신으로 번영하자, 80년대에는 그래도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 그랬습니다. 90년대에 들어서는 삐삐는 진동으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의미 깊은 사실에 입각한 개그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제 온 국민이 힘을 합하면서 추구해야할 가치를 상실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우리나라가 70년대 말부터 80년대 민주화 항쟁 속에서도 경제가 급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두환 대통령때 이상하게 택시비도 내리고 수출이 흑자로 돌아서게 됩니다. 그것이 자기가 정치를 잘해서 그렇다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나라가 그 만큼 발전하게 된것입니다. 사회가... 그렇게 해서 성장을 하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결국은 나라에 충성할 보람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렇지 않습니까? 내 나라가 1930년대, 1940년대, 1950년대, 1960년대 그 나라가 아닙니다. 최소한 박정희 대통령시대 나라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습니까? 국가 보다는 사회 그리고 그 다음에 민족보다는 개인의 행복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받는 분위기가 한국안에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조금 늦게 시작되었을 뿐이지 이미 구라파에서는 벌써 이전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실제로 구라파 나라들 가보면 나라가 부자라는 느낌이 안듭니다. 도로도 우리나라처럼 깨끗한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뭐냐면 개인은 부자이고 사회는 발전을 했는데 국가는 그렇게 발전할 것 같은 느낌이 안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적 구조에서 시민의 활동이 강화되고 산업의 민주화가 촉구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통령 아들이 군대에 가고 전에 대통령 하던 사람이 사형수가 되고 이러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는 속에서 이제 권위라고 하는 것들은 아주 우스운거리가 되고만 것입니다. 그러면서 대통령 이름을 부르고 이자식 저자식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 우리의 특별한 관심사가 되는 종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속세를 떠나고 성스러운 삶을 살기위한 고상한 수준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자아실현과 가장 큰 관심사인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종교가 얼마나 이바지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1980년대 중반 까지는 개신교가 계속 성장세를 거듭했습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복음화니 1200만명이 예수 믿는 사람이니 했는데 그때부터 개신교 인구가 줄기 시작하고 불교와 천주교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뭐라고 하냐면 선교를 열심히 한 것으로 치자면 개신교를 따라갈 종교가 없을 것입니다. 극성 맞죠? 그런데 그런 노력과는 상관이 없이 개신교 인구는 계속 줄고 지금 현재는 교인 이면서 매주 한번이상 교회에 나오는 비율은 41.7%밖에 안된다고 통계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1200만명 그러는데 거짓말이고 실제로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는 기독교인의 수가 470만 정도 밖에 안된다고 통계에 나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개신교의 인구가 줄고 있는 이유가 교회가 똑바로 안했기 때문에 개신교에 염증을 느낀 사람이 더 윤리적이고 깨끗한 불교나 천주교를 찿아 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묻고 싶습니다. 불교가 깨끗합니까? 진짜로? 불교 믿는 사람들 한 예로 우리 집안에 불교 믿는 친척이 있었는데 교회 재정이 어떻게 운영이 되는지 설명해 주었더니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자기 절에서는 갖다 내면 묻는 사람도 없고 대답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인회계사에 감사까지 받는 교회가 있다고 하니까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믿는 사람이 조금 극성스럽고 해서 주일날 주차도 아무대나 하고 욕을 먹기는 합니다. 그 인간들이 그 인간들이지 뭐 불교는 몇사람 빼놓고 고결하겠습니까? 그것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천주교가 사회정의구현에 앞장섯기 때문에 천주교가 매력을 얻어서 사람들이 천주교에 갔다고 하는데 그 해석도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민주화 운동하면서 투옥된 사람은 불교, 천주교보다 개신교에 더 많습니다. 우리들이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그런가 보다 하고 끄덕거리면 그럴듯해 보이는데 파고 들어가면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당신의 해석은 무엇입니까? 저의 해석은 독특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두개 대려고 합니다. 기독교의 교유한 사상을 전파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라 갔던 교회들 중에서도 소위 이야기하는 성공한 교회는 소수일 뿐입니다. 그러면 대중들의 종교적인 이동이 불교와 천주교로 몰린 이유는 무엇때문인가 하면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사상들이 후기 현대주의라고 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과 코드가 안 맞습니다. 오히려 불교나 천주교가 코드가 훨씬 잘 맞습니다. 왜 맞는지를 제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개신교에서는 후기 근대주의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이것이 진리이다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렇습니다. 이것이 진리이다 그리고 우리가 참 종교이다. 나머지는 다 가짜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교회에 있었고 옆에 천주교 교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행사를 하다 보니 차가 몰렸습니다. 그러니까 천주교에서 큰일 하시는데 우리교회 주차장 쓰시라고 했는데 그곳에 차를 대러 갔을까요? 안갔을까요? 그래서 천주교 교회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습니다. 그러다 천주교에서 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가 몰려 오니까 천주교 신부가 목사에게 우리가 행사해서 오늘 차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교회 주차장에 차를 주차 하자고 하니까 목사님은 신세를 졌기 때문에 주차 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교회에서 발칵 뒤집혀졌습니다. 교인이 거둔 헌금으로 마귀들에게 주차장을 빌려준다고... 어떻게 이런일이 있을 수 있나? 장로님이 막 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것이면 그곳에 차를 주차하라고 해도 그냥 딱지 떼고 말죠 하지 일관성이 있어야죠. 이것이 바로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독특성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이런것을 싫어 하는 것입니다. 나만 옳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주교는 얼마나 친절한 천주교씨 입니까? 그래서 성당 앞에 큰 팜플렛을 부쳐서 거기에 부처님 하나를 그려놓고 부처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천주교인 일동...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그런것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또 절에서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기예수를 그려놓고 십자가를 하나 세워놓고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서로 죽이 맞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조금 있다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나 코드가 후기 근대주의 코드하고는 안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버리는 것입니다. 있어야할 이유가 특별히 있는 어떤 개신교도가 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에 가면 예수 믿던 사람들 무지 많습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절에 다니던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 다니던 형제 하나가 삶에 방황을 하다가 절에 갔습니다. 중이 되려고 빗자루로 쓸고 있는데 주지스님이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야! 너 읍내에 내려가서 서점에서 책좀 사오너라" 그래서 서점에 내려 갔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불 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 하는 김남준 목사의 설교 테잎이 있 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가지고 갔습니다. 그래서 다른 중들이 다 잘 때 몰래 카세트로 듣다가 회심을했습니다. 실화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듣다가 걸렸습니다. 절에서 발칵 뒤집힌 것입니다. 이 미친녀석이 절에 와서 목사 설교테잎을 듣고 있다고 주지스님 앞에 끌고 왔습니다. 담임 중에게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임스님이 "자초지종을 말해 봐라" 하니까 "내가 이세상에서 방황을 많이 하고 절에 진리가 있다고 해서 찿아 왔는데 사실은 이 설교테잎을 듣고 보니까 나는 아무래도 기독교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주지스님이 하는 말이 "그래 나도 한때는 주일학교 선생이었는데 네가 그곳이 진리라고 생각하면 그곳으로 가라" 그래서 우리교회로 왔습니다. 그러니까 개신교가 특별히 하자가 있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코드 자체가 후기 현대주의 코드하고 개신교의 코드하고 안 맞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의 눈치 채셨죠? 그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뭔가 기독교 안에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죠? 이러면서 기독교의 후기 근대주의가 들어오면서 중요한 변화가 찿아 오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면 종교다원주의라는 것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어려운 용어지만 설명을 하면 이런 것입니다. 종교 다원주의란 종교들이 서로 다르고 경합하는 주장들이 지닌 전통들간의 특수한 이론으로 적용이 되는데 이 종교다원주의 이론은 거대한 세계종교들의 개념과 인식들 그리고 궁극적인 일자와 신비로운 신적인 실제 이런것들에 대한 응답으로 구성이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기독교도 불교도 이슬람도 서로 싸울것이 아니라 진리라는 산이 있는데 맨 꼭데기에 하나님이 계신데 불교가 우리와 다르게 보이는 것은 우리는 동쪽 능선에서 출발을 했고 저쪽은 서쪽 능선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능선을 각기 다른곳에서 출발했어도 진지하게 이성을 사용해서 종교의 도의를 구하며 계속 가면 그 진리는 산꼭데기에서 모두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가 불교고 네가 기독교 신자이고 네가 천주교 신자인 것도 하나의 과정일 뿐이지 이것이 선악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동쪽 능선에서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집이 북쪽이면 거기서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집이 서쪽이면 서쪽 능선에서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중요한 것은 그런 차이성이 아니라 모두 정상을 향해 올라 간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함께 그렇게 올라가는 사람끼리 가끔 당신 교주 탄생 축하합니다, 예수님 탄생 축하합니다 하고 서로 좋은 이야기 주고 받으면 맨 위의 하나님도 착하다 하실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종교 다원주의라고 하는 것은 철할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중세시대까지 서구사회는 철저하게 절대자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분의 뜻과 의지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16세기말을 거쳐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이러한 상황은 근본적이고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의 물리학 이런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전까지는 모든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지구도 열심히 돌고 있는 존재입니다. 요한 케플러라고 하는 사람은 우주의 조화라는 책을 라틴어로 썻는데 꽤 두껍습니다. 거기에서는 천문학에서 나타나는 질서가 수학 심지어는 음악과 일치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슨뜻이냐면 우주를 망원경으로 보면서 수많은 별들의 괘적을 그려낸 것입니다. 그려낸 괘적들의 움직임들이 비율로 따져서 음표로 옮기니까 피아노나 악기로 쳤을 때 기가막힌 화성을 내는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신이 이렇게 움직여라 저렇게 움직여라 그때 그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신 하나님이 이렇게 돌아 가라고 법칙을 정해 놓았기 때문에 아주 엄격하게 그 법칙을 따라서 움직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라이프니찌와 뉴턴이라는 사람이 아주 중요한 발견을 이룹니다. 미적분을 완성합니다. 뉴턴이 먼저 완성을 하는데 라이프니찌가 먼저입니다. 뉴턴이 펄펄 뛰어습니다. 17년전에 이것을 발견해 놓고 아직 발표를 안했는데 누가 내것을 베꼈다 했는데 알고보니까 라이프니찌는 라이프니찌대로 자기 혼자 연구해서 미적분학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신비하게만 생각하던 모든 자연의 세계들이 아주 엄격한 질서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러한 사상적인 변화는 기독교 신학 안에서만 이 세계를 바라볼수 있다 라는 입장에서 그것이 아니라 이제 근대 과학에 대한 철학적 기반 속에서도 이런 모든 세계를 볼 수 있다 라는 생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 이론적인 기초를 놓은 사람이 데카르트입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1630년에 메르센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주 중요한 이론을 발표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신에 의한 영혼 진리 창조설입니다. 여기를 보면 여기에 지금 인간이 있는데 이 인간이 진리는 하나님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안에 있는 진리들이 자연세계속에서 어떤 법칙들로 발현이 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서 이것을 파악하는데 하나님을 인간이 완전히 파악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신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항상 파악을 하면서도 절대적으로 확신을 못하는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겸손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과학적 확신의 부족입니다. 이것이 중세까지의 일 이었습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무엇을 이야기하냐면 영혼진리창조설이라는 것을 발표합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계신데 진리와 하나님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리이다 그런식으로 말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진리 조차도 초월하신 분이고 선악 조차도 초월한 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를 창조하셨으니까 여기서는 진리가 하나님 안에서인데 여기서는 하나님에 의해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쨎든지간에 이 진리는 자연세계 안에서 이런 법칙들을 만들어 낼 것 아닙니까? 여기서는 느낌표와 물음표가 똑같이 있죠? 아 그거구나 하면서 발견했는가 하면 글쎄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인간이 이성으로 이것을 파악하는데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진리를 만든 다음에 수시로 그 진리를 변화시키시지 않고 한번 딱 창조한 것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이것이 있는데 문제는 뭐냐면 이것을 만든 신보다 그 사람에게는 사실 하나님이라는 말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신입니다. 어쨎든 이렇게 진리가 있는데 신이 이 진리를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이 아닙니다. 누구냐하면 인간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의 근거는 신이지만 이 진리를 진리라고 인식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인간이 이 진리를 인식하는데 인식하는 도구는 여기에서는 이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신앙과 이성 두가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모두 다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확실히 모르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믿을만한 분이시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아멘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성과 믿음으로 진리를 하는데 여기서는 그런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이미 다 알 수 있도록 신이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신은 인간이 직접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성이 믿을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이 진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허울뿐이고 중요한 것은 이녀석이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다 맞다 절대적으로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이해하고 나니까 온 우주가 기계론적으로 제작되었다고 하는 기계적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엄청난 과학문명을 이룩하는 기폭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중에 어떤분을 그럴것 아닙니까? 목사님 그러면 그 사람 그렇게 잘못한것도 없네요 그 사람 때문에 핸드폰도 쓰고 인공위성도 쏘는데... 물론 그렇죠.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것 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물질 생활 자체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해서 데카르트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다음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데 뉴톤이 말하자면 근대 물리학의 중요한 기폭제가 됩니다. 그래서 뉴톤에 의해 시간과 공간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근대적인 개념들이 성립을 합니다. 그래서 고전 물리학에서는 물질, 공간, 시간, 자연법칙 이것들이 세계의 구성 원리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인간이 상정하는 공간, 시간, 자연법칙의 이런 것들이 우주 전체에 불변적으로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뜨린 사람이 두사람 나타난 것입니다. 그중 한사람이 진화론의 찰스 다윈입니다. 획기적인 논문 이었습니다. 인간은 인간으로, 개는 개로, 돼지는 돼지로, 원숭이는 원숭이로 태어났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맨 처음에는 하나 였는데 이것이 변했는데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다. 그리고 인간은 어디로 진화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 이제는 하나하나가 고정되어서 개는 개, 돼지는 돼지, 인간은 인간 이런식으로 고정되어 생각했던 자연세계 자체에 대한 생각들이 다 허물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성은 바로 절대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사물들을 기초로 법칙들과 연관관계 속에서 자연과학을 구축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나온 것입니다. 더 충격은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도입된 상대성이론입니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의 1초나 천년전의 1초나 만년후의 1초나 여기서 1초나 우주공간에서의 1초나 다 똑같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틀리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 한 것입니다. 그것을 시간이 없어 여러분들에게 증명해 줄 시간은 없습니다. 상대성 이론을 설명하면 더 재미있습니다. 그것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쨎든간에 이 시간도 틀린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과학에서 보면 우주선을 타고 잠깐 나갔다 왔는데 돌아 오니까 오백년이 흘렀느니 천년이 흘렀느니 하고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사실들을 기반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파장의 이론이니 중력에 의해 빛이 이끌리고 하는 복잡한 이론들이 소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어야 하냐면 비유를 하자면 평평한 고무막 위를 개미가 걸어 갑니다. 그러면 100초만에 10cm를 갔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것을 밑에서 고무 판대기를 잡아 댕겼습니다. 그러면 이 개미는 부지런히 갔는데 결국은 밑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저쪽에서 1초를 쟀는데 똑같은 고무판이면 저기서 100초를 세면 100초 동안에 개미가 10cm를 가야 하는데 우주 공간에서는 고무판을 잡아 당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맞는 것입니다. 시간이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아인슈타인이 증명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슨 생각을 가져오게 되었나 하면 이것이 결국은 이성을 통해서 모든 것들이 규격화 되어 있고 법칙을 따라 움직이고 이렇게 신에 의해서 창조된 이 진리 이것이 최소한 여기서는 인간을 하나님보다 앞세우든지 말든지 간에 이런 객관적인 것이 있다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자체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이러면서 결국은 사회 문화적으로도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하면 예전에는 기독교 우월주의적인 사고가 지배 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면, 기독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문화까지 받아들이게 만든것입니다. 이제 제 3세계에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문화의 배경이 되는 종교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기독교가 점점 쇠퇴하고 이슬람의 도전 그리고 서구사회가 동양의 문화에 대해서 많은 매력을 느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가끔 신문에 보면 리차드 기어 같은 영화배우들이 티벳불교를 믿는다 하더라 그리고 톰 크루즈 이런 사람이 UFO 종교 같은데에 빠졌더라 그리고 미국의 정치 지도자 이런 사람이 동양의 불교에 심취했다더라 해서 많은 엘리트들이 한국과 중국 이런데로 불교 유학을 옵니다. 그런데 그런 현상들을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대단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보다는 이런 불교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토속 종교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후기 근대주의의 사고방식하고 잘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코드가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강력하게 흡인력 있게 빨려 드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종교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에큐메니칼 이라는 것이 일어 납니다. 에큐메니칼이라는 것은 종교관의 연합운동입니다. 각기 올라가는 통로만 틀릴뿐이지 마지막 하나의 진리를 찿아 간다고 생각하고 타종교와의 대화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는 제2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카톨릭 신학이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희생의 죽음에 의해서만 좌우된다는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나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그래서 칼 라너라는 사람은 무엇이라고 제안하냐면 모든 종교를 통해서 참답게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은 이름 없는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다른 나라 전통에서 탄생한 모든 종교라 할지라도 진리를 찿아가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인과 똑같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이것이 본격적으로 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런 19세기에 자유주의 신학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것은 뭐냐면 성경의 절대적인 계시성을 부정하고 신앙과 삶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을 우위로 생각하면서 자유롭게 믿는 신앙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러한 사람들중 슐라이어 마허라는 사람이 등장하게 됩니다. 1763년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당시의 이성주의가 기독교의 절대성을 공격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최초로 반응을 합니다. 그런데 그 반응한 모습이 뭐냐면 종교라고 하는 것은 알수없는 절대자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셔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객관적인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전적인 의존하는 감정이 종교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의존의 감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의존의 마음을 갖든, 부처를 보면서 의존의 마음을 갖든 물 한그릇을 떠 놓고 의존의 마음을 갖든 본질은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독교의 절대성을 팽개치고 그 시대의 정신속에 야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개신교 안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어떤 심각한 일들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예수가 진짜 역사적인 인물인가 이것을 궁금하게 생각하면서 과연 예수가 우리는 여태까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는데 그것이 진짜 틀림이 없는 것인가? 누군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닐까? 예수가 동정녀에서 탄생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결국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우리를 속일 목적으로 만들어낸 몇몇 사람의 창작이 아니겠는가? 부활이라고 하는 것도 역사적으로 일어났다기 보다는 죽은 예수님이 너무 안타까워서 살아 나셨으면 하는 간절한 희망사항이 만들어낸 조작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대담하게 개진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성경 자체가 거짓말로 얼룩이 묻어 있는 책이라고 보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벗겨 낼때에 참된 기독교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부활 사상을 비롯해서 많은 것들이 이란이나 중동지방에 있는 밀의 종교와의 연관속에서 생겨난 종교적 혼합주의 산물이라고 주장을 하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무슨 문제가 대두되게 되었냐 하면 모든 것들은 절대적인 것들이 없다라고 하는 생각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상대주의입니다. 그리고나니까 그다음에는 소위 이야기하는 메타담론이라고 하는데 형이상학적인 담론입니다. 예를 들자면 인간의 몸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나 이런것은 형이상학적 답론 아닙니까? 인간이 찿는 행복이란 것이 무엇일까? 이런것들은 메타답론입니다. 선, 악, 도덕, 진리, 영광, 영혼 이런것들은 메타답론입니다. 이런것들이 사실은 탄탄하게 수립이 될 때 그때 뿌리가 있는 인간의 사상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기 근대주의는 그런것을 아주 싫어 합니다. 잘 들으십시요. 아주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때문인지 자꾸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그 시대의 정신에 영향을 받고 그 시대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후기 근대주의라는 용어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도 세상이 나를 그렇게 빚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 보십시요. 그런 메타답론들을 다 거절합니다. 거절하는 이유가 무엇때문인가하면 메타답론의 결과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답론 자체를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이고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 하는 것들을 자꾸 이야기하다 보면 인간을 규제하는 커다란 틀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말씀앞에 깊이 회심하고 은혜를 많이 받은후에 혹시 이런 궁금증을 느껴보지 않았습니까? 내가 초등학교 밖에 안나오고 늙었어도 말씀을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는데 저 인간들은 저렇게 젊고 대학도 좋은데 나오고 저렇게 똘똘한데 왜 못알아 들을까? 그리고 왜 배우려고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뭐냐면 그 사람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그것이 이 시대의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시대의 정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열린교회처럼 설교하면 교회가 문을 닫아야합니다. 2003년도에 있었던 일인데 우리교회에 오면 항상 예배 드린 다음에 물어 보는 것이 예배 어떻셨어요? 하고 물어 봅니다. 새가족 위원이 어떤 사람에게 물어 보았더니 로마서 6장 14절을 설교 할 때 였는데 죄와 은혜의 지배인데 "아니 어떻게 6장14절 한절을 읽고 90분간을 설교 합니까? 너무 놀랍습니다." 그랬더니 그 새가족 위원이 "오늘이 16번째 시간입니다" 이것은 이 시대하고 코드가 안 맞는 것입니다. 절대 이렇게 해서는 세상적인 가치 기준에 보면 교회가 단체 성립에 어려운 역코드로 우리가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싫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린교회에 발을 들여 놓은 모든사람들이 그런 설교를 좋아 합니까? 아닙니다. 변화를 받아서 그 진리의 맛을 본 사람만 좋아 하는 것이지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중에서도 지금 죽도록 괴롭게 끌려 나오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왜 코드가 그런 깊은 답론을 싫어하는 코드인데 그것을 가져다 들이 미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놀랍게 변화되고 은혜를 받으면 절대적인 은혜의 진리를 받아 들일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 답론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절대적 가치를 그 진리를 왜 믿는지에 대한 이유가 너무나 분명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가 싫은 것입니다. 여기서 무슨 문제가 생겨나는가 하면 이렇게 모든 것을 상대화 하니까 아까 이야기 한것처럼 언어도 중요한것은 객관적으로 무슨 말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문학에서 20세기의 새로운 비평이 일어나게 되는데 옛날에는 글을 누가 쓰면 원저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썻을까가 시험문제의 핵심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독자비평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쭉 써놓고 내가 그렇다면 그런것입니다. 어차피 이것을 무슨 뜻으로 썻느냐에 대한 객관적인 정답은 없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썻다고해도 그것은 그사람의 자유이고 내가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내 마음이지 저자가 이렇게 이해하라고 나에게 강조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언어가 읽는 사람에 의해 각기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무슨 혼란이 생겨나는가 하면 우리들이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 구원하면 무엇입니까? 죄 때문에 멸망 받을 수 밖에 없고 죽음 가운데 있는 인간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구출을 받고 하나님과 영생을 누리며 사는것이 구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옛날 사람이 한 이야기이고 교회에서 아무리 구원이라고 떠들어도 이해하는 내가 그 구원을 사업이 복 받는것, 병이 낮는것, 기분이 좋아 지는것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종교와 다양한 사상이 의미하고 있는 많은 구원의 개념들이 있는데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도 얼마든지 다른 내용을 담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대신 다른 종교와함께 화해를 하고 유통을 하면서 지내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독특한 구원의 정체는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회해가 자꾸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오늘날 죄에 대한 설교가 사라지게 되는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어느 종교에서는 그런것이 구원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너는 죄인으로 태어났고 죄의 형벌 아래에 있고 무슨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너는 지옥갈 인간이다 이렇게 규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죄에 대한 설교가 사라지는데 그것이 바로 이렇게 거대한 시대 사상을 배경으로 해서 사라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꾸 이야기해서 교회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환영을 받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설교를 해서 그 인간을 거꾸로 뜨리면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죄에 대한 설교를 너무나 좋아하고 거룩해지고 싶어하고 진리를 알고 싶어하고 객관적인 진리가 있다고 말해주면 말해 줄수록 아멘 하면서 기독교를 추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된 사람들에게는 이런 죄에 대한 설교를 계속 하게 되면 종교로서의 매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독단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설교가 사라지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이렇게 가난하게 사느냐? 네가 꿈만 크게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만 해 봐라! 하나님께서 하늘문을 열고 복을 주시려고 안달을 하시는 분이신데 네가 죽어도 싫다고 하고 사니까 네가 그렇게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용서하고 너를 위해서 죽었는데 그렇게 사느냐? 아멘하고 뛰어 나오고 팔만 벌리면 하나님이 안아 주시고 돈도 쏟아 부어 주실텐데... 그 순간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구나! 새로운 인생을 사는 길이 있는데 왜 이러나? 여러분 최근에 백만부가 팔렸다고 하는 긍정의 힘이라는 책 여러분들 본 사람들 있을 것입니다. 조엘 오스틴... 벌써 3만명이 넘는 교회를 목회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말을 하는적이 거의 없습니다. 저는 목회자의 양심으로, 신학자적 양심으로 조엘 오스틴은 크리스챤이 아닙니다. 절대 크리스챤이 아닙니다. 사교를 전파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크리스챤일 수 없습니다. 정말 그 사람이 크리스챤이라면 내 생각을 중대하게 바꿔야 할 것입니다. 레리 킨과의 인터뷰를 제가 삿삿이 뒤졌습니다. 절대 크리스챤 아닙니다. 그런데 멍청하게 그 책이 백만부가 팔리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이해력이 빠르니까 그 책이 왜 그렇게 기가막히게 팔려 나갔을 것 같습니까? 궁극적으로 그 책이 얼마만큼 기가막힌가 하면 인간이 자기를 끊임없이 확장하는데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확장해 가는데에 큰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너는 할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너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 와야 한다 이것이 아니라 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도 네가 한번 활짝 핀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주님이 그렇게 간절히 바라시는데 어떻게 주님을 도와드려야 되지 않겠니? 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계속 그렇게 안타깝게만 할래? 그러니까 기가막힌 것입니다. 저는 그 책을 읽고 회심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종류의 책은 절대로 회심을 불러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면 그 사람은 정신착란입니다. 만약에 눈물을 흘렸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분노 이렇게 성공의 길이 있는데 이렇게 후즐근하게 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팔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이것이 전부 다 종교다원주의적인 색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상황속에서 교회는 안팍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인간이 넷이 있고 꽃이 있는데 이것이 칸트의 인식전환과 도덕인데 칸트라는 사람도 되게 웃기는 사람입니다. 하여튼 기독교에 있어서 오래 동안 기억해야할 본디오 빌라도 같은 인물입니다. 여기 꽃이 있는데 예전에는 꽃이 있고 사람이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네사람이 다 똑같이 꽃을 보았기 때문에 이꽃은 원래 이런 형상이다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칸트는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것입니다. 꽃이 가운데 있는것이 아니라 꽃 조차도 돌아가는 많은 사물들중에 하나이고 중심에는 내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 이렇게 보면서 빨갛게 보이고, 여기는 하얗게 보이고, 여기는 노랗게 보이는데 그것은 인간에게나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개나 양으로 본다면 이것이 흑백으로 보일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빨갛다는 것은 인간인 네가 보기에 빨간 것이지 원래 빨간것을 어떻게 증명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카메라에 렌즈가 있는데 물고기 눈이라는 렌즈를 집어 넣으면 모든 피사체가 동그란 모습으로 변해 버립니다. 그러면 봐라 너는 여기가 평평한 벽이라고 하지만 물고기가 들여다 보면 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인간이 볼 때에는 이것이 이렇게 되어 있지만 물고기가 볼 때는 휘었는데 그러면 이것이 원래 휘지않고 똑바로 되어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져보면 되겠지만 또 만져도 감촉이 각기 상대적이니까 결국은 우리가 인식하는 사물은 자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예전에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선악이 있고 인간이 이렇게 살도록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전혀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지말고 인간이 여럿 있는데 도대체 무슨짓을 하고 사는지 관찰해 보자고 했더니 신기하게 6명의 공통점이 물건을 훔치는 것을 하고는 굉장히 괴로워 하더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이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굉장히 기뻐하지 다른사람을 도와주고 3명은 기뻐하는데 3명은 양심의 가책 때문에 막 괴로워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들 도와주는 것은 좋은 것이지 그렇지 이렇게 하면서 가닥을 잡아서 보편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편타당한 법칙을 따라서 살아라 하고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언명령입니다. 가언명령은 뭐냐면 부자가 되려면 아껴써야지 그것은 가언명령입니다. 그런데 살인하지마라 이것은 살인하지 않으면 부자가 될 것이야 그뜻이 아니라 이유가 없습니다. 왜 살인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나쁘니까? 왜 나쁩니까? 그것은 묻지마 하지 말라면 하지마. 그것입니다. 무슨 근거에 의해서 그런가?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하더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성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성에 의해서 파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궁금증이 뭐냐면 도대체 누가 이런 보편성을 주었냐 하는 궁금중이 떠 오릅니다. 그래서 아주 독특한 용어를 씁니다. 신을 상정한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칸트는 지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나쁜짓을 안 할테니까... 신이 진짜 있느냐 없느냐는 너희 마음대로 생각하라. 그러나 살 때는 있는것 처럼 생각하고 살아라. 그것이 착한 것이다. 그래서 신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신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하니까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신앙의 영역은 실제 있는지 없는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그림입니다. 보십시요. 종교다원주의와 영성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우리 흔히 영성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굉장히 위험한 사상을 담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스피노자 이래로 스피노자, 피대, 셀링 여러분들이 잘아는 헤겔 이런사람들에 오기까지 이 세계가 아주 질서롭게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신이 온 우주에 충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전통적인 기독교에서도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 안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 질서를 이루고 이렇게 되었간다는 것은 우리들이 인정하는 바인데 여기서는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온 물질적인 우주속에 꽉 차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이 변하면 신도 함께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 자체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세계의 변화와 함께 자신도 성장하고 변화를 겪어가기에는 불안정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온 우주가 신들로 꽉 차 있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영적인 존재인데 이 영적인 존재가 아주 신비스럽게 자기의 정신세계속에서 우주에 꽉 찬 신의 본질과 통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영성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기독교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불교 안에서도 인간의 영혼이 신의 본질에 참여해서 이 영성속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슬람에서도 이렇게 참여하게 되는 것이고 모든 잡다한 종교에서도 인간은 이렇게 이 우주에 영적으로 꽉 차 있는 하나님의 본질과 접촉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존재이든지간에 단절이 되지 않고 자기가 알게 모르게 우주에 가득찬 신에 의해서 정신과 영혼의 세계가 영혼에 영향을 받고 자기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들이 보는 인간은 뭐냐면 이렇게 가득차 있는 영성 자체가 신의 본질인데 인간이 이것과 통하게 된다는 것은 인간이 이런 신의 본질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사람 한사람은 신입니다. 그러니까 무시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것하고 통하지 않습니까? 자기를 진리의 기준이라고 보고 다른사람에게는 또다른 진리가 있을지라도 나에게는 내가 진리입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나 이상의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자기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목표는 신과 같은 존재인 자기가 누구에게도 억압받지 않고 마음껏 자기를 실현하고 자기를 펼치는 것이 행복의 최고 수준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아실현입니다. 이정도 되면 여러분 갑자기 교회의 많은 구호들이 눈에 확 들어오지 않습니까? 비젼, 꿈을 가지십시요, 펼치십시요. TV에 보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 느끼는 대로 살아 보는 거야, 나는 통한다 이런 구호들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흡인력있게 빨아들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자기도 모르게 스며들어와 있는 후기근대주의와 코드와 딱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것들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사람들속에 빨려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후기 근대주의는 결국은 이번에 세계개혁신학에서 논문을 발표하는데 영국의 발제자 한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후기 근대주의는 이교주의의 의붓자식이다. 자기 행복을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결국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것을 만든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을 최고의 존재로 자기를 확장시키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신앙을 이용하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가지고 있는책 30페이를 펴 보십시요. 30페이지 밑에서 10째줄부터... 이처럼 후기근대주의에서 다원주의적인 사상이 현대교회에 미친 영향은 하나님 대신 인간을 둔 것이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현대인들의 자아관이 교회에 깊이 스며들어온 것이다. 자기자신을 모든 판단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현대인들의 관심사는 자아다. 자아실현의 과정에서 겪는 곤란과 곤경을 해석해주고 그것을 극복해 주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자신들을 돕는 것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자아를 충분히 실현하지 못한 현대인들은 사회속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고 피해자들이다. 이러한 인간의 해석을 교회가 따르고 있는 동안에는 참으로 복음을 기쁜 소식이 되게 만드는 죄에 관한 설교는 설자리가 없다. 오늘날 교회에서 죄와 회개에 대한 설교가 사라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과 세상의 고통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찿는 전통적인 교리는 훼손되었다. 현대인들은 돌이키고 깨뜨려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상처 입은 자들로 위로 받고 도움을 받아야할 대상으로만 받아들여 싶기만 한다. 이러한 인간관은 회심도 없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만족 하게 하였으며 삶의 방면에서 죄를 버리고 거룩함을 추구해야할 소명을 버리고 경쟁사회에서 자아를 실현함에 있어서 신앙을 이용하게 만들고 있다. 교회가 후기근대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을 자아중심적 입각적을 받아 들이면 포용할 수 있고 그들도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진정한 회개와 회심이 없이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자아가 부서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교회가 나 자신을 실현하고 나 자신을 신처럼 생각하면서 이렇게 자기를 확장해 가는데에 이바지하는 존재 한도 안에서만 신앙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념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보면 교회안에서 잘 보십시요.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주어 집니다. 개수를 다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프로그램들이 제공이 되고 학교가 주어지는데 그것들 중 상당히 많은 부분이 결국은 목표가 무엇이냐면 그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행복하게 사는 것을 돕는 것입니다. 시어머니 학교, 아버지학교, 어머니학교, 아들학교, 며느리학교, 실업자들 학교등 수업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결국 인간이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모든 욕구들을 기독교 라는 이름으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하는 교회들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주 현실적인 도움을 주니까... 그렇게해서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31페이지 제일 밑단락을 보십시요.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무기력하게 보인다. 패배감이 교회에 팽배해 있다. 교회들을 타계책을 세운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후기 근대주의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회개하고 거룩하게 살아야할 존재가 아닌 자기를 실현하도록 하나님께 끊임없이 도움을 받아야할 존재로 본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이 강단에서 사라지는 것은 죄에 대한 이러한 현대교회의 생각의 변화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하여 돌이켜야하 할 인간의 죄는 그리스도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인간의 무력함과 나태함에 대한 책망으로 대치되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자아실현의 비전으로 대치된다. 그래서 보면 요즘 잘 팔리는 책은 꿈을 가져라, 꿈을 이루는 길, 백억 이렇게 벌었다, 일류대학 가는길, 30대에 사장이 되는 비결 아니면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직장인이 되는 비결 이런 것들이 잘 팔리는 이유가 이런 정신 때문 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돌이켜야할 죄는 이렇게 대치된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야할 거룩한 삶은 또 다른 자아실현의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웃들과의 평화로운 삶으로 대치된다. 경쟁을 하고 대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뒤로 넘어가 보면 교회가 자아를 이런식으로 바라볼 때 거룩하신 하나님앞에 변화 되어야할 인간, 성령의 능력을 통해 돌이켜야 할 죄인,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본질적으로 삶의 목표가 바뀌어야할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와서 도와주셔서 갈길을 계속 가게 해야할 인간, 자아를 실현하지 못한 인간들을 끌어 안고 긍휼히 여겨야할 하나님 아버지의 상을 부각하여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건은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며 산 죄값이 아니라 긍정적 사고방식을 위하여 의존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자원삼아 자아를 실현하기 위하여 베푸신 은택의 기반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33페이지로 넘어오면 두 번째 단락에 미국교회의 성공한 모델들이 복제되고 있다. 자아실현을 갈망하는 인간을 진리의 말씀으로 다루기보다는 심리학으로 다루고 영혼에 대한 참다운 연민과 아픔이 없는 교인들의 회집을 위한 노력은 마케팅의 기법까지도 교회에 도입한다. 가장 좋은 효과를 내는 것이 훌륭한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사람들의 판단에 자리잡게 되었고 회심한 신자들이 많이 되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대형화는 촉진되어왔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판단 기준은 좋은 교회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진리를 들려주고 진리로 말미암아 나를 깨뜨리고 변화시키고 하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좋은 교회는 삶의 활력을 주고 희망을 잃었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서 자기에게 긍정적인 자아상을 만들어 주고 하는 것이 복음을 대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결국은 많은 이야기들이 나옵니다만 시간이 없으니까 결국은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이런 사회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10분동안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이 세상속에 살면서 인간이 아무리 부인해도 이런 객관적인 진리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그리고 이런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야말로 온갖 사상의 폭력에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다 라고 우리들이 생각을 해야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객관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결국은 이미 인간의 이성만으로 찿아간 모든 객관적인 기준을 신성시하는 것이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생생하게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진리의 근거를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성경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객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진리이고 그리고 그 진리 자체로서 우리에게 육신을 입고 오셔서 진리대로 사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와 합치하는 인간의 모습인지를 그리스도의 지상세계가 생생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진리를 신봉하지 않던 사람이 이 시대적인 정신속에 젖어있는 사람이 기이 객관적인 진리가 분명히 존재하고 그 진리의 핵심이 존재하고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보여주는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보다 더 많이 돈을 벌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 가야지만 진리가 전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보디발은 애굽의 시위대장이었고 그를 관직으로 불러준 바론은 황제였습니다.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에게 과연 너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다 라고 한 것을 보여준 사람은 옥석에서 끌려나온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삶의 양태이지 그것이 곧 하나님을 많이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렇게 예수를 믿고 여기에 나와 있게 된 것이 여러분들보다 돈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여기에 나왔나요? 아마 조사해 보면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보다 더 학문이 많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말해 주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지위 때문에 신뢰하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은 여러분 가운데 많지 않을 것입니다. 진리는 그 자체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구원받을 사람들을 강력하게 잡아 끄는 엄청난 힘이 있는 것입니다.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 스치는 한두마디의 진리가 그 사람의 가슴을 확 휘어잡아서 부인하던 하나님을 믿게 만들고 없다고 확신하던 진리가 존재한다고 무릎을 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그 힘이 더 크지 진리를 전달해 주는 사람의 힘이 더 위대하고 큰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만 보여주는 되냐면 확고하게 저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저 사람은 내가 이 세상에서 행복해 하는 이유 말고 다른것 때문에 행복해 하는 사람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저 사람은 그것이 예수라고 하더라 진리라 하더라 할 때 그 사람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귀를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전도는 자기가 진리 안에서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 진리 안에서 입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진리를 아주 훌륭한 지식의 체계속에서 그에게 정확하게 말해 줄 수 있는 지성의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 위에 그 진리에 소외된체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한없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최고입니다. 제가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해 볼까요? 그럴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 사람이 열린교회에 다닐지 말지를 1주나 4주안에 결정하고 태도를 분명히 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슨뜻인지 알죠? 그러니까 그 속에서 선포되는 진리에 끌리고 그렇게 믿고 싶으면 남고 아니면 빨리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안 갑니다. 그리고 믿지도 않고 계속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려면 가라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을 끌어 안고 그 어두운 영혼에 빛이 들어가기를 고뇌하면서 기도하며 기다리면 놀랍게도 3년만에, 4년만에, 8년만에 회심하는 사람이 나오더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아멘 할때 저는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하나만 그러면 좀 쉽겠는데 많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주 분명하게 받은것이 없이는 흘려 보낼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어디에 가서 진리를 섭취해야 겠느냐? 교회에서 노회에 와서 진리를 갈망하는 목회자, 진리에 갈망하고 진리에 합치하고 싶어서 분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 진리대로 살았기 때문에 너무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지체들, 그 진리대로 살지 못하고 넘어졌기 때문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의 위로를 기다리며 회개하는 성도들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그 공동체속에서 아주 확연하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존재하는구나! 라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진리의 빛을 떠난 모든 사람들의 삶은 필연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버리는 대신 보이는 자기밖에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리의 찬란한 빛이 비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보같이 어떻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기분이 좋은가, 편리한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진리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되지만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쓰라린 아픔을 가져다 주는 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돌이키지 않는 그 사람 입에 그렇게 달콤하다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차피 완전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하지 않습니까? 어떤때는 그렇게 살기 때문에 말씀이 아주 달고 달콤하게 다가와서 그 진리를 깨닫는 시간이 하늘로 오르는 것 같은 시간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우리의 인생의 시기는 자꾸 진리를 버리고 욕망에 이끌리는 삶을 살고 하는 것이 내안에 살아 있기 때문에 그럴 경우에는 이 진리가 우리를 아프게 하면서 지나가야지만 사실은 진리가 있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냐 아니냐가 문제이지 사실 우리에게 좋으냐 나쁘냐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병에 걸리게 되면 몸 자체가 망가집니다. 그러면 그가 보는 것, 먹고 싶은것, 하고 싶은 행동 모든 것들이 정상적인 판단이 안됩니다. 그러면 의사의 지시대로 치료를 받아야지 자기가 원하는대로 그 치료를 결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러분들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저에게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목사님 오늘 이 강연을 듣고 보니까 사실 우리는 교회속에서 예수 믿으려고 하는 사람을 보면서 살았기 때문에 몰랐는데 눈을 들고 보니까 이 세상이 우리와는 비교도 안될 어마어마한 세력을 형성해서 종교와 정치, 경제 이 모든 사회가 한덩어리가 되어서 절대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을 조롱하면서 절대적인 진리를 비웃으면서 파도처럼 밀려오는데 과연 우리는 이것들을 거스르면서 산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하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고민입니다. 역사를 아무리 살펴 보아도 복음 진리가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던 시대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 복음을 전할 때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했습니다. 지금은 더 그런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위로 받을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이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해서 2000년동안 그렇게 지독하게 짓밟고 짓밟기 위해서 애를 썻는데 멸망시키지 못했습니다. 볼테르라고 하는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는 1800년대 사람인데 100년 후에는 성경이 비웃음거리가 되고 지구에서 완전히 추방될 것이다. 고문서가 될것이라고 했는데 백년후의 그의 집이 프랑스의 성서공의회 사무실이 되었습니다. 잘 들으십시요. 물론 이시대의 정신이 이렇게 타락했고 하나님을 완강히 거스르는 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진리에 아멘하는 일들은 지금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루터기들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자기 자신이 마음껏 자기를 펼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행복이라고 시대의 정신이 가르쳐주는대도 그 마지막은 인간의 비참한 불행입니다. 욕망이 하자는 대로 자기를 다 마음껏 하고 나서 마지막 가는 길이 결국은 너무나 비참한 것입니다. 프랑스의 현대의 많은 철학자중 미셀 푸코 같은 사람은 동성애 에이즈로 죽었습니다. 그런 훌륭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를 마음껏 학대하고 살아보니까 결국은 마지막에는 파멸입니다. 그래서 사르테르는 말하기를 인간의 모든 불안은 자유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그것 하나는 진리입니다. 자유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를 진리가 확 사로잡아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아주 심리학적인 예를 나는 최근에 미국의 잡지에서 발견을 했습니다. 미국 아이들이 한국 아이들보다 더 버르장머리가 없습니다. 부모가 때리면 곧바로 전화합니다. 그래서 부모를 잡아 갑니다. 그러니까 어디서든지 자기 마음대로 고등학생이 총 가지고 다니고 강간하고 성적인 관계를 가지고 난잡한 삶을 살고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구라파가면 부모가 거실에 있는데 자기 친구 손잡고 2층에 올라가서 자고 하는일이 다반사로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미국 어느 주에서 있었던 일인데 한국사람이 태권도 도장을 차렸습니다. 태권도 도장에서 제일먼저 배우는 것이 태극기에 대하여 경례하는 것부터 가르칩니다. 종주국이나까 거기에 먼저 절을 합니다. 그 다음에 태권도를 가르쳐주는 사범을 그랜드마스터 라고하는데 깍듯합니다. 가자마자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 선생님에게 절대복종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가치관이 미국적인 정신하고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먹혀 들어가겠습니까? 그런데 이 아이들이 기가막히게 따라 하는 것입니다. 사범님을 보면 깍듯이 인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희열을 느끼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 인지 아십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도록 된 존재 이기 때문에 자아가 강하고 자기를 최고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그 완강한 이면에는 자신이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는 무너짐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지탱하며 살려고 하니까 수많은 정신병들이 이 사회안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불안에서 오는 것이라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어머니 학교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학교 다녀왔습니다." 어머니가 이것 좀 해 와라 하면 "네" 철저하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들이 너무 좋아 하는 것입니다. 너도나도 태권도 도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냐? 전에는 텔레비전 보지 말아라 하면 씨도 안 먹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텔레비전 보지 마라 하면 사범님 말씀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부모에 절대복종 이니까 "네" 그러면서 나름대로 쾌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게 혼자 사는 그것은 인간에게 행복인것 같지만 행복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렸을 때 몇일씩 가출하는 것 말고 집에서 엄마가 혼내서 화나서 몇시간씩 가출해 본 적 있죠? 내가 집에 가나봐라 하고 저녁이 되고 배고파지면 집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따뜻하고 된장찌개도 있고 동생들도 있고 라디오 소리도 들리고 엄마 아빠도 있는데 돌아 가고 싶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찿아 오는 사람 없고... 그래서 집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엄마 하고 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현대인들이 사실 그렇게 기고만장해 보이고 쾌락을 쫒고 살아도 우리들이 영적인 눈으로 보면 너무 불쌍한 죄인들입니다. 돈 많고 몇억짜리 차를 굴리고 다녀도 그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 인간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부신 찬란한 진리, 언제든지 교회에 오면 선명하게 하염없이 들을 수 있는 그 진리, 진리를 단순하게 배울려고 하면 안되고 그 진리를 체계적으로... 그래서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그 순간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 문서선교부 내려가서 성전을 청소하신 예수님처럼 책꽂이를 다 청소했습니다. 왜 쓰레기 같은 책들이 들어왔는지 제가 막 야단쳤습니다. 이제 내 도장 찍기전에 여기에 한권도 책이 들어오면 안된다. 열린교회에서 가르치는 사상과 정반대되는 책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누구보고 먹으라는 것이냐 라고 했습니다. 이것 보고 교인들이 돌면 책임 질 것이냐? 실제로 제가 교회에 다닐 때 대학부 아이들이 이문열씨의 사람의 아들 읽고 나서 교회를 뛰쳐나간 아이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책들을 읽으면서 진리를 섭취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가 마음을 다하는 기조가 없으면 항상 겉돌아서 개념화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렬한 기도 생활과 함께 진리를 터득하면서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없이 도를 찿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구도의 삶을 찿아보아도 헛다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식의 구도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도 이신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 도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록된 도인 성경의 계시에 기초해서 그 도를 깨달아 가고 그 도와 합치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저들은 모르는 도를 따라 구도의 길을 따라 가지만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신 아는 도를 따라서 구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뜻을 다해서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 바쳐서 기도하고 그리고 그 진리에 합치하고 살아가는 그것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것 같아도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서 제멋대로 살다가 고뇌하다가 자살하고 죽어가는 이 많은 쓰레기 같은 인간들에 비하면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멍에는 가벼우니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들이 기도해야 할것은 중요한것은 교회에 출석해서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이 좋은 누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줌의 누룩으로 서말의 가루를 부풀릴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깊이 변화되어야 하고 절대로 우리교회는 대중적인 교회일수 없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새 사람을 데리고 왔을 때 그 중에서 두 사람 정도가 "에이" 하고 떠나도 우리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는 대중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그렇게 위대한 목회를 했어도 천명에서 이천명 밖에 모이지 못했습니다. 물론 저는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당에 가득하고 그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름만 걸어 놓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을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깨뜨려지고 진리의 맛을 알고 그것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이 꽉 찬 교회 그것을 원합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 꽉 차지 않는다는것 때문에 괴로운것이 아니라 오늘도 이 진리를 들어야 할 사람이 많은데 들을 기회를 우리가 제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 와도 이 진리의 내용을 바꾸지는 말고 진리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믿든지 말든지 정직하게 들려 주는 것을 우리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주님이 주신 사람들은 아멘 할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를 위해 섬길 것이고 또 지금은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교회에 안나오지만 다시 데리고 오고 다시 그 진리를 듣기를 그가 죽을 때 까지 계속 할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교회에 남아서 뭉게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들도 보이는 교회속에 있는 지체들로 생각하고 우리가 더 많이 그 영혼을 위해서 울고 더 이 진리의 말씀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사랑한다면 우리도 가능성이 없는데 그 복음의 위대한 진리가 어느 한순간에 지성의 어두움을 찢고 들어와서 내 마음속에 믿어 진 것처럼 가망 없어 보이는 저 인간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 날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예수여 도우시옵소서. 그런 믿음을 가지고 그들의 부족함까지 짊어지면서 아파하고 그러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 그것 밖에는 또다른 해결의 길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명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뭐냐하면 어떻게 하든지 간에 진리를 깊이 탐구하고 그 진리를 깨닫는 일에 전심전력해서 매일 여러분들이 보지 못한 진리의 찬란한 빛들을 보여 주고 그리고 여러분들만 듣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어디선가 모두 하나님을 거스르며 일치하게 객관적인 진리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성경을 거부하면서 자기를 신처럼 우상화 하면서 살아가는 시대이지만 어디에서든지간에 진리가 들려 지기만 하면 그렇게 홀로 독립하는 외로움속에 살던 사람들이 진리의 빛이 비치기만 하면 그것을 꽉 붙들고 그리스도께 돌아 올 사람이 만에 하나 천에 하나 백에 하나 열에 하나는 우리는 있다고 보고 그것을 수 많은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해도 우리는 온 힘을 다해서 그것을 전파하고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진리를 찿고 그 진리를 찿는 일에 매진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빚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 앞에서 나 자신이 너무나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찿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 하면 뭐한데 진리를 깨닫고 기뻐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 그가 이전에 나에게 무슨 짓을 했든지 다 용서가 됩니다. 정말로 다 용서가 됩니다. 주위에서 수 없이 그 사람에 대해서 비난을 해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의 친구입니다. 마음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대접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탐구하고 그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기도하고 그 진리대로 살기 위해 고뇌하고 그 진리를 여러분들에게 먹이기 위해서 애쓰는 그 일에 온전히 헌신할 수 있도록 그렇게 살도록 우리 모두 힘을 합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 가장 가슴 아플때는 내가 안해도 되는 일에 내가 몰두하면서 시간과 정력을 소비할 때입니다. 그때 너무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교회청소 이런것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할 때 그때 나자신에 대해 화가 많이 납니다. 인생이 짧은데 시간이 없는데 제가 몇 번이나 설교를 하고 여러분 곁을 떠나겠습니까? 건강하게 산다고 한들 불과 얼마 안 남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이 진리를 사랑하고 지난번에 박순용 목사님 오셔서 세미나한것처럼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진리의 광대함에 대해서 끊임없이 묵상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지식의 부요함 그분이 우리를 위해 베푸신 그 놀라운 은혜, 아직도 이 세상에는 그 진리가 믿어지지 않아서 어두움 가운데 살고 있는 인간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가 그 사람들보다 의로울것이 없는데 주님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셔서 남이 보지 못한 진리를 보게 해 주셨고 그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자다가 일어나 외쳐도 모자랄 그런 놀라운 축복과 특권을 우리들이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그 진리를 싫어하면 이세상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진리를 싫어하면 이 세상에 누가 그 진리를 좋아하겠습니까? 자기를 사랑하면서 진리를 싫어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복종시키며 진리를 찿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원하는 것은 나 하나 이 진리를 깨닫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찬송) 넘치소서 은혜와 긍휼을 열방중에 비추소서 빛되신 주의 말씀
그러면서 내가 오대양 육대주를 돌아다닐 힘은 없지만 먼곳에 나가서 전파하지 못해도 만나는 사람에게 이 진리를 전하고 이 진리를 사랑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지구 어느 한 구석에서 그 창조의 목적의 실현에 이바지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며 그리고 하나님을 배워가며 형제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그리고 섬기면서 그렇게 살아가면서 늙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사랑하다가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 속으로 영원히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한한 행복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