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와 목양(1)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마5:2)
제가 목회 사상 가장 짧은 세미나를 하다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산상수훈을 설교하시는 것이죠. 팔복과 함께 시작된 이 산상수훈은 7장까지 이어집니다. 그 장엄한 교훈의 첫 시작을 오늘 성경은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들고 다니는 성경이 없었습니다. 두루마리였고, 이렇게 책으로 엮어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루마리는 그 당시 구약밖에 없었지만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가지고 다니면서 이야기할 엄두를 못내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팔복산에 오르셔서 영혼이, 많이 모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많은 신약 학자들이 이 5장 6장 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은 보다 더 긴 길이로 행해진 예수님의 설교를 핵심을 요약한 것이라는데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산상수훈이 만약에 한번에 설교된 거라고 하면, 그 양은 방대한 양이었다는 거죠. 예수님께서 팔복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천국 시민으로서의 이 당에서의 삶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량을 설교하시는데, 실로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근데 그것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설교하셨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그 전날 밤에 탁자에 앉아서 깨알 같은 글씨를 써서 수없이 노트를 넘기면서 그 영혼들을 가르치셨을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는 거죠. 그랬더라면 ‘입을 열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거라는 거죠. 물이 가득 찬 댐에 수문이 열릴 때 수문이 열릴 때 덮치듯이 수문이 열리면서 하얀 물이 폭포수처럼 밀려서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이 입을 여시자 진리의 말씀이 폭포수와 같이 넘쳤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평소에 과묵하신 분이셨지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기 시작하자, 입을 여시자마자 하나님의 말씀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왔고, 흘러넘치는 흐름에 거기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깊이 잠겼을 것입니다. 그 말씀이 가르쳐질 때에 도시락 뚜껑을 매만지거나 시간을 보면서 언제나 이 지루한 가르침이 끝날까 생각하는 사람은 그중에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궁금한 것은 어떻게 예수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막 쏟아놓는 그런 엄청난 일을 하실 수 있었을까 하는 거죠.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라고 말하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답이죠. 누구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흐르는 물처럼 유창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폭포수와 같이 쏟아서 영혼을 두루 적시게 할 말씀의 능력을 가진 분은 이 세상에 없다는 점에서 그 말은 맞죠. 그러나 그것만 생각하면 안 되죠. 예수님이 12살 되셨을 때에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에 박사들과 함께 성경을 토론하시면서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하실 성경 지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실 때 자동적으로 물려받은 지식이 아니라 자라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이 그러한 것처럼 배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우는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진리를 점점 더 많이 터득하고, 그 말씀에 그 예수님의 마음과 내면의 세계가 진리의 말씀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교사가 하는 일은 참 많죠! 심방 하고 전화하는 일부터 심지어는 그의 공부를 가끔 도와주기도 하고 놀아주기도 하고 상담하기도 하고... 많은 일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목양이라고 하는 것은 전인적인 목양이고, 총체적인 목회입니다. 우리의 삶에 모든 문제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돌보고, 그의 아픔들을 헤아려 주는 것이 목양입니다.
그렇지만 간과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교사의 고유한 사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본질적이고 고유한 사명은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성경 진리의 말씀을 영혼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구체적인 목표가 있으니,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게는 복음의 진리를 잘 가르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가르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으로 성화되어 가고, 또 살아있는 동안 비록 어린아이지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교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오늘날 교회학교는 이런 본질적인 사명에서 멀어져있는 것 같은 우려를 갖게 만듭니다. 많은 행사들을 준비하고, 이벤트들을 준비하지만 정말 그 영혼들에게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심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세미나를 수없이 다녔지만, 대부분 이렇게 앉혀놓고 앞줄에 앉은 열 사람을 일으켜서 어제 주일날 영혼들에게 가르친 성경 본문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여덟 명 정도가 모른다고 하는 게 제가 가지고 있는 통계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가르친 것이 무엇인지 모르니 그대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리가 없고, 선생도 잊어버린 진리를 학생이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려고 분투했을 리가 없는 거죠.
그리고는 머리를 맞대고 어떤 행사나 이벤트를 통해서 영혼들에게 즐거움을 줄까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렇게 문화적인 한 현상으로서 영혼들이 거듭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말씀에 의한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 그 전적인 부딪침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거죠.
그러면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찬 교사가 될 수 있을까?
첫째는, 성경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무엇보다도 성경을 사랑해서 그 성경을 묵상하고 매일매일 읽는 것이 교사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보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자체에 대해서 친숙해지고, 성경진리와 친숙한 가운데 영혼보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비결을 배우고, 그것을 전수 받아서 영혼들에게 성경을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이 바로 교사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죽고, 언젠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내 손을 떠납니다. 그들이 우리를 통해 성경을 사랑하도록 하면 그들의 손에 성경이 들려있는 한 그들은 살아있는 한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으로 계속 성장을 할 겁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할 것입니다. 먼저 성경을 사랑하고 매일 매일 성경을 읽는 교사가 되어야 해요.
두 번째는, 이 영적인 은혜의 비밀들을 터득해 나가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학자의 견해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해져 본 적이 없이 어떻게 이 위대한 말씀을 선포하실 수 있겠습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당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예수님이 핍박을 받아보신 분이 아니라면 이렇게 장중하게 외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신앙의 많은 비밀들, 은혜의 비밀들은 자신이 몸소 그 진리대로 살려고 순종하며 몸부림을 칠 때에, 그 때에 참된 의미가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비로소 진리의 껍질이 깨뜨려지기 시작하고,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그 비밀스런 맛들이 자신의 영혼 속에 흘러들어서 자신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하고 그에게 새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영혼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본인이 반드시 그런 방식으로 진리의 말씀을 알아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지성의 폭을 넓혀가야 합니다. 적어도 교사의 손에는 항상 성경의 참다운 진리를 다루는 견실한 책이 들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자기가 애독하고 있는 책이 일년, 연중, 열두 달 항상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멈춰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퓨리탄 라이브러리까지 있어서 무슨 책이든지 빌려 볼 수 있도록 길이 열려져 있어요.
아무것도 든 것 없이 성경을 펼치고 마치 은혜의 세계를 모두 항해하고 온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영혼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위선이에요. 진실한 교육이 될 수 없어요. 구도자가 구도의 길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지, 구도의 길을 포기한 사람이 하나님의 참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끊임없이 지성의 폭을 넓혀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해가는 교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사와 목양”(2)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1:9)
우리가 영혼들을 돌보면서 우리가 돌보는 영혼들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목표는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게는 복음을 전해서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고,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랑하는 어린 영혼들에게 대해서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신앙의 목표를, 영혼들을 돌보는 교육의 목표로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게 뭐죠? 참되고 진실한 신자로 자라게 하는 거죠.
유치부 때 거듭난 아이가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도전을 언제쯤 받게 되죠? 대학부 1학년 때쯤? 그럼 그동안에는 뭐해요? 너무 빨리 전도한 것 아니에요? 그럼 고 3 때쯤 전도해야지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어느 나이에 예수를 믿게 되었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구원받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목표, 그리고 특별히 믿음 생활하는 이 목표가 모두 동일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일단 영혼들이 거듭나고 구원받은 영혼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영혼들을 위해서 많이 힘써야 합니다. 특별히! 왜냐하면 그 영혼들이 이 지금 우리처럼 이렇게 말씀을 가지고 가르치는 이 동아리 속에 들어와도 거듭나지 않는다면 그들이 다시 걸어서 밖으로 나가 세상으로 돌아가게 될 때, 그들이 거듭날 기회를 지금보다 많이 가지게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만약 거듭나지 못한 영혼들이 있다면, 그것이 그 영혼들에게는 우리가 마지막 만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 영혼들의 회심을 위해서 진지하게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 혼자 거듭나게 하시는 거죠.
그렇지만 조나단 에드워드의 지적과 같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대해서 고민하지도 않고, 구원받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당하게 될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에 대해서도 떨어보지도 않고, 그래서 그 자신이 거듭나야겠다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몸부림쳐보지 않은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볼 때에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요? 그 사람을 변화시켜서 거듭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성령님이 하시지만, 성령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구원받지 못한 너에게 구원의 세계를 하나님이 준비하셨고, 그런 구원이 없이 살아가면 어떻게 될 거라는 두려운 미래를 보여주고,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동행을 하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 삶이고, 그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그와 동행하면서 사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 삶이고, 선택된 삶인가 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줘야 해요. 때로는 두려운 마음을 주어요.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눈물겹게 호소해서,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추상같이 정확하게 가르쳐서, 때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애쓰는 모습을 통해서, 때로는 그림으로, 때로는 글로, 때로는 동영상으로, 때로는 편지로, 때로는 이메일로... 무수한 자극을 주어서 자신이 거듭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깊이 고민하게 만들고, 회심하고 새사람이 되게 해야 되요.
우리가 이것을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이거죠. 그래서 리처드 백스터가 그의 생애적인 작품, <회심>에서 그랬어요. 자기의 회중들을 보면서, 회심하지도 않고 거듭나지 않은 영혼들에 대해서, 회심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고민조차 하지 않는 영혼들을 보며, “내가 주님 앞에 가면 여러분들을 두고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나는 그때 가서 힘을 다해서 내 양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지만, 여전히 많은 영혼들이 끝까지 회심하지 않고 변화되지 않은 채 내가 여기 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주님 앞에 아뢸 때 내 눈에서는 눈물이 샘솟듯 쏟아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목자로서 얼마나 처절한 심정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이것이 없으면 목자라고 말할 수 없죠.
여러분, 나쁜 그리스도인이 언제 결단을 하고 ‘오늘부터는 뜻을 정하고 bad christian이 되어야겠다’ 그러면서 고무신 거꾸로 신은 적이 있습니까? 그냥 엄벙덤벙 그러고 살다 보니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아주 질이 안 좋은 외식하는 신자가 되거나 bad christian이 되는 거예요. 삯군도 마찬가지예요.
‘자, 진실한 목자의 삶은 어제로 끝이고, 오늘부터는 내가 가롯 유다의 길을 따라 삯군의 길을 가기로 작정했노라’면서 삯군의 길을 걸어 가냐구요? 그게 아니에요. 선한 목자로 남고, 영혼을 진실로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교사로 남기 위해서는 그냥 우리들이 주일날 출근하고 일주일을 영혼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영혼의 진지한 고뇌 없이 우리가 반드시 삯군 목자가 되요.
그러면 우리가 돌보는 영혼들 중에서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을 보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웃을지 모르지만, 회심의 역사가 있는 날은 밥을 안 먹어도 되요. 마음이 근심이 되고 어두울 때에 목회자에게 가장 커다란 위로는 누가 회심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이제는 다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그래서 어느 날은 그래요. ‘그 아무개는 참 큰 일 났어.’ 혼자 중얼거리는 거죠. ‘어떻게 그렇게 살아서 뭘 할꼬?’ 그러면, 우리 집사람이 옆에서 ‘여보, 그게 아니야. 내가 잊어먹고 얘기를 안했는데, 최근 몇 개월 동안 얼마나 변했는지 몰라. 정말 그 사람이 당신도 모르는 사이 새사람이 됐데.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했던 날을 후회하고 어린아이처럼 예수님 닮은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면서 가정에서 아내한테도 따뜻하게 하고, 아이들한테도 그렇게 잘하고 그런대.’ 그럼 그냥 말할 수 없는 감격이 몰려와요. ‘저기서 걸어오는 거 보면, 아고 저 인생은 어떻게 하나?’ 그랬었는데. 반가워서 악수를 하죠.
이러한 기쁨을, 영혼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말해도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은 정말 천사들에게도 맡기지 않은 직분이에요. 너무너무 귀한 직분이죠.
구원받지 못한 아이들은 자기가 자기의 영혼을 위해 울 수 있어요? 그럴 수 없잖아요. 그러면 누가 대신 울어줘야 하는데, 누가 하겠어요? 그 일차적인 책임이 누구에게 있어요? 영혼을 돌보는 목자들에게 있어요. 영혼을 위해 간절히 빌고, 눈물로 간절히 기도해서 그 영혼들을 주님께로 구원받도록 인도해야 해요. 그것 없이는 그 위에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르치는 것은 모두 뜬 물 통에 생수를 붓는 거예요.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무리 훌륭한 삶을 가르쳐도 걔네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거듭나지 못했는데. 죄와 싸울 수 있겠어요? 죄를 이길 수 있겠어요? 죄를 죽일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에요. 그리고 이 영혼들이 자기가 맡은 부서에서 변화되고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영혼들을 돌보는 교역자와 교사, 그 책임을 맡은 부장, 일꾼들이 얼마나 눈물 흘렸느냐? 영혼을 위해 많이 아파한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께서 감격의 눈물도 함께 주세요.
그러면 이러한 회심의 역사가 설교 중에, 예배 중에, 공과공부 중에, 심방 중에, 기도회 중에... 항상 일어나고, 그치지 말아야 해요. 나는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회심의 역사가 없는 사역은 하나님이 그들이 모여서 섬기는 무리 자체를 싫어하세요. 정말이에요. 단언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는 교역자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교사들이 마음을 실어서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 곳에서는 절대로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요.
물론 모여서 예배드리는 모든 이들이 한꺼번에 회심하는 역사는 매일 있는 일은 아닐 거예요. 그러나 하나, 둘, 혹은 셋 매주 그치지 말아야 되요. 그 회심의 역사가 그치면 어떻게 될까요? 영혼들이 굉장히 빨리 마음이 굳어지면서 타락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것을 위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자기의 영혼처럼 기도해야 되요.
아이들이 한 번 지옥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웃어요. 두 번 이야기하면,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세 번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진지해지고, 네 번째, 선생님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하면 아이들이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어요. 지옥이 없는데 어떻게 내가 지옥 갈까봐 나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지옥은 안 보이지만, 선생님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니 지옥이 진짜 있나보다고 믿는 거예요.
그래서 간절히 기도해야 되요. 저는 솔직히 주일날 조금 일찍 와서 가르치고, 조금 늦게 가는 것은 교사로서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어느 정도 여건만 갖춰지면 교회 와서 맹숭맹숭 예배드리는 것보다, 자기보다 훨씬 못한 구역장에게 되지도 않는 성경 배운다고 앉아있는 것보다 성경 가지고 가서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면 기분도 좋지 않아요?!
가르치고자 하는 욕망, 선생 되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에게 모두 있는데 그것도 좀 어느 정도 충족되지 않아요? 그것은 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렇게 주일날 조금 일찍 오고 늦게 가는 것이 십자가라고 하면 십자가의 의미가 너무 졸렬해지잖아요.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그럼 뭐가 어려운가요?
일주일 만에 나타나서 주님의 말씀을 전해줄 때에 그것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그냥 선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하나님 대신해서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위해서는 일주일 동안 목자로서의 삶이 자신이 영혼들을 가르치고자 할 때에 영혼들에게 기대하는 그 이상의 삶을 자신이 먼저 구현하기 위해서 진리의 증언과 더불어 몸부림치며 산 육이 있을 때에 그 하루가 그렇게 살아있는 말씀의 증언이 흘러나올 수 있는 말이 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자신이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 분투하고 노력을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뭐라 그랬어요? ‘내가 기도하노라.’ 그들을 위해 기도해요. 그럼 여러분 말하고 싶겠죠. ‘목사님, 정말 아침에 일어나서 직장으로 내뛰고 늦게까지 야근하고 집에 돌아오고 정말 수요 예배, 금요 기도회, 또 청년 기도회에서 뭐 좀 하라. 정말 정신 둘 날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사도 바울이 오늘 뭐라 그랬어요? “내가 기도하노라”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옥 속에 있었어요. 사형의 날을 기다리는 죄수의 몸으로 온갖 문초와 고문을 받으면서도 바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했어요. 그게 목자의 삶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어려운, 고난이 많은 길이에요.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울어서, 거듭나지 않은 아이들 다른 사람의 손에 인계하는 것을 뼈저리게 생각해야 되요. ‘나에게 일년이나 기회를 주셨는데 거듭남이 없었구나. 어떻게 할까?’ 하며 많이 울어야 합니다.
사실 제가 올해로 결혼한지가 여러분이 놀랄지 모르지만, 24년이나 25년이 됩니다. 만약 우리 아들이 제 때에 태어났으면 늦어도 대학교 3학년이나 4학년이 되었을 거예요. 아이가 없다 7년 만에 태어났어요. 근데 제가 가정의 달이면 꼭 설교를 하지만, 그 아이가 나를 너무 기쁘게 했어요. 왜냐하면 너무 총명하고 공부도 잘해. 100점만 맞고, 지금이야 크니까 그렇지만, 어렸을 때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꼭 얼굴을 만지고 갈 정도로 예뻤 어요.
근데 얘가 4학년, 5학년, 6학년 올라가면서 이상하게 뒤틀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굉장히 우리 마음 에 근심이 되었어요. 죄송한 얘기지만, 그때는 우리 학교에 주일 학교가 있었는데, 얘가 도저히 변화가 안 돼 요. 너무 고민하던 끝에 어린이 선교 단체에 수련회를 보냈어요. 근데 얘가 거기서 회심을 경험하고 왔어요. 생전 처음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이 뭔지... 그때까지 거듭나지 않았어요. 그것을 경험하 고 온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왜 그랬나 했더니, 그 수련회를 3박 4일, 4박 5일 하는데, 처음에는 지루하고 힘들고 그랬었는데, 어느 순간 에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는데 생전 처음, 그 기간 동안 자기의 담임으로 만난 여선생님이 우리 아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를 위해 기도를 했데요. 그 광경을 보면서 진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한 거예요.
그 후에 조금 미끄러지는 때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회심한 이후에는 죽 신앙의 길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려는 변화 받은 학생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정말 회심의 역사는 우리의 눈물에 비례해요. 여러분들에게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있다면, 지금 아직까지도 그 영혼들이 회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깊이 찔리고 아파해야 되요. 우리가 마지막 만나는 선생일지도 모르잖아요.
그때 여러분이 리처드 백스터처럼 주님 앞에 갔을 때 내가 그 영혼에게 그림으로, 글씨로, 이메일로, 핸드폰으로, 편지로, 엽서로, 말로 들려주고, 행동으로 보여주고, 수없이 했지만 그 영혼은 결국은 내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내 눈에는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 이거죠.
두 번째는, 구원받은 아이들을 위해서는 어떻게 하나? 우리들은 흔히 이런 생각을 하잖아요! 지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감정이 무디고, 열렬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지성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는데, 다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 성경 구절이 증명을 합니다.
바울이 감옥 속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 빌립보 교인들이 참 은혜를 많이 받는 교인들이에요.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서 그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그에게 마음을 열어서 세우게 하신 교회가 바로 이 빌립보 교회였거든요.
여러분들이 터키 쪽을 가면 마르마라 해협이 있고, 그 해협에서 보스포루스를 통과하면 러시아의 흑해로 이어집니다. 해산물이 많고, 다리 하나로, 그때 다리는 없었겠지만, 아시아 대륙 사람들이 유럽으로 건너오는 길목이었어요. 빌립보는 바로 교통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요. 그 문명이 발달한, 그래서 거기에 로마 제국의 모습을 재현하게 해서 멀리 떨어진 식민지 사람들에게 로마의 영광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샘플 시티였어요.
그렇게 번성하고, 그러면 당연히 타락한 도시인데, 그 도시 한복판에서 교인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슴이 가득 찼어요. 그랬더니 이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선교 사역을 위해서도 많은 헌신을 하는 열매까지 맺게 되었어요. 사도 바울의 마음에서는 그 사랑이 그냥 그대로 있거나, 그 사랑의 불꽃이 서서히 사위어서 꺼져버리는 그런 불꽃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어요.
어떻게 하고 싶을까요? 그들의 마음에 있는 신앙이 횃불 같은 사랑이었다면 모닥불처럼 활활 타오르게 하고 싶었고,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모닥불과 같았다면 커다란 산에 불붙은 것처럼 그렇게 불길처럼 타오르게 만들고 싶었던 거죠. 그 사랑을 그렇게 뜨겁게 불타오르게 만드는 요소를 둘을 제시하는데, 바로 지식과 총명을 통해서 그들 속에 있는 사랑의 불꽃이 그대로 있거나 사위지 아니하고, 진실하게 더 타오르는 그런 커다란 이글거리는 화염이 되기를 원했던 거죠.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지식과 총명이에요.
그 지식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주고, 신앙의 참된 이치가 뭔지를 알게 해주므로 축적되는 지식을 가르치는 거죠. 요즘으로 말하자면, 교리를 잘 가르쳐서, 성경 말씀을 잘 가르쳐서 영혼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들을 차곡차곡 쌓이도록 만드는 것이죠. 교리로 뼈대를 세우고 설명으로 그 살을 붙여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집을 짓도록 지식으로 만들어주는 거죠. 그래서 가르친 지 단 3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 주일에 무엇을 가르쳤는지도 모르는 선생들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자신이 가르쳐 준 것이 선생님의 마음에 남아있지 않은데, 어떻게 그 설명을 들은 아이들의 마음에 그 지식이 쌓일 수 있겠으며, 자기가 영혼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영혼들이 그 말씀을 좇아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가 있겠어요? 그렀잖아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깊고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해요. 그래서 항상 진리의 말씀에 대해 명료한 감각을 유지하고 그 진리를 구도하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 자신이 그 지식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가고 있는 것들을 자신이 경험하는 살아있는 말씀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교사가 그런 사람이에요.
그러나 제가 가지고 있는 서울 시내 교사들의 통계에 의하면, 제가 만난 교사들 가운데 30%만 매일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그 밭에서 어떤 영혼들이 자랄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선생님을 통해 보고, 그리고 말씀대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진정한 변화, 이런 일념으로 살아가는 참된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질 때도 있지만 다시 일어서서 걸어가는 교사의 뒷모습을 보는 일이 없는 그런 밭에서 어떤 영혼들이 자라겠는가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그 지식을 영혼들에게 차곡차곡 심어줘요.
또 하나는 총명을 가르쳐주는 거예요. 이 총명은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는 영적인 통찰력, 그리고 분별할 수 있는 지각을 가르쳐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아이들에게 자신의 삶으로 인생을 분별하는 지혜를 배우게 하고, 사물을 바라보는 시야를 갖게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자주 영혼들을 만나야 해요. 주일날 하루 나타나서 한 시간 가르치고 헤어지는 것으로는 교역이 되지 않아요. 자주 만나야 되요. 그래서 선생님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그리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입증 받게 만들어줘야 해요.
바로 이것을 위해서 가르치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뭘 한다고 했어요? ‘기도하노라’고 했어요.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고, 구원받은 영혼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속에 심겨져서 가르치는 지식과 알려주는 총명을 통해서 계속 그것이 연료가 되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타오르도록 만들어줘야 되는데, 그 일을 위해서는 우리가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전도사 때에 중등부, 고등부 영혼들을, 유치부 빼고 다 거쳐 왔습니다. 부서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섬기는 자세예요. 정말 선생님들이 한마음이 되어 모여서 눈물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얼음같이 차가웠던 영혼들의 마음에 회심을 주시더라구요.
노력한 것도 별로 없었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누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제가 토요일에 와서 기도하니까 부른 적도 없는데 선생님들이 토요일 밤이면 보따리를 싸서 왔어요. 모여 앉아서 기도해요. 성령이 역사하시니까, 정말 교사로 섬기면서도 한 번도 영혼이 회심하지 못한 상태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교사들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로 먼저 눈물을 흘려야 될 영혼은 자기 자신임을 깨닫게 해주셨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말로 눈물로 기도하고 만약에 저 영혼들이 구원 얻을 수 있다면, 저 완고한 영혼이 변화될 수 있다면,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아무리 박식하고 능란하며
또 심오한 설교와 장중을 감동시키는
웅변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이 안에 심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핍을
대신할 수는 없노라
데이빗 브레이너드가 자기의 일기 속에서 이 가사를 남겼어요. 제가 너무 감명을 받아서 제가 곡을 붙였습니다. 그 찬송을 부르면서 남들이 다 쉬는 토요일 밤에 우리 모두 모여 기도했어요. 지금도 기도했던 얼굴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잘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을 주시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 은혜에 미끄러진 영혼들을 위해서 밤을 새워 기도했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고 밤새도록 기도하고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서 샤워를 하다 가슴을 보면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제 인생에, 그때처럼 가슴이 아픈 때가 없었지만, 그때처럼 풍성하고 본질적인 회심의 역사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요즘에 교회를 이렇게 보면서, 한편으로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송한지 몰라요. 여러 가지 핑계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만약에 그렇게 내 가슴에 멍이 들도록 두드리면서, 숫자가 많아지긴 했지만, 영혼의 이름을 부르며 운다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다 많은 회심을 주실 텐데... 어떻게 할까? 육체는 연약하고 일은 많아지고 집중하기는 점점 어려워지는 이 때에 어떻게 할까?
정말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이 사명이 얼마나 고귀합니까?
그래서 지금도 그래요. 회심의 역사가 그치는 것이 느껴질 때에는 누구도 원망스럽지 않고 그리고 그들이 강퍅해서 회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목회하는 내가 강퍅해서, 내가 그 영혼의 이름을 부르며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가슴을 때리며 울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변화하는데, 그리고 그렇게 섬기고 나서야 리처드 백스터처럼 온 힘을 다해 전했지만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내가 기도해도 그들이 변화되기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우리의 눈에도 눈물이 흐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야곱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라헬은 본처가 아이를 낳는 것을 보면서 야곱에게 울부짖지 않았습니까? 나로 아이를 낳게 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어버리겠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그 영혼의 심정이 되어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의 회심과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친다면 우리들이 수만 마디의 말을 가지고도 변화시킬 수 없던 영혼들을 하나님이 친히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심하지 못한 영혼을 위해서 피눈물을 흘리기 전까지는 죄인인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하는 것은 과장입니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과장입니다.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떻게 그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그 영혼들의 거듭남을 위해서 피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죄인의 길에 있을 때 얼마나 자신이 돌아오기를 목매어 하셨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거짓말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과장입니다.
영혼들을 돌보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걸어가는 길은 주님이 기억하세요. 그래서 이 길은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몇 번이나 물어보시고 나서 비로소 영혼을 맡겨 주셨어요.
그래서 그 영혼들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자신이 그 영혼들을 위해 수고하고 치러야 하는 희생과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자신의 섬김 안에서 실제화 되는 것을 경험해요.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내가 회심하지 않은 이 영혼들을 붙들고 고생을 하고,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이미 이전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나의 죽음이, 지금 현재 나의 섬김의 삶 속에서 (realized in, actualized in) 실현이 되요. 재현이 되요. 그렇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경험하는 거예요.
지금도 전도사 때가 기억나요. 그냥 많은 눈물을 흘렸던 때였죠. 그때 생각난 것이, “하나님 이 영혼들이 모두 구원받을 수 있다면 이 고등부실 저 벽 뒤에 내가 못 박혀 죽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로 이런 본질적인 섬김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섬김의 일지를 이 피와 눈물과 땀으로 써내려갈 조국교회의 미래가 여러분들의 손에 달려 있어요. 영혼들을 위해 아무리 큰 빌딩을 사고 좋은 시설을 만들어주고, 먹을 것을 많이 주고, 훌륭한 시스템을 갖추면... 그것이 쥐뿔이나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시스템이라 하는 기계 속에 집어넣어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의 섬김 위해 하나님께서 복 주실 때 그 영혼들에게 있어서 이제껏 경험한 적이 없던 놀라운 변화와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런 마음과 사모함을 가지고 영혼들을 섬긴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마 여러분 자신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그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예요. 그러면서 그 영혼과 함께 눈물 흘리고 아파하고... 그게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바울이 얘기했던,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라.”
그래서 우리의 기독교 교육의 현장은 순교의 정신을 가지고 피 대신 땀을 흘리는 사람들, 죽기를 각오하고 사는 사람들, 그 토양에서 영혼들이 꽃 피고 열매 맺는 사역이에요.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빌딩을 주셨잖아요. 그리고 미력하지만 힘을 다해서 할 수 없는 것 보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다해서, 오늘도 이 골목을 걸어 나오면서, ‘목사님’하고 끌어안는 영혼들을 면서 그 생각을 했어요. ‘정말 너희들이 교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을 머리 하얀 할아버지가 된 뒤에도 감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싶다.’ 이게 돈 가지고 됩니까? 빌딩 가지고 됩니까? 번득이는 지혜 가지고 됩니까? 아니에요. 그것들은 모두 보조적인 도구에 불과합니다. 본질적인 것은 여러분들의 뜨거운 사랑, 그 사역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는 그 정신으로 섬길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