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흔적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다른 서신서와는 달리 갈라디아서는 충분한 인사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가르쳐준 복음 신앙을 버리고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격한 어조로 써 내려 가다가 서신이 끝날 때 즈음에는 그의 마음이 누그러지고 다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사랑은 마음속에 밀물처럼 밀려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사랑하는 자녀로 보며 서신서를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거의 끝 절에 나오는 이 구절.“.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라고 하는 이 구절을 가지고 논란이 많이 있어 왔습니다. 본문에 보면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희랍어 성경에“타스티그마타 투 예수”라고 되어 있는 이 흔적이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세 가지 정도의 해석이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우선 크게 보면 육체적인 해석입니다. 그 중에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것이 핍박설입니다. 이 상처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당한 핍박의 상처일 것이다..라고 말이죠? 실제로 그는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몸에는 돌로 맞은 흔적도 있을 것이고 고문을 당한 흔적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정하게 우리들이 살펴 본다면 이 핍박설은 지지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문맥은 지금 할례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남자의 몸의 특정한 부위에 표시한 그 할례를 자랑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통박하는 가운데 이 문맥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런 사도 바울이 너희들이 거기에 흔적이 있다고 자랑하느냐? 나는 여기 여기 여기 이렇게 몸에 또 다른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육체 대 육체로 발언을 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도는 율법과 복음, 영혼과 육체, 육체의 표, 예수의 흔적, 이것을 뛰어난 수사학적인 기교로 대조시키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은설입니다. 이것은 카톨릭의 신비주의적인 해설이죠. 영적인 체험이 육체에 예수의 흔적을 물리적으로 가지고 왔다는 것인데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의 전설 같은 생애에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는 제의적 문신설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제 사도 바울의 몸에 난 이 표는 이방의 제사, 제의 문맥에 따라서 존귀한 자에게 자기 자신을 온전히 헌신한 표로 드린 문신이 있었는데 사도 바울이 회심한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그런 문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세 가지 육체적인 해석들은 모두 기각됩니다. 더 강력한 가능성이 있는 것은 형상적 해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형상적 해석은 여기에 나와 있는 예수의 흔적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를 닮은 영혼과 마음의 특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해석을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이 해석을 지지한다고 할 때 풀리지 않는 어려운 난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몸에”라고 되어 있는“엔토쏘마티무”라고 하는 구절 때문입니다. 이 구절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이것은 또 다른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실제의 인간의 몸 안에 있는 상처를 지지해 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제 고린도후서 4장 10절로 넘어가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날마다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의 “몸에”라고 하는 이 부분이 바로 똑같이 “엔토쏘마티”입니다. 몸에 나타나는 것이죠. 그러면 만약에 “엔토쏘마티무”라는 표현 때문에 그게 흔적이 육체의 흔적이라면 그러면 예수 죽인 것은 어떻게 몸에 짊어지는 것일까요?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짐”이라고 번역함으로 마치 우리가 우리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에 대해서 가책을 계속 느끼며 사는 것처럼 번역이 됐습니다. 그러나 희랍어 본문을 보면 예수 죽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당연히 “나타나게 함이라”는 그 구절 앞에는 당연히 똑같이 “우리의 몸에”라는 구가 생략됐다고 봐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몸에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한 걸음 나아가서 어떤 신학자들은 이제 이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는 “짊어짐은”이라는 단어가 “ 페리페로”로 되어 있고, 여기의 “가졌노라”는 “바스티죠”라는 단어를 썼기 때문에 양자가 각각 틀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보다 더 많은 권위있는 학자들은 이 두 단어가 의미상에 차이가 별로 없다고 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은 역사적으로 칼빈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그 유명한 “콘포로마치오”의 교리 즉 예수 본받음의 교리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죽으심은 이미 오래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으심을 다른 사람의 몸이 아닌 우리의 몸에 짊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실재화와 영적 생활 가운데서 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이 성화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가는 “컨퍼미티의 교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던지 세상을 본받던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로마서 12장에서 분명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말합니다.“쑤스케마티죠”라는 희랍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다이캐스트 같은 데 어떤 걸 녹여서 부어서 틀을 뜨는 그런 것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똑같은 사람으로 찍어내어서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그 가치관으로 찍어냅니다. 그가 누구이던지간에 세상은 그 일을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세상의 정신이 지배합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지배하죠. 세상이 그렇게 찍어 내려는 것과 꼭같이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의 형상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 가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컨프로마티오”의 교리의 토대를 고린도후서 4장 10절이 제공하는 것입니다. 자 얼마나 놀랍습니까? 예수의 죽음이라는 추상명사를 영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몸에 짊어진다고 할 때의 이것은 피지컬한 바디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그것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 물리적인 해석보다는 형상적인 해석이 문맥에 어울리는 것이죠.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사도 바울 시대의 노예제도의 문맥에서 이것이 쓰여졌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이 “스티그마”라고 하는 제도가 그 당시 노예 문화 속에 있었던 것이죠. 노예는 신분이 노예입니다. 그래서 이 노예에게는 스티그마가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노예가 스티그마를 했는지는 우리들이 알 수 없어요. 그렇지만 노예, 혹은 로마의 군인, 이런 사람들은 스티그마를 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노예에 새겨진 스티그마, 어깨에 혹은 등에 새겨진 스티그마는 그 표시 자체를 보고 노예가 누구에게 소속된 노예인지를 알 수 있어서 알 수 있게 했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로마 시대 때의 사회적인 골칫거리는 노예의 도망이었습니다. 여기로부터 이 노예 소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티그마 문화가 있었다는 거죠. 이 문화를 익히 알고 있는 바울이 이걸 익히 알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나는 예수의 스티그마를 가진 사람이다 ..결국은 이 “스티그마타투 예수”는 “둘로스 크리스토수”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죠. 두 표현 사이의 차이점은 전혀 없는 것이죠. 사도바울은 자신의 서신서마다 자기를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예제도가 사라진 오늘날에서는 별로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이야기지만 노예제도가 건재하고 있던 그 당시 사도바울의 이러한 자기소개는 이방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둘로스크리스토스투”, “스티그마타투 예수” 이 두 표현이 결국은 사도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하는 자기 정체성을 가져 왔는데 이것은 사도바울이 고안해 낸 아주 특별한 신개념이 아니라 구약에서 면면히 이어져 나오는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벳야훼”의 혹은 “에벳아도나이”의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세 부류의 사람을 두셔서 당신의 나라를 신종국가로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은 당신의 선지자들을 나의 종 선지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들의 에벳야훼의 전통입니다. 이러한 전통을 따라서 이제 사도바울은 에벳야훼의 전통을 따라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에벳예수가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것은 명백히 구원사적으로 구약에 면면히 내려오고 있는 선지자들의 에벳야훼의 전통이 기독론적인 전환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러한 놀라운 기독론적인 전환을 통해서 사도바울이 갖게 된 확신은 무엇이죠? 이것은 바로 자기 정체성과 관련이 있는 것이죠.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이고, 나는 그 분께 속했다라고 하는 자기 정체성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전통이나 인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그것이 그들에게 문제가 된 것이었죠. 계시를 받음으로 선지자가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먼저 하나님을 만남으로 선지자가 되었던 것이죠. 신약에서 사도바울의 서신서마다 자기소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과 맞먹는 똑같은 구약에서의 선지서의 소명 기사가 등장합니다. 소위 얘기하는 “와이 예이 다바 디바라 엘로힘”이라고 표현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라고 하는 이 구절들입니다. 이 구절들은 매우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체험으로 하나님의 그 위엄과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이 소유하지 못한 중요한 지식을 소유했는데 그 지식이 소명의 핵심이고 그 지식이 그들을 에벳야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트 엘로힘이에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에요. 그래서 호세아서 4장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들을 버려서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 하게 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똑같이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영광스러운 지식에 사로잡힘으로 그들은 이 세상의 전통과 인습이 어떠하든지 자기의 백성과 자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든지 말든지 숙명과 같은 소명에 붙들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고자 하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론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나 그러나 내가 은혜의 복음 전하는 마지막 이 일을 마치려 함에는 목숨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노라고 고백했던 바울의 유언적인 고백이나 예레미야의 고백, 내가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할라치면 그 말씀이 내 중심에 불 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나이다 했던 그 소명은 똑같은 구속사적인 연장선상에서 있다 라고 하는 것이죠. 오늘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목사의 정체성이 흐려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커다란 기업의 CEO도 아니고 사회 사업가도 아니고 무슨 심리학 전문가도 아니고 아주 애매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탈근대주의 사상의 영 앞에서 우리들이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심각한 위기입니다. 더욱이 신학교에서 자라나는 여러분들이 자기가 정체성이 누구인지를 올바로 깨닫지 못 하는 것은 중대한 잘못을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곳을 바라보고 걸어가도 그 길로 간다는 보장이 없는데 길이 아닌 것에다 목표를 삼는다면 그는 처음부터 그 길을 갈 가능성이 없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목사는 누구입니까? 목회자는 누구이길래 여러분들은 목회자의 길을 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희미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목회를 하는 개념은 얼마나 애매한 개념입니까? 온갖 잡동사니들이 모두 들어와서 목회자로서의 전통적인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았습니까? 개혁파 정통주의 유산을 물려받았던 영국 청교도들은 이 점에 있어선 매우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목사란 누구인가? 목사는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뿌리고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순교했던 사도들의 후예다..”이것이 목사가 가지는 개혁파 목사가 가지는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럼 난 여러분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기 왜 있습니까? 그리고 왜 목회를 하려고 합니까? 비전의 잔치 때문입니까?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입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잘못된 것입니다. 목회의 영광은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은 “더 크게 더 많이 더 강력하게“가 구호처럼 되어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더 많이 누구를 위한 더 크게 누구를 위한 더 강력하게입니까? 이런 것들이 목회의 정신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서 자라는 여러분들은 이제 신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과목과 그리고 진지한 학문의 탐구는 하잘 것 없다고 생각을 하고 이렇게 성공을 이룬 목회자들을 좋아하고 존경하고 그리고 하루 바삐 그런 방법들을 습득해서 그런 목회사역의 뒤를 이어 여러분도 더 크게 많이 강력하게 해보려고 합니다.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인간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떠나면서부터 그의 모든 비전은 크게 많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보편적인 능력과 편재를 악하게 본뜨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결국은 하나님을 본뜰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똑같이 글을 인용하면서 칼빈은 자기의 책 속에서 악인은 악인대로 하나님을 흉내내려 하고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대로 하나님을 본뜨려고 한다..이것이 바로 타락한 이후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벨론의 정신입니다. 바벨론의 정신은 이미 하나님을 떠나 이탈했기 때문에 그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강력한 것입니다. 보편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숫자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기의 나라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 바벨론의 정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크기와 규모와 그리고 그 모든 힘에 있어서는 바벨론이 언제나 강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대중적이었던 시대가 있습니까? 개혁 신학의 아름다운 정신이 이 세상의 교회에 보편적인 때가 있느냐고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진리가 이 세상의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는 때가 있었습니까? 그런 때는 없었습니다. 바벨론의 정신은 바로 이렇게 크게, 많이, 더 크게입니다. 영국 복음주의의 타협의 역사를 여러분들이 보시고 그리고 전 세계의 교회의 교회 연합 운동을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을 지키고 믿음을 따라 살던 사람들은 분열주의자들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모든 교회 연합의 중심엔 한 가지, 하나의 신학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왓 이즈 크리스챤“ 크리스챤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한 사람이 신자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존재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전적인 정의를 무너뜨리면서 연합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기독교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은 경건의 비밀을 안 사람입니다. 중생하고 회심해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죽어도 깨칠 수 없는 하늘의 신비를 맛 본 사람입니다. 그 복음의 능력을 맛 본 사람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그의 주 되심 앞에 자기를 바친 사람입니다. 실제로 그가 하나님 앞에 소원을 품으면 자기 안에 있는 경건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의 도우심을 받고 진리의 말씀 앞에 굴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의 세계를 지닌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 목회 사역의 성공을 이루었다고 칩시다. 그것이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남전도회원만을 60여만명을 거느렸던 모세의 목회가 행복했나요? 오죽했으면 죽여달라고 그랬겠습니까? 이런 정신 속에서 교회는 너무 가슴 아프게 가장 기본적인 것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과 회심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이겠죠. 그럼 여러분들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회심하는 영혼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배시간에 선명하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죄인들이 흐느끼고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모든 삶이 주님을 대적하는 원수의 삶이었습니다.
(찬양)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선명한 십자가와 복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더 크게 더 많이 자신의 세력을 대중화하려고 하지만 예루살렘의 가치는 그런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계사 속에 고등학교 책에 두 줄 밖에 안 나오는 나라입니다. 예루살렘은 나오지도 않는 도시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 작은 예루살렘으로 온 세계를 휘감은 바벨론의 세력을 맞서게 하셨습니다. 바벨론의 가치가 많이 크게라고 한다면 예루살렘의 가치는 거룩함입니다. 캄캄한 밤바다에 칠흑 같은 어두움이 내리고 풍랑이 일 때에 수많은 배들이 항구에 도피하기 위해서 수천발의 조명탄을 쏘아서 항구의 돌멩이 하나까지도 보이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이 모두 어두워도 등대의 불빛 하나만 있으면 수많은 배들이 안전하게 항구에 도피하는 것처럼 세상이 어두운 것은 교회의 기회이고 세상이 세속적인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타락하고 어둡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오히려 진리를 외칠 기회가 되는 것이죠. 목회란 바로 교회의 이 거룩함을 증진시키는 일을 위해 신명을 바치는 것을 목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오늘 이 시간에 목회에 대한 생각을 많이 바꾸셔야 합니다. 목회의 영광은 큰 교회, 대중적인 기질을 받는 사상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외치며 고난은 받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진리를 깊이 체험하고 자기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 운명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담대하게 외칠 때 진리가 침 진리로 외쳐지면 어두움 속에서 누군가 메마른 손을 내밀고 그 진리를 붙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목회의 대상입니다.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진리를 양보하고 대중적인 세속의 사상을 가득 채워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해도 그들은 염소지 양이 아닙니다. 염소는 사육을 하고 양은 목양을 하는 것입니다. 사육할 사람들을 목양을 하려고 하니 그 동안의 교회를 통해 훼방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은 어디에서 보상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에게 과연 외치지 않으면 안 될 진리가 이 “스티그마타투 예수” 처럼 지울수 없도록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외치지 아니하고 죽을 수 없는 그런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 속에 거부할 수 없이 아로새겨져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목회는 액체의 사역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본받는 사역입니다. 그 분이 이 땅에 계실 때 그 분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셔서 불쌍한 죄인들을 위해 땀을 모두 쏟으셨고 일생을 사시면서 그 분은 슬픔과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생애는 뜨거운 눈물이 있는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의 옥체를 깨뜨려 하나님 앞에 자기의 보혈을 모두 쏟으시는 피의 생애였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갈 수 있는 수많은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에 들어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성공, 성공을 기대하며 이 신학교에 들어왔습니까? 이 길을 걸으면 훌륭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고 하는 육신의 삶에 대한 안락한 기대 때문에, 목회자의 좋은 대우 때문에 이 길을 들어섰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잘못 문을 두드리신 것입니다. 우리 중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의 은혜,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그 영혼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너무 강력해서 다른 이 세상의 직업을 가지고는 내 자신 속의 솟구치는 영혼에 대한 연민을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서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주님이 홀로 받으시고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겠노라고..그 정신은 바로 피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러한 피의 목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안 한 전도자가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외치는 것은 토혈의 노래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 그 외침은 피의 노래입니다. 설교는 한 사람의 탁월한 신학 지식을 과시하는 시간이 아니고 성공하는 사람의 길을 터득한 사람의 강연일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의 견해를 표명하는 시간은 더더욱 아닙니다. 설교는 한 사발의 피입니다. 자기가 발견한 그 진리, 그 진리를 통해서 만난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통해 만난 삼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엄과 깊이 사랑하고 그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떨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끌리는 사랑에 붙잡히는데 이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그런 두려움과 사랑의 마음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음이고 그들도 그렇게 십자가를 통해 주님을 만나기를 사모하며 그 일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섬김을 뒤잇는 것이 우리의 생애가 아니겠습니까? 포사이스라는 설교학자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 목회자가 설교함으로 보상을 받는 것은 설교의 효과 때문이 아니라 설교하기까지 살아온 삶, 설교를 준비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듣는 사람이 없어도 내 안의 진리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어서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외침으로 외치고 그리고 그 진리에 대해서 사람들이 반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인생의 모든 처우를 주님께 맡기는 것, 진리가 배척당할 때 사람들이 버린 그 진리를 끌어안고 함께 배척을 당하고 그 진리를 사람들이 받아들일 때 진리와 함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하면서 그러면서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그 큰 은혜를 따라 가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사랑하는 후배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자비하심으로 권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예수를 알기를 갈망하십시오. 일평생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절실한 기도가 되십시오. 치열하게 자기를 복종시키며 그리스도 예수 앞에 한 사람의 아름다운 신자가 되어 가십시오. 한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고, 그 존재의 가치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있습니다. 치열하게 학문을 탐구하십시오. 다시는 오지 않을 날처럼 하루하루 붙들고 온전히 학문에 매진하십시오. 이것을 무엇을 위해서 쓸까를 염려하지 말고, 진리를 찾는 이 일에 학문의 도구를 어떻게 써야 할지를 근심하며 배운 것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는지를 근심하며 학문에 여러분 자신을 매진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동산에서 많이 기도하십시오. 매일 기도하고 난 여러분들의 자리에 눈물이 배이게 하십시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한량없는 은혜와 그리고 그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영혼들에 대한 눈물이 그대들의 가슴에 마르지 말게 하십시오. 오늘 여러분들이 아무렇게나 보내고 있는 오늘이라는 이 날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살아있다는 것, 이것은 하나님 앞에 놀라운 특권이 아니겠습니까?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