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 길로 걸어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
녹취자: 김경애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신 근거를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였다고 오늘 새벽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3절에서는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이유 때문에 이 시인이 스스로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인정하며 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셨기 때문에 영혼이 소생의 경험을 통해서 자기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 영혼의 목자라는 것을 인격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이 시인에게 목자가 되시고, 시인은 목자를 의지하며 따르는 어린 양이 되었던 것이죠.
그러면 도대체 여기서 ‘주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라고 하였을 때 이 소생시킨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구약성경은 원래 히브리인들의 글자로 쓰여 있습니다. 아주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그림 같은 언어가 히브리어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으로 이 23편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당신이 나의 영혼을 살게 하시고.’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게 되었다는 그런 뜻입니다. 하나의 신앙의 단계를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 기도했더니 응답해주셔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고 교회에 나오고 믿음생활을 하는 신앙의 단계가 있는가 하면 좀 더 신앙이 깊어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먹고 입고 마시는 것들을 내게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은밀한 영혼을 살려주시는 놀라운 영혼의 소생의 경험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시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께서 저희의 원하는 것은 주셨으나 저희의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나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셨어도 영혼은 파리하게 만드시는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내리는 복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일반섭리의 복이고 또 하나는 영적인 복이에요. 일반섭리의 복은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이고 변화시켜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복을 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업을 했더니 장사가 잘되어서 돈을 벌었다더라. 애를 낳는데 아주 튼튼하게 잘 크고 머리도 좋아서 일류대학에 들어갔다더라. 얼굴이 좀 못생겼는데 부잣집에 시집을 갔다더라. 아니면 며느리를 얻었는데 며느리가 그렇게 효성스럽고 착하다더라. 그리고 같은 나이 칠십인데 누구는 오늘, 내일 오늘 내일 하는데 그 사람은 아직 이팔청춘이라더라.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일반 섭리의 복이에요. 그러나 이 복 보다도 더 탁월한 복이 있는데 그것은 영적인 복이에요. 이 영적인 복은 하나님이 직접 영혼을 어루만지심으로써 영혼에 내리시는 복이에요. 오늘 아침에 우리들이 영혼에 대한 공부를 좀 했습니다만 그 영혼에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에 더럽혀진 영혼은 깨끗하게 되고 일그러지고 망가진 영혼은 온전하게 되어서 궁극적으로 그 영혼의 아름다움을 회복시켜주시는 복들을 가리켜서 영적인 복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구약시대에는 일반섭리의 복들이 강하게 부각되고 그리고 그 안에 핵심처럼 영적인 복들이 우리에게 계시되는데 신약에 와서는 반대로 영적이 복들이 먼저 제시되고 그리고 일반섭리의 복들이 그 영적인 복에 따라오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신약을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팔복이에요. ‘심령이 가나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복들이에요.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설교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렇지만 온유한 자의 경우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는데 ‘온유한자는 땅을 차지할 것이고’ 그랬더니 ‘지금 땅값이 얼마나 비싼데.’ 그 복을 영혼의 복이라고 말하면 부동산하는 사람들이 짜증을 내지요. 그렇게 질문을 하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온유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백 평, 이백 평, 천 평, 만평, 땅을 진짜로 차지한다는 뜻이 아니고 그런 뜻이 아니고 온유한 사람들은 비록 땅 한 평을 가지지 못할지라도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쳐서 그래서 그들에게 이 영향을 행사한다는 의미에요. 저는 스펄전 목사님이 이 부분을 해석한 이러한 영적인 해석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 의미인 것이에요. 아무튼 그 영혼의 축복은 하나님이 직접 영혼을 어루만지셔서 그래서 그 망가진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그의 영혼을 고쳐주셔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기쁜 일이 일어나도 그게 그렇게 오래 가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집사님! 집사님!’ ‘왜?’ ‘우리 새집을 샀어요.’ ‘어, 잘했네.’ ‘판잣집에 세 들어 살다가 45평 아파트를 단번에 샀어요.’ 첫 번째 이야기를 했을 때 깜짝 놀랄 것이에요. ‘그래? 정말 축하해! 집들이 해야겠네!’ 그 다음날 와서 한 번 더 이야기하면 ‘어제 이야기했잖아?’ 그 다음날 한 번 더 이야기하면 짜증이 날거예요. 그렇죠?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영국속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하루를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고,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장가를 가고, 한 달을 행복하려면 집을 사고, 일 년을 행복하려면 말을 사시오.’ 그랬대요. 그러니까 색시가 유효기간이 일주일밖에 안가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 같은 감격스러운 일반섭리의 복도 이 시간 생각하면 감사할 줄 잘 모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영혼을 하나님이 직접 어루만지시는 그 복이 필요합니다. 그런 인생의 복이, 그런 은혜의 복이 바로 성도들이 받는 복이에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매일 깨달으면서.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이렇게 감격이 넘쳐요.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찾아와 삶이 바뀝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하나님이 내 영혼을 사랑하게 하시고’ 히브리말로 ‘하야’ 인데 그렇게 하셨다는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믿음이 좋은 다윗도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은 때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 죽음에서 자신의 영혼을 살려주신 그 놀라운 변화를 이 시인이 경험했던 것이죠. 그러면 도대체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했던 영혼을 죽은 것과 같은 방불한 영혼으로 만들어서 죽음의 현실을 계속 갖게 하고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고통스러운 일들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영혼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면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의 교통 속에서 누리는 영적 생명이에요. 이런 영적인 생명의 은혜를 아주 충만하게 경험하면서 살아가게 될 때에 왜 어느 때에 이 영적인 생명이 사라지고 죽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 이것을 묻는 것이에요.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쉬운 말로 영적인 침체라고 부릅니다. 침체라는 이 말은 신앙의 활기와 기력이 사라지고 그리고 아주 힘이 없고 파리한 상태가 되어서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움직이는 사랑과 기쁨 같은 것들이 사라져버려서 딱딱하고 무딘 마음이 되어버리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죠. 리처드 핍스 라는 영국의 청교도는 이렇게 설명을 했어요. ‘하나님을 향해 딱딱한 마음은 세상을 향해 부드러운 마음이고 세상을 향해 딱딱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부드러운 마음이다.’ 라고 말이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부드러울 때에는 말씀을 던지면 계속 뿌려지고 뿌려진 것은 즉시 싹이 나기 시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그것이 아주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신앙으로 매일 매일 부쩍부쩍 자라요. 그래서 아주 놀랍게 자라는 것이죠.
우리는 여러분들도 마땅히 그럴 것이라고 믿는데 자라나는 세대들을 아주 철저히 교육시켜야 되고 교회는 거기에 거의 모든 것을 걸어야 돼요. 그래서 적어도 30년 후에는 아니 조금 더 길게 잡아서 여러분들이 40년 후에는 돌아가시고 나서 40년 후에 진주 북부교회가 지금의 진주 북부교회보다 더 좋은 교회가 되어야 해요. 그렇게 해야지 여러분들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애를 낳고 주님을 믿으면서 살았다는 증거에요. 저희 교회도 힘을 많이 기울이고 있어요. 요즘 청소년들이 정말 여러분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에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토요일 오후 좋은 시간에 애들이 하나씩 둘씩 셋씩 손을 잡고 그리고 4층으로 올라가요. ‘너희 어디 가니?’ ‘목사님 안녕하세요? 우리 오늘 토요기도모임에 가요!’ 아이들이 모여서 토요일마다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해요. 그래서 그중의 한 아이에게 취재를 했어요. 이제 우리 성도들이 너희를 위해 무엇을 해주어야할지 한번 방송에 나와서 이야기 해봐라. 그랬더니 ‘성도여러분, 교우여러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우리 중학생들이 참된 성도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마음이 뭉클했어요. 신앙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맘때에 애들이 말할 수 없이 난잡한 삶을 살고 신앙이 들어가면 그 아이들이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도 성도라는 느낌이 들어요. 애들이라는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 성도라는 느낌이 들어요. 거룩한 기운이 이렇게 아이들 속에 흘러요. ‘우리가 성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얼굴이 예쁜 애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신앙으로 말이에요. 그런 신앙의 생생한 활력을 앗아가는 것이 영혼의 침체에요.
그러면 그런 침체는 무엇 때문에 오는 것일까? 몇 가지가 있는데 오늘 시간이 하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어제도 너무 늦게 가셨지요? 그렇죠? 내가 두 시간을 설교 했더라고요? 오늘은 사실 세 시간은 설교를 해야지만 되는데. 그런데 몇 가지 원인이 있는데 오늘 중요한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어요. 그게 뭐냐 하면 죄에요. 죄. 죄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생생하게 살았던 은혜의 감격, 하나님이 주는 사랑, 이런 것 속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이 없어요. 오직 죄만이 우리를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런 영혼의 생기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에요. 여기에 보면 아들을 군대에 보내 보신분이 있지요? 그렇죠? 우리 아들은 특전사로 갔다가 제대를 했는데 아들을 군대에 보내면 세 번 운다고 그래요? 첫 번째는 군대로 태워 보낼 때 울고, 두 번째는 첫 번째 편지 왔을 때 울고, 세 번째는 옷이 왔을 때 운다고 그래요. 군대 보낸 엄마들이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아들 이름만 떠올려도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고 그래요. 여기는 매정한가 봐요. 그렇지요? 그러면 물어볼게요. 길을 가다가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눈물로 울어본 경험도 갖고 있어요? 예전에 그게 18세기의 위대한 목회자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책에 ‘요즘에는 우리 하나님에 대한 단어 한마디만 들어도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집니다. 우리 하나님의 이름은 속성가운데 한 단어만 떠올라도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그런 사랑의 감정이 충만한 가운데서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굳게 붙들고 그분께만 온전히 순종하며 삶과 죽음을 초극한 삶을 살 수 있는 신자의 생활이 되고 있어요? 그런 것들을 빼앗아가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죄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 할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이 시인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사무엘하 11장까지 이 다윗은 그야말로 순결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어요. 흠도 티도 없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영원히 다윗을 하나님 앞에 서있는 참 신자다운 임금의 표본으로 삼았어요. 그래서 누군가가 착하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면 ‘그는 다윗의 길로 행하였더라.’ 그렇게 표현했어요. 악을 행하는 자는 ‘아합의 길로 행하더라.’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더라.’ 그렇게 표현했어요.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올곧게 인생을 살아간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가 그렇게 순결했던 그가 딱 두 가지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금지한 인구조사를 한 사건이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사건이었어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사건은 더 끔찍한 커다란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그가 시편 51편 전체의 시에서 하나님 앞에 고백하지 않습니까?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시고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이 이 당시에는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처럼 한번 믿으면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런 방식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었어요. 어떤 일이 있어서 필요하면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그와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맺게 하시고 머물게 하시고 이야기하신 다음에 임무가 끝나면 성령을 거두시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이 다윗이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가 하나님의 성령을 분노하여 거두실 때에 전임자 사울이 어떻게 되는 것을 똑똑히 보았어요. 그것이 무엇이지요? 하나님이 성령을 거두시고 나니까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신이 그에게 임하여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이죠. 그럴 위협을 이 시인이 최초로 절실하게 경험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모든 기쁨이 사라지는 것을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가슴이 터질 듯한 환희, 기쁨, 감동, 이런 것들이 사라지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에게서 그 구원의 기쁨을 거두지 말라고 강력히 호소했던 것이에요. 오직 환란과 시련, 핍박, 죽음의 위협도 우리의 영혼을 죽은 자처럼 만들 수가 없어요. 오직 죄만이 우리의 영혼에 이러한 끔찍한 침체를 가져오는 것이죠.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 속에서도 너무나 끔찍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잖아요. 사회적으로 욕을 먹고 그리고 예수 믿겠다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불행한 시대에 접어드는 것이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바로 영혼이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의 상태에 있지 못하고 침체에 빠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이름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자신의 명예도 실추시키고, 하나님의 교회의 명예도 실추시키고, 하나님의 영광도 가리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인간의 무한한 악의 가능성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매일 매일 의지하면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서 사는 것 없이는 누구도 나는 성도다운 사람이 되었노라고 고백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에요. ‘목사님의 설명을 듣고 보니까 나도 침체에 빠진 것은 사실인데 나는 다윗처럼 그렇게 죄를 지은적은 없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럴지도 몰라요. 사실일지도 모르고 또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사람들은 흔히 죄라고 말하면 심판대에 오르고 법정에 서고 감옥소에 들어가게 되는 그런 형법상의 죄만을 생각해요. 그러나 그것만이 죄가 아니죠.
좀 깨끗한 비유는 아니지만 들어보십시오. 새벽이면 커다란 초록색 탱크차가 와서 똥을 푸고 사람이 많이 건물과 교회를 사용해서 어마어마하게 많이 일 년에 한 번씩 퍼갑니다. 그런데 잔뜩 집어넣고. 그런데 항상 똥 푸는 차는 ‘엘리제를 위하여’ 그 음악을 틀더라고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그 음악을요. 띠리리리 리리리. 그러면서 말이에요. 만약에 베토벤이 그것을 보면 자지러질 것 같아요. 자기의 음악을 그 똥차에서 사용하니까 말이에요. 어쨌든 퍼가지고 가지요. 출렁거리면서 가는데 뒤에서 이렇게 보여요. 출렁거리면서 가는데 온갖 것들이 뜨면서 출렁거리면서 가는데 그것이 똥이에요. 봤지요? 그런데 그것을 한 국자 퍼서 체에다가 여러 번 걸러서 아주 고운 액체로 노랗게 만들어서 금빛 스프레이에다가 집어넣어서 그리고 펌프질을 한 다음에 확 뿌리니까 오렌지빛깔의 수증기가 쫙 퍼졌어요. 사람들은 생각을 할 때 저것은 아주 더러운 똥이지만 이것은 참 예쁜 물 가루라고 생각을 할까요?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지요. 그렇지만 그 성질을 분석해보면 똑같은 똥이에요.
어느 대학 실험실에서 실험을 했대요. 접시 같은 비커에다가 냉수를 붓고 그리고 개구리 한 마리를 올려놓고 그러니까 개구리는 당연히 마음만 먹으면 훌쩍 뛰어서 도망갈 수 있는 환경이겠지요. 밑에는 일초에 0.02°만 천천히 올라가게 온도를 조절해놓고 한 시간 20분 후에 개구리는 푹 삶아진 채 발견되었어요. 만약에 미지근한 물에다가 논에서 잡아온 개구리를 집어넣었으면 개구리가 ‘이 사람이 미쳤나!’ 그러면서 펄쩍 뛰어서 도망을 갔을 것이에요. 언제나 천천히 자기도 모르게 다가오는 습관적인 유혹과 일상적인 생활,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가는 풍습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죄가 침투해서 우리의 마음 전체를 지배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느 한순간에 꽉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좀먹어서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어느 개울가에서 군이 넷이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상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부하 세 명에게 자루가 큰 것 하나씩을 주면서 명령했어요. ‘이 개울에서 돌멩이 50㎏씩 주워온다. 실시!’ 어수룩해 보이는 군인이 가서 50㎏짜리 큰 돌멩이를 번쩍 들어서 부대에 담고 두 번째 사람은 20㎏짜리 하나 30㎏짜리 하나 이렇게 두 개를 담는 것이에요. 세 번째 사람은 얼마나 먼 길을 갈지 모르는데 어깨가 아프게 왜 저렇게 큰 돌멩이를 찾을까? 그러면서 자디잔 공깃돌 거의 천개를 골라서 50㎏를 채웠어요. 그리고 모두 부대에 가서 달아서 재보니까 진짜 50㎏씩 해가지고 왔어요. 그 다음 명령이 황당해요. ‘모두 돌멩이를 제자리에 갖다 둔다. 실시!’ 그러니까 한 개 가져온 사람은 어디서 가져온 지가 아주 분명해서 들고 온 그곳에다가 갖다놓으니까 정확해요. 두 개 가져온 사람은 왔다 갔다 하다가 그래도 맞춰보니까 맞아요. 천개를 가져온 사람은 한 개도 제대로 제자리에 못 갖다 두었어요.
그런데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자기의 기억 속에 뚜렷하게 있어서 자기 양심이 계속 자기를 고발하는 것이에요. ‘옛날에 이런 죄를 지었지. 이런 죄를 지었지.’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그 죄를 회개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에요. 그런데 야금야금 죄를 지어서 그게 깊이 쌓인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이에요. 자기 같이만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에요. 5년 동안 한 번도 예배에 빠진 적이 없다고 그래요. 그러나 빠진 적은 없지만 안 졸은 적도 없지요.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요. 그런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누구냐 하면 예수님 시대로 따지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어요. 외식으로 가득한 생활이었어요. 그러니까 일 년을 신앙생활을 해도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뼈저리게 뉘우친 적도 없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중심에 우러나와서 고백한 적도 없고 주님이 자기에게 어떻게 주신 영적인 생명인데 내가 이렇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서야 되겠느냐는 반성도 없어요. 그리고는 그런 사람이 교회 하나를 정해서 안 나가고 계속 버티는 것이에요. 그것은 뿌리 깊은 교회생활이 아니라 소 잡아먹은 귀신이 꼼짝도 안하듯이 교회에 눌어붙어있는 것이에요. 우리들이 견고하다는 것은 살아있는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커질 때 견고하다고 그러지 시멘트 바닥에 전봇대를 박아놓은 것을 견고하다고 말하지는 않아요. 생명이 있으면서 견고해야지요. 그래서 살아있어야 해요. 죄가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죄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비례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죄를 두려워해요. 오죽했으면 요한 웨슬러가 영국을 변화시켰던 요한 웨슬레가 그런 고백을 했어요. ‘하나님! 나에게 하나님과 죄만 두려워하는 사람 100명을 주십시오. 영국을 구출해내겠습니다.’ 라고 말이죠. 죄가 깊은 파괴를 가져오는 것이죠. 그러면 이런 질병상태에 있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일도 안 되고, 그리고 봉사를 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하고 달콤한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이 힘들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일은 조금 하면서 교회에 와서 만날 싸우는 것이에요. 문제를 일으켜요. 그렇게 이런 죄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계속 우리를 지배하면서 그래서 우리를 악한 삶으로 데려가는 것이에요.
자, 그러면 침체기가 있을 것이 아니에요. 침체기가 있으니까 이 시인도 영혼이 죽은 것처럼 된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게 해주셔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 길은 무엇일까? 두 개도 아니고 세 개도 아니에요. 오직 딱 한길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 하면 회개에요. 회개. 지금 오늘날 우리시대의 교회는 복음의 본질로부터 너무 멀어졌어요. 그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교회가 죄를 지적하지 않아요. 그리고 회개하라고 외치지를 않아요. 명백하게 죄를 지은 사람한테 그것은 상처받은 것이라고 가르쳐요. 그러니까 회개해야 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회개하셔야 돼요. 하나님이 세상이 바뀐 것을 너무 모르시는 것이에요. 이제는 인간 중심시대이기 때문에 하늘에 계셔서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그러시면 안 되고 당신이 찾아오셔서 사람들 좀 섬기고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가짜복음이에요. 가짜복음. 그러니까 선명하게 살아있는 복음이. 교회에서 회개하라고 설교하고 언제나 울려 퍼져야 돼요. 회개해야 해요.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죠. 다윗이 맨 처음에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 회개를 생각했겠어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밧세바와 자기만 알고 있을 때에, 또 알고 있는 궁 안에 있는 사람들도 왕이니까 덮어주었겠지요. 어떻게 알았어요? ‘제사 드리면 되지 뭐!’ 그런 것이에요. 그것이에요. 제사 속에 항상 죄를 용서해주는 놀라운 은혜의 능력이 있다고 믿었고 또 그것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제사장이 없었겠어요? 아니면 제사에 바칠 제물이 없었겠어요? 온 나라가 다 다윗의 나라인데요. 그런데 하나님을 대신해서 제사를 드려보았더니 아닌 것이에요. 마음속에 아무 기쁨도 없고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때 비로소 깨달은 것이에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번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심령이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한 것이에요. 깊은 회개. 어느 정도냐 하면 ‘밤마다 눈물로 요를 적시고’ 조금 과장이겠지만 ‘침상이 그 눈물에 뜰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한 것이에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내가 너의 눈물을 보았고 네 우는 소리를 들었노라.’ 아마도 그런 응답을 주신 것 같아요. 그래서 ‘행악하는 자들아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우는 소리를 들으심이니라.’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 나아갔어요. 그게 신앙생활이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겠어요. 여러분들이 다른 것 다 그만두고 설교를 듣든지 혼자 기도를 하든지 성경을 읽든지 여러분들이 늘 앉아서 드리는 예배장소에서 여러분들의 죄가 생각나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던 것이 언제든지 생각해보세요. 그런 적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두 부류의 사람 중 한사람이에요. 워낙 정결하게 살아서 회개할 것이 없든지 아니면 이 시인처럼 영혼이 침체에 깊이 빠져서 흙에 구르던 사람이 풀밭위에 누워서 표가 나지 않듯이 너무 침체에 빠져서 죄를 짓고도 그 죄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아픔으로 다가오지 않던지 둘 중의 하나에요. 둘 중의 하나에요. 회개가 살아있는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열렬해요. 열렬해요.
(찬양)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시뿐인 세상에서 밀알로 썩게 하소서.
기꺼이 주님을 향해 기꺼이 자기를 던지는 삶. 요새 삼십년 전에 정말 유행했는데 요새 절대 안 부르는 찬송이 하나 있어요. 무엇인지 아세요?
(찬양) 복음 들고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마지막 가사가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회개가 살아 있으면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영혼이 얼마나 복된지를 알고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전도를 열심히 해요. 전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요. 그냥 가서 정말이에요. 여기에 지금 직장 다니는 사람은 직장에서 교회에 출근해서 여기에서 보면 비지땀을 흘리면서 동료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리고는 그냥 나가서 전도해요. 요즘 이 사람들이 얼마나 곤고한지 여기는 불교의 땅이라면서요? 그러니까 전도하기 더 좋지요. 말로만 믿겠다고 그러면 축복도 받을 것이 아니에요. 목숨을 걸어야 돼요. 목숨을. 진실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해야 돼요. 회개한 사람들이게는 이러한 헌신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회개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 꺾음이 있어요. 어느 한순간에 내가 잘못한 것을 깨달았을 때 무릎을 꿇고 자기를 꺾는 변화가 있다는 것이에요. 그런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울먹거리며 간절히 사모하며 복음을 외칠 때 하나님이 그런 사람과 함께 하셔요. 그것이 아름다운 신앙의 제일 조건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영혼의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것이에요.
시인은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회개할 때 죽은 자와 똑같았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시는 것이에요. 다시 하나님이 이 다윗을 사랑하시는 것을 보여주셨어요.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용서해주시옵소서.’ 그렇게 해서 시인이 죽었던 영혼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왜 이 시인 다윗이 그렇게 침체된 영혼으로 그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시지를 않으시고 다시 한 번 확 살아나는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에요.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렇게 말합니다. 여기에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라는 단어는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당신의 이름을 이 세상에 두셨어요.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높아지지도 않고 낮아지지도 않고 인간의 경배를 필요로 하지도 않으시는 분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이 땅에 남아있어서 높아지기도 하고, 땅에 떨어지기도 하고, 짓밟히기도 하고, 영광스러워지기도 하고, 그 다음에 수치스러워지기도 하는 것이에요. 그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이 세상에 두셨는데 이 이름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때문에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에요.
아주 간단하게 한 번에 이해되도록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들이 여기 살다가 서울로 이사를 갔다고 칩시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에 등록을 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착실하게 예배당도 나오고 교회에 봉사도 하고 하니까 사람들이 물어보았어요. ‘어디에서 이사를 왔우?’ ‘진주에서 이사를 왔습니다.’ ‘거기에서는 어느 교회를 다녔우?’ 여러분들의 교회이름을 대면서 ‘진주북부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래요?’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 그 교회에서는 정말 성도들을 신앙적으로 잘 기르는구나! 어떻게 나이 젊은 사람이 저렇게 신앙의 열심을 품고 그렇게 온지 얼마 안 되는 교회에서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섬길까? 참 훌륭하다.’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진주북부교회는 진주에 있지만 이름은 서울에서 빛나는 것이에요. 이해되지요? 반대의 경우는 제가 설명을 안 하겠어요. 그런 것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줄 사람들을 선택하셔요. 한 사람, 한 가정, 한 나라를 선택하시고 그게 이스라엘이고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이 사라지면서 그 껍질을 깨고 이번에는 한 사람, 교회,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하나님을 믿는 보편교회의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교인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이 짓밟히기도 하고 높아지기도 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신앙생활이에요. 그래서 신앙생활은 그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고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주님이 모든 것들을 공급해주시고 입히시고 먹이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죄가 있으면 용서해주시고 새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 교회가 정말 잘 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 마치 자기의 전매품인 것처럼 그리고 자기가 잘해서 하나님 앞에 상을 받은 것처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은혜에 대한 전적으로 잘못된 해석이에요. 은혜는 그 안에 사명을 포함하고 있어요.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너무 큰일을 요구하셔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이에요. 시인은 죄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침체된 가운데 고통을 받다가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영혼을 회복시켜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먹을 것을 공급해주셨을 때에 하나님을 신뢰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확신을 가지고 ‘그분이 나의 유일한 신앙이고 나의 정말 사랑하시는 목자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이렇게 회복시켜주시는 것은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그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 하나님의 영광을 이렇게 드높이면서 사는 그 길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오늘 마지막에 나오는데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에요. 이 의의 길이라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의로운 길이라는 것, 의의 길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제 의를 이해해야 되는데 이 의는 무엇이냐 하면 아주 너무 쉽게 설명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이렇게 살아야한다고 기준을 정해주셨을 때 거기에 합격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한다는 그 기준을 무엇으로 보여주셨을까요? 율법으로 보여주신 것이죠. 그래서 이 의의 삶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율법, 그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에 부합하도록 살아가는 그 삶을 의로운 삶이라고 말하고 그런 인생길을 가리켜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길을 가리켜서 의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의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말이 두 단어가 등장해요. 그것이 뭐냐 하면 히브리말로 ‘쩨덱’이라는 단어가 있고 ‘쩨데카’ 라는 단어가 있어요. 똑같은 말인데 하나는 여성 형으로 사용되고 ‘쩨덱’은 이제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내면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그것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마음과 정신이 의롭지 않은 사람이 억지로 억지로 의를 흉내를 내는 그것이 위선이 되는 것이에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의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그 사람 자신이 의로움으로 꽉 차있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한 것을 ‘쩨덱’이라고 말하고 ‘쩨데카’는 마음속에 있는 이 의로움이 실제의 행위 속에서 율법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이렇게 행동으로 율법에 부합함에 이를 때 그것을 바라보는 판단기준이 ‘쩨데카’에요. 그러니까 ‘쩨덱’인 사람이 ‘쩨라카’의 삶을 사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위해서 시인을 용서하고 그 일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그 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느냐는 이야기죠.
세상은 타락한 이후로 그 자체가 불의한 세상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을 알리시는 방법은 간단해요. 캄캄하고 어두운 밤에 어딘지 길을 잃었을 때 ‘나 여기에 있습니다.’ 라고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악을 악을 쓰고 소리를 질러 봐야 200m도 안가요. 중요한 것은 그때 불꽃을 터뜨려서 쏘는 것이에요. 그래서 조종사들이 비행기에서 탈출할 때는 항상 그런 조명탄을 가지고 뛰어내리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디에 있든지 쏘면 불꽃이 한없이 올라가서 수십㎞가 떨어진 곳에서도 그 불꽃이 터지는 것을 보면서 찾아가서 그 조종사를 구하는 것이에요. 조종사 한사람을 만드는데 70억이 든다고 그래요. 그러니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생각해보세요. 이 불의한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똑같이 섞여서 불의하게 살아가지고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줄 수 있도록 부르신 그 소명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에요. 더 심하게 이야기해볼까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왕년에 은혜를 많이 받고 간증거리가 많아도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별로 가치 없는 사람들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그 수많은 간증거리를 주신 이유는 여러분들로 하여금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리고 뭉치면서 살아가는 것은 편리할지는 모르지만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소명에 전면적으로 위배하며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면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세상인가? 절대 그렇지가 않아요.
지금은 제가 부흥회를 오라고 그래도 제가 너무 하는 일이 많고 바쁘기 때문에 안갑니다. 그런데 한 십 년 전만 해도 제가 꽤 많이 다녔어요. 10, 15년 전에 많이 다녔어요. 그때도 신학교에 교수로 있으면서 개척교회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여기 전라도인가 청원인가 어딘가에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어느 대학교에서 나보고 설교는 아니고 특강을 해달라고 그랬어요. 그때 제가 자가 운전을 하고 다닐 때였는데 그런데 넉넉히 시간을 남겨놓고 출발했는데 그런데 고속도로에 들어왔는데 사고가 난 것이에요. 한없이 막히는 것이에요. 그때는 휴대폰이 있어요? 내비게이션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그냥 간신히 지도를 보면서 어쨌든 고속도로에서 나왔을 때는 시간이 급박하게 된 것이에요. 그런데 아직도 꽤 가야해요. 그 대신 차는 없어요. 그래서 좀 밟았지요. 제한속도가 80㎞이었는데 100㎞쯤 밟은 것 같아요. 그런데 저기 언덕에서 파란 옷을 입은 경찰이 차를 세우는 것이에요. 경찰이 보기에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가서 세웠지요. ‘안녕하십니까? 면허증 좀 보여 주십시오.’ 왜 그러시느냐고 그랬더니 ‘속도위반을 하셨습니다.’ ‘아니 무슨 속도위반을 했어요? 이렇게 천천히 왔는데 무슨 소리에요?’ ‘제가 보는 데서는 속도위반을 안 하셨는데 산 너머에서 속도위반을 하셨어요.’ 아니 산 너머에서 속도위반을 했는지 안했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그랬더니 거기에 동료가 있어서 스피드건으로 쏴서 자기에게 무전을 쳤다는 것이에요. 그렇게 말하는데 할 말이 없잖아요. 미안하게 됐다고 그랬더니 어디 가시는 길이냐고 물어요. 여기 어디 대학에 강의하러 가는데 저도 어느 대학의 선생인데 내가 잘못했으니까 딱지나 빨리 떼어서 빨리 가게해달라고 그랬어요. ‘교수님이시군요! 걱정 마세요. 벌점 없는 싼 것으로 끊어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순순히 주기에 받아가지고 햇빛가리개에 꽂고 갔어요. 다행히 안 늦고 도착해서 아슬아슬하게 도착을 해서 어쨌든 은혜롭게 강의를 마치고 그리고는 밤에 올라왔어요. 그 다음날 아침이 되었는데 그때 교회가 작기는 했지만 직원이 하나 있었거든요. 직원을 시키려다가 그냥 내가 내자. 그러면서 이런 것은 빨리 내자. 그러면서 은행을 가는 길에 그것을 들고 갔어요. 냈어요. 그게 벌써 16년 전의 일이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펼쳐보니까 과태료가 너무 싸요. 6,000원밖에 안 돼요. 그래서 6,000짜리 과태료가 어디 있는가 하면서 봤어요. 그때도 범칙금이면 15,000이나 20,000원은 되었었는데 혹시 60,000원인가 그러면서 그 당시에 60,000이면 너무 비싸고 6,000원짜리 과태료가 어디 있는가 하면서 다시 한 번 펼쳐보니까 정확하게 6,000원이고 납기 후에는 20% 가산금을 붙여서 7,200원을 내라고 되어있어요. 내가 교통위반을 가끔 해서 내봐서 아는데 이렇게 싼 범칙금은 처음인데 없었어요. ‘교수님! 걱정 마세요. 싼 것으로 끊어드리겠어요.’ 이 말이 생각나요. 이렇게 보았더니 거기에 범칙금은 6,000원인데 맨 밑에 범칙내용이라고 나와요. 이렇게 보니까 ‘ 담배 피다 걸렸음.’ 그것을 만약에 교회 직원에게 내라고 그랬으면 실족했지. 목사님이 어디를 가다가 담배를 피다가 걸려서 이 스티커를 떼어서 왔다니 그러면서 실족했겠지요. 그리고 온 교인에게 퍼지면 우리 목사님은 니코틴 중독자라고 그러겠구나! 그래서 그때 그것을 놓고 조용히 생각했어요. 이것이 처음이기는 하지만 나의 살아온 모든 삶을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것은 아니다. 예수를 믿는 나까지 이렇게 살면 이 세상은 희망이 없다. 그 다음부터는 원칙을 세웠어요. 교통법규를 잘 지키자. 그러나 적발되었을 때는 법대로 처벌을 받자. 그랬어요.
그런데 지난번에 그때 여 전도사님하고 남전도사님하고 있었는데 그 여전도사님은 운전을 못해요. 그래서 담임목사가 태워가지고 다니면서 심방을 다녔어요. 자기는 옆에서 자고 나는 운전을 했어요. 그런데 사거리에서 유턴을 하는데 앞차가 유턴을 안 하는 차가 서 있어서 노란 선을 밟고 유턴을 했더니 경찰이 지하도에 숨었다가 뛰어나와요. 너무 실망했어요.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선생님, 선생님은 지금 교통법률 제 몇 조를 위반하셔서 불법 유턴을 하셨습니다.’ ‘아니 저 차가 유턴을 하지 않는 차인데 그 자리에 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지 않았느냐.’ 그랬더니 그래도 노란 줄을 밟았기 때문에 불법유턴이라는 것이에요. 지금 애들 장난을 하느냐 금을 밟았다고 그러게. 그러면서 내가 ‘알았다.’ 그랬더니 또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에요. ‘아무 걱정 마시고 벌점 없는 것으로 끊어드리겠습니다.’ ‘이봐요!’ ‘왜요?’ ‘네가 그럴 권한이 어디 있느냐? 너는 잘못한 사람을 잡아서 벌금을 매기고 봐줄게 있으면 법원에서 봐주는 것이지 네가 무슨 그럴 권한이 있느냐? 네가 그렇게 맘대로 깎아줄 권한이 있느냐?’ 그랬더니 뿔이 났어요. ‘그대로 끊어주세요.’ ‘알았어요.’ 쫙 긋더니 벌점 15점에 60,000원이에요. 휙 찢어서 던지더라고요. 그리고 돌아왔어요.
그냥 계속 세 들어 살다가 집을 한 채 사게 되었어요. 그것도 사고 싶어서 산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돈을 좀 주어서 빌라에 세 들어 살고 있는데 건너편에 있는 교회 집사님인데 우리 집에 오더니 우리 집사람보고 ‘저, 사모님! 제가 기도해보니까 하나님이 이 집을 목사님한테 팔라고 그러시네요.’ 하나님도 참 이상하시지 그렇게 하시겠으면 우리한테 먼저 오셔서 사라고 그러셔야지 왜 그 사람한테 가셔서 팔라고 그래요? 그랬는데 돈이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진짜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그 집을 사게 되었어요. 사게 되었는데 문제는 세금이에요. 그 집 하나를 샀는데 세금이 무지하게 많이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다 털어서 끝전을 치루고 나니까 돈이 없어요. 그러니까 법무사 사무실에 우리 집사람이 가서 세금이 얼마라고 찍찍찍 적어주었어요. 이렇게 많이 내느냐고 그러니까 그 직원이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아줌마 비싸요?’ ‘비싸죠. 그 조그만 집에 세금이 뭐 이렇게 비싸요?’ ‘너무 비싸면 반만 내요.’ 뭐 그런 세금이 있어요?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하니까 가서 집을 판 사람하고 집을 산 사람하고 둘이서 합의해서 가짜 계약서를 하나 써서 집값을 떨어뜨려서 가짜계약서를 써오라는 것이에요.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하면 절반만 내면 된대요. 집사람이 그것을 들고 와서 나보고 그래요. ‘여보, 그렇게 하면 된다는데 어떻게 하지?’ 그래요. ‘아이고, 여보! 집을 판 사람은 집사고 집을 산 사람은 목사인데 그것을 그 가짜계약서를 쓰고 둘이서 도장을 찍고 그러고 있냐?’ 로마서 13장을 봐라 공세를 바칠 자에게 공세를 바쳐라. ‘그러니 갖다 내라.’ 돈을 다 모아서 정말 거짓말 안보태서 우리 아들 저금통까지 털어서 그래서 돈을 맞춰서 법무사 사무실에 가지고 갔어요. ‘아줌마 어떻게 오셨어요?’ ‘세금 내러 왔는데요.’ ‘그래요? 가짜계약서는 써오셨어요?’ ‘아니!’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냥 다 내려고요.’ 그때 그 직원이 ‘아, 정말 존경스럽다. 어떻게 이렇게 의로운 분들에게 내가 유혹을 해서 가짜계약서를 써오라고 그랬을까? 정말 존경스럽다.’ 그러면서 우리를 쳐다보았겠어요? 아니면 ‘아이 벼엉신!’ 그랬겠어요? 세상이 그런 것이에요.
거기까지는 버텼어요. 그런데 더 어려운 일이 생겼어요. 하다가 이제는 도저히 교회당이 교인들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에요. 지하실에서 200명이던 시절에 나와서 5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예배당을 세를 얻었어요. 그런데 3년 만에 꽉 차서 도저히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어서 어디로 이사를 가야겠는데 돈도 없고 오늘 아침에 이야기했듯이 통장에 1,500만원이 있었어요. 그런데 집사들이 가더니 기가 막힌 땅이 있다는 것이에요. 무엇이냐고 그랬더니 1000평짜리 땅인데 공장 건물인데 깨끗이 수리를 해서 써도 좋고 다시 지어도 되고 기가 막힌 땅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땅을 봤는데 그 땅을 사자고 그랬더니 복덕방에서 그 땅을 어떤 사람이 내놓았는데 도로 들여놔서 팔라고 그래도 안 팔 것이라는 것이에요. 그래도 주소나 한번 가르쳐달라고 그래서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나오셔요. ‘땅 좀 파십시오.’ 그랬더니 ‘안팝니다. 내가 안판다고 얘기했는데 왜 귀찮게 합니까?’ ‘아, 그래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가만히 내버려두면 계속 올라가는 땅을 내가 그것을 왜 팔아요? 안 팔아요. 시간낭비하지 마시고 가세요.’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 할아버지가 ‘내가 땅을 팔면 당신은 그 땅을 사서 뭐하려고 그러시오?’ ‘교회를 지으려고 그럽니다.’ 깜짝 놀라는 것이에요. ‘교회를 짓는다고?’ 그러더니 ‘일주일만 생각해봅시다.’ 그러는 것이에요. 그러면 벌써 감이 오잖아요. 일주일 후에 갔더니 할아버지가 ‘내 땅을 사가시오. 나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 여기에서 공장을 한 20년, 30년 공장을 했는데 이제 나이도 먹어서 모두 청산을 하려고 하면서 이 자리에 교회가 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했대요. 그러면서 가지고 가라고 그래요. 그래서 계약금을 가지고 오라고 그러는데 계약금 3억을 가지고 오라는데 계약금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밥도 못 먹고 그러니까 어떤 교인이 3억을 빌려주었어요. 그것을 가지고 계약을 했는데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하면 가격을 합의를 봐야하는데 36억을 달라는 것이에요. 10원도 안 깎아준대요. ‘얻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그러면서 36억에 사자.’ 그랬더니 그 다음에 문제가 생긴 것이에요. 지난번과 똑같은 것이에요. 30억으로 계약서를 쓰고 6억은 비자금으로 달라는 것이에요. 왜 그러시냐고 그랬더니 이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나는 아무 사심이 없이 당신들에게 이 땅을 교회에게 넘겨주는데 내가 이 땅을 워낙 싸게 샀기 때문에 소득세가 나오고 은행에서 빌려 쓴 돈이 있는데 다 갚으려면 우리가 36억을 주고 사면 자기가 2억을 보태야지만 그게 청산이 된대요.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나두면 자고나면 올라가는 땅인데 내가 믿음으로 당신들에게 교회를 지으라고 이 땅을 줄 수는 있지만 돈을 보태서 이 땅을 청산할 수는 없다는 것이에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분이 26살 때 한 경직 목사님에게 안수를 받고 26살 때 장로가 된 사람이에요. 한 경직목사님이 그 곳에 오셔서 1년 6개월 동안 직원들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치셨대요. 그랬는데 어쨌든 그렇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고민에 휩싸인 것이에요.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했더니 모여 있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이에요. 거기에는 부동산하는 전문가들이 모였지요. 85%가 요즘에는 다 그렇게 하니까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자는 것이에요. 그런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신앙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꼬장꼬장한 회계사를 불러다가 물어보았어요. ‘목사님!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데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이 통용되고는 있지만 사실은 불법입니다.’ ‘알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정리를 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래서 물어보았어요. 세금이 얼마입니까? 3억을 더 내라고 그런대요. 그러면 3억을 우리가 대출을 더 받아서 내겠습니다. 그래서 36억을 달라는 교회의 땅을 39억을 주고 샀어요. 사소한 돈이니까 그렇게 놀랍지도 않지요. 잘 들어보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역사하시느냐하면 39억짜리 교회당인데 계약금을 갖다 주고 돈 5억을 갖다 주니까 이 할아버지가 통장하고 인감도장하고 주민등록등본하고 인감증명서하고 다 주었어요. 마음대로해서 내 땅 가지고 내 이름으로 대출을 받아서 자기한테 끝전을 치르라는 것이에요.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면 돈은 어떻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한없이 축복해주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때에 교인들이 받은 충격이 굉장히 컸어요. 아, 교회가 이럴 수도 있구나! 그 다음부터 정직하게 사는 운동이 교회에 일어났어요. 그래서 지금 밤새워도 하지 못할 에피소드들이 되게 많이 생겨났어요. 그런 정신들을 지금까지도 쭉 이어와서 꼭 여러분들도 우리교회를 따라서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도 정직하고 아주 투명하게 힘들어도 하나님의 백성들답게 살자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교인들이 개인적인 삶속에서 아주 분명하고 의로운 삶을 살고 그리고 이제 교회에서도 원래 교역자들은 근로자가 아니고 세금을 안내도 되는데 그런데 나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교회에서 생활비를 꽤 주는 부목사들이 구청에 영세민으로 등록이 되요. 그러면 아빠가 직업이 없으니까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교육도 거저 시켜요. 그런데 그것은 옳지 않다. 전부 다 세무서에 세금신고를 해요. 교역자들이 내는 세금이 일 년에 육천만원이 되요. 교인들이 교역자들에게 그 세금만큼 월급을 올려주었어요. 결국 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했어요. 그렇게 하면서 철저하게 정직하게 살아요. 일 년 동안 교회에서 돈을 쓴 것이 끝나면 공인회계사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방에 들어가서 일주일 내내 감사를 해서 감사결과를 정식으로 회개법인에서 정식으로 국가인증번호가 들어간 허가번호가 들어간 것으로 감사보고서가 교회에 제출됩니다. 그리고 영상으로 교인들에게 감사한 결과를 당신네 교회에 문제점이 없는지를 설명하는데 그 사람은 불신자에요. 교회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일부로 그런 사람을 구했어요. 신자가 교회를 또 교인중의 한 사람이 하면 자유로울 수 있겠어요? 불신자는 그것과 상관없어서 주었어요. 그렇게 조사해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은 은혜를 받는 것은 쉬운 것이에요. 그러나 그 은혜를 따라서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을 따라서 살아가는 그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에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항상 정도를 걸어가도록 교회는 성도들에게 가르쳐야합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는 물품을 사와도 100% 부가세를 납부하고 법적효력이 있는 영수증을 첨부해야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교회에 와서 빗자루 질을 해도 교회가 너희 세상보다는 깨끗하고 정확하고 정직하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어야 해요. 그러고 나서 정직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서 거의 안하는데 십일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당신들은 25평을 살다가 32평을 살다가, 32평을 살다가 45평을, 45평을 살다가 60평으로 이사를 하는데 그렇게 해서 점점 주택 값이 올라서 남은 돈에 대한 십일조는 언제 낼 거냐? 그게 정직한 것이냐? 십일조를 제대로 부인하든지 아니면 이 땅에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는 정직하게 살아야지 그러면 되겠느냐고 오후예배 때에 설교를 했더니 이상하게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어요. 며칠 있다가 한 사람이 교회에 전화를 걸어서 ‘십일조를 보냅니다.’ 그러면서 통장에 8,000만원을 한꺼번에 보냈어요.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우리들이 카멜레온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 돼요. 낙지 같은 교인이 되어서는 안 돼요. 접시에 올려놓으면 퍼지고 컵에 넣으면 서있는 것 같고 그런데 컵에 있을 때는 서있는 것 같은데 접시에 놓으면 퍼져요. 어디에 들어가든지 뼈 없이 아주 잘 어울리면서 사는 교인은 안 돼요. 로마서 12장에서 사도바울이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희랍어로 ‘스스께마띠죠’ 라는 단어인데 풀빵 굽듯이 계속 똑같은 사람을 찍어내는 것이에요. 우리는 거기에 찍혀내면 안 돼요. 그래서 우리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라고 굳게 믿으면서 옳은 일이 아니면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그 길을 안 갈려고 몸부림을 쳐야 됩니다. 그래야지 그렇게 야합을 해서 우리들이 다 타협을 하고 걸어가면 예수를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가 어디 있어요. 여러분 직장 다니면서 경험을 했지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그러면 자꾸 술을 먹으라고 그래요. 먹어도 괜찮다고 음료수라 괜찮다고 그러면서 실컷 꼬여서 한잔 먹이고 나면 그 다음에 하는 말이 ‘야 너도 나이롱이지!’ 그러면서 머리를 한 대 때린다고요. 그러니까 그렇게 살면 안 돼요. 어린아이들에게도 그런 정직을 철두철미하게 가르쳐서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을 믿으며 진리를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 세상에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에요.
(찬양) 끝없이 무릎 꿇는 그런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그 뜻이 이뤄지기를 외치며 사나니
그렇게 살아야 해요. 핍박도 받겠지요. 그 핍박을 받으라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이에요. 손해를 보겠지요. 손해를 보라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이에요. 이 세상에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다수가 되고 참된 신앙이 대중적인 것이 되던 시대는 없었어요. 그런 때는 마지막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때지요. 그러나 그렇게 이 세상에 어두운 것이 우리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제가 고등학교 때 덕적도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나오는데 파도가 굉장히 심하게 치는데 풍랑주의보가 아니면 배는 그냥 뜨거든요. 딱 중간에 왔는데 항만청에서 무전이 막 와서 큰 태풍이 왔으니까 돌아가라고 무전이 왔어요. 그러면 떠나지를 말지 돌아가는데 전 정말 거기서 죽는 줄 알았어요. 배가 250톤쯤 되는 배인데 이쪽에서 파도가 치면 포물선을 그리면서 배 반대쪽으로 떨어집니다.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데굴데굴 구르는데 토하고 난리가 났어요. 한 시간 반 이상 사투 끝에 어쨌든 항구를 향해 가는데 캄캄한 밤중이에요. 도대체 어디로 가라는 것인가? 캄캄한 밤중에 바람은 불고 비는 오는데 어디로 가라는 것인가? 저기서 등대 하나가 반짝반짝하고 빛나는 것이에요. 잊히지가 않아요. 딱 그거 하나를 보고 수많은 배들고 그곳으로 안전하게 피하는 것이에요. 조명탄을 수천 발을 쏴서 대낮처럼 밝을 필요가 없어요. 누군가 한사람만 등대처럼, 한 교회만이라도 등대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의의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으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면서 자신이 잘못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신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에요. 그럴 때 박해할 수 있지요.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가 참된 신앙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그 놀라운 정신 아니에요? 그런 정신을 가지고 살려면 돈이나 명예를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살아있는 영혼, 충만하게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면서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그런 신념으로 살아가야 해요. 그때 기꺼이 고난을 받으며 그렇게 어두운 세상에 불꽃처럼 되라고 오늘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목자 되신 주님께로 불러 회개하고 새로운 은혜를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돌아가셔서 조용히 자기를 돌아보세요. 자기의 정직하지 못한 것, 이웃에게 불의와 악을 행한 것을 깊이 회개하고 이웃에게 용서를 빌고, 손해 입힌 것은 즉시 청산하고, 돈 떼먹고 안 갚은 것 이런 것들 깊이 뉘우치고. 탐욕이에요. 탐욕은 큰 죄에요. 가서 정직하게 변상하고 새 삶을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해요. 한 사람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영적인 은혜는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삶의 개혁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빌고 기도하는 것은 아첨하는 신앙이지 진실한 신앙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이 드리는 헌금은 뇌물이지 헌금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는 이방의 말하자면 뇌물개념의 제사이지 하나님을 생각하는 신령한 제사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이 지역에서 정말 깨끗한 교회, 정결한 섬김으로 열렬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로 그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